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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도 자 료

배포일시

2016. 3. 2. (수)

배포수량

총 15 매

주관부서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총괄과

담 당 자

[학예연구1실]

강승완 실장 TEL 02-2188-6040

박혜성 학예연구사 TEL 02-2188-6331

변월룡(Пен Варлен) 1916~1990

Pen Varlen 1916~1990

◇ <백년의 신화 : 한국근대미술 거장전> 시리즈 첫 번째 전시

- 1916년생 작가 변월룡, 이중섭, 유영국의 탄생 100주년 기념

◇ 잊힌 거장 변월룡의 국내 최초 회고전

- 러시아 본토에서 활동한 고려인 화가 변월룡의 삶과 예술을

입체적 조망

- <자화상>, <어머니>, <무용가 최승희 초상>, <금강산 소나무>, 2차 세계대전 중 제작한 반전(反戰) 포스터, 에칭 원판, 북한출장 보고서 초안 등 최초 공개

- 3월 3일(목)부터 5월 8일(일)까지 덕수궁관에서 개최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은 근대미술 거장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백년의 신화: 한국근대미술 거장전> 시리즈의 첫 번째 전시로 <변월룡(Пен Варлен) 1916~1990>전을 3월 3일(목)부터 5월 8일(일)까지 덕수궁관에서 개최한다. 본 전시는 국내에서 최초로 열리는 변월룡의 대규모 회고전이다.

변월룡은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舊레닌그라드)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그곳에서 화가이자 교육자로 일생을 보낸 고려인이다. 그의 삶과 예술은 일제강점, 분단, 전쟁, 이념대립 등 한국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 1, 2차 세계대전, 전체주의, 냉전, 개혁과 개방을 겪은 러시아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변월룡은 역사의 증인이자 경계인으로서 세상과 내면을 향한 시선을 화폭에 담았다.

이번 전시는 냉전종식 후에도 한반도에만 여전히 존재하는 철의 장막 때문에 오랫동안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변월룡’이라는 작가를 소개하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역사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변월룡의 디아스포라(Diaspora)*적 삶과 예술은 민족, 국민 등 20세기 근대의 화두와 함께 한국근대미술의 다층적 측면을 드러낸다. 특히 북한미술의 토대를 구축한 그의 존재는 해방 이후 단절된 한국미술사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리라 기대된다. 관람객은 낯선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 속에서 작가의 고국에 대한 애정과 향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디아스포라(Diaspora):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 또는 그 거주지

전시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 레닌그라드 파노라마는 변월룡 작품의 토대가 된 러시아 아카데미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작가의 작품을 살펴본다. 2부) 영혼을 담은 초상은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초상의 계보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변월룡의 초상화를 소개한다. 3부) 평양기행은 1953~54년 소련 문화성의 명령으로 북한에 파견된 변월룡의 시선으로 바라본 북한의 풍경과 인물에 초점을 둔다. 마지막으로 4부) 디아스포라의 풍경에서는 초상화에 비해 덜 주목 받았지만 작가의 개성과 디아스포라의 미묘한 내면세계를 담은 풍경화를 소개한다.

이번 전시 개막을 위해 차남 펜 세르게이 씨와 장녀 펜 올가 씨가 9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다. 이들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레핀 예술아카데미 출신으로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화가로 활동 중이다. 이들의 어머니이자 변월룡의 부인 故 제르비조바 여사 역시 같은 아카데미 출신의 화가로 이들은 러시아에서도 보기 드문 화가 가족으로 불린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백년의 신화 : 한국근대미술 거장전> 시리즈 첫 번째 전시인 <변월룡(Пен Варлен) 1916~1990>전을 시작으로 이중섭전(5월~9월), 유영국전(10월 ~2016년 2월)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 자료와 관련하여 더욱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면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1실 박혜성 학예연구사(02-2188-6331)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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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 [변월룡 1916-1990]

