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이 없으면 죽은 작품” 인간·예술·기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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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제361호 기획 2013년 9월 25일 수요일 “관객이 없으면 죽은 작품” 인간·예술·기술과 소통하다 인생이란 내가 ‘누구와 어떻게 소 통하면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내가 만나서 소통하 는 사람들이 곧 주요한 내 생활이고, 혹 인간 사회와 단절된 채 자연 속 에 들어가 칩거하더라도 사람은 자 연, 하다못해 사물과 소통하며 살게 마련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프라이 데이’를 만나 난파 후 15년 만에 혼 자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영화 ‘캐스트어웨이(Cast Away)’(2000) 의 척(톰 행크스)은 무인도에서 배구 ‘윌슨’을 친구삼아 끊임없이 이 야기하지 않는가. 스콧 스니브(Scott Snibbe)는 인간 사이의 관계 및 예술과 기술의 관계 ‘상호작용적(interactive)’인 작 품으로 보여주는 작가다. ‘경계선의 기능(Boundary Functions)’ (1998) 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정사각형의 바닥이다. 혼자 바닥을 밟아 보아도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누군가 들어 오면 바닥에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경 계선이 그려진다. 두 사람이 서로 움 직이면 그 선도 우리를 따라 움직이 며, 또 다른 누군가 등장하면 경계 선도 늘어난다. 이 작품은 관람객에 게 직접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상 호작용하는 ‘관계성의 작품’이다. 관람객이 없으면 작품은 죽어있는 ‘off’의 상태, 즉 작품이면서 작품 이 아닌 잠재적인 상태이다. 경계선 은 점차 벌집 모양처럼 늘어나고 관 람객들은 벌집 하나씩, 즉 자기 만의 공간이 생기지만, 이 또한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 관계 맺기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 맺기’를 보 여주지만, 나아가서는 ‘인간과 기술 의 관계 맺기’, ‘인간과 물질의 관 계 맺기’를 제시한다. 이러한 리좀 (Rhizome)적 관계는 어떤 정치적 함의나 행동을 촉구하지는 않지만 가장 민주적인 마이크로토피아의 창출을 보여준다. 그러나 옆 관객에 게 밀착하듯 다가서거나 손을 잡아 서로 아주 가까워지면, 두 사람 사이 의 경계선은 사라지고 하나의 공간 속에 놓인다. 이렇듯 다른 사람과의 소통의 경계는 아주 유동적인 것이 다. ‘부끄러운(Shy)’(2003)에서는 투 사된 스크린 자체가 인간의 성격을 띠고 있다. 관람자가 스크린에 들어 서 개인적 공간이 방해 받은 스크린 의 사각형은 살아 움직여 뛰고, 움츠 려 들고, 피한다. 관람자가 스크린의 공간을 너무 침탈하면, 스크린의 사 5 각형은 완전히 사라져 관람자들이 떠나고 모든 상황이 가라앉았을 때 에야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주의 깊 게 조심히 움직이면, 관람자는 스크 린과 친근한 친구처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부끄러운’은 스크린의 빛 과 관람자의 몸 사이의 개인적인 관 계를 생성하며, 인간과 기술의 관계 를 통해 인간 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단순한 스크린 위 사각형의 빛이 아 닌 인격을 부여 받은 작품의 빛을 통 해 우리는 일방적인 관계의 폭력성 을 깨닫고, 서로 상호작용하는 관계 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집중(Concentration) ’(2003)의 아 무 것도 없는 텅 빈 스크린에서는 관 람자가 걸어와 그의 몸이 투사되면, 스크린의 불빛이 그 주변을 비친다. 관람자들이 서로 접촉하면 그 빛은 깜박이며 한 사람에게서 다른 이에 게로 확산된다. 빛의 아우라(aura) 를 지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접촉하면 그림자 속 신 체는 같이 빛을 나누어 받을 수 있 는 것이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우리 가 받는 집중과 주목, 아우라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확산될 수 있음을 체험한다. 니콜라스 부리오 (Nicolas Bourriaud) 는 예술은 특정한 사회성(sociality) 을 생산하는 장소이 며, 전시는 이러한 관계 교환의 장이 된다며, 작품의 ‘형태(form) ’보다는 ‘형성(formation) ’을 강조했다. 