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툰:Textoon V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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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툰:Textoon V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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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x편집자⽈�‥‥‥‥‥3p

About� Textoon‥‥4p

Text단편

6p/�나에게� -케이드

30p/�사랑지키기� -곤냥이

44p/�소설� -하이에나

52p/�어느�살인자의�이야기� -아라비스

68p/� Bomb� -창수

연재

77p/�죄인을�올가미로�모는�밤� 2화� -라이어반

91p/� Lucid� Dream� 2화� -그림니르

릴레이

102p/�메시아Messiah

117p/�미첼라이아의�용병들

감상

135p/�어둠의�저편� -트리키

Toon이미지

142p/�곤냥이

143p/�제닉

144p/�청랑

145p/�홍련화

편집자曰

종합창작 커뮤니티 『 몽니 』에서 제공하는 웹툰 Textoon지의 편집장 라이

어반 인사드립니다. 처음 뵙는 분들, 그리고 1호에 이어 다시 뵙든 분들 모두 반

갑습니다. 2호를 기대하셨던 분들도, 2호가 나오지 못하리라 예상하신 분들께도

모두 인사 올립니다.

얼마 되지 않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월간이 아닌 격월간으로 기획할 때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1호를 내고 너무 늘어져서 2호를 못 만들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을 말입니다. 근데 어떻게든 이렇게 2호를 만들면서 편집장 인사말을 쓰고

있군요. 천만다행입니다.

편집하는 입장에서는, 격월이라는 시간도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바로

지난주에 1호를 만든 것 같은 느낌입니다. 편집하는 과정도, 원고를 받아내는 과

정도 제법 스펙타클하니까요. 그런데, 만드는 입장이 아닌 읽는 입장에서는 어떠

실지 모르겠습니다. 연재글을 읽기에 두 달은 너무 긴 시간이고, 단편을 기다리

기에도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창작에 있어서 생산과 공

급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격월이 아니라 매달 찾아뵙고 싶습니다만 지금 확보하고 있는

인력만 가지고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니 본 Textoon지를 더 자주 만나 뵙고

싶으신 분은 주위 창작자 분들에게 Textoon지를 소개시켜 주시면 됩니다. 인력

이 많을수록 더 자주 만나 뵐 수 있으니까요.

3월도 다 끝나가는 판국에 뒤늦게 상큼하게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즐겨

주시고, 또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0.03.27.

인력부족에 허덕이면서, 라이어반 올림.

About Textoon▷ ‘Textoon’이란?

Textoon은 ‘종합창작 커뮤니티 『 몽니 』’에서 보다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취미활동을 하기 위해 제작, 배포하는 웹진으로, Text와 Toon의 합성어입니다.

즉 글과 그림을 수단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매체의 창작자들과 함께하기 위

한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자유창작을 지향하는 『 몽니 』의 가시적인 결과

물입니다.

▷ Textoon은 웹진입니다

Textoon은 PDF파일 형태로 제공하는 웹진(Web+Magazine = Webzine)입니다. 종

이책이 아닌 웹진으로 제작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빈약한 자

금사정상 수익이 기대되지 않는 종이책 대신 부담 없이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

며, 둘째 PDF파일 특성상 지면이 사실상 무한대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Textoon에서는 참가를 원하는 사람들을 조건 없이 수용하며, 어떤 실험적 시도

도 부담 없이 할 수 있습니다.

▷ Textoon은 창작자에게 지면을 제공합니다

많은 경우, 글이나 그림 등을 제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창작물을 남들에게 보

여주고 또 반응을 얻길 원하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

입니다. 마음에 드는 커뮤니티나 카페를 찾는 것도 쉽지는 않지요.

Textoon은 이런 분들에게 자신의 창작물을 전시하고, 또한 반응을 볼 수 있는

지면을 제공합니다. 혼자만 가지고 있기 아까운 창작물을 Textoon과 함께 나누

어 주세요.

▷ Textoon에 게재된 모든 글은 원작자의 소유물입니다

Textoon에 게재된 글에 대한 모든 권리와 이용권 등은 원작자에게 있습니다.

Textoon에 ‘빌려준다’는 느낌으로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때문에 가능한 한 모

든 표현방식과 관리방법은 원작자의 의도를 최대한 존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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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Text

-단편-

1.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가을이라서인지 날씨는 제

법 쌀쌀했지만 햇빛만은 쨍쨍했다. 창밖으로 내다본 운동장에는 하얀 눈이 얇게

쌓여있는데도, 무심코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운

동장을 상상해보니, 그다지 예민하지 않던 내 감수성이 웬일인지 착실히 반응해

날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늘은 이렇게나 맑은데도, 난 어딘가에 틀어박히고 싶은

정도로 우울해졌다.

아니, 이건 아마도.

아마도 지금 이 학교에 혼자 남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3층에는 몇 명인가

의 학생들이 복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혼자'인 것이다.

이질감이 느껴져,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라는 녀석은 홀로 남겨진다고 외로움을 탈 인간이던가? 아니, 난 그렇게 센

티멘탈한 녀석이 아니었다. 혼자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외로움이라는 게 어

떤 건지도 모른 채 당연하다는 듯이 외톨이가 될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제는 과거라고 불러도 좋은 법한 시절의 이야기. 지금의 나는 혼자 남겨지는 것

을 견디지 못한다.

변했구나?

변했다.

인간은 누구나 변하기 마련이라지만, 내가 이렇게 쉽게 변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쉽게는 아니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 라는 한 줄로 넘어가

기엔 무리일 정도로. 하지만 결국 내 변화를 설명하는 데에는 이 이상 어울리는

글귀도 없었다. 지금의 변해버린 나로서는 내가 변하면서 겪어온 그 많은 일들을

실감하지 못한다.

내 추억은 녹슬어 버렸다.

기억에, 과거에 얽매여 살던 나에게 이것은 큰 파장을 가져왔다. 과거의 웃음

을 떠올리며 아무런 의욕도 찾지 못하던 ‘나’는 과거를 방치함으로써 자신감을

되찾았다. 추억의 소중함을 모르던 꼬맹이로 돌아가 버렸다. 타인이 본다면 많이

밝아졌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고상함과 고귀함을 쫓아 또래 아이들의 유치함

을 비웃던 내가, 이제는 그 아이들과 어울려 어린아이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는

데도 타인들은 그저 '좀 더 즐겁게 웃을 수 있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으로 날 평

가해 버릴 것이다.

거기서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자조적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유쾌한 웃음이었

다.

다른 사람들이 날 그렇게 일축해버린다면, 그래. 난 그렇게 변한 것이다. 친구

를 잃고 질질 짜던 우울한 꼬맹이가 이제는 친구들을 주도하는 활발한 소년이

된 것이다. 의미 없는 고귀함을 쫓지 않고, 어설프게나마 웃을 수 있는 착한 아

이가 된 것이다. 긍정적으로 변한 것이다. 옛날보다 나아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런 것일 뿐인데도, 나는 나의 변화를 웃으며 받아들일 수

가 없었다.

뭐랄까, 이길 수 없는 적과 비굴하게 타협을 하는 것 같아서 어딘가가 씁쓸했

다.

"우울하군."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이대로 가다간 무심코 ‘그립다’고 말해버릴 것 같아서.

그리고는 두 시간 전부터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종이를 구기듯 접어 비행기를 만

들었다. 의외로 그럴듯한 모양이 나와서 멀리 날아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

게 했다.

나는 내 쓸데없는 상념을 가져가주길 바라며 열려있는 창을 향해 있는 힘껏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그러나 종이비행기는 '비행'보다는 '추락'이 어울리는 모습

으로 지면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에 조금 안도하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던져버리긴 했지만, 저 종이비행기는 2일 전부터 날 괴롭혀오던 시

험지라는 녀석이다. 내 상념과는 전혀 상관없이 필요한 녀석이다. …요컨대, 결국

주우러 가야 한다. 나는 비행기를 줍기 위해 걸음을 옮기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

우울함을 주우러 가는 것 같아서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2.

분명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난 여자에게는 전혀 면역이 없다. 18살이 되

도록 키스도 못 해봤고, 애인도 한명 만들어 본 적 없다. 역시나 자랑은 아니지

만 그렇게 살아온 덕분에 남녀공학인 이 학교에서도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여

자는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여자들도 내 이름을 아는 녀석은 손에 꼽을 정도겠

지. 그런 이유로 나는 여자를 어려워하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운 없게도, 내 '시험지 비행기'는 웬 여자아이에게 들려 있었다. 다행이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전혀 상상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해 얼이 빠진 내 얼굴을

들키진 않았지만, 결국 난 저 시험지 비행기를 돌려받아야 한다.

혹시나 아는 아이일까, 하는 마음에 자세히 살펴봤지만 전혀 본 적 없는 뒷모

습이었다. 뒷모습만 가지고 누군지 알아볼 정도로 친한 여자아이가 있는 것도 아

니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행동이 뻣뻣해졌다.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잔뜩 긴장한 자신을 발견하곤 한숨을

쉬었다. 반쯤 포기한 채로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그 비행기…."

말을 이어가려는데 그녀가 나를 홱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아버렸다.

"내 거야. 돌려줘."

날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리깐 눈을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때문

에 그녀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 했지만, 자꾸만 비웃음을 머금은 여자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기사 어디의 멍청이가, 이름이 당당히 적힌 18점짜리 시험지

를 비행기로 접어서 날릴 생각을 할까. 그런 생각에 난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이

대로는 시험지가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자, 아직 안 펴봤어."

그 여자아이는 반쯤 접다 만 모양의, 아니지. 반쯤 펴다 만 모양의 시험지 비

행기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빼앗다시피 시험지를 돌려받고 몸을 돌렸다. 창피함

과 복잡 미묘한 감정에 잽싸게 발을 움직이려는데 들려선 안 돼는 두 마디 째가

들려왔다.

"─?"

내 이름이었다.

꽤나 불시의 기습이었던지라 나는 바보처럼 허둥대며 다시금 몸을 돌렸다. 소

녀는 감정이 깃들지 않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너무 놀라는 바람에 말까지 더듬어 버렸다. …무지 바보 같아 보이겠구나, 나.

"아니. 의외로 고민 같은걸 하는구나 해서."

의외로, 라는 건 평소의 날 알고 있다는 걸까? 하긴,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 상

대가 여자이다 보니 난 놀림 받았단 사실조차 신경 쓰지 못하고 바보 같은 대답

을 했다.

"사람이니까 고민이 없을 수는 없지."

소녀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날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은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게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든다. 말을 걸어놓고는 무시하려는

꽤나 건방진 태도가, 어째서인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단지 그것 때문에

나는 소녀와의 대화를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한테 고민이 있다는 건 어떻게…."

하지만 나는 곧 내가 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말끝을 흐렸다. 이래서

야 자의식 과잉처럼 보이지 않나? 과연, 그렇게 비춰졌는지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로 눈까지 감아버리곤 중얼거리듯 말했다.

"30분이 넘도록 창가에서 하늘을 보고 있으면 보통은 그런 거 아냐?"

툭 쏘듯이 말해놓은 주제에, 그녀는 작게 눈을 떠 내 눈치를 살폈다. 그것마저

나에겐 익숙했다. 나에게 있을 리 없는 여자아이에게의 익숙함. 정말로 만의 하

나지만, 아는 녀석인가 싶어 물었다.

"날 알아?"

…좀 지나치게 직구인가. 어쩌면 시비 거는 걸로 보일수도 있고. 애초에 내게 '

여자와의 평범한 회화'같은 게 가능할 리가 없으니 나에겐 이상할 것도 없지만,

눈앞의 소녀에게는 '뭐하자는 바보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겠지. 자괴감에 다시금

비웃음을 머금은 소녀의 얼굴이 떠오르려 했다. 난 애써 망상을 억누르며, 뻣뻣

한 몸짓으로 그녀의 근처에 있는 벤치로 걸어가 앉았다. 나름대로는 더 할 이야

기가 있다는 제스처였지만 소녀는 정말로 '뭐하자는 바보지?'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지,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형언할 수 없이 어색했지만, 그렇

다고 내게 소녀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솟아오를 리 만무하니 그냥 어색한 공

기를 참았다.

"알아."

소녀는 벤치의 끝에 슬쩍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런 사소한 것마저 내겐 익숙한

행동이었다. 잠깐 뜸을 들이던 소녀는 고개를 휙 돌려 날 바라보곤 말했다.

"그럼 넌 날 알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해'라고 대답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그녀의 질문

에 답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평범했다.

꼬투리가 조금 올라간 눈과 왼쪽 눈 밑의 점도, 조그만 코와 입도, 뭐가 불만

인지 뚱한 표정도,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는데도 굳이 높게 묶은 머리카락도, 전

부 '평범'의 범위에 들어가는 외모였다. 평범함이 문제라는 건 아니지만, '몇 번인

가 본 적 있는 듯한 얼굴이네'라는 것 말고는 별 감상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분

명히 뭔가가 떠오를 거라고 생각했던 터라, 꽤나 당황해서 바보 같은 표정으로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르면 모르겠다고 말하라고."

분명 내 기억 속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행동들인데도, 나는 이 소녀가 누구인

지 전혀 모른다. 그렇다고 단서가 떠오를 때까지 이대로 얼굴을 맞대고 있을 수

는 없으니, 일단 시선을 치우고는 말했다.

"모르겠어. 혹시 같은 반이야, 우리?"

내 질문에, 그녀는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 같은 반 얘들의 얼굴도 몰라?"

이런 걸 묻는걸 보니, 그녀도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뭐랄

까, 창피하지만, 이 사실에 꽤나 안심해 버렸다.

"남자라면 다 알아. 여자도…눈에 띄는 몇 명은 기억하고 있어."

내 대답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치뜨고 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잘못한건 없지

만, 어쩐지 마주 할 수가 없어서 나는 그녀에게서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때문일까, 그녀는 어딘지 추궁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럼 여기서 나랑 만났던 일 같은 거, 기억하고 있어?"

같은 거, 라는 말이 좀 마음에 걸리지만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아

니, 더듬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답은 나와 있었다. 지금까지의 내가 여자와

'만났던 일'이라고 칭할만한 교류를 가질 일이 있었을 리가 없다. 그저 스쳐지나

간걸 말하는 게 아니라면 난 이 소녀와 만난 적이 없다. 한심한 답을 찾아낸 나

는 소녀를 향해 고개를 저으려다가 소녀의 눈매를 기억해내곤 말로 대신했다.

"모르겠어. 아마 없었던 것 같은데."

그녀에 대한 기이한 익숙함에, 나는 확실히 부정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해버렸

다.

그녀를 슬쩍 쳐다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에게서 눈길을 거두며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었다.

"그렇겠지. 없었으니까."

일부러 놀리는 건지, 원래 이런 성격인지 그녀는 그 대답에 샐쭉해진 내 표정

을 보고는 악동 같은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흠잡을 데 없이 잘 어울렸는데도,

내게는 어딘지 힘겹게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딘지, 이런 것을 느끼고

있는 자신에게 위화감마저 느끼며, 나도 허세를 부리듯이 과장된 자연스러움으로

중얼거렸다.

"만난 적도 없는 상대를 용케 알고 있구나."

말해놓고서야 또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는 눈치 채지

못한 건지 그냥 신경 쓰지 않을 뿐인지 덤덤하게 대답했다.

"같은 학교 학생인데, 얼굴 정돈 기억하고 있지. 전교생이 몇 명이나 된다고."

확실히 전교생이 2백 명이 간신히 넘는 학교에 다니다 보면 싫더라도 기억하

게 된다. 여자에 대해 관심을 끊고 사는 나도, 이 학교의 학생이라면, 이름이랑

매치시키진 못하더라도 얼굴을 모르는 여자는 없으니까. 그럭저럭 납득하고 보

니, 그녀는 어느 샌가 원래의 뚱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서야 꽤나 이질

적인 미소였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나는 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안 돌아가고 뭐하고 있던 건데?"

슬슬 해가 떨어지려고 하고 있으니 그렇게까지 어색한 질문은 아닐 것이다. 아

니, 스스로도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나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 정도가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자연스러움'이다. 내 질문에 그녀는 한손으로 자신

의 턱을 꼬집듯이 짚고선 생각에 빠졌다. …생각이 필요할 정도의 질문은 아니었

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잠깐 동안 그대로 있더니 바닥에 버려진 가방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

다.

"이제부터 돌아가야지."

그리고 그대로 몇 걸음 걸어서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은 들

지 않았지만 어딘지 아쉬움 같은 것을 느끼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무한 일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온 몸의 맥이 탁 풀렸다. 여자하나 대하는 데에 이렇게

나 긴장해서는 뭐가 나아졌고 뭐가 변했다는 건지. 현실 앞에서는 이렇게 무의미

한 고민이나 끌어안고 사는 주제에. 나는 작게 한숨지으며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

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돌아갈까."

돌아가 봐야 날 기다리는 건 보충 수업 뿐이지만. 우울한 현실을 자각하며 지

상으로 시선을 옮기자 이미 눈앞에서 사라졌을 것이라 생각한 그녀가 내게서 고

작 몇 걸음 떨어진 위치에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뒤돌아선 채로 아무래도 좋

다는 느낌이 드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그렇게 돌아갈 거라면 왜 남아있던 거야?"

─어?

뒤돌아선 채로 나에게 말을 거는 그녀의 모습이, 무언가와 오버랩 된다.

짧은 머리의 남자아이.

왜인지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소년이었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바보 같

은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 채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보충수업."

내가 말을 마치자 그 소년은 나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피식, 이라는 소

리가 들릴 것만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아, 그렇구나.

툭 던지듯 차갑게 떠들지만 대화가 끊어지는 것은 바라고 있지 않다. 귀찮다는

듯이 자리를 뜨지만 누군가가 붙잡아 주기를 바라고 있다. 언제나 혼자이길 바라

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외로움을 무서워하던, 칩입을 고대하는

철옹성의 주인. 저 소년은 세상과의 싸움을 계속해나가던 '나'였다.

…이렇게나 처량했던가.

그러나 그 소년은 더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미소 띈 얼굴 그대로 옅어져,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녀의 뒷모습이 남았다. 그 뒷모습은 방금

본 소년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눈치 챘다. 그녀는 '나'와 닮아있다

는 것을. 내가 포기해버린 싸움을, 그녀는 계속해나가고 있는 것이리라. ‘나’와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인데 당차 보이던 그녀의 뒷모습이 갑자기 너무나

가냘프게 보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아니,

그녀가 정말로 과거의 ‘나’와 같다면 곧 무너져 내릴 것이다.

막아야, 해.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생각에 지배당했다. 이대로 그녀가 무너져 버

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도 돌아갈 거야."

이대로 헤어져 버린다면 앞으로 내게 그녀를 도울 기회는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고 내가 도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이대로 헤어져 버리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땡땡이치려고?"

미묘하게 생기가 담긴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어울리는 길을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교문과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잽싸게 반쯤 구겨져버린 시험지 비행기를 거친 손동작으로 다시 접어서

완성시켰다. 그리고 교복의 안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마도, "같이 가."라고. 내게도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간신히 중얼거렸던

것 같다.

3.

그녀가 안내한 길은 학교 뒤에 나 있는 산길이었다. 발자국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걸 보니 사용하는 사람은 얼마 없는 것 같았다. 때문에 길이 잘 다듬어져

있지 않았지만, 확실히 이 길을 통하면 교사들의 눈에 걸리지 않고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문제는 정문으로 당당히 나가도 제지할 사람이 없다는 거지만. 애

초에 보충수업인데다, 정규 수업일지라도 학교가 워낙에 막장이라 딱히 말릴 사

람도 없다.

좋은 길이 아니라 어울리는 길이라고 한건 이 때문이었나 보다. 사박거리는 발

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자니, 나도 다행히 어느 정도 진정할 수 있었다. 아니, 정

말로 다행일까?

일단 진정하고 나니 여자와 단 둘뿐이라는, 나에겐 금기나 다름없는 상황이 현

실적으로 다가와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못했다. 분명 그녀를 돕고 싶긴 하지

만 구체적으론 뭘 해야 하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다. 도피라고 불릴만한 선택을

해 버렸으니 조언조차도 여의치 않다고. 그러고 보니 조언은 말로 하는 거지? 결

국 나에겐 무리잖아.

그녀도 가끔씩 방향을 중얼거릴 뿐 딱히 나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결국 서

로 간에 한마디도 오가지 않은 채 산행은 끝나버렸다. 20분은 족히 걸린 것 같

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골똘해있던 나에겐 순식간이었다.

"이상하네."

제대로 포장이 돼 있는, 사람의 발길을 잔뜩 탄 길을 밟으며 그녀는 중얼거렸

다. 산길에선 빠져나왔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의 뒤에 서 있었으므로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말했는지는 보지 못했다. 혼잣말인지 나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어

서 일단 나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꽤나 한참동안 말이 이어지지 않아 뭐라도

말하려고 허둥대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에 나올 땐 이 길이 아니었는데."

…어쩐지 깨닫지 못한 사이에 굉장한 위기를 겪었던 것 같다. 그런 쓸데없는

걸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휙 돌아섰다. 나는 하릴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다가 새침한 얼굴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부터 한마디도 없네?"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는 몇 걸음 걸어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망설

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내 곁으로 다가와 걷기 시작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을 하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점점 그녀와 거리가

벌어지는 것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다정하게도 아니고, 그저 옆에 섰을 뿐이다.

분명 이 정도는 평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미묘한 거리가 ‘보통’이다. 이 이상의 상냥함이나 평범함은

나에겐 무리다.

"할 이야기가…"

없으니까, 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다. 그녀에게

서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이야기들인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애써 설명해봐야, 나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것들을 떠들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미루면 적어도 오늘은 이대로 아무런 의미 없이 헤어지고

만다. 지금 그녀를 돕는 것을 중지한다면, 앞으로 그녀를 도울 기회를 얻을 수

없다. 여자아이와 부담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해지는 것은 아무래

도 내겐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지금 정리해서 말한다고 쳐도 꽤나 뜬금없지 않나? 다짜고짜 ‘네가 곧

무너질 것 같아. 도와줄게.’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모한 일을 벌였구나,

라고. 나는 이제서야 통감했다. 단지 옛날의 나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짊어지기

엔 너무나 큰 리스크였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야 답이 나올 리 없으니 결국

내 생각의 앞머리를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할 이야기야 많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모르겠어. 말해봐야 바보 같은 이야

기로밖에 안 들릴 테고."

말을 하다 보니 나는 걷는 것을 멈추고 있었다. 고작 말 몇 마디 하는 것에 긴

장이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고 앞으로 다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길 리가 없으니, 아쉽지만 조용

히 있는 거다."

그녀는 어느 사이엔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조금

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이때만은 왜인지 그녀의 눈빛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여자와 제대로 눈을 맞추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건 어쩌

면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빛만은 그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익숙했다.

그녀는 이내 눈을 내리깔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학교에서 볼 땐 전혀 몰랐는데,"

조롱인지 즐거움인지 모를 것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너, 나랑 꽤 많이 닮았구나."

그리고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듯이 뒤로 돌아 걷기 시작했다. 유쾌하다는 생

각마저 드는 그 몸짓을 바라보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따라가야 한다

던가, 소리쳐 불러야한다던가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얼이 빠진 것처럼 그저

우두커니 서서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4.

넋이 나간 채로 얼마나 서 있던 것일까.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고 느꼈는

데 정신을 차려보니 해가 져 있었다. 그녀가 있을 때는 노을이 지고 있었으니,

이제 와서 따라가 봐야 …아니, 따라간다고 하기도 민망하군. 서 있는 동안 생각

하는 것조차 멈추고 있었는지 나는 이제서야 그녀가 남긴 말을 이해했다.

그녀는 몇 년간 변해 온, 지금의 나를 부정했다.

타협으로 치장해왔던 내 패배를 다시금 선명하게 각인시켜 버렸다. 거기에 뭔

가 문제가 있는 것이냐며 웃어넘기는 것이 지금의 내가 취해야 할 반응일 텐데,

난 웃어넘기긴 커녕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학교를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를 추억하고 있었는데도, 그 실체를 대면하고 나니 마음속 깊은 곳에 처박아

둔 패배감이 가장 먼저 고개를 쳐들었다.

…결국, 전혀 바뀌지 않았던 것일까. 세상과의 싸움을 뒤로 미루고 있을 뿐이

었던 건가. 그저 도망쳐, 모두 잊은 척 웃고 있을 뿐이었던 걸까. 그게 아니면 오

늘 처음 본 여자아이의 한마디에 다시 성 속으로 숨어버리기라도 했단 건가.

모르겠다.

…모르겠다.

지금 내 몸을 떨게 하는 것이 불안인지, 두려움인지, 그도 아니면 희열인지. 제

기랄, 떠올려보면 ‘나’는 적어도 무엇에 전율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자각하고 있었

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패잔병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가?

…모르겠다, 나로서는.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아아―."

신음인지 환성인지도 모른 채, 나는 그렇게 발음했다. 그리고 날 짓누르는 질

문들을 애써 외면했다. 잊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다시금 패

배자가 돼 버린다는 것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

니까.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으니까 그저 이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기로 했다.

또 다시 도주를 선택하는 자신에게 정나미가 떨어지는 걸 느낄 새도 없이 나

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 의문들을 무시하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려

노력했다. 그러고 보니 해가 졌구나. 집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집에 돌아가거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을 자자. 꿈도 꾸지 말고 곤히 자는 거야. 그리고 일어나

면 8시쯤 되어있겠지. 지각을 피하기 위해 투닥거리다 보면 이런 것들은 생각할

틈도 없을 거야. 근데 아직 버스가 남아 있으려나? 그나저나 지금 몇 시쯤 된 거

지?

나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어쨌든

시간을 알아야 버스 정류장으로 가야할지 학교로 돌아가서 잘 만한 곳을 찾을지

를 정할 테니까.

슬라이드를 밀어 올리자 액정에는 거무튀튀한 기본화면 대신 하얀 배경에 검

고 무뚝뚝한 글씨체로 '지금뭐하냐'라는 다섯 글자가 달랑 적혀있었다. 띄어쓰기

조차도 되어있지 않은, 실용적이라면 실용적인 문자였다.

발신 시각은 6시 36분. 화면 구석의 시계를 보니 7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문자가 왔던 때쯤엔 아마 산길을 걷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멍하

니 서있던 중에 온 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겠지.

나는 어떤 놈이 이렇게 성의 없는 질문을 던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발신인을

확인했다. 하지만 정작 거기에 있는 두 글자를 읽고 나는 바람이 새는 듯한 맥없

는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언젠가 내가 지어준 그 짓궂은 별명을 보니, 나를

압박해오던 질문에 대해 도피 이외의 선택지가 떠올랐다. 누군가 각본을 만들어

둔 것처럼 너무나 명쾌하게 떠올라서, 일순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였다.

그래,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물어보면 될 것이 아닌가. 도망칠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면 되는 거다. 그리고 이 녀석은, 나보다도 나의 변화를

잘 알고 있을 녀석이다. 답을 내놓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확실히 무언가를

말해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묘하게 안심하며 손가락을 움직여 통

화 버튼을 꾹 눌렀다.

그리고 신호음이 두 번 정도 울린 다음에야 이 녀석이 보낸 문자의 내용이 생

각났다.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뭐냐, 갑자기 전화를 걸고?"

대답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녀석은 전화를 받았다. 나는 대답 대신에 대뜸 말했

다.

"잠깐 나와라. 놀자."

5.

중학교 1학년 때였나, 나와 가장 친하던 친구가 전학을 가버렸다. 그 녀석 말

고는 친구가 전혀 없다시피 지내왔던지라, 나는 갑자기 그 학교에 홀로 버려진

것 같았다. 난 친구를 사귀는 데에 서툴렀다. 이미 친해진 녀석과 지내는 것 밖

에는 몰랐기에 ‘친해진다’는 과정에선 뭘 해야 하는지를 전혀 몰랐다. 때문에 당

시의 나에게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나름대로 친구를 사귀기 위해 여러 녀석들과 어울렸지만, 이 학교에 있는 녀석

들은 전부 그 녀석에게 못 미치는 것 같아만 보였다. 그러나 나는 미처 그 감상

을 제대로 숨기지 못했고, 점점 혼자가 되어갔다. 그러나 나는 바보처럼 내가 혼

자 남겨지길 바랐다고 생각해버렸다. 유치하게 구는 그들과 어울릴 바에는 혼자

가 나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내’가 되었다. 이긴대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세상과의 싸움을 시작했

다. 그리고 1년 뒤. 거의 고립되어가던 ‘나’의 삶에 누군가가 발을 들이밀었다.

처음엔 그저 옆 반으로 전학 온 음침한 꼬맹이였다. 그는 소심하고 유난히 말수

가 적어, 나만큼이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었다.

분명 기분 나쁜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녀석이 학교에 적

응했을 때 즈음엔 나와 어깨동무를 하고 웃고 있었다. 전학으로 내 삶에서 반쯤

발을 빼버린 그 녀석과는 전혀 닮아있지 않은. 아니, 정반대라고 할 만한 녀석이

었는데도 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전학생과 친해졌다. 세상과의 소통이 차단된

나에게 있어, 이 녀석만이 예외였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리는 변했다. 녀석의 모습에선 예의 소심함이

나 음침함을 찾아볼 수 없었고, 나 역시 조금씩이나마 세상에게 문을 열기 시작

했다. 눈에 띄는 도움을 주고받은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 녀석과 만날 수 있

어서 ‘나’는 내가 되었다. 이 녀석도 ‘내’가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변하진 못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아니, 지금의 나는 이 녀석과 변했던 내가 아냐.

6.

녀석은 내 위치를 묻더니 근처 편의점 앞에서 보자며 전화를 끊고 대뜸 튀어

나왔다. 사내놈 둘이서 갈 곳이 여의치 않아 그냥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샛노랗게 반짝거리는 네온사인 간판을 보고, 바보같이 의기투합하여 노래방엘 와

버렸다. 평소에도 단 둘이서 털레털레 잘 놀았지만, 노래방은 확실히 오랜만이었

다.

"칙칙하게 사내놈 둘이서 무슨 놈의 노래방이냐."

녀석은 마이크를 집어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뭐라뭐라 투덜대면서

도 노래는 부를 생각인 것 같다. 하긴, 그러기 위해 노래방에 왔을 테니. 나는 그

저 말없이 웃어 보였다. 녀석은 마주 씨익 웃더니 리모컨을 조작했다. 무슨 드라

마의 OST라는 노래였는데, 노래방에 오면 언제나 이 노래로 시작했다. 간주가

흐르기 시작하자 녀석은 날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방정맞게 일어나서 노래를 부

르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본 적도 없었고 좋아하는 곡도 아니었지만, 멜로디와 가사는 이 녀석

덕분에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눈을 감고 작은 목소리로 그 노래를 흥얼

거렸다. 이러고 있자니 중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때에도

이렇게 놀고 있으면 날 괴롭히던 생각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고

등학교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놀고 있어도 현실의 문제들에 눌려 줄곧 마음 한

켠이 싸했었다. 그러나 방금 이 좁고 캄캄한 방에 들어온 이후로, 거짓말처럼 나

는 그 불안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이 더욱 그립게 느껴지는 걸

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혼자서 킥킥대고 있으려니 어느 샌가 노래가 끝났다. 예약

된 노래가 있을 리 없었으니 일순 정적이 흘렀다. 옛날에 나는 무슨 노래를 불렀

더라, 같은 생각을 하며 느릿하게 움직여 책을 집어 드는데 녀석이 그 책을 휙

뺏어들며 자리로 돌아와 주저앉으며 말했다.

"근데 웬일이냐, 네가 놀자고 불러내고."

그러게, 어쩐 일일까, 하고 중얼거리며 나는 다른 책을 집어와 펼쳤다. 이러고

있자니 어쩐지 아까까지 하고 있던 고민들이 실감나지 않아서, 나는 남의 일처럼

말했다.

"지금의 나에게 의문을 가지게 됐단 말이지. 실은 난 전혀 변하지 않은 걸까,

하고. 근데 네가 문자를 보내 뒀길래 불러봤다."

