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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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상 이 미 소 | 아프리카보다 더 멀어지면 안 되니까요.•09

금 상 허 재 희 | 어린이 세계시민의 여름방학과제•12

은 상 임 다 은 | 나눔을 실천할 줄 아는, 그런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작은 노력•16

동 상 이 연 우 | 우리 가족과 KOICA는 마음 부자•21

장려상 이 예 건 | “에피아”들에게 희망을•26

추 덕 인 | 해외 봉사가 가르쳐 준 것•29

김 예 은 | 지구 마을, 우리는 모두 소중해요.•32

제17회 글짓기 모음집

차 례

초등부

대 상 강 보 빈 | 기부가 아닌 선물•37

금 상 정 문 정 | 나에게는 아직 31,527원이 남아 있습니다.•42

은 상 김 호 수 | 시계토끼와의 60분 여행•46

동 상 박 은 선 | 개발도상국과 풍요로운 지구촌•50

장려상 정 혜 린 | 굶주림 대신 희망을!•53

김 가 현 |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57

김 대 희 | 나는 행운아다 - 7박8일간의 네팔 소통여행 - •63

중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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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상 강 호 종 | 굶주림 없는 세상 : 꿈이라는 보물 찾기•69

금 상 김 다 원 | 그 여름 우즈베키스탄, 희망을 찾다•76

은 상 이 정 원 | 당신의 꿈을 응원합니다•80

동 상 홍 수 찬 | 해외봉사를 통해 배운 소중한 교훈•86

장려상 최 해 리 | 지금도 진행 중인 무모하지만 따뜻한 세상의 가능성을 보고 싶은

나의 끝없는 도전•94

전 지 원 | 나에게 찾아온 기적•101

이 현 정 | 내가 했던 착각•105

더불어 사는 우리는 세계시민

고등부

허재희, 신백현초등학교 | 어린이 세계시민의 베트남 견학•113

강보빈, 정천중학교 | 베트남,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119

정문정, 강북중학교 | 더 밝아질 아이들의 미소를 위해•125

강호종, 브렌트국제고등학교 |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촛불•131

김다원, 용인한국외대부설고등학교 | 미소의 나라 베트남 속 KOICA를 보다•139

정민주 교사, 신백현초등학교 | 베트남 코이카 사업현장 견학 소감문•145

황현주 교사, 정천중학교 | 베트남 속의 베트남•151

베트남, 국제개발협력 현장 견학

제17회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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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부 대상이 미 소•아프리카보다 더 멀어지면 안 되니까요.

초등부 금상허 재 희•어린이 세계시민의 여름방학과제

초등부 은상임 다 은•나눔을 실천할 줄 아는, 그런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작은 노력

초등부 동상이 연 우•우리 가족과 KOICA는 마음 부자

초등부 장려상이 예 건•“에피아”들에게 희망을

추 덕 인•해외 봉사가 가르쳐 준 것

김 예 은•지구 마을, 우리는 모두 소중해요.

초 등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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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보다 더 멀어지면 안 되니까요 09

아프리카에는 두 개의 콩고가 있는데 나는 수도 이름을 앞에 붙여 킨샤사 콩고와 브

라자빌 콩고라고 부른다. 2014년 나는 킨샤사 콩고에서 살고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

면 2014년 2월에 가족과 함께 이곳에 와서 이제 겨우 6개월이 넘었다.

가끔 흑인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온통 흑인만 가득한 곳이 나에게는 정말 낯설고, 게

다가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 케냐, 남아공과 같이 알만한 아프리카도 아니었다. 한국

의 친구들이 콩고가 무엇으로 유명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콩고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

도 없이 이곳으로 왔다. 그런데 최근에 나를 아는 모든 친구들이 나를 기억해 낼만한

뉴스가 아주 크게 보도되었다. 그건 바로 서아프리카에서 발생했던 에볼라 바이러스가,

진원지인 킨샤사 콩고에서도 발생했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콩고에서 인터넷으로 밖에

볼 수 없는 한국 뉴스에서는 마치 에볼라가 한국에까지 전염되어 갈 것처럼 난리법석

이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킨샤사에서도 그나마 잘 사는 아이들이 함께 수업을 듣는다. 아

시아 학생이 이 학교엔 나 밖에 없어서 처음에는 친구들이 나를 반겼지만 조용한 성격

과 서투른 영어 때문에 친구 사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상냥하고 말괄량이 같은 콩고

의 흑인 친구 넬리는 쉬는 시간마다 그런 내게 다가와서 팔짱을 끼고 얼굴을 갖다 대며

얘기했고 이런 행동이 불편하면서도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룹 활동

이 있을 때마다 넬리와 짝이 되는 게 편했고 한 학기를 마칠 때까지 많이 의지하게 되

아프리카보다 더 멀어지면 안 되니까요. 킨샤사

초등부 대상

이 미 소, 킨샤사국제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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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긴 방학이 끝났고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면서 나는 학교생활에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고 오랜만에 만난 넬리도 너무 반가웠다. 우리는 여전히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웃

으며 잘 지냈다. 그런데 2주 후인가 서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에볼라 바이러스는 걷잡을

수 없이 전염되었고 결국 내가 살고 있는 킨샤사 콩고까지 번지고 말았다. 만나는 사람

마다 에볼라에 관한 얘기였는데 그래도 학교 선생님들은 에볼라가 콩고 북부지역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밀림을 지나야 하는 수도 킨샤사까지는 전염되지 않을 거라고 하셨

다. 하지만 한국 기사에 실린 에볼라는 마치 감기처럼 쉽게 나에게 옮겨질 것 같았다.

한국의 에볼라 뉴스를 접한 후부터 나는 마치 콩고 친구들의 호주머니 속에는 사탕 같

은 에볼라 바이러스가 한 주먹씩 들어 있는 기분이어서 한동안 흑인 친구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넬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과학수업 시간에 선

생님이 그룹을 묶으셨다. 나는 얼른 스웨덴 출신인 세실 옆에 가서 앉았다. 넬리가 날

힐끔 보았다. 나는 넬리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지만 직접 거절은 못하겠고 알아서 피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일부러 그렇게 몇 번을 피했더니 넬리가 나에게 서운한 표

정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넬리가 한 발짝 다가오면 나는 웃는 얼굴로 한 발짝 물러나면

서 “왜?”라고 물었다. 그러자 까만 얼굴 때문에 더 하얗게 보이는 넬리의 눈에 눈물이

맺혔고 나와 함께 옆에 있던 세실이 넬리를 조용히 안아주며 토닥이고 달랬다. 그 순간

내 온 몸에 찌릿찌릿 바늘이 돋아나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춥고, 부끄러웠다.

한국 학교에서는 마치 착한 학생인양 따돌림 받던 친구를 감싸주던 내 모습이 어느

새 이곳에서 가해 학생으로 변해있었다. 마음이 복잡하고 괴로워서 퇴근 후 집으로 돌

아오신 아빠께 여쭤 보았다. 에볼라가 어떤 병이기에 한국 뉴스에서는 난리가 난 것인

지, 그리고 유럽과 미국 친구들은 담담한데 나는 왜 겁이 나서 피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의 창피한 마음을 조심스럽게 아빠에게 열어 보였다.

아빠는, 현지에서 발생한 상황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항상 대비는 해야 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라고 하시며, 하지만 에볼라가 전염성이 높

지 않아 개인위생만 잘 지키면 괜찮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프리카와 에볼라에 대해

잘 모르면서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고 걱정하셨다. 특히 아프리카 사람들을

기피하는 일부 한국 사람들의 정서는 위험하며 지구촌 국제사회에서 오히려 기피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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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보다 더 멀어지면 안 되니까요 11

이 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아빠의 말씀이 좀 어렵지만 이해가 된 것 같다.

TV나 인터넷을 통해 물과 식량이 부족한 아프리카의 불쌍한 아이들을 보며 울고 그

랬던 나는 한국에 두고 온 모양이다. 당장 내 옆에 있는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흑인

친구도 못 안아주는 내 자신이 창피했다. 어쩌면 전염병을 핑계로 무의식중에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일 당장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넬리를 안아주어야겠다. 그리고 나와 같이 공부하는

현지 친구들에게서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Korean이다”라고 대답하게 만들어야겠다.

아직까지 아시아인을 보면 “china?”라고 묻는 아프리카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이미

지를 물어보면 항상 내 기대보다 나은 적이 없다. 온 세계가 한류 열풍이라는데 아프리

카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한 참 먼 나라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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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게 뭐야? 정말 멋지다!”

“DR콩고? 콩고민주공화국? 이런 건 다 어디서 배웠어?”

“DR콩고 퀴즈? 나도 풀어볼래!”

나는 여름방학 과제물로 ‘지구촌 신문 – DR콩고편’을 만들었다. 방학 중 코이카 지

구촌체험관에서 배운 내용을 신문으로 만들어 본 것이다. 내가 만든 지구촌 신문은 친

구들 사이에 반응이 정말 좋았다. 초등학생 ‘어린이 세계시민’의 작은 실천, 대성공!

지난 여름방학, 나는 엄마와 동생 그리고 친구 수민이네 가족과 함께 코이카 지구촌

체험관에 갔다. 예쁜 숲 속 길을 따라 전동차를 타고 올라가 도착한 지구촌체험관에서

는 아프리카의 ‘DR콩고’라는 나라에 대한 전시가 한창이었다. 우리는 전시관을 한 바

퀴 둘러보았다. 재미있는 그림과 사진들, 독특한 가면과 악기들, 색색깔의 옷들이 전시

되어 있었다. 잠시 후 전시관 선생님께서 어린이 친구들을 모아 전시관을 둘러보며 설

명을 해 주시는 도슨트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우리는 DR콩고를 왜 DR콩고라고 부르는

지, DR콩고는 어디에 있고 얼마나 큰지, 자연환경은 어떤지, 어떤 동물이 사는지, 어떤

음악과 미술작품이 있는지, 어떤 천연자원이 있는지, DR콩고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

고 어떤 음식을 먹으며 생활하는지에 대해 배웠다. 선생님께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

명해 주시니, 혼자 볼 때는 몰랐던 것들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도슨트 설명이 끝나고

엄마가 가로세로 낱말 퍼즐 종이를 주셨다. 원래 중고등학생 언니 오빠들이 하는 건데,

한 번 보고 할 수 있는 것만 해 보라고 하셨다. 나와 내 친구 수민이는 이런 미션을 정

어린이 세계시민의

여름방학과제

초등부 금상

허 재 희, 신백현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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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세계시민의 여름방학과제 13

말 좋아한다. 우리는 그 종이를 들고 전시관을 돌아다니며 문제들을 풀어 갔다. 어려운

문제들도 있었는데 수민이와 힘을 합쳐 전시관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펴보니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정답을 모두 찾아가자 엄마들은 깜짝 놀라셨다. 엄마들한테도 어려

운 문제들이 있는데 우리가 답을 다 찾아냈다며 정말 기특해 하셨다.

집에 돌아와 엄마는 오늘 보고 배운 것 중에 어떤 것이 제일 기억에 남는지 내게 물

으셨다. 나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세계시민’이라고 대답했다. ‘세계시민’은 모두가 행복

한 지구촌을 만들기 위해 다른 나라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

해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코이카 같은 곳에서는 어려운 나라에 학교나 병원

을 지어주고, 해외봉사단을 보내서 도와주고, 그 나라 사람들을 우리나라에 초청해서

교육을 시켜주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기 때

문에, ‘세계시민’으로서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엄마는 다른 나라들

에 대해 관심을 갖고 학교에서 또 지구촌체험관 같은 곳에서 열심히 보고 배우는 것이

‘어린이 세계시민’으로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다. 그 때 문득 며칠째 무얼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던 여름방학 과제가 떠올랐다.

“엄마! 그럼 내가 지구촌체험관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신문으로 만들어서 방학숙제

로 내면 어때요?”

“정말 좋은 생각이다! 그런 게 바로 ‘어린이 세계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며칠 후, 우리 가족은 코이카 지구촌체험관에 다시 갔다. 신문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첨부1) 지구촌 신문 - DR콩고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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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모으기 위해서다. 엄마와 나는 전시관을 다시 한 번 둘러보며 어떤 내용을 신문

에 실어야 할지 의논하고 중요한 내용은 사진으로 찍었다. 전시관 선생님께 부탁 드려

코이카 지구촌체험관 안내장도 우리 반 친구 수만큼 얻어왔다. 집에 돌아와 큰 종이에

“지구촌 신문”이라고 신문 이름부터 써서 꾸몄다. 그리고 DR콩고에 대해 내가 친구들

에게 알려주고 싶은 내용을 써서 신문에 붙였다. 엄마는 신문에 들어갈 사진들을 프린

트해 주셨고, 나는 사진들을 오리고 붙였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신문 내용을 읽어보며

‘DR콩고 퀴즈’를 만들었다. 내가 체험관에서 가로세로 낱말퍼즐을 풀며 신나고 재미있

었던 것처럼, 친구들도 이런 퀴즈가 있으면 신문내용을 더 재미있게 그리고 자세히 읽

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퀴즈 문제를 우리 반 친구 수만큼 프린트하고 접어서 지

구촌체험관 안내장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나는 하루 빨리 내 방학과제를 친구들에

게 보여주고 싶어서 개학날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마음이 너무 설레였다.

드디어 개학날이 되었다. 내가 만든 지구촌 신문을 본 친구들의 반응은 정말 대박이

었다. 인기가 너무 많아서 서로 보려고 잡아당기는 바람에 구겨지고 찢어질 정도였다.

특히 친구들은 ‘핸드폰은 고릴라를 슬프게 해’라는 기사에 관심이 많았다. DR콩고에서

많이 나는 ‘콜탄’이라는 광물은 휴대폰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원료인데, 사람들이 콜탄

을 얻기 위해 DR콩고의 숲을 마구 파헤쳐서 고릴라들의 살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반 친구들은 아직 대부분 휴대폰이 없어서 휴대폰을 가진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엄마한테 사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 친구들에게 자

신 있게 말했다.

“얘들아, 엄마가 휴대폰 안 사주신다고 너무 속상해하지 마. DR콩고에 사는 고릴라

들한테는 정말 잘 된 일이잖아! 우리가 고릴라들을 지키고 있는 거야!”

나는 친구들에게 코이카 지구촌체험관 안내장과 퀴즈 문제를 나누어 주었다. 서로

먼저 퀴즈의 정답을 찾으려고 신문에 모여들어서, 나는 친구들이 줄을 서서 순서대로

신문을 볼 수 있도록 정리해 주었다. 많은 친구들이 열심히 신문을 읽고 문제를 풀었

다. 나는 친구들이 푼 퀴즈 문제를 채점해 주었다. 또 코이카 지구촌체험관에 가면 DR

콩고에 대해 더 많은 재미있는 것들을 볼 수 있으니, 가족들과 함께 꼭 가보라는 얘기

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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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세계시민의 여름방학과제 15

처음에 ‘세계시민’이 되는 것은 내게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직

어리지만, 초등학생 어린이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코이카 지구촌체험관에서 하는 다른 전시들도 열심히 보고 배워서, 나중에 어른이 되

면 코이카 사람들처럼 세계를 위해 봉사하고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DR콩고 퀴즈!지구촌 신문 ‘DR콩고’편 재미있게 읽었나요?

그럼 이제, DR콩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아볼까요?

1.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대륙으로 DR콩고를 비롯한 54개의 나라가 위치해 있는 대륙은?

2. DR콩고에서 DR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영어로 쓰세요)

3. DR콩고의 수도는?

4. DR콩고의 공용어는?

5. DR콩고의 땅은 세계에서 몇 번째로 큰가요?

6. DR콩고를 흐르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강은?

7. DR콩고에 있는 활화산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용암 호수가 있는 곳은?

8. DR콩고에서만 살아가는 희귀한 동물로 다리는 얼룩말, 얼굴은 기린을 닮았으며

‘아프리카의 유니콘’이라 불리는 동물은?

9. 핸드폰을 만드는 주요 광물인 콜탄을 캐기 위해 서식지를 파괴하여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는 동물은?

10. DR콩고의 주요 식재료인 카사바를 바나나 잎에 싸서 찐 음식은?

10개 모두 맞추셨다면: 당신은 DR콩고 박사!

8~9개 맞췄다면: 참 잘했어요!

5~7개 맞췄어도: 잘했어요!

2~4개 맞췄다면: 좀 더 공부하세요!

0~1개 밖에 못 맞췄다면: 지구촌신문을 안 읽었군요!

정답은OOO 기자에게확인하세요!!!

첨부2) DR콩고 퀴즈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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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16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촌 세상에는 여러 장단점을 가진 독특한 사람들이 서

로 배려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외모가 출중한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 돈이 많은 사

람, 가난한 사람, 피부색이 밝은 사람,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 저

멀리 베트남에서 태어난 사람 등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닌 사람들 72억 명이 지구촌이라

는 쳇바퀴 속에서 쉴 새 없이 바쁘게 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지구촌에는 잘 사는 나라, 행복한 나라도 있지만 반대로 먹을 것이 없어 고통받

는 나라, 질병과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나라도 있습니다. 이제 지구촌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남을 무시하고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익뿐 만이 아니라 사람으로 당연히

힘든 사람을 도와야죠. KOICA(코이카)는 이런 힘든 나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국가

기관입니다. 그런데 코이카에서 도와주고 있는 개발도상국들에 관해서 작은 의문이 시

작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끼어 있다고 해도, 우리나라에도 아직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저의 간접적인 경험만으로도 느낄 수 있

었던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우리의 주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집 맞은편의 이층집에 살던 친구는 엄마가 안 계셨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친

구는 늘 과묵한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아직 큰 대로변을 조금만 벗어나도 달동네를 볼

수 있고, 등굣길에 마주치게 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얄팍한 외투 하나 걸치시지 않

고 파지를 줍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렇게 아직도 우리 주변의 적잖은 사람들은 불

나눔을 실천할 줄 아는, 그런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작은 노력초등부 은상

임 다 은, 부천 부곡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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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을 실천할 줄 아는, 그런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작은 노력 17

행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코이카

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불행은 보지 못하고 먼 곳의 불행만 보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찾아가는 코이카 나눔 교실’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

다. 그리고 저는, 우리나라가 왜 꼭 개발도상국에게만 도움을 주며 정작 우리나라 사람

들에 대해서는 방관적인 것인지, 어떠한 보상이 있기에 개발도상국에 그렇게까지 도움

을 주는 것인지 그런 저의 마음 속 물음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1950~1960년대 전쟁 직후 어려웠던 시절. 다른 국가들로부터 많은 도

움을 받았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먹고 입을 것이 없었고 병이 나도 지금처럼 의학과 과

학적인 기술이 발전되어있지 않아 좋은 치료는 커녕 병원의 시설도 마땅치 않은 열악

한 환경 속에서 깨끗한 치료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이야기이었습니다. 그런 불행들의 연

속 속에서 한 줄기 빛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환경에 처해 있는, 제 나이 또래의 친구들

에게 공부는 꿈과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어디에선가는 빈곤과 불평등으

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사업을 펼치

는 기구가 바로 ‘코이카’였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은주지의 이야기에 대하여 배

웠습니다. 은주지의 부모님은 콜탄 광산에서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안정적이

지 못한 환경에서 일당도 받지 못한 채 힘들게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은주지

처럼 어린아이도 음식을 만들어 팔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은주지 가족은

매일 매일을 힘든 나날들로 채워가며 고통스럽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개발도상국의 많

은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노동을 하며 너무 빠른 나이에 세상을 겪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코이카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나눔과 봉사, 헌신, 은주지처럼 어렵고 힘든 사람들

의 아픔 등은,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이기적인 아이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솔직히 학교에서 가져오는 굿네이버스 빵 저금통도 그 전날에 정신없이 채

워 넣었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코이카에 대해 알게 되었고, 코이카를 알게 된 데에는 중요한 디딤돌 역

할이 되어주었던 ‘나눔 교실’이라는 색다른 경험을 맛보았습니다. 이 나눔 교실을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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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18

하기 전의 방학 중 재미있는 경험이 될 거라는 생각만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 나눔 교

실은 이번 여름 방학 중에 운영되었던 프로그램으로 제가 ‘나눔을 실천할 줄 아는 그런

괜찮은 어른’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는 지금까지의 제 경험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이 되

어 준 것 같습니다. 제가 나눔 교실에 참여함으로써 깨닫게 된 점은 크게 나누어 두 가

지입니다.

첫 번째는 퓰리처상과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 ‘대지’의 작가로만 내 기억에 남아

있었던 미국인 작가 펄벅.

두 번째는 아프리카나 코이카가 돕는 개발도상국은 대부분이 천연자원의 수요가 높

기 때문에 지금 코이카에서 그 나라들을 돕는다면 나중에 우리나라가 발전하는 데 걸

림돌이 될 거란 어리석은 마음으로 그런 나라들은 도와선 안 된다고 생각해 왔던 것.

그런 것들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먼저 펄벅 작가에 대한 나의 인식이 확실하게 정리되었습니다. 펄벅 작가의 일생 속

에서 가장 큰 선물이자 축복이었던 그의 딸은 정신 지체 아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라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할 터인데 펄벅에게는 정신 지체장애인이었던 그녀의 아이

도 모두에게 평등한 사랑스러운 한 아이였던 것입니다. 그게 나라면 만약 내가 펄벅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더라면 나는 과연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이런 생각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더 펄벅 작가의 인권과 세계 평화를 사랑한 그 마음가짐을 존경하게 되었습

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작고 여린 힘없는 전쟁고아들 그리고 혼혈아라는 이유로 차

별 대우를 받은 아이들을 위한 ‘소사 희망원’을 설립하여 친자식마냥 돌봐 주었습니다.

누군가가 알아봐 주는 것도, 상을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펄벅은 자신을 믿고 아이들을

돌보며 발전해 왔고 지금 시대에 이르러서는 모두에게 인정받는 위인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저는 아프리카에는 천연자원이 많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코이카가 이들을 돕

는다면 나중에 우리나라의 라이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짧은 생각으로 생긴 이기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세계 여러

나라들이 우리나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 도움으로 인해서 바로 지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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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을 실천할 줄 아는, 그런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작은 노력 19

우리나라가 이룩된 것입니다. 당시에 우리에게 희망이 되어주었던 그 나라들에게 지금

우리가 다시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 줄 차례입니다.

나눔 교실에서 견학한 코이카 지구촌체험관은 우리나라가 이젠 다른 나라에도 큰 도

움을 줄 수 있는 여유와 마음을 갖춘 나라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을 모르고 생활한 것이 후회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나이가 어려 개발

도상국으로 가서 직접 그 친구들을 도울 능력은 되지 못합니다. 그래도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서 최대한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늦었지

만,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이 세 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켜 나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첫째.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

내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나지 않

고, 대한민국이라는 행복한 나라에서 태어난 국민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먹을 수 있고, 두 다리를 뻗고 비가 새 들어오지 않는 집에

서 잠을 잘 수 있는 것과 마음 편히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이미

생활이 되어버린 우리는, 이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 건

너편에선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는 아이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 항상 그 사실을 명

심하며 나의 생활에도, 공부하는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둘째.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자.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를 뜻하

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따라서 부자가 아니라고, 기부할 돈

이 없다는 이유로 나중에 신분이 더 높아지고 더 풍요로워지면 기부하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바로 지금 여기에서>라는 지식채널을 보면 신분이나 경제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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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20

에는 상관없이 기부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나의 사소한 편의만을 생각

해서 나의 사소한 도움으로 인해서 큰 변화가 생길 아픈 그들의 입장은 생각지 않고 기

부를 주저했다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내가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점은

반드시 지켜나가야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우리 학급의, 우리 가정의, DAC이 되어 물질적인 행동으로 나의 이러한

감정을 더욱더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귀찮은 마음에 실천하지

않았던 콩(해피빈) 모으기와, 굴러다니는 동전들 줍기 등의 실천으로 나의 생각을 행동

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나의 이 소박한 도움이 작은 실천이지만 큰 행복으로 조금이

라도 그 친구들에게 삶의 편의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셋째. 내게 주어진 것부터 먼저 시작하자.

남을 위한 따뜻한 봉사와 나눔. 딱히 떠오르는 생각 없이 그저 막연한 마음이 듭니

다. 하지만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에 알

맞은 방법을 강구하여 앞으로 당장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고 봉사와 나눔, 배려와 실

천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학생으로서의 의무. ‘교육’입니다. 내가 교육받은 사람이 되어 개발도상국의 가난

한 사람들을 위한 마음에서 무료 진료를 해 주는 슈바이처나 이태석 신부님 같은 의사

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교육 환경이 열악한 그곳의 아이들에게 멋진 선생님이 되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을 돕는 것은, 바로 내게 먼저 주어진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으로 하는 것이 바로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이태석 신부님처럼 그들에게 좋은

추억거리로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과거 속의 우리나라가 항상 받기만 했던 나라였음에 절망하고, 우리에게 베풀

어 주었던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에 감사하고, 현재는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큰 변

화가 있었음에 다시 한 번 감탄사를 내뱉습니다. 코이카의 발걸음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촌의 모든 불행했던 아이들 모두가 행복에 미소 짓는 그 날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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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색연필 좀 빌려줘.”

오늘도 말썽꾸러기 내 짝꿍은 준비물을 안 가져왔다. 교과서를 안 가져올 때도 있고

미술 준비물은 거의 안 가져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것을 빌려주는데, 처음에는 싫

어도 선생님이 빌려 주라고 해서 빌려줬는데 지금은 안 빌려달라고 하면 괜히 궁금해

지고 내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 이야기를 아빠에게 했더니 아빠는 지식채널을 보여

주셨다. 우리 아빠는 내가 뭘 물어보면 가끔 이렇게 지식채널을 보여주신다. 내가 본

지식채널은 ‘작은 힘’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어려운 말이 많아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을 도와주면 오히려 도움을 준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내용 같았다.

“친구에게 도움을 주면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거야.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듯이 마음

이 부자가 되는 거지. 이런 걸 ‘헬퍼스 하이’라고 하는 거야. 근데 짝을 도와줄 일이 없

으니까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픈 것처럼 마음이 배가 고파진거지.”

아빠는 밝은 웃음과 함께 나에게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한참을 하셨다. 평소 말도 별

로 안 하고 책만 보는 아빠는 나눔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나를 잡고 한참을 이야기하신

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아빠가 캄보디아와 네팔로 봉사활동을 다녀온 뒤로 변했다

고 하셨다. 재미없기도 하지만 아빠랑 오래 이야기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아빠 말

대로라면 난 내 짝궁 때문에 마음 부자가 된 거니까 날 또 놀리고 그래도 때리지 말고

우리 가족과 KOICA는 마음 부자 21

우리 가족과 KOICA는

마음 부자

초등부 동상

이 연 우, 부천 부곡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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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22

참아야겠다.

그런데 진짜 ‘마음 부자’는 내가 아니라 우리 아빠다. 아빠는 내가 6살 때부터 내 이

름으로 나보다 2살 어린 엘살바도르의 ‘아도니’에게 매달 3만 원을 후원해 주고 있다.

또 동생이 두 살 때부터 동생 이름으로 네팔의 ‘푸남’ 언니를 도와주고 있다. 할머니가

왜 ‘다른 나라 아이들만 도와 주냐고?’ 하시니까 엄마 이름으로 또 어린이재단에 기부

를 하셔서 할머니가 놀란 적도 있다. 또 바느질을 잘하시는 할머니에게 유니세프 아우

인형을 두 개나 만들어 달라고 해서 인형한테 우리 이름을 붙여서 다른 나라 친구들에

게 보낸 적도 있다. 그런데 아빠는 우리에게 말 안하고 다른 사람을 몰래 도와주는 ‘우

렁각시’는 아니다. ‘한 달에 두 번 참기’를 억지로 시켜서 아도니와 푸남 언니를 꼭 기억

하게 만든다. 내가 좋아하는 스파게티나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하면 꼭 “스파게티 먹

고 싶어? 그럼 이번 스파게티는 아도니한테 준 걸로 하고 우린 참자!”

