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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박순발 (충남대학교) 호서고고학회 창립 20년의 역사는 한국고고학의 양적 성장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고고학조사가 토지개발 과정의 법적 절차에 포함되 면서 고고학은 이제 인문학의 한 분야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파급 영 향이 막대한 문화재조사로 인식되었다. 고고학조사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조사 보고서의 부실로 이어졌고, 그에 따라 고고학의 학 문적 수준 제고는 정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고고학자료 과잉이라는 미증유의 시기가 바로 지난 20년간이라 하여도 좋다. 그러나 새로운 자료의 증가를 통해 성과도 없지 않았 다. 세종시와 같은 대규모 도시개발에 따른 전면적 발굴을 통해 특히 취락고고학의 성과가 많았다. 분묘·생산·방어시설 등을 구비한 도 시적 취락의 전모가 드러난 점은 매우 중요한 성과이다. 그리고 각지 의 분묘군의 변천을 통해 정치사회적 관점의 지역사 이해가 가능하 것도 중요하다. 공주·부여 등 백제의 고도를 중심으로 한 도 성고고학의 진전도 적지 않았다. 외곽성을 구비한 사비도성의 도시 공간 구조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고, 도성 내외의 불사 조사를 통해 백제의 불교문화가 가지는 고대 동아시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 었다. 풍부한 고고학자료를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고고학발전의 관 건이다. 그를 위해 고고학의 학문적 목표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 다. 문화복원, 문화사, 인간과 역사 지향, 그리고 물질자료와 문화 사 이의 관계에서 관찰되는 보편성 추구 등을 제안하는 바이다. 호서고고학 20년, 역사고고학 주제어 : 호서고고학, 문화재조사, 고고학의 목표, 취락고고학, 묘장고고학, 불교고고학, 도성고고학 Ⅰ. 성장과 반성 . 주요 성과 1. 취락고고학 2. 묘장고고학 3. 도성고고학 4. 불교고고학 . 지향 1. 문화복원 2. 문화사에 기여 3. 고고학 이론 지향 4. 인간과 역사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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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박순발 (충남대학교)

호서고고학회 창립 20년의 역사는 한국고고학의 양적 성장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고고학조사가 토지개발 과정의 법적 절차에 포함되

면서 고고학은 이제 인문학의 한 분야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파급 영

향이 막대한 문화재조사로 인식되었다. 고고학조사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조사및보고서의부실로이어졌고, 그에 따라고고학의학

문적수준제고는정체되는결과를초래하였다.

고고학자료 과잉이라는 미증유의 시기가 바로 지난 20년간이라

하여도 좋다. 그러나 새로운 자료의 증가를 통해 성과도 없지 않았

다. 세종시와같은대규모도시개발에따른전면적발굴을통해특히

취락고고학의 성과가 많았다. 분묘·생산·방어시설 등을 구비한 도

시적취락의전모가드러난점은매우중요한성과이다. 그리고각지

의 분묘군의 변천을 통해 정치사회적 관점의 지역사 이해가 가능하

게 된 것도 중요하다. 공주·부여 등 백제의 고도를 중심으로 한 도

성고고학의 진전도 적지 않았다. 외곽성을 구비한 사비도성의 도시

공간구조에대한이해가가능하게되었고, 도성 내외의불사조사를

통해 백제의 불교문화가 가지는 고대 동아시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

었다.

풍부한 고고학자료를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고고학발전의 관

건이다. 그를 위해 고고학의 학문적 목표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

다. 문화복원, 문화사, 인간과 역사 지향, 그리고 물질자료와 문화 사

이의관계에서관찰되는보편성추구등을제안하는바이다.

호서고고학20년, 역사고고학

주제어: 호서고고학, 문화재조사, 고고학의 목표, 취락고고학,묘장고고학, 불교고고학, 도성고고학

Ⅰ. 성장과반성

Ⅱ. 주요성과

1. 취락고고학

2. 묘장고고학

3. 도성고고학

4. 불교고고학

Ⅲ. 지향

1. 문화복원

2. 문화사에기여

3. 고고학이론지향

4. 인간과역사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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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호서고고학 20년, 역사고고학- 박순발 37

호서고고학회창립20년의역사는정확히한국고고학계의양적성장

의 역사와 겹친다. 1997년 지표조사의 의무화가 실시되면서 고고학적

조사 수요는 이제 학계의 관심을 넘어 사회적 관심이 되었다. 그에 따

라 고고학은 인문학의 한 분야로서의 소박한 위치를 벗어나 토지개발

이라는가장핵심적인경제활동의길목을규제하는위치로급상승한것이다. 사회적접점이

거의없었던한적한인문학의한모서리에불어닥친태풍을견디기에는고고학계의역량이

부족하였음은불문가지였으니, 그간의고고학계의경과가곧그러한저간의사정을반영하

고있다.

생물계 전반이그러하듯갑자기조성된유리한성장환경은그반작용도수반되기마련이

니, 고고학계에제공된풍부한조사기회, 즉사회적수요는그것을학술적으로유용한자양분

으로소화할수있는능력을초과하면서내외적문제로귀결되었다. 바람직한조사전담기구

의형태와운영주체등에대한선진국의역사적경험을토대로한검토없이민간법인체제의

선택과육성은현재가히한국특유의고고학환경이라할만한모습으로우리앞에놓여있

다. 그리고학문내적으로는자료의증가에비해학술적확대재생산혹은성장은매우저조한

실정이다. 이식한농작물이착근도하기전지나친비료나수분을공급하면고사해버리는모

습과크게다르지않다.

