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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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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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학교 60년사편찬위원회편

  • 서울대학교 60년사편찬위원회편

    SEOUL NATIONAL UNIVERSITY SINCE 1946

  • 편찬위원장

    (인문대교수)

    편찬부위원장

    (인문대교수)

    편찬위원

    基 (인문대교수)

    � (인문대교수)

    圭(사회대교수)

    �慶 (자연대교수)

    基(공대교수)

    � (농생대교수)

    肯 (법대교수)

    �基 (사범대교수)

    (의대교수)

    均(국제대학원교수)

    편수원

    � (인문대강사)

    �慶 (인문대박사과정)

    (자연대박사과정수료)

    � (인문대조교)

    편수보조원

    (인문대박사과정)

    (인문대석사과정)

    (인문대석사과정)

    (인문대석사과정수료)

  • 겨레의뜻으로기약한이날

    누가조국으로가는길을묻거든

    눈들어관악을보게하라.

    서울대학교가 지나온 발자취는 시련과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척박한 대지에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서울대학교는 격동의 20세기를 거쳐 근대화된 세계 지평의 한

    굽이를 넘어왔고, 이제는 학문적으로 세계와 더불어 경쟁하는 대학으로 성장하였습니

    다. 이 같은 빠른 발전은 대학 구성원의 부단한 노력과 더불어, 근대사의 어려움을 극복

    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국민 모두의 간절한 염원과 애정 어린 뒷받침이 이루어낸

    결실이라고할수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우리 민족 고유의 학문 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운 학문 연구의 물

    결을 받아들여 1946년 국내 최초의 국립종합대학교로 출범한 서울대학교가 지난 60년

    동안 지나온 흔적을 되돌아보는 것은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빠른 발전상에 자족하기 위

    함이 아니라,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평가하고 역사의 도정 속에서 미래

    를설계하기위함입니다.

    지난 역사를돌이켜 보았을때 서울대학교는인재양성과 학문 연구에있어서 국가의

    발전을 선도해 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세계화라는 무한경쟁

    속에서 선진국의 유명대학들과 견주어 손색없는 초일류 대학으로 도약할 시점에 도달

    해 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적 수월성을 확보하고 창조적인 지식을 생산하여

    기념사

  • 우리사회의미래를밝히는일은우리에게주어진시대적사명이자새로운도전입니다.

    지금까지 서울대학교가 하나의 샘물에서 시작하여 커다란 강을 이루었다면, 이제는

    바다로 나아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 세계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세계 일류대

    학으로 웅비해야 합니다. 미래의 발전된 서울대학교를 만들기 위한 우리의 실천적 의지

    에 사회의 따뜻한 애정과 관심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서울대학교의

    발전을견인해오신여러선학( )들께깊은존경과감사의말씀을전합니다.

    이번에 간행되는 서울대학교 60년사는 지난 2년간 편찬위원회가 심혈을 기울여 노력

    한 결과 그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 60년사 간행을 위해 애쓰신 편찬위원회

    위원장을비롯한여러편찬위원과편수원의노고에깊이감사드립니다. 이성과가 21세

    기의 서울대학교와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훌륭한 지침서가 되기를 기대합

    니다.

    2006년 10월 15일

    서울대학교총장

    이장무

    iv

  • 서울대학교는 2006년 10월 15일로 개교 60주년을 맞이한다. 60년은 동아시아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그동안의 발자취를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하나의획기라고할수있다.

    본교는 개교 60주년을 맞이하여 2004년 6월 8일에 부총장을 위원장, 기획실장을 부

    위원장으로 하는‘개교 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추진위원회에서

    는 2005년 2월 24일에 6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서울대학교 60년사를 편찬하기로 하

    고 그 계획을 수립하였다. 2005년 3월 30일 편찬위원장을 비롯한 편찬위원들이 위촉됨

    으로써‘서울대학교 60년사편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조금 늦은 출발이었지만, 곧 편

    수원 및 편수보조원을 선정하고 본부 2층에 편찬위원회 사무실을 마련하여 자료 수집

    을시작으로본격적인편찬작업에착수하였다.

    그동안 몇 차례 편찬위원회를 열어 서울대학교 60년사의 체제와 편찬 방향을 결정하

    였다. 먼저『50년사』까지 사용된 편년체 대신 분류사 체제를 새로 도입하였다. 기존의

    편년체에서는 획일적으로 시기구분이 되어 있어 분야별 특징을 나타내기 힘들었던 점

    이 있었다. 또 시기별로 특정 분야의 비중이 너무 크고 그에 따라 다른 분야의 서술이

    부족하거나 편의적으로 누락되어 버리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분류사 체제를 도입함으

    로써보완하고자하였다.

    또 하나의 특징은 분야별 5부 체제로 하면서 기존에 없던 공간(캠퍼스) 부문을 제1부

    로 추가한 점이다. 공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공간 개념에 대

    한이해가선행되어야각부문들의활동을쉽게이해할수있다고판단하였기때문이다.

    간행사

  • 한편 지금까지 서울대학교의 전사( )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아, 일부 단과대학은

    서울대학교 전체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역사를 일제 강점기 이전의 역사로 소급하여 설

    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60년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서장에서 전사

    부분을 서술하여, 근대 이후 대한제국의 국립대학교 설립 구상과 그것이 일본에 의해

    좌절되고 식민지적으로 개편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로써 한국 근대의 국립대학교

    구상이,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고등 교육 기관을 거쳐, 광복 이후 국립서

    울대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설명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하였다. 이 체계가 우

    리 근대사의 흐름과 각 단과대학의 시원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기를 기

    대해 마지 않는다. 이밖에 독자 친화적인 서술을 지향하고, 서술 내용을 분야별로 체계

    화하고, 공간∙문화∙연구 등 기존에 비교적 소홀히 다루었던 분야에 대한 서술을 확대

    하여, 가독성을높일수있는교사(校 )를만들고자노력하였다.

    편찬위원회는 위와 같은 편찬 방향 아래 좋은 교사를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편찬위원회의 역량 부족, 시간과 자료의 부족 등으로 미진한 점

    도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점은 이후의 교사에서 보완될 것으로 기대하지

    만, 이번 편찬 사업을 이끌면서 교사 편찬실의 상설화의 당위성을 절실하게 느낀 점을

    이 자리를 빌려 밝혀 두고 싶다. 개교 주년을 1~2년 앞두고 편찬위원회를 급히 조직하

    여 황급히 자료 수집에 나서는 방식은 이제 더 이상 반복되지 말아야 함을 절실하게 느

    꼈다. 서울대학교의 커진 살림이 더 이상 이런 방식을 되풀이 할 수 없게 한다. 이제는

    어느 상설기구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기록들을 모아 매년 충실한 연감( 鑑)을

    발행하고 주년이 되면 그것에 근거해 교사를 편찬하는 체제를 만들어야 할 때가 되었

    다. 자료 수집 단계에서 외국의 저명한 대학들이 수십권에 달하는 규모의 교사를 가지

    고있는것에접해부끄러움을금할수없었다.

    이번 60년사가 나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먼저 이 책의 기획부터 시작

    하여 전체 과정에서 전폭적으로 후원해주신 총장님과 기획실장을 비롯한 기획실 관계

    자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편찬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부분인

    자료 수집에 도움을 주신 본부 각 부서와 기록관, 대학신문사, 중앙도서관 등 각 기관

    관계자들께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표지 디자인에 사용할 작품을 제공해주신 미술대학

    교 동양화과 김병종 교수님, 그리고 많은 원고를 넉넉지 않은 시간에도 좋은 책자로 만

    들어주신서울대학교출판부관계자여러분께도감사드린다.

    vi

  • 마지막으로 서장을 공동집필해주신 서울대학교 병원사연구실 전우용 교수와 국방대

    학교 노영구 교수, 그리고 1년 반이 넘는 기간 동안 본서를 집필한 편수원들, 자료 정리

    와부록작업등힘든일을도와준편수보조원들에게감사의말을전한다.

    2006년 10월 15일

    서울대학교 60년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태진

    간행사 vii

  • 기념사 iii

    간행사 v

    서장 1

    제1절 서울대학교의전사: 한국근대의국립대학구상과

    경성제국대학 1

    1) 개항 이후 신교육 기관의 설립 1

    2) 갑오 교육 개혁과 학제의 정비 5

    3) 대한제국기 대학 설립 구상과 그 좌절 8

    4) 일제 강점기 민립 대학 설립 운동과 경성제국대학 설립 13

    5) 경성제국대학의 변천 16

    제2절 서울대학교 60년의 개관 19

    1) 창건과 시련 속의 발전(1946~1960년) 19

    2) 경제 발전과 대학 종합화의 모색(1960~1975년) 26

    3) 대학 종합화와 대학 자율의 진통(1975~1994년) 33

    4) 지식 기반 사회로의 전환과 연구 중심 대학의

    모색(1994~2006년)

