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려받는 것(傳承)’에 바탕을 둔 현대건축에 관한 연구 · 2015-0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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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建築學會論文集 計劃系 제23권 제7호(통권225호) 2007년 7월 137 ‘물려받는 것(傳承)’에 바탕을 둔 현대건축에 관한 연구 - 지엔니 바티모(Gianni Vattimo)의 해석학을 중심으로 - A Study on Contemporary Architecture based on 'Handing-Down' - Focused on Gianni Vattimo's Hermeneutics - 심 길 재* 이 동 언** Sim, Kil-Jae Lee, Dong-Eon …………………………………………………………………………………………………………………………………… Abstract The present-day society is changing into the society where new and various meanings are more and more pursued. In this situation, tradition has been understood as only a past and already determined concept. The first objective of this study, based on the criticism on De-constructivist architecture that came into existence in such a change in society in 1980, is to verify the fact tradition is not the concept that can be arbitrarily eliminated or refused. After that, by considering tradition as 'handing down' defined in Gianni Vattimo's hermeneutics, which continues to issue not only from the past, but also from the present and various cultures, this study attempts to search the possibility of tradition to house the change in today's society. Finally according to Gianni Vattimo's proposal, this study tries to find how to materialize 'handing down' in architecture. …………………………………………………………………………………………………………………………………… 키워드 : 전통, 해체주의, 물려받는 것, 지엔니 바티모 Keywords : Ttradition, De-constructivist, Handing Down, Gianni Vattimo …………………………………………………………………………………………………………………………………… 1. 서 론 1.1 연구의 배경과 목적 근대 건축이전에는 기존의 전통이 건축가가 따라야만 하 는 이상적인 모델이나 기준이 되었다. 즉, ‘전통->건축가 ->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계 1) 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근대 건축가들은 기존의 전통을 거부하고 객관적이고 합리 적인 방식을 통해서 건축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아름다움 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통은 더 이상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외부적이고 비본질적인 부수 적 개념으로 밀려나 버린다. 2) 결국 ‘전통->건축가->건축’ 이라는 기존의 관계 속에서 전통이 제거되고 ‘건축가->건 축’이라는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러한 관계 속 에서 건축가는 건축을 구성하고 평가할 수 있는 보편적이 고 본질적인 법칙을 오직 건축 그 자체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근대 건축은 그 자체의 내적인 법칙을 가진 하나의 독립적 영역이 되어버린다. 이에 대하여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건축이 라는 것은 인간의 현실적인 삶의 맥락과 아주 밀접하게 연 결되어 있기 때문에, 건축이 그 자체의 내적 법칙만을 따르 * 부산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 석사과정 ** 부산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건축학 박사 1) A->B라는 선형적인 관계에서 A는 B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기원(origin)이나 기준이 된다. 2) Alan Colquhoun,『Form and Figure』, in『Essays in Architectural Criticism』,The MIT Press, 1989, 197쪽. 는 하나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건축이 인간의 삶을 거부하거나, 건축의 내적 법칙을 따르는 건축 을 위한 인간을 가정해야만 한다.” 3) 고 말하고 있다. 결국 기존의 전통과 역사를 거부하고 만들어진 ‘건축가->건축’ 이라는 선형적인 관계는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건 축을 하나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인간 의 삶을 건축의 내적 법칙을 따르는 단지 하나의 개념적 인 요소로 축소시켜 버린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근대 건축가 에게 건축의 형태와 의미는 물론, 인간의 삶을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위치를 부여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건축 가의 위치만을 강조한 나머지 수용자 4) 의 삶을 개념적인 요 소로 축소시켜 버림으로써, 결국 수용자가 다양한 삶과 의 미를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해 버리게 된다. 이러한 ‘건축가->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계 자체가 비판 의 대상이 된 것은 1980년대에 등장한 해체주의 건축에 의 해서였다. 해체주의 건축은 건축가에 의해서 건축의 의미 나 형태가 전적으로 결정되는 ‘건축가->건축’이라는 선형 적인 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교란함으로써, 수용자가 건 축 속에서 자기 스스로 다양한 의미와 체험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자 시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 5) 는 결국 수용자가 다양한 해석을 추구할 수 있는 가 능성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오히려 건축설계를 진행하는 3) Theodor W. Adorno, 『Functionalism Today』,ed. by Neil Leach, 『Rethinking Architecture』, London and New York, 1997, 16쪽. 4) 건축에서 수용자란 사용자를 포함하여 건축물과 관계 맺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이러한 해체주의 건축의 시도와 그 모순에 대해서는 본 연구의 2장 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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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韓建築學會論文集 計劃系 제23권 제7호(통권225호) 2007년 7월 137

    ‘물려받는 것(傳承)’에 바탕을 둔 현대건축에 관한 연구

    - 지엔니 바티모(Gianni Vattimo)의 해석학을 중심으로 -

    A Study on Contemporary Architecture based on 'Handing-Down'

    - Focused on Gianni Vattimo's Hermeneutics -

    심 길 재* 이 동 언**

    Sim, Kil-Jae Lee, Dong-Eon

    ……………………………………………………………………………………………………………………………………

    Abstract

    The present-day society is changing into the society where new and various meanings are more and more pursued. In this

    situation, tradition has been understood as only a past and already determined concept. The first objective of this study, based

    on the criticism on De-constructivist architecture that came into existence in such a change in society in 1980, is to verify the

    fact tradition is not the concept that can be arbitrarily eliminated or refused. After that, by considering tradition as 'handing

    down' defined in Gianni Vattimo's hermeneutics, which continues to issue not only from the past, but also from the present and

    various cultures, this study attempts to search the possibility of tradition to house the change in today's society. Finally

    according to Gianni Vattimo's proposal, this study tries to find how to materialize 'handing down' in architecture.

