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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년도 석사학위 논문 어거스틴과 몰트만의 시간이해 비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홍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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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e, Moltmann,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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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도

석 사학위 논문

어거스틴과 몰트만의 시간이해 비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홍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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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과 몰트만의 시간이해 비교

지도 윤 철 호 교수

이 논문을 석사학위 (M .Div ) 논문으로 제출함

1999년 1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홍 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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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서론 1

II. 어거스틴의 철학적 배경 2

1. 플라톤 2

2. 아리스토텔레스 3

3. 플로티누스 4

4. 어거스틴과의 관계 4

III. 어거스틴의 시간이해 7

1. 창조와 시간 7

2. 시간의 본질 9

3. 영원과 시간 10

(1) 영원 10

(2) 영원과 시간 11

4. 종말적 시간 12

IV . 몰트만의 사상 배경 15

1. 20C 후반의 정신적 상황 15

2. 신학적 배경 16

(1) 블로흐의 영향 16

(2) 바르트의 영향 19

V. 몰트만의 시간이해 21

1. 창조의 시간- 주로 어거스틴과 관련하여 21

(1) 시간의 창조에 대하여 21

(2) 과거의 존재론적 우위성에 대하여 23

2. 성서에서의 시간이해 24

(1) 카이로스(Kairos)적인 시간이해 24

(2) 약속사적인 이해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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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언자의 시간 경험: 역사적 사고의 종말론화 25

(4) 묵시사상 26

(5) 메시야적인 시간이해 26

3. 역사 개념에 대한 통찰 28

4. 역사 의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시간이해 30

(1) 미래의 지평에서 역사의 경험 30

(2) 현재화된 과거(vergegenw ärtigte Vergangenheit ) 32

(3) 현재화된 미래(vergegenw ärtigte Zukunft ) 34

(4) 현재화된 미래의 두 가지 과제 36

1) 역사적 시간들의 동시화(Synchronisierung ) 36

2) 역사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의 동시화 37

5. 시간의 근원과 원천으로서의 미래 38

(1) 기존의 기독교 종말론의 범주들 38

(2) 미래의 두 차원: 현상적 미래와 초월적 미래 39

6. 시간 안에 있는 영원 41

7. 종말론적 순간 42

(1) 카이로스와 종말론적 순간 42

(2) 종말론적 순간 43

VI. 결론: 어거스틴과 몰트만의 시간이해 비교 45

1. 시간의 창조 45

2. 시간의 본질 46

3. 시간의 존재 양태 46

(1) 과거, 현재, 미래 46

(2) 현재화된 시간 개념 47

(3) 시간의 근원과 원천으로서의 미래 47

4. 영원과 시간 48

(1) 영원 48

(2) 영원과 시간의 연결점 49

5. 신학적 관심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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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 서론

인간 실존의 문제는 시간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다. 특별히 시간에 대

한 이해는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이해, 그리고 삶의 의미, 나아가서 역사

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기초를 제공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현대의 많

은 철학자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시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

달해 있었던 어거스틴의 시간론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시간론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주제가 있는데, 시간의 창조, 시간의 본질, 영원과 시간의 문제,

종말 등에 초점을 맞추어서 분석하고자 한다.

어거스틴의 시간론을 살펴 본 후에는 현대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문제

의식과 독창적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대표적 신학자 몰트만의 시간론을 살

펴보고자 한다. 어거스틴이 주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실존, 영원앞에서

의 시간적 존재라는 주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에 반해 몰트만은 하나님

의 종말론적 미래가 이 땅에 가져올 새로운 힘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몰트만은 이 역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

가라는 진지한 물음에 신학적으로 응답하고 있다 하겠다.

이 두 신학자의 시간이해를 연구함으로 인하여 기독교 전통의 깊은 뿌

리에 정초하면서도 신학이 갖는 현대적, 실천적 함의와 의무에 대해 소홀

하지 않는 바른 시야를 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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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 어거스틴의 철학적 배경

어거스틴의 시간 이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고대 희랍 철학

자들의 사상에 대하여 고찰하여 어거스틴이 어떤 점에서 그들의 사상을

이어받았으며, 또한 어떤 점에서 그들을 극복하였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바

른 접근이 될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플로티누스

의 시간 이해에 대하여 살펴본 후 그들의 시간 이해를 어거스틴의 것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1 . 플 라톤

플라톤에게 시간은 가시적인 세계와 함께 존재하게 된 것이었다. 천체들

이 규칙적이고 정규적인 방식으로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밤과 낮이 없

었고 햇수의 계산이 불가능했었다. 이러한 천체들은 결코 변화하지 않는

형상의 세계의 영원한 본성에 대한 하나의 복제이다. 이런 것들이 있기 전

에는 결코 시간- 과거, 현재, 미래- 은 없었으니 그것들 없이는 시간이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러한 천체들과 이것들의 운행을

영원성의 움직이는 영상 (Moving image of eternity )라고 표현했다.1)

플라톤은 모든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개체의 근원과 참다운 실재를 이데

아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이데아의 영원성이 현실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모습이 곧 시간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감각적 개체가 이데아의 상(像)이

1) Diog enes A llen , Philosophy for Un der standin g T heology , 정재현,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대한 기독교서회, 1996), p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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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그림자인 것과 같이 시간은 영원의 상이며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시간

은 참된 실재가 아니다. 또한 시간이 영원을 향하여 끊임없이 흘러가기만

한다는 그의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부정되었다.

2 . 아 리스 토 텔레 스

그는 사물의 변화와 운동 속에서 시간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변화와 시간을 연관지어서 설명한다. 변화는 빠르거나 혹은 느리다 하는데

비하여 시간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빠르거나 느림은 시간에 의

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운동의 척도이다.2)

운동이란 무엇에서 무엇으로 움직여 지는 것인데 그 움직임은 연속되어

있다. 결국 시간은 이 연속된 운동에 비례하여 경과되고 있는 것 같이 보

인다. 운동은 변화속에 선(先)과 후(後)의 관계를 가지듯이 시간도 선과 후

에 관한 운동의 수로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시간이

란 선후(先後)에 따르는 운동의 수(數)이다.

그는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시간에 의하여 포섭된다 (All the

things in time should by contained by time)고 말한다. 이는 결국 무한

한 시간 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 천체 운동이 원운동 으로 영구히

운동하고 있다면 무한한 시간 도 가능하지만 그 측정을 누가 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만일 무한한 시간 을 가정한다면, 그런 시간은 한정을 갖고 있

는 사물계속에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존재는 시간속

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시간은 그런 것들을 포섭하지 못하고 그런 것들의

존재를 측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Curt F riedlein , Geschicht e der Philosophie, 강영계, 서양철학사 (서광사,

1985), p .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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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플 로티 누 스

그는 영원한 우주의 항구적인 순환운동의 측정으로서 시간을 개념화하

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거부했다. 그는 우리가 비록 시간의 흐름을

측정하기 위하여 천체 운동의 규칙을 사용하지만 천체의 운동이 시간 안

에서 이루어질 뿐 그 자체가 시간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설파했다.

플로티누스에게서 운동은 영혼의 산물이다. 그에 의하면 감각적 세계가

유출된 근거로서의 지성적 계층구조를 이루는 세 개의 원초적인 실체들-

일자(the ONE ), 정신(nous), 영혼(psyche)- 중에서 영혼은 가장 낮은 단계

의 것이다. 지성적인 영혼은 형상의 세계의 내용물들을 단번에 포착해낼

수는 없다. 따라서 그것은 그러한 내용물들을 하나씩 받아내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시간을 발생시키며 아울러 감각적인 물질의 세계도 유출된

다. 즉 시간은 영혼의 생동과정이 되며 사고들의 연속성을 구성한다. 이것

이 바로 영원성의 움직이는 영상으로서의 시간 이라는 플라톤의 개념에

대한 플로티누스의 해석이다.

플로티누스에게서 시간과 영원은 다른 것으로 전개한다. 영원은 언제나

지속하는 본성속에 있고, 시간은 생성하는 것 속에 있다. 영원이란 순(純)

현재적인 존재로서 항존(恒存)인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영원은 한갓 관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어떤 실재적인 생명

체로서의 존재, 즉 영원자 를 말하는 것이다.

4 . 어 거스 틴 과의 관 계

어거스틴은 시간이 우주와 함께 창조되었다는 플라톤의 관점과, 천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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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라기 보다는 정신적인 현상으로서의 시간을 주장하는 플로티누스의

견해 모두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3) 그러나 창조론에 근거해서 그의 견해

는 이 양자의 태도들로부터 상당히 이탈해 나갔다. 그의 시간론은 창조론

에 정초하고 있는데, 그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함으로써 플라톤의 형

성설 (Formation T heory )4)이나 플로티누스의 유출설 (Emanation T heor

y )5)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플로티누스와 어거스틴은 함께 시간의 피조성 을 단정짓는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르다. 플로티누스가 시간의 신적 기원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

시간의 유출을 가리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있어서 시간의

실체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실체와 일치한다. 그 둘은 절대 영혼

의 활동에서 함께 생긴 것이다. 더욱이 우주는 시간과 분리되어서는 존재

할 수 없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신의 창조로서의 시간에 대하여 말한다.

시간은 신적 본질로부터가 아니라 무로부터 창조된다. 그는 하나의 신적

본질로부터 만물이 유출된다는 플로티누스의 이론을 분명하게 거부한다.