■ 전시개요

o 전 시 명 : 변월룡(Пен Варлен) 1916~1990

o 전시기간 : 2016.3.3.(목)~5.8.(일)

o 장 소 : 덕수궁관 제 1~4전시실

o 출품부문/수 : 회화, 에칭, 석판화, 드로잉 등 200여점 및 아카이브 70여점

o 관람시간 : 화,목,금,일 오전 10시~오후 7시

수,토 오전 10시~오후 9시

월요일 휴관

* 입장시간: 관람종료 1시간 전까지 가능

o 관 람 료 : 덕수궁 입장료 포함 3,000원(24세 이하, 65세 이상 무료)

o 문 의 : 02-2022-0600

■ 연계 프로그램

o 전문가와 학예사의 대담

- 일시: 2016.3.12.(토), 15:00~16:00

- 대상: 일반인·전문인 대상, 각 30명

- 장소: 덕수궁관 전시실

- 진행: 이영지(듀크대 강사, 미술사학자), 담당 학예연구사

- 내용: 변월룡과 러시아의 미술교육 및 사회주의 리얼리즘

o 큐레이터 토크

- 일시: 2016.4.27(수, 문화가 있는 날), 15:00~16:00

- 대상: 일반인·전문인 대상, 각 30명

- 장소: 덕수궁관 전시실

- 진행: 담당 학예연구사

- 내용: 변월룡 전시준비과정, 변월룡 예술의 특징 등

o 전시연계 강좌 (3회)

- 대상: 일반인·전문인 대상, 각 30명

- 장소: 덕수궁관 시청각실

- 내용: 변월룡에 대한 다각화 된 주제로 작가에 대한 재발견, 분석이

바탕이 된 일반인, 전문인을 위한 강좌

일 시

주 제

강 사

3.26.(토), 14:00~16:00

변월룡의 삶과 예술

문영대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저자, 미술평론가

4.9.(토), 14:00~16:00

변월룡과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미술

이진숙

『러시아 미술사』저자, 미술평론가

4.23.(토), 14:00~16:00

5,60년대 한국 화단 속 변월룡의 영향

박계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초빙교수, 미술사학자

■ 전시해설

- 화, 목, 금, 일: 12시, 1시, 2시, 3시, 4시

- 수, 토: 12시, 1시, 2시, 3시, 4시, 5시(야간개장 시)

※ 상기 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세부 일정은 추후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www.mmca.go.kr)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붙임] 1. 전시내용 및 구성

2. 대표작품 이미지 및 설명

3. 작가연보. 끝.

붙임 1. 전시 내용 및 구성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근대거장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백년의 신화’라는 제목 아래 국민화가 이중섭(1916~56),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과 함께 지금까지 우리가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변월룡(1916~90)의 삶과 예술을 소개한다. 변월룡은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舊레닌그라드)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그 곳에서 화가이자 교육자로 일생을 보낸 고려인이다. 그의 삶과 예술은 식민, 분단, 전쟁, 이념대립 등 한국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 제2차 세계대전, 전체주의, 냉전, 개혁과 개방을 겪은 러시아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그는 국권을 상실한 조국의 국경 밖에서 태어나 이주의 땅에도 보호받지 못하는 소수자였지만, 인간의 존엄에 대한 믿음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운명은 인간의 의지와 상반되게 삶을 밀고 가는 불가항력적인 힘이지만, 변월룡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역사의 증인이자 경계에 선 자로서 세상과 자기 내면을 향한 시선을 화폭에 담았다.

변월룡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지금 여기에 변월룡이란 낯선 화가를 소환하는 일은 서양과 서양을 지향한 근대일본을 기준 삼아 한국근대미술의 후진성을 비난하거나, 혹은 디아스포라를 포용하여 서양의 기준에 부합하는 선진성을 우리 속에서 발견해 내려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변월룡의 첫 회고전인 이번 전시가 작가의 삶과 예술은 물론 한국근현대미술에 내포된 다층의 컨텍스트를 발견하고 또 새로이 생성하는 장(場)이 되기를 기대한다. 무엇보다 북한미술이 토대를 구축하는 데 귀한 자양분이 되었던 그의 존재는, 통일을 실현해야 하는 현세대에 역사적 상상력과 책임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킬 것이다.

