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26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 205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 이 혜 자 서강대학교, 성서신학 1. 서사비평이란? 2. 마르코 복음 플롯 안에서 본문의 의미 3. 등장인물 분석 4. 수사법 5. 내포독자로 읽기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복음서 전체의 중심 주제이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서를 읽어보면 복음서의 시작, 악령들, 제자들, 대사제 등 많은 곳에 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말하거나 고백한다. 로마 백인대장도 예수를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한다. 전통적으로 백인대장의 고백은 마르코 복음의 그리스도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내러티브의 결론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15,39의 백인대장의 고백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고 한다. 1) 그 이유는 그리스어 하느님의 아들에 정관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 E.S. Johnson, "Mark 15,39 and the So-Called Confession of the Roman Centurion", Biblica 연구논문

Transcript of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Page 1: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 205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

이 혜 자

서강대학교, 성서신학

1. 서사비평이란?

2. 마르코 복음 플롯 안에서 본문의 의미

3. 등장인물 분석

4. 수사법

5. 내포독자로 읽기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복음서 전체의 중심 주제이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서를 읽어보면 복음서의 시작, 악령들, 제자들, 대사제 등 많은 곳에

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말하거나 고백한다. 로마 백인대장도 예수를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한다. 전통적으로 백인대장의 고백은 마르코

복음의 그리스도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내러티브의 결론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15,39의 백인대장의 고백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고 한다.1) 그 이유는 그리스어 “하느님의 아들”에 정관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 E.S. Johnson, "Mark 15,39 and the So-Called Confession of the Roman Centurion", Biblica

연구논문

Page 2: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206 신학과 철학 제25호

복음서 서두의 “[하느님의 아들]”에도 정관사가 없다는 것과 본문 비평 상 원래 본문에

없을 수도 있다는 것도 백인대장의 고백을 보충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2) 그러나 하느

님만이 예수의 세례와 거룩한 변모 때, Su. ei= o uio,j mou o avgaphto,j “너는 내가 사랑

하는 아들”이라고 증언한다(1,11; 9,7). 마르코 복음에서 가장 완전하고 결정적인 예수

에 대한 증언은 오직 하느님 뿐 이다. 왜냐하면 이 두 곳에만 그리스어 ‘하느님의 아

들’에 정관사가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백인대장의 고백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아니라면 왜 내러티브의 마지막에 배치되었으며 그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해볼

것이다.

우리는 마르 15,37-39을 서사비평(narrative criticism),3) 즉 문맥과 플롯, 배경, 등장

인물, 그리고 수사법에 초점을 두고 분석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중 70%가 내러

티브4)이고, 복음서는 예수에 관한 자료집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이야기’로

읽도록 서술되었기 때문이다.5)

81(2000), 406-413.2) 연구자가 표제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VArch. tou/ euvaggeli,ou VIhsou/

Cristou/ Îuiou/ qeou/Ð으로 표기한 것은 본문 비평에 따른 결과이다. The Greek New Testament(United Bible Societas)는 “하느님의 아들”이 원본에 있었을 것에 대한 판정을 C등급, 즉 결정하기 어려운

등급으로 판단한다. B.M.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New York: United Bible Societas, 1994), 62는 a Q 28c 등에 uiou/ qeou/가 생략된 이유를 필사자가 비슷

한 끝 부분을 오해했기 때문으로 본다. 또한 필사자가 책의 짧은 제목을 확장시켰을 수도 있다고 말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학비평가들(Kingsbury, Matera, Malbon)은 “하느님의 아들”을 첨가하는 독

법이 맞는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을 후대의 첨가라고 보면 서사비평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중요한 요문제가 될 수도 있다. 즉 마르코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이야

기의 처음부터 향력을 끼치는 용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볼 수도 있다.3) 성경을 서사비평으로 읽는다는 것은 서사(narrative)라고 하는 특정한 문학 유형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성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성경연구

방법론 책들이 많이 출간되었다.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교황청 성서 위원

회,『교회안의 성서해석』; R.E. 브라운,「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신약개론』, (기독교문서선교

회, 2003); 김재성 외,『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서울: 생활성서, 2001).4) 루카 1,1에만 나오는 dih,ghsij, narrative를 서사 또는 설화로 번역한다. 장 루이스 스카,『우리 선조들이

전해준 이야기-구약성경의 설화 분석 입문』, 염철호, 권연진 옮김, (서울: 성서와 함께, 2014). 연구자는

narrative를 ‘서사’, ‘이야기’ 또는 때때로 ‘내러티브’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람스의 문학용어사전은

narrative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번역하고(M. H. Abrams, A Glossary of Literary Terms, 97-100), 제랄드 프랭스의 Narratology도 ‘서사학’으로, S. 채트먼의 Story and Discourse-Narrative Structure in Fiction and Film도 narrative를 ‘서사’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5) E.S. Malbon, “Narrative Criticism: Learning to Listen to the Story”,『가톨릭 신학과 사상』, 72(2013), 11-43.

Page 3: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 207

1. 서사비평이란?

지난 1세기 동안 성경은 주로 역사비평 방법에 의해 연구되었다. 역사비평 방법은

성경 본문(text)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성경이 기록된 시대의 역사적 삶과

사상, 역사적 예수의 시대, 초대 교회의 구전 전승시대, 그리고 복음사가들에 의해서 복

음서가 최종적으로 형성되던 시대의 모습을 밝혀내려고 한다.6) 그러나 이 방법은 복음

서를 낱낱이 분해시켜 일관성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읽을 수 없게 하고, 복음서가 지

닌 독특한 ‘이야기 세계(narrative world)’는 물론 경전성까지 상실하게 하는 위험을 초

래하기도 하 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는 문학비평의 하나인 서사비평에 의한 복음서

연구들이 새롭게 대두되었다.7) 서사비평에 의한 복음서 연구의 초석이 된 것은 채트먼

(Chatman)의 의사소통 모형이다.8) 모든 의사소통 행위는 발신자, 메시지, 수신자를 갖

는다.9) 문학작품에서 발신자는 저자, 메시지는 본문, 그리고 수신자는 독자이다. 서사비

평을 위한 의사소통 모형은 다음과 같다.

실제작가 ……………………… 본문 ……………………… 실제독자

내포저자 → 내러티브 → 내포독자

내레이터→ 이야기, 등장인물 → 청자

6) M.A. 포웰,『서사비평이란 무엇인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22-23.7) D. Rhoads는 "Narrative Criticism and the Gospel of Mark",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50(1982), 411-27에서 처음으로 “서사비평”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J.D. Kingsbury, The Christology of Mark's Gospel,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R.A. Culpepper는 Chatman과

Jakobson의 의미전달 모델에 기초하여 서사비평을 체계화시켜『요한복음 해부』라는 책을 펴냈다: Anatomy of fourth Gospel,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7). R. Tannehill은 루카복음-사도행전의

서사 이야기를 분석했다(1986, 1990): R.C., Tannehill, The Narrative Unity of Luke-Acts: A Literary Interpretation, vol. 1: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Philadelphia, 1986); The Narrative Unity of Luke-Acts, vol 2: The Acts of the Apostles, A Literary Interpretatio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0). 이들은 서사비평의 선구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8) S.B. 채트먼,『이야기와 담론: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 (서울: 푸른사상), 2003.

