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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수표교에서 4대 80년 송림수제화의 장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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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수표교에서

4대 80년

송림수제화의장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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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수표교에서 4대 80년

송림수제화의 장인들The Peoples of Songlim Handymade Shoes’s in Soopyo Street

발행일 | 2014년 12월 20일

글 | 하도겸

사진 | 최호식

기획총괄 | 정명섭

발행인 | 천진기

발행처 | 국립민속박물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37 전화 02-3704-3114 홈페이지 http://www.nfm.go.kr

제작 | 평사리 Common Life Books디자인 | 이승호

발간등록번호| 11-1371036-000178-01ISBN | 978-89-289-0089-3 (비매품)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글과 사진의 무단 복제 및 재편집 출판, 상업적 활용을 금하고 있습니다.

본문 내용 및 현지 촬영한 사진 자료는 국립민속박물관 홈페이지에 원문 제공을 하고 있습니다.

Copyright ⓒ 2014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을지로 수표교에서 4대 80년

송림수제화의장인들

The Peoples of Songlim Handymade Shoes’s

in Soopyo Street

9 788928 900893

93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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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회는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를 통해서 단기간에 눈부신 발전을 이

루어냈습니다. 디지털시대에서 소중한 가족 간의 대화가 점차 사라지듯이 우리들에

게 친숙했던 아날로그 시대의 다양한 직업과 직업인들, 도구, 기술 등도 소리 소문 없

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경시 풍조가 그 주요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든 커다란 빌딩과 같은 우리 사회를 이루는 구성요소의 하

나로서 저마다 기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무관심 속에서 하나

둘 사라져 가면 언젠가는 빌딩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급속한 발

전 속에서 고유의 가치관, 전통, 미풍양속, 민속 등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그 자리에 행

복 대신 불행이라는 어두움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를 늦추기 위해서는 지금이라

도 우리 곁에서 잊혀 가고 사라져 가는 것들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같이 살아가야 함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생태계에서 사라져 가는 동식물 등의 생물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

하는 한편, 소중한 유무형의 유산들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시화, 산업화, 정보화 속에서 소멸 위기를 겪고 있는 근현대 직업과 생활문화에 대해

발 간 사

서도 관심과 다양한 조명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관심을 가지고

타임캡슐을 만들어 두지 않으면 나중에는 우리 곁에서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그 절박함과 간절함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2011년부터 ‘근현대 직업인 생애사’ 사업을 통해서 《교동도의

시계 수리공과 이발사》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올해 2014년

에는 KBS TV 프로그램 <백년의 가게>(2012. 11. 25 방영)에도 소개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몇 안 되는 명장인 ‘송림수제화’의 4대 80년간의 역사를 알게 되어 이에 주목하게 되

었습니다.

창업 80년을 맞는 송림수제화는 우리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온

‘4대’의 인생역정이라는 생애사와 생업 활동을 통해 우리 근현대사를 다시 보게 해 줍

니다. 또한 서울특별시의 재개발과 난개발이라는 도시화의 정반합 과정에서 직업인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보여 주기도 합니다. 아울러 대량 공장생산에 맞서

서 사양길에 접어든 수제화 업계의 영고성쇠를 보여 주면서 삶은 무엇이고 직업은 무

엇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화두처럼 던져 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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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화 작업 공정은 우리 장인의 꼼꼼한 기술의 힘을 느끼게 해 줍니다. 서울 중구

수표로에 터를 잡고 6·25전쟁 직후 영국군 군화를 개조해 한국 최초의 등산화를 만들

면서 유명해진 송림수제화는 손님의 발 형태를 정확히 측정하는 일에서부터 모든 정

성을 기울입니다. 발의 길이, 넓이, 발등의 높이까지 재고 본을 만들어 재단과 재봉, 밑

창 제작에 들어가는 수제화는 평균 25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장인들의 손으로 완성을

향한 긴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신발은 이렇게 천 번의 손길을 거쳐 완성됩니다. 현재 작업장

을 지키는 7명의 직원들에게는 20년 넘게 신어서 닳고 닳아 다시 가게로 수선하러 돌

아온 신발이 직업의 자부심을 되새기는 증표입니다. 자신의 직업에 자존감을 가지고

사는 그들을 만나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송림수제화에 가면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유명인사들을 간혹 볼 수 있습니다. 40

여 년 전 이곳에서 등산화를 처음 구입한 산악인 허영호 씨도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 산과 수많은 히말라야 산맥의 고봉들,

남·북극 횡단에 나설 때 송림수제화에서 만든 등산화와 함께하여 자랑스러운 한국인

이 되었습니다. 이제 송림수제화는 이곳을 찾는 수십 년 단골손님들을 통해서 우리 수

제화 구두를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가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매달 장애인

센터를 돌며 장애인들의 발이 불편하지 않도록 ‘슈즈닥터’로 자원봉사를 하는 송림수

제화 임명형 사장 내외를 비롯한 직원들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송림수제화의 창업자, 그리고 4대째 가업을 잇기 위해 제화과를

다니는 증손자들까지 그들의 삶의 기억을 공유하면서 우리 근현대사 속에서 재조명하

고자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작업의 과정, 사용된 도구 등의 ‘송림수제화의 모든 것’

에 대한 사진 및 동영상 자료도 확보하여 다음 세대에 타임캡슐로 전달할 예정입니다.

이 타임캡슐에는 오늘의 송림수제화를 있게 한 직원들, 손님들을 포함한 20세기 우리

들의 자화상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12월

국립민속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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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수제화 4층 공장에서 보관 사용하는 목형(라스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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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수제화 4층 공장에서 수십 년 사용해 온

펀치(왼쪽), 망치(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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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수제화 3층 매장에서 환담하는

임효성 회장, 허영호 대장, 임명형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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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4

일러두기 14

조사 개요 16

Ⅰ. 수제화의 역사와 송림수제화 21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43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99

Ⅳ. 수제화의 제작과정 135

Ⅴ. 다양한 수제화 제품과 제작 도구 173

Abstract 192일러두기

◎ 구술 자료는 인용문으로 처리하였으며, 구술자의 이야기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

문법에 따른 교정을 하지 않았다.

◎ 중복되는 내용은 말줄임표(……)를 사용하여 생략하였다.

◎ 조사자의 질문 내용은 구술자의 답변 속에 있을 때 생략하였다.

◎ 도구의 길이 단위는 Cm이며, 도구의 명칭은 구술자의 진술에 따른다.

차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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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7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조사 개요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2011년부터 우리 주변에서 소리 소문 없이 점차 사라져 가

는 근현대 직업인의 생애사와 물질문화에 관심을 갖고 그 직업인이 지닌 무형적인 직

능과 유형적인 물질문화에 대한 조사 및 기록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장인의 기술적

인 능력과 함께 재료와 도구 등과 관련된 유·무형의 문화는 우리의 근현대 민속문화

와 직결된 것이며, 급속한 산업화와 더불어 장인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지금이야말로

이에 대한 관심이 절실하고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생애사(life history research) 연구는 특정 개인의 생애에 대해 탐구하는 질적 연구 방법으

로 최근 역사학,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문학 등의 인문·사회과학 전 분야에 걸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방법은 개인과 관련된 일화와 역사적 사실을 연계시키고 그

자료를 분석하여 개인의 생애에 대한 역사를 풍부하고 상세하게 기술하는 것을 목적

으로 한다.

급변했던 우리의 근현대를 살아온 직업인, 특히 장인에 대한 생애사 연구는 20세

기 이후 우리가 처한 현실을 미시적으로 관찰하는 데만 머물지 않는다. 파란만장한 근

현대사의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도전과 응전으로 꿋꿋한 장인의 주체성을 부각시키

고,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서도 자신의 삶과 운명을 개척해 가는 소박하지만 위대한

여정을 생동감 있게 설명할 방법이 바로 생애사 연구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가 중요한 까닭은 한 직업인의 생애사로 이 시대의 전체 생활사를 접하

게 하는 열쇠가 될 수 있으며 이로써 부분과 전체의 대화, 특히 ‘소통’을 가능하게 하

는 기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근현대 직업인의 생애사 조사는 당장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우리 주위

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는 일반 민중의 생활을 기록한다는 점에 주된 목적을 두고

진행하였다. 하지만 이번 송림수제화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왜냐하면 1936년 이래 창

립 8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도 창업자의 증손자에 해당하는 4대가 함께 일하고 있어

서 앞으로도 계속 가업을 이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맞춤구두, 즉 수제화 산업은 이미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제화들에 밀려 사

양길에 들어선 지 오래다. 이미 제작 공정 모두가 기계화·자동화되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으로만 구두를 만드는 것은 그 명맥이 거의 끊어졌다. 그런 측면에서

송림수제화는 수제화 업계에서도 인정하는 현재 유일한 ‘백년의 가게’일지도 모른다.

본 조사에서는 우선 이러한 생애사 조사방법을 통해 이야기를 구술하는 장인 당

사자들과 그들을 지켜봐 온 고객 등 제보자들의 기억을 기록하고 공유함으로써 장인

들의 직업과 관련된 개인적 삶을 지역사와 근현대사 속에서 재해석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직업은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 인자로서의 가치 및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의 역할

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급변하는 사회의 요구에 필연적으로 커다란 영향

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방적인 영향을 받는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 장인

의 시대적 요구 역시 역사성을 띠기 때문이다. 우리 중요 유형문화재들의 역할처럼 근

대 산업사회에서 최선을 다해 일해 온 우리시대 장인들의 삶 역시 그 자체가 역사이

기도 하다.

조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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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9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조사 개요

장인들의 생애사를 통해 전체 사회의 변화상을 다 살필 수는 없다. 다만, 장인들이

속한 산업의 성쇄와 부침 속에서 근현대 산업사도 역동적으로 관련성을 지어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인이 활동하는 지역과의 연계 역

시 해당 지역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기에 최근 지역사회는 새로운 마을 만들기

와 마을 발전을 위한 각종 사업 프로젝트에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중소상공인들을 초

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지금까지 해 온 바대로, 근현대 직업인이 사용했거나 사용하고

있는 소장 도구와 기계, 그리고 재료와 제품 등을 용도별로 조사하고 기록하는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물건들에 대한 개인의 기억은 개인이 구술하는 생애사와

생활사의 부족한 부분을 메울 수 있는 중요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조사 대상자가 소장한 도구 등의 용도, 역사, 그것과 얽힌 일화를 통해서 우리는 인

물이나 사건사적인 접근과는 달리 주제사별로 직업인의 생애에 접근할 수도 있다. 결

국 본 조사는 직업 관련 물질문화를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재조명하여 한층 더 직업인

에 대한 인식의 틀을 확장시킬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

‘근현대 인물 생애사’ 조사는 총 4기간으로 나눠 진행되었다. 3월 말까지의 1차 조

사에서는 조사 대상자를 선정하고 방문하여 살아 있는 관계자들과 소장하고 있는 도

구 및 기계 등의 자료, 전 작업 공정에 대한 영상 및 동영상 등 기초 데이터를 수집하

는 데 치중했다.

6월까지의 2차 조사에서는 조사 대상자인 2대 회장과 3대 사장, 4대 손자들을 비

롯한 송림수제화에서 일하고 있는 장인들과 고객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풀어내는 심

층 면담을 실시하였다.

10월까지의 3차 조사에서는 1·2차 조사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보충하는 형식으로

현지 조사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11월 이후에 보고서 집필에 들어갔다.

송림 수제화의 창립자 이귀석 옹은 1936년, 수표교 근처 지금의 자리에 있던 조그

마한 ‘하꼬방’에서 창업한 뒤 남성화를 중심으로 여성화도 포함한 맞춤구두를 제조하

여 판매하였다. 그는 조카 임효성 회장과 아들 임명형 사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1996

년 사망할 때까지 60년간 수제화를 만들어 온 장인이었다.

수제화업은 20세기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발전한 업종이나, 대량생산 기술이 개

발되면서부터 이제는 흔적도 찾기 어려운 사양 산업이 되었다. 수제화업의 영고성쇠는

구두가 근대적 시간 개념의 물질적 표상으로 등장한 이래 부침을 지속했다. 오늘날 ‘금

강’과 ‘에스콰이어’ 등의 국내 브랜드가 대량생산에 성공하여 해외 브랜드의 무한 공략

속에서도 근근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수제화업은 거의 사라졌다.

누구나 사용해야 하는 생활재이면서도 ‘패션의 완성’이라 불리는 사치품이기도 한

구두산업 가운데서도 수제화업은 오늘날에도 해외에서는 ‘명품’으로 남아 있다. 지금

까지의 생멸해 간 직업에 대한 조사와는 달리, 우리는 송림수제화를 통해서 한때 국제

기능올림픽을 석권했던 우리나라의 수제화가 세계시장을 무대로 어떠한 활로를 뚫어

갈지에 대한 미래적인 측면에서도 서술해 보려고 한다.

조사 과정에서 남북극과 히말라야 고봉 등을 등정한 허영호 대장과 오랜 직원, 그

리고 고객 가운데 몇몇 분들을 별도로 인터뷰하였다. 이분들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 한

국 수제화 산업이 직면한 문제와 해결책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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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1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Ⅰ. 수제화의 역사와 송림수제화

Ⅰ수제화의

역사와

송림수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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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3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Ⅰ. 수제화의 역사와 송림수제화

송림수제화

1960년대 서울 상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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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5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Ⅰ. 수제화의 역사와 송림수제화

우리나라 신발과 구두의 역사

예로부터 전통 가죽신을 만드는 장인이나 기술자를 화혜장(靴鞋匠)이라고

불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화장(靴匠) 과 혜장(鞋匠), 즉 신발 만드는 장인들의

활동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목이 있는 긴 신발인 화(靴)를 만드는 장인을

화장(靴匠), 목이 없는 짧은 신발인 혜(鞋)를 만드는 장인을 혜장(鞋匠)이라고 해

서 별도의 장인으로 구분했다. 또한 공조에 소속되어 가죽 세공을 담당하는

주피장(周皮匠)이 있었다.

조선의 마지막 왕실 갖바치로서 고종과 엄비 등 왕가의 신을 만들던 황한

갑(黃漢甲, 1889~1982) 장인은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7호 화장(靴匠) 기능보유

자로 지정됐다. 1978년 황한갑 장인이 사망하면서 전통 가죽신을 만들던 갖

바치의 명맥이 끊어졌다고 알려졌으나, 손자인 황해봉 씨가 16세부터 할아

버지 어깨너머로 화혜 기술을 배워 5대째 200여 년 가업의 맥을 잇고 있다.

10년 세월 동안 조부의 기술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황 씨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의례 때 신던 적석(임금이 정복을 입을 때 신는 신)과 청석(황후가 예복에 착용한 푸른 비단으로

태사혜 太史鞋

Men’s Shoes with Line Patterns

길이 235 너비 69, 조선.