녀석은 여전히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날 위해 관심 없는 척 해주는 건지 정

말로 관심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그는 팔락팔락 페이지를 넘기며 툭 던지듯 대

답했다.

"이제 와서 무슨. 새삼 중학생 시절이 그리워지기라도 했냐?"

정곡이었지만 긍정하지 않았다. 아니, 다시금 그 시절의 초라함이 떠올라 긍정

하지 못했다. 초라하지만, ‘나’는 아직 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싸움을 계속해

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할 말을 찾아내고, 입을 열려는데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그 얼굴에 서려있는 한심하다는 기색에 나는 의문을 표했다.

"왜 그렇게 봐?"

그는 책을 덮어서 테이블에 던졌다. 그리고 깍지를 끼더니 쭈우욱 기지개를 펴

며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춘기도 아니고 왜 그러는데? 옛날 일이란 건 원래 기억 속에선 미화되어 있

기 마련이야."

아니, 다시 만난 ‘나’는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아까 옛날의 우리랑 비슷한 아일 하나 만났거든."

결국 난 전부 털어놓기로 했다. 이대로라면 이 녀석은 그냥 감수성이 풍부해져

서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거라고 밀어버릴 기세다.

나는 아까 만난 소녀에 대해 적당히 이야기했다. 여자아이라는 말에 꽤나 미심

쩍다는 눈빛을 했던 것 같지만 일단 무시하고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서 '우린 닮았구나'라는 말을 듣고 좀 아까까지 패닉 상태로 있었단 말이

지. 그런 여자가 '닮았다'고 할 정도면 어쩌면 난 지금까지 전혀 바뀌지 않은 게

아닐까?"

말을 마치자, 이 녀석은 명백히 귀찮다는 표정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손

을 멈추고도 머리를 굴리는지 잠시 말이 없더니 갑자기 손을 휘둘러 날 가리켰

다.

"먼저, 도와주려고 한 주제에 휩쓸려 다닌 넌 멍청하다."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근데 내 질문이랑은 별 상관없잖아,

자식아. 그는 날 가리키던 손을 내려 허리에 대며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널' 닮아서 도와주려고 했다며? 그럼 먼저 흠씬 두들겨 팬 다음에 '지

금 넌 이 세상에서 제일 안쓰러운 허세를 부리고 있으니까 당장 그만 둬'라고 했

어야지, 너마저 옛날로 돌아가려고 들면 어쩌자는 거냐. 아니, 이 방법은 너한테

는 여러모로 무리겠군."

그는 한심하다는 듯이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항변하려고 보니 어째서인지

상담을 받고 있는 게 아니라 혼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그런 생각을 무

시하며 말했다.

"알면 말하지 마. 그리고 돌아가고 싶었던 건 아니라고."

그런데도 나는 어쩐지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말해버렸다. 녀석은 테이블로

걸어가 그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정말로 날 떼쓰는 어린아이쯤으로 여기고 있는

지, 그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그럼 그 얘가 부럽기라도 했던 거냐? 아니면 네 몇 년간의 변화는 처음 보는

여자애가 한 말 한 마디에 바뀔 만큼 의미가 없었다던가?"

아까부터 스스로에게 묻고 있던 질문이었기에 나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아

니, 몇 번을 고민해서 말하더라도 결국은 같은 것을 말했겠지만.

"그걸 몰라서 너한테 말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말을 하며 나는 고개를 들어 그 녀석을 바라봤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 얼굴에 용기라도 얻은 것처

럼, 나는 내가 묻고 싶었던 것들을 전부 말해버렸다.

"솔직히 지금 아무것도 모르겠다. 옛날로부터 전혀 변하지 않은 건지, 그 소녀

때문에 옛날로 돌아가 버린 건지. 학교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사람은 쉽게 안 바

뀌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날 보니 전혀 아닌 것 같다. 내 정신이라는 게 이

렇게 허약했나 싶기도 하고. 뭐가 어떻게 되먹은 건지 전혀 모르겠다."

갈수록 신세 한탄처럼 변해버려 나는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의 눈을 쳐다보았

다. 그 가늘게 뜬 눈은 날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내 이야기를 확실히 들어주고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그 눈에 대고 말하듯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네가 뭔가 말해달라고."

얘기를 듣고도 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노래방엘 와서 계속 침묵하고

있는 건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걸 지금 입 밖에 내

는 건 더더욱 실례일 테니 나 역시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 녀석은 인상을 쓰

고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방금 불렀던 노래의 간주가 흐를 정도의 시간을

뜸들이고서야 입을 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일 기억하냐? 그, 내가 더는 너희 교실로 올라가지 않겠다

고 했던 거 말야."

그거라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들어올 때 우리는 각각 인문계

와 실업계로 진학했다. 덕에 나는 3층의 교실로, 녀석은 1층의 교실로 가게 되었

다. 그래서인지 만나기가 힘들어져 한동안 싱숭생숭 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 이

녀석이 우리 교실로 찾아오더니 더는 3층 교실로 찾아오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

었다. 처음엔 장난으로 넘기려 했는데 왜인지 심각해져 서로 뭔가 굉장히 낯 뜨

거운 소릴 진지하게 해댔었다. 거의 똑같은 성격으로 자라버려서 의견충돌도 별

로 없던 우리에게는 기억에 남을만한 일이지.

하지만 이 일은 지금의 내 상황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적어도 나는 이 녀석

의 소심함이 다시 발작했던 게 이유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 일은 선

명하진 않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기억한다. 서로 창피한 소릴 죽어라고 해댔지."

내 말을 듣더니, 녀석은 한차례 소리 내어 웃더니 말했다.

"응, 서로 자기가 무슨 비극의 주인공인 양 떠들어재꼈지. 근데 우리가 언제

원래대로 되돌아 왔는지도 기억 하냐?"

역시나 대강이지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며칠인지 몇 주인지

가 지나자 우리는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왔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 일주일쯤 뒤였던 것 같다. 근데 그건 갑자기 왜?"

어쩐지 얘기가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서, 나는 그런 질문을 덧

붙였다. 그러나 그는 내 질문에 대답 할 생각은 않고 재차 질문했다.

"그렇게 싸워버리고 화해하기까지, 우린 뭘 했지?"

우리의 유치한 말다툼을 싸움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엔….

"…아무것도 안 했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딱히 서로를 피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한동안 얼굴한번

마주치지 못했고, 그 동안은 그게 이상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우

연히 하굣길에서 마주쳐 화해라고 할 것도 없이 그저 서로의 머리통을 한 대씩

때리곤 함께 놀러 가 버렸다. 그러니까, 화해하기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

았다. 말도 한번 섞지 않았고, 서로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를 싸매는 일도 없었다.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정확하게 말했다.

"그래, 우린 그 동안 아무것도 안 했어. 그러니까 난 아무 말도 안할 거다."

순간 이 녀석이 날 놀리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녀석의 표

정만은 더없이 진지했다. 혹시 정말로 놀리고 있더라도 지금 다짜고짜 화를 낼

수는 없으니, 일단 확인하듯 물었다.

"무슨 헛소리야 그건?"

미묘한 단어 선택에 내심 조금 철렁했지만 말해놓고 녀석의 눈치를 살피기에

도 꼴이 우스워 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내가 무슨 생

각을 하는지에는 관심도 없는지 즉답했다.

"어차피 넌 결국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는 소리다. 내 생각엔 그 때엔 처음에

괜한 소릴 떠들었더니 며칠이나 걸린 것 같아. 나 혼자 머리 싸맸다면 몇 시간이

면 답이 나올 것 같았는데 말야. 그러니까 노코멘트다."

이 녀석 나름으로는 날 신경 써서 말해주는 것 같았지만, 내게는 전혀 관계없

는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정말로 모르는 건가 싶어, 나는 굳이 입

으로 말했다.

"상황이 전혀 다르잖아, 그때랑은?"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 때의 이 녀석과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

다. 이 녀석은 돌연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었을 뿐이었다. 지금의 나와는 다르다.

"뭐가 다른데? 그 때 난 이미 이겨냈을 과거의 소심함에 말려들어서 그런 실수

를 했잖아. 그 여자애가 부추겼을 뿐이지 지금 너도 과거의 자신에게 말려들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냐?"

그런 게, 아냐.

이 녀석이 떠들고 있는 말이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간신히 그렇게 항변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그대로 입

을 다물고 있으려니 가슴 한구석에서 불안인지 분노인지 모를 것이 끓어올랐다.

어쩐지 나만이 옛날로 돌아가 버린 것만 같았다. 이 녀석은 이렇게나 자랐는데,

결국 나는 전혀 변하지 않은 그대로였다는 건가.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

석은 계속해서 말했다.

"요컨대, 넌 지금 '변해버린' 자신을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거야. 그래

서 계기가 생기면 옛날 일들을 과거에 두지 못하고 현실로 끌어오는 거지."

녀석은 계속해서 알듯 말듯한 소리를 해댔다. 나는 고개를 내리며 인상을 찡그

렸다. 이해할 수 없어. 아니, 이해한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어. 자신을 세뇌하듯

납득할 수 없다고 되뇌는데도 마음 한구석에선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

스로도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것들은 외면했다.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는 거다. 내 경우엔 변화를 받아들일 배짱이 없었지만,

너에게 배짱은 충분해 보이는데."

─.

…너무나 정곡을 찔려 일순 사고마저 정지했다.

녀석의 말대로, 실은 거부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날 짓누르고 있

는 이 괴로운 상념들을 어리광이라고 단정 지어 버린 것에 반발심이 일었는지,

거기까지 알고 있는데도 나는 쉽사리 그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래

도 내 표정이 펴지지 않아서인지, 녀석은 나에게 다가와 내 등을 가볍게 두들기

며 말했다.

"한 가지만 확실히 말해두마. 네 변화는 무의미하지 않았어. 우린 확실히 '전보

다 나아진 거'야."

너무나 가벼운, 그리고 확실한 한마디에, 오한마저 들어 몸이 가볍게 떨렸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고 한 주제에 녀석은 이렇게나 확실한 대답을 던져 주었

다. 아니, 실은 나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녀석의 말대로, 나는 어

리광을 부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나'의 성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 발을 떼어버리면 다시는

그 성 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성문이 닫히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 발을 떼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예 무너트

려버린 자신의 성벽을 보여주며. 어쨌거나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은 정말로 이 일

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 하지 않았다. 갑자기 긴장이 풀어져 소파에 몸을 파묻으

려니 언제 입력했는지 스피커에서 처음 듣는 노래의 반주가 흘러나왔다. 어느 샌

가 녀석은 테이블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쥐고 있었다. 나에게 등을 보인 채로, 우

두커니 서서 그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새 듣는 노랜데 이거 굉장히 좋더라고. 뭐, 요새 아이돌에 대해 너한테 떠

들어 봐야 관심도 없지? 이 노래 들어본 적은 있냐?"

녀석의 말이 귀를 울렸지만 이해는 되지 않았다. 그저 오늘은 누군가의 뒷모습

을 많이 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 등은 어떤 모습일까? 잘은 모르지만, ‘이

제는’ 이 녀석과 닮아있지 않을까. 뒷모습만 본다면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

로.

녀석은 정말로 평소대로 놀아버릴 생각인지, 마이크에 대고 목을 풀기 시작했

다. 아직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들은 남아있었지만, 다시금 슬그머니 내 안에서

들끓던 감정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상쾌하다고 해도 좋을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의 마이크를 뺏어들었다.

"근성으로 불러주마."

들어본 적이 없다고 인정해 버리는 꼴이 되어 버렸지만 나도 녀석도 별로 상

관하지 않았다. 노래가 시작되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악을 쓰기 시작

했다. 분명 열 몇 명이나 되는 여자 아이돌의 노래였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7.

여차저차 해서 결국 어제는 녀석의 집에서 묵었다.

그간 둘이서 놀지 못한 게 한이라도 되었는지 그 뒤로도 우리는 3시간쯤 노래

방에서 악을 쓰다가 돌아왔다. 돌아온 후에도 어쩐지 둘 다 잘 생각은 들지 않아

밤을 새워서 게임을 하며 떠들어댔다.

결국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늦잠. 알람을 울리는 핸드폰을 보고 새삼 유용하다

고 생각하며, 아침도 거르고 머리도 반쯤 산발을 해선 학교로 향했다. 그렇게 딸

리는 체력으로 달리고 달려서 숨을 몰아쉬며 교문에 도착하니, 이미 지각인건지

그저 귀찮았을 뿐 인건지 선생들은 한명도 없었다.

"지각인 것 같네. 어차피 토요일이니까 상관없겠지."

나는 그제서야 오늘의 첫마디를 꺼냈다. 그것을 신호로 우리는 걸음을 늦추었

다.

"토요일이었냐. 에이, 부모님도 집에 없는데 그냥 빠질걸."

녀석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학교를

빠진 적은 한 번도 없는 녀석이다. 나는 툭 쏘아주려다가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

고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던가."

걸음을 늦추었는데도, 학교가 워낙 좁아서 금세 건물의 앞에 다다랐다. 녀석은

졸려 죽겠다는 얼굴로 1층으로 몸을 돌렸다.

"가보마. 이따 보자."

나는 대답하기도 귀찮아 그저 고개만 까딱해 보였다. 그리고는 교실을 향해 밍

기적밍기적 몸을 움직였다. 막 계단을 오르려는데, 근처의 교실들에서 조례를 시

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피곤함도 피곤함이지만,

갑자기 그 무거운 짐들을 전부 벗어던지니 어딘가에서 나사가 한두 개 빠진 모

양이었다. 어차피 교실을 향해봐야, 이렇게나 맑은 토요일에 교실에 처박아두고

자습이나 시킬 것이다, 그런 시시껄렁한 수업을 받을 바에는 작게나마 뭔가를 남

기기로 했다.

그래, 일탈이다. ‘나’의 성을 부순 기념으로 나에게 휴가를 주도록 하자. 땡땡

이나 치면서 거창한 이유를 달고 있다고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그런 내가 싫지

않았다.

좋아, 일탈이라고 한다면 역시나 옥상인가?

나는 열려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옥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8.

웬일로 옥상이 열려있다 했더니, 선객이 있었다.

“…아.”

뭔가 할 말은 잔뜩 준비했었는데도, 막상 대면하니 잔뜩 긴장해서 이런 얼빠진

소리밖에 하지 못했다. 옥상의 선객은 다름 아닌 어제의 여자아이였다. 아직은

날 발견하지 못했는지, 난간에 손을 얹은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묶지 않은 채라, 소녀의 머리칼은 쉴 새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소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해?”

이 정도면 당황해서 돌아볼 법도 한데, 소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시

선을 하늘에 둔 채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냥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어. 30분은 훨씬 지났을 걸.”

그제서야 그녀는 나에게 시선을 줬다. 굉장히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는

데 역시나 여자 앞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잔뜩 긴장해 버렸다. 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점마저 지금은 싫지 않았다.

나는 피식피식 터져 나오는 만족스런 미소를 참으며 말했다.

“고민이 있나 보네.”

내 대답에 그녀는 맥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전에 내가 말했던, 얼빠

진 대답을 흉내 냈다.

“응, 사람이니까 없을 수는 없지.”

신기하게도, 그런 말을 듣고도 나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무슨 고민인데?”

소녀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더니 난간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숙였다. 내심 실

례인걸 물었나 찔려하고 있는데 그녀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작은 목소리

로 말했다.

“그냥, 이것저것. …실은, 여기서 떨어지면 정말로 죽을까, 하고 생각해봤어.”

조금 놀랐지만, 우선 이유나 들어보자 하는 생각에 나는 다그치듯 물었다.

“갑자기 왜?”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간신히 대답했다. 바람이 조금만 셌더라면 정말로 안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잘 모르겠어. 그냥 무심코 떠올랐어.”

여전히 그녀는 ‘나’를 닮아있었다. ‘나’도 무심코 저런 것을 곧잘 생각해보곤

했었다. 실행 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는데도 괜히 죽음에 관한 걸 머릿속에 그

려보곤 했다. 하지만 결국 기분만 우울해 진 채로 별수 없이 금방 일상의 굴레로

돌아왔지만.

이제는 완벽히 추억으로 변해버린 ‘나’를 떠올리며, 나는 그녀에게 재차 물었

다.

“고민은 그것 뿐?”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턱을 꼬집듯 짚었다. 그리고 한차례 한숨을 내쉬고

는, 몸을 축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아니, 많아. 이 세상 모든 게 다 고민거리지.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고개를 들어 묘한 눈길로 날 쳐다보았다. 나는 예외라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이제는 나도 그녀가 말한 ‘누구’의 범주에 들어

갈 것이다. 그 생각에 결심을 굳히고 나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 멈춰서, 나는 말했다.

“하나 충고할게.”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나는 기다리지 않고 손을 들어 소녀의

머리통을 가볍게 때렸다. 딱, 하고 생각 외로 경쾌한 소리가 나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나는 약해지지 않고 말했다.

“넌 지금 세상에서 제일 안쓰러운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거야.”

소녀는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며 마지막 대사를 읊었다.

"그거 관두면 나처럼 웃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는 피곤에 찌들어있을 얼굴로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보기에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 행복해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옥상의 출구를 향했다. 어이없어 하

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불안하긴 커녕 유쾌하기까지 했다.

이제 정말로 '나'와 작별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의미 없이 몸이 떨려왔다.

옥상에서 나와 계단을 걸어 내려가고 있으려니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이 걸어

나왔다. 그 녀석은 커다랗게 하품을 한 다음에, 날 발견하고는 씨익 웃었다. 눈이

팅팅 불어있는 주제에,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꽤나 멋져 보이는 미소였다. 나는

마주 웃어 보이며 말했다.

"땡땡이냐."

녀석도 지지 않고 잽싸게 말했다.

"너야말로 어디서 내려오는 거냐."

큰 소리로 웃어버리고 싶었지만, 우리는 간신히 참아내고 그저 킥킥댔다.

"에라, 오늘은 피시방이나 가자."

녀석은 계단을 향해 몸을 돌리며 유쾌하게 말했다. 나는 그 등을 따라 가려다

가, 머릿속을 지나가는 생각에 멈춰 섰다.

"잠깐, 할 일이 하나 남았다."

나는 교복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꼬깃꼬깃해져버린 종이를 꺼냈다. 심하게

구겨져 있어서, 이제는 제대로 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시험지 비행기’였다. 그

녀석을 조심스레 들고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볼품없는 겉모습 때문에 멀리

날아갈 것이란 기대는 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할 일을 한다는 기분으로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려있는 창을 향해 반쯤 던지는 모양새로 있는 힘껏 비

행기를 날렸다.

그러나 비행기는 내 예상을 깨고 힘차게 허공을 가르고 날아올랐다. 놀라움에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며 지금쯤 떨어졌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 비행기가 추락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으니까.

케이드

어째서인지 고삼몬 주제에 머리털 나고 처음 써보는 '완성작'입니다.

처음에는 '수필의 느낌으로 가보자'였는데 어째 완성하고 나니 중2병

냄새가 풍기는 녀석으로 만들어져 버렸네요. 제 이야기만 잔뜩 써놓은

지라 마음에는 들지만 .... 뭐랄까, 타인에게 일기를 읽히는 기분인 것

도 같은 게 좀 거시기 하네요.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pills here.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그딴 거 어떻든 상관없다.

난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까.

월요일 아침. 언제나처럼 학교에 가고 있었다. 지루한 일상의 모든 것이 바뀌

게 된 날. 그날의 날씨는 방학을 앞둔 여름답게 푹푹 찌는 날씨였다. 그 주 토요

일이 방학이긴 했지만, 얼굴도 모르는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혼자서 살고 있는 내

게 방학 따위 즐거울 리가 없었다. 그나마 후원자들의 대표격인 김 사장님의 동

의하에 방학 동안 알바를 해서 내 용돈을 버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학

생활이었다. 중학교 2학년의 그날까지 난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날의 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은 꿈 때문에 무척 기분이 나쁜 상태

였다. 덕분에 평상시보다도 일찍 집을 나섰고, 평소 기분 나쁠 때의 습관대로 앞

머리로 살짝 눈을 가려 놓았다. 어차피 앞머리로 눈을 가려봤자 내 시야를 확보

하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으니 괜찮았다. 아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인적이 드문 차도의 앞에서 초록 불로 바뀔 생각이 전혀 없단 듯 멈춰 선 사

람 형상이 들어간 빨간 불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는데, 어째

서인지 그 날은 주변의 어느 것 하나 살펴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 신호만 계

속 노려보고 있었다.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처럼 서 있던 빨간 불빛 속의 사람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순식간에 발랄하게 초록 빛 속을 걷고 있는 이에게 시선

을 빼앗겼다. 몇 초간 왠지 기분 나쁘게 생글거린다는 느낌이 드는 검은 사내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발걸음을 떼었다. ‘그래, 좋아. 네 뜻에 따라주지.’따위의 생

각을 하며 계속해서 초록 불을 노려보면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웬 목소리 하

나가 끼어들었다.

“스톱! 멈춰! 위험해!”

갑작스런 큰 소리에 놀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본 것은 나를 향해 달

려오다가 급정거를 시도하고 있는 한 대의 스타렉스였다.

‘젠장. 그걸 왜 이제 말해? 차의 진로에 들어서기 전에 말하거나 차라리 뛰라

고 할 것이지.’

그 짧은 순간에 이러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긴 했지만 그건 병원에서 정신이 든 후의 이야기였다.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주변 가득 감돌았다. 난 언제나 병원이 싫었다. 특히 병

원 특유의 그 알코올 냄새는 사람을 구역질나게 하는 효과가 있어 더욱 그러했

다. 정신을 잃었던 내가 정신을 차린 것도 그 알싸한 향을 뒤늦게 인식한 뇌가

못 견디겠단 듯 속과 머릴 있는 대로 뒤흔들어대어서였다.

“어라, 일어났네. 몸은 좀 괜찮아?”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더라? 약간은 뻐

근한 느낌이 남아있어 왠지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억지로 다독여 시야를 돌리자

생글생글 웃으며 날 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내게 대강 안부를 물은 그는 어이

없게도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간호사를 불러왔다. 먼저 그가 돌아와

침대 옆 간의 침대에 앉고 얼마 있지 않아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상태를 체크해보았다. 주절거리며 저희끼리 내 몸에 대해 조잘

거리는 게 너무 짜증났다.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걸 아파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한 건지 한 의사가 내게 아픈 곳을 물어왔다. 울컥하는 걸 꾹 억누르며 지끈

대는 머리를 가리키자 그네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트에

뭔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야 드디어 난 내 상태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온 몸 곳곳에 타박상을 입긴 했지만 그건 크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한

일, 이주 정도면 다 나을 겁니다. 문제는 갈비뼈에 금이 갔어요. 머리가 아프시다

는 건 조금 더 살펴봐야 알 수 있겠군요. 일단 다른 건 몰라도 갈비뼈가 완전히

붙을 때까진 병원에 계셔야합니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 역겨운 곳에 있으라고? 그래도 다행히 핑계거리는

있었다.

“죄송하지만, 전 병원비를 낼 돈이 없어요. 하물며 입원비는…….”

“아, 그거 100% 운전자 과실이라 그 쪽에서 내주기로 했어. 여기 그 사람 명

함.”

갑작스레 끼어든 남자가 내게 종이 조각 두 장을 건네주었다. 명함. 한 장은

운전자의 것이라 쳐도 다른 하나는 뭐지?

“아. 그건 내 명함이야. 과제물로 만들었는데 어디 버릴 수도 없고 해서 말이

야. 너 줄게.”

어이없어 하는 나를 두고 그 남자는 의사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의

사들은 들어 올 때와 마찬가지로 우르르 나가버렸다. 아마도 내가 깨어난 것 때

문에 온 거라 나만 살피고 다른 환자들은 따로 보지 않는 듯 했다. 그들이 나가

고 나자 남자가 내 옆에 걸터앉았다.

“내 이름은 명함 봤으니까 알지? 신일호고, 저쪽의 Y대에 다니고 있는 평범한

대학생이야. 넌 이은아 맞지? 미안해. 병원에 접수하고 하느라 멋대로 지갑을 살

폈어.”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내민 것은 바로 내 지갑이었다. 봤으면 얼른 가방에 넣어

둘 것이지, 계속 가지고 있는 건 뭐람? 얼른 빼앗듯 낚아챈 지갑 안을 살펴보았

지만 다행히 없어진 건 없었다.

“에이. 아무렴 환자 지갑을 털었을까봐? 이름이랑만 확인하고 고스란히 뒀으니

까 걱정 마. 음, 그런데 너…….”

뭐가 걸리는 건지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는 무척이나 머뭇거리는 어

조로 내게 물었다.

“너, 가족이 없어?”

난 또 뭐라고.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모두 저런 식이다. 난 얼굴도 모르는 사

람들 그다지 상관없는데, 괜히 자기가 더 걱정하고, 미안해하고.

“네. 없어요.”

“후우……. 그럼 보호자나 문병 올 사람도 없겠네?”

“사람 무시해요? 친구쯤은 있어요. 보호자는……, 김 사장님께 연락 드려야하

나….”

살짝 걱정되는 마음에 중얼거리자 어째서인지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 사

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김 사장님은 내 후원자 중 한 분이실 뿐이에요.

원조교제 같은 이상한 생각하고 있다면 당장 집어치워요.”

“아, 난 또 사장님들 찾을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부르니까 혹시나 했

지.”

좀 머쓱했던 듯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정말로 원조교제 따위를 생각

하고 있었다는 거군.

“근데 그 김 사장님이라는 분이 여기서 계속 간병인으로 계실 순 없으실 거

아니야?”

“그렇겠죠. 간병인 같은 거 필요 없어요. 혼자 다 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나보다.

“무슨 소리야. 사고로 갈비뼈에 금 갔단 소리 못 들었어? 함부로 움직이지 것

도 안돼는 마당에. 간병인이 없다면 내가 해줄게. 어차피 난 종강 했고, 개강하고

나서도 수업시간만 빼면 나머지 시간은 프리니까. 그리고 아까 의사 선생님 말

들어보니 한 달 정도면 다 나을 것 같다니까, 그 동안은 충분히 있을 수 있어.”

“필요 없어요. 처음 만난 분께 그렇게 까지 민폐 끼치고 싶지도 않고요. 그렇

게까지 해 주실 이유도 없잖아요.”

보통 교통사고를 목격하면 신고를 하고 병원까지 데려다 주기도 하지만 간병

인까지 자처해주진 않는다. 당연하다. 간병인은 자기 일상을 포기하고 환자에게

얽매여 있어야 하는데 가족쯤 되지 않는 이상 해 줄 이유가 없다. 그도 자기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는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내가 원래 오지랖이 좀 넓어서 그래.”

결국 그는 부득불 우겨 나의 간병인을 맡았다. 뭔가 이유가 더 있을 것 같은

데……. 학교에 연락을 해준 것도 그였다. 그 날 바로 짐을 가져오겠다며 나가더

니 그대로 학교에 들려 내가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해야한다는 사실을 알렸단

다. 덕분에 방학식 날, 나는 친하던 친구들의 병문안을 받게 되었다. 친구들이 병

문안을 오자 그는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줬다. 자기도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다면

서.

“은아, 너 어떻게 된 거야? 문자로는 ‘별 거 아니야. 나중에 만나면 얘기해 줄

게.’라고만 하고. 자, 이제 우리가 왔으니 이야기 해 봐.”

친한 친구들 중에서 가장 오지랖 넓고 걱정 많은 미래가 말했다. 같이 온 지혜

나 혜란이도 듣고 싶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봤고 그녀들의 기세에 눌린 나는 조

심조심 이야기를 털어놨다.

“너, 내가, 앞머리로, 눈, 가리고, 다니지, 말라고, 얘기, 했지!”

“야, 야, 여기 병원이야. 소리 지르진 마.”

미래가 마디마디 끊어 말하며 내게 소리치려하자 얼른 지혜가 말리고 나섰다.

“앞머리로 그 정도 가린다고 시야 방해 받지는 않는데….”

그 와중에 내가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자, 혜란이가 그에 핀

잔을 주었다.

“그래도 이번에 이렇게 사고 나고 했잖아. 앞으론 미래 말 듣고 그렇게 가리지

마. 보기도 답답하고 위험하잖아. 우리가 너 사고 났다는 소리에 얼마나 놀랐는

지 알아?”

그 후 나는 셋에게서 그가 학교에 내 얘기를 전했을 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 이들이 놀란 것은 내가 사고가 났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웬 남

자가 나타나 그 이야기를 전했다는 사실이었다. 내 친구들은 이미 내가 가족 없

이 혼자 산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었다고 했다. 그리

고 사고 소식을 듣고 내게 간병인을 할 사람이 없단 걸 아는 이들은 원래 자기

네가 번갈아 가며 간병인을 맡을 생각까지 했다고 했다.

“근데 처음 보는 사람 간병인 맡기는 좀 그렇지 않아? 아무리 방학 중인 대학

생이라도 집에서 걱정도 하고 그럴 텐데?”

“아. 지금 혼자 자취하고 있대. 집에 내려가는 건 핑계 대강 둘러대면 된다고

하던데?”

“아무리 그래도 보통 그렇게 까지 못하지 않아? 그냥 오지랖이 넓어서 그런다

고 하기엔 좀 과한 것 같은데?”

지혜의 말에 혜란이가 약간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틱한 이유를 꺼

내 보였다.

“뭐, 첫 눈에 반했다거나 그런 거 아니야?”

“오오.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된다!”

바로 맞장구치는 지혜. 거기에 미래가 장난기로 눈을 빛내면서 짐짓 엄한 표정

을 지어보였다.

“은아야, 이 언니는 허락 못한다.”

“허락은 무슨 놈의 허락이야!”

내가 웃으며 장난으로 크지 않게 소리치자 곧 네 명 모두 웃음이 터져버렸다.

농담으로 나온 소리였지만, 나도 이유가 부족하다 느끼고 있던 때였기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병원생활은 생각보다 오래 걸려 한달하고도 열흘가량을 더 침대신세를 져야했

다. 그 동안 내내 일호오빠는 내 옆에서 간병해줬고, 친구들도 종종 놀러와 준

덕분에 끔찍할 줄 알았던 병원생활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병원에서 동고동락하면

서 일호오빠와도 많이 친해져서 퇴원을 할 즈음에는 말도 놓았고 서로의 친구관

계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다.

내 핸드폰은 사고 때 고장 나서 오빠가 A/S센터에 맡겨 수리해 주었다. 수리

비는 공짜였다고 말했지만 그럴 리가 없으니 결국 오빠가 내줬다는 결론이 나왔

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점점 오빠가 나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다는 확신이

늘어갔고 실상 우리는 사귀지만 않을 뿐, 연인처럼 지내고 있었다.

퇴원을 하고 나자 방학은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어차피 방학숙제는 병원

에 있으면서 심심함을 달랠 겸 다 해두었고, 따로 준비 할 것도 없었다. 그런 때

에 방학 내내 병원에만 있어서 갑갑하지 않았냐며 제의하는 드라이브를 거절할

이유 따위 없었다.

면허를 가지고 있던 오빠가 차를 렌트해서 데려가 준 곳은 바닷가였다. 여름

내내 바다 한 번 못 들어가 보면 아쉽지 않느냐며 발이라도 담그자는 오빠의 제

안에 따라 둘 모두 신발을 벗고 바닷가를 거닐었다. 방학의 막바지를 즐기기 위

해 놀러온 이들이 여럿 있었지만 미어터질 정도로 사람이 많은 건 아니었고, 둘

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인적 없는 바위 근처까지 와버렸

다.

“꽤 멀리 왔네. 여기서 좀 쉬었다가 돌아갈까?”

“응. 그러자.”

오랜만에 맛보는 바닷바람에 기분이 좋아져 생글 웃으면서 그늘진 바위에 걸

터앉는 오빠의 옆에 살짝 앉았다. 시원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짝 날리자 간질이

는 느낌이 나며 웃음이 나왔다.

“병원에만 있다가 이렇게 나오니까 정말 좋다.”

