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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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인디고 여행학교 1년 여행학교 6기의 보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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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인디고 청소년 여행학교GLOBAL INDIGO YOUTH MOVING SCHOOL

여행 중에 많은 수의 우리들이 함께 이동하고 있으면,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어리게만 보이는 우리들이, 자신의 덩치만한 배낭을 메고 있는 모습이 꽤 인상적인가 보다.

어떻게 이곳에 왔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말한다. 우리는 인디고 청소년 여행학교 학생으로서, 길에서 많은 것을 배

우기 위해 지금 이곳에 서있다고. 그렇다. 진정한 배움은 '길' 위에 있었다.

인디고란 천부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사회, 학교, 가정 등 기존 제도의 옷이 제 몸에 맞지 않아 힘들어 하

는 아이들을 이르는 인디언의 어느 종족에서 나온 말이다. 인디고는 쪽빛(남색), 즉 청출어람이다.

한국의 인디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인도, 네팔, 중국 여행을 통해 다른 문화의 사람들, 역사와 종교, 새로운 삶

의 방식들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자신을 발견하며 앞으로의 미래를 세우고 스스로 꿈을 찾아가도록

돕는 학교가 바로 인디고 청소년 여행학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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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타 소 리

딩 가 딩 가

기 분 좋 게

들 려 오 네

뜨 거 운 햇 볕

시 원 한 그 늘

돗 자 리 펴 놓 고

앉 아 있 네

잠 이 스 르 르

들 것 만 같 아

벌 러 덩

드 러 눕 고 싶 어

근 데 어 쩌 나

자 리 가 없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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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 했

INDIGO PROFILE

“야~사진 정말 예쁜데?”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프로필 사진이 제일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첫 한두 장 읽는다고 어찌 이 여행을 다 알겠는가?

그 이면에 담긴 남모를 고통과 기쁨이 있었다.

허나, 인디고에게 미운 정 고운정이 든 사람이라면 눈물을 훔칠 것이다.

함께 솔직담백함을 넘어선 인디고들의 직설적이고 원초적인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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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뭔지_ 김평화, 평스, 파쪼

나이가 뭔지_ 스무살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_ 힌두푸르죠. 마넴빨리 마을센터가 열악

하다고 생각했는데 깔루르 마을이 더 심했더랬죠. 특히 불때서 끓여먹은 짜

이가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태국의 꼬사멧 해변이 최고다 비오는날

스피드보트를 타본적 있는가? 구명조끼가 무색하게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

만 정말로 짜릿하고 그때까지 쌓인 여행의 스트레스를 풀게 되었다 시사아

속의 식단이 그립다.넘치고 흐르는 과일을 언제 다시 한번 맛볼 수 있을

까? 그곳을 다녀오게 되면 한국의 1kg에 만원씩 하는 귤이 무섭다. 중국

의 호도협 트레킹도 추천코스이다. 히말라야 abc만큼이나 환상

적인 곳이다. 특히 100위안 하는 말을 타고 올라가 보고 싶지 않은가? 만

칠천원이면 10시간을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산중턱에서 맛볼 수 있는 수

박도 환상적이다.

제일 끔찍했던 여행지_ 꼴까따 '더러움'이 무서웠던 도시. 너

무너무 더러워서 눈뜨고 쳐다볼 수 없는 쓰레기산을 기억합니다. 파라곤

호텔의 1층도 잊지 못함. 방을 방이라 부를수 없는 상태였음. 사다나포

레스트의 기후도 상상을 초월함. 숨을 턱턱 막히게 하고, 물

은 펌프로 길어 올려야 했던 생태적인(?) 동네였다 기후하면 생각나

는 베트남도 숨 막히게 더웠다. 허나 쌀국수를 위해서라면 참아 볼

만하다.

요즘 뭐하고 사는지_ 잘산다. 일단 6기 책을 발간하기 위

하여 밤낮으로 일을 하고있다. 특히 포토샵의 포자도 모르던

내가 컨트롤키로 1000장이 넘는 사진을 수정 보안 변환 작

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급노동자이지만 기술을 배웠다

는 그사실 하나에 집중하려 한다. 절대 억울하지 않다.

앞으로 뭐하고 살건지_ 잘 살거다. 오지랖 넓은

한국인들이 주로하는 질문은“이제 뭐하고 살거야?”

이지만 나는 그 오지랖을 받아줄 여력이 없다. 그냥 잘

살 거고. 할 거는 없다. 많은 책을 섭렵할 예정이다.

짧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지_ 쉬고 싶을 때는 쉬어야 한다.

쓸데없이 공부한다. 사업한다 하면 망하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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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뭔지_ 정일용

나이가 뭔지_ 열아홉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_ 맥그로드 간즈 내가 기

타를 가지고 가장 재미있게 놀았던 곳 그리고 티벳 분들의

이야기들도 인상적이었다.

제일 끔찍했던 여행지_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

다. 하지만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많아서 고르

기가 힘든 것 뿐이지.

요즘 뭐하고 사는지_ 못 보던 사람들 얼굴 보며

앞으로 뭐하고 살 건지_ 신중하게 생

각중

짧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지_ 모

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답은 없다.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는 길이

진정한 답

이다.

이름이 뭔지_ 김민성

나이가 뭔지_ 열아홉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_ 인도 아무래도 가장

길고 하이라이트 일정이 있기 때문

제일 끔찍했던 여행지_ 인도 가장 길고 덥고 생

활의 모든 면이 힘들었음

요즘 뭐하고 사는지_ 검정고시 학원

앞으로 뭐하고 살 건지_ 춤추면서 살꺼다

짧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지_ 여

행이 끝나고 한국 생활에 적응

하는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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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뭔지_ 이율

나이가 뭔지_ 열다섯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_ 인도 제일 오래 있어서

제일 끔찍했던 여행지_ 인도 너무 더러워서

요즘 뭐하고 사는지_ 다이어트

앞으로 뭐하고 살 건지_ 다이어트

짧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지_ 율아. 너 너무 빈대같애.

앞으로 성실하게 일하자.

이름이 뭔지_ 박한진

나이가 뭔지_ 열여섯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_ 태국 한국인

여행자들이 많고 시설이 좋아서

제일 끔찍했던 여행지_ 인도 더러워서

요즘 뭐하고 사는지_ 휴식중

앞으로 뭐하고 살 건지_ 검정고시 공부

짧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지_ 여행이 끝나서 아쉽네요.

아하..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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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뭔지_ 이슬비

나이가 뭔지_ 열아홉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_ 마넴빨리, 깔루르. 시골의 냄새가 참 좋았다. 이 곳의 밤하늘

도 내 고향 밤하늘과 다를 바 없이 별들이 참 예뻤다. 특히 깔루르에서 불을 때서 밥을 해먹을 때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밤하늘 별 보며 달 보며 엉클이 끓여주신 짜이를 마시던 그때를 나는 잊을 수 가 없다!

제일 끔찍했던 여행지_ 치앙마이. 피해자 가해자를 떠나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시

기이다. 결국엔 몇몇의 사람들이 돌아가는 일이 있었던 치앙마이 이때가 참 힘들었다.

요즘 뭐하고 사는지_ 노가다 하면서 산다. 270일간 있었던 일들을 한권의 책속에 눌러 담느라

온 몸에 근육통이 생길 지경이다.

앞으로 뭐하고 살 건지_ 밥 먹으러 가는 것 조차 흥미롭고 신이 날 만큼 재미난 일상을

가지고 살 거다.

짧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지_ 현실에 지고 살지 맙시

다. 인생 짧은데 꿈꾸며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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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뭔지_ 한명수

나이가 뭔지_ 열다섯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_ 태국 깨끗해서

제일 끔찍했던 여행지_ 인도 손으로 똥 닦아서

요즘 뭐하고 사는지_ 운동

앞으로 뭐하고 살 건지_ 생각중

짧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지_ 여행 즐거웠어요.

이름이 뭔지_ 이은민

나이가 뭔지_ 열여덞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_ 꼬사멧

제일 끔찍했던 여행지_ 바라나시

요즘 뭐하고 사는지_ 재미없는 일상의 반복

앞으로 뭐하고 살 건지_ 하고싶은거 하면서

짧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지_ 더러운 세상

이름이 뭔지_ 조은경

나이가 뭔지_ 열여덟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_ 치앙마이

제일 끔찍했던 여행지_ 하노이

요즘 뭐하고 사는지_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음

앞으로 뭐하고 살 건지_ 하고싶은거 다하면서

짧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지_ 한국은 할게 너무 없어. 넘

심심해. 당장 라오스로 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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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뭔지_ 김희영

나이가 뭔지_ 열여섯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_

맥그로드간즈

제일 끔찍했던 여행지_ 하노이

요즘 뭐하고 사는지_ 방콕

앞으로 뭐하고 살 건지_

검정고시 준비

짧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지_

논다고 지랄

이름이 뭔지_ 방소정

나이가 뭔지_ 열여섯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_ 치앙마이

제일 끔찍했던 여행지_ 꼴까따

요즘 뭐하고 사는지_ 방콕! 전업주부?

앞으로 뭐하고 살 건지_ 기타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며...

짧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지_ 한국만한 곳 절절대!!! 없다.

이름이 뭔지_ 원혜진

나이가 뭔지_ 열여덟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_ 인도죠. 큰 사건 사고들도

많았고 무엇보다 오래 머물러서 더 추억들이 깊게 배겨 있는

듯 싶습니다.

제일 끔찍했던 여행지_ 인도요. 날씨가 보통인 날 없이

더울 땐 더워서 짜증나고 추울 땐 추워서

짜증나고 생리하면 끔찍하고 소똥

밟는 일이 너무 끔찍했습니다.

요즘 뭐하고 사는지_ 편

집부에서 일 하는라

매일 서울 - 인천을

왕복합니다.

짧게 하고 싶은 말은 있

는지_ 2022년 2월 22

일 동창회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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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뭔지_ 신효주

나이가 뭔지_ 만으로 이십오세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_ 포카라 그리고 히말라야 예~

제일 끔찍했던 여행지_ 델리 델리의 환경오염은 정말 최악.

피부병까지 얻었잖아

요즘 뭐하고 사는지_ 방콕 & 때때로 딸기밭에서 딸기 따기

앞으로 뭐하고 살 건지_ 좀 더 여 행?

짧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지_ 보고싶다 얘들아.

이름이 뭔지_ 손정원

나이가 뭔지_ 삼십대 미상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_ 히말라야 ABC

제일 끔찍했던 여행지_ 바라나시

요즘 뭐하고 사는지_ 한국의 생태계에 적응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버

리고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 냄새 나는 옷들을 빨래하고, 검은 피부가 하얗

게 만들기 위해 지하철만 타고 다닌다. 그리고 몸속의 맛살라를 지우기 위해

김치를 많이 먹고 있다. 나는 빨리 한국 생태계에 적응해야 한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 듯... gg

앞으로 뭐하고 살 건지_ 올해 안에 장가 가는게 목표다. 사실 작년 안

에 가는게 목표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다. 6기 인디고에게 나를 책임지라는 협박을 했

으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듯 하다... 모두 이쁜 이모나 고모는 없다고 했다. 나쁜것들... 결

국 앞으로 최대의 목표는 솔로 탈출일 듯.

짧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지_ 나는 교사가 아닌 그냥 손정원이야!!!̂ ̂너희

도 학생이 아닌 바로 너 자신임을 잊어버리지 말아라. 학생 OOO가 아니라. 꿈과 자유를 가

슴에 품은 OOO다. 고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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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국 China

동아시아 대륙의 대부분과 중앙아시아의 일부, 그리고 태평양 연안의 여러 섬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현재 중국은 정치적으로는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주권 국가로는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으로 나뉜다.

단동 중국 랴오닝 성에 있는 도시. 가나안 농군학교가 위치했고 그곳에서

20일을 머물었다. 백두산이 근처에 있어 시간을 내어 잠시 다녀올 수 있

었던 곳이다.

선양 중국 랴오닝 성의 성도. 하루간 테마 별 조 여행을 했다. 먹거

리조, 관광조(선양고궁), 쇼핑조가 있었다. 특히 선양고궁은 자금성

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중국궁전을 처음 본 우리에게는 화려하고

엄청난 크기로 다가왔다.

베이징 중국의 수도. 중국 허베이 성 중앙부에 위치.

자금성 중국 베이징에 있는 명, 청 시대의 궁전. 쯔진청은 명^

청 때 500여 년간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궁전이다. 상상을 초월

한 건축자재로 지어졌으며 드넓은 뜰과 수많은 건물들이 있다.

천안문에서 바라보는 자금성의 크기는 어마어마하며 하루 안에

다 보기 힘들 정도이다. 궁전 안은 눈을 크게 뜨고도 다 담을 수

없어 당황해 하고 있는 우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자금

성안에는 외국인 관광객뿐 아니라 중국 시골 마을에서 관광 온 단

체 중국인들이 모자를 쓰고 돌아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천당

공원, 만리장성(북쪽의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나라 시황제가

증축하면서 쌓은 산성이며 명나라 때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대적

으로 확장하였다. 만리장성을 걷고 또 그 긴 성벽을 바라보면 수많은 시

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 규모에 대해서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다. 중국 역대 왕조들이 만리장성에 들인 노력과 비용에 비해서 방

어벽으로서 역할은 크지 않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어떠한 것으로도 사람의 목

숨을 대신할 수 는 없지만 사람들의 희생가치 또한 없다고 하니 가슴이 아플 뿐

이다.) 등을 관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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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

중국 산시성의 성

도. 짝퉁시장으로 유명

하다는 시안은 짝퉁뿐 아니라

진퉁 백화점도 많고 크다. 그 고급스러움

은 배낭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기를 죽인다. 진

시황릉의 병마용갱(진시황릉원 동쪽 담에서 1km

떨어진 병마도용을 수장한 지하 갱도. 영화에서

만 보던 진흙으로 만든 사람들을 보면 표정 하나

하나가 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엄청난 규모

를 상상하고 갔지만 생각보다 작은 규모를 보면

약간의 실망을 하지만 그 시절 그 기술로 만들었

다는 사실의 대단함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시안

하면 꼭 가봐야 되는 관광지이다. 청두-중국 쓰

촨성의 성도. 청두 무후사(유비와 제갈량의 제사

를 모신 사원.), 청양궁등 자전거를 타고 돌며 구

경해도 될 만큼 관광지가 모여있다.

베 트 남 Vietnam

서쪽은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접하고 동쪽은 바

다를 면하고 있다.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당

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외세들이 다

시 들어오면서 베트남은 정치적 혼란기를 맞게

되었다. 북베트남의 공산당정권이 북베트남에서

프랑스 식민세력을 완전히 패퇴시킨 후, 베트남

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졌다. 남

과 북으로의 분단은 남과 북 사이의 20여 년에 걸

친 긴 전쟁을 가져왔다. 함락시킴에 따라 전쟁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이 났다. 세계에서 유일하

게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통해 공산화를 이

룬 나라이다. 베트남을 대표하는 두 도시 북부의

하노이와 남부의 호치민이 있다. 체제가 달라 전

쟁을 하였는데 호치민이 자본주의를 위했던 만큼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하노이보다 더 활기차게 서

구화 되어있고 상업적이었다. 그런 역사를 가져

서 그런지 하노이사람들이 좀 더 깐깐하고 까칠

한 느낌이 들었다. 미국이라는 대제국을 이겨 물

리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게 경직된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하노이 베트남의 수도

호치민 베트남 남쪽에 위치한 경제중심지. 베

트남 전쟁 증적 박물관이 있다. 우리나라는 전쟁

기념박물관이라고 표현하지만 베트남 정부에서

는 전쟁은 기념하는 게 아니라 증거를 남겨 후손

에게 전달 하는 것이 전쟁박물관이 해야 하는 일

이라고 말한다. 박물관 안에는 그들의 끔찍했던

과거와 외세들이 했던 잔인한 행동들에 대해 동

정심 유발(과장)이 아닌 정확한 사건, 사실 ,사진

만을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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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 보 디 아 Cambodia

인도차이나 반도의 남서부에 있는 나라로, 1863

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이래 프랑스령 인도차

이나의 일부가 되었다. 1940년 일본에 점령되었

고 일본 패전 후 1947년 프랑스연합 내의 한 왕

국으로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1953년 완전한 독

립을 이루었다.

프놈펜 캄보디아 수도. 이삭학교에 머물렀다.

킬링필드 한 사람이 권력을 위해서 같은 민족

의 3분의 1이 되는 사람들을 죽였다는 말을 들으

니 권력을 위해 일어난 사건들도 많이 들어봤지

만 가장 끔찍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씨엠리엡 앙코르와트 (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

문화의 대표적 유적. 바라문교 주신의 하나인 비

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

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는 하지만 현재 많

은 부분이 손상되어 유적물을 보고 감탄하는게

아니라 그 사원 작은 거 하나하나에도 다 역사가

있고 의미가 있고 또 그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있

는 곳이다.)

태 국 Tailand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 중앙부에 있는 나

라이다. 19세기에 유럽 열강의 압박 속에서 사법

^행정제도 개혁과 함께 근대화 실행과 영국과 프

랑스의 대립을 이용함으로써 식민지화의 위기를

벗어났다. 관광이 주산업이 된 나라로 외국인들

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방콕 태국의 수도. 시내에는 대소 300개의 사원

이 있을 만큼 일찍이 불교의 꽃을 피워 온 도시

다. 하지만 관광을 하기보다는 쉬고 놀기 좋다고

알려져 있다.

치앙마이 태국북부에 있는 치앙마이주의 주도.

인 도 India

남부 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1857년 무굴제국

이 멸망한 후 영국의 직할식민지로 편입되었다.

1947년 8월 15일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 힌두권인

인도와 이슬람권인 파키스탄이 각각 영국연방의

자치령으로 독립하였고, 1950년 자치

령의 지위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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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라 인도 마하라슈트라주 엘로라 마을 근처의 석굴유적. 제1굴에서 제12굴까지는 불교굴로 6-7세

기에 개굴되었다. 여기에 이어지는 제29굴까지는 힌두교의 석굴이고, 최후의 5굴이 자이나교의 석굴이

다. 석굴마다 자세히 둘러본다면 세세한 그림, 조각들이 섬세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걸이

벽화에는 금색으로 입혀놓았고, 꽃은 푸른 바다색으로 칠해놓았으며 벽을 치면 아름다운 타블라소리가

나는 석굴도 있다. 1~29번 석굴들을 순서대로 보다 보면 약간씩 양식이 변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아잔타 인도의 대표적인 고대 불교석굴사원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인도뿐 아니라 세계가 인정하는

불교예술의 보고이자 건축, 미술, 불교사 연구의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델리 인도의 수도. 대표적으로 꾸뜹미나르(12세기 말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의 술탄 꾸뜹우드딘 에

이백(Qutab-ud-din Aybak)이 델리 정복을 기념하여 세운 거대한 승전탑이다. 출입이 제한된 곳이 많

지만 중간 중간 앉아 건축물을 바라볼 수 있게 잘 되어있다.)라는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자이뿌르 핑크시티. 실제로는 핑크색이라기 보다는 짜이색 즉 진흙색과 흡사하다.

조드뿌르 블루시티. 밤에 조드뿌르 성을 바라보는 맛이 있는 곳이다. 한국어 가이드가 되는 조드뿌르

의 성에 오디오를 들으며 걷다 보면 짧은 시간에 그들의 역사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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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 인도의 대표적 유물이 위치한 도시. 타

지마할(궁전 형식의 묘지로 무굴 제국의 황제였

던 샤 자한이 왕비 뭄타즈 마할을 추모하여 건축

한 것이다. 순백의 대리석은 태양의 각도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빛깔을 달리하며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고, 웅장한 건물은 중압감은 커녕 오히

려 공중에 떠있는 듯 신비롭고, 건물과 입구의 수

로 및 정원의 완벽한 좌우대칭은 균형 미와 정갈

함을 느끼게 한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웅

장한 타지마할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 남자의 사

랑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이 떠올라 마냥 멋있

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샤 자한이 맞은 편에 자

신의 무덤을 만들려 했으나 아들에 의해 죽기 전

감옥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런 개

인사가 후대의 엄청난 문화유산이 되었다는 사실

이 참 아이러니하였다.

바라나시 바라나시 옆에 흐르는 겐지스강은 인

도인들에게는 성스러운 강이지만 외부인이 봤을

땐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더러운 물일 뿐이다.

그 앞에서 화장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현지인

과 외국인의 표정은 대비되는데.. 현지인은 엄숙

하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화장되는 것을 지켜보지

만 외국인들은 눈 앞에 벌어지는 신기한(?)일에

인상을 찌뿌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진을 찍어가

기도 한다. 돈 있는 사람만이 장작을 사서 화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인도의 역사에 중요한 축을 형성

하고 있는 카스트제도는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하

는 순간까지도 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

한 문화는 인도를 대표할만하다.

네 팔 Nepal

중국과 인도 사이인 히말라야 산맥 중앙부의 남

쪽 반을 차지하는 내륙국가이다.

북쪽으로는 중국의 티베트와 히말라야산맥을 사

이에 두고 접하며, 그 외 지역은 인도와 접한다.

세계 10대 최고봉 가운데 8개를 보유한 국가로

지형이 험악하기로 유명한 산악 국가이기도 하

다. 그러나 인도와 중국 사이에 끼어서 두 국가

의 완충 작용을 할 수 있는 전략적 중요성이 증

가되는 국가이다. 옛날 카트만두에는 세 개의 소

왕국 바산타풀, 파탄, 박타풀이 있었고 지금은 이

곳 왕궁 터를 도시 이름으로 바꾸어 파탄이라 부

른다. 네팔의 역사는 불교 문화가 발달하여 깊은

불교 유적지가 제법 많은데 네팔 불교의 가장 오

래된 사원인 스와야부나트가 세계문화유산이 되

었다. 불교의 대국인 인도는 불교의 탄생지를 인

도라고 믿고 싶어 하지만 북쪽에 있는 룸비니에

서 탄생하셨다. 네팔은 80%가 힌두교 15% 불교

를 믿고 있다.

카트만두 네팔의 수도. 보우드낫는 세계 최대의

불탑. 불탑 꼭대기에 천리안이 있는데 큰 두 눈과

물음표의 코만 있다. 그게 오로지 눈으로 보기만

하라는 불교의 심오한 뜻이 담겨있다. 함부로 판

단하지 말라는 부처의 메시지라는 것을 알았고

관리가 잘 안 되어 있는 모습은 안타까웠다.

포카라 히말라야 멀리서 보이는 히말라야를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에 엽서 한 장을 붙여놓은

듯하다. 멀리서부터 오는 히말라야의 압도 감은

지켜보는 우리를 감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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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부터 29일까지 2박 3일

동안 백두산에 가기 위해 인디

고는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나

와 호텔에서 머물게 되었다. 인

디고가 머물게 된 곳은 겉 보기

에도 꾀나 비싸 보이는 호텔 이

었다. 백두산 일정을 무사히 마

친 우리는 다시 가나안 농군 학

교로 돌아가게 되어 아침일찍

식사를 하고 출발 하기로 했다.

우리의 아침 식사는 호텔 1층 식

당에서 먹게 되었다. 역시 비싸

보이는 호텔답게 뷔페였다. 아

침식사를 하러 1층 식당에 들어

선 율이와 나는 아침으로 먹을

음식을 탐색하는데 그때 율이

와 나의 레이더망에 색다른 음

식이 사로 잡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삶은계란 이였다.

호텔 계란 사건원혜진

율 : 삶은 계란이다_!!

혜진 : 많이 챙기자

의견 일치한 율이와 나는 삶은

계란을 식판에 10개씩 담았다.

혜진 : 우리 싸서 가져가자!

율 : 이동하는 버스안에서 입이

심심하니까 까먹고 놀자. 헤헤

율이와 나는 테이블에 앉아서

버스에서 먹을 삶은 계란을 하

나씩 주머니에 넣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호텔 직원이 율이

와 나의 테이블로 걸어오더니

말을 거는 것이었다.

호텔직원: Hey!! @#$%^&%)!*!

율이와 나는 당황했다. 호텔 직

원이 중국어로 얘기 했기 때문

깝쳤어

/21

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들을

수 가 없었다. 나는 당황해 손

에 쥐고 있던 계란은 무릎에 올

려 놓으며 웨이터에게 한마디

했다.

혜진 : what??!!!!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내가 시

침 뚝 떼고 얘기하니까. 호텔직

원은 내 무릎 위에 놓여져 있

는 계란을 가리키며 한번 흘려

보더니 돌아가는 것이다. 율이

는 계속해서 계란을 가방에 슬

쩍 슬쩍 넣고 있었는데 호텔 직

원이 중국어와 영어, 한글이 적

혀있는 무언가를 들고 와선 우

리 테이블 중간에 우리가 잘 보

이게 올려놓았다.

'음식을 가져가지 마세요'

이건 국제적 망신이었다. 그러

나 이대로 삶은 계란을 버릴 순

없었다. 황당했고, 우리의 행동

이 이미 국제적 망신을 주었기

때문에 율이와 나는 오기로 삶

은 계란을 먹기 시작했다.

1~5개 까지는 먹을 만 했으나 6

개 부 터는 나와 율이 볼이 먹이

를 담는 햄스터 마냥 부풀어 오

르며 삼키지 못하는 비극을 겪

게 되었다. 그렇지만 꿋꿋하게

다 먹어 치운 율이와 나는 의기

양양 했다. 다 먹은 식판을 치우

러 온 호텔 직원이 징 하다는 눈

빛으로 나와 율이를 쳐다 보았

다. 우리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

며 그 곳을 떠났다.

혜진 : 에_ 다므그따

(예_ 다 먹었다.)

율 : 꺼억~

버스를 타러 가는데 방구가 나

오려는지 배가 부글부글 끓었

다. 그러나 끼면 지독할 것 같

아서 뀌지 못했다.

율 : 사실 나 그때 계란 꽁쳐놨

었어

혜진 : 너도?

버스 안 율과 나의 주머니엔 계

란이 두 개씩 들어 있었다. 푸

흑, 이걸 또 언제 먹는담.

했어 /22

5월 25일 호도협

김평화

특별했어

/23

1/ 5월 25일. 맑은 해가 떠 올랐다.

산이라곤 집 뒷산도 올라가기 싫은데 트레킹 이라니...팔다리는 무겁고 머리는 괜히

아파오는 것만 같고 "올라가기 싫은데.." 나지막하게 한마디 달곤 도살장 끌려가듯 봉

고차에 올라섰다.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한참을 올라 가는데, 아스팔트도로가 왜 그리

험악하게 파여있는지 누가 보면 '여기 전쟁터야?' 싶을 정도로 도로가 훅훅 파여있다.

운전사아저씨는 학생들이 가득 찬 차임에도 난폭운전을 하신다. 아빠의 안전한 운전

솜씨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과격한 운전솜씨를 뽐내시는 아저씨를 외면하고픈 마음

에 좁아터진 봉고차에서 이리저리 낑낑 거리며 잠을 청한다. 차가 덜컹거릴 때 마다 시

트 위를 붕 떴다가 내리꽂는 것이 점점 심해져 극심한 고통이 몰려오지만 졸음을 물리

치기엔 살짝 약하다. 그리고 내 뒤로 보이는 OO이 신경 쓰이지만, '설마..' 의심의 눈

초리로 한번 쳐다보곤, 모르겠다 란 심정으로 다시 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머리가 아찔 해지는 것이다. "으악 뭐야!!!" 왓더헬 쌍쌍바 온갖 비타민C같은

단어를 내뱉으며 눈을 뜨고 사태 파악을 하려는데 다시 한번 육중한 소리를 내며 쿵 하

고 떨어지는 그것은 거대배낭 이였다. 20Kg이 훌쩍 넘는다는 그 거대배낭 두 개가 연달

아 내 머리를 강타 한 것 이다. "으, 아퍼~ 이게 뭐야. 자다가 왜 돌덩어리 배낭을 얻어

맞아야 하냐고!" 괜히 운전사 아저씨를 탓하며 궁시렁 거리니, 아저씨가 백미러로 흘깃

쳐다보면서 씩 웃으시더니 "하오하오~(괜찮아 괜찮아~)" 하고 넘겨버리신다. 괜찮기

는요, 심통은 나지만 어쩔 수 없이 아저씨에게 애원의 눈빛으로 쳐다보아도 여전히 폭

격 맞은 도로에서 미친 듯이 엑셀을 밟으신다. 눈앞에 별과 새는 어른거리고 점점 고도

는 높아가면서 힘들어진다. 그래도 슬슬 하얀 머리 산맥들이 보이는걸 보아하니 곧 호

도협 인가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참는 수 밖에..

간단한 짐만 싸 들고 천천히 풍경을 즐기며 호도협 트레킹 시작! 다랑이 논들이 즐비

한 오솔길을 타박타박 걸으며 친구들과 얘기를 하며 걸어갈 때 까지만 해도 이 곳이 호

랑이가 다니는 험한 협곡인지는 몰랐었다.

한참을 걸어가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조랑말을 끌면서 뒤따라 올라오는 것이다. 왜 따

라오지? 걔다가 앞서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의아 하긴 해도 위에 사시는 마을주민인줄

만 알았는데, 우리를 가이드 해주시는 태현이 아버지께서 말씀해주시기를..

"너희들이 낙오하기를 기다리는 거야. 조랑말 타고 올라가라고..."

했어 /24

앗,그런 심오한 계획이 있는 것 이였군. 날카롭게 조랑말을 째려 보곤 눈 앞에 슬슬 험난해지기 시작

한 길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조랑말들은 얄밉게 살랑거리며 쫓아오고, 힘들어 죽겠는데 눈치

없는 주인장이 "백위안~백위안~" 이러면서 흥정하려고 든다. 무시하고 꿋꿋하게 산을 올라갔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 하얀 조랑말을 타고 올라가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 할수록 절실해져만 갔다.

2시간쯤 걸었을까? 내 뒤에도 앞에도 아무도 없네? 앞서 걸어가던 은민이도 뒤따르던 혜진이도 아무

도 없는 이 외로운 산길. 게다가 물이 떨어져 간다. 물통에 수위가 점점 낮아질수록 마음이 급해져서 우

물을 애타게 찾아보기도 하고, 마을이 나오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것이다. 괜

히 겁난다. 젠장 허나 멀리서 일용이가 보인다. 힘든 것도 잊은 채 일용이를 따라잡아 물통 하나를 낚아

채고 도망쳤다. 멀리서 일용이의 짜증 섞인 메아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머~얼리서

2/ 중국의 호도협 은 한자를 풀이하자면

'좁고 험난한 호랑이길.' 이다. 이름처럼 길이

좁고 험해서 위험하지만 중국의 오래된 족자에서

나올법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트레킹 구간이

다. 게다가 바로 옆 산맥이 그 유명한 실크로드라

는데..높디 높은 산 중턱에 희미하게 보이는 저

길이 바로 실크로드일까? 괜히 중세 상인이 된

마냥 등짐이 무겁게 느껴진다. 이 높은 곳까지 올

라와서 저 멀리 인도부터 유럽까지 장사를 하던

사람들은 어떤 각오로 이곳을 지나갔을까? 진짜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마냥 즐기면서 가기

엔 너무 힘들다. 그 좋은 풍경이 앞뒤로 펼쳐지

는데 앞만 보고 미친 듯이 기어올라가니 몇몇 애

들의 뒷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애들아 같이 가... "

죽어가는 목소리로 애들을 불러 세워, 다 같이

낑낑 올라가고도 여기가 정상인지도 모르고,

"야 빨리 가야 돼 반도 못 왔음 어떡해?"

급한 마음에 정상도 모르고 다시 초고속 하산

을 하고 말았다.

올라갈 땐 죽을상을 지으며 올라갔건만, 산 중

/25

턱에 자리잡은 게스트하우스가 저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니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아 이제 다 끝났

구나!! 예이~ 이미 도착한 멤버들은 배고파서 의

자에 널 부러져있다. 나도 동참해야겠다. 그날

선두주자와 마지막 주자의 시간차는 3시간 이였

다. 1시간을 기다려도 2시간을 기다려도 마지막

주자들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슬슬 널부러져 있

는 것도 지겨운 나머지 마을주변을 둘러보러 가

보니, 벽돌로 쌓아 올린 가정집들이 듬성듬성 이

루고 있었다. 따뜻한 볏짚 지붕이랑 빨간 벽돌

이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처음 단둥을 통해 들

어와서 목격한 중국은 '진짜 아니올시다.' 를 연

발 할 정도로 패션테러리스트들의 나라였다. 기

차 안에서는 빨간 내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아줌

마 아저씨들이 즐비하고 심지어 대문 앞이란 앞

마다 빨간 부적과 빨간아기 사진들이 떡하니 붙

어있는 곳이 바로 중국이다. 그러면서 꼭 건축미

학도 한마디씩 거들며 탐탁지 않아 했었다. 그러

나, 호도협 중턱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무지 귀

엽다. 맞은편 산등성이에는 산양들이 좋다고 뛰

어다니고, 암탉들은 쪼쪼 거리며 앞마당에서 돌

아다니는 풍경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뭐 21세기

에 조랑말 타고 다녀도 되지. 안 될게 뭐 있고 이

상할 게 뭐 있겠어? 메이콴시~메이콴시~(괜찮

아~괜찮아~)

3시간을 넘긴 기다림 끝에 마지막 주자들이 기

어서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오고, 맛있는 중국식

저녁식사를 마쳤다. 열심히 산을 타고 올라와서

먹는 밥은 이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자 독약

일 것이다. 분명 올라오면서 살 빼면 뭐해 밥만

먹으면 다시 찌는걸...

호도협 트레킹은 별 기대도 없고 짜증만 가득

한 채 시작한 트레킹 이였지만, 산을 타면서 기

대가 생기고 즐거움이 생겨버렸다. 여행이 좋을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는 것처럼 산도 마찬가지

이다. 여행하는 삶과 산이 닮았다고 느껴지면서

지금까지 마음에 담아 두었던 고민들을 다시금

했어 /26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1년 여행학교를 와서 맨날 울고 짜고 힘들어

하지?'

'여행하기 싫어'

'힘들어'

'엄마 보고 싶어'

이제 나는 표현하지 못하고 쌓아오던 마음의 짐들을 버리지 않고선

앞으로 걸어나 갈수 없다. 버리든가, 불태우든가 끊임없이 나를 비워

내야 했다. 산을 걸어올라 가면서, 평소에는 왠 종일 고민해야 했던

돈이나 미래 걱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우어어!! 해 떨어 지기 전에

올라가 야해!!!' 만 생각하며 걸어가니까. '내가 괜히 어렵게 생각했

던 거구나.' 뜬금없이 유치한 자기반성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별

다른 고민 걱정 없이 위로만_위로만 아래로만_아래로만 걷던 호도협

트레킹은 지금도 여전히 힘들 때마다 내 곁에 남겨두고 있다.

잊을 때도 된 중국여행의 일부이지만 앞으로의 여행에서 가장 필

요한 마음 비우기를 배웠던 호도협에게 고맙다.

고마워. 늘 그 자리에서 다른 이들을 도와줘!

