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0212705.pdf

93
산상설교에 나타난 주기도문의 석의적 고찰을 통한 교역적 적용 장로회 신학대학 교역대학원 신약신학 전공

description

Thesis(Korean Theological)

Transcript of T0212705.pdf

Page 1: T0212705.pdf

산상설교에 나타난 주기도문의

석의적 고찰을 통한 교역적 적용

장로회 신학대학 교역대학원

신약신학 전공

김 영 생

Page 2: T0212705.pdf

산상설교에 나타난 주기도문의

석의적 고찰을 통한 교역적 적용

지도 소 기 천 교수

이 논문을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2002년 1월 일

장로회 신학대학 교역대학원

신약신학 전공

김 영 생

Page 3: T0212705.pdf

김영생의 석사학위 (T h . M .) 논문을 인준함

주심: 소기천 교수 인

부심: 김지철 교수 인

부심: 장흥길 교수 인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역대학원

2002년 1월 월

Page 4: T0212705.pdf

목 차

I. 서론 1

A . 연구의 목적 1

B. 연구의 절차 2

II. 주기도문의 본문 문제 4

A . 두 개의 본문 문제 4

1. 누가복음에 나타난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9

2. 마태복음에 나타난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10

B. 주기도문의 신학적 의의 12

1. 누가의 신학적 의의 12

2. 마태의 신학적 의의 16

C. 산상설교 속의 주기도문 18

III. 주기도문의 석의적 고찰 22

A . 부름 22

1. 하늘에 계신 22

2. 우리 아버지 24

B. 하나님에 관한 청원 27

1. 청원 1 27

a. (당신의) 이름 27

b .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31

2. 청원 2 33

3. 청원 3 38

a. 뜻 39

b .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40

c. 이루어지이다 42

C. 우리를 위한 청원 44

1. 청원 1 45

a. 오늘 45

Page 5: T0212705.pdf

b . 일용할 46

c. 양식 50

2. 청원 2 51

3. 청원 3 57

a. 시험 59

b . 우리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62

c. 악으로부터 구원하옵소서 62

D. 송영 65

IV . 주기도문의 신학적 특징 69

V. 주기도문의 교역적 적용 72

A . 산성교회 성도들의 기도생활 72

1. 산성교회 약사 72

2. 산성교회 성도들의 기도생활 73

B. 주기도문에서 발견한 가르침의 적용 74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75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75

3.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소서 76

4. 뜻이 이루어지이다 77

5.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78

6.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79

7.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79

8. 나라와 권세와 영광 80

V. 결론 82

참고문헌 85

Page 6: T0212705.pdf

I . 서 론

A . 연 구의 목 적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문(마 6:9- 13, 눅 11:2- 4)은 마태복음의 산상보

훈에서 뿐만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 중 가장 핵심 부분에 위치해 있다. 즉

주기도문은 전 복음의 요약인 동시에 예수의 선포의 총수이다.1) 이 주기

도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나라 복음과 그가 의도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가장 잘 압축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신약 신학과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며,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정형을 제시하기도 한다.2) 따라서

이 주기도문을 정확하고 깊이 이해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수

적으로 요청되는 바이며, 우리가 날마다 이 기도를 드리며, 이 기도의 정

신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사는 것을 의미한

다.

주기도문은 복음서에서 마태복음(마 6:9- 13)과 누가복음(눅 11:2- 4)

의 두 가지 형태로 전해져 내려온다. 이 두 주기도문은 같은 의미의 내용

을 가지고 있지만 문맥이나 길이, 어휘에 있어서 이들은 각기 다른 점을

가진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마태의 주기도문과 누가의 주기도문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먼저인 것인가를 밝혀 내려는 시도를 하였다. 결과 마태 우

선설과 누가 우선설, 그리고 두 본문 반복설 등의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러한 연구는 요아킴 예레미아스(J . Jeremias)에 의해 어느 정도

1) 성종현, 주기도문과 예수의 용서 메시지 , 『신학사상』제 52집 (1986 봄

호): 140쪽.2)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2000), 6쪽.

- 1 -

Page 7: T0212705.pdf

정착되어가고 있다. 예레미아스의 견해에 따르면, 길이에 있어서는 누가의

주기도문이, 어법에 있어서는 마태의 주기도문이 더 오래된 형태에 가깝다

는 것이다.3)

그러나 마태의 것과 누가의 것 중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더 먼저 기록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이 중요하지 않다. 이는 그 속에서

주기도문의 의미나 특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태와 누가의

주기도문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문맥 속에서 각기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

의 상황에 알맞은 형태로 수용을 했다는 것이 각 공동체에서 그들이 소유

한 주기도문의 의의와 뜻을 파악하는 데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주기도문의 선후의 문제는 다른 논문을 참조하고, 본

논문에서는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 나타난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본문의

석의적 고찰을 통한 주기도문의 현대적 해석을 이룸으로, 우리 성도들의

기도생활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나온 주기도문도 병행

하여 살펴봄으로 주기도문의 폭 넓은 이해를 돕고자 한다.

B . 연구 의 절차

주기도문은 매우 평이하면서도 더 새로운 이해를 항상 촉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주기도문 안에 담겨져 있는 심오하고 무한한 의미

를 완전히 알아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필자는 먼저 제 1부에서는 이 논문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본 연구 논문의 동기와 연구 목적을 간단히 정리하고,

아울러 연구의 절차를 제시하고자 한다.

3) J . Jer em ias , T he P ray ers of J es us (Philadelphia : F ort r es s Press , 1978), p .

93.

- 2 -

Page 8: T0212705.pdf

제 2부에서는 문학적 맥락에서 주기도문의 두 본문(마태복음 6장

9- 13절; 누가복음 11장 2- 4절)의 문제를 검토함으로써, 각 주기도문이 생

성하게 된 그 배경에 대해 살펴볼 뿐 아니라, 각각의 신학적 의의를 살펴

볼 것이다. 이어서 산상설교 속의 주기도문의 위치에 대해 밝혀 봄으로,

주기도문을 담고 있는 문맥을 통해, 주기도문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다른

기본적인 이해의 토대를 만들어 줄 것이다.

제 3부에서는 마태의 산상설교에 나타난 주기도문의 번역상의 문

제와 본문의 면밀한 구조 분석 및 석의적 고찰을 통해, 주기도문의 본래적

의 의미 접근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제 4부에서는 주기도문의 신학적 특징을 살펴보면서 실제적인 기

도생활에 어떤 도움을 주는 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제 5부에서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주기도문의 교역적 적용을

이루고자 필자가 시무하고 있는 산성교회 성도들의 기도생활을 먼저 살

펴본 뒤, 주기도문에서 발견한 가르침의 적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 3 -

Page 9: T0212705.pdf

II . 주기도문의 본문 문제

A . 두 개 의 본 문 문 제

복음서에는 주기도문이 마태복음(6:9- 13)과 누가복음(11:2- 4) 두 곳

에 실려있는데, 그 내용과 길이가 약간씩 다르게 기록되어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두 기도문 양식의 구조와 내용을 매우 유사하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4 ) 마태의 주기도문 안에는 더 짧은 누가의 본문이 완전히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와 누가의 주기도문 본문을 자세히

비교할 때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그 외형적인 차이점을 살펴보면, 마태의 주기도문은 누가의 주기도

문보다 길다. 마태의 본문은 57개의 단어, 6개의 기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비해, 누가의 것은 37개의 단어와 5개의 기원으로 구성되어 있다.5)

* 마태의 주기 도문 (마 6 :9 - 13 )

I. 부름 Pavt er hJmw'n oJ ej n t oi ' " ouj r anoi '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4) 성종현, 주기도문과 예수의 용서 메시지, 143쪽.5 ) 최갑종, 『1세기 문맥에서 본 주기도문 연구 : 기원, 본문, 그리고 해석』

(서울: 성광문화사, 1985), 19- 21쪽.

- 4 -

Page 10: T0212705.pdf

II. 하나님에 관한 청원

1. 청원1 aJgi asqhvt w t o ; o [nomav sou,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

2. 청원2 ej l qevt w hJ bas i l e i va sou,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

3. 청원3 genhqhvt w t o ; qevl hmav sou, wJ " ej n ouj r a

ej pi ; t h ' " gh ' ".

하늘에서처럼 땅 위에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III. 우리를 위한 청원

1. 청원1 To;n a [r t on hJmw'n t o ;n ej pi ouvs i on d

shvmer on :

우리의 하루치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고

2. 청원2 ka i ; a [ fe " hJmi 'n t a ; oj fe i l hvmat a hJmw'n,

hJmei ' " aj f men t oi ' " oj fe i l evt a i " hJmw'n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한 것처럼, 우리

의 빚을 용서하소서.

3. 청원3 ka i ; mh ; e i j senevgkh/ " hJma ' " e i j " pe i r as

r Ju ' sa i hJma ' " aj po ; t ou ' ponhr ou ' .

우리를 시험에 데려가지 마시고, 오히려 악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소서.

- 5 -

Page 11: T0212705.pdf

* 누가의 주 기도문 (눅 1 1 :2 - 4 )

I. 부름 Pavt er ,

아버지여.

II. 하나님에 관한 청원

1. 청원1 aJgi asqhvt w t o ; o [nomav sou :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

2. 청원2 ej l qevt w hJ bas i l e i va sou :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

III. 우리를 위한 청원

1. 청원1 t o ;n a [r t on hJmw'n t o ;n ej pi ouvs i on di

t o ; kaq ! hJmevr an :

우리의 일용할 빵을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고

2. 청원2 ka i ; a [ fe " hJmi 'n t a ; " aJmar t i va " hJmw'n,

auj t oi aj f i v men pant i ; oj fe i vl ont i hJmi 'n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빚도 사하여 주소서.

3. 청원3 ka i ; mh ; e i j senevgkh/ " hJma ' " e i j " pe i r asmovn

우리를 시험에 데려가지 마옵소서.

- 6 -

Page 12: T0212705.pdf

주기도문에 대한 본문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각각 다르게 나타

나 있다. 각각의 서로 상이한 다른 본문의 기원은 어디인가? 역사적 예수

로부터 전승된 것이라면 각각의 상이한 본문은 어떤 이유에서 덧붙여진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것이 원래의 예수의 가르침에 가장 밀접한

것인가? 아니면 예수는 처음부터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마태의 주기도

문과 누가의 주기도문을 각각 따로 주었는가? 아니면 두 가지 본문의 기

초가 되는 익명의 다른 주기도문을 주었는가? 이러한 문제는 신약신학의

어려움 중의 하나인 공관복음서 문제와 연관되어 난제가 되고 있다. 주기

도문의 본문 문제는 크게 누가의 짧은 본문이 그 본래의 주기도문인가?

아니면 마태의 본문이 원래 주기도문인가? 하는 문제이다.6 )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은 영광송 없는 본문이 영광송 있는 본문

보다 원래 본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믿고 있으며, 그래서 영광송 없는 마태

의 본문이 원래 본문으로, 그리고 영광송은 뒤에 첨가된 것으로 보고 있

다.7)

그러나 내적인 평가기준에 따라 두 본문을 비교해 볼 때, 영광송이

없는 본문이 주기도문의 원래 형식이라면 이는 누가의 주기도문 양식과

일치하며, 영광송을 갖고 있는 마태의 본문은 예배의식8)에 잘 사용될 수

있는 의식적인 주기도문 본문으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다.9) 따라서 마태가

6) 최갑종, 『1세기 문맥에서 본 주기도문 연구』, 26- 45쪽.7 ) 위의 책, 186쪽.8 ) 누가의 기도문은 다섯 개의 청원으로 되어있고, 이것들은 두 개의 당신 청

원과 세 개의 우리 청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마태복음의 주기도문

구조는 여섯 개의 청원 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여섯 개의 청원은 세 개의

당신 청원들과 또 세 개의 우리 청원들로 짝을 이루어 구성되어 있다. 이

것은 세 개의 우리 청원과 짝을 맞추어 예배의식 속에서 적절하고도 풍부

한 형식을 갖춘 것이라고 보여진다.9 ) E . Lohm ey er , Our F ather (N ew York : H arper & Row Publisher , 1965),

230- 232 쪽.

- 7 -

Page 13: T0212705.pdf

덧붙인 것인가? 아니면 누가가 생략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우리는 전자

를 따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누가의 원래 본문에 아마도 예

배의식이 교회에 정형화되면서 마태가 확대 삽입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

기 때문이다.

누가와 마태의 기도문을 비교해서 나타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첫째, 마태의 주기도문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부름에 있어, 장중한

유대식적 문구인 hJmw'n oJ ej n t oi ' " ouj r anoi ' " (하늘에 계신 우

첨가된 반면, 누가의 주기도문에는, 예수가 하나님을 부를 때 자주 사용하

시던 간단한 호칭 아버지여 라고만 되어 있다.

둘째, 마태의 genhqhvt w t o ; qevl hmav sou, wJ " ej n ouj r a

ej pi ; t h ' " gh '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부분이 누가의 주기도문에서는 완전히 빠져있다.

셋째, 역시 마태의 aj l l a ; r Ju ' sa i hJma ' " aj po ; t ou ' po

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부분이 누가에서는 빠져있다.

누가의 기도문과는 달리 마태가 이러한 첨가를 계속하고 있는 이

유는 원래의 주기도문이 갖고 있는 중심 뜻을 보다 더 분명히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유대문화권의 제자들에게 주님가 직

접 준, 이 원래의 기도문은 복음이 타문화권으로 확장되면서 복음의 확장

이라는 선교적인 목적, 곧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 백성의 정

체성을 보다 더 확고하게 표방하기 위한 선교적 열의와 예수 공동체의 소

망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보다 더 분명하게 가르치기 위한 교육적 목적

을 위해 이러한 첨가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 8 -

Page 14: T0212705.pdf

1 . 누가복음에 나타난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누가복음 11장 2- 4절의 주기도문 본문에 앞서는 1절은 이렇게 되

어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

르쳐주옵소서.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에 응해 예수가 기도를 가르친 것으로 되어있다. 즉 누가의 경우에는

세례 요한 그룹이 자기들끼리만 통용되고 있던 기도문을 갖고 있었던 것

처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기도를 가져야 한다는 분위기가

상정되어 있다.10) 누가는 독자적인 기도문에 대한 요구 때문에 주기도문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제시하면서, 바로 그 주기도문을 끈질긴 기도의 필요

성을 강조하고 있는 그 다음 문맥 곧 11장 5- 13절과 밀접히 관련시키고

있다.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다른 공동체들과 구별짓는 뚜렷한 기준으로

독자적인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11) 요한이 가르친 기도가 요한의 신학

을 담아서 요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잘 나타냈듯이, 예수 운동도 예수의 신

학과 예수의 이상과 예수의 소망 등을 잘 담아 표현함으로 예수 공동체,

예수가 지금 새롭게 구성하는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낼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러한 기도

를 가르쳐 달라 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 주기도문이 주어진 것이다.12)

10) 서중석, 『복음서해석』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91), 172쪽.11) 위의 책, 173쪽.12)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18쪽.

- 9 -

Page 15: T0212705.pdf

한 공동체의 입장을 대표하는 기도문을 일상적인 사용을 위해 만

들 경우, 손쉬운 암송을 위해 반복을 제한시키고, 간결한 형태로 처리한다

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이 마태와는 달리, 누가가 자신의

공동체를 다른 공동체와 구별짓기 위한 독자적인 기도문을 갖기 위해 간

결한 형태로 주기도문을 수용한 이유이다. 더구나 정경 복음서에 반영된

그 어느 그리스도교 공동체들보다 이방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누가공동체

는 바로 그런 자신들의 입장 때문에, 마태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 와 같은

유대교적 어법 대신 단순히 아버지 로 하나님을 호칭케 함으로써, 이방인

들도 그 호칭에 별 문제를 느끼지 않도록 해주고 있다.13)

2 . 마태복음에 나타난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다섯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주기도문

은 이 산상수훈의 전체 문맥에서 본문 구조상 한가운데, 6장 1- 18절의 종

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 단락에 들어있다.14) 즉 산상수훈의 핵심에 위치시

켜 놓았다. 이것은 마태가 주기도문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명확

하게 보여준다.

이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의 단락인 6장 1- 18절에는 세 개의 대

표적인 종교 행위, 혹은 경건 행위를 다루고 있다. 첫째는 자선 혹은 구제

이다(6:1- 4) 예수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친다.

