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운동은 가장 강력한 평화적 비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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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그 준비단계부터 대중화, 일원 화, 비폭력을 방침으로 하였다. 특히 비폭 력은 당시로서 다소 생소한 투쟁방법이었 다. 오늘날 ‘촛불혁명’과 같은 방식이다. 총 칼 앞에서 두 손을 번쩍드는 행위는 서구인 에게는 항복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시 우리 민족에게는 승리와 기쁨과 평화를 의미했다. 3·1운동에서 비폭력 평화운동 방식을 채택 했다고 하는 것은 주동자들의 대단히 탁월 한 선택이요 전략이었다. ‘비폭력 저항’은 인류 보편적 가치인 평화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도덕적 우위를 차지한다. 그 래서 ‘정교분리’를 교리처럼 가르치던 선교 사들도 이에 공감하고 지지하였다. 일제는 처음부터 평화적 만세운동을 하는 민중들을 헌병·경찰과 소방대, 군대까지 동 원, 증파하여 무력으로 무차별 탄압함으로써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체포 구금 고문하 였다. 당시의 일본총리 하라 다카시(原敬)는 3·1운동 발발 열흘째인 1919년 3월 11일자 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에게 다음과 같은 탄압지시 전보를 보내 표 리부동한 그들의 기만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소요사건은 안팎으로 표면상 극히 경미한 문제로 간주되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엄중한 조치를 취하여 장래 또다시 발생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다만 조치를 취할 때 외국인이 주목 하는 문제이므로 잔혹한 탄압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 야 한다.” 3·1운동이 처음부터 평화적 만세시위가 아니었으면, 이러한 일제의 탄압과 만행을 정당화시키고 선교사들은 물론 세계 여론 의 지지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 한 일제의 폭력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목숨을 걸고 불의와 억압에 맞서 평 화적 만세시위를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근 대적 민족으로 거듭났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만행에 중립 없다” (No Neutrality for Brutality) 는 구호를 내세우며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탄압 만행을 비판하고, 우리 민족 을 동정 지지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면 3·1운동은 성공한 운동인가? 성공 을 운동의 목표나 이념의 성취로 본다면 절 반의 성공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유, 정의, 평등, 평화와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 를 이념으로 내세운 운동은 그 시도 자체 가 가치가 있고 성공이기 때문에 실패가 없 는 운동이다. 더욱이 우리 민족은 이 운동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충분히 알렸고, 비록 임시정부이지만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 으며, 일제의 폭압적 ‘무단통치’를 기만적이 기는 하지만 ‘문화정치’로 바꾸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더욱이 우리 민족 내부적으로 는 이 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근대적 민족으 로 거듭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민 족의 자주 독립의 의지를 분명히 알림으로 써, 일제의 패망 후 독립 국가를 건설할 기 초를 마련하였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 인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목숨 을 걸고 맨손으로 평화적 만세시위를 벌인 역사적 사건이다. 시기적으로 좁게는 그해 5 월 말까지, 넓게는 이듬해 3월 말까지, 공 간적으로는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우리 동 포들이 이주하여 살던 만주·중국·일본· 미주·하와이·러시아 연해주 등 모든 곳 을 포함한다. 시위 규모는 달랐지만, 그해 5 월 말까지, 50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만 하 더라도 1500여 회가 넘었고, 참여한 연인원 은 202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우 리 인구가 1800만에서 2000만명이었으니까 총 인구의 10%이상이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 었고, 우리 민족은 이 역사적 사건에 자발적 으로 참여함으로써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났 다. 3·1운동의 결과 중국 상하이에서 민주 공화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고, 비 로소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를 꿈꾸고 연습 하게 되었다. 