/27

했어 /28

캄보디아 프놈펜에 들어온 후 매일 1~2달러의 식비로 제한된 메뉴 안

에서 엄청난 고뇌를 겪는 생활을 하며 지쳐있을 때쯤 선생님께서 "오늘

식대는 6달러 지급하는 걸로 할게." 말이 끝나자마자 인디고 아이들 모

두 환호성을 질렀다. 이건 마치 매일 풀 반찬을 먹다가 어느 날 떡하니

고기반찬이 상에 있는 느낌이랄까 너무 좋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샌드

위치를 7개먹을까? 수없이 고민하고 있는 찰라 선생님께서 한국식당을

알아봐서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먹자는 제안을 해오셨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들떠서 나는 일용과 함께 인터넷서핑을 해서 한국음식점인 아리

랑 뷔페라는 곳을 알아냈다. 가격도 6달러!! 계속 무한리필이 가능 너무

감격스러웠다. 우리는 툭툭 2대를 불러 1대당 7~8명씩 끼어서 타고 갔

다.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우리는 뷔페를 갈 수 있다는 행복감으로 견뎌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행복감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니 바로 저

녁에는 고기뷔페이기 때문에 개인당 무려 9달러라는 것이었다. 한국에

서는 9000원 밖에 안하지만 그때 우리에게는 엄청난 큰돈이었다. 사장

님께서는 우리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으시고는 개인당 6달러로 흔쾌히

(?)해주셨다. 정말 눈물이 눈앞을 가렸다.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잡채,

명절에나 볼 수 있는 그 아기자기한 전들, 노랗고 보송보송한 계란말이,

선홍빛 실크 같은 삼겹살 초콜릿빛깔에 고소한 참기름냄새가 어우러지

배가 터진 날!조은경

특별했어

/29

는 갈비 등 음식들이 어서 나를 먹어주세요 라는 아름다운자태를 뽐내

며 우리 인디고를 반기고 있었다. 시작된 우리 인디고의 흡입 곧 반찬과

고기들이 깔끔하게 다 사라졌다. 다시 채워지긴 했지만 아마 그때 사장

님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 거 같다. 하지만 우리 인디고는 다시 채

워진 음식에 눈이 멀어 다시 폭풍흡입을 시작했다. 음식을 많이 먹고 배

가 채워진 우리는 종업원에게 커피를 부탁해 우아하게(?) 커피를 마셨

다. 물론 커피도 개인당2~3잔정도 먹었던 거 같다. 후식까지 야무지게

먹은 우리들은 감동어린 얼굴과 함께 사장님께 꼭 복 받으실 거라고 또

시간이 되면 다시 오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마지막 말을 들으시고는 얼굴

표정이 굳어지셨던 거 같다. 이렇게 좌충우돌 우리 인디고의 저녁회식

은 막이 내리고 우리는 빵빵해진 배와 함께 툭툭을 타고 돌아왔다. 비록

오는 길에 툭툭 아저씨가 길을 헤매셔서 시간이 좀 걸렸지만 참 행복했

던 하루였다. 후에 여행을 다니면서 이 얘기를 하면서 많이 아이들과 웃

었던 거 같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랄까? 아리

랑 뷔페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캄보디아 아리랑뷔페 INFORM

- 캄보디아 프놈펜에 생긴 최초 한국인 식당

- 점심에는 6달러 저녁에는 9달러

- 숙박서비스 제공 3끼 20달러

- TEL 012.611.002 / 023.215.180

- 위치 : Sothearos BIvd(3) 근처

했어 /30

이삭학교를 방문하기 전 나는 그 곳에 대한 짧은 정보를 들었다. 이삭학교란, 교육수준이

낮은 캄보디아에서 교육 해택을 받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학교라

는 막연한 소리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 곳에 가면 언제나 열등

감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들의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내가 봐

왔던 자선단체들은 그랬다. 도와주지 않는 것보다도 더 잔인하게 자기만족을 위해 도움을

주는 사람들, 그로인해 우울해 하고 열등감에 가득 차있는 아이들. 이게 내가 알던 자선단

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편견을 가지고 도착한 이삭학교는 내가 생각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첫

시간이었던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에 본 모습은 열등감에 시달려 우울해 하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설레어 하는 친구들, 열등감을 가지고 도움 받기만을 원

하는 모습이 아닌 오히려 자신들의 상황이 많이 좋은 것이 아닌데도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

려는 친구들의 모습은 내 편견을 바꿔주기에 충분했고, 친구의 관계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맞은 둘째 날, 이삭학교 학생들의 반가운 인사로 프로그램이 시작

되었다. 첫 시간은 모두 함께 노동하는 시간이었는데 나는 샤워실을 신축하는 건설 현장에

서 일하게 되었다. 힘들었지만 날 계속 즐겁게 해주려하는 친구들 덕분에 함께 일하는 동안

즐거웠다. 그 다음에는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가르쳐주는 시간을 가졌다.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었고, 서로 정말 열심히 배우고 가르쳐줬다. 그래서 지금까지 여행 하면서 배운 언어

중 크메르어(캄보디아어)를 가장 잘 할 수 있었다. 그 후, 점심을 먹고 캄보디아 농촌의 가

만났어

/31

정을 인터뷰해 오는 시간을 가졌다. 김기대 선교사님이 우리에게 캄보디아 농촌 사람

들이 어떤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지 느껴 보라고 주신 숙제지만 우리보다 이삭학교 친

구들이 더 나서서 질문하고 같이 안타까워 해주는 모습을 보며 약간 부끄러웠다. 나는

더욱더 빈둥거리며 여유 있게 사는데도 한번이라도 어려운 이웃을 돌아 본 적이 있었

나 하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그렇게 모든 일정이 끝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삭

학교 친구들의 저런 에너지와 저런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하고 말이다. 그러다

문득 첫 날 들었던 김기대 선교사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도움을 주며 뿌듯함을 얻기 보

다는 학생들을 도우며 섬기는 사람이 되는데서 가장 큰 기쁨을 느끼신다는 말씀. 첫째

날 들은 당시에는 그 말이 잘 이해가 잘되지 않았지만 둘째 날 생활을 하며 자기 전에

잠깐 생각을 하며 깨달았다. 김기대 선교사님이 학생들은 도우며, 가르치며 하는 생각

들이 학생들을 긍정적이게 만들고 있음을... 만약 김기대 선교사님이 자신의 만족을 위

해 활동을 하셨다면 이삭학교 친구들은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는

그런 아이들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기대 선교사님은 그들을 진심으로 신경

써주며, 그들이 진정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들으려고 노력하셨고, 그 때문에 이삭

학교가 지금의 모습이 될 수 있었던 것.

어느새 마지막 날 아침이 되었고, 헤어져야 할 시간. 짧은 시간 밖에 같이 생활하지 않

았는데도 벌써 많이 가까워져 버린 우리. 헤어지기가 아쉬웠지만 다음에 또 오겠다는

약속을 하며 떠나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진정한 교감, 봉사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

다. 나도 그런 교감, 봉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했어 /32

혜진, 은민, 은경, 한결, 이렇게 네명의 여성들로 모인 95들은 새로운 변신을 원했다.

한국이라면 절대 도전하지 못할 보라색,초록색,분홍색,파란색

이 네가지 색을 캄보디아의 씨엠리엡에서 95가 도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색깔선정은 사다리 타기로! 두근두근 자신의 머리 색깔은 무슨색일까 긴장되는 순간.

사다리타기 결과 혜진은 보라색 은민은 초록색 한결은 파란색 은경은 분홍색!!이되었다.

새로워질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설레는 발걸음으로 미용실에 들어서는데...

아니 이런! 초록색은 없고 대신 연두색이 있다고 하고 파란색은 아예 없다는 것이다. 하늘색 없나.

결국 색을 바꾼 은민과 한결은 은민은 연두색 한결은 하얀색을 선택하게 되었다.

미용사가 95를 염색해주는 동안 계속 웃었다. 95가 원하는 색깔들은 매우 쇼킹했기 때문이다.

두근두근 설레이는 마음으로 미용사가 해주는 염색을 받는데

염색을 할 때는 색을 맞춰 자연스러운 얼굴을 위해 웃기지만 눈썹도 염색을 해줘야된다는

이모양의 의견으로 95는 결국 미용사에게 눈썹까지 염색해달라고 요청했다.

눈썹까지 해달라는 95의 요청이 황당스러웠는지 실소를 터뜨리는 미용사.

하지만 미용사는 곧 진지한 눈빛으로 두손가락을 이용해 염색약을 발라주었다.

눈썹에도 염색약을 칠한 95가 줄지어 앉아있었는데

다들 거울의 비치는 자신들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피식피식 웃는다.

95들의 새로운 변신 원혜진

깝쳤어

/33

95들의 새로운 변신 원혜진

하지만 아름다워질거라 굳게 믿은 95는 염색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염색이 끝이나고 머리를 감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거울을 보는데

혜진은 기존에 한 염색때문에 보라색이 아닌 빨강색으로 나오고

연두색을 한 은민의 머리색은 갈색이 나왔다.

핫핑크를 한 은경 역시 갈색이 나왔고 하얀색으로 염색한 한결은 밝은 갈색이 나왔다.

그리고 원랜 계획에 없었지만 기대했던 95들의 눈썹염색!

혜진의 눈썹은 아주조금이지만 색이 진해 졌고 은민의 눈썹도 별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은경과 한결의 눈썹은 있는듯 마는 듯 하게 모나리자가 되어

미용실에 있는 모두를 빵터지게 만들었다.

은경의 젖은 머리를 말려주던 미용사가 갑자기 앞머리를 만들고 싶냐는 물음에

은경은 고민을 하게되었다.

앞머리를 자르라고 권유하는 95에 의해 결국 은경은 앞머리를 자르게 되었는데...

다행이도 모나리자 눈썹을 가려주어 은경의 눈썹 염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로 눈썹에 아이브로우를 칠해야만 했던 앞머리 없는 한결..

비록 95의 염색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더 아름다워진 17살 95들은

뿌듯한 발걸음으로 숙소로 향하게 되었다.

했어 /34

일용. 나에게 여행은 거울이다.

여행은 거울 처럼 수많은 나의

모습을 비춰주어 내가 알지

못했던 나를 찾게 했다.

희영. 나에게 여행은 양말이다.

처음에 신을 땐 깨끗한 것 처럼.

처음 여행 할 땐 말끔한데 점점 가면 갈

수 록 꼬질꼬질 해지기 때문이다.

은민. 나에게 여행은 탈출구 이다.현실에 지친 내게 활력을 준다. 하지만 탈출구 일

뿐 답은 아니다.

평화. 나에게 여행은 지옥이다.

천국 같은 한국을 떠나 지옥을 경험했기

에 나에게 여행은 지옥 같이 끔찍하고 벌

받는 기분이다.

민성. 나에게 여행은 밥이다.

꽤 많은 나라들을 단 시간에 돌아보았고 배낭여행의 마지막인 인도 4

개월을 지내면서 온갖 고생은 다 해 보았기에 어디에 떨어트려 놓아

도 밥먹는 것처럼 쉽게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다.

/35

한진. 나에게 여행은 레어탬이다.

긴 시간 동안 여행하는게 참 레어하고 좋은 기피였기 때문이다.

여행하면서 많은 걸 보고 느끼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율. 나에게 여행은 캔디다.

달콤하긴 한데 많이 먹으면 질린다.

혜진. 나에게 여행은 보물찾기다.

여행을 통해 많은 보물을 찾았기 때문이다.

소정. 나에게 여행은 새로운 일상

이다.

한국에서 늘 보고 생활 하던 일상과는

또 다르게 매일 새로운 무언가를 보고

경험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기 때

문이다.

은경. 나에게 여행은 녹차 아이

스크림이다.

내가 여행을 하면서 아이들이랑

놀면서 참으로 즐거운 일도 많았

고, 수많은 사람들과 헤어지고 아

이들 사이의 갈등이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러웠지만 여행이 끝나가

는 지금 안타깝고 아쉽달까?ㅎㅎ 이것이 마

치 녹차 아이스크림의 달콤함과 쌉싸름함 그리고 다

먹고서의 아쉬운 감이 있기 때문이다.

명수. 나에게 여행은 학교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무엇인가 배우는

것처럼 여행을 하면서 무언

가를 배운것과 같아서 여

행은 학교다.

슬비. 나에게 여행은 카페인이다.현실에 지친 나를 취하게 한다. 짧은 시간의 속

임수 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시간 동안 수도 없

는 깨달음과 자신감을 선물 받는다. 현실

로 돌아온 내가 다시 찾게 만드는

그런 매력덩어리다.

했어 /36

여행을 시작한지 4일만에 맞는 인디고의 첫 생일.

깜짝 파티를 열어준 친구들에게

그동안 은민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울었어

/37

* 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맞는

타지에서의 생일이었는데 어떠셨나요?

많이 긴장하고 있을 시기였죠. 희망과 의욕이 넘

칠 때이기도 했고요. 친구들과도 어색하고 여행

을 같이 해야 하는 사람들 정도로만 관계를 맺

고 있었고요. 생일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어

요. 같이 있고 싶어하는 사람들(가족)과 함께 있

지 못해도 생애 한번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도 내가 태어난 날 정도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

던 거 같아요.

* 친구들이 깜짝 파티를 준비해줬었는데

그 때 심경이 어떠셨나요?

당황스럽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죠. 그 때 공동체

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어서 쉽지 않았을 텐데..

열심히 준비 했더라고요. 별 기대 없던 생일이었

는데 미안하기도 했어요. 친구들을 쉽게 받아들

이지 못했던 거 같더라고요. 덕분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

를 받으니 저도 소중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

도 들었고요. 부담감도 있었던 거 같아요. 이들

과 앞으로 어떻게 여행을 해야 할지에 대한 부담

감이요. 가볍게 생각하던 관계들이 좀 더 진지해

지는 계기가 된 듯 해요. 또 우리가 앞으로 1년을

함께할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해줬어요. 단합이

라 해야 되나요? 좀 더 뭉칠 수 있었어요. 그 순

간만큼은 가족보다 인디고가 더 크게 다가오기

도 했었어요.

* 친구들은 깜짝 파티를

눈치를 챘을 거라고 했는데 알고 계셨나요?

정말 몰랐어요. 다들 잘 숨겼더라고요. 뭔가 이상

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깜짝 파티일거라고

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 날 따라 한 친구와 같

이 많이 있었는데 그게 알고 보니 저를 잡아두라

는 작전이었어요.

* 친구들이 많은 축하를 해주었지만

가족들이 보고 싶지는 않았나요?

당연히 보고 싶었죠. 가족들은 그 때뿐 아니라 여

행 내내 보고 싶었어요. 특별한 날이라 좀 더 보

고 싶었을 뿐이죠. 가족들이 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사실을 알았지만 여행을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이미 많은 걸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었어요. 그

때 사정상 통화를 하지 못한 점이 아쉬워요. 특히

부모님께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꼭

하고 싶었거든요. 한번도 그 말을 하지 못했고 감

사한 마음도 별로 없었거든요. 친구들이 축하해

주는 모습을 보고 부모님은 얼마나 제가 태어난

것을 축복했을지 조금은 알 거 같더라고요.

* 생일파티 뒷풀이는 재미있었나요?

전쟁터 같았죠. 정말 미친 듯이 놀았던 거 같아

요. 크림을 서로 얼굴에 묻히러 뛰어다닐 때는 초

등학생으로 돌아간 듯 했죠. 하나에 그렇게 빠져

즐거워 했던건 처음이었을 거예요. 항상 걱정과

생각들이 머리 속에 있었는데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죠. 끝나고 뒤처리가 좀 힘들었지만요. 친구

들이 유성매직으로 칠판에 생일축하 메세지를 적

어놨었어요. 지우는데 애 많이 먹었죠. 친구들의

편지를 보관하지 못한 게 아쉬움이 좀 남아요.

했어 /38

* 그 때 공동체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시끄럽게 파티를 했잖아요.

사실 저희가 피해를 많이 드렸어요. 밤에 건물 전

체에서 시끄럽게 뛰어다니고 소리를 질렀으니까

요. 그래도 같이 제 생일을 축하해줬어요. 케익도

준비해주시고 미역국도 끓여주시고 선물도 주셨

어요. 너무 감사 드리죠. 그 때 그 미역국의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답니다.

* 생일파티 때 케익이 준비되어있었군요.

공동체 안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라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맛은 있었나요?

공동체가 중국 시골마을에 위치해서 빵집은 커녕

제대로 된 슈퍼 하나 없었는데 시내에서 사오셨

다고 하더라고요. 맛은 당연히 최고였죠. 평소 치

즈 케익을 좋아하는데 생크림 케익의 맛에도 감

동했답니다. 기대를 안하고 있던 케익이라 더 그

러지 않았나 합니다.

* 다른 친구들의 생일은 어떠했나요?

솔직히 그 부분은 좀 미안해요. 제가 첫 번째라

서 인지 다른 친구들에 비해 풍성했잖아요. 받

은 만큼 돌려줬어야 했는데 제 여행에 바빠 그러

질 못 했던 거 같아요. 타지에서 맞는 생일의 쓸

쓸함을 알지만 이 일 저 일 신경 쓰느라 잘 못해

준 거 같아요.

* 마지막으로 생일을 준비해준

1년을 여행한 친구들에게 하실 말씀 없으세요?

일단 혜진에게 고맙다는 말하고 싶어요. 제가 생

각했던 것처럼 준비할 때 가족 생일을 준비하는

거 같은 느낌은 안 받았을 텐데 열심히 준비해

줬어요. 마치 친한 친구의 생일을 준비하는 것

처럼요. 책임지고 생일을 준비해줬지만 정작 혜

진이 생일은 흐지부지하게 지나간 것 같아 미안

해요.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생일을 잘 챙기

지 못했어요. 여행 중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제

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제 생일뿐만 아니

라 여행 내내 친구들에게 고마워요. 그 당시에

는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저를 위한 행동이었

더라 고요. 제 응석들과 짜증, 고민들을 본인 일

처럼 받아들이고 같이 해주었어요. 혼자가 아니

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 친구들에게 표현을 잘 못

했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고마워하고 있다는 거

말하고 싶어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성스럽게 파티를 준비해준 인디고. 서로의 얼굴에 크림을 묻혀가며 장난침으로인해서 많이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 1년이란 시간을 함께 여행할 친구들이란 것을 알게 해준 파티였어요. 이상 이은민의 자

문자답이었습니다.

/39

쌌어

했어 /40

/41

했어 /42

9월 24일부터 10월 5일까지.

10박 11일 동안 인디고는 3개

의 조로 나눠져 두 번째 자유여

행을 하였다. 우리 조는 A조였

고 나, 은경, 현주, 소정, 일용,

명수 이렇게 6명이서 한 팀이었

다. 자유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

는 일이 있다면 현주언니와 소

정이와 셋이서 염색을 한 것이

다. 우리의 마지막 정착지 마이

소르.

10월 2일에 있었던 장난이다.

마이소르 여행 첫째날 밤, 우리

는 여자 네 명이서 방을 쓰고 남

잔 둘이서 방을 썼다. 현주언

니와 소정이와 나와 셋이서 몰

래 숙소를 탈출 하였다. 왜? 바

로 우리의 염색으로 깜짝 변신

을 하기 위해서 염색약을 사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8시 밖

에 넘지 않았지만 길거리 삼정

들은 거의 다 문을 닫은 상태였

다. 염색약을 찾는 건 쉽지 않았

다. 아무대서나 살 수 있을 거

라 생각한 우리의 예상을 뒤엎

은 것이다. 우리는 결국 지나가

던 인도청년을 붙잡고 초딩 영

어실력으로 염색약을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물었다. 이 청년

은 다행히도 친절하게 우리를

약국까지 데려다 주었다. 약국

에선 염색약이 딱 2개가 남아있

는 상태였다. 다 같이 오늘 밤

원혜진

쌌어

/43

변신하기로 했기에 내일로 미룰 순 없었다. 결국 우리의 대책은 우

리들의 머리카락이 짧으니 2개로 셋이서 쓰자는 것 이었다. 결국 레

드와인색 염색약 2개를 들고 신나게 숙소로 돌아왔다. 염색을 하는

데 염색약을 바르고 1~2시간을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우리 셋은 심

심해서 무엇을 하고 놀까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 때! 현주언니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파우치에서 아이라인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바로 우리가 염색하는 사이 잠들어버린 은경

이의 얼굴에 낙서를 하자는 것 이였다. 나와 소정도 덩달아 자신의

파우치에서 아이라인을 꺼냈다. 그리고 은경이가 잠들어 있는 침대

에 세 마리의 도둑고양이처럼 스멀스멀 올라가 은경이 얼굴 주변에

셋이서 모였다. 어떻게 은경이 얼굴에 그림을 그릴까 고민하다 눈

을 그리고 고양이 수염도 그려줬다. 신이 나게 그리다가 마무리로

은경이 이마에 은경이의 별명인 군쭈라는 글씨를 쓰려는데 이마가

간지러웠는지 손으로 이마를 쓸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은경이가 깨

어 난 줄 알고 깜짝 놀란 우리 셋은 침대에서 재빨리 떨어져 나갔

다. 다행히 은경이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또 다

시 심심해진 우리 셋은 서로의

얼굴에 낙서를 하며 놀자고 제

안했다. 서로의 얼굴에 프링글

스 수염도 그려주고 고양이 수

염도 그려주고 아이라인도 그

려주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빵 터진 우

리. 증명으로 셀카도 남기고 우

리의 완성작 은경이와도 셀카

를 찍었다. 그리곤 우린 염색

한 머리도 감고 아이라인으로

그린 낙서도 지우고 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화장실에

간 은경이의 비명 소리가 우리

의 단 잠을 깨울 때 까지.

했어 /44

2위. 정일용

/45

했어 /46

mp3 2개, 넷북 하나, 이어폰 5개, 카메라 2개, 교정 보조기 2개, 외장하드 1개 그리

고 자잘한 물건들. 이게 제가 여행 중에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린 물건들의 목록입

니다. 엄청 많죠? 저 물건들 모두 제가 조금만 주의 했으면 잃어버리거나 망가뜨

리지 않을 수 있는 물건들 이었죠 . 그래서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리는 상황

을 최소화 하자는 의도에서 이 코너를 만들었습니다. 팁들을 보면 너무 기본적인

것들이라 가볍게 여기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물건들이 그런 기본적인 주

의 사항들을 어겨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린 것이라는 걸 기억하시며 눈여겨 봐주셨

으면 좋겠습니다.

쌌어

/47

때는 중국의 시안! 그날 유난

히도 노래를 돋고 싶었던 율이

는 노래를 들으며 혜진이와 슈

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였

다. 율이의 귀에 들려오던 노랫

소리가 끊김과 동시에 숙소 앞

에 서 있던 숙소 직원 아저씨가

율이와 혜진이의 뒤쪽을 가리

키며 중국어로 뭐라 소리를 질

렀다. 당황한 율이는 엠피쓰리

를 넣었던 주머니를 뒤적이며

엠피쓰리가 사라졌다며 당황

했고, 그런 율이를 바라보고 있

^ ^ ^ ^

야! 내놔! 니가 가져간거 다 알아!

이율 ̂ 원혜진

던 혜진이 역시 당황했다. 숙소

의 직원 아저씨는 여전히 뒤를

가리키며 중국어로 소리를 질

렀고 누군가 엠피쓰리를 가져

갔다는 것을 눈치챈 율이와 혜

진이는 직원 아저씨가 가리키

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수상

해 보이는 검은색 츄리닝의 아

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

주치자 도망가는 아저씨를 보

고 혜진이는 재빨리 뛰어아갔

고 율이 역시 그런 혜진이를 쫓

아갔다. 얼마 뛰지 않았다 한 반

블록 정도 뛰었을까, 수상한 검

은 츄리닝 아저씨가 보였다. 솔

직히는 겁이 났지만 율이와 혜

진이는 검은 츄리닝의 아저씨

앞으로 뛰어갔고 그 아저씨는

가만히 있었다. 왜 저렇게 여유

가 있지? 이 사람이 아닌 건가?

때리면 어떡하지? 여러 생각이

교차하고 있을 때 어슬렁 어슬

렁 경찰 아저씨가 율이와 혜진

이 그리고 수상한 아저씨 쪽으

로 다가왔고 동시에 혜진이가

아저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저씨는 군말 없이 혜진이의 손

에 MP3를 올려놓았다.

TIP. 소매치기를 조심하라! 해외에

나갔을 땐 반드시 MP3같은 전자

기기는 가져가기 어려운 지퍼달린

가방 같은 곳에 보관하자!

했어 /48

웅성거리는 버스터미널..후덥

지근한 날씨 속에서 짜증은 머

리끝까지 솟구치고, 곁에 있는

친구들의 팔만 닿아도 버럭 소

리를 지르게 된다. 아무리 주머

니를 뒤져보아도 있어야 할 물

건은 보이지 않자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기 시작한다.....정말

순식간 이였다. 방금 까지 평범

하게 음악이나 듣고 있었건만

이게 웬일인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마

냥 친구들을 빤히 쳐다 볼 수밖

에 없었다..이른바 잘 챙기고 못

챙기고를 넘어서서 소매치기는

이렇게 당하는 거다~하고 소매

치기의 표본에 내가 당첨 된 것

이었다.

생각해보건 데 재수없게 내가

당첨된 사건의 계기는 이것이

다. 우리는 고아원에 봉사를 가

기 위해 다같이 후줄근한 로컬

버스를 타고 이동 중 이였고, 늘

그랬듯이 핸드폰의 mp3를 들으

면서 즐거워죽을 것 같은 표정

으로 화면을 보며 킬킬댔던 것

이다.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보

고 약 올랐던 걸까? 아니면 핸

드폰이 좋아 보여서였을까?...

종착점이 점점 가까워지자 이

어폰을 곱게 빼서 목에 걸치고,

핸드폰을 앞 가방에 끼워두었

던 게 문제였다. 빵빵 한 볼륨

으로 올려둔 이어폰은 시끄러

운 터미널에서도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노래가

뚝! 끊기는 것이었다.

"뭐지? 배터리가 나갔나?"

눈을 돌려 앞 가방을 쳐다보니

이어폰 연결부위가 허공에서

흔들흔들~흔들흔들~

핸드폰은 어디로 가고 허공에

저 혼자 이리 둥둥 떠있는 것인

가? 가방을 쳐다보던 시선을 돌

려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눈앞

이 깜깜해지고 막막함이 머리를

한대치고 지나간다......(그냥

보지 말걸......) 내 눈에 비추어

지는 모든 사람들이 용의자 같

고, 옆을 지나가는 저 아저씨의

주머니가 의심스럽고 외국인을

신기한눈으로 쳐다보는 저 아

이가 의심스럽고, 내 가방이 무

거워 보였던지 앞자리에 내려

놓게 해주셨던 고마운 할머니

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

이 황당해서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소

매치기라니?" 범인을 찾고자 마

음먹기 무섭게 코로 뜨거운 열

기가 올라온다. 정말 눈 앞이 흐

려질 정도로 날씨가 덥다. 짜증

이 솟구치지만 화낼 기운도 없

었다. 항의를 하고 도와달라고

부탁해 보지만, 베트남 특유의

무신경함으로 대답해준다. '난

몰라.' 그래 잃어버렸지만 혼란

스럽지도 않아. 눈물도 안 나오

고, 혼잣말로 중얼중얼

"듣고 있는데 빼가냐? 와!대

단"

친구들의 다독임 덕분에 정신

이 반쯤 돌아왔을까? 잃어버렸

지만 꿋꿋한 척, 씩 웃음을 지

어 보이고 있는데 그 순간, "야

저 아저씨 이상해.." 라며 누군

가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혜

진이가 가리킨 저 아저씨. 그냥

평범한 아저씨였지만 근거 없

이 의심부터 시작하고 보니 모

든 게 다~ 이상해 보인다!! 예

^ ^ ^ ^

50만원 할부금의 노예?!

김평화

/49

의고 뭐고, 정신 없이 뛰어가서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근데 황

당한 것은 일반적인 반응이 아

닌 "어디 찾아보시지?" 라는 눈

빛으로 주머니들을 하나 둘씩

빼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어

이상하다? 일반적으로 "나는 아

니에요~불쾌해~" 이런 반응이

평범하게 아닌가? 묻자마자 증

명해대는 이 아저씨 뭐야?!! 그

래도 일단 하나씩 빼서 보여주

니까 믿을 수밖에. 그렇게 다 보

여주더니 "거봐~난 아니잖아?"

라는 눈빛으로 씩_웃으면서 지

하철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께

름칙하더니 아뿔싸. 이제서야

바지 뒷주머니의 뽈록(?) 한 게

보인다. 저 주머니에서 보여 준

건 없었는데, 젠장! 다들 모여

서 하나같이 "그 바지주머니?"

라며 열 분을 토해내 봤자. 어

쨌던 우리는 범인을 다 잡아놓

고도 놓친 것 이였다.

며칠 후, 잠자다가 벌떡 일어

났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는 핸드폰요금고지서. 이제서

야 생각나는 소매치기 당한 핸

드폰의 남은 할부금이 있다 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우아아악!

내 생애 첫 스마트 폰 이라고

싸게 잘 샀다고 좋아라 했던 스

마트 폰 이 이제는 50만원이라

는 할부금을 나한테 남기고 떠

나간 것이다..잃어 버렸을 때도

맘 다잡고 평정 심을 유지했었

건만..괜히 잠자다가 생각난 할

부금은 평정 심은 뒤로한 채 눈

물을 떨구게 하는구나. 다시 찾

아가서 바지뒷주머니에서 끄집

어 낼 수도 없는 핸드폰이 내 발

목을 잡아채니 통장보기가 실

로 괴롭다.

훗날 베트남에서 잃어버린 핸

드폰만 생각하면 잠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기도하고, 남아있는 전자기

기들이 안전한가 살펴보곤 한

다. 불 끄고 잠 다가 벌떡 일어

나서 전자기기체크하고 앉아있

는 내 모습을 본 룸메 들은 내

가 뭐 대단한걸 하는 줄 알았겠

지? 아니야 또 잃어버리면 x팔

리잖아.

TIP. 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 짤막한

한마디를 남겨보자면, 고가의 전자기

기는 본인이 잘 간수하고 못하고를 떠

나서 1순위 소매치기 대상이다! 게다

가 여행 중간중간 넷 북의 고장이 잦았

는데, 고치는 것도 참 막막한 일이다.

충전기가 인도의 좋지 않은 전기사정

으로 몇 번 폭발을 하더니 나중에는 결

국 녹아 내리고 말았다. 지금도 내가

컴퓨터를 쓸 수 있는 이유는 동일 회

사의 제품을 사용하는 친구의 넷 북 이

고장 나서 충전기를 빌려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섬뜩하지만 둘 다 인도

에서 고장 났다.

요즘 우리들은 손으로 일기나 여행

수기를 쓰면 얼마나 귀찮고 안 써지는

지 안다. 컴퓨터로 워드 치는 게 훨씬

편하다 는걸 알기에 챙겨서 여행을 떠

나면 편하긴 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잃어버리거나, 고장 나면 피

눈물 난다.

했어 /50

이제 9개월의 대장정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스마트 폰 을 굳

이 여동생에게 빌려 주지 못하

고 온 게 후회라면 후회일까.?

물론 스마트 폰 이 있으면 좋다.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앱 은 수두룩

하니까. 자꾸 편함을 추구 했다

면 절대 빼놓을 수 없었을 테지

만, 여행을 떠나와서 두근거리

고 즐거운 마음에 찬물을 끼 얹

는 건 다름아닌 핸드폰 이였다.

예를 들어 장거리 잔소리를 들

어야 한다거나 맨날 듣던 친구

의 한풀이를 듣고 있어야 한다

거나 나랑 별 상관도 없는 한국

의 경제, 사회, 연애 뉴스를 벗

어날 수 없다거나 잃어버리고

한참 동안은 불안함에 어쩔 줄

몰랐었다. 일단 심심하고 소식

지가 꽉 막힌 상태가 되니까. 괜

히 한국에서 잘 지낼 먼~칠 팔

촌언니를 걱정한다거나, 한국

경제상황을 몰라서 짜증내곤

했었다. 허나 잃어버린 것을 계

기로 스마트한 세상을 벗어나

손으로 편지를 쓰고, 현지국제

전화부스를 찾아내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급한 마음으로 "엄

마 요금 비싸~~얼른얼른 아빠

도 바꿔줘!!" 하며 발을 동동 굴

리는 재미를 느끼고 나선 생각

이 좀 달라졌다. 옛 사람들이 구

작다리 방식으로 생활을 못 하

던 게 아니었던 거다. 아마 불

편 한 줄도 모르고 살다가 새로

운 것이 발명되고 사용하면서

불편이라는 단어도 생겨났을지

도 모른다. 중요한 건 다들 예전

에는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수

많은 제 3세계들은 신제품의 폰

하고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변

한 나도 한국에 돌아가면 수많

은 유혹들이 눈앞에 번들거려

서 넘어 갈 테지만, 지금 당장

은 이 올드한 방식으로 사랑하

는 사람들과 소통할 예정이다.

쉽게 카 톡으로 전할 수 있는 것

들도 손으로 쪽지를 전하는 지

금이 불편하긴 하다. 다만 불편

하다! 만 외치면서 있는 것에 감

사하지 못한다면 진정 편리함

이 눈 앞에 보여도 이용할 줄 모

르는 바보가 될 것이다.

No1. 모두들 소매치기 조심! 일

단 훔친 놈 보단 잃어 버린 놈이

바보래요..

/51

그날은 베트남의 하노이라는

지역에서 호치민이라는 지역으

로 침대 버스를 타고 72시간이

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이동

한 날 이였다. 초반엔 잘만 가

던 150도(150도까지 내려가는

의자) AC 침대 버스가 고장이

나서 버스를 갈아타려 짐을 모

두 내리는 과정에 내 가방 커버

가 사라졌다!!!

"헐! 짜잉나. 뭐 어쩔 수 없지"

라는 생각을 하며 두 번째 버

스를 기다렸다. (하루를 노숙

함) 두 번째 버스가 오고 짐은

남자들+현호 쌤이 옮긴다며 먼

^ ^ ^ ^

인사도 못하고 떠나간 나의 영혼

이 율

저 버스에 타라 그러 길래 나는

할 수 없이(?) 버스를 탔다. 한

10분 후 부릉부릉 버스는 출발

하고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달

려 호치민에 도착했다. 하나 둘

사람들이 내리고(호치민이 종

착지임) 마지막으로 인디고가

내렸다. 우리는 우리들의 엄청

난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하나

아 두우울~ 세에엣~ ...... 어

랍쇼? 내 큰 배낭이 보이질 않

는다! "자... 잠깐 그럴 리가 없

죠~구... 구치?" 당황해서 버스

짐칸을 휙휙 둘러 봐도 깨끗한

버스 짐칸은 나의 배낭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마 나와 똑같은

배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

신의 배낭이라 착각하고 내 배

낭을 내린 것 같다. ....... 눈물

나 .......... 나는 이렇게 허무하

게 내 알맹이 같은 배낭을 잃었

다. 나는 진짜 나밖에 안 남은

것이다!!! 끄아앍~~~~~!!

TIP. 장시간 버스를 타고 이동 할

땐 큰 배낭에 체인을 채워 놓는 것

이 좋으며, 가능하면 배낭 커버를

씌우자 그래야 ‘내 가방’이라는

표시를 하는 것이다.

