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麟祥그룹의교유양상과詩書畵활동연구€¦ · 67)강혜선(성신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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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 67) 강혜선 (성신여대 ) 국문요약 이 논문은 조선후기 李麟祥 그룹의 문인들이 서로 교유하면서 함께 펼쳐 나간 詩書畵 활동을 주목하였다 . 이인상 , 李胤永, 吳瓚, 宋文欽 등은 자신들 이 살고 있는 시대의 정치적 , 현실적 상황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 산수자 연과 시서화에 몰두한 문인들이었다 . 이들은 자신들의 주거공간인 凌壺館, 澹華齋, 山天齋, 歸去來館, 단양 龜潭 등지에 모여서 講學詩作, 書畵 작을 함께 펼쳐나갔으며 , 서화 및 골동품을 감상 , 비평하고 , 화훼 취향을 서 로 공유하였다 . 또한 , 이들은 여행을 통한 산수체험을 시서화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 이 그룹의 개성적인 문예 취향은 西池夜蓮會, 氷燈梅花飮에 집 약적으로 나타나 있다 . 여름 밤 유리잔에 촛불을 넣어 연꽃 위에 올려놓고 연꽃을 감상하는 방식 , 겨울밤 얼음을 파서 그 안에 촛불을 넣어 매화 가지 에 걸어놓고 매화꽃을 감상하는 방식에서 이들의 세련된 도시적 감각과 심 미적인 취향을 볼 수 있지만 , 이 모임에서 창작된 시문과 서화에는 즉물적 감각적 에 국한되지 않는 , 유가의 處士意識文字氣를 볼 수 있다 . 요컨 ,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는 처사의식이 기본이 되는 시문 , 古隸八分體 같은 古風을 추구하는 서예 , 神會를 중요시하는 문인화가 이 그룹의 공통된 문예사조였다 . * 이 논문은 2015년 성신여자대학교 전기 학술연구조성비 지원으로 수행된 연구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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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67)강혜선(성신여대)

    국문요약

    이 논문은 조선후기 李麟祥 그룹의 문인들이 서로 교유하면서 함께 펼쳐

    나간 詩書畵 활동을 주목하였다. 이인상, 李胤永, 吳瓚, 宋文欽 등은 자신들

    이 살고 있는 시대의 정치적, 현실적 상황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산수자

    연과 시서화에 몰두한 문인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거공간인 凌壺館,

    澹華齋, 山天齋, 歸去來館, 단양 龜潭 등지에 모여서 講學과 詩作, 書畵 창

    작을 함께 펼쳐나갔으며, 서화 및 골동품을 감상, 비평하고, 화훼 취향을 서

    로 공유하였다. 또한, 이들은 여행을 통한 산수체험을 시서화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 그룹의 개성적인 문예 취향은 西池夜蓮會, 氷燈梅花飮에 집

    약적으로 나타나 있다. 여름 밤 유리잔에 촛불을 넣어 연꽃 위에 올려놓고

    연꽃을 감상하는 방식, 겨울밤 얼음을 파서 그 안에 촛불을 넣어 매화 가지

    에 걸어놓고 매화꽃을 감상하는 방식에서 이들의 세련된 도시적 감각과 심

    미적인 취향을 볼 수 있지만, 이 모임에서 창작된 시문과 서화에는 즉물적

    감각적 美에 국한되지 않는, 유가의 處士意識과 文字氣를 볼 수 있다. 요컨

    대,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는 처사의식이 기본이 되는 시문, 古隸나 八分體

    같은 古風을 추구하는 서예, 神會를 중요시하는 문인화가 이 그룹의 공통된

    문예사조였다.

    * 이 논문은 2015년 성신여자대학교 전기 학술연구조성비 지원으로 수행된 연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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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상 그룹, 단호 그룹, 이인상, 이윤영, 교유의 장, 詩書畵

    1. 문제제기

    조선후기에는 문인들 사이에서 함께 모여 시문을 창작하고 서화를 감상하

    거나 창작하면서 동질적인 문예사조를 공유하는 일종의 유파적 성격을 띤

    그룹들이 출현하였다. 조선후기 白岳詩壇을 이끈 金昌翕과 李秉淵의 시문과

    鄭歚의 회화 활동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백악시단의 경우, 시문과 회

    화는 하나의 사조 속에 상호 영향을 끼쳤으나 실제 창작에서는 별개의 영역

    이었다. 그런데 다음 세대에 이르면, 詩書畵 활동을 함께 펼치면서 공통의

    문예사조를 형성한 일군의 문인들이 나타났다. 이 그룹의 중심에 凌壺觀 李

    麟祥(1710~1760)과 丹陵 李胤永(1714~1759)이 있다. 이인상은 金正喜로부터

    ‘隸書와 그림에 모두 文字氣가 있다’는 고평을 받은 문인화가이고, 이윤영은

    벗 이인상으로부터 “먹을 희롱하여 때로 세상을 놀라게 하니, 나찬[倪瓚]과

    대치[黃公望]를 배웠다 하겠네(墨戱時驚俗, 謂君學懶癡)”(, �凌壺集� 권1)라는 말을 들었듯이, 역시 문인화가였다.1)

    최근 이 그룹에 대한 문학연구가 심화되었는데,2) 이윤영의 호인 단릉에서

    1) 이인상이 남긴 회화 작품은 매우 다양하고 풍성하다. 널리 알려진 와

    를 위시하여, 등의 그

    림에서는 문인화의 높은 수준을 볼 수 있다. 또한

    등의 그림에서는 畵中詩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이윤영은 茅亭을

    중심으로 한 누각산수, 바위와 소나무, 연꽃 등을 주로 그렸는데, 명대 吳派와 安

    徽派 화풍을 수용하여 문기 있고 깨끗한 표현을 구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등이 전한다.

    2) 서화 분야의 연구로는 유홍준, 「凌壺觀 李麟祥의 生涯와 藝術」(홍익대 석사학

    위논문, 1983), 유승민, 「凌壺觀 李麟祥 書藝와 繪畵의 書畵史的 位相」(고려대

    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장진성 외 1명, 「이인상의 자아의식과 작품세계」(�서

    양미술사학회논문집�, 2012) 등이 있다. 문학 분야 연구로는 김민영, 「능호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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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이인상의 호인 능호관에서 호를 취해 ‘丹壺 그룹’으로 명명되기도 하였

    다. 이 그룹에는 이인상과 이윤영 외에 吳瓚, 宋文欽, 申韶, 洪梓, 尹冕東, 金

    純澤, 金茂澤, 任邁, 任薖, 金相岳, 金相肅 등이 속해 있었다. 이들은 18세기

    조선의 시류에 역행했던 인물들이고 당대 현실에서 이탈했던 소수자로, 사

    대부와 서얼이라는 신분상의 차이를 넘어 결교하였다.3) 이 그룹의 문인들은

    동지의식을 종종 다음과 같이 표출하곤 했다. 예컨대. 이인상은 벗 송문흠을

    추모한 제문에서 “지금 그대가 죽었으니 어느 누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생

    각하겠는가?”라 하였으며, 신소의 제문에서는 신소의 말을 빌려 “우주에 오

    직 우리 무리가 있다”거나 “화이를 따져 출처의 의리를 정한 선비들”이라 하

    였다. 또, 이윤영을 기린 제문에서는 “지난날 그대와 더불어 대의를 강론하

    며 죽을 때까지 지키자고 약속했던 사이”라 하였다. 金鍾秀가 쓴 이인상의

    제문(, �夢梧集� 권5)에서는 이인상의 네 벗으로 “子有友四, 宋・

    申・吳・李”라 하여, 송문흠, 신소, 오찬, 이윤영을 꼽은 바 있다.

    본고는 이상의 논거에 근거하여 이인상 그룹이라는 명칭 아래 이인상과

    이윤영을 중심으로 이 그룹 문인들의 특별한 교유양상을 주목하고자 한다.