    38

    제1장 캠퍼스의변천 49

    제1절 초창기의 캠퍼스 49

    1) 기억의 공간 49

    2) 국립종합대학교의 탄생과 분산된 캠퍼스 56

    3) 파괴와 재건 63

    차례

    제1부공간

  • 제2절 종합캠퍼스의 구상∙건설∙이전 70

    1) 종합화의 구상 70

    2) 관악종합캠퍼스 마스터플랜 78

    3) 종합캠퍼스의 건설과 이전 86

    4) 남겨진 공간 93

    제3절 캠퍼스와 환경 97

    1) 종합화 이후의 캠퍼스 97

    2) 캠퍼스의 확충 104

    3) 미래의 대학, Eco-campus! 114

    제2장 대학의 심장, 도서관 123

    제1절 초창기 도서관 123

    1) 도서관 설립 123

    2) 한국전쟁과 도서관 125

    3) 도서관 정비 129

    제2절 도서관의 종합화와 그 이후 133

    1) 종합화 계획과 관악 캠퍼스로의 이전 133

    2) 종합화 이후의 도서관 136

    3) 도서관과 학생생활 140

    제3절 지식 기반 사회와 도서관 143

    1) 도서관의 변모 143

    2) 전산화 사업의 추진 147

    3) 지식 공유의 장으로 150

    제3장 정보화 155

    제1절 정보화의 추진 155

    1) 정보화의 도정 155

    2) 정보 기반의 구축 159

    제2절 교육, 학술 연구, 행정의 정보화 164

    1) 교육의 정보화 164

    2) 학술 연구의 정보화 168

    3) 행정의 정보화 173

    제3절 정보와 문화 177

    x

  • 1) 캠퍼스 정보 문화 177

    2) 정보화 비전 183

    제1장 운영 체제의 변화와 기구 개편 189

    제1절 국립서울대학교의 설립과 초기의 대학 운영

    (1946~1953년) 189

    1) 국립서울대학교 창건 189

    2) 개교 초의 행정 기구와 운영 체제 192

    3) 정부 수립 이후의 대학 운영 198

    제2절 환도 이후 기구 개편과 대학 운영(1953~1975년) 201

    1) 국립학교설치령에 따른 기구 개편 201

    2) 평의원회의 설치와 운영 204

    3) 서울대학교설치령의 제정과 종합화의 준비 206

    제3절 종합화와 대학본부의 역할 강화(1975~1987년) 207

    1) 종합화와 대학 관리 조직의 강화 207

    2) 1980년 대학 자율화의 시도와 기구 변화 212

    제4절 대학 자율화와 운영의 효율성 추구(1987~2006년) 216

    1) 자율화와 효율성의 확대에 따른 기구 개편 216

    2) 대학 운영 체제의 개선 225

    3) 대학 행정의 효율화와 분권화 231

    제2장 대학 발전 계획의 수립과 추진 237

    제1절 캠퍼스와 대학 운영의 종합화: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 238

    1) 종합화 계획의 수립 과정 238

    2) 서울대학교 종합10개년계획의 수립 240

    3) 서울대학교 종합10개년계획의 추진 242

    제2절 학문의 대학, 민족의 대학, 세계의 대학: 서울대학교

    발전10개년계획 247

    1) 서울대학교 발전10개년계획(1979년) 247

    2) 학사조정위원회의 대학개혁구상 249

    3) 서울대학교 발전10개년계획(1983년) 253

    차례 xi

    제2부운영

  • 제3절 국제 수준의 대학원 중심 대학으로의 발전: 서울대학교

    발전장기계획(1987년) 255

    1) 서울대학교 발전장기계획의 수립 경위 255

    2) 서울대학교 발전장기계획의 내용 257

    3) 발전계획의수정작업과서울대학교2000년대미래상(1995년) 264

    4) 서울대학교 장기발전구상(1998년) 268

    제4절 세계 수준의 종합 연구 대학 지향: 서울대학교

    장기발전계획(2002년) 270

    1) 교육부의 국립대학발전계획(2000년) 270

    2) 블루리본패널(교육개선패널)의 활동 273

    3) 서울대학교 장기발전계획(2002~2011년) 276

    제3장 교수 사회의 변천 285

    제1절 교수 인사 제도 변천과 임용 상황 285

    1) 초창기 교수진과 한국전쟁기의 수난 285

    2) 교수 임용 기준의 법제화와 증원 290

    3) 교수 공개 채용 제도 확대와 재임용제 실시 298

    4) 교수 정년 보장 제도의 시행과 업적 평가 강화 303

    제2절 총장 선출 제도의 변화 325

    1) 이사회의 총장 선임 325

    2) 정부 임명제 하의 교수회 동의권 여부 326

    3) 총장 직선제의 실시 328

    4) 간선제 전환 논의와 학내 구성원 참여 확대 331

    제3절 교수 사회와 교수 단체의 활동 337

    1) 교수회의 활동과 대학 자치 337

    2) 교수협의회 결성과 대학 자율화의 시련 341

    3) 교수협의회를 비롯한 교수 단체의 활성화 345

    제1장 입시 제도의 변화 357

    제1절 초창기‘자율적’입시제도(1946~1961년) 358

    1) 창건과 전입∙입시제도 358

    2) 전쟁 기간 및 환도 후의 입시제도 361

    xii

    제3부교육

  • 제2절 대학입학예비고사와 대학입학자격의 국가 관리

    (1961~1980년) 366

    1) 대학입학자격 국가고시와 대학입학예비고사 실시 366

    2) 대학입학예비고사 개정과 의무 반영 비율의 확대 370

    3) 군 위탁 학사 편입생과 모국 유학생 교육 372

    4) 대학원 입시제도 정비 376

    제3절 대입 본고사 폐지와 모집 정원 급증(1980~1994년) 377

    1) ‘7∙30 교육개혁조치’와 대입 본고사 폐지 377

    2) 졸업 정원제 실시와 모집 정원 급증 382

    3) 논술 고사 시행과 선지원-후시험제 전환 386

    4) 특례 재입학 제도 실시와 정원 외 입학 제도 개편 388

    5) 석∙박사 연계 과정 제도 도입 391

    제4절 대학수학능력시험과 선발 방식의 다양화(1994~2006년) 392

    1)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대학별 고사 392

    2) 고교장 추천제와 특차 전형제 도입 398

    3) ‘무시험 전형’과 수시 모집 실시 402

    4) 지역 균형 선발 전형과 수시 모집 확대 407

    5) 재외 국민 특례 입학제와 정원 외 입학제도 411

    6) 대학원 정원 감축과 후기 모집 실시 413

    제2장 교육 단위의 개편 417

    제1절 개교와‘연립적 종합대학교’(1946~1961년) 418

    1) 개교 당시 교육 기구 418

    2) 전시연합대학과 국립학교설치령 제정 423

    제2절 자연 과학 계열 학과와 특수 대학원 증설(1961~1974년) 428

    1) 대학 정비 시책과 사범대학 축소 428

    2) 근대화 추진과 자연 과학 계열 대학 확충 430

    3) 특수대학원 증설 435

    제3절 종합화와 교육 단위 개편(1974~1994년) 438

    1) ‘교육연구 및 기구조직계획’과 교육 기구 개편 438

    2) 실험 대학 참여와 계열별 모집 444

    3) 종합화 이후 학과 증설과 명칭 변경 449

    차례 xiii

  • 제4절 학부제와 모집 단위 광역화(1994~2006년) 453

    1) 대학원 중심 대학을 위한 학부제 구상 453

    2) 학부제와 모집 단위 광역화 추진과 갈등 459

    3) 학부 대학(University College) 구상과 전문 대학원 설치 469

    제3장 교과 과정의 정비 479

    제1절 초창기 교과 과정(1946~1961년) 480

    1) 창립과 새로운 교과 과정 도입 480

    2) 한국전쟁기 특수 교과목 482

    3) 교육법시행령 제정과 교과 분류 484

    제2절 교과 과정 개편 노력과 교양과정부 설치(1961~1974년) 487

    1) 학사 자격 고시제와 학위 등록제 487

    2) 교과과정연구위원회 활동과 교과 과정 개편 488

    3) 교양과정부 설치와 운영 491

    제3절 실험 대학 참여와 법정 교양 필수 과목 운영

    (1974~1980년) 493

    1) 실험 대학 참여와 교과 과정 조정 493

    2) ‘면학 분위기 조성 시책’과 법정 교양 필수 과목 증가 500

    제4절 법정 교양 필수 과목의 지속과 계절 수업 시행

    (1980~1990년) 506

    1) 신군부의‘수업 충실화 방안’과 학사 운영 강화 506

    2) 이데올로기 비판 교육과 법정 교양 필수 과목 운영 508

    3) 계절 수업과 교양 과목 특별 시험 시행 511

    4) 교과 과정 개선 방안과 실험 과목 개발 514

    제5절 자율화 진전과 기초 교양 교육 강화(1990~2006년) 518

    1) 법정교양필수과목폐지와영역별교양교과과정체제시행 518

    2) 일반 교육(general education) 원칙 강조와 핵심 교양 과목

    신설 521

    3) 기초교육원 설립과 기초 교양 교육 강화 528

    4) 전공 선택의 기회 확대와 학사 관리 엄정화 방안 535

    제4장 장학 제도와 학생 교류 확대 545

    제1절 장학 제도 확충 545

    xiv

  • 1) 초창기 장학 제도 545

    2) 장학 제도 정착 547

    3) 장학 제도 개선 552

    4) 대학원 장학 제도 강화 556

    제2절 국내외 학생 교류 확대 561

    1) 국내 대학 간 학생 교류 561

    2) 외국 대학과의 학생 교류 564

    제1장 연구 활동의 흐름 575

    제1절 초창기 연구 상황(1946~1962년) 576

    1) 해방 직후 학문 연구 분위기 576

    2) 부산 시절의 어려움과 각 학회의 발족 578

    3) 원조를 통한 교육∙연구 기반 재건 581

    제2절 자립적 연구 기반 조성을 위한 진통(1962~1975년) 584

    1) 1960년대 초반 연구 환경에 대한 논란 584

    2) 연구 활성화를 위한 대학 내부의 개선 노력 588

    3) 종합 발전 계획과 연구 여건 강화 모색 592

    제3절 연구 활동의 정상화를 위한 노력(1975~1980년대 말) 597

    1) 캠퍼스 종합화와 대학원 제도 개혁 597

    2) 대학원 중심 대학론의 등장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특성화 시도 602

    3) 1980년대대학원위기론확산과대학원중심대학론의재부상 608

    제4절 연구 중심 대학의 기치와 세계화의 지향

    (1980년대 말~2006년) 613

    1) 대학원 중심 대학의 연구 여건 조성 613

    2) 세계화와 연구 중심 대학의 이상 615

    3) 연구 중심 대학 서울대의 성과와 과제 619

    제2장 연구 여건의 개선 625

    제1절 연구 지원 제도의 정비 626

    1) 연구위원회 발족과 제도 변화 626

    2) 연구처 설치와 연구 행정 합리화 632

    3) 서울대학교 산학협력재단 637

    차례 xv

    제4부연구

  • 제2절 연구비 재원과 규모 638

    1) 초기 연구비 지원(초창기~1975년) 638

    2) 연구비 확충과 다각화(1975~1980년대 말) 645

    3) 대규모 연구비 지원(1980년대 말~2006년) 654

    제3절 교수 연구 업적 680

    1) 교원 확충과 연구 업적의 증가(1962~1980년대 전반) 680

    2) 연구 업적의 급증(1980년대 후반~2006년) 682

    제3장 연구시설의발전 687

    제1절 연구소(원)의 설립과 변화 688

    1) 초창기의 연구소 설립(1946~1974년) 688

    2) 종합화 이후 연구소 제도 변화와 설립 양상(1975~1987년) 690

    3) 연구소(원)의 급증과 통합(1988~2000년) 694

    4) 최근 연구소(원)의 제도 변화(2001~2006년) 704

    제2절 연구소(원)의 운영과 활동 710