1. 레닌그라드 파노라마

변월룡이 졸업하고 교수를 지낸 ‘일리야 레핀 레닌그라드 회화, 조각, 건축 아카데미’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1764년 설립) 러시아 최고의 미술교육기관으로, 스탈린 통치 시절(1922-53)에는 시각예술분야에서 이뤄진 엄격한 중앙통제의 모체였다. 냉전의 종말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변월룡의 예술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그 토대가 된 러시아 아카데미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가들에게 당성, 대중성, 이념성이라는 획일적인 목표를 제시하면서 지도자와 노동자, 조국의 발전, 혁명적 투쟁과 승리를 찬미할 것을 요구했다. 아카데미 교수였던 변월룡은 이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냉전을 거치면서 고착된 소련 미술에 대한 정치적, 미학적 선입견을 버리고 그의 작품을 감상한다면, 그 속에서 형식과 내용, 진실과 거짓, 개인과 집단, 기억과 망각, 현실과 이상 등이 복잡하게 얽힌 복수(複數)의 의미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견실한 수련이 토대가 된 뛰어난 기교와 표현력, 그리고 진정성에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2. 영혼을 담은 초상

변월룡은 공공장소에서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전제로 하는 공식미술과는 별도로 자기 자신만의 창작영역을 구축했다.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초상화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초상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공적으로 주문받은 초상화 이외에 아카데미의 동료교수와 제자,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학술원 멤버, 가족과 이웃 등 가까운 사람들과 나눈 내밀한 관계를 담은 초상화를 다수 남겼다. 그려진 인물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과 관심, 존경이 배어있는 이들 초상화에서 소수로 구성된 아카데미 사회에의 강한 소속감을 엿볼 수 있다. 때로는 아카데미즘이 추구하는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때로는 거칠고 생생한 몇 번의 붓질만으로 마무리된 그의 초상화는 대상의 개성을 잡아내는 뛰어난 직관과 관찰력, 이를 캔버스에 옮기는 대담함과 정확함, 그리고 놀랄 만큼 풍부한 색채가 인상적이다.

3. 평양기행

1953년 7월 변월룡은 소련 문화성의 명령에 따라 북한에 파견되어, 러시아 예술아카데미 시스템과 교과과정을 모범삼아 전쟁에 파괴된 평양미술대학을 재건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전수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당시만 해도 미술창작에 대한 김일성의 구체적인 지침이나 민족적 형식의 교시가 없었기 때문에 북한의 예술가들은 소련의 문예이론과 실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변월룡은 그 매개였다. 15개월 남짓 북한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해방 이후 우리에게 오랫동안 잊힌 북한의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고, 처음으로 밟은 조국산천의 풍경과 북한 주민들의 소박한 삶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그의 존재는 분단 후 반쪽이 되어버린 한국현대미술사에 귀한 연결고리를 제공한다. 귀국 후 변월룡은 정치적인 이유로 북한으로부터 입국을 금지 당했다. 북한을 주제로 한 에칭 대부분은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변월룡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을 그리워하며 제작한 것이다.

4. 디아스포라의 풍경

변월룡의 풍경화는 초상화에 비해 덜 주목받았지만, 작가의 개성과 미묘한 내면세계를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장르다. 전쟁의 공포와 비극을 극복하고 다시 일상을 즐기게 된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삶, 화려한 도시의 풍경, 교회나 성채 등 러시아의 전통적인 건축물, 설경, 생명력 가득한 광활한 초원과 강 등을 그린 풍경화는 소련인이자 고려인인 그가 지닌 이중의 정체성을 내포하고 있다. 소련에서 풍경화는 영혼의 언어를 갖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모호하다는 이유로 중시되지 않았지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모국의 풍경과 근대공업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풍경은 허용되었다. 레닌그라드에서 멀리 떨어진 극동 지역을 자주 찾은 변월룡의 풍경화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보인다. 북한을 다녀온 후 그는 특히 구불하게 뒤틀린 소나무를 주로 그렸다. 사실적이고 세밀하게 재현된 그의 소나무 이미지에는 디아스포라의 향수와 내적긴장, 고독 등 사적이고 내밀한 정서적 울림이 배어있다. 그래서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비현실적인 심리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붙임 2. 대표작품