했어 /52

고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평

화를 픽업하고 태현이와 작별

인사를 하기위해 뱅갈로르로

가야했었다. 급하게 일정을 변

경 하느라 (원래는 평화와 태현

이가 고아로 올라 오리고 했었

으나 태현이가 귀국하기로 결

정한 바람에 벵갈로르 행이 결

정되었다.) 기차표를 구하지 못

해서 sleeper 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고, 버스를 탄 후 난 여느

때처럼 누워서 영화를 보며 뒹

굴고 있었다. 그러다 자세를 바

꾸려 넷북을 들고 일어나던 중

"빠직"하는 느낌이 엄지손가락

으로 전해져오고, 화면의 3분

의 1이 무지개 색으로 변했다.

가슴이 철렁 했다. 6개월쯤이

지나는 동안 아무 문제도 없었

기에 전원을 컸다 켜보면 괜찮

아 지겠지하며 다시 켜보았더

니 그대로였다. 액정이 깨진 것

이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

으로 우리의 행선지는 인도에

서 가장 세련된 도시이며 IT산

업으로도 유명한 뱅갈로르였

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의 목적

지이며 뱅갈로르의 메인로드인

M.G(Mahatma Ghandi) Road에

도착하고, 자유시간이 주어졌

을 때는 불안해하며 컴퓨터 수

리점만 찾아 다녔다. 다행히 hp

A/S 센터에서 내 넷북 액정과

같은 사이즈의 액정이 있어 액

정을 교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 든 돈은 자그마치 4900루

피, 거의 13만원에 육박하는 돈

이었다.(요즘 넷북 중고로 사면

그 정도에 산다는데) 이렇게 해

서 넷북과 무사히 그리고 사이

좋게 여행을 마무리 했으면 좋

았겠으나, 이 이야기 역시 여기

서 끝이 아니다. 보름쯤 지났을

까 자이푸르에서 넷북을 켜던

중 잠깐 새하얀 화면이 지나쳐

갔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 다

음부터는 정상적으로 작동해 별

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조드푸

르 에서는 아예 새하얀 화면으

로 일관, 그리고 더 이상 바뀌지

않았다. 그 이후 자이살메르에

서 다시 켜지기는 했으나 그 이

후로는 다시 전혀 켜지지 않았

다. 그러나 나에게도 일말의 희

망이 있었으니 인도의 최대도

시 이며 수도인 델리가 일정상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델리 갈

때 까지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

려(넷북 때문만이 아니라 교정

기도 델리에서 받기로 되어 있

었기 때문이다.) 델리에 도착하

고 시간 날 때 마다 수소문해 네

루플레이스라는 컴퓨터 수리상

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후 맥그로드간즈로 가는 버스

표를 예매하러 나가는 길에 네

루플레이스를 들렀다. 네루 플

레이스는 컴퓨터 상가, 컴퓨터

수리 점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중 아무데나 들어가 수리를 맡

겼다. 2시간에 걸친 분해, 진단,

그러나 결국 수리공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부품이 없어 여기서

는 수리가 불가능하네요."였다.

충격! '넷북 관리 조금만 더 잘

^ ^ ^ ^

좌충우돌 넷북

정일용

/53

할 걸' 넷북 액정 고치는데 얼마

나 들었는데 하는 후회들, 넷북

안의 음악들은 어떡하지, 한국

에서 고칠 수는 있을까 하는 생

각들 별별 생각이 그 짧은 순간

동안 머릿속을 거쳐 갔다. 그러

나 결국 나온 결론은 한국 가서

고쳐봐야 된다는 것 답은 여행

동안은 넷북을 쓰지 못한다는

것 정도? 그리고 고장의 원인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잘 못

관리해서 그런 것이니 더욱 더

짜증나고 화가 났다. 정말 아쉽

고 기분이 안 좋았지만 어쩔 수

없지. 다음부턴 잘 관리해야지

하며 날 위로 해 주었다.

TIP. 전자기기는 소중히 다뤄야 합

니다. 그리고 노트북의 액정을 잡

고 드는 일은 절대 하지 마시고요(

액정 교체 비용은 진짜 많이 나갑

니다.) 그리고 항상 전자기기는 충

격을 가장 덜 받는 곳에 보관하세

요. 케이스가 있으면 넣어서 보관

하시면 더욱 좋고요.

했어 /54

베트남은 15일 무료비자로 입국

한 해서 하루하루 일정이 빡빡

하다. 도착하자마자 한국-베트

남 협력 센터에서 봉사를 하고

이제는 '아맙'이라는 사회적 기

업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호치

민으로 이동한다. 교통편은 버

스인데, 에어컨이 나오고 누워

서 갈수 있는 침대버스다. 하지

만 총 이동 시간은 50시간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우리는 앞으

로 무슨 일이 닥칠지도 모른 채

버스에 올라선다. 호치민은 그

나마 덥지 않다는 말에 인디고

들은 들떠서 호치민으로 향하

고 있었다. 이곳 하노이는 정말

찜통 속에 있는 듯 후덥지근한

날씨였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

고 가는데 늦은 밤, 버스가 도로

한 가운데에 멈추어 섰다. 버스

가 고장 났다고 한다. 큰일이었

지만 '금방 고쳐지겠지' 라고 안

심하고 있었는데 1시간. 2시간

이 지나도 버스는 고쳐지지 않

았다. 그러던 중 새벽이 지나 아

침이 밝아오니 버스 안이 너무

더워서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

었다. 버스안과 마찬가지로 밖

에서도 해가 떨어질 때까지 더

위와 싸우며 지쳐가고 있었다.

우리는 근처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안에서 해가 넘어가기를

기다리며 쉬고 있었는데 버스

를 같이 탔던 외국인들은 슬

슬 화가 나기 시작한 것 같다.

솔직히 나도 날씨만 아니었어

도 짜증이 솟구치진 않았을 텐

데... 계속 기다리다 보니까 저

녁이 되었다. 버스회사에서 미

안한지 버스 앞, 가게에서 음료

를 내다 주었다. 한참을 수리하

고도 버스가 고쳐지지 않으니

까 다른 버스를 불렀다며 미안

해했다. 밤이 깊어져 버스 앞 가

게도 문을 닫아 버렸다. 우리도

지칠 만큼 지치고 날씨 탓에 땀

도 많이 흘려서 찝찝하던 상태

에 근처 호텔에 방 하나를 잡아

인디고 모두가 간단하게 씻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인디

고들이 다 씻고 나왔는데도 버

스는 오질 않았다. 지루하고 습

한 날씨를 늦은 밤 까지 참으며

^ ^ ^ ^

베트남 72시간 버스

한명수

기다리니 드디어 버스가 왔다.

그 때 모두가 말할 것 없이 기

뻐하며 버스에 탔다. 그날 버스

가 고장 나서 기다린 시간이 약

24시간 정도 되었다. 큰 소원도

아니고 나는 그저 버스를 타고

쭉 호치민까지 가길 바랐는데,

설마 했던 데로..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타려고 하는데 이곳이 종착역

이라며 딴 버스로 갈아타라고

한다. 헉! 호치민도 아닌데 아

무데나 종착역이라고 우기면서

갈아타라니.. 너무 힘든 나머지

선생님도 몇마디 하시더니 포

기하시고 짐을 내리는데 하나,

둘, 셋, 넷 ..... 한 개가 모자란

것이다. 헉... 율이 배낭이 없어

졌다. 아무리 찾아도 율이 가방

이 없다. 아마 같이 탔던 외국

인이 자기 가방인 줄 알고 가져

간 것 같다. 그래도 율이는 씩씩

한 표정으로 참아냈다. 대견해

보였다. 율이는 결국 배낭을 찾

지 한채 버스를 갈아타고 호치

민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오후, 드디어 호치민에 도착했

다. 정말 다시하기 싫은 72시간

버스여행이 마무리 되었다. 그

렇지만 우리 인디고는 다신 해

보지 못할 새로운 경험을 했기

에 힘들어도 행복했다. 인디고

정말 대견하다!! 화이팅!!

/55

인도에 우리나라의 구정과 같

은 디왈리는 양력으로 10~11월

에 해당한다. 그 기간에 인도에

서는 고향으로 갔다가 돌아오

려는 사람들의 대 이동이 이어

지는데 마침 그 시즌에 우리의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세바그람에서 자이푸르

로 직행하는 기차표는 전혀 구

할 수 없었고 직행버스도 없어

결국 차선책으로 세바그람에서

낙푸르로 버스로 이동 한 다음,

낙푸르에서 인도르로 버스로

이동한 후 인도르에서 자이푸

르로 이동하는 다소 복잡한 일

정을 선택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정을 진행해야 했던 나였

기에 온 신경이 버스에 쏠려 있

었고, 그래서 한 발 늦게 낙푸

르에서 인도르로 이동하는 버

스가 출발한지 한 3시간 쯤 됐

을 때야 알아챘다. 교정이가 사

라졌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쌤

들께 말씀 드렸더니 잘 찾아 보

라는 말씀. 그러나 버스 안을 아

무리 뒤져 보아도 나오지 않았

고, 버스를 타기 전에 있었던 여

^ ^ ^ ^

빌어벅을 교정기

정일용

행사에도 전화 해 보았으나 역

시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돌

아왔다. 교정기를 끼지 않고 있

으면 교정했던 것들이 모두 처

음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꼭 찾

거나 받아야 했다. 찾을 확률은

거의 없을 거라 판단, 다음날 바

로 한국에 전화해 요청을 하였

고, 인도 우편은 믿을 수 없어

델리의 여행자 거리 빠하르간

지로 들어오시는 한국 여행자

분께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

인도 방랑기에 맡겨 놓고 가시

라는 부탁을 하기로 했다. 문지

혜 선생님과 나의 부모님이 고

생하셔서 인도 방랑기에서 안

전하게 받는데 성공했다. 조금

만 더 신경 쓰면 끝까지 그 교정

기를 끼고 다닐 수 있었지만 나

는 그러지 못했다. 그 것도 이

동도 하지 않는 바라나시 20일

일정에서 또 잃어버린 것이다.

그 때는 모두에게 너무 미안해

서 알리지 말까하는 생각도 했

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여행 기

간으로 보아 교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될 것 같았기 때

문에 결국 말했다. 그로부터 10

일 쯤 후 한국에서 또 고생하셔

서 카트만두에서 소포로 잘 받

긴 했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

였으면 여러 사람이 고생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하며 후회했

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나의

교정기 공수(?)를 위해 고생하

신 문지혜 선생님, 사랑하는 나

의 부모님, 인디고 여행학교 선

생님 두 분, 인도 방랑기 사장

님, 델리로 교정기를 가지고 오

셨던 이름 모를 여행자, 카트만

두 우체국에서 교정기를 찾아

와 주셨던 조 선교사님 그리고

여기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나

의 교정기 때문에 고생하신 모

든 분들께 감사와 함께 죄송하

다고 전하고 싶다.

TIP. 주머니나 손에는 많은 물건을

보관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

히 이동할 때는 주머니나 손에 물

건을 두지 마세요. 배낭의 수도 가

능하면 적은 것이 좋고요.

했어 /56

인디고의 모습을 통해

안녕하세요. 중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김홍명교장입니다.

인디고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방문한지 벌써 9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네요.

많이 궁금하고 많이 보고싶은데 이렇게라도 함께할 수 있다니 저로선 영광입니다.

저희 학교는 매 해 많으면 15례, 적으면 4~5차레 정도 학교나 단체들이 방문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턴가 이 곳으로 오는 학교나 단체들을 보면

아무런 감흥이 없고 오면 온다, 가면 간다는 정도의 느낌만 들뿐이었습니다.

인디고 학교도 마찬가지였구요.

하지만 한편으론 긴 여정동안을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배우며,

알아간다는 슬로건에 저도 모르게 기대를 하고 설렘을 가지고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신기했어

/57

그리고 만나게 되었습니다.

9개월이라는 기나긴 여행 가운데 첫 여행지인 저희 학교에 도착했을 때의 여러분의 모습은

마치 신기한 것을 보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보였고,

긴장하는 모습과 당당한 모습들이 교차하였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실해 보이던지

마치 제가 처음 이 곳 중국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가 기억이 나더라구요.

저는 중국을 한국과 수교가 이뤄지기 전 해에 들어왔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을 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스러웠죠.

하지만 오랜 시간 중국을 공부하고 간절함이 있었기에 그 누구도 저를 막진 못했죠.

만약 그 때 저에게 아무런 꿈도 없고 간절과 설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여행이었습니다.

인디고 학생들을 처음 본 제 감정은 마치 제가 그 때 여행을 하던 제 모습이 보여

잠시 잠깐이지만 꿈과 열정으로 무장했던 젊은 제 시절을 보는 것 같아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전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한 달여 시간 동안을 중국에 대해서 공부하고,

저희 학교의 오랜 전통인 땀 흘려 일하는 자의 값진 모습을 배우는 노동을 함께하고,

밥 한톨의 철학을 배우며 우리보다 못 먹고 못 사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오늘 우리에게 양식을 주신 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구호를 외치고 먹었던 식사시간...

어려움 가운데서도 자신의 꿈을 가지고

3일 밤낮으로 기차를 타고 온 우리학교 학생들과의 만남과 교제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당당히 체험했던 여러분들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젊기에 자신의 혈기를 절제하지 못했던 친구,

몸이 아파 갑작스레 작은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서 치료받았던 친구,

축구하며 여기서 사역하는 선생님의 눈을 공으로 차서 병원에 입원시켰던 친구,

그리고 이번 여행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도전하겠노라고 꿈과 계획을 말하던 친구 등

전 다양한 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10여 년전 이 곳 중국학생들을 가르치겠노라고

첫 발을 내딛었던 제 초심의 마음들을 확인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보다 더 많은 나라와 깨달을 얻은 그들과 다시 함께 만나

그 동안의 여정과 가르침, 그리고 그들의 마음 등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서로를 기억하며 끝까지 기도해 줄 수 있는 동역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 기회가 저에게 다시 올 수 있을까요?

다시 한 번 기다려보게 됩니다.

했어 /58

사랑하는 인디고 학생들..

혹 제가 첫시간에 강의 했던 여행에 관한 내용이 기억나나요?

우린 여행을 혹 '관광'이라고도 합니다.

'볼 관', 빛 광' 관광....

바로 진정한 여행은 그저 새로운 것을 보고 먹고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그 나라를 사랑했던 근본적인 힘,

그리고 우리가 그 나라를 갈 수 있게끔 우리를 끌어들이는 매력과 전통 등

바로 그 나라의 고유한 빛을 보는 것이 바로 진정한 여행이라는 내용 말이죠.

아마 여러분들이 9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저의 작은 가르침을 잊지않고 여행했다면

아마 여러분들은 그 빛을 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여러분들이 세상의 나라를 단순히 보고 돌아다니는 것에 그치는 여행이 아닌,

진정한 자아를 깨닫고 자신을 발견하고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진정한 여행인 위대한 여행을 도전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비추고 이 나라를 비추고,

더 나아가 모든 세계를 비칠 수 있는 바로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때 우리 다시 만나 서로를 이야기하고 함께 나눴음 합니다.

그리고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늘 여러분들을 기억하고 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중국 단동에서 김교장이

/59

예수님은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기적을 행하셨다.

작고 소박한 그것들로 기적을 만들어 내실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은 여느 종교지도자나 신보다도 독보적이다.

나는 우리의 여행을 기적이라 생각한다.

서로 전혀 다른 청소년들이 만나서 1년을 여행하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의문이 들었고, 시작하기도 전에 좌초될 뻔 했지만,

우린 떠났고, 이제는 돌아왔다.

청소년계의 독보적인 길을 개척한 것이다.

첫 번째 기적은 중국에서 일어났다.

생전 처음 손빨래를 해야 하고,

생판 모르는 언니, 오빠 친구들과 먹고자고싸고(?) 를 같이 해야 하다니..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왔으나

무거운 짐을 안고 여행은 시작되었다.

했어 /60

작지만 강한 묘족 친구들 한명수

만났어

/61

우리는 중국의 쿤밍이라는 도시에서 4시간 정도 떨어진 곳

에 위치한 중국의 소수민족, 묘족의 마을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디고는 태현이 형과 태현아버지를 만났

다. 태현이 형은 그때의 인연으로 인디고 학생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첫 만남 때는 태현이 형은 우리 인디고6기 학

생이 아닌 가이드 역할 이였다. 우리들은 호도협이라는 유명한

산을 걷고, 리장 이란 도시에 며칠 묵었다가 묘족사람들이 사는 곳으

로 가게 되었다. 경운기를 타고 올라가는데 심하게 덜컹 거려서 엉덩이가 무지 아팠다. 그렇게 경

운기를 타고 1시간이나 걸려 묘족학교에 도착했다. 묘족학교에 와서 묘족 친구들 과 인디고 자기

소개를 하고 묘족에 대해 설명을 들을수 있었다.

묘족은 수많은 중국 내의 소수민족 중에서도 세력이 약하고 사람들도 착하다. 그들은 여러 전

쟁 겪으면서 중국 정부와 한족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핍박이 심해질 수 록 높은

산으로 마을을 이주하면서 이 꼭대기까지 올라 왔다고 한다.

그렇게 첫 인사와 설명이 끝난 후 묘족 학교를 구경하러 갔다. 묘족 학교 근처에 저수지가 있는

데 그곳에서 빨래를 한다고 했다. 물이 오염된 것처럼 더러웠다. 학교 안에는 교회도 있었는데 그

안에서 묘족사람들과 인디고 6기와 태현이 형, 태현 아버지와 다 같이 기도도 하고 노래를 불렀

다. 태현형의 아버지는 이곳 묘족의 선교사로 활동하신지 5년 정도 되셨다고 한다. 선교사님께

서 묘족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한국노래 알려주어서 묘족 친구들이 한국 노래를 불러주었고, 인디

고와 묘족 친구 몇 몇이 장기자랑도 하면서 즐겁게 끝났다. 그리고 다음 날 묘족 친구들과 처음

이자 마지막으로 같이 일을 했다. 삽질도 하고 통나무 옮기기, 짐 옮기기를 분담해서 하니까 힘

들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심히 할수 있었다. 다른 애들하고도 일을

하면서 같이 게임도 하고 재밌었다. 하지만 마지막 날 떠나려고 하

니까 뭔가가 아쉬웠다. '좀 더 친하게 지낼걸...'이라는 생각도 들

고 미안하다. 묘족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고 다시금

끔찍한 경운기를 타고 고생하면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많

은 아쉬움이 남았다.

했어 /62

임진년 새해가 힘차게 밝았습니다.

오늘은 1월의 스산한 날씨에 오늘은 햇살이 찬란하게 온땅을 두루 비치고

길가의 가로수엔 벚꽃들이 화사하게 꽃망울을을 일제히 터뜨리기 까지하니 마음까지 포근합니다.

겨울 날씨에 무슨 벚꽃이야기냐고요. 곤명은 일명 이곳 말로 춘청, 봄의 도시라고 합니다.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업 되었다만,

우리 생명누리 여행학교 6기 인디고학생들이 십수개월의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귀국하는 소식이 더 기쁜 소식이 아닐까합니다.

어린 학생들이 서로가 격려하며 용기를 내어 앞만보고 정진하여

오늘과 같은 결과를 이루었으니 참으로 대단한 일들을 해낸 여러분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인디고와는 작년 5월에 중국 운남성 곤명에서 만남을 가지고 가이드를 하였고요.

그것이 인연이되어서 아들 태현이를 여러분과 여행을 동참시키게 되었습니다.

당시 인디고 학생들에 대한 느낌은 뭔가를 찾기위해서 나선 전사들 같아보였습니다.

찾긴 찾아야하는데 갈길은 먼데 가긴 가야하는데 찾을 수없고, 보이지않는 그런 상태.

한명수, 이율, 박한진, 방소정, 조은경, 원혜진. 이은민, 박한결, 정일용, 이슬비, 김평화

이곳에서 동행하게 된 김태현 그리고 김선숙, 신현호 두분 선생님. 나중에 참가한 두 학생.

불과 며칠 정도의 만남이었지만 그동안에도 성장하고 변화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십개월간의 긴 여행기간, 기간도 기간이지만

과연 아직은 미숙한 어린 학생들이과연 견뎌 낼 수는 있을 까하는 의문이 있었고요.

대장정의 여행기간 동안에 닥칠 수많은 슬픔과 고통, 외로움과 괴로움 등의 우여곡절이

여러분의 여행과 함께 하였던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인내함으로써 극복하고 순종하며 승리한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

태현이가 여러분과 같이 여행을 하던 중,

인도에서 몸이 안좋아져서 좀 일찍 한국에 돌아오게 되어었지만,

중국에서 저와 같이 생활하는 태현이에게는

한달간의 생명누리에서 생활하면서 배운 한국의 생활도 여행지와 별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신기했어 쿤밍에서 보내는 글

/63

태현이와 6개월만에 만나게 되었는데,

그동안 키도 훌쩍 컸고, 지켜보니 말하는 것이나 생각등이 많이 성장한 것을 보게 되었답니다.

걱정했던 건강도 좋아져서 오히려 볼에 살도 통통하게 올랐구요.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이만한 좋은 경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여행이란 이렇게 참 좋은 것이구나,

대견한 아들의 성장에 마음이 든든하고 자랑스럽기 까지한 부모의 심정이 되어었답니다.

여러분께 받아 누린 사랑을 세상을 향하여 되돌리 수있는 삶이 되도록 태현이를 교육하겠습니다.

불과 몇개월간의 기간이지만 많은 성장과 변화를 이루게 한 여행을 통해서,

태현이보다 몇개월은 더 고생을 하며 더 맣은 것을 익히고 배운 여러분은 더 말할 것도 없겠네요.

학부모님들께서도 오랫만에 만나는 여러분의 자녀가 한없이 자랑스러우실 것이니,

같이 기뻐하며 축하드리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곳 곤명에서 헤어질 때 드린 말씀이 기억 납니다.

사랑받기 보단 남을 사랑하고 자기를 위한 삶보단 남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이 아름답다고...

생명누리와 권술용 정호진 대표님과 식구들, 그리고 6기 인디고 학부모님, 김선생님 신선생님께

김태현군을 금번 인디고 여행학교에 동참시켜주신 배려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6기 인디고 여행학교의 학생들이 보여준 넉넉한 마음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손정원 선생님, 지준구 선생님 감사합니다.

수고하신 손길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함께 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여러분께 다시 한번 머리숙여 깊이 감사를 표합니다.

인디고 여러분의 삶은 이번 여행으로 인해서 좋은 변화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을 확신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여러분이 원하는 바를 맘껏 펼치며 이루어 나가시기를 바라며,

그러한 여러분의 삶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저와 태현이가 사는 이곳에 한번 놀러오세요.

기후도 좋고 볼 것도 많은 곳이랍니다. 오시면 잘 모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새해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는 인디고와 여러분의 새로운 삶을 두손모아 축복합니다.

자랑스런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쿤밍에서 태현이 아버지가

했어 /64

왜 베트남이 기억 속에 각인되었는가?

이유를 굳이 묻는다면 찜통더위 일 것이다.

푸르른 금수강산에 둘러싸여진 한국이 얼마나 그리웠냐고 묻는다면,

"내가 흘린 땀만큼 이요." 라고 서슴없이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베트남 쌀국수 한 그릇과 시원한 베트남 커피한잔을 하러

지금 당장 베트남으로 날아가고 싶다.

잊지 못할 최고의 나라이자, 최고의 쌀국수였다..

처음 우리를 맞이한 것은 베트남 사람들의 당당함과 뻔뻔함(?) 이였다.

이긴자의 자신감이랄까.

머리 하나 이상 차이나는 서양인들에게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뻔뻔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베트남 여성 박물관에서 알게 된 여성존중 문화,

월남전 증거 박물관이 전시하는 진실을 대하는 태도,

한국-베트남 협력단체의 장애인 자활센터와 청소년 합창단,

공정무역기업 아맙의 공정하고 재밌는 베트남 문화자원개발.

이걸 모든 걸 보고 느끼고 돌아왔다는데 믿기어 지지가 않는다고?

자, 이제 소개합니다.

신 짜오! (안녕하세요)

/65

만났어

했어 /66

/67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과 함께 첫 도보

여행을 했을 때 산속에서 두 갈래 길이 나오면 선

두로 걷고 있던 누군가는 꼭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 어디로 가야 해요?"

그러나 선생님은 절대 답을 주시지 않았다. 그

리곤 그 선두의 학생은 잠시 고민을 한 뒤,

"이쪽으로 가는 거죠?"라고 되물었고, 그제서야

선생님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긍정의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게 우리가 여행 중에 길을 찾아가

는 가장 단순하고도 유일한 방법이었다. 선생님

은 우리가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고, 각

자 스스로 그 길을 찾아 갈 수 있기를 바라셨다.

두 갈래의 길최유리 간사 (베트남 한-베협력센터 지구촌나눔운동)

e-mail : [email protected]

Blog : http://pane9.egloos.com

* * *

2011년 6월, 13명의 용감한 인디고 청소년 여행

학교 친구들이 베트남에 도착했다. 인디고 친구

들과의 첫만남은 어느 이른 일요일 새벽 하노이

기차역 앞에서였다. 이미 중국에서 베트남 라오

까이 국경으로 넘어와 하노이까지 오랜 시간을

기차에서 보낸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비몽

사몽 기차 역 앞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어디

가 배낭이고 어디가 사람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

로 바닥에 퍼져버린 친구들을 본 베트남 쎄옴(오

토바이 택시) 기사 아저씨들도 재미있는 구경이

라도 난 듯 웅성웅성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들려온 "안녕하세요!!" 우렁찬 친구들의 인사 소

신기했어

했어 /68

리에는 절대 지치지 않는 힘이 느껴졌다.

하노이 시내의 저렴한 도미토리에 숙소를 잡았

다. 이층 침대 가득 붙어있는 한 방에 몰아서 자

는 게 불편하기도 하겠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이

미 자기 침대들을 하나씩 찜 해놓느라 부산스럽

다. 이 친구들, 누구 못지않게 참 적응이 빠르다.

베트남쌀국수와 분짜 등 하노이 음식들을 알아서

도 잘 찾아 먹고는 와서 하는 말이

"쌤, 베트남 음식이 너무 담백하고 좋아요!!"

오랫동안 중국 음식만 먹어온 탓인지, 기름진

베트남 음식에 가끔씩은 질리기도 하는 나로써

는 베트남 음식이 담백하다는 이 친구들 말이 재

미있기만 하다. 인디고 친구들 역시 중국여행에

서 열심히 고행을 즐겼기에 이제 베트남 여행쯤

은 껌이 된 셈이다. 1200원짜리 쌀국수 한 그릇

에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하는 친구들

의 얼굴을 보니 앞으로 이 친구들의 여행이 더 기

대가 되었다.

나의 첫 해외 배낭여행지는 인도였다. 인도 여

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나는 잠시 태

국을 들렀었는데, 그곳이 나에게는 마치 천국과

도 같게 느껴졌다. 그렇게 태국에서의 매일을 만

족을 넘어 심지어 황홀해하며 보내고 있는데, 어

느 날 같은 도미토리의 옆 침대에 유럽 여행을 마

치고 돌아온 친구가 들어오더니 불평을 하기 시

작했다. 태국같이 더럽고, 시끄럽고, 사기꾼 많

고, 먹을 것 없는 나라는 처음이라며 말이다. 태

국이 정말 깨끗하고, 조용하고, 사기꾼 없고, 먹

을 것 천지인 나라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 친구의

불평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상

대적이다.

인디고 친구들은 하노이에서 국제개발NGO인

지구촌나눔운동의 두 센터인 '한-베협력센터'와

'한-베장애인재활센터'를 방문하여 활동하는 시

간을 보냈다. 로컬 버스를 갈아타기를 여러 번,

'한-베협력센터'가 있는 '빙다 마을'까지 도착했

고, 마중 나온 경운기와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내리 쬐는 태양 아래서 고작 1km의 거리를 가는

데 10분이나 걸리는 느려터진 경운기를 타는 게

고역일 법도 한데, 어마어마한 중국 경운기 탑승

의 경험을 얘기하느라 결국 또 이 정도는 아무것

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 얘들아, 중국에서 고생

하고 오길 잘했구나. 센터 식당에서 베트남식 식

사를 했다. 손 큰 '짹' 아주머니가 엄청 넉넉히 준

비해 주신 식사는 역시나 금새 동이 났고, 베트

남 향신료에 한 두 명쯤은 질릴 법도 한데 맛있

다고 싹싹 비운 친구들의 식성에 주방 아주머니

들도 웃기 바빴다. 이는 '한-베협력센터' 기록에

남을 식사다.

'한-베협력센터'를 찾은 인디고 친구들은 농촌

마을 중, 고등학교 여학생들로 이루어진 '탕와이

현 청소년 합창단' 친구들과 함께 문화교류도 하

고, 이틀간의 합창 특훈을 통해 때마침 열렸던 '

한-베노래자랑'무대에 함께 오르기도 하였다. 합

창 무대에는 기타와 플룻 연주도 함께 더해져서

그간 무거운 기타와 플룻을 들고 다녔던 노력이

빛을 발했다. 무대는 한국과 베트남 친구들의 합

창을 통한 화합이 장이었지만, 사실 객석의 많은

관객들이 끝까지 일부 인디고 친구들을 한국 사

람이 아닌 베트남 사람으로 생각했다. 가까워지

면 닮는다고 하지 않는 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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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여행 길 위에선, 매 순간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다. 하루는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어서, 언제 일어날

지,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잠을 잘지, 그리고 또 다시 어디로 떠날지 등 모든

것들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게 설사 조금 삐뚤어진 방향일지는 몰라도 어쨌든 결정을 해야만

한다. 결정하지 않으면 어디로든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도 스스로 책

임져야 한다.

여행에서 마주했던 수 많은 두 갈래의 길과, 그 길 위에서 배운 선택과 책임을 통해 우리 친구들은 이

미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성장을 했다. 그리고 끝나지 않은 '선택의 여행'은 그들 각자의 삶

에서도 계속 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여러분은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

인디고 친구들, 새로운 여행 길에 오른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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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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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0일. 태국으로 들어왔다. 이 어색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도로가 깔끔하게 포장되어있

고, 세븐일레븐 편의점이 눈에 띌 때마다 흠칫, 놀랜다. 잘 모르는 태국이지만, 동남아의 국가 중 에서

는 그나마 경제나 사회기반이 안정궤도로 들어선 모습이다. 동남아시아를 베트남을 통해 들어 왔었을

땐 정말 끔직한 찜통 같은 더위가 기승을 부렸었는데, 막 건너온 태국은 왠지 모를 설렘 덕분에 날씨가

산뜻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아직 방심은 금물. 더위가 언제 기승을 부릴지 모를 일이니 일단 지켜보고

느껴 보는 수밖에~ 그런데 오늘은 정말 멀미가 심하게 올라온다. 국경버스를 타고 넘어올 때 멀미를 참

고 참다가 결국 구토를 해버리고 말았는데... 지나가는 생각으론, 그저 내 몸 어딘가가 아플 때는 어디

구석에 죽은 듯이 삼일 밤낮을 아프고 싶다. 설사, 멀미, 몸살 요 세가지가 정말 끈질기게 여행 내 동 나

를 쫓아 다니는 것만 같다. 봉고차로 대 여섯 시간을 달려, 오후 늦게 시사아속 공동체에 도착했다. 도

착하니 비가 제법 내리고 있어서 당황했는데, 시사아속 선생님께서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계신 것이다.

환영을 받으며 숙소로 걸어가는 길은 마치 예술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풍경이 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속

을 비 오는 밤 걸어 들어가보니 왠걸? 마을이 떡 하니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닌가? 동남아 판 원더랜드 같

기도 하고, 우리 집 같기도 해서 괜히 입가에 웃음이 스며든다. 여행자 신분이지만, 잠시나마 쉴 수 있

겠단 김치 국을 마셔도 되는 동네다.

하지만 늦게 도착했어도 다음날 아침부터 바로 어딘가에 가야 한다는 거다. 반정부시위인지 노동

인지 모를 무언가에 참여하러 가야 한다는데 눈 밑까지 잠이 쏟아져 내려와 대충 흘려 듣고 말았다. 결

국 새벽 4시에 일어났어야 하지만, 5시 기상. 일단 지각확정. 비비적거리며 일어나 고양이세수로 대충

가다듬고 시사아속 공동체 식구들과 첫 인사를 가지게 되었다. 늦게 온 손님이 늦잠까지 잤으니..쯧쯧

여행자는 쉬거라~김 평 화

만났어

/79

시원한 새벽공기를 마시며 가는데도 쭈그려서 앉으니 멀미가 올라온다. 새삼 군인오빠들이 고생이 많

구나싶다. 시원했던 공기가 점점 뜨겁게 달구어져 가는 게 느껴지는걸 보니 슬슬 태양이 떠오르는 가

보다. 어제의 산뜻한 기분은 어디로 가고 달구어져 가는 트럭 속에서 병든 닭 마냥 졸면서 나는 반정부

시위를 하러 간다~

2톤 트럭 위에 백 명분이 넘는 음식을 가득 싣고, 공동체 전원이 원정투쟁을 하러 가는 이 반정부

시위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투표거부시위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은 우리나라의 80년대 민주화 과정과 비

슷한 점이 많다.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일구어냈지만 여전히 공직자의 부

정부패가 심각하고, 남부와 북부의 소득차이가 날 이갈수록 벌어져 양쪽에서 팽배하게 신경전을 벌이

고 있는 상황 이였다. 그리고 선거에 막대한 자금을 쏟는 남부 쪽 정치인이나 북부의 정치인. 이 두 쪽

다 태국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다 는걸 아는 소 농민들과 진보인사들의 세력이 아예 투표거부를 선

언한 것 이다. 물론 선거결과에서는 무효 표를 던진 사람들은 1% 도 못 미쳤지만.. 이 대단한 발상에 동

참했던 수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태국은 변화해 갈 것이다. 그러나, 투표거부선언을 지지하는 시사아

속 공동체 식구들에게서는 흔히 시위장면에서 보이는 비장한 얼굴로 상경 투쟁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아 이거 참, 마치 소풍 가는 얼굴들이다. 어린 학생들은 음식을 가득 실은 트럭을 타고 다른 동네를 놀

러 가는 것처럼 들떠있는 이 분위기에 나도 어울려서 어른들이 흔히 얘기하는 사태의 심각성은 느끼지

못했었다. 이른바, 사태는 사태고 소풍은 별개?! 굳이 연관 지어서 분위기 팍 죽이는 건 어른의 세계에

서나 일어나는 것이니까.

했어 /80

돌아오는 길은 2톤 트럭도 부족해서,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고이 저장되어있는 트럭지붕에 올

라가서 가는데도 다들 즐거워 보인다. 노래도 부르고, 게임도 하면서 가는 이 길이 불편한 자리지만 누

구 하나 불평불만보다는 쪽 잠을 자는 그 모습이 하나같이 예쁘다. 아직 이름도 못 외운 옆 친구지만 서

로 어깨를 빌려가며 돌아오는 길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쿨쿨쿨 꿀 잠에 빠져 들어간다. 그리고, 몰랐는

데 돌아와서 자세히 보니 우리 숙소가 진짜 통나무로 지어진 이층집이다. 마룻바닥도 있고 삐걱 소리가

나는 계단이 있는 시사아속의 명물 통나무집에서 자는 줄도 몰랐다니..거기에다가 통나무집에서 바라

보는 폭우는 정말로 끝내준다. 일단 모기들도 살고자 집안에서 기승을 부리니 모기장은 필수품! 쏟아지

는 빗방울소리를 들으며 시사아속의 이틀 밤이 지나가고 있다.