이렇게 한 달에 두 번은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하고 아도니하고 푸남 언니에게

준 거라고 참으라고 하신다. 내가 울어도 동생이 떼를 써도 소용없다. 한 달에 두 번은

꼭 참아야 한다.

“너희들 이름으로 도와주고 있으니까 당연히 참아야지.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뭘

나눠준다는 거야?”

정말 무서운 아빠다. 엄마가 그냥 사주라고 해도 절대 안 통한다. 그래서 이제는 나

도 적응이 되어서 차라리 빨리 내가 하고 싶은 걸 말하고 참을 때도 있다. 그래서 그런

지 가끔 집으로 오는 아도니와 푸남 언니의 편지가 반갑다. 아도니는 아직도 글씨를 못

써서 맨날 자기 손만 그려서 보낸다. 하지만 처음 본 사진보다 지금은 훨씬 건강해 보

여서 좋다. 내가 두 번 참아서 이렇게 건강해 진거다. 푸남 언니도 더 예뻐졌다.

마음 부자 우리 아빠는 내가 학교에서 가져온 동전 모으기 저금통을 나보다 더 열심

히 채워준다. 또 저금통하고 같이 가져 온 CD를 함께 보면서 편지도 같이 쓴다. 아빠는

조금 더 돈을 많이 벌면 한 명 더 도와주고 싶다고 하신다. 하지만 난 절대 ‘한 달에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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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과 KOICA는 마음 부자 23

번 참기’는 안 할 거다. 이번엔 아빠 이름으로 후원을 해서 아빠가 한 번 참아야 한다.

난 유치원 때부터 아빠랑 KOICA 지구촌체험관에 갔었다. 한 번이 아니라 우리 아빠

는 시간만 나면 KOICA 지구촌체험관에 가자고 한다. 난 롯데월드에 가서 신나게 놀고

싶은데 말이다. 지금은 KOICA가 마음 부자 우리 아빠처럼, 우리나라보다 어려운 나라

를 도와주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유치원 때 나는 KOICA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아빠를 따라 간 것 같다. 지금 내 동생처럼 말이다.

유치원 때 갔던 건 지금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우리 아빠가 지구촌체험관에서 받아

온 책이며 안내장 같은 것을 다 보관하고 있어서 가끔 심심할 때 꺼내 본다. 안내장을

보니 아빠와 나는 몽골,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베트남, 북아프리카 3국, 네팔, 미얀

마, 스리랑카, DR콩고를 보고 왔다. 아빠 말로는 캄보디아, 잉카 빼고는 우리가 다 체험

했다고 하셨다. 나도 몽골전에서 먹었던 이상한 만두 ‘보쯔’와 베트남전에서 내가 직접

만든 ‘고이꾸온’ 그리고 이번 여름방학에 만든 DR콩고의 ‘모암베 소스’는 잘 기억이 난

다.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맛없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감자가 페루에서 왔다고 들

었던 기억도 난다. 기념품으로 산 전통 목걸이는 지금도 자주 쓴다. 그리고 앨범을 보

면 우리 아빠는 지구촌체험관에서 내 사진을 엄청 많이 찍어 놓았다. 전통의상을 입은

모습, 음식 만들기를 하는 모습, 설명을 듣는 모습 등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사진 속에 다 담겨져 있다. 사진을 보면서 아빠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덧

나는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 되곤 한다.

이번 여름방학은 KOICA 지구촌체험관을 두 번이나 갔다. 한 번은 아빠랑 모암베 소

스 만들기를 하러 갔었고 또 한 번은 학교에서 나눔 교실이 열려 참가했는데 또 KOICA

를 간 것이다. 같이 갔던 언니, 오빠들은 KOICA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또 모암베 소

스를 만드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찾아라, DR콩고의 보물’을 했다. DR

콩고는 자원이 많은데 특히 내가 사용하는 핸드폰에 꼭 필요한 콜탄이 대부분 DR콩고

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콜탄으로 부자가 될 수 있는 나라가 이 콜탄을 판 돈으로 무

기를 사고 전쟁만 하고 있다고 한다. 나처럼 어린 아이들도 학교에서 공부하는 대신 총

을 들고 싸워야 한다고 해서 마음이 아팠다. 마지막에는 십자말풀이를 했는데 내가 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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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24

리 맞춰서 언니 오빠들이 놀랐다. 사실 나는 한 번 설명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런 거다.

나눔 교실에서 ‘펄벅 기념관’도 가고 ‘척 피니’같이 하루에 10억씩 기부하는 사람도

지식채널로 봤다. 그리고 KOICA에 대해서 더 많이 배웠다. 특히 ODA(공적개발원조)에

대해서 배웠는데 아빠와 함께 지구촌체험관에 갔을 때마다 봤던 단어였다. 내가 이해

하고 있는 ODA는 옛날 우리나라가 어려웠을 때 다른 나라들이 학교 만들어 주고 기술

도 가르쳐 줘서 지금 잘 사는 것처럼 지금 힘든 나라들에게 우리나라가 병원, 학교, 도

로 같은 것을 지어줘서 우리나라처럼 그 나라도 잘 살게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발표했더니 칭찬도 받았다. 그러고 보니 KOICA는 우리 아빠보다 더 큰 마음 부자다.

도와주는 나라가 30개도 넘는다. 도와주는 데 사용되는 돈이 다 세금이라고 하니 우리

나라 사람들 모두 마음 부자인 것 같다.

아빠랑 어렸을 때부터 KOICA도 가고 나눔 활동을 많이 해서 이번 나눔 교실에서 나

는 스타가 되었다. 언니 오빠들이 처음에는 나랑 같은 조 안 하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나랑 같은 조가 되려고 했다. 이게 다 마음 부자 아빠 덕분이고 내가 한 달에 두 번을

잘 참아서 행운이 찾아온 것 같다.

집에 와서 엄마, 아빠한테 나눔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자랑했다. 그리고 KOICA에서

받아 온 안내장을 아빠가 모아놓는 파일에 꽃아 주었다. 나는 지금 국토교통부 어린이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데 9월에는 지구촌체험관을 이달의 현장탐방으로 기사를 작성

할 것이다. 내 기사를 보고 많은 친구들이 지구촌체험관에서 재미있게 체험도 하고 마

음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조금은 KOICA에 가는 것이 재미있고 좋다. 물

론 롯데월드 가는 것이 더 좋지만, KOICA에 갔다 오면 내가 시험 봐서 100점 맞은 것

처럼 뿌듯하다. 아마 마음 부자 우리 가족과 함께 한 달에 두 번 참기를 해서 기부도 하

고 인형도 만들고 나눔을 실천해서 그런 것 같다. 또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더 큰 마음

부자가 되는 KOICA가 낯설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우리 딸 중학생이 되면 청소년 블로그단 하고 고등학생이 되면 해외 연수 사업 도

우미 하고 우리 아들은 국제협력요원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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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과 KOICA는 마음 부자 25

이런 아빠의 소망대로 우리 가족은 앞으로 KOICA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함께 마음

부자가 될 것이다. 다음은 또 어떤 나라를 경험할지 살짝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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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26

에피아는 터벅터벅 농장을 향해 무거운 발

걸음을 옮겼다. 어제 자신이 맡은 일을 다 하

지 못해 저녁식사를 거른 터라 몸이 잘 가누어

지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의 사정도 마찬가지

였던지 오늘따라 도통 속도가 나지 않았다. 숙

소에서 카카오 농장까지는 반도 채 가지 않았

는데 벌써 어슴푸레하게 동이 터 오자, 감독관

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재촉했다.

카카오 농장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자 감독관은 오늘 딸 카카오의 양을 정해 주고

서는 에피아를 카카오 농장 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에피아는 능숙하게 카카오를 따

다가 문득 부모님 생각이 떠올라 카카오를 손에 쥔 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일곱 살

때 납치당해 이곳으로 끌려온 후 6년 동안 매일 자신의 하루 일과는 같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숙소에서 카카오 농장까지 먼 거리를 걸어온 후 농장에서 카카오를 따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곤 했다.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할 때에는 밥조차 굶기 일쑤였다.

이젠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조차도 가물가물했다. 가까스로 한 단어가 떠올랐다.

선생님. 하지만 그런 단어들은 더는 소용이 없게 되었다. 에피아는 그런 것을 꿈꿀 수

조차 없는 처지였다. 아니, 농장에서 일하는 아이들 모두가 그랬다. 탈출하려던 아이들

“에피아”들에게 희망을

초등부 장려상

이 예 건, 서정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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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아”들에게 희망을 27

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아이들은 족족 다시 붙잡혀 왔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죽거나 심한 매질을 당했다.

“당장 일하지 못해!”

감독관 하나가 몽둥이로 자신의 등을 내리치자 에피아는 얼른 카카오 열매를 내려놓

았다. 그래, 중요한 건 일단 배를 채우는 것이었다. 감상에 빠질 시간 따윈 없었다. 에

피아는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얼마 전, 코트디부아르의 카카오 농장에서 자행되고 있는 어린이 노동 착취에 대한

책을 보면서 머릿속에 그려 본 카카오 농장 소녀의 모습이다. 나와 같은 지구촌에 살

고, 나와 같은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을 나와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그토록 비참

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책이나 TV 프로그램, 인터넷 등을 통해 알게 되면서, 내가 얼

마나 안이하고 무지했는지를 깨닫게 되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도 코트디부아르의

카카오 농장에서는 수많은 어린 에피아들이 꿈을 가질 자유조차 박탈당한 채 노예와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다. 믿고 싶지 않고 믿을 수도 없지만 이 아이들은 때로는 먹을

음식도 없이 하루 종일 힘들게 카카오 따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지구촌 곳곳에 또 다른 에피아들은 얼마든지 있다. 시에라리온에서는 약 7,000여 명

의 소년병들이 어른들이 공급하는 마약과 술, 담배에 취해 살인과 같은 용서받을 수 없

는 죄를 저지르고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세계에는 7억 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18세 이전에 결혼하며 그 중 2억 5천만 명은 15세 이하의 어린 나이

에 결혼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또한, 파키스탄에서 UAE의 낙타 경주 기수로 이용되도

록 팔려나간 4~7세의 소년들은 체중을 감량하기 위해 하루에 20~30차례씩 머리가

물속에 처박히거나 15~20번 전기 충격을 받고 있다. 이 수많은 아이들의 인권은 누

가, 어떻게 보호해 주어야 할까? UN 아동권리협약에는 생존과 보호, 그리고 발달의 권

리가 명시되어 있지만, 이렇게 착취당하고 유린당하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국제조약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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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28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나 유니세프, 월드비전, DAC, 세이브더칠드런, 그리

고 굿네이버스와 같은 구호 단체들이 수십만 명에 달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어린아

이들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다. 하지만 고통받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아직은 어린 초등학생이고 힘도 미약한 나이지만

그들을 위한 도움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벅차고 뜨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물론 나와 같은 초등학생들이 거액의 돈을 기부하거나 해외에 나가 봉사활동에 참여

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어 ARS를 통한 소액 기부는 쉽고 편리할 뿐만 아니라 초등학생도 부담없이 함께 참

여할 수 있다. 또한 국제적 구호단체를 통해 고통받는 아이들을 정기적으로 후원할 수

도 있고, 학교에서 나누어 주는 사랑의 빵 저금통에 돈을 넣는 것도 큰 보탬이 될 것이

다. 하지만 단순히 이러한 금전적인 기부만이 도움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뜬 털모자

하나는 사막의 밤 추위에 떨고 있는 어린이 하나를 살리는 밑거름이 될 수도 있고, 공

정무역 초콜릿을 구매함으로써 카카오 농장에서의 어린이 노동 착취를 근절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SNS나 유튜브, 글짓기 대회를 통해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실태를 낱낱이 밝히고 고발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에 관해 관심

을 가지고 개선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빚이 있다. 누가 갚으라고 강요하지도, 매번 들먹이지도 않지만, 꼭 갚아

야 하는 빚이다. 우리나라가 빈곤한 처지에 놓여 있었을 때 우리나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원조해 주었던 다른 나라들의 도움이 바로 그것이다. 독립 후 수십 년간 세계

곳곳에서 보내주었던 도움과 지원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지도 모른

다. 이제는 우리가 진 빚을 갚을 때이다. 우리나라의 한강의 기적과도 같은 놀라운 발

전이 지구촌의 가난한 나라들에서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에피아는 코트디부아르에서, 나는 이곳 대한민국에서 미래에 선생님의 꿈을 이루어

칠판 앞에 서서,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에피아와 나, 그리고 지구촌의 아이들 모두 사랑받으며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소중한 꿈을 이루기를, 그리고 그들 모두 행복해지기를 소망한다.

Page 30: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해외 봉사가 가르쳐 준 것 29

3년 전 여름방학, 부모님을 따라 동생과 함께 처음으로 해외봉사를 가게 된 곳은 캄

보디아였다. 처음에는 그냥 여행가는 기분으로 설레고, ‘무엇을 하며 놀다가 올까?’하

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날씨가 많이 더우니까 힘들더라도 잘 참아달라

는 것과 음식과 잠자리가 불편하더라도 며칠만 견디어 내라고 부탁하셨다. 그렇게 나

의 첫 해외봉사는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시작되었다.

캄보디아는 생각보다 많이 더웠고, 더러웠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이지만 학

교에 다니지도 않았고, 신발도 신지 않았고, 많이 낡은 옷들을 입고 있었다. 심지어 옷

을 입지 않은 친구들도 많았다. 학교에 가지 않고 동생을 돌보는 친구들도 있었다. 처

음엔 많이 낯설고 이상하게 보였다. 부모님께서는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처럼

배우는 것도, 좋은 것을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고, 예전의 우리나

라도 이러한 때가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예전의 우리나라도 이렇게 가난한 시절이 있

었다는 것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가난한 우리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

까? 이렇게 가난한 캄보디아도 우리나라처럼 변할 수 있을까?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

었던 해외봉사였다.

이렇게 시작된 해외봉사는 그 다음해에 캄보디아로, 올해는 인도네시아로 3년째 계

속되었다. 캄보디아와 인도네시아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도시는 자동차도 많고,

멋진 건물도 많았는데,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자동차와 좋은 건물들은 볼 수 없고,

해외 봉사가 가르쳐 준 것

초등부 장려상

추 덕 인, 솔개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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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30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같은 나라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캄보디아와 인도네시아에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곳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학교를 지어서, 그 나라 사람들이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그리고 가게도 지어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

을 위해 일하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인 캄보디아와 인도네시아를 돕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우리도 가난한 시절에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았고, 그 도움으로 우리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우리를 도와주는 나라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가

난에서 벗어나는 데 많이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배울 수 있고, 잘 먹

고, 잘 살 수 있는 것을 당연히 여기기만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우리의 가진 것들을 필요로 하는 곳에 나누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를 더 행복하

게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이 있다는 것이고, 따라

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

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도움을 주면 기쁨이 배가 되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도, 우리

도 더 기쁠 것이다.

셋째, 가난한 나라를 도우면서 우리도 배우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세 번의

해외봉사를 하면서, 음식을 아껴먹고, 용돈을 아껴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의 아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물건을 파는 모습을 보았고, 잘 먹지

못해서 많이 말라있었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한국에서만 있었다면

쉽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우면서 또 배우게 된 경우였다.

세 번의 해외봉사를 경험하면서, 우리나라가 참 좋다는 생각과 지금 내가 당연하다

고 생각하는 것들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아끼고 낭비

하지 않는 습관을 지녀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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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봉사가 가르쳐 준 것 31

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

다. 앞으로도 부모님과 함께 더 많은 해외봉사를 경험하고 싶다. 지금까지는 부모님께

서 하시는 일을 지켜보는 것이 많았지만,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도 찾아보고, 작은 일

이라도 함께하고 싶다. 비록 줄 수 있는 도움이 작을지라도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그래서 우리는 도움의 손길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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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32

우리 집 가족은 엄마를 제외하곤 보통 집처럼 평범하다. 직장에 다니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지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자상한 ‘우리 아빠’와 나보다 6살이나

어려서 매우 귀엽긴 하나 간혹 나랑 친구 먹으려고 해서 애먹는, 공룡과 로봇을 좋아하

는 ‘우리 남동생’ 그리고 12년 세상을 살면서 세상 알기와 나 찾기에 바쁜, 사춘기 출발

점에 서 있는, 명탐정 코난을 좋아하는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 ‘나.’ 이 정도면 우리

나라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구성원일터이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 중에 남다른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엄마이시다. 친구 엄마들

은 학원이 어쩌고, 공부가 어쩌고 하시는데 우리 엄마는 항상 ‘다문화와 다양한 가치의

소중함, 봉사의 가치’를 외치시니 우리 엄마가 한국인 얼굴을 가진 외국 출신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엄마는 마음이 매우 여리고 툭하면 감동 받고 우시는 '너무

감동적이야' 외치는 순수 한국인 아줌마이시다.

엄마는 나에게 내가 어릴 때부터 ‘다문화, 다양한 가치, 생명의 소중함’ 등에 관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주시곤 하셨다. 이런 생각은 엄마의 어린 시절부터의 관심사

였다고 하신다. 간혹 철학적이고도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늘어놓으시곤 하시는데, 이

해하긴 힘들지만, 결론은 결국 ‘그래서 모두가 소중하단다.’이다. 엄마가 계속 만나시는

사람들 중에 베트남 출신의 가난한 한국 아줌마가 있으신데, 자식 중 남자아이가 7살

이란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한국말이 익숙하지 않아 안타깝다며, 그 아이가 우리말을 능

지구 마을, 우리는 모두 소중해요.

초등부 장려상

김 예 은, 이매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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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마을, 우리는 모두 소중해요. 33

숙하게 하도록 그 아이와 베트남 아줌마의 ‘우리말 도우미’가 되고 싶다는 말씀을 종종

하시곤 한다. 동생과 나를 키우시고, 직장도 다니시는 우리 엄마는 아프리카 콩고에 살

고 있는, 나와 나이가 똑같아 더욱 애정이 간다는 12살 내 또래 여자 친구를 몇 년 동

안 후원하고 계신다. 한 번씩 나도 그 친구에게 줄 편지를 영작하며 엄마와 같이 쓰곤

하는데, 엄마는 엄마의 작은 관심과 노력으로 그 친구가 나처럼 잘 웃고 반듯한 사람으

로 커 주길 바라신다.

내가 사는 학교와 집 주변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지만, 엄마를 통

해 나는 다양한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을 전해 들으면 만나고 있다. 엄마가 후원하고 있

는 아프리카 콩고의 내 친구나, 엄마가 만난 가난한 다문화 가정의 어려운 친구들 이

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멀리 아프리카에서 우리 집까지 보내온 편지와 그 친구의 그림,

그리고 사진을 보면, 내 나이 또래인데도 그 친구는 신발도 신지 않고 있고, 소원이라

는 게 학교에 다니는 것이라는 둥 별천지 세상을 말하곤 한다. 그 친구가 엄마의 후원

금으로 학교에 다녔다는 둥 글자를 배웠다는 둥 하는 말을 들으면 요즘에는 내가 얼마

나 넉넉한 삶을 살고 있는지 속으로 생각하며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

어릴 때 TV에서 어려운 나라의 사람들에게 우물을 지어주는 캠페인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수돗물만 틀면 깨끗한 물이 철철 넘쳐 흘려 물에 대한 소중함을 못 느끼고

사는 나에게 그 나라의 어려운 상황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엄마께 ‘저 나라는 왜 저렇

게 더러워요?’, ‘우물은 왜 만들어요?’하고 여쭈었더니, 뚫어져라 프로그램을 보시면서

심각한 얼굴로 ‘가난해서 그렇단다. 어찌 보면 세상살이 궁극적으로는 돈 문제이기도

하지. 가난해도 사람은 귀한 거야. 수도 시설을 만들 돈이 없어서 저렇게 더러운 물만

있는 거야. 깨끗한 물이 귀하다 보니 마실 수 있는 물을 모아두려고 우물을 만드는 거

란다’라며 가난을 몰랐던 나에게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셨던 기

억이 난다. ‘사람은 다 귀한 거야.’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이런 엄마의 영향 때문인지 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보면 엄마처럼 반응

이 좀 격한 편이다.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과 함께 눈시울이 곧장 뜨거워진다. 엄마와

함께 봉사를 하면서 조그마한 내 손길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자부심과 도운 자만이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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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34

끼는 생명에 대한 고귀함을 몸소 느끼면서 나는 이미 그것에 중독된 건 아닐까? 모두

가 소중하다고 가르치시는 우리 엄마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싶다는 마음이

요즘에는 든다. 나는 엄마보다 더 큰 역할을 맡아 지구 마을 곳곳에 도움이 필요한 자

를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나의 모든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

하며 살고 싶다. 한해 한해 커 가면서 나는 그 능력을 키우는데 나의 에너지를 집중하

려 애써야 한다고 다짐한다. 왜냐하면 나는 엄마를 너무나 사랑하며 또 지구촌의 우리

모든 사람은 모두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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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부 대상강 보 빈•기부가 아닌 선물

중등부 금상정 문 정•나에게는 아직 31,527원이 남아 있습니다.

중등부 은상김 호 수•시계토끼와의 60분 여행

중등부 동상박 은 선•개발도상국과 풍요로운 지구촌

중등부 장려상정 혜 린•굶주림 대신 희망을!

김 가 현•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김 대 희•나는 행운아다 - 7박8일간의 네팔 소통여행 -

중 등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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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가 아닌 선물 37

(짝짝짝)

나는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무대에서 내려왔다. 이 날은 내가 처음으로 피아노 연주

회에 선 날이자 그 연주로 누군가에게 선물을 건넨 날이었다. 그 뒤로 선물에 대한 호

기심은 많아졌다.

내가 지금 6년째 다니고 있는 피아노 학원은 내게 선물을 주었다. 그 선물은 1년에

한 번씩 여는 연주회에 설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더 소중

한 선물이었다. 비록 학원에서 주최하는 연주회지만 매회 입장 티켓을 팔고 있다. 입장

티켓은 한 사람당 5,000원. 사람들은 5,000원의 소중함을 모를 것이다. 더군다나 요즘

시대에는 가까운 시내로 나가보면 실감할 수 있다. 5,000원이면 빙수 한 그릇 값도 안

되고 청소년들이 화장품이나 필요 없는 물건에 낭비하는 금액에 비하면 별거 아니라

느낄 것이다. 나 역시 밖에 나가서 노래방 한 번 가면 10,000원은 휙휙 나간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작은 5000원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연주회를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다.

학원 선생님은 연주회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에게 선물을 할 기회를 주셨다. 때는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선생님께서 꽤 관심을 주는 학생이 아닌 그냥

학원을 다니는 아이였다. 게다가 1년이 늦은 시작 덕에 나는 혼자였다. 1년이란 세월

기부가 아닌 선물

중등부 대상

강 보 빈, 정천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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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38

은 숨길 수 없다고 증명하듯 다른 친구들은 끼리끼리 친한데 나는 혼자 덩그러니 떨어

져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연습 밖에 없었던 나는 연습만 죽어라고

반복했다. 그런 연습에도 한계가 있는지 슬슬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선생님은 나에게 또 다른 목표를 선물해 주셨다.

“우리가 이 연주를 하는데 그냥 하는 것이 아니야. 티켓 한 장에 5,000원인 거 알고

있지? 그 수익금으로 염소를 사서 선물할 거야.”

대단했다. 내가 연주를 해서 염소를 선물한다니. 이처럼 어떤 사람들은 이 5,000

원을 모아서 염소를 산다. 우리나라에서의 5,000원의 가치가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똑같지는 않다. 세계의 어느 나라의 누군가에게는 소중하다 여기기에 충분한 금액이

다. 어떤 나라에서는 젖을 공급해 주는 중요한 동물인 염소를 살 수 있는 금액, 그것이

5,000원이다. 한국에서 동물원에나 가두어져 있는 염소가 생필품이라고 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이 염소가 가서 뭘 먹고 자라고 무

슨 도움을 준다고 그러지?’라고 생각하던 내가 달라졌다.

그날 이후 연습실에 들어가 피아노를 치는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아니, 겉의

나는 같았지만 속의 내가 달랐다. 나는 연주를 하고 그 수익금으로 염소를 선물하는 것

뿐인데도 그로 인해 내가 받는 행복은 더욱 값진 것이었다. 그러고 며칠 뒤 문득 머릿

속 저편에서 생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님께서는 ‘기부’라는 표현을 ‘선물’이라

고 하셨다. ‘우리는 이 염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게 아닌 선물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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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가 아닌 선물 39

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 한 번은 다들 해 보았을 것이다. 일 년 365일 중에

널린 것이 기념일이다. 생일, 결혼기념일, 빼빼로데이, 발렌타이데이, 크리스마스 등등.

그리고 선물을 줄 때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여기서 사람들은 고정관념을

깨고 알 밖으로 나와야 한다. 기부는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뜻이 크게 느껴지지만 선

물은 동등한 사이에서 주고받는다는 의미가 크다. 선물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건네는

것이다. 친근감을 가지고 기뻐하기만을 바라며 주는 것이 선물이다. 하지만 기부는 은

연 중에 기부를 통해 나 자신을 빛내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기부’보다 ‘선물’이 더 좋았다. 그런데 나 자신을 빛낼 수 있는 연주회를 통해 선물까지

하게 되는 것은 일석이조였다. 하지만 이것은 나에게 일석삼조가 되었다. 나는 선물을

통해 짜릿한 번개도 맛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 먼 나라에서 한 아이가, 더 나아가서 많은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내

가 준 선물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볼 때 온 몸을 타고 흐르는 번개의 맛을 봐야 한다. 어

떤 사람들이 홈쇼핑을 보며 사고 싶은 욕구를 채우려 그 물건을 살 때 또 다른 어떤 사

람들은 선물을 준 사람의 답장을 받고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는다. 이를 통

해 보면 물질주의적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과연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내가 한 가지 선물을 건네고 싶다. 지금 당장 수첩에 ‘죽기

전에 번개 맛보기’를 써 넣는 것을 추천한다. 이는 되도록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번개

맛에 중독될 지도 모르니.

번개 맛을 본 이후 내게 생긴 변화는 신기했다. 이게 난가 싶을 정도였다. 지나가면

서 보이는 포스터, 인터넷에 뜬 사진들은 내 이목을 끌었다. 역시 경험을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안목이 넓어진다고 내 뇌의 용량은 3-4배 더 커진 듯 했다. 시작은 또 다른

시작을 낳았고 그것이 몸에 배어 내가 되고 그로 인해 꿈을 가지는 일은 황홀했다.

나의 또 다른 시작의 시작은 ‘세이프 더 칠드런 모자’였다. 나의 어머니는 뜨개질에

남다른 솜씨를 갖고 계신다. 어느 날 어머니는 모자를 뜨는 키트를 주문하셨고 나와 내

동생은 그것에 호기심이 생겼다. 아버지는 뜨개질을 계속하다보면 어머니께서 어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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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40

뭉치고 삭신이 쑤시는 것을 아시기에 엄마를 걱정해 말리셨다.

“그런 걸 왜 하려고.”

“차라리 돈으로 하지 그래, 응?”

하지만 나의 어머니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나의 재능을 남에게 나누는 일은 아깝

지 않다’는 어머니의 생각은 나와 내 동생에게까지 전염되었다. 그리하여 나와 내 동생

도 어머니에게 뜨개질을 배워 동참하게 되었다. 다 뜬 모자를 다 모아놓으니 마음 한

쪽에서 연주회 때 느꼈던 그 기쁨이 다시 샘솟았다. 비록 삐뚤삐뚤 못난 모자였지만 내

마음을 듬뿍 담은 모자가 어디든지 가서 좋은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포장을 하고 주소를 적고 후에는 또 다른 선물거리는 없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

다. 선물을 더 주고 싶었다. 시작이 내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마음속으로는 계속 산타

할아버지가 되고 싶은 욕구가 넘쳐났고 자연스레 인터넷으로 여러 봉사에 대해 검색하

게 되었다.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후진국들의 상황은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심각했다. 유명인

들의 생사에는 떠들썩하게 떠들던 사회가 굶음과 죽음이 일상이 되어 버린 나라는 외

면하고 있었다. 단지 소수의 사람만이 그걸 알고 생명이라는 선물을 주고 있었던 것이

다. 순간 나는 이 소수에 내가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안에서 이미 이

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이들이 있었지만 대다수가 아직 모르고 있다. 이것이 나에

게 꿈을 일으켰다. 나는 도움의 손길이 소수가 아닌 다수가 되게 만들고 싶었다. 그리

고 연주회는 이런 것을 실천하는 작은 홍보자리였고 소수를 다수로 바꿀 것이란 희망

을 머릿속에 심어 준 날이었다.

