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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士學位論文 佛敎生死觀 硏究 指導敎授 東國大學校 佛敎大學院 葬禮文化學科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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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碩士學位論文

    佛敎의 生死觀 硏究

    指導敎授 曺 勇 吉

    東國大學校 佛敎大學院

    葬禮文化學科

    金 永 墩

    2007

  • 碩士學位論文

    佛敎의 生死觀 硏究

    金 永 墩

    指導敎授 曺 勇 吉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2007年 봄

    金永墩의 文學碩士(葬禮文化) 學位 論文을 認准함

    2007年 봄

    委員長 (印)

    委 員 (印)

    委 員 (印)

    東國大學校 佛敎大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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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목목 차차차

    ⅠⅠⅠ...서서서 론론론 1ⅡⅡⅡ...죽죽죽음음음이이이란란란 무무무엇엇엇인인인가가가 31.일반적 정의 32.불교에서의 죽음 63.생명의 기원 94.생명의 탄생 12ⅢⅢⅢ...불불불교교교의의의 생생생명명명관관관 211.근본불교의 생명관 212.중도설의 관점에서 본 죽음의 생명관 27ⅣⅣⅣ...初初初期期期經經經典典典에에에 있있있어어어서서서의의의 죽죽죽음음음 341.죽음의 정의 352.죽음의 분류 423.죽음의 진행과정 454.죽음의 시점 판단 기준 47

    ⅤⅤⅤ...어어어떻떻떻게게게 죽죽죽어어어가가가는는는가가가 491.죽음의 유형 492.죽음의 과정 50ⅥⅥⅥ... 輪輪輪廻廻廻와와와 十十十二二二緣緣緣起起起 521.인도사상의 윤회 522.불교의 윤회설 561)윤회 582)윤회에서 본 죽음 653.緣起論에서 본 죽음 691)十二緣起설의 의미와 내용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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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十二緣起의 순관과 역관 713)연기관적 입장에서 본 죽음 73

    ⅥⅥⅥIII... 죽죽죽음음음에에에 대대대한한한 불불불교교교적적적 극극극복복복방방방법법법 751.열반(nirvāṇa) 752.부처님의 열반의 의미 783.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 -수행 801)四聖諦의 바른 이해 -최상의 가르침 81(1)苦를 초월하는 수행체계 82(2)실천적 수행체계 84① 열반이라는 목적지에 대하여 86② �結果 �(苦)라는 출발점에 대하여 90③ �原因 �(集)이라는 방향에 대하여 92④ �길 �(道)이라는 방법에 대하여 94⑤ 견줄 수 없는 최상의 수행체계 98

    2)三十七助道品 993)위빠사나(vipassanā) 101(1)위빠사나의 원어적 의미 101(2)아누빠사나(anupassanā) 103(3)知(sampajañña) 104(4)念(sati) 105(5)지혜의 개발과정 106(6)위빠사나의 실제 108(7)위빠사나의 실천 110

    ⅦⅦⅦIII... 결결결 론론론 113l 參參參考考考文文文獻獻獻 115l AAABBBSSSTTTRRRAAACCCTTT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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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서서서 론론론

    ‘生也一片 浮雲起 死也一片 浮雲滅’,즉 태어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다.죽음이란 무엇인가?인간은 죽음을 왜 그토록 두려워하는가?직접 경험 할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이런 오래된 질문을 던져온 것이 인류사,특히 종교사에서는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인간은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찾고 神을 믿으며영생을 갈구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죽음의 문제는 불교에서도 근본문제 가운데 하나이다.부처님의 출가 동기가 生老病死의 解脫 추구로부터 시작된 것이며,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涅槃도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불교에서의 죽음은 人生苦의 근본원인 중의 하나로 본다.그러나 세존께서는 生과 死,죽음과 涅槃을 다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출발점으로 생각하였다.生과 死의 本性을 진지하게 관찰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상반된 고정된 실체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부처님께서,깨달으신 내용은 우리로 하여금 生老病死를 있게 한 요인은 마음속의 번뇌 망상이고 ‘나’를 위주로 한 고정관념이라는 것이다.다시 말하면‘나’를 기준해서 지나치게 세운 기대가 어긋난다고 할 때 괴로운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뜰 앞의 단풍잎 하나 떨어지는 걸 보는 거나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 보는 거나 다를 게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체험을 하신 게 부처님의 生死觀의 특징이다.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 중의 하나가 죽음이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다.때문에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해 설명한 모든 것들은다른 이를 통한 간접적인 것이며 직접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불교에서의 죽음은 불가피한 현실로 철저하게 인식되고 있지만 정작 부처님 자신의 死後에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無記’라 하여 논하려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이는 당장의 실재에 대한 탐구에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부처님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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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生老病死를 모두 苦로 보고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그 苦에서 解脫하게하고자 하였다.부처님께서 확연하게 깨달은 진리[法]는 다름 아니라 ‘森羅萬有란 因緣生起的 現想’이며,마음이라고 부르는 청정한 고요의 바다 위에 일어난 하나의 물결파문이라고 본 것으로,결국 상대적인 인간개념과 경험의 현상으로서의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도 森羅萬有 중의 한 가지 현상일 터이니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삶과 죽음 역시 因緣生起的 現想일 뿐 그것 자체로서의 실체나 실재로서의 불변적 속성이 없다는 것이다.본 논문은 이처럼 인류사가 안고 있는 ‘生死觀’을 불교적 관점에 살펴보고자한다.이를 위해 먼저 죽음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살펴 본 후,근본ㆍ초기불교에서 보는 죽음 및 生死를 어떻게 보는지 알아보겠다.동시에 輪廻와 十二緣起가 生死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겠다.다음으로 본 논문의 주된 부분인 生死를 극복할 수 있는 불교적 접근방법이 무엇인지,修行이 왜 중요한것인지를 알아본다.육체는 물질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은 주관적인 입장에서 그러한 정신세계에 이르면 내가 지금 죽는구나 하더라도 이것은 뜬구름이 피어올랐다가 바람 따라 지나가는 걸로 무심히 볼 수가 있다.이것을 일러 생사의 고통을 뛰어넘었다고 하는 이른바 초월한 경지이다.그래서 혹자는 불교를 ‘죽음 앞에떳떳하기 위한 공부’라고 말한다.올바른 生死觀은 삶을 즐겁게 누리고 죽음을편안히 맞이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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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III...죽죽죽음음음이이이란란란 무무무엇엇엇인인인가가가???

    111...일일일반반반적적적 정정정의의의

    종교와 철학 그리고 모든 문명의 시발점에 이 문제는 참여하고 있다.그러나 과학적 지식이 극대화되고 분초를 다투어 정보가 쏟아지는 오늘날에 와서도 이 문제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다.대개의 학자는 죽음이란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원형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태”라는 데에 동의하지만,단서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삶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하지 않고는 죽음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있을수 없다”고도 하고,“죽음의 세계란 인간의 경험 영역,지각 영역을 넘어서는차원의 문제에 속하기 때문에 그 본체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고도 한다.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해석에 특히 자기 식의 독단을 많이 개입시킨다.각자 자신의 안경을 통해 죽음을 보는 것이다.죽음에 대한 통일된 답변을 들을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죽음이라는 것이 그만큼 인생에서 중대 문제이고,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며,또 그것으로 모든 것이종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생물학자들은 삶과 죽음의 구분에 고심한다.생물계에는 단세포 생물도 있고 다세포 생물도 있어서,생사를 가늠하는 기준을 일정하게 말하기 어렵기때문이다.의사들은 고등 동물인 인간의 죽음을 판정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일반적으로 심장 고동과 호흡 운동의 정지를 표준으로 삼지만 가사상태(假死狀態)인 경우도 있고,한 때 멈추었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죽음의 형태도 가지각색이다.천수를 누리고 기력이 쇠진하여 저절로 여러기능이 멈추는 자연사가 있는가 하면,아직 창창한 나이에 뜻하지 않은 원인이 생겨 죽음을 맞는 우연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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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사람은 예로부터 오래 사는 것[壽]을 가장 큰 행복으로 삼았고,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考終命]을 오복의 하나로 꼽았다.인간을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 규정한 철학자도 있고,“산다는 것은 무덤을 향하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소설가도 있다.“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을 돌려라.그리고 미구에 죽을 것이라 생각하라.어떠한 행동을 할 것인가를 그대가 아무리 번민할 때라도 밤이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번민은 곧 해결될 것이다.그리하여 의무란 무엇인가,인간의 소원이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가 곧 명백해질 것이다.이를 받듯이 몽테뉴(Montaigne,M.)는 그의『수상록(隨想錄)』에서 다음과같이 적고 있다.

    “어디에서 죽음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곳곳에서 기다리지않겠는가!죽음을 예측하는 것은 자유를 예측하는 일이다.죽음을 배운자는 굴종을 잊고,죽음의 깨달음은 온갖 예속과 구속에서 우리들을 해방시킨다.”

    어쨌든 사람은 죽지 않으면 안 되고 단 한번 혼자서 죽는다.그리고 그것은삶의 끝막음이다.누구도 피하지 못하고 거부하지 못하며 전신으로 맞아들여야 한다.이러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의문은 다시 되풀이된다.

