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 大學), 큰...

25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101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 大學 ), 큰 공동체( 大同社會 ): 포스트모던 시대의 평생교육 이 은 선 세종대학교, 교육철학 1. 시작하는 말 2. 교육의 초월적 근거-인간적 초월성() 3. 큰 배움(大學)의 방법론-지행합일(知行合一) 4. 교육의 이상-지극한 善에 머물다 5. 마무리하는 말 1. 시작하는 말 올해로 대학에 26년째 재직하고 있다. 그 전에 스스로가 대학생이었고, 석박사의 과 정을 거쳐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으니 지금까지 청년기와 성년기의 거의 모든 시간을 대학에 머물고 있고, 그것이 거의 40여년이 되어간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그 긴 시간 을 대학에서 보냈으니 대학에서 보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 또는 결과, 아니면 효과를 무엇이라고 하겠으며, 그 대답이 전체적으로 어떤 색깔을 띠느냐고 묻는다면 나 특집: 종교영성과 교육 논문

Transcript of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 大學), 큰...

  •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101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포스트모던 시대의 평생교육

    이 은 선

    세종대학교, 교육철학

    1. 시작하는 말2. 교육의 초월적 근거-인간적 초월성(仁) 3. 큰 배움(大學)의 방법론-지행합일(知行合一)4. 교육의 이상-지극한 善에 머물다5. 마무리하는 말

    1. 시작하는 말

    올해로 대학에 26년째 재직하고 있다. 그 전에 스스로가 대학생이었고, 석박사의 과정을 거쳐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으니 지금까지 청년기와 성년기의 거의 모든 시간을

    대학에 머물고 있고, 그것이 거의 40여년이 되어간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그 긴 시간을 대학에서 보냈으니 대학에서 보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 또는 결과, 아니면 효과를 무엇이라고 하겠으며, 그 대답이 전체적으로 어떤 색깔을 띠느냐고 묻는다면 나

    특집: 종교영성과 교육 논문

  • 102 신학과 철학 제24호

    는 그렇게 썩 긍정적으로 대답할 자신이 없다. 이번 학기의 시작도 그랬지만 나는 매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많은 물음을 물으면서 학기를 맞이하고 있는데, 과연 내가 계속해서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내가 맞이하고 있는 학생들 대부분이 현재의 나보다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오는데 그들이 와서 과연 어떤 것을 얻어 가는

    지, 우리 대학이 그들을 받아서 잘 하고 있어서 그 부모와 학생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지, 그들이 많은 것을 감수하면서 대학에 머물기로 한 결정과 선택이 좋은 것이었다고 나 스스로가 긍정할 수 있는지 등,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면서 시간이 흘렀고,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이러한 질문들이 단순히 몇몇 개인적인 상황으로 인한 질문이 아니라 점점 더 우리 사회의 보편적 질문이 되어 가는 것을 본다. 한국의 대학은 그런 상황에서 ‘서울소재’의 학교도 휴학생과 자퇴생의 증가로 등록금 수입이 감소되는 것을 염려하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우리 대학교육은 점점 흔들리고 있다. 일찍이 1960-1970년대의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는 “학교 없는 사회 (deschooling society)”를 외치면서 어떻게 인류의 삶이 대학이나 연구소와 같은 전문가 그룹의 독재사회로 더욱 더 변해 가는지를 밝혀주었다. 인류 문명의 전개 가운데서 지금까지 3백여 년 이상 지속된 산업사회의 지속적인 작동을 위해서 학교는 그 산업생산물들을 계속해서 소비할 수 있는 미래의 소비자를 키워내는 최대의 생산자이고 고용주라는 것

    이다. 학생들은 미래의 소비능력에 따라서 그 가치가 등급 매겨지므로 더 많은 지식을 사기 위해서 점점 더 학교나 전문가에게 종속되어 간다는 것을 그는 지적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생산의 측면에서나 소비의 측면에서 학교 교육에 말려들어 가고 있는데, 그러나 일리치에 따르면 우리 각자가 그러한 제도적 학교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만 점점 더

    증가해 가는 소비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 이렇게 일리치는 “끊임없이 수요가 증대되는 세계는 단순히 불행이라는 말로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것은 바로 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는 지적으로 20세기 후반기 인류 산업사회의 교육 상황을 급진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대안으로서 ‘탈학교 사회’를 말하고 ‘성장을 멈추라(Tools for Conviviality)’고 촉구한다.1) 오늘 21세기에 한국사회는 이러한 지적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잘 실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더해서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평생교육’에 대한 요구는

    1) 이반 일리치,『성장을 멈춰라』, (미토, 2004).

  •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103

    점점 더 증대하고 있다. 우리 대학의 교육학과에서도 평생교육을 전공으로 하려는 석박사 학생들이 제일 많고, ‘평생교육사’라는 직업의 전망을 아주 좋게 보고 있다. ‘평생교육(lifelong education)’이라는 개념은 한국교육의 현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 크게 환영받았다. 그것으로써 교육과 배움을 학교제도 안에서 만의 일정한 나이까지의 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라는 구호처럼 종전 제도교육의 울타리를 훨씬 넘어서 시공간적으로 교육의 영역을 넓게 확장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앞의 일리치가 탈학교를 말하고 배움이 제도교육에 의해서 독점된 것을 해체하고자 한

    것도 일면 이러한 평생교육의 사상과 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예를 들어 필자의 지인으로서 지금까지 기독교 교회에서 쭉 신앙생활을 해오던 한 중년여성이 요

    즈음은 교회조차도 학교로 변해서 쉽지 않다고 한 지적한 것처럼 오히려 이 평생교육

    의 이상이 다시 사람들을 더 많은 교육과정에 옭매는 일이 되고 있다. 일리치는 현대사회는 너무 “과잉계획”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고, 배움의 균형이 깨져서 교육비의 지출은 날로 늘어가지만 자신감은 한없이 떨어지는 것을 지적했는데, 오늘 한국사회에서의 많은 구성원들이 교육의 과잉으로 인해서 놓여있는 현실을 지적하는 것이 되어서 매우 의미가 깊다. ‘종교영성과 교육’이라는 연구주제도 이러한 상황에 대한 타개책을 찾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라고 여겨진다.2) 왜냐하면 오늘 우리 삶은 인간이 한낱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해 있고, 거기서 교육은 제일 중요한 돈벌이 수단이 되어서 점점 더 비싸지고 있으며, 여기에 비해서 우리 삶의 기쁨과 보람은 한없이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어인 ‘영(靈)’ 또는 ‘영성(靈性)’의 한자어를 회의적(會意的)으로 의미 분석해 보면, 그것은 무당의 ‘무(巫)’와 세 개의 입 ‘구(口)’, 그리고 비 ‘우(雨)’가 합하여진 합성어라고 한다. 곧 그 언어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무당이 한 입으로도 아니고 세 입으로 간절히 간구하여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비를 구한다는 의미인데,3) 여기서 우리 교육의 일을 그 영과 관계시키려 한다는 것은 그만큼 오늘의 교육을 새롭게 하려

    2) 본 논문은 원래 2013년 9월27-29일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주관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을 보완한 것이다.

    3) 전달수,「가톨릭에서 본 영성신학」,『신학사상』, 99(1997, 겨울), 74-75; 이은선,『한국여성조직신학탐구-聖性誠의 여성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04, 142.