지금은 그저 작은 일에서 시작하지만 한비야를 내 롤 모델로 삼아 나아갈 것이다.

‘개발도상국을 돌아다니면서 희망과 생명을 선물로 주고 다닐 것’이라는 꿈이 생겼으니

후에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내 장래희망인 주택 설계 디자이너를 꼭 이루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 글을 끝내고 나도 내 수첩에 ‘죽기 전에 가난한 나라를 다니며 선물

주기’라고 써야겠다. 그 선물은 아이들이 머물 수 있는 집, 혹은 학교. 내가 닿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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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가 아닌 선물 41

는 건물이란 건물들 모두이다. 그러기 위해선 나 혼자의 힘으로 부족한 것이 많기에 지

속적인 활동이 필요할 것이고 그를 위한 작은 모임부터 만들어 나갈 것이다. 나라는 작

은 사람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

사회는 나날이 발전하더라도 여전히 가난한 나라들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선

물을 주려는 소수는 ‘나도’라는 한 마디에 다수로 성장한다. 예전에는 단돈 얼마면 선

물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중요한 건 마음이었다. 마음 없는 선물을 누

가 좋아할까? 갑자기 ‘나도 선물을 해 보고 싶다’ 혹은 ‘번개를 맛보고 싶다’ 하는 마음

이 생기면 당장 실천해라. 가까운 곳에서 찾으면 나도 몰랐던 것이 보일 것이다. 끝으

로 나는 내년에도 연주회를 할 것이고 일상 속에서, 미래에서도 늘 선물을 줄 것이다.

기부가 아닌 선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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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42

‘가만, 오늘이 며칠이지? 8월 29일이니까 이제 이틀 남았네…….’ 매월 말이 되면 습

관처럼 날짜를 되새겨 보고 내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게 된다. 학교 끝나고 집으로 오면

서 확인해 본 통장 잔고는 31,527원. ‘휴, 이번 달은 괜찮겠지만 이제부터는 더 아껴서

써야겠는 걸.’ 언제나처럼 아무 의미도 없이 용돈을 써버린 것 같은 반성과 다가올 새

로운 달에 대한 의지를 새롭게 하면서 한 달을 마무리한다.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

긴 하지만 ‘그 때 왜 이런 결정을 해서 매달 고민을 해야 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스스

로에게 던져보기도 하는 것이 벌써 몇 해째 계속되고 있는 나의 월말 풍경이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장래 희망에 대한 발표 시간, 몇 날의 고민 끝에 나는 의사가

되겠다는 내 꿈을 친구들에게 말해주었고 그 때부터 나의 고민 아닌 고민이 매월 되풀

이 되게 되었다. 드라마에서 의사들이 흰 가운을 입고 환자를 돌보는 모습이 정말 멋

있어 보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신기하면서도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나의 꿈이 더욱 선명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슈바이처 박사에 관련된 책을 읽

고 난 이후부터이다. 그때까지 의사는 멋있고 훌륭한 직업이기만 했는데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단한 직업이었으며 보통의 의지로는 이겨낼 수 없는 강인함

이 있어야만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

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한 직업이기도 하다. 슈바

이처는 자신보다 환자들을 먼저 생각하며 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즐기고 환자를 돌보는

나에게는 아직 31,527원이 남아 있습니다.

중등부 금상

정 문 정, 강북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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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아직 31,527원이 남아 있습니다. 43

데 보람을 느끼는 의사였다. 멋있는 모습만을 동경하면서 의사가 되려 했던 내가 그냥

의사가 아닌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을 지 생각해보았다. 그때부터 가치 있는 삶을 살

기 위해,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다. 슈바

이처 박사가 봉사활동을 위해 아프리카로 떠났던 것처럼 나도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가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을 때 우연히 학교에서 참가한 글쓰기 대회를 통해 굿

네이버스의 후원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글쓰기 용지 밑에 있던 아동 후원 신청서를

보게 되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주소와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때

가 2012년 초가을, 나는 13살짜리 후원자가 된 것이다.

굿네이버스에 아동 후원 신청을 하고 만나게 된 친구는 타지키스탄에 사는 나와 동

갑인 ‘아리쉐르 굴마트조다’라는 친구이다. 사진으로 본 아리쉐르는 13살이라고 믿기

에는 너무 어리고 작고 야위어 보였고, 실제로도 몸무게가 30 킬로그램 밖에 되지 않

았다. 엄마는 아리쉐르가 가난하기 때문에 잘 먹지 못해서 성장이 더뎌서 그럴 수 있다

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아리쉐르는 흙으로 지어진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와

살고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하셔서 같이 살고 있지 않다 하였다. 어머니는 가정

을 꾸리기 위해 청소부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고 어머니의 수입으로 아

리쉐르의 네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하였다. 나는 밥을 한 끼만 굶어

도 참지 못하고 가지고 싶은 물건에 대한 욕심도 많은 편이다. 새벽에도 먹고 싶은 것

이 있으면 반드시 먹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맛있다는 음식은 먼 거리라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갈 수 있는 미식가이자 대식가이다. 먹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삶

의 큰 기쁨이기도 하고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한다. 그만큼 먹는 것은 내

게 큰 기쁨이다. 하지만 아리쉐르에게 하루 3끼를 먹는 것은 사치라고 한다. 그런 아리

쉐르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라와 부모는 자신이 선택해

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나는 그래도 비교적 풍족한 나라와 풍족한 가정에서 태

어나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살아가는데 반해 아리쉐르는 기본적인

끼니조차 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아리쉐르가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 곳의 어린이들은 모두 아리쉐르처럼 힘든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타지키스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조사를 해 보았다.

타지키스탄은 건조한 대륙성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국민 대부분은 이슬람을 종교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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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44

지고 있다. 언뜻 보기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계속된 정치 불안과 경기 침체로 인해 국민의 고통이 심해진 상황이라고 한다. 또한 내

전으로 인구의 7%에 해당되는 러시아계 주민의 절반 이상이 다른 국가로 떠나버려 전

문 인력이 부족한 상태이기도 하다. 1997년 내전 이후로 평화 협정의 체결을 통해 경

제가 서서히 회복하고 있으며 2001년에는 10%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

지만 2005년 기준, 전체 국민의 50~60%가 빈곤층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으며, 높은

실업률과 취약한 정부, 높은 대외 채무, 화물 운송을 책임지는 교통수단의 미비로 말미

암아 비교적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과 은 등 귀금속을 제

외하고는 자원 개발이 이루어질 전망이 아직까지 보이고 있지 않다. 이렇듯 어려운 나

라의 경제 사정으로 아리쉐르를 비롯한 많은 어린이들이 다른 나라의 원조를 받으며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나는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달에 3만원을 아리쉐르에

게 후원하면서 기쁘게 후원하지 못한 시간들이 많았다. 내가 받는 용돈에서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3만원을 모아야 했고 때론 그렇게 힘겹게 모은 돈이 한순

간에 쉽게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속상할 때도 많았다. 그리고 왜 후원을 하겠다고 했을

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월말마다 내가 고민을 하고 생각에 잠기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아리쉐르로부터 편지가 왔다. 아리쉐르는

자기는 동물을 좋아하고 그 중에서 곰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후원을 해줘서 고

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짧은 내용의 편지였지만 아리쉐르의 진심이 담긴 편지를 받

고 보니 아리쉐르의 따뜻한 마음이 나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도 곧 아리쉐르에게

답장을 보냈다. 아리쉐르는 나와 동갑이기 때문에 편하게 나의 꿈 이야기, 나의 삶 이

야기,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사는 아리쉐르에게 본받을 점이 많다는 솔직

한 이야기를 쓰며 아리쉐르와 한껏 가까워진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장문의 편지를 보

내고 나는 아리쉐르에게 올 답장을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아리쉐르의 편지가 중간에

분실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지금도 나는 아리쉐르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다. 아리쉐르의 꿈은 교수라고 한다. 아리쉐르가 살고 있는 타지키스탄은 아직 후진

국이기 때문에 교육 수준 또한 매우 낮은 편이다. 이러한 나라 상황에서 아리쉐르가 훗

날에 훌륭한 교수가 되어 자신처럼 훌륭한 학생들을 많이 키워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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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아직 31,527원이 남아 있습니다. 45

다. 그래서 자신의 조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또한

예전에 다른 나라의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이제는 다른 나라를 돕는 나라가 되었는데

타지키스탄도 우리나라처럼 훗날에 많은 발전을 해서 다른 나라를 돕는 나라로 성장했

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날에 아리쉐르가 나와 우리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것을 기

억하며 어려운 나라의 누군가를 돕는 사랑의 릴레이가 계속 이어지기를 소망해본다.

그리고 나 역시 나중에 아리쉐르를 만났을 때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라는 내 꿈을 이

루어 아리쉐르 말고 또 다른 누군가를 돕고 있는 훌륭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다시 나의 통장을 들여다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내 통장에는 아직 31,527원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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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46

“아, 알았어! 잔소리 쫌~~~” 내 대답에는 잔뜩 짜증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침부

터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라~~~”하시는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서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현관을 나왔다. 밥 먹고 가라는 엄마의 말이 닫는 문틈으로

비집고 나왔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학교로 내달렸다. 배는 쫌 고팠지만, 아침을 먹으면

엄마랑 타협한다는 생각에 뒤도 안 돌아보고 학교로 달려갔다. 실은 어젯밤에 엄마와

다퉜다. 중학교 3학년인데, 용돈이 없다니 말이 되는가? 그러나 결론은 변함없었다. 고

등학생이 되면 해결될까?

7시 50분,...... 엄마를 향한 소심한 시위 덕분에 모처럼 이른 시간에 학교에 도착

했다. 교문에는 선도부 학생들도 생활지도부 선생님도 아무도 없다. 나는 교무실에서

3-5반 출석부를 꺼내 들고 커튼 자락 사이로 하얀 아침 햇살이 번지는 3층 우리 반 교

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교실 문을 활짝 열었다.

“앗! 아~~~~~~~쿵”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어!”

눈을 떠보니 하얀 토끼가 왼손에는 검정가방을 들고 오른손목의 시계를 쳐다보며 정

신없이 뛰어가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메고 토끼를 쫓아갔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그곳

에는 까만 피부색의 아이들이 벽돌을 나르고 있었다.

시계토끼와의 60분 여행

중등부 은상

김 호 수, 강북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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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토끼와의 60분 여행 47

타진이는 방글라데시의 11살 여자아이다. 6남매의 맏이인 타진이는 벽돌을 나

르는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일을 한다. 한 번에 8개의 벽돌을 머리 위로 이고 매

일 150회를 왕복하다 보면 반나절이 훌쩍 지난다. 이렇게 한 달 내내 일하면 한 달에

1,500~1,600다카를 번다. 우리 돈으로 2만 3~4천 원의 금액이다. 타진이는 왜 학교

에 갈 시간에 벽돌을 나르고 있을까? 8명이나 되는 가족의 생계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벽돌공장에서 일을 하지만, 타진이의 손을 빌려야만 여덟 식구의 생계를 유

지할 수 있다. 11살 소녀는 벌써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오늘 아침에 밥을 먹고

가라는 엄마에게 신경질을 내고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토끼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서 손을 잡아끌었다. 시계토끼

와 함께 온 이곳은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 시내의 도로변. 이곳에서 7살 딴지는 9살

오빠와 엄마랑 함께 벽돌을 깨는 일을 하고 있었다. 딴지의 아버지는 릭샤(인력거)를

끌고 딴지의 어머니도 벽돌을 깨는 일을 하지만 가난 때문에 딴지는 걷고 손에 망치를

들 힘이 생긴 순간부터 지금까지 벽돌을 깨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학교에 가고 싶

지만 입학금 400~500다카(6천 원~7천5백 원)이 없어서 벽돌을 깨는 일을 해야만 한

다. 옆에 있던 시계토끼 내 손에 망치를 쥐여준다. “자 너도 할 수 있어, 7살 꼬마도 하

는 일이야. 게다가 이 일은 무거운 벽돌을 나르는 것도 아니고 위험한 철공소의 일도

아니라고~” 나는 하기 싫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작고 왜소한 7살 소녀와 9살 소년

이 하는 일을 힘들다고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런데 무서웠다. 이 망치를 한 번 잡게

되면 영원히 이곳에서 벽돌을 깨는 일만 하게 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싫어! 싫

어! 시계토끼야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이런 일은 정말 하기 싫단 말이야~”

“호수야, 일어나~ 벌써 조회 끝나고 1교시 시작할 시간이야. 마녀라고! 얘는 아침부

터 무슨 잠을 이렇게 자!” ‘또각 또각!’~ 악명 높은 마녀 사회 선생님의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다. 학교였다. 나는 화장실도 못 가고 수업 준비를 해야만 했지만 정말

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방글라데시의 빈민촌도 내 손목을 놓아주지 않

던 시계토끼도 온데간데 없었다. 나는 공부만 하면 되는 대한민국의 중학생, 집과 옷과

먹을 것 그리고 무한 사랑을 주시는 우리 엄마 아빠의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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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48

시계토끼와의 이상한 여행에서 빠져나와 1교시 수업에 집중했다. 마녀 선생님의 사

회시간은 ‘도시화’에 관한 단원이었다. ‘도시화란 일자리가 많은 도시로 사람들이 모

여들어 도시가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선진국은 오래전부터 도시화

가 서서히 진행된 반면에 개발도상국의 도시화는 20세기에 들어와서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빠르게 전개되었다. 나는 ‘늦게 시작했지만, 선진국이 되려면 개발도상국

도 빨리 도시화를 진행하면 좋은 것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빠른 도시화의 문

제점은 상당히 컸다. 필리핀 바기오시는 빠른 도시화 현상으로 물 부족 현상이 심화되

고, 중국은 환경오염, 식량 부족 문제 등이 일어나고 있다. 나는 방금 전에 다녀온 방글

라데시의 모습을 떠올리며 개발도상국의 이런 문제들에 대한 ‘법적인 보호나 해결책이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개도국의 현실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검색해 보았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14세 미만 아이들을 고용하는 일은 불법이라는 ILO

의 권고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2006년부터 14세 미만 아동의 노동을 금지시켰지만, 절

대 빈곤 속에 놓인 현실은 고용을 꺼리는 공장 사장에게 부탁하고 사정하여 더 적은 금

액을 받고 고용되는 음지의 일자리가 되어버렸다. 학교에서 한창 공부하고 뛰어놀 나

이에 방글라데시의 아이들은 연필 대신 망치를 들고, 무거운 벽돌을 머리에 이고 불과

하루에 1~2달러를 벌기 위해 노동 현장으로 여전히 내몰리게 된 것이다.

방글라데시에는 이런 어린이 노동자가 47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방글라데시뿐만

이 아니다. 인도에는 일하는 아이들이 6,000만 명이나 된다. 반면 성인 실업자 역시

6,500만 명이나 존재한다. 하지만 노동 시장의 고용주들은 아이들을 선호한다. 왜냐하

면, 아이들은 임금이 낮은 데다, 성인들 보다 말을 잘 듣고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부

당한 대우에도 소송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이처럼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는 가엾은 아이들이 1억 6천만 명을 넘는

다고 한다. 너무 많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은 마땅히 어른들

과 국제기구가 해결해야 한다. ILO는 아동 노동 문제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을 높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02년부터 매년 6월 12일을 ‘유엔 세계 어린이 노동 반대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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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토끼와의 60분 여행 49

로 제정하였다. 유엔 세계 어린이 노동 반대의 날은 제1회 ‘아동노동이 없는 미래’라는

주제로 개최되었고, 세계아동노동반대의 날을 통해 아동노동캠페인을 세계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각국 정부는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세계 도처에는 타진이와 딴지 같은 어린이 노동자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일까? 12년이나 지났는데 UN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예전

처럼 생각만 하고 그만 둘 수 없었다. 오늘 아침 시계토끼와의 여행이 너무 생생했기

때문이다. 11살 타진이와 7살 딴지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문제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

터 지금까지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엄마에게 부탁했다. “엄마 내가 이제부터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신경질도 안내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할 테니까 용돈 3만원씩만 주면 안 돼?” “갑자기 왜 그러는데?

아침도 안 먹고 새벽부터 학교 가더니, 여태 한 번도 안 달라던 용돈을 달라고?” “아니

그럴 일이 있어서 그래, 여태 한 번도 안 받았으니까 그 정도는 줄 수 있잖아?” “호수

야,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누가 돈 빌려 달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3만 원이

면 방글라데시의 아이 한 명이 한 달 동안 벽돌을 나르지 않아도 되고, 학교에 입학하

여 공부도 할 수 있데~ 엄마 딸 하나 생긴 셈 치고 도와주라! 나도 엄마 말 잘 듣고 공

부 열심히 할게!”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시더니 그리고 다시 감으셨다. 아마도 내가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짐작하시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더 이상 묻지는 않으셨다. 그리고 다음

달부터 나는 처음으로 용돈을 받는 학생이 되었다. 물론 그 돈은 내가 만져보기도 전에

방글라데시의 이름 모를 아이에게 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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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50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1970년대 신경림 시인은 가난한 이웃 청년을 위해, 가난해도 인간적인

삶과 감정을 지녔음을 노래했었습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2000년대 대한민국을 사

는 우리에게 시인의 질문과 호소는 여전히 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웃’의

의미를 더 넓게 봐야 하는 책임이 늘었습니다. 오늘 저는 이곳에서 누구나 알지만 잘

알려고 하지는 않는 개발도상국(이하 개도국)의 정의와 이들 나라가 처한 문제점, 그리

고 우리가 그들을 왜 도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개도국이란 경제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나라, 경제 개발이 진행되고 있지만, 선진국

에서 채택하고 있는 기술, 지식 및 제도가 아직 충분히 보급되지 않아서 산업의 근대화

와 경제 개발이 뒤지고 있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이 개념에 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는

데, 로스토우(W. W. Rostow)는 ‘도약은 완료되지 않았으나 그 과정에 있는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개도국의 대표적인 나라로는 필리핀,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인도

등과 같은 나라들이 있으며 우리나라는 현재 선진국으로 분류됩니다.

개도국에는 크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선, 정치적인 문제

로는 국가주도 성장으로 인한 정치인들의 독재가 있습니다. 성장을 국가가 주도하면서

국민들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은 상태로 개발이 진행되어가니 국민들은 반란을 일으키

고, 국가는 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무력을 행사해 죄 없는 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는

개발도상국과 풍요로운 지구촌

중등부 동상

박 은 선, 와동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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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도상국과 풍요로운 지구촌 51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개도국 정부가 취한 공업화 정책으로 인해 이중구조의 심화 뿐

아니라 공업화를 위한 저금리정책에 의해 농업자금이 부족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사회

문화적인 문제는 개발도상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고유문화나 전통들이 차츰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이나 생

활풍습 등이 사라지고 대부분의 것들이 서양화된 것처럼 말이죠. 마지막으로는 경제적

문제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중위생과 의료수준의 향

상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자 노동력도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나, 농업이 더욱 노동집

약적 된다는 형태로 흡수되어 1인당 생산량은 하락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임금은 점점

낮아지고 빈부격차는 심화되었습니다. 또한, 성장 위주의 정책으로 인해 사막화나 열대

림 파괴, 스모그 등 환경문제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산업의 근대화와 경제개발이 뒤지고 있는 개도국을 도대체 왜 도와

주어야 할까요? 우리나라는 36년의 일제강점기에 이어 약 3년간의 한국전쟁을 겪었습

니다. 계속되는 전쟁 속에 우리나라는 쑥대밭이 되었고 모두가 우리나라가 원래의 모

습을 되찾기도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보란 듯이 굉장히

빠른 시일 내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나아가 1996년 말에 OECD에 29번째 회

원국으로 가입하였으며, 2013년에는 약 1조 2천억으로 GDP 순위 15위를 차지하였습

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과 정치인들의 피나는

노력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 우리보다 경제 수준이 높은 선진국들의 120억 달러 이상

의 꾸준한 원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도움을 받아,

원조를 받던 빈민국에서 세계 20위 안에 드는 경제대국이 되었으니 우리나라도 세계시

민의식을 가지고 같은 지구촌 이웃인 개도국을 돕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한 나라의 위기는 전 세계

의 위기를 부를 수 있으며 김제동이 했던 ‘내 아이가 행복하려면 옆집 아이가 행복해야

한다.’는 말처럼 우리나라가 풍족해지려면 다른 나라들이 풍족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

문입니다. 또한, 개도국도 다른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국민들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며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국가를 개발할 개발권리가 있으니 우리는 개도국

들이 그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바람직한 행동이라

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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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52

이를 위해 우리나라는 2011년 10월 26일에 국제개발협력기본법을 시행하였습니다.

동 법에는 한국의 개발원조 목적, 정의, 기본정신 및 원칙 등을 담고 있어, 국내적으로

는 체계적인 공적개발원조(이하 ODA)정책 시스템의 역할을, 대외적으로는 국제개발협

력에 대한 한국의 기여 의지를 표명하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ODA 추진

의 법적 기반 마련을 위한 국제개발협력기본법 제정을 계기로 ODA 통합 추진체제를

구축하고, 동시에 ‘ODA 선진화 전략’, ‘분야별 국제개발협력 기본계획(2011-2015)’을

비롯하여 ‘국가협력전략(County Partnership Strategy, CPS)’을 수립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체제 개선 및 질적 제고를 위한 전략을 기반으로 수원국에 최적화된 개발협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도국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돕기 위해 의료나

교육 자원봉사를 나가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코

이카 해외 봉사단을 들 수 있습니다. 만 2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참

여할 수 있는 코이카 해외 봉사단은 ‘우리나라와 개도국들의 우호협력관계 및 상호교

류 증진, 이들 국가의 경제사회발전 지원을 통해 국제협력 증진에 기여’를 목적으로 활

동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가

와 민간인들이 이렇게 그들을 돕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 학

생의 신분이다 보니 실질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적지만 개도국에 대하여

충분한 관심을 가지고 개발협력과 개도국에 대해 공부하고 자신의 마음과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부나 자원봉사를 탐색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으로 개도국에

대한 의식을 키워나가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외에도 개도국의 친구들과 1:1

자매결연을 하여 도움을 주거나 용돈을 조금씩 모아 기부를 한다거나, 쓰지 않는 학용

품과 책들을 모아 기부하는 운동을 시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개도국을 돕고 있지만, 개도국의 문제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습

니다. 아직도 개도국의 이중구조는 남아 있고, 임금수준의 격차는 확대되고 있으며, 사

람들은 빈곤하고, 부족한 기술과 자본으로 인해 개발은 더뎌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러한 문제들이 해결되고 개도국이 경제개발을 이루어 내게 되면 모두가 굶주리지 않는

풍요로운 지구촌이 될 수 있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계

속 세계시민으로서 개도국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모두 함께 풍요로운 지구촌을 건설

해 나가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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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대신 희망을! 53

영국의 인스턴트 수프 한 통, 캐나다의 초코 칩 쿠키 2개, 베트남의 차가운 쌀국수

인 ‘번 다오’ 1인분, 가나의 닭고기와 쌀밥 한 그릇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의 떡볶이 한

접시. 이 음식들의 공통점은 뭘까요? 바로 절대 빈곤층 12억 명의 하루 소득 1,280원

(1.25달러)으로 살 수 있는 나라별 음식들입니다.

영국, 캐나다,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간식거리 정도밖에 사지 못하는 적은 돈이지만,

베트남과 가나에서는 이 적은 돈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직 놀라기는

이릅니다. 전 세계 12억 명이 하루 소득 1,280원 이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끼 식

사를 콩알 쪼개듯 나누어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풍요로운 지구촌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아는 사람이 얼

마나 있을까요? 굶주림을 겪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하는 사람들이 얼마

나 될까요? 마음으로나마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마도 ‘태어날 때부터 정해

져 있던 이치’라고 생각하며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사실 저 또한 한때 이

러한 생각을 하고 지냈습니다. 한 번도 가까이서 본 적 없는 그들의 힘든 삶을 알기 위

해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를 통해 저는 이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조금이나마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게 되었습니다.

‘Rani, Suborna(라니 수보르나)’. 방글라데시 키쇼르곤즈에 살고 있는 이 아이는 저

굶주림 대신 희망을!

중등부 장려상

정 혜 린, 야탑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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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54

의 여동생입니다. 약간 작고 마른 체구에 눈이 큰, 이 귀여운 아이의 부모님은 직장이

없습니다. 마땅한 일거리가 없이 때에 따라 얼마 남지 않은 가재도구를 팔며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수보르나의 어머니는 재봉틀 사용법을 배우시고, 아버지는 농사짓는 법

을 배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수보르나도 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며 선생님이 되는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가족이 2013년 12월부터 수보르나를 후원하

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나눔을 할 수 있던 계기는 매년 학교에서 꾸준히 진행되

는 세계구호단체의 교육 덕분이었습니다.

만약 옆에서 친구가 굶어 죽어 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친구를 도와주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2012년 중학교에 입학한 후 한 ‘학급 한 생

명 살리기’, 기아체험(불평등 달리기, 다이아몬드 줍기, 식수 나르기, 영양 죽 먹기, 세

계 신문 만들기) 등 여러 교육 활동 참가하면서 배고픔과 노동의 힘겨움을 느껴본 후,

빈민국 어린이들의 어려움을 공감할 수 있었고, 가까운 친구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안타까운 현실과 그들을 돕고 싶은 저의 마음을 가족들에게 전하고 후원에 동

참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제 여동생의 예쁜 미소가 담긴 사진과 희망 가득한 편지를

받을 때마다 우리 가족의 행복도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보르나와 같이 빈곤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 속한 나라는 어떤 상황인 걸까

요? 장 지글러는 그의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절대로 보지 않는 이상

그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그동안 자신이 목격하며 겪었던 개발도상국의

아픔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지구촌의 불공평한 사실들과 우리 사회의 모순된 현상을

드러냅니다.

가끔씩 뉴스에서 내전 지역 사람들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배만 볼록한 아기, 벽에

힘없이 기대고 있는 여인, 지팡이를 짚고 겨우 서 있는 노인. 하지만, 이것은 수박 겉핥

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지글러가 그의 책에서 고발하는

그들의 실상은 더욱 처참합니다. 그들 중에서도 생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비닐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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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대신 희망을! 55

찌를 차고 매일 영양 죽을 먹으러 오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선별위원에 의해서 배급

이 거절됩니다. 삶의 포기를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의 어린이들은 마지

막 희망인 흰개미를 먹기 위해 오늘도 개미굴을 팝니다.

책을 읽고, 사진을 보고, TV를 보고, 영화를 보며 우리는 배고픔을 봅니다. 하지만,

배고픔은 직접 느껴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하루, 아니 한 끼만 굶어보면, 하루 한

끼도 잘 먹지 못하는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

은 내일도, 모레도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우리 모두 기아로 고통받는 지구촌의 사람들과 같이 아파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작

은 노력이라도 모아야 합니다. 먼저 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집 식탁에 예

쁜 저금통을 놓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한 끼 식사를 맛있게 할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으

로 가족들 모두 동전을 넣고, 모인 동전은 일 년에 한 번씩 그들을 돕는 데 사용할 것입

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첫 번째 주 토요일 점심 한 끼는 건너뛸 것입니다. 비만을 걱

정하는 우리 사회에서 한 달에 한 끼 굶는 것은 건강에 전혀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 것

입니다. 오히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먹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새삼 깨닫고, 식사를

같이 하는 가족에 대한 고마움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저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연말연시에만 몰리는 구호물품이나 기부 때문에 다른 계절에는 구호활동이 더 어렵다

고 합니다. 여름이면 모두 휴가를 떠나기 바쁜데, 휴가계획에 나눔 활동도 포함시키면

좋을 것입니다. 공항, 고속도로 톨게이트, 피서지 등에 ‘한여름의 시원한 파란색 자선냄

비’를 준비해서 조금씩만 마음을 모은다면, 더욱 뜻 깊은 휴가가 될 것입니다.