영원의 개념에 대해 플로티누스는 그것은 있었다고 하나 있을 것이다

라고 우리가 말할 수 없고 다만 그것은 있다 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인 것

이다. 그것이야말로 안정된 존재, 즉 미래속에 변화될 아무것도 인정할 수

없고 과거속에 변화된 아무것도 없는 이런 안정된 존재가 바로 영원인 것

이다 라고 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플로티누스의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영원을 창조자의 본성에서 찾아 하나님의 영원성이란 시간의 무한

3) 정재현, op . cit ., p . 474) 세계의 기원에 대하여 태초에 Demiurg e라는 신이 있어서 본래부터 있던

어떤 질료를 재료로 하여 영원부터 존재한 이데아 를 따라 가능한 한 좋게

형성하였다고 설명한다.5 ) 우주는 계층적으로 되어 있으며, 존재의 하강 운동에 의하여 일자 (the

ONE )으로부터 정신 (n ou s ), 혼(psy che), 물질이 흘러 나왔다고 주장한다. 이

것은 흘러 나온 것이지 일자 스스로가 창조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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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 있지않고 절대 불변성 에 있다고 말한다. 만일 피조물이 하나님과

함께 항상 존재해 왔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영원한 존재자라고 말할 수

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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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 어거스틴의 시간이해

1 . 창 조와 시 간

어거스틴의 시간 이해는 창조론과 함께 전개된다. 어거스틴이 이해한 세

계 창조에는 두 단계가 있다. 그는 창조와 형성을 구분하여 당신은 절대

무로부터(de omnino nihilo) 질료(형상이 없는)를 창조하셨고 그 형상이

없는 질료에서(de informi materia ) 세상의 형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6)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창조이해의 배후에는 두 단계의 과정이 있다

고 볼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질료를 절대 무 로부터 창조해 내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이 단계가 무로부터의 창조를 시사한 것이다. 둘째

단계는 하나님이 말씀(Logos )을 통해서 이 질료를 형성하여 피조물을 만

드신 것이다.7 ) 두 창조의 사건은 동시적 또는 무시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

다.

형상이 없는 질료를 창조하신 것과 질료에 형상을 부가하여 어

떤 존재를 만드신 것 사이에는 아무 시간적 간격이 없기 때문에

동시적이라 말합니다.8)

여기서 질료는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므로 절대 무 와는 다르다. 또한

동시에 이것은 형상화될 가능성을 가진 것일 뿐 이미 형상화된 피조물과

6) Augustine, Confession , 선한용,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대한 기독교서회,

1990), XIII, 337) 선한용, 성 어거스틴에 있어서 시간과 영원(성광 문화사, 1986), p. 528) 선한용, 고백록, XIII,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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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다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질료를 거의 무 (prope nihil)라고 불렀

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시작되게 되었을까? 어거스

틴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무형의 질료란 개념에서 찾아 내려한다.

무형의 질료란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아무 형체가 없는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아무 형체가 없는 곳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에 시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형체가 없는 그 질료란 무엇으로 형상화될 수 있는

가능성(capax )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바로 가변성(mutability )의 조건이 된다. 다시 말하면 무형의 질료가 모든

변화의 주체가 되고 가변성의 원리가 된다. 그러나 이 가변성이 시간 자체

를 의미한 것은 아니다. 가변성은 시간적인 존재들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

성과 조건이 될 뿐이다. 시간이란 현상은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하여 무형의 질료를 형성한 세계 창조와 함께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

다. 시간은 무형의 질료에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질서가 있으며 또한 측량할 수 있는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시간은 절대무에 직면해 있는 거의 무 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무

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가변성에 의해 제약받고 있어서 그

자체 내에 정반대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머물러 있지 못하고

유동하여 지나가고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란 있으면

서도 항상 있지 아니한 것 이라고 표현한 것은 시간은 항상 지나가는 것

으로서만 존재한다 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9)

그의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개념에 의하여 시간 역시 무로

부터의 창조의 지배를 받는다. 그의 사고 속에서 시간은 하나님의 피조물

인 것이다.10)

9) 선한용, 시간과 영원, pp. 60-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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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당신이 아무 것도 만드시지 않으셨을 때는 시간도 있

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도 당신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시간도 당신과 같이 영원할 수

는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만이 변함없이 항상 머물러 계시기 때

문입니다. 만일 시간이 항상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벌써 시간이

아닙니다.11)

2 . 시 간의 본 질

어거스틴에 의하면 시간이란 비존재 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

일 우리가 시간의 본질을 어떤 주어진 존재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없고 , 미래는

아직 없는 것 이기 때문이다. 오직 현재만이 지금 존재한다. 그리고 길거

나 짧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현재에도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재는 공

간적인 연장(延長) 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의 본질을 객관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인간

의 내면성에서 의식된 시간 경험으로 이해하려 함으로써 이 문제의 해결

책을 찾는다. 그러므로 그는 세 개의 시간, 즉 과거, 현재, 미래가 존재한

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의 시간이 있다

고 말하는 것도 적당치 않습니다. 아마 과거 일의 현재 , 현재

10) Augustine, T he City of God, XI, 611) 선한용, 고백록, XI,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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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현재 , 미래 일의 현재 라는 세 가지의 시간이 있다고 말하

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시간이 어떤 면에서 우리

의 영혼(마음)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 밖

의 다른 곳에서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즉 과거 일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 일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 일의 현재는 기대입

니다.12)

3 . 영 원과 시 간

(1) 영원

어거스틴은 피조물인 시간 이해를 창조자의 영원성에 도입하여 이해하

였다. 하나님은 시간의 범위에서 먼저 계신 것이 아니라, 영원성에 의하여

세상 이전에 계신다. 즉,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을 초월해 있는 것이며,

단순히 시간의 무한한 확장으로서의 영원성이 아니라 절대 불변성을 의미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이 시간과 다른 점은 그 연장(시간의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에 있는 것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어거

스틴은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항상 같으시고 당신의 세월은 무궁합니다. 당신

의 세월은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습니다...당신의 모든 세월이 동

시적으로 함께 있음은 그 세월이 항상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세월은 흘러 지나가지 않아서 오는 시간이 가는 시간을

12) Ibid., XI,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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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쳐냄이 없습니다...당신의 세월은 하루의 날 이지만 그 날은 지

나가는 매일이 아니요, 항상 오늘 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오늘

은 내일에 의해 밀려나지도 않고 어제를 뒤따라 좇아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영원입니다.13 )

이처럼 어거스틴은 영원을 무한(endlessness )이나 시간의 연속으로 보지

않는다. 시간은 항상 지나가는 것이지만 영원은 항상 머물러 있는 현재

(nunc stans)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은 항상 머물러 있음으로 하나님께는

영원한 현재 만이 있을 따름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 안에서는 모

든 시간과 모든 것이 현존 하며, 그리고 동시적 으로 인식되게 된다. 반면

에 시간은 항상 지나가는 것으로서 머물러 있지 않음(numquam stans ),

즉 무상(無常)을 의미하고 있다.

(2) 영원과 시간

인간은 무상한 시간 안에서 항상 무의 위협, 행복의 상실, 죽음의 가능

성에 직면하여 살고 있다. 따라서 무엇을 얻었다 할 때는 그것의 상실이

뒤따르고, 존재는 비존재를 동반하며, 생성은 멸망을 수반하고, 삶은 죽음

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듯 시간 속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경

험하고 있는 인간 실존의 문제 해결은 과연 무엇일까?

주의할 것은 어거스틴이 결코 시간을 악한 것이라든가 혹은 시간으로부

터의 도피가 인생문제의 해결이요, 구원이라고 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다. 또한 그는 시간을 단순한 정신 현상 또는 환상으로 생각하여 그 실체

성을 소홀히 취급한 것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의 문제는 인간의 영

13) Ibid., XI,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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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생활과 그 의미를 추구한 종교적인 문제였다. 어거스틴이 시간의 본질

을 이렇게도 깊이 규명하고 이해한 이유는 무로 향해가는 시간체험, 즉 무

의 체험을 통해서 인간과 하나님, 시간과 영원을 중재하기 위함이다. 인간

은 비록 시간 속에서 무를 체험하며 살고 있다는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이 부정적인 무의 경험을 통해서 불변하신 영원자에게 그

의 마음의 지평을 열게 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시간론의 배후에는 영

적 관심, 즉 영원한 하나님을 떠난 인간 존재는 항상 불안한 것이므로 영

원자에게 닻을 내려 그를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주제가 놓여있는 것이

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이 시간 속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는가? 시간의

문제는 시간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로지 시간이 영원에 매개(관계)될 때

만 인간은 이 세상에서도 상대적인 안정을 얻을 수 있고 다가오는 미래의

세계에서는 완전한 행복과 안정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영원자가 시간 속

으로 들어와서 시간적인 사건이 된 성육이야말로 인간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성육은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겸손으로서

시간에 매여사는 교만한 인간들을 자기에게로 불러 이끄시는 길이라고 어

거스틴은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이 시간에서 영원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영원자가 먼저 시간적인 존재가 되셨다는 이 성육의 역설을 겸손하게 받

아들이고 굳게 붙들어야 한다. 이렇듯 역사적(시간적)인 성육의 사건을 받

아들이는 것을 어거스틴은 믿음(fides )이라고 했다.

4 . 종 말적 시 간

어거스틴은 헬라주의의 순환적 시간관에 반대한다. 순환적 시간 개념은

대체로 자연질서의 영역, 즉 우주질서를 관찰한데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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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우주의 운동이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그리면서 영구불변하게 반복하

고 순환하듯이, 인간의 영고성쇠의 역사도 영구히 반복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이다.14 ) 순환적인 시간 개념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시작이나

중간이나 끝이 없고 모든 것이 시작이요, 중간이요, 끝이라 볼 수 있다. 따

라서 세계의 창조나 종말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의 과정에서는 엄밀

한 의미에서 새로운 것이란 하나도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시간의 반복을

주장하게 되면 시간의 어떤 순간이나 역사의 어떤 사건에도 심각한 의미

를 부여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창조신앙의 근거 위에서 순환사관을 논박하였다. 시간은 하

나님에 의해서 천지창조와 함께 창조되었기 때문에 시작이 있고 종말이

있다. 그리고 시간의 과정에서는 동일한 것으로 순환되는 것이 아니라 새

로운 것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따라서 시간은 시작과 중간과 종국이 있는

유한한 선이어서 연속되는 각 순간 순간은 이 유한선에서 독특한 사건을

이루고 있다. 또한 역사는 창조 사역과 더불어 창조자의 계획에 따라 세상

의 멸망을 향해 나아간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이 순환사관을 비판한 신학적 근거는 세 가지의 근본적인 기독

교 신앙 때문이다. 그것은 무로부터의 창조, 그리스도의 성육, 그리고 종말

론적 완성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다.