9) R. Jakobson,『일반 언어학 개론』, (서울: 민음사, 1989), 215-22. R. Jakobson은 의미전달의 과정을

“발신자는 수신자에게 서로가 익히 알고 있는 기호를 사용해서 문맥을 통해 메시지를 보낸다.”라고

진술하고, 그것에 6가지 언어적 기능을 부여한다. 발신자-상황, 메시지, 접촉, 기호-수신자.

Page 4: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208 신학과 철학 제25호

내러티브 읽기(서사비평)는 본문을 완전한 의사소통 모형으로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

추기 때문에 실제저자와 실제독자는 의사소통 행위와는 관련이 없는 외적인 것으로 간

주된다.10) 서사비평자는 단순히 본문으로 지칭되던 것을 ‘내포저자11) → 내러티브(서사

이야야기) → 내포독자’라는 새로운 차원의 문학세계로 인식해야 한다. 더 나아가 비평

가는 내러티브가 ‘내레이터→ 이야기, 등장인물→ 청자’라는 하부구조를 형성하면서 이

야기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인지하고 내러티브를 읽는다. 서사비평은 작품을 본문의 실

제 청중들의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고, 내포독자의 입장에서 본문을 읽는 것이다.12)

내포독자는 내레이터의 이미지를 그대로 반 하는 인물이다. 내포독자는 저자가 이

야기를 하면서 만들어 놓은(혹은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독자로서,

내러티브에 담긴 모든 이상적인 반응들을 보이는 상상속의 독자이다.13) 마르코 복음에

서 내레이터는 ‘전지적(omniscient) 작가’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14) 즉, 이야기

세계의 모든 것 -언제, 어디서, 등장인물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해준

다. 그러므로 내레이터의 지배를 받는 내포독자는 본문에 기술되지 않은 것도 알고 있

고,15) 전지적 내레이터를 믿을 만한 안내자로 받아들인다.16)

10) 포웰은,『서사비평이란 무엇인가』, 28에서 실제저자와 내포저자 사이의 구별은 신약성경의 복음서

연구에는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복음사가들 중 두 권의 복음서를 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서의 실제저자들의 생각과 그들의 책에 표현된 생각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11) W.C. Booth는 1961년 실제저자가 ‘자신의 내포된 관점’을 작품 속에 제시한다고 말하면서 목소리가

결여된 ‘내포저자’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W.C., Booth, The Rhetoric of Fict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1). 내포저자는 서사 안에 반 되어 있는 문학적 장치로서, 실제저

자가 서사이야기에 만들어 놓은 인물이다. 한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읽을 때 그 이야기의 저자에 대

한 인상을 반드시 갖게 되는데, 그가 바로 내포저자다: S. 채트먼,『 화 소설의 서사구조』, (서울 : 고려원, 1997), 178.

12) 포웰,『서사비평이란 무엇인가』, 48-49. 그러나 서사비평은 주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독자 중심적(실용적) 비평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보다 본문 중심적(객관적)인 방법으로 읽게 한다.

13) D. 로즈 외,『이야기 마가』, (서울: 이레, 2003), 367-368.14) N. Petersen, “Point of View in Mark's Narrative”, in Semeia, 12(1978), 97-12115) 예를 들어, 오늘날의 실제독자들은 모른다고 해도, 복음서의 내포독자는 한 달란트가 한 데나리온보

다 가치가 있다는 사실(텍스트는 이것을 말한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16) 내레이터는 귀뜸하기 기법을 통해 독자들을 안내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예수가 제자들에게 “있어

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 예언할 때 불쑥 끼어들어서 “읽는 이는 알

아들으라”고 한마디 덧붙인다(13,14). 그렇게 주의를 줌으로써 복음서를 읽어주는 사람에게, 이 구절

이 성전이 파괴된 것을 가리키는 중요한 구절이라고 주의를 준다. 내레이터는 사두가이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귀뜸하거나 때로는 아람어 단어의 뜻을 알려주기도 한다. 무화가 나무 열매가 맺지

않았는데,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토를 다는 것도 내레이터가 한 일이다.

Page 5: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 209

채트먼은 서사(narrative)가 이야기(story)와 담론(discourse)으로 구성된다고 본다.17)

이야기(story)는 사건들(events), 등장인물들(characters), 배경(setting)이 기본요소를 이루

는데, 이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플롯이라고 한다. 그리고 담론(discourse)은 플롯과 서술

방식, 관점, 문체, 수사적 기법 등을 통해 이야기의 내용들을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

하는 방법들을 말한다.18) 복음서의 내용이 예수 사건이라면, 복음서의 형식은 바로 이

야기인 것이다.19) 우리는 먼저 복음서의 플롯 안에서 본문이 갖는 위치와 의미가 무엇

인지 살펴볼 것이다.

2. 마르코 복음 플롯 안에서 본문의 의미

2.1. 마르코 복음 플롯

마르코 이야기는 예수가 세례를 받는 장면과 예수의 죽음의 순간에 흥미롭게도 동일

한 메타포(metaphor), 즉 ‘찢어짐’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20) 이 두 장면은 예수

를 하느님의 아들로 전해주면서(1,11; 15,39) 포괄구조(inclusion)라는 문학적인 구성을

갖는다. 마르코 복음의 전체 구조는 등장인물, 배경, 사건이 서로 연결되어, 플롯(줄거

리)을 이룬다. 마르코 복음의 플롯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생각해볼 수 있

다.21) 발단은 복음서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단계로서 주인공인 예수가 소개되고 사건의

실마리가 나타난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1,9-11), 광야에서 유혹을 받

는다(1,12-13). 전개 단계에서는 사건이 시작되고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이 나타나기 시

작한다. 전개는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는 1,14부터다. 예수가 갈

릴래아 출신이라는 처음의 정보는 서사 전체에서 내포독자의 예수 이해에서 아주 중요

하다. 예수가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또 서사의 종결에서 갈릴래아가 새로

운 출발지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12제자들을 뽑아 세우고 여러 기적을 행한다.

17) S. 채트먼,『이야기와 담론』, 19.18) 기본적인 사건, 등장인물, 배경이 동일한 이야기라해도, 이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엮느냐에 따라 상이

한 서사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 네 복음서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 송창현,『마르코 복음서: 이야기로 읽기』, (대구: 대구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2), 71.20) 데이빗 E. 갤런드,『마가복음』, (서울: 솔로몬, 2011), 738-740 참조.21) 송창현,『마르코 복음서: 이야기로 읽기』, (대구: 대구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2), 49-50 참조.

Page 6: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210 신학과 철학 제25호

여기서 반대자들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위기에서는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긴장이 고조된다. 베드로의 고백 이후, 이야기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시작했고, 반대자들뿐만 아니라 제자들과도 갈등을 겪게 된다.

