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철자서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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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철의 삶과 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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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총선 전주완산을 예비후보 이광철 자서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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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철의삶과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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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겠습니다.

지난 여름, 희망버스의 주역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책 <소금꽃나무>를 읽었습니다. 그 책의 서문에서 김진숙님은

책을 내자는 권유를 받고서 베어질 나무들을 생각하여 망설 다

고 쓰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세상에 좋은 책들이 넘쳐나는데 굳이 나까지 책을 만들겠다

고 덤비는 것은 민망한 일이고 자원낭비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

에, 지난 17대 국회에서 의정활동을 하던 시절에도 감히 책을 만

든다는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치활동을 하는 사람

으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스스로 되돌아보고 가고자 하는 길을

세상에 밝히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었습

니다.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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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인‘함께’는 본래 제가 지난 17대 국회에서 의정활

동을 하던 당시에 의정보고서의 제호로 신 복 선생님께서 주신

입니다. 제호에 덧붙여서 주셨던 말 대로“이웃과 함께, 시대

와 함께, 기쁨도 함께, 아픔도 함께”하겠다는 다짐으로 제목을 붙

습니다.

‘함께’는 경쟁이 아닌 연대(連帶)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처

럼 1%만 행복하고 99%가 절망하는 사회를 다 함께 행복한 사회

로 바꾸는 힘은 연대의 가치에서 나옵니다. 각자가 자신이 1%에

끼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경쟁이라면, 99%가 행복한 사회를 만

들기 위해 모두 함께 노력하는 것이 바로 연대일 것입니다.

책을 준비하다보니 앞길에 대한 모색은 지나온 과정에 대한

성찰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니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도 있지만 아쉽거나 부

끄러운 기억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때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

면’‘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손을 내 었어야 했는데’하는 후회

입니다.

정치활동을 하다 보니 지난 시기에 서로 의지하며 한 시대를

건넜던 동지들과 본의 아니게 마음이 갈라진 적도 있었습니다. 정

치적 견해의 차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저의 부족함 탓이 컸습니

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 시절의 동지들에게 내미는 진심어린

사과의 악수이기도 합니다.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만, 올해 2012년은 대한민국의 역

서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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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한해가 될 것입니다. 민주정부 10

년 동안 공들여서 쌓은 탑이 이명박 정부 4년 만에 송두리째 무너

져버렸습니다. 민주주의는 뒷걸음질 하 고, 남북관계는 살얼음

판이 되었으며, 서민의 삶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국가의 최고지도

자라는 사람부터 반칙과 부정을 일삼으니, 아이들에게‘정의’를

이야기하기 부끄러운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올해 치러질 두 차례의 선거, 제19대 국회의원총선거와 제18

대 대통령선거에서 정의로운 세력이 국회의 다수파가 되고 국민

을 나라의 주인으로 섬기는 정부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진보-

개혁진 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

2012년의 승리를 위한 저의 고민과 결의도 책에 담았습니다.

제가 평소에 고민해왔던 우리 지역의 문제도 담겨 있습니다.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인재를 많이 배출했던 이 고장 전북이

불과 몇십년 만에 쇠락해질 대로 쇠락해져버렸습니다. 고령화지

수는 전국 최상위권, 재정자립도는 최하위권인 낙후된 지역이 되

어버렸고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등지고 떠나갑니다.

독재정권 시절의 지역차별로 산업화에서 소외되었던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겠으나, 민주화와 지방자치 이후에는 특정 정치세

력이 지역을 독점함으로써 경쟁이 불가능했던 정치현실도 작용

한 것이 사실입니다.

혁신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정치세력이 경쟁하면서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지역정치, 소통과 협치(governance)가 실현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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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5

지방자치로 바뀌어야 합니다. 새만금사업 같은 토목개발에만 올

인하지 않고 사람에게서 성장의 동력을 찾고 미래를 준비해야 합

니다. 우리 자녀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도 꿈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책은 저 혼자서 만들지 않았습니다. 책의 제목 그대로 많은

분들과‘함께’만들었습니다. 책의 첫머리에‘내가 본 이광철’이

라는 꼭지를 실었습니다. 저명한 인사의 추천사보다는 젊은 시절

부터 오늘날까지 시기마다 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셨던 분들의

육성을 담고 싶었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기꺼이 귀한 말 과 사진

을 보내주신 여러 분들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삼십년

전의 활동들을 되살려낼 수 있도록 저의 희미해진 기억을 보충해

주신 선후배 동지들에게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촉박한 출

간 날짜를 맞추느라 밤을 새워가며 졸고를 엮어 보기 좋은 책으로

만들어 준 두인출판사 식구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의 저를 있게 해주셨고 지금은 천국에서 저를 지켜보고

계실 부모님, 25년 동안 온갖 고난만 안겨준 저를 단 한 번도 원망

치 않고 늘 가장 든든한‘빽’이 되어주는 아내 소성섭, 제대로 보

살펴준 것 하나 없는데도 스스로 잘 자라 어엿한 젊은이가 되어준

외동딸 이산하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2012년 1월

이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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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이광철

함께6

어린 시절부터 50여 년 동안 지켜본 이광철 전 국회의원은 항상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낮추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등불이 되고, 민주화 운동에 꽃다운 젊음을 다 바친 우리시대의 웅인 것 같다. 그와 함께 살아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광철! 세상의빛과 소금이 되어 별과 같이 원하길…….

전종길 _ 전주비전대학교교수

사실 나는 이광철을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성장과정을, 그의 치열했던 젊은 날을. 그런데도 나는 이광철에게 깊은 신뢰감을 가지고 있다. 내가 본 그는 사람을, 사물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가볍지 않다. 묵직한 마음과 행동, 그는 무슨 일을 의논하면 귀 기울여 찬찬히 들어주는 사람이다.

전성진_ 방송인

이광철, 냉철하면서 따뜻한 마음을, 가슴엔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사회엔 정의와평화를 항상 갈망하고,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행동하는 매력적인 사람.

이식희 _ 부동산중계사

1980년도 서슬 퍼렇던 시절에 처음 뵈었던 그는 거리에서‘호헌철폐’를 외치던 사람들의 우상이었다. 또한 세상의 현상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은 항상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여러 면을 오랫동안 보아온 나는 선생님이 국회의원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옥주 _ 전주시의회의원

이광철의원은‘막걸리’다. 소박하고 서민적이고 이웃의 갈증을 잘 해소한다. 텁텁하고수더분한 그 맛은 전세계로 통한다.

양성균 _ 기업체임원

이광철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민주투사, 전북지역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이라는 단어이다. 17대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참정연 대표를 하면서 노무현대통령의 든든한 지원자로서 노무현의 벗으로 최선을 다했다. 어려운 풍랑과 시련에 당당히 맞설 그에게 위로와 찬사를 보낸다.

이홍규 _ 전국민참여당전북도당부위원장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 그리고 전두환 일당이 정권을 잡으려 갖은 꼼수를 부리던 1980년4월 어느 봄날,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고 부르짖었던 이광철! 아직도이 사회를 바로잡아 보겠다는 순수한 열정만큼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겠지요.

이 동 _ 전북대학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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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본이광철 7

그는 온살이 요가원 새벽반 강사 다. 잔잔한 명상과 음악은 잡념을 몰아내기 위한 메시지 고 자존감을 확장시키기에 최고 다. 요가회원들은 그가 가르친 요가철학을 삶의철학으로 삼고, 행복했으며,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배정희 _ 어울림문화공간대표

이 사회에 힘없고 빽없이 소외된 약자를 대변하고 사회 모든 계층과 구석구석 소통할수 있는 역량있는 달인. 이 나라 문제점을 하나하나 뜯어 고치고 더불어 웃음과 행복을줄 수 있는 요기와 비젼을 갖춘 정치인이다.

조오익 _ 현대관광대표

지금도 가난하지만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그를 사랑한다. 그의 정직함과 참신한 인간적인 면모를 사랑한다. 그리고 한국 정치에 큰 획을 이루는 정치인이 되기를 소원해본다. 정말로 참신한 정치인을 추천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광철이란 기분 좋은 선택을하겠다.

오성택 _ 목사

이광철은 교육 전문가이다. 그의 섬세함과 문화적 안목은 교육운동에 몸담아 온 나보다더 고민한 듯 탁월한 대안을 내놓을 때마다 속으로 놀라곤 했다. 그에게서 늘 배운다.

정우식 _ 사단법인전북청소년교육문화원장, 교사

이광철동지는 우리 지역 사회변혁운동의 산파역할을 한 산 증인이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다 여러 번의 옥고를 치룬 민주화투사요, 통일₩ 노동₩ 농민₩ 교육 등 지역의 여러 부문운동의 씨앗을 뿌리고 터를 닦은 선구자이다.

김윤수 _ 교사

강한 투사의 모습 뒤, 지극히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모습 참 좋아했습니다. 올곧게 외길을걸어온 형의 발자취! 이제 큰 뜻을 위해 우리 모두가 다시금 신발 끈을 고쳐 매고 함께 하겠습니다!

박종일 _ 이지스대표

이광철 선배님과는 슬픈 일 보다는 함께 웃었던 일이 많았다. 옆에 있으면 하루 종일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다. 온 국민이 웃는 그날까지,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원동력이 있는 사람이다.

양윤신 _ 전북 5.18 동지회사무국장

이광철은 신바람 나는 세상을 꿈꾸어 온 실천가요 투사이다. 청년의 뜨거움과 송곳 같은예리함이 그의 무기이다. 거대한 지배세력의 빙벽을 뜨거움과 예리함으로 깨뜨리기 위해 악전고투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꿈이 있기 때문이다.

윤찬 _ 전주대학교교수

시련을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만들어 온 사람, 바로 이광철입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자 하는 그의 꿈이 현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차상철 _ 전전교조전북지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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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철 전 의원은 퍽 인간적이다. 서신동 주민에게 비친 그의 이미지는 너무 서민적이며,인간미 훈훈한 우리네 이웃사촌이다. 서늘한 지성과 남을 배려하는 심성은 자못 존경할만하다.

소병열 _ 서신동주민

꾸밈없이 소탈한 성품, 매사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사람, 항상 언행이 일치하여 만인에게믿음을 주는 외유내강형의 신사, 예술을 사랑하고 특히 삶이 버거운 순수 예술인들의 복지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사랑과 존경 속에 늘 그리운 사람 바로 당신입니다.

허현호 _ 연극협회회장

이광철의원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전주의 문화현장, 뒷전에서 땀 흘리며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로서 이광철 의원을 손꼽는데 누구도 주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이 필요한 시점에 가장 필요한 인물이 또한 이광철 의원이다.

조법종 _ 우석대학교교수

세월이 많이 흘 네요. 대학시절에 도산사상 계승 및 흥사단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공동체 대학문화운동 등등 그 역사의 현장에 계셨던 이광철 선배님을 난 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이광철위원장님을 가슴 떨리게 만나고 싶습니다.

박찬호 _ 전북대흥사단아카데미 20기후배

‘광철이 형님’은 마음이 넓고 사려 깊으며, 또 예지력이 있어 존경심을 저절로 가지게 됩니다. 저는 남의 경북사람이고‘광철이 형님’은 호남의 전북 분이시지만 지역차별 없는 세상, ‘시민은 자유롭게 국가는 정의롭게’라는 목표를 향해 함께 하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유성찬 _ 전국민참여당최고위원

나는 최근에 종교적 심성을 얻고 나서야 형의 궤적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삶의외피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는 내적 진화를 멈춘 적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뜻대로 말고 당신 뜻대로 하라는 형의 기도소리가 들린다.

허혁 _ 전북대학교철학과후배

항상 겸손하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 같다. 초심을 잃지 않고 한 길만 가는 강직함이 마치 만고풍상을 겪으면서도 푸르름을 간직한 채 우뚝 서 꿋꿋이 선산을 지키는 소나무와 같은 사람이다.

송호진 _ 익산시의회의원

내가 민주를 절망할 때 그는 싸웠다. 내가 정의를 갈망할 때 그는 정의로웠다. 내가 자유를 선망할 때 그는 자유로웠다. 내가 낙망할 때 그는 희망했다. 낯이 두껍지 못한 것이 흠이다.

이재훈 _ 전주대학교교수

전주 사람 이광철은 한지의 감촉처럼 편안하고 친숙하다. 한지에 내리비치는 햇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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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하고 따뜻하다. 한지의 빛깔처럼 은은하고 멋스럽다. 이광철은 전주의 한지처럼‘전주의 보배’같은 일꾼이 될 것이다.

손봉숙 _ 제17대국회동료의원

젊은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으로 거듭 옥고를 치루었고 참여정부 때, 의정활동에 충실한국회의원이었습니다. 송진의 향은 소나무의 상처가 클수록 짙다고 하 습니다. 어둠이짙을수록 새벽이 가깝습니다.

김형석 _ 자 업

이광철은 열정이 넘치고, 미래에 대한 비젼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는 전라북도와 대한민국, 그리고 국민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정치가다.

이정천 _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지도위원

모 초등학교 교장 재직시 국회에서 하는 일에 대한 6학년 사회수업을 하기 위해 당시 지역구 이광철 국회의원을 초청했었다. 약속시간에 오셔서 꿈과 희망이 담뿍 담긴 수업을정성껏 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정의를 실현하는 참 대변인의 모습을 보았다.

한 선 _ 전효문초등학교교장

이광철은 항상 겸손하며, 예리한 통찰력으로 세상을 관조하는 철학이 있으며, 농심과 같은 마음으로 진실하고 패기와 눈물이 있으며, 친화력이 있고 유머가 있는 사람이다. 약자의 입장에서 골고루 잘 사는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진솔한참 일꾼이다.

육익수 _ 농부

이광철 선배는 1980년 전북대학교 교정에서 본 모습에서부터 인연이 시작된다. 목소리는 쩌 쩌 하여, 주변에만 있어도 그가 말하는 정부비판의 내용이나 시대의 갈 길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었다. 이광철 선배의 젊은 날의 꿈이 그대로 살아나길 바란다.

김성숙 _ 숲해설가

착한사람이 우리 사회 주류가 되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 참여정부 시절 착한사람을 위한 생활정치인으로 각인된 이광철 선배가 착한사람들이 주류가 되는 사회의 선봉에 서주기를 간절히 원한다.

최순삼 _ 교사

이광철의원은 1980년대 초부터 전북의 학생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의 지도자로 눈부신 활동을 하면서 고난과 핍박도 많이 받았다. 그의 성품은 성실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쉽게 타협하지 않고, 의리를 지킨다. 이야말로 정치인 최고의 자격이며 미덕이 아닌가!

조성용 _ 전북노무현재단상임고문

10년 전 삼천초등학교에서 제일 가난한(그의 말) 운 위원장으로서 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희망을, 또한 5년 전에는 열악한 환경이었던 효림초등학교 급식실 증축 및 강당설립으로 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따뜻한 감동을 전해주었던 분!

조혜경 _ 학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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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은 모두가 잘 사는 북유럽식 선진국가가 될 것인지 1%만이 세상의 주인인미국식 자본주의가 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내가 본 이광철 의원은 우리나라를 모두가 잘 사는 복지국가로 발전시킬 정치인이다.

김현진 _ 지니스대표

혼이 살아있는 사람, 가슴이 따뜻한 사람,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며, 웃음을 선사해주는 친구, 그리고 곁에 없을지라도 그의 향기로 볼 수 있는 사람. 이광철은 늘 그리운 사람입니다.

최병석 _ 군장대학교기획관리처장

이광철은 한 마디로 순수한 사람이다. 대학생 때 지녔던 순수함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자신의 소신이 있어 세속에 흔들리지 않아 거짓이 없고,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 이웃을돌아보고 함께 기뻐하고, 아파하는 어울려 사는 사람 냄새나는, 오늘날 필요한 믿음이가는 신뢰의 대상이다.

박옥철 _ 혜성중학교교장

내가 본 이광철의원은 맑은 사람이다. 언제나 소신을 지켜왔으며, 자신의 속내를 감추거나 숨기지 않았다. 그는 국회 문화관광위원으로서 전북의 문화와 체육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의원 재임 시 지역을 위한 열정적 국회 활동은 첫 손에 꼽힐 만하다.

라혁일 _ (사)한국청소년야생동식물총재

사람이 태어나서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진정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한 점 없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천만번을 다시 봐도 진정으로 변치 않고 언제나 그렇듯이 처음처럼을 실천할 이광철! 형님, 화이팅!

고양곤 _ 전북도립국악원

이광철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강직함이다.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며 그 강함 속에진정한 힘을 느끼며 약한 자를 돌아보는 눈을 느낀다.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 속에 머물고싶어하는 사람. 또 따뜻한 인간미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싶어하는 사람 바로 이광철이다.

오규명 _ 삼천동주민

80년 민주화의 봄, 전북대학교 교정에서 일명 호메이니로 불리우는 이광철의 연설은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신념으로 가득했다. 지금 다시 정치혁신을 꿈꾸며 도전장을 내 때에도, 그의 삶과 행태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민주화운동 동지의 한 사람인 나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존경한다.

최인규 _ 친구, 목사

이광철 전의원은 똑똑하고 뜨겁다. 근데 이광철은 띨빵하다. 돈 계산을 속여도 모를 것같다. 혹자는 인간적이라고 하지만, 자기 앞에 큰 감 놓을 줄 모르는 걸보면 아무래도 띨빵한 게 맞는 것 같다.

박일범 _ 순창제일고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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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대 중반, 후배들에게 탕수육 만들어 준다고 큰 프라이팬에 돼지고기를 튀기는 손놀림이 어찌나 익숙하시던지 일류요리사가 따로 없었다. 배고파 그랬는지 야채소스 맛도일품이었다.

정은숙 _ 교사

그는 언제나 명쾌하다. 선이 분명하고 굵다. 넓은 판과 틀 속에서 보면 그는 더욱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친구 언제나 민족, 민주의 버팀목, 민중의 버팀목이다. 젊음의 날들을같이 나누었던 그는 내 삶속의 자랑이다.

한규채 _ 목사

광철이 형은 전북대 철학과 2년 선배다. 군사독재 시절 전북대 분수대 앞에서 혼자 소주마셔가며 데모한 사람, 항거와 수배· 도피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우둔한 사람이다. 사건기자 땐 경찰서에서, 정치부기자 땐 정치 일선에서 마주친 묘한 인연이 있다. 이런 치열성을 가진 인물을 우리 곁에 둔 건 행복이다.

이경재 _ 전북일보논설위원

눈 덮인 겨울산자락에 서 있는 동백나무. 그 짙푸른 이파리 사이 후둑후둑 뛰는 선홍빛심장,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이윽고 겨울 맨땅을 껴안아 제 몸을 식힌 후 정수리로부터 차가운 피 맑게 돌리며 따사로운 봄빛으로 우리 곁에 다가설 동백꽃, 그 사람이광철!

문병학 _ 시인

작은 거인 이광철, 당신은 평화주의자다. 당신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평화의 빛이 밝혀지리라. 그 빛을 위해 쉼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시길…….

종고 _ 도솔암주지

“이광철 의원님이 말 하시면‘우리가 정말 잘못했구나, 틀렸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관 모 기관 국회담당자의 말이다. 국회에 난무하는 자극과가짜 속에서도 가슴에 닿는 햇빛처럼 진짜를 찾아 보여주는 분. 나는 보좌진으로서 이런의원님과 함께 할 수 있어 자랑스러웠습니다.

황윤정_ 전정책비서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 바로 그 사람은 이광철 위원장님이십니다. 15년째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분들을 위해, 요가 자원 봉사를 해 주고 계시는 이 위원장님의 모습을 보며, 세상의 빛이 되어 준 다는게 뭔지를 알게 됩니다. 이런 훌륭한 분들이 더욱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성병주 _ 마음사랑병원간호팀장

김치찌개를 끓 다. 광철형은 시국사범으로 수배중이라 밖에 나가서 밥 먹을 수는 없는때 다. 몇 숟가락 먹다 무심코 찌개 밑에 깔린 고기를 위로 올렸다. 그 때 갑자기 형은

“야 , 찌개를 뒤집을 꺼면 빨리 뒤집지, 주인이 안 뒤집으니 고기를 먹을 수 없잖냐...”힘든 시기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그 다.

박광철 _ 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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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30년 동안 지켜본 이광철은 항상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소중히여기며 그 사람의 꿈 또한 소중히 여기는, 이광철은 겪어볼수록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구윤상 _ 후배

지난 11월 중순경 이광철선배와 함께 서울에서 내려오다가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 다.커피한잔을 하는데 낙엽 진 앙상한 나무를 바라보며 이광철 선배가“내 인생이 늦가을이구나!!”한다. 이광철선배의 고단했던 삶에 애틋한 마음을 전하며, 그가 서있는 길에 나도늘 함께하고 싶다.

이해규 _ 통합진보당김제시지역위원장

민주화운동의 선구자여! 우리는 옳고 그름이 확실하고 불의에 앞장서는 당신의 덕택으로 이만큼이라도 누리는 모든 혜택에 깊이 감사드리며 더욱 좋은 정치 좋은 세상 만들어주시길 간곡히 기대합니다.

노 쇠 _ 전북대학교교수

나라의 정의가 무너졌을 때 그가 항상 투쟁의 맨 앞자리에 서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세상이 그의 진심을 알아주리라 믿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맑은 웃음이피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전 주 _ 전국민참여당전국여성위원장

시골 아저씨처럼 터벅한 모습이지만, 그를 알면 알수록 진실함과 사람 사랑이 넘쳐난다.겉 보다는 내면의 내실이 더 단단하며, 항상 희망을 가지고 갈 길을 가는 사람이다. 원칙이 통하는 사회, 더불어 사는 사회, 사람이 사랑 받는 사회를 위해 소금의 역할을 하는 그는 현 사회가 요구하는 진정한 공동체의 리더이다.

이중희 _ 전북대학교교수

지금 우리는 매우 가볍고 급하다. 어떤 지식인, 어떤 정치인에게도 진정성이 없기 때문일것이다. 이 시대의‘지식인’,이 시대 진짜‘정치인’은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만을말할 수 있는 참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광철에게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고 본다.

강남선 _ 주부

인간 이광철은 신념이 투철하고 변치 않는 곧은 심성을 갖고 있다. 청교도적인 집안에서교육을 받아서인지 옳고 그름을 확실히 판단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 보인다. 나의 진심어린 충고도 선뜻 받아 주었던 고마운 친구다. 자주 연락을 못하지만 가끔씩 안부를 물어오는 인간 이광철에게서 인간 냄새가 물씬 느껴진다.

종걸 _ 승려, 대한불교조계종성불사주지

그의 겉모양은 평범하다. 소탈하고 꾸밈없고 키도 크지 않고 잘 생기지도 않았다. 그러나내면은 빛나는 보석이다. 열정, 패기, 신념의 사나이. 그러나 무엇보다 제대로 된 인간!

김낙완 _ 전전주성심여고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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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본이광철 13

우리 민족의 전통에서 보면, 의(義)를 지키고 실천하는 수의(守義)와 창의(倡義)가 참 정치에 임하는 기본 자세 다. 이광철의원은 우리의 선비정신을 철저하게 이어받아 민주화 과도기에 수의와 창의를 몸소 실천하 다. 이광철의원은 집념과 용기를 갖춘 참정치인이다.

최 찬 _ 전북대학교교수

이광철의 속에 있는 뜨거운 서민 사랑과는 달리, 겉모습은 너무 투철해 보여서 손해를 좀봄 직도 하다. 선거구민들은 밝고 구수하고 따뜻한 이미지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기에..

강기종 _ 국경없는인권의장

내가 형님을 만난 것은 봉사활동 아사모 (아름다운 사람을 위한 작은 모임)를 통해서다. 올곧은 삶의 철학이 있고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바른길이라면 굽히지 않는 실천하는사람, 막걸리 한잔 기울이며 세상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김종연 _ 대한민국목공예명장

1974년 흥사단 전북 아카데미의 신입회원이었던 이광철 전의원은 수줍은 듯 풋풋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의정활동에 바쁜 중 에도 신앙의 공동체인 전주동신교회에서 포도나무 중창단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은 그를 인도하시고 지금은 미약하나 더욱 큰일을 맡기실 것을 확신한다.

박상규 _ 우석대학교교수

둘도 없는 친구도 함께 살아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의 여의도 한 조그만 골방에서 두 달간 이광철과 함께 먹고 잤던 사람이 인간 이광철을 말합니다. “이광철! 그저봄 햇살같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홍진혁 _ 전국민참여당사무부총장

이광철을 생각하니 문득 이런 이야기가 떠오른다. 남편을 잃고 오랫동안 혼자 살고 있는할머니와 오랫동안 무명 생활을 하고 있는 예술가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감이 없는 것이라나! 이광철 전 의원은 감이 가득하고 열정이 넘쳐나며 혼이 맑은 참 괜찮은 캐릭터의 소유자다.

배한성 _ 성우

바람이 분다. 서슬 퍼런 칼바람 인다. 바람의 칼끝 앞에 서 보아야 담장 안쪽의 따뜻함을알겠다. 이 칼끝 앞에서 생각나는 이. 철이형!

김완술 _ 전전주지역자활센터장

본인을 기꺼이 불살라 전북에 희망을 주어왔고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과 대망을 잃지 않고 전북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큰 리더이다. 그는 전북을 새로운 도약으로 이끌 수있는 전북의 박 원순이다.

오창환 _ 전북대학교교수

나는 이광철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을 때 보았다. 민주화가 우리의 희망이고 꿈이었던 시절이었다. 당찬 그의 모습에는 민주화 열기가 온몸을 휘감고 카리스마가 펄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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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14

넘쳤다. 그런데 가까이서는 너무나도 가슴이 따뜻하고 착할 수가 없었다. 부드러운 이웃아저씨 기에 그렇게 강할 수 있었나보다.

김구배 _ 전북대학교교수

전북대 동창회장 시절에 수석부회장으로서 가까이 지켜보았다. 바쁜 국회 일정에 짬을내서 동창회 임원진에게 일일이 전화 인사도 하고 시키는 대로 회비독촉(?)도 해줬다. 자상하고 희생적인 사람이다. 평생 동지관계로 함께 생활했던 동창회 사무국 직원들에게매월 자기 급여를 떼어주는 반값 세비도 실현했던 선배다.

원용찬 _ 전북대학교교수

국회에서 8년 간 보좌관으로 있으면서 가장 아프게 깨달은 것은“정치인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광철 전 의원만큼 이런 깨달음에 부합하는 정치인이 또 있을까. 나는지금 뼈에 사무치게 그가 그립다.

안성배 _ 제17대국회시절보좌관

내가 본 이광철은 신사(紳士)다. 그는 불의에 맞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꿈꾸고 실천하면서 살았다. 그러므로 그는 정의롭고 성실하며, 신념과 지조를 갖춘, 이 시대가 요구하는 선비다운 정치인이다.

이태 _ 전북대학교교수

그는 하얀 목련꽃을 든 화감독 같다. 메가폰을 들고 화의 흐름을 설명하는 화감독처럼 그는 세상 사람들 앞에 서서 미래의 희망을 말한다. 때로는 자신이 직접 화배우가되어 봄이 오기 전 목련꽃을 피우고 세상을 온통 하얗게 밝히기도 한다. 그는 바로 이광철형이다.

한천수 _ 한국마을연구소사무국장

뜨거운 열정과 불굴의 용기로 실천해온, 꼼수가 통하지 않는 밝은 정의를 위해 멈춤이 없이 달려온 민주주의의 빛, 민주투사 우리 고장의 꼭 필요한 참된 일꾼!

최병선 _ 치과원장

따뜻하고 정감 있는 말투로 옆집 아저씨처럼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과 눈높이를 맞추는사람. 그런 그의 모습은 정치를 갓 시작한 저에게‘시대가 원하는 정치인의 모범’이었습니다. 오늘은 그와 마주 앉아 차 한 잔 나누며 우리의 굴곡진 인생사에 대해 따뜻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엄윤상 _ 법무법인드림대표변호사

정치인이기 전에 기본적인 도덕적 인품과 모나지 않는 성격에 험난한 인생역정을 오직청렴결백하고 담대하게 살아온 의리의 사나이이며 항상 남에게 겸손하고 바른 일을 위해선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며 당당하게 대처하는 강직한 추진력과 정의감을 가진 모범적인 사나이.

고선길 _ 전서천초등학교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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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본이광철 15

그는 투박한 칼이다. 떠들썩한 장날, 배추도 고기도 썰 것 같은 소박함과 친근함이 배어나온다. 서민의 풍모가 풍기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의 칼은 날카롭다. 열정과 논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정의의 칼이자 수호의 칼이다. 그래서 함께 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다.

이흥수 _ 원광대학교치과대학교수

내가 그를 만난지 30여년, 지금까지 그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그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삶의 여정을 동경하면서도 한편 두려움때문이었으리라. 견해의 차이라는핑계로...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한결같은 우리들의 멘토이고 스승이며 웅이고 지도자이다. 게다가, 용서와 사랑을 아는 큰 그릇이며 큰 나무이다.

이완배 _ 교사

학생시절에는 철학적 사고와 예시적 통찰력이 강한 학생이었다. 살아온 길에서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앞장섰다. 의원시절에는 의정활동에 혼신을 쏟았고 서민을 위해 살았다.

남정길 _ 전북대학교명예교수

이광철의원만큼 현대사에서 고통을 몸소 겪으며 성장한 인물도 그리 많지 않다. 이 땅에민주진보의 진정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다. 거지왕자처럼 값진 경험을 우리는 믿는다. I like lee Kwang-chul. I love you. I believe you.

김종국 _ 전주대학교대학원장

내가 본 이광철님은 나무 같은 사람이다. 그것도 푸른 상록수 같은 사람이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나무 그늘을 내어주고 열매를 나눠주는 사람이다. 나뭇가지를 쳐내서 땔감을내어주듯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한결같은 사람이다.

이 실 _ 주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두 사람이 있다. 그 중 한 분이 이광철 선배님이다. 이광철 선배님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긍정’의 힘이 있다. 지금 시기 한국사회의 진보와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국민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다.

이우봉 _ 전금속노조부위원장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등산을 하게 되면서 이광철의원님을 알게 됐다. 의원님의첫인상은 의원님! 하고 부르기보다 그냥 동네아저씨 같은 느낌이 더 들었고 만남이 잦으면서 참 인간적이면서도 강렬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큰 열정과 에너지... 대쪽같은 성품.... 이런면들이 날 이광철이라는 사람의 팬이 되게 했나보다. 난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를 믿는다.

양춘미 _ 주부

스스로 걸어 광장의 촛불이 되고자 하는 사람. 바람으로 흔들리는 촛불이어도 기꺼이 불타올라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 심연의 바다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늘 경계의 파장으로 나를 깨우는 사람, 이광철.

최경애 _ 익산생협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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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원님을 처음 뵌 자리는 국회의원 후보 연설 자리로 기억합니다! 후보연설을 듣고 그후로 팬이 되었죠! 짧은 연설시간이었지만 그 말 한 구절 한 구절 마다“의지, 열정, 신뢰”가 실천에서 베어난 말 이셨습니다! 이광철 의원님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의원님의건승을 빕니다!

김준기 _ 주민

우리는 시작이라는 말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런데 보통은 우리의 손이 닿았던 일임에도불구하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손에서 털어버리고 내 탓이 아니야 라고 고개를 저어 버리곤 하지만~ 의원님께서는 늘 묵묵히 달리는 미라토너! 의원님과 함께 걷고 싶습니다.

송은교 _ 전동아한일아파트부녀회장

형을 보면 이런 생각이 난다. 당구치며 이기려고 몸부림치는 승부욕, 국감장에서 질타하는 용감한 얼굴모습, 그래서 나는 그런 형이 좋다.

정귀원 _ 후배

그가 걸어온 길은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시련에 굴하지 않고 시대와 함께, 이웃과 함께,기쁨도 함께, 아픔도 함께... 그가 가는 길에 희망이 있음을 기대해 봅니다.

허만승 _ 후배

이광철 의원을 생각하면 바닷가의 한 그루 붉은 소나무가 떠오른다. 모진 바닷바람에 몸통은 휘어지고, 가지는 바스라졌어도 그 의연함과 주변과 잘 어우러지는 그 넉넉함과,지치지 않는 색과 향기를 품고 가는 해송. 이런 해송을 사랑하듯이 이광철 의원은 우리에게 그런 사람인 듯하다.

심 옥 _ ‘동락’풍물패총무

그는 이 시대 진정한 촌놈이다. 화려한 것과 거리가 있고 편한 길보다 논두 처럼 질펀한길을 쫓는다. 왜냐고 묻는다면 대의와 명분 앞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 삶의 자세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이광철이라 쓰고 촌놈이라 읽는다. 그것이 광철스러움이다.

조용식 _ 공무원

잘은 모르지만 의원 시절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의원직을 성실히 하셨던 분이라 생각듭니다. 또한 이광철님은 친정아버지 같이 서슴없이 다가갈 수 있는 편한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분을 다시 볼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홍공례 _ 주민

아들의 사회문제 풀이집에 우리나라 정치를 발전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란 문제가 나왔더군요. 답이‘우리나라의 썩어빠진 국회의원을 다 바꾸면 됩니다’로 되어있더군요.애정남은 안 가르쳐줄 것 같으니 이광철 형님이 모범답안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이인희 _ 후배

이광철은 당당하다. 통합민주당은 2008년 3월 현역의원이었던 이광철을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누가 봐도 엉터리 공천심사 다. 본인은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지역 정가에서는

‘탈당 후 무소속 출마’의 소문이 나돌았다. 그것은 정도가 아니었다. 꼼수 다. 이광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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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백만 _ 노무현대통령청와대홍보수석

이광철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눈을 갖고 있다. 개혁가 이광철은 애향심이 남다르다. 17대 의원시절 전주 한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산업화를 촉진하는데 앞장섰고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앞으로도 미래를 책임지는 용사이길 기원합니다.

유두희 _ 전주시니어클럽관장

어려서 고향 임실을 떠났습니다. 아련히 남아있는 그리움과 애틋함은 아마 상실감일 것입니다. 그리워하면서도 많은 시간은 잊고 있었던 고향을 만났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고향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홍용표 _ 통합진보당서울시당위원장

노무현 대통령을 분노와 통곡 속에 떠나보내고 그를 닮은 한 사람을 만났다. 그가 이광철이었다. 이광철은 여느 정치인들과 다르게 부당함과 반칙에 분노할 줄 알았다. 고난 속에몸을 던질 줄 아는 진정 용기있고 씩씩한 남자이다.

장정우 _ 통합진보당당원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살지는 않았지만 항상 정의로운 것을 바라는 일반 시민입니다.이의원님을 보면서 흔들림 없이 대의명분과 옳은 길을 걷고, 의원일 땐 누구보다도 열심히 의정활동을 하시는 것을 보고 흐뭇했습니다.

박경만 _ 한동네축구동호회회장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노래자락 흥얼거리며, 막걸리 한 사발을 두고, 봄날의 연정을 나누고 싶은 사람. 봄의 따뜻한 기운처럼 이광철의 따뜻한 사람 기운은 만나는 이들의 마음에 꽃을 피운다.

변미정 _ 통합진보당부산시당사무처장

제가 아는 의원님은 순수하고 순박하셔서 정치라는 옷이 잘 어울리지 않으신... 하지만의원님 같은 분이 계시기에 우리정치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1년을출판으로 멋지게 마무리 하세요.

박경완 _ 부산소라갤러리관장

대학 입학 후, 반독재투쟁과 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투옥, 이후 시민운동과 정치인으로 헌신하면서 늘 한결같은 사람“비록 가진 것 없어도 권력에 줄서지 않고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우직하게 나아가는 사람, 바로 이광철”

박태수 _ 깨어있는시민

Herry David Thoreau는 그의 저서‘시민의 불복종, 1849’에서“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하 다. 작은 눈으로 커다란 세상을 바라보는 이광철의원께서 꿈꾸는 세상을 함께 기대해본다.

박재현 _ 호남대학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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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는 자기는 정작 아무소리도 내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이광철은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고 주변의 큰소리 작은 소리를 모아 최상의 선율을 만들어내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옥만 _ 전국민참여당최고위원

“아는 것이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이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이광철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의 진정성과 열정에 힘입어 전주는 전통문화중심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에게 그런 열정의 날이 다시 오기를...

이종민 _ 전북대학교교수

이광철 선배님은 전북지역 교사들에겐 스승입니다. 어두웠던 80년대, 참교육을 실천하고자 고뇌했던 젊은 교사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셨고요. 교사들을 위한 선배님의 변함없는 응원과 격려는 지역 교육 현장에서 열심히 뛰게 하는 자양분입니다.

이미 _ (사) 전북청소년교육문화원이사장

독재에 항거하다 수년간 옥고를 치른 후 복학한 학생 이광철의 연설은 대학 캠퍼스를 울렸다. 그 후 20여 년간 어려운 생활고를 인내하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 이 땅에 민주화 정착을 위해 전념하던 시민 이광철은 이 지역 공동체의 마지막 남은 빛과 소금이다.

김 재 _ 전북대명예교수

어느 날 동요의 멜로디처럼 천천히 내게 오신 분, 우리는 낙동강 도보 순례도 하고, 비 많던 날에는 남도 여행도 같이 했다지요. 지금 우리 가는 길 고단한 언덕길이어도 승리의길이라서 좋습니다.

조덕섭 _ 시민광장대표

나이와 신분을 막론하고 항상 경어를 사용하고 존중하는 반듯한 사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잘 들어주는 사람. 저렇게 욕심이 없어서야 어떻게 정치를 하나? 라고걱정해야 하는 사람. 제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지켜 본 이광철 전 의원님의 모습입니다.

이재식 _ Aliance Korea 대표이사

서슬 퍼런 독재시절, 해학과 풍자, 촌철살인으로 가슴을 후련하게 씻어줬던 사람! 우리결혼식 때 함잡이로, 뒷풀이 사회에서 걸쭉한 입담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람! 이제 신독재에 맞서 민주주의와 진보정치 승리의 선봉장이 될 걸로 확신합니다.

오은미 _ 전라북도의원

지역문화 활성화 중심에 누구? 이광철이 있고, ♪ 통합정치 중심에도 이광철♪ 공사가분명하여 구태정치 안에서는 매력 없는 사람이지만♪ 절절한 소망으로 가슴 뭉클~!! 환한웃음~

정서윤 _ 교사

많은 전설과 지역운동 야사(野史)의 주인공, 탁월한 노래와 연설, 냉소와 따뜻함을 함께한 사람, 그리고 목사 아들... 내가 기억하는 이광철선배이다.

양진규 _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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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본이광철 19

통합진보당 출범식 날, 그는 청바지를 차려입고 나타났다. 열린 우리당 시절 그는 가발을 어깨에 걸치고 육자배기를 뽑았다. 알찬 내면을 숨기고 가볍고 발랄한 사람, 분위기띄우느라 스스럼없이 망가지는 사람, 남도사람, 풍류쟁이 이광철 화이팅!"

노항래 _ 통합진보당정책위원회의장

자신의 달보다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미래에 따뜻한 희망의 온기를 불어 넣어주고자 쉬임없이 연구하고 현장을 누비는 열정을 가졌음에도, 항상 촌철살인의 풍자와 유머를 발산하는 친근한 이웃 형님. 그가 바로 이광철이다.

허석원 _ 사업가

돈과 권력 그리고 정보를 독점하여 그들만의 인맥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대한민국의 1%에 맞서 99%가 대안이 되는 사람중심의 행복한 세상!! 전주에는 이광철이 있습니다.

문현수 _ 광명시의회부의장

서민의 아픔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 조금이라도 힘들 때 같이 막걸리 한잔 하고 싶은 사람, 실력이 있고 콘텐츠가 풍부한 사람입니다. 미래 국가 비전에 대한 큰 안목과 철학을가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더욱 감동시키는 것은 서민과 국가를 사랑하는 그의 올곧은 진정성입니다.

유철중 _ 전북대학교교수

참 노래를 구성지게 잘하시던 분으로 대학시절 막걸리집에서 구수한 말 을 잘하셨던분으로, 철학을 전공하셔서 철저한 논리와 분석을 잘 하셔서 대화와 설득의 귀재이셨다.국회의원으로서 청문회나 의정활동에서 전국 최고의 평판을 받은 이면에는 철저한 준비와 이런 분석력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이국용 _ 교사

대학시절부터 익히 얼굴과 명성은 알고 있었지만 92년 우연한 기회에 대금을 배우고 싶다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몇몇 사람들을 모아 대금을 불게 되면서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비에 젖은 꽃잎을 바라보며 시를 낭송할 줄 알고, 남의 아픔에 슬퍼할 줄 아는, 이광철의 모습을 보았다.

이종진 _ 전북대고고문화인류학과강사

만약 그가 시민운동의 길이 아닌 시를 쓰는 직업을 삼았다면 하는 생각을 한다. 말 한마디에 철학이 있고 말 한마디에 함축의 의미를 담고 있어 감탄을 할 때가 많다. 그가 담고있는 세상에 대한 참 가치가 인정받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유수경 _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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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이력서

1. 추억들

익산, 오수, 군산, 모두가 고향

나를 안아준 고향 들녘

시골뜨기에서 어린‘시인’으로

저항의식에 눈뜨다

2. 시대와 대결했던 청춘

스무 살 청춘

80년, 전주의 봄

5월 18일 0시, 운명의 밤, 그리고 이세종

도망자 생활과 35사단 창

상무대 창

두 번째 징역살이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창립, ‘대중 속으로’

3. 세 여자

풍수지탄(風樹之嘆)

20년간의 신혼 생활

‘간첩의 딸’

사랑을 키운 감옥 편지

4. 새로운 모색, 시민운동의 길

‘새길청년회’와‘전주시민회’

간첩누명과 무죄판결 그리고 800만원의 국가배상금

인도 여행, ‘틀림’이 아닌‘다름’

거버넌스의 모범 - 전주천 자연하천 조성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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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제1부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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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 기득권의 장벽을 넘어서

‘지방자치개혁연대’창립과 좌절

시민사회에서 정치로 - 노무현 일병 구하기

거대한 기득권의 장벽

극적인 경선 승리와 국회의원 당선

2. 제17대 국회, 발로 뛴 4년

토종 국회의원

국감 스타, 이광철

문화도시 전주

유홍준문화재청장과의전북투어, 문광위원전주 화제참석정례화

유홍준 전 청장이 본 이광철

제정 주도했던 지역문화진흥법 이명박 정권에서 무산

“미디어가 살아야 지역도, 국가도 산다”

“이명박 정권 미디어 장악 안된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주한지 산업화대책 제안

3. 정치개혁의 일선에서

참정연

당내의 색깔론에 맞서

유시민 대표와 나

무너져버린 당내 민주주의

내려진 열린우리당의 깃발

노무현 대통령과의 만남

청와대에서 뽐낸 노래실력

너무나 어이없었던 제18대 총선 공천 탈락

대의를 위한 승복

퇴임 이후 노대통령과의 만남

2009년 전주완산갑 재선거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아! 노무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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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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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가꾸어야할전북

1. 전북은 지금

“책임도 안지고 대안도 없다”

전북은 독과점 사회

권력 독과점은 기회를 박탈한다

지방의원 재량사업비?