    1) 연구소(원)의 운영 710

    2) 연구소(원)의 연구 재원 714

    3) 연구소(원)의 연구 실적 개황 717

    4) 연구소(원) 평가 제도 720

    제1장 대학 문화의 흐름 727

    제1절 낭만적 대학 문화의 형성(1946~1960년) 728

    1) 설립 초기‘서울대생’의 모습 728

    2) 대학 문화와 대학가 형성 731

    3) 과외 활동의 시작 735

    제2절 비판 의식의 성장과 청년 문화의 영향(1960~1975년) 737

    1) 종합화 이전 학생 특성 737

    2) 민족주의 고양과 청년 문화 논쟁 741

    3) 대학가 풍속 변화 743

    4) 축제와 서클 활동의 활성화 746

    제3절 대항 문화(Counter-Culture)와 공동체 문화의 강화

    (1975~1990년) 750

    xvi

    제5부학생

  • 1) 관악 세대의 등장 750

    2) 운동권 문화와 의식화 754

    3) 공동체 문화의 활성화 757

    4) 녹두거리의 형성 762

    제4절 소비 문화의 확산과 대안 모색(1990~2006년) 765

    1) ‘신세대’학생과 대학 문화의 정체성 765

    2) 축제의 다양화 771

    3) 정보 통신 문화의 확산 776

    4) 동아리 활동의 변화와 대안적 학생 활동 780

    5) 서울대생의 일상과 녹두거리 784

    제2장 학생회의변천 791

    제1절 학도호국단 창설과 학생 동원(1946~1960년) 792

    1) 건설학생회 결성과 학도호국단 창설 792

    2) 학도호국단의 활동과 학생 동원 795

    3) 학도호국단 해체론의 확산 798

    제2절 학생회 건설과 단과대학 학생회의 활성화(1960~1975년) 799

    1) 학도호국단 해체와 학생회 건설 799

    2) 학생회 조직과 활동의 어려움 802

    3) 단과대학 학생회와 여학생회의 활동 805

    제3절 학도호국단 부활과 학생들의 반발(1975~1984년) 807

    1) 학도호국단 부활과 학생 활동의 위축 807

    2) 10∙26 사태 이후 학생회 재건 시도 811

    3) 학도호국단의 민주화 814

    제4절 학생회 재건과 대중화(1984~2006년) 816

    1) 학원 자율화 조치와 학생회 재건 816

    2) 학교 당국의 학생회 인정 819

    3) 학생회론과 학생회 선거 821

    4) 학생회 약화와 비운동권 학생회의 등장 825

    제3장 학생 운동의 발자취 833

    제1절 국대안 파동과 초기 학생 운동(1946~1960년) 834

    1) 국대안 파동의 발생 834

    차례 xvii

  • 2) 학생 이념 서클의 등장 837

    3) 유근일 필화 사건과 이강석 편입 반대 운동 839

    제2절‘선도적’학생 운동의 전개(1960~1979년) 841

    1) 4∙19 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 841

    2) 4∙19 혁명 직후 계몽 운동과 통일 운동 845

    3) 6∙3 항쟁과 한일 회담 반대 운동 848

    4) 3선 개헌 반대 운동과 교련 반대 운동 852

    5) 반유신 민주화 운동 856

    제3절‘대중적’학생 운동의 발전(1979~1996년) 862

    1) ‘서울의 봄’과‘서울역 회군’ 862

    2) 5∙18 광주 항쟁과‘무림-학림 논쟁’ 864

    3) 학원자율화조치와 학생 운동의 조직화 867

    4)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10 항쟁 871

    5) 통일 운동과 1991년 5월 운동 873

    6) 공개적 학생 정치 조직의 등장과 5∙18 학살자 처벌 운동 876

    제4절 학생 운동의 다양화와 새로운 전망(1996~2006년) 880

    1) ‘한총련 사태’와 정치 운동의 약화 880

    2) 반( )성폭력 운동의 확산 885

    3) 교육 자치 운동의 활성화 890

    1. 역대기관장명단 899

    2. 현직교수 명단 917

    3. 명예교수 명단 926

    4. 전직교수 명단 933

    5.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960

    6. 통계 961

    7. 연표 1025

    참고문헌 1075

    후기 1095

    xviii

    부록

  • 종합캠퍼스 마스터플랜 공동 작업 분담표 84

    종합캠퍼스 단계별 건설 공사 현황 91

    건물 신축 사업 현황(1986�1996년) 104

    두뇌한국21 대학원전용시설 구축 사업 계획 108

    신축 건물 현황(1996�2005년) 112

    도서관 명칭과 조직의 변화 144

    도서관 시설 현황(2005년 12월 31일 현재) 144

    서울대학교 도서관 전자자료구독비와 총 자료구입비 145

    단계별 장서 확보 계획 146

    서울대학교 정보화 추진 경과 157

    멀티미디어 강의동 강의실∙세미나실 현황 166

    규장각 정보화사업 추진 현황 171

    한국과학재단 지정 전문연구정보센터 173

    행정정보시스템 재구축 로드맵 176

    학내 단위기관 홈페이지 운영 현황(2006년 4월 1일 현재) 178

    컴퓨터 공개 강좌 편성 내용(2006년 여름) 182

    창립 당시 대학본부 기구표 196

    1948년 문리과대학 기구표 197

    1948년 의과대학 기구표 197

    1948년 상과대학 기구표 197

    1953년 대학본부 기구표 202

    표차례 xix

    표차례

  • 1959년 대학본부 기구표 203

    1973년 대학본부 기구표 206

    1976년 대학본부 기구표 210

    1985년 대학본부 기구표 216

    2006년 대학본부 기구표 221

    교직원 현황표(1951년 11월 현재) 290

    1953년 현재 교수 임용 자격 기준 291

    직급별 경력 및 업적 요건(1971년 현재) 296

    교직원 수의 변동 297

    단과대학별 교수 대 학생 비율(1970년 6월 30일 현재) 298

    신규교수 채용 인원(1976~1993년) 300

    명예 교수 추대 현황(~1990년) 303

    단과대학(원)별 신규 교수 임용 상황 306

    신규 임용 교수의 성별 분포와 학위 취득 상황(1996~2005년) 307

    재직교원 최종학위 취득국가 현황(2005년 12월 31일 현재) 308

    교원 현황(2000~2005년) 309

    전임 교수 수, 학생 수와 교수 1인당 학생 수의 변화

    (1987~2005년) 310

    성과급 연구 보조비의 차등 지급 실적(1998~2001년) 317

    기금 교수 현황(1995~2005년) 320

    BK 계약제 교수 임용 상황 321

    각 학년도별 입학 상황(1946~1950) 360

    입학 고사 과목 배점 상황(1974~1980년) 371

    연도별 학사 편입 상황(1961~1976년) 373

    연도별 군 위탁생 취학 상황(1961~1975년) 374

    연도별 재일교포학생 취학 상황 375

    1981학년도 입시 전형 요소와 반영 비율 379

    1981학년도 대학별 정원 및 합격자 현황 381

    1986학년도 입시 전형 요소와 반영 비율 386

    1991학년도 사범대학 입시 전형 요소 및 반영 비율 387

    특례 재입학생 현황(1987~1995년) 390

    정원 외 입학 제도의 종류별 입학 현황(1986~1993년) 391

    xx

  • 1994학년도 입시 전형 요소별 반영 비율 394

    199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영역별 배점 395

    1995학년도 입시 전형 요소별 합격 공헌도의 비 396

    1997학년도 입시 전형 요소별 반영 비율 398

    고교장 추천제 추천 조건과 인원 변화 399

    연도별 고교장 추천제 현황(1998~2001년) 400

    2002학년도 정시 모집 전형 요소별 배점 405

    2005학년도 지역균형 선발전형의 전형 요소별 배점 408

    2005학년도 정시모집 전형 요소별 배점 409

    2005학년도 수시 및 정시 모집 일반전형 모집인원 비율 410

    정원 외 입학 현황(1993~2005년) 412

    2001학년도 박사과정 입학 경쟁률 414

    대학원 특차 모집 연도별 합격자 수(1998~2001) 415

    2007학년도 석사∙박사 통합 과정 전형 요소 및 배점 416

    1960년 2월 27일 현재, 학부 교육 기구 427

    대학 정원 변동 상황(1961~1973년) 432

    종합화 직전의 교육 단위 편제표 434

    연도별 대학원 설치 학과 수(1961~1974년) 437

    1975년 종합화 이후 교육 기구 편성 상황 442

    1974학년도 계열별 모집 내역 445

    1974학년도 과별 모집 내역 446

    기초 과정 학생의 대학별 소속(1975학년도) 447

    1994년 현재 교육 기구 상황 452

    대학원과정 학생 정원의 확대 계획과 실제 입학 정원 455

    학사과정 학생 정원의 감축 계획과 실제 입학 정원 455

    자연과학대학∙공과대학∙농과대학 학사과정의 학부제 진행 과정 462

    2006년 현재 교육 기구 편제 464

    전공 예약제 시행 분야 및 인원(2002~2006년) 468

    2002~2006학년도 정시 모집의 모집 단위 470

    기초 과정 학점 배분표(1974학년도 기준) 495

    과목 영역별 최저 이수 학점 498

    부전공 이수 졸업자 현황(1976~1985년) 500

    표차례 xxi

  • 계절 수업 실시 현황(1984~1990년) 513

    교양 과목 특별 시험 응시자 및 합격자 현황(1984~1990년) 514

    1993학년도대학별영역별교양과목최저이수학점배분표 520

    단과대학별 기초 교양 교육 과정 이수 규정 527

    2006학년도 1학기 교양 과정 종류별 교과목 수 및 강좌 수와 비율 529

    관악초청 강좌 현황 534

    복수 전공 학생 수 현황(1998~2005년) 538

    2002학년도 연합 전공 과정 현황 539

    연도별 연합 전공 지원자 및 최종 선발 인원(2003~2006년) 540

    연도별 전과, 전학 현황 541

    학사 경고, 학사 제명 받은 학생 수 543

    연도별 계절 수업 현황 544

    1959년도 각종 장학금 지급 통계표 547

    장학금 수혜자 상황(1960~1974년) 548

    서울대학교 대여 장학금 연도별 지급표 549

    장학금 수혜자 상황(1975~1980년) 551

    2002~2003학년도 대학원 장학금 지급 및 학비 감면 현황 555

    2004~2005학년도 장학금 지급 현황 558

    2006학년도 1학기 현재 교내∙외 장학금 종류 559

    국내 대학 간 학생 교류 상황 562

    2006년 상반기 현재 국내 대학과의 학생교환협정 체결 현황 563

    1997년 외국 대학과의 학생 교류 현황 565

    2005년 교환 학생 파견 현황 569

    국제학술교류 협정 체결 현황 570

    해방 이후 약 10년 간 학회 창립 현황(1946~1955년) 580

    1960년대 초반 본교 학술연구비 585

    1960년대 초반 학술 연구 조성비 585

    연구 교수 인원(1967~1974년) 589

    단과대학 간행 학술지(1950~1960년대) 590

    연구소 간행 학술지(1960년대) 591

    교수 해외 파견 상황(1961~1975년) 591

    교수 해외 파견 상황(1966~1975년) 592

    xxii

  • 대학원과 대학원 학생 추이(1965~1975년) 597

    대학원 입학 정원 증원 상황(1979년) 606

    1987년도 발전장기계획의 연구 활동 및 대학원 문제점 분석 612

    연구처 학술 활동 지원 현황(1998~2004년) 635

    학술연구용품 수입대행업무 실적(1988~2004년) 636