절정은 갈등과 긴장이 최고조로 이르는 단계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체포되

며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이야기는 절정에 이른다. 결말은 갈등이 해소되고 사건이 해결

되며 등장인물들의 운명이 분명해지는 단계이다. 빈 무덤에서의 이야기가 끝나고 예수

의 부활이야기로 복음서는 마무리된다. 그러므로 전체 플롯은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선

포하고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부활한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주제를 서술하려

고 한 것이다. 한편, 저자는 마르코 복음의 플롯에서 예언, 선언, 명령 등을 통해 그의

계획을 제시하기도 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나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와

같은 선언으로 내포독자들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과연 이런 기대들이 어떻게 이루어지

나 살핀다. 또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나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와 같은 명령에 독자들은 이야기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어

떻게 이 요구에 응하는지 눈여겨본다.

2.2. 수난 이야기 끝에 위치한 15, 37-39

우리 본문은 수난이야기(14-15장)의 끝에 위치해 있다. 내레이터는 수난이야기로 들

어오면서 예수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전해준다(14,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

는 날에(14,12) 예수는 최후 만찬을 한다. 파스카 축제시기에 군사들은 긴장하고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를 축제기간에 죽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다의 변절로 그들은

마음을 바꾸어 군중이 없는 밤에 예수를 붙잡음으로써 소동을 피하는데 성공한다.22)

그들은 예수를 붙잡고 올가미를 씌워 죽이려고 그 증언을 찾는다(14,55). 두 번의 거짓

증언에도 예수가 침묵하니까 대사제는 그가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14,61)’인지

직접 질문한다. 이에 예수는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14,62).’”라고 대답한다. 처음

으로 예수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대사제는 예수

의 사람의 아들 발언을 신성모독이라고 하며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고 단죄한다. 다음날

22) 데이빗 E. 갤런드,『마가복음』, 641.

Page 7: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 211

아침, 수석사제들과 온 최고의회는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주고(15,1)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아침 9시). 정오에는 어둠이 온 땅을 덮었었고 오후 3시에 예수는 큰소리로 “엘

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라고 부르짖는다(15,34). 조롱하는 자들은 이 기도를 예수

가 십자가 위의 자신을 구해달라고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조롱 후

예수는 큰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둔다.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진다. 예수가 큰 소리를 지르고 죽는 것과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을 본 백인대

장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을 때(오후 6시)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지고 무덤에 묻힌다(15,42).

2.3. 핵심 용어분석

마르 15,37-39

마르 15,37 o de. VIhsou/j avfei.j fwnh.n mega,lhn evxe,pneusenÅ

마르 15,38 Kai. to. katape,tasma tou/ naou/ evsci,sqh eivj du,o avpV a;nwqen e[wj

ka,twÅ

마르 15,39 VIdw.n de. o kenturi,wn o paresthkw.j evx evnanti,aj auvtou/ o[ti ou[twj

evxe,pneusen ei=pen( VAlhqw/j ou-toj o a;nqrwpoj uio.j qeou/ h=nÅ

마르 15,37 예수는 큰 소리를 지르고 숨을 내쉬었다.

마르 15,38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마르 15,39 그리고 예수를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가 그렇게 숨을 거두

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하고 말하 다.

이 이야기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예수와 백인대장으로서 그 관계가 접하다. 그리고

주요 행동들로는 ‘큰 소리를 지르다’, ‘숨을 내쉬다’, ‘둘로 갈라지다’, ‘숨을 거두다’,

‘보다’, ‘말하다’ 등이 있다. 이 이야기에서 ‘성전’과 ‘하느님의 아들’이 핵심 주제어다.

예수는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 “부르짖다(boa,w)”라는 동사를 사용한 또 다른 경우는

세례 요한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1,3)이다. “숨을 거두었다”의 그리스어는 evxe,pneusen

인데, 이것은 예수가 마지막 숨을 내쉰 것으로서, 그의 숨인 성령의 발산으로 볼 수 있

Page 8: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212 신학과 철학 제25호

다. 동사 evxe,pneusen는 성령이 예수에게 내려온 것(katabai/non eivj auvto,n)과 대조된다

(1,10). 이 세례 때 내려왔다가 죽음의 순간에 나간 것이다. 성령이 내려와서 하늘이

찢어지는 것처럼(1,10) 예수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발산의 힘은 성전의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게 한 원인이다. 마르코 복음에서 “찢다(sci,zw)”라는 동사도 두 번 나오

는데, 예수의 세례 때 하늘이 찢어질 때와 예수의 죽음의 순간에 성전이 찢어질 때에

사용되었다(evsci,sqh). 예수의 세례 때 하느님의 현존이 비둘기처럼 그 위에 내리고, 하

늘로부터 Su. ei= o uio,j mou o avgaphto,j( evn soi. euvdo,khsaÅ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

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소리가 들려온 것처럼, 백인대장은 예수가 그렇게 큰

소리로 숨쉬며 죽는 것과 성령의 바람이 성전의 휘장을 찢는 것을 보고(VIdw.n) 비슷하

게 VAlhqw/j ou-toj o a;nqrwpoj uio.j qeou/ h=nÅ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

다.”고 선언한다.23) 그런데 세례 때 하늘의 음성에서 들리는 ‘하느님의 아들’의 그리스

어에는 정관사가 있고, 백인대장의 고백의 ‘하느님의 아들’에는 정관사가 없다.

2.4. 내러티브의 핵심 주제와 문학적 도식

독자24)들은 내러티브를 통해서 이야기의 줄거리를 서술하는 저자의 문학적 장치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

서 문학적 요소들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 중에는 선언이나 구조화된 도식

을 생각해볼 수 있다. 마르코 복음에서 이야기의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선언은 하늘의

목소리에 의해 선포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주제다. 그리고 구조화된 도식은

‘메시아 폭로 금지’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예수의 참된 정체성을 알고 따르게 하기

위해서 이방인인 백인대장을 복음서의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드러낸다.

2.4.1. 하느님의 아들과 메시아 폭로 금지

내레이터는 이야기로서의 마르코 복음을 VArch. tou/ euvaggeli,ou VIhsou/ Cristou/

Îuiou/ qeou/ÐÅ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기술한다. 내레이

터가 처음부터 예수의 정체(정관사가 없는 ‘하느님 아들’)에 대해 알려 주고 있기에, 내

23) R.H. Gundry, Mark, (Grand Rapid, MI: Eerdmans Pubblishing, 1992), 944-951. 24) 본 논문에서 ‘저자’나 ‘독자’는 각각 ‘내포 저자’나 ‘내포 독자’를 일컫는다.

Page 9: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 213

포독자는 메시아가 누구인지에 관해서 어느 정도 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하여 메시아의 정체성에 대해, 내포독자는 독서 과정에서 이야기와 담론간

의 부조화를 만나게 된다.25) 그러나 당장은 예수가 왜 기름부음 받았는지(그리스도),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독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예언이나 성령이 예수 위에 내리는 장면을 통해 예수가 누

구인지를 알게 된다. 특히 세례 때, 예수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하늘의 목소리

(Su. ei= o uio,j mou o avgaphto,j( evn soi. euvdo,khsa)는 중요한 선언이다. 또한 예수가

처음으로 한 말 즉 o kairo.j kai. h;ggiken h basilei,a tou/ qeou/\ metanoei/te kai.

pisteu,ete evn tw/| euvaggeli,w|Å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1,14).”는 선언을 들은

후에, 내포독자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받아들인다.26) 그리하여 내포독자는

하늘의 소리(정관사가 있는 하느님의 아들)와 예수의 선언을 하느님의 평가적 관점으로

서사의 모든 규범을 규정짓는 기준으로 삼는다.