스콧 스니브의 작품에서는 작가가 작품 을 만든 시점의 그 상태가 아니라 관 람객과 소통하는 그 형성 과정이 진 정한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이는 단절 과 고립, 소외와 외로움이 가득한 현 대인의 모습을 심각하게 제시하는 방법이 아니라 작품과 같이 바라보 고 움직이며 웃고 즐기며 놀게 함으 로써 완성된다. 우리는 스콧 스니브의 작품 앞에서 조용히 작품과 거리두기를 하는 고 상한 감상자가 아니라, 팔을 뻗어 보 고, 여기 저기 걸어보며, 다른 사람 들과 부딪치고 춤도 추며 놀이하는 인간, ‘호모루덴스(Homo Ludens)’ 가 된 다. 요 한 하 위 징 아(Johan Huizinga)에 따르면 ‘놀이’는 일상 생활의 바깥에서 벌어지고, 진지하 지 않으며, 독립적인 자유 행위이나, 놀이하는 사람을 완벽하게 몰두하 도록 만든다. 그것은 물질적 이해와 는 상관없는 행위이고 아무런 이득 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콧 스 니브의 작품이라는 유쾌하고도 창 조적인 놀이감을 가지고 즐겁게 소 전혜정의 미술속 키워드로 읽는 삶① 스콧 스니브 작 집중, 2003 ② 스콧 스니브 작 환승, 2010 ③ 스콧 스니브 작 경계선의 기능, 1998 ④ 최승준 작 반딧불이의 숲 ⑤ 최승준 작 반딧불이의 숲 작가 스콧 스니브는 누구? 컴퓨터 사이언스와 순수미술, 실험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스 콧 스니브는 예술가이자 디자이너, 공학자, 사업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터랙티브 아티스트(interactive artist)로 다른 장르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고정된 유일무이의 예술작품이 아 닌 즐거운 유희적 프로젝트를 창조한다. 무용가, 디자이너, 가수, 음악가, 소프트웨어 아티스트 등 다른 예술가들과의 소 통과 협업을 통해, 상호작용적 영상, 설치, 그래픽, 영화, 스 마트폰 앱 앨범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다. 필자 전혜정은 누구? 큐레이터, 미술비평가. 예술학과 미술비평을 공부했으며, 순 수미술은 물론, 사진, 디자인, 만화, 공예 등 시각예술 전반의 다양한 전시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통할 뿐이다. 관람객이 만들어내는 동작과 소 리에 따라서 검은 스크린이 아름 다운 이미지로 채워지는 최승준의 상호작용적 작품에서도 우리는 창 작의 유희를 즐긴다. 이상한 나라 (Wonderland)에 들어온 앨리스처 럼 우리는 놀라움(Wonder)이 가득 한 시각적 쾌감을 우리 몸의 움직임 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어렸을 적 시 골에서 반딧불이를 경험한 어른이 나 책 속에서만 반딧불이를 본 아이 모두, 이상한 나라의 ‘반딧불이의 숲’(2007)에 들어가 자신 만의 반 딧불이, 자신 만의 숲, 자신 만의 추 억과 상상의 놀이터를 구현하는 것 이다. LA 국제 공항에 설치된 스콧 스니브의 ‘환승(Transit)’은 검은 보 전혜정 행자 실루엣들이 꾸미는 이야기가 58개의 모니터 위에서 펼쳐지는 작 품이다. 아이가 뛰어가다 엄마에게 되돌아가기도 하고, 캐리어를 끌고 짐을 들며 한 방향으로 걷고 있는 사 람들이 갑자기 가방을 내려놓고 힙 합, 살사, 발레 등을 추기도 한다. 걷 다가 서로 겹쳐져 한 사람의 실루엣 이 된 보행자들, 무심히 걷는 사람 들 사이로 갑자기 나타나 격정적인 춤을 추는 붉은 옷의 여인 등 공항의 일상적이면서도 일탈적인 모습들이 스크린에 연속된다. 예술가의 작품 이건, 공항의 새로운 인테리어건, 지 루하고 긴 줄에 지쳐있는 승객들을 배려하기 위한 서비스건, 작품을 보 는 사람들은 이 실루엣들이 만들어 내는 우연적이고, 유쾌한 이야기와 소통하는 즐거움/ 스콧 스니브 그의 작품은 관람객에게 직접적 반응을 보임으로써 상호 작용하는 작품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맺기’ ‘인간과 기술의 관계맺기’, ‘인간과 물질의 관계맺기’ 작품 앞에 서는 관객들은 고상한 감상자가 아니라 팔을 뻗고, 여기 저기 걸으며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고 춤도 추며 놀이하는 인간 모두가 ‘호모루덴스’가 된다. “내 작품은 사람들의 삶에 의미와 즐거움을 주는 것” 우린 스니브의 작품이라는 유쾌한 놀이감을 가지고 즐겁게 소통할 뿐이다. 경쾌한 춤 동작을 보며 웃고 즐긴다. “내 작품의 목표는 사람들의 삶에 의미와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나는 상호작용성을 활용하여 세계가 상 호 의 존 적(interdependent)이 라 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고 싶다.”는 스 니브의 말처럼, 그가 작품에서 입으 로 부는 작은 바람이 다른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주는 큰 바람으로 증폭 되는 것처럼, 소통의 즐거움을 표현 하는 것은 누군가의 존재를 기분 좋 은 바람처럼 느끼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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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제361호 기획 2013년 9월 25일 수요일