“그렇게 말해주니까 차까지 렌트해서 온 보람이 있네. 너 전에 병원은 알코올

냄새 때문에 싫다고 했었으니까, 퇴원 축하 겸해서 알코올 냄새를 싹 날려버릴

곳을 생각해 봤거든. 역시 시원한 바닷바람이 최고 일 것 같단 생각이 들더라.”

특유의 씩 웃는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오빠가 왠지 반짝여 보이는 느낌이었다.

“어머? 그 말 기억하고 있었어? 입원하고 얼마 안 되서 지나가듯 얘기 했던

것 같은데?”

“그랬지. 근데 계속 마음에 걸리더라고. 어디 나가지도 못하는데 심지어 병원

싫어한다고 하니까, 퇴원하면 시원한 바람이도 쐬게 해줘야지, 하고 있었어.”

새삼스레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어졌다. 사고 현장의 목격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날 생각해 주고, 아껴주는 오빠가 너무 고마웠고, 또 좋았다.

“고마워, 일호오빠.”

“고맙긴 뭘.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한 남자가 연약한 소녀를 위해 이 정도는 해

야지.”

장난스럽게 말하며 별로 굵지도 않은 팔을 들어 보이는 오빠의 익살스런 모습

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하하, 그래도 보통 이렇게까지 해주진 않는다고. 오빠가 좀 특이한 거지.”

“쩝.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 없네. 뭐, 내가 좀 특이하긴 하니까.”

내 한 마디에 또 금방 머쓱해하는 오빠의 모습이 재미있어 왠지 더 놀려주고

싶어졌다.

“그래도 난 그런 특이하게 착한 남자 싫지 않더라.”

생글생글 웃으며 먼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오빠가 약간 놀란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오빠가 좋다고 이야기한 적은 한번도

없었으니 오빠가 놀라 바라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조용하던 오빠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고백…… 해야겠지?”

순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설마 이렇게 갑자기 단도직입적으

로 얘기 할 줄은 몰랐으니까. 뭐라고 말할지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오빠가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돌아갈까?”

결국 난 오빠의 고백 비슷한 것에 대답하지 못하고 약간은 어색하게 집에 돌

아왔다.

곧 개학을 하고 난 입원하기 전처럼 학교에 나갔다. 간만에 가는 학교라 약간

어색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병원이 아닌 친구들이 있는 학교로 돌아왔다는 느

낌이 미묘한 안정감을 선사했다. 개학을 하고 나선 오빠와 같이 있지 못하는 대

신 계속 문자를 주고받았다. 친구들의 놀림이 기분 나쁘지 않은 건 나도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일까……. 그 날 이후 딱히 진전은 없었지만 우리는 주말마다 만나

서 놀았고 얼마 후 오빠도 개강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변한 건 없었다. 아니, 없

을 줄 알았다. 그 문자가 오기 전까지.

[은아야, 나 여자친구가 생겨서, 앞으론 못 놀아 줄 것 같다. 미안해. 그 애

가 질투가 좀 심해서 너랑 노는 걸 이해 못 해주네.]

어느 금요일 오후에 온 문자였다. 다음날은 놀토여서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빠에게 온 문자는 평소와 다른 문자였다. 이제 연락하지 않겠다는 문자.

“뭐야, 이게……. 납득 할 수 없어!”

수업도 끝났겠다, 급히 오빠가 다니는 Y대를 향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얼마 걸리지 않아 도착했고 오빠를 찾아 캠퍼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생

처음 와 본 대학 캠퍼스는 넓었고, 중학교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

들 사이에서 오빠를 찾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오빠를 찾아서 제대로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사람들 사이를 뒤지

고 또 뒤졌다.

“은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오빠의 목소리에 얼른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로 오빠였다.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오빠는 날 알아보고 찾아 준 것이

다.

“너……, 여길 어떻게……?”

놀란 표정의 오빠가 중얼거리더니 얼른 표정을 바꾸어 약간 긴장한 듯한 얼굴

로 주변을 둘러보곤 나를 데리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학교는 오빠가 말해줬었잖아. 그보다 오빠, 아까 그 문자 무슨 뜻이…….”

“신일호.”

오빠에게 막 뭐라고 하려는 찰나 오빠의 등 뒤에서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

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오빠의 어깨너머를 살피자 긴 웨이브 파마를 한 머리

에, 높은 힐을 신은, 표독스럽고 발랑 까져 보이는 미니스커트의 여자가 서 있었

다.

“하, 한미야…….”

오빠가 주춤거리며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한미라는 짙은 화장의 여자는 나를

힐끔 보고서는 오빠에게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쟤구나? 뭐? 그냥 아끼는 동생? 그냥 아끼는 동생이랑 이렇게 밀회를 즐기

셔? 여자친구인 나랑 한 약속은 내팽개치고 어린년이랑 노니까 좋아? 쟤, 저쪽

세일중 애지? 야, 중학생이랑 대학생이면 원조교제야, 원조교제. 내가 신고하면

너희 둘 다 감방 신세라고.”

“잠깐, 한미야, 원조교제라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오빠가 강하게 말하지 못하고 당황해 주춤거리자 한미라는 여자는 계속 원조

교제라며 만나지 말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그 순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다. 오빠가 갑자기 그런 문자를 보낸 것도, 오빠가 이 여자와 사귀게 된 것

도 전부 다 이 여자에게 협박당한 것이다. 오빠는 여자한테 다정하고 착하니까

함부로 어쩌지 못하고 따라 줄 수밖에 없었겠지. 그 문자를 보낼 때의 오빠는 속

으로 내게 sos를 외쳤을 지도 모른다. 어떤 약점을 잡은 건지는 몰라도 이대로

두면 착한 오빤 계속 이 여자에게 끌려 다니게 되겠지. 오빠는 내가 구해줘야

해.

내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잇을 때도 여자는 오빠에게 쏘아대고 있었다.

“동생 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네가 네 동생에게…….”

여자가 오빠에게 동생 일을 들먹이는 순간 오빠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확히 어

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생의 일은 오빠에게 있어서 가슴 아픈 기억이란 걸

알고 있었다. 계속 오빠를 괴롭히게 두지 않겠어.

“저기요.”

내가 말을 끊고 그 여자의 앞에 서자 여자가 말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마

치 할 말 있으면 지껄여 보란 듯한 눈빛.

“저 이만 갈게요. 두 분이 싸우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리고 오늘 온 건

제가 멋대로 온 거니까, 오빠한테 너무 뭐라고 하진 말아주세요. 폐가 되었다면

죄송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좀 의외였는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고

난 그 사이 미안해하는 오빠에게 사과하고 그 자리를 떴다. 두고 보자고.

오빠랑 헤어진 지 30분쯤 있다가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조심스러운 오빠의 목소리에 그 여자도 함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얼

마 지나지 않았으니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빠가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괜히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손 안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오빠. 죄송한데요. 핸드폰을 주워서요. 오빠네 학교 근처에서 주운 거니까 오

빠네 학교 학생 것 같아서요. 오빠가 주인 좀 찾아주실래요?”

“아, 핸드폰을? 그래. 그럴게.”

그때 오빠의 목소리 사이로 그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어머? 내 핸드폰이 어디 갔지?”

“어? 핸드폰 없어졌어?”

“응. 언제 잃어버렸지?”

약간 작게 들리는 둘의 대화를 들으면서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기

핸드폰을 훔쳐 온 게 언제인데 그걸 이제야 눈치 챘담.

“아? 오빠, 이 핸드폰 바탕화면이 오빠 사진인데요?”

“어? 그래? 한미가 핸드폰 잃어버렸다는데, 네가 주운 게 한미 핸드폰인가 보

다. 한미야, 은아가 네 핸드폰 주웠나보다.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은아야, 어디에

있어? 우리가 지금 갈게.”

“여기 정문 쪽이요.”

“응.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려.”

곧 전화가 끊겼고, 오빠와 여자는 전화를 끊고 20분이 되지 않아 나타났다.

“여기요.”

“…고마워. 근데 이거 어디 있었어?”

내가 핸드폰을 돌려주자마자 그 여자가 의심하듯 물어왔다. 여자의 질문에 오

빠는 불만이 있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여자가

그렇게 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미리 대답을 생각해 두고 있었던 나는 능청

스럽게 근처의 화단을 가리켰다.

“먼지투성이가 되어서 있더라고요. 먼지는 대강 한 번 닦아내긴 했는데, 깨끗

하게는 안됐으니까 한 번 더 닦으시는 게 좋으실 거예요.”

실제로 흙바닥에 한번 굴렸다가 대강 닦아내어서 그 여자의 핸드폰은 꽤나 지

저분했고 여자는 약간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핸드폰을 닦아 가방에 넣었다. 그 여

자가 핸드폰을 챙기고 나자 오빠가 기다렸단 듯 입을 열었다.

“저녁 시간도 되고 했으니 우리 다같이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은아가 한미

핸드폰도 찾아줬으니 고맙단 뜻으로 이 언니오빠가 사줄게.”

“나야 고맙지.”

내가 생글 웃자 오빠는 기특하단 듯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고, 여자는 불만

가득한 눈빛을 보내긴 했지만, 내가 핸드폰을 찾아줬기 때문인지 별로 토를 달지

는 않았다.

셋이서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나서 우리는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

누었다. 내가 오빠보다도 그 여자와 얘기하려고 하는 눈치를 보이자 그 여자도

많이 경계심을 풀고 얘기를 나눴다.

“아. 시간이 많이 늦었네. 한미 너 얼른 들어가야지?”

“응? 9시 밖에 안 됐는데?”

“우리 집이 좀 엄해서……. 10시까진 들어가야 해.”

여자가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빠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리가 먹은 걸

정리했다.

“은아, 너 데려다주고 한미네 가면 시간 딱 맞을 거야.”

“에이, 데이트 방해하기 싫으니까 그냥 갈게.”

내가 한 번 뺐지만 오빠가 그걸 내버려 두는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

다. 그저 혹시라도 저 여자가 거부하지 못하게 미리 연막 좀 친 것 뿐.

“여자애 혼자서 밤길은 위험해.”

오빠와 그 여자에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오는 척 창문으로 그 둘이 가는

방향을 보았다. 그리고선 살짝 둘의 뒤를 미행했다. 오늘 저녁 내내 그 역겨운

여자와 이야기를 한 건 그 여자의 집을 알기 위해서였다. 한참 만에 도착한 곳은

복도형 아파트였다. 오빠는 아파트 건물의 앞까지 여자를 데려다 주었고 여자가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몸을 돌려버렸다. 오빠가 그렇게 돌아가자 그 여자가 사는

듯한 15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15층 복도에 그 여자의 모습이 보인 뒤 한 집

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여자의 집을 알고 나서 며칠간은 조용히 지냈다. 가끔은 미래, 지혜, 혜란이

와 함께 놀고, 가끔은 그 여자가 또 오빠를 괴롭히지 않나 몰래 감시하며 지내는

사이 일주일정도의 시간이 지나갔다. 더 이상 오빠를 그 여자에게 휘둘리게 하기

싫었다. 첫날 오빠를 구하리라 마음먹은 그 날부터 그 마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내게 불똥이 튀는 건 오빠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되는 걸 막기 위해 꾹

참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자 온 몸이 간질거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해낼 일을 생각하면서 생긴 약간의 긴장과 드

디어 오늘 오빠를 구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묘한 흥분을 끌어안은 채

준비를 마치고 그 여자의 아파트를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 복도로 올라

가자 뻥 뚫린 복도를 마음껏 뛰노는 시원한 고층 바람이 온 몸을 휘감았다. 깊게

눌러 쓴 챙 모자로 수상할 정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헐렁한 검은 추리닝차림의 여학생이 얼굴을 가린다고 딱히 신경 쓰는 사람은 없

었다. 슬슬 땅거미가 지는 시간, 여느 고층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라는

편리한 이동수단을 놔두고 계단으로 15층이나 걸어 올라오는 바보는 없음을 생

각하여 계단에 앉아 그 여자의 귀가를 기다렸다.

9시 반. 가끔 심심함을 달래려 복도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 이외엔 계속 계단에

앉아 엘리베이터만 확인하던 내 눈에 15층에서 멈추는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그

리고 문이 열리고 나타난 이는 사람을 홀리는 구미호보다도 얄미운 그년이었다.

“언니,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 와요?”

“어? 너, 여긴 어떻게 알고……?”

불길함을 느낀 것일까. 의아하게 묻던 그년은 하던 말조차도 끝내지 못하고 한

걸음 다가서는 나를 피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궁지에 몰린 여우 마냥 날 노

려보면서 슬슬 뒷걸음질치는 그년을 계단 안쪽으로 몰아넣고 방화문을 닫았다.

방화문은 불만 차단하는 것이 아니다. 소리 역시 많이 차단된다. 이 문을 닫음으

로써 이 불쌍한 척하는 여우의 끽끽거리는 신음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되었

다.

나는 알코올 냄새가 싫었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향긋한 피 냄새를 지워버리는

알싸한 알코올 냄새는 사람을 구역질나게 하는 효과가 있어 더욱 그랬다.

“한 고층 아파트의 계단에서 20대 여성이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여성

의 집이 시신이 발견된 층에 있던 것을 보아 귀가하던 길에 살해당한 것으로 보

입니다. 시신이 발견된 계단은 방화문이 닫혀 있었고 때문에 시신의 발견이 늦

어졌습니다. 시신에는 날카로운 칼에 수차례나 난도질당한 흔적이 있었으며, 사

인은 출혈과다로 밝혀졌습니다. 경찰은 칼에 의해 난도질당한 시신의 심각한 훼

손상태를 볼 때, 원한관계에 의한 범행으로 보고 피해자의 주변 관계를 살피고

있으며, 정신병자에 의한 묻지마 살인의 가능성도 염두 해두고 있다고 밝혔습니

다. 시신에 성폭행의 흔적은 없었지만…….”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일호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은아의 보호자 비슷

한 이라며 나타난 그는 일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김 사장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

습게도 김 사장이란 이 남자는 의사 가운을 입고 경찰과 함께 나타났다.

“그러니까……, 한미를 죽인 게……, 은아고……, 그 동기가……, 저라고요?”

억지로 쥐어짜낸 듯 띄엄띄엄 힘겹게 일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대꾸

하는 상대의 목소리는 약간의 안타까움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너무나 사무적이

고 평이한 어조였다.

“예. 그 아이가 직접 말하지 않는 한 확실히 알 수는 없겠지만, 주변 정황이나

그 아이의 상태, 과거의 일등을 봤을 때는 그럴 겁니다. 당신은 교통사고로 죽은

여동생을 떠올려 그 아이에게 잘해 준 것 뿐이겠지만, 그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

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신의 생각이 현실이라 믿는 경향이 보통

사람보다 강합니다. 심각할 정도로요. 그 아이에게 있어 그 아이가 생각해낸 것

은 절대적인 사실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이번 피해자와 사귀는 것도 인정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 아이는 당신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 피해자

와 당신의 교제는 당신의 의지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겠죠.”

“난 그 애한테 몇 번이나 그녀에게 고백한 이야기도 하고,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도 했어요!”

“소용없습니다. 그건 그 아이의 이야기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왜곡해서 기

억하거나 아예 기억을 지워버렸을 겁니다. 그 아이가 자기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습니까?”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자기는 고아라는 것 외엔.”

“그 애는……, 자신의 손으로 부모와 어린 동생을 죽였습니다. 겨우 7살짜리

아이가 말입니다. 그리곤 전부 지워버렸습니다. 자기의 어린시절이 어땠는지, 가

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부 다요. 오직 자신의 이름만을 기억할 뿐이었습니다.

7살이란 나이 때문에 형사미성년자로 처리되어 그 어떠한 법적 처벌을 받진 않

았지만, 대신 저와 같은 정신과 의사가 붙게 되었고, 저희들의 진단이 있을 때까

진 병원에서 지냈죠. 3년이 지나 일상생활은 가능한 정도라고 진단하여 퇴원을

시켰고 사회생활에 적응한 듯 하였지만 결국 5년 만에 사고를 쳤군요. 저희가 그

아이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생각하곤 그 아이의 생활 감시를 안이하게 하

여 일어난 사건이니, 은아는 다시 저희가 관리하게 될 겁니다. 이번엔 형사처벌

도 피하기 어렵겠죠.”

김 사장, 아니, 은아의 담당의는 씁쓸함을 감추지 않고 일호를 바라보았다.

“당신께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은 당신은 당사자이기 때문에 알아야 한다고 생

각에 모두의 의견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힘든 사실이겠지만, 이게 진짜 그 아이

의 모습입니다. 앞으로 그 아이를 또 볼 건지 말건지 등은 직접 정하십시오. 그

럼 저희는 이만 은아를 데리고 가…….”

“오빠!”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은아가 뛰어 들어왔다. 순식간에 방 안의 모든 시선

이 은아에게 모였지만 은아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보였다.

“오빠! 도와줘! 이상한 사람들이 날 끌고 가려해!”

겁먹은 듯 와락 안겨오는 은아를 일호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끌어안고 토닥

여 줄 수가 없었다. 대신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가장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물었

다.

“은아야……. 한미 죽인 거……, 정말로……, 너야?”

잠시 은아가 일호를 바라보았다. 몇 초간 눈빛이 마주친 사이, 조금씩 은아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이내 여자 아이는 해맑게 웃었다.

“응. 오빠도 이제 자유롭게 지낼 수 있어. 협박 따위 당할 필요 없어. 오빠도

기쁘지? 아직은 믿기지 않는 눈치네? 걱정 마. 오빠를 괴롭히는 년들은 내가 다

혼내줄게. 오빠가 여자들한테는 심하게 못하는 거 알고 있어. 그래서 그 여자한

테도 손쓰지 못하고 그냥 당해준 거잖아? 그런 여자들은 내가 다 혼내 줄 테니

까 이제 오빠 혼자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

“……한미를……, 한미를 살려내!”

발작적으로 외치는 일호를 보고 담당의가 급하게 둘에게 달려들었지만 은아는

이미 일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더 이상 진실을 왜곡할 수 없게 되자 은아라는

아이는 다시 모든 걸 지우려 들었다. 급히 달려온 경비원들과 의사들에 의해 간

신히 일호는 구조되고 은아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렇게 사건은 막을 내렸다.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그딴 거 어떻든 상관없다.

난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까.

곤냥이

공모전에 내겠다고 쓴 글이 여기에 또 신청하게 되네요. 작품을 막 쓸 때는 퇴고

도 많이 하고 맞춤법 검사만 해도 서너번은 한 작품이었는데, 스타일 상 '완성'이

라는 딱지를 붙이고 나니 더 이상 손을 델 수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이 작품에

꽤나 만족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다음에도 단편을 내볼까하는데... 역

시 또 살인물?

안녕하세요. 에나입니다. 웹진 마감일이 벌써 며칠 앞인데 제 노트북 안 워드

프로세서는 1페이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직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 지, 소재조

차 결정하지 못한 상태로 이 모양이군요. 아예 원고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서 버려버렸습니다. 여과하지 않아 거칠거칠한, 제 감정덩

어리에 불과해서 독자가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대중 앞에 일기장을 보이는 느

낌이 들어 지워버렸습니다. 예. 뭘 썼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군요. [시스템] 데이

터가 이미 소실되었습니다.

지금에서는 일단 마감이 닥치고 보니 내용이야 아무래도 좋고 한편이라도 완

성작을 내는 게 급합니다. 글을 취미삼아 쓰겠다는 입장도 아니고 보니 어떤 상

황에서든 작품이 나오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나태해질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현재는 아르바이트 하는 카페에서 키보드를 난타중이에요. 전날 자지 못해서

글자가 두 개로 보이는 상황입니다만. 제 절친한 친구와 술을 마셨거든요. 별로

안 마셨는데 집에 오기가 힘들었어요. 다행히 이번에는 이분 저분을 콕콕 찔러대

는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아르바이트. 적당히 마시는

미학이 필요합니다.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죠. 이유가 어쨌건, 써야합니다. 솔직히 만사에

변명 따위는필요없습니다.

그래요. 하얀 종이짝을 채워야 해요. 작가의 의무라고 명명합니다. 탕탕. 사실

요것 때문에 요즘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혼자 메우

는 게 어렵다고 하면 직무유기겠죠? 원래 새하얀 종이만 보면 이는 울렁증이 있

긴 했지만, 이번에는 한계에 이르러서 종이만 보면 속이 미식거리는 지경이기 때

문에,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소설은 거짓말입니다. 작가는 거짓말을 해요. 어떻게 없던 일을 지어낼 수가

있습니까? 가식적입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만들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게

더. 세계. 등장인물. 스토리. 플롯. 당연히 안하고는 쓸 수가 없는 것들이지요. 후

우, 울렁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번 한번만, 안 하고 쓰겠습니다.

그래서, 제 얘기를 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네. 이미 있는 캐릭터가 행동하는 걸

쓰면 됩니다. 쉽죠. 세계도 이미 존재하고요. 스토리도 언제나 진행중입니다. 뭘

지어낼까 고심할 것도 없네요. 그냥 문자로 옮기면 되니까.

음 제 얘기라고 해도 저는 별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일이니, 누가 봐도

상관은 없어요. 아니 그렇다고 내가 쓴 소설이라고 뽑아서 여기저기 돌려보여주

기는 싫으니 왠만한 친구들 빼고는 모두에게 비밀입니다. 오늘 카페에 K가 오기

로 한 날이라 급하게 쓰고 있네요. 분명히 노트북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면 뭐

쓰냐고 하면서 달려들게 뻔한데 별로 원하지 않는 결과입니다. 하, 왜 오겠다는

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여기 취직한 이후로 손길 닿는 사람마다 한번 오세요, 라

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진짜로 오겠다고 할 줄은 몰랐어요. 오라고 온다니, 그것

도 모두가 모인 곳에서 어쩌다 말했을 뿐인데.

노트북을 절전모드로 돌려놓고 물기어린 접시를 행주로 닦아 거치대에 올려놓

는데 제 얼굴로 그림자가 집니다. 올 것이 왔습니다. 말도 없이 와서 내려다 보

고 있습니다. 남자. 머리 위 삼십센티. 이분은 중학교 가서부터 키가 크기 시작해

지금은 백팔십을 가볍게 넘는 장신입니다. 이런 면을 좋아했었죠. 키 큰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니깐요.

“다 끝났어?”

저는 아무말 않고 그릇을 정리합니다. 물기에 젖어 거치대가 차갑습니다. 스테

인리스제 거치대를 붙잡으니 손이 미끌거립니다. 후. 카운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K가 발로 카운터를 차대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건 주변기물을 아

무 이유 없이 까대는 건 그의 습관입니다. 정서불안의 표출이라고 몇 번이나 말

했지만 별로 상관없다는 듯 한 귀로 흘려버리고 맙니다. 아예 익숙해진 다음부터

는 그 화제를 꺼낼 때마다 갑자기 호기심 어린 아이가 되어 주변에 있는 아무

것을 집어들고 열심히 탐구하는 척 합니다. 이거 무슨 브랜드지? 저번에 네가 이

옷 입고 나오지 않았었냐?

지금도 살짝 째려보니 슬쩍 메뉴판을 보기 시작합니다. 뭐가 맛있느냐고 묻는

데요.

저런 걸 귀엽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죠. 헤어질 즈음에는 진물이 나서 쿨럭쿨

럭 넘치는 걸 닦느라 정신이 없었고 결국에 다 못 닦고 넘치는 걸 들켜버리는

바람에 그 꼴을 보지 않아도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손을

앞치마에 문질렀습니다.

“카라멜 마끼아또가 제일 좋아요.”

K가 허리를 숙여 카운터에 고개를 괴었습니다. 그럼 그거 줘, 응.

언제나 드는 생각이지만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했던 버릇이 연애가 끝난 이후에도 또 나오거든요. 계속 하고 있

거든요. 그러면 으악. 기억력이라는 건 가끔 짜증날 때도 있습니다. 훗.

카라멜 마끼아또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바닥에 카라멜 소스를 붓고 커

피원액을 부어준 다음 거품 인 우유를 넣고 생크림을 얹은 그 위에 다시 카라멜

소스. 그가 좋아하는 단 것으로 도배되어 있죠. 사실 그는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쓰기만 하니까. 핫초코를 시키면 될 일이지만 커피를 마신다는 행위를

현대인의 교양으로 여겨서 기어코 마시고 맙니다. 가끔은 에스프레소도 시켜요.

그리고 제가 화장실 간 동안 설탕과 시럽을 산처럼 쌓고 있죠. 부정하지만, 나중

에 잔 바닥에 반짝이는 알갱이들은 소금입니까? 제가 지적하니까 혓바닥으로 핥

아서라도 흔적을 지우고 싶은 표정이더군요. 그 다음부터 말 안해요.

저는 원액이 든 컵을 쥐고 고민하다가, 재빨리 넣고 우유를 아무렇게나 쏟아버

렸습니다. 그 바람에 우유가 밖으로 흘러넘쳐 튀었고 놀라서 그대로 엎었어요.

잘 닦아놓은 조리대에 원가비싼 카라멜 마끼아또가 생으로 누운 걸 보니 다 핥

아버리고 싶더군요. K가 웃는 걸 보니까 더. 음. 그는 카운터 안으로 들어와서

걸레로 쓱 닦아냅니다. 저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조심스럽게 새 컵에 카라멜 소

스를 짰습니다. 설거지 하시는 모습을 보니 할말이 없어 그냥 대충 만들어 조리

대에 올려놓았습니다. 잘 마시네요. 칭찬까지 하는 이유는 무조건 달기 때문인데

정량의 두 배를 넣었기 때문이랍니다. 멍하니 보고 있다가 제가 웃고 있었나 봐

요. 따라 웃네요. 싫어서, 카운터 밖으로 쫓아낸 다음 다시 들어가 덮개를 기계

위에 가지런히 덮었습니다. 아까처럼 들어와 도와주려는 몸짓을 했지만 짜증을

내니 듣네요. 여전히 제멋대로 웃고는 있습니다만 그 정도로 만족입니다. 저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앞치마를 벗고 숨 좀 돌리고 나니 청바지 위가 살짝 돌출되어 있는 게 보였습

니다. 머리를 감싸쥐거나 짚거나 둘 중에 하나를 하려다가 그냥 외투를 찾았습니

다. 별로 제 마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겨울은 갔지만 날이 아직 쌀쌀했습니다. 카페 문을 열고 나오니 순식간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목도리를 두르긴 했지만 추운 건 추운 거였습니다. 원래 먹으려

했던 건 제쳐두고 국물 있는 걸 고를 수 밖에 없었어요. 음식이라면 대부분이 따

뜻한 거고 음식점 안 또한 수증기와 히터의 열기로 뜨끈할 테지만, K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내내 굳어 있던 K의 얼굴이 국밥이 좀 들어가자 풀렸습니다. 저는 밥만 잘 건

져내서 살살 목으로 넘겼어요. 그가 이상하다는 듯 봅니다. 식사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것쯤이야 최근 일어난 일들 때문에 그렇지만 설명해주기도 귀찮았습니

다.

계산을 그가 하는 동안 저는 화장을 고쳤습니다. K하고는 같이 다니면 편한

게 자기가 돈을 다 내거든요. 마치 돈을 다 내야 자신이 저를 다 휘두를 수 있다

는 듯이 말이죠. 사회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가치 중에 돈이 대표적이긴 하지만

허위의식에 불과한데, 음.

하긴 제가 얼굴에 하는 짓도 같은 짓이겠죠. 외모도 중요한 가치이긴 하지만

덮는다고 해서 특별히 더 좋아할 사람도 아닌데. 그냥 일종의 자존심 싸움인 것

같습니다.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뜯어먹고 사는 거죠. 뜯어먹는다는 표현은 좀

과하군요. 전 아무렇지 않은데? 그가 대신 돈을 내줘도 상관없듯 절 만진다고 해

도 별로 끔찍할 건 없는 것 같아요. 네. 이해해줄만하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 분이라면 음, 그럴만한 그릇의 분이니까 제가 딱히 할말은 없어요.

방금 외투를 바닥에 깔아줘서 성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싸늘한 비상계단에 그냥

앉고 싶지는 않아서 멈칫거리니까. 좀 조용한 곳이 필요했습니다. 북적북적한 식

당 따위나 카페가 아닌, 아무도 없는 어떤 장소.

이분의 취미를 위해서죠. 입에 한 개피 물고 라이터를 켜지요. 섹스 아니면 담

배. 제가 알고 있던 이 분의 관심사 두 개. 음악은 생업이니 제외하죠. 사실 생업

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에요. 예술인을 주장하면서 형식적인 노력 그 외

에는 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게 솔직한 감상입니다. 스물여섯이나 먹었으면서 노닥

거리듯 음악을 해도 되는 것은 집안이 잘 살기 때문이에요.

“작업은 잘 되가요?”

형식적으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잘 안돼.” 어차피 잘돼나 잘 안돼, 어느 쪽으로든 심각하게 담배연기를 뿜으

면서 대답했겠지요. 머리 위 30센티님.

“왜요.”

“여자친구가 생겼어.”

“어떤 사람이에요?”

귀찮다는 듯 단답형. 더 이상 말하기도 싫다는 몸부림. 예상 그대로의 범위 안

에서 뛰노는 사람과 대화하니까 컴퓨터랑 얘기하는 기분입니다. 나보다 한살 위

고 그저 그런 대학생. 사랑에 빠진 사람이 늘 그렇듯 그 여자분에 관한 이야기란

모조리 신화처럼 들리는데, 베이킹파우더를 잔뜩 넣듯 부풀려진 얘기만 들었는데

도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뭐 그래요. 부럽네. 전 없는데.” 대화에도 기브 앤 테이크.

“좋아하는 사람은? 전에 있다고 한 것 같은데”

좋아하는 사람이야 많죠, 하면서 제 친구의 이름을 장난식으로 주워섬기려다가

말았습니다. 친구에게 미안했어요.

“있다고 해도 오빠가 아나요.”

“알 리가 있냐.”

“알면?”

”내가 밀어줄까?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냐?”

“말하기 싫은데.”

“나?”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한 건 그 대답 다음부터입니다. 어디서부터가 좋은 거

고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더군요. 물론 저는 중간에 자리를 뜨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더 있었지만, 이미 같이 있는 것 자체에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앉아있던 걸 보면 인내심이 깊거나 그가 뭔말을 하든 상관없었거

나 둘 중 하나겠지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라면서 뒷말을 지껄이는데, 아마 여러

의미를 함축하여 잘해보란 뜻이겠지요.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네번째로 잔 남자

한테 그런 얘기 듣고 싶지는 않은데. 누구랑 몇 번을 잤다고 해서 그게 문제가

될 건 아니잖아, 라고 하실지 몰라도 제 입장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여자는 몸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나중에 만날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요. 그 다른 사람이

있기나 할까 모르겠습니다만- 남자들은 앞서 거쳐간 사람이 있는 걸 싫어한답니

다. 남이 쓰던 칫솔을 씻어서 쓰는 기분이라고 하던데요.

하긴 네번째로 잔 남자랑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어정쩡하게 발걸치고 있는

저도 생각해 보니 웃깁니다. 헤어진 이후에도 요구는 있었지만 다 받아준 적도

없고, 그렇다고 대놓고 꺼지라고 말한 기억도 없는 걸 보니 참 이상하죠. 섹스가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말이죠. 실제 소설의 주인공이었다면 아무 당위성

도 없이 건질 것도 없으면서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낸다는 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작가를 욕했겠죠. 저도 욕먹었습니다. 절친한 친구에게 어쩌다 이 일을 말

했더니 목소리 톤이 갑자기 높아지면서 대답이 돌아옵니다. 야 이 병신아.

다시 말하자면 소설은 빈공간에 채워넣는 거짓말입니다. 저는 거짓말이 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이어야 합니다. 소설이 아니라면 저는 정말 병신

이었을 겁니다. 그럼 읽는 사람 선택은 두 가지 아닌가요. 이걸 소설이라고 인정

한다. 아니면 제가 병신이다. 감사합니다.

하이에나

전 별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존재 자체로 개그라고는 하던데?