신코와 뒤축에 태사문이 있는 신발을 말한다.

주로 양반가의 남성들 혹은 남자 아이들이 신었던

신으로 남성들의 경우 갓과 함께 착용하였다.

밑창에는 말발굽 형태의 징을 박았다.

2011년 국립민속박물관

특별전 <모자와 신발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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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7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Ⅰ. 수제화의 역사와 송림수제화

백목화白木靴

Mid-calf Length Boots the Period of Mourning

높이 240 길이 280 너비 87, 조선.

상중에 착용하였던 관리의 신발이다.

나막신木履 Wooden Clogs

높이 110 길이 250 너비 90, 20세기 초.

두 개의 굽이 달린 신으로 통나무를 다듬어 만들었다. 주로 비가 올 때 신던 것이나,

개화기 이후 사진에서는 마른날에도 신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제혜祭鞋 Shoes Worn for Ancestral Rites

길이 250 너비 85, 조선.

관리들이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 신던 신이다.

가죽 위에 하늘색 비단을 덧대었고, 양측과 뒷부분에 가죽고리를 만들어 가죽끈을 달았다.

명성황후의 조카였던 민영소(閔泳韶, 1852~1917) 집안의 유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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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9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Ⅰ. 수제화의 역사와 송림수제화

때때옷을 입은 한국 소년

Korean Boy in Holiday Dress

가로 254 세로 193, 1919년.

다색목판화로 색동저고리에 흰색 바지, 남색 전복을 입고 머리에는 복건을 쓴 남자아이가

묘사되었다. 아래 부분에 ‘Buddha’s Birthday’라고 적혀 있다.

목화木靴

Official's Boots also Worn at Weddings

높이 240 길이 280 너비 87, 조선.

목화는 관리들이 관복에 신던 신으로, 혼례 때에는

서민에게도 착용이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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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1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Ⅰ. 수제화의 역사와 송림수제화

만든 신)을 재현해 1999년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받았고, 2004년에는 중요

무형문화재 116호 화혜장으로 지정돼 갖바치의 맥을 잇게 되어 다행이 아

닐 수 없다.

부산시에서 공방을 운영하는 안해표 씨(63)가 2010년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7호 화혜장으로 지정되었고, 2011년 6월 행정안전부의 ‘향토 핵심 자원

시범사업’ 공모에 선정되면서 사업비를 지원받아 기존의 화혜장 전수관을

리모델링해 2013년에 개관한 것도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짚풀공예 국가기능전승자 08-03호로 지정된 임채지 씨는 순천 낙안읍성

에서 짚풀공예방을 14년째 운영했고, 현재는 곡성 기차마을 관광단지 내에

서 짚풀전시장 및 공예방을 운영하고 있다. 남도 짚풀공예대전에서 최우수

상 등을 수여받은 임 전승자는 일본 산규아스케 민속박물관 초청작가로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미투리草鞋 Hemp Shoes

길이 240 너비 70, 1950년대.

신 바닥은 삼을 6날로 삼아 촘촘하게 짜고 상부는 종이를 꼬아 총을 세워 만들어 지총미투리라고도 한다.

미투리는 대개 선비들이 맑은 날 나들이 때 신었으며, 조선 말기에는 종이미투리와 미혼 남녀의 장식 신인

꽃미투리도 있었다.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에서는 왕골신이나 망혜(芒鞋)를 가난한 사람의

신이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미투리도 신분에 따라 그 재료가 달라졌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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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33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Ⅰ. 수제화의 역사와 송림수제화

우리의 전통 수제화가 명백만 겨우 유지하게 된 이유를 들자면 우리가 현재

신고 있는 서양 구두의 유행이 가장 클 것이다.

서양에서는 1300년대 초반 영국에서 처음으로 신발 규격 치수가 정해졌다고

한다. 1700년대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전에 이미 최초로 구두 공장이 설립되기도

했다. 19세기에는 재봉틀이 발명되어 구두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전까지 모든 구두는 손으로 만들어야 했다.

“수제화란 손으로 만든 구두라는 뜻이에요.

하지만 손으로 직접 어디까지 만들어야 수제화인가라는 문제가

남아요. 원칙대로라면 전통사회에서 신발을 만들던 장인 갖바치처럼

가죽부터 밑창까지 모두 손으로 만들어야 하죠.

하지만, 이제 수제화업을 하는 장인들은 소가죽이나 고무 밑창을

직접 만들지는 않아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거죠. 필요한 가죽은

전화로도 주문 가능하고 밑창은 이미 문수(사이즈)별로

나와 있어요. 또 대부분의 수제화점에서도 제작 과정에서

이미 기계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요즘 수제화라고

하면 ‘대량생산’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부러 손으로 만드는 수제화를 사용하는 것은

발에 꼭 맡는 신발을 신기 위해서겠죠.

그러니, 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족형(라스트)만은 직접 만들어야

‘수제화’라고 할 수 있죠.”

(3대 임명형 사장 인터뷰)

독일 로만틱 가도에 자리잡은

작은 도시 안스바하의 한 구두가게

(하도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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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5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Ⅰ. 수제화의 역사와 송림수제화

1884년 갑신년 이후 조선 정국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1885년 을미년에

는 단발령이 공포되고 서양의 신과 군복이 채택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이

단행되고 양복이 공인되면서 고종과 민비가 구두를 신은 모습이 공개되자

세상이 들썩거렸다. 이후 상류사회에서 양복과 함께 구두가 유행하게 되었

고 1899년에는 외교관 복장이 채택되었으며, 1900년에는 조선왕조의 관복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양복과 함께 구두는 왕족, 정부 관료, 외교관, 개화파, 유학생, 기독교 선교

사, 신여성 등을 중심으로 파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는 아직 고무신도 보

급되지 않은 시기로, 대부분의 구두는 수입에 의존했을 것으로 보인다. 양말조

차도 1920년대에 나왔기 때문에 버선에 구두를 신은 모습도 적지 않게 목격되

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 신발은 더욱 빠르게 보급되었다. 1925년, 신여성

의 상징이던 구두 한 켤레의 값은 벼 두 가마니의 값과 맞먹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칠피구두와 샌들이 유행하기도 했는데, “샌들은 거리에 신고

다니는 구두가 아니며, 위생상 나쁘다”라는 시각도 있었다. 당시 최초의 등

산화도 등장했다. 지금과 달리 등산화는 대장간에 가서 만들기도 했는데, 가

죽 창에 징을 박는 수준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게 없어서 안타깝다.

이 무렵 서울 한복판인 명동과 가까운 한국은행 부근에는 승마화로 유명

했던 ‘상동제화점’을 필두로 소규모 수제화점이 번성했다. 우리가 조사 대

상으로 삼은 송림수제화 창업주 고 이귀석 옹을 비롯하여 제화업계에서 유

명했던 칠성제화의 창업주도 모두 이 상동제화점에서 일을 배운 동료들이

었다.

DURCH KOREA

가로 165 세로 230, 1944년, 베커스 김 기증.

한국에 사냥을 즐기러 온 스웨덴인인 저자(Sten Bergman)가 기술한

북한 여행 견문기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실은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등거리와 토수를 어깨와 손에 한가득 들고 있는 장사꾼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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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7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Ⅰ. 수제화의 역사와 송림수제화

LE MONDE ILLUSTRE가로 275 세로 300, 1948. 2, 김영준 소장.

프랑스의 시사 잡지 『LE MONDE ILLUSTRE』의 ‘철의장막 -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이라는

특집기사에 수록된 사진이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서울은 흰 옷을 즐겨 입는 거주민들과

고무신으로 회상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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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9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Ⅰ. 수제화의 역사와 송림수제화

“이젠, 이게 신발을 만든 것이 업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의 신발

기술력은 참 좋아요. 세계적인 수준입니다. 양화기술은 일제 강점기

시기 일본사람들한테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들었어요.

사실 순수한 우리 양화, 즉 수제화의 역사는 100년도 안 됩니다.

미국이나 유럽에는 300여 년 된 제화점도 있어요. 참 부러운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생을 신발 만드는 장인, 예전 같으면 갖바치로

살아간다는 것은 제게는 정말 커다란 행복이죠.”

(3대 임명형 사장 인터뷰)

일제 강점기 말 소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그때, 일제는 우리나

라를 침략전쟁의 후방기지로 만들고 군수산업을 확장하면서 농산물을 비롯

한 각종 광물자원 및 기타 원료를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특히 생고

무의 경우 화염제 등의 재료로 쓰이는 바람에 구하기조차 어려워 품귀현상을

빚게 되었다. 이에 제화업계에서는 헌 고무신을 재생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친미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구두는 더욱 광범하게

보급되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로는 타이어를 분해해서 신발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전후 복구가 이뤄지면서 본격적으로 서울 명동에는 수많

은 제화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도 사업을 하고 있는 유명 구두 브랜드인

금강제화·에스콰이어제화도 그때 생긴 제화점들이다.

금강제화산업사는 1954년 10월에 설립되었고, 에스콰이아제화는 1961

년 9월에 설립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보다 앞서 작은 제화점으로 시

작했다는 의견도 있다. 여하튼 여성 패션화를 많이 만들었던 금강, 에스콰

이어와 달리 1947년에 설립되었던 칠성제화는 남성 구두, 즉 신사화가 중

심이었다고 한다.

구두 만드는 법 고치는 법

Guide Book for Making and Repairing Shoes

가로 150 세로 210, 1960년대.

구두를 만드는 법과 고치는 법을 수록한 책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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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41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Ⅰ. 수제화의 역사와 송림수제화

“당시 여대생들은 좋은 신발을 가지고 싶어서 돈이 생기면 명동으로

나왔어요. 처음에는 예약금 조금을 걸고는 대충 만들어지면 와서

가봉을 하던 시기였어요.

그리고 마음에 들면 완성되자마자 매우 기뻐하며 바로 사갔죠.

그때 구두가 귀해서 대학입학을 해서 어렵게 한 켤레만 생겨도 방안에

모셔두던 시기였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여대생들이 너무나 고가의 구두가 마음에 안 들면

안 되니까 지금말로 꼼수를 부리기 시작했죠. 금강, 에스콰이어 등의

유명한 여성 수제화 전문집 세 군데 이상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예약금을 걸고 신발을 맞췄어요.

세 켤레를 사냐구요? 아닙니다. 예약금은 구두 재료값만 받는

것이었기에 매우 저렴했죠. 결국 가봉까지 다하고 나서는 나중에

안 찾아가는 손님들이 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쇼윈도에는

갓 완성된 상품들을 찾아 가라고 전시했기 때문입니다.

찾으러 몰래 와서는 자기 신발 전시된 걸 보고 세 군데 다

돌아다니고서 제일 모양 나는, 즉 제일 예쁜 것만 구입한 거죠.

그래서 재고가 많이 생기고 그로 인해 며칠 동안 고생만 하고

금전적인 손해도 많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아예 여성화를 거의 안 만들었습니다.

남성 수제화나 등산화를 주로 만드는 우리 가게는 괜찮았지만,

여성 수제화를 만드는 곳들은 점차 여성화 만들기를

꺼리게 되기까지 했죠.”

(2대 임효성 사장 인터뷰)

우리에겐 흥미로운 어려웠던 시절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지만, 당시 제

화업계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양화, 즉 구두의 역사는 이제 130여 년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20~30

년대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겨우 100년도 안 된 우리 수제화 역사의 산증인

가운데 하나가 수표교에 자리 잡은 송림수제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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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43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Ⅱ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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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45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송림의 가족사와 수제화의 변천사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에 자

리 잡은 한 허름한 건물의 3층과 4층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송림수제화가 있

다. 명색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제화의 명가 가운데 하나인 송림수제화

이지만, 각 층당 16평 남짓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80년이 다 되어가는, ‘고향의 늙은 나무’처럼 말없이 서 있는 노포(老鋪)의

모습은 오늘날의 열악한 수제화업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 시대의 당당한 ‘백년의 가게’인 ‘송림수제화’는 을지로3가

역 2번 출구 근처에 자리 잡은 작은 가게가 아니라 매년 10억에 가까운 매

출을 올리는 중소기업이다. 현재 3층 매장에는 남성화, 여성화, 골프화, 등

산화, 특수화 등 다양한 제품이 전시 판매되고 있으며, 4층 공장은 가죽 원

단부터 목형 등이 갖춰져 7명의 장인들이 열심히 일하는 ‘극한 직업’의 공간

이 자리 잡고 있다.

서울 을지로 3가역

인근에 자리한 송림수제화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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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47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송림수제화 3층 매장

3대에 걸쳐 송림수제화가 걸어온 길

1936~1999

1936 1대 이귀석 옹 “송림화점” 개업. 남성화, 여성화 제조 판매

1950 2대 임효성 사장 입사

1952 대한민국 최초 등산화창 몰드 제작

1950년대 후반 대한민국 최초 수제등산화 개발 판매

1977 산악인 고상돈 안나푸르나 등반 신발 제작 협찬

1980 “송림제화”로 사명 변경

1984 3대 임명형 사장 입사

대한사격연맹 사격화 공인증 획득

1985 장애인(무지외반증, 평방, 당뇨발, 요족, 뒤꿈치 통증 등)신발 사업 확장

대한민국 최초 족형(발바닥 모양)콜크 신발 개발 판매

1987 판매점(전주 세화산악) 영업 확대

1988 88올림픽 사격화 협찬

대한민국 최초 산악스키화 제작(군납)

사격화 유럽, 미국, 동남아 수출 시작

1992 판매점(울산 정상특파원) 영업 확대

1995 판매점(서울 대림스포츠) 영업 확대

산악인/탐험가 허영호 대장 대한민국 최초 남북극 횡단 특수신발 협찬

1996 산악인/탐험가 허영호 대장 베링해협 횡단 특수신발 협찬

1대 이귀석 옹 별세, 2대 임효성/이덕해 공동대표 취임

2000~2013

2006 대한민국 최초 수제숙녀화 족형(발바닥 모양)콜크 신발 개발 판매

2009 2대 이덕해 사장 은퇴, 2대 임효성 사장 단독 대표로 전환

“송림수제화”로 사명 변경, 3대 임명형 사장 취임

고객 1:1 방문판매 확대

2010 기능성 신발(스위스산 쉘러 방수 원단 사용) 수제 워킹화,

수제등산화 대한민국 최초 개발 판매

2011 가죽신발→천 제품(특수천) 신발 개발 확대 판매

2012 obs 경인방송(살맛나는 세상)

『월간 산』 소개(등산화는 손님과의 대화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

브로드밴드방송 소개

KBS 소비자고발(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철저한 A/S업체로 소개)

KBS 백년의 가게 소개

2013 세계일보(한올 한올 정성 담아 송림수제화) 소개

KTV 소개

아리랑TV 소개

중소기업중앙회 주최 역사박물관 전시(송림등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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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49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송림수제화의 1대 이귀석 옹은 일제 강점기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인 1936년 10월에 “송림화점(松林靴店)”을 개업했다. 구두를 만드는 기계가

없었던 당시에는 남성화·여성화 모두 손으로 제조되었다. 1933년 당시 서

울에는 6곳의 제화점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 유일하게 한국인이 운영했던

한국은행 부근의 ‘상동제화점’에서 3년 정도 어깨너머로 구두 만드는 기술

을 익혔다. 기술을 빨리 익힌 이귀석 옹은 을지로 한복판에 구두를 제조·판

매하는 수공업가게 겸 공장을 개업했다.

