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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집 2 0 1 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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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집 2 0 1 0년 9월 한국조직신학회편

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Vol.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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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진술에 대한연구 7

김희헌 기독교 신학의 내적딜레마에대한과정사상의응답 43

신옥수 몰트만의 창조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79

이찬석 토착화신학의모델들에 대한비판적 고찰 111

박원빈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 고찰 139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67

김화영 ‘무(無)의 몸-되기’를 통한신학과 과학의 연대 207

최승태 성만찬에 대한신학적 이해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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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신론적진술에대한연구

최성수(한남대학교강사)

I. 서론

칼 바르트(Karl Barth)는 신학의 과제를 Reden von Gott1)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말하였다.

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Vol. 27

Choi, sung soo “Gott als der ganz Andere” - “hinweisendes Reden von

Gott”

Kim, hi heon A Response of Process Theology to the Internal Dilemma

of Traditional Christian Ideas: the Collapse of Substance

Philosophy and the Necessary Arising of Panentheism

Shin, ok su A Study on the Understanding of God’s kenosis in the

Theology of J. Moltmann

Lee, chan seok A Critical Study on the Models of Korean Indigenous

Theology

Park, won bin A Historical Reflection on Anti-Semitism: Focusing on

Accepting Others of German Church in the Second World

War

Paik, Choong hyun Some Responses of Process Theology to the Doctrine of

the Trinity

Kim, hwa young Solidarity of the Theology and Science through Becom-

ing - The Body of Nothingness

Choi, seung tae A Theological Approach to the Eucharist

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7-42

1) 글의 이해를 위해 매우중요한 용어인“Reden von Gott”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살

펴보도록 하겠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Reden von Gottes Handeln(하나님의 행위

에 대한 인간의 진술)이다. 이 개념은 terminus technicus, 즉 신학전문용어로서원래

의 의미는‘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행위를 말하는 것’을 일컫는다.

따라서Reden von Gott은 그대로‘신학’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철학에서 신에 대해

진술하는방식인Reden über Gott과 구별된다.

‘Reden von Gott’에 대한 한국어 이해는 아직 통일되어 있지 않다.‘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말하다’,‘하나님에 대해 말하다’,‘하나님에 대한 언술’,‘하나님에 대한

고백적 진술’,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진술’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Reden von Gott이“하나님에 대해 말하다”로 번역되었지만, 바르트에게 있어서

Reden von Gott의 내포적인 의미는‘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에 근거해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증명을 요구하지 않고 고백될 뿐이다. 바르트

의 이해는고전적인의미를 갖는다. 바르트 연구가들에의해서(특히박순경은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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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의본연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설명한 것이다. 그는자신의 신학 전체

에서하나님과그의말씀, 곧 예수그리스도를말하려고노력했는데, 특

히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기독론 중심적 관점에 강조를 두며, 예수 그리

스도라 명명한 점이두드러진다.4)

필자는 바르트의 신론을 고찰하는 가운데 그의 신론적인 진술이 세

번째 계명, 곧“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

라”라는말씀과 매우 의미 있는상관관계를 갖고 있으며, 심지어 첫 번

째 계명과 더불어서 신학의 또 다른 과제로 설정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가 첫 번째계명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신학적 과

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 번째 계명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일치한

다. 다시 말해서 세 번째 계명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과

인간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 그리고 계시를 남용하는(쓸데없는 곳에사

용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5) 세 번째 계명과의 관계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그가 교의학을 규정하면서“교회의선포

와 성서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의 일치”6)를 추구하는 것으로 본

부분이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은 요구하거나 경

고하며, 그리고 참 진리에 대한 주장을 제기한다는 그의확신에서 찾아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 계시와 믿음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이

다. 하나님에 대해말하는것은 하나님의말씀을 말하는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그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된다(Gott wird Mensch

wird.)’는 이 네 개의 단어를 우리는 말할 수는 있어도, 사실은 그것으

로 그 속에 진리 자체가 들어있는 하나님의말씀을 말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 자신의 말

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우리의 신학적 과

제도바로그것이어야한다.2)

신학함의 과제로서 Reden von Gott과 신학함의 본질을 성찰하는

1933년 코펜하겐 강연에서 바르트는 첫 번째 계명을 신학의 공리로

주장했다.3) 첫 번째 계명을 통해서 신학이 누구와 상관하고 있고, 또 신

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9

의『교회교의학』을 번역하면서 이렇게 번역했다.) 이미‘하나님에 대해 말하다’로 번

역되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Reden von Gott 이해에 따라

신학적인 입장이 달라지는 경우는 판넨베르크와 자우터에게 찾아볼 수 있다(최성수

편저,『신학은 어떤 의미에서 학문인가-판넨베르크와 자우터의 학문이론 논쟁』, 한국

학술정보, 2010). Reden von Gott에 대한자우터의 이해는 바르트적인의미에서 이뤄

지고 있다. 보다자세하게 말한다면, 자우터에게 있어서 이것은 검증의 대상이 아니라

신학의 출발점이 되며, 또한 신학적 논의 과정에서 함께 지향해나가는 최종적인 목표

점에 해당된다. 이에 반해 판넨베르트에게 있어서Reden von Gott은 하나님에 대한

진술로서‘주장’의 성격을 갖는다. 다시말해서참과거짓으로판명될 수 있는명제라

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판넨베르크는신학 역시검증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기 때

문에 고백을 포함한 모든 신학적 진술이 가설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 K. Barth, “Das Wort Gottes als Aufgabe der Theologie”, in: Anfänge der dia-

lektischen Theologie(hg. von J. Moltmann, TB 17/1, 4. Aufl. München 1977), 178-

197. 이 논문은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바르트학회 편역,“신학의 과제로서 하나님의

말씀”, 『말씀과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90-104, 인용은 106.

3) Barth, “Das erste Gebot als theologisches Axiom”, ZdZ X I(1933). 다음의 글에 수록

되어 있다: Theologische Fragen und Antworten: Gesammelte Vorträge. 3. Band

(1927-1942). 2. Aufl.(Z?rich: Theologischer Verlag,1957), 127-143. 독일교회에서

첫 번째계명은 우리에게십계명서언에 해당되는것을포함한다.

4) Barth, Kichliche Dogmatik(이하 KD) I I/1, 173.

5) Barth, Vorträge und kleinere Arbeiten. 1922-1925, hg. von Holger Finze, Gesam-

mtausgabe Bd. 19(TVZ, 1990), 144-175, 172. 이곳에서바르트는세 번째계명의 맥

락에서 신학의 의미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신학의 과제로서 하

나님의 말씀과 세 번째 계명의 상호관계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바르트는

단지 신학자혹은설교자가 처해있는조건적인상황과 관련해서신학의 과제를강조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 필자는 바르트에게 함축되어 있는 신학의 과제와

세 번째계명의관계를분명하게 드러내고자한다.

6) Barth, KD I/1, 289. 바르트의 이런 확신과 세 번째 계명의 상관관계는 세 번째 계명

에 대한 해석에서 보다 분명하게 밝혀진다. 참고: Werner H. Schmidt(zusammen mit

H. Delkurt/A. Grauppner), Die Zehn Gebote im Rahmen alttestamentlicher Ethik

(Darmstadt: Wiss.Buchg. EdF Bd. 281, 1993); 최성수 옮김,『계명은 복음이다』(대전:

글누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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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의Reden von Gott에 있어서 나타나는특징은 주로기독론적

인 정당화 작업에 있다.11) 이것은 슐라이에르마허와 현저하게 다른 점

인데, 왜냐하면 슐라이에르마허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인간의 종교적인 자기의식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Reden von

Gott의 내용을“하나님이인간이 되신다”로 규정하고, 이것을 말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12) 바르트는 신학의 곤고

함을 말하면서, 그것이 신학자가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 의무로

인해서 비롯되었다고 본다.13) 이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 위한

적합한 길을발견하기가쉽지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이유가

있다. 하나는 인간의 본질때문이고, 다른하나는 하나님의행위를 종교

볼 수 있다.7)

바르트는 무엇보다‘하나님’이라는 말에 적합한 사태와 형태를 찾

을 뿐만 아니라, 또한‘하나님’이라는 말의 사용에도 주의할 것을요구

하였다. 하나님의 계시를 다루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바

르트가‘하나님’이라는 말이나 하나님의 계시를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이란 말이 기능적으로 사용되거나8) 혹은 하나님

의 계시가 남용되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사실을 말하는 것이다.9)‘하나

님’이란 말의 기능적인 이해와 사용은 진정한 주체인‘하나님’을 그의

술어와 분리시키는것이다.10)

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11

7) Barth, Die christliche Dogmatik im Entwurf: die Lehre vom Worte Gottes. Pro-

legomena zur Christlichen Dogmatik(1927)(hrsg. von Gerhard Sauter, Zürich:

Theologischer Verag, 1982), 73.

8) 필자가 말하는 기능적인 사용은 기능화(Funktionalisierung)를 의미하는데, 이 개념

은 필자의 학위논문지도교수인G. Sauter가 즐겨사용하는 용어로 하나님이라는 말

이 인간이 자신의 설득력 있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을의미한다. 다

음을 참조: G. Sauter, ‘Reden von Gott’ -Die christliche Gotteslehre zwischen

g e g e n-wärtiger geistesgeschichtlicher und theologischer Orientierung und

kirchlicher Verkündiung und Seelsorgepraxis; - , Theologisches und

philosophisches ‘Reden von Gott’, in: Gasteiner Gespräch der lutherischen

Bischofskonferenz: Reden von Gott(Hamburg 1971), 45-99.

9) 이런 추측을 더욱 확증해주는 다음을 참조: Barth, Die chr. Dogmatik im Entwurf,

ibid., 402-410.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남용하는 것에 말하는 것(KD

I I/1, 224. 하나님의 속성론(Eigenschaftslehre)과 관련해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는데, 375에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하나님의 속성들을 인식하고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보편 개념 안으로 혹은 피조세계에 대한

인간 인식의 최상개념 안으로 포괄시켜서, 그를 피조세계의 완전에 참여하게 해도

된다거나 그럴수 있다고 말하는것은아니다”)과 하나님의이름을 남용하며말하는

것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바르트에게 있어서‘하나님’이라는 말은 객관

과 주관의 의미에서 계시와 더 이상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말이 갖

는 인격적인 의미 때문에 특히 그렇다. 종교와자연신학에 대한그의 비판의 본질은

바로이 점에서 비롯된다.

10) 분리(Trennung)는 진술한다(prädizieren)는 것을의미한다. 이런진술이가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진술자가 주관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하며 심지어 주관에 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입장에 있어야 한다. 예컨대, 하나님이 술어와 분리될 경우,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바르트는 바로 이런잘못된 시도를 직접적으로 환기시키면서인간의 신격화

내지는 우상숭배와연결시키고 있을 뿐만아니라, 또한이러한 시도를 포이에르바흐

(L. Feuerbach)가“기독교의본질”에서시도했던작업과동일하게취급한다.

11) 바르트에게 있어서 기독론적인 정당화 작업이란 신학적인 진술의 정당성을 예수 그

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과의 논쟁 속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일컫는다. 참고로

신학적 윤리학에서는신학적인 진술을 정당화하려고 할 때, 신학적인인식과 구원사

건을 동근원적으로(gleichursprünglich) 간주하는 것이다. 이점과 관련해서 더욱 상

세하게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다음을 참조: G, Sauter, Was heißt ‘christologische

Begründung’ christlichen Handelns heute?, in: EvTh 35(1975), 407-421. 또한 바

르트연구가로 잘 알려진 가톨릭 신학자 Hans Urs von Balthasar, K. Barth, Drstel-

lung und Deutung seiner Theologie (Köln: Verlag Jakob Henger, 1956). 특히 124-

131. 폰 발타자는 이곳에서 바르트의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가 어떻게 기독론

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육화 사건에서 유비가 이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설명하고 있을뿐, 바르트의 신학에 있어서 기독론적인 정

당화 작업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하고 있지 않

다.

12) Barth, Das Wort Gottes und die Theologie, ibid., 212. 일반적인 맥락에서 볼 때, 바

르트에게있어서하나님에대해말하기는증거(zeugnishaft)의 성격을 갖는다.

13) Barth, “Not und Verheißung der christlichen Verkündig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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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send) 혹은 기대에 부푼 상태로(erwartungsvoll)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17) 그밖에 바르트에게 있어서 Reden von Gott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타자로서 하나님에 대해말하는 것이며, 이것 역시그의 신학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따라서 다음의 글에서 필자는 신학적인 방법의 변

화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Reden von Gott의 방법적인

절차와 방식이 서로 어떤연관관계를 갖는지 살펴보고자한다. 앞서언

급하였듯이, 바르트가 신론적 진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하나님이 남용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필자는 그의 신론적

진술과 세 번째계명의 연관성을밝힐것이다.18)

바르트의Reden von Gott에 대한한국에서의연구는 현재까지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바르트에 대한 일반적인 연구만을 참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논문은 특히 바르트의 신론적 진술을 연구하는 중에 그가

첫 번째 계명을 신학의 공리로 삼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 번째 계명역

시 그의 신학, 특히 신론적 진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발견

한 연구 결과이다. 따라서 세 번째 계명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이해가

선행되는 것이 당연하나, 지면관계상 각주 3)에서 언급한 논문을 참고

하길 바라며, 이곳에서는 세 번째 계명이 단지‘하나님’혹은‘하나님

를 통해 매개하고자 했던 슐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의 영향

때문이다.14) 첫 번째 이유에서 비롯되는 곤고함을 극복하기 위해 바르

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역설적인 상황을 환기시킨다. 바

로 이런 상황에서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를 거절하며, 또한그렇

게 한다고 해도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진단함에 있어

서 바르트는 문제를 변증법적으로 다루었다. 두 번째 이유와 관련해서

그는슐라이에르마허의종교론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자신의 계시개념

을 강조한다.

주지하다시피, 바르트의 신학적 사유방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

다.15) 다시 말해서 변증법에서 유비로 바뀌었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에서 떠난 이후로 하나님에 대해 일관

된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지시하면서(hin-

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13

14) Barth, Die Protestantische Theologie im 19. Jahrhundert: Ihre Vorgeschichte und

ihre Geschichte(5. Aufl., Zürich 1985), 379ff.

15) 안춘근은“Karl Barth의 신학방법론”,「나사렛논총」(제9호, 2004), 7-23에서 제1판

의 로마서 강해(1919) 시기의 입장까지 포함해서 세 가지 방법을 언급한다. 자유주

의 신학에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에서 변증법적인

신학에로의 변화는 신학방법론에있어서의 변화라기보다는 신학의 본질에 있어서의

변화이다. 바르트가“Zur Sache”로 표현한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하

나님과 인간의동질성에서질적차이에로의전환이었다.

16) Michael Beintker는 Die Dialektik in der ‘dialektischen Theologie’ Karl Barths

(München: Chr. Kaiser, 1987)에서 바르트가 두 개의 방법을 로마서 제2판에서뿐

만 아니라, 또한하나님의 현실과인간의 현실 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KD에서도 여전히 사용했음을 입증해 보였다. 그밖에 Beintker는 두 개의 방법을 바

르트 신학의 전체 안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가 특히강조한 것

은 방법론의 변화는 하나님의 현실의 말할 수 있음(Sagbarkeit der Wirklichkeit

Gottes)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엄밀하게 말해서 방법론의 변화가 아니

라 체계에 상응할 수밖에 없는 사고의 결과라는 것이다. 여하튼 방법의 변화는 서서

히 진행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며, 폰 발타자는 바로 이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Hans

Urs von Balthasar, ibid., 116f). 다음을 참조: E. Jüngel, Art. “K. Barth”, TRE Bd.

5, 251-268., 258: “…변증법은이미그 당시에유비를 내포하고있다.”

17) Beintker가 지적하고 있듯이(Die Dialektik, 282) 두 개의 방법이“말할 수 있음”에

근거하고 있다 해도, 이 두 방법은 구별이 가능하다. 변증법이 주로 겨냥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처한 모순적인 상황과 관련해서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

게(recht) 발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여기서 하나님의 현실의 피안성을강조한다. 다음

을 참조: Barth, Der Römerbrief, 제2판(1922)(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89), 114. 유비를 통해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됨과 그의 죽음을 통해

성취된 화해가 진리임을 말하고자 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은인간역사의 한가운데

에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주권적으로 당신 자신이 주님이고 참 진리임을 입증하셨다

는 것이다. 물론 두 개의 방식이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다고 확신있게 말할수는 없

다 해도, 두 개의 사유형태가밀접한맥락을 형성한다고 주장할수는있다.

18) 세 번째 계명에 대한 필자의 조직신학적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Das dritte

Gebot und die Frage nach dem richtigen Reden von Gott”, Korea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Vol. 3, 1999), 283-298. 그리고『계명은복음이다』, 6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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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n Gott이 어떤 방식으로든 실천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바

르트의 이런 견해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바로 이

관계 속에서 그의 신학에서 언어게임으로서Reden von Gott의 본질적

인 성격이 인식될 수 있기때문이다. 다시말해서 바르트는 일반적으로

인간적인 것으로 여겨진 종교에서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인

간의 관계를 하나의 사실로 전제한다. 그것이 모순의 상태이든, 아니면

평화의 상태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모든인간은 어떤 식으

로든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신

학자는 하나님에 대해말해야만 한다’라고말한다면, 이런 주장은 일반

적인 상황에서 Reden von Gott의 사실성이 의심받거나 부정되는 현실

을 전제한다. 혹은 만일 우리가‘우리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에 대해 말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불순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르트는 인간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명백히 밝히고자 했는데,

그가 말하는 다음과 같은 목적 규정은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즉, 그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듣는 자로서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서,22) 신학

은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지시해야만 한다.23) 그러므로

하나의 언어게임으로서Reden von Gott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없어서는안 되는구성성분이다.

바르트에게서 신학의 과제는 Reden von Gott이며, 이는 곧 하나님

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을 바르트는

“Gott wird Mensch”로 규정하였다.24) 그렇다면 죄인으로서 인간은 어

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과 관련해서 볼

의 말씀’이 기능화되고있는현실을함의하고있다는 사실만을밝힌다.

I I. Reden von Gott과 변증법(Dialektik, 1918-1932)

자신의 변증법적인 사고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 서문에서 4가지 요소들을 제시하고 있는데,19) 그중에서도 가장 깊

은 영향력은 아마도 키에르케고르(Søren A. Kierkegaard)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신학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인혁명에 버금가는 것

으로 평가될 정도로 자유주의 신학에서 변증법적인 신학으로의 전환은

바르트 자신뿐만 아니라 개신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음의

인용은 바르트의변증법적인사고를 가장잘 보여준다.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말할수 없다. 마땅히 해야만 하지만 할 수 없다는 사실, 이것

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다.20)

이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바르트가 신학 함에서 가장 큰 문제로

삼은 것은인간의 모순적인 상황이다. 그에게 모순으로보이는 이 상황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21) Reden

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15

19) Barth, Der Römerbrief, X I I I-X I V.

20) Barth, Das Wort Gottes und die Theologie, 199.

21) Barth, Die Christliche Dogmatik in Entwurf: die Lehre vom Worte Gottes.

Prolegomena zur Christlichen Dogmatik(1927)(hrsg. von Gerhard Sauter, Zürich:

Theologischer Verag, 1982), S. 71ff. R. Leuze는 Gotteslehre(Stuttgart, 1988)에서

이를 두고, 바르트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우리 언어의 말로서, 즉“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 말로서”(17) 전제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Leuze에 따르면 바르트는‘하나님’

이란말을 일반적인의미에서 사용하고있다. 이런관찰에 근거해서Leuze는 바르트

의 신학적 프로그램은 좌절되었다고결론짓는다. 그러나 필자가보기에 그렇지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Leuze가 간과하고있는것이있는데, 바르트에게 있어서언어게임

은 규칙을 따르는 언어게임(ein geregeltes Sprachspiel)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르트는공동체, 곧 교회의 언어를의도하고있다.

22) Barth, Die chr. Dogmatik im Entwurf, 90ff.

23) Barth, Das Wort Gottes, 217.

24) Barth, Das Wort Gottes, 207.

Page 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서 하나님의 예(yes)를, 그리고 예(yes)에서 하나님의 아니요(no)를 하

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했다. 바르트는 그럼으로

써 하나님이라는 말이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없다는 것을 표현

하고자 했으며, 또한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서드러내고자했다.

한편, 변증법적인 사유형태에서 올바른 관계를 얻고자 하는 바르트

의 노력은 인간이 하나님과 철저하게 상관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에 제한되어 있다. 여기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를 명료

하게 하는데 모든노력을 집중했다.‘하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주님으로

서 계시하신다’30)는 주장은 바르트 신학의 핵심에 해당된다. 일반적으

로 볼 때, 바르트에게있어서 계시는 하나님의자기계시를의미한다. 하

나님은 스스로를 직접적으로 계시하신다.31)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것이지 다른존재가 말하는 것이아니다. 그러나 이런 계시의 직접성과

관련해서질문이 제기되었는데, 왜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인식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32) 바르트는 이 질문에 대해‘주체로서

하나님’을 지시함으로써대답했다.

바르트의 계시 개념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숨겨진 하나님(Deus revelatus, Deus

absconditus)33)을 의미한다는 바르트의 주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

때, 바르트가 제시하는 신학적 과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

다. 한편으로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으로 무한한 간격을 인정

하고 싶은 것이고,25) 다른 한편으로 신학을 종교로 소급시키려고 하거

나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당대의 문화신학을 비판하는 것이다. 바

르트는 신학의 중점을 하나님의 이름에 적합한 신학함을 추구하는 것

에 두었다. 즉 ”적합성을 얻으려는 노력이며, 신학적인 내용이 본질에

적합하게 되는것, 신학의 내적적합성, 이야기 되어지는것과관련해서

신학의 적합성을얻으려는 노력이다.“26)

그러나 바르트는 기독교 진술의 적합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

상 상술하지 않았다. Reden von Gott이라고 하는 언어게임에서 어떤

규칙이 적용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27)

바르트는 오직 기독교적인 진술 내용의 올바른 인식과 사실적인 관계

에만 집중했다.28) 이를 위해 그는 우선적으로 변증법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역설적인 언어형태를 사용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으로서

Reden von Gott에 이르는 가능성을 얻는 길은 오직 변증법적으로 생

각하게 될 때이다.29) 이런 방식의 사유를 통해 바르트는 아니요(no)에

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17

25) 다음을 참조: Barth, Der Römerbrief, XX:“내게 있어서 이런 인간에 대한 이런 하

나님의 관계, 이런 하나님에 대한 이런인간의 관계는 성경의주제이며 철학의 전체

이다.”

26) Barth, Die chr. Dogmatik im Entwurf, 13ff.

27) 다음을 참조: Barth, KDI I/1, 224. 바르트는 이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현재 도르트문

트 대학 조직신학 교수 Ernstpeter Maurer는 삼위일체론이 바르트 신학의 규칙(die

Regel)임을 주장한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Sprachphilosophische Aspekte in Barths

‘Prolegomena zur kirchlichen Dogmatik Theologie’(Dissertation Bonn, 1989), 특

히 194ff.

28) Barth, Die chr. Dogmatik im Entwurf, 15.

29) 다음을 참조: Barth, Das Wort Gottes, 49. 바르트가 주장하는 인간의 Reden von

Gott의 Gott-redet-selber와의 관계와 관련해서Beintker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

다:“변증법을 통해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설정된, 그러나 보이지 않고, 또 단절된 동

일성(Identität)을 비동일성(Nichtidentität) 속에서 간접적으로볼 수 있게된다.”

30) Barth, Die chr. Dogmatilk im Entwurf, S. 173. 다음을 참조: H. Ott, “Der Gedanke

der Souveränität Gottes in der Theologie Karl Barths”, in: hg. von der Theo-

logischen Fakultät der Universität Basel, ThZ Hf. 2 Festgabe für K. Bart zum 70.

Geburtstag, Basel, 1956, 409-424.

31) Barth, Die chr. Dogmatik im Entwurf, 67. “revelatio immediata”(직접계시).

32) 이 질문은 특히W. Pannenberg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판넨베르크는(in Verbindung

mit R. Rendtorff, U. Wilckens, T. Rendtorff), Offenbarung als Geschichte( 5 .

Aufl., mit einem Nachwort,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63)에서 이

문제와 더불어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한다. 그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 직접계시

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간접계시를 구분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특이하고 또한 바

르트와대비되는견해는예수그리스도조차도간접계시로 보는것이다.

33) Barth, Die chr. Dogmatik im Entwurf, 292. 그밖에 바르트의계시 개념을한편으로

Page 1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의 술어와 동일하다는 것은 우선 인격과 사역39)을 동일하게 놓는 것

이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과 행위를 통

해 스스로진리이심을입증하신다, 혹은그렇게 입증된다는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바르트가 하나님에 대해서 오직 하나님 자신

만이말할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충분히이해될 수 있을것이다.

계속된 이해를 위해 지금까지 서술된 것을 다음의 질문과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를 시작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

가? 바르트는 이 질문에 대한대답에서 자신의 신학적인 전제, 즉 계시

에 의존하지않았다. 어디서 시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면

서 바르트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가능하

지 않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해서 볼 때, 그리고

인간의 무능력함에 비추어 볼 때, 남아있는 길은오직 하나님께 순종하

고, 하나님에 대해깊이숙고하며,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하는것

뿐이다.40)

그러나 불가능함을 바르게 인지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

나님에 대해 말하려고 시도하는 몇몇의 신학자들이 있음을 바르트는

지적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슐라이에르마허인데, 바르트는 특히 그의

종교론에서전형적인모습을 발견한다.41)

명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계시하는 자’와‘숨겨진

자’라는 두 개념 안에서 주님으로서 하나님이 가장 명백하게 표현되

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은“Deus dixit(하나님이 말씀하

셨다)”34)의 주체이자 내용이며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계시에 대한

진술의 목적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에 대해 말할 과제를 이행하는 것이

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가지고 바르트가 구체적으로 드러내려는 것

은 하나님 계시의 수용자로서 인간이 죄인으로인식되는것이다. 즉, 인

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없으며 또한 자신의 이성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하나님은 물론

이고자기자신조차도인식할 수 없다.35)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코 주체가 될 수 없다. 바르트는‘하

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주님으로 계시하신다’는 명제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비록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분명하게 현존하는 하나님의

통치를표현하고있다. 즉, 하나님은당신스스로를계시하시고또 말씀

하시면서 이러한 장애물을 무너뜨리고, 인간들을 통치하신다. 그 결과

인간은 창조의 원리에 맞게, 즉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서 살게 된다. 하

나님 인식과 인간인식은, 바르트에 따르면, 오직 고백함으로써

(bekennend) 그리고 증거함으로써(bezeugend)만 가능하다.36) 이런 인

식을 바르트는 하나님의 숨어계심과 관련해서”최고의 비밀“37)이라고

말한다. 또한하나님은 계시의 주체(Subjekt)일 뿐 아니라, 또한 계시의

대상( O b j e k t )이며 계시의 술어( P r ? d i k a t )이다.3 8 ) 주님으로서 하나님이

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19

는 형식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내용상으로 분석할 수 있는데, 형식적이라 함은

‘Gott redet’를 말하고, 내용적이라 함은‘Gott wird Mensch’를 일컫는다.

34) 앞의책, 165-183.

35) 앞의책, 173.

36) 앞의책, 174.

37) 앞의책, 179. 이는하나님의 통치, 주님되심을의미한다.

38) 앞의책, 180ff.

39) 앞의 책, 180. 이 주제를 판넨베르크는 비판적으로 바꾸어 해석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는하나님의 계시를역사로정의했다.

40) 앞의책, 173.

41) 바르트는 슐라이에르마허를 심지어 영웅으로 보면서도 그의 종교론에 대한 비판은

과감했다. 괴팅엔 대학에 재직할 때 1923/24에 행한 강의를 묶은다음의 책을 참조:

Die Theologie Schleiermachers, Vorlesung Göttingen, Wintersemester 1923/24

(hrg. von Dietrich Ritschl,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78).

Page 1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접적인 자기의식 혹은 감정”인데, 이것은“인간 본성의 본질적이며 일

반적인 요소”이다.48) 슐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의 능력을 하나님의 인간되

심을 환기시킴으로 정당화시키고 있지만, 그가 무시하고 있는 것은 기

독교신앙과신앙의 본질적인 기능, 즉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를인정하

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심지어 자기사신의내적인 능력으로부터가능한데, 하

나님이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경우에 그렇다. 이러한 견해

를 바르트는 대단히 열정적으로 비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현실과

그것의 인식가능성은 오직예수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말씀안에, 그

리고성령의 사역에 제한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자

신으로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슐라이에르마

허의주장에 대해 말하면서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해말해지는 것은오

직 자기의식의기원을 규정하기 위해서일 뿐이라고비판한다. 슐라이에

르마허에 대한 바르트의 비난은,49) 필자의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이라는

I I I. 종교비판

바르트는 종교는 바로 앞서 언급한 내용, 곧 인간의 모순적인 상황

을 무시하고잘못된 길을선택한다고 비판하고“로마서주석”42)에서종

교를마치율법을 다루듯이취급한다. 실제적으로볼 때, 종교의 핵심은

“전적인 타자에 대한 경외심”43)에 있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전적인 타

자와 상관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생산된 것이다. 종

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질적으로 무한한 차이를 철저하게 간

과한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종교가, 적어도 슐라이에르마허가 말하는

의미에서 볼 때,“인간 영혼의 가능성에 근거”44)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종교를 신학의 위치에 놓으려는 시도를

“근대인으로서 인간은 방법적으로 근본적이고 또 격앙된 목소리로 하

나님에 대해서 말하려고 감히 시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단히 난처

한 고백”45)으로 여긴다. 바르트는 이러한 노력의 전형적인 모습을 또

다시 슐라이에르마허에게서본다. 우리는 종교의기초에 대한바르트의

비판에 대해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하나님이라는 말의 기

능화(Funktionalisierung)46)를 파악할 수 있기때문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개념을 비판하면서 바르트가 제기했던 질문

은, 종교에 근거하고 있는 인간의 능력은“계시의 주관적인 가능성과

실제적으로 동일한 것인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상응하는 것을 실

제적으로 종교현실속에서 발견해야만하는지”47) 이다. 이런 능력은“직

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21

42) Barth, Der Römerbrief, 특히 230-270.

43) Barth, Die chr. Dogmatik im Entwurf, 396.

44) Ibid, 402.

45) Ibid, 399.

46) 기능화란 하나님을 말하면서 다른 것을 의도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체로서 이해되지

않고오히려인간의 의지와 뜻을관철시키려는매개가되는것을의미한다.

47) Ibid, 402.

48) Ibid, 404.

49) 만일 바르트의 비판이 옳다면, 슐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의 이미지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진술한(reden über Gott) 것이 된다(다음을 참조: Barth, KD I I/1, 368). 여기에

서 바르트는자아의식 내지는절대의존감정을, 포이에르마흐가주장했던 것과같이,

인간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써 이해했다. 그러나 질문이 제기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실제로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서술하려고 시도했는가? 왜냐하면 슐라이에르마허

는 하나님에 대해 서술하라는 강한 요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듭해서 하나님을

서술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Ü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ächtern(Ausg. von R. Otto, 7. durchgesehene Aufl.,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91), 89ff.를 보라. 바르트는 그 밖에도 슐

라이에르마허의 자아의식 혹은 의존감정을 적합하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슐라이에르마허에게있어서 하나님이란 말은“본래적으로 의존감정 안에 함께 정립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Der christliche Glaube 1, Nach den Grundsatzen der

Evangelischen Kirche im Zusammenhange Dargestellt (1830/31)(hrg. von Martin

Redeker, Berlin/New York: DeGruyter, 1999), 28, 각주a. 함께 정립되어 있을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런 감정에서 함께 규정하는 자(Mitbestimmende)로서, 모든

것을자기자신과 관련시키고모든것으로부터발전되는존재이다(30). 슐라이에르

Page 1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를 변증법적으로파악하고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하나님과의관계에

서 인간의 모순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또한 질적으로 전혀 다른 타자로

서 하나님을세상 속에서 드러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의중심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인간이 죄인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사로잡힌 상태에서 변증법적

인 방법이외의다른방법을 취할수 있는가?53)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의무를 언급하고 있

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하나님이 스스로 말씀하신다’,‘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신다’는 의미에서 말한것이다. 그

러므로 적어도 그의 변증법적인 사유방식의 범위에서 바르트는‘어떻

게?’를 묻는질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있는것 같지않다.

그러나‘하나님’이라는 말을 남용하는 종교적인 노력(예컨대, 자연

신학)과 관련해서볼 때, 바르트는 말할수 없는상황54)에 더 이상머물

러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하나님의 현실의 말할 수 있음

(Sagbarkeit)을 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 작업의 도움을 받

아 우리는 그가 유비적으로 생각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를 명료하게 밝

힐 수 있다. 즉, 바르트는 두 가지 이유에서‘말할 수 있음’을 주제로

삼았다.

첫째, 그는 하나님이 타락한 세상에서 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자신의 신학적인중심으로삼았기 때문이다.55)

둘째,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간되심과 관련해서 세상을 더 이상 하나

말의기능화, 곧 이름의남용을 지적하는것이다.

보다 상세하게 서술해본다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

님에대해진술(reden über Gott)할 수 있어야만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해 진술하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하

나님은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식할 수 있도록 허락

하시지만, 그러나 자신의 주권적인 방식으로 하신다. 그의 계시는 결코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시안에서 또한 숨어계시

는 분이시다. 바르트에 따르면, 슐라이에르마허는 하나님의 숨어 계심

을 미처 생각하지 않았다.50) 슐라이에르마허가계시의 주관적인 능력으

로서 성령의 사역을 인간의 능력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

하는 바르트는, 이에반해 하나님은 오직하나님의 성령의 현실 속에서

인식될 수 있다고 대답한다.51) 그밖에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

에서 오직 자신의 모순적인 상황만을, 진리와 모순된 모습만을 이해할

수 있을뿐임을 강조한다.52)

IV. Reden von Gott과 유비(Analogik, 1932-1968)

바르트는 변증법적인 사유방식을 통해서 신학의 출발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신학은 한편으로는 첫 번째 계명에 충실하려는 시도

였고, 다른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남용되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

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는, 바르트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23

마허는 하나님을 서술하면서, 혹은 하나님을 주체로서 술어와 분리시키면서 하나님

에게 무엇인가를 덧붙이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표상이 하나님에게 전가되는 것에 대해“타락(Korruption)”(30)이라고

말할정도였다.

50) Barth, Die chr. Dogmatik im Entwurf, 402ff.

51) 앞의책, 380-417.

52) 앞의책, 382.

53) 참조: M. Beintker, Die Dialektik, 206.

54) 참조: Barth, “Kirche und Theologie”, 168: “오직 예수 그리스도, 즉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 하나님과인간을 진실한언어로 말할수 있는 사람만이자신이 어떠한‘변증

법적인신학자’가 아니라는것에대해자랑할수 있을것이다.”

55) 여기서 주제는화해론이다. 다음을참조: Barth, KD I V/1, §58.

Page 1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맥락에서 유비를 불가피한 것이라고 간주하는데,59) 왜냐하면 만일 인간

이 논리에 충실하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인간의 “Reden

von Gott”는“위험한 행위”60)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로 말하는 행위

는, 만일 조심하지 않을 경우-예컨대 존재의 유비(anlogia entis)에 대

한 언술속에서 이루어지는 것과같이, 그리고 존재의 유비로부터 출발

하는 자연 신학에서와 같이-하나님의 이름을 쉽게 남용할 수 있다.61)

이에 반해“Reden von Gott”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비유로

이뤄질 수 있다.62) 그래서 바르트는‘하나님을 지시하면서 말하기(hin-

weisendes Reden von Gott)’ 가 하나님을 전적인 타자로서 말할 가장

적합한 방식이라고 본다.63)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유비적인 사

고방식과세 번째계명의 의미와의상관관계다.

님과 모순된 관계속에서 보지않았기 때문인데, 다시말하면 하나님은

세상과 자신을 화해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바르트가 하나님에

대해서유비적으로말하게 되는출발점이다.56)

바르트가 시도한 것은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게 말하

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화해와 그 안에 함의된 하나님의 언약

을 표현해낼 가능성을 추구하였다.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에 대해 말해

야만 하는 사유가능성(Denkmöglichkeit)을 마련해야만 하는 어려움은

바로 이런 노력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바르트에 따르면, 원래는 인간

의 언어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 허용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이 일이필연적으로이뤄져야 하는것이라면, 어

떻게 해야 정당하게 행하는 것이겠는가? 바르트는 이런 맥락에서 하나

님의 화해되심(Versöhntwerden)을 사용하여 돌파구를 찾는다.57) 바르

트는 겉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 곧 해야만 함(Sollen)과 할 수

없음(Nicht-Können) 사이에 있는 역설을 언어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

를 하면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인간되심에 근거한다.58) 바르트는 이런

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25

5 6 ) Barth, K D I V/1, 85: “Sie [die Versöhnung als Gottes Souveränitätsakt] und sie

allein ist der Ort, von dem aus man christlich Gottes- und Menschenerkenntnis

möglich ist. 다음을 참고: Jung Young Lee, “Karl Barth’s Use of Anaology in His

Church Dogmatics,”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22 (1969): 129-151. 이 논문에

서 저자는 특별한 주장을 하고 있지않지만, 바르트가KD I/1, I I/1, I I I/1, I I I/2에서 유

비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탐색한다. 그러나 바르트의 유비적인 사고가 어디서

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는 질문과 관련해서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구체적으로는KD

I/1에서 발견되지만 이미 그 이전에 시작된“Cur Deus Homo”라는 주제의 강좌와

Anselm에 대한 연구의 결과로 1931년에 출판된Anselm: Fides Quaerens Intel-

lectum에서비롯되었다는것으로보는것이옳다.

57) 다음을참조: Barth, KD I V/1, 86.

58) 필자는 변증법과 유비의 관계를 폰 발타자가 표현한‘Wendung(전환)’으로 표현하

지 않는다. 오히려 바르트 신학의 전체속에서 서로보충하는 사유형태라고 본다. E.

Mechels는 KD 안에서 세 개의 방법, 변증법, 논리학, 그리고 유비가 현존하고 있음

을 입증했다. 그리고 M. Beintker는 유비가 이미 바르트의 변증법적단계 속에함축

되어있다는주장을 제기했다(Dialektik, 246). 그러나-Beitntker가 짧게언급한 사

항을제외하면(Dialektik, 282, “Sagbarkeit”)-이 두 신학자는왜 서로 다른 방법들

이 현존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두 개의 사유방식

사이의 관계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필자는 바르트의 신학적인 강조점

안에서 바르트의 신학적인 상대자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Beintker 역시

이런 의미에서 양자의 관계를 관찰하였다(Dialektik, 279ff.). 그가 이런 관찰에 이르

게 된 것은, 그가 변증법적인 사유방식이 지배적이던 단계 안에서 유비가 현존하고

있다는것을확신했기때문이다(특히다음을 참고: Dialektik, 259-279).

59) Barth, Der Römerbrief, S. 346ff.: “인간의 사고, 행위, 소유, 정의라는 방식이 아닌

것으로는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설령 그가 방언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우리는다른방식으로는 하나님을말할수 없다.”

60) Barth, Die chr. Dogmatik im Entwurf, 17.

61) 다음을 참조: M.Beintker, Die Dialektik, 271.

62) Barth, Die chr. Dogmatik im Entwurf, 17.

63)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또 어떤 범위에서 전적인 타자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바르

트의대답은 속성론(§29-§31)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이신데, 그

것은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그렇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시라는 의미에

서 전적인 타자이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자유 안에서 사랑하시며, 모든 완전

함은본질적으로 하나님께속해있다는 것을일컫는다.”(KD I I/1, S. 363)

Page 1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2. 자연신학과존재의유비(analogia entis)

자연신학은 변증법적 신학의 동료로서 함께 활동했던 브루너와의

공고한 관계마저도 무너뜨린 이유가 되었을 정도로 바르트에게 신학적

으로 중대한 문제였다.65) 자연신학이 존재의 유비에 따라 구성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브루너는 말씀과 개인상황의관계에 관심을 기울이면

서 소위‘접촉점(Anknüpfungpunkt)’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 브루너는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이르는 길을 전제했고,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동시대적인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독일 기독교도들(Deutsche Christen)’에게서 자연신학의 단면

을 보고 그것의 폐단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었던 바르트는 1934년

에 출판된 브루너의“Natur und Gnade”에서 자연신학의 일면을 볼 수

있었고, 이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요(Nein)!를 외칠 수 있었다. 결국 신

학적인 결별로 이어진 갈등의 핵심은 ”창조 안에 있는 자연 계시와 예

수 그리스도안에나타난 역사적 계시와의관계에 대한것이었다.”66)

바르트에 따르면, 자연신학의 본질은“하나님의 은혜나 믿음과는 다

른 방식으로 하나님 인식을 보장하려는 노력에 있다.”67) 자연신학이 이

렇게하는것은“자연인이생명을 위한노력(Lebensversuch)에 참여하

기”68) 위함이다. 이런노력을 지켜보면서 그는존재의 유비에 대해 강한

1. “하나님은스스로를주님으로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주님으로 계시하신다(Gott offenbart sich als

der Herr)’라는 명제는 바르트의 유비적인 사유방식에 어떠한 기여를

행하는가? 하나님이 계시에 있어서 주체이며 객체라는 의미에는 아무

런 변함이 없다. 변증법적인 사유방식에서 위의 명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주목하게 한다. 그러나 이 명제는 유비적인 사

유방식에서 인간의 말로 하나님에 대해 말할수 있는 가능성을 보장하

는 기능을 한다. 여기서 전제된 것은 하나님의 인식가능성이 화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열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체로서 인식될 가능

성64)을 스스로 마련할 뿐만아니라 또한인간에게 믿음을 선물하신다.