  • 104 신학과 철학 제24호

    는 간절함이 큰 것을 말해주고, 그 새로워짐의 내용에 있어서도 지금까지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나는 여기서 이 일을 특히 동아시아의 유교 전통에 집중하면서 수행해보고자 한다. 흔히 유교는 종교가 아니고 단지 윤리나 도덕일 뿐이고, 정치담론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유교의 종교성과 영성은 그 도의 실현 방식을 핵심적으로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낮은 것을 배워서 높은 데 도달한다)’이나 ‘극고명이도중용(極高明而道中庸, 지극히 높은 것을 추구하되 일상을 따르라)’이라는 말로 표현해주고 있듯이 바로 정치나 교육 등 여기이곳의 모든 인간적인 삶 가운데서 그 궁극의 도를 실현하려는 것이므로 ‘종교영성과 교육’이라는 주제를 위해서 여느 종교전통과의 대화 못지않게 풍성한 열매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여긴다. 즉 “침묵의 종교”와 “최소한의 종교(minimal religion)”로서의 유교적 ‘포스트모던 영성(postmodern religiosity/spirituality)’이 어떻게 오늘날 교육적으로 의미를 줄 수 있겠는지를 살펴보는 일을 말한다.

    2. 교육의 초월적 근거-인간적 초월성(仁)

    오늘 우리 시대의 삶과 교육이 당면한 제일 큰 난제는 어떻게 하면 오늘 우리 존재와 활동을 근대 산업사회의 소비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어떻게 그 수단과 목적의 영원한 순환 고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겠는가? 라는 물음일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도 잘 지적한 대로 역사적으로 사적 소유의 관리가 사적인 관심에서 최대의 공적 관심사로 변형된 근대 산업사회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사적 소유의 증대를 위해 도구화되고 수단화되는 공리주의의 무한정한 증가 고리

    를 끊는 것을 말하는데, 이 일은 종교의 도움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4) 그런 의미에서 종교영성과 교육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의미가 깊고, 이 모든 일은 결국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인간은 물론이려니와 이 세상의 아무리 하찮은 미물과 단순한

    사용물조차도 그 최종적인 처분은 신의 영역이라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는 일과 관계된

    다고 하겠다.5)

    4) 이은선,「세계화 시대 한국 교육의 무한경쟁주이 극복을 위한 인문학적 성찰」,『생물권 정치학 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대화 속에서』,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3), 209.

    5) 한나 아렌트,『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2002), 217.

  •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105

    인류 근대 산업문명의 계산하는 이성은 존재의 내재적 가치를 모두 탈각시켰다. 또한 과격한 개체주의적 사고로서 주체성의 원리를 최고의 행위원리로 삼아서 자아의 무한정한

    확장을 위해 세상의 만물을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종교와 영성은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한다. 서구의 ‘종교(religion)’라는 말도 우리의 존재가 현재의 드러나는 것을 넘어서 더 오래된 근원과 토대와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religare(to be tied back)’에서 연원되었다고 하듯이,6) 일찍이 서구 근대의 비판자 슐라이에르마허도 종교의 본질이란 주위의 수많은 유한자가 궁극적으로 모두 무한자에게 속해있는 것을 직관하면서

    “모든 개별적인 것을 전체의 일부분으로, 모든 한정된 것을 무한자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였다.7) 이러한 지적들은 오늘 우리의 인간 이해와 현실 이해에서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지만, 본 필자는 여기서 이러한 기독교 전통에서의 대안적 초월이야기도 넘어서 동아시아 전통의 유교적 초월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기독교 전통의 성속분리의 이야기에서보다도 훨씬 더 보편적으로 초월의 평범성을 이야기하고, 바로 우리 인간성 자체에 주목하면서 그 인간성의 영적 기원에 근거해서 세계의 의미를 실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8) 하나의 종교 전통으로 이해된 유교의 인간 정신이해는 기독교 전통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그 힘의 내재적 초월성을 지시해주고(性卽理 또는 心卽理), 그러한 만물 공통의 정신에 근거해서 자아를 제어하고, 공동체를 배려하여 공공선을 지향하도록 가르쳐왔다. 인간의 공부와 대학 공부가 단지 사적 이익을 키우기 위한 수단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성의 실현과 만물의 하나 됨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유교 공

    부는 그리하여 그것을 ‘성학(聖學, To become a sage)’, ‘거룩한 학문’이라고 이름 지어왔고, 예를 들어 그 성학의 길을 열 가지의 구체적인 내용과 과정으로 설명해주는 퇴계선생은 그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에서 유교 전통에서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을 지시하는 ‘만물일체(萬物一體)’의 경지를 바로 우리 마음속 인간성(仁)의 신장(求仁成聖)을 통해서 이룰 수 있다고 밝혀주었다. 그는 말하기를,

    6) Hannah Arendt, “What is authority?”, Between Past and Future, (NY: Penguin Book, 1993), 121. 7) 이은선,「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교육론-한국 사회와 교육을 위한 의미와 시사」,『한국 교육철학의 새

    지평-聖性誠의 통합학문적 탐구』, (내일을 여는 책, 2009), 94. 8) 이은선,『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09), 58.

  • 106 신학과 철학 제24호

    “대개 성학(聖學)은 仁을 구하는데 있습니다. 모름지기 이 뜻을 깊이 체득하여야 바야흐로 천지만물과 더불어 일체가 되는 것이 참으로 여기서 말한 경지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仁을 행하는 공부가 비로소 친절하고 맛이 있어서 허황되고 아득하게 자신과 상관없게 될 염려가 없고, 또 세상을 자기로 여기는 병통도 없게 되어서 마음의 덕이 온전해질 것입니다.”9)

    여기서 퇴계는 당시 사람들이 많이 빠져있던 “인물위기지병(認物爲己之炳)”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것은 주관주의에 깊이 빠진 자아가 세상과 다른 사람을 온통 자기 자신으로 착각하는 병, 무엇이든지 자기 좋을 대로 재단하고 처분하는 자아중심주의, 즉 주체전체주의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세상의 만물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탈바꿈시키는 우리 시대의 병과 유사하다고 하겠는데, 퇴계는 바로 이러한 병을 고치는 길이 우리 마음(心)속에 “살리는 생명의 이치(生之性)”와 “사랑의 원리(愛之理)”로서 차별 없이 놓여있는 ‘인간성(仁)’의 정신을 다듬고 기르는 일이라고 밝혔다.10) 그는 송나라 주자의 이해에 깊이 동감하면서 유학의 배움의 길을 가는 사람은 누구나

    “인을 구하고 찾는 일에 몰두해야(所以必使学者汲汲於求仁)”한다고 강조하였다. 주자는 또한 이 인간적 마음을『역경』과『중용』의 언어인 “천지가 만물을 낳고 살리는 마음과 원칙(天地生物之心/理)”이라고 파악했는데, 이것은 매우 역동적인 우주적 언어이고, 동시에 깊은 심정(情)의 언어로서 바로 인간 공부와 배움의 초월적 근거인 것이다. 이 仁을 인간성의 뿌리와 씨앗(性)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 존재는 그래서 ‘하늘의 명령(天命)’을 받은 귀한 존재이고, 천지만물일체를 이루려는 공부는 바로 이러한 토대와 출발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유교 전통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러한 천지만물일체를 이루는 공부를 ‘큰 배움(大學)’이라고 불러왔다. 인간으로서 이루어야 하는 공부가 바로 그 큰 공부인데, 그러한 큰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유교 경전『大學』은 큰 공부의 토대를 ‘명덕(明德)’, 인간 속의 밝은 덕, 인간 정신 안에 하늘의 씨앗으로서 내재하는 ‘밝은 토대’라고 하였다. 즉 유교 전통의 공부와 교육은 인간을 단지 계산하고 이익만을 챙기는 물질적 자아로

    그린 것이 아니라 초월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존재, 하늘의 밝은 덕을 품수 받은 존재로

    9) 이황,『성학십도』, 이광호 옮김, (홍익출판사, 2001), 171; 최중석, “인간의 주체적 진실성과 퇴계심학의 과제”, 이동준 등 24인,『동방사상과 인문정신』, (심산, 2007), 369 참조.