한국고고학계가당면하고있는문제는결코지난20여년의기간에그뿌리를두고있지는

않은것으로정확한진단과처방또한용이하지는않다. 그가운데우선눈에띄는것이고고

학의정체성이모호하다는점이다. 모든학문영역이그렇듯기초혹은순수영역과응용혹

은사회적수요부응의영역이있게마련인데, 고고학의경우그에대한인식이매우희박하

다. 국가나사회는매장문화재(埋藏文化財)의 발견·조사·보존이중요할뿐그것을행하는

고고학의육성과성장에는관심이없는듯하다.

‘문화재(文化財)’라는 용어 그 자체는 골동적(骨董的) 가치에 치중된 관념의 산물임은 두

말할필요없으므로고고학자료를통해과거사를연구·복원한다는고고학적인식자체와매

우다르다. 그에대한연구역시고고학자료가운데매우좁은한부분에국한될뿐일반적인

고고학연구와는거리가있다. 이러한국가문화재관리체제가바로현재의문화재청·문화

재연구소시스템이다. 고고학은자료확보단계일련의조사가모두발굴제도과의행정적관

리의대상으로되어있다. 그러나발굴조사를위한인허가사항과보고서발간등절차적양

적행정관리만담당할뿐조사의품질유지와직결되는고고학자의육성이나조사연구의질

적관리는완전히방기되어있다.

Ⅰ.성장과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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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역시이러한문제의식이결여되기는마찬가지다. 조사원자격인정및육성과관련한

진지한논의가부족하였고, 규제및양적관리중심의문화재행정에대한대처역시본질적

이기보다는미봉적인경우가많았다. 그가운데대표적인것으로서한국고고학계의연구역

량저하를초래하는데매우큰작용을한것이이른바‘사실보고(事實報告)’에충실하자는명

분의등장이다. 2년이라는매우촉박한보고서발간기간규제에대응한학계의궁여지책(窮

餘之策)으로시작되었지만, 이제그관성은점점돌이키기어려워지고있는게사실이다.

여기서짚고넘어가야할것은도대체‘사실보고’에서말하는‘사실’이란무엇을의미하

는가이다. 이러저러한유구에서그런저런유물이얼마나나왔고, 그형태, 재질, 제원은여

하하다는 것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사실’인가. 고고학자료는 일반적으로 극히 부분적인

형태만남아있는것이대부분이므로특정유물의파편이본래어떤모양의어느부분인지도

직관적인관찰로만파악하기는어렵다. 당연히유사한선행자료를종합하여비교검토한연

후에비로소판단하여야하는절차가필요하다. 사실이이러할진데‘고찰’없이‘사실’을보

고할수있을까지극히의문이다.

따라서그간의이른바‘사실보고’는유물이나유구가운데극히일부분에해당하는기지

(旣知)의 내용만을 반복적으로 보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매년 수백~1천여건의

보고서가학계에공급되어도고고학자료로서학술적인피드백으로작용하는것이극히적은

것은이러한보고서의근본적인문제에기인된것으로보인다.

부실한보고서의문제는그자체에머물지않고그이후에그를토대로재생산되는발굴조

사에영향을미치게되고이것이악순환하면서고고학조사전반의질적저하로집적되기마

련이다. 보고서평가는이와같은현실인식에바탕을두고있는것으로서그의미를부여할

수있을것인데, 그가운데가장중시되어야할내용가운데하나가바로‘고찰’이라여긴다.

그러나‘고찰’에는도대체무엇을다루어야좋을지가갑자기떠오르지않는것이작금의현

실인것같다. 여기에대해서는뒤에서다시짚어볼것이지만, 지금이시점에서필요한것은

고고학의본래의학문적목표를되돌아보는것이라여긴다.

지난 20년은어느지역을막론하고많은새로운고고학자료의확보를

통해새로운고고학적관심의창출및연구영역의확대가있었다. 그가

운데 호서지역의 지역특성과 관련된역사고고학의 영역은 역시마한과

백제의고고학적성취라고할수있을것이다. 여기서는그와관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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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주요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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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락, 묘제, 도성, 불교등의분야로나누어그간의성과를들어보기로한다. 그러나구체적

내용은어디까지나필자의주관적판단이므로객관적중요성평가와는관계없다.

단위 조사면적의확대라는여건에힘입어종전에는거의불가능

하였던취락전체에대한발굴조사가가능해지면서원삼국시대~백

제에이르는취락의전모가속속드러나게되었다. 아산 갈매리(葛梅里) 유적은 곡교천변의

충적평야에입지한것으로서하천변저평지에대한본격적인고고학조사의효시(嚆矢)라할

수 있다(고려대학교 고고환경연구소 2007; 공주대학교박물관 2007; 충청남도역사문화원

2007). 당시로서는새로운유형의유적이었으므로조사과정의어려움도적지않았고, 특히

유구의성격에대한판단이쉽지않았으나교역(交易) 혹은유통(流通)과관련되는것으로각

광을받은바있다.

이유적조사이전에는하천변충적지에대한조사예가거의없었던당시현실에비추어

보면이유적의조사성과는호서지역을넘어원삼국이후의취락고고학진전의기폭제가되

었다할수있다. 이른바‘저습지’에대한고고학적관심이제고되면서세종시대평리(大坪

里)·나성리(羅城里) 등 대규모 취락유적을 확인 조사하는 성과로 이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고지형(古地形) 분석이큰역할을하였다. 특히한국고고환경연구소가개발한디지털지형분

석장비의보급은한국고고학의저평지유적검출(檢出) 능력을획기적높였고, 그결과새로

운유적입지관념을확립하기에이르렀다(韓國考古環境硏究所2006).