1) 식민주의의 족쇄를 끊어버려라! 1945, 134×101.5cm, 종이에 과슈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의해 봉쇄 되었을 때, 변월룡은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된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이 무렵 특히 타슈켄트의 국립출판국에서 많은 포스터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포스터는 피난 갔던 아카데미가 레닌그라드를 돌아 온 후 제작된 것으로, 이 원본을 바탕으로 일부 이미지가 수정되고 문구가 추가되어 대량으로 복제된 포스터가 전국에 배포되었다. 모든 민족의 해방을 촉구하는 이 작품은 정확한 인체묘사를 바탕으로 대각선의 과감한 구도와 인물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화가의 시선이 노예 아래 쪽에서 시작하는 독특한 앵글을 취해 사건의 긴박함을 더욱 강조하고, 남자 인물의 윤곽선이 그래픽의 효과를 상승시키고 있다.

2) 사회주의 노동영웅 어부 A.S. 한슈라의 초상, 1969, 200x115cm, 캔버스에 유채

변월룡의 유화 작품에서 노동자는 무명씨가 아니라 이름을 가진 영웅으로 표현되었다. 소련에서 노동자는 사회주의라는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는 주인공으로, 예술가는 이들의 잠재적인 추동력을 이끌어내고 이들의 입장에서 계급투쟁을 형상화하는 작품을 제작해야했다. 이 초상화에서 어부 한슈라는 실물크기보다 크게 기념비화 되어 화면을 장악하고 있다. 그녀는 자녀를 많이 출산해 국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은 고려인이다. 그녀의 건장한 신체, 두툼하고 거친 손과 미소 띈 얼굴, 전방을 주시하는 시선 등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특유의 도상학적 코드와 낙천주의의 구현으로 읽을 수 있다. 젊고 아름답지는 않지만 건강한 에너지와 삶의 연륜이 넘치는 고려인 여인의 모습에서 단순한 도식화를 넘어선 작가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읽을 수 있다.

3) 자화상, 1963, 75x60cm, 캔버스에 유채

수많은 초상화를 남긴 변월룡이지만, 자신의 자화상은 미완의 이 작품이 유일하다. 비록 미완이지만 몇 번의 붓질만으로 결정적인 윤곽과 표정이 형성되었다. 흰 셔츠에 하늘색 멜빵을 한 변월룡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상체는 정면을 향하고 있다. 작품이 완성되었더라면 붓을 쥐고 있을 왼 손을 오른 손이 감싸고 있는데, 손가락 하나하나에서 힘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과장되게 크게 그려진 손은 하루도 작업을 소홀히 한 적 없는 화가로서의 소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부심 높아 보이는 자세에 비해 시선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쉽지 않은데, 가늘게 뜬 눈이 관람자와 시선을 직접 교환하지 않고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화상에서 눈은 화가의 가장 진실한 상징이며 속성이다. 변월룡의 눈은 지금 여기에 있는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기보다는 지금과 그 때, 여기와 거기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그가 내밀한 자의식과 열린 세상의 경계에 홀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고독함이 느껴진다.

4)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초상, 1947, 70x144cm, 캔버스에 유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요구하는 도상(지도자, 노동자, 혁명 등)만이 공식적으로 승인되는 폐쇄적인 분위기 속에서 변월룡이 구축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창작영역은 초상화였다. 그가 러시아에서 특히 인정받고 있는 분야인 초상화에서, 그는 (공적으로 주문받은 초상화 이외에) 아카데미의 동료교수와 제자, 예술가, 학술원 멤버, 가족과 이웃을 그린 초상화를 다수 남겼다. 이들 초상화에는 그려진 인물에 대한 화가의 애정과 관심, 혹은 존경이 깊이 배어있다.