한편,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때도 정관사는 있다)이라는 것을 더러운 들도 알

아보지만(1,24; 3,11; 5,7), 침묵 명령을 받는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서의 신학적 모티브

중의 하나인 ‘메시아 폭로 금지’와 연관되어 있다.27) 즉 메시아가 누구인지는 예수의

활동, 수난, 죽음, 부활이라는 전체 삶을 통해서 드러날 것이다. 제자들과 사람들도 예

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들을 통해 그가 누구인

지 관심을 갖는다.28) “이게 어찌된 일이냐?”(1,27), “하느님 한 분 외에는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2,7),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하는

가?”(4,41) 그의 가족들도 그를 미쳤다고 생각하고(3,21), 유다 지도자들은 그가 하느님

을 모독하는 자, 율법을 어기는 죄인이며, 베엘제불이나 마귀의 우두머리인 사탄에 사

로잡힌 자라고 생각한다(3,22). 군중들은 그를 단지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예언

자들 중의 하나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전개된 사실들을 알고

25) R.M. Fowler, Let the Reader Understand, (Harrisburg: Bloomsbury T&T Clark, 2001), 20.26) D. 로즈 외,『이야기 마가』, 276.27) 예수가 치유나 가르침 후에 침묵을 명령하는 이유는 그 치유와 가르침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E.S. Malbon, Mark's Jesus: Characterization as Narrative Christology, (Texas: Baylor University Press, 2009), 147.

28) J.C. Kingsbury, Conflict in Mark: Jesus, Authorities, Disciples,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9), 39.

Page 10: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214 신학과 철학 제25호

있는 내포독자는 이런 것들이 예수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야기의 중반에

베드로는 예수의 질문에 Su. ei= o Cristo,jÅ “스승님은 그리스도입니다”(8,29)라고 고백

한다. 그리하여 내포독자는 잠시나마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베드

로를 만난다.29) 그러나 내레이터는 예수가 바로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 침묵

할 것을 경고한 후, 사람의 아들로서 수난을 받고, 죽고 그리고 죽은 이들로부터 살아

날 메시아임을 공개적으로 가르친다고 기술한다.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은 베드로의 고

백에 관한 내레이터의 평가적 관점을 반 한 것이다.30)

베드로의 고백을 분수령으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예수의 광스러

운 변모 장면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하느님은 예수를 Ou-to,j evstin o uio,j mou o

avgaphto,j( avkou,ete auvtou/Å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

라”(9,7)하며 두 번째로 예수의 정체를 밝혀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따르라고 명령하

기까지 한다. 여기서도 ‘아들’에 정관사가 있다(o uio,j mou o avgaphto,j). 예수의 하느

님 아들로서의 정체성은 수난 이야기에서도 계속된다. 수난이야기에서 대사제는 예수에

게 Su. ei= o Cristo.j o uio.j tou/ euvloghtou/È “당신은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

요?”(14,61) 즉 예수에게 하느님의 아들과 그리스도인지를 묻는다. 예수는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시편 110과 다니엘 7,13로 수정한다. 십자가에 처형되어 숨을 거두는 예수

를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예수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VAlhqw/j ou-toj o

a;nqrwpoj uio.j qeou/ h=n(15,39)고 고백한다. 이 구절의 그리스어 ‘하느님의 아들’에 정

관사가 없다. 정관사가 없는 ‘하느님의 아들’은 구약에도 종종 나오는 ‘신(하느님)의 아

들’을 뜻하지만, 정관사가 붙은 ‘하느님의 아들’은 예수의 완전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바

로 ‘하느님의 그 외아들’을 의미한다.

2.4.2. 이방인 선교와 백인대장

이방인 백인대장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기까지 내레이터는 이방인 선교에

대해 많은 암시를 깔아놓는다. 복음서 앞부분에서, 이방지역(이두매아와 요르단 강 건너

편, 티로, 시돈)의 사람들까지 예수에게 몰려들어(3,7-8) 그들도 복음 선포와 구마행위

29) R.M. Fowler, Let the Reader Understand, 71.30) 킹스베리,『마가의 기독론』, 136-137.

Page 11: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 215

의 수혜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는 게라사 지방에서 더러운 을 쫓아낸다

(5,1-20). 이것은 예수가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맨 먼저 더러운 을 쫓아낸 것

(1,21-28)과 동일한 유형의 활동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게라사

라는 이방도시와 로마군 부대를 상징하는 마귀들의 이름(군대)을 통해 로마제국의 압제

를 상징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방지역에서의 첫 선교는 무엇보다도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통해 전개된다.31) 복음서 중간 부분(7,24-8,21)에서, 예수의 활동 무대는

다시 이방지역이다. 그는 티로 지방으로 가서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에게서 마귀를 쫓

아내는데(7,24-30), 이 이야기는 예수가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의 길로 들어가는 돌파

구 역할을 한다.32) 이방 지역을 순회하던 중에 귀먹고 말더듬는 이도 고쳐주고

(7,32-37), 4천명을 먹이는 빵의 기적도 행한다(8,1-9).33)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복음서 끝에 이방인 백인대장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함으로써 이방인들을 포

함하는 보편적인 구원의 전망이 열린다. 그리하여 마르 13,10의 예수의 예언이 이루어

지고 있다.

2.5. 배경으로서의 성전

마르코 복음에서 배경이 되는 세계는 믿음 없는 세계로 힘센 사탄의 집과 그의 나

라가 되었으며 하느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세상이다.34) 이러한 세상에 예수가 와서

하느님의 나라(다스림)가 왔다고 선포한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은 마르코 복음에서 커

다란 배경 역할을 한다.35) 예수가 처음으로 성전에 들어간 것은 11,11에서다. 성전에

도착한 다음 예수는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본 다음 베타니아로 돌아간다. 샌드위치식

배열에 의해 마르코는 무화과나무와 성전 간의 연관을 암시한다.36) 예수가 열매를 발

31) 백운철,「마르코 복음서의 서문과 연속적인 독서」,『가톨릭 신학과 사상』, 8(2006), 5-42.32) 장인식,「서사비평적 관점에서 본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문학과 종교』, 13 (2008), 155-184.33) 유다인 지역에서 5천명을 먹이는 이야기가 12광주리의 상징과 함께 유다인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

방인 지역에서 4천명을 먹인 이야기는 7광주리의 상징과 함께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다. 34) 로즈 외,『이야기 마가』, 173.35) 배경으로서의 성전은 베르너, H. 켈버,『마가의 예수이야기』,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를 참조하 다. 36) 마르코 복음에는 샌드위치적 배열이 많이 나타난다. 성전 정화 사건은 두 번 언급된 무화과나무 저

주 사건 사이에 놓인다. 즉 월요일 베타니아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가던 예수가 잎사귀는 무성하

나 열매는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다(11,12-14). 그리고 나서 성전에 들어가 성전을 정화한다

(11,15-19). 저녁나절 성밖으로 나온다. 이튿날 이른 아침 베타니아로 돌아올 때 제자들은 예수가 저

Page 12: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216 신학과 철학 제25호

견하지 못한 것은 때가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11,13). 제자들은 예수가 무화

과나무를 꾸짖는 것을 들음으로써 적절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튿날 예

수는 성전이 장사하는 곳과 정치적인 곳으로 사용되는 것을 개탄한다(11,15). 예수가

성전을 무효화 한 다음 날 성전 관리인들은 성전에서 그에게 권위에 대해 질문한다.