    ……………………………………………………………………………………………………………………………………

    키워드 : 전통, 해체주의, 물려받는 것, 지엔니 바티모

    Keywords : Ttradition, De-constructivist, Handing Down, Gianni Vattimo

    ……………………………………………………………………………………………………………………………………

    1. 서 론

    1.1 연구의 배경과 목적

    근대 건축이전에는 기존의 전통이 건축가가 따라야만 하

    는 이상적인 모델이나 기준이 되었다. 즉, ‘전통->건축가

    ->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계1)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근대 건축가들은 기존의 전통을 거부하고 객관적이고 합리

    적인 방식을 통해서 건축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아름다움

    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통은 더 이상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외부적이고 비본질적인 부수

    적 개념으로 밀려나 버린다.2) 결국 ‘전통->건축가->건축’

    이라는 기존의 관계 속에서 전통이 제거되고 ‘건축가->건

    축’이라는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러한 관계 속

    에서 건축가는 건축을 구성하고 평가할 수 있는 보편적이

    고 본질적인 법칙을 오직 건축 그 자체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근대 건축은 그 자체의 내적인 법칙을 가진

    하나의 독립적 영역이 되어버린다.

    이에 대하여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건축이

    라는 것은 인간의 현실적인 삶의 맥락과 아주 밀접하게 연

    결되어 있기 때문에, 건축이 그 자체의 내적 법칙만을 따르

    * 부산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 석사과정

    ** 부산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건축학 박사

    1) A->B라는 선형적인 관계에서 A는 B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기원(origin)이나 기준이 된다.

    2) Alan Colquhoun,『Form and Figure』, in『Essays in Architectural

    Criticism』,The MIT Press, 1989, 197쪽.

    는 하나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건축이

    인간의 삶을 거부하거나, 건축의 내적 법칙을 따르는 건축

    을 위한 인간을 가정해야만 한다.”3)고 말하고 있다. 결국

    기존의 전통과 역사를 거부하고 만들어진 ‘건축가->건축’

    이라는 선형적인 관계는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건

    축을 하나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인간

    의 삶을 건축의 내적 법칙을 따르는 단지 하나의 개념적

    인 요소로 축소시켜 버린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근대 건축가

    에게 건축의 형태와 의미는 물론, 인간의 삶을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위치를 부여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건축

    가의 위치만을 강조한 나머지 수용자4)의 삶을 개념적인 요

    소로 축소시켜 버림으로써, 결국 수용자가 다양한 삶과 의

    미를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해 버리게 된다.

    이러한 ‘건축가->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계 자체가 비판

    의 대상이 된 것은 1980년대에 등장한 해체주의 건축에 의

    해서였다. 해체주의 건축은 건축가에 의해서 건축의 의미

    나 형태가 전적으로 결정되는 ‘건축가->건축’이라는 선형

    적인 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교란함으로써, 수용자가 건

    축 속에서 자기 스스로 다양한 의미와 체험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자 시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5)는 결국 수용자가 다양한 해석을 추구할 수 있는 가

    능성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오히려 건축설계를 진행하는

    3) Theodor W. Adorno, 『Functionalism Today』,ed. by Neil Leach,

    『Rethinking Architecture』, London and New York, 1997, 16쪽.

    4) 건축에서 수용자란 사용자를 포함하여 건축물과 관계 맺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이러한 해체주의 건축의 시도와 그 모순에 대해서는 본 연구의 2장

    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 심길재․이동언

    138 大韓建築學會論文集 計劃系 제23권 제7호(통권225호) 2007년 7월

    그림1. 제임스 조이스의

    텍스트와 런던의 지도

    과정에서 건축가의 자의적인 개입을 더 강화시키는 모순만

    을 만들어 낼 뿐이었다.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해체주의

    건축이 근대 건축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건축가

    ->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해체

    주의 건축 역시 은연중에 근대 건축과 마찬가지로 전통을

    자의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고정된 개념정도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6) 따라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

    성을 제한하고 있는 ‘건축가->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계

    에 대한 비판은 전통과의 관련 속에서 다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과거의 ‘전통->건축가->건축’

    이라는 선형적인 관계에서처럼 단지 전통의 권위만을 강조

    하여 전통의 의미를 현대 사회 속에서 다시 생각하지 않는

    다면, 전통, 건축, 건축가, 수용자의 새로운 관계는 다양한

    정보기술과 미디어의 발달을 통해서 예전 보다 더욱 다양

    한 삶과 의미를 추구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변화를 적절히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지엔니 바티모(Gianni Vattimo)의

    해석학(Hermeneutics)을 바탕으로, 다양한 해석을 추구하

    는 현대사회의 변화를 건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

    을 전통 속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왜나하면 지엔니 바티모는 그의 해석학 이론에서 인간의

    삶을 역사와 전통의 연속성 안에서 파악한 하이데거(M.

    Heidegger)와 가다머(H.G.Gadamer)의 사상을 미디어 기술

    의 발달과 같은 현대 사회의 변화 속에서 다시 이해하고

    수정함으로써, 전통의 의미를 고정되고 닫혀있는 강력한

    기준이 아닌, 약하고 희미한 열린 흐름인 ‘물려받는 것

    (handing down)'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전통에

    대한 이해는 건축가의 자의적인 선택을 적절히 제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수용자가 다양한 의미를 만

    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2 연구의 내용과 방법

    본 연구에서는 우선 ‘건축가->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

    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교란함으로써 수용자가 다양한 해석

    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자 했던 해체주의

    건축이 오히려 건축가의 자의적인 선택만을 강조하게 되는

    모순과 그 이유를 살펴보고, ‘건축가->건축’이라는 선형적

    인 관계에 대한 비판이 전통 속에서 다시 이루어져야할 필

    요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후에 지엔니 바티모의 해석학

    을 바탕으로, 전통의 의미를 ‘물려받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것을 건축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6) 앤드류 벤자민(Andrew Benjamin)은 “기존의 지배적인 영역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나 단절은 단지 단절의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에 불과하

    다. 따라서 기존의 지배적인 영역에 대한 거부와 저항의 시도는, 기존의

    지배적인 영역이 거부와 저항의 대상이 되는 동안은, 기존의 지배적인

    영역을 받아들이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2. 전통, 건축, 건축가: 해체주의 건축의 한계