    특히 이들이 大明義理論에 입각한 정치적 입장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생활

    방식이나 미적 취향까지 공유한 양상을 주목하며, 이들이 함께 전개해간 시

    서화 활동을 주목하고자 한다.

    인상 산문 연구」(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김수진, 「능호관(凌壺觀) 이인

    상(李麟祥) 문학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박경남, 「丹陵 李胤永의

    �山史� 硏究」(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백승호, 「丹壺 그룹 문인들의 哀

    辭에 대한 고찰」(�한국한문학연구� 51, 한국어문학회, 2013) 등이 있다. 가장 최

    근 성과로는 이인상의 �능호집�을 완역한 박희병의 �능호집� 상・하(돌베개, 2016)

    가 있다.

    3) 김수진, 앞의 논문, 참조. 박희병 또한 이인상의 �능호집�을 번역한 뒤 부친 글

    「능호관 이인상, 그 인간과 문학」에서 이인상 그룹의 우도는 문예만이 아니라 道

    義의 지향성이 아주 강렬했음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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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인상 그룹의 교유의 場과 詩書畵활동 양상

    이인상 그룹의 문인들이 서로 교유하면서 시문 창작과 서화 창작을 병행

    한 양상은 매우 풍부하게 그들의 시문에 포착되어 있다. 예컨대, 1745년 이

    인상은 이윤영을 위해 작은 그림으로 과 을 그렸고, 이윤영이

    그림 끝에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서 그림 속의 풍경을 글로 재현하였

    다.(, �능호집� 권4) 또, 1755년 이인상은 송익흠을 위

    해 부채에 ‘海嶽의 가을 달’을 화제로 삼아 부채에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箴

    을 썼다.(, �능호집� 권4) 申思輔가 수집한 중국의 화첩에 이

    인상이 古隸로 표제를 쓰고, 각 그림마다 짤막한 시를 적어 뜻을 부치기도

    하였다.(, �능호집� 권1) 이와 같이 이들의 시서화 활동은 상

    호 연동되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러한 활동은 주로 자신들의 집을

    서로 내왕하며 함께 머물 때 일어나거나 함께 여행을 하며 전개되었다. 서울

    의 남산 기슭에 위친한 이인상의 집 凌壺館, 西池 가에 위치한 이윤영의 집

    澹華齋, 계산동(창덕궁 서쪽 지역)에 위치한 오찬의 집 山天齋, 이인상과 이

    윤영이 일시 퇴거해 거주한 단양의 龜潭 등이 중요한 활동 장소였다.

    1) 이인상의 남산 凌壺館

    이인상은 1741년 32세 때 벗 송문흠과 신소의 도움을 받아 서울 남산 기슭

    에 작은 초가집 능호관을 마련하였다. 능호관을 마련할 때까지 이인상은 여

    러 차례 이사를 하면서 가난한 살림을 꾸려갔다. 송문흠의 (�閒

    靜堂集� 권7)에 의하면, 능호관은 비록 “서까래 몇 개로 된 초가집이라 비바

    람조차 가리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고 몸을 웅크리고 눕는” 형국이

    었지만, 이인상이 스스로 그 집의 경관을 수백 가지로 꼽을 정도로 전망이

    좋은 집이었다. 사방으로 열린 창으로 남산의 中峰, 白岳, 백악의 서쪽에 위

    치한 필운대와 안산, 삼각산, 도봉산을 모두 조망할 수 있었다. 이에 송문흠

    은 李白이 周惟長의 橫山草堂에 부친 시에서 횡산의 경관이 방장산보다 낫

  • 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191

    다고 한 말을 취하여 이인상의 집 또한 방장산을 능가한다는 뜻에서 능호관이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능호관을 두고 南澗이라 지칭하기도 하였는데, 여기

    에는 천 권의 장서가 있었으며, 아름다운 수목과 화훼가 가꾸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교유의 장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윤면동과 신소, 송

    문흠이다. 윤면동의 집 卓犖觀 역시 남산 기슭에 있어서 능호관에 내왕하기

    용이하였다. 윤면동의 정원 이름이 衆芳園인데 보듯이, 윤면동도 이인상처

    럼 나무와 꽃 가꾸기를 좋아하였다. 이인상은 능호관에서 란 그림

    을 송문흠에게 그려주고 그의 매화분을 빌려와 세모의 감상거리로 삼기도

    하였고(, �능호집� 권1), 송문흠과 그의 재종

    형 宋益欽 등이 국화를 감상하러 능호관에 찾아와 함께 시를 짓고, 신사보가

    와서 함께 자며 시를 짓기도 하였다. 1754년 능호관의 임원에서 李演, 김무

    택 등 여러 문인이 모여 가을을 보내며 함께 경전을 공부하고 시를 짓기도

    하였는데,(, �능호집� 권2) 다음에서

    그러한 교유양상을 잘 볼 수 있다.

    고상한 벗 머물게 하려고 쓸고 닦아서

    남간의 서늘한 집에 모이자 거듭 약속했지.

    뭇 산은 눈 내리는 달에 어울리고

    높은 나무에는 눈과 서리 서렸네.

    가을부터 술을 끊고

    밤늦도록 경전 공부를 하네.

    귀밑머리 세어 감을 서로 보다가

    시든 국화 보며 가는 세월을 애석해 하네.

    灑掃留高友, 重期澗屋凉.

    衆峰宜雪月, 喬木繞雪霜.

    止酒從秋盡, 硏經及夜長.

    相看玄鬢改, 衰菊惜年光.

    李明翼을 애도한 시 제6수를 보면,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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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관을 찾아온 이명익이 이인상에게 단양 구담의 옥순봉을 그린 를 빨리 완성하라 재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이윤영의 회상에

    따르면, 이윤영은 능호관에서 이인상과 黃公望의 대폭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였다.4)

    이상에서 보듯이, 남산의 능호관에 모인 벗들은 함께 경전을 공부하는 한

    편 매화나 국화 등을 감상하며 시를 짓고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인상이 능호관에서 등을 그린 사실이 주목된다.

    2) 이윤영의 西池 가 澹華齋와 경교 밖 水晶樓

    서대문 밖 모화관 근처에 있던 연못 西池 -일명 盤池 -가에 이윤영의

    집 澹華齋가 있었다. 담화재는 白石山房으로도 불렸는데, 1741년 조성되었

    고 담화재의 편액을 이인상이 썼다.5) 담화재의 園亭 이름은 綠雲亭이었다.

    담화재에 모인 문인들은 이윤영 李運永 형제, 임매 임과 형제, 이인상, 이민

    보, 김무택, 김순택 등이었다. 이들은 함께 모여 聯句를 짓기도 하고, 더불어

    서화 창작을 병행하기도 하였다.

    담화재에서 이루어진 교유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모임은 여름날 서지에서

    펼친 연꽃 감상회였다. 이윤영과 그의 벗들은 서지에서 하루 종일 연꽃을 감

    상하다가 밤이 되면 다시 특별한 방식으로 연꽃을 감상하였다. 그 방식은 유

    리잔에 촛불을 넣어 연꽃 위에 올려놓고 비추어보는 것이었다. 1739년 7월

    보름에 열렸던 연꽃 감상회의 정경을 이인상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못 동편에도 못 서편에도 연꽃 향기 가득하여

    마름 뜬 섬, 여뀌 언덕에는 온통 한 기운.

    붉게 반짝이는 은하수에 물고기 뛰놀고

    맑은 달빛에 스민 향기에 까치가 날아오르네.

    4) 李胤永, , 「山史」, �丹陵遺稿� 권11: “余甞至凌壺觀, 出視大癡長幅,

    其峻壁層嶂, 靈恠若蜃樓, 與主人擊碎如意, 嗟賞不已.”