당시 유대인들처럼 자기를 드러내 놓고 자랑하면서, 자기 과시나 자기 만

13) 자세한 것은 서중석, 누가공동체의 구성과 선교적 역할, 『신학논단』제

17권 (1987): 115- 134쪽.을 참조하라.14)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30쪽.

- 10 -

Page 16: T0212705.pdf

족을 위해 자선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다.(6:5- 15) 셋째는 금식에 대한 가르침이다.(6:16- 18) 금식한다는 것을 사

람들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유대교의 대표적인 종교 행위인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대

한 가르침 중에서도 기도에 관한 가르침 속에 이 주기도문이 속한다. 즉

자선, 기도, 금식으로 대표되는 유대교의 종교 행위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의 중심 부분에 기도를 위치시켰고, 그 기도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에 주기도문이 포함되어 있다.15)

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 속에서도 주가 가르쳐 준 기도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6장 5- 15절이 기도에 관한 가르침인데, 6장 5- 9절

전반부에서 먼저 그릇된 기도들을 다루는데, 유대인들의 그릇된 기도와 이

방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비판한다. 그리고 온전한 기도의 모범으로 주기

도문 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14- 15절에서 주기도문의 강조

점을 되새김하는 방식으로 다시 한번 이웃에 대한 죄 용서를 요구하면서

이 단락을 마친다.16 )

마태는 산상수훈을 매우 치밀한 문학적 구조로 짜면서 주기도문을

그 한가운데 위치하도록 했다. 즉 산상수훈(마 5- 7장)에서 중심 부분에,

종교적 관행 혹은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을 위치시켰고(마 6:1- 18), 또

그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도 중심에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배열

했으며(마 6:5- 15), 그 가르침 중에서도 또 중앙 핵심부에 주기도문이 자

리하도록 하는(마 6:9b- 13) 문학적 구조를 취하고 있다.17)

마태가 이렇게 치밀한 문학적 구조 속에 주기도문을 둔 이유는, 기

도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가장 근본 도리이며, 이 기도를 통해

15) 위의 책, 31쪽.16) 위의 책.17) 위의 책, 32쪽.

- 11 -

Page 17: T0212705.pdf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삶의 힘을 얻는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됨의 가장 근본 또는 중심에 주가 가르쳐 준 기도가 있다는

것이다.18 )

B . 주 기 도문 의 신 학적 의 의

1 . 누가의 신학적 의의

누가는 왜 짧은 형태의 주기도를 선택하여 기록하였는가? 누가는

어느 대상을 염두에 두었으며, 그의 신학적 테두리 안에서 주기도문을 어

떻게 사용하였는가?

먼저, 우리는 누가복음의 서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 중

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눅 1:1- 4)

우리는 여기서 누가는 이미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이는 곧 마태에 의한 주기도문 본문도 그가 알고 있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 연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태의 것

과 비교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누가의 주기도 본문이

그 내용상으로 마태의 것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18) 위의 책, 33쪽.

- 12 -

Page 18: T0212705.pdf

누가복음은 그 직접적인 대상이 데오빌로 각하인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이방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기독교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믿음을 촉구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19) 때문에 그는 복음서 초두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

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먼저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였

고, 오히려 예수가 이방을 비추는 빛 (눅 2:32)이 되었다고 하였다.20)

또한 마태의 경우와는 달리 누가의 족보에서는 비록 다윗을 통해

아담까지 이르는 예수의 혈통을 추적하는 족보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다윗 이후의 세대가 보좌에 앉았던 왕들이 아니라, 평민들에 의해 대표되

어 예수의 인류와의 결속을 강조한다. 이는 곧 메시야적 왕의 개념을 넘어

모든 인류의 보편적 구세주로서의 예수상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아브라함

을 지나 인류의 조상인 아담까지 족보를 거슬러 올라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21)

누가에 의하면 예수는 실로 만인의 구세주로서 오셨다. 때문에 그

는 자신의 복음서가 포괄적이라는 것과 예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뜨리시고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했던 과거의

불평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전세계적인 공동체를 시작하셨다는 사실

을 보여주고 있다. 즉 마태복음이 유대적인 기독교라는 지방색을 띤 포괄

성을 표방하고 있다면, 누가복음은 유대적인 편협성과는 전혀 무관한 헬라

식 포괄성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누가는 이방인 청중들에게 말하

고 있기 때문에, 성취된 메시야적인 예언에 대한 유대적인 관심을 마태와

는 달리 겉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22) 바로 이러한 특성이 누가복음에 나

19) 김경신, 『신약이해의 길잡이』(서울: 도서출판 은성, 1993), 171쪽.20) John Dran e, 이중수 역, 『예수와 4복음서』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0),

160쪽.21) 위의 책, 162쪽.

- 13 -

Page 19: T0212705.pdf

타난 주기도 본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누가는 그가 가지고 있는 자료 중에서 유대적 특성이 배제되어 있

는, 곧 하늘 , 뜻 등의 용어가 빠져있고,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기원하는

부분23 )이 생략된 자료를 선택하였으며, 이제 처음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기

도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기도하려는 용기가 일어나야만 될, 그의 다수의

독자들을 위해, 제자들의 요청에 의한 예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기록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왕이라기보다는 인간들의 친구로서 묘사되어

있다.24) 물론 예수께 대해 주님 이라는 칭호가 빈번히 사용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버림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로서 그려져 있다. 이

러한 그의 예수에 대한 묘사와 그의 복음서 전반에 흐르는 포괄적 신학은

우주적일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보다 교제적이다.25 ) 즉 그

의 주기도문 본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라는 관용구26) 없이 아버지 를

부를 수 있는 것은 보다 포괄적이고, 친밀한 아버지와 인류와의 관계를 강

22) Robert H . Gun dry , 김일우 역, 『신약개론』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6), 171- 173쪽.23)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청원하는 것은 전통적인 유대인의 기도문이다. 이것

은 쿰란의 레위기 기도와 유대인의 공적인 아침기도, 그리고 밤기도에도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다. 손혜신, 주기도문의 유대적 배경, 『그말씀』제

56권 (1997. 3), 57쪽.24) J . Dran e, 『예수와 4복음서』, 162쪽.25) M ark A . P ow ell, 배용덕 역, 『누가복음 신학』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155쪽.26) 유대인들의 기도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팔레스틴적

용법에서는 하나님을 우리의 라든지 나의 라는 대명사를 붙여 표현했다.

또한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의 표현의 일환으로 하늘에 계신 을 덧

붙이기도 했다. 마태는 바로 이러한 용법에 의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라

는 관용적 표현이 사용된 주기도문을 선택한 것이다. I. H . M ar shall, 강요

섭 역, 『국제성서주석- 루가복음』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4), 99쪽.

- 14 -

Page 20: T0212705.pdf

조하고 있는 것이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가 빠져 있으므로, 누가복음의 나라 에 대한 개념은 마태에 의한 하늘나라

의 개념보다 더욱 우주적이다.27 )

또한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4절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

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를 마태의 것과 비교하여 볼 때, 마태는 6장 12절에

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로 되어 죄 지은 자

들 이 복수로 되어있는 반면, 누가는 죄 지은 모든 사람 이라 하여, 단수에

다 모든 이라는 관형사를 붙여, 실질적으로는 다를 것이 없으나, 표현상으

로는 전 포괄적인 보편성을 드러내 주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28 )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왜 몇몇 사본에 당신의 거룩한 영이 우리

에게 임하셔서, 우리를 깨끗케 하옵소서 라는 성령 청원의 본문이 형성되

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의 또 다른 신학적 주제를 살펴보면 쉽게 해

결할 수 있다. 곧 누가에게 있어서 성령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

물론 그것은 그의 또 다른 저작인 사도행전의 주요 특징이기도 하다. 누가

복음에 의하면, 성령은 예수의 탄생, 세례 및 사역에 관련되어 있다.29) 또

한 복음서 말미에서 제자들은 그들도 성령 선물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

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듣는다.

이와 같이 누가복음에서 성령의 역할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기

도의 중요한 모델이요, 복음서의 핵심이 될 수도 있는 주기도문 본문에 성

령을 청원하는 기도문구가 삽입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

27) 물론, 마태와 누가의 나라 의 개념은 궁극적으로 같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나님 나라 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마태복음에 비해 하늘 의

개념이 빠진 상태에서 그 나라 를 말하고 있는 누가복음의 것은 독자의

느낌상 보다 포괄적이고 우주적이다.28) 나채운, 주기도문의 형성과 의미에 관한 한 고찰, 『장신논단』제2집

(1986), 149쪽.29) J . Dran e, 『예수와 4복음서』, 161- 162쪽.

- 15 -

Page 21: T0212705.pdf

령 청원 문구의 삽입은 마태복음에서 영광송의 삽입과는 달리 주기도문

본문 가운데에서 고려하지 않아도 될 문구라고 사료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을 정리하면, 누가복음에 나타난 주기도문의 누

가의 신학적 의의는 보다 포괄적이고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기도의 모델이

라고 정의할 수 있다. 언뜻 생각하기에 마태의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보다 간단한 기도문의 형태는 더욱 큰 의미적 개념들을 소유

하고 있다. 때문에 필자는 마태의 것보다 누가의 것이 우리 온 인류에게

보다 적합한 기도의 모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 . 마태의 신학적 의의

마태복음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항이다. 학자들은 그 근거로

복음서 서두에 나와있는 예수의 족보와 의 , 하늘 등과 같은 용어의 빈번

한 사용 등을 들고 있다. 마태는 진정 그의 복음서 시작에서 예수께서 다

윗의 보좌의 합법적인 상속자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의 혈통

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과 그를 뒤이어 왕좌를 차지했던 다윗 왕조의

왕들을 거쳐서, 즉 솔로몬으로부터 바벨론인들에 의해 유랑의 몸이 되었던

여호야긴까지 추적된다.30 )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태는 예수께서 이스라엘

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 그리스도이심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마태는 왕으로 오신 메시야의 소개에 이어 천국을 선포한다(마

3:2; 4:17, 23) 이 선포는 예비하는 자의 선포와 왕으로 오신 이의 선포이

30) F . F . Bru ce, 김광택 역, 『신약의 메시지』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3),

81쪽.

- 16 -

Page 22: T0212705.pdf

다. 이 천국 에 대한 용어의 사용은 그만의 독특한 사용이다. 이는 하나님

을 경외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두려워 한 유대적인 특징의 하나

라고 할 수 있다.31) 그리고 천국 선포에 이어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의 규

범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이 곧 산상설교이다.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가 천국을 선포하고, 이제는 그 백성된 자들의 규범을 가르치는 것이다.

즉 언젠가 시내 광야에서 모세가 옛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의 계시를

주었듯이, 이제 그리스도가 산상설교를 통하여 새 이스라엘 곧 교회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주고 계신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새 계명은 모세의 것보다 심화되어 있다. 모세의 율

법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모세의 율법이 모든 상황에서 행해

져야 할 것을 규정한 것인데 반해, 예수의 계명은 구체적인 지시보다는 오

히려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32) 결국 왕에 의해 그 나라에 대한 선포가 이

루어지고 있고, 그 선포는 하나의 방향성을 지시해주는 규범적 모델로 제

시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기도하는 습관과 방법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 자칫 외

식적인 기도가 될 수도 있고, 습관적이 될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한 자들에

게 예수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고 말씀하시며 기도의 방향성을 제시

해 주신 것이다.33) 때문에 이 기도문에는 그들이 늘상 사용하던 단어도 포

함되어 있다. 예수는 하늘에 계신 이를 부르고 계시며, 그분의 뜻 이 하

늘 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간구하고 있다.

31) H . Ridderbos , 오광만 역, 『하나님 나라』(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4),

55쪽.32) A . M . Hunt er , 박창환 역, 『신약성서개론』 (서울: 컨콜디아사, 1989),

77쪽.33) S . J . Kist em aker , 신성종·최갑종 역, 『현대 복음서 연구』(서울: 도서출

판 엠마오, 1987), 44쪽.

- 17 -

Page 23: T0212705.pdf

정리하면, 마태복음에 나타난 주기도문의 마태의 신학적 의의는 왕

에 의해 가르쳐진 천국 백성의 기도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미

와 아직 의 신학적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마태에 의한 주기도문은

천국 백성에게 주어진 복의 기도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34)

이처럼 마태의 주기도문은 누가의 것보다 더 교회론적으로 설정되

어 있기에, 본 논문의 교역적 적용을 위해서는 마태의 본문을 따르도록 한

다.

C . 산상 설 교 속 의 주 기도 문

마태의 주기도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산상설

교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제자들이 행해야 하는 세 가지 자선, 기

도, 금식의 실천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기도와

는 달리(마 6:5), 제자들에게 알맞는 짧고, 진실한 기도를 바치라는(마

6:7- 8) 반명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마태는 유대교가 가지고 있던 기도

의 풍부한 전통을 알고 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달리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할 것(마 6:6)과,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들이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시니,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당부(마 6:7)와 함께

짧은 기도의 실례로 주기도문을 소개하고(마 6:9- 13), 이어서 마태는 용서

의 중요성을 반복하여 싣고 있다.(마 6:14- 15)35)

34) 정훈택, 『산상설교- 기록 이유와 목적』(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1990),

28- 37쪽.35) 최혜영,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기도연구』 (서울: 서강대학교,

1995), 9- 10쪽.

- 18 -

Page 24: T0212705.pdf

마태는 산상설교의 주제를 의(義)로 설정하고 가르치고 있다.36) 마

태는 이 개념에서 자선, 기도, 금식을 요약할 수 있었다. 즉 마태는 유대의

경건과 의의 표상으로서 3대 덕목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마 6:1- 18에서

보여준다. 기도와 자선과 금식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유대교의

3대 덕목이 재해석된다. 이는 얌니아공회의 이후에 유대교와 기독교가 분

리되면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재확립해야만 했던 마태 공동체의 상황을 파

악하게 한다.37) 마태의 주기도문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유

대인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행했던 3대 덕목에 대한 기독교의 정체성

을 확립하기 위해, 기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산상설교는 천국복음이다. 이러한 천국복음 속에 두 가지 관점이

실려있다. 그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윤리적인 부분이다. 제자들

에게 하는 말씀이 축복의 말씀 다음에 직접 첨가된다. 그리고 바리새인들

보다 더 나은 의가 제자들에게 요구된다. 즉 유대인의 신앙에 의하면, 율

법에 나타나 있는 것을 능가하는 자선은 특별한 공로를 세울 수 있거나

또는 율법 위반을 속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에 보상을 기

대할 수도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인들의 의를 세우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덕목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에 알맞은 방법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산상설교를 윤리적으로만 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은 주

기도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이해의 근거가 된다. 즉 문맥의 통일

성이 산상설교 속에 있는 주기도문에게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바로

36) 정양모, 『마태오복음서』(서울: 분도출판사, 1990), 83쪽.37)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열은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나, 공식적인 것은

이 회의를 통해서이다. 보다 자세한 것을 참조하기 위해서는 B . Reike, 번

역실 역, 『신약성서 시대사』 (서울: 한국신학연구소,1988), 267- 277쪽을

참조하라.

- 19 -

Page 25: T0212705.pdf

천국복음의 두 번째 관점인 종말적인 부분이다.

산상설교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5장 1절에

서 48절, 두 번째 부분은 6장 1절에서 7장 12절, 마지막 부분은 7장 13절

에서 27절까지다. 첫 부분은 복 있는 사람으로 시작하여, 천국의 권유로

끝나고 있다. 이것을 이루고 있는 큰 주제는 하나님 나라와 의(義)다. 이

둘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종말적인 지배

로 나타나며, 예수가 제자들에게 소금과 빛으로 위임되기로 약속한 것이

다. 너희의 의는 제자들에게 명령된 행위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완전히 능가하는 것이며, 다음에 나오는 원수를 사랑하는 명령의 정점에

이르는 댓구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부분에서도 통일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수의 말을 듣

고 행하는 사람과 행하지 않는 사람, 특히 7장 15절의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와 7장 21절의 단순히 주여 주여 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들이 종말론

적 심판 이야기 속에 복합 구조를 이룬다.

산상설교는 복음의 틀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무

한한 은사를 받은 인간이 그 은혜에 감사해서 지키게 되는 하나의 생활화

시킨 신앙 이라는 예레미아스의 말은 주기도문의 결론을 이끌어내는데 중

요한 지표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의 시민이 된 자들이 미

래의 천국을 바라보면서 지켜야 하는 윤리인 것이다.