송림수제화를 개업한

1대 이귀석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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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51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대정4년(1915년)

등재된 땅을

1936년

이귀석(창업주)이

공유지분을

취득했다는

내용의 토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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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53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보다 편안한 등산화를 만들기 위해 이 옹은 자신이 만든 등산화를 신고

매 주말이면 산을 올라 직접 상태를 점검하기도 했다. 송림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강점은 가격이 일반 등산화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 이는 이

옹 자신의 덜도 안 받고 더도 안 받는다는 경영 원칙에 따른 것으로, 지금까

지 그 흔한 ‘세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경향신문 1992년 11월 28일자)

이귀석 옹은 1950년부터 함께 일했던 신발기술자인 조카 임효성(2대 대표)

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등산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계로 찍어대는 기성화가 고개를 들었다. 당시

등산화 한 켤레가 한 달 봉급과 맞먹을 정도로 고가였다. 두 기술자는 앞으

로 등산 인구가 많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수제등산화로 눈길을 돌렸다. 세계

최초로 7대륙 최고봉을 등정한 산악인 허영호 씨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산

을 타고 오를 때 어김없이 발을 송림제화에 맡긴다.

1960년대 등산화

송림에서 개발 제작한

등산화 몰드

“60~70년대엔 내가 만든 등산화가 업계 수위를 달렸어. 우리가 가격을

5,000원에 내놓으면 경쟁업체에선 500원 정도 싸게 팔았지. 특히 허영호 씨

는 내(임효성 사장)가 만든 신발 아니면 안 신었어. 한번은 미국 딸네 집에

가 있는데, 허영호 씨가 국제전화를 했어. 1주일 후에 북극 횡단을 떠난다고

신발을 빨리 만들어 달래. 그래서 어떡해. 부랴부랴 귀국해서 밤을 새워 만

들어 줬지.” (경향신문 2003년 12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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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55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수복 후 서울 인구가 차츰 늘어나고 여가가 생기면서 등산하고 레저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났어. 당시 을지로엔 지업사가 많았는데 그곳을

중심으로 몇몇 산악회도 결성됐지. 등산화가 없어

영국군화(발목까지 오는 군화) 신고서 산엘 다녔는데 밑창 갈 곳이

없는 거야. 대한민국에 등산화 창도 없을 때야.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신은 가져오고……. 그래서 국내 등산화 1호 창 몰드를 만들었지.

그걸 갖고 천호동 대동고무 가서 창 찍어다 갈아주고 우리 신발도

만들었어. 그렇게 등산화를 내니 이번엔 스키화를 만들어달라는 거야.

단국대와 이화여대에만 스키부가 있고 진부령에서 스키 탈 때지.

일제 스키판은 어떻게 구했는데 신발이 없는 거야.

그래서 신발 만들고 바클(버클)과 바인딩을 붙여줬어.

바클 단 스키화 만드는 곳은 송림밖에 없었어.”

(제2대 임효성 회장의 인터뷰)

1996년 작고할 때까지 “늘 푸른 소나무 수풀처럼 평생 신을 수 있는 구

두를 만들자”는 각오로 가게를 열었던 것이다. 1977년 에베레스트를 최초

로 등반한 고 고상돈 씨를 비롯하여 노산 이은상 씨 등 산을 좋아하는 사람

들은 모두 그의 고객이었다.

1951년 우리나라 최초로 쇠 징을 박아 만들던 밑창을 고무로 바꾼 수제

등산화를 개발하여 고개들에게 선보였다. 그때로부터 “등산화의 메카”로 명

성을 쌓아갔던 1952년에 등산화 창인 몰드를 개발·제작했다. 이전의 등산

화보다 가벼운 데다 밑창이 고무인 탓에 미끄럼도 방지해 주는 등산화가 나

왔다는 소식에 세계적 수준의 등산 실력을 가졌던 우리나라 등산 마니아들

은 열광했다.군납용 노르딕 스키화의 재료 분석 사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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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57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국방부

조달본부에

납품했던

스키화의

측면 도면과

고무창 도면

1975년

6월 3일

국방부

조달본부에

46족의 스키화를

납품하겠다는

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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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59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1961년에 만든 송림 제품을 알리는 광고 전단.

가격과 약도가 함께 실렸다.(김영춘 소장 및 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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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61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당시 등산화가 8천 원 정도 하던 시절에 등산을 좋아하던 사람들

사이에는 송림에서 만든 수제화를 신는 게 소원이었다.

결국 이러한 바램들은 ‘계’를 만들어 차례대로 구입하는 진풍경까지

연출했고, 송림의 등산화는 이른바 ‘대박’을 터뜨렸다.

70년대 초, 송림 등산화 한 켤레 값이 사천 원에서 만 팔천 원

선이었습니다. 당시로선 목돈이었던 만큼 등산화 계가 유행할 정도로

명성을 누렸습니다. 등산화 하나 가지면요,

잠도 안 자고 머리맡에 놓고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산악인 허영호의 인터뷰)

그 ‘계’를 만든 사람 가운데 산악인 고 고상돈 씨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

다. 1977년 고상돈 씨의 안나푸르나 등반에 사용된 ‘크레타’라고 불렸던 신

발 역시 송림수제화에서 제작·협찬한 것이다.

2015년 창업 80년을 맞는 송림제화의 창업주 1대 이귀석 옹은 금강제화

나 에스콰이어의 창업주와 마찬가지로 국내 제화업계 1세대라고 할 수 있

다. ‘서울시 양화상조합’의 조합장을 역임하기도 한 이귀석 옹은 동료들에

게는 신용과 믿음을 보여 준 철두철미한 기술자였다. 그에게서 기술을 배

운 직원들은 이귀석 옹을 한눈 안 팔고 오직 똑바로 외길을 걸은 분이었다

고 평가한다.

네팔 카스키주 담푸스에서 본 히말라야의 마차푸추레 전경

(하도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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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63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70년대 초반 등산화 1 70년대 중반 등산화70년대 초반 등산화 2 70년대 후반 등산화

겨울철 동상을 막아 주는 등산화를 만들기 위해 가죽에 파라핀 등 4개 약

품을 배합해 열처리하는 방수법을 개발한 것도 1970년대 후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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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65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한우물 경영 : 산악인치고 ‘송림제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세계적인

등산가 허영호 씨가 북극을 횡단하며 신었던 등산화도 바로 이곳에서 만든

것이다. 그 명성 때문에 함께 제화공장을 차리자는 유혹을 수도 없이 받았

다. 하지만 창업주 고 이귀석 옹은 ‘고객 한 명에게 완벽한 단 하나의 신발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수작업과 작은 가게를 고집했다. 바로 ‘규모보다 중요

한 것은 따로 있다’는 한우물 경영철학인 것이다.” (파이낸셜 뉴스, 2005년 5월 18일자)

국산 등산화 개발로 명성을 얻자 주위의 유혹이 많았지만 이 옹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1970년대에 사업 확장을 하지 않고 이귀석 옹은 1980

년대까지 오로지 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70~80년대만 해도 수제화 만드는 곳이 꽤 있었다. 그들이 기계화를 외

치며 나갈 때 어르신(창업주)은 “너희들은 돈 많이 벌어라. 나는 이 일을 하겠

다”며 좋은 신발 만들기를 고수했다. 그 후 한 가지만 하던 집들은 설 자리가

없어졌지만 송림은 토탈 제화를 지향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매일경제 2011년 7월 5일자)

1980년 사명을 변경한 송림제화는 1984년 1월 31일에는 대한사격연맹

으로부터 사격화 공인증을 획득했다. 가족들과 합심하여 1985년에는 장애

인 신발 사업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였으며, 대한민국 최초로 족형 콜크 신

발을 개발하였다.

80년대 초반 등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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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67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1988년에는 88서울올림픽 사격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의 사격화를 협찬

했으며, 유럽·미국·동남아에도 수출을 시작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로 산

악스키화를 제작하여 군납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조카손자인 임명형 사장

(3대 대표)이 군대 제대 후 얼마 안 있어 입사했다.

“군대 가기 전만 해도 다른 일을 하려고 했다.

제대하고 먼저 다니던 회사에 복직했는데, 누군가 낙하산으로

내려왔다. 사사건건 부딪혔지만 오너 쪽 사람이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사표 던지고 나왔다.

인연인지 마침 송림 1층에서 먹고 자며 일하던 사람이 그만뒀다.

아버지가 셔터맨이나 하라고 해서 나왔는데 어느 순간 이곳의 매력을

알게 됐다. 좋은 신 만들어 줬다고 감사 편지 보내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수제화집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보곤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하겠다고 말씀 드리고 달라붙었다.”

(3대 임명형 사장 인터뷰)

1980년대 마라톤으로 금메달을 수상한 손기정 옹이 북악산을 오를 때 애

용할 정도로 ‘송림수제화’는 등산가들에게는 국민등산화가 되어가고 있었

다. 그리고 신사화, 숙녀화, 골프화 등 다양한 구두를 만들어 냈다.

80년대 사격화

80년대 신사화

88서울올림픽대회 사격 종목 선수들이

신었던 사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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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에는 무역회사를 거쳐 등산용품 전문점을 운영하던 석사 출신의

차남 이덕해 사장(2대 공동대표)이 송림제화에 합류했다. 1987년에 전주 세화산

악, 1992년에는 울산 정상특파원, 1995년에는 서울 대림스포츠로 영업을

확대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돈이 아닌 고객들이 보낸 100여 통의 ‘감사 편지’를

유산으로 남겼다. “편지를 보낸 사람들을 실망시켜선 안 된다”는 유언과 함

께. “편지를 읽으면서 고객의 발에 딱 들어맞는 신발을 만든다는 것이 의사

들이 의술을 펼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국경제 2008년 5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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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의 북극 횡단 도전에 성공한 허영호 씨는 본인이 사인한 대형 사

진을 송림에 선사했다. 그 사진은 지금 임명형 씨의 작업실에 ‘위풍당당하

게’ 걸려 있다.

“송림제화의 30년 고객이라는 허영호 씨는 “신발에 발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발에 신발을 맞추는 방식이어서 마치 신체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

는 게 송림 신발의 장점”이라며 “송림제화가 없었다면 남극점 도보 탐험 같

은 극한 도전을 수행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제 2008년 5월 8일자)

그리고 그해에 산악인이자 탐험가인 허영호 대장이 대한민국 최초로 남

극과 북극 횡단에 성공했으며, 그때 신었던 신발을 송림수제화가 개발하여

협찬했다.

허영호 대장의 베링해협 횡단 때도 특수신발을 협찬한 1996년, 송림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송림을 국내 최고의 수제화점 가운데 하나로 만든 창업자

이귀석 옹이 별세한 것이다. 언제까지나 슬퍼할 수 없었던 송림은 차남 이덕

해와 조카인 임효성 두 사람을 공동대표로 맞이한다.

“96년에 작고하셨지.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이곳에서 하꼬방부터

시작했어. 건물을 새로 지어 오픈할 때 어머니(이귀동)가

같이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해서 딴 일 하다가 들어왔지.

수작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재료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터득하는 데 오래 걸렸지.”

(2대 임효성 공동대표 인터뷰)

송림수제화가

특수 제작한

등산화를 신고

히말라야

등반을 했던

허영호 대장

(허영호 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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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북극해 횡단 당시

허영호 대장이 신었던

특수 제작된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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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월, 허영호 대장이 참가한 한국남극점탐험대가

44일간 1,400km를 걸어서 남극점에 도달하였다.

이때도 허영호 대장은 송림수제화에서 제작한 특수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허영호 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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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딛고 일어선 송림제화는 1997년에 신문에 광고를 낸다.

“송림제화 : 지난 36년부터 수제품만 전문적으로 생산해 왔다. 단골 손님

중에는 유명인사와 전문 산악인들도 많다. 고객의 발바닥과 족궁(足弓) 모양을

목형으로 본떠 제작한다. 족궁, 뒤꿈치, 앞발바닥 등 전체 부위가 힘을 받쳐

주므로 발이 편하고 오래 걸어도 피로가 덜하다. 발 모양이 많이 변형돼 일

반 등산화를 신을 경우 불편한 사람이라면 들러볼 만하다. 천연 소가죽을 사

용하며 고급 소가죽 안창·충격 흡수용 천연 코르크창·2차 충격 흡수 EVA

(에틸렌 비닐 아세틸렌)창·밑창 등 4중창으로 설계한다. 방수 처리는 기본, 여성화는

검정색과 황색의 투톤형, 아동화는 빨간색 계열의 디자인이 잘 나간다. 가격

은 12만~14만 원대가 주종을 이루며 주문생산만 하는 최고급형은 28만 원,

서울 지역에 한해 고객을 방문, 주문을 받고 직접 배달도 해 준다. 단점이라

면 매장이 1곳(서울 을지로3가)뿐이고 수제품인 만큼 값이 비싸다는 것.”

(경향신문 1997년 3월 28일자)

대한민국 최초로 수제숙녀화 족형 콜크 신발을 개발 판매한 2006년에는

이덕해 사장을 돕기 위해 이동주 씨가 입사했다. 2007년에는 이덕해 사장의

매제인 기우천 씨(54)를 통해 강남점도 냈다.

“요즘엔 등산화보다 장애인을 위한 구두를 주로 만들어. 일본에서 비행

기 타고 오는 손님들도 많아. 몇 년 전엔 교통사고 당한 여대생한테 구두를

만들어 줬는데, 그걸 신고 다리를 절룩이지 않게 되었다고 얼마나 좋아하는

지 몰라. 그런 게 사는 보람이지 뭐.” (경향신문 1997년 3월 28일자)

2009년에 이덕해 사장은 성실한 교인으로서 ‘선교’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연스레 고종사촌인 수제화기술자 임효성 대표를 이은 3대 임명형

사장이 가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내가 지키려고 했었는데 의약품 개발과 종교 활동에 더 큰 뜻을 두게

되었다. 아버지 때부터 함께 일하던 조카가 맡아주겠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편한 신발을 만들어 주겠다는

아버지의 뜻과 가업을 대신 지켜줘서 고맙다.”