    10) 퇴계,『聖學十圖』,「仁說」, 188.

  •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107

    서 교육이란 바로 그 신적 뿌리와 씨앗을 키워서 더 밝게 하는 ‘명명덕(明明德)’의 일이라고 보았다. 이『大學』과 더불어『中庸』은 이와 같은 유교 공부와 대학교육의 초월적 뿌리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준다. 우리가 알다시피『中庸』의 첫 머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로 시작한다.11)

    “하늘이 명한 것을 性이라고 하고(天命之謂性), 性을 따르는 것을 道라고 하며(率性之謂道), 그 道를 닦는 것을 敎라고 한다(修道之謂敎)”(『중용장구』제1장).

    우리는 이 짧은 세 마디의 문장 안에 유교 교육사상, 더 나아가서는 유교 사상 전체가 핵심적으로 들어있는 것을 본다. 그것이란 다름 아니라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좋은 본성을 잘 길러내어서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인 ‘聖人’과 ‘大人’으로 길러내는 일을 말한다. 그것이 인간의 규정이고 교육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天)이 명한 것은 성(性)’이라고 하는 언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성품(性)은 곧 하늘(天)로부터 받은 것이고, 그래서 그냥 땅의 것이 아니라 초월의 것이므로 인간의 존귀성은 단순히 후천적이고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언술에서 유교 형이상학의 깊은 내재적 초월성을 본다. 보통 서양의 종교 사상들과 비교하여 유교에는 종교성이 없고 초월과 형이상학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유교 형이상학과 초월성에 대한 신앙과 인식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인

    간에 대한 깊은 신뢰가 그 내재적 초월성의 파악 안에 있으며, 그것들을 특히『중용』과 같은 경전은 깊이 있게 전해주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유교 형이상학은 외재하는 초월적 대상(神)에 대한 신앙과 형이상학이 아니라 도덕과 정치와 교육의 형이상학적이며, 그것은 바로 ‘인간 그 자신’에 대한 논술이라는 것이다.12)

    『中庸』이 ‘하늘(天)’로부터 온 것이라고 표현한 ‘性’이란 글자는 그 모양이 ‘마음(忄=心)’과 ‘삶(生)’의 결합체인 것을 알 수 있고, 그래서 ‘살려는 마음’, ‘살려는 의지’로 풀이될 수 있다.13) 그러고 보면 인간 누구에게나 하늘로부터 살려는 의지를 부여받은 것

    11) 여기서부터 본인의 글은 기발표된 논문「『大學』과『中庸』사상의 현대 교육철학적 해석과 그 의의」,『교육학연구』, 한국교육학회, 39(2001, 4), 19-44에서 많은 부분 발췌하여 다시 가져왔음을 밝힌다.

    12) 한스 큉·줄리아 칭 지음,『중국 종교와 그리스도교』, 이낙선 옮김, (경북: 분도출판사, 1994); 이은선, 「유교적 그리스도론-그리스도론의 교육적 지평확대를 위한 한 시도」,『포스트모던 시대의 한국 여성신학』, (경북: 분도출판사, 1997), 49.

    13) 이기동 편역,『大學․中庸 講說』, 1991, 21.

  • 108 신학과 철학 제24호

    을 말하고, 그 살려는 의지가 인간에게는 ‘仁’이나 ‘밝은 덕’, ‘도덕심(理)’이나 ‘양지(良知)’ 등으로 나타나는 것을 유가의 도통은 밝혀주고 있다. 다시 이야기하면 인간이 도덕적으로 위대해지려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살려는 의지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유불도와 기독교를 의미 있게 연결시키는 다석(多夕) 류영모 선생은 中이란 “속마음(알)”이고, 내 마음에 오신 “하느님의 성령”이며, 절대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뚫려서 “참나”와 “얼나”로 거듭나게 된 것을 말한다.14) 중용이란 그러므로 그 성령(中)이 나의 전 삶에서 항상(庸) 뚫고 있다는 것인데, “성령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15) 이러한 中을 항상 살고 있는(庸) 인간은 기독교의 다른 개념으로 이야기하면 ‘그리스도’가 되는데, 이렇게 인간 누구나의 (本)性으로서 놓여 있는 中의 개념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류영모에게는 그러므로 예수만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만이 ‘하느님의 아들(天子)’이 되는 것이 아니다.16) 오히려 우리 모두가 제 속에 그리스도를 포함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天子이며, 중국 사상 속에 하느님의 아들 사상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감탄한다. 다만 제왕(帝王)만이 천자라는 것은 잘못이고, 기독교에서도 예수만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며, 우리 모두가 천자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한다.17) 그의 말을 들어보면,18)

    “그러므로 밖에서 그리스도․부처․성인을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제 속에 그리스도가 있고, 부처가 있고 성인이 있다. 그리스도나 부처나 성인이란 내 속에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 제 속에 온 천명(天命)의 그리스도․부처․성인을 모르면 밖으로 오는 그리스도․부처․성인도 알아주지 못한다. 그러면 거짓에 속기만 한다.”

    『中庸』 제19장에는 “하늘과 땅을 제사지내는 예(郊社之禮)”와 “조상들을 제사지내는 예(宗廟之禮)”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中庸』은 이 두 제사 지내는 예에 대한 뜻을 분명히 안다면 “나라 다스리는 일은 손바닥을 보는 것 같이 잘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치의 근본이란 자신의 근원을 잘 알고 섬기는 일이라는 가르침이라

    14) 류영모 옮김 박영호 풀이,『마음길 밝히는 지혜』, (성천문화재단, 1994), 21.15) Ibid., 22.16) Ibid., 105.17) Ibid., 144.18) Ibid., 105.

  •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109

    하겠는데, 교육적으로 풀어보면 진정한 교육이란 그 교육의 대상인 인간이 하늘로부터 근원된 존재이고, 그 안에 하늘의 씨앗(性또는 中)을 담지하고 있는 존재임을 분명히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초월적 근거에 대한 인지야말로 모든 교육 활동의 근거가 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中庸』 20장은 다시 말하기를, “사람을 알려고 한다면 하늘을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思知人, 不可以不知天)”라고 했다. 또한 여기서 수신(修身)으로부터 시작하여 사친(事親)을 말하고 지천(知天)을 이야기했다면 바로 자신을 닦고, 부모를 섬기며, 인간을 교육하는 모든 일이 하늘을 섬기는 일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류영모는 이제 옛날 중국에서처럼 제왕만이 郊社(교사), 하늘에 제사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제사지낼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하며, 이 가르침을 믿는 한 사람 한사람이 천자가 되어 천제를 올려야 한다고 했다.19) 유교 전통은 교육이란 바로 이렇게 우리 모두가 자신 속의 신적 뿌리를 알고서 그것을

    키워나가는 ‘하늘에 대한 제사(配天)’라고 가르쳐주고, 오늘의 교육과 대학 공부에서 바로 이렇게 자신 활동의 초월적 근거를 아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본다. 이러한 교육적 영성이 부재하므로 오늘의 교육은 한갓 임금노동자의 생계벌이를 위한 수단으

    로 전락했고, 거기서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과 소중함은 한 꿈이 되어버렸다.

