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정복하라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있다 여리고성은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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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위대한 3솔라(3solas) 중 하나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이다.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또 이 믿음 이 겨자씨만큼 하더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 고 한다(마 17:20). 그리고 ‘이스라엘 중 아무 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마 8:10)는 말씀만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다(약 2:17). 어떤 때는 믿음 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는 것 같 기도 하다. 스스로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의 심나기도 하다. 이렇게 믿음의 다양한 측면을 볼 수 있다. ‘구원하는 믿음’ 또는 ‘참된 믿음’이란 말씀에 계시된 모든 진리에 대한 확실한 지 식만 아니라 복음에 대한 신뢰이다( < 하이델베 르크 교리문답서 > 21문). 칼빈은 믿음을 “우리 를 향한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확고하고 확 실한 지식”이라 정의한다( < 기독교강요 > 3권 2 장 7항). 이 지식은 당연히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 을 말하는데, 이것은 ‘사도신경’에 포함된 사 항들이다(22문). 이런 지식이 우리 마음에 계 시되고 심정에 보증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믿음은 지성적(mind)이라기보다 심정적(heart) 이다(3권 2장 36항). 믿음은 로마 가톨릭이 말 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삶 속에서 증명되 어야 하는 것이다. 또 루터파가 주장하는 의 지적인 측면이 아니라 실천적이다(3권 24장 3 항). 한 마디로 말하면, 삶 속에서 체험되어 갖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⑵ 어떤 자들이 믿게 되나? 복음 선포가 이 뤄지더라도 어떤 이는 믿지만 그렇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령의 사역이 불성실하거 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미완성이라기보 다 거절하는 자의 잘못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거절한다는 의미다. 결국 거절하는 자는 선택 함을 받지 못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 돌드레 히트 신조 > 2장 6항). 당사자의 의지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선물’이 라고 부른다(엡 2:8).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에 만사 가 믿고자 하는 의지와 믿는 행위를 인간 안 에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선물이다” ( < 돌드레히 트 신조 > 3~4장 14항). 이와 유사하게 칼빈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하도록 하는 의지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 온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역사하신 결과이기 때문이다( < 기독교강요 > 3권 2장 33항)라고 한 다. ⑶ 연약한 믿음이 있나? 믿음을 성령 하나 님의 선물이라면 그것을 받은 자들에게 불완 전함과 불안이 왜 이뤄지는 것일까?( <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 > 14장 3항) 이에 대한 답 변을 위해 < 기독교강요 > 3권 17~28항을 읽어 보도록 하자. ‘육체의 잔재 속에 잠자고 있던 불신앙이 내면에 있는 믿음을 공격’하기 때문 이다(3권 2장 18항). 공격에 취약한 이유는 무 지 때문이고, 이 무지가 불신앙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에 의심과 불안감이 나타나는 것 이다(3권 2장 20항). 이것을 극복하고 승리하 기 위해서는 ‘숱한 공격들을 막기 위해 하나 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믿음을 유지해야 한다’ (3권 2장 21항). 이러한 내적 투쟁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 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두렵고 떨리 는 심정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겸손하기 위함이다. 궁극적인 이유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3 권 2장 23).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 인간의 어 떠한 노력이나 행위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무상적 은혜로 이뤄졌음을 삶을 통해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믿음을 견고하게 붙잡으려면 믿음을 붙잡고 있는 돌쩌귀가 있다. 하나는 복음에 나타난 약속을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3권 2장 16 항). 이 두 가지를 굳게 붙잡고 있으면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승리하면 살 것이다. 이 일 을 위해 그분의 말씀 공부와 연구는 필연적 이다. ⑷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은 ‘없다’ . 성숙한 믿음과 미성숙한 믿음도 ‘없다’ . 이런 질문들 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억지 주장하는 내용들 이다. 그들은 믿음을 양적으로 표현한다. 무엇 을 하는 것을 보니 믿음이 좋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믿음은 그러한 기준을 허용하지 않는 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믿음을 동의로 주장할 뿐 아니라 교회가 제시하는 것을 신뢰하고 따르면 믿음이 있는 것이라 기만술을 쓰고 있다. 이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참된 교회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순전한 말씀 선포가 이뤄지 지 않는 교회의 지침을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 원하고 바라는 바가 기적같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있다고 공적으로 간증하거 나 예화를 드는 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가시 적인 현상은 단지 믿음의 준비일 뿐 구원과 는 무관하다(3권 2장 5항). 