“당신은 대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13,28) 독자는 예수가 세례를 받

을 때 하늘의 음성에 의해서 권위가 주어졌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몇몇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보내어 예수의 성전 가르

침에서 트집을 잡아 올가미를 씌우려고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지 아닌

지 질문을 하게 한다(12,14).37) 예수는 성전에서 자신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성전파

괴를 예언한다(13,1-2). 성전 파괴 예언은 예수의 전체 성전 활동의 정점을 나타낸다.

성전은 무화과나무처럼 파멸될 것이다. 그 나무가 뿌리째 말랐던 것처럼 성전은 돌 하

나도 돌 위에 놓이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즉각적인 두 결과, 즉 성전 커튼이

찢어지고 백부장의 고백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수는 성전의 죽음을 알리고 자신이

죽음을 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다. 그의 십자가위의 죽음은 이 두 동기

들을 서로 결합시킴으로써 그의 예루살렘 여행 목적을 해결한다.

3. 등장인물 분석

독자는 내러티브에서 등장인물들의 역할은 무엇이고 어떻게 그 역할을 인식하는지

등을 질문해야 한다. 저자는 내러티브의 전개를 통해 독자의 예측을 빗나가 새로운 이

야기를 만들어갈 수도 있다. 등장인물은 특성과 개성을 지닌 자율적 존재나 인격이기보

다는 성취해야 할 임무나 과업을 가진 플롯의 일부인 기능적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해석

자는 등장인물들이 해야 할 임무, 플롯에서의 기능, 그들이 대표하는 가치의 국면을 고

찰해야 한다.38) 따라서 인물묘사에 대한 연구는 내러티브 전반에 미치는 총체적인

주한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 있음을 본다(11,20-25).37) 그것은 예수를 폭력적인 혁명가로 연루시키기 위한 교묘한 의도적 질문이다. 이스라엘이 후에 유다

의 패배와 성전 파괴로 끝난 로마와의 혁명적 전쟁을 시작한 것도 바로 로마에 대한 납세 거부 때

문이었다.38) R. A. Culpepper,『요한복음 해부』, 161-62.

Page 13: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 217

향력까지를 포함한 통합적인 연구가 된다. 이처럼 등장인물은 내러티브에서 중요한 기

능을 수행할 뿐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을 주도할 정도의 역할도 수행할 수도 있다.39)

내러티브에서 등장인물들은 ‘보여주기(showing)’ 혹은 ‘말하기 기법(telling)’을 통해 제

시된다.40) 내포저자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자신의 계획을 설계하는 것이다.

3.1. 예수와 유다 지도자들

마르코 복음에서 정치지도자들은 예수를 방해하는 사람들이다. 헤로데, 빌라도, 대사

제, 수석사제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여러 방면으로 연합하면서 예수를 없애려고 서

로 협력한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서 일하는 하느님의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십자

가 처형 장면에서 유다 지도자들이나 로마 지도자들은 모두 예수의 무기력하고 연약한

모습을 조롱한다. 그들은 스스로 승리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야기는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으로 마무리되면서 플롯은 반전된다.

3.2. 예수의 죽음과 백인대장

예수가 큰 소리로 울부짖고 운명하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겨진다. 예수

는 소리를 지른 다음에 잠시 후에 운명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은 소리 지름과 동시

에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41) 성전의 멸망을 예고했던 예수는(13,1-2) 십자가 위

에서 그의 마지막 숨으로 성전을 쳐서 그 휘장을 위에서 아래까지 완전히 찢어놓는다.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양면적인 의미를 지닌다. 한편에서, 그것은 성전

과 성전 관리들, 즉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하기 위해 로마제국과 결탁한 지역 관리들에

대한 심판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하나의 확증이다. 휘장이 찢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예

수의 죽음에 의해 이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확증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확증은 마르코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소개한 것을 뒷받침해준다.

39) J.F. Williams, Other Followers of Jesus: Minor Characters as Major Figures in Mark’s Gospel, The Library of New Testament Studies 102, (Sheffield: Bloomsbury T&T Clark), 1994, 54-57.

40) D. 로즈 외,『이야기 마가』. 41) R.H. Gundry, Mark: A Commentary on His Apology for the Cross, (Grand Rapid, MI: Eerdmans

Pubblishing, 1992), 948. 건드리는 소리 지르는 행위 그 자체가 죽음이라고 이해한다.

Page 14: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218 신학과 철학 제25호

백인대장은 전형적인 상투적 인물이기보다는 다면적(입체적) 인물로 볼 수 있다. 왜

냐하면 그는 처음 등장할 때 예수의 재판과 사형선고를 실행하는 역할을 하지만, 나중

에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며 변화되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 군인으로서 예수를

조롱하고 채찍질하는데 관여했었다. 그는 예수의 죽음과 그에 수반한 표징들을 보고 황

제에게 고백해야 할 말을 예수에게 고백한다. 백인대장은 당시 로마 황제에 대한 호칭

이었던 ‘디비 필리우스(divi filius)’를 예수에게 고백한 것이다.42) 이럼으로써 그는 명목

상의 하느님 아들인 카이사르에게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에게로 그의 충성 맹

세를 옮긴 것이다.43) 인간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

백한 것이다. 그러나 백인대장의 고백은 정관사가 없는 ‘하느님 아들’ 고백이기에 불완

전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백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3.3. 마르코의 예수와 하느님, 그리고 내포독자

하느님은 마르코의 예수와 내레이터에게 중심이다.44) 마르코 복음에서 하느님과 예

수는 서로에게 두 번씩 말한다. 하느님은 예수의 세례 때 예수에게 말한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 그리고 예수의 변모 때도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9,7) 어떤 경우에도 마르코의 예수는 하

늘의 목소리가 말한 것을 선포하며 스스로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하지 않는다.

한편, 예수는 두 번, 즉 겟세마니와 십자가 위에서만 하느님에게 말한다. “아빠! 아

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14,36). 그

리고 오후 세시에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는다(15,34).

십자가 처형 이전에 내레이터는 하느님을 잘 이해하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그린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는 하느님께 철저히 순종하여 죽음을 선택했지만 버림받고

42) Tae Hun Kim, “The Anarthurous uioj qeou/ in Mark 15,39 and the Roman Imperial Cult”, Biblica 79(1998), 221-141은 마르코의 독자들은 백인대장이 예수에게 무관사 uioj qeou/ 고백을 했을 때 바로

결정적인 고백으로 알아들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E.C. Colwell의 그리스어 관사에 대한 연구를

인용하면서 동사 앞에 오는 결정적인 술어 주격은 정관사가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근거로 든다. 43) 크레이그 A. 에반스,『마가복음』, WBC 34 하, (서울: 솔로몬, 2007), 777.44) E.S. Malbon, Mark's Jesus, 173.

