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ing of Fist Fighters_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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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왕무적 6권 “화산에서 불어 온 바람은 황산에서 막히고 장강을 타고 달려온 물길은 태산에서 잠들며, 꿈 을 쫓아 달려온 무사의 혼은 숭산에서 고인다.” 이는 무림맹이 생기면서 강호에 퍼진 노래 중 하나로, 수많은 무사들이 출세를 위해 무림맹이 있는 숭산으로 모여들면서 생겨난 노래 중 하나였다. 하남성 숭산 태실봉에 무림맹이 생기면 서 소림사로 상징되던 숭산은 무림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무에 꿈을 지닌 자라면 누구나 무 림맹의 무사가 되어 강호를 질타하는 꿈을 꾸게 되었고, 무림맹의 무사가 되는 것은 무인들 중에서도 귀족이 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북경에서 하남성 숭산을 향해 가는 관도 위로 한 명의 청년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길을 걷던 청년은 잠시 걸음을 멈춘 다음 하늘을 본다. “빌어먹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빈손으로 내쫓다니, 정말 아 버지가 맞는 건가? 하늘은 더럽게 맑기도 하네.” 아운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고 울화가 치밀었다. 처음에야 자신 스스로 도망쳤었기에 빈손이 라고 해도 누구를 원망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 해서 빈손으로 쫓겨난 신세고 보니 그때와는 사정이 또 달랐다. 가난은 사람을 아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이 명예를 얻으면 싫던 좋던 그만큼 입지가 좁아지는구나.’ 아운이 처음 집을 나갈 때와는 달리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하기가 싫었다. 권 왕이란 명성이 주는 스스로의 위상도 그가 함부로 행동할 수 없게 제재를 가한다. 어떻게 되 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한 아운은 나름대로 평온하게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그의 걸음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알게 모르게 약혼녀가 보고 싶었던 탓이라 할 수 있었다. ‘우칠이나 흑칠랑 일행보다 훨씬 빨리 무림맹에 도착하겠군.’ 아운은 우칠과 흑칠랑 일행과 무림맹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었다. 우칠이야 충복이니 까 그렇다고 해도, 살수인 흑칠랑과 야한이 무림맹까지 쫓아오겠다고 한 것은 사실 조금 뜻밖 이었다. 살수란 직업 자체가 무림맹과는 적대적 관계인지라, 흑칠랑과 야한의 경우 호랑이 굴 에 뛰어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살수는 기꺼이 그것을 감수하겠다 고 나섰다. 물론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고, 무림맹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무림의 절대 고수가 된 아운과 일행이라고 하면 아무리 무림맹이라고 해도 함부로 하지 못할 거란 계산이었다. 더군다나 아운은 신주 오기 중 한 명이 버틴 북궁세가의 사위가 아닌 가? 충분히 그늘이 되고도 남는 신분이었다. 무엇보다도 두 명의 살수는 아운이 무림맹에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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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 of Fist Fighters_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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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왕무적 6권

“화산에서 불어 온 바람은 황산에서 막히고 장강을 타고 달려온 물길은 태산에서 잠들며, 꿈을 쫓아 달려온 무사의 혼은 숭산에서 고인다.”

이는 무림맹이 생기면서 강호에 퍼진 노래 중 하나로, 수많은 무사들이 출세를 위해 무림맹이 있는 숭산으로 모여들면서 생겨난 노래 중 하나였다. 하남성 숭산 태실봉에 무림맹이 생기면서 소림사로 상징되던 숭산은 무림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무에 꿈을 지닌 자라면 누구나 무림맹의 무사가 되어 강호를 질타하는 꿈을 꾸게 되었고, 무림맹의 무사가 되는 것은 무인들 중에서도 귀족이 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북경에서 하남성 숭산을 향해 가는 관도 위로 한 명의 청년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길을 걷던 청년은 잠시 걸음을 멈춘 다음 하늘을 본다.

“빌어먹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빈손으로 내쫓다니, 정말 아버지가 맞는 건가? 하늘은 더럽게 맑기도 하네.”

아운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고 울화가 치밀었다. 처음에야 자신 스스로 도망쳤었기에 빈손이라고 해도 누구를 원망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빈손으로 쫓겨난 신세고 보니 그때와는 사정이 또 달랐다. 가난은 사람을 아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이 명예를 얻으면 싫던 좋던 그만큼 입지가 좁아지는구나.’

아운이 처음 집을 나갈 때와는 달리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하기가 싫었다. 권왕이란 명성이 주는 스스로의 위상도 그가 함부로 행동할 수 없게 제재를 가한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한 아운은 나름대로 평온하게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그의 걸음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알게 모르게 약혼녀가 보고 싶었던 탓이라 할 수 있었다.

‘우칠이나 흑칠랑 일행보다 훨씬 빨리 무림맹에 도착하겠군.’

아운은 우칠과 흑칠랑 일행과 무림맹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었다. 우칠이야 충복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살수인 흑칠랑과 야한이 무림맹까지 쫓아오겠다고 한 것은 사실 조금 뜻밖이었다. 살수란 직업 자체가 무림맹과는 적대적 관계인지라, 흑칠랑과 야한의 경우 호랑이 굴에 뛰어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살수는 기꺼이 그것을 감수하겠다고 나섰다. 물론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고, 무림맹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무림의 절대 고수가 된 아운과 일행이라고 하면 아무리 무림맹이라고 해도 함부로 하지 못할 거란 계산이었다. 더군다나 아운은 신주 오기 중 한 명이 버틴 북궁세가의 사위가 아닌가? 충분히 그늘이 되고도 남는 신분이었다. 무엇보다도 두 명의 살수는 아운이 무림맹에 들

어가서 벌어질 일들이 너무도 궁금했다.

아운은 집에서 약간 머물 생각을 했었기에 우칠이나 흑칠랑 등에게는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약속을 잡아 놓았던 것이다.

하남성을 향해 가는 관도 위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무인들도 상당 수 섞여 있었다. 그들 역시 하남성 무림맹을 향해 가는 자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무림맹의 힘이 지나치게 강한 것 같군.’

아운의 생각이었다. 이미 이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무림에 나와 보니 생각보다도 무림맹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아운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부지런히 걷다가 언덕 위에 서 있는 누군가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키가 크고 얼굴이 검은 삼십 대의 사내 한 명이 관도를 지나가는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그 사내의 오른쪽 허리엔 짧은 검 한 자루가 차여 있었다.

‘대단한 실력자다. 검을 보니 쾌검을 익힌 것 같은데…….’

아운은 비록 먼 거리에서 상대를 보았지만 상대가 상당히 강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잔잔하게 안으로 갈무리된 기는 그가 극한의 수련을 하였고, 이미 어느 정도 경지 이상을 대성하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사내는 언덕 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상대가 무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가서서 무엇인가를 묻곤 했다.

아운의 눈에 호기심이 어린다. 아운이 언덕에 올라섰을 때였다. 사내가 아운에게 다가왔다.

“말 좀 묻겠소.”

아운은 덤덤한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물으시오.”“혹시 몽혼지약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시오?”“없습니다.”

사내는 조금 낙담한 표정이었다.

“휴, 정말 이 넓은 세상에 몽혼지약을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렵구나.”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아운은 사내에게 무엇인가 사연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애써 묻지 않았다. 그는 빨리 무림맹으로 가서 자신의 약혼녀를 보고 싶었다. 지금 다른 것은

별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단 것이다. 아운은 무림맹을 향해 걸어갔고, 삼십 대의 사내는 또 다른 무인을 찾아 묻고 있었다. 이렇게 하나의 인연이 스쳐지나갔다.

사내랑 헤어져 한 동안 길을 걷던 아운은 마른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무공이 절정에 달해 배가 고픈 것은 아니지만 식욕은 어쩔 수 없었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구가 그로 하여금 군침을 삼키게 한다.

‘사냥이라도 해야겠군.’

결국 아운은 사냥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곰이라도 한 마리 잡아서 가죽을 팔아 여비로 쓰고 고기는 먹을 생각을 한 것이다. 길가에서 갑자기 아운의 신형이 사라졌지만 길을 걷던 사람들 중 아운의 신형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을 떠나 하남성 무림맹으로 출발한지 오 일째 되는 날이었다.

길가에 있는 숲은 생각보다 깊었고, 나무도 울창했다. 숲에 들어온 아운은 일단 정신을 집중하고 천이통을 펼치기 시작했다. 여러 짐승들의 발자국 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한꺼번에 빨려 들어왔다. 그 중에서 사냥감으로 적당한 짐승의 소리를 구별하던 아운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이런 빌어먹을…….”

저절로 욕지기가 나올 뻔한 아운이었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이다.

“비가 오기 전에 좀 쉴 곳을 찾아야겠군.”

아운의 신형이 무섭게 숲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달리는 그의 귓가로 사람 목소리가 얼핏 들여온다. 아운의 신형이 그쪽을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잠시 후, 아운은 작은 산 아래 있는 낡은 폐찰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두런거리는 사람의 소리는 그곳에서 들려왔다.

아운은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운이 사찰 안으로 뛰어드는 것과 동시에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물론 아운 정도라면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호신강기로 인해 옷이 젖을 염려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작은 일에 무공을 사용하기도 그렇고, 질퍽거리는 분위기도 좋아하지 않는 아운이었다. 그러나 어딘가에 들어가서 느긋하게 책을 보거나, 한가롭게 앉아서 비 구경을 하며 비 소리를 듣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아운이 폐찰로 들어가자, 그 안에 있던 이남 이녀가 놀라서 아운을 바라보았다. 남자들은 모두 이십 대 중반의 젊은이들이었는데, 호리호리한 체격에 제법 미남인 청년과 맹호의 얼굴에 체격이 당당한 청년, 그리고 귀엽게 생긴 십대 후반의 소녀였다. 마침 그들은 두 마리의 토끼와 한 마리의 꿩을 잡아서 굽고 있던 참이었다. 아운은 그들을 보고 희죽 웃으면서 말했다.

“실례를 했습니다. 먼저 오신 분이 있으셨군요.”

아운의 말에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청년이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주인이 있는 폐찰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역시 먼저 왔을 뿐, 편히 쉬다가 가십시오.”“고맙습니다. 그럼.”

아운은 터벅거리며 걸어와 한 쪽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문짝이 부서진 틈새로 시원하게 내리는 비와 타닥거리는 빗소리가 운치를 더해준다. 더없이 좋은 풍경이었고, 아운이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여기에 마실 것과 먹을 것만 있다면 더욱 좋았을 테지만…….

두 명의 청년은 아운이 자리에 앉아 비 구경하는 모습을 보고 굽던 고기를 마저 굽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여러 번의 노숙 경험이 있는 듯, 고기를 굽는 모습이 능숙해 보였다. 고기가 익어갈수록 며칠 동안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아운의 코가 간질거리고 배가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운은 담담한 표정으로 비구경만 했다.

이윽고 고기가 다 구워지자, 당당한 체격의 청년이 아운에게 다가와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이리 오십시오. 마침 고기가 충분하니 함께 드시면 어떻겠습니까?”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었다. 당연하게도 아운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함께 먹겠습니다. 권하지 않았으면 훔쳐라도 먹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아운의 가벼운 농담에 모두들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어울리기 시작했다. 호리호리한 청년이 먼저 포권을 하고 말했다.

“산동 고가장의 고명이라고 합니다. 무림맹에 친구가 있어서 보러 가던 참이었습니다.”“산동 여씨세가의 장남인 여적산이라고 합니다.”

일단 자기소개를 한 여적산은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여동생인 여운령이라고 합니다. 무림맹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도 떼를 써서 할 수 없이 데리고 나왔습니다. 우리 남매 역시 고형과 함께 친구를 보러 무림맹으로 가던 참이었습니다.”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얼굴이 호랑이 상인데다 덩치가 우람한 여적산과 귀엽고 예쁜 여운령이 남매란 사실은 언뜻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고가장이나 여씨세가는 무림에서 크게 명성을 떨친 곳은 아니지만, 산동에서는 제법 알려진

가문들이었다. 산동이라면 특히 북궁세가의 세력권이기 때문에 아운은 더욱 이들에게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가장은 검법으로, 여씨세가는 도법으로 유명했다. 두 청년은 각각 검과 도를 등에 메고 있었으며, 여운령 역시 허리에 폭이 좁고 길이가 짧은 도를 차고 있었다. 아운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하영운이라고 합니다. 마침 나 역시 볼 사람이 있어서 무림맹으로 가던 참이었습니다.”

당연히 하영운이란 이름은 무명이었다. 이들 중 하영운과 아운을 동일시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운이 무림맹으로 간다고 하자, 고명과 여적산이 반기면서 말했다.

“이것도 인연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함께 무림맹까지 동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심심하지 않아 좋을 것 같습니다.”

무공을 모르는 아운이 산속의 폐찰에 나타난 것도 그렇고 무림맹으로 가는 것도 조금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사연이 있으려니 했다. 무림맹이라고 해서 꼭 무인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인도 상당수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운과 두 청년은 서로 맘이 통한 듯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며칠 만에 먹는 음식 맛에 아운은 혀가 살살 녹는 기분이었다.

서로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을 때였다.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거의 부서질 것 같았던 폐찰의 문이 열리며 서너 명의 인물들이 걸어 들어왔다. 두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여인 그리고 한 명의 노인으로 구성된 사인의 무리들은 거침없이 폐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운은 이미 그들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기에 모른 척할 뿐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기척을 전혀 모르고 있던 고명과 여적산 그리고 여운령은 그들의 갑작스런 출현과 뿜어내는 기세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나타난 무리들을 보던 고명과 여적산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비에 젖은 여인의 신체 굴곡이 그대로 내비친 것이다. 폐찰 안으로 들어온 여인은 두 청년이 자신을 보고 얼굴을 붉히자, 무엇인가 느낀 듯 얼른 장포로 몸을 가린 후, 얼굴에 분노의 표정을 떠올리고 말했다.

“천한 놈들이 엉큼하게 무엇을 보느냐? 모두 눈을 뽑아 버리겠다.”

여자의 말에 고명과 여적산은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들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모욕적인 말이었던 것이다. 성질 급한 여적산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보고 싶어 본 것도 아닌데 좀 심한 것 같습니다.”

여적산의 말에 여인은 물론이고 여자와 함께 온 두 명의 청년의 표정도 차갑게 변했다. 여인

이 화를 내기도 전에 먼저 분노를 터트린 것은 두 명의 청년 중 미남의 얼굴에 키가 후리후리하게 큰 청년이었다. 얼핏 보면 그의 체격이 고명과 비슷했다.

“이런 죽일 놈들이 있나? 네 놈들은 이 아가씨가 누구인지나 알고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것이냐?”

물론 알 턱이 없었다.

“바로 남궁세가의 남궁청 낭자이시다.”

남궁세가의 여식이란 말을 듣고 고명과 여적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가문 중에 하나가 바로 무림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였다. 청년은 고명과 여적산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면서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놈들은 상대를 알았으면, 어서 사과를 하고 자리를 비키거라.”

청년의 말에 고명과 여적산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고, 청년의 말에 울컥하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켜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화가 나고 억울했지만, 상대는 남궁세가였다.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가문이었고, 자칫하면 자신들 뿐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문까지도 위험해질 판이었다. 그들은 무림맹을 형성하고 있는 삼십삼 명의 장로들이 얼마나 무섭고 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무림은 그들의 것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가 아닌가.

고명과 여적산이 억울함과 분노를 억누르고 자리를 비키려할 때, 아운은 여자가 남궁세가라고 하자, 사막에서 만났던 남궁단의 얼굴이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다. 한데 마침 비웃는 표정으로 고명과 여적산을 보던 남궁청이 그런 아운을 보고 말았다. 여자의 눈에 독기가 어린다.

“이 어린놈이 감히 나를 비웃어!”

그녀의 시선은 아운을 향하고 있었으며, 호리호리한 청년은 남궁청의 말을 듣고 아운을 노려보며 말했다.

“참으로 불쌍한 놈이로군. 네 놈이 감히 남궁 낭자를 비웃는다 말이지.”

청년의 말에 당황한 것은 여적산과 고명이었다. 여적산은 재빨리 일어서서 포권지례를 하면서 말했다.

“글을 쓰는 문사라 아직 강호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남궁 소저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고명 역시 청년에게 포권지례를 하고 말했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용서하십시오.”

두 사람이 사과하는 모습을 본 아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 또한 지은 죄가 없다. 무엇보다도 나타난 자들의 오만하고 건방진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자칭 남궁청이 대변인 역을 자처하는 청년은 아운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그는 고명과 여적산을 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용서를 못하겠다면 어쩔 참이냐?”

여적산과 고명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궁청이 그런 두 사람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 볼 때였다.

“정말 눈꼴시어서 못 봐주겠군.”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라서 모두 바라본 곳에는 아운이 서 있었다. 여적산과 고명은 더욱 당황했고, 남궁청의 얼굴은 분노로 인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녀를 대변하던 청년은 살기를 품고 아운에게 다가온다. 여적산과 고명은 빠르게 아운의 앞을 가로 막는다. 청년은 비웃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자명이라고 한다. 네 놈들도 들어는 봤으리라.”

이자명이란 말에 고명과 여적산은 놀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고명이나 여적산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삼절서생 이자명. 호북의 명가인 이가장의 장자였고, 이가장의 가주는 무림맹의 삼십삼 장로 중 한 명이었다. 역시 고명이나 여적산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당황할 때, 아운이 그들의 츰 사이로 빠져 나오면서 말했다.

“이자명이라고 했나? 계집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자식의 이름 하나는 좋군.”

아운의 말에 이자명의 얼굴은 삶은 감자처럼 변해 버리고 말았다. 고명이나 여적산 역시 당황스러움과 함께 그저 놀란 시선으로 아운을 바라보았다. 어떤 면에서는 아운의 베짱을 부러워하는 시선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청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운을 보면서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아운이 비웃는 표정으로 먼저 말을 끊어 버린다.

“정말 볼품 없는 계집이군.”“커억!”

남궁청의 목이 콱 막히면서 말을 멈추고 말았다. 지독한 모멸감을 느낀다. 이자명은 당황한 시선으로 남궁청을 보았다가 아운을 보면서 고함을 질렀다.

“이런 개자식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네 놈은 눈이 있어도 보는 눈이 없는 장님이구나.”

아운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눈이 없는 장님이라고? 네 놈은 마치 저 계집의 알몸이라도 본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운의 말에 남궁청이나 삼절서생 이자명의 얼굴은 정말 보기 민망하게 변해 버렸다.

“이이…….”“내가 장님이라고? 그게 저 계집을 두고 한 말이냐? 아무리 봐도 볼게 없는데…….”

말도 말이지만 아운의 표정이란 정말 볼게 아무 것도 없다는 그 표정 그대로였다. 남궁청은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해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때 이자명 뒤에 서 있던 청년이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말버릇이 고약한 놈이군. 감히 작은 말재주로 명문의 규수를 능멸하다니,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놈이구나.”

청년이 나서자 남궁청은 상당히 기쁜 표정을 지었고, 이자명은 청년의 눈치를 보면서 뒤로 물러섰다. 참으로 수려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시원한 이목구비와 청수한 얼굴의 윤곽은 보는 사람에게 경건한 마음이 들게 만들 정도였다. 청년의 허리엔 장검 한 자루가 걸려 있었는데 손잡이만 보아도 상당한 보검임을 알 수 있는 명품이었다. 청년을 바라보던 아운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감히 내게 덤비다니,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놈이군.”

청년이 조금 전 아운에게 했던 말 그대로였다. 그러나 청년의 표정은 큰 변함이 없었다.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마음공부가 상당한 자라고 할 수 있었다. 아운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청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호, 대단한 수양이군. 넌 이름이 뭔가?”

완전히 아랫사람을 대하는 말투였고 태도였다. ?년의 미간이 조금 더 구깃해진다.

“참으로 아래위가 없는 놈이군.”“아래 위라……. 그 아래 위를 어떻게 정하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본 사람에게 이놈 저놈 하는 저 멍청한 녀석이나, 아무에게나 막말하는저 못 생긴 계집을 보면 뭐 그게 그거인듯…….”

아운의 말에 남궁청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장검을 뽑아 들면서 고함을 쳤다.

“윤정 사숙님, 저 자식을 내게 맡겨 주세요.”

남궁청의 고함 소리를 들은 고명과 여적산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탕마검 윤정…….”

고명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아운은 더욱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윤정을 본다. 그러나 아운의 얼굴 어디에도 윤정이란 말에 겁먹은 표정은 없었다. 탕마검 윤정. 아운도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화산파의 제자로 정파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비록 강호에서 젊은 층의 명성으로 따지자면 이미 강호의 초고수로 떠오른 권왕과 사룡삼봉이 있지만, 그들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인물들이 아니었다. 정통 무파에서 최고의 인물로 꼽는 후기지수 중 한 명이 바로 윤정이었다. 그의 무공은 삼룡삼봉에 거의 근접해 있다는 수문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별호가 탕마검인 것처럼 악한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한 번 손을 보면 그 손속이 잔인하기로도 유명했다. 그리고 그의 광명정대함이나 의협은 이제 나이 삼십 전의 윤정을 대협이라고 부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 화산파의 전대 장문인인 매화성검 한수영의 제자로 현 화산파 장문인의 사제 뻘 되는 인물이 바로 윤정이었다.

남궁청이 윤정을 보고 사숙이라고 부른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배분 상 윤정은 남궁청에게 사숙 뻘인 것이다. 남궁청은 의식적으로 윤정의 이름을 불러 그의 신분을 노출시킨 다음 여적산과 고명의 질린 표정을 보면서 만족한 미소를 머금었다가 전혀 겁먹지 않은 아운을 보고 다시 인상이 구겨졌다.

호기심어린 눈으로 윤정을 보는 아운의 시선이 점점 냉정해졌다.

“정파의 신성이란 놈도 알고 보니 별거 아니군.”

윤정의 얼굴에 무서운 살기가 어렸다. 그러나 아운은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선과 악을 어떻게 구별하는지 모르겠지만, 소문대로의 탕마검이라면 저 계집과 저 멍청한 자식의 잘못을 능히 알고 있을 터인데, 그땐 어째서 나서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그러니까 명서이 모자라거나 가문이 부족하면 당해도 싸다 이건가? 결국 강호 무림답게 힘이 곧 정의란 말이지. 이거 재미있군.”

아운의 빈정거리는 말에 윤정의 표정은 점점 싸늘해졌고, 그 말을 듣고 있던 남궁청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이 빌어먹을 놈 뭐라고 지껄…….”

남궁청의 말은 거기서 딱 멈췄다. 남궁청 뿐이 아니었다. 윤정의 표정도 굳어졌고, 이자명의 입도 딱 벌어져 있었다. 당황하고 있던 여적산과 고명도 놀라서 눈을 부릅뜨고 아운을 본다. 윤정의 뒤에서 그저 지켜만 보던 노인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언제 어떻게 아운이 움직였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아운은 바로 남궁처의 코앞에 서 있었다.

“계속 지껄여 봐라. 계집. 더 지껄이면 이빨을 전부 부셔버리겠다.”

아운의 차가운 말에 남궁청은 가슴 속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겁 먹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 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네 놈이 감히 남궁세가에 대항하려 하는 것이냐?”“정말 뭐도 없는 계집이 가문 하나 믿고 설쳐 대는 꼬라지가 가관이군.”“이런 개자식이 감히 남궁세가를 능멸…….”

남궁청의 말은 다시 잘려야 했다.

“계집, 남자의 말을 종이쪽으로 들었는가?”

고함과 함께 아운의 주먹이 남궁청의 입에 들어가 쳐 박혔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남궁청의 앞니가 몽땅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지독한 고통과 함께 남궁청의 신형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망치만한 아운의 주먹을 입으로 문 채 바들거리는 남궁청의 모습은 정말 가련해 보였지만 아운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설마하던 삼절서생 이자명과 탕마검 윤정의 표정이 굳어졌고, 그 뒤에 있던 노인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설마 아운이 정말 남궁청의 이빨을 부셔 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그들이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무공이 고강한 남궁청이 이렇게 허무할 정도로 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당할 줄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삼절서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놈은 누구냐? 네 놈은 지금 건드린 남궁 소저가 얼마나 귀한 신분인지 망각한 것이냐?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이란 말이다. 이제 네 놈은 죽었다.”

삼절서생은 거의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로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감히 남궁가의 여식을……. 어떻게 무명의 무사가 남궁 가의 여식에게 주먹질을 할 수 있을까? 차후에 자신은 물론이고 그 가문 전부가 몰살당할 생각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정파의 남궁세가가 그렇게까지……. 이런 생각은 이미 이십 년 전에 사라진 말이었다. 삼십삼 명의 장로원으로 대변되는 정파의 인물들을 무소불위였다. 그들에게 반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없다는 것은 강호 무림의 누구라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사실상 무림맹을 움직이는 장로원의 힘은 무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맹주조차 더 이상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장로원의 힘은 커져 있었던 것이다. 맹주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의결 기관으로 시작한 장로원이었지만, 이젠 무림의 막강한 힘을 대변하는 이름이 되었다. 강호에서 제대로 살아남은 무파라면 이 삼십삼 장로의 한 자리를 차지한 곳뿐이었다. 그들의 힘을 일컬어 구중천이라고 했고, 남궁 가라면 바로 그 장로원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는 남궁학의 가문이었다. 남궁청은 바로 남궁학의 손녀였다. 그걸 알고 감히 남궁청에게 시비를 거는 바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 바보 같은 일이 지금 벌어졌다.

“지……지금 네 놈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아운은 남궁청의 입에서 손을 빼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남궁학을 대신해서 이 어린 계집에게 훈계를 좀 했다.”“이놈.”

삼절서생 이자명이 무서운 속도로 아운에게 달려들었다. 독랄한 살수로 당장이라도 아운을 죽일 것 같은 공격이었다. 바로 그의 무공인 삼절장의 절기였다.

“네 놈이 삼절이니, 별호 그대로 만들어 주마.”

아운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삼절서생의 손을 잡아챘다.

“네 놈이 삼절이니 그대로 해주마. 이게 바로 삼절기란 절기니라.”

아운은 이자명을 잡아채자마자 그의 몸 세 곳을 꺾어버렸다. 말 그대로 삼절을 만들어준 것이다. 아운이 삼절서생의 한 팔과 두 다리를 꺾어 놓는데 걸린 시간은 실로 눈 깜박할 사이였다. 나름대로 무공에 자부심이 강한 윤정조차 멍하니 아운의 얼굴만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윤정은 아직 검조차 뽑아들지 못하고 있었다. 검을 뽑아들기도 전에 삼절서생의 팔 다리를 꺾는 아운의기백에 압도당한 것이다. 윤정의 뒤에 서 있던 노인, 남궁소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주 특이한 신분의 인물인데 현 남궁 가의 가주가 그의 형이기도 했으며, 화산파 장문인이 그의 사형이기도 했다. 또한 탕마검 윤정의 사형이었다. 아운은 삼절서생 이자명의 팔 다리를 꺾어 그야말로 삼절로 만든 다음 부서진 입을 움켜쥐고 주저앉아 있는 남궁청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세상엔 네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명심하고 살아야할 것이다.”

아운은 남궁청을 폐찰 문 밖으로 집어 던졌다. 겨우 형상만 유지하고 있던 문이 박살나면서, 질퍽한 땅바닥에 거꾸로 쳐 박힌 남궁청의 허연 다리가 하늘을 향해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바닥에 안착하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안쓰러워 보인다.

고명과 여적산은 놀란 표정으로 아운을 바라볼 뿐이었다. 윤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너는 누구냐?”“나는 하영운이라고 한다.”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윤정과 남궁소운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는다. 상대는 무명이다.

“네 놈은 지금 죽을 것이다.”

윤정의 목소리엔 소름 돋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너 말이 많군. 원래 정파란 작자들은 싸우기 전에 우선 입으로 한 몫 하는가?”

윤정은 한 발씩 아운에게 다가왔고, 남궁소운은 천천히 남궁청에게 다가가려 했다. 불쌍하게도 삼절서생 이자명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앙!”

하는 소리와 함께 윤정이 검을 뽑아 들었고, 그와 동시에 그의 검에서는 눈부신 검기가 매화 꽃 형상을 지니면서 아운의 미간과 명치, 그리고 목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화산의 성명절기인 이십사 수 매화검법 중 매화낙수의 초식이 펼쳐진 것이다. 원 이십사 수 매화검은 모두 삼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전 십이 초식은 화산파의 제자들이라면 누구나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중 구 식은 최소 문파의 장로급 이상이나 직전 제자들만이 배울 수 있는 절기로 보통 강호무림에서 말하는 매화검법의 정수란 바로 이 중 구 식을 통칭해서 하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후 삼 식은 화산파의 장문인이나 차기 장문인, 그리고 화산파에서 인정한 최고의 기재들만이 배울 수 있는 무공이었다. 매화낙수는 중구식 중에서도 상승의 절기였다. 이미 아운의 무공이 보통 이상이란 것을 안 윤정이 처음부터 강한 무공으로 공격을 가한 것이다. 원래 매화낙수가 제 위력을 지니려면 허공에서 몸을 띄운 다음 아래를 향해 공격을 가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검기로 형상이 만들어진 매화가 낙수처럼 떨어지며 상대를 공격하는데 그 아름다움과는 달리 스치기만 해도 사람이 상하는 살수였다. 그것을 윤정은 선 채로 펼쳤다. 그러자 매화송이들은 마치 물결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아운의 삼대사혈을 노리고 밀려든 것이다.

수십여 개의 매화가 흘러오며 공격해오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운은 그 안에 숨어 있는 살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아운은 굳이 피하지도 않았고, 피할 이유도 없었다. 그의 주먹이 연환금강룡 중 금강붕의 초식으로 질러 나갔다. 순간 그의 주먹에서 나간 강기가 그대로 매화검기를 부수고 앞으로 뻗어 나간다. 그토록 날카로워 보이던 매화검기들이 마치 떨어지다가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튕겨 나갔다. 그리고도 힘을 잃지 않은 금강붕의 힘은 그대로 윤정을 향해 밀려갔다. 상상하지도 못한 위력 앞에서 윤정은 순간적으로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파를 상징하는 절대 기재 중 한 명이었다. 그의 검이 갈지자로 돌아가며 아운의 권경을 차단하려 했다. ‘퍽’하는 소리가 들리며 윤정의 신형이 뒤로 주르륵 밀려갔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겨우 참고 선 윤정은 무식할 만큼 강한 아운의 주먹을 본다.

남궁청을 향해 걸어가던 남궁소운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그의 시선 역시 아운의 주먹에 머물렀다. 그저 평범한 주먹. 그러나 남궁소운은 그 순간 머리를 관통하는 어떤 힘을 느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은 근래에 강호를 폭풍 속으로 몰고 간, 한 명의 절대 고수에 대한 전설이었다.

“권왕 아운.”

남궁소운은 혹시나 해서 한 말이었지만 그 말 한 마디의 충격은 폐찰 안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어 놓았다. 고명과 여적산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아운을 보았고, 윤정은 질린 표정으로 아운을 본다. 그래도 설마 하는 눈빛이었다. 비록 아운에 대한 전설은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그것을 모두 그대로 믿지 않았던 윤정이었고, 강호에 나가면 반드시 한 번은 겨루어 보고 싶었던 인물이 바로 권왕 아운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겪어보거나 눈으로 본 일이 아니면 좀처럼 남의 말을 믿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윤정처럼 자존심이 강한 인물들의 경우 더더욱 그런 부분이 심할 수 있었다. 윤정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아운을 보면서 물었다.

“정말 네가 권왕 아운이냐?”

아운은 윤정을 쏘아보며 말했다.

“네 놈은 버릇이 없구나. 최소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사람을 대하는 예의부터 제대로 배워야 할 것이다.”

아운의 말에 윤정의 표정이 모욕감으로 붉게 물이 들었다. 사실 무림에서 위치를 보았을 때, 윤정은 감히 권왕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설혹 그게 아니라도 아직 친분이 없는 아운에게 사용한 말투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비로고 자신이 실수한 것은 알았지만, 윤정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은 명가의 자손이었고, 아운은 그 뿌리조차 알 수 없는 존재로 애초부터 신분이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운이 좋아 어설픈 명성을 이은 파락호에 불과한 자. 이것이 윤정이 생각하는 아운이었다. 그런 아운에게 훈계를 듣자,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한 놈이 감히 내게 훈계를 하려 드느냐?”

아운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윤정을 바라보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헤아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네 놈을 보니 화산이 후예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능히 짐작이 가는구나. 내가 대신 네 놈의 버릇을 고쳐 놓겠다.”