그리고 바로 이와 관련해서만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인식된다. 그밖에

변증법적 단계에서 이 명제는 하나님과 인간이 동일하다거나(Identität)

유사(Ähnlichkeit)하다는 주장들을 비판한다. 이에 비해 유비적인 사유

방식에 따라 볼 경우, 이 명제는 비유사성 속에서 유사하고, 유사성 속

에서 유사하지 않음을 표현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숨어 계심을 표

현한다. 두 사유방식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하는 데에 있다.

곧 명제‘하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주님으로 계시하신다’라는‘하나님’

이라는 말이나 그의 이름에 대한 인간의 자의적인 권한행사를 거부한

다. 그렇다면 바르트는 어디서 자신의 유비적인 사유를 통해서 이름을

남용하지 말라는 계명과 동일한 현상,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하

나님’이라는 말이기능적으로사용되는경우를 보게되었는가?

필자의 관찰에 따르면, 자연신학, 곧 존재의 유비에 근거하고 있는

자연신학이대표적이다.

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27

64) Barth, KD IV/1, 86: “화해는인간을 향한하나님의월경(Grenzüberschreitung) 행위

이다.”

65) 다음을 참조: E. Brunner, Natur und Gnade. Zum Gespräch mit Karl Barth

(Tübingen: J. C. B. Mohr, 1934); K. Barth, Nein! Antwort an Emil Brunner,

ThEh, Heft 14(München 1934); Claus Westermann, Nein! Antwort an Emil

Brunner, ThEh, Heft 14(München 1934); 정승훈,“칼 바르트와 에밀 부르너: 자연

신학과 계시신학”. 정승훈의 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브루너의 자연신학이 성

령론적인근거가있음을 언급하는것이다. 353.

66) 정승훈,“칼 바르트와 에밀 부르너: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칼 바르트와 동시대성의

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351-360, 352.

67) Barth, KD I I/1, 93.

68) Barth, KD I I/1, 103.

Page 1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재의 유비를 문제시하는 여러 이유에 대해서 요아킴 트락( J o a c h i m

Track)은 다음과 같이매우간단명료하게 정리했다.73)

첫째, 존재의 유비는 삼위일체하나님을반대한다.

둘째, 하나님의역사속 행위는 전혀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결

과로하나님이라는말은개념적인의미로전락한다.

셋째, 만일 존재의 유비를 출발점으로 삼게 될 경우 인간의 신격화가

일어날수 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하게 지적되는 사실은, 폰 발타자(Hans Urs von

Balthasar)가 표현하고 있듯이,‘존재’개념으로 인해서‘하나님’이라는

말이 남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74)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바르트는

존재의 유비에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였는데, 필자가 보기에 바르트는

자연신학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인간의 자의적인 사용, 좀 더 구체적

으로 말한다면 세속적인 가치(Weltlichkeit)로 전락하여, 그 결과 신학

이“비 본래적인 것으로”변질될 수 있는 위험을 본 것 같다.75) 바르트

는 신앙의 유비를 통해이런위험에서벗어나려고 노력했다.

V. 신앙의유비76)와지시하면서하나님말하기(hinweisen-

des Reden von Gott)

신앙의 유비는 인간이 언어와 사고를 매개로 자신의 대상

거부감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연신학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방식은, 하나님을 하나의 개념으로 환원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 개념을 매개로 현실 전체를 파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69) 자연

신학이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근거는 존재의 유비에 있

다.7 0 ) 존재의 유비에 따르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의 유비

(analogia entis)가 있는 한, 인간은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

다. 왜냐하면 존재의 유비는 인간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이를 수 있다고 보기때문이다. 바르트는 이런견해를 단호하면서도반

복적으로 거부한다. 그는 어떠한 유비라 하더라도 인간에게 주님으로

서, 창조자로서, 화해자와 구원자로서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를 인식하

는 길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71) 물론 존재의 유비를 강하게 거부

함에 있어서 바르트가 주목하는 것은 존재론적인 본질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인식의 기원에 있다. 그러므로바르트를 비판하면서존재

론적인 관점을 출발점으로 삼는것이나, 혹은 그 반대로 바르트의신앙

의 유비(analogia fidei)와 존재의 유비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들은 바르

트의의도에서벗어나는것이다.72)

바르트는 신앙의 유비를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하고 또 하나

님에 대해 말할수 있는인간의 능력에 강한이의를 제기한다. 그가 존

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29

69) Barth, KD I I/1, 93. 바르트에 따르면, 이런 형태의 시도는 신학에서뿐만 아니라 철학

에서, 특히관념론에서 볼 수 있는데, 이들은 하나님에 의해규정되고 또 현실화되어

져야 할 관념들을 선취하여 그것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보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

다(Schicksal und Idee in der Theologie, 339f.).

70) Barth, KD I I/1, S.89. 다음을 비교: W. Pannenberg, Analogie, Art. RGG. 3. Aufl.,

350-352, 351.

71) Barth, KD I I/1, S. 82ff. 바티칸과의논의에 대해서는86ff.를 보라. 바르트의 주요관

심은하나님의통일성(Einheit)에 있다.

72) 예컨대 이런 시도를 시도한 가톨릭 신학자 E. Pryzwara, H. U. von Balthasar, G.

Söhngen. 가톨릭 신학자들과의 논쟁을 다룬 출간 예정인 다음의 책이 주목된다:

Keith L. Johnson의 Karl Barth and Analogia Entis(T & T Clark International

2010).

73) J. Track, Art. Analogia, TRE, Bd.1, 625-650, 640. 또한 다음을 참조: H. U. von

Balthasar, Karl Barth, 175ff. 이곳에서 발타자는 바르트의‘존재’개념에 대해 만족

해하지않고있음을 표현하고있다.

74) Hans Urs von Balthasar, Karl Barth, 176.

75) Barth, KD I I/1, 103.

Page 1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유비는 하나님 자신에게서유래한다는말이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인간

인식의 대상으로 내어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당신 자신을 인식

하는사람으로 만든다.82)

이러한 인식가능성과 말할 수 있음은 소위 준비(Bereitschaft)와 관

련해서 더욱세부적으로살펴볼 수 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은당신이

하나님임을 나타내시는 때에(im Vollzug der Erkenntnis Gottes) 실제

로 인식되는 그런 방식으로 인식되도록 준비하시며,83) 또한 인간 역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를 열어놓을 준비를 한다고 한다.84) 바르

트는 이런 준비를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에게 위임된 능력으로, 그리고

능력의 근원에 대해 감사와 그에 대한 순종의 의지로 표현한다.85) 이렇

게 볼 경우 하나님 인식은 위임된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준비 하심

에 근거를 둔다. 그러므로 하나님 인식의 진리성은인간의 능력에 의해

서가 아니라 하나님이“어느 정도로”인식을 허락하셨는가에 의존한

다.86)

인간의 준비에 관해서 바르트는 기독론적으로 설명하고 또 정당화

하려고 노력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또 그에 대해 말할 수 있

는 능력은 어떻게 얻게되는지를 설명하려고 했다. 예수그리스도가인

간이라는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

다.87) 그러나 인간에 관한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였고, 그래서 자

(Gegenstand)으로서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 대한 진술을 본질로 한다.

그래서 신앙의 유비는“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로 이해된다.77)

출발점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확

신이다. 그런데 이것을 주장하는 것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비 신앙적인

일이고 또한 인간의 신격화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적 타자

로서 인간의 언어적인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파악

할 수 있는 것과만 유사할 수 있을 뿐이다.78) 하나님은 자신을 감추시

면서 그리고 또한 드러내시는 분으로서 전적 타자이시다. 따라서 바르

트는 신앙의 유비를 통해 하나님 현실의 인식 가능성과 말할 수 있음

에 대한 근거를 발견하고자 했고, 결국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

의 계시, 곧 하나님의은혜로운행위에서발견할 수 있었다.79)

바르트에따르면, 신앙의 유비는 하나님에 대한신뢰를 본질로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은80) 근본적으로 나-너의

관계, 하나님-인간의 관계에 근거한다. 이 관계 속에서는 두 가지 중요

한 점이 전제되어 있는데, 주체로서 주님과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만남이다.81)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그

러나 하나님 인식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식하도록 허락해주는 범위에

제한된다. 또한 인간은 오직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이자기 자신에 대

해 말씀하시는 그런 방식으로만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는 곧

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31

76) 바르트는 이 개념을 로마서12장 6절에서 차용하였다: “analogia tes pisteus(믿음의

유비)”. 바울은 이 말을통해서성서에 대한바른해석을 얻기위해노력하였다.

77) 바르트는KD I I I/1, §45에서 두 번에걸쳐analogia relationis(관계의 유비)를 언급하

고 있다.

78) KD I I/1, 211.

79) KD I I/1, 271. 266쪽에서 바르트는 은폐와 드러냄의 형태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

는 유비를 사용하도록 촉발한다고 보았다. 다음을 참조: §29: ‘Gottes Vollkom-

menheit (하나님의온전함)’, 특히377, 384ff.

80) KD I I/1, 377.

81) Barth, Die chr. Dogmatik im Entwurf, 294ff.

82) 발타자는 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바르트의 신앙의 유비에 있어서“관건은 믿음 안에

서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이다”(K. Barth, 117)라고했다.

83) KD I I/1, 70

84) KD I I/1, 141ff. 보다 상세한 내용을 위해서는143 이하에 나오는 die Offenheit des

Menschen 부분을 참조.

85) KD I I/1, 71.

86)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어느 정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의미한다

(KD I I/1, 80f.). 그밖에 바르트는 은혜를 말하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하나님으로서(73) 그리고 전적으로(ganz und gar, 81)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사실을분명히 하고자했다.

Page 1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두 개의측면을 고려해서 더욱상세하게설명한다. 하나는 하나님 인식

의 한계이고, 다른하나는 부적합한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하나님 인식

이 어떻게 진리일 수 있는지에대한 그의대답이다. 왜냐하면하나님은

진리이시고, 바로 그래서 역사의 마지막에 가서야 완전히 인식될 것이

기 때문이다.94)

두 번째 측면은 Reden von Gott의 진실성을 찾는 문제이다. 하나님

인식에 대한서술에서 바르트가 문제삼는 것은“절대적이고, 단순하며,

논란의 여지가 없는확실성”인데, 왜냐하면 하나님 인식은 구원으로 인

기 자신으로부터는 은혜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는 곧 하나님과 원수

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매개로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무너졌음

을 의미한다. 인간은 이제예수 그리스도 안에곧 하나님 안에있게 되

었다.88) 그러므로 인간의 준비란 결국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일 뿐이다.89) 인간에게 유효한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

도에 대한 믿음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90) 인간은 오직 이 믿음에서만

하나님을 인식하고 또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신앙의 유비가 실행

되는 순간은“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 안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위해 준비된 자”91)일 때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인식과 언술은 모든

시간에 현재하는하나님의행위, 곧 예수그리스도에 정초되어 있다. 언

약의 확증을 바르트는 하나님의 영의 사역에 귀속시켰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은 본질적으로 완전한 진리 안에서 영원히 우리를 위하시

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적인 현재이다.92) 하나님의 영에 대한 진술이

보증되는 한, 진리는 현존한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하나님의 영 안에서

의 삶을‘아직 아니(noch nicht)’의 한가운데에 있는 삶으로 해석하는

데,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바르트가 진리문제를 어떻게 종말론적인 문

제로, 미래를 어떻게 신학적인 문제로 삼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다.‘아

직 아니’는 단지 어떤 한순간에 아직 실행되지 않고 나중에 나타날 계

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하나님의 감추어짐

(Verh?lltheit)을 의미한다. 이러한 감추어짐은 인간에게 언약으로나타

난다. 곧,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나타난 계시에 근거해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인식을 주신다는 약속이다.93) 바르트는‘아직 아니’를

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33

87) KD I I/1, 169.

88) 이것은 하나님과참다운 연합안에있음을 의미한다. 다음을 참조: KD I I/1, 252f.

89) KD I I/1, 143.

90) KD I I/1, 173. 바르트는 이런 믿음에 관한 모든 것, 예컨대, 믿음의 본질과 형성 등은

예수그리스도로부터온다고 본다.(174)

91) KD I I/1, 174.

92) KD I I/1, 175ff. 177.

93) 다음을 보라: KD I I/1, 240f.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만일M. Beintker가 말하고 있듯

이, 하나님의 계시 안에“주어져 있지 않음(Nicht-gegebensein)”과“주어져 있음

(Gegebensein)”을 말한다면(Beintker, Die Dialektik, 206), 이것은 바르트를 오해한

것이다.

94) KD I I/1, 242: Die Verborgenheit als Modus der Offenbarung und die Wahrheit als

der Sinn der Offenbarung(계시의 양태로서 은폐와 계시의 의미로서 진리). 플라톤

과 칸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종종 궁극적인 것 혹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는무능력을 감추려고 시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폐에 대해말한다. 그러나 바르트에

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폐는 일종의“신앙적 진술(Glaubenssatz)”이며, 인간의 인식

능력에 따라 형성되는 개념이 아니다. 바르트는 오직 계시에 근거해서만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이해한다.(205f) 실제적인 하나님 인식과 그의 은폐 사

이에긴장이 현존하는데, 바르트는 이것을 해결하기위해노력했다. 바르트의 다음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긴장은“ein Wunderwerk des göttlichen Wohlgefallens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이며 또한 “eine seiner Eigenschaften(그의 속성들 가운데

하나)”이다(206, 이것에 대해 바르트가 제시하는 성서적인 증거들은207f.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역에 있어서 숨어서 행하시고, 본래적으로 숨어 계시는 분

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인식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알

지 못하며, 인식가능성은 우리능력에 좌우되지 않는다. 하나님 인식은 언제나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될 뿐이다.(206) 하나님은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파악될 수

없고,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표현은 언제나 충분하지 못하다.(209f.) 아무

리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해도 충분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께서“산 자( d e r

lebendige)”로서, 영원한 전적 타자로서 우리와 관계를 갖고 계시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소유로 삼으시기 때문이다.(211f)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자로

서 우리에게 인식의 기회를 주시며 또한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다.(213) 이 허락은하나님의은혜로우신행위에 대한고백을 의미한다.

Page 1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VI. 결론

필자는 지금까지 계시에서 출발한 바르트가 신앙의 유비와 전적 타

자이신 하나님을 지시하는진술에 이르는 사유과정을 살펴보았다. 바르

트가 신앙의 유비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간단하게 요약

하면다음과 같다.

첫째, 바르트는 신학의 전제와그 한계및 목적을명확하게 했다.

둘째, 바르트가 시도한 것은, 인간이 이러한 전제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으며, 혹은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말해야만 하는지를 설

명하려는 것이다. 그는 이점과 관련해서 말하기를, 믿음의 행위에

서, 그리고순종안에서 해야한다고 했다.

셋째, 바르트는 신학을 인간학적 혹은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남용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피해

져야하고, 오히려 신학은 예수그리스도와그의 인간되심에 근거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신학적 방법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Reden von Gott의 본질적 성격을 규명하고자

했다. 특히 궁금해 했던 것은, 그가 말하는 지시하는 진술이 실제로 어

떤 성격을 갖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탐색한 바에 따라 바르

트의대답을 정리하면,

첫째, 증거하는 성격을 갖는다. 곧, 지시하는진술은 하나님의계시를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명령된, 은혜에 따른 인간의 행위이다.99) 이 일이일어나는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이다.100) 이처럼 오직 증거하는 진술

도하기에 충분해야 하기 때문이다.95) 그러므로 개념적인 진술은 원래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하

나님은 인간을 자신과 닮은 자로서 받아들이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현

실과 인간의 개념에 따른 하나님의 인식은 상응하며 일치한다.96) 하나

님에 대한 인간의 언술은 유사한 관계 속에 있으며,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의 언술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진리로 입증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 혹은 계시에 적합하게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진리로서 하나님을 지시하면서(hin-

weisend) 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은폐에 근거를 두고 있는 완전한 하나님 인식에

접근하는 것이며(Annährung) 그 길을 향한 도중에 있는 것( u n t e r-

wegs)이기 때문이다.97) 이는 우리의 진술이 단지“일시적인 지시(vor-

läufige Hinweise)”98)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이며, 예수 그

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지시하는것임을 가리킨다.

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35

95) KD I I/1, 202. “...absloute, schlechthinge, undiskutierbare Gewißheit...”.

96) KD I I/1, 254ff. “in Entsprechung”, “in Übereinstimmung”.

97) KD I I/1, 227ff.

98) 다음을 참조: Barth, Der R?merbrief, 346ff. 이곳에서 바르트는 어떤 인간도 비록

그가 방언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유비의 형태와 달리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본다. Beintker 역시 Dialektik(271, 276)의 결론부분에서 바르트의

Reden von Gott의 본질이 하나님이진리를 지시하는것에있다는것과하나님의 말

씀은 유비를 생산하는 계기임을 강조했다. 이점과 관련해서KD I I/1, 283f.과 Kirche

und Theologie(in: Theologie als Wissenschaft, Ges. Aufs. Hg. und eingel. von G.

Sauter, 1971, 152-175), 167과 169를 참조할 것. 그리고E. Maurer는 바르트의 지

시하는 진술을 Reden von Gott이 하나의 언어게임으로서 언어외적인 것에 정초되

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매우 정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S p r a c h p h i l o s o p h i s c h e

Aspekte, 130).

99) KD I I/1, 223ff. 100) 바르트의다음의글들을 참조: Barth, “Der Christ als Zeuge”, in: ThEh 12(1934),

Page 1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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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해서만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의 대상이 된다.101) 더군다나 인간이

말하는 것을 하나님이 받아들이시기를 소망하면서. 증거는 부정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실행된다.102)

둘째, 지시하는 진술은 고백 성격을 갖는다. 즉, 감사와 경외감 속에

서 역사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사역에 대한대답의 성격을 갖는다.103)

필자는 바르트의 신론적 진술의 성격을 그의 신학 방법론에 따라

개괄적으로규명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이훼손되는 것을막으려

했다는 사실에 천착하여 세 번째 계명과 깊은 상관관계를갖고 있음을

밝혀 보이고자 했다. 다시 말해서 바르트는 존재의 유비에 근거한 자연

신학과 철학적인Reden von Gott이 하나님과그의이름에 정당하지못

함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영광을 드러내

기 위해서는증인으로서 지시하는 성격의Reden von Gott이 되어야 함

을 주장하고 있다.

주제어

바르트 신론, 하나님을 말하기, 세 번째 계명, 신앙의 유비, 변증법, 신

학의과제

Barths Reden von Gott, das dritte Gebot, Analogik der Glaubens,

Dialektik, Aufgabe der Theologie

접 수 일 2010년 6월 7일

심사(수정일) 2010년 8월 4일

게재확정일 2010년 8월 15일

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진술에대한연구 37

5-31과 “Menschen Wort und Gottes Wort in der christlichen Predigt”, in: Hg. u.

eingel. von F. Wintzer, Text zum Verständnis und zur Praxis der Predigt in der

Neuzeit (TB. Bd. 80, 1989, 95-116).

101) KD I I/1, 232.

102) KD I I/1, 389.

103) KD I I/1, 243-252 그리고Kirche und Theologie, 164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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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39

Page 2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Gott als der ganz Andere”- “hinweisendes Reden von Gott”

Sung-Soo Choi, Dr. Theol.

Lecturer

Hannam University

Daejeon, Korea

Es handelt sich hier darum, den Zusammenhang zwischen Barths

Reden von Gott und dem dritten Gebot, also Verbot des Mißbrauchs

Gottesnamens zu erschliessen.

Barth bemüht sich in seiner Theologie, das dritte Gebot als theo-

logische Aufgabe zu begreifen. Er versucht, durch seine Theologie

hindurch Gottes Wort zu reden und nachzusprechen, indem er den

Namen Gott - christologisch verwendet - Jesus Christus nennt. In der

Tat faßt er zwar das Wort Gottes als die theologische Aufgabe auf:

Theologie müsse das Ereignis deutlich machen, in dem Gott selber

redet. Genauer betrachtet aber bedeutet dies nichts anderes als das,

was das dritte Gebot vor allem im Sinne der Heiligung des Namens

Gottes und der Verwehrung der menschlichen Verfügung über Gott

bzw. seine Offenbarung meint.

Es muß nun dementsprechend in diesem Artikel sowohl darum

gehen, den Zusammenhang zwischen dem methodischen Verfahren

und der Weise, von Gott zu reden, zu verdeutlichen. Außerdem soll

der sachliche Bezug auf das dritte Gebot herausgestellt werden.

Von Balthasar, Hans Urs. K. Barth, Drstellung und Deutung seiner Th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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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ermann, Claus, “Karl Barths Nein. Eine Kontroverse um die theolog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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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최성수, 칼 바르트의신론적 진술에대한연구 41

Page 2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기독교신학의내적딜레마에대한

과정사상의응답1)

실체철학의종말과범재신론의도래

김희헌(한신대 강사)

I. 서론

우주는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우주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우리로 하여금‘우주(cosmos)’라는 실재를 느끼게 하는 질서는 무엇에

기초하고 하고 있는가? 인류의 정신활동은 이러한 우주론적 근본물음

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기독교 신학은 이 우주론적 근본물음에 답하

기 위해 자연철학(과학)과 제휴하거나 갈등해 왔다. 기독교 사상사를

볼 때, 19세기에이르러 본격적인 대립의 시기를 맞기까지기독교 신학

은 자연철학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소통하여 왔다.2) 특

Ich habe dem Gedankengang von der Offenbarung zur Rede von

der analogia fidei und zum hinweisenden Reden gefolgt. Ich fasse

hier mit kurzen Worten zusammen, was Barth mit der Rede von der

analogia fidei zu sagen versucht:

1. Barth macht die Voraussetzung der Theologie und sowohl ihre

Grenze als auch ihr Ziel deutlich. 2. Er versucht zu erklären, wie

Menschen Bezug auf diese Voraussetzung nehmen bzw. in welcher

Weise man von Gott reden soll: in dem Akt des Glaubens, im

Gehorsam. 3. Schließlich wollte Barth die anthropologische oder die

philosophische Begründung der Theologie, die unmerklich zum

Mißbrauch der Offenbarung Gottes führen kann, vermeiden und

vielmehr die Theologie auf Jesus Christus und dessen Menschwer-

dung gründen.

Schließlich frage ich, wie das hinweisende ‘Reden von Gott’

tatsächlich aussieht. Wie ist es beschaffen? Die Antwort würde

lauten:

1. Zeugenhaft, also ein Zeugnis von Gottes Offenba-rung. Zeugnis

von Gottes Offenbarung abzulegen, ist ein von Gott erlaubtes,

befohlenes, begnadigtes Tun des Menschen. Solches tut man, indem

man das Wort Gottes verkündigt. Nur durch dieses zeugnishafte

Reden könne Gott zum Gegenstand des menschlichen Reden werden,

in der Hoffnung, daß Gott das, was Menschen sagen, aufnimmt. Das

Zeugnis vollzieht sowohl negativ als auch positiv.

2. Bekennend, also ein Antworten im Danken und in Ehrfurcht auf

die Tat Gottes in der Geschichte.

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43-78

1) 이 논문은 2009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지원을 받아 수

행된연구임(NRF-2009-351-A00048).

2) David R. Griffin, Two Great Truths: A New Synthesis of Scientific Naturalism and

Christian Faith (Louisville: 2004), 6-11, 18-21. 그리핀은기독교 신학과 (그리스) 자

연철학의 역사적인 관계를 다음과 같이7가지로 정리한다. ① 2세기 초반, 플라톤의<

혼돈으로부터의창조> 개념차용, ② 2세기중반이후<무로부터의창조> 개념채택으

로 플라톤사상수정, ③ 13세기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자연철학과의결합, ④

Page 2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학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학과 근대과학의 밀월관

계는 얼마 가지 않았다. 18세기에 이르자 신학과 과학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하였고,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과학은 종교를 학문세계

에서거의밀어내버렸다.

그러나 신학과 과학 사이의 갈등은 아이러니하게도 양자가 공통적

으로 전제하고 있던 존재론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이점을 가장 철저

하고 일관되게 들여다본 사상가가A. N. 화이트헤드였다. 그는 이후의

종교사상(기독교신학)이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종교적 진리

를 해명할 수 있는 사상적 기초를 놓았다. 그가 제공해준 실마리는, 신

학과 과학이 동일한 존재론에 함께 근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대립하는방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면, 대립을 유발시킨 근본원인

을 그 (실체론적) 존재론에서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글은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이 제공하는 사상적 실마리들을

통해 기독교 신학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한다. 이글이 주목하고 있는

주제는 가시적으로 나타난 기독교 신학과 과학 사이의 갈등의 문제보

다도, 그 갈등을 유발시킨 실체론적 존재론의 문제와 그 존재론에 기초

하였을 때 기독교 신학 내부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딜레마이다. 먼저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의 특징과 그것이 안고 있는내적 문제가 무엇

인지를 서술한 다음, 과정사상에 근거한 신학적 방법론이 어떤 해결책

을 줄 수 있는지를살펴보기로하자.

I I. 기독교의고전적인철학적신론의문제점

우주 만물의 존재론적 본성을“우주의 연대성의 문제(the problem

of the solidarity of the universe)”로 본 화이트헤드의 우주론5)은 근대

별히 기독교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토마스 아퀴나스(1225-74)

로부터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을 넘어 뉴턴(1642-1727)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학은 사상적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학이 이러한 권위를

획득한 것은 단순히 서구교회의 강력한 교권질서에 의존한 결과라기보

다는, 그것이 전제하고 있었던 <고전적인 철학적 신론, classical

philosophical theism>이 우주론적 질문을 해명하는데(당시까지) 설득

력이있었기 때문이라고보는것이옳을것이다.3)

이 고전적인 철학적 신론은 우주의<존재론적 근거>를 궁극적이고

필연적 존재인 신에게서 찾고, 우주적 질서의<인과론적 근거>를 신의

주권적 능동성으로 해명하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과 과학의

시대라 불리는 근대의 세계관도 신의 주권적 능동성(active sover-

eignty)에 대한 신학적 확신과 세계의 기계적 피동성(passive mechan-

ism)을 전제한 자연철학의 연합으로 시작되었다.4) 17세기 근대과학은

신이 창조한 피조세계를 탐구함으로써 신의 본성과 뜻을 밝히려는 신

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45

14세기 의지론(voluntarism)의 부흥: <신의전능>과 <무로부터의 창조> 개념의 강조

를 통한그리스 철학과의이격, ⑤17세기근대적 종합: <초자연주의> 사상과<기계론

> 철학의 결합, ⑥ 18세기 이신론의 정착, ⑦ 19세기, <무신론적 유물론적 자연주의>

철학과 갈등. 기독교 신학과 자연철학(과학) 사이의 연합과 갈등을 위와 같이 분류한

그리핀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통해 일곱 번째 단계의 갈등을 극복할 여덟 번째

의 통합을 시도한다. 이 글 역시그리핀의 관심과맥락을같이 한다.

3) 이 진술은 어쩌면 과장일지도 모른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하던“신플라톤주

의적-마술적”자연철학이퇴조하고, 17세기에 기계론적 자연철학이 승리하였던 것은

순전히 사상적 투쟁의 결과였다기보다는후자가기성사회의<질서, status quo>, 즉부

자와 강자의 이권 체제를 옹호하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연구도 있다. Brian

Easlea, Witch Hunting, Magic and the New Philosophy: An Introduction to the

Debates of the Scientific Revolution, 1450-1750 (Atlantic Highlands, N.J.:

Humanities Press, 1980), 89-90, Griffin, Two Great Truths, 14에서 재인용; David

C. Lindberg and Roland L. Numbers, eds., God and Nature: Historical Essays on

the Encounter between Christianity and Science, 이정배·박우석 옮김,『神과 자연:

기독교와과학, 그 만남의역사, 상권』(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8), 31, 337.

4) Lindberg and Numbers, 『神과 자연, 상권』, 252. 5) 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오영환옮김,『과정과실재』(서울: 민음

Page 2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해를 낳는다.

따라서 <자기 독립성>을 가진 물질조각들을 전제한 존재론은 사물

의 관계방식을<외적 관계>로만 보는 이해를 낳고, 또 이와 같은 견해

는 <도구적 가치>를 우주의 기본적 가치로 파악하는 이해로 이어진다.

사물의 존재와 관계방식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근대의 자연과학이나

실증주의적 유물론 철학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전통적인 사고

패러다임을 지탱하는 사상적 전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고전적인 철학적 신론은 <신의 본성>과 <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상상력을왜곡시켜왔다.

실체론에 기초한 기독교 신학은 신을“[자신의] 항구적인 [신적] 속

성을 지닌 채, 분화됨(differentiation)이 없이 존속하며, 시간의 장단(長

短)에 구애됨이 없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존재로 간주한다.9) 이

신은 세계와의 관계(relationship)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 완벽한

독존성(perfect aseity)을 지닌존재로 이해되기때문에, 신의 속성가운

데 내재성(immanence)은 선택적인 것이지만 초월성(transcendence)은

필연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때 신의 초월성이란 세계(자연)와 외적

관계성을 맺는 초자연적 공간의 거주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신의

초월성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의미인 인식론적 포착불가능성(incompre-

hensibility)도 바로 이 신의 초자연적 존재방식으로 인해 생겨난 공간

적 균열이 만들어낸 산물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신의 존재방식을 설명

하기 위해 자연과 초자연을 나누었던 초자연주의적 이원론( s u p e r-

naturalistic dualism)이 어거스틴과안셀름, 토마스 아퀴나스와칼빈그

리고 라이프니츠(와 그 이후)에 이르는 기독교의 주요 사상가들이 자

신들의 신학적 세계관의 틀로 사용한<고전적인 철학적 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10)

의 과학적 세계관의 왜곡과 기독교의 고전적 신론이 지닌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 지혜를 준다. 오늘날“일상적인통속적 학설”은

우주 만물이“공간 속에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존속하는 물질조

각들(bits of matter)”로 이루어져있다는 전제를 하고 있다.6) 그리고 이

물질조각들은 마치“연속적인 시간의 계기들이 개체적인 독립( t h e

individual independence of successive temporal occasions)”의 상태를

취하듯이 존재한다고 말한다.7) 이와 같은 존재론은 사물의 근본양태를

더 이상 쪼개지지(tomo") 않는(aj) 원자(原子, atom)로 보았던 데모크

리투스로부터, 실체(substance)의 본성을 자기 독립성에서 찾았던 데카

르트와 그 이후의 사상가들까지 서구철학의 주류를 형성하여 왔다. 이

러한 실체론적 이해를 전제한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은 이제 생명현상

은 물론이요 물리적 세계를 설명할 수 없는 낡은 학설에 불과하다는

이해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왔음에도, 이“낡은 상식적 학설”은 과학

과 철학에서 새로운 발견과 혼재된 채 여전히 우주론의 근본원리로 받

아들여지고있다.

사물의 개체적 독립을 전제한 실체론적 이해는 우리의 세계관 형성

에 중요한 또 다른 두 가지사고방식을 낳는다. 그 하나는 만약사물이

“개체적 독립”의 상태로 존재한다면, 사물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

이란 항상 공간 속에서의“외적(external)”관계일 수밖에 없다는 이해

이다.8) 그리고 타자가 자기존재를 구성하는내적(internal) 구성요인이

된다는 유기체적 관계를 배제한 이와 같은 이해방식은 결과적으로 타

자가 지닌 가치(value)를 단지‘도구적인(instrumental)’ 것으로만 보는

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47

사, 1991), 56/151. (화이트헤드 저작의 인용은 다른 연구자들의 활용에 도움을 주기

위해<원문/번역서>의 페이지를동시에 기록하는방식을취한다).

6) Alfred North Whitehead, Modes of Thought, 오영환 옮김,『사고의 양태』(서울: 다산

글방, 2003), 131/182.

7) Whitehead, 『과정과실재』, 137/293-94.

8) 앞의책, 309/594.

9) 앞의책, 78/189.

10) Charles Hartshorne and William L. Reese, Philosophers Speak of Go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3), reprint. (Amherst: Humanity Books, 2000),

Page 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트헤드는 기독교 사상에 등장한 위와 같은 우상숭배적 이미지들로 세

가지, 즉“지배하는[천상의] 황제(ruling Caesar)”와“무자비한 도덕[적

심판자](a ruthless moralist)”와“부동의 동자(the unmoved Mover)”를

꼽는다.12) 둘째는 기독교의 종교적 가치를 결정할 신앙(영성)의 변질이

다. 원래 기독교는 새로운 가치의 원천인 신의<본질적 의로움, essen-

tial rightness>을 닮으려는 세계종교로서의 탁월한 특징에서 출발하였

음에도 불구하고, 실체철학을 통해 구상된 기독교 신학은 종교적 영성

을 자신(이 속한 사회구조)의 <보존, preservation>에 관심하여 일방적

힘을 행사하는 신의 의지나 살피는 종교정신으로 퇴행하는 방향으로

이끌었고, 더 나아가 신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적,

instrumental> 가치를 지닌 존재로 여기도록 하였기 때문에“안락한 삶

을 장식하는(embellish) 형식 신앙으로 타락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는 것이다.13)

실체철학에 기초한 기독교의 고전적인 신론은 자신의 신학적 해명

에서도 다양한 내적 딜레마를 유발시켰다. 그것은 각 존재의 개체적 독

립성을 전제한 실체론이 실재의<연대성, solidarity>의 문제를 해명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체론 관점에서 볼

때, 존재의 연대란 외적관계성이요, 따라서 실재의 본성을 밝히려는분

석적 사고가 최종적으로 이르게 되는 지점은 연대의 유기체적 총체성

에 대한 해명이 아닌 관계로부터 분리된 개체의 개별적 속성이 무엇인

지를밝히려는양자택일적선택(Either/or)이었다. 예를들어, 신과세계

의 관계성의문제, 예수그리스도의신성과 인성의문제, 역사적 실재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의 문제, 세계에서 발생하는 악의책임성의 문제등

에서 실체론에 입각한 기독교 신학은 항상 극단적인 이원론적 선택을

그렇다면 초자연에 거주하며,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변화

를 겪지 않는 신이 어떻게 자연(세계, 우주 만물)과 관계를 맺을 수 있

는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신이 영원하기 때문에 시간적 추이

(temporal passage)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신이 세

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impassible) 따라서 변화를 겪지 않는다는

것(immutable)을 의미한다.11) 이렇게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 완벽한 자

존(自存)의 신을 전제할 때, 기독교 신학은 신이 완벽한 힘(omnipo-

tence)과 완벽한 지식(omniscience)을 가지고 세계에 대하여 일방적으

로(unilaterally) 활동할 뿐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화이트

헤드에 따르면, 이러한 기독교의 고전적인 철학적 신론은 도리어 기독

교가지닌종교적 생동감을잃게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말았다.

화이트헤드가 지적한 기독교의 고전적인 철학적 신론의 문제점은

크게 보면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갈릴리에 기원을 둔 기독교(the

Galilean origin of Christianity)”에서는 발생할 수 없는 신의 이미지들

이 등장하여 기독교가“우상숭배적성격”을 갖게되었다는점이다. 화이

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49

17. 하트숀은 여기서 다섯 가지의 신의 속성을 열거하며, 이를 기준으로 하여 역사

속에 등장한 여러 신론을 분류한다. 그에게 신은 1) 영원하면서(Eternal), 2) 시간 속

에 있고(Temporal), 3) 자기 스스로를 지각할 뿐만아니라(Conscious), 4) 세계를알

고(Knowing), 5) 세계를 자기안에 담을 (World-inclusive) 수 있는특징을 갖고 있

다. 기독교의 고전적인신론은 이 다섯가지중, 1), 3), 4)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

다.

11) 형이상학적으로 볼 때, 신이 시간의 추이(推移)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신이 세

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을의미할 수밖에없다. 그런의미에서 하트숀의 분류법에 따

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이1)과 3)의 속성, 즉 영원하면서(Eternal) 자기 자신만을

지각할 뿐 세계를 생각하지 않는다고보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신론을 채택

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의 오래된 종교적 관심인<세계를 아는 신>의 관념을

덧붙여 자신의 신론을 정립하였다. 이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형이상학적 문제를

고찰하는 데 있어 전적으로 냉정하여…종교적 관심으로 형이상학적 결론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최후의 인물”이라고 본 화이트헤드의 생각은 옳다. Whitehead, 『과학

과 근대세계』, 173/253.

12) Whitehead, 『과정과 실재』, 342-43/647-69.

13) Alfred North Whitehead, Religion in the Making, 정강길 옮김,『형성과정에있는종

교』(고양: 동과서, 2003), 41/53; Alfred North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오영환 옮김, 『과학과근대세계』(파주: 서광사, 1989), 188/273.

Page 2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따라서 그가 가진 사상적 문제점은 기독교의“모든고전적인 유신론자

들(all classical theists)”의 문제로 대변될수 있을것이다.14)

토마스는 자신의『신학대전』에서 기독교 신학의 주요 주제를 방대

한 체계로 구성하여 깊이 있게 논증하였다.15) 신의본성에 관한 논문으

로 시작된 그 책에서 토마스는 자신에게 신은 이전의 기독교 사상가들

이 물려준 여러 특징을 그대로 간직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토마스의

신은 1) 모든 것을 자기 안에 갖고 있기 때문에<완벽, perfect>하고,

따라서<불변, immutable>한다(I.1.4,9). 2) 신은 시간의 처음과 끝을

갖고있지 않으며 또한추이(succession)가 없이전체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영원, eternal>하고, 따라서<무한, infinite>하다(I.1.

7,10). 3) 신은 자신의 힘( p o w e r )으로 만물에게 존재( b e i n g )와 힘

( p o w e r )과 작용( o p e r a t i o n )을 부여하며 <만물 안에 존재, omni-

p r e s e n t >한다(I.1.8). 4) 신은 자신의 본성 안에 <모든 지식, omni-

scient>을 갖고 있고, 이 지식은 사물의 원인이 된다(I.1.14). 5) 신은

완벽하게<선, good>하고, 이 완벽한 선함에 근거하여 불변하는 의지

(unchangeable will)를 갖는다(I.1.6,19). 6) 신은 <무한한 힘, omni-

p o t e n t >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I.1.25).

위와 같은 신의 본성은<단순성, simplicity>이라는 개념으로 통합

된다(I.1.3). 요약하여 말하자면, 토마스는 신이 완벽하고, 무한하며, 변

화를 겪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신에게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

해야만 하는기로에 서 왔던것이다.

다시 말해, 첫째, 신이 세계에 내재하였다면 그 세계는 신성을 갖게

되는가 아니면 신성과는별개로 존재하는가? 둘째, 신이인간으로(에게)

육화(incarnation)하였다면 그 인간은 신인가 인간인가? 셋째, 역사 속

으로 침노해 온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역사 속에 사

는가 하나님 나라에 사는가? 넷째, 세상에 악이 발생하였다면 그 악의

원인은 전능한 신의 계획 때문인가 우주(역사, 인간)의 타락 때문인가?

위와 같은 주요 물음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양자택일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선택을 좌우하는 밑그림은 초자연주의적

이원론이었다.

이 글은 기독교 신학의 내적 딜레마가 생겨난 근본 이유를 전통적

인 기독교 세계관이 전제하고 있었던 실체론적 존재론(substantialist

ontology)에서찾는다. 그리고 이 존재론에 기초하였을 때 기독교 신학

은 필연적으로 초자연주의적 이원론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된다는 것

을 주장하고자 한다. 기독교 신학이18세기이후 과학적 세계관과 갈등

을 빚다가 결국 패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근본 이유는 바로 자신이 오

랫동안 전제해왔던 세계관 내부에 있었다. 기독교 신학을 내부적으로

딜레마에 빠뜨렸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들을

예로들어살펴보기로하자.

I I I. 기독교우주론의전통적패러다임과그 내적딜레마

무엇을 기독교 신학의 전통적 세계관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선 다양

한 의견이 있을것이다. 이글은 기독교 사상가 중,“가장 위대한 사상의

정돈자(the greatest arranger of ideas)”로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로부

터 시작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철학으로기독교 사상을 재구성

한 토마스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종합해낸 사상가로 여겨지고 있으며,

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51

14) Hartshorne and Reese, Philosophers Speak of God, 119.

15) Thomas Aquinas, The Summa Theologica, 2 vols., of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 vol. 19 and 20, trans. by Fathers of the English Dominican Province

(Chicago: Encyclopedia Britannica, INC., 1952). Summa에 대한 언급이 빈번하기

때문에 과다한 각주를 피하기 위해 본문에 괄호를 넣어 삽입하였다. 앞의“I.1”은 1

권의 첫 번째“신에 관한 논문(Treatise on God)” 부분을 가리키고, 이어지는 숫자는

신의속성을 설명하는항의번호를뜻한다.