국왕이 통치하던 전근대적인 제국(帝國)의 신민(臣民), 식민지배를 받는 피 압박 민족에서 근대적인 민주공화국의 국 민(國民)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3·1운동 ‘3·1혁명’으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가들은 ‘3·1혁명’으로 불 렀고, 3·1운동이 일어난 당시에도 북감리회 의 웰치 감독(Bishop Herbert Welch)이나 캐나 다장로회의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같은 선교사들은 이를 “한국 혁명” (Korean Revolution)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 ‘혁명’은 아직까지도 ‘미완의 혁명’으로 남아있다. 3·1운동에서 추구하였 던 이념 내지 정신이 아직도 이 땅에 온전 히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3·1운동의 이 념 내지 3·1정신은 크게 세 가지다. 자주독 립(自主獨立, liberty and independence)·정의인 도(正義人道, justice and humanity)·평등평화(平 等平和, equality and peace)가 그것이다. 그리 고 이것은 하나 된 민족을 전제로 한 것이었 기 때문에 현 분단체제가 극복되지 않는 한 결코 온전히 성취될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인 민주화도 사회정의도 평화통 일도 3·1정신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 이다. 따라서 이 모든 역사적 과제를 해결해 야 비로소 ‘3·1혁명’이 완성되는 것이다. 3·1운동의 이념인 자주독립 정의인도 평 등평화는 자유 정의 평등 평화로 요약될 수 있고, 이것은 인류 보편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3·1운동은 인류 보편적 가 치를 추구한 권리장전이자 인권선언이라고 도 할 수 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고나 서 1948년 12월 유엔(국제연합) 총회에서 제 정한 세계인권선언의 전문에서는 “인류사회 의 모든 구성원의 고유의 존엄성과 평등하 고 양여할 수 없는 권리를 승인함은 세계에 있어서 자유 정의와 세계평화의 기본이 되 는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이것을 우리 민족 은 이미 그 30년 전인 1919년 3·1운동에서 천명하였고, 그 실현을 위한 행동에 자발적 으로 거족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래서 3·1운 동을 주동하거나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되 어 재판을 받게 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 의 행동은 정의인도에 따른 정당한 것이며, 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법정투쟁을 벌 였다. 3·1운동에는 우리 민족 전 계층이 자발 적으로 참여했고, 참여하면서 그들의 의식 이 변화되었다. 전근대적 굴종의식이 사라지 고, 근대적 권리의식, 저항의식, 시민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정치의식에서도 과거의 복벽 주의(대한제국 재건)가 사라지고,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임시정부)을 수립하려는 의식이 지 배하였다. 이것은 3·1운동이 우리 민족이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난 역사적 사건이었음 을 말해주는 것이다. 미북감리회 한국선교부를 책임지고 있던 웰치 감독(Bishop Herbert Welch)은 그해 여 름 미국에 건너가 그곳 교계신문인 < The Christian Advocate > ‘1919년 한국 독립운 동’이라는 글을 1919년 7월 24일자부터 4회 에 걸쳐 게재하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은 정말 민족 운동이다. 비 록 북부가 특히 첫 주 동안 더 공공연하게 관여되었지만, 그것은 어떤 종교 단체에 국 한되지 않았으며, 어떤 한 사회 계급-양반 들, 학생들, 전도자들, 농부들, 노동자들, 소 상인들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의 지배에 항 의하는 그들 자신의 독특한 방식을 따랐다. 그것은 한 성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들 이 자유롭게 행동과 고난 둘 다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여학생들도 놀라운 담력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삶의 어 떤 기간에도 제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 체 인구, 고령자에서 초등학교에 있는 아이 들에 이르기까지, 이 운동에서 그들의 자리 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젊고, 늙고, 부유하고, 가난하고, 좋거나 나쁘거나, 교육받거나 무 지한 사람들은 주목할 만하고 전례 없는 민 족적 통합에 동참했다. 이 운동에서 사람들 이 변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 또한 주목해 야 한다. 최근 몇 년간 그들은 다소 오해를 살 만한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의 마 음은 뜨거웠지만, 그들은 겁에 질려 있고 공 포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이 봉기 가 시작되면서, 공포에서 대담함으로 바뀌는 것이 나타났다. 그들의 선언 중 하나는 다음 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약하지 않고, 두려움이 없다. 우리 는 우리의 이상과 희망을 위해 최후의 순간 까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이다.’ 