    1)인격체로서의 기능의 불가역적 상실이 입장에 따르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특성은 그가 다른동물들과는 달리 인격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그러므로 인격체로서의 기능을 불가역적으로 상실한다는 것은 어떤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는가장 근본적인 변화로,이런 변화를 죽음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인격성’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라는 견해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하나의 인간관을 표방한 것으로 이런 인간관의 수용 여부는 믿음의 문제이지 더 이상 객관적 논의의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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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런 인간관에서 볼 때 ‘인격성의 영원한 상실’이야말로 산 자가 죽은 자가 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유일한 변화이기 때문에 이 변화를 ‘죽음’의 의미에 부합하는 사건이라고 보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그렇다면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인격성의 영원한 상실’이라고 할 때 이런의미가 충족되어 죽음이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기준은 어떤 것이 될까?인격성은 다시 ‘합리성의 토대’,‘경험 능력’,‘사회적 상호작용의 능력’,‘자아 정체성유지’등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하지만 어떻게 해석하든 이 인격성이 최소한 ‘의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모두가 인정할 것이다.그런데 인간의 신체 중 의식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대뇌로 알려져 있다.그렇다면 대뇌의 불가역적인 정지를 의미하는 대뇌사가 죽음의 기준이 될 것이다.

    2)생물학적 통합 기능 상실한 사람이 생물학적 통합 기능을 상실하는 것을 죽음으로 보는 이 입장에서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인격체라는 사실이라기보다 생명체라는사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그리고 그 근거로 인간도 다른 생물체로부터 진화해왔다는 것,인간의 인격적 기능은 생물학적 기능이 없어지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더 나아가 그 인격적 기능이라는 것도 실은 개체의 생물학적 유지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으로 가령 인간의 이성은 개체의 생명 유지의도구로 볼 수 있다는 것 등을 내세울 것이다.‘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한 개체로서의 생물학적 기능을 상실하는 사건’으로받아들일 때,이 의미를 충족시키는 죽음의 기준은 다시 두 가지 입장이 나뉘는데,심페사론과 뇌사론이다.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인간 유기체의 통합적 기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심장 박동과 호흡에 의한 순환으로 본다.왜냐하면 이런 순환이 있어야 신체의 각 부분들이 상호 연관을 맺고 서로 에너지와 물질을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심장 박동과 호흡의 중단으로 이런 순환이 멈추는 것을 죽음의 시기로 본다.그리고 뇌사론 입장에 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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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심장 박동과 호흡에 의한 순환을 인간 유기체의 통합적 기능에서 매우중요한 것으로 본다.그런데 이런 심장 박동과 호흡을 유지시키는 신체 내 기관은 뇌간이다.뇌간이 정지하면 심장 박동과 호흡은 오직 기계에 의해서만 유지될 뿐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그러므로 이 뇌간을 포함한 뇌 전체가 불가역적으로정지한 뇌사가 바로 죽음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3)모든 생물학적 기능의 불가역적 상실산 자가 죽은 자에 이르는 과정에는 의식의 상실,생물학적 통합 기능의 상실과 같은 큰 변화들이 있다.하지만 이들 중 어느 것을 유일한 근본적인 변화라고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그리고 설령 이들 중어느 하나를 근본적인 변화라고 본다 해도 이런 큰 변화 후에도 신체의 여러부분에서 작은 변화들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이런 사실에 비추어보았을 때‘산 자가 죽은 자가 되게 하는 사건’으로서의 ‘죽음’은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종결을 의미해야 한다고 보는 이 입장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게된다.그리고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산 자가 죽은 자가 되는 과정에서의 모든 변화의 종결’로 볼 때 이런 의미를 충족시키는 죽음의 기준은 “생체가 기능하는데 필요한 모든 화학적,물리적 또는 전기ㆍ생리적 활동의 소실로 특징지워지는 인체의 각 세포의 불가역적인 상태로의 변화”가 될 것이다.즉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모든 세포의 죽음인 세포사가 죽음의 기준이 될 것이다.

    222...불불불교교교에에에서서서의의의 죽죽죽음음음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 중의 하나가 죽음이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다.때문에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해 설명한 모든 것들은다른 이를 통한 간접적인 것이며 직접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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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에서의 죽음은 불가피한 현실로 철저하게 인식되고 있지만 정작 부처님자신의 사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무기’라 하여 논하려 하지 않으셨다고한다.이는 당장의 실재에 대한 탐구에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하지만부처님께서는 인간의 생노병사를 모두 고로 보고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그 고에서 해탈하게 하고자 하였다.부처님께서 확연하게 깨달은 진리[法]는 다름 아니라 ‘삼라만유란 인연생기적 현상’이며,마음이라고 부르는 청정한 고요의 바다 위에 일어난 하나의 물결파문이라고 본 것으로,결국 상대적인 인간개념과 경험의 현상으로서의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도 삼라만유 중의 한 가지 현상일 터이니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삶과 죽음 역시 인연생기적 현상일 뿐 그것 자체로서의 실체나 실재로서의 불변적 속성이 없다는 것이다.불교에서는 생과 사가 같다고 하며,언제나 생사라고 함께 표현한다.이것은불교의 죽음관을 설명하는데 있어 중요한 열쇠이다.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아니라 삶이 곧 죽음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다시 말해서 산다는 것은 곧 죽고 있다는 뜻이며,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뜻도 된다.삶의 편에서 보면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죽음의 편에서 보면 아직 죽지 않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보면 늙음과 병듦도 마찬가지이다.산다는 것은 늙는다는 것이요 늙는다는 것은 병든다는 것이다.말하자면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다.따라서 죽음을 벗어나려면 삶도 벗어나야 한다.생이 있는 한 사는 필연적인것으로 그 어떤 경우도 사를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는 없다.이 같은 생노병사는 인간고의 근본으로 인간의 살려는 의지를 단절시키고 죽음을 가져온다.인간 존재란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다섯 가지 요소가 인연에 의해 임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존재인 것으로 경전에서 죽음의 정의와 시기에 관계되는 내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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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阿含經』에"어떤 것을 죽음이라 하는가,저러한 중생들이 저러한 종류로 몰락 하여옮겨가되 몸이 무너지고 수(壽)가 다하면 더운 기운[火]이 떠나고 목숨이멸하여 음(陰)을 버리는 때에 이르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

    “죽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죽음이란 무엇인가.이른바저 중생의 무리들이 목숨을 마치는 것은 정하는 바가 없어서 흩어져 멸하고 목숨이 다하면,부서져 명근(命根)이 닫힌다.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수명과 체온과 의식은 몸을 버릴 때 함께 버려진다.그 몸은 무덤 사이에 버려져 나무나 목숨이 분리된 것을 죽음이라 한다."

    『增一阿含經』에"어떤 것을 죽음이라 하는가.저러한 중생들이 윤회하여 받은 몸에 온기가 없고 덧없이 변하여 오온이 나누어져 오음의 몸을 버리고 목숨과 기관이 끊어지고 파괴되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

    『中阿含經』에"세 가지 법이 있어 산 몸이 죽은 후에는 몸은 무덤 사이에 버려져 마치나무처럼 무정해진다.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첫째,수(壽)이고 둘째,난(暖)이며 셋째,식(識)이다… 죽음이란 수명이 다 소멸하고 따뜻함이 이미 사라지며 모든 기관이 무너지는 것이다."

    『승만경』에는"죽음이란 모든 근(根)이 무너지는 것이요,생이란 새로 모든 근이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나타나 있다.‘모든 근(根)이 무너진다’라는 것은 ‘모든감각기관의 기능이 멈춘다’는 의미로,죽음이란 수(壽 :수명의 수로 들숨과 날숨 즉 호흡을 말함)와 난(煖 :체온을 말함)과 식(識 :의식을 말함)이 몸을 떠난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경전의 내용에서 수(壽)란 영혼이나 개별적 자아[個我]와 같은 실체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대방등대집경』에서 "수명이란 들숨과 날숨이다.(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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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出者名爲壽命)"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들숨과 날숨 즉,호흡을 의미하는것이고,화,난,온,은 모두 체온을 의미하며,식은 정신 현상으로서의 의식을의미한다.이러한 견지에서 불교에서의 죽음이란 "오온이 화합해서 이루어진 '거짓된나[假我]'가 인연이 다해서 호흡이 정지되고 체온이 상실되고 그리고 의식이없게 된 상태"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며,불교에서의 죽음은 기관의 통합기능이 회복 불가능한 상실에 처했을 때를 뜻한다.불교에서는 중생이 생사를 유전하는 과정으로 신,구,의를 통한 선악의 인에 따른 과로 사유라 하여 생유,본유,사유,중유로 4분하여 중생이 무명의세계에 윤회하는 한 기간의 상태를 뜻하는데 여기서 유는 중생의 생존을 의미한다.생유는 각각의 세계에 생을 받는 결생의 찰나,본유는 생을 받은 뒤 임종직전까지 생유와 사유의 중간을 말하며,사유는 최후에 임종하는 찰나,중유는죽은 뒤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사유와 생유의 중간으로 죽은 영이 다음 생에 태어나기 전 중음의 상태인 49일 동안을 말한다.불교에서는 일반적 죽음의 상태인 중유를 또 다른 생존의 형태로 인식하고있다.이는 죽음을 단멸(斷滅)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연장선으로 인식하는 특징을 갖는다.