146일 동안의 전주 버스 파업, 무엇이 문제인가

LH본사 유치 실패

덕진수 장 파문

리더십의 위기, 정책의 위기

2. 전북의 활로 어디서 찾을까

민주당 독점구조에서 경쟁구조로

충남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시민참여형 리더십으로

언제까지 새만금만 바라보고 살 것인가

실질적인 민관 협력체제로

완주와 진안을 주목한다

전주, 전통문화중심도시에서 세계무형문화의 메카로

신산업을 발굴하자

세상을바꾸는힘있는진보를위하여

역사 속으로 걸어간 국민참여당

노무현 정신과 전태일 정신의 만남, 통합진보당

정권교체를 넘어 정치혁신으로

‘정치적 종(種)다양성’과 선거제도

스웨덴에서 본 진보정치의 힘, 배려와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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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제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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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4: 이광철자서전 '함께'
Page 25: 이광철자서전 '함께'

제1부· 나의이력서 25

제1부

나의이력서

Page 26: 이광철자서전 '함께'

함께26

Page 27: 이광철자서전 '함께'

1. 추억들

익산, 오수, 군산, 모두가고향

누군가 고향을 물을 때마다 나는 잠깐씩 머뭇거리는 버릇이

있다. 태어난 곳과 정을 붙이고 산 곳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익산시 여산면 두여리라는 시골 들녘마을이

다. 나는 목회를 하시는 아버님 이병선과 어머님 최은섭 사이의 5

남매(4남1녀)중 넷째로 태어났다. 익산은 아버님, 어머님의 고향

이기도 하고 내가 태어난 두여리는 어머님의 고향이요, 외가의 고

향이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목회를 하시는 아버님의 부임지를

따라 이사를 했다. 임실군 오수로 이사를 했고 초등학교 4학년 때

까지 주인 살린 개의 기념비(아이러니하게도 이 유명한‘의견비’

의 바로 건너편엔 보신탕으로 유명한 신포집이 있다)가 있는 원동

산에서 뛰놀며 지냈다. 그해 겨울 군산으로 또 다시 이사를 했다.

제1부· 나의이력서 27

Page 28: 이광철자서전 '함께'

오수의 시골 소년이 도시로 이사를 간 것이다. 군산에서 고등학교

를 마치고 대학시절, 더 정확히는 대학 2년을 마치고 군복무 중 아

버님은 전주로 임지를 옮겼다. 전주로 이사 와서 30년을 살았다.

이곳이 내겐 삶의 고향이 된 것이다.

사람들이 고향을 말할 때, 태어난 곳을 말하는 사람이 있고, 어

린 시절을 보냈던 곳을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청소년 시절

의 친구들이 존재하는 곳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내겐 태어나서 자란 곳 모두가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고향이

다. 굳이 태어난 곳만을 고향이라 말한다면 그 많은 추억을 쌓은

오수도 군산도 몹씨 섭섭해 할 것이다.

이렇게 나는 고향을 묻는 질문에 머뭇거리다 군산이라고 말하

지만 속내는 여산도, 오수도, 그리고 30년을 살고 있는 전주도 고

향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고향을 묻는 질문에“태어

난 곳을 말합니까? 아니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을 말합니까? 아니

면 중·고교 시절을 보낸 곳을 말합니까?”라고 되묻든지, “오수에

서 10년 살았고 군산에서 11년 살았고 전주에서 30년 살았습니

다.”라고 답하게 되는 것이다.

고향이 많은 것은 그만큼 다양한 삶의 환경을 경험했다는 것

이니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안아준고향들녘

오수에서의 기억은 늘 번데기로 시작된다. 원동산 옆에 제사

함께28

Page 29: 이광철자서전 '함께'

공장(누에고치에서 견사를 뽑는 공장)이 있었는데, 아침 일찍 공

장 앞에 소쿠리를 들고 줄 서 있으면 견사를 뽑다 실패한 누에고

치를 나눠준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누에고치를 벗기면서 먹는 번

데기 맛은 알맹이로 파는 번데기 맛보다 훨씬 좋았다. 하긴 그 시

절엔 그 어떤 것을 먹어도 모두 맛이 있었다. 아니, 사실 그때는 맛

보다는 양을 채우는 것이 우선이었을 만큼 배고픈 시절이었다.

그 때 집보다 학교가 좋았던 것도 집에서 못주는 점심을 학교

에서 주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밥이 아니라 우유나 옥수수 죽이었

지만, 학교가 일종의 구제기관이었던 셈이다.

수업 끝난 뒤 동네 형들 따라다니며 밭에서 뽑아먹는 무시(무)

나 고구마 맛은 기가 막혔고 산에는 삐비, 산딸기, 명감, 으름 등

철따라 먹을거리가 많았다. 향기 짙은 아카시아 꽃을 너무 먹어

설사를 하기도 했다.

오수 읍내를 가로 지르는 오수천과 관월천은 놀이터이면서 때

때로 배고픔을 달래주는 식량창고 다. 멱을 감고 물놀이하면서

물고기를 잡아 불에 구워서 빈 배를 채웠고, 개천 옆 하천부지의

뽕나무 밭에는 검붉은 오디가 식욕 왕성한 아이들을 유혹했다. 오

디즙으로 입술이 온통 벌겋게 물들 무렵, 뽕밭 임자가 작대기 들

고 쫓아 오면 벗어놓은 옷을 들고 형아들 따라 줄행랑치느라 간이

다 쪼그라들었다.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산과 들 그리고 냇가마다

먹을거리들이 보물찾기 하듯 구석구석 숨어 있었다.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전국에 온통 재건바람이 불고 신작로

제1부· 나의이력서 29

Page 30: 이광철자서전 '함께'

가 생기고 나무 전봇대가 콘크리트 전봇대로 바뀌던 시기 다. 전

봇대를 교체하는 일은 어린 우리에게도 횡재 다. 전봇대를 교체

하고 나면 한 뼘 남짓한 구리전깃줄 토막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녔

고, 그것을 주워가면 엿장수, 아이스케키 장수에게 고급손님 대접

을 받았다. 거의 사이다 병만큼 값을 쳐주었다. 그만큼 물자가 귀

한 시절이었다.

학교에선 풀씨 모으기, 파리 잡아 성냥갑에 모아오기, 산토닌

(구충제)을 나눠주고 나온 회충 수 세어오기, 퇴비증산을 위해 풀

짐 가져오기 등등 옥수수 죽 한 그릇에 시키는 일이 많았었다.

밥 먹여주는 대신 해야 할 일이 많기는 집에서도 마찬가지

다. 항상 동생을 챙겨야 했고, 특히 가을에는 더 일이 많았다. 가을

이면 이삭도 줍고 꼴망태기를 메고 엄마랑 형들을 따라 나무를 하

러 다니기도 했다. 갈퀴로 떨어진 소나무 잔가지와 잎들을 모아

망태기 가득 담는 일은 조마조마한 일이다. 나무를 하다가 산지기

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나무는 나무대로 뺏기고 작대기로 맞고 망

신을 당하곤 했다. 그때는 나무가 유일한 땔감인지라 산을 지키고

있는 산지기가 큰 권력이었다.

10살 때까지 시골 들녘에서 보낸 그 시절, 그 아름다운 추억속

의 고향, 오수. 어렸을 때 보았던 그 깊고 푸른 냇가는 지금은 댐

탓으로 말라붙었고 그토록 크게 느껴졌던 학교 뒤 호수는 지금 가

보면 손바닥만한 방죽이다.

함께30

Page 31: 이광철자서전 '함께'

시골뜨기에서어린‘시인’으로

군산으로 이사했던 때는 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 끝

나가는 12월 초순이었다. 그날 오수역에서 정든 이웃과 친구들의

눈물어린 배웅을 받으며 기차를 탔고,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버

스를 타고 군산에 도착했다.

그렇게 큰 도시도 태어나 처음이었고 이미 날이 저물어 주위는

어둑어둑했고 날씨마저 추운 날이었다. 새로운 곳에 대한 설렘이

나 호기심보다는 낯설고 생소함에 대한 두려움과 추위에 기가 질

렸다. 게다가 차멀미까지 겹쳐서 낮에 기차 속에서 먹었던 삶은 고

구마, 찐 계란과 사이다를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대로 토해내었

다. 군산에서의 첫날은 지금도 그렇게 침침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시골소년이 도시에서 적응하기는 수월치 않았다. 마냥 쾌활하

고 거칠 것 없던 시골뜨기 소년이 군산에 와서는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않게 4학년을 마쳤고, 5학년이 되어서야 조금씩 친구들

과 장난도 치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두 가지 사건이 모두 5학년 때의 일이다.

시인으로 등단한 사건과‘메주’가 되고‘삐뚤이’가 되는 사건이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에도 고학년 학생들이 각기 구역을

맡아서 저학년 교실을 청소해 주었는데, 어느 날 1학년 교실 청소

를 마치고 친구들과 계단 난간에 올라타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

다가 현기증인지, 빈혈 탓인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아래층으로 떨

어져버렸다.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나를 누군가가 등에 업고

제1부· 나의이력서 31

Page 32: 이광철자서전 '함께'

학교 앞 사거리에 있는 시민병원으로 데려가서 제법 큰 수술을 받

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의료 수준으로, 그것도 소도시의 병원

에서 안면근육을 섬세하게 재생시키는 치료가 가능할 리 없었고,

그 후유증으로 웃으면 부자연스럽게 입이 삐뚤어지게 되었다.

우리 형제 중 나를 제외하곤 눈도 크고 코도 크고 다들 그런대

로 잘생긴 얼굴들이다. 안 그래도 나만 눈도 작고 인물이 좀 쳐지

는 편이었는데, 거기에다 얼굴을 다친 후로 입까지 삐뚤어진 것이

다. 그 후로 학창시절 내내‘메주’나‘삐뚤이’같은 별명들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웬만하면 웃지 않게 되었고 사진 찍는

것을 기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얼굴에 대한 컴플렉

스는 점점 사라졌고, 정치를 하면서 주변에서“이광철이 입은 삐

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내심 흐뭇하기도

하다.

시골소년이 촌티를 벗고 도시소년으로 변신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특별활동시간의 작문반 활동이었다. 특히 작문반

에서 썼던 작품이 소년동아일보, 중앙일보, 전북일보 등에 실리면

서 나는 꽤 유명해졌다.

시골뜨기 소년을 일약‘시인’으로 만든 그 시절의 시(동시) 한

편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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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3: 이광철자서전 '함께'

우리어머니

우리 어머니 예쁜 이마에

주름살 하나

공부해라

주름살 두 개

심부름 잘하고

말 좀 들어라

주름살 세 개

예쁜 이마가 미워졌어요.

저항의식에눈뜨다

1971년 군산 남중을 거쳐 군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교 시

절은 나에게 인생의 또 다른 세계를 열어준 시기 다. 요새말로

하면‘범생이’ 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사회의식의 싹이 트기 시

작했다. 여기에는 아버님과 사회 선생님의 향이 컸다.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기독교에

대한 통제의 손길을 뻗치는 시기 다. 전북에서도 1972년 말 은명

기 전주 남문 교회 목사가 구속되는 등 독재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유신 이후 최초의 성직자 구속 사건이었다. 은 목사

님은 72년 11월 19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집회를 갖는다는 내용

의 유인물을 돌리면서 경찰과 정보 당국의 요주의 인물로 꼽히다

제1부· 나의이력서 33

Page 34: 이광철자서전 '함께'

가 체포됐다. 은 목사 사건이 일어나자 기독교계의 저항이 일어나

기 시작했다. 아버님이 봉직하던 군산에서도 구국기도회가 매월

열렸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고교시절을 보

낸 나는 사회에 대한 저항 의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물론 사회

선생님의 향도 컸다.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지식인이 되려면 사

회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신문 읽기를 권장했다. 그래서 당시

만 해도 정론지로 여겨졌던 동아일보를 구독하면서 세상 돌아가

는 소식을 접했다.

10대 후반의 청소년 시기, 한창 세계관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반독재 저항의식에 눈뜨기 시작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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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5: 이광철자서전 '함께'

2. 시대와대결했던청춘

스무살청춘

1974년, 나는 전북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철학과를 선택한 것

은 철학을 하고난 뒤 신학을 해 목사의 길을 가라는 아버님의 기

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무 살 청춘이었던 내가 맞닥뜨린 현실은 나를‘청춘

의 설렘’속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유신정권의 폭압이 맹위

를 떨치던 그 때,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고 그토록 원했던 민주화

의 꿈이‘시대의 반항아’ 던 나를 비껴갈 리 만무했다.

그 해 봄, 대학가는 유신반대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한

완상, 함석헌, 백기완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당대의‘행동하는

지성’들이‘축제’라는 열린 장을 통해 대중강연회, 공개학술대회

를 가지곤 했다. 그런 자리에서는 지식인의 사명, 대학과 시대정

제1부· 나의이력서 35

Page 36: 이광철자서전 '함께'

신, 대학인과 사회의식 등을 주제로 유신 비판과 젊은이들의 사회

참여 촉구가 이뤄졌다.

그러던 어느 봄 날, 유신반대 시위로 이인갑(고인₩이정덕 전북

대 교수의 형), 박양규, 조남곤, 곽주섭, 고 종(고인₩고 조 전 부

안 군의원의 형) 등 흥사단 선배 5명이 제적을 당하고 중징계를

받는 일이 발생한다. 당시 철학과 선배 던 문용주 전 전라북도

교육감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다 시위에 참석하지 못했던 나

는 한 동안 충격과 자괴감 속에서 괴로워해야 했다.

이듬해 2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위에 나서게 된다. “눈

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

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죽었단 말인가?”나는 진

정으로 이 시대를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

민했고, 폭압과 폭력에 대한‘저항’이 곧 나의 길임을 깨달았다.

그해 10월, 이른바 유신을 비판한‘낙서’사건으로 공안당국의

감시가 심해졌다. 결국 나는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다가 공안요원

에 의해 대공 분실로 끌려갔다. 이틀 동안 고문과 허위자백을 강

요당했다. 독재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하자는 학생의 주장을 간

첩으로 몰아가는 조사에 기가 질리고 두렵기 짝이 없었다. 괴물이

돼가는 국가의 모습에 좌절했다.

12월에는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건이 터지자 전북대 철학과

이름으로 광고를 했다. 내가 작성한 광고 문구는 독일 나치의 유

태인 수용소에서 쓰여진“Forgive, do not forget”(용서하자, 그러

함께36

Page 37: 이광철자서전 '함께'

나 잊지는 말자)이었다.

공안 당국의 요원들은 끈질기게 내게 군 입대를 종용했다.

좌절에 빠졌던 나는 피곤하고 지쳐 결국 군 입대를 결심하게

된다. 군부독재가 앗아가 버린‘청춘’을 뒤로하고 쓸쓸히 군에 입

대해야 했다.

1976년 3월 전투경찰대로 입대한 나는 서울기동대 창설요원

으로 배치됐다. 본래 전투경찰제도는 대간첩작전을 위해 만들어

진 것으로서 주로 해안경계부대로 배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

데, 나는 해안부대가 아닌 서울기동대 창설요원으로 배치됐다. 서

울대로, 고려대로, 연세대로, 건국대로 거의 매일 시위 진압에 동

원됐다.

‘돌 던지는 시위 주동자에서 돌 막는 전경’으로 운명이 반전

된 것이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기막힌 반전이었다.

더 우스운 것은 만기 제대할 때까지 계급이 일병이었다. 군 생활

동안 말썽을 부려 창을 간 것도 아니고, 징계도 받지도 않았지

만 제대 군복의 계급은‘작대기’두 개에 불과했다. 당시 내무부

관리하에 있던 전투경찰대는 서울 기동대를 창설하면서 늘어나는

부대원 숫자에 따른 계급 정원을 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무부는 30개월 동안 이런 계급 정원 조정을 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제1부· 나의이력서 37

Page 38: 이광철자서전 '함께'

80년, 전주의봄

1978년 8월에 제대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대학 써클인

흥사단 아카데미 다. 내게 사회의식을 눈뜨게 해 줬던 곳. 그러

나 아카데미는 독재정권과 대학당국의 학원자유 탄압에 의해 이

미 해체된 상태 다.

나는 복학하기까지 남은 6개월 대부분을 아카데미 재건에 바

쳤고, 드디어 1979년 3월 재건됐다. 이전보다 더 크고, 강하게, 이

제는 전북지역 7~8개 대학이 참여하는 연합서클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전북대 흥사단 아카데미는 신입생 회원이 100명이 넘을 정

도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 전북대 흥사단 아카데미가 발행했던‘참빛’과 전북지역

연합회가 발행했던‘두레’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만큼 정성어

린 손때가 깃들었던 흥사단 아카데미의‘회지(會誌)’ 다. 월간으

로 발간한 이들 회지에는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사회의식을 담고

있었으며 유신정권의 막바지‘3.1운동과 오늘의 현실’, ‘4.19와

대학인의 역할’과 같은 특집기사들로 편집됐다. 당국의 눈엣가시

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1979년 10.26, 12.12를 거쳐 1980년이 되자 크고 작은 시위가

연일 열렸다. 당시 전주 팔달로는 시위 군중으로 가득 찼다. 전북

대 옛 정문 앞에서만 이루어졌던 시위는 팔달로를 거쳐 전북도청

앞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 많던 시위 가운데 같은 해 5월 15일, 옛 전주역 앞에서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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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9: 이광철자서전 '함께'

최됐던 전북지역 연합시위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이른바 5.15 시

위는 공안당국마저도 넋을 놓을 정도로 대규모 시위 다. 말하는

사람에 따라 학생과 시민 3만 명 또는 5만 명이 모 다는 그 많은

청중 앞에 섰지만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오직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군부 독재를 끝장내고 새로운 민주 정부를 세워야 한다

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나는 무려 1시간 넘게 열정적인 연설을

했다.

“10.26 사태가 나고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을 때, 우리는 드디

어 민주화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2.12는 우리

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애국시민, 학생 여러분!! 모두 일

어나 민주화의 꿈을 앗아간 전두환 신군부 일당을 타도합시다. 지

금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죽고, 우리의 미래가 죽을

것입니다. 모두 함께 떨쳐 일어납시다!”

이날 연설로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명인사가 되어버렸

다. 공안당국으로부터‘호메이니’라는 별명을 얻게 됐고, 블랙리

스트 1호가 됐다.

5월 18일 0시, 운명의밤, 그리고이세종

80년 5월. 뜨거운 민주항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학살자 전두

환 신군부 집단은 애국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제대 후

복학해서 4학년이었던 나는 크고 작은 시위로 이미 3월부터 수배

를 당한 상태에서 삭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제1부· 나의이력서 39

Page 40: 이광철자서전 '함께'

전북대 학생회관은 학생시위의 본부 다. 시위 지도부와 학

생 100여명이 학생회관에 머물면서 매일 시위를 기획하고 행동

에 옮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5월 18일을 맞았다. 계엄령 전국확

대조치 소식이 전해지자 우리는 심각하게 대책회의를 했다. 수배

자로 구성된 지도부와 농성 학생들이 모두 피할 것이냐, 아니면

모두 남아 저항할 것이냐, 갖가지 분석과 의견이 엇갈리면서 갈

피를 잡지 못했다. 격론 끝에 내린 결론은 지도부만 피하고 나머

지 학생들은 남자는 것이었다. 계엄령으로 경찰이 학교에 들어온

다고 해도 수배자들로 구성된 지도부만 체포할 것이라고 예상했

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수배자 등은 농성장을 빠져나왔고 일부

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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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최초의 희생자 이세종 열사의 비 앞에서. 해마다 5월17일이 되면 80년 5월 함께 했던 동지들이 전북대 교정에 있는 이세종 열사 추모비를 찾는다.

Page 41: 이광철자서전 '함께'

그러나 그것은 뼈아픈 판단착오 다. 군인이 아닌 경찰이 학

내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했고 학생인 점을 감안해 진압이 아닌 해

산 위주의 작전을 펼 것이라고 판단한 것과는 정반대로 총칼을 휘

두르는 군부대의 진압작전이 전개됐던 것이다.

5월 18일 0시 무렵, 학내로 진입한 공수부대는 학생회관에 남

아 있던 학생들을 착검한 M16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짓밟기 시작

했다. 그들은 저항하는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짓밟고, 굴비 엮듯

엮어서 개처럼 35사단 헌병대 창으로 끌고 갔다. 한 여학생은

그때 당한 만행 때문에 지금도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옥상으로 피신했던 전북대생 이세종(당시

농대 2학년)이 사망했다. 이세종은 공수부대가 휘두른 개머리판

에 머리가 깨지고 잔혹하게 짓이겨진 채 학생회관 옥상에서 땅바

닥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광주에서의 학살이 18일 낮부터 시작되

었으니, 17일 자정 직후에 사망한 이세종은 사실상 전두환 신군부

에 의해 학살당한 전국 최초의 희생자인 셈이다.

나는 아직도 이세종을 잊지 못한다. 아니 죽는 날까지 그를 잊

을 수 없을 것이다. 그를 잊는다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자

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개인적

으로는 어린 후배들을 짐승들의 군홧발 아래 남겨두고 학생회관

을 빠져나왔다는 자책감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후 31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해마다 5월 17일이면 그를 추모하고

있다.

제1부· 나의이력서 41

Page 42: 이광철자서전 '함께'

이세종 열사의 죽음은 훗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나

를 지배한 운명적인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망자생활과 35사단 창

5.18 계엄령 확대조치 이후 수배망은 점점 더 조여져왔다. 나

는 신분을 숨긴 채 떠돌아다니는 수배자 생활을 해야 했다. 일단

서울로 갔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고 복잡한 서울이 몸을 숨기는데

수월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중국집 배달부, 테니스장 그라운드보이(콘크리트 롤

러를 어서 코트바닥을 다지는 일꾼)를 하면서 은신했다. 그러나

오래갈 수가 없었다. 당시 서울에서 조그마하게 안경 부품 사업을

하던 사촌형 집을 들른 게 화근이었다. 사촌형 집에 잠깐 들 을

때 내가 배달부로 일했던 중국집‘방배장’의 성냥갑을 놓고 온 게

꼬투리가 되어 행적이 추적된 것이다. 테니스장 그라운드 보이를

하던 중에‘방배장’옆 친구 사무실에 들러 동료들과 짜장면을 먹

다가 그만 붙잡히고 말았다.

나를 체포한 경찰관 이 모씨는 나에게 수갑을 두 개나 채워 고

속버스로 전주 경찰서로 연행했다. 그 때부터 고통스럽고 지긋지

긋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조사는 주로 밤에 행해졌고, 나는 밤이

시작되면 되면 공포에 몸을 떨었다. 낮에는 유치장에 다른 유치인

들과 함께 있다가 밤만 되면 조사실에 불려갔다. 그리고는 온 몸

이 피투성이가 돼 새벽에 다시 유치장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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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43: 이광철자서전 '함께'

다 되풀이됐다.

경찰 조사가 끝나고 35사단 헌병대로 넘겨진 후에도 마찬가

지 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됐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죽지 않

은 게 다행이었지만 끝까지 아픔을 호소하지 않았다. 맞을수록 더

가슴을 내 었고, 절대로“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때리는

사람도 스스로 폭력의 광기에 도취돼 때리고 또 때렸다.

나는 조사를 받거나 감옥살이를 하면서 유독 매를 많이 맞았

다. 맞으면서도 절대 굴복하지 않았고 할 말은 다하면서 버티는

성질머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19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35사

단 헌병대에 수감됐을 때다. 헌병대 유치장 마룻바닥에 정좌로 앉

아있는 수감자의 일상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참담함 그

자체 다.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떨고 있는 우리들에게 매일 저녁 병장

한 명이 위로(?)를 해주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참고 견디라”

는 등‘공자님 말 ’을 했다. 그러나 피멍투성이로 녹초가 된 나

에게는 위로가 될 리 없었다. 참다못한 나는 그 고참병에게“예수

님은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배고픈 자에게는 빵을 준다고 했다.

지금 나에게 절실한 것은 예수님 말 이 아니라 잠이다. 잠 좀 자

자.”고 말했다. 그 고참병은 머쓱해했고 한동안 불편한 관계가 계

속됐다.

정치를 하면서도 입바른 소리를 많이 해서 불이익을 당한 경

우가 자주 있었다. 그렇지만 비록 불이익을 당하더라도“이광철

제1부· 나의이력서 43

Page 44: 이광철자서전 '함께'

은 입은 삐틀어졌어도 말은 바른 대로 한다”는 평판을 듣는 것이

좋다.

상무대 창

모진 고문 끝에 보안대와 35사단 헌병대를 거쳐 끌려간 광주

상무대 창의 첫 인상은‘비겁함’이었다. 전주 35사단 창에 있

던 시절에 상무대에 수감되어 있는 광주항쟁의 투사들에 대한 은

근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다. 5월의 광주, 그 학살과 항쟁의 현장을

지켰던 분들에 대해 일종의 경외감이나 흠모의 심정을 가지는 것

이 당연했다. 총검 앞에 맞서 싸웠던 이들은 나 같은 일개 학생운

동가와는 차원이 다른‘전사’일 것이라고 여겼다. 심지어 얼굴색

이나 몸가짐 자체도 우리와는 어디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환상

조차 있었다.

그러나 막상 상무대 창에서 그들을 본 순간 그런 환상이 산

산조각으로 깨졌다. 당시 창에는 총 인원 400~500명가량이 한

방에 70~80명씩, 6개의 방에 나눠져 수감돼 있었다. 당시에 내가

본 그들은 나약하고 생존본능만 남은 모습이었다. 배고픔과 추위

에 떨면서 매일 밥과 담요를 갖고 싸웠다. 목숨 바쳐 민주화 운동

을 했다는 자부심은 커녕 끼니때면 밥, 잠잘 때면 담요 때문에 싸

우는 사람들을 보며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천막 조사실에 끌려

와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폭도 홍길동, 취조 받으러 왔습니다.”

를 복창하는 그들의 모습에는 투사의 기개는 온데간데 없고 오로

함께44

Page 45: 이광철자서전 '함께'

지 공포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광주는 총칼에 맞서 싸우지 않았

는가? 그래도 광주 사람들은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만 했다. 그들은 몇 달

동안 계속된 고문으로 너무나 지치고 무너질 대로 무너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를 위해 불려나가 들것에 실려 오는 경우가 비일

비재했다. 그동안 얼마나 괴로운지 숟가락으로 배를 가르고, 벽에

머리를 부딪쳐 자해하는 소동이 끊이지 않을 정도 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들의 내면에 5.18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월 정신은 그

들을 하나로 묶었고, 상무대는 곧‘저항’으로 들끓었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역사다. 지금은 비록 여기 있지만, 우리

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우리는 항쟁의 주역이며

제1부· 나의이력서 45

전주 중앙성당에서 5월 항쟁 계승집회

Page 46: 이광철자서전 '함께'

민주주의 투사들이다”

우리는 헌병의 눈을 피해 토론을 했고, 스스로를 교육해 갔다.

상무대에 끌려온 사람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노동자와 농민은 물

론, 교사와 교수, 은행원 등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가 본 광주의 5

월을 토론했다. 어느 날 술집 종업원을 했던 사람이 자신이 본 광

주를 얘기하는 것을 들으며, 5월 광주의 역사적 의미를 비로소 깨

닫게 되었다. 80년 5월 그 빛나는 항쟁의 진정한 주역은 운동권

명망가들이나 대학생들이 아닌 이름 없는 소시민들이었던 것이

다. 시민군 지도자 던 정상용(전 국회의원)과의 만남도 그 때 이

뤄졌고 그와 함께 당시의 정세, 5.18의 성과와 한계 등을 주제로

토론하곤 했다.

광주 상무대 창에 수감되어 있던 시절은 80년 5월 운동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

두번째징역살이

1980년 11월 형 집행정지로 상무대 창에서 풀려난 이후, 선

배,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지역운동의 진로를 모색했다. 다른 한편

으로는 생계 문제가 절실하게 다가왔다. 당시 이미 만 25살의 나

이 던 만큼 언제까지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살 수는 없었다.

경제적으로 자립한 생활인이 되어야 했다. 내 손으로 벌어서 먹고

살 수 있어야 운동도 제대로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시작한 것이‘옥피방석’장사 다. 옥피방석은 옥수수

함께46

Page 47: 이광철자서전 '함께'

껍질을 엮어서 짠 방석으로 강원도의 특산품이었다. 땀이 차는 것

을 방지해 쾌적하게 해주는 기능이 있어 서울 등지에서 인기가 있

었다. 도매상에서 한 장에 2,000원씩 300만원어치를 샀다. 80년

대 초반 당시로서는 꽤 큰돈이었다. 방석이 천오백장으로 한 트럭

이나 됐다. 옥피방석 장사를 위해 나름대로 사전조사도 하고 판매

조직도 만들었다. 운전기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반응이 괜찮

았다. 잘만 하면 많이 팔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웬걸. 막상 장사에 뛰어들자 현실은 달랐다. 세상물정

모르고 난생 처음 돈벌이를 시작한 청년들에게 장사라는 것이 그

렇게 만만치 않았다. 택시기사들이 단체로 구입하기로 얘기가 잘

되고 있던 터 는데, 때마침 일어났던 일택시 노사분규로 물거

품이 돼버렸다. 회사 측은 택시기사들이 스스로 사야 하는 물품이

라고 했고, 노조는 회사가 사줘야 하는 물품이라고 서로 떠넘겼

다. 결국 주 고객으로 생각했던 택시기사에 대한 판매 계획이 틀

어져 판매 방향을 바꿔야 했다.

어떻게든 집안 가득히 쌓아놓은 옥피방석을 처분해야 했다.

리어카 행상에도 나섰다. 리어카에 옥피방석을 싣고 전주 시내 아

파트 단지를 돌아다녔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제품이라 인식조

차 안 돼 팔기가 어려웠다. 하루 종일 리어카를 끌고 전주시내를

헤매고 다녀봤자 고작 3~4장씩 파는데 불과했다. 그렇게 2년 이

상 쌓아두었던 애물단지 방석을 YWCA 바자회에 한 장에 1,000원

씩 넘겼다. 원금과 이자는 고사하고 헐값이라도 처분할 수밖에 없

제1부· 나의이력서 47

Page 48: 이광철자서전 '함께'

었다. 옥피방석 사업은 처절한 실패로 2년여 만에 막을 내려 당시

로서는 거금인 300만원을 고스란히 날리고 말았다.

장사 실패로 현실의‘뜨거운 맛’을 본 나는 자본과 기술 없이

도 할 수 있는 생계거리를 찾아 나섰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세탁소

다. 세탁은 기술만 있으면 초기자본이 별로 들지 않은 반면 인

건비가 비쌌다. 다리미와 다림판만 있으면 돼 나 같은 사람에게는

딱 맞는 일이다 싶었다. 세탁기술을 배우려고 군산에 있는 한 세

탁소에 취직했다. 81년 12월 무렵의 일이다.

그러나 세탁소‘시다’생활도 얼마 가지 못했다. 경찰과 기관

원들이 수시로 세탁소에 드나들며 당사자인 나는 물론이고 주인

아저씨까지 성가시게 하는 통에 민망해서 더 이상 머물고 있을 염

치가 없었다. 그 때 익힌 기술이 지금은 가족들로부터 사랑받는

재주가 됐다. 내 옷은 물론이고 아내와 함께 사는 장모님 옷도 다

린다.

세탁소를 나온 이후 이리(지금의 익산)직업훈련원에 입학하

여 선반기술을 배우게 된다. 선반기술을 배워두면 생계해결 뿐 아

니라 장차 노동현장에 진출하여 노동운동을 하는 데에도 유익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직업훈련원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선

반기술을 익혀서‘기능사 자격시험’을 눈앞에 두고 있던 82년 10

월 무렵, 느닷없는 예비군훈련 소집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소집

통보를 받고 찾아간 송천동사무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은 예비군 훈련이 아니라 보안대 수사관들이었다. 문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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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49: 이광철자서전 '함께'

끌려간 보안대 지하실에서 발가벗겨진 채 얻어맞고 고문을 당했

다. 이 과정에서 내가‘좌경의식화조직’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

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81년 여름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에게 사회과학 서적 몇 권

을 권해 주고 함께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 옥피방

석 장사다, 세탁소 일이다, 직업 훈련소 생활이다 해서 생계와 직

업문제에 매달리느라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런데 그 후배가 주로

익산과 군산에서 활동하며 동지들을 규합했고 82년 8, 9월‘민족

에게 고함’이라는 유인물을 전주, 군산, 익산 등지에서 뿌렸다. 바

로 이것이 공안사건화 됐다. 공안기관은 이것을 빌미로 나를 배후

로 몰아 대규모 조직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결국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가 형기를 반쯤 남긴 84년 봄 이른바‘유화국면’당시, 형집행정

지로 풀려나왔다. 두 번째 징역살이 다.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창립, ‘대중속으로’

감옥생활 중에 나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80년 광주의 처

절한 희생을 거울삼아 전국적인 범위에서의 국민항쟁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84년 2월 출옥 직후부터 지역 내 민주화

운동의 어르신들과 선배 활동가들을 찾아뵙고“탄압에 노출되는

한이 있더라도,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서 대중과 함께 투쟁하

며 대중을 조직화할 구심점을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여쭙고 다

제1부· 나의이력서 49

Page 50: 이광철자서전 '함께'

녔다.

이 때 뜻을 같이 해 공개적인 대중운동단체 창립 준비에 나선

동지들은 허종현 성공회 신부, 박종훈, 노동길, 박순희(민주노총

지도위원), 전병생 목사, 문규현 신부, 하연호 전 민주노동당 전북

도당 위원장 등이었다. 특히 완주 이서의 기독교농촌개발원장을

맡고 있던 한규채 목사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드디어 84년 8월 27일,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전북민협)가

창립대회를 열었다. 오랜 동안 숨죽이며 비공개활동에 치중했던

각 부문의 민주화운동세력이 당당하게 한자리에 모여 대중적인

투쟁을 선포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전북민협에는 당시 활동했

던 재야단체와 지식인들이 거의 모두 참여했다. 개신교와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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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보안대에 끌려가 갖은 고문 끝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후 1심 재판정에서. 항의하는김경섭 목사와 나의 아버님, 그리고 지인들

Page 51: 이광철자서전 '함께'

기독교농민회, 가톨릭농민회 등 종교계와 종교단체, 종교인과 지

식인들이 총망라됐다. 이로써 전국에서 최초로 지역의 연합운동

조직이 탄생했다.

그동안 침체됐던 전북의 민주화 운동은 전북민협이라는 연합

단체의 결성을 계기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초대 사무국장을 맡

은 나는 교육과 노동, 농민 등 분야별 조직을 만들고 대중속에 뿌

리내리도록 하는 일에 열을 올렸다. 하루에 성명서 3~4건씩 쓰는

것은 다반사 다.

1985년 들어서는 노동과 농민 운동의 조직화에 힘을 쏟았다.

전주, 군산, 익산 등 노동 현장을 돌면서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학

습 모임을 가졌다. 나는 주로‘한국 근·현대 운동사’, ‘노동의 철

제1부· 나의이력서 51

84년 8월 전국최초로 지역운동의 깃발을 올린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창립식

Page 52: 이광철자서전 '함께'

학’등을 강의하며 의식화 교육을 했다. 그 후 학생운동권 출신들

로 농민운동에 투신했던 동지들과 함께 농민운동의 초창기 조직

이었던 기독교 농민회, 가톨릭 농민회를 넘어서는 자주 농민회 구

성을 위해 힘을 모았다. 이에 따라 순창을 시작으로 시·군 농민

회가 속속 결성됐다. 이것이 바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북도

연맹의 씨앗이 됐다.

함께52

Page 53: 이광철자서전 '함께'

3. 세 여자

風樹之嘆

시위와 민주화 투쟁 이야기만 하니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지금

부터 내가 사랑했던 여인들 얘기를 해볼까 한다. 그 누구에게도

전체 이야기(full story version)를 들려준 적이 없는, 애틋한 러브

스토리가 될 지도 모르겠다.

남자들은 누구나 일생을 살면서 가슴에 한 사람쯤 품고 사는

여인이 있기 마련이다. 내게도 그런 여인이 있다. 무려 셋이나 된

다. 나는 지금까지 이 세 여인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힘

들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즐거울 때나 이들은 내게 힘이 되

어주고, 따뜻한 동무가 돼 주고, 다정한 애인이 돼 주곤 했다.

먼저 첫 번째 여인을 소개한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상점에 걸린 스웨터를 보면서 어머님

제1부· 나의이력서 53

Page 54: 이광철자서전 '함께'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이 새벽기도를 가실 때나 심방을

다니실 때 입으면 참 따뜻하고 곱겠구나 하고요... (중략) 어머님

께 따뜻한 진지 한 그릇 올리지 못하는 불효막심한 놈이지만, 남

의 것을 훔치고 나만이 잘 살기 위해서 이웃을 해하는 그러한 자

식은 아닙니다... (중략) 저는 매일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만일

예수가 불쌍한 이 땅에 왔다고 한다면 예수는 어떻게 살까”...(중

략) 이 자식이 부족하지만 예수가 하려고 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제가 하는 일을 예수도 옳다고 생각

하고 자기의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중

략) 어머님이 우리 식구들의 십자가를 혼자 다 메셨다고 생각됩니

다..(중략) 제가 그 십자가 중에 눈꼽 만큼이라도 나눠가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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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학교 철학과를 11년 만에 졸업했다. 졸업식장에서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Page 55: 이광철자서전 '함께'

요...(중략) 추운 겨울날 이 스웨터로 따뜻하게 지내세요.”1991년

1월 23일 불효자 이광철 올림.

1990년 3당 합당 반대투쟁에 앞장서다 다시 맞이한 수배생활

중에 우연히 옷가게에 걸린 스웨터를 보고,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서 어머님께 보내드리면서 썼던 편지 의 한 대목이다.

숨 가빴던 당시 정세가 엿보이는‘전북민련 90 하반기 활동

약평’이라는 제목의 문건 뒷면에 긴박하게 써내려갔던 이 편지

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머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회한이 담

겨 있다.

어머니는 강산이 변하는 그 숱한 세월 속에서 아들인 나를 믿

어주고, 지지해준 유일한 후원자이자, 동지 다. 하루가 멀다 하

고 수배, 징역으로 밤을 지샌 시절에도 어머니는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시고 나를 믿어주셨다. 그 어떤 시련과 고난이 와도 나

를 신뢰하고, 변함없는 애정을 보내주신 분. 수배로 쫓기고 구속

돼 고문 받고 감옥생활로 만신창이가 된 자식을 보면서 어머니의

가슴은 피멍이 지고 한이 맺혔을 것이다.

밥그릇에 떠 놓은 물마저 얼어버리는 엄동설한의 차가운 0.75

평 독방에서 새벽녘에 깨어 멀리 바람에 려오는 새벽 교회 종소

리를 듣노라면, 아들이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는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오곤 했다. 나는 그 기도소리를 떠올리며

이날 이때까지 살아왔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고난과 시련

이 닥쳐올 때도 어머니를 생각했고 유혹의 손길이 뻗쳐 왔을 때도

제1부· 나의이력서 55

Page 56: 이광철자서전 '함께'

어머니를 생각하며 버텨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에게 끝내 못난 자식이었다. 평생 마음 한

번 편하게 해드리지 못했다. 광은 커녕 태산 같은 걱정으로 짓

눌리게 한 죄인 자식이었다. 심지어 제17대 국회의원 임기 동안

국회 구경 한번 시켜드리지 못했다. 아니 아내와 딸 가족에게도

마찬가지 다. 가족 보다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

의 일이 우선이었고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에게는 언제나 뒷순위

다.

국회의원 임기가 끝났던 지난 2008년 가을 초입 어머니는

면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식은 어머니의 바람과 반대로 하는

청개구리인 것 같다. 돌아가신 뒤에 더 아쉽고 마음이 아프다. ‘한

씨외전(韓氏外傳)’이라는 중국의 고서에 나오는 樹欲靜而風不止.

子欲孝而親不待(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를 다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구절의

의미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어머니! 감사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

합니다. 따뜻한 진지 한 그릇 제대로 올리지 못한 못난 불효자식

이 어머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20년간의신혼생활

두 번째 여인은 겉보기엔 여리고 약해 보이지만, 한없이 강한

내면의 소유자, 바로 내 아내 소성섭이다.

한참 사귀던 시절에도 운동권 특유의‘엄숙주의’에 빠져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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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57: 이광철자서전 '함께'

금 이 시대가 한가하게 연애나 할 때냐며 핀잔이나 주고, 행여나

결혼하면 삶의 태도가 나약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손 한

번 제대로 잡아주지 않았다. 그런 나를 그녀는 무려 7년이라는 긴

세월을 견뎌냈다. 그것도 모자라 집안의 반대마저 물리치고, 아무

직업도, 가진 것도 없었던 나와 선뜻 결혼해 주었고 지금까지 살

고 있다. 아내와의 이야기가 혹시 길더라도 그동안 같이 살아준

죄 닦음이겠거니 하고 이해해줬으면 한다.

아내와의 인연은 결혼 7년 전인 1980년부터 시작됐다. 아내

는 나의 아버님이 목사로 있던 전주 송천동 시천교회를 다녔다.

