하인리히_불링거의_교회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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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교회개혁 박상봉 박사 (대신총회신학연구원, 교회사) 서론 1555 9 월에 있었던 아우그스부르그 종교평화회의(Augsburger Religionsfriede)통해서 공식화되었다고 해도, 이미 유럽 전체의 분위기는 종교개혁 초기에서부터 ‘그의 지역, 그의 종교’(cuius regio, eius religio)라는 원칙 아래 있었다. 지역을 다스리는 군주나 정부가 어떤 신앙고백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지역이 로마 카톨릭 교회를 지지하는 지역으로 남아있던가, 아니면 종교개혁에 기반을 루터주의 교회 혹은 개혁주의 교회로 변모될 있었다. 이러한 원칙 아래서 표면적으로 정치적 권력자에게 귀속된 지역적인 믿음의 자유만 있었을 , 실제로 개인적 믿음의 자유를 갖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개인적 믿음의 자유를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지지하는 지역으로 고향과 가족을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독립적 주권을 가진 도시국가였던 취리히 역시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취리히 교회가 정부와 협력 속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어 것은 거부될 없는 운명이었다. 이미 쯔빙글리로부터 ‘Respublica Christiana’대한 이상이 추구된 것이다. 1 불링거는 1504 7 18 일에 현재 취리히 서쪽으로부터 대략 5km 떨어진 아르가우 (Kanton Aargau)브렘가르텐(Bremgarten)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안나 비더케어(Anna Wiederkehr)결혼을 하여 그리고 기독교적 정치사상을 유산으로 받고 있는 하인리히 불링거는 취리히 교회와 시민사회를 기독교적 공동체의 일원들로 간주하였다. 당연히, 불링거에게 있어서 모든 공적인 교회활동은 비정치적이나 비사회적일 없었다. 그는 교회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원리적인 면에 있어서 교회와 사회(국가)에서 동일하게 실천되도록 노력한 인물이다. 교회에 많은 유익을 주거나 이상의 일을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인류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정부와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되고 위임된 직무들을 해나가길 원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조망 속에서 불링거의 교회개혁은 이해되어야 한다. 논문은 아직 한국 신학에서는 낯선 불링거의 교회론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 교회개혁과 관련하여 신학적 원리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오히려 실천적인 면에 중점을 두었다는 말이다. 불링거가 종교개혁 시대 속에서 취리히(Zürich) 교회의 문제들을 어떻게 개혁했는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링거의 교회개혁이 시대와 지역을 넘어 제시해 주는 조망 속에서 작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교회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가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을 살피는데 결론적 의의를 두었다. 1. 불링거의 생애 2 1 Elsa D. Zodel, Bullingers Einfluß auf das züricherische Staatswesen von 1531-1575, (Zürich: Reutimanm & Co., 1921), 17. 2 Fritz Blanke, Der Junge Bullinger 1504-1531, (Zürich: Zwingli-Verlag, 1942), 5-7. 불링거의 아버지는 순결서약을 파기한 사제였다. 그는 비밀리에 결혼생활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개적으로 자신의 가정을 이끌었다.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파면되지 않았으며,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영향 아래서 개신교 목사가 때까지 브렘가르텐의 사제로 활동하였다. 다섯 명의 아들들을 두었다. 불링거는 자녀들 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 무렵에 고향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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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의 교회개혁

박상봉 박사

(대신총회신학연구원, 교회사)

서론

1555 년 9 월에 있었던 아우그스부르그 종교평화회의(Augsburger Religionsfriede)를 통해서

공식화되었다고 해도, 이미 유럽 전체의 분위기는 종교개혁 초기에서부터 ‘그의 지역, 그의

종교’(cuius regio, eius religio)라는 원칙 아래 있었다. 한 지역을 다스리는 군주나 정부가 어떤

신앙고백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지역이 로마 카톨릭 교회를 지지하는 지역으로 남아있던가,

아니면 종교개혁에 기반을 둔 루터주의 교회 혹은 개혁주의 교회로 변모될 수 있었다. 이러한

원칙 아래서 표면적으로 정치적 권력자에게 귀속된 지역적인 믿음의 자유만 있었을 뿐, 실제로

개인적 믿음의 자유를 갖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개인적 믿음의 자유를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지지하는 지역으로 고향과 가족을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독립적 주권을 가진

도시국가였던 취리히 역시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취리히

교회가 정부와 협력 속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어 간 것은 거부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미

쯔빙글리로부터 ‘Respublica Christiana’에 대한 이상이 추구된 것이다. 1

불링거는 1504 년 7 월 18 일에 현재 취리히 서쪽으로부터 대략 5km 떨어진 아르가우

주(Kanton Aargau)의 브렘가르텐(Bremgarten)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안나 비더케어(Anna Wiederkehr)와 결혼을 하여

그리고 이 기독교적

정치사상을 유산으로 받고 있는 하인리히 불링거는 취리히 교회와 시민사회를 한 기독교적

공동체의 일원들로 간주하였다. 당연히, 불링거에게 있어서 모든 공적인 교회활동은 비정치적이나

비사회적일 수 없었다. 그는 교회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원리적인 면에 있어서 교회와

사회(국가)에서 동일하게 실천되도록 노력한 인물이다. 교회에 많은 유익을 주거나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는 ― 하나님으로부터 인류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정부와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되고 위임된 직무들을 해나가길 원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조망 속에서

불링거의 교회개혁은 이해되어야 한다.

본 논문은 아직 한국 신학에서는 낯선 불링거의 교회론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즉,

교회개혁과 관련하여 신학적 원리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오히려 실천적인 면에 중점을 두었다는

말이다. 불링거가 종교개혁 시대 속에서 취리히(Zürich) 교회의 문제들을 어떻게 개혁했는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링거의 교회개혁이 시대와 지역을 넘어

제시해 주는 조망 속에서 작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교회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가야 하는가에

대한 한 모범을 살피는데 결론적 의의를 두었다.

1. 불링거의 생애

2

1 Elsa D. Zodel, Bullingers Einfluß auf das züricherische Staatswesen von 1531-1575, (Zürich: Reutimanm

& Co., 1921), 17. 2 Fritz Blanke, Der Junge Bullinger 1504-1531, (Zürich: Zwingli-Verlag, 1942), 5-7. 불링거의 아버지는

순결서약을 파기한 사제였다. 그는 비밀리에 결혼생활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개적으로 자신의 가정을

이끌었다.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파면되지 않았으며,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영향 아래서 개신교

목사가 될 때까지 브렘가르텐의 사제로 활동하였다.