(이덕해 2대 공동대표 인터뷰)

지금도 사이좋게 지내는 두 집안의 모습은 고 이귀석 옹의 ‘화합’을 강조

한 경영정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임명형 사장이 취임하면서 단독대표

로 전환시키고 “송림수제화”로 사명도 변경하며 고객과의 1:1 방문판매를

확대한다. 2010년 스위스산 쉘러 방수 원단을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능

성 수제 워킹화와 등산화를 개발하였다. 2012년에는 KBS<백년의 가게>에

소개되었다. 2013년에는 중소기업중앙회 주최로 역사박물관에서 송림등산

화가 전시되었다.

성공한 중소기업 송림수제화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 봉사활

동과 기부활동을 지속하여 ‘돈보스코 지역아동복지센타’, ‘서울특별시 장애

인 복지시설협회’, ‘꿈나무 골프선수’, ‘결식가정 장애인회’, ‘NGO 나마스떼

코리아’ 등을 후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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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0일 향년 78세를 일기로 별세하기 전까지 수시로 회사에

나와 제품을 꼼꼼히 살피던 임효성 회장은 “스물일곱에 들어왔는데 벌써 52

년이 흘렀다”면서도 손자까지 가업을 잇는다며 흐뭇해했었다. 그는 “세상에

서 하나밖에 없는 신발, 고객마다 다른 신발을 맞춰 주는 곳이 송림”이라고

자랑이 대단했었다.

“오랫동안 보광동에 살았지. 한남초등학교와 고개중학교(장충중고교

전신)를 다녔어. 6·25가 터지고 수복 후 고2에 복학했는데,

고3에 영장이 나와 입대를 하게 되었지. 근데 부대 정훈장교로 오신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을 우연히 만나서 군에서 만든 공민학교

문맹퇴치반에서 교관으로 2년간 편하게 생활했지.

제대 후에는 복학을 안 했어. 입사 예정이었던 회사를 안 가고

어머니 말씀에 따라 외삼촌 회사 송림제화에 입사했어. 만25세였지.

당시 을지로는 폐허 상태였어. 종이 하는 지업계가 많이 들어와

있었고, 재개발과 건물공사 등이 시작된 첫해가 이때였어”

(제2대 임효성 회장의 인터뷰)

부친 임상봉과 이귀동 여사의 4남 3녀 가운데 넷째로 차남이었던 임효성

회장은 1935년 11월 30일생(음)이다. 결혼 후 고 이귀석 옹과 아이디어와 손

재주의 합작으로 많은 신제품을 개발해냈다. 본드 냄새를 하도 맡아서 냄새

를 거의 못 맡게 된 고 임효성 회장은 “여한 없다”고 말한 게 유언이 되었다.

공장이 쉬는 주말에는 산행을 즐겼던 그는 인천 소래포구를 지나다 본 동네

가 마음에 들어서 바로 이사를 할 만큼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2대 임효성 회장의

회갑연과 젊은 시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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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8월 4일(음)이 생일인 이경옥 여사는 황해도 장현군 출신으로, 초

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4후퇴 때 서울로 피난을 왔다. 만 22세이던 1961

년에 군대 하사관으로 있었던 8촌 오빠의 소개로 임효성 회장과 만나 임 회

장 제대 후 2년 뒤에 결혼했다. 신발로 남들을 편하게 해 주는 직업이고 손

님이 몇 십 년 지나도 찾아와서 감사하다고 해 줘서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

했다고 한다.

작은 며느리이지만 13년 동안 군말 없이 시부모님을 모신 효부이자, 오

직 집안일과 내조에만 힘쓰고 문밖에는 거의 나간 적이 없는 요즘 보기 드

문 ‘할머니’이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남편이었지만 무뚝뚝하고 사랑한다

는 말 한마디 없었으며 길가에서 손 한번 안 잡아 줘서 서운했다고 당당하

게 밝히는 마음은 신세대인 할머니이기도 하다. 작은 며느리(임명형 사장 부인 최갑선

여사)는 며느리가 아니라 딸이라며, 6년이나 같이 살아준 며느리가 한없이 고

맙다고 몇 번이나 강조한다.

3대 임명형 사장은 1963년 12월 23일(음)에 출생했다. 1대 이귀석 옹을

‘구의동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었다고 자랑한다.

25세 때부터 신발 만드는 기술을 배운 그는 지금 3대째 송림을 지키고 있

다. 공장이 쉬는 토요일에도 혼자서 나와 근무한다. 직원을 대신 쓰지도 않

는다. 부인이나 아들한테도 맡기지 않는다. 지방에 살거나 직장에 다녀서 평

일에 송림수제화를 찾아올 수 없는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서이다. 임 사장은

매장에서 손님의 발을 직접 잰 후 발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고객이 원하는

디자인, 원단 등을 대화를 통해 세밀히 파악한 뒤 맞춤 신발을 제작하는 걸

천직으로 매우 즐겁게 생각한다.

2대 임효성 회장과 부인 이경옥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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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89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3대 임명형 사장의

첫돌기념 사진

이경옥 여사와

어린시절의 임명형 사장

“돈을 벌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뭐랄까, 제가 이런 일을 안 하면

그동안 송림을 찾은 손님은 다른 신발을 신지 못하십니다.

그분들을 위해 더 편안한 신발을 만들자는 사명감이라고 할까요.

세밀하게 나누면 천 가지 공정을 정성스럽게 해야 구두 한 켤레가

세상에 나옵니다. 그만큼 편안한 신발을 만드는 게 어려운 일이지요.

이제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손님의 발 모양만 봐도 단박에

건강상태까지 알 수가 있어요.”

(3대 임명형 사장 인터뷰)

보광초등학교,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한흥예고에서 도자기와 그림을

배웠던 그는 금속회사를 다니다 입대했다. 정훈병으로 근무하면서도 어깨

너머 눈썰미로 배운 제작기술로 온 부대의 군화 수선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입사 후 1남 3녀 중 막내딸로 자란 최갑선 여사를 만나 자주 함께 등산을 다

니다가 1990년 11월 11일 결국 결혼에 성공한다.

“남편은 솔직하고 성실하고 한결같아요. 맑고 가식이 없고

계산적이지 않아서 좋았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뜸 ‘이상형이다.

평생 같이하자’는 말을 했어요. 너무 놀라서 한동안 피해 다녔어요.

그런데 친정아버지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셨어요. 연락도 안 했는데

와서 도와주고 이후 크게 의지가 되었어요. 계속해서 너무 잘해주니까

‘내가 뭔데…… 저런 좋은 사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끝에

결혼했어요. 지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최갑선 여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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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91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3대 임명형 사장의

학창 시절(교복 차림)

군대를 제대하고

송림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의

임명형 사장

3대 임명형 사장과

최갑선 여사의 연애 시절

주택은행에 다니던 친구 소개로 임명형 사장과 만나 결혼한 최갑선 여사

는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술곡리가 고향이다. 1964년 5월 8일(음)에 태어

난 그녀는 결혼 후에도 가죽 관련 무역업을 하는 중소기업에서 2006년까지

근무했다. 연매출 10억을 이룬 송림의 뒤에는 며느리이자 부인이며 두형제

의 어머니인 최갑선 여사의 내조가 컸다고 시부모인 2대 회장과 사모님은

이구동성으로 전한다.

2009년에 송림수제화에 합류한 그녀는 남편,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상의

한 끝에 ‘백년의 가게’인 송림수제화의 캐치프레이즈로 “세상에 하나 뿐인

편한 신발, 곧 4代가 이어 갑니다”를 내걸었다.

“큰아들(임승용)과 작은 아들(임승철) 둘 다 지금 오산대학

제화패션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군대를 다녀온 장남에게

바닥부터 가르쳐 실습을 완벽하게 시킬 생각입니다.

그러면 100년이 가능하지 않을까 해요.”

(최갑선 여사 인터뷰)

1990년에 처음으로 방문판매를 도입한 임명형 사장은 2004년 수제 방수

화를 처음 구상했다. 수없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2009년 어렵게 스위스

쉘러 원단을 소량 구입하게 되었다. 100여 가지의 공정을 거쳐서 결국 2010

년에 수제 방수화를 개발해냈다. 그리고 2014년 올해에도 이 원단을 사용해

서 수제 방수 워킹화와 운동화를 비롯해서 다양한 기능화를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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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93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문수가 5㎜ 단위로 구분되는 기성화와 달리,

고객 발의 본을 떠서 만든

송림수제화의 신사화와 여성화

2010년에 개발한 수제 방수 등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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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95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장애인을 비롯한 지방 거주 고객들의 요구로 2013년 12월 잠시 중단되

었던 방문판매까지 재개한 임명형 사장은 바다낚시가 취미다. 인천은 물론

강화도, 서산을 비롯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섬까지 친구들과 함께 구석구석

다니며 일이 끝나는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 1박 2일간의 낚시를 즐긴

다. 평일 근무를 위해 주말에는 푹 쉬어야 한다는 세대에 속하면서도 주말 취

미활동을 위해서 주중에 열심히 일하는 신세대에 속하기도 하다.

장남 임승용 군은 1992년 6월 25일생이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해병대에 가지 않았을 것이고 어차피 한 번 가는 거 멋지게 가고 싶어서 해

병대에 입대했었다는 대한민국의 참된 젊은이인 그는 어렸을 때부터 뭔가

만드는 것을 좋아했었다고 한다. 부모님도 원하고 굳이 멀리서 꿈을 찾을 필

요가 없었기에 오산대 제화패션학과에 들어갔다. 박격포를 주특기로 하여

해병대를 제대하고 현재 2학년에 복학한 그는 20대 후반에 결혼할 생각이

며, 만드는 걸 좋아하는 아들이 생기면 가업을 잇게 하겠다며 포부를 밝힌다.

“아이들이 쉽지 않은 결정을 해 줘서 고맙죠. 앞으로는 자기네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100년 기업의 꿈을 이룰 수 있을 듯해요.

열심히만 하면 노력 여하에 따라 더 잘될 수 있다고 믿어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서 뒷받침할 생각입니다.”

(최갑선 여사 인터뷰)

차남 임승철 군은 1995년 5월 4일생이다. 어렸을 적부터 틈이 나면 송림

수제화에 와서 일을 돕곤 하던 착한 아들이다. 지금도 매주 잡일과 석고작업

송림수제화를 이끌어 온 2대 임효성 회장과 부인 이경옥 여사,

3대 임명형 대표와 부인 최갑선 여사,

그리고 4대인 장남 임승용 군(맨 왼쪽), 차남 임승천 군(맨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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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97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Ⅱ. 4대 80년을 지켜온 가족들의 삶

을 돕고 있다. 오산대 제화패션학과에 들어가고 나서는 아르바이트 조로 용

돈도 줘서 더 기쁘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모든 걸 받아주면서 항상 자상하게

챙겨줬기에 너무 고마웠다는 막손주인 그는 작년까지 건강하셨던 할아버지

의 장례식을 치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당신의 신발 정말 안녕들 하십니까?

슈즈닥터(Shoes Doctor)를 아십니까?

외국에서는 풋닥터(Foot Doctor)라고 불리지만, 국내에서는 의사가 아니기

에 오해를 받을까 봐 슈즈닥터라고 한다. 지금 신고 계신 신발 정말 괜찮으

십니까? 여러분의 신발 안녕들 하십니까? 특별히 병이나 장애도 없는데 혹

시 발이 불편하지 않으시나요? 별로 걷지 않았는데 발이 붓고 다리가 아프

진 않으신가요?

유명 구두 브랜드 매장에서 기성화를 수십만 원 주고 사 신어도 불편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신발이 5㎜ 단위로 문수(사이즈)가 정해져 있지만, 실제

로 발은 1㎜만 크거나 작아도 매우 불편하기 때문이다. 신발업계에서는 쉬

쉬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넓은 볼 사이즈도 사람마다 그 크기, 형태, 모양이 다 다르다. 그렇게 작

은 치수 정도는 별 차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근데 그게 아니다. 일상 속

에서 외부에서 활동하느라 신을 오래 신고 있어야 하는 우리 현대인에게는

자신에게 딱 맞는 신발을 신을수록 발이 매우 편안해진다. 심지어 겨우 1㎜

만 바꿔도 발은 정말 매우 편안해진다. 그러기 위해선 발의 본을 떠서 자신

의 발과 똑같은 모형을 만들어 거기에 맞추는 신발이 진정한 의미의 신발이

라고 할 수 있다. 일반 평범한 사람도 그렇지만 혹시 발이 불편한 분이라면

더더욱 자신에 맞는 맞춤 구두가 필요하다. 발이나 다리의 외형적인 부분뿐

만 아니라 걷는 습관 등에 따라 그에 딱 맞게 신발도 달라져야 한다. 그런 일

을 하는 사람이 슈즈닥터다.

KBS <백년의 가게>에 소개된 4대를 잇는 80년 정통의 송림수제화 임명

형 대표는 원인도 모르고 발이 불편한 이들에게 무료 상담을 해 준다. 발을

보는 게 아니라 발에 맞는 신발에 대한 상담을 한다.

임 대표는 큰 부자도 아니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다.

NGO 등에 수제화 신발을 기부하는 것은 기본이고 매주 한 명씩 서울특별시

장애인복지시설협회를 통해 무료로 장애인들에게 맞춤 신발을 선물해 주고

있다. 신발의사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 주는 인간극장의 주인

공이다. (불교닷컴, 2014년 3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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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99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Ⅲ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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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101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장인정신

임명형 사장은 전문등산가들에게 ‘등산화는 송림’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경량등산화 ‘크레타’를 잘 기억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등산화는 ‘수제

화’였기에 가능했다. 그 명성을 잘 지키기 위해서 임 사장은 송림수제화를

찾는 고객의 발 특성을 잘 살피며 구두를 만든다. 길이, 모양, 형태 등 작은

것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핀다. 거기에 기성화보다 수제화가 나은 점

이 있는 게 아닐까?

“까다롭게 만들어야 사람과 같이 움직이는 신발이 됩니다.

좋은 신발은 신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가죽이 발을 감싸고

있게 됩니다. 걷고 뛸 때 맨발로 움직이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발의 감각을 느껴야 최고의 신발입니다.”

(임명형 사장 인터뷰)

수제화를 제작하기 위하여

고객의 발을 그려서

모양과 크기를 기록한다.

발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풋폼으로 고객의 족형을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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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103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발을 보고 신발을 판단하려면 5년은 지나야 해요. 기술을 배우겠다고

마음먹고 처음으로 송림제화에서 한 일이 손님의 발 형태를 보는

거였어요. 세상에 똑같은 발 모양은 없죠. 다 틀립니다. 그 다른 차이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발 모양의 차이를 직감적으로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데만 20년의 세월이 결렸어요. 편안한 신발 한 결례

만드는 게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30년 됐는데도 아직 힘든 발이 있어요.