그런가 보다 싶어요. 별 감정 없음. 도망치려 해도 떠나지 못해

지워지지 않는 수많은 기억 때문에 나의 감정들은 이미 사용됐

는데 돌려달라 떼를 써도 이젠 돌이킬 수 없네. 아웃사이더, 이

별의 숲. 응? 왜 여기다 로맨틱한 가사를 덧붙여? 으악. 죄송합

니다 여러모로ㅋ

정신을 차린 나의 두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아무런 장식도 없이 휑한

콘크리트 천장이었다.

"……."

난 잠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다가 서서히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천장과

마찬가지로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소품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

는 거친 벽과 바닥. 넓지만 썰렁한 분위기의 방은 천장 한가운데 매달려 홀로 외

로이 깜빡이는 전등불 밑에서 어슴푸레한 침묵에 감겨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을 때까지 누워있던 난 이윽고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

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 간단하지만 또 전혀 간단하지 않은 사실에, 난 깜짝 놀라 당황하며 반사적

으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덜컹

그 때, 뭔가 커다란 소리와 함께 시야가 다시 휘청, 하며 뒤로 쓰러졌다. 난 바

닥과 부딪혀 어찔어찔한 머리를 간신히 추스르며 눈을 깜빡였다. 그 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다시 아까와 같은 천장 뿐.

바닥에 기대어 어지러움이 가시길 기다리던 난 문득 팔다리가 몹시 쑤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뿐인가, 몇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기라도 했던 듯 등까지

부서질 듯 아프다. 난 손마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한숨 지으며 고개

를 어깨 너머로 돌렸다.

"……!"

낡아빠진 나무 의자와 그 의자 등걸이에 밧줄로 묶여있는 양 손이 눈에 비쳤

다.

"…누구…!"

혹시나 하여 밑을 내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발도 의자 다리에 꽁꽁 묶여있는

상태. 난 입을 열고 온 힘을 다해 부르짖었지만 막상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모기

소리보다도 더욱 가냘픈 웅얼거림 뿐이었다. 목이 쉬어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

같다.

미친듯이 주변을 둘러보며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 헤매던 난 귓가를 파

고든 미미한 소음에 숨을 삼켰다.

-뚜벅뚜벅뚜벅, 또렷한 발소리가 점차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난 몸을 틀어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려고 애썼다. 소리는 내가 있는 방의 입

구, 즉 오른쪽 위 대각선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사지가 묶여 있어서 일어서

기는커녕 반대쪽으로 돌아눕는 것도 불가능하다. 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

로 이 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끼이익

잠시 뒤, 마침내 고막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적은 양의 햇빛이 비

어져 들어왔다. 난 눈 위로 바로 떨어지는 햇빛을 피하려고 애쓰며 고개를 최대

한 젖혔다. 열린 문 사이로 밝은 햇빛을 등지고 선 한 사람의 실루엣이 시야 구

석에 걸렸다.

"깨어났나?"

그 사람은 입을 열어 낯선 목소리를 뱉으며 방 안으로 들어와 천천히 문을 닫

았다. 눈을 자극하던 햇빛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느낀 난 다시 눈을 떴다.

"깨어났냐고 묻잖아?"

"……."

난 대답하지 않은 채 머리맡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양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설렁설렁 걸어오는 그 남자를 희미한 백열등 불빛이

비추고 있었다.

"아차, 목소리가 안 나오던가."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검은색 후드와 그 아래로 비어져 나온 치렁치렁한 흑

발,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는 커다란 마스크, 오래 입어 밑단이 다 헤진 청

바지와 낡은 스니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유일하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눈으로는 경멸하듯 날 내려다보고

있는 젊은 남자.

난 그 차가운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다가, 느릿한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형편없이 갈라지고 뒤틀린 내 목소리를 들은 남자는 마스크 너머로 한쪽 입꼬

리만을 치켜올려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오호, 말을 하네."

글자 그대로 놀랍다거나 뜻밖이라기보단, 일이 더욱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듯

한 말투.

"내가 누구냐고?"

굵직한 목소리만 아니었으면 내 나이 또래 여자아이로 착각할 만큼 여리고 가

냘픈 인상이었지만, 막상 입을 여니 그것은 힘없는 여자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싸늘하고 소름 끼쳤다. 남자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시늉을 하다가 갑

자기 한쪽 발을 힘껏 치켜들었다.

콰직

"아악!!"

저절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자는 밑창이 뚫릴 지경인 스니커로 내 어깨

를 지근지근 밟으며 말을 이었다.

"눈을 뜨고 나서 제일 처음 하는 소리가 이게 무슨 짓이냐, 여긴 어디냐, 날

어떻게 할거냐,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도 아닌-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

남자는 피식 웃었다.

"더럽게 기분나쁜 자식이네, 이거."

"으윽……."

어깨가 부서질 듯 아팠다. 난 온 몸을 비틀며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이봐, 아기면 아기답게 징징거리기부터 해야지. 안그래?

남자가 다시 발을 치켜들고 이번엔 반대쪽 어깨를 내리찍었다. 난 있는 힘껏

이빨을 깨물고 비명을 삼켰다.

"어서 해보라니까? 혹시 알아? 네가 찔찔대는 꼴이 내 마음에 들면 집으로 돌

려보내줄지."

"아아……악…!"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계속 부서져라 내 어깨를 짓밟으면서 입 안

에 든 것을 질겅질겅 씹어댔다. 난 눈 앞이 점차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필사적

으로 정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쳇."

잠시 뒤, 남자가 발을 뗐다.

"비명소리 한 번 안 내네. 재미없어."

난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어깨가 끊어진 듯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땀인지 피인지도 모를 찐득찐득한 액체가 입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래도 꼬맹이치곤 울지도 않고 잘 참았으니까, 알려줄까? 내가 누군지."

남자는 작게 쿡쿡대더니 내 머리 위로 허리를 굽혔다.

"-난 말이지, 널 죽일 사람이야."

"……!"

온 몸의 세포가 새파랗게 경직되는 듯 하다. 난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젖혀 남

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

내 눈동자에 떠오른 무언의 공포를 읽었던지, 남자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마스크를 살짝 벗어 보였다.

"살인마…… 유의태."

반쯤 벌린 입에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익숙하고도 낯설기 그지없는 이름.

"큭."

남자가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남자는 상체를 뒤로 젖힌 채 커다랗게 웃으며 아예 마스크를 벗어서 던져버렸

다. 새하얀 마스크가 바닥에 내팽개쳐지자 그 자리에 자욱한 먼지가 인다.

"역시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군. 하긴 그렇겠지. 그 때 나 덕분에 밤잠

설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난 어깨의 고통도 잊고 격렬하게 몸을 흔들며 밧줄을 풀어버리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겉보기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낡은 밧줄이지만 단단하게 묶

어 놓아서 움직이지조차 않는다.

"그래봤자 소용 없어. 그 정도로 쉽게 풀어질 만한 밧줄이면 애초에 묶어 놓지

도 않았지. 안 그런가?"

"당신… 분명……."

난 초조하게 침을 삼키며 간신히 말했다.

"분명히 그때, 감옥에 갔었는데."

갑자기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래……. 난 분명 감옥에 있었지."

남녀노소 구분 없이 30명이 넘는 사람들을 참혹히 살해하고 시체를 토막낸 사

상 최악의 살인마.

"하지만 그것도 이젠 옛날 얘기야. 그런 지긋지긋한 곳에 1분이라도 더 머물렀

다면 난 이미 미쳐 버렸을걸."

"그렇지만 판결은 종신……. 아."

순간 떠오른 생각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 그래. 네 예상이 맞아, 당돌한 아가씨."

남자는 뒤집어쓰고 있던 두꺼운 후드를 벗었다.

"한마디로 탈옥했다, 이거지."

"말도 안 돼!"

멋대로 입이 쩍 벌어졌다. 난 속으로는 그럴 리 없어, 다 거짓말일거야 하고

중얼대면서도 눈으로는 이미 그 남자의 제멋대로 얽혀서 자라난 머리와 비정상

적일만큼 동그랗고 새카만 눈동자 등을 머릿속에 남은 희미한 사진과 비교해 보

고 있었다.

"이봐, 탈옥이란 건 영화에 나오는 것만큼 그렇게 힘든 게 아니야. 몇 명만 죽

이면 간단하게 끝나거든."

남자는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이 내가 탈옥해서 처음으로 선택한 사람이 바

로 너인 셈이니까. 뭐 딱히 가려서 뽑은 건 아니었지만 말야."

"거짓말……."

난 혼잣말처럼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너무 황당해서 눈물같은 것조차 나오지

않는다. 수십명의 사람들을 난도질해 죽이고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하게 일상생활을 했던 정신이상자에게 납치되다니. 그리고 이젠- 이젠, 죽어

야 한다니.

"거짓말이야… 내가 왜……!"

어째서,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란 말인가.

마침 눈에 띄어서? 여고생이어서? 길을 가다 어깨가 부딪혀서? 내가 사나운

표정으로 옆을 스쳐 지나가서?

그 무엇이 되었건, 내가 이따위 살인마에게 희생될 이유 같은것은 전혀 없는

데.

"크큭,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군. 아주 좋아."

반면 남자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방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 참, 그럼 이것도 아나?"

남자가 주머니에서 은색의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게임을 좋아한다는 거. 난 원래 사람을 그냥 죽이고 꽅내는 법이 없거

든."

손바닥 위에서 은은한 불빛을 발하고 있는 그것은 다름아닌 손목시계였다.

"지금부터 약 한시간의 말미를 줄게."

남자는 그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톡톡 두들겼다.

"물론 그 시간이 지나면 난 기다리지 않고 널 죽일거야. 알겠지?"

"싫어……."

그 수법이라면 이미 TV건 인터넷 뉴스건 그냥 입소문이건 지겹게 들어서 알

고 있다. 내가 그 희생자가 되리라곤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그럼……. 하나, 둘, 셋."

마치 지휘자라도 되는 양 남자는 손가락을 튕겨 올렸다가 허공에서 내리그었

다.

"-시작."

어렸을 적에 나는, 길거리에서 엄마의 손을 놓쳐 미아가 되었던 적이 있다.

난생 처음 갔던 복잡한 시내. 이것저것에 정신이 팔려 바쁘게 돌아다니다 고개

를 들어 보니 어느새 난 엄마도 없이 홀로 서 있었다.

'엄마.'

아무리 목청이 터져라 소리치고 울먹여도 돌아오는 것은 군중의 차가운 시선

뿐. 누구도 엄마 찾는것을 도와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시끄럽

다고 면박을 주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일곱살짜리 어린아이였던 내게 쏟아진 것

은 사람들의 비난도, 짜증도, 질책도 아닌.

단순한 무관심이었다.

'엄마, 어딨어?'

그러한 사실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난 몇시간 동안이나 지치지도 않고 돌아다

니며 엄마를 찾아 헤맸다. 길을 잃었을 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도움을 기다려

야 한다느니, 뭔가 표식이 될 만한 것을 들고 있는 게 좋다느니 하는 등의 어린

이집에서 배운 기본 수칙들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져버린 지 오래였다. 난 한

손엔 다 녹아 사라진 아이스크림과 다른 한 손엔 미미 인형 하나만을 안고 그

넓은 거리를 하루 종일 헤매고 다녔다.

'엄마, 나 무서워.'

이윽고 노을이 질 무렵이 되었을 때, 난 빌딩 너머로 점점 모습을 감추어 가는

태양을 보고 눈물을 삼켰다. 노을빛을 받아 불그스름해진 뺨을 하고, 너무 잘근

잘끈 깨문 나머지 입술엔 핏방울까지 매단 채로.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그 때, 야속한 태양이 아스팔트의 숲 너머로 사라지던 순간, 저 앞쪽 길 위에

익숙한 모습이 나타났다.

'구해줘. 무서워. 도와줘.'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가 그 포근한 품에 몸을 던졌

다. 그 순간 나를 감싸 안았던 따뜻한 손길, 코를타고 흘러들었던 익숙한 향기,

손 끝에 감겼던 폭신한 감촉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엄마!'

그 한마디를 제외한 다른 말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난 고장난 태엽 인형처

럼 계속해서 엄마라는 이름만을 부르며 한참을 울었다. 엄마 역시 그 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서워요, 엄마."

-엄마, 이번엔 언제쯤 나를 안아주러 오실 건가요?

똑딱똑딱, 시곗바늘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퍼진다.

"이제 대충 삼십 분 정도 남았나."

남자는 구석에 놓인 의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슬슬 실망인걸."

이미 대답할 기력조차 잃은 난 힘없이 눈만 깜빡이며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

았다.

"도대체 아까의 그 당돌한 기질은 어디로 간 거야? 단순히 멋모르고 덤볐던 것

뿐이었나?"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모처럼의 기념일인데 이렇게 끝내기엔 너무 재미없잖아. 정말 이럴거야?"

계속 대답이 없자 남자는 정말로 시시하다는 듯 체, 하고 혀를 차더니 팔짱을

꼈다.

"내 평생 수많은 사람들을 봐 왔지만 너같은 녀석은 처음이다. 하다못해 살려

달라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보지 그래?"

그제야 난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용 없다는 걸 아니까."

작은 목소리였지만 남자에게 들리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남자는 그 말이 신

경에 거슬린다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네가 날 재밌게 해주지 못하겠다면, 내 스스로 놀거리를 찾는 수 밖에."

남자는 저벅저벅 다가와서 오른쪽 발을 뒤로 뺐다가 내 복부를 세차게 걷어찼

다.

"윽!"

허리가 활처럼 구부러지며 짧은 숨을 토했다.

"그러게 아프기 싫었으면 진작에 말을 좀…… 응?"

다시 발을 들어 올리려던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보고 멈칫했다.

"아."

그것은 내 지갑이었다.

남자는 이상한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한동안 뚫어져라 바닥에 떨어진 지갑

을 쳐다보다가, 허리를 굽혀서 그것을 집어들었다. 발로 차이는 바람에 주머니에

들어있던 지갑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저……."

그거 제 건데요, 하고 말하려 했으나 남자의 표정을 본 난 하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남자는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펼쳐진 지갑 한쪽 면을 계속해서 들여다보

고 있었다.

"이거……."

잠시 뒤, 드디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거, 네 거냐?"

"아, 네……."

머뭇거리며 그에 대답한 난 남자의 표정이 다시 미묘하게 변화하는 것을 똑똑

히 보았다. 이제 남자는 금방이라도 고함을 지를 것만 같은 표정을 한 채 지갑을

으스러져라 꽉 쥐고 있었다.

"…이 사진."

그 뒤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남자는 다짜고짜 지갑을 내 코앞으로 들

이밀었다.

"이 사진에 있는 사람이, 너희 가족들이냐?"

바로 눈 앞까지 디밀어진 지갑을 본 난 잠시 망설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

다. 남자가 내민 지갑의 한쪽 면에는 투명한 비닐 너머로 사진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네, 저희 가족이에요."

사진 맨 오른쪽에서 상냥하게 미소짓고 있는 언니와 그 옆에서 브이자를 그리

며 환하게 웃고 있는 나, 그런 우리를 보며 역시 밝은 표정으로 손을 꼭 붙잡고

서 계신 부모님. 유치원 졸업식 때 찍었던 사진이라 나는 얼굴보다도 커다란 꽃

다발을 품에 안고 있었다.

"여기에 있는 이 여자, 이 여자가……."

남자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엄마의 얼굴을 가리키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

으나,

"……아니다, 아무것도."

하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 되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난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잠시 뒤, 어색한 침묵을 참다 못한 난 조

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제 부모님은, 제가 열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어요."

"…열 살…이라고?"

남자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지금 네가, 몇 살이지?"

난 남자의 행동 하나 하나를 유의해서 살피며 대답했다.

"열여덟 살이요."

"그럼 팔 년 전……."

남자가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몇 발짝 물러났다.

"괜찮으세요?"

그런 모습을 쳐다보며 걱정스레 묻자, 남자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신경질적

으로 소리쳤다.

"난 괜찮아.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마!"

한동안 넓은 방 안에는 남자가 숨을 씩씩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난 살

살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저희 언니가 올해로 스물다섯인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딱 제 나이였어

요. 그 때 전 너무 어려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몰랐어요. 그냥 언니가 부모

님은 좋은 데로 가셨다고, 그러니까 이제부턴 엄마 아빠 걱정 끼치지 말고 우리

끼리 잘 살아야 한다고 울면서 얘기했던 것만 기억나요."

남자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걸음걸이로 의자에 가서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뒤엔 바로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어요. 친척이라곤 결혼한 삼촌이

랑 이모밖에 없었는데 이모는 애인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 버렸고, 결국 저희

는 삼촌네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됐죠. 그래도 다들 좋은 분이셔서 구박도 안

하고 여직껏 잘 대해 주세요. 저희 언니는 대학교 붙자마자 바로 기숙사에 들어

가 버렸지만."

남자는 초점 없는 눈으로 내 쪽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삼촌네 집에는 아이가 없어서 저랑 언니를 친딸처럼 키워 주셨어요. 그래서

언니도, 저도 이 나이때까지 등록금 같은거 걱정 없이 마음껏 학교에 다닐 수 있

었던 거고. 지금 제가 다니는 학교도 사립이라 학비가 많이 드는데, 그런 내색

하나도 안 하시거든요. 이런 분들이 친척이라 정말 다행이에요."

남자는 아직까지도 말이 없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입맛만 다시고 있던 난 시간이 제법 지나도 남자가 입

을 열지 않자 결국 이런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저어……. 아저씨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세요?"

반쯤은 대답하지 않으리라 여겼던 내 예상과 달리, 남자의 눈에 곧바로 빛이

돌아왔다.

"…나의… 부모님?"

그것이 굉장히 생소한 단어라도 되는 듯, 남자는 어색하게 혀를 굴려 발음해

보고서는 눈을 감았다.

"부모님……."

그 뒤로 또 한참동안, 남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묻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

았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남자가 입을 열었을 땐 약속한 시간이 5

분도 채 남지 않아서였다.

"옛날에."

거의 포기한 채 바닥에 쌓여있는 먼지만을 쳐다보고 있던 난 화들짝 놀라 고

개를 들었다.

"아주 옛날에, 말이야."

남자는 여전히 얼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로 웅얼웅얼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한 중년 여자를 죽인 적이 있었어."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찔하게 된다.

"그 때가 열다섯 번째였을 거야. 그리고 여자를 죽여본 건 그 때가 태어나서

처음이었어."

남자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얼굴에서 손을 뗐다.

"밤거리를 지나가던 여자를 아무 생각 없이 칼로 찔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

니 그 뒤에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더라고. 나이대도 비슷해 보였고, 아마 평범한

중년 부부였지 싶어."

"-그래서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목격자를 남기면 안 되고, 무엇보다 그 때 난 흥분해 있었으니까- 뒤에 있던

남자도 같이 죽였지. 그리고 난 뒤에 시체를 숨기고 나서, 오랜만에 기분 좋게

집으로 들어가 술을 잔뜩 마신 다음 잠이 들었었어."

어쩐지, 남자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배어 나올 것만 같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 직후에 난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어 남자의 얘기에 집

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사흘 후인가, 일주일 후인가… 아는 친척 대신 웬 초상집에 가게 됐

어. 내 친척의 친척이니까 내게도 먼 친척뻘인 셈이었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슬

픈 표정을 연기하면서 초상집에 들어갔는데, 그랬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거기에, 그 사람들이 있었어."

"…그 사람들이요?"

내 목소리까지 덩달아 흔들리는 것만 같다.

"그 때 죽였던 사람들, 그 중년 부부. 바로 그 사람들의 장례식이었던 거야."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귓전에 메아리친다.

"물론 많이 놀랐었지. 그래도 뭐 사람 죽여본 게 한두번도 아니니까, 어차피

상관 없는 거겠지 하고 거기에 앉아 있었는데……. 딱 네 또래 여자애 하나가 상

복을 입고 영정 앞에 앉아 울면서 이렇게 말하더라."

어느날 나란히 죽음을 맞이한 평범한 중년 부부와 그 앞에 홀로 남겨진 딸.

어째서인지, 어렸을 적 어렴풋이 보았던 언니의 우는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반드시 찾아내서 복수할거야. 내가 그 사람을 죽여버릴거야', 라고."

핏기 맺힌 그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와 가슴을 할퀴어대는 것만 같다.

남자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고는 허공을 헤매던 시선을 돌려 내게로

향했다.

"그래서……."

그 시선을 마주 바라보던 난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남자의 눈가에 무엇인지 뜻 모를 감정이 맺힌다.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이윽고 흘러나온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 역시 나처럼 잔뜩 갈라지고 메말라 있

었다.

"이런 말하긴 좀 뭣하지만, 그 때 나 때문에 죽었던 부부……. 그 중에서도 특

히 그 여자, 그 여자가 네 사진 속의 엄마라는 사람과 많이 닮았어."

"그 사람이 우리 엄마와……."

난 멍청하게 그 말을 따라 중얼거리며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

남자는 슬그머니 내 시선을 회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로 난 절대로 결혼을 했거나 아이가 있는 사람은 죽인 적이 없었다는 거

야."

그 말을 마친 남자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의자 근처에서 잠시 서성대더니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남자는 어느새 다시 힘이 돌아온 발걸음으로 방의 출구를 향해 다가가 손을

뻗었다.

콰앙

힘차게 양쪽 문을 밀어 젖히자 이제 서서히 붉은빛으로 물들어 가는 저녁 무

렵의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가라."

"……네?"

미처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새도 없이, 남자는 내게 다가와 의자를 똑바로 일으

켜 세웠다. 잊고 있던 어깨의 고통에 다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살인마 주제에 무슨 양심이나 죄책감 같은게 있겠냐만, 왠지 너만은 여기서

죽이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 손과 발을 묶은 밧줄을 슥슥 자르기 시작

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밧줄이 끊어져 나가고, 난 자유로워진 손을 쥐락

펴락 하면서 그 지긋지긋한 의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절 여기서 풀어주면, 목격자를 만드는 게 돼요. 그래도 괜찮아요?"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밧줄과 의자를 방 저쪽 구석으로 던져 버리며 피식 웃

었다.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해주는 거야? 난 탈옥까지 한 사람이야. 그 정도로 잡

힐 만큼 허술하지는 않아."

"……아저씨."

난 한동안 말없이 남자를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 때, 남자가 들고 있던 손목 시계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이제 1시간 다 됐다."

남자는 시계를 도로 주머니에 넣으면서 먼저 방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나 역시 절뚝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지, 참. 안 믿어지겠지만 바로 저 옆이 한강 공원이니까

그리로 나가면 어떻게든 될거야. 난 알다시피 밝은 쪽으로는 함부로 나갈 수 없

는 몸이라."

남자는 강물 너머로 사라져 가는 태양을 바라보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해, 안 가?"

"저기……."

난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해하며 일단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에서 몇 발자

국 벗어났다. 남자는 내가 옆으로 와서 설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자, 잠시만요. 이대로 그냥 가면……."

내가 우물우물하며 망설여 하는 모습을 보던 남자는 어깨를 바라보며 쯧쯧 혀

를 찼다.

"많이 아팠겠다. 미안."

"어? 아니, 저, 괜찮아요. 하지만 그보다……."

하지만 남자는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어디서 났는지 모를 마스크로 다시 얼

굴을 가린 뒤 후드를 뒤집어 썼다. 이번엔 긴 머리칼도 옷 속으로 감추어져 보이

지 않았다.

"미안했어. 잘 가라."

"자, 잠깐만요!"

내 만류에도 개의치 않고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뒤로 돌아 어슬렁

어슬렁 걸어가기 시작했다. 노을빛이 지는 방향이었다.

"저기, 저…저…!"

잠시 고민하던 난 결국 주먹을 꽉 쥐고 이렇게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그 커다란 외침에, 멀어져가던 남자의 뒷모습이 멈칫했다.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찰나, 혹은 몇시간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흐르고, 우뚝 멈춰 섰던 남자는 다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후웃.

점점 멀어져 가는 뒷통수를 바라보며, 난 품에서 흰 장갑을 꺼내 들었다.

'자.'

서둘러서 장갑을 양손에 끼운 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조용히 남자의 뒤를

따라 뛰었다.

'지금이야.'

소리 없이 남자의 바로 뒤까지 다가가서, 그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주머니에

서 손을 빼고는-

-푸욱

번뜩이는 칼날이 남자의 왼쪽 가슴을 정확히 찔렀다.

"…윽."

잠시 남자의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정말로,"

곧 기우뚱, 하고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풀썩

바닥에 쓰러지면서 후드가 벗겨져 안에 감춰져 있던 흑발이 쏟아져 내렸다.

"…후우."

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칼날을 들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 남자의 등을 내려

다보았다.

거칠었던 호흡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간다.

칼을 든 쪽 어깨가 견딜 수 없이 아프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뱃속에서 뭔가가 치고 올라와 목이 메인다.

"…됐어."

남자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땅 위에 고여 붉은색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이제 됐어."

난 고운 붉은빛으로 물든 장갑을 벗어서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다 된거야."

문득, 남자가 들고 있던 지갑의 존재가 떠오른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던 난 남자의 왼쪽 손에 쥐어져 있는 지갑을 발견했다.

-

붉은 가죽에 붉은 물이 들어, 눈이 시리도록 붉다.

아라비스

어어… 일단 부득이하게 연재 한 회 분을 떼어먹게 되어 굉장히 유감스럽

게 생각합니다…… 라는 건, 라는 거고. 라○○반 씨의 피 말리는 핍박과

폭력(!) 아래 덜덜 떨던 한 달이었습니다.

모쪼록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라고, 여러분…… 살려주세요.

Bomb

3년 = 삼백육십오 곱하기 삼. 1,095일. 천구십오 곱하기 이십사. 26,280시간. 이

만육천이백팔십 곱하기 육십. 1,576,800분. 일백오십칠만육천팔백 곱하기 육십.

94,608,000초.

-

그녀. 작다. 155cm가 못 되는 키로 들고 있던 붉은 책을 책장에 돌려놓으려

애쓴다. [도와드릴까요?]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이라고는 믿을 수 없

을 정도로 강한 오만함이 담긴 시선이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책을 건넸다. 책을

꽂아 넣었을 때 그녀는 [고마워.]하고 말한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

녀의 손에 들려있었던 붉은 책을 올려다보았다. 막상스 페르만의 「눈」이라는

책이다.

-

"오늘은 자고 갈 거야."

너는 그렇게 선언해버리는 나를 힐끔힐끔 노려보며 생리대를 갈아 끼웠다. 오

늘은 섹스 할 수 없다는 암묵적인 시위였다. 그 대신의 키스를 받으며 그녀를 떠

올렸다. 그녀는 피부가 새하얬지. 허벅지 안쪽은 더 하얬었지. 그 다리 사이에서

흐르는 피는 마치 그녀가 읽던 붉은 책 같을 거야. 너의 앙탈 섞인 불만을 듣고

나서야 환상은 깨졌다. 나도 모르게 팬티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탓에 손에는 덩

어리진 피가 끈덕끈덕하게 묻어있었다. 손을 씻고 돌아오자 녀석은 이불로 온 몸

을 꽁꽁 싸매고 "진짜 생리하는데 집어넣는 사람이 어딨어 냄새나 더러워 저리

가!" 라며 나를 흘겨본다. 우리는 키스만 했다. 이불 속에서 서로의 몸을 밀착시

키고 정신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낮게 흥분했다.

"날 사랑해?"

부드러운 속삭임에 나는 웃었다. 그러자 볼을 꼬집혔다.

"왜 그렇게 웃어!"

꼬집힌 손을 놓지 않고 울컥한 표정으로 다시 네가 투정을 부린다.

"왜 그렇게 웃어!"

이제 점점 뺨이 시려온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제서야 그 야무진 손이

나를 놓고 품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기가

막힐 정도로 다른 성격 때문일 것이다. 같은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와 이렇게

까지 다를 수 있을까. 너는 내 가슴에 등을 돌리고 자신의 몸을 가둔 내 두 팔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그녀와 함께였을 땐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딱 3개월 전 헤어진 그녀의 검은

장갑이 떠올랐다. 사춘기의 이상한 열기에 휩쓸려 그녀의 오만함은 자신감으로

보였고, 그녀의 결벽증은 도도함으로 보였다. 너의 가슴을 매만지는 순간에는 그

녀의 뽀얀 젖가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창백한 입술과 비슷한 색이었던 창

백한 유두가 떠올랐다.

훌쩍거리는 소리에 상체를 조금 들어 네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울고 있다. 왜

우느냐고 묻기보다는 그냥 꽉 끌어안아 주었다. 너는 그 작은 두 손으로 칼자국

이 선명한 내 왼쪽손목을 쥐고 있었다. 3년간의 끔찍하게 긴 세월동안 그녀가 내

게 남긴 흉터는 그것 말고도 많았다. 나는 회복중이다. 그리고 네가 이 회복이

끝날 때 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너무 착해서 싫다는 말도

못하고, 내 감정을 전부 받아들이려고 한다. 만약 네가 정말 그렇게 한다면 너는

고장나버리고 말 것이다.

나는 그것이 3년 동안의 긴 폭발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세상에 나 하나뿐

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에 자신감이 있었던 내게 우울을 가르쳤다. 나보다 세살

위였던 그녀는 내가 더 이상 연상을 사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의 그 끔찍한

열등감은 모든 일에 긍정적이었던 나를 깎아내렸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있던

가. 지금 나의 50%는 그녀다. 나는 최대한 네가 슬프지 않도록 웃었지만 너는

다시 내 뺨을 꼬집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렇게 웃어!"

나는 또 뺨이 시려오기 전에 네게 입 맞췄다. 진한 키스. 다정한 키스를 좋아

하는 네게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이 입 맞추듯 강하게 돌진했다.

부산에 사는 그녀와는 한 달에 두 번씩 만났다. 그녀의 결벽증은 내가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을, 포옹하는 것을, 입맞춤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쏟아내듯 그녀

에게 못했던 그 모든 것을 네게 건넸다. 너의 뺨을 쓰다듬고, 눈과 콧등에 입 맞

추고, 귓가에 속삭이고, 격렬한 키스를 나눈다. 나는 너마저 그녀로 채워가는 것

같다. 그녀는 그 3년 동안 나를 미친놈으로 만들어버렸다.

네가 내 손목의 상처에 입술을 맞추고 물어보았다.

"이것도 그 여자야?"

어느 날 통화중에 그녀는 내게 물었다.

[날 사랑해?]

1년 3개월 째였다.

[나는 당신을 한 달에 두 번 찾아가고 매일 문자하고 전화하고 매달 이벤트해

주고 선물하고 사랑한다 수천수만 번 속삭이고 사랑한다고 말할 때 마다 나 자

신을 추하게 만드는데 아직도 내 사랑을 확신하지 못합니까.]

[그럼 증명해봐.]

그녀의 가난, 그녀의 손등에 선명한 화상, 그녀의 몸 곳곳의 흉터, 그것은 그녀

를 끔찍한 열등감 속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그 열등감 속에서 자신을 사랑한다며

쫒아 다니는 나를 발견했겠지. 그녀는 나를 놔주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밀쳐내

지 않는다. 그녀는 내 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곁에 두지만 나를 사랑하지는 않았

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내 사랑이 증명될까요.]

[날 위해 죽어봐.]

끔찍한 패배감을 느꼈다.

[네.]

내 입은 제 멋대로 대답하고, 내 몸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곧바로 창밖

으로 던졌다. 나는 3층에서 떨어졌다.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뼈저린 고통

이 느껴지는 다리를 이끌어 집 안으로 들어와 면도칼로 손목을 그었다. 그때 나

는 울고 있었다. 피가 붉게 물들어가는 욕조 물에 팔을 담구고 엉엉 울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수건으로 팔을 감싸고 나가 문을 열어보자 모르는 여자가

나를 한번 슥 훑어보더니 들고 있던 핸드폰에 대고 짧게 말했다.

[야, 얘 안 죽었어.]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가슴에서부터 차가워지는 이 감정은

뭐란 말인가.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본 여자는 한

마디 톡 쏘아붙이고는 떠나버렸다.