다섯 명의

아들들을 두었다. 불링거는 그 자녀들 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 무렵에 고향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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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라틴어 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열두 살이었던 1516 년 11 월 11 일에 불링거는 화란 근교의

라인강에 인접한 마지막 독일권 도시인 니더하인의 엠머리히(Emmerich am Niederrhein)에 있는

성 마르틴(St. Martin) 라틴어 학교로 옮겼다. 이 학교는 인문주의(Humanismus) 영향 아래

있었는데, 이곳에서 불링거는 자신의 고향에서는 소개받지 못했던 다양한 고전들과 교부들의

저술들을 접할 수 있었다.3

불링거는 1519 년 여름 이후로 1522 년까지 당시 독일의 로마로 불리어졌던 쾨른(Köln)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불링거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수도사로

일생을 살아야 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4

쾨른(Köln) 대학교에서 석사 시험을 합격한 이후, 불링거는 1522 년 4 월에 5 년 간의 외국

유학을 마치고 고향 브렘가르텐으로 다시 돌아왔다. 1523 년 1 월 초에 알비스 카펠(Kappel am

Albis)에 위치한 시토회(Zisterzienser) 수도원의 원장인 볼프강 요너(Wolfgang Joner)가 제한한

수도원 학교의 교사직을 받아들인 18 세 청년 불링거는 6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곳에서

불링거는 인문주의 교육방식에 근거하여 고전어, 수사학, 논리학 등을 수업하면서, 동시에

에라스무스와 필립 멜랑흐톤(Philipp Melanchthon)의 저술들을 규칙적으로 강독하였다.

이곳에서 알버두스 마그누스(Abertus Magnus), 토마스 폰 아퀴나스(Thomas

von Aquin),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Johnnes Duns Scotus),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등을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인문주의 영향 아래서 로테르담 폰

에라스무스(Erasmus von Rotterdam)의 저서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과정 속에서

청년 불링거의 관심은 당시 전(全)독일을 뒤흔들었던 종교개혁과 마틴 루터에게 전가되었는데,

이미 루터의 글들을 통하여 신앙적 방향성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불링거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수도사가 되겠다는 장래희망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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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링거는 1528 년 4 월에 목사 임직을 했다. 알비스 하우젠(Hausen am Albis)에서 지역교회

담임 목사로 청빙이 이루어졌는데, 1528년 6월 21일 그곳 교회에서 첫 번째 설교를 하였다. 그

이후로 불링거는 47 년 동안 대략 7.000-7.500 번이 넘는 설교사역을 감당하였다.

특별히,

이 기간 동안에 불링거는 쯔빙글리와 레오 윳(Leo Jud), 마틴 부처(Martin Butzer), 기옴

파렐(Gilliaume Farel), 베르흐톨트 할러(Berchtold Haller)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5 개월 간의 휴가와 함께 취리히에 있는 예언회(Prophezei)에서 쯔빙글리의

신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사실, 쯔빙글리와 교류는 이후 불링거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개기가 되었다. 불링거는 카펠 수도원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기간 동안

작가적인 활동에 있어서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는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관심 속에서

30권의 라틴어 저술과 22권의 독일어 저술을 지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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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1 년 12 월 9 일에 불링거 인생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쯔빙글리가

제 2 차 카펠 전쟁에서 패전하여 처형된 대략 두 달 후에 불링거는 27 세 나이에 많은 상황적

그리고

1529 년 여름에 불링거는 취리히 종교개혁 발생 전에 수녀였던 안나 아드리슈빌러(Anna

Adlischwyler)와 결혼을 하였다. 그들 사이에서 모두 다섯 명의 딸들과 여섯 명의 아들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아내와 세 딸들은 1564 년과 1565 년에 만연한 흑사병으로 인하여 죽었으며,

불링거 보다 오랜 생존한 자녀들을 겨우 4 명이었다. 불링거의 가정사는 한 인생과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연단을 보여주는 서사시와 같다.

3 Blanke, Der Junge Bullinger 1504-1531, 21-23. 16 세기 초 인문주의 영향은 대학교들에만 머물지 않았다.

당시 라틴어 학교들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미 학생들은 그 학교들에서 다양한 고전들을 접하면서 새로운

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4 쾨른은 독일에서 경제적, 정치적, 사상적 그리고 교회적 중심도시였다. 11 개 종교제단을 이끌고 있는

대주교관, 19 개 교구교회, 100 개 예배당, 22 개 수도원, 12 개 양로원, 76 개 종교조합과 셀 수 없는

성유물들로 유명한 곳이었다. 5 Blanke, Der Junge Bullinger 1504-1531, 52. 불링거의 초기 신학은 1521 년에 저술된 멜랑흐톤의 《Loci

communes》에 대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Fritz Büsser, Bullinger – Der Prediger, 『Wurzeln der Reformation in Zürich』, (Leiden: E. J. Brill, 1985),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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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을 가진 취리히 교회의 의장(Antistes)으로 선출된 것이다. 취리히 교회를 책임지게 된

불링거는 쯔빙글리가 미완으로 남겨둔 종교개혁과 교회–사회적 과제들을 계승발전 시켰으며,

취리히 교회를 유럽 개신교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게 세워나갔다: 1549 년 깔뱅과 성만찬에 대해

합의한 문서인 《취리히 일치서》 7를 통해서 개혁주의 교회를 하나로 일치시켰다. 불링거가

보내거나 받았던 12,000 통의 서신들은 당시 그의 영향력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학과 교회정치적인 면에서 개혁주의 교회를 견고하게 만들고, 그 교회가 유럽 전역에

확대되도록 헌신하였다. 여러 지역들에서 발생하는 교리적 논쟁과 정치적 갈등의 해소를 위한

변호자이자 후원자로 역할을 감당하였다. 불링거는 1566 년에 독일 팔츠(Pfalz)의 선제후를

위기에서 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중되고 있는 개혁주의 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서들 중에

하나인 《스위스 제 2 신조》를 작성하였다. 취리히 교회의 의장으로 활동한 44 년 동안

100 여권이 넘는 저술들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불링거의 근면함이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8, 《오래된 믿음》9, 《거룩한 성경의 권위에 관하여》10,

《기독교 결혼생활》11, 《설교집》12, 《기독교 신앙요해》13, 《재세례파의 기원》14, 《100 편의

요한 계시록 설교집》 15 , 《종교개혁사》 16

7 CONSEN / SIO MVTVA IN RE / SACRAMENTARIA MINI‐ / strorum Tigurinae ecclesiae, & D. Io‐ / annis

Caluinis ministri Geneven‐ / sis ecclesiae, … … TIGVRI EX OFFICINA / Rodolphi Vuissenbachij. / M.D.L.I.. 8 DE TESTAMMENTO SEV FOEDERE DEI unico & aeterno Heinrychi Bullingeri breuis EXPOSITIO. … TIGVRI,

IN AEDIBVS CHRISTOPH. FROSCH. MENSE Septemb. An. M.D.XXXIIII.. 9 Das der Christen gloub von anfang der waelt gewaeret habe der recht vnd vngezwyflet glouben sye … …

D.M.XXXVI.. 10

DE SCRIPTVRAE SANCTAE AVTHORITATE, … … ad Sereniss. Angliae Regem HEINRYCHVM VIII.