첫째로 태초에 하나님이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창조 신앙은 순

환적 시간 이해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둘째로 그리스도가 시간속에 오신 성육신을 통한 구원의 사건은 숙명적

인 시간의 순환을 자르고 정지 시켜서 구원으로 정향(orient )시키고자 하

는 하나님의 직선적인 드라마이다.

셋째로 순환적 시간관은 종말의 완성을 바라다 보는 기독인의 소망을

14) 이장식, 기독교 사관의 역사(대한 기독교서회, 1992), p.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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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소망이란 본래 우리가 바라는 미래에 있

을 최후의 완성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순환적인 시간관에 있어

서는 과거나 미래의 시간이 사실상 같은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구원과 완성이 없다. 거기엔 다만 인간의 행복과 괴로움이 끝없이 반복될

뿐이다. 여기엔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불합리한 시도밖에 안되며,

역사의 모호성만이 숙명의 수레바퀴와 함께 돌아가는 인생을 지배하고 있

을 뿐이다.15)

이처럼 어거스틴은 순환사관을 배격하면서 시간은 역사의 종말, 시간의

완성을 향해 반복하지 않고 일회적으로 직선적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하였

다.

그는 순환적인 시간관만 반대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시간 개념도 반대

한다. 종국의 완성이 없이 무한히 계속되는 시간은 목적이 없는 역사과정

과 같다. 그는 무한한 시간을 영원과 동일한 뜻으로 보지도 않으며 의미있

는 것으로도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간은 의미와 목적도 없이 막무가

내 무한정 흘러가고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역사는 그

것을 초월해 있는 세계 창조, 그리스도의 성육, 그리고 역사의 완성이라는

사건에 관계되어 있을 때에만 비로소 그 의미와 통일성을 찾을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어거스틴이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창조의 시작부터 종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보는 보편적인 역사관을 처음으로 수립한

기독교적 역사철학자라 볼 수 있다.

15) Augustine, T he City of God, XX, 5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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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 몰트만의 사상 배경

1 . 20C 후 반 의 정 신 적 상황

몰트만의 시간이해를 살피기 위해서는 그가 처해있던 역사적 상황을 간

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18C 계몽주의가 남긴 낙관론이 몰트만 당시 서구

에서는 별다른 의미없는 회의와 절망으로 대체되어 갔다. 20C의 양대전은

인간 역사에서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의 한숨만이 가득차게 했다. 따라서

인류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희망의 소중함을 절실히 각성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은 50년대를 지나고 60년대를 향하면서 무엇인가

새로운 희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라는 안정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고 소련 주도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확대,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팽배 사이에 묘한 희망이 발생했다. 특

히 제 3세계의 독립과 신식민주의 출현 등 급변하는, 그러면서도 안정을

주는 역사 변천 와중에 희망이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사회,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사상의 흐름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어 갔다. 바르트는 말씀의 신학을 말하면서 인간 역사를 양분하여 신

과 인간이라는 수직적 관계를 설정, 역사의 희망을 피안적 세계에서 찾았

으며, 불트만은 역사속에 있는 인간의 실존 문제를 중시한 나머지 역사적

희망을 인간학적으로 협소화시켰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 2차 바티칸 공

의회는 세계 교회 운동에 새로운 희망을 보여 주었고, 1968년에 스웨덴 웁

살라에서 열린 에큐메니칼 운동 총회는 그 표어로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 는 약속의 말을 내걸었다. 미래 에 대한 관심과 가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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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사고, 계획, 설계등은 어디서나 중요한 주제가 되었고, 미래 , 희

망 등을 주제로 한 책과 강좌가 급속히 증가되어 갔다.

전체로서의 역사는 미래의 희망적 관점에서 조망함으로써 기독교 신앙

에 있어서 역사적 차원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조류 속에서

몰트만은 전통적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부터 희망의 신학

을 탄생시켰다. 이 희망은 서구 사상적인 뿌리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기독교 신학적 근거점을 가진 것으로 이

해되었다. 그는 다분히 구원사적 관점에서 세속사를 극복하려는 이분법적

경향을 띠지만 기존의 관념론적 신학을 실천 지향적인 해방의 신학으로

새로이 정초한 공로가 크다 하겠다.16) 또한 종교를 아편으로 공격하고 사

회적 유토피아를 약속하고 나오는 마르크스주의 상황에 대하여 그의 신학

은 기독교의 참된 미래와 희망을 보여주고 책임적인 사랑의 행동을 강조

하는 그리스도의 산 증인의 모습으로 대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17)

2 . 신 학적 배 경

(1) 블로흐의 영향

유대인 맑스주의자였던 블로흐는 그의 저서 희망의 원리 에서 인간은

미래를 향한 길 위에 서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인간 존재의 본질은 그

가 무엇을 소유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

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16) 조성노, 역사와 종말(한국신학연구소, 1992), pp. 35- 3617) 박봉랑, 오늘의 신학 사조, 기독교 사상(81년 4월),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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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흐는 희망을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 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미래요 가능성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의

미래 이지만 블로흐에게 있어서 희망은 개념과 실체가 완전히 일치하는

데 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블로흐에 의하면 아직 현실은 완전한 정신

적 이념, 즉 개념에 합치하는 데 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치의 경

지를 블로흐는 유토피아라고 하는데 이러한 유토피아는 결국에는 세계사

의 전개 방식과 차원에서 성취될 것이지만, 아직도 미래를 향해서 가고있

는 모든 현실 속에서는 그러한 유토피아가 지극히 단편적이고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18 )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 는 1954- 57년에 걸쳐 나왔다. 이 책을 통하여 블

로흐는 초월적이거나 내재적으로 진술된 궁극적인 존재가 새로운(Novum )

실재가 아니라 이미 고정되어 있는 근원적인 존재에 배타적으로 관계하는

한, 서구의 철학적, 신학적 전통들 안에 있는 궁극적인 것을 폐기시킨다고

주장한다. 이같이 새로움과 미래를 추구하는 블로흐의 사고는 전통적인 신

개념 즉 초월적인 하나님(God above us), 실존적으로 해석된 하나님(God

in us) 개념의 한계에 직면한 시대 상황 속에서 몰트만에게 새로운 형태의

하나님 존재를 설명 가능케 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몰트만은 블로

흐의 미래가 가진 무신론, 유물론적 전제를 받아들이지는 않고 블로흐의

성서종교 해석에서 논의된 하나님의 미래를 향한 새로운 존재양식을 받아

들이고 그 미래를 철저한 하나님의 행위에 의존시켰다.

블로흐와 몰트만의 관련성은 역사와 종말의 문제에서도 나타난다. 블로

흐에 있어서 역사의 과정은 동일성의 고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혹은 종

말론적으로 모든 것의 재생과 변형을 향해 나아간다. 인간이라는 존재도

나는 존재하지만 아직 나 자신이 되지 못해서 생성해야 하는 존재 라고

18) 장일선, 희망의 철학과 희망의 신학, 기독교 사상(1981. 4), p.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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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한다. 즉, 유토피아 의식이 인간 존재까지도 존재하지만 아직 내 자신

이 되지 못한 이 명제와 반명제를 미래의 가능성 속에서 화해시킨다고 본

다. 인간은 세계의 객관적인 조건에서 실망하고 괴로워하지만, 그러나 또

다시 아직 표현되지 않은 내용에서 실체적인 예기의 의식을 찾아내며 이

러한 경험과 희망의 상이성이 역사를 추진해 간다고 한다.

한편 몰트만은 기독교 선교를 부활절에 의한 과정에 둔다. 즉 세계를 열

려져 있는 것으로 보며 세계를 충만한 가능성으로, 세계가 세계의 목적을

향해 근본적으로 방향지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점에서 블로흐의 희망

의 원리는 몰트만에게 중요한 통찰을 주었다. 블로흐가 아직 아님의 존재

론 (Noch nicht - Sein )에서 그의 희망의 철학을 펼쳐 미래로 향하는 반면

몰트만은 하나님의 행위에 근거를 둠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열려있고 모

든 것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종말을 바라본다.

블로흐의 역사의 종국으로서 종말의 개념은 유토피아적 동일성을 말하

지만, 몰트만은 하나님의 신실성과 의로움에 의해 창조되어진 가능성들에

의존하고, 그 과정은 약속된 생명과 하나님의 의의 도래와 성취에 의해 이

루어지는 종말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몰트만과 블로흐의 역사와 종말에 대한 도식이

거의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조는 근원적으로 블로흐의 것이

고, 다만 몰트만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강한 강조를 함으로써 블로흐

철학을 신학화한 것이라고 보여진다.19)

몰트만이 블로흐의 지도를 받은 적도 없으며 그가 동독의 추방 명령을

받고 튀빙겐 대학교 철학부의 객원교수로 초빙받았던 60년도부터 몰트만

이 블로흐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고 지적하면서 두 학자의 관련성은 별로

없다는 주장도 있다.20) 하지만 몰트만의 신학이야말로 전적으로 블로흐에

19) 조성노, op. cit ., pp. 282-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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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새로움을 얻었으며 몰트만의 변증법은 바르트와 블로흐에게서 배운 것

이고 블로흐는 몰트만의 근원적인 희망의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도록 용기

와 자극과 철학을 통찰을 주었다는 주장21)을 배제하더라도 몰트만이 희

망 이라는 말로써 그의 신학의 핵심을 드러내는 중심개념으로 삼은 것은

블로흐와의 정신사적 관련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22)

(2) 바르트의 영향

바르트는 계시의 객관적인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계시를 강조하는 반면, 자연계시에 대해서는 아무런

위치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23)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 되었

다.