중앙문화재연구원과한국고고환경연구소가분담해서발굴조사한나성리유적(中央文化財

硏究院 2015; 韓國考古環境硏究所 2015)은 최초의 백제 지방도시(地方都市)의 모습을 드러

낸것으로취락고고학분야의이정표가되고있다(朴淳發 2014). 이후저평지조사는지속적

으로학계의관심을모으면서아산북수리, 청주오송정중리, 청주테크노콤플렉스유적등

의발견조사로이어진다.

저평지 입지 취락유적에서확인되는 주거지는그간 구릉지등에서드러났던수혈식이아

닌굴립주혹은고상(高床)건물일가능성도제기하였다. 특히세종나성리의추정수장거관

(居館)의 구조는 일본의 야요이~고분시대의 고상건물과 비교될 수 있어 장차의 연구가 기

대된다.

저평지유적들은단순취락이아니라대체로물자의생산·유통등과관련된것으로서그

출현은원삼국시대이후라는점도당시의정치·사회적통합의진전양상을보여주고있어

연구논문

호서고고학 20년, 역사고고학- 박순발 39

1. 취락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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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다. 넓은간석지(干潟地)에인접한서산잠홍리일원의도로부지유적(한국선사문화연

구원2017)은제염(製鹽) 등과의관련성도제기되기도하였다.

한편, 구릉지에위치한원삼국시대대규모의취락의전모도알려지면서취락간의위계관

계을위한양호한자료가되기도하였다. 대전용계동유적은3~4세기대의환호취락으로지

금까지확인된것가운데는가장많은443기의집자리와토기가마터등이확인되었다. 원삼

국시대환호취락은서울풍납토성내부환호취락을비롯하여, 연기응암리, 홍성석택리, 순

천덕암동, 양산평산리등삼한(三韓) 각지의소국중심지에해당되는취락으로판단되고있

다. 용계동 취락은 대전지역의 원삼국시대 국(國)의 중심적인 취락으로 이해되지만, 인접한

곳에서주구묘등으로구성된묘역이확인되지않아장차의자료가기대된다. 원삼국시대중

심취락의전형으로평가되는홍성석택리유적에서는환호취락바로인근에묘역, 공방등이

확인되었다(박순발2018a).

한강이남지역에서지금까지확인된고구려유적은대부분분묘군이었는데, 세종시남성골

산성(中原文化財硏究院 2008)과 대평리 주거지(韓國考古環境硏究所 2017)는 당시 고구려

군의동향과지배의모습을엿볼수있는자료로서중요하다. 특히대평리에서최초로확인

된고구려주거지는당시의역사상을구성하는데에있어매우큰영향력을가질것으로평

가된다.

정치·사회적통합및지방으로의재편등은각지에분포한분묘

군의변화를통해짐작할수있다. 원삼국시대각소국의국읍은지

금까지읍면혹은시군의소재지로남아있는전통적인구밀집지역에해당하는경우가많다.

비록당시의취락그자체는남아있는경우가매우드물지만이러한분묘역의확인을통해

원삼국시대의마한세력의분포양상을파악할수있게되었다. 그리고각묘역의존속기간

이나새로운묘제의출현등으로써마한~백제시기의지역의정치적사회적변화를파악할

수있게된것도주요한성과라할수있다.

아산탕정면소재지인명암리·용두리일원에서는 2~4세기대의원삼국시기분묘약 300

기가량으로구성된대규모묘역이확인되었다(충청남도역사문화원2011; 충청문화재연구원

2011). 지금까지알려진바로는대략읍면소재지등전통지역중심지에서 10기내외에서수

십기정도가발견되므로, 탕정면소재지의묘역의규모와위상을미루어짐작할수있다. 학

계에서는마한의맹주국이었던목지국(目支國)과관련시켜보는입장이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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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묘장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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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오송제2생명과학단지조성부지에서는정연한묘역배치상태를보여주는주구묘군

이발견조사되었는데, 이곳에서는 2세기무렵부여(夫餘)와관련되는동병철검(銅柄鐵劍)이

발견되어 원삼국시기 마한과 북방과의 관계 파악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中央文化財硏究院

2018).

원삼국시대분묘역에서는진천송두리를필두로대략 2세기전반대의영남지역와질토기

를부장한무덤에혼재하고있음이드러나고있다. 최근조사된아산배방면공수리분묘역이

대표적인데, 목지국과진변한소국과의관계를밝힐수있는단서가될것으로기대된다.

연기 용호리주구묘군은 2000년대 초반에그일부가조사되어궐수문(蕨首紋) 장식 철검

등그간영남지역에서자주발견되던철기가확인되어주목을끈바있다. 최근동고분군의

나머지부분이발굴되었는데, 궐수문장식철검및전장 1.9m를넘는초대형철모등이처음

으로확인되어1) 이러한유형의철기문화의기원문제를재검토할필요성을제기하고있다.

서산예천리에서는이지역주구묘에서는처음으로철단검이출토되어주목을끈바있는

데(백제문화재연구원2012), 주구묘의연대가 1세기대로소급할수있는가능성을제시한점

이중요하다.

