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構造와 系譜 · 구암리에 신라고분이 조성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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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 -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構造와 系譜 吳 在 鎭 Ⅰ. 머리말 Ⅱ. 忠州地域 新羅古墳의 調査現況 Ⅲ. 新羅 石室墓의 形式과 編年 Ⅳ.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系譜 Ⅴ. 맺음말 - - 충주지역 석실묘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조사된 원형 석실묘를 제외한 석실묘는 현 실의 평면형태에 의해 크게 방형·횡장방형·장방형으로 분류되었고, 연도의 위치에 따라 중 앙연도·우편연도·좌편연도가 달린 것으로 세분되었다. 충주지역 신라 석실묘는 출토유물로 보아 크게 두 단계로 설정된다. Ⅰ단계는 루암리와 하 구암리에 신라고분이 조성되기 시작하는 단계로 모든 형식의 석실묘가 축조되었으며, 단각고 배와 부가구연장경호를 표지로 하는 신라후기양식토기로 보아 6세기 중엽에서 후엽으로 편년 되었다. Ⅱ단계는 단월동에 신라고분이 조성되는 단계로 현재까지는 장방형의 현실에 우편연 도가 달린 석실묘만 축조되었으며, 합과 병을 표지로 하는 인화문토기로 보아 7세기 전반으 로 편년되었다. 충주지역 석실묘는 문경지역이나 영주지역 등 영남 북부지방과의 석실묘와 구조적으로 관 련성이 희박한 반면에, 합천 저포리고분군 등 낙동강 서안지방의 석실묘와 형태나 구조적으 로 관련성이 깊어 주목된다. 이와 같은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기록을 통해 볼 때 신라는 6세기 중엽 이후 충주지역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충주는 한강 중·상류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충주지역에 축조된 신라고분은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 과정을 규 명하는데 미비한 문헌 기록을 보완해 주는 고고학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주제어 : 충주, 신라 석실묘, 구조, 편년,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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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構造와 系譜

    吳 在 鎭

    Ⅰ. 머리말

    Ⅱ. 忠州地域 新羅古墳의 調査現況

    Ⅲ. 新羅 石室墓의 形式과 編年

    Ⅳ.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系譜

    Ⅴ. 맺음말

    - 요 약 -

    충주지역 석실묘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조사된 원형 석실묘를 제외한 석실묘는 현

    실의 평면형태에 의해 크게 방형·횡장방형·장방형으로 분류되었고, 연도의 위치에 따라 중

    앙연도·우편연도·좌편연도가 달린 것으로 세분되었다.

    충주지역 신라 석실묘는 출토유물로 보아 크게 두 단계로 설정된다. Ⅰ단계는 루암리와 하

    구암리에 신라고분이 조성되기 시작하는 단계로 모든 형식의 석실묘가 축조되었으며, 단각고

    배와 부가구연장경호를 표지로 하는 신라후기양식토기로 보아 6세기 중엽에서 후엽으로 편년

    되었다. Ⅱ단계는 단월동에 신라고분이 조성되는 단계로 현재까지는 장방형의 현실에 우편연

    도가 달린 석실묘만 축조되었으며, 합과 병을 표지로 하는 인화문토기로 보아 7세기 전반으

    로 편년되었다.

    충주지역 석실묘는 문경지역이나 영주지역 등 영남 북부지방과의 석실묘와 구조적으로 관

    련성이 희박한 반면에, 합천 저포리고분군 등 낙동강 서안지방의 석실묘와 형태나 구조적으

    로 관련성이 깊어 주목된다.

    이와 같은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기록을 통해 볼 때 신라는 6세기 중엽 이후 충주지역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충주는 한강 중·상류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충주지역에 축조된 신라고분은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 과정을 규

    명하는데 미비한 문헌 기록을 보완해 주는 고고학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주제어 : 충주, 신라 석실묘, 구조, 편년, 계보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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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머리말

    충주는 조령과 이화령을 통해 영남 북부지방의 문경지역과 연결되며, 남한강

    을 통하여 한강 중·하류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삼국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을 끊임없이 전개한 만큼 각 국의 많은 유적이 분

    포하고 있다.

    이렇게 매우 중요한 역사성을 지닌 충주지역에서 신라고분이 처음으로 조사된

    것은 1989년 루암리고분군이다. 루암리고분군(文化財硏究所 1991·1992, 忠北大

    學校博物館 1993)은 이 지역에 산재해 있는 고분군 가운데 가장 밀집도가 높은

    대규모 고분군 중 하나로 충주지역 신라고분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

    었다. 그러나 이후 간헐적으로 단월동고분군 등 신라고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

    지다가, 1999년 하구암리고분군(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2000)에 대한 지표조

    사 결과 총 386기의 고분이 확인되어 대규모의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음이 알려

    지게 되었다. 2008년 충주 하구암리유적(중앙문화재연구원 2008)에서 신라 석실

    묘 35기와 석곽묘 31기가 확인되었는데, 충주지역에서 신라고분으로서는 루암리

    고분군 발굴조사 이후 최대 규모로 조사되었으며, 특히 원형 석실묘가 우리나라

    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조사성과를 바탕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신라의 호서지방 진출과정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충주지역에 대한 신라고분이 일부 다루어지기 시작하였

    다(서영일 1999, 山本孝文 2001:pp.1~44, 吳在鎭 2001:pp.45~65). 또한 충북지

    방 고분문화 전개과정과 관련하여 각 정치세력의 교체와 지역적 범위에 초점을

    맞추어 지금까지의 조사·연구 상황이 정리되기에 이르렀다(최병현 2008:

    pp.63~90).

    이상과 같이 신라의 충주지역 진출과정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

    으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충주지역의 석실묘 그 자체에 대한 분석은

    다소 소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먼저 충주지역에서 지금까지

    조사된 신라고분의 현황을 살펴보고, 충주지역의 신라 석실묘를 대상으로 형식

    을 분류하고 편년을 설정하고자 하며, 마지막으로 충주지역 신라 석실묘의 각

    형식에 따른 계보를 파악하여 보고자 한다.

  •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構造와 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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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 忠州地域 新羅古墳의 調査現況

    지금까지 충주지역의 신라고분은[도면 1]과 같이 남한강과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 주변 능선의 경사면에 분포하고 있으며, 달천강 동안에 위치하고 있는

    단월동고분군과 용산동유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라 고분군이 남한강이나 달천

    강 서안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루암리와 하구암리 일대에는 약 600여기의 고분

    이 밀집되어 있는 대규모의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주

    지역에서 신라고분은 루암리고분군을 비롯하여 단월동고분군, 하구암리고분군,

    퉁점고분군Ⅱ, 큰골유적, 음달말유적, 용관동고분군, 용산동유적, 하구암리유적,

    완오리유적 등에서 조사되었다.