    5) �뇌상관고� 제5책에는 가 남아 있다.

  • 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193

    유리잔에 촛불을 넣어 붉은 연꽃에 옮겨다 놓고

    계피주에 설탕 타 연잎자루로 마시네.

    패옥[이슬]과 고운 옷[연잎]이 서로 비추니

    아름다운 꽃을 따와 집안을 가득 채우네.

    芬芬郁郁水西東, 菱島蓼堤一氣籠.

    色燦絳河魚潑浪, 香薰淸月鵲飜風.

    琉璃擁燭移紅萼, 蔗桂和霜飮碧筒.

    玉佩華衣相與映, 芳菲攬取滿堂中.

    李麟祥, , �능호집� 권1

    위 시와 같은 정경을 이윤영은 에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

    사해 놓았다.

    윤지[이윤영]가 손으로 막 피려고 하는 연꽃을 꺾어 연잎의 물 위에 띄우고

    는 백현[임매]을 불러 유리잔을 꽃 가운데 얹었다. 원령[이인상]이 유리잔 속에

    촛불을 켜니 불빛이 잔을 비추고 잔이 연꽃을 비추었다. 꽃과 물의 빛이 또

    연잎을 비추어 바깥은 푸른빛으로 안은 수은 빛으로 반짝반짝 빛났다.6)

    이와 같이 이날 연꽃 감상회에 참석한 이들은 함께 연꽃을 읊은 시를 지

    었을 뿐 아니라 그림도 그렸다. 이인상은 를 그렸고, 그 그림에 임

    매가 절구를 썼다. 그리고 이윤영은 화병에 꽂은 연꽃을 읊은 를

    지었다.

    바람 부는 버들가지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에

    두건을 비스듬히 쓴 산가의 객은 소슬하여라.

    6) 李胤永, , �丹陵遺稿� 권12: “胤之手折荷花欲開者, 泛於葉水, 呼

    伯玄置琉璃鍾于花心, 元靈點燭鍾中, 火透鍾, 鍾透花, 花水之光, 又透于葉, 外

    碧內汞, 熀朗洞澈.”

  • 194 韓國漢詩硏究 24

    시를 완성하려고 병의 맑은 물 다 쏟아 붓지만

    마음은 꽃망울 막 터뜨리려는 연꽃에 가있네.

    高柳風來三兩蟬, 欹巾山牖客蕭然.

    淸壺瀉盡詩將就, 意在蓮花欲吐邊.

    李胤永, , �丹陵遺稿� 권1

    이윤영은 또 이날 는 제목으로 이날 밤의 연꽃 감상을 마음껏 기렸

    다. 이날 쓴 시를 모은 것이 바로 이었다. 이날 밤의 모임은 그

    다음날로 계속 이어졌으니, 한낮이 되어서야 술에서 깬 이인상은 를 그리고, 이윤영은 를 그렸다.7) 다음 해인 1740년에 이인

    상은 또 을 지었다. 이러한 일련의 기록을 통

    해 시문과 회화의 창작이 연동되어 일어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한편, 담화재는 서화나 골동품 등을 감상하고 품평하는 공간이고, 또 서예

    를 하는 장소였다. 다음 글에서는 이 그룹의 문인들이 담화재에 모여서 서화

    골동을 감상하고 비평하는가 하면, 또 때로는 古隸 등 고풍의 서체를 시범하

    7) 李胤永, , �丹陵遺稿� 권12: “歲己未, 李胤之,健之家于池南巷,

    與友人李元靈任伯玄仲寬約乘夜游池上, 時七月之望也. 元靈先至, 展紙作淸暑

    圖, 圖半伯玄來, 題絶句其上. 胤之又賦甁蓮詩成, 酒已行數觴, 仲寬亦至, 袖出

    數綃幅, 爲畫供偕, 伯玄元靈各次胤之韻, 遂相與劇談竟夕. … 遂繞塘徘徊, 至

    夜半坐石橋, 各飮一觴, 仲寬手捧大蓮葉, 障露而歸, 取堂前石泉, 瀉其中, 元靈

    頻頻俯視, 顧胤之而笑, 胤之手折荷花欲開者, 泛於葉水, 呼伯玄置琉璃鍾于花

    心, 元靈點燭鍾中, 火透鍾, 鍾透花, 花水之光, 又透于葉, 外碧內汞, 熀朗洞澈.

    … 拈韵賦詩, 伯玄,元靈先就二詩, 曉雞已腷膊矣. 胤之,健之繼成一篇, 仲寬

    醉睡其傍, 亦坦然可喜. 日高起飮一廵, 元靈寫九龍淵於大幅, 出仲寬紙, 作三日

    浦, 胤之又爲仲寬畫池上夜游, 仲寬亦次韵談笑.”

  • 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195

    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처음 윤지가 반지 가에 집을 짓고 편액을 달기를 ‘담화’라 하였다. 집 안

    에는 서화와 고기, 진기한 볼거리들이 쌓여 있었는데, 대개 벗들이 준 것이

    많았다. …매양 한가한 날이면 古銅과 古玉과 鼎彛와 琴劍 따위를 꺼내 놓

    고는 품평을 해 가면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 윤공[尹心衡]이 밤에 담화

    재에서 술자리를 벌였을 때 내게 古隸를 쓰라고 분부하셨다.8)

    한편, 이윤영은 1756년 여름 서지 가 담화재에서 西城 밖 경교 부근에 있

    는 鄭斗卿의 옛집으로 이사하였다.9) 이윤영은 이곳에 水晶樓(水精樓)라는

    이름의 書樓를 세웠다. 이윤영은 담화재에 서화와 古器 등 진귀한 물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중부 이태중이 청나라 연경에서 사온 수

    정필산도 들어 있었다. 이윤영은 이 수정필산을 기념하는 한편, 꿈에 단양의

    바위[이인상은 사인암이라 하였다]가 수정으로 바뀐 것을 보고 단양으로 가

    고 싶은 마음을 붙여 서루의 이름을 수정루라 불렀다. 이러한 내용이 1757년

    에 金鍾秀가 쓴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10) 이인상 또한 를 썼는데, 그 글에 따르면 이 집은 담화재 만큼 화초와 나무가 성대하

    지는 못했고, 서화와 기물들도 많이 없어졌다고 하였다.11)

    8) 李麟祥, , �능호집� 권3: “始胤之築室盤池之上, 扁曰澹華, 繞以花

    竹, 室中蓄書畵古器瑰奇之觀, 槩多朋友所贈. … 每於暇日, 出古銅古玉鼎彝琴

    劒之屬, 拂拭以示人, 卽水精筆山, 在胤之器翫. … 尙記尹公夜讌澹華之室, 命

    余作古隷.”

    9) 이인상 지음, 박희병 옮김, �능호집� 하, 128쪽.

    10) 金鍾秀, , �夢梧集� 권4: “李子胤之家京口之橋東, 因屋而樓, 樓之

    高可蒲伏行而不可平立, 其濶容古書一二千卷, 古銅玉器數枚, 木石恠奇之物以

    外, 主人有客二人, 則不足以列觴豆, 揖讓於其間. 胤之不恒樓居, 見余輒携而登

    焉, 一日, 胤之名其樓曰水晶樓, 樓中盖有淡紫水晶一塊云. 胤之之言曰, “是晶

    也, 吾仲父之所賜也, 仲父亡而吾益重是晶. 且丹山吾所歸也, 吾甞夢人巖四百

    尺, 盡化爲水晶, 吾思丹山而不得歸, 則見是晶如見丹山焉, 故以名樓.”

    11) 이인상, , �능호집� 권3: “胤之移居西城, 庭植卉木, 不及澹華之盛,

    室中之書畵器翫, 已多存沒之感, 而水精在其中, 遂作古物矣.”