[걔는 내 친구지만 너, 정말 이해 안가. 왜 그런 애랑 사귀니?]

그녀는 내가 정말 죽었는지 아닌지 내가 살던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자

신의 친구를 보내 확인을 시킨 것이다. 나는 왜 당신을 사랑하는지 모르겠다. 당

신은 지독하게 잔인하고 이기적이다. 그런데도 나는 당신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

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동물원 밖의 구경꾼 같은 존재였다. 매일 내

우리를 찾아와 봐주지만 절대 먹이를 던져주지 않는 이기적인 구경꾼. 나는 수많

은 구경꾼들 가운데 하필이면 그녀를 사랑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의

손에서 넘겨받은 붉은 책은 불꽃으로 다가와 내 마음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그녀를 만난 지 2개월. 그녀의 검은 장갑 안쪽의 화상을 발견한다. 나는 슬플 때

웃고 기쁠 때 인상 쓰는 당신의 진짜 기쁨과 슬픔을 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

다.

얘기가 끝났을 때 너는 울고 있었다. 정말 눈물이 많구나. 네 눈가에 입을 맞

추자 너는 더 크게 울었다.

"왜 그런 사람을 사랑했어."

그러게, 왜 그런 사람을 사랑했을까. 지금의 나는 폭발후의 황폐한 폐허다. 잿

더미와 썩은 땅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황무지가 내 마음과 같았다.

3년간의 끔찍하게 긴 폭발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만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던 날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강간하듯 그

녀를 범하고 말았다. 여태까지의 서러움과 발악을 담아 그녀의 모든 곳을 탐닉했

다. 그녀 손등의 화상, 그녀 허벅지의 흉터. 그녀의 몸은 마치 그녀가 읽던 책 막

상스 페르만의 「눈」에서 나오는 얼음 속에서 수십 년 간 그 젊음과 아름다움

을 간직해온 외줄타기 여자 같았다. 나는 그렇게 3년 동안 단 세 번 섹스 했다.

너는 그 부분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야한 거 좋아하는 사람이 3년 동안 세 번 밖에 못 했다고?"

"어떠냐, 좀 존경스러워 보이냐?"

너는 다시 웃으며 내 품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참을 부비적거리던 너는 내게

물었다.

"날 위해서도 죽어줄 수 있어?"

살짝 떨리는 목소리. 나는 조용히 너를 내려다보았다. [인간은 공포를 나눌 수

없는 생물이다.] 그녀가 했던 말이다. 네가 그 때 내가 느낀 공포를 느끼지 못

한 거라고 믿고 싶었다. 만약 그 기분을 알면서도 이렇게 물어보는 것 이라면,

너는 정말 나쁘다. 내가 대답이 없자 너는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난 못해."

내 말과 함께 네가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훌쩍대던 너는 눈

물콧물범벅이 된 얼굴로 개구쟁이처럼 씩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그 여자가 너무 부러워. 나는 당신 사랑을 받으려고 이렇게나 노력하는데도

아직 그 여자가 받은 사랑의 반도 못 받는데, 그 여자는 당신에게 상처주고 엉망

으로 만들어놓고도 아직까지 당신의 사랑을 받아. 그 여자가 부러워, 너무 부러

워서 미워."

"난 이제 그 사람 사랑 안 해."

나는 네 눈물을 옷깃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나는 네 눈물을 보고 울고 싶어졌

다. 너는 내 눈에서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는데도 내 눈에 입 맞췄다. 그녀가

모두 빼앗아간 내 눈물을 돌려놓듯. 그녀에게 기쁨과 슬픔을 돌려주고 싶었던 나

는 역으로 나의 슬픔을 빼앗기고 말았다. 내 눈물이 말라가던 3년의 끝, 그 긴

폭발의 끝에서 그녀는 내 도화선에 한 번 더 불을 붙이려 했다. 점점 지쳐가는

나를 붙잡고 다시 폭발시키려 했다.

[이제 헤어져.]

나는 휴대폰을 붙잡고 안 된다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폭발의 마지막 불꽃이

내 안의 생명을 남김없이 잡아먹어 버리는 것을 느끼며 미친 것처럼 욕을 하고

비명을 질렀다. 절대 헤어지자는 소리는 하지 않았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마지막, 혹시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의 동아줄을 끊

어버렸고. 나는 결국 미쳐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폭발의 잔해는 의외로 빠르게

정리되어갔다. 나는 이틀 밤을 새 울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넌 날 사랑하잖아! 헤어지지 마!

싫어! 왜 그런 소릴 하는 거냐고!]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공포를 나눌 수 없는 생물이다.

그것은 인간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소리였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무엇인

지 말하지 않고, 당신이 어떤 것을 느끼고 반응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당신은 내

가 당신에게 간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당신이 기쁜지 슬픈지만

알면 되는 소박한 인간이었다. 나는 그녀의 분노에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아버리

는 것을 느꼈다.

[날 사랑하긴 합니까?]

[사랑해.]

그녀의 불꽃이 나의 점화선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기쁨보다는 공

포를 느낀다.

[언제부터요?]

[이번… 추석부터.]

3년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나는 커다란 패배감을 안고 사랑을 했다. 공포가

엄습해 오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더 이상 이런 괴로운 경험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추석이라면 세 달 전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나를 세달 전

부터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3년 동안 뭘 한 걸까? 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창밖으로 뛰어내렸을까? 그녀가 나를 사랑하

지 않으면서도 나를 곁에 둔 이유는 어쩌면 그녀의 사랑은 느린 사랑이었기 때

문일지도 모른다. 몇 초 만에 모든 것을 폭발시키는 다이너마이트처럼 빠르게 타

오르는 사랑이 아니라 3년 동안 발화해야만 피어나는 버섯구름이었을지도 모른

다. 어쩌면 3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상처를 가진 당신에게 사람을 다시 믿고 사랑

하기엔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에게 3년이란 시간은 오히려 부족할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게 3년이라는 시간은 수만 수억 가지 종류의 패배감과 우

울함을 느끼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어. 나는 그저 당신이 지금 기쁜지 슬픈지만 알

면 되는 단순한 인간이었는데.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 마치 오래된 폐가에 창문이 열리고 봄바람이 들어와 먼

지를 날려버리듯 나는 해방된 느낌이었다. 그 어떤 다른 감정보다도 나는 해방감

을 먼저 느꼈다.

"나 이제 그 사람 사랑 안 해."

아버지의 끔찍한 폭력으로 만들어진 허벅지의 상처와, 큰아버지의 이유 없는

증오로 만들어진 손등의 화상. 그녀가 어찌할 수 없는 가난을 모두 끌어안고 싶

었던 나는 내 눈물과 우울을 3년에 모두 쏟아 부어 더 이상 울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연상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남의 슬픔을 끌어안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내 심장에 뻥 뚫린 구멍은

더 이상 사랑에 목맬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너를 안고 있는 지금도 그녀가 그립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고 싶지는 않

았다.

창수

창수입니다

스물한살입니다

전편 텍스툰에서 변태민생활백서를 썼습니다

제목을 못 정해서 반서방이 건네준 제목을 써 봅니다

....젠장 그나저나 너무 어두운 글인가? 이 글을 보고 현실성

이 없다고들 하던데 이건 제가 아는 누군가의 경험담입니다.

97퍼센트의 실화 3퍼센트의 픽션을 섞은 글입니다.

아, 그리고 요즘 비가 많이 와서 동동주가 땡기던데, 같이 한잔 하실분을 찾습니다.(근데 여기서 그런

얘기 해도 되나)

T E X T

O

O

N

Text-연재-

――――― 일요일

다음날인 일요일. 늦게까지 놀다 새벽에나 잠들어서 오전 10시쯤 일어났더니

아무도 없었다. 잠 많기로 소문난 송 군이 이 시간에 어딜 간 걸까? 밥도 안 먹

고 적당히 주섬주섬 챙겨 입고 나간 것 같다.

컴퓨터 모니터가 켜져 있어 확인해봤더니 인터넷 페이지가 몇 개 떠 있었다.

뭐지, 이건? 지하철 노선표부터 버스 노선표까지. 학교 주변을 다니는 대중교통

수단에 관련된 인터넷 페이지다. 지하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버스라니. 송 군은

버스를 싫어할 텐데, 울렁거린다고. 이런 걸 검색한 다음 어디로 나간 걸까?

생각해봤자 알 수 없는 일인가. 때가 되면 돌아오지 싶어서 전화도 하지 않았

다. 자기 집에 친구 내버려두고 설마 아무 말 없이 다른 곳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온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신경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일부터 다시 학

교에 가야하기도 하고. 교복도 가방도 전부 방에 남아있다.

적당히 밥 차려 먹고 놀고 있다니 오후 7시쯤 해서 송 군이 집에 돌아왔다. 어

라, 이거 말하다보니 우리 집에 송 군이 놀러온 것처럼 들리는데?

"넌 완전히 자기 집인 양 편하게 누워있다?"

응, 내 말이 그 말이다. 이제 여기가 남의 집 같지가 않다.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아무튼, 오늘은 어딜 그렇게 신나게 돌아다니다 오는

거야?"

"일종의 사전작업. 자세한 건 내일이 되면 알게 될 거야."

풀어 말하자면, 적어도 내일 뭔가 일을 저지르겠다는 거냐? 지금까지 준비한

것만 해도 충분히 기가 막힐 정도로 끔찍한데, 거기에 나를 빼놓고 추가적인 장

치를 했다는 건데. 박성찬 씨, 세상을 너무 비관하지는 마세요. 천재지변이 어디

사람 골라서 찾아옵니까? 포기하면 편할 겁니다.

――――― 월요일

――――― 화요일

――――― 수요일

――――― 다시 목요일

그리하여 오늘은 다시 목요일이다. 뭐가 그리하여 인가하면 역시 그리하여 그

리하여 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뭔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을 저지를 것 같

이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송 군의 말투와는 관계없이 지난 3일, 그러니까

월, 화, 수요일은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이렇다 할 사건사고도 없었고, 어쩐지 점

점 불쌍해지고 있는 지하철 치한하고도 만나지 않았다. 언제나 골치 아픈 소식만

전하는 ‘제비 집배원’도 오지 않았고, 누군가 수상한 소식을 가져오지도 않았다.

정신줄 놓고 사는 집주인이 아직까지도 아무런 연락 없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건 어떤 일일까,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언제까지고 송 군네 집에 들러붙어

살 수도 없는 일이니까 집주인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건 분명 나쁜 일이지만, 그

인간은 존재 자체가 트러블이니까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참에 확 집

을 바꿔볼까? 아니아니, 그런 짓을 했다가는 나중에 조용히 끌려갈지도 모르니까

역시 참자.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구나.

평화로웠다고 말은 했지만, 전혀 아무런 일도 없었냐 하면 또 그건 아니다. 기

분 나쁜 일도 아니고, 말하자면 역시 기분 좋은 일이지만 말이지. 일요일 이후,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송 군은 한사랑 씨하고 연락을 해서 틈틈

이 만나고 있다. 등굣길에 지하철에 만나서 같이 가고, 점심을 같이 먹고, 잠깐

기다리다가 하굣길에 다시 지하철에서 만나서 같이 가고. 그렇게 삼일을 계속 하

고 있다. 여자 친구라 그래도 이 정도는 못하겠지 싶기도 하고, 이 친구 이거 내

친김에 작업을 거는 건 아닌가 하고 보면 또 그건 아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하

면, 나 역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있으면, 어색

한 분위기가 싫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내고, 한사랑 씨가 거기에 맞장구를 치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송 군은 한 발 떨어진 듯 한 태도로 구경하고 있다. 분명

히 말하지만 매번 만나자고 연락하고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송 군이다. 이래서야

원, 왜 일부로 만나자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건 마치, 한사랑 씨를 감시하는 것

같지 않은가? 당사자는 전혀 그런 자각 없이 상당히 즐거워 보이지만.

아무튼 그런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상황이 오늘로 벌써 4일째다. 찝찝하긴 하

지만 즐겁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역시 아니다. 사실 상황 자체는 즐겁고 좋다.

이 상황을 연출한 녀석의 꿍꿍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거지.

목요일 하교 후 지하철역 주변의 한 카페. 속모를 음모가가 드디어 침묵을 깨

고 먼저 한사랑 씨에게 말을 걸었다.

"잠깐 이 사진 좀 봐주시겠습니까?"

"네?"

한사랑 씨는 아직까지도 송 군이 어색한지, 나한테는 쉽게 반말하면서 송 군에

게는 말을 높인다. 뭐 그건 그렇고, 그렇게 말하며 송 군이 내민 사진은 익숙한

것이었다. 지난주 금요일이었나? 스토커로 변신하려던 치한을 물 먹이고 오르막

길 위쪽에서 여유만만하게 찍었던 바로 그 사진이다. 언제 현상한 걸까? 시간상

으로 보면, 역시 일요일 외출했을 때 겸사겸사 같이 뽑아온 건가.

"어디, 봐요."

어둡고 비오는 날에 찍어서 그런지, 사진은 그리 선명하지 않았다. 그래도 워

낙 가까운 거리에서 찍은 사진이라 아쉬운 대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선명하

지는 않아도 보여야 할 건 다 보이는 정도라고 할까. 기습당한 상황에서도 우산

과 팔을 들어 얼굴을 막고 있는 모습이, 얼마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명대사

가 떠오르는 걸 왠지.

"얼굴은 안 보이지만, 흐음~ 어쩐지 낯설지 않은데요."

그야 낯설지 않겠지. 지난주까지 치한 짓을 하고 있던 치한 본인이니까 말이

야.

"이 사람을 보고 뭔가 알 수 있는 게 있습니까?"

"잠깐 자세히 좀 볼게요."

송 군은 그리 기대하지 않는 말투로 물었지만, 한사랑 씨는 사뭇 진지하게 사

진에 달려들었다. 왜 이 사진을 보여줬는지 묻지도 않으면서 이렇게까지 성의를

불태우다니. 좋은 사람이구나, 좋은 사람이야.

그야말로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한사랑 씨가 사진의 한 지점을 손으로 쿡

집었다.

"여기 이곳을 보면 말이에요."

가리키고 있는 것은 양복 상의의 옷깃 부분이다.

"사진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왼쪽 옷깃에 가느다란 네모 모양으로

검게 나온 부분 있잖아요? 이 부분이 상표라고 한다면, 이 양복은 상당히 비싼

걸지도 몰라요. 소매나 어깨 라인을 보면 그 메이커랑 특징이 비슷하네요. 아마

유명 메이커가 맞을 거예요."

어? 그게 그렇게 되나? 내가 보기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양복하고

다를 게 전혀 없는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 치한 씨는 돈도 제법 있고, 옷

차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는 건가?

"어, 하지만 옷차림에 그렇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닌 것 같네요. 아니, 오히려

패션에는 둔하거나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입 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부정당했다, 큭.

"단추가 세 개 달려 있잖아요? 이 브랜드뿐만 아니라 요즘에는 아무도 이렇게

안 만들어요. 많아봤자 두 개, 보통은 한 개 정도죠. 소매에 달린 단추도 네 개

나 되네요. 이 양복은 재작년, 아니면 작년 초까지나 유행하던 스타일이에요. 작

년 말부터는 버튼 숫자가 줄어드는 게 유행이고요."

나만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는가 봤더니, 송 군도 그녀의 냉철한 관찰에 놀랐

는지 굳은 얼굴에 금이 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척 보면 침착해 보이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어딘가 묘하게 일그러져 있는 얼굴인데, 뭐야 그럼, 전혀 기대

도 안하고 한 번 물어나 봤단 건가?

"어머, 제가 너무 생각에 잠겨서 말을 많이 한 모양이에요. 이런 건 송 군이

더 잘 할 텐데."

"아닙니다. 저는 전혀 알지 못하던 내용이네요. 역시 전문가는 다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나도 솔직하게 감탄해버렸다. 역시 전문가가 그냥 전문가는 아니구나.

부끄러워하는 한사랑 씨와 적당히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다 시간이 9시쯤 되

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같이 지하철을 타고 가야겠지만, 오

늘은 무슨 일인지 송 군이 볼일이 있다고 말하면서 먼저 가라고 한다.

"아 그래요? 그럼 전 이만 갈게요, 나중에 봐요."

처음에는 모델이 매일 출근해서 시간 채우는 게 이상하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일하고 있는 직장은 지인과 같이 세운 인터넷 쇼핑몰이라고 한다. 모델일은 물론

이고, 홈페이지 관리와 상품 배송 등의 일도 거들고 있다고 하니 이 시간쯤 되면

역시 피곤할 거라고 생각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일찍 들여보내는 게 맞겠

지.

손을 흔들며 지하철역까지 그녀를 배웅한 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몸을 돌려

송 군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뜬금없이 한사랑 씨를 혼자 돌려보낸 이유가 뭐야? 이번엔 무슨 일을

꾸미고 있어?"

"눈치가 많이 늘었군. 시간이 없으니까 움직이면서 말하지."

그러면서 움직인 곳은 버스 정류장. 지하철역 앞까지 와서 버스라니? 이 녀석

이 버스보다 지하철을 좋아하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

"한사랑 씨가 말한 건 사실 생각도 못해봤던 거였어.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

지. 범인의 심리상태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된 것 같아."

벌써 범인 취급이다. 아니, 범죄를 저지른 건 확실하지만 말이야.

"그래서, 뭘 알게 됐는데?"

"이미 유행이 지난 양복을 고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그 양복에 무슨 특별

한 의미가 있거나, 작업복으로서 가치가 있는 걸까?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

것보다는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해. 범인은 그 양복에 집착하고

있다."

집착하고 있다?

"그래, 집착. 아까 말한 대로 그 양복이 정말 메이커 상품이라면 가격은 우리

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나갈 거라고. 범인은 적어도 작년까지는 그런 옷

을 사 입을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옷에 제법 신경을 쓰

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어. 하지만 그런 사람이 왜 이제 와서 그런 유행

도 지난 양복을 고집해서 입고 다니고 있을까?"

"음, 더 이상 그런 양복을 살 돈은 없는데 싼 건 사고 싶지 않아서, 같은 건

어때? 직장에서 해고된 거지."

"바로 그거야. 내가 생각한 것도 비슷해. 거기에 더불어, 범인은 원래 사회적으

로 지위가 제법 높은 직업에 종사했을 가능성이 있어. 그래서 경제적 능력을 상

실한 오늘에 와서도 새로운 삶, 싸구려 양복에 만족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고 있는 거야. 과거를 회상하면서 내가 한 때 이런 사람이었어, 라고 자랑

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확실히, 이 추론은 적어도 절반 이상 맞을 것 같다. 빈약한 근거를 기반으로

시작한 추론이라서 영 불안하기는 하지만 어째서인지 신용이 간다. 요즘 들어 처

음으로 송 군이 내 말에 동의해서 그런 건가? 으, 이런 걸로 안심해 버리다니,

기대치가 낮아도 한참 낮다.

단순한 나 자신을 열심히 한심해하고 있을 때, 버스가 도착했다. 송 군은 이

버스에 탈 생각인 모양이다. 어, 그러고 보니 어딜 가는지, 왜 버스를 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뭐 일단 타. 자세한 이야기는 역시 가면서 이야기해주지."

아무래도 이 버스를 타는 것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다. 마침 자리

가 비어있어 그 곳에 앉은 송 군이 그 앞에 선 나를 올려다보면서 이야기를 시

작했다.

지긋지긋한 꼬마들이다. 지난주 목요일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1주

일에 걸쳐 나를 방해하고 있다. 특히 안경을 쓴 녀석은 위험하다. 처음 만났을

때 공격당한 것도 그렇지만, 그 녀석은 목적이 뭔지 알 수가 없다. 그 여자를 돕

는다고 너에게 남는 게 뭐가 있지? 없다. 아무것도. 전혀. 그런데 어째서 그 악마

같은 번뜩임을 낭비하고 있는 거냐!

지난 금요일에는 정말 아찔했다. 미행을 해 본 적이 있는 건 아니어서 자신은

없었지만, 그토록 완벽하게 당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기적적으로 택시에

올라탄 다음에야 두 꼬마가 나를 일부로 그런 곳으로 유인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행을 처음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당황하지 않고 함정에 빠트리기까지 했다. 역시 그 전날 학교까지 따라갔던 것이

안 좋았던 걸까. 지난 한 달 동안 처음 등장한 방해자여서 너무 당황했는지도 모

른다. 그 결과 다리와 엉덩이를 다치지 않았는가.

방문한 병원에는 실력이 좋은 의사가 있어서 주말동안 요양하는 것만으로 다

친 부위의 붓기가 많이 빠졌다. 격하게 움직이는 것은 무리지만, 이 정도라면 깁

스를 할 것도 없이 일상적인 생활은 가능할 것 같아서 월요일부터 다시 그녀를

찾았다. 지난주의 일은 우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고, 또

한 믿고 있었다. 아니,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녀를 발견했을 때의 희열은 곧바로 절망으로 전환되었다. 보란 듯이, 아주

당당하게 그녀는 그 꼬마들과 같이 있었던 것이다. 우연이 아니다. 우연이 아니

다 우연이 아니다 우연이 아니다!! 아주 보란 듯이 나를 위협하고 있다. 그렇게밖

에 생각할 수 없다. 어째 서지? 너희들은 도대체 무슨 관계야?!

그 같은 생각이 머리를 온통 휘저어 놓아서 처음 실수할 때와 마찬가지로 꼬

마들의 뒤를 밟을 뻔 했다.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날카로운 눈을 하고 꼬마들을

쫓아 지하철역 밖까지 나왔을 때, 간신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다른 꼬마는 모르

겠지만, 그 꼬마, 안경 낀 꼬마는 감이 좋다. 예리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날카롭

다. 비가 오고 있었다. 이런 날 무리하게 뒤를 쫓는 건 지난주의 멍청함을 반복

하는 행동에 불과하다. 나는 그 정도로 학습능력이 없는 얼간이는 아니다. 불쾌

하지만, 시기가 저들에게 유리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오는 장마철은 나에

게 불리하다.

그래서, 무리하지 않고 조용히 여자의 뒤를 따르며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그

랬는데, 이번에도 그 꼬마들이 문제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집과 직장을 오갈 때마

다 그 빌어먹을 녀석들이 항상 옆에 있다. 월요일도 그랬고, 화요일도 그랬고, 수

요일도 그랬으며 오늘 저녁까지도 똑같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녀석들은 내 생

각을 읽은 것처럼 언제나 한 발 앞서서 움직인다. 정확히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이쪽의 공격을 원천봉쇄하기 때문에, 나는 망연자실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

다. 저쪽이 갑자기 나를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상

대는 수상하면서도, 의외로 유능했다.

강력한 적이었지만, 결국 기회는 찾아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꼬마

는 약속이 있는지 어떤지 그녀와 지하철역 앞에서 헤어졌다. 바로 그녀를 쫓아갈

까? 아니, 이번에도 함정일지 모른다. 여기서 그녀의 집까지 가는 수단이 지하철

말고 없는 건 아니다. 이번에야말로 나를 끌어내서 마무리를 지을 생각일지도 모

른다. 지금은 그녀보다 꼬마들을 먼저 살펴야 한다. 지하철을 탈 생각은 없는지

버스정류장으로 향한 두 꼬마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더니, 곧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노선표에서 아까의 버스를 찾은 결과, 그 버스는 도심으로 나

가는 것으로 그녀의 집과는 정 반대 방향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확실하다! 이

번에야 말로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을 직감한 나는 더 이상 기다릴 것도 없이 재

빨리 지하철역으로 달려갔다. 카드를 찍고 플랫폼으로 내려서자마자 열차가 도착

해서 입을 열었다.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자 어렵지 않게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잡석 속의 옥 같은 여자다. 대중 속에 섞어놔도 이렇게까지 눈에 잘 들어오는 사

람은 흔치 않다. 퇴근시간과 맞물려 플랫폼 가득한 인파를 간신히 헤집어 나는

간신히 그녀와 같은 차량에 탈 수 있었다.

그녀가 내리는 역은 여기서 족히 30분은 걸리는 거리에 있다. 조급해하지 말

고, 정거장에 도착해서 사람들이 타고 내릴 때마다 조금씩 신중하게 그녀와의 거

리를 좁힌다. 약간의 연습만 한다면, 자리가 불편한 척 몸을 뒤틀며 서서히 앞으

로 나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의도를 들켜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그녀 본인이 아니라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수상한 눈으로 쳐다보게 되고, 그럴

경우 끝이다. 지금까지의 행동을 봤을 때, 그녀는 엉덩이를 만지거나 허벅지 안

쪽을 쓰다듬어도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부르

르 떨며 더러운 기분과 치욕, 수모감을 참는다. 적당히 할 경우, 다른 사람에게

들킬 이유는 없다. 하지만 한 번 주위에서 나를 신경 쓰기 시작한다면, 그것으로

이미 끝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맹목적인 접근은 삼가야 한

다. 때로는 옆으로 빠지기도 하고, 자리를 탐내고 있는 것처럼 눈길을 뿌리기도

하면서.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만큼은 아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그 정도로

만족할 생각은 없다. 같잖은 꼬마를 이용해서 나에게 안겨준 수치와 모욕감을 보

답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처럼 단발적인 접촉행위로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보다 확실한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일단은 참는다. 어디까지나 더 큰 일을

위한 전술적인 양보에 불과하다.

어딘지 바람 빠지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들리며 스크린 도어와 열차 문이

열린다. 내릴 역이다. 나도, 그녀도 말이다.

서울 외각 지역인 이 지역은 전형적인 서민 주택가다. 베드타운이라고 해도 좋

을 정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낮에 일하러 도심지역으로 떠났다가 밤이 되면 돌

아온다. 그래서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녀가 사

는 곳은 이 지역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이다. 서울 도심보다 경기도가 가까운 그

런 곳에 그녀는 살고 있다.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한 사실이다. 지하철역에서 그녀

의 집까지 가는 길에는 주택 증축에 의해 가로등불이 잘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골

목이 있다. 그곳이, 내가 바라던 바로 그런 곳이다.

그 전에, 그녀에게 들켜서 쓸데없이 불안감을 조성해서는 안 된다. 그때가 될

때까지, 참고 또 참으며 기회를 노리다, 단 한 번에 쓰러트려야 한다. 두 번의 기

회는 없다. 한 번에 접근해서 소리 지르지 못하게 순식간에 제압해야 한다. 그렇

지 않으면 주변이 온통 주택가인 사방에서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그야말로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어쩐지 방심하고

있는 상태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자아, 생각하는 거다. 지난 일주일간의 굴욕을. 패배를. 억울함을. 조용히 손을

푼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게 천천히 접근한다. 지난번 비오는 날 꼬마에게 철저

히 농락당한 이후, 아픈 발을 이끌고 철저히 연습했기 때문에 오늘처럼 땅이 마

른 날에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 그녀는 이제 곧 골목으로 들어설 것이고, 나는

이미 충분할 만큼 접근해 있다. 조명이 이렇게까지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잘 뻗

은 그녀의 팔다리를 볼 수 있다. 입은 옷의 패턴 하나하나를, 들고 있는 가방의

재질까지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손만 뻗으면 된다. 아른아른하게 흔들리는 그녀

의 머리카락에 닿을 듯 말 듯, 절묘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 충분하다. 단

한 번의 도약이면 끝난다. 어려운 건 그걸로 끝이다. 기다리는 건 처절한 복수와

유린. 복수와 쾌락이다. 다리에 힘을 주고, 온 몸을 잔뜩 긴장시킨다. 이제…….

"거기까지 해 두라고, 박성찬 씨."

갑자기 이름이 불려도 놀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미 반쯤 앞으로 기운 몸에 급하게 제동을 걸어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 문제의 안경 쓴 꼬마! 꼬마가 비틀어진 입으로 웃는다.

"김치."

가차 없이 플래시가 터졌다. 윽, 그런 걸 쓸 거면 미리 말하라고. 송 군이 이름

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달려 나가 한사랑 씨 옆에 선 나는 플래시 불빛에 완전

히 노출되어버렸다. 야밤에 갑자기 플래시를 맞으니 시야가 순간 백색으로 물들

었다가 도통 돌아오질 않는다.

"끄아아아!"

꼭 나만의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지만.

"뭐, 뭐에요?! 어라, EJ? 여긴 어떻게,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놀라는 것도 이해하지만, 나도 지금 다른 사람 챙겨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아, 이제 간신히 좀 보이기 시작한다. 옆에서 한사랑

씨가 걱정 반 당황 반의 얼굴로 나를 부축하고 있고, 치한, 아니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범인은 머리를 가린 채로 바닥에 쭈그려 엎드려있다. 나머지 한 사람, 송

군으로 말하자면, 그 모습을 한껏 내려다보며 비열하게 웃고 있다. 응, 비열하다

고 밖에 할 말이 없는 얼굴이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송 군의 예상대로 되다니. 범인이 단순한 걸까,

아니면 송 군이 쓸데없이 비열한 걸까? 여기까지 버스, 주로 택시를 타고 오면서

들은 이야기가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은 것 같다. 버스를 타고 도심 쪽으로 한 정

거장 간 송 군과 나는 그대로 내려서 바로 돌아왔다. 퇴근길이라 정체가 심해 생

각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범인의 의표를 찌르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송 군

이 이름을 부른 순간, 돌아보는 범인의 얼굴은 온통 경악으로 가득했으니까. '지

금부터 내가 범인이 된 걸로 가정하고, 범인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맞

춰보도록 할까'같은 소리를 하며 혼자서 독백을 마구 늘어놓을 때는 섬칫했는데

막상 현장에 와서 보니 더 끔찍하다.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 위해 지난 일요

일에는 이곳까지 와서 사전조사를 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저기, 송 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아, 별 거 아닙니다. 그냥 여기 이 사람이 문제의 치한일 뿐입니다."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네?!"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까지 한사랑 씨를 괴롭히던 치한은 바로 지금 이 자리

에 있는 박성찬 씨입니다. 어디, 볼까요."

카메라를 넣은 손으로 꺼낸 종이뭉치는 전에 유호 낭자한테 받은 바로 그 자

료일 것이다.

"작년까지 모 대학에서 전임교수로 일하고 있던 여기 이 쓰레기는 조교한테 잘

못 손대다가 파면 당했습니다. 본인은 자신만만하게 '겨우 그런 일로 날 자르다

니, 사람 볼 줄 모르는군!'같은 소리를 하며 당당하게 떠났다는 것 같습니다만,

그 뒤부터 성희롱 교수라는 직함이 붙어서 재취업에 계속 실패했군요. 동료도 친

구도 이 쓰레기의 본질을 알아보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동창에

게 속아서 저축을 죄다 사업으로 날려먹고 지금 남아있는 재산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뭐, 그런 사회적 병신이란 말이 되겠군요. 그런 쓰레기가 어쩌다 한사랑

씨한테 붙게 되었는지는 역시 쓰레기 본인한테 들어봐야 알겠습니다만."

송 군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엎드려 부들부들 떨고 있던 범인이 갑자기 폭발

적인 기세로 벌떡 일어나서 송 군에게 달려들었다. 빠르다! 저 나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을 정도의 순발력이다! 이제 와서 내가 막기엔 늦은 것 같다.

"위험해!"

달려오며 뻗은 범인의 오른 주먹을 어깨너머로 피한 송 군이 겹치듯이 오른손

을 뻗더니만 범인의 얼굴을 낚아채듯이 움켜쥐었다. 움켜쥘 수 있을 정도로 얼굴

이 작은 건 아니지만, 움켜쥔다고 밖에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잡은 오른

손과 동시에 뻗어나간 오른발 발꿈치가 범인의 무릎 뒤쪽을 가격한다. 자세가 뒤

로 무너지기 시작한 상태의 범인의 머리를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요령으로 강하

게 내리 찍으니, 달려오던 기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리가 뒤로 접힌 상태로

바닥에 널브러져 동공이 풀린 상태의 범인이었던 물체가 되었다. 그렇다고 죽은

건 아니겠지.

그래서 위험하다고 한 건데. 범인이.