    본교 예산 중 학술연구비 지원 현황(1953~1964년) 639

    문교부 학술연구조성비 지급 상황(1963~1975년) 641

    학문 분야별 학술연구조성비 지급 상황(1966~1972년) 642

    단과대학별 문교부 학술연구조성비 지급 상황(1973~1974년) 643

    서울대학교 학술연구재단 연구비 지급 상황(1968~1976년) 644

    과학기술처 조사∙연구개발 사업비 지급 상황(1967~1970년) 644

    성곡문화재단 연구비 지급 상황(1969~1975년) 645

    학술 연구비 지원 총액(1976~1989년) 646

    문교부 학술연구조성비 지원 상황(1976~1989년) 647

    문교부 정책과제연구비 지원 상황(1977~1989년) 648

    문교부 기초과학(학문)분야 육성연구비 지원 상황(1977~1990년) 648

    문교부 대학원 중점육성연구비 지원 상황(1979~1986년) 649

    한국학술진흥재단 연구비 지원 상황(1983~1989년) 649

    한국과학재단 연구비 지원 상황(1978~1989년) 650

    본교 학술 연구비 구성(1978~1989년) 650

    학술연구재단 목적사업비 지출 상황(1978~1985년) 651

    학술연구재단 학술활동보조비 지급 건수(1978~1985년) 652

    과학기술처와 상공부 연구비 지원(1985~1989년) 652

    산학협동재단 연구비 지원 상황(1976~1989년) 653

    한국학술진흥재단 학문 분야별 연구비 지원 상황(1986~2001년) 654

    본교 연구비 총액(1988~2005년) 655

    주요 재원별 학술연구비 지원 상황(1990~2005년) 657

    본교 연구비 수주 실적(2001~2005년) 658

    단과대학(원)별 연구비 총액 659

    단과대학별 교수 1인당 평균연구비(1992~1994년) 660

    단과대학(원)별 교수 1인당 평균연구비(1998~2004년) 661

    교육부 세부 과제별 연구비 지원 662

    표차례 xxiii

  • 한국학술진흥재단 세부 과제별 연구비 지원(1987~1998년) 664

    BK21 사업비 지원 현황(1999~2004년) 666

    본교에서 집계한 한국과학재단 세부 과제별 연구비 지원

    현황(1989~1998년) 667

    한국과학재단의 세부 과제별 연구비 지원 현황(1991~1994년) 668

    한국과학재단의 세부 과제별 연구비 지원 현황(1995~1999년) 668

    한국과학재단의 본교 연구비 지원 현황(2003년) 669

    한국과학재단의 본교 연구비 지원 현황(2004년) 670

    서울대학교 우수연구센터 지원 현황(1990~2004년) 671

    분야별 우수연구센터 지원 수(1990~2004년) 672

    서울대학교 우수연구센터 지원 현황(1990~1999년) 672

    서울대학교 우수연구센터 지원 현황(1995~2005년) 673

    과학기술부, 산업자원부 교원 연구비 지원 현황(1986~1998년) 674

    과학기술부 지원 창의적연구진흥사업단 선정 현황(1997~2004년)675

    한국과학재단 외 정부 지원 연구센터(단) 현황(2002~2003년) 676

    서울대학교 발전기금과 기타 기관 연구비(1987~1998년) 677

    내부 연구비 재원별 구성(1998~2005년) 678

    교내 연구사업 지원 실적(2002~2004년) 679

    교수 연구 업적(1962~1984년) 680

    교수 논문 발표 상황(1962~1984년) 681

    교수 저서 출판 상황(1962~1984년) 681

    교수 번역 활동 상황(1962~1984년) 681

    교수 연구 업적 상황(1988~2003년) 683

    교수 단행본 출간 및 학술 논문 발표 상황(1988~2005년) 683

    교수 해외논문 발표 상황(1988~1994년) 684

    주요 단과대학(원) SCI(E) 논문 수(1999~2003년) 684

    연구소 설립 현황(1946~1973년) 689

    종합화 이후 연구소 소속 및 위상 변동 690

    종합화 이후 연구소 명칭 및 위상 변동 691

    연구소 설립 상황(1975년 종합화~1987년) 692

    연구소 설치 상황(1987년) 693

    연구소 현황 추이(1990~2000년) 694

    xxiv

  • 연구소 설립 추이(1988~2000년) 694

    연구소 증설 상황(1988~1998년) 695

    공학 계열 공동연구소 용역연구비 수혜 현황(1988~1998년)698

    인문사회과학 분야 주요 본교직할연구소 용역연구비 수혜

    현황(1990~1996년) 698

    연구소 승격 상황(1989~1997년) 700

    연구소 명칭 변경 상황(1989~1997년) 701

    연구소 통합 상황(1995~1999년) 702

    연구소 설치 현황(2000년 현재) 703

    연구소 지위 변경(연구소에서 제외) 704

    본부직할연구소의 주관 대학 변경 상황(2001년) 705

    연구소 명칭 변경 상황(2001년 이후) 705

    연구소 통폐합 상황(2001년 이후) 706

    연구소 현황 추이(2000~2005년) 706

    연구소 신설 상황(2001~2004년) 707

    통합연구원 산하 소속연구소 현황(2006년) 708

    연구소 설치 현황(2006년 8월 현재) 709

    연구소(원) 연구 인력 추이(1986~2003년) 711

    연구소(원) 연구 인력 추이(2004~2006년) 712

    연구소(원) 시설 개황(1989~2004년) 713

    지원기관별 연구소 연구비 수혜 상황(1985~2004년) 716

    법정 연구소의 용역 연구비 수주 실적(1989~1998년) 717

    1960년대 연구소 간행 학술지 718

    본부직할연구소 학술지∙논문집 발간 현황(1999년 현재) 719

    연구소 연구 실적 상황(1986~2004년) 720

    제1단계 이공계 연구소 평가(1994년) 721

    제2단계 인문∙사회∙예체능계 연구소 평가(1995년) 722

    연구소 분류별 배점 비교(2005년) 724

    신입생 성비(1969~1979년) 751

    신입생 주소지 상황(1975~1979년) 752

    생활 수준 지각( 覺) 상황(1974~1979년) 752

    신입생의 학비 충족도(1987~1999년) 766

    표차례 xxv

  • 여학생 신입생 비율(1991~2005년) 766

    학생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 767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조직도 794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예∙결산 내역(1982년) 815

    xxvi

  • 그림 1-1-1 1976년 12월 16일, 마로니에 공원에 세운‘서울대학교 유지 기념비’ 50

    그림 1-1-2 대학천‘세느 강’과‘미라보 다리’ 50

    그림 1-1-3 동숭동 대학가 플라타너스 길 51

    그림 1-1-4 강의실만큼이나 자주 들르던 학림다방 51

    그림 1-1-5 서울대학교의 상징이던 마로니에 나무 52

    그림 1-1-6 동숭동 캠퍼스 중앙도서관 52

    그림 1-1-7 문리과대학 캠퍼스에 세워진‘4∙19탑’ 53

    그림 1-1-8 동숭동 법과대학 본관 정문 옆‘정의의 종’ 53

    그림 1-1-9 상과대학의 야외 휴게소, ‘향상림’ 54

    그림 1-1-10 사범대학 교정에 서 있던‘4∙19 기념 동상’ 54

    그림 1-1-11 음악대학 분수대 55

    그림 1-1-12 공릉동 공과대학의 명물이던 플라타너스 숲길 55

    그림 1-1-13 ‘국대안’발표 기사가 실린 1946년 7월 14일자『동아일보』지면 56

    그림 1-1-14 동숭동 문리과대학 캠퍼스 전경 57

    그림 1-1-15 문리과대학 교사 58

    그림 1-1-16 법과대학 교사 58

    그림 1-1-17 미술대학 교사(동숭동 캠퍼스 시절) 59

    그림 1-1-18 연건동 의과대학 캠퍼스 전경 60

    그림 1-1-19 공릉동 공과대학 캠퍼스 전경 60

    그림 1-1-20 수원 농과대학 캠퍼스 전경 61

    그림 1-1-21 종암동 상과대학 캠퍼스 전경 61

    그림차례 xxvii

    그림차례

  • 그림 1-1-22 을지로 5가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교사 62

    그림 1-1-23 소공동 치과대학 교사 62

    그림 1-1-24 음악대학 교사(연건동 캠퍼스 시절) 63

    그림 1-1-25 전시인 1951년 부산 동대신동 대학본부 64

    그림 1-1-26 1951년 부산 소개로 세운 문리과대학 가교사 64

    그림 1-1-27 을지로 6가 약학대학 교사 65

    그림 1-1-28 연건동 옛 경성의학전문학교 건물에 들어선 수의과대학 65

    그림 1-1-29 1953년 10월 15일, 서울대학교 환수식 67

    그림 1-1-30 전쟁 중 불타 버린 농과대학 제1호관 68

    그림 1-1-31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의한 원조로 복구, 증축 공사 중인 농과대학 제1호관 69

    그림 1-1-32 서울대학교 소속기관 조감도(『서울대학교 요람』1959�60』) 72

    그림 1-1-33 1960년대 초‘종합5개년계획’에 따른 본부 중심 지역의 종합 계획도 74

    그림 1-1-34 1960년대 동숭동∙연건동 캠퍼스 전경 75

    그림 1-1-35 이전을 거부하고 증축 공사 중인 중앙공업연구소 76

    그림 1-1-36 종합6개년계획에 따른 서울대학교 메인 캠퍼스(동숭동-연건동) 배치도 78

    그림 1-1-37 종합10개년계획의 메인 캠퍼스 부지 확보 계획도 80

    그림 1-1-38 1968년 8월,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부지로 발표한 태릉 일대 조감도(계획안) 80

    그림 1-1-39 골프장이었던 관악산 종합캠퍼스 부지 81

    그림 1-1-40 ‘교육연구 및 기구조직분과위원회’제1차 보고서에 수록된 캠퍼스 배치도 82

    그림 1-1-41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응용과학연구소의『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계획 수립 보고서』(1970년) 83

    그림 1-1-42 최종 결정한 종합캠퍼스 마스터플랜의 캠퍼스 배치도 86

    그림 1-1-43 1971년 4월 2일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기공식 87

    그림 1-1-44 종합캠퍼스 기공식 안내 팸플릿「종합캠퍼스 기공」(1971년) 87

    그림 1-1-45 종합캠퍼스 조성시 건설하였던 인문대학 건물 처마 88

    그림 1-1-46 관악 캠퍼스 부지와 주변 환경의 변천 과정(1971년 12월~ 1975년 2월) 89

    그림 1-1-47 1975년 1월 20일, 관악 종합캠퍼스로 이전을 위해

    동숭동 캠퍼스 교문을 나서는 수송 차량 92

    그림 1-1-48 1975년 2월 28일, 관악 종합캠퍼스로 이사를 마친 후

    동숭동 캠퍼스 현판을 떼는 모습 93

    그림 1-1-49 1973년 9월 3일 주택공사에서 발표한‘문리대 아파트 조감도’94

    그림 1-1-50 옛 동숭동 캠퍼스의 대학본부 건물 96

    xxviii

  • 그림 1-1-51 1984년 5월, 옛 문리과대학 교정에 조성한 마로니에조각공원 97

    그림 1-1-52 1975년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전경 98

    그림 1-1-53 1980년대 초 강의실 풍경 101

    그림 1-1-54 환경대학원 유병림 교수 등이 제안한『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시설장기발전계획』(1980년) 101