국가적으로는 ‘나눔세’의 확산입니다. 이 세금은 돈으로 내는 것이 아닙니다. 청소년

들에게 학교에서 꼭 이수해야 할 봉사활동시간을 권장하듯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이행해야 할 나눔 활동 시간을 정하는 것입니다. 한 달에 몇 회 또는 일 년에 몇 회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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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56

외된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주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 가서 돕는

다면 생산량이 증가될 것이고, 독거노인들의 집을 방문해 함께 한다면 노인 문제는 점

점 줄어들고, 다문화 가정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늘린다면 대한민국은 진정한 세계시

민의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계획하고 알리는 것은 국가에서 하지만 준비하고 진행

하는 것은 자원봉사자들이 해야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우고 익힌 자원봉사의 정신

을 사회에 나가서도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자원봉사는 이제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외교관이 될 것입니다. 저개발 국가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의 생활 터전

을 둘러싼 환경을 개선하고, 그들의 국가와 우리나라가 서로 교류하여 상호 이익을 증

대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배고픔이 해결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욱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생활 속 작은 노력과 적극적 기부활동이 이

루어진다면 지금 어디선가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그들은 입가에 환한 미소를 머

금고 내일을 꿈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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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57

작년에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드디어 중학생이 되었다. 입학 후 한 달쯤 시간이

지났을 때 어머니께서는 학교 어머니 봉사단인 ‘샤프론’에 가입하셔서 봉사활동을 다니

셨다. 그리고 나한테도 제안을 하셨다.

“가현아, 너 봉사활동 해보지 않을래?”

“네?”

어머니께서 봉사단원분들의 자녀 몇 명과 용인외고 선배들과 함께 봉사 팀을 하기로

했는데 나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하셨다.

“네, 좋아요!”

나는 바로 승낙했다. 중학교 3년 동안 봉사시간 60시간을 모아야 하는데 담임선생님

께서는 60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내신 점수가 깎인다고 하셨다. 특목고를 준비하는 나

에게는 봉사시간이 꼭 필요했다.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 더 컸다.

내가 참여한 팀의 이름은 ‘We Are The World’(WATW)이다. 거기서 내가 처음 참여

한 봉사는 ‘제 2회 휴먼틴 볼런티어 캠프’라는 봉사 대회였다. 이 캠프는 봉사 팀들이

후원해 줄 나라를 지정해서 후원금을 모으는 활동을 한다. 어떤 팀이 가장 열심히 그리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중등부 장려상

김 가 현, 영덕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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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58

고 가장 의미있게 했는지 순위도 가린다고 했다.

우리 팀을 포함해 9개 팀이 이 캠프에 참여했다. 우리 팀은 작년 선배들이 도와주었

던, 중국 동포와 카메룬을 맡았다. 우리가 도와 줄 2개의 팀 이외의 8개 나라는 네팔

1, 2, 몽골, 캄보디아, 라오스, 서부 아프리카 베네, 베트남, 아이티 팀이었다. 그 나라

를 도와주는 봉사단체 대표들의 설명을 들으니, 그 아이들 모두를 내가 도와주고 싶다

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였다. 정말 우리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도와주어야 할 것 같은 아이들이었다. 기생충이 온 몸에 있고, 더러운 물을 마시다 병

에 걸려 죽고, 진흙으로 만든 쿠키를 먹는 다는 그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

다. 그때 나는 봉사시간을 채우려고 이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이 활동을 통

해 그 아이들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정말 내가 이 아이들을 도와주고 있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중국 조선족학교에 지어질 네모

상자(‘네가 꿈꾸는 모든 것들을 상상해봐 자유롭게’의 약자) 도서관에 보내질 책들을 분

류하는 일이었다. 수원시 청소년 문화센터에서 친구들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직

원 분들과 여러 종류의 책을 분류했다. 한 여름 뙤약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무

거운 책을 한 권, 두 권 옮길 때마다

‘아, 나의 노력이 그 아이들에게 행복이 되겠지.’하는 생각을 하며 힘을 내었다.

‘중국에 있는 아이들이 그곳에 지어지는 네모상자 도서관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좋

아하겠지?’라는 생각도 했다. 책들은 박스에 포장되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를

통해 중국 연변으로 보내지게 된다고 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모금활동도 했다. 그 중 하나가 ‘IF메일 활동’이다. IF메일은 간헐적

단식인 Intermittent Fasting의 약자이다. 간헐적 단식은 하루의 한 끼를 굶는 활동이다.

우리는 굶은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값을 만 원이라고 정하고, 그 돈을 모아서 기부를 하

는 활동을 진행했다. IF메일은 돈도 기부하고, 간헐적 단식을 통해 건강도 지킬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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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59

활동이다. 우리는 주변 지인 분들께 IF메일에 대해 설명하고, 신청서를 작성하고, 한 끼

식사의 값을 기부 받는 모금활동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스

러웠고, 부끄럽기도 해서 말이 잘 안 나왔다. 하지만, 하다 보니 점점 부끄러운 일이 아

닌 자랑스러운 일임을 깨달았고, 자신 있게 홍보를 하면서 모금활동을 진행했다.

그 후에는 후원금을 모으는 바자회도 열었다. 우리는 학교 가사실에서 뻥스크림을 팔

았다. 뻥스크림은 TV 프로그램 ‘해피투게더’에서 ‘양상국’이라는 방송인이 만들어서 유명

해진 음식이다. 생각보다 인기가 많아서 후원금을 꽤 모았다. 우리는 그때 약 100만 원

가량 후원금을 모았다. 이 돈은 카메룬에 있는 사람들에게 염소를 사 줄 돈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내 자신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또, 우리는 화성행궁에서도 직접 바자회를 열어 후원금을 모았다. 행궁광장에 천막

을 치고, 음식과 물품을 팔고, 여러 가지 전통 놀이들을 체험 해볼 수 있는 행사를 진행

했다. 어머니들께서는 추억의 도시락과 사이다, 계란, 묵밥을 만들어서 판매하셨고, 우

리는 뽑기라고 불리는 달고나를 만들어서 팔았다. 이날은 가을이었지만, 조금은 더운

날씨여서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달고나를 만들어 팔았다. 또한 우리 팀의 로고가 새

겨진 카드지갑과 카드형 USB도 팔았다. 이날 모은 수익금은 모두 카메룬에 있는 사람

들에게 전해졌다. 중국 동포들과 카메룬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노력해서 모은 돈과

책을 받고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니 얼굴에 저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그로부터 약 다섯 달 후, 우리는 우리가 도와주었던, 그 중국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

로 했다. 1월 16일 부터 20일 까지 4박 5일간이었다. 카메룬은 아프리카에 있어서 아

쉽게도 가지 못했다. 이동거리가 너무 길어서 가지 못하고 중국 동포들을 만나러 가기

로 했다. 나는 그 소식을 접하고 당장 신청을 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는 사

실만으로도 기뻤다.

1월 초, 우리는 수원시 자원봉사센터에서 OT를 했다. 그곳에 같이 갈 언니 오빠들이

있었다. 우리학교 선배, 친구들도 있었고, 모르는 언니, 오빠들 그리고 용인외고 선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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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60

이 있었다. 같은 학교 선배,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모르는 사이였지만, 같은 봉사활

동을 하는 사이라고 생각하니 친근감이 들었다. 우리는 중국 동포들과 함께 할 북아트

와 우리나라 단옷날 만드는 실 팔찌인 장명루 만들기를 연습하고 마침내 1월 16일, 그

날을 맞이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떠나는 길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2시간이 넘는 비

행기, 그리고 3~4시간의 중국 내 이동거리 등 만만치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잘 견뎠다.

중국 헤이룽장 성 목단강시 삼차구진 조선족 중심 소학교. 우리가 후원해 주는 곳이

다. 우리학교 별관 크기만 한 작은 학교였다. 그곳 네모상자 도서관은 우리나라의 여러

단체에서 중국 조선족 학교 도서관 지원 사업으로 지어진 것이다. 우리가 보내준 책들

이 많이 꽂혀 있었다. 동화책부터, 만화책, 장편소설, 백과사전, 잡지들 여러 종류의 책

들이 있었다. 이미 아이들이 여러 번 읽어서 찢어지고, 손때가 탄 얼룩덜룩한 책들이었

지만, 책을 보는 아이들의 눈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아이들과 함께 북아트를 하고, 같

이 점심을 먹고, 장명루를 만들고, 술래잡기를 했다.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가고 싶다.’

지금도 나는 그 아이들을 생각한다. 지금은 2학년이 되었고 봉사활동과 함께 바쁜

한국의 중학생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곳에서 중국 동포 학생들과 카메룬에 있

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신 덕분에 많은 책들과 돈이 모이고 있다.

지구에는 여러 나라들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산다. 그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살고,

다른 환경에서 지낸다. 그리고 빈부격차도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를 위한 세상이 아닌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인생을 살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낙

오자들을 기다리고, 보살펴야 하는 사람은 꼭 있어야 한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

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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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61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나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나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

는 것이다.”

예기 중 중용 편 23장에 적혀있는 내용이다. 올해 개봉된 영화 ‘역린’에서 주인공인

정조(현빈)가 한 대사로도 유명하다. 영화관에서 이 대사를 들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내가 만난 중국동포 학생들과 우리 봉사단체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님들이었다. 우리는

그 학생들과 카메룬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그 학생들은 우리를 밝은 미소로

맞아주고, 학부모님들은 우리를 정성스럽게 도와주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올랐기 때

문이다.

우리가 나서서 어려운 아이들을 모두 돌봐주는 것은 힘들다. 다행히 우리나라에는

이런 좋은 일들을 아주 많이 하는 ‘코이카’라는 기관이 있다. 나는 이것을 알고 얼마나

마음이 기뻤는지 모른다. 코이카는 동남아시아 쪽의 나라들을 비롯해,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 또 생소하게 생각할 수 있는 동유럽, CIS 지역의 몇몇 나라들을 도와준다. 자원

봉사자들, 코이카의 직원 분들이 그 나라에 가서 집을 새로 지어주거나, 학교를 지어주

거나 재능 기부 등을 통해 지식 등을 알려주고 온다. 이뿐만이 아니라 자연재해가 발생

했을 때 다친 사람들을 치료 한다거나 구호물자를 지원해서 빨리 복구 될 수 있도록 도

와준다. 우리가 직접 그 나라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지 못하더라도 구호물자 지원이나,

구호금 기부, 영어 편지 해석, 아동 후원, 아이들의 학습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나

학용품 기부 등을 통해 우리는 남을 뒤돌아보고 도와주는 삶을 살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생활을 돌아보면 우리는 부족한 것 없이 넘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학교는 매일 가서 가기가 싫을 정도이고,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에 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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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62

며 공부를 한다. 또한 주변에는 음식점이나 옷 가게들도 많아서 돈만 있으면 원하는 음

식이나 옷을 살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생활에 질리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서 부

모님들께서는 언제나 우리는 복에 겨운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먹을 걱정도 없고 학

교에 못 다닐 걱정도 없고 더 나아가 학원까지 다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만난 나의 봉

사 활동 경험은 세계의 이웃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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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희야, 네팔 가자.”

“네? 네팔 여행요?”

“아니, 일주일간 봉사하러...”

“헐...”

처음에 아빠가 같이 네팔에 가자고 했을 때 나는 딱히 내키지 않았다. 가족이 전부

다 가는 것도 아니고 놀러 가는 것이 아닌 봉사하러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봉

사를 제대로 해본 적도 없고, 남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을 잘 몰랐다.

결국 나는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아빠와 함께 네팔에 가게 되었다. 처음 공항에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처음 나의 생각은 7박8일 동안 고생을 좀 하겠구

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팔은 가까운 나라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 가깝지도 않

았다. 자그마치 7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갔다. 네팔에 도착해서 네팔의 국제공항을 보니

네팔의 상황이 열악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공항에서 나와 시내로 들어가

니 매연은 무척 심하고 비포장도로가 즐비하며, 신호등은 커녕 1차선 2차선 표시도 없

었다. 굉장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나는 한국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좋은 도로로 다니

고, 좋은 신호등으로 안전하게 잘 살았는데 네팔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네팔

에 도착해서 처음 머문 숙소인 게스트하우스는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저 침대

가 있는 방이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둘째 날에는 네팔 현지인의 집에 머물러 1일 생

나는 행운아다 - 7박8일간의 네팔 소통여행 - 63

나는 행운아다 - 7박8일간의 네팔 소통여행 -

중등부 장려상

김 대 희, 염경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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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64

활을 하는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다. 나는 사실 외국어를 배우기만 했지 외국인들과 직

접 대화를 많이 해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외국인들과 다른 문화, 다른 언어를 이겨내고

소통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같이 홈스테이를 한 친구들과 형들이 네팔 사람들

과 서스름 없이 편하게 대화를 잘 해서 나도 안심이 되었다. 간식을 먹고 네팔인들과

산책을 갔다. 나와 동갑인 아이가 나에게 계속 많은 것을 물어 왔다. 네팔어는 전혀 모

르니 영어로 나는 말은 할 수 있었지만 듣는 것이 어려웠다. 그렇게 네팔 영어에 적응

하며 나눈 얘기는 한국에서 내 친구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관심사들이었다. ‘아, 이렇게

소통하면 되는 거구나…….’ 하며 대화에 익숙해질 때쯤, 저녁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 게

임, 네팔 게임을 하다가 잘 때가 되어 침낭을 끼고 잤다. 그곳은 굉장히 추웠다. 난방이

되지 않아 집에서도 밤에는 거의 영하의 날씨로 지냈다. 그래도 이런 것도 다 추억이라

고 생각하고 지내니 좋았다. 네팔 집에서의 홈스테이, 그들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많이 아쉬웠다. 어느새 정든 이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다니. 아쉬움을 뒤로 하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갔다.

다음날은 네팔의 포카라로 이동하였다. 네팔의 비행기를 타고 30여 분간 날아서 갔

다. 네팔 비행기의 이미지는 마치 우리나라의 비행기에 비하면 장난감 같았지만 안전

하게 잘 갔다. 포카라는 카트만두보다 좋았다. 매연이 덜하여 공기가 깨끗하고 주민들

도 여유로워 보이며 무엇보다 이번에 머무른 숙소도 더 업그레이드 된 듯 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열악한 환경이라 받아들이고 나니 조금만 좋으면 한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던 소소한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는 네팔의 학교에 가서 아

이들과 수업도 같이 하고 봉사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드디어 봉사를 하는 것이다.

솔직히 네팔에서 관광은 마치 그냥 서울에서 경복궁 보는 것 같았다. 현지 사람들과 만

나서 교류하는 것이 아니어서 나에게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우리가 학교에 도착하자, 우리를 반기는 아이들이 즐거워 보이고 행복해 보였다. 우

리가 힘겹게 들고 간 물품들도 나눠주고 교단에도 서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항상 학생

이고 선생님에게 배우는 입장이었는데, 내가 그 선생님의 자리에 서게 되다니. 흥미롭

고 신기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열심히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수업시간에

가져간 과학도구들로 보조교사 입장에서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아이들은 굉장히 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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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운아다 - 7박8일간의 네팔 소통여행 - 65

히 수업을 들으려고 하였다. 나도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더욱 열심히 보조

해주기로 하였다. 수업이 끝난 후, 한국과 네팔 축구시합을 하였다. 학교에서 그 넓은

운동장에서 가끔 축구를 하던 내가 이런 좁은데서 축구를 한다는 게 생소했으나 네팔

친구들보다 내가 축구를 잘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날쌘 네팔 학생들 사이에서 나

는 잘하지 못하였다. 마치 개미굴에 빠진 개미 같았다. 결국 그렇게 허우적대다 축구는

지게 되었다.

다음날은 좀 더 높은 고지대에 위치한 다른 학교를 가서 학생들을 만나 수업도 하고

물품들을 나눠줬다. 나는 그곳에서 네팔 학생들의 공통점을 찾았다. 바로 뭐든지 열심

히 한다는 것. 학습교재도 부족하고 도구도 별로 없는 환경에서 네팔 학생들은 모든 것

이 풍부한 우리들보다 배움의 욕구는 더 강했고 모든 것에 진지했다. 본래의 나는 좋아

하는 것만 찾고 싫은 것은 안하려고 하고, 반항하였는데, 정말 많이 후회가 되었다. 이

두 학교에서의 봉사가 끝나고 나니, 나는 내가 도와주려고 왔는데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으며, 함께 나누고 간 그런 봉사활동이 된 것 같았다. 버스 안에서 네팔에 학교를 지

으신 엄홍길 재단 지부장님이 말씀하셨다. 네팔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아직

도 개발도상국이며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다. 그건 바로 환경

이 안되기 때문인데, 산으로 둘러싸인 이 환경에서 다른 곳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런 환경이 되며 기회가 있는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가. 참으로 나와 내 일상 환경을 되돌아보게끔 만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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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66

어느새 8일간의 짧은 네팔 체험이 끝나고 한국에 와서 생각했다. 이곳이 정말 좋은

곳이구나. 나는 행운아다. 네팔에 함께 간 데이빗 선생님은 계속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행운아입니다. 그러니 그 기회를 잘 활용하세요.”라고. 이번 네팔 8일간의

여정을 끝으로 나는 봉사가 아닌, 사람들과 소통하고 함께 나누고 온 것 같아 뿌듯하기

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일회성으로 끝나는 그런 봉사가 아닌 그들에게 진

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봉사였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고 너무 짧은 시간 알게

되었던 친숙한 아이들과 헤어짐의 아쉬움. 만감이 교차하는 그 돌아오는 여정에서 봉

사, 원조, 나눔, 소통 등의 많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평범한 중학생의 일상에서 벗어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니 나의 모습이 더 잘 보였다. 그리고 당연시 여기는 것들도 다

시금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초롱초롱한 네팔 아이들의 열정에 나도 그런 눈과 마음으

로 세상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과 언어는 잘 안 통했지만 마음으로 소통

한 며칠간 나에게는 가족과 여행을 한 것 이상의 큰 경험을 얻었다. 타인과의 소통과

나눔 그리고 배움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같이 간 어른들이 나에 대해 말씀하

셨다. 네팔로 떠날 때보다 얼굴이 많이 밝아졌다고.

“대희야, 또 봉사하러 갈까?” 아빠가 물어 오신다.

“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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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부 대상강 호 종•굶주림 없는 세상 : 꿈이라는 보물 찾기

고등부 금상김 다 원•그 여름 우즈베키스탄, 희망을 찾다

고등부 은상이 정 원•당신의 꿈을 응원합니다

고등부 동상홍 수 찬•해외봉사를 통해 배운 소중한 교훈

고등부 장려상최 해 리•지금도 진행 중인 무모하지만

따뜻한 세상의 가능성을 보고 싶은 나의 끝없는 도전

전 지 원•나에게 찾아온 기적

이 현 정•내가 했던 착각

고 등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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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없는 세상 : 꿈이라는 보물 찾기 69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 직장 때문에 가족 모두 필리핀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필

리핀에 대한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검은 피부와 낡은 옷차림의 사람들, 쓰러질

듯 허름한 집들과 군데군데 구멍이 난 아스팔트 도로 등 모든 경제 문화 인프라가 한국

과 비교되면서 어린 나에게 필리핀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였다. 그땐 외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에서 산다는 사실이 그나마 큰 위안이었다.

이처럼 필리핀 사람들은 너무나 낯선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한해 한해 지날

수록 그들은 내 이웃과 다정한 친구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학교에서 만난 필리피노 친

구는 한국 친구들과 다를 바가 없었고 그들과 우정을 나누면서 같은 감정을 가진 인

간이라는 동질감이 내 마음속 장벽을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게 필리핀은

제 2의 고향처럼 친숙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필리핀을 이해하고 필리핀 사람들

에게 애정을 가질수록 필리핀의 부조리와 가난한 이웃이 마음에 걸렸다. 필리핀은 상

위 3~5% 정도가 상류층의 생활을 영위하며, 인구의 25%는 빈곤층으로 하루 2달러

이하의 소득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을 만큼 부의 양극화가 심각한 나라이다. 2009년

ADB(Asian Development Bank) 자료에 의하면 현재 필리핀 국민 54%가 빈곤층이며

3명 중 1명은 최빈곤층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교에서 내가 가입한 봉사 동아리(Project Compassion과 Community Club) 활동

으로 최빈곤층 마을을 방문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비

굶주림 없는 세상 :

꿈이라는 보물 찾기

고등부 대상

강 호 종, 브렌트 국제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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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70

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2평 남짓한 좁은 방에서 식구 10명이 눕지도 못해 앉아

서 자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식구들이 아파도 병원을 가지 못하고, 돈이 없어 끼니를

거르는 일은 그들의 흔한 일상이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손길은 부족한데, 그들은 너무나 많은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준비된 음식과 약품은 늘 부족했고 그걸 나눠주고 돌아오면 늘 마음이 무거웠고 커다

란 아쉬움이 들었다.

어쩌면 날 가장 슬프게 했던 것은 아이들의 처절한 생존 본능이었다. 만약 당신이 이

곳에서 천진난만한 동심의 눈빛이나 도움의 손길에 감사하고 부끄러워하는 아이들의

순박한 눈빛을 기대했다면 엄청 당혹스러움을 경험할 것이다.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애쓰는 탐욕과 몰염치의 눈빛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권이란 인간으로서의 존엄

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권리이거늘 이곳에선 인권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봉사 동아리 한국인 친구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그들을 우리 힘으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친구와 방과 후에

모여 매일 고민했다. 문득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국의 어려웠던 과거가 떠올랐

다. 잘 먹지 못하고 잘 입지 못했지만 지금의 발전된 한국을 만들었던 지혜는 바로 “교

육”이었다. 이것에서 모티브를 얻어 학교에서 책을 모금해 이들에게 전달하는 “북 드라

이브 프로젝트(Book Drive Project)”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를 계획한 배경은 책의 절대적 부족때문이기도 하다. 필리핀은 7,000개 이상의 섬

나라로 되어 있어 모국어가 173개에 이른다. 서로 의사소통이 될 수 없을 만큼 다른

언어이기에 영어와 따갈로그어를 대표 공용어로 지정해 학교에서 쓰고 배우고 있다.

그러나 교육이나 학습에 필요한 모든 책은 영어로 되어 있고, 만화책이나 소설책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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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없는 세상 : 꿈이라는 보물 찾기 71

간간히 따갈로그어로 되어 있다. 우리가 쉽게 책을 구입할 수 있는 서점에 가면 영어로

된 책은 자국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별로 없고 대부분 미국이나 영국 등 영어 선진국에

서 수입된 책이 전부이며, 이는 국민 소득 대비 굉장히 비싸기에 일반 서민층에선 책을

구입할 엄두를 못내는 실정이다. 단지 상류층만이 고급 교육에 필요한 양서를 접할 수

있고, 일반 서민층은 접할 수 없기에 지식의 빈익빈 부익부는 계속되고, 이는 부의 양

극화가 고착되는 악순환의 패턴이 필리핀의 현실인 것이다.

영어로 되어있는 교과서를 학교에서 배운다고는 하지만 낱장으로 복사해서 사용하

는 상태였다. 책이 무척 귀해, 많은 공립학교와 공립 도서관은 도서관이라 부르지도 못

할 만큼 책의 상태와 보관량이 형편없었다. 학교 재정은 빈약하고 국가 지원도 거의 없

기에 책을 다량으로 구입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 빈곤층의 학생들이 책을 통해 지식을 배우고, 스스로 생각할 힘을 키우고,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워 가난을 극복하는 내적 의지를 갖길 바랬다. 진정으로 책 속에서

지식과 지혜, 꿈과 희망을 찾고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 이를 유지할 수

있는 내적 자존감을 형성하길 바랬다. 단순 노동으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이 아니라

좋은 직업을 통해 인간답게 사는 삶을 영위하길 바란 것이다. 즉, 난 단지 오늘 먹을거

리를 주어 배를 채워주는 것보다 유명한 탈무드의 격언처럼 고기 낚는 법을 가르쳐 주

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북 드라이브 프로젝트를 실행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

유이다.

외국 국제학교에서는 단체 모금 활동을 학생이 계획, 실행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하는

매뉴얼이 있다. 먼저 담당 선생님(Supervisor Teacher)을 정해 자문을 구하고, 어떤 목

적과 방법으로 모금 활동을 할 것인지 의논하고, 이를 교장 선생님과 여러 선생님의 허

락을 구한 후에 오피스와 협조하여 실행하는 것이다.

나는 학교 종교 과목 선생님이시자 목사님이신 Father Hance 선생님께 이 프로젝트

의 담당 선생님이 되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 선생님은 우리들의 선한 뜻을 이

해하시고 도움을 주시기로 약속했다. 선생님과 일단 책을 모금한 후 전달한 수 있는 학

교와 도서관을 사전 답사했다. 너무나 많은 곳이 책이 부족했기에 모금한 책을 전달하

는 곳을 지정하는 것조차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환경적으로는 가장 열악하되, 가장 많

은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전달하자고 원칙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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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72

책 모금 활동에 필요한 포스터를 만들고 어떻게 모금 활동을 할 것인지 구상 단계에

있던 무렵, 북 드라이브에 위기가 닥쳤다. 나와 함께 이 모금 활동을 함께 계획했던 친

구가 한국으로 돌연히 떠나게 되었다. 친구 아버님께서 주재원 임기가 끝나 가족 모두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친구는 너무나 아쉬워하며 한국으로 떠났다.

나는 망연자실하여 아무 계획과 준비 없이 여름 방학을 맞이하고 말았다.

여름 방학 동안 북 드라이브에 대해 고민한 결과 혼자 힘으로라도 이 프로젝트를 완

성하고자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래서 혼자 중단된 포스터를 다시 만들고, UCC(홍보

동영상)를 제작했다. 평소 가지고 있던 컴퓨터 기술을 모두 쏟아 부어 UCC 제작에 온

힘을 쏟았다. 내가 다니고 있는 국제 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단독 계획 실행하는 모금

활동이었기에 커다란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래는 이렇게 완성된 포스터와 홍보

UCC 사진이다.

개학이 되고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활기차게 신학기를 시작할 무렵,

난 북 드라이브 프로젝트 홍보를 시작했다. 학생들이 많이 볼 수 있는 벽면에 포스터를

붙이고, SNS를 이용해 홍보하고, 고등부 전체가 강당에 모이는 예배 시간에 준비된 동

영상을 상영하고 프로젝트의 중요성에 관해 연설했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고, 모든

선후배 학생들은 내가 실시하는 프로젝트의 참뜻을 이해하고 참여 의사를 밝혔다. 선

생님들도 많은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다음날부터 책 모금함에 책들이 쌓이

기 시작했다.

이 모금 활동에 앞서 안정된 책 확보를 위해 학교 도서관 담당 선생님을 면담했다.

포스터 및 홍보 U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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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없는 세상 : 꿈이라는 보물 찾기 73

작년에 한차례 방문해서 협조를 요청했으나 완곡한 거절을 한 번 당했던 터라 이번에

다시 방문하는 데에는 참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조금만 헌 책이 되면 전량으로

폐기하는, 아깝고 좋은 책들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도서관 담당 선생님께 이 프로

젝트의 의의와 도서관의 참여가 어떤 시너지와 선행의 좋은 선례가 되는지에 대해 설

명 드렸다. 결과는 흔쾌히 200권의 중고책을 도와주시기로 약속했다. 나의 끈기와 설

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책 모금함에 책들은 놀라울 만큼 많이 쌓여갔다. 하루가 끝나면 모금함이 꽉 차서 옆

공간까지 책들이 쌓여있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사 선생님께

서 값비싼 백과사전 한 벌을 기증하셨던 것과, 물리 선생님께서 아끼던 과학 관련 전문

책들을 기증하셨던 일이다. 이 외에도 선후배 모두 집에 있는 읽지 않는 책부터 아끼던

책까지 아낌없이 기부했다. 참 고마웠고 감사했다.