나는 알지 못했지만 아내는 목사의 아들이자‘데모꾼’으로 소문

제1부· 나의이력서 57

87년 4월11일 결혼을 했다. 그러나 신혼의 달콤함을 누릴 겨를도 없었다. 이틀 뒤 전두환의 4.13호헌조치로 다시 거리에 나서고 수배가 되었다. (결혼사진 속에 민통련 동지들과 전북지역의 민주화운동 동지들이 보인다. 이재오, 이명식, 고인이 된 정순철, 광주의 장갑수, 대구의 김균식, 이상호선생,친구인 최인규 목사, 치과의사가 된 후배 김운주, 박남준 시인, 손인범, 강기종, 김윤 부부 등)

Page 58: 이광철자서전 '함께'

난 나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80년 봄, 아내와의 인연을 깊게

해준 사건이 일어났다. 아내가 다니던 전주 예수간호대 2, 3학년

생 70여명은 기숙사를 나와 복귀거부 투쟁에 들어갔다. 전교생이

기숙사생활을 하며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을 강요받는 것에 반기

를 든 일종의‘학원자율화투쟁’이었다.

아내와 이옥주(현 전주시의회 의원) 등이 포함된 이들은 익산

의 한 여관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아내가 나를 거

론했던 모양이다. 유명한 시위주동자인 나와 상의하면 향후의 투

쟁방향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내와 흥

사단 후배인 또 다른 학생이 자신들의 자문역할로 나를 추천한 것

이었다. 아내는“우리교회 목사님 아들이 데모 전문가인데 우리

에게 도움이 될 거다.”했고, 후배는“그런 선배님이 있으면 도움

이 될 것이다.”고 한 것이다.

나는 이들과 만나 학원자율화의 필요성과 정치정세를 설명하

면서 학생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칭찬했다. 이들과 함께 이틀 동

안 익산 여관에서 보낸 뒤 송광사 보이스카우트 캠프장으로 옮겨

학칙개정요구안을 만드는 등 이후의 투쟁방향을 상의했다.

학교 측과 학부모, 공안기관은 이들을 찾아 나섰고 며칠 후에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이들은 보름 동안의 투쟁 끝에 학생회

부활과 자율권 확보 등을 중심으로 한 학칙 개정을 쟁취했다. 내

가 자문해주기도 했지만 여학생들의 강한 단결력이 만들어낸 결

과 다. 그러나 이 같은 자율권 확보는 신군부의 5.18 쿠데타 이후

함께58

Page 59: 이광철자서전 '함께'

학교 측의 일방적 파기로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주동한 학생들은

다른 대학으로 옮겨가야 하는 파동을 겪어야 했다.

아내와의 만남은 80년 겨울 상무대 출소 뒤에도 이어졌다. 그

러나 나는 결혼에 대해 경직된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혼한

선배나 동료들이 생활상의 문제로 인해 운동의 일선에서 이탈하

는 모습을 보면서 일종의‘경계의식’같은 그릇된 관념이 자리 잡

은 것 같았다. 결혼은 혁명가를 나약하게 만드는 덫이라고만 생각

했다. 결혼이 아닌 연애상태에 대해서조차 죄의식에 젖어있었다.

“선배·동료들은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는데 나는 연애질이나

할 수 있겠는가.”하는 편협한 자격지심이었다.

이런 가운데 86년 겨울 어느 날 오목대 데이트에서 프러포즈

를 받았다.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일

을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 경제적인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다. 그

러기 위해서 간호사 직업을 갖고 있다.”아내는 훗날 이 말이 그냥

자기 생각을 한 말이었다고 했지만 나는 크게 흔들렸다. 결혼이라

는 것을 당면한 문제로 심각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86년 12월 말 학생 때부터 운동권 후배로 동고동락한 김운주

(치과의사)의 집에서 가까운 운동권 선후배와 지인들과 함께 송년

회를 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아내에게 평소 하던 대로 변혁과 우

리의 역할 등에 대해 얘기를 했다. 이에 대해 아내는 얼굴이 굳어

지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이럴까 봐 참석하지 않으려 했는데 오

늘도 마찬가지다. 나는 훈계의 대상밖에 안되느냐.”고 반발했다.

제1부· 나의이력서 59

Page 60: 이광철자서전 '함께'

나는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 무엇이었나. 한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만인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

나. 이는 허구이고 거짓이다.”그 자리에 있는 후배들에게 선언했

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운동을 포기할 것이다”

그 후 나는 결혼문제를 피하기만 할 게 아니라 정면으로 돌파

하자고 결심했다. 이래서 86년 4월 11일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전북지역의 동지들뿐만 아니라 이재오, 이명식, 신 일 등 전국 각

지의 운동권 동지들이 하객으로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다음날 오후에야 우리는 사람들의 권유를 못 이겨 계룡산

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그러나 시대의 엄혹함은 신혼을 즐길 틈조

차 허락하지 않았다. 결혼식 이틀만인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의 이

른바‘4.13호헌선언’이 나와서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하루 만

에 다시 거리로 달려 나가야 했던 것이다.

우리의 신혼집은 예수병원 뒤편의 허름한 단칸방이었다. ‘후

지카’곤로에, 작은 장롱과 찬장, 이불 한 채가 살림의 전부 다.

그 좁은 신혼 단칸방은 언제나 운동권 선후배들로 북적 고, 연일

집들이가 이어졌다. 이런 신혼생활조차 채 두 달도 가지 못했다. 6

월 민주항쟁의 기운이 무르익어가던 어느 날, 정보기관원들이 집

을 급습한다는 제보를 받고 황급히 몸을 피해 한동안 집에 돌아가

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우리 부부는 평범한 부부 같았으면 갈라서도 수도 없이 갈라

졌을 것이다. 좋은 세상 만들겠다는 핑계로, 조금은 무모해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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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61: 이광철자서전 '함께'

는 신념 때문에, 한 번도 생계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하루

가 멀다 하고 수배에, 투옥에 시달려야 했던 못난 남편을 한 번도

탓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묵묵히 생계를 꾸리고,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를 혼자서 낳고, 길러냈다.

딸아이 임신 6개월째부터 조산기가 있어 두 달을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런 실정에서 아홉 달도 안 돼 2.45kg짜리 미숙아로 황

달까지 안고 태어난 딸아이를 살리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했었던

그녀 다. 그러고도 모자라 생후 한 달밖에 안 된 갓난아이가 목

근육이 뭉쳐 놔두면 목이 틀어지는‘사경’이라는 병 때문에 이틀

에 한 번 꼴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을 때 조차도 그녀는 묵묵히 잘

도 견뎌냈다.

하늘이 도왔는지 다행히 갓난아이의 병세가 자연치유될 무렵,

이번에는 아내 자신이 만성 간염으로 쓰러져 버렸다. 그토록 강했

던 그녀의 육신과 혼마저 감당해 내기 힘든‘시련의 계절’이었

던 것이다. 이때가 1992년의 일이다. 90년 초부터 92년까지 수배

를 당해 피해 다녀야 했던 나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아내에

게 한없이 미안해진다.

1999년 내가 한창 시민운동에 열중하고 있었을 무렵, 아내는

광주에서 6개월 동안 취업 겸 유학을 위한 준비를 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2000년 8월, 미국에 간 그녀는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면

서‘노인 간호’를 배웠다.

그러다가, 내가 2004년 총선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하자마자

제1부· 나의이력서 61

Page 62: 이광철자서전 '함께'

그녀는 공부를 중단하고 급거 귀국해서 나의 선거를 도왔다. 미국

에서 공부하던 그 시기가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한 기회 는지, 그

녀에게 얼마나 귀한 공부 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는 나로

서는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다른 수많은 동지들의 노력

도 컸지만, 그녀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내가 과연 존재할 수 있었

을까 하는 생각에 그녀가 더 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딸아이를 낳고, 병간호를 할 때, 절실하게 남편을 필요로 했을

때에는 수배를 당해 집을 떠나 객지를 헤매고 있었고, 수배가 끝

나 집에 와서‘남편노릇 좀 하나’싶으니까 자신이 중병을 얻어

친정에서 요양을 해야만 했다.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신산의 삶에

대한 미안함을 뒤늦게라도 조금이나마 씻어줄 수 있다면, 나로서

는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 그랬다. 우리는 1987년에 결혼해 25년을 부부로 살았지

만, 정작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국회의

원 임기 4년 동안에도 내내‘주말부부’로 살아야 했다. 평범한 부

부로 산 날을 모두 합하면 잘해야 4~5년이 채 안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25년 부부생활 동안 크게 싸운 적은 없었

다.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적어도 얼굴 붉히

도록, 또는 이웃이 들릴 정도로 소리 나게 싸운 적은 없었다. 서로

의 운명에 대한 애틋함과‘측은지심’때문이다. 그녀는‘시대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남편이 불쌍했고, 나 또한 항상 미안하고

죄스럽기만 했던 까닭에 부부싸움이란 원천적으로 있을 수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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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63: 이광철자서전 '함께'

었던 것이다.

이렇게 떨어져 지내다 보니 우리는 25년 동안 늘‘신혼부부’

다. 언제나 만나면 새로웠고, 떨어지면 절실히 그리워했다. 그

야말로 신혼부부가 따로 없었던 것이다. 결혼 10년째 던 96년

어느 날 구치소에서 아내에게 썼던 편지의 첫 대목으로‘ 원한

신혼’의 애틋함을 전해 본다.

“그리움에 지쳐버리면 그리움을 잊어버릴까 했는데도 그리움

에 지치면 지칠수록 왜 그리 더욱 더 그리워지고 보고 싶은지 모

르겠습니다. 너무 먼 걸음이라 그립다는 이야기도 마음 놓고 해보

지 못했습니다. 보고 싶다는 말 때문에 모든 일 팽개치고 여기 왔

다 가면 공허감에다 피곤함까지 겹쳐 아프지 않을까? 더 서 프지

않을까? 등의 이유로 그립다는 말 못했는데, 오늘은 그립다는 말

로써 편지를 써봅니다.”

‘간첩의딸’

“아버지께. 안녕하세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요.

저는 그저께 시험을 봤어요. 1학년 때와는 다르게 시험을 볼 때

재미있었어요. 시험 점수가 나왔는데 국어는 96점, 즐거운 생활

100점, 바른 생활 92점, 슬기로운 생활 96점, 수학은 80점이었어

요. 저는 즐거운 생활이 재미있어요. 앞으로는 열심히 공부해서

수학을 더 잘할게요. 요즘 어도 배워요. 너무 재밌지요. 그 속은

어떠나요. 춥지 않으세요. 저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안녕히 계

제1부· 나의이력서 63

Page 64: 이광철자서전 '함께'

세요. 96.12.12. 산하 올림”

나의 외동딸, 이산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감옥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게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에 쓴 편지다. 당시 초등

학교 2학년이었다. 카드를 받은 나는 손이 떨렸고 눈물이 샘물같

이 솟아나왔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그냥 눈물이

소리 없이 흘 다. 감옥과 수배생활로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했는

데 벌써 이렇게 됐구나. 가슴이 먹먹해지고 머리는 하얗게 비워

졌다.

나의 세 번째 여인 이산하. 사랑하는 나의 딸이다. 산하는 어

릴 적부터‘아빠 집’이 수없이 많다고 생각했다. 수배를 당하면서

매일매일 집을 옮겨 다녔고, 그 넓디넓은 대궐 같은 감옥들이 모

두 아빠 집이었으니 어린 산하에게는 그렇게 여겨질 법도 했다.

혹여 엄마가 수배 중이던 나와 연락이 닿아 만나거나, 감옥에 면

회를 갈 때마다 산하는“아빠 집에 가자”고 보챘다. 옆에서 지켜

보는 엄마는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겠는가. 문 모르는 사람들은

나와 아내에게 이혼한 부부 보듯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곤 했다.

나는 수배 중에도, 투옥 중에도, 산하에게 많은 편지를 썼다.

그 수많은 편지들은 사무치는 그리움과 보고픔을 솔직히 표현한

것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아빠 노릇 제대로 한 번 하지 못한‘미안

함’을 속죄하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산하

가 태어날 때, 그리고 산하가 너무 많이 아파서 힘들어 할 때조차

도 나는 수배 중이라는 핑계(?)로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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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65: 이광철자서전 '함께'

산하는 어렸을 적 지나치게 문단속을 하곤 했다. 공안당국의

감시가 심해져 안기부 기관원들이나 형사들이 집 근처를 배회할

때마다 어린 마음에 두려웠던 산하가 할 수 있는 일이 대문을 잘

잠그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어린 산하는 가끔씩

쓸 데 없이 뒤를 돌아보는 버릇이 있었다. 수배 중이었던 내가 산

하를 만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기관원들이나 형사들이 자

주 산하를 따라다녔던 통에 생긴 버릇이었다.

산하가 대여섯 살이었을 때, 그러니까 유치원을 다닐 무렵이

었다. 당시 나는‘전주시민회’대표를 맡아 시민운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당시 여섯 살이던 산하는 유치원이 끝나면 집에 사람이

없어 아빠 사무실에 와서 하루 종일 놀아야 했다. 그러다가 밤 11

시 쯤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엄마가 병원 일을 끝내고 집에 데리

고 갈 때까지를 기다리지 못해 허름한 소파에서 쪼그려 잠들어 있

곤 했다. 그 모습을 보노라면 내 가슴은 언제나 찢어질 듯 아팠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내가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렸을 때의

일이다. 공안당국의 조작에 의해 졸지에 이른바‘구국전위간첩

단’의 전북조직책으로 둔갑한 나 때문에 산하는‘간첩의 딸’이 되

어야 했다. 당시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다. 입학식에도 후배 정

훈(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의 손을 잡고 가야만 했

다. 무엇보다 산하에게 아빠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

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감옥에 있을 때 산하에게 이렇

게 편지를 썼다.

제1부· 나의이력서 65

Page 66: 이광철자서전 '함께'

“산하에게. 우리 예쁜 딸 산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빠

는 모르겠다. 엄마나 삼촌, 이모들이 설명해주리라 믿는다. 산하

야! 아빠 보고 싶지. 아빠도 산하 보고 싶단다. 아빠가 이곳에서

일어나면 지금 산하도 일어나겠지, 숙제는 다 했는지, 일기는 다

썼는지, 밥은 잘 먹는지 생각하며 산하를 그려본단다. 산하야! 우

리 산하는 옆에 없지만 아빠가 옆에 있는 것처럼 아빠에게 물어보

고 대답하며 생활해봐. 그럼 아빠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거야. 산

하야! 아빠가 없지만 우리 산하는 씩씩하고 건강한 아이가 되었을

거야. <중략> 산하야! 건강하자. 슬픈 일이 있으면 기쁜 일도 있

는 거란다. 다음에 있을 기쁜 날을 생각하며 건강하고 씩씩하게

슬픔을 참자!”

다행히 산하는 잘 자라주었다. 당당하고 자립심이 강하다. 남

에 대한 배려도 깊다. 혼자 해외를 다니며 자신의 세계를 가꾸고

있다. 나의 손길이 닿지 않고 자랐지만 아빠를 끔찍하게 아낀다.

아직도 나는 아내와 딸의 보호를 받아야 할 아이 같은 존재인

것 같다. 나를 지금까지 그 모진 세월을 견디고 지탱하게 한 것은

어머니와 아내와 딸, 세 여인이다.

사랑을키운감옥편지

툭하면 들어가는 감옥생활은 아내와 산하, 그리고 가족과 세

상에 대한 사랑을 키운 자양분이었다. 편지로 사랑을 전했고 고통

을 토로했다. 세상에 대한 나의 생각도 펼쳤다. 다행히 그 여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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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67: 이광철자서전 '함께'

나를 그대로 받아들 다. 한없는 모성애적 사랑이지 않았을까.

감옥 편지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나의 반쪽 소성섭

도, 가정도,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감옥 편지는 나의 사랑을

잉태하게 했고 키웠다. 나의 가정을 만들고 지키게 했다. 볼품없

는 나무에 불과했던 나를 지금의‘이광철’이라는 기둥으로 깎고

다듬은 대패 다.

처음 맞닥뜨린 감옥은 분노와 격정의 공간이었다. 격리의 고

통과 고독에 처절하게 맞서야 했다. 혈기와 고독의 부딪침에 나의

정신과 육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찢어졌다. 인생과 세상에

대한 분노가 정의와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불타올랐다.

결국 부서지고 태워진 나라는 존재는 사라져갔다. 존재할 수

제1부· 나의이력서 67

내 인생의 전부인 세 여자 (2008년에 돌아가신 어머니, 아내 소성섭, 그리고 딸 이산하)

Page 68: 이광철자서전 '함께'

가 없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나를 지키고 지탱해준 방패 고 방편이었으며 지혜 다.

감옥은 나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이었다. 나를 닦는 수행의

공간이었고 학습의 공간이기도 했다. 지난날을 성찰하면서 지인

들과의 관계를 돌아봤다. 나라와 세상에 대한 지혜의 날을 날카롭

게 갈기도 했다. 그러면서 생각은 넓어져갔다. 나로부터 주변으

로, 지역으로, 나라로, 세계로…. 0.75평 공간에서 펼쳐지는 정신

의 세계는 경계선이 없었다.

생각은 깊어지고 넓어졌지만 출발점은 언제나 사랑이었다. 결

국 사랑밖에 없었다. 아내와 딸에 대한 사랑, 부모님에 대한 사랑,

지인들에 대한 사랑, 나라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었다.

80년에 35사단과 광주 상무대 창에 투옥되었을 때만 해도

편지를 쓴다는 것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서신왕래 자체를 일

체 허용하지 않았다. 82년에 붙잡혀가서 민간교도소에서 두 번째

징역살이를 하던 시절에는 편지를 쓸 수 있었다.

펜을 잡으면 쓰고 싶은 얘기는 넘쳤지만 쓸 지면은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교도소 측이 준

봉함엽서 한 장뿐이었다. 궁리 끝에 봉함엽서를 뜯으면 A4 용지

한 장 크기로 넓어졌다. 깨알같이 쓰고 또 썼다. 우표와 주소를 쓰

는 공간만 빼고는 두 쪽을 빼곡히 채웠다.

‘구국전위’간첩 사건으로 감옥생활을 한 96~97년에는 편지

지를 3장씩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편지를 쓰면 교도소는“검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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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69: 이광철자서전 '함께'

안부만 ”이라는 스탬프를 찍어 발송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썼을까. 수사를 받거나 재판준비를 할 때는 쓰지 못했지만 그렇게

쓴 편지가 100통이 넘는다. 모두 애인이자 아내인 소성섭에게 보

냈다. 나의 아내 소성섭은 받은 편지들을 다리미로 깨끗이 펴 스

크랩을 해두었다. 집을 옮길 때마다 한 장도 손상되지 않도록 소

중하게 간직했다. 우리 집 보물 1호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어쩌다 한 번씩 읽어보면 감옥생활과 당시 겪었던 일들이 주

마등처럼 지나간다. 나를 잊고 살 때 나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반

면교사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아내 소성섭이 없으면 나는 존재할

수 없는 모양이다.

편지를 쓰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공간은 달리하지만 아내와 딸을 마주하

고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건강을 걱정하고 챙겨주는 소소한 일상

은 물론 세상 돌아가는 일들이 모두 편지로 이루어졌다. 부모님과

지인들에 대한 생각도 켜켜이 쌓았다. 미당 서정주는“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했지만 나의 사랑을 키운 건 팔 할이

감옥편지 다. 편지 첫머리는 결혼 전에는“고운 님에게”나“보고

싶은 사람에게”에서 결혼 후에는 언제나“사랑하는 당신에게”로

시작했다.

“이리 직업 훈련소에 보고 처음 봤어. 햇수로 2년에 지났는

데…. 그간 몸 건강히 잘 있었는지? 접견 때 안부도 묻지 못했군.

제1부· 나의이력서 69

Page 70: 이광철자서전 '함께'

난 성섭이 항상 염려해준 덕분으로 몸 건강히 잘 있다네. 사회에

있을 때보다 더 몸 관리를 하고 있다네. 새벽 6시에 일어나 냉수

로 온몸을 씻는 냉수마찰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어. <중략> 난

매일 아침 성섭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데 듣고 있는지 모르겠

군. 가장 잘 부르는 노래가 이은상 작시 홍난파 작곡‘사랑’이라

는 곡이야. 곡도 곡이지만 가사가 아주 마음에 들어. 1.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타다 마시라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쓰일 곳이 없느니라. 2. 반 타고 꺼질진대 애

저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 타고 생각으로 잊으시오. 탈진대

재 그것조차 마저 탐이 옳습니다.”[1983년 1월 19일]

“많은 기대감속에서 기다렸습니다. 말 그대로 특별면회 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사랑을 더 굳게 결속하는 약혼일(?)이기 때

문이었습니다. 지난밤에도 설렘 속에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

니다. 이제까지 접견실에서의 만남은 투명한 벽이 가로막아 아쉬

웠지만 이번 특별면회로 해갈되리라 생각했답니다. 만나면 고생

하고 있는 가냘픈 손목을 꼭 잡아봐야 하지 하고 지루하게 기다렸

답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실망과 허무함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내 사랑하는 님, 손이나 한번 잡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소원이었는

데 정작 손목 한번 잡지 못하고 헤어졌으니 후회와 섭섭함이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용기 없는 나의 행동에 환멸을 느끼고 있답니다.”

[1983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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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71: 이광철자서전 '함께'

“당신이 손수 지어준 셔츠, 더구나 깨끗이 빨아 풀까지 먹여

정성스럽게 보내준‘성의(聖衣)’를 입기가 아까워 걸어놓았습니

다. 만지고 보기만 하겠습니다. 이전의 작품 보다 훨씬 더 잘 됐다

고 생각합니다. 다만 설운 눈물이 더 많이 포함됐으리라 생각합니

다. 눈물자국을 보이지 않으려고 세탁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 한

올 한 올 마다, 한 매듭 한 매듭마다 애정과 설움으로 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고이 품에 간직하겠습니다. 당신이 접견실에서 보인

눈물로 내 눈에 종기가 났습니다.”[1983년 6월 24일]

“갑자기 이송지휘가 떨어져 새벽밥을 먹고 거의 일년 동안 생

활했던 정 아닌 정이 붙은 전주교도소를 떠났습니다. 지프에 몸을

싣고 산을 건너고 내를 건너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자전거

하이킹을 했던 관촌 사선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오수, 모래사장이

좋은 금지, 춘향의 도시 남원, 고깃병으로 고기 잡던 압록 그리고

구례를 지나 순천 교도소에 수감됐습니다. 그 산이 그 산이고, 그

내가 그 내 지만 나는 그 나가 아니었습니다. 어의 몸으로 산

천을 바라보는 마음은 딱하기보다는 한스럽습니다. 나야 어딜 가

든 상관없지만 날 기다리는 당신과 부모님 그리고 형제들이 고통

스럽기 때문에 더더욱 안타깝습니다. <중략> 순천교도소가 나에

게 준 수감번호는 666번입니다. 좋은 번호라고 생각합니다. 여의

주를 입에 문 금시조가 바다를 쪼개고 깊이 들어가 용을 낚아채

머리를 쪼아 먹는 그 기상에 찬 성품을 갖기를 원합니다. 이 금시

제1부· 나의이력서 71

Page 72: 이광철자서전 '함께'

조의 내용은 이문열 창작집‘금시조’로 동화서적에서 출판한 창

작집에 있습니다. 이문열이 이데올로기와 종교문제를 주제로 쓴

소설‘사람의 아들’을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금

시조’를 읽고 얘기해주기를 부탁드립니다.”

[1983년 9월 28일]

“만날 때마다 당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잡아주지 못하고 보

내고 나서야 안타까워하는 심정은 순수하기 보다는 무능력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밖에서 세상일로부터 속상하며 못난 놈 나오기만

애타게 기다리며 인내하는 손목 한번을 따뜻하게 잡아주지 못하

는 사내놈이야말로 부끄럽고 쑥스럽기 보다는 용기 없는 바보 멍

청이가 아닐까 하며 자조의 웃음을 짓습니다. 사랑하는 님! 오늘

은 꼭 차디찬 손을 잡으면서 위로해 줘야지라고 맘을 먹지만 막상

접견실에 앉으면 나의 손을 어디에 어떻게 놓아야 할지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당신의 외로운 손을 수없이 어루만

지며 고통을 위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나의 손은 허공만 왔다갔

다 할 뿐 오늘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보내고 나서야 나의 소심

한 행동을 후회한 지가 1년여 동안 반복됐습니다. 법정에서, 접견

실에서 님의 손길을 잡아주지 못하고 자리를 뜬 것이 수십번이었

습니다. (중략) 나의 용기 없는 행동을 탓하면서, 오늘 이 추운 날

언 손을 녹여주었으면 전주까지 가는 길이 따뜻했을 텐데…, 하면

서 후회합니다.”[1984년 1월 21일]

함께72

Page 73: 이광철자서전 '함께'

“난 당신께 아무것도 해줄게 없소. 오직 당신께만이 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오. 당신의 삶을 먹고, 당신의 위를 먹고, 당신의

골수를 먹는 사람이 되었소. 이제 내가 당신을 위해 내 살을 도려

내고, 내 피를 적시며 내 골수를 드리는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인내와 정진을 통해 내 그릇을 키우겠소. 그 날이 와서 빈 그릇을

내놓을지라도 오늘 그릇을 키우기 위해 땀 흘리겠소. 이제 나도

당신과 산하에게 커다란 느티나무가 되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 수

있도록 나를 닦아보겠소.”[1996년 7월 마지막 밤에]

“어제 당신 편지를 받은데 이어 오늘 또 다시 아버님과 당신의

두터운 편지를 받았소. 아버님 은퇴 예배 소식지와 호-혜경 결

혼식 청첩장도 들어있었소. 눈에 선하오. 아버님, 어머님 두 분이

마음에 드는 은퇴 예배여서 나도 마음 기쁘오. 아버님 편지를 보

면서 가슴이 아프면서도 감사했습니다. 또 당신 건강 염려하지 않

아도 된다니 기쁘기 한이 없소. 당신 스스로 과로하지 않으려 한

다니 다행스럽기 짝이 없소.”[1996년 9월 11일]

“요사이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옳다’는 이유 하

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나하고 말

입니다. 격려하고, 지원하고, 함께 해야 했음에도 매도하고, 단죄

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옳고 그름이야 누가 모르겠습니까. 단

지 선후의 문제로 누가 먼저 알았다할 뿐인데도 거품을 물고 웅

제1부· 나의이력서 73

Page 74: 이광철자서전 '함께'

전 쓰듯이 칼을 휘둘러 아물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내지 않았는가.

돌이켜보면 별 것도 아닌 건데도 그 때는 왜 그렇게 생사의 갈림

길인 것처럼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몰아부쳐야 했는지 모르겠

습니다.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보지 못했고, 닦지 못했습니다. 내

마음에 여유가 없었습니다.”[1996년 9월 31일]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오. 생일을 축하하는 편지를 보내는 것

이 쑥스러울 뿐이오. 새삼 생일을 축하하는 편지를 쓰니…. 그러

나 오늘도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없는 미래로 미룰 수밖에 없군요.

다음에는 당신이 기뻐할 만큼 생일을 축하해주리라고…. <중략>

지난 세월을 더듬다 보면 당신의 강함과 인내, 고생스러움, 안쓰러

움이 손 끝에 그대로 전해옵니다. 참으로 많이 사랑받아야 할 당

신인데 제대로 사랑 한번 받지 못하고…. 아프고 힘든 일, 모두 보

따리에 차곡차곡 싸 두세요. 훗날 내가 풀어서 하나하나 감싸주고

도려내고 풀어내고 위로해 드릴께요.”[1996년 9월 17일]

“내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밤이 두려웠습니다. 지난 밤을 새

하얗게 보냈습니다. 누우면 저 먼 명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고 숨쉬기도 멈춘 듯합니다. 일어나 앉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

고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찬물을 마셔도 물이 기도를 막는 것처럼

물 마시기도 힘든 밤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뛰는 가슴을 어루

만지며 거울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여리고 여린 나를 발

함께74

Page 75: 이광철자서전 '함께'

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갈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 실망으로 돌아

와 아득했었나 봅니다. 내 자신이 왜 이렇게 바보스러운지, 왜 이

렇게 심약했는지. <중략> 그러나 오늘 뿐입니다. 내일은 다시 힘

차고 활기 있는 생활로 돌아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당신은 밖에

서 나는 안에서 서로 용기를 주고 건강하게 살아갑시다.”

[1996년 11월 13일]

“사랑하는 당신! 당신 몸 상태가 어쩐지 걱정되오. 소화도 잘

안 되는 것 보니 전체적으로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소. 소화가 안 되

면 간에 부담을 주니, 좀 힘들고 귀찮더라도 발등에 붙이는 파스

요법을 계속했으면 좋겠소. 발목에는 붙이지 않더라도 발가락 바

로 위편 발등에 엄지와 둘째 사이가 간이고, 둘째와 셋째 사이가

위요, 셋째와 넷째 사이가 췌장이고, 넷째와 다섯째 사이가 쓸개입

니다. 이 네 군데를 꼭 붙 으면 합니다.”[1996년 12월 3일]

“여보 힘내세요. 나야 허깨비고 당신이 우리 집 기둥이잖아

요. 난 내가 생각해도 냄비 같은 사람이요. 당신 편지 받고 조금

밝으면 날아갈 것 같고, 조금 슬픈 일이나 안타까운 일이 있으면

그냥 가라앉고. 사람은 모름지기 뚝배기 같아야 하는데, 진득하고

믿음직스럽고 그런 사람 말이요. 사랑하는 당신! 내가 편지를 쓰

면서도‘보고 싶은 당신!’, ‘그리운 당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

는 이유는 혹시나 당신이 그 표현을 보고 먼 길을 달려오지 않을

제1부· 나의이력서 75

Page 76: 이광철자서전 '함께'

까 걱정돼서입니다. 결코 면회 오는 일 조차 당신의 건강을 중심

에 놓고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1996년 12월 7일 새벽]

“면회실에서 산하를 볼 때마다 산하의 마음을 엿봅니다. 아빠

라고 부르고 싶어도 차마 부르지 못하고 할 말이 있는 것 같음에

도 입안에서 맴돌고 눈빛은 뭔가 대기만 하면 터질 것 같은 서

픔을 안고 있습니다. 돌아서면서 다시 한 번 애잔하게 아빠를 쳐

다보는 모습에 가슴이 저립니다. 그래도 마음속으로 아이니까 금

방 잊어버리며 생활하겠지! 마음깊이 상처를 입지 않을 거야! 엄

마가 있으니까! 하면서 자위하곤 합니다.”[1997년 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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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77: 이광철자서전 '함께'

제1부· 나의이력서 77

Page 78: 이광철자서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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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79: 이광철자서전 '함께'

제1부· 나의이력서 79

Page 80: 이광철자서전 '함께'

4. 새로운모색, 시민운동의길

‘새길청년회’와‘전주시민회’

87년 6월 항쟁 이후 많은 것이 급격히 달라져 갔다. 운동조직

도 연합단체 중심보다는 각 부문별로 세분화 되어갔다. 말하자면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분가하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방식을 바꾸어야 했다. 노동자, 농민 중심의 체제변혁

운동에서 각계각층의 이해와 요구에 바탕을 두는 부문별 운동으

로 전환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문턱 없는 청년 운동이었

다. 문화를 매개로 직장 청년을 중심으로 사회와 공동체문제에 관

심을 갖는 청년 조직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새길청년회’ 다.

새길청년회는 활동 방향과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듬해 90년부

터 정식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조직은 시사 토론반, 문학반,

상반, 풍물반, 역사기행반 등으로 구성했다. 시민사회가 주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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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81: 이광철자서전 '함께'

되어 삶을 보다 풍요롭고 건강하게 하고 사회의식도 키우자는 것

이 새길청년회의 활동 방향이었다. 새길청년회는 상당한 호응을

얻어서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일반 청년들이 200여명까지 불어

났다. 매주 한 두 차례씩 모임을 갖고 풍물, 상, 쓰기, 시사토

론 등 취미별 문화 소모임을 꾸리며 활동했다. 봄맞이 음악회 같

은 행사는 지금도 기억나는 뜻 깊은 어울림 행사 다.

그러나 새길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나는 다시 무언가 허전했

다. 문화운동 중심의 활동은 나름의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었지만

사회 변화를 위한 역동성과 확장성이 부족함을 느꼈다. 보다 더

시민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픈 호기심과 열정이 생겨났다.

현실은 갈수록 공동의 사안들이 일상적으로 조직되기 보다는

제1부· 나의이력서 81

전주새길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모악산 등반 중

Page 82: 이광철자서전 '함께'

부문 운동적 성격의 의제와 활동들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변화했

다. 노동, 교육, 농민 등 각 부문별 조직은 자리를 잡아가고 연합

운동은 갈수록 쇠락해갔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차라

리 시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는 생각을 했다. 말하자면 지역

주민의 구체적 삶을 바탕으로 시민들이 참여하는 형태의 새로운

운동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전주시민회 준비위원

회’(시민회)를 꾸렸다.

시민회 활동 가운데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리 희, 손석희, 조정래 같은 명사들을 초청해서 <보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의 정기 강연회를 개최한 것이고, 두

번째는“언론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제목의 언론학교

를 개설한 것이었다.

운동단체가 대중집회를 하면 수십 명밖에 안 모이던 시절에

강연회와 언론학교에는 수백에서 1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들

었다. 전주시 경원동 원불교 대강당은 시민들로 만원사례를 이루

었다. 시민회의 사업은 모든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업을 했

다하면 수백 명 이상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모두가 신바람이 나

서 즐겁게 일했다.

그러나, 신의 질투 을까. 내 인생 최대의 시련이 아무도 모르

게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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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83: 이광철자서전 '함께'

간첩누명과무죄판결, 그리고 800만원의국가배상금

새길 청년회를 거쳐 전주시민회 활동을 하던 90년대 초반, 내

인생 가운데 가장 행복하고 평온한 시기 다. 피폐한 몸을 추스르

기 위한 운동으로 시작한 요가로 밥벌이를 하고 시민 운동을 하며

삶의 평화를 만끽하던 날들이었다. 요가 자격증으로 새벽반 강사

를 뛰며 난생 처음 내손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뿐만 아니라 전주

시민회도 잘돼가는 시절이었으니 말 그대로 자유롭고 신바람 나

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런 행복도 잠깐이었다. 1994년 6월, 전주시민회 단

합대회를 준비하던 나는 미행하는 눈길과 발길이 부쩍 잦아졌다

는 것을 느꼈다. 오랜 수배와 감옥생활로 민감해진 동물적인 육감

때문이었다. 바로 문규현 신부가 있는 김제의 한 성당으로 몸을

피했다.

바로 다음날 MBC 저녁 7시 뉴스를 보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학원계, 노동계, 농민계 침투간첩 이광철 수사기관 추적

중 잠적!”

나는 문도 모른 채 간첩으로 둔갑돼 있었다. 다시 도피생활

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87년에 함께 독재타도를 외치던 사람이

대통령을 하는 시대 아닌가. 함께 투쟁하던 동지들이 여당 국회의

원도 된 세상인데, 내가 간첩으로 몰리다니…”나는 스스로의 순

진함과 오판에 치를 떨었다. 무엇보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딸에

게 해 줄 말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해야 했다.

제1부· 나의이력서 83

Page 84: 이광철자서전 '함께'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할복이라도 해서 간첩이 아니라는 것

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다. 나는 이 절망

적인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세 여자’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슴이 아팠다.

재판은 매주 두 차례씩 느리고 신중하게 진행됐다. 재판 때마

다 재판정은 전주의 어르신들과 동지들로 꽉꽉 들어찼다. 당시 사

건을 담당했던 변호사가 바로 친구이자 제17대 국회 시절 동료

국회의원이었던 임종인이었다. 그와 나는 80년대에 같이 학습을

하기도 했던 운동권 동지 사이 다.

구속시한 마지막 날 내려진 1심 판결은 나를 또 다시 좌절시

켰다. “징역 3.6년에 자격정지 3.6년!”나는 구치소의 내 방에서

땅을 쳤다. 사법부는 객관적이고 정의로운 판단을 할 것이라는 기

대가 물거품이 됐다.

항소를 포기하려했다. 그러나 끝까지 나 자신에게 주어진 마

지막 사명감(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으로 항소를

했다. 형량이나 줄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항소심에서 뜻밖에 무

죄가 선고됐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와~’하는 함성에

무죄판결이 내려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정도 다. 3년 가

까운 투쟁에서 마침내 나는 승리를 거뒀다. 당황한 검찰은 대법원

에 상고했지만, 대법원에서도 나는 승리했다.

그러나 3년 전 처음 사건 발표 당시 한 달 넘게 연일 간첩사건

을 대서특필하던 언론도, 나와 가족들을 극심한 고통으로 몰아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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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85: 이광철자서전 '함께'

었던 국가도 모두 무죄판결에는 침묵했다. 나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한 마음에 무죄석방의 기쁨을 마냥 누릴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국가를 상대로 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변호사도

처음에는 승소한 전례가 없고, 무엇보다 조작됐다는 것을 증명하

기 어렵기 때문에 승소 가능성이 없다며 말렸다. 그러나 나는 결

국 국가배상 판결을 받아냈고, 나에게 500만원, 아내 소성섭과 딸

이산하에게 각각 200만원과 100만원, 이렇게 총 800만원의 국가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이었다. 한사람의 무고한 시민이 억울

한 누명을 쓰고 간첩으로 몰리고, 간첩의 아내와 딸이 되어 무려 7

년이라는 세월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낸 것에 대한 위자료인 셈이

었다. 그나마 검찰이‘배상금 지급중단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여

다시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투쟁 끝에 받을 수 있었다. 1994년 6월

부터 만 7년 동안 나는 간첩 아닌 간첩이었다.

인도여행, ‘틀림’이아닌‘다름’

간첩 누명을 벗은 나는 그간 쌓인 혼의 피로를 풀고 훨훨 하

늘을 나는 한 마리 새가 되고 싶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가

족에게 늘 짐이 되었던 내 혼에게 잠시 휴식을 주고 싶었다.

1998년 4월, 그렇게 나는 섭씨 40도가 넘는 열사의 땅 인도로 떠

났다.

인도 배낭여행은 요가 수행을 할 때부터 마음에 두었던 나라

이기도 하고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나라 다. 요가를 처음 시

제1부· 나의이력서 85

Page 86: 이광철자서전 '함께'

함께86

햇빛보다 더 눈부신 안나푸르나봉

Page 87: 이광철자서전 '함께'

작했을 때는 마음과 몸을 치유하기 위해서 지만, 나중에는 요가

가 생계수단이 되어주었다. 요가를 시작한 후 나는 자격증을 따

서‘온살이 요가원’에서 새벽반 강사로 활동을 했다. 그 때 처음

아주 적은 돈이지만, 생활비 일부를 부담하게 됐을 때 얼마나 뿌

듯했는지 모른다. 하루 두 번씩 요가 강의를 해서 생계문제를 해

결하면서도 시민운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좋았다. 그렇

게 시작한 요가가 너무 좋아서, 인도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나

다.

인도 여행 중에 만난 어느 마을은 어제 일인 듯 자주 떠오르는

데, 요가의 훈련지이자 쉼터인‘아쉬람’을 찾다가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들르게 된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 모두 화롯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돌아가며 대마초를 나눠 피고 있었다. 회갑을 갓 넘긴

독일인 여자와 마을 촌장으로 보이는 남자 앞에서 마을 사람들은

제1부· 나의이력서 87

인도의 한 시골마을 촌장집에서. 화톳불에 둘러 앉아 하루일과의 여독을 풀면서 담소하곤 했다.

Page 88: 이광철자서전 '함께'

하루의 피로를 고백하듯 풀어헤친다. 촌장은 사람들과 대화하면

서 그들의 말에 담긴 고단한 일상과 피로를 읽고 치유한다. 촌장

이 이들의 피로를 치유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는 것은 대마초다.

그들에게 대마초는 환각용 마약이 아니었다. 마을공동체를 유지

하는 수단이었고, 하루의 피로를 푸는 피로회복제 다.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 국가인 인도에서 보낸 6주는 내게‘다

양성’과‘나눔’이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이 나라에서는 대마초가

마약으로 취급받지 않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이‘틀

림’이 아닌‘다름’으로 존재한다. 너와 나의 다름, 힌두교와 기독

교의 다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다름-그것은 한낱‘차이’에 불과

했다. 이들에게‘다름’은 서로의 가치관과 철학을 인정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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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성지 바라나시의 강가에서

Page 89: 이광철자서전 '함께'

었고, 그런‘차이’는 단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 공존하며, 닭과 소와 인간

이 함께 어울려 지낸다. 다름과 차이에 대한 인정, 하찮은 빵 한 조

각이라도 무엇이든 ¼은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고 함께 나눠야 할

몫이라는‘나눔’과‘베품’의 문화 속에서 우리의 획일적인 문화

와 단일민족론의 배타성이 문득 잔인하게 다가온다.

여행을 하다 보니 독재와 분단에 시름하던 조국을 민주화와

통일의 품으로 보내려 사십 평생을 바쳤던 한 사내에게‘간첩’이

라는 불명예를 덧씌운 조국에 대한 서운함이 어느 덧 가시는 것

같았다. 내 마음에서 용서라는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고 조국에 대

한 사랑이 다시 솟아올랐다.

거버넌스의모범전주천자연하천조성사업

인도에서 돌아온 나는 전주시민회에 복귀해 시민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나는 전문성을 중심으로 세분화되면서도 통합된 시민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전주시민회, 전주시민센터, 새전북포럼,

참여자치시민연대(준), 경실련을 통합하자고 주장했다. 그 결과

일부 단체들 통합하는데 의견을 모아‘시민행동21’을 출범시켰

다. 나는 98년 말부터 2001년까지 오용규, 김윤덕과 함께 이 단체

의 공동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제1부· 나의이력서 89

Page 90: 이광철자서전 '함께'

시민행동21은 때마침 지방자치제도가 부활되어 자치에 대한

관심이 많아짐에 따라 이와 관련한 활동을 강화했다. 지방자치,

환경, 복지 등 4개 분과를 구성해 각 분과별로 전문성을 살리는 일

에 주력했다.