세상엔 희한한 발도 많습니다. 그런 발은 데이터화가 불가능합니다.

평균은 의미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1㎜도 크게 느끼고 아주 예민한

사람은 0.1㎜ 차이도 크게 느낍니다. 그런 사람은 기성화 못 신어요.”

(임명형 사장 인터뷰)

평상시 신발을 신고 걸어 다닐 때 전혀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 신으면 신

을수록 편한 신발이어야 한다.

이런 실력과 신뢰가 있기에 평생을 송림만 찾은 한 백발의 노인은 “송림

신발을 한번 신으면 다른 것은 절대 신지 못한다”고 격찬한다.

“기계로 찍어 내는 게 아니라 손으로 하는 겁니다.

하루 열 켤레 안쪽으로 만드는 것으로 족합니다.

아흔이 넘으신 분이 아직도 우리 집 단골이라면 이해하시겠어요?”

(최갑선 여사 인터뷰)

보다 정확한 측정을 위해서 임명형 사장은 발 모양을 본뜬 석고 모형을

만든다.

“수제화를 맞추려고 가면 발을 얹어놓고 펜으로 모양을 따라 선을

그어가면서 모양과 사이즈를 재잖아요. 전 다르게 생각했어요.

모양을 긋고 하면 발의 형태는 잡히는데 더 편하지는 않을 것

같더군요. 찰흙에 발바닥을 그대로 찍어 눌렀다고 생각해 보세요.

자기의 발 모양이 똑같이 나오잖아요. 그것과 같은 원리로 개발한 것이

스펀지로 족형을 뜨는 기구입니다. 그 틀을 갖고 신발을 만드는 거죠.

거기에 장인들의 정성을 담아냈는데도 그 신발이 편하지 않다면

이상한 일인 겁니다.”

(임명형 사장 인터뷰)

그런 신발을 만들기에 한번 온 손님은 평생 단골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

손님을 맞이하는 접객이 매우 중요하며, 고객의 발을 보는 정확한 눈썰미를

가져야 한다. 손님의 발을 한번 보면 “아 265㎜ 사이즈네요”라고 바로 발 크

기를 맞춘다.

“신발만큼은 우리에게 믿고 맡겨야죠. 그만큼 자신 있습니다.

처음 오시는 분들은 다양한 것을 선택하시는데 그러면 발이 아파서

다시 오십니다. 발을 수만 번 만져 본 우리가 손님에게 꼭 맞는 신발이

어떤 것인지 단박에 아니까요. 그것을 신어야 발이 편안하죠.”

족형 뜨는 것만으로는 기술이 아니죠. 그건 그저 손님 발에 꼭 맞는

신발을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기술은 그 족형을 뜨고 나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명형 사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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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105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자신의 발에 맞는 신발은 몸에도 편한 데 그치지 않고, 허리와 무릎 관절

보호가 된다고 한다. 따라서 “착용감이 편한 신발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

하다”고 강조한다.

“디자인만 생각하면 발은 절대로 편안할 수 없어요. 자신에게 맞는

디자인을 고르고 발을 맡기는 게 중요합니다. ‘힐 앞쪽이 뾰쪽하죠?

앞쪽을 꾹 눌러보세요. 손이 아프죠?’ 당연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딱딱하니까 당연히 아프겠죠?’ 그런 신발을 오래 신으면 발이

변형됩니다. 20대에 힐을 많이 신으시는데요. 40~50대 되면

발이 변형되어서 우리 가게로 찾아오십니다.”

(임명형 사장 인터뷰)

하지만, 내용이나 의미보다는 형식이나 패션 스타일이 강조되는 현대사

회에서 아무리 건강이 중요하더라도 ‘여포(여성이기를 포기한) 신발’ 등 패션에 뒤

처진 신발을 신기는 쉽지 않다. 개성시대에 걸맞은 나만의 신발 디자인도 고

를 수 있다.

“예전엔 질기고 오래 신는 신을 원했지만 지금은 편하고 부드러운

신을 강조합니다. 그에 따라 원단도 고급으로 갑니다.

가죽은 피혁점이나 피혁공장을 직접 다니며 고르는데,

좋은 재질을 찾으면 그보다 더 좋은 품질을 주문합니다.

눈에 차는 게 있으면 계속 살 테니 잡아놓으라고 하지요.

많이 쓰는 가죽이 천연 송아지가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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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107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참 편안하죠. 하지만 말가죽하고 악어가죽에는 당할 수 없습니다.

한번 이 재료로 만든 신발을 신어 본 손님은 다른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지 못해요. 가죽이 늙지 않아요.

주인 발에 평생을 적응하면서 편안하게 해 드리죠.

신고 다닐수록 편안해지는 게 좋은 신발이잖아요.

중국에서 들어오는 가죽 중에서 식별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직접 육안으로 보고 만지고, 감각으로 느껴서 가죽을

선택합니다. 창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기업에서 100원 주고 창을

찍으면 우리는 120원 주고 찍습니다. 더 좋은 것, 더 튼튼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임명형 사장 인터뷰)

송림수제화는 모든 제품에 최고의 재료를 사용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소

가죽은 기본이며 등산화에는 타사 방수 원단보다 투습이 월등하다고 생각

한 스위스 쉘러 원단을 사용했다. 4겹의 통원단을 사용해 한 올 한 올 수작

업 제작과 철저한 AS도 이뤄진다.

“신발 만드는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이 정성이란 놈이 신발에 꾹 눌러서 들어가지 않으면 절대로 편안한

신발을 만들 수 없거든요. 그렇게 만들어진 신발 한 결례가 손님을

평생 단골로 만들어 놓지요. 다시 오십니다. 발을 수만 번 만져 본

우리가 손님에게 꼭 맞는 신발이 어떤 것인지 단박에 아니까요.

그것을 신어야 발이 편안하죠.”

(임명형 사장 인터뷰)

송아지 가죽, 말 가죽, 악어 가죽 등

편하고 부드러운 가죽 원단을 찾아

직접 피혁공장을 방문하여 육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느껴서 원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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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109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수십 년의 경험이 쌓여 임 사장은 이제 고객의 발 모양을 보면 사이즈뿐

만 아니라 왜 발이 아프고 발가락이 굽었는지,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그 결

과 어떤 신을 신어야 좋은지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도

대체 얼마나 연구했기에 그렇게 잘 설명하느냐”라고 묻는 고객들에게 임 사

장은 “연구라기보다는 직업이니 당연한 것 아닙니까?”라며 되묻는다.

임 사장은 오로지 편한 신발만 만들려고 몇 년 동안 저명한 정형외과 의

사들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정형외과 의사들이 신발 들고 찾아가면 좋아하

던가요?”라는 질문에 그간의 사연을 털어놓는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죠. 그런데 제가 편한 신발을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발이 편한 신발을 만들 수 있는지 의학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얘기를 해 달라고 졸랐죠.

많은 의사 분들이 제화점에서 발을 다 혹사시켜놓았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을 만들고 그것을 신고 다니셨던 겁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정형의과 의사들을 쫓아다니며 발에 대해

배웠습니다. 종합병원 과장님들 만나 뼈에 대해 묻고 신발을 얘기했죠.

여러 사람의 얘기를 듣고 종합해서 신발을 만들게 되었죠.

그렇게 만든 신발을 들고 대학병원 찾아다니며 임상실험을 하자고

부탁했어요. 그렇게 몇 년 하다 보니 그분들도 우리의 성과를

믿게 됐습니다.”

(임명형 사장 인터뷰)

수십 년 송림과 인연을 맺어온

“고객”과 격의 없는 대화를 하는

3대 임명형 사장

임 사장은 외반증(하이힐 등의 이유로 엄지발가락이 휘는 증세)이나 족근막염, 평발, 요족(평

발의 반대) 등의 증상들이 모두 신발로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우리 신은(발의 기형을) 치료해 주는 건 아닙니다.

생활을 편하게 해 주고, 발이 더 이상 변형되지 않게 해 주는 것일

뿐입니다. 외반증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게 하려면 힘을 조절해

줘야 해요. 공학박사와 저 같은 신발장이, 의사가 함께 연구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발이 모두 달라 각각을 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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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111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공학으로 분석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신발 한 켤레에 몇 백만 원

가야 하죠. 병원마다 찾아다녀도 이상이 없다는데 발이 아픈 분들이

많이 옵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신발을 맞춰 줘도 처음엔

불편하다고 해요. 하지만 신으면 신을수록 편안해합니다.

어떤 분은 너무 편하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요.”

(임명형 사장 인터뷰)

한 작은 구둣가게에 불과한 송림수제화가 불경기에도 지금까지 살아남

아서 연매출 10억이 넘는 중소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진짜 비결은 고객의 이

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개발했

기 때문이라고 한 고객은 전한다. 임효성 회장은 오랜 연구 끝에 몇 가지 약

품을 섞어 가죽에 방수 처리를 하는 비법도 개발한 적이 있다.

“그 비법을 아들에게 물려줬지. 송림 등산화는 고리 하나까지도 달라!

손자들까지 해서 4대로 가업을 승계시킬 생각이야.

전국의 토털 제품 수제화로는 송림이 아마 유일할 거야.

‘정성’과 ‘초심’의 마음으로 편한 발을 위해 끊임없는 연구와

제품 개발을 한다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거든”

(임효성 회장 인터뷰)

완성된 구두를 살펴보고 있는 2대 임효성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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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113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고객

송림수제화가 우리나라 등산화로 명품브랜드가 된 것은 임효성 회장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정성껏 꾸준하게 한우물만 팠기 때문이라고 고객들

은 평가한다. 송림수제화의 단골 중에는 유명인사가 적지 않다.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 김영삼 전 대통령, 조순 전 서울시장, 그리고 현역 국회의원과

대기업 회장 등 정·재계 인사가 모두 이곳의 단골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김영삼 전 대통령도 서울 상도동 자택에 감금된 시절 마음을 삭히려고 집 마

당을 많이 밟고 다녔다고 한다. 등산화가 닳자 비서를 보내 송림수제화에서

밑창을 간 일화가 있다.

산악인 허영호 씨는 40여 년 전인 고교시절부터 송림수제화를 찾았다. 처

음에는 누군지도 몰랐다가 나중에 허영호 씨가 유명해지고 나서야 알게 되

었다고 한다. 허영호 씨는 돈을 모아 등산화를 처음 구입한 이래 에베레스트

와 히말라야 등반, 남극과 북극 횡단 시 송림수제화에서 제작한 특수화를 착

용하며 오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아들이 잘해서 완전히 맡겼지. 손자가 막 배우기 시작했으니

4대째 되는 것도 시간문제야.”

(임효성 회장 인터뷰)

그렇게 만든 제품 가운데 일부는 지금 송림의 보물이 됐다. 매장엔 1호 등

산화창 몰드 외에 임 회장이 보물처럼 아끼는 것이 몇 개 더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초기 국산 등산화는 진열장에 고이 모셔져 있고, 산악인 허영호 씨가

북극점 다녀올 때 쓴 설상화는 허 씨의 사진과 함께 벽을 장식하고 있다. 허

영호 씨는 그 신발을 신고 북극 횡단에 성공했다.

“이게 말이야, 하루 종일 품을 들여 봤자 겨우 한 켤레밖에 못 만들어.

공정이 복잡한 특수화는 사흘에 두 켤레 꼴이라구.

요즘엔 기계로 팍팍 찍어내니까……. 수제화는 가격 경쟁이 안 돼.

품삯 건지기도 힘들다구. 딱 지금 정도만 되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어요. 적게 판다고 해서 지금까지 우리 기술자들한테

월급 밀린 적도 없고요. 그 정도면 됩니다.

주문 많아지면 돈이야 벌겠지만 손님발이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우리 기술자들이 하루에 소화해 낼 정도로만

신발 주문을 받아요.”

(임명형 사장 인터뷰)

가업에 대한 자신을 가진 임효성 회장의 고객우선주의로 인해서 매장에

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대개 입소문이나 지인의 소개로 찾아오

는 사람이 많았지만 얼마 전부터는 TV나 신문 등에 자주 소개되면서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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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115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오는 손님들이 많아졌다. 수작업을 통해 생산하는 신발은 종류에 따라 하루

12~18족 내외에 불과하다. 신발 한 컬레가 완성되는 데 최소 4~5일이 걸린

다. 등산화의 경우 10일~15일 정도가 소요된다. 요즘은 신발 주문이 밀려

주문 후 완성까지 3개월 정도 기다려야 받을 수 있다. 완성된 신발은 고객이

직접 찾아와 신어보거나 택배로 배송한다.

“신발을 외국 브랜드로만 신었어요. 근데 발이 너무 불편해서,

내발에 꼭 맞는 신발을 제작해 준다는 소문을 듣고

시골에서 올라왔어요.”

(지방에서 올라온 고객)

송림은 1997년 이후 신발을 맞춘 손님의 데이터를 모두 보관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전화로도 고객만을 위한 발 편한 신발을 만들 수 있게 된 것

이다. 기성화에 발을 맞추라고 억지를 부리는 보통 구둣가게와는 천양지차

다. 그래서 한번 이곳을 들른 사람은 평생 단골이 된다. 2년 전 송림이 1층에

있던 매장을 3층으로 옮겼는데도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곳 신을 신

어본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가기 어려울 만큼 발이 편하기 때문이다.

“송림에서 여러 종류의 신발을 제작해 신고 있어요. 발이 불편해서

스트레스를 받았었는데 이젠 그런 게 없어졌어요. 정말 발이 편해요.”

(단골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고객)

하루 평균 서너 건의 수선 의뢰가 들어온다. 대부분 밑창을 교체하기 위

해 맡기는 신발들이다. 등산화 등은 평균 15년의 세월을 품고 있다. 가게로

돌아온 신발은 ‘자부심’ 그 자체라고 한다.

“송림에선 20년을 신어도 조금 신었다고 할 정도죠.

그만큼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창갈이만 하면 계속 신을 수 있습니다.

기성화 가게에서 이렇게 만들면 굶어 죽겠죠.

게다가 발 편한 것은 자타가 공인합니다. 한번은 한 사람에게만

스무 번이나 고쳐준 적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잘 맞게 돼 그 목형을

아예 그대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기계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여기선

할 수 있죠. 우리처럼 수제화 만드는 집은 전국에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데, 특히 모든 종류의 신을 그렇게 만드는 곳은

송림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임명형 사장 인터뷰)

20년 정도 지난 신발은 오래 신었다고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곳이 이곳이다.

“소개 받고 오는 분들은 대부분 사전조사 다 해 보고 옵니다.

그런 분들 발을 보면 어디가 불편한지 단번에 압니다.

웬만한 의사보다 정확히 알려주니 믿고 따르나 봅니다.