    3. 큰 배움(大學)의 방법론-지행합일(知行合一)

    인간 존재의 초월적 내면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교육은 그 과정과 방법론이 그렇지 않은 경우와 확연히 다를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유교 배움의 전통에서 그 차이를 가장 확연히 드러낸 것이 신유교 전통에서의 주희와 왕양명의『大學』 논의라고 할 수 있

    다. 물론 주희도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대로 ‘性卽理(우리 본성이 곧 하늘이다)’라는 명제를 가지고 인간 내면의 초월성에 대한 믿음을 나름대로 표현했고 거기에 근거해서

    자신의 공부 방법론을 펼쳤다. 하지만 양명은 거기서 근본적으로 더 나아가서 단지 우리의 본성(性), 즉 사고하는 이성(理)만이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사고하는 능력을 포괄한 우리 마음 전체, 즉 감각과 감정, 직관력과 상상력 등도 모두 포괄해서 우리 ‘존재 자체(心)’가 초월과 닿아있다고 본 것이다(心卽理). 그래서 그에게는 공부란 단지 우

    19) Ibid., 180.

  • 110 신학과 철학 제24호

    리의 이성 능력만을 기르기 위한 지적 작업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정신을 모두 아우르는

    통합적 삶의 과정이 된다. 그것을 그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명제로 표시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주희는『大學』을 “처음 배우는 자가 덕에 들어가는 문이다”라고 하면서 원래『禮記』 49편 가운데 제42편으로 들어있던 고본의 형태를 자신의 평생의 작업이라고 고백하는『大學章句』를 통해서 재편집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후에 신유교사에서 많은 중요한 논쟁을 일으킨다. 주희는 그 서문에서 궁리정심(窮理正心)하고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道로『大學』을 요약하면서 그 첫머리로부터 205자를 經이라고 하고, 대학의 목적을 논술한 삼강령(三綱領: 明明德, 新民, 止於至善)과 이를 닦는 차례를 논술한 팔조목(八條目: 修身/齊家/治國/平天下/格物/致知/誠意/正心)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10장으로 나눈 傳은 이 삼강령과 팔조목에 대한 해설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 經의 글의 순서를 따라 傳의 글의 차례를 바꾸고 본문을 교정하고 보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3백여 년 후 明代의 양명은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원래의 고본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양명이『大學古本』을 주장하는 이유는 주희가 개인의 지적인 공부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스스로 보충의 말을 집어넣어 앞으로 배치했고, 원본에는 원래 더 앞에 나와 있던 성의(誠意)에 대한 부분을 뒤로 돌려서 傳 6장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양명에 따르면 이것은 모두 주희가 지적인 공부와 개인의 공부, 밖에서 구하는 박학(博學)의 공부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주희의 주지주의적 경향은 知와 行을 둘로 분리하는 것이며, 명명덕과 신/친민(新/親民)을 둘로 나누어서 단지 행동하지 못하는 허구의 지식인만을 양산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에 반해서 양명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공부는 성의(誠意) 공부이다. 그것은 行의 공부이며, 만물과의 관계에서 기본적인 출발점이 되며 원천이 되는 나의 ‘마음(心)’의 ‘의도(意)’를 바로잡고 진실 되게 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주장이다. 이 일은 마음이 어떤 일과 만났을 때 단순히 그 일에 대한 지식을 수집하고 정보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 일과 관계하

    는 내 마음을 먼저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는 일이다. 이렇게 體와 用과 知와 行과 안과 밖의 하나 됨을 훨씬 강조하는 양명은『大學』 팔조목의 모든 공부가 결국은 하나를 이루는 것이며, 결코 안팎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20)

    20) 왕양명,『전습록』中 174, 答羅整菴少宰書: 夫理無內外,性無內外,故學無內外。講習、討論,未嘗非內

  •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111

    양명은 당시 과거제도를 통해서 거의 관학화 되어있던 주희 공부법의 폐해와 맹점을 보았다. 원래 어느 누구보다도 주희의 공부법을 충실히 따르고자 시도했던 양명은 주희의 그와 같은 지식 중심적 방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깨달음에 이를 수 없고, 우리 속의 밝은 덕을 밝힐 수 없다고 판단했다. 즉 주희의 격물 이해에서의 ‘물(物)’은 외부세계에 있는 사건이나 사물들을 가리키는데 이에 대한 끝을 다하는 연구는 사람들의 연구능력

    의 한계를 벗어나고, 특히 보통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유교 道의 오래된 전통인 ‘사람은 누구나 다 배움(學)을 통해서 聖人이 될 수 있다(學而至聖人)’는 가르침에도 어긋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격물의 격(格) 자를 ‘이르다’가 아닌 ‘바르게 하다(正)’로 보고, 또한 물(物)을 주희보다 훨씬 더 주객의 관계성 속에서 보면서 단순히 바깥의 대상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의 뜻이 머무는 곳, 우리의 지향이 닿는 지향점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양명에 따르면 우리의 공부, 즉 ‘격물’이란 그 ‘마음을 고치는 것(正心)’, 그 속의 ‘뜻을 진실 되게 하는 것(誠意)’을 오히려 출발점으로 삼는 공부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공부의 초점을 다시 우리 자아에로 돌리는 것이고, 거기서 단순히 그 자아의 계산하는 이성이 아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인간 인식력인 감각과 감정, 직관력에 주목하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 직관과 지향의 마음이야말로 주관이 만물과 만나는 출발점과 핵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통찰이 ‘심즉리(心卽理)’의 깨달음이고, 그렇게 그의 공부법은 우리 마음에 이미 초월이 내재해 있고, 그것을 통하여 누구나 하늘의 자식이라는 깨달음 위에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우 급진적인 만인 평등의 감각에서 우러나와서 실천과 삶 중심적인 지행합일의 방법이 되었다. 양명은 당시

    也;反觀、內省,未嘗遺外也。夫謂學必資於外求,是以己性爲有外也,是「義外」也,用智者也;謂反

    觀、內省爲求之於內,是以己性爲有內也,是有我也,自私者也:是皆不知性之無內外也。故日:「精義

    入神,以致用也;利用安身,以崇德也」:「性之德也,合內外之道也。」此可以知「格物」之學矣。「格

    物」者,《大學》之實下手處,徹首徹尾,自始學至聖人,只此工夫而已,非但入門之際有此一段也。夫「正

    心」、「誠意」、「致知」、「格物」,皆所以「脩身」:而「格物」者,其所用力,日可見之地。故「格物」

    者,格其心之物也,格其意之物也,格其知之物也:「正心」者,正其物之心也:「誠意」者,誠其物之意

    也:「致知」者,致其物之知也。 此豈有內外彼此之分哉? 理一而已:以其理之凝聚而言則謂之「性」,以

    其凝聚之主宰而言則謂之「心」,以其主宰之發動而言則謂之「意」,以其?動之明覺而言則謂之「知」,以其明覺之感應而言則謂之「物」:故就物而言謂之「格」,就知而言謂之「致」,就意而言謂之「誠」,就心而言

    謂之「正」。 正者,正此也;誠者,誠此也;致者,致此也;格者,格此也;皆所謂窮理以盡性也;天下無

    性外之理,無性外之物。 學之不明,皆由世之懦者認理爲外,認物爲外,而不知「義外」之說,孟子蓋嘗闢

    之,力至襲陷其內而不覺,豈非亦有似是而難明者歟?不可以不察也!