바르트는 자연계시를 중시하지 않음과 동시에 신의 절대타자성을 강조

했다.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이 둘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는

19세기 내재적 신론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다. 그러나 신이 계시의 주체로

서 주권을 가지고 우리에게 계시하는 한에서 인간은 신과 통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이신론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초월신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적 기독론과 내재신론 및 초월신론에 대한 비판을

몰트만은 그대로 따르고 있다.24 )

20) 김균진, 헤겔 철학과 현대신학(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7), p. 217, p. 23921) 조광호, 몰트만의 종말론: 기독교의 재종말화(장신대 신대원, 1989), p. 3422) 장일선, op. cit ., 기독교 사상(1981. 4), p. 5023) Mackintosh, T ypes of Modern T heology , 김재준, 현대신학의 선구자들(대

한 기독교 서회, 1995), p. 32724) 이양호, 몰트만의 역사이해(연신원, 1976), pp. 2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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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몰트만의 신학의 중심도 기독론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기독교는

전적으로 종말론이며 기독교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미래에 대해

서 말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 신학의 중심내용은 종말론적 기독론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와 몰트만 둘 다 신학의 중심을 기독론에 두는 점에서는 일치하

나,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적 기독론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몰트만은 블로흐

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종말론적 기독론을 말하고 있다. 물론 몰트만 역시

삼위일체론을 말하긴 하지만 바르트에게 있어서처럼 신학의 기본 구조는

아니다.

또한 바르트가 초월신론과 내재신론을 비판한 것처럼 몰트만도 초월신

론과 내재신론을 다 비판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위에서부터 수직적으로 오

는 신을 말하는 데 반해, 몰트만은 우리 앞에 있는 신 (God in front of

us ) 혹은 희망의 신 (God of hope)을 말한다. 이는 바르트 신학의 공간적

인 구조를 블로흐의 구조를 빌어 시간적인 구조로 바꾸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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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 몰트만의 시간이해

1 . 창 조의 시 간 - 주 로 어 거스 틴 과 관 련 하여

(1) 시간의 창조에 대하여

몰트만은 어거스틴의 시간과의 창조 (creatio cum tempore) 개념에 대하

여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시간의 시작, 즉 태초 는 시간에 속하는가, 아

니면 영원에 속하는가?25) 만일 그것이 시간에 속한다면 시간 이전에 시간

이 있었을 것이며, 만일 그것이 영원에 속한다면 시간 자체가 영원할 것이

다.

그는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모든 시간들의 영원한 창조자 라고 부름으

로써 영원한 창조 를 생각하는 경향으로 빠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한편 바르트는 하나님의 창조의 결정의 표상 으로 어거스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즉, 하나님이 세계와 그리고 시간을 창조하기 이전, 그는

그의 존재와는 다른 세계와 그의 영원과는 다른 시간의 창조자이기를 결

정하였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영원한 하나님이 자기와는 다른 시간을 존

재하게 한다 는 것을 의미하는 한에서는 적절하나, 그 뿌리를 본질적인 창

조의 결정 이라는 개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이 결정이 의

지의 결정이라면, 그것은 본질적이며 영원한 것일 수 없으며, 거꾸로 그것

이 본질적이고 영원한 결정이라면 의지의 결정일 수 없기 때문이다.26)

25) J . Moltmann , Gott in der Schöpfung, 김균진, 창조안에 계신 하느님(한국

신학 연구소, 1991), p. 14726)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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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몰트만은 유대교의 카발라 전통속에 있는 zhimzhum (:하나님의

자기 제한)개념27)을 사용하여 바르트의 논리를 확장시켜 나가는데, 에큐메

니칼적 대화를 통하여 여러 종파들과의 사귐, 신학적 대화를 추구하였던

그의 신학적 면모를 보여주는 부분이라 하겠다.28)

그는 자기의 창조에게 시간을 허용하기 위하여 자기의 영원을

자기 안으로 거두어 들인다. 그의 본질적인 영원과 피조물의 시

간성 사이에는 창조의 결정을 통하여 결정된, 그의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 과 이 속에서 열려진 창조의 시간적 공간이 있다.

어거스틴이 말한 시간과의 창조 (creatio cum tempore)는 피조물

의 시간적인 존재와 관계할 뿐이다. 이에 반하여 시간안에서의

창조 (creatio in tempore)라는 명제는 피조된 시간과 관계할 수

없고 오히려 창조의 결정과 함께 정립되었고 열려진 하나님의 시

간과만 관계할 수 있다. 이렇게 구별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시간 안에서- 시간과의 창조(creatio cum tempore- in

tempore).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세계를 세계의 시간과 함께 창조하였다. : 하나님

의 시간 속에서 창조된 시간과 함께 지으신 세계 (Mundus factus

cum tempore creata in tempore Dei)29)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는 바로 하나님의 본체에 속한 것이라 볼 수 있

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본체 안에서 과거에 없었던 어떤 것이 생겨났다

면 그 본체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영원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러나 만일 천지를 창조하시겠다는 계획이 영원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의지

였다면 그 피조물도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겠는가? (선한용, 고백록, XI,

10)27) 김균진, op. cit , p. 1128) 조성노, 현대신학 개관(현대신학 연구소, 1994), p. 50829) 김균진, op. cit , p.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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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은 자신의 최근 저작 Das Kommen Gottes 에서 좀 더 이 개념

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즉, 창조시의 하나님 자신의 시간을 근원적 순간

으로, 창조시의 세계의 시간을 처음의 순간 으로 개념화하고 있는 것이다.

근원적 순간(unsprüngliche Augenblick)은 세계와 시간의 창조

이전, 창조자가 되기로 한 하나님의 자기 결정 속에 있다. 하나님

의 영원의 자기 제한으로부터 창조의 시간 이 나온다. 하나님의

창조의 결정의 근원적 순간속에는 창조자가 창조의 시간 속에서

전개하고자 하는 모든 가능성이 마련되어 있다

창조의 시간의 근원적 순간으로부터 피조물적 시간을 위한 처음의 순간

(anfängliche Augenblick )이 나온다. 창조의 행위 속에서 시간이 영원으로

부터 나타나며, 처음과 나중, 미래, 현재, 과거로 자기를 전개시킨다. 여기

서 우리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한 시작(창 1:1)과, 땅의 시간의 시

작,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라 고 말하는(창 1:5) 시간을

성서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30)

(2) 과거의 존재론적 우위성에 대하여

몰트만이 어거스틴에 대하여 제기하는 두 번째 질문은 모든 미래가 현

재를 거쳐 과거로 흐른다면 과거가 시간들의 존재론적 우위를 가지지 않

는가? 라는 것이다. 미래로부터 과거로 향하는 시간의 흐름의 돌이킬 수

없는 성격은 사실상 모든 것을 과거로 만든다. 이리하여 과거적인 과거 ,

현재적인 과거 , 미래적인 과거 가 있을 뿐이다. 과거는 모든 사물의 끝이

30) J . Moltmann , Das Kommen Gottes, 김균진, 오시는 하나님(대한 기독교서

회, 1997), pp. 482-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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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것이 시간의 성격이라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를 죽음을 위하여 창조

하였는가? 피조물의 시간은 죽음의 시간 인가?

몰트만은 어거스틴의 하나님 경험은 창조자와 피조물, 영원과 시간 사이

의 차이에 대한 경험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에 대한

피조물의 시간의 근본적 차이는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시간을 과거와 동일

시하게 하고 피조물의 시간을 죽음의 시간으로 규정하게 한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이러한 시간 이해에서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피

할 수 없는 허무함은 하나님의 영원 에로의 종교적인 세계 도피만을 통하

여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2 . 성 서에 서 의 시간 이 해 3 1 )

(1) 카이로스(K airos )적인 시간이해

끝이 없는 선적인(linearen ) 시간의 연속에 대한 표상들과 절대적 시간에

대한 표상들은 이스라엘 고유의 것이 아니었다. 사건과 시간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은 복수(Plural)의 시간들 에 대하

여 말하였다. 사건에 의하여 시간이 결정되는 그들의 시간 이해에서는 사

건의 시간은 그 속에서만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적절한 시간이었으며, 시

간의 통일성 은 그들과 거리가 먼 개념이었다. 이스라엘은 파종과 추수,

추위와 더위, 낮과 밤의 이 시간들을 하나님의 계약, 그리고 성실하심과

결합시켰다. 하나님의 계약의 성실하심은 시간들의 주기와 각 사건의 카이

로스를 보증한다.

31) 김균진, op. cit , pp. 150-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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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약속사적인 이해

이스라엘은 그의 하나님을 유일회적인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경험하였

다. 그러나 그 유일회적인 사건 은 그와 동시에 모든 후 시대에 대한 사

건으로 이해된다. 가령 출애굽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지나가버린 사건

이 아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그것은 그 뒤의 시간들을 결정한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은 하나의 계속되는 역사의 연속 에 대한 생각을 얻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를 인식하고 전달하는 형식은 개념 이 아니라 이

야기 이다. 이야기는 미래의 것을 예고하기 위하여 지나간 것을 현재화시

킨다. 그것은 희망을 확립하기 위하여 회상을 불러 일으킨다. 미래에 있어

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뢰를 세우기 위하여 이미 경험된 하나님의 성

실하심에 대하여 보도한다.

(3) 예언자의 시간 경험: 역사적 사고의 종말론화

예언자들도 자신들의 백성의 선택의 역사와 약속의 역사 안에 서 있다.

그러나 그들을 오경의 역사서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예루살렘의 파괴

와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노예화 속에 나타나는 구원의 역사의 단절에

대한 경험이다. 이것은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역사의 불연속성에 대한 경험

을 뜻한다. 현재에 대한 이 경험이 과거의 역사를 지나가버린 역사 로 되

게 한다. 다른 한편, 만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미래

가 있다면, 이 미래는 과거의 전통의 계속이나 연속적 발전일 수가 없다.