다음날은 짜장과 김치가 아침식사로 나왔다. 완전 맛있다! 이렇게 행복한 한국음식은 정말 오랜만이

라서 폭식하고 말았지만, 이곳 시사아속 음식 맛도 장난이 아니다. 어쩜 무엇으로 이렇게 맛있는 음식

을 만들지? 고기 한 점 없는 순수채식주의 식단이지만 밥 한 숟갈 반찬한쪽 이 모든 게 너무 맛있어서

자꾸 더 먹게 된다. 한번 거하게 접시에 담아와도 두 번 받는 건 기본! 과일도 음식도 늘 넉넉해서 매 끼

마다 행복한 함박웃음이 절로 나온다. 흐흐흐!

그러나.이쯤에서 한번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지금 와서야. 태국은 천국이요, 시사아속은 엄마품속 이였다 는걸 인정하지

만.. 그 당시의 시사아속에 입성해서 한마디씩 하기를

밥에 고기가 없어. 우린 원시세계에 온 거야. 손으로 X꼬 닦아야 한데! 헉 개미랑 모기랑 같이 살아 야

해?!!! 뭐 이하 등등. 우리가 원더랜드를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다들 입 모아 큰 목소리로 "돌아가고 싶어 태국!!!!!!!!!!!"을 외치고 있다.

반정부 시위를 다녀오고 며칠후 시사아속 공동체의 일년 행사 중 가장 크다는 모내기 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모내기 라니? 응? 쌀은 쌀 포대에서 자라나는 거 아니야? 화분에서 키우는 거

아니었어? 음, 조금 오버를 하긴 했지만, 모내기를 처음 본다는 다수의 인디고들~ 어쩌것서~ 이 큰 누

님이 나서야지! 근데 아뿔싸. 여긴 한국이 아니었다. 모내기를 기계로 하는 게 아니고, 일일이 손으로

3~4개를 포개서 땅속에 살짝 묻어주고 나와야 하는 손 모내기 인 것 이다. 아, 물론 나는 농촌에 사는

촌 내기 이지만, 손 모내기를 딱 한번 해보고, 기겁하면서 논을 뛰쳐나왔던 과거가 있는데 모내기를 할

수 있을까? 겁이 든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거머리, 빈대, 개구리, 심지어 제일 싫어하는 뱀까지!!!

만약에 뱀이 나온다면 논 안에서 기절할 텐데 그건 진짜 부끄러운 일이라서 피하고 싶다. 어깨에 힘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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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넣고, 파이팅!을 외치긴 했지만 슬그머니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는데 시사아속 교장선생님께서 우

리에게 한 말씀을 하시는 것 이다.

"인디고 학생들이 일을 너무 안 해서, 같은 또래의 시사아속 학생들의 사기가 저하돼요."

으. 이제는 도망가기 글렀다.

드디어 모내기 당일, 트럭에 학생을 한 가득 실은 채 논으로 떠났다. 심호흡하며, 첫발을 논에 딛

게 되었다. 물컹한 진흙이 발가락 사이로 꼼지락 삐 져 나오더니 발바닥에는 존재를 알 수 없는 이물질

이 느껴져 온다. 느낌이 꼭 뱀을 밟은 기분이 여서 "으악 나 나갈래!!" 소리쳐 보지만, 진흙이 나를 놓아

줄 리가 있나? 내 발을 꼭 붙잡는 논 바닥 덕분에 허수아비마냥 허우적대다가 결국 뒤로 나자빠져버렸

다. 나의 농촌패션이 논에 입성한지 1분만에 축축해져 버렸군. 벼를 솎아 논 묶음 한 다발을 쥐고, 양

팔간격 안의 땅에는 책임지고 벼를 심어야 한다. 어떤 땅은 허벅지까지 푹푹 들어가고, 어떤 땅은 이게

갈린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주춧돌 같은 돌들이 묻혀있기도 한다. 한창, 열 맞춰서 예쁘게 심고 있는데

주위가 한산 한 것이다. "뭐지?" 싶어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나 빼고 다들 초고속으로 심어가는 중

이네? 심지어 몇몇은 다 끝내고 다른 논으로 옮겨간 것이다. 앞서 가신 할머니께서 내 자리까지 다 심

어버리시는 바람에 나는 한 열댓 줄 심고 나면 논 중간에 영락없이 갇히게 생겼다. 바보같이 중간에 멍

하니, 이게 뭐야, 이제 남들 심어놓은 곳을 피해 살금살금 나가는 게 일인 거야? 자존심에 금이 팍_하

고 나간다. 내가 누구냐! 전라도 산골에서 살긴 하지만 절대 농사일은 안 하던 김평화 가 아니더냐. 가

슴 속 깊은 곳 에서 승부욕이 용솟음친다!! 예쁘게 하나하나 "벼야 사랑해~" 하던 평화는 사라졌다. 안

되겠다. 촌년 평화로 돌아가야겠다.

그때부터였던가? 모내기가 시작하고 끝나는 그날까지, 시사아속의 할머니들이 나만 보면 환한 미

소와 함께 손가락을 치켜드신다. 감사합니다! 이젠 태국의 촌년 이네요. 모내기는 그 후로부터 몇 칠을

더 고생하고 끝이 났기에 막판에는 세지도 않고 착착 모를 떼어내서 심는 기술까지 사용할 줄 알게 되

었다. . 시사아속 공동체의 힘은 자급자족이라서 그런가, 정말 논도 많고, 농장도 넓다. 할 일이 많은

것을 알면서도, 잘 도와드리지 않았었는데, 맨날 밥도 많이 먹고 잠도 늦게까지 자고 편안하게 생활했

었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놀기만 잘 놀고, 먹기만 했으니.다시 돌아간다면 열심히 일한만큼 더 먹고,

더 놀아야겠단 생각이 절실하다. 후회가 클수록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시사아

속을 돌아가겠다고 약속해본다.

보고싶다.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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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시사아속 공동체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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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아속은, 태국의 중부에 있는 불교 공동체입니다.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로 넓은 농장을 갖고 있고, 친환경물품도 만들어 판매

를합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노동을 다같이 시작하고 친환경 채식

주의 식단으로 맛있는 아침식사가 끝나면 학생들은 여러 교실에서 공부를 하

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시사아속 공동체는 일체의 숙식비를 받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찾아오는 여러

외국인과 손님들에게는 노동으로, 서로 지식을 나누는 것으로 숙식비를 대처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료로 베풀 수 있는 바탕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이

이 공동체 내부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인데요, 농사를 짓기에 음식의 모자람

이 없고, 공동체 내부에 학교가 있기에 배움에 부족함이 없고, 예쁘게 지어 올

린 통나무집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곳이 정말 살아있는 공동체라는 느낌을 받

을 수 있을 겁니다.

거기에 더해서 친환경세제를 제한 다른 일반용 세제나, 샴푸, 비누 등은 이곳

에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외부의 음식도 가지고 들어올 수 없고요.

이 곳이 오랫동안 깨끗한 공동체로 유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 불편함

을 조금씩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몸으로 실천해서 일 것 입니다. 그런

데 가끔 부끄러운 이야기가 들려오는데요. 외국인 친구들이 다녀가고 나면 과

자봉지부터 해서 담배꽁초까지, 샴푸사용은 말할 것 도 없고, 손님으로 들어

간 우리들이 너무나 당당하게 룰을 어긴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뜨

끔, 하고 그때 잠시를 참지 못했던 제 모습이 부끄러워집니다.

모두들 조심을 넘어서서, 약속을 해야 합니다. 시사아속의 규칙을 어기지 마

세요 !한 사람의 실수가 여러 사람의 얼굴에 먹칠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여행학교 여럿 팀이 이곳을 다녀갔었는데요. 시사아속 친구들의

무한한 환영이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친구, 특히나 한국인친

구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 곳에 방문해서 기본적인 농사일 돕기나, 주방일 돕기에 충실

하는 것 도 중요하지만, 더 많은 것을 나누고, 한번 들렸다가 쉽게 떠나는 친구

가 아닌 오랫동안 소중한 친구로 남기 원한다면 태국어로 인사한마디, 한국의

재미있는 영화 드라마를 챙겨서 시사아속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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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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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을 마치며

김태현

나는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왔을 땐 '태국이랑 캄보디아랑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기대하는(?) 시사아속이 나에겐 너무 가기 싫은 곳이었다. (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하지만 정착된 생활은 잠시나마 할 수 있다는 것에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결국 나의 기대에는 미치지도 못했다. (그 곳에서 있던 복잡한 일들 때문에) 하지

만 나는 태국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곳을 택하라면 시사아속을 택하겠다. 나는 지금까

지 내 틀 안에서만 행동했고 알고 있는 배움도 내 틀 안에서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

에게 색다른 것을 선사하였고 힘든 일이지만 같이 느끼면서 배울 수 있도록 해주었다. 태

국문화를 교류할 수 있었던 계기도 전부 시사아속 덕분이다. 그리고 사람 만나는 것을 두

려워하는 나에게 만남을 소중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우리내부의 갈등이 내 삶속에 또

다시 되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깨닫게 해주었다. 이런 갈등에서 내 의지를 포기 하지 말

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말로만 베푸는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들에게 아

낌없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해주었다. 그리고 힘들고 지칠때에는 한 번이라더 조용히

생각해볼수 있게되어 행복했다. 힘들다 힘들다라는 생각은 모두에게 인식시켜주면 안된

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 힘들땐 옆에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즐겁게 웃을땐 같이 행

복해주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시사아속을 마치고 우리들끼리 여행을 떠났을 땐

진짜 맘에 들지 않던 부분도 많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약간의 양보만 한다면 서로 즐거

울 수 있다는것도 알았다. 그리고 그냥 스치는 만남이지만 이런 만남도 나중에 추억이 될

수 있단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태국은 보면 볼 수로록 끌리는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내

가 원하는 여행을 한다면 어디서든 행복한 만남을 가질 수 있을것같다. 그리고 내가 만약

이 순간에 여기에 없다면 평범하게 살거란 우스게 상상을 하기도하였다. 태국은 진짜로

떠나는게 아쉬운 나라라는 생각이든다. 무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내가 이번에 여행하면서 가장 인상깊은 나라이다.

울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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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난 넓은 세상을 누빌 비밀스런 아이들을 보았다

빠이에서...

치앙마이...

방콕에서 만났던 아이들...

지금 인도 또는 네팔의 어느 시골에 있을 아이들...

나의 한 달 여행 여정 중 2주를 넘게 같이 보낸 아이들...

아이들은 날 잊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이들이 많이 보고 싶다.

세상의 다른(?)아이들과는 또 다른 아이들.

그러나 그 누구보다 더 겸손하고, 착하고, 예의 있고

난 이들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다.

같은 또래들은 학교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배우고 익혀야 할 시간인데

이들은 여행에서 무언가를 얻고자 떠나왔다.

9개월의 여정이 거의 다 지난 이 시간, 이 아이들은 뭘 배웠을까?

사실 지금. 나도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될 것이고,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나갔을 때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란다.

이번 여행을 통해 아이들이 세상을 누비면서

자기 자신과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고, 행복하며 살 아이들을 미래를.

인디고 6기 모두 사랑한다.

치앙마이에서 카르페디엠

Paul 윤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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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다녀왔습니다!아빠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

아빠, 태국에서 쓴 편지가 마지막편지일 줄 알았

는데, 이 최종 후기가 정말 마지막 편지가 될 거 같

네요.̂ ̂제가 누군지 아시죠?? 여행 중 후기글로

아빠에게 편지를 쓴 아이가 저 한결이 밖에 없을

테니까요. 이 편지가 마지막이니만큼 할 말이 많

을 텐데.. 서둘러 본론부터 말씀드릴까요?

음.. 아시다시피 저는 다른 인디고들과 달리 기

쁨언니와 태국여행을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

왓어요. 다른 후회나 안타까움은 전~혀 없어요.

여행중단으로 인해 여행보다 커다란 선물을 얻었

으니까요. ^ ̂그게 무엇인지는 말씀 안 드릴래요.

이미 알고 계실 테니까. 히히

아부지!! 솔직히 쓰자면 여행을 하면 할 수록 시

간허비의 짜증만이 계속났어요. 우아~ 여행을 이

만하고 중단한게 다행이지.. 크흠! 아, 공개 편진

데 나쁜말만 하면 안좋겠군요.

이 글을 쓰려고 여행을 하면서 나름 꾸준히 쓰

던 일기를 잠시 읽어 보았어요. 한국에 사는 한결

이보다 여행을 하는 한결이가 더 어른스러워 보이

고.. 제가 저의 내면에게 혼나는 기분이었어요.(아

빠와 사이가 안 좋아질 때마다 꼭 봐야겠어요.

처음에 제 나쁜 건강의 쉼을 얻으려고 여행을 시

작 했죠? 그런데 오히려 건강은 악화되고 마음과

정신이 치료를 받았네요. 스스로 한심해지고 삶이

캄캄히 소멸되어 갈 때 여행이 딱인 것 같아요. 정

말 나란 사람이 누군지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었

어요. (기간이 길어서 허탈했던게 가장 후회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이런 기회가 있어서 평소에 궁

금했던 박한결이란 아이를 만나게 해주셔서^^

저야 다른 인디고 보단 한국에 돌아온지 6개 월

이 넘어가지만 한국의 교육현실을 제데로 직감 못

하고 헤매는게 보여요 안타깝죠?? 그래서 여행은

3개월이 딱 적당하다는 거에요 그 정도 기간이면

자기 자신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거 같아요.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을 돌면서 여러 경

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 아쉬워하기

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여러

모로 저도 생각의 깊이가 깊어지고 넓어진 걸 느

껴요.

여행을 하면서 새롭게 만남사람들은 선교사님

아니면 사회적기업인들이었어요. 정말 모두들 그

나라에 정착하고 그 나라를 섬기면서 돕는 훌륭한

영웅들이에요. 전 그 분들의 삶을 본받고 한국에

서도 인생에 소외됨을 받은 사람들을 응원하는 사

람이 되고 싶어요.

아빠! 여행을 다시 되돌아 모며 생각나는 3가지

사건이 있어요. 베트남의 음식점 사기꾼, 중국의

철이오빠, 캄보디아 밥퍼단체의 귀여운 아기들.

아빠도 기억하세요? 베트남 호치민에서 기쁨언니

와 식당을 찾다가 지쳐서 길을 가는 도중에 어느

쌀국수집 식당에서 현호선생님 혼자 밥을 먹고 있

박한결

끝났어

/89

는 걸 보았잖아요. 그때 그 식당에서 현호선생님

은 어른이라서 제 가격에 주고 기쁨언니와 저한테

는 가격을 2배나 불려서 돈을 내라고 했어요. 얼마

나 어처구니없고 당황했는지.. 서로 안되는 영어

로 이 가격이 아니지 않느냐고 따지고 오랜 말싸움

이 오갔는데.. 그 사기꾼5명중 1명이 우리보고 욕

했어요. 참.. 그때만 생각하면, 분해서 눈물고이던

기쁨언니의 마음이 막 전해지는 것 같네요. 머 결

국 제 가격에 계산을 했긴 했지만..

여행을 시작하면서 중국에 발을 디디고 여행의

첫 시작을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했었죠? 그때 알

게 된 철이 오빠 기억해요? 우리랑 단둥부터 청두

까지 오랜 기간 같이 도와주면서 함께해었는데..

저와는 친하게 지내지 못했지만 무지무지 보고싶

네요, 그 오빠한테도 여행가이드 겸 여행이 즐겁

고 귀한 경험이었겠죠? 중국사람들도 자기 나라구

경 못하고 죽는 사람이 많다잖아요. 아 캄보디아

에서 '밥퍼'공동체를 만난 것 너무 행복했어요. 저

는 그 곳의 아기들이 너무 천진난만하고 사는 게

즐거워 보였어요. 식당에는 언니가 동생 밥을 먹

여주느랴, 식어가는 자기 밥은 제데로 못 먹고, 어

떤 아이들은 밥을 받아서 누가 훔쳐갈세라 가져온

비닐봉지에 싸들고 가고.

제가 자기의 밥을 비닐봉지에 담고 있는 한 아이

한테 아침밥을 먹었냐고 물어 봤어요. 놀랍게도

그 아이는 먹었데요. 머 먹었냐고 물어보니까 그

아이의 대답은 파인애플.. 밥에 김에 김치에 참치,

계란과 필수적으로 고기가 들어간 찌개와 깨끗한

물을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먹고다니는 제가 정

말 부끄러워지더군요. 자기는 밥을 안 먹고 식판

의 밥을 모두 싸가는 그 아이에게 집에 형제가 어

떻게 되는지 물어 봤어요. 제 기억이 가물가물하

지만 그 아이의 옆에 앉은 여동생과 위에 언니 한

명, 엄마와 동생 2명이 더 있다고 말했을 거에요.

자신이 싸가는 밥의 양이 그 인원이 충분히 먹을

양이 아닌데.. 언니의 착한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숟가락도 제데로 사용할 줄 모르는 동생은 자기

의 앞에 놓인 밥을 맛있게 먹더라구요..

상황이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 아

이들이 한편으론 부러웠어요. 한국에는 돈 때문에

싸우고 돈 때문에 스스로 삶을 죄어놓는 한국인과

달리 돈이 없어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한 아이들이

너무 부러웠어요. 제가 그 아이들보다 더 배운사

람으로서 이 땅의 저보다 못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

해 제 삶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야겠어요.

아빠, 과거를 다시 생각해 보느랴 편지가 뒤죽박

죽이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6개월여행 고마웠어

요.̂ ̂이제 일상의 한결이가 일기에 적힌 내면의

한결이 보다 부끄럽지 않도록! 한국생활 잘 할게

요!!! 응원해주세요!

했어 /90

생각을 바꿨다. 명상과 영성의 나라 인도?

기겁할 따름이다. 길거리의 들개마냥

원숭이가 뛰어 다니고,

세계적인 도시 꼴까타 에서는

몰이꾼이 염소들을 몰고 다닌다.

'더러움' 이란 자체가 무섭고,

3억 3천만 명에 달하는

신과 여신들의 신전이 있으며

절대 다수와 절대 소수가 없는 동네이다. 이리

섞이고 저리 섞이다 보니

공존 할뿐.

INDIA

/91

사람을 미치게 하고,

열 받게 하고,

울게 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인도를 주목해보자.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곳이다.

사람들의 눈, 인도식 영어,

환상적인 탈리,

기억 속에 자리 잡은 화려한 색채들이

우리를 어지럽게 한다.

너무 강한 햇빛을 바라보고 나면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비비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가 너무 강렬해서

그 전의 여행을 잊게 만들었다.

했어 /92

바라나시의 어느 날 밤. 손 쌤이 파업을 선언하였다.

그 말을 듣고 벙쪄 있는 인디고. 손 쌤에게 이유를 물어 봤다. 아주 디테일

하게 말씀해 주시는 손 쌤이다. 너무 디테일해서 간략하게 정리 한다면 위험

한 바라나시의 3주 일정 동안 인디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

는 선생님으로서의 걱정과 그 동안 인디고들과 여행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

아 더 이상 못 참겠다고 하셨다. 손 쌤은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시다며 휴

가를 요청하셨고, 두 차례에 대 회의를 거친 끝에야 손 쌤에게 휴식이 필요하

쌌어

/93

다는 결론이 나왔다. 손 쌤의 휴가 동안 인디고들은 손 쌤이 있어도 없는 듯 인사를 건

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인디고들은 손 쌤 없이 번갈아 가면서 회의도 진행하고 공동 프로그램도 알아서

진행하였다. 손 쌤이 있었더라면 30분~1시간이 걸릴 회의도 2분, 3분 안에 끝나는 기적

의 기록도 나왔다. 손 쌤이 없는 동안 인디고들은 방콕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

도 있었고, 예전 같이 자신의 교육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취미 활동을 펼친 사람도 있었

다. 그러나 그런 사람보다도 방콕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었다. 이렇게 각자 손 쌤 없

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인디고들. 회의 시간은 짧아져서 좋지만 손 쌤과 마주칠 때 마다

어색해 하고 불편해 했다. 손 쌤 휴가 3일 째 밤. 드디어 손 쌤이 입을 여셨다. 생각 외로

빨리 입을 여셔서 당황했다. 손 쌤은 3일의 휴가동안 쉬지 않으시고 우리의 네팔 일정과

트레킹에 관해 준비 하셨다면서 우리에게 네팔 정보들을 취합한 글들을 주셨다. 주시면

서 네팔의 관해 말씀해주시고는 자신이 휴가를 보낸 것의 대한 말씀을 해주셨다. 자신

이 파업을 한 것은 바라나시가 생각보다 학생들이 지내기엔 유흥적인 부분이 많아 인디

고 안에 충격이 필요하다 생각이 들어 파업을 선언하였다고 하셨다. 그런데 자신의 생

각을 알아들은 인디고가 없어 인디고들은 아직 어려서 모르면 진짜 모른다고 그래서 차

라리 혼자서 화내느니 마음을 비워버렸다고 하셨다. 그 날 이후 손 쌤은 다시 예전 같이

인디고들과 이야기도 나누면서 생활을 하셨다. 이렇게 손 쌤의 파업 덕인지는 모르겠지

만 우리 인디고들은 마약, 교통사고, 납치 등등 아무런 사고 없이 3주간의 바라나시 일

정을 무사히 끝냈다.

후 일 담

손 쌤이 다즐링에서 인디고들에게 바라나시 일정을 무사히 끝내주어서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손 쌤, 저희도 한다면 잘한다고요! 우릴 조금만 더 믿어주세요. 더 잘 할게요~

했어 /94

울었어

/95

했어 /96

왜 인도사람들은 손으로 밥을 먹는 것일까?

인도에서는 식기를 통하여 부정(더러움)이 전해지지 않기 위하여 손으로 식사를 한다고 한다. 인도 사

람들은 식사를 하기 전 양손을 물로 깨끗이 씻은 후 식사를 시작한다. 이때 인도 사람들의 식사하는 모

습을 가만 지켜보면 왼손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인도사람들은 왼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인도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배변활동 후 뒤처리를 휴지가 아닌 왼손과 물로 하는 문화를 가졌기 때문

이다. 인도인들이 언제부터 이러한 문화를 갖게 되었는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이러한 인도의 화장실 문

화에 깊은 궁금증을 갖고 있는 내게 친구가 던져준 답은 "옛날부터 인도인들이 전부 휴지를 쓰고 있었

더라면 아마 아마존은 벌써 없어 졌을 걸?" 아하, 접수 되었다.

자 그럼 이제 인도의 대표적인 음식 탈리를 먹는 법을 소개하겠다.

우선 탈리란, 인도의 음식 문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인도의 정식이다. 우리나라의 백반 정도로 생각

하면 비슷할 것이다. 탈리의 뜻은 큰 접시라는 뜻으로 그 뜻에 맞게 여러 반찬을 담을 수 있는 큰 접시에

커리와 콩 스프인 달, 반찬, 차파티, 다히(요구르트), 아차르(인도 김치)등이 수북하게 담겨져 나온다.

인도에서

밥 맛있게 먹기

이 슬 비

여러분은 손으로 밥을 먹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

이다. 아마 몇몇의 사람들은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고, 몇몇의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이 미개하다 느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손으로

먹는 식생활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에게는 조금 어색한 이런 식생활 문화를 가진 나라들 중 나는 이번

에 내가 다녀온 인도의 식생활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특별했어

/97

자! 이제 음식이 나왔다.

연장을 준비하자.

번거로울 것 없이 그저 오른손의 소매만 걷어 올리면 된다.

물론 그전에 손 씻기는 잊지말것!

하늘을 날아 갈 것만 같은 인도의 밥을 먹기 위해선 먼저 커리

와 달스프로 밥을 촉촉이 적셔주어야 한다. 이때 손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많이 뜨겁다 싶을 땐 적당히 숟가락을 이용 할 수

도 있다. 요즘 식당들은 요청하면 숟가락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참고로 외국인들에겐 먼저 가져다주기도 한다.

자!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촉촉하게 젖어든 밥이 소

스들과 잘 조합을 이루기 위해선 오

른 손의 지휘가 필요한 순간이다. 손

으로 먹기의 하이라이트! 오른 손으

로 비비고, 또 오른 손으로 비비고~

꼭꼭 많이 쪼믈딱 거릴 수 록 더 맛있

는 탈리의 맛을 볼 수 있을 터이니!

자, 오래 참았다. 이제 조물조물 잘 뭉쳐진 밥을 검지 중지

약지를 이용해 숟가락 위에 밥을 퍼 올리 듯 예쁘게 퍼 올

린다. 모델의 행복해 하는 저 미소를 감상해 보라.

지금까지 수고가 많았다. 이제 부터는 세 손가락으로 예

쁘게 퍼 올린 밥을 엄지의 손톱을 이용하여 입속에 힘차

게 밀어 넣어 주기만 하면 진정한 손맛으로 인도의 음식

을 맛 볼 수 있게 된다.

했어 /98

나에게 인도의 식생활 문화는,

이미 여러 번 들어 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경험해 보게 되니 살짝 당황스럽기도 하고, 익숙하

지 않게 손으로 먹는 나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잘 먹어 볼 수 있

을까 하는 생각에 인도인들의 식사하시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하였다.

그때 내가 모르는 인도의 식사 예절이 있었으니.

그것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식사를 하고 계시는 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안 된 다는 것. 또

인도의 다수 종교인 힌두교에서는 식사 중에 이야기하는 것을 무례하다고 생각하기에 식사가 다 끝이

난 후 입을 헹구고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여행을 한 21세기의 인도는 많이 봐주는 듯

하다. 식후에 손을 씻고, 입안을 헹군 훈 가게를 나서는 것은 이들의 또 하나의 예법이라고 한다. 예의

범절을 중시하는 곳에서는 손가락 두 번째 관절까지만 사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에겐 어색할 이들

의 문화이지만, 이들은 오랜 경험 속에서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음식의 촉감과 온도를 입과 손에서 느

낄 수 있어 맛이 훨씬 좋다는 것을 깨우친 민족이다.

/99

이쯤 되면 슬슬 손으로 먹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가?

마음의 평화를 찾아 인도를 찾은 여행자 분들이여.

인도인들이 아주 오랜 시간동안 몸과 영혼을 위해 만든 인도의 전통 음식들을 맛보아 보자. 여러분들은

진정한 심신의 평화를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도의 고급 식당에서는 식사가 끝이 나면 레몬을 담근 따뜻한 물을 내어 올 것이다.

절대 마시면 안 된다.

그 이유는? 그 물은 손을 씻는 물이기 때문이다.

했어 /100

죽음의 공포원혜진

깝쳤어

/101

오늘은 점심때 오로빌 공동체로 갔다. 그리고 오로빌이 만들어지는 관련 영상도 보게 되

었다. 그리고 나서 solitude 라는 유기농 농장으로 이동했다. 여기는 유기농 농사로 재배

된 재료로 만드는 식당이 있었는데, 그 옆에는 지름이 4m 정도되고, 깊이는 5m, 수심은

10m정도가 되는 우물이 있었다. 허나 내가 도착했을 때는 우물 속으로 다이빙을 하신 생

명누리 자봉 선생님들이 있었다. 우리 인디고 친구들도 하나 둘씩 우물 속으로 뛰어 들

기 시작했다. 한진이와 일용오빠를 보고 나도 한번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남자들이 용감하게 뛰어내리는걸 보면서도 아직은 여자인 나도 뛰어보려고 했지만 너

무 무서웠다. 그때 현주선생님이 우물단위에 서서 다리를 덜덜 떨면서도 악~소리를 내

며 점프하는 것이다.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물에 가라앉더니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잠

시 후 현주선생님은 허우적 거리며 수면위로 떠올랐다. 미리 물에 입수했던 일용오빠가

현주선생님을 받쳐주고 있어서 나도 뛰어내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두 다리가 후들거

리며 무섭기는 했지만 왠지 아까와는 달리 자신감에 차서 뛰어내릴 수 있게 되었다. 물

에 뛰어드는 짧은 찰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공중에 있는 나의 몸은 '왜 아직 물에

닿질 않았지?'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내 물과 내 몸이 마찰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난 물 속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 순간 두려움과 오싹함이 내 몸을 엄습해왔

다. 아무리 손으로 허우적 거리며 저어보아도 수면 위로 몸이 올라가질 않는 것이다. 숨

은 막혀오고 눈 앞이 아찔해져 왔다. 목숨의 위협을 받은 난 잠시 죽음의 공포를 느낀 것

이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나를 잡아주었다. 허리를 감싸고 나를 벽 쪽으로 데려다 주었

는데, 우리 모습을 목격한 율이가 "뭐함? 둘이 연애함?"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생명의 은인이 바로 일용오빠였던 것이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는 했

지만 우물 속으로 뛰어드는 다이빙이 너무 재미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 성격은 온 몸

에 짜릿함이 느껴지면 다시금 그 자극을 받고 싶어하는 것 같다. 소정이와 현주 선생님

과 셋이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부터 다이빙 하기로 했다. 현주 선생님은 두 번째

뛰어드는 거라 그런지 가볍게 입수하셨다. 소정이는 처음에는 못 뛸 거라 예상한 생각과

는 반대로 멋지게 뛰어 내렸다. 드디어 내 차례다. 이번에는 주저하지 않고 용감하게 뛰

어내렸다. 물을 좀 많이 먹기는 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우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무

섭고 용기가 필요하지만, 우물 밖으로 나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마치 암벽등반을 하

는 것처럼 한 발 한 발 우물 사이에 있는 돌 틈새를 밟고 올라서야 했다. 오늘은 끔찍하

게 덥고 습한 날씨였지만 이렇게 우물에 뛰어드는 경험을 하게 되어서 색다른 하루였고

즐거웠다. 오늘의 경험으로 나는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도전정신을 느끼게 되었고, 용기

와 자신감을 얻었다! 만약 다음이란 기회가 있다면 나는 죽음의 공포를 맛보고 싶다. 이

제 나는 변태가 된 것이다.

했어 /102

1

와! 인도다!!!

킁킁 공항에서부터 특유의 스멜(?)이 코를 감싸

온다. 분명 콜카타 공항은 국제공항 일텐데, 빠

른 출국수속을 마치고 몇 발자국 걸어 나왔다고

벌써 출구가 보이는걸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온

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고 나니 웃음기가

싹 사라진다. 시커먼 아저씨가 어슬렁 지나가고,

군인들은 장 총을 메고 경계태세를 하고 있는 것

이다. 인도는 테러가 심심찮게 자행된다던데 긴

장해야 되나? 밖으로 나오자마자 손 샘은 여행경

비를 찾아야 한다며 ATM부스로 사라지셨다. 물

끄러미 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누가 소매치기라

도 할까 봐. 괜히 걱정이 든다. 내 얼굴에는 긴장

이 묻어 나오고, 초짜 여행자 티를 팍팍 내곤 있

지만 솔직히 나는 초짜 여행자는 아니다. 다만 초

행 인도에 10대 아시아계라니 (심지어 여자!) 이

건 긴장 해야 되는 충분한 이유라고 그때는 그런

귀여운 생각을 했다.

천국 같은 태국에서 건너온 우리는 어 벙벙한

표정을 띤 채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

다. 역시나, 오토기사들이 몰려와선 "밖에 테러

가 일어났다." 라던가 자기가 프리페이드 택시 라

고 자청하며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는데..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내가 지난 4개월 동안

여행하면서 뚝뚝기사, 릭샤꾼 이라면 이골이 나

있기에 위험하다고 겁을 준 다한들 가볍게 무시

할 수 있는 내공이 좀 생긴 모양이다. 꿋꿋하게

걸어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빨

간색의 88년도에나 만들어졌을 법한 버스가 우

리들 앞에 멈추어 섰다. 다만 '이게 그렇게 비싸

다는 에어컨버스라고? 우리가 타면 움직이기나

나에게 인도란? 기차다. 유럽대륙과 맞먹는 인도, 이 거대한 대륙을 횡단하는 지구상에서 제일 긴 기차! 그 속은 작은 마을과도 같아서, 앞 침대 옆 침대 둘러보면 모두가 친구가 될 수가 있다. 그리고 마치 작은 지구와도 같아서, 사계절을 느낄 수 있고, 지구오염의 근원지를 찾아 낼 수도 있다. 인도에서 나는 사람을 만나고, 사계절을 느끼고, 미래를 만져 볼 수 있는 기차를 타고 여행한다. - 12월 초순, 다즐링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인 크 레 더블 인

아 나

만났어

/103

할까?' 괜한 걱정이 든다. 게다가 타는 사람을 기

다려주지도 않는 야속한 버스였지만 드디어 평범

한 인도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들은 동물원의

원숭이를 본 것 마냥 신기하다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 보고 있긴 해도, 나도 똑 같은 생각으로 바

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불쾌하진 않더라. 우리는

배낭이란 흉기(?)를 휘두르며 한쪽으로 착착 쌓

아 올린 후 에나 창 밖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제

버스는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하고 무거운 가

방덕분에 아프던 어깨의 고통이 잠잠해지니..이

젠 눈물이 맺힌다. 내가 이곳에 오기를 얼마나 기

대했던가... 인도에만 가면 모든 게 해결될 꺼야.

이 고집 하나로 약한 마음, 얇은 귀를 다 잡고 온

곳이 아닌가? 그러나 약한 마음은 여전히 나에게

많은 생각을 요구한다.

콜카타의 여행자거리인 서든 스트리트로 가는

길, 창 밖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글썽이려고 했는

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저것은 내 눈물을 쏙 마르

게 해버린다. 이곳이 진정 지구인가? 충분히 중

국과 동남아를 경험했기에 무덤 덤 할 줄 알았는

데.인도가 아무리 배낭여행의 종결지라지만, 이

런 곳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해보았었다.

창 밖 너머로 보이는 저 둥근 산이 무엇인고 보

아하니, 내 눈에 보이는 저 산이 설마 쓰레기로

만들어진 건가? 옆에 붙어있는 저수지는 검정색

페인트를 부어 놓은 것 마냥 걸쭉해 보인다. 그

곳은 쓰레기 위에 쓰레기를 또 버리고 그렇게 쌓

인 쓰레기 산 위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였

던 것 이다.

혼자 말 못할 경악과 충격 속에서 지나가는 풍

경들을 보고 있으면 하나같이 등골의 쭈뼛 선다.

이제 인도의 첫인상은 콱! 박혀버리고 말았다. 너

무 더러워서 무서운 나라로..

그날 8/9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미쳐버리겠어!!!" 이 한마디가 내 심정을 그대

로 토해낸 것이다.

했어 /104

2

인도의 꼴까따를 여행하면 인도의 '진짜 모습'

을 본거라고 한다.

이유인즉 엄청난 빈부격차와 인도인의 뼛속에

있는 계급사회를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데, 말마따나 우둘툴툴한 도로에는 외제차가 심

심찮게 돌아 다니고, 도시 곳곳에는 방글라데시

와 인도농촌에서 올라온 빈민들이 넘쳐난다. 그

리고 인도의 마지막 인력거가 남아있는 도시. 꼴

까따 는 인도대륙의 축소판 이다. 그래서 꼴까따

의 명물은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지만, 여행

자에게 가장 사랑 받는 곳은 역시 서든 스트리트

가 아닐까? 우선 세계 각국의 여행객들은 꼴까따

의 서든 스트리트를 꼭 한번씩은 거쳐가게 된다.