    범례 1. 하구암리고분군 2. 큰골유적 3. 퉁점고분군Ⅱ 4. 하구암리유적 5. 음달말유적 6. 완오리유적 7. 루암리고분군 8. 용관동고분군 9. 단월동고분군 10. 용산동유적

    [도면 1] 충주지역 신라고분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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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樓岩里古墳群(도면 2)

    루암리고분군은 1991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남한강의 지류

    인 달천강 서쪽에 접한 중원군 가금면 루암리 일대에 약 230여기의 고분이 분포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忠北大學校博物館 1992).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3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동서방

    향의 주능선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은 가지능선상에서 신라시대 횡혈식석실묘 23

    기를 비롯하여 횡구식석곽묘 2기·소형 석곽묘 3기, 고려시대 석곽묘 5기·토광

    묘 2기, 조선시대 토광묘 4기 등 모두 39기의 분묘가 조사되었으며1), 신라고분

    은 28기이다.

    신라고분은 일정한 묘역을 갖고 조성되었으며, 횡혈식석실묘는 등고선 방향과

    9호분

    20호분

    21호분

    1호분출토유물

    2호분출토유물

    7호분출토유물

    7-Ⅱ호분출토유물

    10호분출토유물

    19호분출토유물

    [도면 2] 루암리고분군 석실묘 및 출토유물

    1) 충주지역 신라고분의 조사현황에서‘○○분’과‘○○묘’로 기술되었으나, 논리 전개상‘○○묘’로 통일하였으며, ‘석실’과‘석곽’등에 대한 용어는 보고서에 기술된 그대로 사용하였다.

  •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構造와 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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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교하게 경사면을‘ㄴ’자상으로 정지한 후 벽석을 축조한 지상식이다. 벽석2)

    은 할석과 괴석을 사용하여 하단부를 세로쌓기로 수직에 가깝게 축조한 후 상부

    를 가로쌓기로 네 벽을 내경시키면서 궁륭상으로 좁혀 천장의 마무리는 쐐기돌

    을 꽂은 형태이나, 21호분은 천장부를 대형 판상할석을 이용하여 덮었다. 현실의

    평면은 모두 방형이다. 연도는 우편연도가 대다수이고, 중앙연도가 7기이며, 좌

    편연도는 9호분 1기뿐이다.

    유물은 단각고배를 비롯하여 부가구연장경호, 대부직구호, 병 등의 토기류와

    철도자와 관고리 등 철기류, 대단금구와 금동제 이식 등 장신구류가 출토되었다

    (文化財硏究所 1991·1992, 忠北大學校博物館 1993).

    2. 龍觀洞古墳群

    용관동고분군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 서쪽에 접한 가파른 능선의 동쪽 사

    면에 분포하고 있다. 1991년과 충주공업전문대학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를 실

    시하여 신라 횡구식석곽묘 2기와 완전히 파괴되어 형태를 알 수 없는 것 1기 등

    모두 3기가 조사되었다. 그 중 1기는 등고선 방향과 직교되게, 다른 1기는 등고

    선 방향과 평행하게 축조되었다. 그러나 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파악할 수 없다(忠北大學校 博物館 1993:pp.187~199, 忠州市 2001:pp.346~348).

    3. 丹月洞古墳群(도면 3)

    단월동고분군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 북쪽에 접한 낮은 능선의 남쪽 사면

    에 분포하고 있다. 1993년과 1994년 건국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2차에 걸쳐 발굴

    조사가 실시되어 통일신라시대 횡혈식석실묘 6기와 석곽묘 2기, 고려시대 토광묘

    5기와 석곽묘 1기 등 모두 14기의 분묘가 조사되었으며, 신라 고분은 8기이다.

    고분은 대규모의 群을 이루지는 않았고, 2호·4호·6호·9호는 통일신라시대

    전기에 속하고 5호와 10호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속한다고 보았다. 벽석은 할

    석을 사용하여 1~4단까지 수직으로 쌓아오다가 2~5단부터 모를 죽여 가볍게 내

    경하여 올라가며 축조하였다. 현실의 평면은 모두 장방형이며, 천장은 평천장이

    고, 연도는 모두 우편연도이다.

    2) 벽석의 축조방법에서 세로쌓기는 현실의 장축방향과 평행하게 석재를 쌓은 것을, 가로쌓기는 현실의 장축방향에 직교하게 석재를 쌓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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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물은 단각고배를 비롯하여 합, 병 등의 토기류와 철도자와 관못 등 철기류,

    금동제 이식과 은제 팔찌·반지 등 장신구류가 출토되었다(建國大學校 博物館

    1994, 忠州市 2001:pp.364~375).

    5호분

    10호분

    5호분

    출토유물

    10호분 출토유물

    6호분 출토유물

    [도면 3] 단월동고분군 석실묘 및 출토유물

    4. 下九岩里古墳群

    하구암리고분군은 1999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한 지표조사 결

    과 묘곡구역에서 12기, 양직(지)골구역에서 25기, 병마지골구역에서 102기, 위양

    지골구역에서 57기, 걸피기골구역에서 105기, 속도장구역에서 36기, 갓도장골구

    역에서 33기, 조이산구역에서 16기 등 총 386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퉁점마을 구릉에 위치한 8기에 대한 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나 시굴조사라는 한

    계로 인하여 전체적인 형태와 정확한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으며, 횡혈식석실묘

    또는 횡구식석곽묘로 추정될 뿐이다.

    유물은 단각고배와 병 등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2000).

    5. 퉁점古墳群Ⅱ(도면 4)

    퉁점고분군Ⅱ는 충북대학교 박물관이 1991년 실시한 지표조사를 통하여 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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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에 접한 능선에 약 22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고(忠北大學

    校 中原文化硏究所 2000),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능선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남서

    쪽 사면에서 석실묘 1기와 석곽묘 2기, 목탄요 1기, 목탄폐기장 1기 등 모두 5기

    가 확인되었으며, 신라고분은 석실묘 1기이다.

    벽석은 할석을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혼용하여 5~6단까지 수직으로 축조하다

    가 상부는 약간 내경되게 축조하였다. 연도는 중앙연도이다.

    유물은 단각고배를 비롯하여 부가구연장경호, 병 등의 토기류와 철겸과 철도

    자 등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다(韓國文化財保護財團 2001a).

    [도면 4] 퉁점고분군Ⅱ 1호 석실묘 및 출토유물

    6. 큰골遺蹟(도면 5)

    큰골유적은 남한강의 서쪽 평풍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가지능선의 정상부와

    남쪽 사면에 위치한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 의해 2000년부터 2001년까지 발굴

    조사가 실시되어 백탄요 3기, 석실묘 4기, 석곽묘 3기, 석열유구 1기, 야철유구

    3기, 흑탄요 5기, 조선시대 토광묘 3기·구상유구 4기 등 모두 26기가 조사되었

    고, 신라고분은 석실묘 4기와 석곽묘 3기이다.