    그림 1-1-55 ‘풀리지 않는 삼각관계(?)’ 102

    그림 1-1-56 『서울대학교 발전장기계획 캠퍼스부문계획』(1987년)에

    따른 연건 캠퍼스 계획도 103

    그림 1-1-57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시설확충종합계획』(1992년)의 공학관 구상도 106

    그림 1-1-58 『서울대학교 연구공원종합계획』(1994년)의 서울대학교 연구공원 조감도 107

    그림 1-1-59 1992년 9월 농과대학 이전을 요구하는 수원 캠퍼스 농과대학 학생들109

    그림 1-1-60 『관악캠퍼스 발전관리기본계획』(1994년)의 지구 상세

    계획에 따른 캠퍼스 지역 구분 115

    그림 1-1-61 『서울대학교 캠퍼스부문장기계획』(2001년)의 관악 캠퍼스 권역 설계도 116

    그림 1-1-62 늘어나는 건물, 줄어드는 녹지 공간 117

    그림 1-1-63 ‘에코캠퍼스’의 첫걸음, ‘걷고 싶은 거리’지도 121

    그림 1-2-1 동숭동 문리과대학 캠퍼스의 도서관 전경 124

    그림 1-2-2 1956년도『서울대학교 요람』에 실린「서울대학교 소속 기관 조감도」 124

    그림 1-2-3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평면도 125

    그림 1-2-4 전쟁 당시 소개지 부산에서 임시로 개관한 도서관 전경 126

    그림 1-2-5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 분관 공학도서관 130

    그림 1-2-6 1972년 패독(James A. Paddock)이 설계한 관악

    캠퍼스의 새 도서관 단면도 134

    그림 1-2-7 미국의 캠퍼스용역단 DPUA가 작성한 캠퍼스 배치도 134

    그림 1-2-8 1975년 1월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는 도서관 136

    그림 1-2-9 관악 캠퍼스 중앙도서관 전경 137

    그림 1-2-10 1975년 8월 27일자『대학신문』에 실린 도서관 중앙 통로 사진 141

    그림 1-2-11 1981년 경제학과 학생 김태훈의 투신자살 시위 이후

    쇠창살을 친 도서관 창문 143

    그림 1-2-12 1994년 3월 24일 심악문고 기증식 147

    그림 1-2-13 도서관 업무 전산화를 위해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

    SORLARS 초기 화면 148

    그림차례 xxix

  • 그림 1-2-14 도서관의 일반인 개방 문제를 다룬『대학신문』만평 151

    그림 1-2-15 2004년 10월 14~15일 도서관 문제 해결 방안을 위해 열린 토론회152

    그림 1-3-1 1980년대 초 컴퓨터 터미널실 156

    그림 1-3-2 1990년 8월 23일 서울대학교 근거리 전산망 개통 156

    그림 1-3-3 2005년 6월, 서울대학교 슈퍼컴퓨터 3호기가 세계

    51위임을 증명하는 인증서 161

    그림 1-3-4 서울대학교 네트워크 구성도 162

    그림 1-3-5 학생회관 내 모바일 서비스 센터 163

    그림 1-3-6 24시간 정보 검색이 가능한 I. Space 내부 163

    그림 1-3-7 멀티미디어 강의동(83동) 대형 강의실 165

    그림 1-3-8 e-Learning 시스템의 구성 요소 167

    그림 1-3-9 중앙도서관 홈페이지 168

    그림 1-3-10 규장각 홈페이지 169

    그림 1-3-11 박물관 홈페이지 170

    그림 1-3-12 농생명과학연구정보센터 홈페이지 172

    그림 1-3-13 서울대학교 홈페이지 178

    그림 1-3-14 보안관제실 전경 181

    그림 1-3-15 서울대학교 정보화 비전 184

    그림 2-1-1 부산 피난 시절의 학생과와 교무과 199

    그림 2-3-1 정치경제학 전공 교수 영입 요구 대자보 300

    그림 2-3-2 교수 윤리 헌장을 발표하는 정운찬 총장 323

    그림 2-3-3 윤천주 제13대 총장 취임식(1975년 6월 12일) 327

    그림 2-3-4 김종운 제19대 총장 취임식 330

    그림 2-3-5 제20대 총장 선거 투표장(1995년) 330

    그림 2-3-6 제20대 총장 선거 개표 모습(1995년) 330

    그림 2-3-7 제24대 총장 선거(2006년 5월 10일) 336

    그림 2-3-8 서울대학교 교수협의회 총회(1980년 3월 4일) 343

    그림 3-1-1 1955학년도 입학 시험 실시 풍경 365

    그림 3-1-2 1955학년도 입학 시험 합격자 발표 광경 365

    그림 3-1-3 학사 과정 모집 정원과 지원자 추이(1953~1960년) 366

    그림 3-1-4 학사 과정 모집 정원과 지원자 추이(1961~1974년) 369

    그림 3-1-5 1973학년도 기계설계학과 입학시험 광경 371

    xxx

  • 그림 3-1-6 대학원 입학 정원 변화(1968~1980년) 376

    그림 3-1-7 학부 모집 인원 추이(1986~1993년) 385

    그림 3-1-8 1993학년도 입시 원서 접수 마지막날, 원서접수 창구가

    설치된 체육관 앞 풍경 388

    그림 3-1-9 학부 입학 정원 추이(1994~2006년) 401

    그림 3-1-10 체육관에서 행해진 2006학년도 입학식 광경 410

    그림 3-1-11 대학원과정 정원(입학생 기준) 증감 추이(1980~2006년) 413

    그림 3-2-1 1975년에 열린 아카데믹 플랜에 대한 회고와 반성 좌담회 441

    그림 3-2-2 계열별 모집을 실시하던 1979학년도의 과배정 발표 광경 449

    그림 3-2-3 「서울대학교 장기발전계획」의 학부 대학, 일반 대학원,

    전문 대학원 개념도 472

    그림 3-3-1 1975년 대형강의실 수업 광경 499

    그림 3-3-2 기초교육원과 교수학습개발센터가 함께 입주해 있는 61동 전경 531

    그림 3-3-3 2006년 대형강의실 수업 광경 538

    그림 3-4-1 학사과정 장학금 수혜율 및 1인당 수혜액 추이(1990~2006) 554

    그림 3-4-2 2005학년도 2학기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장학금 수여식 557

    그림 3-4-3 2006학년도 2학기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장학금 수여식 전체 기념촬영 557

    그림 3-4-4 1997년 2월 24일 국립대학교간 학술교류협정 체결식 장면 561

    그림 3-4-5 학생 단기 해외 연수 사업 실적 566

    그림 3-4-6 대학원생 장기 해외 연수 현황 567

    그림 4-1-1 미네소타 프로젝트 책임자 슈나이더(Arthur Schneider)와

    공대∙농대∙의대 학장(1955년) 581

    그림 4-1-2 『조선왕조실록』오대산사고본 인도인수식(2006년 7월 14일) 621

    그림 4-2-1 서울대학교 산학협력재단의 연구 채널 638

    그림 4-2-2 교육부와 과학기술부의 사업 구분 모형 666

    그림 5-1-1 1956년 종합체육대회 입장식 736

    그림 5-1-2 1960년대 축제의 카니발 모습 746

    그림 5-1-3 제1회 대학축전 포스터 757

    그림 5-1-4 IFF에 참여한 외국인 학생들 775

    그림 5-3-1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모습 849

    그림차례 xxxi

  • 제1절 서울대학교의 전사( ): 한국 근대의 국립대학 구상과경성제국대학

    1) 개항 이후 신교육 기관의 설립

    동서양을막론하고전근대의학문 체계는 대체로분석적이기보다는통합적이어서선

    험적으로 전제된 우주론, 세계론에 기반하여 세상 만물을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하였다.

    중세 동아시아의 학문 사상계를 지배했던 유교 역시 같은 맥락에서“일물( )이라도

    지( )치 못함은 유자( )의 치( )”라는 태도를 견지해 왔다. 그런데‘수기치인( 己

    )’을 중시한 주자 성리학은‘수제치평( )’에 이르는 입문( )의 도( )를

    ‘격물치지(格 )’에서 찾았다. 이는『대학( )』이 가르친바 유자( )의 요무(

    )였던바, 주자 성리학은 그런 점에서 중세적 사유 체계로서는 드물게 경험적, 실증적

    태도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신성( )에 대한 불가지론적 태도가 일반화된 유

    럽에서는‘과학 혁명’을 거친 17세기 이후에 들어와서야 수집과 분류, 배열과 종합의

    과정을거치는분석적접근법이일반화되었다.

    서장

    1

  • 유럽지성계의변화가본격화된 17세기말, 조선의지성계역시청( )을매개로서구

    학문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8, 19세기를 거치면서‘실사구시( 求 )’를 중

    시하는 학문적 태도가 힘을 얻었고, 그 과정에서 유자의 관심 분야가 확장되는 한편 특

    정 분야에 집중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주자 성리학적 세계관의 틀 내에서나마 학문의

    분야별 독립 경향이 맹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9세기 중반에는『박물

    신편( )』, 『해국도지( 國 )』, 『영환지략( )』등서구의신과학을소개

    한 책자들이 유입됨으로써 조선 유자들의 서구 지식에 대한 이해도가 크게 높아졌다.

    근대의 학문과 교육이 지식의 누적 체계로서의 학제와 지식의 분산 체계로서의 분과에

    기반을 두고 정립되어 왔다고 할 때, 조선 후기에는 이미 분과화의 경향이 상당 정도로

    진행되었던 셈이다. 학문과 교육을 중시해 왔던 조선 성리학의 전통에 덧붙여 조선 후

    기 지식계가 이루어 낸 성과는 서구의 근대적 대학 교육 제도를 도입하는 데 유리한 조

    건으로작용하였다.