그런데 가끔 디자인만 고집하며 맞지 않는 신을 주문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의 주문은 받지 않아요. 발은 편해야 한다는

고집을 굽힐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임명형 사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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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117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송림에 고객 인터뷰를 요청하면 바로 달려올 ‘예약 손님’이 적지 않다. 그

만큼 송림 신발에 감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사연 가운데 하나는 다음

과 같다.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송림수제화 대를 잇는 장인

현재 우주항공 관련 엔지니어링 컨설팅(자문)과 러시아어 통번역을 하는

김명철(45) 씨는 어린 시절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그리고 중학교 2학

년 때 또 한 번 교통사고로 같은 곳인 대퇴부가 2번이나 골절됐다. 그때 병

원의 잘못으로 왼쪽 다리가 휘게 되어 안짱다리처럼 6㎝나 짧아졌다. 당시

의료보조 구두를 신었지만 무겁고 두꺼워 뛰면 바로 창이 떨어져서 계속 신

기가 어려웠다.

대학 졸업을 앞둔 1991년 말 옆집 이웃 아저씨가 을지로의 송림수제화

를 소개해 주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가볍고 튼튼하며 발목까지 안전하게 감

싸주는 신발을 신게 되면서 처음으로 운동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뿐만 아니

라 밖에서는 알아챌 수 없게 왼쪽 신발만 키다리 구두처럼 속으로 6㎝를 높

여줘서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또 신발 바깥쪽을 안쪽보다 높게 만들어

허리 통증도 사라졌다. 시간이 흘러 발이 성장하고 신체가 변해도 그에 맞는

신발을 만들 수가 있었다. 러시아를 비롯해 전 세계를 돌 때도 정장에 맞는

구두와 다니기 편한 등산화가 필요했는데 위는 구두화, 밑창은 등산화로 만

들어 발이 무척 편했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인생을 선물 받은 것이 무척 감사하면서도 자신을 송림수제

왼쪽 다리가 오른쪽보다 6㎝가 짧은 김명철 고객의 요구 대로

왼쪽 신발은 밑창이 등산화고 위는 구두화로 주문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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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119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화의 나쁜 고객이라고 말한다. 20년 넘게 찾는 단골이지만, 한번 신으면 적

어도 5~6년 이상이어서 많이 팔아주지도 않았다. 소개도 꼭 필요하거나 절

실한 사람한테만 해줬다. 가격이나 모양을 따지지 않고 편안함과 건강을 추

구하는 이들은 모두 만족했다. 2대 사장이 마지막으로 해준 신발을 7년째 신

고 있는 그는 최근 3대 사장으로부터 새 신발을 맞추고는 7년을 신어본 후

두 분의 실력을 비교해 보겠다고 한다. 20여 년이 지난 신발을 아직도 놔두

고 가끔 신는다는 그는 그동안 관심은 뒀지만, 엄두도 못 내던 모터사이클에

2001년부터 취미를 붙이게 된다.

끊임없이 신소재가 개발되고 제조하는 도구나 기계도 바뀐다. 그래도 송

림수제화의 4대를 잇는 장인들은 전통기술을 익히고 그것에 기반을 둬 신기

술을 만드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과 기술이 끊이

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김명철씨만이 아닐 것이다. “나같이 불의

의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계속 있을 것이니 이 제화점이 사라질까 두렵다”는

그의 말에서 절실함과 고마움이 느껴진다.

우리나라에는 빈티지 문화가 없다. 얼마 전 어느 박물관에서 현대자동차

의 첫 모델을 구하는 데 매우 애를 먹었다. 결국, 외국에서 다시 수입해 왔다

고 한다. 100년 이상 된 물건만 골동품이나 문화재로 인정받는 사회는 이상

하다. 50년도 안 됐지만, 그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있는 한 그 어느 문화

재보다도 소중한 물건이 아닐 수 없다. 송림수제화에 전시된 구두 가운데는

20~30년 전 것뿐만 아니라 80년이 다 된 신발까지 있다. 여기가 바로 토털

제화, 즉 구두 박물관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근현대생활문화조사의 하나로

4대째 구두 장인의 맥을 이어가는 송림수제화 등을 조사하고 있다.

(뉴시스 2014년 1월 25일자)

수십 년 동안 송림수제화를 찾아오는 고객 김희달 씨는 1936년 7월 1일

생이다. 임효성 회장과는 몇 달밖에 차이가 안 나는 동기생이라고 한다. 한

양대학교 병원 산악회 창립멤버인 김희달 씨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은 산

악가이드로 활동하는 멋진 산악인이다. 등산화로 군대 워커를 신던 시절인

1970년대 중반 도봉산 등산 도중에 조우했다고 한다. 하산 후 한잔하다가

알고 보니 육군 훈련병 동기였고, 마음 터놓고 얘기하면서 서로 호감을 갖

게 되었다고 한다.

송림 신발을 신고 다니면 모두들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멋지다고 어디서

샀냐고 물어봐 줬던 시절이었다. 목에 힘주고 다니기도 한 그에게 친구들이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하면, “10년 넘게 신으니 비싼 것도 아니다”라고 강변

했다고 한다. 일 년에 한 번씩 창갈이를 해서 새 신발처럼 신는 그는 기념품

임효성 회장과

육군 훈련병 동기로 서로 알게 된

김희달 씨는 한양대학교 병원의

족클리닉을 통해

신발 본을 뜨는 몰드,

코르크 붙이기 개발에

일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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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121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으로 집에 모셔둔 송림 등산화도 몇 켤레 있다고 고백한다. 이제는 임효성 회

장과 한 달에 한 번씩 부부 동반으로 식사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등산하고 나면 먼지 털고 약품 칠하고 잘 보관해 놔야 신발이 방수도 잘

유지되고 자꾸 일그러지지도 않는다”라며 유지 비결과 손질을 재차 강조하

는 그는 송림의 세일즈맨을 자처한다.

그는 임효성 회장에 대해 “신용 있고 대인관계가 완벽한 친구로 한번 연

을 맺으면 쉽게 끊을 수 없다”라며, 그래서 평생고객이 많은 게 아니냐고 반

문한다. 한양대학교 병원의 류머티스 관련 명의를 송림에 소개한 그는 재활

의학과의 족클리닉을 통해 신발 본을 뜨는 몰드, 코르크 붙이기 도입 개발에

일조했다. 어떤 정형외과 선생님은 장애를 가진 아들의 신발을 송림수제화

에 주문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송림수제화 매장 벽에는 수많은 상장과 감사장이 걸려 있다. 단기 4282

년(1949년) 이기붕 당시 서울시장으로부터 받은 우량상, 1974년 이은상 한국

산악회 회장으로부터 받은 감사장, 1984년 사격연맹에서 받은 공인증 등도

걸려 있다. “내가 평생을 구두에 바치고 얻은 ‘훈장’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

로 수십 년 동안 변치 않는 고객의 신뢰감”이라고 말했다.

송림수제화는 고객만족 중심의 경영철학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실천한다. 대표적으로 “장애인(성인) 맞춤형 수제 구두 지원사

업”을 들 수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령에 따른 기초생활수급(권)자, 차상

위계층에게 송림수제화에서 맞춤형 수제 구두를 만들어 주고 있다. 매주 1

명씩 서울시 장애인협회가 추천한 만 18세 이상 성인 장애인들에게 선물하

고 있다.

1974년 12월 31일 당시 한국산악회 회장이었던 노산 이은상 시인이

이귀석 대표에게 수여한 감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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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125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이 외에도 1년에 2회 돈보스코 천주교 재단과 NGO 나마스떼코리아 등

에 재고 신발을 기부하고 있다. 바자회를 통해서 팔리는 이 구두에 대해서는

수리와 보증을 못해 줘서 미안할 따름이라고 한다. 모든 상품에 대한 기록

이 있으므로 기록이 없는 것은 기부물품이라고 할 정도로 많이 기부하고 있

다. 대개 매년 10~12월 연말 대정리 때 기부를 하는데 가끔 “좋은 신발을 싸

게 샀다”며 좋아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어서 기쁘다고 최갑선 여사는 전한다.

여력이 되면 송림수제화는 박물관도 건립하고 싶다고 한다. 4층 정도의

건물에 전시관을 열어서 한 층에 진열 쇼룸을 만들어 놓고 판매장을 겸할 예

정이라고 한다. 앞으로 송림수제화가 있는 을지로3가 부근이 재개발되면 한

남동 쪽으로 나가서 등산화 모양의 빌딩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10년 목표로

준비 중이며, 현재 중소기업청 박물관(상암동)에 초기 등산화 몰드와 신발 등

을 기탁해서 전시 중이다. 최근에는 국립민속박물관에도 오래된 등산화 등

을 기부하고 있다.

고객 가운데 포항제철 유상부 전 회장 같은 이는 임원들 모두에게 등산화

를 맞춰 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포항제철 산악팀도 고객이 되었다. 히말라

야 원정대에서 3인이나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자, 송림수제화는 시

신을 수습하기 위한 원정대의 대원들에게 신발을 후원했다. 지금도 산악인

들의 시산제에 협찬하고 있는데, “우린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후원하고 있다”라고 최갑선 여사는 전한다.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주지를 역임한 명진 스님도 송림수제화의 고객

가운데 한 명이다. 돌아가신 화암사 주지 종수 스님께서 송림 등산화를 신고

지리산을 자주 다니셨다고 한다. 종수 스님도 그렇고 주변에서 자주 추천했

지만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얼마 전 동국대학교 출신인 황찬익 씨가 2012

년 11월 25일 KBS에서 방영된 <백년의 가게>를 보고 다시 추천하기에 찾

게 되었다고 한다. 와서 보니, 1970년대 중반 K2와 레드페이스가 있을 때에

도 한번 와 본 기억이 났다고 한다. 요즘은 오대산 상원산 진고개에서 북대

까지 가는 길에 자주 신는데 발에 딱 맞는 정말 편한 신발이라고 극찬한다.

특히 하산 시 엄지발가락이 앞창에 닿지 않아서 무엇보다도 좋다고 한다. 조

금 불편해서 얘기를 하면 바로바로 얼른 수리를 해주니 참 좋다고 한다. 그

래서 수제화를 맞추는 것이라며 인터뷰가 끝나자 세 번째 새 신발을 신고는

바로 길을 나섰다.

봉은사 주지를 역임했던 명진 스님도 송림수제화의 고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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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127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직원

“명품 하면 세계적인 상표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장인의 정

성으로 명품 신발을 만드는 곳이 있다. 재단부터 재봉, 봉합 작업 등 평균 30

년 이상의 기술자들이 일반 구두부터 골프화, 등산화, 특수화까지 신발이란

신발은 모두 만든다. 디자인을 우선하면 신발에 발을 맞추어야 하지만, 발에

신발을 맞춰야 편하고 오래 신는다는 것이 이들의 신발 철학이다. 덕분에 80

년 이상 운영되어 4대째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 이곳 장인들은 일일이 발을

재고 석고로 발 모양을 떠서 가죽을 자르고 바느질을 하는 수작업으로 신발

을 만든다. 세밀하게 나누면 천 가지 공정을 정성스럽게 해야 구두 한 켤레

가 세상에 나온다는 장인들, 누군가의 편안한 발을 위해 지금도 수천 번의 망

치질과 못질을 견디는 사람들의 정직한 땀방울을 소개한다.”

(2014년 9월 3일 오후 10시 45분 방영 EBS <극한직업>의 일부분)

오늘의 송림을 지켜온 가장 중요한 분들은 특수화를 수작업하는 사람들

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최근에 TV 등을 통해서 많이 소개된 바 있다. IMF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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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129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경기 등 매우 어려웠을 때도 모두들 한마음으로 한우물만 파서 이겨냈다. 아

무리 어려워도 직원 월급을 한 번도 안 준 적이 없는 송림수제화다. 직원 누

구 하나도 쫓아낸 적 없다고 한다. “내가 굶어도 직원은 안 굶게 하겠다”라는

임효성 회장의 직원 사랑은 예사롭지 않다.

좁은 공간에서 건강을 위협하는 본드 냄새 등에 항상 노출된 작업 환경

이라 4층의 환풍기는 한시도 쉬지 않고 돌고 있다. 항상 퇴근 전에 자기 자

리 주변의 청소는 스스로들 정말 깨끗이 하고 간다. 실내에서는 절대 담배

를 피지 못하게 한다. 처음에는 반발하며 몰래 숨어서 피기도 했고, 더러는

“아들(임명형 사장)도 못 끊게 하면서 왜 우리들에게 강요하느냐?”라는 원성도 있

었다. 하지만 건강에 대한 진심 어린 충고임을 알게 되어 결국 대부분 다 끊

게 되었다고 한다.

장상범(63) 씨는 벌써 40년 넘게 한결같이 이 일을 하고 있다. 충남 논산

출신인 장 씨는 중학교 중퇴 후 누님과 함께 상경해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낮에 식당일을 하다가 우연히 구두기술자를 만나 배우기로 작정한 게 이 일

을 시작한 계기라고 한다. 처음에는 판매를 했다고 한다. 전차가 다닐 때에

버스표 한 장이 5원이었는데, 당시 구두는 2,000원이나 해서 월부 판매를 했

다. 이후 기술도 조금씩 배우다가 명동 칠성제화에서도 일하게 되었다. 개인

점포도 운영했는데, 아는 분의 소개로 송림수제화에 들어오게 되었다. 1995

년에 그만둔 뒤 홍제동에서 ‘잉글랜드(인왕등산화)’를 7, 8년 운영하다가 다른 사

람에게 넘기고 다시 재입사했다.

자부심으로 40년 넘게 구두기술자로 일하고 있는 장상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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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30 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기술자가 제일 편하고 좋지. 정년도 없고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거든.

여긴 몸만 건강하면 언제까지나 일을 할 수 있지.

한번은 술 먹고 뻑치기 당한 적이 있었어. 월급봉투가 사라졌을 때

사정을 얘기했더니 임효성 회장이 조금씩 나중에 공제하기로 하고

다시 준 적도 있었어. 일하다가 작업장에서 깜빡 잠들기도 했지.

한번은 불이 난 적도 있었는데 가죽으로 덮어서 끄기도 했어.

별의별 일이 다 있었지만 기술자로서 자부심이 느껴지는 곳이야.

신발이 좋다고 한 번 온 손님이 다시 찾아오니까 커다란 보람도

느끼지. 한 사람이 몇 개씩 만들어 가기도 하고,

특별하게 ‘만들어 준 사람’ 보자고 해서 만나니, 앞으로는 내게만

만들어 달라고 하는 손님도 있었어. 한번은 혼동을 해서 다른 사람이

제작을 했는데 그 손님이 알아채는 경우까지도 있었어.

손맛이 서로 다른 것까지 잡아내니 대단한 손님이시지.

3대 임명형 사장은 같이 일해 봤는데 신세대로 남자다워서 좋아.