    333...생생생명명명의의의 기기기원원원

    동서양,종교,철학,자연과학을 막론하고 태초에는 생명이 없었다가 어느순간에 그것이 나타나게 된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생명의 기원에 관해서 신화와 일부 종교에서는 창조주나 조물주에 의해 생명이 창조되었다는 생명의 창조론과 과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생명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자연발생설이 있는데,이들은 17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다.그러나 지구의 생성문제에 대해 연구가 깊어지면서 생명의 기원에 대한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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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 달라지게 되었다.수십억 년 전의 원시지구상에는 단지 물과 몇 종류의가스만이 있었을 뿐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으며,이 물과 가스들은 번개와 자외선의 충격에서 에너지를 얻어 생명의 기초가 되는 간단한 유기 화합물들을합성하게 되었다.이 간단한 화합물들은 서로 반응하여 보다 복잡한 화합물로되고,다시 몇 개의 분자가 모여서 복합체를 만들고 마침내 원시 생명체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이 최초의 생명체는 장구한 시간을 거쳐 진화하면서 점차로 복잡한 생명체로 되었고,다시 분화하여 현대와 같은 다양한 생물로 되었다고 한다.대체로 과학자들은 생명체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첫째로 물질대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에 의해서 생명체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둘째로 자신과 똑같은 개체를 만들어내는 복제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이것에 의해 생명체는증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셋째로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이는 그것에의해 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성질을 동시에 갖추고 있을 때 생명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과학자들은 이와 같은 생명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물질이라고 설명하고있다.생명은 물질에 기초를 두고 있고,물질의 복합체가 생명활동을 형성하고있으며,위에서 보았던 생명의 기원 역시 물질에서 비롯한 것이다.원시 지구상태에서 합성된 유기물이 발전하여 현재와 같은 복잡한 생명체에 이르게 되었으며,생명체를 생명체로 가능하게 한 것도 단백질이라는 물질이고,생명체를 계속하게 하는 유전정보인 DNA도 물질이다.생명체의 고도의 기능인 정신활동도 물질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결국 생명활동은 어떤 신비스러운 힘이나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은 어디까지나 지구환경 조건에서 화학물질이 진화한 결과로 발생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생명의 기원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불교는 생명의 기원이나 세계의 형성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가지지 않았다.이와 같은 문제는 불교의 궁극목표인 열반의 성취를 위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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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방해가 되는 것이라 해서 터부시하기까지 했다.그러나 후기 불교에 와서 여러 불교학자들은 이들 문제에 대해 많은 연구와나름대로의 설명을 내놓기 시작했다.특히 부파불교의 논서의 하나인 구사론에서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구사론의 설명에 따르면 이 우주는 한없이 광대하고,그 속에서는 수 없는소우주들이 존재하고 있다.그리고 이 소우주 속에는 역시 수많은 지구가 있고,그 지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이 살고 있다.이 우주와 그 속에 사는 중생들은 산이나 조물주 같은 어떤 존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불교에서는 그와 같은 존재를 생각하지 않았다.우주와 존재들을 형성하고 유지시키는 것은 ‘어떤 에너지의 작용’에 의해서이다.이 에너지는 우주 속에 살고 있는 ‘업력(Karma)'이라는 것이다.불교는생명의 발생과 그 유지의 문제를 ‘업설’로 설명하고 있다.업이란 중생들이 짓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업에는 육체적으로 짓는 행위인 신업,언어로서 짓는 구업,그리고 마음으로 짓는 행위인 의업이 있다.중생들이 짓는 모든 행위를 업이라고 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행위가다 업은 아니다.업의 결과인 과보를 초래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행위라야 한다.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있는 업이 되기 위해서는 의도적이고,윤리적이라는두 가지 조건을 갖춘 행위이어야 한다.의도되지 않은 행동,무의식적으로 행해진 행동은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없다.먼저 마음 속에서 의도하고 그 의도한 것을 육체나 언어를 통해 바깥으로 구체화한 행동이어야 한다.윤리적인 행동이란 선하거나 악한 행동을 말한다.업에는 선ㆍ악업 이외에무기업이라는 것이 있다.무기업이란 무의도적이거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업으로서 아무런 결과를 초래할 능력이 없다.이 업은 ‘무정란’과 같은 것이다.업설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라는 ‘인과의 법칙’위에 성립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악의 행위라는 ‘윤리적인 법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그래서 업설은 인과성과 윤리성의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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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설의 인과성은 자연과학에서와 같은 것이지만,그것의 윤리성,즉 선한 행위에는 좋은 결과가 나오고 악한 행위에는 나쁜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은 종교적인 것이다.업은 개체의 의지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전적으로 개별적인 것이다.자신이 지은 업을 다른 존재에게 이전시킬 수 있거나 다른 존재가 지은업의 결과를 자신이 대신 받을 수는 없다.역시 어떠한 외부적인 영향력도 미칠 수 없다.자신이 짓고 자신이 그 결과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업은 개체의 운명뿐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도 결정한다.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중생들이 공동으로 짓는 업,즉 공업은 그 공동체의 성격을 결정하고 운명을 만든다.그들이 살고 있는 국토와 환경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선업을 지은 중생들이 많이 사는 사회는 전쟁도 질병도 없는 살기 좋은 곳이 되고 국토는 풍요롭고 기후는 순조롭다.반대로 악업을 지은 중생들이 많이 사는 사회는 살기 나쁜 곳이 될 뿐 아니라 국토는 거칠고 기후는 순조롭지못하다.따라서 업은 산하대지 등 자연계까지도 만들고 유지하는 에너지로 작용한다.지구와 우주가 형성되고 소멸되는 것은 우연에 의해서도,어떤 위대한 존재의 힘에 의해서도 아니다.그것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중생들이 만드는 업력에 의해서라는 것이 생명의 기원에 대한 불교에서의 관점인 것이다.

    444...생생생명명명의의의 탄탄탄생생생

    생명체의 시작을 어디에 두느냐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다.동양에서는 인간이 태어나면 한 살부터 시작되므로 입태와 동시에 나이가 계산된다.이는 단순한 나이 계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체의 시작을 어느 시점에서부터 보아야 하느냐하는 중요한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다.그러면 불교에서는 생명의 시작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중유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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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불교의 여러 경론에서는 생명체의 탄생에 대하여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이는 태생ㆍ난생ㆍ습생ㆍ화생의 사생(四生)을 일컫는다.여기서 문제로 삼는 것은 사생 가운데 태생이며 이는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결합하는 과정에 識이 들어가 하나의 生命體가 형성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1)

    이 생명체는 생사를 윤회전생하게 되는데,초기불교에서는 十二緣起사상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으나,전생에서 금생으로 태어나는 과정과 사후의 생명체에서 내세로 출생하기까지의 설명이 충분하지 않은데 비하여,부파불교의 四有說은 이론적으로 확실히 설명해 주고 있다.삼계ㆍ육도(오취)ㆍ사생은 유정의 윤회하는 모습이며,유정의 생사륜회 상태는 四有說로 설명될 수 있다.일체의 모든 생명체는 사유라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윤회전생하여 생사상속하는데,이 四有說에 대하여『大毘婆沙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네 가지 有가 있으니 本有와 中有와 生有와 死有이다.이 가운데 有라고하는 것은 衆同分에 속한 有情數와 五蘊을 말한다.本有란 무엇인가.답하기를,生分과 死分을 제외한 중간의 모든 有이다.이것은 곧 一期동안의 五蘊(욕계와 색계의 것)과 四蘊 (무색계의 것)을 性으로 삼는다.무엇때문에 이 有를 本有라 하는가.이것은 바로 지난 날에 지었던 업으로생기게 되기 때문이다.生有란 무엇인가.답하기를,生分의 모든 蘊이다.곧 結生할 때의 五蘊과 四蘊을 性으로 삼는다.死有란 무엇인가.답하기를,死分의 모든 蘊이다.곧 목숨을 마칠 때의 五蘊과 四蘊을 性으로 삼는다.中有란 무엇인가.답하기를,두 가지 유(二有)의 중간의 五蘊을 性으로 삼는다.무엇 때문에 이 有를 中有라 하는가.답하기를,이 有는 두가지 有의 중간에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두 가지 有의 중간에 생기면서도 趣에 포섭된 것이 아니면 中有라 한다.묻기를,이 四有는 刹那인가,相續인가.답하기를,둘은 刹那인데 死有와 生有이며,둘은 상속인데 나머지 有이다.2)

    1)韓普光,『佛敎에 있어서 胎兒의 성장과정과 生命觀』,太空 宋月珠스님 華甲記念論叢,『菩薩思想』,1996.p.445참조

    2)『阿毘達磨大毘婆沙論』,大正藏,卷27,p.959上 -中 “如說四有。謂本有中有生有死有。云何本有。答除生分死分諸蘊中間諸有。此則一期五蘊四蘊爲性。問何故此有說名本有。答此是前時所造業生故名本有。云何生有。答生分諸蘊則結生時五蘊四蘊爲性。云何死有。答死分諸蘊則命終時五蘊四蘊爲性。云何中有。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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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四有는 환경을 포함한 광의의 신심을 나타내는 오취온을 체로 한다.중생이 미혹의 세계,생사에 윤회하는 한 기간의 생존 상태즉 윤회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하여 이를 4가지로 분류한 것으로본유ㆍ생유ㆍ본유ㆍ중유의 네 가지를 말하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① 생유는 모태에 탁생되는 찰나의 최초의 생명 즉 태아로서 형성 발전되는처음의 그 시작을 말한다.② 본유는 모태에 출생하여 사망할 때까지의 살아 있는 기간 즉 인간의 일생을 의미함을 말하는 것이다.③ 사유는 인간이 사망하는 찰나,즉 죽음을 뜻한다.④ 중유는 중생이 사망하여 그 업력에 따라 래세에 출생하기 이전까지의 기간또는 사유와 생유의 중간에서 활동하는 윤회의 주체로서 사망하여 그 업력에따라 내세에 출생하기까지의 중유 생명체를 말한다.3)