그런 믿음은 맹목 적인 믿음이고 시작일 뿐이다. 여러 삶을 통 해 참과 거짓이 증명되어야 한다. 라은성 교수의 쉬운 교리해설 (23) 오직 믿음으로①:구원하는 믿음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 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질게 길었던 광 야의 40년 생활을 마감하고, 드디어 하 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젖과 꿀이 흐르 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행군을 시작 하였습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합니다. 눈앞에 있는 요단강도 기 적 가운데 건넜습니다. 그런데 소문으 로 들었던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만납 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해야 할 여리고 성을 여호수아 6장 1절에 “여리 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 라”고 말합니다. 굳게 닫힌 성문은 이 스라엘 백성들의 희망이 막힌 것을 상 징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이스라엘의 힘 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을 만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에서 만난 ‘여리고성’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 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일상 에서 만나는 문제들이 마치 여리고성과 같이 희망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우 리 앞에 감당하기 어렵고 도무지 해결 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제들 앞에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믿음이 우리에게 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평범한●순종이●능력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구체적 으로 행동지침을 말씀해주십니다. 여호 수아 6장 2절 이하를 보면 매일 한 번 씩 성 주위를 돌되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한 순종은 평범한 것입니 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은 태어나면 서부터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걸어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 게 특이하고 비범한 것을 요구하지 않 습니다. 여리고성보다 더 크고 높은 성 을 쌓거나, 군사훈련을 하라는 생소한 방법을 명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걷 던 그 걸음을 주님 앞에 드리라고 말합 니다. 평범한 것에 순종하라고 말씀하 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큰 능 력을 체험하려면 영웅적이거나, 특별한 순종을 해야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늘 일상적인 삶에서의 순종입니 다.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말씀에 순종 할 때 눈앞에 가로막은 여리고성은 무 너집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하인 들에게 명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포도 주가 떨어지자 물을 채우라고 명하십 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인들 이 하는 가장 주된 일이 두 가지입니 다. 장작을 패는 것과 물 긷는 일입니 다. 물을 긷는 일은 하인들이 밤낮 하 는 일이었습니다. 매일 물을 길어오는 하인들에게 물을 채우라고 명하신 것입 니다. 그래서 하인들은 “내가 매일 물 을 길어 부었지만 아무 일도 안 일어났 는데요? 물을 붓는다고 떨어진 포도주 가 해결되겠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 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 종하였습니다. 그때 물이 변하여 포도 주가 된 것입니다. 여리고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40년 동안이나 돌아다녔던 순례자입니 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게 돕니다. 하나 님의 약속을 믿고 돕니다. 13바퀴를 돌 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 하실 것을 믿고 돕니다. 하나님의 명령 은 평범했습니다. 평범한 말씀에 순종 할 때 불가능의 여리고는 무너집니다. 목사로서 고백할 것이 하나 있습니 다. 제 삶에 있어서 주님 앞에 순종할 때 크거나 특별한 일을 두고 실패한 경 우보다 일상적인 삶에서 실패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매일 성경을 묵상하고 기 도하며 예배하는 일상의 삶이 가장 중 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실패 때문에 우 리가 주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죄 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 다. 우리의 순종이 크고 대단해서 주님 이 위대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 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에 큰 일을 행 하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작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우리의 진실한 삶을 드릴 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침묵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7일에 걸쳐 13번 도는 동안 지켜야 할 독특 한 명령이 있습니다. 침묵하라는 것입 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이 명령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추가해서 한 것입니다. 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침묵하라 했을까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은 감사와 찬송이 아 니라 불평과 원망의 역사였습니다. 하 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는 감격과 감사로 먹었습니다. 