Page 2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신의 단순성>이라는 개념은 풀기 힘든 딜레마로서 끊임없는 신학적

문제의 원천이 되고 말았다. 이 문제를 풀고자 했던 위대한 사상가는

스피노자였다. 그러나 그의 해결책은 도리어 서구신학에‘위협’만을 가

져다주었다. 그의 사상이 지닌 위협은 전혀 의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위협적이었다. 왜냐하면스피노자는 전통신학의 철학적 전제를 바

탕으로 철저하게 추론할 때 필연적으로 이를 수밖에 없는 귀결점이 무

엇인지를보여주었기때문이다.

스피노자는 한 세대 전에 태어난 데카르트가 정립한 철학체계로 토

마스의 신학에서 종합된 신의 무한성과 불변성의 문제를 깊이 숙고하

였다. 그러나 그의결론은<신과세계의관련성>에 관한전통적인사고

를 뒤집는 것이었다. 그는 데카르트가 주장한 대로 실체(substance)를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것(I.def.3)”으로보면서, 신을“절대적으로무한

한 존재(I.def.6)”로 정의한 전통신학을따랐다.17) 스피노자의 주장에 의

하면, 만약 신이 무한한 존재라면, 우주 만물의 그 어떠한 개체도 신의

외부에 있을수 없을것이다(I.prop.15). 그리고 신의뜻이 영원하고필

연적이라면, 우주 안에있는그 어떠한 것도 우연히(contingent) 존재한

다고볼 수 없다(I.prop.29). 따라서 세상안에 존재하는 개체들은 오직

하나의 무한한 실체인 신의 속성(attributes)이나 양태(modes)의 변용

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I.prop.25). 결국 스피노자는 전통신학이

전제한 철학적 신론에 근거하여 신과 세계의 관계를 철저하게 사고할

때, 결국신과세계의 존재론적일치를 말하는 범신론(pantheism)에 이

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보여주었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결론은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는 더욱 곤혹스

서 신의 실재(being)는 그의 본성(essence)과 구분됨이 없고, 신의 신

적 본성(Godhead) 자체가 신(God)이라는 점에서, 신은 단순(simple)하

다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무한하고 불변하며 완벽한 신의 지식

(knowledge)과 의지(will)와 능력(power)이 동일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경험하듯이, 피조물(인간)은 우선 (지식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

에) 아는 것이 변하고, (완벽하게 선하지 않기 때문에) 알고 있다 하더

라도 아는 바대로 하고자 하지 않으며, (능력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하고싶어도 이루어낼수 없다. 그것이 세상이 복잡한(complex) 이유이

다. 그러나 신은 무한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완벽하게 선하므로) 아는

바대로 하고자 하며, (무한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대로할

수 있기에, 신은 가능태와 현실태가 다르지 않다는 의미에서 단순하다

는 것이다.

문제는 토마스의논리체계가<신과세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피

할 수 없는 문제점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즉, 토마스의<신의 단순성>

이라는 개념은 우주 속에서 발생하는<사건의 우연성>과 조화를 이룰

수 없고, 따라서 우주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신에 의

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피하기 힘들다. 왜냐하

면 전지전능하면서 동시에 불변하는 신은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

건의 원인이라고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토마스는 이러한 결정론

(determinism)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해명과 복잡한 개념들을 쏟아내

지만, 그러한 세부적인 해명이 소용없는 까닭은 자신의<신의 단순성>

이라는 개념때문이다.16)

토마스가 체계화한 기독교의‘고전적인’신론은 후대의 사상가들에

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의 철학적 신론 특히

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 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53

16) David Ray Griffin, A Process Theodicy: God, Power, & Evil, 이세형 옮김,『과정신

정론』(대구: 이문출판사, 2007), 98. 결정론을 피하고, 특히 우주에서 발생하는 악에

관하여 신의 책임을 변호하기 위한 토마스의 주요 논리를 요약적으로 보기 위해서

는 이 책의89-98을 참고하시오.

17) Benedict de Spinoza, Ethics, in Works of Spinoza, trans. by R. H. M. Elwes (New

York: Dover Publications, INC., 1955). 본문에 삽입된 저작에 대한 표시 중, 앞의

“ I ”는『윤리학』의 1부(신에 관하여)를 의미하고, “def.” 는 정의(definitions) 편을,

“prop.”는 명제(proposition) 편을 뜻하고, 뒤에 이어지는 숫자는 정의와 명제의 번

호를가리킨다.

Page 2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는 자신의『신정론』에서 신의 무한한 힘과 지혜, 그리고 완전한 선에

대한 신학적 전제를 바탕으로 하여, 이 세계가 죄와 고통을 담고 있다

고 하더라도“모든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상의 세계(the very best

possible [world]”라고주장하며 전통적인 견해를 재확언하였다.20) 라이

프니츠는 세계 안에 악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해도, 그것은 악을

막을 수 없었던 신의 무능의 지표라기보다는, 그 세계가 다른 어떤 가

능한 세계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 신이“그러하도록 선택했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그 세계는 신이“미리

확립한 조화의 체계(the System of Pre-established Harmony)” 위에

형성된 것이라고주장한다.21)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한 것

으로써 이후의 기독교 신학이 오랫동안 (현재까지) 자신의 철학적 토대

로 사용하는주요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이 전지전능한무

한자로서의 신을 강조하고 또 그 신을 설명하기위해 초자연주의를 채

택하면 할수록, 지속적으로 자라나는 시대의 지성과의 대화에서주도권

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22) 18세기계몽주의 시기에

초자연주의적 이원론에 기초한 이신론( d e i s m )이 확립되고, 대부분의

기독교 교회가 그 세계관을 수용했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학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것이 되고말았다. 그 결과, 19세기부터 기독교 전통신학은

종교적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우주론의 광활한 지평

을 상실한 채, 개체적 실존과 심리 속에서만 종교의 의미를 밝히는 소

러운 것일수밖에 없었다. 신과세계의 존재론적 일치를 말하는 범신론

은 신의 내재성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기독교 사상이 정초하고 있는

또 다른 축인 신의 초월성을 해명하지 못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기 때

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기독교 사상가들은스피노자의 철학을 비판하

고, 초자연주의적 신론을 채택하여 신의초월성을일방적으로강조하는

방식을 택했다. 사실 이것은 오래전부터 소위‘정통’기독교 신학이 취

한 입장이었다.

루터와 칼빈에 의해 중세적 교권질서는 무너졌지만, 중세의 신학사

상을 대변한 토마스의 신학체계는 큰 변동없이 전승되었다. 칼빈은 자

신의『기독교 강요, 1559』에서 토마스의‘신의 단순성’이라는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신학적 결론을 더욱 분명하게 밀고 나갔다. 그 결론은

지식과 의지와 능력에서 무한한 신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면, 세계안

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신에 의해서 예정(predestination)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론은 분명히 우주에서 경험하는 우

연성(contingence)의 문제, 인간 활동의 선택과 판단 작업에서 전제되

는 자유(freedom)의 문제등을설명하기어려운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

나 이후의 기독교(개신교) 신학은 칼빈의 결론 즉, 우주는 신의계획과

능력에 의해“모든 것이 조절(regulate)되고, 따라서 신이 의도하지 않

은... 운(fortune)과 우연(chance)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없다”라는결정론적 사고에 계속해서경도되었다.18)

근대에 등장한 기독교 사상가들의 주장에는 저마다의 독특함이 묻

어 있기는 하지만, 칼빈의 세계관에서 멀어져 간 것으로 보이지는않는

다. 형이상학적 명료함을 자랑한 라이프니츠 역시칼빈과 그 이전토마

스가 남겨준 신의‘절대적 무한성’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였다.19)

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55

18)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n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 X X, trans. by Ford Lewis Battle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60), I . x v i.2-3.

19) Charles Hartshorne, Insights & Oversights of Great Thinkers: An Evaluation of

Western Philosophy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3), 133.

20) G. W. Leibniz, Theodicy: Essays on the Goodness of God, the Freedom of Man,

and the Origin of Evil, trans. by E. M. Huggard from C. J. Gerhardt’s Edition of

the Collected Philosophical Works, 1875-90(Chicago: Open Court, 1985), 187.

21) 앞의책, 64, 80, 129.

22) 한 두 세대가 지나고 나자, 이 세계를“가능한세계 중 최선”이라고 주장했던 라이프

니츠의사상은 비판받기시작한다. 볼테르는『캉디드, 1759』에서전지전능한신 관념

에 기초한 라이프니츠의낙관론을통렬히비판하였다.

Page 2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다. 실체론에 근거한 과학적 유물론이그 환원론적(reductionist) 세계관

으로 인해 질식하여 갈 때, 유기체가 자신의 환경과 맺는 고유한 관계

에서 새로움이 창발(emergence)하는 것에 집중하는 새로운 사유방식

이 등장하고 있었다.24)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사유를 종합하여 실체철학

을 극복할 수 있는 유기체 철학(과정사상)을 제시하여, 세계(와 신)를

새롭게 설명할 수 있는전망을 열어갔다.

화이트헤드는 실체론적 세계관 즉, 분화됨이 없이 자기 동일성을 유

지하며 존속하는 물질조각들로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간주하는 세계관

이“형이상학적인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았다.25) 그러한 오류가 생겨

난 것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오직“시각, 청각, 촉각 등의 명석 판명한

감각경험에 의존”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감각주의적 인식론과 그

것에 기초한 실증주의적 과학정신 때문이라고 보았다.26) 근대과학의 상

식처럼 여겨져 온 이러한 사고방식은 실상<관찰과 이론과 실천> 사이

에서 일관성을 결여한 것으로써, 자연의 근본 개념을“자족적 고립”이

아닌 다양한 요소간의내적인 연관 속에서 복잡한 변화와 활동을 하는

심함으로침잠하여갈 수밖에 없게 된다.

I V. 과정사상과이에기초한신학의새로운사고패러다임

근대에 기독교 신학이 사상적 위기를 맞게 된 과정에는 내외적 이

중요인이 있었다. 내적으로는 기독교 신학이 초자연주의적 이원론을 자

신의 철학적 신론으로 채택하여<신의 본성>과 <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서 한계를 가졌기 때문이고, 외적으로는 자신과 대립의 길

을 걷게 된 근대과학과의 대결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이 두 요소는

외형상으로는 상반되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 본질은 동일한 것으로써,

양자 모두 실체론을 존재론적 전제로 사용한 데서 온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신학의 위기는 실체론에 기초한 기독교 신학자체의 내

적 딜레마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실체론에 기초한 과학적 세계관이 신

학적 사고방식 자체를 담을 수 없는 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생긴 문제

이기도 하다.23)

따라서 기독교 신학이 자신의 위기를 돌파할 가장 근본적인 방법을

실체론적 사유방식의 극복에서 찾아야 함이 타당하다. 이러한 해법을

상상할 수 있도록 형이상학적 안목을 제공한 사상가는 분명 화이트헤

드일 것이다. 그는 시대의 아들로서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위기를 뚫

기 위해 등장하고 있었던 새로운 철학사조들과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

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57

23) David R. Griffin, God and Religion in the Postmodern World, 강성도 옮김,『포스

트모던 하나님포스트모던기독교』(서울: 조명출판사, 1995), 91. 실체론에근거한 근

대의 과학적 세계관은17세기에는 데카르트의 유신론적 이원론에서 출발하였지만,

그 실체론적 특징 때문에 결국19세기에는 무신론적 유물론으로 귀착하였다. 이 과

정은 근대과학 자체 안에서 신을 지워간 과정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과학적 세계관

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결론에 이르러야만 하는 논리적 필연성 때문이 아니요, 실증

주의적 인식론과 결합한 실체론적 존재론을 사고의 틀로 삼았기 때문에 생긴 과학

적 세계관의왜곡 과정이라고봐야옳을것이다.

2 4 ) Philip Clayton, Mind & Emergence: from Quantum to Consciousness ( O x f o r d :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1-37. “ 창발( e m e r g e n c e ) ”이라는 개념은 G e o r g e

Henry Lewes의 Problems of Life and Mind(1875)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Samuel

Alexander의 1916-18년 기포드 강연, Space, Time, and Deity(1920); Conwy Lloyd

Morgan의 기포드 강연, Emergent Evolution(1923); D. Broad의 The Mind and Its

Place in Nature(1925) 등은 새로운 유기체적 사상을 과학과 형이상학과 신학에 적

용하는시도들이었다.

25) Whitehead, 『과정과 실재』, 79/190.

26) Whitehead, 『사고의 양태』, 128/178. 물론 실체론적 사유방식을 근대에 정착시킨 역

사적 요인은 보다 복잡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그것을 크게 두 가

지로보았다. 그 하나는 개체적 존재의 내적 가치를 강조한 중세의 정신수련에서생

긴 개체성에 대한 이해가인간 자체의 개별적 가치를 강조하던 당시의 추세를 반영

하여 변형되었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물질적 매체에 의존하는 미적 효과를 혐오

하는 개신교도들의 정신상태(예, 성상숭배 반대)가 반영되어 물질적 실체를 정신에

서 독립되어 가치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과학과 근대세

계』, 194-95/281-82.

Page 3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아들인다. 이때 주체의 목적지향은 환경(efficient cause)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써, 장차새로움을낳게할 가능태(eternal object)를 수용

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이 가능태의 거처

를 주체도 환경도 아닌신(의 시원적 본성)에게서 찾았다.

이러한 유기체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려지는 우주론은 신과

세계가 서로에게 내재하고 서로를 초월하면서 우주적 공생과 상생의

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우선신은 세상안에서 일어나

는“모든 창조적 활동”의 근거로서 새로움의 원천이자,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사멸하는”사건들을“묶어내어(binding)” 지키는 질서의 원

천으로 여겨진다.31) 그러나“신의 단순성(simplicity)”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완벽한 무한으로써의 불변>의 속성이 이 신에게 적용되는 아니

다. 어떤의미에서 신은세상에 의해서“결정되고(decided) 따라서 제한

을 받는다”(limited).32) 그것은 신 역시“자기 존재를 위해 자기 이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비록“지나가는 그림자(passing shadow)”와 같은 사건들로 가득 차 있

다 할지라도, 다른 한편 세상은“종국적인 사실(final fact)”이기 때문에

신은세상을 필요로 한다.33) 새로움과질서의 원천인“신을 떠나서 세상

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우주적 실재의“종국적

인 사실”인 세상(the world)을 떠나서는“신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이

상적인 비전에 대한 그 어떠한 합리적인 설명도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34)

위와 같은 과정사상의 존재우주론을 토대로 할 때, 우리는 전통적

기독교 신학의 초자연주의적 이신론과는 전혀 다른 이해를 하게 된다.

세계와 유기체적 연관을 맺고 살아가는 신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이

“과정(process)”으로 파악해 가는 새로운 이해와 상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27) 뉴턴 물리학에서는 자연 속의 어떤 실체가 어떤 순간에 일

정한 공간을 점유하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실재의 궁극적 존재방식

으로 간주되지만, 이것은 오늘날 용납되기 힘든과거의 견해가 되고말

았다. 대신 화이트헤드에 의하면,“과정과 활동과 변화”가 존재하는 것

들의 본질이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호관계성 속에서“창조적으로 전

진(creative advance)”하는특징을 지닌다.28)

새로운 과학적 성과물을 바탕으로 하여 세계를 일관성 있게 설명하

고자 하는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은관계적 존재론 즉, 우주 만물이 자

신의 환경과 유기체적 관계를 맺으면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탄생시키는

사건(event)으로 구성되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환경은 (뉴

턴 물리학에서 말하듯이) 주체의 외적 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주

체와 <내적, internal> 관계를 맺으면서(다시 말해 주체 안에 내재하

여) 주체를 조성해내는 조건(condition)이 된다. 그러므로 환경이란 주

체에게 단순히 도구적 가치를 지닌 것에 그치지 않고 <본원적

intrinsic>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환경이 주체의 창조적

활동을 결정하는(determining)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어떠한 사건도

또 다른 [이어지는] 사건의 완전하고도 유일한 원인일 수는 없기”때문

이다.29) 이 점에서는 무한한 신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다.30) 창조성

은 본질적으로 주체의 자기 향유(self-enjoyment)에 가로놓여 있다. 주

체는 환경 즉 우주의 총체적 영향 아래에 놓여 있지만, 환경을 수동적

으로 수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 목적지향성의빛에서 느끼고 받

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59

27) Whitehead, 『사고의양태』, 135-40/187-94.

28) 앞의책, 146/202.

29) 앞의책, 225.

3 0 ) John B. Cobb, Jr., “Does It Make Sense to Talk about God?” in Essentials of

Christian Theology, ed. by William C. Placher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3), 65. 역사란 신이 연출한 인형극 드라마에서 꼭두각시들이 움직

이는무대가결코아니기 때문이다.

31) Whitehead, 『과정과 실재』, 247/488;『형성과정에있는종교』, 154/154, 158/158.

32) Whitehead, 『형성과정에있는종교』,153/152.

33) 앞의책, 87/93.

34) 앞의책, 157/157.

Page 3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 신의예정에 갇힌세계로 이해되기보다는“진선미의비전을 가진시

인”과 같은신에의해창조적으로열려가는세계로이해될 것이다.

아울러 만약 진선미의 비전을 가지고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설득력

있는 힘으로 일하는 신을 전제한다면, 그 신을 향한 종교의 성격 역시

바뀔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주의 궁극적인 흐름이 신의진선미의비

전을 구현하는 것, 다시말해 이 세계가“신을자신 안에 육화시킴으로

써 살아가는”것이라면, 종교(적 삶)의 목적은“자기 보존”이 아닌“신

(의 선함)을 닮기”위해 궁극적인 미덕을 추구해가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40) 만약 종교가 신을 닮기 위해 (삶의 안전이 아닌) 궁극적 미

덕을 이끌어오는 모험(adventure)을 감당할 수 있다면,“문명과 안전을

혼동하여”,“힘의 복음(the Gospel of Force)”에 굴복했던 역사의 타락

이 치유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41) 그리고 이러한 종교정신을 추구하는

기독교 신학역시새롭게재구성될수 있을것이다.

V. 과정사상의범재신론을통한기독교사상재해석

“연대성(solidarity)”의 관점에서 사물의 존재방식을 이해하고 범재

신론적 지평에서 신학적 사유를 하게 될 때, 기독교 신학은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사상적 난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를 얻게될 것이다. 이

것은 소위 히브리적 종교정신이 헬라의 철학적 사유와 만나면서 겪게

된 갈등을 치유하는 것이자, 성서를 타고흐르는 신앙정신을일관된 사

상체계 속에서 그려내고자 하였던 기독교 신학의 이상을 현시대의 지

성과충분히 대화할 수 방식으로 그려낸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과정

사상의 범재신론을통해새롭게 이해될 수 있는신학적 주제로 우주론,

주장해 온 초월적인 창조성(creativeness)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계-내재적인“응답성(responsiveness)”을 지닌다는 점에서,“양극적

인(dipolar)” 본성을 갖고있다.35) 이 신은영원하면서동시에 시간속에

참여하여 변화를 겪으며,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자각하면서 동시에 세

계를 알고, 이 세계와 같지 않으면서 이 세계를 자기 안에담는 특징을

갖는다.36) 달리 말하자면, 이 신은 무한한 지고성(至高性, supremacy)을

가지면서 동시에“세계에 빚을 지고(indebted)” 있으며, 절대적

(absolute)이면서 동시에“세계의모든 것과 관계를 맺는(related)”다.37)

과정신학자 하트숀은 이런 특징을 가진 신을 서술하는 신관을 가리켜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하였다.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해명하려는 과정사상의 범재신론은

전통신학의초자연주의적 신론이 발전시켜내지 못한내재성의 이론 즉

신과 세계의 관계방식을 신이 가진<힘의 특성>에 착안하여 해결하려

고 한다. 신의초월성에과도하게 경도된 전통신학은 신의완전성과 불

변성을 옹호하기 위해, 신의 내재를 말할 때 간헐적인 간섭(intermit-

tent intervening)의 방식으로일방적인(unilateral) 신의힘이세계속에

서 관철되는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과정사상은 세상과의관계에서

신은 설득적(persuasive)이고 관계적(relational)일 뿐만 아니라, 지속적

이면서도 공감적인(compassionate) 방식으로 힘을 행사한다고 본다.38)

이런 특성의 힘을 가진 신은 전제 군주적 이미지를 가진 천상의 존재

가 아니라“위대한 동반자”이자“동료 고난자(fellow-sufferer)”의 이미

지를 가진 존재로 그려지게 된다.39) 또한 이런 신과 관계를 맺는 세계

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61

35) Whitehead, 『과정과실재』, 345/653.

36) Hartshorne and Reese, Philosophers Speak of God, 17.

37) Charles Hartshorne, Divine Relativity: A Social Conception of God (New Haven:

Yale University(1948) 1964), i x; A Natural Theology for Our Time (La Salle, IL:

Open Court, 1967), 123.

38) Robert C. Mesle, Process Theology, 이경호 옮김,『과정신학과 자연주의』(대구: 이

문출판사, 2003), 45-55.

39) Whitehead, 『과정과 실재』, 346/655, 351/663.

40) Whitehead, 『형성과정에있는종교』, 156/156.

41) Whitehead, 『과학과 근대세계』, 206-7/297-98

Page 3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 전통신학이 우주론을 구성할 때,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건너온<완벽

하고 무한하기 때문에 불변하는 신>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

다. 이 그리스적 관념이 토마스 아퀴나스로 하여금“신의 단순성”이라

는 개념을 만들도록 이끌었지만, 실상 토마스의 개념은 신의“추상적

측면”에 대한 언급이었을 뿐, 우주 만물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가장

복잡(the most complex)” 할 수밖에 없는신의“구체적 측면”을 다루지

는 않았다는점에서 일방적인사고였다.45)

과정사상은 신의 추상성과 구체성을 동시에 포착할 세계관으로 범

재신론(panentheism)을 주창한다. 이 세계관은 기독교 성서의 이해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자, 기독교 신학이 다루고자 했던 신의 초

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체계화한 것으로 여겨지며, 기독교 신학의 위

기를뚫고 나가려는 오늘날의 많은 신학자에게 영감을 주고있다. 범재

신론적 세계관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6가지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

다.46) 첫째, 유물론적 환원론과 감각주의적 인식론에 근거한 근대의 과

학적무신론의“부적절함(inadequacy)”에 대한 비판. 둘째, 전통적인서

구 유신론의“비일관성(inconsistency)”에 대한지적. 셋째, 이원론적사

유에 대한“성서의 저항(resistance)”을 옹호. 넷째, 신이라는 언어에 담

긴“무한성(infinity)”의 참된의미를 이중적으로지지.47) 다섯째, 세계에

신정론, 기독론, 종말론, 4가지를 예로들어간략하게살펴보겠다.

1. 우주론(cosmology)

역사적으로 볼 때, 어떤 종교사상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가장 근본

적인이유는 당대의 지성과 감수성을만족시킬수 있는보편적인“세계

정신(world-consciousness)”을 우주론의 일관된 체계 속에 담아낼 때

였다.42) 기독교 신학 역시 단순히 국지적인(parochial) 성격의 독특한

종교 감정을 반복하여 진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매 시대의 사상을

자신의 체계 속에 담으려고 끊임없이 발전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기독

교 신학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해명하여 <신과 세계의 관

계>라는 우주론 문제를 체계적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관심을 지속적으

로 유지했음에도불구하고,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해내지 못했다. 그 근

본 이유는 전통신학이 신의 내재성(immanence) 문제를 이론적으로 발

전시키지못했기 때문이다.43)

전통신학은 신의 내재성, 즉 <세상과의 유기체적 관계를 통해 만물

속으로 화육하는 신> 혹은<신이라는 포괄적인 우주적 지평에서 창조

적으로 길러지는 세계>라는 주제를 발전시키지 못했다.44) 그 근본이유

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63

42) Whitehead, 『형성과정에 있는 종교』, 38-41/51-54, 139-41/140-42. 기독교와 불교

가 세계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세계정신”을 획득하여 우주론적 체

계를 세웠을 때요, 반대로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은 새로운 우주론의 등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때였다. 근대과학이 두 종교에 위협이 되었던 것은 과학이 새로운 우

주론을 제창하며 과거의 상식들을 변경시켜갔기때문이다. 특히 우주론적 해명의 문

제로 근대과학과 대화를 할 때 기독교가 초자연주의적이신론의 틀을고집하였지만,

그것은 기독교 전통을 강화시켜내는 방향으로 가기보다는 기독교 신학을 궁지로 몰

고 갈 뿐이었다.

43) Alfred North Whitehead, Adventures of Ideas, 오영환 역,『관념의 모험』(서울: 한길

사, 1996), 169/271.

44) 이 우주론적주제는기독교성서자체가 증언하는바였다. 예를들면,“그분[신]은 만

물 위에계시고 만물을꿰뚫어계시며 만물 안에계십니다”(에베소서4장 6절). “[신

은]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

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in him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사도행전

17장27-28절).

45) Chareles E. Hartshorne, Aquinas to Whitehead: Seven Centuries of Metaphysics of

Religion, The Aquinas Lecture (Milwaukee: Marquette University Publications,

1976), 24.

46) Philip Clayton, God and Contemporary Science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97), 96-104.

47) 전통신학은 신의 무한성을“초월성”에서만 일면적으로 찾았지만, 과정사상의 범재신

론은 신의 무한성을<초월적 무한>과 <내재적 무한>이라는 두 차원 모두에서 찾는

다. 초월적무한성은 세계가 나아갈 모든가능성을담고 있는신의측면을 가리키며,

내재적무한성은우주만물과관계를 맺으면서양육하는신의측면을가리킨다. 이

Page 3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였지만, 실상 이 둘을 결합하면 (“예정(predestination)”이라는 신의

절대적 힘에 대한 이해 때문에) <불의한 신>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

에 없기 때문이다.49) 이것은 신학적 모순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정치철

학적 문제까지 유발하는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악까지 신의 계획 속에 있다는 주장은 악을 발생시키는 불의

한 체제(status quo)를 용인하면서, 그것에 항거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

들을 (신의뜻을 거역한다는 명분으로) 거세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

이다.

신정론이라는 주제를 해명하려는 문제에서 과정사상의 접근법이 전

통신학의 사유와 전적으로 다른 것은 신의<전능성>의 문제를 이해하

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신은 악을 제거할 수 있는 전능한 힘을 가지

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과정사상은 부정적인 대답으로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악이란 우주 만물의 존재방식에서 필연적으로 형성

되는 형이상학적 실재이기 때문에,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 역시

존재할 수 없다고 봐야 하기때문이다.50) 이러한 이해는(자신이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인과율이든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전능

한 힘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해서 신을 기소(起訴)할 수는 없다는 생각

을 낳는다. 과정사상의 인과론은 미래에 발생할 사건을 완전히 통제할

힘이란 (신이라 할지라도)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한

다. 대신과정신학에서 말하는 신의 힘은사랑하는 일에서 실패하지않

대한 신의“인과성(causality)”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 여섯째,

종교적 경험이 증언하는 신과 세계의“보다 밀접한 관계성(closer rela-

tionship)”의 문제를 해명. 이상과같은새로운 가능성을열어놓은범재

신론적 기독교 우주론은 다른 기독교 신학의 내적 딜레마를 풀 수 있

는 해석학적 안목을 제공한다.

2. 신정론(theodicy)

기독교 신학이 위기를 맞게 된 일차적인 원인은 기독교 사상 자체

의 내적모순에 있었다. 19세기에 서구기독교문명의큰 흐름이 무신론

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기독교 신학의 여러 문제점 가운데 특히<악에

대처하는 신의 정의(justice)>에 관한 문제였다. 무한한 지식으로 모든

가능성을 알고 있으면서, 완벽하게 선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할 수 있

는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참혹한 악이 발생할 수 있단

말인가?48) 이런 인문주의적 항변에 기독교 신학은 도그마에 갇혀 제대

로 대답하지못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신의 단순성, divine simplicity>에서 출발하여,

칼빈이 발전시킨<예정, predestination>의 사상과 라이프니츠의<예정

된 조화, Pre-established Harmony>의 개념으로 이어져간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신정론의 문제를 풀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신학

은 <예정의 신이 지닌 힘>과 <악을 심판하는 신의 선>을 동시에 지지

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 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65

두 측면은 모든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가 정신 축과 물질 축을 갖듯이, 신 역시

정신적 측면과물질적 측면을 동시에가진다는 화이트헤드의사상과상통한다.

48)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사유의 내적 딜레마에 대한 물음이다. 악이 실재하고

있는 현실을 앞에 두고 물을 때, 만일 신이 그것을 막을 힘이 충분히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허용했다면 신의<선함>을 부정해야 할 것이고, 그것을 막고자 하였지만 그

렇게 할 수 없었다면 신의<능력>을 부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

은 이 두 가지 신의 속성을 동시에 지지하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내적 모순이 발생

할 수밖에 없었다.

49) Whitehead, 『형성과정에 있는 종교』, 95/101. 화이트헤드는 만일 신의 힘이 우주의

운행을결정(determination)할 수 있을만큼절대적인것으로 이해한다면, 우주속의

“악이란 신의본성과 일치하는것”으로봐야한다고주장한다.

50) Whitehead, 『과정과 실재』, 29/98, 82/196, 338/639;『관념의 모험』, 204/321, 237-

38/368-69. 과정사상에서 이해되는 악이란“끊임없이 사멸하는(perpetually perish-

ing)”하는 우주 만물의 근저에 깃든 파괴적인 요소로 이해된다. 이 파괴적인 면은

창조적 전진의 이면에 있는것이기 때문에, 파괴적 요소가 없다면 세계 안에서 새로

움의 창조라는 것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선의 실현이란 악의 발생 가능성

을 비례적으로 동반하는위험과모험을 감내하는것이라는이해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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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독론(Christology)

기독교 신학의 중심을 구성하는 이 주제는 어떻게 역사적 인물인

예수가 그리스도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기독론적 사고를 뒷받침할 성서

본문의 다양성과 수많은 신학자의 다양한 논증 방식이 기독론을 복잡

하게 이끌어갔지만, 핵심적인 질문은“어떻게 신성과 인성이 한 실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공존할 수 있는가?”하는 철학적 해

명과연관된다.

역사적으로 기독론 논쟁은 에비온주의와 가현설, 양자론과 양태론,

삼신론과 성부수난설 사이에서 갈등하여왔다.53) 그리고 전자는 인성을

강조하고, 후자는 신성을 강조하는일방적인 신학으로 이해되었기 때문

에 이단으로 처리되었다. 이후 기독교 교회는 칼케돈 회의(451년)를 통

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완벽한 신성과 완벽한 인성>이 서로“혼

돈( c o n f u s i o n )이나 변화( c h a n g e )나 분열( d i v i s i o n )이나 분리( s e p a r a-

tion)됨이 없이”완벽하게 결합하였다고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 <선언,

proclamation>이 기독론의 철학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볼 수는 없다.

칼케돈 회의는 이 문제를<이해할 수 있는 해명>을 제공했다기보다는

단지<믿어야만 할 기준>을 제시했을뿐이다. 따라서 칼케돈 회의가 제

시한 기준에 동의하지 않았던 그룹들은 기독교의 본류에서 제거되어갔

다. 그러나 문제는 기독론적<해명>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칼케돈

회의 이후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초자연적인 신-인(God-man super-

natural being)으로 이해되기 일쑤였고, 이것을<믿는 것>이 기독교 신

고, 우주적 질서에 사랑을 심는작업에서 실패하지 않는 무한한 사랑과

공감의 힘이다.51) 그것이 진선미의 비전으로 끊임없이 악을 극복하며

평화를 심어가는신의우주적 활동의 본성인것이다.

과정사상에 의하면, 우주의 진행 과정에서 악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신의 모험과 그 모험의 세계로 만물을

불러들이는 신의 활동은 계속된다. 만일 그렇다면, 악의 문제를 대처하

는 종교적 삶에서 새로운 의미지평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종교

적 인간이란 악의 실재성을 이유로 신의무능을 기소하는 사람이 아니

라, 악의극복을 통해 더 큰 선으로 부르는 신의선함을 따르고 닮아가

는 사람이 되는것이다. 물론여전히<악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

능하게 여겨지는 신이 과연경배(worship)를 받을 만한 존재인가?>라

는 질문은 계속될 것이다. 전통신학은 이 질문에 대해부정적인 대답을

염두에 두었고, 따라서 신의 인과율적 전능성을 증명하여 종교적 삶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답은 형이상학적 유

추에 근거한다기보다는 종교적 삶의 가치에 대한 미학적 판단에 근거

하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의 의미를“자기 보전”을 위한 신과의“외교

(diplomacy)”에 둘 것인가, 신의“본질적 의로움(essential rightness)”

을 닮아가기 위한“새로운 미덕의 추구”에 둘 것인가?52) 이 둘 사이의

선택의 차이가 신정론적사유구조의 차이를 낳을것이다.

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67

51) 이것은 전통신학의 철학적 개념으로서의<전능성>과는 어울리지 않을지는 몰라도,

기독교 성서가 지시하는 신의 속성과는 일치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신을 알 수 있

는 길이 “기적(miraculous signs)”에 있지 않고, (사랑의 극치를 상징하는)“십자가”

에 있다고 본 바울(고린도전서1장 22-23절)이나, 신을“사랑”자체로 알고 사랑을

통해서만 신을알고신의 뜻을따라살 수 있다고 본 요한(요한1서 4장 7-8절)은 과

정사상의생각과 연결된다.

52) Whitehead, 『형성과정에 있는 종교』, 41/53-54. 이것이 화이트헤드가 역사 속에 등

장한 종교들에 대한 판단기준이다. 전자의 가치를 붙든 종교는 결코 세계적 보편성

을 획득하지 못하고 결국사멸해 갈 것이지만, 후자의 가치를 붙든종교야말로 종교

적 본성을 꽃피웠다고 칭송될것이다.

53) 에비온주의(Ebionism)는 예수가 메시아(Messiah)이기는 하지만 신은 아니라는 주

장이고, 가현설(Docetism)은 예수가 신이었기 때문에 비육체적(incorporeal)이었지

만 육체를 갖고 육체적으로 죽은 것처럼 보였다는 주장이다. 양자론(Adoptionism)

은 예수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다시 말해신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지만) 나중에 신

성을가졌다는 주장이고, 양태론(Modalism)은 성부·성자·성령은한 신의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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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과정철학적 이해는 기독론의 해명이 아니라 (기독론적

믿음을 깨뜨리는) 해독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신성과 인성의

공존>에 관한 철학적 해명의 문제는 해소되었다고 하더라도, 이와는

다른 신앙의 문제, 즉 구세주로 고백되는 예수 그리스도의<독특성>의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과정신학자 존 캅은 신의

화육이란2천 년 전 갈릴리에 살았던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게만 배

타적으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이것이 예수의“독특

성”을 곧장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54) 예수 안에서는“그의 자아(self-

h o o d )가 신의 말씀( L o g o s )으로 구성되는 독특한 화육( d i s t i n c t i v e

incarnation)”이 있었고, 따라서“예수는 그리스도였다(was)”라고 캅은

말한다.55) 분명히 캅의 주장은<완벽한 신성과 완벽한 인성의 연합>을

고백한 칼케돈의 신조를 지지하고 있지만, 그의 과정신학적 주장을 온

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학이 먼저 종교다원주의라는 산을

넘어야 할 것이다.

4. 종말론(eschatology)

기독교 신학의 종말론은 크게 보면 세 가지 물음을 던졌다. 첫째, 종

앙의 기준인 냥 여겨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이 온존하고 있는오늘

날, 기독교는반지성주의로전락할 위험에 놓였다고 해도좋을것이다.

기독론적 해명에서 과정사상이 철학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것은, <기

독론>과 <실체철학>의 제휴를 끊어내는 일에 있다. 기독론이 실체론적

사유로 구성될 때, 신성과 인성의 공존이란 영원히 형이상학적으로 해

명될수 없게된다. 왜냐하면, 실체철학에의하면 자기완결적 독립성을

가진 실체는 다른 실체와 내적으로 연합할 수 없기 때문에, 만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있다면 그것은 서로 이질적인 것

이거나 아니면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으로 밖에 이해될 수 없을 것이

다. 다시 말해, 실체철학은<신성-인성>의 유기체적 연대성(both-and)

의 문제를 해명하지 못하고 양자택일의 선택(either/or)을 요구하기 때

문에, 기독론적 설명에서 (양자론처럼) 신성을 약화시키거나 (가현설처

럼) 인성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신성과 인성이 서로를 대치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인성에 충만하게 임한 신성>, <신성을 담

은 인성> 등과같은 유기체적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과정사상은 우

주 만물의 생명의 전개는 신의 화육(incarnation)으로 가능하고, 신의

화육(즉 신성의 내재)은 피조물의 속성을 제거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고양시키는방식으로 일어난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만물은 신성이 참여

한 성례전(sacrament)이라는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

리스도(만이 아닌 모든 사람)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있다고

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69

른 양태에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앞의 주장은예수의 인성(humanity)을 강조하고 뒤

의 주장은 신성(divinity)을 강조한 것이다. 후자는 전자를 가리켜 예수의 신적 위격

(personhood)을 다른 두 위격과 전혀 다른 것처럼 보고 있으며 따라서 세 가지 다

른 신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삼신론(Tritheism)이라고 비판하였고, 전자

는 후자를 가리켜예수를 신과일치시켰기 때문에성부가 마치예수의 몸을입고대

신 수난을 당한 것처럼 주장한다는점에서 성부수난설(Patripassionism)이라고 비판

하였다.

54) 신의 화육이 배타적으로 오직 한 번 예수에게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

의 특성을“유일성(uniqueness)”에서 찾겠지만, 신의 화육이 보편적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사람은“독특성(distinctiveness)”에서찾을것이다.

5 5 ) John B. Cobb, Jr., Christ in a Pluralistic Age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5), 139, 142, 257. “예수가 그리스도였다(Jesus was Christ)”는 서술은<

그리스도>라는 개념과<로고스, the Logos>라는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는

캅의 독특한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170). 캅에게 그리스도는 로고스가 화육한 형

태(Christ = Logos incarnate)를 의미한다. 캅에 의하면, 이 두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기독교신학은시대착오적오류(anachronism)를 범한것으로본다. 왜냐하

면 로고스는 만물의 생성원리로 신(의 시원적 본성)에 속한 것으로2천년에 존재했

던 예수와동일시 될 수 없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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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도하여, 구원(해방)을 갈구하는 사람들을 기독교적 종말론의 주체에

서 배제하여, 그들을 이 땅에서의(정치-사회적) 해방을 저 세상적(종

교적) 구원으로분리/대체하려는 이데올로기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만드

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기독교 종말론의 왜곡의 뿌리는 실체론에 기초

한 초자연주의적이원론에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과정사상은유기체적 존재론과 범재신론적우주

론으로 종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한다. 과정사상에 의하면, <하

나님 나라>는 (초자연주의적 이신론이 주장하듯) 역사로부터 분리된 공

간이 아니다. 그렇다고(범신론이 말하듯) 역사와 동일한 것도 아니다.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을 역동적 관계성 속에서 파악

한다. 그는“천국이자연세계를초월하듯, 이 세계도 천국을 초월한다…

그 나라는 이 세상 안(in)에 있지만, 이 세상의 것(of)은 아니다”라고

말한다.57) 이러한 사유는 과정사상의 범재신론이 지닌 우주론적 지평에

서 가능한 것이다. 신이 우주적 생명의“이상적 동반자(ideal compan-

ion)”이자 그것을 신적 비전으로 이끄는‘시인’이듯이, 그의 나라는 홀

로 선(good)이 되어세계의 악과 분리된 채로존재하지 않고,“악을 선

으로극복해가는”곳에존재한다.58)

이러한 범재신론적 이해는 영원이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

고, 영원을 시간의“깊이(depth)”로 이해하는 것에 있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세계의“완벽한 실현”이란 단순히 영원의 도래, 즉“초시간적인

(timeless) 것의 예증”이 아니라,“그 본질에 있어서 일시적인 것 위에

초시간성을 심는”것이다. 따라서“완전한 순간이란 시간의 경과속에서

사라지지않고…시간은‘영원의 움직이는 이미지’가 된다.”59) 전통신학

말론(또는 종말신앙)이 발생한 삶의 자리에 대한 질문으로, 누구로부터

종말신앙이 요청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영민한 신학은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종말, eschaton>

을 원했다고 답할 것이다.56) 둘째, 종말신앙을 가졌던 사람이 원했던 종

말이란 어떤성격의 종말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세상자체의 종말>

보다삶을질곡으로빠뜨리는<악의종말>일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기

독교의 종말신앙이 증언하고자 하는 목표가 역사적 실존의 참혹 속에

서도<희망을 가능케 하는 힘> 또는<사랑(혹은 투쟁)의 삶을 살아갈

근거>를 밝히는 것이란 이해를 낳는다. 그리고 종말론이 신학적 체계

를 더해 가면서 두 번째 질문의 철학적 차원을 밝히는 문제, 즉 <종말

과 우주적 시간/공간의 관계>에 관한마지막 질문으로옮아갔다.