    여기서 “有란 소속된 무리들의 同分有情數인 五蘊을 설명하여 有라 이름한다”고 하였다.그러므로 五蘊은 色ㆍ受ㆍ想ㆍ行ㆍ識을 말하며 이는 存在를 뜻하기도 한다.따라서 四有는 그 소속된 부류에 따라 五蘊의 性이 있으며,이는 하나의 존재로 엄연히 현존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즉 本有와 中有는 相續이고,그 마음은 染汚心과 不染汚心이 나타나며,有漏와 無漏에 모두 통하고 同分과 不同分의 마음을 일으킨다.또,死有와 生有는刹那이고,그 마음은 오직 染汚心 뿐이며,有漏에만 통하고,同分의 마음만 일으킴을 알 수 있다.이러한 四有說은『구사론』에서 煩惱業으로 인하여 연기되어지는 윤회의 생생상속은 사유에 불과하다라고 한 것과 같이 유정의 윤회는 사유에 바탕을 두고 있다.사유는 유정들의 끊임없는 윤회를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除死分生分諸蘊中間諸有則二有中間五蘊爲性。問何故此有說名中有。答此於二有中間生故。名中有。問若爾餘有亦是中有皆於二有中間生故。答若於二有中間生非趣所攝者名中有.問此四有幾刹那幾相續 答刹那謂死有生有 二相續餘有”

    3)金東華,『俱舍學』,서울 :文朝社,1971,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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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회의 모습을 사종으로 분류한 것이라 할 수 있다.四有說은『아비달마발지신론』과『大毘婆沙論』,『俱舍論』등으로 이어졌고,『아비담감로미론』에 나타나고 있다.전생에서 금생으로의 인연이란 중유에서 생유로 태어남을 뜻한다.중유는전생의 모든 업력을 지니고 금생에 출생하기 이전의 생명체이고 생유는 그 중유의 생명체가 업력에 따라 부모에게 출생하는 刹那를 의미하는 것이다.이와같이 중유와 생유는 윤회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중유가 생유로 출생하는 모습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인간으로 태어나는 모습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그러면 태중에 있는 태아는 생유에 속하는가?본유에 속할 것인가?여기에대해서는 분명한 언급은 없다.입태에서 출산까지의 기간을 어떻게 보아야 할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그러면 태중의 기간을 사유 중 어디에 속하는가에 대해 경론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태아가 형성되는 인연을『아비달마대비바사론』권70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 때,만일 남자의 중유이면 장차 태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어머니에대해서는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성을 내면서 ‘만일 저 丈夫가 이곳에서 떠나면 나는 이 여인과 교회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뒤바뀐(顚倒)생각을 내면서 그 장부가 이 곳에서 멀리 떠난 것을보고 이윽고 자신이 여인과 화합하는 것을 보게 되며,부모가 교회하면서 정혈이 나올 때에는 아버지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긴다.이것을 보고 기뻐하다가 곧 혼란해지고 답답해하며 이로 인해 중유는 거칠고 무거워지며 무거워진 뒤에는 곧 어머니의 태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자기의몸이 어머니의 오른쪽 겨드랑이에 있으면서 등골을 향하여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본다.그 때에 중유의 모든 온은 곧 소멸하고 생유의 온이생기는 것을 결생하였다고 한다.만일 여자의 경우에는 반대로 뒤바뀐생각을 하며,태 안에서의 위치는 자신의 몸이 어머니의 왼쪽 겨드랑이에 있으면서 배를 향하여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된다.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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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유정들은 뒤바뀐 생각을 일으키면서 어머니의 태 안으로 들어가게된다.그러나 보살의 경우에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버지라 생각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어머니라 바르게 생각하나 그 어머니에 대해서 정이 들어서 뒤쫓는 사랑을 느끼고 이런 사랑하는 힘을 타고 태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4)

    새로운 생명이 형성되는 조건으로 부모의 정혈과 중유가 결합되어야 한다.이 때 중유는 모태에 들어가면서 스스로 소멸되고 새로운 생유로 변천하게 된다.이때를 결생이라 한다.그러면 수태가 되는 것이다.이와 같은 설명은『增一阿含經』권12에서도 설하고 있다.

    세 가지 인연이 있어야 아기를 밴다(受胎).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비구들이여 어머니가 욕심이 있어서 부모가 한 곳에 모여 함께 자더라도 바깥에서 식이 오지 않으면 수태를 하지 못한다.또,식이 와서 들어가려하더라도 부모가 한 곳에 모이지 않으면 受胎하지 못한다.만일 부모가한 곳에 모이고 부모에게 병이 없으면 ‘식신’이 오고,또,부모에게 모두자식을 둘 상이 있으면,그는 곧 수태하게 된다.이것이 곧 ‘세 가지 인연이 모이면 수태한다.’는 것이다.5)

    이와 같이 식이 모태에 태어나는 생명체가 되며,식과 아버지와 어머니가화합하지 않으면 수태할 수 없으며,오직 식과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 가지 인연[三因緣]이 화합하여야만 비로소 식이 와서 수태할 수 있다고 한다.또,『유가사지론』권1에서도 삼사화합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즉,

    三處現前에 말미암아서 母胎에 들어갈 수 있다.첫째,그 어머니가 적당하게 다시 때가 되었어야 하고,둘째,부모가 화합하여 함께 愛染을 일으켜야 하고,셋째,健達縛가 바로 앞에 나타나 있어야 한다.6)

    4)前揭書,pp.363上-下 "世尊經中作如是說。三事和合得入母胎。父母俱有染心和合。母身調適無病。是時及健達縛正現在前。此健達縛爾時二心展轉現前入母胎藏。此中三事和合者。謂父及母幷健達縛三事和合。父母俱有染心和合者。謂父及母俱起?貪而共合會。母身調適無病。是時者。謂母起貪身心悅豫名身調.........言.....自見己身在母左脅向腹?坐。爾時中有諸蘊便滅生有蘊生名結生已。諸有情類多起如是顚倒想已而入母胎。唯除菩薩將入胎時。於父父想於母母想。雖能正知而於其母起親附愛。乘斯愛力便入母胎"5)增一阿含經,大正藏 卷1,p.603下-604上6)瑜伽師地論,大正藏,卷30,p.282中.“又由三處現前.得入母胎.一其母調適而復値時.二父母和合俱起愛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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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하여 어머니의 신체적인 적당한 조건과 부모의 사랑이 함께 일어날 때건달박가 그 앞에 나타난다고 하면서 이러한 세 가지 인연이 맞았을 때 수태가 된다고 한다.여기서 건달박이란 중유의 다른 이름(異名)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아비달마대비바사론』권70에 의하면,중유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중유라 하기도 하고,健達縛ㆍ求有ㆍ意成이라고 하기도 한다.7)

    라고 한다.각각의 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중유란 사유와 생유의 중간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건달박은 욕계의 중유에 대한 이름으로 향기만을 먹기 때문에 이를 식향,심향행이라고도 한다.또 구유란 육처문에서 생유를 구하며,의성이란 모든 유정이나 의에 따라 生하므로 이러한이름을 붙였다고 한다.『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서는 건달박을 중유의 다른 이름으로 보고 있지만,『유가사지론』에서는 중유에서 생유의 입태과정을 말하고 있으므로 한층더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초기경전에서도 건달박에 대해『중아함경』권37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三事가 고루 화합하여 태를 받았다.곧 父母가 합하고,번뇌가 없이 견디어 香陰이 이미 이르렀으니,阿私羅여 이런 일들이 모여서 어머니 胎(母胎)에 들어가게 된다.8)

    라고 하며 香陰으로 표현하고 있다.『增一阿含經』卷12에서는,또,識이 와서 들어가려 하더라도 부모가 한 곳에 모이지 않으면 受胎하지 못한다.만일 부모가 한 곳에 모이고 부모에게 병이 없으면 ‘識身’이오고,또,부모에게 모두 자식을 둘 상이 있으면,그는 곧 受胎하게 된다.

    三健達縛正現在前”7)大毘婆沙論,大正藏 卷70,p.363上."如是中有 有多異名 成名中有 或名健達縛 或名求有 或名意成"8)中阿含經,大正藏 卷1,p.666上.“以三事等合會受胎 父母合會 無滿堪耐 香陰已至 阿私羅 此事等會入於母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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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곧 ‘세 가지 인연이 모이면 受胎한다.’는 것이다.9)

    라고 하며 식신으로 표현하고 있다.『유가사지론』권1에서는,그때 부모는 貪愛가 모두 절정에 이르면 맨 마지막에 각기 농도 짙은 精血을 흘려 보내는데 양쪽의 그 精血이 모태에 함께 머물면서 하나로 합해져서 한 덩어리의 우유가 발효한 것처럼 응고될 때,바로 그 곳에 모든 종자들이 果報(一切種子의 異熟)로서 끌려 들어가게 되고,지각(執受)의 근거(所依)인 阿賴耶識이 화합해서 依託하게 된다.10)

    이 설명의 요점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화합하여 수정란이 생길 때,거기에아뢰야식이 화합하여 자신을 맡김으로써 생명체가 결성된다는 것이다.그리고여기서 아뢰야식이란 현생에 적응되는 중유의 다른 이름이다.즉 새로운 생명체가 결성되는 찰나에 제 역할을 다한 중유는 그 이름을 상실하고,아뢰야식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의 주체가 된다.현재의 생존상태를 본유라고 하므로,현생에서는 중유라는 명칭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이상을 정리해 보면 중유에서 생유로 되는 과정[受胎]은 신체적인 조건 및부모의 정혈과 건달박의 결합으로 인한 삼사화합이 이루어져야 하는데,여기서 말하는 건달박은 중유와 생유의 사이에 있는 존재 즉 중간 생명체로 윤회의 주체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윤회의 주체인 중간 생명체를『중아함경』에서는 향음으로,『增一阿含經』에서는 식신으로 표현하고 있으며,『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서는 중유의 다른이름으로서,『유가사지론』에서는 건달박,아뢰야식 또는 일체종자식이라고 하고 있다.따라서 후대에 올수록 中有에서 生有의 과정을 분리하여서 보려고 하는 견해가 있다.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완전히 구분

    9)增一阿含經,大正藏 卷1,p.603下-604上10)瑜伽師地論,大正藏 권30,p.283上."爾時父母貪愛俱極.最後決定各出一滴濃厚精血.二滴和合住母胎中合爲一段.猶如熟乳凝結之時.當於此處.一切種子異熟所攝.執受所依阿賴耶識和合依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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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한다.이에 대하여『아비달마대비바사론』권192에서는,묻기를,이 四有는 刹那인가,相續인가?