산상설교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절대적인 윤리라든가, 인간

으로 하여금 새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는 일종의 실존적인 설교라든가,

어떤 계약된 백성들에게만 주신, 천국에 들어가는 윤리는 아니다. 그렇다

고 종말을 맞이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꼭 지켜야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의 말씀도 아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인간이 그 은혜에 감사하며 행하는 자발적인 윤리이고, 실현된 종말

- 20 -

Page 26: T0212705.pdf

과 미래적인 종말 사이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주신 생활윤리

이다. 즉 단편적으로 윤리만을 주장하거나 또한 종말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이라는 큰 그릇 안에 윤리(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

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윤리(의)는 떨어져서 생각될 수 없고, 어느 하

나만 언급이 될 수 없다. 주기도문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윤리의 부분과 종말의 부분이 동시에 주기도문 안에 나타난다.

- 2 1 -

Page 27: T0212705.pdf

III . 주기도문의 석의적 고찰

A . 부 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38)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사역)

1 . 하늘에 계신

하늘은 신약에 284회(복수는 94회) 나타나며, 그 중 마태복음에는

84회(복수는 58회) 나타난다.39) 신약에서 이 단어의 뜻은 크게 3가지로

(1) 우주의 일부분으로 하늘, (2)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 (3) 그리고 비유적

으로 하나님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40)

38) 민영진 교수는 현대의 번역이론에서 본 주기도 번역의 문제 에서 아버

지 를 부르는 호격 조사 - 여 가 아버지 에게 붙어서 아버지여 라고 번역된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한다. - 여 는 받침 없는 체언 아래에 쓰이어서,

느낌이나 호소하는 뜻을 나타내는 조사 (助詞)이다. 예를 들어, 동포여, 궐

기하라. , 친구여, 모이자 , 신도들이여, 회개합시다. , 학도들이여, 학문

연구에 매진하라. 등과 같은 표현에서 귀를 기울여야 할 대상을 부를 때

쓰이는 조사이다. 높으신 하나님께나, 하나님을 가리키는 아버지 라는 표

현을 써서 부를 때 호격 조사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나채운 교수 역시 - 여 를 생략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개정하고 있다.39) G. Kit tel, ed., T heolog ical D ictionary of the N ew T es tam en t (Gran d

Rapids : Eerdm an s P ublishin g Company , 1967), p . 513.40) 박창환 편, 『성서 헬라어 사전』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8), 318쪽.

- 22 -

Page 28: T0212705.pdf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유대인의 기도에서 흔히 나타

난다.4 1)(왕상 8:36; 느 2:20) 하나님은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

이오리까? (왕상 8:27) 여기서 하늘에 계신 분은 초월적인 능력자에 대한

경외와 존경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하늘에 계신 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

우주에 대한 그의 통치권을 의미하며, 헨드릭슨은 이 말이 하나님의 신성

성과 존엄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것은 기도자의 자세가 경건하고 겸허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클라크(A . Clark)는 이것을 5가지 의미로 표현하였다. (1) 하나님의

편재, (2)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위엄과 통치권, (3) 하나님의 권세와 능

력(대하 20:6; 시 115:3), (4) 하나님의 전지(시 11:4), (5) 하나님의 완전한

순결성과 거룩성(신 26:15; 사 57:15) 등이다.42)

헨리(M . Henry )는 하늘에 계신 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

내며, 하늘은 그의 보좌를 나타내며(시 103:19), 이 보좌는 성도를 향한 은

혜의 보좌이며, 그리스도는 이곳에서 지금 중보의 역할을 한다(히 8:1)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하늘은 (1) 눈에 안 보이는 영적 세계이며, 따라서 우

리는 영적 기도를 드려야 하며, (2) 하늘은 높음을 뜻하며, 따라서 기도는

세계를 초월하여 마음을 높은 데 두고(시 5:1) (3) 하늘은 순결을 뜻하며,

기도는 순결한 손을 들고 해야 하며, (4) 하늘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감찰하심을 뜻하며(시 33:13- 14), 따라서 기도에서 하나님의 감찰하심을

느껴야 하며, (5) 위의 하늘에서 우리의 필요와 모든 선한 은사가 내려옴

41) 이상근, 『신약성서주해』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1977), 115

쪽.42) A . Clarke, Clark e 's Com m en tary (New York : Abin gdon Press , 1962),

p . 85.

- 23 -

Page 29: T0212705.pdf

을 확신하는 기도라고 하였다.43 )

2 .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부성론은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신관이다. 이것도 구약에

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민족신이

었으므로 하나님의 부성도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해당하였다.(출 4:22)44)

이러한 혈통 중심의 부성관은 예언서에서 신령화(spiritualized)하여 하나님

께 순종하여야 자녀의 특권을 누린다는 것을 강조했다.45)

이와 같은 민족적 신관은 포로기 회당예배 시작 시에 여호와를 개

인의 하나님으로 섬겼다. 이러한 구약의 영향하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우

리의 아버지임을 결정적으로 가르치셨다. 구약에서는 이와 같이 기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일은 없었고,46 ) 유대인들은 비록 하나님의 자녀라

고 하였으나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에서 직접적으로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

듯 (아바)라 함은 새로운 것이었다.47)(참고 : 롬 8:15; 갈 4:6)

예레미아스는 아람어 (아바)의 배후에는 아빠 의 뜻이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대인의 심성으로 볼 때, 이렇게 친숙한 단어로

43) M . H enry , S t. M atthew : M atthew H enry s ' Com m entary on the W hole

B ible V ol. 3 (Grand Rapids : Guardian Press , 1976), p .42.44) 이상근, 『신약성서 주해 마태복음』, 108쪽.45) 위의 책.46) C. F . Pfeiffer & E . F . H arrison , eds ., T he Gosp e l A ccord ing to

M atthew : T he W y cliff e B ible Com m en tary (Chicago: M oody Pres s ,

1976), p . 939.47) F . Stag g , M atthew : T he B roadm an B ible Com m en tary V ol 8 , eds . C. J .

A llen an d Other s (Na shville : Broadm an Pres s , 1969), p . 115.

- 24 -

Page 30: T0212705.pdf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부적절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가 마치 어린이가

아빠를 부를 때 사용하는 감각을 갖고 하나님을 (아바)로 부른 것은

독특하고 새로운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48)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르는 것은 이처럼 예수의 독특한 어법이다.

이 아빠 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아빠 와 똑같은 말이다. 원래 아버지

를 친근하게 부르는 어린아이의 언어였다. 이렇게 아빠 또는 아버지 로

부르는 것은 언약 신학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자기

백성 삼으시고, 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 노릇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을 언약이라고 한다.49)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선민으로 구별되었고(렘

7:23, 11:4, 27:7, 30:22; 겔 11:20, 14:11, 36:28, 37:27), 또 모세를 통해 율법

이 주어지고, 그들은 하나님에게 율법을 지킬 의무를 지며, 하나님은 그들

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렘 7:23, 11:4; 겔 11:20)50)

이에 대하여 신약시대에 있어서의 예수의 제자 및 다른 사람들에

게 있어서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는

위의 경우와도 다르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은 물론 이스라엘처럼 민족

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

이 아버지 되심은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의 경우와도 다르다.51)

예수는 자기 자신을 자신의 하나님의 나라 복음 선포를 통해 새롭

게 창조하고 모으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 창조주 하나님의

48) J . Jer em ia s , T he P ray ers of J es us , p .96.49)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67쪽.50) 나채운, 『주기도, 사도신경, 축도』, 28쪽.51) 위의 책, 29쪽.

- 25 -

Page 31: T0212705.pdf

부요함을 덧입게 하는 자로 이해했다. 그러니까 예수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자기 이해를 한마디 아빠 라

는 표현 속에 담았다.52)

이 아빠 기도는 우리 인간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됨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자녀 됨

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상속자 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르는 것은 하늘과 땅을 지으

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라는 뜻이며, 그분의 그 모든 부요함을 내가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속받는다는 것은 결코 모자람이 없

는 그 하나님의 부요함을 내가 끌어 쓸 수 있다는 뜻이다. 피조물인 우리

가 창조주인 하나님의 부요함을 끌어 쓰고자 하는 행위, 그것이 기도이

다.53)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 안에서 영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서 기도할 수 있는 자격과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클라크(A . Clark )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모

든 인류의 아버지이지만,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심을 깨닫지 못하면, 아버

지를 부르고 기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54)라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게 될 때, 우리의 존경하는 사랑

을 나타내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강한 신뢰의 표현을 나

타낸다.55 ) 따라서 아버지 라고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간구의

내용을 아시고, 응답이 함축되어진, 요약된 믿음의 호칭이다.

52)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69쪽.53) 위의 책, 72쪽.54) A . Clarke, Clark e 's Com m en tary , p . 86.55) 위의 책, p . 85

- 26 -

Page 32: T0212705.pdf

여기서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 인 것이다. 우리는 동일한 하나님

의 소생(권속)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따라서 우리 아버지 에게

기도한다. 이 정신은 형제적인 일치와 사귐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말한

다.56)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럼으로 그에게 기도하는

우리 는 한 아버지의 형제가 된다는 것은 논리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아버지 라는 호칭에 하늘에 계신 을 부가한 것은 그 아

버지가 혈육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주려는 것이다. 곧 하나

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전통적인 가족 개념(혈육)이 아닌 새로운 가족 개념

으로 규정해 주려는 것이다.57)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모친 (마 12:50; 눅 8:21; 막 3:35)이듯이 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 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이

다.

따라서 이 부름의 부분에서 우리는 간구에 앞서 먼저 두 가지 인

식, 즉 하나님은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인가를 인식하게 된다.58) 그리고

우리 라는 말에 의하여 이 기도문은 사적인 기도문이 아니라 공동적인 기

도문임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B . 하 나 님에 관 한 청원

1 . 청원 1

56) 위의 책.57) 서중석, 『복음서 해석』, 176쪽.58) M etzg er , A T ex tual Com m entary on the Greek N ew T es tam ent (United

Bible S ociet ies , London New York , 1971), p . 127.

- 27 -

Page 33: T0212705.pdf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 (사역)

a . (당신의 ) 이름

이름 은 헬라어 원문에는 당신의 이름 으로 표기되어 있다. 기도의

첫 머리에 하나님을 대면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르면서 말

을 걸었기에, 여기서 당신 은 하나님을 가리키며, 당신의 이름 은 곧 하나

님의 이름이다.

우리말의 경어법에서 2인칭 대명사의 경우에는 극존대(아주 높임)

가 없다. 즉 너 (아주 낮춤), 자네 (예사 낮춤), 당신 (예사 높임)으로 세

계층은 있는데, 그 위에는, 인칭대명사로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일

상생활에서는 실제로 당신 이상의 극존대형으로는 가족관계, 사회관계,

직장관계 등을 나타내는 명사로 대신하여 아버지 , 어머니 , 형님 , 댁 ,

선생님 , 어르신네 , 사장님 , 회장님 등으로 쓰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당신의 이름 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다. 우리말 어법에 맞게 번역하기 위해서는 부

득이 당신의 라는 2인칭 대명사의 소유격을 생략할 수밖에 없다.59)

그러나 나채운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당신 을 쓸 수 있다

고 주장한다.60)

59) 김창락, 『성서읽기 역사읽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9), 131쪽.60) 나채운, 주기도문의 번역상의 문제점, 『성경원문연구』 제8호 (2001.

2.): 34- 35쪽.

- 28 -

Page 34: T0212705.pdf

첫째, 제 2인칭 대명사가 헬라어 원문에 있는 만큼, 그 뜻을 분

명히 하기 위해서는 번역을 해야 하며, 둘째, 당신 이라는 말이

대우법 상으로는 극존대가 안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말

기도문과 같은 문어체에 있어서는, 예의적인 용법(courteou s

u sag e)으로보다는 문법적 용법 (gram m atical u sag e)을 더 중요시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고, 셋째, 여기서의 당신 은 단순한 비존대

형으로서의 평칭이 아니라, 특별한 친밀감을 나타내는 친칭 (親稱)

으로 보아야 하며, 넷째,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하나님

에 대한 기도에서 당신 을 쓰는 추세가 점점 늘어가고 있고, 1991

년 한글학회 발행의 우리말 큰 사전 에서도 공동 번역 성경에서

쓴 당신 을 인정하여, 하나님에 대한 아주 높임 으로 당신 을 쓸

수 있다고 했으며, 다섯째, 신약성경에서는, 대화의 상대자로서의

예수께 대해서 당신 이라고 쓴 사례가 허다히 많은데 (마 3:14,

12:2, 47, 9 :14, 11:3, 15:2, 22:16- 17; 막 3:11, 5 :7, 8:29, 12:14; 눅

9:40, 20:2; 요 1:49 등) 교인들이 그러한 대목을 읽으면서도 아무

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나채운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현재로서는 적절한 시기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자녀들이 그들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향해서, 당신 이라는 말

을 악의적으로가 아니라 순수하게, 선의적으로 쓸 수 있을 때가 되면, 역

사적으로 언중(言衆)의 자연스러운 동의가 이루어지면, 당신의 이름 , 당

신의 나라 , 당신의 뜻 이라 부르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지금은 비록 많

은 교회에서 그렇게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글학회의 인정이 있었다

할지라도, 의견이 갈라져 있는 만큼 언어생활의 현실을 더 살피는 것이 좋

겠다.

- 29 -

Page 35: T0212705.pdf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존재의 됨됨이를 표현한다. 성서에서 보는

이름은 단순히 그러한 지칭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지고 있

는 사람의 존재 또는 인격 자체를 표명한다. 그래서 어떠한 특정인의 인격

이나 신분에 근본적인 변경이 있을 때는 그 이름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

다. 예컨대 아브람 이 아브라함 이 되고(창 17:5), 야곱 이 이스라엘 이 되

고(창 32:28), 사울 이 바울 이 되고(행 13:9), 시몬 이 게바 (베드로)가 된

것(마 16:18) 등이다.

그리고 이름은 어떤 경우에는 출생과 더불어 특정한 사명과 신분

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컨대 예수 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라고

말하고(마 1:21), 임마누엘 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 1:23)라는

뜻으로서, 그리스도는 이미 출생에서부터 이렇게 명명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요건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 라고 말하고(요 1:12), 바울도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리스도의 이

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한다 (롬 1:5)고 말한다. 하

나님은 자신의 존재와 인격 자체를 그의 이름 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이란 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셨다.(출 3:13)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이름 은 하나님 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경

우가 많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

다. (시 145:2),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

할지어다. (시 149:3), 주를 송축하는 것 과 주의 이름을 송축하는 것 은

똑같은 뜻이고, 그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 과 그를 찬양하는 것 도 똑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병행대구는 시편 20장 1절, 29장 2절, 44장 8절,

66장 1- 2절, 68장 4절, 69장 30절, 74장 18절, 86장 9절, 96장 2절, 100장 4

- 30 -

Page 36: T0212705.pdf

절, 103장 1절, 105장 1절, 116장 4절, 135장 3절, 138장 1- 2절, 139장 20

절; 사무엘하 22장 50절; 말라기 2장 5절 등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

다.61)

b .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기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aJgi asqhvt w로서 그 원형 aJgi a w의 뜻은 거룩히 여기다 가 아니라, 거룩

게 하다 로서, aJgi asqhvt w는 거룩하게 하다 의 3인칭 단수과거 명령형

동태로 거룩하여지게 하시며 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이 기원의 뜻은 본래적으로 거룩하지 않은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인격 자체)이 거룩하게 여겨지도록(신성시되도록)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또 대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무시되거나 모독을 받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거룩하여지게(신성화되도록) 해달라는

기원인 것이다.62)

그러면 이 본문에서 거룩하게 하는 행위자는 누구냐? 즉 하나님이

냐? 아니면 인간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이유에서 그 주체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으로 본다.

첫째, 주기도문의 배경이 되는 유대교의 카다쉬 기도문에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영화롭게 해달라는 청원이 나온

다.

61) 김창락, 『성서읽기 역사읽기』, 135쪽.62) 나채운, 주기도문의 번역상의 문제점 , 35쪽.

- 3 1 -

Page 37: T0212705.pdf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 영화롭게 하옵소서

둘째, 이 수동태는 신적인 수동태로서, 마태에 흔한 문체이며, 늘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키고 있다. 유대인 신자를 의식한 마태복음이 하나님

의 이름을 사용하기 꺼려하여, 신적인 수동태를 사용했음은 극히 자연스러

운 것이다.63)

셋째, aJgi asqhvt w가 단순과거 수동태 명령형으로 되어 있어, 반

적인 동작보다는 단회적인 동작, 즉 하나님의 역사적인 어떤 사건을 가리

킨다.