    석실묘는 경사면을 굴착하고 조성된 반지하식이다. 벽석은 할석을 사용하여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혼용하여 수직으로 쌓은 후 내경하는 부분부터 가로쌓기

    로 축조하였다. 연도는 우편연도가 1기이고, 좌편연도가 2기이다.

    유물은 단각고배와 직구호 등의 토기류와 방추차가 출토되었다(韓國文化財保

    護財團 200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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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호 석실묘

    2호 석실묘

    4호 석실묘

    출토유물

    [도면 5] 큰골유적 석실묘 및 출토유물

    7. 음달말遺蹟

    음달말유적은 남한강의 서쪽에 접한 능선의 서남쪽 사면에 위치하며, 한국문

    화재보호재단에 의해 2000년부터 2001년까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신라 석곽묘

    2기가 확인되었다.

    석곽묘는 생토층을 굴착하고 벽석을 축조하였으며, 1기는 소형 석곽묘이고, 1

    기는 대부분 파괴되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유물은 단각고배와 병 등 토기류가 출토되었다(韓國文化財保護財團 2001b).

    8. 龍山洞遺蹟

    용산동유적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 북동쪽에 접한 능선의 정상부와 남서쪽

    사면에 분포하고 있다.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중앙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

    사가 실시되어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의 것으로 판단되는 석곽묘 13기와 목탄요

    2기, 조선시대 토광묘 5기 등 모두 20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벽석은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혼용하여 축조하였으며, 장축방향은 대체로 등

    고선 방향과 직교되나 2호·12호 석곽묘는 등고선 방향과 평행하게 조성되었다.

    1호·2호·13호 석곽묘는 횡구식으로 추정되었다.

    유물은 단각고배와 병 등 토기류가 출토되었다(中央文化財硏究院 2007)

    9. 下九岩里遺蹟

    하구암리유적은 남한강의 서쪽에 접한 ‘조간이산’정상부에 위치한 진밭등

  •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構造와 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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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발 148m)의 북서쪽 사면에 분포하고 있다. 1999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

    소의 지표조사 당시 조이산구역에 해당하며, 모두 16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2000).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중

    앙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삼국시대 목탄요 10기·석실묘 35

    기·석곽묘 31기, 고려시대 석곽묘 16기, 조선시대 이후로 추정되는 흑탄요 4

    기·토광묘 13기 등 모두 109기가 확인되었고, 신라고분은 모두 66기이다.

    석실은 경사면 위쪽을 단면‘ㄴ’자상으로 얕게 굴광하여 경사면 아래쪽과

    평탄하게 조성한 후 축조한 지상식이다. 벽석은 할석을 사용하여 하단부는 세로

    쌓기로 수직에 가깝게 쌓은 후 상부를 가로쌓기로 네 벽을 내경시켜 축조하였는

    데, 장방형 석실묘는 벽석을 거의 수직으로 축조한 후 대형의 판상할석을 사용

    하여 덮은 평천장8)인 반면에, 방형과 횡장방형, 원형 석실묘는 하부 2~4단 정도

    를 거의 수직으로 쌓고 그 윗단부터 네 벽을 내경시켜 축조한 후 판상할석을

    12호 석실묘

    19호 석실묘

    20호 석실묘

    23호 석실묘

    28호 석실묘

    35호 석실묘

    석실묘 출토유물 31호 석실묘 출토유물 35호 석실묘 출토유물

    [사진 1] 하구암리유적 석실묘 및 출토유물

    8) 실제로 35호 석실묘에서는 동벽 상부에 천장석으로 사용된 판상할석 1매가 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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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용하여 덮은 궁륭상천장으로 추정된다. 현실의 평면은 방형·횡장방형·장방형·

    원형으로 분류되고, 연도 위치는 중앙연도와 좌편연도, 우편연도가 공존하고 있다.

    유물은 단각고배와 부가구연장경호 등 토기류, 철도자와 관고리·관못 등 철

    기류, 은제 대단금구와 금동제 이식 등 장신구류가 출토되었다(중앙문화재연구

    원 2008).

    10. 完五里遺蹟(도면 6)

    완오리유적은 남한강의 서쪽에 접한 법고개고분군의 일부가 충주첨단지방산업

    단지 진입도로 개설사업부지에 포함되면서 2008년 중앙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

    굴조사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시대 석실묘 1기·석곽묘 1기, 고려시대 석곽

    묘 8기·토광묘 1기, 조선시대 목탄요 4기 등 모두 15기가 확인되었다.

    신라고분은 능선 사면에서 확인되었으며, 벽석은 할석을 사용하여 세로쌓기와

    가로쌓기를 혼용하여 축조하였다. 석실묘의 평면은 횡장방형이며, 연도는 우편연

    도이고, 시상은 연도 방향과 직교되게 설치되었으나 대부분 파괴되었다.

    유물은 철도자와 대단금구가 출토되었다(중앙문화재연구원 2008).

    [도면 6] 완오리유적 1호 석실묘 및 출토유물

    Ⅲ.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形式과 編年

    1. 形式分類

    지금까지 충주지역에서 신라 석실묘는[표 1]과 같이 루암리고분군 23기, 단월

  •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構造와 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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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고분군 4기, 퉁점고분군Ⅱ 1기, 큰골유적 3기, 하구암리유적 35기, 완오리유적

    1기 등 모두 67기가 조사되었으며, 이를 대상으로 형식을 분류하고자 한다.

    유적명 유 구현 실 연 도 시 상

    비 고길이×너비 평면비 길이 위치 길이×너비×높이 방향

    루암리

    고분군

    1호분 275×235 1.17:1 350 중앙225×110×45 직교

    배수로225×50 직교

    2호분 245×200 1.23:1 120 우245×85×15 직교

    245×50×15 직교

    3호분 250×263 0.95:1 136 우 263×105×20 직교 배수로

    7호분 235×208 1.13:1 160 우

    208×72 직교

    소형석곽 2기

    제사유구 3기

    205×40 직교

    198×85 직교

    185×43 직교

    7-Ⅱ호분 221×257 0.86:1 130 우 225×120×25 직교

    8호분 230×205 1.12:1 91 우 215×80×25 직교

    9호분 195×215 0.91:1 101 좌 220×80×20 직교

    10호분 205×230 0.89:1 130 우 238×128 직교

    11호분 203×240 0.85:1 105 중앙

    238×95 직교

    234×45 직교

    230×45 직교

    12호분 218×228 0.96:1 170 우 238×70 직교

    13호분 205×225 0.91:1 140 우230×95 직교

    제사유구228×50 직교

    14호분 205×243 0.84:1 110 우215×120 직교 목관 사용

    215×55 직교

    15호분 198×232 0.85:1 120 우 225×95 직교

    16호분 240×223 1.08:1 105 우 232×95 직교

    17호분 250×215 1.16:1 140 우 220×93 직교 제사유구 2기

    18호분 238×261 0.91:1 158 중앙235×75 평행

    200×120 직교

    [표 1] 충주지역 석실묘 현황표 (단위:㎝, ( )는 잔존 및 추정임)

