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조경석재·조안정미소 갤러리hwanghaedo.or.kr/minbo/548/HH07-548.pdf · 지금은...

1
第548號 2021年 1月 1日 (金曜日) 【7】 고향(故鄕)은 첫사랑 연인(戀人) 같 다. 고향에는 많은 추억이 남아있고 첫 사랑에는 이루지 못한 미련(未練)이 쌓 여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향과 첫사 랑을 늘 그리워하며 산다. 남몰래 흠모 (欽慕)까지 한다. 연인 같은 고향에 우 리 실향민들은 갈 수가 없다. 칠월 칠 석날이면 견우직녀(牽牛織女)도 일 년 에 한 번은 만난다는데 우리는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70여년 동안 고향 근처에 얼씬도 못 했을까? 그나마 몇 년 전에는 추석이나 설이 되면 이산가 족 만남이 입에 오르 내렸었지만 이제 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있다. 코로나 요놈이 더욱 그렇게 해놔 살아서 고향 가기는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어느 누가 발 벗고 나서는 사람도 없고 만나 야 할 사람들이 자꾸만 저세상으로 가 고들 있다. 그러니 우리 후손들이 혹시 나 어떻게 먼 훗날 고향에 갈지도 몰라 몇 가지 부탁의 말을 하려 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그 러기를 일 곱 번이나 했으니 우리가 살 던 고향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우리 고향은 황해도 구월산 자락에 자리 잡 은 고요한 마을이었다. 고향의 4계절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지. 봄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꽃을 피워 꽃향기가 가득했고 파릇파릇 솟아나는 보리밭 위에서 종달새가 지지배배 지 저귀면 온갖 시름이 사라졌었다. 여름에는 싱아를 벗겨 먹었다. 상큼 달큼했던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 다. 작가 박완서는 그녀의 고향에 “그 많던 싱아 누가 먹었을까?” 했다. 맑은 냇가에서 잡은 물고기로 끓인 매운탕 맛 또한 일품이었고. 가을에는 빨갛게 익은 싱싱한 사과가 그렇게 맛있을 수 가 없었다. 또 구월산 단풍놀이 너무나 좋았다. 떨어진 단풍잎 위에서 친구들 과 즐겁게 뛰어놀던 기억이 떠오른다. 겨울에는 함박눈이 내리는 논에서 썰 매 타고 집에 들어오면 할머니가 물레 질하시며 화로(火爐)에서 구운 따뜻한 감자가 꿀맛이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 했고 흙 색깔 그대로 였다. 밤에는 동 네 사랑방에서 두툼한 빈대떡 시원한 동치미 냉면을 먹었었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는 지금도 그 짼지 두붓국이 먹 고 싶다. “짼지”는 황해도 사투리로 ‘김치’를 일컫는다.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 (W.Wordsworth)는“하늘에 있 는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뛰노라.”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라 하며 “산 에는 기쁨이 있고 샘에는 생기가 있 다” (There’ s joy in the mountains; There’ s is life in the fountains.)라고 했다. 우리들이 두고 온 고향을 생각하 면 가슴이 뛰고 우리가 살았던 마을 산 천(山川)에는 기쁨과 생기가 있었다. 우리 고향마을을 쉽게 가려면 길을 잘 찾아야 한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신작로(新作路)가 있었다. 길 양 쪽에 포플러 (Poplar) 나무가 심겨 있 었고 자갈길이라 자동차가 지나가면 흙먼지가 사방으로 날리었었다. 그래 도 애들은 자동차 오가는 것 구경하느 라 신작로에서 뛰놀았다. 버스가 하루 에 두세 번 지나쳤는데 목탄차라 언덕 에서는 힘이 모자라 차에 타고 있던 사 람들이 내려 차 뒤꽁무니를 밀어줘야 했었다. 장날이 되면 소달구지를 타고 마을 사람들이 그 길로 시장에 갔었는 데 그날이 서로 만나 친교 하는 잔칫날 이었다. 바닷가 사람들은 시장에 갈 때 는 우리 동네 과수원에 들려 사과들을 배불리 먹고 갔었다. 