시민행동 21의 최대 성공 작품은 아무래도‘전주천 자연하천

조성사업’이 아닌가 싶다. 2000년 당시 김완주 전주시장이 야심

에 찬 전주천 정화 사업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러나 김 시장이

남원시장으로 있을 때 벌 던 요천 정비사업의 재판이나 다름없

었다. 천 양안을 콘크리트로 바르고 대형 보를 막고 분수대를 설

치하는 등 인공 구조물화하자는 것이었다.

시민행동 21은 이 같은 전주천 사업에 즉각 반대하고 자연과

생태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계획 수정을 강력히 주장했다. 시

민행동 21에 참여한 대학교수 등 전문가들이 과학적이고 체계적

인 근거를 대며 끈질기게 주장했다. 마침내 김 시장이 우리의 주

장을 받아들여 시민사회와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전주시 자연형 하천 조성을 위한 민관 공동위원회’가 탄생했고

권위주의적인 관료사회에서 김 시장의 전면적 수용은 극히 드문

일이었고 신선했다.

민관공동위는 시민사회가 이름만 걸어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기구가 아니었다. 사업비 집행은 전주시가 했지만 사업 계획 단계

에서부터 설계, 시공, 감리, 평가 등 모든 것을 공개하고 협의했다.

당시는 IMF 구제 금융 사태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문이

함께90

Page 91: 이광철자서전 '함께'

구조조정의 한파를 겪던 시절이었다. 이런 대규모 하천 사업에 대

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 언론으로부터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멀쩡하게 있는 전주천을 파헤치고 새로운 사업을 하느냐는 비판

을 받았다.

그러나 막상 사업이 완료되자 평가는 달라졌다. 사업 완료 1년

여만에 전주천에 쉬리가 돌아오고 백로가 찾아와 놀기 시작했다.

수년 뒤에는 수달이 살기 시작하는 등 어려울 것 같았던 생태계 복

원이 현실화됐다. 이에 따라 환경부로부터 자연형 하천 조성의 모

범사업으로 70억원의 추가 사업비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2년 뒤

에는 일본에서 열린 세계 강의 날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전주천

사업은 삼천으로 이어져 전주의 쾌적한 도시 환경 조성에 상당한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물론 몇 가지 한계는 있었지만 시민사회

의 큰 성과 고 시민운동했던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특히 전주시 자연하천 조성을 위한 민관 공동위는 민간부문과

행정부문의 협치, 즉 거버넌스의 전형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민간부문이 행정과 대등한 관계, 아니 이를 넘어 사업의 방향과

내용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의 시민사회가 그 때

보다 성숙되고 전문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거버넌스가 이

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결국 지도자

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거버넌스의 질이 좌우되는

것이다.

제1부· 나의이력서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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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93: 이광철자서전 '함께'

제1부· 나의이력서 93

제2부

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Page 94: 이광철자서전 '함께'
Page 95: 이광철자서전 '함께'

1. 기득권의장벽을넘어서

‘지방자치개혁연대’창립과좌절

90년대부터 시민사회운동진 에서 정치는 늘 논란을 불러일

으키는 화두 다. 정치가 변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변화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건강하고 깨끗하고 성실한 인사

가 정치권에 들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나 시민사회에서

는 부패한 정치권에 대한 혐오가 심했다. 격동의 시기를 거쳐 민

주화를 이루어냈지만 지역차별의 반작용에 따라 정당지지 정서가

지역감정으로 고착돼 갖은 폐해를 양산하고 있었고‘호남은 민주

당, 남은 한나라당’으로 상징되는 정당 패권주의는 한국 정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95

Page 96: 이광철자서전 '함께'

나는 결국 정치개혁운동으로의 전환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때

까지만 해도 나 자신이 직접 선출공직에 도전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80년대 후반부터 정치권으로부터 몇 차례 입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이해찬, 김근태, 임채정, 장 달 등

‘민통련(고 문익환 목사님이 이끄시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시절의 선배들이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평민당)에 입당하면

서부터 선거 때만 되면 나에 대한 정치권 입문 권유는 반복됐다.

그러나 나는 그 때마다 시민사회 운동에 남겠다고 거절했다.

때문에 2002 지방선거에서도 나는 새로운 정치풍토를 일궈내고

참신한 젊은 인재가 지방자치에 진출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나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참신하고 역량 있는 후배들을 지방의회에

진입시켜 지방의회의 분위기를 바꿔보는 일부터 해보자고 생각

했다.

그래서 2002년‘전북지방자치개혁연대’를 결성했다. 당시 민

주당에 대항할 후보자들을 결집해 지지, 지원하는 활동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대중은 이상과 논리보다

더 큰 감동, 더 큰 세력을 원한다는 것을 처음 경험했다. 32명의

후보를 내었다가 8명을 당선시키는데 그쳤다. 게다가 당선된 이

들마저 독자적인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

성되지 못했고 거의 대부분 지역 패권을 쥐고 있는 민주당의 향

권으로 들어가버렸다. 결론적으로 민주화운동 세력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가 좌절되고 만 셈이었다.

함께96

Page 97: 이광철자서전 '함께'

시민사회에서정치로 - 노무현일병구하기

지방선거의 좌절에 계속 빠져있을 수는 없었다. 2002년의 정

치상황이 숨 가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 해 12월 치러진 대통

령 선거는 시민사회가 정치권 진입을 마냥 거부할 수만은 없는 상

황이었다. 2002년 경선에서 당선돼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노

무현에 대한 흔들기가 당 내외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당내 일부에

서는 후보 사퇴론까지 나오는 실정이었다.

시민사회운동 진 에서는 이렇게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공

감대가 형성됐다. 그래서 서울 YMCA에서 전국 활동가들이 모여

논의에 들어갔다. 나도 그 회의에 참석해 민주당의 노무현 흔들기

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날 회의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97

민주당의 지방정치의 독점을 깨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시키자고 출발한 전북지방자치개혁연대출범식. 2002년 지방선거 당시 전북지역에서 시민사회의 이름으로 32명의 후보를 내었다가 8명당선에 그치는 좌절을 겪었다. 그때의 좌절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현실정치 역에 참여하게 되었다.

Page 98: 이광철자서전 '함께'

에서는 민주당만으로는 대선을 치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노

무현 후보의 확실한 지지세력 만들기가 절실함을 공감했다.

이날 회의를 계기로 8월부터 정당 결성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

11월 개혁국민정당(개혁당)을 창당했다. 유시민, 명계남, 문성근,

김태년, 김형주, 유기홍, 문태룡 등이 함께 했다. 나도 전라북도 개

혁국민정당 추진위원회 실행위원장과 중앙당 집행위원으로 활동

했다. 개혁당은 2002년 대선 만이 아니라 정당 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는 대안정당을 표방했다. 당원이 주인되는 정당, 당원이 당

원다운 정당을 당헌당규로 정했고, 실제로 그렇게 운용했다.

개혁당 출범이후 2개월여 만에 치러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

령이 당선됐다. 개혁당은 노 대통령의 당선에 총력을 기울 다.

함께98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을 앞두고 개혁국민정당과 시민사회인사들 및 각계 전문가들이 함께 만든범개혁신당 추진운동본부의 대국민설명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Page 99: 이광철자서전 '함께'

개혁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속한 민주당 외부의 든든한 지지 세력

이었다. 개혁당의 이런 역할이 민주당 내부의 노무현 후보 흔들기

에 대해 어느 정도 버팀목 구실을 했다고 본다.

개혁당은 이듬해인 2003년 4월 고양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에서 유시민이 당선돼 국회의원은 김원웅과 함께 두 명에 불과했

지만 원내 정당으로 발돋움했다. 유시민이라는 정치인의 역량도

있었지만 당원 민주주의를 철저히 실천해 정치혁명과 국민통합을

주장한 개혁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반 된 결과 다.

거대한기득권의장벽

정치는 역시 생물이다. 정치 상황은 개혁당의 독자적인 존립

을 허용하지 않았다. 개혁당이 지지했던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

정부의 국정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허약한 지지기반이 문제 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다수당으로서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데다가 이를 적극 방어해야 할 민주당(새

천년민주당)마저도 소극적이었다. 개혁의 속도를 내야 할 집권

초기가 이런 상황이니 참여정부 앞날을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참여정부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세

력을 결집하자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에서 탈

당한 인사들과 개혁당 및 시민사회 등 개혁세력이 참여했다.

2003년 5월 신당 추진 모임 결성, 9월 국민참여 통합신당 준비위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99

Page 100: 이광철자서전 '함께'

원회 결성과 원내교섭단체 등록, 10월 열린우리당 창당 준비위원

회 결성, 11월 창당 등의 과정을 거쳐서 열린우리당(우리당)이 탄

생했다.

열린 우리당 창당까지는 말할 수 없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민

주당 탈당파의 기득권 고집이 주된 이유 다. 개인적으로도 열린

우리당 전북도당 창당준비 과정에서도 엄청난 견제를 받았다. 민

주당 탈당파와 신당추진위가 공동 위원장을 맡기로 창당 준비위

에서 결정한 일을 이들은 3일 만에 나의 공동위원장 직함을 빼앗

아 버렸다. 의원총회를 열어 공동위원장이 아닌 단독위원장으로

하기로 바꿔버리고 현역 국회의원으로 임명해버렸다. 도당위원장

뿐만 아니라 70명의 당직자를 일방적으로 임명해버렸다. 다음해

있을 총선 공천과정에서 현역 의원들인 자신들의 입지에 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재야에서 제도권 정당에 진입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열린 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기득권의 벽을 넘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열린 우리’는 아니

었다.

이런 가운데 우리당의 첫 중앙위원회가 2004년 1월 구성됐

다. 이를 위해서는 각 시도별로 당원투표를 통해 중앙위원을 선출

해야 했다. 중앙위원은 당내에서 상당한 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위여서 현역 국회의원 등 비중있는 정치인들이 선거에 나섰다.

2003년 치러진 전북도당 중앙위원 선거에는 나를 포함한 상

함께100

Page 101: 이광철자서전 '함께'

당수가 나섰다. 그 결과 이변이 일어났다. 정세균, 이광철, 박 자,

최규성, 장세환 등의 순이었다. 내가 2위를 차지한 것이었다. 시

민사회 출신으로 당내 기반이 거의 없는 나의 득표결과는 커다란

이변이었다. 진성 당원제로 동원이 어느 정도 제한됐다는 것이 나

의 2위 득표에 상당한 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원들이 개

혁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고, 나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

극적인경선승리와국회의원당선

열린 우리당이 창당과 주요 당직 인사 등 절차가 마무리되고

당은 2004년이 되면서 본격적인 제17대 국회의원 총선 체제로 들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01

열린우리당 창당 직후인 2004년 1월말 전북지역 중앙위원으로 당선. 1위 정세균, 2위 이광철,3위박 자순으로 3명이 당선되었다.

Page 102: 이광철자서전 '함께'

어갔다. 우리당은 국회의원 후보자를 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

참여 경선으로 뽑기로 했다.

전주에서는 이전까지‘완산’이었던 선거구가‘완산 갑’과

‘완산 을’로 분구되었고 나는 전주‘완산 을’선거구에 출사표를

던졌다. 우리 선거구의 경선은 3월 13일로 예정돼 있었는데, 국회

의원선거에 처음 도전하는 정치 초년생인 나로서는 경선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턱이 없었다. 더욱이 경선이 당원뿐

만 아니라 여론조사와 당원과 일반 시민이 선거인단으로 참여하

는 형식이어서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혼신을 다해 바닥에서 뛰는 수밖에 없었다. 손성모, 정훈 등

후배들과 전북발전시민포럼을 중심으로 선거조직을 꾸리고 선거

사무소를 열었다. 후진적인 한국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참신

한 후보 이광철을 선택해달라고 선거운동을 벌 다. 10명이 넘는

후보자들이 나서 선거전은 치열했다. 기성 정치인들에 비하면 자

금과 조직력에서 딸릴 수밖에 없는 나로서는‘이광철’을 알리고

‘개혁의 적임자’임을 알리는데 집중했다. 승리를 위해서는 뛰고

또 뛰는 수밖에 없었다.

여론조사를 통해 1차 컷오프 통과자가 추려졌다. 나를 포함해

장세환, 박 자, 김윤덕 등이었다. 이제 네 명이 경선을 치러야 했

다. 2004년 3월 13일 전주 화산체육관에서 완산 을 선거구의 열

린우리당 국회의원 후보를 최종 결정하는 경선이 치러졌다. 당원

과 시민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이 잇따라 경선장에 들어오면서 열

함께102

Page 103: 이광철자서전 '함께'

기는 고조됐다. 각 후보 진 마다 지지자들과 운동원들의 막판 지

지활동이 치열했다. 경선장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경선 절차가 시작되었고 후보 연설이 있었다. 나는 혼신을 다

해 연설했다. “이 나라의 정치 개혁과 참여정부의 성공을 위해 나

이광철에게 표를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경선 결과는 나의 승리 다. 전체 선거인단 801명 가운데 617

명(투표율 77%)이 참가한 투표에서 334표를 얻어 283표를 얻은 2

위 후보자보다 51표를 더 얻었다.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승리 다. 당시 도내 정가와 언론

에서는 내가 아닌 특정 상대 후보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측하고 있

었다.

나를 선택한 정의로운 전주시민이 참으로 고맙고, 감동스러웠

다.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를 후보로 뽑아준 시민의 뜻을

절대 배반하지 않겠다는 것을. 정치 개혁과 지역 발전을 위해 내

가 할 수 있는 일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을.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03

Page 104: 이광철자서전 '함께'

2. 제17대국회, 발로뛴 4년

토종국회의원

나는 정치개혁과 관련한 활동 못지않게 국가정책과 지역발전

을 위한 활동도 자못 열심히 했다고 자부한다. 평가란 자고로 남

이 해 줘야지 자기 스스로 해봐야 자기 자랑 밖에 안 돼 남사스럽

다. 그렇다고 명색이 국회의원 했다는 사람이 의정활동 얘기를 빼

고 갈 수 없지 않은가. 객관적인 기록과 사건을 토대로 돌아본다.

평생을 전북에 살면서 국회의원이 된 사람은 사실 극히 드물

다. 출신은 전북이지만 서울에서 살고 활동하다가 선거 때 얼굴을

내 고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는 전북에서 태어났

고 고등교육까지 모두 전북에서 받았다. 내 삶은 과거나 지금이나

전북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이 이 대통령을 일컬어서“뼛속까지 친미, 친일”이라고 했다

함께104

Page 105: 이광철자서전 '함께'

는데, 그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나는‘뼛속까지 전북사람’일 수밖

에 없다.

그래서 2004년에 내가 당선된 이후‘토종 국회의원’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토종 국회의원인만큼 정치 활동도 의정 활동

도 역대 다른 국회의원들, 특히 서울에서 활동한 국회의원 보다

더 모범이 돼야 한다고 다짐했다. 의정활동이 미흡해서“역시 서

울 물 먹은 사람에게는 안 돼”, “명문대 출신이 아니어서 한계가

있나 봐”같은 말을 듣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지역 출신이 국

회의원 활동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거듭 다

짐했다.

사실 나는 의정활동에 대해 내심 자신이 있기도 했다. 오랜 민

주화운동을 통해 익힌 역사의식과 시민운동의 과정에서 체득한

정책현안들에 대한 기본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지역에서 살

았기 때문에 현장의 문제점과 지역발전의 방향에 대해서도 나름

대로 생각이 있었다. 특히 전북의 저발전 상태를 탈피하기 위해

국회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겠다

고 결심했다. 이와 함께 비록 지역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민주화운

동의 과정에서 형성한 전국적인 인적 네트워크도 있었다.

국회의원으로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나는 권위주의와 부정부

패의 늪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했다. 항상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

울이고 성실하게만 하면 국회 활동은 성공적으로 할 수 있다고 자

신했다. 의정활동은 정치적으로는 개혁, 정책적으로는 소외계층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05

Page 106: 이광철자서전 '함께'

보호와 지역발전을 양 날개로 삼았다.

국감스타, 이광철

국정감사는 국회의원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중요한 무대

다. 행정부를 상대로 잘못을 지적하고 대안도 낼 수 있기 때문이

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고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이다. 또 본회의와 상임위도 마찬가지다. 본회의와 상임위 발

언 내용 모두 국가 정책에 대한 예리한 지적으로 평가받았다. 본

회의 발언기회를 양보하지 않았고 상임위를 주무대로 삼았다. 뿐

만 아니라 정책 세미나와 간담회, 방송 출연 등을 통해 정책을 설

명하고 설득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에 따라 매년 국감 베스트 의원, 의정활동 우수의원 등으로

선정됐다. 나는 국회의원 임기 첫해부터 국감 스타로 주목받았다.

언론으로부터 연일 국감과 의정 활동상황이 소개됐다. 10월 6일

에는 서울신문이‘오늘의 국감 베스트 의원’, 14일에는 한국일보

가‘국감 인물’로 각각 선정했다. 문화일보와 사회과학 데이터 센

터가 평가한 문화관광위원회 국정감사 베스트 5에 선정했다. 서

울신문의 경우‘지역언론활성화 방안’을 비롯‘예술인 복지제도

도입방안’, ‘독립문화공공지원 방안’등 5가지의 자료집을 한꺼

번에 내놓은 것을 높이 평가했다. 신문은 나의 국감 활동은 양 뿐

만 아니라 질에서도 돋보 다고 평가했다. “예술가들의 열악한

창작활동 여건을 지적하고 고사상태의 기초예술 회생을 위한 특

함께106

Page 107: 이광철자서전 '함께'

별 프로젝트 추진과 재정 확충, 예술인 사회복지 제도를 도입하자

고 주장해‘기초예술의 중요성’을 환기했다.”고 밝혔다. 이 신문

은 또 내가 인천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기까지 한국 상징물이 하

나도 없는 관광정책의 허점, 지역문화의 특화발전 방안 등을 거론

하면서 문화예술계의 사각지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 다고

썼다.

2005년에는 국정감사 NGO 모니터단이 국정감사 우수의원으

로, 한국장애인 인권포럼과 장애인 정책 모니터링 센터가 국감 상

임위별 우수의원 베스트 5에 선정했다. 주간 한국이 국감 상임위

별 선정 우수의원, 국회의장 선정 우수의원으로도 각각 뽑았다.

2006년에도 국정감사 NGO 모니터단이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07

2005₩2006년 국정감사 NGO모니터단이 선정하는 국정감사우수의원에 연속 선정되었다.

Page 108: 이광철자서전 '함께'

국회의장이 우수의원으로 각각 선정했다. 잇따른 우수 의원 선정

은 솔직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한국일보가 2004년 10월 14일‘국감인물’나를 조명한 상자

기사를 소개한다.

열린우리당 이광철 의원(전주 완산 을)은 문화관광위원회

에서‘저승사자’로 통한다.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은“저음이지만 빈틈없는 논리로 질

의하는 모습을 보자면 등골이 오싹해지곤 한다”며“대부분의

피감기관이 자신에 찬 이 의원에게 꼼짝 못했다”고 치켜세울

정도다. 이 같은 자신감은 철두철미한 준비가 바탕이 됐다. 이

의원 보좌진은 거의 매일 현장으로‘쫓겨난다’. 한 비서관은

전국 청소년 단체의 현황 파악을 위해 한 달 가까이 전국 방방

곡곡을 돌고 있으며 체력측정시설의 문제점을 찾기 위해 직접

실험대상을 자처한 보좌관도 있다. 이런 노력을 밑거름 삼아

이 의원이 매일 쏟아내는 정책대안은 양과 질 모두 알차다는

평이다.

13일 한국방송광고공사 감사에서 이 의원은 공익광고에

서 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며 직접 만든 공익광고 시안

3가지를 제시했다. 문화재청 국감에서는 고려 왕릉에 대한 관

리 부실을 지적하며 직접 찍은 고려왕릉 훼손 현장사진 등이

함께108

Page 109: 이광철자서전 '함께'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09

포함된‘고려왕릉 보존관리실태 조사보고서’를 제출, 관계자

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의원은 특히 지역언론과 기초예술에 대한 지원 방안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국감 첫날‘예술인 공제회’설립

등을 포함한‘예술인 복지제도 도입’과 고사 상태에 빠진 지

역언론과 문화를 살리기 위한‘지역언론발전지원법’도입 등

을 담은 정책 자료집 5권을 내놓았다.

이 의원은“문화발전의 밑바탕이라 할 수 있는 기초예술

과 지역문화가 정책과 예산에서 소외당하고 있다”며“국감 이

후도 꾸준히 문제제기 해 꼭 지원방안을 입법화 하겠다”고 말

했다.

문화도시전주

나는 국회 문화 관광위에서 문화도시 전주를 부각시키기 위해

골몰했다. 전주가 전통문화의 본고장이요, 화제도 열리는 문화

도시라는 것을 우리끼리만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남들이 알아주

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특히 국가정책을 담당하고 향

을 미치는 사람들이 전주의 문화적 가치를 인식하고 공유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상임위 활동은 물론 사적 관계를 통해 전주의 문화적

가치를 새기도록 하는데 주력했다. 상임위에서는 발언을 통해 전

주가 경주와 광주 등 문화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다른 도시 못지않

Page 110: 이광철자서전 '함께'

다고 주장했다.

나의 논리는 거점별 문화도시론이었다. 경주는 역사문화도시

로, 광주는 아시아 문화도시로, 전주는 전통문화도시로 각각 육성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주와 광주는 눈에 보이는 것이 있으니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그러나 전주는 문화도시로서 보이는 게 없

어 이해시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판소리는 시각이 아닌

청각 예술이고, 한옥 마을 조성은 초기 상태 고, 한지는 아직 보

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주장했다. 일제 강점기와 산

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전통문화가 사라졌다. 전통문화의 분

위기가 남아있는 전주를 중점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주

함께110

전주시민의날에 경기전 앞뜰에서 전주의 상징 비빔밥을 비비기 전“자, 준비하세요”

Page 111: 이광철자서전 '함께'

장을 통해 전통문화진흥법 같은 한옥마을을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상임위에서 경주의 국회의원과 치열하게 다퉜다. 현안

마다 경주와 맞붙은 경우가 많았다. 전주한옥마을 지원에 대해서

는 경주는 양동 마을을 내세웠다. 무주 태권도 공원에 대해서도

경주와 대립했다. 경주 출신 정종복 한나라당 의원과 앙숙처럼

돼버렸다.

정의원과 경주에서는 내 발언을 과장해석해 문제 삼고 나서기

도 했다. 이들은 2004년 11월 23일 국회 문광위에서 경주는 태권

도와 관계없고, 실패한 역사문화도시라며 경주를 폄훼했다고 주

장했다.

그러나 이는 내 발언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었다. 속기록을 확

인한 결과“태권도 공원 조성 예산이 새해 예산안에 미반 혹은

삭감돼 필요한 문화기반 조성사업들이 대단히 어렵게 됐다”며 조

속한 정부의 대안 마련을 촉구했을 뿐이었다. 경주와 태권도 공원

유치를 연관시켜 언급한 부분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경주 폄훼’발언도“수조원의 돈을 쏟아 부었는데도 역

사문화도시로 자리잡지 못한 경주를 새로운 21세기형 역사문화

도시로 자리잡기 위한 리모델링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드

러났다.

이는 전주 역시 한국의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곳으로 전통문화

도시 육성을 위한 예산 반 을 주장하면서 경주를 폄훼한 것으로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11

Page 112: 이광철자서전 '함께'

오해를 산 것이었다. 전주와 경주의 치열한 신경전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나는 전주지역사업의 지원을 주장하면서 낙후지수를 적극 활

용했다. 참여정부가 지역균형 발전 정책을 지역개발의 핵심정책

으로 하면서 지원과 육성의 정도를 판단하기 위한 자료로 낙후지

수를 개발했다. 상대적으로 지수가 낮은 곳은 더 많이 지원하고

높은 곳은 더 적게 지원하는 게 균형발전에 맞기 때문이었다.

나는 관계 부처 장관 등 고위 관계자들을 물고 늘어졌다. 결코

경주에 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 김완주 전주시장과 김세웅

무주군수 등과도 긴 히 협력했다. 관련 자료를 용도에 맞게 만들

어 공유하고 역할도 분담했다.

이에 따라 문화관광분야에서 전주에 배정된 국가예산이 경주

보다 적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기도 했다. 태권도 공원도 무주로

유치하는데 역할도 했다.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협력하면 못할 일

이 없었다.

유홍준문화재청장과전북투어, 문광위원전주 화제참석정례화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함께 2박 3일 동안 전북 투어를 한 것도

큰 의미가 있었다. 전북을 예향으로 인식시키기 위한 방안이 무엇

이 있을까 고민하다 유 청장을 전북에 초청키로 했다. 국회 문광

위원으로 문화재청과 관련될 사안이 많아 유 청장과 협력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전북을 돌아다니며 전북의 문화에 취

함께112

Page 113: 이광철자서전 '함께'

해보자는 취지 다. 유 청장은‘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리언

셀러를 기록한 미술사학자로 유명하다. 우리 문화유산을 대중화

하고 답사열풍을 불게 한 장본인이었다.

나는 유 청장과 함께 남원을 시작으로 전북 도내 일원을 돌았

다. 남원 실상사를 돌아보고 전주한옥마을에서 자면서 경기전과

한옥마을 등 전주의 전통 문화를 얘기했다. 한지와 판소리, 한복,

한식 등에 대해서도 많은 공감대를 이뤘다. 전주가 무형문화의 보

고라는 데에 인식을 같이했다.

유 청장은 고민하고 있던 유네스코의 아시아₩태평양 무형문

화센터 입지로 전주를 생각하게 됐다. 당시 전주가 아닌 다른 곳

을 고려하고 있던 터 다. 전북 투어를 통해 전주를 중요한 입지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13

전주를 방문한 유홍준 문화재청장, 송하진 전주시장 등과 함께 경기전에서 하마비(下馬碑)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Page 114: 이광철자서전 '함께'

로 포함하게 된 것이다. 유 청장의 전북 투어는 전주가 아₩태 무형

문화센터 입지로 지정되는데 큰 역할을 한 셈이 됐다. 그 이후 나

와 유 청장은 아₩태무형문화센터에 대해 많은 교감을 갖게 됐음은

물론이다. 이것이 전주시와 나의 유치활동에 상당한 도움이 됐었

다. 지금 전주시 서학동 옛 전북도 임업시험장 부지에 건립중인

아·태 무형문화센터를 보면 감회가 새롭다.

전주 국제 화제에 국회 문광위원들을 참석하게 하고 한옥 등

전주 전통문화를 새롭게 인식시킨 일도 의미 있었다. 국민들은

2000년대 중반 전주 화제가 부산 화제의 아류쯤으로 알고 있

었다. 전주 화제가 추구하고 있는 디지털 화, 독립 화에 대

한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규모나 참관 인

원, 예산 등으로 화제 수준을 예단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20명 가까이 되는 문광

위원 전체를 전주 국제 화제개막식에 참석토록 해 한옥 마을, 판

소리 등 전주 문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일일이 위원들과

협의해 문광위 공식 일정으로 화제 개막식 참석과 한옥마을 관

광 일정을 잡는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국회의원들 10여명이 화

제 개막식에 참석했고 한옥마을을 둘러봤다. 화제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어려운 국회의원 일정을 집단으로 잡을 수 있

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문광위의 화제 참석은 그 이후 한

동안 정례화 되다시피 계속됐다.

이런 일을 통해 전주 화제에 대해 비주류 화제의 세계 화

함께114

Page 115: 이광철자서전 '함께'

제로 발전할 가능성을 봤고, 전주 전통문화와 도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음은 물론이다. 전주가 전통문화를 간직한 도시로 이를

특성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국회 문광위가 우리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실천하

도록 하는데 앞장섰다. 문광위원들이 국회 본회의에 한복을 입고

참석하기도 했다. 또 국회의장과 각 당 대표들이 국정감사 첫 날

전주비빔밥 비비기 행사도 하고 식사를 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이 전주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무형의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12개 도시에 분야별로 분산 배치할 계획이었던

브랜드 사업 대상지가 전주 한 곳으로 집중 육성키로 결정됐다.

12개 도시로 분산 배치하면 지원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부작용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15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공식일정으로 전주국제 화제에 참석한 국회의원들. (왼쪽부터 문화관광위원장이미경 의원, 김재윤 의원, 문화관광위원회 간사 우상호 의원)

Page 116: 이광철자서전 '함께'

이 더 크다는 점을 주장한 것이 주효했다. 이를 계기로 전주가 한

스타일 거점도시로 발돋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유홍준전청장이본이광철

내가 문화재청장을 지낸 것은 제17대 국회 4년 중 앞뒤로 6개

월이 빠지는 2004년 9월부터 2008년 2월까지 3년 6개월이었다.

때문에 나는 17대 국회의원들과 임기를 같이 했던 셈이다.

문화재청은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상임위 소속으로 업무보고

와 국정감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광철 의원은 줄곧 문광위에서 활

동했으니 우리들의 만남은 최소한 2개월의 한번은 있었다. 또 이

광철 의원은 예산결산위원으로도 있어서 그 기간엔 일주일간 생

활을 같이 해야 했다.

이런 업무적인 만남으로 나는 이광철 전 의원과 가까워 질 수

밖에 없었다. 사실 행정부처의 장은 국회의원에게 애로사항이 많

다. 행정을 감독하고 감사하는 역할을 국회의원이 갖고 있으니 장

관, 청장은 부탁과 해명할 사항을 항상 갖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

서 국회의원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심지어는 꼼짝 못하고 살살 기

어야 하는 일까지도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행정부의 일을 이해하고 지원하기로 맘먹

으면 행정이 원활하게 돌아갈 뿐만 아니라 막힌 일도 잘 풀린다.

그래서 행정부 입장에서 국회의원은 모진 시어머니일 수도 있고,

이해심 많은 사돈집도 될 수 있다.

함께116

Page 117: 이광철자서전 '함께'

이광철 전 의원은 다른 것은 몰라도 문화재청에 대해서만은

대단한 애정을 갖고 업무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산결산위원으

로 있을 때 문화재청의 예산 증액을 위해 애써 주셨고, 국정감사

때는 야당의 공격에 방패막이가 되어 내가 억울하게 당할 때는 해

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곤 했다. 그 고마움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

고 갖고 있다.

이광철 전 의원은 고향 전주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

다. 문화재청에서 전주에 무형문화재전당을 짓게 된 것도 사실은

이광철 전 의원의 건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청장의 입장에서

이는 전주가 적격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 유치하

려는 이른바 로비가 상당했다. 나는 이광철 전 의원에게 이 문제

의 교통정리를 부탁했고 이내 원만히 해결되어 지금의 무형문화

재전당이 전주로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문화재청장을 지내면서 이광철 전 의원과

임기를 같이했다는 것은 큰 인복이었다. 이광철 전 의원이 국회를

떠나고, 나는 청장을 그만둔 뒤 우리의 만남은 예전 같을 수 없었

다. 그러나 전화로 안부를 물으며 그 때의 우정을 잊지 않고 나누

고 있다.

나는 청장을 떠난 뒤 빨리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

르치고 쓰기에 전념하고 싶어하여 바깥 출입을 잘 하지 않았다.

그러다 요즘은 텔레비전의 예능프로에도 기꺼이 출연하면서 문화

유산을 전도하고 있다. 이제 나는 언제 문화재청장을 지냈던가 싶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17

Page 118: 이광철자서전 '함께'

을 정도로 자유인을 만끽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광철 전 의원과 술자리 한번 같이 하지 못한 것

이 마음에 걸린다. 얼마 전에 한차례 강연이 있어 전주에 내려갔

을 때는 공교롭게도 이광철 전 의원은 서울에 일이 있어 못 만났

다.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만난 셈으로 쳤다. 그리고 이

을 쓰고 있으니 또 만난 것만 같다. 만나지 않아도 만난 것 같은 사

이를 진짜 가까운 사이라고 하지 않던가, 내 마음 속의 이광철 전

의원은 그런 사람이다.

제정주도했던지역문화진흥법이명박정권에서무산

전주 전통문화 도시 만들기는 국회와 지역차원에서 활발히 이

루어졌지만 효과가 지속적으로 나타나지 못했다. 관련 사업이 추

진될 때마다 예산 반 을 주장해야 했고 관련 부처를 설득해야만

했다. 사업에 따라 단발성으로 추진돼 조직적이고 체계화되지 못

했다.

법적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관련법이 있으면 이를 근

거로 쉽게 설득하고 예산을 반 할 수 있는 것이다. 법이 없기 때

문에 애를 먹어야 했다.

그래서 관련법 제정에 나섰다. 이른바 지역문화진흥법(안)이

었다. 나는 자료를 수집하고 전문가들과 논의했다. 국회와 전주에

서 각각 전국 지역문화 전문가와 문화콘텐츠 산업 관계자, 학계

등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지역문화간담회를 갖고 법안 내

함께118

Page 119: 이광철자서전 '함께'

용을 논의하고 여론을 환기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06년 4월 지역문화진흥법(안) 제정을 대

표 발의했다. 당초 전주 전통문화 중심도시 지원을 위한 특별법

을 제정하려고 했지만 다른 지역에서 특혜시비가 제기될 우려가

컸다. 이에 따라 다른 지역도 포괄하는 지역문화진흥법으로 만들

었다.

법안의 주요 내용은 지역문화 진흥을 위한 국가와 자치단체

의 역할과 지역문화 전문인력 양성, 지역문화 진흥기구 설치, 문

화도시₩문화지구 조성, 지역문화진흥 재원 등이었다. 법안에는

문화의 집과 지방 문화원 등 지역문화시설에 지역문화 진흥사업

을 담당할 일정 자격을 취득한‘문화 복지사’를 배치하는 규정도

넣었다.

그러나 법 제정은 지지부진했다. 각 도시마다 지원 특별법을

제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경주나 부여 등 다른 도시들이 경쟁적

으로 특별법을 발의하는 실정이었다. 이들 법제정 추진이 지역문

화진흥법 제정에 발목을 잡은 것이다. 국가 전체로 볼 때나 입법

의 효율성면에서 각 도시의 개별적인 특별법 제정은 합리적이지

않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또 다른 형태의 지역 이기주의

다. 이들 법안 역시 제정되기는 어려웠다. 이런데도 이들 도시들

은 경쟁적으로 법안을 상정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다른 지역의 특별법

이 제정되면 그 만큼 전주가 차별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예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19

Page 120: 이광철자서전 '함께'

방하는 차원에서라도 전주에 대한 특별법 법안을 내놓았다. 전주

전통문화 도시 지원 특별법(안)이었다.

문광위 법안심사 소위에 계류 중인 지역문화진흥법으로 전주

전통문화중심도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적절했지만 그런데도 다

른 지역이 특별법을 발의하고 있는 실정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도민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2007년 4월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 추진을 위한 특별

법을 의원 40명의 서명을 받아 대표 발의했다. 대통령 소속으로

전통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회를 두도록 하고, 문화관광부 산하에

전통문화중심도시기획단을 두도록 했다. 또 무형문화의 전당, 전

통문화중심도시진흥재단을 설립하고, 전통문화중심도시조성 특

별회계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법안의 제정이 더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다른 도

시의 법안을 제쳐두고 전주 법안만을 처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

다. 다른 도시도 사정은 마찬가지 다. 서로 견제하고 발목을 잡

는 격이었다. 결국 이후에 지역문화진흥법으로 포괄하기로 하고

개별 도시의 특별법은 폐기됐다. 지역의 욕심만으로는 안되는 일

이었다.

그러나 지역문화진흥법도 2008년 총선 정국에 휩쓸려 진전되

지 못했다. 더욱이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총선에서 내가

국회에 들어가지 못하니 법 제정을 위한 힘을 모으지 못했다. 지

역 분권 보다는 중앙 집권, 지역 보다는 수도권 중심주의에 젖어

함께120

Page 121: 이광철자서전 '함께'

있는 이명박 정권에서는 지역문화진흥법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2008년 김재윤 의원이 내가 상정했던 법안을 또 다시 제출했

지만 한나라당에서 동조하지 않아 2009년에 폐기되고 말았다. 한

나라당 의원들은 법안 내용이 정파성이 있고 주체가 모호하며, 재

원 마련방안도 불투명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한나라당 정권이 지역은 안중에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다. 지역에 무슨 문화가 있느냐는 시각이다. 설혹 있다손 치더라

도 별도로 지원할 필요가 없고 현재의 시스템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런 정권에서 어떻게 지역의 고유성과 차별성을 찾을 수

있겠는가.

“미디어가살아야지역도, 국가도산다”

나는 국회의원 4년 임기 동안 언론정책에 많은 관심을 가졌

다. 신문과 방송 등 언론의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의 성패를 좌우하

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표현이 자유롭고 다양해야 올바른 여론이

형성되고 여론에 따라 국가가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도 언론이 자유로워야 가능하다. 독재 정

권일수록 언론을 장악하려고 하는 것인 바로 이 때문이다.

국의 사상가 J.S 이‘자유론’에서 갈파한 사상의 자유시

장론은 언론의 자유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좋은 정보, 나쁜 정보

모두 자유롭게 흐르도록 해야 한다. 정보들은 사상의 자유시장에

서 서로 공방을 벌이면서 경쟁한다. 나쁜 정보는 도태되고 좋은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21

Page 122: 이광철자서전 '함께'

정보는 여론화된다. 말하자면 사상과 여론의 정반합이 반복되면

서 사회는 발전하는 것이다.

자유롭고 다양한 언론은 권력이 간섭하고 개입하지 않음으로

써 보장된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언론도 자본에 향을 받기 때문이다. 자본과 권력이 유착

함으로써 중립성이 훼손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오늘날 조중동으

로 대표되는 보수 부자 언론의 폐해가 바로 그것이다. 언론은 권

력화하고 자본과 기득권층의 논리를 중심으로 보도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약자와 소외층을 대변하는 가난한 언론은

갈수록 적어지고 입지도 약해지게 된다. 그래서 자본이 취약한 진

보 언론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여론의 다양성이 확보되

함께122

KBS의 HD 화제 개막식 행사 중 (민병두 의원, 화배우 장미희, 정병두 의원, 정연주 전 KBS사장, 화진흥위원장, 우상호 의원)

Page 123: 이광철자서전 '함께'

지 않고 진보와 보수의 균형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지방언론은 더욱 더 어렵다. 지방의 경제력이 취약하니

자본력의 뒷받침이 미흡해지고, 그러니 지방 언론이 취약해진다.

약해진 지방언론은 지역 주민을 대변하지 못하게 된다. 경 이 어

려워지니 자치단체와 기업 등 광고주의 의존도가 높아진다. 그래

서 지방언론은 난립하지만 제대로 된 언론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는 여론의 다양성을 이루지 못해 민주주의를 해치고 있

고 주민 피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또한 첨단 미디어 기술의 발달로 방송 등 미디어 환경이 급변

해 이에 대한 대응도 해야 했다. 케이블 TV, 인터넷 방송, 스마트

TV 등 방송 미디어의 발달은 언론 환경 자체를 바꿔놓고 있기 때

문이다.

나는 우선 지역 언론 정책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전북도내

의 언론 실정은 그야말로 눈뜨고는 보지 못할 지경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문은 더 말할 것이 없겠다. 기자 임금

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세한 경 여건, 구독자도 많지 않은 주

민의 언론의식, 존경받지 못하는 언론인, 그러면서도 난립한 신문

사, 사주의 이해관계에 향받는 보도, 자치단체에 의존하는 광고

환경 등 열악한 현상을 열거하기로 하면 열 손가락도 모자랄 지경

이다.

이에 따라 지방 신문에 대해서는 지원이 절실했다. 건전한 여

론 형성의 가능성이 있는 신문을 지역신문발전 위원회의 엄격한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23

Page 124: 이광철자서전 '함께'

심사를 거쳐 지원하는 방안이었다. 그것이 바로 지역신문 발전 지

원제도 다. 참여정부 들어 지방언론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이 논

의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국회에서는 내가 주도해 지역신문 발전

지원법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도내에서도 당시 지원신문사에 선정돼 상당한 도움이 된 것으

로 알고 있다. 이 제도는 지금 당시 지원 방향과 내용이 달라지기

는 했지만 유지되고 있다.

지역 방송도 문제 다. 방송은 신문에 비해 경 여건은 낫지

만 서울 본사의 지배력이 너무 컸다. 지역의 고유문화를 제대로

반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제작의 자율성과 특성을 제

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효율적 경 을 이유로 지역방송의 권

역별 통폐합, 방송 통신 융합 등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실정이었

다. 이 과정에서 자본과 방송 통신 융합방식 등이 논의될 뿐 지역

문화와 지역성 구현방안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됐었다. 이렇게

되면 지역방송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지역의 위기상황이 초래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나는 지역방송 발전위원회를 설립해 지역방송 정책

을 독립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방송법 일부 개정안을 국회의원 66

명의 서명을 받아 발의했다. 2006년 5월 발의한 법 일부 개정안은

지역방송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방송위 부위원장이 담당하고, 모두

5인의 위원으로 구성되도록 했다. 위원회를 통해 지역 방송의 자

율성과 지역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서울 본사의 향력

함께124

Page 125: 이광철자서전 '함께'

을 견제토록 했다.

이 법안의 개정을 위해 개최한‘지역방송 발전위원회 설립과

지역방송 활로 모색을 위한 대토론회’에서 나는 지역 방송의 고유

한 역할에 대해 강력히 주장했다. “방송통신 융합 논의에서 지역

문화 구현에 대한 의견은 철저히 실종됐다. 무료 보편적 서비스

실현, 지역문화 창달과 지역성 구현, 지역 콘텐츠 진흥은 뉴미디어

시대에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가치다”고 말했다. 이런 나의 활

동에 대해 지역 방송인들의 큰 지지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방송통신 겸 이 허용되고 부자신문

에 종합 편성 케이블 TV를 허가해 지역방송의 지역성 구현은 위

축되고 있다. 자본력이 있는 언론사일수록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

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는 가난하지만 건전한 언론을 하려고 하는

언론사에게는 더 큰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또 이와 관련해 당시 논란되고 있던 한미 FTA 협상에서

방송시장개방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강력히 주장했다.