    답하기를,둘은 刹那인데 死有와 生有이며,둘은 상속인데 나머지 有이다.11)

    라고 하여 사유와 생유는 찰나 사이에 일어난다고 한다.새로운 생명체의 성립과정에 대해『유가사지론』권1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和合依託이란 무엇을 말하는가?여기에서 흘려보낸 진한 精血은 한 덩어리로 합성되면 顚倒된 인연과 함께 中有와 같이 소멸한다.소멸함과 동시에 一切種子識의 功能力에 의하여 다른 미세한 根과 大種이 합해서 생기고,나머지 根의 同分은 정혈과 합해져 둥글게 뭉쳐서 생긴다.이러는동안을 ‘意識이 이미 머무르고,엉기고,생기고,相續한다’고 하니 곧 이것을 ‘갈라남의 자리(羯羅藍位)’라고 한다.이 羯羅藍중에는 여러 根의 大種이 있으나 身根과 身根의 所依處의 大種만이 함께 생긴다.이 身根과 같이 생긴 여러 根의 大種의 힘으로 말미암아 眼 등의 여러 根이 차례로생기게 된다.이 身根과 같이 생긴 根의 所依處의 大種의 힘에 의하여여러 根의 所依處가 차례로 생기게 되며,여러 根과 所依處가 다 갖추어생기게 됨으로 말미암아 得圓滿依止成就라 한다.이 羯羅藍의 色과 心,心所와는 편함과 위험을 함께 하기 때문에 依託이라 한다.心.心所의 依託力으로 말미암아 色은 썩어 문드러지거나 부서지지 아니하며,色의 손해와 이익이 있으므로 그것도 손해가 되고 이익이 된다.이러므로 그것의 安危는 함께 한다고 한다.또 이 羯羅藍은 意識이 최초로 의탁하는곳이므로 肉心(心臟)이라 하며,이와 같이 識이 여기에 최초로 의탁하기에 여기에서 맨 마지막에 버리게 된다.12)

    라고 한다.즉 부모의 정자와 난자[精血]가 결합하면서 중유는 소멸됨과 동시에 아뢰야식인 일체종자식은 공능을 발휘하여 미세한 근과 대종으로 화합하

    11)阿毘達磨大毘婆沙論,大正藏,卷27,p.959中."問此四有幾刹那幾相續 答刹那謂死有生有 二相續餘有"12)『瑜伽師地論』,大正藏30,p.283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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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생한다.모든 근들이 정혈과 화합하여 생하며,식이 결생하여 상속하는 것을 羯羅藍位라고 한다.즉 이는 식이 최초로 탁태하는 것이라고 하므로 배태가 이루어지는 단계,다시 말하면 수태,성태의 상태를 말한다.여기서 羯羅藍位는 수태 일주일간을 뜻하고 있다.이때부터 육심이 생긴다고 하므로 육체와 정신,즉 색과 수상행식의 오온이 생긴다는 것이다.이 오온은 중유의 것이 아니라 생유에 의해 생기므로 이것이 형성되었을 때에는 이미본유의 오온이 되는 것이다.따라서 생유란 모태에 수태되는 순간을 말하며,이 때부터 생명체가 형성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다시 말하자면 불교에서 보는 생명의 정의는 수태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따라서 이 기간부터 낙태를 할 경우 이미 불살생계를 범하는 결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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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ⅢⅢⅢ...불불불교교교의의의 생생생명명명관관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인간중심의 생명관에서 기인하며,특히과학은 인간의 복리 증진을 목적으로 출발했다고 본다.그러나 결과적으로 과학은 자연 파괴,환경오염,생태계 파괴에까지 이르러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기에 이르렀으며,생명 복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인간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손상하게 되었다.이러한 때 진정한 생명의 존엄과 가치의 근거를 불교의 생명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111...근근근본본본불불불교교교의의의 생생생명명명관관관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생명의 기원을 이야기하고,영혼을 생명의 본질로 생각한다.그러나 불교에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언급도 없고 영혼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붓다의 가르침에 생명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생명이라는 말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개념이다.즉 세계를 생물과 무생물로 구분하는,다시 말해서 물질과 정신을 개별적 실체로 생각하는 데카르트적 세계관에서 나온 개념이다.데카르트적 세계관에서 본다면 생명은 정신이나 영혼/마음을 소유하고 있는사물이다.그러나 최근의 시스템 이론은 데카르트의 기계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연을 서로 연결된 관계들의 그물망으로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고,13)생물 시스템에 대한 이론에 따르면 마음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즉생명의 과정 그 자체이다.14)

    붓다 당시의 인도 사상계에서 생명의 문제와 관련하여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중요한 논쟁거리였다.붓다는 ‘육신과 영혼이 동일한가 다른가?’에 대한 질문에 침묵으로 대응한다.‘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의13)프리쵸프 카프라 저/김용정·김동광 역,《생명의 그물》(범양사출판부,1998),p.64참조.14)위의 책,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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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음에도 침묵한다.15)

    영혼과 육신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는 생명의 본질을 영혼이라고 믿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신념의 근거는 모든 생명현상에 나타나는 인지작용(認知作用)이다.생명현상에 나타나는 인지작용을 근거로 인지의 주체로서 영혼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며,이것을 생명의 본질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붓다 당시의 인도 사상계에는 이러한 영혼을 불멸의 실체로 생각한 정통 바라문교와 자이나교가 있었고,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정신/영혼은 물질로부터 생긴다고 생각한 유물론자들이 있었다.붓다는 이러한 대립적인 두 사상을“의미는 한 가지인데 다르게 주장될 뿐”16)이라고 비판한다.붓다가 같은 의미라고 비판한 것은 이들이 영혼이나 물질을 실체로 생각하는데카르트적인 이원론적 실재론에 빠져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데카르트적 이원론의 입장에서 보면 생명체는 신체 속에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이다.붓다는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어리석은 범부는 무명에 가리고 애욕에 묶여 자신의 내부에 식(識)이 있고,외부에 명색(名色)이 있다고 분별한다”고 이야기한다.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식하고 사유하는 실체이다.우리의 몸 속에는 이러한 영혼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밖에 있는 사물을 본다는 것이 범부들의 생각이다.‘十二緣起설’의 출발이 되는 무명은 바로 이러한 생각이다.따라서 十二緣起설의 무명은 생명의 실상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붓다는 우리가 정신이나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연기한 현상임을 강조한다.『중아함』「차제경」에서 붓다는 우리의 몸 속에 있는 의식[識]이 인식과행위의 주체로서 업을 짓고 죽어서는 다음 세상에서 그 과보를 받는다고 생각

    15)『중아함경』「箭喩經」등에서 붓다는 ‘영혼과 육신은 동일한가 다른가?’생사를 해탈한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등의 문제에 대하여 답변하지 않고 이런 문제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이야기한다.(大正藏 1,pp.804a∼805c참조.)

    16)大正藏 2,pp.84c∼8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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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는 차제라는 비구를 크게 꾸짖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나는 식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이야기했다.식은 연이 있으면 생기고,연이 없으면 멸한다.식은 연이 되는 것을 따라서 생기므로 그 연을 이야기했다.안과 색을 연하여 식이 생기며,식이 생기면 안식이라고 부른다.몸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의식이 눈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사물을봄으로써 나타난 인지현상을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붓다는 우리가 영혼이나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각활동이 체화된 인지현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의식이나 영혼을 인지의 주체로 생각하는실체론적 사고는 신체의 수만큼 영혼도 많다는 신념을 낳는다.이러한 신념에서 사후에도 영혼은 죽지 않고 존재하는가,아니면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영혼도 사멸하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붓다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단상중도(斷常中道)를 설한다.상견(常見)은 업의 주체인 불멸의 영혼이 사후에 자신이지은 업의 과보를 받는다는 견해이고,단견(斷見)은 영혼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사멸하므로 업을 짓는 자와 그 과보를 받는 자는 서로 다른 영혼이라는 견해이다.이러한 상견과 단견은 생명체의 수만큼 영혼의 수도 많다는 신념에서비롯된 것이다.붓다는 생명의 본질을 육신이나 영혼으로 생각하는 실체론적 사고를 벗어나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중도를 제시하고 있으며,붓다가 제시한 패러다임은 세계와 생명을 상호의존적인 관계구조로 보는 연기설이다.붓다는 생명을 영혼과 육신으로 이해하려는 기존의 생명관이 생명에 대한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연기법의 자각을 통해 생명의 실상을 이해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최근의 생물시스템에 대한 이론에 의하면 생명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며,생명이라는 과정은 인지의 과정과 동일시된다.그리고 마음은 인지의 과정이며 생명의 과정 그 자체이다.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불교의 十二緣起는 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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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과정,즉 마음을 이야기한 것이므로 생명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붓다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처한,태어나면 반드시 늙어 죽는다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문제삼았다.만약에 생명이 본래 태어나서 늙어 죽는 것이라면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十二緣起의 무명은 경험과 기억을 쌓아놓고[集]‘나’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의미한다.우리는 이러한 어리석음으로 살아가면서 ‘나’를 바탕재료로 하여 끊임없이새로운 자료를 쌓아간다.이렇게 경험과 기억이 쌓인 것을 오온이라고 부른다.생명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무명에 휩싸인 중생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과 기억을 모아 오온을 형성하여 ‘나’로 집착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것이 十二緣起의 ‘유전문(流轉門)’이다.그리고 생명의 실상을 자각하여 오온을멸하고 생명의 구조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十二緣起의 ‘환멸문(還滅門)’인 ‘팔정도’이다.붓다는 十二緣起의 깨달음을 통해 오온의 집과 멸을 발견한 것이다.우리에게 죽음이 문제되는 것은 ‘나’를 생명의 주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러나‘나’가 경험과 기억의 모임이라면 ‘나’는 생명의 주체일 수 없다.우리는 태어나서 늙어 죽는 것을 ‘나’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경험과 기억의 모임에 불과한‘나’는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늙어 죽는 것도 아니다.단지 경험과 기억의 모임인 오온을 ‘나’라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나’는 태어나서 늙어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붓다는 우리가 생명의 주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삶을 통해 형성된 경험의 내용이 기억되고 개념화되어 언어화된 것으로서 이것을 실체시(實體視)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무지[無明]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17)

    붓다는 생명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나타나는 과정이라고 가르친다.