갖고 가는 것은 안 됐지만 먹고 가는 것은 아무 말 않 고 돈 같은 것 받지 않았다. 신작로를 닦아 놓은 건 일본이었다. 우리나라가 8.15 해방되자 그 길로 일 본사람들이 자기 나라로 쫓겨가고 소 련군들이 빵을 먹으며 그 길로 들어왔 었다. 그리고는 누구든 만나면 “다와 이 다와이!”했었다. 뭐든 “내놔라!” 는 소리였다. 시계를 무척이나 좋아했 었다는데 뇌물로 받은 손목시계를 양 팔에 주렁주렁 달고 있던 어느 소련군 이 안방에 걸려 있는 큰 벽시계를 보고 는 손목시계 여러 개와 바꾸자고 떼를 쓰기도 했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한국 전 6·25동란 전쟁이 터지기 바로 전에 는 인민군들이 그 길을 통해 남으로 몰 려갔었다. 그러다가 국군이 북진해 오 자 이번에는 UN군이 껌을 씹으며 그 길로 왔었다. 그때 흑인을 처음 보고는 저 사람들은 세수하지 않아도 되겠네 싶었었다. 1.4 후퇴 때는 많은 사람이 고향을 뒤로하고 그 길을 걸어 걸어 남 으로 피난 갔었다. 너희들도 고향에 가려면 그길로 가 야 한다. 신작로에서 갈라져 위쪽으로 조금 가면 방앗간이 있었고 거기서부터 우 리가 살던 30여 가구의 마을이 이루어 져 있었다. 동네 가운데 오래된 느티나 무가 있었다. 여름에는 그 나무 밑에 멍석을 깔고 동에 어른들이 호박부침 개 와 탁배기(막걸리)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었다. 밤에는 쑥을 태워 모기를 쫓 으며 수박과 참외를 깎아 먹으며 정담 을 나누던 곳이다. 음수사원(飮水思源): 조상이 없었다 면 어떻게 우리가 오늘 있었겠냐. 조상숭배는 사람이 해야 할 효(孝)의 기본 예(禮)이다. 마을 이 집 저 집 들 러 빠짐없이 공손하게 인사를 해라. 인 사드리면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라 “동무들 뉘 십니꺄?”하고 물을 것이다. 오래전에 아니 옛날에 이 동네 살았던 사람들의 후손들이라 말하면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쳤던 사람들의 피붙이라 “일 없어요.” 하며 쌀쌀하게 대할는 지 모른다. 아무 말 말고 다소곳이 받 아드려야 한다. 그건 “왜 이제야 왔느 냐 ?”하는 원망의 소리일 테니까. 그때 헤어진 건 이러했다. 제 발로 걸을 힘 있는 사람들은 피난 길에 올랐고 힘없는 노약자와 어린것 들은 집에 남았었다. 얼마 후 곧 다시 만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못 만나니 피난 떠난 사람들이 배신자가 돼 버렸다.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어떤 험한 말을 듣더라도 그들을 따뜻하게 사랑으로 감싸야 한 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 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 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 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 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잖아. 고향 분들 만나거든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을 소리 내지 말고 보이지 않게 아 낌없이 베풀어라! 그리고 동네 언덕바 지에 나무로 지은 예배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마 빈터로 남아 있을 게다. 그곳에 교회를 아담하게 짓고 “다시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헤어지는 일이 없 게 해 달라!”고 기도해라. 이종민 (은율·전 대전MBC 사장) 고향에 가거들랑 서일조경석재·조안정미소 갤러리 묘지석물 , 조각 건축석 , 각종 조경 납골묘 , 장례상담 , 묘지조성 갤러리- 동양화 , 서양화 , 서예조각 수백점 전시 황해도민과 후손 방문시 차와 음료 무료 본사(갤러리) :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229번길 18-1 (조안초등학교 정문) 공장 :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152-13 (금곡중학교 정문) H P: 010-5252-4040 P : 02- 434-6238 FAX 031-516-1957 이해천