Heinrychi Bullingeri Liberi duo. TIGVRI IN OFFICINA FROSCHOVIANA MENSE MARTUO, ANNO M.D.XXXVIII.. 11

Der Christlich Eestand. Von der heiligen Ee harkummen / wenn / wo / wie / und von wåm sy vfgesetzt

… durch Heinrychen Bullingern beschriben, Zürich: Christoff Froschauer 1540. 12

Sermonum Descades quinque, de potissimis christianae religionis capitibus, in tres tomos digestae,

authore Heinrycho Bullingero, ecclesiae Tigurinae ministro, Zürich, Christoph Froschauer 1552. 13

Summa Christenlicher Religion. Darin vß dem wort Gottes / one alles zancken vnd schaelten / richtig

vnd Kurtz / anzeigt wirt / was einem yetlichen Christen notwendig sye zů wüssen / zů glouben / zů thůn /

vnd zů lassen / ouch zů lyden / vnd saeligklich abzůsterben: in x. Artickel gestelt / durch Heinrychen

Bullingern … … Zů Zürych by Christoffel Froschouer / M. D. LVI.. 14

Der Widertoeufferen vrsprung fuergang Secten waesen fuernemen vnd gemeine irer leer Artickel … …

Getruckt zu Zuerych by Christoffel Froschower im Mertzen Anno M.D.LX.. 15

IN APOCALYPSIM Iesu Christi, reuelatam quiddem per angelum Domini, uisam uero uel EX-CEPTAM

ATQVE CONSCRIPTAM A IOANNE apostolo & euangelista, Conciones centum: authore HEIN-RYCHO

BVLLINGERO … BASILEAE, PER IOANNEM Oporinum 1557. 16

Heinrich Bullingers Reformationsgeschichte, nach dem Autographon hrsg. v. Johann Jakop Hottinger

und Hans Heinrich Voegeli, 1-3 Bd., (Frauenfeld: Ch. Bevel, 1838-1840). 최종적으로 1567 년 11 월

10 일에 완성된 불링거의 《종교개혁사》은 30 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쓰여진 방대한 것이다. 여기에서

불링거는 1519 년부터 1532 년까지의 취리히, 스위스 그리고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에 관한 격변의

역사들을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하지만 이 저술은 불링거가 생존하는 동안 출판되지 못했고, 거의 270 여

년이 흐른 후인 1839-40 년에 출판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St. Andrews 대학교의 저명한 교회사가인 부르스

고든(Bruce Gordon) 교수는 이 저술에서 불링거가 쯔빙글리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특별히 이 평가가 쯔빙글리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 자극이 되어 개신교 연합에 저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참고: Bruce Gordon, Heinrich Bullinger 1504-1575, 『The

Reformation Theologian』, Ed. Carter Lindberg, (Oxford: Blackwell Publishing, 2002), 172.)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외에 불링거는 영국과

로카르노(Locarno)에서 취리히로 온 망명자들을 돌보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럽 전역에서

개신교 신앙 때문에 고난받은 이들을 위한 대변자로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특별히, 위에

언급된 1557 년에 출판된 요한 계시록 설교집은 믿음 때문에 고난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기 위해서 출판된 것이다. 불링거는 자신이 1554-1556 년 사이에 행한 요한 계시록에

관한 100편의 설교들을 묶어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헌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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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링거는 1575 년 9 월 17 일에 방광염과 신장염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취리히 정부와 국민들에게 한 교회를 이루며, 종교개혁의 유산을 잘 계승해 줄 것을

당부하는 유언을 남겼다. 불링거에게 절대적으로 기대어 있었던 취리히 교회는 그의 죽음 이후로

유럽 내에서 개혁주의 교회와 관련된 자신의 주도적 권위를 상실하였다.

2. 쯔빙글리의 교회개혁

불링거는 카펠 전쟁에서 불행하게 죽은 쯔빙글리가 남겨 놓은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불링거에게서 고유성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불링거의 개혁사상은

‘쯔빙글리와 함께, 동시에 쯔빙글리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불링거의

교회개혁을 확인하기 전에 먼저 쯔빙글리의 교회개혁을 살펴야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쯔빙글리는 1519 년 1 월 1 일부터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Grossmünster) 교회에서 마태복음

주해를 시작으로 한 복음적 설교를 선포하였다. 그 열매는 1523 년 1 월 29 일에 개혁주의 교회

설립을 위한 첫 역사적 회합으로 간주될 수 있는 쯔빙글리와 다른 동료 목사들, 취리히 시장,

상∙하 의회의 위원들, 콘스탄츠(Konstanz)의 대주교관으로부터 온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절단,

시민들을 포함하여 대략 600 여명이 참석한 첫번째 취리히 논쟁(Erste Zürcher Disputation)으로

이어졌다. 17 이때 쯔빙글리는 이제까지 선포했던 복음적 설교를 구조화시킨 67 개 신학적

논제들을 통해 자신의 개혁적 원리에 근거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를 비판하였다. 18 특별히, 이

논제들에서 교회개혁과 관련하여 쯔빙글리는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전제

위에서 참된 교회는 모든 선택된 성도들의 모임 19을 강조하였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제와 평신도들의 계급적인 구별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모든 평신도들 역시도 복음의 증거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16 장 13-20 절의 열쇠권(die

Schlüsselgewalt)을 가지고 있음을 표명하였다. 20 그리고 쯔빙글리에게서 교회개혁은 정부와

협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안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는 교회와 정부의 관계를 계급적

서열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둘이 서로 구별되어 있지 않는 관계로도 규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있어서 교회와 국가는 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협력해야 할 일원이었다. 국가의 존재는

교회의 보호에만 있지 않고,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기독교적 사회를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한 역활을 감당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21

17

Huldrych Zwingli, Auslegung und Begründung der Thesen oder Artikel, Huldrych Zwingli Schriften II, (Zürich: TVZ, 1995), 5. 18

쯔빙글리는 이 논쟁을 위해서 67 개 신학적 논제들을 준비하였다: a. 1-16 논제들은 쯔빙글리의 신앙관과

성경관에 근거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적인 문제들을 비판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다룬 내용들이다.

b. 17-33 논제들에서는 직접적인 교황주의 교회의 문제들이 다루어졌는데, 중심적으로 다음의 사안들이다:

교황의 권위, 미사, 선행, 성직 소유, 금식계명, 축제일, 순례, 사제와 수도자 복장과 외형적 표식, 사제들의

독신주의와 동정맹세, 교회의 파문, 교회가 행사하는 세속권력의 문제 등. c. 34-67 논제들은 세속정부의

권위와 역할, 기도, 죄사함, 연옥, 교회의 모든 미신적 폐단 등을 다루었다. 19

Zwingli, Auslegung und Begründung der Thesen oder Artikel, 63-73 (The. 8: Alle, die in diesen Haupt

leben, Glieder und Kinder Gottes. Und das ist die Kirche oder Gemeinschaft der Heiligen, die Ehefrau

Christi: ecclesia catholica.). 20

Zwingli, Auslegung und Begründung der Thesen oder Artikel, 127 (The. 17): “… diese Schlüssel nicht

dem Papst Worte Gottes allein gehören, sondern all denen, die mit dem Worte Gottes lösen und binden;

sie sind auch der ganzen Schar der Jünger gemeinsam gegeben worden. … verheisst Christus dies (die

Vollmacht, mit göttlicher Kraft zu wirken) nicht nur Petrus und Aposteln, sondern allen Gläbigen, …“ 비교:

426-7 (The. 50). 21

Gregory J. Miller, Huldrych Zwingli,『The Reformation Theologian』, 164.