그러나 전통신학이 실체론에 빠져 초자연주의적 이원론을 세계관으

로 채택하였을 때, 이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기 위해 <시간과

영원>을 분리하고 <역사와 하나님 나라>를 분리하는 편리한 선택을

하곤 하였다. 그래서 역사적 시간의 끝이 신의 영원한 세계의 시작이

요, 역사적 공간의 파멸이 신의 공간(나라)의 시작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형이상학적 엄밀성을 갖고 보자면, 이러한 이해는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신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전통신학은 자신의 실체론적 전제에 갇혀 시간과 영원을,

세계와 신을, 유한과 무한을, 몸과 영혼을, 역사와 하나님 나라를, 속과

성을 분리함으로써 신께 영광을 돌리는 종교성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

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만이

아니라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해명까지도 왜곡시켜, 종말의 성격이<악

의 종말>이 아닌<세계의 종말>로 이해하게 하고 결국 기독교 종말론

의 본질을 흩트리고 말았다. 더 나아가 첫 번째 질문에 관한 답변까지

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71

56) 이 주장은 실로 타당한 것으로, 성서의 많은 본문들의 지지를 얻을 것이다. 예) 악한

현실을 탄식하며“새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던 사람(사 65:17; 66:22; 계 21:21). 가

난한자, 포로된자, 눈먼자, 눌린자(예수의 취임설교, 눅 4:18).

57) Whitehead, 『형성과정에있는종교』, 88/94.

58) 앞의책. 155/155. 예수는 하나님의나라가 겨자씨처럼“자란다”라고 하고“우리안에

있다”라고도 하면서, 동시에 우리가“들어가야 할”나라 라고도 말하였다. 이러한 이

해는과정사상의범재신론과의미하는바가다르지않다.

59) Whitehead, 『과정과 실재』, 338/639.

Page 3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체적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은 이러한 예측이

기우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주고있다.

어떻게 오늘날 교회가 맞고 있는 심각한 (신학적) 위기를 돌파할 것

인가? 이 과제에 깨어 있는 많은 시도들 가운데, 과정신학은 신학적 사

유의 기저에 위치한 세계관의 개조에서 찾는다. 그것은 전통신학 방법

론의 변경을 뜻하지만, 이와 동시에 신학적 사유 자체를 아예 담아낼

수 없는구조와 특성을 가진현대의 과학정신에대한비판이기도하다.

이 글은 거시적 안목으로 과정신학의 핵심구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 설득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식적 세계관으로통용되는 실체론적

사유방식이 얼마만큼 걷혀질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것이 실체론과

제휴한 신학적 사고의 내적 딜레마를 다룬 이 글의 목적이기도 하고

한계상황이기도하다.

주제어

범재신론, 실체철학, 과정신학, 우주론

Panentheism, Substance Philosophy, Process Theology, Cosmology

접 수 일 2010년 6월 12일

심사 (수정일) 2010년 8월 5일

게재 확정일 2010년 8월 15일

의 시간 이해에서 신의 종말론적 도래( a d v e n t )는 시간의 파국( t e r-

mination)을 의미하지만, 과정사상에서 신의 도래는 시간 속에서 세계

를 구원하기 위해활동하는 신의“모험(adventure)”으로이해된다.60) 그

모험의 목적은“조화가운데 조화”, 즉 평화를 이루어내는것이다. 분명

히 이 세계는 선과 악이 혼재된 지극히 모호한(ambiguous) 곳이다. 그

러나 신의“항존하는 힘주심(the ever-present empowerment)”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인 평화(shalom)는 이 세계 속에서 이루어져 간

다.61)

VI. 결론

이 글은 기독교 전통신학이 지닌 근본문제를 실체철학과의 연합에

서 발견하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과정사상의 유기체

철학을 통한 신학적 사유의 재구성에 있음을 말하였다. 이러한 재구성

의 필요성은 기독교 신학이 시대의 합리적 정신과 소통하는 힘을 잃어

가고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서양의 사상사를 통해볼 때 실체론

에 기초한 기독교의 전통신학은19세기 중후반 무신론의 등장에 의해

그 합리적 위상을 상실한 것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서의

가르침과 예수의 삶에 대한 기억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요소가 시

대정신과 소통하지 못하고, 믿음에로의 귀의라는 미명하에 반지성주의

와 결탁한다면, 그것은 신학의 무능함에 그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의 총

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73

60) Roland Faber, “God’s Advent/ure: The End of Evil and the Origin of Time,” in

World without End: Christian Eschatology from a Process Perspective, ed. by

Joseph A. Bracken, S.J.(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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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75

Page 3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 Response of Process Theology to theInternal Dilemma of Traditional ChristianIdeas: the Collapse of Substance Philosophyand the Necessary Arising of Panentheism

Hi-heon Kim

Lecturer, Department of Theology

Hanshin University

Osan, Korea

This paper suggests that process panentheism can be a cosmo-

logical solution for the internal dilemma of traditional Christian

theology which stems from its adoption of substance philosophy. The

dilemma, which was systematically internalized in Christian thoughts

by Thomas Aquinas and fixed by Calvin and Leibniz, engenders so

many theological problems in explaining important Christian doc-

trines such as the cosmological relation of God and the world, the

Christological understanding of the divinity-humanity relationship in

Jesus Christ, the eschatological interaction of the secular history and

the divine salvific history, the responsibility for evils in the world,

and etc. This paper proposes that such theological problems neces-

sarily arise when theological ideas are formulated with the philo-

sophical base of substantialism in which traditional Christian theo-

logies were deeply engaged, and that the philosophical engagement of

Christian theology with substantialism results in supernaturalistic

cosmological dualism because of which Christian theology fails to

dialogue with the modern scientific worldview.

1952.

Whitehead, Alfred North.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오영환 옮김.『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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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희헌, 기독교 신학의 내적딜레마에 대한과정사상의응답 77

Page 4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몰트만의창조이해에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신옥수(장로회신학대학교조교수)

I. 서론

현금의 신학의 주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의 행동(kenotic action)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이러

한 케노시스(kenosis)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강조되었으며, 19

세기 루터교 신학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케노시스 기독론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창조의 사건뿐만 아니라 성령의 활동

속에서도하나님의케노시스를발견하고이를주장하는경향을 지닌다.

특히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은“신학에 대한 조직적인 기여”

(Systematic contributions to Theology)를 위한 기획으로 출간된 여러

저서에서 자신의 신학적 착상을 전개하는 바,『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

라』,『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생명의 영』,『예수 그리스도의 길』,『오

시는 하나님』등에서 케노시스 사상을 일관되게 펼치고 있다.1) 본 논문

Instead of the philosophical adoption of substance philosophy, this

paper argues, Christian theology needs to employ process thoughts,

especially its cosmological framework-panentheism, which point

out “the solidarity of the universe.” This paper finally examines how

Christian theology can differently and consistently explain its

doctrines of cosmology, Christology, eschatology, and theodicy when

it formulates the doctrines on the philosophical basis of process

panentheism.

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79-109

1 ) J.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of God: The Doctrine of God, t r a n s .

Margaret Kohl (San Francisco: Harper Collins, 1981), 이하TK; God in Creation: A

Page 4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장한다. 아이삭 루리아(Isaac Luria)의 표현에 따르면, 침춤은“집중과

수축(contraction)을 의미하며 자기 자신 안으로 물러서는 것을 뜻한

다.”3) 몰트만에 의하면, 루리아는 이 개념을 하나님과 창조에 적용한다:

“하나님이 자신으로부터 자신에게로 물러서는 곳에서 그는 신적인 본

질이나 신적인 존재가 아닌 어떤 것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4) 달리 표

현하면, 창조자 하나님은세계의‘부동의 동자’(the unmoved Mover)가

아니다. 오히려 안팎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운동이 창조를 위한공간을

만든다. 몰트만은 주장하기를“창조는 하나님 편에서의 이러한 자기 운

동, 즉 창조에게 그 자신의 존재를 위한 공간을 허락하는 운동에 의해

서 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자신 안으로 물러

선다.”5) 따라서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기 제한은 하나님의 은혜

의 첫 번째 행동이다.6) 이를 통하여 유한한 세계가 하나님과 공존할 수

있게된 것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자기 제한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선

행 조건이다. 창조에 앞선 하나님의 자기 결단(self-determination)의

사고를 긍정하면서 몰트만은 하나님의 본래적인 자기 제한에 관한 사

고를주장한다. 그에따르면, 하나님은그의창조를 위한공간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편재성(omnipresence)을 제한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

물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자신의 영원성(eternity)을 제약하신다. 하나

님은 그의 피조물에게 자유를 허락하기 위해 자신의 전지성( o m n i-

science)을 제한하신다.7) 그 결과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은 몰트만의 사상속에나타난‘하나님의 케노시스’에 대하여 분석하되

특히 창조와 관련하여다루며, 이에대한 현금신학자들의 논의를 중심

으로 비판적 대화를 수행하고자 한다. 이를 토대로 하여 몰트만의‘하

나님의 케노시스‘에 대한 사고의 신학적 의미와 영향 및 한계 등을 성

찰해봄으로써하나님의창조이해에 대한전망을 제시하려한다.

I I. 몰트만의창조이해에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1. 하나님의자기비움의창조

몰트만의 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자

기 제한(self-limitation)에 관한 그의 사고이다. 유대교 카발라 신학의

침춤(zimzum) 개념을 차용함으로써2) 몰트만은 창조의 행동에서하나님

의 자기 축소(self-withdrawal) 또는 자기 제약(self-restriction)을 주

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81

New Theology of Creation and the Spirit of God, trans. M. Kohl (London: SCM

Press, 1985), 이하GC; The Way of Jesus Christ: Christology in Messianic Dimen-

sion, trans. M. Kohl (New York: Harper Collins, 1990), 이하WJC; History and the

Triune God: Contributions to Trinitarian Theology, trans. John Bowden (New

York: Crossroad, 1992), 이하 HTG; The Spirit of Life: A Universal Affirmation,

trans. M. Kohl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2), 이하 SL; The Coming of God:

Christian Eschatology, trans. M. Kohl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6), 이하

CoG; Experiences in Theology: The Ways and Forms of Christian Theology, trans.

M. Kohl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0), 이하 ET. 이외에도 최근에『과학과 지

혜』에서 특히 케노시스 사상을 강조한다. J. Moltmann, Science and Wisdom, trans.

M. Kohl (London, SCM Press, 2003), 이하 SW.

2) G. Scholem, “Schoepfung aus Nichts und Selstverschraenkung Gottes,” in Eranos

Jahrbuch 25(1956), 87-119, GC, 334, n. 25에서 재인용. 카발라 신학에 의하면, 그의

빛이 본래 무한한 우주를 채우고 있었던 무한하신 거룩한 분, 단 한 분은 그의 빛을

거두어들이고,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실체에 집중시킨다. 이를통하여빈 공간이 생겨

난다. SW, 62.

3) GC, 87.

4) G. Scholem, “Schoepfung aus Nichts,” 117.

5) GC, 87; WJC, 328f; CoG, 282, 297을 참고하라.

6) SW, 62.

7) C o G, 282; T K, 109f; W J C, 328f; C o G, 297; J. Moltmann, “God’s Kenosis in

Creation and Consummation of the World,” in The Work of Love: Creation as

Kenosis, ed. John Polkinghorn (Grand Rapids, MI/Cambridge, U. K: Wm. B.

Eerdmans, 2001), 149를 참고하라.

Page 4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몰트만의 사고에서 하나님의 편재와 전능성의 본래적인 자기 제한

은 하나님의 자유로 말미암은 창조적인 결단에 근거한다.12) 그는“하나

님이 자신밖으로부터 창조적으로 나오기 전에 그는자신을 위하여 결

단하고 자신에게 위탁하며 자신을 결정하면서 자신에 대해 내적으로

행동한다.”13) 더 나아가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제한은 하나님의 본질적

인 본성과 부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몰트만에 의하면“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신성과 모순 없이 조화될 수 있는 그의 창조에 선행하는 하

나님자신에의한자기제한의 가설인 것이다.”14)

타자의 실존을 위한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론적 수축으로 말미암아

무한한 하나님은 창조에 있어서“자신 안에 앞서서 미리 유한을 위한

공간을 만드셔야만 했다”15)고 몰트만은 믿는다. 여기서 무로부터의 창

조(creatio ex nihilo)를 설명하기 위해 몰트만은 무(nihil)에 대한 수정

된 이해를 제공한다. 루리아의 견해를 좇아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인용

한다.

그의 최초의 행동 안에서 밖을 향해 행동하는 대신에 안으로 향하는

신적인 존재의자기제한 속에서무(Nothingness)가 들어선다.16)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무한하고 편재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러한

자기 제한을 통해 무가 존재하게 된다.17) 태초의 창조 안에서 하나님은

비존재(nonbeing)의 본래적인 요소를 허용하기 위해 특정한 공간으로

부터 자신이 스스로 물러선다. 따라서 몰트만에게 이러한 자기 비움의

사고는“형태도 없고 공허한”창조 이전의 존재에 대한 창세기1장과2

장의성서적인 묘사와 부합되는것처럼 보인다.

세계안에거하신다(God is in the world and the world is in God).8)

이런 맥락에서 몰트만은 제2행동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창조적인

활동”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한 제1행동으로서의 하나님의 자기 제

한의수동적인활동을 묘사한다.9) 그는다음과 같이말한다.

무한한 존재의 진정한 최초의 행동은 따라서‘밖을 향한’발걸음이 아

니라‘안을 향한’발걸음이다. 이는 곧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

이 주장했듯이‘자신으로부터 나와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자

기 제한’이다; 즉 그것은 신의 수동적 행위(passio Dei)이지 신의 능동

적 행위(actio Dei)가 아니다.…하나님이 창조자로서의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그가 이전에 제1행동에서 양도했던 본래의 공간 속으로 나오

는 것은오직 제2행동에서이다.10)

여기서 몰트만은 세계창조의 과정속에서 하나님의‘밖을향한’행

동과‘안을 향한’행동사이를 명백히 구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에 따르면, 창조에서 하나님의 안과밖을 향한측면은 서로에게서구별

되지만 서로에게 상응한다. 그는“밖을 향한 모든 행동은‘밖을 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안을 향한 행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안팎을 향하여 동시적으로 창조한다”11)고 말한다. 몰트만의

견해에 따르면, 창조는 능동성이 아니라 수동성, 즉 신적인 자기 제한

또는 고난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세계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안을 향

한 운동으로부터 나오는데, 이는 곧 창조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한

자기제한의 고난인 것이다.

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83

8) 이러한 몰트만의 만유재신론적 사고는 그의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가 된

다. 그의 기독교적 만유재신론은 삼위일체론적·자발적·종말론적특성을 지닌다. 신

옥수, “몰트만신학에 있어서의만유재신론적인비전,”「조직신학논총」8 (2003).

9) TK, 110.

10) TK, 109f; CoG, 282를 참고하라.

11) TK, 100.

12) CoG, 297.

13) GC, 86.

14) 앞의책.

15) 앞의책.

16) G. Scholem, “Schoepfung aus Nichts,” 118; GC, 87을 참고하라.

Page 4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몰트만의 사고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내적인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겸비의 선행적인 신적행동이라는사실이 핵심적이다.

그에 따르면“하나님은창조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으로부터나

와 자신에게이르도록 자신을 제약한다. 그의밖을 향한창조적인 활동

은 이렇게 겸비한 신적인 자기 제한에 의해 선행된 것”22)이다. 더 나아

가 몰트만은 태초의 창조 속에서 빌립보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마음

과 병행되는어떤점을발견한다.

하나님의 자기 겸비는 단지 창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그것

은 그 이전에 시작되며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선제 조건이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랑은 자신의 겸허한 자기 겸비적인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자기 제한적인 사랑은 빌립보서2장이 메시아의 신적인 비밀로

이해한 하나님의자기 비움의 시작인 것이다. 실로하늘과 땅을 창조하

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충만한 전능을 비우시며 창조자로서 종의

모습을 취하신다.23)

몰트만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선행적인 자기 제한은 자신의 창조를

위해 하나님이 공간을 만드심, 육체를 입으심과 십자가 및 부활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자기 겸비의 행동, 그리고 구속과 새 창조에 있어서

의 성령의 자기 낮추심의 내주를 포함하는 일련의 신적인 자기 제약에

로 인도한다.24)

그렇다면 몰트만에게 하나님의 케노시스의 동기는 무엇인가? 이는

곧 사랑으로 말미암은 자유이다. 창조를 존재론적인 신적 필연성으로

보는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과는 달리 몰트만은 창조를 자유와 사랑

가운데 있는하나님의 자기결정의 행동으로이해한다. 다시말하면, 이

러한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창조적인 활동은 신적인 자기결정과 다른

여기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동 안에 들어 있는 내재적 요소로서의

“되어짐”(letting be)에 대한 몰트만의 묘사가 성서적 주장에 부합된다

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이것을 하나님의 창조의 여성적인행동

이라고 지칭한다.

하나님이 그의 세계를 되게 하고 그 안에 있도록 세계를 창조하신다:

그대로되어라!18)

더 나아가“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적인 관계성은 매우 광범위

하여그 안에서 세계전체가 공간과 시간및 자유를발견할수 있다.”19)

이런의미에서 몰트만은“이 교리[zimzum]의 기본적인사고는 범신

론으로 희생당하지 않고도 하나님 안에 있는 세계를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안겨 준다”20)고 생각한다. 달리 표현하면, 침춤의 사고

에 의해 몰트만은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인 구별과 분리를 보

전할수 있도록 시도한다는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토대로 몰트만은 자기 비움의 사고가 전통적인 창조

론에있어서 필수적인교정을 지향한다고믿는다.

하나님은 단지 어떤것을 생겨나게함으로써, 또는 어떤 것을계획함으

로써 창조하지 않는다. 좀 더 심오한 의미에서 그는 되게 함으로써, 공

간을 만듦으로써, 그리고 자신을 제한함으로써‘창조하신다.’창조적인

만듦(making)은 남성적인 은유들로 표현된다. 그러나 창조적인 되어짐

(letting-be)은 모성적인범주를 통해좀 더 잘 드러난다.21)

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85

17) GC, 86f; TK, 109를 참고하라.

18) TK, 109.

19) 앞의책.

20) TK, 110; GC, 86ff를 참고하라.

21) GC, 88.

22) 앞의책.

23) 앞의책; GC, 5; CoG, 303f를 참고하라.

24) ET, 316.

Page 4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플라톤에 의해 지대하게 영향을 받음으로써 하나님 안에 있는 무시

간성을 긍정하는 고전적 유신론과는 달리, 몰트만은 자기 비움의 사고

와 관련하여 시간과 영원의 개념을 재해석한다. 그는“세계는 시간 속

에서 창조되었는가 아니면 시간이 세계와 함께 창조되었는가?”29)라고

묻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좇아 몰트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시

간성의 개념으로부터시작한다. 그는다음과 같이진술한다.

따라서 시간을 가능하도록 창조했고 시간을 위해 공간을 만들었던 것

은 오로지 영원의 자기 변화라는 가정으로부터 착수해야 한다.…그의

본질적인 결단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를 위해 시간을 취하시고

자신의 창조에게 그 자신의 특수한 시간을 허용하기 위해 자신의 영원

을 자신 속으로제한하셨다.30)

몰트만은 창조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태초의 창조(creatio

o r i g i n a l i s),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 그리고 새 창조(c r e a t i o

nova).31) 무로부터의 창조의 교리를 반대하는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과

는 달리, 몰트만은 창조에있어서 신적인 주도권을보전하기 원한다. 그

에 의하면 최초의 창조는‘어떤 선제 조건’이나‘어떤 원초적인 물질

없는’창조를 뜻한다.32) 오히려 몰트만은 이 세계의 창조가 우연적인

(contingent) 것이라고 믿는다.33) 그는 주장하기를“이 세계가 하나님에

것이 아니라고 몰트만은 믿고 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자기 결정과

자기 제한이 동일한 것이다”25)라고 말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두 개념은

영원 속에서 하나님 편에서의 자기 변화(self-alteration)를 전제하고

있다. 창조이전에 하나님의 자기 결정은 하나님의 자기 제한을 지향한

다. 달리 표현하면, 자기결정의 목적은 자기제한이다.26) 몰트만의신학

에서 이러한 두 개념은 대립되거나 모순적이지 않으며 신학적인 동전

의 동일한 양면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창조적인활동

은 근본적으로자발적(voluntary)이며자기겸비적(kenotic)이다.

2. 하나님의시간성

몰트만에게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역사를 갖는다. 그에따르면, 자기

결정과 자기 제한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 속에서 세계에게 시

간을, 자신의 무한성 속에서 유한성을, 자신의 편재성 속에서 공간을,

그리고 자신의 비이기적인 사랑 속에서 자유를 세계에게 주심으로써

“자신 안에서 세계를 창조했다.”27) 이러한 맥락에서“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그

는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대답한다:“세계 창조 이전에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에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그것의 창조자가 되기로 결단하셨

다.”또한 그는 주장하기를“하나님의 본질적인 영원성과 창조의 시간

사이에는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창조하겠다는그의 결단을 통해

지정된 시간-이놓여있다.”28)

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87

25) CoG, 282; SW, 61.

26) TK, 111. 그리고CoG, 299를 참고하라. 몰트만에게 태초의창조에 있어서의자기 제

한을위한자기결정의최종적인목적은 종말론적창조안에있는 하나님의자기탈

제약(self-delimitation)이 될 것이다.

27) TK, 109.

28) GC, 114.

29) CoG, 282; CoG, 264를 참고하라.

30) GC, 114; WJC, 328f; CoG, 297을 참고하라.

31) GC, 55. 달리 표현하면, 창조는 태초의 창조, 역사적 창조, 그리고 완성된 또는 종말

론적 창조의 용어들로 표현될 수 있다. 몰트만은 진술하기를“우리는 태초의 창조를

그 어떠한 선행 조건이 없는 신적 창조로 볼 수 있다: 무로부터의 창조; 그 반면에

역사 속의 창조는 재해를 극복하는 구원의 수고가 따르는 창조이다. 영광의 왕국의

종말론적 창조는 최종적으로 죄와 죽음을 극복하는 것, 즉 무를 무화하는 것으로부

터 계속된다”(앞의책, 90)고 한다.

32) GC, 74, 207.

33) 판넨버그또한말하기를“전체세계가 하나님의창조라면그것은 그 실존이완전하

Page 4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에 따르면“심지어 창조는 시작에 있어서도 이미 구원의 역사를 넘어

영광의 나라에서의 그 자신의 완전한 완성을 지향한다.”38) 그러나 전통

적인 창조에 대한 이해와 달리, 몰트만은 창조의 목적이“에덴동산의

본래적인 조건에로의 회귀가 아니라”,“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라고 천

명한다.39) 그래서 그에 따르면“만일 창조의 과정이 하나님의 내주를

통해 완성된다면, 신적인 가능성의 무제한적인 충만이 새 창조에 거한

다.”40)

한 걸음 더 나아가 몰트만은 새 창조를 모든 것들의 새로운 창조의

완성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영광의나라에서는 시

간과역사, 미래와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며, 이것들이전혀방해를 받지

않는 정도로 그리고 더 이상 대립이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될 것”41)

이라는사실이다. 그러므로몰트만은다음과 같이강력하게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무시간적인 영원성 대신에 영원한 시간에 대해 좀더 잘

말하게 될 것이며 역사의 종말 대신에 선-역사의 종말과 하나님과 인

간 및 자연의영원한역사의 시작을말하게 될 것이다.42)

종말에 하나님의시간성이 여전히 남아 있게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

로 몰트만은 영원에 대한 무시간적 개념과 종말에 이루어질 새 창조에

서의 시간의 부재에 대해 반대한다. 결국 새 창조에서는“일시적인 것

이 없는 변화, 과거가 없는 시간, 그리고 죽음이 없는생명”43)이 존재하

게 될 것이다. 요약하면, 몰트만의사고에서하나님의영원은 자신의 자

발적인 자기 비우심의 행동을 통해서 시간을 포함하며 시간적인 실재

의해 창조되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연적인것이다.”34)

몰트만에게 있어 창조는“자신 안에 닫힌 것이 아니라”,“역사를 향

해 열려진 것이며”따라서“개방된 체계”(open system)로 이해되어야

한다.35) 이런 의미에서 그는 계속적인 창조를 진화 이론에 비추어 변화

와 발전 그리고 불완전한 과정에 종속된 비결정적인 의사소통의 체계

(a non-deterministic communicative system)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계속적인 창조에 대한 상세한 교리는 하나님의 역사적 활동을

다음과 같은측면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그가창조하신세계에 대한보

전, 그것의 완성과 완전을 위한준비. 하나님의역사적인활동은 최초의

창조와 새 창조사이에 놓여있다”36)고 진술한다.

몰트만의 견해로 창조는“미래를 향한 방향에 맞추어져 있다.”37) 그

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89

게 그리고 전적으로 우연적임을 의미한다. 결코 다른 세계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

다”라고 한다. W. Pannenberg, “Theology and Science,” Princeton Seminary

Bulletin 13, no. 3 (1992), 301; 또한 그는“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세계의 기원은

여전히 우연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삼위일체적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유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W. Pannenberg,

Systematic Theology I I, trans. G. W. Bromiley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1994), 9.

34) GC, 38.

35) GC, 207; FC, 126을 참고하라. 몰트만의“열린 체계로서의 창조”의 이해는 근대 과

학의 발견들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따르면, 물질과 생명의 복잡하고 복합

적이며 진화론적인 체계들은 시간에 대해 증대하는 개방성과 가능성들의 풍성함을

보여 주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그에게 창조는 비결정적인 의사소통 체

계이다. J. Moltmann, “Reflections of Chaos and God’s Interaction with the World

from a Trinitarian Perspective,” in Chaos and Complexity: Scientific Perspectives

on Divine Action, ed. R. J. Russel, N. Murphy and A. R. Peacocke 2nd ed.

(Vatican City State/Berkeley: Vatican City Observatory Publications; The Center

for Theology and the Natural Sciences, 2000), 209-10.

36) GC, 209.

37) GC, 207; FC, 126을 참고하라.

38) GC, 56; FC, 216을 참고하라.

39) 앞의책.

40) FC, 126.

41) GC, 213; FC, 126을 참고하라.

42) FC, 126; GC, 213을 참고하라.

43) 앞의책.

Page 4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나님의 공간적 현존을 말한다. 하나님의 공간성에 대한 사고는 하나

님과 그의 창조와의 관계에 대한 몰트만의 자발적인 자기 비우심에 대

한 이해에 상당히 의존되어 있음에 유의해야한다.

몰트만에 의하면“하나님은 자신의 현존을 제약하심으로써 그의 창

조를 위해 공간을 만드신다.”49) 유대교 카발라 신학의 침춤 개념을 받

아들임으로써 그는 하나님과 창조 안에 있는 공간을 말한다. 몰트만은

“하나님 밖에 있는 세계의 실존은 하나님의 침입에 의해 가능해진다.

이것은 자신으로부터 나오시는 하나님이 그 속으로 들어올 수 있으며

그 안에서그가자신을 계시할 수 있는어떤‘신비한본래적인 공간’을

석방하는것”50)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본질적인 편재의 자기 제한을 통해 창조

안에서의 하나님의 특수한 현존이 생겨난다. 카발라 신학의 이해에 의

하면, 자기 수축을 통해 하나님은‘비우셨고’(vacated) ‘빈공간’(empty

space)을 창조하셨다.51) 그러나 여기서 몰트만은 카발라 신학의 견해와

자신의 자기 비우심의 창조의 견해를 구별한다. 그에 따르면“삼위일체

하나님이 자기 밖에서 창조를‘거기에’있도록 허용하기 위해 자신의

편재를 제한할 때 그는 카발라 신학의 침춤 교리가 제안하듯이 진공

하에 두지 않는다.”52) 따라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내적인 제한을 통

해 그 안에서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용기’(vessel) 또는‘장소’(place)

로서의 공간을 말한다. 몰트만은 생태학적인 범주로 공간을 말한다. 그

에 참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과 창조의 시간성을 만드는‘하나님의

시간적인영원’(God’s temporal eternity)을 말할수 있다.44)

3. 하나님의공간성

그의 창조론에서 몰트만은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몇 가지

성찰을 제안하고 있다:“그의 창조적인 사랑 속에서 그 자신의 무한한

생명 속에서 창조의 공간과 시간 및 자유를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

의 타자인 창조와 연합하신다.”45)『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몰트만

은‘카이로스적인 시간의 개념’에 상응하여‘생태학적인 공간의 개념’

을 발전시킨다. 그에 따르면 마치‘모든것이 자신의 시간을 갖고있듯

이’,“모든 것은 자신의 공간을 가지며 모든살아 있는 것은 자신의 삶

의 공간을 갖는다.”46)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동

종의 것이아니라는 것이다. 몰트만의관점에서시간과 공간은 각각그

들 안에서 일어난 것에 의해 창조되고 결정된다. 따라서 그는“사건이

없는 공허한 시간이나 대상이 없는 공허한 공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다”47)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은 공간적인 용어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몰트만은『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이후로 그의 주된 신학적 관심이 하

나님의 시간성으로부터 하나님의 공간성에로 옮겨졌다고 스스로 기술

하고 있다.48) 그는 성서와 유대교 전통 및 여러 과학적 지식에 근거한

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91

44) W. Stoeger, S. J., “God and Time: The Action and Life of the Triune God in the

World,” Theology Today 55, no 3 (October 1998), 366. 슈퇴거(W. Stöger)에 따르

면, 이러한 방향성을 지닌 현대 신학자들은K. Barth, C. Welch, K. Rahner, J.

Moltmann, W. Pannenberg, R. Jenson, C. LaCugna, C. Gunton, T. Peters와 D .

Lason 등을들 수 있다.

45) TK, 114.

46) CoG, 299.

47) GC, 145.

48) CoG, 299. 다른 곳에서 몰트만은 진술하기를“생태학적 창조론과 사회적 삼위일체

론에대한나의저서이후로 나는그 방향성이시간을향해일방적이었던 나의신학

적 세계를 확장하고자 노력했다. 이제 나는 그것을 공간과‘집’, 쉐키나와 페리코레

시스, 상호 내주와 상호간 안식의 도래 등의 개념을 통해 확대하려고 시도한다”(ET,

314).

49) GC, 87.

50) 앞의 책.

51) G. Scholem, “Schopfung aus Nichts,” 87-119.

52) CoG, 298.

Page 4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러나 종말에 이르러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창조 안에 거하

시고 그 안에서‘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기 위해 자신을 탈제약하신

다. 따라서 창조가 하나님의 영원한 쉐키나를 위한 성전이 될 때 창조

의 본래적인 시간과 공간은 끝나게 된다: 시간적인 창조는 영원한 창조

로 변화되고 공간적인 창조는 편재적인 창조로 변화될 것이다. 그러므

로 모든피조물은 하나님의 영원과 편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57) 이것

은 전적으로 그의 자기 결정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탈제약의 행동에 기

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몰트만의 자발적인 자기 비우심의 사

고는 창조와 종말론의 주장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지속적으로 지배적

인 것처럼 간주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공간성에 대한 몰트만의 개념은 범신론적으로

가 아니라 만유재신론적으로이해될 수 있다. 그는 유한한 세계를 하나

님의 무한성과 결합하려는 경향을 지닌 모든 종류의 범신론을 거절한

다. 그의창조론에서몰트만은 하나님의 시간성과공간성을긍정한다.

I I I. 몰트만의창조 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에

대한비판적대화

케노시스 개념은 몰트만의 신학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열쇠이다. 몰

트만에게 하나님에 의한 세계 창조는 자기 제약의 사고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자신‘밖으로’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 무한하신

하나님은 그 이전에 자신 안에 유한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58) 몰트

만은 자신의 케노시스 개념을 탐구하기 위하여 카발라 신학의 침춤이

라는 주장을 사용하고 있지만, 동시에 매우 사려 깊게 카발라 신학의

주장을 선택적으로 사용한다.59) 그는 기독교와 유대교 사상에 들어 있

는 아래와 같이주장한다.

‘창조의 공간’은 하나님 안에 있는 그의 살아 있는 공간이다. 자신을

제한하고 그의 창조에 공간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을 그가 창조

한 사람들의 살아 있는 공간으로 만드신다. 그 공간은 그의 제한으로

인해‘빈 공간’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창조를 수용하는 하나님

을 통해 제한되고 구성된다. 창조자는 거주될 수 있는 하나님이 되신

다. 세계의 살아 있는 공간으로서의 하나님은 플라톤이 이미 진술했듯

이, 여성적인은유인 것이다.53)

몰트만에 따르면, 공간의 생태학적인 개념은 살아 있는 것들의 환경

을 포함한다:“모든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살아 있는 공간을 가지며

그 안에서 발전한다.”54)

몰트만의 견해로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세계를 위한 살아 있는 공간

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것들은 신적인 현존 안에있으며 하나님은

공간 안에 현존하신다. 몰트만은 진술하기를“만일하나님이 그의편재

를 통해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모든것을 파악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피조되지 않은 편재가 공간의 편재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전

제하는 것이다.”55) 여기서 만일 공간이 하나님의 공간이라면 세계는 그

의‘밖’에 있지 않고‘안에’있는 것이다. 몰트만의 관점에서 비록 창조

의 공간이 하나님의 편재의 차원으로 이해될지라도 범신론적인결론은

불가능하다. 그는 하나님이 세계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

한 맥락에서 몰트만은“창조의 신적인 비밀은 쉐키나요 하나님의 내주

이다; 그리고 쉐키나의 목적은 전체의 창조를 하나님의 집으로 만드는

것이다”56)라고선언한다.

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93

53) CoG, 299.

54) CoG, 300.

55) GC, 155.

56) GC, x i v-x v.

57) CoG, 294; CoG, 280을 참고하라.

58) GC, 86.

Page 4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자신을 피조된 세계와 구분함으로써 하나님은 신적인 것이 아니며 무

또한 아닌실재를 창조하시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심으로써그

것을 보전하신다.…만일 하나님이 그의 참된 본질에 있어서 무한하시

다면그 어떤 제한이나 경계는 그의 자기제한을 통해서만 존재한다”64)

고 말한다. 침춤의 사고를 통해 몰트만은 하나님과 세계사이의 존재론

적 구별이나 분리를 보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디안 드루몽

(Dean-Drummond)에 의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 제한과 자기 구

별의 사고는 몰트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통적인 주권(sovereignty)

개념이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에서 여성적이며 그 방향에 있어서 생태

학적인 방식으로설명하도록 한다는 것이다.65)

몰트만의 사고는 에밀 브룬너(E. Brunner)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그는 창조의 사건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기 비하의 첫번째 행동이 발견

되었으며, 이것이 그리스도의십자가 사건에서정점에 이른다고주장한

다. 브룬너는다음과 같이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존재의 공간을 홀로 차지하려고 하지 않으며,

다른 존재에게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행함으로써 그

는 자기 자신을 제한한다.…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의 정점에 도달

하는 케노시스는이미세계 창조와함께시작한다.66)

그러나 알랜 토랜스(Alan Torrance)는 창조론에 대한 몰트만의 독

특한만유재신론적해석을 비판한다. 알랜토랜스에게 창조는 무조건적

인 것으로‘하나님 편에서의 전적으로 자유롭고 주권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67) 그는 몰트만의 창조에 대한 케노시스적 견해가 유출설과 범

는 케노시스에 대한 사고를 진술한다: 17세기부터19세기에 이르는 루

터교 신학자들은 빌립보서2장 1절-11절을 성육신에 대한 그들의 사

상에 적용했다. 20세기에 이르러 한스 우르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asar)는 케노시스를 삼위일체론 안에서 해석했다. 유대교 사상은

쉐키나(Shekinah), 즉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내

주에집중했다.60)

몰트만은 창조를 하나님의 자기 제한 또는 자기 제약의 행동으로

말하고 있다:“하나님은자신의 현존을 제약함으로써그의창조를 위한

공간을 만드신다.”61) 또한 그는 덧붙이기를“만일 밖을 향한 창조가 하

나님 자신에 의해자유롭게 된 공간속에생겨난다면, 이러한 경우에는

하나님 바깥의 실재가 자기 자신 안에서 그‘밖을 향한’것을 양도한

하나님 안에 여전히 남아 있다”62)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하

나님은 자신의 현존과 영원 그리고 능력을 제한하심으로써 창조의 시

공 및 자유를 창조하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몰트만은 하나님 안에있는

시간성과 공간성을 긍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하나님의 최초의

자기제약으로부터그의종말론적인 탈제약에로의운동”63)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몰트만은 하나님의 자기 결정의 사고와 자기 제약의

개념을 결합한다.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적 결단은 창조에 대한 신적인

행동에 연관된 케노시스의 내적인 동기이다. 몰트만은“창조자로서의

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 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95

59) C. Deane-Drummond, Ecology in Juergen Moltmann’s Theology, Texts and

Studies in Religion, vol. 75 (Lewiston/Queenston/Lampeter: The Edwin Mellen

Press, 1997), 203.

60) J. Moltmann, “God’s Kenosis,” 138-44. SW, 55-60.

61) GC, 87.

62) GC, 88-89.

63) GC, 89. 자기 비우심의 창조의 사고를 설명하면서 또한 몰트만은 성육신과 십자가

와 부활의 자기비우심의사고를 확장한다. 그는“그가죽으셨던 죽음의지점에 이르

기까지 성자의 자기 비우심과 속박의 길속에서, 그리고 창조 전체에 의한자신의 고

양과영화의길속에서, 하나님은편재하게되신다”(GC, 91).

64) J. Moltmann, “God’s Kenosis,” 145.

65) C. Deane-Drummond, Ecology in Juergen Moltmann’s Theology, 125.

66) E. Brunner, Dogmatik I I (Zürich, 1950), 31. SW, 202. n. 17에서재인용.

67) A. Torrance, “Creatio ex nihilo and the Spatio-Temporal Dimensions, with special

reference to Jürgen Moltmann and D. C. Williams,” in The Doctrine of Creation:

Page 4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피조물이 창조자 안에 흡수되어 버린다는 것이다.71) 또한 건톤에게는

케노시스 관점에서 몰트만의 하나님의 공간성에 대한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는 창조의 공간성에 대한 적절한 신학은 세계 바깥에 있는 것

으로서 창조에 대한주장을 좀더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72)

그러나 몰트만에게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제약

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기 제약은“하나님‘바깥의’독립적인 창조

를 가능하게 하도록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73) 달리 표현하면, 하나

님은‘바깥의’창조를 위한 공간을 만드시기 위해 자신 안으로 수축한

다. 몰트만은 창조에 있어서‘안을 향한’행동과‘밖을 향한’행동을구

별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무로부터의 창조를 위한 무는 전

능하고 편재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현존을 제한하고 자신의 능력을 제

약하기 때문에-제약하는 한-오로지 생겨난다.”74) 이런 방식으로 그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긍정한다.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과는 달리, 몰트만

의 무로부터의 창조의 주장은 세계가 하나님 안에 실존하지만 하나님

은 세계로부터 구분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준다. 디안 드루몽(Dian

Drummon)에 따르면, 이 사고는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구별

이 없는범신론적경향에로 몰트만이 빠져드는것을보호해 준다.75)

몰트만은 자연적인 진화의 역사와 하나님의 내주 및 영화를 통해

열려진‘개방된체계’로서창조를 이해한다. 그것은“태초로부터그것의

구속을 향해정렬된”76) 과정이라고그는 믿는다. 그는시간적인창조또

는 역사적인 창조뿐 아니라 영원한 창조를 포함하는 세 가지 범주로

창조를 말한다.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과는 달리, 몰트만은 무로부터의

신론을 둘 다 피하기 위한 시도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

한 시도가 몰트만이 의도했던 것을 제대로 성취하고 있는지에 대해 질

문한다. 알랜 토랜스에 따르면, 몰트만의 근본적인 오류는 그가 회피하

고자 했던 두 가지 함정 가운데 하나에 빠진 것은 아닌지에 대한 것이

다. 이외에도 하나님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몰트만의 개념은 그것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위험에 놓여 있으며, 그래서 창조론을 위태롭

게 하는것이라고 한다.68)‘창조를 시간속에위치가 정해진 것 또는확

대된 시간으로’해석하는 대신에 알랜 토랜스는 우리가“절대적인무로

부터 나온 그들의 상호 연결된 모체들(Matrix)과의 공간적·시간적 동

일성의 전체를 하나님이 창조한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69)고 제안한

다. 또한알랜토랜스의견해로는, 신적인 편재로 말미암아 하나님 편에

서의 공간적인 비움이 창조를 위한 필수적인 존재라는 몰트만의 주장

은 불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콜린 건톤(Colin Gunton)에 따르면, 몰트만의 신적인 케노시스의 행

동으로서 무로부터의 창조의 개념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창조의 본질적

인 타자성 또는 구별을 상실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

다.70) 신적인 자기 전달로서의 창조를 말하는 대신에 건톤은 우리가 그

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를 내어주심의 장소로서 창조보다는 우선

적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창조에서 신적인 자기

전달의 사고는 불가피하게 유출설에 빠지게 되며 마침내 범신론적으로

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97

Essays in Dogmatics, History and Philosophy, ed. Colin E. Gunton (Edinburgh: T

& T Clark, 1997), 84.

68) C. Gunton, “Introduction,” in The Doctrine of Creation, 10.

69) A. Torrance, “Creatio ex nihilo,” 98. 알랜 토랜스에게 있어서 무로부터의 창조는

또한‘창조의 모든 국면과 실존의 모든 측면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그것의 특수하고 구체적인 관계들과 관련하여

해석되는것을요구한다는사실을긍정하는것이다(앞의책, 102).

7 0 ) C. Gunton, “The End of Causality?: The Reformers and their Predecessors,” in

The Doctrine of Creation, 81-82.

71) 앞의책, 81.

72) C. Gunton, The Triune Creator, 141.

73) GC, 88.

74) GC, 86-87.

75) C. Deane-Drummond, Ecology in Juergen Moltmann’s Theology, 119.

76) GC, 5.