무엇보다도 신제품 개발을 잘하고 손님도 더 많아져서 고맙지”

(송림수제화 직원 장상범 씨 인터뷰)

송림에서는 사장도 직원이다. 사장은 직원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줄 알

아야 한다. 사장 혼자서도 다 잘해야 가르칠 수 있다고 한다. 안 그러면 직원

통솔이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아야 신상품도 개

발하고 기획할 수 있다. 그래서 임명형 사장은 출근하면 직원들이 만들어 놓

은 완제품들을 점검하고 바로바로 실수를 찾아낸다. 가끔 대충 눈가림한 것

도 바로 찾아내곤 한다.

재료에 하자가 있을 수 있기에 재료 구입은 2대 회장이 직접 챙긴다. 가죽

은 필요한 양에 따라 구입처가 다르다. 대량일 경우는 안산 반월단지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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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133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Ⅲ. 송림수제화를 지켜온 장인정신, 고객, 그리고 직원

피혁공장과 직거래를 하는데, 전화로 주문을 넣는 것이 다다. 보통 1,000평

정도씩 주문하는데, 이게 가죽공장 입장에서는 소량에 불과해 원래 잘 안 해

주는데 만들어 줘서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고 임 사장은 전한다.

하지만 소량일 경우는 동대문 시장의 피혁점을 직접 찾는다. 피혁만 취급

하는 것이 아니라 수제화에 필요한 대부분의 부자재, 즉 못, 본드, 칼 등의 소

모품들이 모두 구비되어 있다. 대부분의 부자재를 피혁점이 대행해서 구해

주는 셈이다. 등산화 방수 원단 등은 스위스에서 직접 보내주기 때문에 적어

도 4달 정도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송림의 직원 가운데는 에스콰이어(배재홍), 금강제화(양동주) 등으로 진출한 사

람도 있다. 그리고 한 번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사람도 두 명이나 된다. 자

기 가게 한다고 나가면 잡지 않는다. 다만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한

다. 절대 해고가 없는 회사지만, 미싱재단사 한 명이 갑자기 몸이 안 좋아 잠

시 쉬겠다고 한 뒤 이틀 만에 패혈증으로 사망한 것은 아직도 큰 아픔이라

고 임 회장은 전한다.

송림수제화 4층에는 7명의 기술자들이 재단부터 재봉, 봉합 작업까지 제

작에 여념이 없었다. 모두들 최소한 2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명장들이다.

40여 년을 제작에 열정을 쏟는 분도 있다. 직원 중 가장 어린 사람이 장현창

(48) 씨다. 장상범(63), 김무웅(72), 조천규(62), 김정태(67) 씨는 하창과 접부를 담

당하고, 장현창(48) 씨는 윤명원(52), 최태원(60) 씨와 함께 재봉 등을 담당한다.

1. 장상범

3. 김정태

2. 김무웅

4. 조천규

1. 장현창 2. 윤명원 4. 최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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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창과 접부 담당

재봉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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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135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Ⅳ. 수제화의 제작과정

Ⅳ수제화의

제작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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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137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Ⅳ. 수제화의 제작과정

한 컬레에 천 번의 손길

송림은 기성화가 아니라 수제화이다. 수제화라고 해서 모든 것을 손으로

만들 수는 없다. 이제 공정의 일부분에 기계가 사용되고 사실 어디까지가 수

제화라고 할 수 있는지 그 개념이 모호하다. 송림수제화는 ‘수제화’의 특징

을 ‘손’에 두지 않고 ‘편안함’에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싱이나 건조기 등을

사용하더라도 기계산업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수제화의 반대말로 기성화를 들 수 있다. 기계를 이용해서 같은 물건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을 기성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성화의 근본에

는 ‘문수’의 통일이 자리 잡고 있다. 222나 223처럼 1㎜ 단위가 아니라 220

나 225 등 5㎜ 단위로 정해진 문수의 신발에 자신의 발을 맞추는 것이다. 발

이 편하자고 신발을 신는 것인데, 자신의 치수가 222라도 220이나 225치

수의 신발에 발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따라서 비록 ‘수제화’

의 간판을 내걸었더라도 자신의 발에 맞는 신발이 아니라 만들어진 신발에

발을 맞추라면 그건 ‘기성화’와 다를 바 없다는 게 송림수제화의 설명이다.

이런 까닭에 송림은 이미 틀을 짜놓은 신발 목형으로 다른 고객의 신발

을 만들지 않는다. 신에 발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발에 신을 맞추는 것이다.

세상에 똑같이 생긴 발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발에 신발을 맞추기 위해서

는 대량으로 기계화된 생산을 할 수가 없다. 오직 한 사람의 고객에 맞는 단

하나의 신발만을 제작해야 한다. 기계로도 만들 수는 있지만, 단 하나의 신

발을 맞추는 데는 효율성이 전혀 없다. 그렇기에 수제화를 만든다고 생각하

면 어떨까?

송림에 있는 수없이 많은 사람의 발 모양을 본뜬 ‘목형’은 기본적인 틀

에 불과하다. 언제나 새로운 형태의 발 모양을 한 고객들이 찾아온다. 미세

한 차이 때문에 늘 목형은 손님 발 모양에 맞는 것으로 새롭게 짤 수밖에 없

다. 그래서 송림의 신발 제작은 발 측정부터 시작된다. 이후 재단, 밑창 바느

질까지 천 번의 손길을 거쳐 만드는 신발이야말로 송림이 말하는 수제화라

고 할 수 있다.

구두 관련 용어

목형 = 화형 = 라스트 = 구두골 = 골

고소리 = 스트레치 플라이트

노리 = 접착제(본드)

피할 = 스카이빙 = 스끼

이음질(피할된 부분 칼질

운동화 혀 부분 = 베로 = 베라

이찌키리 = 이찌기리(모서리 부분 절개)

선심(앞코 형태 유지)

월형(뒤꿈치 형태 유지)

대다리 = 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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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139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Ⅳ. 수제화의 제작과정

측정과 족형 제작

신발 제작의 첫 공정은 발 형태를 측정하는 일이다. 발의 길이, 넓이, 발

등의 높이 등 사람마다 다른 발의 형태를 측정해서 문서로 기록한다. 주문서

위에 고객의 발을 얹고 연필로 정확히 발의 모양을 그려낸다. 그리고 발가

락, 발등의 두께 등을 줄자로 재어서 기록한다. 이렇게 만든 주문서로도 부

족해서 석고로 족형까지 뜬다.

손님의 족형을 일일이 뜬 뒤 석고로 다시 발 모양을 만들고, 그것으로 발

바닥 모양의 코르크 바닥을 찍어 낸다. 이렇게 만든 신은 발바닥 전체가 체

중을 받쳐주므로 오래 걸어도 피곤하지 않고 발목과 무릎 관절을 보호해 준

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든 족형과 주문서를 바탕으로 본을 만들어 재단과 재봉,

밑창 제작에 들어간다. 모든 제작공정은 평균 25년 경력 장인들의 수작업으

로 이뤄진다. 가죽 원단을 스케치해서 자르고, 또 밑창을 바느질해 붙이는

작업까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신발은 천 번의 손길을 거쳐 완성된다고 할 정

도로 수많은 공정을 거친다.

수제화 기술자들의 손에는 이제 물집조차 잘 안 생긴다. 물집이 터지고

또 터져서 이젠 굳은살이 배어 아프지 않다고 한다.

30여 년 동안 오직 한 가지 일만 해 온 탓에 멀쩡한 손이 하나도 없을 정

도다. 휜 채로 굳은 손가락도 있다. 너무 아파서 잠자다가 일어나 손을 주무

르기도 한다. 머리를 숙여 일에 집중하다 보니 어깨와 등이 아예 굽은 경우

도 있다.

이 모든 일을 첨단 기계는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기계가 못하

는 일도 많다. 기성화처럼 접착제로 붙이는 게 아니라 수제화는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바느질을 해야 한다. 특히 바닥창과 갑피를 붙일 경우에는 비스

듬히 세워서 바늘을 넣어 옆으로 잘 빼야 한다. 이런 기술은 ‘슈퍼컴퓨터’도

할 수 없는 기술이라고 한 기술자는 농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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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네모 안의 번호는 작업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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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형 뜨기가 끝나면 석고를 붓는 라스트 제작을 위한 준비과정에 들어간

다. 석고로 발바닥 형틀 뜨기가 끝나면 족형에 석고를 붓고 말린다. 아르바

이트를 하는 임명형 사장의 차남 임승철 군이 와서 이 일을 전담한다. 다 붓

고 나서 말리면 임 사장이 손으로 석고를 다듬기 시작한다.

라스트 제작

깔창 위에 코르크를 엉기게 하여 판에 고정시켜 놓는다. 그 다음엔 다듬

은 석고로 눌러 발바닥 모양에 맞는 깔창을 만든다.

이렇게 깔창이 만들어지면 4층 공장으로 이관된다. 4층에서는 주문서를

확인하고 등산화의 경우는 이름표를 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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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143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Ⅳ. 수제화의 제작과정

라스트는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 라스트 중에서 고객의 데이터와 가장 흡

사한 것을 골라 측정한 발 형태에 맞춰 코르크를 붙여서 완성시킨다.

주문서를 보고 발 모양과 가장 비슷한 라스트를 선정한다. 기본 라스트에

다가 살을 붙여가며 개인별로 맞춤형의 라스트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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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오전 9시 반에 작업이 시작될 때 이 과정부터 시작된다. 인솔, 저부

과정, 중창 과정이라고도 하는 이 과정에서는 라스트와 중창을 맞춰서 차이

가 나는 부분을 정확하게 도려낸다.

보통의 다른 수제화점에서는 중창의 경우 기계로 찍어 만든 기성품을 이

용하기도 한다. 송림수제화는 사람마다 발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중창도 직

접 만든다.

깔창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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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147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Ⅳ. 수제화의 제작과정

라스트가 완성되면 다음으로 라스트에 맞게 종이 패턴을 자르는 패턴 작

업이 시작된다. 기존 디자인이 없거나, 사이즈가 많이 다른 것들은 종이 패

턴을 처음부터 새롭게 만든다. 라스트에 특수 테이프를 붙인 후 그 위에 연

필을 대고 자를 곳을 표시한다.

이후 그대로 때어내어 다시 종이에 붙인 후 종이 패턴을 완성한다. 패턴

이 완성된 다음에도 칼과 가위 등으로 오려내는 작업이 전혀 간단치가 않다.

종이 패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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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에 따라 오려 낸 종이를 가지고 재단에 들어간다. 가죽에 패턴 종이

를 대고 은펜으로 패턴을 그린다. 은펜으로 그리는 것은 휘발유 등으로 쉽게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가죽에 패턴을 대고 그려진 선을 따라서 가위나 칼

로 오림질(가위질)을 해 나간다. 탑라인(아귀) 부분 등은 은펜으로 그린 선보다 조

금 간격을 더 띄워서 재단한다.

갑피 재단 과정

왜냐하면 선 밖의 남는 자투리 부분은 선에 맞춰 안으로 접어서 붙이기

위한 접음질 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접음질을 할 때는 스타본드 등의 여러

본드와 망치 등을 주로 사용한다. 패턴을 가지고서 똑같은 방법으로 내피 역

시 오려낸다. 이 역시 외피와 내피가 결합한 부분에 홈칼질을 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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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로 자른 내피와 외피의 가장자리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미세하게 더

두꺼워진다. 두꺼워져서 봉합(접음질)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부

분에 대한 다듬기를 한다. 이것이 가장자리면 다듬기라고도 하는 스카이빙

작업이다. 스카이빙은 가죽 두께를 조금 줄여 줘 재봉을 편하게 해 주며, 맞

물리는 두 면을 딱 맞춰 붙일 수 있게 해 준다.

스카이빙 작업

스카이빙 작업이 끝나면 다음으로 내피와 외피를 결합시키는 봉합 과정

으로 들어간다. 미싱 작업인 재봉 전부터 이뤄지는 작업으로, 이때 천이 늘

어나지 않게 하려고 보강천 등을 본드로 붙여 넣기도 한다.

외피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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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 복숭아뼈 보호를 위한 패드, 베라 속, 발등을 덮는 부분의 베라 쿠션

등을 붙이는 과정이 여기서 이뤄진다.

외피 결합 시의 재봉은 각 과정에서 실로 봉합이 필요할 경우 보통 네 번

정도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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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가 필요한 등산화에 고리를 치는 작업이다. 구멍을 뚫고 리벳을 때

려 박아 끈을 맬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끈을 매는 구두에도 구멍을 내기 위

해 펀치 작업을 한다.

펀치 작업

완성된 갑피를 라스트에 씌우는 작업을 성형 작업이라고 한다. 골싸기 또

는 골씌우기라고도 하는데, 펀치 작업이 끝난 후에 이뤄진다.

성형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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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만 기계로 때리고 나머지는 일일이 손으로 못을 친다. 이후에 당겨서 쨍쨍하게 만들며 골싸기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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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 작업이 끝난 후에는 신발 앞뒤를 강화하기 위해 선심과 월형을 딱딱

하기 굳히는 작업을 한다. 송림수제화에서 일을 도왔던 한 새터민은 북한에

서는 이 작업을 ‘신작업’이라 한다고 전했다. 월형을 넣기 전에 소주 등을 뿌

려 가죽을 유연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후 ‘936번’ 또는 ‘7000번’ 등의 제품번

호를 가진 본드를 넓게 바른다. 이후에 뒷춤, 옆춤, 뒷중심 등의 높이에 유의

하여 풀칠을 하고 월형을 넣는다.

다른 수제화점에서는 보통 기성품 선심과 월형을 사용하는데 송림수제

화는 이 모든 것을 직접 만든다고 한다. 기술자들의 습관에 따라 월형과 선

심은 골싸기 전에 넣기도 하고 골싸기를 하고 나서 넣기도 하는데, 이로 인

한 차이는 없다고 한다.

선심 월형 작업과 열가공

이렇게 선심과 월형 작업이 끝나면 신발의 주름을 쨍쨍하게 펴주기 위해

열가공을 한다. 건조기에 넣기 전에 창 바닥 등에 박은 못을 뺀다. 이후에 그

자국을 줄이기 위해 망치로 두드린다. 다음으로 오래 놓아두면 가죽의 기름

기가 빠지고 변형이 오기에 섭씨 100도 정도에서 약 30분간 건조시킨다. 이

과정에서 내피, 외피, 선심, 월형 등이 붙고 성형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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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심 월형 작업과 열가공으로 성형 작업이 다 끝나면 속창 붙이기 전단계

로서 골목 빼기를 한다. 창 붙이기 전에 외피를 젖히는 이 작업을 위해서 타

카심과 못을 모두 뺀다. 그리고 골밥 부분은 칼로 잘라낸다. 이 과정 중에도

그라인더로 사포 작업을 한 번 더 하기도 한다.