이 회합을 시작으로 취리히

교회는 공적인 승인 아래서 교회와 사회 전반에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온 종교개혁의 문을

합법적으로 열었다. 이때로부터 취리히 교회개혁은 구체적으로 현실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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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빙글리에 의해 주도된 교회개혁의 특징은 교회개혁를 통해서 사회개혁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와 국가의 협력 속에서 수행되었다는 점이다. 교회개혁를 통해서 사회개혁이

의도된 것은 바른 신앙적 입장에 근거한 교회개혁은 교회가 속해 있고, 동시에 그 교회의

성도들이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전제 속에서

이루어졌다. 22 실제로, 교회가 개혁됨으로 인하여 그 효과는 모든 시민사회의 윤리의식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균형에 대한 개선을 결과시켰다. 다른 종교개혁 도시들의 한 모델이

되었던 취리히는 당시 복음적 원리에 근거한 인권의식의 함양과 함께 복지사회에 대한 국민적

의식의 기초를 만들어 낸 것이다.23 그리고 쯔빙글리의 교회개혁은 당시 국가의 협력 없이 가능할

수 없었다. 16 세기 초에 각 지역에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려면 종교적으로 그곳의 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로마 카톨릭 주교회의 지지나, 혹은 정치적으로 정부(혹은 지역의 영주)의

승인이나 협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쯔빙글리 역시도 종교개혁을 수행할 때 맨

처음 취리히 교회가 속해 있는 콘스탄츠 주교회에 호소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주교회가 종교개혁을 지지한다는 것은 교황으로부터 독립하는 것뿐만 아니라, 곧바로 그의

적대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때문에 많은 주교들과 영향력 있는 사제들이 교회개혁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공론화시키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쯔빙글리는 취리히 정부를 향해 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유럽의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취리히에서도 종교개혁이 교회와 국가의 협력 속에서 진행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취리히 정부는 쯔빙글리의 처벌을 요구한 주교회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교회와 관계를 단절하면서까지 그를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주도에 의한 개혁의

길을 지지하고 승인하였다.24

22

Fritz Büsser, Huldrych Zwingli: Reformation als prothetischer Auftrag, (Zürich: Musterschmidt Götingen,

1973), 73-80. 23

교회와 국가(사회)에 대한 이상향과 관련하여 종교개혁 이후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글들이 쓰여졌다.

대표적으로 이미 잘 알려진 모마스 모어(Thomas Morus)의 유토피아(Utopia), 루터적인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 에버린(Johann Eberlin)의 볼파리아(Wolfaria), 개혁주의에 가깝지만, 그러나 영국식 국가와 교회

상호관계적 이상향에 대한 기록인 마틴 부쳐(Martin Bucher)의 그리스도의 규범에 관하여(De regno Christi),

당시에 새로운 로마 카톨릭 교회에 근거한 이상국가를 그린 토마소 캄판넬라(Tommaso Campanella)의

태양의 국가(Civitas Solis), 현재 유럽식 자본주의에 가까운 경제개념 위에서 이상향적 도시를 규정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대륙(Nova Atlantis)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일

수 있는 것은 북미 대륙으로 이주를 하였던 재세례파의 한 분파인 후터러(Hutterer)의 창시자 야콥

후터(Jakop Hutter)가 저술한 형제들의 공동체(Bruderhöfe)이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저술들에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그 당시 오늘날 사회주의적 복지국가 개념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해들이 기독교적인 토대 위에서 언급되었다는 것이다. 정치, 경제, 군사, 노동, 교육, 쉼, 의료 혜택 등의

거의 모든 사회 영역들에서, 기독교인이든 혹은 이방인이든, 인간의 소외나 차별이 없으면서도, 또한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다하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종교적이고, 인권적이며 그리고 복지적인

사회 개념을 그려내고 있다. 24

Martin Haas, Huldrych Zwingli und seine Zeit, (Zürich: Zwingli Verlag, 1968), 120-3.

그럼 이러한 배경 속에서 쯔빙글리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개혁적

의지를 정부에 관철시킬 수 있었을까? 쯔빙글리가 공적인 회의를 통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523 년 1 월 29 일에 열린 첫 번째 논쟁 이래로

지속적인 종교개혁 수행을 위한 여러 회합들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서 정치인들과 일반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고, 큰 저항 없이 논의된 문제를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

물론, 이때 고려되어야 할 다른 중요한 면도 있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흥미롭게도 쯔빙글리는

설교를 통해서 교회에 오는 정치인들과 시민들에게 교회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정치적인 도움과

결단을 강요하였다는 점이다. 쯔빙글리는 평상시에 신약과 구약을 설교했으나, 만약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이 필요할 때에는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였다. 한 실례로, 1523 년 7 월

30 일에 농민전쟁과 관련된 급진주의가 취리히 사회에 문제가 되었을 때 ‘신적인 정의와

인간적인 정의에 관하여(Von göttlicher und menschlicher Gerechtigkeit)’라는 설교를 통하여

Page 6: 하인리히_불링거의_교회개혁

6

재세례파와 구별된 세속정부에 대한 정치–사회적 질서를 성경에 근거하여 제시하였다. 25

이러한 특징 속에서 취리히 교회개혁은 실천적인 면과 구조적인 면을 띄고 있다. 먼저,

실천적인 면에서 1524 년에 교회 안에서 성화와 성상들이 철거되었다. 교회는 오직 예배드릴

회중들로만 채워질 공간으로 새롭게 변모했다. 1525년에 수도원 폐쇄와 함께 미사도 중단되었다.

일년에 네번 성찬식을 거행하는 설교중심적 예배가 도입된 것이다. 그 외에 다양한 성일들이

폐지되고, 오직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 등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절기들만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구조적인 면에서 쯔빙글리는 취리히에 개혁된 신학과 교회를 유지시킬 수 있는 기관들을

정비하거나 세우고,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 체계를 갖춘

것이다. 1525 년에 교회권징이 효율적으로 집행될 수 있도록 가정법원을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결혼과 가정불화에 대한 문제만 다루었지만, 점차적으로 풍속을 단속하는 기관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도 어려운 문제들을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26

같은 해 개혁주의 목회자를 길러내는 최초의 신학교육기관인 예언회(Prophezei)도 설립되었다.

이곳 교수들의 수고 아래서 1531 년에 취리히 성경이 최초로 출간되었다. 1528 년에는 취리히

개혁주의 총회가 처음 열리게 되었다. 이 종교회합은 교리와 목회자들의 도덕적 생활을 감독하고

교회 내부의 일들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27

25

Georg Finsler u.a., Ulrich zwingli: Eine Auswahl aus seinen Schriften, (Zürich: Schulshess & Co., 1918),

343-367. 특별히, 이 설교에서 쯔빙글리는 세속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해를 가졌다: 인간은 국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국가에 순종해야 한다. 나쁜 통치자들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다.

이 때문에 그 폭군에게도 시민서약을 해야 하며, 그에 따른 국민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세속권세에 복종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세속권세에

순종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정의가 하나님의 정의를 앞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속적인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를 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위정자들은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대한 바른

기준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목사는 설교를 통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는 선한 국가 안에서 상호보안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와 국가의 계급적 서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 선포를 통한 경고 속에서

교회와 세속정부가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알고, 그것을 함께 이루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26

가정법원이 확대되어 재편된 풍기단속법원(1526)에서는 가정문제, 매춘, 도박, 음주, 춤, 비방,

고리대금업 등의 일반 사람들에 대한 문제들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과 관련된 문제들 역시 다루어졌는데,

특별히 성직임명에 대한 자격과 성직임무의 책임성에 대한 심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서 목회자들의

활동과 생활이 규칙적으로 점검(die Visitation)되었다. 27

취리히 총회의 구성은 모든 목회자들, 평신도 대표 두 명, 대위원회에서 네 명 그리고 소위원회에서 네

명으로 이루어졌다. 일년에 두차례 취리히 시청에서 개최되었다. (필립 샤프, 박경수 역, 스위스 종교개혁,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85.)