하지만 시 간이 지나면서 불평으로 바뀝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원망과 불평의 본 성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여리고 는 정말 난감하고 두려운 존재였습니 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광야 40년을 기 적으로 이끌어 오시고 요단강을 하나님 의 능력으로 건넜다 할지라도 여리고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제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 기들 입장에서 불평할 수 있습니다. 오 래 전부터 시작되었던 불평과 원망과 의심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이스라엘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불평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 로 광야에서 다 죽게 된 것을 여호수아 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불평하는 백성 의 특징을 잘 알기에 여호수아는 침묵 하도록 하였습니다. 때로 불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 어보면 너무나 옳습니다. 설득력도 있 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감합니다. 왜냐 하면 현실에 근거한 말이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믿음에서 나온 말은 아닙니 다. 부정적인 말은 사람의 마음에 급속 도로 퍼집니다.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 다. 하지만 불평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불평하지 못하도록 침묵 하라 명령합니다. 침묵은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집중할 수 있 게 해 줍니다. 우리에게 분별력을 갖게 해줍니다. 나의 기대와 욕망의 소리를 잠재우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해줍니다. 그들의 침묵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음 성을 잘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대 부분의 문제들은 조용히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 많습니다. 현대인들 은 침묵하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침묵 의 필요합니다. 최근에 우리 입을 통해 서 쏟아낸 말들을 살펴보십시오. 그 말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 는 말이 있었습니까? 나로 하여금 하나 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눈앞에 전개 되고 떠오르는 생각 너머에 계신 하나 님을 바라보게 한 말들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분노와 상한 감정 등 주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의 말들뿐이었습니까? 그 말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었습니 까? 입술의 소리가 믿음의 소리였는지 를 돌아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침묵 중에 걸으면 서 무엇을 묵상했을까요? 여리고를 바 라보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는 사실, 그리고 언약궤와 나팔 그리고 제사장들의 모습에서 지난날 불가능했 던 일들을 가능하게 하셔서 오늘에 이 르게 하신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았을 까요? 광야의 40년을 돌아보니 정말 하 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농사짓지 않고 길쌈을 하지 않았는데 그 많은 백성들 이 굶지 않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 니다. 하나님의 능력이고 기적인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침묵하는 동안 그들 은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 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분명히 가야하고 해결되어 야 할 일이 나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해 결하지 못해서 포기해야만 하는 장대한 여리고를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 씀은 믿음으로 여리고성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오늘 나의 삶 속에 큰 절망으 로 다가와 있는 그 문제를 향해, 주님 은 여리고가 무너진 것처럼 분명히 해 결될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내 인생 의 여정에, 가정에, 그리고 조국의 교회 에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여리고와 같 은 크고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여리 고를 무너뜨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 성의 믿음이 우리 믿음이 된다면, 장대 한 성의 무너짐과 같이 삶의 여리고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제 좌절과 절망 의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종교개혁자 칼빈은 “믿음이란 세상 에 대하여 눈을 감고 하나님에게 귀 기 울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제 현실을 보던 나의 눈을 들어 하나님 약속을 바 라보십시오. 그리고 그의 말씀을 들으 십시오.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끝까 지 그리고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침묵하며 불신앙의 소리가 아닌 주님 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나를 향한 주 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때에 우리 앞에 서있는 여리고성은 하나님의 힘으 로 무너집니다. 여리고성은 하나님 힘으로 무너집니다 일상의 삶에서 말씀에 순종할 때 눈 앞의 장애는 사라져 라은성●교수 총신대 · 역사신학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 니 성이 무너졌으며 (히 11:30) 23 2016년 6월 28일 화요일 제2063호 설교 이 주일의 설교 / 믿음으로 정복하라(히 11 : 30 , 수 6 : 1 ~ 7) 김종수●목사 안산 섬기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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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위대한 3솔라(3solas) 중 하나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이다.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또 이 믿음