  • - 96 -

    유적명 유 구현 실 연 도 시 상

    비 고길이×너비 평면비 길이 위치

    길이×너비×높

    이방향

    루암리

    고분군

    19호분 250×265 0.94:1 155 중앙254×98 직교

    목관 사용250×55 직교

    20호분 252×234 1.08:1 135 우224×86×32 직교

    250×104×32 직교

    21호분 240×280 0.86:1 320 중앙 285×90×55 직교

    22호분 272×240 1.13:1 220 중앙260×112×50 직교

    배수로167×74×24 평행

    24호분 215×225 0.96:1 200 우 210×96×43 직교

    28호분 241×240 1.00:1 118 중앙 240×94×35 직교

    단월동

    고분군

    5호분 250×190 1.32:1 150 우 전면 직교 목관 사용

    6호분 215×150 1.43:1 130 우 195×60×26 직교

    9호분 170×100 1.70:1 90 우 170×70 직교 제사유구 3기

    10호분 280×120 2.33:1 160 우 · · 목관 사용

    퉁점

    고분군Ⅱ1호 석실묘 243×207 1.17:1 130 중앙

    207×98×32 직교배수로

    207×20×32 직교

    큰골

    유적

    1호 석실묘 228×208 1.10:1 126 좌 220×102×18 직교

    2호 석실묘 230×182 1.26:1 126 우 234×84 직교

    4호 석실묘 228×234 0.97:1 112 좌234×94×36 직교

    236×58×31 직교

    하구암리

    유적

    1호 석실묘 (234)×259 · · (우)

    210×64×34 직교

    200×58×34 직교

    (80)×120×34 평행

    2호 석실묘 (300)×(214) · · (우)190×74×26 직교

    156×56×12 평행

    3호 석실묘 242×(148) · · (우)(148)×108×24 직교

    (118)×56×12 직교

    4호 석실묘 217×249 0.87:1 · (좌) 249×80×35 직교

    5호 석실묘 220×202 1.09:1 (55) 좌 202×108×17 직교

    6호 석실묘 240×210 1.14:1 106 좌

    236×98×9 평행

    184×72×12 평행

    146×68×16 직교

  •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構造와 系譜

    - 97 -

    유적명 유 구현 실 연 도 시 상

    비 고길이×너비 평면비 길이 위치 길이×너비×높이 방향

    하구암리

    유적

    7호석실묘 216×225 0.96:1 111 우 225×54×32 직교

    8호석실묘 225×214 1.05:1 130 우

    225×60×17 직교

    배수로225×66×19 직교

    225×48×26 직교

    140×47×22 직교

    9호석실묘 212×176 1.20:1 104 우196×96×20 평행

    196×90×8 평행

    10호 석실묘 254×196 1.29:1 160 중앙196×82×13 직교

    196×90×8 직교

    11호 석실묘 228×190 1.20:1 129 좌228×100×40 직교

    (53)×(41)×24 직교

    12호 석실묘 261×261 1.00:1 152 좌

    261×97×21 직교

    원형261×46×21 직교

    261×110×23 직교

    13호 석실묘 259×226 1.15:1 130 좌226×96×40 직교

    226×42×44 직교

    14호 석실묘 242×208 1.16:1 120 우

    208×73×26 직교

    208×45×34 직교

    208×74×34 직교

    15호 석실묘 220×197 1.12:1 150 우

    197×44×42 직교

    197×64×56 직교

    197×58×44 직교

    16호 석실묘 240×212 1.13:1 · 좌240×84×20 직교

    240×126×12 직교

    17호 석실묘 232×234 0.99:1 138 좌 234×87×22 직교

    18호 석실묘 220×186 1.18:1 128 우

    176×48×18 직교

    176×38×20 직교

    176×48×22 직교

    168×74×21 평행

    19호 석실묘 218×208 1.05:1 160 좌218×80×6 직교

    174×76×6 직교

  • - 98 -

    유적명 유 구현 실 연 도 시 상

    비 고길이×너비 평면비 길이 위치 길이×너비×높이 방향

    하구암리

    유적

    20호석실묘 234×204 1.15:1 87 중앙204×93×10 직교

    204×42×11 직교

    21호석실묘 244×222 1.10:1 (52) 우

    222×70×6 직교

    222×46×8 직교

    222×36×10 직교

    222×80×8 직교

    22호석실묘 242×201 1.20:1 136 좌201×78×6 직교

    (136)×52×13 직교

    23호석실묘 243×261 0.93:1 182 우260×94×18 직교

    배수로260×88×14 직교

    24호석실묘 (222)×212 · · ·212×132×12 직교

    (136)×74×8 직교

    25호석실묘 221×246 0.90:1164

    좌246×69×32 직교

    남벽 보축202 246×80×36 직교

    26호석실묘 214×212 1.01:1 169 우212×60×39 직교

    212×118×43 직교

    27호석실묘 238×228 1.04:1 · 우 · ·

    28호석실묘 168×229 0.73:1 112 좌 229×106×18 직교

    29호석실묘 250×228 1.10:1 (76) 우228×86×14 직교

    228×84×25 직교

    30호석실묘 146×205 0.71:1 · ·

    205×44×9 직교

    205×70×10 직교

    205×32×6 직교

    31호석실묘 (254)×226 · · ·

    226×76×14 직교

    226×64×20 직교

    226×130×20 직교

    32호석실묘 236×230 1.03:1 194 우

    236×54×28 직교

    원형236×54×32 직교

    236×60×35 직교

    236×26×36 직교

  •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構造와 系譜

    - 99 -

    유적명 유 구현 실 연 도 시 상

    비 고길이×너비 평면비 길이 위치 길이×너비×높이 방향

    하구암리

    유적

    33호석실묘 244×224 1.09:1 94 좌224×80×40 직교

    224×44×34 직교

    34호석실묘 236×119 1.98:1 95 우 232×74×18 평행 목관 사용

    35호석실묘 220×98 2.24:1 126 우 216×60×12 평행 목관 사용

    완오리유적

    1호 석실묘 90×186 0.48:1 · 우 (96)×40×10 직교

    이미 신라 횡혈식석실묘는 대체로 현실의 평면형태에 따라 방형·횡장방형·장

    방형으로, 연도의 위치에 따라 중앙연도·우편연도·좌편연도로 분류되어 왔으며,

    천장의 구조와 시상의 구조, 벽석의 축조방법 등에 의하여 세부적으로 이루어져

    왔다(崔秉鉉 1992:pp.434~518, 洪潽植 1993:pp.81~89, 강현숙 1996:pp.113~132).