  • 196 韓國漢詩硏究 24

    1756년 이윤영은 이인상, 김상묵, 김종수와 함께 새로 이사한 집 수정루에

    서 아회를 열었다. 이날 이운영, 이서영, 이유수, 김광묵, 조정이 참여하였는

    데, 이 모임은 사흘이나 지속되었다. 이때 이윤영은 당시 이인상이 그림을

    그리는 광경과 김상숙이 글씨를 쓰는 광경, 李惟秀가 바둑을 두는 광경 등을

    시로 남겼다.12) 그 중 김상숙이 글씨를 쓰는 광경을 그린 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살며시 웃으며 기이한 붓을 소매에서 꺼내고서

    계절 안부 서로 묻고 나자 대화조차 끊겼네.

    흰 눈 같은 종이 두루마리를 먼저 펼치고는

    팔뚝 사이로 검은 구름 같은 기틀을 조금씩 움직이네.

    재갈 벗은 천마가 바람을 따라 달려가는 듯

    물을 뚫고나온 뱀이 번개가 되어 나는 듯.13)

    열 사람 이름을 쓰는 것은 진실로 성대한 일이니

    서원의 굽이진 물가를 그리는 마음은 또렷하여라.

    奇毫出袖笑微微, 相見寒暄說且稀.

    白雪先開楮上陣, 玄雲稍動腕間機.

    脫銜天馬追風逝, 透水驚蛇化電飛.

    十子題名眞盛事, 西園曲水思依依.

    3) 오찬의 계산동 山天齋

    오찬(1717~1751)은 대제학 吳瑗의 이복동생으로, 1751년에 정언에 제수된

    후 징토를 엄히 할 것과 시비를 분명히 할 것 등을 상서하여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李宗城이 凶逆들과 어울린다는 상서를 계속 올

    12) 李胤永, , 「水晶錄」, �丹陵遺

    稿� 권10.

    13) 魏나라 名筆 鍾繇의 제자 宋翼의 글씨가 놀랜 뱀이 물을 통과하는 것[驚蛇透

    水] 같았다 한다.

  • 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197

    리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피임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같은 해 내

    수사를 파할 것을 청하자 급기야 영조는 진노하여, 오찬을 仕版에서 삭제하

    고 성문 밖으로 쫒아냈다. 후에 함경도 삼수로 귀양 보내져, 그곳에서 죽었

    는데 관직에 오른 지 1년 만이었다. 이인상과 이윤영은 벗 오찬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하고서 와 를 각각 지어 깊은 슬픔을 토로하였다.

    오찬의 집은 서울 계산동(창덕궁 서쪽 지역, 지금의 가회동)에 있었는데,

    1748년 겨울 오찬이 자신의 집 정원인 臥雪軒 동쪽에 山天齋라는 이름의 書

    室을 조성하였다. 산천재가 완성되기 이전에도 이 그룹의 문인들은 오찬의

    집을 찾곤 하였다. 1747년 정월 보름밤, 이인상, 兪彦淳, 김상숙은 종로의 술

    집 賣貂樓에서 몹시 취한 뒤 다시 광통교에 있는 술집을 찾아가 술을 더 마

    시고는 달빛을 밟으며 오찬의 집을 방문하여 밤이 늦도록 놀다가 파한 적도

    있었다.14) 오찬의 산천재에서는 벗들이 함께 모여 書史를 講磨하고, 산을 품

    평하고 거문고를 배우고, 꽃을 옮겨 심거나 대나무를 심는 등 다양한 교유를

    펼쳤다.15) 이인상이 쓴 다음의 시제를 읽어보면, 당시 이인상 그룹의 문인들

    이 산천재에 모여 강학회를 여는 동안 함께 시문을 창작하고 서화골동 및

    화훼 취향을 함께 즐기는 양상이 잘 드러나 있다.

    갑자년(1744) 겨울에 오경보[오찬]가 두 조카 오재순과 오재유를 데리고서

    계산동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이윤지[이윤영]와 김유문[김순택], 윤자목

    [윤면동]과 내가 모두 가서 모였다. 책을 들고 찾아와 묻는 동자가 셋이었다.

    자목은 �논어�를 읽고 유문은 �맹자�를 읽고 나머지 사람들은 �서전�을 읽

    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는 함께 주자의 편지글 몇 편을 읽었다. 그렇게 대

    략 한 달을 하고서 마쳤다. 골짜기가 깊고 날이 고요하여 손님이 거의 오지

    않았는데, 오직 송사행[송문흠]과 김원박[김무택]이 한번 오면 밤을 지새워

    이야기를 했고, 권형숙[권진응]은 해가 기울어야 돌아갔다. 오성임[오재홍]은

    14) 李麟祥, , �능호집� 권2.

    15) 李麟祥, , �凌壺集� 권3.

  • 198 韓國漢詩硏究 24

    병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고 간간이 내왕하였다. 또 매화 감실과 석죽(石竹)

    을 옮겨와 앉은 자리 구석에 놓아 두어 파초 화분과 짝을 맞추었다. 집이

    매우 따뜻하여 파초 잎이 여전히 푸른색으로 빛나며 시들지 않았다. 항아리

    에는 금붕어 대여섯 마리를 길렀는데 이리저리 활발히 헤엄치는 모습이 완

    상할 만하였다. 향로와 보검, 문방구 등 아정한 용품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

    어, 이따금 시간이 가도록 감상하고 품평하느라 책 읽는 일과를 간혹 중단

    하기도 했으므로 듣는 자들이 웃었다. 그러나 강학하는 즐거움은 이 모임보

    다 나은 모임이 없었다. (후략)16)

    위 글을 보면, 산천재에서 열린 강학회에는 오찬의 두 조카 吳載純과 吳

    載維, 이인상과 이윤영, 김순택, 윤면동, 송문흠, 김무택, 권진응 등이 참석하

    였다. 이 강학회는 거의 한 달간 지속되었으며, 경전 학습을 위주로 하면서

    도 시문을 짓고 때로는 자신들의 출처를 토론하기도 하였다. 산천재에는 향

    로와 보검, 문방구 같은 골동 취향의 기물들과, 또 매화 감실과 석죽, 파초

    화분 같은 아치 있는 화훼가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이 모임의 광경을 그

    린 그림이 바로 인데,17) 이 모임에 참석했던 김순택은 이 그림

    에 제화를 붙여 그림 속 인물과 기물들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김순택의 제

    화는 다시, 48년의 세월이 흐른 1792년 오재순이 쓴 에 그

    대로 전재되었다. 오재순의 글에 의하면, 탁상 위에는 문왕의 尊彜를 본뜬

    오래된 솥[古鼎], 오래된 고동 술잔[古螺杯], 검, 필통 등이 놓여 있었다 한

    16) 李麟祥, , �능호집� 권1. 이 글은 강학회가 열린 지

    2년 뒤인 병인년(1746)에 기록한 글이다.

    17) 현전하는 이인상의 그림 가 바로 이날의 정경을 그린 그림으로 추정

    된다. 송희경, �조선후기 아회도�, 다할미디어, 2008. 참조. 박희병은 이 그림을

    라 불러야 그 성격에 맞다고 하였다. 박희병, 앞의 글, 437면.

  • 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199

    다.18)

    이윤영의 서지 담화재가 이 그룹이 특별한 연꽃 감상회를 연 곳이라면,

    오찬의 산천재는 이 그룹이 특별한 梅花宴(梅花飮)을 열었던 곳이다. 이들의

    매화 감상법은 얼음 덩어리 가운데 촛불을 넣어 만든 얼음등[氷燈]을 매화가

    지에 걸어 놓고 그 빛에 비친 매화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이인상이 이때 그

    린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로 추정된다. 얼음등으로 매화를

    감상하는 아치를 이인상은 (�뇌상관고� 제4책)로 남겼을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이 한시로도 읊었다.