“관객이 없으면 죽은 작품” 인간·예술·기술과 소통하다

인생이란 내가 ‘누구와 어떻게 소통하면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내가 만나서 소통하는 사람들이 곧 주요한 내 생활이고, 혹 인간 사회와 단절된 채 자연 속에 들어가 칩거하더라도 사람은 자연, 하다못해 사물과 소통하며 살게 마련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프라이데이’를 만나 난파 후 15년 만에 혼자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영화

‘캐스트어웨이(Cast Away)’(2000)의 척(톰 행크스)은 무인도에서 배구공 ‘윌슨’을 친구삼아 끊임없이 이야기하지 않는가. 스콧 스니브(Scott Snibbe)는 인간

사이의 관계 및 예술과 기술의 관계를 ‘상호작용적(interactive)’인 작품으로 보여주는 작가다. ‘경계선의 기능(Boundary Functions)’(1998)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정사각형의 바닥이다. 혼자 바닥을 밟아 보아도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누군가 들어오면 바닥에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경계선이 그려진다. 두 사람이 서로 움직이면 그 선도 우리를 따라 움직이며, 또 다른 누군가 등장하면 경계선도 늘어난다. 이 작품은 관람객에게 직접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상호작용하는 ‘관계성의 작품’이다. 관람객이 없으면 작품은 죽어있는

‘off’의 상태, 즉 작품이면서 작품이 아닌 잠재적인 상태이다. 경계선은 점차 벌집 모양처럼 늘어나고 관람객들은 벌집 하나씩, 즉 자기 만의 공간이 생기지만, 이 또한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 관계 맺기는 기본적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맺기’를 보여주지만, 나아가서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 맺기’, ‘인간과 물질의 관계 맺기’를 제시한다. 이러한 리좀(Rhizome)적 관계는 어떤 정치적 함의나 행동을 촉구하지는 않지만 가장 민주적인 마이크로토피아의 창출을 보여준다. 그러나 옆 관객에게 밀착하듯 다가서거나 손을 잡아 서로 아주 가까워지면, 두 사람 사이의 경계선은 사라지고 하나의 공간 속에 놓인다. 이렇듯 다른 사람과의 소통의 경계는 아주 유동적인 것이다. ‘부끄러운(Shy)’(2003)에서는 투사된 스크린 자체가 인간의 성격을 띠고 있다. 관람자가 스크린에 들어서 개인적 공간이 방해 받은 스크린의 사각형은 살아 움직여 뛰고, 움츠려 들고, 피한다. 관람자가 스크린의 공간을 너무 침탈하면, 스크린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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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형은 완전히 사라져 관람자들이 떠나고 모든 상황이 가라앉았을 때에야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주의 깊게 조심히 움직이면, 관람자는 스크린과 친근한 친구처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부끄러운’은 스크린의 빛과 관람자의 몸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를 생성하며,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통해 인간 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단순한 스크린 위 사각형의 빛이 아닌 인격을 부여 받은 작품의 빛을 통해 우리는 일방적인 관계의 폭력성을 깨닫고, 서로 상호작용하는 관계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집중(Concentration)’(2003)의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스크린에서는 관람자가 걸어와 그의 몸이 투사되면, 스크린의 불빛이 그 주변을 비친다. 관람자들이 서로 접촉하면 그 빛은 깜박이며 한 사람에게서 다른 이에게로 확산된다. 빛의 아우라(aura)를 지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접촉하면 그림자 속 신체는 같이 빛을 나누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우리가 받는 집중과 주목, 아우라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확산될 수 있음을 체험한다. 니콜라스 부리오(Nicolas Bourriaud)는 예술은 특정한 사회성(sociality)을 생산하는 장소이며, 전시는 이러한 관계 교환의 장이 된다며, 작품의 ‘형태(form)’보다는

‘형성(formation)’을 강조했다. 스콧 스니브의 작품에서는 작가가 작품을 만든 시점의 그 상태가 아니라 관람객과 소통하는 그 형성 과정이 진정한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이는 단절과 고립, 소외와 외로움이 가득한 현대인의 모습을 심각하게 제시하는 방법이 아니라 작품과 같이 바라보고 움직이며 웃고 즐기며 놀게 함으로써 완성된다.우리는 스콧 스니브의 작품 앞에서