이 겨자씨만큼 하더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

고 한다(마 17:20). 그리고 ‘이스라엘 중 아무

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는 말씀만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다(약 2:17). 어떤 때는 믿음

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는 것 같

기도 하다. 스스로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의

심나기도 하다. 이렇게 믿음의 다양한 측면을

볼 수 있다.

⑴ ‘구원하는 믿음’ 또는 ‘참된 믿음’이란

말씀에 계시된 모든 진리에 대한 확실한 지

식만 아니라 복음에 대한 신뢰이다(<하이델베

르크 교리문답서> 21문). 칼빈은 믿음을 “우리

를 향한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확고하고 확

실한 지식”이라 정의한다(<기독교강요> 3권 2

장 7항).

이 지식은 당연히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

을 말하는데, 이것은 ‘사도신경’에 포함된 사

항들이다(22문). 이런 지식이 우리 마음에 계

시되고 심정에 보증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믿음은 지성적(mind)이라기보다 심정적(heart)

이다(3권 2장 36항). 믿음은 로마 가톨릭이 말

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삶 속에서 증명되

어야 하는 것이다. 또 루터파가 주장하는 의

지적인 측면이 아니라 실천적이다(3권 24장 3

항). 한 마디로 말하면, 삶 속에서 체험되어

갖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⑵ 어떤 자들이 믿게 되나? 복음 선포가 이

뤄지더라도 어떤 이는 믿지만 그렇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령의 사역이 불성실하거

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미완성이라기보

다 거절하는 자의 잘못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거절한다는 의미다. 결국 거절하는 자는 선택

함을 받지 못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돌드레

히트 신조> 2장 6항).

당사자의 의지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선물’이

라고 부른다(엡 2:8).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에 만사

가 믿고자 하는 의지와 믿는 행위를 인간 안

에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선물이다”(<돌드레히

트 신조> 3~4장 14항). 이와 유사하게 칼빈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하도록 하는 의지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

온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역사하신 결과이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3권 2장 33항)라고 한

다.

⑶ 연약한 믿음이 있나? 믿음을 성령 하나

님의 선물이라면 그것을 받은 자들에게 불완

전함과 불안이 왜 이뤄지는 것일까?(<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 14장 3항) 이에 대한 답

변을 위해 <기독교강요> 3권 17~28항을 읽어

보도록 하자. ‘육체의 잔재 속에 잠자고 있던

불신앙이 내면에 있는 믿음을 공격’하기 때문

이다(3권 2장 18항). 공격에 취약한 이유는 무

지 때문이고, 이 무지가 불신앙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에 의심과 불안감이 나타나는 것

이다(3권 2장 20항). 이것을 극복하고 승리하

기 위해서는 ‘숱한 공격들을 막기 위해 하나

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믿음을 유지해야 한다’

(3권 2장 21항).

이러한 내적 투쟁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

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두렵고 떨리

는 심정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겸손하기

위함이다. 궁극적인 이유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3

권 2장 23).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 인간의 어

떠한 노력이나 행위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무상적 은혜로 이뤄졌음을 삶을

통해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믿음을 견고하게 붙잡으려면 믿음을

붙잡고 있는 돌쩌귀가 있다. 하나는 복음에

나타난 약속을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3권 2장 16

항). 이 두 가지를 굳게 붙잡고 있으면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승리하면 살 것이다. 이 일

을 위해 그분의 말씀 공부와 연구는 필연적

이다.