    2.1 해체주의 건축, 건축가

    베르나르 츄미는 자신의 라 빌레뜨 공원 계획안에 대하

    여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건축, 의미 대상이라기보다는

    의미 주체로서의 건축, 즉 순수하게 언어를 추적하고 그것

    을 즐기는 건축을 추구했다. 그리고 니체(F. Nietzsche)의

    철학적 사유에 따라 해석의 무한성을 지향했는데, 자율적

    이면서 무한한 조합이 가능한 폴리(folie)들을 배치하면서

    그것이 가능하게끔 했다.”7)라고 말하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무수한

    차이들의 파괴적인 놀이와 같은 해석의 무한성8)을 지향하

    는 건축을 위하여 베르나르 츄미는 공원을 계획해나가는

    과정에서 건축가의 주체적인 개입을 회피할 수 있는 방식

    으로 점, 선, 면이라는 세 가지 체계를 중첩시키는 방식을

    사용한다. 베르나르 츄미는 이러한 방식에 대하여, “각각은

    차별되고 자율적인 텍스트를 재현하는데, 다른 것에 대한

    그것의 중첩은 차별성을 유지한 채, 어떠한 선호되는 체계

    나 구성 요소의 우월성도 배제하며, 어떠한 형태적 구성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비록 각각은 주체로서의 건축가에 의

    해 결정되지만, 하나의 체계가 다른 체계에 중첩될 때, 그

    주체인 건축가는 지워진다.”9)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베르나르 츄미는 조

    이스(James Joyce)의 텍스

    트와 런던의 지도를 연결시

    키려 했던 작업(그림1)에서

    유래한 폴리라는 붉은 구조

    물을 통하여 사람들이 우연

    적이고 다양한 사건을 만들

    어 낼 수 있도록 시도 하였

    다. 이러한 시도 역시 조이

    스-베르나르 츄미-데리다(Jacques Derrida)로 이어 지는

    상호 지시 관계10)를 통해 공원설계의 저자가 베르나르 츄

    미라는 인식을 고의적으로 흩뜨려 놓음으로써 근대적인 의

    미에서 주체로서의 건축가의 존재를 거부하려고 시도한 것

    으로 볼 수 있다.11) 더 나아가 베르나르 츄미는 이러한 폴

    리를 건축의 역사나 전통에서 무엇이 고정되고 필수적이며

    기념적인 것으로 인정되는가를 물어보는 건축, 다시 말해

    서 근대 건축에 의해서 정당화되어온 습관적인 형태와 기

    능 사이의 인과 관계를 거부하고 '건축이란 무엇인가?'라

    는 물음을 던짐으로써 일종의 쇼크를 만들어내는 건축이라

    7) 정인하,『현대 건축과 비표상』,아카넷, 2006, 78쪽에서 재인용.

    8) Vincent B. Leitch, 권택영 옮김,『해체 비평이란 무엇인가』, 문예출

    판사, 1988, 141쪽.

    9) 제프리 브로드벤트, 『해체의 실습』, 김원갑 편저, 『건축과 해체』,

    세진사, 2000, 304쪽.

    10) 베르나르 츄미는 조이스의 텍스트와 런던의 지도를 연결시키려고

    했던 시도가 데리다의 상호 텍스트성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라고 보

    았다.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에 근거하여 베르나르 츄미는 공원안의 폴리

    라는 구조물이 ‘제임스 조이스베르나르 츄미데리다’ 라는 상

    호 지시 관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11) 각주 7)의 책,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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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韓建築學會論文集 計劃系 제23권 제7호(통권225호) 2007년 7월 139

    그림2. 폴리(Folie)

    그림3. 폴리의 분해

    그림5. 건축과DNA구조의

    중첩

    그림4. CIAM

    도시계획

    Grid의 4요소

    고 주장한다.12)

    그러나 공원 안의 붉은 구조물인

    폴리(그림2)는 베르나르 츄미의 의

    도와는 다르게 오히려 라 빌레뜨 공

    원 계획안에서 '건축가->건축'이라

    는 선형적인 관계가 전복되지 않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

    여 주고 있다. 베르나르 츄미는 폴리

    를 통하여 기존의 습관적이고 전통적인 의미들 속에 묻혀

    버린 일상을 뚫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고자 하였다. 그

    러나 폴리의 형태에서는 근대 건축의 요소들을13) 파편화

    시킨 후에 그것들을 비 기능적으로 뒤섞어 놓은 근대 건축

    에 대한 해체주의 건축가의 저항(그림3)만이 보일 뿐이지,

    1990년대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마

    주치게 되는 다양한 간판과 화려한

    상점들의 쇼윈도, 다양한 미디어 기

    술14)같은 것들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즉, 건축가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서 일상속의 다양한 요소들이

    폴리의 형태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못하고 배제되

    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근대 건축가들이 인간의 삶

    을 자신들의 임의적인 판단에 의해서

    단지 몇 개의 요소로 추상화하고 개

    념화 시켜버린 것(그림4)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공원안의 폴리

    의 형태는 베르나르 츄미가 거부하고

    자 했던 ‘건축가->건축’의 관계가 여

    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

    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체주의 건축은 여기서 더 나아가

    해체주의 건축이 거부하고자 했던 ‘건축가->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이상의 모순을

    가지고 있다. 베르나르 츄미는 라 빌레뜨 공원에서 ‘건축가

    ->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계를 전복시키기 위한 방식으로

    조이스-베르나르 츄미-데리다라는 저자를 서로 중첩시키

    는 방식과 점-선-면이라는 공원의 구성 체계를 상호 중첩

    시키는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베르나르 츄

    미는 이러한 방식으로 ‘건축가->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

    계가 거부된다고 주장만 하고 있을 뿐, 사실상 어떠한 경험

    12) 베르나르 츄미,『이벤트 건축』,피터 노에버 엮음, 김경준 옮김,『뉴

    모더니즘과 해체주의 2』,청람, 1996, 8쪽.