백제가마한지역으로영역을확장함에따라원삼국시대의묘역에는변화가확인되는데, 기

본묘역이소멸되는경우, 새로운지점에묘역이등장하는경우, 원삼국의묘역이백제의묘

역으로이어지는경우등으로나뉜다. 지금까지각지에서확인된분묘역은당시의백제의지

방지배가진전되어가는모습을파악하기에부족하지않은정도이다. 그러한내용을해당지

역의묘역과관련하여구체적으로짚어보면다음과같다(朴淳發2007).

충청남도 지역은 대략 4세기 중후반경에 이르러 천안 용원리(龍院里)·공주 수촌리(水村

里) 등을대표로하는지방지배거점이출현하였다. 천안·아산지역은전술한바처럼마한

연맹의중심이었던목지국연고지이므로거점마련에세심한주의를기울인흔적도있다. 용

원리고분군에서는중국수입도자기를비롯한백제중앙의위세품을다수부장한무덤으로

구성되어있으나, 그에앞선원삼국시기에는결코지역의중심지는아니었기때문이다. 바꾸

어말하면소국시기의중심지가아닌곳을백제중앙이의도적으로육성하고그를통해구세

력을제어하기위한전략이숨어있는것이다.

공주수촌리역시백제이전의원삼국시대분묘군이발견되지않은곳이므로천안용원리

연구논문

호서고고학 20년, 역사고고학- 박순발 41

1) 2017~2018년에 걸쳐 삼한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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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경우와다르지않는새로운지배거점육성과관계가깊다. 최근세종시조성과정에서확

인된송원리(松原里) 고분군역시그러한범주에해당된다. 특히송원리고분군을분묘역으로

하던당시취락이전술한나성리지방도시로드러나면서백제한성기의지방도시의전모가

소상하게밝힐수있었다.

한성기의 지방 지배 제도는 아직 담로제(魯魯制)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의 왕·후제

(王·侯制)로이해되고있는데, 주로토착수장(首長)을그세력에따라‘왕’이나‘후’로임명

해일괄지배를맡기는방식이었을것으로보인다.

아무튼, 한성시기의충청남도지역은이후백제의도성이되는곳을포함한다수의지방지

배거점으로재편되었다. 서해안지역의중요거점인서산·태안지역에는 5세기전반무렵

서산부장리(富長里) 고분군의피장자로대표되는세력의존재가확인되고, 내륙교통로를따

라가야지역으로통하는금산지역도거의같은시기에수당리(水塘里) 고분군이등장한다. 5

세기 후반경에는마침내금강을넘어익산입점리(笠店里) 고분군에서금동관및중국청자

등위세품을부장한무덤이등장하기에이른다.

분묘에서보이는백제의지방지배전개과정과관련하여주목하여야하는유적이저장유적

이다. 흔히저장공(貯藏孔) 혹은저장혈(貯藏穴)로 부르는유구는대략 4~5세기를중심으로

각지에단독유적으로존재하는사례가많은데, 이는당시지방지배진전과정에수반된수취

체제의 확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金王國 2016; 박순발 2018a). 신

라·가야지역에는아직확인되지않고있어백제특유의지방지배방식으로주목될만하다.

호서지역은공주와부여등백제의도성으로서지역정체성이강

하다. 도성은국가단계정치체의중심취락으로서왕을비롯한지

배집단과도시적주민의집주지역이다. 도시의방어와위상을나타내는성벽을구비하고, 주

변에왕릉을비롯한각급계층의분묘역등이주요구성요소라할수있다.

웅진과사비도성의소재지인공주와부여는일찍부터도성관련고고학조사가이어지고있

었으나, 중요한전기는 1990년대말~2000년대초에걸친사비도성내외에대한발굴조사였

다. ‘나성(羅城)’으로 부르곤 하였던 외곽성(外郭城)의 평면 형태에 대한 재검토, 도성 내부

도시구획을파악할수있는도로망등이확인되었기때문이다. 지금까지확인된고고학자료

를종합하면다음과같이정리된다(박순발2010).

사비도성은도성전체를나성으로방어하고있는점에서그이전의백제도성과는물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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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성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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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시한반도고대국가의도성어디에서도유래가없는새로운형태의도성이다. 천도이전

의사비지역은인구밀도가높지않은미개발지였던것으로서, 웅진이가진제반문제를해

결하기위해비교적장기간에걸친모색끝에단행된기획천도였다. 천도에수반되는신도성

건설에는많은공역이필요하였을것인데, 이와관련되는조치들은주로무령왕(武寧王) 시기

에집중되고있다. 고구려에빼앗겼던한강유역의고토회복과정에서옛백제민을데려오거

나가야지역으로도진출하여영토확장과더불어백성들을확충하는등의노력이다. 사비도성

건설과정에특히한강유역의옛백제인들을투입하였을가능성이높다. 사비도성내부최하

층에서출토되는고구려토기와유사한사비양식(泗泗樣式)토기는그러한추정을뒷받침하는

고고자료로이해된다.

사비도성을구성하는중요한기반시설은부소산성(扶蘇山城)과 외곽성인나성이다. 부소

산성은왕궁의배후에위치한금원(禁苑) 혹은 친위대의주둔지적인성격이강하다. 나성은

도성의도시적성격의증대와더불어다수의도성주민들의거주구역을방호하는것으로서

동시에도성의경계선역할을하였다. 이로써사비도성은왕궁을방어하는궁성이아직확인

되지않았지만, 한반도에서최초로등장한내성외곽제도성의형태라할수있다. 고구려장

안성(長安城) 역시 왕궁이위치한내성과외곽이일체화된유형에해당되나그완성시점이

593년이므로사비도성보다늦기때문이다. 사비도성의정확한축조시점은문헌사료상으로

는알수없으나, 외곽이가지는방어상의중요성을감안할때적어도천도시점인538년이전

에는이미완성되었을것으로보아야하다. 사비도성의나성은도성의사방을모두에워싼것

으로이해된적도있으나현재까지드러난고고자료상으로는백마강과면한서쪽에는확인

되지않는다.