넷째, 요한복음 12장 28절에는 거룩케 한다 와 영화롭게 하다 가

하나님의 동작으로 나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유일회적,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달라, 즉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바라는 기도문인 것이다.64)

인간이나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

는, 하나님께 대한 기원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 칼빈은 먼저 소극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히는 인간의 모든 불 경건함과 비방과 조롱을 불식하고 다음 적극적

으로 하나님의 위엄이 더욱 빛나도록 하는 것이다. 65)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 거룩함 이란 하나님의 주요한 속성으로서 그것이 인간

의 악의에 의해 손상을 받지 아니하고 거룩함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기원

63) 박수암, 『산상수훈』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0), 152쪽.64) 위의 책, 152- 153쪽.65) Calvin , I ns titutes of the Chr is t ian R elig ion (E T ) (T h e W estm in ster

Pres s , Philadelphia , 1967), p . 904.

- 32 -

Page 38: T0212705.pdf

하는 것으로 브라운(R . E . Brown ), 바클레이(W . Barcley ), 헨드릭슨(W .

Hendrikson ) 등 오늘날의 많은 주석가들은 요한복음 12장 28절의 아버지

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라는 예수의 기도에 비추어 그와

같은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66)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주체는 하나님으로서, 이 기

원은 아버지의 이름이 아버지의 힘에 의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 된다.67)

그러므로 < 200주년 성서>가 주기도문의 청원 1 을 아버지의 이

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라고 번역하고, 각주에 아버지의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소서 라는 뜻으로 풀이한 것은 주석적으로 정확하다.68)

2 . 청원 2

(당신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69)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 (사역)

66) 나채운, 『주기도문, 사도신경, 축도』, 34쪽.67) 서중석, 『복음서 해석』, 180쪽.68) 김창락, 『성서읽기 역사읽기』, 139쪽.69) 본래 우리말에서 나라 는 나랗 으로서, 여기에 - 이 조사가 붙어 나라히

로 쓰기도 하였는데, 그 후에 - 히 조사가 없어지고 - 이 조사가 되고, 그

후에 받침 없는 명사에는 - 가 가 붙게 되었고, 그 문법에 따라 성경 중

모든 나라 에 - 가 조사를 붙여 나라가 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주

기도 본문에서만 아직도 나라이 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라고 개정하는 것이 옳다. 나채운, 주기도문의 번역상의 문

제점 , 32쪽.

- 33 -

Page 39: T0212705.pdf

여기서 나라 는 당신의 나라 로 전 문장과 연관시키면 아버지의

나라 라고 볼 수 있다. 당신의 나라=아버지의 나라=하늘 나라=하나님(의)

나라=천국 등 동일개념이지만, 신구약 배경으로 보아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천국)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세례 요한, 예수님과 사도

들의 말씀 선포의 핵심이며, 선교의 핵심이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의례이 기도하였

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을 통치하시도록, 또 하나님께서 번영의

축복을 주시며, 메시야가 속히 도래하며,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도록 간

구하였다.70)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왕국은 순전히 미래적인데,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현재적인 개념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

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다윗의 후손으로 날 메시야에 의해 통치되는 나

라인 동시에, 이스라엘에 국한된 나라이지만, 예수에게 있어서는 이스라엘

에만 국한하지 않는 것이다.7 1)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주적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왕국(하나

님의 나라)이 만국 위에 뛰어날 것이라고 약속(단 7:14- 27)하셨다. 그리스

도의 왕국은 만국을 지배, 통치하는 세계적 왕국의 건설이다.(사 9:7)72)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 는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의 지배 로

바꾸어 쓸 수 있는데, 하나님의 통치는 그 주체가 하나님이다. 인간은 그

통치의 도래를 앞당길 수도 없고, 뒤로 미룰 수도 없으며, 다만 그 도래를

위해 준비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는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한다. 하나님

의 나라는 마치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아서, 누구든지 그것을 발견한 사

70) A . Clark , Clark 's Com m en tary , p .86.71) 나채운, 『주기도문, 사도신경, 축도』, 86쪽.72) A . Clark , Clark 's Com m en tary , p .86.

- 34 -

Page 40: T0212705.pdf

람은 그것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을 판다.(마 13:44) 하나님의 나라는 또 모

든 것을 팔아 사려는 진주와 같기도 하며,(마 13:45) 그것은 또한 마치 작

은 겨자씨와 같아서, 싹이 트고 자라나면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곳에 깃들이게 된다.(마 13:31- 32)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아서(마

12:33),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먹

고 마시는 잔치집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 상에는 기

득권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사회의 변두리에서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사

람들이 초대된다(마 22:1- 10)

이와 같은 비유를 들어 설명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기

존의 가치나 사회질서와 질적으로 다른 세 가지 차원, 즉 우주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과 종말론적 차원을 지닌다. 지금까지 미래의 차원에 머물러

있던 이러한 궁극적인 변혁의 차원들은 이제 예수의 인격 속에서, 그리고

그의 선포와 메시야적 실천 속에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선취

(先取)된다는 것이 복음서의 일관된 증언이다.

따라서 세상을 통치하는 마귀의 왕국과 구조 악에 대립하여 서있

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생애와 부활 속에서 구체화된다. 즉 십자가와

부활은 이 사단의 세력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인

간이 꿈꾸는 궁극적 희망인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는 앞당겼고, 이를 위해

서 제자들에게 병 고치는 능력( )과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 )

를 주어 파송함으로(마 10:1- 8),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셨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때가 차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시작되었고,

다시 한번 때가 차면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전자는 이미 (already )

이루어진 것이고, 후자는 아직 (not yet )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 둘

사이에서 주기도는 한편으로는 이미 의 확장을, 또 한편으로는 아직 의 조

- 35 -

Page 41: T0212705.pdf

속한 실현을 위한 간구이다.73)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다.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하나님

의 최종적인 승리가 오는 통치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처럼 두 가지 차원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기

원하는 것에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는 기원은 첫째, 그 나라가 이 땅에 현재적으로 실현되

게 해 달라는 것이며, 둘째는 그것이 미래에 궁극적으로 완성되게 해 달라

는 기원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을 하

나님의 백성과 그의 선교기관인 교회를 통해서 확장되어 나아가고, 마침내

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미래에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교회는 그의 선교적인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74)

이것은 또한 지상적이거나 현재적인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정립되

거나 확장되는 것이 아니며,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을 인정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가 많게 하려는 점진적인 것도 아니고, 미래에 인

자 메시야의 도래와 심판을 통해 전체적으로 단번에 쳐들어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축복된 상태가 하나님의 왕적 통치보다

오히려 더 강하여, 축복된 상태와 새 질서를 암시하는 하나님의 왕적 통치

가 완성되기를 바란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왕적 통치의 완성이 전제

되는 축복된 상태와 새 질서를 더 바라는 간구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

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며, 간구

73) 최갑종, 『1세기 문맥에서 본 주기도문 연구 ; 기원, 본문, 그리고 해석』,

225쪽.74) 나채운, 『주기도문, 사도신경, 축도』, 40- 41쪽.

- 36 -

Page 42: T0212705.pdf

하는 것이다.75)

특별히 주기도문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으로는 로마 황제

의 통치와 대립되어 있고, 종교적으로는 유대교 성전과 대립되어 있다. 로

마 황제의 통치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기원하라고 가르치는 주기도문은

황제의 통치에 대한 거부를 전제하고, 또 황제의 통치를 상대화시키는 선

언이었다. 종교적으로는 유대교 성전과 대립되어 성전이라는 공간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라는 시간과 때를 중요성을 선언하고 있다.76)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간구하는 임하옵시며 라는 간구는 예수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왔기에(마 12:21),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가 구

체적으로 잘 실현되게 해 달라는 의미까지 포함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

가 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77)

그리고 청원 2와 그 전후의 두 청원(첫째 청원과 셋째 청원)과의

관계를 고찰해 보면, 상호적인 인간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즉, 첫째,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면, 하

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

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된다.

두 번째로 가능한 것은 그것의 반대, 즉 본문 그대로의 순서이다.

세 번째로 가장 합당한 해석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중심으로

하는 해석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하나님의 이름도 거룩히 여김

을 받고, 하나님의 뜻도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

75) 오덕호, 주기도문에 나타난 나라가 임하옵소서 연구, 장신대학원석사논

문 (1986), 85- 86쪽.76) 서중석, 『복음서 해석』, 182- 184쪽.77) 나채운, 『주기도문, 사도신경, 축도』, 42쪽.

- 37 -

Page 43: T0212705.pdf

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다.78)

3 . 청원 3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79)

하늘에서처럼 땅 위에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사역)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 세 번째 청원은 누가복음에는 생략되어 있

다. 자연히 이 청원에는 마태적인 문체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마태는 이

청원을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서의 예배 경험의 결과로 주기도문

의 원래 형태에 부과했을 것이다.80)

로이드 존스(D. M . Lloyd- Jones)는 두 번째 청원이 첫 번째 청원

의 논리적인 결론인 것처럼, 세 번째 청원은 두 번째 청원의 논리적인 결

론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오히려 이 세 번째 청원은 이전의 두 청원들과 마

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공의 또 다른 한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청원이 하나님의 영광의 내적인 측면을 보다

더 강조하고 있고, 두 번째 청원이 그 영광의 외적인 측면을 보다 더 강조

하고 있는 반면, 이 세 번째 청원은 그 영광의 우주적인 차원을 보다 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81)

78) 위의 책, 42- 43쪽.79) 나채운 교수는 그의 주기도문의 번역상의 문제점 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

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고 개정하기를 원한다.80) 서중석, 『복음서 해석』, 185쪽.81) 위의 책.

- 38 -

Page 44: T0212705.pdf

a . 뜻

여기서 뜻 은 당신의 뜻 인데, 본문의 연결과 기도자의 친근성을

강조하고,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 으로 빈번히 사용한 것 등으

로 보아, 이곳에서도 아버지의 뜻 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문맥상의

내용의 연결과, 의미상 거룩성과, 권위를 강조할 때 하나님의 뜻 이 더 기

도문으로 타당하게 생각된다.82)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확

장과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으로, 예수는

직접 하나님의 뜻을 천명하여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

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 18:14)라고 말함으로, 온 세

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비유로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마 18:12- 13; 눅

15:1- 7), 잃은 드라크마 하나를 다시 찾은 기쁨(눅 15:8- 10), 잃어버린 탕

자를 다시 맞은 기쁨(눅 15:11- 32) 등에 언급한다.

이상의 경우에서 잃은 자 는 한결같이 죄인 으로 비유되는데, 이것

은 바로 예수께서 공생애의 시초에 선포하신 말씀 중 회개하라 고 하신

것과 일치한다. 즉 죄인을 회개시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로 잃

은 자를 찾는 것이다.83)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청원은 그 뜻에 대한 저항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뜻은 온 우주 만물의 구원을 위한 그

의 계획과 관련되어 있다. 이 계획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마 28:18)를

82) 고재봉, 주기도문 해석에 관한 연구, 『복음과 실천』 제9집(1986년): 33

83) 나채운, 『주기도문, 사도신경, 축도』, 45- 46쪽.

- 39 -

Page 45: T0212705.pdf

허락 받은 예수에게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두 무릎을 꿇게 (빌 2:10)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져 있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난

다.( 마 11:25- 26) 표적을 구하는 사람이나, 지혜를 찾는 사람에게는 숨겨

져 있으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에게는 드러난다.(고

전 1:17- 25)84 )

하나님의 뜻은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 모든 백성이 그

이름에 무릎을 꿇게 될 때, 곧 그의 통치가 완전히 실현될 때, 그것과 동

시에 이루어질 것이다.85)

b . 하 늘에 서 이 룬 것 같이 땅에 서도

베자 사본이나 시리아 사본 등 몇몇 사본에서는 같이 ( 는 비교

상관접속사)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청원은 하늘과 땅 모두 로

도 읽혀질 수 있다. 먼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라 할 때는 하나님의

뜻이 이미 하늘에서는 이루어졌고, 바로 그런 비슷한 방법으로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청원이 된다.86) 곧 하늘은 땅을 위한 모델이 된다.

요한 계시록에는 이러한 사상을 뒷받침해줄 만한 묘사가 나온다.

그때 하늘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과 싸

웠습니다. 용은 자기 부하들과 함께 맞서 싸웠지만 당해내지 못하여,

하늘에는 이미 그들이 있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 큰 용 곧 악마라고

도 하고, 마귀이라고도 하며, 온 세계를 미혹하게 하던 늙은 뱀은 땅으

84) 서중석, 『복음서 해석』, 185- 186쪽.85) 위의 책, 187- 188쪽.86) 위의 책, 186쪽.

- 40 -

Page 46: T0212705.pdf

로 내던져졌고, 부하들도 함께 내던져졌습니다.......그러므로 하늘과 그

안에 사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에는 화가 있다. 악마

는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크게 분노를 품고, 너희에게

내려갔기 때문이다. (계 12:7- 9, 12)

여기서는 하늘은 이미 해결되었고, 이제 악마가 기거하는 장소인

땅만 해결되면 될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하늘은 천사들과 의인이 거주하

는 영역인데, 구약의 사고에 따르면 그곳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이

다. 하늘에 거주하는 천사들과 의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룬다. 하

늘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곳이라면, 땅은 그렇지 못한 곳이다.

땅은 하나님의 뜻이 거부당하고, 하나님의 자비, 인내, 관용을 업신여기는

자들이 거하는 곳이다.(롬 2:4)

하늘과 땅 모두에서 라 할 때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과 땅 양쪽 모

두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청원이 된다. 이럴 때는 하늘 역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장소, 곧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장소가 된다. 이러한 사상 역시 신약 마가복음에서 뒷받

침 받고 있다.87)

그날 그 환난 후에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을 것이며, 별들

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

그는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하나님이 택하

신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막 13:24- 27)

87) 위의 책, 186- 187쪽.

- 4 1 -

Page 47: T0212705.pdf

묵시문학적 전망 속에서 묘사되는 이러한 구절들은 장차 흔들리게

될 하늘의 세력들 이 아직은 하늘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

의 뜻이 지금은 하늘에서 완전하게 실현되고 있지 않다는 암시가 된다. 이

하늘의 세력들 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 모두를 통치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사라질 것으로 제시되었다.

이 두 가지 입장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러나 어느 쪽을 택한다 해도 두 입장 모두에 시간적인 문제를 제외한다면,

하나님의 뜻의 실현은 하늘과 땅 모두를 포함한 만물 전체가 된다는 사상

이 똑같이 반영되어 있다. 곧 기도문의 이 세 번째 청원은 하나님의 주권

에 우주적인 차원을 부여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이 청원이 첫째 및 둘째

와 더불어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 모든 백성이 그 이름에 무릎을 꿇게 될 때, 곧

그의 통치가 완전히 실현될 때, 그것과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다.88)

c . 이루 어지 이다

이루어지이다 (genhqhvt w)는 기노마이(g )동사의 단순과거

수동태 명령형으로 되어 있어, 미래에 있을 단회적인 동작을 기원하고 있

으며, 신적인 수동태로 되어 있어, 하나님의 동작인 것을 보여준다. 뜻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수동문을 능동문으로 바꾸어서 뜻을

이루시옵소서 라고 번역하는 것이 우리말 어법에 더 어울린다.89)

하나님 자신이 그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은 구약에 흔한 사상이다.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

88) 위의 책, 187- 188쪽.89) 김창락, 『성서읽기 역사읽기』, 141쪽.

- 42 -

Page 48: T0212705.pdf

하셨도다. (시 135:6)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은 그의 백성들을 압박에서

부터 구하시는 것이며(사 46:10, 13),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다.(사

49:8) 카다쉬 기도문도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실현될 것

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는 그의 나라를 너의 생애 기간 동안 통치하시기

를..... ), 당시 랍비 엘리 에제르는 당신의 뜻을 하늘 위에서 행하소서 라

고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구원의 뜻을 실행하신다는 것은 마태복음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 있으며(마 18:14, 26:42), 신약 다른 책에도 공통된

사상이다.(요 12:28)90) 그러나 이 간구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루어진 실현된 종말 사상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 땅위의 인간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됨을 내포하고 있다.