미국은 방송통신융합서비스를 서비스 분야가 아닌 전자상거래 대

상으로 분류해 개방을 요구하고 있었다. 방송온라인콘텐츠가 전

자상거래 상품으로 분류돼 국내에 제공될 경우 문화정체성은 물

론, 방송의 공공성도 보장할 수 없게 될 우려가 컸다.

예를 들면 미국에 서버를 둔 업체가 월드와이드웹 형태로 방

송프로그램이나 화를 판매할 경우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국내 문화정체성 유지를 위한 방송쿼터는 물론 방송법의 종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25

Page 126: 이광철자서전 '함께'

합편성 PP나 보도전문 PP에 대한 규제 역시 무력화 될 것으로 예

상됐다.

미국의 상품 개방 뿐만 아니라 문화개방에 대한 폐단이 우려

됐다. 미국 문화가 홍수처럼 몰려와 문화까지 예속될 수 있기 때

문이다. 적어도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방송

시장 개방만큼은 막아야 했다.

지역방송을 위협하는 요인들은 끊임없이 생겨났다. 2007년

하반기 들어 본격화된 복수 미디어 렙 논의도 지역 방송을 고려하

지 않은 채 진행됐다. 미디어 렙은 현행 한국방송광고공사(코바

코)외에 다른 기업들도 지상파 방송광고 대행판매에 나설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코바코가 독점하던 방송광고 대

행이 경쟁체제가 된다. 광고주 입장에서 보면 경쟁체제로 광고료

가 싸지는 긍정적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마구잡이 광고로

오히려 부작용이 클 수 있다. 특히 서울의 큰 방송사는 그런대로

유지할 수 있으나 광고시장이 열악한 지역방송의 광고수입은 오

히려 줄어들 수 있었다.

그래서 복수 미디어 렙 법 개정 논의는 지역방송에 대한 대안

없이는 강행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지역방송사 매출액 가운데 광

고 의존율이 80%이상이 되고, 지역방송프로그램에 대한 코바코

본사와 지사판매 비율이 7:3으로 연계판매가 안되면 지역방송사

의 생존자체가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지상파의 연간 방송광고 미 판매율이 20~40%에 달하는

함께126

Page 127: 이광철자서전 '함께'

상황에서 경쟁체제가 도입되면 민방은 생존할 수 없게 된다. 민방

인 SBS의 경우 광고를 지역민방과 판매연계하거나 지원할 의무가

없어 SBS본사와 자사 PP 광고판매에 우선 주력할 것이기 때문이

다. 지역 민방은 재원감소로 독자적인 제작능력을 상실해 SBS의

중계소 역할로 전락할 것이 뻔했다.

2011년 현재까지도 복수 미디어 렙이 해결되지 않은 채 논란

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복수 미디어 렙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

이지만 처리되지 않은 채 시일을 끌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허가

한 조중동 종편 방송사의 광고를 미디어 렙을 통하지 않고 방송사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방송사 끼리 과도한 경쟁으로 광고 시장이

무너질 우려가 크다. 더욱이 광고성 기사가 넘쳐나게 돼 중립성을

해치고 왜곡된 정보, 광고주에 이익이 되는 정보가 넘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종편이 광고시장의 질서를 흐트러지게하면 가

뜩이나 어려운 지역방송사는 더욱 더 곤경에 빠지게 된다. 이전에

는 자치단체나 지역의 기관들에 대해서는 광고 업을 하지 않았

으나 종편 방송사 개국 이후에는 서울의 방송사들이 이에 진출할

가능성이 커 그 만큼 지역방송사의 광고시장은 나빠지는 것이다.

“이명박정권미디어장악안된다”

2008년 2월 출범한 이명박 정권은 정권 인수위 때부터 미디어

를 손에 넣을 정책을 추진했다. 정권에 협조적인 부자 언론의 경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27

Page 128: 이광철자서전 '함께'

쟁력을 강화해주는 내용들이었다. 말하자면 언론의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이었다. 언론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빚어질 것은 뻔했다.

이의 위험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조중동을 비롯한 부자

언론이 그렇지 않아도 이 나라의 여론을 쥐락펴락하는 실정에서

방송 겸 까지 하게 되면 그 향력은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2월 11일 KBS 1라디오‘KBS 열린 토론’에 나가 베일이

드러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미디어 정책에 대해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 당시 인수위가 발표한 미디어 정책은 KBS2 TV와 MBC 민

화, 신문방송겸 및 신문법 폐지, 방송통신위원회의 대통령 직

속화 정책 등이었다. 하나같이 시장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나온 정

책들이었다. 돈 많은 언론이 더 많은 매체를 가질 수 있고 돈 많은

기업이 언론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이날 토론회에서“이러 정책들이 언론의 독립성, 중립성,

공공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성이 많이 훼손될 수 있는 방송정

책”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정책이 과연 새 정부가 지향하는 공정

경쟁에 맞는지, 규제완화의 시장주의가 언론의 독립성, 공공성을

뛰어넘는 미디어 정책의 핵심가치가 될 수 있는지를 반문했다. 나

는 특히“한나라당이 이 같은 미디어 정책을 강행할 경우, 방송과

언론을 장악해 80년대‘땡전뉴스’의 역사로 회귀하려는 의도로

비춰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나는 바람직한 미디어 정책의 대안을 제시했다. ▲방송통신위

원회의 무소속 독립기구화 ▲KBS2, MBC 민 화, 신문방송겸

함께128

Page 129: 이광철자서전 '함께'

등에 있어 정치적 합의를 뛰어넘는 사회각계의 논의와 합의를 촉

구했다. “이를 위해 정치권, 언론인, 언론단체 및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논의하는 사회적 공론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신문시장의 다양성과 진흥을 위해 제정된 신문법을 폐

지하고 신문방송겸 을 허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권과 재벌의

언론 장악의 위험성이 있음을 경고했다. 지역신문을 포함한 마이

너신문의 공멸과 거대 보수 신문들의 여론 독과점 심화, 언론과

재벌의 유착관계를 가져올 게 분명했다. 그 피해는 국민들께 돌아

갈 것은 뻔했다.

나의 비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4일 뒤인 2월 15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한국방송학회와 한국 방송 특별위원회 창립세

미나로 개최한‘새정부 미디어정책과 지역 지상파 방송’이라는

주제의 토론회에서도 비판의 강도를 높 다. 한마디로 이명박 정

부의 언론정책에는 공익성과 지역성의 가치는 없고 효율성과 시

장성만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언론은 지역의 가치를 뒷받침하는 소통의 창구로, 지역

민의 권익 보호, 지역의 민주적 여론 형성을 위해 지역신문과 지

역방송이 살아야 한다”고 전제했다. 그러나“새 정부의 신방겸 ,

민 화 정책에는 공익성과 지역성의 가치는 없고 메이저 신문 중

심의 효율성과 시장성만 있다”고 말했다. 이어“지역성 구현을 헌

법적 가치로 추구해야 하며, 언론정책에 있어서 지역성을 어떻게

실천해갈 것인지 국민들에게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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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30: 이광철자서전 '함께'

이명박 정부가 2008년 2월 23일 공식 출범한 뒤 본격적인 인

사 청문회가 열렸다. 특히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에서도 이 같은 언론정책의 문제점을 주장했다. 3월 17일

열린 청문회에서 최 후보의 적절치 못한 행적에 대해 지적했다.

87년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 시절에 최 후보자가 당시 문공

부 직원과 두 번 이상 만난 이유와 대화 내용을 캐물었다. 당시 신

문기자로서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보도지침에 대해 싸워야 하

지 보도지침과 관련 있는 문공부 직원과 만난 것은 서로 거래를

했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최 후보자

는“이 직원이 후배라서 사적으로 만났으나 잘못된 일이었다”고

해명했다.

또“94년 한국갤럽에서 일할 때 대선기간에 주한미국 보스워

스 대사를 만나 여론조사 등에 대한 대화를 나눈 것은 국가기

누설행위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최 후보자는 이에 대해서도“일

상적인 대화만 나누었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의 언론 정책은 그 이후 그대로 진행됐다. 조₩중

₩동₩매경에 종합편성 TV채널을 주고, 미디어 렙도 미루고 있다.

정권 창출에 협력한 대가로 온갖 특혜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

언론사와 이명박 정권의 월은 계속되고 있다.

노무현대통령에게전주한지산업화대책제안

“대통령님 이왕 전북에 오시는 길인만큼 하룻밤 묵으셨으면

함께130

Page 131: 이광철자서전 '함께'

합니다. 새만금을 둘러보시고 한옥 마을의 정취를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전주는 전통문화를 오롯이 보존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판

소리와 한지, 한식, 한옥 등 우리 조상이 이어온 문화를 전주만큼

간직하고 가꾸고 있는 곳이 없습니다. 특히 한지 산업은 앞으로

유망한 산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의원님과 전북도민의 뜻 잘 알겠습니다. 전북 방문 일정

을 늘리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한지 산업화를 위

한 대책도 농림부로 하여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2007년 5월 30일. 나는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북과 전주의 현안에 대해 보고하고 말 을 들었다. 대화 시간이

아마 한 시간 가량은 됐을 것이다.

노 대통령의 말 은 이어졌다. “전통문화야말로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와 토양이지만 너무 무관심하고 무시하는 경

향이 있습니다. 전통문화의 기틀 위에서 올바른 문화가 꽃피울 것

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주의 노력을 평가하고 정부도 지원해야 합

니다.”

나는 이날 노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을 곱씹어봤다. 한편으로

는 기쁘기 짝이 없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과 장시간 지역 현안에

대해 대화를 하고 더욱이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어떻게 현실화하고 구체화하느냐는 것이었다.

전북도와 전주시, 농림부와 연계 협력하면 못할 일도 없겠다는 생

각이 들었다.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31

Page 132: 이광철자서전 '함께'

어쨌든 노 대통령과의 면담은 성공적이었다. 긍정과 부정 등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지

키려고 하는 노 대통령 성격에 긍정적인 답변을 이끌어냈기 때문

이다. 적어도 전북 방문 일정이 늘어나게 됐고 특히 전통문화도시

로서 전주와 한지 산업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노 대통령과의 면담은 다음 달인 6월 8일 원광대에서 명예박

사 학위를 받기위해 전북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추진됐다. 당

초 일정은 당일 학위만 받고 곧바로 귀경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도민들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이왕 전북을 찾는 길이니

하룻밤을 전북에서 보내고 이튿날 귀경하는 것으로 일정을 늘리

자는 의견이 제기됐다. 그러면서 전북과 전주의 현안과 진면목을

대통령에게 보이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청와대 비서실에 연락해 약속을 잡았다. 다행히 노 대통

령이 허락했고 국가수반으로서는 예외적으로 긴 시간을 배려했

다. 나로서는 지역 현안을 피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다. 새만

금 사업은 너무 잘 아는 사안이고 플라즈마와 한 스타일 산업에

비중을 두었다. 한 스타일 산업도 한 스타일 문화 진흥원 등 하드

웨어는 갖추어가고 있었다. 한지 문화센터와 한 스타일 진흥원은

2010년과 2011년에 각각 준공됐다.

이래서 나는 한지 산업화의 비전에 중점을 두었다. 말이 한지

문화지 실질적으로 한지 문화라고 할 것이 없는 게 솔직한 현실이

다. 전시나 공예 작품 정도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기본적으로

함께132

Page 133: 이광철자서전 '함께'

생산기반이 갖춰져야 문화가 일어날 것 아닌가.

나는 대통령님에게“한지 산업은 단순한 한지를 생산해 전통

문화를 복원하고 발전시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첨단산업화도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부가가치가 높은 한지 스티커, 스피

커 등 음향기기와 우주선 보호막 등 산업자재로의 활용이 연구돼

실용단계에 있음을 말 드렸다. 또 한지의 수요도 갈수록 늘고 있

음을 설명했다. 한·중·일 동북아를 비롯한 아시아의 경제 성장

과 함께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지의 재료인 닥나무 재배단지 조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적어도 630만㎡(200만평) 규모는 필요하다고 밝혔다.

무너진 국산 닥나무 생산 기반을 복원하는 게 급선무 기 때문이

다. 현재 생산되는 한지의 재료는 대부분 국산이 아닌 중국산 닥

나무인 게 현실이다. 한지의 소비가 적으니 농가들이 재배를 포기

해 생산기반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최근 들어 수요가 늘고 있어도

국산 닥나무는 수입산 닥나무에 비해 비싸 경쟁력이 없는 실정이

다. 이에 따라 재배지는 남아도는 휴경지를 활용하면 되고 대체

작목으로 보조금을 지원할 수 있다는 정책적 대안도 제시했다. 정

책적으로 지원해 경제성을 확보해주면 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또 종이 생산은 펄프로 만드는 과정의 환경오염 보다도 닥나

무 재배가 환경적으로 장점이 있다는 점도 말 드렸다. 이에 덧붙

여 한지 공장의 열악한 환경과 종사자들의 저임금 실태를 보고하

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복지기금 지원, 한지 제조기술의 현대화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33

Page 134: 이광철자서전 '함께'

방안 등을 설명했다.

면담 내용은 그 동안 전주 한지 산업 현장을 살피고 제조 관계

자와 문화 예술인들로부터 공부한 내용이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

다. 한지의 품격과 고급스러움은 작품으로 만들어놓아 한결 같이

찬사를 받지만 그 기반의 취약성과 어려움은 창피할 정도 다.

이날 면담을 토대로 전주 방문 행사에서 공식 보고하고 정책

화하는 일이 문제 다. 나는 면담 결과를 전북도와 전주시에 통보

하고 구체적인 동선과 보고내용을 협의했다. 그러나 숙소의 경호

가 문제 다. VIP가 한옥 마을에서는 도저히 묵기가 불가능하다

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노 대통령은 코아리베라호텔에 묵고

수행 인사들은 한옥마을에서 자기로 했다.

6월 8일 노 대통령은 원광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새만

금을 거쳐 전주 한옥마을을 둘러봤다. 이미 청와대에서 내가 설명

한 내용을 토대로 보고가 이루어졌다. 노 대통령은 배석한 박홍수

농수산부 장관에게 한지산업 육성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

에 따라 나는 박 장관에게 별도로 설명할 기회를 가졌다.

나는 그날 저녁 만찬이 끝난 뒤 박 장관과 함께 한옥 마을을

걸으면서 한지 산업화 방안을 설명했다. 박 장관도 한옥 마을의

멋스러움에 감탄하면서 한지 넥타이, 양말 등을 구입했다.그러면

서 박 장관은 전주시 관계자에게 구체적인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

라고 지시했다.

그 이후 이 계획이 제대로 추진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전주

함께134

Page 135: 이광철자서전 '함께'

시가 사업 계획서를 만들어 농림부에 제출했는지, 제출받은 농림

부가 어떻게 했는지 들은 바가 없다. 아마 박 장관이 그 후 얼마 안

있어 사망한데다 연말 대선이 있는 등 정권 교체기여서 혼란스러

워 챙기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 자신도 2008년

총선 공천에서 탈락해 이 사업을 챙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은 바뀌었어도 전북도와 전주시가 의지를 갖고 추

진했으면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정권 말기

으나 정부 사업에 반 됐으면 정권 교체에 관계없이 추진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추진되지 않아 안타깝다. 지금도 닥나무 재배

에 대한 대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전주시가 일부 재배 사업을

하고 있지만 별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지 산업을 육

성한다고 하면서 국산 닥나무가 아닌 중국산을 수입해 쓰는 현실

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수입 닥나무로 만든 종이를 한지라고

해야 할까, 중국지라고 해야 할까.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35

Page 136: 이광철자서전 '함께'

3. 정치개혁의일선에서

참정연

국회의원에 당선된 나의 의정활동 목표는 크게 두 가지 다.

하나는 지역주의와 기득권에 발목 잡힌 우리 정치를 개혁하는 일

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십년 동안 낙후되어온 우리 전북지역의 희

망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정치개혁은 내가 시민사회에서 정치

역에 뛰어든 이유 다. 2₩30대의 청춘을 바치며 꿈꾸어왔던 민주

주의를 반석 위에 세우고 정의로운 나라,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

드는 것이 내가 사는 이유요,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나는

2004년 하반기에 낸 첫 국회의원 의정활동보고서에 개혁이 나의

소명임을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

“나는 꿈이 있다. 꿈을 이루고자 정치인이 됐다. 지난 날 추구

함께136

Page 137: 이광철자서전 '함께'

해온 민주주의와 개혁을 완수하고 국민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깨끗한 정치를 이루는 꿈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 전 분

야를 지배해왔던 낡은 관행과 기득권을 극복하고 새로운 틀을 짜

나가는 것이 바로 개혁이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것은 불편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개혁이라는 것이 때로는 국민의 마음을 불편하

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소 위태롭게 보이기도 한다. 아직은 어

린 묘목처럼 가냘픈 개혁의 나무를 국민이 편히 쉴 수 있는 아름

드리나무로 자라게 하겠다. 처음 다짐했던 마음 그대로 다음 선거

보다는 다음 세대를 위한 정직한 정치를 하겠다.”

나는 마지막 문장에서처럼“다음 선거보다는 다음 세대를 위

한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임기 동안 보다 더 나아진 세상,

한걸음이라도 진전된 세상, 조금이라도 진보된 세상을 이루는데

온힘을 다 하겠다는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이러한 다짐으로 열린우리당 내의 개혁성향모임인‘참여정치

연구회’(참정연, 2006년에 참여정치실천연대로 바뀌었음)를 만들

었다. 참정연은 개혁당 출신을 비롯하여 2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참여하여 참여민주주의 원리에 걸맞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자

는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다.

나는 참정연의 대표로서 특히 열린우리당 내의 정당개혁에 앞

장섰다. 열린우리당은 호남을 기반으로 한 옛 민주당 중심의 주류

세력과 재야운동권, 시민사회 출신의 개혁세력으로 구성된 정당

이었다. 특히 제17대 총선에서 대거 당선된 초선 의원들의 대부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37

Page 138: 이광철자서전 '함께'

분은 운동권과 시민사회 출신의 비주류 다.

두 세력의 성향이 다르고 정치 경험이 다르니 개혁과제를 놓

고 의견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참정연도 당내의

주류세력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우리는 당내

주류세력이 기득권에 안주하려 한다고 여겼고, 그들은 그들대로

젊은 의원들이 현실 정치를 모르면서 너무 이상적인 주장만 한다

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내의색깔론에맞서

2005년 10월 26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열

린우리당은 선거가 치러진 4개 선거구에서 모두 패배하 다.

함께138

열린우리당 내의 개혁성향모임인 참정연은 개혁당 출신을 비롯하여 2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참여하여 참여민주주의 원리에 걸맞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자는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다.

Page 139: 이광철자서전 '함께'

10.26재보선의 참패는 당내의 노선대립이 표면화되는 계기로 작

용하 다. 당내에서는 선거 참패의 원인에 대해 제각기 분석과 처

방이 쏟아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정권에 대한 내부 비판, 민주당

과의 통합론, 분당설까지 나오는 등 자중지란의 위기상황이 빚어

졌다. 더욱이 일각에서는 민주당과의 재통합에 반대하면‘분열주

의’로 모는 분위기마저 있었고 참패의 원인을 노무현 대통령과 당

내 개혁그룹에게 돌리려는 움직임마저 있었다. 급기야는‘극좌’

라는 거친 표현까지 등장했다.

참정연 대표인 나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2005년 11월

30일 한 인터넷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옛 민주당과의 통합론과

분당론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자신의 신념과 정치노선

을 포기하고 지극히 정치공학적인 이합집산을 통해 지역주의에

편승하려는 태도라고 비판했다.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서민과 중

산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창당정신과 시대정신에도 맞지 않다

고 지적했다.

특히 노 대통령과 유시민 의원을‘좌파’로 몰아서 배제하고

구 민주당과 재통합하려는 움직임은 신종 색깔론이고 비열한 짓

이라고 일갈했다. 친노 세력을 극좌로 모는 것은 노 대통령을 뽑

아준 국민을 좌파로 보는 것으로 국민에 대한 모독행위라고 주장

했다. 나는“열린우리당은 지극히 중도개혁적인 정당이고 노무현

대통령과 참정연도 마찬가지다”며“여당 내에 극좌파는 없다”고

단언했다.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39

Page 140: 이광철자서전 '함께'

당시의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50%대에서 10%로 추락한 것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진지하게 진단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

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창당정신을 되

새기며, 이시대 개혁의 과제, 민생을 되돌아 봐야 해법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지지가 떨어진 것은 당의 이념이나 성향이 아니라 오히

려 초심을 잃고 개혁과제의 추진과 민생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

고 진단했다.

유시민대표와나

통합진보당 유시민 대표와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

이 많다. 도대체 어떤 관계이길래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고 있는

가. 개혁당부터 열린우리당을 거쳐 국민참여당, 통합진보당까지

함께 하고 있으니 궁금해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유는 나의 정치적 소신이 유시민 대표와 거의 일치하기 때

문이다. 나는 우리의 정치현실에 대한 유시민 대표의 진단과 정치

개혁 목표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할 뿐만 아니라 정치활동을 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깊은 신뢰를 갖고 있다. 무릇 정치인은‘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무엇을 하기 위해서’활동해야 한다. 선

출공직을 포함해서 어떤 지위든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그것

을 활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정

치인 본연의 자세가 아닐까. 나는 유 대표가 바로 그런 류의 정치

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보다는 정치개혁, 민주주

함께140

Page 141: 이광철자서전 '함께'

의 발전, 국민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적

어도 내가 지난 10여년 동안 곁에서 지켜보아온 유시민은 그렇다.

나는 스스로 유시민 대표의 옹호자를 넘어 대변자 역할을 자

처했다. 열린우리당 시절에도 당내의 유시민 비토세력에 대해 강

력히 맞섰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겨레 21> 2006년 1월 9일자에

실린 인터뷰 내용이다. 당시 유시민 의원의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

을 놓고 벌어진 논란에 대해 내 견해를 밝힌 인터뷰이다.

나는 유 의원의 복지부 장관 임명 반대에 대해“싸움꾼으로 써

먹다가 싸움꾼이라고 안된다고 비토하는 격”이라며 반대 논리가

어이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유시민에 대한 나의

생각을 그대로 밝힌 것이어서 전문을 전재한다.

▲ 유시민의 입각을 반대하는 의원들의 논리가 문제가 있다고

보던데.

참여정부 후반 국정 운 의 주요 과제로 저출산·고령화 대책

이나 양극화 해소 등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유 의원은 전

문성 면에서 누구보다 적임자다. 그런데도 합리적인 근거가 아닌

비상식적인 이유로 누구는 안 된다며 반대하는 것을 보면 어처구

니없다. 업무수행 능력이나 자질, 추진력, 도덕성의 문제를 제기

해야 일리가 있지 않나.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한 권한으로 대통

령의 몫이다. 자기 몫도 모르면서 잘못됐다고 얘기하는 것은 적절

치 않다. 반대의 수준이 단순한 불평불만을 넘어서 지나치다고 본

다. 이건 인기투표로 장관을 선발하자는 식이다.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41

Page 142: 이광철자서전 '함께'

▲ 유시민의 입각으로 당₩청 관계가 악화되는 것 같다.

유시민 의원 때문이 아니라, 입각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당

₩청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여론재판이나 마녀사냥식으로

몰아가고 있다.

▲ 한마디로“싸가지가 없다”로 상징될 만큼 유시민에 대한

인간적 불신이 큰 것 같다.

그런 반대 논리는 저급한 수준이다. 비열하다. 잘할 수 있다고

얘기하면서 비본질적인 문제를 내세워 반대하는 것은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다.

함께142

열린우리당을 거쳐 국민참여당, 통합진보당까지 유시민 대표와 함께한 나는 우리의 정치현실에 대한유시민 대표의 진단과 정치개혁 목표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할 뿐만 아니라 정치활동을 하는 태도에대해서도 깊은 신뢰를 갖고 있다. 사진은 참정연 후원의 밤.

Page 143: 이광철자서전 '함께'

▲ 계파간 노선의 차이에 따른 견제 논리도 작동한 것 같다.

유 의원은 지난해 4월 전당대회에서 당원의 지지를 받고 선택

된 지도부 구성원이다. 소수가 아니다. 의견이 같지 않더라도 포

용하고 가야지, 입고 있는 옷이 다르거나 인상이 좋지 않다고 해

서 이렇게 해선 안 된다. 당의 정강이나 정책, 운 방식에서 지향

하는 가치가 다양하다. 이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원인이 돼서 유 의원의 내정에 반발한다면 그건 더욱 옳지

않다. 의견이 다르다고 따돌리는 것은 안 된다. (유시민은) 당의

소중한 색깔이자 의견이다.

▲ 극단적인 유시민 의원의 입각으로 당 지지율이 내려갈 것

이라는 주장도 있다.

유시민은 용어 선택과 상황 판단을 잘하는 것이 장기다. 누구

보다 잘 알고 잘 표현한다. 유시민이 당의 문제나 전망에 대해서

아픈 얘기를 했다면 왜 아픈지 검토해봐야 한다. 유시민은 열린우

리당 내 필요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유시민 없는 열린우리당, 개

혁성 없는 열린우리당을 한번 상상해봐라. 유 의원을 좌파나 극좌

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됐다. 민주노동당에서 보면 웃을 일이

다. 유 의원은 좌파적 성향을 드러낸 적이 없다. 굉장히 중도적 입

장에서 고민한다. 이건 이념적 문제가 아니다. 정확히 짚는 게 오

히려 문제가 된 것 아닌가 싶다.

그리고 가슴이 따뜻하지 않다는 게 무슨 (반대의) 이유가 되는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43

Page 144: 이광철자서전 '함께'

가. 오히려 차가운 가슴이 필요한 것 아니냐. 너무 차가운 곳에 갖

다놔 가슴이 차가운 것 아니냐. 지지율이 떨어진 것은 당이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게 왜 유시민의 발언을 탓

할 일인가.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자유스럽게

발언을 못한다. 그동안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이 훼손되니 날카롭

게 지적할 수밖에 없었고, 당의 운명이나 생존을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다.

▲ 유시민의 당내 공헌도가 높다고 보는가.

초창기 당이 어려울 때 저격수로 나서지 않았는가. 헌신적으

로 당을 대변하고, 정확한 상황 판단과 단어를 구사하지 않았나.

너무나 정확해서 상대 당이 미워했던 것 아니냐. 그런데 실컷 싸

움꾼으로 내놨다가 넌 싸움꾼이니까 이젠 안 된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는가.

2006년 지방선거, 전북도지사후보경선을 지켜내다.

2006년에 들어서면서 지방선거 정국에 접어들었다. 5월 31일

이 민선 4기 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뽑기로 예정된 날이었기 때문

이다.

그런데 당내, 특히 전북 도당에서는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

고 있었다. 후보자 선출방식을 놓고 당내에서 경선이 아닌 다른

함께144

Page 145: 이광철자서전 '함께'

방식이 제기되고 있었다. 특히 도지사 후보자 선출방식을 놓고 경

선에 대한 부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특히 다선 중진의원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기류가 더 강했다. 전략공천이나 추대형식으로

특정 인물을 후보로 내세우는 방식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안 될 일이었다. 열린우리당이 출범 때부터 정

당개혁의 핵심으로 삼았던 당원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발상이었다. 당시 최규성 의원이 도당위원장이었고, 나는 지방선

거기획단장을 맡고 있었다. 당헌당규상 지방선거에 대한 거의 모

든 일은 도당 책임으로 치르도록 돼 있었다. 정치에서도 지방분권

을 구현한 것이다.

당시 강현욱 지사와 김완주 전주시장과의 공천 경쟁이 물밑에

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최 도당 위원장과 나는 당연히 도

지사 후보 선출을 경선으로 할 것으로 믿고 준비했다. 그러나 도

내 국회의원이 참석하는 주요 당직자 회의를 하면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전략 공천이나 추대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당시

도내 국회의원들은 중앙당의 주요 당직을 맡고 있을 정도로 막강

한 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북 도당이 열린우리당 중앙당의 축

소판이나 마찬가지 다.

나와 최규성 위원장은 경선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주장했다.

2002년 대선, 2004년 선거에서도 경선으로 바람을 일으켰고, 국

민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않았나. 열린우리당의 창당 정신을

봐서라도 경선을 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45

Page 146: 이광철자서전 '함께'

그러나 대부분의 의원들은“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절차가 복

잡하다. 선거인단 동원 가능성이 커 오히려 민심을 왜곡할 수 있

다. 지방선거는 대선이나 총선과 다르다. 경선을 치르는 노력에

비해 성과가 별로 없다. 경선의 장점이 있지만 단점도 이에 못지

않다.”

이 문제를 놓고 몇 차례 회의를 했지만 결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도지사 경선방식의 결정을 중앙위원회에 넘겼다. 나와 최 위

원장은 중앙위원회에서 경선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설득했다.

결과는 경선이었다. 중앙위의 결정이 있고 난 뒤 강현욱 지사

는 불출마 선언을 했다. 경선은 김완주 전주시장, 유성엽 전 정읍

시장 등이 나섰다. 그 결과 김완주 시장이 경선을 통해 후보로 선

출되었고 본선에서도 당선되었다.

당시를 되돌아보면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이 도지사 후보결정

권을 당원과 국민에게 주기 보다는 자신들이 행사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정당의 공직선거후보자 선출은 단연코 당원과 국민에게

돌아가야 한다. 공직선거후보자 선출은 당원의 기본권이다. 정당

민주주의를 하려면 당원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당원은 국회의

원이나 실력자의 동원대상이나 허수아비가 아니다. 공직선거후보

자 선출을 비롯한 당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당원들이 참여하는 것

이야말로 정당민주주의의 기본이다.

함께146

Page 147: 이광철자서전 '함께'

무너져버린당내민주주의

중진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당원 민주주의와 참여 민주주의

의 왜곡과 후퇴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에서 경선을 회피하는 현상이 많아졌다.

이런 가운데 2006년 하반기부터 당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가 기간당원제를 폐지하고 기초당원제를 도입해버렸다. 당내에서

충분한 논의와 절차도 없이 전격적으로 결정해버렸다. 기간 당원

제는 월 1만원의 당비를 연간 6개월 이상 내고 1회 이상 당 행사

에 참여해 교육을 받은 사람을 당원으로 하는 것으로 열린우리당

의 당원 자격 조건이었다. 이에 반해 기초 당원제는 당비를 2,000

원으로 내리고 그것도 3개월 이상 내거나 아니면 당 행사에 두 번

참여한 사람이면 당원 자격을 주자는 것이었다. 당원 자격을 크게

낮추는 것이었다.

나는 11월 22일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에 나가 그 부당

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기간 당원제를 폐지하고 기초 당원제를 도

입하는 것은‘동원 당원’을 합법화해 양산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2007년 2.14 전당대회를 앞두고 기초당원제 도입 말고도 나

자신이 큰 쟁점이 됐다. 내가 당 최고위원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130여명 가운데 하나인 내가 당의

전당대회 개최 여부를 가르는 관건이 됐다. 당의 주류세력은 아예

나의 최고위원 출마 자체를 반대하고 나섰다. 당 대표와 최고위원

을 선거를 치르지 않고 합의 추대하는 것으로 당 주류세력 내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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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48: 이광철자서전 '함께'

묵계가 있었던 것이다. 당 지도부인 최고위위원회는 민주적인 선

출방식을 통해서 당내의 다양한 세력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공정한 경쟁은커녕 노골적으로 배제하면서 출마 자체를 저지하려

들었다. 참으로 어이없고 황당한 일이었다.

당 지도부의 합의추대 방침에 대해 내가 속해있는 참정연과

신진보연대 등 당내 혁신모임이 반발하고 나섰다. 혁신모임은 나

를 독자 후보로 내세우기로 했다. 나는 2월 6일 오후에 후보등록

을 마친 뒤 4시쯤 기자회견을 갖고 출마를 공식화할 예정이었다.

결국 내 문제가 당내 분란의 뇌관이 되고 있었다. 당은 그야말

로 일촉즉발의 초긴장 상태 다. 불과 2년전에 정치개혁을 모토

로 창당했던 열린우리당의 모습에 심한 자괴감이 들었다.

2월 4일 오후에는 이강철 청와대 특보가 국회의원 회관으로

와서 노 대통령의 뜻을 전달했다. 당이 단합해 전당대회를 잡음

없이 잘 치 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중진의원들

의 모임에서 거친 말들이 오갔다. “청와대가 친노계를 조종하는

것 아니냐”, “단합할 수 없게 해놓고 단합해서 잘 치르라는 게 말

이 되느냐”등이었다. 말 그대로 콩가루 집안이었다.

다음날인 5일 개혁파 의원들이 나를 최고위원 후보로 선정하

자 청와대로부터 긴급 연락이 왔다. 나와 유기홍, 김형주, 백원우,

김태년 의원 등 5명이 청와대로 들어갔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정

치 역정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의원님을 비롯한 개혁 소장파

의원님들의 주장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소수자로서 정치하

함께148

Page 149: 이광철자서전 '함께'

기 정말 어렵습니다. 나라를 위한 충정입니다. 그러나 정치는 큰

선으로 하는 것입니다. 당이 분열로 이어지면 안 됩니다.”노 대통

령은 우리의 주장을 이해하지만 현실적으로 통 크게 양보하는 것

도 정치라며 나의 최고위원 출마를 사실상 만류하는 것이었다. 당

분열 사태를 우려한 노 대통령의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정말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 대통령의 간곡한 만류

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나는 참정연과 신진보연대 등 나를 지지

하는 국회의원들을 만나 대통령 면담 결과를 전해주고 대책을 상

의했다. 밤늦게까지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다.

결국 최고위원 후보 등록 마감일인 6일, 나는 최고위원 출마

를 접었다. 정말 눈물을 머금고 정치적 소신을 현실의 장애물 때

문에 포기해야 했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윽박지르기와 억지에

소신을 굽힌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때 그 결정을 후회한다. 단 몇 명의 국회

의원이 남더라도 열린우리당을 지켰어야 했다. 지역주의를 극복

하는 전국정당, 참여민주주의 정당, 정책정당을 추구했던 열린우

리당의 창당정신을 지켰어야 했다.

내려진열린우리당의깃발

2007년 2.14 전당대회 이후 당은 해체수순에 들어갔다. 12월

대선은 닥쳐오고 이에 대한 준비를 하면서 열린우리당으로는 안

된다는 패배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은 탈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49

Page 150: 이광철자서전 '함께'

당해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대선을 치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핵심은 결국 옛 민주당과의 통합이었다. 이

를 위해 일부 의원들이 먼저 탈당해 이른바‘가교 정당’을 만들고

열린우리당과 옛 민주당이 서로 합치는 모양과 절차를 밟아갔다.

이런 대연합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국민적 관심을 끌겠다

는 의도 다. 겉으로는 대통합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일단 세를 불

리고 보자는 것일뿐 정작 국민들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

는 그들만의 이합집산에 다름 아니었다.

마침내 열린우리당은 해체됐고‘대통합민주신당’이 만들어

졌다. 이 당이 다시‘통합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꿨다가‘민주당’

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혁신과 변화 없는 정치공학적 세불리기로

함께150

열린우리당 전주완산을 당원들과의 열린대화, 국회의원이 아닌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을 만들고자했던 열린우리당의 좌절은 지금도 회한으로 남는다.

Page 151: 이광철자서전 '함께'

어찌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통합민주당의 정동 후보

는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대패했다. 무

려 500여만 표차라는 사상 유례 없는 참패 다. 여당 후보가 이렇

게 큰 차이로 져본 일이 없었다. 이듬해 2008년의 총선에서도 민

주당이 70여석을 얻는데 그쳤다. 제1야당이기는 하지만 초라하

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 때를 돌이켜보면 정치력 부족을 절감한다. 개혁의지

와 소신은 있었지만 정치구조를 재편하고 변화시키는 역량과 내

용이 부족해 기존 정치세력을 극복할 수 없었다. 국회의원이 모두

떠나더라도 열린우리당을 지켰어야 했다. 당시 정치 초년생으로

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지 않다.

노무현대통령과의만남

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은 나에게 운명이 되었다. 노 대통

령은 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한 적도, 행동한 적도 없지만 내 인

생을 바꾸도록 한 보이지 않는 손인 것 같다. 생전에도 그렇고, 사

후에도 그렇다. 나도 모르게 그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 같다.

고 노 대통령은 나를 정치에 투신하게 했다. 물론 그분이 나에

게 직접 정치를 하라고 권유한 적은 없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 정당하게 선출된 대통령후보이면서도 당내 기득권세

력에 의해 궁지에 몰린 그의 상황이 나를 정치라는 낯선 역으로

이끌었다. 이를 계기로 개혁당에 참여하게 됐고, 열린우리당 소속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51

Page 152: 이광철자서전 '함께'

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통합민주당을 거쳐 국민참여당, 통

합진보당까지 이르게 되었다.

노 대통령과 직접 만난 것은 2002년 12월 19일 새벽이 처음이

었다. 개표 결과 당선이 확정된 뒤 곧바로 개혁당 당사를 찾았을

때 다. 선거에서 보여준 개혁당의 노고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 다.

정말 감격스런 만남이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철학과

개혁당의 지향 방향이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선거과정에서 확인

했고 당선의 감격을 함께 나누었다. 노 대통령은 개혁당이 비록

정치 초년병들로 이루어진 소수 세력이지만 정치개혁에 대한 의

지와 열정만큼은 어느 정치세력 보다 강하다는 것을 인정했던 것

이다.

제17대 국회의원과 참정연 대표로 활동하면서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특히 2007년 6월 노 대통령의 전주 방문

때는 한옥 마을과 한지 산업, 플라즈마 연구소 등 전주의 현안에

대해 보고하기도 했다.

청와대에서뽐낸노래실력

2004년 제17대 총선 직후에 노 대통령이 과반이 넘는 다수당

으로 도약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152명 모두를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탄핵정국으로 궁지에 몰려있었지만

총선에서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얻어 다수당이 돼 모처럼 기분이

함께152

Page 153: 이광철자서전 '함께'

좋았던 때 다. 정치개혁과 참여정부의 국정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노 대통령은 물론 권양숙 여사도 참석한 그 자리에서 나도 기

분이 좋았다. 이 자리에서 연예계 스타쯤으로 대접받는 상황이 벌

어졌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분위기가 오르면서 사회자가 이광철

을 불 다. 노래를 한번 해보라는 거다. 박수가 터지고 나는 자리

에서 일어섰다. 청와대와 국회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

에서‘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느낌이었다. 전주에서 올라온‘촌

놈’이 아닌 전통과 멋과 맛의 고장인 전주에서 온‘멋있는 선량’

임을 보여줘야 했다.

나는 당시 총선의 의미를 새기고 개혁을 다짐하는 간단한 인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53

청와대 만찬에 초대되어 고 노무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뒤쪽으로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장관(현경남도지사)의 모습이 보인다.

Page 154: 이광철자서전 '함께'

사말을 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한곡이 끝나자 앙코르가 잇따라 터

져나와서 모두 세곡이나 불 다. 첫 번째는 유명한 베르디의 오페

라 라트비아타‘축배의 노래’를 개사한 이른바‘마누라 송’이었

다. 기품이 있으면서도 코믹한 노래로 사석에서 즐겨 불러 다진

실력(?)을 발휘했다. 두 번째로는 심청가 가운데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을 불 다. 판소리의 고장 전주의 멋을 각인시키자는

의도도 있었다. 마지막 부분을“이다지도 깊을 줄은 난 정말 몰랐

었네”라는 대중가요 가사로 마무리해 좌중을 웃음의 도가니로 만

들었다. 마지막 곡은 윤복희가 부른 명곡‘여러분’이었다. 국민을

생각하며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맡겨진 개혁이라는 역사적 책

무를 다하자는 다짐의 의미가 있었다.

나는 당시 고 노 대통령과 권 여사가 파안대소하는 모습을 바

로 옆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 얼굴 근육에 큰 주름을 만들면서

솔직 담백하면서도 천진한 노 대통령의 큰 웃음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만찬에 대해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은 다음날“샥스핀과 같은

고급 요리로 주지육림의 풍악을 울렸다”는 독설의 논평을 내놓았

다. 사실 청와대의 음식은 고급스럽지 않다. 그 날 만찬 음식은 게살

스프에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샥스핀 가락 한두 개 있는 게 고작이

다. 다른 때도 마찬가지 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식단이었다. 오히

려 국무총리 관사에서의 만찬이 훨씬 더 화려하고 풍성했다. 일상

적인 식사마저 정쟁의 소재로 삼는 것이 우리의 정치풍토이다.

함께154

Page 155: 이광철자서전 '함께'

너무나어이없었던제18대총선공천탈락

2007년 12월 대선에서 정동 민주당 후보는 이명박 한나라

당 후보에게 500만표 이상의 큰 차이로 졌다. 민주정부를 만들기

위해 희생했던 수많은 이들과 국민에게 참으로 면목 없는 통한의

패배 다.

대선 참패의 충격이 컸지만 2008년이 되면서 제18대 국회의

원 총선 준비는 해야 했다. 당은 손학규·박상천 공동대표 체제로

바뀌어 전열정비에 들어갔다. 당은 대선 참패에 대한 반성과 새로

운 모습을 보여야 했다. 개혁적이고 참신한 모습으로 새 단장을

하고 국민에게 다가가야 했다. 그래서 국회의원 후보자 공천이 중

요했다. 민주당은 어느 선거 때 보다도 참신하고 개혁성과 전문성

을 가진 후보자를 내세워야 했다.

당은 이 같은 개혁공천을 위한 방안을 찾은 끝에 당내·외 인

사로 공천심사위를 구성했다. 위원장에 박재승 전 대한변호사협

회장, 재야 사학자 이이화, 시골의사 박경철 등 유명 외부 인사들

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당내에서는 각 계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

치인들이 참여했음은 물론이다.