    따라서 충주지역 석실묘9)도 이러한 분류 기준을 적용하여 현실의 평면형태10)

    에 의해 크게 방형(Ⅰ형)·횡장방형(Ⅱ형)·장방형(Ⅲ형)으로 분류하고 연도의 위

    치에 따라 중앙연도(a식)·우편연도(b식)·좌편연도(c식)로 세분하면 석실묘는

    [표 2]와 같이 분류할 수 있는데11), Ⅰ형은 모든 연도위치가 확인되었으나, Ⅱ형

    은 우편연도와 좌편연도만, Ⅲ형은 우편연도만 확인되었다. 각 형식에 따른 벽석

    의 축조방법과 천장 및 시상의 구조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Ⅰ형은 경사면 위쪽을 단면 ‘ㄴ’자상으로 얕게 굴광하여 경사면 아래쪽과

    평탄하게 조성한 후 축조한 지상식의 방형 석실묘이다. 벽석은 할석과 괴석을

    사용하여 하단부를 세로쌓기로 수직에 가깝게 축조한 후 상부를 가로쌓기로 네

    벽을 내경시켰으며, 천장은 궁륭상이다. 연도의 위치에 따라 3식으로 세분된다.

    Ⅰa형식은 중앙연도가 달린 석실묘로 루암리고분군 1호분·11호분·18호

    분·19호분·21호분·22호분·28호분, 퉁점고분군Ⅱ 1호 석실묘, 하구암리유적 10

    호·20호 석실묘 등 모두 10기가 해당된다. 현실의 규모는 길이 200~280㎝, 너비

    195~265㎝이다. 시상의 장축12)은 루암리고분군 18호분과 하구암리유적 10호·20

    9) 현재 학계에서는 석실묘란 용어를 횡구식과 횡혈식에 모두 사용하거나, 횡혈식만을 석실묘로 사용하기도 하는 등 통일되지 않고 있다. 본고에서는 현실에 연도가 달린 무덤, 즉 횡혈식만을 석실묘로 한정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10) 현실의 규모에서 길이는 연도 방향과 평행한 것을, 너비는 연도 방향과 직교하는 것이며, 현실의 형태가 원형인 석실묘를 제외한 나머지 석실묘의 현실 평면은 평면비 0.8:1 이하를 횡장방형, 0.8~1.3:1을 방형, 1.3:1 이상을 장방형으로 분류하고자 한다.

    11) 하구암리유적에서 평면형태가 원형인 12호 석실묘와 32호 석실묘가 확인되었으나, 현재로서는 한 형식으로 분류하기에 무리가 있어 본고의 형식분류에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 - 100 -

    a식 b식 c식 b식 c식 b식

    Ⅰ형 Ⅱ형 Ⅲ형

    [표 2] 충주지역 석실묘 형식분류표

    호 석실묘만 현실의 장축방향과 직교되게 설치하였고 다른 석실묘는 평행하게

    설치하였고, 루암리고분군 19호분은 목관을 사용하여 시신을 안치하였다.

    Ⅰb형식은 우편연도가 달린 석실묘로 루암리고분군 2호분·3호분·7호분·7-

    Ⅱ호분·8호분·10호분·12호분·13호분·14호분·15호분·16호분·17호분·20

    호분·24호분, 큰골유적 2호 석실묘, 하구암리유적 7호·8호·9호·14호·15

    호·18호·21호·23호13)·26호·27호·29호·32호 석실묘 등 모두 27기가 해당

    된다. 현실의 규모는 길이 195~255㎝, 너비 175~265㎝이다. 시상의 장축은 큰골

    유적 2호 석실묘와 하구암리유적 7호·8호·14호·15호·18호·21호·23호·26

    호·27호·29호·32호 석실묘가 현실의 장축방향과 직교되게 설치한 반면에, 하

    구암리유적 9호 석실묘와 이 형식에 속하는 모든 루암리고분군 석실묘는 평행하

    게 설치하였고, 루암리고분군 19호분은 목관을 사용하여 시신을 안치하였다.

    Ⅰc형식은 좌편연도가 달린 석실묘로 루암리고분군 9호분, 큰골유적 1호·4호

    석실묘, 하구암리유적 4호·5호·6호·11호·12호·13호·16호·17호·19호·22

    호·25호·33호 석실묘 등 모두 15기가 해당된다. 현실의 규모는 길이 195~260

    ㎝, 너비 190~260㎝이다. 시상의 장축은 루암리고분군 9호분과 큰골유적 4호 석

    실분, 하구암리유적 6호 석실묘만 현실의 장축방향과 평행하게 설치하였고 나머

    지 석실묘의 시상은 직교되게 설치하였다.

    Ⅱ형은 경사면 윗쪽을 단면 ‘ㄴ’자상으로 얕게 굴광하여 경사면 아래쪽을

    평탄하게 조성한 후 축조한 지상식의 횡장방형 석실묘이다. 연도 위치를 알 수

    없는 하구암리 30호 석실묘를 제외하면 중앙연도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우편연도

    12) 시상의 장축방향은 연도의 방향과 평행하는 것을 말하며, 시상(관대)의 장축방향은 1차 시상을 기준으로 한다.

    13) 23호 석실묘의 경우 현실 우측 벽이 곧게 연결되다가 연도부에서 벽석 1개 정도를 좌측으로 꺾은 후 연도 우측 벽을 축조하였다. 따라서 완전한 우편연도는 아니지만 하나의 형식으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우편연도에 포함하여 기술한다.

  •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構造와 系譜

    - 101 -

    (b식)와 좌편연도(c식)가 확인되었다.

    Ⅱb형식은 우편연도가 달린 석실묘로 완오리 1호 석실묘 1기뿐이며, 현실의 규

    모는 길이 90㎝, 너비 186㎝이다. 벽석은 할석을 사용하여 세로쌓기와 가로쌓기를

    혼용하여 축조하였다. 시상의 장축은 현실의 장축방향과 직교되게 설치하였다.

    Ⅱc형식은 좌편연도가 달린 석실묘로 하구암리유적 28호 석실묘 1기뿐이며,

    현실의 규모는 길이 168㎝, 너비 229㎝이다. 벽석은 할석을 사용하여 하단부를

    세로쌓기로 수직에 가깝게 축조한 후 상부를 가로쌓기로 네 벽을 내경시켰으며,

    천장은 궁륭상으로 추정된다. 시상의 장축은 현실의 장축방향과 직교되게 설치

    하였다.

    Ⅲ형은 경사면 윗쪽을 단면 ‘ㄴ’자상으로 얕게 굴광하여 경사면 아래쪽을

    평탄하게 조성한 후 축조한 지상식의 장방형 석실묘이다. 단월동고분군 5호·6

    호·9호·10호분과 하구암리유적 34호·35호 석실묘 등 6기가 해당되며, 우편연

    도인 b식만이 확인되었다. 현실의 규모는 길이 220~280㎝, 너비 95~120㎝이다.

    벽석은 할석과 괴석을 사용하여 하단부를 세로쌓기로 축조한 후 상부를 가로쌓

    기로 네 벽을 수직에 가깝게 축조하였으며, 천장은 평천장이다. 시상의 장축은

    현실의 장축방향과 평행하게 설치하였다. 단월동고분군 5호·10호분과 하구암리

    유적 34호·35호 석실묘는 목관을 사용하여 시신을 안치하였다.