젼혀 흥분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차분하게 말하는 아운의 말투엔 자신감이 베어 나왔다. 단순히 치기어린 자신감이 아니었다. 윤정이나 남궁소운은 그것을 느끼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다시 한 번 권왕에 대한 무수한 소문들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윤정이나 남궁소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윤정은 아운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고 마음을 안정시키려 했다. 겁을 먹게 되면 사람은 조급해지고 허둥거리게 마련이었다. 윤정은 자신이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감추려는 듯

들고 있던 검으로 아운을 가리키며 고하을 지렀다.

“화산을 모욕한 대가를 치루어라!”

그의 검이 매화산영의 초식으로 아운을 찔러왔다. 열여섯 개의 매화가 윤정의 검 끝에서 생성되더니 한꺼번에 아운의 얼굴을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잎이 바람에 날려 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을 가르고 공격해 오는 암기 같기도 했다. 매화산영이 최절정에 달하면 모두 스물네 개의 매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윤정의 지금 경지를 내려 보아서는 안 된다. 현 화산에서 지금 윤정의 나이에 열여섯 개의 검활르 만들어 내었던 고수는 단 한 명 뿐이었다. 그만큼 윤정이 실력은 능히 인정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실력도 상대적인 것이다. 열여섯 개의 매화가 아름답고 날카로웠지만, 아운은 그 검화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주먹을 들어 내질렀다. 아주 단순한 동작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도 단순하진 않았다. 아운의 주먹에서 무서운 힘이 뿜어지면서 날아오던 검화들이 전부 튕겨져 날아갔다. 그러나 그 힘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검화를 한꺼번에 날려버린 힘은 그대로 윤정을 향해 날아왔다. 연격포의 전육식인 연환육영뢰의 일기영이었다. 윤정은 자신의 검화가 너무 무력하게 튕겨지자 당황했다. 그러나 아운의 공격은 그가 다른 생각할 틈마저 주지 않고 그대로 밀고 들어온다. 아운은 방어와 공격을 단 한 주먹으로 해 버린 것이다. 윤정의 검이 기묘하게 호선을 그리면서 아운이 일기영으로 쳐낸 권경을 비켜내려 했다. 그러나 일기영의 힘은 윤정이 생각한 것보다 더욱 무섭고 빨랐다. 일기영의 권경은 오히려 윤정의 검날을 비켜 내면서 밀고 들어왔다. ‘퍽’하는 소리가 들리며 윤정은 뒤로 세 발자국이나 물러서고 난 다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으윽!”

어깨뼈가 부서져 나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뜨거운 피가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컥’하는 소리와 함께 윤정은 피를 토하고 말았다. 화산파 최고의 후기지수라는 윤정이 단 일 권에 주저앉은 것이다. 모두 놀라서 아운을 본다.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강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놀라는 것은 아직 빠른 판단이었다. 윤정이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아운의 신형이 번개처럼 날아오면서 발로 그의 턱을 올려 차 버렸다. ‘퍽’하는 소리가 들리며 윤정의 몸이 하늘로 일장이나 떠올랐다가 땅바닥에 쳐박혔다.

남궁소운은 기겁을 해서 도우려고 했다. 그때 아운이 남궁소운을 향해 돌아섰고, 그의 몸에서 무서운 기세가 남궁소운에게 밀려왔다. 검을 뽑으려고 하던 남궁소운의 동작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 스스로 멈춘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다른 동작을 취할 수가 없었다. 아운의 기세가 남궁소운의 정신과 육첼르 완전히 제압한 것이다. 남궁소운으느 감히 검을 뽑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검을 뽑으면 죽는다.’

남궁소운은 그렇게 느꼈다. 아운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세가 그에게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아운이 남궁소운을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그 말과 함께 남궁소운을 옥죄었던 기운이 사라지면서 남궁소운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운은 땅바닥에 쳐 박혀서 허우적거리는 윤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발로 사정없이 걷어차기 시작했다. 한데 그 차는 방법이 기가 막혀 급소만 차면서도 이상이나 내상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윤정이 느끼는 고통과 수치심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매 앞에서 견디는 인간 없다고 시간이 지날수록 수치심보다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정신이 경직되어 가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고명과 여적산 그리고 남궁소운은 기가 질려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비가 그친 후로도 무려 이틀이나 모든 사람들은 폐찰에 남아 있어야 했다. 아운이 그들의 이동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틀간 윤정이나 남궁청이 얼마나 지독하게 아운에게 당했는지 고명과 여적산마저도 나중엔 두 사람이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제야 그들은 깨우쳤다. 아운에 대한 소문에 조금도 과장이 없다는 사실을…….

하남성을 향해 가는 대로를 걸어가는 일행이 있었다. 바로 아운과 고명, 그리고 여적산을 비롯해서 남궁소운과 윤저어 일행이었다. 윤정은 삼절서생을 어깨에 메고 있었으며, 가녀린 남궁청은 나머지 일행의 짐을 잔뜩 짊어지고 있었다. 남궁소운은 일행의 맨 뒤에서 터벅거리면서 쫓아오고 있었는데, 불과 얼마 전에 비해서 부쩍 늙어 보였다. 윤정이나 남궁청은 감히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아운이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따르고 있었다. 남궁청은 걸으면서도 계속해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부러진 이빨 사이로 말이 새어 나왔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러나 남궁소운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남궁소운은 남궁청의 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만큼 들은 그로서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귀하게만 자란 남궁청이나 윤정이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개를 건드려도 개의 주인을 보고 건드리란 말이 있었다. 그만큼 인간은 사람을 대하는데, 그 사람의 신분이나 배경을 안 볼 수가 없게 마련이었다. 그것은 제 아무리 대단한 신분을 지녔거나 무공이 강한 무사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람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마련이었다. 설혹 화산이나 남궁세가보다 그 힘이 정말 대단한 단체의 수장이라고 해도 이 두 개의 무파라면 서로 원한 관계를 지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즉 그 배경을 보고 조금이라도 양보하는 면이 있어야 정상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우연히 만나서 시비가 붙었을 땐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상대가 어떤 단체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일 경우엔 그런 면이 더욱 심하기 마련이었다.

헌데 아운은 거침이 없었다. 윤정이 화산파의 장로 신분이라거나 남궁청이 남궁세가의 여식이란 사실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뒷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두 사람을 다루었던 것이다. 윤정이나 남궁청은 물론이고, 남궁소운마저 그런 아운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가 되고 말았다. 다행이라면 남궁소운의 나이가 있어서인가? 남궁소운은 두 사람을 다루는데 참견

만 못하게 했을 뿐이었다.

남궁소운으로서는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하게 깨우쳐야 했다. 아운의 기세에 눌려 그저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실력으로 아운에게 덤벼 보아야 한 주먹감도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명문의 특혜를 누려왔던 윤정이나 남궁청은 아운 앞에서 철저하게 무너졌다. 조금이라도 대꾸를 하거나 반항하는 것을 아운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무자비한 폭력은 남궁청이 여자라고 봐주지 않았고, 윤정의 고귀한 신분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처음에는 꿈틀거리며 대항하려 했던 윤정과 남궁청은 아운이 눈치만 줘도 알아서 기기 시작했는데, 그 시간은 불과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고명과 여적산은 길을 걸으면서 슬쩍 아운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당장의 기분에만 충실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 같기도 했다. 윤정이나 남궁청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 그들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무림맹을 향해 태연하게 걷고 있는 아운의 모습은 한가로워 보였다.

고명이나 여적산은 통쾌하기도 하고 아운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조금씩 당사자인 아운의 태평함에 전염되어 가고 있었다. 아운과 함께 있으면 무엇인가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남궁소운은 아운이 가는 길이 무림맹쪽을 향하자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다. 두 사람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 가는 곳이 무림맹이라면 이건 정말 미친 짓이다. 정말 무림맹으로 가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지만 묻지 못하고 가슴만 태울 때였다. 아운의 뒤를 따르던 고명이 물었다.

“권왕께서는 정말 무림맹으로 가시는 것입니까?”

신분을 알고도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운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공대를 하는 것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두 사람에게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당연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남궁소운이나 윤정, 그리고 남궁청의 표정은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지금 무림맹으로 가면 위험합니다.’

하고 말하려 했던 고명은 그 말이 아운을 무시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말을 바꿨다.

“무슨 일로 가시는 것입니까?”“약혼녀를 찾아 갑니다.”“약혼녀?”

고명과 여적산은 물론이고 모든 시선이 아운을 향했다. 아운은 그저 웃으면서 앞으로 걷는다. 북궁연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기가 싫었다. 그녀의 이름이 가볍게 오르내리는 것도 싫었고, 여러 사람들에게 지나친 놀라움을 주는 것도 싫었던 것이다.

권왕 아운의 약혼녀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고명이나 여적산은 함부로 물어 볼 수가 없었다. 특히 여적산의 여동생인 여운령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거의 있는 듯, 없는 듯 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운의 표정은 더 이상 물어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지였기에 아무도 물어보지 못했다. 이렇게 일행은 무림맹을 향해 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윤정과 남궁청은 죽을 지경이었다. 혹시 길 가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몰골이 하도 정상이 아니라서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실로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태원을 거쳐 무림맹이 있는 태실봉 근처에 도달했다. 막상 무림맹 근처에 도착하고 나자, 고명이나 여적산, 그리고 여운령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선 정말 윤정이나 남궁청을 저 상태로 무림맹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냐 하는 점이었다. 정말 그랬다가는 무림맹이 뒤집어 질 것이 뻔했다. 뿐만 아니라 무림맹에 도착하자마자 권왕은 그들과 원한을 지게 되고 무림 공적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아운은 태평천하였다. 그런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고명이나 여적산은 말하고 싶어도 아운의 분위기에 말려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남궁소운이나 남궁청, 그리고 윤정도 마찬가지였다. 아운의 기세로 보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 상태로 무림맹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들어온 권왕이라면 정말 그러고도 남을 거란 생각을 하니,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남궁소운은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운에게 다가와 말했다.

“대협, 이제 저들도 잘못에 대한 벌은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만 용서해 주심이 어떻습니까?”

아운은 묵묵히 남궁소운을 바라보았다. 공손한 태도로 말하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궁연을 보러 와서 말썽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죄 없이 욕 보셨습니다. 이제 모두 데리고 돌아가십시오.”

아운이 순순하게 말하자, 남궁소운은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궁청은 그 호의를 달리 받아 들였다.

‘흥, 안 그런 척 하면서 겁을 먹었군. 개자식. 그러나 너무나 늦었다. 내가 무림맹에 들어가면 두고 보자.’

이를 바드득 갈아 붙인다. 남궁소운은 아운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궁청과 윤정을 데리고 사라졌다. 고명 일행도 아운에게 다가와 포권지례를 하고 말했다.

“만나서 영광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 근처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기에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아운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오. 단, 내가 무림맹에 왔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기를 바라오.”

아운의 말에 고명과 여적산 일행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서 여적산 남매와 고명은 총총히 사라져 갔다. 아운은 그 뒷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날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지만, 아운의 시선은 무림맹을 향해 있었다. 예의상 밤에 찾아가는 것은 옳지 않았고, 해가 저물면 손님을 안으로 들이지 않는 무림맹의 불문율이 있었짐나, 아운은 거리끼지 않고 무림맹을 향했다.

해가 져서 어둑해질 무렵 하나의 그리자가 무림맹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무림맹의 선위 무사들은 사람이 다가오자 바싹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 시간에 무림맹 앞을 얼쩡거릴 인간이라면 무림맹의 고수들 외엔 없었다. 일반 제자들이 이 시간에 혼자 터덜거리고 올 일도 없을 것이고, 손님이라면 의당 무림맹의 규칙을 알 테니 다음날 아침에 올 것이다. 손님 중에 지금 이 시간에 당당하게 무림맹의 문을 노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구파일방의 장로급은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선위 무사들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장인 육삼은 더욱 긴장한 눈으로 나타난 그림자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림자의 인물이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오자 그만 맥이 빠지고 말았다. 나타난 인물은 일단 무림맹의 고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명문파의 장로급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제 이십 대 중반의 명문파 장로급이라면 몇 되지도 않거니와 그가 이미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씨발, 대체 뭐하는 종자야?”

자신도 모르게 욕이 나가고 말았다. 괜히 긴장했다는 자괴감과 맥이 빠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한 말이었다. 육삼이 어떻게 말을 하든 말든 관심도 없고, 고민도 없는 아운은 터덜거리고 걸어와 무림맹의 거대한 대문 앞에 섰다. 육삼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아운을 노려본다.

‘이거 뭐하는 떨거지야?’

이런 표정이었다.

“여기 무림맹 맞소?”

육삼은 새끼손가락으로 코 구명을 후비면서 대답했다.

“맞지.”

아운이 육삼을 보고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무림맹의 문지기는 손님에게 그렇게 하대를 하나?”

아운의 말에 육삼의 얼굴이 험하게 변했다.

“이런 빌어먹을 당나귀 같은 놈이 있나? 여긴 애들이 함부로 오는 곳이 아니다. 그러니 어여 꺼져라!”

그렇지 않아도 요즘 심기가 많이 불편한 육삼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아운마저 긁고 나오자 울화가 치밀고 말았던 것이다. 육삼의 말을 듣고 아운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봐. 자네는 문지기 아닌가? 그런데 손님을 그런 식으로 대하라고 자네 상관이 가르치던가?”

순간 육삼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놈, 내가 욕을 했으니 내가 뭐라 하는 것은 용서를 하겠다. 하지만, 내 윗분을 함부로 말하지 마라! 비록 지금은 움츠리고 계시지만 능히 영웅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시다.”“호…….”

아운은 감탄한 표정으로 육삼을 바라보았다. 생기긴 무식한 곰처럼 생겼지만, 상관에 대한 충심을 제법 되어 보였다.

‘흠, 충후한 자로군.’

아운은 육삼이 거칠지만 충후하고 제법 반듯한 기질을 지닌 무인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자네의 상관이 누군가?”“내게 네 놈에게 그것마저 보고를 해야 하나?”

아운의 표정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 육삼이란 문지기 조장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조장의 상관이 누구인지도 궁금했다. 문지기들의 상관이라고 해봐야 무림맹에서는 할 일은 많아도 별로 높은 지위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수하들에게 저 정도의 충성을 받는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 이름이 뭔가?”“육삼이다.”“그렇군. 그럼 말일세. 안에 북궁연이란 여자가 있지.”“미친놈, 북궁연은 왜 차……부……북궁연…… 대총사님인 북궁연 아가씨 말이냐?”

말을 하던 육삼의 눈이 왕방울 만해졌다.

“북궁연이 둘인가? 둘이 아니라면 맞을 것이다.”

육삼의 얼굴이 굳어졌다.

“너……너는 어떤 사이십니까?”

말을 하다 보니 하대하기가 꺼림칙해진다. 아운은 피식 웃으면서 서신 한 장을 내 놓았다.

“가서 전해라! 그리고 내일 오전 중으로 온다고 하면 알 것이다.”

육삼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아운을 바라보았다. 그냥 넘기기엔 북궁연이란 이름값이 너무 컸다. 요즘 북궁세가가 여러 가지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고 하지만, 천하에서 절대쌍가라 불리는 두 개의 가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북궁연이라면 육삼에게는 또 다른 면에서 중요한 이름이었다.

무림맹의 선위 무사들은 모두 금강선위대 소속이고, 현 금강선위대의 대주는 북궁연의 동생인 북궁명이었다. 그의 실력이나 신분으로 보아 결코 선위무사들의 대주인 금강선위대주에서 머물 인물을 아니었지만, 지금 북궁세가가 세력 다툼에서 계속 밀려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무림맹에서 육삼이 충성을 맹세한 인물이 바로 북궁명이었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주군이었다. 그런 상황이고 보니 북궁명의 누나인 북궁연이란 이름을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잘 전해 줄 것이라 믿고, 자네에게 한 가지만 묻고 싶은데, 대답해 줄 수 있나?”

육삼은 이상할 정도로 당당한 아운을 보면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친놈이 아닌 다음에야 북궁연의 이름을 이렇게 함부로 팔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본 눈앞의 청년은 광오하긴 해도 미치진 않은 것 같았다. 일단 북궁연의 중요한 손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청년이 북궁연에게 중요한 손님일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육삼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한 대의 마차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왔다. 모두 네 마리의 설리총이 끌고 있는 마차는 마차 전체가 구하기 힘든 자단목으로 만들어져서, 누가 보아도 대단한 신분의 인물이 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만한 마차였다. 육삼을 비롯한 선위무사들은 모두 마차로 시선이 모아졌다. 아운 역시 이 호화로운 마차로 시선을 준다. 마

차는 무림맹의 문 앞에 와서 멈췄다. 마부 석에는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노인은 아주 오만한 표정으로 육삼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문을 열어라!”

육삼의 눈이 찌푸려졌다. 자연히 말도 퉁명스러워진다.

“누구인지 신분을 확실히 밝히시오. 그리고 여기는 무림맹이오. 제대로 절차를 밟고 출입해 주시기 바라오.”

육삼의 말을 들은 노인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당장이라도 육삼을 쳐 죽일 기세였다. 몹시 화가 난 표정이다. 육삼은 이미 노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얼굴에 식음땀을 흘리면서도 꿋꿋하게 서서 노인을 바라보았다.

“네놈은 이 마차를 보고도 마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모른단 말이냐? 설마 너는 나를 초면이라고 말하고 싶은 게냐?”“내가 마차 안을 보지 못했는데, 누가 탔는지 그것을 어찌 알겠소. 그리고 노인장하고 내가 구면이든 초면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오.”

노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네 놈이 북궁명의 수하가 되더니 간덩이도 배 밖으로 나왔구나. 이제 기울어지는 가문에 기대어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노인의 입에서 북궁가란 말이 나오자, 아운은 더욱 흥미로운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제야 육삼이 말한 윗사람이 북궁명이란 사실도 알았다. 물론 아운은 이 북궁명이란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처남이 아니던가.

‘북궁세가의 장남이 겨우 선위대의 대주란 말인가? 북궁가가 그렇게 까지 밀리고 있단 말이지.’

아운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지금 북궁세가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노인의 말에 육삼이 대답했다.

“당신이 어떤 협박을 해도, 최소한 나는 자신이 섬기던 주군에게 등을 돌리는 짓은 하지 않소.”“뭐라고? 네 놈은 지금 나에게 그 말을 한 소리냐?”“나는 누구라고 지칭한 적이 없소. 그런데 그 말에 민감한 것을 보니 찔리는 곳이 있는 모양이오?”

육삼이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말하자, 노인의 얼굴은 더욱 험악하게 변했다.

“이 놈, 내가 오늘 네 놈을 그냥 두면 철면귀랑이란 아호를 버리겠다.”

아운은 노인의 아호가 철면귀랑이라고 하자 마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 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철면귀랑은 비록 사파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손속이 잔혹하기로 이름 높은 자였다. 그는 천하 사패 중 하나인 산동 패도문의 문하로, 패도문의 대공자인 노자춘의 심복으로도 유명했다. 강호를 떨어 울리는 문파들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중추를 꼽으라면 구파일방, 그리고 오대세가를 비롯한 전통의 명문 정파와 절대쌍가로 지칭되는 북궁세가와 호연세가 그리고 천하를 네 곳으로 나누어 그 세력이 가장 막강한 강호사패를 등을 들 수 있었다. 그 외에 수많은 문파들이 있지만 위에서 열거한 이십여 개의 문파와 삼대 검파 중 하나인 남해 청조각이나 섬서 쾌도문이 포함된 일각, 이문, 이보, 일곡, 일맹 등이 정파 무림의 중추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정파라고 지칭하는 것은 모두 자신들 스스로였다. 그 이유로는 그들이 전부 무림맹 소속이라는 점이었다.

노인의 정체를 안 순간 아운은 다시 한 번 육삼을 보았다. 육삼은 이미 상대가 철면귀랑임을 알아보았고, 마차의 주인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대꾸하는 것을 보면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육삼의 베짱이었다. 아운은 한 눈에 육삼이 철면귀랑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굳이 실력이 아니라도 신분상으로도 그렇다. 일개 문지기와 사패의 정예고수인 철면귀랑과의 신분 차이는 굉장히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육삼도 그것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육삼은 기가 죽지 않고 대항하는 베짱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육삼은 철면귀랑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다.

“그냥 두지 않으면 어쩔 셈이오. 내 비록 문지기의 조장에 불과하지만 말도 하지 못한단 말이오?”

철면귀랑이 이를 부드득 갈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였다.

“그만 두어라!”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준수한 외모의 귀공자와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신 미모의 여자 한 명이었다. 아운은 귀공자가 노자춘임을 알아보았다. 철면귀랑은 노자춘의 명령에 얼굴을 붉히고 얼른 마부석에서 내려와 노자춘의 옆에 공손하게 시립한다. 노자춘은 그런 철면귀랑을 한 번 힐끗 쳐다 본 다음 육삼을 보고 말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야 하니 문을 열어주게.”

노자춘의 말에 육삼이 고개를 흔들었다.

“무림맹의 대문은 술시부터는 함부로 열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공자님께서는 장로원이나 당주급 이상의 직인이 없다면 돌아가 주십시오.”

육삼이 냉정하게 거절하자, 노자춘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갔다.

“네 놈이 내 신분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느냐? 급한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나는 그것이 뭔지 알지 못하고, 어떤 보고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고 공자님은 누구의 직인도 가지고 있지 못하니 규칙상 문을 열어 줄 수가 없습니다.”“내가 알기로 조장이 임의로 신분이 확실하다면 문을 열 수가 있다고 했다. 네 놈은 나의 신분을 의심하는 것이냐?”

그 말에 육삼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는 문을 열기 싫습니다. 그러니 돌아가 주십시오.”

노자춘의 얼굴이 노화로 떨린다.

“네 놈이 정말 나중을 생각하지 않는구나. 네 놈의 상관이 북궁명 그 덜떨어진 자식이지. 아무래도 네가 북궁세가를 믿고 방자한 모양이구나. 그러나 이미 기울어가는 가문, 네 놈도 북궁세가와 함께 죽을 수 있다.”

완전한 협박이었다. 그러나 그 협박은 오히려 육삼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리고 말았다.

“나는 엄연히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오. 당신이 나중에 나를 어떻게 대하던 그것은 당신의 문제지만, 지금 나는 규칙대로 할 뿐이오.”

육삼은 조금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이제는 공대에서 반공대로 말투도 바뀐다. 노자춘은 한 동안 육삼을 노려보다가 조용히 마차로 오르면서 말했다.

“돌아가자. 내일 아침에 무림맹으로 들어간다.”

철면귀랑이 살기 어린 눈으로 육삼을 노려보고 마부석에 올랐다. 마차가 사라지고 나자 육삼이 들고 있던 장창을 바닥에 던지면서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쥐새끼 같은 놈, 산동성에서 북궁노사의 도움으로 성공했으면서 이제 와서 등을 돌리고 호연가의 계집애 가랑이 밑으로 들어간 주제에 감히 나를 협박해. 호로새끼 같으니라고, 나는 적어도 그런 배신은 하지 않는다.”

육삼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리자. 지금까지 굳은 표정으로 눈치만 보던 다른 선위 무사들이 다가와 그를 위로하였다.

“조장님, 화 푸십시오. 언제고 그들은 벌을 받을 겁니다.”

한 명의 선위 무사가 육삼을 달랜다. 육삼이 차츰 화를 풀어갈 때 아운이 다시 그에게 다가왔다.

“이제 일이 끝난 모양이군.”

육삼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아운을 보며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소. 서신은 내가 꼭 전해주리다. 그리고 전하라는 말도 꼭 전하겠소. 그런데 북궁연 총사님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요?”“그거야 내일이면 알 테고,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아운의 말투가 조금 바뀌었다. 육삼이 의아한 눈으로 아운을 보았다.

“저 자가 노자춘이란 자 맞지 않소?”

육삼이 내뱉듯이 말했다.

“맞소.”“듣자하니, 저 자가 북궁세가를 배신한 모양이던데, 어찌된 일이오?”

육삼이 다시 화가 난 듯이 말했다.

“배신뿐이오? 저 놈의 가문은 북궁노사의 도움으로 컸으면서도, 지금은 등을 돌리고 북궁세가에 나쁜 짓은 도맡아 하는 놈이요. 북궁명 대주님과는 견원지간이라고 할 수 있죠. 저 놈은 배신자 주제에 북궁연 낭자에게 가장 질척거리는 자식 중 한 명이라오. 오늘 무림맹에 들어가려 하는 것도 북궁연 낭자를 만나러 왔을 것이오. 개자식, 배신자 주제에 누굴 넘봐!”

육삼이 화가 나서 욕지거리를 해 댔다. 아운의 눈이 스산하게 변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육삼을 보고 말했다.

“자네 지금 당장 들어가서 북궁연 낭자에게 전하게. 지금 낭군이 무림맹 문 앞에 와서 기다린다고…….”

아운의 말에 육삼은 눈이 튀어 나올 정도로 놀라서 아운을 바라보았다. 육삼이 그럴진대 다른 선위 무사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 육삼은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 번 아운을 바라보았다. 북궁연 낭자의 낭군이라고 했다. 너무 생각외의 말이라 육삼과 선위 무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아운을 보고 눈만 멀뚱거린다. 북궁연의 낭군이란 그 한 마디가 주는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컸던 것이다. 아운은 태연한 표정으로 육삼을 보고 있었다.

“다…다시 한 번만 말해 보시오. 지금 뭐라고 했소?”

아운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같은 소리를 반복해야 하는 상황에 조금 짜증이 치밀었다. 성질대로 다 때려뉘고 문짝까지 부순 다음 그냥 들어가고 싶었지만, 북궁연의 체면을 보아 참기로 했다.

“북궁연 소저에게 가서 전해라! 낭군님이 문 밖에 와서 기다린다고…….”“나……낭군.”

이번엔 확실히 들었다. 선위 무사들은 모두 당황한 표정으로 아운을 보았고, 육삼은 고개를 흔들고 생각해 보았다. 상대는 대총사 북궁연 낭자의 낭군이란다. 선뜻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북궁연이 누구인가? 그녀가 지닌 무공의 깊이나 지위는 둘째 치더라도 무림맹은 물론이고, 무림의 남자라면 애 어른 할 거 없이 연정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상징적인 여자였다. 만인의 연인. 그 한 마디가 딱 어울리는 여자였다. 오죽했으면 무림맹으로 모이는 청년 무사들은 무림맹에서의 출세가 목적이 아니라 북매가 목적이라는 말까지 나돌겠는가? 그리고 그 말은 실제 틀린 말도 아니었다. 호연세가와 장로원이 북궁세가를 그렇게 몰아붙이면서도 마지막 결정타를 먹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검왕 북궁손우와 북궁연 때문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특히 젊은 청년 고수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북궁연 때문에 대 놓고 그녀를 총사의 자리에서 밀어 내지 못했다. 육삼만 하더라도 북궁연은 꿈의 여자였다. 그런데 지금 그런 여자의 낭군이라고 스스로 지칭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육삼은 아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평범했다. 그저 조금 잘 생긴 중키의 청년일 뿐이었다. 무공을 익힌 흔적도 없고 그렇다고 뛰어난 문사로 보이지도 않았다.

‘설마 미친 놈?’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너무 멀쩡하게 생겼고,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무림맹에 와서 헛소리를 하고 저렇게 태연하진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북궁연에게 낭군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비록 무림맹의 이룡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만, 둘다 아직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것은 무림맹의 고수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육삼은 망설였지만, 그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육삼은 그 말을 남기고 뛰기 시작했다. 먼저 북궁명에게 보고하고 싶었지만, 오늘밤엔 북궁명이 없었다.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금강선위대의 부대주인 소혼검 육자명이었다. 육자명은 절강성 육가장 출신으로 그의 소혼검법은 상당히 유명한 편이었다. 나이 이십육세인 육자명은 실제 나이에서 북궁명보다 훨씬 위였다. 실력 또한 대단했지만, 그에게는 가문이나 연줄이 없었다. 결국 금강선위대의 부대주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도 북궁명이 아니었으면 무림맹의 평범한 무사로 남아 있을 뻔했었다. 육자명은 육삼에게 있어선 또 다른 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육자명이 육삼의 사촌형이었던 것이다. 육삼은 일단 육자명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른 체격에 약간 키가 큰 편인 육자명은 육삼이 뛰어오자, 얼굴을 찌푸렸다.

“뭐가 그리 급한가?”“형님, 아니 부대주님. 지금 밖에 총사님의 낭군이란 분이 와 계십니다. 이거 믿을 수도 없고, 그냥 넘길 수도 없고…….”

육삼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육삼의 말을 듣던 육자명의 신형이 총사가 있는 내원으로 달리고 있었다. 육자명은 북궁명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의 누이인 북궁연에게 약혼자가 있고, 어쩌면 조만간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무공을 모르는 문사 출신이니, 혹여 자신이 부재중일 대 온다면 소홀히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받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북궁명은 누나의 약혼자가 하영운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 하영운이 권왕 아운일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북궁연과 소홀이 아직은 때가 아니다 싶어서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 내원에 위치한 거대한 누각이 하나 있었다. 누각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누각의 양 옆으로는 모두 세 개의 작은 누각이 있었고, 뒤로는 대나무 숲이 있었으며, 아담한 인공 연못이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담 주위로는 수많은 꽃들이 돌아가며 피어 있었고, 누각 옆으로는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언뜻 보아도 운치 있는 이 누각이 바로 대총사 북궁연의 거처인 매화각이었다. 이곳에서 북궁연은 집무도 보고 잠도 잔다. 작은 세 개의 각 중 하나는 소홀과 시녀들이 거처하였고, 두 개의 누각은 북궁연을 호위하는 여자 호위 무사들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매화각 본청의 창밖으로 어두워지는 하늘이 가득 들어오자, 북궁연은 심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내가 왜 이러지?’

평소 같지 않게 마음이 심난하자 북궁연은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쓴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련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도 가물거리는 자신의 어린 낭군이었다.

‘뭘 하고 계실까? 광풍사와의 결투에서 큰 부상을 당하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다 나으셨을까?’

북궁연은 아운에 대한 걱정 때문에 몇 개월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창밖을 스쳐가는 바람이 그녀의 허한 마음을 더욱 외롭게 만드러 주었다.

‘무심한 분, 이젠 나를 찾아오실 때도 되었는데…….’

이제 삼십이란 나이가 꽉 차고 있었다. 아무리 일반인들에 비해 결혼이 늦은 무림이라지만 노처녀란 말을 듣기엔 충분한 나이였다. 비록 겉모습이야 무공으로 인해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지만 들은 나이가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었다. 요즘은 아운이 준 비방대로 열심히 수련을 하는 중이기도 했다. 나중에 나이 들어서 남편보다 더 늙어 보인다는 말은 듣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그녀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 주진 못한다.

“휴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나가는 바람이야 무심도 하지만이제 떠 오는 달은 하늘에 걸려내 님이 오른 곳, 아련하게 비추네.밤을 새워 기다리는 마음정은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가?오는 님은 어디쯤인데연심을 벌써, 님의 품에 안겼네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내 혼이 그 안에서 홀로 울고 있어라.>

북궁연은 스스로 마음을 시로 표현하다가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시가 조금 진한 면이 있었다. 조숙하게 자라온 북궁연은 무심코 표현한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부끄러웠던 것이다.

‘참으로 사람의 그리움이란 무공을 익히는 것보다 백 배나 더 힘들구나.’

북궁연은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며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보았다. 검풍에 밀려서인가? 방안에 켜 놓은 십여 개의 촛불이 흔들거렸다. 마치 검이 주인의 심란한 마음을 아는 듯했다. 북궁연이 웃으면서 자신의 애검을 쓰다듬었다.

“네가 내 마음을 아는구나. 하지만 지금은 너의 예리함이 내 가슴을 베는 것 같다.”

그녀가 혼자 말을 하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아가씨.”

소홀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몹시 다급한 소리였다. 북궁연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녀가 아는 한 소홀은 대범하고 침착한 여자였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지금처럼 조급해 하지 않는다.

“들어오세요. 무슨 일이죠?”“아가씨, 제가 들어갈 게 아니라 나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북궁연은 더욱 궁금해졌다.

“무슨 일이기에?”“그 분이 오셨습니다.”“그 분?”

“하영운 공자님께서 지금 무림맹 정문 앞에 와 계시답니다.”

북궁연의 몸이 굳어졌다. 갑자기 호흡이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침착하려 애쓴다.