이 거리가 바로 여행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밀집되어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여행객들을 위

한 호텔도 밀집되어있는데, 우리도 이곳에서 삼

일 을 지내게 되었다. 우리가 지내던 서든 스트

리트의 이름도 기억 안 나는 호텔. 3일을 묵었어

도 기억이 안 나는데, 나는 머물지도 않았던 최

악의 두 호텔은 여태껏 잊을 수가 없다. 나와 한

진이 둘이서 숙소를 체크하려고 한 시간을 꼬박

돌아다니면서 몇몇 호텔을 몇 개를 보고나니, 속

이 울렁거린다. 벽지가 누렇게 떠서 곰팡이가 하

~얗게 스며든 방도 있었고, 바닥에 벌레가 수북

하게 쌓여있는 방은 그나마 괜찮았다. 심지어 지

하실에 있던 더블 룸 은그건 방이란 이름을 갖다

붙이기도 죄스럽기 까지 한다.

먼저, 유명 가이드북에 소개되어있는 호텔 아

닌, 호텔. 딱 두 곳만 짚고 넘어가자면 마리아,

파라곤 이 두 호텔의 일층은 지옥이다. 족히 10년

은 갈지 않았을법한 시트와 커버들.교수형장 같

은 화장실...진심으로 방문하는 것 마 저도 자제

하길 바란다.

결과적으론, 서든 스트리트의 중저가호텔 자체

가 마땅히 몸을 눕히기에 적당한 곳 따위가 없다

고 생각된다. (그러나, 경비가 넉넉하다면 숙소

걱정은 패스~ )

숙소만큼이나 끔찍했던 꼴까따 의 날씨는 습하

고 꾸중충해서 사람을 지치게 하고, 짜증을 불러

일으켰다. 빨래도 정말 안 마르고, 침대도 꿉꿉

하고 별 것 아닌 문제로 친구들과 대판 싸우기도

했었지만, 그런 일들은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꿈속까지 쫓아와서 나를 괴롭혔던 잊지 못할 호

텔 앞 공중화장실. 사람이 엉덩이를 까고 대변을

보고 있는데 무심코 쳐다봤다가 엉덩이에서 똥

이 뚝_떨어지는 장면을 보고 말았다.. 젠장 냄새

는 또 어찌나 심하던지 지린내가 골목을 돌 때까

지 따라온다. 나는 엊그제 까지만 해도 여행자들

의 천국이라 불리는 태국에 있었는데 하룻밤 새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다. 말로만 무

성하던 인도를 진짜로 대면하게 되니 모든 게 당

황스럽기 그지없다. 사소한 하나하나가 말로만

전해 듣던 것 과는 천지차이였고, 먹고, 자고, 입

을 때 쓰이는 기본적인 상식들이 머릿속에서 문

화충돌을 일으키다가 사라져버린다. 더는 꼴까

따를 기억하고 싶지 않다.

/105

# 내가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

인디안 뮤지엄은 여행자들의 필수코스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지만, 어떤 여행자 부류는

근처에 얼씬도 안 한다. 만약 당신이 여행을 길

위에서 즐기고 싶어하고, 사람 만나는걸 중요시

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여행계획을 작성할 때 제

일먼저 박물관을 제외 할 것이다. 물론 박물관이

나 미술관을 제외한다 해서 비난 하는 건 절대 아

니다. 다만 무엇에 초점을 두던 내가 현재 있는

그곳의 문화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 후

에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골목귀퉁이의 나무 한

그루를 보더라도 10가지의 색다른 느낌으로 만

날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꼴까따 인디안 박물관이 그러했는데...

유물이 차고 넘쳐, 박스 채로 밀봉해서 짐짝 취급

하는 그런 박물관은 처음 보았다.

기원전 몇 세기~몇 세기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 차오르는 유물이 박물관 구석에 처 박혀 있는

걸 볼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린다. '아 이걸 훔쳐

말아?' 게다가 박물관이 영국식민지배 시절의 건

물이라서 의아하기도 했다. 한국으로 치면 일본

이 세웠던 구 시청이 과거와 현재를 전시하는 박

물관이라고? 말이나 될까? 그러나, 인도라서 이

해하는 방식을 조금 바꿔야겠다. 앞서 말했듯이,

인도는 대륙이다. 거대한 대륙이라서 다양한 문

화들이 섞이고 섞여있기에, 문화의 뒤섞임을 가

장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곳이 인도라고 생

각한다. 인도에게는 영국의 식민지배 유산도 그

러한 것이다. 다양한 문화들 중 하나이지, 내 나

라의 정신적 지주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문화

는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밑바탕이 훨씬

다른 나라의 경우보다 깊게 깔려 있는 게 느껴진

다. 분명 간디의 인도독립도 인도국민들의 위 아

래로부터의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이루어졌을 것

이다. 이들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내 것으

로 만드는 문화는 얕잡게 보면 안 되는 중요한 힘

이다. 예를 들어 우리 한국은, 전통의상 한복을

일년에 한번이라도 입을까? 민족 대 명절은 용돈

받는 날로 여기고, 우리역사를 먼 나라 이야기로

치부하는 한국인들은 국민소득도 낮고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인도의 빈민들을 보며 생각 해

야 한다. 더럽고 헤져도 전통의상 사리를 입는 여

인들, 어린 학생들의 가방이 얼마나 무거운지...

정말 별별 걸 다 배우는 이 친구들이 인도의 숨겨

진 힘 인 것 이다. 한국인 김 평화 에게는 인도는

그저 끔찍하고 더러운 나라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더러운 게 무서운 나라였는데, 박물관

을 나와 바라본 인도는 이제까지 와는 다른 색깔

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젠 그저 더러워서 눈길조

차 주지 않았던 것들이 신기하고, 궁금증이 생긴

다. 짜이티의 토기 그릇이라던가~우울하게 생긴

영국식건물이라던가~ 촌스러운 원숭이 상이 다

이유가 있어서 그 곳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나는 박물관을 사랑한다. 새로운 감정을

불어넣어주고, 상상력을 뻗어나가게 해주는 박

했어 /106

물관을 여러분께 추천합니다. :B 얏호!

# 지옥행급행열차!

달려라 34시간~

빠앙~칙칙칙칙~~

이 올드 한 맛이 나는 경적소리가 무엇이냐고

요? 네.기차소리입니다.

이곳 21세기 인도는 아직도 철컥철컥 소리를 내

며 긴~차량을 끌고 들어오는 기차가 열심히 인

도대륙을 질주하고 있지요. 오늘은, 꼴까따 에서

뱅갈로르 라는 남부도시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날입니다. 손 샘의 계획대로 친구들은 긴장을 한

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차역으로 고고! 첫 기

차타기이니까. 가슴도 콩닥거리고, 비도 부슬부

슬 내리니 기분이 묘하게 들떠가고 있었습니다.

몇 분 후 내가 무엇을 보게 될지도 모른 채..

눈앞에 보이는 저것들이 꼼지락거리며 역내를

기어 다닌다. 표정이 일그러져 가는 나를 보고 애

들이 괜찮나? 라고 물어오지만, 곧 그들도 나와

같은 표정을 짓게 되었다. 바로 꼼지락 거리는 그

들의 정체는 쥐들. 분명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

는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숨어 있었을 줄이야.

다른 건 노파심에 잘 챙겨왔는데, 마음은 준비를

못했던 것이다.

"으악!!!!! 기차역에 쥐가!!! 쥐!!!!!!!쥐!!!!!!" 새

파랗게 질린 채 엄마를 마음속으로 찾아보아

도..위로 받긴커녕 엄마에게 미안해진다. '엄마..

엄마... 내 꿈은 엄마랑 세계일주 하는 건데, 엄마

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라도 인도는 자제해야겠

어. 엄마를 모시고 올만한 동네가 아냐..'

놀란 가슴은 벌렁거리고 눈을 어따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왼쪽을 쳐다보면 거지들이 바닥에 신

문지 한장 깔아놓고 주무시고, 오른쪽은 쥐 농장

이다. 이제 겨우 우중충한 꼴까따 를 좋은 시선으

로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절대 꼴까따 에

다신 오지 않겠어. 라고 다짐을 하게 됐다. 여기

저기 널려있는 쥐들을 외면한 체 돌기둥 앞에 차

곡이 배낭들을 포개어놓고, 기차 안에서 먹을 음

식을 구입하기 위해 여럿이 흩어졌다. 먼저, 생수

구입 팀의 사건을 들어보자.

"엉클엉클~ 하우머치? 워터르?"

"투웬띠 빠이브"

/107

"아, 야야 25RS래. 몇 병살까?"

그러나 여기서 잠깐. 아직 인도 물가에 익숙지

않던 나는 '콜드 차지' 라 고해서 시원하게 해주

는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추가요금을 바가지 쓴

줄도 모르고 1리터짜리를 10루피씩 더 주고 의기

양양 하게 돌아온 것이다.

손 쌤 왈 "너희 들이 물 값을 너무 비싸게 줬어.

바가지 쓴 거야. 바꿔와!!!"

손 쌤의 불 같은 한 소리를 듣고, 다시 슈퍼로

돌아가는 길을 잘 몰라서 그런 건데 괜히 잔소릴

듣고 나니 속상해진다. 그래도 안심이 되었던 건

중국 때부터 영수증 챙기는걸 일상화 했기 때문

이다. 어쩔뻔했어? 입 싹~닦으면 끝이잖아? 한

화 250원짜리를 샀는데 영수증 찾는 한국인은 아

마도 우리밖에 없을 꺼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우물거리며 영수증 얘기도 못 꺼냈었지만 이제

는 습관화된 '영수증 받기' 덕분에 환불도 받으러

가니 자랑스럽다. 특별한 인디고 이니까. 아저씨

가 다시 돌아온 나를 보고 눈치를 챘는지 내빼려

는 걸 낚아챘다. "엉클!!!!!!!!" 얼굴에 인상 팍! 쓰

고 목소리 큰놈이 이긴다는 부끄러운 옛말에 충

실해야겠다. 아저씨 얼굴에 영수증을 들이밀며,

당신이 사인해 주지 않았느냐? 환불해달라. 뭐시

라? 반만 환불해준다고? 웃기지 마라 나는 정확

하게 300루피를 당신에게 줬는데 반만 환불이라

니?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돈을 주 내~못 주겠네

~ 헛소리하는 아저씨를 제압하고 찬란한 전액환

불을 받고 돌아서는데 아저씨가 대뜸 "나쁜 코리

안 궁시렁 궁시렁~" 욕을 하는 거다. 성격 같아

선 홱 돌아가 성질을 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흠

흠 그냥 고상하게 한마디만 해야겠다. 난 괜찮아!

란 표정으로 씩-웃으면서 "엉클 노~~프라블럼?

(문제 없지?) 오케이? 바이~" 전쟁 치르듯, 아저

씨와 대판 싸우고 돌아와서 기차역에 널 부러졌

다. 더럽고 자시고를 떠나서 인도는 피곤한 동네

다. 뭐 하나만 사려고 해도 저리 싸워야 하니 말

이다. 말마따나 올 때가 다된 기차가 당연하다는

듯이 연착이라고 한다. 성질 낼 기운도 없어서

가만히 듣고 있자니 대충 이렇다. 예를 들어서 1

시 30분 기차라면, 2시~3시 사이에나 도착한다

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약속 같은 게 암묵적으

로 있나 보다. 하지만 마치 "한시 기차? 아~두 시

쯤 봅시다~" 이런 암묵적 동의에 속수 무책으로

당하긴 싫은데, 마음 속으로 항의해보지만 결과

는 한 시간 후에 올라타는 게 전부다. 드디어 기

차가 도착하고, 첫 인도기차에 첫발을 내디뎠다.

했어 /108

겉모습도 심상치 않더니, 아니나 다를까 정말 난

민촌이 따로 없다. 막말로 내가 뱅갈로르 를 가

는 거지 전쟁터에 가는 거야? 한 칸에 사람이 이

렇게 많이 탈수 있나 싶다. 바글바글한 인간개미

세상..게다가 내 자리는 더 끔찍했다. 손으로 열

어젖힐 수 있는 창문 틈 사이에는 온갖 종류의 날

벌레시체들이 바스러져있다. 게다가 기차의 자

리가 넉넉지 않아서 두 명이 하나의 침대를 써야

했는데, 작은 사람 하나 정도가 누우면 꼭 맞아떨

어질 침대에 여자애 두 명은 그래도 나은 편 이였

다. 남자친구들은 더 고생했다고 한다. 나는 소정

이와 둘이 누워서 가는데 자꾸 나만 떨어지는 것

이다. 소정이를 밀치고 자기에는 양심에 찔리기

도 하고 세상 모르고 자는 소정이가 진정한 승리

자인거지. 온갖 두려움에 떨면서 잠을 설치는 내

가 양보 해야겠다. 아직 10시간 정도 남았는데 눈앞이 핑핑 돈다.

아무리 잠을 자도 10시간이나 남아있고, 자리는

소정이한테 먹혀서 빈자리를 찾아 헤매는 부랑

자 신세가 되었다. 에어컨도 없어서 숨이 턱턱

막혀오는데 다가 후덥지근한 찜통 속에서 땀이

삐질삐질 나고, 심지어 저녁에는 살짝 쌀쌀하기

까지 한다. 이상한 날씨라서 적응이 안된 친구

들은 슬슬 감기 몸살 끼가 보이는데 앞, 뒷 칸으

로 날라 다니시면서 물 챙기랴~ 밥 챙기랴 바쁘

신 손 샘이 쉽지 않은 이동이라고 말씀해 주신

다. 눈물이 핑 돌면서 "맞아요 샘. 지부에 도착하

면 쓰러질래요"

한참을 더위에 뒤척이다가 드디어 새벽에서야

잠이 들었다. 이제 겨우 자나 싶은데, 문득.어디

선가 시선이 느껴지는 것 이었다. 맞은편 인도인

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도인들의

/109

크고 흰자가 넓은 눈은 가끔 무섭게 느껴지지만,

알다시피 그냥 쳐다보는 거다. 문득, 어제 저녁

공동 넷북을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얘기가 생각

난다. 슬그머니 겁이 나 가방지퍼를 체크해보니,

다행히 굳게 잠겨있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니 넷

북이 없어진 슬비는 얼마나 당황했을지 짐작 간

다. 내 경우에는 베트남에서 폰 을 잃어버린 후,

잠 잘 때도 가방도 꼬옥 껴안고 자고, 그러다가

가위도 눌려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가방을 베게

삼아 자면서 가방 끈을 목에다가 걸고 잔다. 숨

막히지만 내가 이러는 이유는. 아직도 쳐다보고

있는 저 인도인이 나는 너무 무섭다.

3

인도시간으로 am 1: 20분이다. 34시간의 빛나

는 기차여행의 종착점이 점점 다가온다. 물론 다

시 버스로 갈아타야 하지만 일단 너무너무 행복

하다.. 역시 인간은 장시간(?) 땅에서 떨어지면

체력이 고갈되는 연약한 존재라서 얼른 땅으로

내려가길 고대하는 중이다. 드디어 뱅갈로르 도

착. 무거운 배낭을 비몽사몽에 다시 짊어지고 내

려와 뜨거운 새벽 짜이를 마시며 한숨을 돌려본

다. 집이 그립고, 가족과 친구들이 너무나 보고

싶었던 37시간 이였다.

그 후, 손 샘이 쓰러지셨다. 몇 칠이나 열이 펄

펄 끓으시더니 결국엔 링거를 맞으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고생 많으셨어요. 손샘~

했어 /110

꼴까따에서 힌두푸르까지 35시간에 걸쳐 기차와 버스를 타고 도착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생명누리지부가 있어서이다. 생명누리지부에서 하는

일은 시골 마을을 개발하고 자립시켜 주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부에

는 지부장님과 한국에서 오신 자원봉사 자분들이 그 일을 도와주고 있

다. 우리 인디고6기는 지부에서 마을 지원센터로 개발된 마넴빨리 라는

곳으로 2주일간 머물게 되었다. 마넴빨리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물

탱크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미 민들레학교라는 곳이 물탱크의 골격을

만들어 놔서 우리의 할 일은 시멘트 작업이었다. 물탱크의 작업자는 생

명누리 자봉샘 2명 손쌤 그리고 인디고6기였다. 물탱크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손쌤과 한진을 뺀 남자들은 시멘트를 개고 뭉치고 옮기는

일을 하고 나머지는 시멘트를 바르는 작업을 했다. 약 사 흘에 걸쳐 작업

이 이루어졌다. 한국에서는 기계로 해도 힘든데 여기서는 일일이 손으

로 하다보니까 시멘트 작업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느꼈다. 어떻게

인도인들은 이렇게 힘든 작업을 기계를 쓰지 않고 손으로 한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일을 하면서 우리가 이런 작업을 한다는 것이 놀라웠

다. 남자들이 시멘트를 만들고, 여자들이 시멘트를 쉴 새 없이 벽과 바

닥에 바르다 보니 어느 샌가 완성해버렸다. 완성된 물탱크를 보았을 땐

놀라웠다. 이렇게 빨리 만들었다는 게 놀라웠다. 작업이 끝난 후 우리

인디고들은 시멘트를 바르던 손으로 친구 얼굴에 바르고 난리가 아니었

다. 이렇게 인도에 와서 좋은 경험을 해서 행복했고, 해보지 못한 일을

겪어보니 즐거웠다. 여러분 인도오시면 힌두푸르란 곳에 가셔서 마넴빨

리에 저희가 만든 물탱크 꼭 한 번 보고 가세요.

힌두푸르 한명수

만났어

/111

빨리는 원래 인도의 힌두푸르라는 지역에 위치한 생명누리 본부에서

지내던 개였다. 사람을 좋아하고 잘생겼으며(?) 다리 한쪽을 저는 하얀

색 개인데, 힌두푸르 지부의 사정으로 빨리를 '칼루르'라는 곳으로 보내

게 되었다.(칼루르는 생명누리 NGO가 운영하는 방과 후 교실과 모자 보

호 센터 등이 있는 마을 개발 센터이다.) 빨리는 힌두푸르가 그리워서 죽

으려고 한다. 칼루르 안에는 여러마리의 멍멍이가 서열싸움을 하며 지

내고 있다. 못난이(귀여운 암컷개), 외계인(밤에 보면 눈이 빨간), 빨리(

제일 잘생김), 땡큐(터줏대감) 이렇게 4마리인데 빨리가 칼루르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땡큐라는 터줏대감 개랑 마주치면 서로 으르

렁 거리기 바쁘다. (솔직히 빨리는 약골임) 그러던 어느 날에 둘이 또 마

주보고 으르렁 거리오 있는 거당! 무지 시끄럽게 급기야는 왕왕대면서

짖는데 그 시끄러움에 짜증이 난 나는 빨리에게 킥 아닌 킥을 날렸 것만

빨리 이슥끼가 내 발을 무는 거다! 콱 하고 또 콱콱.

너무 당황한 나는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는 발로 빨리에게 도망쳐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빠.. 빨리 이슥끼... 너.. 센캐구나" 숙소 안에 들어와

발을 들여다보니 엄머! 발에서 피가 뚝뚝뚝 그걸 본 일용이 오빠는 이상

한 나의 행동+표정에 왜 그러냐고 물어봐서 내가 개한테 물렸다고 하

니까 완전 심드렁한 표정으로 "피도 안 나는데?"라면서 자기할일을 하

는 거다! 헐, 남은 아파 죽겠는데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그리곤 나는

곧 빨리에 대한 배신감에 휩싸였다. 나는 빨리에게 몰래 쿠키도 주고 칼

루르 정자에서 둘이 같이 잠을 자기도 했는데!!! 빨리가 나에게 어떻게

~!!! 이럴 수 이써 흙흙힉흙!

지부장님이 서둘러 나에게 뛰어오시더니 밖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밖에

서 치료를 받는데 눈물이 줄줄줄... 주사를 맞는데 눈물이 줄줄줄... 그

날 저녁에 방광이 터질 것 같아서 화장실에 가야겠는데 발이 넘후시 아

푸공... 진짜 죽을 뻔했다. 그 일이 있던 후로 빨리는 조용히 나에게 다

가왔던 적이 많았지만 지부장님이 절 때 잘해주지 말라 그러셔서 빨리

를 내쳐내야만 했다. 흙 미안행... 하지만 그 후로도 지부장님 몰래 빨리

를 예뻐해 주기도 했고 여전히 먹을 걸 몰래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개들

이 으르렁 대면 (특히 빨리가) 나는 말리지 못하고 도망을 가기 바쁘다.

그래도 나는 빨리를 사랑한다. 인디고의 다수는 날 보며 널 문 개를 왜

그렇게 예뻐 하냐고 묻는다. 나도 모른다. 왜 빨리가 그렇게 사랑스러운

건지 이쁘니까 이뻐하지~ 빨리야 사랑해!

나쁜 남자빨리 이 율

쌌어

했어 /112

낙타와의 1박2일 데이트

김희영

낙타의 낭만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걷네.

낭만 같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가랑이는 찢어질꺼 같은데

낙타는 계속 뛰고 풀 뜯어먹고

정말 힘들어.. 매우매우..

걍 걷는 게 낳을지도...

아냐. 걍 집에 가자!

만났어

/113

낙타와 사막이 있는 그 곳, 자이살메르. 그곳에 인디고 6기가 떴다!

2011년 10월 31일 이른 새벽 데저트뷰에 입성하였다. 장시간 버스를 타 씻지 못한 꼬질꼬질한 모습으

로 식당으로 사용되어지는 옥상에서 취침을 하였다. 다른 팀이 사파리를 떠나서야 빈 방이 생겨 늦은

아침 숙소를 배정 받고 쉴 수가 있었다. 우리는 하루 동안 낙타 사파리를 하기 위해 안구를 보호해줄 선

글라스, 얼굴과 피부가 타지 않도록 해줄 스카프와 모자 등등 낙타를 탈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낙타와의 데이트가 시작 되었다. 인디고들과 낙타는 서로 눈빛 교환을 한 후 사랑의 짝대기를 통

해 개성 만점 커플들이 탄생했다! 이중에서도 희영이의 거대한 진상 낙타와 은민 언니의 예민한 엄마

낙타가 베스트 커플로 뽑혔다. 이 두 낙타가 제일 까다롭고 골치가 아팠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하겠

는가 자신이 선택한 낙타인 것을. 어쨋거나 저쨋거나 낙타를 타면서 인디고들은 즐거움도 잠시 고통을

호소해 가기 시작했다. Because 장시간 편하지 않은 넓은 안장 위에서 낙타를 타면서 다리 사이를 벌리

고 있는 탓에 가랑이가 찢어지기 일보직전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낙타 특유의 덜컹거리는 걸음걸이는

우리를 더욱 더 힘들게 하였다. 그러다 뛰기라도 하면 우리는 낙타를 부여잡으며 울고불고 난리를 피

웠다. 하지만 지금 울고불고 난리쳐도 소용없는걸 알기에 잠자코 사막을 향해 걸어가야만 했다. 2시간

쯤 걷다보니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다. 짜파티와 커리를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 얼씨구나

낙타끼리 풀 먹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도망간 노비를 쫓는 추노처럼 도망간 낙타를 쫓으러간 엉클. 시

간이 지난 후, 엉클이 도망간 낙타를 잡아왔다. 좋아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감이 안 잡히지만 다

시 낙타를 타고 사막을 향해 걷는다.

걷고 또 걷다보니 모래 언덕 사막 도착! 낙타가 도망간 덕에 늦게 도착했다. 근데 사막을 보며 "이게

과연 사막일까.."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래도 엉클이 사막이라고 말하니 믿는다. 무튼 드디어 낙타

에 내려 아픈 가랑이를 부여잡고 사막으로 뛰어 간다. 모래에서 뒹굴고 뛰고 씨름을 하니 온몸엔 모래

투성이, 입에선 아삭아삭 모래 씹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게 생각 외로 맛있다. 이걸 보고 있는

당신도 한 번 자이살메르에 가서 모래를 먹어보길 권유한다. 무튼 그렇게 신나게 놀다보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 저녁을 허겁지겁 먹다보니 벌써 광란의 파뤼 타임. 우리의 뉴페 효주t가 드디어 미쳤다. 광

란의 나이트 클럽 댄스를 추며 미성년자 인디고 들을 성인의 세계로 현혹시킨다. 그렇게 재밌는 밤이

흘러 흘러 야식타임이 되었다. 방금 저녁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구운 감자와 치킨을 미친 듯

이 흡입한다. 그렇게 밤은 오고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변들이 인디고들의 마음을 벅차게 했다. 정말로

식탁보에 설탕을 뿌려 논 듯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을 보며

행복한 마음으로 잠을 청한다. 다음 날 새벽, 으슬으슬 춥다. 침낭과 담요는 아침 이슬로 젖어 있었다.

일어나면서 다시 낙타를 타야한다는 사실에 괴로워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집에 가려면 낙타를 타

야하는 법. 근육이 뭉쳐 어제보다 더 아픈 가랑이를 부여잡으며 낙타를 탄다. 2~3시간 낙타를 탄 끝에

다시 처음 제자리로 오게 된 인디고 이제 낙타와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니 행복하고 후련함과 동시에 아

쉽다. 하루사이에 정이 들었나보다. 그러나 헤어짐에 끝엔 다음 만남이 있는 것! 다음을 기약하며 낙타

와의 데이트는 끝이 난다. 낙타야 잘 있어!

했어 /114

오늘은 드디어 인도에 가는 날이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아침

일찍 도착한 공항엔 모르는 사람 투성이다. 그나마 인도가기 전부

터 생명누리를 나가서 손정원 선생님과 은민언니만 안다. 비행기를

탈시간이 되자 공항에 나온 부모님, 생명누리 분들과 단체로 사진을

찍고서 몇 가지 검사를 거친 후에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와우-비

행기가 후져보였다. 역시 아시아나가 최고 인 듯하다. 무튼 나와 은

민언니는 자리에 앉아 어색하게 아무런 이야기 하지 않고 시간만 흘

러갔다. 약 4시간 후 말레이시아 도착. 우린 경유해서 가기 때문에

4시간 정도 말레이시아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그 동안 우린 한국 과

자들을 먹으며 영화 삼매경에 빠졌다. 첫 영화는 고양이. 별로 재미

없었다. 다음 편으로 넘어가서 이번엔 써니. 미친 듯이 웃었다. 중

간쯤 보다가 비행기에 탈시간이라 잠시 넷북을 접고 나서 다시 대

기실에서 보면서 또 미친 듯이 웃는데 승무원 아저씨가 우릴 이상

한 눈빛으로 본다. 뻘쭘 해도 어찌 하겠나 웃긴데.

6시간이란 시간이 흘러흘러

벌써 인도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비행기에서 내리니

공항 안에서부터 살짝 덥다. 검

사를 마치고 짐을 찾고 밖으로

나가니 허걱- 덥다. 그러나 생

각 외로 그리 덥진 않다. 그런데

인도인들이 내 다리를 보고 있

지 않던가. 손 쌤이 말하길 반바

지를 입어서 그런 다고 한다. 참

으로 인도란 나라 여자들이 살

기 힘들겠다. 그렇게 택시를 타

고 우리가 간 곳은 첸나이에 사

시는 이규열 선교사님댁! 와 정

말 쾌활하시다. 지금 아내 분이

뉴질랜드에 가셔서 음식도 선

교사님이 하셨는데 아직 까지

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렇게 해서 인도에서의 첫 날은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우린 선

희영이의

인도입성기 김희영

만났어

/115

교사님이 해주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집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간 곳은 다름 아닌 첸나이에서

가장 큰 백화점!! 인도 백화점들

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우린 살

짝 둘러보고는 영화관을 갔다.

어머 이럴 수가. 진심으로 이것

이 인도 영화관이던가. 정말 시

설 최고였다. 화장실은 우리나

라보다 더 좋았고 다른 시설들

도 한국이랑 비슷비슷했다. 우

린 3D 해리포터 마지막 편을 보

았다. 영화는 손 쌤이 쏘셨고 팝

콘이랑 콜라는 내가 쐈다. 얼씨

구나- 근데 인도 영화관은 3D

안경 빌리는데도 돈을 내야 한

댄다. 무튼 영어자막 나와도 난

해석이 불가능함으로 그냥 영

상만 보고 나왔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있었다. 영화를

다보고 나서 우린 KFC를 갔다.

저녁으로 패밀리 사이즈를 시

켜서 선교사님 댁에 가서 먹었

다. 나는 그닥 치킨이 안 당겨서

2조각만 먹고 은민언니는 "아..

후회 할텐데.." 이러면서 역시 2

조각만 먹고 저녁을 끝냈다. 지

금 와서 후회 하는 건데 은민언

니 말이 옳았다. 진작에 더 먹어둘걸. 왜 그땐 귀한 걸 모르고 남겼

지.. 하여튼 그렇게 둘째 날 밤이 지나갔다.

셋째 날 이제 말로만 듣던 인디고 작자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선교사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우린 떠났다. 4시간? 정도 버

스를 타고 나니 뿌두체리라는 곳에 와 있었다. 흐걱- 되게 덥다. 지

금 우리가 갈 곳은 사다나 포레스트. 거참 이럼부터 거창하다. 우린

대기되어 있는 택시를 타고 꼬불꼬불 길을 지나 사다나 포레스트에

도착했다. 바로 앞에 현지인 같이 생긴 여자애가 있다. 헐 인디고란

다. 그것도 막내 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나는 어쨌든 인사를 하였다.

와웅- 갑자기 인디고라는 남자들이 나와서는 인사를 하더니 짐을

번쩍 들머지고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앞으로의 4개월 여행. 정말 걱

정되고 무섭지만 '열심히 할 수 있다'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한 채 사

다나 포레스트에 발걸음을 옮긴다.

후 일 담

사다나 포레스트에서의 생활은 내게 충격을 주었다. 하루 3끼 채식은 크나 큰 고통이었고 손으로 똥을 닦으라고 해서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래서 몰래 휴지로 닦았다. 무튼 그 이후에도 열심히 적응해서 인디고의 미친 존재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했어 /116

아.. 덥고 힘들다. 우린

지금 남부 자유여행을 마

치고 자유여행의 마지막

종착역인 고아에 도착했

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고아 해변을 걷고 있다.

우린 자유여행의 손쌤 조

로서, 현주쌤 조 보다 며

칠 일찍 집합 장소인 남부해변으로 내려가고 있

었다. 같은 조에 남자는 손쌤과 나 그리고 한진

이. 여자애들은 어떻게든 따라오고 있었지만 산

더미만한 짐을 이고 있는 한 진이는 저~ 멀리 뒤

쳐져 있다. "다 왔어! 조금만 더 가자!"를 외치지

만 들리지도 않는가 보다.

그렇게 걷기를 한 시간, 드디어 손쌤이 찾아주

신 명당 호텔에 도착! 그 호텔은 우리의 예산보

다 오버했지만 호텔 내부에 근사한 레스토랑이

있고 10m앞이 바로 꿈에 그리던 해변이다! 우리

는 호텔에 짐도 풀지 않고 바로 해변으로 뛰어들

었다. 물놀이도 하고, 해변 근처의 요상한(?) 생

물도 잡았다. 길쭉하게 생긴 조개도 잡고 불가사

리, 심지어 물고기 시체까지;; 잡았던 것들을 모

아 놓고 꾸며보니 그럴싸한 아쿠아리움을 연상

하게 한다. 그리고 해변을 가면 빠질 수 없는 모

래성 쌓기와 모래찜질을 시작했다. 손 쌤께서 만

드시는데 정말 크다. 뭔가 많이 해보신 솜씨다.

구덩이를 깊게 파시더니 사람을 넣고(?) 얼굴을

뺀 전신을 묻어주었다. 답답하지만 시원하다. 한

참 묻고 있는데 여기서 손 쌤의 성형외과가 시

작된다. "몇 컵으로 하시겠습니까?" "F컵이요!!!"

묻혀있던 내가 웃겨서 묻고 있던 모래가 들썩인

다. "손님~ 가만히 안계시면 가슴이 흐트러지십

니다!" 모두 박장대소

한다. 아.. 묻혀있던 사

람은 나인데 사진 찍고

난리가 났다. 슬비는

올라타더니 얼굴에 모

래를 뿌린다. 에 퉤퉤

퉤퉤 열심히 놀고 이제

호텔방으로 돌아가자 "

우와~" 정말 넓고 깨끗

하다. 곧 인디고에게 더럽혀질 것을 생각하니 뭔

가 아쉽고 아까웠다. 애들 모두가 샤워를 하고 내

가 들어가 보니 역시나 바닥에 모래투성이다. 들

어오자마자 방청소를 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

어차피 매일 해변에 갈 텐데 굳이 청소를 해야 하

나?" 실로 맞는 말이었다. 이틀 후 현주샘 조가

합류한 이후로도 일정은 똑같다. 해변에서 놀기,

밥 먹기 해변에서 놀기... 우리의 일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 일정은 우리에게 제대로된 휴

식을 선사하였다. 시끄럽고 놀자~판인 북부해변

과는 달리 휴양지 느낌이 강한 남부해변을 선택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호텔 레스토랑

에서 먹은 점심은 정말 값 싸고 맛있었다. 이 역

시 가격 자체는 예산에 오버했지만, 스테이크나

볶음밥, 질과 양에 비교하면 정말 쌌고, 맛도 정

말 맛있었다.

현주 쌤 조가 합류한 이후, 우리는 각자의 자유

여행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회계는 밀

린 회계를, 에세이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인터넷

카페에 가서 한국에 못했던 연락도 하고, 가장 중

요한 것은 이제 다음 일정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제 100일 밖에 않는 상황과 여행을 더 즐겁고

다이나믹하게 하기위해 일단 우리는 각자의 '역

특별했어

/117

할 분담'을 하기로 했다. 장시간의 회의 결과 3가지 '파'로 나누었다. 조사 파, 행동 파, 생활 파였다. 조

사 파는 말 그대로 앞으로 갈 곳을 여러 가지 방향으로 조사를 하여 미리 준비 하는 조로서, 정일용, 그

뒤로 은경, 은민, 한진, 소정, 그리고 율이었다. 행동파는 실제로 현장에 가서 몸으로 움직이는 일들을,

가령 호텔조사나 물건 사오기 등등을 맡고 있는 조 로서 민성, 명수가 맡았다. 생활파는 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체크하고 구입해왔다. 혜진, 슬비, 희영, 평화가 그 일원들이었다. 이것들을 정한 후 각

자 앞으로 이동 할 인도 북부 지역들 중에서 가고 싶은 곳, 이유를 적어서 조사 파에게 가져다주어 루

트를 짜기 시작했다. 이런 일들은, 인도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됐다.