자들, 여자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그 들에게 어떤 처벌이 닥쳐도 감당한 준비로, 위축되지 않고 법의 집행관들과 대면했다. 그들의 용기, 끈기, 독창성, 보여준 조직력은 가장 오래된 선교사(웰치 자신)에게는 놀라 운 것이었다.” 또한 3·1운동은 한국교회의 정치와 현실 참여의 좋은 모델을 보여주었다. 당시 한국 기독교인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3·1운동 참여와 역할은,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이 정치와 현실 또는 역사적 과제 해결에 직 접 뛰어들어 큰 기여를 하였다. 기독교인들 이 3·1운동을 계획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 였던 것은 자신들의 권익을 신장하기 위해 서나, 권력의 헤게모니를 잡고자 한 것이 아 니었다. 그야말로 순수하게 우리 민족의 해 방 독립을 바라서 자신을 희생하고 민족의 선두에 서서 일제에 항거하였던 것이다. 그 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사 후의 그들을 중심 으로 한 권력구조를 생각지 않았고, 종파나 계급적 이익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어떤 이 들은 이러한 것을 이들의 한계로 지적하기 도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그들이 얼 마나 순수하게 이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 였나를 실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한국의 기독교 인 수는 10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적 과제인 민주화운동과 사회정 의운동, 평화통일운동을 가장 앞장서 이끌어 가는 이들도 기독교인이요, 이에 못지 않게 이러한 운동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3·1운동을 새롭 게 인식하고 거기서 역사적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종교적 이념을 초월하여 타 교파 는 물론 타 종교계까지도 포용하고 협력하 였던 당시 기독교계 지도자들, 자신의 희생 을 각오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 정의와 평 화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과감하 게 일어섰던 믿음의 선배들, 이들이 가졌던 3·1정신이야말로 현재 우리의 민족사적 과 제인 자주적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을 이루 기 위해서도 절실히 요구되는 정신이다. 이 러한 역사의 맥락에서 볼 때 기독교인들의 현실 참여와 역사 참여는 결코 정치적 문제 만이 아니다. 이것은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 는 신앙의 문제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이 웃에 대한 책임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 리고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은 정신사적으 로는 우리 역사에서 아직도 미완성인 운동 인지도 모른다. 한국교회는 올바른 3·1운동의 인식을 통 하여 이 운동의 이념을 지속적으로 활성화 시키고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 민족 의 자주적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 등의 역사 적 과제 해결과 역사 발전에 앞장서 기여해 야 할 것이다. 3·1운동의 참여와 역할은 우 리 민족 모두에게,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들 에게 민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봉사한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 될 것이다. 그리고 3·1운동에 대한 이러한 기억은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 를 돌파할 새로운 영감과 용기를 주는 원천 이 될 것이다. 사기 태극기 삼천리 만세강산 왜 평화적 만세운동이었나 15 2019년 2월 26일 화요일 제2188호 특집 만세운동은 가장 강력한 평화적 비폭력 저항이었다 3·1운동 100주년 목차 제1부 만세의 현장을 가다 제2부 삼천리 어디에서나 대한독립만세 왜 평화적 만세운동이었나 수도권의 만세운동 충청지역 만세운동 영남지역 만세운동 호남지역 만세운동 이북지역 만세운동 제3부 우리가 이어갈 만세행렬 3 · 1운동이 비폭력과 평화의 방법을 택한 것은 탁월했다.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우리 민족은 국제 사회 에 독립의 의지를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2019년 3 · 1절을 맞아 경기도 화성 순국 순교의 현 장 제암리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화성시 목회자와 성도들이 재현하고 있다. 김승태 목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수원 생명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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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만세운동은 가장 강력한 평화적 비폭력 저항이었다pdf.kidok.com/2188/218815.pdf · 일도 3·1정신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 이다. 따라서 이