    기억건대 갑자년(1744년) 겨울에 경보는 여러 벗들을 불러 계산동 자신의

    집에서 책을 읽었다. 대나무와 파초 화분 두 개를 매화 감실에 뒀더니, 파초

    또한 겨울을 나도록 죽지 않았다. 그 후 경보는 卧雪園을 수리하고 산천재

    를 지어 겨울 동안 매양 여러 벗들과 모여 매화를 감상하였다. 한번은 얼음

    등을 만들어 매화나무 위에 매달아 놓고 새벽까지 실컷 술을 마신 적이 있

    는데, 경보는 이윤지[이윤영]의 山子馬를 빌려 여러 벗들을 초청하였다. …

    병자년(1756) 가을 매화축(梅花軸)에 이 시를 적어 김정부[김종수]에게 보이

    면서 시 속의 용사가 은미하기에 적는다.19)

    위 시제에 보이는 은 매화를 그린 두루마리로 보이는데, 이인상

    은 바로 여기에 옛 일을 추억하여 기록하고 다시 시를 지어 붙였던 것이다.

    산천재의 매화연은 오찬이 죽은 뒤 그를 추념하는 한시에서 다시 추억될 만

    큼 이 그룹 문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였다.

    이와 같이 이인상 그룹에게 매화는 특별한 예술적 제재였다. 1751년 오찬

    과 이윤영은 林逋의 매화시 여덟 편에 차운한 뒤 이인상에게 화답을 청하였

    18) 吳載純, , �醇庵集� 권6.

    19) 李麟祥, , �능호집� 권2.

  • 200 韓國漢詩硏究 24

    는데, 미처 화답시를 완성하지 못한 이인상은 오찬이 세상을 뜬 다음해에 시

    를 완성한 바 있다. 이런 모습은 매화가 이들 사이에서 변함없는 신의와 의

    리를 상징하는 소재였음을 말해준다.

    오찬의 산천재 역시 서화, 골동품을 많이 수장하고 있어서, 이들이 서화

    및 골동품, 화훼를 감상하고 품평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특히 이들이

    직접 골동품을 만들기도 한 점이 주목되는데, 이인상의 시 (�능호집� 권1)에서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古器를 마음에 맞게 제작하였고

    맛난 음식 장만하니 마침 벗들이 찾아왔네.

    얼음등은 투명하게 촛불을 담아내고

    소라 고동은 공교하게 술잔이 되었네.

    취한 마음 참으로 단단한 쇠가 되고

    헛된 명성은 사그라진 재처럼 여기네.

    은하수 아스라이 빛나는 밤

    쓸쓸히 겨울 매화를 보고 있노라.

    古器稱心製, 嘉餐賴友來.

    氷燈淸耐燭, 螺甲巧成杯.

    醉肚眞成鐵, 浮名極似灰.

    崢嶸星漢夜, 寥落看寒梅.

    이 시를 보면, 이 그룹 문인들이 자신들이 제작한 古器를 감상하고 얼음

    등으로 매화를 감상하는 등 독특한 매화연을 연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보이는 고기 제작은 ‘心製’라 하였으니 진품과 똑같은 형태를 추구하

    기 보다 古의 정신을 재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에 대해 김수진은 이인상과

  • 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201

    그의 벗들이 중화문명을 계승한다는 의식 아래 고기를 재현한 것으로, 이들

    의 골동 애호는 단순한 好古 취미가 아니라 大明義理論과 관련된 상징적 문

    예 행위라 하였다.20)

    한편, 오찬의 집에는 玉磬樓라는 이름의 누각이 있었다. 이인상의 (�능호집� 권3)에 의하면, 오찬과 이윤영은 경쇠 연주하기를 좋아했는

    데, 이인상이 오찬의 작은 누각에 ‘옥경’이라는 두 글자를 편액으로 써 준 적

    이 있었다. 오찬과 이인상은 한가한 날이면 서로 경쇠를 두드리며 그 소리를

    듣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21) 오재순은 을 보고 느낀

    감회를 시를 남겼는데, 그에 따르면 옥경루에서 눈이 온 달 밤 오찬은 벗들

    을 불러 매화연을 열었는데 맑은 얼음으로 벼루에 먹을 갈고 눈 같은 흰 종

    이를 10폭이나 잇달아 펼쳐놓고는 시의 교졸을 가리지 않고 서로 화답하였

    다 한다.22) 이윤영이 옥경루에서 읊은 다음의 시에는 古器와 海嶽 병풍이

    놓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정신적 지향을 읽을 수 있다.

    화산[북한산]이 두 들창문에 늘어서 있어

    밤낮으로 맑음과 흐림이 떠 있네.

    그릇은 은나라 주나라 古器를 본떴고

    병풍에는 깊은 바다와 산이 펼쳐져 있네.

    그대와 함께 작은 누대에 기대니

    저 속세와는 천 길이나 벗어나 있네.

    20) 김수진, 앞의 논문, 115~116면.

    21) 李麟祥, , �凌壺集� 권3: “余與友人吳敬父,李胤之, 性好擊磬, 余

    嘗扁敬父小樓曰玉磬, 每於暇日, 相與敲擊而聽之, 以爲樂焉.”

    22) 吳載純, , �醇庵集� 권1: “玉磬樓下白雪姸, 玉磬樓

    上明月懸. 招邀爲赴梅花約, 頎然兩弟笑相延. 淸香藹藹酒氣暖, 窮陰勾迴陽和

    權. 肴核狼藉杯無廵, 歌吟笑呼喧四筵. 歡會從古戒荒康, 攝以威儀無太顚. 淸冰

    磨墨滿古硯, 雪膚新楮十幅連. 題詩不復論工拙, 爾唱我和盈百篇. 句不成語字

    似鴉, 瀾漫眞意猶可宣. 攬衣出戶不見人, 星斗燦燦天惟圜. 流霜萬瓦光沃若, 明

    月閉戶幾家眠. 循庭徐步酒顔熱, 北風吹來思化仙. 尋常盃酒跌宕間, 每憶關塞

    心黯然. 華山雪色高切雲, 遮斷愁人北望天. 城烏棲定魚鑰牢, 白門之西情更牽.

    曉天飮罷出門去, 鼕鼕漏皷街上傳.”

  • 202 韓國漢詩硏究 24

    북으로 바라보니 근심은 끝이 없는데

    옥경 소리 들으며 마음을 논하네.

    華峯列雙牖, 日夜泛淸陰.

    器象殷周古, 屛開海嶽深.

    共君憑小檻, 與世拔千尋.

    北望愁何極, 論心玉磬音.

    李胤永, , �단릉유고� 권7

    한편, 이 그룹의 골동 취향은 각종 器物銘 제작으로도 나타났다. 이인상

    은 �뇌상관고�에 48편(�능호집�에는 단 5편만 수록되어 있음)의 기물명을 남

    겼는데, 종정, 향로, 검, 호, 고, 필, 연, 묵, 필통, 거문고, 동경, 자명종, 원경

    등 종류도 다양하였다. 이윤영, 오찬, 송문흠 등이 소유한 기물에 부친 것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윤영 역시 이인상의 기물에 명을 남겼고, 송문흠

    역시 이인상과 이윤영의 기물에 명을 남겼다.(, �한정당

    집� 권7) 이와 같이 기물 애완과 기물명 제작은 이들의 공통된 취향이었다.