하지만 이렇게 천국 같은 고아 일정 중 반가운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있었다. 반가운 소식은 고아 일

정 중 우리 여행이 끝나는 d-day 100! 그날 밤 오랜만에 과자와 음료수를 모아 놓고 먹고 떠들고, 100

일 남은 소감들을 말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 와중 며칠 후 한 달이 넘게 같은 여행 동반자로서

여행을 같이 했고, 인도 남부여행 A조를 책임지셨던 현주 쌤께서 다시 자신의 일정으로 돌아가신다는

것이었다. 인디고에서 빠지게 되는 날이 온 것이다. 떠나시는 전 날, 인디고들이 쓴 롤링 페이퍼와 편

지들도 전하고 같이 마지막이 될 밤을 보냈다. 인디고에서 눈물을 흘린 친구들도 많았지만 그 뒤로 여

행하면서 가끔 일정이 겹쳐, 뵙기도 하였고 연락도 종종 할 수 있어서, 몸은 떠나셨지만, 현주샘은 아

직 인디고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1주일간의 휴양지 생활을 잘 보내고 다음 일정으로 정

해진 뱅갈로르로 이동한다. 1주일이면 길면 길수 있다고 한 그 시간동안 잘 쉬었고 다음 여행을 준비하

고 각오를 다시 다질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고, 아쉬운 일도 있었고 정말 즐거웠던 일도 있었다. 다시

한번 가 볼만한 좋은 곳이다.

했어 /118

함피 여행은 약간은 지루했던 마넴빨리, 칼루르 일정에서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이 세상에 존재 할 수

없는 풍경이라는 찬사와, 자유로운 음악가들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함피 일정은 출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기차 예약이 잘 못 되어 우리의 자리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 날 밤에는 결국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도착해서도 숙소 조였던 나는 숙소를 찾

아야했기에 잠시도 쉬지 못하고 숙소 흥정을 하러 다녀야 했다. 그렇게 해서 숙소를 잡고 나니 난 완전

녹초 상태가 되어 있었고 누워서 자고만 싶었다. 하지만 기대를 많이 했기에 숙소에만 있기는 아쉬워

돌아다니는데, 중심길 주변의 건물들이 모두 공사 중이라 그런지 내가 기대했던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돌고 돌다 찾은 '갈리'가 운영하는 뮤직 샵 여기서 젬베를 가르치기도 하고 악기를 팔기도 한단

다. 그리고 갈리는 내가 기타 치는 것을 보고 오늘 저녁에 잼 세션 (즉흥연주)을 하니 올수 있으면 오라

고 하는 것이었다. 기대되고 또 긴장이 많이 됐다. 지금까지는 기타를 가지고 거의 연습만 했지 제대로

공연을 하거나 다른 사람과 어울린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 저녁. 젬 세션이 진

행되는 카페로 갔다. 그곳에 마침 통기타가 있어 그 통기타로 치기로 결정! 사람들이 아직 오지 않아 나

혼자 기타를 치고 있었더니 서서히 등장하는 뮤지션들. 어느새 갈리를 비롯해, 각각 멜로디안(멜로디언

을 그렇게 멋지게 연주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저 어린이용 악기인줄만 알고 있었는데.)과 색소폰을

연주하던 서양인 아저씨 그리고 악기는 잘 다를 줄은 모르지만 무엇이라도 두들기거나 춤출 사람들이

특별했어

/119

모여 있었다. 갈리가 리듬을 깔아주어 그 위로 서서히 멋진 멜로디 들이 쌓여 갔다. 무아지경, 나도 거

의 아무 생각 없이 음악에 내 기타 연주를 얹었다. 중간에 기타 줄이 2개 끊어지긴 했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기타 줄이 1개만 없어도 크게 느껴졌지만 그때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연주

할 수 있었다. (근데 젬 세션이 끝나고 나서야 내 기타가 아니랄 걸 깨닫고 기타주인한테 사과했으나 쿨

하게 받아주었다.) 진짜 그 전에 있었던 모든 힘들었던 일들이 잊혀 지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그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가야 할 시간. 하지만 그날의 그 설레임은 아직 까지도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리고는 잠이 잘 오지는 않았지만 다음날을 위해 취침. 둘째 날은 첫날 보지 못했던 함피의

멋진 풍경들을 보기위해 자전거를 빌려 돌아다니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조금 벗어나자 금방

펼쳐지는 평원과 거대한 바위들 그리고 시원한 바람.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했다. 행복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자전거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아무 사원이나 들어가 간식을 먹기도 하고, 높은 곳에 올

라가 멋진 경치를 앞에 두고 기타를 치기도 하며... 어느새 서서히 해는 져 갔고 버스시간에 맞춰야 했

던 우리는 서둘러 버스정류장으로 향하긴 했으나 함피를 떠난다는 것이 많이 아쉬웠다. 사람들과 즐겼

던 잼 세션과 멋진 풍경들을 뒤로 하고 가기가. 좀 피곤하고 몸 고생도 좀 했던 일정이었지만 함피는

내가 있는 내내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아직 까지도 그때 '시간이 조금 만 더 있었더

라면' 하며 아쉬워한다.

원래 ‘잼(jam)’은 성적인 뜻을 지닌 흑인 사투리이지만

1930년대에는 재즈에서 즉흥연주를 한다는 뜻하는 사용

되었다. 재즈 연주자가 자발적으로 모여 애드 리브(ad lib)

를 경연하는 모임이나 그러한 연주를 말한다. 보통 스튜

디오나 클럽에 모여 연다. 미리 정해진 프로그램이나 리

더, 악보 없이 연주하는 것이 보통이다.

했어 /120

여행자들은 가이드북에 맹신하지 않는다.

내 눈으로 보고 느끼지 않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망감과 더불어 여행의 회의감이 밀려올 테니까.

비현실적인 공간에 흩뿌려져 있는 화강암과 고대 유적들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1 / 이들은 함피의 외계인들과 교감하고 싶었을까? 간절함이 느껴진다.

/121

1 / 이들은 함피의 외계인들과 교감하고 싶었을까? 간절함이 느껴진다.

함피는 그런 곳이다.

이상하리만큼 푸르른 하늘과

깊은 바람

이런 조합이 어우러질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면,

묘사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시간이 멈춘 함피로 초대한다.

2 / 신뢰와 믿음의 대명사. 한진 명수의 시원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의 순수함 느껴진다.

했어 /122

만났어

/123

했어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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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한 한 나라의 왕

김희영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만큼 몹시 사랑했지

그런 그녀가 죽자 왕은 슬픔에 잠겼어

그녀를 잃은 슬픔에 미쳐버렸지

왕은 죽은 그녀를 위해 무덤을 만들라 했어

무덤을 만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

만드는 동안 왕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어

아들은 왕을 죽이려 했지

왕은 아들에게 부탁 했어

이 무덤을 만들 때 까지 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그래서 왕은 감옥에 갇혀서 창문으로

무덤이 완성되는 걸 바라봤지

22년 동안 만든 무덤, 타지마할.

그 무덤은 그녀를 사랑한 왕의 마지막 선물이야

그러나 그 무덤을 만들면서 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었지

타지마할, 아름답고 예쁘기만 할지 몰라도

슬픔을 담고 있는 무덤이야

했어 /126

네팔 치과협의회는 몇 년 전, 이런 내용을 발표했다.

"네팔의 어린이들에게 사탕을 선물하지 마세요."

네팔 어린이들에게 아직도 사탕과 초콜릿을 선의의 마음

으로 선물하는 이가 있다니,

요즘에도 그러겠어? 싶어서 찾아가본 네팔은, 여전히 나를 보며

캔디!캔디! 를 외치면 졸졸 따라왔다.

꼬질꼬질한 얼굴과 손으로 캔디를 달라고 하면 마음이 약해져서 곧 잘 주고 만다

는 관광객들,

이해는 되지만 절대 해선 안 되는 행동들 중 하나다.

아이들 이빨이 썩어도, 아파도 치료를 못 받을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기 때

문이다.

대륙의 지붕들을 생존이 아닌 트레킹으로 즐기는 우리들이지만,

최소한의 배려와 다른 이에 대한 존중을 뼛속 깊이 배울 수 있었다.

/127

했어 /128

Merry Christmas!

여러분 혹시 들어보셨나요? 네팔의 고아원과 교회를 180도 탈바꿈 시

킨 인디고의 '폭풍 데코 팩토리'를요! 어~? 아직도 못 들어 보셨다고요?

이런~ 이런 알려드려야겠군요!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카트만두에서 사역을 하고 계신 조중현 선

교사님께서 지원하시는 고아원에 크리스마스 데코를 하기위해 3명의

아이들의 안내로 고아원에 갔습니다. 건물이 채 다 지어지지 않은 '공사

중' 인 3층짜리 벽돌 건물이었죠. 돈이 없어 '공사 중'으로 남아 있는 건

물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음이 찡해지지만 밝게 웃으며 "

나마스테" 를 외치는 아이들과 함께 웃으며 교회 예배당으로 사용 중인

3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같이 와준 승원이(조선교사

님 아들 -15세)가 네팔어로 통역해서 진행해주었습니다. 자기소개를 마

친 뒤, 인디고는 아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데코를 시작했습니다.

모빌을 만드는 그룹, 종이를 연결해 고리를 만드는 그룹, 그림을 그리

방소정

인디고 폭풍데코 팩토리

만났어

/129

는 그룹 등으로 나뉘어서 말이죠. 효주 쌤과 저, 은민 언니, 평화언

니, 혜진 언니와 일용오빠는 고리 팀이 되었습니다. 고아원 오는 길

에 마련한 종이, 가위, 풀 등으로 종이를 자르고, 아이들과 함께 풀

로 붙이며 놀고 있었습니다.

어.. 그런데 점점 손에 풀이 묻고, 종이가 안 붙기 시작합니다. 아

이들도 심심한지 다른 팀으로 하나 둘 씩 휭~... 모두들 지루함을

느낄 즈음, 효주 쌤께서 말투를 바꾸시기 시작합니다. "여보게나,

나 풀 좀 주시게", "자네는 고리를 만들 종이를 더 자르게나". "이봐,

얼른 얼른 해야지!"등의 사장님 말투로 말입니다. 그 뒤의 일은 일

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혜진언니-이사장, 평화언니-공장장, 나

머지-사원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공장은 설립되자마자 부도의 위기를 맞이하고 맙니다. 왜

냐고요? 바로.. 원재료가 동이 나고 만겁이다! 원재료를 구하기 위

해 팩토리는 재활용 되어진 종이를 쓰레기통에서 꺼내 자르고, 다

른 팀에서 빌려와 원재료를 어떻게든 생산해 내려 합니다. 완성도

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당연히 일정하지 않은 두께, 구겨지고 잘

려나간 종이들을 이어 그래도(완성도는 떨어지지만), 겨우겨우 우

리들이 필요한 만큼의 고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임무를 완료한

우리 인디고 데코 팩토리! 고아원 아이들과 네팔 라면을 나누어 먹

고, 장기자랑도 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서로서로 안아주며 헤

어졌습니다.

이틀 날. '밥퍼' 봉사를 가는 우리들. 차 속에서 효주 쌤은 일용오빠

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맙니다. 이유는 공장 지분과 주식!

효주T : 알았어. 알았어! 그러면 너 40, 나 40, 직원 10!

일용 : 그럼 나머지 10은요? '푸욱 - 간질이기!'

효주T : ok~! 45,45,10! 으악 - 그만 좀 괴롭혀~ 하지마 으악.

일용 : 싫어요. 50, 40, 10!

효주T : 아.. 알았어! 네가 최대주주 해라 - 다 먹어라! 다 먹어!

아이고, 결국 간질이기에 당해 주식과 지분을 거의(?) 몽땅 내준

효주 쌤. 그 사이에 밥퍼 도착. 그리고 봉사를 시작 했습니다. 열심

했어 /130

히 퍼주는 봉사를 끝낸 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은 또 다른 곳에 크

리스마스 데커레이션을 하기 위해 조 선교사님 사역지인 빈민촌의 작은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는 시궁창가 근처의 빈민촌에 자리 잡은 교회였

습니다. 이 빈민촌주변의 시궁창에서는 여름에 독한 악취가 올라와 사

람이 살 수 없는 곳 이라고 합니다. 그 말인 즉슨 도시 빈민들은 사람들

이 살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인데요. 가슴이 다시 저려왔습니

다. 그런 곳에서 사람들을 전도 하시려는 조 선교사님이 정말 멋져 보

이셨습니다.

그런 생각도 잠시, 곧 있으면 예배를 들이서 신도들께서 오신다는 네

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팩토리 몇몇 구성원들이 근처 큰! 문구점으로

갔습니다. 종이의 양과 질, 풀과 칼의 부족이라는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

자라는 의미로 좋은 색지 200장, 풀과 가위, 칼들을 더 사 왔습니다. 곧

1시가 되자 모두들 모여 크리스마스 캐럴과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다른 인디고와 팩토리는 열심히 모빌과 고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팩토리 내에서 결성된 팀이 있으니! 원재료 팀과 생산 팀!

/131

효주t : 원재료 팀은 어서 고리 만들 종이를 자르시게나. A4용지 한 장

당 24등분을 하시오! 생산 팀은 아이들과 고리를 연결 하시오! 원재료

팀과 생산 팀은, 미친 듯이(!) 자신들이 맡은 일을 -(사실, 정말 기계적

으로) 진행했고, 전 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길이의 고리를 완

성했습니다. 손쌤 께서 도와주셔서 깔끔하게 고리 데코를 끝내고도 너

무 많은 고리가 남아서 천장을 채우고 또 채웠답니다! 마지막-! 우리 인

디고가 꾸미기 전의 교회가 맞나? 싶을 정도의 교회가 예술적으로 완성

되었습니다! 짝짝짝! (역시 고리팀이 한 몫 했어!̂ )̂열심히 노력한 인디

고 속 팩토리의 활약은 역시 대단해!

뿌듯한 마음으로 선교사님 댁으로 돌아와 꿀맛 같은 밥을 기다리는데!

기도하시기 전, 조 선교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방금 전 여러분이 방문했던 교회에서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께서 여러분이 교회를 너무 예쁘게 꾸며주었다고, 감사하다고 전해달

라고 하시더라고요."

"우와 감동입니다! 저희도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렇게 우리의 팩토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효주 쌤께서는 말

씀 하십니다. "Factory will be back..!"

했어 /132

카트만두. 조 선교사님 댁에서 지내고 있다. 4

개월가량의 힘든 인도 생활을 마친 후 네팔로 넘

어와 ABC트레킹을 앞두고, 마지막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맛있는 한국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까지, 이곳은 천국이다!

조 선교사님 댁에서 지내면서 인디고가 주로 한

봉사는 '밥퍼' 공통체와 타파딸리 교회, 조띠 고

아원 등에 갔던 것이다. 밥퍼 공동체는 매일 아

침 일찍 맛있고 따듯한 밥을 해서 밥을 못 먹는

빈민어린이들에게 밥을 주는 곳이다. 나이기 어

리면 6살 난 애기도 있었고 중 고등학생으로 보

이는 애들까지 아주 다양했다.

우리는 캄보디아에서도 밥퍼 공동체에서 봉사

를 해 보았기에 자신감 가득 찬 상태로 봉사에 임

했다. 몇 명은 밥과 국, 반찬을 퍼주고 물을 떠다

주면 한명이 무릎을 꿇고 아이들 보다 낮은 자세

에서 "나마스떼", "사랑합니다." 등을 말하며 밥

을 건네준다. 가끔 너무 어려 자신의 힘으로 식

판을 들지 못하는 아이가 있으면 같이 가서 도

와주기도 한다. 또 몇 명은 돌아다니며 밥이 부

족한 아이들에게 음식을 채워주는 작업과 밥상

에 흘린 밥풀들을 치워 주는 작업을 한다. 물이

나 밥, 달 등을 들고 돌아다니면 아이들이 'once

more!'을 외친다.

카트만두 봉사 이야기 김민성

만났어

/133

어느새 식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가

면 식당은 엉망진창이다. 우리는 밥상위도 마저

치우고 바닥도 청소한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인

산더미 같은 설거지가 남아있다. 이젠 인디고 모

두가 발 벗고 나서야 한다. 큰 것부터 처리해 나

가며 닦는 작업, 씻는 작업 물 나르기 등으로 단

계별로 나누어져 설거지를 한다. 하지만 밥퍼에

서 일하시는 예리한 눈 꼬리의 아주머니께 서는

우리의 밥 접시를 빠꾸 내신다.(빠꾸란? 무언가

를 할 때 어설프게 할시 퇴짜를 놓다. 라는 의미)

다시 손이 아리도록 설거지를 한다. 다음 날 또

식사를 하러 오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 우린 더

열심히 했다. 어느 새인가 쌓여있던 설거지거리

가 끝나고 나면 이제 인디고의 식사 차례가 돌아

온다. 다 같이 감사기도문을 읽고 아이들이 먹었

던 똑같은 밥을 우리도 먹는다. 보람 있는 고생을

한 만큼 밥도 맛있다.

훨씬 기회가 많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생각은 필자

인 나뿐만이 아니라 인디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

한다고 믿는다. 이번 봉사들 모두 경험해 보았던

터라 앞으로 더 잘해 낼 수 있었고, 정말 보람찬

봉사들이었다고 생각한다.

했어 /134

/135

`다음날 근처 조띠 고아원으로 갔다. 그곳 아

이들은 어리면 6살부터 18살 까지 있는 가족 공

동체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이번 봉사는 전에 맥그로드 간즈때 '록빠'라는

단체에서 운영하는 록빠 고아원에서 봉사를 해

봤기에 아이들과 노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

이었다. 록바 때에는 인디고 한 명당 한 아이를

책임지고, 근처의 달라이라마 사원에 가서 놀다

오는 일이었다. 어떤 애기는 아장아장 걸으며 따

라갈 줄 알았었지만 몇 몇 아이들은 단 1초도 걷

질 않으려 했다. 사원에 도착하고 자율적으로 각

자 구경을 한 후, 다 같이 모여 애기들에게 바나

나와 음료수 등의 먹을 것을 주고 애기들의 장기

자랑도 보았다. 애기들은 각자의 개성이 담긴 귀

여움을 뽐냈다. 어떤 4살의 아기는 또래 아기들

보다 덩치가 컸는데 군가식 으로 한국 민요를 부

르기도 했다. 일정이 끝나고 다시 록빠 고아원으

로 돌아와 애기들을 돌려보내는데 뒤도 안돌아

보고 가버리는 애기들이 아쉽고 야박했지만 보

고싶다. 이런 록빠 고아원의 경험을 밑바탕으로

카트만두 조띠 고아원의 아이들과 놀려고 마음의

준비했다. 하지만, 고아원 입구에 들어서자 '이게

고아원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돈이 문

제였다. 고아원이라기 보단 거의 폐가, 흉가 분

위기 이었다. 이런 곳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과연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밝고 환하게 웃어주며 반

겨주는 아이들을 보자 그 생각은 한순간에 사라

졌다. 부족한 게 많지만 그 속 에서도 밝고 환히

웃을줄 아는 친구들인데 내가 울상 지을 순 없었

다. 그렇게 인디고들도 모두 웃으며 아이들과 장

난치고 게임하며 놀았다. 이번 봉사의 주된 활동

인 크리스마스 데커레이션을 시작했다. 아이들

과 열심히 놀기만 하던 인디고들은, 준비했던 재

료들을 꺼내 어설프게 꾸미기 시작했다. 그런데

옆에서 같이 만들던 한 아이가 너무나도 멋있는

장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곳의

아이들이 인디고보다 실력이 몇 수는 위였던 것

이다. 인디고는 '고리 공장'(일명 '링 팩토리') 를

운영하며 천장에 길게 장식할 링을 만들고 나머

지는 모빌들을 만들고 천장에 붙이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정말 어설프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

지만, 그곳 아이들이 도와주었기에 괘 그럴싸한

데커레이션을 마칠 수 있었다. 데커레이션을 마

친 후 아이들과 장기자랑도 하고 인디고가 소정

의 기부금도 전달할 수 있었다.

이 봉사들을 하는 동안 아이들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우리 인디고는 당연히 한국에 부모님도

계시고 집도 있는데 거의 모든 면에서 고아원 아

이들 보다 행복한,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다. 하

지만 인디고와 고아원 아이들의 행복 지수를 비

교해 보면 어느 쪽이 높을지 의문이다. 고아원 아

이들은 부모님이 없어도 행복하게 지낸다. 그러

나 부모가 없어서 못 받은 정과 관심을 우리처럼

같이 놀러오고 안아준다면 이 들은 더 큰 행복을

느낄 것이다. 인디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아이

들 모두가 적어도 이 고아원 아이들보단

했어 /136

벌써 한국에 도착한지 1달 정도 됐다. 트레킹하면서 내 얼굴이 울상이고 웃고 감동한 것도 엊그제 같은

데.... 시간이 참 빠르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이제 나의 파란만장했던 7박8일의 ABC(Annapurna

Base Camp)트레킹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처음엔 트레킹을 포기할까도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왜냐하면

나의 저질 체력으로 과연 ABC를 올라갈 수 있을까? 중도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걱정과 내가 많

이 뒤쳐져서 아이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을까? 등등 여러 고민에 휩싸여 살짝 방황했다. 뭐 나중엔 마

음을 다잡고 이 악물고 올라가겠다고 다짐했지만. 역시 명성에 맞게 트레킹은 쉽지만은 않았다. 정말

한번은 오르막길이 끝없이 나오자 정말 몸이 지치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나는 대나무 스틱을 눈에 던져

버리고 더 이상 못가겠다고 울어버린 적도 있었다. 진짜 내가 한국에서 편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생각

하며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께 감사했고 효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트레킹을 하면서 정말 힘들었고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언제나 내 뒤에서 나에게 화도내시고 격려해주

시고 응원해주시는 손쌤, 얘들보다 늦게 도착지에 도착하면 항상 웃으면서 서툴게 한국어로 "괜찮아?"

라고 말해주시던 가지엉클(우리를 가이드해주신 트레킹가이드 분), 그리고 항상 힘내라고 말하는 우리

인디고 아이들과 효주언니 이들이 옆에 있어서 포기하지 않고 힘내서 올라갈 수 있었던 거 같다. 올라가

면서 내내 드는 생각이 내가 17년 동안 살면서 조금만 힘들어도 도중에 포기하는 것들이 머릿속에 사진

처럼 한 장 한 장 스쳐지나갔다.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 내가 긍정적이고 좀 끈기 있게 했더라면 지금쯤

뭐 하나 건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당시 나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겼지만 시간은 되돌

히말라야 트레킹을 마치고 조은경

특별했어

/137

릴 수 없기에 뭐 후회하진 않았다. '앞으로는 살날을 걱정해야지.' 라고 다

짐하며 열심히 올라갔다. 올라가는데 설상가상으로 눈이 오기 시작했다.

정말 왓 더 헬이다. 다행히 다음날 한국 사람들이 아이젠 5개를 빌려줘서

한숨 돌렸다. 하지만 우리 인원은 14명... 휴~ 나는 오르막을 못 올라가서

결국 아이젠을 찼고 말았다. 정말 아이들에게 미안했고 눈치 보여 미칠 거

같아 울면서 열심히 올라갔다. 눈과 사투하며 드디어 정상에 즐겁게 올라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역시 손쌤 앞에서 질질 올라갔다. 정말 내

가 살면서 하루에 이렇게까지 울어본 건 처음 이였던 거 같다. 한 5번 울었

을라나? 엄마를 한100번 정도 외친 거 같고 올라가는 중간에 정말 김주현

오열을 했다. 정말 손쌤께 감사의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될지. 정말 20~30

분마다 못가겠다고 나를 버리고 가시라고 울면서 땡강 부리는 나를 정말

열심히 잘 끌고 ABC까지 올라가게 해주셨다. 손쌤 정말 감사해요.

역시 고생 끝엔 낙이 온다더니 정말정말 ABC주위 경관은 죽여줬다. 내

일생에서 봤던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주위에는 온통 하얀 설산 이였는

데 아이들과 미친 듯이 사진을 찍어댔다. 고산증세가 와서 도중에 소정이

가 포기하고 다시 숙소로 내려갔는데 같이 이풍경을 못 본 게 아쉬웠다.

정말 정상에 올라오니 가족들 생각이 많이 났다. 우리 엄마 아빠는 등산

을 좋아하는데 같이 여기를 오지 못한 게 아쉬웠다. 고통스러운 트레킹을

다시 오라면 거절하겠지만 엄마 아빠랑 같이 온다면 한번 생각해 봐야겠

다. 정말 지금까지 ABC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풍경을 마음에 담아두고 나는 아쉬움을 남긴 채 히말라야에

게 작별인사를 하며 하산했다. 올라올 땐 발걸음이 걱정으로 발걸음이 무

겁기만 했지만 내려갈 땐 다 끝냈다는 안도감으로 발이 부스터를 달았다.

마지막으로 산에 있는 온천에서 피로에 지친 몸을 풀고 후들거리는 다리

를 이끌고 드디어 트레킹이 끝이 났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7박8일 ABC트

레킹이 끝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트레킹이 힘이 든 만큼 정말 얻는 것도 많았던 거 같다.

그때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지금다시 돌아

가 트레킹을 하라고 하면 거절하겠지만 한10~20년 뒤에는 내가 자처해서

갈수도 잇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간 내가 다시 갈게 기다려 히말라야~~

했어 /138

수 고 했 어 , 긴 - 여 행 을 끝 낸 자 랑 스 런 너 희 들 .

/139

그 리 고

끝 나 지 않 을

우 리 들 의

이 야 기

했어 /140

"용기를 주세요"

여행의 끝이 보이는 지금 나

는 여행을 떠나오기 전 한국에

서의 나의 모습, 여행을 선택하

기까지의 과정을 쓰려고 한다.

내가 이글을 쓰려하는 이유는

지금까지는 용기 있게 나서서

하지 못한 말. "세상엔 여러분

이 잘 알지 못하는 '이와' 같은

길을 걷는 청소년들이 있습니

다."라는 작은 말을 나와 같은

시대를 사는 10대들에게, 그들

의 부모님들에게 전하고 싶어

서 이다.

나를 위한 인생의 첫 도전

나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

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일명 '

홈 스쿨러', '탈학교 학생'등 나

의 선택을 지칭하는 수많은 이

름들이 존재한다. 내가 학교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 여러 일들

이 있었지만, 그때 그 갈림길에

서 나는 학교에서의 배움 보다

는 그 밖 세상의 배움이 더 절실

히 필요했다. 나는 그때 나의 작

은 세상 고향을 벗어나야만 했

다. 내가 이러한 선택의 길로 가

기 위해선 제일 첫 번째로 부모

님을 설득시키는 과정이 필요

했다.

"제겐 믿음과 지지가

필요해요"

아마 나의 부모님에게 나의 선

택은 감당하기 힘든 큰 충격이

셨을 것이다. 나의 부모님들은

시골 분들이시고,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나 내가 살던 군내 학

교에서나, 나의 선택은 결코 흔

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더는 얘

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나 또

한 실망했다. 늘 내가 하는 일

에 응원해주시고 지지해 주신

분들이기에 나는 부모님의 동

의 없이는 나의 선택의 길을 가

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

할 수도 없었다. 나는 내가 하

고 싶은 것들을 분명히 말씀드

렸다. 음악이 간절히 하고 싶고,

더 큰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들

을 만나고 싶다고. 내가 지금 살

고 있는 이곳은 너무나 작다고.

10대의 선택 이슬비

끝났어

/141

지금까지처럼 응원해 주시라고

실망시켜드리지 않겠다고. 그

땐 나의 시야가 좁았으므로 대

학도 남들보다 먼저 들어가겠

노라고 약속드렸었다. 내가 끝

까지 엄마 아빠를 믿는 것처럼

나를 믿어 달라고. 어디서 주어

들은 이야기들과 내가 할 수 있

는 얘기들은 아마 다 했던 듯하

다. 다행히도 큰 상처 없이 부모

님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었다.

힘들지만 "힘듭니다."

라고 말 할 수 없었다.

나의 선택에 후회한 적은 없

었지만, 각오 했던 10대에 겪게

되는 사회는 결코 쉽지 않았다.

나의 목표가 흐려지기도, 선명

하던 미래가 깊고 깊은 어둠속

에 잠기기도 했다. 참 어려웠다.

해야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무엇부터 손에 집어 들

어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

다. 부모님껜 힘들다 한마디, 조

언 한마디 구하지 못했다. 자식

으로써 그 앞에 눈물을 보일 수

도 없었다. 그때 나를 수면 위로

끓어 올려준 것은 나의 친구들

이었다. 그리고, 점점 찾지 않게

되던 음악이었다.

나에게 음악이란

'어울림'이다.

듣고 있으면, 하고 있으면 행

복하고 힘이 나는 것이 음악이

었다. 내가 당당하게 믿고 덤빈

것도 음악이었다. 자취시절, 그

런 음악은 내게 힘이 되기보다

는 경쟁의 도구였다.

내가 음악을 하기위해 찾았던

음악학원은 입시를 위한 또 하

나의 학교였고 나는 음악으로

경쟁해야 한다는 것에 괴로웠

다. 그 때 대학에 대해서도 고

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 자

신에게 괴리를 느끼며 하루하

루를 살고 있던 시기 내게는 몇

몇의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생

겼다. 그들을 만나게 된 곳은 홍

대였다. 많은 이들이 음악을 하

러 모여드는 홍대. 나는 그때 까

지도 홍대에 대해 잘 모르고 있

었다. 그곳에서 내가 만난 친구

들은 평화를 연주하는 친구들

이었다. 그들 중엔 내가 시골

에서부터 존경하는 음악인도

있었다. 그들의 음악은 정말로

놀라웠다. 많은 소리들이 조화

를 이루었고 음악을 알던 모르

던 모두가 소리를 내며 동참 할

수 있는 그런 음악이었다. 그들

을 만난 이후 내게 있어 음악은

더 이상 경쟁의 도구가 아니었

다. 내가 누구이고 당신이 누구

이던 그저 어울려 함께 즐기면

되는, 사람과 사람이 만날 수 있

게 도와주는 중매쟁이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멀어졌던 음악

은 내게 다시 한 번 친구로 다

가왔다.

"미안해, 친구"

친구로 다가온 음악과 계속

함께이고 싶었다. 다니던 학원

도, 생계를 위해 해야만 했던 일

도 전부 그만두었다. 잠시 시간

을 갖으며 경쟁의 도구로 사용

되어져 버린 음악에게 사과하

고 싶었다. 진심으로 음악에게

미안했다.

했어 /142

나도 하고 싶었다.

'평화의 노래'

나는 평화를 노래하는 친구들

과 축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강화도에서 한 달간 축제를 준

비하며, 나의 마음에 여유가 생

기기를, 음악에게 사과 할 수 있

기를 바라며 열심히 했다. 그러

나 이것 또한 쉽지가 않았다. 모

두가 평화를 노래하는 그 가운

데 나 혼자 어색했다. 아무래도

아직은 마음에 여유가 찾아오

지 않은 듯 했다. 친구 음악에

게도 어색함을 느끼며 다가가

지 못했다. 그 때의 내 모습은

정말이지 실망스러웠다.

또 한 번 예전의 모습처럼 가

라앉을 수도 있었던 그때 그래

도 내게 이것 하나는 감사하다

싶은 건 많은 사람들과 친구가

된 것. 그들이 내게 준 가르침을

감사히 배움으로 받아드렸다는

것, 그들에게서 도망치지 않았

다는 것이다.

'에스꼴라 알레그리아'

드디어 내게도 선물이 도착했

다. 축제에 함께했던 한 친구가

내게 에스꼴라 알레그리아 (기

쁨학교) 라는 브라질 바투카다

팀을 소개시켜 주었던 것이다.

바투카다란 브라질 타악기들의

앙상블이다. 리듬과 리듬이 만

나 하나의 선율을 이루어 음악

이 되는. 나는 이곳에서 젬배와

여러 타악기들을 배웠다.

또,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수

많은 리듬들도 배웠다. '음악의

어울림이란 진정 이것이 로구

나' 내가 진정 음악과 친구가 되

는 순간이었다. 부모님께 '당당

하게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라

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연주

하는 하나의 리듬이 사람들을

춤추게 하였고, 옆에 친구와 대

화하지 않아도 리듬과 리듬이

서로의 마음을 전해 주었다. 내

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가

장 행복한곳. 무대에서 나는 그

모두와 함께였다. 그리고 그 시

절 나는 처음으로 나와 같은 길

을 걷고 있는 10대 청소년들을

여럿 만나 볼 수 있었다.

용기가 필요했던 기회.

두려웠던 선택

살면서 다시없을 기회가 갑작

스레 나를 찾아왔다. 나는 행복

했고 그 행복을 떠나고 싶지 않

았다. 하지만 그 분은 알고 계셨

던 듯하다. 그 행복에 안주하며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나

의 모습을. '인디고 여행학교' 1

년의 프로그램. 청소년들이 모

여 함께 떠나는 학교 밖 세상 공

부. 그땐 나에게 1년이라는 공

백이 생기는 것이 두려웠다. 그

때의 난 1년이라는 시간도 나를

위해 투자하지 못하는 겁쟁이

였다. 부모님과 약속했기에 고

등졸업시험을 봐야했고, 대학

문제로 또 한 번 고민하며 부

모님을 설득해야 했다. 무언가

에 쫓기듯 여유가 없었다. 그런

데 의외로 부모님이 보내고 싶

어 하셨다. 마음 한편 으로는 가

고 싶었던 나였지만 포기한 일

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오히려

부모님이 나보다 더 여유를 가

지셨다. 갈 수 있게 돕고 싶어

하셨다. 시험과 대학의 스트레

스에서 조금은 해방된 나도 단

체 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살짝

은 걱정이 되었지만 여행을 가

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

런데 그때 하나의 문제가 내게,

/143

우리 가족에게 찾아왔다. 그것

은 바로 자금 문제. 형편이 넉

넉하지 않은 집안 사정인지라

여행학교에 드는 비용이 우리

가족에겐 정말 큰 부담이 되었

다. 여행의 기회가 좌절되어가

는 순간이었다.

"잡아라 네게 온 기회를"

포기하고 있었다. 이미 많이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지만,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나오려고

했다. 그런 내게 친구가 자신의

기회를 나누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그

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친구

만이라도 시작 할 수 있기를 빌

었다. 안타까웠고 속상했다. 돈

이 밉고 싫었다. 정말 많이 울

었고, 기도했다. 기회를 가져가

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이번

에도 그 분은 다 보고 계셨었나

보다. 여행을 주최한 생명누리

에서 내게 말씀하셨다. "잡으렴

기회를" 많은 금액을 지원받으

며 여행을 선택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부담이 되지 않

을 순 없었다. 제주도 합숙 훈

련 중 그런 부담이 나 자신에게

또 한 번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던 적 이 있다. 그래서

또 한 번 여행을 가야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어

야만 했다. 그렇게 점점 지쳐갈

쯤 내게는 그전에는 없었던 수

많은 나와 같은 10대 친구들이

있었다. 나의 실수를, 나 자신은

정말 실망스럽다 느끼는 그 모

습들을 공감해주며 위로해 줄

수 있는 10대 친구들이. 그들은

내게 울지 말라고 했고, 힘을 내

라고 했다. 그리곤, 꼭 같이하자

고 했다. 그들은 내게 조언도 충

고도 해준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 때 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어렴풋이 남

아 있던 그 느낌. 나와 같은 10

대들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하며

세상과 맞서고 있는 그 모습. 나

는 혼자가 아니라는 그 느낌. 그

때 태어나서 정말 처음으로 소

리 내어 울어 볼 수 있었다. 슬

픔의 눈물이 아닌 고마움의 눈

물을. 그때의 내가 할 수 있이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그저 주

어진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

는 것뿐 이었다.