    13) 매끈하게 처리된 벽과 계단, 램프와 회전계단, 격자형 그리드 등은

    근대의 모더니즘 건축과 그 형태가 상당히 유사하다.

    14) 1982년도에 시작되어 1990년에 완공된 라 빌레뜨 공원 안에 계획된

    건물 중에는 라 빌레뜨 과학관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다양한 미디어

    기술이 적극적으로 사용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1977년에 파리에는 이미 기계적인 외관을 자랑하는 현대 미술과 조각

    그리고 미디어 작품을 위한 전시관인 퐁피두 센터가 지어져 있었다. 따

    라서 이것은 사회적이거나 기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건축가의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적인 진술이나 논리적 근거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15)

    결국 베르나르 츄미가 사용하고 있는 이러한 중첩의 방

    식은 단지 건축가의 자의적인 선택에 불과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체계를 중첩시키는 방식으로 ‘건축가->

    건축’의 선형적인 관계를 거부하여 해석의 다양성을 만들

    어 내는 과정에서 건축가를 배제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

    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건축가 자신이다. 따라서 건축가

    는 이러한 과정에서 건축가라는 존재를 제거 할 수 있는

    건축가 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게 된다.

    사실상 이러한 위치는 건축가를 보이지 않는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건축가가 건축설계 과정에서

    건축을 구성하는 방식과 건축의 형태를 자신의 자의적인

    선택에만 의존하여 결정할 수 있는 특권과 그러한 선택의

    정당성의 문제에 대한 면죄부마저도 건축가에게 부여한다.

    따라서 이러한 건축가의 보이지 않는 초월적 위치는 작품

    에 대하여 저자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특권적 지위16)를 대

    신함과 동시에 그러한 지위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건축가->건축'의 선형적인 관계

    를 거부하기 위한 해체주의 건축의 시도는 오히려 건축설

    계에 있어서 건축가의 자의적인 선택과 지위를 더욱 강조

    하게 되는 모순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또 다른 해체주의 건축가인 피터 아이젠

    만의 프랑크푸르트 생물학 연구소계획에서 도 찾아 볼 수

    가 있다. 일반적으로 '건축가->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계

    속에서 건축가는 건축이 수용해야만 하는 기능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결정된 이미지들을 가지고 작업을 진

    행하게 된다.17) 이와 같이 건축가가 기능이라는 하나의 고

    정된 의미를 고려하는 과정에서 건축의 형태가 미리 결정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피터 아이젠만은 생물학과 건축이

    라는 서로 다른 영역을 중첩

    (그림5)시키고, 비인간적인 컴

    퓨터를 이용하여 생물학과 중

    첩된 건축 형태를 만들어 내

    는 방식으로 '건축가->건축'

    이라는 선형적인 관계의 거부

    를 시도한다. 그리고 피터 아

    15) 여러 가지 상이한 형태들의 복합적인 단편들을 중첩함으로써, 우리

    는 의도적으로 어떤 명시적인 형태들을 말살하고 그 의미가 고도로 애

    매한 흐리 멍텅한 형태를 창출해 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복합적

    인 단편들을 동일한 공간에 중첩시키는 행위가, 반드시 끝없는 사슬의

    의미를 생산해 준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16)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저자와 작품의 관계에 대하여 “저자

    는 작품 이전에 존재해서, 그것을 위해 생각하고, 고통 받으며 사는 존

    재로서,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 앞서 있는 것처럼, 저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선행하는 위치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17) 피터 아이젠만은 프랑크프루트 생물학 연구소의 계획안에 대하여

    “건축의 역할이 전통적으로 기능에 따르고 기능을 표현 하는 것이라고

    보여 지는 반면에, 이 계획은 단순히 어떠한 방식, 심지어 생물학적인

    연구과정이 이루어지는 방식에도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 심길재․이동언

    140 大韓建築學會論文集 計劃系 제23권 제7호(통권225호) 2007년 7월

    그림6. 라 빌레뜨 공원

    산책로

    그림7. 베르사이유

    궁전 정원 산책로

    그림8. 라빌레뜨 공원

    최종 배치도

    그림9. 베르사이유

    궁전 정원 체계

    이젠만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공간은 기능이라는

    고정된 의미를 고려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앞서서 베르나르 츄미의 라 빌레뜨 공원 계획안

    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생물학과 건축이라는 서로 다른 체

    계들의 상호 중첩은 '건축가->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계

    를 거부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건축가의 자

    의적인 선택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전반적인 건축생성의

    과정에서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비인간적인 컴퓨터일지

    모르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형태들 중에서 최종적인 형태

    를 결정할 수 있는 최종 결정권자는 비인간적인 컴퓨터가

    아닌 피터 아이젠만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18)

    건축가에 의해서 건축의 형태나 의미가 자의적으로 통제

    되어 미리 결정되는 ‘건축가->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계

    의 거부를 통해서 수용자가 자기 스스로 다양한 해석과 체

    험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해체주

    의 건축의 시도는 결국 근대 건축과 마찬가지로 수용자의

    삶 속에서 다양한 해석과 체험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지 못

    한 채, 건축가의 자의적이고 파괴적인 개념 놀이 수준에 머

    물고 만다.

    2.2 해체주의 건축, 수용자

    창조적인 독자의 탄생을 주장한 롤랑 바르트는이라는 글에서 “독자는 글쓰기를 만드는 모든 인용들

    이 하나도 상실되지 않고 기재되는 공간이다. 따라서 텍스

    트의 통일성은 그 기원이 아니라 목적지에 놓이게 된다. 그

    러나 독자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독자는 역사,

    전기, 심리가 없는 존재를 말한다. 그는 씌어진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흔적들을 하나의 단일한 영역으로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19)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독자는 그 안에 어떠한 판단의 기준도 갖고 있지

    않은 텅 빈 존재에 불과하다. 따라서 독자는 모든 의미를

    아무런 거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수용자라는 존재를 이

    런 식으로 가정하는 것은 건축가의 죽음을 통해서 수용자

    의 탄생을 시도한 해체주의 건축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해체주의 건축이 ‘건축가->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계를

    거부한 궁극적인 목적은 건축가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미리

    결정된 의미가 건축에 부여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수용

    자가 자기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하

    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 속에서 해체주의 건축

    은 건축가가 부여하는 고정된 의미를 거부하기 위해서 수

    용자라는 고정된 의미를 고려해야만 하는 모순 속에 놓이

    게 된다.