취리히 총회에서 결과적으로

두번의 카펠 전쟁들을 발생시킨 원인이 되었던 이미 쯔빙글리를 지지하고 있는 베른(Bern)이나

다른 지역들과 협력하여 아직까지도 로마 카톨릭 교회를 고수하고 있는 다른 스위스 도시들까지

종교개혁을 강력하게 확대시킨다는 것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당시 스위스 분위기는 지역간의 갈등이나 국가간의 갈등이 종교개혁을 통한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 사이의 주도권 싸움(Hegemonie)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종교개혁의 선두에 있었던 쯔빙글리의 지위와 관련하여 그의 영향력은 당연히 클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취리히 교회와 정부가 주변 지역들의 종교개혁을 지원하고 이끄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

다른 로마 카톨릭 교회를 지지하는 다섯 지역들(Luzern, Uri, Schwyz, Unterwalden, Zug)의

반발로 발생하게 된 제 2 차 카펠 전쟁 때, 그 책임적 지휘에 있었던 쯔빙글리와 동료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기독교 국가를 지키기 위해 전쟁의 선두에 서야했던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3. 불링거의 교회개혁

Page 7: 하인리히_불링거의_교회개혁

7

1531년 12월 9일에 불링거는 쯔빙글리의 후계자로 취리히 교회의 의장이 되었다. 27세 나이에

불링거는 종교개혁의 지속성을 통해서 아직까지 미흡하게 남아있는 교회개혁과 기독교적 사회의

안정에 관심을 두었다. 제 2 차 카펠 전쟁에서 패한 취리히 정부는 교회의 목사들이 세속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였다. 28 하지만 쯔빙글리에 의해 추구되어 왔던 교회와 정부의

협력 속에서 교회적이고, 사회적인 용무들을 해결하는 구조는 유지시켰다. 특별히, 불링거의

입장에서 볼 때 교회와 국가의 협력은 그 당시의 험난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교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종교개혁적 정신과 실천에 맞게 해결하기 위한 필수적인 선택일 수 밖에 없었다. 29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불링거가 세속권세와 동행하는 취리히 교회의 방향을 표명하였을 때 두

가지 명제를 분명히 하였다: 첫째는 교회개혁에 있어서 바른 신학적 이해에 근거한 순수한

적용과 관련된 것이고, 다음은 모든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선지자적이고, 파수꾼적인

역할과 관련된 것이었다. 30 교회개혁에 있어서 국가의 참여 대한 이해는 이미 《Freundliche

Ermahnung zur Gerechtigkeit, 1526》, 《Anklage und ernstliches Ermahnen Gottes, 1528》,

《De Prophetae Officio, 1532》 등과 같은 불링거의 초기 저술들 안에서부터 발견되고 있다.

불링거에 의해 추구된 교회와 세속정부의 협력사역은 서로의 고유한 직무를 침해하거나 혼합됨이

없이 상호적 관계를 존중하면서 각 영역에 주어진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다. 두 기관의

상호협력은 질서나 역할에 대한 구별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분명하게

구별되는 질서와 역할을 상호존중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각 자의 고유한 직무들을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 인식된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Campi의 언급은 교회와 세속정부의 관계에

대한 불링거의 입장을 선명히 밝혀 준다: “목사들과 세속정치적 정부의 협력사역을 문제가 될 수

있는 혼합의 위험성으로부터 보호한 것은 불링거가 쯔빙글리 보다 이론과 실천 안에서 훨씬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31

새로운 취리히 교회 의장(Antistes)으로 선출된 다음 해인 1532 년 10 월 22 일에 젊은 불링거는

쯔빙글리의 친구이자 동역자였던 레오 윳(leo Jud)과 함께 작성한 《취리히 설교자와 총회를 위한

규범》을 공포하였다. 이 문서는 종교개혁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와 구별되는 교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분명히 하기 위한 일환 속에서 요청된 것으로 불링거의 사역기간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프랑스 혁명(1789) 이전의 나폴레옹이 집권한 구체제(Ancien Régime)에까지 존속된

것이다.

그럼 불링거가 쯔빙글리를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넘어서 더욱

발전적으로 완성해 가길 원했던 교회개혁의 사역적 내용들은 무엇인가?

1) 취리히 교회규범

32 엄밀히 말하면, 취리히 교회규범은 교회의 역할이 정부의 감독과 협력 아래서 진행되는

정부 참여적인 교회규범이다. 33

28

Emidio Campi, Heinrich Bullinger und seine Zeit, 『Zwingliana』xxxi, hg. E. Campi, (Zürich: TVZ, 2004),

8. 29

Zodel, Bullingers Einfluß auf das züricherische Staatswesen von 1531-1575, 16. 30

Campi, Bullingers Rechts- und Staatsdenken, 119-120. 31

Emidio Campi, Bullingers Rechts- und Staatsdenken, 126: “Es ist Bullinger in Theorie und Praxis

besser als Zwingli gelungen, das Ineinanderwirken von Pfarrern und Politischer Obrigkeit vor der Gefahr

einer problematischen Vermischung zu bewahren.” 32

Fritz Büsser, Heinrich Bullinger: Leben, Werk und Wirkung, B.I., (Zürich: TVZ, 2004), 127. 33

취리히 교회를 17 세기 영국에서 장로회주의자들과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에라스투주의자들이 말하는

정부가 교회를 다스리는 입장과 혼돈해서는 안된다. 실례로,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ederford)는

《Divine Right of Church Govermemt, 1645》에서,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는 《Aaron’s Rod

Blossoming, 1646》에서 불링거의 입장이 에라투스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또한 에라투스주의자들과

구별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Andries Raath & Shaun De Freitas, From Heinrich Bullinger to Samuel

Rutherford: The Impact of Reformation Zurich on Seventeenth-Century Scottish Political Theory,

『Heinrich Bullinger Life – Thougt – Influence』. Zurich, Aug. 25-29, 2004 International Congress Heinrich

Bullinger (1504-1575) hg. Emidio Campi & Perter Opitz, Vol. II, (Zürich: TVZ, 2007), 853-879.