당과 박재승 위원장 체제가 제일로 내세우는 공천 심사기준이

개혁성과 성실성이었던 만큼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 걱

정할 이유가 없었다. 만용인지는 모르지만 공정한 심사만 이루어

진다면 나의 공천 탈락은 있을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의정활동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현역 의원에 대해 이루어진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55

Page 156: 이광철자서전 '함께'

다는데, 법안제출 실적, 국회 출석 회수, 매년 국정감사 우수의원

선정 등 모든 면에서 뒤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 객관적인 평가

다. 더구나 공천심사 직전에 이루어졌던 유인촌 문화관광부장관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도 나의 활약상은 연일 보도돼 주

목을 받았다.

그래서 호남지역 현역의원 30% 물갈이 방침이 발표됐어도 나

의 공천 탈락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국회의원 임기 4년 동안의

의정활동과 지역구 활동을 성실히 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민

주당의 공천이 아무리 계파사이의 나눠먹기라고 해도, 외부 인사

들이 참여하고 있는 공천심사위원회의 평가는 최소한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유지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안이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3월

13일, 내가 컷오프 대상자로 발표된 것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었다. 나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내가 정치라는 정

의 생리를 너무 몰랐고, 가볍게 생각했다. 개혁공천을 표방한

공심위 평가가 공정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나의 공천 탈락에 대해 나는 물론이고 주위에서도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반응이었다. 현역의원 물갈이론이 악화가 양

화를 구축하는 꼴이 됐다는 평가가 줄을 이었다. 민주당 공천이

개혁공천이기는커녕 계파간 나눠먹기와 미운털 박힌 국회의원 내

몰기용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함께156

Page 157: 이광철자서전 '함께'

대의를위한승복

나의 공천 탈락에 대해 주변에서 항의하고 재평가하라는 촉구

가 이어졌다. 내가 속한 완산을 선거구의 지방의원들이 기자회견

을 갖고“이 의원이 공천탈락 대상자로 분류된 것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투명한 근거자료를 제시해 달라”고 촉구했다.

언론인들도 나섰다. 19개 MBC계열사와 KNN 등 9개 지역민

방으로 구성된 지역방송협의회는 3월 16일 민주당 박재승 위원장

에게 이광철 의원의 공천탈락을 재고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협

의회는 편지에서“이광철 의원이 언론장악을 통한 한나라당의 장

기집권 기도를 막아낼 수 있는 적임자”이니 재공천을 요청했다.

지역방송협의회는“이 의원은 17대 국회에서 어느 의원보다 앞서

언론 자유와 독립을 위해 활동한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이광철 의

원을 통합민주당이 공천에서 배제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이 의원이 최근 의정활동평가에서 2위를 차지하는

등 중앙 위주의 정치 구조속에서 지역언론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지역언론 발전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노력했다”고 평가했

다. 지방의원들이야 나하고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기 때문에 항의

할 수 있다고 해도 언론인들이 나선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정

치적 중립과 공정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언론인들까지 나서준

것은 나로서는 과분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역사회와 각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정당이 공식 발

표한 공천자를 쉽게 번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최소한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57

Page 158: 이광철자서전 '함께'

탈락의 사유와 경위를 알아야 했다. 나는 박재승 위원장을 찾아갔

다. “내가 승복할 테니 이유만이라도 알려 달라. 학생이 시험을 보

면 성적을 알려주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하고 탈락의 근거와 심

사내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박 위원장은 묵묵부답이었다. 계속 미

안하다는 말만 되뇌었다. 박경철 위원에게도 나의 자료를 편지로

보내 탈락 이유와 근거를 밝혀달라고 요구했지만 아무런 답이 없

었다.

나는 박 위원장을 비롯한 외부 심사위원들이 공정한 심사를

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당 생활을

하면서 공천제도와 과정을 꿰뚫어보고 있는 당료들의 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공천 방침과 기준, 배점이 당에

서 나오고 그 자료를 당으로부터 받아야 한다. 공심위의 선의와

무관하게 구조적 한계가 있었다는 얘기다.

나의 지지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당의 결정에 분노하면서 무

소속 출마를 통해 잘못된 공천을 심판해야 한다고 결기를 세웠지

만, 정치개혁, 정당개혁을 위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내가‘공

천 탈락 후 무소속 출마’라는‘이인제식 행태’를 따라할 수는 없

는 일이었다. 70~8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는 물론이

고 현실정치에 참여한 이후에도 작은 이익을 위해 명분을 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나는, 대의를 따르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생

각하고 담담한 심정으로 불출마를 선언했다.

지난 2009년의 공천탈락을 겪으면서 정당개혁과 정치개혁이

함께158

Page 159: 이광철자서전 '함께'

결코 쉽지 않은 길이고 외롭고 험난한 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퇴임이후노대통령과의만남

노 대통령이 임기를 마친 뒤에는 사저가 있는 김해 봉하마을

을 가끔 방문해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사적으로 각별한 교류가

있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정치개혁과 지역 균형발전에 대한 의지

와 비전은 교감하는 사이 다.

노 대통령은 청와대에 살다가 봉하로 오니 훨씬 환경친화적이

되는 것 같다는 말 을 자주 하셨다. “비누칠을 하지 않고 샤워를

하니 피부병이 없어졌다.”며 자연생태의 복원과 오리농법 등에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59

2008년 11월 전북대 정보과학대학원 12기 원우들과 봉하마을을 방문. 그해 가을 뵌 것이 그분과의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Page 160: 이광철자서전 '함께'

관심이 많으셨다.

그런 가운데 노 대통령께 본의 아니게 부담을 드린 일이 있었

다. 2008년 가을, 전북대 정보과학대학원 12기 동기생 20여명과

함께 봉하마을을 찾았다. 이들은 노 대통령과 함께 사저 옆 잔디

밭에 둘러앉아 1시간 이상 대화했다. 일행 중 한사람인 김태수씨

가 하얀 종이에 1만원짜리 지폐를 붙여 1만원권이 하얀 백지로,

접으면 만원권으로 변하는 어설픈 마술도 선보이며 즐거운 시간

을 가졌다.

그러던 중 갑자기 김태수씨가 물었다. “이광철 전 의원은 누

구 보다 의정활동도 잘한 우수 국회의원이었는데 공천을 받지 못

했습니다. 대통령님 왜 그랬나요.”노 대통령은“친노니까 못 받

았지”라고 넘기셨다. 김태수 씨는 또 다시“이광철 의원이 정치적

으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힘없는 내가 도움이 될까?”하고 잠시 침묵하고 말

을 이었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노력합시다. 이

광철 의원도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세요. 정치를 하려면 말이에

요. 착하다고 정치 잘하는 것 아니에요. 자기 욕망이 강하던지 의

지가 중요합니다. 야망이 있는 사람들은 의지가 강한데 비해 좋은

사람들은 정치적 의지가 약해요. 정치에 대한 회의가 많아서…”

2009년전주완산갑재선거와노무현대통령의서거

대통령의 말 대로 이른바‘친노’는 여러모로 정치적 불이익

함께160

Page 161: 이광철자서전 '함께'

을 감수해야 했다. 특히 2008년과 2009년초 무렵에는‘친노’가

일종의 정치적 낙인과도 같았다. 내가 2009년 4월에 치러진 전주

완산갑 국회의원 재선거에 나섰을 때 다. 민주당의 공천을 얻기

위한 예선전부터 노 대통령과 친노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었다.

당시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나와 경합했던 한광옥씨(김대중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는 자신과 나의 대결구도를 김대중 대 노무현의

대결로 몰아갔다. 언론이 그런 제목을 뽑고 부추기면서 분위기를

돋웠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내가 경선에서 승리하여 본선에 진

출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본선에서는 이른바‘친노’에 대한 비토가 더욱 극에

달하 다. 당시 당명에 불복하고 자신의 정치적 아성인 전주덕진

재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함으로써 정치적 명분을 상실한 정동

씨는, 완산갑 재선거에 역시 무소속으로 출마한 신건 후보와 이른

바‘정-신 연대’를 결성하 다. 자신의‘런닝메이트’격으로 인접

선거구에 출마한 신건후보까지 동반당선시켜서 화려하게 재기하

고 싶었던 그는 자신의 선거구보다 전주완산갑의 선거에 모든 화

력을 집중하 다. 연일 나를 겨냥하여 정권재창출 실패의 책임이

노 대통령과 친노진 에 있다고 비난해댔다. 참여정부 시절에 노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며 집권여당의 당의장과 통일부장관까지 지

내는 등 승승장구했던 정동 씨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정

치적 신의와 명분을 등지고 열린우리당 해체에 앞장서는가 하면,

퇴임한 대통령의 등 뒤에 칼을 꽃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던 것을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61

Page 162: 이광철자서전 '함께'

생각하면 지금도 분노를 가눌 수 없다. 도둑에도 도가 있다는 장

자의 말 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정치에도 도가 있지 않겠는

가.

공교롭게도 그 당시야말로 노 대통령이 가장 곤경에 처했던

시기 다. 검찰이 이명박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전직 대통령을 상

대로 졸렬한 정치보복을 자행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 같이 검찰은

노 대통령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이‘피의사

실 유포죄’를 저지르고 언론은 이를 받아써서 확대 재생산하는 공

세가 지속되던 때 다.

결국 나는‘정-신 연대’의 위력 앞에 아깝게 패배하 고, 그로

부터 한 달여가 지난 그해 5월 노 대통령은 사저 옆 부엉이 바위에

서 꽃잎처럼 떨어졌다. 그날 내 가슴도 함께 무너져내렸다.

아! 노무현대통령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아침 7시 30분경, 전화를 받은 나는

정신을 잃었다. 아니 정신을 잃었는지 어땠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

지 않는다. 누구의 전화를 받았는지, 누구와 어떻게 대화를 나눴

는지, 전주에서 김해 봉하까지 누구와 어떻게 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후배들이 그 과정을 얘기해줬지만 나는 정말 그랬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지금도 내가 그 소식을 들은 직후 몇 시간은

내 의식의 빈 공간이다. 뒷날 후배인 박호석군(두인기획 대표)은

나에게“그날 저녁 선배님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 제 정신이 아

함께162

Page 163: 이광철자서전 '함께'

니었다. 인사를 나누기는 했으나 실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람

도 잘 알아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내가 당시의 나를 기억하는 것은 봉하마을에서 부터이다. 낯

익은 참여정부 인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인사들은 빈소를 만

들고 또 다른 일부 인사들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권양숙 여사

의 침통한 표정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차마 위로의 말을 건

넬 수 없었다. 같이 활동했던 국회의원들, 참여정부 인사들과 함

께 몰려들기 시작한 조문객들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전북에서 온

조문객들은 주로 내가 안내해야 했다.

다음날인 24일 새벽에 전주로 돌아왔다. 전주시내에 있는 오

거리 문화광장에 시민사회단체와 노사모 등 노무현 대통령의 서

거를 애통해하는 뜻있는 분들이 함께 빈소를 꾸렸다. 29일 결식

까지 빈소를 지키며 명복을 빌었다.

시민들의 조문행렬은 줄을 이었다. 퇴근길에는 조문행렬이 수

백미터까지 늘어섰다. 노인과 장년층은 물론 직장인, 중고생들도

노 전 대통령을 추모했다. 심지어 초등학생, 유치원생들까지도 부

모의 손을 잡고 와 고사리 손으로 헌화했다.

오거리 문화 광장은 매일 추모행사가 열렸다. 연극인 한 애

선생의 추모 퍼포먼스, 유성우씨의 추모 노래, 국악 추모 굿, 편지

낭독, 살풀이, 대금독주, 추모의 노래 등이 번갈아 이어졌다. 시

민들은 촛불을 밤늦게 까지 켜고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기렸

다. 오거리 문화광장은 촛불광장이었다. 노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63

Page 164: 이광철자서전 '함께'

노란 리본과 노란 쪽지 등의‘노란 물결’도 가득했다. 이 기간 동

안 오거리 문화 광장을 찾은 추모객은 7만여명에 달했다.

시민들은 작은 종이에 추모의 을 남겼다. 나중에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위원회는 이 들을 모아‘아주 작은 추모 문집’을 만

들어 봉하에 기증하고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문집은 시민들의

연령과 주제를 나눠‘아이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쓰는 편지’,

‘시민들의 가슴에 묻힌 노무현 대통령’, ‘강물처럼 흘러가는 슬픔

과 바다에 담기는 분노’, ‘아무도 민주주의와 미래를 포기하지 않

습니다.’등으로 총 4부, 170 쪽으로 이루어졌다. 추모의 몇 개

를 소개한다.

“부정한 자가 정직한 사람을 심판 하는 나라. 당신은 정말 바

보입니다. 당신을 지켜주지 못한 우리는 더한 바보입니다. 조중

동, 현 정부, 더러운 정치가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당신을 바위 끝으로 몰고 간 악덕정치가 뿌리박는 일이 없도

록 노 전 대통령님께서 지켜봐주시고 부디 우리를 돌보아 주세요.

사랑합니다.”

“이제야 후회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당신의 환한 웃음만 보면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집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사법살인의

희생양이 되실 때 방관했던 제가 한심합니다. 죄송합니다.”

분향객들이 몰리면서 자원봉사자들도 늘었다. 하루에 50여명

이 나서 서로 분향소를 정리하고 상주역할을 맡아 분향객들을 안

내했다. 주부와 직장인은 물론 78세의 어르신도 직접 봉사에 나섰

함께164

Page 165: 이광철자서전 '함께'

다. 이들은‘근조 리본’을 달아주고 방명록 작성과 주변정리, 조

문객 맞이 등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성금기부와 협찬도 많았다. 시민들은 분향소 관

리와 결식에 써달라고 성금을 모금함에 넣었다. 자신의 상조보

험을 기부하는가 하면 조화, 막걸리, 노란 종이 등 분향에 쓰일만

한 물품들을 앞장서 내놓았다. 전주 시민들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깨어있는 시민’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죽음으로써 일깨운

민주 의식이 다시 일어나는 것 같았다. 어려울 때일수록 빛나는

시민의식이 놀라웠다. 이런 시민이 있는 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결

코 거꾸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제2부·정치를바꿔야세상이바뀐다 165

오거리에 설치된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

Page 166: 이광철자서전 '함께'
Page 167: 이광철자서전 '함께'

제1부· 나의이력서 167

제3부

함께가꾸어야할전북

Page 168: 이광철자서전 '함께'
Page 169: 이광철자서전 '함께'

1. 전북은지금

“책임도안지고대안도없다”

우리는 과거 얘기를 곧잘 한다. “60년대에는 전북 인구가 250

만이었네”, “전주가 전국 7대 도시 네, 10대 도시 네.”한다. 마

치 월매가“나도 한창 때는 미인이었다”고 말하는 식이다. 초라한

오늘에 비추어 화려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위안을 삼고, 다른 한편으로는“어쩌다 이렇게 됐을까.”탄식을

한다.

전북의 초라한 현실은 전북애향운동본부가 지난 2008년 도민

의식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절반가량

인 47%가‘기회가 주어지면 또는 언젠가 반드시 전북을 떠나겠

다’고 했다. 또 전북의 미래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응답을 했고,

‘전북이 인심은 좋지만 생활하기는 고단하며 보수적이고 비합리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69

Page 170: 이광철자서전 '함께'

적이다’고 했다. 한마디로 전북은 살 만한 곳이 아니고 기회만 있

으면 떠나겠다는 얘기다.

지역의 위기다. 어느 시기인들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겠는가

마는 지금처럼 위기의식이 심각할까. 숙원이었던 새만금 개발이

크게 차질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위기의식은 줄지 않고 있다.

오히려 더 깊고 넓어지고 있다. 방조제가 완공되고 내부개발이 되

고 있는데도 말이다.

희망은 커지지 않고 절망은 계속되고 있다. 사회 지도층일수

록 낙후 전북을 개탄하는 목소리를 높인다. 해마다 1만여명의 도

민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등 전북 낙후가 갈수록 심각하다는 것

이다.

절망과 개탄은 이제 스테레오 타이프가 됐다. 공식석상이든,

사석이든 자동으로 나온다. 인사말에서도, 격려사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 됐다. 지역을

걱정하는 한숨에 땅이 꺼진다.

그러나 책임과 대책을 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특히 자신

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지도층 인사를 본 적은 더 더욱 없다. 원인

과 책임을 온통 외부로 돌린다. 역대 정권 탓이고, 지역 차별 탓이

고, 국가의 산업 중심 정책 탓이란다.

심지어는 도민의식 탓으로 돌리는 일까지 빚어졌다. 2008년 6

월 14일 전북 애향운동본부는‘도민의식의 대전환’운동 실천대회

를 열었다. 이날 대회에는 도 부지사를 비롯해 시장 군수 등 자치

함께170

Page 171: 이광철자서전 '함께'

단체장, 그리고 각급 기관장, 대학 총·학장과 언론사 사장, 사회

단체 대표 등 전북의 지도급 인사 30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전

북의 새로운 도약의 전환점은 애향운동이 그 출발점이 돼야 한다

고 결의했다. ‘내 고장 상품을 애용하자’, ‘명품 새만금에 가보

자’, ‘향토기업을 살리자’, ‘법질서 확립에 동참하자’등 10대 실

천 강령을 채택했다.

10가지 실천강령을 채택해서 고향사랑하기 운동을 벌이는 일

이야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동네슈퍼, 재래사장을

사랑해서 지역 세 상인 가슴을 펴게 하는 일들이 우리시민으로

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민의식을 대전환해야 하고 새로운 도약의 전환점이

애향운동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우뚱

해진다. 그럼 도민의 책임일까? 설득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불

순한 의도마저 읽힌다. 뒤집어 생각하면 도민의 애향의식이 부족

하기 때문에 전북 낙후와 침체가 됐다는 말이 된다.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은 애향심이 부족해서 정든 고향을 떠나

는 것이 아니다. 먹고 살기위해 일자리를 찾아 낯선 타향으로 떠

리고 있는 것이다. 지도층의 책임일 지언정 생계를 위해 떠나는

사람들의 탓도 아니고 더더욱 애향심의 부족도 아니다.

이는 지금까지 전북을 이끌어온 자신들의 책임은 쳐놓고 도

민에게 전가하는 꼴이다. 위기의 본질을 외면한 자기 면피용 관제

캠페인으로 보이는 것이다. 관제 캠페인이라 하더라도 어떤 시기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71

Page 172: 이광철자서전 '함께'

에 일회성으로 끝나버린다. 진정성을 갖고 지속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이것이 지도층이 할 일인가. 지도층의 이런 태도가 전북

의 위기를 가져왔고 심화시키고 있다.

전북 낙후에는 정권도, 국가 정책도, 도민의식도 문제가 없지

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의 지도층 책임이 우선이다. 먼저 지

도층 책임을 말하고 다른 것은 그 다음이다. 어떤 사안이든 문제

가 생기면 내 안에서 찾는 게 순서다.

그래야 올바른 대안이 나온다. 그러나 전북은 대안도 외부에

서 찾는다. 외부에서 가져오거나 유치해야 된다는 것이다. 국가

정책으로 지원해야 하고, 심지어는 사업 거리도 주라는 것도 있

다. 사업 기획과 재원 등 모두 해주라는 말이다. 요즘 말로 날로

먹으려는 것이다.

지역 내부에서 스스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발적 의지가 있

는지 극히 의심스럽다. 적어도 자신의 의지가 있어야 되는 것 아

닌가. 그래야 국가나 자본에게 손을 벌릴 수 있다. 자발적 의지가

충만하다면 외부의 지원도 활발해진다. “무엇을 어떻게 할 테니

이것을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과“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도와 달

라”고 하는 것은 다르다.

이런 행태는 짧은 국회의원 생활동안 너무 많이 보았다. 감나

무 밑에 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바라는 격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

야 할지를 모른다. 모르면 알 만한 사람에게 묻기라도 해야 하는

데 그것도 하지 않는다.

함께172

Page 173: 이광철자서전 '함께'

이는 진정으로 책임지고 반성하는 자세가 안 돼 있기 때문이

다. 책임 없는 곳에 반성 없고, 반성 없는 곳에 대안이 있을 수 없

다. 지금 전북이 그렇다.

전북은독과점사회

전북은 민주당 독점권력 사회다. 정치는 물론 경제, 사회에서

민주당을 통하지 않고서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웬만

한 사업을 하려면 민주당에서 힘쓰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

해야 한다. 이런 사회가 벌써 수십 년이 됐다.

전북은 또 특정고교 출신 독과점 사회다. 지역별로 특정고교

를 나와야 행세할 수 있다. 전주시는 J고 군산시는 K고, 익산시는

N고 등이다. 다른 시·군도 비슷하다. 정읍시는 J고와 H고, 고창

군은 K고, 부안군은 B고 등이다. 도내에서는 어느 고교를 다녔나

에 따라 평생을 좌우하고 있다.

이들 고교 출신들이 지역에서 향력을 독과점하고 있기 때문

이다. 시·군은 물론 기관 단체에는 이들 고교 출신들이 상대적으

로 많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 기관에 일을 보러갈 때 같은 고교 동

문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하게 된다.

그래서 특정 고교 출신이라는 게 사회생활의 브랜드가 되다시

피 했다. 유명 브랜드는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인정하고 신뢰해

구매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특정고교를 나오지 않은

경우에는 여간 노력하지 않고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73

Page 174: 이광철자서전 '함께'

전북은 민주당₩고교동문₩인맥으로 얽혀진 사회다. 문제는 이

렇게 맺어진 권력의 독과점 관계가 사적 생활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공적인 의사결정에 향을 미치는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이래서 나온다.

독과점 사회의 폐해는 말할 수 없이 크다. 같은 편이 아니면

살아가기 어려우니 그 속에 들어가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

원한다. 그 과정에서 비리의 고리가 연결되고 확장된다.

이렇게 해서 정₩관계와 경제계, 사회계로 연결된 기득권 카르

텔이 형성된다. 전북사회는 기득권층에 줄서기 사회가 돼버렸다.

도내 경제는 규모가 적으니 기득권층의 촉수가 드리워지지 않는

곳이 없다. 사업 하나 하나, 행위 하나 하나가 기득권층의 손아귀

안에서 움직인다. 씨줄 날줄로 엮여있는 것이다.

강력한 기득권 카르텔은 공정한 경쟁을 해치고 견제와 균형을

잃게 하고 부정부패의 온상이 된다. 전북 도내에서 사업 좀 한다

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이런 현상은 너무 심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누구는 누구와 가깝고, 다른 누구는 다른 누구와 가까

워 일이 쉽게 풀렸다는 것이다. 국회의원과 단체장은 물론이고,

하다 못하면 도의원이나 시·군 의원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 세상

이 됐다.

이런 사회에서는 기득권층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자율성이

확보되고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니 창의력도 발휘

될 리 없다. 더욱이 기득권층과 유리된 서민층은 소외될 수밖에

함께174

Page 175: 이광철자서전 '함께'

없다.

이명박 정부를 1%를 위한 정권이라고 비판하지만 전북도 마

찬가지다. 전북 권력은 기득권층에 포위돼 있는 것이다. 이래서

전북의 기득권층과 권력이 친서민적이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

한 일이다.

전북이 좀처럼 낙후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도민의 진취적 기상이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북 도민의 대다수인 서민층에게 활력을 주지 못하

고 있는 것이다.

일부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한 독과점 지방권력은 이래서 좋지

않다. 공정사회로 가는 길은 이런 독과점 지방권력구조를 깨는 일

이다.

권력독과점은기회를박탈한다

권력의 독과점 현상은 전북 전체로는 낙후와 침체로 나타나

고, 개인에게는 기회의 상실로 나타난다. 기회가 상실되니 전북에

서 살맛이 날까. 전북이 바로 이런 상황이다.

기회가 없는 사회에서는 꿈을 꿀 수가 없다. 창의력과 상상력

을 발휘할 수도 없다. 도전과 야망을 갖기 어렵다. 성취욕이 줄어

들고 박탈감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도 좀처럼

잡기 힘든 기회를 기득권층에 막혀 날개를 펴지 못한다면 어떤 마

음이 들까. 좌절과 절망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75

Page 176: 이광철자서전 '함께'

사람들이 전북을 떠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표면적으로는 일

자리가 없어서다. 그러나 한걸음 더 들어가 보면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기회를 살릴 수 있는 여건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기회를 살릴 수 있는 여건이 부족하지 않느냐고 반문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자리가 없는 것과 기회를 살릴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일자리가 없더라도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분위

기를 조성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일자리가 없다고 무작정 전북을

떠나는 사람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전북에서 잘사는 방안에 대해

토론하고 협의하고 배려하는 분위기를 만들면 달라질 것이라는

얘기다.

이같은 생각을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

나 작지만 차별화하고 특화하는 방안을 스스로 머리를 맞대고 고

민하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추면 어떨가. 그런 제도적 시스템

을 고민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하는 것을 답습하니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기득권층이 독과점하고 있는 지방권력부터 깨야 한다.

줄서기 하는 분위기부터 없애야 한다. 힘 있는 사람이 한마디 하

면 눈치 보는 행태가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유로운 분

위기가 살아나 토론과 협의가 이루어진다.

도와 시·군, 정치권 등은 공정한 경쟁으로 기회를 보장해줘

야 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함께176

Page 177: 이광철자서전 '함께'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체계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역 혁신이다.

지방의원재량사업비?

예산편성 철이면 지방의원들의 포괄사업비가 어김없이 논란

이 된다. 언론과 시민단체는 도의원과 시·군의원의 쌈짓돈인 포

괄사업비를 편성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예산편성 원칙에 위배되

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방의회는 의원 당 수억원씩 포괄사업비

를 편성한다.

포괄사업비는 지역의 소규모 숙원사업비를 의원 몫으로 편성

하는 예산이다. 예산서 어디에도 의원과 관련돼 있다는 얘기는 없

다. 전북도의 경우 예산서에는 주민편익증진사업비라고 기재해놓

고 개별 의원들의 의도에 따라 집행부가 형식적으로 집행한다.

구체적인 사업명과 예산액을 밝히는 예산편성의 원칙과는 달

리‘주민편익 증진’이라는 극히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말을 쓴다.

그래서 공식적인 명칭이 없다. 전북도와 같이 주민편익증진 사업

비라고 하기도 하고, 포괄사업비, 재량사업비, 숙원사업비 등 부르

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는 투명성과 명확성, 구체성의 원칙을 정

한 예산 관련법에 위배하는 것이다.

이런 재량사업비가 철퇴를 맞았다. 감사원은 관행화된 전북도

의 재량사업비를 폐지하라고 촉구했다. 감사원 감사 결과 2007년

부터 2011년까지 5년간 전북도가 편성한 재량사업비는 790억원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77

Page 178: 이광철자서전 '함께'

이나 됐다. 이 같은 막대한 예산이‘주민편익증진사업비’란 항목

으로 도의원들이 원하는 사업에 썼다는 것이다. 이는 해마다 도의

원 한 사람당 3억~5억원씩 배당됐다.

감사원은 현행법상 포괄사업비는 예비비나 시책추진보전금

정도로 최소화해야 하지만 전북도는 타당성 검증과 집행계획없이

도의원 지역구에 예산을 썼다고 지적했다. 예산은 사업 타당성을

검토한 뒤 구체적인 집행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관련법을 위반했

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의원들은 재량사업비를 어떻게 썼는가. 도의원들은

자신의 지역구에 필요한 사업비를 도에 요구하거나, 시₩군이 지역

구 도의원을 대신해 사업비를 도에 신청하는 편법을 썼다. 한 의

원은 지역구 마을 19곳에 모정 신축 보수비로 1억9,500만원을 썼

고 또 다른 한 의원은 특정 사찰에 1억8,000만원을 지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집행과정에서 해당 의원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을 리 없

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업에 집행을 지정하는 것은 물론 사업

자 선정에도 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향력 행사에 대한 대가가

없을까. 지방의원에 대한 비리의 소문이 끊이지 않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전북도는 감사원 감사에 따라 재량사업비 편성을 폐지하겠다

고 한다. 그러나 말 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벌써 편법의 냄새가 난

다. 도의원들로부터 숙원사업비 목록을 받겠다는 것이다. 이는

도의원들이 필요로 하는 사업을 그대로 편성하겠다는 말이나 마

함께178

Page 179: 이광철자서전 '함께'

찬가지다. 다만 포괄사업이비나 재량사업비로 하지 않겠다는 것

이다.

전북도내 지방의원들의 재량사업비 편성은 이미 관행이 됐다.

도의원은 물론 시₩군의원들도 마찬가지다. 전주시의원들도 2011

년도 예산에 1인당 2억5,000원씩 편성했다.

이런 재량사업비의 폐해는 막대하다. 첫째 자원배분이 왜곡된

다. 예산은 전체를 놓고 중장기적으로 꼭 필요한 사업, 단기적으

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업을 평가해 편성하는게 원칙이다. 합리

성과 효율성, 투명성이 그 잣대다. 그러나 포괄사업비는 의원들에

게 일률적으로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씩 일률 배정하면 그 만큼 예

산 편성에 구멍이 생긴다. 전북도의회와 전주시의회와 같이 의원

1인당 5억원이나 2억5,000만원씩 배정하면 전북도의회는200억

원 이상, 전주시의회는 70억원 가량이 나 된다. 의원들이 요구하

는 사업 가운데 다른 전체 사업들과 비교하면 타당성에서 비교우

위를 갖는 사업이 얼마나 될까.

둘째 의회의 기능이 무력화된다. 포괄사업비를 배정받으면 의

원은 할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집행부와 의회로 분산한 자치권

력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무너진다. 견제와 감시, 대안제시의

기능을 충실히 할 수 있을까. 갈수록 의회 기능이 위축되는 것은

포괄 사업비같은 단맛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의원으로서는 독

주를 마시는 것과 같다.

셋째 그 피해가 결국 주민에게 돌아간다. 포괄사업비로 혜택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79

Page 180: 이광철자서전 '함께'

을 받는 주민들은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더라고 그 때는 좋을 수

있겠다. 그러나 총량으로 보면 예산의 누수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

다. 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바로 이런 예산이다.

지방의원들은 재량사업비를 자신의 몫으로 생각한다. 자신이

당연히 써야 할 쌈짓돈처럼 여기는 이권사업비다. 주민의 혈세를

주민의 대의기관이라는 권한을 악용해 특권화하는 것이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국민의 세금을 사적 용도로 쓰겠다는 말이다. 지

방의원들이 기득권을 철옹성처럼 쌓겠다는 의도다.

지방의원의 기득권은 예산 편성과 집행의 권한을 갖고 있는

집행부와 짬짜미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집행부는 지방의

원의 이권사업을 예산이라는 제도적 장치로 보장해주고, 지방의

원은 집행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 기능을 완화해준다. 지방의회와

집행부는 정치적으로는 물론 사적 이익을 서로 보호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서로 잘 봐주는’관계가 된다.

지방의원의 귀족화요, 기득권층화다. 제도적, 사적 고리를 통

해 지방의원이 기득권층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방의원

들은 재량사업비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여론은 무시하

면 되고, 감사원 지적은 편법으로 감추면 된다.

같은 민주당끼리니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견이 있다 하더라

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같은 당 의원끼리 왜 그래”하면 아무

리 옳은 이견이라 하더라도 당 관계에서, 인간관계에서 소리를 높

이지 못한다. 이럴 때 목소리를 낼만한 수준의 다른 당 소속 의원

함께180

Page 181: 이광철자서전 '함께'

이 있다면 어떨까.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146일동안의전주버스파업, 무엇이문제인가

2011년 초 전주 시내버스 파업으로 시민이 큰 불편을 겪었다.

지난 2010년 12월 초부터 2011년 5월초까지 146일이나 계속됐

다. 이 같이 긴 버스 파업은 이전까지 전무할 만큼 이례적이었다.

앞으로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유례가 없는 전주 버스파업 장기화사태는 전북과 전주의 수준

을 알몸으로 드러나게 했다. 지역사회 지도층들이 해결을 위한 진

지한 노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주 사회가 교통약자의

문제에 대해 얼마나 무능하고 무력한지 자괴감을 들게 했다.

전주사회의 무력증은 비단 교통약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시내버스를 주로 타는 시민들은 고령

노인, 학생, 경제적 취약 계층이다. 서민이고 소수자이고, 사회적

약자다. 이들에 대한 태도가 어떤 것인지 버스 파업 장기화 사태

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146일 동안의 파업과정을 들여다보면 지방권력 주체가 일반

시민에 대한 애정과 문제해결능력이 얼마나 없는지 그대로 알 수

있다. 파업 진행 과정에서 고비마다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

는 기회가 많았지만 이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회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노력해야 하겠

다는 의식조차 없었다는 의심이 들 정도다. 그 기회는 파업한 민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81

Page 182: 이광철자서전 '함께'

주노총 전북 운수노조에 대한 법원의 노조와 교섭권 인정 판결,

시민사회단체의 중재안, 고용노동부와 정치권의 중재안 제시 등

이었다.

법원의 판결이 나왔을 때는 불법 파업이라고 단정한 전주시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전주시와 시의회는 파업초기

불법 파업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노사의 문제인 만큼 전주시가

개입할 필요가 없고, 더욱이 불법 파업이니 행정기관이 어찌할 수

없는 문제라는 시각이었다. 그러니 적극적인 해결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파업을 한 민주노총이 교섭권을 가졌고 교섭권자

가 파업을 할 수 있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어도 전주시의 근본적

인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애초의 잘못된 판단은 물론 이를 교정

하지 않은 교만한 태도가 파업 장기화의 근본 원인이었다.

또 시민단체 중재안과 정부, 정치권의 중재안이 잇따라 제시

됐을 때도 전주시의 해결 노력은 소극적이었다. 이들 중재안의 핵

심은 사측의 민주노총에 대한 교섭권 인정이었다. 법원의 판결 내

용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사측은 교섭권 불인정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민단체와 정부, 정치권 모두 사측

이 너무 무리한 태도를 보 다는 입장이었다.

이런데도 전주시는 해결을 위한 단호하고 강력한 정책 수단을

쓰지 않았다. 더욱이 시민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

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못했다. 전주시의회도 특위를 구성해 가동

했지만 사태해결에는 큰 향을 미치지 못했다.

함께182

Page 183: 이광철자서전 '함께'

말하자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전주시와 시의회가 파

업 장기화 과정에서 역할이 미미했다는 얘기다. 왜 그랬을까. 전

주시는 시내버스 업체에게 연간 120억원이나 되는 보조금을 주면

서도 말이다.

파업으로 고통을 겪는 서민 보다는 사측과의 관계에 더 민감

하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다. 전주시와 시의회

가 시민 보다는 사측 편을 들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다.

사측과의 관계가 단순치 않을 것이라는 정황이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그 근거를 공개하는데 소

극적이었다. 원가계산서는 물론, 정산서도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

다. 공개한 자료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더욱이 전주시는 사측을 압박할 수 있는 행정수단을 가지고

있음에도 쓰는데 주저했다. 불법 논란이 일고 있는 대체버스 투입

정도에 그쳤다. 보조금 지급 중단이나 버스 인가 취소 등 대책은

파업이 일어난 지 수개월이 지나 전북도가 나선 뒤에야 검토하는

데 그쳤다.

전주시는 한쪽만의 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옳고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상대 쪽에 대해서는 눈치보는 정도에 그쳤다. 그래서

이번 파업은 불법이고 노사 문제인 만큼 개입할 거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파업 진행과정에도 이런 판단에 기초한 기본자세와 성

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정할 기회가 수차례 있었어도 바로 잡지 못했다. 집행부의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83

Page 184: 이광철자서전 '함께'

이런 자세에 대해 의회가 나서서 교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

버스 파업에서는 의회도 시늉만 그쳤을 뿐이다. 문제의식과 해결

의지가 절실하지도 강하지도 못했다.

뿐만 아니라 버스 파업이 풀어진 뒤에도 약속한 대책이 어떻

게 추진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보조금 집행의 투명성과 경제

성, 버스 요금 수납의 투명성 확보 등 대책이 발표됐다. 그러나

7~8개월이 지난 지금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지 감감무소식이다.

파업이 끝나고 유야무야 돼버린 것인지, 구체화 방안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전주시는 물론이고 시의회도 잊어

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실정에서 일반 시민으로서는 버스업체-시-시의원으로 연

결되는 기득권 고리가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의 불

편을 외면하는 시와 시의회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전주시와 시

의회가 시민이 위임한 자치 권력을 시민을 위해 쓰고 있다고 생각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전주 지도층이 시민 보다는 기득권층 편이

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LH본사유치실패

“LH 본사를 껴안고 죽을 지언 정 포기할 수 없다.”아직도 귀

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구호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 본사 유치

를 위한 도민 의지를 보이기 위해 도민들이 이 구호를 집회에서

외치고 플래카드로 내걸었다.

함께184

Page 185: 이광철자서전 '함께'

도민 집회는 전주와 서울에서 열었다. 집회 때마다 수천 명씩

의 도민들이 동원됐음은 물론이다. 전북도 애향운동본부를 비롯

한 관변단체를 중심으로 시₩군마다 수백 명 씩 할당됐다. 주민동

원 집회는 2011년 4월 18일 열린 서울 여의도 집회가 하이라이트

다. LH 본사 분산배치를 위한 범도민 서울 궐기대회란 이름으

로 서울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서 열었다. 이날 대회에는 김완주

도지사와 도내 시장₩군수, 김춘진 민주당 전북도당 위원장과 정동

의원 등 도내 출신 국회의원, 도와 시₩군의원등 2,000여명이 참

석했다. 정치권 인사와 동원 주민 등이 총 출동했다. 김완주 지사

와 최규성, 장세환 국회의원, 도의원 몇 명 등이 삭발을 하면서 결

연한 의지를 보 다.

이에 앞서 2010년 12월 10일 전주시청 앞 광장에서 5,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LH본사 유치 전북도민 궐기대회에서도

마찬가지 다.

이들은“550만 도민 똘똘 뭉쳐 LH본사 사수하자”, “LH본사

분산배치 기필코 관철하자”, “정부는 분산배치 원칙을 준수하라”

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당초 정부 원칙대로 LH본사 분산배치를

강력 촉구했다.

이와 함께 LH 분산 배치를 촉구하는 플래카드는 도내 전역을

도배질하다시피 했다. 도심은 물론 시·군 지역의 공인된 게시대

는 물론 보일만한 곳에는 거의 모두 플래카드가 붙여졌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2010년 국토해양부는 5월 13일 경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85

Page 186: 이광철자서전 '함께'

남 일괄 이전을 내용으로 하는 LH 배치 계획을 국회에 보고해버

렸다. 전북도민이 그렇게 목소리를 높 던 LH 분산 이전은 무산

돼버렸다.

사실 이 같은 결과는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 이명박 정부

의 성격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데다가 변화하는 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LH 유치 전략과 전술에 문제점을 드러낸 것

이다.

정부는 2009년 토지공사와 주택공사를 통합했다. 비슷한 정

부 투자기관을 통폐합해 투자와 집행의 효율성을 높이자는 취지

다. 정부는 통합에 따라 참여정부 때 토지공사를 배정받은 전북

과 주택공사를 배정받은 경남에 대해 유치방안을 내도록 했다. 이

에 대해 전북은 본사 기능과 집행기능을 2:8로 나눈 분산 배치안

을, 경남은 일괄 배치안을 각각 제출했다.

정부는 이를 놓고 두 지역이 협의해 결정토록 했으나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정부는 처음에는 분산 배치를

선호하다가 갈수록 일괄 배치로 바뀌어갔다. 전북으로서는 억울

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부의 당초 방침을 신뢰한

전북으로서는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국가 정책은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비판은

할 수 있지만 유치하지 못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자치

권력을 위임받은 세력은 비판을 하면서도 지역의 이익을 위해 능

소능대하게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함께186

Page 187: 이광철자서전 '함께'

그러나 전라북도는 그렇지 않았다. 분산배치안을 신주단지 모

시듯 끌어안고 있다가 경남에 당한 것이다. 사실 정부가 결정한

일괄배치는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토지공사와 주

택공사를 통합한 것은 기능을 단순화해 효율성과 합리성을 높이

자는 것이었다. 부동산 개발이라는 비슷한 기능을 가진 정부투자

기관을 구태여 두 개의 공사로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통합한 마당에 이를 다시 지휘와 집행 기능을 나눠 배

치하자는 전라북도의 안은 정부의 논리로 봤을 때는 설득력이 부

족했다. 그래서 정부의 입장은 당초 분산 배치에서 일괄배치로 옮

겨갔다.

이런 기류는 그동안 충분히 감지됐었다. 장관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와 경남 출신 국회의원 등에서 흘러나왔다. 그럴 때마다 전

북은 당초 원칙과 다르다고 항의하거나 정부의 진정한 입장이 무

엇이냐고 묻는데 그쳤다. 뿐만 아니라 일부에서 분산 배치를 대신

하는 제3의 대안 마련의 필요성을 제기했으나 이를 무시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LH 유치 전략은 주먹구구 고, 순진하기 짝이 없

었다.

그러다가 LH 배치 방안 결정이 임박해지자 여론 동원에 들어

간 것이다. 대규모 집회를 열고 플래카드를 붙 다. 이를 위해

쓴 예산이 2010년과 2011년 2년 동안 6억원이나 들 다는 것 아

닌가.

주민과 여론 동원은 그야말로 LH 유치 실패에 대한 책임을 호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87

Page 188: 이광철자서전 '함께'

도하기 위한 술수가 아닐 수 없다. 유치 실패에 대한 책임론에 대

한 물타기인 것이다. 실패 책임 여론을 도정 수임 세력이 아닌 정

부 잘못으로 전환해버렸다. 자신의 책임론에 대해서는 비켜갔음

은 물론이다.

LH 유치 실패 이후 도의회가 도지사를 비롯한 도정 집행부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고 했으나 이는 정치적 구호에 그쳤다. 책임론

이 제기될 때마다 김 지사 등은 책임론을 얘기할 때가 아니라 오

히려 단합할 때라고 회피했다. 그런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

는 것이다.

지역 발전을 위한 핵심사업에 실패하고, 더욱이 이를 호도하

기 위해 주민동원까지 한 세력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는 것이

전북의 오늘의 현실이다.

덕진수 장파문

덕진수 장 폐쇄와 재개장을 놓고 오락가락한 과정은 정치인

의 향력이 얼마나 큰지 그대로 보여준 파동이다. 재개장의 잘잘

못을 떠나 유력 정치인의 입장에 따라 이미 이루어진 결정을 뒤집

는 과정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뒤돌아볼 일이다.