* * *

내가 주최가 되어 선택하는 모

든 일에 힘들지 않았던 적은 없

었다. 나와 같은 청소년들을 편

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선

이 버겁고, 고통스러웠고, 10대

로서 감당하기 힘든 책임을 져

야했으며 사회에서 10대라서 받

는 차별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였다. 늘 나 자신의

문제에 외면하며 숨어버리던

나였다.

그러나 여행이 마무리 되어 가

는 지금 나는 과거의 그때를 정

면으로 들춰내며 현재의 나의

모습을 당당히 마주하고 있는

중이다. 힘든 시간을 견뎌 온 지

금. 나는 나의 선택 중 그 어떤

것에도 후회하지 않는다.

했어 /144

인디고 6기. 9개월간의 기나긴 시간이 지나가

고 우린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학생

이란이유로 학교에서만 살아야했던 나 벗어나고

싶다고 몸부림도 쳐보고 소심한 반항도 해 봤지

만 결코 난 학생이란 타이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

었다. 부모님의 기대치에 닿아야한다는 부담감

에 지쳐있던 나에게 인생의 반환점을 준건 아빠

였다. 그러나 나에게 아빤 너무 어려운 존재였다.

대화하기도 부담스럽고 친하지 안다고만 느껴지

는 아빠였다. 그리고 이 여행을 하라며 아빠의 옆

에서 같이 설득시키던 엄마 또한 나에겐 너무 어

려운 존재였다. 항상 잠깐의 즐거움도 잠시 엄마

와 나의 어색함은 날 너무나도 지치게 했다. 애

기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서 자란 나는 중

학교 1학년 때 중간고사를 망친 후 여행을 시작

하기 전까지 총 2년 동안 나는 그 어색함에 힘들

어하며 지쳐있었다.

물론 이 여행이 그 어색함에서 벗어나기 위항

수단은 아니었다.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

아빠와의 어색함 원혜진

던 엄마 아빠 권유로 시작 된 것이었다. 난 부모

님의 곁에서 빠져나와 9개월간 여러 사람들을 만

나고 함께 지내며 웃고 울고 별별 일들을 다 겪으

면서 여행을 했다. 무거운 내 짐을 들며 땀을 흘

리기도 했고 따라주지 않는 내 몸을 질책하며 울

기도 했다. 한국이었다면 흘리지 않았을 땀과 눈

물을 흘리며 난 계속 여행을 했다.

그러다 여행 4개월째 되는 어느 날 인도의 깔로

르라는 시골에서 잠시 장작으로 불을 때는데 내

옷에 물든 나무 타는 냄새를 맡게 되었다. 어렸

을 적 담배 피는 아빠의 등에 업혀 잠들기 전 맡

은 냄새와 흡사했다. 정말 갑자기 4개월 동안 여

행하며 단 한 번도 보고 싶지 않던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 항상 피하고 싶고 어색한 사이 때문

에 힘들었던 그 아빠가 말이다. 아무리 딱딱하게

대했더라도 좋은 아빠 자상한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했을 아빠. 아빠가 너무 너무 소중해진 순간

이었다. 그 때 부터 난 가족들의 소중함을 깨우쳤

다 그리고 우리의 분위기가 어색했더라도 그 어

끝났어

/145

색함을 깨기 위해 아빠는 노력 했을 거라는 것도

느꼈다. 그 뒤부터 나는 여행하는 동안 인터넷을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아빠와의 메일을 주고받

았다. 아빠의 소식이 궁금했고 지금의 아빠의 기

분과 말투, 변화까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가

여행을 하는 동안 주고받았던 메일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옛날에 주고받던 메일과 지금주고 받는

메일은 너무나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딱딱한 말

투와 어색한 존댓말로 주고받던 옛날의 메일, 그

러나 지금은 너무나도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우리

의 메일. 나는 여행을 한 덕분에 아빠와 나사이의

벽을 깰 수 있었다. 물론 서로에게 실망 아닌 실

망을 느낀 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 실망

마저도 추억이 된 듯싶다.

이제 난 한국에 간다. 메일로만 주고받던 자연

스러운 대화가 현실이 될 차례인 듯싶다. 내겐 너

무 어려웠던 존재 아빠. 지금은 내 든든한 친구이

자 지원군이 되어준 것 같다. 그리고 메일을 자주

주고받지 못해 아직은 완전 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자연스러워지고 가까워진 엄마와도 여

행이 또한 어색함을 깨어준 듯하다. 이 자연스러

움을 잃지 않고 오래오래 부모님과 함께 행복하

게 잘살고 싶다. 9개월간의 여행을 끝내고, 아빠

와 그리고 엄마와 가까워 질 수 있게 해준 이 여

행에게 너무너무 고맙다.

했어 /146

어릴적 우리집은 무척이나 가난했었다. 겨울이

면 창문과 문틀에 성애, 고드름이 맺히는 단칸

월셋방에 다섯식구가 다리를 접어가며 누워 잠자

야 했고,문이얼어붙어열리지않는 그 작은방에

살림이라곤 아무것도 가질수도, 놓을 수 도 없었

다. 시장을 기웃거리며 떨어진 배추잎을 토끼준

다며 주워온 것이 우리집 밥상에 국과 반찬으로

올랐고 어물전 손님들이 가끔씩 놓고가시는 생선

머리를 개 준다고 얻어다 끓여먹곤 했다.

그 시절우리집은 개를 꽤 많이 키웠다. 돈벌이

수단으로. 개 밥준다고 중국집에 손님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밥을 모아다 끓여주곤 했었는데,가

끔씩 저녁밥상에 오르는 반찬에 낯익은 것이 보

이고, 이물질도 나왔지만 우린 아무 말없이 먹

었다. 그때 그시절은 우리집 뿐만 아니라 많은 사

람들이 어렵게 살았다. 판자집 움막에서 비를 피

해가며 그리 어렵게 살았던 그시절 그모습을 지

금 우리 아이들은 상상이나 할까. 아마 상상 할

수도 있으리라. 인도에 후미진 뒷골목에 묻혀사

는 천민, 아니 그들보다 더 어려웠을게다. 시대

가 변하였고, 세상이 변했다고 쉽게 말하는 젊은

이들 그리고 우리 아들 딸들.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 않키위해 흘렸던 많

은 땀과 노력, 나의 아버지,어머니. 가난하였기

에 월셋방으로 시작했던 많은 젊은사람들. 그때

는 사랑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결혼했었다. 요즘

은 결혼할때 조건을 맞추기 위하여 많은 빚을 지

고 허니문푸어로 전락한다는 보도를 보았다. 아

고라에는 질타에 목소리가높다. 하우스푸어가자

가용을운영한다. 왜 큰 빚을지고 아파트를 들어

갔냐~ 하며. 그것이 예전 우리세대와 지금에 세

대가 다른것이다. 우린 사랑했기에 결혼하였으

며, 그 이외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었는데.

많은사람들이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졌고 노력

하며 살아도 힘든 세상이라고 세상탓은 하지만

옛날그시절우리들도지금보다더많이어려웠을지

도모른다는것을아는지모르는지 많은 보도자료

조차 삼포세대 운운하며 잘난 기성세대들이 지

금 젊은이들을 더욱 좌절하게 한다. 가난이 결혼

에 걸림돌이 아니였고, 일자리는 더더욱 부족하

였으며, 출산은 테어날때 먹을것을 가지고 테어

난다고 믿어왔다 12시 통행금지, 그 많은 구속과

억압, 군부 독재정치 유신세대, 그리고 민주화

에 물결, 광주의거,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부정

내가 더 많이 변해간다 원상묵 (원혜진 아버지)

신기했어

/147

과 독재와 맞서싸운 의로운 세대. 책가방을 던지

고 길거리로 뛰쳐나간 세대. 반드시 그분들에 정

의로운 정신은 기억해야한다. 그래야만 나라가

산다. 그리고 우리가 산다.

나의 이런 이야기는 고리타분한 노인의 옛날 이

야기가 아니다. 현재 지구촌 어디선가 그시절

그모습으로 또다른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친구들은 보았을게다. 쓰레기더미를 헤쳐

가며 비닐, 플라스틱, 깡통조각을 주워 팔아가

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또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릴적 나는 보며 자랐지만 직접 그생활을

겪고 살아가시던 나의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메

이어 온다. 더 이상 기억을 떠올리기도 싫다. 생

일이지만 친구들이 집에 찾아올까봐 숨기고 살았

던 그 어렵던 시절을.

딸아...사랑하는 나의 딸아....

긴여행을 건강하게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것이

정말로 고맙다. 힘들고 지쳤을텐데도 아무런 불

평없다는것 정말로 고맙다. 여행에서 돌아온후

며칠동안 바라본 너의 하나도 변한것없는 모습

이 너무도 고맙다. 떠나기전날 보았던 그모습 그

대로 내가 사랑하는 아이에 맑았던 그모습 그대

로임에 정말정말 고맙다. 많이 변해버린 모습일

까봐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단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리는건 아닐까 하곤 걱정했었

다. 하지만 공항에서 밝은 너를 본 순간 괜한 걱

정했구나 하고 안심을 했다.

내가 처음 생명누리를 알게 된것은 강화에 "마

리학교" 게시판을 읽고였다. 이전에 다른경로를

통하여 여행경험을 했다는 여러가족 이야기를 듣

고 평소에도 생각은 많았었다. 그러한 주관적인

생각에 아이에 의견을 충분히 묻지도 않코 급히

여행에 합류시키게 되었다. 그저 평범하고 밝은

학생이던 아이가 많이 당황도 하였지만 고민하

고 생각할 시간도 주질 못했다.어떤 문제가 있어

사람되라고 보낸것 아니고, 무엇인가 바뀌어서

오라고 보낸것도 아니었다. 나도 어린시절 가보

고 싶었던 모험여행이었고 나에 아이들도 가 보

고싶을 세상일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여행을

통하여 작은 홀로서기를 직접 느낄수 있기를 희

망했다. 스스로 선택하여 살아가는 멋진 세상을

했어 /148

가지려면 어떤 과정없이 생각만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노력이라는 땀 없이는 열매가 맺히지 않는

다는 것을. 아이가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면서

그후로도 수십년을 생을 다할때까지 책임지는

삶을 마음대로 살아야 할때 그것이 훗날 얼마나

슬프고, 힘들지를 겪게되고 부모에 그늘아래 살

던 오늘이 그리워도 질수도 있을 것이다.

홀로서기. 그 이외는 아무런 이유가없었다. 또

다른 목적과 이유가 없었다는것이 조금은 미안

도하다.

많은 어른들이 회사, 집, 회사, 집. 재미 없이 시

계 바늘 마냥 돌고 돌며 물질만능 세상속에 굽신

굽신 살아가고 아이들은 학교, 교육이라는 틀에

박힌 울타리에서, 부모님에 그늘아래....해라 마

라~~ 강요 강요....

내가 짧게나마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니 의미있

고, 행복한 삶이란것은 별거 없더라는....

그렇게 젊은날을 틀에박힌 공부, 학습 한다해

서 행복한 삶을 살수 있을거라 말 못하겠다. 다

람쥐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세상에서 잠시 쉬어가

는 시간이 필요했다 여겼고 그래서 인생에 휴가

를 선물했다. 아빠는 환경을 제공해주었고 느낌

과 판단은 아이가 스스로 하는것이다.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것. 단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으면

만족한다. 살아가며 두고두고 꺼내볼수 있는 소

중한 기억이면 충분하다.

아이와 처음으로 주고받던 메일속에서 모르고

있던 서로에 진실한 마음도 느낄수 있었으며, 곁

에 있을 때 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

이 가족이고 사랑이란것을 또 배운다. 여행은 끝

나 또다시 곁에 있지만, 가끔씩 메일로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어야 겠다. 나의 아이이라는 이유 하

나만으로도 무조건 사랑해야 하고, 사랑받을 충

분한 이유가 된다는것을 또 배운다. 언젠가 내게

여유와 시간이 허락되어 진다면 아이가 걸어갔

던 그길을 같이해 보고싶다. 많은 사람들이꿈꾸

는 미지에 여행을 나도 떠나고싶다.

아니 떠날 것이다.

이제는 지금 아이들의 삶을 인정해야 겠다.어릴

적 눈물로 보았던 풍자적 코메디는 말장난 개그

로 바뀌었고 목로주점에 통키타 낭만을 찾던 젊

은이 모습은 소녀시대, 샤이니를 따라 춤추고 노

래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TV 채널을 돌리거나

못보게 하였던 개그프로를 같이 보아야겠다. 그

것 또한 지금의 문화라고 인정해야 겠다. 지금세

/149

대 아이들에 눈높이로 마주 보아야 겠다. 그래서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싶다. 어쩌면 나도 어릴적

겪었던 부모님세대와의 문화 차이, 갈등이있었

지 않았던가. 나의 주관된 생각이 옳타고 우기며

아이들를 내 기준에 끼워 넣지 말아야 겠다.

이번 여행을 다녀와서 가난한 나라, 열악한 환

경에 테어나지 않았기에 감사함을 느꼈을 것이

고, 티벳에 나라 잃은 설움과 억압을 보았기에 나

의조국이 있음에 감사함도 느꼈을 것이고 코끼

리 눈물과 거대한 히말리아 설산에 웅잠함에서

환경의 소중함도 느꼈을 것이고 여행지 기억을

돌아보면서 작은나라 한국에 태어난것을 감사하

게되었기에 아이들은 이미 애국자가 되었다.

이제는 조금더 성숙한 모습으로 돌아온 나의 아

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인디고 여행에 참

여했고, 조금은 불안했지만 완주하고 돌아왔다

는 그 사실하나로 충분히 장하다고.

돌아보았던 여행지의 많은사람, 여러나라에서

힘들거나 감동했던 자랑스런 기억을 하나, 둘 꺼

내보며 스스로를 대견해하라고.

쉽게 포기하려 했던 상황에서도 할수 있다는 자

신감을 얻었고, 내안에 숨어있던 능력까지도 일

부 보았지 않았냐고. 말해주고 싶다.

늘 걱정만 했던 젊은세대를 나에 아이 눈을 통

해 바라다 본다. 그리곤 믿는다. 앞으로의 너희

들 맑은 세상을. 모두가 행복하게 잘사는 참다운

세상의 정의로운 많은 일들을 반듯이 이루어 줄

수 있을거라고.

아이가 태어나 지금의 너의 나이가 되었을 무

렵, 소중했던 젊은날의 여행이었다고 말해줄거

라고.

잘될거야! 우린할수있어! 긍정의 힘이 엄하기

만 했던 고집쟁이 아빠의 생각이 변하고 있다.

했어 /150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집중적으로 하겠다며 (사실은 학교가 지겨워져) 학교를 뛰쳐나왔다. 그렇게 나오

고 보니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

서 딱히 어떤 결심도 없이 나오다보니 계속해서 방황하기만 했다. 어쨌든 빨리 아무 길이나 일단 선택

해야지 하며 급한 마음에 선택한 것이 기타로 대학에 들어가는 길. 버클리 음대에서 기타를 전공할 계획

이었다. 처음 시작 할 때는 야심차게 하루에 8시간에서 10시간 쯤 연습하는 계획을 잡았고, 나는 따라가

지 못했다. 오히려 그 일정에 스트레스 받으면서 더 많이 흐트러졌다. 그러나 나는 그 일정에 따라 오지

못하는 나만 질책했고 이 길이 내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시했다.

부모님께선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내가 안타까워 보이셨는지 나에게 유학, 다른 학교로의

진학 등을 제안하셨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제안된 것이 이 '인디고

여행학교' 이었다. 나는 당연히 거부 했다. 9개월, 아니 거의 10개월 동안의 이 여행은 내가 가고 있는

길(기타로 대학을 들어가겠다는 계획)에서 역주행을 하는 것과 같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여

행을 갔다 왔을 때 다른 입시생들을 따라 잡지 못하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부모님의 설득(혹

은 강요라고 해도 될 것 같다)에 결국 투덜거리며 제주도 합숙에 참여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의 생활은 재미있었다. 매일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 사건들을 인디고 애들과 같이

풀어가는 과정이 마냥 새롭고 즐거웠다. 이 애들과 9개월을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고, 투덜거

림은 여행에 대한 설렘으로 바뀌었다.

드디어 여행의 시작, 단동으로 가는 배에 올랐고, 제주도에서 느꼈던 즐거움이 그대로 펼쳐졌다. 자

유 여행을 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정말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 하지만 조금씩 지쳐가는 애들

나의 이야기 정일용

끝났어

/151

이 생기고 서로간의 갈등도 잘 해소되지 않은 채 자꾸 쌓여만 갔다. 그러다 결국 태국 시사아속에서 대

다수의 아이들은 힘들고 지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당시 나 또한 돌아가기를 원했다 비록 부

모님께서는 여행을 계속 하기를 원하셨지만 난 전혀 아쉽지 않았다. 그때까지 얻은 것이 많았고 남은 6

개월 동안 얻지 못할 것을 어디서든 채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자꾸 '내가 한국으로 돌

아가는 것을 정말 간절히 원하고 있나?' 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계속해서 스쳤다. 그 질문이 나를 자꾸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주장을 펼칠 수 없게 만들었고, 내가 진정으로 어떤 길을 원하고 있었는지 모

른 채 결국 결정 되는대로 따라갔다. 그래서 결국 9개월을 끝까지 가게 되었고. 하지만 그 때 깨달았

다. 남의 눈에 맞추느라, 그리고 남을 따라가느라 나를 잘 살피지 못하고, 남들과 다른 '나' 들은 계속

무시해 왔다는 것을. 그리고 계속 이렇게 가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자 그 동안 눌려 있

었던 '나'가 보였다.

그 잘나신 '나' 는 생각보다 도도했다. 태국 시사아속 이후의 5개월 동안은 정말 힘들었다. 내가 이 여

행을 계속 하고 있는 간절한 이유를 찾지 못해서, 그렇다고 한국에 돌아가야 할 간절한 이유도 보이지

않아서... 17년 동안 무시당했던 것이 자존심이 상했었는지, 쉽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 대답은 여행

이 끝날 때까지도 듣지 못했다.

이제 나는 또 다른 여행(어디로 다시 훌쩍 떠난다는 말이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을 시작하려 한다. 내

안의 '나'와 함께, '나'를 찾아, '나'를 위해 이제부터 또 다른 여정을 떠날 것이다.

내 마음이 열릴 때 까지...

했어 /152

정말 길고도 긴 9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꿈만 같다. 별 탈 없이 무사히 돌아온 것이 꿈만 같다. 아이

들 각각의 마음속에 이 여행이 어떤 씨앗들을 심었는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처음 여행학교를 선택할

때만해도 굉장한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갈등과 다툼,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감동의 눈물 등

등을 말이다. 여행의 한 장면을 상상했지 싶다. 6기 여행학교가 쓴 파노라마가 어떠했는지 잘은 모르겠

다. 다만 쉽지 않은 여행이었던 건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작년 이맘때 일용이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둔 상태였다. 기타를 공부하고 싶어 했고 대학진학이나 유

학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들은 너무나 부족했다.

" 나는 왜 내가 좋아하는 것도 열심히 하지 못할까?"

이것이 당시 일용이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문제의식이었다. 그런 질문을 가지고 일용이는 조금은 강

요(?)된 여행을 떠났었다.

일용이를 떠나보내고 참 많이 힘들었다. 정말 기도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마음을 잡기가 힘들 정도였

다. 기도의 내용은 단지 하나였다. "일용이는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불

안을 잠재우기 위해, 여행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에너지를 보내지 않기 위해 기도로 이렇게 마

음을 다스려야 했다. 기도 덕에 내 마음은 조금이나마 편해졌지만 일용이는 여행을 하며 몸 고생, 마음

고생을 무수히 한 듯했다. 다시 여행을 하겠냐는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다른 친구들에게 여

행을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단다. 얻는 것도 많지만 상처를 많이 받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어른들을 만족

시켜야 하는 여행이라는 느낌을 받아 더 힘들었다고 한다. 부모님들의 지나친 기대와 자식에 대한 맹신

이 자신들을 많이 힘들게 한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늘상 남의 눈치를 보며 생활했거나 그것이 싫어 갓

길을 가던 아이들이 여행을 하면서도 그 압박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한 듯했다.

다시 원점에서 김경예 (정일용 어머니)

신기했어

/153

아이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여러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아이들이 정말 힘든 여행을 했구나라

는 생각, 그 힘듦의 일정 부분은 어른들의 준비 소홀과 지나친 기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

이 많이 아팠다. 심지어는 내가 아이를 두고 도박을 했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그런 심정이었

다. 여행에 대한 막연한 꿈과 기대를 가지고 아이를 정말 위험한 곳으로 내몰았구나 싶었다. 어쩌면 세

상의 위험이 아니라 6기 여행학교 구성원 각각이 하나의 위험 요소였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이 아이들

에게, 아이들 각각이 서로에게.

9개월 동안 서로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았을까? 작게는 소소한 생활 습관부터 크게는 삶을 움

직여 나가는 주요한 동력들의 차이들까지... 때때로 어떤 것들은 단순한 다름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인 판단의 문제일 수도 있었을 테고... 사실은 크고 작은 위기 상황들이 아이들에게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가장 큰 기회였을터. 이런 각각의 상황들에 어른들이 얼마나 적절하게 개입해 도움을 줬는지

는 잘 모르겠다. 단편적으로 느끼기에 아이들은 그냥 자기 패턴대로 생활했고, 그 패턴들끼리 서로 좌

충우돌 부딪히고 끝낸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일용이에게는. 그래서 일용이가 상처라 표현하지 않았

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용이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을 '원점'이라 표현했다. 이런 저런 계획들을 다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 하는 지점에 있다고 얘기한다. 자유로워졌다.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공부와 입시로부

터 자유로워졌다. 무조건 해야 한다는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자유를 얻은 댓가로 외할머니댁에서

올해 꼭 대학에 가야 한다는 긴 설교를 들어야 했다. 내심 그 설교를 반겼다. 멋진 엄마인 척하느라 현

실의 문제를 얘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 그것만은 아니다. 일용이가 잘 하리라 믿기 때문이기도 하

다. 스스로롤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힘을 여행의 어려움을 통해 키워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지 며칠 안 되긴 했지만 지금의 일상은 9개월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마음은 평화롭다. 여유롭다. 일용이와 떨어져 있었던 9개월의 시간이 엄마인 내게도 약간의 내공을 키

워준 듯하다. 아이와 약간의 거리 두기. 지켜 보기. 떨어져 지내는 그 시간에 비하면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지, 그걸 알게 했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 지금 이 순간의 소박하고 작

은 행복과 평화로움이 여행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손정원선생님, 신효주선생님, 김선숙선생님, 신현호선생님, 윤재훈선생님, 그리고 6기 친구들을 도와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했어 /154

엄마_ 어떻게 해서 여행을 해야지라고 마음먹었니?

일용_ 애들이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을 많이 경험한 부분이 흥미 있었어.

엄마_ 인천항을 출발하는 순간 어땠니?

일용_ 별 느낌이 없었어. 실감이 안 났어. 서서히 여행이라는 느낌이 들

었지.

엄마_ 친구들과는 어떻게 지냈니?

일용_ 힘든 부분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 남자 아이들이 여자아이

들과 사이가 안 좋았어. 서로 좋아하지 않았어.

엄마_ 왜?

일용_ 이유는 모르겠어.

엄마_ 긴 시간 여행했는데 너만 모르고 있었던것 아니

야?

일용_ 모르겠어.

엄마_ 그런데 왜 해소하지 않고 가만 있었을까?

일용_ 귀찮아서. 그게 내 잘못이야. 딴 애들끼리

갈등이 많았어. 난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갈등

이 별로 없었어.

엄마_ 어떤 갈등들이 많았어?

일용_ 사소한 것들로.

엄마_ 서로 친한 것 같은데

일용_ 별로 안 친해.

엄마_ 크게 싸운 적도 있었어?

일용_ 몇 번.

엄마_ 넌 누구랑 싸웠어?

일용_ 평화랑

엄마_ 재밌었던일은?

일용_ 맥간에서 콘서

트 준비하는 과정이

재미있었고, 콘서트 전에

멋진 뮤지션들과 함께 했

던 잼 세션도 즐거웠어. 나

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줬

어. 기타 치면서 노래 하시던 미

국 할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씀이 가

장 기억에 남아. "너 기타는 잘 치는

데 여자한테 몇 번 차여봐야 더 잘 치

겠다" 그러셨어.

엄마_ 힘들 때는? 기타만 쳤니?

일용_ 거의.

엄마_ 애기도 안하고?

일용_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 없었어.

엄마_ 외로웠겠다.

일용_ 신현호 선생님 계실 때는 신현호 선생님하고는

얘기를 나누었어. 손정원 선생님은 너무 어려워. 선생님

이 무서운 건 아니고 어쨌든 다가가기 힘들어.

엄마_ 여행을 하면서 좋았던 점은?

일용_ 입시를 향해서 빨리 달려가고 있었어. 잠깐 뒤로 물러서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

엄마_ 떨어져서 보니까 어때?

일용_ 신기해

엄마_ 어떤 점이?

일용_ 내가 남들에게 많이 끌려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 그래서 내가

모르는 것들을 좀더 살펴봐야 되겠다 생각했어. 자유학교 선생님 말씀이 학원

은 입시위주로만 얘기하지 않느냐구. 나와서도 한 번 봐야되지 않겠냐고. 그 말

이 맞는 것 같아.

엄마_ 입시위주를 위한 공부는 하고 싶지 않다는 거구나?

일용_ 입시위주가 나쁘다는 건 아니고 학원 사람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던 것 같아.

엄마_ 어떤 선택인지 너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는 거지?

일용_ 그래야지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어. 너무 급하

일용이와 일용엄니가 나눈 여행 뒷담화

/155

게 결정한 것 같애.

엄마_ 시사아속은 어땠어?

일용_ 모기가 많어. 모기가 그냥 많은 게 아니라 엄청 많아. 엄청 독하고.

엄마_ 뭐했어?

일용_ 노동만 했어. 주로 모내기

엄마_ 꾀 안 부렸니?

일용_ 나 엄청 열심히 일했어. 제일 열심히 일했지. 나만 일할 때도 있었

어. 모내기를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엄마_ 사다나는?

일용_ 분위기 좋아. 내가 약간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영어도 잘 안되

는데다가 그래서 친구들을 별로 못 사귀었어.

엄마: 공동체들이 어떤 것 같아?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든다 그

런 곳을 만들고 싶다든가 그런 마음들이 떠올랐어?

일용_ 아니. 거긴 별로 살고 싶지 않아. 분위기는 참 좋은데

살기 편하지 않아. 난 편한 게 좋아. 영어가 통했으면 오

래 살고 싶었을 수도..

엄마_ 공동체 프로그램이 어떻게 다가왔니?

일용_ 의미 있게 다가온 점도 있고, 공동체 방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애들도 있고 좋아하는 애들

도 있었어.

엄마_ 애인은 사귀었어?

일용_ 무슨 애인?

엄마_ 애인. 사랑하는 사람.

일용_ 아니.

엄마_ 왜?

일용_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없

었어.

엄마_ 어떤 사람을 좋아하

는데?

일용_ 내가 어떻게 알

아?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야 알지.

엄마_ 네 또래나

동생들에게 여행학교

한 번 가봐라 추천하고

싶니?

일용_ 아냐, 절대 아냐

엄마_ 왜?

일용_ 물론 얻는 것들이 많은데

상처를 많이 받아.

엄마_ 왜? 어떤 부분에서

일용_ 여러가지. 그리고 힘들어.

엄마_ 한번 쯤은 권할줄 알았는데.

일용_ 프로그램을 바꾼다면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이 상태로는 아니야.

엄마_ 어떤 부분이 취약했던 것 같아?

일용_ 준비도 부족했고 여러 가지로 많이. 주체적

인 여행이 되지 못했던 것도 아쉬웠어. 주체적인 여

행이라고 하는데 너무 책임질 수 없는 게 많아. 활동의

제약이 너무 많았어. 우리가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엄마_ 예를 들자면?

일용_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잖아. 통금시간도 있었고.

특별히 가고 싶은 데가 있어도 꼭 같이 움직여야 하고. 그리고

여행이 끝나면 어른들을 만족시켜야 된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

어. 내가 만족하면 되는데 어른들을 만족시키려고 여행하는 것 같

은 느낌. 부모님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 선생님들도 그

런 강박관념에 약간 젖어 있었던 것 같아. 부모님들의 요구도 그렇고

처음부터 프로그램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잖아.

엄마_ 앞으로 어떤 계획들을 갖고 있어?

일용_ 정리가 안 되었어. 일단 기타는 쳐야지. 기타를 쳐야지 하는 생각밖에 없

어. 내가 여행을 하면서 다른 길을 보긴 봤는데 무었보다도 음악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어. 입시에 필요한 측면만 봤었는데 다른 음악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 다른 아티스트들의 삶에 대한 공부도 하고, 음악에 담긴 평론들을 읽는 공부

도 하고 싶어. 한 주에 한 사람씩.

했어 /156

120일간의 여행이야기 김희영

120일이라는 시간이 눈 120번 감다가 뜨니 어

느새 끝이 나버렸다. 처음 인디고 6기에 합류할

때 난 중2병을 심하게 앓느라 학교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15살이면 반항의 끝

을 보여주는 나이 아닌가? 나도 나와 같은 또래

의 애들과 마찬가지로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그

래서 어머니의 특급조치가 내려진 것이 바로 인

디고 여행학교로 입학하는 것\ 이였다. 처음엔 "

그까이꺼 쨉도 아니지! 초라하게 갔다가 화려하

게 돌아오자!" 이런 마인드로 여행을 결정했던 기

억이 난다.

하지만 내 희망사항은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산

산조각이 나버렸다. 더럽고 퀄리티 떨어지는 이

나라는 뭐지?! 정말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수준 이

였다. 길마다 기본 5마리씩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소들과 거기다가 똥을 얼마나 싸는지 길거리가

온통 똥 천국 이였다. 그리고 한국 시설과는 차

원이 다른 초 더티한 식당들과 버스 기타 등등..

내가 왜 학교안가고 여행 간다고 지랄을 했을까.

정말 후회하고 또 후회했었다. 그리고 난 중간에

합류한 터라 인디고 6기라는 그 틈에 들어가기가

참 힘들고 무서웠다. 벌써 지들끼리는 친하니까

재미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같

이 있으려니 참 어색하고 재미없었다. 하지만 나

의 초특급 울트라 사교성으로 인디고 6기의 '미

존'(미친 존재감) 으로 등극. '미존'이 되기까지는

정말 많은 고난과 핍박이 있었다. 솔직히 한국에

서의 나였으면 "이 따위 여행 다 엎어버려!!" 이

런 방식으로 나왔을 텐데 하나님이 내게 참을성

을 내려주셨는지 '참을 인' 자를 세기며 여행을 끝

까지 하게 되었다.

이런 나에게도 힘든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

다. 인도의 맥그로드 간즈 라는 도시에서 난 결

국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이 인디고

들이라는 작자들은 정말 내가 봤을 땐 내숭덩어

리들에다가 별의 별 엿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나를 갈구고 싸우는데...

그 땐 진짜 여행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그래

끝났어

/157

서 한국에 간다고 한참 동안 지랄을 하다 스트레

스성 위궤양이라는 병을 얻고 다시 여행을 가고

야 말았다. 아직 한국에서도 그 것 때문에 고생

을 한다. 무튼 그 만큼 여행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의 내 심정은

다른 인디고 6기 친구들에게도 있었던 일들 이었

다. 평화언니가 말하길 "너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 우리도 다 겪었어. 너도 이 고통을 겪고 있

다니... 생각보다 빨리 와서 놀랬지만 무튼 네가

진정으로 인디고 6기가 되었구나. 축하한다." 라

고 말했다. 거참 그 상황에선 그 말이 뭔 개소리

야 하면서 무시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간다. 그렇

게 한 고비를 넘기고 우여곡절 끝에 여행은 끝이

났다. 여행 끝나기 전 사건사고가 참 많아서 힘들

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다 미운 정 고운 정으로

남아버리고 내 삶의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제일 뼈저리게 느낀 것은 사람과 사람사이

엔 신뢰가 중요한 것인 걸 깨달았다. 신뢰는 쌓는

건 어렵지만 무너지면 훅~가서 참 힘들다. 그래

서 난 사회생활을 하면서 신뢰를 깨지 않는 그런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려면 일단

엄마와의 사소한 약속부터 지켜야 되겠다고 생

각했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아

빠의 그런 말을 꼭 꺾어버리겠다는 결심을 가지

게 됐다. 내가 여행을 하면서 제일 안타까운 점은

바로 '언어'였다. 난 영어를 지지리도 못하는 전

교 꼴지 여서 여태껏 여행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

게 통역해달라고 빌빌거렸었는데 너무 비루하지

않은가.. 그래서 난 영어를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행을 하며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학업' 이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내게 학교란 잠

자는 곳, 밥 먹으러 가는 곳, 친구 만나러 잠깐 놀

러가는 곳 이었다. 근데 여행을 하면서 생각이 많

아졌다. '내가 한국에서 예전처럼 똑같이 살면 내

20살 이후의 인생은 좆망이다' 라는 생각에 다급

해졌다. 내가 언제부터 공부를 안했는지 잘 살펴

보면 6학년 때 부터 점점 미치더니 중2때 최고치

를 쳤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초등학

교 공부부터 하면 옥스퍼드대는 껌이겠구나. 싶

어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한다. 초반은 좀 힘들

지 몰라도 내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겠구

나 싶다. 내가 공부한 만큼 미래의 남편 얼굴이

바뀐다는데 지금으로선 내 미래의 남편은 박 휘

순 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난 꼭 원빈 같은 남자와 결혼을 할 것이다. 지금

은 미친 소리로 들릴 진 모르지만 진짜로 난 꼭

잘생긴 남자와 결혼할거다. 그러려면 내가 스팩

이 좀 있어야겠지? 그래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무튼 이런 마인드를 가지게 해준 인디고 여행학

교가 참? 고맙고 나중에 혼자 인도나 가보련다.

그럼 안녕!

했어 /158

2011년의 4분의 3, 270일, 6480시간.

인디고 6기의 여행이 모두 끝이 나고야 말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시간들. 하지만 지금 생

각하면 아쉬울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버린 시간들아~ 누가 내 시간, 여행 돌리도~~!

4월 22일부터 2012년 1워 17일까지 우리는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중국 단동으로,

쉽지 않았던 호도협- 첫 트레킹, 처음 육로로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 장장 삼일을 걸친 하노이-호

치민 버스 표류(?), 중국에서 귀국했던 민성오빠의 캄보디아 합류, 태국 시사아속 친구들과의 만남과

인디고 분열위기, 인도 전원(?) 귀국, 사다나 포레스트에서의 생활과 희영이의 합류, 은민언니, 손쌤 복

귀, 세바그람 에서의 효주쌤의 등장, 맥그로드 간즈에서의 자선 콘서트, 네팔 카트만두서의 밥퍼 봉사,

포카라 에서의 ABC트레킹까지....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 '마냥 잘할 수 있을 거야', '9개월이면 금방이

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배에 올랐었다. 하지만 여행은 생각했던 것들과는 다르게 더디게만 느껴졌다.

하루하루가 일주일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위생도 별로 좋지 않은 곳에서 생활하거나 더운 것에 아쉬

움, 때로는 불만을 표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바보 같지(아하하;;;̂ )̂. 그때의 생활이 여행

중 가장 편하고 행복한 때였다는 것을 몰랐으니 말이다.