문제는 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이루어지게 하는 자)인가 하

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청원에서 이것까지 세 가지 동사가 나온 중에

서, 둘째 청원인 나라의 임함 에서는 능동태이지만, 첫째와 셋째는 수동태

로 되어 있어, 해석상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

스는 하나님의 뜻이 비록 우리 인간에 의해서,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 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바르트는 하나님의 뜻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뜻은 죄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는 사람을 구원하고, 그의

왕국을 나타내는 것인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고 했다.91)

이렇게 하나님에 관한 세 가지 청원을 살펴볼 때, 이 세 가지는 결

코 본질적으로 다른 세 가지의 기도가 아니고, 한 가지 기도(하나님에 관

한)의 다른 면(그의 이름, 그의 나라, 그의 뜻)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

90) 박수암, 『산상수훈』, 155- 156쪽.91) 나채운, 『주기도문, 사도신경, 축도』, 47쪽.

- 43 -

Page 49: T0212705.pdf

나님의 본성과 활동간의 본질적인 관계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일의 내

적 자기일치(일관성)을 보이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그의 활동 중에서 자신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본질적 동일성의 입장에서

보면 이 셋째 청원이 빠져있는 누가복음의 주기도도 마태복음의 그것과

실제적으로 다른 것이 없다.92)

C . 우리 를 위한 청 원

주기도문의 기도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대별된다. 첫째 부분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이 바르게 받들어지고, 바르게

실현되기를 간구하는 기도이다. 그것은 마치 십계명의 10계명 중에서, 제

1계명부터 제 4계명까지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관련되는 계명이고,

제 5계명부터 제 10계명까지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물간의 관계를 규

정하는 계명이라는 점에서 서로 상응한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 후, 우리의 필

요를 간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이다.(마 6:33) 따라서 하나님에 관한

청원을 한 다음, 우리를 위한 청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를 위한 청원이 필요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미 왔지만, 그 완전한 실현은 아직 미래에 있기에, 이 기간을 살아가는 그

리스도인에게는 여러 가지 요청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주기도문에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세 가지를 청원하고 있는데, 우리의 일

용할 양식, 우리의 죄의 용서, 우리를 시험과 악으로부터 보호하심 이 세

92) 위의 책, 48- 49쪽.

- 44 -

Page 50: T0212705.pdf

가지를 청원하고 있다.

1 . 청원 1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떡(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의 하루치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옵소서 (사역)

우리를 위한 첫 번째 청원은 시간적으로는 현재에 관련되고, 내용

적으로는 몸을 지닌 생명체의 삶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문제이다.

a . 오늘

우리가 교회 공동기도문에서 사용하는 주기도문은 개역성경을 따

르는데, 개역성경에는 오늘날 로 되어져 있다. 오늘날 이라는 단어는 오

늘 이라는 단어의 뜻과는 매우 다르다. 오늘 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shvmer on(쎄메론)이라는 단어로, 24시간, 곧 하루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

러므로 영역은 this day , today '로 번역되고, 독일어는 heute로, 중국 한문

성경은 금일(今日)로 번역되어 있다.

오늘날 은 오늘의 시대 , 최근의 시기 , 즉 하루가 아니라 상당한

시간의 길이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본문의 뜻을 가리울 위험이 있다.

그래서 최근의 표준성경 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 라고

번역하여, 원문에 좀더 가깝고 충실한 번역을 했다.

- 45 -

Page 51: T0212705.pdf

b . 일 용할

일용할 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피우시온(ej pi ouvs i on )이라는 단

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오직 주기도문에서만 사용되었고, 그 당시의 세

속적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를 밝히기 어렵다. 에피우시

오스 (ej pi ouvs i o )는 에피 (ej pi )라는 접두사와 우시오스 (ouvs i o )가

결합된 합성어인데, 우시오스 (ouvs i o )의 어원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네 가지 서로 다른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93)

첫째로, 우시아 (ouvs i )(=존재 또는 생존)를 그 어원으로 보면, 에

피우시오스 (ej pi ouvs i o )는 전치사 에피 (ej pi )와 우시아 (ouvs i )(=존재

생존)의 합성어로서, 생존 또는 존재에 필요한 (necessary for existence)

라는 뜻을 갖는다.(Origen , Chry sostom, T holuck )

둘째로, 있다 라는 동사의 여성·단수·목적격·현재분사인 우산

( )을 그 어원으로 보고, 그 다음에 헤메란 ( )(=날, day )이 생략

되었다고 보면, 바로 오늘을 위한 (for the current day , today )이란 뜻이

다.(A . Debrunner , K . Brugmann, Kirchenfreund)

셋째로, 오다 라는 동사의 여성·단수·주격·현재분사를 그 어원

으로 보고, 그 다음에 헤메란 ( )(=날, day )이 생략되었다고 보면, 다

음날을 위한 (for the following day )이란 뜻이 된다.(T h. Zahn, J . Weiss ,

E . Klostermann )

넷째로, 미래를 가리키는 에피에나이 ( )를 그 어원으로 보

면, 미래를 위한 (for the future)이라 말이다. 즉 종말론적인 구원의 식탁

에서 누리게 될 그러한 양식을 뜻한다.94)

93) 김창락, 『성서읽기 역사읽기』, 142쪽.94) 위의 책, 142- 143쪽.

- 46 -

Page 52: T0212705.pdf

이상과 같은 해석 중에서 브라운(R. Brown), 예레미아스(J .

Jeremias ), 로마이어(E . Lohmeyer ), 하아너(Harner ), 슈바이처(A .

Schw eitzer ) 등 유수한 학자들이 네 번째 설을 따르고, 더구나 그 미래 를

종말론적인 개념으로까지 확대시키면서, 아르톤 (a [r t on-빵, 우리말 개역

본에서는 양식 )을 또한 생명의 양식 (the bread of life)으로까지 보지만,

그것을 절대적인 해석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95)

예수께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

라. (마 6:25)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 6:33)고 하

셨으나, 이 말씀의 의도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

선시하는 생활을 하도록 권하는 것이지, 결코 현실의 생활을 도외시하라는

말씀은 아닌 것이다. 주기도문의 구성이 전반은 하나님께 대한 청원 이고,

후반은 우리를 위한 청원 으로 되어 있다고 보고, 하나님에 대한 것은 하

늘 나라에 관한 일이고, 우리 를 위한 것은 땅에 관한 일이라고 볼 때, 이

에피우시온 (ej pi ouvs i on)을 종말론적인 미래에만 적용시키려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으로 여겨질 수 있다.96)

브라운(R. Brown )이나 예레미아스(J . Jeremias)는 에피우시오

스 (ej pi ouvs i o )를 내일을 위한 떡 곧 종말시의 떡으로 해석하지만, 여기

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종말시의 잔치에는 떡이 아니라, 기름진 것 과

맑은 포도주 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

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

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다. 주

95) 나채운, 『주기도문, 사도신경, 축도』, 54- 55쪽.96) 위의 책, 55쪽.

- 47 -

Page 53: T0212705.pdf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

서 제하시리라. (사 25:6, 8)

종말의 그 대 잔치에는 소와 살진 짐승 (마 22:4) 또는 살진 송아

지 (눅 15:23)가 주어질 뿐 아니라, 마실 것까지 제공되고 있다. 내 아버지

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서

먹고 마시며.....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

22:29- 30) 그 잔치에는 고기와 포도주가 제공될 뿐, 떡은 생략되고 있다.

주의 만찬의 경우에도 예수는 떡과 포도주를 구별하여, 각각 제자

들에게 나누어준 후, 떡에 대해서가 아니라 포도주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

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실 그날까지 나는 포도 열

매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막 14:25) 곧 떡은 종말론적 잔치에

서 다시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포도주는 그때 제공되지만, 떡은 그렇

지 않기 때문이다.

떡은 그날에 이르기 전까지의 양식이 된다. 이것이 결국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떡으로 먹는 그날까지 다시는 떡을 먹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생략된 이유이다. 더구나 종말론적 잔치에서 제공되는 살진 고기와 맑은

포도주는 모두 하나님의 것 이지, 우리의 것 이 아니다. 그러나 주기도문

은 우리의 떡 을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결국 주기도문의 떡 은 미래의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일

상적인 것이다. 따라서 에피우시오스 (ej pi ouvs i o )는 내일 을 위한 것이

기보다는, 또는 우리말 개역이나 새 번역처럼 일용할 이나, 필요한 으로

번역되는 것이 보다 더 적절할 것이다.97)

그러므로 우리말의 일용할 은 나날이 사용할 이라는 뜻으로, 첫째

97) 서중석, 『복음서 해석』, 193- 194쪽.

- 48 -

Page 54: T0212705.pdf

설과 둘째 설 즉, 오늘을 위한 양식 과 존재 즉 생존에 필요한 양식 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98) 다시 말하면 o ;n a [r t on hJmw'n

t o ;n ej pi ouvs i on 은 시간에 관해서는 내일이나 종말론적인 미래가 아

닌 오늘 로, 양식의 내용(분량)에 관해서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 최소한도

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사건에서 그들은 너무 적지도 않고, 너무 많

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당연히 부족해 보

이는 듯하고 또 필연적으로 부족한 것으로 여겨지는 그때에 부족함이 없

다는 말이다.99)

주기도문에서 그날 그날에 필요한 떡을 구하라 한 것도 삶을 지탱

하는 데 극히 필요한 최소의 물질만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가

르치려는 것이다. 창고에 가득 쌓아둘 수 있는 많은 떡이 아니라, 일용할

떡을 구하라는 것은, 신뢰를 철저히 하나님에게 두고 살라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 파송 사건에 대한 보도도 비슷한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여행하는 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먹을 것도 가지지 말

고, 자루도 가지지 말고, 전대에 동전도 넣어 가지지 말고, 신은 신더라도

두 벌 옷은 가지지 말라. (막 6:8- 9; 마 10:9- 10; 눅 9:3) 방랑하는 선교활

동과 혹독한 제자직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이 구절은 결국 신뢰를 소유

에 두지 말고 하나님에게 두라는 권고로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산상수훈

의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마 7:25- 34)로 시작되는 권고들과 일용할 떡 을

구하라는 것은 내용상 일치한다. 요컨대 일용할 떡 을 달라는 것은 삶을

하나님에게만 철저히 위탁하며 살게 해달라는 청원이 된다.100)

98) E . Lohm ey er , T he Lord ' s Pray er (E . T .) (Lon don , 1965), p . 98.99) W . Brug erm ann , 강성렬 역, 『성서로 본 땅』 (서울:나눔사, 1992), 68쪽.

- 49 -

Page 55: T0212705.pdf

c . 양식

본문의 톤 아르톤 헤몬 ( o ;n a [r t on hJmw'n-문자적으로는 우

빵을 )이 무엇을 뜻하느냐에 대해서는 네 가지 설이 있다.

첫째, 가장 단순한 해석으로서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양식이란 뜻

이다. 여기서 아르토스 (a [r t o )가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빵이라고 해서 결

코 주식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넓은 뜻으로는 식물 전체를 말하

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 전반(의, 식, 주)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이 아르토스 (a [r t o )를 영적인 양식(Spiritual food)으로 보

는 견해이다. 그리고 이 영적인 양식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루터는

아르토스 (a [r t o )를 물질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식물(양식)임을 강조하고,

그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하지만, 바르트는 여기의 아르

토스 (a [r t o )를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10 1)

셋째, 이 양식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기도를 성례(Sacrament )

를 위한 기도라고 하며, 초대교회의 매일의 성찬식(Daily communion )에서

쓰여진 것으로 본다. 과연 예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요 6:3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라. (요 6:55)라고 말씀하심으로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참된 생명을 소유하는 요건이 됨을 가르치셨다. 무릇 양식은 우리

의 생명을 지속하게 하는 것인데, 생명에는 육신의 생명이 있는 동시에 영

의 생명이 있다면,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마땅히 우리의 기도할 바라고 한

100) 서중석, 『복음서 해석』, 195쪽.101) 나채운, 『주기도, 사도신경, 축도』, 56- 57쪽.

- 50 -

Page 56: T0212705.pdf

다면, 본문에서의 청원은 좁은 뜻으로는 육신의 양식을, 넓은 뜻으로는 영

의 양식을 다같이 간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아르토스 (a [r t o )의 근본적인 의미는 칼빈이 말한 것처

럼, 우리가 우리의 이 땅에서의 생활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탁

하는 것이다.102) 단지 우리의 육신의 모든 것, 즉 먹고 입는 것뿐만 아니

라,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 나아가 영적인 것도 간구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본문의 청원에 있어서, 강조되는 두 가지의 마

음의 자세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주기도문은 앞에서 하나님에 관한 세 가지의 청원이 끝나고,

본 청원에서 시작하여 세 가지의 우리를 위한 청원 이 이어지는데, 도합 8

번이나 나오는 우리 라는 말은, 이 청원이 나 한 사람만을 위한 청원이어

서는 안되고, 우리 를 위한 청원이어야 한다는 것(give me가 아니고 give

us )이며, 이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예수의 세계관과

뜻이 일치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 청원을 매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

은 하루도 양식이 없이 살 수 없는 만큼, 우리는 마태의 모든 오늘 에 청

원을 드려야 하고, 누가가 말하는 것처럼 날마다 이 청원을 드려야 한다

는 것이다.103)

2 . 청원 2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빚진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빚

102) Calvin , I ns titutes of the Chr is tian R elig ion(E T ), p . 908.103) 나채운, 『주기도, 사도신경, 축도』, 59쪽.

- 5 1 -

Page 57: T0212705.pdf

들도 용서하옵소서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을 우리들이 용서한 것처럼, 어쩔 수 없

이라도 우리의 빚을 용서하소서. (사역)

청원 2의 주제는 죄 용서 문제이다. 마태나 누가는 이 청원을 모두

단순과거 형태(아페스- a [fe ")로 시작하고 있다, 문자적으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달라. 는 것이나, 실제로는 이번만큼은 꼭 용서해 달라. 는 간절한

청원으로 볼 수 있다. 이어서 그 다음 문장을 누가는 현재 형태로, 마태는

또 다시 단순과거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빚 (oj fe i l hvmat a )이라고 되어져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죄 (aJmar t i va ")라고 되어져 있는데, 마태복음의 본문이

아람어에 더 가까운 번역이다. 그것은 아람어 호바 ( )의 번역으로서,

빚 혹은 부채 를 의미한다.104) 이렇게 마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

서를 쓰면서,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아람어 호바 ( )의 개념을 도입하

여 오페일레마타 (oj fe i l hvmat a )를 썼으나, 누가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복

음서를 썼기에, 그들에게 더 익숙한 본래적인 의미로서의 하마르티아

스 (aJmar t i va " )를 쓴 것이다.

누가는 빚 이란 언어를 의미상 죄 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

은 유대인들이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 으로 보았고, 또 이웃에 대한 빚 으

로 본 것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으로 보았다. 이것

은 죄의 엄중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죄를 하나님께 대한 빚으로 생

각한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적인 문화와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들에

104) 박수암, 『산상수훈』, 158쪽.

- 52 -

Page 58: T0212705.pdf

게 이 복음서를 쓴 누가는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것이 금전적 채

무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죄의

문제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빚을 죄 라는 말로 풀어서 쓴 것이다.105)

그러나 누가는 같은 절 하반에서는 본래적인 어휘로 돌아가 오페

이론티 (oj fe i vl ont i )를 쓰고 있다. 이로써 보면 이 낱말의 사용에서는 누

의 것보다 마태의 것이 더 본래적이며, 두 어휘가 어원적으로는 다르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굳이 빚 으로만 번역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아람

어에서 빚 과 죄 는 동일한 낱말이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빚 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문자

그대로의 빚 이 성립될 수 없다.106)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 죄 사함을 빌어야 한

다.107)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죄가 용서되지 않을 경우에는 정상적

인 관계가 회복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죄뿐만 아

니라, 빚이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인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빚진 사람을 용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쓰인 동사 아페카멘 (aj f men

은 현재완료형으로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완료형 아피오멘 (aj f i

men)으로 되어 있어, 마태복음에 있어서는 일회적인 행동이, 누가복음에

있어서는 계속적인 것을 나타낸다.

105)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168쪽.106) 김창락, 『성서읽기 역사읽기』, 144쪽.107) 나채운, 주기도문의 번역상의 문제점, 『성서원문연구』제8호 (2001. 2):

38쪽.