그러던 중 Father Jance 선생님은 이 프로젝트를 중학교와 초등학교까지 확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다. 그래서 중학교와 초등학교 후배들 앞에서 동영상이 상

영되고 나는 이 프로젝트에 관한 연설을 했다. 너무나 많은 호응과 참여가 따르고 난

이 상황이 좀처럼 믿겨지지 않았다. 책을 통해 필리핀 가난한 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찾

길 바랬는데 난 책 모금 활동을 통해 이 사회의 따뜻한 꿈과 희망을 본 것이었다.

원래 이 프로젝트의 기간은 2주로 잡았으나 고등학교, 중학교 거기다 초등학교까지

확대하는 바람에 장장 한 달에 걸친 프로젝트가 되었다. 참여한 사람은 고등, 중등, 초

등 선생님과 학생들로 약 1,500명 가량 되었고, 모금한 책은 800권 가량 되었다. 난

책 한 권 한 권 북 드라이브가 새겨진 도장을 찍어 카운트를 했고, 책의 상태와 종류에

따라 분류했다. 방과 후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이 프로젝트를 위해 기꺼이 참여했고 책

을 수선하거나 책을 묶어 학교 창고에 보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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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74

모금된 책은 Binan에 있는 도서관과 인근 공립학교에 기증되었다. 이 도서관은 옛

시청 건물로 현재 새롭게 공립 도서관으로 탈바꿈하려고 공사 중이다. 담당자를 만나

책을 기증했고 이들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로 인해 필리핀 아이들이 책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 그들이 처한 척박한 인권 상황이 조금이라도 개선되길 바랬다.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순간 순간이 나에겐 도전이었고 용기가 필요한 과정이었다.

참여도가 크지 않을까봐 염려스러웠고 특히 이런 전체 모금의 선례가 없었기에 절차도

잘 몰랐고 성공 여부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 책을 읽는 아이들의 반

짝이는 눈동자를 생각했고 몇 권의 책이라도 의롭게 읽혀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결연하

게 용기를 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타인을 도와준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지 보다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성장하는지를 배웠다. 어떤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절차와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까지 선한 뜻에 동

참하는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힘이 우리 사회를 지탱한다는 사실은 내가 얻은 가장 중

요한 자산이었다.

1년이라는 긴 준비 과정을 거쳤지만 막상 북 드라이브 프로젝트를 마치니 아쉬웠던

점이 많았다. 필리핀 뿐만 아니라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를 살펴보면 아주 많

은 나라가 있다. 그러나 몇몇의 선진국을 제외하곤 아프리카나 동남아, 남태평양에 위

치한 가난한 후진국들이다. 대부분 교육 환경이 열악하고 책은 절대 부족 국가이므로

도움이 필요한 곳은 너무나 많다.

책은 특성상 한두 번 읽거나, 읽는 사람이 연령이 많아지면 책꽂이에 내내 꽂혀있거

나 아님 버려지게 된다. 한국엔 지금 수많은 영어 유치원과 영어 학원, 국제 학교가 존

재한다. 학생들은 연령과 자기 수준에 맞는 영어 교재(미국 교과서 등)와 스토리 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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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없는 세상 : 꿈이라는 보물 찾기 75

설, 에세이 등)을 사서 배우고 있으나 빠른 진도에 의해 대부분의 교재들은 활용도가

높지 않다. 진도가 지나간 영어 책들은 대부분은 선순환하지 못하고 종이 쓰레기로 분

류 버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고가 되어 폐기되는 영어책들을 모금하여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에게 지속

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면 분명 이들에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아끼던 것을 나누

어주는 것은 어렵지만 나에게 더 이상 소용없어진 것이 누군가에겐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보다 값지고 쉬운 선행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책 모금 방법, 홍보 전략, 지원 장소 선정 등 북 드라이브를 지속하기 위해서

는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에 책 모금에 뜻이 있는 자원 봉사자들

이 동아리(club, Activities)를 형성하거나 이미 네트워크가 있는 민간 단체나 봉사 단체,

국제 기구와의 협력 등을 고려할 수 있다. 또한 이들 단체는 지속적으로 책을 지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책을 기부한 학교나 도서관에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독서 지도나 토론

회, 독서 퀴즈, 에세이 대회 등 문화 행사까지 진행한다면 민간 외교 사절단의 역할까

지 수행할 수 있다. 이는 코이카(KOICA)의 미션인 개발도상국의 빈곤 감소 및 삶의 질

향상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경제발전을 실현하고 국제 사회와의 상호 조화를 통해 범지

구적 개발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것과 뜻을 함께 한다. 이런 활동은 문화 외교의 맥락

으로 소프트 파워 효과까지 얻어 한국 국가 브랜드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G. 바슐라르는 책은 꿈꾸는 것을 가르쳐 주는 진짜 선생님이라고 했다. 북 드라이브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책이 지금 어딘가에서 누군가에 의해 즐겁게 읽히고 있을 것이

다. 그리고 그 책을 읽는 사람은 꿈을 꾸리라. 드디어 그들을 가난에서 구제해 줄 꿈이

라는 보물찾기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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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76

“즈드라스브이쩨, 우즈베키스탄!”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나는 ‘여성가족부 청소년해외봉사파견단’의 일원으로 생애

첫 해외봉사활동을 떠나게 되었다. 목적지는 낯선 이름의 나라, 우즈베키스탄. 고등학

생이 되기 전 마지막 여름방학을 보람된 추억으로 기억하고 싶어 무작정 내린 결정이

었다. 막상 합격 소식을 듣고 본격적인 활동 준비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게 되면서, 머

릿속으로 온갖 걱정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과일들로 가득

한 활기찬 시장 골목, 모래바람이 날리는 실크로드의 이슬람 사원들은 내 상상에 불과

했을까? 이야기와 글로만 전해 듣는 너무나도 열악한 그곳 상황에 지레 겁부터 먹어버

렸던 것 같다. 낯선 나라로의 여행에 기꺼이 도전하겠다던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우

즈벡어는 물론이고 러시아어 한 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땀 흘려 준비해왔던 교육

활동이 모두 헛수고가 되는 건 아닐지 이런저런 생각에 출국일이 다가올수록 기대와

설렘만큼 걱정이 쌓이는 날들이었다.

드디어 우즈베키스탄에서의 첫 날.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간 어린이 센터 주위에는

이른 아침부터 우리를 보러 나온 아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교실 안을 기웃거리

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내가 맡은 첫 임무는 수업에 등록한 아이들의 명단 만들

기였다. 교실 입구에서 아이들을 마당 밖까지 한 줄로 세워놓고 손에 든 종이 위에 이

름을 적기 시작했다.

그 여름 우즈베키스탄,

희망을 찾다

고등부 금상

김 다 원, 용인한국외국어대학교부설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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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우즈베키스탄, 희망을 찾다 77

“깍 바스 자붓? 이름이 뭐에요?”

109번의 인사와 109번의 자기소개. 아이들은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 인사를 건네자

무척이나 신기하고 쑥스러운 눈치였다. ‘안녕’ 한 마디에도 뭐가 그렇게나 즐거운지 까

르르 뒤집어지는 아이들도 있었고, 손을 번쩍 들며 러시아어로 뭔가를 물어오기도 했

다. 비록 그 뜻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하지만, 그 날 우리를 스스럼없이 반

갑게 맞아 주었던 아이들의 미소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키르키즈스탄에서 건너와 빈민촌에 머물면서 수업을 들으러 온 세 자매가 있었다.

군데군데 해진 옷에 발에는 신발도 제대로 신겨져 있지 않았다. 막내 동생 손을 잡고

구석에 서 있는 아이에게 통역 봉사단과 함께 다가가 말을 건넸는데, 아이는 손을 내저

으며 쭈뼛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한 두 마디 대화를 나눈 통역 봉사단

을 통해 그 아이들이 러시아어를 할 줄 몰라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전통 탈을 나누어주고 음악에 맞춰 같이 탈춤을 배우는 시

간이었는데, 안으로 데려와 의자에 앉혀 놓았던 4살 난 막내가 그 사이 어디에 숨었는

지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서야 교실 구석에서 울먹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가

보였다. 옷에 실례를 한 것이었다.

우는 막내를 안고 나와 화장실에서 씻기고, 당장 입힐 옷이 없어 급하게 내 겉옷을

둘러 데리고 나왔다.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 당할 걱정 때문인지,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

는 아이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 때 떠오른 생각에 남겨둔 탈을 가져와 조심스레 막내에게 씌워 주었다. 얼굴이 보

이지 않으니 아이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다시 웃으며 어울려 노

는 순수한 아이를 보며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상대의 입장에서 진정으로 고민하고 배

려하면 마음으로 충분히 소통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 날의 짧은 소동은

둘만의 비밀로 남겨두고.

저녁 시간, 봉사단 회의 시간에 현지 NGO 지원단으로부터 세 자매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에는 주변 국가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주해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있는데, 복지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할 뿐더러 아이들은 학교에 등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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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78

수 없어 정식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했다. 우리와 같은 봉사단이 간간이 여

는 특별 수업이 그 아이들이 또래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며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

인 셈이었다.

그날 센터에서 주위 아이들이 서로 장난을 치며 뛰어 노는 동안, 부러운 눈으로 한참

을 주변만 서성이던 세 아이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국제적으로

이러한 난민 아동들을 보호하고 교육할, 보다 효과적이고 행동적인 지원 체계의 구축

이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매일 오후, 수업이 끝난 교실 앞마당에서는 한국 NGO가 설립한 센터에서 한국어 수

업을 들어왔던 아이들이 재잘재잘 서툰 한국어로 말을 건네 왔다. 40도를 웃도는 습한

날씨에 지칠 법도 한데, 항상 누가 시키지 않아도 교실 안부터 마당 청소까지 깨끗이

해 놓는 기특한 녀석들이었다. 그 중에 유달리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단원들 모두를

놀라게 한 ‘다리야’라는 이름의 꼬마 숙녀가 있었다. 하루는 다리야가 나를 ‘언니’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다 자랑스럽게 자기 꿈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사뭇 진지

한 표정으로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 한국에서 대학교에 다닐 거라며,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우즈벡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 줄 거라고 한다. 기특한 생각이

라며 칭찬해 주었더니 으쓱해져서 하루 종일 얼마나 열심히 수업을 들었는지 모른다.

2015년을 기한으로 UN이 설정한 8가지의 새천년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 MDGs)에도 포함되어 있듯이, 모든 아이들은 평등하게 기초교육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한국은 여느 나라 못지않은 교육 기반 시설과 다양한 교육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룩하기 가장 큰

주춧돌이 되었던 것 또한 교육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 가치를 직접 경험한 나라로써 한

국이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자원이자 힘은 바로 우수한 인적 자원과 교육콘텐츠라고 생

각한다. 한국의 교육학 전문가들, 개발협력 분야의 외교관들이 직접 개발도상국들의 멘

토가 되어 교육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개선점을 찾아간다면 분명 큰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정부와 국제기구 차원에서의 공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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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우즈베키스탄, 희망을 찾다 79

우리 국민들의 자발적인 관심과 도움이다. 세계시민으로써 지구촌 이웃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나눔을 베풀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오

늘날 국제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개발협력국의 국민으로서의 우리의 역할일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넉넉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티 없이 자

라나는 아이들에게서 보았던 것은 배움에 대한 순수한 소망과 열정이었다. 공부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더 넓은 세상을 열어주는 것이 선진국

으로 발돋움한 한국의 우리들이 지녀야 할 책임이 아닌가 생각한다. 학교에 다닐 수 없

어 운동장 주변만 맴도는 아이들도, 공부할 책상과 의자가 없어 흙바닥을 칠판 삼아 꿈

을 키워나가는 아이들도, 더 밝고 멋진 미래를 그릴 수 있도록 우리가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언젠가 멋진 선생님으로 자란 다리야가 그곳의 아이들에게 자신이 이루어낸

꿈의 열매를 또 다시 작은 희망의 씨앗으로 전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우즈베키스탄의

어느 작은 마을, 그렇게 심어질 희망이 또 다시 천천히,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전 세계

모든 아이들의 꿈속에 꽃피울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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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80

이 편지를 당신에게 부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스스로에게 다

짐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써 내려갑니다.

버스는 돌길을 덜커덩 덜커덩 달려갑니다. 오늘 우간다 소로티 지역의 날씨는 쨍 하

니 맑음입니다. 바다를 뒤집어 놓은 듯 푸른 물감이 펼쳐진 하늘 아래 붉은 흙 길이 끝

없이 이어집니다. 그 길 끝에는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ITASO’ 진료소가 있습니다. 떨

리는 마음과 긴장 되는 마음을 안고 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빛나는 흰자위와 마주쳤습

니다. “Ki kati? Ffe tuli bakorea. (안녕? 우리는 한국에서 왔단다.)” 인사를 건네자 어

린 남자 아이가 씨익 웃으며 말합니다. “Ki kati? Erinnya lyange nze Akiki (내 이름은

아키키에요.)”

아키키는 태어날 때부터 에이즈와 싸워 왔다고 합니다. 온 몸에 물집이 잡힌 채 구

토와 설사를 하는 나무토막 같은 아이들, 에이즈가 뇌를 삼켜서 움직이지 못하고 지쳐

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꺼져 가는 공기에 숨이 막혀 왔습니다. 태

어날 때부터 함께 해 온 병을 친구처럼, 운명처럼 받아들인 아이들에게 내일은 없는 듯

보입니다. 여섯 살 아키키는 “나는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은데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

어요…….” 라고 말끝을 흐립니다.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서는 “바로 이거야. 이거 때문

에 내가 달려 온 거야.”라는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당신의 꿈을 응원합니다

고등부 은상

이 정 원,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소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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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꿈을 응원합니다 81

아키키와 같은 여섯 살의 저는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러 갈래의 줄

을 달고 빛나는 머리로 병원 침대에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께서는 제 손을 당신의 몸에

가져다 대셨습니다. 손에 닿는 단단한 덩어리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손을 떼고 말았

습니다. 다시 제 몸을 만져보았지만 물렁한 살밖에 만져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할아

버지께서 아프셔서 건강해지시기 위해서 치료를 받을 거란다.” 부모님의 말과는 달리

너무 늦게 병을 발견하셨던 할아버지께서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셨습니다. 주말이면

함께 공원을 산책했고 목마를 태워주셨고 당신을 많이 닮은 저를 예뻐하셨던 할아버지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침대에 누워 고민했습니다. “나는 할아버지를

닮았으니 아프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처음에는 무서웠다가 그

다음에는 화가 났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밥을

먹어도 맛있지 않았고, 친구와 놀아도 재미있지가 않았고, 무엇을 해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후 몇 년간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거나 장염으로 배가 아프거나, 눈병이라도 걸릴

때면 혹시 큰 병에 걸렸으면 어쩌나 속으로 전전긍긍 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면 의사선생님께서는 분명한 진단을 내리시면서 “큰 병이 아니니 걱

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고 안심을 시켜 주셨습니다. 필요하면 주사를 맞고, 약을 먹

으면 그만, 1주일이 채 걸리지 않아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매년 학교에서 나눠주는 신

체검사 결과표에 인쇄된 “건강 양호”를 보면 괜히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나도 아프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고 암흑 속을 헤매는 코미디를 찍지 않습

니다. 어떤 병에 걸려도 제 때 병원에 가서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고칠 수 있다는 사실

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긍정적으로 내일을 준비하며 열정적으로 꿈을 꾸고 있

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나 친구들이 장래희망을 물을 때 저는 당당하게 어깨를 피고 “앞으

로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누군가를

지키는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들이 간절하게 “의사 선생님” 하

고 부를 때 의사는 희망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피어납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끊임없

이 “당신을 지켜 주겠습니다. 당신이 건강해질 수 있도록 힘 닿는 데까지 보호해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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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82

책임져 주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아프고 지친 누군가를 일으켜 세워주고 상처를

치료해 주고 다시 달릴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일은 두근두근 가슴이 뛰는 일입니다.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던 당신의 모습은 제가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숨을 죽이며 바라보게 되는, 본받고 싶은 참된 의사의 모습

입니다. 매년 세계 보건기구(WHO)의 총회가 열리면 각국의 대통령과 총리, 빌 게이츠

와 같은 다국적 기업의 CEO 등 유명 인사들이 제네바에 모여 그 해의 중요한 보건 현

안을 논의합니다. 당신은 그 곳에서 결연한 눈빛과 단호한 목소리로 “우리는 올바른 일

을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라고 호소하셨지요. 그 결의는 구

체적인 정책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유엔 회원국의 분담금과 기부금이 결핵약품을 후

진국에 지원하는 GDP(국제의약품기구)의 설립, 2005년까지 3백만 명의 에이즈 환자

에게 항 에이즈 바이러스 치료제를 보급하는 ‘3 by 5’ 정책, 소아마비 퇴치 정책 등에

사용됨으로써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하루

에 천원이 없어서 치료약을 먹지 못하고 죽어가던 에이즈 환자 백 만 명이 절망에서 벗

어났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는 ‘아, 백만 명의 환자는 한 명의 의사가 평생을 걸쳐

진료해도 돌볼 수 없는 숫자가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당신의 뒤를 쫓아 인류에 보탬이 되는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

력하고 있습니다. 우선 제 꿈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신약을 개발해 질병으로 고

통 받는 사람들, 특히 가난한 개발도상국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는 포부를 가

지고 있습니다. 의학은 언제나 부유한 선진국을 중심으로 발달하지만 정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피해를 보는 곳은 빈곤하고 위생상태가 취약한 개발도상국이기 때

문입니다. 서아프리카에서 불길처럼 번지는 에볼라 바이러스는 우리 사회를 불안에 떨

게 하고 있습니다. 불과 한 달 만에 2,400명이 넘는 감염자가 가족들을 떠나 숨을 거

두었다고 합니다. 에볼라 바이러스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 라이베리아의 어떤

어린이가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엄마와 아빠를 끌고 어디론가 가 버렸어요.”라고

말하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우리에게는 가슴 아픈 뉴스거리였지만 그들에게는

비참한 현실이자 생명의 위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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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볼라 바이러스가 만약 유럽에서 유행했다면 치료제로 알려진 지맵(ZMapp)이 지

금처럼 더디게 개발되거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어처구니없이 희생당하고 있을지 의

문이 들었습니다.

보건의 혜택이 닿지 않는 많은 곳들에서는 에볼라 바이러스 외에도 다양한 질병 때

문에 간단한 치료만 받아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NEJM(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JAMA(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등 의학 저널들을 봅니다. 비록 전문적인 내용들은 이해하지 못

하지만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건강 문제에 대해서 시야를 넓혀 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당신이 몸담았던 세계 보건기구와 같은 곳에서 저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갈고

닦아 실현 가능한 정책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연습하기

위해서 ‘단국 ODA’ 동아리를 만들어서 회장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기생충 사업’의 성공사례를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에 적용하면 어떨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10명 중 7명이 기생충에 감염되었다고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소득수준은 어떠한지를 기준으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기생충에 많이 감염되는

지를 정기적으로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를 가지고 기생충을 박멸한 결과 20년이 지난

후 기생충 감염률은 0에 수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생충 사업의 경험을 개발

도상국가에 알려주고 도와주어 성공을 거둔다면 사람들이 더러운 물을 마시고 사상충

에 감염되어 실명을 하거나 기생충 때문에 면역력이 약해져서 폐렴, 빈혈 등의 합병증

에 걸리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이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단순하게

의사가 되기 위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도 공부는 결국 자기 수련이기 때문입니다. 꼬리

에 꼬리를 무는 수행평가, 중간고사, 영어 자격증 시험, 올림피아드를 준비하다 보면

가끔은 게으름을 부리고 친구와 신나게 한 번 놀고 싶다는 유혹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오늘만 놀면 괜찮지 않을까. 기분 전환을 제대로 한 후 내일 더 열심히 하는 거야.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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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달콤한 속삭임이 가슴 속에서 들려올 때 저는 스스로에게 “아니야. 이 정도도 이

겨내지 못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

니다.

물론 앉아서 꿈만 꾼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

름 행동하는 지성이었던 당신을 본받고자 ‘한 톨 나눔 축제’에 참가해서 뜨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 톨 나눔 축제는 기아대책본부에서 청소년들이 직접 저개발 국가에 도

움의 손길을 내밀어 보자는 취지에서 마련한 행사입니다. ‘단국 ODA’ 동아리의 친구들

과 월드컵 경기장을 찾은 저는 고통받는 지구촌에 관한 영상을 보고 퀴즈를 푸는 캠페

인에 참가했습니다. “단지 굶주림 때문에 몇 시간(분·초)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눈이

멀고 아사할까요?”라고 사회자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글쎄… 한 두

시간에 한 명 정도가 굶어 죽고 눈이 멀지 않을까?” “아니야, 바보야, 아프리카만 해도

인구가 얼마나 많은데 아마 30분에 한 명 정도는 될 걸?” 하면서 서로의 무식을 뽐냈

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바로 지금도 5초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아사하고, 3분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실명이 되고 있습니다.”라는 정답을 듣고 못 견디게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의식 있는 세계 시민이 되

려고 관련 있는 행사에도 참여하며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급식이 맛이 없다고 반찬 투정을 하고 소중한 밥을 버리는 그 순간에도 지구 반대편의

친구들은 굶주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깨달은 이후 급식을 남기지 않고 뷔

페에 가도 먹을 만큼만 덜어 와서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리고 학용품이 부족한 가나의 어린이들에게 줄 학용품 키트를 정성을 담아 만들었

습니다. ‘이 연필과 지우개, 펜으로 가나의 친구들이 글씨를 배우고, 수학을 배우며 꿈

을 키워 나갔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며 완성된 키트(kit)에 응원의 글을 적었습니

다. 그러는 동안 6월의 맑은 하늘에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햇살이 쏟아져 내려 등이

따가워오고 주룩주룩 땀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에는 밝고 따뜻한 빛이 퍼져나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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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으로도 이번 달에도 용돈을 아끼고 쪼개서 삼만 원의 기부금을 마련하는데 성

공했습니다. 제가 기부한 돈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의약품을 보급하는데 사용됩니

다. 기부를 결심한 이유는 불평등을 가장 빨리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가진 사람, 잘 사

는 국가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당신의 주장에 동감했기 때문입니

다.유래 없이 평화롭고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개발도상국들이 가

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할 수 있는 밑천이 되는 최소한의 ‘마중물’을 부어

주는 것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은 결코 우

리의 이익이나 생존을 위협할 정도의 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루에 천원을

아끼기 위해서 쉬는 시간에 매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싶을 때 한 번 꾹 참고,

학원에 가는 길에 친구와 간식을 사먹고 싶을 때 또 한 번 꾹 참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개발도상국을 도와주는 일은 우리에게 실제적 이익을 가져다주

지 않는 낭비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외국에 대한 지원은 결국 우리에게

지원의 효과가 되돌아올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변에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손

을 내밀어 함께 나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시민의식으로 자리 잡을 때 우리 사회는 중산

층이 두터운 보다 안정된 사회구조가 되지 않을까요. 마찬가지로 국제사회가 지금처럼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누어진 채 극심한 양극화에 시달린다면 그것은 우리나라에게

도 큰 부담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최소한의 건강조차 지킬 수 없는 절망 속에 놓인 사람들을 치료해주어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에 평생을 몸담고 싶습니다. 제가 앞으로 실패와 좌절을 겪을

지라도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뚜벅뚜벅 걸어가셨던 당신의 앞선 발걸음을 나침반으로

삼고, 뜨거운 열정을 엔진으로 삼아 나아가겠습니다. 지금도 ‘KOICA’의 수많은 해외봉

사단원들,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의 봉사자들, 그 외의 수많은 비정부기구와 국제기구

에 직원들은 당신의 모습으로 지구의 가장 어두운 곳들을 밝게 비추어주고 있겠지요.

저 역시 또 다른 당신이 되어 소외된 사람들의 꿈을 응원하겠습니다. “당신의 꿈을 응

원합니다.”

존경하는 고(故)이종욱 박사님께 이 편지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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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난 이 나라의 이름만 들어도 희망과 열정이 꿈틀거린다.

내가 처음으로 외국을 나간 것이 베트남이었고, 가장 많은 나라를 방문한 것이 베트

남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은 앞으로의 내 삶의 목표를 선사해주었고 지침이 되었

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의 해외봉사활동을 통해서.

2014년 1월 24일. 2년간의 준비 끝에 베트남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파주청년문화봉사단 봉사활동에 고1때부터 참여하면서 대학생 선배들이 해외봉사를

다녀온 영상물과 사진들을 보여주며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러면서 앞으로 우리에게도

그러한 해외봉사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다짐을 가졌다.

그렇게 다짐한 친구들이 나를 포함하여 하나, 둘씩 모이면서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비용 문제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자신의 용돈을 비롯하여 각종 공모전

에서 받은 상금 및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면서 조금씩 경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선배들이 이룩한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청소년인 우리들만이 할 수 있

해외봉사를 통해 배운

소중한 교훈

고등부 동상

홍 수 찬, 문산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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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를 통해 배운 소중한 교훈 87

는 일들을 찾아가며 지속적으로 새로운 해외봉사 프로그램을 연구, 발굴하는데 치중했

다. 그러다가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다문화 가정에 대해서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

고 그 추세를 반영하듯 내 고장에서도 건강가정지원센터, 다문화복지협회를 비롯한 다

문화 관련 단체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단체에서 진행하는 다문화

관련 프로그램에 봉사자로 참가하게 되면서 나 또한 자연스럽게 많은 관심이 생겼다.

관심 어린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니 확실히 다문화 가정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다문화 주부들이 한국에 정착하는데 내가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내 고장에 살고 있는 다문화 주부들 중 지역 곳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

히 하고 있는 분들을 발굴하여 내가 갖고 있는 재능인 영상 제작을 통해 결혼이주여성

들의 일상을 담은 영상물 “난 한국 愛 살아요”를 제작 봉사하기로 결심했다. 영상물을

제작하는데 있어 그동안 여러 다문화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맺어진 인연이 큰 도움이

되었고 그로 인해 다양한 다문화 주부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분들의 고충과 그것을 극

복하기 위한 노력, 앞으로의 발전상들을 영상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아름다운 동행 - 응웬 띠 호안(베트남)

베트남에서 온 응웬 띠 호안(한

국명 : 이정희) 주부는 6년 전 한

국으로 시집 와서 두 딸을 낳으

며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는 다문

화 주부다. 남편을 비롯한 시어머

니, 시댁 식구들이 자신을 매우 아

껴주고 사랑해 주는 모습에 감사

해 하며 한국에서의 생활을 훌륭

하게 꾸려나가고 있었다. 남편 윤

국현씨는 자녀들에게 한국말과 엄

마 나라의 말을 모두 가르쳐 장차

‘글로벌 인재’로 육성하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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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88

으로 자신이 먼저 일주일에 2번씩 아내에게 꾸준히 베트남어를 배우고 있는 멋진 남편

이자 훌륭한 아빠다. 또한 아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변에 있으

면 가정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배울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었다.

사회 곳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꿋꿋하게 해내는 다문화 주부들의 모습을 담은 “난 한

국 愛 살아요”를 통해 다른 다문화 주부들이 자신이 할 수 일을 더 빠르게 찾으며 행복

하게 정착하기를 기원하며 파주시 건강가정지원센터 및 파주시 다문화복지협회에 촬

영한 영상을 기증했다.

그리고 이정희 주부가 한국에서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촬영을 통해 목

도한 나는 이 가정을 좀 더 중점적으로 영상에 담았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

리가 준비하는 해외봉사를 더 다채롭고 의미 있게 하기 위해 ‘러브 인 아시아’ 프로그

램을 벤치마킹하여 이정희 주부의 친정 방문 프로젝트 ‘러브 인 동탑’을 실행하기로 해

외봉사 단원들과 협의하여 결정했다.