    2. 編年

    충주지역 신라고분은 시기적으로 한정되어 있고, 또 출토유물이 많지 않으며,

    출토된 유물 또한 절대연대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세부적으로

    편년하기에 어려움이 많다. 따라서 충주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의 변화과정을 대

    략적으로 살펴본 후 영남지방의 신라토기 편년안들과 비교하여 단계를 설정하고

    각 단계의 연대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충주지역에서는 신라전기양식토기는 출토되지 않았으며, 단각고배와

    부가구연장경호를 표지로 하는 신라후기양식토기와 합과 병을 표지로 하는 인화

    문토기가 출토되었다. 그러므로 충주지역 신라 석실묘의 단계는 [표 3]과 같이

    크게 Ⅰ단계 신라후기양식토기단계, Ⅱ단계 인화문토기단계로 파악할 수 있다.

    단계는 루암리고분군, 퉁점고분군Ⅱ, 하구암리고분군, 하구암리유적의 석실묘

    와 유물이 해당된다. 석실묘는 경사면 윗쪽을 단면 ‘ㄴ’자상으로 얕게 굴광

    Ⅰ하여 경사면 아래쪽을 평탄하게 조성한 후 축조하였다. 현실은 방형·횡장방

  • - 102 -

    유 물

    단 계토 기 대 단 금 구 시 기

    Ⅰ단계6세기

    중엽~후엽

    Ⅱ단계

    7세기 전반

    [표 3] 충주지역 신라 석실묘 편년표

    형·장방형 석실묘 모두 축조되었으며, 연도는 중앙연도·우편연도·좌편연도

    모두 보인다. 방형과 횡장방형 석실묘의 벽석은 할석을 사용하여 하단부를 세로

    쌓기로 수직에 가깝게 축조한 후 상부를 가로쌓기로 네 벽을 내경시켰으며, 천

    장은 궁륭상이다. 장방형 석실묘의 벽석은 할석과 괴석을 사용하여 하단부를 세

    로쌓기로 축조한 후 상부를 가로쌓기로 네 벽을 수직에 가깝게 축조하였으며,

    천장은 평천장이다.

    단각고배는 구연부가 길게 안으로 숙여졌으며 뚜껑받이 턱이 위로 짧게 돌출

    되었고, 배신이 비교적 깊다. 부가구연장경호는 구연부가 직립하였으며, 동체는

    구형이다. 병은 반구형의 구연부가 좁고 동체가 구형이며 대각은 부착되지 않았

    다. 이러한 신라후기양식토기는 울주 화산리고분군 제Ⅱ군(釜山大學校博物館

    1983), 상주 청리유적 A지구(韓國文化財保護財團 1998)·병성동고분군(韓國文化

    財保護財團 2001) 등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또한 루암리고분군 10호분과 하구암리유적 31호 석실묘에서 출토된 대단금구는

    끝으로 갈수록 조금씩 넓어지며 끝이 둥글게 처리되었고, 띠연결부와 띠끝장식이

    경첩고리식으로 연결되었다. 이 대단금구는 상주 청리유적 A-나지구 10호 석실

    분·A-다지구 1호 석실분·A-다지구 10호 석실분(韓國文化財保護財團 1998), 합천

    저포리고분군 E지구 14호분(釜山大學校博物館 1987) 등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충주지역의 신라 석실묘 Ⅰ단계는 崔秉鉉의 신라후기양식토기 1~4단계(崔秉鉉

    1992:pp.661~700), 洪潽植의 후기양식토기 제Ⅲ·Ⅳ양식(洪潽植 2001:pp.39~81),

    李漢祥의 대금구 3단계(李漢祥 1996:pp.51~78)와 평행기인 6세기 중엽~후엽으로

    편년될 수 있다.

    Ⅱ단계는 단월동고분군 2호·4호·6호분의 석실묘와 유물이 해당된다. 석실묘는

  •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構造와 系譜

    - 103 -

    얕게 굴광하여 평탄하게 조성한 후 축조하였으며, 모두 우편연도가 달린 장방형

    석실묘이다. 벽석은 할석을 사용하여 하단부를 수직으로 쌓다가 상부부터 모를 죽

    여 가볍게 내경시켜 축조하였으며, 천장은 평천장이다. 시상의 장축은 현실의 장

    축방향과 평행하게 설치하였으며, 목관을 사용하여 시신을 안치한 경우도 있다.

    단각고배는 Ⅰ단계보다 뚜껑받이 턱의 높이가 낮아져 구연과 높이가 같아졌으

    며, 배신이 얕아졌다. 부가구연장경호는 출토되지 않는다. 합은 구연부가 직립하

    는 것과 외반하는 것이 공반하고, 동체에는 종방향의 점열문이 찍혀 있다. 병은

    반구형의 구연부가 넓으며 동체가 편구형이고 대각이 넓다. 대단금구는 출토되

    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인화문토기는 부여 정림사지 蓮池(李熙濬 1994:121-135),

    慶州 皇龍寺址 東金堂址(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84), 상주 청리유적 A-가

    지구 18호 석실분·20호 석실분·22호 석곽묘·A-다지구 12호 석실분(韓國文化

    財保護財團 1998) 등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충주지역의 신라 석실묘 Ⅱ단계는 崔秉鉉의 신라후기양식토기 5·6단계(崔秉

    鉉 1992:pp.661~700), 洪潽植의 통일양식토기 제Ⅰ양식(洪潽植 2001:pp.39~81),

    宮川禎一의 종장연속문이 출현하는 2a기(宮川禎一 1991:pp.205~228)와 평행기인

    7세기 전반으로 편년될 수 있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충주지역에서 지금까지 조사된 신라 석실묘에 한

    정시켜 볼 때 신라 석실묘는 먼저 남한강이나 그 지류인 달천강 서안에 조성되

    었고, 차츰 달천강 동안으로 그 축조 범위가 확대된 것으로 판단된다.

    Ⅳ.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系譜

    충주지역 신라 석실묘의 계보는 앞에서 살펴본 충주지역 석실묘의 형식별로

    파악해보고자 한다. 그러나 단월동고분군에서 조사된 4기의 석실묘는 7세기 이

    후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충주지역 석실묘의 계보를 파악하기 위한 자

    료로서 부적당하고, 석실묘 1기가 조사된 퉁점고분군Ⅱ와 석실묘 3기가 조사된

    큰골유적은 하구암리유적과 인접해 있으며 유구의 형태 및 출토유물 등으로 보

    아 하구암리유적과 하나의 고분군에 포함시켜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루암리고

    분군과 하구암리유적을 대상으로 계보를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먼저 충주지역 석실묘의 계보를 파악하기 위해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두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발달된 영남 북부지방의 문경지역과 영주지역을 살펴

  • - 104 -

    보고자 한다.