변월룡과 파스테르나크가 어떤 관계였는지 유족조차 알지 못하지만, 그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초상>(1947)은 격동적인 혁명의 시대에 인간 혹은 예술가의 길에 대해 고뇌하는 문학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Борнс Л. Пастернак 1890~1960)는 『닥터 지바고』의 저자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1917년 문단에 등단한 이래 서정적이고 음악적인 시를 주로 써왔다. 혁명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회피한 나약한 지식이자 예술을 통한 불멸을 추구한 시인이기도 한 유리 지바고의 굴곡진 인생과 사랑을 다룬 이 소설은 소련에서 출판을 금지 당해 이탈리아에서 출간 되었다. 소설은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지만(1958년) 작가는 정치적인 이유로 수상을 거절했다. 파스테르나크가 그의 자전적 소설로도 불리는『닥터 지바고』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이 1945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펜을 들어 아직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백색의 원고 위에 문장을 곧 써내려가기 시작할 것만 같다.

5) 화가 올레그 예레메예프의 초상, 1983, 80x70cm, 캔버스에 유채

변월룡과 함께 오랫동안 아카데미에서 교수를 지냈던 화가 올레그 예레메예프의 초상이다. 변월룡은 때로는 매끄러운 표면에 세밀한 선적 묘사와 견고한 양감으로, 때로는 몇 번의 거칠고 생생한 붓질로 초상화를 완성했다. 말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후자의 방식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오랜 동안의 훈련과 이를 통한 기술적 완숙의 결과였다. 이 작품은 대상의 개성과 인상을 잡아내는 뛰어난 직관과 관찰력, 이를 캔버스에 옮기는 대담함과 정확함, 그리고 놀랄 만큼 깊고 풍부한 색채가 돋보인다.

* 올레그 A. 예레메예프(Олег А. Еремеев, 1922~)

러시아 화가, 레닌그라드 레핀 예술아카데미 교수 역임, 레닌그라드 예술가 조합 회원.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그는 1957년 이오간손 지도 하에 예술아카데미를 졸업했다. 1990년부터 2001년까지 예술아카데미 총장을 역임했다. 러시아 역사와 청년들을 주제로 한 작품을 다수 제작했으며 2011년 중국에서 개인전을, 2012년에는 아카데미에서 탄생 90주년 기념전을 가졌다.

6) 근원 김용준 초상, 1953, 51x70.5cm, 캔버스에 유채

소련 문화성의 명령으로 북한을 방문한 변월룡은 체재 기간 교류한 북한의 예술가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초상화에 남겼다. 1956년부터 생애의 마지막까지 평양미술대학의 조선화 강좌장으로 재직하면서 많은 후학들을 양성한 김용준은 세련과 품위를 지닌 멋스러운 신사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조선 후기 추사의 문인화에서 전통미술의 정수를 찾았던 김용준은 1950년대 후반 이후 『조선화 기법』(1959),『조선화 채색법』(1962) 등의 저작들을 내놓아 자신의 예술관을 선회했지만, 1953년에 그려진 초상화에서는 종이 위에 번지는 묵의 흔적과 향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어 이념과 무관한 그의 원래의 뜻과 취향이 훼손되지 않은 채 전해져 진한 감동을 준다.

* 김용준(金瑢俊, 1904~67)