이제 그들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의 약속을 가진 종말론적 사고를 취한다.

미래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이다. 그것은 근원으로의 회귀나 과거의 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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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니다. 과거와 새로운 미래는 동일한 시간의 연속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옛 것 과 새 것 처럼 서로 대치한다. 그들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시간들이 된다. 그들의 통일성은 옛 것을 낡아지게 하고 새 것

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성실하심 속에만 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초월적

인 배경 속에서 예언자들은 옛 것 속에서 발견한 유비(analogia)를 가지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선포한다.

(4) 묵시사상

묵시사상의 문헌을 관찰해 보면 다음의 사실이 드러난다. 즉 과거의 하

나님의 역사 속에 있는 모든 연속성의 경험은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우주

적인 차원으로 확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와 과거는 불의와 죽음의

이 시대 로 되며, 미래는 의와 삶의 장차 올 시대 로 된다. 멸망의 이 시대

속에서 지금 이미 계시되는 토라만이 옛 시대 속에서 새 시대의 삶을 중

재한다.

(5) 메시야적인 시간이해

신약성서의 철저히 메시야적인 시간 이해는 묵시사상의 시간론을 전제

하고 있다. 메시야적인 시간 이해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이 결정적인 시대의

전환으로 이해된다.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은 옛 시대가 끝남을 표시하고,

예수의 부활은 새 시대의 시작을 나타낸다. 이 경우에도 죄와 율법과 죽음

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는 과거 와 은혜와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통하여

결정되어 있는 미래 사이의 질적 차이가 너무도 강조되기 때문에 미래에

서 과거로 이를 수 있는 어떠한 연속성도 없다. 하지만 묵시사상과 뚜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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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되는 한 가지 특징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의 사귐 속에서 질

적으로 새로운 이 미래가 이미 이 시대의 한 가운데에서 시작하였다 는 데

에 있다. 새 시대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하여 이미 선포되었고 일어났고

시작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나타나지는 않았다.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이 시간을 우리는 메시야적 인 시간 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편

적인 성취의 시간은 아니지만 확립된 희망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

을 우리는 종말론적 시간 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메시야에 대한 경험을 근거로 메시야적인 신앙은 시간들을 지배

하는 힘들에 따라 시간들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메시야 예수의 현재 속에서 더 이상 인정되지 않으며 더 이상 작용하

지 않는 모든 것, 다시 말하여 죄와 율법과 죽음은 과거 에 속한다.

메시야 예수 안에서 이미- 지금 인정되며 작용하는 것, 다시 말하여 은

혜와 화해와 자유는 현재 에 속한다.

아직 경험되지 않지만 이미 희망될 수 있는 것, 다시 말하여 죽은 자

들의 부활, 몸의 구원, 영원한 생명은 미래 에 속한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을 의미한다. 신앙인의 현재 는 과거에 의하여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의 현재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우며 메시야의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다. 그리스도교 신

앙은 고대의 순환적인(zyklisch ) 시간이해 를 결코 현대의 직선적인 시간

이해 로 대치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동일한 선상으로 가져

오지 않고 오히려 양자를 질적으로 구분하는 메시야적인 시간이해 로 대

치시킨다.

성서의 시간이해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몰트만은 성서에 등장하는 다양

한 시간의 지평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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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올바른 순간의 시간 은 사건을 통하여 결정된다. 각 사건은 그의

시간을 가진다.

둘째, 역사적인 시간 은 약속의 발생과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사건들을

통하여 결정된다.

셋째, 메시야적인 시간 은 메시야의 오심을 통하여, 그리고 지나가는 이

시대 한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새 창조의 시작을 통하여 결정된다.

넷째, 종말론적인 시간 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일어난 과거와의 단절을

통하여, 그리고 새로운 다른 미래에 대한 그들의 선포를 통하여 결정된다.

다섯째, 영원한 시간 은 신적인 영광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새롭고 영

원한 창조의 시간일 것이다.

3 . 역사 개 념에 대 한 통찰

몰트만은 그의 독특한 시간 구조를 전개하기 이전에 역사 라는 개념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여기서 그의 시간론이 단순한 관념적 유희가

아니라 그 시대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 대안 제시로서 전개되었다는 사실

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그는 그의 시간론을 지구적 공동체성

과 생태학적 조화라는 구체적인 주제에 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그는 먼저 역사 라는 현대적 상징을 진보의 상 (das Bild des

Fort schritt s )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역사관

하에서 과거 란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때마다 자기의 뒤에 남겨두는 것이

다. 미래 는 그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에게 새로 열려지는 것이며, 현

재 는 그에게 있어서 과거로부터 미래로 넘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에게

는 언제나 단 하나의 목표와 단 하나의 길과 단 하나의 전진이 있을 뿐이

다.

-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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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진보 의 상을 가진 역사 는 단 하나의 사회, 단 하나의 계급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며 다른 세대들을 억압하고 통합시키려는 현재 세대의

도구가 아닌가? 라고 몰트만은 질문한다. 왜냐하면 이런 역사관 아래서의

사회는 단 하나의 공통적인 진보와 통일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과정 속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진보 의 상을 가진 역사 는 인간의 의지와 의도에 자연을 예

속시키려는 인간의 도구가 아닌가? 라고 질문한다.

실제로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이 진보의 상 이라는 상징이 가진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고 분석한 후 몰트만은 이 상징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밝히

기 위해서

첫째, 역사 라고 하는 개념 자체를 좀 더 엄밀히 분석하여 과거- 현재- 미

래의 시간들을 여러 모양으로 세분하고자 한다.

둘째, 역사 를 자연 이라고 하는 보다 더 큰 개념속에 통합하기 위하여

인간의 시간 과 땅 이라고 하는 생태계의 자연적인 시간 을 동시화

(Synchronisierung ) 시키고자 한다.

몰트만은 이러한 연구에 있어서 시간들에 대한 순환적 이해가 중요하다

고 전제하며, 다음과 같은 명제들을 제시한다.

첫째, 역사 로서의 현실에 대한 경험은 역사의 미래 라고 하는 종말론

적인 지평 속에서 의미있게 되며 존속할 수 있다.

둘째, 역사적(historische) 의식 은 현재적 과거와 과거적 현재를 구분하

며 미래를 과거 속에서 발견하고 과거의 가능성들을 다시 받아들이며 그

것을 현재적 미래와 결합시킬 수 있게 한다.

셋째, 미래 의식 은 현재적 미래와 미래적 현재를 구분하며 미래적 과거

와 미래적 미래를 구분할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 역사적 미래와 종말론

적 미래 사이에 신학적으로 중요한 구분이 생긴다.

-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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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현재적 미래 는 상이한 역사적 시간들을 동시화시키는 것 을 지향

하고 있다. 인간의 상이한 역사들이 하나의 역사로 용해된다. 점점 늘어나

는 상호 의존과 갈등으로 인하여 하나의 인류 가 그들의 공통적인 역사

의 주체로 되든지 아니면 서로 적대시하는 인간의 그룹들이 하나의 재난

속에서 함께 몰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현재적 미래 는 인간의 역사의 시대와 자연의 시간 의 리듬을

동시화시키는 것 을 지향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땅 이라고 하는 생태계

의 리듬과 인간의 몸의 생물학적 리듬과의 동시화를 지향하고 있다. 인간

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는 서로 조화되든지 아니면 인간의 역사는 생태학

적 죽음 속에서 그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을 발견할 것이다.32)

4 . 역사 의 한계 에 대한 대 안 으로 서 의 시 간 이해

창조안에 계신 하느님 에서 몰트만은 앞에서 제시한 다섯가지 명제에

입각하여 그의 시간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 각각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미래의 지평에서 역사의 경험

몰트만은 현재의 역사철학의 문제를 세 가지로 파악한다.

첫째, 인간의 세계가 자연의 세계로부터 분리되면 될수록 우주의 법칙들

과 자연의 리듬에 대한 인간 세계의 조화가 상실된다. 결과적으로 인간 자

신의 희망과 목적을 향한 방향정립이 자연을 향한 방향정립을 완전히 대

32) 김균진, op. cit , pp. 157- 158

-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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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해 버린다. 그러므로 역사의 미래에 대한 질문은 사건이 인간의 목적과

희망에 대하여 가진 의미에 대한 질문이 된다.

둘째, 인간의 세계가 자연의 세계로부터 분리되면서 시간의 원운동과 리

듬에 대한 고대의 표상들이 상실되었다. 그 대신 직선적인 시점의 나열이

등장하였다. 시계의 시간은 모든 것을 동일한 방법으로 물량화시켜 버린

다. 그러므로 현대의 공업사회에서는 시계가 어디에나 있고 전능한 시간

측정기로 되었다.

셋째, 인간의 세계가 자연의 세계로부터 분리되면서 근대의 실험 이 시

작된다. 과학적- 기술적 문명 이 인간의 실험 이라면, 이 문명은 인간의

구상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나의 구상은 그것을 이끌어가는 희망이, 이

구상과 더불어 인간이 겪는 경험을 통해 근본적으로 단념되지 않는 한에

서만 실천될 수 있다. 경험은 희망을 새로 해석할 수 있으며, 새로운 경험

을 기초로 방향을 정립할 때 방향을 수정할 수 있다. 이 해석학적 과정은

연속성을 보존하며, 이미 시작된 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근대의 실험을 동반하는 미래의 환상들의 양립들은 이미 여기에서

불확실성을 보여준다. 인류는 근대의 실험속에 숨어있는 위기가 바로 막을

수 없는 재난의 전조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주목하고 있지 못한 것

이다.