    이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는, 롤랑 바르트가 가정하

    고 있는 독자처럼, 수용자를 건축가의 어떠한 시도도 거부

    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 안에 판단의 근거나 기

    18) 만약 컴퓨터를 통해서 만들어진 형태가 피터 아이젠만의 마음에 들

    지 않아도 그 형태를 피터 아이젠만이 선택할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19) 각주 16)의 책, 34쪽.

    준이 될만한 어떠한 역사나 전통도 갖고 있지 않은 존재로

    가정해야만 한다. 결국 근대 건축이 하나의 독립적인 영역

    을 유지하기 위해서 건축을 위한 인간을 가정해야만 했던

    것처럼, 해체주의 건축 역시 건축가의 자의적이고 파괴적

    이 개념 놀이를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역사나 전통

    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로 가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2.3 해체주의 건축, 전통

    앞서서 해체주의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 베르나

    르 츄미의 라 빌레뜨 공원계획을 다시 한번 살펴본다면, 베

    르나르 츄미가 여기서 ‘공원’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형식이

    나 기능(그림6,7)을 사실상 그대로 받

    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

    론 베르나르 츄미가 공원의 구성에서

    점, 선, 면이라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체계를 중첩시키고는 있지만, 이러한

    서로 다른 체계들의 중첩을 통해서

    만들어진 공원의 최종적인 모습(그

    림8)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공원과 크

    게 다르지 않다. 또한 여기서 베르나

    르 츄미가 선택한 점, 선, 면이라는

    세 가지 체계들(그림9)20) 역시 프랑

    스의 전통적인 공원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체계들이다.

    이것은 해체주의 건축이 사실상

    ‘건축가->건축’이라는 선형적인 관계

    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면, 해체주의 건축에서 건축가가 의

    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전통 속

    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다. 그리고 해체주의 건축에 의해서

    텅 빈 존재로 가정된 수용자 역시,

    폴리를 통해서 무한한 의미를 만들

    어내지는 못할지라도, 라 빌레뜨 공

    원의 잔디밭에서 휴식하고, 운동하고

    산책하면서 기존의 일반적인 다른

    공원들을 이용하는 것과 비슷한 방

    식으로 라 빌레뜨 공원을 이용하고

    있다. 따라서 건축가와 수용자는 폴

    리 속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해석의 다양성과는 상관없는 일상적

    이고 단순한 만남에 불과할지라도,

    ‘공원’이라는 전통적이고 일상적인 개념을 통해서 서로 만

    나고 있는 것이다.

    20) 라 빌레뜨 공원에서는 다양한 이벤트를 만들어 내기 위한 폴리가

    점의 요소라면, 베르사이유 궁전 정원에서는 다양한 기하학적 구성을

    가지고 있는 12개의 사각형 정원이 이벤트를 위한 점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 ‘물려받는 것(傳承)’에 바탕을 둔 현대건축에 관한 연구

    大韓建築學會論文集 計劃系 제23권 제7호(통권225호) 2007년 7월 141

    3. 전통, 건축, 건축가, 수용자

    해체주의 건축에서 건축가는 단지 표면상으로만 건축에

    서 사라진, 사실상 초월적인 익명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고,

    그러한 건축가의 사라짐을 통해서 탄생한 수용자는 역사나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로 가정되었다. 결국 현실적

    인 삶 속에서 건축가와 수용자는 건축 속에서 서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앞서의 라 빌레뜨 공

    원의 경우에서처럼 건축가와 수용자는 전통적인 개념을 통

    해서는, 비록 그 만남이 습관적일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만

    날 수가 있었다. 따라서 건축가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자기 자신과 수용자가 서로 자연스럽게 만나고 있는 전통

    속에서 추구한다면, 건축가는 이러한 과정에서 앞서서 언

    급된 해체주의 건축의 한계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건축가가 전통을 통해서 다양한 해석을 추구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아도르노는 “하나의 독립적인

    영역에서 본질적인 법칙을 가정하는 것은 물신 숭배적인

    측면일 뿐이다. 형태나 질료도 단순히 자연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전통이 쌓여 있고 인류의 영혼이 쌓

    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축적된 요소들을 깨우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다.”21)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건축가는 건축을 구

    성할 수 있는 사물 속에 쌓여 있는 전통과 역사를 자신의

    상상력으로 흔들어 깨움으로써 다양한 의미와 가능성을 만

    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전통과 역사

    속에서 사물과 인간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

    진 의미와 가능성들은 다시 사물 속에 쌓이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이러한 사물과 인간의 상호

    작용에 대하여 “인간의 정신은 사물로부터 정신이 먹고 자

    랄 수 있는 인식을 가져오고, 정신은 다시 이러한 인식들을

    정신이 자유롭게 만들어낸 움직임22)의 형태로 사물 속에

    쌓아둔다.”23)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간과 사물의 상호 작용은 어느 하나에 의해

    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선형적인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

    라, 전통이라는 엄청난 흐름의 순환 속에 건축가와 수용자,

    그리고 건축이 함께 모여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 속에서 만약 전통을 단순히 과거의 고

    정된 개념정도로만 이해한다면 전통이라는 흐름의 순환 속

    에 건축가, 수용자, 건축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전통 속에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통의 의미를 현대 사회 속에

    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3.1 지엔니 바티모의 해석학

    앞서서 간단하게 살펴보았듯이 건축가와 수용자는 결국

    전통이라는 흐름 속에서 서로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

    21) 각주3)의 책, 14쪽.

    22) 여기서 사물 속에서 쌓여가는 움직임이라는 것은 결국 사물과 인간

    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전통과 역사라고 할 수 있다.

    23) Joyce Dixon Medina,『Cezanne and Modernism』,State University

    of New York, 1997, 36쪽에서 재인용.