번복 과정이 민주적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은 채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전북도와 전주시, 도의회와 전주시의회 등 관련 기관들

이 시설의 안전성, 재원 부담 문제, 주민 삶의 편익성 등에 대해 충

분히 토론하지도 않았고, 협의하지도 않았다. 힘 있는 정치인의

함께188

Page 189: 이광철자서전 '함께'

입장에 따라 지역 정치권이 줄서기를 한 꼴이 됐다는 비판을 받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독단이요, 정치적 결정인 것이다.

파동의 개요는 이렇다. 전주 종합경기장에 있는 덕진 수 장

은 지난 2008년 11월 지하 보일러실에서 폭발사고가 났다. 1991

년 수 장이 건립된 지 17년이 지난 뒤 다. 전북도는 12월 △사

고 위험 및 연간 3억원 적자 △2015년까지 종합경기장에 들어설

컨벤션센터 건립 계획 등을 내세워 철거키로 했다.

전라북도의 덕진수 장 철거는 도의회의 지적에 따른 것이었

다. 2008년 11월 도의회 행정사무감사에 도의원들이 시설이 오래

된 데다 보일러 폭발사고까지 일어나 안전성에 문제가 있고 하루

이용객이 적어 예산낭비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도는 철거와 보수 후 이용 등을 놓고 검토에 들어갔

다. 안전성과 경제성, 이용자의 복지 등이 고려 사안이었다. 이용

자들의 반발은 거셌으나 철거하는게 보수 후 이용보다 낫다는 결

론을 내렸다. 도의회와 집행부가 진지하게 토론과 검토를 한 결과

다.

그러나 정동 의원이 등장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2009년 4₩29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덕진에 출마한 정동 후보가

‘보수 뒤 재개장’을 공약했기 때문이다. 표를 의식한 무책임한 공

약이었다.

정 후보가 당선되자 전북도의 방침은 철거에서 재개장으로 번

복됐다. 정 의원은 삶의 질 차원에서 재개장하는 게 더 큰 이익이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89

Page 190: 이광철자서전 '함께'

라는 논리를 들이댔다. 도의회도 철거에 부정적인 분위기로 입장

이 바뀌었다. 전북도가 2009년 5월초 철거를 위해 요구한 도유재

산관리 계획 변경안을 도의회 행정자치위는 미료안건으로 처리해

버렸다. 도의회의 속뜻은 도유재산 관리계획을 철거로 변경하지

말라는 의미다. 도의회 자신이 행정사무감사에서 제기한 문제를

실행단계에서 오히려 발목을 잡아버린 것이다.

도의회가 이런 실정인 가운데 시의원들도 움직 다. 정동

의원과 가까운 일부 시의원들 중심으로 덕진 수 장 재개장을 촉

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덕진 수 장을 전주시가 관리해야 할 체육

관리시설에서 제외시킨 내용으로 관련 조례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도의원과 시의원들이 앞장서 정 의원의 입장에 동조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자신들이 이전에 한 결정을 무시하고 번복해버렸다.

전북도는 그렇지 않아도 정 의원의 요구에 부담스러웠던 상황에

서 도의회 등 지역 정치인들이 앞장서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을 것

이다.

전북도의 번복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도와 전주시의 문

제로 번졌다. 전주시는‘전면 보수(35억원)’를, 전북도는‘부분

보수(12억원)’를 각각 주장했다. 전주시는‘부분 보수로는 안전

을 보장할 수 없고, 추가비용이 불가피하다’고 버텼으나 이것이

관철될 리가 없었다. 정동 의원과 전북도가 전주시의 입장을 수

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2009년 7월 전북도가 전주시에

함께190

Page 191: 이광철자서전 '함께'

무상 사용허가를 내줌으로써 부분보수 후 사용하게 됐다.

그러나 덕진수 장은 계속 말썽이 터져나왔다. 전주시는 보수

공사를 마친 2011년 1월 덕진수 장 시험가동에 들어갔으나 또

다시 고장이 났다. 물을 덥혀 공급하는 열교환기 4기 가운데 3기

가 누수돼 2800만원을 들여 교체했다. 그러나 2개월 뒤인 지난 3

월23일 시험가동 때 또다시 지하실 천장 등 16곳에서 배관이 터

졌다. 고장에 고장의 연속이었다.

이에 따라 재개장일이 2011년 1월초에서 5월 25일로 늦어졌

다. 이 바람에 2010년말 덕진수 장에 근무할 직원 11명(수 강

사 4명, 시설관리직 7명)을 뽑았지만 제 때 발령을 내지 못하기도

했다.

덕진 수 장 파동은 정치적 결정의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전북도와 도의회의 결정 번복은 유력 정치인에 대한 줄

서기 행태의 극치인 것이다. 전북도와 도의회의 신뢰 추락, 예산

낭비, 안전성 문제로 이어졌다. 특히 도의원들은 그야말로 정동

이라는 정치인에 들러리 선 꼴이 됐다. 또 지금이야 안전하다고

하지만 원래 낡은데다가 고장이 자주 난 시설이어서 언제 또 다시

고장이 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리더십의위기, 정책의위기

최근 들어 우리가 경험한 몇 가지 사례를 보면 전북은 위기상

황이 아닐 수 없다. 위기가 아닌 때는 없었다고 하지만 최근의 전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91

Page 192: 이광철자서전 '함께'

북만큼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시기는 없었다.

전북의 위기는 리더십의 위기요, 정책의 위기다. 오죽하면 시

민단체가“전북의 판을 바꾸자”는 연속 토론회를 열까. 정치, 현

안, 언론, 시민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층 중심으로 짜여진

낡은 지도력과 관행을 깨자고 주장하고 있다.

시의적절한 기획이다. 낡은 지도력과 관행을 바꾸지 않으면

전북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도민의

창의성과 진취성을 담아내기는커녕 오히려 위축시키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는 지도력의 위기에서 온다. 도민과 함께 가는 리더십이 아

니다. 도민의 창발성을 유도하거나 자극하지 못하고 있다. 권위주

의적이고 관료주의적 리더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도민에

게“잔말 말고 따라 오라”는 리더십이다. 단체장의 주변 인사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치 권력이 주민 참여의 문을 닫아걸고 있는

격이다. 소수 몇 사람이 자치권력을 독점하고 좌지우지하고 있다.

전북의 자치가 그들만의 리그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갈등은 커지지만 이를 해결하는 능력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리더십 부족 현상은 전주 시내버스 파업 사태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146일 동안 버스 파업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도지사와

도의회 의장, 전주시장과 전주시의회 의장을 비롯한 지역 지도자

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방관하

거나 늑장 대처를 했다. 파업사태 해결이 늦어짐으로써 교통약자

함께192

Page 193: 이광철자서전 '함께'

들은 그 만큼 많은 피해를 입었다. 피해를 당한 서민들은 하소연

할 데도 없다. 지역사회에 갈등과 대립 등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를 해결하라고 자치 권력을 위임해주지 않았는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유치 실패과정은 어땠는가. 전략을 제

대로 짜지도 못했고, 능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정부의 의도와 성

격, 관련 내용을 제대로 파악치 못한 채 허둥대기만 했다. 제2, 제

3의 가능성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정부에 대해 불만만

늘어놓았다.

능력이 안되니 주민 동원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자신이 할 일

을 도민에게 떠안기는 일이다. 직무유기를 한 셈이다. 더욱이 실

패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주민 동원을 통해 전북도의 책임

이 아닌 정부 잘못으로 돌리려는 얄팍한 수를 썼다.

지도력 부족은 정책의 위기를 낳는다. 전북하면 새만금이 떠

오른다. 다른 정책, 다른 사업이 떠오르지 않는다. 도민들이 이런

데 다른 지역 사람들은 오죽할까. 새만금만 되면 낙후와 침체에서

벗어날 줄 알았다. 새만금 사업은 전북 정책의 모든 것이라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수십 년 동안 새만금만 우려먹었기 때문이다. 방조제가

완공되고 내부개발이 한창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른 정책은 새

만금에 묻혀버린다.

이에 따라 새만금 아닌 다른 현안 사업이 발굴되지도 못했고,

다른 현안을 힘 있게 추진하지도 못했다. 전북에는 지금 이후에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93

Page 194: 이광철자서전 '함께'

추진할 현안 사업이 뚜렷하지도 않고 차별화되지도 않고 있다. 신

재생 에너지, 식품 산업, 탄소 산업 등을 내세우지만, 다른 지역에

서도 추진하는 산업들이다.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고 전북이 차지

할 파이가 그 만큼 적다는 얘기다.

리더십의 위기는 바로 정책의 위기를 낳았다. 전북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채 과거의 리더십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 아무

리 좋은 기회가 와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귀를 닫고 있는 것

이나 마찬가지 다.

전북의 소통 정도는 얼마나 될까. 조사를 해보지 않았으니 계

량화시킬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평가는‘실망스럽다’이다. 민주

당과 도의 주민과의 소통이 제대로 안되고 있다는 것이다. 소통이

얼마나 안됐으면‘대외 협력국’을‘대외 소통국’으로 바꿨을까.

소통을 위한 공청회를 따로 열 정도 다. 그런데도 여전히 주민과

의 소통은 불만스럽기 짝이 없다. 민주당의 불소통은 여기서 따로

더 말할 것이 없다.

자치 권력의 성격과 리더십에 따라 지역사회가 달라진다. 지

금 전북에게는 새로운 리더십이 요구된다. 민심과 사회의 흐름을

주시하고 의견을 다양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주민 속에 흐르고 있는 욕구를 정책으로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 주민의 활력을 지역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

다. 실질적인 주민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열린 리더십이 절실하

다.

함께194

Page 195: 이광철자서전 '함께'

2. 전북의활로어디서찾을까

민주당독점구조에서경쟁구조로

전북의 정치지형이 민주당 독점 구조다. 민주당 독점구조는

30년 이상 계속되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로 돼버

렸다. 특히 지난 1995년 단체장 선거이후 더욱 단단해져 난공불락

의 요새가 됐다.

물론 호남지역민들의 민주당에 대한 배타적인 지지는 역사적

이유가 있었고 그 나름의 긍정성도 없지 않았다. 민주당에 대한

호남의 지지는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큰

발판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성취한 민주주의는 이에 힘입은 바가

크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적어도 호남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민주당 독점구조는 이 시대에도 필요한가. 민주당은

지역정당화라는 몹쓸 병에 걸렸다. 민주당은 호남이 아니면 지지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95

Page 196: 이광철자서전 '함께'

기반이 허약한 당이 되고 말았다. 호남은 민주당, 남은 한나라

당이 기반하는 지역대결구도로 고착됐다.

정당의 지역대결 구도는 순기능 보다는 역기능이 많아졌다.

도덕성과 정책 비전으로 경쟁해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는 정당의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 지지는 지역정서에 의존하는 안일

주의에 이미 빠져버렸다. 한나라당도 마찬가지지만 민주당도 정

당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계파 보스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정당 개혁과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이에 따라 민주당 독점구조는 지역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됐다. 주민과 정치를 연결하는 소통의 창구가 되지 못하

고 있다. 주민과 지역의 과제를 정책에 반 해 해결하는 정당의

기능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나라와 지역에 대한 비전을 갖고

활동하는 국회의원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고작 낯내기 정치행

사의 주인공으로 전락했다.

전주 시내버스 파업 장기화 사태, ‘가미카제 망언’의 주인공

김윤철 전주시의원 처리, 의사결정과정에서 파행을 보인 덕진수

장 문제, LH 유치실패과정 등은 민주당의 실패라고 해도 지나치

지 않다. 모두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이 관계된 사안들이다.

지역권력 담당자로서 문제해결의 능력도, 의지도 없음이 그대

로 드러났다. 민주당이 지배하는 단체장, 국회의원, 시의회가 해

결해야 할 일들이었다. 그러나 장기화와 파행, 졸속으로 처리했

함께196

Page 197: 이광철자서전 '함께'

다. 시민의 요구를 제대로 받들지 못했다. 민주당이 시민을 위한

정치조직이기 보다는 기득권 유지에 집착하는 이익집단으로 전락

해버린 증거들이다.

정치 발전은 물론 지역발전을 위해서는 이제 민주당 독점 구

조를 깨야 한다. 민주당 독점구조에서는 자체 혁신도, 지역발전도

기대할 수가 없다. 민주당 독점 시대를 마감해야 한다.

그리고 정당 사이의 경쟁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국회의원도,

지방의회도 민주당 의원들만이 아닌 다른 정당 의원들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적어도 민주당 독점현상을 견제할 있는 수준은 돼

야 한다.

정당들이 서로 주민에게 사랑받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주민

의 불편을 풀어주고, 삶의 질을 높이고, 지역 발전을 이루기 위한

정책 생산 경쟁을 하는 구도가 돼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민과 지

역에 이익이 되는 정당구조다.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서로 경쟁하

는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전북의 활로는 민주당 독점구조를 깨는

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이제 민주당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을 거

둘 때가 됐다. 고여 썩고 있는 물을 흐르는 물로 바꾸어야 한다.

충남어떻게이해해야할까

우리 전라북도와 인접한 이웃 충남의 발전은 놀랍다. 아래의

표를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듯이 전북에 비해 지역내 총생산

(GRDP) 평균 성장률이 최근 9년간 전북보다 3배 가까이나 된다.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97

Page 198: 이광철자서전 '함께'

최근에 가까울수록 차이가 더 난다.

2009년에 충남은 5.8%로 전북의 0.5%에 비해 무려 11배 이상

높았다. 2008년 6배, 2005년 4배, 2006년 3배 가까이씩 차이가 났

다. 근접한 경우가 각각 2001년 0.3% 포인트, 2007년 1.5% 포인

트 차이 다.

금강으로 접해 있는 전북과 무엇이 달라 이런 차이를 나게 했

을까.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수도권과의 근접성이다. 충남

북부지역은 바로 경기도와 인접해 수도권이나 마찬가지다. 천안

₩아산 지역과 평택항, 아산₩탕정지구, 세종시 개발이 대표적이다.

수도권 개발이 한계점에 이르면서 인접한 충남지역까지 개발되는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행정수도 이전에 따른 지역균형발

전 정책의 효과가 충남지역에 집중되는 이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아무리 입지조건이 좋아도, 개발정

책이 집중돼도 지역이 수용하지 못하면 개발효과가 반감된다. 적

어도 충남은 그렇지 않았다.

반면 전북은 어떤가. 전북이 자랑하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새

만금 방조제가 2004년 4월 연결되고 방조제 도로가 개통된 지 3

년이 지났다. 내부개발은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그런데도 최

근 10년 동안의 지역내 총생산 성장률이 충남과 3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다. 더욱이 2008년, 2009년 성장률 차이는 눈뜨고는 못

볼 지경이다. 차이가 나도 너무 나는 것 아닌가. 지리적 입지조건

때문이라고 간단히 치부하기에는 꺼림칙하다.

함께198

Page 199: 이광철자서전 '함께'

나는 지역 정치의 경쟁구도에도 원인이 있다고 본다. 충남 지

역 제18대 국회의원 10명 가운데 자유선진당 8명, 민주당과 한나

라당 각 1명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유선진당이 대부분을 차지

하고 있지만 적어도 1당 독점 구조는 아니다.

또 자치단체장의 출신 당은 더 다양하다. 충남도지사와 15개

시장₩군수 등 민선 5기 단체장 16명 가운데 자유선진당 6명, 민주

당 4명, 한나라당 3명, 국민중심당 2명, 무소속 1명 등이다. 4개당

과 무소속이 골고루 포진돼 있다. 국회의원과 단체장의 출신 당이

다른 곳이 같은 곳보다 더 많다.

이는 충남의 정치구조가 경쟁적 구조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

역발전과 주민 소통을 위해 서로 경쟁하면서 견제와 균형을 이루

고 있다. 이런 구조가 주민을 위해서는 독점구조 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다른 정당과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고, 다양한 정책을 제시

해 주민들에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주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는 구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북은 국회의원도, 단체장도 대부분 민주당 일색이

다. 단체장이나 국회의원 중 일부 무소속이 있기는 하지만 기회만

있으면 민주당에 들어가려고 해 민주당이나 다름없다. 이런 곳에

서 경쟁이 일어날 수 없다. 경쟁 없는 곳에 제대로 발전이 이루어

지지 않는 것이다.

전북과 충남의 발전 차이, 입지조건 차이로만 볼 일이 아니다.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199

Page 200: 이광철자서전 '함께'

시민참여형리더십으로

리더십의 위기가 바로 정책의 위기를 낳았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다. 위기를 가져온 전북의 리더십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기

로는 관료주의적 리더십이다.

도내 지방정부의 수장 대부분이 관료 출신들이다. 김완주 지

사와 송하진 전주시장이 대표적이다. 정치인 출신이 있기는 하지

만 전북 전체에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않다. 이

들은 도와 행정안전부에서 화려한 경험을 쌓았다. 관료로서는 유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관료들은 의사결정이나 실행에서 일방통행으로 일하는 관행

함께200

최근 10년간 16개시도별GRDP 성장률

연도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평균

서울 3.4 8.0 1.3 1.0 2.2 4.3 4.4 3.0 1.2 3.2

부산 7.9 6.7 4.8 0.6 3.0 3.4 4.6 1.0 -1.6 3.4

대구 1.0 4.4 2.6 3.2 0.6 3.9 4.5 1.5 -3.8 2.0

인천 4.9 10.7 2.4 3.8 3.7 6.8 7.4 1.7 -0.3 4.6

광주 3.4 9.5 1.6 1.5 6.5 6.5 3.7 -0.6 0.4 3.6

대전 4.6 8.1 7.4 1.6 2.6 3.4 3.2 1.5 0.1 3.6

울산 0.5 15.8 2.6 4.3 4.6 1.9 4.6 0.2 -1.1 3.7

경기 6.1 13.7 4.8 9.1 11.0 7.7 6.1 4.0 1.1 7.1

강원 2.3 6.8 8.4 1.0 1.8 5.0 4.8 0.9 -0.2 3.4

충북 1.1 8.3 3.9 9.8 0.7 3.9 5.9 2.0 4.0 4.4

충남 2.8 9.2 14.2 12.3 9.8 12.6 7.1 6.2 5.8 8.9

전북 2.5 4.0 5.0 2.9 2.2 4.5 5.6 1.1 0.5 3.1

전남 3.3 8.0 2.2 1.7 1.9 1.7 6.5 3.0 0.6 3.2

경북 7.4 9.8 8.4 7.5 7.6 1.3 8.9 0.7 -3.2 5.4

경남 9.7 5.0 5.9 2.9 1.9 5.7 5.5 5.7 -0.8 4.6

제주 8.6 8.0 3.2 5.0 0.8 2.1 6.4 -3.4 5.2 4.0

Page 201: 이광철자서전 '함께'

에 젖기 쉽다. 관료주의는 두가지 행태로 나타난다. 자신의 의도

를 실현하기 위해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이용한다. 자신이 정한

의도대로 결정하고 절차와 과정은 행정 기술적으로 접근한다. 평

생 이런 분야에 경험과 훈련을 쌓았으니 전문가다.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형식적으로 거치는 변형된 권위주의적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주민 중심이 아니라 성과 중심적이다.

주민 속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기 보다는 관료 중심으로 일하는데

익숙하다. 목표가 정해지면 어붙이기식으로 일을 추진한다.

관료주의 리더십의 또 다른 형태는 절차와 과정에 매몰되는

안일주의로 나타난다. 새롭게 도전하기 보다는 관행에 안주한다.

제도에서 규정한 절차와 과정에 충실해 실수는 없다. 그러나 이루

어지는 일이 없다. 흔히“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다.”는 평

가를 받는다. 주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먼

저 처리하지 않는다. 민원이 생기면 되는 쪽 보다는 제도의 핑계

를 대고 안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관료주의 리더십은 압축 성장을 하기 위한 일방적이고 속도전

을 할 때나 어울린다. 개발독재로 흐르기 쉽다. 과거 군사 독재시

대에 우리의 리더십이었다.

이런 리더십은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다.

시민은 더 이상 계몽의 대상도 아니요,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우민

(愚民)도 아니다. 단순한 대중에서 시민으로 발전하고 있다. 함께

절차를 밟으면서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하는 동반자로 돼가고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201

Page 202: 이광철자서전 '함께'

있다. 제도만 갖춘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시민과 함께 가야 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전북은 이런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채 낡은 리더십에 머물

러 있다. 개발독재시대의 끝자락에 남아 있는 과거의 지도력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추진하는 일마다 민심과 유리되고

겉돈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은 박원순 서울 시장 당선으로 열렸다. 이

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퇴행에 대한 반작용으로 박 시장 체제가 나

타났지만 근본적으로는 시민 권력의 탄생이다. 시민이 주인이고,

시민과 함께 하는 공동체 시대의 막을 연 것이다. 관료는 일의 주

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심부름꾼이면 된다.

시민권력의 시대, 공동체시대의 정책은 대다수 시민의 삶의

질에 초점을 맞춘다. 정책의 중심은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다. 토

건 개발 보다는 복지와 교육 등에 중점을 둔다.

박원순 서울 시정은 벌써 방향을 이런 방향으로 틀었다. 서울

운하 계획 철회와 뉴 타운 계획 최소화를 검토하고 있다. 반면 본

격적으로 친서민 행보에 나섰다. 초등학생 친환경 무상급식에 들

어갔고, 서울시립대 등록금 감축을 실시했다. 권력의 성격과 리더

십에 따라 정치와 지역사회가 달라진다는 것을 박원순 서울시장

체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전북도 권력의 성격이 변해야 한다. 민주당 독점구도와 관료

주의적 리더십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과감한 시민참여 지방

함께202

Page 203: 이광철자서전 '함께'

정부로 거듭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실질적인 민관 협력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언제까지새만금만바라보고살것인가

새만금은? 전북인에게 꿈의 사업이다. 낙후와 침체에 허덕이

다가도 새만금만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를 짓는 그런 사업이다. 새

만금만 되면“전북은 고생 끝”이라는 환상의 사업이다. 전북은 수

십 년 동안 새만금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

로도 그럴 것이다.

새만금 사업은 1991년 기본계획이 발표되면서 가시화됐다.

사업추진이 지지부진하다가 1999년 방조제 공사에 들어갔으나

환경단체의 반대로 민간공동조사위의 환경 피해 조사로 2000년 8

월 공사가 중단됐다. 국무총리실의 물관리 정책조정위가 2001년

8월 정부 방침으로 공사를 다시 진행했다. 그 이후로도 환경단체

의 매립면허 취소소송이 제기됐으나 대법원 판결로 정부측이 승

소해 공사는 계속됐다. 마침내 2007년 4월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완료됐다.

2008년 12월 새만금 사업 특별법이 제정되고 2010년 8월 방

조제 도로가 개통됐다. 2010년 4월 새만금 내부개발 기본구상 및

종합실천계획이 확정된 데 이어 2011년 새만금 위원회 내부개발

계획이 확정됐다. 부안 쪽에 관광지 조성, 군산쪽에 산업단지 조

성 등 개발이 본격화되고 있다.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203

Page 204: 이광철자서전 '함께'

전북은 1991년 기본계획 발표 이후 새만금은‘전북의 신앙’

이 됐다. 언론에‘새만금’이 보도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 다.

화려한 집을 지었다가 다시 부수고 또 다시 짓는 과정을 되풀이하

고 있다.

특히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시작돼 중단되고, 소송으로 분쟁

이 붙는 등 고비를 맞을 때마다 도민들은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

어지는 고통을 격는 듯 했다. 당시 국회의원이고 지방정부 관계자

들이 이런 분위기를 부추겼다. 새만금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전주

와 서울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졌다. 이런 상황이 수십년 계속되다

보니 새만금은 전북의 운명이 됐다.

그러나 사업의 윤곽이 드러나는 지금 어떤가. 관광용지와 다

용도 부지는 이미 마련됐고 산업용지가 속속 조성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투자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투자와 관련해 다

녀가는 사람은 종종 있지만 실제 투자하겠다는 곳은 없다. 특히

외국 자본일수록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 투자를 약속했다가 포기

해버리는 사례도 있었다. 사우디와 미국 자본이 그랬다.

국내 자본도 신뢰하기가 왠지 꺼림칙하다. 삼성이 태양광 등

신재생 에너지 산업을 위해 전북도와 투자협약을 맺었지만 실현

될지 의심스럽다. 10년 뒤에나 투자하고 협약을 맺은 시기가 한국

토지주택공사(LH) 유치가 무산되는 때 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투자 협약인 만큼 말 그대로 그 때 가봐야 아는 일이 됐다.

이처럼 새만금찬가를 불 지만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함께204

Page 205: 이광철자서전 '함께'

방조제가 연결되고 내부개발이 되면서 기대했던 경제효과는 아직

도 감감무소식이다. 군산에 있는 OCI의 태양광 제조공장 하나 유

치하는데 그쳤다.

뿐만 아니라 관광객도 크게 줄어들고 있다. 방조제 완공 이후

폭발적으로 늘었던 관광 특수조차 챙기지 못하고 있다. 방조제 도

로만 지나가고 마는 관광 상품으로는 관광객을 유혹할 수 없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는 정책의 빈곤이다. 방조제 도로 완공을 계기로 매력적인

관광 정책과 상품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손에 쥐어줘

도 먹지 못하는 꼴’이 되고 있는 셈이다. 도와 군산, 부안, 김제

등 새만금 관계 시₩군의 관광정책 생산 능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새만금 노래에 취하고 있다가 다른 현안 사업을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챙기지도 못하고 있다. 수도권을 비롯한 전국에서 보면

“전북은 새만금 하나로 충분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

하다.

새만금 때문에 손해를 본 것이 얼마나 되는가. LH 유치 실패

도 따지고 보면 새만금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경남측이“전북에

는 새만금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LH는 경남에 일괄 이전돼야 한

다.”는 논리를 폈다. 그것이 적어도 경남 측의 손을 들어주는 명분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동안 전북의 새만금 중심 정책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새만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205

Page 206: 이광철자서전 '함께'

금 사업은 국가사업인데다 개발 효과를 보기까지는 적어도 10~20

년을 기다려야 하는 만큼 전북이 과도하게 홍보하고 챙길 필요가

없다는 지적이었다. 정부에 맡겨두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었다. 또

당대에 효과를 볼 수 있는 사업이 아닌 만큼 후대가 필요에 따라

쓸 수 있도록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수질 개선과 환경 문제 등 산적한 과제를 해결하는데 초

점을 맞춰야 한다는 논리 다.

그러나 전북은 어땠나. “새만금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식이

었다. 전북 정책의 절반 이상은 새만금이었다. 전라북도의 모든

에너지가 새만금에 집중됐다. 새만금 사업은 국가사업이 아니라

전북 사업으로 잘못 인식할 정도가 됐다. 정부 부처에서 보면“전

북에게는 새만금만 좀 챙겨주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가질만하다. 새만금은 도내에서나, 도외에서나 다른 정책

을 잡아먹는 하마가 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새만금 아닌 다른 현안 사업이 발굴되지도 못했고,

다른 현안을 힘 있게 추진하지도 못했다. 전북에는 지금 이후에

추진할 현안 사업이 뚜렷하지도 않고 차별화되지도 않고 있다. 신

재생 에너지, 식품산업, 탄소 산업 등을 내세우지만, 다른 지역에

서도 추진하는 산업들이다.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 전북이 차

지할 파이가 그 만큼 적다는 얘기다. 이제는 새만금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솔직히 전북이 관여하지 않더라도 국가가 하지 않

으면 안되게 돼 있지 않은가.

함께206

Page 207: 이광철자서전 '함께'

그리고 가능한 사업부터 천천히 하면 된다. 이미 부지가 마련

된 다용도 부지나 부안쪽 관광개발, 고군산군도 관광개발 등에 초

점을 맞춰야 한다. 현실적으로 조건이 갖추어지고 있는 이들 부지

조차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아닌가. 새만

금에 쏟는 노력과 정력의 절반은 다른 곳에 써야 한다.

실질적인민관협력체제로

세상은 변했다. 인류역사상 변화하지 않은 시기는 없었지만

요즘처럼 변화를 실감하는 때가 있었을까. 이는 어느 때보다도 변

화의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수직 사회에서 수평 사회가 됐다.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다.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념적,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존중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아가

기 어렵게 됐다는 의미다.

내가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게 됐고, 내가 못하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 있게 됐다. 지식과 기술은 누구나 관심만 있으면

습득하게 됐다. 나 보다 잘난 사람이 항상 있다고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수평적 시대에는 한편으로는 다양화와 개별화가 극단적으로

발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연계도 한다. 필요에 따라 협력

하고, 필요에 따라 고립되기도 한다.

이런 생활은 수직사회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원시공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207

Page 208: 이광철자서전 '함께'

산사회(모계사회)이후 지금까지 중앙집권, 집중의 사회 고 가부

장적 수직사회 다. 명령과 지시로 사회가 움직이는 사회 다.

그러나 지금은 중앙 집권과 집중이 분권, 분산화되고 있다. 중

앙에 뺏기고 동원되고 포섭되었던 지역, 지방이 개성과 자율 그리

고 창의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시장은 공급자 중심에

서 소비자, 수요자중심으로 바뀌었고 생산현장은 대량생산 대량

소비 방식에서 다품종 소량주문생산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서열 중시의 조직사회(오너-국장-부장-과장-사원)는 팀제로

바뀌어가고 있다. 의사결정구조 역시 위에서 아래로 (top-down)

하향식에서 아래에서 위로 (bottom-up) 상향식으로 변하고 있다.

피통치자로서 수동적 국민(reacter)이 적극적 주체로의 시민

(acter)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정보통신의 발달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선물이다. 구텐베

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으로 인한 성경책의 대중적 보급이 종교개

혁의 촉매가 되었듯이, 제한된 지식과 학습을 무기로 형성되고 유

지되어온 수직적 체제는 정보의 대중화로 인해 무너져가고 있다.

정보의 자유는 소통의 자유를 낳았다. 소통은 신분과 상하관계는

물론 인종과 나라의 경계선을 무너뜨렸다. 정보의 물결, 소통의

물결은 이제 제한할 수 없는 사회구조가 됐다.

이런 시대에 정치와 자치의 모습은 어때야 될까. 시민중심, 민

간 중심체제로 변해야 한다. 아니 변하지 않을 수 없다. 2011년 10

월 26일 서울 시장 선거 결과가 그 변화의 신호탄이다. 박원순 시

함께208

Page 209: 이광철자서전 '함께'

장은 시민시대의 개막을 내걸고 당선됐다. 시정의 방향은 시장과

자본의 성장 보다는 시민의 행복으로 틀었다.

정치나 자치는 이제 민관 협력체제(거버넌스)를 구축하지 않

을 수 없다. 협력체제를 만들지 않으면 도태되는 시대가 됐기 때

문이다. 협력체제를 지역 실정에 맞게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문

제다.

물론 이전에도, 지금도 거버넌스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

나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와 자치단체에 설치돼 있는 각종

위원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심의위원회든, 결정위원회든 정

부나 자치단체가 정하는 방향대로 심의되고 결정되어왔다. 결과

를 합리화하는 형식적 장치에 불과했다.

갈등조정위원회와 주민참여예산제가 대표적이다. 갈등조정

위는 발생하는 갈등사안에 대해 연구 조사해 조정하고 해결하는

게 본래의 취지다. 그러나 전북의 경우 거의 기능이 상실됐다. 위

원 구성 자체가 명망가 중심으로 이루어져 지역 유지들의 회의체

나 친목회처럼 운 됐다. 오죽하면 갈등조정위가 아닌‘갈등조장

위’라는 비아냥이 나왔을까.

주민참여예산제도 역시 제대로 운 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제

도는 예산을 주민의 의사와 필요에 따라 편성하겠다는 취지다. 예

산의 주인이 주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주민 의사가

예산에 반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공청회나 회의를 열고 거기에

서 나오는 의견을 종합해 예산에 반 하는 정도다. 이런 식의 주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209

Page 210: 이광철자서전 '함께'

민참여예산제는 구태여 할 필요가 없다.

제도적 시스템을 만들어 주민이 직접 행정에 참여하는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면 주민 참여 예산제의 경우 주민들이 직

접 읍면 단위로 필요한 사업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예산에 반

하는 절차와 과정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정책들도 마찬가지다. 주민과 함께 하는 정치와 자치를

해야 한다. 특히 자치는 주민에게 직접 향을 미치는 정치와 행

정작용인 만큼 주민 참여를 확대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

야 주민 화합과 정책의 추진력을 확보할 수 있다. 전북의 희망은

민간에서 찾아야 한다.

완주와진안을주목한다

민관 협력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물결이 됐다. 자치단체 마다

거버넌스를 하고 있다. 그러나 핵심정책을 거버넌스 체계를 갖춰

추진하고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이 가운데 도내에서는 완주와 진

안이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완주와 진안은 주민 스스로 붕괴된 농촌과 농업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군의 핵심정책을 쓰고 있다. 진안은 마을 만

들기, 완주는 커뮤니티 비즈니스(Community Business) 방식을 각

각 쓰고 있다. 이 두 방식은 모두 넓게 보면 마을 만들기 방식이지

만 CB가 더 사업성에 방점을 두고 있다.

두 방식은 모두 마을 공동체를 살리는데 주민이 자발적으로

함께210

Page 211: 이광철자서전 '함께'

나서고, 군은 이를 유도하고 적극 지원하는 공통점이 있다. 민관

협력 체제를 제도화하고 시스템화했다.

완주는 마을 단위의 마을 사업과 사업 아이템에 관심 있는 주

민들이 만든 공동체 사업을 지원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자립하는 마을 회사 100개를 만들겠다는 게 완

주의 목표다. 이를 위해 주민 공동체를 조직화하고 사업의 진척도

에 따라 단계별 지원 계획을 짰다.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사업이

발굴되면 그 사업 육성을 위해 지원하는 방식이다. 사업이 없는데

도 건물을 짓는데 지원하는 이전의 방식과는 다르다.

완주군은 특히 주민과 군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위해 중간

지원조직을 둔 게 큰 특징이다. 완주 지역경제순환센터라는 중간

지원조직은 마을 사업을 위한 주민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여기에

서 나오는 사안을 군 정책에 연결시키는 활동가 조직이다. 완주군

은 여기에 공동체 사업을 연구 조사하고 발굴하고, 마을 리더를

육성하는 커뮤니티 비즈니스 센터, 마을 사업을 구체적으로 추진

하는 마을 회사 육성센터, 귀농 귀촌인을 지원하는 귀농귀촌 지원

센터를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완주군 조직도 농업 농촌 관련 부서와 정책을 농

촌활력과로 통합해 조직을 일원화했다. 여기에서 마을 사업과 공

동체 사업 등을 총괄해 추진한다. 완주군은 주민-중간지원조직-군

으로 이어지는 민관 협력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이를 통해 주민

들이 마을 자원을 활용해 농산물 판매, 가공, 체험관광 등 사업을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211

Page 212: 이광철자서전 '함께'

벌이고 있다. 현재 마을과 공동체 사업이 103곳이나 되고 있다.

진안은 도내에서 마을 만들기의 원조지역이다. 2000년 임수

진 군수 때부터 마을 만들기 사업을 군 핵심정책으로 꾸준히 해왔

다. 매년 마을 만들기 축제를 열어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진안도 마을 사업에 대한 지원체계를 갖췄다. 주민들이 마을 사업

을 할 수 있는 준비와 능력을 갖추는 정도에 따라 지원을 늘리는

단계적 지원 방안을 마련했다. 처음에는 마을 가꾸기 등 간단한

사업을 시작해 생산과 판매, 체험관광 등으로 확대해나가는 방식

이다.

진안군은 이를 위해 전문가를 채용해 총괄토록 하고 마을과

관련된 일을 하는 간사를 두었다. 간사가 마을 일을 보면서 군을

연결하는 중간 역할을 하고 있다. 진안은 마을-간사-군이라는 연

계 구조를 만들었다. 진안식 민관 협력 체제다.

완주는 진안에 비해 중간지원기구를 조직화하고 마을에는

리더를 두는 등 중간 조직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사업성을 강

조한 만큼 이에 대한 전문 활동가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

이다.

완주와 진안은 농촌과 농업을 살리기 위해 민관 협력체계를

갖춰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주민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역량이 미

치지 못하니 중간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구를 둔 것이다. 지역 실정

과 정책 목표에 따라 거버넌스 체제를 만들었다. 완주와 진안은

나름대로 거버넌스 모델을 만든 것이다. 민과 관이 서로 협력해

함께212

Page 213: 이광철자서전 '함께'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방안을 창안한 것이다.

이런 체제를 갖춘 완주와 진안은 지역에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다. 무너진 농촌과 농업을 살리기 위한 실험이 정착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주민을 배제한 예산 투입식 정책을 추진한 이전의

농촌₩농업 정책에서 보지 못한 새 빛을 만들어내고 있다.

완주와 진안 모델은 앞으로 정치와 자치의 방향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정치와 자치가 민간과 어떻게 협력하느냐, 민간의 에

너지를 어떻게 모아내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지역마다 자신에

적합한 민관 협력 모델 창출에 고민해야 한다. 이는 기초 자치단

체와 광역자치단체 등 지방정부는 물론 정부 차원에서도 마찬가

지다.

전주, 전통문화중심도시에서세계무형문화의메카로

2014년 어느 날.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아시아-태평양 무

형문화유산센터’와 무형문화유산 센터에서는 내외국인 관계자들

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라진 남태평양의 전통

문화인‘우쿠우쿠’춤과‘발라발라’춤의 원형복원에 성공했다.

또 남태평양 원주민들의 고유의 운송수단이었던 카누(팁놀 카누

와 마샬 카누)의 복원과 함께 남태평양의 주민들에게 카누제작방

법을 전수하는 데 성공했다. 아₩태 무형문화유산센터는 지난 2년

여 동안 남태평양의 피지와 마샬제도, 투발루공화국 등에서 현대

화의 물결에 사라졌던 전통문화들을 복원하고 전승하기 위해 관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213

Page 214: 이광철자서전 '함께'

련국 문화예술 관계자들과 공동 연구한 결과다. 이 연구결과는 60

여명의 남태평양 주민 전수자들이 참여했던 유네스코의 A-5 프로

젝트다. 이번 A-5프로젝트는 다음달 4일 국립‘무형문화유산의

전당’무형유산전용극장에서 유엔 교육문화위원회 관계자들과

남태평양 섬나라들의 문화관련 장관들 그리고 세계의 전통문화예

술인 등 해외인사 500여명이 초청된 자리에서‘우쿠우쿠’춤, ‘발

라발라’의 춤과 카누제작과정이 재현되고 자료가 전시된다.

그리고 무형문화교육센터에서도 함경도 북부지방의 구전가

요 발표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제 전주는 한국적인 도시를 넘어서

세계적인 전통문화도시로서 동남아시아 전통문화 원형재현에 이

어 남태평양의 전통문화 복원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함께214

2011년 전주한옥마을에서 펼쳐진‘아시아₩태평양무형문화유산축제’

Page 215: 이광철자서전 '함께'

2014년 전주상황을 예상한 이다.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세계적인 전통문화중심도시, 무형문화 도시로서 발돋움할 수 있

는 아₩태 무형문화유산센터 전주 유치가 확정돼 이런 상황이 가

능하다.

지난 2009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35차 총

회에서 아시아태평양무형문화유산센터 설립을 한국으로 최종 승

인했다. 유네스코는 문화적 다양성과 인류 창조성의 근원이 되는

무형유산에 대한 보호와 함께 문화유산의 보호와 진흥에 중점을

둔 중요한 국제 규약을 마련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무형유산

분야에서는‘전통문화 및 민속보호에 관한 권고안’(1989)과‘무

형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협약’(2003)을 채택한 바 있다.

이를 계기로 문화재청은 아₩태 무형문화유산센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2005년 3월, 나의 초청으로 전북에 온 당시 유홍준 문

화재청장은 전통의 문화가 살아 숨쉬는 전주가 무형문화를 보존,

전승하는 장소로 적합하다며 국립‘무형문화유산의 전당’건립의

사를 밝혔고 2005년 10월 제33차 유네스코 총회에‘아₩태 무형문

화유산센터’의 설립을 제안했다. 문화재청과 국회 문광위는 국립

‘무형문화유산의 전당’사업을 국가사업으로 선정했고 2011년 완

공계획으로 국가예산을 2006년부터 배정했다.

국립‘무형문화유산의 전당’건립과‘아₩태 무형문화유산센

터’건립은 별개의 사업이 아니다. 급격한 산업화와 서구화 등으

로 사라져 가는 우리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시급한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215

Page 216: 이광철자서전 '함께'

사업이 국립‘무형문화유산의 전당’건립이다. 또 유엔 유네스코

의 아₩태 무형문화유산센터 유치를 위한 인프라 구축의 일환으로

본격화된 사업이‘무형문화유산의 전당’건립이기도 했다. 그래

서 국립‘무형문화의 전당’의 부지에 유네스코의 아₩태 무형문화

유산센터를 설립계획을 추가했고 490여억원의 예산이 부지비용

을 제외한 753억원으로 확대됐던 것이다.

이런 계획과 노력으로 2008년 4월 유네스코에 정식으로 설립

제안서를 제출했고 2009년 1월 유네스코의 타당성 조사와 4월

181차 집행이사회의 심의를 거쳐 10월 35차 총회에서 최종승인

이 난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일본과 중국이 유사 센터의 설립의지를 표명함에 따라 사무총

함께216

태조어진반환문제로 유홍준 문화재청장을 전주로 초청하여 송하진 전주시장과 함께 경기전을 둘러보고 있다. 당초에 문화재청은 태조어진 보존문제를 들어 어진을 고궁박물관에 전시하려 했으나 이를 설득하여 전주 경기전에 어진전을 지어 보관하기로 하 다.

Page 217: 이광철자서전 '함께'

장의 권고와 양해각서까지 체결하는 우여곡절이 있었고 국내에서

는 복권기금에서 출연했던 예산이 동결됨으로 사업 중단 위기에

까지 이르 다. 아₩태 무형문화유산센터 건립을 위한 예산확대에

따라 기획재정부의 타당성 조사의 요구로 또 한번의 위기 등 어려

움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보다 먼저 기획했고 치 한 계획과

준비가 있었기에 전주유치가 가능했다.