  • 112 신학과 철학 제24호

    이 ‘근본(頭腦處)’을 키우지 못하고 밖으로부터의 사물에 대한 잡다한 지식만을 추구하는 일로 전락한 주희식 공부 방식은 “잡다한 견문(聞見之雜)”과 “번쇄한 암송(記誦之煩)”, “화려하게 꾸며진 문장(辭章之靡濫)”과 “공리의 경쟁(功利之馳逐)”에만 치우치게 만들어 참다운 덕성이 길러진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인간을 키우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 이유는 공부의 출발점과 근거를 자신 속에서 찾지 못하고 다만 외형적인 정보나 지식의 축적만 치우쳤기 때문인데, 이러한 “시작에서 극히 작은 차이가 끝에 가서는 엄청난 오류를 일으키는” 잘못된 공부의 관행을 인간 가능성에 대한 깊은 믿음으로 치유하기를 원한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교육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본다. 대학에서의 주된 공부가 토익시험 공부가 되고, 교육은 점점 비싸져서 교육에서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점점 더 먼 신화가 되어간다. 지식교육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과 사물 사이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발성을 기르는 교육이 아니라 단지 잡다한 지식들을 마구잡이로 외우게 하는 암기교육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선하고 도덕적이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성 있는 인간을 키워내고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정치사상가 랑시에르(J. Rancière)의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 이야기는 많은 시사를 준다. 왜냐하면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이라는 부제와 더불어 묶여진 『무지한 스승』에서의 그의 관점은 유교 전통에서 양명의 주희 비판과 마찬가지로

    급진적으로 인간누구나의 보편적 내재적 인식 능력과 일상의 힘에 근거해서 인간 교육

    의 혁명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1818년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프랑스 교육자 조제프 자코토가 스스로가 네덜란드어를 조금도 모르는 상태에서 프랑스어를 모르

    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어떻게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게 되었는지를 전하는 서술을 중

    시 여긴다.21) 당시 강사 자코트는 서로 언어 소통이 되지 않던 상황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쳐야 하는 경우가 되자 매우 특이한 방식을 쓰게 되었다. 즉 그는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으로 출판된 한 책을 구해서 학생들 스스로 네덜란드어 번역문을 사용해서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임시방편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대조하

    21) 자크 랑시에르,『무지한 스승』, 양창렬 옮김, (궁리, 2008).

  •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113

    면서 익히게 하여 제1장의 반 정도에 이른 직후에 그는 학생들에게 그 익힌 것을 쉼 없이 되풀이하게 하고 나머지는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만 읽으라고 지시했다. 그런 방식으로 제1장의 반을 외우고, 나머지는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읽은 학생들에게 그들이 읽은 내용 전부에 대해서 프랑스어로 써보라고 하자 결과는 너무도 놀라웠다고 한다. 프랑스어를 생판 모르던 젊은이들이 쓴 프랑스어 작문은 많은 프랑스인조차 맞닥뜨리

    는 난관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우연한 실험 후 그때까지 선생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들을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 ‘설명’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오히려 학생들의 ‘무능력’이란 설명자 교사가 지어낸 허구이고, 교사가 구성해낸 필요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즉 그에 따르면 “설명은 교육학이 만든 신화”이다. “‘이해하다’라는 슬로건이 바로 모든 악의 근원”으로서 여기서 학생들이 설명의 도움 없이도 프랑스어를 말하고 쓰게 된 것은 교사가 그러한 학생들의 “바보 만들기(abrutissement)”를 멈춘 때문이라고 한다. 즉 전통적으로 “지능의 세계에 세워진 위계에 복종”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22) 자코토는 “어린이는(학생들은) 먼저 말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이미 자신의 모국어를 습득한 존재이고, 그렇게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교사가 인식하는 것이 제일의 관건이고, 거기서 학생들이 모국어를 배울 때 썼던 지능과 하려고 하는 “의지”가 바로 이 “평등의 방법”, “해방하는 스승”의 방법이라는 것이다.23) 여기서 랑시에르가 소개하는 자코토의 실험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려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양명이 자신의 ‘심즉리’의 발견에 근거해서 그 마음의 ‘의지(誠意)’의 힘에 특히 주목하면서 각자가 직접 실천하고 행위하며 배우는 지행합일의 공부법으로

    인간 지성을 해방시키고자 한 것처럼, 그렇게 학생 개개인이 이미 가지고 있는 배움의 능력에 근거한 “해방”의 교육이 가능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쟈코토는 말하기를, “학생을 해방한다면, 다시 말해서 학생이 그의 고유한 지능을 쓰도록 강제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 또한 “해방하지 않고 가르치는 자는 바보를 만든다”고 하였다.24) 자코토는 이런 자신의 방식을 “인간 정신의 진정한 힘을 깨닫는”

    22) Ibid., 15-22.23) Ibid., 29-30.24) Ibid., 34, 39.

  • 114 신학과 철학 제24호

    것에 근거한 “역량의 고리”의 방식이며, 세계가 시작되면서 함께 존재해왔던 “보편적 가르침”이라고 명명한다.25) 그러면서 그것을 단순히 “인민을 지도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빈자들에게 알려야 할 혜택”이라고 지시하는데, 이것은 길 위의 모든 사람들을 이미 聖人으로 보는 양명이 자신의 ‘만인성인설(滿街聖人說)’의 확신에 근거해서 주희가『大學』해석에 있어서『大學古本』의 ‘親民(인민을 사랑하는)’을 ‘新民(인민을 교육하는)’으로 바꾸는 것에 반대한 입장과 상통한다. 양명은 그러한 자신의 공부법은 “너무나 즐겁고, 자유로운 것이며, 단순하고 쉬운” 공부법이라고 강조한다.26)

    랑시에르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이러한 자코토의 급진적인 해방의식에 근거해서 소위 현대 “진보주의자들”의 사회개혁 의식도 세차게 비판한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진보주의자들은 사회를 개혁하는 핵심적인 방식으로 ‘교육’을 들고, ‘공교육 체계’를 잘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그래서 ‘대학’이 필요하고 대가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의 그런 선한 의지는 자칫하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갈파

    한다. 왜냐하면 보수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진보주의자들도 인민의 진정한 능력을 믿지 못하는 ‘설명자’, 다시 말하면 “불평등의 옹호자”가 되고, 그러한 “진보론자들의 고리”는 오히려 제도화된 교육을 통해 불평등을 제도적으로 더 고착시키고 영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27) 그래서 그는 공교육을 “진보의 세속적 권력이자, 불평등을 차츰차츰 평등하게 만드는 수단, 다시 말해 평등을 무한적 불평등하게 만드는 수단”이라고 급진적으로 비판한다.28) 그는 지적하기를,

    “즉 사회를 통째로 애 취급하기, 다시 말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일반적으로 아이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중에 그것을 평생 교육, 다시 말해서 설명하는 제도와 사회의 공외연성이라고 부를 것이다.”29)

    라고 하였다. 이것으로써 오늘날처럼 ‘교육’과 ‘평생교육’이 또 하나의 막강한 신화가 된 사회를 근본적으로 비판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오늘 한국사회에서도 교육학자, 평생교육 옹호론자, 진보주의 정치가들이 이러한 지적을 경청해야 한다.30) 우리 사회에서도

    25) Ibid., 36.26) 왕양명,『전습록』, 27) 랑시에르,『무지한 스승』, 227.28) Ibid., 247.29) Ibid., 251.