3·1운동은 그 준비단계부터 대중화, 일원

화, 비폭력을 방침으로 하였다. 특히 비폭

력은 당시로서 다소 생소한 투쟁방법이었

다. 오늘날 ‘촛불혁명’과 같은 방식이다. 총

칼 앞에서 두 손을 번쩍드는 행위는 서구인

에게는 항복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시 우리

민족에게는 승리와 기쁨과 평화를 의미했다.

3·1운동에서 비폭력 평화운동 방식을 채택

했다고 하는 것은 주동자들의 대단히 탁월

한 선택이요 전략이었다. ‘비폭력 저항’은

인류 보편적 가치인 평화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도덕적 우위를 차지한다. 그

래서 ‘정교분리’를 교리처럼 가르치던 선교

사들도 이에 공감하고 지지하였다.

일제는 처음부터 평화적 만세운동을 하는

민중들을 헌병·경찰과 소방대, 군대까지 동

원, 증파하여 무력으로 무차별 탄압함으로써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체포 구금 고문하

였다. 당시의 일본총리 하라 다카시(原敬)는

3·1운동 발발 열흘째인 1919년 3월 11일자

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에게 다음과 같은 탄압지시 전보를 보내 표

리부동한 그들의 기만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소요사건은 안팎으로 표면상 극히

경미한 문제로 간주되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엄중한 조치를

취하여 장래 또다시 발생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다만 조치를 취할 때 외국인이 주목

하는 문제이므로 잔혹한 탄압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

야 한다.”

3·1운동이 처음부터 평화적 만세시위가

아니었으면, 이러한 일제의 탄압과 만행을

정당화시키고 선교사들은 물론 세계 여론

의 지지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

한 일제의 폭력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목숨을 걸고 불의와 억압에 맞서 평

화적 만세시위를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근

대적 민족으로 거듭났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만행에 중립 없다”(No Neutrality for Brutality)

는 구호를 내세우며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탄압 만행을 비판하고, 우리 민족

을 동정 지지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면 3·1운동은 성공한 운동인가? 성공

을 운동의 목표나 이념의 성취로 본다면 절

반의 성공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유,

정의, 평등, 평화와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

를 이념으로 내세운 운동은 그 시도 자체

가 가치가 있고 성공이기 때문에 실패가 없

는 운동이다. 더욱이 우리 민족은 이 운동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충분히 알렸고, 비록 임시정부이지만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

으며, 일제의 폭압적 ‘무단통치’를 기만적이

기는 하지만 ‘문화정치’로 바꾸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더욱이 우리 민족 내부적으로

는 이 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근대적 민족으

로 거듭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민

족의 자주 독립의 의지를 분명히 알림으로

써, 일제의 패망 후 독립 국가를 건설할 기

초를 마련하였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

인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목숨

을 걸고 맨손으로 평화적 만세시위를 벌인

역사적 사건이다. 시기적으로 좁게는 그해 5

월 말까지, 넓게는 이듬해 3월 말까지, 공

간적으로는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우리 동

포들이 이주하여 살던 만주·중국·일본·

미주·하와이·러시아 연해주 등 모든 곳

을 포함한다. 시위 규모는 달랐지만, 그해 5

월 말까지, 50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만 하

더라도 1500여 회가 넘었고, 참여한 연인원

은 202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우

리 인구가 1800만에서 2000만명이었으니까

총 인구의 10%이상이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

었고, 우리 민족은 이 역사적 사건에 자발적

으로 참여함으로써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났

다. 3·1운동의 결과 중국 상하이에서 민주

공화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고, 비

로소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를 꿈꾸고 연습

하게 되었다. 국왕이 통치하던 전근대적인

제국(帝國)의 신민(臣民), 식민지배를 받는 피

압박 민족에서 근대적인 민주공화국의 국

민(國民)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3·1운동

이 ‘3·1혁명’으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가들은 ‘3·1혁명’으로 불

렀고, 3·1운동이 일어난 당시에도 북감리회

의 웰치 감독(Bishop Herbert Welch)이나 캐나

다장로회의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같은 선교사들은 이를 “한국 혁명”(Korean