    조선 조야( )의 지식인들이 고도로 전문화된 학문 체계와 고등 교육이 결합된 서

    구의 근대적 대학 교육 제도에 대해 구체적 정보를 얻게 된 것은 1881년에 일본으로 조

    사시찰단을 파견한 이후의 일이었다.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세관 사무 시찰을 담당했

    던 이헌영은 일본 문부성 관할의 각급 학교는 물론 농상무성과 육군성, 해군성, 공부성

    산하의 특수학교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소개하였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는

    이미 법학부, 이학부, 문학부, 의학부로 구성된 도쿄대학이 설립되어 있었고, 그밖에 경

    외(京 ) 대학이 7, 공사립 중학이 784, 공사립 소학교가 28,025교에 달하는 상태였다.

    한편 조사시찰단의 수행원 일부는 일본에 남아 신식 교육 기관에 입학하거나 미국으로

    옮겨 유학하기도 하였다. 유길준, 유정수, 윤치호는 게이오기주쿠(慶 ) 및 도진샤

    ( )에 입학했고, 김양한, 손붕구 등의 수행원들 역시 일본이나 미국의 대학에 입학

    하였다. 1883년경에 출간된 것으로 보이는『만국교육설략( 國敎 )』은 서구 교육

    제도에 관한 개략적인 내용과 더불어 일본 내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고등보통학교,

    사범학교, 대학교 등의 세부적인 법령 규칙도 수록하였다. 이 책에는 도쿄사범학교, 도

    쿄여자사범학교, 도쿄대학 등의 학제, 학생 및 교원 수, 교과 과정, 각종 비품의 구비 상

    황, 도서관 및 구비 도서 현황 등도 빠짐없이 정리되어 있어, 이 무렵에는 이미 일본이

    채택한학제및대학교육에대해체계화된정보를갖추고있었음을알수있다.

    조사시찰단 파견 반년 후, 정부는 신식 무기 제조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청국에 대규

    모 유학생단을 파견하였으며, 그와 별도로 국내에 신식 교육 기관을 설치하기 시작하였

    2

  • 다. 그 첫 번째가 1881년 5월에 창설된 별기군이었다. 오군영에서 선발된 별기군은 일

    본인 교관에게서 서양식 군사 훈련을 받는 한편으로 제한적이나마 외국어 및 기타 서양

    지식을 전수받았다. 별기군 창설로 시작된 신식 군관 양성 과정은 임오군인폭동 후에도

    계속된 군제 개혁을 통해 신식 군대 양성 과정으로 발전되었다. 이어 미국과 국교를 수

    립한 직후인 1882년 말에는 동문학( )을 설립하고 영어 교육을 시작하였다. 또

    1885년에는 서양식 병원으로 설립한 제중원에 의학당을 부설하고 학도를 모집, 영어와

    기초의학을가르쳤다.

    조선 정부가 새로운 교육 제도를 구상하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참고가 된 것은 1883

    년 미국에 파견한 보빙사의 보고였다. 보빙사 일행은 미국 체류 중 매사추세츠 주에 있

    는 공립학교와 대학을 방문하였으며 워싱턴에서는 교육국장으로부터 각종 교육 관련

    자료를 기증받아 국내로 가지고 들어왔다. 귀환 후 부사( ) 홍영식은 고종에게 미국

    교육 체제를 본받아 교육 개혁을 추진할 것을 상주하였던바, 이를 계기로 1884년 9월,

    고종은 푸트(Lucius H. Foote) 미국 공사를 통해 미국 정부에 군사 교관 및 왕립 영어

    학교 교사, 그리고 왕실 농장 책임자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정부가

    이 요청에 따라 헐버트(Homer B. Hulbert), 길모어(George W. Gilmore), 벙커(Delzell

    A. Bunker) 등 유니온신학교 졸업생 3명을 교사로 선발하여 조선에 보낸 것은 1886년

    9월의 일이었고, 조선 정부는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육영공원을 설립하였다. 육영

    공원은 비록 영어 학교로 출범하였지만, 학생들은 구래의 역관 자제가 아니라 고관의

    자제나 그들이 추천한 유생들로 구성되었고, 정부 또한 이 학교를 대학으로 발전시킬

    구상을 갖고 있었다. 국왕은 이 학교에 대해“언어, 문자뿐만 아니라 농상(農 ), 의학

    ( ), 공기(工技), 상무( ), 이용( ), 후생( ) 등 각 방면의 기술 분야를 두루

    설치하여 제각기 체계를 갖추도록 명”하였고, 교사들 역시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세계

    지리, 정부 조직, 공공 재정, 산업, 교육, 종교, 군사학 등을 모두 포함시켰다. 미국인 교

    사들은 이 학교를 왕립 대학(Royal University)이라 불렀는데, 이는 학교 설립과 관련한

    외교적 교섭을 담당한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llendorff)가 국왕의 의중을 그

    렇게전한때문이었을것이다.

    그런데 1880년대 해관세나 객주 분세 등 외국 무역과 관련한 세수를 기반으로 신설

    된 대개의 신문물 도입 기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육영공원 역시 1880년대 말부터 극

    심한 재정난에 빠져들었다. 임오군인폭동 이후 청국의 조선 속방화( ) 정책이 본

    격화하면서 정부의 재정 주권이 심각하게 침해되었던 것이 근본 이유였다. 길모어가 재

    서장 3

  • 계약을 앞두고 봉급 인상을 요구하다 사직한 것이 1888년이었고, 1891년 제3기 계약

    시에는 벙커만이 교사로 남았다. 학생들 역시 이 신교육 기관에 대해 별다른 열의를 보

    이지 않았다. 연소한 현직 관리들로 구성되었던 좌원( )은 설립 후 얼마 되지 않아

    유명무실해졌고, 1889년부터는 아예 관직이 없는 젊은 선비들만을 학생으로 받아들였

    다. 1894년 2월, 계약만료일을몇달 남겨두고벙커가사임하자육영공원은사실상폐

    지 상태에 이르렀다. 갑오개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894년 7월경까지도 육영공원의 명

    칭은 존재하였으나, 이 무렵 해군무관학교 교사 영국인 허치슨(W. du. F. Hutchison)에

    게인계되어한성영어학교로개편되었다.

    한편조선정부가미국에교사파견을요청해두고있던 1885년 8월에는일본인사쿠

    라이( )라는 자가 김홍집을 만나 대학교 설립을 권유하였다. 일본 공사관은

    그의 대학교 설립 제의가 조선 내에서 김옥균 일파의 세력을 복구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고 분석하였는데, 실현 가능성이 낮은 제안이기는 하였으나 대학교 교육을 통

    해 새로운 정치 세력을 육성한다는 구상은 김홍집 등에게 상당한 시사를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1888년에는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가 국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1) 소학교,

    중학교를 설립하여 6세 이상의 남녀로 하여금 모두 입교하여 수학하도록 할 것, (2) 장

    학교( 校)를 설립하여 한문 혹은 언문으로써 정치, 재정, 내외 법률, 역사, 지리 및

    산술, 이화학대의( ) 등의서( )를역( )하여소장( )의관인(官 )을가르

    치고혹은팔도에서장년( 年)의사( )를징모( )하여이들을가르친다. 그업( )이

    이루어짐을 기다려 과거 시험으로써 이들을 시험하여 문관에 채용할 것’등을 제시한

    바 있었다. 이는 근대 교육 제도의 핵심인 의무 보통 교육 제도에 기초한 대학 제도의

    창설을제안한것으로서, 그취지는갑오교육개혁과정에서상당정도수용되었다.

    그런데 개항 이후 조선 정부와 조야의 지식인들이 서구의 신학문과 신학제, 특히 대

    학 제도에 보인 관심은“부국강병”을 위한 실용적 지식과 인재의 양성에 중점을 둔 것

    이었다. 그들에게 서구의 유니버시티(university) 칼리지(college) 개념은『대학( )』

    이 가르치는“수제치평의 도”에 자연스럽게 용해되었다. 그에 따라 대학교는 신문물에

    통달한 지식 관료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되었던 바, 육영공원에서 연소한 관리

    및관료예비군에게신학문을가르친것은대학교육의실험이었다고해도좋을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조선 정부의 대학 구상은 돌출적인 성격을 면하기 어려웠다. 우선 초

    등 보통 교육에서 대학 교육에 이르는 누적적 지식 전수 체계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었

    4

  • 다. 정부는 빠른 시일 내에 서구의 신지식과 기술을 도입하여 강병(强 )과 식산( )

    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하려 하였기 때문에 기존 교육 체계의 전면적 개편 없이 제한된

    분야에서 대학 교육의 형식만을 실험적으로 도입하는 데 그쳤다. 그에 따라 전통적인

    관리 임용 제도와 신교육 기관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새로운 대학을“수기치인의 학”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중인들에게 특화되어 있던 잡

    학을전수하는기관정도로보았고육영공원의실패는그에말미암은것이었다.

    둘째로 개항이후 국가주도의 근대화 정책이추진되는과정에서대학은공장이나병

    원, 인쇄소 등과 병렬되는 일종의 신문물 실험 기관으로 자리매김되었고 그 때문에 수

    단으로서의 의미 이상을 갖지 못하였다. 당시 개혁 주도 세력이 견지한 동도서기론(

    器 )은 서양 학문과 사상 전반을 학습의 대상으로 삼는 데에 심각한 제약 요인이

    되었다. 그 탓에 근대 대학의 본질적 속성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즘이 자리 잡을 여지

    는 거의 없었고 실용적 지식에 치중한 기능적 대학관(觀)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기능적

    대학관은 후발국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후 한국의 대학 교육에

    는상당한부담을남겨주었다.

    2) 갑오 교육 개혁과 학제의 정비

    1894년 7월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빌미로 출병한 청군에 대응하여 군대를 파견한 일

    본은 그 달 10일, 일본 공사 오토리( 圭介)로 하여금 남산 노인정에서 내아문 독판

    신정희 및 협판 김가진, 조인승 등과 조선의 내정 개혁 문제에 관해 회담하도록 하였다.

    이 회담에서 오토리는 전문 5조 27개 항의 내정 개혁 방안 강목을 제시하였는데, 교육

    제도 개혁과 관련해서는 ① 시세를 짐작하여 학제를 신정( )하여 각 지방에 소학교

    를 설립하며 자제를 교육케 할 것, ② 소학교의 설립 준비함을 기다려 점차 중학 및 대

    학을 설립할 것, ③ 학생 중 준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외국에 유학시킬 것의 3개 항을 제

    시하였다.