경상북도 선산 출신 화가,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 수필가. 1923년에 고려미술원에서 이마동(李馬銅, 1906~80), 구본웅(具本雄, 1906~53), 길진섭(吉鎭燮, 1907~75), 김주경(金周經, 1902~81) 등과 함께 미술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도화교실에서 이종우(李鍾禹, 1899~1981)로부터 미술수업을 받았고, 같은 해 학생 신분으로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동십자각(東十字閣)>이 입선되었다. 1930년에 동경미술대학교 동문들과 함께 동미회(東美會)를 조직하여 대표가 되고, 향토회(鄕土會)와 백만양화회(白蠻洋畫會)를 조직하는 등 한국 근대화단의 대표적인 인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46년에 서울대학교 회화과 교수에 취임하였고 1948년에 수필집 『근원수필』을 출간했다. 1948년 국대안 파동의 여파로 서울대 교수직을 사퇴하고 동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조선미술대요』를 출간했다. 6.25 전쟁 발발 후 월북한 그는 곧 평양미술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 위원장과 조선건축가동맹 중앙위원을 지냈다. 1953에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사퇴하고 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에 취임하였다. 1962년에 평양미술대학 예술학 부교수로 복직하여 「조선화의 채색법」 등을 발표하였고, 『조선미술사』와 『단원 김홍도』를 출간하는 등 월북 이후에도 전통미술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7) 판문점에서의 북한포로송환, 1953, 51x71cm, 캔버스에 유채

1953년 8월 초, 6·25전쟁 중 남과 북에 억류됐던 포로들의 교환이 판문점 일대의 완충지대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스스로 송환을 희망한 자들이었다. 트럭과 열차 등을 이용해 도착한 포로들은 신원확인 등 송환을 위한 절차를 밟았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 포로들이 “미국이 준 옷을 입고 조국으로 갈 수 없다”며 옷을 벗어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데, 실제로 그 광경을 변월룡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전협정 최대 이슈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변월룡은 역사의 증인이자 기록자로서의 책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8월의 뜨거운 태양이 만들어내는 극적인 명암과 밝은 색감이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의 비극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8) 금강산 (만물상), 1959, 49.3x64.7cm, 에칭

만물상은 금강산의 여러 명승 가운데서도 깎아지른 층암절벽과 온갖 물형과 유사한 형태의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산악미로 유명한 곳이다. 변월룡은 드넓은 초원과 숲, 강이 주를 이루는 러시아의 지형과 다른 조국 지형과 풍경을 섬세한 필치와 드라마틱한 명암법을 통해 표현해 냈다. 작가는 흑백의 선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뉘앙스를 자유롭게 구현하고 있다. 여러 방향으로 뻗어 교차하는 짧은 터치로 이루어진 짙은 어둠의 전경, 어둠 속에 더욱 도드라지는 굴곡진 형태의 소나무, 부드럽고 흐린 미묘한 톤의 변화를 발현하여 벨벳의 감촉을 연상시키는 중경, 가늘고 율동적인 선 하나로 산봉우리의 윤곽을 따라가는 원경의 조화가 마치 수묵화의 유려한 먹의 농담을 보는 듯하다.

9) 바람, 1959, 40x63.8cm, 에칭

변월룡은 ‘바람’을 소재로 한 에칭을 많이 남겼다. 운명이라는 바람에 순응하면서도 굴하지 않는 작가의 삶을 은유하는 듯하다. 평양미술대학이 소재한 송정리를 묘사한 이 작품은 화면 내에 거침과 세밀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가지와 잎의 굵고 짧은 선의 리듬이 바닥의 풀에서 반복되고, 가늘고 긴 호흡의 예리한 선이 바람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을 인상적으로 시각화하였다. 명암의 극적인 변화 없이도 화면에 긴장감이 가득하다. 그런 가운데 작가는 초라한 기와집, 거름 무더기, 바위, 날씨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일에 여념 없는 한 무리의 사람들, 원경의 산과 나무 등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있다. 다양한 효과를 위해 작가는 원경의 산과 대기의 부분을 점묘로 표현했고, 부식을 반복했다.

10) 미하일로브스코예 마을의 시축제, 1975, 65x49.5cm, 에칭

변월룡은 푸쉬킨 동상 개막식, 전통적인 방식으로 푸쉬킨의 초상을 그리는 일본인 학생, 푸쉬킨을 기리는 시낭송 축제, 푸쉬킨의 무덤이 있는 산 등 푸쉬킨을 주제로 한 작품을 비교적 많이 남겼다. 러시아인들에게 푸쉬킨은 단순히 위대한 모더니스트 시인, 사랑을 두고 벌인 결투로 사망한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같은 언어로 같은 시인의 작품을 읽는 경험과 정서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매개였다. 소련 정부는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러시아 문학을 내세웠고 그 선두에서 푸쉬킨이 자리했다. 푸쉬킨이 ‘소련인’이라는 확실한 표지이자, ‘인민의 계몽’이라는 위대한 목표를 달성한 영웅으로 신화화된 존재였음을 고려하면, 소수민족출신이었던 변월룡에게 있어 푸쉬킨 재현은 더욱 복잡한 의미를 지닌다.