Page 5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양자의 자유를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자기 제약이라는 몰트만의 사고를 선호한다고

공공연히언급한다.80) 그에게 있어서는케노시스가하나님 자신이“하나

님의 능력을 케노시스의 방식으로 제한하는 창조의‘자유로운 과정’에

종속됨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취해진 모험”81)을 뜻한다. 폴킹혼의 관점

으로는 이러한 케노시스의 사고가 과학적 지식과 신학적 사고를 적절

히 일치시키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82) 신정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83) 또한 폴킹혼은 이러한 케노시스의

견해가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계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케노시스의 개념은 하나님의 본질과 성격을 묘사하는 데 있

어서 하나로 통합하는 주제이다. 또한 폴킹혼은 몰트만의 창조의 케노

시스 사고가 공간적인 범주들로 하나님의 내재적 현존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과학자들에게는 유익한 통찰력이라고 주장한다.84) 비록 하나님

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 현존하지만, 이러한 신적인 내재적

현존은 하나님의 존재를 소진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미하엘 벨커(Michael Welker)의 견해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

창조를 긍정하고 있지만, 고전적 유신론을 넘어서서 계속적 창조를 강

조한다. 그는 과학적 지식에 밀접하게 관련된 개방적인 체계로서의 창

조를 말한다: 즉 물질과 생명의 카오스, 복잡성(complexity), 진화적인

체계와 우주의 비결정적인 의사소통 체계이다. 존 폴킹혼( J o h n

Polkinghorn)은 케노시스 사고에 비추어 계속적인 창조에 대한몰트만

의 해석을 긍정적으로평가한다. 그에따르면, 창조에 대한하나님의내

재성에 관한 신학적 긍정은 무로부터의 창조의 개념을 계속적인 창조

의 개념으로 보충함으로써 우주의 진화적인 성격에 대한 과학적 지식

을 통합할 수 있다.77) 아서피콕(A. Peacocke) 역시하나님을 자연적 질

서의 과정 안에서 그리고 그것들을 통하여 내재적인 창조자로 정의한

다.78)

창조론에 대한 케노시스적인 접근은 현금 신학 사상에서 가장 통찰

력 있는 발전을 보여주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학적 신학자인

이얀 바버(Ian Barbour)의 견해로는,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은 자기 제

한으로서의 케노시스적인 행동이 아닌 신적인 본성에 내재적인 것으로

서의 신적인 능력의 제한을 이해한다. 바버는 자신의 과정신학적인 견

해가 케노시스를“자발적인 자기 제약”이 아니라“형이상학적인 필연

성”(metaphysical necessity)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79) 몰트

만에 의하면,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에서는 하나님의 고난과 설득하는

사랑이 하나의 필연적인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과정신학의 만유재

신론과는 달리 몰트만은 세계가 신적인 사랑으로부터생겨난다고 믿고

있다; 세계는 전적으로하나님의자발적인사랑에 의존되어있다.

폴킹혼은 명시적으로 어떤 종류의 만유재신론도 반대하는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과 세계를 서로 뒤얽히게 하며 그 결과 하나님과 세계,

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99

77) J. Polkinghorne, “Kenotic Creation and Divine Action,” in The Work of Love, 95.

78) A. Peacocke, “Science and God the Creator,” Zygon 26, no. 4 (December, 1993),

482.

79) I. Barbour, “God’s Power: A Process View,” in The Work of Love, 12-13.

80) J. Polkinghorne, Faith, Science & Understanding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0), 93-4; Science and Providence: God’s Interaction with the

World (London: SPCK, 1989), 22; The Faith of a Physicist: Reflections of a

Botttom-Up Thinker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1), 64.

81) J. Polkinghorne, “Kenotic Creation and Divine Action,” in The Work of Love, 96.

82) 앞의 책, 102-06. 폴킹혼의 관점으로는 공간과 시간 및 물질을 함께 연결하는 일반

적 상대성이라고 하는 근대 과학적 통찰력들은 많은 현대 신학자들로 하여금 하나

님 안에있는시간성과공간성을 긍정하는데 동의하도록한다.

83) 앞의 책, 95-96. 여기서 폴킹혼은 케노시스의 사고 속에서 하나님은 전적이며 직접

적으로 책임적이라고 주장되어질 수 없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그는 신적인 무능성

또는 무관심에 대한 의심을 제거하기를 원하는 방식 속에서 이러한 통찰을“자유로

운 과정의 변호”라고 일컫는다. J. Polkinghorne, Science and Providence, 66-67을

참고하라.

84) J. Polkinghorne, Belief in God in an Age of Science, 81.

Page 5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것을 전개할 자유를 허락함으로써 하나님의 자기 제약을 포함하는

케노시스창조신학의 대표자이다.88)

몰트만은 신적인 전능의 주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 곧

그의 전능한 고난의 인내라고 한다.89) 몰트만은 주장하기를“전능한 것

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다. 전능한 것은 그의 사랑이다”90)라고 한다.

달리 표현하면, 그의 무한성과 전능성과 편재의 자기 제약은 하나님의

전능의 행동 그 자체이다. 그는“오로지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제약할

수 있다”91)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창조의 케노시스는 하나님의 은

총의행동이다.

랜든 길키(Landon Gilkey)는 몰트만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옹호된

창조의 케노시스 사고를 찬성한다. 그에따르면, 자기제약은 그의초월

성을양보함 없이 하나님을고난당할 수 있게(vulnerable) 만든다. 그는

“하나님은 그의자기제약(self-limitation)으로인해고난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자기 제약이기 때문에 초월적으로 남아 있다”92)고

나님의 자기를 비우는 사랑은 창조전체를 포함하는것이다.85)

몰트만에게는 성육신만이 아니라 창조 자체가 자기를 비우는 신적

인 활동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인 능력이나

완전한 지배 및 지식을 포기함으로써 창조의 고난의 경험에 참여한다

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기 비우심의 행동의 목적은 창조를 하나

님 자신과의 관계성과 교제로 이끄는 것이다. 그의 만유재신론적 비전

에서 자기를 낮추는 신적인 행동은 하나님의 자기를 낮추는 창조와 그

리스도의 낮추심, 그리고 성령의 자기를 낮추는 내주를 포함하는 것이

다. 그의 논문인“창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케노시스와 세계의 완성”

(God’s Kenosis and Consummation of the World)에서 몰트만은 유대

교와 기독교 전통에서 하나님의 전능, 편재와 전지의“자기를 내어주

심”,“자기 제약”,“자기 겸비”,“자기 제한”등과 같은 케노시스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제공하고있다.86)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형이상학적 속성의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몰트만은 성서적 내러티브에 비추어 전통적인 하나님의 속성을 재정의

한다. 신적인 전지성의 주제에 대해 몰트만은 이렇게 진술한다:“하나

님은 그가 모든 것을 앞서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미리

앞서 알지않는다. 그는그가창조한 자들의 응답을 기다리시며 그들의

미래가 이루어지도록 허락한다.”87) 이렇게 몰트만은 창조에게 실존과

1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101

85) M. Welker, “Romantic Love, Covenant Love, Kenotic Love,” in The Work of Love,

133-36.

86) J. Moltmann, “God’s Kenosis,” 145-49.

87) 앞의 책, 148. 이러한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하나님에 관해 열린 견해’를 상기시켜

준다. 피녹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자유를 주셨을

때, 그는 그들에게 그 모든 사소한 사항에서 이미 결정된 미래가 아니라 열린 미래,

어느 정도 그들의 결정들에 의해 형성되는 미래를 주셨다…하나님은알려질 수 있

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 그러나 하나님의 예지는 결정되지 않은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미래의선택 또는모든인간의결정을 미리알지못하신다.

하나님은 그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의미에서 전지하시며, 그리고

필요한 것은무엇이든지충분히 하실수 있을만큼능력이 있다.”C. Pinnock et. al.,

The Openness of God: A Biblical Challenge to the Traditional Understanding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123-24.

88) CoG, 282.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하나님은 그 어떤 자유를 허용하지 않

는 독재자나 명령자처럼 세계를 유지하고 다스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죄책들과

재난들을 지닌 세계를 감당하는 고난당하는 종과도 같다.…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자들에게 펼쳐 나갈 수 있는 공간, 발전할 수 있는 시간 및 그들 자신의 운동을 위

한 능력을 주시는 방식으로, 자신의 인내와 침묵의 현존을 통해 자연과 인간들의 역

사 속에서 행동하신다.”J. Moltmann, “God’s Kenosis,” 149.

89) 몰트만은 하나님의 인내를 통한 세계의 보전으로서의 자기 비우심의 신적 행동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전능은 하나님의“오래 참으심”또는 하나님의 인

내를의미한다. J. Moltmann, “Reflections of Chaos,” 209.

90) J. Moltmann, “God’s Kenosis,” 148. 몰트만은 훨씬 더 나아가 성경적 내러티브 속

의 하나님은‘신실하시며,’그는 또한‘후회하시고,’-‘슬퍼하시며’- 열정과 자비가

가득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위의 책, 141-42. 이러한 사고는‘하나님에 관해 열린

견해’의 주장과 비슷하다. R. Rice, “Biblical Support for New Perspective,” in The

Openness of God, 27.

91) J. Moltmann, “God’s Kenosis,” 145.

Page 5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복하면서 동시에 여러 이점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고전적

유신론과는 달리, 몰트만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하나님 안에 가져온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현대 신학적 논의를 위해 신적인 시간성과 공간

성의 일관성을 제안한다.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과는 달리, 몰트만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긍정하면서도 고전적 유신론을 넘어서서 계속적인

창조를 매우강조하고 있다. 그는창조를 과학적 지식과 밀접하게 관련

시켜 개방적인 체계로 말한다. 또한 자발적인 자기 비우심의 행동으로

서의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한 주장은 고전적 유신론의 신적인 전능

성이나 주권성과 같은하나님의 속성에 대한견해에 도전한다. 또한그

것은 세계 안에서의 악과 고난의 당혹스런 질문에 대한 좀더 만족스러

운 응답을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몰트만에게 있어서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제약은 하나

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보전한다. 유한한 피조물을 위한 공간

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신적인 무한성을 자발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세

계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세계 안에 거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제약은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에서처럼 형이상

학적 필연성이 아닌 하나님의 자발적인 결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몰트

만의 기독교적 만유재신론은 현금의 창조에 관한 이해에 상당한 통찰

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및 부활에서의 자

기 비움의 행동, 그리고 구속과 새 창조에서 성령의 자기 비움의 내주

를 포함하는 일련의 신적인 자기 제약의 일관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비록 몇몇개념의 모호성과 논리적 정합성 여부에 대한 비판자들

의 지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더라도 몰트만의 창조의 케노시스 사고

는 이후의 논의에서지속적으로대화의 문을여는데 기여하고있다.

주제어

몰트만, 케노시스, 창조, 하나님의사랑, 하나님의자유, 만유재신론

J. Moltmann, Kenosis, creation, the love of God, the freedom of God,

panentheism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계속해서“하나님의 주권성에 대한 제약은 자

유와 자기 실현에 의해 특징지어진 유한성을 창조하고 보전하는 데 있

어서하나님의자기제약으로이해될 수 있다”93)고 주장한다.

여기서 몰트만의 신적인 행동의 케노시스 견해에 있어서 다음과 같

은 질문이 제기된다: 신적인 능력의 자기제약은 하나님을악을 극복하

는 데 있어서 무능력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닌가? 달리 표현하여, 만

일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몰트만은 하나님의 케노

시스 사고로부터 출발함으로써신정론의문제를 해결하기원한다. 그의

만유재신론적 비전에서 몰트만은 구속적으로 악을 변화시키고 악에 저

항하도록 사람들에게 힘을부여하는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한다. 그에게

창조와 세계의 보전에 있어서 하나님의 케노시스의 목적은, 모든 피조

물의 고난이 극복되고 변형되며 세계가 종말에 이르러 하나님의 선의

내주하시는 충만함에 방해받지 않고 참여하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이다.

I V. 결론

케노시스 사고에 관한 논의는 20세기 후반 이후 신학 사상에서 가

장 중요한 진보 중의하나이다. 여러 현대신학자와 과학자들이 이러한

간학문적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몰트만은 창조의 케노시

스 신학의 위대한 주창자이다. 창조에 관한 몰트만의 케노시스 사고는

유대교 및 현대 과학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는 창조를 하나님

의 자발적인 자기제한의 사랑하시는 행동으로 본다. 이러한 자기낮추

심의 사고는 고전적 유신론과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을 비판적으로 극

1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 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103

9 2 ) L. Gilkey, Reaping the Whirlwind: A Christian Interpretation of History ( N e w

York: Seabury, 1976), 307.

93) 앞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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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 수 일 2010년 6월 30일

심사(수정일) 2010년 8월 2일

게 재 확정일 2010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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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105

Page 5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 Study on the Understanding of God’s kenosis in the Theology of J. Moltmann

ok-su Shin

Professor

Presbyterian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This paper deals with the nature and basic characteristics of the

understanding of divine kenosis in the theology of J. Moltmann,

primarily focused on the doctrine of creation. Through the analysis of

the foundation and the meaning of Moltmann’s thought, and also his

critical dialogue with contemporary theologians, this paper evaluates

the merits and limitations of Moltmann’s theological standpoint for

the future of theology.

The discussion of kenotic idea has been one of the most important

advances in theological thought since the late twentieth century.

Several contemporary theologians and scientists are involved in this

interdisciplinary discussion. Among them, Moltmann significantly

develops the kenotic view of creation and the Holy Spirit. He sees

creation as God’s loving act of divine self-limitation. According to

him, the concept of kenosis stands for God’s voluntary self-

restriction of his divine infinity in order to make room for finite

creatures. Through his voluntary, kenotic action, God gives time,

space, and freedom to creation. As a result, the world is in God and

God dwells in the world.

SPCK, 1989.

. The Work of Love: Creation as Kenosis. Grand Rapids, MI/

Cambridge, U.K: Wm. B. Eerdmans, 2001.

Russell, Robert J., Nancey Murphy and Arthur R. Peacocke. eds. Chaos and

Complexity: Scientific Perspectives on Divine Action. 2nd ed.

Vatican City State: Vatican Observatatory Publications/Berkeley:

The Center for Theology and the Natural Sciences,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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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Participation with special reference to Volume One of Karl

Barth’s Church Dogmatics. Edinburgh: T & T Clark,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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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ker, M. “Romantic Love, Covenant Love, Kenotic Love.” In The Work of

Love: Creation as Kenosis. ed. by John Polkinghorne. Grand

Rapids, MI/Cambridge, U.K: Wm. B. Eerdmans, 2001.

1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107

Page 5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such as divine almightiness or sovereignty in classical theism. Also, it

provides a more satisfying response to the bewildering problem of

evil and suffering in the world. In conclusion, it seems to me that for

Moltmann, divine kenosis preserves both divine transcendence and

immanence.

According to Moltmann, this self-limitation of God is not a matter

of metaphysical necessity but rather a matter of the voluntary resolve

of God. In Moltmann’s theology, God’s initial kenotic self-w i t h-

drawal leads to a whole series of divine self-limitations, includ-ing

God’s making room for his creation, Christ’s act of self-humiliation

revealed in his becoming flesh and in the cross and resurrection, and

the kenotic indwelling of the Spirit in redemption and new creation.

Moltmann’s understanding of divine kenosis puts considerable

emphasis on God’s immanent presence. Unlike classical theism, he

brings the temporality and the spatiality into God. In this way, he

proposes the coherence of the divine temporality and spatiality for

contemporary theological discussions. While unlike process panen-

theism, Moltmann affirms creatio ex nihilo, he strongly accentuates

on creatio continua, contrary to classical theism. He speaks of

creation as the open system closely related to the scientific know-

ledge: the chaotic, complex, and evolutionary system of matter and

life and non-deterministic communicative system of the universe.

Furthermore, he grasps temporality and eternity of God simultane-

ously. Thus, he describes God’s immanent transcendence in the world

in terms of God’s temporal eternity.

On the issue of the spatiality of God, Moltmann proposes the

perichoretic space of God with the help of the Jewish concepts of

zimzum and Shekinah and the Christian concepts of perichoresis.

Though it carries its own limitations, he engages in speaking of God’s

immanent presence in the world in spatial categories. This appears to

lead Moltmann into dialogue with some scientific theologians. How-

ever, for Moltmann, the spatiality in God should be maintained in

panentheistic manner. This notion of God’s creative work as divine

voluntary kenotic action challenges the view of the attributes of God

1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신옥수, 몰트만의창조이해에 나타난‘하나님의케노시스’ 109

Page 5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토착화신학의모델들에대한비판적고찰

불이모델을향하여

이찬석(협성대학교전임강사)

I. 서론

맥페이그는 생태학적 위기의 시대에 적합한 하나님과 세계의 모델

은 왕이나 아버지로 대표되는 군주모델보다는 몸 모델이 적합하다고

주장하면서 어머니 하나님, 연인 하나님, 친구 하나님이라는 그림언어

를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주장한다.

이미지 없는 개념은 황량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 전통들이 하나

님과 세계와-이 관계를 가리키는 은유와 모델이 되는 개인적이고 공

적인 인간관계(아버지, 어머니, 연인, 친구, 왕, 주인, 통치자로서의 하나

님)에 의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한 은유들은 개념만으로는불

가능한 하나님의구성에 정밀성과설득력을제공한다.1)

맥페이그는 개념적인 언어보다는 은유적 언어와 모델, 즉 그림언어

가 정밀성과설득력을제공한다고강조한다. 한국문화와 복음의 관계성

1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111-138

1) 샐리맥페이그, 정애성옮김, 『어머니, 연인, 친구』(뜰밖, 2006), 84.

Page 5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운 모델의 방향을 모색하여 보려고 한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윤성범,

박봉배, 박종천의토착화 신학을 전체적으로 고찰하기보다는이들이 제

시하는 복음과 문화의 모델에만집중하려고한다.

I I. 파종모델

파종모델은 윤성범에 의하여 제시된 한국문화와 복음의 관계성에

대한 그림언어이다. 윤성범은 일찍이1970년대에“우리의 신학은 이제

부터는 사상적인 식민지적 포로에서 벗어나야 되고, 이러한 신학적인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야 되겠다는 것이다”3)라고 선언하면서 한국

적 신학(토착화신학)으로서‘성(誠)의 신학’과‘효(孝)의 신학’을 주창

하였다. 파종모델은 씨앗과 토양의 비유를 근거로 하고, 씨 또는종자는

복음이고, 토양혹은밭은한국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음과같

이 말한다.

예수께서는 복음을‘씨’(혹은 종자)로 비유한 적이 많이 있다. 만일 복

음을 씨로 본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씨가 심어지고 자라나고 그리고

열매를 맺게 되는 자리(토양)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물을 여

지없이 인간의‘마음 밭’또는 한국이면 한국의 문화적인 전통을 지적

하고 있음이분명하다.4)

을 성경의 비유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모델을 제시한 사람들은 감리교

를 중심으로 한 토착화신학자들이다. 그들은 한국 신학의 근원적인 과

제는 한국문화와 복음의 관계성에서 시작된다고 파악하면서 이 둘의

관계성을 위하여 성경에서 파종, 발효, 접목이라는 은유를 찾아내어 파

종모델, 발효모델, 접목모델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모델은

모두20세기에 형성된 그림언어들이다. 세계화의물결이 한반도를덮기

이전에 형성되어진복음과 한국문화의관계성에대한모델들이었다.

21세기에 접어든 한국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이주노동자

들의 증가와 이중문화 가정의 증가로 한국사회는 더 이상 단일민족의

사회라고 볼 수 없고다문화 사회로 이미 진입하였다. 대기업들의경제

적 활동은 한반도에 제한되지 않고 해외로 확장되었고, 한국의 기독교

는 국내선교를 넘어서 해외선교로 선교의 지평을 확장하였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동북아시아를 넘어서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한류라

는 명칭이 주어졌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다시 제기하고 있고, 한국적인 것의

본질을 순수한 것으로 규정하기보다는 혼종(hybridity)적인 것으로 규

정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은가? 라는 물음들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구적인 것과 차별화되어질 수 있는 한국적인 것의

순수성을 전제하면서 제시된 한국문화와 복음에 대한 그림언어(모델)

들은 낡은 패러다임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모델의 출현을

기다리고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20세기에 이루어진 한국문화와 복음의 관계성

에 대한 모델, 윤성범의 파종모델, 박봉배의 발효모델, 박종천의 접목모

델2)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21세기 다문화 한국사회에 적합한 새로

1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이찬석, 토착화신학의모델들에대한비판적고찰 113

2) 김경재는 박형룡의 신학을 파종모델로, 김재준의 신학에서 발효모델로, 유동식의 신

학에서 접목 모델로 제시한다. 그러나 한국문화와 복음의 관계성에 있어서 성경의 비

유를찾아 제시하면서 실제적인 모델을 제시한 것은윤성범, 박봉배, 박종천이다. 그러

므로본 논문은 김경재의분류를따르지 않는다(김경재, 『해석학과종교신학』(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4).

3) 윤성범, 『한국적신학』(서울: 조명문화사, 1972), 11.

4) 윤성범,“한국재발견과 한국신학의과제”윤성범 전집편집위원회편,『한국종교문화와

한국적 기독교』(서울: 도서출판 감신, 1998), 288. 또한 윤성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음은 씨(種子)와 마찬가지이다. 이 종자는 토양을 필요로 한다. 토양 없이는 씨는

자랄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한국의 종교적 터전이라고 부르고 싶으며, 다른 말

로는 종교적 아프리오리(a priori)라고 말하고 싶다. 이 종교적 아프리오리 혹은 문화

적 아프리오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윤성범,“현대신학의 과제-토착화를 지향하

면서”, 『한국종교와한국적기독교』, 321.

Page 5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러므로 토착화의 첫 번째 단계는 한국교회라는주체의식이 요구된다

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수용성의 문제로, 제시되어지는 성경의 본문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포도주도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 되느니라”(마 9:17)이다. 여기에서‘포도주’는‘하

나님의 말씀’을 지시하고,‘부대’는 우리‘인간의 마음 밭’을 지시하는

것으로 읽어가고, 헌 가죽부대와같은인간의 심성은 싱싱한 새 포도주

와 같은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개인

은 물론한국 고유한 전통이 새롭게 자각되어야 하며, 여기에서 자각이

란 잘못된 것, 진부한 것, 구습을 일소해 버리고, 한국고유한 미덕을다

시 살린 후에 복음을 받아들여 능히 보전할 수 있는 참신성을 의미한

다. 즉 복음을 받아 유지 보존할 수 있으리만큼 먼저 새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결국 복음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토질이 결실을 거두지

못할정도로 박하다면 먼저 토질 조사를 하고, 이토질에 적당한 비료를

주어서 옥토를 만들어 놓고 씨를 심어야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

는 토착화이다. 이 단계를 위하여 제시되어지는 성경 본문은 요한복음

12장 24절이다.“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

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한 알의 밀알이 그대로 있어서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토착화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의도로

해석한다. 복음이 한국 민족이라는 마음 밭에 깊숙이 떨어져 들어가서

죽고, 새로운 싹이 나오지 않으면 많은 영혼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복음은 절대적인 진리이므로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변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판단하기 쉽지만, 복음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 여하에 따라 이런 저런 모양으로 변질된 모습이 가능하게 되는

것을 간과하기 쉽다는 것이다. 복음이 영원한 진리이지만 인간이란 마

음의토양에 떨어질 때에는 벌써 변질될 가능성을 이미 간직하고 있다

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변질 가능성 속에서도 변질되지 않고 좋은 복

음의 씨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복음의 토착화의 과업이라는

윤성범에 따르면, 토양은“폴 틸리히의 정황(情況)일 수 있고, 좀 더

구체적으로 인간의 마음바탕이며, 윤리와 종교와 학문등 말하자면 문

화 일반이다”5) 파종모델을 제시하는 윤성범에게 있어서 토착화신학의

과제는 서구신학을직수입하여 그대로 전달하던방법을 멈추고, 우리의

정신적인 토양을 똑바로 구명(究明)하고 난 뒤에 그곳에다가 복음의

씨를심는그 작업이다.6) 그는다음과 같이주장한다.

앞으로의 우리의 신학은 이중적인 과제를 수행해야 되겠다는 것이다.

즉 한국적신학은 한국적인실존과 한국적인정황, 다시 말하면 한국적

인 문화적, 정신적 전통에다가 서구적인 신학적 전통을 가미함으로서

우리의 전통이 다시금 살아나게 하는 것이 한국적 신학의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업은단순한 신학적토착화의 과제만이아니요, 이것

이 바로신학 그 자체라고말할수 있는것이다.7)

“올바른 한국 신학의 수립은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인 전통과 한국

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8)고 생각하는 윤성범

은 토착화의 단계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 번째 단계는 주체성으로

한국교회의 주체성의 문제이다. 그는 주체성의 문제를 위하여 다음의

성경본문을 제시한다.‘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 진주를 돼

지 앞에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

할까 염려하라’(마 7:6). 여기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복음을 의미하며,

이 말씀은 고귀한 복음을 아무에게나줄 수 없음을 의미한다는것이다.

즉, 주체성이 없는 사람들은 복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한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잘 받아 보존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하

나님께서는자기의 독생자인예수그리스도를선물로 주신다는것이다.

1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이찬석, 토착화신학의모델들에대한비판적고찰 115

5) 윤성범, 『한국적 신학』ibid, 13-4.

6) 앞의책, 6.

7) 앞의책, 12.

8) 윤성범, “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신학”『한국종교문화와한국적 기독교』ibid, 284.

Page 5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라는 말씀에서 윤성범은 토착화를 심

고, 물을주는작업, 즉 바울과 아볼로의 역할에 연관시킨다.

우리가 심고 물을 주는 일을 등한히 할 때에는 좋은 복음의 열매는 변

질되어 열종(劣種)으로서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러

한 변질된 우려가 있는 곳에 바로 토착화의 과제가 있고, 이것은 하나

의 크리스천의 의무에 속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의무

를 소홀히 할 때에는 바울이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는 책임을 우리가

포기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의 씨는 고갈되어 버리고 말라빠져

좋은 열매를맺지못하고 말게될 것이다.13)

결국 파종모델의 관심은 단순한 객관주의와 단순한 주관주의를 지

양하고 이 양자를 유기적으로통일연관을 맺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유

기적통일은 성령의 역사임을 파종모델은 부정하지않는다. 파종모델은

복음의 씨를 아무데나 뿌려서 나면 나고 안 나면 그만이라는 재래식

전도 방법을 지양하고 이 복음의 씨를 옥토에다 뿌려서 복음의 씨의

합당한 열매를 거두는 데에서 복음의 토착화의문제를 찾는것이다.14)

I I I. 발효모델

발효모델은 토착화신학의 변혁주의를 강조하는 박봉배가 그리는 모

델이다. 그는 문화와 종교, 즉 복음과 문화의 관계에 대하여 세 가지(배

타주의, 상대주의, 변혁주의)로 구분하면서 변혁주의를 추구한다. 배타

주의의 장점은 철저한 신념과 강력한 선교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지만, 때로는 독선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으며, 특히 타종교와 대화의

관문을 닫아버리거나 대화를 하여도 그 목적이 개종이나 설복(說服)을

것이다.9)

박형룡의 신학을 파종모델로 규정짓는 김경재는 파종모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파종모델은 씨앗인 복음, 또는 그리스도교의 생명력,

발아력, 성장력, 결실력만을 인정할 뿐 씨앗이 심겨지고 뿌려지는 대지,

흙의 어떠한 공헌과 유기적 관계성도 부정”10)한다. 박형룡의 신학은 파

종모델이라기보다는 정복모델로 규정되어야 한다. 박형룡은“한국의 전

통문화와 전통종교 일체를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대치되고 정복되어야

할 대상”11)으로 보면서 복음의 일방적인 초월성을 강조한다. 윤성범의

파종모델은 복음이 심겨지는 토양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복음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초월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복음의 수용자가

주체성이 없다면 복음은 변질될 수도 있음을 전제한다. 정복모델과 파

종모델은 구별되어야 한다. 전자는 한국문화를 정복의 대상으로 간주하

는 것이고, 후자는 한국문화와 복음의 유기적 관계성을 간과하지 않는

다. 윤성범의 파종모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한국의 주체성을 문제 삼

고 있으며, 그 주체성이 박하다면 영양분을 주어서라도옥토로 만든다

음에 복음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파종모델은 복음이 수용되

는 자리, 토양을 문제시 삼고 있으며, 복음의 자리로서 비옥한 옥토의

중요성을 간과하지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박형룡의 신학은 정복모델

로, 윤성범의 신학은 파종모델로 규정해야 한다. 윤성범의 파종모델에

보면, 유사종교는“돌작밭과 엉겅퀴 사이에서 자라난 열등의 열매”12)이

다. 복음을 수용하기 전에 토양을 옥토로 가꾸어 주체성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파종모델이 토착화의과정에서 옥토를 가꾸

고, 만드는 인간적인 작업만을강조하는것은아니다. 고린도 교회에 주

는 바울의 권면, 즉“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

1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이찬석, 토착화신학의모델들에대한비판적고찰 117

9) 앞의책, 293-297, 338-340.

10) 김경재, 『해석학과종교신학』(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4), 198.

11) 앞의책, 195

12)『한국종교문화와한국적 기독교』, 341.

13) 앞의책, 340.

14) 앞의 책, 260.

Page 6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종자와 토양의 비유로 설명한다면, 토양의 변질이라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종자가 어떻게 자라서 열매 맺는가?를 중점적으로

논의 될 뿐 복음의 씨로 인하여 토양자체가 어떻게 변질되느냐? 하는

것은 도외시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16) 발효모델은 변혁주의적 입

장에서서파종모델을비판한다. 토착화신학은복음이 한국문화를 변혁

시키는 측면이 있어야 하는데 파종모델에 근거한다면 씨앗이 옥토를

만나지 못한다면 씨앗이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토양에 의한 씨앗의

변질, 즉 한국문화에 의한복음의 변질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박

봉배는“문화를 변혁하고 사상적 바탕을 변질시키는 일없이 복음의 열

매는 완전하지 못하기”17) 때문에“토착이란 복음의 빛이 토착문화에 비

치어 새로운 방향을 밝혀주고 복음의 누룩이 발효하여 토착문화의 발

전적인 자기변화를 의미하는 것18)이라면서 발효모델을 토착화신학의

모형으로 제시한다. 빛이 비치고 누룩이 발효한다는 것은 그것을 바탕

으로해서 되는것이므로 본래적인 것과대치하는 것은아니지만, 복음

의 누룩이 작용한다는 것은 재래적인 문화나 가치의 질적인 변화도 결

과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박봉배는 주장한다.19) 그는 발효

모델에 근거하여토착화신학을다음과 같이말한다.

토착문화 자체 내에 선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방향전환이 그 잠재적 가

능성을 완성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 변혁주의의 입장이다. 그러나 토

착문화의 가능성은 자연적으로 자체를 완성시키리 만큼 완전한 것이

아니며 방향전환은 문화의 질적인 변화도 결과해야 하는 이 변혁주의

입장은 가루 속에 누룩과 같은 것이다(마 13:33). 이런 의미에서 변혁

주의 입장에서 말하는 토착화란 복음의 빛이 토착문화에 비치어 새로

운 목표를 밝혀주고 복음의 누룩이 발효하여 토착문화의 발전적인 자

목적으로 삼기때문에 복음과 문화의 관계에 있어서 일방적인 것이 되

기 쉽다고 박봉배는지적한다. 상대주의는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태도를

갖고 모든 종교에 대해 그 특색과 공통점을 찾아 대화와 통일을 유지

하려는 점에서 장점을 가졌다고 할 수 있지만, 상대주의의 문제점은 만

일 모든 종교가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 종교의 본질을 내

포한다면 구태여 기독교만을 전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느냐?는 선

교학적인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이다. 박봉배는 배타주의와 상대주의를

종교와 문화에 대한극단적인 입장으로 규정하며, 이런양 극단적인 입

장을 건전하게 종합하려는 것이변혁주의라고 주장한다. 변혁주의는 자

연적이거나 재래적 주체성이나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파괴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복음이 전통문화나 종교와 아무런 대립이 없다는 입

장도 아니다. 이 주장은 리차드 니버의 이론으로써 전통적 문화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그 근거는 무엇이든 존재하는 것은 모

두 선하다는 것, 죄나 잘못은 그 방향이 잘못되었고 왜곡된 질서 때문

이기에 재방향, 방향 전환이 요청된다는 주장이다. 즉 재래적 문화나

종교에 선을 향한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암흑 속에 가리어 잘못된

질서나 왜곡된 상태에 있는 것을 복음의 빛이 비치어 그리스도에게 방

향을 전환시키는 것, 즉 새로운 주체와 완전한 자기를 형성한다는입장

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래적 문화나 종교가 절대 자연적으로 그

가능성을 완성시킬 수 없다는 점이고 복음의 빛이 단지 방향전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룩이 발효하여 질적인 변화를 일으킴과 같

이 방향전환과 함께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15)

박봉배의 변혁주의적 토착화신학이 제시하는 모델은 발효모델이고,

성경적 근거는‘소금의 비유’(마 5:13), ‘누룩의 비유’(마 13:33), 요한

복음의‘세상의 빛’의 비유이다. 발효모델의 특징은 윤성범의 파종모델

에 대한 비판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박봉배에 따르면, 토착화 개념을

1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이찬석, 토착화신학의 모델들에대한비판적고찰 119

15) 박봉배, 『기독교윤리와한국문화』(성광문화사, 1983), 315-6.

16) 앞의책, 250.

17) 앞의책, 287.

18) 앞의책

19) 앞의책, 250.

Page 6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에 유비하는것이다.

접목모델은 한국 정신사의 근기(根氣)를 민중의 약동하는 생명력으

로 규정한다. 그러나 민중의 입장에서 한국 정신사의 나무를 평가한다

면, 그것은 참담한 한 그루의 노송으로‘恨’의 나무라는 것이다. 왜냐하

면 민중의 끈기는 봉건 구체제와 식민주의적 외세에 의해 억압당함으

로써 한국 문화의 모성적 근저로부터 단절되어 뿌리가 단절되어 가는

‘한의 나무’라는것이다. 이 한의나무를 회생시키는 길은나무의 밑둥

을 과감히 단(斷)하고 민중의 끈기가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에 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접하기 이전에 선결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斷이 있다. 서구 기독교적이며 서구 지향적 한국교회로부터

‘斷’해야한다.24) 이와같이 이중적 단(斷)후에접붙임을 시도하는 것이

접목모델이다.

이를 위해서 논자는 한(恨), 단(斷), 접(接)의 논리를 갖추고 있는 접목

(접목접木)의 유비를 로마서11장에서 찾아내었다. 토착화란 한의 나무

인 복음의 주체적 수용자와 그리스도에 뿌리 박았으나 열매를 맺지 못

한 서구 문화의 나무 사이의 접붙임이다. 올바른 접붙임은 올바른 단

(斷)이 선행될 때에만 가능하다. 첫째, 한(限)의 나무로 표상되는 한국

의 종교 문화사에 있어서 민족, 민중의 恨을 단(斷)하여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달자이나 그것에 위배되는 서구 문화의 제국주의

를 또한 단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이중적 단이 이루어진 연후에만 한의

나무는 그리스도의 뿌리에 접붙임 되어 민족, 민중의 근기를 창조적으

로 흡입할 수 있으므로 상극을 넘어 상생(相生)으로 향하는 살림의 문

화를 창출할수 있을것이다.25)

접목모델은‘한과 단의 변증법’을 통한 접목이다. 한의 나무에서 민

중의생명을 단하며, 또 다시 그리스도와 서구 기독교의 형이상학적신

기 변화를일으키게하는것을의미하는것이다.20)

박봉배는 토착화의 변혁주의는 두 가지 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

다. 토착 문화가 가지고 있는 완성을 향한 가능성(potentiality)의 문제

그리고 복음이 가지는 독특한 영향력이 어떠한 형식으로 재래적인 문

화와 상호작용하느냐 하는 문제이다.21) 더 나아가서 박봉배는 변혁주의

적 토착화 신학의 과제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하나는 복음에 대한 올

바른해석이고, 다른하나는 문화에 대한올바른 이해이다. 박봉배에따

르면, 우리가 받아들인 복음은 싫건좋건 서양의 문화적 형식을 가지고

들어왔으므로 내용으로서의 복음과 형식으로서의 기독교 문화의 연관

성을 분석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발견되는 복음의

내용은 토착화를 위한 규범지향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으로 자아가 형성되어 온 전통적 문화를 통한 내용과 형식면에서 분석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발견되는 우리 문화의 정수는 토착화

를 위한상황지향적인것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2)

I V. 접목모델

접목모델은‘상생의 신학’을 주창한 박종천이 제시하는 한국문화와

복음에 대한 그림언어로 성경적 근거는 로마서11장 13-24절이다. 접

목모델은“사도 바울이 팔레스틴적 기독교가 헬레니즘적 이방 세계 속

에서 새롭게 꼴을 갖추어 가는 과정 속에서 마련한 착상”23)이며, 토착

화를 야생 올리브 나무의 가지를 올리브 나무의 밑둥에 접붙이는 과정

1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이찬석, 토착화신학의모델들에대한비판적고찰 121

20) 앞의책, 277

21) 앞의책, 250

22) 앞의책, 277-8

23) 박종천, 『상생의 신학』(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1), 101.

24) 앞의책, 41.

25) 앞의책, 15.

Page 6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계를 지닌다고 평가한다.31) 윤성범의 종자와 토양의 모형은 정황의

조건에 대한 복음의 의존성 때문에 토착화를 성령의 일하심으로 보기

보다는 인간의 종교적 수용 능력을 과신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소

위 혼합주의의 부담을 갖는다. 반면에 박봉배의 누룩과 반죽의 모형은

복음의 변혁 능력의 극대화에 비하여 정황은 단지 수동적으로만 관여

되어있으므로 변혁의 일방성만강조될우려가 있다32)는 것이다.

V. 세 모델에대한비판적고찰

21세기를 걸어가고 있는 한국 기독교는 다양한 세대를 형성하고 있

다. 토착화 신학도1세대와2세대를 넘어서3세대를 논하고 있다. 다양

한 세대들이 혼종적으로 존재하고 있는21세기 한국의 상황에 근거하

여 세 모델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토착화의 전

제, 두 번째는 토착화의 주체, 마지막으로 일원론과 이원론이라는 구조

를 문제 삼으면서세 모델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새로운 모델의 방

향을제시하려고한다.

1. 토착화의전제

파종모델, 발효모델, 접목모델이 공통적으로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은

복음과 한국문화의 만남에 있어서 한국문화를 복음과 분리하여 규정하

고 있다. 이미 토착화되어진 한국적 복음이나 한국적 기독교에 대하여

는 부정적인입장을 지니면서한국적 신학을 위한모델을 그리고 있다.

파종모델은 한국신학의 과제를 한국적의 문화적, 정신적 전통에 서

구 신학적인 전통을 가미함으로 우리의 전통이 살아나게 하는 것이라

학 사이를‘단’한 후에민중의 생명을 생명나무이신그리스도에접하는

것이다. 민중과 그리스도가접한이후에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이고민중

은 여전히 민중이다. 그리스도와 민중의 접목은 두 가지 신학적 시사점

들이 있다. 첫째, 민중의 새 생명은 그리스도에 근거할 때에만 보전 된

다 점에서 그리스도는 민중의 신비한 존재 근거이다. 둘째, 이 역사 속

에서 그리스도의 발견은 고난받는 민중의 해방에 동참할 때에만 가능

하다는 점에서 민중은 그리스도의종말론적인식근거라는것이다.26)

그러므로 접목모델은 민중성과 그리스도 중심성이라는 두 축을 중

심으로 이루어지는 접목이다. 실제적으로 접목모델은 민족종교이면서

민중종교인 동학에서 한국 신학의 형식을 발견하지만27)‘기독론 축소주

의’가 아니라‘기독론 최대주의’로 나아간다.“상생신학(접목모델-논자

주)적 기독론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의 범재신론적 기독론이나 민중신학

자들의 예수론의 기독론적 오류를 비판하고 극복하면서”28)“다원주의

세계를 직면하고 있는 근대 이후의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성서언어의

고유성만이 아니라 타문화와 타종교의 언어와 관행을 배움으로써 예수

의 그리스도 되심의 새로운 의미와 기능을 다중언어로 통화할 수 있게

하는‘기독론적 최대주의’”29)를 주장한다. 박종천은다음과 같이 주장한

다.“기독교적 담론이 없는 민중종교의 담론은 예언자적, 메시아주의적

정열을 잃고영지주의적신비종교로변질한다. 민중종교의 담론이 없는

기독교적 담론은 선포적, 복음적 진실성을 상실하고 신식민주의적기복

종교로 전락한다.”30)

접목모델의 입장에서 박종천은 윤성범의 파종모델은 일차적 단이

완결되지 못했고, 박봉배의발효모델은 이차적 단까지 철저화하지못한

1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이찬석, 토착화신학의모델들에대한비판적 고찰 123

26) 앞의책, 34-5.

27) 박종천, 『기어가시는하느님』(서울: 도서출판감신, 1995), 125-221.

28) 앞의책, 283.

29) 앞의책, 270.

30) 박종천, 『기어가시는하느님』ibid, 246.

31) 박종천, 『상생의신학』30.

32) 앞의책, 100.