    당시 오토리의 개혁 방안 강목은 사안에 따라 10일 내에 처리할 것, 6개월 내에 처리

    할 것, 2년 내에 결행할 것 등으로 나뉘었는데, 교육에 관한 항목은 모두 시급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였다. 조선 정부가 이 권고안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자, 일본군은 7월 23

    일(음력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인질로 삼은 후 군국기무처를 신설, 개혁

    서장 5

  • 에 착수토록 하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7월 30일, 군국기무처에서는 국정 전반에

    대한 개혁 방안을 마련하였는데, 국내의 교육, 학무 등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학무아문

    을 신설하고 그 산하에 총무국, 성균관 및 상교서원사무국( 校 局), 전문학무

    국( 局), 보통학무국( 局), 편집국, 회계국의 6국을두도록하였다. 이중

    보통학무국은 소학교와 사범학교에 관한 사무를, 전문학무국은 중학교와 대학교, 기예

    학교, 외국어 학교 및 전문학교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교육 개혁안

    은 비록 급조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반 보통 교육의 토대 위에 중등 교육과 대학 교육을

    연속적, 누적적으로 배치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어 교육, 전문 교육, 특수 교육을 각각

    따로 설정함으로써 제도상으로는 일단 완비된 모양을 갖추었다. 특히 관리 재교육 기관

    이자 최고급 교육 기관이었던 성균관은 단지 선현의 사묘( )와 경적(經 ) 등을 보수

    하는 사무만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격하되어 교육 기능이 배제되었다. 당시 군국기무처

    에서는 아예 성균관을 폐지하고 바로 대학교를 설치하는 방안을 논의했는데, 소학교조

    차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대학을 설립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에 따라 일단 보

    류되었다고한다.

    그런데 이 때 대학 설립을 보류한 것이 신학문에 대한 기초 교육이 미비하다고 판단

    한 때문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 무렵 제중원 의사로 있던 에비슨(Oliver R. Avison)은

    일본인 교수진으로 채워지는 대학이 설립될 경우 조선의 독립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본

    박영효가 군국기무처의 대학 설립 계획을 유보시키고 왕후를 설득하여 별도의‘사립대

    학’을 설립하려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왕후가 이에 찬동하여 자금을 내놓자 박영효는

    언드우드(Horace Grant Underwood)로 하여금 미 선교부의 사업인 것처럼 위장하여

    대학 설립 계획을 진척시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악(북악산) 기슭에 부지를 마련하

    고 건물 신축과 교수진 확보 준비까지 진행하고 있던 차에 기밀을 알아차린 일본이 박

    영효를 모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게 만듦으로써 대학 설립안을 수포로 돌렸다고 하였

    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Horton Lillias) 역시 비슷한 내용을 증언하고 있다. 그녀

    는 1895년 2월 2일엘린우드(F. Elinwood)에게보낸편지에서, 박영효가언더우드와스

    크랜튼(William B. Scranton)에게 새로 설립할 대학에서 일본인들을 배제한다는 원칙

    하에 비밀리에 선교사들을 활용한‘국립대학’설립을 제안했다고 썼다. 또한 그에 소요

    되는자금 3만달러는국왕이마련하되, 일본인들이눈치채지못하도록미선교부의사

    업인 것으로 위장하며, 대학 설립이 마무리된 후에 가서야 왕립 대학임을 밝힐 것이라

    고 하였다. 요컨대 고종과 박영효 등은 일본이 지배할 가능성이 큰 관립 대학을 바로 만

    6

  • 들기보다는 미국 선교사들의 원조 하에 독립적인 왕립 대학을 만들고자 했던 것인데,

    이계획은 1895년 7월박영효가역모혐의를받아재차망명함에따라무산되었다.

    일본이 고종의 대학 설립안을 언제쯤 눈치 챘는지는 알 수 없으나 1895년 1월의「홍

    범 14조」에는“國 廣 遣 國 技 (나라 안의 총명하고 준수한

    젊은이를 널리 유학시켜 외국의 학술과 기예를 배우게 한다)”라는 조항이 들어갔고, 이

    어 그 해 5월 양반 자제 192명이‘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

    기주쿠, 세이죠학교( 校), 사관학교 등에 입학하였다. 이 일은 거의 일본 공사 이

    노우에( )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다. 각 학교마다 유학생 수용의 규정이 다소 달랐

    던 것 같기는 하나, 게이오기주쿠가 당시 학부대신 이완용과 맺은 유학생 위탁 계약에

    따르면, ① 조선국 학부는 매년 일정한 학생을 일본 도쿄 게이오기주쿠에 유학시키고,

    ② 유학생은 초년( 年)에 300명을 보내고 그 이듬해부터 학생을 파견하는 일은 서로

    연락한 후에 시행하기로 하며, ③ 유학생의 비용은 1인당 20엔씩을 유학생 파견 전에

    게이오기주쿠에 보내기로 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 계약안에 대해 당시 재일 유학생 친

    목회는“이는 다수 학생을 외국인 감독의 손에 맡기는 일이며 재권( 權)을 포기하는

    일”이라고 지탄하였는데, 이는 이 유학생 파견 사업이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 사업

    의일환이라는점을정확히포착한데서나온것이었다. 제1기관비유학생은고종의러

    시아 공사관 이어( ) 이후의 정세 변화 등으로 인해 지속되지 못하고 1896년 12월

    전원 계약 해제로 대다수 유학생이 귀국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대한제국 선포 후에

    도 일본에 관비 유학생을 파견하는 사업은 지속되어 1897년에 64명, 1898년에는 47명

    이 선발되었지만, 이 때의 유학생 파견은 대한제국 정부의 신문물 도입 정책과 관련된

    것으로서제1기의관비유학생과는그취지가크게달랐다.

    당시 고종과 일부 관료들이 일본의 조선 고등 교육 장악에 대해 우려를 갖고 있던 상

    황에서, 일본은 조선에 따로 대학을 세우는 것보다는 영민한 젊은이들을 자국으로 데려

    가 가르치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관비 유학생 제도는 조선에 일본식 대학을

    세우지 않고도 친일적 지식인 관료를 양성하는 방안이었으며, 아울러 대학 설립이나 기

    타 교육 개혁에 소요되는 재원을 유학생 파견으로 전용함으로써 그를 지연시키는 방책

    이기도하였다.

    박영효가 제안하고 고종이 승인했던 왕립 대학 설립안은 최종적으로 무산되었지만,

    갑오 교육 개혁 과정에서 마련된 학제 개편안은 보통 교육 및 중등 교육 부문에서는 구

    체적인성과를내었다. 1894년 7월에군국기무처에서마련한교육개혁방안에따라우

    서장 7

  • 선 서울에 소학교를 설립하여 7세 이상의 남아를 교육하겠다는 고시가 발포되었다. 이

    고시가 나온 지 두 달여 뒤인 1894년 9월 18일 교동에서 사범학교와 부속 소학교가 개

    교하였다. 소학교령이 공포된 것은 그로부터 1년 가까이 지난 1895년 7월 19일이었으

    며, 이보다앞서같은해 4월 16일에는‘한성사범학교관제’가공포되었다. 이들관제공

    포를 계기로 교동에 설립되었던 학교는 한성사범학교와 부속 소학교로 개편되었다. 관

    립 소학교가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1895년 8월부터였고, 1898년까지 모두

    9개가 설립되었다. 소학교령에서 부군( 郡)이 설립하도록 규정된 공립 소학교는 1896

    년전국적으로 38개가설립되었고, 1900년경에는 50여개교로늘어났다.

    소학교 졸업자를 수용하기 위한 중등 교육 기관으로 관립 중학교(나중의 경기중고교)

    가 설립된 것은 1900년 10월이었다. 소학교의 수업 연한은 심상과( 科)가 3년, 고등

    과가 2년으로서 총 5개년이었기 때문에, 1895년에 설립된 소학교의 졸업생이 진학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관립 중학교의 개교는 한편으로 학제상 최고 교육 기관으로

    대학교가 설립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전제가 구비된 것을 의미하였다. 관립 중학교의

    최초 졸업생이 1904년에 배출되었기 때문에, 이 무렵까지 대학이 설립되면 갑오 교육

    개혁 당시에 구상한 학제안이 완전히 실현되는 셈이었다. 이밖에 갑오 교육 개혁에서

    제안한 특수학교들도 축차로 설립되었다. 법관양성소 설치를 포함하는‘법부관제’가

    반포된 것은 1895년 3월 25일이었고, 같은 해 5월 10일에는‘외국어학교관제’가 반포

    되었다. 또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이어( ) 직전인 1896년 1월에는 칙령 제2호로‘무

    관학교관제’가 반포되었다. 이로써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로 이어지는 기본 학제와 중

    등 정도의 전문 교육 기관이 병립하는 교육 제도가 마련되었는데, 이 교육 제도는 대한

    제국선포이후에도큰변화없이그대로지속되었다.

    3) 대한제국기 대학 설립 구상과 그 좌절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고종은 전제 황권을 강화하는 한편, “구본신참

    (舊 )”의 원칙하에자력근대화를위한제반사업을적극적으로추진하였다. 교육

    부문에서는 갑오 교육 개혁 과정에서 마련된 학제를 그대로 승계하는 한편, 상공학교,

    의학교(이상 1899년), 광무학교(� 校), 전무학교( 校), 우무학교( 校)(이

    상 1900년) 등 각종 전문학교 관제를 잇따라 반포하여 적극적으로 신기술과 신학문을

    8

  • 도입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군사, 의학 등 일부 분야에서 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

    를구체화해갔다.

    대한제국 정부의 대학교 설립 구상을 담은 최초의 관제는 1899년 7월 6일의‘원수부

    관제’였다. 관제 제2관 제2조 군무국 분장 사항 제5항은‘육해군 대학교와 육해 측량에

    관한사항’이었는데, 이는장기적으로원수부산하에육해군대학교를설치하겠다는뜻

    을 표현한 것이다. 아울러 제4조 검사국 분장 사무에서‘각 병학교( 校)의 교육에 관

    한 사항’을 규정하였는데, 군대 내에 병학교에서 육해군 대학교로 이어지는 교육 체계

    를 마련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때 바로 육해군 대학교 설립이 추진된 것은 아

    니었지만, 이듬해 3월 원수부관제가 개정될 때에도 관련 규정을 그대로 존치해 둠으로

    써대학설립에대한변함없는의지를표명하였다.

    원수부관제와 거의 같은 때에 공포된‘의학교규칙’에도 대학교 설립과 관련된 내용

    이 포함되었다. 이보다 앞서 1899년 3월 24일 칙령 제7호로‘의학교관제’가 발포되었

    는데, 이관제에서는의학교의수업연한을 3년으로정해두고, 학과및정도( )와기

    타 규칙은 학부대신에게 위임해 두는 것으로만 규정함으로써 의학교가 전체 학제상에

    서 어떤 위치를 점할 것인지는 따로 밝히지 않았다. 다만 관제 전문( )에서“우리나

    라( 國)에 각종 학교를 대략 설치하였으나 의학교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아”라 하여 애

    초에는 외국어 학교나 사범학교 등 전문 교육을 실시하는 중등 정도의 학교로 구상했던

    듯하다.