- 53 -

Page 59: T0212705.pdf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 (t oi ' "

oj fe i l evt a i " )로 되어 있는 것이, 누가복음에서는 우리에게 죄 지은 모

든 사람들 (pant i ; oj fe i vl ont i )로 되어 있다. 전자에 있어서는 복수로

되어 있고, 후자에 있어서는 단수에다 모든 (pant i )이라는 관형사를 붙여,

실질적으로는 다를 것이 없으나, 표현상으로는 전 포괄적인 보편성을 드러

낸다.108)

그리고 이 청원2 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주었듯

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할 때, 우리 어감으로는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를 모델로 삼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

할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하

나님도 우리의 죄의 빚을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의미가 된다. 우리 이웃

에 대한 우리의 용서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듯한 어감을 준다.109)

사실 구문상으로 볼 때,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부사 wJ "로 연결되

어 있는데 비해서, 누가의 경우에는 접속사 ga ;r 로 되어 있지만, 의미상으

로는 위의 어느 경우든지 후반절이 전반절의 전제 또는 결과가 되는 점에

서 다름이 없다. 유대인들은 이와 같이 인간간의 용서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을 기준

으로 풀어보면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

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죄들)을 용서하겠나이다. 라는 뜻이다.110 ) 그러나

신약 시대에서의 용서는 다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

아 하나님 앞에서 이미 용서함을 받았다.111) 하나님의 사죄는 하나님의 은

108) 나채운, 『주기도문, 사도신경, 축도』, 61- 62쪽.109)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169쪽.110) 위의 책, 170쪽.

- 54 -

Page 60: T0212705.pdf

혜로 말미암은 자유로운 선물이지, 우리의 사죄와는 상관이 없다.

실제로 마태복음에는 용서의 순서에 대한 두 가지 이해가 공존하

고 있다. 주기도문 다음에 곧이어 나오는 예수의 선언, 즉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

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 15)에는 조건부 용서, 곧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

의 용서에 앞서야 할 전제조건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마 18:23- 35)에서는, 왕이 일

만 달란트 빚진 자의 간청을 듣고 그의 빚을 탕감해 주었을 때(27절), 이

것은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상호 용서에 앞서서 베풀어진다는 것을 강

조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왕의 탕감은 그 큰 빚진 자가 아직 작은 빚진

자에 대해 아무런 행동도 취하기 이전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이 비유를 근거로 주기도문의 탄원에서 하나님의 용서가 마치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얻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가 배제된다

고 주장하는 것은 이 비유의 의미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으로 보인

다. 이 비유에서 왕의 첫 번째 행위(용서)는 큰 빚진 자의 행위와 무관하

게 이루어졌지만, 왕의 두 번째 행위(용서하지 않은)는 철저하게 그 큰 빚

진 자의 행위(용서하지 않은)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28절 이하) 결국

이 비유에서 용서의 순서에 관한 이해가 마태 공동체 내에서 아직 분명히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는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앞선다고 주

장하는 그룹과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용서를 앞선다고 주장하는 그룹이

마태 공동체 안에 공존하고 있었음을 반영해 주고 있다. 마 18장 23- 27절

은 후자의 사상을, 18장 28- 35절 및 6장 14- 15절 등은 전자의 사상을 대

111) 나채운, 『주기도문, 사도신경, 축도』, 62쪽.

- 55 -

Page 61: T0212705.pdf

표하고 있다. 주기도문의 죄 용서의 청원은 크게 보면 전자의 입장을 대변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청원의 ...한 것같이 에서 모델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용서의 행위라기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

용서의 불가피한 법적 상황이기 때문에, 이 청원은 전자의 입장에 속하면

서도 그 입장을 다소 변경시키고 있다.

결국 이 청원은 이렇게 재구성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토라의 해방법 때문에, 우리끼리는 싫어도 마땅히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빚들도 어쩔 수 없이라도 꼭 용서하시옵소서.

이것이 마태가, 용서에 대한 간절한 간구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단순과거로

이 청원을 구성하고 있는 이유이다.112)

하나님께 죄 사함 받음과 우리 이웃에 대하여 죄 용서함이 이렇게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웃에 대한 죄 용서 없이 하나님에 대한 죄

사함 받음이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이웃에 대한 죄

용서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공로를 내세워서 그 반대 급부로 하나님께

죄 사함 받는 것은 아니다. 이웃 사랑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죄에 대해 용서를 비는 자들로서,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서 용서를 비는 것은 헛

것이라는 말이다.113)

그러므로 이 주기도문의 죄 사함의 청원이 의미하는 바는 조건적

인 사죄가 아닌, 순환적인 사죄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 무조건적인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은 인간은 거기에 대해 반사작용으로 형제의 죄를 용

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용서 행위가 있을 때만이 하나님은 완전한

구원을 허가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수적인 은총(과거)과 거기에 대

112) 서중석, 『복음서 해석』, 200- 201쪽.113)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171- 172쪽.

- 56 -

Page 62: T0212705.pdf

한 인간의 반응(현재)이 하나님의 또 다른 은총을 불러오는데(미래) 크게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자는 반드시 그 사랑을

반사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를 지니게 되며, 이 의무를 지키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수직적 차원과 수평

적인 차원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신자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114)

3 . 청원 3

우리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으로부터 구하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데려가지 마시고, 오히려 악으로부터 우리를 건

져주소서. (사역)

누가복음은 이 청원의 앞 부분만을 사용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는데, 마태는 아마도 이 청원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악

으로부터 구하옵소서 를 덧붙인 것 같다. 따라서 마태의 청원은 이 두 개

의 간구로 되어져 있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 상관 없는 간구를 연결해 놓

은 것이 아니라, 부정(否定)의 간구와 긍정의 간구를 대립적으로 관련지어

놓은 것이다. 즉 ......하지 아니하고, ......하다 (not .....but )라는 상관적 의미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둘은 의미상으로 하나의 대립적인 통일체를 이

루고 있다. 부정문과 긍정문이 이렇게 상관 관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문

장을 번역하는 경우에, 긍정문 앞에 다만 이라는 부사를 붙이는 것은 오역

이다. 우리말에서 다만 은 오늘은 나가지 말라. 다만 도서관에 가는 건

114) 박수암, 『산상수훈』, 159쪽.

- 57 -

Page 63: T0212705.pdf

좋다. 또는 가도 좋다. 다만 고생은 각오해라. 에서처럼 앞의 말을 받아

서 조건부로 이와 반대되는 말을 할 때에 사용하는 접속부사이다.115 )

우리 청원 3 의 시험에 들게 하지 말고, 악에서부터 건져달라는 이

청원은, 우리를 세상의 어려움에서 지켜달라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세 가

지 청원에서, 일용할 양식에 대한 첫 번째 청원은 육신적인 것임에 대해,

죄의 용서를 구하는 둘째 청원과 유혹과 악으로부터 보호를 구하는 셋째

청원은 영적이며 심적인 것이고, 다음 둘째 청원이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자율적인 것에 대한 것임에 대해, 셋째 청원은 외부로부터

오는 유혹이나 악과 같은 타율적인 것에 대한 청원이라는 점에서 상이점

이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위한 이 세 가지 청원은 앞선 하나님에 관한

세 가지 청원과는 달리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구문상으로도 볼 수

있다. 즉 앞선 세 가지 하나님에 관한 기원에 있어서는 그 기원들 사이에

접속사 없이 문장의 첫 머리가 다 같이 명령형 동사(aJgi asqhvt w,

ej l qevt w, genhqhvt w)로 시작되어 있는데 비해서, 우리들을 위한 청원에

있어서는 넷째 청원과 다섯째 청원과 여섯째 청원 사이에 접속사 ka i (그

리고)로 연결하고 있다.116 )

또한 이 청원을 하나의 청원으로 간주할 것인가? 별개의 청원으로

(따라서 우리를 위한 넷째 청원으로) 간주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예를 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별개의 청원으로 보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라는 청원은 미래의 죄에 대해,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청

원은 이미 범한 죄로부터 구해 주기를 청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칼

빈은 13절 전반과 후반을 한 가지 청원으로 보며, 헨드릭슨 등 오늘날의

115) 김창락, 『성서읽기 역사읽기』, 144- 145쪽.116) 나채운, 『주기도문, 사도신경, 축도』, 65쪽.

- 58 -

Page 64: T0212705.pdf

여러 학자들도 이것을 한 청원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츠거 교

수가 표현한 것처럼 이 두 절을 지키심 (protection )이라는 하나의 범주 속

에 넣을 수가 있다.117 )

여기서 전반 절(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와 후반 절(악에서 구

하옵소서)와의 연결은 12절과 13절간의 연결 접속사 ka i 와는 달리, 접속사

aj l l a (but )로 되어 있어, 소극적인 청원과 적극적인 청원이 한 청원 가운

데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118 )

a . 시험 (pe i ras mov )

여기서 사용된 페이라스모스 (pe i r asmov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마사 ( )의 번역인데, 이 히브리어 마사 나 헬라어 페이라스모스 는 둘

다 이중적인 의미로 쓰이는 단어이다. 하나는 유혹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다른 하나는 시험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어떤 때는 유혹과 시험이 섞여 사

용되기도 한다.119)

하지만 이때까지의 우리말 번역성경의 실재를 보면, 해방 전까지의

번역에서는 거의 시험 으로 일관하고 있으나, 해방 후의 번역에 있어서는

유혹 이 우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시험 으로 번역한 것은 『새로 옮긴

신약성서』(1961년), 『표준신약전서』(1983년), 『현대인의 성경』(1985

년), 『표준 새번역』(1993년) 등 넷인 데 비해서, 유혹 으로 번역한 것은

『신약전서 새번역』(1967년). 『공동번역』(1971년), 『현대어 성경』

(1978년), 『천주교 신약성서』(1964년), 『천주교 200주년 기념 신약성

117) 위의 책, 69- 70쪽.118) 위의 책, 70쪽.119)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177- 178쪽.

- 59 -

Page 65: T0212705.pdf

서』(1991년), 『개역성경 개정판 신약』(1995년) 등이다.120)

우리말에서 일반적으로 재능이나 실력 따위를 검사하고 평가하거

나, 사물의 성질을 실지로 증험할 때 쓰는 시험 이란 말에는 헬라어 페이

라스모스(pe i r asmov )가 주기도문에서 가지고 있는 뜻은 전연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면 주기도문 본문에서 말하는 페이라스모스(pe i r asmov )란 무슨

뜻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먼저 그 시험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판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낱말의 동사형 페이라조(pe i r - 시험하다. 유혹하다)의 주체

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마귀, 인간 셋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그 행위

를 할 수 있는, 대립적인 두 존재는 하나님과 마귀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

도의 주체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과, 시험 또는 유혹의 주체인 마귀의

삼각 관계가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우리가 우리를 죄 가운데로 유혹하는 마귀(악한 자)의 행위에 빠져들지 않

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것과, 그 행위가 시

험이 아닌 것은 본 문맥상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지만, 약 1:13에서도 볼

수 있다. 즉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

지 아니하시느니라. 더구나 본절 후반이 악으로부터 건져 달라는 것을 보

아서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의 주체도, 악으로 유혹하는 주

체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121)

따라서 마귀가 하는 일은 우리를 죄와 악에 빠지게 하기 위한 유

혹인데 대해, 하나님의 경우에 우리로 일시적인 어려움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은 시련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기는 하지만, 유혹하시지는

120) 나채운, 주기도문의 번역상의 문제점, 38쪽.121) 위의 책, 39쪽.

- 60 -

Page 66: T0212705.pdf

않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는데,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

고, 우리의 믿음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기는 하지만, 유혹하시지는 않는다. 유혹은 마귀가 하는 것이

다.122)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페이라스모스(pe i r asmov )는 신약에 21회 나

오는데(동사형은 38회) 그중 딤전 6:9에서만 유혹 (tempetation )의 뜻으로

쓰이고, 나머지는 모두 시험 (trial, t esting )의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리

고 후자의 경우는 마지막 날에 성도들에게 있을 거짓 선지자나 적그리스

도 등의 박해 또는 유혹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페이라스모스

(pe i r asmov )이 가진 성질을 정리해 보면,

첫째, 시험은 보편적이며, 불가피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시조 아

담이 시험을 받은 이후,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에게 숙명적인 것이다. 시

험은 인간의 죄성을 전제하는데, 모든 인류는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

암아 근본적으로 죄성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시험은 그것이 어떠한 재난과 인간의 불행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어떠한 시

험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시험을 다 이길 수가 없다. 즉 인간

은 마귀보다 약한 존재로서 마귀를 이길 수가 없고, 하나님만이 마귀를 이

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시험에 들지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123) 이 시험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들

이기 때문에 당하는, 즉 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과 그의

나라의 확장과 그의 뜻의 성취를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에 당하는 모든 핍

122)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178쪽.123) 나채운, 『주기도, 사도신경, 축도』, 68- 69쪽.

- 6 1 -

Page 67: T0212705.pdf

박과 환난과 유혹을 가리킨다.124)

b . 우 리로 시험 에 들 게 하 지 마 옵시 고

이 문장을 문자대로 직역하면 우리를 시험 안으로 인도하지, 이끌

지, 빠뜨리지 마시옵소서. 이다. 여기서는 마귀의 유혹이 전제되어,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는 마귀의 유혹을 저지할 힘이 없기에, 그래서 하나님이 우

리를 그 마귀의 유혹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막아 주시옵소서. 마귀의

유혹에 떨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막아 주시옵소서. 라고 간구하는 것이

다.125)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를 유혹으로부터 면하게 해 달라는 것 이 아

니라, 유혹 안에서 지켜달라는 것 이다.126) 주님께서도 그의 소위 대제사

장의 기도문에서 제자들을 위해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기를 위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했다.(요 17:5)127)

c . 악으 로부 터 구 하옵 소서

이 청원은 누가의 주기도문에는 없는 청원이다. 여기서 악 으로 번

역된 토우 포네로우 (t ou ' ponhr ou ' )는 악 이라는 중성명사 2격과, 악한

자 라는 남성명사 3격은 형태가 꼭 같기 때문에, 여기서 어느 의미로 사용

되었는지 확실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만약 중성명사 3격으로 보면 악으로

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주소서. 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며, 남성명사 3격으

124) 박수암, 『산상수훈』, 160쪽.125)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178쪽.126) 나채운, 주기도문의 번역상의 문제점, 39- 40쪽.127) 박수암, 『산상수훈』, 160쪽.

- 62 -

Page 68: T0212705.pdf

로 보면, 악한 자 라면 틀림없이 마귀를 두고 한 말이기에, 따라서 마귀

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주소서. 라고 이해해야 한다.128)

중성으로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유대교 배경을 가지고 토론한다.

즉 유대교 내에서 마귀를 지칭하는 이름들이 여러 가지 많지만, 악한 자

로 이름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복음서에서도 명백히 나오는 경

우가 별로 없는 것 같으므로, 중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요

즘처럼 마귀의 인격적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은 악으로부터

구출하소서.라고 보려고 하기 때문에, 중성으로 해석하려고 한다.129)

하지만 복음서를 자세히 보면 여러 곳, 예를 들면 마태복음 13장

19절과 38절 등에 악한 자 라는 말이 나온다. 누가복음 22장 28- 32절에 보

면 거기에서도 시험 이라는 말이 바로 마귀 이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누가복음 11장 26절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유대교 배경 문

서에 마귀를 악한 자 라고 명백히 부르는 곳이 별로 없다 하더라도, 복음

서 곳곳에 악한 자 라는 말이 나올 뿐만 아니라, 마귀가 악하다 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마태복음의 마지막 우리 청원의 토우 포네로

우 (t ou ' ponhr ou ' )는 남성으로 봐야 한다. 즉 마귀를 지칭한다고 봐야

한다는 말이다.130)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를 유혹에 떨어지게 않게 하소서 라는

말 자체가 이미 마귀를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더 나아가 마태는 바로 이

점을 확연히 드러내기 위해, 두 번째 부분을 덧붙였기 때문에, 당연히 여

기 악한 자는 남성으로 보고, 마귀를 지칭한다고 봐야 한다.131)

그리스도인들은 악 이라는 무인격적·추상적 실재로부터 위협을

128)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179쪽.129) 위의 책.130) 위의 책.131) 위의 책, 180쪽.