Page 6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접목모델에서 중요한 작업은 한과 단의 변증법이다. 파종모델/발효

모델이 복음을 담고 있는 서구문화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수행하지 않

는 반면에, 접목모델은 서구문화 속에 깃들어 있는 제국주의적 측면을

단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비판적 작업을 수행한다는 점은 파종/발효모

델보다는 발전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한국문화 속에서

민중을 억압하였던 전통에 대하여서도 단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점

도 두 모델들보다도 발전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접목모델에서 예수 그

리스도라는 생명나무에 접붙여지기 이전의 한국문화는 민중의 끈기를

회복했지만, 복음과의 접촉이나 상호작용을 거치지 않은 한국문화이다.

즉 접목모델에서 접목 이전에 이루어지는 단의 과정에서 한국문화는

한국문화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단이고, 복음은 서구문화와의 관계에서

만의단이다.

파종, 발효, 접목모델 모두는 복음과 문화가 상호작용하여 형성되어

진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를 간과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

는‘한국적 기독교인’과‘기독교적 한국인’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

자는 한국적 전통과 문화를 토대로 성장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수용한

기독교인이라면, 후자는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기독교 문화의 전통에

서 태어나 성장한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다. 전자는 한국의 전통적 문

화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전통종교나 문화에 대하여 친숙하지

만, 후자는 기독교적 전통에서성장하였기 때문에 한국인임에도불구하

고 한국의 전통종교/문화보다는 기독교 전통이 더 친숙한 사람들이다.

젊은 세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적 한국인에게 기독교는 내부

이고, 한국의 전통종교문화는외부또는타자로 인식되어진다.

탈식민지론가 호미 바바의 문화이론은‘교섭’과‘전이’를 말한다. 문

화적 교섭은 이질적인 문화들이 다른문화 속에 타자로서 침투하여 순

수한 동일성을 깨뜨리는 작용을 말하고, 전이란 자신의 문화를 동일성

내부가 아니라, 다른문화의 언어로 번역하는 위치, 즉 타자의 위치에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3 4 )‘문화적 교섭’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한다면,

고 규정한다. 여기에서 한국적인 전통은 기독교 복음과의 접촉이전의

전통이다. 파종모델이 제시하는 토착화의 세 단계는 주체성, 수용성, 토

착화로 그려진다. 주체성의 핵심은 주체성이 없는 사람은 복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한국적 문화의‘주체성 만들기’이지만, 이 주체

성은 복음과의 만남 이전의 한국적 주체성이다. 수용성의 핵심은 복음

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새사람이 되는 것으로 옥토 만들기이지만, 이

단계에서 복음과 만남을 통한 옥토 만들기가 아니라 복음과 분리되어

진 옥토 만들기이다. 마지막 단계인 토착화의 핵심은 변질의 가능성이

있는 복음이 변질되지 않고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으로 한국문화

와 복음의 접촉과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국문화는 복

음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은순수한 한국문화를 전제하고 있다. 결국

파종모델에서 한국문화는 복음과 단절되어진 상태에서의 한국문화이

고, 한국문화와 복음의 관계성은서로대립적으로작용한다.

배타주의와 상대주의를 거부하면서 변혁주의를 지향하는 발효모델

은 토착화를 복음의 빛이 토착문화에 비치어 새로운 목표를 밝혀주고

복음의 누룩이 발효하여 토착문화의 발전적인 자기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 발효모델은 한국문화가 지니고 있는 선을향

한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암흑속에 가리어 왜곡된 상태

에 있음을 전제한다. 더 나아가서 토착문화는 자연적으로 또는 스스로

의 힘으로 선의 가능성을 완성할 수 없다고 전제한다. 결국 토착문화인

한국문화가복음에 의하여 변혁되어져야함을 주장한다. 파종모델과 동

일하게 발효모델에서도전제된 한국문화는 복음과 접촉하기 이전의 재

래문화이다.33) 밀가루에 상응하는 한국문화는 누룩에 해당하는 복음과

상호작용이이루어지지않은상태를 전제한다.

1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이찬석, 토착화신학의모델들에대한비판적고찰 125

33) 물론 박봉배의 변혁주의적 토착화 신학은 한국문화와 복음의 만남을 고찰한다. 그러

나 박봉배에 따르면 한국역사에서 복음과 한국문화의 관계는 변혁적이지 않고 타협

적이었다는 것이다. 타협적이었다는 것은 올바른 토착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Page 6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있는지를 문제 삼는 것이고, 후자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복음의 토착화

라는성령의 역사로서의 복음화의 사건을 학문적으로 성찰때, 그 학문

적 성찰의 대상이 되는 신학적 사물로서의 사건을 의미한다. 김광식은

‘신학적 토착화’를 지지하면서 토착화신학은 신학을 토착화하려는 것

이 아니라 신학적 대상으로서의 복음화의 사건이라고 주장한다.37) 이런

맥락에서 김광식은 파종모델은“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능동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문화의 창의력에 따라 좌

우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38)고 비판하고, 발효모델은 복

음의 우월성에서부터 출발하지만,“그 우월한 그리스도교적 진리가 무

엇인지를 명확하게 논술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단지 추상적으로 그렇게

전제할 뿐이다“라고 비판한다.39) 결국 김광식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인

간이 행하는 통속적인 의미의 토착화를 거부하고, 토착화는 인간의 인

위 조작적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기적으로 값없이 주어지는 성령의 역

사라고 주장한다.40) 파종모델과 발효모델에서 토착화의 주체가 인간이

므로 토착화는 인위적인 작업이 되어감으로 토착화는 성령의 역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김광식의 주장은 복음의 선교, 토착화에 있어서 인

간의 역할을 축소하는 측면이 있기에 부정적이지만, 토착화의 주체의

문제를 제기한다는점에있어서는도전적이다.

파종모델과 변혁모델에서 복음/기독교 문화는 타자로 자리매김 되

어져있다. 파종모델에서한국문화는 토양으로서 복음의 수용자로서주

체이지만, 복음은 한국이라는 마음 밭에 심어져야 하는 타자이다. 발효

모델에서는 누룩이 밀가루를 변혁시키듯이복음은 한국의 문화를 변혁

시켜야 한다. 소금이 물을 변화시키듯이 복음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변

화시켜야한다. 여기에서도 토착문화와복음은 주체와 타자로 분리되어

‘한국적 기독교인’에게 복음은 타자로서 한국문화 안에 침투하여 한국

적 동일성을 깨뜨리는 작용이지만,‘기독교적 한국인’에게는 한국문화

가 타자로 침투하여 복음적 동일성을 깨뜨리는 작용이다.‘문화적 전

이’라는측면에서 고찰한다면,‘한국적 기독교인’은 한국적 전통문화를

복음과 기독교의 언어로 번역하고 이해하는 작용이고,‘기독교적 한국

인’에게는 복음과 기독교 문화를 한국적 전통과 문화의 언어로 번역하

고 이해하는 작용이다. 21세기 한국 기독교에는 교섭과 전이의 과정을

거친 독특한 기독교가 존재하고 있음을 한국 신학은 전제해야만 한

다.35) 더 나아가서 한국의 많은 젊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한국인이

기 때문에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보다는 기독교 문화에 더 친숙함을 느

끼고, 기독교가 내부이고, 한국의 전통문화가 외부로 인식하는 기독교

인들이 존재하고있음을 토착화신학은 전제로 삼아야 한다. 즉 한국기

독교의 혼종성을전제해야만한다.

2. 토착화의 주체

일찍이토착화의주체를 문제삼은사람은 김광식이다. 그는“토착화

는 인간의 인위 조작적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기적으로 값없이 주어지

는 성령의 역사이다”36)라고 주장하면서 토착화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

라 성령이라고 강조한다. 그는‘신학의 토착화’와‘신학적 토착화’를 엄

격히 구분한다. 전자는 서구신학을 한국적 상황속에 어떻게 수용할 수

1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이찬석, 토착화신학의모델들에대한비판적고찰 127

34) 이찬석, “탈식민지론과아시아신학,”『신학사상』141집, 100-1.

35) 21세기 한국신학은토착화된 한국신학과 기독교 문화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

해야만 한다.‘성(誠)의 신학’,‘풍류(風流) 신학’,‘상생(相生)의 신학’,‘민중(民衆)신

학’등은 토착화된 한국신학의 실제적인 예일 수 있고, 새벽기도, 통성기도, 성경통독,

최근의CCM의 등장 등은 토착화된 한국적 기독교의 모습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설

빔, 추석빔보다는 성탄 선물을 받으며 자랐고, 판소리보다는CCM에 친숙함을 느끼

는 기독교적한국인이 존재하고있음을토착화신학은전제로삼아야한다.

36) 김광식, 『토착화와해석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9), 23.

37) 앞의 책, 19.

38) 앞의책, 21.

39) 앞의책, 22.

40) 앞의책, 23.

Page 6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다. 결국 파종모델은 성(誠)과 기독교의 계시를 동일시한다.‘효(孝)

의 신학’에서는 성경적 윤리와 서양의 윤리를 구분하면서 전자는 공동

체윤리이고, 후자는 개인윤리라는 것이다. 동양의 윤리는 효에 근거하

고 있음으로 개인윤리가 아니고 공동체 윤리라고 본다. 윤성범은 공동

체 윤리(가정윤리)라는 측면에서 성경적 윤리(복음)과 효의 윤리(한국

문화)를 일치시킨다.

발효모델은 복음과 한국문화의 차이성을 강조하고 있음으로 이원론

적이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복음의 우위성을 전제하고 있다. 물론 발효

모델의‘존재하는것은모든것은선하다’는 어거스틴의주장을 근거로

토착문화를 전적으로부정하는 것은아니다. 그러나 토착문화인한국문

화는 복음에 의해서 변혁되어져야 하는대상이므로 한국문화보다는복

음이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박봉배는 한국문화에 대하여

는 긍정적인 요소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복음(기독교)에 대

해서는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는한국문화와기독교의 관계성을

다룬논문의 결론부분에서다음과 같이말한다.

기독교의 초월적 유일신관과 이에서 결과하는 보편적 공동체사상에근

거한 기독교적 가치관이내재적이요주관적인, 그리고여기에서결과되

는 특수주의적 공동체 의식에 근거한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에 도전하

여 새로운 가치와 이념을 심어 넣는 혁신자(innovator)의 구실을 하였

다. 그리고 원형적 역사관, 묵종주의, 복고주의 때문에 사회변화에 대해

전적으로 외면했던 한국의 전통 사회에 교회를 통해 기독교가 직선적

역사의식, 행동주의, 급진적 희망의 개념을 전파함으로써 한국을 근대

화로 이끌어들였고따라서 사회변혁의기수가 되었다.41)

박봉배는 한국문화에서 특수주의적 공동체와 원형적 역사관이라는

부정적인측면을 강조하고있고, 기독교에 있어서는초월적 유일신관에

근거한 보편적 공동체 사상과 직선적 역사의식이라는긍정적인 측면을

진다. 접목모델은 단의 과정을 거친 한의 나무가 서구제국주의를 단

(斷)한 복음에 접목되어지는 과정이고, 기독론 최대주의를 주장하고 있

다. 이러한 측면에서 접목모델의 주체는 한국 문화가 아니고 복음이라

고 말할 수 있다. 결국 파종, 발효, 접목모델에서 토착화의 주체는 복수

가 아니라 단수로 전제되고 있다. 토착화의 주체논쟁을 제기하였던 김

광식의 전제는‘토착화의 주체는 하나(단수)이다’라는 전제에 출발한

다.‘주체는 단수가 아니고 복수이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면 성령과

더불어 인간도 토착화의 주체로 인식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복수 주

체중의 하나인 인간도 단수가 아니고 복수이다.‘한국적 기독교인’만이

아니라‘기독교적 한국인’도 토착화의 주체로 인식되어져야 함으로서

토착화의 주체는 복수로 인식되어야 한다. 21세기의 상황에서 토착화

의 주체는단수가 아니라 다수가 되어야 한다. 21세기에 한반도에는토

착화된 신학과 기독교 문화가 이미 존재하고,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토착된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성장한 이들이 토착화의 주체로 부상

하고 있다면 복음과 한국문화는 더 이상대립적인 두 요소로만 간주될

수 없다. 이들에게 복음은 주체이면서 타자이고, 한국문화도 타자이면

서 주체이다. 혼종적이라 할 수 있다. 복음적이면서 한국적이고, 한국적

이면서도복음적이므로혼종적이라할 수 있다.

3. 일원론과이원론적모델을넘어서

한국문화와 복음의 관계성에 일원론과 이원론을 적용한다면, 복음과

문화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것은일원론적이라 할 수 있고, 차이성을 강

조하는 것은 이원론적이라규정할 수 있다. 파종모델은‘성(誠)의 신학’

과‘효(孝)의 신학’으로 전개되면서 한국문화와 복음의 차이성보다는

유사성을 강조했으므로 일원론적 방향으로 전개된다. 성의 신학에서는

성(誠)은 말씀(言)이 이루어짐(成)으로 해석함으로 성의 성육신적 측면

을 읽어내고, 불성무물(不成無物)을 통하여 성의 초월적인 측면을 강조

1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이찬석, 토착화신학의모델들에대한비판적고찰 129

41) 박봉배, 『기독교윤리와한국문화』ibid, 309.

Page 6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국 민중의 체험과 언어도 복음의 빛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에 의해 증

거 되어야만한다. 민중 체험의증거와복음의 증거는동일하지않다…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성령께서 증거하지 않는 한 그는 그리스도

인이 아니다.42)

한국신학에서 복음과 한국문화의 일치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한

것은 유동식의 풍류신학이다.43) 유동식은 최치원의 비문으로부터 한국

의 바탕이 풍류도임을 발견하고, 풍류도의 핵심은“하나님과 우리가 하

나 되는데 있다.”44) 또한 유동식은 요한복음을 근거로 하여“복음의 중

심은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로 통합되

는 데 있다”45)고 말한다. 이와 같이 풍류도와 복음의 핵심을 신인 통합

으로 보는 풍류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풍류도의 화신, 풍류객으로 읽

어간다.

풍류도의 뿌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요. 하느님의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풍

류도의 화신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과삶속에서풍류도

의 구체적인모습을볼 뿐만아니라풍류도 자체를보는것이다.46)

유동식의 풍류신학과 반대로 박봉배의 변혁주의적 토착화신학은 복

음과 한국문화의 일치성보다는 차이성을 강조한다.47) 박봉배는 윤성범

강조하고 있다. 결국 발효모델에서는 복음과 한국문화를 이원론적으로

인식하면서한국문화에대한복음의 우위성이전제되어있다.

접목모델은 모델 표면상으로는 한국문화에 중심성이 있는 것 같지

만, 내용적으로는복음에 중심성을두고있다. 접목이란다른두 식물의

절단면을 접붙여서 하나의 개체로 만드는 행위로 대목(臺木)과 접수(接

穗)로 구분되어진다. 대목은 뿌리, 바탕나무로서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부분이고, 접수는 과실을 더 풍성하게얻기위하여 대목에 붙여지는 나

무이다. 대목은 튼튼한 나무로서 영양분을 공급하고, 접수는 영양분을

대목으로부터 공급받아서 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예를 들어서 돌배

나무와 배나무의 접목에서, 돌배나무는 튼튼하지만 열매가 좋지 못하

고, 배나무는 열매는 좋지만 뿌리가 튼튼하지 못할때 돌배나무의뿌리

에 배나무의 뿌리를 접목하여 풍성한 배를 결실하려는 것이접목의 목

적이다. 접목의 목적과 결과는 돌배를 얻는 것이 아니라 배를 얻는 것

이다. 이와같이 접목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을 접목모델에 적용한다면,

접목모델에서 복음이 대목이고, 한국문화가 접수이므로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은복음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이다. 그러나 접목모델은 야생올

리브 나무와 올리브 나무라는 바울의 비유에 근거하면서기독론축소주

의가 아니라 기독론 최대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으로 복음과 한국문화의

관계성에 있어서 중심성이 복음에 있다. 접목모델은 모델상으로는복음

과 한국문화의 공통성에 근거하고 있는것 같지만, 상생의 신학으로 진

입하면서복음에 대한 우위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국문화에 대한단

의 과정에서 중심적 기준은 민중성이다. 서구적 기독교에 대한 단, 즉

탈서구화의중심적 기준은 탈제국주의이다. 억압과 상극을 가져오는 측

면들이 단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민중성과 탈제국주의는 상극을 넘어서

상생을 가져오는 가치관들이다. 그러나 접목모델에서한국의 민중체험

과 복음은 동일하지 않다. 박종천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기독론 최

대주의를표방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에 의해 증거 되어야 하듯이, 한

1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이찬석, 토착화신학의모델들에대한비판적고찰 131

42) 박종천, 『기어가시는하느님』ibid, 237.

43) 물론 민중신학1세대도 한국의 민중문화와 복음의 일치, 민중과 예수의 일치를 읽어

간다. 한국의 민중적 전통과 예수의 전통은 분리되지 않는다. 또한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메시야의위치에 있다.

44) 한국문화신학회, 『한국문화와풍류신학』(서울: 한들출판사, 2002), 186

45) 유동식, 『풍류도와한국신학』(서울: 전망사, 1992), 81.

46) 앞의책, 93.

47) 물론 한국신학에서 복음과 한국문화의 차이를 가장 철저하게 강조하는 것은 보수신

학이다. 대표적으로 박형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리스도교의 이교(異敎)에 대한

적절한관계는 타협이아니라정복이다…예수 그리스도의이름을 가진종교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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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종교 간의 대화는 종교 간 평화를 넘어서 각 종교의 변혁을 지향한

다. 이와 같이 이원론적인 사유방식의 강점은 실천 지향적이고 변혁적

이다.

그러나 이원론적 사유방식은 차이성을 강조함으로 비대칭적 가치서

열을가져올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의 차이를 강조하였던 전통신학은인

간에대한 자연의 종속을 가져왔다. 백인과 흑인의 차이를 강조한 이데

올로기는흑인차별을가져왔고,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지나치게강조한

관념은 가부장주의를가져왔다. 이와같은 비대칭적이원론의 한계를 극

복하기 위해서는 일원론적 사유방식이 동반되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은 근원적으로 하나이다(동등하다)라는 일원

론적 사유방식이 동반되어야 한다. 일원론을 동반하는 이원론, 이원론

을 동반하는 일원론은 불이론으로 언표 할 수 있다. 21세기에 복음과

한국문화의 관계는 공통성을 강조하는 일원론적 사유방식과 차이성을

강조하는 이원론적 사유방식을 통전하는 불이론적 사유방식이 추구되

어야 한다. 복음과 문화의 일원론적 측면이 강조된다면 선교의 정당성

은 상실되어지고, 이원론적 측면이 강조되어진다면 문화(종교)제국주의

를 가져올 수 있다.

V. 결론

복음과 문화의 불이적 관계로 보는 사유방식은 동학의 불연기연, 이

정용의 both/and 사유방식에서 논리적 전거를 찾을 수 있다. 이정용에

따르면, 조화는 동아시아에서 관계적 범주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서양

은 e i t h e r / o r의 사유방식으로서 배타적이고, 절대적이지만, 동양은

both/and의 사유방식으로 포용적이고 관계적이다.50) 신과 세계의 근원

의 토착화신학이 유사성만 강조하고 차이성은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

다. 변혁주의적 토착화신학에 따르면, 윤성범의 성의 신학은 율곡의 성

과 바르트의 계시의 개념의 유사성만을 강조하고 차이성은 간과하고

있다48)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박봉배는다음과 같이주장한다.

서양적인 초월화나 객관화에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동양 사람들에게

는 오히려 그런 초월화나 객관화를 배우고 연구하는 일이 앞서야 할

것이다. 즉 계시이해의문제는 성의 내재적인 경향성이 복음의 빛 아래

서 초월적인 차원으로승화되어야한다고생각된다.49)

복음과 한국문화의 관계성으로 한정하여 말한다면, 풍류신학은 복음

과 한국문화의 일치성을 강조하고 있음으로 일원론적이고, 변혁주의적

토착화신학은 둘의 차이성을 강조하고 있음으로 이원론적이라 할 수

있다. 변혁이나 실천성은 일원론적 사유방식보다는 이원론적 사유방식

에서 강점을 지닌다. 복음에 의한 한국문화의 변혁에 핵심이 있는변혁

주의적 토착화신학은 복음과 한국문화의 차이와 대립을 강조하는 방향

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다원주의 신학에서도 나

타난다. 존 힉을 중심으로 하는 실재(신)중심적 다원주의는 종교 간의

공통성을 강조하고 있음으로 종교간의 평화는 이루어질 수 있으나, 각

종교들간의 변혁적인 측면은 약화된다. 반대로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

적 다원주의는 각 종교의 공통성이 아니라 차이성에서 출발하기 때문

1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이찬석, 토착화신학의모델들에대한비판적고찰 133

도는타협이아니라 충돌이며정복이다”(유동식, 『한국신학의광맥』196).

48)“윤박사는‘성’(誠)을 풀어서‘말씀이 이루어짐이라고하였다. 아주독창적이고통찰

력 있는 견해이다. 그러나 유교의 전통적 해석을 참조할 때에 과연 성이 그렇게 정

의될 수 있겠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이 존재론적인 각도에서 만물을 존재케

하는근거하고말하여 유교에서불성무물(不誠無物)이라고 말하고 있는것은사실이

다. 그러나 여기서 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나 도 또는 신유학파에서 말하는 리

(理)에 속하는 것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 같은‘말씀‘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된

다”(박봉배, 『기독교와 한국문화』283).

49) 박봉배, 『기독교와한국문화』ibid, 285

5 0 ) Jungyoung Lee, The Trinity in Asia Perspective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32.

Page 6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상둘이아니다. 그러나 하나로 인식해서도 안 된다. 복음과 한국문화

는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라는인식에 근거되어져야한다.

주제어

토착화신학, 파종모델, 발효모델, 접목모델, 불이적 사유.

Korean Indigenous Theology, Sowing Model, Fermentative Model,

Grafting Model Non-dualistic Thinking

접 수 일 2010년 6월 30일

심사(수정일) 2010년 8월 9일

게재 확정일 2010년 8월 15일

적 일치를 전제로 하는 힌두이즘의 불이론은 일원론적 불이론의 경향

을 띠고 있음으로복음과 문화의 차이성이 간과되어질수 있다. 그러나

동학, 특히 수운의 불연기연은 일치와 차이성을 전제하고 있음으로 불

이적 사유방식의 전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either/or의 사유방

식이 아니라 both/and의 사유방식도 공통성과 차이성을 담보하고 있음

으로 불이적 사유의 전거로 삼을 수 있다. 불이적 사유의 성경적 근거

는 요한복음에서 찾아진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나는 하나님의 아들

이다”(10:36)라고 선언하고,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가 자신을 하

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보도한다(19:7). 요한복음의 결론에 해당하

는 20장 31절은 요한복음의 목적은‘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하

기 위한 것으로 선언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예수는 육신이

된 말씀으로서 하나님으로 선포된다. 더 나아가서 예수는“나를 본 사

람은 아버지를 보았다”(14:9)라고 선언하고, 결정적으로10장 30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명료하게 선언한다.51) 이와 같이‘~이

다’와‘~아니다’로 전개되어지는 요한복음의 논리를 불이적 사유의 성

경적근거로 삼을수 있다.

세계화의물결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확대되어질 것이고, 한

국교회의 해외 선교적 열정을 계속되고 있다. 이와더불어 한국의 전통

문화보다는 기독교문화에 더 친숙함을 느끼는‘기독교적 한국인’은 계

속적으로 증가될 것이다. 이러한21세기의 상황에서 복음과 문화를 분

리하고,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파종, 발효, 접목의 비유는 적합성이 상실

되어지고있다. 복음은 단수가 아닌다수로 전제되어야하고, 한국의 문

화도 단수가 아닌다수로 전제되어야 한다. 토착화의 주체도 단수가 아

니라 복수로 전제되어야 한다. 복음도 문화도 순수한 본질을 지녔기 보

다는 혼종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으로 복음과 문화에 대한 불이적 사유

방식이 더 적합성을 지닌다. 21세기의 상황에서 복음과 한국문화는 더

1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이찬석, 토착화신학의모델들에대한비판적고찰 135

51) 서중석, 『복음서 해석』(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1), 336-41.

Page 6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 Critical Study on the Models of KoreanIndigenous Theology

Chan-seok Lee

Full-time Lecturer

Hyupsung University

Kyungki, Korea

The first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consider and criticize the

models of Gospel and Korean culture in Korean indigenous theology,

and the second purpose is to seek a new model in the situation of 21

century.

The first part of this article will examine three models, sowing

models, fermentative model, and grafting model. The sowing model

was developed by Sungbum Yoon, and grounded the parable of seed

and soil. And this model focuses on the soil, Korean culture before

the contact between Gospel and Korean culture. It tries to make a

good soil (Korean culture) because seed, Gospel can be changed by

soil, Korean culture. The model of fermentation focuses on the

contacting point between Gospel and Korean culture, and transfor-

mative aspect by Gospel. This model seeks to change the negative

aspect of Korean culture by Gospel. However, the grafting model

suggests that Korean culture should be reconsidered before meeting

with Gospel because Korean Minjung were suffered in the Korean

history. Of course, Gospel should be reconsidered because there is the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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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1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이찬석, 토착화신학의모델들에대한비판적고찰 137

Page 7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고찰

독일교회의타자수용문제를 중심으로*

박원빈(남서울대학교전임강사)

I. 서론

나와 타자와의 만남은 늘 긴장과 갈등을 불러온다. 하지만 이러한

긴장과 갈등은 우리 삶이 끊임없는 타자와의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음

을 고려해본다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이 연구는2차 대전 전후로

독일 나치가 대표적 타자1)로 규정한 유대인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고

이를독일교회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신학적 관점에서 탐구한다. 독일교

회가 타자를 향해 취한 태도는 나치즘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기에 매

우 정치적이었지만이러한 정치적 의도를 더욱 강화, 혹은 비판한 것은

신학자들이었다. 정치와 신학이 충돌하는 시대적 상황속에서 타자라는

비동질적 계기를 어떻게 수용했는지 검토함으로써 점점 다원화 다문화

imperial aspect in Western Christianity, which delivered Gospel to

Korea. Therefore, the grafting model presupposes ‘double cutting.’

As a result, the three models do not embrace Korean aspect after the

contact between Gospel and Korean culture.

In the 21st century, there are many young Christians in Korea who

were born, and grown in Christian culture. They feel comfortable in

Christian concept and culture rather than Korean traditional concept

and culture. Even tough the first generation of Korean indigenous

theology like Yoon Sungbum tried to explain Christian concept

through Korean concept, young Christians tries to Korean traditional

concept through Christian concept. This means that Korean theology

should understand the relationship between Gospel and Korean

culture from the non-dualist perspective rather than monistic or

dualistic. Therefore, this article suggests that non-dualistic model in

the relationship between Gospel and Korean culture in situation of

21st.

1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139-166

* 이 논문은2010년도 정부 재원(교육과학기술부 인문사회연구역량강화사업비)으로 한

국연구재단 (구)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K R F-2 0 1 0-3 3 2-

A00034).

1) 2차 대전을 전후독일의 특수한 정치적상황에서 타자란 유대인, 비기독교인, 집시, 장

애인등이었다.

Page 7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오래된 단일 민족에 대한 증오는 결국 홀로

코스트라는 파국으로까지이어졌다. 홀로코스트를가능케 한 유럽의 반

유대주의 역사를 살피는 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난 광범위한 연구

와 조사를 필요로 하기에 여기서는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대략적으로만

살피고 2차 대전을 전후한 독일의 정치, 사회, 종교적 맥락에서 가장대

표적인 타자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증오와 멸

시의 대명사로 타자화되어가는지 추적할 것이다. 이를 위해 1차 대전

이후 빠른 속도로 정치적 세력을 키우며 정계에 등장한 히틀러의 유대

인 정책을 살펴볼 것이고 이러한 극단적인 사회적 배제화의 과정을 겪

는 동안 독일교회의 반응과 대응을 검토할 것이다. 또한 독일교회 뿐

아니라 유럽 지성 사회에 전반적으로 편재했던 반유대주의가 교회 내

에서어떻게 작동했는지를살피는 것도주요한 연구주제가 될 것이다.

전반부에서 독일 교회 전반에 걸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다루었다

면 후반부에서 논의를 좁혀 독일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의 나

치에 대한 입장을 신학적으로 검토해 볼 것이다. 이를 통해 바르트, 니

묄러 등으로 대표되는 고백교회 개신교 지도자들과 당시 교회 지도자

들의 차이점이 드러날 것이고 고백교회 운동이 지닌신학적 의의를 평

가하려고 한다. 고백교회 운동은 2 차대전 중 독일 나치 정권에 대항한

개신교회의 유일한 신학적이며 실천적 대응이었다고 하나 고백교회 인

사들이 보여준 반유대주의에 대한 태도를 통해 고백교회 운동의 한계

또한검토하고자한다.

마지막으로 교회와 국가, 신학과 정치가 충돌하는 역사적 상황에서

타자에 대한 오해내지는 왜곡이 미치는 폭력적 양상을 신학적으로 반

성해 봄으로써 점점 다문화되고 다원화되는 한국 사회와 교회가 역사

적 비극으로부터배울수 있는교훈을모색해 보고자 한다.

되어가는 우리 사회 속에서 올바른 타자이해란 무엇인지 신학적으로

성찰해 보는것이본 논문의 주된목표이다.

유대인과 헬라인, 자국인과외국인, 비장애자와 장애자 등 인류는 끊

임없이 서로를 타자와 동일자라는 범주를 통해 나와 다른 것을 구분하

고 분리해 왔다. 때로이러한 구분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사회적인이유

에서, 그리고 경제적인 이유에서 정당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넘어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되어타자를 배재

하고 탄압하는 구실로 사용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기

억되고 있다. 나와 다른타자를 단순히 미워하고 혐오하는 정서적 반감

을 넘어극단적으로타자를 말살하려고 했던 시도가 바로 2차 대전 중

독일 나치에 의해자행된 홀로코스트라고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가 역

사 속에서 일어난 수많은 대량학살 사건과 근본적으로 다른점은 그것

이 종교에 기초한 정서적 반감에서 출발하여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통

해 매우 정교하게 정당화되고 합법화의 과정을 거쳐 진행된 집단살인

이라는데 있다.2) 또한 이러한 집단 살해극은 단지 독일인 혼자만의 힘

으로 진행되었던 것이 아니라2차 대전 말, 유대인 살해 명령이 떨어지

기 이전부터독일이 병합한 오스트리아를비롯하여 라트비아, 우크라이

나, 헝가리 뿐 만 아니라 일부 서유럽 국가들의 자발적 협력을 통해 전

체 유럽 유대인의3분의1 가량을 학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

해 유럽인들의 상당수가 나치의 정치적 힘에 의해 굴복당했지만 나치

가 내건유대인 말살정책에 대다수의 유럽인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일부는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사실에서 반유대주의 뿌리는 정치적 요

소만으로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럽 역사에서 반유대주의의 역사는 기독교 역사와 함께 시작되어

1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박원빈,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고찰 141

2) 홀로코스트가 갖는 독특한 정치적 종교적 함의에 대해선 알란 로젠바움( A l a n

R o s e n b a u m )이 편집한 Is the Holocaust Unique?: Perspective on Comparative

Genocide (Boulder, Colo.: Westview Press, 1997)에 수록된 Steven T. Katz의 논문

“The Uniqueness of the Holocaust: The Historical Dimension,” 49-50을 참조하라.

Page 7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향해 하나님 살해자(God-killers), 악마의 자식들, 심지어 인류의 적이

라고 칭하고 있다.5) 이러한 오명은 근대까지 더욱 다양한 형태로 존재

해 왔는데 물질적이며 욕심이 많고 섹스와 돈과 권력만을 추구하는 대

표적세속 집단으로각인되어왔다.6) 유대인들에 대한부정적 인상은 반

대로유대인들에대한긍정적 측면을 더욱 약화시켰다. 특히구약에 등

장하는 믿음의 선조들이 보여준 신앙에 대한 순수성과 열심은 예수이

후 시대유대인들과는단절된 별개의 덕목으로여기게 되었다.

교황 우르반 2세(Urban I I)에 의해 시작된 제1차 십자군 운동

(1095-1204)은 회교도의 수중에 들어간 예루살렘 교회를 해방시킨다

는 명목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무슬림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 중 이같은 반유

대주의에 대한 폐단을 지적하는 의견7)도 있었지만 항상 다수의 소리에

묻혀 버렸다. 중세에 지속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까지 이어졌는데 개혁 초기 루터는 유대인에 대한 상당한 동정을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유화적인 태도가 유대인을 개종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태도를 바꾸게 된다. 1543년에 작성

된「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라는 글은1938년 나치가 유대

인들을 탄압하고 그들의 회당을 불태울 때 즐겨 인용하곤 했다.8) 루터

는 이 글에서 유대인들은 악마와 같은 종족으로 버림받아 마땅하다는

전통적인기독교인들의반유대주의적반감을 여과없이드러내고있다.

I I. 기독교와반유대주의

유럽에서 반유대주의의 뿌리는 초기 기독교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

예수는 자신을 유대교를 전복시키는 파괴자가 아닌 율법을 온전케 하

러 온 랍비(마 5:17)로 묘사하고있다. 하지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비전

과 기존의 유대교 질서를 거부하는 언급은 당시 교권을 쥐고 있던 많

은 유대인들을불편하게 했다.3)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퍼진 유대교와의

갈등은 예수 죽음을 통해 절정에 이르렀는데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적극적으로 빌라도를 향해 예수를 못 박으라고 요구하는 대목(막 15:

11; 요 11:49-53)에서 예수 죽음의 책임이 로마 권력이 아닌 유대교

지도자들에 기인한다는 당시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유대교와기독교의 첨예한 대립은 예수 이후 사도 바

울에 의해 봉합되는 듯이 보였다. 바울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극단적인

분리 내지 대립을 택하기보다 이방인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온 이스라

엘을 구원코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밝히기도 한다.4) 바울은 그

의 서신서 곳곳에서 이방인들을 기독교로 개종하기 위해 가장 큰 걸림

돌이었던 할례 문제를 유대교적 시각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이신칭

의(以信稱義)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

의 유대교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기독교가 유대교라는 민족 종교

적 색채를 극복하고 보다 넓은 세계, 즉 지중해권을 아우르는 보편 종

교로발돋움 할 수 있는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고할 수 있다.

바울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첨예한 갈등요소인 할례 문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해결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와 유대교 간의 모든 갈

등이사라진 것은아니었다. 바울이후, 초기교부들의 글이나설교에는

예수 죽음의 직접적인 책임이 유대인들에게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들을

1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박원빈,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고찰 143

3) 마태복음23장에 율법을 준행하는 데 있어 탁월한 수행자로 여겨졌던 바리새인들에

대한언급을참조하라.

4) 특히로마서9장-11장을참조하라.

5) 기독교 역사에서 반유대주의의 역사는Rosemary Ruether의 Faith and Fratricide:

The Theological Roots of Anti-Semitism (Minneapolis, Minn: Seabury Press, 1974)

과 J. G. Gager, The Origins of Anti-Semitism: Attitudes Towards Judaism in Pagan

and Christian Antiqu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등을참조하라.

6) 로버트 위스트리치, 송충기옮김, 『히틀러와홀로코스트』(서울: 을유문화사, 2004), 38.

7) 대표적으로 St. Bernard of Clairvaux가 있다. 이에 대하여는 David Berger, “The

Attitude of St. Bernard of Clairvaux toward the Jews.” American Academy for

Jewish Research, vol. 40 (1972), 89-108 을 참조하라.

8) 위스트리치, 앞의책, 41 참조.

Page 7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여행도 제한되었다. 1850년 경에 교황 피우스9세는 이탈리아의 유대

인 지역에 종교재판을 부활시켰지만1870년 이탈리아에 세속 정부가

탄생된 이후 곧이어 사라지게 된다. 가톨릭 교회의 반유대주의 정서를

충분히 알고 이용할 줄 알았던 히틀러는1933년 이미 교황 치하의 이

탈리아에서 시행되었던 유대인 차별법을 시행한다. 이 법은 모든 유대

인들은 전문직에 종사할 수 없으며 유대인이 아닌 사람과 접촉을 금하

는 내용을 담고있었다.

이탈리아 등 몇몇 지역에서 이루어진 차별을 제외하면 계몽주의부

터 시작된 유대인들의 유럽 사회로의 대규모 편입은 유럽 전역에서 일

어난 현상이었기에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는 더욱 충격적이라

고 할 수 있다. 특히 프랑스에서 서유럽 최대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

고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들을 종교 집단으로서가 아

닌 개인으로서 사회의 일원으로 빠르게 동화되어 간다.11) 유럽 전역에

서 독일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으로 살아간 유대인들의 노력은 일견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끈질긴 동화(同化)노력을

일시에 무(無)로 돌리고 유대인은 사회에서 영원한 소수자요 사라져야

할 타자임을주장한 이가바로 2차 대전의 주역인 아돌프 히틀러였다.

I I I. 1차 대전직후독일의상황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은 북미와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의 하나가 반기독

더 나아가 루터는 독일의 지도자들을 향해 유대인들의 신앙을 제한하

고 거주 이동의 자유를 박탈할 것을 촉구하면서 유대인들의 재산을 빼

앗는 것은 정당하며 이를 통해 더 이상 고리대금업과 같은 짓을 못하

게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9)

18세기 들어와서 근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유대인들은 사회적으로

좀 더 나은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유대인에 대한 시각

이 바뀌었다기보다유대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면

서 끈질기게 유럽사회에 동화하려고 애쓴결과이기도하다. 특히프랑

스 혁명은 유대인들에 대한 인식변화와 지위에 커다란 향상을 가져왔

다. 프랑스 혁명 전까지 로마가톨릭 신자들은 유대인을 이단까지는 아

니어도 불신자들이라고 보았으며 유대교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살아남

은 비기독교적 종교라고 여겼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로마가톨릭 교회

의 절대적 권위는 붕괴되었고 개신교 뿐 만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시민

적 권리가 부여된다. 프랑스에서 앙시앙 레짐의 붕괴를 통해 가장혜택

을 많이 본 집단이 바로유대인들이었고 가톨릭 교회는 가능하다면 이

러한 무너진 질서를 다시 회복시키고자 노력했다. 가톨릭 교회가 오랫

동안 누려온 권위를 가장 손쉽게 실현할 수 있었던 곳은 바티칸의 직

접적 영향 하에 있는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19세기 말(1870)까지

교회의 직접적 통제 하에 있었으며2차 대전의 독일 나치가 시행했던

유대인 분리의 상징인 게토(ghettos)가 이미 존재했다.10) 당시 이탈리아

에 있는 유대인 게토에선 저녁이면 유대인들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문

을 걸어 잠갔으며 옷에는 유대인 상징의 표식을 달도록 했고 기독교인

들과의 접촉도 금하였다. 또한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은 이미사유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전문직에 종사할 수 없었으며 대학 진학과

1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박원빈,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고찰 145

9 ) Martin Luther, “Vom dem Judem und ihre Lügen.” Luthers Reformations-

Schriften 20 (1890), 1861-2026, 위스티리치, 앞의책, 41에서재인용.

10) David T. Goldberg와 John Solomos이 공저한A Companion to Racial and Ethnic

Studies (Oxford: Blackwell Publishing, 2002), 340-345를 참조하라.

11) 초기프랑스인들이유대인들에대한인식은 클레르몽-토네프 백작이프랑스의국민

회의에서 한 연설에서 읽을 수 있다.“유대인들을 하나의 민족으로서는 결코 받아들

일 수 없지만, 개인으로서는받아들일 수 있다…만약 그들이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면, 우리는 그들을 추방할 수밖에 없다.”Jay B. Berkowtiz, The Shaping of Jewish

Identity in Nineteeth-century Frace (Detroit, 1989), 71, 위스트리치, 앞의 책, 45에

서 재인용.

Page 7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 시기에 이른바‘유대인 문제’(the Jewish Question)를 해결할 수 있

는 가능한 대안으로 유대인 이주계획까지 등장하게 된다. 계몽주의이

후 시작된 유대인들의 해방은 그들을 지식인, 교사, 작가, 정치가, 금융

인 등으로 성장하게 했지만1차 대전 이후 대다수 유럽의 기독교인들

은 처음으로 유대인들을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보았듯이 유대인들을 게토에 가두었을 때 그들의 힘은 제한되나 유대

인들을 해방시킨다면 오히려 예측할 수 없는 능력으로 기독교에 해를

끼친다고생각했기때문이다.

유대인들에대한이러한 생각은1차 대전패배이후독일의 교회지

도자들에게는 더욱 더 깊게 각인된다. 연합국들은 독일을 인류 역사에

서 가장 끔찍한 전쟁을 일으킨 주범으로 지목하였다.14) 독일 외부에서

독일을 바라보는 시각과 독일 내부 교회 지도자들이 자국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클라우스 숄더(Klaus Scholder)에 따

르면“전쟁기간 중 전쟁의 명분과 신의뜻을동일시하는분위기가최고

조에 달했기에 독일의 승리는 마치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듯이보

였다”라고 진단한다.15) 신의 뜻이 자신들의 역사 가운데 실현된다는 믿

음은개신교 지도자들에게도예외는아니었다. 그들은 1차 대전을 자랑

스럽게“독일 전쟁”(The German war)이라고 불렀고 독일전쟁은 다름

아닌 그들의 선조 게르만족이 로마에 대항하고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

해 로마교회와 투쟁한 것의연장이라고생각했다.16)

교적 혁명운동에 의해무신론자들의손에넘어갔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는 단지 러시아의 짜르체제를 전복시키는 것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사회주의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러시아사 연구가인 리

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는“볼셰비키파는 단지 러시아를 변화시

키기 위해 러시아를 장악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러시

아를 단지 발판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12) 이러한

볼셰비키 혁명의 이상은1차 대전(1914-1918)의 종결과 더불어 실패

하는 듯 보였으나 독일 남부 바이에른과 헝가리 등에서 공산주의 세력

을 확장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 사상에 공감하는 유대인들의 수는매우

적었지만 러시아 공산주의 지도자와 극단적 좌익 인사들 중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많았다. 또한 칼 마르크스는 세례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을

한 후 유대인을 매우 혐오하였지만마르크스 본인 또한 유대교 가정에

서 자라난 유대인이었기에 대다수 유럽인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은 그

근원에 있어유대교적색채를 지닌사상이었다.