    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것처럼 건축가와 수용자 모두 이미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문화적 전통 속에 던져져 있

    으며, 그 속에서 비로소 사물들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하이데거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

    들인 가다머는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전통의 작용24)으로

    해석자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선(先)이해는 해석자가 그

    것을 이해함에 있어서 마음대로 적용하거나 또는 그것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그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5)

    하지만 지엔니 바티모는 하이데거 사상에 대한 가다머

    의 이러한 이해는 전통과 그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행위나 사물에 대한 이해는 물론 개인적인 미의식까지도

    역사적 경험이나 이해로 단순히 환원시켜 버리고, 더 나아

    가 하이데거의 사상이 가지는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를 단

    순히 하나의 역사 철학정도로 축소시켜 버릴 위험성을 가

    지게 된다고 주장한다.26)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토

    대-허물기(Un-grounding)’라는 하이데거 사상의 허무주의

    적 측면을 전통과의 관계성 속에서 다시 살펴보고, 이러한

    허무주의적 측면이 새로운 ‘토대-세우기(founding)’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엔니 바티모의 주장에 따르면, ‘토대-허물기’는 전통과

    의 관계 속에서 ‘다시-모음(re-collection)’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다시-모음’은 인간이 그 존재(mortals)의

    심연(abyss) 속으로 뛰어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다. 이러한 뛰어듬(leap)은 모든 현상의 완벽하고 충분한

    이유나 원칙, 세계의 합리적인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

    니라, 오히려 논리적인 이유나 근거들이 뒤바뀌고 혼란스

    러운 상태로 함께 모여 ‘같이’ 있는 ‘해방된 구속(liberating

    bond)’으로 자기 자신을 던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27)

    따라서 인간의 삶을 전통과의 연속성안에서 파악하고 있

    는 지엔니 바티모에게 ‘해방된 구속'으로 우리 자신을 던진

    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전통 속에 위치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엔니 바티모는 이러한 ‘해방된 구속'에

    서 전통은 더 이상 우리에게 고정되고, 강력한 역사적 기반

    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희미하며 열려있는 하나

    의 배경으로만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인간

    은 기존의 일상적이고 고정된 전통 속에서 존재(Being)를

    경험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고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를 경

    험함으로써,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

    다.28)

    24) 가다머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전통과 역사적 문화적 권위의

    작용 속에 존재하며 그것에 의해 제약된 선(先)이해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이 사물/사건을 이해함에 있어서 현재를 버리고 과거

    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재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진

    사물/사건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25) 위의 책, 69쪽. 26) Gianni Vattimo, 『Hermeneutics and Nihilism』in 『The End of

    Modernity』, trans. Jon R. Snyder, Polity Press,1988. 113~114쪽

    27) 위의 책, 119쪽.

    28) 위의 책, 121, 128쪽.

  • 심길재․이동언

    142 大韓建築學會論文集 計劃系 제23권 제7호(통권225호) 2007년 7월

    그림10. 롱샹 성당의 벽

    3.2 ‘물려받는 것’으로서의 전통

    지엔니 바티모는 위에서 언급된 그의 해석학 이론에서

    유동적이고, 불명확하고 흐릿한 배경과 같은 전통을 기존

    의 고정되고 개념적인 전통과 구분해서 ‘물려받는 것

    (handing down)’으로 부르고 있다.

    지엔니 바티모는 “우리의 삶은 일종의 게임29)과도 같은

    데, ‘물려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게임의 규칙으로서 작용하

    는 것이다. 이 규칙은 게임 그 자체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

    이므로, 우리가 삶이라는 게임 그 자체를 변형하든, 수용하

    든, 심지어 거부할지라도 항상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30)라

    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물려받는 것’이 인간이 이 세계에

    거주하는 순간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규칙이므로,

    이것을 단순히 고정된 개념으로 만들어 제거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는 것과 동시에 규칙을 가진 게임 속에서만 인간이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해서 지엔니 바티모는 ‘물려받는 것’이 가지고 있는

    개방성을 특히 강조하여 “이러한 ‘물려받는 것’은 강력한

    형이상학적 기준이 사라진 지금 이 시대에 규칙으로서 작

    용하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표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물려받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

    니라, 이것은 현재에 의해서도 계속 형성되어 되어간다. 또

    한 현대 사회에서 그들의 목소리를31) 가지게 된 다양한 문

    화들과 다양한 공동체들에 의해서도 형성된다.”32)라고 말

    하고 있다.

    결국 과거와 현재는 물론 다양한 문화들33)에 의해서 계

    속해서 형성되어가는 ‘물려받는 것’속에서, 기존의 지배적

    인 기준이나 관점들 역시 특정한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하

    나의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다양한 사건과 문화들

    에 의해서 형성되어가는 ‘물려받는 것’이 가지고 있는 다양

    성들은 특정한 기준에 종속되지 않은 채, 서로간의 차이를

    유지하면서 같이 있는 흐릿한 배경으로 머물게 된다.

    이와 같이 전통의 의미를 풍부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흐릿한 배경과 같은 ‘물려받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물려받

    는 것’ 이라는 열린 흐름 속에서 건축가, 수용자, 건축의 상

    29) 이것은 비트겐 슈타인(L.Wittgenstein)의 언어게임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게임”이라는 것을 간단히 설명하면, 도구나 게임 말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실제의 작업 상황이나 게임에서 쓰

    일 때 제 기능을 하는 것처럼, 언어가 가지는 의미는 일상적이고 실제

    적인 삶 속에서 생각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참조.

    30) Gianni Vattimo,『The End of Modernity, the End of the Projec

    t』ed. by Neil Leach,『Rethinking Architecture』, London and New

    York, 1997, 151쪽.

    31) 가다머는 “세계를 갖는다는 것은 언어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

    한 세계라는 것은 삶의 세계로서 이해의 공동체이며 의사소통의 공동체

    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지엔니 바티모가 말하는 목소리라는 것

    은 가다머가 말하는 언어를 공유하는 국가와 같은 거대한 공동체와는

    구별되는 특정한 이해나 관심을 공유하는 다양한 소주집단들의 자기 표

    현수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2) 위의 책, 152쪽.