    그런데 이인상 그룹의 이러한 취향은 동시대 경화사족 부호가의 사치, 향

    략적 취향과는 구별된다.23) 예컨대, 이인상은 윤면동의 벼루에 부친 명에서

    “번다한 글을 쓰려고 붓을 적시지 말라(無繁辭以濡筆)”거나 “문채를 감추어

    소박함을 보존하라(用晦于文以存樸)”와 같은 말로 기물 애호의 폐단을 경계

    하고 있다.(, �능호집� 권4) 또, 이인상이 이윤

    영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우리 무리를 일러 기량이 천박하며 늙어도 정박함

    이 없다(有識者論吾輩伎倆賤薄, 老無依泊)”는 비난을 받는 근거가 “우리가

    속세를 떠나 깊이 운둔하지 못하고 그간 자잘한 애완물을 갖춘 바람(吾輩旣

    不能長往而深藏, 閒具瑣細)”에 생긴 일이라 하며, “애완물을 자꾸 읊어 성정

    을 깎아 왜소하게 만듦으로써 보는 자로 하여금 염증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될 일(不宜纍纍稱述, 斲小性情, 而使觀者厭射也)”이라 충고하고 있다.(, �능호집� 권3) 이로써 보면, 이인상 그룹의 서화골동 취향은

    성리학적 관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23) 김수진, 앞의 글, 151면.

  • 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203

    4) 송문흠의 方山 歸去來館

    이인상 그룹에서 중요한 또 한 명의 인물이 송문흠이다. 그는 宋浚吉의

    후손으로 백형 宋明欽과 함께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일찍 졸하여 학문적 성

    과가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고 유고도 많지 않았다. 송문흠의 遺文을 처음 정

    리한 사람이 바로 이인상, 신소, 송명흠 등이다. 송문흠은 충청북도 方山에

    여섯 칸의 초가집 귀거래관을 마련하였다. 주희가 南康郡의 지사로 있을 때

    陶公醉石이란 바위 곁에 집을 지어 귀거래관이라 했는데, 이를 본떠 명명한

    것이다. 이인상은 이 귀거래관의 상량문을 지었으며,24) 또 송문흠은 여러 당

    실들의 편액 글씨 및 주변에 각석할 글씨를 이인상에게 요청하였다.25)

    그런데 송문흠의 귀거래관은 서울의 능호관이나 담화재처럼 이 그룹의 문

    인들이 함께 모여서 시서화 활동을 펼칠 수 있는 편리한 공간은 되지 못했

    다. 그러나 이 그룹의 삶의 태도나 정신적 지향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공간

    이다. 송문흠이 귀거래관과 그 주변 이곳저곳에 부친 명칭들을 보면, 대부분

    이 주희의 시구나 도연명의 시구에서 가져온 것을 알 수 있는데, 송문흠이

    도연명처럼 강호자연에 은거하여 한가롭게 살면서 주희처럼 강학하며 심성

    을 연구하는 삶을 지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간파한 이인상은 을 지어, 송문흠의 귀거래관에서

    의 삶을 칭송하였다. 도연명의 에 보이는 ‘閒靜’에서 이름을 취

    한 閒靜堂과, 도연명의 에서 이름을 취한 息交門에 부친 이인상

    의 시를 차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거친 골짝 개간해 집을 짓느라

    띠도 이고 도끼자루도 잡네.

    깊은 방 홀로 있어도 본심을 보존하니

    24) 이인상, , �능호집� 권4.

    25) 송문흠,, �한정당집� 권3: “且乞偉筆, 無論篆隷楷草, 一一寫來,

    或作扁或刻石, 扁字不要大, 只如掌許, 刻石者卻須稍大也, 養之不別爲書, 乞照

    此紙, 就中分寫幾箇, 要令丘壑增輝, 仍作千里顔色, 幸甚.”

  • 204 韓國漢詩硏究 24

    참된 즐거움은 고요할 때 많네.

    結構開荒谷, 編茅復引柯.

    存心在屋漏, 眞樂靜時多.

    초가집 문 단지 널판으로 만들었고

    온갖 풀 무성하여 뜰에는 길도 없네.

    책상 주위에는 책이 일만 갑

    누운 곳엔 거문고 경쇠 소리가 세상을 막았네.

    草門獨板扉, 羣卉不開徑.

    繞床書萬函, 卧處礙琴磬.

    이상의 두 시를 통해 송문흠이 세상과 멀리 떨어진 공간 방산 귀거래관에

    서 본성을 지키는 처사로, 또 일만 갑의 책을 수장한 학자로 고고하게 살아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처사로, 학자로서의 삶을 지향한 송문흠이지만, 그 역시 서화에 힘

    썼다. 이인상이 송문흠에게 일본의 적간관에서 만들어진 벼루를 주면서 “옥

    주 북쪽 들녘 그윽한 대숲의 그대 집에 간직하며, 세상 놀래키는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리. 古隸는 엄중하고 草書는 날래, 필묵이 淋漓하고 붓놀림이

    한가롭네(藏君沃北之野幽篁室, 贊君造書驚區寰. 古隷嚴重草書疾, 筆雷墨雨

    驅使閒).”라26) 읊은 것을 보면, 송문흠 역시 귀거래관에서 시문 창작과 함께

    고풍의 서예에 침잠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인상의 시 (�능호집� 권1)에 언급된

    26) 이인상, , �능호집�, 권1.

  • 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205

    는 아마도 송문흠의 방산 귀거래관을 염두에 두고 그린 그림이 아

    닌가 한다.27) 이인상이 부채에 그린 에 홍자, 송문흠, 이인상이 차

    례로 두 구씩 연구를 지어 완성하였다. 위 시제에서 말한 대로 이들은 시 속

    에 천첩 산중, 석탑, 다로 등을 자세하게 묘사하여 詩中畵의 경지를 구현하

    였다. 송문흠의 �한정당집�에 의하면, 이 연구는 1743년에 창작되었다.28) 연

    구의 한 대목만 들어본다.

    그늘진 골짜기에는 맑은 바람소리 은은하고

    푸른 뜰에는 꽃다운 자리 깔렸네. - 홍자

    석상에는 연꽃 향기 짙은데

    차 끓이는 화로는 잣나무 곁에 있네. - 송문흠

    빈 못은 한 개의 거울처럼 환하고

    허공의 폭포에는 두 개의 띠가 드리워 있네. - 이인상

    峒陰隱泠珮, 庭綠薦芳茵 養.

    石榻薰荷氣, 茶爐近柏身 行.

    虗池開一鑑, 空瀑拖雙紳 靈.

    이상에서 ‘귀거래’로 상징되는 송문흠의 삶을 통해 이인상 그룹의 시문과

    서화가 처사적 정신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5) 이인상과 이윤영의 단양 龜潭

    이인상과 이윤영은 한때 모두 서울을 떠나 단양의 구담 가에 은거하였다.

    이인상이 신사보에게 준 시 (�능호집� 권1) 제2수의

    27) 물론, 이인상이 1738년 남송의 四大 화가인 劉松年의 를 솜씨 좋은

    화가가 임모한 것으로 보이는 그림에 부친 발문(, �능호

    집� 권4)을 남기고 있어, 유송년의 또한 이인상의 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여겨진다.

    28) 송문흠, , �한정당집� 권1.

  • 206 韓國漢詩硏究 24

    일부분을 보면, 이인상은 오래전 단양의 구담으로 이거할 계획을 가지고 벗

    이자 동서간인 신사보와 그 일을 의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의 서재를 구담에 세우고

    또 설마동 북쪽에 雲樓를 지으리.

    그곳에 古劍과 銅鼎을 두고

    皇命 시절 새긴 古書와 寶篆도 두며,

    뜰에 매화, 국화, 대, 오동을 나눠 심으리.

    아득한 구름 속에서 그대와 시를 주고받으면

    온 산 가득 낙화뿐 아는 이 없으리.

    着我畵舫龜潭中, 更架雲樓雪洞北.

    中藏古劒與銅鼎. 古書寶篆皇明刻,

    梅菊竹桐分庭植. 雲濤杳冥相和唱,

    落花滿山無人識.