⑷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은 ‘없다’. 성숙한

믿음과 미성숙한 믿음도 ‘없다’. 이런 질문들

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억지 주장하는 내용들

이다. 그들은 믿음을 양적으로 표현한다. 무엇

을 하는 것을 보니 믿음이 좋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믿음은 그러한 기준을 허용하지 않는

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믿음을 동의로 주장할

뿐 아니라 교회가 제시하는 것을 신뢰하고

따르면 믿음이 있는 것이라 기만술을 쓰고

있다. 이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참된 교회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순전한 말씀 선포가 이뤄지

지 않는 교회의 지침을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 원하고 바라는 바가 기적같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있다고 공적으로 간증하거

나 예화를 드는 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가시

적인 현상은 단지 믿음의 준비일 뿐 구원과

는 무관하다(3권 2장 5항). 그런 믿음은 맹목

적인 믿음이고 시작일 뿐이다. 여러 삶을 통

해 참과 거짓이 증명되어야 한다.

라은성 교수의 쉬운 교리해설 (23) 오직 믿음으로①:구원하는 믿음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질게 길었던 광

야의 40년 생활을 마감하고, 드디어 하

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젖과 꿀이 흐르

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행군을 시작

하였습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합니다. 눈앞에 있는 요단강도 기

적 가운데 건넜습니다. 그런데 소문으

로 들었던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만납

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해야 할

여리고 성을 여호수아 6장 1절에 “여리

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

라”고 말합니다. 굳게 닫힌 성문은 이

스라엘 백성들의 희망이 막힌 것을 상

징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이스라엘의 힘

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을 만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에서 만난

‘여리고성’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

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일상

에서 만나는 문제들이 마치 여리고성과

같이 희망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우

리 앞에 감당하기 어렵고 도무지 해결

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제들 앞에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믿음이 우리에게

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평범한●순종이●능력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구체적

으로 행동지침을 말씀해주십니다. 여호

수아 6장 2절 이하를 보면 매일 한 번

씩 성 주위를 돌되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한 순종은 평범한 것입니

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은 태어나면

서부터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걸어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

게 특이하고 비범한 것을 요구하지 않

습니다. 여리고성보다 더 크고 높은 성

을 쌓거나, 군사훈련을 하라는 생소한

방법을 명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걷

던 그 걸음을 주님 앞에 드리라고 말합

니다. 평범한 것에 순종하라고 말씀하

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큰 능

력을 체험하려면 영웅적이거나, 특별한

순종을 해야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늘 일상적인 삶에서의 순종입니

다.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말씀에 순종

할 때 눈앞에 가로막은 여리고성은 무

너집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하인

들에게 명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포도

주가 떨어지자 물을 채우라고 명하십

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인들

이 하는 가장 주된 일이 두 가지입니

다. 장작을 패는 것과 물 긷는 일입니

다. 물을 긷는 일은 하인들이 밤낮 하

는 일이었습니다. 매일 물을 길어오는

하인들에게 물을 채우라고 명하신 것입

니다. 그래서 하인들은 “내가 매일 물

을 길어 부었지만 아무 일도 안 일어났

는데요? 물을 붓는다고 떨어진 포도주

가 해결되겠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

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

종하였습니다. 그때 물이 변하여 포도

주가 된 것입니다.

여리고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40년 동안이나 돌아다녔던 순례자입니

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게 돕니다. 하나

님의 약속을 믿고 돕니다. 13바퀴를 돌

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

하실 것을 믿고 돕니다. 하나님의 명령

은 평범했습니다. 평범한 말씀에 순종

할 때 불가능의 여리고는 무너집니다.

목사로서 고백할 것이 하나 있습니

다. 제 삶에 있어서 주님 앞에 순종할

때 크거나 특별한 일을 두고 실패한 경

우보다 일상적인 삶에서 실패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매일 성경을 묵상하고 기

도하며 예배하는 일상의 삶이 가장 중

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실패 때문에 우

리가 주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죄

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

다. 우리의 순종이 크고 대단해서 주님

이 위대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

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에 큰 일을 행

하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작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우리의 진실한 삶을 드릴

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침묵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7일에

걸쳐 13번 도는 동안 지켜야 할 독특

한 명령이 있습니다. 침묵하라는 것입

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이 명령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추가해서