이러한 역사 철학은 역사 를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하나의 시간적인

선상에서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 는 현재와 미래, 현재와 과거, 미래

와 과거의 구별 속에서 인지된다. 따라서 하나의 시간적인 선상에서 기술

하여 이 구별들을 이전과 이후의 상황 으로 위축시켜 버린 시간이해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제 몰트만은 역사의 미래 라고 하는 종말론적 지평이 우리에게 어떠

-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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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의미를 주는지에 대하여 서술한다.

그는 과거 를 단순히 우리 자신의 현재의 전역사(Vorgeschichte)로만 생

각하지 말고 오히려 그 자신의 과거와 그 자신의 미래를 가진 과거적 현

재 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적인 현재 는 과거적인 현재 뿐만

아니라 과거적인 현재 의 미래를 전제로 가지고 있다. 즉, 과거적인 현재

의 희망들과 가능성들로부터 현재가 생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미래적

지평을 희망, 가능성을 주는 원천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종말론적 미래 란 무엇인가?

회상되었고 경험되었으며 아직도 회상될 수 있는 모든 현재들

을 초월하는 이 미래를 우리는 종말론적 미래 라고 부른다. 그것

은 미래적 역사 가 아니라 역사의 미래 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

은 그 역사의 미래로서 과거의 미래인 동시에 미래의 현재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역사적 시간의 근원이요 원천이다.33)

(2) 현재화된 과거(vergegenw ärtigte Verg angenheit )

현재화된 과거에 있어서 현재화 의 과정에는 회상과 본래 그것이 어떠

했는가 34 )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개입되는데, 몰트만은 여기서 전통 과

33) 김균진, op. cit , p. 16234) 역사주의적 역사 서술의 대표자 Ranke의 유명한 어구 실제로 있었던 그대

로 (wie es eigentlich gewesen )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어구에서 부사

eigentlich는 20세기 독일어 용법에서는 확실히 실제로 (actually )라는 뜻이

지만 랑케가 살았던 19세기의 용법에서는 본질적으로 (essentially )라는 의

미였다. 따라서 랑케의 이 명언은 본질적으로 발생한 것 으로 번역되어야

옳다. 랑케는 과거가 역사가에 의해 정확히 기록되어야 하며, 그 서술 과정

에 역사가의 정신이 가미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역사

-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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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의 관련성에 대해 주목한다.

그는 전통을 통하여 과거를 현재화시키는 일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인

사실적(史實的, historische) 연구 방법을 받아들인다. 전통은 그 속에서 과

거와 현재의 자명한 연속성을 주장하지만, 사실적 연구 방법에 의해 역사

적 상대성과 우연성을 인식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의 미래를 형성하기

위해서 전통으로부터의 자유 를 획득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사실적 비판에 의하면 과거의 것은 지금의 현재의 단 하나의 과

거로 배열되어 버린다. 이것을 몰트만은 지나간 현재에 대한 지금의 현재

의 제국주의 라고35) 표현한다. 이러한 자세는 결국 과거 자체안에 있는 미

래에 대한 시야를 상실케 해 버린다.

따라서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이 사실적 연구 방법의 문제를 극복하려

한다.

근대 역사주의의 이 난제(難題)들은 한편으로는 현재화된 과

거 (의식적인 전통들과 무의식적인 전통들)가 사실적 재구성에 의

하여 본래 존재하였던 것 으로 인식되는 과거적 현재 와 비판적

으로 비교될 때에 부분적으로 해결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 자신의 미래 와 이 과거적 현재속에 있었던 그 자신의 가능

성들 과 비교될 때 부분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전통들

과 도그마들은 비판적으로 상대화되며, 그들 속에 보존되어 있고

그들을 통하여 배제된 희망들이 다시 파악된다. 그렇다면 중단된,

가의 정신이 사건들의 본질을 파고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역사가의 과

거의 직관이 역사가에게 과거의 본질을 깨닫게 할 수 있다는 역사주의 신

념을 표현했던 것이다. David Bebbington , Pattens in History , 김진홍, 조

호연 역, 역사관의 유형들(IVP, 1997) pp. 172- 17335) 김균진, op. cit , p. 164

-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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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되었거나 아직 파악되지 않은 과거적 현재들의 가능성들이

다시 살아나며 현재적인 현재의 미래 속으로 통합된다.

과거적 현재의 가능성들이 다시 살아나 현재적인 현재의 미래 속으로

통합되는 한 가지 예로 몰트만은 1525년 독일 농민 전쟁을 든다. 이 어두

운 역사에 대한 회상은 300년동안 억압되고 배제되었으나 프랑스 혁명과

함께 자유, 평등, 박애 에 대한 희망의 현재적 미래의 지평위에 등장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1525년 농민들의 좌절된 희망을 회상하였고, 그 희망을

다시 받아들였던 것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그의 사고를 사실적(史實的, historische) 의식 이라고

표현한다. 사실적 의식에는 사실적 비판과 사실적 연구라는 두 가지 요소

가 있다. 사실적 비판은 과거의 전통들을 사실적으로(historisch) 연구될

수 있는 과거적 현재와 비교함으로써 전통속에 있는 과거의 현재화에 대

해 비판적으로 관계한다. 이러한 사실적 비판의 관심은 현재의 주체의 자

유이다. 그러나 사실적 연구는 중지되었고 배제되었거나 혹은 망각된 과거

적 현재의 미래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따라서 과거 안에 있는 미래에 대한

사실적 연구의 관심은 언제나 현재적인 미래에 대한 질문에 의하여 결정

되어 있다. 이처럼 사실적 의식은 현재화된 과거와 과거적 현재를 구분하

며 미래를 과거 속에서 발견하고 과거의 가능성들을 다시 받아들이며 그

것을 현재화된 미래와 결합시킬 수 있게 한다.36)

(3) 현재화된 미래(vergegenw ärtigte Zukunft )

미래 를 표현하는 단어는 futurum과 adventus이다. 영어의 future는 라

36) 김균진, op. cit , p. 157

-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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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어의 futurum - 형성되는 것 (wird)을 표시하는- 으로부터 유래하며, 독일

어의 Zukunft는 라틴어 adventus- 오는 것 (kommt )을 표시하는- ,헬라어

Parusia로부터 유래하였다.

Futur로서의 미래는 과거와 현재로부터 형성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자연(physis )의 형성 과정속에 있다. Futur로서의 미래는 미래적인 과거만

을 가져온다. 여기에 있어서 시간의 과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된

다. 미래로부터 과거가 되며, 그러나 과거로부터 다시 미래가 되지 않는다.

몰트만은 이처럼 형성(Werden )의 의미를 가진 Futurum은 발전과 계획에

대한 근거와 동기를 주지만 영속적 희망에 대한 근거와 동기는 주지 않는

다고 평가한다.

반면에 Zukunft로서의 미래는 과거로부터 발전되는 것 이 아니라 오히

려 새 것의 현재에의 도래 를 의미한다. 그것은 오고있는 것이지만 다시

지나가버리거나 사라지지 않고 영속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심 가운데 있다. 몰트만은 이

처럼 하나님과 미래 를 신학적으로 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종말론

적으로 이해하고 미래를 신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미래가 갖는 신학적

의미에 대해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래는 모든 현재에 대하여 영속하는 초월을 얻으며 모든 현재

를 잠정적인 현재로 만든다. 이리하여 미래 는 초월의 모범

(Paradigma)이 된다. 그렇다면 과거와 미래는 시간의 동일선상에

환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질적인 차이 속에 대칭하게 된다. 이

차이는 옛 것 과 새 것 의 차이이다.37)

37) 김균진, op. cit , p. 167

-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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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은 미래 의 언어적 분석을 시행한 후 그 개념들이 갖는 실천적

함의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다.

Futur는 미래를 향하여 끊임없이 추구하는(Extrapolation ) 경향성을 내

포하는 개념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연장선상에 있는 발전을 의미한다. 그러

나 이처럼 연장된 현재에 불과한 미래 개념은 현재의 소유와 힘을 유지시

키는데 기여할 뿐이다. 왜냐하면 실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만이 계획

할 수 있으며, 발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개념은 참된 미래를 창조할 수 없으며, 오히려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배제한다.

Zukunft로서의 미래 개념은 선취(Antizipation )에 그 핵심이 있다. 인간

은 선취를 통하여 장차 오는 것에 대한 태도를 취하며 선취하여 오는 의

식 없이 미래의 것을 지각할 수 없다.

이러한 분석 후 몰트만은 인간 역사의 실천에 있어서 끊임없는 추구 와

선취 는 서로 결합되어있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희망하는

것이나 두려워하는 것을 우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결합시키기 때

문이다. 인간이 희망하며 소원하는 혹은 두려워하거나 배격하는 미래의 대

상들은 종말론적 미래의 상징들이다. 여기서 몰트만은 현재의 미래적 지평

들 속에서 종말론적 미래의 흔적들 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어떤 현재적인 미래의 지평도 그 미래 자체와 동일시될 수

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현재적인 미래와 역사적으로 언제나 미

래적인 미래를 구분하고 있다.

(4) 현재화된 미래의 두 가지 과제

1) 역사적 시간들의 동시화(Synchronisier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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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의 두 단락에서 몰트만은 현재화된 과거의 사실화(史實化) 와

현재화된 미래의 미래화 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고, 이 단락에서는 현재화

된 미래의 과제에 대하여 고찰한다. 현재화된 미래는 언제나 제한된 일시

적인 방법으로 역사의 희망과 과제를 결정한다. 여기서 몰트만은 현재화된

미래의 두 가지 과제에 대하여 고찰하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 과제가 바

로 역사적 시간들의 동시화이다.