    위 시를 보면, 이인상이 설계한 구담 가의 집은 다만 단양 구담이라는 이

    상적인 자연공간에 위치한 것만이 달랐지 서울의 능호관이나 담화재, 산천

    재와 마찬가지로 서적과 서화골동, 화훼가 잘 갖추어진 집이었다. 1751년 1

    월 이인상은 구담에 정자를 짓고 陶弘景의 시구 “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

    에서 이름을 취하여 多白雲樓라 하였다. 청풍의 능강동에 거주하고 있던 신

    사보가 음죽 현감으로 있는 이인상을 대신해 다백운루를 건립하는 일을 하

    였다. 이에 이인상은 “그대 덕에 운루를 지어 구봉에다 책을 수장하였지”라

    시를 읊어 감사한 마음을 신사보에게 전하였다. 退漁堂 金鎭商이 葛筆을 휘

    둘러 白雲居라는 편액을 써주었다.

    또, 이인상은 강물을 따라 구담의 절경을 보기 위해 뗏목 위에 초정을 세

    운 浮亭을 만들었다. 이인상은 (�능호집�권3)와 (�뇌

    상관고� 수록)를 쓰고, 거기에 시를 부쳐 동호인들에게 보였다. 이인상의

    에는 이윤영과 송문흠이 차례로 화답하였다.

    이즈음 이윤영은 단양 군수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단양에 와 있었다.

  • 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207

    1751년 3월 말경 이인상과 이윤영, 김종수 등은 합류하여 단양 일대를 유람

    하였는데, 사인암의 석벽에 글씨를 새긴 것이 이때로 추정된다. 1752년 이윤

    영도 마침내 단양의 구담봉 맞은편에 蒼霞亭을 건립하였다. 창하라는 이름

    은 주희 시구 “흰 눈은 맑은 절벽에 남아 있고, 푸른 노을은 적성을 마주하

    고 있네(素雪留淸壁, 蒼霞對赤城)”에서 따왔다. 이 창하정의 상량문을 이인

    상이 1754년에 지었다. 이윤영의 (「山史」, �단릉유고� 권11)에 자

    세한 사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보면, 단양 구담은 이인상과 이윤영이 처사로서의 문예적 여유

    와 학자로서의 본분을 양립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산

    수탐승과 시서화 활동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교유의 장이었다.

    3. 이인상 그룹의 산수기행과 시서화 활동

    이인상 그룹은 산수기행을 통해 시서화의 영역을 확장했을 뿐 아니라, 산

    수를 품평하는 미적 활동을 실제의 산수체험으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직접

    산수 간을 여행하면서 한시를 짓고 기행문을 쓰고, 또 서로의 산수기행에 의

    미를 부여하는 비평적 글쓰기를 행하고, 조선의 산수를 직접 그렸다.

    먼저, 이인상의 경우, 1738년 여주 일대를 유람하고 , , , 등의 시를 남겼다. 1743과 1744년 사이에는 송문

    흠과 충청북도 단양과 제천 지역을 여행하였다. 1747년은 사근도 찰방에 부

    임한 해로, 그 겨울에 부산 바닷가에 내려가 제10차 통신사행을 전별하였다.

    이때 , , 등을 남겼다. 다음해에는 진주, 고성, 통

    영 일대를 유람하고 , , 를 지었다. 1749년에

    는 사근도 근처의 안의, 삼동을 유람하였다. 이와 같이 이인상은 비교적 활

    발한 산수기행을 통해 많은 산수시와 유기문을 남겼다.

    회화와 관련해서 주목해 볼 기행은 1737년 28세 때 金剛山을 유람한 일이

    다. 이때 이인상은 , , , 등을 지었다.

    1739년 이윤영의 담화재 모임에서 이인상이 흥취가 일자 구룡연을 대폭에

  • 208 韓國漢詩硏究 24

    그렸다고 하였는데, 이때 자신이 직접 가본 금강산 구룡연의 모습이 자연스

    럽게 연상되었을 것이다. 또 黃景源의 에 따르면, 이인상은 김창

    흡의 시를 토대로 그림을 그린 뒤 자신에게 기문을 부탁했다 한

    다.29)

    다음으로, 이윤영은 1739년 鎭川 현감으로 부임하는 부친을 배종하였고,

    1740년에는 金山 郡守로 부임하는 백부 李華重을 전송하는 길에 지인들과

    金川을 유람하였으며, 1741년 경에는 尙州와 善山의 명승지와 伽倻山의 海

    印寺 등을 유람하였다. 또, 1741년 任邁와 경기도 楊州의 石室書院을 참배하

    고 돌아왔으며, 1743년에는 載寧 郡守로 부임하는 부친을 배종하였으며,

    1747년에는 金堤 郡守로 부임하는 부친을 배종하며 여행하였다. 1751년부터

    1755년 무렵까지 단양에서 은거 생활을 하며 단양 일대를 유람하였다. 이처

    럼 이윤영은 많은 지역을 유람하고 다녔던 만큼 명승지를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지었다. 또한 유기문 역시 다량 창작하였으니, 단양의 龜潭, 鷰子山, 石

    芝磴, 降仙臺, 長淮灘, 可隱洞, 赤城山, 玉筍峯, 雲潭書樓, 島潭, 舍人巖, 芙

    蓉城, 橋內山, 玉鍾窟 등지를 지인들과 유람하며 지은 記文 18편을 모은 「山

    史」가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이윤영은 역시 산수에 대한 관심을 회화로 확장하였으니, 1739년 이

    인상은 (�뇌상관고� 권4)에서 이윤영의 산수화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윤지는 마음이 맑고 명성을 가까이하지 않아서 그가 그

    린 그림은 모두 마음 가는 대로 표현한 것이며 그 교졸은 스스로 생각지 않

    는다. 이 그림은 그윽하고 자욱하여 사람의 정신을 감동시킨다. 이는 흥회가

    있어 그것을 드러낸 것이지만, 후대에 감상하는 자들은 어김없이 이자[이윤

    영]가 대치[황공망]의 筆意를 배워서 만폭동과 화양동의 수석을 그렸다고만

    하지, 북담에 연꽃이 한창 피고 달밤에 벗이 찾아와 이자의 흥회가 바로 이

    에 있었음을 어찌 알겠는가?” 이러한 비평을 통해 이윤영의 산수화는 공교한

    솜씨로 대상을 핍진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신, 자신과 대상 사이의

    29) 황경원, , �江漢集� 권9: “今年秋, 李君元靈, 本三淵金公昌翕所爲

    九淵詩而爲之圖, 屬余爲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인상의 는 이러

    한 상황 속에 나온 그림일 것이다.

  • 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209

    神會를 중요시하는 문인산수화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송문흠은 18세에 關西를 유람하는 큰형 宋明欽과 松都를 유람

    하였고, 29세에는 宋明欽과 함께 華陽洞을 유람하였으며, 문의현감 시절 사

    근역으로 이인상 찾아갔을 때 를 지었다. 이때 이인상은 또한 역

    관 남루에 올라 술을 마시다가 흥이 나서 송문흠과 수수정에까지 걸어간 사

    정을 시로 남기기도 하였다.30) 이덕무의 기록에 의하면, 이인상이 사근역 찰

    방으로 있을 때 많은 것을 설치하였는데, 관아의 동헌에 건 寒竹堂이라는 편

    액을 大篆으로 팠으며, 마루 동쪽 모퉁이에 杜沖・紅梅와 古松・脩竹 등속을

    심었으며, 조그마한 기와 정자 수수정을 나무 사이에 세웠다. 그리고 이 數

    樹亭에 걸린 세 글자의 편액은 文義縣令 송문흠이 쓴 八分體였으며, 북쪽

    기둥에는 이인상의 自書를 걸었다 한다.31)

    송문흠의 유기문으로는 속리산 文藏臺에 오르는 노정과 그 형세를 적은

    , 경상북도 문경에 위치한 甁泉精舍(이곳에 宋明欽이 은거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를 찾아가 그 승경을 적은 등을 들 수 있다.