“그러니까 지금 소홀은…….”“맞습니다. 아가씨. 그 분이 지금 문 밖에 오셨답니다. 낭군이 와서 기다린다고 전하라 했답니다. 그 분 다운 말투였습니다.”

북우연은 잠시 심호흡을 하였다. 마음을 가라앉힌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침착하고 빠르게 말을 한 북궁연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는 쾌검처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고 띠를 두른다. 들고 있던 검은 감추고 얼굴에 살짝 분칠도 했다. 거울을 서너 번 보고서야 겨우 끝을 냈는데 그 걸리는 시간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그녀는 여자였다.

밖에서 기다리던 소홀은 북궁연이 늦어지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녀도 여자였기에 지금 북궁연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능히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운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소홀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잘못해서 누구와 시비라도 붙게 되면 무림맹 입성 첫날부터 북궁연의 입장이 곤란해 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궁지로 몰리고 있는 북궁세가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렇게 초조해 하는 그녀의 한 편에 또 다른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운이 그동안 눈꼴시게 만들었던 무림맹의 인물들과 시비가 붙어 시원하게 때려 눕히는 광경이었다. 나중은 나중이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가슴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소홀이 이렇게 이중의 갈등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북궁연이 문을 열고 나왔다. 소홀과 시녀들이 눈이 등잔만 해졌다. 평소 경장 차림만 하던 북궁연이 오랜만에 궁장 차림을 하고 나왔는데, 그 모습을 본 소홀과 시녀들은 넋을 잃은 것이다. 북궁연의 얼굴에 작은 홍조가 어렸다.

“괜찮은 가요?”

소홀은 북궁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름답습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아가씨.”“소홀, 너무 과찬하지 마세요. 그보다도 기다리고 계실 텐데, 빨리 가 보기로 해요.”“알겠습니다. 아가씨.”

두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나섰다. 시녀 두 명이 촌촌 걸음으로 그 뒤를 따른다.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 북궁연이 소홀을 보고 물었다.

“아까 그 분께서 뭐라고 하셨다 하셨죠?”

소홀은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낭군님이 와서 기다린다고 전하라 했다 합니다.”

북궁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 분 답군요.”“어디 가겠습니까? 그동안의 행적을 보면 그냥 들어와서 고함을 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호호…….”

북궁연이 짧게 웃었다. 마치 수십 개의 매화꽃이 활짝 피어나는 것 같았다. 실로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소홀은 그녀가 그렇게 밝게 웃는 모습을 근래에 본 적이 없었다.

‘아가씨, 부디 행복하세요.’

소홀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기원해 주었다. 이제 아운이 온다면 그녀에게 더없이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라 믿었다. 이미 권왕이란 명성만 해도 충분한 힘이었다. 매화각을 나서자 그곳에는 육자명이 서 있었다. 육자명은 북궁연과 소홀이 나타나자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육자명이 총사님께 인사드립니다.”

북궁연 대신 소홀이 먼저 나서며 말했다.

“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겠습니다. 어서 안내하세요.”

육자명은 정신이 없었다. 대총사인 북궁연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도 처음인 데다, 궁장 차림의 그녀 모습은 그의 혼을 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법 침착하게 인사를 하고 앞장을 서서 무림맹의 정문을 향해 출발했다.

아운은 뒷짐을 지고 하늘을 보고 있었으며, 선위 무사들은 모두 안절부절 못한 채 그를 보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지금 아운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판단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자명에게서 돌아온 육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연신 무림맹의 문 안을 보았다가 다시 아운을 보곤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 명의 선위 무사가 허겁지겁 달려 나오며 육삼에게 말했다.

“조장님, 지금 대총사께서 직접 이리로 오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들은 선위 무사들과 육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했던 일이 사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저 평범해 보이는 청년이 대총사

북궁연의 낭군이란 사실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믿을 수 없다기 보다는 믿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대총사께서 오셨습니다.”

한 명의 선위 무사가 다급하게 말하자, 육삼을 비롯한 선위 무사들은 일제히 도열을 한 채 대기 상태로 들어갔다. 이때 안으로부터 문이 열리며 네 명의 여자와 육자명이 나타났다. 선위 무사들과 육삼의 허리가 일제히 굽혀지며 우렁차게 구호를 외쳤다.

“조장 육삼 외 팔 명이 대총사를 뵙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의 인사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대신 소홀이 눈짓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북궁연의 시선은 처음부터 아운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아운을 알아본 것이다. 아주 어려서 본 그의 모습이 조금은 남아 있었기에 알아보기 쉬웠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아운에게 다가오자 아운 역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운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고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과연 할아버지가 여자 하나는 제대로 골랐구나.’

새삼 할아버지가 고마운 아운이었다. 아운은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북궁연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북궁연이 다가와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서야 뵙습니다.”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이제야 찾아온 아운에 대한 원망과 반가움, 그리고 그동안의 그리움이 한꺼번에 배어나온다. 육삼 등은 그래도 설마 했다가 북궁연이 먼저 인사를 하며 하는 말을 듣고는 모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육자명의 시선 역시 아운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모두 심하게 충격을 받은 표정들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무림맹은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무림의 꽃이라는 북궁연에게 임자가 생긴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임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고 나면 그 파장은 무림맹 전체가 뒤집어질 일이었다. 아운은 그녀의 한 마디에 어린 뜻을 알아듣고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참으로 많이 보고 싶었소.”

아운의 나직한 한 마디에 북궁연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그 한 마디에 모든 섭섭함을 다 잊고 말았던 것이다. 아운은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북궁연은 얼굴이 더욱 붉어졌지만 손을 빼지는 못했다. 아운은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씨익 웃으며 소홀을 돌아보았다.

“무림맹의 남자 자식들 중에 연 누이에게 찝적거린 놈들이 누구누구요?”

아운의 말에 부끄러워하던 북궁연이 놀라서 그를 보았다. 소홀 역시 그렇게 대놓고 그런 것을 물어 볼 줄은 몰랐기에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꽤 많은 편입니다.”“그럼 그 자식들 명단부터 작성해 주시오.”

소홀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혹시 그 사람들을 전부 혼내려고 하시는 것인가요?”

소홀의 말에 아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자식들은 눈이 제대로 박혔고, 여자 볼 줄 아는 녀석들이니, 나한테 잘못한 게 있어도 조금 봐 줄 생각으로 물은 겁니다.”

소홀의 입이 쩍 벌어졌다. 북궁연은 그만 킥하고 웃고 말았다. 세상에 여자를 이런 식으로 칭찬하는 사람도 있긴 있었다. 소홀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운을 보면서 생각했다. 참으로 권왕 아운이란 괴물에게 어울리는 칭찬이라고, 그녀는 갑자기 즐거워졌다. 그리고 내일이 그리워진다. 앞으로 아운으로 인해 벌어질 일들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아운의 한 마디로 인해 분위기는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처음 만나는 어색함이 사라지자, 북궁연은 아운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살며시 빼면서 말했다.

“이제 안으로 드시지요.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북궁연의 목소리엔 약간의 습기가 배어 나왔다. 격동을 참지 못하는 북궁연을 보면서 소홀도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아는 북궁연은 철의 여인이라 불리울 정도로 강한 여자였다. 자신의 감정을 쉽게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무수하게 많은 일들을 겪어오면서 그녀의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말소리에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지금 북궁연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과 아운의 앞에서 다소곳한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소홀은 생각했다.

‘그만큼 외로우셨던 것인가? 아니면 아운 공자에 대한 그리움이 생각보다 훨씬 컸었던가?’

그녀는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둘 다겠지.’

나름대로 단정을 내린 소홀은 조금 원망스런 시선으로 아운을 보았다.

‘좀 일찍 오셨으면 더욱 좋았을 것을…….’

북궁연 대신 그녀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운은 몹시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마침 연 누이의 거처가 몹시 보고 싶었었소. 어서 들어갑시다.”

아운의 너스레에 북궁연이 가볍게 웃으면서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아운이 따랐다. 그리고 아운의 뒤쪽으로 소홀과 두 시녀가 북궁연의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육자명을 비롯한 육삼과 선위 무사들은 모두 멍한 표정으로 아운과 북궁연 일행의 등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듯 인사하는 것조차 잊어 먹고 있었다. 무림맹 정문 안으로 그들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육자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얼른 육삼을 보고 명령을 내렸다.

“육삼.”

육삼이 화들짝 놀라 육자명을 보면서 황급하게 대답했다.

“예. 형님, 아니 부대주님!”“지금 당장 사람을 풀어서 대주님을 찾아라! 그리고 대주님이 어디 계신지 알게 되면 바로 나에게 알려라! 그리고 내가 말하기 전에 오늘 일을 먼저 대주님께 말하지 말도록……. 그리고 지금 일은 철저하게 비밀이다. 만약 지금 있었던 일이 조금이라도 소문이 나면 오늘 선위조는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충, 명대로 행하겠습니다.”“어차피 총사님과 부군께서 외성을 가로질러 내성으로 향하실 테니 다른 사람들이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저 분의 정체에 대해서 물어 올 것이다. 모두 입을 닫고 모른다고만 하여라.”“충.”

육삼과 그의 부하들이 힘차게 대답을 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육자명의 안색이 어두웠다.

‘아무리 비밀을 지키려 해도 내일이면 무림맹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운 공자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그전에 어떤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육자명은 자신이 존경하는 북궁명을 위해서도 북궁여의 낭군인 저 연약해 보이는 남자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궁연을 사랑하는 남자들 중엔 위험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육자명이 아는 그들이, 북궁연에게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것은 그로 인해 지금까지 북궁연의 눈치를 보느라 북궁세가를 노골적으로 적대시 하지 않았던 자들이 완전히 돌아설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내일은 시끄러울 것 같다.”

육자명이 혼자 말로 중얼거렸지만 육삼을 비롯해서 선위 무사들은 그 말을 모두 들었고, 그 의미 또한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육자명은 상황이 점점 어렵게 되자, 북궁세가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검왕 북궁손우가 생각났다. 북궁세가가 여러 가지로 곤경에 처해 있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육자명은 그 부분에 대해서 북궁명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당시 북궁명은 다시는 그 부분에 대해서 묻지 말라고 정색을 한 채 말했었다. 그 이후 육자명은 의문을 가슴속에 묻어 버렸었다.

북궁연과 아운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아운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거대한 무림맹의 건물들을 감상하고 있었으며, 약간 뒤에 서서 걸어오는 북궁연은 그런 아운을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무림맹은 모두 삼중 구조로 되어 있었고, 그 안에 포함된 큰 건물만 사백이십 채나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 만약 작은 건물들까지 전부 합하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무림맹을 둘러싼 거대한 성벽은 외성과 내성 그리고 소천성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중 소천성은 무림맹의 최고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 들어 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맹주 일가의 집도 그 안에 존재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삼중 구조라고 말하지만, 내성은 내성대로, 외성은 외성대로 다시 한 번 복잡하게 나누어져 있는 곳이 무림맹이었고 그 규모만 따져도 하남성 태원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무림맹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외성의 시작인데, 북궁연이 있는 내성까지 걸어서 도착하는 시간만 잡아도 거의 반시진 이상이나 걸렸다. 그리고 내성에서 다시 북궁연의 거처인 매화각까지 걸어가려면 이각이란 시간이 걸린다. 물론 이는 보통 사람들이 보통 걸음으로 걸었을 때 이야기였다. 만약 말이나 마차를 이용하거나 신법을 펼친다면 다를 것이다. 외성에서 내성으로 가는 길에만 해도 거대한 고루거각들이 즐비했고, 망루처럼 생긴 거대한 돌탑과 마차 서너 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는 큰 길이 두 개나 나 있었다. 하나는 마차와 말이 다닐 수 있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다니는 길이나 마차가 다니는 길은 다시 두 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는 내성의 인물들이 다니는 길과 보통 일반 무사들이 다니는 길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그것을 본 아운은 이미 눈치를 채고 코웃음을 쳤다.

‘여기서도 귀족들은 따로 놀려 하는군.’

이미 북경에서 권문세도가들의 행태를 너무나 많이 보아온 아운이었다. 무림맹 내에서도 그들이 하던 비슷한 형태의 길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인가 유치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아운은 그들을 비웃을지언정 우습게보지는 않았다. 힘 있고 유치한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무서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 특별한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서슴없이 다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여기나 저기나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 것인가? 하긴 그것도 좋겠지. 누를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혜택을 누려도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자가 몇이나 있을 런지…….’

아운의 생각이었다. 어둠속에서 고루거각들은 더욱 거대하고 웅장하게 보이기 마련이었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어지간한 사람이라도 주눅이 들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아운은 호기심 이외의 감정은 없어 보였다. 물론 북궁연이나 소홀은 아운이 이 정도에 기가 죽을 사람이 아니란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치 놀러온 것처럼 한가롭게 무림맹을 구경하면서 들어갈 줄은 생각지 못했다. 나름대로 아운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한 소홀이었다. 그녀가 아는 아운이라면 무림맹 내의 미묘한 흐름이라던가 북궁세가의 처지 그리고 지금 북궁연의 난처한 입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단 자신의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거나 몰래 북궁연을 만나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이는 아운이 적에게 겁을 먹거나 다른 사람들의 위협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최소한 시끄러운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아직도 아운의 성격에 대해서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한 소홀의 짐작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아운은 태평한 모습이었다. 북궁연과 소홀은 그것이 강자의 여유라고 생각했다. 권왕이라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소홀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어렸다. 그것은 아운을 비웃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분노의 대상들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그녀는 아운이 얼마나 매서운 인간인지 그래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들 그 동안은 참아왔다. 그러나 아운님이라면 조금 다를 것이다.’

그녀가 웃을 수 있는 이유였다.

무림맹 외성과 내성을 경계하는 거대한 성 하나가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내성으로 가는 정문이 있었으며, 그 정문에 무려 십여 명의 장정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외성을 지키는 선위 무사들과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아운 역시 이들 십여 명의 기도를 보고 상당히 놀랐다.

‘외성을 지키는 무사들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내성을 지키는 문지기들의 무공 수준이 이 정도일 줄이야, 과연 무림맹 답구나.’

아운이 놀라서 다시 볼 정도로 내성의 정문을 지키는 무사들의 모습은 당당했다.

“연 누이, 내성의 선위 무사들도 처남이 관리합니까?”

아운의 물음에 북궁연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외성을 지키는 선위 무사들은 금강선위대 소속이지만, 내성을 지키는 무사들은 내성수호대 소속이에요. 그리고 내성수호대는 비월령 소속이죠.”“비월령?”“호연세가의 상아도후 호연란이 령주로 있는 무림맹의 기관입니다. 무림맹에서 가장 중추적인 기관 중 한 곳이죠.”“호연란이라…….”‘그래. 계집 이제야 제대로 만나는 구나.’

순간적으로 아운의 눈에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북궁연과 아운은 간단하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정문에 도착했다.

경계를 서던 십여 명의 내성 선위 무사들은 북궁연을 보고 일제히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북궁연을 존중하는 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북궁연에게 경외감을 품은 모습들이었다. 감히 고개를 들어 마주보지도 못한다. 그 모습을 보고 아운은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북궁세가가 어떻든 연 누이가 대단히 인정을 받고 있구나.’

아운이 기분 좋게 웃을 때였다. 무림맹 내성의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청년이 나타났다. 청년의 뒤에는 다섯 명의 무사들이 경장 차림에 장검 하나씩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청년의 모습을 본 소홀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청년은 북궁연의 모습을 보고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은 북궁연이 입고 있는 옷과 그녀의 모습에 머물러 있었다.

아운이 보기에 나타난 청년 무사와 북궁연은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고, 청년은 북궁연의 새로워진 복장에 놀랐고 그 복장으로 인해 더 아름다워진 모습에 놀란 듯이 보였다. 소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유부대주, 무례하군요.”

나타난 청년은 소홀의 나직한 호통에 얼른 두 손을 모으며 포권지례를 하고 인사를 했다.

“풍운수호대의 유대석이 총사님을 뵙습니다.”

북궁연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수고하시는 군요. 그럼…….”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북궁연이 내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아운과 소홀 등도 북궁연의 뒤를 따르려 했다. 하지만 그제야 아운을 발견한 유대석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운을 가로막았다.

“넌 누구냐?”

아운은 유대석을 바라보았다. 개를 건드려도 그 주인을 보고 건드리라고 했다. 더군다나 처음부터 하대였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예의가 아니었다. 북궁연과 함께라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는 자신을 가로막았다. 이는 북궁연을 모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북궁연의 체면을 봐 주지 �邦?행동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눈앞의 인간은 호연란의 수하였다. 그래서 아운의 시선이 곱지 못했다. 설혹 아운이 호연란과의 관계를 떠나서 생각한다고 해도, 아운은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유대석의 임무상 자신을 막았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게 함께 있는 북궁연에 대한 예의라 할 수 있었다. 북궁연의 표정 역시 서늘해졌다.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유대석의 얼굴을 향했다.

“감히 지금 나에게 시비 거는 것인가요?”

북궁연의 짧고 강한 말에 당황한 유대석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황급히 말했다.

“저희 대주님께서 아무나 함부로 내성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제 입장도 입장이라서…….”

유대석이 얼버무리자, 북궁연의 표정은 더욱 쌀쌀맞게 변했다.

“아무나라뇨? 유 부대주는 지금 저 분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보지 못했나요? 내가 아무나 내성으로 사람을 데리고 들어갈 여자로 보이나요?”

유대석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북궁연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비록 대주가 시켜서 하는 일이지만 별로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대주는 그에게 북궁연과 함께 들어오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내라고 지시를 내렸었다. 이미 맹에 북궁연의 손님이 왔고, 그녀가 평소와 다른 옷차림으로 마중을 나갔다는 보고가 무림맹의 중요 인물들에게 알려지고 난 다음이었다.

유대석은 대주의 명령과 북궁연의 추궁 속에서 최대한 살아남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며 더욱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총사님. 하지만 이 분은 무림맹의 사람이 아니니, 원칙대로 이름과 신분을 적어주고 가셨으면 합니다. 자칫하면 제가 추궁을 당할 수 있습니다.”

유대석의 말에 북궁연은 더 이상 뭐라고 추궁하기가 어려워졌다. 엄연히 내성을 들어가는 외부인은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선위 무사들에게 알리고 들어가야만 한다는 규율이 있기는 있었다. 특히 방명록에 이름과 신분을 적는 것은 기본적인 규칙이었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내성의 장로들이나 최고층의 고수들이 함께 온 손님이라면 선위무사들이 감히 그 이름이나 신분을 추궁하지 못했다.

“내가 보증한다.”

이 말 한 마디면 더 이상 추궁하지 못하고 적당히 알아서 적어 놓게 마련이었다. 선위무사들로서는 감히 그들에게 함부로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우긴다면 어쩔 수 없이 신분과 이름을 말해야 하긴 했다. 그것은 엄연히 큰 규칙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아운은 눈치로 전후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아운은 선위 무사들이 있는 곳을 보았다. 책상 하나가 있고, 그 위에는 방명록으로 보이는 책 하나와 언제든지 서명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져 있으며, 그 앞에는 서생 차림의 장한 한 명이 의자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운은

군말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서 붓을 든 다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방명록에 휘갈겨 썼다. 서생 차림의 장한은 아운의 행동에 당황해서 그를 지켜보다가 아운이 붓을 놓자 방명록을 들여다보았다. 서생은 방명록을 보고 굉장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칼을 휘두른 듯, 날카롭고 산악처럼 웅장한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굉장하다.’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무려 십오 년 동안 내성의 방문객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동안 내성을 방문한 수많은 손님들이 있었지만 지금 아운처럼 멋진 필체는 기억 속에 없었다. 섬세하면서도 남자의 기개가 그대로 실린 아운의 필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원한 마음과 웅심이 절로 일어나게 만들 정도였다.

서생은 아운을 감탄한 표정으로 다시 본 다음, 이번엔 방명록의 내용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가 얼굴에 아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아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아운을 보았닥가 이번엔 북궁연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유대석은 서생의 이상한 표정을 보고 다가와서 방명록을 바라보았다. 유대석의 안면 근육이 전부 굳어버렸다. 거기엔 다음과 같이 서 있었다.

- 북궁연의 약혼자 하영운.

아운의 정체를 감추려고 노력하는 육자명의 노력은 이렇게 무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운의 표정은 당당했다. 유대석은 설마 하는 시선으로 북궁연을 보았다. 북궁연과 소홀은 왜 그러나 하는 심정으로 방명록을 보았다. 그리고 방명록을 본 순간 두 여자는 그만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운을 바라보았다. 아운은 담담한 표정으로 북궁연을 보면서 물었다.

“뭐가 잘못되었소?”

북궁연이 상큼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단지 너무 간단해서 웃었을 뿐이에요.”

유대석과 선위 무사들 그리고 서생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져 버렸다. 간단한 대화 속에 방명록의 글이 사실이라고 북궁연이 인정한 것이다. 유대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북궁연을 보면서 물었다.

“총사님, 정말 이 분이…….”

북궁연이 뭐라고 대답하려 할 때 유대석에게 다가선 것은 아운이었다. 아운이 다가오자 유대석은 얼굴을 찌푸리며 아운을 보았다. 아운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물론 사실입니다. 그런데 댁은 나이가 몇이오?”

유대석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서……서른입니다.”

아운은 그러냐는 표정으로 유대석을 보고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나보다 겨우 몇 살밖에 더 쳐 먹지 않은 자식이 감히 처음부터 하대를 해. 그리고 감히 내 마누라를 무시해…….”

아운이 부드러운 말투에서 갑자기 거칠게 변했다. 유대석은 당황하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운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유생같이 비리비리하게 생긴 자식이 감히 자신에게 대든다는 사실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이 개자식이 계집을 믿고 까부는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해는 한다. 제 아내 될 여자 앞에서 제법 점수 좀 따려고 하는 것 같은데 번지수를 잘못 잡았다. 유대석이라면 북궁연의 눈치를 끝까지 보지 않아도 된다. 만약 일이 터져도 내성 수호대 대주와 호연란이 알아서 막아 줄 것이다. 더군다나 북궁연 앞에서 그의 남편감을 혼내 주었다면 오히려 상까지 받을 게 확실했다. 그리고 시비도 먼저 걸어왔다. 이렇게 되면 할 말도 있다. 물론 북궁연이 참견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아무리 유대석이라도 북궁연의 상대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얼른 물러서면 된다고 판단을 내렸다. 최소한 북궁연의 남자에게 수치를 안겨 주어 무림맹의 웃음거리로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주가는 하루아침에 상한가를 칠 것이다. 판단이 서자 유대석의 표정이 스산하게 변했다.

“쥐새끼가 여자 믿고 까부는군.”

유대석의 막말에 아운은 웃었다.

한편 이 상황을 보고 있던 북궁연은 아운이 내 마누라라고 당당하게 말해 버리자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숙였고, 소홀은 아운의 말투가 변하자 당황했다. 그의 성격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설마 싶었다.

‘설마……. 여기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맹 복판에서 중견 무사를 친다는 것은 아무리 권왕이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아운의 주먹은 유대석의 면상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대답을 주먹으로 대신한 것이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유대석은 골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 보

지 못한 고통이 충격으로 전해온다. 그러나 유대석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그것은 유대석을 물론이고, 보고 있던 무림맹의 모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들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벌어지고 나면, 잠시 동안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보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바로 지금이 그와 같았다.

유대석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이 있었지만, 정신은 그 고통을 쫓아가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 맞았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았다. 상식적으로 무림맹 복판에서 무림맹 제자가 맞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더군다나 자신 같은 절대 고수(그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가 아운 같은 문사에게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당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대석은 얼굴에 전해오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현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라 보고 있던 그의 수하들도 멍하니 보고 있었는데 그들의 생각은 정말 자신들의 상관인 유대석이 문사인 아운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들 중엔 유대석이 아운을 도발시키고 그에게 한 대 맞음으로서 아운을 징계할 수 있는 명분을 찾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속 깊은 수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나 유대석의 어리석은 생각은 아주 잠깐이었다.

‘건들지 않을 거면 모르지만, 일단 건들면 다시는 똑바로 내 얼굴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만들어라.’

바로 뒷골목에서 터득한 아운의 철학이었다. 괜히 섣부르게 건들면 언제고 뒤통수를 맞던지, 상대에게 복수의 열정을 심어주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 자신의 발목을 잡을지 모르는 늪이 되어 버린다. 아운은 그것을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맞은 충격으로 유대석이 뒤로 튕겨질 때 그보다 빠르게 아운의 다른 손이 유대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어서 아운은 유대석을 거꾸로 들어서 바닥에 얼굴부터 쳐 박아 버린다. 조금의 인정도 사정도 없는 손속이었다. 다시 한 번 ‘퍽’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유대석은 머리부터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유대석과 그의 수하들은 이제야 상황을 조금 깨우쳤다. 그러나 유대석은 아직도 무림맹의 힘과 위용을 믿었다. 그의 평생 동안 그 이름 앞에 위축되지 않은 외부인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석이 엄청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이…이 놈 난 무림맹의……. 끅!”

말을 잊지 못했다. 아운의 발이 유대석의 입을 걷어찬 것이다. 유대석의 신형이 마치 통나무처럼 바닥에 쳐 박혔다. 아운은 그런 유대석을 무참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아운이 유대석을 구타하는 방법은 무자비했다. 인정사정없었고, 닥치는 대로 차고 때리는데 그 살벌함은 지켜보는 사람들이 모두 질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몸이 부서지지 않는 유대석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고통이 심해지면서 유대석의 자존심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정말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과 함께 어떻게 해서든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운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유대석이 아운에게 구타당하는 동안 그의 수하들은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

다. 유대석이 너무 허망하게 당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북궁연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다.

소홀은 설마 했다가 아운이 정말 사고를 치자, 기가 막혔다. 설마 오자마자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이야……. 더군다나 북궁연 앞에서 보여주기는 좀 아닐 것 같은 모습을 아운은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나 이런 놈이다 하고 시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북궁연은 처음에 당황했다가 일단 유대석의 수하들을 가로막았다. 쌍화 중의 한 명이자 검후로 통하는 그녀의 기에 눌린 유대석의 수하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녀는 유대석의 수하들을 감시하느라 아운의 무자비한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북궁여과 소홀은 크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속이 시원해지는 쾌감 또한 어쩔 수 없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동안 북궁연은 무던히도 참아왔었다.

아운이 동작을 멈추었다. 그제야 겨우 기회를 잡은 유대석은 아운의 발을 잡고 늘어졌다.

“사……살려주……시시오……. 흑흑…….”

울며 바람 새는 소리로 말하는 유대석의 모습은 이미 이전의 모습을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오로지 살고 싶은 불쌍한 인간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오줌까지 지린 그의 모습은 보기에도 처참했다. 아운은 유대석을 들어 올린 다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따위가 감히 내 여자를 무시해? 잘 들어둬라. 넌 앞으로 나와 연 누이가 지나갈 땐 대가리까지 땅에 쳐 박고 있지 않으면 오늘 같은 일이 또 벌어질 거란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라.”“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흑흑.”

눈물과 콧물까지 범벅이 되어 있는 유대석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아운은 유대석의 다리를 잡고 들어서 무림맹의 성벽에 집어 던지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네 놈은 처음이니까 이 정도로 끝낸다.”

‘퍽’하는 소리가 들리며 날아간 유대석의 머리와 성벽의 무식하게 큰 바위돌이 충돌하였다. 유대석은 그 충격으로 기절하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유대석의 머리가 부서지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아운의 배려 때문이었다. 고통은 심하게 주어도 죽이진 않은 것이다. 앞으로 유대석은 아운을 생각하기만 해도 오줌을 지리고 말 것이다.

북궁연은 아운으로 인해 걱정이 되었지만, 그를 뜯어 말리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무모해 보이고 앞뒤 없는 일 같았지만,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녀와 소홀이 연구해서 알고 있는 아운은 그랬다. 그래서 지금도 두 여자는 아운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아운이 유대석에게 하는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졌다. 아운의 말이 싫지 않았던 것이

다.

하지만 불쑥 궁금해지는 것도 있었다. 봐주는 것이 이 정도면? 이미 아운에 대해서 연구했고, 나름대로 안다고 생각했던 소홀과 북궁연이 당황하고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는 상황이고 보면 무림맹의 수하들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그들은 처음으로 무림맹의 인물도 무명의 무사에게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무림맹 내원의 대문 앞에서……. 그 이전엔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아운은 유대석이 기절하자, 태연하게 북궁연을 보면서 말했다.

“연 누이, 이제 갑시다.”

북궁연은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고 앞장을 서며 말했다.

“보통 말보다 행동이 빠른 사람은 많이 보았지만 가가처럼 주먹으로 말하는 사람은 첨입니다.”

북궁연의 말에 아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원래 주먹이 말보다 설득력에서 앞설 때가 많은 법이오.”

북궁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소홀은 통쾌한 표정으로 유대석을 보다가 아운의 말을 듣고 공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은근히 내일 일이 걱정 되기도 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동안 쌓인 숙변을 한꺼번에 쏟아낸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때 아운이 걸으면서 던진 말은 소홀의 작은 걱정마저도 잊어버리고 웃을 수 있게 만들었다.

“내가 그래서 권왕 아니오.”

그 말을 듣고 소홀은 활짝 웃었다.

‘맞아. 저 분은 권왕이시다. 광풍사를 혼자서 쓸어버린 권왕. 감히 누가 함부로 할 수 있으랴.’

소홀도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북궁연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표정이었는데 아운의 말을 듣고 몹시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워 하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소홀은 다시 한 번 가볍게 웃고 말았다.

‘참으로 든든한 분이 오셨군요. 그래도 너무 티 나게 좋아하시네. 여자는 빼는 맛인데…….’

소홀은 무엇인가 아쉬운 시선으로 북궁연을 본다. 그들이 뒤에서 문지기들이 굳은 채 서 있었다. 아쉽게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겐 불행하게도 그들은 아운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말했을 때, 그 말을 제대로 들은 사람이 없었다. 만약 그들 중 누군가가 아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면 그 다음날 벌어진 사태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렇게 비켜 나갔다.

유대석의 일로 어둠에 휩싸인 무림맹이 발칵 뒤집어 졌을 때, 아운은 느긋하게 북궁연의 거처에 앉아 있었다. 북궁연은 손수 요리를 하여 가져왔고, 아운은 그것을 먹는데, 주변에서 태풍이 불어도 모를 정도로 정말 맛있게 먹어 댔다. 꽤 많은 양의 음식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어대는 아우의 모습을 북궁연은 아릿하게 보면서 앉아 있었다. 아운은 그런 북궁연에게 음식을 먹어보란 소리 한 번 안하고 다 먹어치웠다. 북궁연은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누구든지 자신이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기분 좋을 수밖에 없었다.

소홀은 그 모습을 보면서 더욱 아운이 마음에 들었다.

‘아십니까? 아가씨께서 당신이 오시면 직접 요리를 만들어 드린다고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하셨는지…….’

물론 아운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단지 그동안 그리웠던 연인이 해온 음식이란 그 하나만으로도 아운은 충분히 감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식을 다 먹은 후, 차가 나올 때까지 아운과 북궁연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니 이미 알고 있는 수순이라도 되는 듯이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흘러왔다.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는 소홀은 알고 있었다.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원래 대화란 꼭 말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운이라고 매일 주먹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아운과 북궁연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대화를 하면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홀이 시녀를 시키지 않고 직접 가서 차를 가지고 나오자, 북궁연은 고맙다는 시선을 보냈고, 소홀은 한 눈을 찡긋해 보이며 웃었다. 소홀이 나가려 하자, 아운이 그녀를 보고 말했다.

“잠시 좀 앉을 수 있습니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아무래도 연 누이와 함께 대답할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소홀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녀는 대답 대신 북궁연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앉을 자리가 아닌 듯 했던 것이다. 북궁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홀, 앉으세요.”

그제야 소홀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두 분이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많을 텐데, 제가 방해되지 않겠습니까?”

소홀의 말에 아운이 웃으며 말했다.

“연 누이와는 이미 충분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소홀이 의아한 눈으로 아운을 보자, 아운이 미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원래 뜻이 통하고 정이 통하는 사람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법입니다.”

아운의 대답에 소홀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도 느끼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북궁연은 정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말에 다시 얼굴을 살짝 붉힌다. 지금 모습을 보고 누가 그녀를 천하의 검후라 하겠는가? 아운은 이렇게 돌려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고, 북궁연은 그것을 은근히 즐기는 분위기였다.

“좀 어색하지만, 그럼 잠시만 앉았다 일어서겠습니다.”