Revolution)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 ‘혁명’은 아직까지도 ‘미완의

혁명’으로 남아있다. 3·1운동에서 추구하였

던 이념 내지 정신이 아직도 이 땅에 온전

히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3·1운동의 이

념 내지 3·1정신은 크게 세 가지다. 자주독

립(自主獨立, liberty and independence)·정의인

도(正義人道, justice and humanity)·평등평화(平

等平和, equality and peace)가 그것이다. 그리

고 이것은 하나 된 민족을 전제로 한 것이었

기 때문에 현 분단체제가 극복되지 않는 한

결코 온전히 성취될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인 민주화도 사회정의도 평화통

일도 3·1정신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

이다. 따라서 이 모든 역사적 과제를 해결해

야 비로소 ‘3·1혁명’이 완성되는 것이다.

3·1운동의 이념인 자주독립 정의인도 평

등평화는 자유 정의 평등 평화로 요약될

수 있고, 이것은 인류 보편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3·1운동은 인류 보편적 가

치를 추구한 권리장전이자 인권선언이라고

도 할 수 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고나

서 1948년 12월 유엔(국제연합) 총회에서 제

정한 세계인권선언의 전문에서는 “인류사회

의 모든 구성원의 고유의 존엄성과 평등하

고 양여할 수 없는 권리를 승인함은 세계에

있어서 자유 정의와 세계평화의 기본이 되

는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이것을 우리 민족

은 이미 그 30년 전인 1919년 3·1운동에서

천명하였고, 그 실현을 위한 행동에 자발적

으로 거족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래서 3·1운

동을 주동하거나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되

어 재판을 받게 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

의 행동은 정의인도에 따른 정당한 것이며,

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법정투쟁을 벌

였다.

3·1운동에는 우리 민족 전 계층이 자발

적으로 참여했고, 참여하면서 그들의 의식

이 변화되었다. 전근대적 굴종의식이 사라지

고, 근대적 권리의식, 저항의식, 시민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정치의식에서도 과거의 복벽

주의(대한제국 재건)가 사라지고,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임시정부)을 수립하려는 의식이 지

배하였다. 이것은 3·1운동이 우리 민족이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난 역사적 사건이었음

을 말해주는 것이다.

미북감리회 한국선교부를 책임지고 있던

웰치 감독(Bishop Herbert Welch)은 그해 여

름 미국에 건너가 그곳 교계신문인 <The

Christian Advocate>에 ‘1919년 한국 독립운

동’이라는 글을 1919년 7월 24일자부터 4회

에 걸쳐 게재하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은 정말 민족 운동이다. 비

록 북부가 특히 첫 주 동안 더 공공연하게

관여되었지만, 그것은 어떤 종교 단체에 국

한되지 않았으며, 어떤 한 사회 계급-양반

들, 학생들, 전도자들, 농부들, 노동자들, 소

상인들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의 지배에 항

의하는 그들 자신의 독특한 방식을 따랐다.

그것은 한 성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들

이 자유롭게 행동과 고난 둘 다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여학생들도 놀라운

담력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삶의 어

떤 기간에도 제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

체 인구, 고령자에서 초등학교에 있는 아이

들에 이르기까지, 이 운동에서 그들의 자리

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젊고, 늙고, 부유하고,

가난하고, 좋거나 나쁘거나, 교육받거나 무

지한 사람들은 주목할 만하고 전례 없는 민

족적 통합에 동참했다. 이 운동에서 사람들

이 변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 또한 주목해

야 한다. 최근 몇 년간 그들은 다소 오해를

살 만한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의 마

음은 뜨거웠지만, 그들은 겁에 질려 있고 공

포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이 봉기

가 시작되면서, 공포에서 대담함으로 바뀌는

것이 나타났다. 그들의 선언 중 하나는 다음

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약하지 않고, 두려움이 없다. 우리

는 우리의 이상과 희망을 위해 최후의 순간

까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이다.’ 남

자들, 여자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그

들에게 어떤 처벌이 닥쳐도 감당한 준비로,

위축되지 않고 법의 집행관들과 대면했다.