Page 15: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 219

절망으로 괴로워하는 비참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

시나이까?).45) 마르코의 예수는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죽는다. 그러나 마르

코의 예수가 죽음의 순간에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했더라도, 내레이터 또는 내포독

자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낀다. 왜냐하면 마르코의 예수가 시편 22의 첫 구절만 외쳤다

해도, 내포독자는 시편 22 전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본(Malbon)은 이 부분을 내

레이터의 관점과 예수의 관점 간에 창조적 긴장이 있다고 본다. 이것은 마르코의 내레

이터와 예수는 내포저자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그리스도론과 내레

이터의 그리스도론을 병치시키는 것은 바로 내포저자이며, 그 두 그리스도론을 결합시

키는 일은 내포독자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46) 그리고 내포독자는 오직 하느님만이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47)(신적 수동태: 찢겨지다), 예수

의 죽음에 하느님이 개입했음도 안다.

4. 수사법

내레이터는 수사적 질문, 비유, 성경 인용, 예언, 그리고 아이러니 등을 통해서도 이

야기를 풀어간다.48)

4.1. 비교와 대조

내레이터는 비교와 대조라는 방법으로 등장인물들이 어떠한지 보여준다. 부수적 인

물들은 제자들과 대조를 이루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백인대장의 고백도 제자들이

할 것을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제자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

들은 예수를 버렸다. 그래서 제자들이 해야만 했지만 할 수 없었던 고백이 적에게 -역

설적으로, 처형에 관계된 사람에게- 넘겨진 것이다. 백인대장은 그 전에 예수의 기적을

보지 못했고, 그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들어보지도 못했다. 다만 백인대장은 예

45) D. 로즈 외,『이야기 마가』, 294-306.46) E.S. Malbon, Mark's Jesus, 189-190.47) E.S. Malbon, Mark's Jesus, 189.48) 참조. D. 로즈 외,『이야기 마가』, 113-122.

Page 16: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220 신학과 철학 제25호

수의 맞은편에 서 있으면서 예수의 힘 있는 부르짖음과 그 결과로 성전 휘장이 찢어지

는 것을 보았다. 그에 대한 조롱과 큰 울부짖음, 그리고 그의 죽음만 보았을 뿐이다.

이 군인은 ‘하느님의 아들’이란 호칭을 처형당한 한 유다인에게 사용한다. 아이러니하

게 정치지도자들이나 예수의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

는 반면, 백인대장 같은 부수적인 인물들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아본다. 그

리하여 이방인이나 죄인들, 여인들도 변화할 수 있고 하느님과 그의 다스림을 볼 수 있

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4.2. 아이러니

내레이터는 아이러니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여 독자들이 내레이터의 관점을 받아

들이도록 유도한다. 가장 뚜렷한 아이러니는 십자가 위의 예수의 외침과 십자가 밑의

백인대장의 고백이라는 대조로 나타난다. 마르코의 예수는 하느님에게 당신을 구해달라

고 소리친다. 마르코의 내레이터는 반대 관점 즉 하느님은 낮이 어두워지고, 성전의 휘

장이 찢어지고, 백인대장의 말속에 현존한다고 소개한다. 내레이터는 하느님의 현존은

예수의 인식이나 감정적 경험에 달려있지 않다고 본다. 마르코의 예수는 언제나 하느님

만이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한다. 백인대장은, 이방인이자 로마의 대표로서, 예수는 ‘하

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는 이상한 인물이다. 그래서 내레이터는 아이러니하게 마르

코의 예수가 말한 것은 부당하다고 하고, 백인대장이 말한 것은 옳다고 확증하는 것 같다.

4.3. 예언

내레이터는 예언을 통해서도 자신의 플롯을 이어나간다. 대표적인 예언이 예수의 수

난예언이다(8,31; 9,31. 10,32-34).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

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

게 넘겨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나서 죽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10,33-34) 예수가 예언한 세 가지는 수난이야기에서

실현된다. 예수는 배반당하여 대사제들에게 넘겨졌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다른 민

족들 손에 넘겨지고, 그들은 그를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결국에는 죽 다. 예수의 예언

들이 이루어진 것을 볼 때, 내포독자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

Page 17: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 221

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14,62)이라는 예수의 예언도 이루어질 것

임을 믿을 수 있다. 그리고 빈 무덤에서 흰옷 입은 젊은이가 “예수는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고 거기서 그를 만날 것이다”(16,7)는 예언도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4.4. 성경 인용

복음서 저자는 자신의 관점이 옳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수사

법도 사용한다.49) 마르코 복음에는 성경을 인용한 구절이 22개다50). 성경의 인용과 암

시는 내레이터의 설명이 되며 하느님 편에서의 평가적 관점과 시점이 되기도 한다51).

예수가 유다 지도자들과 논쟁할 때는 예수가 성경 말씀을 더 많이 알고 있고 더 권위

있게 해석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수는 성경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는

성경말씀으로 살았고, 자신이 성경 말씀을 이루었다고 믿었다(14,49). 예수의 마지막 울

부짖음인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도 시편 22,2의 인용

이다.

5. 내포독자로 읽기

내러티브 비평의 목적은 본문을 내포독자로서 읽는 것이다. 내레이터는 복음서 처음

부터 예수가 정관사가 없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알려준다. 특히 예수의 세례와 산위

에서의 그의 변화의 장면에서, 하느님의 목소리에 의해 예수는 바로 ‘그의 사랑하는 아

들’임이 선언된다(1,11; 9,7). 이 증언은 그리스어 ‘하느님의 아들’ 앞에 정관사가 있

다.52) 정관사가 있는 ‘하느님의 아들’은 바로 한분 하느님의 아들, 유일한 아들임을 나

타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포독자는 예수가 누구인지 잘 알게 된다. 차차 마르코 복음

에서 하느님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 신뢰할 만한 것이고, 반면에 인간의 것을 생각하는

49) K. O'brien은 그의 책 The Use of Scripture in the Markan Passion Narrative, (New York: T&T Clark, 2010), 141-154에서 시편 22가 수난 이야기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연구한다.

50) J. Marcus, The Way of the Lord를 보라. 51) R.M. Fowler, Let the Reader Understand, 88-89.52) E.S. Johnson, “Mark 15,39 and the So-Called Confession of the Roman Centurion”, Biblica,

81(2000), 406-413.

Page 18: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222 신학과 철학 제25호

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는 관점도 드러난다(8,33). 악령들도 예수가 거룩하신 분의 ‘아

들’(정관사가 있다)임을 알지만 침묵 명령을 받는다.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베드로와

대사제 앞에서 긍정하지만, 그 진실을 알아보는 눈이 없는 자들에게는 여전이 감추어진

상태로 있다(4,11-12 참조).53) 따라서 내포독자들은 예수와 한편이 되어 특히 하느님과

한편이 되지만, 유다 지도자들과는 거리를 둔다.