그렇고 보니 여행 초반의 많고 많은 사건 사고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호치민으

로 이동할 때 탔던 오픈버스였던 것 같다. 으아! 지금 생각해도 지긋지긋하다;;. 길어도 이틀이면 도착

한다는 오픈 버스를 타고 하루를 달리니~ 고장이 나 하루가 넘도록 길바닥에서 노숙한 우리. 열심히 차

를 뜯어 고치던 기사 아저씨가 결국 포기 하시고, 26시간을 쭈~욱 기다린 끝에야 하노이에서 오는 차

인디고 소정이 이야기 방소정

끝났어

/159

를 타고 호치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에고...;;음.. 가장 보람찼던 일을 말해볼까요??? 굳이 한 가지를

뽑자면 인도 맥그로드 간즈에서 티벳인 들을위한 자선 콘서트. 맥그로드 간즈에 가게 된 우리. 우연히

눈에 띈 한국어 전단지를 보고서 찾아가게 된 오아시스 카페. 나중에 알고 보니 NGO를 함께 운영하시

고 게신 티베트 분의 부속(?) 카페였다. 그래서 NGO를 위해 자선 콘서트를 계획하게 되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무사히 작은 콘서트를 마칠 수 있었다.(물론 다른 외국인분들의 도움도 컸다.)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젠가-하니, ABC트레킹! 생각보다 몸이 너무 잘 따라주기는 했지만, 힘들었던

건 사실이다. 배낭이 그렇게 무거울 줄이야. 처음 알았다. 여행 동안 맸던 가방 중 가장 가벼운 가방임

에도 불구하고 짐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천근만근 몸뚱이와 가방을 질질 끌며 갔다 온 트레킹.

수도 없이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힘들긴 했어도 여행의 끝이었다 생각하니 아직 아쉬움이 조금은 남아

있는 듯하다.

돌이켜보니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싶다. 9개월 동안 말이다. 한국이었으면 겪어보지도 못할 수많은 소

중한 추억들이 이젠 앞으로 나와 함께한다는 생각이 드니 왠지 가슴이 설레고 뿌듯하다.

수고 했어 소정아!!!

했어 /160

처음에는 내가 왜 이 여행을 온지 나도 잘 모르겠다. 부모님께서 9개월 간 내 또래학생들과 여러 개의

나라를 여행을 해보라는 권유로 여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제주도 합숙훈련 때 나와 같이 여행하는 애들

을 처음 만났다. 거의 형, 누나들이어서 내가 정말 이 여행을 무사히 잘 다녀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여러 가지 걱정이 들어서 여행을 간다는 선택이 후회가 됐다. 그러면서 4월22일 나는 걱정, 후회,

기대, 설렘을 가지고 여행을 시작됐다.

하지만 나는 이번 9개월간의 여행을 하면서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되었다. 첫 번째는 신뢰와 배려다. 왜

냐하면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여행을 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만약 서로 간에 신뢰

가 없고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행을 끝내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것

이다 . 두 번째는 내가 현재 누리고 있는 부분들에 대한 감사함이다.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가난한 사

람들을 보았다. 그 사람들을 보면 처음엔 구걸하는 모습이나 여러 가지로 짜증이 났는데 그런 사람들

이랑 입장을 바꿔 생각을 해보니 내가 부끄러웠다. 그 사람들은 돈을 벌기위해 어린애들도 조차 아무

런 투정이나 불만 없이 돈을 벌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공부나 일을 할 기회조차 없는 사람도 있

는데 항상 보면 웃고 있다. 반대로 나는 만날 사소한 것에도 투정부리고 했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9개월 간 여태까지 많은 사건 사고도 일어나고 남들이 해보지 못한 색다른 경험도 했다. 이러

한 경험들 때문에 나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여행을 다니면서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우리

끼리 많이 부딪혔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왜 그때 더 잘해주지 않았을 까라는 생각도 들고 여행 중에 만

났던 사람들에게도 감사한다. 그리고 인디고 6기 형,누나 그리고 친구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내가 못

되게 했는데 화내지 않고 웃으면서 이해해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어쨌든 9개월을 여행하면서 헛된 시

간을 보내지 않아서 다행인 것 같고 이제 평생 잊지 못 할 소중한 추억이 나에게 생겼다.

신뢰, 배려, 감사 한명수

끝났어

/161

나는 행복하다 박한진

난 여행을 통해 많은 것들을 깨달았고, 보고, 조금 느꼈다.

여행 초기 때는 부모님을 원망하며 이유도 없이 하는 여행이라 생각하고 항상 대충했다 . 뭐 그렇게

되든 말든.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도 않았고 모든 것이 짜증났다. 하

지만 여행을 하면서 조금씩 변해갔다.

매일하는 회의가 의외로 뜻 깊게 다가왔다. 매일 각자가 하나하나 느꼈던 것 들을 공유하고 다 같이

모여 마주보고 함으로서 그 순간만은 공동체에 한걸음 더 가까이 간 것 같았다. 회의 때는 말을 잘 안

했지만 말하고 싶은 것 들이 참 많았다. 표현을 잘 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해 항상 답답했다. 함께 여

행하면서 개인 간의 사정을 알게 됐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사람들이랑 많은 얘기는 나누지 않았다.

이때 다가가지 않은게 후회된다. 다른 아이들이 경험 할 수 없는 경험을 난 2번이나 하고도 또 낭비한

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배려, 나눔을 배웠고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의 눈이 더 커진 것 같다. 그 수

많은 가난한 아이들을 보며 내가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 수가 없었던 것 갔고 참 안쓰러웠다. 솔직히 여

행의 목적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깨달은 것들은 많다. 특히 기회는 한번이고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시 잡

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끝났어

했어 /162

처음 18살의 나에겐 9개월 여행을 다녀오라는 말은 큰 부담이었다. 보통의 나와 동갑내기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공부를 하러 다니고 있지만, 나는 그러질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남들은 접할 기

회가 없을 인디고 여행학교를 알게 되었다. 어머니께 인디고 소개를 해주셨지만 결국 9개월이라는 시

간 동안 다른 나라로 가서 봉사도하고 즐기고 오라는, 한마디로 정신 좀 차리고 오라는 얘기였다. 수십

차례의 거절을 온갖 설득으로 어머니는 꼭 나를 인디고에 합류시키고 싶어 하셨고, 결국 제주도 합숙

훈련을 해보고 결정 하라는 부탁에 처음 인디고에 합류하게 되었다. 제주도 합숙 훈련에 참가하기 전엔

합숙만 끝내고 집에 돌아가자 라는 생각이었지만, 합숙 훈련이 끝난 후 한번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

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으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고 그 문제들에게서 회피하고 싶었기에 결국 9

개월 여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처음 여행을 시작 할 때는 별의 별 부정적인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상

상하고 기대했던 '여행'이라는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편한 잠자리와 맛있는 밥 뭐든 편

리했던 한국 생활을 버리고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할까,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문에 다른 애들에게 까지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었다. 하지만, 점차 여행에 적응도 하고, 봉사 활동들

과 여러 가지 활동의 경험이 나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여행을 하며 배울 것도 많

고, 먹어볼 것도 많고, 특히 지금 남들은 못 하고 있는 9개월 여행을 나는 하고 있다는 점이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실로 여행학교가 나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인디고 여행을 하며 가장 큰 위기

였던 태국에서의 한국행 vs 인도행 문제가 터졌을 땐 나도 한국행을 택했었다. 그 문제로 인하여 손정

원 선생님께서 인디고에 문제를 해결하러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선생님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가 원하는 춤을 추기 위한 준비를 여행을 하며 하는 것은 어떤지" 이 전까지는 '아 이젠 정말

여행이 끝났구나.' 싶었지만 손샘의 설득력 있는 진심에 다시 여행을 계속하게 될 결심을 하게 만들었

다. 그 결심의 이유는 내가 한국에 돌아가 춤을 추고 싶다는 나의 얘기를 선생님께서 들으시고 아령과

몇 가지 운동기구를 주셔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이유였다. 그날 이후로 여행이 끝나고

이제 정신차렸습니다 김민성

끝났어

/163

한국에 가면 바로 춤을 출 수 있게 몸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춤을 추기위해 돌아가면 갈 만한 대학

들과 경로 등을 조사하고 부모님들을 설득 시킬 수 있게 준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의지

가 약해하지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여행을 통해 어설프지 않게 제대로 준비하고 결심한 계기를 긴 시간

동안 가질 수 있었다. 또 여행을 시작하기 전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문제들을 알게 되었고 몇몇 문제

점들은 실제로 애들과도 깨져보고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 고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들을 풀어가

는 과정 중에 생긴 트러블과 스트레스 또 한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끝까지 고치지 못한, 오히려 더 생

긴 문제들은 한국에 돌아가서도 고쳐야 할 숙제로 남게 되었다. 그간 나의 문제들로 인하여 피해를 본

모든 인디고와 선생님들께 죄송하다. 여행을 하며 내가 제일 심각하고 중요하게 여겼던 문제는 나의 집

안과 나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항상 부모님들에게 기죽어 있어 시키는 대로만 하다가 결

국 회피만 하고 해결하려 하지 못했지만, 여행을 하며 나의 확고한 의지와 목표가 생겼기에 집에 들어

가 부모님과 얘기하고 설득 할 용기가 생겼다. 이번의 길고 길었던 9개월 여행학교는 내가 올해 19살로

들어섰다는 점에서 정말 중요한 시기의 일이었다. 갈피조차 잡지 못해 방황하는 나를 무언가로 이끌고

결심하게 만들었고 여러 봉사들과 내가 쳤던 사고들,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깨우침을 주었다. 가장 중

요한 것은, 여행을 하며 인디고가 정말 싸우기도 많이 싸우었지만 점점 가족처럼 친근하고 서로를 이끈

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 얘들이 과연 나와 얼마나 깊고 길게 연락 할 수 있는 친구가 될까 생각이 들었

다. 이 여행 중 가장 큰 것을 얻었다 하는 것은 친구이다. 비록 완벽하게 잘 소화해냈다 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여러 가지 방면으로 나를 바꾸어 놓고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 고

칠 점도 찾게 만들어준, 모든 고생을 같이한 어쩌면 나 때문에 더 심하게 고생했을 인디고 모두와 선생

님들께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이글에 적는다. 1년을 통째로 한 학년처럼 같이 보낸 인디고와의 기

억들과 추억들은 절대 잊지 못할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했어 /164

벌써 우리의 9개월 대장정의 여행이 끝을 맺혔

다. 처음에 부모님께서 인디고 여행학교를 가라

고 말씀하셨을 때 정말 가기 싫다고 발악했지만

부모님의 집요한 부탁(?)으로 어쩔 수 없게 가게

된 여행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고향집을 떠나 여

행을 시작하고 아직 친하지 않은 아이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모두 나에

게 익숙하지 않았다. 초반에는 정말 집으로 돌아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루하루 모든 것

들이 불편하고 어색했다. 나에게 정말 최악이었

던 것은 바로 저녁마다 하는 회의시간 이였다. 회

의시간에는 어떤 의견이 나오면 그것에 대한 자

신의 생각을 말하며, 불평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말하고 풀어가는, 내가 살아가면서

접해보지 못한 생소한 방식의 진행이었다. 정말

나에게는 부담이 됐다. 나의 의견을 학교회의시

간에도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여기 와서 갑

작스럽게 하려고하니 어색하고 창피했다. 처음

에는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고 당황해서 나는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참석만 하고 뚱하게 쳐다

보고 있고 아이들이 어떡해하나 지켜만 보았더니

아이들이 나의 표정을 보며 항상 불만이 많은 표

정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때 정말 당황했었다. 그

말을 들으니 내 맘을 몰라주는 것 같아 잠시 화가

났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내가 말하지 않고

그냥 있기만 하면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하겠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걸은 나는 이 여행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초반에는 어색하고 서투르지만 나의 의견도 조금

씩 내비쳐보고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서로 간에

진지한 얘기들도 나누어보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나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볼

수 있었으며 나의 소극적인 한국생활에 대해서

반성도 많이 하게 되었다. 또 한국에서 하지 못

한 경험들을 하며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만들었다.

중국에서 분수대에 들어가서 놀아보기도 하고 베

트남 하노이에서는 한 -베 협력센터에서 베트남

얘들과 노래를 준비해 같이 합창대회도 나가고,

무지개같은 여행길 조은경

끝났어

/165

호치민에서는 아맙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만나 그

곳을 꾸미고 태국 불교 공동체인 시사아속이란

곳에 들어가 생활도 해보았다. 갈등도 있었고 태

국에서 조를 나누어서 4~5명이서 태국 자유여행

도 해보고 인도 오르빌 공동체 중 하나인 사다나

포레스트공동체에서 생활하며 노동하고 마넴 빨

리, 깔르루에서 지내며 방과 후 교실에서 아이들

을 가르친 일 맥그로드 간즈에서 기부공연 했던

것 네팔 카투만두 밥퍼 공동체에서 봉사했던 일

그리고 여행 하이라이트인 히말라야 ABC트레킹

을 올랐던 것 등등 정말 여러 가지의 추억들이 내

가슴 깊은 곳 에 하나하나 박혀 남아있을 것 같

다. 여행을 하면서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 그냥

일상적인 일들도 인디고 아이들과 같이하고 느끼

고 이 모든 것 들이 나의 한국에서의 삶의 원동력

이 될 거 같다. 생각해보면 웃음이 난다. 처음에

는 어색하고 불편해서 서로 같이 있는 게 싫었는

데 여행을 하면서 친해지고 싸우고 정들고 서로

를 알아가면서 정말 말도 필요 없고 나의 옆자리

를 지켜주는 든든한 친구가 되었는데 벌써 여행

이 끝나고 그 친구들이 내 옆에 없으니 벌써부터

이상하고 그립고 보고 싶다. 아마 여행 때 만큼은

많이 못 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멀리서라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고 날 믿어주는 나의 친구들이 있

기에 나는 앞으로 무서워하지 않으며 나의 길을

나아갈 수 있을 거 같다.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

은 여행이 막이내리고 이제 나는 현실로 돌아와

나의 길을 가야된다. 9개월이란 공백 아니 9개월

이란 나의 배움 어쩌면 나의 길이 힘들고 외롭더

라도 그때마다 이 9개월간의 여행을 생각하며 열

심히 걸어갈 것이다. 힘내자 은경아!!!!! 인디고

6기 짜요~~~~

했어 /166

중국을 시작으로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인도, 네팔을 걸쳐 9개월의 여행이 끝이 났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여행의 끝에 선 지금 지난 9개월은 나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 시간에 따라 인디고는 다른 모

습으로 다가왔다.

유혹으로 다가온 여행을 성장의 수단으로 선택해 달려갔던 초기. 초반의 나는 이기적이었다. 남을 위한

듯 보이는 행동들은 결국 나를 위한 내 발전을 위한 것들이었다. 어찌 보면 잘못된 그 방식은 가식을 덜

게 만들었다. 착한 이미지로 나를 포장하고 마치 희생하는 것 같아 보이게 했다. 9개월 어린 나이에 여

행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주변에서의 시선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그 부응에 맞추려고

또 가식을 떠느라 어느 순간 지쳐있었고 제대로 된 내 여행이 아니라는 느낌도 들었다.

한국에서의 휴식은 여행을 다른 시각으로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자만심에 쩔어 있던 내게 다가

온 한국 현실을 만만하지 않았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는 내 모습은 부모님뿐만 아

니라 나 스스로도 실망을 하게 하고 여행을 다시 시작하게 한 이유였다. 다시 시작하는 여행에서는 한

국 현실에 대한 도망(회피)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다시 시작한 여행은 많은 짐을 내려놓고 여

행을 즐기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억지스럽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으로 부딪히면서 고쳐나가

고 또 여행에 집중해나갔다. 그렇게 여행을 하다 보니 예전과는 달리 사소한 것에도 감사해지고 감동

할 수 있었다.

여행을 마쳐가면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의 한계가 보였다. 피곤한 일을 만들지 않고 싶다는 마음이 강

하게 자리잡아 있던 터라 힘든 시기를 같이 겪고 좋은 추억을 함께하고 있어 형제처럼 가족 같을 수 있

진짜 내 마음이야 이은민

끝났어

/167

었던 우리들은 그저 여행을 같이 한 사람들로 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던 것 같다. 끝에서 터진 문제들로

내가 맺었던 관계방식에 대한 잘못된 점들을 알게 된 듯 싶다. 잘못된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물론

고쳐나가기조차 매우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좀 더 진실되게 인간적으로 마음을 열고

서로를 신뢰하면서 때론 힘들 때 옆에서 같이 울어줄 수 있는 때론 따끔한 조언자가 되었어야 했지만 9

개월이란 긴 시간 속에서 만들지 못했다. 정을 주는 듯 보이지만 아웃사이더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

이었다. 세상에 혼자 있는 듯 한 느낌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가면서 그들의 소중함, 살아가면서 다시는 만나지 못 할 귀중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행에

서 완성시키지 못한 우리들의 관계가 앞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천천히 발전될 거라 믿는다.

앞으로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여행의 자유로움에서 벗어나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마

음 한 켠엔 있다. 하지만 믿음이 있다. 내가 세상 어디에 있든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뭘 하든 할 수 있

을 것이다. 예전과 뭘 하든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좀 달라졌다. 과거에는 자만심이었지만 지금

은 나 자신을 믿는다. 이은민은 이은민일 뿐이다. 스스로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 지금을 알고

충실하며 앞으로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믿는다.

여행을 통해 뭘 얻고 배웠다기 보다는 여행을 한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에 있던 친구들과는 다르

지만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을 것이다. 사람들과 행복, 슬픔, 기쁨, 아픔을 같이 나누며 함께했다. 솔직

히 여행을 통해서 배웠고 성장한 것들의 목록을 만들 순 없다. 뭔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 몸 속.

행동 어딘가에 자리 잡혀있을 것이다. 그게 보이든 안 보이든 내 안에는 1년이란 여행이 있을 것이다.

관점에 따라 내 여행에 쏟은 1년이란 시간이 아깝고 무의미 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난 만족한다. 무엇

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값진 경험과 추억, 사람들을 쌓았다. 나중에 살아가면서 종종 그 기억들을

떠올리며 행복해 할 수 있어 좋다.

2011년은 또 다른 세상을 알게 해줬다.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수

많은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여행이 끝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말이다. 처음 한국 현실이

일상이었던 나에게 삶이 된 여행, 일상이 된 여행에서 다시 돌아온 한국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

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쌓은 내면의 힘, 날 믿고 응원해줄 인디고 친구들이 있어 용기를 내어 다가가보

려 한다. 이은민! 너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멋진 삶을 살자. 이은민 파이팅!

했어 /168

4월 22일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배

에 오를 때 나는 울지 않았다.

부모님의 마중이 없어도 괜찮았고, 미처 연락

하지 못한 친구들이 있어도 서운하지 않았다. '

아, 드디어 나의 첫 배낭여행이 시작 되는구나'

뭐 그렇다고 미친 듯이 설레지도 않았다. 우여곡

절 끝에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음에도 왜 그렇게

건조했던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음식이 참 힘들

었던 중국을 거치고 미칠 것 같은 더위의 베트남

도 이겨내고 캄보디아에, 엄청난 사건이 있던 태

국도 무사히 여행해 나갔다. 내가 제일 가고 싶어

하던 나라 인도에도 상륙했고 그곳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사람들을 만나 여러 일들을

겪으며 많이 행복했다. 네팔에 도착해선 마음속

에서 꿈틀꿈틀 내 꿈이 자라나는 것이 느껴졌고,

그로인해 참 많이 벅차고 설레었다. ABC에 오르

면서는 '그래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 누구에게든 나의 꿈을 자랑하고 싶었

다. 한국에 돌아간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든 꿈

그래, 그래서 뭐하고 왔다고? 이슬비

속에서 행복하리라 신이 났다. 둥실 둥실 그렇게

계속 꿈에 부풀어 떠다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귀국 3일 전 부터인가 가

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착잡하더니 귀국 당일 비

행기 바퀴가 땅에 닿을 때에는 결국 울고야 말았

다. 왜 그런지 이유도 모르고 엉엉 울다가 차를

타고 집에 왔는데 내가 왜 그렇게 답답하고 착잡

한지, 왜 눈물까지 흘렸는지 그때서야 이해가 갔

다. 내가 잠시 현실을 잊고 있었다. 꿈에만 부풀

어 현실은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여행 막바지에

했어야 했던 일은 현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 방법을 찾아냈어야 했는데 아, 꿈에 너무 부풀

었는지 잊고 있었다. 조금 더 솔직해 지자면 외면

하고 싶었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거야', '모두가 나를 응원해 줄거야' 그

렇게 계속 나 자신에게 얘기하며 힘을 얻고 싶었

다. 그런데 정작 나는 가족들의 물음에 기가 죽

어버렸다. "그래 그래서 뭐하고 왔는데?" 봉사도

끝났어

/169

하고 여행도하고 사람들도 만나면서 많이 배우

고 참 즐거웠다고 신이 나서 얘기하려는데 "그래

서 앞으론 어떻게 하려고?" 설 명절에 찾아 뵌 큰

집에서는 "시험도 보고 학교도 준비해야 하지 않

겠어?", "공부는 때가 있는 거야 대학도 가고 취

직도해서 돈 벌어야지" 내가 외면하고 있던 말들

을 돌아오자마자 내게 쏟아 부으셨다. 공부가 뭐

가 공부인건지 학교 가는 공부만 공부인건지 취

업하는 공부만 공부인건지 내가 하고 온 공부는

보이지 않는 건지 참 답답하고 화가 났다. 세상

에는 배울 것이 너무나 많은데 삶을 사는 자체가

공부라고 생각하고 사는 나에겐 도대체 얼마나

더 무슨 공부를 해야 하나 하..하하 하는 헛 웃음

만 나올 뿐이다.

솔직히 나는 기대 했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나의 세상은 조금은 바뀌어 있지 않을까 하고 내

가 달라진 만큼 우리 가족도, 이곳도 조금은 달라

져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이건

내 기대만큼 "이 곳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어!" 하

며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이곳은 이곳의 상황대

로 미래를 꿈꾸며 계획했을 것이고, 나는 나의 상

황대로 미래를 계획했을 테니 말이다. 그저 상황

이 조금 달랐을 뿐이다. 나는 알고 있음에도 외면

한 사람이고. 그냥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여행을 통해 그 무언가를 찾기

를 바라고 떠나지만 그 것을 찾지 못했다고, 그

것을 찾았지만 활용할 수가 없다고 상처 받고 스

트레스를 받지는 말자는 거다. 내가 경험하고 온

많은 일들이 설명이 잘 되지 않고 나의 성장이 다

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기에 언젠가는 빛을 발하며

말하지 않아도 보이게 되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지금 여행을 마치고 막 돌아온 나는 공부도, 복학

도 좋지만 여행하는 동안 빠르게 성장해온 나 자

신을 돌아보며 너무 빨리 오느라 긁힌 곳, 헝클어

진 곳, 상처들을 치유하고 단정히 하여 이 현실에

서 어떻게 하면 내가 담아온 이 보따리의 선물들

을 풀어 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중이다.

여행 도중이나 한국에 막 귀국해서나 마음이

어찌나 안절부절 했던지 모른다. 그래서 일기장

을 뒤적이며 여행 도중 '이날은 앞으로 정말 힘이

될 거야' 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다시 용기를 되찾

았다. 이렇게 여행이 한 고비를 넘겨주었다. 앞으

로도 살아가면서 그 때를 떠올리며 얼마나 힘이

될지를 생각하니 참 아픈 거 많았다고 찔찔 짜던

여행이었는데 고맙고 소중하게 그렇게 공유하고

싶은 그런 여행이 되었다. 모두 끝나고 난 이 여

행이 내게 이렇게 소중한 존재로 다가왔듯이 내

가 여행 중 담아온 나의 배움 들이 다른 사람들에

게도 선물이 되어 공유 되었으면 좋겠다. 아, 네

팔에서처럼 다시 한 번 두둥실 떠오른다. 이번에

는 현실 속에서 말이다.

했어 /170

좋은게 좋은게 아니다 김평화

외로운 여행이었다.

남는 거라곤 사진뿐. 사진만 남는 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지만,

억울한 감정은 이미 사그라졌다. 억울함도 슬픔도 남지 않은 채 공허한 육체만 살아 돌아왔다.

살아있는 내 영혼과 정신은 인도 어디쯤에 버려두고, 몸만 살아 돌아온 곳은 바로 한국이다.

꿈에서도 그리워서 찾아가려 했던 한국인데 실제 오고 나니 내가 죽어서 왔다 는걸 알 수 있었다.

넘어진 것을 넘어졌다고 인정하지 않은채 어찌 살아 갈수 있을까?

여행은 즐거웠다.

남는 거라곤 추억과 우정들.

내 몸속 깊숙이 새겨진 여행의 추억들을 되새기다보면 웃음이 절로 흘러나오고 눈물이 쏟아진다.

어린아이 김평화가 20살이 되어서 돌아오게 되었다.

성장 통을 겪은 것이다....

예쁘게 포장해서 말한다.

그래 나는 성장 통을 겪은 것이다.

사람을 보면서 배우고, 꿈이 생기고, 생각이 깊어졌다.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속이 비어있다 는걸. 나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득 차 있고, 가슴은 내 인생에 통틀어 가장 따뜻하지만,

내 몸은 비었다.

끝났어

/171

외로운 여행이었다.

사람이 힘이다. 사람관계를 구축하는 게 능력이다. 사람이 미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은 홀로 외로이 하게 된다.

누가 그러라고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렇게 외로운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 여행 길이였다.

그래서 여행으로 만난 인연들이 진정한 관계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단순하고 가볍게 만난 사이를 깊게 엮어가려 하면 할수록 외로움은 깊어져만 갔다.

이제 진짜 여행을 시작하려 한다.

외로움을 느낀 여행이었다면,

이제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람 속에서 같이 여행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다.

내 여행은 이제 부터다.

했어 /172

누가 나에게 여행을 가면 살이 빠질 거라고 그랬다. 난 그 말을 굳게 믿었고 그런 줄 알았다. 그 말을 한

사람은 기억나지 않지만 날 싫어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여행은 정말이지 익사이팅하고 스릴이 난무했다. 화장실이 급한데 새벽이라 겁이 나서 참고 있을 때라

던지, 배가아파 급하게 설사를 눴는데 휴지가 없을 때라 던지, 기차에서 똥을 누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는 경우라 던지, 참을 수 없는 설사가 항문을 괴롭힐 때 화장실이 없을 때라 던지... 예쁜척하고 있

는데 인도인이 쳐다보고 있을 때라 던지 고춧가루 때고 있는데 현지인이 보고 있을 때라 던지자리 절대

안 비켜줘서 서로 자는 척 하며 힘겨루기를 했던 현지인 이라 던지. 고생한 기억밖에 없는 이유는 왠진

모르겠지만 나름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어서 좋다.

짧을 줄 알았던 9개월은 쭉쭉 늘어져 한 9년은 여행하고 온 기분인데 한국에 오니 한 9일 여행하고 온

듯 한 기분이다.가족들과는 많이 안 싸우는데 그건 그거 나름대로 짜증나는 일... 여행 할 때 보다 덜

활기찬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살이 많이 빠진 줄 알았건만 한 1키로는 더 쪘다. 아 짜증남. 안 그래도 살빼려고 내가 얼마나 노

력했는데 그래서 요즘은 아침하고 저녁을 안 먹고 점심만 먹는다. 배가 뒈지게 고플 땐 패트병 째로 물

을 들이마신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지만 뿌듯하다.

요즘은 나 말고 다른 친구들에게 이 여행을 가라고 추천중이다. 그것도 좀 오래. 공유 할 수 있는 고생

을 다 같이 하자꾸낭. 엄마는 나보고 날이 사라졌다며 좋아라 하신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나는 날을

세우고 다닌 적은 없었는데. 암튼 마지막으로 가장 아쉬운 건 다이어트 실패와 함께 밀려오는 서러움이

다. 꼭 성공하고 말테닷!! 내가 40kg때가 되는 날까지 나의 다이어트는 멈추지 않을테닷!

그리고 다시는 살 빼러 여행 안가!!

폭풍 다이어트 중 이율

끝났어

/173

했어 /174

나에게인디고는짐가방이다.

메고 가는게 힘들 수 있지만,

언젠가 꼭 나에게 필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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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성

했어 /176

나에게인디고는결단이다.

마냥 어정쩡하게 살고 싶은 나에게

1~10까지 결단하라고 주문한다.

결단력 없는 나에게 인디고란 결심과 결단이 맞는 것 같다.

/177

김평화

했어 /178

김희영

/179

나에게

인디고는

첫 눈이다.

내게 첫눈처럼

희망과 기쁨을

선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했어 /180

박한진

나에게 인디고는 인디고다.

인디고는, 한국가면 다 흩어지겠지만 마음은

그대로 뭉쳐있는 하나일 것이다. 각자 뿔뿔이

흩어져서 개인의 멋진 꿈을 찾아 과거 와는 다

른 길을 걸어 갈 것이다.

/181

박한진

했어 /182

나에게

인디고는

치어리더다.

언제나 나를 응원해 준다.

/183

언제나 나를 응원해 준다.

원혜진

했어 /184

이슬비

/185

나에게

인디고는

같은 사진 속

주인공이다.

내가 10대로서 그들의 추억속에

내 추억속에 그들이 10대로서 존재하는.

중학교 친구들 추억 속에

내가 없어 힘들어 하던 내게

힘이 되는 사진을 선물한 그런 존재들이다.

했어 /186

나에게 인디고는

버릇이다.

옳든 그르든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187

이율

했어 /188

이은민

/189

나에게 인디고는 친구들이다.

평생 만나기 힘든 인연들을 만났다.

언제나 마음만은 함께인 친구

했어 /190

정일용

/191

나에게 인디고는 성장 촉진제이다.

인디고는 마치 성장 촉진제를 맞은 것처럼 빠르게 성장

하게 했다. 하지만 너무 빨리 성장하는 과정이 조금 고

통스러웠다.

했어 /192

조은경나에게 인디고는 무지개다.

처음 인디고 아이들을 봤을 때 각자의 개성이 무척 강했다. 같이

함께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우린 지금 잘지

내고 있다. 난 다른 친구에게 많은 걸 배웠고 그 친구를 이해 할

수 도 있다. 애들 하나하나 생깔이 너무 뚜렷 하지만 같이 화합

하는 모습이 색깔 하나하나 뭉쳐 무지개가 된 것 같다.

/193

했어 /194

/195

방소정

인디고는 선물이다.

행복한 일, 슬픈 일들 모두 함께했고,

나에게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일깨워준 선물이다.

했어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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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수나에게 인디고는 벽이다.

내가 정말 힘들 때 그 벽에 기댈 수도 있지만

그 만큼 인디고들 사이에 벽이 있는 것 같아서.

했어 /198

함께했던 친구들기쁨 한결 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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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어 /200

손정원 선생님

김선숙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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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우리들의 쌤들

신효주 선생님

홍현주 선생님 신현호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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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우리의 6기 인디고 친구들에게

6기 여행학교 교감 정 호 진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아픔도 많았지만

그만큼 더 성숙해졌을 지구촌인디고청소년여행학교 6기 친구들

여러분의 성공적인 여행학교 완수와 보고회 준비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돌이켜보면 참 많은 느낌이 교차합니다.

지난 2011년 1월 생명누리는 아직 1년 여행학교를 준비하고

실천에 옮기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하여

1년 여행학교를 추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술용대표님과 1년학교에 참가하기를 희망하는 두 명의 학생들이 있어서

10명이 모아지면 해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씩 마음을 모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권대표님은 1년 여행학교를 책임질 교사를 내게 소개하셨고

학생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여 10여명으로 늘어나자

1년 여행학교는 막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있었던 국내 합숙훈련 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책임교사였던 선생님이 중도 하차를 하는 쉽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어렵게 다시 새로운 선생님 두 분을 선정하여 합숙훈련을 마무리하고

본래 계획했던 행로였던 인도가 너무 더운 계절이라는 이유로

배를 타고 중국 단동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여행학교의 첫 걸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단동 가나안농군학교에서 백두산을 다녀오고

북경과 쿤밍 등을 거쳐 중국일정을 끝내고 베트남으로 들어갔지요.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태국으로 들어간 여행학교 친구들은

태국의 시사아속공동체에서 생활하는 동안 다시 힘든 일들을 겪어야했습니다.

여행을 계속하기를 원하는 친구들과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친구들

그리고 인솔하는 두 선생님들이 계속 인솔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일이 생겨서

6기 여행학교가 중도하차를 해야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명누리에서는 손샘을 급파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했고

몇 명만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머지 친구들은 겨우 겨우 몸과 마음을 추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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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인도 마넴빨리에서 만난 6기 친구들은 어딘지 지쳐있고 의기소침해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런 모습으로 과연 남은 5개월을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다시 오뚜기처럼 우뚝 서서 마지막까지 예정된 일정을 잘 소화해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보고회를 준비해가는 모습이 참 대견스럽습니다.

인도 생명누리의 마을개발센터들에서 노동과 쉼으로 새롭게 충전하고

오로빌공동체에서 힘든 생태적 삶도 체험해보고

코다이카날 우띠 뱅갈로 함피 세바그람 등등을 거쳐

자이살메르 리시케시 바라나시 등 듣기만 해도 가슴벅찬 곳들을 돌아보고

배움의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네팔로 넘어가 히말라야 트레킹도 하고 밥퍼공동체에서 밥도 퍼주고

타파탈리 교회에서 성탄장식도 하고 마지막 마무리를 한 후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한국으로 돌아왔지요.

여러분들이 지난 1년간 돌아보았던 곳들과 체험했던 이야기들을

대충만 살펴보아도 숨이 가쁠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경험과 사건들을 가지고 있군요.

이런 사건들과 현장들을 돌아본 여러분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의 여러분들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일 것입니다.

외모도 달라지고 목소리도 달라졌겠지만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마음이 달라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달라진 모습으로 세상을 사는 여러분이 될 것입니다.

여행기간 동안 새로운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수용력 높은 사람이 되고

그동안 만났던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세상에 친구들을 두는 폭넓은 인간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함께 여행했던 친구들 덕분에 나 아닌 다른 친구들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가를 알게 되고

무엇보다도 그런 여행을 끝까지 잘 해낸 나 자신이 대견스러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이 여행에 참여해준 모든 선생님들도 참 자랑스럽습니다.

인디고 여행학교 6기 여러분!

여러분을 마음껏 칭찬해주세요. 여러분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지세요.

이제 달진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 세상을 안아주고 힘을 주세요.

여러분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멋진 세상으로 만들어갈 힘을 지닌

훌륭한 친구들이 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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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누리로고 The Logo of Life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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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원혜진

편집부

이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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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김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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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인디고 여행학교 6기 보고집

했 어

초판 1쇄 2012년 2월 16일

지은이 인디고 여행학교 6기

펴낸곳 생명누리

주소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409호

전화 02-766-5595 / 070-4010-4949

팩스 02-766-5596

홈페이지 www.smnuri.com

전자우편 [email protected]

발행인 권술용

편집책임 손정원

편집관리 민유니

편집팀 이슬비, 김평화, 원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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