- 63 -

Page 69: T0212705.pdf

당하고 있는가? 악한 자라는 인격적 존재(여기서는 악마, 마귀를 지칭한

다.)가 일으키는 위험에 처해 있는가? 악 이라는 추상명사로 이해하면, 인

간이 바질 수밖에 없는 악의 보편성이 부각되고, 악한 자 라는 인격적 존

재로 이해하면 , 그리스도인들이 위험에 빠져 있는 절박성이 부각된다. 예

수의 제자들이 악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인격도야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

하여 이러한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가 일으키는 악독한

폭력으로부터 구출 받기 위하여 이러한 기도를 드려야 했던 그들의 절박

한 삶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악한 자 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할 것이다.132)

이상으로 우리는 주기도문의 둘째 내용인 우리를 위한 세 가지 청

원 에 대해서 살펴보았거니와 이것들은 실로 인간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

는 것으로서 실질적인 영역에서, 또한 시간적인 차원에서 잘 조화를 이루

고 있다. 넷째 청원이 육적인 필요에 상응한 것이라고 하면, 다섯째 청원

은 영적인 필요에 상응한 것이라 할 수 있고, 넷째 청원이 현재의 필요에

상응한 것이라고 하면, 다섯째 청원과 여섯째 청원은 각각 과거와 미래의

필요에 상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또한 전반의 하나님에 관한

청원과 후반의 우리를 위한 청원도 전적으로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

로 상관적인 관계에 있다.

즉 우리에 관한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하

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사실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루어

진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모든 필요(욕망)가 충족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다.133)

132) 김창락, 『성서읽기 역사읽기』, 147- 148쪽.133) 나채운, 『주기도문, 사도신경, 축도』, 73쪽.

- 64 -

Page 70: T0212705.pdf

D . 송 영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

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언제나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사역)

이 송영 부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

다. 는 고대의 권위 있는 사본, 즉 시내산( ), 바티칸(B), 베자(D) 사본 등

가장 권위 있는 사본들에는 없는 것이지만, 후대에 예전적인(liturgical) 필

요에서 첨가된 것으로서, 성경 번역상으로는 혹은 탈락시키기도 하고, 혹

은 괄호 안에 처리하기도 하지만, 예배시의 기도로 드릴 때에는 어느 나라

말을 불문하고 다 이 부분을 포함시킨다. 그것은 이 송영 부분이 주기도

본문 전체의 구성에서 볼 때, 그 마무리가 되기 때문이다.134)

어떤 사람은 이 송영을 다윗의 송영(역대상 29장 11절)이라고 한

다. 역대상 29장 11- 13절과 같은 송영은 옛적부터 유대인들이 사용했으며,

또 사본에 따라 주기도문의 송영과 동일한 송영이 있다는 것과, 그 송영이

주님의 가르침과 성경의 모든 진리와 일치한다는 것으로 보아, 이 송영을

주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본문으로 인정하고 사용해도 조금도 모순이

없다. 오히려 주기도문을 더 완전케 함으로, 이 송영을 생략하는 것은 합

당치 못하다. 주기도문을 외우고 하나님께서 꼭 응답해 주시리라고 믿을

때, 자연히 이 송영이 마음에서 넘쳐 흘러나오게 됨을 막을 수가 없다. 따

라서 영원토록 이 송영이 교회와 함께 끊이지 않을 것이다.135)

134) 나채운, 주기도문의 번역상의 문제점, 40쪽.135) 고재봉, 주기도문 해석에 관한 연구, 『복음과 실천』제 9집 (1986) :

- 65 -

Page 71: T0212705.pdf

대개 라는 말은 우리말 개역본의 괄호 안에 있는 송영에는 나타나

지 않고, 찬송가에 부기되어 있는 주기도문 본문에 있는 것으로, 헬라어

호티 ( )에 대한 번역이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호티 ( )라는 접속사가

맨 앞에 놓여있다. 호티 ( )는 본래 원인을 나타내는 종속접속사이다. 그

러므로 호티 ( )는 원칙적으로 종속문에 사용되는 것이지, 독립된 문장

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원인을 나타내는 종속접속사일 경우에 그 뜻은 ....

하기 때문에 (because)이다. 그런데 헬라어 문장에서는 물리적인 인과관계

를 서술하는 원인 (cause)이라는 개념과 논리적 근거를 서술하는 이

유 (reason )이라는 개념을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고 양쪽에 모두 호티 ( )

를 사용한 경우가 많다.

영어문법으로 설명하면,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는 for '인데, 그것

은 대등접속사이고, 독립된 문장에서 사용될 수 있다. 서구어 번역서들은

모두 이 송영의 호티 ( )를 이유를 뜻하는 대등접속사 for '로 번역했다.

그것은 적절한 것으로, 송영의 내용이 청원의 내용에 선행하는 원인이 아

니기 때문이다. 이 송영은 후대에 첨가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청원 전체에 연관하여 그렇게 간구하는 신앙적 근거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136)

그러면 우리말의 대개 는 어디서 유래하는가? 그것은 우리말의 한

자어 대개 (大蓋)에서 유래한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말 성경 번역의 참고

자료가 되었던 중국어 성경이 카이 (蓋)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대개 (大蓋)는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 라는 뜻으로, 동음이의어(同音

異議語)인 대개 (大槪; 대강 말해서, 대체적으로)와는 다르다.137) 그러나 주

기도문에 대개 (大蓋)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사람조차도 그 낱말의 의미를

44쪽.136) 김창락, 『성서읽기 역사읽기』, 148쪽.137) 나채운, 주기도문의 번역상의 문제점, 41쪽.

- 66 -

Page 72: T0212705.pdf

아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또한 그 의미는 원문의 의미에도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쪽이 바람직하다. 대개 (大蓋)를 대체할 적합한 우

리말이 없다.138)

송영의 내용을 살펴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다. 이

셋은 절대자 또는 절대권력자를 서술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 송영

이 처음 작성된 그 당시에는 로마 제국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오로지 로마 황제의 것임을 인정하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

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용감히 고백하면서 살아갔다. 이러한 고백 속에는 로마 황제의

절대권을 부정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개역)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영원하도록, 영원토

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것이옵니다,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공동번역)의 의미상의 차이를 명백히 밝혀야 한다.

그 사람에게 집이 있다. 라는 말은, 그 사람이 집을 소유하고 있

음을 뜻한다. 반면에 이 집은 그 사람의 것이다. 라는 말은 그 집의 소유

권을 배타적으로 그 사람에게 한정시키는 말이다. 즉 다른 사람은 그 집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된다. 그것은 네 형 것이야. 라고

하면, 너는 그것에 손대지 말라. 너는 그것을 가지려고 넘보지 말라. 는

뜻이 된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아버지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

은 다른 이를 배제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권리로 확인하는 신앙적

행위이다.139 )

그리고 우리는 이 송영에서 주기도문의 하나님과 관련된 처음 청

원의 3가지 내용을 더욱 강조하는 청원의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이 3가

138) 김창락, 『성서읽기 역사읽기』, 149쪽.139) 위의 책, 149- 150쪽.

- 67 -

Page 73: T0212705.pdf

지의 단어(나라, 권세, 영광) 앞에 헤 ( )라는 정관사가 있다. 첫째, 그 나

라는 우리가 기도하는 땅 위에 임하여야 할 하나님 나라이며, 그것은 그

나라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 권세는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

님의 뜻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통치권이며, 그것은 그 통치권

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 영광은 우리가 기도하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것은 그 영광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관련된 주기도문은 그 의

미를 송영에서 더 분명히 해주며, 소망을 더욱 실질적인 것으로 마지막날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면서,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

음을 믿게 한다.140)

이상과 같은 주기도문은 그 구성에서 볼 때, 일반적인 기도가 가지

는 세 가지 기본 요소와 일치한다. 일반적인 기도의 세 가지 요소란, 첫째,

하나님과의 만남(encounter ), 둘째, 하나님과의 대화(dialoge), 셋째, 하나님

과의 일치(conformity )인 것이다. 즉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 불러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다. 다음 하나님에 관한 것

(T hou- petitions )이나, 우리 자신에 관한 것(We- petitions)을 아뢰면서 대

화한다. 셋째로 모든 것의 성취를 하나님께 위탁하면서 일치 를 이룬

다.141)

140) 고재봉, 주기도문 해석에 관한 연구, 44- 45쪽.141) 나채운, 『주기도문, 사도신경, 축도』, 75쪽.

- 68 -

Page 74: T0212705.pdf

IV . 주기도문의 신학적 특징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는 말

로 시작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에는 아무런 손상이 가지 않게 하면서, 본

래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려고 한다면, 그렇게 하지 말고... 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즉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해봐. 를 줄인 말이

이렇게 해봐 이다.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는 말도, 그 앞에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라는 말을 넣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이 말

은 너희는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이렇게 기도하라. 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하면 안된다는 말인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 앞에 있는 구절

을 보면,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

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

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5- 8)

결국 이렇게 기도하라 는 말은 외식하는 기도나 중언부언하는

- 69 -

Page 75: T0212705.pdf

기도를 하지 말고 이렇게 기도하라 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율법 밑에서 모

든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기도 생활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의 참다운

뜻을 모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왜곡시키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의 기도

생활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의 구속을 위한 역사의 섭리를

모르고, 오로지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려는 의식적인 종교적 행위로 전락시

킨 것으로 예수는 평가하고 있다. 참 종교성의 실현은 하나님을 올바로 알

고, 그의 구속을 위한 섭리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중언부언( Jg ) 는 헬라어 원문상, 어

린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말을 배울 때, 그 뜻도 알지 못하고 부모를 따라

할 때의 발음에서부터 이 단어가 유래하며, 의미 없는 단어의 기계적인 반

복을 말한다. 오랜 신앙 생활과 오랜 기도 생활에서 어쩌면 우리의 기도

용어는 하나의 익숙한 기계적인 언어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

의 기도에 영혼이 실려있지 않을 때도 많이 있으며, 그 기도의 의미를 느

끼지 못하며, 무의미한 단어의 반복만을 하고 있을 때도 있다.

예수께서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이방인의 기도라고 하시면서, 저

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만 하나님이 들으실 줄 안다고 하셨다. 기도의 시간

을 오래 잡으면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실 것으로 생각하고, 또 무조건 오래

엎드리기만 하면 그것이 좋은 기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러한 기도를,

바로 이방인의 기도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는 이러한, 내용 없이 중언부언하는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기

도를 거부하시고, 새로운 형식의 기도인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는데, 이

간결하고 명료한 주기도문은 비록 짧지만, 그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

는 충분성과 포괄성이 있다. 주기도문은 모든 간구와 서원을 포함하고 있

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들어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

- 70 -

Page 76: T0212705.pdf

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계와 우리 상호간의 관계와, 일상생활을 지극히 사

소한 요망사항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 등등의 모든 것이 여기에 들어있

다.

이러한 주기도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먼저, 하나님 중심의 기도이다. 주기도문은 무엇을 먼저 기도할 것

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주고 있다. 기도의 우선 순위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무엇을 달라는 기도부터 하기

쉬운데, 주기도문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하늘

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말로 시작해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라는 말로 끝나고 있다. 즉 아버지 로 시

작해서 아버지 로 끝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주기도문은 나의 필요보다 하

나님이 우선시 되는 하나님 중심의 기도이다.

둘째, 인간에게 절대로 필요한 기도이다. 주기도문에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세 가지의 문제, 곧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 문제, 그리고

시험의 극복문제에 관한 기도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일용할 양식은 현재적

인 문제이며,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과거의 문제이고, 시험에 들지 않

게 해달라는 간구는 미래에 속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인간의

모든 문제뿐 아니라,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전부 다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며, 아울러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인간에게

절대 필요한 기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주기도문을 타종교의 주문처

럼 단순히 암송할 것이 아니라, 기도의 정신과 기도의 올바른 태도와 기도

의 전부를 배울 수 있는 귀중한 것으로 여겨, 진정한 주기도문의 의미와

뜻을 생각하면서, 주기도문의 생활화를 이룰 수 있는 기도생활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 7 1 -

Page 77: T0212705.pdf

V . 주기도문의 교역적 적용

A . 산 성교 회 성 도들 의 기도 생 활

1 . 산성교회의 약사

산성교회(구. 서산교회)는 대구제일교회 당회의 개척교회 설립 결

의에 의해, 1979년 11월 11일, 대구직할시 달서구 용산동 211번지에서, 대

구제일교회가 담임교역자로 모시기로 결의한 김상두 목사와 함께 대한 예

수교 장로회 서산교회 란 명칭으로 시작되었다. 1986년 3월에 조직교회로

발전한 뒤, 1992년 9월 초대 위임목사 김상두 목사의 사임 이후, 1998년 4

월까지 약 6년 동안 4명의 목사가 바뀌면서, 한 명의 목사도 위임받지 못

하는 혼란기를 거친 뒤, 1999년 1월 제 6대 목사로 김영생 목사를 청빙한

뒤, 1999년 5월에 위임을 함으로써, 2대 위임목사가 임직하게 되었다.

1999년 1월에 출석교인 25명으로 출발한 서산교회는, 도시계획으로 본당이

철거되는 관계로, 남은 교회 땅 용산동 211- 4번지 대지 위에, 지상 3층 건

물로 6월부터 짓기 시작하여 12월 4일 입당하였으며, 5월에 교회 이미지

쇄신을 위해 서산 교회 의 명칭을 산성교회 로 바꾸었다. 이후 계속적인

발전을 이루어 2001년에는 담임목사와 교육목사, 그리고 전임 전도사 1명

이 교역자로 섬기고 있고, 시무장로 3명, 협동장로 3명, 안수집사 6명(협동

및 피택 포함) 권사 9명(협동 및 피택 포함)이 봉사하며, 평균 120- 3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다.

산성교회는 창립 22주년이 되도록 선교 및 대외 지원이 이루어지

지 못하고 있었지만, 새해(2002년) 들어 창립 이래 처음으로, 해외 선교를

- 72 -

Page 78: T0212705.pdf

위해 북방선교회를 지원하고, 국내의 미자립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군 선

교를 전담하고 있는 화산 산성교회를 지원하기로 했으며, 청소년 선도를

위해 소년원을 지원하며, 죽전 여중학교의 소녀 가장을 돕기로 했으며, 선

교적 차원에서 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도록 했다.

2 . 산성교회 성도들의 기도생활

산성교회는 위의 약사에서 보다시피 개척 이래로 많은 환난과 어

려움이 있었던 교회이다. 창립 목사 이외에는 위임목사도 없이, 평균 임기

4- 5개월을 채우지도 못하는 혼란스러운 교회였으며, 목사와 장로, 장로와

집사의 다툼으로 노회 재판뿐 아니라 법정시비까지 일었던 교회였다. 이러

한 인간적인 갈등과 반목으로 인한 성도들의 영적인 피폐함은 심각한 수

준이었다. 신앙생활의 기본인 예배의 기쁨과 감격을 잃고,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굳은 심정으로 지내기에, 자연히 기도생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정규 예배(주일 오전, 오후 예배 및 수요예배) 외에

는 다른 특별한 기도 프로그램도 없으며, 정규적인 모임도 없는 형편이었

다.

1999년, 산성교회는 오직 예수 란 표어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는 목표 아래,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며 사랑하기에 힘씀으로 화합을 이루

며, 영적인 회복을 위해 기도 훈련에 집중했다. 금요 심야기도회를 부활했

으며, 화요일, 금요일 기도훈련과 매일의 새벽기도회와 절기별 특별 새벽

기도회를 계속함으로, 교회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2000년, 2001

년을 넘어 오면서, 24시간 연속 릴레이 기도회와 2주간 24시간 연속 금식

기도회를 통해 암환자의 치료의 기적과 성도들의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되는 체험하면서, 지금은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

- 73 -

Page 79: T0212705.pdf

는 기도 특공대가 조직되어 교회 성장의 초석이 되고 있다.

특별히 산성교회 성도들은 지난 날의 분쟁과 아픔에 대한 상처가

너무나 깊기에, 다시는 이러한 분쟁으로 인한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용서하지 못하는 굳은 마음을 제하여 달라는 기도

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기도를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

B . 주 기 도문 에 서 발견 한 가르 침 의 적용

주기도문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간

직하고 있고142), 교회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기도이며, 예수의 가르침

과 사역 전체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143) 기독교인의 삶은 주님의 가르침

대로 순종하며, 예수를 따라가는 삶이기에, 성도는 이 주기도문의 가르침

을 통해 예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며, 예수의 삶을 따라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사는 성도들은 이 주기도문에 대한 훈련이 있어야 한

다. 산성교회는 이 주기도문의 가르침으로 인해 교회 성장뿐 아니라, 신앙

생활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산성교회는 1999년 6월부터 7월까지, 총 8회에 걸쳐 매 주일 주기

도문을 본문으로 한 설교를 통해, 기도의 정신과 기도의 올바른 태도 및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자세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여

기에 관한 우리 모두의 상호관계 등에 관한 가르침이 있었다.