Transcript of 서일조경석재·조안정미소 갤러리hwanghaedo.or.kr/minbo/548/HH07-548.pdf · 지금은...

  • 第548號 2021年 1月 1日 (金曜日) 【7】

    고향(故鄕)은 첫사랑 연인(戀人) 같

    다. 고향에는 많은 추억이 남아있고 첫

    사랑에는 이루지 못한 미련(未練)이 쌓

    여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향과 첫사

    랑을 늘 그리워하며 산다. 남몰래 흠모

    (欽慕)까지 한다. 연인 같은 고향에 우

    리 실향민들은 갈 수가 없다. 칠월 칠

    석날이면 견우직녀(牽牛織女)도 일 년

    에 한 번은 만난다는데 우리는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70여년 동안 고향

    근처에 얼씬도 못 했을까? 그나마 몇

    년 전에는 추석이나 설이 되면 이산가

    족 만남이 입에 오르 내렸었지만 이제

    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있다. 코로나

    요놈이 더욱 그렇게 해놔 살아서 고향

    가기는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어느

    누가 발 벗고 나서는 사람도 없고 만나

    야 할 사람들이 자꾸만 저세상으로 가

    고들 있다. 그러니 우리 후손들이 혹시

    나 어떻게 먼 훗날 고향에 갈지도 몰라

    몇 가지 부탁의 말을 하려 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그

    러기를 일 곱 번이나 했으니 우리가 살

    던 고향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우리

    고향은 황해도 구월산 자락에 자리 잡

    은 고요한 마을이었다. 고향의 4계절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지.

    봄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꽃을 피워

    꽃향기가 가득했고 파릇파릇 솟아나는

    보리밭 위에서 종달새가 지지배배 지

    저귀면 온갖 시름이 사라졌었다.

    여름에는 싱아를 벗겨 먹었다. 상큼

    달큼했던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

    다. 작가 박완서는 그녀의 고향에 “그

    많던 싱아 누가 먹었을까?” 했다. 맑은

    냇가에서 잡은 물고기로 끓인 매운탕

    맛 또한 일품이었고. 가을에는 빨갛게

    익은 싱싱한 사과가 그렇게 맛있을 수

    가 없었다. 또 구월산 단풍놀이 너무나

    좋았다. 떨어진 단풍잎 위에서 친구들

    과 즐겁게 뛰어놀던 기억이 떠오른다.

    겨울에는 함박눈이 내리는 논에서 썰

    매 타고 집에 들어오면 할머니가 물레

    질하시며 화로(火爐)에서 구운 따뜻한

    감자가 꿀맛이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

    했고 흙 색깔 그대로 였다. 밤에는 동

    네 사랑방에서 두툼한 빈대떡 시원한

    동치미 냉면을 먹었었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는 지금도 그 짼지 두붓국이 먹

    고 싶다. “짼지”는 황해도 사투리로

    ‘김치’를 일컫는다.

    영 국 시 인 윌 리 엄 워 즈 워 스

    (W.Wordsworth)는 “하늘에 있

    는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뛰노라.”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라 하며 “산

    에는 기쁨이 있고 샘에는 생기가 있

    다” (There’s joy in the mountains;

    There’s is life in the fountains.)라고

    했다. 우리들이 두고 온 고향을 생각하

    면 가슴이 뛰고 우리가 살았던 마을 산

    천(山川)에는 기쁨과 생기가 있었다.

    우리 고향마을을 쉽게 가려면 길을

    잘 찾아야 한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신작로(新作路)가 있었다. 길 양

    쪽에 포플러 (Poplar) 나무가 심겨 있

    었고 자갈길이라 자동차가 지나가면

    흙먼지가 사방으로 날리었었다. 그래

    도 애들은 자동차 오가는 것 구경하느

    라 신작로에서 뛰놀았다. 버스가 하루

    에 두세 번 지나쳤는데 목탄차라 언덕

    에서는 힘이 모자라 차에 타고 있던 사

    람들이 내려 차 뒤꽁무니를 밀어줘야

    했었다. 장날이 되면 소달구지를 타고

    마을 사람들이 그 길로 시장에 갔었는

    데 그날이 서로 만나 친교 하는 잔칫날

    이었다. 바닷가 사람들은 시장에 갈 때

    는 우리 동네 과수원에 들려 사과들을

    배불리 먹고 갔었다. 갖고 가는 것은

    안 됐지만 먹고 가는 것은 아무 말 않

    고 돈 같은 것 받지 않았다.