이와 관련하여 이해를 돕기 위해 한 실례를 든다면, 취리히

Page 8: 하인리히_불링거의_교회개혁

8

교회의 총회에서는 두 명의 의장―목사들 중에 한 사람과 시위원들 중에 한 사람이 세워졌다. 34

쯔빙글리 죽음 이후 발생된 정치상황과 무관되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정부의 도움 없이

종교개혁을 완성할 수 없었던 취리히 교회의 현실과 고민이 그 안에 녹아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취리히의 설교자와 총회를 위한 규범》은 크게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11 조항으로

구성된 첫번째 주제는 “설교자들의 선택, 파송 그리고 부양에 관하여”이다. 목회자가 될 수 있는

자격조건, 감독관들에 의한 시험 35 , 합격한 목사의 파송교회 등에 관한 세부적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다. 특별히, 목회자 부양에 대한 조항은 당시 취리히 교회의 재정과 관련하여

현실적으로 실행되는데 제약이 있었다. 이 문제는 1536 년에 기본적인 해결점이 제시되었다. 18

조항으로 구성된 두번째 주제는 “설교자들의 가르침과 삶에 관하여”이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국가에서 파송된 목사는 한 지역 교회의 사역자로 설교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지역의 악습,

이단, 죄악 그리고 부도덕과 투쟁하는 책임이 의무지어져 있다는 언급이다. 즉, 목사의 책무에는

자신이 선포하는 말씀에 근거하여 공적인 파수꾼 역활에 대한 감당도 포함되어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10 조항으로 구성된 마지막 주제는 “총회의 구성과 모임, 목사의 직무와 사역 그리고

교회와 정부에 대한 목사의 의무에 관하여”이다. 전체적으로 이 주제는 목회자들에 대한

관리∙감독를 통해서 교회의 일치와 목회자들의 품위유지를 목적으로 정리된 것이다. 36 불링거는

교회규범을 통해서 쯔빙글리의 사역을 계승하고, 더욱 발전적으로 취리히 교회의 개혁을

이끌고자 의도했다. 37

16 세기 당시 개신교 신학교는 종교개혁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 줄 가장 좋은 수단들 중에

하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교회의 봉사자와 사회의 지도자를 길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중세

후반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스콜라적인 추상적 교육을 지양하고, 오직 교회와 성도들에게

실제적인 유익이 될 수 있는 실천적인 지식을 쌓도록 하였다. 즉,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고,

바른 신앙정신 위에서 세대와 세대를 넘어서 교회를 유지시킬 수 있는 기관으로 이해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신학교나 대학교 옆에서 16 세기 초중반부터 유럽의

개혁주의 도시들 안에서 발생한 ‘예언회’로부터 발전된 취리히 학교(Schola Tigurina)나 제네바

학교(Geneva Academie) 같은 목회자 교육을 위한 전문학교들(Hohe Schulen)이 개신교

목사들을 길러내는데 중심적인 기여를 했다. 특별히,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온전히 하고, 그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신앙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일은 매우 급박한 사안이었다. 필수적으로

목회자 신학교육이 요청되었다. 쯔빙글리는 (신)학교를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사제계급이 교회 안에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명하는 종교개혁적 산물로 간주하였다. 즉, 교육을 사제와 평신도의 지식-

계급적 차이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여긴 것이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쯔빙글리는 목회자들이

교회의 교사들로 신적인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성도들을 복음적 진리로 인도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학교를 통해서 전문적인 신학교육에 대한 연마가 필요함을 직시했다. 이

때문에 1525 년 7 월 19 일에 쯔빙글리에 의해 명칭된 예언회가 설립된 것이다. 쯔빙글리 사후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적 색채를 완전히 극복한 오직 종교개혁에 기반을

둔 교회를 취리히에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2) 취리히 교회의 신앙교육

a. 목회자 신학교육

34

Bruch Gordon, Clerical Discipline and the Rural Reformation. The Synode in Zürich , (Bern: TVZ, 1992),

96-101. 35

시험감독관은 정부파송 시위원 2 명, 목사 2 명 그리고 신학교 교수 2 명으로 구성되었다. (Büsser,

Heinrich Bullinger, 128.) 36

Büsser, Heinrich Bullinger, 133. 37

Büsser, Heinrich Bullinger, 136.

Page 9: 하인리히_불링거의_교회개혁

9

취리히 교회에서 130 여명의 목회자 교육과 지속적 수급을 위해 더욱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신학교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532 년 2 월 17 일에 불링거는 취리히

시위원회로부터 그로스뮌스터(Grossmünster) 라틴어 학교를 전문 신학교로 개편해도 좋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취리히 교회의 의장은 같은 해 10 월에 테오도르 비블리안더(Theodor

Bibliander)와 함께 새로운 취리히 학교규범인 『Ordination』 38을 작성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육과 훈련된 삶을 목적으로 한 학교규범은 그로스뮌스터 라틴어 학교를 새롭게 재편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39 취리히 신학교에서 학생들은 기독교적 인문주의

인식을 가진 교수들 아래서 고전어(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와 함께 성경의 해석과 번역,

신학(교리), 자연과학(물리학 및 의학), 철학 등을 배우면서, 이후 개혁주의 목사로 전문적인

소양을 갖출 수 있었다. 처음 카펠 전쟁의 패전으로 취리히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과 관련하여 교회와 정부 사이에 논쟁이 있었지만, 불링거의 중재 속에서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자선기금과 다른 모든 교회재산들은 오직 학교운영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쓰여져야

한다는 것이 합의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교수들이 충원되고 40

취리히 교회는 목회자들의 신학교육과 함께 학생들과 평신도들에 대한 신앙교육에도 관심을 가졌

다. 신앙교육의 목적은 기독교 신앙의 인식과 교리적인 무지에 대한 극복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앙

의 변질 없이 교회를 세대와 세대를 넘어 보존시키기 위한 의도 속에 놓여 있다. 이러한 신앙교

육을 통해서 불링거가 의도한 것은 믿음과 삶이 결코 신앙지식이나 경건과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것이었다.

, 학교공간과 공부여건(교재나

자료)이 개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학생들에게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학문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장학금도 확충되었다. 더욱이, 재능이 있고 성실한 학생들에게는 정부의 후원 아래서

신학과 의학(자연과학) 분야를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취리히 신학교의

졸업생들은 거의 대부분 취리히 교회를 섬기는 목사들이 되었다. 종교개혁 이전과 달리 바른

교육의 전제 아래서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잘 준비된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의 헌신과 협력

속에서 취리히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서 갔다.

b. 평신도 신앙교육

41 그리고 신앙교육은 어느 특정한 세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세대를 목표

로 한다: 먼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교회, 학교 그리고 가정의 신앙교육을 통해서 경건한 삶

의 변화를 이룰 수 있기를 기대했고, 다음으로 성인들은 구교와 신교의 분리 이래로 새로운 믿음

의 질문들에 대해서 바른 인식을 갖길 원했다. 이와 관련하여 불링거는 신앙교육을 통해서 기독

교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고, 경건의 삶을 강화시키고 그리고 신앙공동체적인 삶에 관심을

가졌다. 모든 연령층을 위한 신앙교육은 종교적이고, 사회-공동체적인 책임으로써 반드시 필요한

교회 프로그램으로 간주된 것이다.42

38

Ordination und Ansähen, wie man sich fürohin mit den schuleren, letzgen und anderen Dingen halten

sölle in der schul zum Münster Zürich 1532. Oktober. 39

그로스뮌스턴 라틴어 학교는 1532 년에 3 등급으로 구성된 기본과정(Lateinschule)과 이미 쯔빙글리에

의해 ‘예언회’로 불리운 상급과정(Loktorium)으로 구분된 전문학교로 재편되었다. 그 이후로 1546 년에

기본과정이 5 년으로 확대되었고, 1548 년에는 상급과정과 관련하여 초급 목사들이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강좌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었다. 오랜시간 동안 존속된 종합적인 학교규정은 1559 년에 새롭게

공포되었다. (Hans U. Bächtold, Heinrich Bullinger und die Entwicklung des Schulwesens in Zuerich,

『Schola Tigurina』, (Zuerich & Freiburg: Pano Verlag, 1999), 49.) 40

쯔빙글리 사망 이후 취리히 신학교 주요 교수들은 다음과 같다: 콘라트 펠리칸(Konrad Pellikan),

테오도르 비블리안더(Theodor Bibliander), 루돌프 콜린(Rudolf Kollin), 암만(J. J. Ammann), 콘라트

게스너(Konrad Gessner / 당대 가장 유명했던 자연과학 교수), 요시아스 심러(Josias Simmler) 등페터

마르티어 베어미글(Peter Martyr Vermigli) 등. 41

Sang-Bong Park, Heinrich Bullingers kateketische Werke, Dissertation zur Erlangung der Doktorwürde

an der Universität Zürich (2011), 1. 42

Park, Heinrich Bullingers kateketische Werke, 2.