142)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10쪽.143) 위의 책, 19쪽.

- 74 -

Page 80: T0212705.pdf

1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바로 하늘에 계신 우

리 아버지 하나님 이다. 그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지칭한 것은 메시야

인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속한 자녀들과의 관계의 본질적인 성격을 제

시한 것이다. 이는 당시의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하

나님과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부족

을 채워주시고, 사랑으로 함께 하시며 돌보시는 분임을 말하기 위함이다.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에 계시는 분

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 세상 안에서

의 행위가 세상적인 것과 전혀 다르다는 점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지만 동시에 그 존재와 능력이 우주적임을 들어내기 위함이

다. 그리고 우리 라는 단어를 통해, 성도들은 기독교 공동체의 한 가족일

뿐 아니라, 선교적 소명도 포함되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내 아버지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버지도 되기에, 이것을 먼저 깨달은 사람들에게

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과 함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

다.

따라서,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을 바라보는 신앙은 실망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며, 다툼으로 서로 상처

받은 성도들 간에,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는 우리 는 한 형제이기에,

서로 이해하고, 한 공동체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2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75 -

Page 81: T0212705.pdf

기도의 첫째 시작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내 형편과 처지

와 내 개인적인 요구조건을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

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 이며,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이기에, 성도의 생활을 통해 하

나님께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될 수 있도록 생활해야 한

다.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태도로 드리는 불경건한 예배나 기도

는 차라리 드리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덜 손상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한 분이기에,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는 없고,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거룩한 생활에서 하나님의 거룩

이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영광도 받고, 멸시도 받는다.

그러므로, 다툼과 분란으로 인해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세상 사

람들의 비난받은 것은 우리만의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에, 성도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게 해야 한

다.

3 .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소서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뜻하

며, 하나님의 질서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곳을 의미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

라의 확장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 기도는 나의 삶을 위한

다스림을 달라는 기도이기도 하지만, 복음이 만방에 펼쳐지기를 바라는 선

- 76 -

Page 82: T0212705.pdf

교적인 기도도 포함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갖고서 신적 최고권의 실

제적 행사를 의미한다. 바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한 현재적인 실재이

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 나라는 장차 영광스럽게 임할 미래적인 실재의 의

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는 영광스러운

종말에 종국적으로 임하겠지만, 이 영광스러운 종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

자가 사건과 부활사건 이후 신약 교회에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될 것이라

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이미 현존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

은 종말적인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역사 속에서 시작

되었지만, 이 나라의 실현은 아직 미래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를 비롯한 성도의 모든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에, 하나님에 의하여 주장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하며, 교회와 성도의

의무는 하나님 나라가 속히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며, 하나님 나라가 더욱

확장되도록 힘써야 한다.

4 .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이 뜻을 믿음의

공동체인 성도들을 통해 이루어지기 바라시기에,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나

님으로부터 허락 받은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뜻의 구현에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도들의 순종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보다 우선되어야 하고, 더 나

아가 하나님의 뜻 앞에 우리 자신을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하나님

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은 주여 주여 라고 말하는 자나, 기적을 행하는 자

에게 열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열려있고, 예수에게 속

- 77 -

Page 83: T0212705.pdf

한 사람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적인

진술을 하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청원은 우리에게 그것을 이루도록 노력

을 해야 하는 윤리적인 책임을 부여해 준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온전한 도구가 되기 위

해, 깨끗이 준비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룸에 내 모든 것을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5 .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하나님은 성도들이 굶주림과 헐벗음으로 고통 당하는 것을 원치

않을 뿐 아니라, 필요 이상의 것으로 탐욕스럽게 살기도 원치 않기에 일

용할 양식을 구하라 고 명령하셨다. 초기 교회에서 영적인 해석을 하려는

경향과 달리, 이 청원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사람들의 육적인 필요가 얼

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친히 병자를 고쳤고, 많은 사람

들을 먹이는 등, 실질적으로 인간의 육신적인 필요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

다. 이 청원 속에 보여지는 것은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자기 자녀들의 모든

필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며, 공급해주시는 자상하고 인자한 부성이다.

또한 이 청원은 성도를 먹이는 하나님께 철저한 신뢰를 두어야 함을 말하

고 있다. 하루 하루의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써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생명을 내가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잠언 30장 8절로 9절까지의 말씀처럼, 너무 부

하기도 바라지 말고, 너무 가난하기도 바라지 말고, 그저 오늘 필요한 양

식이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며 살뿐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을 달라 는 기도를 통해 모든 인류가 함께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힘

써야 한다.

- 78 -

Page 84: T0212705.pdf

6 .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죄는 하나님의 법을 떠난 것으로, 인간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해 주실 때만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 죄 없으

신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함으로 모든 죄가 해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용서하

시는 하나님을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그 용서가 우리의 삶에 실현

되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이런 용서의 경험은 자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잘못한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를 통하여 적용되는 것

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죄의 용서를 통하여 은혜를 받은 사람은 거기

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용서의

행위가 있을 때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없고, 서로를 정죄할 수도 없기

에, 용서하지 못하고 그 동안 서로 미워하며 반목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은

혜를 계속 누리기 위해서라도 속히 서로 용서해야만 한다. 사죄의 은총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의로운 백성이 될 수 있고, 사죄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용서해 줄줄 알아야 한다.

7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는 오늘의 문제를 주께 의탁하는 심령이

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는 어제 잘못된 것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

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는 아직 내가 당하지 않는 문제들, 즉 내일

을 위한 기도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험을 없게 해 달라는 것보다는, 시험

- 79 -

Page 85: T0212705.pdf

안에서 지켜달라는 뜻이다. 이런 시험에서의 보호 는 현재 당하는 문제뿐

아니라, 앞으로 닥칠 유혹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겟세마네 동

산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 고 하신 말

씀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청원은 우리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그 어떠한 시험에도 초월하여, 우리들이

그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실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악에서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연약한 우리들은 시험에 들

지 않고 악에서 구함 받기를 하나님께 솔직히 간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연약함으로 비롯될 수 있는, 미래의 영적 유혹과

악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

님께 간구함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연약한 우리의 삶을 전능하신 하나님

의 권능에 연결시켜주는 영적인 통로가 된다. 시험에 든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으로, 이제까지 쌓아올린 공력을 일시에 무너뜨려 버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시험에 들지 않게 조심해야 하는데, 시험에 들지 않는 최상

의 예방책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영적인 힘을 얻고자 하는 기

도이다.

8 . 나라와 권세와 영광

우리의 기도의 중심은 항상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과 하나님의 권

세가 이 땅에서 펼쳐지며,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나라 는 곧 주의 다스림 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온 종교이

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며, 가르치는 종교이다. 권세 는 독재자의 권세

가 아닌 은혜와 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참된 권세, 바로 부활의 권세이다.

- 80 -

Page 86: T0212705.pdf

또 영원히 주께만 있는 영광 은 쇠함이 없는 영광, 언제나 참 만족을 주는

영광, 참다운 지식을 주는 영광이다. 그 영광이 오직 우리 아버지 하나님

에게만 있다.

기도는 기독교 신앙의 특별한 은총이다. 기도는 나의 욕망을 충족

시키는 매개수단이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구하고, 하나님과의 절

대적인 신뢰와 하나됨 안에서, 그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확신을 가

지고 기도하되,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절대 신

뢰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 기도의 극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송영

이며, 그것은 인간의 제일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확장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의지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가득하도록 노력하는 것이기에, 분쟁과 다툼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주기도문 강해는,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성도간의 반목을

치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대상과 기

도자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기도자 서로의 관계는 형제의

관계임을 밝혀준다. 따라서 주기도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진 자는 아

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

하여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서로 용서하고 사

랑할 수 있다.

- 8 1 -

Page 87: T0212705.pdf

V . 결론

주님의 거룩하고 권능 있는 삶의 기초는 기도였다. 그래서 제자들

은 권능과 거룩한 삶을 가르쳐 달라고 말하지 않고,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 가운데 기도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

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주기도문은 짧지만, 복

음의 내용이 모두 들어있고, 예수의 구원사역의 모든 것이 드러나 있다.

먼저 누가복음에 나타난 주기도문에는 마태복음의 유대적 편협성

과는 전혀 무관한 헬라식 포괄성과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기도의 모델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인류에게 보다 적합한 기도로 보여

지고 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진 마태복음의 주

기도문은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하나

의 모델로 이 주기도문이 주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주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부분은 하

나님에 관한 청원이고, 둘째 부분은 인간의 관심과 관련된 우리를 위한 청

원이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

의 관심을 떠나 있지 않고, 인간의 관심은 하나님의 관심에 낯설지 않다.

즉 인간의 일용할 양식, 용서, 늘 따라 다니는 유혹, 인간을 위협하는 악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일,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 하나님

의 뜻이 실현되는 것과 상호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개인이나 가정과 교회에서, 또 성도들의 모임에서 항상 주

기도문을 사용한다. 때때로 뜻은 별로 생각지 않고 심령에 닿는 기도가 아

닌 형식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분명히 파악

- 82 -

Page 88: T0212705.pdf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라

도 주기도문의 바른 이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본 연구 논문은

주기도문의 뜻을 분명히 하고자 시도했으며, 주기도문의 특징을 살펴봄으

로, 하나님 중심의 기도생활과 인간의 모든 문제뿐 아니라,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전부를 다 하나님께 맡기며, 주기도문의 생활화를 이룰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자 했다.

온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주기도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첫째,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청원이 우리를 위한 청원보다

앞서 있는 데서,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

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예수의 말씀에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고 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청원 이후에 나오는 주기도문 후반은 나 를

위한 청원이 아닌, 우리 를 위한 청원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기도가

이기적인 것이나, 자기 중심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공동체적이 되어

야 한다.

셋째,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 영적인 것이든, 신

적인 것이든, 그리고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

넷째, 주기도문은 형식적인 유대교 기도처럼 외식적이거나, 이방인

들의 기도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당시의 어느 기도보다 간결하

면서도, 우리가 간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구체적이고 친밀한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다섯 째, 주기도문은 기도자 서로 간의 관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한 형제이기에,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용서가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83 -

Page 89: T0212705.pdf

주기도문의 석의적 고찰을 통해 찾을 수 있는 이런 주기도문의 교

훈은 우리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며, 분쟁과 다툼으로

갈라진 성도간의 회복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적인

주기도문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함을 제언하는 바이다.

- 84 -

Page 90: T0212705.pdf

< 참 고 문헌 >

1. 주석 류

강병주. 『호크마종합주석- 마태복음』. 서울: 기독지혜사, 1990.

박수암. 『성서주석(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기념)- 마가복음』.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박윤선. 『성경주석- 공관복음』. 서울: 영음사, 1975.

이상근. 『신약성서주해 마태복음』. 서울: 총회교육부, 1982.

. 『신약성서주해 누가복음』. 서울: 총회교육부, 1982.

조경철. 『성서주석 마태복음』.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Calvin , John . 『신약성경주석- 공관복음I』.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0.

Hendrikson, W . 김경신 역. 『누가복음(중)』. 서울: 아가페출판사, 1984.

Henry , Matthew . 홍정수 역. 『누가복음(상)』. 서울: 기독교문사, 1980.

. 고영민 역. 『마태복음(상)』. 서울: 기독교문사, 1985.

Lenski, R. C. H . 문창수 역. 『마태복음(상)』. 서울: 백합출판사, 1973.

Marshall, I. H . 강요섭 역. 『국제성서주석- 루가복음』. 서울: 한국신학연

구소, 1984.

Schw eizer , Eduard. 『국제성서주석- 마태복음』.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

2 . 단행 본

김경신. 『신약이해의 길잡이』. 서울: 도서출판 은성, 1993.

- 85 -

Page 91: T0212705.pdf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2000.

김창락. 『성서읽기 역사읽기』.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9.

나채운. 『주기도, 사도신경, 축도』. 서울: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89.

박수암. 『산상수훈』.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 『신약연구개론』. 서울: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99.

. 『신약성서신학』. 서울: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99.

서중석. 『복음서 해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1.

성종현. 『신약총론』. 서울: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96.

. 『신약성서의 중심주제들』. 서울: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98.

원용국. 『최신 성서 고고학(신약편)』. 서울: 지혜문화사, 1988.

정양모. 『열두사도의 가르침』. 서울: 분도출판사, 1993.

- - - - - . 『마태오 복음서』. 서울: 분도출판사, 1990.

정훈택. 『산상설교- 기록 이유와 목적』. 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1990.

최갑종. 『1세기 문맥에서 본 주기도문 연구 ; 기원, 본문, 그리고 해석』.

서울: 성광문화사, 1985.

Bruce, F . F . 김광택 역. 『신약의 메시지』.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3.

Brugermann, W . 강성렬 역. 『성서로 본 땅』. 서울: 나눔사, 1992.

Drane, John . 이중수 역. 『예수의 4복음서』.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0.

Dunn, J . 김득중·이광훈 역.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서울: 나단

출판사, 1988.

Gundry , R. H . 김일우 역. 『신약개론』.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6.

Hunter , A . M . 박창환 역. 『신약성서개론』. 서울: 컨콜디아사, 1989.

Jeremias , J . 정광욱 역. 『신약신학』.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2.

Kistemaker . S . J . 신성종·최갑종 역. 『현대의 복음서 연구』. 서울: 도

- 86 -

Page 92: T0212705.pdf

서출판 엠마오, 1987.

Ladd, G. E . 이남종 역. 『신약의 중심사상』. 서울: 새순출판사, 1990.

Metzger , B. M . 강유중 역. 『사본학』.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Pow ell, Mark A . 배용덕 역. 『누가복음 신학』.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Reike, B. 번역실 역. 『신약성서 시대사』.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8.

T enney, M . C. 김근수 역. 『신약개설』.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0.

Calvin , John . Ins titutes of the Chris tian R elig ion(E .T .) . Philadelphia:

T he Westminster Press , 1967.

Clarke, A . Clark e 's Com m entary . New York : Abingdon Press, 1962.

Henry , M . S t. M atthew: M atthew H enry 's Com m entary on the

Whole B ible Vol. 3 . Grand Rapids : Guardian Press, 1976.

Jeremias , J . The P ray ers of J esus .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8.

Kittel, G. Theolog ical D ictionary of the N ew T es tam ent . Grand Rapids :

Eerdmans Publishing Company , 1967.

Lohmeyer , E . Our Father . New York : Harper & Row Publisher , 1965.

Lohmeyer , E . The L ord 's P ray er(E .T .) . London, 1965.

Metzger . A T ex tual Com m entary on the Greek N ew T es tam ent .

London,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71.

Pfeiffer , C. F . & E . F . Harrison . eds . The Gosp el A ccording to

M atthew: The Wy cliff e B ible Com m entary . Chicago: Moody

Press , 1976.

Stagg, E . M atthew: The B roadman B ible Com m entary Vol. 8. eds .

C. J . Allen et. al. Nashville: Broadman Press, 1969.

- 87 -

Page 93: T0212705.pdf

3 . 논문 및 정 기 간 행물

고재봉. 주기도문 해석에 관한 연구. 『복음과 실천』. 제9집 1986년.

30- 33쪽.

나채운. 주기도문의 번역상의 문제점 『성경원문연구』. 제8호 2001.

34- 35쪽.

. 주기도문의 형성과 의미에 관한 한 고찰. 『장신논단』. 제 2집

1986. 101- 171쪽.

박수암. 복음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그 말씀』. 제 56권 1997.

44- 55쪽.

서중석. 누가공동체의 구성과 선교적 역할. 『신학논단』. 제 17권 1987.

115- 134쪽.

성종현. 주기도문과 예수의 용서 메시지. 『신학사상』. 제 52집 1986.

140- 141쪽.

손혜신. 주기도문의 유대적 배경. 『그 말씀』. 제 56권 1997. 51- 58쪽.

오덕호. 주기도문에 나타난 나라가 임하옵소서 연구, 장신대학원석사논

문 1986. 85- 86쪽.

한제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 비교 및 적용. 『그 말씀』. 제

56권 1997. 84- 92쪽.

- 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