소홀이 자리를 잡고 앉자 아운이 북궁연과 그녀를 한 번씩 본 후 물었다.

“검왕께서는 어찌 되신 것입니까? 혹시 해라도 당하신 것입니까?”

아운의 급작스런 물음에 북궁연과 소홀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차 첫 말을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줄은 몰랐었고, 그 말이 검왕에 대한 말일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검왕 북궁손우에 대한 소문을 강호상에 흘러 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북궁연이 입으로 가져가던 차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할아버지께서 변을 당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아운은 별거 아니란 투로 대답했다.

“북궁세가가 검왕이 건재하시다면 지금처럼 북궁세가가 몰리진 않았을 것이오. 누가 뭐래도 무림에서 무는 첫 번째요. 검왕이 있는데 북궁세가가 지금처럼 몰렸다면 그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라면 검왕께서 벌써 활동을 하셔야 했을 시기가 넘었소. 그리고 이미 그 부분에 대한 소문이 있어야 했으리라고 생각하오.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도 그 분께서 침묵으로 일관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아운의 대답에 북궁연은 차를 만지작거리다가 대답했다.

“그 분은 독수에 당하셨습니다. 지금은 거동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큰 상처를 입고 북궁세가의 깊은 밀실에서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하지만 무엇에 어떻게 당했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운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소.”

북궁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상황을 설명했다.

“어느날 갑자기였습니다. 어떤 일로 나갔다가 돌아오신 후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대체 왜 쓰러지셨는지 조차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로 나갔다가 누구를 보고 왔는지조차 들을 사이도 없었습니다. 이미 독수를 당하시고 겨우 북궁세가로 돌아오셨고, 오시자마자 쓰러지셨기 때문입니다.”

북궁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운은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 보지 않은 상황에서 미리 짐작하고 말했다가 실망을 주기 싫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넘어갔다. 아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북궁연을 보면서 말했다.

“내가 짐작을 했다면 다른 사람들도 짐작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오. 그러니 마음 놓고 북궁세가를 몰아 붙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무리 중에 어르신을 독수한 자가 있으리란 짐작입니다.”

아운의 말에 북궁연 역시 그 부분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현명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무력이 있으면서도 많은 부분을 참았으리라.

“많은 조사를 한 모양이오.”“그러나 성과는 별로 없었습니다.”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검왕을 암수할 정도라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남기진 않았으리라. 아운은 북궁연은 보면서 다시 물었다.

“검왕 정도 되시는 분이 그냥 쓰러지시지는 않았을 것이오. 어떤 단서를 남기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소?”

북궁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없었습니다.”

아운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상황이 생각보다 조금 더 심각하고 복잡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운은 여러 가지 상황들을 정리해 보았다. 문득 옥룡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헤어지면서 한 말들이 가슴에 걸렸다. 그리고 그의 처지가 지금의 무림과 불가분의 관계로 이어져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생각보다, 현 무림의 상황은 더욱 복잡한 것 같았다. 특히 검왕 북궁손우 정도의 고수가 단서조차 남기지 못하고 쓰러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쩌면 암수를 당하고 온 것이 아니라 북궁세가에 와서 암수를 당했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추론 중 하나일 뿐이었다.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한 아운은 북궁연을 보면서 말했다.

“참으로 고생이 많았겠구려.”

북궁연이 고개를 숙였다. 누구한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녀였지만, 아운이 위로의 말을 하자 그동안 가슴에 쌓였던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던 것이다. 서글프고 힘들었던 일들이라 쉬이 잊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북궁연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을 하고 나면 참지 못하고 울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상황을 짐작했음인지, 그녀의 곁에 있던 소홀이 민망해 하는 북궁연 대신 대답하였다.

“이제 공자님께서 오셨으니, 아가씨께서도 안심이 되실 것입니다.”

소홀의 말에 아운은 흔쾌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오.”

단 한 마디의 겸손함도 없는 말이었지만 북궁연이나 소홀에겐 더 없이 믿음직한 말이었다. 그리고 답답한 마음이 확 풀어지는 대답이기도 했다. 그 말이 맞을지 안 맞을지는 나중이었다. 북궁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가가께서는 조금 조심하셔야 합니다. 여기는 무림맹이고, 유대석은 호연세가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자입니다. 아무래도 내일은 조금 시끄러울 것 같습니다.”

북궁연의 말에 아운이 웃었다.

“그러길 바라고 있을 뿐이오. 그래야 그들을 뿌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고, 가장 빠르고 가장 쉽게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오.”

북궁연은 새삼스런 시선으로 아운을 보았다. 그의 말을 듣고서야 북궁연은 아운이 계획적으로 상대에게 싸움을 걸었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북궁연의 시선을 확인한 아운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원래 전쟁은 가장 자신 있는 것으로 하는 것이 유리한 법이오. 세력에서도 돈에서도 우리는 그들에게 떨어지지만, 주먹은 조금 다를 것이오. 명색이 내가 권왕 아니겠소.”

아운의 말에 북궁연과 소홀은 그저 아운을 보고만 있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무식한 방법인 것 같기도 하였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도 같았다. 소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고수도 많고, 세력도 큽니다. 한꺼번에 수십 명이 덤빌 수도 있습니다.”

소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아운은 태연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들이 한꺼번에 전력을 다해 덤비지는 못할 것이오. 여기는 정도 무림의 심장인 무림맹이오. 정파란 허울을 쓰고 있는 한 그들도 이 안에서 행돌력에 제한이 있을 것이오. 그런 면에서 혼자인 내가 유리한 셈이지요. 이미 명분은 주었으니 내일은 알아서 찾아 올 것이고 내가 힘들여 찾아다닐 필요도 없고……. 내가 권왕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를 테니, 적당한 실력자들이 올 테고, 몸 풀기에 딱 좋은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주먹은 강하고 볼 일이오. 후후…….”

아운이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며 북궁연과 소홀을 바라보았다. 두 여자는 그저 아운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문사 출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보면 아운은 상황을 너무 간단하고 단순하게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두 여자는 아운에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하기엔 권왕이란 이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특히 홀로 사라신교와 광풍사를 몰살시킨 전설 하나만으로도 그의 이름은 능히 무림맹의 맹주와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아운은 북궁연과 소홀을 보고 희죽 웃으면서 말했다.

“식사를 하고, 목욕물도 부탁하리다. 그래도 명색이 연인을 만나러 왔는데 꼴이 이래서야 되겠소?”

아운의 태연한 말에 북궁연과 소홀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어차피 걱정해 봐야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무림맹 내성의 한 곳. 연화각은 호연란의 거처였다. 막 수련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던 호연란은 짜증이 났다. 이 밤중에 급한 전갈이라고 그녀의 충복 중 한 명이 달려온 것이다. 비록 짜증을 냈지만 호연란은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소식을 가지고 온 자가 자신의 심복 중 한 명인 교연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 밤중에 직접 달려왔다면 분명 적지 않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밖에서 대기 중인 시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곧 가겠다. 매화각 취의청에서 기다리라고 전해라!”“예. 아가씨.”

짧게 대답한 시녀가 물러가자, 호연란은 옷을 갈아입고 나섰다. 취의청으로 들어서자, 한 명의 남자가 급히 그녀의 앞에 다가왔다. 남자는 약 삼십 대 후반으로 인상 좋게 생겼으며, 누구에게나 호감이 갈 만한 모습의 청수하게 생긴 서생이었다. 그가 바로 호연세가의 제이 군사라

일컬어지는 담설천하 교연이었다. 그의 아호 그대로 입과 혀로 하늘도 강으로 믿게 만들 수 있다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의 재담과 말 실력은 무림맹의 군사인 와룡과 능히 겨룰 수 있다고 알려진 인물이기도 했다. 교연은 호연란의 앞에 부복하면서 말했다.

“교연, 아가씨께 급히 알릴 일이 있어서 직접 달려왔습니다.”“무슨 일인가요?”“지금 매화각에 북궁연의 약혼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호연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교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신의 소식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이 변했다는 사실 하나가 그를 기쁘게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무엇인가 큰일을 전했다는 뿌듯함이 가슴을 차 왔다. 교연은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호연란의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큰 낙이고 기쁨이었다. 어차피 자기가 차지할 수 없는 여자가 호연란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변화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그때만은 그녀를 자신의 의지대로 조종한다는 뿌듯한 감정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유독 호연란에 한한 것만은 아니었다. 날고 긴다는 무림의 고수들이 자신의 한 치 혀에 놀아나는 것을 보며 즐기는 것이 바로 그의 취미였다. 무식하게 힘만 있는 무사들을 혀 하나로 움직이는 묘미는 아는 사람만 아는 재미였다.

“자세히 말해 보아라!”“그는 불과 반시진 전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북궁연과 소홀이 함께 있었고, 북궁연이 자신의 연인임을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호연란의 표정이 굳어졌다.

‘갑자기 연인이라니?’“뭐하는 자라더냐?”“보기엔 문사 출신 같았다고 합니다.”“문사 출신 같았다고?”

호연란이 다시 한 번 강조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처음엔 분명히 그렇게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자는 가증스럽게도 문사처럼 유약하게 변복하고 나타났을 뿐, 실제는 상당한 고수였다고 합니다. 그 자와 유대석 부대주가 시비가 붙었고 유 대주는 그 자에게 당해 심한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호연란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유대석 부대주가 당했다고? 자세히 설명을 해 보아라!”

교연은 조금 전 있었던 상황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설명했다. 다 듣고 난 호연란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그러니까 그 자는 무림맹의 복판에서 무림맹의 수하를 공격했단 말이지. 그런 것인가? 교연.”

교연은 호연란의 의중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호연란의 의중을 읽고 있었으며 어떻게 나올 것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냥 둘 수 없지. 비록 상대가 총사의 연인이지만, 엄연히 무림맹의 수하에게 모욕을 주었고 거의 죽을 정도로 중상을 입혔다. 이는 무림맹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고, 나 호연란에 대한 모욕이다. 그렇지 않은가?”“그렇습니다.”“그렇다면 내일 날이 밝자마자 그 자를 생포한다.”

교연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하지만 북궁 총사의 연인입니다.”“흥, 그게 어떻단 말이냐? 아직은 확인된 것도 없다. 그러니 그 자를 잡아다 취조를 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한 다음 풀어줘도 된다. 물론 그를 생포하다가 크게 다치거나 심하면 죽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렇지 않은가?”

교연은 호연란의 뜻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그가 호연세가의 제이 군사란 호칭을 붙이지 않아도 머리만 조금 돌아간다면 누구나 눈치 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북궁 총사의 남자를 호되게 다룸으로써 북궁연에게 상처를 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참지 못하고 북궁연이 도발이라도 한다면 호연란에게는 호기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상황이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또한 그녀로서는 자신의 수하가 당한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수하들, 특히 자신과 호연세가의 휘하에 든 자들에게 그늘이 되어 주지 못한다면 누가 호연세가를 따르려 하겠는가? 이 기회에 그런 부분을 딱 부러지게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가 북궁세가라면 본보기에 있어서 더욱 좋았다. 어차피 직접 북궁세가를 치는 것도 아니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북궁연의 장래 남편감일 뿐이었다. 직접 북궁연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곧 북궁연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교연은 모사꾼답게 그녀의 마음을 모두 헤아리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명대로 하겠습니다.”“이왕이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겠지. 이 일은 명 장로와 고 대주 선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너는 북궁연의 연인이 나타났다는 것을 이룡에게 전해라. 앞으로 볼 만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충, 명대로 행하겠습니다.”

교연이 힘차게 대답을 하고 물러갔다. 그 모습을 보는 호연란의 눈에 살기가 어린다. 이룡을

생각하자, 참을 수 없는 질투심과 분노가 그녀를 못 견디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룡이라면 무림맹 최고의 기남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두 명의 남자가 모두 북궁연을 좋아했다. 같은 천중 쌍화 중 한 명인 자신은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 남자란 족속들이 약해 보이는 북궁연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고 자위해 왔던 호연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일 뿐, 실상은 그녀에게 참을 수 없는 수치였고, 치욕이었다. 문득 얼굴에 있는 상처가 아리는 느낌이었다.

‘모두 그 놈 때문이다.’

호연란은 자신이 이룡에게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은 얼굴에 난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 원인을 제공한 아운이 못 견디게 미웠다. 살아서 돌아온다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서 죽이고 싶었다. 그녀는 언제나 북궁연에게 여자로서 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왔다. 분명히 호연세가는 북궁세가를 밀어내고 천하제일세가의 위치에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했고, 그 와중에 호연란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그러나 고요하기만 한 북궁연의 존재는 언제나 그녀를 앞서고 있었다. 천중 쌍화로 명성을 같이하지만, 북궁연의 인기는 언제나 호연란을 앞섰던 것이다. 이는 호연란에게 상처가 되었고 이는 북궁연과 함께 이룡에게도 원한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언제고 이룡 이 놈들의 눈알을 전부 뽑아 버릴 것이다. 여자를 볼 줄 모르는 눈은 달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북궁연 그 계집은 내 수하들에게 던져 주었다가 개 먹이로 쓰고 말겠다.’

그녀는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같아 붙였다.

아침, 동이 채 뜨기도 전에 십여 명의 중무장한 무사들이 매화각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들의 맨 앞에는 교연과 두 명의 노인, 그리고 한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사십 대 장한이 앞장을 서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모두 고수들로 보이는 그들은 당당하게 걸어서 매화각 정문 앞에 도착했다. 매화각 정문엔 두 명의 여자 무사가 지키고 있다가 이들이 다가오자, 그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두 명의 노인 중 한 명이 두 여사 무사를 보고 나직하게 말했다.

“장로원의 명정이라고 한다. 가서 총사에게 내가 왔다고 전해라!”

명정이란 이름을 들은 두 여 무사는 놀란 표정으로 명정을 향해 인사를 했다.

“매화각의 요하와 오손이 장로님을 뵙습니다.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녀들의 모습은 공손했다. 명정은 그녀들을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비록 함께 내원에 있긴 하지만 내원은 넓고 사람은 많았다. 그녀들이 삼십삼 명이나 되는 장로들을 전부 볼 수 있는 기회란 결코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매화각 소속의 여자 호위무사들이라면 거의 매화각을 떠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되었다. 가서 내가 왔다가 전하기나 하여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두 명의 여자 무사 중 오손이라고 불린 여 무사가 매화각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북궁연과 소홀이 가벼운 경장 차림으로 나타났다. 나타난 북궁연의 모습은 아침 이슬처럼 맑고 투명해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 준다.

명정은 다시 한 번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면서 먼저 인사를 했다. 무림맹에서 총사의 위치란 아주 특수한 경우에 해당했기에 결코 장로원의 일반 장로들에 비해서 그 지위가 낮지 않았다.

“장로원의 명정이 총사를 뵙소.”“총사 북궁연이 명 장로님을 뵙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른 아침에 매화각을 방문하셨는지요.”“북궁 총사께서도 어제 함께 있었다닌 잘 아실 거요. 어제 무림맹의 유대석 부대주가 큰 부상을 당했소이다. 그런데 그 범인을 총사가 잘 안다고 하더군.”“그 일이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저의 태중 혼약한 분이시기도 하죠. 그런데 그 분이 무슨 잘못을 하였던가요?”

북궁연의 태연한 말에 놀란 것은 명정과 그 일행이었다. 설마 설마 했지만 그 남자가 정말 북궁연의 약혼자란 사실이 증명되었기에 놀랐고, 유대석을 공격해서 큰 부상을 입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무엇이 잘못이냐고 묻는 것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설마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총사, 그것을 몰라서 묻는단 말이오? 무림맹 안에서 무림맹의 중진 무사를 부상 입혔소. 당연히 좌시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총사랑 관계가 있다 해서 지금까지 참고 있지만,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오.”

명정의 말에 북궁연이 냉정한 눈으로 명정을 바라본다. 여자지만 기개가 넘치는 시선이었다. 명정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위축되는 기분을 느끼고 얼른 내공을 끌어올려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한심한 작자는 자신이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군요. 그리고 명 장로님쯤 되시는 분이 모든 정황을 알아보지도 않고 오진 않았을 테고, 이미 서로의 잘잘못을 잘 아실 텐데, 여기 와서 따지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유대석 부대주를 추궁해서 사죄를 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북궁연의 말에 명정을 일시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유대석이 당했다는 말만 들었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 이는 명정이 서둘러서가 아니라 언제나 무림맹의 일에 있어서 잘잘못을 다질 계제가 없었기에 그것은 습관처럼 굳어진 관행이었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지 않아도 무림맹의 행사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자가 없었다. 설혹 잘못 한 게 없어도 함부로 따지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따져 보았자 소용도 없고, 오히려 그 뒷감당하기가 힘에 겨워진다는 것을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명정이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교연이 나섰다.

“북궁 총사님, 우린 그 부분을 잘 알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림맹의 부대주가 큰 부상을 당했고, 그 범인을 잡으라는 장로원의 지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행할 뿐입니다. 그리고 명 장로님은 장로원의 뜻을 대표해서 오신 것뿐입니다. 만약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으시면 먼저, 그 분을 이쪽으로 인도하신 후 차후에 장로원에 오셔서 공정한 판결을 받으시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쉽다면 장로원에서도 그 분이 총사님의 예비 부군이신 줄 전혀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알았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미 떨어진 명령이라 어쩔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라도 그 분께 예우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은 하겠습니다.”

참으로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믿을 만큼 북궁연이 어리석지 않았다.

“참으로 멋진 말이군요. 그보다는 차라리 장로원에 들어가서 다시 보고를 하고 먼저 진상조사를 한 다음에 오는 것이 예의 아닌가요?”

북궁연의 차가운 대답에 교연이 교활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아침에 열렸던 비상 장로회의는 끝났고, 그 분들은 모두 흩어진 상황입니다. 만약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면 명 장로님의 입장이 아주 곤란해집니다.”

그 말을 들은 북궁연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교연을 쏘아 보았다. 교연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지만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총사님, 어떤 일이 있어도 장로원의 결정은 따라야 한다는 무림맹의 법규가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총사님이 장로원과 대치하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습니다. 우선은 뜻에 따르고 차후에 따지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교연의 말을 들은 북궁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전 이 일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무림맹의 사람이 아니니 그 법규에 따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말 잘하는 당신이 설득해 보세요.”

북궁연의 말을 들은 교연은 쾌재를 불렀다. 무림맹의 법규는 곧 무리의 법이었다. 무림인이라면 무림맹의 법을 안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곧 북궁연의 연인을 무림맹의 법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교연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총사님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결코 그 분께 실례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북궁연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교연이 무안한 표정을 지을 때 매화각 안에서 한 명의 청년이 걸어 나오며 명정과 교연 일행을 바라보고 말했다.

“나를 찾아왔다고 들었소.”

모든 시선이 매화각의 정문을 향했다. 거기엔 평범해 보이는 중키의 청년이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서 있었다. 교연은 지금 나타난 청년이 바로 문제의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무공을 익힌 무사 같진 않았다. 그가 아는 무인들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고 그의 전신에서 어떤 기세가 우러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교연은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얕보는 마음이 생겼다. 명정 역시 청년의 어디에서도 크게 무공을 익힌 흔적을 찾을 수 없자, 유대석이 북궁연에게 당하고 그녀의 약혼자 핑계를 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명정이 앞으로 나서며 아운을 보고 말했다.

“그대가 어제 저지른 일을 기억하고 있는가?”“물론 기억하고 있지. 어떤 멍청한 자식이 내 여자를 무시하길래 제대로 버릇을 가르쳐 주었지. 그런데 그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가?”

아운의 말투가 바뀌었다. 명정과 또 한 명의 노인은 아운의 말투가 하대로 바뀌자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로서는 아직까지 나이어린 청년에게 그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명정과 또 한 명의 노인 노숙은 우선 숨을 고르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명정이 누구인가? 절강 무림의 패자인 명왕성의 전재 성주로서 그의 무공은 이미 무림맹 내에서도 알아주는 실력과 덕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노숙은 바로 호연세가의 가신 중 한 명으로 그의 무공은 세상이 다 아는 전대의 고수였다. 이런 위치에 있는 두 사람이 단 한 명의 무명 청년에게 완전히 무시를 당했으니 그 마음이야 오죽하랴. 교연이 교활한 눈으로 아운을 보면서 나무랐다.

“아무리 북궁 총사를 믿는다고 하지만, 어른에게 대한 말 버릇이 고약하군.”

아운이 교연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명정과 노숙을 보면서 말했다.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대접할 줄 알아야지. 아무리 나이차가 난다고 해도 기본 나이가 있는 사람에게 처음부터 하대를 하면 되겠는가? 더군다나 그 사람의 위치란 것이 있는데…….”

아운의 말에 명정이나 노숙은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명정이 잘못한 바가 있었다. 더군다나, 아운의 위치는 총사의 부군될 사람이었다. 함부로 말을 낮추어 가볍게 부를 상대는 아니었다. 명숙과 노숙이 당황하는 표정을 보이자, 교연은 다시 한 번 앞으로 나서며 명정과 노숙을 힐끔 바라보았다.

‘역시 무식한 것들은 어쩔 수가 없다니까…….’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끼며 앞으로 나온 교연은 아운의 이 장 앞까지 걸어 나와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건방진 태도는 일단 안으로 감추었다. 아운의 말솜씨도 제법이라고 판단을 내렸기에 상대에게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교연이라고 합니다. 공자님의 말에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서 두 분 장로님 대신 나왔습니다. 물론 지금 공자님이 한 말도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공자님이 비록 총사님의 부군이 될 남자라고 해도, 아직은 젊은 나이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두 분 장로님의 위치가 결코 총사님의 아래가 아니니 말을 놓아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약간 오해의 소지는 있지만 그 정도로 젊은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면 결코 옳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는 북궁 총사님에게도 해가 되는 일입니다. 어서 사과하시고 두 분의 말을 따르는 것이 공자님은 물론이고 총사님에게도 좋을 것입니다.”

교연의 말에 명정과 노숙의 안색이 약간 풀렸다. 구구절절 상당히 옳은 소리로 들렸다. 물론 여기서 두 분 장로라고 말한 것은 약간 틀린 부분도 있었다. 명정은 정식으로 장로원의 장로가 맞지만 노숙은 객원장로로 부 장로급에 해당된다.

아운은 교연이 말을 끝낼 때까지 아무런 말도 안하고 그저 정중하게 듣기만 했다. 교연은 아운의 태도를 보고 자신의 설득이 제대로 먹혔다고 득의한 마음을 지녔으며, 명정이나 노숙은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북궁연과 소홀을 바라보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들의 얼굴에 조금 당황스런 표정이 떠올라 있었고, 불안한 시선으로 아운과 교연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런 것은 그녀들이 참견하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교연 역시 슬쩍 그녀들의 못브을 보고 속으로 오만하게 웃었다.

‘흠, 장래 부군이 어른들에게 막말을 했으니, 당황스럽고 실망스럽겠지. 그리고 내 언변에 몰린 낭군이 애처롭겠지. 어디 나서 보아라! 총사. 이번엔 총사마저 내가 말로 눌러 놓겠다.’

교연은 한껏 고무되었다. 이때 교연을 보던 아운이 말했다.

“이제 말 다했나?”

아운의 말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던 교연은 당황하고 말았다. 명정 또한 의외의 표정으로 아운을 보았다. 그 말은 결코 교연이나 명정이 기다리던 말이 아닌 것이다. 교연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다시 아운을 설득하려 했다.

“이보시오. 공자, 말귀를 못 알아듣는 모양인데…….”

말을 하던 교연의 눈이 방울처럼 커졌다. 아운의 주먹이 면상을 향해 날아온 것이다. ‘퍽’하는 소리가 들리며 아운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들어가 박혔다. 교연은 골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상태로 뒤로 날아가 기절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운이 다른 한 손으로 교연의 멱살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 무림맹이 말로 했지?”

아운은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며 교연을 본다. 명정과 노숙, 그리고 그의 일행은 놀라서 무기를 뽑아들었다. 명정이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다.

“이노옴, 뭐하는 짓거리냐?”

아운이 비웃는 시선으로 명정을 보면서 말했다.

“보면 모르나? 나는 지금 이 멍청한 작자의 말에 대답을 하는 중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 멍청한 놈은 말로 했고, 나는 주먹으로 화답을 하는 중이다. 좀 기다려라. 늙은이. 먼저 이 똑똑한 놈의 말에 대답마저 끝내고, 누가 잘못했는지 시시비비를 가린 다음 상대해 주겠다.”

아운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운은 단 한 번에 명정과 노숙을 압도하고 나온다. 조금 전까지 문사처럼 유약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명정과 노숙이 당황해서 주춤하였지만 무림맹의 장로인 명정이나 부장로이고 호연세가의 가신인 노숙이 그 정도에 위축될 정도는 아니었다.

“쳐라!”

명정이 고함을 질렀다. 명정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렇지 않아도 기회를 노리던 자가 있었다. 바로 호연세가의 천각 예하 현무단의 단주인 등천귀도 허태무와 부단주인 소화검 정기였다. 그들은 천각의 각주인 경천묵장 모대건이 죽은 후, 새롭게 천각의 각주가 임명된 후 그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기회가 없었던 참이었다. 오늘 공을 세우면 현무단의 위치도 올라가게 될 것이다. 특히 두 사람 중 소화검 정기는 아직 젊은 나이에 호승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제일 먼저 몸을 날려 아운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그는 자신들이 상관인 모대건이 아운에게 어떻게 죽었는지 전혀 모른다. 정기의 신혀은 무서운 속도로 아운을 향해 돌진하며 자신의 성명절기인 소화검법을 펼쳤다. 그의 손에 들린 검에서 불꽃같은 검기가 일어나며 아운의 미간과 목을 향해 뻗어갔다. 그리고 그때 아운의 자유로운 한 주먹이 공격해 오는 소화검 정기를 향했다.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소화검 정기의 신형이 공격해 갈 때보다 더욱 빠르게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무려 오장이나 날아가 땅바닥에 쳐 박힌 정기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공격하던 현무단의 무사들이 모두 제 자리에 멈추었다. 명정이나 노숙의 표정도 굳어졌다. 그들은 아운이 어떻게 정기를 공격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단지 아운은 공격해 오는 정기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그 간단한 동작은 쉽게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아운은 현무단의 부단주씩아나 되는 정기를 간단하게 처리한 후 다시 교연을 바라보았다. 이미 교연의 안색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운은 교연을 들어 올린 다음 바닥에 거꾸로 쳐 박았다. 땅과 머리가 충돌하면서 격심한 두통과 목이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교연을 질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고통은 그것으로 간단하게 처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운은 교연을 다시 들어 올린 다음 주먹으로 그의 면상을 가격했다. 그 충격으로 교연은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기절은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인가? 공포심과

두려움은 배가 되어갔다.

“이노옴!”

놀라서 멈칫했던 현무단의 단주, 등천귀도 허태무와 호연세가의 가신인 노숙이 일제히 아운을 공격해 왔다. 둘 다 호연세가의 가신들인 만큼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지 동격을 하는 순간 서로 교묘한 위치에서 협공을 하고 있었다.

노숙의 단명귀조와 허태무의 도법은 기이한 호선을 그리며 아운의 얼굴과 옆구리를 공격해 왔다. 아운은 무림에서 최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두 사람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태연했다. 두 사람의 공격이 아운을 핍박하려는 순간 아운은 앞으로 세 걸음을 걸어 움직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공격은 아운의 곁을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칠보둔형보법이 펼쳐진 것이다. 달래 신기란 이름이 붙었겠는가? 천고의 절기는 너무 쉽게 두 사람의 공격을 헛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두 사람이 놀라서 동작을 멈추며 재차 공격을 하려 할 때였다. 아운이 교연을 한 손으로 잡은 채 다시 두 걸음을 걸어 허태무에게 다가서며 자유로운 오른손을 금강룡 권법 내의 절기인 금강추의 초식으로 허태무의 복부를 향해 내질렀다. 칠보둔형의 두 걸음은 단 한 번에 아운과 허태무의 거리를 공격하기 가장 좋은 거리로 좁혀 주었고, 그의 주먹은 너무 빨랐다. 허태무는 막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이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충격이 강하면 사람이 뒤로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쓰러진다. 마치 개구리처럼 땅바닥에 엎어진 허태무는 오장육부가 조각조각 부서지는 고통을 느끼면서 일어서질 못했다.

허태무가 그 자리에 쓰러지는 순간 아운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다급하게 공격해 왔던 노숙의 귀조가 흩어진 아운의 신형이 있던 공간을 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공격이 지나간 자리에 아운의 신형이 다시 나타나며 다시 한 번 오른 손을 노숙에게 내질렀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아운의 주먹이 연환금강룡 권법의 유운성월로 노숙의 얼굴을 쳐버렸다. 노숙 역시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기절한 것이다. 역시 칠보둔형에 이은 연환금강룡의 권법이었다. 일권. 일압. 강자부터 약자까지 단 한 주먹이었다.

일초식이 아니라 단 한 번의 주먹. 현무단의 일반 무사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미 자신들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깨우친 다음이었다. 명정은 순간적으로 망설여야 했다. 자칫했다가는 망신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무공은 지금 당했던 노숙이나 현무단의 단주 등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무림맹의 정식 장로란 그렇게 쉬운 자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라고 해도 노숙과 같은 고수를 단 한 주먹으로 이기진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의 청년은 그 무공의 깊이가 능히 삼룡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란 말인가? 물론 명정은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노숙이나 현무단의 단주가 너무 쉽게 보았다가 당했다. 교활한 놈이다. 약한 척하다가 일거에 제압하다니…….’

명정이 본 아운은 교활하면서 제법 무공이 고강한 청년 정도였다. 아직 자신을 이길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주춤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명정이 북궁연을 슬쩍 보았다. 그녀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명정은 그 시선을 보고 더욱 확실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신의 부군이 꽤나 걱정되는가 보군. 하지만 늦었다.’

생각을 굳힌 명정은 결연한 의지를 보인 채 북궁연을 보고 말했다.

“총사, 보시다시피 이젠 내가 참을 수 없게 되었소. 아무리 총사의 부군 될 사람이지만 초사는 참견하지 않을 거라 믿겠소.”

북궁연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애처로운 시선으로 명정을 본다. 명정은 꿈쩍도 하지 않고 북궁연을 마주 보았다.

“물론 저는 이 일에 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명 장로님께서는 부디 조심하세요.”

명정은 순간적으로 북궁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해석을 한 명정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조심하라니. 그러니까 내가 자신의 부군에게 해를 가하면 차후라도 반드시 보복을 하겠단 말인가? 마음대로 해 봐라. 감히 나에게 협박을 하다니……. 내 저 놈의 뼈를 분질러 그 말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꿈보다 해몽이라고 했단. 나름대로 멋진 해석에 혼자 화까지 난 명정이었다. 명정의 화난 모습을 본 소홀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아무리 생각해도 공자님이 나이든 무림맹의 장로라고 봐 주진 않을 것 같은데, 뒤가 많이 시끄러워질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간단하게 주먹질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서…….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북궁연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말했다.

“나이 드신 분의 말을 따라야겠죠. 우리더러 참견하지 말라고 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소홀은 북궁연을 보았다. 안됐다는 표정으로 명정을 보면서도 무엇인가 기대가 어린 표정.

‘설마 아가씨께서…….’

소홀은 무엇인가 짐작하고 안심을 했다. 그 기분을 느낀 소홀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안심되는 기분이라니……. 아가씨가 안 말리는 것이 왜 안심이 되고 기대가 되지?’

스스로 대답을 찾으며 그녀는 명정과 아운을 보았다. 명정은 천천히 아운을 향해 가면서 말했다.

“교활하구나. 무공을 숨기고 있다가 상대가 자신을 얕보게 한 다음, 일거에 제압하다니…….”

명정의 말에 아운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이라면, 당한 놈이 바보지. 그리고 제대로 못 본 사람은 멍청하고…….”

아운의 웃음은 마치 명정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말투도 그렇다. 명정의 말이 옳다는 것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하다. 그래서 명정은 더욱 기분이 안 좋았다. 그는 자신의 절학인 명왕신권을 끌어올리고 천천히 아운을 향해 다가섰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아운이 말했다.

“동작에 사설이 많군. 그냥 빨리 오기나 하지. 어차피 한 주먹인데…….”

그 말을 들은 명정이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이놈, 죽어라!”