사비도성내부에는현재까지10여개지점에서동서남북의방위에기준하여구획된것으로

보이는도로망이확인된다. 도로의폭은9m 전후와5m 전후의2등급이있었던것으로추정

되는데, 부소산성남쪽의추정왕궁지일대에서는그러한도로에의해구획된남북약 113m,

동서약 95m 가량되는토지구획이확인되기도하였다. 도성내부전체가그러한구획으로

구성되었는지의여부는아직분명하지않으나적어도일정한기준에의해토지구획이점진

적으로이루어졌을가능성은매우높다. 문헌사료에의하면도성내부는5부로나뉘고각부

는다시5개의항(巷)으로세분되었다고하므로도로망은그러한구획과밀접한관련이있을

것이다.

도성내부의주요시설로는왕궁, 사원등이있는데, 그가운데왕궁은아직전모가드러나

지않았다. 그중심부위치가현재의시가지와중복되는지점에해당되어조사가이루어지지

연구논문

호서고고학 20년, 역사고고학- 박순발 43

Page 9: 03 박순발 재수정 - dcontent.dkyobobook.co.krdcontent.dkyobobook.co.kr/genomad_gift/001/article/1/04/71/10471833.pdf · 학계역시이러한문제의식이결여되기는마찬가지다.

않았기때문이지만, 그북단에해당되는관북리(官北里) 추정왕궁지일대에서정면 7칸측면

4칸의대형건물지가확인됨으로써당시백제왕궁을구성하고있던전각(殿閣)의모습을짐

작할수있다. 그규모나구조가백제의왕궁이분명한익산왕궁(王宮)유적의정전(正殿)이나

백제의영향을받았던동시기일본의왕궁정전과동일한점에서사비도성왕궁의정전급건

물로판단된다.

한편, 웅진도성은그간공산성을중심으로조사가이어져왔으나, 아직까지왕궁에걸맞는

규모와위상을구비한건물지는확인되지않았다. 공산성의성벽절개조사를통해그축조기

법이부여의외곽성이나사비기의산성등과기본적으로같다는점이밝혀진점은백제당시

의공산성의평면구조를파악하는실마리가될것이고, 도로망과함께발견된일련의건물지

는장차공산성의성격을특정함에있어중요한단서가될것으로보인다. 그러나웅진도성의

왕궁지가어디에위치하였느냐는문제는아직미해결이다(박순발2017; 여호규2017).

도성의분묘역에대해서는일찍이송산리고분군이왕릉역으로비정된이래계층별묘역의

분화가있었음이드러나고있다. 그와관련하여최근조사된교촌리전실묘의양상은그러한

묘역의성격을파악함에있어중요한실마리를제공할것으로보인다. 그리고정지산유적의

성격을둘러싸고아직견해가갈리고있는데, 왕이나왕비의빈전(殯殿)으로보는견해는재

검토의필요가있다.

사비도성의외곽성과관련하여오랜기간청산성(靑山城)의존재를상정하고있었으나, 최

근몇차례발굴조사결과존재하지않은것이확인되었다. 그리고, 청산성이라여겼던지점

에서는한성기늦은시기부터점유된흔적이드러났으며, 외곽성축조이후에는군사적성격

이농후한일련의시설이배치되어있었던점도확인하였다(박순발2018b).

사비기왕묘역과관련하여최근몇년간이어지고있는능산리서고분군의조사는당시왕

릉의입지선택및봉토등외형상의특징을파악하는데에매우중요한자료를제공하였다2).

전통적인음택(陰宅) 풍수상의이른바혈(穴)에해당하는곳에배치하는특징이분명하고, 묘

실은지하깊은곳에두고봉분은자연지형을그대로활용하는의도가드러났다. 이러한입지

선택과인위봉분의최소화는‘이산위릉(以山爲陵)’, 즉산으로서릉으로삼는산릉(山陵) 관

념이작용한것으로보이며, 역시남조(南朝)를통해받아들인장묘문화로이해된다.

44

2) 2016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조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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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불교문화는한반도고대삼국가운데가장융성한것으로

평가된다. 불교가처음전해진한성기의불교유적은아직드러나지

않고있으나, 웅진~사비기의불교유적에대한조사성과는풍부하다. 능산리사지목탑지출

토명문(銘文) 사리감(舍利龕)은 비록이미훼손된상태였으나 567년의기년(紀年) 사리장치

로서백제사상은물론동아시아적중요성을가지고있다(周炅美2015).

왕흥사지조사를통해577년의기년사리장치일괄품이고스란히드러남으로써백제불교

문화가지니는동아시아적중요성을다시금재확인시켜주었다. 그밖에일제강점기에조사

된적있는군수리사지가재조사되어구체적인가람배치확인을위한진전이있었으며, 일제

강점기및 1980년대에두차례조사된바있는정림사지재조사를통해기존에알려졌던가

람배치와다른모습의창건가람배치를확인하는성과를거두었다.