불링거의 신앙교육 내용은 모든 시대에 요청되는 신앙지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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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삶의 성숙을 이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구속사적인 교리와 신앙적 윤리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신앙지식의 내용에 있어서 어른과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과 문제들을 세분화하여 전

달하기를 원했다. 실례로, 십계명을 가르칠 때 성인들의 관심과 청소년들의 관심 사이를 구분하였

다. 부모공경에서 성인들과 관련하여 국가에 대한 이해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면, 청소년들과

관련하여서는 부모 자체에 대한 이해에 더 많은 설명을 첨가하였다. 또한, 간음금지에서는 성인들

과 관련하여 부부관계에 관심을 두었다면, 청소년들과 관련하여서는 그 나이 때에 발생할 수 있

는 성적인 방종에 시각을 돌렸다. 43 뿐만 아니라, 불링거는 목회적 사역에 속하는 신앙교육이 성

숙한 신앙적 삶을 위한 신앙지식의 효과적인 전달이 전제된 전략적인 계획임을 표명했다. 즉, 다

양한 현실 안에 있는 여러 연령대에게 신앙지식은 내용적이고 방법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뿐만 아

니라, 동시에 신앙지식의 수준에 따른 고려도 있음을 피력하고 있다. 44 이를 통해서 불링거는 세

대와 세대 사이의 신앙의 연속성에 대해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배움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의 구별 역시도 예방하였다. 더욱이, 신앙교육은 교회들과 성도들 사이의 신앙적 일체성

역시도 제공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별히, 새롭게 개종한 신자들이나 초신자들이 있을

경우 신앙교육을 통해서 기존 신자들과 신앙일치를 갖도록 인도한다. 즉, 신앙교육은 한 교회의

성도들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확정시켜주고, 동시에 다양한 생각을 가진 성도들을 한 신앙정

신으로 묶는 역할도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45

종교개혁 이후 취리히에서 수도원들이 폐지되고 로마 카톨릭 교회들이 개신교로 전환되면서 많은

수도사들과 사제들이 새롭게 개신교 목사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 이때 목사들은 가정을 새롭게

이루었다. 그들이 가정을 갖게 됨으로 인하여 경제적 부양에 대한 문제가 교회개혁의 한

걸림돌이 되었다. 목회자의 덕목으로 경건, 성실 그리고 청빈이 강조되기는 하였지만, 당시

어려운 현실 속에서 많은 목사들이 빈곤 가운데 살아야 했다. 즉, 목회자의 안정되지 않는 생활은

교회나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6 세기 초반의 취리히 교회의 재산은 모든

목회자를 먹여 살리는데 충분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미 취리히 정부가 종교개혁이 시작되는

때부터 목회자의 부양에 대해 보증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현실적인 문제로 인하여 잘

지켜지 않았다. 취리히 정부는 국유화된 교회재산을 쯔빙글리의 목숨을 잃게 한 카펠 전쟁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출하고, 심지어 정부청사를 구입하는데도 사용하는 등 교회와 관련이 없는

일들에 허비한 것이다.

3) 목회자 부양문제

46 이 때문에 당시 부모들은 자녀들이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것에 대해

현실적인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47

43

Park, Heinrich Bullingers kateketische Werke, 178. 44

Heinrich Bullinger, Der christliche Ehestand, 『Bullingers Schriften I』, hg. von Emidio Campi, Detlef

Roth & Peter Stotz, (Zürich: TVZ, 2004), 549f; Dekade 5, 『Bullingers Schriften V』, 187f(Predigt 4). 45

Park, Heinrich Bullingers kateketische Werke, 16f. 46

Hans U. Bächtold, Bullinger und die Obrigkeit, 『Vorträge, gehalten aus Anlass von Heinrich Bullingers

400. Todestag』, hg. Ulrich Gräbler & Endre Zsindely, (Zürich: TVZ, 1977), 79. 47

K. J. Rueetschi, Bullinger, der Schulpolitiker, 『Der Nachfolger Heinrich Bullinger (1504-1575)』,

(Zürich: TVZ, 2004), 69.

우수한 학생들이 거의 8 년간의 시간 속에서 엄격한

학문과정을 밟고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여 교회의 봉사자가 되었지만, 그 현실은 너무도 열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불링거는 교회의 안정을 목적으로 1536 년에 목회자 부양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긴급 조치를 단행할 수 밖에 없었다. 먼저, 취리히에서 활동하는 모든 목사들의

가정형편, 경제적인 상태 및 급료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그리고 교회재산을 통한 부양 외에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취리히 정부를 설득하였다. 물론, 불링거가 원하는 만큼 성과를

얻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완전히 관철될 때가지 긴 시간이 걸린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사건은 1546 년에 취리히 정부가 시위원들의 봉급을 도입했을 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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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필요한 재정을 수도원 수익으로 충당하고자 한 것과 관련하여 불링거가 강하게 비난했던

사건이다: “취리히 정부관리들은 교회의 재산 안에서 뒹굴기 위해 오직 복음을 받아들인다.” 48

결과적으로, 교회재산이 취리히 정부에 의해 운영되지만, 그 사용은 오직 교회와 관련된 일들에만

국한된다는 것이 약속되었다. 이것과 함께 목사들의 급료가 정부에 의해 보장됨으로써 목회자

부양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다. 49

취리히 교회개혁은 사회개혁을 이끌었다. 쯔빙글리 당시 사회개혁의 성과 중에 대표적인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다. 취리히 교회의 요청에 따라 정부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것을

중지시킨 대신에 여러 지역에 무료급식소를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빵, 곡식가루, 보리나 다른

야채를 끓인 수프가 숙명적인 사건들로 인하여 가난해지거나 수입이 없어서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현지인들과 타지인들에게 제공되었다. 그리고 빈민복지사들을 채용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후원금이나 구호물자를 지급하였다. 가난한 가정의 우수한 자녀들을

위해 학교에서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아이들에게는

수공기술을 무상으로 배울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물론, 이러한 구제가 취리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 것은 아니다. 행실이 나쁜 사람들, 자신의 잘못으로 가난해진 사람들(도박이나

게으름),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으로 화려한 장식이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 포주나

매춘녀로 일한 사람들 그리고 욕설을 하거나 술집에 앉아서 주정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긍휼은 베풀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쯔빙글리의 사회개혁 기조 아래서 불링거는 더욱 발전적으로

사회적 소외계층을 위한 구조개선과 사회윤리의 의식확대를 위한 노력에 힘을 기우렸다. 교회와

수도원의 자선기금을 목회자 교육을 위한 신학교 확충과 함께 일반 어린학생을 위한 독일어와

라틴어 학교들(Deutsche Schulen und Lateinschulen) 역시 개선하는데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환자들을 돌보는데도 지출하였다.