    17)大正藏 2,pp.87c∼88a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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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수행은 생명의 구조를 깨닫고 그 구조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길이다.이 가운데 ‘四念處(四念處)’는 생명의 구조를 깨닫는 방법이다.우리가 내 몸[身],내 감정[受]내 마음[心],외부의 사물[法]이라고 생각하는것들을 잘 관찰하면 내 몸,내 감정,내 마음,외부의 사물이라고 할 수 있는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 ‘四念處’인 것이다.우리의 삶을 관찰하면 제일 먼저 드러나는 것은 먹어야 산다는 사실이다.또 배설해야 산다.먹기 전의 음식은 나의 몸이 아니지만 먹은 음식은 나의몸이 된다.배설하기 전의 배설물은 나의 몸이라고 생각하는데,배설한 후의배설물은 나의 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과연 참된 나의 몸은 어떤 것인가?몸[身]에 대한 관찰은 이렇게 이루어진다.그 결과 이 세상에 나의 몸이라고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감정·마음·사물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의 관찰과 사유를 행한다.고락을 느끼는 감정[受]은 영혼이나 정신의 작용이 아니다.지각의 경험[觸]이 쌓여 감정을 유발한다.사물을 인지하는 마음은 삶을 통해 형성된 관념[名色]이 모인 것이다.그리고 그 마음에 인지된 대상[法]은 외부에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마음에 기억된 관념이 대상화된 것이다.18)

    이와 같이 四念處의 수행을 통해 우리의 몸이 있고,그 속에 영혼이 있으며,영혼이 외부의 사물을 인식한다는 신념은 허구임이 드러난다.우리가 내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다.먹은 음식이 소화되어 배설되는 과정 속에 우리의 육신이 있다.육신은 존재하고 있는 사물이 아니라 음식물이 흐르는 강과 같은 것이다.물이 흐르지 않으면 강이 사라지듯이 우리의 육신은 음식을 먹지 않거나 배설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정신도 마찬가지이다.음식을 먹지 않고는 정신활동이 있을 수 없다.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나타나는 인지의 과정을 우리는 정신이나 영혼이라고 부를 뿐이다.

    18)大正藏 2,p.171b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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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육신과 영혼은 삶을 통해 우리가 인식한 내용으로 만들어 낸 허구적인 관념일 뿐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다.삶에는 물질과 정신,육신과 영혼의 구별이 없다.모든 것이 함께 상호의존적으로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모든것이 상호의존적으로 연기하고 있는 삶 속에는 특별히 ‘나’라고 할 만한 것이없을 뿐만 아니라 ‘나’가 아니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이것을 ‘무아’라고 한다.무아의 입장에서 보면 ‘나’도 없고,‘나’아닌 것도없으며,생명도 없고,생명 아닌 것도 없다.이러한 사실에 무지한 상태에서는생로병사를 느끼는 괴로운 삶이 연기하고,무아와 연기를 깨달은 상태에서는‘나’아닌 것이 없이 모두가 ‘한 생명’이므로 생사가 본래 없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행복한 삶[涅槃]이 연기한다.이것이 十二緣起의 유전문과 환멸문이다.이와 같이 十二緣起의 유전문과환멸문은 삶의 두 가지 상태,즉 생명의 두 가지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삶을 의미한다.삶을 불교에서는 ‘업’이라고부른다.우리가 나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오온은 삶[業]을 통해 나타난 무상한 의식[報]들이 모여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의식 덩어리’이며 ‘삶의 그림자’이다.보고,듣고,맛보고,만진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색온을 이루고,즐거움을 느끼고,괴로움을 느낀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수온을 이루고,비교하고 사유한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상온을 이루고,욕구를 가지고 의도한 삶의 그림자가모여서 행온을 이루고,사물을 분별하여 인식한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식온을이룬다.이와 같이 오온은 중생들이 삶의 과정에서 생긴 경험을 기억하고 모아서 존재화한 것이다.우리는 보고 듣고 만진 경험을 통해 외부에 사물이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고,그것을 지각하는 감관을 지닌 육체가 존재하고 있다고 믿게 되며,과거로부터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한 경험을 통해 외부에 사물이 존재하고그것에 대하여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감정·이성·의지·의식이 몸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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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우리가 외부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물과 나의 존재라고 믿고 있는 육신이나 영혼은 ‘경험의 모임[集]’에 지나지 않는다.이와 같이 우리가 ‘나’의 존재로 믿고 있는 오온의 실상은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삶,즉‘업보’이다.생명은 이러한 삶,즉 업보의 현상이다.우리가 육신이라거나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본질은 업보인 셈이다.불교의 연기설은 이러한 ‘무아업보설’을 의미한다.무아의 논리적 근거가 되는 연기란 업보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업보,즉 연기하는 삶에는 두 가지가 있다.하나는 생명의 실상이 무아이며 업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는 삶과,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무명에서연기한 삶이다.붓다가 깨달은 것은 이러한 업보,즉 연기의 도리이다.우리의 삶이 생명의실상에 무지한 무명의 상태에서 살아가면 생로병사의 괴로운 삶이 연기하고,무명을 멸하여 생명의 실상을 깨닫고 살아가면 괴로움은 사라지고 열반의 삶이 연기한다.이러한 사실은 삶의 세계에 변함없이 상주하는 진리이다.이와같이 불교에서는 생명의 본질을 육체나 영혼과 같은 존재로 보지 않고 업보,즉 삶으로 본다.이러한 업보의 생명관에서 보면 생명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업보의 과정,즉삶이다.그리고 “모든 생명(衆生)은 업의 소유자이며,업의 상속자이며,업에서나온 것”19)이다.따라서 생명의 가치는 생명체가 소유한 육체나 영혼 또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다.

    222...중중중도도도설설설의의의 관관관점점점에에에서서서 본본본 불불불교교교의의의 생생생명명명관관관

    기존의 생명관을 생명의 기원에서 생명의 가치와 의미를 찾았기 때문에 영혼의 유무가 생명관의 근본문제처럼 되었다.그러나 불교에서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논의가 없다.그 결과 영혼의 유무도 논의의 초점이 되지 않는다.영혼의 문제와 관련하여 붓다의 ‘무기’에 논의의 초점을 두고자 한다.『중아함

    19)Majjhima-Nika-ya,Vol.3,ed.RobertChalmers,PTS,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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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전유경」등에서 육신과 영혼이 동일한가 다른가에 대한 물음에 침묵으로 대응한다.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물음에도 역시 침묵한다.이러한 물음에 대한 침묵의 이유는『雜阿含經』297경 일이중도(一異中道)에나타난다.세존은 영혼과 육신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는 생명에 대한 전도된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영혼과 육신이 같다면 육신의 죽음을 통해 삶은 끝날 것이다.죽으면 그만인 삶에 가치 있는 삶의 추구는 무의미하다.과학적 생명관은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다.육신과는 달리 죽지 않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영혼이 죽지 않는다면 생사해탈의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붓다는 이 모두가 생명의 실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고 생명의 실상을 자각할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흔히 수명과 생명은 동일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 두 개념에는 차별이 있다.즉 ‘수명’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타나는 생명현상을 지칭한다.우선 수명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살펴보면『중아함경』의「대구치라경」에서 사리불과 구치라의 대화에서 설명하고 있다.수명[壽]이 의지하여 머무는것이 체온[煖]으로 수명과 체온은 하나의 현상이지 별개의 현상이 아니라고한다.즉 체온이 있으면 살아 있고,체온이 식으면 죽었다는 의미이다.불교에서는 숨 쉬며 체온이 유지되는 상태가 살아있는 것이고 살아 있을 때 의식 작용이 나타나며 의식이 작용할 때 감각을 통한 인식 작용이 나타난다는 과학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이와 같이 수명에 대한 과학적인 시각을 갖는다고 해서 생명을 수명이 다하면 끝나는 것으로 보지 않으며,그렇다고 수명이 다한 후에도 동일한 수명이유지된다고 보지는 않는다.『雜阿含經』300경에 세존께서 단상중도를 설하고 있다.현세에 자기가 지은 업을 내세에 자기가 받는다 한다면 이는 영혼 불멸을 인정하는 常見이 된다.반면 업을 지은 자와 받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이는 육신의 삶,즉 수명이 다하면 생명이 없어진다는 단견이 된다.이것이 세존의 ‘중도설’의 입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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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이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중생들에게 ‘무명에서 生,노사가 연기한다’는 十二緣起법을 그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다.그러면 연기설에서 바라본 생명관은 무엇인가?불교의 연기설에 의하면 혼자서 생긴다든지,혼자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모든 존재들은 원인들과 그 원인들의 관계에 의해 발생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연기법을 설명하기 위해 초기 경전은 다음과 같은 간결한 문장을 사용하고있으며,이를 연기의 공식이라 부르기도 한다.즉,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사라진다.20)