고함과 함께 명왕신권의 가장 무서운 절학인 명왕추사를 펼쳐 아운을 공격했다. 명정은 이 초식으로 이십 년 전, 강호에 흉명을 떨치던 중주삼살을 단 일격에 죽여 전설을 만든 바 있었다. 아운은 여전히 왼손으로 교연을 잡고, 다른 한 손을 내쳤다. 명정이란 고수를 눈앞에 둔거치곤 너무 가벼운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먹에서 뿜어진 힘은 명정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십성의 공력으로 펼치던 초식을 십이성까지 끌어올렸다.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전부 쏟아 넣은 것이다. 아운의 눈이 반짝였다.

‘과연 무림맹의 장로란 것이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아운은 은근히 감탄하면서 주먹을 쥔 손으로 명정의 권경을 향해 마주쳐 갔다. 두 개의 경기가 맹렬하게 날아가 충돌했다. 명정은 아운이 정면으로 승부를 해오자 내심 쾌재를 불렀다. 정면 승부라면 내공에서 앞선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퍽’하는 소리가 들리며 두 개의 힘이 충돌했다.

그리고 그 순간 북궁연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녀는 시간차로 들리는 충돌 소리를 연이어 두 번 들은 것이다. 그것은 너무 순간적이라 마치 한 번 충돌한 것처럼 들려왔다. 그러나 북궁연은 분명히 두 번의 충돌 소리를 들었다.

명정은 두 개의 힘이 충돌하는 순간 두 개의 힘이 균형을 이루는 것을 느끼고 크게 놀랐다. 상대의 내공과 권경이 자신의 상상을 넘어선 것이다. 설마 이제 이십 대의 젊은 청년이 자신

과 맞먹는 내공과 초식의 정교함을 지니고 있으리란 생각은 못했었다. 명정의 별호가 맹호신권이라고 불린 만큼 권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 그의 권경과 맞먹을 수 있는 후기지수라면 맹세코 삼룡, 삼봉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무명의 청년이 그와 맞서지 밀리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힘이 균형을 이룬다 싶은 순간, 또 하나의 권경이 뒤이어 날아와 자신의 권경을 완전히 무산시켜 버렸다. 그리고 두 번째 힘은 첫 번째 힘의 두 배에 해당했다. 그 압력에 명정은 온 몸이 부서져 나가는 통증을 느끼고 급하게 피하려 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밀고 들어온 권경은 명정이 피할 수 있는 범위를 완전히 차단한 채 밀고 들어왔다.

드디어 연환육영뢰의 일기영, 이벽권으로 이어진 중첩권이 펼쳐진 것이다. 아운이 이 초식을 만들게 된 계기는 장무린의 단엽중첩경과 겨루고 나서였다. 그때의 결투 경험을 살려 이 무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정말 부단하게 연구 노력을 했었고, 이제 어느 정도 그 결과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사실 그 이전에 아운은 비슷한 방법으로 연환육영뢰를 펼친 적이 있었고, 그 원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숙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면서 참오했고, 근래에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다. 그는 아직 이 초식의 이름조차 만들지 못했다. 단 일 권에 두 개의 힘을 연이어 중첩으로 보내는 이 무공은 명정으로서도 불가항력이었다.

‘크아악’하는 비명과 함께 명정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풀썩 엎어지고 말았다. 권경의 힘에 의해 몸이 밀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오며 쓰러졌다. 엄청난 압력에 의해 둘 사이가 진공상태가 되면서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였고, 명정도 뒤로 튕겨 나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빨려온 것이다. 명정이 단 일권에 쓰러지자, 북궁연과 소홀도 상당히 놀란 눈치였고, 현무단의 단원들은 감히 아운과 시선을 마주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끄으윽’하는 신음을 흘리며 명정은 겨우 일어섰지만 다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운은 속으로 아직 자신의 중첩권이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깨우쳤다. 만약 완벽했다면 명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거나 죽었을 것이다. 처음 일기영의 위력은 완벽했지만 뒤이어 파고 든 이권벽은 칠할 정도밖에 제 힘을 내지 못했다. 아운은 다시 한 번 중첩권의 운결을 생각하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아운의 아쉬움과는 달리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의 놀라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무리맹과 호연세가의 고수 네 명이 모두 아운의 단 일권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교연이나 당사자인 명정을 이 사실을 보고, 직접 당하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아운의 시선이 교연을 향했다.

“교연이라고 했나?”

아운의 말에 교연은 마른침을 삼키고 의연한 표정을 말했다.

“그렇소. 호연세가의 제이 군사인 교연이오. 그러니 예의를 차리시오.”“군사라, 그럼 머리가 좋겠군.”

교연이 아운을 보았다.

“그러면 이제부터 뭐가 옳고 그른지 명확하게 판단하도록…….”

아운의 말에 교연은 내심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거야 당연합니다.”

아운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는 교연의 멱살을 잡은 채, 쓰러져 있는 현무단의 단주와 부단주에게 다가가서 바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마구잡이로 걷어찼는데 두 사람은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기절하기를 반복한다. 살 떨리게 험악한 아운의 모습에 교연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으며 단주인 허태무와 부단주인 정기는 처음엔 이럴 수 있는가? 하는 반발심에 대꾸를 하였다가 아운의 발이 입안에 쳐 박히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두 사람의 이빨은 한 개도 남김없이 땅바닥에 쏟아져 나왔고, 팔, 다리가 그 자리에서 꺾어졌다. 교연은 그 모습을 보면서 머리가 하얗게 비는 것을 느꼈다. 지금 아운은 그에게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을 잘못하면 이들과 똑같이 될 거란 암시였다. 그러나 그는 아운의 뜻을 오해했다. 그건 협박이 아니었다.

아운의 무자비한 모습을 보면서 소홀과 북궁연은 차마 보지 못하고 돌아서 있었다. 소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고 있었지만 정말 무서운 분이시군요.”

북궁연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말했다.

“남자는 독해야 세상을 산다고 했어.”“그렇죠. 사실 저 두 자식은 유난히 북궁세가의 일에 참견을 많이 하던 놈들이라 언제고 제가 손봐주려던 참이었어요.”

그 말을 하면서 소홀은 고개를 슬쩍 돌려 사정없이 맞고 있는 두 사람을 본 후 북궁연을 보면서 말했다.

“아가씨, 말려야 하지 않겠어요?”

북궁연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남자가 하는 일에 여자가 끼어들기가 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소홀이 말했다.

“그렇죠. 어쩔 수 없네요.”

그렇게 말하는 소홀의 얼굴은 화장실에 가서 묵은 변을 다 쏟아놓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북궁연의 표정은 전혀 큰 변함이 없었다. 담담한 표정이다. 그러나 그녀의 눈을 본 소홀은 웃었다. 그녀의 눈엔 그동안 참아왔던 묵은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들은 무림의 여인들이다. 죽은 사람을 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닌데, 지금 정도의 일로 당황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명정과 노숙을 비롯해서 맞고 있는 허태무와 정기는 달랐다. 설마 무림맹 안에서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일을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절대적이라 믿었던 무림맹과 호연세가의 명성과 위엄도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믿음과 벽이 깨지자 견딜 수 없는 공포가 그들을 공황 상태로 몰고 갔다. 이제야 그들은 아운이란 인간이 정말 자신들을 이 자리에서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을 완전히 뭉게 놓은 아운이 노숙과 명정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아직은 참지. 그래도 예의란 것이 있으니 나이 값을 쳐 주겠다. 하지만 한 번 더 내 손에 걸리거나 오늘 단 한 번이라도 내 일에 참견하면, 그땐 이들과 똑같아 질 것이다.”

이건 협박이었고, 정말 그렇게 하리란 것을 명정이나 노숙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감히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대꾸를 하게 되면 그 결과를 충분히 알 만큼 아운의 눈은 살벌했다. 그리고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란 것을 이젠 알았다.

이미 돌아서서 그 광경을 본 소홀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의도 있으시네요.”

북궁연이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야 문사 출신이니 당연한 거지.”

소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면서 북궁연을 본다. 북궁연은 그녀의 시선을 냉담하게 외면했다.

일단 명정과 노숙을 완전히 제압한 아운의 시선이 이번엔 멍하니 서 있는 현무단의 단원들에게 옮겨졌다. 모두 두려움에 얼어붙은 표정들이었다.

“내가 일을 끝낼 때까지 움직이는 놈들은 저것들처럼 될 것이다.”

아운의 말에 그들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와 내 여자에게 무례했던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똑똑하게 봐 두었다가 세상에 알려라!”

다시 한 번 현무단원들의 고개가 정신없이 끄덕여진다.

아운의 선포를 들은 북궁연의 얼굴이 붉어지자, 그 모습을 본 소홀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멋진대요? 주먹 못지않게 말도 잘하시네요.”

북궁연이 대답했다.

“문사 출신이시니까…….”

소홀이 북궁연을 본다.

“좋으시겠어요.”

북궁연은 슬쩍 웃으면서 소홀의 시선을 다시 외면했다.

이번엔 아운의 시선이 교연을 본다. 교연은 빠르게 머리를 돌렸다. 지금 상황이라면 빨리 아운의 편을 들고 이 위기를 벗어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크게 당할 판이었다. 머리를 돌려 할 말을 정리한 교연은 자신 있었다. 이제 자신이 말을 시작하면 아운은 충분히 만족하고 자신은 교묘하게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그래서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말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겐 그럴 기회가 없었다. 아운의 주먹이 교연의 얼굴에 꽂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아운은 그때부터 무차별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허태무와 정기가 당한 것은 교연에 대한 협박이 아니라 전주곡이었던 것이다. 교연은 어떤 말도 할 사이가 없이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온 몸의 뼈란 뼈가 모조리 자리를 이탈하고 분질러지는 아픔과 오장육부가 전부 터져 버릴 듯한 고통은 교연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그는 이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아닌 단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좋은 머리도 지금은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생각해 두었던 말들은 고통 속에서 이미 다 잊고 말았다.

아운의 주먹이 그의 복부를 후려쳤다. 삼 일 전에 먹은 음식찌꺼기까지 전부 토해놓은 교연의 손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살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아운의 주먹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아운이 뒷골목 흑도에서 확실하게 배운 것이 있다면 일단 손을 봐줘야 할 상대가 있을 땐, 다시는 자신을 향해 불손한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확실하게 처리를 하든지, 아예 죽이든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야 차후 뒤가 편안해진다. 특히 말이 많고 교활한 자일수록 뒤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감히 엉뚱한 생각을 품을 여지조차 주지 말아야 한다. 생각만 해도 오금을 펴지 못할 만큼 확실하게 다루어 놓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보복을 당하게 된다. 특히 주먹을 쓰는 자보다 머리가 교활한 자는 더욱 골치가 아파진다. 그리고 그들은 생리상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아주 교묘한 말로 빠져 나간다. 그런 자들을 다룰 땐 감히 틈을 볼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고 마음속에 감히 딴 생각을 품지 못할 만큼 공포심을 심어 주어야 했다. 자신의 말이 안 먹히고 무시하는 상대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심어 주어야 했다.

아운의 구타는 무자비했다. 조금의 용서가 없었고 누가 봐도 때려죽이려는 기세였다. 보고 있는 사람들이 기가 질려 감히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 중에 두 사람은 임 충분히 지옥을 경험한 후였다. 아운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자근자근 저며 주듯이 때리는데, 교연은 공포로 인해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고 말았으며 영활하게 돌아가던 머리는 이미 멈춘 지 오래였다.

“그…그만…….”

교연이 겨우 고함을 지르자 아운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내 맘이지. 건방지게 맞는 놈이 말이 많군.”

아운은 그 말을 했다고 다시 세차게 구타를 해 댄다. 말을 하면 말을 했다고, 손을 흔들면 흔들었다고 팬다. 그렇게 무려 일각이나 맞고 나자, 교연은 고통 속에서 자신이 뭘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빠르게 생각했다. 그래도 그는 바보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손을 내저으며 항복을 선언하고 빌고 별 짓을 다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운의 구타는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패는지 고통은 갈수록 배가되고 정신은 잃지 않는다. 아운이 겨우 행동을 멈추고 말했다.

“좀 쉬었다 해야겠군.”

그 말을 들은 교연의 심정은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리고 교연은 지금이 아니면 자신이 맞아 죽을 것이란 것을 알았다. 상대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괴물이었다. 정말 때려죽이는데 인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고……. 공자님. 이제야 생각났습니다.”“뭐가?”“오늘의 잘못은 무조건 무림맹과 호연세가의 자……잘못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좋아. 그럼 그 이유가 뭐지? 그 합당한 이유를 대 봐라.”

교연은 침을 삼켰다. 그는 오로지 이 지옥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모든 머리를 전부 쥐어짰다. 아주 약간이라도 잔머리를 굴릴 생각은 당연히 못했다. 그 다음 결과가 얼마나 참혹할지 이미 몸으로 경험한 다음이었다.

교연은 여기서 아운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말 죽을 거란 것을 알았다. 이후의 일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고,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그저 빨리 아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무림맹과 호연세가가 아운과 북궁연에게 잘못한 것을 골라서 조리 있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이지 아운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의 언변은 빙판의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것처럼 매끄러웠다. 자신이 하는 말로 아운의 맘에 들기 위해서 그는 무림맹과 호연세가를 깎아 내리는 말로 서슴치 않았다.

그것을 지켜보는 명정과 노숙은 기가 막혔지만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말을 하고난 다음이 너무 두려웠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소홀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북궁연을 보면서 말했다.

“말 잘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말하게 만드는군요. 정말 기가 막힌 방법입니다.”

북궁연도 고개를 흔들었다.

“저런 방법이라면 주먹이 말보다 확실히 강하네.”“생각할 기회도 안 주네요.”“다시는 가가 앞에서 잔머리 굴릴 생각도 못하겠지?”“저러고도 다시 잔머리를 굴릴 수 있으면 인간도 아니겠죠.”“정말 무서운 분이네.”“아가씨에게 무례했던 사람들, 앞으로 두 발 뻗고 자긴 글렀군요.”

북궁연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면서 고소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일일이 고자질할 수 없잖아.”

소홀이 웃었다.

“아가씨는 잊은 것이 있군요.”“뭘?”“이거.”

소홀이 품안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어 슬쩍 보여주었다. 북궁연의 눈이 커진다.

“정말로…….”“아가씨에게 무례한 자들은 지나가던 강아지까지 다 적어 놨지요.”

북궁연은 놀라서 소홀을 보다가 그만 웃고 말았다. 소홀의 미묘한 표정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소홀은 그런 걸 정말 적어 놓다니, 못 말리겠군요. 남들이 보면 흉 봐요.”

북궁연의 말에 소홀이 슬쩍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이거 그냥 태워버릴까요?”

북궁연은 조금 망설이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하면 소홀이 고생한 보람이 없어지잖아. 할 수 없지. 그대로 두세요.”

그 말을 듣고 소홀이 웃는다. 북궁연의 시선은 먼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의 구름 속에서는 그동안 북궁세가를 괴롭히던 무리들의 앞날이 꿈처럼 아련하게 보인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도 북매란 이름의 고매한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었다. 희노애락이 있고, 쌓인 감정이 있으면 풀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였다. 그녀는 정말이지 너무 많이 참아 왔다. 만약 자칫해서 자신이 도발이라도 하여 실수라도 하게 되면 할아버지가 없는 북궁세가가 세풍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항상 먼저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묵묵히 때를 기다려 왔었다.

교연이 급하게 말을 쏟아내자, 아운이 따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말 많은 놈이 제일 싫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해라!”

교연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이미 무림맹과 호연세가에 대해서 할 말은 다 끝이 난 다음이었다. 교연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우치고 마른침을 삼켰다. 머릿속이 텅 비어 오는 느낌을 받았다.

‘내…….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이제 나도 끝이구나.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어떻게 하던…….’

교연은 지금 자신이 한 말들은 무림맹 내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들도 많았다는 사실을 알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이제부터라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어떻게 하던 수습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입지는 그걸로 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할 기회가 생겼다면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 생각을 다시 집어넣어야 했다.

“다시 잔머리가 돌아가는군.”

그 말고 함께 아운의 주먹이 사정없이 교연의 머리를 쳤고 이어서 말이 그의 복부를 강타해 버렸다. 머리가 하얗게 비워져 버렸다. 조금 전 고통스런 생각이 떠오르자, 딴 생각은 전부 날아가 버렸다. 아운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다시 반각에 걸쳐 구타를 당한 교연은 아운의 발을 잡고 매달리며 필사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혼쭐이 난 교연의 뇌구조는 완전히 개조가 되고 난 다음이었다.

“우……. 우리가 잘못한 점은 이렇습니다. 무림맹의 규칙상 무림맹 요직의 배우자가 확실한 사람이람녀, 그 요직에 있는 사람의 직위에 준하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개 문지기 조장 따위가 공자님을 경시했으면 벌을 주어야 마땅함에도 오로지 총사를 욕보이기 위해 공자님에게 위해를 주려고 있습니다.”

그 말에 아운은 구타를 멈추고 교연을 내려다본다.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볼 뿐이었다. 그러나 교연은 그것이 더 무서웠다. 일단 자신의 말이 조금이라도 아운의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하자 기뻐서 눈물이 다 나온다. 빨리 더 마음에 드는 말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몸에 고통이 안 온다. 그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아직 총사의 부군이란 사실이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욕보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확실해지면 풀어주고 설마 이런 사람이 총사의 부군일 줄은 몰랐다고 할 작정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전부 공자님이 총사님의 부군될 사람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정말 우리는 그것을 알고 공자님을 능멸했으니 그 죄가 막중합니다.”

말을 듣고 있던 북궁연과 소홀이 기가 막히다는 시선으로 교연을 본다. 한편 노숙은 더 이상 교연이 말을 했다가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다급했다.

“이 멍청한……. 캑.”

그러나 노숙은 단 몇 마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아야 했다. 노숙이 말을 하려 하자, 아운은 교연이 신고 있던 신발을 벗겨 던졌고, 신발은 그대로 노숙의 입안에 들어가 틀어박히고 말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아운의 내공이 주입된 가죽 신발은 돌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노숙의 입안이 완전히 망가지는 순간이었다. 부서진 이빨과 피가 가죽신을 타고 내려온다. 노숙은 뒤로 다시 일장이나 굴러가서 기절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열어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명정 역시 교연에게 소리를 치려다 기겁을 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운은 노숙의 입을 다물게 한 다음 친절한 목소리로 교연에게 물었다.

“교연이라 했지?”

교연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마음에 드는데, 계속하지.”

교연은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혹시 공자님께서는 총사님이 자신의 부군될 사람이라고 확실하게 밝혔는데 우리가 이럴 수 있느냐? 의문을 가지신다면 거기에 대답은 이렇습니다. 총사님이 공자님을 보호하기 위해 꾸민 말인 줄 알았다고 둘러댈 생각이었습니다. 아니면 이미 기절한 문지기 조장이 말을 하지 못했기에 거기에 대한 보고는 듣지 못했다고 둘러댈 생각이었습니다.”

교연은 말을 하면서 아운의 표정을 살폈다. 아운 역시 교연을 바라본다. 무엇인가 아직도 못 마땅한 표정이었다. 교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겁을 했다. 이번에 한 번 더 맞으면 분명히 죽을 것 같았다.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교연이었다.

“이 모든 것은 장로원이 아니라 호연란이 시켰습니다. 상아도후 호연란 령주가 명령을 내렸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저는 호연란 령주가 명령을 내릴 때 바로 곁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장로원을 평계 삼아 총사님을 능멸하려 했습니다. 그녀도 이미 공자님이 총사님의 부군될 남자란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모두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엉엉…….”

끝내는 공포에 질려 울고 만다. 그 모습은 눈 뜨고 못 봐줄 풍경이었다. 명정이 말리고 어쩌고 할 시간조차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뱉어진 말이니 다시 집어넣을 수도 없었다. 명정과 현무단 단주, 부단주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갔다. 그러나 그들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다음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 일에 호연란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짐작할 만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 호연란이 아니라고 우기면 된다. 그런데 호연란이라는 이름이 직접 거론되었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발뺌할 여유가 좁아진 것이다. 더군다나 호연란의 충복이 직접 한 말이니 방법이 없었다. 아운이 웃으며 말했다.

“호연란이란 계집의 계급이 총사보다 높은가?”“절대 그렇지 않습니다.”“누가 더 높지?”“총사님이 조금 더 높습니다.”“그럼 하극상이군. 그렇지 않은가?”

아운이 교연을 노려보며 말하자, 교연은 황급하게 대꾸를 했다.

“그렇습니다. 굳이 따진다면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월령의 령주로서 임무를 완수하고자 한 일이라면…….”

아운은 교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상황은 상당히 미묘했다. 비록 총사에 대한 하극상이 될 수도 있지만 비월령의 직책으로 따지다면 그녀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고 우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비월령은 정보를 수집하고 간세를 잡아내는 임무와 정찰, 그리고 무림맹에 불리한 행동을 하는 자들을 색출하고 제거하는 임무를 함께 수행하는 곳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아운은 말하기에 따라 비월령의 표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아운은 무림맹의 조장을 크게 다치게 했다. 그것도 무림맹 내부에서……. 물론 그렇다고 해서 총사의 남자를 건드린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유를 만들기만 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운에게 그런 것이 통할 리 없었다.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간단하게 말해라. 무림맹에서 하극상은 어떻게 되는가?”“매우 엄벌에 처해집니다.”“그 엄벌이 어느 정도인가?”“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무림맹의 요직에 있는 자일 겨우 장로원의 회의에 따라 결정됩니다.”“장로원의 회의 결국, 판결을 결정하는 것은 장로원이란 말이군.”“그렇습니다.”

“그럼 하나마나군. 전부 같은 족속일 테니…….”

아운이 명정을 노려보고 말하자. 명정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아운의 말은 사실 그대로였다. 하지만 누가 대놓고 저렇게 말할 수 있으랴.

“좋아. 그럼 호연란이란 계집에게 가서 전해라! 사과 따윈 받지 않겠다. 대신 오늘 일은 잊지 않겠다고…….”“예. 꼭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명정이나 다시 정신을 차린 노숙은 이제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다. 그들은 교연의 말을 듣고 있다가 아운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들으며ㅕ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남을 괴롭혀 보았어도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었던 그들이었기에 지금 상황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정파란 허울을 뒤집어 쓴 그들이었기에 어떤 일을 하는데 절차가 있어야 했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명분이란 것을 중요시하며 살아왔었다. 폭력을 사용해도 남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사용하거나, 정면에서 사용할 땐 그래도 품위 있게 사용했었다. 물론 그 안에서 온갖 짓을 다 했어도 일단 표면상으로는 그랬다.

그런데 아운은 전혀 달랐다. 그는 대 놓고 주먹질부터 시작을 한 것이다. 그에겐 무림에서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무림맹이나 호연세가라는 이름이 무용지물이었고 행동을 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남들 눈을 의식하거나 명분을 따지지 않았다. 굳이 이러니저러니 시시비비도 따지지 않았다. 명정이나 노숙은 이런 종류의 사람을 상대해 본 경험이 없었다.

그것은 교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법 무공 좀 할 주 안다고 하는 자들이라야 자신의 세치 혀에서 놀아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틈만 있으면 그의 혀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곤 했었다. 특히 아무리 교활하고 잔인한 성품의 무인이라도 그들에겐 체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고, 남의 눈을 많이 의식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정파의 명숙일수록 심한 편이라, 그 점만 잘 이용하면 그의 혀는 능히 초절정 고수 이상의 힘을 내곤 했다. 그러나 아운은 달랐다. 아니 말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무조건 주먹질부터 하고 나서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는 자에게 무슨 말이 통하겠는가? 교연은 세상에 이런 몰상식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그 인간이 여기 있을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리고 설사 아운이 그 자인 줄 알았다고 해도 피부로 느끼기 전에는 제대로 그 가치를 알기 어려운 법이었다.

소홀이 교연이 하는 말을 전부 듣고 나서 아운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까지 들으면서 북궁연을 보고 말했다.

“공자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군요.”

북궁연이 상기된 얼굴로 소홀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소홀에게 그 이유를 묻고 있었다.

“할 짓은 다했지만 교연이 한 말로 인해 이제 그 누구도 공자님에게 허튼 짓을 하기 어렵게 되었잖아요. 이제 호연란은 다른 사람이 공자님을 공격하려 해도 막아야 할 판이에요. 자칫하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그리고 이미 공자님이 아가씨의 부군이 될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고 했으니 더 이상 어떤 핑계거리도 찾을 수 없게 되었어요. 이 일로 인해 그녀는 좀 많은 손해를 볼 것 같아요.”“하지만 교연이란 자가 폭력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말을 했다고 할 수도 있잖아요.”“공자님은 그냥 치기만 했지. 묻지도 않았어요. 그러니 명분이 있지요. 그리고 저길 보세요.”

북궁연은 소홀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매화각이 보이는 건물 곳곳에 많은 사람들이 숨어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 근처를 순찰하던 순찰 무사도 있었고, 다른 누군가가 보낸 첩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직접 아서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교연이 하는 말을 전부 들었다. 북궁연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공자님은 모든 것을 예상하고 일을 가장 간단하게 처리하신 것이다.’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들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간단하게 일을 처리했지만, 과연 누가 권왕과 같은 방법을 망설이지 않고 사용할 수 있을까? 힘든 일이었다. 감히 단언하건데, 자신의 부군이 권왕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신없이 쏟아내는 교연의 말을 다 듣고 난 아운이 명정과 노숙을 보면서 말했다.

“이렇다는 군. 이제 당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겠지? 그럼 이제 수하들과 함께 고이 돌아가도록……. 아, 다시 올 땐 심사숙고해서 오는 것이 좋을 거야. 힘이 모자라면 그런 눈치라도 있어야겠지.”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돌아서서 휘적거리며 북궁연에게 다가갔다. 북궁연이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아운을 맞이했고, 소홀은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아운은 그녀들과 함께 매화각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으며, 매화각 정문을 지키던 두 명의 여무사는 그저 멍한 모습으로 아운 일행의 뒷모습을 보기만 했다. 교연은 아운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맥이 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교연의 귓가에 아운의 전음이 천둥처럼 들려왔다.

- 나, 권왕 아운이다.

그 말을 들은 교연의 얼굴이 다시 한 번 하얗게 질겨갔다. 이제야 자신들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들었던 권왕 아운에 대한 전설을 생각하며 그의 말을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않았다. 들은 대로의 권왕과 지금 자신들을 상대한 자의 성정이 완벽하게 일치했던 것이다. 그리고 권왕이 아니라면 누가 명정을 한 주먹으로 이기겠는가? 이제야 상대가 터무니없이 강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들이 진 것은 아운을 우습게 보다가 당한 실수가 아니라, 정확하게 실력에 진 것이다. 만약 상대가 권왕 아운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런 멍청한 짓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누가 감히 그에게 정면으로 덤비겠는가? 다시

한 번 아운의 전음이 들려왔다.

- 만약 내 정체가 밝혀지면 네 놈의 머리통을 부셔 놓겠다.

말투 자체가 완전히 뒷골목의 하류잡배의 말투였지만, 그것이 지금은 더 무섭다. 교연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교연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아운이 권왕이란 사실을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해야만 한다. 무림맹이나 호연세가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버렸다.

수하들의 보고를 받은 호연란의 표정은 담담했다.

“후후, 그 자 제법이군. 총사의 부군 될 자격이 있는 자야.”

호연란은 경탄한 표정이었다. 일이 틀어지거나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 것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앞에 앉아 있던 설비향은 그녀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도 호흡 한 번 거칠어지지 않다니, 과연 대단한 분이다.’

굳이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 것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보고대로라면 상대는 명정을 일권에 이긴 자였다. 물론 설비향의 판단으로 본다면 명정 일행이 상대를 너무 쉽게 보았다가 그 교활함에 당했다고 판단하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상대의 무공은 절대 만만치 않다는 것이 설비향의 생각이었다. 그것을 호연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담담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이리라. 설비향이 본 호연란은 시간이 갈수록 독해지고 강해졌으며 노련해져 갔다.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그녀의 재지는 설비향으로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설비향이나 호연란은 자신들의 상대가 권왕 아운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아운의 활동 무대가 감숙 부근이었고, 그와 함께 행도하던 우칠 일행이 없었으며, 그들이 판단하건데 절대 귀족 태생이 아닌 권왕 아운이 북궁연의 배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설비향은 아운의 행동이나 그의 성격을 분석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내린 결론은 아운이 뒷골목 출신이거나, 마도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명문 출신인 북궁연이 그런 자와 어렸을 때부터 어떤 인연이 닿아 있으리란 생각을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야말로 똑똑한 자가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당한 셈이라 할 수 있었다. 설비향이 호연란을 보면서 물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특히 교연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호연란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주인을 팔았으니, 용서 할 순 없죠. 본보기를 위해서도…….”“죽인다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의혹을 살 수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처벌한 다음, 배신자의 낙인을 얼굴에 찍어 쫓아내 버리세요.”

호연란의 단호한 말에 설비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다시는 설익은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배신자란 낙오와 함께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의 자백은 총사의 남자가 주먹으로 협박하는 바람에 살기 위해서 한 말이라고 자백을 받아 놓겠습니다.”“그 부분은 각주가 알아서 하세요.”

호연란이 냉정하게 말하자, 설비향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연을 몹시나 싫어하던 설비향이었다. 지닌 그릇이 교활하고 깊은 지혜가 아닌 잔머리로 부군사가 된 교연을 언제나 경멸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 기회에 혀 바닥이나 뽑아 놓아야겠군.’

설비향은 생각할수록 통쾌한 생각이 들었다. 비록 보는 눈이 있어서 죽이진 못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혀를 뽑아내는 것은 당연한 조치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설비향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연란이 그를 보면서 명령을 내렸다.

“총사의 남자에 대해서 모든 것을 조사해 보고하도록 하세요. 그에 대한 것이라면 아무리 소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말고 조사해 주세요.”“충.”

설비향이 간단하지만 확실하게 대답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뒤로 물러서 있죠. 우리가 아니라도 그 자와 북궁연을 상대할 사람들은 많은 테니. 그리고 권왕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호연란의 물음에 설비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에 대한 모든 것이 의문투성입니다.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자 같습니다. 그가 처음 나타난 곳은 동정호 근처의 낭인촌이라고 합니다. 한데 그 이전의 행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행적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권왕과 함께 있던 자들도 사라졌습니다.”

설비향이나 호연란이 아운이나 흑칠랑 일행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가택과 살수들만이 아는 길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삼대 살수란 이름이 달래 붙은 것이 아니었다.

“현재 세가의 정보망을 총 동원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그 부분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권왕과 함께 있던 자들 중, 중원의 삼대 자객 중 한 명인 흑칠랑과 야한으로 생각되는 자들이 있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겠죠.”“제 생각엔 흑칠랑과 야한 같은 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가의 정보망을 피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사라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설비향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본 호연란은 설비향에게 나름대로 비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믿고 있겠습니다.”

설비향이 묘하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구, 그는 절강성 신아현 출신이었다. 나이 여덟 살에 뜻한 바가 있어 강호의 기인을 찾아 세상을 헤맸고, 열두 살에 드디어 원하던 기인을 만날 수 있었다. 스승인 대산진인은 왕구를 보자마자 그를 제자로 삼으며 말했다.

“너는 비록 키가 작고 왜소해 보이지만, 능히 천하제일 인이 될 만한 그릇이다. 내게서 십 면만 무공을 닦으면 세상이 모두 네 주머니 속에 들어갈 것이다.”

왕구는 스승이 너무 맘에 들었다. 우선 자신의 왜소한 체구와는 달리 풍체가 당당한(사실은 비만한) 것도 마음에 들었고 우선은 자신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스승은 선인이라 할 만 했다. 그리고 십 년 후엔 천하제일 인이라고 하지 않은가? 왕구는 무조건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십 년 동안 스승의 수발을 들며 열심히 무공을 닦았다. 십 년이 지난 후 스승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아. 세상의 무공이 날로 발전하고 있구나. 그런데 너의 진전은 너무 느리니, 넌 다시 십 년을 더 수련해야겠구나.”

왕구는 그 말도 믿었다. 그리고 다시 십 년. 정말 뭐같이 고생하며 스승에게 무술을 배웠다. 비쩍 마른 몸에 낮에는 일찍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아 스승을 봉양했으며, 저녁부터 새벽까지는 죽어라 무공을 배웠다. 그렇게 이십 년이 지났다. 왕구의 나이 서른둘이었다.

북궁연의 거처로 돌아온 아운과 북궁연 일행은 나란히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운은 조금 전 있었던 일은 이미 모두 잊은 듯 차를 마시는 것에 열중했다. 북궁연과 소홀은 그런 아운을 보고만 있었다. 보기만 해도 듬직한 모습이었다. 차를 다 마신 후 아운이 북궁연을 보면서 말했다.