    33) 단순히 다른 나라의 이국적인 문화뿐만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적인

    기준이나 관점에 의해 가려지고 억눌려 있었던 타자화 되어있던 동성애

    자, 장애인, 등과 같은 소수집단의 문화까지도 의미한다.

    호 작용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건축을 통해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3.3 ‘물려받는 것’의 건축화 가능성

    지엔니 바티모는 ‘물려받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건축에

    대하여 “건축가는 ‘한 곳에 뿌리내려진 것’과 ‘다양성을 명

    백하게 인식하는 것’ 사이의 중간적인 위치에서 작업할 수

    있어야만 한다.”34)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한 곳에 뿌리내려진 것’은 ‘물려받는 것’을 체계

    화하거나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절대적인 관점이나 기준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 속에서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사

    물의 의미들이 그러한 관계에서 벗어나면서, ‘물려받는 것’

    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들이 함께 모일 수 있도록 비워놓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워진 공간이 아무것도 없

    는 텅 빈 공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비워진 공

    간 안에는 사실상 ‘물려받는 것’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들을

    모을 수 있는 힘뿐만 아니라, 공간과 다양성들이 서로 속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내재되어 있다.35) 하지만 이러한 힘과

    가능성은 단순히 사물 그 자체에 의해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쌓여 있는 전통과 역사를 인식하고

    그것을 흔들어 깨우려는 건축가의 상상력에 의해서 생겨나

    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성을 명백하게 인식하는 것’은 공간과 건축

    가의 상호작용에의 의해서 공간 속에 모이게 되는 ‘물려받

    는 것’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들이 특정한 기준이나 관점에

    종속되지 않고 함께 모여 ‘같이’ 있을 수 있도록 다양성들

    이 가지고 있는 서로간의 차이들을 명백히 인식하는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양성들이 서로간의 차이를 유지

    하면서 ‘같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다양성들이 서로 중첩되

    거나, 병치되어 섞여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것은 다양성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면서 함께 있는 것

    (inter-penetr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들의

    ‘같이 있음’36)의 상태는 르 꼬르비제(Le Corbusier)의 롱샹

    성당의 남쪽 벽(그림10)에서 잘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 벽은 근대의 기술이나 몬드

    리안(P. Mondrian)의 그림(그림

    11)에 중세의 성벽이나 스테인 글

    래스(그림12.13)가 종속되어 이루

    어진 것도, 그렇다고 과거의 것들

    에 현대의 것이 종속되어 만들어

    진 것도 아니다. 바로 이러한 모

    습이 ‘물려받는 것’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들이 서로가 서로

    34) 위의 책, 154쪽.

    35) Martin Heidegger,『Art and Space』,ed. by Neil Leach, 『Rethinking

    Architecture』, London and New York, 1997, 122~123쪽.

    36) 철학적 사유의 후기 단계에서 전통이 가지고 있는 개방성을 인정한

    하이데거 역시 다양성들의 ‘같이 있음’에 대하여 “차이에 의해서 모이고,

    차이를 유지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면서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 ‘물려받는 것(傳承)’에 바탕을 둔 현대건축에 관한 연구

    大韓建築學會論文集 計劃系 제23권 제7호(통권225호) 2007년 7월 143

    그림11. 몬드리안

    의 구성

    그림12.유럽

    고성의 창문

    그림13.

    스테인글래스

    그림15.

    베를린유대인홀로코

    스트 메모리얼

    그림16.

    사각형박스의 반복

    그림17. 통로 공간

    그림18. 유럽의

    공동묘지

    그림19. 사각형

    박스 공간 01

    그림20. 사각형

    박스 공간 02

    그림21.유럽공동묘지

    안의 산책로

    그림22. 다양한

    무덤의 예

    그림23.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외관 01

    그림14. 지중해

    지역 주거지

    에게 속하면서 함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렇게 다양한 이미지들이 ‘같이’ 있는 롱샹성당의 벽 속에서

    누군가는 몬드리안의 그림을, 누군가는 스테인 글래스나

    유럽의 고성을, 누군가는 또 다른 무엇인가(그림14)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건축가는 그 사이의 중간적인 위치

    에서 작업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바티모의 주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피터 아이젠만의 베를린 유대인 홀로코스트

    메모리얼과 프랑크 게리(Frank O. Gehry)의 빌바오 구겐

    하임 미술관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피터 아이젠만의 베를린 유대인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의

    경우 일상적인 기념관이나 기념비가 가지는 모습과는 다르

    게 거대한 기념탑이나 추모를 위한 중심적인 공간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그림15) 오히려 개인적인 해석의 다양성

    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아무런 장식도 없이 1~4m의 높이

    차만을 가진 비슷한 형태의 사각형 박스를 반복(그림16)시

    키고, 그 사이의 폭을 한번에 한 사람 정도만 지나갈 수 있

    도록 95cm정도(그림17)로 제한하고 있다.37) 즉, 우리에게

    익숙한 기념비라는 의미가 습관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면서

    비워놓은 공간에 개인적인 추모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유

    럽의 공동묘지(그림18,19), 그리고 다양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미로(그림20)와 같은 다양한 대상들이 함께 모여

    ‘같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피터 아이젠만이 단순히 자신의 자의적인

    37) domous, 2005년, 3월호, 72~79쪽.