    이 공식의 첫 구절에 의해 존재의 발생이 설명되고,다음 구절로서 존재의소멸이 설명되고 있다.또,十二緣起설은 인간 존재의 각각의 개체발생학적 과정을 12단계로 나누어서 연기의 이치에 의해 해명한 것으로,이 十二緣起의 각내용을 경전 增壹阿含經,卷2,p,797中-下 과 旣存의 硏究結果 金東華,『原始佛敎思想』(서울:佛敎思想社,1973),pp.69-72.에 기초하여 살펴보기로 한다.① 無明 -고통(苦)ㆍ고통의 원인(集)ㆍ사라짐(滅)ㆍ사라지는 길(道)를 모르는 것으로,중생의 근본적인 번뇌를 말한다.② 行 -行에는 세 가지가 있다.이른바 몸의 행(身行),입의 행(口行),뜻의행(意行)이다.즉 行이란 행위를 말한다.③ 識 -識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眼ㆍ耳ㆍ鼻ㆍ舌ㆍ身ㆍ意識이다.여기에서 識이란 감각적 지각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認識作用을 의미한다.④ 名色 -名이란 느낌상상ㆍ기억ㆍ닿임ㆍ생각이다.色이란 네 가지 요소(四大)와 네 가지 요소로 된 몸[四大所造色]이다.즉,名은 受ㆍ想ㆍ行ㆍ識의정신적 작용이고,色은 물질적 육체이다.또,名은 관념,色은 인식의 대상으로볼 수 있는데,이런 관점에서는 名色은 주관과 객관이 분화되는 단계라 할 수

    20)『雜阿含經』,大正藏 卷2,p.92下."次有故彼有 次起故彼起 次無故彼無 次滅故彼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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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겠다.⑤ 六入處 -안의 여섯 감관이니,ㆍ 닿임이다.즉 위의 여섯 가지 인식 주관이 각각의 인식객관과 접촉하는 것이다.⑥ 觸 -접촉하다라는 뜻으로 감각하는 기관(육처)과 그 대상인 육경(六境 :色,聲,香,味,觸,法)과 감각,지각의 주체(六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가 화합,접촉하는 것을 말한다.⑦ 受 -느낌이란 세 가지이니,즐거운 느낌,괴로운 느낌,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이다.즉,위의 觸에 의한 感受作用을 말한다.⑧ 愛 -세 가지 욕망의 몸이니,욕심세계의 욕망의 몸(欲愛),형상세계의욕망의 몸(色愛),무형세계의 욕망의 몸(無色愛)이다.흔히 渴愛로 표현됨.⑨ 取 -네 가지 잡음이 있으니,욕심세계의 잡음,소견의 잡음,계율의 잡음,‘나’의 잡음이다.즉,집착을 말한다.⑩ 有 -세 가지 存在이니,욕심세계의 존재,형상세계의 존재,무형세계의존재이다.⑪ 生 -生이란 어느 집에 태어나 갖가지 존재를 받아 다섯 쌓임(五蘊)을얻고 여섯 감관을 받는 것이다.즉,五蘊으로 형성된 삶이 시작됨.⑫ 老死 -늙음이란 중생들의 몸이 나빠지고,머리털이 새며,기력이 쇠하고,수명이 날로 줄어들어 본래의 정신이 없는 것이다.죽음이란 중생들의 몸이 溫氣가 없어지고 덧없이 변하여 다섯 친척(五親)이 다섯 쌓임의 몸을 버리고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다.이 십이지연기설에서 설명하고 있는 존재의 발생과 소멸의 문제를 고찰해보기로 한다.먼저 존재의 발생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즉,‘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행을 인연하여 식이 있고,식을 인연하여 명색이있고,명색을 인하여 육입이 있고,육입을 인연하여 촉이 있으며,촉을 인연하여 수가 있고,수를 인연하여 애가 있으며,애를 인연하여 취가 있으며,취를인연하여 유가 있으며,유를 인연하여 생이 있다.이렇게 발생된 존재가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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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는 것은 이와 반대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즉,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하고,행이 멸하기 때문에 식이 멸하며,… 유가 멸하면 생이 멸한다.인간 존재는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생사를 되풀이한다.연기법에 의하면존재는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며 조건 지워져 있는 것이다.거기에는 고정불변적인 것은 없으며,이는 무아론적인 존재임을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연기법은 만물의 인과법칙이다.연기법의 요지는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다수의 원인들이 상호작용함으로써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의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그것은 만물이 무상할 수밖에 없는 인과의 이치를 지적하는 개념이다.그리고 인류의 유구한 역사의 경험을 통해서 아직까지 변하지 않은 채 고정되어있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에서도 실증되는 우주 법칙이다.자연과학에서는 신과 영혼의 존재가 아직 실증되지 않은 상정으로서 탐구의 대상으로 취급될 수있을지 모르지만,근본적으로 세존은 육신과 영혼으로 나누어 생명을 규정하려는 자체를 비판하고 있다.세존에 의하면 육신이나 영혼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허구의 망념이다.‘十二緣起설’은 유전문과 환멸문이 있는데,유전문에서는 생사가 나타나지만 환멸문에서는 생사가 사라진다.영혼이 있는가 없는가 라는 질문은 중생들이 생명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생사를 실제의 것으로 느끼면서 만들어낸 허구적 관념으로서만 인정하고 있다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생명을 어떻게 보는가?그 해답을 ‘업설’에서 찾을 수있다.불교의 업설은 상식적인 업설과는 달리 自我의 존재를 부정하는 불교의‘무아설’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고 있다.『雜阿含經』355經에서 세존은

    “비구들이여 眼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멸할 때 가는 곳이 없다.이와 같이 眼은 不實하게 생기며,생겨서는 남김없이 사라진다.따라서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다.이 陰이 멸하면 다른 陰이 相續한다.”21)

    21)『雜阿含經』卷2,p.107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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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한다.인간이 사물을 볼 때 ‘보는 나’를 통해 생각이 생기나 ‘보는 나’의 지각을 볼때만 나타나고 보지 않을 때에는 ‘보는 나’는 지각에서 사라진다.즉 ‘보는 업’을 통해서 ‘보는 나’가 나타날 뿐 ‘자아’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볼 때는 나오고,보지 않을 때는 숨는 것은 아니다.‘보는 업’을 통해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보는 나’는 있지만 ‘보는 業’의 작자로서의 ‘자아’가 없다는 것이 이 경에서의의미이다.이 경에서 음은 온의 상속이다.『雜阿含經』39경에서 오온의 상속을 종자에비유한다.한 알의 볍씨가 인연을 만나면 그 볍씨는 사라져도 거기에서 뿌리,줄기,가지,잎,볍씨가 나오듯이 식온이 인연을 만나면 새로운 오온으로 상속된다는 것이다.이러한 상주불변하는 영혼은 없으며 이러한 생명의 상속은 업보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생명은 이러한 업보의 현상이다.육신이나 영혼이라 부르는 것도 그 본질은업보인 것이다.불교의 연기설은 이러한 ‘무아업보설’을 의미한다.이처럼 불교에서는 생명의 본질을 육체나 영혼과 같은 존재로 보지 않고 업으로 본다.이러한 업설의 생명관에서 보면 생명의 존엄은 업의 결과 즉 果報이다.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생명은 본래적으로 존엄한 것이 아니라고귀한 삶이 생명을 존엄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겠다.대체로 이 시대의 생명관의 문제는 인간의 생명만을 중시하고 자연이나 세계 그리고 다른 생명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데 있다.인간의 생명이 창조신에게 기원한다는 서구 종교적 생명관은 인간중심의 과학을 낳았고,그 결과 인간의 신성조차 파괴되고 있다.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물질에서 생명이 나온다는 과학적인 사고가 생명의 존엄을 해치는 것이 아니다.생명과 물질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주어진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서 바른 생명관을 수립해야 하며,물질과 인간,자연과 인간을 동등한 가치로 바라볼 때 인간의 삶은 보다 숭고하고 존엄해 질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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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을 것이다.또,생명의 참된 구현은 올바른 지혜와 자비의 실천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즉,지혜로 ‘한 생명’의 진실을 밝혀내고,자비로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진실된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불교적 방법이라고 생각되며,이러한 삶 속에는 인간의 영생을 위하여 헛되이 목숨을 끊는 일도 생명을 조작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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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ⅣⅣⅣ...初初初期期期經經經典典典에에에 있있있어어어서서서의의의 죽죽죽음음음

    늙는 것과 죽음[老死]은 불교경론에서 끊임없이 언급되고 있는 고통(dukkha)의 두 측면들이다.불교의 가르침은 현상의 내적 無常을 강조한다.初期 經典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발생의 본성이 있는 모든 것은 중지의 본성도 가지고 있다.’모든 형태의 유기적 생명들은 발생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그들은 어떤 일정한 시점,즉 수태의 순간에 통합된 전체로 발생하기 때문이다.그들은 자신은 복합적인 실체이며,불교철학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응집력을 잃고 분해되는 것은 모든 복합적인 실체들의 본성이다.죽음은 인간적 조건의 모든 불만족들을 캡슐 안에 넣는다는 의미가 있는데,죽음은 개체적 생명의 덧없음과 더불어 수반되는 늙음의 고통과 아픔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불교의 패러다임 문제이다.왜냐하면 죽음은 거기에 업의 삶이 종속되는 모든 질병들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아시아 문화에서 불교는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생명의 끝인 죽음과 관계된 의식이나 제례 및 관습들에서 권위 있는 것으로간주되었다.그러나 대체로 보아 죽은 자와 산 자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어떤 특별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의료기술의 향상으로 최근 몇 십 년 사이에야 비로소 죽음을 정의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이에 발맞추어 불교에서도 경전에 나타난 죽음의 문제에 대해 교리발달순으로 초기불교에서는『아함경』부파불교에서는『구사론』과『대비사론』대승불교에서는『유가사지론』을 중심으로 그 정의와 분류,진행과정,시점 판단 기준을 총체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삶은 끝없는 고통으로 얽혀져 있다.그 고통의 최고조는 죽음이다.그러나죽음의 문제는 의학적으로만 복잡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 불교교리의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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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다층적이다.여기에서는 초기경전,즉『중아함경』,『雜阿含經』,『增一阿含經』에서 설명하고 있는 죽음의 내용들을 중심으로 이들은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으며,어떤 과정으로 진행되고,그 시점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11...죽죽죽음음음의의의 정정정의의의