“연 누이는 그동안 총사로서 임무를 조금 소홀히 하고 있었던 것 같소.”

북궁연은 아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 뿐인 총사지요. 총사로서 내 임무를 완전하게 하기란 여러 가지 여건이 너무 빈약했어요.”“그럼 묻겠소. 총사가 무림맹에서 하는 일이 무엇이오?”“크게 몇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일이라면 형법을 집행하는 일을 하지요. 또 대내외적으로 무림맹의 당주급 이하의 무사들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런데 가가께서는 그것을 왜 물으시는지요?”

아운이 묘하게 웃으면서 다시 물었다.

“대답은 좀 있다 하리다. 그런데 형법을 집행 한다는 것은 무엇이오? 그 부분을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간단하게 저의 직할대인 금룡단이란 별도의 단체가 있습니다. 이들은 무림맹 산하에 있는 무사들이 잘못을 했을 때 그들을 잡아서 압송하거나 적과 내통한 문파들이 있을 때는 그들을 징벌하는 역할을 합니다. 황실에 비교하자면 동창과 비슷한 역할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문제?”

북궁연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고, 소홀이 그 부분을 대신 대답했다.

“금룡단은 그 힘이나 역할 상 무림맹에서 아주 중요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금룡단의 단주는 총사가 겸하고 있지만, 그 외의 수하들은 장로원에서 사 할을, 그리고 구파일방의 제장 중에서 무조건 삼 할을 뽑아야 해요. 그리고 나머지는 총사가 뽑아서 장로원의 허가를 맡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그들은 모두 총사님의 수하가 아니라 장로원이나 자신을 밀어준 자에게 충성을 하게 되죠. 총사님은 그들을 관리하지 않은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아운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소? 단주가 수하들을 직접 뽑지 못하다니…….”“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룡단의 힘이 커지고 그것이 총사님께 힘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장로원과 맹주가 이년 전에 그렇게 결정을 내렸습니다.”“그럼, 그 사정은 나중에 묻기로 하고 내가 그 금룡단의 단주가 되는 길은 있소?”

아운의 물음에 북궁연과 소홀이 놀란 표정으로 아운을 본다. 북궁연이 궁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것은 어렵지 않지만, 가가께서 그럴 이유가 있나요?”

아운은 웃으며 말했다.

“아주 좋은 징조요. 일단 금룡단을 나에게 맡겨 주시오.”

북궁연과 소홀은 더욱 궁금한 표정으로 아운을 본다. 아운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왕구는 스승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제 늙어서 다 죽어가는 스승은 애처러운 눈으로 왕구를 본다. 비록 사기를 쳐서 데려온 제자였지만 늙어서 정 붙이고 살아온 사랑하는 제자였다. 언제고 진실을 밝히고 싶었지만 제자의 의지가 너무 강하고 천하제일 인에 대한 집념이 너무 강해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밖에 나가 사고라도 칠까봐 십 년을 더 잡아 놓았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였다. 자신이 죽고 난 다음엔 분명히 강호 무림으로 나갈 것이고 이제 자신의무공이 겨우 삼류를 조금 벗어난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실망을 할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지금이라도 말을 해주고 싶은데, 너무 의연한 제자의 모습을 보니 그것도 못할 노릇이었다. 그래도 자신에게 배운 무공으로 어디 작은 표국이라도 들어가면, 표두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니 굶어죽진 않을 것이라 위안하며 숨을 놓고 말았다.

‘처음에 만났을 때, 천하제일 어쩌고 하지나 말 걸.’

왕구의 스승은 마지막으로 그 부분을 후회하며 그렇게 죽어갔다. 왕구는 스승의 유해를 정성껏 모신 후 그 앞에서 맹세를 했다.

“스승님, 제가 고금제일무적이 되어 돌아 온 후 이 산 전체를 스승님의 묘지로 사용하겠습니다.”

정말 포부도 당당했다. 그리고 왕구의 꿈은 조금 더 커져 있었다. 그후 산을 내려온 왕구는 당당하게 무림맹을 향해 전진했다. 자신의 무공을 입증하려면 아무래도 무림맹의 맹주와 직접 겨루어 이기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행히 그동안 모아놓은 돈이 조금 있어서 여비는 큰 문제가 없었다. 드디어 무림맹 근교까지 도달한 왕구는 노숙을 하게 됐다. 산에서 자란 왕구에게 노숙은 그다지 불편한 잠자리가 아닌지라 적당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불빛이 보이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 보니 커다란 나무 아래 세 명의 인물이 노숙을 하며 산돼지 한 마리를 굽고 있었다. 마른 체형에 날카로운 인상의 두 남자와 덩치가 산만한 인물. 세 사람은 모두 만만해 보이지 않았지만 왕구는 그들이 마음에 들었다. 문득 생각을 해보니 자신이 무림맹 맹주와 겨루려면 그래도 무엇인가 어필할 품위가 있어야 하고 자신 대신 움직여 줄 수하도 있어야 할 것이다. 마침 용도에 딱 맞는 인물 셋이 나란히 모여 있다. 그리고 덤으로 음식까지…….

‘그래, 이 자식들로 하자.’

결정을 한 왕구는 당당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세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모아지자, 그는 가슴을 활짝 열고 말했다.

“나는 고금제일무적 왕구님이시다. 지금 무림맹 맹주와 겨루러 가는 중인데, 너희들을 내 수

하로 거두려 한다. 영광으로 알고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어라.”

세 사람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건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었다. 흑칠랑과 야한의 시선이 우칠을 향했다. 흑칠랑이 묻는다.

“너 언제 후계자 키웠냐?”

우칠이 고개를 흔들며 왕구를 본다. 왕구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 겁 먹었다 오판을 하고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이 놈들 뭐하느냐? 어서 와서 무릎을 꿇어라! 아니면 내 주먹에 죽을 만큼 맞고 후회할 것이다.”

우칠이 한숨을 쉬면서 일어나려 하자, 야한이 더욱 빠르게 그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하지.”

말을 하는 야한의 한 손은 이미 품속을 더듬고 있었다. 그의 품에 피 묻은 도끼자루가 아직도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흐흐.”

야한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감돈다. 왕구는 야한을 보면서 ‘저 놈이 내 기세에 압도당해 미쳤나?’하는 생각을 했다. 야한은 왕구가 어떤 생각을 하던 관심이 없었다. 그는 왕구에게 조용히 다가선 다음 점잖게 말했다.

“권왕께서 주먹으로 말씀하셨다.”

왕구가 뭔 말이야 하는 표정으로 야한을 본다.

“치매는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뭐 이런 미친 놈이……. 켁.”

도끼 자루가 화려하게 하늘을 가르며 왕구의 이마를 강타했고, 그 힘에 의해 왕구의 몸은 멋지게 뒤로 넘어갔다. 정신이 황홀해진다. 왕구는 그날 매란 것이 얼마나 아픈지 처음으로 깨우쳤다. 아주 확실하게 몸으로. 이미 아운의 폭력에 중독된 야한의 도끼 자루는 무자비하고 용서가 없었다. 그날 왕구는 평생 맞아야 할 매를 한 번에 다 맞고 말았다. 그는 그날 이후 평생 동안 야한의 그림자만 보아도 벌떡 일어서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운이 금룡단의 단주가 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실질적인 단주라고 할 수 있는 북궁연에게 단 하나의 권한이 있다면 바로 자기 대리로 단주를 선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경

우 금룡단의 단주는 총사의 명령 이외에는 누구의 명령에서도 자유롭다. 북궁연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직책이 제 아래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운이 웃으면서 물었다.

“대신 내가 그만 두고 싶은 땐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는 것이 맞소?”“그건 그렇습니다.”“그럼 내가 잠시 금룡단을 맡기로 하겠소. 그리고 내가 지명하는 자들을 금룡단의 단월들로 선출해 주시오.”“그들이 누구누구인가요?”

아운은 웃으면서 지필묵으로 몇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이름을 다 적은 후 아운이 무엇인가 망설이며 말했다.

“혹시 모든 무림맹 이외의 인물들도 선출할 수 있소?”“무림맹 이외의 인물이라면 장로원이나 맹주부에서 허가를 안해 줄 겁니다. 대신 단주의 권한으로 그들의 허락 없이 다섯 명 정도는 임의로 선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단주가 지닌 거의 유일한 권한입니다.”

아운은 만족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때, 종이에 적힌 이름을 보면서 북궁연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명이도 있고, 의외의 인물들이 많군요. 그리고 이 자는 누군가요?”

북궁연이 가리킨 자는 바로 무림맹의 문지기였던 육삼이었다. 비록 그의 사촌형인 육자명은 동생 북궁명과 친한 사이라 알고 있었지만 총사가 문지기 조장의 이름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지기 조장이오.”

북궁연과 소홀은 아연한 표정으로 아운을 보았다. 금룡단이 아무리 이름뿐이지만 무림맹에서 가장 유명한 세 개의 단체 중 하나였고, 그만큼 그 권한도 의외로 컸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문지기 조장을 뽑는다면 누구라도 비웃을게 뻔했다. 그러나 아운은 그저 태연하다. 북궁연도 더 묻지 않았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 정도라면 그다지 어렵진 않을 겁니다. 문제는 명이가 문제인데, 내 밑에 있기 싫어서 금룡단의 부단주도 마다하고 문지기를 했던 참이라 어떨지 모르겠습니다.”“그건 나에게 맡겨 놓으시오. 단, 처남에겐 나중에 말해주시오.”“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하오. 이제 금룡단의 단주로서 가지는 권한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오.”“단주는 당연히 대원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니게 됩니다. 비록 대원들을 뽑는 것은 장로원의 힘이 크지만, 그들을 어떻게 쓰건 그것은 단주의 권한입니다. 그리고 죄가 확실한 자일 경우, 그가 누구든지 잡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만만치 않습니다.”“만만치 않은 이유가 무엇이오?”“실제 잘못을 한 자가 있더라도 그 자가 무림맹의 요직에 있거나 장로원의 장로들과 연관이 있는 자들이라면 수하들이 꺼려하고 잡아들인다고 해도 시끄럽기만 할 뿐 실제 제대로 벌을 받는 경우가 없습니다.”“금룡단에게 직접 문책을 하거나 할 순 없소?”“일반 무인이나 무림맹 소속의 고수가 아닐 경우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무림맹의 조장급 이상일 경우 장로원의 허가나 무림맹의 부맹주님 이상의 허가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럴 경우 범죄자를 잡는 것까지만 허락됩니다. 그 다음 그의 유죄판결이나 벌칙은 장로원의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아운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건 또 어떤 절차가 필요한 것이오?”“일단 어떤 범법자가 잡히고, 그가 무림맹의 조장 이상이라면 장로원은 세 명의 판결 위원을 선발하고, 그들로 하여금 공개 재판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판결된 내용을 가지고 벌을 줍니다.”

아운의 얼굴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주 지들끼리 다 해먹는군.”“그래서 장로원의 힘은 거의 절대적이지요.”

아운은 길게 한숨을 몰아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북궁연은 그런 아운을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운이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재밌군. 정말 재미있어. 사람은 자기가 가진 권력이라면 친 자식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는 법인데, 장로원의 힘이 지나치게 비대한데도 맹주는 그저 보고만 있었단 말이지.”

북궁연과 소홀은 아운이 하는 소리가 마음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아운이 한 말에 무엇인가 가시가 있어 보였던 것이다. 북궁연 또한 아운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말 그렇다는 것을 깨우쳤다. 항상 그 안에 살다보니 그저 그러려니 하고 묻어서 살아 왔기에 깨우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운의 말을 듣고 보니 장로원의 힘이 지나치다. 그들은 현재 무림맹의 맹주에 못지않은 힘과 권력을 지니고 무림맹과 무림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 장로들 중에서 명리에 초연한 자들도 있긴 하지만 그건 극소수에 불과했다. 힘을 지닌 장로들의 힘은 맹주 이상으로 무림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고, 그들은 더욱 강한 힘을 지니기 위해 지금도 부단하게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었다. 장로원에서 어떤 일을 처리함에 모든

결론은 다수결이 원칙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떤 이익을 위해 장로들이 뭉치게 되었고 그들은 모두 서너 개의 분파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이득을 위해 그들은 서로 협력한다. 그래서 어떤 일에도 과반수 이상의 힘을 지닌 채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을 만들어 내곤 했다. 또한 장로원의 장로들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공간에 누가 끼어드는 것을 철저하게 방어해 왔다. 오년마다 한 번씩 장로원의 장로들을 새롭게 뽑았지만 삼십 년이 넘도록 그 구성원에 큰 변화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신들의 힘을 키워왔었다.

북궁연이나 소홀은 그것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아운의 말을 듣고 보니 맹주가 그들을 방관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구든지 자신의 권련을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경계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영역까지 침범해 오는 장로원의 힘을, 맹주는 크게 저항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맹주의 힘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장로원의 힘은 그런 맹주의 권력에 거의 근접해 있거나 어떤 면에서는 넘어서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운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참, 그건 그렇다 치고 주시오.”

아운이 손을 내밀자, 북궁연이 당황해서 아운을 보았다. 무엇을 달라고 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이때 소홀이 무엇인가 깨우친 듯 품안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아운에게 주었다. 아운은 그 책을 받아 들고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들은 이 세상에도 지옥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오.”

북궁연은 소홀이 준 책자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어이 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가가께서는 정말…….”“당연하지 않소. 어떤 남자가 자기 여자를 괴롭힌 자들을 그냥 둔단 말이오?”

북궁연이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말했다.

“제가 정말 큰 봉변을 당한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 알면 속이 좁다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아운이 놀란 눈으로 북궁연을 보면서 말했다.

“몰랐소?”

이번엔 오히려 북궁연이 놀란다.

“예! 뭐가 말인가요?”“나, 속 무지 좁소.”

아운의 태연한 말에 북궁연과 소홀은 그만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하지만 어떤 자식들처럼 체면이나 위신 때문에 응징을 뒤로 미루거나 마음 넓은 척 넘어가지 못하오.”

북궁연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달래듯이 말했다.

“그래도 그들을 응징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나 속 좁고 경우도 없는 사람이오. 명분 찾다가 늙어 죽을 참이오? 내 알아서 할 테니 너무 걱정 마시고, 나를 금룡단의 단주로 선출한다는 공고나 해 놓으시오. 한숨자고 일어나리다. 그리고 오늘 중으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오. 잘 부탁하리다.”

태연하게 말한 아운은 자신의 잠자리로 가버렸다. 북궁연과 소홀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만 바라본다. 그가 사라지자 갑자기 소홀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북궁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홀은 왜 웃죠?”

웃던 소홀이 겨우 진정을 하면서 말했다.

“속 좁은 공자님이 낭군이어서 좋으시겠다고요.”

북궁연의 표저이 멀뚱해진다. 소홀은 그저 웃기만 했다. 앞으로의 일이 너무 기대가 된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무려 오장이나 날아가 쳐 박힌 북궁명은 아직도 정신이 멍한 기분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육자명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북궁명이라면 신주오기 중 한 명인 북궁손우의 손자였다. 그의 재질이 누나인 북궁연에 미치진 못하지만, 나름대로 기재란 소리를 듣는 청년 고수였다. 세상에 그를 일 권에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란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 기적 같은 일을 목적에서 보고 있었다. 아운이 빙긋이 웃으면서 자신의 주먹을 흔들며 말했다.

“아직 멀었군. 처남.”

북궁명은 겨우 일어서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운을 본다. 북궁명은 육자명의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매화각으로 왔었다. 그땐 이미 그의 매형인 하영운은 무림맹 내에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북궁명은 매화각으로 가면서도 의아했었다.

‘매형은 무림인이 아닌데 어떻게 된 일이지? 가출 했다고 하더니 어디서 한 수 배워 온 것인가?’

그 점이 가장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는 매형에게 따질 일이 많았다. 단 하나 밖에 없는 누나였다. 그런 누나를 버리고 집을 뛰쳐나가 연락 한 번 없었던 매형에 대한 원망은 북궁명의 가슴을 불태웠던 것이다. 매화각에 도착한 북궁명은 자고 있던 아운을 강제로 깨운 다음, 그를 원망하며 달려들었고 지금 이 꼴이 난 것이다.

“이……익.”

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달려들려고 할 때였다.

“뭐하는 것이냐?”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북궁연이 소홀과 함께 나타났다. 북궁명은 누나를 보자 안색이 굳어졌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세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누나인 북궁연이었다.

“누……누나?”“네가 감히 매형에게 덤비다니, 누가 너에게 그렇게 가르쳤더냐?”

북궁연의 매서운 일갈에 북궁명은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만 하시오. 연 누이. 내가 처남 입장이라도 그랬을 것이오.”

아운의 말에 북궁연이 얌전해진다. 아운은 북궁명을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네. 처남.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술 한 잔 하며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여기서 멈추세.”

그 말을 남기고 아운은 휘적거리며 나갔다. 북궁명은 멍하니 아운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아직도 자신이 단 일 권을 이기기 못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복 소홀이 다가와 말했다.

“공자님이 지신 것은 당연합니다.”

북궁명이 소홀을 본다.

“저 분이 바로 권왕이십니다.”

그 말을 듣고 북궁명의 입이 딱 벌어졌다. 육자명은 그보다 더하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북궁연을 보았다. 북궁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북궁명과 육자명의 이마엔 식은땀이 흐른다. 그렇게 멍하게 서 있던 북궁명은 무엇인가 정신이 번쩍 든 표정으로 갑자기 아운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뛰어가며 고함을 쳤다.

“매형, 이야기 좀 합시다. 매형이 정말 혼자서 사라신교와 광풍사를 섬멸했습니까? 그거 어떻게 한 것입니까? 이야기 좀 해요. 이야기 좀…….”

그 모습을 보면서 소홀과 북궁연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미 권왕 아운의 명성은 젊은 무인들에게 있어서 우상, 그 이상의 존재였다. 나이 삼십이 되기 전, 천하십사 대 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도 전대미문의 사건인데다, 혼자서 광풍사를 섬멸한 사건은 그를 신화 속의 인물로 만들어 놓았다.

무림맹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북궁연에게 태중 혼약자가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 가시기도 전, 일 년 만에 처음으로 금룡단의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더욱 놀란 사실은 금룡단의 새로운 단주가 바로 북궁연이 낭군이라는 사실이었고, 새로 뽑힌 인물들 중에 문지기 조장까지 있다는 사실은 더욱 화제가 되었다. 무림맹의 인물들 중 반 북궁세가 파들은 북궁연이 낭군의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금룡단을 이용한다고 비웃었다.

이런 저런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흑칠랑과 야한 그리고 우칠이 무림맹으로 들어왔다. 왕구는 세 명의 하인 신세가 되어 함께 들어왔다. 아운은 그들을 모두 금룡단의 단원으로 선출했고, 흑칠랑은 훈련 조장으로 야한은 군기 조장으로 임명했다. 야한은 도끼 자루를 휘두르며 좋아했고, 흑칠랑은 왜 내가 네 밑에 있어야 하냐고 난리를 쳤었다. 아운이 그럼 지금 당장 대결을 하자고 나오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그 이튿날, 금룡단이 거주하는 금룡각의 거대한 건물 앞에는 넓은 연무장이 있었고, 연무장 앞에는 큰 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로운 단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가? 백이십 명의 단원들은 일찍 나타나서 여기저기 삼삼오오 몰려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화제는 당연히 새로운 단주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북궁연을 연모하던 자들이라, 새로운 단주에 대한 질투심으로 공공연하게 적개심 이상의 살기를 드러내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일부는 새로 온 단장을 어떻게 길들일까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었다.

이때 약 십여 명의 인물들이 천천히 연무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 모아진다. 그들 중에는 북궁명과 육자명 그리고 육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윽고 북궁명 일행은 연무대에 도착했고, 그들 중 한 명이 대 위로 올라갔다. 바로 문지기 조장인 육삼이었다.

“새로운 금룡단의 단주님이 오셨습니다. 모두 여기, 대 아래로 모이시랍니다. 아울러 내가 열을 셀 때까지 다 모이랍니다. 하나…….”

단원들은 모두 시큰둥한 표정들이었다. 그들 둥 누군가가 말했다.

“저거 누구야? 외성의 문지기 하던 놈 아닌가?”“아니 저런 놈이 금룡단이라니 금룡단도 다 됐군.”

여기저기서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육삼은 숫자를 세고 있었다. 이때 우칠의 뒤쪽에 있던 아운이 나서며 금룡단의 단월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한편 단원들 중에는 남궁세가의 남궁단과 쾌도문의 문형기, 그리고 새롭게 단원이 된 개방의 소걸개 이심방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도 역시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타난 일행을 보면서 우칠과 흑칠랑을 어디선가 보았다고 생각하며 기억하려 하던 참이었다. 그동안 우칠의 덩치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아운을 보고 안색이 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는데 걸린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우칠을 보고도 생각을 못한 자신의 머리를 저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명정이 한 주먹에 깨진 것은 당연했다. 이제 사태를 파악한 그들은 벌떡 일어섰다. 다른 단원들은 뭐하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보았지만, 그들은 급했다. 조금이라도 잘못 보이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너무도 잘 아는 그들이었다. 그 끔찍했던 과거가 생각나자 똥줄이 탄다. 다른 단원들이 불쌍해서 알려주고 싶었지만, 지금 육삼이 일곱을 세고 있었다.

눈치라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는 소걸개 이심방은 아운의 모습을 보자마자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 그는 급했다. 그래도 혼자 살 순 없었다. 그는 자신의 주위에 뭉기적거리고 있는 친한 친구들을 보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들 날 믿나?”

동료들이 그를 바라본다.

“날 믿으면, 저 자가 열을 세기 전에 빨리 날 쫓아오게. 늦으면 평생 후회할 걸세.”

천하에 이심방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건 아무리 잘 봐도 겁먹은 모습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이 세상에 이심방이 두려워하는 자가 있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평소 염라대왕 앞에서도 이심방의 입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놀리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놀라기도 전에 이심방은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평소 그를 잘 알고 그와 친했던 친구들 세 사람은 덩달아 달리기 시작했다. 최소 이심방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살렸다. 그런데 달리는 그들보다 더 빨리 달리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소림 십팔나한의 한 명인 몽진이었다. 그 역시 얼굴엔 다급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천하에 몽진이……. 그들이 서둘러 도착하는 순간 육삼의 입에서 ‘열’하는 숫자의 마지막이 떨어졌다. 그리고 자리에 선 자들은 모두 열 명에 불과했으니, 그들은 다음과 같았다.

개방의 소걸개 이심방, 소림 십팔나한 중의 한 명인 몽진, 절환검 남궁단, 비호섬 문형기, 그리고 이심방의 친한 친구인 종남의 은형분광 정명호, 절강성 추가장의 세우검 추운, 무당의 운현검 우영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머저 세 명은 강소성 운룡표국의 십단검 한명옥, 호남성 철가장의 소장주인 금강대도 철담, 하복성 무진상단의 소장주인 칠보금검 소광이었다. 한명옥이나 철담 그리고 소광은 아운을 알아서가 아니라, 그들은 금룡단에서도 가장 특이한 존재들이었다. 원래 그들이 금룡단이 된 것은 순전히 가문에서 사활을 걸고 돈으로 밀었기 때문이었다.

강소성의 운룡표국이나 철가장은 정말 보잘 것 없는 곳이었다. 그들의 가문에서는 자신의 아

들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무림맹에 출세시켜보고자 집안의 전 재산을 장로들에게 바쳐 겨우 금룡단의 일원이 되게 만들었다. 이는 무진상단의 소장주 역시 마찬가지라 하겠다. 삼류 상단에 불과한 무진상단은 소광을 무림맹 금룡단에 넣고는 휘청했었다. 세 명은 금룡단에 들어오긴 했지만 모든 대원들로부터 심하게 차별을 받았고, 잔심부름부터 시작해서 궂은 일은 모두 도 맡아서 해야만 했다. 자칫하면 다른 단원들에게 놀림을 받고 대련을 빙자해서 구타당하기 일쑤였다. 그들 중에선 노골적으로 이들을 무시하고 구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럴 적마다 숨어서 울며 서로를 의지해 왔었다.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금룡단과 무림맹을 나가고 싶어 했지만 가문을 위해서 꿋꿋하게 버티는 중이었다. 보통 그런 식으로 들어왔던 자들 중, 중소문파의 자제들일 경우 십일을 버티는 자가 없었는데 세 사람만 유일하게 일 년 이상을 버티고 있었다. 금룡단에서는 그들을 일컬어 삼충 즉 세 마리의 벌레라고 부르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런 모진 역경 속에서도 그들은 금룡단을 나갈 수 없었다. 자신들이 금룡단을 벗어나는 순간 가문은 몰락하고 말 것이란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가장 먼저 자리를 지키고 섰었다. 육삼은 열을 다 세고 아운을 바라보았다.

“육삼, 내려와라!”

육삼은 좌중을 둘러보고 자리에서 내려갔다. 아운이 단에 올라오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 모아졌다. 그러나 자리를 지키고 선 열 명 이외의 인물들은 모두 비웃는 눈초리였다. 아운은 그들을 돌아본 후 북궁명을 돌아보고 말했다.

“처남, 단주의 말을 무시한 자들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하는가?”

북궁명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형만 아니면, 단주님 마음입니다.”“그래? 그거 하난 좋군.”

아운은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이심방이나 몽진, 그리고 문형기와 남궁단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가 얼마나 유식하고 폭력적인지 잘 아는 그들이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본 종남의 은형분광 정명호가 전음으로 물었다.

“자네 왜 그러나?”

이심방은 기겁을 해서 전음으로 대답했다.

“살고 싶으면 그냥 입 다물고 있게. 잠시 후면 알게 될 걸세.”

그 말 한 마디를 하곤 대꾸도 하지 않는다. 정명호는 더욱 궁금해진다. 아운은 흩어져 있는 금룡단원들을 보고 웃으면서 천천히 말했다.

“뭐 그럼 내 명령을 무시한 자들에게 벌칙을 주지. 오늘부터 여기 앞에 선 열 명과 내가 선정한 자들을 빼곤 전부 금룡단의 하인으로 강등한다. 그리고 네 놈들이 정신교육을 지금부터 시작한다.”

마치 장난처럼 말하는 아운의 말에 모든 금룡단원들은 하품이 날 정도였다. 별로 마음에 와닿지도 않았고, 겁도 나지 않았다. 지금 금룡단에 포함된 인물들은 모두 명문의 자제들이다. 이들을 하인으로 쓴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당장 그들의 가문으로부터 난리가 날 것이다. 그리고 정신교육이라니……. 누가 당하고 그대로 있겠는가? 그들은 모두 무공이라면 나름대로 자신 있는 자들이었다. 인원만 해도 몇 명인데……. 물론 그들의 무공은 광풍사와 비교한다면 조족지혈에 불과하겠지만……. 아운은 서 있는 자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너흰 모두 이쪽으로 물러서라.”“충.”

이심방과 몽진, 그리고 문형기와 남궁단은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르고 빠르게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 묻어서 한 쪽으로 물러선다. 그 모습을 본 다른 금룡단원들은 모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금룡단에서도 괴짜로 소문난 이심방과 가장 진중한 몽진, 그리고 오만하기가 둘째라면 서러운 문형기와 남궁단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들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었다.

아운은 천천히 걸었다. 그 뒤를 흑칠랑과 야한이 뒤쫓는다. 야한의 손은 이미 품안에 들어가 있었다. 먼저 십여 명의 무리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한 아운이 그들을 보고 명령을 내렸다.

“모두 일어서라.”

그 말을 들은 십여 명은 모두 피식 웃었다. 그들은 모두 태연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안 일어서면 너 어쩔래? 하는 표정들이었다.

“말 안 듣는군.”

아운이 씨익 웃으며 말하자,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뭐, 우린 자격 없는 자는 인정하지 않으니까…….”

아운이 그를 향해 물었다.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난 화산의 매화고검 운몽이라고 하지. 들어보았나?”“매화고검이라 앞으로 매화곡검이라고 부르게.”

운몽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단주라도 말을 함부로 하면 혼날 수도 있을 텐데…….”

아운이 웃는다. 운몽도 지지 않고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운의 신형이 바람처럼 날아가면서 발로 운몽의 입을 걷어찼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운몽의 이빨 다섯 개가 하늘로 날아갔다. 운몽이 검을 뽑아들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었다. 아운은 뒤로 두 바퀴나 구르고 나서 바둥거리는 운몽에게 다가가 발로 그의 머리를 밟아 뭉개기 시작했다. 순간 그와 함께 있던 십여 명의 청년들이 무기를 빼어 들었다. 그의 모습을 본 아운이 웃었다.

“단주에게 무기를 뽑아 덤비다니, 죽어도 할 말이 없겠지. 지금 기회를 주겠다. 누구든지 나에게 불만이 있는 자들은 나에게 덤벼라! 버러지들이니 한꺼번에 덤비는 것이 좋겠군.”

아운의 말을 들은 추운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심방에게 말했다.

“미친 것 아닌가? 저건 중과부적일세.”

그 말을 들은 이심방은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당연히 중과부적이지. 저들은 아마도 지옥이 무엇인지 곧 알게 될 걸세.”

추운과 주변에 있던 몇몇 인물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심방을 보았다.

“자네는 설마…….”“그냥 지켜보게.”

이심방의 단호한 말에 모든 시선은 다시 아운에게 모아졌다. 아운은 두 손을 번쩍 들어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씨익 웃는다. 그것을 본 금룡단의 인물들은 기분이 아주 나빴다. 그리고 그 기분은 아주 신기하게 잘 맞아 떨어진 셈이었다. 아운의 신형이 바람처럼 그들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칠보둔형의 묘에 이은 아운의 주먹과 발은 사정이 없었다. 십여 명은 무기 한 번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금룡단이 놀라서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심방과 몽진, 문형기와 남궁단을 뺀 열 명 중 나머지 여섯과 육삼, 북궁명, 그리고 소혼명은 넋이 나가 버리고 말았다.

이건 완전히 일방적인 구타였다. 아운의 손과 발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마구 짓밟고 치기 시작하는데 너무 빨라서 보이지도 않았다. 금룡단의 인원은 현재 팔십이 명이었다. 그중 열 명을 배면 칠십이 명이다. 그들은 모두 명문의 제자들이다. 무공이 약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공은 지금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제대로 공격할 기회도 없었고, 공격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운의 신형은 보이지도 않는다. 몇몇 겁을 집어 먹은 인물이 도망가려 했으나 그것도 소용없었다. 아운의 신법은 과히 천하제일이 아니던가. 일권, 일퇴에 어김없이 한 명씩 쓰러진다.

뒤이어 야한의 도끼 자루가 사정없이 허공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이미 쓰러진 금룡단의 젊은 고수들을 인정사정없이 두들긴다. 야한의 도끼 자루는 얼굴이고 다리고 가리지 않았다. 물론 신분도 가리지 않는다. 보기만 해도 살 떨리는 광경이었다. 이미 아운에게 한 방 맞고 땅바닥에서 파닥거리는 싱싱한 먹잇감을 야한은 결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끔찍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보고 있던 흑칠랑은 손을 꼼지락 거리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쭈욱 폈다. 그리고 그 손가락으로 쓰러진 자들의 코구멍을 돌아가며 한 번씩 찔러대기 시작했다. 모조리 코피가 터지는데, 그 중에서 얄미운 놈은 한 번 더 찌르고 있었다. 특히 운몽은 모두 합해서 다섯 번이나 찔리고 기절한다. 그것도 해보니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오금이 저리고 식은 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이심방과 몽진 등의 행동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무당의 운현검 우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저 사람, 아니 저 분이 누구시기에…….”

이심방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권왕일세.”

그 말을 들은 추운과 우영은 물론이고 삼충의 얼굴마저 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들은 그저 놀란 시선으로 아운을 본다. 설마 권왕이라니……? 약 이각이 지났을까? 금룡단의 연무장엔 시체 아닌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어김없이 도끼 자루에 맞은 상처가 있었으며, 코 구멍 한 곳이나 두 곳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흑칠랑은 자신의 중지 손가락을 보면서 아주 만족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개발한 구타 방법은 아주 획기적이고 기발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운은 쓰러져 있는 자들을 둘러보고 천천히 돌아온 다음 서 있는 십여 명을 보았다. 순간 십여 명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완벽한 차려 자세를 취한다. 그 뿐이 아니라 북궁명을 비롯한 육자명이나 육삼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불만 있는 자식은 앞으로 나오시게.”