  •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115

    교육이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보편적인 생명억압의 기제가 된 것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성을 우리 교육에 다시 관계시키고 받아들이고자 한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양명이나 랑시에르가 지적해 준 것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인간

    에 대한 ‘선험적인(초월적인/영적인)’ 평등성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랑시에르는 말하기를, “자코토는 진보 아래 평등이 지워져버리고, 지도 아래 해방이 지워지는 것을 생각한 단 한 사람이었다”고 자코토의 급진적 평등사상을 평가했다. 또한 “진보의 표상 및 제도화를 평등의 지적, 도덕적 모험에 대한 포기로 지각하고, 공교육을 해방에 대한 애도 작업으로 지각한 유일한 평등주의자였다”라고 했다.31) 이제 21세기 오늘 인류 문명의 상황에서는 일찍이 이반 일리치도 간파한 대로 종교가와 정치가와 대학과

    학교의 관계자들이 이러한 급진적인 언술 속에 들어있는 인간 이해의 진실을 정직하게 목

    도하고 어떻게 하면 오늘 다시 과도하게 교육 계획의 위험 앞에 놓여있는 현대인들을 학

    교와 제도교육의 올무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32)

    4. 교육의 이상-지극한 善에 머물다

    오늘 우리 교육을 돌아볼 때 가장 주목되는 점 중의 하나는 그것이 극심한 정도로 수단화 되어 있고, 과정과 목표 사이의 간극이 커서 교육으로 인한 피로와 소진이 심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교육과 삶이 많이 유리되어 있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사라진 것을 뜻하기도 하며, 우리 인생에서 ‘더불어 사는 일’과 ‘윤리’와 ‘善’에 대한 관심과 책임이 실종된 것을 지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주목한 퇴계선생의 성학의 길은 이러한 난점을 치유할 열쇠로 ‘경(敬, 스스로 삼가고 경계함)’을 제시했다고 읽을 수 있다. 그의『성학십도聖學十圖』의 마지막 두 장

    30) 강성훈,「랑시에르의 교육학 비판」,『敎育哲學硏究』, 35(2013, 1), 1-21; 강성훈 박사의 이 논문을 통해서 나는 랑시에르의 사고가 또 하나의 교육학을 이루려는 사고라기보다는 우리의 ‘교육학’ 자체에 대한 존재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았다. 이 논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초월과 정치와 교육에 대한 이해가 포괄적으로 어우러져서 전개되는 랑시에르와 같은 이야기가 한국 사회와 교육계에

    더욱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한다. 31) Ibid., 252.32) 이은선,「탈학교 사회와 한국 생물(生物)여성 영성의 교육」,『생물권 정치학 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

    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대화 속에서』, 223-264.

  • 116 신학과 철학 제24호

    인「경재잠도敬齋箴圖」와「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는 바로 우리의 공부가 어떻게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밤낮으로, 일생동안 간단없이 敬에 잠기는 공부가 되어야 하는지를 밝혀준다. 경이란 오늘날 일상의 언어에서 간단히 ‘공경심’을 말하는 것으로 쓰이지만 퇴계선생이 가르치는 경의 의미는 한없이 포괄적이고 깊고도 높다.33) 그는 우리 삶과 학문의 길에서 경을 지키는 자세를 “상제를 마주 모신 듯이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潛心以居, 對越上帝)”, 행동할 때는 “땅을 골라 밟기를 말을 달릴 때 개미 둑을 피하듯이 하며(擇地而蹈, 折旋蟻封)”, “문을 나설 때는 큰 손님을 뵙는 듯이 하고(出文如賓)”, “일을 할 때는 제사를 지내는 것 같이하라(承事如祭)” 하였다. 또한 “입 다물기를 병마개 막듯이 하고(守口如甁)”, “성을 지키듯이 뜻을 지키라(防意如城)”고 했다. 또한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을 나누지 말고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펴보라”고 하는데, “주일무적(主一無適, 전일로 하여 옮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34) 여기서 퇴계가 가르치는 경이란 오늘 우리 주관성의 시대에서는 매우 낯설고 소원하며, 현대 주체성의 시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하게 ‘세계(物)’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타자’에 대한 경외를 바로 하늘의 상제를 섬기듯이 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과거는 간단히 무로 돌려버리고, 미래의 성취를 위해서 현재는 쉽게 수단과 과정으로 환원시키는 현대적 사고와는 달리 바로 ‘현재’에 대한 더할 수 없는 집중 속에서 ‘지금 여기’에서 ‘영원’을 보는 것이다. 또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우리 곁의 늙은 부모와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말없는 자연이 바로 상제이고, 영원이 현존하는 초월이며, 바로 그 현재가 궁극의 시간이므로 결코 미래의 것을 위해서 그냥 흘려버린다거나 단

    순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 준다. 초월의 내재화가 이와 같은 정도로 이루어진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없는데, 특히 그 내재화의 소재가 먼저 자기 주변과 가족과 이웃이고, 公의 영역이며, 그의 수많은 자연을 읊은 시에서 보듯이 자연 속에서 체험하고 표현한 것이라면 퇴계 敬의 심학을 통해 드러난 유교 영성은

    지금까지 지적한 우리 교육의 병폐를 치유하는데 좋은 기여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35)

    33) 서명석,「『심경부주』에 드러나는 경의 개념/작용/효과 그리고 그 너머의 교육적 메시지」,『교육철학연구』, 34(2012, 4), 132.

    34)『퇴계집』,「聖學十圖를 올리는 箚子」, 263; 이광호,『성학십도』, 95 참조.35) 한나 아렌트, “문화의 위기: 그 사회적 정치적 의미”,『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서유경 옮김, (푸른숲,

    286); 이은선, “한나 아렌트 사상에서 본 교육에서의 전통과 현대”, 152.