    먼저 초기경전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초기경전에서는 죽음에 대해 수없이 말하고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은 없다.주로 十二緣起를 설명하면서 마지막 항인 ‘死’를 말할 때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중아함경』과『雜阿含經』,『增一阿含經』에 죽음의 정의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거의 내용이 유사하기는 하나 이들 경전에 나타난 내용들을 살펴보기로 한다.『중아함경』「대구치라경」에서는 세 가지 업을 주제로사리불 존자의 질문에 대구치라 존자가 대답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으며,죽음에 의해 업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과 수도자가 수행에 의해 업을 짓지 않는멸진정과의 차이를 분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여기에서는 죽음을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세 가지 法이 있어 산 몸이 죽은 뒤에는 몸이 무덤사이에 버려져 나무처럼 無情物이다.어떤 것을 세 가지 법이라 하는가?첫째 壽이고 둘째 暖이며 셋째 識이다.이 세 가지 법으로 산 몸이 죽고 나면 몸은 무덤사이에 버려져 나무같이 無情物이다.22)

    여기에서 죽음은 ‘壽ㆍ煖ㆍ識’의 세 가지 요소가 몸을 떠난 것을 말하며,‘모든 根이 무너진다’는 것은 ‘모든 감각 기관의 기능이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 세 요소가 하나로 모여 있을 때 우리는 살아 있다고말하는 것이고,이 세 요소가 육체에서 떠날 때 인간은 무덤사이에 버려진 나

    22)『中阿含經』,大正藏,권1,P.791中-下."有三法生身死已 身棄塚間 如木無情 云何爲三 一者壽 二者暖三者識 此三法生身死已 身棄塚間 如木 無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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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토막처럼 의식이 없는 물질 즉 生命이 없는 상태로 되어 버리는데,이것을죽음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그렇다면 죽음을 규정하게 하는 이들 壽ㆍ煖ㆍ識은 무엇인가?① 수(壽)는 壽命의 壽이다.② 난(煖)은 體溫을 말하는 것으로,이 두 가지 요소는 精神的인 측면이 아니라 生物學的 측면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③ 식(識)은 十二緣起에서의 제3지로 요별이라고 설명되며,인식작용을 말한다.이 식에는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의 육식이 있다.식[인식작용]이 없어지면 심신은 사멸한다.식에 의해서 생명체로서 심신[名色]이 통일되고 있다.보다 넓게 말하면 識의 인식을 통해 세계가 성립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이것은 인식과 인식작용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따라서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다시 말하면,수라든가 상이라든가 행을 떠나,더욱이 이와 대립하는 것으로보는 경우이다.이런 경우에서의 식은 오로지 통각 또는 오성의 작용으로서,심을 의식적으로 통일하는 동시에 판단ㆍ추리를 관장하는 심작용이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경전에서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식이라 불린다.’여기서 안다는것은 구별하여 아는 것이다.‘이것은 백색이 아니라 적색이다.이것은 단맛이아니라 쓴맛이다.이것은 낙이 아니라 고다.’고 판단하고 구별하여 아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이 식에 의거해 보면,다른 수ㆍ상ㆍ행도 그 인식 대상이 될수 있는 것으로써 세존이 다른 세 가지 작용이 촉에 의존한다고 말하는데 반해,이 식만은 명색에 의존한다고 하여 폭넓게 심신 전체에 대하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도 사실은 이 때문이다.23)

    그러므로 이 식은 부파불교의 논서에서 보게 되는 윤회의 주체 역할이나 유식학파의 아뢰야식과는 다르며,의식 즉 오온에서 말하는 식으로 인식작용을

    23)木村泰賢 著,朴京俊 譯,『原始敎理 思想論』(서울:經書院,1992),p.1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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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미한다.24)

    또 이 세 가지 요소에 대해서 대승경전의 일종인『대방등대집경』에서의 내용을 통해 醫學的 죽음의 定義와 일치하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살펴보기로 한다.

    壽에 대해서는 ‘壽命이란 들숨과 날숨이다.’25)

    즉,그것은 呼吸이다.또 煖에 대해서는 ‘煖이란 냄새나지 않고,썩지 않음이다.’26)

    고 정의하고 있다.다시 말하면,죽음이란 ‘呼吸이 정지되고,體溫이 상실되며 意識이 없게 된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이는 現代 醫學의 觀點에서 보면 肺의 死亡(肺死)에 의해 心臟(心臟死)과 腦의 죽음(腦死)이 초래된다는 死亡觀을 반영하는것이라 하겠다.무엇이 그들의 신체적 유지나 유기적 토대를 제공하는가 라는 意味에서 이육체를 이루는 요소인 무엇에 의존하고 의지하는가 관한 문제가 제기된다.그대답은 다음과 같다.이를 경전에서는,

    意는 무엇을 의지하여 머무는가.意는 壽를 의지하고 壽에 의지하여 머문다.… 壽는 무엇을 의지하여 머무는가.壽는 煖에 의지하고 煖에 의지하여 머문다.… 壽와 煖 이 두 법은 합쳐지는 것인가,분리되는 것인가.壽와 煖 이 두 가지는 합쳐지는 것이고 분리되는 것이 아니어서 이 두가지를 별개로 설정할 수 없다.무슨 까닭인가.壽를 근거로 煖이 있고煖을 근거로 壽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壽가 없으면 煖도 없고,煖이 없으면 壽도 없다.27)

    라고 설명하고 있다.수가 없을 때 난과 식이 있을 수 없으며,난이 없을 때

    24)윤호진,『佛敎에서의 죽음의 意味』,「腦死認定,그 불교적 조명」(서울:동국대 불교문화원,1993),p.11.25)『大方等大集經』,大正藏 13권,p.164.中."識入出者 名爲壽命"26)前揭書,大正藏 13권,p.164.中."不臭不爛 是名爲暖"27)『中阿含經』,大正藏,권1,P.791中 -下,"意者依何住耶 意依壽...依壽住壽者依暖 依暖住 壽及暖 此二法爲合爲別...壽及暖...二法合不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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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와 식도 또한 있을 수 없다.이와 같이 호흡과 체온,의식은 우리의 생존을위한 필수적인 3대 조건이며,이들 세 요소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이 불가분의 관계를 ‘등불의 비유’를 들어,

    비유하자면 기름을 근거로 하고 심지를 근거로 하여 등에 불을 붙일 수있는 것과 같다.그 가운데 불꽃을 근거로 빛이 있고 빛을 근거로 불꽃이 있는 것이어서,만약 불꽃이 없으면 빛도 없고,빛이 없으면 불꽃도없다.이와 같이 壽를 근거로 煖이 있고 煖을 근거로 壽가 있는 것이어서,만약 壽가 없으면 煖도 없고,煖이 없으면 壽도 없다.그러므로 이두 가지는 합쳐지는 것이고 분리되는 것이 아니어서 이 두 가지를 따로설정할 수 없다.28)

    라고 하셨다.우리는 이것을 죽음이라 한다.壽命(壽)과 體溫(煖)의 두 개념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또한 서로 의존적이다.‘煖은 壽를 根據로 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體溫(煖)은 살아 있는肉體 내에서 일어나는 呼吸으로 인한 에너지 산화과정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에서 壽命 즉 呼吸의 부수 현상일 수도 있다.그러면,“壽는 煖을 根據로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이것은 壽와 煖 사이의 관계를 因果的으로 생각하면 잘못일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여기에서는 壽와 煖의 관계는 불꽃과 그 빛의 이미지로 설명되었다.“불꽃을근거로 빛이 있고,빛은 불꽃을 근거로 한다”고 하는 것은 불꽃과 빛은 실제로는 두 개의 분리된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因果的 관계가 아니다.아마도 이둘 사이의 상호관계는 불꽃과 그 빛은 연소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동일한 과정의 산물들이라는 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經典에 의하면,이러한 상호의존적인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기름등의 燃燒때문이라고 한다.기름 등의 연소가 기름의 공급에 의해 연료를 얻

    28)前揭書,大正藏,권1,P.791中 -下."猶如因油因炷 故得燃燈 彼中因]故有光 因光故有 若無者則無光 無光者則無如 是因壽故有暖 因故有壽 若無壽者則無暖 無暖者則無壽 是故此二法合不別 此二法不可別施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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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연소는 각 개체의 생명의 불꽃이 얼마동안이나 탈것인가를 결정할 에너지의 공급에 의해 동력을 얻게 될 것이다.이러한 의미에서 壽는 어떤 특정한 기관의 기능과 관계된 것이 아니며,생물학적 생명을추진시키고 수명을 결정하는 업에 의해 결정된 에너지의 몫을 의미한다.그러므로 살아있는 육체의 수와 난은 둘 다 생물학적 생명이자 업의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