    그런데 학부대신에게 위임된 의학교규칙은 관제 반포 후 5개월가량이 지난 1899년 7

    월 5일에야 공포되었다. 이 규칙은 의학교 운영의 세부 사항을 담은 것이지만, 관제가

    확정하지 않았던 의학교의 학제상 위치에 대해서도 새로운 구상을 담았다. 규칙 제1관

    제3조는“수업연한 3개년은속성과니학과를간이적요(簡 )로주( )하고국내의

    술이 발달한 후에는 연한을 갱정(� )하여 심절( )한 술업( )을 교수함이라”고

    하였고, 제4관 제2조는“입학을 원하는 자는 중학교 졸업장이 유( )하고 …… 단, 현금

    간만 중학교 졸업생이 무( )하므로 문산( )이 초유( )하고 재지( )가 총명한

    자를 특시허입( )함이라”고 하여 당장은 속성을 주로 하는 전문학교의 지위로

    설립하되,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는 대학으로 승격시키겠다는 의도를 내비쳤다. 이 규

    칙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당시 중학교 졸업을 입학 자격으로 규정한 학교로는 의학교

    가 유일하였다는 점이다. 갑오 교육 개혁에서 고등학교에 대한 별도 규정이 없었기 때

    문에 중학교 졸업 자격을 명시하였다는 것은 의학교의 학제상 지위를 대학교에 비정하

    서장 9

  • 고있었음을의미하는것이다.

    의과 대학에 대한 명시적 표현은 다음해인 1900년 11월에 내부령 제27호로 공포된

    ‘의사규칙’에 담겼다. 이 규칙 제2조는“의과 대학과 약학과에 졸업 증서가 유( )하여

    내부시험을경(經)하여인가를득( )한외( )에의업( )을행( )치물( )할사( )”

    라 하여 의사의 자격을 의과 대학과 약학과 졸업생으로 한정하였다. 앞의 의학교관제에

    서는 의학교를 졸업한 자에게 의술 개업 인허장을 부여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 규칙

    은 의학교를 잠정적이나마 의과 대학에 준하는 것으로 해석한 셈이다. 의학교가 개교한

    지 2년 뒤인 1901년에는 의학교 부속 병원이 개원하였다. 이로써 의학교는 2년 간의 이

    론교육과 1년간의임상교육을실시하는의학전문기관으로서의면모를갖추었고, 대

    학에준하는교육기관으로서의위상을확보하였다.

    관립의학교의위상이 대학교에준하는것이었기때문에, 관제 및 규칙에 나타난 운영

    방침을 통해 대한제국기 국립대학 구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우선 교수진은 원칙적

    으로 내국인만으로 구성할 계획이었다. 관제 제10조와 제11조는 외국인 교관의 임용을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경우에 따라 외국인을 고용할 수는 있되, 외국인 교관은

    교수만 담당할 뿐 학생에 대한 지도 감독의 권한은 부여하지 않는 것으로 하였다. 둘째,

    교육비는 전액 국고에서 지급하도록 하였으며, 셋째, 학생의 입학 자격은 중학교 졸업

    생으로서 소정의 시험에 합격한 자로 하되 합격한 경우에도 추천인과 보증인을 세우도

    록 하였다. 이는 국비 무상 교육에 대한 안전장치로서 학생이 중도에 퇴학할 경우 보증

    인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조치였다. 넷째, 중도 퇴학한 학생은 다른 관∙사립학교에 입

    학할 수 없음은 물론 관리로도 서용하지 못하도록 하여 학업의 지속성을 보장하도록 하

    였다. 다섯째, 학사 관리를 철저히 하여 매월, 매학기, 매학년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으

    며낙제생은진급시키지않거나심한경우출학( )하도록하였다.

    한편 이 무렵에는 언론에서도 대학 설립을 촉구하기 시작하였다. 황성신문은 1899년

    9월 7일자 논설에서 유신( ) 이래로 소학교, 사범학교, 외국어 학교, 무관학교, 법관

    양성소, 의학교 등이 잇따라 설립되어‘천인지제( )에 달( )한 학과를 확지(

    )하였으니’이를 기반으로 태학( : 성균관을 말함—필자)을 근대적 대학교로 개편

    할필요가있음을역설하였다. 그렇지만의학교는중학교졸업생이배출된 1904년이후

    에도 의과 대학으로 승격하지 못하였다. 1900년의 흉작으로 인한 재정난에 따라 각급

    학교에 대한 예산 지원이 곤란해졌고, 그 같은 상황에서 학생들이 규칙을 무시하고 무

    관학교 등으로 전학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 더불어 입학생 모집에도 차질이 빚어져

    10

  • 1900년 이후로는 입학 정원을 채우지 못해 추가 모집이 일상화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내국인으로구성된교수진을갖추지못한데있었던것으로보인다.

    애초 의학교는 내∙외과를 비롯한 각종 의술을 전문으로 교수하는 곳으로 규정되었

    는데, 당시 서양 의학을 교수할 만한 한국인 의사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그에 따라 우선

    서울에 찬화의원( )이라는 개인 병원을 내고 있던 일본인 후루시로(古 溪)를

    교관으로 초빙하였는데, 그가 해부학 강의 시의 오류로 인해 학생들의 배척을 받아 물

    러나게 되자 다시 일본 군의(軍 ) 고다케( )를 고빙하여 의학 교육을 전담시켰

    다. 의학교에 서양 의학을 가르칠 수 있는 한국인 교관이 고용된 것은 1900년 4월의 일

    로서, 이 때 일본 자혜의원 의학교를 졸업한 김익남이 새로 부임하였다. 그 후 1900년

    10월 외국어 학교, 의학교, 중학교 졸업생을 모교에 수용하는 건이 공포되어 1902년 제

    1회 졸업생들이 모두 의학교 교관의 자격을 얻었지만, 이는 명색뿐인 것으로서 실제로

    교육을 담당한 이는 김익남 뿐이었다. 두 번째 한국인 교관은 러일전쟁 발발 이후인

    1904년 12월에임용된유병필이었다.

    의학교 교육이 나름대로 성과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교수진을 구성할 수 없

    게 된 데에는 러일전쟁 전후의 국내외 정세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를 둘러싸

    고 러일 간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짐에 따라 대한제국 정부는 군대의 강화에 주력하였

    고, 더불어 군진(軍 ) 의료에도 관심을 집중하였다. 1898년 2월 고종황제는 군부에서

    관할하는 육군병원 설치를 재가하였는데, 이 병원은 1901년 11월에 병원 건축에 착공

    하였고 1902년 8월에 옛 비변사 자리로 이전하였다. 육군병원은 1903년 2월 10일 육군

    위생원이라는 독립 기관으로 승격되어 대한제국 육군의 의무( )를 총괄하게 되었는

    데, 이 무렵부터 한의들로 구성되어 있던 군 의료진이 의학교 졸업생으로 교체되기 시

    작하였다. 1904년에는대대적인군제개편을단행하면서의학교내유일한한국인교관

    이었던 김익남을 군부 의무국장으로 임명하여 의학교 출신 군의들을 총괄 지휘하도록

    하였다. 김익남의 뒤를 이어 의학교 졸업생 유병필이 의학교의 새 한국인 교관으로 임

    명되었지만, 김익남과같은권위를지닐수는없었을것이다.

    한편교육부문에대한통감부의간섭이본격화하기직전인 1905년 5월, 황제는내장

    원경 이용익으로 하여금 러일전쟁을 계기로 폐교된 전동의 아어학교( 校) 자리에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이 학교는 2년제의 법률학전문과와 이재학전문과

    ( 科)를 두었으며, 그 해 9월 한성법학교 학생 22명을 인수하여 법률학전문

    야학과를 신설하였다. 1907년 1월에는 법률학전문과와 이재학전문과를 각각 법학과와

    서장 11

  • 경제과로 개칭하고 수업 연한을 3년으로 연장하였는데, 궁극적으로는 이 학교를 대학

    으로발전시킬구상을하였던것으로보인다. 그러나 1907년 3월에이용익이사망하고,

    1909년에는 학교 경영을 인수한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마저 투옥됨으로써 이 학교는 천

    도교로이관되어버렸다.

    을사늑약이후 서울에 설치된통감부는대한제국정부가추진해 온 자력 근대화 사업

    의 성과들을 와해시키고, 그를 식민지적으로 재편하는 데 주력하였다. 교육 부문에서는

    국∙공립학교 체제의 근간을 뒤흔들어 고등 전문 교육 기관을 폐쇄, 축소하고 초등 교

    육 및 기초적인 실업 교육 기관 위주로 재편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선교사들

    에 의해 설립된 사립학교를 제외한 상당수 사립학교가 폐쇄되었고, 관립학교는 소학교,

    중학교를 제외하고는 전부 개편, 또는 폐교되었다. 1906년 성균관을 대학으로 승격시

    키려는 대한제국 정부의 시도를 좌절시킨 통감부는 1906년 8월에 새로운 학교령을 제

    정하면서 각 외국어 학교를 관립한성외국어학교로 통합하였고, 관립농상공학교를 수원

    농림학교와 경성상업학교, 경성공업전습소로 개편하였다. 무관학교는 군대해산 이후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다가 1909년 결국 폐지되었다. 관립의학교 역시 1907년 대한의원

    교육부로개편되었다.

    일본은러일전쟁직후 대한제국의의료 및 의학교육 체제에도개입해 들어오기시작

    하였다. 통감부는 1906년 2월 관립 병원이던 광제원 원장에 사사키( )를,

    같은 해 7월에는 적십자병원 원장에 요시모토(吉 )를 각각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광

    제원, 의학교 부속 병원, 적십자병원 등 대한제국의 3대 신식 의료 기관을 모두 장악하

    였다. 통감부는 나아가 이들 3대 의료 기관을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1906년 4월

    이토( )는 적십자병원에 나머지 두 병원을 합설하는 안을 내었는데 일본 군의총

    감 사토( )가 내한(� )한 후에는 세 병원을 통합하여 하나의 최신식 대형 병원을

    만드는 안으로 선회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의원 설립 계획이 추진되었으며, 병원 부지

    는 황실과의 협의를 거쳐 옛 경모궁 터로 결정되었다. ‘대한의원관제’가 반포된 것은

    1907년 3월 13일이었으며, 동시에 의학교도 대한의원 교육부로 개편되어 교관과 학생

    전원이 이관되었다. 1908년 10월에는 대한의원 본관 건물이 완공되어 병원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대한의원 교육부는 1908년 1월 대한의원 의육부로 개칭되었다가 강제 합

    병 직전인 1910년 1월, 다시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로 개편되었다. 이 때 의학교의 교육

    연한이 4년으로 확정되어 실질적으로는 대학에 다름없는 교육 기관이 되었지만, 연구

    와 교육이 우위에 서는 학교 부속 병원 체제가 아니라 진료 중심의 병원 중심 체제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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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으로써교육과연구의비중은상대적으로낮게취급되었다.

    통감부는 외국인이 설립한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대해서는 외교적 문제를 고려하여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으나 국∙공립학교에 대해서는 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