  •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117

    퇴계 선생은 이런 경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무슨 일을 하건 어느 때이거나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을 마음의 “거룩한 곳(영대靈臺)”에 깊이 새기고, 항상 “하나님(上帝상제)앞에 마주 앉아 있는 듯이 하며, 걸음걸이는 마치 말 달리는 사람이 그 말발굽 아래의 개미 둑 사이를 잘 피해 가듯이” 그렇게 조심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살아가라고 했다.36) 오늘의 세속사회에서 이보다 더 극진한 종교적 영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묻게 되는데, 왜 우리 교육이 이렇게 객관과 세계와 타자와 하찮은 미물에게라도 깊은 공경과 예를 다할 수 있는 경의 마음을 교육의 목표로 삼지 않는지 반성

    할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우리 교육에서 또 하나의 강력한 교육 주제로 부각되고 있는 ‘평생교육’이 지금까지의 한국 교육과 대학의 실제처럼 또 하나의 스펙 쌓기를 위한 과정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여기 퇴계가 말한 “거경대학(居敬大學)”의 의미를 잘 살펴서37) 우리의 평생교육은 분명하게 그런 정신과 인격의 사람들을 길러내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을 명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일을 연구하는 ‘평생교육학’이 하나의 잡다한 방법론학의 모음이 되지 말고 진정으로 인간의 평생교육과 배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학문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평생교육학이 퇴계를 비롯한 신유교 전통이 그렇게 지고한 종교심과 신앙심을 인간 누구나의 보편적인 ‘공경심(敬)’과 ‘공감(仁)’의 일로 삼아서 하나의 ‘보편종교(common religion)’와 ‘시민종교(civic religion)’의 의미로 드러낸 일을 잘 참조할 수 있다. 거기서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 보편성(仁/性/敬/誠)’의 깊은 영성적 차원과 의미를 간파하고서 그것을 갈고 닦는 일을 공부의 목표로 삼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38) 그런 의미에서 퇴계 심학 등의 유교 심학이 바로 오늘의 평생교육학의 선취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오늘 동아시아 전통에서 포스트모던 평생교육학을 구축하려는 노력은 그러한 전통의 공부법을 깊게 탐구하

    는 일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39) 또한 이것은 단순히 교육학

    36) 퇴계,『聖學十圖』,「敬齋箴」, 194.37) 지난 여름 퇴계 선생 평생공부의 중요한 터전이었던 경북 봉화의 청량산에 갔다가 그 청량산의 정상

    즈음에 자리 잡고 있는 퇴계 암자 ‘청량정사(淸凉精舍)’가 ‘거경대학(居敬大學)’이라는 또 다른 현판을 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감동이 컸다. 퇴계 선생도 자신의 일생의 배움과 공부를 바로 이 경에 거하고, 그것을 더욱 갈고 닦아서 온전한 경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고서 나 자신과 우리 교육을 위해서 마음에 새겼다.

    38) 이은선,「仁의 사도 함석헌 사상의 유교적 뿌리에 대하여」,『陽明學』, 한국양명학회, 33(2012, 12), 314.39) Michael C. Kalton, (ed.) Yi Toegye, To become a sage - Ten Diagrams on sage Learning, (New

  • 118 신학과 철학 제24호

    의 한 분과로서의 평생교육학뿐 아니라 우리 대학 교육자체가 다시 회복하고 지향해야

    하는 일이라고 밝히고자 한다. 『大學』은 큰 학문의 세 번째 강령으로서 ‘지어지선(止於至善,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것)’을 말하면서 그것을 모든 공부가 도달해야 하는 지향점으로 제시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大學』이 우리 공부와 학문의 최고 이상으로 말한 善, 그 중에서도 ‘최고 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생기는데, 일찍이『孟子』는 “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히 하고자 하는 것(원할만한 것)”을 善이라 했고,40) 우리 입이 고기를 좋아하는 것 같이 우리 마음을 공통으로 기쁘게 하는 것이 있으며 그것이 이치(理)나 義라고 했다.41) 즉 아무리 악인이라도 그가 진정으로 원하고 기뻐하는 것은 선이고, 서로 사랑하는 것(仁)이며, 의로움(義)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대학교육이 온통 직업훈련의 장으로 바뀌었고, 경제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되어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교육은 철저히 녹을 얻기 위한 수단을 가르치는 공리주의의 도구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서 맹자는 선비가 하는 일이란 “뜻을 고상하게 하는 일(尙志)”이라고 대답했다.42) 그러므로 큰 배움의 일이란 한 사람에게, 한 나라와 공동체에게 뜻을 고상하게 하는 일을 가르치는 일이라는 지적이겠다. 이와 관련해서 앞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인간 속의 인간성의 씨앗을 “씨”이라는 언어로 참으로 고유하게 제시해준 한국의 함석헌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는 인간이 그것을 가지면 살고 갖지 못하면 죽는 ‘뜻’의 한자어 ‘지(志)’는 바로 ‘선비(士)’의 ‘마음(心)’을 말하는 것이라고 지적해 주었다. 또한 거기서의 ‘선비’란 그 한자어 ‘士’가 지시하는 대로 ‘열(十)’에서 ‘하나(一)’를 보고, 다시 하나에서 열을 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참된 대학과 학자의 일은 어떻게 세상의 만물이 궁극적으로 ‘하나’에로 모아지고, 그 하나는 어떻게 다시 세상의 ‘만물’을 통해서 다양하게 현현되는지를 깊이 통찰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43) 그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40)『孟子』盡心下 25, “何謂善? 何謂信?, 曰: 可欲之謂善, 有諸己之謂信.” 41)『孟子』告子上 7, “故曰: 口之於味也, 有同耆焉; 耳之於聲也, 有同聽焉; 目之於色也, 有同美焉. 至於心,

    獨無所同然乎? 心之所同然者何也? 謂理也, 義也. 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 故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

    42)『孟子』 盡心上 33, “王子墊問曰: 士何事? 孟子曰: 尙志.” 43) 함석헌,『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 1, (한길사, 198611), 354; 이은선,「仁의 사도 함석헌 사

    상의 유교적 뿌리에 대하여」, 324.

  •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119

    래서 바로 대학 공부와 대학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 큰 통찰의 마음을 길러주는 것

    이라고 하겠다. 앞의 양명에게로 다시 돌아가서 살펴보면 그는 ‘至善(최고선)’에 대해서 주희와는 다른 관점을 펼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주희는 ‘명명덕’과 ‘신민(新民)’ 각각의 至善에 대해서 말했고, 그것을 인욕과 관계시켜서 설명했지만 양명에 따르면 至善은 바로 우리 마음의 본체를 말하는 것이며, 그 본체에 대한 자각 속에서 ‘명명덕’과 ‘친민(親民)’의 덕을 온전히 하나로 이루어내는 것이다(「大學文」, 144). 그에 의하면 자신의 명덕을 밝힌다고 하면서 거기에만 몰두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일에 소홀히 하는 것은 至善에 머

    무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신의 덕을 밝히는 일을 소홀히 하면서 백성을 사랑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러므로 至善이란 바로 수신과 치국, 지와 행, 개인적 공부와 사회적 책임, 지적 공부와 몸으로의 실행, 명명덕과 친민이 온전히 하나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며, 그것을 이루는 사람이 바로 ‘大人’이라는 것이다. 양명은 이러한 至善이 바로 우리 마음속에 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곧 우리의 교육과 배움, 또한 삶에 있어서도 과정과 목표, 오늘과 내일을 너무 과격하게 인위적으로 나누는 방식을 지양하도록 한다. 바람직한 교육이란 오늘 여기의 삶과 공동체에 주목하면서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본래적인 힘과 능력들이 조화롭게 쓰일 수 있

    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거기서 각자의 인간성의 능력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지지 않고 바르게 커나가도록 돕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의 지적인 능력과 도덕적인 능력, 신체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이 고루 키워지고, 자신의 마음과 개성을 지극한 곳에까지 키우면서도 그 능력을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서 사용할 줄 아는 도덕심을 가진 사람, 양명의 이야기대로 하면 천지의 만물과 한 몸과 한 형제자매를 이루는 ‘큰 사람(大人)’을 키우는 일이다.