    선택에 의존하지 않고 ‘물려받는 것’

    속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함으로써 수

    용자와 자연스럽게 만나고는 있지만,

    비워진 공간, 그 자체가 모여 있는 다

    양성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되도록 하

    고 있어서 기념비, 추모, 죽음 등의 개

    념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두운

    분위기가 계획안 전체를 전반적으로

    지배하도록 만들고 있다. 따라서 모든

    공동묘지가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유

    럽의 공동묘지들이 가지고 있는 공원

    의 모습이나(그림21,22), 죽음이나 추

    모가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38)

    이 비워진 공간 속에서 배제됨으로써

    결국 수용자는 다소 제한된 가능성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배제는 결국 ‘물려받는 것’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

    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다양성들의 차이를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기준으로 그러한 다양성

    들을 판단하고 지배하려는 시도나 열망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위에서 언급한 “건축가는 그 사

    이의 중간적인 위치에서 작업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바티

    모의 주장은 이러한 식으로 ‘물려받는 것’의 다양한 가능성

    이 제한되지 않도록 건축가가 공간과 다양성들 사이에 위

    치해서 다양성들이 가지고 있는 차이를 제거하거나, 다양

    성들을 특정한 기준에 종속시켜서 하나의 균질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나 열망을 공간 속에서 제거 해야만 한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가가 공간과 다양성들을 중재하는 이러한 과정은 공간

    과 다양성들이 서로간의 차이를 유지하며 ‘같이’ 있을 수 있

    도록 할뿐만 아니라, 건축가의 개인적인 삶의 흔적이나 미의

    식 역시 자연스럽게 공간 속에 다양성들과 함께 모여 ‘같이’

    있도록 함으로써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더욱 증가 시킨다.

    예를 들어, 프랑크 게리의 빌바

    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누군가

    는 빌바오(Bilbao)라는 조선과 제

    강산업으로 한때 부흥했었던 도

    시의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

    한 거대한 배의 모습(그림23)을,

    누군가는 갤러리의 천장에서 가

    우디(Antonio Gaudi)의 건축을

    (그림24),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

    는 높이 50m의 거대한 아트리움(그림25)에서 뉴욕에 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구겐하임

    미술관의 나선형 램프로 둘러싸인 거대한 아트리움을 떠올

    릴 수도 있을 것이다.39) 그리고 더 나아가 누군가는 이러한

    38) 예를 들어,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소재를 감동적이고 장엄하게 보여

    주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1994)’와 이에 비하여 다소 가

    볍지만 웃음과 슬픔 속에서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는 로베르토 베니니

    의 ‘인생은 아름다워(1999)’의 차이가 또 다른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39) 건축과 환경 편,『Frank O. Gehry』,건축과 환경, 2001, 8~17쪽.

  • 심길재․이동언

    144 大韓建築學會論文集 計劃系 제23권 제7호(통권225호) 2007년 7월

    그림24. 갤러리 그림25. 아트리움 단면도 그림26. 외관 02

    다양한 이미지들 사이에서 이것들을 중재하고 있는 건축가

    의 개인적인 삶의 흔적인 물고기의 모습(그림26)40)까지도

    볼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현대 사회는 더욱더 새로운 의미와 해석의 다양성을 추

    구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전통을 단순히 자의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과거의

    고정된 개념정도로만 이해한다면, 건축가의 자의적인 선택

    을 적절히 제한하고 동시에 새로운 의미와 다양한 해석을

    추구할 수 있는, 전통의 가능성을 놓쳐버리게 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전통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고려

    하기 위해서, 인간의 삶을 전통과의 연속성안에서 파악한

    하이데거의 사상을 현대 사회 속에서 다시 이해하고 수정

    한 지엔니 바티모의 해석학을 바탕으로, 전통을 ‘물려받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것을 건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가능

    성으로 ‘같이 있음’을 제안하였다.

    지엔니 바티모에 따르면, 건축가, 수용자, 그리고 건축은

    전통의 흐름 속에 함께 모여 ‘같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러한 전통의 흐름이라는 것은 단지 어떤 구체적이고 고정

    된 역사나 전통 속에서만 고려되어지는 폐쇄적인 순환이

    아니라, 약하고, 흐릿한 하나의 배경으로서 과거와 현재는

    물론 다양한 문화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형성되는 다양성들

    을 향해서 열려있는 흐름 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지엔니

    바티모가 ‘물려받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 열려있

    는 흐름으로서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물려받는 것’을 바탕으로 건축 속에서 다양한 의

    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전통->건축가->건축’과

    ‘건축가->건축’이라는 기존의 선형적인 관계들과 비교해서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물려받는 것’을 건축화 하기 위해서, 건축가는 다양성들

    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특정한 기준이나 관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물려받는 것’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들이

    서로 모일 수 있도록 가능성의 공간을 비울 수 있어야 한

    다. 그리고 건축가는 공간 속으로 다양성들을 모으고, 그렇

    게 모인 다양성들과 공간이 서로간의 차이를 유지하면서,

    ‘같이’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건축가는 더 이

    상 건축의 형태와 의미는 물론 인간의 삶까지도 자의적으

    로 결정할 수 있는 특권적인 위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40) 프랑크 게리는 물고기의 이미지에 대하여 “처음으로 물고기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이것을 디자인의 주요한 형태로 만들고자 했

    던 의도는 없었다. 그것은 본능적인 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공간과 다양성들 사이의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물려받는 것’은 건축 속으로

    수용 되고, 수용자는 이러한 건축을 통해서 다양한 이미지

    와 체험의 가능성은 물론, 건축가의 개인적인 삶의 흔적까

    지도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지엔니 바티모의 해석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러

    한 해석이 본 연구에서 언급된 르 꼬르비제, 피터 아이젠

    만,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들에 대한 모든 것을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단지 하나의 가능성을 제

    시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전통

    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고려하여 전통을 ‘물려받는 것’으로

    이해한 지엔니 바티모의 해석학이 현대 사회의 다양한 삶

    과 의미를 건축 속에 수용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충

    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본 연구에서 지엔니 바티모가 제안하고 있는 ‘공간

    과 다양성들의 중재자’는 건축가의 역할이 건축가의 자유

    를 제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중재의

    과정은 모두 사물과 건축가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며, 사물 속에 쌓여 있는 전통과 인류의 영혼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깊고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건축가에게 있어서 가

    장 필요한 것은 사물 속에 쌓여 있는 이러한 가능성이 우

    리의 일상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사물

    을 두려움이나 편견 없이 바라보려는 열린 마음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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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domous, 2005년, 3월호.

    (接受: 2007.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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