"뭐 별로 들어보고 싶지는 않군요."

손을 터는 송 군을 내가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한사랑 씨가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 경찰심문 결과에 의하면 범인이 한사랑 씨를 노렸던 이유는 단순히 한사

랑 씨가 교수 파면 당시 그 원인이 되었던 조교랑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미인과 닮은 조교라니, 우와 그 학교 학생들은 좋겠구나. 그나저나.

"어지간히 쓰레기네, 범인."

참고하자면 내가 한 말이다.

결국 송 군이 했던 추론은 거의 다 맞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교수라, 그쯤 되

면 사회적으로 제법 높은 편 아닌가? 교육도 받을 만큼 받았고. 아니, 교육을 받

은 게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바로 대학교육을 주도하는 이 시대의 지성인 아닌

가. 한때 잘 나가선 대학교수의 결말이 이런 거라니. 선뜻 납득이 되질 않는다.

"결국 병신은 어딜 가도 병신에 불과하다는 거지."

그런 식으로 마무리 지으며, 사정청취가 끝난 송 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

찰서를 떠나기 전, 송 군은 마지막으로 한사랑 씨를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지적했

다.

"하지만 말입니다. 이번 일에는 당신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습니다. 부당한 일

을 당했을 때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긍정과도 같은 겁니다. 스스

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말 할 자격, 없습니다."

쓴 소리를 들었는데, 한사랑 씨는 왜 얼굴을 붉히는 걸까.

아무튼, 한사랑 씨를 경찰서에 두고 밖으로 나오자, 하늘은 이미 새카매서 희

뿌연 달을 빼면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결국 어땠는데?"

"뭐가?"

"마음이 내켰니 어쩌구 하면서도 한사랑 씨하고 계속 붙어 다니자고 한 사람은

너잖아. 그 왜, 한사랑 씨는 성격도 좋고, 착하고, 무엇보다도 툭 까놓고 말해서,

예쁘잖아. 아름답잖아!"

"응, 그래서 뭐."

"아니, 그래서 뭐, 가 아니라. 전혀 마음이 없냐는 거다! 호감이, 연애감정이!"

결국 내 입에서 이런 말까지 나오게 만들고 나서야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감을 잡은 모양이다.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글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하지만, 저 소극적인 성격은 별로

마음에 안 드는군."

하긴, 그런 성격이면 매번 송 군에게 휘말려 다닐 뿐이겠다. 뭐 이것도 다 그

녀 쪽에서도 마음이 있을 때 이야기지만.

――――― 그 뒤

이렇게 해서 일주일에 걸친 지하철 치한 사건은 해결되었다. '천재지변'의 변덕

에서 시작해서 '검은 사서', '흰 사서'에게 도움을 받고, '장미 아가씨'한테서 정보

를 빼돌리고 '해결사'에 대한 힌트를 '복제 자매'가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을 빌미

로 '유호 낭자'와 거래를 하고. 얼래, 이거 간단하게 정리하고 보니까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 같은 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

어난 사람들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던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

다.

사건이 끝난 다음날인 금요일. 지금까지의 피로를 풀 틈도 없이 보충수업이라

는 말도 안 되는 벌칙을 받으러 학교에 가는 길이었다. 망할 집주인은 주말에나

돌아온다고 밤늦게 전화가 왔었다. 수화기 너머로 작게나마 유호 낭자의 목소리

가 들리는 게, 아무래도 직접 가서 잡은 모양이다. 돌아오면 또 한참 투덜거릴

것이 틀림없다. 뭐 그래서, 여전히 송 군의 집에서 같이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가는 길이었다. 여름방학 초반부터 너무 기운을 낭비한 건 아닌가 의심하면서 멍

한 눈길을 여기저기 던지고 있을 때,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한사랑 씨다. 여전히 멋진 모습이다. 말이라도 걸어볼까 손을 들어 올리던 참

에, 내 손 말고 다른 손이 그녀한테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아니, 그렇다고 내 손

도 같이 접근하고 있었다는 건 아니고. 아무튼, 그 제 3의 손은 은밀하게 움직

이더니만, 그녀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려는 듯 했다. 이거 또 치한인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송 군에게 알려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경쾌한 타격음이 울렸다.

"어딜 만지는 거야, 이 더러운 쓰레기가!"

한순간 내 눈을 의심할 뻔 했다. 다른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아니, 확실히 맞

는데. 맞긴 한데, 내가 알던 한사랑 씨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반발하면서 따귀를

올려붙이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따귀 한 방에 사람이 넉다운 될 정도로 무서운

사람도 아니었는데. 게다가 말투는 왠지 송 군하고 닮아있다.

진짜로 분노했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흘겨보던 그녀의

눈이 우연히 나와 마주쳤다. 아-니, 내가 아니라 정확히는 내 조금 뒤인 것 같

다. 내 뒤라면, 송 군이 오늘도 각기병 걸린 닭처럼 가사수면상태로 절묘한 균형

을 유지하고 있지. 가끔은 날 봐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녀는 오늘도 송 군을

바라보고 있다.

"송 군, EJ!"

그리고 아는 척을 해 온다. 이건 수상하다. 적잖이 수상하다. 잘못하면 송 군이

멀쩡한 사람 또 하나 망쳐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것보다, 지금 막 깨달은 사실인데,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랑 송 군을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다르지 않나? 송 군을 대할 때는 뭐랄까, 굉장히 부끄러워하

고 쑥스러워 하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또 반갑게 인사하면서 활기차게 다가온

다. 흠, 나로서는 지난 일주일에 걸친 지하철 치한 사건보다 이쪽이 더 미스터리

다. 이번에는 해설해 줄 사람도 없고 말이다.

하긴, 이제 장마도 끝나가고, 여름은 이제 시작이니 이런 것 저런 것 복잡한

일이 조금 많아도 괜찮겠지. 여름은 이제 시작이다.

라이어반

어째 쓰다 보니 여름 이야기네요. 3월까지 눈이 오고 있는 판국에 이건 좀 아니다

싶기도 한데 그냥 그러려니하고 넘어갑시다. 비축분이란 위대하니까요. 아, 끝나버

렸네요 그러고보니?

4/ A detective

감겨있던 눈을 뜬다. 퀭한 눈동자로 방안을 몇 차례 둘러본다. 창문에서 새하

얀 여명이 방 안 곳곳 기어들고 있다. 뻐근한 몸을 일으키자 자연적으로 방바닥

으로 시선이 간다. 소파베드 아래 놓인 재떨이엔 수십 개의 담배꽁초가 말미잘처

럼 박혀있고, 간밤에 오너 몰래 가져온 빈 맥주 병 몇몇이 더러운 방바닥을 나뒹

굴고 있다. 그리고 어제 밤 아현이 입을 댔던 머그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아니

오늘 새벽의 일이 다시 떠오른다. 몇 번이고 아현에게 그냥 꿈일 뿐이라고 안심

시키며 집으로 돌려보낸 후, 왠지 모르게 심란해진 마음은 지금도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꿈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한 건 난데, 왜 이러는 걸까. 평소의

아현답지 않은 호들갑 때문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나는 그 이야기를 의외로 진

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새벽 내내 눈을 감고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트고 만 것이다. 머리가 천근만근이다. 다시 눕고 싶다.

그 순간 야단이라도 치듯이 소파베드 구석에 박혀있던 핸드폰에서 모닝콜이 터

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침이 시작됐다.

등교준비를 하고 1층으로 내려가자, 바 안쪽에선 오너가 핸드그라인더로 커피

원두를 갈고 있었다. 바 맞은편, 길게 늘어선 좌석 가운데엔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 있었다. 옆방에 사는 구진호 형사였다. 구 형사는 주름진 정장상의의 소

매를 걷으며 토스트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책가방을 고쳐 메며 다가간다. 구 형사는 그제야 나를 알아보고 홀짝이던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여, 오랜만이다.”

“1주일 만인가요? 바쁘신 모양이네요.”

“늘 그렇지, 이번엔 특히 더 바빠서 숨 쉴 시간도 없다.”

구 형사가 며칠째 깎지 못해 수염이 덥수룩한 턱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얼굴골

격이 들쑥날쑥하기 때문에 평소 구 형사의 눈 밑은 늘 어두웠지만 오늘은 특히

더했다. 비단, 그림자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렇게 바쁘신 양반이 아침부터 어인 일로 오셨나?”

오너가 잘 갈아진 원두가 놓인 종이필터 위로 김이 펄펄 끓는 주전자 물을 부

으며 능구렁이처럼 빈정거렸다.

“내가 내 집에 온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 모습에 나와 오너는 킬킬 거린다. 나 역시 곧바로 구 형사 옆에 앉아 별 볼

일 없는 아침 만담에 참가한다.

“그래서, 누굴 만나러 가는데요?”

호기심 가득 한 눈으로 묻는다. 이제 곧 서른을 바라보는 이 젊은 강력계 형사

는 남에게 말하길 좋아해서 곧 잘 여러 사건사고 이야기를 하는데, 개중엔 기밀

사항도 가끔 나오기 때문에 오너와 나는 구 형사가 오는 날이면 늘 이런 식으로

찔러보곤 한다. 물론 기밀사항이 궁금한 것도 있지만, 뭐가 그리 대단한 이야기

라고 연신 손짓 발짓 섞어 이야기하는 구 형사의 모습이 상당히 우스꽝스러워서

이야길 거는 거지만……. 구 형사는 상의의 옷깃을 한 번 매만지며 입술을 핥더

니, 짐짓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허, 이번엔 말하면 안 됩니다. 진짜로.”

구 형사가 점잖게 빼며 이야길 미루자 오너가 냉장고에서 베이컨을 꺼내오며

나에게 말했다.

“오늘 아침은 베이컨 토스트를 해 먹을까? 학생은 아침이 든든해야지. 아! 형

사님은 다 드셨으면 올라가시죠? 바쁘시다면 서요?”

오너가 잔뜩 거드름 피우며 피식피식 웃자 구 형사의 입술이 삐틀어진다.

“와 너무하네, 오너. 이런 식으로 괴롭히는 겁니까? 아니, 경찰이 기밀사항을

지킨다는데 이런 식으로 차별하다니. 콩밥 먹게 해드릴까요?”

“허, 무슨 FBI 요원이라도 되는 듯이 매번 정장 다려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자

기가 짭샌건 아셨나봐? 것보다 궁금해 죽겠으니깐 좀 말 해봐요. 치즈도 한 장

올려 줄 테니. 한두 번 말 한 것도 아니고, 얼마 후면 뉴스에 나올 내용일 텐데.

뭘 그렇게 빼나?”

구 형사는 그래도 완강히 말하길 거부하며 묵묵히 커피 잔을 다시 입술로 옮

길 뿐이었다.

“정말 중요한 일인가보죠. 너무 보채지 말아요. 오너.”

바 너머 지글지글 구어지고 있는 베이컨을 뒤집는 오너의 손을 좇으며 말한다.

저 인간은 고기를 금방 태워먹기 일수니 뒤집을 때가 되면 말해줘야 한다. 내 말

을 끝으로 바 안엔 약간의 침묵이 감돌았다. 결국 구 형사가 참지 못하고 입술을

열었다.

“아니, 뭐 조금이라면 별 상관없지만, 아우 알겠습니다. 조금만 알려드리죠.”

“진작 그럴 것이지.”

“아! 오너 뒤집어요! 조금 그을었잖아요!”

내 말에 능글거리는 웃음을 얼굴 가득 그리던 오너가 급히 프라이팬 위 베이

컨을 뒤집는다. 그러든 말든 구 형사는 혀에 제동이 걸렸는지 결국 입술을 열었

다.

“에, 그러니깐. 제가 마약단속반인건 다들 아실 테고, 뭐 이번에 국내에서 신종

마약이 들어온 모양이어서요.”

“뭐, 그리 대단한 이야긴 아닌 것 같은데?”

오너가 식빵위에 양배추와 베이컨 치즈, 그리고 몇몇 소스를 뿌리며 대답했다.

“뭐 저 내용만 들어선 그렇죠. 근데 그게 이번에 발견된 약이 해외여서도 발견

된 적이 없는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국과수에서도 무슨 효능을 갖고 있는

지 아직 밝혀지지도 않은데다, 물장사하는 놈들한테도 정보가 없는 꽤 신출귀몰

한 물건이란 말이죠. 무엇보다, 투약자들이…….”

구형사의 안색이 급히 어두워지더니 논두렁에 물 새듯 쭉쭉 이야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수학여행에서 귀신이야기를 하는 아이같이 쓸데없는 무게가 들

어간 목소리 톤이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나와 오너는 숨죽여 킬킬 거렸다.

“투약자들이 뭐 어쨌는데요?”

“아니, 여기까지 하죠.”

그 말을 끝으로 구 형사는 정말 굳게 입을 닫아버렸다.

“뭐야, 뭔가 중요한 부분에서 끊는 느낌인데? 싱겁구먼. 뭐, 우리 같은 사람들

한텐 별 내용도 아닌 듯싶은데. 어쨌든 말하느라 수고했소. 그것보다. 자아, 기다

리시던 베이컨 토스트 나왔습니다.”

그렇게 아침만담은 흐지부지하게 끝이 났고 난 곧 등굣길에 올랐다. 새벽녘부

터 내리던 비는 지금도 계속 이어져 밖은 꽤 서늘했다. 본격적인 장마철에 들어

선 듯했다.

비오는 날 지하철역이 늘 그렇듯 역 안은 마치 꿀물이 떨어진 개미집 마냥 북

적였다. 사람들의 신발엔 너나 할 것 없이 빗물이 서며 젖어있었다. 지하철을 타

고 네 정거장 떨어진 학교 근처 지하철역으로 나온다. 챙겨온 우산을 펼치며 손

목시계를 본다. 시각은 7시 20분. 지각시간까진 아직 15분 정도 남았다. 학교는

역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니 조금은 여유가 있었지만 축 쳐진 공기와 덕

인지 오늘 하루도 지겨운 학업에 끙끙거릴 생각을 하니 왠지 텐션이 내려간다.

그나마 오늘이 토요일인 것이 작은 위로일까. 비가와선 나가 놀 수도 없지만

……. 교실에 도착해 창가 쪽 제일 끝에 자리 잡은 내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

아, 참고서 몇 권을 배게 삼아 머리를 뉘었다. 빗방울이 창문에 부닥치는 소리와

클래스메이트들의 수다소리가 섞여 평소보다 반은 몇 배나 시끄러웠다. 며칠 전

만해도 중간고사니 뭐니 너도나도 볼펜 똑딱거리며 미칠 듯이 공부하던 분위기

는 어디로 사라지고, 무거운 공기와 어울리지 않는 교실의 난잡함에 위화감이 느

껴질 정도다. 그렇게 곧 0교시가 시작됐다.

4교시가 끝나서야 나는 아현이 없음을 알아챘다. 어젯밤 분명 집으로 보냈는

데, 왜 등교하지 않은 거지? 다른 때 같으면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겠지만 어제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때마침 종례를 하기 위해 들어온 담임에게 다가가 아현의

부재를 물었다. 몸이 좋지 않아 결석을 했다며 담임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딱히 아픈 구석은 없어보였는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 자리로 돌아갈

찰라, 담임이 다시 날 불러 세웠다. 담임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 지금 너희 아버지 어디계신지 아냐?”

순간, 기분이 무척 불쾌해졌다.

“저랑 아버지 지금 연락 끊고 지내는 거 아시잖아요? 알 리가 없죠.”

역시 그랬군, 하고 담임이 혀를 한 번 차더니 나에게 들릴 만큼만 조용히 말한

다.

“병원 측에서 교무실로 전화가 왔었는데, 너희 아버지가 지금 입원 중이라고

하더라.”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 속이 덜컥하고 흔들린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아, 에. 그렇군요.”

“입원수속이라든지 여러 가지로 네가 보호자 명의로 동의를 해야 할 게 있는

상황이어서 말이야. 병원주소를 가르쳐줄테니 가봐라.”

담임이 병원의 주소와 약도가 대충 그려진 메모지를 꺼내 내 손에 올렸다. 나

는 걸레라도 만진 듯 메모지를 재빨리 구겨 주머니 속에 쑤셔 넣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머릿속에 어지럽다. 아현의 일도, 아버지의 일도, 자지 못해 무거운 머

리도, 시끄러운 교실의 소음도 분명한 악의를 띈 채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5/ Dream

“네, 이걸로 503호실 환자님. 입원수속 마치셨습니다.”

연분홍빛이 감도는 제복을 입은 간호사가 인스턴트식품 같은 급조한 미소를

보고나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이걸로, 오늘 일은 대충 끝났나? 나는 여러

가지 수속을 도와주러, 아버지가 소속된 ‘화랑’측에서 나온 사람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그럼 이만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무테안경에 세미정장을 걸친 30대 중반쯤 되 보이는 일명 ‘화랑측 사람’은 약

간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기, 아직 면회시간이 남아있는데 아버지 보러 안 올라가니?”

평범한, 가족이라면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우린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망

가져버린 관계라는 걸 보여주는 건 싫었다. 그렇지만 입원하신 아버지보다 바쁜

일이 있다고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건 어딜 봐도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아, 음. 뵙긴 해야 하는데,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다면서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보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도 이 물건 얼른 처

리하고 싶고. 같이 가지.”

그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과일바구니를 한 번 흔들더니 곧 나를 이끌고 아버지

의 병실로 향했다.

“501호…502호…503호. 좋아, 여기군.”

그가 미닫이로 된 문을 열며 병실로 들어서는 걸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좀처럼 발을 뻗을 용기가 안 났다. ‘그날’ 이후로 좀처럼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이런 식의 만남은 아버지도, 나도 생각하지 못

했을 터였다.

“안 들어오고 뭐해?”

내가 멍하니 있자 먼저 병실에 들어간 사내가 나를 불렀다.

“아, 네. 들어가요.”

얼떨결에 병실로 들어선 나는 병원 특유의 크레졸 소독약 냄새에 얼굴을 찡그

렸다.

“쯧, 정말인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건지 몰라. 해외에서 개인

전도 잡혀있던 양반이.”

사내는 과일바구니를 침대 근처 가구에 올려 세우며 뭐라 중얼거리더니 곧 바

쁜 일이 있다며 나가버렸다. 나는 홀로 덩그러니 병실에 남겨졌다. 나갈까 했지

만, 그래도 왠지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몸이 상해 스러져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 기분이 나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자조적으로 비웃으

며 침대로 다가갔다. 산소 호흡기를 낀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햇빛을 못 봐

새하얗게 질린 피부위로 지렁이처럼 자리 잡은 주름살들이 눈에 띄었다. 반백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은 관리를 안했는지 어께 아래까지 넘실거렸다. 예술가란 작자

들은 다 이런 건진 몰라도, 못 본지 1년 사이 그는 거지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

다. 침대 옆에 자리 잡은 의자에 앉아 아버지를 지긋이 내려다본다. 가슴 한편이

욱신하고 아려왔다. 어느새 비웃음은 입가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말로 토해내

지 못할 설움만 뱃속에서 울렁거리고 있었다. 눈시울이 어느덧 뜨거웠다.

“이렇게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싶어서, 절 쫓아낸 거 에요?”

홀로 말해봤자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약간 머뭇거리는 손으로 유화물감이

잔뜩 스며들어 검게 때가 낀 아버지의 손끝을 잡았다. 차가웠다. 차가운 아버지

의 손등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나는 우리 집 현관문 앞에 서있다. 언제부터 어느 정도의 시간을 여기에서 서

서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문뜩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에 서있었을 뿐이

다. 익숙하지만 낯선 장소, 내가 지금 사는 집이 아니다. 아버지와 나와 그리고

어머니가 함께였던 집.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이건, ‘꿈’이다.

하지만 깨어나고 싶진 않았다. 왠지 그리운 기분이 들어 조금이라도 이곳에 머

물고 싶었다. 그래도 계속 서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눈동자를 굴려 천

천히 주위를 살펴봤다. 아파트의 층계참. 엘리베이터문과 위, 아래 복도로 이어지

는 계단, 창문, 옆집의 현관문. 마지막으로 우리 집 현관문을 훑어본다. 우리 집

문 표면엔 수십 장의 전단지가 붙어있다.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호수가 써진

푯말조차 전단지에 뒤덮여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알 수 있다. 이 문은 우리 집

으로 이어지는 문이다. 설사 그렇지 않아도, 내가 문을 여는 순간 그리 될 것이

다. 하지만 아직 이 문을 열어볼 용기가 없다.

그때, 복도 한편에 자리 잡은 창문에서 눈서린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그러자

전단지들이 바람에 따라 거칠게 부대끼기 시작했다.

──팔락팔락팔락팔락팔락팔락팔락팔락팔락팔락팔락팔락팔락팔락팔락팔락

수 십장의 전단지가 고개를 들어 올리듯 일어선다. 동시에 괴물의 울음소리라

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괴기스럽고 혐오스러운 소리가 전단지 사이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 소리는 수많은 사람이 떠드는 소리 같기도, 수많은 동물들이

단체로 울부짖는 것 같기도 했다. 소리는 갈수록 커져 어느새 복도 전체가 크게

울렸다. 더 이상 참고들을 수 없어진 나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닫아 바람을

막을 요량이었다.

창가에 다다라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검은 도화지 같은 밤하늘 그 한가운데

에 일그러진 달이 떠있었다. 달은 무슨 모양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시시각각

그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보름달인 듯싶더니, 어느새 하현달이 되었다가, 전혀

알 수없는 형태로 변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신기해 한참을 바라보다 바람에 흘러

들어온 눈이 눈 속에 들어갔다. 눈동자 위로 싸한, 냉기가 달린다. 그제야 창문을

닫으려고 했던 것이 다시 떠올랐다. 아직 그 소리는 멎지 않았었지…….

이번에야말로 창문을 닫는다.

탁─.

둔탁한 소리를 내며 창문이 닫히자, 마치 영화감독의 ‘컷’사인을 들은 배우마냥

전단지들은 몸에서 힘을 빼고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그 기괴한 소리 역시 멎었

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그 것도 잠시 이번엔 또 다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

다. 은은하고 감미로우면서도 감정이 북받치는 소리. 그 소리가 귓바퀴를 돌아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가슴 한편이 아릿해진다. 무게 있는 저음. 이건 첼로

의 소리다. 아주 그리운 음율.

아아──, 그래. 알고 있다. 나는 이 소리를 알고 있다. 서둘러 소리의 근원을

찾아 발을 옮긴다. 우리 집에서 새어나오는 소리였다. 엄마의 연주소리가 들리고

있다. 하지만 급한 마음과 달리 한 발짝 한 발짝 발길 옮기는 것이 힘들다. 다리

를 내려다봐보니 내 다리가 녹아가고 있었다. 다리뿐만 아니라 몸통도 손도, 그

리고 세상 또한 첼로연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순간부터 녹아내려가고 있다. 하

늘도, 달도, 아파트도, 그리고 내 몸 역시 유화물감처럼 뚝 뚝 흘러내리기 시작한

다. 내 다리가 다 녹아 사라지기 전에 얼른 엄마를 찾아야한다. 기듯이 복도를

지나 현관문 앞에 섰다. 재빨리 손잡이를 잡는다. 손잡이를 돌린다. 이 문에 자물

쇠 따윈 걸려있지 않다. 분명히 그렇다. 왜냐면─── 내가 그렇게 바랐기 때문이

다.

쾅-!

문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동시에 언제 녹아내렸었냐는 듯, 모든

사물들이 뚜렷한 윤곽선을 갖추고 온 상태로 돌아왔다. 손바닥을 내려 보니 내

몸 역시 평소 그대로다. 나는 멍하니 집 안을 둘러본다. 낡아서 뻐꾸기가 나오지

않는 뻐꾸기시계, 먼지가 가득 낀 앤티크 식탁. 린시드와 테레핀 냄새가 가득 차

숨쉬기조차 괴로운 공기. 집안 구석구석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이젤, 캔버스,

아그리파나 줄리앙, 비너스 따위의 석고상. 우리 집이다. 모든 것이 집을 나오기

전의 그대로다.

나는 구두를 벗지도 않고 신발장을 지나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 옆 베란다 너

머, 아스라이 떠있는 초승달이 푸른 달빛을 뿜어내며 거실을 적시고 있다. 그리

고 그 한 가운데 아버지와 엄마가 보였다. 나는 웃었다. 저기서 모두 나를 기다

리고 있다. 서둘러 다가가려한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나의 머리채를

잡아 당겼다. 팔뚝으로 안듯이 내 목을 조인다. 비명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바로

저기에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있는데……. 그때, 나의 목을 조르

던 것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왜 이제야 온 거야?」

─── See You Next Dream

그림니르

텍스툰 마감에서 제일 걸림돌이 되는 그림니르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번

에도 어김없이 마지막 턴으로 원고를 제출했습니다. 기쁘군요.(웃음) 지

난번엔 편집장과 서로 재워달라고 애원하면 비몽사몽으로 즉석에서 글

을 써 제출해 엄청나게 오타가 많았습니다. 이번엔 그 정돈 아닐 겁니

다. 좋은 하루되세요.

T E X T

O

O

N Text

-릴레이-

0. 초장부터 너무하는구먼 -라이어반

좋아 자네가 이번에 새로 온 신입이지? 하하, 그렇게 놀라지 말라고, 여기

처음 오는 신입들은 전부 어리둥절하게 눈만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거든.

알아보는 거야 어렵지 않지. 난 진 체터Jin Chatter라고 하네. 기지 안에서는 '레알

수다'라고 부르는 녀석도 있긴 한데, 거기까진 알 것 없고, 그냥 진이라고 부르면

되네. 에이, 경례는 무슨,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말이야. 자네 미 해병대

출신이라 그랬나? 여기 메시아Messiah 사社는 민간사업체니까 그렇게 격식 차릴

거 없어. 난 단순히 신병 담당이니까 나 말고, 나중에 부대 배정 받으면 거기

가서나 좀 챙기라고. 실전부대에는 그런 거 좋아하는 인간들도 있거든.

그래, 그러면 일단 기지를 둘러보면서 이야기 해 볼까? 여긴 얼마나 알고

왔어? 해병대에 있다가 고액에 스카우트 되서 왔다고? 이야, 어지간히

엘리트였던 모양이네. 여기 사람이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여기

있는 인간들은 평범하고는 거리가 좀 있거든. 헤드헌팅 당했다면야 그만큼

능력이 있는 거겠네. 그런데, 스카우트 되면서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었지? 어어,

아마 그랬을 거야. 인사 담당들은 일단 사람 긁어모으기에 급급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해 주는 편이니까.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일단,

자네가 왜 여기, 태평양 군도의 고만고만한 섬에 왔는지부터 이야기 해 볼까.

물어보는 것도 웃기지만, 메시아가 뭐 하는 곳인지는 알지? 그래, 세계에서

가장 큰 민간 군수업체야. 순수 군사력만 따져도 어지간한 나라는 일주일 안에

완전히 집어 삼킬 수 있을 정도라고들 하지. 실제로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전에는 우리 회사가 반란군과 정부군, 양측을 다 돕고 있기도

해. 회사 내부에서 쌤쌤이하고 싸우니 결말이 날 리가 없지. 돈만 되면 뭐든

하는 곳이니까 말이야. 아아, 너무 그렇게 우울한 얼굴은 하지 말라고. 어차피

군대란 곳은 어디든 다 똑같은 거 아니겠어?

메시아가 군수업체로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은 자회사를 무시무시하게 가지고

있는 초거대 기업이거든. 메가 플랜트Mega Plant라는 종자 회사 들어본 적 있어?

그래, 거기도 메시아의 자회사거든. 메가 플랜트 말고도 에너지 사업체, 정보산업

사업체 등등 아무튼, 메시아는 무지막지하게 큰 곳이란 거야. 그러다보니 당연히

후계자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 후계자가 한 명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기나긴 암투 끝에 살아남은 게 결국 두 명이거든. 메시아

수뇌부에서 엄청나게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린 게, 바로 여기 태평양 군도야.

뭐라더라, '메시아 게임'이라고 하던가? 체스게임 같은 건데, 체스는 알지?

군수업체답게 두 후계자한테 똑같은 조건을 주고 서로 싸워서 이긴 쪽을

후계자로 하겠다는 거야. 진 쪽은? 하하, 순진한 척 하면서 뭘 그런 걸 다

물어보고 그래. 당연히 죽는 거지. 승자를 위한 비료라고나 할까. 모르긴 몰라도,

진 쪽에 붙었던 직원들도 거의 다 좌천당하거나 해고당할 걸? 어느 쪽이 이기던,

대대적인 숙청이 있을 거야.

신병 자네가 있는 이곳은 통칭 블랙 팀Black Team으로, 상대방인 레드 팀Red

Team하고 싸워야 하는 입장이지. 후계자를 세우기 위한 싸움에 끼어들게 된

거라고, 자네나 나나. 뭐 월급은 지나치게 빵빵해서 돈 쓸 걱정이 들 정도니까

불만이야 없지만, 뒷말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지.

자, 여기가 격납고야. 장갑차, 탱크, 별의 별 게 다 있긴 하지만, 가장 강력한

건 역시 이거지. 이거, 본 적 있어? 없다고? 음, 그럼 설명하기 좀 복잡한데.

뭐라고 하더라, 피네Fine였나? 한정된 지역에서 진짜 요만큼만 생산되는

특수금속이 있는데, 그걸 가지고 만든 인간형 병기야. 정식 명칭이 있긴 한데 난

그냥 콥스Corps라고 불러. 생긴 건 사람을 닮아선 파일럿이 타지 않으면 죽은

것처럼 꿈쩍도 안 하거든. 다른 사람들은 '딸내미', '노다지', '장식용' 등등,

아무튼 편하게 부르니까 그냥 자네도 편하게 부르면 돼. 원래 호칭은 쓸데 없이

복잡해서 엔지니어들도 잘 안 쓰거든.

오, 자네도 콥스에 관심이 있나? 여기 오기 전에 무슨 기계를 몸에 붙이고 한

테스트 있었지? 그래, 그 기분 나쁜 거. 그게 그 피네라는 특수금속하고 얼마나

잘 맞는지 테스트하는 건데, 수치는 얼마나 나왔어? 40% 정도? 에, 그러면

콥스는 못 타겠네. 적어도 70-80% 정도는 되어야 손이나 대 볼 수 있거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아, 그 피네라는 특수금속이 까탈스런 녀석이라,

사람을 가리거든.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사람마다 피네랑 잘 맞고 아니고,

가 있는 모양이야. 콥스를 타려면 피네랑 잘 맞아야 하고. 엔지니어들은 그걸

'싱크로율'이라고 하더라.

아, 엔지니어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저 콥스란 녀석이 까탈스럽다는 게 말이지,

정비하기도 힘들어. 피네를 가지고 콥스를 만든 엔지니어만 그 콥스를 정비할 수

있거든. 옛날 장인인 마에스트로같다고. 우리 부대에는 콥스를 정비할 수 있는

치프 엔지니어가 두 명이 있는데, 둘 다 가까이 하는 건 그리 추천하지 않아.

적잖이 또라이들인데다가, 서로 사이도 안 좋거든. 이틀에 한 번은 대판

싸우니까 자네도 조만간 한 번 볼 수 있을 거야. 실력은 괜찮은데 성질머리가

그래서야.

아무튼 그러니까 말이야, 콥스도, 콥스 파일럿에도 함부로 손대면 안 돼.

잘못하면 그 순간 즉결처분당할 수 있다고. 자네나 나는 얌전히 중무장 하고

총이나 로켓 같은 걸 들고 설쳐야지, 하하. 그래도, 상대방 콥스를 보면 목숨

걸고 도망가는 게 좋아. 콥스는, 저 징그럽게 생긴 만큼이나, 강하거든.

아, 벌써 점심시간인가? 도시락을 파네. 응? 격납고 안에서 무슨 도시락을

파냐고? 하긴, 다른 곳에서는 못 보겠구나. 도시락 팔고 있던 청년 있지? 그래,

잘 생긴데다가 어딘지 멍청해 보이는 남자 말이야. 그 사람이 우리가 밀고 있는

후계자, 즉 레드 킹Red King이야. …어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의심하는 얼굴을

하는 건 실례라고. 농담이나 과장은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이야.