    5. 마무리하는 말

    앞에서 우리가 다루었던 랑시에르는 “평등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출발점, 모든 정황 속에서 유지해야 할 하나의 가정이었다”라고 하면서 우리 정치와 교육이 어떤 토대와 근거 위해서 시작해야 하는지를 지시하였다. 또한 “평등은 주어지거나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고 입증되는 것이다”44)라는 말로 그 일에서의 목표와 과

  • 120 신학과 철학 제24호

    정이 어떻게 서로 상관되고 연결되는지를 밝혀주었다. 이러한 모든 이야기는 우리들이 지향하는 큰 배움과 큰 공동체는 바로 존재 개개인에 대한 선험적 존엄성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고, 또한 그 일이 우리들의 날마다의 인간성의 실천 속에서 현현되지 않고서는 바랄 수 없는 이상임을 드러내준다. 진정한 영성은 그래서 “개체에서 전체를 보는 것”이고, “인간이 반드시 죽는다 할지라도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시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항상 상기시켜주는 행위의 내

    재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지시해 준다.45) 인간의 이러한 능력에 대한 믿음이 참된 영성이라고 믿고, 동아시아의 전통은 그것을 잘 전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 시대의 비인간성은 이러한 믿음을 더욱 요청하지만 만나기가 매우 드물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보답이 있고, 등불이 켜지면 반드시 사람들이 모인다.”는 말이 증거 되고 있어서 우리 시대의 위로가 되고 있다.46)

    44) 랑시에르,『무지한 스승』, 257-258.45) 한나 아렌트,『인간의 조건』, 311.46) 이 말은 내가 지난 주말 왕가위 감독의 영화 에서 의미 깊게 들은 말이다. 우리 시대는

    한 편의 영화가 대학 한 학기의 강의보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121

    참고문헌

    『孟子』

    왕양명,『傳習錄』.퇴 계,『聖學十圖』.강성훈,「랑시에르의 교육학 비판」,『敎育哲學硏究』, 한국교육철학학회, 35-1(2013, 3),

    1-21. 류영모 옮김 박영호 풀이,『마음길 밝히는 지혜』, 성천문화재단, 1994.서명석,「『심경부주』에 드러나는 경의 개념/작용/효과 그리고 그 너머의 교육적 메시

    지」,『교육철학연구』, 한국교육철학학회, 34-4(2012, 2). 이기동 편역,『大學․中庸 講說』,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91.이은선,「유교적 그리스도론-그리스도론의 교육적 지평확대를 위한 한 시도」,『포스트모

    던 시대의 한국 여성신학』, 경북 분도출판사, 1997. ,『大學』과『中庸』사상의 현대 교육철학적 해석과 그 의의」,『교육학연구』,

    한국교육학회, 39-4(2001, 12), 19-44.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교육론-한국 사회와 교육을 위한 의미와 시사」,『한국

    교육철학의 새지평-聖性誠의 통합학문적 탐구』, 내일을 여는 책, 2009 개정판. ,「仁의 사도 함석헌 사상의 유교적 뿌리에 대하여」,『陽明學』, 한국양명학회,

    33(2012,12).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도서출판 모

    시는 사람들, 2009, ,『생물권 정치학 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대화 속에

    서』,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3. 이 황, 『성학십도』, 이광호 옮김, 홍익출판사, 2001.최중석, “인간의 주체적 진실성과 퇴계심학의 과제”, 이동준 등 24인,『동방사상과 인문

    정신』, 심산, 2007.한병철,『피로사회』, 문학동네, 2012.함석헌,『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 1, 한길사, 198611.

  • 122 신학과 철학 제24호

    이반 일리치,『성장을 멈춰라』, 미토, 2004.자크 랑시에르,『무지한 스승』, 양창렬 옮김, 궁리, 2008.한나 아렌트,『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2002.한나 아렌트,『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서유경 옮김, 푸른숲, 2006. 한스 큉·줄리아 칭 지음,『중국 종교와 그리스도교』, 이낙선 옮김, 분도출판사, 1994.Michael C. Kalton, ed., Yi Toegye, To become a sage - Ten Diagrams on sage

    Learning,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

  •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123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포스트모던 시대의 평생교육

    이은선

    본 논문은 오늘 21세기의 포스트모던 영성의 시대에 대학과 대학교육이 어떻게 변해야하는지를 탐색한 글이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의 대학교육은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의 시대를 맞이하여 대학교육이 한갓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고, 거기에 더해서 교육의 새로운 대안이라고 여겨지던 평생교육도 또 하나의 스펙 쌓기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 현실 앞에서 본 논문은 특히 한국 유교전통의 영성과 대화하면서 대학 공부의 참 의미를 다시 되새기고자 한다. 인류의 여러 종교전통 중에서 특히 동아시아의 유교는 그 급진적 내재적 초월성으로 인해서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으로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 교육과 삶의 문제가 인간을 철저히 수단화하고 그 존재론적 존엄성과 고유성을 망각한 데서 오는 것이라고 보면서 그러한

    유교 영성을 새롭게 회복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 교육의 새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여기서 특히 21세기의 평생교육(lifelong education)을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자크 랑시에르의『무지한 스승』에 나타난 사고와 접목하여 살펴보면서 한국 유교전통에서의 퇴계의

    敬사상, 왕양명의 ‘대학(大學)’ 공부에 대한 비전과 연결시켜 새로운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주제어: 포스트모던 시대의 영성, 훌륭한 학습, 평생교육, 왕양명, 퇴계, 자크 랑시에르

    초 록

  • 124 신학과 철학 제24호

    21st Century’s Postmodern Spirituality and the Great Learning(大學): Lifelong Education in our Postmodern Era

    Lee, Un-sunn

    This article aims at the discovering of the ground and the fundament of the 21st century’s alternative education and the lifelong learning of humankind. In doing this, this article recognizes a good possibility in East Asian Confucian tradition, especially in its New-Confucian spirituality of the innate transcendence of human beings and its goal of learning to become a great wo/man(聖學). East Asian Neo-Confucian spirituality emphasizes strongly on human being’s innate ability to become a great being, and this article acknowledges that its emphasis on ethical and spiritual goal of human learning has to be revaluated in our postmodern education and society. That is the work of recovering of spiritual and religious characters of our education, and this article sees that it is also very important for our lifelong education which is now running the risk of falling into another job learning. This article sees a good chance in French postmodern political thinker Jacques Ranciere(1940-) how we can revolutionize our education into more subjective and independent work of students. And it sees that the kernel for that lies in teacher's deep faith on every learner's innate ability to learn and to act. This article regards such abilities as transcendentally rooted in every human being. This article names that faith as postmodern spirituality and finds out its genuine embodiment and reality in East Asian New-Confucian spirituality. Hence, the thoughts of Wang Yang-ming, Toegye, Yulgok etc. are good guides and providers

    Abstract

  •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125

    for our postmodern education and lifelong education, and this article tries to bring out valuable lessons from those New-Confucian thinkers.

    Key Words: postmodern spirituality, the great learning, lifelong education, Wang Yang-ming, Toegye, Jacques Ranciere

    논문 접수일 2014년 2월 10일

    논문 수정일 2014년 5월 6일

    논문게재 확정일 2014년 4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