최근공주대통사의존재를확인할수있는조사성과역시매우중요하다. 그간“대통(大

通)”명인각와의출토지점등으로서그존재를추정하였을뿐인대통사의존재는물론구체

적인위치등에대해서도획기적인진전이기대되는성과로평가된다(한국고고학회·백제학

회2018). 장차대통사지에대한전면적인조사가이루어진다면, 중국남조에서한반도를거

쳐일본열도에이른불교건축으로서그시기가가장이른예를확보할수있는쾌거가기대

된다.

그밖에부여나익산등당시의도성이외지역에서와당의출토사례가알려진바있는데,

그러한유적의성격파악에큰진전을가져올수있는유적이최근서천종천면신검리농업

용저수지확장공사부지에서확인되었다(국강고고학연구소 2018). 사비기의 토상(土土) 기

초의건물지 1동과토기, 기와, 금속기등생산시설이함께조사된이유적은대체로고려시

기이후불교사원으로전환된것은분명한데, 그창건시점의성격을특정하기는쉽지않다.

이유적이위치한곳은서천비인면의항포구에서부여로통하는지방도상이어서사비시기

주요교통로와관련된시설이었음을가능성이높다. 이와관련해주목하여야할것이부여에

서출토된“북사(北舍)”명토기이다.

위진남북조시기“사(舍)”는“관(館)·역(驛)·점(店)”등과함께중국고대에서여관을지칭

하는명칭가운데하나로그기원은주대로거슬러올라간다. 주나라의사는국빈이나관리용

의“려사(廬舍)”와일반상인용의“여사(旅舍)”로나뉜다. 춘추전국시기에오면“려사”는“전사

(傳舍)”가되고, 여사는“객사(客舍)”로바뀐다. 전술한위진남북조시대에성행한“객사”는춘

추전국시대처음출현한것이다. 한대에도시내에여관이설치되는새로운양상은전술한바

와같지만, 관용은“전사”, 민용은“알사”로불린것은앞서본바와같다. 북조의경우“객사”

연구논문

호서고고학 20년, 역사고고학- 박순발 45

4. 불교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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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명칭이외에“여사(旅舍)”라고도하였다(鄭向民 2000). 이렇듯“사”는관용이든민용이

든여관을지칭하는것이었다. 남북조시대에처음으로“여관”이라는명칭이등장하였음은전

술한바지만, 수당(隋唐)이후에들어“사”는더이상쓰이지않게된다. 이러한여관의명칭

변천을고려하면백제의“북사”는당시사비도성내에설치되었던여관이었음을짐작하기에

충분하다. 구체적으로그위치가어디이고그와도로와관련성, 운영및사용주체등에대해

서는장차연구의과제가되어야할것이지만, 적어도당시객사의존재는분명하다. 종천리

유적은백제사비기의객사일가능성을적극검토할필요가있다.

고고학은인간행위의산물인일체의물질적자료를통해인간(집단)을

이해하는것이라할수있는데, 이때인간의행위는개체특수적인행위

가아닌문화적행위만이그대상이된다. 문화(Culture)는인간이주변

환경(자연환경및사회환경)에적응하는유일한수단으로서신체외적인

과정(Extrasomatic Process)을 통해 학습, 전달, 공유되는 행위, 관습, 지식, 사고, 가치관

등으로구성된복합체로서그자체는비가시적(非可視的) 실체이다3). 그러나 이러한인간의

문화적행위는거의대부분물질적인수단을동반하기마련이므로문화적행위의산물인물

질자료를통해비가시적실체인문화에접근할수있다. 고고학의학문적목표혹은연구대

상을구체적으로들면대략다음과같다.

첫째, 물질자료를통한문화의복원이다. 전술하였듯이문화그자체는비가시적이며, 문화

적행위에수반되었던물질자료만이고고학자료로남아발견될수있다. 따라서물질자료에

나타나는정형성을토대로당초의문화를복원하는일은그대상시공을불문하고모든고고

학연구의제1차적인목표가되어야한다.

둘째, 그렇게복원된개별문화들의시공간적궤적을파악하는일이다. 이를흔히‘문화에

대한역사(Culture History)’라한다. 이는 20세기전반까지전세계고고학의가장중요한

목표가되었던것으로서고고학의후발자라할수있는한반도고고학의발전을위해반드시

달성되어야할당면과제이다.

46

Ⅲ.지향

3) 1960~70년대를 풍미하였던 대표적인 신진화론자인 레스리 화이트의 문화개념(L. A. White 1975, The

Concept of Cultural Systems,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참조)으로서, 화이트의 제자로

이른바 신고고학을 주창하였던 빈포드(L. R. Binford)가 수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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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복원된 문화들의 개별사(個別史)를 통해 얻어지는 문화변동 과정에 나타나는

보편적定型性(Regularity)을 추구하는일이다. 이는 각개별문화들의시공간적변천과정,

즉특수성을충분히이해한바탕위에그결과를연문화적(連文化的)으로비교해봄으로써비

로소얻어지는것이라할수있는데, 그결과는흔히‘고고학이론’이라부르는것이된다.