바이에른과 헝가리에서의 혁명 시도도 결국 우익 인사들의 승리로

끝나게 되자 뮌헨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반유대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뮌헨은 이후 독일에서 국가사회주의의 정신적 수도로 자리하게

된다. 이렇게 혼란한 시기에 뮌헨에는 이른바<시온 장로들의 의정서>

(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라는 것이 나돌기 시작하는데 유

럽의 보수주의자들은 이 의정서가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기독교

를 파괴하려는 볼셰비키 혁명의 본래 의도를 입증한 것이었다고 주장

하게된다.13)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의 반기독교적 성향을 목격한 기독

교 지도자들은 이에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된다.

1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박원빈,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고찰 147

12) Richard Pipes, A Concis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New York : Vintage

Books, 1995), 286.

13) Leon Poliakov, “Elders of Zion, Protocols of the Learned,” Encyclopedia Judaica,

CD Rom edition (Jerusalem: Judaica Multimedia, 1997).

14) 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는 850만 명이 넘으며 부상자는 2,100만 명에 이른다. 전사

자 중 170만 명은 독일인이었고120만 명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전사자들이었

다. 전쟁으로 인한민간인의 사망, 기아 등의피해를 입은사람의 수는1,300만 명에

이른다. “World War I: Killed, Wounded, and Missing,” Table 4: Armed Forces

Mobilized and Casualties in World War I, Encyclopedia Britannica, DVD edition,

2001.

15) Klaus Scholder, The Churches and the Third Reich, trans. John Bowden (London:

SCM Press, 1988), 1과 6.

16) 앞의책.

Page 7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골비처의 유대인에 대한 언급은 당시 독일 사회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종교 지도자라 할지라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벌을받고 있는집단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골비

처의 유대인에 대한 묘사는 유럽 지성사회에서 반유대주의의 뿌리는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이유라기보다 신학적 근거에서 찾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있다.20)

VI. 히틀러의등장과반유대주의

초기 기독교부터 중세를 거쳐 홀로코스트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유대인은 언제나 영원한‘타자’의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은 근대 계몽주의 시기를 지나면서 많이 희석되는

듯 했으나 1차 대전 이후다시반유대주의가 역사전면에 등장한다. 특

히 패전국 독일은 베르샤유 조약에 따라 전승국에 대한 막대한 전쟁

부담금을 지불해야 했고 국내적으로 치솟는 인플레이션으로 경제는 마

비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패전국 독일인의 마음에 민족적 자긍심을호

소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 청년

이 바로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국가 사회

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NSDAP 혹은 나치당)을 통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이상적 결합을

발견하고정당의 선전부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히틀러가 나치에 처

음 가입했을 때 나치당은 독일에서 결코 주목받지 못하는 소수당에 불

1차 대전 후 대부분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독일 군주제의 붕괴를 안

타깝게 생각했다. 독일 군주제에서 황제를 칭하는 카이저(Kaiser)의 또

다른 명칭은 독일 복음주의 교회의 최고주교(Supreme Bishop)였다. 제

국에 대한 충성과 제국의 몰락에 대한 아쉬움은1차 대전 후 외세에

의해 인위적으로 탄생한 바이마르 공화국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제

국에 대한 강한 향수 속에서 개신교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는 당연히

바이바르공화국17)기간 동안 더욱 성장하게 된다. 구 체제는 외세의 적

들에 의해 철저하게 붕괴되었고 마치가롯 유다와 같은 유대인들의 배

신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했으며 유대인들이야말로가장위험한 내부의

적이라는 생각이 퍼지게 된다.18)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많은 개신

교 목사들은오히려 나치의 등장을 환영하게 된다. 비록 정식당원으로

등록하는 것을 꺼리기는 했지만 나치당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반대하지

않았다. 칼 바르트의 제자이자 저명한 독일 신학자인 헬무트 골비처

(Helmut Gollwitzer)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평균이라는 말처럼 당시 독일 개신교인들 대부분은 중산층이었고 동시

에“민족적”이었으며…또한 반유대주의자들이었다…나 또한 그들이 예

수를 배반하기 전까지 충직한 사람들이며…농부요 목동들이라고 믿고

성장했다. 하지만 후에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을 때 그들은 상인이었고 옳은 일이라곤 하나도 한 것이 없으며

어디에나 가서모든 일에참견하였다…나치당의 정치프로그램에서유

대인은 독일시민이 될 수 없었는데 거의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이러한

시도가 충분히시도할만한가치가 있는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19)

1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박원빈,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고찰 149

17) 독일 군주제가 멸망하고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전후 모든 부담을 떠맡으며 생긴

과도기적 정부로1919년에시작되어 히틀러가나치총수로 오르는1933년에사라지

게 된다.

1 8 ) Hagen Schulze, Germany: A New History, trans. Deborah Lucas Schneider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8), 206.

1 9 ) Victoria Barnett, For the Soul of the People: Protestant Protest Against Hitle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15.

20) Wolfgang Gerlach, And the Witnesses Were Silent: The Confessing Church and the

Persecution of the Jews, trans. and ed. Victoria Barnett (Lincoln: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2000), 230.

Page 7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히틀러가 유대인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 편지의 수신자 점리

히는 병사들에게 민족주의적 자긍심과 공산주의에대한 적대심을 고취

시키는 일을 맡은 정훈장교였다. 히틀러가 유대인 문제를 단순히 감정

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보다 조직적이며 합법적인‘이성적’

접근을 필요로 한다는 대목은 일찍부터 반유대주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준비했음을 보여준다. 다음의 구절은 히틀러의 유

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어느 정도에 달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유

대인은 인종간의 연합에 전혀 자격이 없는 민족이며 그들은 종교적인

연합체도 아니다…유대인들의 영향은 마치 사람들에게 결핵을 퍼트리

는 병마와 같다.”22)

1920년대와30년대초에접어들면서 히틀러의반유대주의의감정은

더욱노골화되는데그는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역사에서 가장 극단적 악을 행했던 민족이다. 그들은 세계

를 장악할 음모에 가담했고 유럽문명을 초토화하려고 했다. 그들은1차

대전의 독일의 패배와 볼셰비키 혁명에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독일과

세계에 만연하고 있는 모든 형태의 도덕적, 재정적, 정치적, 사회적 문

제에 직접적원인이다.23)

히틀러의 이러한 반유대주의 사상은 전쟁 말기 거의 종교적 확신에

이를 정도로 발전하게 되며 유대인을 유럽에서 몰아내는 것을 신이자

신에게 부여한 사명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의 자서전적 저서인『나의

투쟁』(Mein Kampf)에서“만약 마르크스주의 강령을 통해 유대인들이

세계의 다른 민족 지배할 수 있다면 유대인들의 왕관은 인류의 조화

(弔花)일 것이고 지구는 이미 수 천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인간이라곤

과했지만 전후독일의 정치 불안과 경제 불황은 히틀러의 나치당이 성

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히틀러는1차 대전 이후 전쟁의

패배와 이에 따른 국민들의 절망감에 대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러한 전쟁의 책임을 바로 유대인에게 지운 것

이다. 유대인들은 전후 독일에서 희생제물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타자

였다. 오래 전부터 서구 유럽에 내려온 반유대인 정서와 무너진 독일

국민의 자긍심을 한껏 드높여준 히틀러의 민족주의는 독일인들 마음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던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활화산 타오르듯 불타

오르게 했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언제부터 반유대주의자였는가라는 문

제는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히틀

러에 대한 기록 중 유대인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대목은1919년의 기

록이 최초이고 이 기록만으로 유대인에 대한이전의 입장까지 모두 소

급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틀러도 당시 유럽 사회

의 일반적인 유대인에 대한 인식 위에 자신의 반유대주의를 형성했음

은 틀림없으며 최초의 기록을 통해 어느 정도 그의 사상의 방향을 가

늠해 볼 수 있다. 그가 나치 당원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1919년 아

돌프 점리히(Adolf Gemlich)에게 보낸 편지에서 히틀러는 감상적 반

유대주의와이성적 반유대주의를다음과 같이구분하고있다.

반유대주의의 감정적 기반은 [유대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의 형태에서

그 극단적 예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 반유대주의

(Rational anti-Semitism)는 우리와 같이 사는 다른 외국인들과 달리

유대인들이 누리고 있는 엄청난 특권에 대한 조직적이고 법적인 반대

의사와제거를 통해이루어져야 한다.21)

1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박원빈,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고찰 151

2 1 ) Adolf Hitler, “Letter to Adolf Gemlich, September 16, 1919,” A Holocaust

Reader, ed. Lucy S. Dawidowicz(New York: Behrman House, 1976), 30.

22) 앞의책.

23) Richard Rubenstein and John K. Roth, Approaches to Auschwitz: The Holocaust

and Its Legacy(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3),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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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던 나치 돌격대(Sturmabteilung, SA)들은 1933년 3월부터 유대인

상점 불매운동, 거리폭력, 방화, 살인 등의 본격적인 반유대인 운동을

펼치게 된다.

V I I. 독일교회와반유대주의

독일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거의 모든 지역이 루터교 영향 하에

있었고 그 밖에 지역에서 개혁교회들이 산재해 있었다. 1903년 독일

군주제 하에서 루터교 전통과 개혁교회 전통이 통합되어 이른바 복음

주의교회(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EKD)가 형성되었다.

독일복음주의교회는1922년 보다 적극적인 지역교회와의 연대를 목표

로 독일 복음주의 교회연합(Deutscher Evangelischer Kirchenbund)을

설립하였지만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되자 독일 복음주의 교회

(Deutsche Evangelische Kirche)라는 국가교회에 흡수되어 독일 복음

주의 교회의 수장(Reichsbisholf)으로 루드비히 뮬러(Ludwig Müller)

를 임명한다. 국가교회의 성립은 히틀러가 더욱 손쉽게 교회를 장악할

수 있는기반을 제공해 주었다.27)

1933년 3월,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chancellor)으로등극하기 두 달

전에 행해진 방송 연설에서 그는 나치당의 교회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전까지 히틀러의 기독교에대한태도는 냉소적 무관심으로부터

적대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이었지만 이 연설에서 그는 매우 잘 정

돈된 언어로 자신이 권좌에 오를 때를 걱정하고 있는 독일 가톨릭 교

회와 개신교 진영의 불안을 누그러뜨리려고 시도한다. 그는 독일의 모

든 교회들은“새로 태어나는나치와함께독일국민의 도덕적 갱생과 국

가의 부흥을 위해 함께 서게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의 나치당은

찾아볼 수 없는 허공으로 이동할 것”임을 단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

론을 내리고 있다.“따라서 나는 오늘 내가전능하신 창조주의 뜻에 따

라 일하고 있음을 믿는다. 유대인들로부터나를지키는 것은 바로내가

주님의 일을위해투쟁”24)하는것임을 밝히고 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을 스스럼없이 드러냈지만 그가 늘

유대인들에 대해 단호한 태도만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는 나치

당이기업가와 재산가들, 전직고위장성들, 교회로부터지지를 얻을필

요가 있을 때에는 어김없이 반복되던 반유대주의에 대한 언급을 자제

할 줄 아는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다.25) 히틀러는 대중들에게 잠재되

어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를 어떻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증오를 단순히 무차별적인 폭력과 무력행사

로만일관하지 않고보다 조직적으로 실행해야 함을 알고있었다. 히틀

러가 자신의 반유대주의를 정치화하고 실천하는 데 그의 참모들과 더

불어 수년간 정교하고 세심한 계획을 통해 완성된 것이었음을 염두할

필요가 있다.26) 히틀러의 이러한 강온양면 정책은1932년에 행해진 선

거를 통해서 확연히 드러나는데 나치당이 그 해의 선거에서 다수를 차

지했더라면그들은 당연히 유대인들의 선거권을박탈했을것이다. 하지

만 그와는 반대로 다수당이 되는 데 실패하자 유대인의 권리를 부분적

으로 제한하는 것에그치고 만다. 하지만 이러한 다소유화적인 태도가

나치당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아니었고 나치 내에서 가장극렬 당원

1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박원빈,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고찰 153

2 4 ) Adolf Hittler, Mein Kampf, tans. Ralph Manheim (Boston: Houghton Mifflin,

1971), 65.

2 5 ) Saul Friedländer, Nazi Germany and the Jews: the Years of Persecution 1933-

1939, vol. 1(New York: HarperCollins, 1997), 101-102.

26) 히틀러의 홀로코스트가 우발적인 나치의 폭력 행사가 아닌 좀 더 거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이를 근대성의 종말로 해석하려는 연구가들이 있는

가 하면 또 한편으로 근대 독일 관료주의의 전형으로 이해하려는 해석 또한 상존한

다. 이를위해서는박원빈,“홀로코스트를통해본 근대성의정치철학적고찰,”「사회

와철학」18(2009), 391-416을 참조하라. 27) Barnett, For the Soul of the People, 47.

Page 7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대인 문제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드러난다. 일예로 상당수의 고백교회

지도자들은 공공연히 반유대주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유대인 문

제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지도자라고 해도 그들에게 유대인 문제란 기

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만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백교회진영

의 지도자들 중 극히 일부는 유대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정서적 반감을

극복하고그들을 위해자신의 목숨을 바치기 까지했다.

V I I I. 개신교의고백교회운동

독일 고백교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목회자 위기연합(P f a r-

rernot-bund)은 조상들 중에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나치

에 의해 목사직을 박탈당하거나 체포된 목회자들을 돕기 위해 결성되

었다. 1933년 말에 이르러 목회자위기연합에 가입한 개신교 목회자들

의 회원수는6천명에 이르게 되는데 이 숫자는 당시 나치의 국가교회

에 협력하기로 다짐한 성직자 수의 약 3분의1 가량에 해당하는 규모였

다. 목회자위기연합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마르틴 니묄러

(Martin Niemöller)목사는 결성이유를 다음과 같이밝히고 있다.

본 연합은 교회[의 위기]를 대신 짊어지려 함도 아니요 세상을 뒤흔들

려 함도 아니다…본 연합은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빚을 지고

있기에 우리의 형제들에게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할 뿐 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에 단지 구경꾼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신중한 행보를 취하는 태도는 배신자나 다름없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

면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형제로부터 오는 연대의

확신을 갖지못하기때문이다. 그렇기에우리가 지금행동해야 한다!30)

독일 교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을 것이며 전통적으로 내려온 국가와

교회의 관계도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을 거듭 천명한다.28) 하지만 이러

한 약속은 그가 권좌에 오르는 것이 거의 확실시 되면서부터 거짓이었

음이드러나게된다.

나치는1933년 5월부터 개신교회를 향해 나치에 협력할 것을 요구

하며 독일에는 오직 하나의 국가교회(Reich Kirche), 즉 독일 복음주의

교회만이 존재함을 법령으로 공포한다.29) 주요 요직에 친 나치 인사들

을 임명하기 시작함으로 교회에 대한 당의지배를 강화한다. 나치당 내

에 공식적인 기독교 담당 기구는 없었지만 대부분 개신교인들은 나치

이데올로기에 찬동했으며 특히 민족주의적 기독교에 열광하기까지 했

다. 루드비히 뮬러는 새로 탄생한 나치국가교회의 수장으로 독일기독

교를 국가 사회주의 이념에 적합한 조직으로 만들기 위한 구조 조정에

들어갔다. 국가가 교회의 지배를 강화하는 동안 대다수의 보수적 개신

교인들은 전체주의 국가로부터 교회의 권리를 지켜내고 전통적인 교리

를 수호하는 소극적 형태의 운동을 벌이게 된다. 같은해 9월로 접어들

자 나치는 교회에 대한 지배를 더욱 강화하기 시작하는데 국가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은 어느 누구도 유대인의 피가섞이지 말아야 함을 법으

로 규정하는‘아리안조항’(Aryan paragraph)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개

신교 목사와 그들의 아내는 유대인일 수 없으며 심지어 유대인의 후손

이나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또한 순수한 아리안의 혈통에서 벗어

나기에 교회에 참여할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본격적인 나치의

탄압에 맞서 많은 개신교 목사들은 고백교회 운동을 시작한다. 나치에

대항하는 개신교 목사들의 고백교회 운동은 바르멘 선언을 통해 신학

적으로 구체화되는데 바르멘 선언에 참여한 지도자들이라 할지라도 유

1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박원빈,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고찰 155

28) Tandy McConnel, ed. History in Dispute: The Holocaust, 1933-1945, vol 11. (Far-

mington Hills, MI: Thomson Gale, 2003), 27.

29) 독일 복음주의 교회는 나치 국가교회의 공식 명칭이고 일반적으로는 국가교회로 불

렸다. 30) McConnel, ed. History in Dispute: The Holocaust, 31.

Page 7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자들이 나치의 유대인 정책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꺼려했

던 것과는 달리 바르멘 선언문이 작성되기약 6개월전인1933년 12월

에“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이시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다. 당시 독

일의 반유대주의 정서를 생각하면 매우 용기 있는 설교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바르트는 그의 설교를 듣고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교회의 여신도에게“예수는 유대인이며 그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위해

죽으신 분임을 믿어야 한다. 오늘날 시대의 명령이라고 할 수 있는 유

대인 탄압과 이들에 대한 혹독한 처사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

는 내용의 답장을 쓴다.35) 바르트는 그 다음 해에 독일에 대한 충성서

약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대학의 교수직에서 해직된 후 1935년 자신의

고향인 스위스 바젤로 돌아가 그 곳에서 남은 연구생활을 계속하게 된

다. 스위스로 추방된 이후로도 나치정책에 대한바르트의 저항은 계속

된다. 1938년 5월 이른바 수정의 밤(Kristallnacht)36) 사건 이후 바르트

는“유대인에게 적의를 품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해야

하며 반유대주의는 성령을 반하는 죄”임을 밝힌다.37) 바르트의 이러한

신학적 입장과 정치적 행보는 독일의 저명한 학자들 대다수가 나치의

정치적 권력 앞에 암묵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찬성했다는 점을 고려

해 본다면 더욱 가치 있는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38) 하지만 나치의

위의 창립선언문에서 목회자위기연합이 나치의 기독교 정책에 간접

적으로나마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교회 내에

서 세례받은“비-아리안”사람들에 대한 문제는 커다란 입장 차이를 발

견할 수 있다. 즉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한 경우 이들을 교회의 일원

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교회 리더들 간에 이견이 있었다. 또

한 고백교회 지도자 대부분 교회에 대한 나치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것

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지만 히틀러가 내세운 아리안 민족주의에 호

감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에 나치 정권에 대한 문제제기는

없었다.31)

고백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신학 선언문은1934년 5월에 작성된 바

르멘 선언이다. 이 문서는 국가의 특별한 명령과 교회의 교리가 변질될

경우 인간 삶을 위협하는“전체주의적 질서”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면

서 교회는“국가의 조직”이 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32) 하지만 이 문

서에서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나치 정권에 대

한 비판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독일의 정치적 상황에서 바르멘 선

언은 독일 개신교 지도자들이 보여준 몇 안되는 매우 귀중한 신학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유대인 문제에 있어서 많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33) 바르멘 선언의 참여자인 칼 바르트는 후에 본회퍼 연구가인 에

버하르트 베트게(Eberhard Bethge)에게 보낸 1967년의 한 편지에서

자신이 바르멘 선언에“유대인 문제를 중심부에 놓치 못한 것에 대해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34) 바트트는 대부분의 신학

1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박원빈,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고찰 157

31) 히틀러의 국가 지도자로서의 자격(legitimacy)에 대한 문제 제기는 본회퍼 목사 이

외는 찾아보기 어렵다. 고백교회 내 반유대주의에 대한 다양한 입장에 대해서는

Shelley Baranowski, “The Confessing Church and Antisemitism: Protestant

Identity, German Nationhood, and the Exclusion of the Jews,” Betrayal: German

Churches and the Holocaust (Minneapolis: Fortress, 1999), 90-109를 참조하라.

32) J. S. Conway, The Nazi Persecution of the Churches (Toronto: Regent College

Publishing, 2001), 84.

33) Barnett, For the Soul of the People, 55.

3 4 ) Eberhard Bethge, “Troubled Self-Interpretation and Uncertain Reception in the

German Church Struggle,” The German Church Struggle and the Holocaust

(Detroit: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973), 167.

3 5 ) Eberhard Busch, Karl Barth: His Life from Letters and Autobiographical Texts

(Philadelphia: Fortress, 1976), 235.

36) 나치가 독일 전역에서 유례없이 유대인 탄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폭력과 테러를

일컫는 말로 나치는 유대인 상점을 무단으로 침입하여 유리창들을 부수었다. 깨친

유리조각들이빛나는 것이마치수정같다는의미로‘수정의 밤’이라고부른다. 위스

트리치, 『히틀러와홀로코스트』, 107 참조.

37) Busch, Karl Barth, 290.

38) 바르트의 저항이 갖는 신학적 의의에 대해 보다 자세한 논의는Barnett, For the

Soul of the People, 47-50을 참조하라.

Page 8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Friedrich Weissler)의 손을 거쳐 에른스트 틸리히(Ernst Tillich)에게

전달된다. 틸리히는 그 사본을 다시 복사하여 베르너 코흐( W e r n e r

Koch)에게 전달하였고 코흐에 의해서 마침내 비망록이 공개된다. 문서

가 외국언론에 공개되고난 후 틸리히, 코흐, 바이슬러모두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고 틸리히와 코흐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바이슬러

는 혹독한 고문으로1937년 작센하우젠(Sachsenhausen)에서 숨을 거

두게 되는데 그가 유대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고백교회 최초의 순교

자이다.41)

IX: 결론: 신학과정치의충돌현장에서

1차 대전 후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은 독일인의 상처난 자존심을 회

복시켜 주었다. 아리안 민족주의를 발판으로 삼아유대인과 그 밖의타

자들42)을 향한 정서상의 혐오를 한 단계 끌어올려 모든 갈등의 원인으

로 정치 프로그램화하는데성공한 나치와 히틀러는 홀로코스트라는비

극을 역사 속에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마지막 청소(Die

Endlösung)라고불렀던홀로코스트의 주된원인이2차 대전을 전 후한

유럽의 특수한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뿐 만 아니라 문제의 핵심엔 반

유대주의라는 신학적 이유가 내재해 있다는 사실은 홀로코스트 이후

신학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홀로코스트 이후생존자들은기

독교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질문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하나님 이해, 신정론, 구원론, 종교 간

의 대화등의 주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반유대주의 정책에 대한 바르트의 신랄한 비판은 독일 사회내에 의미

있는반향을 일으키기에역부족이었다는것은매우안타까운사실이다.

바르트만큼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백교회 인사 중 베를린에 있는 신

학교 학장이었던 하인리히 그뤼버(Heinrich Grüber)는 자신의 사무실

을 통해 유대인들을 나치 몰래 이주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1938년

부터 시작된 유대인 비밀 탈출 작전은 주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에게 국한되었지만 후에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유대인 모두에게 도움

의 손을 내밀었다. 독일 비밀경찰인 게슈타포가 사무실을 강제로 폐쇄

하기 전인 1 9 4 0년 1 2월까지 이곳 사무실을 통해 무려 1 7 0 0명에서

2000천 여 명의 유대인이 국외로 빠져 나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뤼버는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던35명의 동료와 함께1940년 체포되

어 다카우(Dachau)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그뤼버를 포함하여단지12명

만 생존하게 된다.39)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고백교회의 지도자는 앞서 언급한 마르틴

니묄러 목사이다. 1936년 4월 니묄러 목사가 주축이 되어10명의 고백

교회 지도자들은 히틀러에 대한 장문의 비망록을 작성한다. 이 비방록

은 바르멘 선언의 내용을 뛰어넘는 것으로“반유대주의가 나치 국가사

회주의자들의 척도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유대인을 증오하도록 강요할

때 이웃 사랑에 대한 기독교적 권고는 여전히 유대인들을 위해 유효하

다”고 밝히고 있다.40) 이 문서는 나치의 강제수용소, 비밀경찰 제도와

그 밖의 타자에 대한 나치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반유대주의 정책에

대한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더 나아가 유대인도 사랑해야 할 이웃임을

밝혔다는 점에서 그 신학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니묄러 목사는 비

망록을 완성한 후 비공개를 원칙으로3개의 사본만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유대인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프리드리히 바이슬러

1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박원빈,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고찰 159

39) Richard Rubenstein, After Auschwitz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4), 3-13.

40) Barnett, For the Soul of the People, 83-85.

41) Rubenstein, Approaches to Auschwitz, 262.

42) 여기에는집시, 여호와의 증인들, 장애인, 어린이등이 포함된다.

Page 8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2차 대전 중에 벌어진 인류 최대의 참사 중 하나로 기억될 홀로코

스트를 통해 오늘날 신학은 타자의 음성과 고통에 민감해야 함을 깨닫

게 된다. 타자를 위한 신학이란 우리의 삶의자리가 끊임없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짐을 기억하고 우리 안에 있는 자아의 장벽을 무너

뜨리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내러티브를 끊임없이 계발(啓發)함을

통해 완성된다. 타자의 얼굴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얼굴로만 드러

나는 것이 아니라 때론 권력과 심지어 신성까지 겸비한 뿌리치기 어려

운 치명적인 악마의 얼굴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악의 힘은 조직적

인 폭력을 통해 나보다 더 약한 자의 소유를 박탈하고 자신의 행위를

끊임없이신학적으로정당화하려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타자신학은이

러한 악의 음모를 드러내기 위해 폭력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기억을

구체화하는 동시에 아직도 우리안에남아 있는 폭력적 경향성에 민감

하게반응하며 이를제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자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나를 개방하여 타자에로 나아가는 내러

티브를 구성하는데 있어 도움이 되는중요한 출발은 바로 타자의 고통

을 바르게 기억하는 것이다. 가해자를 무턱대고 용서하는 것도 아니고

가해자가 행한 악행을 망각하는 것도 바른 용서의 출발이라 할 수 없

다. 참된용서는 가해자의행위를 온전히기억함을통해출발한다. 폭력

으로 희생당한 사람에게 가해자가 준 고통을 기억해 내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런 경험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을 통해 피해자는 폭력을 행사

한 사람을 향한 분노를 넘어 용서로 나가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고 그

러한 기억을 통해 우리 자신에 내재한 동물적 폭력성을 다시 반성할

기회를 마련한다.4 4 ) 이런 점에서 노벨상 수상자인 엘리 비젤( E l i e

Wiesel)의 연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그는 1987년 독일의 라

1. 유럽의 기독교 국가에서 가장 반 기독교적 방법으로 행해진 대량학

살 사건에 대해기독교인들은과연 진지하게 신학적인 성찰을 해 보

았는가?

2. 기독교가 유대교의 뿌리에서 나온 종교이며 양자 간 최소한 유사성

이 존재한다고 할 때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몸소겪으며 생존한 사람

들에게 기독교인이되라고 말할수 있을까?

3.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홀로코스트를 겪고 생존

한 유대인들에게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

4. 홀로코스트를 기독교 구원사적 관점에서 벌어진 필연적인 과정이었

다고설명할 수 있을까?

호흡곤란 증상을 느낄 정도로 위의 질문들은 기독교인들을 당혹하

게 만든다.“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이웃의

범주에도 들지 못했던 전적 타자인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

었다. 앞의 논의에서 유럽역사의 반유대주의는 신학적 뿌리를 두고 진

행되어 온 것임을 밝혔다. 타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기독교가 오히

려 타자에 대한 탄압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며 일부는 동조했다는 사

실은 우리로 하여금 신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청한

다. 정치 권력과 그 정치 권력이 타자에 대해 휘두르는 폭력을 신학적

으로 뒷받침할 때 벌어진 지난 세기의 비극은 오늘날 우리 주변의 타

자에 대한 배려와 성찰이 없다면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43) 홀로코스트를 정치와 신학이 충돌했던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충돌의 현장에서 신학은 정치에 철저히 종속화되었고 나치

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뒷받침하는 도구에 불과하였다.

1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박원빈,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 고찰 161

43) 우리는 지금이라도 한국사회에서 들려오는 타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주

노동자, 성적 소수자, 장애우, 북한 탈북자들, 다문화가정의 자녀들과 배우자들의 목

소리를 기독교인들이 가슴으로 듣고 윤리적으로 응답하지 못한다면 홀로코스트의

유대인들이 기독인들에게 했던“당신들의하나님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을것이다.

44) Miloslav Voff는 폭력의 가해자를 향해 용서와 화해로 나아갈 때 피해자의 기억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매우 진지한 신학적인 성찰을 진행

하고 있다. The End of Memory: Remembering Rightly in a Violent World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2006)을 참조하라.

Page 8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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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히스태그(Reichstag)에서 열린 수정의 밤 50주년 행사에 초대되어

다음과 같이말했다.

우리는아우슈비츠를기억합니다. 또한 아우슈비츠가상징하는모든 것

을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지난날 모든 공포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구원

받을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대속(redemption)과 같이

오직기억(memory) 속에서 발견될수 있습니다.45)

그가말하는 구원을 가능케 하는 기억이란 바로믿음을 말한다. 믿음

은 폭력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모든 사람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세상

의 만연한 폭력을 제거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홀로코스트 생존

자들이 자신들의 고통스런 기억과 경험을 믿음을 통해한 차원 높은단

계로 승화시키는것을 보며우리 삶의고통의 현장에 함께하셨던 하나

님의 자취를 바라보는믿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 믿음의 자취는 우리

가 쌓아놓은 높고 튼튼한 동질성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타자를 향해 나

를 얼마나 개방할 수 있는가를 통해 판가름 날 것이다. 내 주위에 있는

‘지극히 작은 타자’를 향한 사랑을 통해 우리는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

는 하나님나라공동체의 초석에 한 걸음더 다가갈 수 있을것이다.

주제어

홀로코스트, 반유대주의, 독일교회, 고백교회, 정치, 교회와국가

The Holocaust, anti-Semitism, German Church, Confessing Church,

Politics, and church and the state.

접 수 일 2010년 7월 6일

심사(수정일) 2010년 8월 11일

게재확정일 2010년 8월 15일

1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박원빈,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고찰 163

45) Eile Wiesel, From the Kingdom of Memory: Reminiscences (New York: Summit,

1990), 201.

Page 8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 Historical Reflection on Anti-Semitism:Focusing on Accepting Others of German Church

in the Second World War

Won-bin Park

Full-time Lecturer

Namseoul University

Cheonan, Korea

This article focuses on how German Church receives others during

the World War I I. ‘Others’ in Germany during the World War II refer

to the Jewish, non-Christians, Gypsy, and the handicap, but I want to

focus the status and changes of Jewish people. Though many

Holocaust scholars have explored causes of this tragic events, my

study aims at the politico-religious dimension which makes this

tragedy possible. The Holocaust is not only a Hitler’s and Nazi’s

political agenda, but also a projection of most European anti-Semit-

ism. In speaking of anti-Semitism, it begins with history of Chris-

tianity. In this paper, I briefly sketch the history of anti-semitism in

the Christianity. Adolf Hitler knows that how this simple prejudice

can galvanize for his political agenda. It is a very interesting point

that even though many European Christian leaders have rejected

Hitler’s political radicalness, they are welcoming Hitler’s anti-

semitism. In exploring relationship between Church and the State, I

focus on how German church reacts Hitler’s policy towards Jewish

people. Most German Christian without distinction their denomina-

tions, explicitly support Histler’s policy of anti-semitism, but a few

Christian leaders boldly rejects Nazi’s policy. Finally, I reflect 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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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박원빈, 반유대주의에대한역사적고찰 165

Page 8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1)

백충현(장신대, 숭실대강사)

I. 서론

발전하는 현대과학의 세계관의 영향과 자극을 받아 등장한 신학들

중의하나가 과정신학이다. 이러한 과정신학에서는기존의 기독교의전

통적인 교리인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수용하고 변형하고 발전시켜왔는

지를 고찰함으로써, 미래의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해 신학이 어떻게 반

응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하나의 귀중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

다. 이 논문에서는 과정신학이 삼위일체론을, 특히경륜적-내재적 삼위

일체 관계라는 현대 삼위일체 신학의 쟁점에 관하여 어떻게 반응하여

왔고어떠한 입장들을 드러내고있는지를 윌리엄 노만피턴저(William

Norman Pittenger), 마조리 휴잇 수코키(Marjorie Hewitt Suchocki),

조셉브라켄(Joseph A. Bracken)을 중심으로살펴보고자 한다.

과정신학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kind of relationships between church and the state should be desirable

based on the lesson from the Holocaust.

1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167-206

1) 이 논문은2010년 4월 24일(토)에 개최된 제5회 한국조직신학자전국대회의제3분과

(철학, 인간학, 종교철학등)에서발표된논문을 다듬은것입니다.

Page 8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신의 양극적 구조라는 개념에 크게 영향을 받은 과정신학자들은 세

상에대한 신의초월성(the transcendence of God to the world)과 세상

속에 있는 신의 내재성(the immanence of God in the world)과의 관계

에 주된관심을 두었으며, 신의 내적인 구별들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룬

다. 그래서 쟌 캅(John B. Cobb, Jr.)이 인정하듯이,“과정신학은 전통적

인 삼위일체의 개념들에 부합하기 위하여 신의 내적인 구별들을 정식

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6) 캅 자신은 화이트헤드의 양극성

구조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아서 신의 창조적 사랑(the creative love

of God)과 신의 반응적 사랑(the responsive love of God)을 구별한다.

그리고 캅은 이와 같은 구별이 가장 우선적이고중요한 구별이라고 주

장한다. 게다가, 캅은 이위일체(the Binity), 사위일체(the Quaternity),

또는 오위일체( the Quintity)를 제안함으로써 삼위일체 개념을 상대화

하기까지 한다.7) 예를 들면, 이위일체와 관련하여 캅은 세상에 대한 신

의 초월성과 세상 내에서의 신의 내재성과의 구별은 이위일체를 의미

한다고 주장하며, 이위일체가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실재

( 1 8 6 1-1 9 4 7 )의“유기철학(Philosophy of Organism)”2 )과 찰스 핫숀

(Charles Hartshorne)(1897-2 0 0 0 )의“초상대주의( S u r r e l a t i v i s m ) ”3 )와

같은철학적 저작들로부터 강한영향을 받았다. 이 둘 사이에는 차이점

이 있지만, 공통된입장이 많기에 과정철학으로 널리알려져 왔다. 이들

의 신관이 지니는 두드러진 특징은 신의 본성의 양극성 구조( t h e

dipolar structure of God’s nature)에 대한 이해이며, 이것은 기존의 고

전적인 신의 무감동성(impassibility)이라는 개념을 극복하고 신과 세

상과의 관계를 이어주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신의 원

초적 본성(the primordial nature of God)과 신의 결과적 본성( t h e

consequent nature of God)을 구별한다.4) 핫숀은 신의 추상적 본질(the

abstract essence of God)과 신의 구체적 현실(the concrete actuality of

God)로 신의양극성을구분한다.5)

1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69

2) 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An Essay in Cosmology (New York:

Macmillan, 1929), v. 이후로는 Process and Reality로 표기함. 이 책은 1927-1928년

에 에딘버러대학교에서행하였던기포드 강연에토대를 둔다.

3) Charles Hartshorne, The Divine Relativity: A Social Concept of Go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48), v i i. 삼위일체에 관하여 핫숀은 삼위일체론은완전한 인

격들 사이에서의 사회적 관계를 제공할 수 있다고 지나가는 말로 언급하면서도 막상

자신은 삼위일체론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The Trinity is supposed to meet the requirements of giving God an object of love

which yet agrees with his absolute self-sufficiency, and also an object of love

‘worthy ’to be loved with so perfect a love as the divine. This is done by making the

lover and the beloved identical - yet not identical. But whatever be the truth of this

idea - whose meaning seems to me just as problematic as its truth, for once more,

nonsense is only nonsense, however you put a halo around it - it leaves the essential

problem of divine love unsolved.” Hartshorne, Man’s Vision of God and the Logic

of Theism (Chicago: Willett, Clark & Company,1941), 26 and 164.

4)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521-524.

5 ) John B. Cobb, Jr. and David Ray Griffin, Process Theology: An Introductory

Exposition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76), 47. 이후로는 Process

Theology로 표기함. Gregory A. Boyd, Trinity and Process: A Critical Evaluation

and Reconstruction of Hartshorne’s Di-Polar Theism Towards a Trinitarian Meta-

physics (New York: Peter Lang, 1992), 205. 여기에서 보이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다:“This, in a nutshell, is the neoclassical understanding of God’s di-polarity. What

is abstract is what must necessarily characterize God’s actuality whatever actual

divine state is being exemplified. What is concrete is the particular way this abstract

character is being contingently exemplified at a given moment.”

6) John B. Cobb, Jr. and David Ray Griffin, Process Theology, 110.

7) John B. Cobb, Jr., “Relativization of the Trinity, ”in Trinity in Process: A Relational

Theology of God, eds. Joseph A. Bracken and Marjorie Hewitt Suchocki (New

York : Continuum, 1997), 21, 이후로Trinity in Process로 표기함. 여기에서 캅은 다

음과같이진술한다: “We can analyze our doctrine of God into three elements as has

been traditionally done, or into two. We could also use a fourfold distinction as one

text in Whitehead suggests: The Primordial Nature, the Superject of the Primordial

Nature, the Consequent Nature, and the Superject of the Consequent Nature. This

could be translated easily into theological language. We could then, if we wished,

add a fifth name for what unites all these.”

Page 8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휴잇 수코키(Marjorie Hewitt Suchocki),1 4 ) 윌리엄 파워(William L.

Power),15) 그레고리 보이드(Gregory A. Boyd)16)는 과정신학의 틀 내에

서 신적 실재의 삼중적 구조를 포착하려고 함으로써 삼위일체 탐구를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한다.17) 예를 들면, 포드는 화이트헤드의신관

적이라고 주장한다. 전자는 신의본성을 고려하는관점에서 실재적이며

후자는 인간에 의한신의인식의 관점에서실재적이다.8)

이와는 반대로, 몇몇 과정신학자들은 비록 상호간에 다소 차이점들

이 있지만 과정신학의 틀 안에서 삼위일체론을 해명하려고 시도한다.9)

윌리엄 노만 피턴저(William Norman Pittenger)는 1967년도 책인『과

정 중에 계신 하나님』(God in Process)?10)에서 그리고 1977년도 책인

『하나님의 삼위일체』(The Divine Triunity)?11)에서 과정신학과 관련하

여 삼위일체에 대한충분히 역사적 체계적 이해를 제시한다. 그리고 조

셉 브라켄(Joseph A. Bracken),12) 루이스 포드(Lewis Ford),13) 마조리

1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71

8) Cobb, “Relativization of the Trinity,” 12.

9) 중대한 책인Trinity in Process: A Relational Theology of God는 9명의다른과정신

학자들이 쓴 9개의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공동 편집자들 중의 한 사람인 수코키

는 자신도 놀랍게도 이 책에는9개의 매우 다른 삼위일체 이해들이 있음을 인정한

다. Suchocki, “God, Trinity, Process,” Dialog: A Journal of Theology Vol. 40

No.3 (Fall 2001), 173.

10) William Norman Pittenger, God in Process (London: SCM Press, 1967).

11) William Norman Pittenger, The Divine Triunity (Philadelphia: United Church

Press, 1977). 피턴저는“trinity”라는 용어 대신에“triunity”라는 말을 사용한다. 왜

냐하면 “trinity”라는 용어가 삼신론적인 견해를,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또는

말씀,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삼신론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그는 판

단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trinity”라는용어는 삼위성과 일치성을 동시에 언급할수

있기에 신적본성안에있는풍성한 복잡성과충만성을더 잘 가리킨다고그는 주장

한다.

12) Joseph A. Bracken, “The Holy Trinity as a Community of Divine Persons I,” The

Heythrop Journal: A Quarterly Review of Philosophy and Theology vol. 15 No.2

(April 1974): 166-182. 이후로“The Holy Trinity I”로 표기함. “The Holy Trinity as

a Community of Divine Persons II”, The Heythrop Journal: A Quarterly Review of

Philosophy and Theology vol. 15 No.3 (July 1974): 257-270. 이후로 “The Holy

TrinityII”로 표기함. What Are They Saying about the Trinity? (New York: Paulist

Press, 1979); The Triune Symbol: Persons, Process and Community( L a n h a m :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5), 이후로 The Triune Symbol로 표기함. “Process

Perspectives and Trinitarian Theology,” Word & Spirit - A Monastic Review 8:

Process Theology and the Christian Doctrine of God, ed. Santiago Sia (Petersham:

St. Bede’s Publications, 1986), 51-64; Society and Spirit: A Trinitarian Cosmo-

logy (Selingsgrove: Susquehanna University Press, 1991); “Panentheism from a

Trinitarian Perspective” Horizons vol.22 No.1 (Spring 1995): 7-28; “Panentheism

from a Process Perspective,” in Trinity in Process, 9 5-113; “Trinity: Economic

And Immanent,” Horizons vol. 25 No.1 (1998): 7-22.