흑칠랑이 뒤에서 중지를 들어 보인다. 열 명의 안색은 노랗게 굳어졌다. 불만……. 절대 있을 수 없었다.

“그럼, 가서 물을 떠다 저 쓰레기들에게 끼얹고 깨우도록…….”

아운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열 명의 신형이 섬광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아운은 북궁명과 육자명 그리고 육삼을 보면서 말했다.

“너흰 금룡단이 아닌가?”

세 명의 신형도 날아갔다. 그들은 그들 생애에 지금처럼 전력으로 신법을 펼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던 금룡단의 인원들이 한 곳에 던져졌다. 그리고 물을 끼얹자 그들은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어나는 족족, 다시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이번엔 어떻게 차고 때리는지 기절하지도 않았다. 아운이 차고 때리고, 야한이 도끼자루로 패는데 그렇게 맞고도 기절하지 않은 게 신기하기만 했다.

“살려…….”“부처님, 흑흑…….”“제발…….”

그들은 이제 감히 아운에게 달려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특히 그래도 눈을 뜨고 자신의 가문 어쩌고 하던 자들은 흑칠랑의 가공할 손가락에 이어, 아운의 발길질에 이빨이 몽창 날아가는 비운을 감수해야만 했다. 찔린 코 구멍 다시 한 번 찔려봐라! 맞은 곳 골라서 다시 맞아 봐라! 당한 사람은 거의 미치게 마련이었고, 뇌가 근육으로 변하게 마련이었다. 다시는 대들 엄두도 나지 않게 마련이었다. 바닥에서 거의 기절한 시체 비슷한 인간들이 꿈틀거린다. 아운이 다시 단상에 섰다.

“셋이다. 셋을 셀 때까지 모두 도열하도록, 하나…….”

필사적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그들을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온전한 상태가 아닌 자들이 제대로 모이겠는가? 셋을 세었지만, 아직도 도열하지 못한 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시 한 번 참혹한 현상으로 이어졌다. 그나마 제대로 섰던 자들은 원망의 시선으로 아운을 본다. 자신들은 왜?

“너만 살자고 동료들을 무시한 놈은 그냥 둘 수 없다. 단 한 명이라도 제대로 도열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불만 있는 놈은 말해.”

흑칠랑이 중지만 쭉 핀 주먹을 들어 올린다. 야한이 도끼 자루를 어깨에 둘러매고 묘한 표정으로 웃는다. 불만.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아운은 다시 연단에 섰다.

“다시 셋을 세겠다.”

셀 필요도 없었다. 거의 죽어가던 자들이 숫자를 세기도 전에 이미 도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열해 있는 금룡대의 모습을 보면서 아운은 조금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러면 지금부터 기마자세를 취한 후, 나에게 대든 것을 반성하도록……. 시간은 두 시진이다. 물론 내공은 사용하지 못하게 할 생각이다. 혹여 견디지 못하는 자는 그냥 쓰러져도 된다. 결과는 겪어보면 알 것이다. 그리고 책임은 너희들 공동이 진다.”

아운의 말에 칠십이 명의 금룡대는 완전히 기가 죽어 버렸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감히 대꾸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모두 기마자세 시작! 한 명만 견디지 못해도 모든 동료들까지 조금 전 고통을 다시 맛보게 될 것이다.”

아운의 고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이미 기마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금룡대가 생기고 지금처럼 빠르고 일사분란하게 대주의 명령을 이행한 적은 처음이었다. 흑칠랑과 야한은 돌아다니면서 금룡대 대원들의 무릎과 허리 부근의 혈을 눌러 다리 쪽으로 내공을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때부터 칠십이 명의 금룡대원들은 기마자세와 눈물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다. 모두 한쪽 코구멍이나 두 코 구멍에서 코피를 질질 흘리며, 팅팅 부은 얼굴로 기마자세를 취한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쟁 난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실은 그들보다 훨씬 더 불쌍해 보인다. 코피가 흐른다고 감히 그 코피를 닦으려는 간 부은 인간도 없었다. 오히려 코피가 나며 얼얼한 코구멍은 조금 전의 지옥을 떠올리게 만들어 그들에게 행동의 자유를 박탈해 갔다. 아운은 그들을 한 번 훑어보고 뻣뻣하게 서 있는 나머지 금룡대원들에게 다가갔다. 아운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야한과 흑칠랑이 대신한다. 야한이 도끼자루를 꺼내 휘두르며 아주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좀 못 견뎌 다오.”

칠십이 명의 금룡대 대원들의 얼굴이 노랗게 변한다. 이때 야한의 뒤에 서 있던 흑칠랑이 유난히 긴 가운데 손가락을 쫙 펴고 들어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그렇지 않아도 얼얼한 코 구멍이 뻥 뚫리는 뼈아픈 기억이 새로워지면서 그들의 안색은 거의 죽은 시체처럼 변해갔다. 만약, 혹여, 여기서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기마자세를 푸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나머지 금룡대 전원에게 평생 동안 원한을 지는 일이 될 것이다.

이심방과 북궁명을 비롯한 열세 명의 인물들은 한쪽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조금 전 보았던 참혹한 광경을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명호와 추운 그리고 우영은 이심방이 너무나 고마웠다. 생명을 구해준 것보다도 열 배 이상은 고마웠다. 그들은 추후에 은혜는 반드시 갚으리라고 다짐을 하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아운을 두려움과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약관을 넘은 나이에 강호 무림의 최고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일한 인물. 그의 한 주먹에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사막의 지배자라는 사라신교와 몽고의 전설, 혹은 사막의 신이라고 칭송을 받는 광풍사를 몰살시킨 전설의 고수. 그들 역시 가슴속으로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아운이었다. 그를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심방은 마른 침을 삼키면서 생각했다.

‘아직 장로들은 권왕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 자칫하면 무림맹 장로들을 최강의 적을 만들 수 있다.’

이심방은 단 한시라도 개방에 이 사실을 알리고 절대로 아운이나 북궁세가와 적대시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바로 단절이 되었다. 아운은 서 있는 열세

명의 인물들을 보면서 말했다.

“여긴 나를 아는 인물들이 좀 있군. 만약 내 정체가 혹여라도 내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 원인이 여기 있는 누군가의 입에서 나간 정보라면 최소 여기 있는 사람들이 소속되어 있는 일곱 개 이상의 문파가 나와 적이 될 것이다.”

이심방을 비롯하여 십여 명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변하고 말았다. 그들은 감히 아운의 말을 어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너희들이 어느 문파, 어디 소속이건 묻지 않겠다. 하지만 오늘 이후로는 너희는 금룡대의 유일한 대원이다. 그것이 끝이다. 그 외엔 모두 잊도록……. 그러면 나중에 그만한 보상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면 나 아운과 적이 될 것이다. 난 적이 된 자와 그가 소속된 문파를 그냥 둔 적이 없다. 알겠나?”

아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즉각으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좋아. 그럼 이제부터 금룡대가 완전히 부활되었음을 선언하겠다. 그리고 금룡대의 정대원은 여기 열세명과 앞으로 몇 명을 더해서 총 이십여 명으로 구성한다.”

아운은 흑칠랑과 야한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기 두 명은 우리 금룡대의 교관으로 임명한다. 아울러 북궁명은 부대주의 역할을 하고, 여기 우칠은 나의 친위대로 내 호법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너…….”

아운이 왕구를 바라보며 부르자, 왕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젠 천하제일고수 같은 것 다 필요 없었다. 감히 이런 지옥에 끼어든 것부터가 저주스런 일이었다. 입과 혀가 굳어서 말이 잘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세상에서 흑칠랑과 야한이 가장 강하고 무자비한 인간인 줄 알았다. 최소한 고금제일인에게 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달랬다. 아주 오래 전 우칠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아운을 보고 나선, 아니 조금 전 지옥을 보고 나서는 모든 사고 기능이 마비되어 버렸다.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흑칠랑이나 야한이 아운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넌 부호법이다.”

아운은 아주 간단하게 말했다. 즉 그는 이제부터 정 호법인 우칠의 수하로 자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우칠은 드디어 자신에게도 수하가 생겼다는 사실에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이제 제대로 교육을 시켜서 고금제일충복인 자신에게 절대 충성하게 만들어야 한다. 최소 천하제일충복 정도로…….

왕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맞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뭔지 몰라도 일단

우칠은 보기에도 대단해 보이는 덩치였다. 그런 우칠과 함께 고금제일인이 분명한 아운의 수하가 된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왕 자신이 못 될 것 같으면 그런 사람의 수하가 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일 것 같았다. 왕구는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충, 앞으로 고금제…….”

말을 하던 왕구는 도끼눈을 뜨고 째려보는 우칠의 시선을 보고 무엇인가 잘못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 사이에 는 것은 눈치뿐인지라 재빨리 말을 바꾼다.

“고금제이충복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일에서 이로. 왕구의 거창한 말에 열세 명의 금룡대원들은 입이 딱 벌어졌다. 세상에 저런 맹세도 있구나 싶었다. 더군다나 고금제이충복이라니, 그럼 제일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우칠을 본다. 우칠은 아주 만족한 표정이었다. 허탈한 기분이 들 정도로……. 반대로 흑칠랑이나 야한은 별로 새롭지도 않았고, 아운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아운은 기마자세를 취하고 있는 금룡대를 바라보다가 다시 열세 명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약속대로 저 자식들은 금룡대의 하인들이다.”

아운의 마지막 말은 단호했다. 누가 끼어들 여지도 없었다. 일다 선언을 한 아운은 이심방을 보면서 말했다.

“야! 거지.”

이심방의 얼굴이 변했다. 아무리 그래도 거지라니……. 그렇지만 얼굴에 추호도 기분 나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는 이미 사막에서 아운의 무자비한 교육을 몸으로 깨우쳤던 자였다.

“부르셨습니까?”“금룡대는 모두 백이십 명으로 구성된다고 들었다. 나머지는 모두 어디 있는가?”

차가운 아운의 말에 이심방은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그들은 부대주와 함께 비월령주님의 밀명을 받고 그 명령을 수행하러 갔습니다.”

아운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비월령주라면 상아도후 호연란 그 계집에 말인가? 그리고 언제 금룡대에 부대주가 있었나? 내가 듣기로 연 누이는 아직 부대주를 임명한 적이 없다고 들었다.”

이심방은 가슴이 철렁했다. 단언하건데 무림맹 안에서 상아도후 호연란을 계집이라고 큰소리로 말한 것은 아운이 처음이었다. 누가 들었다가 호연란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누구라도 온전

하게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물론 지금의 경우는 좀 다르다. 아운이 아무나 일순 없는 것이다. 아무리 호연란이라고 해도 상대가 권왕이라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심방은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총사님께서 부대주를 선출하지 않자, 장로원에서 임으로 부대주를 뽑아 임명하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검각의 소각주인 태을금검 사자명입니다.”

태을금검 사자명은 젊은 고수들 중에서 능히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고수였다. 삼룡사봉을 배고 가장 고강한 무공을 지닌 젊은 고수들 몇 명을 말하라고 하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사자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아운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이심방의 말을 듣고 난 아운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월권도 모자라 감히 남의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단 말이지. 그건 그렇고, 부대주란 자식이 감히 대주인 총사와 의논도 없이 다른 사람의 명령을 이행해. 그것도 자신의 직속상관과 적대적인 계집의 명령을 말이지. 아주 특별한 교육이 필요하겠군.”

아운의 표정을 본 이심방은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금 아운처럼 대놓고 말하진 않는다. 솔직히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수하가 다른 여자의 명령을 듣는다고 하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은근슬쩍 넘어가려 할 것이다. 그런데 아운은 아주 적나라하게 다 펼쳐 놓았다.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이…….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그의 각오가 대단하다는 것이리라. 이심방은 태을금검 사자명을 생각해 보았다. 검각은 사실상 호연세가의 가신이 되다시피 한 곳이었다. 그런 만큼 사자명은 호연란의 말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또한 사자명이 호연란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금룡대원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친 호연세가인만큼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아주 노골적으로 차별 대우를 하며 으스대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게 불만이 많았던 이심방이었다.

‘너 아주 죽었다고 복창을 해라.’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괜히 가슴이 시원해진다. 이심방은 아주 작성을 하고 나서기로 했다. 이 기회에 아운을 이용해서 확실하게 사자명을 혼내주고 싶은 욕망이 생긴 것이다. 그 동안 당한 것의 몇 백배에 달하는 복수였다. 더군다나 자신은 손도 안 대고 코 푸는 격 아닌가. 이심방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부대주인 사자명은 호연란의 사람입니다.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켁…….”

이심방의 말을 다 들은 아운의 주먹이 이심방의 얼굴을 가격했다. 이심방은 얼굴이 깨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뒤로 삼장이나 날아가 엎어졌다. 이심방이 놀라서 고개를 드는 순간 벌써 눈앞에 나타나 아운의 발이 그의 턱을 올려 찬다. 이유조차 모른 채 구타를 당한 이심방은 금방이라도 맞아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잔머리로 유명한 그의 머리가 굳어졌고, 혀가 굳어져서 말도 하지 못한다.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이심방을 보면서 아운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네 복수심에 이용하려 한 대가다. 앞으로 나를 시험하거나 나를 이용하려 하지 말라. 그렇다간 너도 저 놈들처럼 될 것이다.”

아운의 말을 듣고서야 이심방은 자신이 왜 맞았는지 알았다. 아울러 아운이 얼마나 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인지도 알게 되었다. 주먹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아운의 지혜와 감각을 본 이심방은 더욱 아운이 두려워졌다. 감히 헛생각을 한 자신의 머리가 미워진다.

“그들은 언제 오기로 되어 있는가?”

아운의 물음에 이심방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가 듣기로 오늘 안에 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대주님이 취임했다는 것을 전서구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보다 일찍 왔을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쯤 호연란의 밀명을 이행하고 보고하러 갔을지도 모릅니다.”“가서 데려와라!”“옛?”“거지의 걸음이 빠르다고 들었다. 지금 튀어가서 찾아오란 말이다. 만약 사자명이란 쥐새끼가 호연란에게 먼저 가게 된다면 네 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달려!”“옛!”

이심방은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금룡대 사십여 명이 비밀리에 밀명을 받고 해야 하는 일이라?’

아운은 그 일도 궁금했다.

무림맹의 내성을 달리던 이심방은 얼마 가지 않아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이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자명을 비롯한 나머지 금룡대가 마침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향한 방향은 지금 금룡대 본부가 아니라 호연란이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호연란에게 일의 보고를 하러 가는 것 같았다. 그건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이심방은 다급하게 사자명에게 달려갔다. 사자명은 자신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오는 이심방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부대주께 아룁니다.”“뭔 일이냐?”

사자명의 냉랭한 하대에 이심방은 울컥하는 기분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말했다.

“새로 온 대주께서 빨리 금룡대로 오시랍니다.”“무슨 개 같은 소리냐? 난 지금 밀명을 수행하고 보고하러 가는 중이다. 좀 이따 갈 테니 기

다리라고 전해라!”

이심방은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 여기서 물러섰다가 사자명이 호연란에게 먼저 가게 된다면 그 다음이 너무 두려웠다. 그리고 아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사자명을 데려 가야만 했다. 그러나 사자명의 기색으로 보아 먼저 호연란에게 보고를 하기 전엔 절대로 금룡대로 갈 것 같지가 않았다. 이심방은 급했지만 침착했다. 잔머리라면 금룡대 제일의 인재가 이심방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고함을 질렀다.

“사자명 이 개새끼! 금룡대의 일원이면서 총사의 명도 없이 호연란의 사주를 받고 행동을 해. 당장 오지 않으면 네 놈과 네 수하 놈들을 몽땅 껍데기를 벗겨 나무에 매달아 놓겠다는 대주님의 전갈이다. 그러니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라. 이 후레자식아.”

이심방의 말을 들은 사자명을 비롯한 그의 수하들 얼굴이 벌개졌다. 이심방은 그 말을 하고 금룡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으드득…….”

이를 같아 붙인 사자명이 그대로 이심방의 뒤를 쫓았고 나머지 금룡대의 인원도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표정엔 살기가 등등했다.

“이놈, 어떤 새끼가 대주인지 몰라도 머리통을 부셔 놓고 보고를 해도 하겠다. 그리고 저 거지 새끼도 사지를 잘라 버리고 말겠다.”

이를 갈며 이심방의 뒤를 쫓는 사자명의 고함 소리였다. 그러나 달리는 이심방의 얼굴에 가득한 회심의 미소를 그는 보지 못했다.

‘너 이 개자식 좀 있으면 지옥이다. 흐흐…….’

이심방이 사자명을 데리러 가자, 아운이 북궁명을 보고 물었다.

“누가 사자명과 그 무리에 대해서 잘 아는가?”“저도 조금은 잘 압니다. 하지만 완전하진 않습니다. 사실 사자명이 금룡대의 부대주인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운은 북궁명의 말을 듣고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선 누나의 처지를 생각했을 때 금룡대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을 것이다.

“너!”

아운이 몽진 일행을 돌아보다가 칠보금검 소광을 지목했다.

“넷. 대주님.”“자네는 사자명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 같군.”

소광이 놀라서 아운을 다시 본다.

“아까 사자명의 이름이 나왔을 때, 네 표정 변화가 가장 극심하게 변하더군. 자넨 사자명과 원한 관계가 있지? 그렇다면 그에 대해서도 가장 많이 알고 있겠군. 그 원한 관계가 무엇인진 묻지 않겠다. 대신 그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 보아라.”“그…그건…….”

소광은 놀라고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아운의 말을 인정한 셈이었다. 모두 놀란 시선으로 아운을 보았다. 설마 아운의 눈치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언제 다른 사람들의 표정 변화까지 살폈는지, 그들 중에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광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결심을 한듯 말문을 열었다. 소광의 얼굴은 울분으로 인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사자명, 그 개자식은 나의 약혼녀를 강간하고 죽였습니다.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아운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소광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육 개월 전, 사자명과 그의 수하들이 비월령주인 호연란의 명령으로 안휘성 위씨세가를 멸문시킨 적이 있습니다. 당시 위씨세가의 장녀였던 위지연 낭자는 나와 태중 혼약한 사이였습니다. 난 상황도 모르고 사자명의 명령으로 함께 동행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공격하는 문파가 위씨세가인 것을 알고 전 위지연 낭자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자, 그 개자식은 오히려 나를 비웃으며 그랬다가 우리 가문마저 화를 입을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리고 위지연 낭자를 사로잡아 내 앞에서……. 나는 죽을힘을 다해 달려들었지만 단 삼초 만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점혈을 당한 채 쓰러져 있는 내 앞에서 지연 낭자는 강간당한 채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위씨세가도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그들은 너무도 잔인했습니다. 난 언제고 내 손으로 복수를 하겠다는 결심으로 여기서 버티고 있었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위씨세가는 무슨 이로 공격을 당한 것인가?”“잘은 모르지만 무림맹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위씨세가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알 것입니다. 그곳은 그럴만한 베짱도 능력도 없는 곳입니다.”

소광은 울고 있었다. 아운은 하늘을 보았다. 청명한 날씨에 시원한 바람이 그의 답답한 가슴을 더듬고 지나간다.

‘위씨세가처럼 보잘 것 없는 곳을 왜 공격했을까? 그 정도의 세가가 멸문까지 당할 정도로 잘

못을 할 만한 일이 없을 텐데……. 그렇다면 무엇인가 사연이 있는 것 같다. 뭐 알 기회가 있겠지. 그건 그렇고 호연란이 여우같은 계집의 머리가 제법이구나.’

아운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다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허허, 그런 거군. 위씨세가가 무엇 때문에 멸문 당했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금룡대가 한 짓이니 욕은 북궁세가가 먹겠군.”

아운의 말을 들은 사람들 표정은 다시 변했다.

“도사!”

갑자기 아운이 운현검 우영을 부른다. 우영은 도사란 말이 자신을 부르는 것인 줄 몰랐다가 곧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는 것을 깨우치곤 기겁을 해서 대답했다.

“옛.”“사자명과 함께 하는 무리들이 대체적인 심성이 어떤가? 거의 모든 족속들이 잔인하고 여자를 탐하는 하오배 같은 자들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객관적으로 말해보게.”

아운의 말을 들은 우영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사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들에 대해서는 워낙 소문이 무성했던 참이었다.

“무량수불.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소문이 아주 안 좋은 것은 확실합니다.”“그들 중엔 무공 좀 높고 소문 안 좋고 그저 그런 가문의 인간인데 장로원의 추천으로 들어온 인간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겠지?”“그걸 어떻게?”

우영이 놀라서 아운을 보고 반문하자 아운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잔머리 굴리는 인간들을 아주 싫어하지. 호연란 그 계집 아주 기가 막히게 금룡대를 이용해 왔군. 자신의 일은 일대로 금룡대가 처리했고 거기에 따른 원성이나 욕은 북궁세가가 다 듣고……. 하하하, 멋지다. 멋져.”

그 말을 하곤 웃는다. 우영은 아운이 하는 말을 듣고 깨우치는 것이 있었다.

‘볼수록 놀라운 사람이다.’

우영이 아운에게 다시 한 번 감탄할 때, 아운은 차가운 표정으로 소광을 바라보며 말했다.

“복수를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강해져라. 내가 그 기회를 줄 것이다.”

소광이 놀라서 아운을 바라본다. 아운은 냉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소광은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더 이상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심방이 숨차게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수십 명의 무리가 쫓아오고 있었다. 아운은 달려오는 이심방과 그 뒤를 쫓아오는 사자명을 보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잔머리 잘 돌아가는 이심방을 보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심방은 아운을 보자 느긋해졌다.

“대주님, 명대로 사자명과 그의 수하들을 데려 왔습니다.”“수고했다. 한 쪽에 가서 서 있도록…….”

이심방은 후다닥 자기 자리를 찾아가 선 다음 사자명을 바라본다. 아운은 사자명을 바라보았다. 당당한 체격에 약간 각이 진 얼굴. 날카롭게 갈라진 눈은 누가 봐도 만만해 보이지 않은 인상이었다.

‘제법이군.’

아운은 사자명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음식도 맛이 있어야 먹을 맛이 나는 것처럼, 사람도 칠 맛이 나야 치는 재미가 있기 마련이었다. 수많은 금룡대의 수하들이 전부 기마자세를 하고 도열해 있었고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몽진이나 이심방, 그리고 무당의 우영이 반듯하게 서 있었지만 지금 사자명의 눈엔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심방이 보고를 하는 것을 보고 아우이 바로 새로운 대주란 것을 알게 되자 일단은 허탈했다. 비리비리해서 별로 무공을 익힌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일검도 견딜 것 같지 않은 자였다.

‘이제 막다른 곳에 왔다고 총사가 발악을 하는구나. 얼마나 사람이 없었으면…….’

사자명은 북궁연의 처지를 동정하며 혀를 찬다. 사람은 가끔 하나에 집착하면 주변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는 지금 기마자세로 도열해 있는 금룡대 전원의 처참한 몰골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것을 보았다면 최소한 경계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지금 그의 머리는 아운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고민 하나만으로도 꽉 차고 넘쳤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시선은 아운 외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은 보았어도 그것이 아운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자명은 실실 웃으면서 아운엑 다가와 고개조차 숙이지 않고 인사를 한다.

“사자명이오. 당신이 새로 온 대주외까?”

아운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내가 대주다. 그럼 네가 사자명이란 호연란의 강아지 새끼가 맞나?”

사자명의 안색에 살기가 감돌았다.

“대주라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군. 그러다 맞아 죽지.”

사자명의 말을 들은 이심방과 추운, 우영은 물론이고 한명옥, 철담 등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들은 그렇지 않아도 사자명에게 원한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표정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랬다.

‘네 놈 이제 죽었다.’

아운은 사자명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호, 네 놈은 대주에게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것이냐?”“난 네 놈을 대주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

그 말을 들은 아운이 이심방을 부른다.

“야! 거지.”“옛. 말씀하십시오.”“이거 하극상 맞지?”“분명히 맞습니다.”“금룡대에서 하극상은?”“최고 사형입니다. 아니 대주님 맘 대로입니다.”

이심방은 신이 나서 말했다. 아운이 웃으면서 사자명을 보고 말했다.

“그렇다는 군.”

사자명은 코웃음을 쳤다. 언제 금룡대가 규칙을 따졌던가? 그리고 별 힘도 없는 대주가 어쩌겠단 말인가? 하극상에서 대주가 처리 못하면 장로회로 넘어간다. 그렇게 되면 장로들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장로원에서 북궁세가의 힘은 아주 미미했다. 반면에 자신에겐 아주 든든한 후원자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 두렵겠는가? 오히려 대주를 혼내주면 경쟁자인 호연란의 호감만 더 살 뿐이었다. 사자명은 마음껏 아운을 비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쩌겠단 말인데?”“그래서 말이지…….”

아운은 터덜거리며 걸어가서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 말했다.

“우선 네 놈의 입을 틀어막고…….”“그게 네 놈……. 크억!”

아운의 신형이 움직였나 했을 대 이미 사자명의 코앞에 나타났고, 이어서 돌멩이를 사자명의 입안에 박아 넣었다. 앞니가 전부 부러져 나가면서 돌멩이가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 박혔다.

보던 사람들이 눈이 튀어 나올 정도로 놀라서 아운과 사자명을 바라보았다. 저런 무식한 방법으로 사람을 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안 그들이었다.

“야한!”

아운이 부르자 이미 준비 중이던 야한이 바람처럼 날아와서 도끼 자루를 건네주었다. 그 다음에 벌어진 것은 조금 전 금룡대 칠십여 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떻게 힘써 볼 상황도 아니었다. 아운의 도끼 자루는 추호도 용서가 없이 얼굴만 가격했다. 부대주인 사자명을 비롯한 그의 수하들은 덤빌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칠보둔형의 절기를 등에 업은 아운의 도끼 자루는 천하무쌍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흑칠랑이 달려왔다. 그리고 흑칠랑은 가운데 손가락을 쫙 편 다음, 쓰러진 놈들이 코 구멍을 꼭 두 번씩 찔러댔다. 그리고 야한이 흉내를 내며 쫓아가는데, 야한은 가운데 손가락이 아니라 엄지 손가락을 쓴다. 길이가 안 되니까 굵기로 도전한 것이다. 인정사정도 없었다. 특히 사장명은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아운에게 거의 떡이 된 사자명의 코 구멍은 흑칠랑과 야한에 의해서 완전히 돼지 코가 되어 있었다. 뿐인가. 앞 이빨은 돌멩이가 전부 부수어 놓았고, 제법 영준했던 그의 얼굴은 완전히 파면이 되어 있었다. 다시는 제 얼굴로 돌아오긴 힘들 것이다.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보던 추운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나라면 죽는 것이 행복하겠다.”

이심방은 후둘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런 소리 말게. 저 놈들, 앞으로 숨 쉬기 편하겠다. 코 구멍이 뻥 뚫릴 테니…….”

그들의 말을 들은 무당의 운현검 우영이 나직하게 불호를 외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무량수불, 너무 잔인한 짓일세. 하……하지만 사자명은 좀 당해도 되긴 하지.”

우영의 말에 이심방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기도 하지만, 저런 식으로 확실하게 해 놓으면 앞으로 다시는 덤빌 생각을 못할 걸세. 오히려 저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지도 몰라. 그렇지 않은가? 몽진화상.”

몽진은 숨소리를 죽여 가며 말했다.

“아미타불. 아운 시주에게 잘못 보이느니 난 그냥 지옥으로 가겠네.”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는 몽진의 얼굴을 본 이심방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자신이나 운현검 우영이나 앞으로 감히 아운에게 도정하거나 대항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기엔 이미 그들의 가슴 속에 새겨진 아운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은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대 정파 무림의 한 복판에서 보여준 아운의 모습은 강하면서도 화가 났을 땐, 뒷골목의 파락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정파 무인들이 적을 상대함에 단검에 죽이거나, 싸워서 패하면 보통은 그것으로 끝인 것이 이쪽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한데 아운은 다르다. 저렇게 무식하고 잔인하게 사람을 다루어 놓으면 아무리 강골인 사람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다시는 아운에게 대항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아운은 상대의 신분과 체면을 고려해 주지 않았다.

‘앞으로 무림맹은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니 그건 오로지 아운 하기 나름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아운에게 선택된 것은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이심방이었다. 물론 아운이 좀 두렵긴 하지만 그거야 아운의 말을 잘 듣고 잘못을 안 하면 된다.

아운의 무자비한 폭력에 사자명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입안엔 주먹만 한 돌멩이가 들어가 박혀 있고 머리엔 도끼 자루가 날아다니는데 제 정신이면 오히려 이상하다 하겠다. 처음 도끼 자루가 머리통을 내리 쳤을 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어진 아운의 구타 앞에서 사자명의 자존심을 너무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무공.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던 사자명이었지만, 단 두세 번 대항하려 해본 다음, 더 이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우쳤다. 상대는 자신이 어쩔 수 있는 고수가 아니란 것을 처절하게 깨우쳤을 뿐이었다. 공포와 아픔 때문에 사자명의 정신은 혼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그 아픔은 정말 끔찍했다. 대항할 생각, 그것은 꿈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최소한 지금 상황에선 그렇다.

‘살려주세요.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흑흑…….’

그러나 그것도 속으로만 들린다. 입안에 돌멩이가 말문을 막은 것이다. 거의 걸레가 되도록 매를 맞은 사자명을 아운은 미련 없이 바닥에 쳐 박아 버렸다.

“네 놈들은 이쪽으로 모여라!”

별로 큰 소리도 아니었지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자명의 수하들이 덜덜거리며 일어서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코피가 줄줄 흐르고 콧구멍이 돼지 코처럼 벌어지고 팅팅 부운 그들의 모습은 어찌 보면 불쌍하기에 앞서 우습기조차 했다. 그것을 본 아운의 눈썹이 다시 곤두섰다.

“셋을 세겠다. 그때가지 다 모이지 못하면 오늘 네 놈들을 전부 죽여 버리겠다. 하나…….”

번개보다 빠르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디든지 죽을지 살지 모르고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골통들이 있게 마련이다.

유범석은 점창파 장문의 셋째 제자였다. 그는 아직까지 그 누구에게도 이런 구타를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뼈를 아리는 아픔과 함께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유범석,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의 끈질긴 독기는 금룡대 뿐이 아니라 무림맹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오죽했으면 점창파에서 그의 사부조차 두 손을 들 정도겠는가? 또한 금룡대에서 부대주인 사자명조차도 꺼리는 인간 말종이 바로 유범석이었다. 사람을 죽여도 가장 지저분하게 죽이고, 여자를 간음해도 가장 변태적인 인간이 유범석이다. 그리고 지독하게 끈질겨 한 번 그에게 잘못 보인 사람은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백이십의 금룡대원들 중에서도 가장 용맹한 다섯 명의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고, 누군가와 한 번 싸우기 시작하면 팔다리가 부러지고, 바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라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 인간이 바로 유대석이다. 그의 이 질긴 성격과 무대포적인 기질은 다른 사람이 쉽게 따를 수 없는 재능이기도 했다.

점창의 장문인인 유운무적검 사운한은 만약 유범석이 폭력적이고 작은 일로 사람을 때려죽이는 남모르게 여자들을 납치 강간하는 성격만 고칠 수 있다면 점창의 대들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탄했었다. 유범석이 강호에서 저지른 추악한 죄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점창파의 힘 때문에 몇 번이나 그 위기를 벗어났다. 지금도 사운한은 유범석이 무공에만 전념한다면 대성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유범석인 만큼 다른 사람은 공포에 질려 있을 때 오히려 이를 갈고 원한을 키웠다. 대 점창파의 제자를 이렇게 패는 놈이 있다니 생각할수록 분했다. 능력이 모자라서 맞았지만, 그것은 두 번째였다. 반드시 스승에게 말해서 점창의 힘으로 버릇을 고쳐 놓고 말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다시 셋을 셀 때까지 모이라고 윽박지르는 아운을 보자 그의 기질이 다시 폭발하고 말았다.

“야! 이 개자식아. 차라리 여기서 날 죽여라. 흐흐, 난 절대 네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 이제 어쩔 테냐? 네가 정말 날 죽이기라도 하겠느냐? 그렇게 되면 점창파에서 네 놈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흐흐, 나는 점차의 유범석이란 말이다.”