그들의 용기, 끈기, 독창성, 보여준 조직력은

가장 오래된 선교사(웰치 자신)에게는 놀라

운 것이었다.”

또한 3·1운동은 한국교회의 정치와 현실

참여의 좋은 모델을 보여주었다. 당시 한국

기독교인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3·1운동

참여와 역할은,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이

정치와 현실 또는 역사적 과제 해결에 직

접 뛰어들어 큰 기여를 하였다. 기독교인들

이 3·1운동을 계획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

였던 것은 자신들의 권익을 신장하기 위해

서나, 권력의 헤게모니를 잡고자 한 것이 아

니었다. 그야말로 순수하게 우리 민족의 해

방 독립을 바라서 자신을 희생하고 민족의

선두에 서서 일제에 항거하였던 것이다. 그

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사 후의 그들을 중심

으로 한 권력구조를 생각지 않았고, 종파나

계급적 이익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어떤 이

들은 이러한 것을 이들의 한계로 지적하기

도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그들이 얼

마나 순수하게 이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

였나를 실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한국의 기독교

인 수는 10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적 과제인 민주화운동과 사회정

의운동, 평화통일운동을 가장 앞장서 이끌어

가는 이들도 기독교인이요, 이에 못지 않게

이러한 운동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3·1운동을 새롭

게 인식하고 거기서 역사적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종교적 이념을 초월하여 타 교파

는 물론 타 종교계까지도 포용하고 협력하

였던 당시 기독교계 지도자들, 자신의 희생

을 각오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 정의와 평

화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과감하

게 일어섰던 믿음의 선배들, 이들이 가졌던

3·1정신이야말로 현재 우리의 민족사적 과

제인 자주적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을 이루

기 위해서도 절실히 요구되는 정신이다. 이

러한 역사의 맥락에서 볼 때 기독교인들의

현실 참여와 역사 참여는 결코 정치적 문제

만이 아니다. 이것은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

는 신앙의 문제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이

웃에 대한 책임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

리고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은 정신사적으

로는 우리 역사에서 아직도 미완성인 운동

인지도 모른다.

한국교회는 올바른 3·1운동의 인식을 통

하여 이 운동의 이념을 지속적으로 활성화

시키고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 민족

의 자주적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 등의 역사

적 과제 해결과 역사 발전에 앞장서 기여해

야 할 것이다. 3·1운동의 참여와 역할은 우

리 민족 모두에게,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들

에게 민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봉사한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

될 것이다. 그리고 3·1운동에 대한 이러한

기억은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

를 돌파할 새로운 영감과 용기를 주는 원천

이 될 것이다.

역사기획 태극기 삼천리 만세강산 ⑦ 왜 평화적 만세운동이었나

152019년 2월 26일 화요일제2188호 특집

만세운동은 가장 강력한 평화적 비폭력 저항이었다

3·1운동 100주년

목차

●제1부 만세의 현장을 가다

●제2부 삼천리 어디에서나 대한독립만세

❼ 왜 평화적 만세운동이었나

⑧ 수도권의 만세운동

⑨ 충청지역 만세운동

⑩ 영남지역 만세운동

⑪ 호남지역 만세운동

⑫ 이북지역 만세운동

●제3부 우리가 이어갈 만세행렬

3·1운동이 비폭력과 평화의 방법을 택한 것은 탁월했다.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우리 민족은 국제 사회

에 독립의 의지를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2019년 3·1절을 맞아 경기도 화성 순국 순교의 현

장 제암리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화성시 목회자와 성도들이 재현하고 있다.

김승태 목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수원 생명평화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