예수의 죽음의 순간에 독자들은 어리둥절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관점과 하느님의 관

점이 다른 것 같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예수에게 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1,11;

9,7) 선언과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에게의 울부짖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

까?”라고 외치는 소리(15,34=시편 22,2)는 너무 대조되는 것 같다. 예수는 하느님에게

버림받고 절망하며 죽는 것 같다. 이 부분에서 내레이터의 관점과 예수의 관점 간에 긴

장이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내레이터는 마르코 복음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관점만 따

르기에 내포독자로 하여금 이 긴장을 해결하도록 이끈다. 내포독자는 하느님의 관점에

서 예수의 시편 기도를 해석할 수 있다. 더군다나 내포독자는 예수가 큰 소리로 부르짖

을 때 오후 3시 유다인의 기도시간이었음도 안다. 예수는 버림받고 죽은 것처럼 보이지

만, 내포독자는 승리의 희망을 노래하는 시편 22 전체를 알고 있다. 내레이터는 예수가

시편 22의 전체 내용처럼, 조롱을 받았고(시편 22,7-9), 힘이 소진했으며(시편 22,15-16),

손과 발이 찔렸고(시편 22,16), 옷이 나누어졌음을 안다(시편 22,18)54). 그래서 예수의

죽음은 시편 22의 성취의 시작이라고 해석한다. “세상 끝이 모두 생각을 돌이켜 주님

께 돌아오고 민족들의 모든 가문이 그분 앞에 경배할 것이다.”(시편 22,27). 내포독자는

예수의 죽음과 이방인의 고백으로 시편 내용이 성취되었음을 알기에 민족들의 경배, 부

활에 대해서도 희망할 수 있다.55)

53) D. 로즈 외,『마가 이야기』, 33.54) 마커스는 시편들을 통해 어떻게 마르코의 수난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는지 연구하 다. 특별히

15,20-16,7에서 마르코의 내레이터가 어떻게 시편 22을 따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Marcus, The Way of Lord, 174.

55) H.J. Carey, Jesus' Cry From the Cross, (New Work: T&T Clark International, 2009), 160-175. 카

레이는 1세기에는 시편 22와 마르코 복음의 내러티브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했을까를 연구하면

서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살피면서 하느님은 예수를 절망에 버려두지 않았고, 그의 외침을 듣고 응

답했다고 분석한다. 예수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십자가 처형에서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나를 버리셨느냐’는 예수의 외침은 1세기 예수를 버린 유다인들을 향한 외침과도 관련이 있다고 해석

한다.

Page 19: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 223

그러니까 서사비평56)으로 예수의 죽음 장면을 읽을 때, 예수는 전적으로 인간으로서

고통을 느끼고 운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포독자는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이 그를 살릴 것이라고 것

을 믿는다.

비록 복음서 서두(1,1)와 백인대장의 고백에서 예수가 누구인지 드러나는 것 같지만

정관사가 없이 ‘하느님의 아들’로 표현한 것은 저자의 고도의 전략인 것 같다. 그것은

저자가 예수의 참된 정체성은 복음서의 표제에서도, 악령들에 의해서도, 베드로에 의해

서도 심지어 백인대장에 의해서도 아니고, 오직 하느님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드러난다

(1,11; 9,7)는 것을 계획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백인대장의 고백의 역할은 무엇인

가? 그의 고백이 왜 예수의 죽음과 함께 복음서의 끝에 배치되었을까? 그 이유는 예수

가 누구인지는 하느님에 의해 알게 되었지만(1,11; 9,7) 그 진정한 의미는 전체 이야기

를 읽으면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 부활 이후에야 알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

다. 예수의 세례의 장면과 예수의 운명과 백인대장의 고백 장면은 ‘찢어짐’이라는 이미

지와 예수의 정체성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복음서의 저자는 내포독자로 하여

금 두 장면을 비교하게 함으로써 백인대장의 고백을 부각시켰다. 사람으로서는 처음이

자 마지막으로 예수를 정관사가 없는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의 어느 등장인물도 예수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하지 못했으니, 독자들은 하

느님의 증언으로 예수가 누구인지 올바르게 알고 그를 따르라는 초대에 응하라는 메시

지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존슨(Johnson)이 주장했듯이, 저자가 복음서의 마지막

(16,8)을 가르(ga,r)라는 문구로 끝맺으면서(“여인들이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독자들

을 그 공동체로 끌어들이는 구조로 끝맺은 것처럼, 백인대장의 고백도 완전한 고백은

아니지만, 예수를 완전한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따르는 것은 독자들의 몫임을 가르

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57) 그러므로 내포독자는 예수의 죽음을 하느님의 관

56) 갤런드에 의하면 내포독자는 예수의 마음속에 자연적으로 시편 22편이 떠올랐을 것이고, 예수는 고

통의 표현으로부터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신뢰로 이동하는 이 시편을 인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내포독자는, 예수가 고통에 대해 큰 소리로 부르짖지만, 그것을 넘어 의로운 자를 보호하는 하

느님에 관한 신뢰를 표현하 을 것이고, 곧 하느님의 개입이 있을 것임을 신뢰하면서 고통을 받아들

을 것(시편 22,24)이라고 한다(데이빗, E. 갤런드,『마가복음』, 246).57) E.S. Johnson, “Mark 15,39 and the So-Called Confession of the Roman Centurion”, Biblica,

81(2000), 413.

Page 20: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224 신학과 철학 제25호

점과 일치하여 읽으면서, 예수를 ‘하느님의 사랑스런 아들’로 믿고 그의 죽음을 강한

메시지로 선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메시아는 하느님의 종말적 다스림을 수행함으

로써 사탄의 세력을 정복해서 하느님 나라를 세울 하느님의 아들임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58)

나가는 글

우리는 마르 15,37-39을 서사비평으로 읽었다. 특히 내러티브의 세계에서 본문의 모

든 내용들이 해석을 위한 요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의 상호 연결고리를 이해하

며 읽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적어도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는 성경의 눈으로 성

경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마르 15,37-39을 역사비평방법으로만 읽

었다면 오로지 예수의 죽음의 의미와 백인대장은 예수가 누구인지 고백했다고 결론지

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의 신성만 생각하여 그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죽었을 것이

라고 해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사비평의 도움으로 적어도 예수의 완전한 정체성은 하

느님에 의해 선포되었으며, 예수의 죽음 자체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의 시편 22,2의 기도에서 예수의 관점과 내레이터의 관점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즉 마르코의 예수는 절망으로 죽어갔지만, 내레이터는 하느

님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내레이터는 독자에게 예수는 철저히 인간으로서 고통을 받고

죽지만, 하느님은 그러한 완전한 비움의 상태에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알게 한다. 마르

15,37-39에서 내레이터는 독자들에게 예수가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할 것임을 뻔히 알

면서도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진정한 임금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렇게 죽는 것’을 알 때에야 비로소 그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내레이터는 이방인 백인대장 같은 사람이 예수가 죽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하

느님의 아들임을 불완전하게나마 믿기 시작했다면 그 누구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드

러내려고 했을 것이다.

하느님 말씀인 성경에 일반문학 비평방법을 적용하는 것을 두고 반대가 없지 않

다.59) 그러나 복음서들과 서사문학 간에는 많은 유사성이 있다. 복음서 저자들이 사실

58) D. 로즈 외,『이야기 마가』, 277.