유범석은 그 자리에서 옷을 벗더니 아예 바지와 속옷까지 전부 벗어던지고 주저앉아서 고함을 질러 댔다. 모든 시선이 유범석에게 모아졌다. 점차의 제자. 구대문파 중의 한 곳이다. 그런 인물이 죽일 테면 죽이라고 덤빈다. 누구라도 난감한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유범석이 그렇게 나서자, 금룡대에서도 골통으로 유명했던 세 명의 인물들이 더 일어섰다. 그들은 유범석과 가장 친한 자들이었고 가장 악종들이기도 했다. 그들 역시 아래 위로 옷을 전부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유범석 근처로 모여 들었다.

“흐흐, 범석이 멋져. 나도 합류한다. 난 절강성 오가장의 오승이라고 한다. 나 역시 죽어도 네 놈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

오가장은 절강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무가였다.

“난 모산의 손장순이다. 네 놈은 어쩔 테냐? 흐흐, 나를 죽일 테면 죽여라.”

모산파는 비록 구파일방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절대로 뒤지지 않는 세력을 가진 대문파였다. 그들에 이어 합류한 또 한 명의 청년은 입고 있던 천을 다 벗어 던지고 스스로 자신의 몽에 지닌 검으로 핏줄을 그어대며 고함을 쳤다.

“칠 테면 쳐라. 이놈, 난 겁 안 난다. 내가 죽으면 네 놈은 나의 사문인 황룡표국과도 원한을 져야 한다.”

황룡표국은 복건성의 패자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모두 쟁쟁한 가문이나 문파의 제자들이거나 후예들이었다. 이렇게 되자, 금룡대의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 모였다. 그들은 모두 얼굴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만큼 나선 인간들이 얼마나 독종들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는데 언제나 앞장서서 싸우는 자들이었고 언젠가는 합이 열세 대의 화살을 맞고서도 끝까지 임무를 수행했던 자들이었다. 사자명조차도 그들에겐 절대 함부로 하지 못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은 잘만 다스리면 보석이 될 거라고 칭찬하던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문파에서는 누구도 그들의 자질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없다고 알려진 자들. 강화 무림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무림맹의 독종 사공자가 바로 그들이었다. 무림에서는 따로 무림맹의 사흉이라고도 부르는데 아운 역시 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칫하면 금룡대 전부가 가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기마자세를 하고 있던 금룡대원들마저도 긴장한다. 여차하면 반기를 들 기세다. 북궁명을 비롯한 열세 명이 금룡대원들의 얼굴에도 긴장한 빛이 떠오른다. 그러나 흑칠랑이나 야한은 오히려 히죽거리고 웃고 있었다. 아운이 유범석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유범석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알몸의 가슴을 활짝 펴며 고함을 질렀다.

“흐흐, 그래 요 개자식아. 어서 와서 나를 죽여라! 죽여!”

다른 세 명은 그 자리에 큰 대자로 누워버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운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는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그들 주우 오승이 유범석과 보조를 맞추어 고함을 쳤다.

“이 씨발 놈아! 얼마든지 패라. 하지만 우린 절대 네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 우리를 때릴 순 있어도 명령을 따르게 하진 못할 것이다. 으하하…….”

코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악을 쓰는 유범석과 오승 일행을 바라본 아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법이군. 좋아. 인정은 하지.”

아운의 말을 들은 유범석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적당하게 타협을 하려 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운은 그런 유범석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난 우서 네 놈부터 죽이기로 결정했다.”“뭐……. 뭐…….”

유범석이 놀라서 아운을 본다. 설마 자신이 잘못 들었겠지 하는 표정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똑똑하게 들었다. 처음엔 놀랐던 유범석이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멍청한 새끼, 네가 나를 죽이겠다고 죽여봐라. 그럼 그 다음엔 점창이 가만히…….”

그 다음 말이야 뻔한 거지만, 아쉽게도 유범석은 그 다음 말을 다 이어가지 못했다. ‘빠각’하는 소리와 함께 아운의 주먹이 그의 어깨를 쳤고, 어깨뼈가 모조리 부서져 버렸다.

“크아악!”

하는 비명과 함께 유범석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아운은 그 자리에서 사정없이 유범석의 왼쪽 정강이를 걷어찼다. ‘빠각’하는 소리가 다시 한 번 시원하게 들린다. 그 소리를 들은 이심방이 질린 얼굴로 우영을 보며 말했다.

“저 소리는…….”

우영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뼈가 완전히 부서졌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지. 무량수불. 다시는 고치기 불가능할 것 같은데…….”“끄으윽…….”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비명이 유범석의 입을 타고 넘어왔다. 그런 유범석을 보면서 아운이 느긋하게 말을 했다.

“네 놈이 여기 있어 다행이다. 그동안 네 놈의 명성은 아주 잘 듣고 있었다. 한 마디로 넌 죽어도 싼 놈이다.”

유범석은 어깨뼈와 다리뼈가 부서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으며 아운을 노려보고 말했다.

“나는 점창…….”“점창, 좋지. 네 말대로 점창이 나를 적으로 돌리면 점창을 강호 무림에서 아주 지워주마.”

아운의 태연한 말에 금룡대원들이 표정이 질리고 말았다.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거란 말인가? 이 세상에 저런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은 처음 알았다. 물론 그들은 아운이 정말 점창파와 정면충돌하거나 멸문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운의 정체를 아는 열세 명이나 그들보다 더욱 아운을 잘 아는 흑칠랑과 야한, 우칠 등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단지 그들도 아운이 유범석을 죽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유범석의 협박을 무시할 거란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니만큼 어떤 식으로 아운이 유범석을 다룰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운의 무자비한 기세에 땅바닥에 대자로 누웠던 세 명이 불안한 표정으로 상체를 들어 올릴 때였다. 아운은 어깨벼와 정강이뼈가 부서진 고통으로 덜덜 떨고 있는 유범석의 턱을 올려 차

버렸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로 일장이나 솟구쳤던 유범석이 대자로 누워있는 세 명의 옆에 털썩하고 떨어졌다. 입에서 거품을 물고 유범석의 눈동자가 돌아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세 명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어디 그들뿐인가? 서있던 열세 명이나 우칠, 그리고 왕구의 표정마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운이 다시 유범석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사람들은 정말 아운이 유범석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때 이심방은 빠르게 머리를 돌렸다.

‘지금 권왕은 유범석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렇지만 점창의 힘을 감안하고 앞으로 무림맹에서의 입지를 생각한다면 죽이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나서야 한다. 나서서 권왕에게 물러설 수 있는 명분을 준다면 내게 고마워할 것이다.’

빠르게 머리를 돌린 이심방이 재빨리 나서며 권왕에게 말했다.

“대주님께 아룁니다.”“말해라!”“지금 이들을 죽이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차라리 잘 다스려서 쓴다면 상당히 재질을 가진 자들입니다. 대주님께서 마음을 크게 가지시고 목숨만을 살려 주십시오.”

이심방의 말에 아운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주제 넘는 놈이군. 역시 잔머리가 잘 돌아간다. 하지만 그건 네 놈도 명문의 제자이기 때문에 하는 개소리다. 나는 이 자식을 죽일 것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받으며 아주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다. 인재라고 죽일 짓을 한 놈을 살려주고 명문의 자제라고 여자를 강간해도 벌을 주지 않는다면 세상의 법은 있으나 마나다. 이 개자식들은 모두 죽을 죄를 수십 번 이상 저지르고도 제 입으로 자랑하고 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자체가 금룡대를 모욕하는 것이고 무림맹이 어떤 곳인지 인증하는 것이다. 당연히 죽어 마땅하다. 네 놈이 다시 한 번 주둥이를 놀리면 너도 죽이겠다. 빨리 꺼져.”

이심방은 아운의 살기 앞에 기가 죽어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각에 걸쳐 아운은 유범석의 뼈를 하나씩 분질러버렸다. 아주 천천히, 모두 입이 얼어붙어 말을 하지 못했다. 바닥에 누워있던 세 명은 시간이 지날수록 덜덜 떨고 있었다. 이미 무공이 전폐되고 척추가 부러진 유범석은 사실상 살아도 산게 아닐 것이다.

“이제 지옥으로 가라!”

아운의 주먹이 그대로 유범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유범석의 머리가 박살 난 채로 죽어버렸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심방이 덜덜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정말 죽였다.”

몽진은 침착하려고 바둥거리며 말했다.

“죽을 짓을 수없이 한 자니 죽어서 마땅하지만, 정말 죽이다니 아미타불. 마…만약 내가 권왕에게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자네들이 먼저 죽여주시게.”

몽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마른침을 삼키며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마음이 그랬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경직된 표정으로 아운을 볼 때 아운은 더 없이 개운한 표정이었다. 정말 사람을 죽인 것 맞나 싶은 모습이었고 그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 강한 공포심을 심어 주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해서는 지옥의 악마가 있다면 바로 아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때도 있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젠 새로 온 단주가 설마 이것은 못하겠지 하는 생각은 전부 지웠다. 이제 단주가 무림맹에 불을 지르겠다고 하면 분명히 그럴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고도 많이 남을 인간이란 것을 깨우친 것이다.

“네 놈은 언제고 만나면 반드시 죽이고 싶었던 쓰레기 중 한 명이었다. 아주 시원하네.”

아운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오승을 비롯한 세 명의 얼굴은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이제야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멍청한 객기를 부렸는지 알았던 것이다. 그들이 엉거주춤 서 있을 때 아운이 다가왔다. 상체만 일으킨 채 앉은 자세로 있던 알몸의 세 금룡단원들은 기겁을 해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아운의 신형이 흐릿해 지면서 이미 그들 앞에 다가와 있었다. 칠보둔형의 보법이 펼쳐진 것이다. 아운은 나타나자마자, 사정없이 오승의 사타구니를 발로 밟아 버렸다. 추호도 망설임이 없는 동작이었다. ‘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꺼억’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면서 오승의 눈이 돌아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이심방이 목소리까지 떨며 몽진을 보았다.

“서…설마?”

몽진이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이미 이심바이 물으려 하는 말을 짐작하고 있었던 몽진이었다. 역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미타불, 터진 것 같습니다.”

서 있던 열세 명의 금룡대와 우칠 그리고 왕구는 숨소리마저 멈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야한은 아운의 행동을 보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권왕 아운님은 멋지지 않습니까? 선배님. 흐흐, 저 박력이며 베짱하고 역시 남자는 저래야지. 암 그렇고 말고…….”

물론 흑칠랑에게 물으면서 한 말이었다. 흑칠랑은 자신도 모르게 오싹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가 야한이 묻다 당황했다.

“그…그게 그렇지만, 뭐 저 정도의 베짱은 나도 있지. 아암. 그렇고 말고…….”

흑칠랑의 말에 야한의 표정이 아주 묘하게 변했다.

“선배님, 나중에 조심하십시오. 자칫하다가는 죽는 것은 둘째 치고…….”

야한의 시선이 흑칠랑의 거시기를 내려다본다. 흑칠랑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그곳을 감싸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야한은 아주 안 됐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쯧, 그러게 그냥 제자리에서 만족하지. 무슨 제일씩이나……. 에휴, 불쌍해라!”

흑칠랑의 안색이 검게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흑칠랑이 누구인가? 절대 기죽지 않는다. 그는 야한의 말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역시 권왕을 꺾을 자는 나 밖에 없을 것 같군. 이건 운명이다.”

흑칠랑의 말에 야한은 정말 찬탄한 표정으로 흑칠랑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을 보면서 흑칠랑은 어깨를 쭉 폈다. 아주 늠름하게…….

“근데 선배 목소리는 왜 떨고 그러슈.”

흑칠랑의 펴진 어깨가 좁아지면서 표정이 구겨진다. 그리고 야한의 이어지는 말.

“그러고 보니 선배, 거기 터져도 별 상관 없지 않나? 어차피 쓸 데도 없는데……. 흠, 그래서 당당했나?”

흑칠랑의 코 구멍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야한이 슬그머니 도망간다. 아운은 느긋하게 우칠을 보며 말했다.

“우칠, 왕구와 함께 금룡각의 대문을 지켜라. 어느 누구도 들여보내기 말라!”“옙!”

우칠과 왕구가 동시에 대답을 했다.

“그리고 어떤 여자가 물건을 전해 주면 지체 없이 가져와라! 이제 올 때가 되어 가는군.”

아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칠과 왕구는 금룡각의 대문을 향해 뛰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아운이 돌아서서 남아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제 남은 두 사람은 다급했다. 여기서 더 이상 태연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미친놈뿐일 것이다. 모든 금룡대

원들의 자세가 반듯해졌고, 알몸의 두 청년은 기겁을 해서 일어서려 했다. 둘의 얼굴은 이미 공포에 질려 있었다. 죽여보라고 베짱을 부릴 담력이 더 이상은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아운은 정말 죽일 것이다. 이젠 그들도 그것을 알았다. 자신들이 자신 있게 내세웠던 가문이나 문파에 대한 믿음감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점창파 장문인의 제자를 죽인 인간이다. 그들의 배경이 구대문파의 하나인 점창보다 뛰어날 순 없었던 것이다. 아운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는 오승을 발로 차서 밀어 놓고 두 사라에게 다가서자, 손장순과 강환은 그 자리에서 엉거주춤하고 말았다.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빌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자존심이 너무 상하고, 그렇다고 덤비자니 그런 너무 무모한 것이란 것이 증명되고 난 다음이었다. 하지만 둘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운이 허리에 찔러 차고 있던 도끼 자루를 빼어 들은 것이다.

두 사람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젠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둘은 빠르게 바닥에 엎드려 살려 달라고 빌 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엎드리자 참으로 때리기 좋은 자세가 되었다. ‘빠각’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말보다 아운의 도끼자루가 먼저 모산파 손장순의 머리에 작렬했다. 이어서 아운의 발이 황룡표국의 둘째인 강황의 갈비뼈 두 개를 분질러 놓았다. ‘으허헉’, ‘꾸에엑’하는 이상한 비명소리와 함께 둘의 신형이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일각동안 그들은 다시 한 번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해야 했다. 말을 할 틈도 없었고, 용서를 빌고 싶어도 받으려 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제야 아예 작정을 했다는 것을 깨우치고 공포에 오줌까지 지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저 자신들이 아니란 사실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운은 그들의 팔다리를 분질러 놓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다음 오승에게 다가섰다. 이미 깨고 일어나서 인고의 고통을 참으며 공포에 질려 있던 오승은 아운이 다가오자 필사적으로 도망가려 했다.

“자꾸 움직이면 허리뼈를 분질러 놓겠다.”

아운의 말 한 마디에 신기하게도 오승이 동작을 딱 멈췄다.

“자, 이제 지금부터 네 놈들이 호연란의 명령으로 한 짓거리를 하나도 빼지 말고 다 말해라. 혹시 말을 빼 먹거나, 허튼 짓을 하고 싶으면 해 봐라.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지금보다 훨씬 더 끔찍할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말을 하면 아주 깨끗하게 끝내 주마.”

아운의 말을 들은 오승의 얼굴이 참혹하게 변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쪽에 몰려있던 사자명의 수하들 얼굴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도 입에 돌멩이를 물고 있는 사자명은 바둥거리며 무엇인가 말하려 했다. 그 모습을 본 아운이 웃으며 야한과 흑칠랑을 복 말했다.

“아직도 팔팔하군.”

흑칠랑과 야한은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얼굴이 불게 윤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 개종자들이 자꾸 사람 피곤하게 만드네.”

흑칠랑과 야한이 그들의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비명소리가 사방으로 들리는 가운데 아운이 다

시 한 번 오승을 내려다보았다.

“나…난 잘 모릅니다.”“그렇군. 그럼 할 수 없지.”

아운의 발이 오승의 턱을 걷어찼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오승의 턱이 부서져 날아갔다. 그 충격에 뒤로 삼장이나 날아간 오승은 그 자리에 눈을 뒤집고 숨을 거둔다. 죽었다. 정말 죽은 것이다. 턱이 깨져서 날아간 시체가 거짓말 일리는 없었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운은 미련없이 돌아서서 나머지 두 사람을 보고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말 안 해도 된다. 네 놈들 말고도 죽일 놈은 많으니까…….”

절대 안 된다. 반드시 말해야 한다는 것을 두 사람은 이미 깨우치고 있었다. 그것도 아운이 행동하기 저에 서둘러서 말을 해야만 했다. 이젠 아운이 무섭다 못해, 그의 숨소리만 들어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둘은 급했다. 조금만 늦으면 죽을 것이다. 자신들이 호연란의 명령으로 중소문파들을 멸문시킬 때,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은 것처럼 아운은 자신들에게 사정을 두지 않았다. 물론 자신들은 그래도 된다는 특권이 있다고 생각했다. 무림맹의 당당한 금룡단이고, 그들은 버러지 같은 삼류무사들이나 정말 그저 그런 가문과 문파들일 뿐이었다. 헌데 지금은 반대가 되고 나자 새삼 자신이 잔인하게 죽였던 사람들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이 벌레처럼 죽어 감녀서 두려움에 떨던 모습이 생각나면서 자신이 그렇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그들의 심성을 파괴해 갔다. 손장순과 강황은 정말 그렇게 죽기 싫었다.

“우리는 호연란 령주의 명령으로 호연세가에 반하는 문파들을 제거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내린 것은 북궁연 총사가 한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다른 금룡대원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어었던 듯 모두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그래, 그럼 거기에 가세했던 놈들이 누구누구냐? 지금 저기 네 놈들 패거리들 말고 또 누가 가세했었느냐?”

아운의 물음에 손장순과 강황은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없습니다. 그건 사자명 부단주가 책임을 지고 우리들이 한 짓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어서…사…살려주십시오.”

아운은 잠시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손장순과 강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호연란의 밀령을 이행하면서 살려달라는 사람들을 살려준 적이 있나?”

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손장순은 마음이 다급했다. 자칫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심으로 인해 정신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정말 별 볼일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와는 신분이 다른 천한 것들이라 죽어도 세상에 티가 안 나는 것들입니다. 만약 우리를 살려 주신다면 충성을 다할…….”“닥쳐.”

아운의 한 마디에 손장순은 입을 다물고 아운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별 볼 일 없는 파락호 출신이다. 하지만 세상에 함부로 죽어도 되는 자가 있단 소리는 못 들었다. 진짜 죽어야 한다면 바로 네 놈들이다.”

아운은 그 자리에서 도끼 자루를 휘둘러 손장순의 머리통을 쳐 버렸다. ‘퍽’하는 소리가 들리며 머리가 터져 나간다. 이어서 아운은 강황의 배를 걷어찼다. 강환이 뒤로 자빠지자, 다시 한 번 발로 차서 굴려 놓고 허리뼈를 바로 밟아 버렸다. ‘빠직’하는 소리가 들리며 허리가 꺾어진다.

아운은 손을 탁탁 털면서 이심방과 열세 명의 금룡대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모두 숨이 빳빳하게 굳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였다. 별로 크지도 않은 아운의 모습이 금룡각 전체를 꽉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아운이 걸음을 멈추고 열세 명의 인물들을 죽 훑어본 다음에 북궁명을 보며 말했다.

“인원이 좀 적군. 혹시 추천할 만한 인재들이 있나?”

아운의 물음에 북궁명은 힘차게 대답을 했다.

“있습니다. 모두 두 명이고 여자도 한 명이 있긴 합니다.”“여자라고 안 되는 법은 없겠지. 상관없다.”“그럼 세 사람이 있습니다.”“그 정도면 되었다. 그 세 사람에 저기 우칠과 부호법을 합하면 열여덟이군. 그 외에 몇 명 더 보충하면 되겠군. 그들을 오늘 중으로 내 앞에 데려오도록…….”“충.”“좋아. 그럼 그 정도로 인원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명이는 부단주, 그 외에 너희들이 앞으로 금룡단이다. 그리고 저들 중에서 쓸 만한 인간들만 골라서 금룡단을 축소 개편할 것이다. 부단주는 다서 추천한 자들을 데려오도록…….”“충.”

북궁명은 구호를 외친 후 뛰어 나갔다. 그가 나가자 아운은 이심방을 보면서 말했다.

“거지.”“옙.”“넌 다른 사람과 함께 이 자식들 두 명을 담벼락에 걸어 놓아라! 천천히 고통을 당하면서 죽

어갈 것이다. 그냥 죽이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이들의 죄 값이 너무 헐하다 안 그런가?”“단주님의 말씀이 백 번 지당하십니다.”“흠, 맘에 드는군. 그리고 도사.”“옙.”

운현검 우영이 능라자락을 휘날리며 바람처럼 날아왔다.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적어 사방에 전해라. 이들이 죽어야 할 타당성을 제대로 적어놓도록……. 단, 사자명을 비롯한 그들이 한 일은 적지 마라. 대신 그 부분은 따로 적어서 나에게 주도록…….”“옙, 명대로 하겠습니다.”“서두르도록…….”“옙.”

우영은 고함을 치듯이 대답을 하고 서둘러 글 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심방을 비롯하여 십여 명의 금룡단원들은 아운이 시킨 일을 빠르게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왕구가 종이 뭉치를 들고 뛰어왔다. 아운은 왕구가 전해 준 종이 뭉치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금룡단 단원들의 신상명세서가 적혀 있었고, 그 동안 소홀이 조사를 해둔 그들에 대한 많은 정보가 적혀 있었다. 북궁가의 정보력은 어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금룡단 단원들에 대한 정보는 비교적 정확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운은 종이에 적힌 글을 읽으면서 종이를 두 개로 나누었다. 이윽고 그 안의 내용을 전부 훑어 본 아운은 기마자세를 취하고 있는 금룡단 칠십이 명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자들은 모두 일어서도록…….”

아운은 종이 뭉치를 넘기면서 이십팔 명의 이름을 불렀다. 호명된 인물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아운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아운이 그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참으로 재수가 좋다. 원래 금룡단의 하인으로나 쓸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너희들은 아주 나쁜 놈들은 아니라기에 봐준다. 너희들은 금룡단으로 남는다. 저쪽에 가서 서도록…….”

새롭게 호명된 이십팔 명의 인물들이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짓고 한 쪽으로 우루루 몰려가자 아운은 나머지 인물들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너희들은 저것들과 함께 서라!”

호명 되지 못한 금룡단의 인물들은 얼굴이 굳어진 채 한쪽으로 우루루 몰려갔다. 아운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은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원래부터 있던 사십사 명과 사자명, 그리고 그의 수하들 34명을 합해 총 칠십팔 명이었다. 그때까

지도 사자명은 입안에서 돌멩이를 빼내지 못하고 있었다.

“네 놈들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놈들이다. 오늘부터 너희들은 금룡단의 하인이다. 하인으로서 본분을 잃지 말도록……. 만약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는 자가 있다면 모두 팔다리를 분질러 놓겠다. 혹여라도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네 놈들에게 지금부터 특수한 제재를 가해놓을 것이다.”

아운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여 칠십팔 명의 형을 점해 버렸다. 그들은 모두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네 놈들의 무공을 전부 막아놓았다. 하인들한테 내공이 필요 없을 테니까. 혹여 불만이 있는 놈은 앞으로 나와라. 아주 죽여 줄 테니까…….”

아무도 없었다. 모두 얼굴이 검게 변한 채 공포에 질려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아운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운은 그들이 감히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답이 없군.”“충. 명심하겠습니다.”

고함소리가 하늘을 찢어놓을 것 같았다. 금룡단의 담장을 중심으로 음성을 차단하고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는 진법이 펼쳐져 있지 않다면 고함 소리에 무림맹이 떠들썩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나마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단 아운으로부터 더 이상의 구타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앞으로 모든 명령의 대답에 대한 구호는 충으로 통일한다. 그 자리에서 모두 뒷짐을 지고 기마자세로 대기한다. 이상.”“충.”

칠십팔 명이 그 자리에서 기마자세를 취하자, 아운은 이심방 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약 반시진이 지났을 대 모든 서신이 완성되었다. 아운은 우종이 쓴 내용을 주욱 훑어 본 다음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설이 너무 많군. 앞으로는 간단하게 쓰도록…….”“충.”

우종이 벌떡 일어서며 고함을 질렀다. 아운은 우종에게 붓을 빼앗아 들고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내용을 본 우종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운은 그것을 대충 접은 다음, 우종이 손장순과 강환이 자백한 내용을 적은 글을 집어 들었다.

“거지.”“추웅.”

이심방이 고함을 지르며 화살처럼 날아왔다.

“이것을 호연란에게 주고 오도록…….”“충.”

이심방은 두 개의 서신을 들고 호연란이 있는 곳을 뛰어 갔다. 우종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아운을 보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여러 가지로 복잡했다. 감탄과 함께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이 세상에 서신을 그런 식으로 쓰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호연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모욕을 당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새로 금룡단의 단주란 자가 보내온 서신은 그냥 종이쪽지에 대충 써서 보낸 것 하나와 금룡단의 사대독종이 자백한 내용이 적힌 서신 하나였는데 문제는 단주란 자가 직접 써서 보낸 서신이었다. 그 내용은 정말 후안무치였고, 뒷골목의 파락호나 할 말투였다.

<호연란 계집 보아라! 네 년이 심어 놓았던 금룡단은 내가 하인으로 잘 써먹겠다. 그리고 사대독종이라고 불리던 쓰레기들은 내가 아주 치워버렸다. 모두 죽여서 무림맹 담장에 걸어 놓았으니 알아서 찾아가게 해라! 그들은 하극상에 도저히 인간으로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 그것을 시킨 것은 네 년이니까 알아서 책임져라. 단, 내가 조금이라도 귀찮게 되면, 네 년에게 따로 보낸 서신이 무림맹 안에 모두 나붙게 될 것이고 나는 정식으로 장로회의에 그것을 상정시키겠다. 바로 네 년이 시킨 일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몸 잘 간수하고 있어라. 네가 네 년의 목을 비틀고 머리통을 부셔 놓을 때까지…….>

호연란이 치를 떨만한 내용이었다. 입에 거품을 물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설비향은 글 내용을 전부 읽어 보곤 안색이 침중해졌다. 새로운 단주란 자가 보낸 내용은 둘째 치고 따로 보낸 서신은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 될 것이고 분란이 일어날 소지가 많았다. 우선 그 내용을 변명하고 싶어도 쉽지 않았다. 글을 쓴 자가 무당의 운현검 우종이고, 서신을 전한 자라 개방의 이심방이었다. 또한 그 자리엔 소림의 몽진도 있었다고 했다. 잠시 여러 가지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가슴이 섬뜩해진다.

‘이 자 굉장히 영리한 자다. 막무가내로 일을 처리한 것 같지만, 정확하게 계산된 행동을 하고 있다.’

서류를 관찰하면 할수록 새로 단주가 된 자에 대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무림 명문의 자제들 중에서도 중량감이 있는 자들을 금룡단으로 끌어들였다 그들로 인해 금룡단은 더욱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고,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믿을 수 있는 증인들을 지니게 된 것이다. 우종이 직접 사태에 대해서 해명을 했고, 이심방이 서신을 가져 온 것은 절대 우연일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심방이나 몽진 같은 자들이 금룡단에 가입하게 된 이유였다. 그들 정도라면 명분뿐인 금룡단에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 이심방과 몽진이 금룡단에 온 것은 가입을 거절하러 왔었던 것인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아운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 이유로 감히 가입 불가 선언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종은 거기에 휩쓸리고 만 상황이었고……. 무당의 제자와 개방의 제자라면 그것만으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호연세가가 이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려면 먼저 그들과 싸우거나 호연세가로 끌어 들어야 하는데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개방이나 무당이 만만하지도 않거니와 그들이 심성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림의 몽진 화상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들 정도의 인물들이 새로운 단주의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라면 새 단주는 이미 금룡단을 완전히 자신의 수중에 넣었다고 봐야 한다.

이것이 불과 금룡단주로 임명 된 지 한시진도 지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면 천하에 그 누구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사대독종의 사문들도 감히 금룡단주에게 따지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그들의 죄목이 낱낱이 공개 된다면 따질 명분도 없거니와 따지러 온다고 해도 눈 하나 까딱할 인간이 아닐 것 같았다. 문제는 아무리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말 이렇게 베짱대로 밀고 갈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존재할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에 이런 자가 또 있다니, 가만 또 라고?’

상황을 정리하던 설비향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 이런 인간이 둘일순 없다. 그렇다면 금룡대를 간단하게 무력으로 제압하고 이 정도의 머리를 쓸 수 있는 자는 정말 무림 어디에서도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만약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이것은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 권왕이라면 이러고도 남는다. 그리고 그라면 호연세가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홀로 광풍사를 전멸시킨 인간이니까…….’

몸이 떨려왔다. 천하에 설비향도 권왕은 두려웠다. 연구를 하고 알면 알수록 두려운 자가 바로 권왕 아운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머리로도 예측할 수 없는 자.

“이 자는 권왕일 지도 모릅니다.”

분에 못 이겨 몸을 떨던 호연란의 얼굴이 다시 한 번 굳어졌다. 권왕이란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설비향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만약 상대가 정말 권왕이고, 그가 북궁연의 약혼자가 맞다면 정말 상황은 최악입니다. 빨리 조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던 호연란이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북궁연, 이 창녀 같은 년, 혼자 고고한 척 하더니 몸으로 권왕을 꼬여 자기 편으로 만들었구나.”

오해가 잇을 만도 한 일이었다. 그러난 설비향은 북궁연의 성격으로 보아 그러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단순한 도움을 청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분간 북궁연과 연인처럼 행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권왕의 행보에 도움이 될 테니까. 그렇다면 권왕이 북궁연의 미모에 반해서 그녀를 돕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 해도 북궁연의 성격으로 보아 아직 서로 아무 관계도 아닐지 모른다. 그렇다면 아직 기회는 있다.”

설비향의 눈이 빛났다.

무림맹이 만들어지고 지금처럼 생기있게 돌아간 적이 몇 번이나 될까? 거의 없었을 것이다. 북궁연 총사의 연인이 나타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무림앵이 뒤집어지기 직전인데, 뒤이어 터진 금룡단의 사건은 무림맹 전체를 벌집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거뿐이 아니었다. 이미 무림맹 금룡단에서 벌어진 일은 무림맹 밖을 향해 맹렬하게 번져 나가는 중이었다. 호연란이 금룡단을 이용해서 북궁세가를 궁지로 몰려고 했던 이야기가 아주 구체적으로 번져 나갔다. 물론 이는 아운이 이심방을 이용해서 밖으로 퍼트린 소문이었다.

무림맹의 외성. 무림맹의 무사들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담장 위해 네 명의 시체가 걸려 있었고 그들의 죄목에 대해서 적힌 방문이 여기 저기 붙어 있었다. 그 방문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분통을 터트렸고, 당연히 죽어도 싸다고 한 마디씩 했다. 그들의 행실에 대해서 적힌 글 중에 이미 밖으로 번지기 시작한 소문과 조합을 하면 기가 막히게 떨어지는 부분이 많아서 일의 연유를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이로 인해 호연세가는 막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고 그동안 북궁세가에 대해서 오해를 했던 일부 일들이 시원하게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무림맹에서 각 지역을 향해 수십 마리의 전서구가 날아갔고, 맹의 장로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대책을 강구하려고 했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무림맹의 일반 무사들은 여기저기서 환호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대독종이라면 이를 갈던 무사들이 많았고, 그들이 악행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참이라, 알게 모르게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면 대외적인 체면이란 게 있게 마련이라 장로들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일이란 터지기 전에 막아야지 지금처럼 세상에 전부 알려지고 난 다음이라면 방법이 없게 마련인 것이다.

당장 상황이 난처하게 된 것은 사대독종의 사문들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금룡단주에게 이를 갈았지만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호연세가에서 설득을 했고, 그들의 설득이 아니라도 죄가 너무 명백했다. 금룡단의 증인들 중엔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자들이 여럿 있었기에 우기지도 못했다. 그 외에 장로원에 올라간 보고서엔 무당의 우종과 소림의 몽진 화상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음으로서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게 했다.

점창파 장문인은 자신의 제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세 명의 장로들과 함께 급히 무림맹으로 행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그 외에 사대독종의 사문에서도 사람들이 무림맹을 향해

출발했다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이미 무림맹에 있던 그들 사문의 존장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금룡단주에게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이를 갈았지만 당분간은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금룡단주는 단 한 번에 무림맹 무사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최고의 여자를 연인으로 둔 자. 금룡단에서의 박력. 그 엄청난 무위. 매혹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모든 시선은 금룡단의 단주에게 모아졌다.

과연 북궁연을 사랑하는 이룡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대독종의 사문은 어떻게 복수를 할 것이고, 호연세가와 북궁세가의 대결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모든 무인들에겐 생각만 해도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이렇게 무림맹의 대풍운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권왕을 아는 몇몇을 제외한, 수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차후 무림의 역사는 권왕이 무림맹에 들어온 시기부터 새롭게 써야 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