전술한 고고학의 학문목표들은 얼핏 보면 우리의 고고학조사 현장

과다소거리가있는것으로느낄수도있을것이다. 그러나사실그렇

지않다는것이필자의생각이다. 우선, 물질자료인고고학자료는인간의문화행위의산물이

라는인식만투철하여도여러현장조사에서발견되는유물이나유구에대한이른바‘성격’

파악에더욱많은관심을가지게될것이다. 대부분의현장조사에서단지편린으로남아있는

유물이나유구는어떤문화행위의결과물인지에대한천착조차없이의미없는형태실측이

나재질및재원기술만으로대체될뿐이었던작금의관행을반성케할것이다. 발굴조사는

남아있는상태그대로노출시킨유물이나유구의관찰기를작성하는것이목표가아니다. 그

를통해현재는비가시적인인간의문화행위를복원하여학계에보고하는것이기본적인목

표임을몰각해서는안된다.

따라서모든발굴조사에서기본적으로추구하여야할목표는고고자료로남아있는유물이

나유구가어떤부류혹은영역의인간행위와관련된것인지, 구체적으로어떤문화행위의

산물인지를규명하기위한것이되어야한다.

위에서제시한두번째목표인특정문화의시공간적궤적파

악은개별발굴조사에서다루기는그범위가크고실제로단일

유적조사결과에서그것을파악하기는매우어렵다. 그렇지만관련고고학자료가축적된분

야에서는그러한학문목표를지향하여야하며, 그것은고고학이라는학문의중요한목표라는

인식을환기할필요가있다.

사실, 한국고고학에서개별‘문화’를고고학자료를통해설정혹은인식한예가극히드물

며, ‘문화’로 명명(命名)하기 위한 실제적인 학술과정에 대한 공통인식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를위해서는고고학의형태단위에대한개념정의와인식을공유할필요가있다. 무분별하

게사용되고있는‘OO문화’가서로다른수준의개념이착종되어있는경우가많다. 예컨대,

연구논문

호서고고학 20년, 역사고고학- 박순발 47

1. 문화복원

2. 문화사에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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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신석기문화’와‘빗살문토기문화’에서‘문화’의개념은같지않다. 이러한문제를해

소하기위해서는모두가동의하지는않을수는있으나적어도일정한가이드라인으로서고고

학형태단위에대한개념에관심을가질필요가있다.

고고학자료에대한분석및정리과정은무질서하게보이는자료에질서를부여하는행위

라할수있으며, 그질서는시간(Time), 공간(Space), 그리고형태(Form)라는3개의차원을

축으로정리하는것을의미한다. 그리고이는또한자료에서정형성(Pattern)을인지하는과

정이기도하다. 고고학자료의형태분석과관련하여그결과얻어지는고고학의여러형태단

위들의개념및그인지과정은다음과같다.

먼저, 고고학의 형태단위들에 대한 것이다. 고고학 형태단위들로는‘고고학적 문화

(Archaeological Culture)’, ‘類型(Assemblage)’, ‘型式(Type)’, ‘遺物個體(Artifact)’, ‘屬

性(Attribute)’등이있는데, 이들은차례로상하의위계적인관계에있다(David L. Clarke

1978).

고고학적문화란일정한지리적분포범위내에서여러유형들에반복적이고일관되게나타

나는특정유물형식들의집합체로정의된다. 이는동일한인간집단이문화행위를영위하면

서수반된다양한분야의물질적흔적으로이해될수있다. 이러한의미에서볼때실제로우

리가한유적에서채집한고고학자료들은특별한경우를제외하고는원칙적으로그러한고고

학적문화의부분들일가능성이매우높다. 그러한관점에서이들을고고학적문화의‘부분

문화(Subculture)’또는‘부분문화’들이라할수있다.

유형이란‘유물조합’으로도 부르는데, 동일한 시간 범주에 드는 여러 유물형식들(An

associated set of contemporary artifact-types)로 정의되는데, 동일한인간집단이특정

동시간대에제작사용하였던여러유물형식들로이해될수있다. 하나의고고학적문화는서

로다른시간대에속하는복수의유형들로구성되어있다고할수있다.

문화행위에 대한 복원을 바탕으로 개별 문화의 시간적 공

간적궤적, 즉 문화사를재구성하였다면, 이제 서로다른문

화의시간적공간적궤적과비교검토함으로써특정문화의역사를넘어서인류문화사가가

지는보편성을추구할필요가있다. 이는물론개별유적단위보고서에서다룰수있는기회

는흔치않으나적어도고고학의가장중요한학문목표가운데하나이므로한국고고학의학

문목표로서인식할필요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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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고학이론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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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문화적인 비교를 통해 반복적으로

관찰되는정형성혹은보편성을‘고고학

이론’이라 한다. 사실, 우리 학계에서

‘고고학의 이론과 방법’을 고고학자료

생산현장및보고서내용과의밀접한연

관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별도의 이론과 방법이 기성품으로

구비되어 있는 도구처럼 이해하는 이들

도있을지모르겠다. 고고학이론이란비

가시적인문화및문화행위와그산물혹은매개물로서남아고고학자료로인식되는물질자

료사이의반복적이고보편적인관계설명을말한다. 따라서대부분의상위고고학이론은가

설적인성격이매우강한것으로서계속적인발굴조사를통해검증이누적되어야하는것이

다. 이러한의미에서특정문화에속한개별유적조사결과보고서는기존의관련고고학이

론을지속적으로관심을가지고있어야하고그검증혹은수정에기여하려는노력을기울여

야한다.

고고학자료는 특정 인간(집단)이 공유하고 있던‘문화’라

는시나리오에의한행위(퍼포먼스)에수반되었던일종의소

품과같은것으로비유할수있다. 대개는당초의상태와는같지않은모습으로남아있는소

품의일부분혹은편린을이용하여구체적인행위및그것이한부분이었던전체시나리오를

복원하는것이고고학의매우중요한일단계과제가된다. 이과정에서특정물질자료와문

화행위및그것이포함된특정문화전체를연결하기위한논리가필요하게된다.