골목 빼기

등산화를 비롯한 방수가 필요한 신발에는 속창 붙이기에 앞서 방수 처리

를 한다. 이 과정은 3층 매장 옆 작은 작업실에서 임명형 사장이 혼자서 직

접 극비리에 진행한다. ‘며느리에게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기술이 이 과정

이라고 한다. 임 사장은 이 밖에도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을 틈틈이 점검하

기도 한다.

방수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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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이 끝난 갑피에 속창을 붙인다. 속창을 붙이기 위해 속창을 직접 가

스레인지 불에 대는 작업이 인상적이다.

속창 붙이기

속창을 붙이고 꿰매기에 앞서서 신발에 따라서는 대다리를 넣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숙녀화의 경우 맵시가 나지 않고 둔탁해지기 때문에 이 작업

을 생략하고 바로 창을 붙인다. 고무로 된 세피를 붙일지 가죽으로 된 세피

를 붙일지는 신발에 따라 다르며, 대다리로 할 경우 더욱 튼튼해진다는 이

점이 있다.

대다리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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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로는 절대 할 수 없다는 작업이 바로 이 부분이다. 두꺼운 가죽을 커

다란 바늘로 종횡무진 누비는 기술자의 손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꿰매기를

하면서 속창의 비어져 나온 부분은 여기서 잘린다.

속창 꿰매기

인솔이라고 하는 속창 작업이 끝난 후에 아웃솔이라고 하는 겉창 붙이는

작업이 이뤄진다.

겉창 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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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느질로 작업이 끝난 후 굽에 풀칠을 하고 붙인다. 이 작업을 마치면

칼질 자국 등을 없애기 위해서 창옆 다듬기를 한다.

굽 붙이기와 다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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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신발을 점검하고 다 되었으면 약을 바르고 광택을 낸다. 이후에

제품에 대한 최종 검사가 이뤄진다.

마무리 작업과 제품 최종 검사

수제화가 완성되면 약속된 날에 고객에게 물품이 인도된다. 예정보다 일

찍 완성된 경우에는 바로 고객에게 문자를 보낸다. 임명형 사장은 약속된 날

에 내방한 손님에게 직접 신발을 신겨주며 끈 맺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시착

한 손님에게 매장을 걸어보게 한 후 미세한 부분까지 물어본 다음에 고객이

만족하면 포장해서 인도한다.

물품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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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171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Ⅳ. 수제화의 제작과정

수제화가 인도되는 것으로 모든 과정은 일단 끝난다. 하지만 한 신발을

20여 년 가까이 쓰는 고객도 적지 않아서 수시로 ‘창갈이’ 등의 A/S 의뢰가

들어온다. A/S 과정에도 임명형 사장은 점검과 지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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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173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Ⅴ. 다양한 수제화 제품과 제작 도구

Ⅴ다양한

수제화 제품과

제작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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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175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Ⅴ. 다양한 수제화 제품과 제작 도구

다양한 수제화 제품

송림이 만든 신발의 종류는 구두와 등산화 외에도 매우 다양하다.

양구에 있는 육군스키부대에 납품한 스키화가 있다. 현재 송림수제화에

는 육군 조달본부에 입찰했던 서류들이 보존되어 있다.

언젠가 국군의 날 행사를 20일 남겨두고 주문이 들어온 고공화도 있다.

군화 재봉한 갑피를 가져와 착지용 쿠션을 달아 10일 만에 완성해서 납품

한 바 있다.

한국산악회에서 주문해서 만든 빙벽화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에는

외제밖에 없었고 등산배낭에다 체중까지 합쳐 120㎏을 지탱할 수 있는 것

이어야 했지만, 마침내 개발에 성공했다.

송림수제화의 ‘크레타’는 암벽화(크라이밍화)로 유명했다. 암벽을 타기에 방

수가 불필요해서 방수 처리를 하진 않았다. 또 하나 송림등산화를 유명하게

만든 등산화 ‘비브람’이 있다. 등산모임에서 이 방수 신발을 사기 위해 ‘계’를

들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국내 유일의 ‘물 안 새고 튼튼한’ 수제 방수 등산

화를 만들기 위해 송림은 가죽을 태우지 않고 열처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송림이 만든 사격화는 태릉선수촌 사격장에서 국가대표들이 사용하기

도 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까다로운 규격을 통과해 대한사격연맹 공인증

까지 받았다. 외제 사격화를 잘 분석해서 만들어 낸 것이었는데, 대형 스포

츠 신발회사로부터 자기들 상표를 붙여서 출시하자는 제의를 받기도 한 일

화가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수렵화를 비롯해서 오토바이화, 승마화, 헌병 사이드카화, 남

극과 북극 횡단용 설상화, 골프화 등 많은 특수화를 제작했다. 손님이 원하

면 남성화, 숙녀화, 캐쥬얼화, 운동화까지 무엇이든 연구해서 편안한 신발을

만들었다. 송림수제화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수제화이므로 원하는 종류와

디자인으로 제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기부물품을 제외하고, 송림에서 직접 만들어 판매한 구두는 A/S를 받을

수 있다. 창갈이 등은 빠르면 2~5일 사이에 수리해서 택배를 이용해 보내준

다. 아울러 송림은 판매 시 고객들에게 구두와 등산화 등을 가장 좋은 상태

로 유지·관리하려면 ‘Wax 가죽 보호제’로 평소에 잘 닦아 줘야 하며, 특히

방수 제품은 불에 닿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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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177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Ⅴ. 다양한 수제화 제품과 제작 도구

등산화

워킹화

골프화

남성화, 여성화, 캐쥬얼화

티롤화

장애인화

(송림수제화 사진 제공)(송림수제화 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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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도구

집게

종류별도 그 용도가 다르다. 주로 방울집게를 사용하는데,

못을 빼거나 가죽 등을 집어서 뜯어내는 데 사용한다.

잃어버리거나 쇠가 부러지지 않는 한 계속 사용한다.

고수리(레)

목형에 갑피를 씌운 다음 당기는 데 사용한다.

지렛대 역할을 하도록 고수리 아래턱 부분에 목형을 대고 가죽을

당겨서 붙인다. 망치로도 사용하며, 고수리가 없으면 신발을

못 만든다.

다리미

헝겊으로 된 라벨상표나 방수테이프를 붙이는 등의 작업에서

열접착용으로 사용한다. 기술자의 편의에 따라 다양한 다리미를

제작해서 사용한다.

가위

패턴을 자르거나 원단 등을 자를 때 주로 사용한다.

오림질 등의 재단 작업에 사용되며 가위 대신 ‘칼’을

사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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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181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Ⅴ. 다양한 수제화 제품과 제작 도구

갑피칼

정밀하고 빠르게 자르는 재단 작업에서 주로 사용한다.

구두칼

가죽도 자르지만 대부분 창을 자르거나 다듬질할 때 주로 사용한다.

드라이버 대용 도구

수선할 때 창을 뜨기 위해 만들어 사용한다.

개인에 따라 다르며, 방울집게를 사용하지 않고

대용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망치

신발을 만들 때 수천 번 원단을 두드려야 한다. 이렇게 다듬질할 때

구두용 특수 망치를 사용한다. 골을 씌워서 다듬을 때 주로 사용하며,

못질을 할 때도 사용한다. 못 빼는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목형(골) 빼기

라스트를 씌운 후에 그 목형을 잡아 빼기 위해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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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183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Ⅴ. 다양한 수제화 제품과 제작 도구

본드 통

본드를 담는 통으로, 기술자가 자신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 사용한다.

송곳

여러 종류가 있다. 일반 송곳을 비롯해

줄송곳, 창송곳, 대송곳, 대다리송곳

등으로 용도를 나눠 사용한다.

숫돌

칼, 가위, 송곳 등의 날을 세울 때 사용한다.

재봉틀

재단이 끝난 갑피 원단을 접합할 때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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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185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Ⅴ. 다양한 수제화 제품과 제작 도구

줄자

발 치수를 비롯해 사이즈 등을 잴 때 사용한다.

줄칼

창송곳을 만들기 위해 갈구기를

다듬어 가는 데 사용한다.

일지걸이용 집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며 기술자가 편의상

일지를 걸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징걸이

굽못을 박을 때 사용한다.

용도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

쪽가위

실밥을 다듬거나 따낼 때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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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통

주름을 펴거나 갑피 등을 탱탱하게 만들기 위해

열처리를 할 때 사용한다.

콤파스

패턴을 낼 때 주로 사용한다.

창송곳

송곳 가운데 창을 뚫기 위해 전용으로

사용하는 송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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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용 테이프

패턴을 낼 때 종이를 붙인 뒤 다시 그대로 떼어내는

용도로 사용된다.

패턴용 칼 겸 드라이버

재단사가 패턴을 낼 때 여러 용도로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만든 도구 가운데 하나다. 손에 익게 칼로도 쓰고

드라이버로도 쓰기 위해 제작되었다.

펀치

고리 구멍이나 끈 구멍 등 구멍을 뚫을 때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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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판

펀치 날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래에 대는 판이다.

풋폼

발바닥의 모양 형태를 찍어 내기 위한 재료다.

하도메(결합기)

예전에는 펀치 작업을 수작업으로 다 했는데, 등산화 또는

일반 구두의 하도메 집에 끈 구멍을 만들어 둥글게 생긴 고리를

결합시키는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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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193192

Abstract

The Peoples of Songlim Handymade Shoes’s in Soopyo Street

Since 2011,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NFMK) has taken

interest in the life history of pre-modern and modern professionals that are

quietly vanishing from our world, and has been carrying out surveys and

documentation projects on the intangible vocational skills and tangible

material culture of such professionals. The technical skills of these artisans

and the tangible and intangible culture relevant to their materials and tools

are directly linked with the pre-modern and modern folk culture of Korea.

Furthermore, now is the time interest in these artisans and their culture is

in most dire and urgent need, as fast-paced industrialization charges on and

artisans are being lost.

Life history research is a qualitative research methodology that explores the

life of a particular individual. This methodology has been drawing attention

across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disciplines, including history, psychology,

sociology, anthropology, and literature. Life history research connects an

individual’s anecdote to a historical fact and analyzes relevant data to produce a

rich and detailed description of the life history of the individual.

Life history research on professionals – particularly artisans – who lived

through the sea change of pre-modern and modern Korea does not stop at

merely micro-observing the reality Korea was faced with in the 20thcentury.

The research sheds light on the self-reliant spirit of artisans who took on

challenges and counterchallenges amidst the sweeping wave of turbulent pre-

modern and modern history, and presents a vivid description of their plain but

magnificent human journey of charting their destiny that hung by a thread.

Life history research is the key that links the life history of a professional to

the larger history of daily living of the time, and a mechanism that facilitates

dialogue, more specifically communication, between the part and the whole.

So far, life history surveys of pre-modern and modern professionals have

focused on recording the lives of ordinary people that may forever be lost from

around us if not recorded immediately. However, Songlim Shoemaking is an

exception, because the family business will continue into the fourth-generation

by the great-grandnephew of the founder, who started the business nearly 80

years ago in 1936.

Handmade to measure shoe business has long been in decline, driven out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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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factory-made, mass-produced shoes. The entire shoemaking process has been

mechanized and automated, while hand-making from start to finish has been

rendered a lost art. Songlim may well be the only standing “shop of a century”

that is well-recognized among handmade shoemakers.

This survey was conducted with the life history research methodology to

document and share memories described in verbal accounts given by artisans

themselves and other informants such as clients who have known the artisans,

thereby re-interpreting the lives of individuals relevant to the profession of

the artisans within the larger framework of local and pre-modern to modern

history.

A profession is indivisibly related to its value as an element that constructs

a society and its role in the society it belongs. Therefore, professions are

inevitably and largely influenced by the demand of a rapidly changing society.

However, the influence is not unilateral, because the demand of the time for an

artisan is also historic. Just like major 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Korea, the

lives of pre-modern and modern artisans who have worked to the best of their

abilities in the modern industrial society are themselves historic.

Life history of artisans cannot cover the entire history of social change.

However, the dynamic connection between the rise and fall of artisan

businesses and pre-modern and modern industrial history is undeniable.

Moreover, an artisan’s relations with his or her active area are not irrelevant to

the local history. That may be why local communities invite artists and small-

to-medium sized business owners to various projects aimed at building new

towns or improving existing ones.

As with previous projects, the NFMK diligently surveyed and documented

by usage the tools, machines, materials, and products owned and used by the

pre-modern and modern professionals, because the memories of individuals

about these objects are important subject matters that can fill gaps in the verbal

accounts individuals give about their life and the daily living of the time.

This is because stories of usage, history, and anecdotes about the tools allow

a thematic approach to the life of the professional, as opposed to people-based

or incident-based approach. In the end, this survey is significant in that it was

an effort to extensively broaden the perception of professionals by shedding

diverse and multi-dimensional light on the material culture related to the

artisans’ profession.

The survey of “life history of pre-modern and modern individuals” was

conducted in four periods. During the first period ending March, focus was

on selecting and visiting individuals to be surveyed and collecting basic data

on relevant living individuals, tools and machines artisans possess, and video

images and clips on the entire work process.

In the second period ending June, in-depth interviews were carried out

on the second-generation chairman, third-generation president, and fou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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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 수제화의 장인들

generation descendants who work for Songlim, as well as clients to document

and narrate their stories. The third period continued until the end of October

and completed the field survey after complementing shortcomings of the first

and second periods. Writing the report began in the final period starting in

November.

Mr. Lee Gwi-seok, founder of Songlim Shoemaking, started his business in

1936 in a small, rundown shop near Supyo Bridge close to the current location.

He produced and sold handmade to measure shoes; mostly men’s and some

women’s. He was an artisan who made shoes for almost sixty years until he

handed down the business to his nephew Lim Hyo-seong (chairman) and his

son Lim Myung-hyun (president) and passed away in 1995.

Handmade shoe business flourished as Korea modernized in the 20th

century, but ever since mass-production technology started to develop, it

has become a lost business. The ups and downs of handmade shoe business

continued on as shoes became a material symbol of modern times. Korean

shoe brands such as Kumkang and Esquire succeeded in mass-production and

managed to maintain their places despite the endless inflow of overseas brands,

but handmade shoes have all but disappeared.

Shoes are daily goods that everyone needs as well as luxury goods dubbed,

“the finishing touch to fashion.” Particularly, handmade shoes are considered

designer goods in other countries even today. Unlike previous surveys on

professions that perished, the survey on Songlim attempts to discuss the future

of the business on how Korean handmade shoes that once dominated the

World Skills Competition can make inroads into the global market.

During the survey, mountaineer Heo Young-ho, who explored the Arctic,

Antarctic, and Himalayan peaks, long-time employees, and several clients were

interviewed separately. These interviews offer a glimpse into challenges to the

current handmade shoe business in Korea and possible solu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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