국립‘무형문화유산의 전당’은 전국 123종목의 중요무형문화

재 보유자를 비롯한 3,000여명의 전승자들의 교류와 발표 장소가

된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전승·체험활동이

어우러지는 무형문화재 놀이마당의 총본산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또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다. 뿐만 아니라 전통을 문화사업과 연결시켜 경제적 자원으로 삼

고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다.

여기에 아₩태 무형문화유산센터가 함께 건립되면 한국 최초

의 유엔기구의 건립이라는 의미도 크겠지만 사라져가는 아₩태 지

역의 다양한 전통의 문화가 전주에서 재현되고 전승되고 보존된

다. 세계인들의 문화교류와 체험도 이루어진다.

경제적으로도 큰 자산이 되고 국가경쟁력 강화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일회성에 그치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대회의 유치보다 훨씬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효과가 크다. 이제 전주는 가장 한국적인

도시를 넘어 세계에서 손꼽히는 문화도시로 발돋움할 것이다.

지난 2009년말 완산구 동서학동의 옛 전라북도 산림환경연구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217

Page 218: 이광철자서전 '함께'

소 부지에 국립‘무형문화유산의 전당’과 유네스코의‘아₩태 무

형문화유산센터’가 착공돼 2012년 완공된다. 한 삽, 한 삽의 흙이

전주에 희망을 가져 올 것이다. 전주는 문화가 또 하나의 희망이

기 때문이다.

이들 전당의 건립이 전부가 아니다. 이를 활용한 문화 관광 상

품을 개발해야 한다. 한옥마을의 관광객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만

큼 무형문화 유산의 전당과 아₩태 무형문화의 유산 전당 건립을

계기로 더 풍성하고 내용 있는 문화 관광 상품을 만들 수 있는 좋

은 여건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 증가

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아₩태 지역 전통문화

를 함께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전주 밖에 없다.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 관광거리 개발과 함께 늘어나는 관광객

편익시설 확충도 절실하다. 지금도 한옥마을은 주차장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숙박시설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 이런 편익시

설 부족이 오래전부터 지적돼왔음에도 아직까지 대책 마련이 충

분치 않아 걱정이 많다.

신산업을발굴하자

낙후된 전북이 앞으로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까. 전통적인 공

업화로는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아 충분치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

다. 앞으로 다가오는 첨단 지식 정보산업화 시대의 흐름에도 맞지

도 않다.

함께218

Page 219: 이광철자서전 '함께'

문화 관광산업과 함께 첨단 신산업에 눈을 부릅떠야 한다. 신

재생에너지 산업, 식품 산업 등도 포함된다. 이들 산업은 이미 상

당 수준 방향을 잡아가고 있고, 산업으로서 체계를 갖추어가고 있

다. 기술이 더 고도화하고 추진력을 더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한 정

치권과 지역사회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차세대 산업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지금까지 본 산

업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플라즈마 산업과 탄소 산업이다. 5년

전 국회의원 활동을 하면서 이에 대한 정보를 듣고 기초를 마련하

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탄소 산업은 재벌급 기업의 투자

가 확정됐고, 플라즈마 기술은 연구소를 건립하는 단계에 있다.

고온 플라즈마 산업에 대한 관심은 2007년 1월 4일 전주의 내

사무소에서 관련 정책 간담회를 가지면서 수면위로 떠올랐다. 간

담회는‘플라즈마를 이용한 전북 미래 산업 발전 방안’이라는 주

제로 열렸다. 이날 간담회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박 철

박사, 김훈철 전 한국기계연구원장, 김병덕 한국기계연구원 책임

연구원, 김규홍 서울대 교수, 노 쇠 전북대 교수 등 30여명의 과

학자들이 참석했다. 관련 분야의 석학들이 공식 세미나도 아닌 간

담회에 참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들은 대분 전북 출신이거나 관련 있는 학자들로 앞으로 유

망한 플라즈마 산업이 전북에 가져와야 한다는 지역 사랑이 컸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박 철 박사는 플라즈마에

대한 원천기술을 가진 학자로, 미국 NASA에서 40여년 동안 플라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219

Page 220: 이광철자서전 '함께'

즈마의 우주항공, 레이저 분야에 대한 응용 연구를 수행했다.

플라즈마 관련 기술은 정부가 10년간 1조원 규모를 투자할 계

획으로 있어 전북이 추진하고 있는 부품소재 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산업이었다. 방위산업, 우주항공산업, 핵융합

산업 등 거의 모든 산업에 응용할 수 있는 첨단 기술이다. 플라즈

마는 고체나 액체, 기체 상태의 물질이 아닌 분자나 원자의 이온

화된 상태를 말한다. 고온에서 이온화된 물질은 다른 물질과 쉽게

융합될 수 있어 신소재 개발이 매우 쉽다는 것이다. 당시 국내에

있는 플라즈마 시설은 연구실 등에서 사용되고 있는 몇 십 kw급

에 불과하다. 신소재를 개발하고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은

없었다. 미국은 60MW급, 일본과 독일은 5MW급 플라즈마 시설

을 갖춰 신소재 부품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나는“새만금 이후의 전북 경제 활성화를 이끌어갈 새 산업이

필요하고 현재 진행중인 부품소재산업을 획기적인 수준으로 올릴

수 있는 산업이 바로 플라즈마 기술 산업이다. 다른 지역에서 관

심이 적은 지금 우리가 선제적으로 유치해 전북의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고 말했다.

이후 노 쇠 전북대 교수를 중심으로 융복합 플라즈마 연구센

터 유치가 추진됐다. 전북도와 전주시, 군산시, 완주군 등이 참여

하기 시작했다. 나도 노무현 대통령에게 플라즈마 기술을 설명하

며 전북 유치를 건의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전북은 군산에 저온 융복합 플라즈마 연구센터, 완

함께220

Page 221: 이광철자서전 '함께'

주에 고온 융복합 플라즈마 연구센터가 각각 유치됐다. 군산연구

센터는 2010년 국가 핵융합 연구센터와 전북도, 군산시 등이 협약

을 맺고 착공에 들어가 2012년 완공 예정이다. 완주의 고온센터는

전북대가 교육과학기술부의 고온 플라즈마 연구센터 구축사업에

선정돼 2011년 4월 착공했다.

군산센터는 대전의 국가 핵융합 연구소 융복합 플라즈마 팀이

이주해 연구를 하게 되고 완주 센터는 전북대가 운 하게 된다.

이들 시설이 완공돼 연구에 들어가면 전북이 플라즈마 연구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관련 기업을 유치해 플라즈마 산업 클러스

터를 형성해야 한다. 탄소 산업도 전북대 공대 교수들과 함께 차

세대 신산업으로 유치를 추진했다. 지금은 효성그룹이 전주시 팔

복동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 단지 조성을 위해 토지 보상에 들어

갔다. 효성은 2013년까지 2,500억원을 들여 전주시 팔복동 친환

경첨단복합단지 18만㎡에 탄소섬유 공장을 설립키로 했다. 이어

2020년까지 총 1조2000억원을 탄소산업에 쏟아 붓겠다는 계획이

다. 이는 내가 국회의원 임기동안에 했던 유치활동이 씨앗이 된

것 같아 감회가 새롭다.

탄소는 강도가 철보다 10배나 높지만, 무게는 5분의 1에 불과

하다. 자동차 차체에 활용할 경우 무게를 50~60% 줄일 수 있으며,

이산화탄소(CO2) 배출량은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이 소재는 앞으

로 10년 내 전 세계 차량 8억대의 차체를 대체할 것으로 예상된

다. ‘21세기 산업의 쌀’로 불리는 탄소 얘기다.

제3부·함께가꾸어야할전북 221

Page 222: 이광철자서전 '함께'

효성그룹의 전주 탄소 산업단지 조성은 전북도와 전주시가 다

른 지역에 앞서 탄소산업기술원을 설립해 연구를 했기 때문이다.

전주기계탄소기술원은 국내 최초로 탄소섬유 시험생산 시설을 갖

추고, 국산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효성과 3년 동안

공동연구 끝에 최근 중성능(T700) 탄소섬유 국산화에 성공했다.

일본₩미국에 이어 세번째로 항공기₩자동차₩스포츠 용품 등에 사

용된다.

그러나 과제가 만만치 않다. 탄소 상용화 기술을 고급화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는 개발한 중성능 탄소섬유로는 부가가치가 고

성능에 비해 적다. 세계 기술에서도 앞서지 못하는 것이다. 고성

능 탄소섬유개발이 절실하다. 결국 신산업을 발굴하고 유치해야

한다. 먼저 보고 연구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래야

다른 지역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플라즈마 연구센터와 탄소

산업 유치에서도 얻은 경험이다.

물론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도 잇따

라 이들 산업을 유치해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플라즈마 산업은

강원도가, 탄소산업은 대구가 각각 참여하고 있다. 이들과의 경쟁

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기술 개발과 지역과의 협력이 요

구되는 것이다.

함께222

Page 223: 이광철자서전 '함께'

제1부· 나의이력서 223

제4부

세상을바꾸는힘있는진보를위하여

Page 224: 이광철자서전 '함께'
Page 225: 이광철자서전 '함께'

역사속으로걸어간국민참여당

2010년 1월에 창당되었던 국민참여당은 창당선언문에“대한

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삶을 당원의 삶과 당의 정치적 실천을

규율하는 거울로 삼을 것이다.”라고 명시하 을 만큼 노무현 정

신의 계승을 당의 중요한 가치로 채택한 정당이었다. 국민참여당

이 추구했던‘노무현 정신’은 우리 사회에서 반칙과 특권을 배격

하고 원칙과 상식을 뿌리내리게 하며,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국민

통합과 균형발전을 이루는 일, 정치적 기회주의를 반대하는 소신

정치, 탈권위주의와 참여민주주의 구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창당 과정에서부터 네티즌들과 촛불시민들이 스스로 주도하

고 당의 지도부를 전체 당원들의 직접선거로 선출하는 등, 국민참

여당은 기존의 정당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과 운 원리를 가진 정

당이었다. 때마침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직후 이명박 정권의

난폭한 국정운 에 대한 분노, 2008년 촛불의 경험, 제1야당의 기

득권에만 안주하려는 민주당의 무능력함에 대한 실망 등이 복합

적으로 작용하여 국민참여당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기대는 날로

증폭되었다. 창당 즈음에 자발적으로 가입한 당원이 4만 여명이

넘었고 이 중 매월 1만원의 당비를 납입하는 주권당원이 1만 3천

여명에 달할 정도 다.

나도 국민참여당의 창당 직후인 2010년 2월에 당에 참여하여

전북도당의 창당을 주도하 고, 이후 2년여 동안 제1기 최고위

원, 전북도당위원장, 통합연대특별위원장, 새로운진보정당추진위

제4부·세상을바꾸는힘있는진보를위하여 225

Page 226: 이광철자서전 '함께'

원회 집행위원장 등의 역할을 맡아서 당 지도부의 일원으로 활동

했다.

그러나 국민참여당은 창당 당시부터 많은 오해와 질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민주당으로부터는‘분열주의자’라고 공

격을 당하고, 진보진 으로부터는‘신자유주의자’라는 혐의를 받

기도 하 다. 국민참여당의 정치적 지도자들 중 일부가 현재의 민

주당 세력과 함께 과거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에 참여했던 경험

이 있다는 점에서 민주당에서 떨어져 나온‘아류’정도로 비쳐질

수도 있고, 참여정부에 대한 진보진 일반의 평가가 긍정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창당과정에서부터 노무현 정신의 계승을 표방했으

므로 신자유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을 개연성이 있었던 것도 사실

함께226

2010년 2월 21일에 열린 국민참여당 전북도당 창당대회. 천호선 당시 최고위원(전 노무현 대통령대변인), 유시민 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당대표, 이재정 당시 당대표, 이병완 당시 창당준비위원장(전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보인다.

Page 227: 이광철자서전 '함께'

이다. 그러나 국민참여당의 당원들의 절대 다수는 과거의 열린우

리당이나 현재의 민주당과는 거의 인연이 없으며, 2008년 촛불시

위와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라는 두 가지의 계기를 통해 정

치적으로 각성하고 현실정치의 변화를 열망하며 참여한 시민들이

었다. 한편 핵심활동가들의 상당수는 지난 시기에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변혁에 대한 열정으로 진보의 이상을 위해

청춘을 바쳤던 진보적인 성향이었다. 아울러 정당내부의 민주주

의를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당의 주요한 의사결정에 있어서 직접

민주주의의 원리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민주당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정치세력이었다.

당의 강령에 적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국민참여당의 구성원 다

수가 공유하고 있는 이념적 지향은‘진보자유주의’에 가까웠다.

‘진보자유주의’는 다소 생소한 정치이념이며 아직 그 노선이 명

확하게 정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대체로 요약하자

면‘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그 실현을 가로막는 사회적 차별

에 주목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면서도 극단적인 빈부격차에

반대하고 시장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달리 요약하자면 개인의 자기결

정권(시민적 자유권)을 옹호하면서도 사회적 공공성과 연대의 가

치를 소중히 여기고, 시장을 인정하되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며, 경

쟁을 용인하되 공정한 룰과 탈락자보호에 중점을 두는 입장인 셈

이다. 이를 압축한 것이 2011년 2월 제2기 전국당원대회 직후부

제4부·세상을바꾸는힘있는진보를위하여 227

Page 228: 이광철자서전 '함께'

터 당의 주 슬로건으로 널리 쓰 던“시민은 자유롭게, 국가는 정

의롭게”라고 할 수 있다.

국민참여당의 역사를 말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분이 두

분이다. 참여정부 시절에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고 현재 광주 서

구 의원(기초의원)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이병완 전 고문과 재야의

원로로서 참여정부 통일부장관을 지내셨던 이재정 전 당대표이

다. 이병완 전 고문은 국민참여당 창당 당시 창당준비위원장으로

창당을 이끌었고 당사 마련을 위해 자신의 노후자금 1억원을 흔

쾌히 내놓으실 정도로 당을 아끼고 사랑하셨던 분이다. 이재정 전

대표님은 명망 있는 성직자답게(성공회 신부로서 성공회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셨다) 당의 정신적 지주로서 당의 어려운 고비마다

지혜와 용기를 주셨던 큰 어른이시다. 이 두 분은 이른바‘친노진

’을 포함한 개혁진보진 전체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갖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창당의 취지를 깊이 헤아려 주시고 신

생 정당인 국민참여당에 기꺼이 참여하셔서 당을 이끌어주셨다.

이 두 분의 지도자들 덕택에 그나마 국민참여당이 기존의 정당들

로부터 노골적으로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지금

도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된다.

2011년 12월 4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청 대강당에서 국민참

여당 임시전국당원대회가 열렸다. 이날의 전국당원대회는 국민참

여당과 민주노동당, 그리고 새진보통합연대 3자가 합의한 진보통

합정당의 건설을 공식의결하기 위해 열린 것으로서 국민참여당의

함께228

Page 229: 이광철자서전 '함께'

이름으로 열린 마지막 전당대회 다. 이날 전당대회 결과 재적 주

권당원 8763명 가운데 77.20%인 6765명의 투표, 유효투표 중

89.33%인 6043명의 찬성으로 통합진보정당 승인을 찬성하 다.

노무현 정신의 계승과 참여민주주의정당을 표방했던 국민참여당

이 창당 2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국민참여당의 전당대회는 다른 정당들처럼 대의원대회가 아

닌‘전당원대회’로 치러졌다. 당의 진로와 관련한 중요한 사안은

모든 주권당원들이 1인1표로 참여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말 그대

로‘당원이 주인인 정당’이었다. 통합진보정당 참여를 의결하는

12월 4일의 전당대회를 두고 이미 대의원투표를 통해 합당을 결

의한 민주노동당 등 진보진 내부에서 많은 우려가 있었다. 당

의 간판을 내리고 다른 정치세력들과 합당하자는 투표에 과연 9

천명에 가까운 전체 주권당원의 과반수가 참여하고 2/3 이상의

찬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걱정이었다. 통합진보정당에

참여하는 정치세력들 중 마지막으로 공식의결을 하게 되는 국민

참여당에서 만에 하나 통합안건이 의결되지 못한다면 10여 개월

동안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막바지 단계에 이른 진보통합 자체

가 자칫 무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80%

에 가까운 투표율과 90%에 가까운 찬성률은 이러한 걱정을 무색

하게 하 고, 당원들의 참여의식과 당원민주주의의 저력을 새삼

확인시켜준 것이다.

국민참여당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걸어갔다.

제4부·세상을바꾸는힘있는진보를위하여 229

Page 230: 이광철자서전 '함께'

노무현정신과전태일정신의만남, 통합진보당

우리 국민의 상당수는 스스로의 이념적 성향을 진보라고 규정

하고 있으며 진보적인 정치세력을 지지할 의사를 갖고 있다. 한겨

레신문의 실시한 국민의식 조사결과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27%

가 스스로의 이념성향이 진보라고 응답하 고, 보수라고 응답한

비율은 21.3%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향후 대한민국을 이끌어나

갈 정당으로는 진보정당이 34.8%, 중도정당이 22.5%, 보수정당이

18.5%로 꼽혔다. 특히 고소득₩고학력층과 30~40대에서 스스로를

진보로 규정한 응답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진보정당들이 한 자릿수 지지율을 넘

지 못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최근의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의 야권

함께230

2011년 12월 21일 통합진보당 전북도당 창당대회에 이정희, 유시민, 심상정 공동대표들이 참석해서‘세상을 바꾸는 힘있는 진보’라는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열었다.

Page 231: 이광철자서전 '함께'

후보단일화 경선 결과에서 드러났듯이 이른바‘안철수 돌풍’이후

기존 진보정당들의 존재감과 정치적 위상이 매우 낮아진 것이 사

실이다. 민주당을 신뢰하지 않는 진보 성향 유권자들의 지지가 안

철수 교수, 박원순 시장 등에게 쏠리고 있는 것은 기존의 진보정

당들이 대안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 한 것이었다.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규정하는 국민의 다수가 실제 투표행

위에서는 진보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현상의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선거구-단순다수대표제 방식의 현

행 선거제도로 인해 이른바‘사표방지 심리’가 발생하고 반(反)한

나라당 성향의 유권자들이 부득이하게 제1야당에 대한 지지를 강

요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기존의

진보정당들이 국민의 마음을 얻는 데에 실패하 다는 것은 분명

한 사실로 인정하여야 한다.

기존의 진보정당들은 노동자 중심의 계급주의와 진보적 민족

주의에 그 이념적 뿌리를 두고 계급문제와 민족문제의 틀 안에서

한국사회를 해석하고 대응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의 갈등구조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라는 분석틀로만 해

석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다양하고 중층적이며 지구상의 어느 나라

도 개방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

이다. 물론 기층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문제나 민족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문제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정치적 표현의

자유, 사회정의, 생태, 사회적 다양성에 대한 존중 등으로 진보정

제4부·세상을바꾸는힘있는진보를위하여 231

Page 232: 이광철자서전 '함께'

치의 의제를 확장하고‘촛불’로 상징되는 진보적 시민대중의 역

동성을 수렴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물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기존의 진보정당들이 지난 10

여 년간 풍찬노숙하면서 이루어온 소중한 성과는 정당하게 평가

받고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진보정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지

속적으로 정체하거나 하락하고 있는 상황을 뼈아프게 직시하고

진보정치세력의 근본적인 혁신과 재구성을 통해서 다수 국민이

믿고 지지할 수 있는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이

진보진 내부로부터 제기되었다.

또한‘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이 단순히 민주노동당 분당 이전

상태의 회복, 즉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재결합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진보진 다수의 견해 다. 진보적 가치에 동의하는

모든 정치세력의 폭넓은 참여를 통해 진보의 지평을 넓히고 진보

성향 대중들의 적극적인 지지는 물론이고 중도적 입장의 유권자

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대중적인 정당을 만들어 나가자

는 것이었다.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기존의 진보정치세력과

진보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세력이 서로 존중하고 힘을 모은다

면, 제도정치권에 참여하기를 주저하던 다수의 진보적 지식인, 시

민사회활동가들도 기꺼이 함께 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자체가 바로

진보정치세력을 혁신하고 재구성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진보통합 논의과정에서‘진보대통합을 위한

정당·시민사회연석회의’가 구성되었고, 국민참여당은 2010년

함께232

Page 233: 이광철자서전 '함께'

10월부터 진보통합 관련 논의에 참여하는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

하기 시작했다. 두 달 뒤인 12월에는 연석회의의 참가주체 중 하

나인‘진보통합시민회의’측으로부터 연석회의 참가를 공식적으

로 제의받고 최고위원회의와 상임중앙위원회 등의 의결을 거쳐

진보통합논의에 참여할 것을 결정하 다. 나는 이 과정에서 6월

부터 당의‘통합연대특별위원회’위원장을 맡게 되었고 이 특위는

7월 10일 제4차 중앙위원회의 결의에 따라‘새로운 진보정당 추

진위원회(새진추)’로 전환하게 된다. 새진추의 집행위원장을 맡

게 된 나는 본격적으로 우리 당의 진보통합 참여를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진보정치세력의 통합을 통한 대중적 진보정당의 건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진보정당들이 참여

정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선입견이 가장 큰 장애가 되

었다. 기존의 진보정당들과 민주노총 등의 내부에서 참여정부가

추구했던 정책노선에 대한 반감이 높은 상태에서‘노무현 정신 계

승’을 표방했던 국민참여당을 진보진 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

으려는 경향이 강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진

보통합정당 건설문제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재결합 차원에

서 바라보는 흐름도 있었다. 결국 국민참여당은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논의 테이블에 초대받지 못한 채 3개월여를 협상장

문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2008년 분당사태 이래 민주노동

당과 진보신당 사이의 뿌리 깊은 불신도 진보통합의 과정을 더디

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진보신당의 대의원대회에서 진보통합안

제4부·세상을바꾸는힘있는진보를위하여 233

Page 234: 이광철자서전 '함께'

이 부결되어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 당의 지도자들이 눈물을

머금고 당을 떠나야 했고, 민주노동당 역시 대의원대회에서 한 차

례 부결되는 사태를 겪는 등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은 고비 고비마

다 암초에 부딪쳤다.

그러나 군소정당으로 분립되어 있는 진보정치세력을 하나로

묶어세우고 진보정치를 근본적으로 혁신함으로써 집권이 가능한

진보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작은 차이

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기에 여러 차례의 난관을 극

복할 수 있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의 이정희 대표와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대표, 새진보통합연대의 노회찬, 심상정 대

표 등 지도자들이 보여준 정치적 결단력과 자기헌신은 많은 이들

에게 감동을 주었고 이것이 진보통합을 성사시키는 소중한 동력

으로 작용하 다.

온갖 우여곡절과 풍파를 겪고 좌초의 위기도 많았지만 마침내

2011년 12월 11일, ‘통합진보당’이 역사적인 출범을 세상에 알렸

다. 지난 10여년 동안 정통 진보정당의 깃발을 지켜온 세력과 시

민의 정치적 자유와 정의로운 국가를 추구하는 새로운 진보세력

이 하나의 물줄기를 이루어 진보의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런 의미에서 보자면 통합진보당의 출범은‘노무현 정신과 전태일

정신의 만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함께234

Page 235: 이광철자서전 '함께'

정권교체를넘어정치혁신으로

통합진보당의 당면과제는 강력한 야권연대를 통한 의회권력

과 정부권력의 교체이다. 2012년 4월에 치러지는 제19대 국회의

원총선거에서 진보-개혁진 이 연합하여 안정적인 다수의석을 확

보하는 것과, 이어 12월에 치러지는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여 진

보-개혁진 의 공동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과 한나

라당에 의해 사회 전반의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서민의 삶이 파탄

에 이른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정권교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대

적 과제이며, 이는 비단 통합진보당만의 과제가 아니라 진보-개혁

진 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정치세력의 공통의 과제이다. 최근

‘혁신과 통합’과 민주당 사이의 통합움직임을 비롯해서 범야권

내에서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는 통합이나 연대의 흐름은 모두 진

보-개혁진 에 주어진 공통의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그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야권연대냐 야권통합이냐를 두고 지금까지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왔고 지금도 논쟁이 진행 중이다. 연대보다는 하나의 당으로

통합하는 것이 시너지가 높아서 총선과 대성에서 필승을 기약할

수 있고, 당내에서 경쟁함으로써 진보진 의 몫을 더 확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주로 범야권통합정당을 주장한다. 그런

분들은 주로 지난 2010년 지방선거와 2011년에 치러졌던 몇 군데

의 보궐선거에서‘불완전한 야권연대로 인해 패배한 사례’를 예

로 들면서 당을 하나로 합쳐야만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제4부·세상을바꾸는힘있는진보를위하여 235

Page 236: 이광철자서전 '함께'

그러한 사례들이 없지 않았고 그분들의 의견을 십분 존중하지만,

그들의 주장에는‘불완전한 야권연대’의 원인에 대한 진단이 빠

져 있다.

2009년 6.2 지방선거 이후 치러진 몇 군데의 선거에서 야권연

대가 지지부진했거나 형식적인 연대에 그쳐 패배하 던 근본원인

은 민주당이 연대에 대한 진정성과 정치적 신의를 다하지 않아서

지 당을 합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민주당의 기득권의식이야

말로 튼튼한 야권연대를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장애요소이다.

‘혁신과 통합’측과의 통합을 의결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11일에

열렸던 민주당 전당대회가 폭력으로 얼룩진 아수라장이 되고 의

결정족수 문제를 두고 법리논쟁까지 벌어진 것에서도 그들이 가

진 기득권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하고 집요한지를 확인할 수 있

다. 민주당이 스스로를 혁신하고 기득권을 내려놓을 의사도 능력

도 없는 상황에서 진보정당까지 한울타리로 통합하자는 것은 가

능하지 않은 일이다.

결국 문제는 힘의 균형을 확보하는 것이다. 진보진 과 시민

사회가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민주당을 상대로 대등한 교섭력을

확보하여 제대로 된 정치연합을 구성하는 것이 오히려 2012년의

양대 선거에서 승리를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통합진보당의 보다 장기적인 목표는 현재 수구보수세력과 중

도개혁세력이 양분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정치구도를 근본적으로

혁신하여 중도보수와 진보의 경쟁구도를 확립하고 진보진 의 독

함께236

Page 237: 이광철자서전 '함께'

자적인 집권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구도는 지역주의

에 기반한 두 개의 거대정당이 정치를 독과점하고 있는 양상이며

이는 현행 선거제도에 의해 유지₩강화되고 있다. 지역주의는 여전

히 한국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핵심적인 기제로 위력을 떨치고

있는 실정이다. 경쟁이 없이 특정정당이 특정 지역을 독점하는 지

역주의 정당구도를 그대로 두고서 한국정치를 혁신하고 한국사회

를 진보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국적

으로 고른 지지를 받는 진보정당의 성장 자체가 지역주의 정치구

도를 극복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지역주의와 소선거구제의 결

합을 바탕으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거대정당들이 스스로 나서

서 선거제도를 개혁하고 지역주의 정치구도를 혁신할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므로 진보진 과 시민사회의 정치적 진출을 통해

선거제도의 개혁을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

지역주의 못지않게 우리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젊은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이다. 물론 최근에 있었던 몇 차례 선

거에서 젊은이들의 투표율이 높아지고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

스)의 위력이 발휘되기도 하 지만, 젊은 세대들은 여전히‘투표

참여운동의 대상’일 뿐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진입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정당들이 젊은 세대의 삶의 문제와 관심사들을

정치적 의제로 설정하는 데에 관심이 없거나 혹은 실패했기 때문

일 것이다. 또한 정당들이 그 내부구조나 문화에 있어서 젊은 세

대의 적극적인 참여를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너무 노후화되어 있

제4부·세상을바꾸는힘있는진보를위하여 237

Page 238: 이광철자서전 '함께'

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당 내부의 중요한 의사결정이나 공직선거

출마는 주로 중년층 이상의 전업정치인들의 몫일 뿐 당원이나 젊

은 세대들이‘낄 자리’는 거의 없다. 젊은 세대의 정치참여를 통

해서 정치혁신의 동력이 강화되고 다음 세대의 정치를 이끌어갈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어야 한다. 젊은이들이 즐겁게 참여하여 낡

은 정치문화를 바꾸고 새로운 활력과 기풍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통합진보당의 몫이다.

‘정치적종(種)다양성’과선거제도

현재 지구상에는 약 3,000만 가지의 생물종(種)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야생동식물의 남획, 각종 개발과 환경오

염에 따른 서식지의 파괴 등에 의해 해마다 약 3만 종 이상의 생물

이 멸종되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생물자원이 감소하고 생태계

의 먹이사슬이 붕괴되면 결국 우리 인간의 삶과 지구의 미래가 위

협받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이에 국제사회는 생물종 보호의 중

요성을 인식하고 생물종의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협약을

체결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류의 속성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생물학적 종다양

성이 보호되어야 하듯이 정치적 종다양성 역시 우리 정치의 건강

한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날로 다양해지는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정치세력의 존재가 필수적

이다. 다양한 계층의 이해와 요구를 정치 역에 수렴하고 선의의

함께238

Page 239: 이광철자서전 '함께'

경쟁을 통해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민주정치, 특히 대의제

(代議制)민주주의의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기업이 시장(市場)을 독점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예

컨대 국내에서 유일하게 S전자만이 TV를 생산해서 판매한다고

치면, 소비자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좋든 싫든 S전자의 TV만

을 구입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아예 TV를 안 보고 사는 수밖에

없다. 반대로 기업의 입장에서는 가격이나 품질, 고객서비스 등을

두고 경쟁할 상대가 없으니 땅 짚고 헤엄치는 격이다. 그 독점적

이익을 누리기 위해 서로 대리점을 따려는 업자들끼리의 경쟁은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소비자의 이익과는 무관한‘그들만의 경쟁’

이다.

정치라는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의

선출공직을 독점하는 상황에서 상품의 질(정책이나 입후보자의

자질)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 기업(정당)의 대리점 판권(공천)

을 따내기만 하면 성공이 보장된다. 그래서 예선(당내의 공천경

쟁)이 훨씬 치열하고 막상 본선(선거)은 싱겁게 끝나버리는 기이

한 현상이 되풀이 된다. 물론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

(유권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우리 전라북도의 경우 11명의 국회

의원 중 무소속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주당 소속이며, 도지사

부터 시장·군수, 도의원, 시·군의원들 대다수가 민주당 소속이

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민의 다양한 정치적 요구가 정치 역에 반

되고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 사이의 비판과 견제기능이 제대

제4부·세상을바꾸는힘있는진보를위하여 239

Page 240: 이광철자서전 '함께'

로 작동할리 만무하다.

이러한 정치적 독과점을 유지·강화하는 핵심적인 기제는 무

엇보다도 소선거구-단순다수대표제 방식의 현행 선거제도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와 같이 승자독식의 현행선거제도가 강력한 지역

주의와 결합하는 경우, 선출공직에 출마하는 모든 정치인들은 자

신의 이념적 지향이나 정치적 소신과 무관하게 해당 지역을 정치

적으로 독과점하고 있는 정당에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실제로

내가 제17대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할 당시에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호남지역의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 중에는 한나라당 못

지 않게 보수적인 인사들이 적지 않았고, 반대로 남에 지역구를

둔 한나라당 소속의 의원들 중에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합리적이

고 개혁적인 성향의 인물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선거제도개혁은 정치혁신의 핵심적 요소이다. 다양한

정치세력의 공존과 경쟁을 원천적으로 제약하는 현행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방식을 개혁하고 비례대표의석을 획기적으로 늘

리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어느 신진 정치세력이 전국적으로 고

르게 10% 정도의 지지율을 얻었다고 치면, 현행 선거제도에서 이

정당의 국회의석은 전체 299석 중 기껏해야 4~5석에 불과하게 된

다. 10%의 지지율로 지역구선거에서 당선자를 내기 어렵고 현재

의 비례대표 몫 의석 45석 중에서 지지율에 따라 배분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10%의 지지를 받은 정당이라면 10%의 의석을 확보하

는 것이 옳은데, 실제의 국회의 의석 점유율은 1.5%남짓이 되는

함께240

Page 241: 이광철자서전 '함께'

셈이므로 이 정당을 지지한 국민의 의사는 제대로 대의(代議)되지

못하는 셈이다. 즉 과소대표성의 문제가 발생하며 소수파정치세

력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한 제도이다.

우리 정당정치를 혁신할 수 있는 대안으로 학계와 시민사회에

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것이 이른바‘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

제’이다.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Personalisierte

Verhaeltnisswahl)의 특징은 지역구 의석수와 비례대표 의석수를

동일하게 하고 정당지지율과 의석배분율을 일치시킨다는 점이다.

독일 연방의회의 전체 의석 656석 중 328석을 지역구 1위 득표자

로 하고 나머지 328석은 각 정당의 지역구 당선자수와 전국 득표

율의 차이만큼 배분한다. 즉 각 정당의 지역구 당선자수와 전국득

표율의 차이를 비례대표 의석을 통해 보정해줌으로써 어느 정당

이나 국민이 지지한 만큼 의석수를 갖게 하는 방식이다. 단순다수

대표제(승자독식) 방식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제도로 꼽힌다. 그런데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수를 1:1로 동일하

게 하려면 현행 299석(지역구 245+비례대표 54)인 국회 전체의석

수를 490석으로 늘리거나 지역구 의석수를 150석 미만으로 줄여

야 한다. 우리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높지 않은 상태에서 국

회의 의석수를 대폭 늘리기가 쉽지 않고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자

신의 기득권을 포기해가며 지역구 의석수를 줄일 리가 만무하다

는 점이 이 제도 도입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비례대표제의 강화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결선투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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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과반수 득표자가 없는 경우 상위 1, 2득표자를 상대로 2차

투표를 실시하는 것이다.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는 대부

분 결선투표제도를 시행한다. 심지어 신생독립국이나 마찬가지이

며 극심한 내전 상태인 아프가니스탄에도 결선투표제가 있다. 우

리나라처럼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으면서 결선투표제가 없는 국

가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이다. 결선투표가 없다보니 이른바‘사

표방지 심리’가 강하게 작동하여 소수정파는 존립을 위협받고 선

거 때만 되면 정치공학적인 후보단일화론이 난무한다. 다양한 정

치세력이 공존하고 상생하면서 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연합할

수 있는 정치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결선투표제의 도입을 진지하

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선거제도의 개혁이 국회의원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점

이다. 우리 헌법은 국회의원의 선거구와 선출방식을 법률로 정하

도록 하고 있는데, 그‘법률’을 만들거나 바꾸는 일이 바로 국회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2012년에 치러지는 제19대 총선에서 지역주

의에 기대어 정치를 독과점하고 있는 거대 정당들의 담합구조를

깨고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의미 있는 수의 의석을 확보하여야 하

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스웨덴에서본진보정치의힘, 배려와소통

우리에게‘노벨상의 종주국’으로 잘 알려져 있는 스웨덴은 유

럽의 북서쪽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있는 나라로서 약 9백만 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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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한반도의 두 배쯤 되는 면적에 살고 있다.

2008년 5월‘2008 한국 전통한지 페스티벌’행사로 스웨덴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스톡홀름시의 초청으로 열렸던 한지 페스

티벌은 전통한지공예작품들과 한지를 응용한 실생활용품들이 전

시되고 한국문화 체험행사도 다채롭게 마련되어 현지인들의 높은

관심과 호응을 얻었다. 이 행사로 그동안 한국문화를 중국이나 일

본문화의 아류쯤으로만 여겨왔던 스웨덴 사람들이 한국문화와 우

리 전통한지의 우수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스웨덴 국 방송인‘TV4’등 현지 언론의 평가이다. 특히 깊은 멋

과 실용성 및 자연친화성을 두루 갖춘 한지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

응이 뜨거워서 향후 우리 전통한지의 유럽시장 진출 가능성이 확

인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 다.

나는 이 행사의 조직위원장을 맡아 스웨덴에 머물면서 이 나

라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스웨덴 정치를 직접 보

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첫째,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사회복지제도이다. 의료비

전액이 의료보험에서 지급되는 것은 물론이고 육아부터 성인이

된 이후의 평생교육까지 대부분 국가가 제공하는 무상교육으로

이루어지는 등 포괄적인 사회복지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본래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국 노동당이 내걸었던‘요람에서 무덤까지

(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는 슬로건이 오늘날에는 스웨덴

을 상징하는 말이 된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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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렇듯 높은 수준의 사회복지제도를 유지하려면 당연히

많은 국가재정이 필요하다. 즉, 세금을 많이 거두어야 한다. 고소

득자는 최고 59%까지 소득세를 내야 하고 고용주는 자신이 피고

용인에게 지급하는 급여에 대해 32~33%의 사회보장세를 별도로

납부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납세자의 저항은 거의 없다고 한다. 고소득

자일수록 세금을 많이 내서 국가재정에 기여하고 국가는 그 돈으

로 서민의 복지를 책임진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인 것이

다. 우리나라에서 기득권층 일부가 종부세 위헌 논란을 야기하고

정부가 앞장서서 감세를 추진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두 번째는 정치에 대한 국민의 높은 관심과 신뢰다. 입헌군주

국으로서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스웨덴의 의회는 리크스다

그(Riksdag)이다. 이 리크스다그를 구성하는 의원이 총 349명이

니 의원 한 사람당 평균 3만 명 미만의 국민을 대표하고 있는 셈인

데, 이들 의원들은 대부분 대중교통이나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걸

어서 의사당에 출근한다. 의원 2명에 비서 1명만이 배정되어 있

어 의원이 직접 전화를 받거나 우편물을 발송하기도 한다. 오죽하

면 과로를 이기지 못해 3년 임기의 국회의원직을 중도에 사퇴하

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웨덴에서 정치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은 비단 정

치인들의 근검함이나 청렴성 때문만이 아니다. 정쟁과 힘의 논

리가 아닌 소통과 협력의 정치라는 것이 보다 본질적인 이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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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매년 여름에 열리는 알메달렌 주간

(Almedalen Week)이라는 정치축제이다. 이 행사에서는 130석의

의석을 가진 집권당부터 소수정당, 노동조합이나 NGO는 물론 일

반시민까지 한 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국가의 미래비전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토론한다. 이러한 토론

의 성과가 실제 국정에 반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듯 정치가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다 보니

주요 선거의 투표율이 평균 82%에 이를 정도이다. 정치권에 몸담

으면서 우리 정치권의 실상과 그로 인한 국민의 뿌리 깊은 불신을

몸소 겪은 바 있는 나로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웨덴인들의 공동체에 대한 생각은 우리와는 정말 다르다.

스웨덴 사람은 적어도 1개 이상의 정당이나 정치조직, 노조, 시민

단체, 종교단체, 이익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뿐

만 아니라 동네모임, 지역모임, 학부모모임, 독서모임, 봉사단체,

합창단 등 각종 단체에 대부분 가입돼 있다. 1,0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스웨덴의 전국합창단협회 소속 합창단의 500여 개나 된다.

교회합창단은 무려 6천 개가 넘는다.

조직화 수준과 공동체주의 문화가 특별하다. 조직과 공동체

문화속에서 살다 보니 대화와 협의, 토론과 합의, 상대에 대한 존

중과 배려가 몸에 뱄다. 한국 사람들이 매일 야근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반면 스웨덴 사람들은 조직이나 모임에 나가 토론하고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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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스웨덴의 이런 문화 형성에는 독서가 바탕이 되고 있는 것 같

다. 스웨덴 국민 가운데 1주일에 책 한권 이상 읽는 사람이 여성

은 50%, 남성은 30%에 이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성인의 연

간 독서량 평균 11권과는 크게 대비된다. 책을 통해 남의 생각이

나 삶, 다른 의견을 접하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지식과

상상력을 넓히고 스스로 돌아보게 되는 힘이 길러진다. 이런 문화

가 가정에서는 물론 사회 생활에서 이성적인 대화를 가능케하고

합리적인 사고와 대화와 협상과 합의를 가능하게 해주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런 문화의 힘으로 스웨덴 복지 정책의 핵심 정신이라고 할

만한‘국민의 집’이념이 싹텄다. ‘국민의 집’이념은 1910년대부

터 1976년까지 60년 남짓 동안 집권했던 스웨덴 사민당이 한결같

이 공유하고 실천했던 정치철학으로 그 틀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소외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한 집에서 골고루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민당은 사유재산 폐지가 아니라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한‘국민

의 집’을 함께 건설하자는 연대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바로 자본

주의정당이나 농민, 중산층과의 정치적 대화와 협조를 가능하게

했다. ‘국민의 집’은 빈곤층과 노동계급만을 위한 복지 정책이 아

니라 전 국민에 대한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복지 제도를 마련한 스

웨덴 특유의 복지국가 모델을 이루는 근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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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스웨덴 사민당이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국유화 같은, 상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리한 정책은

되도록 지양하면서 모든 시민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복지정책을

하나 하나 추진했다. 필요할 때는 과감한 양보를 하면서 결국 시

스템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착시켜나간 것이다. 사민당

은 지난 100여년 동안 소걸음으로 끈기있게 갖가지 복지 제도를

도입하고 완결시켜나갔다. 그 제도를 보면 유치원 보조금, 완전

한 보통₩평등 선거권, 출산휴가와 휴가비, 아동연금, 노령연금, 대

학 등록금 무료, 전국민 의료보험, 실업보험, 임대주택 보편화 등

이다. 모두 우리가 실시하고 있거나 발전시켜나가려고 하는 것들

이다.

국가가 서민의 삶을 책임지고 보살피는 사회복지제도, 다수파

는 소수파의 주장을 경청하고 소수파는 다수파에 협력하는 정치

풍토, 이러한 배려와 소통의 정신이 9백만 인구의 스웨덴을 강소

국(强小國)으로 만드는 진정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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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1월 02일 초판 인쇄

지은이 이광철

펴낸곳 두인출판사

디자인 김현주₩ 이미진

교열 박선희

사진 박광철

등록 2000년 9월 20일 (제99-6호)

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무삼지2길 10-3

전화 (063)247-5425 팩스 (063)247-5427

ⓒ 이광철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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