    끝으로, 이인상 그룹이 함께 한 산수기행에서 시서화 활동을 한자리에 펼

    쳐 보인 예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에 든 예시문은 이인상의

    인데, 이 글은 �능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뇌상관고�에 실려 있다.

    때는 1741년 여름날로, 이인상, 송문흠, 김성재, 송익흠, 윤득민 등이 함께 삼

    청동을 유람하였다.

    다섯 명이 우산 하나를 빙 둘러 써서 귓가에 바짝 붙어 말을 하니 그제야

    뜻을 통할 수 있었다. 물이 더 불어나서 앉아 있던 바위를 적시자 사람들이

    다들 겉옷을 벗어 접어들고 앉았다가 다시 물보라가 어지러이 날리는 사이

    로 한가로이 노닐면서 발을 씻고 머리를 감는데, 유독 김공[김성재]과 시해

    [송익흠]는 버선과 띠를 갖추고 우산 아래에서 소라 껍데기 잔으로 독한 술

    30) 이인상, , �능호집� 권1.

    31) 이덕무, ‘數樹亭’조, , 「寒竹堂涉筆上」, �청장관전서� 제68 .

  • 210 韓國漢詩硏究 24

    을 건네어 함께 마시면서 참외를 먹고 있었다. 사행[송문흠]이 문득 우산 아

    래로 가더니 작은 보따리를 풀어 종이, 부채, 먹, 물감 등을 내어 나더러 그

    림을 그리라고 하였다. 나도 거절하지 않고 부채를 들고 바위를 등지고 앉

    아 잽싸게 그리니, 비가 먹물에 떨어져 포치도 못한 채 검게 칠한 부분을 소

    나무와 바위로 삼고 희게 남겨진 부분을 세찬 냇물로 삼았을 뿐 사람은 하

    나도 그리지 못했다. 이어서 김공의 기름 먹인 부채를 가져와 먹물을 뿌려

    우산 아래 다섯 사람을 그리고 한 아이종이 냇물을 보고 있는 모습을 그렸

    다. 수염과 눈을 뜻에 따라 그려 넣었을 뿐, 누구를 닮게 그렸고 누가 다른

    지는 생각지 않았다. 성구[윤득민]가 먼저 절구를 짓고, 사행이 율시를 또 지

    었으며, 김공과 시해는 즐거워하며 곁에서 지켜보았다. …시의 아속과 그림

    의 정추는 따지지 않았다.32)

    이 글은 이인상과 그의 벗들이 삼청동 산행을 나섰다가 여름비를 우산 하

    나로 가리며 계곡 가에 앉아 술과 참외를 먹다가, 문득 흥이 나서 그림을 그

    리기를 청하는 벗의 요구에 부응하여 이인상이 즉흥적으로 수묵산수화를 부

    채에 그리고 이어서 산수 간에 있는 자신들을 겨냥하여 인물들을 그려 넣는

    장면이다. 이 그림에 화답하여 윤득민과 송문흠이 연달아 시를 짓고 있다.

    이런 장면은 바로 산수기행의 장이 詩畵相看의 창작공간으로 바뀌는 순간을

    잘 보여준다.

    이와 유사하게 이인상과 이윤영 두 사람이 보여준 시화상간의 예가 있다.

    1748년 여름, 이인상은 사근역을 찾아온 이윤영과 함께 지리산 천왕봉에 올

    랐다. 이때 이윤영은 부채에 천왕봉을 그렸는데, 그 그림에 이인상은 다음과

    같이 제화시를 썼다.

    땅이 끝 난 곳에 오직 바다가 있고

    산봉우리는 멀어서 구름조차 없네.

    아득한 이 우주 안에

    32) 이인상, , �뇌상관고� 권4. 이상의 번역문은 김민영, 앞의 논문

    84, 85면을 재인용하였다.

  • 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211

    맑은 바람소리 철 따라 들려오네.

    地窮惟有海, 峰逈更無雲.

    茫茫八極內, 淸籟四時聞.

    李麟祥, , �능호집� 권1

    이 시는 성리학적 畵意로 그림과 상응하였으니, 아득한 우주에 사계절 불

    어오는 맑은 바람소리는 바로 불변의 天理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이 그룹 문인들의 시화는 서로 다른 두 예술 장르의 정신 지향이 같음을 확

    인해주는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4. 결론

    본고는 이인상 그룹이 교유의 장에서 펼친 시서화 활동을 그들이 남긴 시

    문을 대상으로 하여 살펴보았기에, 근본적으로 이인상과 이윤영 등의 회화,

    서예 작품 등의 미학을 적시하는 데까지 나갈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

    만 한시와 다양한 산문의 글쓰기에 드러나 있는 이들의 정신적 지향과 내면,

    그리고 미적, 예술적 지향은 충분히 드러난 셈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인상

    그룹의 회화와 서예의 특질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이인상

    그룹의 문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정치적, 현실적 상황과는 일정

    한 거리를 두고, 산수자연과 시문과 서화에 몰두한 문인들이었다. 西池賞蓮

    이나 氷燈賞梅와 같은 雅會를 즐기는가 하면, 서화골동 수집과 감상에 몰두

    하고, 또 아름다운 산수 사이를 누비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줄곧 맑고 깨끗

    하며 졸박한 문인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 결과 이들의 회화는 文字氣를

    강하게 띄고 있으며, 이들의 시문은 수사와 기교를 중시하는 세련된 시문이

    라기보다 질박한 문채를 지닌 시문에 더욱 가깝다. 또한, 勝景의 즉물적, 사

    실적 美에 경사되거나 초월적, 신선적 취향으로 달아나지 않고, 儒者로서 성

    리학적 사유에 기반한 미적 지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본고는 이인상 그룹으로 지칭한 문인들 중 다수를 미처 살피지

  • 212 韓國漢詩硏究 24

    못했다. 김무택의 �淵昭齋先生遺稿�, 윤면동의 �娛軒集�, 김순택의 �志素遺

    稿�, 김양행의 �止菴集�, 홍락순의 �大陵遺稿�등을 추가 검토할 필요가 있다.

  • 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21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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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서화관 테마전, 「능호관 이인상-소나무에 뜻을 담다」, 국립중앙박물관,

    2010.

  • 214 韓國漢詩硏究 24

    A study on Lee Insang Group's companionship and their paintings,

    calligraphic works and literary works

    Kang Hyesun(Sungshin Women’s Univ.)

    This paper focuses on the activities of painting, calligraphy and literature of

    Lee Insang Group(or Danho Group)'s members while keeping company with

    one another. Lee Insang, Lee Yunyoung, O Chan, Song Munhuym and others oc-

    cupied themselves with doing painting, calligraphic works and literary works.

    Also, they spent much times on traveling far. They kept distance from the politi-

    cal reality and clarified their courses opposing political courses of the mainstream

    society. The places for their companionship and the literature and art activities

    were their houses named Neunghogwan, Damhwajae, Sancheonjae, etc. They

    gathered together in those houses and spent times to study scriptures of

    Confucianism, paint pictures, do calligraphy and write poems. They shared their

    tastes about appreciating curios and gardening. They held two famous meetings

    for appreciating apricot flowers and lotuses in a unique way. They used ice

    lamp for apricot flowers and used glass lamp for lotuses in the night. Those ap-

    preciation methods showed a great sense of beauty. However, they set a much

    value on Confucian spirituality not realistic beauty when they did their painting,

    calligraphy and literary works.

    Lee Insang Group(or Danho Group), Lee Insang, Lee Yunyoung, companion-

    ship, activities of painting, calligraphy and literature

  • 李麟祥 그룹의 교유양상과 詩書畵 활동 연구 215

    논문투고일 : 2016. 9. 15.

    심사완료일 : 2016. 10. 15.

    게재확정일 : 2016.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