하지만 교회재산의 사용과 관련하여 불링거의 제안이

존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 언제든지 교회와 정부 사이에 분쟁이 될 수 있는 잠재적인

요인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4) 사회개혁

a. 사회제도 개혁

50 취리히 학교들의 새로운 정비는 그

사회의 종교개혁적 신앙정신에 부합된 윤리수준을 향상시키고, 시민들의 권위와 인권의식을

발전시키는 다양한 유효적 결과들을 가져왔다. 이러한 시민의식의 신장 속에서 불링거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보살핌을 단순히 먹을 것과 필요한 것을 일시적으로 공급해 주는 차원을 넘어서

직접적인 제도 개선으로도 확장시켰다 51 : 취리히에서 돈을 빌려주는 측에서는 막대한 이익을

취하지만, 돈을 빌리는 측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굶주리게 만드는 고리대금업을

금지시켰다. 그 대신 오직 빌린 돈의 5%를 연이자의 개념으로 금전으로 혹은 자연생산물로

지불하는 것이 권고되었다. 52 노예신분으로 농노 일을 하는 농민들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돈을

지불하고 신분적 자유를 누리도록 장려되었다. 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가난한 친척들의 돌보는 것을

의무화시켰고, 취리히 정부를 설득하여 도로개설공사 같은 일자리 창출이나 수공업 관련 직업을

갖도록 지원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익이 있도록 도왔다. 53

48

Bächtold, Bullinger und die Obrigkeit, 82 49

Patrik Müller, Heinrich Bullinger: Reformator, Kirchenpolitiker, Historiker, (Zürich: TVZ, 2004), 38. 50

Zodel, Bullingers Einfluss auf das zuercherische Staatswesen von 1531-1575, 25. 51

Zodel, Bullingers Einfluss auf das zuercherische Staatswesen von 1531-1575, 26. 52

Zodel, Bullingers Einfluss auf das zuercherische Staatswesen von 1531-1575, 44. 5% 이자에 대한

규정은 처음 1523 년에 쯔빙글리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다. 53

Zodel, Bullingers Einfluss auf das zuercherische Staatswesen von 1531-1575, 27.

그 밖에 공공기금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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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에게 땔감, 옷 그리고 집세가 보조되도록 하였다. 불링거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모든 시민들로 하여금 자선에 관심을 가지며, 가난과 재난을 극복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공동체적

의식을 고무시켰다. 가난은 사회 전체의 평안과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요소 중에

한 가지임을 인식하였다. 교회가 앞장서지 않으면 해결되기 힘든 중대한 문제임을 직시한 것이다.

당시 취리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교인이자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불링거는 사회 문제들의

개선을 위해서 평생을 두고 고민했다.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글들도 집필하였다:《새로운

이자법》 54 , 《빈민구호에 관하여》 55 , 《고리대금업에 대한 조치》 56 , 《사악한 예술에

관하여》 57 , 《가난극복을 위한 제안》 58

불링거는 이미 1530 년 사회풍속에 대한 규범이 결정된 이래로 비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인

풍습이나 문화에 대한 감시와 제도적 개선을 강화하였다. 교회는 정부의 협력 아래서 목회자들,

성도들 그리고 시민들의 사회윤리에 대한 의식확대를 위해서 앞서 언급한 고리대금업 이외에

알코올중독, 도박, 오락(춤), 복장불량, 매춘 등을 금지시켰다. 한 실례로, 당시 춤은 음란한

오락으로서 결혼식 때를 제외하고 모든 시민들에게 금지되었다. 만약, 이 규범을 어길 경우

10 실링(Schilling)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춤을 위한 음악 연주가에게는 은화 1 마르크(Mark)가

부과되거나 감옥 생활을 해야 하는 형벌이 주어졌다.

. 이 사실은 불링거가 사회문제들에 대해서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b. 생활개혁

59

불링거가 추구한 교회와 정부의 협력은 자신의 시대 앞에 놓인 험난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교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종교개혁적 정신과 실천에 맞게 해결하기 위한 숙고의 과정에 따른

선택적 결정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를 통해서, 취리히 교회의 의장이자 약 7 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국가의 100 여 개가 넘는 교회 안에 130 여명의 목사들의 지도자였던 불링거의 궁극적

관심은 취리히에서 교회와 국가의 협력을 통하여 새로운 종말론적인 규범을 실현시키고자 한

것에 있었다.

당시 이러한 시민사회의 건전한

생활풍속의 유지를 위해서 사회의 지도층이었던 목회자들과 공무원들이 앞서 모범을 보였으며,

실제로 그들에 대한 감시가 더욱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이렇게 볼 때, 당시 개혁된 교회의 한

책무에는 사회윤리 의식과 시민사회의 건정성 위한 파수꾼적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속해 있었다.

결론

60

54

Eine neue Zinsordnung (1534), Autographe Reinschrift, Zürich Staatsarchiv (E II 102, S. 335-341);

Bullingers Schriften VI, 171-181. 55

Zur Armenfürsorge (1558), Autographe Reinschrift mit eigenhändigen Unterschriften von Heinrich

Bullinger, Rudolf Gwalther, Hans Wolf & Ludwig Lavater, Zürich Staatsarchiv (E I 5. Ia, Nr. 13. 23);

Bullingers Schriften VI, 343-355. 56

Massnahme gegen den Wucher (1568), Autographe Reinschrift. Zürich Staatsarchiv (E II 102);

Bullingers Schriften VI, 435-442. 57

Gegen die schwarzen Künste (1571), Abschrift von Johann Jakob Wick, Zürich Zentralbibliothek (Ms. F

63, Bl. 356-363); Bullingers Schriften VI, 483-501. 58

Vorschlag zur Bekämpfung von Armut (1572), Autographe Reinschrift, Zürich Staatsarchiv (E II 102, S.

299-315). August 1572; Bullingers Schriften VI, 519-540. 59

Zodel, Bullingers Einfluss auf das zuercherische Staatswesen von 1531-1575, 41. 60

Müller, Heinrich Bullinger, 36.

즉, 교회 공동체와 시민들이 동일한 하나님이 백성의 일원으로 전 삶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완전한 ‘Respublica Christiana’의 구현이었다. 이와

과련하여 불링거에게 있어서 교회개혁은 내부적인 일(res interna)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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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적인 일(res externa)이도 하였다. 즉, 교회는 내적으로 교회의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어야

하며, 또한 외적으로 사회에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함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미 다원적

종교토양을 가진 한국에서 불링거의 교회와 국가에 대한 관계의 이상이 요원(遙遠)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오늘 우리 교회에서 결코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의 교회개혁이 결국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교회는 성도들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불링거가 당시 시대적 현실과 관련하여 정부의 협력 속에서 교회개혁을

이끌었다고 해도, 그 개혁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인간의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이상적으로 보여주고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삶의 전

영역 속에서 복음을 실천적으로 구현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로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불링거의 목회자적 헌신도 볼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