조용히 작품과 거리두기를 하는 고상한 감상자가 아니라, 팔을 뻗어 보고, 여기 저기 걸어보며,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고 춤도 추며 놀이하는 인간, ‘호모루덴스(Homo Ludens)’가 된 다. 요 한 하 위 징 아(Johan Huizinga)에 따르면 ‘놀이’는 일상생활의 바깥에서 벌어지고, 진지하지 않으며, 독립적인 자유 행위이나, 놀이하는 사람을 완벽하게 몰두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물질적 이해와는 상관없는 행위이고 아무런 이득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콧 스니브의 작품이라는 유쾌하고도 창조적인 놀이감을 가지고 즐겁게 소

전혜정의

‘미술속 키워드로 읽는 삶’

① 스콧 스니브 작 집중, 2003② 스콧 스니브 작 환승, 2010③ 스콧 스니브 작 경계선의 기능, 1998④ 최승준 작 반딧불이의 숲⑤ 최승준 작 반딧불이의 숲

③ ④

작가 스콧 스니브는 누구?컴퓨터 사이언스와 순수미술, 실험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스

콧 스니브는 예술가이자 디자이너, 공학자, 사업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터랙티브 아티스트(interactive artist)로 다른 장르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고정된 유일무이의 예술작품이 아

닌 즐거운 유희적 프로젝트를 창조한다. 무용가, 디자이너,

가수, 음악가, 소프트웨어 아티스트 등 다른 예술가들과의 소

통과 협업을 통해, 상호작용적 영상, 설치, 그래픽, 영화, 스

마트폰 앱 앨범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다.

필자 전혜정은 누구?큐레이터, 미술비평가. 예술학과 미술비평을 공부했으며, 순

수미술은 물론, 사진, 디자인, 만화, 공예 등 시각예술 전반의

다양한 전시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통할 뿐이다.관람객이 만들어내는 동작과 소

리에 따라서 검은 스크린이 아름다운 이미지로 채워지는 최승준의 상호작용적 작품에서도 우리는 창작의 유희를 즐긴다. 이상한 나라(Wonderland)에 들어온 앨리스처럼 우리는 놀라움(Wonder)이 가득한 시각적 쾌감을 우리 몸의 움직임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반딧불이를 경험한 어른이나 책 속에서만 반딧불이를 본 아이 모두, 이상한 나라의 ‘반딧불이의 숲’(2007)에 들어가 자신 만의 반딧불이, 자신 만의 숲, 자신 만의 추억과 상상의 놀이터를 구현하는 것이다. LA 국제 공항에 설치된 스콧 스니브의 ‘환승(Transit)’은 검은 보 전혜정

행자 실루엣들이 꾸미는 이야기가 58개의 모니터 위에서 펼쳐지는 작품이다. 아이가 뛰어가다 엄마에게 되돌아가기도 하고, 캐리어를 끌고 짐을 들며 한 방향으로 걷고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가방을 내려놓고 힙합, 살사, 발레 등을 추기도 한다. 걷다가 서로 겹쳐져 한 사람의 실루엣이 된 보행자들, 무심히 걷는 사람들 사이로 갑자기 나타나 격정적인 춤을 추는 붉은 옷의 여인 등 공항의 일상적이면서도 일탈적인 모습들이 스크린에 연속된다. 예술가의 작품이건, 공항의 새로운 인테리어건, 지루하고 긴 줄에 지쳐있는 승객들을 배려하기 위한 서비스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이 실루엣들이 만들어내는 우연적이고, 유쾌한 이야기와

소통하는 즐거움/스콧 스니브

그의 작품은 관람객에게

직접적 반응을 보임으로써

상호 작용하는 작품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맺기’

‘인간과 기술의 관계맺기’,

‘인간과 물질의 관계맺기’

작품 앞에 서는 관객들은

고상한 감상자가 아니라

팔을 뻗고, 여기 저기 걸으며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고

춤도 추며 놀이하는 인간

모두가 ‘호모루덴스’가 된다.

“내 작품은 사람들의 삶에

의미와 즐거움을 주는 것”

우린 스니브의 작품이라는

유쾌한 놀이감을 가지고

즐겁게 소통할 뿐이다.

경쾌한 춤 동작을 보며 웃고 즐긴다. “내 작품의 목표는 사람들의 삶에

의미와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나는 상호작용성을 활용하여 세계가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고 싶다.”는 스

니브의 말처럼, 그가 작품에서 입으로 부는 작은 바람이 다른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주는 큰 바람으로 증폭되는 것처럼, 소통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은 누군가의 존재를 기분 좋은 바람처럼 느끼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