    문경지역은 계립령이나 조령, 이화령을 통하여 충주지역에 가장 가깝게 접근

    할 수 있는 곳으로, 지금까지 新峴里古墳群(中原文化財硏究院 2007)이 조사되었

    다. 신현리고분군에서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수혈식석곽분

    20기, 횡구식석곽분 5기, 횡구식석실분 3기 등 모두 28기가 조사되었으나, 본고

    에서 대상으로 하는 횡혈식석실묘는 조사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영주지역은 죽령을 통하여 단양을 지나 충주지역에 접근할 수 있는

    곳으로, 석실묘는 순흥면에서 於宿墓(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1984)와 邑內里 壁畵

    古墳(大邱大學校 博物館 1984), 읍내리 3호분·11호분(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

    所 1994), 바느레고분(동양대학교 박물관 2007) 5기가 조사되었다.

    이들 석실묘는 [도면 7]과 같이 묘광을 판 후 벽석 6단까지 수직으로 쌓고 7

    단부터 약간씩 내경시킨 후 천장을 2매의 판석을 사용하여 덮었다. 현실의 규모

    는 길이 180~274㎝, 너비 240~353㎝이며, 평면은 평면비 0.57:1~1.13:1의 횡장

    방형 3기, 방형 2기이다. 연도는 횡장방형 석실묘 3기는 모두 좌편연도인 반면

    에, 방형 석실묘는 어숙묘가 우편연도, 바느레고분이 좌편연도이다. 시상은 높이

    20㎝인 어숙묘의 2차 시상을 제외하면 어숙묘 1차 시상과 읍내리 벽화고분, 읍

    내리 3호분·11호분이 높이 55㎝ 이상의 고시상이며, 현실의 방향과 평행하게

    한쪽 벽에 붙여 시상이 설치된 읍내리 3호분과 바느레고분을 제외하면 어숙묘와

    읍내리 벽화고분, 읍내리 11호분은 벽석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되었다. 시

    상의 설치방법은 어숙묘가 2매의 판석으로 설치하였고, 벽화고분이 괴석을 쌓아

    설치하였으며, 읍내리 11호분과 바느레고분은 자연석을 3단 깔고 상부에 2매의

    판석을 놓아 설치하였고, 방형 석실인 읍내리 3호분은 자연석을 깔고 상부에 강

    자갈을 깔아 사용하였다. 이러한 특징들로 보아 충주지역 석실묘 Ⅱ형식과 충주

    지역 석실묘와 벽석의 축조방법은 유사한 점이 보이나, 시상의 축조방법과 천장

    의 구조 등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영남 북부지방의 문경지역에서는 석실묘가 조사

    되지 않았고, 충주지역 석실묘와 영주지역의 석실묘와는 구조적으로 이질적인

    면이 많다. 따라서 충주지역 석실묘의 계보는 영남 북부지방보다는 다른 지역에

    서 찾아야 하는데, 서부 경남지방의 합천 저포리고분군(曉星女子大學校博物館

    1987, 釜山大學校博物館 1987)의 석실묘가 그 형태나 구조 등에서 주목된다.

    합천 저포리고분군은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유역의 구릉 경사면에 분포하고 있

    으며, 석실묘와 횡구식석곽묘가 주로 조사되었다. 여기에서 조사된 석실묘는 얕

  •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構造와 系譜

    - 105 -

    어숙묘 읍내리 벽화고분

    읍내리 11호분

    [도면 7] 영주지역 석실묘

    은 묘광을 파고 네 벽을 세로쌓기로 3~5단까지 수직으로 쌓고 그 상부를 내경

    시켜 궁륭상으로 축조한 형태이며, 현실의 평면은 방형·횡장방형·장방형이

    모두 보이며, 연도는 중앙·좌편·우편에 설치되어 있다. 시상은 할석과 천석

    을 사용하여 높이 10~40㎝로 설치하였다.

    충주지역의 중앙에 연도가 달린 방형 석실묘(Ⅰa형식)는 합천 저포리고분군

    C지구 2호·E지구 2호분·6호분, 우편에 연도가 달린 방형 석실묘(Ⅰb형식)는

    합천 저포리고분군 E지구 8-1호분, 좌편에 연도가 달린 방형 석실묘(Ⅰc형식)

    는 합천 저포리고분군 C지구 6호·E지구 9호분·14호분·23-1호분 등과 현실

    의 규모나 형태, 벽석의 축조방법, 연도의 위치, 시상의 형태 등과 각각 관련성

    이 깊다. 좌편에 연도가 달린 횡장방형 석실묘(Ⅱc형식)는 합천 저포리고분군

    E지구 11호분, 우편에 연도가 달린 장방형 석실묘(Ⅲb형식)는 합천 저포리고분

    군 E지구 1-3호분·15-1호분·19호분 등과 구조에 있어서 매우 유사하다. 특

    히 루암리고분군 2호분과 10호분, 하구암리유적 18호 석실묘는 연도가 비스듬

    하게 설치되또한 신라 석실묘에서는 일반적으로 목관 없이 피장자 시신을 직

    접 시상 위에 안치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崔秉鉉 1992:p.482). 그런데 루

    암리고분군 14호분·19호분과 하구암리유적 34호·35호 석실묘에서는 관고리

    나 관못이 출토되어 목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러한 관고리와 관못

    은 합천 저포리고분군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연도는 합천 저포리 11호분·23-1

    호분에서도 보이고 있다. 이상으로 충주지역 석실묘의 각 형식별 계보를 정리하

    면 [표 4]와 같다.

  • - 106 -

    지 역

    형 식충 주 지 역 합천 저포리고분군

    Ⅰ형

    a식

    하구암리유적 20호 석실묘 루암리고분군 21호분

    C지구 2호분

    b식

    하구암리유적 23호 석실묘 루암리고분군 7호분E지구 8-1호분

    c식

    하구암리유적 19호 석실묘 루암리고분군 9호분E지구 9호분

    Ⅱ형 c식

    하구암리유적 28호 석실묘 E지구 11호분

    Ⅲ형 b식

    하구암리유적 35호 석실묘 E지구 15-1호분

    [표 4] 충주지역 석실묘 형식별 계보

  •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構造와 系譜

    - 107 -

    E지구 2호분·12호분·14호분 등에서도 출토되었다. 루암리고분군 5호분·10

    호분과 하구암리유적 31호 석실묘에서 출토된 대단금구는 합천 저포리고분군 E

    지구 14호분에서 출토된 것과 매우 유사하다([표 5] 참조).

    유적명

    유물명충 주 지 역 합천 저포리고분군

    대단금구

    하구암리유적 31호 석실묘 루암리고분군 10호분 E지구 14호분

    관고리·관못

    하구암리유적 35호 석실묘 루암리고분군 19호분 E지구 19호분

    [표 5] 충주지역·합천 저포리고분군 석실묘 출토 대단금구 및 관고리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충주지역 석실묘는 낙동강 서안지방의 합천 저포

    리고분군 석실묘의 형태와 구조, 목관의 사용, 유물 등에서 유사하여 두 지역 사

    이의 관련성이 매우 깊다고 판단된다.