    신작로를 닦아 놓은 건 일본이었다.

    우리나라가 8.15 해방되자 그 길로 일

    본사람들이 자기 나라로 쫓겨가고 소

    련군들이 빵을 먹으며 그 길로 들어왔

    었다. 그리고는 누구든 만나면 “다와

    이 다와이!”했었다. 뭐든 “내놔라!” 하

    는 소리였다. 시계를 무척이나 좋아했

    었다는데 뇌물로 받은 손목시계를 양

    팔에 주렁주렁 달고 있던 어느 소련군

    이 안방에 걸려 있는 큰 벽시계를 보고

    는 손목시계 여러 개와 바꾸자고 떼를

    쓰기도 했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한국

    전 6·25동란 전쟁이 터지기 바로 전에

    는 인민군들이 그 길을 통해 남으로 몰

    려갔었다. 그러다가 국군이 북진해 오

    자 이번에는 UN군이 껌을 씹으며 그

    길로 왔었다. 그때 흑인을 처음 보고는

    저 사람들은 세수하지 않아도 되겠네

    싶었었다. 1.4 후퇴 때는 많은 사람이

    고향을 뒤로하고 그 길을 걸어 걸어 남

    으로 피난 갔었다.

    너희들도 고향에 가려면 그길로 가

    야 한다.

    신작로에서 갈라져 위쪽으로 조금

    가면 방앗간이 있었고 거기서부터 우

    리가 살던 30여 가구의 마을이 이루어

    져 있었다. 동네 가운데 오래된 느티나

    무가 있었다. 여름에는 그 나무 밑에

    멍석을 깔고 동에 어른들이 호박부침

    개 와 탁배기(막걸리)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었다. 밤에는 쑥을 태워 모기를 쫓

    으며 수박과 참외를 깎아 먹으며 정담

    을 나누던 곳이다.

    음수사원(飮水思源): 조상이 없었다

    면 어떻게 우리가 오늘 있었겠냐.

    조상숭배는 사람이 해야 할 효(孝)의

    기본 예(禮)이다. 마을 이 집 저 집 들

    러 빠짐없이 공손하게 인사를 해라. 인

    사드리면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라

    “동무들 뉘 십니꺄?”하고 물을 것이다.

    오래전에 아니 옛날에 이 동네 살았던

    사람들의 후손들이라 말하면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쳤던 사람들의 피붙이라

    며 “일 없어요.” 하며 쌀쌀하게 대할는

    지 모른다. 아무 말 말고 다소곳이 받

    아드려야 한다. 그건 “왜 이제야 왔느

    냐 ?”하는 원망의 소리일 테니까.

    그때 헤어진 건 이러했다.

    제 발로 걸을 힘 있는 사람들은 피난

    길에 올랐고 힘없는 노약자와 어린것

    들은 집에 남았었다. 얼마 후 곧 다시

    만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못 만나니 피난 떠난 사람들이

    배신자가 돼 버렸다.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어떤 험한 말을 듣더라도

    그들을 따뜻하게 사랑으로 감싸야 한

    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

    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

    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

    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

    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잖아.

    고향 분들 만나거든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을 소리 내지 말고 보이지 않게 아

    낌없이 베풀어라! 그리고 동네 언덕바

    지에 나무로 지은 예배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마 빈터로 남아 있을 게다.

    그곳에 교회를 아담하게 짓고 “다시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헤어지는 일이 없

    게 해 달라!”고 기도해라.

    이종민 (은율·전 대전MBC 사장)隨 想 고향에 가거들랑

    서일조경석재·조안정미소 갤러리

    묘지석물 , 조각 건축석 , 각종 조경

    납골묘 , 장례상담 , 묘지조성갤러리- 동양화 , 서양화 , 서예조각 수백점 전시

    황해도민과 후손 방문시 차와 음료 무료

    본사(갤러리) :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229번길 18-1

    (조안초등학교 정문)

    공장 :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152-13 (금곡중학교 정문)

    H P: 010-5252-4040 P : 02- 434-6238 FAX 031-516-1957 이해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