먼저 친정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파악하고 선배들의 활동에 많은 도움을 준 호치민

대학교 한국어과 루이옌 교수에게 조언을 구했다. 무엇보다 베트남은 공산국가이기 때

문에 외부인의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지역 인민위원회의 허락을 받아야 활동이 가능하

다고 했다. 더군다나 친정인 동탑 지역은 유독 한국으로 시집오는 사람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 즉, 한국으로 시집오는 사람도 많지만 잘 적응하

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많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단장님과 나는 12월 23일, 출정을 한 달 앞두고 예방차 베트남을 방문했다. 우선 우

리의 통역봉사를 담당할 호치민 대학교 한국어과 학생들을 만나서 미리 일정을 조율하

고 우리가 봉사할 지역인 구찌 인민위원회와 구찌 중학교, 구찌 장애인학교를 나란히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정희 주부의 친정인 동탑으로 향했다. 동탑은 호치민에서 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버스로 5시간 정도 가야했다. 인도차이나의 젖줄, 메콩 강을

가로질러 목가적인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한산한 시골길을 한참 달리다보니 어느

덧 친정집 근처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전화하니 멀리서 한 노파가 걸어오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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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를 통해 배운 소중한 교훈 89

다. 친정 어머니를 사진으로

본 적이 있었기에 난 대번

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집에

방문하여 친정아버지, 오빠,

남동생, 조카들과 함께 저녁

을 먹고 내가 편집한 영상을

보여주었다. 한글말로 작성

되어서 완벽하게 이해하지

는 못하는 것 같았지만 딸이

멀리 이국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 하셨다. 4년 전, 남편과 딸이 방문했을 때는 아직 둘째 지원

이가 태어나기 전이었는데 영상으로 손녀딸의 재롱을 보며 친정 식구들의 웃음꽃이 활

짝 피었다. 동탑 인민위원회의 업무 시간이 지나서 도착했기에 어쩔 수 없이 친정집에

서 하룻밤 머물러야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이곳 베트남에서 올린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과 한국에서 올린 결혼식 사진, 그리고 지수를 가졌을 때의 사진, 이정희 씨가 보

낸 한국에서의 사진들을 보았다. 가족들은 내가 씻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잘

때는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모기장을 펼쳐주며 세심하게 신경써 주었다.

아침에 인민위원회 문화공보부에 방문하여 방문 취지와 목적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문화공보부 간부가 우리가 계획한 활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었는데, 영상

편지를 보여주며 진정성을 호소하자 허락해줬다. 우리가 전통혼례 및 위문공연을 할

장소는 동탑에서 가장 상징적인 곳, 동탑 인민위원회 인민회관으로 정했다. 인민회관으

로 정한 이유는 주변 사람들에게 더 많은 홍보와 관심을 유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

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출정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다른 프로그램은 이미 몇 번의 경험과 노하우가 있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처음 시

도하는 ‘러브 인 동탑’ 프로젝트에 특별히 집중했다. 먼저 우리나라 결혼식에 방문한 하

객들을 위한 답례물로 수건을 주는 것에 착안하여 수건 100개를 제작하였다. 수건 밑

에는 남편 성함 윤국현을 영어로 “YOON KOOK HYUN”과 이정희씨 본명 “NGUY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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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 HOAN”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전통혼례 신랑 신부 복장 및 소모품을 파주향교에

서 대여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우리는 파주향교 집례 선생님으로부터 전통혼례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신랑 신부를 포함하여 각 측 들러리들의 역할까지 시연해

보며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러브 인 아시아를 넘어 아름다운 아시아 문화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우리들의 위대한 도전

2014년 1월 24일. 우리는 아름다운 아시아 문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12박 13일

의 장도에 올랐다. 모든 스케줄을 무리 없이 소화하고 드디어 1월 30일. 우리 단원 12

명과 베트남 통역 봉사자 10명은 동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는 한번 왔

던 길이라 낯설지 않았지만 다른 단원들은 새로운 여정에 마음이 들뜬 것 같았다. 친정

식구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며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내일 있을 일정에 대해서 상

세한 얘기를 나눴다. 아침 일찍 기상한 우리 단원들은 먼저 동탑 시내와 곳곳에 홍보물

을 부착하였다. 그리고 식장에 무대 시설을 꾸미고 앰프 시설 및 마이크 상태를 점검하

며 행사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시장 거리나 주변이 조금은 한산

했다.

무대 시설 준비를 끝내고 곧바로 우리는 한국음식 페스티벌 메뉴를 만들었다. 세계

적으로 가장 대중적인 한국 음식인 김밥, 불고기, 김치를 준비했다.

오후 4시. 우리는 전통혼례를 시작으로 ‘러브 인 동탑’의 막을 올렸다. 우리의 전통

악기인 사물놀이가 앞장서고 그 뒤를 신랑이 이은 친영의식과 전안례를 시작으로 교배

례, 서천지례, 서배우례, 근배례, 필례선언 등 모든 순서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참석자

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우리의 전통혼례를 축하해줬다. 5시부터 우리는 한국음식 페

스티벌을 개최하여 참석자들에게 우리의 음식인 불고기, 김치, 김밥을 대접했다. 우리

가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베트남 분들을 보면서 그와 우리는 결코 다르

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저녁 식사를 모두 마치고 2부 행사인 문화의 밤 공연을 시작

했다. 공연에 앞서 이정희씨 영상 편지를 방영했다. 베트남 사람을 대상으로 방영할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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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를 통해 배운 소중한 교훈 91

정이어서 미리 루이옌 교수님한테 부탁해서 베트남어로 편집했다. 친정 식구들을 비롯

한 참석한 베트남 사람들 모두 눈시울을 붉히며 영상편지를 시청했다.

영상편지를 마치고 우리는 사물놀이, 수화, 라인댄스, 율동, 워십댄스, 베트남 노래

합창, 응원 무를 공연했다. 응원 무 공연 중간에 나는 ‘여러분의 딸 이정희씨는 결코 부

족해서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한국이 이정희씨를 원했기 때문에 온 것이며 그랬기에

현재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얘기하며 ‘한국은 앞으로도 오게 될 여러분

들을 따뜻하게 맞을 것이며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약속할 것’이라고 참석자들에게 말

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자 동탑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우리에게 감

사장을 전달했다. 그들의 환대와 열린 마음에 다시금 감동받으며 모든 일정을 마무리

하며 다시 호치민으로 돌아왔다.

‘러브 인 동탑’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그들에게 마음을 먼저 열라고 하기 전에 우

리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허락받는데 많은 어려

움이 있었던 동탑 인민위원회도 내가 먼저 진정성을 갖고 호소하자 마음을 열었듯,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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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게 다가가는데 있어 먼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봉사단체가

동탑으로 우리와 같은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면 내가 진행했을 때보다는 한결 수월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봉사 단체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지 않고서는 진

행하기 힘들 것이라는 조언을 해 주고 싶다.

함께하는 평등한 열린사회를 만들기 위한 제언

‘러브 인 동탑’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나는, 다문화 프로그램에 대해서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다문화 가정 멘토-멘티 봉사 프

로그램을 연구하여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문화 가정 중에는 행복하게 사는 사람

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도 적지 않음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다. 그래서 우선 우

리의 봉사를 희망하는 가정을 선별하였다. 자녀가 남자면 남학생들로 편성하고, 여자

면 여학생들로 편성하여 현재 다섯 가정에 멘토 봉사를 진행하고 있다. 멘토 봉사에 가

장 중점을 둔 것이 우리의 것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문화 주부

가 주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먼저 학생의 신분인 우리들

이 먼저 다문화 주부의 나라에 대한 음식을 배우고 그 나라의 말을 배우는 것부터 시

작했다. 다문화 주부의 대부분은 한국에 와서 일반적으로 우리의 것을 배울 것을 강요

받았을 것이다. 그러한 사정으로 항상 피 교육생으로서 지내왔을 것이기에 먼저 우리

가 배우는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그 분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

했다. 그러면서 차차 가까워지면 우리의 장기(사물놀이, 수화 등)를 함께 배우며 우리의

것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았다. 그래서 연말에 그 분

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가서 함께하는 다문화 문화 예술제를 계획하고 있다. 또한 한번

맺어진 멘토 봉사자와 지속적으로 연계하여 다문화 가정의 자녀가 자라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며 그들의 길잡이가 되도록 할 것이다.

4월 17일. 멘토 봉사자 4명과 함께 이정희씨 가정에 방문했다.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4월 17일이 그 가정의 특별한 날이라는 기억이 있어서 방문할 때 케

이크를 준비했다. 알고 보니 4월 17일이 친정집에 방문해서 사진으로 봤던 한국에서의

결혼 날짜였던 것이다. 즉, 우연히도 우리가 방문한 날이 결혼 6주년 되는 날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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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를 통해 배운 소중한 교훈 93

이다. 우리들은 준비해간 케이크로 결혼 6주년을 축하하며 앞으로 두 분의 60주년을

기원했다. 두 분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해 드리며, 예전 동탑에서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

며 보내준 이정희 씨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문화 봉사를 통해 나는 다른 봉사활동을 할 때보다 한층 넓어진 시선과 더 많이

성숙해졌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열린 마음과 긍정적인 사고로 봉사에 임했

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도 내게는 진정한 다문화사회로 가기 위해서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앞으로 대한민국이 더욱 발전되고 성숙해지려면 차이가 차별이 되는 사회를 극복하

고 다문화 사회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과 아량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

다. 내가 다문화 봉사를 통해서 배운 교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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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94

1. Introdution 나는 왜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나

현재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평범하지만 남다른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는 나

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청소년이다. 나의 꿈은 제3세계 국제 구호 개발가로 일하는

것인데, 꽤 오래전부터 국제 빈곤문제에 관심이 많고 무엇보다 해외자원봉사활동을 고

대하는 Dreamer였다.

항상 해외자원봉사활동 참가자를 모집하는 공문을 찾아 볼 때면, 너무 부담스러운

참가비용이나 나이 제한으로 인해 참가 신청서를 낼 수조차 없었다. 그러던 중 중학교

3학년이 된 추운 1월 6일, 나에겐 운명적인 날이기에 그 날짜까지 기억한다. 내가 꾸준

히 후원하고 있는 한 NGO단체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11월에 해외 빈민 아동

편지쓰기 대회에서 수상하게 되었고, 부상으로 그 아이에게 편지를 읽어주러 가는 취

지로 해외봉사활동 기회를 제공한다는 전화였다. 엄마께서 전화를 받으시는 동안 거실

을 날아다녔다. 그리고 나는 1월 24일부터 2월 5일까지 베트남 구찌로 해외자원봉사

활동을 다녀왔다.

전화를 받은 그날부터 짐을 싸기 시작한 그 기대만큼, 가기 전에도, 가 있는 동안에

도, 다녀 온 후에도, 내 마음은 계속 베트남에 머물고 있다. 너무나도 예쁘고 맑은 아이

들이 힘들게 생활하면서도 활짝 웃으며 행복해했다. 더운 날씨에 땀이 범벅이 되었지

지금도 진행 중인 무모하지만따뜻한 세상의 가능성을 보고 싶은 나의 끝없는 도전

고등부 장려상

최 해 리, 파주여자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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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진행 중인 무모하지만 따뜻한 세상의 가능성을 보고 싶은 나의 끝없는 도전 95

만 자신의 머리핀을 빼 나의 머리를 고정해 주는 아이들이 있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이제 나의 꿈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그런 곳이라는 걸.

그 꿈을 확신한 뒤, 나는 더더욱 열심히 공부했고 장학생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것 또한 나의 도전이라면 도전 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나의 흥미진진하고 스펙터

클한 도전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2. Story 나의 도전 이야기~ 내 힘으로, 우리 힘으로, 가겠어!

# ‘잠이 안와’- 꿈에서는 자꾸 베트남 아이들만 나오는걸.

원래 꿈도 잘 꾸지 않는데, 베트남에서 집으로 돌아온 몇 달 동안은 고향도 아닌데

다시 가고 싶어 향수병에 시달리는 듯 했다. 무엇보다 정이 많이 들었던 ‘타오’라는 아

이 때문에도 그렇고, 계속 밤마다 베란다로 나가 별을 보며 생각하곤 했다. 적어도 저

별을 보고 있으면 그곳의 사람들도 저 별을 보고 있겠지, 생각했다. 내 꿈을 다짐하

고 난 뒤 열심히 공부하리라 했는데, 하루하루 있었던 일, 너무 예쁘던 아이들 하나하

나 자꾸 생각나서 도무지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결국 절정에 달한 어느 날. 나는 무모

한 도전장을 내던졌다. 그 도전은 나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자, 곱지 않은 시선

의 사람들에 대한 도전이었다. ‘내년 겨울에, 나는 베트남에 다시 간다. 단순한 나의 만

족이 아닌 아이들에게 가치 있는 것을 선물해주러 간다.’ 드디어 마음을 먹으니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속앓이는 끝나는 듯 했다. 속은 시원했지만, 막상 도전장을 내고 나니

할 일이 많았다. 어떻게 갈 건데? 비용은? 가서 뭐 할 건데? 등등.

정부기관과 같은 큰 곳에서 해외자원봉사활동 참가자를 모집하는 것은 많이 보아왔

지만, 직접 학생들의 계획으로 자발적인 해외봉사활동 사례는 이전까지 접한 적이 없

었고 사회에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 것 같았다. - 후에 더 뼈저리게 깨달

았지만, 정말 힘들었다. 항상 어딜 가든지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 긴 계획을 설명해야

만 했고, 가끔 우리의 이런 도전과 생각을 이해하거나 도와주기 꺼려하는 사람들이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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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96

무나 많았던 것이다 - 하지만 그러면 어떠하랴, 나의 마음은 그 순간부터 이미 도전을

성취한 사람과도 같이 부풀고 희망에 차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행복을 선물해 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을 우리 학교 친구들과도 더 깊게 느낄 수 있다면, 내가 이

도전을 통해 그런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 해외봉사동아리 창설!

“장학생 합격을 축하합니다!” 합격의 기쁨은 ‘장학생’이라는 타이틀 보다는 나의 도

전을 이루기에 더 좋은 터를 잡았다는 생각으로 느껴졌다. 학교에 입학한 3월 초에 바

로, 겨울방학 이전부터 몇몇 친구들과 함께 고민해오던 해외봉사활동 계획을 추진하고

자 해외봉사동아리를 창설했다. 1학년 창설. 1학년 기장 동아리로서는 최초였다.

#해외봉사활동, 해외봉사동아리?

나는 베트남에 갈 것이다. 따라서 작년에 방문했던 베트남 지부에 계신 서정일 사무

장님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겨울방학의 방문 일정을 알리고, 개략적인 봉사활동

일정과 그에 따라 필요한 것들을 점검하였다. 그리고 점검 내용 자료에 따라 그 취지를

살려 해외봉사동아리를 창설한 것이다. 3월부터 12월까지는 봉사를 위해 필요한 것들

을 마련하고 준비하는 기간, 1월에는 봉사를 가는 것이었다. 해외자원봉사를 가기 위

해서는 먼저 봉사를 함께 가게 될, 잘 교육된 참가자들과 봉사활동 내용과 목표에 따른

물품들이 필요했다. 우리는 베트남의 구찌중학교 아이들에게 학용품과 신발을 제공해

주기로 계획했다. 자기 또래의 학생들이 방문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아이들이 매

우 좋아했다. 그 장점을 살려 한국문화, 특히 한류의 춤과 노래에 대해 공연하는 시간

도 가져보기로 하였다. 그 외에도 마술이나, 체육이나 소질 있는 우리 동아리 원들은

자신의 능력을 공유하기로 하였다. 자, 이제 동아리를 창설하고, 동아리 원을 면접을 통

해 선발하고, 각 부서-인터넷부, 촬영부, 홍보부, 회계부-를 편성하고, 정보를 수집하

고, 많은 조언을 얻어 이 모든 계획들을 조율하고 맞춰보니 벌써 5월 중순이었다. 앞

으로의 계획과 우리가 순차적으로 해나가야 할 일들-정말 힘들고, 무모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남아있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600만 원이었다. 60만 원도 아니고 600만 원이었다. 목표는 항상 크게 잡아보자 했지

만 내가 600만 원을 계산하고 말한 뒤 동아리 아이들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 질 줄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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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진행 중인 무모하지만 따뜻한 세상의 가능성을 보고 싶은 나의 끝없는 도전 97

랐다. 둘째로는, 이 모금액을 모으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여러 단체와 장학재단을 수집해서 연락하기, 사람들이 많은 길거리에 나가 직접 모금

활동하기, 인터넷 청원사이트를 이용한 온라인 모금 달성하기, 학교 장학금 받기, 교내

물건 판매 자선행사, 학교 자판기 앞에 모금함을 설치해서 남는 거스름돈 모으기와 같

이 작은 규모의 계획도 있었다. 세 번째로는, 우리가 해외봉사활동을 안전하게 다녀오

기 위해 학교와 단체의 승인과 연계가 필요했으므로, 여러 조직과 단체들과 지속적인

연락을 주고받아야 했고 방문을 통해 계속 정보를 알려드리고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 그 모든 계획들은 어떻게 되었나?

비 내리는 태풍 날의 모금활동, 넣는 곳마다 퇴짜 맞기, 모두를 좌절시킨 온라인 모

금활동의 미집행, 시한부 선언과도 같았던 말 -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판

단한다면 우리 기관과의 연계가 어려워 봉사를 못 갈 것 같구나.”

비 내리는 태풍 날에도 우리는 목소리를 높인다.

“가난한 아이들을 도와주세요!”, “제3세계 아이들을 도와주세요!” 우리 동아리 단

원들이 한 달에 한 번꼴로 파주 로데오 거리나 다른 중심상가에서 외치는 구호이다.

15~16명이 두 줄로 서서 팜플렛을 손에 하나씩 쥐고 있다. 그리고 중간에는 모금 통

을 든 모금활동 전용 연두색 조끼를 입은 한 명이 더 선다. 모금활동을 나가는 토요일

에 비가 오는 날이 왜 이리도 많은 걸까? 하지만 우리 동아리 단원들은 지친 기색이 없

다. 힘들 때 즈음 모금 통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 우리를 응원하

시며 모금해주시는 시민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뿌듯한 마음에, 뿌듯한 목소리로 이구동성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내 마음을

찌르는 눈초리도 여전히 공존한다.

“쯧쯧, 우리나라에도 가난한 사람 많은데 뭐 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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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98

가장 많이 듣고, 가장 많이 의문이 들고, 가장 많이 불편한 소리이다. 하지만 이해하

고 받아들인다. 사실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를 위해 선뜻 자신의 돈을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 11시에 나가서 저녁 6시에 학교로 다시 돌아올

땐, 비보다 땀에 더 많이 절어 힘들어하는 우리지만, 나는 다시 한 번 그곳의 추억을 떠

올리면서 웃으며 멍든 곳을 찜질한다. “예스! 오늘도 더 우리의 목표에 다가갔어. 얼마

남지 않았어, 잘되고 있어!”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가장 큰 기둥이 무너지다-온라인 모금활동 미집행,

“봉사활동 못 간다!?”

가장 처음으로 추진한 동아리 계획은 온라인 모금활동이었다. 우리의 모금 목표와

내용을 게시한 뒤 500명의 동의 댓글을 받아야 한다. 그 후에야 심사가 이루어지고 모

금이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가장 규모가 크고 참여 인원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중심으

로 삼고 해 나갈 주축이었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점이 많았다. 우선 500명 댓글을 받는

일에서 500명이라는 인원이 결코 적은 수가 아님을 실감했다. 학교의 모든 컴퓨터 라

운지에 우리들의 모금활동 내용에 대한 설정을 즐겨찾기에 추가하고, 안내 문구를 붙

이고, 캠페인 홍보를 했다. 주말마다 집에 가서는 모든 동아리 단원들이 지인들에게 홍

보하곤 했다. 심지어 우리 부모님까지 자신의 카페회원들에게 일일이 쪽지를 보내는

등 혼신의 힘을 다해 결국 성공시켰다. 달성이 이루어지자 우리는 당연히 해내야 할 일

을 성사시켰음에 안도했고 커다란 첫 번째 목표를 이뤘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기뻐했

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원래는 심사를 진행하고 모금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정말 이상했다. 다음에 연락을 취하자 며칠 뒤 모금을 진행할 수 없다는 통보

를 받았다. 기관과의 연계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기관에 연락을 해 보았는데, 그곳

에서도 당황해 했다. 우리의 취지와 계획을 말씀드리며 계속 연락해 오던 직원이 갑자

기 그만두시게 되었고, 서울 지부에 계신 팀장님께서는 담당 부서가 아니기에 말씀을

못 드렸다 하신다. 한마디로 우리들의 활동에 대해서 명확히 알고 있는 분이 없다는 것

이었다. 온라인 모금활동이 좌절된 것도 너무 아쉬웠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해보기로 했다. - 항상 무언가에 좌절하면 되돌아가면 되는 법, 시간

이 좀 더 걸릴 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관의 여러

가지 정책을 따져 봤을 때 해외 자원봉사활동이 어려울 수 있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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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진행 중인 무모하지만 따뜻한 세상의 가능성을 보고 싶은 나의 끝없는 도전 99

맙소사! 아예 돌아가는 게 아니라 돌아갈 수조차 없게 길이 막히게 되었다. 이젠 어

떻게 해야 할까? 고민도 많고 힘들었다. 그동안 동아리 단원들과 함께, 또는 나 혼자

열심히 준비하고 고심해오던 이런 계획들을 되돌아보며 아예 이러한 나의 도전이 잘못

된 것이었나 하는 회의감까지 들었다. 그럼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건가? 아니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만일 포기한다면 나를 믿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우리 동아리 단원들은 무엇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내가 보고 싶던 그 가능성들이 정말

처참히 무너지는 것일까?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지금 포기해 버리면 나중에 더 후회하

지 않을까? 초심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진행해오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 모든

것을 감당하면서까지 이 도전, 이 결심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내겐 없었다. 오히려 내

도전을 성취하기 위해 이 정도의 어려움은 당연히 극복해야 할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

기 시작했다.

# 돌아가는 법-청사진을 만들기 시작하다.

어두운 밤하늘에도 별이 반짝이는 것처럼, 역시 해결 방법은 있었다. 마침 우리의 봉

사활동 당시 많은 인연을 쌓은 베트남 지부 서정일 사무장님이 한국에 귀국하셔서 우

리를 기관과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만든 자료들과 계획을 설명하는 프레

젠테이션을 통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순차적으로 설명했고, 사무장님께서 적극적

으로 지지하고 응원해 주셨다. 팀장님께서도 앞으로 우리가 해 나갈 수 있는 계획들을

차차 고민해보자며 관심과 의지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좌절된 온라인 모금활동으로 인

해 모금액이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 우리 동아리 원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본

결과 '자신의 장점을 살린 모금활동'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교내 아이스크림 팔기 행사

가 진행 중이고, 자신이 강한 분야에 다양한 방법으로 공모전에 참여하고 있다. 나는

그중에서 단장님의 추천으로 이번 미래지식성장포럼 청소년 자원봉사활동 체험수기

공모전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나의 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나를 되돌아 볼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참여하게 되었다.

나의 이런 도전의 모든 시작은 “아이들이 너무나도 다시 보고 싶다. 도움을 주고 싶

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누가 보면 참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한 도전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고등학생으로서 학업을 병행하면서 이러한 활동을 해 나가기가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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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100

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아직 어린데 해외까지 나가서 그러한 활동을 한다는 것 자

체가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그런 만큼 장애물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었고,

나의 꿈을 걸고 한 약속이기에 나는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는 가능한 사람이 되었다.

베트남에 가서 그 아이들을 다시 품에 안고 나의 지금까지의 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나의 꿈을 성취하게 될지 아니면 좌절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나는 나의 도전, 나의 꿈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 도전을 통해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내가 이 활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는 것이다. 하던 일이 커다란 장애에 부딪힐 때,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 분명 돌아가는

길이 있다는 것, 그리고 돌아가는 과정에서 얻는 것이 더 많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길거리로 모금활동을 나갔을 때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텅 빈 모금 통을 볼 때면

단원들에게 무안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앞에 다가와 우리를 보며

웃어주시며 “힘내라” “좋은 일은 힘이 드는 법이야.” 하는 따듯한 위로를 해주시는 시

민들을 볼 때마다 나는 무언가 뜨거운 것을 느꼈다. 그 뜨거운 것이 나를 벅차게도 하

고, 뿌듯하게 만들기도 하고,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해 보게까지 한다. 내가 이 모든 도전

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한 결과가 무엇일까. 단순한 나의 만족에서 그치는 것이 아

닌 그 이상의 것을 느끼고 싶다. 아름다운, 따듯한 세상 - 엄마, 아빠, 우리 가족은 아

니지만, 가족과도 같은 전 세계인의 연대감 - 속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

는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미 나의 도전이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이런 나의 기쁨을 베트남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나중

에 훗날 내가 더 자라나면, 베트남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아이들에게 - 물론 나의 큰

꿈이고, 바람이고, 이상이지만 - 나의 도전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의 가능성을 응원

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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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찾아온 기적 101

사랑하는 엄마

엄마,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시죠?

지금 한국은 울긋불긋 단풍잎이 진 쓸쓸한 가을을 넘어 어느덧 온 세상이 하얗게 뒤

덮인 겨울이 왔을 거예요. 사계절이 여름인 여기 스리랑카는 더위에 바이러스가 전염

되어 식중독부터 각종 병이 유행하고 있어요. 이렇게 잠시 동안 휴식을 가지고 먼 하늘

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네요. 엄마는 제가 영어교육학과를 나와 당연히

선생님이 될 줄 아셨을 거예요. 하지만 엄마의 예상과는 달리 무작정 스리랑카로 가겠

다고 그랬던 것 기억하세요? 그때 참 많이 반대하셨지요. 엄마께서는 저를 붙잡아 우

시고 저도 엄마를 설득하려고 울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요. 지금 그때를 생각하

니 웃음만 나오네요.

엄마, 저는 이곳 스리랑카에서 보람찬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래도 엄마가 여전히 불

안해하시는 것 다 알아요.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늘 자기 자신을 돌보고 가

꾸기 바쁜 이 시대에 사람인 제가 과연 남을 돌아볼 여유가 있을까 걱정을 했어요. 하

지만 그건 한낱 고민에 불과했어요. 저는 지금 제가 꿈꿔왔던 일을 하며 행복함을 느끼

고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에 감사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물론 저도 사람

이기에 사실 힘든 적도 많았고, 제 한계에 다다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

나에게 찾아온 기적

고등부 장려상

전 지 원, 오산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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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102

어요. 여기는 물도 없고, 쓰레기 더미에서 음식을 찾아 가족들과 끼니를 겨우 해결하며

살고 있어서 처음 스리랑카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막막했어요. 게다가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의 아이들이 탄광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미약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

어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호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엄마 저는요, 제 전공을 살려 일을 하고 있어요. 어렸을 적 아쉽게도 통역사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여기 와서 제 꿈도 동시에 이루고 있는 것 같아요. 스리랑카 사

람들과 의사, 간호사, 그리고 구호 전문가의 말을 서로 알아듣기 쉽도록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때그때마다 어디가 아픈지, 어떤 약인지, 상세하게 알려주면서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이곳 스리랑카는 약 70%로 문

맹률이 높아요. 그래서 학교에 갈 수가 없어 글을 배우지 못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

치고 있어요. 가장 기초적인 알파벳을 가르쳤는데 어려워하다가 곧잘 따라 하더라고요.

A, B, C, D도 모르던 첸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돌멩이로 영어를 쓰고 있는 모습을

봤어요. 그 순간 몸에서 무언가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어요. 어느새 제가 가르쳤던

것을 다 기억하고 배워가고 있다는 것에 너무나도 신기하고 감출 수 없는 벅찬 감동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어요. 혹여나 따라 쓰는 것이 힘들까 싶어 사물에 빗대어 가며

설명을 하니 영어에 흥미를 가지더라고요. 하루가 다르게 점차 성장하며 달라지는 아

이들의 모습을 보니 너무 흐뭇해 미소가 절로 났답니다. 사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우

리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수업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아이들의

수준에 맞추어 수업을 준비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 걱정이 많았어요. 무

작정 낯선 나라에서 무엇을 한다는 자체가 고민이었지요. 하지만 하루하루 새로운 것

을 배워나가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행복을 볼 수 있었어요.