그래, 진짜야. 킹이 왜 저러고 있냐고? 음, 메시아 게임이 시작한 이후부터 바로

본가로부터 지원이 끊겼다 그러더라고. 그렇다고 해봤자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주식이나 채권만 가지고도 우리는 상상도 못할 돈이 들어오지만, 저것도 꼴에

남자라고 여자를 자꾸 찾는단 말이야. 그 정도야 좋다 쳐도, 어디서 꽃뱀만 자꾸

물어 와서 털리거든. 그렇게 털리고 나면 용돈벌이 삼아서 저렇게 도시락이나

팔고 다니는 거야. 아니, 진짜야?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니까?

왜 저런 사람을 미냐고? 글쎄, 확실히 상대 쪽 후계자가 더 능력도 있고

멋지긴 해. 회사를 생각해서는 솔직히 상대방이 이겼으면 좋겠어. 아직 미치진

않았으니까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봐. 근데 저쪽 후계자는 사람 부리는 게

험하거든.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게, 지금 메시아랑 똑같아서 말이야. 반면 우리

후계자님은 사람이 약간 맹하고 멍청하긴 하지만, 사람 사는 맛이라는 게

있거든. 어, 재미있잖아? 왠지 돌봐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내버려둘 수

없는 타입이랄까. 애도 아닌데 말이야, 이상도 하지. 그래,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한 달만 지나면 너도 내가 무슨 이야기 하는지 대충 알게 될 거야.

여기 격납고 말고도 숙소, 공장 아무튼 여기저기 많긴 한데 그건 천천히

알아보고 일단 식당에서 밥이나 먹자고. 여기 요리사는 어리긴 한데 실력이

보통이 아니거든. 자네 한식 먹어봤나, 한식? 이참에 한 번 먹어 보라고. 뭐든지

말만 하면 만들어주니까 말이야.

어이,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뭘 보고 있는 거야? 응? 피아식별? 그거야

간단하지, 레드 팀은 빨간 색으로, 블랙 팀은 검은 색으로 무장을 통일하거든.

그러니까 한 눈에 보면 알 수 있다는 이야기지. 가끔 제대로 보지도 않고 쏘고

보는 얼간이도 있어서 문제긴 하지만 말이야, 하하.

뭐? 격납고 안에 빨간 색으로 도장되어 있는 로봇이 있었다고? 아, 적기를

포획해서 해체하거나 분석하는 일도 자주 하거든. 같은 기술력으로 만들었다고는

해도, 콥스는 엔지니어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곤 하니까. 응? 움직이고

있었다고? 가동 테스트라도 하고 있나.

───.

뭐, 뭐야?! 젠장 격납고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뭐? 아까 그거, 포획한 게

아니라 적기가 침입한 거 아니냐고?

…초장부터 너무하는구먼.

1. 개전 -라이어반

주문. 사슴고기 스테이크. 레어. 핏물이 표면에 흐를 정도로.

"치프, 아침부터 너무 과하지 않나요."

실언. 육식에 과함은 없다. 요는 섭취한 것을 효율적으로 소화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다. 인간의 소화기관은 투입한 음식물의 질량에 비례해서 에너지를

생산해낸다. 제대로 소화해 낼 수만 있다면 과함 따위는 입지가 없지. 입실론,

너야말로 그따위 푸성귀로 식사를 때울 셈인가?

"푸성귀라니요, 제대로 영양균형 맞춘 샐러드라고요. 사슴고기 스테이크보다

밀리는 건 칼로리 정도 밖에 없을 걸요."

우둔. 이곳 베이스의 주방장은 물리적, 화학적으로 해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상한 인물이다. 한 달 내내 같은 음식만 먹어도 영양편중 같은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영양보조제 같은 것에 의존하지 않고도

육식에 전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그 위대한 주방장이 치프의 편식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라는

거군요. 뭐 실력 하나 만큼은 최고지만요. 요리사들 이야기 들어보면 거의

연금술을 하는 것 같다고 하던데요."

신기. 어떤 재료로도 훌륭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블랙 베이스의 기둥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킹의 보잘 것 없는 조리물에 비하면…….

───.

굉음. 폭발음과 강한 진동. 방향은.

"치프, 제 1 격납고 쪽입니다."

확인. 제 1 격납고 안에 현재 소재자는?

"그게, 크사이가 잔업 하던 중이었고, 카이만 치프가 휘하 엔지니어들과 함께

있을 겁니다."

판단. 카이만과 악어 떼가 실험 중에 폭발물이라도 건드린 건가.

"아니, 아무리 카이만 치프라고는 해도 그 정도로 무책임할 리는… 아 치프,

크사이한테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치프, 크사이입니다. 그쪽은 무사합니까?」

보고. 이쪽은 무사하다, 상황을 보고하라.

「포획한 화이트 폰WP이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격납고 안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적기가 비무장 상태라 피해가 심각하지는 않지만,

파일럿들도 기체에 타지 못해 곤란한 상황입니다.」

"그 WP, 파일럿도 없이 버려진 걸 포획한 거잖아."

우문. 원격조종이다. 특이할 것도 없는 하등한 기술이다.

"하지만 치프, 기지에는 전파보호막이 깔려 있잖습니까. 그걸 뚫고 CP를

움직이려면 말도 안 되는 증폭기가 필요할 텐데요."

「경계선 안에 중계기라도 설치한 모양입니다. 아무튼 현재 심각한 부상자는

없지만 응전할 수 없습니다.」

대기. 초계근무중인 다른 부대에게 입전하겠다.

"잠깐, 미스터 JC,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요."

확인. 크롤 클러치Crawl Clutch. 전략전술가. 대화를 들은 모양. 느긋한

태도로 대화를 가로막는다.

"지금 초계근무중인 부대를 안으로 불러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네, 아마

조금 곤란할 겁니다."

설명. 로드 디고리Lord Digory가 이끄는 블랙 폰BP 편대라면 위치도 가깝고,

삽시간에 적기를 제압할 수 있다. 적기는 비무장 상태지만, 그래도 무방비

상태의 CP 정도는 어렵지 않게 대파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체 대파율은

높아져만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근거를 제시하라.

"지금 아군 부대 내에서 비무장 상태의 WP 한 기 가지고 난동을 일으키는 게

얼마나 큰 효과가 있을까요? 잘 모르겠는데요, 고작 기체 몇 기 부수기 위한

계획이라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수지가 맞지 않을 것 같은데요.

중계기까지 동원할 정도라면 다른 게 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러면,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말입니까?"

"예에, 아마도. 제가 이 작전을 계획했다면 아마 그럴 겁니다. 아마도

양동작전, 내부 소란 때문에 경계가 흐려진 틈을 타서 적 본대가 공격해

들어온다, 같은 전개일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초계근무중인 부대는 계속

버티고 있는 게 나을 거라고 봅니다."

"…치프, WP를 방치하면 격납고 하나 털리고 말지만, 경계선이 털리면 게임

오버입니다."

인정. 실언했다. 나는 엔지니어, 전술전략은 그쪽이 전문이다.

「그런데 미스터 크롤, 지금 격납고 안에는 치프 카이만 무리가 개발 중인

신무기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그것도 박살날 텐데요.」

"아 그런가요. 분명히 전격을 이용한 포획용 그물이었나, 그랬었죠."

정정. 그건 돈 많이 들어가는 대형 모기장에 불과하다.

"아무튼 간에 말입니다, 치프. 그 대형 모기장에 예산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는

기억하시죠? 그게 박살나면 상부에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네요. 신무기가 아니라도 기체가 파손되는 건 곤란해요. 만약에 적이

침입한다면 역시 대응할 병력이 있어야 하니까요. 아니, 어지간해서는 격퇴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여유병력은 있는 게 낫겠죠. 그렇죠? 아마 있는 게 나을

겁니다."

동의. 엔지니어 입장에서도 기체는 절대적으로 파손되지 않는 편이 좋다. 자재

생산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 한 번에 대량의 기체가 파손될 경우 수복률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든 하는 편이 좋겠네요. 경계선을 유지하면서도 기지 안에

침입한 적을 격퇴해야 할 것 같네요."

"…저기, 미스터 크롤."

"네? 무슨 일인가요, 미스터 입실론?"

"일단 지금은 생각하는 것 대신 무슨 명령이라도 내려야 하지 않을까요.

위급상황인데요 지금."

"아, 그거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미스터 입실론."

"네? 그게 무슨…."

「왔습니다, 미스터 크롤. 지금부터 영상중계를 시작하겠습니다.」

"사실은 상황을 파악하는 대로 병력을 파견해 놨습니다. 영상을 보시죠."

난동. 부자유스런 움직임으로 한 기의 WP가 격납고 안에서 아무렇게나 팔을

휘두르고 있다. 기체 곳곳에 부탁된 고정대가 아직도 덜렁거린다.

난입. 순간 격납고 벽을 뚫고 한 발의 탄환이 날아들어 막 카이만의 앰버를

집어드려는 WP를 두드린다. 탄환은 정확히 WP의 어깨 고정대를 끊어낸다.

갑자기 WP의 팔이 축 처진 바로 그 순간, 반대쪽 격납고 벽이 거칠게 박살나며

한 기의 기체가 격납고 안으로 침입해 들어온다. 빠른 속도로 무기를 뽑아든 그

기체는 벽을 뚫고 들어옴과 동시에 무방비한 상태의 WP를 공격, 사지를 갈가리

절단해 해체한다.

정적.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도 시선을 빨아들이는 검은 기체. 조금 전의

격렬한 기동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침묵.」

침묵. 짧은 무전을 남기고 적기도 아군기도 침묵한다.

「이상으로 CP-BB01 '아라크네'와 CP-BN02 '러너', 긴급임무를 마칩니다. 」

"아라크네와 러너는 그대로 경계지역으로 이동해 로드 디고리 편대에 합류하기

바랍니다. 미스터 카마엘, 미스터 미카엘, 이번에도 아군기를 공격하면

지난번처럼 간단히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 행정담당관이 전해달랍니다."

인식. 블랙 비숍 아라크네와 블랙 나이트 러너. 저격과 돌격기로 이루어진

듀오인가.

지긋지긋한 녀석들이군.

2. 양동작전 -견공

D-Day 02:00 C-d4지역

C-d4, 백전의 노장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대치하고 있는 그 땅은 Black

Team(BT)의 입장에서나 White Team(WT)의 입장에서나 중요한 곳이었다. 그

리고 바로 지금, 그런 C-d4의 균형이, 아니 White Team과 Black Team의 전체

적인 균형이 깨지려고 하고 있다.

"곧 피바람이 불어 닥치겠군."

어두운 밤, 달빛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던 Black Team의 로드 디고리는

전장의 기운을 느꼈다. 집어든 술잔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곧 올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잠을 청하기로 결정한 그는 그대로 침상에 들었다. 그와 같은 시각, White

Team의 용장 존 크라우스 또한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곧 전투가 시작되겠구나! RPG 로켓 병을 재배치시키고, 탱크의 포신의 거미

줄을 걷어내라! 모든 조종 병들은 충분히 자두라고 전하고, 일반 병들 경계를 게

을리 하지 말라고 그래! 로드 녀석과 오랜만에 한 번 제대로 붙어 보자구나."

그는 로드 디고리와는 달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RPG 로켓 병을 기지 내 재

배치 시켰고, 탱크에 기름칠을 다시 했다.

D-Day 11:50 Black Team의 초소

한편 크롤에게 러너와 아라크네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 지도를 보며 작전을 짜

고 있던 로드 디고리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누군가 또 내 욕을 하나보군."

워낙 원한 산 일이 많은 그는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지도를 바

라보았다.

"현재 꼬마들의 위치가 이쪽쯤인가? 음……. 통신병! 지금 당장 러너와 아라크

네에게 통신 요청해라!"

"아… 아, 아이, 써!"

갑작스런 명령에 하품을 하던 통신병은 갑작스런 명령에 황급히 러너와 아라

크네에 통신요청을 넣었다.

"P로부터 N2와 B1에게 통신을 요청합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P로부터

N2와 B1에게 통신을 요청합니다."

곧 응답이 왔다.

"N2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B1입니다. 말씀하세요."

통신병은 고개를 들어 로드 디고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헤드셋을 벗었다.

로드 디고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통신병의 헤드셋을 넘겨받아 썼다.

"로드 디고리다. 러너, 아라크네. 현 위치가 C-d3 맞는가?"

"그렇습니다."

로드 디고리는 지도를 보며 말을 이었다.

"C-d5에서 C-d4지역, WT초소로 12시 45분에 침투하라. 기본적 플랜은 C까

지 허용하겠다."

"알겠습니다."

"옛 서!"

"앞으로 닥칠 상황엔 각자 판단하고 대응하라. 이만."

통신을 끊은 로드 디고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통신병을 향해 헤드셋을 던지며

말했다.

"모든 CP 조종사는 전투 준비, 이를 제외한 모든 병사들은 대기하라. 12시 30

분에 저 허여멀건 놈들의 땅을 빼앗는 거다!!"

D-Day 11:50 White Team의 초소

다음날, 존 크라우스는 Mr.왕의 전갈을 받고 자신의 예감이 적중했음에 묘한

표정을 지으며 모든 사항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CP 조종 병들을 불러와! 지금부터 검둥이 녀석들을 칠 준비를 한다. RPG 로

켓 병들은 현 위치에 대기한다. 탱크와 헬기는 각각 6대, 10기정도 따로 차출해

놓아라! 차출한 것을 제외한 모든 탱크와 헬기는 대기하라!"

"옛 서!"

거수경례를 한 뒤 명령을 전달하는 오퍼레이터를 보며 존은 주먹을 불끈 쥐었

다. 대련 할 때마다, 그리고 전투에서 적으로 만났을 때마다 항상 자신을 밟아왔

던 로드 디고리와의 전투를 생각하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아 견딜 수가 없었다.

"놈……. 이번엔 꼭 이기고 말테다!"

D-Day 12:30 White Team의 초소

"최전방으로부터의 전갈입니다. Black Team에서 전 기체 이동 중! 목표는 저

희 초소입니다!"

"예상대로다, 따로 차출해 놓았던 녀석들과 CP 3대를 이용해 맞선다! 나머지

병력은 대기하라! 자, 가자! 오늘에야 말로 검둥이 녀석들을 쓸어버리는 거다!"

D-Day 12:40 White Team의 초소에서 가까운 평원

검은색 문양이 들어간 CP들과 하얀색 문양이 들어간 CP 및 탱크, 헬기로 이

루어진 부대가 대치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전투가 시작될 거 같은 분위기가 느껴

지는 가운데 로드 디고리가 자신의 애기 플람베르그를 타고서 앞으로 나왔다.

"존 이 겁쟁이 녀석~ 순수한 CP만으로는 이길 자신이 없던 것이냐?"

외장 스피커로 모두가 들으라는 듯, 도발을 시도한 로드 디고리, 하지만 존 크

라우스는 그 정도에 걸릴 인물이 아니었다.

"..편의상 오른쪽부터 B-1에서 B-7까지로 부르겠다. 플람베르그를 제외한 폰

형 CP를 향해 사격하라!"

"아이 아이 써!"

"레디, 샷!"

존 크라우스는 통신을 통해 명령을 내렸고, 곧 미사일과 포탄이 CP-BP들을

향해 쏟아졌다.

"어림없다!"

하지만, 마치 그렇게 나올 줄을 알았다는 듯, 적들이 사격 준비 자세에 들어가

자마자 일제히 몸을 숙였던 BP들은 몸을 들면서 바닥에 숨겨 놓았던 엄청나게

거대한 방패를 세웠다. '아이기스'라 불리는 그 방패들은 몰아치는 포격을 견뎌내

고 자신의 주인을 지켰다.

"말도 안 돼……."

"집중하라! 탱크와 헬기는 다음 포격 준비! CP는 시간을 끈다. 방패를 들어

라!"

"아이, 아이 써!"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파일럿을 향해 존이 호통을 하자, 파일럿들은 정

신을 차리고 명령에 따랐고, 아이기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꽤 어느 정도

포격을 막을 수 있는 방패를 들어 몸을 가리고 사격에 대비 했다. 하지만 기다린

충격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기스를 든 적 CP들이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추격하겠……."

"가지마! 뭔가 이상하다. 일단 포격으로만 상대해!"

"아이, 아이 써!"

D-Day 12:45 White Team 초소 인근

"잠입 성공. 지금부터 전투 기동으로 전환합니다. 설정, 점령. 목표는 C-d4

WT 초소. CP-BN02, CP-BB01 작전을 시작합니다."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Black Team의 통신에 울려 퍼졌다. 그

와 동시에 산을 넘어 천천히 움직이던 검은색의 두 CP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

했다. CP-BN02 코드명 러너, CP-BB01 코드명 아라크네. 두 대의 CP는 적진

을 향해 달려갔다. 전투 기동으로 전환된 두 CP가 땅을 박찰 때마다 바닥은 움

푹 패었고, CP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카마엘, 플랜 B를 실행하겠다."

"옛 서."

미카엘의 명령에 아라크네가 방향을 틀어 White Team 초소 뒤쪽의 산을 향

하여 이동했다. 한편 러너는 계속해서 White Team 초소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

고 저 멀리 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 러너를 향해 미사일이 날아왔다. 그

것은 RPG였고, 이런 상황을 예상한 존 크라우스가 깔아 논 포석이었다. 하지만

러너의 몸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던 RPG는 러너의 오른팔에 달린 대탄실드

를 뚫는데 그쳤고, 미처 자리를 뜨지 못한 RPG병들은 러너에 의해 그 생을 마감

했다. 하지만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1시 방향, 3시 방향, 11시 방향에서 RPG 접근 중

경고를 알리는 화면을 본 미카엘은 러너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회피 기

동을 시도했다.

쿵!

하지만 러너는 그곳에서 완전히 도망치지 못했다. 폭음을 뚫고 나타난 러너의

몸은 성한 상태가 아니었다. 왼팔에 달려있는 대빔실드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

고, 어느 샌가 뽑아 든 빔 블레이드는 빔을 생성하지 못했다. 칠흑과도 같은 색

으로 칠해졌던 러너의 몸은 합금 본연의 색을 들어냈고, 장갑에는 이리저리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러너의 다리는 멀쩡한 듯 엄청난 속도로 RPG병들을 찾아 갔

고, 곧 그들은 러너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두두두 두두

그렇게 RPG병들을 찾아 죽일 때, 하늘을 뒤덮는 소음이 들려왔다. White

Team의 헬기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은 러너를 향해 날아들었

다. 러너는 자동식 유도 제벌린을 찾는 듯 허리춤을 더듬었지만 아까의 폭발에

다 부서졌는지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런 러너의 목숨을 끊기 위해 헬기들은

러너를 조준하고 사격하려 했다.

-쒜에에엑!!

바로 그 때, 헬기들 사이로 무엇인가가 지나갔다. 그것은 아라크네의 지원 사

격이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날아든 레일 스나이프 탄은 주변의 공기를 찢으며

자신을 막는 모든 헬기를 뚫어버렸다. 그리고 곧 그것이 찢어놓은 공간을 매 꾸

기 위해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고, 헬기들이 하나 둘씩 추락했다. 러너는 초

소 인근 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떨어지는 헬기들을 무시한 채, 초소를

향해 달려갔다.

-콰앙!

초소 안에 침입하는 데 성공한 러너는 White Team의 깃발을 향해 뛰었다. 물

론 방어 탑이 30mm기관총을 쏘며 러너를 막으려 했지만, 곧 레일 스나이프 탄

에 의해 그 기능을 정지당했고, 러너를 향해 포를 쏘려던 탱크들은 러너의 순간

적인 접근 때문에 별 다른 반응도 못한 채, 히든 블레이드와 단 분자 커터의 희

생양이 되었다. 그렇게 러너는 자신이 목표로 한 깃발을 향해 계속 달렸고, 아라

크네는 그런 러너를 엄호했다.

"플랜 B에서 플랜 C로 변경. 적 CP가 도망쳤다. 찾아서 사살하라."

"옛 서."

CP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러너의 움직임이 변했다. 모든 것을 뚫

고 달릴 것 같던 그것의 움직임이, 주변을 경계하는 맹수의 움직임으로 바뀌었

고, 간간히 공격해 오는 RPG나 대 CP용 수류탄을 가볍게 피하며, 자리를 지켰

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통신망으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 클리어, 도망치던 CP-WP 3대 전부 제거했습니다."

"알았다."

그리고 러너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다 갈기

갈기 찢어버렸으며, 그 뒤에는 오직 찢겨진 탱크와 헬기, 그리고 짓눌러져 누군

지 알아볼 수 없는 시체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러너는 White Team 초

소의 중심에 도착했고, 더 이상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C-d4는 Black Team에

게 완전히 넘어갔다.

D-Day 같은 시각, 평원

러너와 아라크네의 기습 소식을 들은 존 크라우스는 황급히 초소로 돌아가려

고 했다. 하지만 로드 디고리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었기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던 때, 점령 소식이 들려왔고,

곧 로드 디고리가 존 크라우스에게 퇴각을 제안한다. 존 크라우스는 이번에도 졌

음을 인정하며 복수의 눈물을 흘렸고, 곧 모든 CP를 버린 채 White Team의 영

역으로 돌아갔다.

라이어반

자꾸 뵙습니다. 라이어반입니다. 일단 그렇습니다.

견공

안녕하세요. 견공입니다. 그것뿐입니다.

1화 -곤냥이

평화로운 시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평화가 그리워졌다.

왕국의 수도 세이탄티아의 동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 나무로 만든 목책을 가진

이 마을은 다른 마을들과 다름 없이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몸을 지킬 호신술이

나 그 이상의 무술을 익히고 살아왔다. 군대가 있어 사람들을 지키는 도시의 사

람들과는 달리 이곳에는 그러한 군대가 없어서 마을 사람들이 자경단을 만들어

돌아가며 목책 위에서 경계를 서야했고 혹시라도 모르는 사태에 대비하여 여자

와 어린아이를 비롯한 마을 안의 사람들도 약간씩이나마 호신술이나 무기들을

다룰 수 있게 해둔다. 언제 몬스터들이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남자들이 경계

를 서고 있는 이 목책 위에는 언제나 긴장감이 가득하다.

“카일! 교대다! 가서 밥 먹고 와!”

뒤를 돌아보자 곰 같이 생긴 옆집의 제스터 아저씨가 손나팔을 만들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야 점심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목책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

으켜 기지개를 켰다. 굳어 있던 근육들이 이완되며 시원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얼른 가봐. 네 레이디께서 맛있는 것 해두고 기다리는 모양이더라.”

어느새 목책 위로 올라온 제스터 아저씨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어깨에 툭 하고

손은 얹었다. 레이디라니…….

“켈리아는 그냥 여동생일 뿐이에요. 어쨌든 얼른 가볼게요. 기다리게 하고 싶

지 않아요.”

얼른 목책을 내려가며 대꾸하자 아저씨가 우습다는 듯 푸훗 하고 웃음을 날렸

다.

“네가 그런 식으로 아끼니까 레이디란 말이 나오는 거지.”

하여간. 대꾸해주면 끝이 없다니까.

마을을 걸어 집으로 가는 동안 주변 여기저기서 인사를 해왔다. 우리 마을은

겨우 40여 호의 가구로 이루어져 있어 대부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사람 수는

적고, 외곽의 마을이다 보니 우리 마을 사람들끼리의 결속력은 강할 수밖에 없었

다. 서로 투닥거리며 싸우는 일도 거의 없을 정도였다. 몬스터만 없다면 정말 평

화로운 곳이었을 텐데…….

―.

입안이 써왔다. 쓴 물이 입안 가득 올라온 느낌이었다. 벌써 몇 마리를 베어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손엔 더 이상 검을 들고 있는 감각이 없었다. 몸이 무거웠

지만, 살기위해서 다시금 나를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키익-!”

괴상한 비명소리가 울리고 몬스터의 몸에 큰 검상이 남았다. 바닥에 쓰러져 몇

번인가 꿈틀거리던 몬스터는 결국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원래라면 확인 사살

을 해 보기 위해 다시 한 번 목에 검을 찔러 넣었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한 마리를 죽이면 다른 두 놈이 달려온다. 그리고 두 놈을 죽이고 나면 세 놈이

나타난다. 끝도 없이 몬스터들이 몰려온다. 이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린다. 하지만 포기 할 수는 없었다.

마을의 목책도 무너진 지 오래였다. 근래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몬스터들이 좀

늘었다 느낀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평상시의 배가 되는 양의 몬스터들이 한꺼번

에 몰려왔다. 거의 100에 달하는 수의 몬스터의 등장에 경계를 서고 있던 자경

단은 당황했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사람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면서 마을 수비

에 나섰다. 하지만 급증한 몬스터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원이 도착하기도

전에 수년에 걸친 몬스터의 공격에 약해져 있던 목책의 한 부분이 무너져버렸고,

그곳을 향해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다행히 때맞춰 도착한 나를 비롯한 지원군

들이 어서 그 몬스터들의 사냥에 나섰지만, 끝도 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들에게 사

람들은 점차 밀려갔다. 곧이어 목책의 또 다른 부분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몬스터들에게 당해낼 수가 없게 되었다. 언제나 사람의 수가 몬스터보다 많

아서 두 사람이 몬스터 한 마리를 잡는 형세였는데, 그날만은 사람 한 명이 몬스

터 한두 마리를 사냥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 형세가 되었다. 형세가 뒤집혔다. 그

사실은 사람들에게 절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고, 절망은 더욱 우리들의 사기를

꺾어버렸다.

그럼에도 우리가 버티고 싸워야만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포기하면 내 가족이 죽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왕국의 수도 세이탄티아의 동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 샤필터 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

난생 처음 와본 수도는 넓었다. 수백의 수도 어림없다 생각될 정도로 많은 건

물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고,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그 전부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정도로 큰 시장도 매일 열렸다. 수도의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성은

아주 어디서나 눈에 띄었고, 이 아름다운 도시를 아우르는 느낌이 들었다. 성에

서 멀지 않은 곳에는 멋진 조각상이 물을 뿜어내는 넓은 분수 광장도 있었다. 사

람들은 시냇물이 아닌 왕국에서 만든 수로가 옮겨주는 깨끗한 물을 떠 마셨다.

치안대는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안정을 도모했다. 누구나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고 있었고, 돈이 좀 많은 사람들은 화려한 프릴이 달린 옷도 마음

껏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하지만 며칠을 돌아본 수도는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

의 사람들은 메말라 있었다. 마을에서와 같은 정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치

안대가 없어선 안 될 정도로 싸움도, 악행도 많았다. 도둑도 많았고, 사기꾼도 많

았다.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않았고, 전혀 배려해주지 않았다. 자신에게 이득이

될 때는 어떠한 행위도 묵인하고,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 같으면 당장에 치안대

에 연락했다. 치안대도 사람들을 중재하지 않았다. 그저 연행해 갈 뿐이었다. 어

떠한 일이 있건 일단 사람들을 연행해 성 근처에 있는 임시 수용소로 끌고 가버

렸다. 그 와중에 반항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 서슴지 않았다. 남자

건 여자건 거칠게 다루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주먹부터 날렸다. 그러다 귀족이라도

지나가면 모두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바닥에 바짝 엎드려야 했다. 그러지 않는

자는 채찍을 맞게 되고, 심하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것이 당연하

다. 귀족과 돈 많은 자들이 멋대로 판을 치고 사람들을 착취하는데도 아무도 그

에 토를 달지 못한다. 치안대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 위협하기 위해

존재하는 걸로 보일 정도였다.

수도가 이런 곳일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보통의 촌사람들이 그러하듯 살기

좋은 곳일 줄만 알고 있었다. 수도에 대한 환상은 철저하게 깨지고 말았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거지 취급하며 냉정하게 내쫓아버리는 여관 주인에게 야

속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도에선 돈이 없는 것이 죄였다. 그 정

도는 이 며칠 사이에 너무나 절실하게 깨달았다.

“잠시만요. 그럼 음식만이라도 조금만 얻을 수 없을까요? 이미 며칠이나 굶어

서 쓰러질 것 같아서 그럽니다. 일을 해서라도 값은 치를 테니…….”

“이 거지가! 우리가 무슨 자선 사업가인 줄 알아? 당장 꺼지지 못 해?!”

주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정물 세례가 날아왔다. 축축해져 버린 단벌 옷을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결국 포기하고 뒤를 돌아섰다. 이번이 몇 번째 퇴짜인

지 세는 것도 포기했다. 돌아 볼 수 있는 곳은 다 돌아본 터라 갈 곳이라고는 서

민을 위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수로뿐이었다. 그곳의 물 만큼은 얼마든 마실 수

있었다. 더러운 옷을 입은 상태라 경비대에게 보였다간 바로 접근 금지를 당하긴

하지만.

또 물로 대강 배를 채우고서 그냥 맨바닥에 누워버렸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로 힘들었다. 태어나 나고 자란 그 마을이 너무나 그리

웠다. 불과 일주일 만에 모든 상황이 변하였다. 따뜻하고 서로를 아끼던 마을은

사라지고 말았다. 내게 남은 것은 그때 가지고 나온 것이 전부였다. 홀로 살아남

았다는 죄책감을 내가 마을을 되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억누르고 며칠을 걸어

간신히 수도에 도착했다. 수도에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

냥 막연히 수도에 도착하면 어떻게든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큰 착

각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수도의 정문에서는 검문이 펼쳐지고 있었다. 신분이 명확하지 않은 자는 통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상 밖의 난관에 난감해하고 있을 때,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검문을 하는 경비원들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작고 네모난 나무패였다.

그것을 확인한 경비원들은 그뿐만 아니라 그의 뒤로 거의 10명 가까이를 한 번

에 통과시켜 주었다. 일행이기 때문에 각각 그 나무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

한 명이 그 보증을 서 주면 충분한 모양이었다. 그 것을 본 순간 내가 성안에 들

어갈 방법은 그 것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누가 날 데리고 들어가 주느냐

였다.

성문 앞에 줄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피던 중 문득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피델?”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의아한 듯 돌아보았다가 나를 보는 순간

놀라움이 가득 찼다. 잠시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무어라 속삭인 그는 상대가 고개

를 끄덕이자 얼른 내게로 달려왔다.

“이게 누구야? 카일이잖아? 이게 얼마만이야? 아니, 그 이전에 여기 수도엔 어

쩐 일이야? 여기서 널 보게 될 줄이야. 촌장님은 잘 지내시고 계셔?”

순식간에 여러 질문을 한꺼번에 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피

델의 매력이었다. 쾌활하고 활기찬 그는 가끔 우리 마을에 물건을 팔러오는 상인

이었다. 원래 그의 아버지가 왔었는데, 지금은 그가 그 일을 물려받아 하고 있다

고 했었다.

“차근차근 이야기해줄게. 그보다…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

“뭔데? 일단 말해봐. 들어보고 가능한 일이라면 뭐든 들어줄게. 너희 마을은

내 단골 고객이시니 할 수 있는 한 성심성의껏 도와야지.”

장난스럽게 찡긋하고 윙크를 날리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한시름 놓았다는 생

각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아는 사람들 만났다는 것 자체가 다행이었고, 앞으로

의 일도 잘 풀려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그는 내 부탁을 들어주었

고, 나는 그와 함께 수도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도움을 받아 며

칠 만에 제대로 된 식사와 잠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아무도 모르는 수

도에서 그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든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그날 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그의 태도는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마을은 전멸당하고 오직 너 혼자 살아남았다는 거야?”

“응…….”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부탁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렇게 차갑게 굳은 피델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잠시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지켜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의 쾌활하고 명랑한 목소리가 아닌 싸늘하고도 메마른 목소리가 내 귓가에 와

닿았다.

“오늘은 옛정을 생각해서 여기 있게 해주겠지만, 이 이상은 나도 곤란해. 내일

쯤 다른 곳으로 가 주겠어?”