    한편 충주지역과 신라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문헌 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는데, 『三國史記』를 통하여 검토해 보고자 한다.

    眞興王 12(551)년 于勒이 가야인이었으며 그의 제자 尼文과 함께 신라에 망명

    하였고 진흥왕은 그를 받아들여 국원에 안치하였다14)는 기록, 진흥왕 18(557)년

    충주에 국원소경을 설치하고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두었다15)는 기록, 진흥

    왕 19(558)년 귀척자제와 육부호민을 이주시켰다16)는 기록이 있다.

    14)『三國史記』卷四, 新羅本紀 第四, 眞興王. 十二年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 樂 特喚之 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 第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 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

    『三國史記』卷三十二, 雜志 第一(樂), 加耶琴. …羅古記云 加耶國嘉實王見唐之樂器而造之 王以謂諸 國方言各異聲音 豈可一哉 乃命樂師省熱縣人于勒造十二曲 後于勒以其國將亂 携樂器投新羅眞興王 王 受之安置國原… .

    15)『三國史記』卷四, 新羅本紀 第四, 眞興王. 十八年 以國原爲小京…廢新州 置北漢山州 .16)『三國史記』卷四, 新羅本紀 第四, 眞興王. 十九年 春二月 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 以實國原… .

  • - 108 -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먼저 신라는 551년 이전에 충주지역을 점령한 후 일차

    적으로 가야 왕족을 포함한 상당수의 지배층을 집단으로 충주지역에 사민시켰으

    며, 557년 새로이 확보한 충주지역을 한강 중·하류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략

    적 요충지로서 회유·감독하기 위하여 소경을 설치하였고(林炳泰 1967:pp.456~483,

    梁起錫 1993:pp.5~31), 이듬해 국원을 실질적인 소경의 역할을 갖추고 한강유역의

    관리를 위해 또다시 중앙의 귀척자제와 6부의 호민을 이주시겼다(張俊植 1998:

    pp.122~128,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2002:pp.64~88)고 판단된다.

    즉 가야 지배층의 사민이 합천 저포리고분군 등 낙동강 서안지방의 석실묘와

    같은 유형의 석실묘가 루암리고분군과 하구암리유적 등 충주지역에 조영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소경 설치 등은 충주지역이 한강

    중·하류지역으로의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한강 중·하류지역의 석실묘17)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

    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Ⅴ. 맺음말

    이상으로 충주지역에서 지금까지 조사된 신라고분의 조사현황을 먼저 살펴보

    았고, 다음으로 신라 석실묘를 대상으로 형식과 편년, 나아가 계보를 파악해 보

    았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충주지역에서 신라고분은 루암리고분군을 비롯하여 단월동고분군,

    하구암리고분군, 퉁점고분군Ⅱ, 큰골유적, 음달말유적, 용관동고분군, 용산동유

    적, 하구암리유적, 완오리유적 등에서 조사되었다.

    충주지역 석실묘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조사된 원형 석실묘를 제외한

    석실묘는 현실의 평면형태에 의해 크게 방형·횡장방형·장방형으로 분류되었

    다. 방형 석실묘는 연도의 위치에 따라 중앙연도·우편연도·좌편연도가 달린

    것으로, 횡장방형 석실묘는 우편연도·좌편연도가 달린 것으로 세분되었으며, 장

    방형 석실묘는 우편연도만 보인다.

    충주지역 신라 석실묘는 출토유물의 편년상 크게 두 단계로 설정된다. Ⅰ단계

    17) 학계에서는 한강 중·하류지역에 축조된 석실묘를 각각 고구려·백제·신라의 것으로 취급하는 등 그 축조집단에 대하여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한 석실묘의 문제는 다음 기회에 다루고자 한다.

  • 忠州地域 新羅 石室墓의 構造와 系譜

    - 109 -

    는 루암리와 하구암리에 신라고분이 조성되기 시작하는 단계로 모든 형식의 석

    실묘가 축조되었으며, 단각고배와 부가구연장경호를 표지로 하는 신라후기양식

    토기로 보아 6세기 중엽에서 후엽으로 편년되었다. Ⅱ단계는 단월동에 신라고분

    이 조성되는 단계로 현재까지는 장방형의 현실에 우편연도가 달린 석실묘만 축

    조되었으며, 합과 병을 표지로 하는 인화문토기로 보아 7세기 전반으로 편년되

    었다.

    충주지역 석실묘는 문경지역에서는 석실묘가 조사되지 않았으며 영주지역의

    석실묘와는 구조적으로 다소 이질적이어서 영남 북부지방과의 관련성은 희박한

    반면에, 합천 저포리고분군 등 낙동강 서안지방의 석실묘와 형태나 구조적으로

    관련성이 깊어 주목된다.

    이와 같은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기록을 통해 볼 때 신라는 6세기 중엽 이후

    충주지역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충주는 한강 중·하류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충주지역에 축조된 신라고분

    은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 과정을 규명하는데 미비한 문헌 기록을 보완해 주

    는 고고학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투고일 2008.08.06. / 심사완료일 2008.09.08.〉

  • - 110 -

    《참 고 문 헌》

    『三國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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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12 -

    Structure and Genealogy of Silla Stone Chamber Graves

    in Chungju

    Oh, Jae-Jin

    Except a stone chamber grave with a round plan first excavated, stone

    chamber graves in Chungju region has been classified into square, long

    rectangular, and rectangular types to the shape of plan of a main chamber,

    and into central, right, and left types to the place of passage.

    Based on artifacts, Koreanarchaeologists have divided the developmental

    stages of the Silla stone chamber graves in Chungju into two phases. In the

    first stage, Silla graves began to be constructed at Luam-ri and Haguam-ri. In

    this phase dated to middle or late 6th century AD based on late types of Silla

    pottery, all types of stone chamber graves had been constructed. In the second

    phase dated to early 7thcentury based on pottery with stamped design, Silla

    graves began to be constructed at Danwol-dong. Stone chamber graves with a

    rectangular plan and a passage placed in right side were the only type of

    stone chamber that had been constructed in the second phase.

    While stone chamber graves in Chungju region display little structural connection

    with the graves of northern Yeongnam region such as those of Mungyeong and

    Yeongju, they show considerable structural connection with those in the west of

    the Nakdong-River, in particular, those from Jeopo-ri site in Hapcheon.

    Both archaeological data and historical accounts suggest that Silla had

    advanced into Chungju region since the middle of the 6thcentury AD.

    Thereafter, Chungju region had become a point of strategic importance to

    expend to the Han River Valley. In collusion, Silla graves are significant

    archaeological data to explain territory expansion processes of the King

    Jinheung and they also complement scanty historical accounts at that time.

    Keyword:Silla stone chamber graves, Chungju, structure, genea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