요즘은 가르치는 기쁨으로 저도 두 배로 행복을 느끼며 생활하고 있어요. 저 스스로

도 힘겨운 환경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새로움을 배우며 사소한 것 하나하나 느끼

는 것에 감사해 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에 오히려 제가 감동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어

요. 제가 아이들에게 배울 것도 많고, 제가 아이들에게 전한 작은 나눔 들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될 수 있는가를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꼈어요. 살아가면서 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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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찾아온 기적 103

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참 행복하고 값진 일인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TV로 보고

듣고, 실제로 제가 알고 있던 사실보다 현실이 훨씬 더 비참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에 비해 저는 너무나 풍족하게 잘 살고 있는 걸요. 하루는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나누어 준 적이 있었는데 먹지 않고 손에 쥐고 있더라고요. 그래

서 물어봤더니 그 아이들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가족들을 줘야 해요. 저는 굶어도 상

관없어요. 안 먹어도 배가 부른걸요.”

대한민국에서는 그리고 저에게 있어서 상상치도 못한 굉장히 낯선 행동에 당황스러

우면서도 가슴이 아려왔어요. 우리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르쳤다는 자부심에 자만

했던 저는 오히려 아이들을 통해 배우고 얻고 있는 것 같아요. 같은 하늘에 살고 있지

만, 저와는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자신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오히려 긍정

적으로 생각했어요. 환경이 너무나도 열악해 뭐 하나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주어

지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들을 통해 저의 삶을 되돌

아볼 수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눈만 뜨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고

민하고 불평만 하였지만, 이곳에 온 이후에는 나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감사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어요.

엄마,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시민 의식이 부족해요. 세계는 하나이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세계가 유기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6·25 전쟁 직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에게 우유와 빵을 나누어 주며 도움을

주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 당시에만 감사함을 느꼈지, 지금은 세계가 원조를 해준 것

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어요. 식량과 지원이 부족한 나라에게 도움을 주더라도 금

전적인 도움만 주고 그들의 미래의 삶이나 정서적 안정에 대하여는 고민하지 않아요.

그러나 진정으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금전적인 도움보다는 희망이에요. 그래서 저

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그들에게 꿈을 주고자 해요.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학

생들을 지도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책임감이 생겨요. 저의

역할은 그들을 도우면서 그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북돋아 희망을 안겨주

는 것이에요. 살아가면서 제가 다른 이의 꿈이 되고 행복이 된다는 것은 정말 값진 일

이에요. 행복의 시간이란 이런 나눔의 시간들을 뜻하는 말이에요. 언어는 통하지 않지

Page 105: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104

만 마음이 통했던 행복한 시간을 함께하는 데에 필요한 것은 꼭 언어가 아니에요. 언어

는 통하지 않지만, 마음이 통한다면 저의 진심이 아이들에게 전달되어 그들의 얼굴에

미소를 줄 수 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 아이들을 웃게 할 수 있고 희망을 주며 사

랑을 일깨워 주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받을 줄만 아는 것이 아니

라 때로는 줄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배웠어요. 비록 언어는 통하지는 않

지만, 마음으로 눈으로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소통, 이것이 바로 나눔이 아닐까 싶어요.

엄마, 저는 이제껏 바라던 삶을 살고 있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그러니

더 이상 저를 걱정하고, 저를 위해 눈물지으실 필요 없으세요. 저는 주어진 삶에 하루

하루 감사함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얼굴조차 보기 힘들

지만, 언제나 저는 엄마 곁에 함께 있어요. 엄마가 아프실 때 옆에 있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사랑하는 엄마, 많이 보고 싶어요. 내년 봄 즈음에 한번 한국에 찾아뵈러 갈

게요. 그때까지 추운 겨울, 옷 따뜻하게 입으시고, 허리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2035년 12월 1일

엄마를 사랑하는 둘째 딸 올림

Page 106: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내가 했던 착각 105

나는 2013년 1월에 네팔로 첫 해외봉사를 다녀왔다. 예전부터 봉사에 관심이 많았

는데 기회가 생기니 너무 설레고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 하지만 네

팔에 다녀온 후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혹은 무의식중에 자신이 남을 도우러 가고 나로 인해 엄청난 발전이 될 것이라

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일인 것인

지 내가 필요한 존재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네팔에 가기 전 6개월 동안 사전교육을 받

으며 전문가의 얘기를 듣고 현지에서 할 활동들을 준비했다. 기획한 것들을 다시 처음

부터 시작하기도 하고 수정하면서 힘이 들기도 했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

요한 것이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

었다.

6개월의 사전교육기간 동안 나는 현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었다. 사전교육 기간에 나는 실제로 NGO에서 근무하시는 전문가들의 얘기를 들었

다. 제일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네팔에 있는 한 학교 이야기였다. 외부에서 학교를 뚝

딱뚝딱 지어주고 떠났더니 학교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

에게 남들이 지어준 학교는 자신들의 학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에겐 그것보다 중

요한 일이 있다. 바로 생계유지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보다 물을 길어

오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학교라는 의식이 없

어서 더러워져도 치우지 않고 그냥 두는 현상들이 발생하기도 한다고 한다. 사실 나는

내가 했던 착각

고등부 장려상

이 현 정, 서울국제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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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106

학교를 지어주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을 해봤지 그 이후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

곳엔 학교만 생기면 모두가 다니고 싶어 하고 교육을 받아서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당

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학교를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잘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보았다. 그리고 이 얘기를 들으니 내가

현지 상황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몰랐었다

면 나는 학교에 오지 않은 학생들을 보며 아마 좋은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다고 생각했

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들으니 생계유지가 힘든 지역의 학교에서 전문적

인 기술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바로 일을 해서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면

학부모와 아이들 모두에게 좋은 교육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학교에 오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이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교육열

이 높고 공부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로 교육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이다. 그러나 당장 먹을 것이 없는 곳에서는 교육이 우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에

는 상상해 보지 못한 사회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데 그 사람들이 어떤 상

황인지도 모른 채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했던 나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만

약 자원봉사자들이 현지 상황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고 간다면 아마 남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일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특히 사전준비

를 탄탄히 하여 자신이 갈 곳에 대한 현지 상황과 사람들의 인식들을 확실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정말 많이 느꼈다.

내가 네팔의 비레탄티 지역의 학교에 있을 때 결정적으로 나를 되돌아보게 된 일이

있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운동장을 잠깐 걷고 있었는데 귀여운 꼬맹이 세 명이 나에

게 왔다. “Candy! Give me!”라며.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영어를 잘하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영어로 짧은 단어로 얘기하며 다짜고짜 사탕을 달라고 했다. 사탕을 주

고 싶어도 내가 가지고 있지 않아서 못 준다는 안타까움을 느끼려던 차에……. 그런데

잠깐, 얘네 내가 사탕 주려고 온 줄 아는 건가? 난 NO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잠깐 아

쉬워하더니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랗게 손을 만들고는 “Money! Okay?”라며 이번엔

나에게 돈을 요구했다. 이쯤 되자 나는 이 조그만 아이들에게 위협감까지 느꼈다. 이번

엔 더 단호하게 말했다 “No!!” 그러자 내 주머니를 가리키더니 이건 뭐냐고 한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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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했던 착각 107

가지고 있는 줄 몰랐던 휴대용 물티슈가 있었다. 그거라도 달란다. 아이들에게 차마 화

를 낼 수는 없었지만 뭔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그냥 이렇게 무

언가 줘버린다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또 새로운 것을 달라고 하겠지. 이렇게 아이들은

외부인들에게 의지해서 살게 되겠구나. 혹시 내가 아이들에게 무작정 준 것은 없었는

지 준다고 무조건 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내가 여길 왜 왔을까. 이 아이들을 더 망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내가 오지 않고 이 아이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내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조심스러워졌다. 나로 인해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성장하는데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기부 문화가 잘 되어있기 때문에 무언가 주는 것에 익숙하며 그들에게 도움

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지 특

히 직접 봉사를 가는 사람이라면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나

를 포함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내가 도와주고 오니까 나만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절대 아니다. 내가 네팔에 갔을 때 쿡 보이들은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설명을 해주고 자원 활동가들을 위해 먼저 일어나 요리를 해주

고 우리보다 늦게 자면서 우리보다 힘든 생활을 했다. 아마 굳이 따져본다면 우리가 더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아마 우리의 프로

그램은 진행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도 처음엔 내가 남을 돕는다는 마음으로 갔지만,

현지에서 활동하고 돌아와서 느낀 것은 내가 더 많이 배우고 내가 더 많은 도움을 받았

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네팔을 다녀오면서 내가 두 가지의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움을 더 많이 받고 또 배웠다는 것, 그리고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일이 그들에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네팔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아주 늦게 알거나 혹은 평생 몰랐을지도 모르는 일들이라서

너무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에 나는 봉사를 가는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들

Page 109: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제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108

에게 신신당부하는 말이 있다. 네가 이걸 해준다고 해서 그 사람들은 바뀌지 않을 수도

있고 네가 이걸 주는 것이 이 아이들을 망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Page 110: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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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12: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어린이 세계시민의베트남 견학

허재희, 신백현초등학교

초등부 <금상>1

Page 113: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1초등부 <금상>허재희, 신백현초등학교

Page 114: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어린이 세계시민의 베트남 견학 113

KOICA와 함께한 베트남 견학은 나에게 정말 놀라

운 선물이었다. 지난 여름 나는 KOICA 지구촌체험관

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지구

촌 신문을 만들었고, 또 그 과정을 일기처럼 썼을 뿐인

데, 공모전 수상과 함께 이렇게 엄청난 선물을 받게 되

다니!

나는 KOICA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언니, 오빠,

KOICA 선생님들과 함께 3박 4일 동안 비행기를 4번

이나 타고 베트남 곳곳을 돌아다니며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전쟁으로 고통받았던

나라이고, 우리나라에 비하면 아주 가난한 나라이다.

우리나라의 대외무상원조 기관인 KOICA는 베트남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도움

을 주고 있었다. 자금을 지원하고 필요한 시설을 지어주고 그런 시설들이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특히 베트남 중부 지방은 베트남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지역

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 곳이라고 한다. KOICA는 학교가 부족해 제

대로 공부를 할 수 없는 이 지역의 아이들을 위해 40개의 초등학교를 지어주었다. 또

한, 이 지역에 한국과 베트남이 함께 IT전문대학을 만들어 베트남의 IT산업을 이끌어갈

일꾼들을 길러주고 있었다.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큰 종합병

원을 지어주고 의료시설들도 마련해 주었다.

어린이 세계시민의 베트남 견학

Page 115: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제17회 KOICA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114

우리가 방문한 꽝남 중앙 종합 병원 안에는 큰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고 그 지역 사

람들이 이 병원을 ‘한국병원’이라고 부르며 이런 병원을 지어준 한국을 아주 좋아한다

고 했다. 정말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KOICA가 베트남이 더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도

록 도와줄수록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여러 견학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바로 Duy

Phuoc 초등학교였다. 이 곳은 KOICA가 베트남에 지

어준 40개의 초등학교 중 하나이다. 나 또한 초등학생

이다 보니 베트남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보는 것이

너무 좋았다. 친구들은 교문까지 뛰어나와 환하게 웃

으며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안녕하세요”라고 한국어

로 인사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우리도 “신 짜오”라고

베트남어로 인사를 했다. 친구들은 사진 찍는 것도 너

무 좋아해서 함께 사진도 많이 찍었다. 우리는 교실로

들어가서 미리 연습해 둔 색종이 접기를 친구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귀여운 토끼 얼굴 접

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아도 친구

들은 내가 만드는 걸 보고 아주 잘 따라 했다. 짧은 시

간이었지만 나는 이런 봉사활동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직접 봉사활동에 참여해 보니 정말 뿌듯하고 보람 있

꽝남 중앙 종합 병원 방문

Duy Phuoc 초등학교 방문(위)색종이 접기 봉사활동 모습(아래)

Page 116: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어린이 세계시민의 베트남 견학 115

었다. KOICA가 지어준 초등학교에서 친구들이 즐겁게 지내는 것을 보니 정말 기뻤다.

Duy Phuoc 초등학교는 내가 다니는 신백현 초등학교만큼 크고 좋지는 않았지만, 그

곳 친구들은 우리학교 친구들만큼 밝고 행복해 보였다.

이번 견학을 통해 나에게는 새로운 장래 희망이 하나 더 생겼다. KOICA 선생님들처

럼 가난한 나라들이 더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른들은 그런

사람을 ‘ODA 전문가’라고 부른다. 원래 나의 꿈은 경찰관이지만, ODA 전문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어찌 보면 두 직업 모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돕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긴 하다.

아쉬운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와 나는 또 하나의 방학숙제를 시작했다. 바로 KOICA

베트남 견학일기를 만드는 것이다. 나는 스크랩북에 어머니께서 뽑아주신 사진들을 붙

이고 베트남에서 있었던 일들과 느꼈던 점들을 적어보았다. 개학을 해서 친구들이 이

KOICA 베트남 견학일기

Page 117: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제17회 KOICA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116

견학일기를 본다면 얼마나 재미있어 할까! 친구들을 만나면 견학일기에 미처 다 적지

못한 이야기들도 해 줄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KOICA 글짓기 공모전에 참여하라고 알

려줄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친한 친구와 공모전에서 같이 수상을 하고 함께 견학도

가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

Page 118: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어린이 세계시민의 베트남 견학 117

베트남,상상 이상의 아름다움

강보빈, 정천중학교

중등부 <대상> 2

Page 119: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2 중등부 <대상>강보빈, 정천중학교

Page 120: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베트남,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 119

수업시간 도중 황현주 선생님께서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오셨다. 그리고는 내가 상

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선생님께서는 외치셨다.

“강보빈 대상!!”

순간 당황스러웠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지만 홈페이지에 올라간 내 이름을 보고

나서야 ‘아!’ 라는 소리가 입에서 흘러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

치고 간 해외 견학이 나를 더 설레게 했다. 비행기를 타기 전의 그 설렘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해외 견학 일정이 베트남으로 잡히고 공항으로 가기 하루 전, 나는 잠을 이룰 수 없

었다. 첫 번째는 부모님 없이 떠나는 여행의 설렘과 두 번째는 가까운 괌 외에 처음 나

가는 해외 견학에 대한 설렘이었다. 그 덕에 나는 4시 30분에 일어나 과하게 일찍 공

항에 도착하였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시간은 쉴 틈 없이 지나가 기다림

의 끝에 비행기를 탔을 때 그 동안 비행기를 탈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비행

기 좌석 앞에 붙어있는 기기는 나에게 시대가 너무 빨리 바뀌고 있다고, 빨리 적응하라

고 충고를 하는 것만 같았다.

베트남은 나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염소를 선물했던 아프리카 쪽 나라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기던 베트남에서 처음 갔던 곳은 한-베 친선 IT 대학교였다. 들어서자마자

든 생각은 ‘베트남에도 이런 학교가 있구나’ 라는 것이었다. 내가 상상하던 학교와는 격

베트남,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

Page 121: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제17회 KOICA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120

이 다른 건물들은 입을 다물지 못 하게 하였다. 이 학교의 기숙사는 확실히 우리나라보

다는 좋지 않았지만 미래에 내가 원하는 아담한 집을 떠오르게 했다. 내가 가장 관심이

갖는 분야는 건축 디자인과이다. 건축에서는 설계과 다음으로 디자인이 있기 마련인

데, 이 곳은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디자인과에 들어가야만 했다. 내가 미래에 여느 건

축 디자이너들과 차별성을 가지려면, 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하나의 길이 되지 않을

까? 사실 처음 방문한 곳 치고는 굉장히 평범한 대학교였지만 마지막에 다 같이 총장

실에 모여 들었던 말이 내 머리를 한 대 때리고야 말았다. 부총장님께서 한국이 베트남

에게 큰 선물을 해 주셨다고 말씀하실 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감동과 기쁨을 받았

다. 일방적인 기부로 생각하지 않고 선물이라고 표현된 통역사 말이 참 다행이었다. 선

물을 받는 사람이 부담스럽거나 위축되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또 나와 같은 생각

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 동기 부여를 받아 내 생각을 더 많이 퍼트리고 싶다는 생

각이 동시에 들었다. 많은 사람이 선물이라 생각할 수록 많은 사람이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우리나라도 베트남에게 배워야 할 점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점을 뽑자면 출산율이

었다. 꽝남 병원을 찾은 우리는 쉽게 임산부를 볼 수 있었다. 한 명당 평균 3-4명의 자

녀를 갖는 베트남의 문화는 본받을 만 했다. 저 출산이 급격화 되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그들을 보고 후진국이라 칭하며 무시할 수 있을까. 가까운 중국만 보아도 그렇다. 공산

주의 국가라 하여도 어떤 면에서는 민주주의인 우리나라보다 나은 점이 많다. 이 병원

을 돌아보면서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한 한숨과 비판, 한탄을 가장 많이 한 것 같다. 병

원 사람들이 "쭝궈" 하면서 중국인이냐고 물었을 때 한국인이라고 하였으나 마음 한편

에서는 부끄러웠다. 정확한 이유가 없었던 부끄러움이기에 더욱 답답했었다.

그 다음은 교육이었다.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아이들은 정말 순수하고 예뻤다. 타

고 온 차가 정문 앞에 서자마자 우르르 몰려 온 아이들은 전교생이라 치기엔 작고 한

차창밖의 베트남 풍경

Page 122: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베트남,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 121

학년이라 보기엔 좀 많은 수였다. 미리 배운 “신 차오”

(베트남 어로 안녕하세요)를 쓰며 다가가니 재미있다는

듯이 까르르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아마 내가 어렸을

적에 외국인이 인사하고 다가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밖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우리나라가 사교육에

찌든 초등학생을 길러낼 때 이 아이들은 개방된 수업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반강제이긴 하지만 전자기기와도

멀리 지내며 나에게 건강을 챙기라는 말을 전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내가 카메라를 내밀면 멋쩍은 듯 웃어주고

초콜릿을 내밀면 부끄러운 듯 가져가 입에 쏙 넣었다.

색종이를 보고 좋아라 웃었고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내 눈과 손을 보면서 따라 접었다.

피아노를 치는 나로서는 제일 먼저 눈에 띈 손톱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손톱이 짧은

데도 불구하고 끼어있는 때가 아이들의 웃음을 슬퍼 보이게 만들었다. 순간 나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질까 봐 과장하여 설명하며 알려준 종이 접기도 아이들은 잘 따라주었

다. 풍선이 날아가는 모습에 마냥 즐겁고, 재미있어하는 아이들을 보며 내 감정이 너무

말라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베트남은 세로로 조금 과한 듯 길게 생긴 나라이다. 수원 지역에 살고 있는 나는 육

지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바다를 보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하

고 있을 찰나 코이카 베트남 사무소장님의 센스로 바다 옆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

었다. 한국에선 만들어도 볼 수 없는 색의 바다는 은은한 파도를 내뱉고 있었다. 바다

순수하고 예뻤던 베트남 친구와 함께

은은한 파도를 내뱉던 베트남 바다, 본연의 맛을 느낄수 있었던 생망고(왼쪽부터)

Page 123: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제17회 KOICA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122

특유의 찐득한 바람과 발을 디딜 때마다 밀리는 모래는 정말 좋았다. 긴 기장의 바지를

입은 나는 그늘에 서서 가만히 파도 소리를 듣기만 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바다에 들어

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만 보았다. 보기만 해도 사람들의 나음에 나한테까지 전해

지는 듯 했다. 바다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다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그 바다보다 예쁜

바다는 한국에서 못 볼 것처럼 예뻤다.

베트남에 다녀왔으니 음식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베트남 음식의 특징은

기름이 많고 향이 진하다는 것이었다. 기름은 참아도 향은 참을 수 없는 나에겐 그저

향이 나는 풀만 빼고 먹으면 되는 거였다. 먹을 때는 무척 맛있었고 내 몸도 받아주는

것 같았는데 지금 한국에 와서 생각에 없는 고생을 하고 있으니 다시 먹으라고 한다면

사양을 하겠다. 음식의 질은 높았다. 항상 영어로 되어있던 메뉴 판에 한국어가 조금씩

보이는가 하면 전통 음식도 있었고 한식도 있었다. 그 나라에 갔으면 그 나라 음식을

먹어야 하는 법이지만 전통 음식은 내 입맛에 딱 맞지 않았고 망고 신또(망고에 우유를

갈아 넣어서 만든 음료)만 질리도록 먹고 온 것 같다. 망고 맛은 우리나라에서 먹는 것

과 달랐는데 같이 간 동갑내기와 숙소에서 생 망고를 6개 까 먹으니 본연의 맛을 알 것

같았다. 결론은 베트남은 과일이 제일 맛있다 라고 할까??

마지막 날 비행기를 타기 전 마지막 일정은 베트남 사무소에서 이루어졌다. 베트남

코이카 사무소에 과장님께서 방문하시어 현재 사업 추진 현황 설명과 내년 계획 등을

설명해 주셨다. 코이카의 또 다른 모습을 알게 되면서 내 장래희망인 건축 디자이너가

되어 코이카와 같이 집을 선물하는 사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더불어 내 길

로 나아가는 동기가 더해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보이는 한국은 너무도 밝았다. 그 많은 빛에 눈을

가리거나 외면하는 현실이 하루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와 학

원으로 물들어 있는 방학에 꽃잎 하나를 떨어뜨려 주신 코이카 측과 도움을 주신 황현

주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이 멀리 볼 수 있기

를, 많은 아이들이 코이카를 알기를, 선물을 할 기회가 사회적으로 많아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Page 124: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어린이 세계시민의 베트남 견학 123

더 밝아질 아이들의미소를 위해

정문정, 강북중학교

중등부 <금상> 2

Page 125: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2 중등부 <금상>정문정, 강북중학교

Page 126: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더 밝아질 아이들의 미소를 위해 125

정말 놀라웠다. 평소 글 솜씨가 뛰어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코이카 공모전

에 당선된 것은 기적이었다. 나는 그저 나와 2년 전부터 인연을 맺어 온 타지키스탄 동

갑내기 친구에 대해 글을 썼을 뿐인데 예상치 못하게 큰 상을 받게 되어 기쁘기도 했지

만 어리둥절한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코이카 글짓기 공모전에서 입상을 한 사람들은

부상으로 베트남으로 현장견학을 보내주신다고 했을 때 솔직히 실망하는 마음이 있었

다. 베트남은 4년 전 가족여행으로 갔던 곳이기 때문이다. 살짝 아쉬운 마음으로 베트

남으로 가지고 갈 짐을 챙기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그래도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어

떠한 경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

면서 그 많고 많은 나라들 중 왜 베트남이 선정된 것인지, 그 곳에서 내가 배우고 느껴

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엿보기 위해 베트남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베트

남의 2015년은 한국의 1970년대와 비슷하다고 했다.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나라와 같

이 베트남도 베트남 전쟁을 겪고 많은 것이 무너진 상태에서 경제성장에 힘을 기울이

고 있다. 마치 우리나라의 1970년처럼. 빈부격차가 눈에 띄게 크고 국민들에게 복지라

는 개념이 아직 생소한 베트남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고 그러면서 내가 베트남에서 보

고 듣고 느끼고 배워할 것이 무엇인지, 왜 베트남으로 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베트남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방문한 코이카사업지는 한베 친선 IT 대학이다. 한베 친

선 IT 대학은 내가 가지고 있던 베트남에 대한 편견을 깨준 대학이다. 나는 우리나라보

다 덜 발전된 베트남에는 발전된 대학이 별로 없을 것 같고 만약 존재한다고 해도 극소

수의 상위층 학생들만이 교육의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베 친선 IT

대학은 내 예측과는 전혀 달랐다. 한국과 비슷한 방식으로 누구나 대학입학 시험을 보

더 밝아질

아이들의 미소를 위해

Page 127: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제17회 KOICA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126

고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이었다. 또한 취업률도 60%나 되어서 많

은 학생들이 입학하기를 희망하는 대학이었다. 한베 친선 IT 대학을 방문한 후 내가 베

트남을 너무나 후진국으로 보았다는 반성이 되었다. 또한 앞으로는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기 전에는 섣부르게 판단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베

친선 IT 대학을 방문하면서 베트남의 교육 열기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교

육에 대한 열망이 높기 때문에 ‘베트남도 빠른 시일 안에 더욱 발전할 수 있겠다!’ 라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한베 친선 IT 대학은 나의 우둔함을 깨닫게 해주고 베트남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품게 해주었던 여러모로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방문이었다.

베트남의 의료 복지 시스템은 매우 이상적이다. 의료비의 80%를 국가가 지원해주

고, 출산 시 6개월의 휴가와 월급을 지급한다. 하지만 빈부격차가 심한 베트남은 중부

지역이 매우 가난해 그곳 사람들은 의료 혜택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그러한 중부

지역에 지어진 꽝남 중앙 종합 병원은 중부의 열악한 의료 환경을 개선하는데 큰 역할

을 하고 있다. 꽝남 중앙 종합 병원은 500개의 병상을 갖춘 베트남에서 가장 큰 규모

의 종합병원으로 한국에서 들여온 최신 의료 기계로 한국과 맞먹는 수준급의 치료가

가능하다. 꽝남에 있지만 꽝남성 주변에 있는 지역 환자들까지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엄

청난 규모의 병원이다. 그곳은 베트남에서 한국병원이라고 불리운다. 한국이 베트남에

서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것 같아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꼈다. 사람을 살릴 수 있

다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내 꿈은 정신과 의사가 되어 의료봉사를 떠나

는 것이다. 베트남은 정신과 치료가 대중화되지 못해 사람들은 정신문제로 인한 외상

적 치료가 필요하기 전까지는 정신 문제로 병원을 찾지 않는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가

한베 친선 IT 대학, 꽝남 중앙 종합 병원(왼쪽부터)

Page 128: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더 밝아질 아이들의 미소를 위해 127

된 후에 꼭 베트남을 방문하여 베트남 사람

들에게 정신적인 행복을 주고 싶다. 내가 꿈

꾸는 의사라는 직업이 사람들을 살릴 수 있

고 도울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것에 또 다시

강한 매력을 느끼고 꿈을 꼭 이루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코이카사업지는 베트

남의 DuyPhuoc 초등학교였다. 한국의 초

등학교와는 다르게 소박했고, 전쟁의 흔적

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전쟁의 흔적을 매

일 보고 느끼는 이곳의 아이들이 혹시나 마

음까지 전쟁의 흔적을 새기며 살아가고 있

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바라는 것은

이 아이들이 전쟁의 흔적을 보면서 다시는

이 나라에 전쟁이 나지 않도록 나라를 발전

시키는 나라의 일꾼들로 자라나기를 소망하

고 바라게 되었다. 그 곳에서 초등학생들에

게 종이접기를 알려주며 마치 내가 그 아이들의 선생님이 된 것만 같았다. 아이들을 사

랑하는 마음이 생겼으며 풍선을 불어 날리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땐, 덩달아 나도

웃게 되었다. 그리고 조그만 것에도 감사해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동안 불평불만이

많던 내 태도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같은 아시아 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고 생각했는데 다시 찾은 베트남에서 이국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다. 색다른 거리풍경

과 주택들을 보며 불과 4년 전에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와 많이 달라진 새로운 면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사업지 방문을 통해 베트남이 꾸준히 발전 중이고, 그 발전의

중심에 우리나라, 코이카가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코이카는 한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인 교육, 의료에 힘을 많이 쏟고 있었다. 그래서 코이카에게 고마웠고 내가

소박하지만, 전쟁의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있었던 DuyPhuoc 초등학교

Page 129: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제17회 KOICA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128

한국인인 것이 매우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아픔을 겪고, 극복 중인

베트남에게는 우리나라의 도움이 아직도 절실하다. 지속적인 도움과 발전으로 베트남

도 우리나라처럼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베트남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Page 130: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어린이 세계시민의 베트남 견학 129

전쟁의 상흔을치유하는 촛불

강호종, 브렌트국제고등학교

고등부 <대상> 3

Page 131: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3 고등부 <대상>강호종, 브렌트국제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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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촛불 131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세계는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세계

인구의 약 20% 정도는 최빈곤층이며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 사이의 빈부 격차는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빈부 격차 확대와 소득 불평등은 빈곤을 넘어 인간 존엄의 문제

로도 대두되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최빈곤층 삶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처참

하고 하루 하루가 생존을 위한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실정에 비추어,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는 개

발도상국의 경제 성장과 빈곤감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있어 한 가지 중요한 방안

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국가 이미지 개선과 향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동양평화를 저해한 일본의 만행은 피해 당사자들인 한국을

비롯해 동남아 여러 국가에서 아직까지도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이들 나라에

서는 아픈 식민 역사에 대한 교육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무척 이중

적인 모습을 보인다. 일본의 잔혹한 과거와는 별도로 일본인, 그리고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감정은 무척 우호적인 상반된 모습을 목격하니 말이다.