그는 핵무기로 인한 인류 전체적 위기를 의식하며 인간은 단일한 희망

과 미래, 하나의 공통된 미래가 있을 뿐임을 역설한다. 왜냐하면 살아남는

일은 서로간의 평화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류는 공동의 위

험으로 인하여 먼저 파멸의 전체적 대상 으로만 묘사되고 있으나 살아남

음의 전체적 주체 로서는 아직 묘사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묵시

문학적 위험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을 발견하여야 한다. 몰트만은

그 구원은 삶에 대한 희망 의 공통성 과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의

지 의 연대성 으로부터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희망에 의하여 고

무되는 의지의 힘으로 지구 위의 모든 진영과 국가들이 긴밀하게 결합되

어야 함을 역설한다.

2) 역사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의 동시화

근대의 실험이 시작된 이후 역사 와 자연 은 언제나 다시금 대립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그리하여 자연 은 고정되어 있는 것, 반복하는 것, 회

전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반면, 인간의 역사 는 시간과 변화와 우연

성과 가능한 것의 경험들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결과 자연에 대한

무역사적인 견해와 역사에 대한 무자연적인 견해가 생겨났다.

- 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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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분리가 생태학적 위기라고 하는 파괴적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만일 인간과 땅이 공통된 재난을 피하려면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가 동시화되고 근대의 실험이 자연에 상응하여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 역사의 일방적인 진보를 지연시키고 인간의 시간

관은 그 자신의 신체성 안에 있는 자연의 삶의 법칙들과 리듬과 중재되어

야 할 것이다.38)

5 . 시 간의 근 원 과 원 천 으로 서 의 미래

(1) 기존의 기독교 종말론의 범주들

몰트만은 그의 책 오시는 하나님 에서 여태까지의 기독교 종말론의 범

주를 나누는 가운데 과거, 현재, 미래의 선적인 시간이해에 대한 그의 견

해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강림 을 새로운 종말론적 범주로 제시하고 있

다. 이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그의 시간론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그는 먼저 종말론을 시간화(Verzeitlichung )한 것으로서 예언자적 신학,

철저 종말론 학파, 그리고 오스카 쿨만으로 대표되는 구원사적 종말론을

들고 있다. 이들 견해에서는 현재와 미래가 모두 동일한 시간선상에 있는

것으로 전제되고 있으나 이러한 선적 시간에 대한 표상은 성서적 표상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서 이미 발견될 수 있는 근대 자연과학

적 표상이라고 비판한다. 이 표상에서 시간은 양적인 것으로 이해되며 따

라서 시간이 구원사적 질을 갖게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다음으로 종말론을 영원화한 입장으로 칼 바르트(Karl Barth ), 파울 알

트하우스(Paul Althaus ),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의 종말론을 들

38) 김균진, op. cit , pp. 169- 173

-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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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여기에서 종말은 인류의 마지막 날들 처럼 우리의 역사적인 날들의 시

간적 끝이 아니라 이 역사의 모든 순간 속에 있는 영원의 현재이다. 이처

럼 종말이 마지막 시간을 뜻하지 않고 영원을 뜻한다면, 종말론은 더 이상

미래와 관계가 없다. 이처럼 모든 시간에 대하여 동시적이며 그들에 대하

여 똑같은 영원 개념이 시간 이해의 중심에 올 때 모든 시간은 영원에 대

하여 동시적이며 똑같은 의미를 가질 뿐이라고 몰트만은 비판한다.39)

또한 실존론적 종말론은 세계의 미래적 마지막에 대하여 다루지 않고,

인간의 실존의 현재적 탈세계화에 대하여 다룬다. 미래 란 케리그마 속에

서 인간에게 오며 그를 마지막 결단으로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달력

의 시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몰트만은 그것이 세

계와 자연의 역사를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인간 실존을 자기 자신

과의 관계 속에서만 보고, 그의 사회적 관계와 그의 신체적- 감성적 관계

에서 보지 않는 것은 지나치게 일면적 이해라고 비판한다.40)

(2) 미래의 두 차원: 현상적 미래와 초월적 미래

몰트만은 이처럼 기존의 종말론을 시간화, 영원화라는 범주로 분석한 후

자신의 종말론을 전개하는 데, 이 때 그는 계속 진행되는 역사가 모든 종

말론을 삼켜 버리거나, 언제나 현재적인 영원이 모든 역사를 폐기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미래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그에게 있어서 미래는

시간 일반의 근원과 원천이다. 몰트만의 종말론의 범주가 전향 이라고 했

을 때, 전향과 새로운 생명으로의 거듭남은 시간과 시간의 경험을 변화시

39) 김균진, 오시는 하나님, p . 5240) Ibid., pp. 55- 56

- 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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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다. 이는 마지막의 것을 마지막 이전의 것 안에서 현재화시키기 때문이

며, 시간의 미래를 시간 한가운데서 현재화 시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재

화된 미래는 역사적 가능성들의 새로운 조건들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래의 두 가지 개념을 생각할 수 있다. 현상적 차원에서 우리는

과거의 시간- 현재의 시간- 미래의 시간을 인지한다. 그러나 초월적 차원에

서 미래를 시간 일반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전제한다. 그렇다면 미래는 시

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힘으로서 시간의 원천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미래를 과거적 미래로 규정하며, 미래적 시간을 미래적 미래로 규

정한다. 역사의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미래가 과거로 되지만, 과거가 다

시금 미래로 되지는 않는다. 그 까닭은 가능성이 현실로 되며 과거와 현재

의 모든 현실은 실현된 가능성이지만, 현실이 다시금 가능성으로 되지 않

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현실 이상의 것인 것처럼, 미래는 현재와 과거 이

상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시간의 초월적 미래에만 해당하며, 현상적 미래

의 시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초월적 미래가 시간의 원천이라면, 초월적

미래는 시간을 무시간적이며 동시간적인 영원으로 지양하지 않으며, 모든

시간적 존재의 보편적 허무성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의 시간을 열어주며 역사의 시간에게 미래적으로 규정

된 시간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종말론의 종말 은 시간 속으로 등장할

수도 없고 시간 속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채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영

원이 아니라, 시간의 초월적 조건들의 변화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오심과

함께 미래의 시간은 끝나며, 영원한 시간이 시작한다.41)

41) Ibid., p. 65

-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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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시 간 안에 있 는 영원

시간 안에 있는 영원은 현재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정신적 현

재는 언제나 회상과 기다림의 힘으로 과거와 미래의 상대적 동시성 을 나

타내기 때문이다. 현재안에 있는 과거와 미래의 동시성을 하나의 상대적

영원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영원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동시성이기 때

문이다.42) 만일 이것이 자신의 그때그때의 정신의 현재에 해당한다면, 그

것은 또한 과거적 현재와 미래적 현재에도 해당한다. 현재는 언제나 과거

와 미래를 현재화시킨다. 이리하여 현재는 시간 속에서 영원을 현재화시키

는데, 여기서 영원은 과거와 미래의 동시성을 뜻한다.

그러나 시간 속에 있는 영원은 상대적 동시성 안에서만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심층적 경험 속에서도 인지된다. 카이로스(Kairos )로서,

바른 시간 , 유리한 기회 , 유일회의 기회 로서 현재의 경험은 시점으

로서의 현재 와 동시성으로서의 현재 를 넘어선다. 카이로스적 이해에 있

어서 시간의 흐름은 비동질적이다.

시간 속에 있는 영원은 외연적인(extensiv ) 삶의 범주가 아니라 내연적

인(intensiv ) 삶의 범주이다. 영원의 현재는 현재안에 있는 나누어지지 않

은 현재를 통하여 철저히 삶으로 산 순간 속에서 일어난다. 내가 전적으로

거기 있을 때, 내가 나를 완전히 줄 때, 내가 나를 완전히 내어놓을 때, 내

가 전적으로 머물 수 있을 때 나는 현재적 영원을 경험한다. 그것은 영원

한 삶의 전체성(Ganzheit ) 속에 있는 시간의 충만함 의 경험이다. 이것은

역사적 시간 속에서 가지는 영원의 단지 순간과 같은 경험이지만, 그것은

분명히 영원의 경험이다. 여기서 영원은 단지 동시성일 뿐 아니라, 절대적

42) 선한용, 고백록, XI, 2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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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성(absolute Gegenwärtigkeit )이기도 하다.

영원한 생명은 무시간성이나 죽음과 관계없다. 오히려 그것은 성취된

삶 을 말한다. 역사적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성취된 삶을 오직 순간적 영원

의 형태 속에서만 경험하기 때문에, 전혀 흐려지지 않은 삶의 충만함과 영

원한 삶에 대한 굶주림이 일어난다. 현재적 영원의 이 경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현재를 갈망하게 된다.43 )

7 . 종 말론 적 순 간

(1) 카이로스와 종말론적 순간

현재적 카이로스를 종말론적 순간과 동일시하고 양자의 차이를 인지하

지 못한 것이 현재적 종말론의 오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종말론적 순간을

영원의 현재와 연관시키고 그것을 현재적 카이로스와 동일시한 첫 번째

인물이다. 그는 영원한 것은 현재적인 것이며, 현재적인 것은 충만함

(Fülle)이다 라고 말한다. 그는 시간과 영원은 순간속에서 서로 접촉하며

이것은 시간의 충만함 이라고 연역함으로써 역사적 순간과 종말론적 순

간을 동일시한다. 불트만은 메시지가 선포되는 지금은 종말론적 지금이

다...모든 순간 속에는 종말론적 순간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다.

너는 이 순간을 깨워야 한다 고 말함으로써 키에르케고르의 생각을 따르

고 있다.

현재적인 구원의 날 은 종말론적 순간의 시간적 선취(Vorw egnahme)이

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삶의 승리가 종말에 완성해야

43) 김균진, op.cit ., pp. 496- 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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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것의 시작이다. 믿음의 현재적 카이로스에 대한 경험 속에서 시간의 인

상(Eindruck )은 허무성에서 미래성으로 변화된다. 믿음과 생명으로의 거듭

남의 현재적 카이로스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종말론적 순간에 죽은 자들

에게서 일어날 것의 역사적 선취(Antizipation )이다. 또한 전자는 후자의

유비(Analogie)이기도 하다.