Page 21: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 225

적 서사를 저술하면서 서사문학의 모든 구성 요소들을 사용한다고 의식하지 않았을지

라도, 실제 그들은 등장인물, 내레이터, 또는 내포독자 등의 요소를 사용하여 서사를 완

성했을 것이다. 서사비평은 결론보다는 독서과정 자체를 강조한다. 따라서 서사비평에

서는 자율적인 독자가 아니라, 내포저자의 통제를 받는 내포독자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

다. 서사비평을 통해 하느님은 역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서도 계시한다

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또한 서사비평은 성경본문 자체에 초점을 두고 읽으면서 역

사적인 배경이 불확실한 본문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전문적인 성경학

자나 일반평신도들이 모두 성경을 가까이 대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연구자

는 서사비평만 올바른 접근방법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가장 좋은 성경읽기 방법은 서

사비평과 역사비평을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59)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현대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개발된 방법을 고대 저술에

적용한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2) 소설을 연구하기 위해 개발된 방법은 성경 연구에 부적절하

다. 3) 문학비평은 역사비평이 주는 이점과 역사적 기술인 복음서의 본질을 무시하고 있다.

Page 22: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226 신학과 철학 제25호

참고문헌

갤런드, D.E.,『마가복음』, NIV 적용주석, 서울: 솔로몬, 2011.

김광모,『마가의 서사적 기독론』, 서울: 한들출판사, 2005.

로즈, D. 외,『이야기 마가』, 서울: 이레, 2003.

백운철,「마르코 복음서의 서문과 연속적인 독서」,『신학과 사상』, 8(2006), 5-42.

송창현,『마르코 복음서: 이야기로 읽기』, 대구: 대구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2.

아브람스, M.H.,『문학용어해설집』, 서울: 예림기획, 1997.

야콥손, R.,『일반 언어학 개론』, 서울: 민음사, 1989.

스카, J.L.,『우리 선조들이 전해준 이야기-구약성경의 설화 분석 입문』, 염철호·권연진 옮

김, 서울: 성서와 함께, 2014.

장인식,「서사비평적 관점에서 본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문학과 종교』, 13(2008),

155-184.

채트먼, S.B.,『이야기와 담론: 화와 소설의 서사구조』, 서울: 푸른사상, 2003.

,『 화 소설의 서사구조』, 서울 : 고려원, 1997,

컬페퍼, R.A.(Culpepper, R.A.),『요한복음 해부』, 서울: 요단출판사, 2000.

켈버, 베르너, H.,『마가의 예수이야기』,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에반스, 크레이그 A.,『마가복음』, WBC 34 하, 서울: 솔로몬, 2007.

페린, N.,『새로운 신약성경 개론』,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5.

포웰, M.A.,『서사비평이란 무엇인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한국천주교주교회의,『성경』, 2005.

Booth, W.C., The Rhetoric of Fic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1.

Carey, H.J., Jesus' Cry from the Cross, Towards a First-century Understanding of the

Intertextual Relationship between Psalm and the Narrative of Mark's Gospel,

New Work: T&T Clark International, 2009.

Fowler, R.M., Let the Reader Understand: Reader Response Criticism and the Gospel

of Mark, Harrisburg: Bloomsbury Academic, 2001.

Gundry, R.H., Mark, Grand Rapid, MI: Eerdmans Pubblishing, 1992.

Page 23: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 227

Kingsbury, J.D., Conflict in Mark: Jesus, Authorities, Disciples,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9.

, The Christology of Mark's Gospel,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Malbon, E.S., Mark's Jesus, Texas: Baylor University Press, 2009.

, “Narrative Criticism: Learning to Listen to the Story”, 『가톨릭 신학과 사

상』, 72(2013), 11-43.

Marcus, J., The Way of the Lord: Christological Exegesis of the Old Testament in the

Gospel of Mark, Lousville: John Knox Press, 1992.

Metzger, B.M.,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New

York: United Bible Societas, 1994.

O'brien, K., The Use of Scripture in the Markan Passion Narrative, New York: T&T

Clark, 2010.

Petersen, N., “Point of View in Mark's Narrative”, Semeia 12(1978), 97-121.

Rhoads, D., “Narrative Criticism and the Gospel of Mark”,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50(1982), 411-427.

Tannehill, R.C., The Narrative Unity of Luke-Acts: A Literary Interpretation, vol. 1: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6.

, The Narrative Unity of Luke-Acts, vol 2: The Acts of the Apostles, A Literary

Interpretatio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0.

Williams, J.F., Other Followers of Jesus: Minor Characters as Major Figures in

Mark’s Gospel, The Library of New Testament Studies 102, Sheffield:

Bloomsbury T&T Clark, 1994.

Page 24: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228 신학과 철학 제25호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

이혜자

본고는 마르코 복음 15,37-39의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백인대장의 고백 이야기를 서

사비평에 따라 고찰한다. 따라서 우리는 철저히 본문 안의 내포 독자의 입장에서 본문

을 읽는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복음서 전체의 중심 주

제이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선포하면서 시작한다. 이야기

가 전개되면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의 세례 때와 산 위에서의 예수

의 거룩한 변모 때 선포된다. 복음서 말미에 가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백인대장은 이방인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인물이다. 백인대장의 고백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의 플롯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백인대장은 로마 군인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다면적 인물이다. 내포독자는 예수가 하느님의 사랑스런 아들임을 십자가 죽

음을 통하여 알게 된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에 대한 완전한 정체성은 복음서 서문

이나, 악령들, 제자들, 백인대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다(1,11; 9,7). 왜냐

하면 오직 거기에만 정관사가 있는 ‘하느님의 아들’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주제어: 내러티브 비평, 백인대장의 고백,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 정관사

초 록

Page 25: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 229

Narrative and the Confession of the Centurion(Mk 15,37-39)

HyeJa Lee

This article studies Mk 15,37-39, the narrative of Jesus' death and the centurion’s

confession from the perspective of narrative criticism. Therefore we read the text in

the position of the implied author. ‘Jesus is the Son of God’ is the central theme

in the Gospel of Mark.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Mark starts with the

proclamation of Jesus as ‘Son of God’. As the narrative unfolds, the fact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is revealed at Jesus’ Baptism and at His glorious Transfiguration

on the mountain. The Centurion who confessed that Jesus is ‘Son of God’ near the

end of the Book of Mark, is the first and the last Gentile to do so. The

Centurion’s confession is an important part of the plot of the Book of Mark. The

centurion is a round character, changing from a Roman soldier to a confessor of

Jesus as ‘Son of God’. The implied reader knows Jesus as the beloved Son of God

through the death of Cross. However Jesus' identity is not revealed in the

introduction to the gospel or by demons, the disciples, the centurion. It is made by

God's declaration that he truly is the beloved Son(1,11; 9,7). Only there is a

expression ‘the Son of God’ with a definite article.

Key Words: Narrative criticism, Confession of the centurion, Son of God, Death of

Jesus, A Definite article

Abstract

Page 26: 내러티브와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7-39)theoinst.sogang.ac.kr/theoinst/file/25-10 이혜자.pdf · 2018-02-06 · narrative 를 ‘서사물’로, narratology를 ‘서사학’으로

230 신학과 철학 제25호

논문 접수일 2014년 9월 30일

논문 수정일 2014년 11월 9일

논문게재 확정일 2014년 10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