그와관련되는것으로서그논리적타당성을담보해줄수있는것으로는대략다음과같은

3가지가있다. 민족지적유추(Ethnographic Analogy), 역사기록(Historical Record), 그리

고고고학이론이그것이다.

고고학은물질자료를남긴인간집단이존재하지않으므로인간의문화행위와물질자료사

이의연관성설정, 즉설명에대해논리적타당성을확보할수있는현실적수단은이 3가지

밖에없다. 민족지적유추는물질문화가유사한인간집단에대한관찰을통해고고학자료를

해석하는것인데, 이는대체로선사고고학에주로활용된다.

연구논문

호서고고학 20년, 역사고고학- 박순발 49

그림 고고학 이론의 구조

고고학의이론

문화(C) 물질(M)

C와 M 사이에서관찰되는정형성

쪽지고고학의추구점 : 중거리이론(Middle range theory)

연문화적인규칙성 : 고고학이론(대부분의이론은가설임)

M과 M 사이에서관찰되는정형성

유적형성과정혹은추퇴적과정에대한중거리이론

4. 인간과역사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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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은역사시대고고학자료해석에사용되는것으로서이경우역사기록에대한엄정

한사료비판이전제되어야함은물론이다. 대부분의경우역사기록은그기록을남긴시점이

나사람(들)의관심분야에국한되어있어고고학자료에대한해석에는직접적으로도움이되

지않는경우가많으나적어도기록들을통해서당시의역사적맥락을구축해볼수는있고그

러한 맥락 속에서 고고학자료를 해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고고학에서 역사기록과

고고학자료를연계설명하는것을마치고고학의순수성을저해하는것처럼보는경향도없

지않았으나이는결코바람직하지않으며, 오히려적극적으로활용하여야한다. 개별문화의

궤적, 즉문화사는특수성을기본으로하고있으므로비록비교를통한연문화적인규칙성이

인지되어어느정도보편성을획득한이론이더라도그것이설명해줄수있는영역은그다지

많지않기때문이다. 그런점에서고고학이론은개별문화의고고학자료해석에서는최후로

적용하여야할준거라할수있다. 이러한 2가지근거는연문화적으로검증된고고학이론과

함께활용하면더욱효과적임은두말할필요없으나, 고고학이론의적용에는신중을기할필

요가있다.

한편, 우리나라의경우조선시대지지(地誌)들에는풍부한자료들이남아있다. 가령각지

역의특산물, 취락의분포, 인구규모등에대한기록은비록시기는다르나선사시대의고고

학자료해석을위한역사민족지적근거로충분히활용될수있다. 시공을초월한민족지자료

에비해적어도공간을공유하고있다는점에서훨씬자료적가치가높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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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2018년12월10일 심사완료일2019년1월20일 게재확정일2019년1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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引用文獻인용문헌

| 한국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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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호서고고학 20년, 역사고고학- 박순발 51

Page 17: 03 박순발 재수정 - dcontent.dkyobobook.co.krdcontent.dkyobobook.co.kr/genomad_gift/001/article/1/04/71/10471833.pdf · 학계역시이러한문제의식이결여되기는마찬가지다.

인용문헌 引用文獻韓國考古環境硏究所2015, 『行政中心複合都市中央綠地空間및生活圈2-4區域內低濕7·8遺蹟(南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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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Page 18: 03 박순발 재수정 - dcontent.dkyobobook.co.krdcontent.dkyobobook.co.kr/genomad_gift/001/article/1/04/71/10471833.pdf · 학계역시이러한문제의식이결여되기는마찬가지다.

연구논문

호서고고학 20년, 역사고고학- 박순발 53

Abstract >>>On the the royal tomb naming Dongmyoung and the

tombs of Pyoungyang Jinpari of Koguryo

Abstract >>>

Kang, Hyun-sook

The Hoseo Archaeological Society's(HAS) past 20years was just overlapped with the rapid

growth phase of archaeology of Korea. A lot of salvage archaeological excavation had been

occurred by legal proceeding against land development, therefore archaeology becomes

accepted not as a brach of humanities but as a cultural resource management(CRM).

Consequently the quality of excavation and its report had been worse.

The period of unprecedented over-supply of CRM just has closed with 20th anniversary of

HAS. Of course during past 20years we have achieved not a few, especially in the settlement

archaeology part resulting from large extent stripping of land. In the real sense, has been

possible some settlement archaeological research, which is comprised mortuary site, industrial

site and fortification, in the other word a ‘city of underground’. In addition to that the finding of

ancient Backje(百濟) capital city archaeology also is remarkable, clarifying of city wall plan and

space layout ete. Buddhist temples is characteristic of ancient east asian capital's religious

facility, of which overall plan and its change has shed light on that part.

Though the key of archaeology's growth is often assumed to the use of affluent mateials, but

also requires correct establishment of its pursuit. Hereby suppose the pursue of archaeology as

this ; the reconstruction of culture, the history of culture, the human and history orientation and

the theory orientation.

Key Words : archaeology of Hoseo region, CRM(cultural resource management), pursuit of

archaeology, review of Korean archaeology

A Review on the archaeology of Hoseo region, focused

on Historical Archaeology

Abstract >>>

Park, Soonbarl (Prof. of Chung nam Nat’l Un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