(2) 종말론적 순간

종말론적 순간 자체는 역사의 종말과 완성을 넘어서 태초의 창조의 완

성으로, 시간으로부터 영원으로의 나감(Austritt )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근

원적 순간(unsprüngliche Augenblick)이 창조의 결정과 그 속에 포함된 하

나님의 자기제한(Selbstverschränkung )으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종말론적

순간은 하나님의 구원의 결정과 그 속에 포함된 자기개진

(Selbstent schränkung )으로부터 나온다. 그때 시간적 창조는 영원한 창조

가 될 것인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간도- 허무성의 시간도, 미래성의 시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종말론적 순간은 영원으로부터 시간이 나오는 근원적 순간에 상응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면을 가진다

첫째,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서 종말론적 자기개진을 수행한다. 그는

그의 은폐되지 않은 영광의 광채 속에서 그의 창조안에 나타난다. 그는

빛나는 얼굴 과 함께 오며,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얼굴과 얼굴로 인

식하게 된다. 이를 통하여 시간적 창조는 영원한 창조로의 변화를 경험한

다.

둘째, 근원적 창조로부터 시간의 처음 순간이 나오는 것처럼, 마지막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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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 시간은 영원으로 넘어간다. 그러므로 상징적으로 말하여 최후의 날

은 영원의 시작 곧 끝이 없는 시작이다. 이것은 성취된 시간 이요, 영원

한 시간, 영원으로 성취된 시간이다.44)

44) 김균진, op. cit ., pp. 500-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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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I. 결론 : 어거스틴과 몰트만의

시간이해 비교

1 . 시 간의 창 조

어거스틴은 시간 안에서의 창조 (creatio in tempore)를 거부하고 시간

과의 창조 (creatio cum tempore)를 주장함으로써 시간 역시 피조물임을

분명히 한다. 피조물로서의 시간은 무형의 질료에 하나님의 말씀(Logos )이

임하여 세계와 함께 형성된 것이다.

몰트만은 어거스틴에게 태초 는 시간에 속하는가 아니면 영원에 속하

는가? 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는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모든 시간들의 영원한 창조자 라고 부름으

로써 영원한 창조 를 생각하는 경향으로 빠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에

대해 몰트만은 하나님의 자기결정과 자기제한의 모델을 제시한다. 창조자

가 되기로 한 하나님의 자기 결정속에 근원적 순간(unsprüngliche

Augenblick)- 하나님의 시간 - 이 있으며, 하나님의 영원의 자기제한으로부

터 피조물적 시간을 위한 처음의 순간(anfängliche Augenblick)- 창조의 시

간적 공간- 이 나온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 안에서- 시간과의 창조(creatio cum tempore- in tempore). 이것은 다

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세계를 세계의

시간과 함께 창조하였다. 이를 몰트만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창조된 시

간과 함께 지으신 세계 (Mundus factus cum tempore creata in tempore

Dei)라고 명제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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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시 간의 본 질

어거스틴에 의하면 시간이란 비존재 로 흘러가는 것이다. 무형의 질료,

거의 무 로부터 온 시간은 무를 향해 움직이고 가변성에 의해 제약을 받

는다. 따라서 시간이란 있으면서도 항상 있지 아니한 것 이다.

이에 대해 몰트만은 어거스틴의 시간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과거의 존

재론적 우위성 은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피할 수 없는 허

무함을 하나님의 영원 에로의 종교적인 세계 도피만을 통하여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학의 영역을 미래에 정초

한다. 그래서 그는 역사 로서의 현실에 대한 경험은 역사의 미래 라고

하는 종말론적인 지평 속에서 의미있게 되며 존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러한 그의 시간이해는 성서의 시간이해에 대한 그의 분석과 맞닿아 있다.

성서의 메시야 적 시간은 보편적인 성취의 시간은 아니지만 확립된 희망

의 시간이다. 이러한 메시야적 시간이해에 의하면 신앙인의 현재 는 과거

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의 현

재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우며 메시야의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다. 그런 점

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과거와 미래를 동일한 선상으로 가져오지 않고

오히려 양자를 질적으로 구분하는 메시야적인 시간이해 로 대치시킨다고

본다.

3 . 시 간의 존 재 양태

(1) 과거, 현재,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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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과거는 이미 없고 , 미래는 아직 없는 것 이며

오직 현재만이 지금 존재한다. 그는 시간의 본질을 객관적으로나 공간적으

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성에서 의식된 시간 경험으로 이해한

다. 따라서 그는 세 개의 시간, 즉 과거, 현재, 미래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과거 일의 현재 , 현재 일의 현재 , 미래 일의 현재 가 우리의

영혼(마음)안에 기억과 직관과 기대로 존재할 뿐임을 말한다. 이러한 그의

시간론에 대해 주관적 관념론이라는 비판도 있으나45) 실제로 그가 객관적

인 질서로서의 시간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시간을 하나님이 창조

하신 객관적인 질서인 동시에 마음의 팽창으로 보았던 것이다.46)

(2) 현재화된 시간 개념

몰트만은 현재화된 과거, 현재적 현재, 현재화된 미래라는 시간 개념으

로 부재하는 것의 창조적 현재화 를 표현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의식적, 무

의식적 전통 을 거쳐서 해석된 현재화된 과거는 본래적 사실인 과거적 현

재와 비판적으로 비교되어야 하며, 과거 속에 있는 미래 와 가능성 을 새

롭게 발견하는 작업을 통하여 전통들과 도그마들은 비판적으로 상대화되

며, 그들 속에 보존되어 있고 그들을 통하여 배제된 희망들이 다시 파악된

다. 그렇다면 중단된, 억압되었거나 아직 파악되지 않은 과거적 현재들의

가능성들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3) 시간의 근원과 원천으로서의 미래

45) 고흥식, 어거스틴의 시간관, ACT S, 신학석사 학위논문(1991), p.7646) 조성노, 역사와 종말, p.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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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에게 있어서의 미래는 마음 속의 기대 로 존재하는 데 비해서

몰트만에게 있어서 미래는 시간 일반의 근원과 원천이다. 이는 마지막의

것을 마지막 이전의 것 안에서 현재화시키기 때문이며, 시간의 미래를 시

간 한가운데서 현재화 시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재화된 미래는 역사적

가능성들의 새로운 조건들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일방적으로 흘

러가버리는 시간 이해를 거부하고 이처럼 미래 를 현재 속에서 새로움 을

가져다 주는 범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의 신학의 역동성 역시 바로 이러

한 그의 시간 이해에 크게 기초하고 있다 하겠다.

4 . 영 원과 시 간

(1) 영원

어거스틴에게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을 초월해 있는 것이며, 단순히 시

간의 무한한 확장으로서의 영원성이 아니라 절대 불변성을 의미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영원이 시간과 다른 점은 그 연장(시간의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에 있는 것이다. 시간은 항상 지나가는 것이지만 영원은 항

상 머물러 있는 현재(nunc stans)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은 항상 머물러

있음으로 하나님께는 영원한 현재 만이 있을 따름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

원한 현재 안에서는 모든 시간과 모든 것이 현존 하며, 그리고 동시적 으

로 인식되게 된다.

그러나 몰트만은 기독교 신학이 영원=변화 불가능성(Unveränderlich -

- keit ), 시간=변화 가능성(Veränderlichkeit ) '라는 플라톤적 구도를 벗어

나야 함을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은 시간성의 단순한 부정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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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창조적 삶의 충만함(Fülle)을 의미할 때 시간에 대하여 영원을 여는 것

이 가능하다고 한다.47)

(2) 영원과 시간의 연결점

어거스틴은 시간속에 있는 인간이 시간에서 영원으로 상승하기 위해서

는 영원자가 먼저 시간적인 존재가 되셨다는 성육의 역설을 겸손하게 받

아들이고 굳게 붙들어야 한다고 한다. 이렇듯 역사적(시간적)인 성육의 사

건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거스틴은 믿음(fides )이라고 했다.

몰트만은 시간 속에서의 현재적 영원 경험은 영원한 삶의 전체성

(Ganzheit ) 속에 있는 시간의 충만함 의 경험이다고 말한다. 영원한 생명

은 무시간성이나 죽음과 관계없다. 오히려 그것은 성취된 삶 을 말한다.

그러나 역사적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성취된 삶을 오직 순간적 영원의 형태

속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5 . 신 학적 관 심

어거스틴은 그의 시간론을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 서 있는, 시간적 존재

인 인간 실존을 의식하며 전개해 나간다. 따라서 비존재 로 흐르는 그의

시간 개념에서 받는 허무주의적 느낌은 그의 원 의도와 신학적 관심의 연

장선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그는 이러한 인간 실존의 허무함, 시간의 무상

함 자체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피조적 존재, 시간적 존재인 인간이 자신

의 불안정한 존재 기반을 스스로 인식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그 얼굴을

47) 김균진, op. cit ., p.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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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할 것을 갈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몰트만은 기존의 시간이해가 과거와 미래를 동일한 선상으로 가져옴으

로써 성서의 메시야적 시간 이해가 갖는 새로움의 범주를 잃었다고 비판

한다. 또한 무시간적 영원 개념, 그리고 실존주의적 영원 개념으로 인하여

역사와의 분리, 그리고 자연과의 분리가 초래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그의

문제 제기에는 현 시대의 문제- 핵으로 인한 전인류적 위기, 심각한 생태

계 파괴 등의- 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응답이 담겨있다. 따라서 어거스틴

이 개인 구원의 차원에서 시간론을 전개한 것에 비하여 몰트만은 좀 더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생태적 관점으로 지평으로 넓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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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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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대한 기독교서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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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장식, 기독교 사관의 역사(대한 기독교서회, 1992)

7. 조성노, 역사와 종말조성노, 역사와 종말(한국신학연구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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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장일선, 희망의 철학과 희망의 신학, 기독교 사상(198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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