11) 쉬코토프스키, 1964, 49x91.4cm, 에칭

쉬코토프스키는 변월룡의 고향이다. 그는 1960년대 초 이후 자주 연해주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러시아 대륙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자작나무와 전나무 대신, 구불하게 뒤틀린 소나무를 많이 그렸다. 북한에서 본 바로 그 소나무였다. 대개 과장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뒤틀림이 심하고, 가지가 화면 밖으로 뻗어 나가거나 비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으로 그려진 변월룡의 소나무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순수한 자연보다는 거친 환경과 변화를 극복해야하는 인간의 삶에 더 가까워 보인다. 소나무가 주요 소재일 경우에도 작품의 중경이나 원경에는 공장이 뿜어내는 연기와 크레인, 도로, 전선 등 개발의 모습이 디테일하게 재현된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러한 풍경화에서조차 그의 소나무 이미지에는 사실적이며 세밀한 표현 속에 디아스포라의 향수와 내적긴장, 고독 등 사적이고 내밀한 정서적 울림이 배어있다. 그래서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비현실적인 심리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12) 금강산 소나무, 1987, 72x129.5cm, 캔버스에 유채

변월룡은 소련의 붕괴(1991년)를 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외적 조건에 의해, 망명과 다를 바 없이 조국, 남과 북으로 나뉜 두 조국 어디에도 연을 맺지 못하고 냉전의 종주국 소련에서 냉전의 시대만을 살다갔다. 이 작품은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35년간 몸담았던 아카데미를 떠난 후(1985년), 죽음을 앞두고 그린 그림이다. 높은 산봉우리와 거기에 걸쳐 있는 구름의 보랏빛과 분홍빛이 전체적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중경의 소나무숲과 사슴떼에서 홀로 떨어진 키 큰 소나무 한 그루가 마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해 온, 강인하게 극복했지만 이방인으로서 외롭고 힘겨웠던 변월룡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붙임 3. 작가연보

1916 9월 29일 연해주 쉬코토프스키의 유랑촌에서 태어남.

1937 블라디보스토크에 중등교육을 마치고,

우랄산맥 부근의 스베르들로프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 미술학교에 편입.

1940 일리야 레핀 레닌그라드 회화 조각 건축학교 회화과에 입학.

전공인 회화 공부와 함께 그래픽과 워크샵에서 동판화와 석판화 연구에도 매진.

1942~1944 독·소전쟁으로 인해 레핀예술대학 교직원, 학생들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로 피난.

타슈켄트 국립출판국에서 정치포스터를 제작.

1944 동급생 제르비조바와 결혼

1947 A.A. 오스묘르킨 교수 지도하에 예술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

소련 미술가 연맹 회원으로 발탁됨.

1950 B.V. 이오간손 교수 지도 하에 대학원을 마침. 전시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시작.

1951 레핀 예술아카데미의 데생과 조교수직을 맡고 데생을 가르치기 시작.

미술학 박사학위를 취득.

1953 데생과 부교수가 됨. 1953년 6월부터 1954년 9월까지 소련 문화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을 방문, 그곳에서 평양미술대학 학장 및 고문 역임.

1954 북한에서 돌아온 후 예술아카데미에서 강의를 이어감과 동시에 여러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 전개.

1961 유럽과 극동지방 여행하기 시작.

1977 예술아카데미 데생과 정교수로 승진.

1985 예술아카데미 퇴직.

1990 5월 25일 레닌그라드에서 뇌졸중으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