밤 공기는 차가웠다. 옷이 젖어 있는 상태라 더 했을지도 모른다. 구정물이 마

르면서 점점 악취도 심해지는 것 같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지만, 배가 고파서

살라만다를 소환할 수가 없었다. 녀석을 소환하기엔 너무나 지친 상태였다. 자칫

잘 못하면 오히려 더 위험해 질 수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참는 수밖에 없었다.

춥다. 배가 고프다. 해야 할 일이 있지만, 그 방법은 전혀 보이지도 않고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민을 하는 사이에 조금씩 눈이 감겨왔다. 졸려온다. 근데 평소와는 왠지 느

낌이 달랐다. 평안한 느낌이 아니다. 졸음이라는 갈증에 못 이겨 잠드는 느낌과

는 다른 무언가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 머릿속에서 위험하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

다. 하지만 점점 감기는 눈을 다시 뜨기엔 너무나 지쳐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무나 행복했던 그때가 그리워지기 시작했

다. 그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 오기 시작했다. 죄책감. 그것

은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고, 그러자 이제까지의 저항이 한 번

에 무너져 버렸다.

눈이 감기는 순간 마을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온 머릿속을 가득 채워간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하나씩 스쳐 지나간다. 피델, 크론, 제스터 아

저씨, 켈리아. 아는 얼굴들이 빠르게 나타나 웃어준 뒤 괴로움에 가득 차 사라진

다. 그러던 중에 한 실루엣이 보였다.

‘누구지?’

정신을 잃어 가는 건지 멍해져 가는 머리로 열심히 누군지 떠올려 보았다. 베

티도 아니고, 세이도 아니다. 미스트도, 실레트도, 피에츠도 아니다. 누굴까. 누굴

까. 누구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20년이 넘도록 함께한 가족과도 같은 마을 사

람인데 어째서 기억나지 않는 걸까. 모두에게… 미안하다.

그렇게 나는 죽어갔다.

2화 -새얀

내가 그 녀석을 주운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실수였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해진 어린 시절부터 나는 전쟁터에 서있었다.

“레이얀. 오늘 밤... 알지?”

“…네.”

나는 터무니없이 약했다. 그렇기에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했어야 했다.

설령 그것이 나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죽은 어미 곁에서 홀로 울고 있는 나를 거둔 이들을 결코 이야기 속에 등장하

는 정의로운 용사나 기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잔인하고 무자비했으며 또한 비열

했다. 강한 자에겐 한없이 약하며 약한 자에게는 잔혹할 정도로 강한 자들- 하지

만 그럼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나를 받아들인 것은

가엾게 여긴 동정심이 아닌 추잡하기 그지없는 욕망이란 이름 때문이었다. 꾹 깨

문 입술과 움켜쥔 두 손에서 피가 배어나올 때 까지 참고, 참고 또 참았다. 나는

약하고, 힘없는 어린아이에 불과 했으니까-

오갈 곳 없는 분노를 마음속에 억누르고, 거짓된 미소를 지어보이며 철저히 나

자신을 숨기고 연기를 시작했다. 마치 무대 위의 어릿광대가 된 양- 화려한 화장

과 가식된 미소 그리고 달콤한 언어들로 그들을 속였다. 내가 그 무대에서 내려

와 가면을 벗게 된 것은 탐욕스레 나의 몸을 훑던 그 눈을 파내고, 거칠게 나의

몸을 쓰다듬던 그 손을 잘라내고,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나를 가진 그 몸을 갈기

갈기 찢은 후였다.

그렇게 차디 찬 전쟁터에서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힘

이 생겼지만 나에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막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여행

자마냥 헤매는 내가 간신히 붙잡은 것은 전쟁터에 홀로 내팽개쳐지기 전 어미가

손에 쥐어준 ‘돈’이라는 이름의 구릿빛 차가운 금속 하나였다.

ㅡ.

이리저리 떠돌던 생활을 버리고 수도에 정착을 했다. 그리고 돈이 되는 일이라

면 뭐든지 했다. 단 ‘평범한 일반인’을 건드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지킨 최

소한의 마지노선이었다. 꼭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돈이 되는 일은 넘칠 만큼 있

었다. 몬스터들은 남녀노소와 신분 그리고 빈부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위협했고,

위협당하는 이들은 두려워하며 그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단을 찾았다. 그리고

나는 ‘돈 있는 자들’의 몸을 지키는 수단이 되었다. 푸른 예기를 머금은 화살이

많은 몬스터들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지만 화살을 메기는 나의 손은 멈추지 않

았다. 찬 바닥에 스러진 그 생명의 무게만큼이나 나의 주머니는 무거워져갔고,

내 텅 빈 마음 역시 조금이나마 채워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때 뿐 공허함이 엄

습할 때 마다 나는 다시 활과 화살을 챙겨들고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 나 자신을

맡겼다.

몸을 돌보지 않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생활을 반복

하길 몇 년- 나는 수도에서 꽤 알려진 용병이 되었다.

ㅡ.

그를 가장 처음 본 것은 어느 한 상단을 호위하던 중이었다. 수도로 통하는 문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도중 상인 하나가 사람을 데려왔다. 상인은 평소 상단의

후계자라는 이유로 거들먹거리는 꼴이 마음에 안 들던 터라 썩 좋아하지 않는

이였기에 상인이 데려온 그 역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흔들림 없이

곧고 맑은 눈으로 바라 볼 때면 더더욱 거슬렸다.

아주 오래전의 누.군.가.를 생각나게 해….

티 나지 않게 이를 악물며 오랜만에 느껴지는 감정의 파도에 눈을 감았다. 애

써 그를 외면하며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계약을 끝내고 도망치듯 상단을 떠났다.

그를 다시 본 곳은 평소 자주 다니던 여관이었다. 여관 주인의 매몰찬 말에도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는 곧은 눈은 바뀌지 않았다.

거슬려….

가슴 속에 작게 퍼지는 일렁임을 가라앉히려 입 안쪽 살을 지그시 물었다.

여관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나왔다. 등 뒤로 촤악- 하는 물이 쏟아지는 소

리가 들렸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그 초록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 마

음이 불쾌해졌다. 그 눈동자를 떨쳐버리 듯 수도 이곳저곳을 배회하듯 돌아다녔

다. 그런데 마치 따라다니기라도 하는 양 가는 곳마다 눈에 띄는 그 모습은 더욱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 거슬림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곳은 외곽에 위치한 수로였다. 한참이나 물을 마시는 모습을 뒤에서 노려보다 그

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몸에 힘이 다 빠진 듯 지친 모습으로 땅바닥에 털썩- 누웠다. 어쩐지 못

마땅한 마음에 쯧- 하고 작게 혀를 차곤 누운 그의 바로 옆으로 다가갔다.

왜… 이런 눈을 하고 있지? 줄곧 변하지 않던 눈이… 왜 이제야 그렇게 변하

는 거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초록빛 눈은 더 이상 마음을 거스르던 그 곧고 맑

은 눈이 아니었다. 늘 내가 거울을 통해 보던 공허하고 아득하기 짝이 없는 ‘이

곳’을 보고 있지 않는 눈이었다. 거칠게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힘없이 딸려오는

그의 몸 위로 지독히도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많은 사선 속에서 질리도록

느껴온 죽음의 향기였다. 한 번 더 작게 혀를 찬 나는 그를 대충 둘러매고 느긋

하지만 느리지 않는 걸음으로 치료사의 집으로 향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얀 자기 아냐?!”

화사하게 웃으며 나를 반기는 이는 치료사인 키르케로 막 수도에 정착할 무렵

알게 되어 인연을 이어온 이였다. 성격 자체는 좋지 않으나 솜씨가 쓸만하여 오

랫동안 알고 지내온 이이기도 했다.

“어디 다치기라고 한거야? 그런 것치곤 피 냄새가 안 나는 걸?”

수다스럽게 말을 붙여오는 키르케를 무시하며 침대에 그를 눕히고 키르케에게

눈짓했다.

나와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바라보며 연신 호들갑을 떠는 그녀에게 주의를 주

고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를 붉게 물들이던 노을은 어

느새 자취를 감추고 밤의 여신의 옷자락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단순 과로에 영양실조야-. 잘 먹고 푹 쉬며 나을걸?”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막 불을 붙이려는

찰나 누군가 담배를 가로채갔다.

“…돌려줘.”

“어허- 진료실에서는 금연이야♡.”

평소 키르케의 생활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가당찮은 말이었다. 키르케의 손에

들린 담배를 다시 뺏어 들었다.

“늘 진료실을 너구리굴로 만드는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난 괜찮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 뻔뻔함에 잠시 잊었던 이 여자의 성격이 다시 생각

났다. 이럴 땐 무시 하는 것이 상책.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담배 필터를 질근

질근 깨무는 것으로 그녀를 외면했다.

“곧 일어날 테니까 식사거리 가져올게. 아, 식비는 진료비랑 같이 청구할거야.”

빚지기 싫어하는 내 성격을 아는 그녀다운 선택이었다. 그녀가 나가자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제 막 성년이 된 듯 아직 소년

티를 다 벗지 못한 앳된 모습이 이제 18~19세 정도 되어 보였다. 더러운 옷을

입고 먼지투성이였지만 잘 정돈된 머릿결이나 부드러워 보이는 하얀 피부를 보

니 꽤나 사랑받고 자라온 도련님인 듯 했다.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이 가출이라도 한 건가….

미동없이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자 옆에서 음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무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는 거 아냐? 사람한테 관심 없는 자기가 이렇게

지극정성이라니… 혹시…?”

“닥쳐.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네 입에 박아주지.”

싸늘하게 말하며 허리춤에 달린 단검의 손잡이를 잡자 그녀는 쳇- 하는 소리

와 함께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

놓고 당당하게 담배를 꺼내들어 입에 물었다.

“주웠다고 했지? 오늘 비오던가?”

다소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유리창을 사이

에 두고 환한 빛을 뿌리는 달과 반짝이는 별이 보였다.

“매일 이상한 실험만 해대더니 드디어 미친 건가.”

“어머, 숙녀한테 실례야! 그나저나 ‘저건’ 어디서 주운거야?”

환자 앞이라는 자각은 있는지 나와 마찬가지로 불을 붙이지 않고 필터만 가볍

게 잘근거리는 그녀를 보다 품에서 성냥을 꺼내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수로.”

“물 가까이에서 주웠다는 소리네? 후훗-.”

어쩐지 기분이 나빠지는 묘한 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

런 나의 낌새를 눈치 챈 건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키르케는 방을 나가버렸

다.

“예로부터 물이 있는 곳에서 사람을 줍는 건 인생 망하는 지름길이라 하더라-.

자기도 조심해♡.”

묘하게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알 수 없는 말에 키르케가 나간 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안 드는 여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을 포기하고 다른

치료사를 찾기엔 키르케의 실력이 너무 아까웠다. 어째서 이런 곳에서 치료사 일

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실력은 좋았다.

“으음….”

한참 방문을 노려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

자 맑은 녹색의 눈과 마주쳤다.

“…천사님?”

미쳤군.

나는 그의 상태를 한마디로 정의했다. 그는 대답 없는 내 모습에 벌떡 일어나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막 손을 떨쳐내려는 찰나 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여긴 천국인가요? 마을 사람들 모두 이곳에 있나요? 아아- 천국의 향기는 좋

네요. 꼭 맛있는 음식 냄새같…”

꼬르륵-

자신의 배에서 들리는 성대한 소리에 그는 말을 멈췄다. 생각보다 악력이 좋은

손을 다소 거칠게 떨쳐내고서는 쟁반에 놓인 음식을 가리켰다.

“정말 신기하네요! 천국에서도 배가 고프군요!”

“멍청한 소리 그만하고 먹기나 해.”

새하얀 김과 함께 맛있는 냄새가 피어오르는 음식들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

던 그는 쟁반 위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마치 ‘먹어.’ 라는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

지와 같은 눈이랄까…?

“먹어도 되요?”

“…난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그를 다시 관찰하기 시작했다. 배

가 많이 고팠는지 꽤나 허겁지겁 먹지만 딱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예의를 지키

는 모습이 역시 식사 예절에 관해서는 배운 듯 싶었다. 쟁반 위의 접시가 거의

비워져갈 무렵 짐 속에 입은 적 없는 반바지와 셔츠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다 먹었으면 가서 씻도록.”

“천국에서도 씻어야 하나요?! 아! 혹시 지상에서의 때를 씻어야 한다는 건가

요? 그런 거군요! 알겠어요. 금방 씻고 나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천사

님!”

밥을 먹고 힘을 찾았는지 나는 듯한 걸음걸이로 내가 가리킨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며 대하기 힘든 상대라는 생각에 아파오는 골치를 지그시

눌렀다. 일단 저 착각에서 깨어나게 설명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

지 귀찮다는 생각에 키르케를 찾았다.

- 잠시 나갔다 올게. 오래 걸릴 테니까 기다리진 마♡

타이밍 한 번 끝내주는 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괜히 주워왔나 라는 후회감이 갑자기 밀려오는 듯 했

다. 침대에 앉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찰나 그가 욕실에서 나왔다.

“욕실도 인간세상과 똑같네요!”

반짝거리는 눈이 더없이 거슬려 어서 저걸 치워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

해졌다.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을 하고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를 바라

보는 그의 눈길에서 왠지 ‘천사님도 담배를 피는군요!’라는 말이 들려오는 듯 했

다.

“다 씻었으면 나가.”

“네? 천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난 천사도 아니고, 여긴 천국도 아니다.”

“에이~ 천사님 맞으시면서… 천사님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전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일이라는 것

을 처음 알게 되었다. 복잡해지려는 머리를 애써 정리하며 답답함을 뱉어내듯 담

배연기를 그의 얼굴 위로 뿜었다.

“여기는 수도 세이탄티아. 네가 생각하는 천국이 아니야. 그리고 난 천사가 아

니라 용병이다. 어쩌다가 널 주운 것뿐이지. 정신 차렸으면 이제 돌아가도록 해.”

꽤나 혼란스러운 듯 떨리는 눈동자가 진실을 찾듯 내 얼굴 위를 헤맸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라는 마음에 담배를 한 개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나

의 얼굴에서 거짓을 찾지 못한 것인지 그는 되물어 왔다.

“정말…인가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쉰 그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렇군. 고마워. 빚을 졌네.”

그의 눈은 어느새 처음 봤던 그 곧음이 다시금 되살아나 있었다. 뭔가 찝찝하

면서도 한편에서 느껴지는 안도감에 불쾌감을 느낀 나는 고개를 흔들고는 나가

라는 듯이 손짓했다. 하지만 그는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지 연신 머뭇거리고 있

을 뿐이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내 말에 결심이라도 한 듯 몇 번 목을 가다듬은 그는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신세 진 김에 한번만 더 부탁할게!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이 없을까?!”

“집으로 돌아가. 너 같은 애송이가 뛰어들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야.”

세 번째 담배를 꺼내 입으로 가져가던 손이 멈췄다. 그의 표정을 본 탓이었다.

일순 쓸쓸해진 그의 얼굴은 무엇인가를 잃어본 자만이 가지는 고독함과 공허함

이 깃들어 있었다.

“내겐 돌아갈 곳이 없어.”

머뭇거리면서도 침착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를 바라보다 다시 품속

에서 담배를 꺼내려 뒤적거리다 담배가 다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품에서 손을 빼어 자연스럽게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그의 목

을 향해 휘둘렀다.

카앙-

쇠와 쇠가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내가 내뻗은 단검이 튕겨져 나왔다.

“반사 신경은 괜찮군. 몬스터를 잡아본 경험도 있겠다. 괜찮겠군.”

연신 얼굴에 물음표를 그리며 검을 꺼낸 어정쩡한 자세로 있던 그는 나의 말

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용병이 되라. 제 몫을 할 때까지 후견인이 되어주지.”

잠시 이해가 안 갔던지 잠시 멈칫 했던 그의 표정이 일순 밝아졌다. 처음 정신

을 차렸을 때처럼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연신 고맙다 인사하는 그의 손을 억지

로 떼어 냈다.

“공짜는 아냐.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받아낼테니까.”

차갑게 이야기 하는데도 연신 싱글벙글 웃는 그의 모습에 왠지 한 편으로 잘

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내뱉은 말이었다.

“난 카일레이드. 카일이라고 불러줘. 나이는 21살이야.”

의외의 연속이랄까.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나와 동갑

이었고, 가출한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풍파를 헤치며 걸어온 이

였다. 아직 철이 덜 든 것 같다거나 세상 물정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은 내생

각과 그다지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았지만….

“레이얀. 너와 같은 21살이고, 용병이다.”

“잘 부탁해. 얀.”

너도 그 애칭이냐.

작게 미간을 찌푸리다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내 인생 최대의 오점이자 평생 내 발목을 옭아맨 족쇄는 이렇게 무심코 주운

사람 하나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만약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다시 그를 줍

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를 줍는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실수였지만 또한 최대의

도박이기도 했다.

나는 지는 도박 따윈 하지 않는다. 내가 승부를 걸 때는 늘 어떤 형식으로든

내게 이익이 돌아올 때뿐이었다.

“아아, 잘 따라오도록.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정말 버리고 갈거다.”

그때 내 표정이 어땠더라… 아마… 웃고 있지 않았을까?

곤냥이

미첼라이아의 용병들, 약칭 미첼은 원래 자캐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마련해둔

세계관이었습니다. 대강의 스토리와 세계관 뿐이었던 이야기가 이렇게 새얀과

의 릴레이로 재탄생되다니.. 꽤나 느낌이 새롭습니다. 처음부분인데, 카일 녀석

이 너무 암울해져서 살짝 걱정이네요. 원래 저런 아이가 아닌데 말입니다. 뭐...

새얀이 열심히 바보이미지를 함께 밀어주어 무거운 모습은 많이 줄었지만요.

앞으로 이 둘이 엮어나갈 이야기... 정말 궁금하네요. 제가 작가지만요. 네.

새얀

안녕하세요.

이런식으로 다른 이에게 글을 보이는건 처음이라 참 두근두근 떨리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네요. 사실 처음 이 소설을 만든 것은 곤냥이였습니다.

카페 커뮤니티의 세계관에서 쓴것인데, 이글의 주인공중 하나인 카일은 곤

냥이의 자캐랍니다. 저는 그저 아, 이녀석과 정 반대 성격의 주인공이 카

일과 투닥투닥하는 걸 쓰면 재밌겠다는 생각에 곤냥이에게 부탁(을 가장한 무언가)을 해서 결국 이렇

게 사고를 쳐버렸지요. 무작정 밀고나가기만 한 제 땡깡(?)을 받아주며 글을 쓸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준 곤냥이에게 무척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끈기 없는 제 성격에 이렇게 긴 글을 쓸 수 있으리

라 생각 못했거든요. 잡설이 많이 길어졌습니다만은 결론은 릴레이 글인지라 이런식으로 많이 얼굴

을 내비칠것 같다는 것입니다. 미숙한 글이나마 부디 끝까지 같이 달려주시기를...

홍련화

곤냥이 새얀과 함께 미첼라이아의 용병들 소설 표지로 참여하게 됬습니다.

비록 표지 밖에 안그렸지만 소설 재미있게 읽어주시길 바라요.

WANTED

▷ Textoon과 함께 할 가족을 찾습니다

시급도 일당도 봉급도 월급도 못주지만, 무엇보다도 확실한 재미와 놀 거리,

같이 놀 사람, 보다 거창하게 놀 수 있는 기회, 흔히 접하기 힘든 독특한 사람과

의 만남, 뭘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자유, 그러면서도 우리는 동료라는

소속의식 등등을 제공합니다.

연령, 학력, 거주지, 스타일, 취향, 창작 장르 등등 일절 제한 없습니다. 가능하

면 친구들도 끌고 들어와 함께하면 좋습니다. 뭐든 하고 싶은 분, 뭐든 하는 걸

구경하고 싶으신 분들 모두 환영합니다.

▷ 연락처

Textoon 제작처 종합창작 커뮤니티 『 몽니 』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http://cafe.naver.com/tex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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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E X T

O

O

N

Text-감상-

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을 좋아하는 편이다. 일상도 극적인 장면도 아주 담

담한 얼굴로 묘사해나가는 그 초연함이 좋고, 절정에 올랐을 때 숨막히도록 빨아

들이는 문장들의 흡인력이 아주 매력적이다. 그래서 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좋아한다. 낮잠을 자면서 거리를 굴러다니는 봄날의 곰('상실의 시대' 中)처

럼…….

1. 밤은, 언제 어디서나 우릴 보고 있다.

이 책은 그런 편안하지만 날카로운 책들과는 다르게 조금은 실험적인 책이다.

우선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시점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

따르고 있으나 첫 페이지를 펴자마자 독자는 이상함, 혹은 신기함을 느낀다. 전

지적 작가 시점, 즉 신이 관찰자인 문체의 한 전제는 '자아'가 없다는 점이다. 즉,

상황을 멀리서 들여다보면서 어디까지나 정황과 심리묘사에만 문장을 할애해야

하는데, 여기엔 화자에 '자아'가 존재한다. 그러면 3인칭 관찰자 시점이 아니냐,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지만 인물들의 심리까지 읽어버리는 문장들로 보아 그렇

게 간단히 구분지을 일이 아닌 모양이다. 물론 곳곳에 심리 묘사를 배제하려 한

작가의 흔적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완전히 빼지는 않은 것은 어떠한 효과를 노리

고 이 두 시점 사이를 왕복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두 번째는, 이 책에는 뚜렷한 주인공이랄 만한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굳이 말

하자면 마리가 주인공이겠지만, 이전 작품들이 대부분 강한 자아와 그 주체가 사

건에 대해 품은 감상들이 작품의 주였음('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 '렉싱턴

의 유령' 등)을 감안한다면 하루키 독자로써는 이 책의 기법은 상당히 신선한 시

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다른 효과를 불러일으키는데, 인물들과 사건의

관계가 여러 인물상의 공감대를 제시하시에는 아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

다는 점이다. 이런 기법과 연관지어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소재의 상징과 연관

이다. 얼핏 전혀 상관이 없는 소재들(우유나 연필 같은)이 인물 사이를 이어 아

주 자연스럽게 장면을 전환하고 있다.

이런 시점 처리와 기법.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시점의 자아는 독자로 하여금 글에 강력한 흡인력을 느끼게 한다. 조금은 사물들

을 빠르게 지나치면서도 인물들의 과거의 상처와 거기에 대한 태도, 그리고 타인

에 대한 마음을 전달하는 이 시점의 '자아'. 설명되지 않지만 우리를 늘 관찰하고

있는 이 '나(우리)'는, 어찌 보면 밤 그 자체일는지도 모른다. 도시를 바라보고 거

기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직접적으로 묻어나지는 않지만 그 서술을 통해 막연

한, 혹은 아련한 감상을 품는 나(우리). 생명을 가진 밤은 언제 어디서나 우릴 들

여다보고 있고, 그리고 독자는 그 밤을 통해 얼핏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인물

들의 공통점을 찾아내게 된다.

2. 시스템과 그 폭력.

이 작품은 하룻밤 사이에 한 거리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려내고 있다. '전철 막

차가 떠나고, 첫 전차가 올 때까지 좀 딴 세상이 돼버리는'(p. 81, 카오루) 이 거

리에서 마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도 자신의 이

야기를 풀어놓는다. 밴드를 하는 다카하시부터 러브 호텔 지배인인 카오루까지,

굉장히 다양한 폭의 사람들이 자신의 주관과 과거를 마리에게 털어놓는다. 어쩌

면 이런 상호 관계는 어색해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밤의 거리라는, 공간적 특

수성 때문인지, 읽는 내내 나는 인물 사이에 어떤 유대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

다. 예쁜 언니에게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는 마리, 트롬본을 부는 법대생 다카하

시, 러브 호텔 지배인 카오루와 폭행을 당한 중국인 소녀, 어떤 조직으로부터 쫓

기고 있는 고오로기, 권태에 빠진 샐러리맨 시라가와….

그러나 이 사람들 사이에는 그런 공간적 유대감 외에도 하나 더 공통점이 있

다. 바로 시스템에 의해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마리가 동경한 에리

의 경우, 대중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법을 배움으로 인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잊어버리게 된다. 예쁜 외모 때문에 잡지 일을 하고 모델 일을 하며 자신을 가꾸

는 데에 한층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그녀는 오히려 역으로 마리를 부러워

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의 삶 중에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 없었음을 깨달았

기 때문일까. 에리의 깊은 수면은 그런 이해받지 못하는 자신의 표현이기도 하

며, 동시에 씁쓸한 미봉의 도피행위이기도 하다. 마리는 역으로 항상 언니와 비

교당해 온 자신에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대중과

시스템의 성격상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마리에게 다카하

시 또한 시스템의 악의를 털어놓는다. 아버지가 교도소에 다녀오고, 새 엄마와

결혼하고. 또, 재판을 찾아다니면서 만난 사형수들이 실은 별로 일상과 벗어나

있지 않음을 알게 되면서, 그는 사형수에게 연민을 품게됨과 동시에 재판이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해 강한 회의를 품게 된다. 이 시스템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탐구하기 위해 그는 그가 좋아하는 음악마저 버리고 법률가가 되겠다고 마

리에게 이야기한다. 고오로기 또한 자세히 이야기해주지는 않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일본 천지를 도망다니고 있다. 고오로기라는 것 또한 본명이 아니고 러브호

텔 직원이라는 위치도 거기에 관련되어 있다. 자신이 다니던 직장도, 가족도, 이

름도 버리고 오직 살기 위해 도망다녀야 하는 몸. 어떤 종류가 되었든 여기에 시

스템이 개입했음은 확실하다. 시라가와 역시, 사회 체계에 의한 피해를 보고 있

다. 맞벌이 부부라 사랑하는(혹은 사랑했던) 아내와 얼굴조차 보기 힘든 생활. 도

대체 회사일과 자신의 일상은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시스템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의 표정은 이미 권태과 슬픔에 가득 차 있다.

이렇듯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은 시스템과 관련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의 이름은

사회이기도 하고, 법률재판이기도 하며, 어떤 조직이기도 하고, 좀 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무엇'과의 관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인간의 사회성과 현대 산업의 발전.

이 둘이 맞물려 새롭고 또 커다란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을 멀리서 내려다보는 밤은, 그래도 '도망칠 수 없다'고 현실을 차갑게 전한다.

그래, 도망칠 수 없다. '은색 휴대폰'이 말한 것처럼 어디로 도망친다 한들 세상

은 끝까지 쫓아가서 당신을 찾아내고 말 것이다.

3. 그리고, 밤은 머지 않아 아침이 되고

그런 시스템의 폐해 속에서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믿어야 하며 어떻

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마리가, 이런 시스템과 닮아 있는 밤의 거리에서 찾아다

니고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 자신을

괴롭히는 시스템의 상징이자, 한때 사랑했던 언니로부터 도망치듯 빠져나와 거리

로 나온 그녀는,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라 가만히 패밀리 레스토랑에 앉아서 책

을 읽는다. 이에 반해 다카하시가 시스템에 대응하는 태도는 조금 다르다. 자신

이 본 부조리를 알기 위해 음악을 버린다고 했던 다카하시는 마지막 공연을 위

해 이 거리에 남았다.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시스템과 싸워나가겠다는 태

도다. 은색 휴대폰을 주운 그가 '도망칠 수 없다'는 말을 나지막히 반복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는 도망치지 않는다. 도망칠 수 없음을 알기에. 고오로기 또

한 마찬가지다. 그녀의 등에 남은 상처, 현재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목숨을 끊어

도 이상하지 않은, 어찌 보면 비참하기까지 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그녀는 도망

치지 않는다.

"중요한 기억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기억도, 전혀 쓸모 없는 기억도, 구별할 수도 차

별할 수도 없는 그저 연료

일 뿐이지. 만약 그런 연료가 내게 없었다면, 그래서 기억의 서랍 같은 것이 내 안에

없었다면, 나는 아마 아득한

옛날에 뚝 하고 두 동강이 나 버렸을 거야. 어딘가 낯선 곳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길바닥에 쓰러져 개죽음을

면치 못했겠지. 중요한 것이든 아무 쓸모 없는 것이든 여러 가지 기억을 때에 따라, 꺼

내 쓸 수 있으니까, 이런

악몽 같은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야 더 이상은 안 돼, 더

이상은 못 해, 하고 생각하

다가도, 어떻게든 그 난관을 넘어설 수 있는 거지." (고오로기, p. 235~236)

그녀는 마리에게 이런 시스템에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 것인지 일러준다. 기억

을 연료로 삼아라. 자신과 언니에 대한 일을 떠올려라. 그 말을 들은 마리는 편

안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잠을 잔다. 이는 방황의 끝을 알리는 신호이다. 그녀

는 더 이상 밤의 거리에서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아마, 이 편안한 수

면 너머에서 그녀는 언니의 얼굴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그녀는 다시 다카하시와 만난다. 다카하시에게 언니에 대

한 따스한 기억을 풀어놓는 그녀의 눈에는 이미 망설임은 없다. 다카하시 또한,

그녀에게 다음에 또 만날 것을 묻는다. 아직은 어제와 내일의 중심에 선 그는 자

신이 하고 싶은 일을 알고 있다. 그녀가 반 년 동안 유학을 떠난다는 것을 듣고

도 다카하시는 기다리겠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 폭력에 젖은 거리에서, 아스라

히 동이 터오는 전철역 앞에서, 그럼에도 작가는 사랑을 긍정한 것이다.

집에 돌아간 마리는 에리의 방으로 간다. 에리가 잠든 채 일어나지 않는 침대

로 파고들어 잠드는 그녀의 행위는, 그리움을 표현하려는 행위라기보다 모든 것

을 극복했음을 드러낸다. 밤의 배회도, 언니와의 관계도, 자신의 콤플렉스도. 아

마 여전히 난관은 남겠지만 그녀는 고오로기 말대로 '어떻게든 해 나갈 것이다',

적어도 그런 자신을 얻었기 때문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침대로 파고든다.

그 위에선 사라져가는 밤만이 그 정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다음 어둠이 오기 전

까지, 아직 시간은 있는(p. 279)' 시점에, 시점은 사라지기 전 에리의 모습을 이

야기한다. 에리의 입술이 아주 살짝 움직인다. 이는 에리가 긴 동면을 끝내고 일

어나려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제 그녀도 시스템의 악의를 극복하기 위해 움직

일 것이라는, 그러한 작은 태동. 시점은 계속 그 부풀어오르는 암시를 주의깊게

지켜보기로 한다. 구원은 있다. 어둠이 지나고 아침이 오는 한. 그것이 이 작품의

제목이 'AFTER DARK'인 이유다.

간만에 굉장히 흡입력 있는 책을 읽은 것 같다. 얼마 전 기사에 무라카미 하루

키가 또 신작을 냈다고 들었는데 한국에는 언제 들어올지 상당히 기대된다. 하루

키의 책엔 언제나, 쉽지만 가볍지는 않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전작에 담긴 희

망은 조금 작위적이거나, 일차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구원의 메시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 같아서 요즘 경향은 굉장히 마음에 든다.

트리키

우울한 밤에는 생각나는 책입니다. 세상 어딘가에는 희망이 반짝이고

있다나요.

T E X T

O

O

N Toon

"곤냥이"이번에 일러스트를 낼까말까 하다가 갑작스레 '이번에 내겠어!'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그려서 채색했습니다.

처음으로 타블렛을 써서 채색했는데-.. 꽤 느낌이 좋더군요. 호오.

처음엔 아무 주제가 없었는데, 칠하고 나서 보니 마비노기라는 게임의 제 캐릭터와

남편 캐릭터의 머리색, 눈색과 같게 칠했더군요.

미묘하게 끌린 이유가 있었어요.

"제닉"

Bouguet

condolence

"청랑"

"홍련화" 예전부터 몽니에 가입해있었는데 구경만하다가

웹진 1호 보고 2호에는 꼭 참여하고 싶어서 이렇게 참여를 하게됬는데

많이 부족한 그림이지만 많은분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좋았습니다.

The End.

And...

Need Something More?

Then, See You Nex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