이 비결은 일본의 ODA에서 찾을 수 있다. 전후 일본은 침략 국가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동남아에 막대한 ODA 자금을 퍼부었다. 인도네시아에 지원한 ODA만 해도 420

억달러(약 42조원)에 이르렀다. 내가 현재 살고 있는 필리핀 마닐라의 중심가에도 일본

의 원조로 세운 지하 터널이 있다. 이곳엔 선명한 일장기와 필리핀 정부가 보낸 헌사의

글이 함께 새겨져 있다. 이렇듯 공적 인프라 원조를 통해 과거 잔혹한 학살 만행을 희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촛불

Page 133: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제17회 KOICA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132

석시키고 근대화에 기여한 고마운 나라라는 이미지로 변모하여 일본 제품을 불티나게

팔고 있다. 단지 일본산 자동차의 점유율로만 보아도 동남아에서 최고의 점유율을 보

이고 있다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ODA의 중요성이 바로 이것이다. 해당 국가 국민들의 일상 생활에 직접 혜택을 주는

행위야말로 국가 브랜드 이미지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KOICA 글짓기 대회 대상 수상으로 KOICA가 베트남에서 진행하는 일련의 ODA 사

업지를 직접 견학할 수 있는 기회는 그래서 나에겐 남다른 소중한 의미였다. 공적개발

원조를 통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베트남 빈곤과 인권이 어떻게 개선되고 있는지, 이

를 통해 한국의 국가 이미지 향상이 어떻게 실현되고 구체화되고 있는지 그 현장을 직

접 견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 첫날 KOICA 베트남 사무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KOICA 베

트남 사무소는 현재 베트남 무상원조에 있어 지속 가능한 성장, 인적자원 개발, 경제

인프라를 3대 중점 지원 분야로 선정하고 지속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관계자 분

들의 자세한 설명으로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된 뜻 깊은 자리였다.

다음 날 첫 견학지인 다낭 한-베 친선 IT 대학(Vietnam-Korea Friendship Information

Technology College)을 방문했다. KOICA가 지원해 설립한 베트남 유일의 IT 전문 3년

제 대학으로 베트남 정보통신부 산하에서 정부의 IT 분야 중점 육성 계획의 구심점 역

할을 하고 있었다. 2015년에는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KOICA 베트남 사무소

Page 134: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촛불 133

IT 대학의 부총장님께 4년제 대학으로 승격했을 때 어떤 긍정적 효과가 있냐고 질문했

더니 교육의 질 향상, 그리고 현재보다 더 우수한 교수와 인재 확보가 가능하다고 답변

해 주셨다. 한국의 발전된 IT 분야의 기술 교류를 통해 베트남 선진화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넓은 들판과 우거진 수풀, 허름한 집들이 시선을 채웠고 베트남 전통 모자인 논

(Non)을 쓴 사람들을 지나치며 약 두 시간 정도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베트남 중부지

역 꽝남성에 있는 꽝남 중앙 종합 병원이었다. 두 번째 견학지이자 KOICA가 베트남에

한-베 친선 IT 대학

꽝남 중앙 종합 병원

Page 135: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제17회 KOICA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134

서 추진하는 일련의 활동 중 보건 의료 분야를 담당하는 곳이다. 이곳은 베트남의 가장

낙후된 지역이기도 하고 베트남전의 끔찍한 전쟁의 상흔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베트남 견학을 가기 전 베트남 빈곤에 대해 궁금해 인터넷으로 여러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베트남 빈곤 문제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고엽제의 피해, 그것으로 인한 농작

물 재배 토지의 감소, 질 낮은 생산량, 그리고 일자리 부족 및 기술 인력 부족, 인구 중

노인과 장애인(고엽제 피해)이 많아 낮은 생산성, 열대 지방의 고질 문제인 자연 재해

와 열심히 소득 증대에 애쓰지 않는 국민성 등이 원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베트남 현

실은 낮은 양적 질적 의료 서비스로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KOICA에서 베트남 의료, 보건에도 투자를 하고 무상 원조 사업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질병 극복과 국민건강이 바로 빈곤을 해결하는 가장 기

본이기 때문이다.

직접 견학한 꽝남 중앙 종합 병원(Quang Nam Central General Hospital)은 현대식

최첨단 시설을 갖춘 종합 병원이었다. 몰려드는 환자로 인해 아직까지는 응급실 침대

를 서로 공유하거나 경증 환자는 입원보다 통원 치료를 더 많이 받고 있지만, 그 지역

에서는 가장 시설이 좋고 뛰어난 의사들을 보유한 병원이기에 질적으로 높은 의료 서

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병원 곳곳에 있는 태극기와 베트남 국기가 두 국가간의 협력

과 우정을 상징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애국심의 심장인 태극기를 보자 나도 모르게

가슴 속 깊은 곳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DuyPhuoc 초등학교

Page 136: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촛불 135

다음 날 마지막 견학지인 꽝남성에 있는 DuyPhuoc 초등학교에 방문했다. KOICA 베

트남 사무소가 2001년도부터 베트남에 건설한 40개 학교 중 한 곳으로 전체 학생수는

358명이라고 한다. 교육 사업을 통해 우수한 인재들을 배출하고 베트남전의 과거사 문

제 해결에 기여하고자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교실로 들어가자 베트남 아이

들이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며 해맑게 환영해주었다. 종이접기와 풍선 불기를 하면

서 아이들과 낯선 거리감과 어색함을 없애고 자연스러운 친밀감을 형성하는 즐거운 시

간을 가졌다. 이곳에서 즐겁게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참 뿌듯했다. 넬

슨만델라가 말한 “교육은 네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Education

is the most powerful weapon which you can use to change the world)”란 말이 이

곳에서 실현되길 간절히 바라며 아이들의 뜨거운 배웅 속에서 학교를 떠났다.

한 개의 촛불에 여러 개의 초를 붙여도 처음 촛불의 빛이 약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캄캄했던 세상이 여러 개의 촛불로 더욱 환하게 빛날 것이다. 견학을 하는 동안 한국

KOICA가 진행하는 여러 ODA 활동 및 봉사활동들이 베트남 여러 지역에 환한 빛이 되

어 베트남 전쟁으로 얼룩진 피의 역사가 치유와 발전의 역사로 거듭나길 희망했다.

Page 137: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제17회 KOICA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136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흔히 문명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진정한 문명이

란 무엇일까. 단지 생활의 편리성이 높아지고 여러 기술이 집약적으로 발달하는 시대

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진정한 문명이란 빈곤을 배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축

소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책임인 것이

다. 이 중심에 대한민국 KOICA가 있었다.

Page 138: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어린이 세계시민의 베트남 견학 137

미소의 나라베트남 속 KOICA를 보다

김다원, 용인한국외대부설고등학교

고등부 <금상> 3

Page 139: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3 고등부 <금상>김다원, 용인한국외대부설고등학교

Page 140: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미소의 나라 베트남 속 KOICA를 보다 139

올해 KOICA에서 개최한 글짓기 공모전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덕에 KOICA 베트남

사업현장견학이라는 뜻밖의 기회에 함께할 수 있었다. 한국은 추운 겨울이 한창 이어

지고 있을 무렵,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따뜻한 미소의 나라 베트남으로 향했다.

베트남에 도착한 첫 날, 가장 먼저 견학한 장소는 KOICA 하노이 현장 사무소였다.

베트남에서 이루어지는 KOICA ODA사업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장 본부를 직

접 둘러본다는 것이 굉장히 뜻 깊은 시간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장소와 시간에 각기 다

른 맞춤형 사업을 지원하고, 직접 소통해야 하는 현장사무소의 인프라와 시설기반이

충분히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베트남 사무소가 더욱 더 흥미로운 공간

으로 다가왔다. 멀지 않은 미래에 한국의 국제개발협력 전문가로 다시 한 번 이곳에 방

문할 수 있다면 어떨까하고 잠시나마 행복한 상상에 빠져보기도 했다.

두 번째 날에는 수도 하노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베 친

선 IT 대학을 방문했다. 한-베 친선

IT 대학은 IT 기술 전문가 양성을

목표로 한국과 베트남 정부가 공동

지원하여 건립한 교육기관으로, 현

재 우수한 교수진과 졸업생들의 높

은 취업률 등으로 앞으로의 밝은

미래가 기대되는 대학이었다. 부총장님이 직접 내해주신 바에 따르면 4년제 대학교로

미소의 나라

베트남 속 KOICA 를 보다

Page 141: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제17회 KOICA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140

의 승격을 위해 양국의 협조 아래 꾸준한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었다. 지금보다도 더 나

은 교육수준과 인지도 아래 학교가 성장할 기틀을 닦는 과정에 KOICA가 많은 기여를

했다는 것이 참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꽝남 중앙 종합 병원에서는 KOICA가 선물한 또 하나의 큰 변

화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의료사업에 있어 한국은 상대적으로 우수한 기술력과 인적 자

본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발도상국의 원조에 있어 한

국은 상대적으로 우수한 기술력과 인적 자본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라고 생각

한다. 그리고 개발도상국의 원조에 있어 가장 중시되어야 할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의

료’라고 믿는다. 때문에 꽝남 중앙 종합 병원 방문은 이런 나의 생각을 보다 확고히 가

지게 해준 참으로 유익한 경험이었다. 병원에 전통의학과가 따로 개설되어 있어 베트

남에서 한국인 의사 선생님께 한방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신기했다.

병원을 견학하면서 협력의사 선생님께서 듣게 된 이야기 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베

트남은 발달한 의료보험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보다 양방과 한방의 융합이 자

유롭고 각 의학과 간의 긴밀한 협조 아래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타국의

원조가 많은 국가인 만큼 베트남의 의료복지는 수준이 높지 않고 그 수혜대상도 굉장

히 제한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편견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개발도상국이라는 개

념 하에 분류되는 많은 국가들에 대해 그 동안 나 자신이 무의식 속에서 상당히 많은

꽝남 중앙 종합 병원

Page 142: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미소의 나라 베트남 속 KOICA를 보다 141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국가의 다양한 매력

과 우수성을 존중하고 같은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를 잊지 않아야겠다고 다

짐하는 시간이었다.

이어진 일정 중, Duy Phuoc 초등학교에서 지역 학생들과 종이접기 수업을 하고 간

단한 마술 공연을 보여주는 시간을 가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들과 직접 소통하

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기뻤다. 국제개발협력 중에서도 특히 교육 분야 ODA

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3박 4일 간의 견학 중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경험이었던 것

같다. 해외봉사를 통해 다른 국가의 아이들을 만나보았을 때마다 밝은 미소로 다가와

주는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느꼈었는데, 이 지역 아이들도 너무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수업을 따라주어서 얼마나 기특했는지 모른다. 열심히 배우고 꿈꾸며 자라는 아이들이

곧 미래의 주역이고 훌륭한 세계시민으로 거듭날 꿈나무라고 믿는다. 앞으로의 글로벌

세대의 주축이 될 많은 아이들이 원조 사업을 통해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각자의 큰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앞으로도 꾸준한 관심과 도움이 있었으면 했다.

이번 견학을 통해 베트남의 다양한 문화와 KOICA의 활동, 그리고 한국의 ODA에 보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수업을 따라 주었던 베트남 초등학교 아이들

Page 143: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제17회 KOICA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142

다 가까워지고 그 내용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좋은 선후배들과

선생님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몇 배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베트남에서의 3박 4일은

오랫동안 기억에 담아 두고 때때로 기분 좋게 되새겨 볼 멋진 선물로 남았다. 앞으로

도 KOICA 현장견학의 시간을 통해 한 층 더 뚜렷해진 꿈을 향해 힘차게 다가가는 내가

되어야겠다.

Page 144: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어린이 세계시민의 베트남 견학 143

베트남 코이카 사업현장견학 소감문

정민주 교사, 신백현초등학교

지도교사 <초등부> 4

Page 145: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4 지도교사 <초등부>정민주 교사, 신백현초등학교

Page 146: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베트남 코이카 사업현장 견학 소감문 145

지난 여름 방학을 지나고 온 후 방학 과제물을 확인하는 중 똘똘한 허재희의 숙제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국제협력단(이하 코이카) 지구촌 체험관에서 체험한 내용을 바탕으

로 DR콩고에 관한 신문과 퀴즈를 만들어 온 것인데 여느 다른 과제물들에 비해 스스로

체험한 내용을 잘 정리하였고 어린이다운 생각이 깊이 있게 담겨 있었으며 반 아이들

의 관심도 또한 높아 교내 과제물 우수작품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

고 과제를 해결하며 보고 배우고 느낀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디어 공모전 글짓기 분야

에 응모하였다. 금상이라는 좋은 결실을 맺게 되어 코이카 해외 사업현장(베트남) 견학

의 기회가 재희와 나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출발 마지막

주까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다 강행하게 된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먼저 정부 무상원조 전담기관인 코이카와 ODA에 대해 막연한 개념 정도만 가지고

있던 중 좋은 기회에 실제 해외 사업 현장을 견학해 보니 많은 생각이 들게 되고 또 바

뀌게 되었다.

베트남 도착 첫 날 찾아간 코이카 베트남 사무소는 큰 지도에 추진 중의 사업의 통

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 그 규모와 봉사자들의 노력을 가늠해보기에 좋았다. ODA라는

일에서 오는 선입견은 천막 숙소에서 현지인들과 같이 생활을 나누고 체력적으로 많은

희생이 뒷받침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였는데 베트남 사무소 소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는 단원들과 직원들이 있음에 같은 한국인으로서 뿌

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베트남 코이카 사업현장

견학 소감문

Page 147: 제 17회 KOICA 글짓기 모음집

제17회 KOICA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146

둘째 날 다낭 지역으로 이동해 한-베

친선 IT 대학을 방문하였다. 중부지역 IT

기술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학교를 한국

과 베트남이 공동으로 설립한 대학이며,

학장님의 인사말씀 중 ‘한국이 베트남

에 준 선물’이라는 말씀은 지금 생각해

도 큰 감동이다. 4년제 대학 승격사업을

준비 중이라는 말씀에 좋은 결과가 있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학 이 곳 저 곳을

살펴보았다. 두 번째 견학 장소는 코이카의 지원에 의해 세워진 500 병상급의 ‘꽝남 중

앙 종합 병원’이였다. 파견근무 중이신 강동우 한의사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병원 곳곳

을 둘러보니 한국의 병원과 다를 바 없는 최신 의료기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생아집

중치료실을 비롯해 초음파 방사선실이 그랬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는 ‘꽝남 중앙 종합

병원’을 ‘한국병원’으로 부른다고 하셨다. 단순한 의료시설과 의료진 연수 뿐 아니라 한

국에 대한 인식 개선, 친한국적인 정서 함양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사업들을 실천

하고 있는 핫(Hot)한 현장이었던 것이다.

셋째 날 우리는 꽝남성의 DuyPhouc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차에서 내리자 밝

은 표정의 아이들이 학교 뜰로 우르르

나와 ‘안녕하세요!’ 라며 먼저 인사를 건

네주었다. 아이들의 천진한 표정은 온

세상이 공통이었지만, 교실에 들어서자

우리와 다른 점이 많이 보였다. 초등교

사로서 나는 멀티미디어 기자재와 교구

하나 없이 오직 육성과 교재, 연필만으로 종일 수업을 하라고 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

이 먼저 든다. 맨손으로도 알찬 수업을 하기 위해 더 많이 연구하고 고민해서 활동을

생각해내야 할 것이다. 특히 저학년 아이들의 수업에 있어 볼 것, 만질 것, 체험할 것

없는 수업은 상상하기 싫다. 그러나 이곳은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듯 오직 칠판 뿐이었

한-베 친선 IT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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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코이카 사업현장 견학 소감문 147

다. 자석칠판이 당연한 나는 예시작품을 붙일 자석부터 찾다 분필을 들어 종이접이 속

동물들의 눈, 입을 그릴 위치를 그려서 보여주었다. 함께 한 선생님과 말은 통하지 않

았지만 손짓, 발짓, 몸짓으로 고래와 연필모양의 종이접기를 하며 행복해 하는 아이들

을 만난 것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과 경험이 되었다. 안타까운 마음도 잠시였다. 곧 베

트남의 아이들 역시 과거 우리가 그랬듯 눈부신 발전의 동력인 인재들로 성장할 것을

믿고 코이카의 ODA라는 발받침을 통해 더 높이 뛸 수 있는 우리아이들의 동반자임을

새기며 좀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만약 내게 통일의 당위성에 대해 관한 초등 수업 요청을 받는다면 1시간 동안 꽉 차

게 수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대학에서도 배웠고 임용고시에서도 나왔으며 현장

연수에서도 항상 나오는 필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시민으로서 해외 공적개

발원조, 국제개발협력과 국제봉사의 이해와 당위성에 관해서는 이번 견학 이전 나는

물음표였다. 이번 견학을 통해 어린이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나의 역할과 비전

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으며, 앞으로 더불어 사는 세계시민으로서

국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코이카의 사업에도 기회가 닿는 한 참여해 보고 싶은 마음

과 실천의지가 생겼다.

지난 추석 연휴 동안 이메일로 재희의 원고를 받아보며 기특한 한 학생의 도전으로

만 여긴 일이 나비효과가 되어 임신 7개월의 몸으로 베트남 코이카 사업 현장까지 견

학하게 되었고 현지에서 애쓰시는 직원과 봉사단원분, 베트남 사무소 소장님, 그리고

인솔해 주신 분들과 함께 간 미래의 인재들, 중등선생님과 만나 생각을 나누고 배운 일

은 내게 더할 나위 없이 큰 경험의 선물이 된 귀한 시간들이였기에 감사한 마음을 재차

전하며 이번 베트남 사업 현장 견학 소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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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세계시민의 베트남 견학 149

베트남 속의 베트남황현주 교사, 정천중학교

지도교사 <중등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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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도교사 <중등부>황현주 교사, 정천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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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속의 베트남 151

두 번째 베트남 하노이 여행, 하지만 저는 낯선 두 곳을 경험했습니다. 2008년 여행

을 위해 왔던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속의 한국을 보았지만, 진정한 베트남의 참 모습을

못 보았습니다. 하지만 2015년의 베트남 견학에서는 베트남 속의 베트남을 보았습니다.

베트남의 얼굴 하노이 공항에서

한국에 버금가는 국제공항! 언제 이렇게 변했지? 그전에는 버스 터미널 같은 공항이

었는데, 5시간 만에 도착한 하노이 공항은 말 그대로 ‘환골탈태.’ 동남아시아의 세계화

진행 속도에 멀미가 났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시민’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시대

에 변화를 받아들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해야겠죠? 아마 조만간에 “저의 국적은 ‘한국’이

라는 말 대신에 ‘지구’입니다.” 라는 말이 나올 것 같습니다.

공항이 그 나라의 얼굴이라고 한 여행 전문가의 표현이 생각났습니다. 잘 화장하고

단장한 베트남 하노이 공항은 견학의 순조로운 출발을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랜드마크 72층 경남이 건설하다

지금은 조금 밀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최고층건물하면 대부분은 63빌딩을 떠

올립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높은 건물이 베트남에 있다는 것에 묘한 경쟁심이 생깁니

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 기업에서 수주를 받아 지었다고 하니 경쟁심이 자부심으로 변

했습니다. 그 건물 57층에서 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전망대로만 즐길 수 있는

층에서 잠을 자고 밤새 거리와 도시의 불빛을 야경 삼아 책을 읽고 생각에 잠길 수 있

베트남 속의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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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152

다니 설레기도 했습니다. 여러 놀라움을 감추고 생각해 보니 이렇게 발전된 나라를 우

리가 계속 도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국제 원조에서 많

은 부분을 베트남에 투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구심이 증폭되었습니다. 그리

고 높은 전망대와 같은 곳에서 바라본 하노이의 저녁 풍경은 웬만한 대도시 못지않았

습니다. 72층 건물 주변에는 계속해서 마천루를 만들어가는 고층 건물들이 대나무 밭

죽순들처럼 쭉쭉 뻗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거리에 오토바이가 대부분이

었는데 이제는 3분의 1 이상이 자동차였습니다. “경차! 모닝 내 차가 여기까지…….”

좁을 도로를 효율적으로 달리는 자동차들, 대부분이 한국 차였기에 오토바이만 없었다

면 한국의 동대문쯤으로 보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높은 건물에는 그만큼 긴 그늘이 생깁니다. 도시의 앞은 화려하지만 뒷골목

은 대조적으로 초라하듯이 공산국인 베트남에도 빈부 격차의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지

거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생겨 서로의 골이 깊어지면 어떡하나 라는 생각에 미치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다낭에 있는 병원의 환자들이 다~ 나앙

원조나 교육을 이야기 할 때 항상 떠오르는 비유로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낚는

법을 알려 줘야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파 누워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하

는 사람에게 낚시질을 가르친다는 것은 폭력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 앞에서는 무

조건적인 희생과 나눔이 필요합니다. 나중에 써 먹을 것을 가르친다느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등의 이야기는 현장을 체험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머릿속에서나 나올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체험하고 직접

맞닥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국경없는 의사회의 의사들이 왜 모든 기득권과 이권을 포기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포기하고 험한 선택을 하는지, 경험이 적은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장

에 와 보면 계산기를 두드리던 생각들이 사라집니다. 오롯이 느껴지는 고통 앞에서 우

선 이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입니다. 내가 금덩이를 들고 있더라도 아이가 내

눈 앞에서 벼랑 끝에 매달려 있다면 금덩이를 던지고 그 생명을 향해 손을 뻗어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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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속의 베트남 153

니다. 그래서 원조 중에서도 생명을 위한 원조가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고 그곳에 저희

는 갔습니다. 허허벌판에 우뚝 솟은 건물, 다들 말하지 않아도 그 곳이 꽝남 중앙 종합

병원임을 한 눈에 알았습니다. 당연히 병원에 못가고 의료 기계가 부족해 잘 치료를 받

지 못하는 곳에 도움의 손길을 뻗기 위한 코이카의 협력을 실천하는 곳이라는 것은 다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한국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한방과 양방이 종합

병원에서 서로 협력적으로 치료를 하고 있다는 자원 봉사 의사 선생님의 말에 이곳은

경쟁이 아닌 도움이 먼저인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와 반대인 한국의 현실이 떠올

라 씁쓸했습니다. 상호 보완적으로 서로 협력하면 환자에게 더 나은 것은 당연한 일인

데 한방에서 양방의 기계를 쓰지 못하게 법을 만든 한국이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더군

다나 산후 휴가가 장장 6개월이라는 말에 모두가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그러면서 3개

월의 산후 휴가도 감지덕지로 여기는 한국이 과연 의료 선진국일까라는 의문이 더해졌

습니다. 심장병 환자가 많은 곳에서 심장의 미세한 혈관까지 보고 치료할 수 있게 최신

의료 장비가 갖춰져 있는 곳. 그리고 1500원 밖에 하지 않는 저렴한 초음파 비용까지.

오히려 한국이 먼저 닮아야 할 곳이 이곳 병원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었고 그 전투에서 한국군이 혁혁

한 공을 세웠던 다낭은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이 아니라 반성과 용서 그리고 갚음이

있어야 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 곳에 병원을 세웠다는 것은 화해의 상징으로 보입니

다. 다낭은 우리가 무조건적인 용서와 희생으로 죄 갚음을 해야 하는 곳이기에 한국과

비교하기보다는 좀 더 많은 무상 지원으로 꾸준히 봉사해야 하는 곳입니다.

두 학교 이야기

예상대로 베트남도 빈부의 격차가 심했습니다. 우리가 갔던 DuyPhuoc 초등학교는

코이카의 후원으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지만 아직도 낡은 교실과 부족한 건물 때문에

예전 전쟁 직후의 한국처럼 2부제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학교 벽면을 크게 메운 지뢰와 폭탄을 조심하라는 포스터였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지뢰가 많은 나라가 베트남과 한국이라고 합니다. 한국은 많이 제거를 했다지만

아직도 여름 홍수 때면 휴전선 부근에서 유실된 지뢰들이 충남 홍성에서도 발견된다고

합니다. 이곳 베트남에서도 아이들이 냇가에서 놀다 지뢰나 폭탄에 의해 사고가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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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KOICA 국제개발협력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견학소감문154

발생하기 때문에 안전 교육을 강하게 실시한다고 합니다. 이런 베트남에서만 특이하게

실시되고 있는 원조 중에 지뢰 제거 원조도 코이카에서 실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

으면서 그 나라 특성에 맞게 특화된 원조에 감사했습니다. 원조하면 경제적 도움만 생

각하는데 이런 실질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원조는 밀착된 것이고 가장 필요한 부분을

찾아 주는 원조로 이익을 떠나 동병상련의 이해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 2달러 이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전 지구에서 10% 밖에 안 된다고 합니

다. 세계가 100인의 마을이라면 100명 중 10명 안에 한국사람 대부분은 속합니다. 그

런데 그 10명 중에서도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2명이라고 합니

다. 결국 우리는 세계의 2% 안에 드는 기술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당연

하게 생각하는 카카오톡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최신 기술이고 아직 누리지 못한 신세계

입니다. 세계가 진정한 100인의 마을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을 공유하고 그것을 돈벌이

만 활용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는 곳에 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실천이 이

루어지는 곳이 다낭 한-베 친선 IT 대학이었습니다.

IT 기술을 공유해 구직에 도움을 줄고 나아가 일자리 창출도 만들어내는 경제적 시

너지를 일으키고 있는 곳이 이곳 다낭 한-베 친선 IT 대학이었습니다.

베트남 속의 베트남

하노이의 높은 건물들의 소유는 대부분은 외국계 기업이었습니다. 경제 발전을 위해

외국 자본의 투자를 받았지만 그것이 과연 국민들에게 골고루 돌아갈지는 지켜봐야 합

니다. ‘낙수 효과’라는 말처럼 윗물이 아래까지 흘러내려 모두를 적시기를 바라지만 인

간의 끝없는 욕심이 이런 당연한 이론을 역행합니다. 그래서 여행자로 와서 상대적으

로 값싸지만 질 좋은 서비스나 리조트, 저렴한 음식과 마사지만 즐겨서는 베트남 속의

베트남을 본 것이 아닙니다. 빌딩의 그늘 속에서 아직도 힘들어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줄 알 때 우리는 진정한 베트남을 본 것입니다.

2008년, 2015년 같은 곳을 다녀왔지만 저는 다른 두 곳을 보았습니다. 여행자가 아

닌 세계시민의 시각에서 다시 베트남을 볼 수 있어서 제게는 의미있는 견학이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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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속의 베트남 155

다. 여행으로 와서 돈을 쓰는 원조가 아닌 지뢰를 제거해 주고 아픈 사람을 무상으로

치료해 주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진화된 ODA의 현장을 보면서

세계시민의 소양을 조금을 넓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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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행 인

발 행 처

발 행 일

주 소

전 화

팩 스

홈 페 이 지

디자인/인쇄

김 영 목

한국국제협력단 ODA교육원

2015년 05월 14일

461-833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대왕판교로 825

031-740-0500

031-740-0640

한국국제협력단 | http://www.koica.go.kr

KOICA ODA교육원 | http://oda.koica.go.kr

동화 D&P

본 책의 저작권은 한국국제협력단에 있으므로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본 책은 비매품입니다.

제17회 글짓기 모음집

더불어 사는 우리는 세계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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