한 것입니다. 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침묵하라 했을까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은 감사와 찬송이 아

니라 불평과 원망의 역사였습니다. 하

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는

감격과 감사로 먹었습니다. 하지만 시

간이 지나면서 불평으로 바뀝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원망과 불평의 본

성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여리고

는 정말 난감하고 두려운 존재였습니

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광야 40년을 기

적으로 이끌어 오시고 요단강을 하나님

의 능력으로 건넜다 할지라도 여리고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제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

기들 입장에서 불평할 수 있습니다. 오

래 전부터 시작되었던 불평과 원망과

의심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이스라엘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불평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

로 광야에서 다 죽게 된 것을 여호수아

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불평하는 백성

의 특징을 잘 알기에 여호수아는 침묵

하도록 하였습니다.

때로 불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

어보면 너무나 옳습니다. 설득력도 있

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감합니다. 왜냐

하면 현실에 근거한 말이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믿음에서 나온 말은 아닙니

다. 부정적인 말은 사람의 마음에 급속

도로 퍼집니다.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

다. 하지만 불평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불평하지 못하도록 침묵

하라 명령합니다. 침묵은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집중할 수 있

게 해 줍니다. 우리에게 분별력을 갖게

해줍니다. 나의 기대와 욕망의 소리를

잠재우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해줍니다.

그들의 침묵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음

성을 잘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대

부분의 문제들은 조용히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 많습니다. 현대인들

은 침묵하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침묵

의 필요합니다. 최근에 우리 입을 통해

서 쏟아낸 말들을 살펴보십시오. 그 말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

는 말이 있었습니까? 나로 하여금 하나

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눈앞에 전개

되고 떠오르는 생각 너머에 계신 하나

님을 바라보게 한 말들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분노와 상한 감정 등 주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의 말들뿐이었습니까? 그

말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었습니

까? 입술의 소리가 믿음의 소리였는지

를 돌아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침묵 중에 걸으면

서 무엇을 묵상했을까요? 여리고를 바

라보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는 사실, 그리고 언약궤와 나팔 그리고

제사장들의 모습에서 지난날 불가능했

던 일들을 가능하게 하셔서 오늘에 이

르게 하신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았을

까요? 광야의 40년을 돌아보니 정말 하

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농사짓지 않고

길쌈을 하지 않았는데 그 많은 백성들

이 굶지 않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

니다. 하나님의 능력이고 기적인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침묵하는 동안 그들

은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

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분명히 가야하고 해결되어

야 할 일이 나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해

결하지 못해서 포기해야만 하는 장대한

여리고를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

씀은 믿음으로 여리고성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오늘 나의 삶 속에 큰 절망으

로 다가와 있는 그 문제를 향해, 주님

은 여리고가 무너진 것처럼 분명히 해

결될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내 인생

의 여정에, 가정에, 그리고 조국의 교회

에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여리고와 같

은 크고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여리

고를 무너뜨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

성의 믿음이 우리 믿음이 된다면, 장대

한 성의 무너짐과 같이 삶의 여리고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제 좌절과 절망

의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종교개혁자 칼빈은 “믿음이란 세상

에 대하여 눈을 감고 하나님에게 귀 기

울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제 현실을

보던 나의 눈을 들어 하나님 약속을 바

라보십시오. 그리고 그의 말씀을 들으

십시오.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끝까

지 그리고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침묵하며 불신앙의 소리가 아닌 주님

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나를 향한 주

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때에 우리

앞에 서있는 여리고성은 하나님의 힘으

로 무너집니다.

여리고성은 하나님 힘으로 무너집니다일상의 삶에서 말씀에 순종할 때 눈 앞의 장애는 사라져

라은성●교수총신대·역사신학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

니 성이 무너졌으며” (히 11:30)

232016년 6월 28일 화요일제2063호 설교

이 주일의 설교/ 믿음으로 정복하라(히 11:30, 수 6:1~7)

김종수●목사안산 섬기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