13) Lewis Ford, “Process Trinitarianism,”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

gion vol. 43 No.2 (June 1975): 199-213. 이 논문은 그의 책에 포함되어 있다. The

Lure of God: A Biblical Background for Process Theism(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8), 99-111; “A Naturalistic Trinity” in Trinity in Process, 2 3-4 0 .

“Contingent Trinitarianism,” in Trinity in Process, 41-68.

1 4 ) Marjorie Hewitt Suchocki, G o d-C h r i s t-Church: A Practical Guide to Process

Theo-logy (New York: Crossroad, 1982). 1989년도 새개정판은 제목이 다음과 같

다. God, Christ, Church: A Practical Guide to Process Theology (New Revised

Edition) (New York: Crossroad, 1989). 이후로 God, Christ, Church로 표기함.

“John Cobb’s Trinity: Implication for the University,” in Theology and the

University: Essays in Honor of John B. Cobb, Jr., eds. David Ray Griffin and

Joseph C. Hough, Jr.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1): 148-

165; “Sunyata, Trinity, and Community,” in Divine Emptiness and Historical

Fullness, ed. Christopher Ives (Valley Forge: Trinity PressInternational, 1995):

136-149; “Spirit in and through the World,” in Trinity in Process, 173-190. 이 논

문은 쟌 캅의 삼위일체에 관한 그의 1 9 9 1년도 논문을 확장한 것이다. “God,

Trinity, Process,” Dialog: A Journal of Theology vol. 40 No.3 (Fall 2001): 169-

174. 이후로 “God, Trinity, Process”로 표기함.

15) William L. Power, “The Doctrine of the Trinity and Whitehead’s Metaphysics,”

Encounter vol. 45 No.4 (Fall 1984): 287-302.

16) Gregory A. Boyd, Trinity and Process: A Critical Evaluation and Reconstruction

of Hartshorne’s Di-Polar Theism Towards a Trinitarian Metaphysics (New York:

Peter Lang, 1992). 이 책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 토대를 두고 있다. “The A Priori

Construction of the Doctrine of God in the Philosophy of Charles Hartshorne: A

Page 8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 I. 내재적-경륜적삼위일체관계에관한각각의입장

1. 피턴저:팔레스타인삼위일체보다훨씬더큼(much more than)

피턴저는1967년도 책인『과정 중에 계신 하나님』(God in Process)

3장“성령과 하나님의 삼위일체”에서 단초적으로, 그리고1977년도 책

인『하나님의 삼위일체』(The Divine Triunity)21)에서는 좀더 종합적으로

삼위일체론을 과정신학의 틀로 이해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피턴저는

다른 삼위일체론적 과정신학자들과는 달리 신의 삼중적 구조를 신의

원초적 본성과 신의 결과적 본성으로부터 추론해내지 않는다. 전자를

성부로, 후자를 말씀인 성자 혹은성령으로 일컫는 것은어리석은 일이

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신의 전체적 구체적 현실

에 적용되는용어들이기때문이다. 피턴저는다음과 같이진술한다.

삼위일체적 사상이 언급하곤 하는 신적 존재와 신적 활동의 세 양태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신성의 이 두“측면들(aspects)”에게로 구체적으로

돌리는 것은선뜻이해가 되지않는다.22)

대신에, 피턴저는 신의 실재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 호소하여 신의

삼중적 구조를 주장한다. 그는신의 실재에 대한인간의 경험은 필연적

으로 삼중적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단지 둘이 아닌 세 가

지 면들, 양식들, 혹은 방식들,”즉“신의 초월성(divine transcendence)”,

“신의 내재성(divine immanence)”, “신의 공존성(divine concomi-

tance)”이 있기 때문이다. 피턴저에게 신의 공존성은 성육신을 대등하

게 가리키는 용어이다. 달리 표현하면, 피턴져는 신의 실재의 세 가지

측면들을 각각“자신 안에 계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세상 안에서

의 삼중구조, 즉 신의창조적 행위(the divine creative act), 신의원초적

본성(the primordial nature), 신의 결과적 본성(the consequent nature)

을 포착한다.18) 수코키는 과정신학은 신을 삼중적인 방식으로, 즉 원초

적 본성(the primordial nature), 결과적 본성(the consequent nature),

(the superjective nature)로 이해한다고 주장한다.19) 그리고 파워는 성

부는 신의 원초적 본성(the primordial nature of God), 성자는 영원한

대상들(the eternal objects), 성령은 신의 결과적 본성(the consequent

nature of God)을 가리킨다고 제안한다.20)

피턴저, 브라켄, 수코키는 더 나아가서 내재적 삼위일체(the im-

manent Trinity)와 경륜적 삼위일체(the economic Trinity)와의 관계를

충분하게 논의하고 있기때문에, 이 논문에서는이들세 사람을 집중적

으로 다룬다. 먼저,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관한 각각의 입장

을 정리할 것이며, 다음으로 각각의 입장을 인식론과 존재론이라는 관

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이들은 모두 과정신학의 틀로써 삼

위일체 신학을 전개하고 있지만,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관해

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제시하는데, 이 논문에서는 어떻게 각각 다른

입장을 제시하게되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1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73

Critical Examination and Reconstruction of Di-Polar Theism Twoards a Trini-

tarian Metaphysics,” (Ph.D. diss.,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1988); “The

S e l f-Sufficient Sociality of God: A Trinitarian Revision of Hartshorne’s

Metaphysics,” in Trinity in Process, 73-94.

17) Dorothy Mary Emmet (1904-2000). 맨체스터 대학교의 철학자로서1932년도의 책

에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있는 신적 실재의 삼중적 구조에 관심을 불러일으켰

다. 그리고 창조성, 하나님의원초적 본성, 하나님의 결과적 본성은 성부의 창조적 권

능, 로고스, 성령에 각각 유비적이라고 제안하였다. 2판은1966년도에 동일한 출판사

에 의하여 동일한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Emmet, Whitehead’s Philosophy of

Organism (London: Macmillan, 1966), 253-255.

18) Ford, “Process Trinitarianism,” 200 and 205.

19) Suchocki, God, Christ, Church, 215.

20) Power, “The Doctrine of the Trinity and Whitehead’s Metaphysics,” 296.

21) Pittenger, God in Process, 40-51.

22) Pittenger, The Divine Triunity, 113-114.

Page 8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 중심에 있는 영원한 성부, 영원한 말씀, 영원한 성령을 가리키며, 경

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우리의 삼중적 경험에 있는성

부, 말씀, 성령을 가리킨다. 눈에 두드러지게 뜨이는 점은, 피턴저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

적 삼위일체를 구분하는경계선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피턴저는 어떻게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연결하고 있는가? 더 구체적으로, 그는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

일체에 상응하고 있음을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가? 그에따르면, 초대교

회의 기독교인들은 하나의 유일한 하나님을“신적 실재(the divine

Reality)”라고주장하였다.27) 그리고 그들은 처음에는예수를 선생과 스

승으로 인식하였는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면서 예수를 하나님

의 나라를 세운 메시야 또는 하나님의 최고의 대표자로 부르기 시작하

였다. 다음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

하셨다고 고백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유대교 사상과 그리스 사상에

근거하여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말씀이라고 일컬었다. 하나님의 말씀

이란신적 실재의“자기-표현(Self-Expression)”28)임을 의미하고, 또는

하나님께서 집중적이고 결정적으로 현존해있는“신적 활동(the Divine

Activity)”,29) 또는“신적 행동(the divine Action)”30)임을의미하였다. 그

리고 동시에 그들은 성령을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예수

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의 신적 행동에 반응하도록 해주는“신적 반응

(the divine Response)”31)으로이해하였다.

피턴저의 판단에 따르면, 엄격하게 단일신론자이었던 초대교회의 기

독교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삼중적인 경험이 삼신론을 의미할 수는 없

행동하시는 또는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는 분으로서의하나님”,“하나님

의 행동과 계시에 대하여 적절하게 반응하거나 대답하도록 세상을 이

끄시고 가능케 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본다.23) 그런

후에 첫 번째 측면을 성부하나님으로, 두 번째양식을 성령으로, 세 번

째 방식을 로고스 또는 말씀으로 여긴다.24) 피턴저는 이와 같은 삼중적

경험이 삼위일체론정식의 자료가 된다고 주장한다.25)

이처럼 삼위일체론을 현저하고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턴져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와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암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다. 즉 내재적 삼위일체

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에는 상응의 관계(a corresponding relation)이

있으나,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보다 훨씬 더 크다라는 입

장을드러낸다. 그의입장은 다음과 같은구절에서 드러난다.

그런즉 영원한 성부, 영원한 성자 또는 말씀, 영원한 성령은 인간이 경

험하는 것보다 더 크다; 하나님의 삶 그 자체의 심연 속에는, 하나님의

실재의 바로 그 중심에는삼중성이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활동에 대

한 인간경험 안에있는삼중성에 상응한다.26)

여기에서 피턴저는 내재적 삼위일체란 하나님의 실재의 심연 속에

있는 삼중성이며 경륜적 삼위일체란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인간 경험

속에 있는삼중성이라고암시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실재의

1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 반응들 175

23) Pittenger, The Divine Triunity, 6 9-70. 이 점에 관하여 피턴저는 시릴 리차드손

(Cyril C. Richardson)의 결론을 비판한다. 즉리차드손은 신성 안에 필연적인 삼위

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은인공적 구조물이라고 결론을 내린

다. 왜냐하면 신성은 일차적으로 이중적인 구별, 즉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과 하나

님의 친밀한 내재성 두 가지를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Cyril C. Richardson, The

Doctrine of the Trinity (New York: Abingdon Press, 1958), 146-148.

24) Pittenger, The Divine Triunity, 76.

25) Pittenger, The Divine Triunity, 101.

26) Pittenger, God in Process, 48.

27) Pittenger, God in Process, 15.

28) Pittenger, God in Process, 20-21.

29) Pittenger, God in Process, 24.

30) Pittenger, God in Process, 42.

31) Pittenger, God in Process, 43.

Page 8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데, 그에게서 상응이란 양자사이의 어떤느슨한 관계를 암시하는것

처럼보인다.

이와 같은 세심한 관찰은 위에서 언급한 피턴저의 입장, 즉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보다더 크다라는 입장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점은그의 일관된 주장, 즉 내재적 삼위일체는 초대교회의기독교인

들이 경험한“팔레스타인 삼위일체(the Palestinian Trinity)”34)에 한정

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도 뒷받침된다. 피턴저에 따르면, 신적 실재는

소진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신적 실재로서의 하나님은 창조계에 초월

적이며, 하나님은창조계 속에서 만물을 통하여활동하신다는 의미에서

세계 속에 내재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적 실재는 신적 행동과 신적

반응을 통하여 세계 속에서 활동한다.35) 예수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말씀은 신적 실재의 자기-표현으로서의 신적 행동이다. 그러나 신적

행동은 예수에게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집중적으로,

최고로, 결정적으로 행동하신다. 그러나 신적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라

는 역사적 인물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36) 마찬가지로, 성령은 초대교회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예수 안에서 드러난 신적 행동에 반응하도록 도

와주는 신적반응이다. 그러나 신적 반응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성령으

로 국한되지않는다.37)

었다. 더욱이, 이러한 경험들이 단순히 신적 실재의 일시적인 면들만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에게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

은 삼중적인 경험은 양태론을 의미할 수도 없었다.32) 이러한 점에서, 피

턴저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구별을, 그리고 양자 사

이의어떤상응하는관계를 주장하고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창조 속에서 활동하시는 방식이 하나님 자신

의 내적인 모습을 진정으로 계시한다면, 창조세계 속에서 알려지는 성

부, 말씀 또는 성자, 성령과, 하나님 자신의 바로 그 실재와의 사이에는

어떤상응관계(correspondence)가 필연적으로존재해야 한다고 주장된

다. 이 점을 형식적인 말로 표현하면, 삼위일체(the Triunity)는“경륜적

(economic)”일 뿐만 아니라, 즉 신적 기능들 혹은 활동들의 문제일 뿐

만 아니라, 신적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본질적(essential)”인 것이다.

즉 어떤존재론적토대를가져야만한다.33)

여기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는 창조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의 방식

과 관련이 있으며, 반면에 본질적 삼위일체(the essential Trinity), 즉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참된 실재의 방식과 연관된다. 경륜적 삼

위일체는 세상속에서 경험되어지고알려진 삼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

일체는 신적존재그 자체 속에존재하는 삼위일체이다. 그리고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양자 사이에는 어떤 상응의 관계가 존재

한다. 왜냐하면 세상속에서의 신적활동의 방식이 신적 실재의 방식을

참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를드러

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론적 근거이다. 그러

나, 피턴저는 양자의 관계가 동일성의 관계라고 주장하는 데까지는 나

아가지 않는다. 그 대신에 피턴저는 어떤 상응의 관계가 있다고 언급하

1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77

32) Pittenger, God in Process, 47.

33) Pittenger, The Divine Triunity, 39.

34) Pittenger, God in Process, 48.

35) Pittenger, God in Process, 17.

36) Pittenger, God in Process, 19-20; Pittenger, The Divine Triunity, 43-44 and 112.

여기에서 피턴저는 두 종류의 신학적 실수를 피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하나는 말씀

으로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기독교 공동체에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한정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저런 계기들에서만배타적으

로 인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피턴저는 첫 번째 실수를“기독론적인 오류

(Christological error)”라고 명명하여 하나님의 말씀 또는 신적 행동을 전적으로 성

자로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자

를 주의깊게 구별할 것을 제안하며, 하나님의 성자는 하나님의 성육하신 말씀에 적

용하는것이더 적절하다고 제안한다.

37) Pittenger, God in Process, 47.

Page 9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에 출판한 삼위일체적 우주론(the Trinitarian cosmology)에 관한 책에

서 브라켄은 더 나아가서 신-세상의 관계를 자기장 중심형의 관점에

서 이해할 것(a field-oriented understanding of the God-world rela-

tionship)을 제안한다.41) 이후의 여러 논문들에서 그는과정신학적 범재

신론과 관련하여 삼위일체 이해를 추구해오고 있다.42) 마지막으로, 그의

1 9 9 8년 논문, “삼위일체: 경륜적 그리고 내재적(Trinity: Economic

And Immanent)”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와의 관계를

충분히 다룬다.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브라켄은 다

음과같은결론에 도달한다.

삼위일체를“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God for us)” 으로 재인식하려고

시도할 때에 우리는 내재적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지니는 방법론적 중

요성을 상실하지 말아야한다. 아무리불완전하고임시적으로이해된다

고 하더라도, 내재적 삼위일체라는 개념은…경륜적 삼위일체 혹은“우

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한 객관적인 준거점을 보증해주

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개념이다.43)

여기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는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God for us)를

가리키며, 반면에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자신으로서의 하나님(God

in Godself)를 가리킨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구원의 경륜 속에 있는 창

그러므로, 한편으로, 피턴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드러난 신적실재

의 집중적 현시를 통하여 세상 속에서 드러난 보편적 편재적 신적 행

동을 보도록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으며,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드러난 신적 반응의 집중적 계기를 통하여 창조계에서 드러난 편재적

포괄적 신적 반응을 인식하도록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

로, 피턴저는 우리가 신적 본성의 내적 활동에 관하여 완전한 지식을

소유할 수 없음을 제안하며 우리가 신적 본성의 암시들과 단서들을 말

하는 것에 만족해야 함을 제안한다.38) 그러므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

재적 삼위일체와의 관계에 관한 피턴저의 입장은 내재적 삼위일체가

기독교인들이 경험하는 경륜적 삼위일체 속에 최고로 표현되지만 그러

나 독점적인 것은아니라는점이다.

2. 브라켄: 경륜적삼위일체를내재적삼위일체속으로 담금

(immersing)

브라켄은 그의1974년도 논문인“신적 위격들의 공동체로서의 거룩

한 삼위일체I, I I (The Holy Trinity as a Community of Divine Persons

I and I I)”39),에서 삼위일체른 위격들의 사회로서 이해하려고 시도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세 위격들은 공동체 속에서 일치성을 유지하고 계시

기에 한 분 하나님이라고 제안한다. 다음으로, 1979년도와1985년도에

출판한 삼위일체에 관한 책들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최근의 여러 가지

입장들을 탐색하면서 신-화이트헤드적 신-세상 관계의 틀을 바탕으

로 삼위일체에 대한 과정신학적 공동체적 이해(a processive and com-

munitarian understanding of the Trinity)를 제시한다.40) 그리고 1991년

1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79

38) Pittenger, The Divine Triunity, 18.

39) Bracken, “The Holy Trinity I,” 166-182; “The Holy Trinity I I,” 257-270.

40) Bracken, What Are They Saying about the Trinity? (New York: Paulist Press, 1979)

and The Triune Symbol: Persons, Process and Community(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5). 이 책의 2장은 개정되어 다음의 논문에 실려 있다. “Pro-

cess Perspectives and Trinitarian Theology,” 51-64. 1979년도 책에서 브라켄은 위

르겐 몰트만, 대니얼 데이 윌리엄스, 허버트 뮐렌, 에르 하르트 윙엘, 후안 루이스 세

군도, 죠시아로이스, 칼 융, 쟌 사울롭을다른사람으로서탐구하였다.

41) Bracken, Society and Spirit: A Trinitarian Cosmology (Selingsgrove: Susquehanna

University Press, 1991).

42) Bracken, “Panentheism from a Trinitarian Perspective,” 7-28, and “Panentheism

from a Process Perspective,” 95-113.

43) Bracken, “Trinity: Economic And Immanent,” 21-22.

Page 9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같이각각설명한다.

신성 안에서의 삶과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성부는 자신을 전적으로 성

자에게 소통하여 준다. 성자는 이제 성부의 주도권에 완벽하게 반응한

다. 성부와성자 사이의 매개자, 즉 양자사이의 삶과 사랑의 교환을용

이하게 해주는 자는 바로 성령이다. 성령은 그 자체로서 자기-희생의

사랑의 과정을 일으키며, 이러한 사랑은 양자의 공통적인 본성으로서

사랑의 필수적인절정혹은 완전에도달한다.45)

성부는 각각의 잠재적 유한 존재자에게 생명력을 전달한다. 이 생명력

은 사실상 자기-결정을 위한 철저한 힘이며 그 힘을 행사하기 위한

주어진 방향성이다.…성자는 자신에게삶과 사랑을 제공하시는 성부에

대한 자신의 반응 속으로…성부의“시초적 목적”에 대한 유한 존재자

의 반응을 통합시킨다. 이 모든 일은 성령의 권능 안에서 그리고 권능

을 통하여 성취되어진다. 성령은 신적 공동체 내에서성부와 성자 사이

를 매개하는 인격적 원리로 작용하면서 어떤 순간에서도 또한 성부, 성

자, 그리고 유한적 계기들의 세계 사이에 매개하는 인격-원리로서 작

용한다.46)

여기에서 브라켄은 삼위의 각 위가 하나님 자신 내에서와 창조세계

를 향하여서가 모두“동일한 방식으로(in the same way)”47) 활동하신다

는 점에서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의 상관관계를 주장하고 있는 것처

조세계와 관련된 삼위일체이며, 반면에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내적인 삶이다. 이런 식으로 양자는 서로 구별된

다. 그러나 브라켄에게 있어서 양자가 전적으로상호 무관한 것은아니

다. 왜냐하면 내재적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관한 이

해를 돕는 객관적 준거점으로서의 필요불가결한 보증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내재적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경륜적 삼위일

체라는 개념을 위한 존재론적으로필수적인 토대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상호연관성을 맺고 있다. 이렇게 보면, 브라켄은 양자 간의 상관관계

(correlation)의 입장을 주장하고있는것처럼 보인다.

브라켄은 자신의 상관관계의 입장을 카파도키안 교부들과 아퀴나스

에 대한 그의 평가 속에서 더 정교하게 다듬는다. 그에 따르면, 그들은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의 상관관계에 깊은관심을 가졌다. 카파도기안

교부들은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을 성자의 파송과 성령의 파송에

각각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으며, 아퀴나스도 성자와 성령의 파송들

(missions)의 근거를 성자와 성령의 발출들(processions)에 매우 의식

적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라켄에 따르면, 이들 모두는 내

재적 삼위일체를 경륜적 삼위일체와는 동떨어져 홀로 그 자체로 존재

하는 실재로서 이해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이들 모두는 양자의 상관관

계를 인정한다. 그러나 브라켄은 이들 모두는 상관관계를 오로지 발출

과 파송의 관계에만 배타적으로 제한시키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삼위일

체 하나님과 창조세게와의 친밀한 관련성을 효과적으로제시하지 못하

고 있다고 지적한다.44) 이러한 지적은 브라켄 자신이 내재적-경륜적 삼

위일체 관계를 신-세계의 관계성과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의 상관관계에 관한 브라켄 자신의 이해는

그의 초기의 책과 논문 속에 더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는 다음과

1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81

44) Bracken, “Trinity: Economic And Immanent,” 12-13.

45) Bracken, The Triune Symbol, 37-38 “Process Perspectives and Trinitarian Theo-

logy,” 53.

46) Bracken, The Triune Symbol, 46 “Process Perspectives and Trinitarian Theology,”

57-58.

47) Bracken, “Process Perspectives and Trinitarian Theology,” 57. “동일한방식으로(in

the same way)”라는 구절은 브라켄 자신이 다음의 구절에서 사용하고 있다. “But

insofar as in my scheme all finite beings participate in the communitarian life of

the three divine persons, I can further specify that this power of self-c r e a t i v i t y

comes from God the Father in the same way that the latter communicates being

and life to the divine Son.”

Page 9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또한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브라켄에 따르

면, 모든유한의 존재자들은 성부께서 제공해 주시는 시초적 목적에 반

응하며, 이러한 반응은 성부에 대한 성자의 반능 속으로 통합된다. 그

결과 모든 유한적 존재자들의 어떤 반응은 성부에 대한 성장의 반응에

영향을미칠수 있는가능성이있다. 그는다음과 같이설명한다.

예를 들면, 모든순간에 인간은태어나고죽는다. 다른변화들이자연의

세계에서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성자와 자연의 세계와의 관계는, 그리

고 성자와 인간 일원과의 관계는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이것은 신

적 공동체적 삶 내에서의 성자와 성부와의 관계에, 그리고 성자와 성령

과의 관계에영향을미친다.48)

브라켄에게는, 세상이 성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신

적 공동체 내의 내재적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방

식으로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어서, 세상이 신

의 공동체적인 삶의 일부이라는 점과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

일체 속으로 담그어지고 있다는 점을 바꾸지는 못한다. 이러한 가능성

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내재적 삼위일체 속으로 실제적으로 통합되어

진다. 브라켄은 과정신학에 근거하여 범재신론을 옹호하는맥락에서이

러한점을언급한다. 그는다음과 같이진술한다.

간략하게 말하면, 세 신적 위격들과 모든 창조물들은 공동의 삶을 공유

하기 때문에 범재신론의 교리가 옹호된다. 즉, 이 세계 내에 있는 현실

적 계기들로 구성되는 무수한 하위계들은 모두함께전체로서의우주에

적합한 활동의 장을 구조화하는 데에 기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그렇지만 여전히 유한한 활동의 장 그 자체는, 역동적인 상호관련을 맺

고 있는세 신적위격들의훨씬더 포괄적인활동의 장으로 통합된다.49)

럼 보인다. 성부는 자신의 존재를 성자에게소통하여 주시고, 이와동일

한 방식으로, 즉 자신의 존재를 성자에게제공하시는 것을통하여, 성부

는 모든 유한적 존재자들에게 내적인 자기-형성의 힘과 그 힘을 사용

하는 방향성을 제공해 주신다. 성자는 성부에게 반응하며, 모든 유한적

존재자들도 성부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반응하는데, 즉 성부에 대한 그

들의 반응이 성부에 대한 성자 자신의 반응 속으로 통합됨으로써 반응

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성을 용이하게 한다. 이와동일한 방식

으로성령은, 첫째, 성부에 반응하는성자의 반응속에서모든유한자와

성자와의 관계를 용이하게 하며, 다음으로, 성자를 통하여 모든 유한자

와 성부와의 관계를 용이하게한다.

그러나 브라켄의 진술들을 면밀하게 검토하면 그의 상관관계의 입

장이 그가 기대하는 대로 완전하게 작동하고 있지않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것의 주된이유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활동들의 방식이 경륜

적 삼위일체의 활동들의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성부는

자신을 전적으로 성자에게 내어주시지만, 성부는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

에게는 간접적으로, 즉 성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내어주심을 통하여 시

초적 목적(an initial aim)을 주신다. 성자는 성부에게 직접적으로 그리

고 완전하게 반응하지만,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은 성부에게 간접적으

로, 즉 성자가 성부에 대한 성자자신의 완전한 반응 속에그들의 반응

을 통합시킴으로써 반응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직접 이어주지만,

성령은 성부와 세상을 간접적으로, 즉 성자를 통하여 매개한다. 여기에

서 세상 속에서의 경륜적 삼위일체의 활동들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의

하여 간접적으로 실행되어 짐을 볼 수 있다. 그 결과로 세상은 성령의

권능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의 계속적인 삶의 흐름의 일부가 되며, 동시

에 세상 속에서의 경륜적 삼위일체의 활동들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활

동들속으로 담그어지고있다.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 속으로 전체적으로 담궈진다고

보는 입장에 추가하여, 브라켄은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에

1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83

48) Bracken, “Process Perspectives and Trinitarian Theology,” 57.

Page 9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3. 수코키:내재적삼위일체를경륜적삼위일체로흡수(absorbing)

1982년에 처음으로 출판하고 1989년에 개정한 자신의『하나님, 그

리스도, 교회: 과정신학에 대한 실제적 지침』(God, Christ, Church: A

Practical Guide to Process Theology)에서, 수코키는 화이트헤드에 근

거하여“관계적 신학(A Relational Theology)” 을 제안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God for Us)”이라고 주창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즉 모든 계기들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다. 왜냐하면 존재

한다는 것은다른 것에영향을 미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각각

의 요소는 이 존재의 과거로부터 전달된 에너지들로부터 힘을 얻으며

이것들을 창조적 운동 속으로 결합시켜 새로운 현실성에로 나아간다.

모든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세상과 관련되어 있는데, 단순

히 외적으로가 아니라 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점은 하나님이

단지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세상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있음까지도 암시한다. 하나님은 세상에게 시초적 목적을

제공함으로써 세상에 영향을 미치며, 또한 세상의 영향을 수용하고 이

것을하나님 자신에로수용하고있음을 의미한다.53)

수코키는 더 나아가서 그러한 관계성의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

라고 진술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에 제공하는 시초적 목적이 하

나님의 본성의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때문이다. 이와같은 하나

님의 본성의 지식은 간접적이며 모호하지만, 그러나 세상에 시초적 목

적을 제공하는 것을 통하여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활동들

은 하나님의본성의 어떤점을보여주는 계시적인 것이다. 그리고 수코

키는 이러한 관계적 계시적 하나님은 세상 속에 있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현존(Presence), 지혜(Wisdom), 권능(Power)으로경험하도록

이끈다고 강조한다.54) 여기에서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경험의 차원들

그러므로 브라켄의 입장을 단순히 상관관계의 입장으로 여기는 것

보다는, 경륜적 삼위일체가내재적 삼위일체속으로 담그어진다고여기

는 입장으로 규정하는 것이 더 낫다. 이와 같은 입장으로 인하여 브라

켄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개념을 단지 사변으로만 간주하여 경륜적 삼

위일체에 배타적으로 집중하는 신학자들을 비판할 수 있다.50) 예를 들

면, 로저 헤이트는1988년의 논문인“삼위일체 신학의 요점(The Point

of Trinitarian Theology)”에서 하나님은 실재적으로 예수와 성령 안에

서 경험되는분으로서의하나님이라고제안한다. 헤이트의 이러한 언급

은, 첫째,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라너에게는 하나님 내에서의 실재

적인 내적 구별들을 다루는 내재적 삼위일체는 순전히 사변적인 것임

을 의미하며, 둘째, 하나님은 오로지 경륜적 삼위일체의 예수와 성령을

통하여 경험되어지는 분임을 의미한다.51) 라쿠냐는 자신의1991년도 책

인『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 삼위일체와 기독교적 삶』(God for Us:

The Trinity and Christian Life )에서 부분적으로 모리스 와일즈

(Maurice Wiles)와 고든 카우프만(Gordon Kaufmann)에 동의하여, 경

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즉 대외적 삼위일체(the Trinity

ad extra)와 대내적 삼위일체(the Trinity in se)를 구별할 필요성이 없

으며그러기에내재적 삼위일체의개념이 불필요함을제안한다.52)

1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85

49) Bracken, “Panentheism from a Process Perspective,” 102.

50) Bracken, “Trinity: Economic And Immanent,” 7 n.1.

51) Roger Haight, “The Point of Trinitarian Theology,” Toronto Journal of Theology

vol. 4 No. 2 (Fall 1988), 201-202. 여기에서 헤이트는삼위일체교리의 핵심에 관하

여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that God is absolutely and uniquely one, that God’s

saving action in Jesus and the Spirit is real, and that therefore God as such is a

saving God.”

52) LaCugna, God for Us, 225-227 and 234 n. 6. 53) Suchocki, God, Christ, Church, 12 and 33-34.

Page 9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수용하는 반응들을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이 상상하는 바 속으로 통합

시킨다.55) 이런 점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는 단순히 경륜적 삼위일체와

구별된 삼위일체가 아니라, 도리어 세상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하고 있

는 삼위일체이다. 수코키는 자신이“내재성(immanence)”이라는 용어의

이중적인의미들을사용하고 있음을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설명한다.

기독교 전통 내에서는“내재성(immanent)”이 이중적 의미를 지니는데,

한편으로는하나님의내적인구조를 의미하며, 다른한편으로는하나님

이 세상 속에 계심을 의미한다.“내재적”삼위일체는 세상 속에 내재하

시는 하나님의 경륜적 활동(an immanent-i n-t h e-world economic

work of God)을 이루어내신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신적 삶 속으로

편입된다.56)

이것으로 볼 때에, 수코키에게는 내재적 삼위일체는 이미 세상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경륜적 삼위일체(the immanent-in-the-world econo-

mic Trinity)이다. 즉그에게 내재적 삼위일체는 세상 속에서 내재적으

로 활동하고있는경륜적 삼위일체인것이다.

이와 같은 관찰들을 고려하면, 수코키가 몇몇 의도적인 진술 속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구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 속으로 불가피하게 흡수되어 가고

있어서 오직 두 종류의 경륜적 삼위일체들만이, 즉 현존, 지혜, 권능으

로 우리에게 경험되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세상 속에 내재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로 남는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경험되는경륜적 삼위일체는

세상 속에 내재적으로 활동하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현시이며, 세상 속

에 내재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우리가 경험하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전제이다. 이 둘의경륜적 삼위일체들은서로에게 상관적이며 상응적이

속에서 경험되는 현존, 지혜, 권능으로서의 삼위일체이다. 동시에, 하나

님에 대한이러한 삼중적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내적인 삼중

성을 이해하도록 이끈다. 수코키는 하나님의외적인 행동들이하나님의

내적인 본성에 관하여 알려주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내적인 본성

에 관하여 삼중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은

원초적 본성(the primordial nature), 초월체적 본성(the superjective

nature), 그리고 결과적 본성(the consequent nature)이 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삼중적 본성은 전통적인용어인 성부, 성자, 성령에 각각병행하

고 있으며, 경륜적인 관점에서 말하지만 현존의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에각각상응하고있다.

여기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는 현존, 지혜, 권능으로 우리에게 경험되

어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킨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원초적 본성,

초월체적 본성, 결과적 본성을 내적으로 가지고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을 가리킨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현시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경륜적 삼위일체의 토대이다. 경륜적 삼위일체의삼중적 구

조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내적인 삼중성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내재적

삼위일체의 내적인 삼중성은 우리에게 현존, 지혜, 권능이 되시는 우리

를 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험의 전제가 된다. 이렇게 하여,

수코키에게 있어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는 상관관계와

상응관계가성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를 더 면밀하게 고찰하여 보면, 수코키에게는 내

재적 삼위일체가 본질적으로 이미 세상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삼위일

체임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은 세상의 모든

가능성들의 토대이다. 하나님의 결과적 본성은 세상의 모든 반응들을

수용한다. 하나님의 자기초월체적 본성은 결과적 본성이 세상으로부터

1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87

54) Suchocki, God, Christ, Church, 49-84. 수코키에게 따르면, 인간은 외로움의곤경에

대한 응답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을경험하며, 일시성의 곤경에 대한응답으로써 하나

님의지혜를경험하고, 부정의에대한응답으로써하나님의권능을경험한다.

55) Suchocki, “God, Trinity, Process,” 171-172.

56) Suchocki, “Spirit in and through the World,” 186.

Page 9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피턴저는 자기의 입장을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가브

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로부터 이끌어낸다.58) 그에게 따르면, 아퀴

나스는 만물이 신비에로 나아간다[omnia abeunt in mysterium]고 말하

면서 인간 경험에 관하여 심오한 통찰을, 즉 인간 경험에 주어진 것에

는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남아있다는 통찰을 제공한

다. 아퀴나스에 동의하면서 피턴저는 우리는 신비의 한 가운데에서 살

고 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마르셀은신비란 우리에게해답될 수 없는

궁극적인 질문들을 제시하는것이라고 이해하면서 우리의 경험에는 해

결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 즉 신비가 항상 남는다고 암시한다.

마르셀이 아버지됨과 아들됨과 같은 가족관계가 신비를 드러낸다고 이

해하듯이,59) 마찬가지로 피턴저는 인간관계들을 신비의 탁월한 예로 여

긴다.60)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피턴저는 한편으로 모든 형태의 종교는 신적

실재라는 신비에 대한 반응이라고 인정하면서 팔레스타인의 종교경험

을 분석하기시작한다:

우리를 둘러싸고있는 신비가 있다. 이 신비는 도처의 인간에게 간절히

호소하는 사랑 속에서, 즉 나사렛의 인간 속에서, 최고로 결정적으로

(기독교인들은대담하게 이렇게말한다) 우리에게드러난다.61)

그에게 팔레스타인의 종교경험은 신적 실재라는 신비의 삼중적인

다. 그러므로 스코키의 입장은 내재적 삼위일체를 경륜적 삼위일체로

“흡수(absorbing)”하는입장으로규정하는것이더 적절하다.

I I I. 비판적분석

1. 피턴저: 팔레스타인삼위일체보다훨씬 더 큼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관하여 피턴저는 양자사이에 어떤

상응의 관계가 있음을 주장하지만, 동시에 내재적 삼위일체가팔레스타

인의 삼위일체로 한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더 구체적으로, 피턴저

의 입장은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적 실재

를 자기-표현해주는 신적 행동임을, 그러나 이러한 신적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한정되지 아니함을의미하며, 다른한편으로성령은 초

대교회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예수 안에 드러난 신적 행동에 반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신적반응임을, 그러나 이러한 신적반응은 기독교 공동

체 내의성령에게로제한되지아니함을의미한다.

피턴저는 주로 인간경험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삼위일체론에 접근

하는데, 이러한 접근법은 신적 실재의 신비(the mystery of divine

reality)를 인정하도록 한다. 그는다음과 같이설명한다.

인간은 광범위한 경험론적 의식(wider experiential awareness)이라고

불리는 것을 통해서 삼위일체적 사상에로 나아가는 접근법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인간의 경험 전체 속에는 신비에 대한 지각(a sense of

mystery)이 있다. 이 신비 속에서 자연과 역사의 사건들 속에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 주어져 있는 것에 대하여 인간이

반응을하면서 의미가밝혀질수 있다고믿는다.57)

1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89

57) Pittenger, The Divine Triunity, 50-51.

58) Pittenger, The Divine Triunity, 51-52.

59) Gabriel Marcel, The Mystery of Being: Vol.1 Reflection & Mystery vol. 2 Faith &

Reality, trans. G. S. Fraser and René Hague (London: The Harvill Press, 1950-

1951), I, 204. 1권은 계시의 개념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2권이 발전하고

있다. 이 책은마르셀이1949년과1950년에행한기포드 연설을바탕으로출판된 것

이다.

60) Pittenger, The Divine Triunity, 53-54.

61) Pittenger, The Divine Triunity, 59.

Page 9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영원한 성자(the Eternal Son), 영원한 성령(the Eternal Spirit)을 가리

킨다.65)

이 같은 추론적 차별화의 결과로, 피턴져는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

와 영원한 성자, 즉 영원한 말씀 사이를 구별하며 심지어 분리시키는

경향으로 엄연히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과 영원한 성령 사이

를 구별하며 심지어 분리시키는 경향으로 엄연히 나아간다. 여기에서

그는예수 그리스도를 성육한 말씀으로 간주하지만, 영원한 말씀 그 자

체로는 여기지 않는다. 이 점에서 피턴저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전적

으로 완전히 현존하고 계시다는 점을 부인하며 이것은“기독론적 오류

(christological error)”66)라고 명명한다. 그 대신에 그는 하나님이 집중

적이고 결정적으로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시되어 있음을 주장하며,

영원한 말씀의 성육신은 인간예수에게로만 한정되지 아니한다고 반복

하여 말한다. 이와 같은 논리를 성령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한다. 하나님

은 기독교 공동체가 경험하는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지지만 전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며, 영원한 성령은 교회의 성령에게로 제한되지 아니

한다.

피턴저는 자신의 경험적 인식적 개념으러서의 신비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내재적 삼위일체와내재적 삼위일체사이의 어떤상응관계가

잇음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보다, 즉 우리가 팔레스탄인 삼위일체에서경험하는것

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피턴저는 우리가 신적

본성의 내적인 활동들에 관한 지식은 전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교만

한 주장을 할 수 없다고 제안한다. 그 대신에, 피턴저는우리는 다만신

적 실재의 신비을 알려주는 암시들과 실마리들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에 만족한다.67) 이러한 의미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구조, 즉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적 행동, 그리고 성령을 통

한 신적 반응을 포착한다.62) 피턴저는 이와 같은 삼중적 형태가 그가

“팔레스타인의 삼위일체(the Palestinian Trinity)”63)라고 부르는 삼위일

체론을 정식화하기위한기본적 자료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턴져가 팔레스타인의 삼위일체 그 자체를 신적 실재 그

자체로 동일시 하고 있지 않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자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가 있지만, 여전히 조그마한 간격이 남는다. 이것

은 피턴저가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을 분석하고 신비를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방법때문에 그렇다. 신비에대한 이와같은

경험적 인식적 접근은 양자의 관계를 동일시하지 못하도록 여지를 남

겨둔다. 그러나 비-동일적 관계(the non-identification relation)는 다

시 양자사이의 존재론적인차이를 더 확대시킨다.

팔레스타인의 삼위일체를 신적 실재의 신비로 동일시하는 대신에,

피턴저는 팔레스타인의 삼위일체로부터 삼중적 구조를 추론하여 낸 후

에, 이 삼중적 형태를 신적 실재의 신비에로 이식한다. 이런 식으로 그

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삼중적 구조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삼중적 구조

를 차별화한다. 이 점에 관하여 브루스 드마리스트(Bruce A. Dema-

rest)는 피턴저가“창조와의관계를 맺고 있는하나님에게 해당되는 바

가 하나님 자신에게 그대로 해당된다고”64)고 주장함으로써 논리적 비

약을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피턴저에게, 경륜적 삼위일체의 삼중

적 구조는 하나님(God),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성령(the Holy

Spirit)을 가리키며, 내재적 삼위일체의 삼중적 구조는 하나님(God), 신

적 행동(the divine Action), 신적 반응(the divine Response)을, 또는

신적 초월(divine transcendence), 신적 공존(divine concomitance), 신

적 내재(divine immanence)를, 또는 영원한 성부(the Eternal Father),

1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91

62) Pittenger, God in Process, 42-43.

63) Pittenger, God in Process, 48.

64) Bruce A. Demarest, “Process Trinitarianism,” 26-27.

65) Pittenger, God in Process, 48.

66) Pittenger, The Divine Triunity, 43.

67) Pittenger, The Divine Triunity, 18.

Page 9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n ontology of society)”을 전개한다. 그러한 사회적 존재론에서는 관

계성(relation)이 인격(person)에 비하여 존재론적우선성을갖는다.

관계성은 실재에 우연적이지도 외부적이지도 아니하며, 관계성들이

실재를 구성할 정도로 실재 그 자체에 내적이다. 그리고 존재는 개별적

으로 인격적(individually personal)이지도 단순히 상호인격적(merely

interpersonal)이지도 아니하며 오히려 본질적으로 상호주체적(intrin-

scially intersubjective)이다.71)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최종적 실재적인

것들(the final real things)로서의 현실적 존재자(actual entities)들이라

는 화이트헤드의 개념에 근거하여,7 2 ) 피턴저는“상호주체성( i n t e r s u b-

jectivity)”이란“둘 또는 그 이상의 주체들의 경험을 위한 공통된 자기

장적 활동(a common field of activity for two or more subjects of

experience)”73)이라고규정한다.

그러므로 브라켄의 사회적 존재론에서의 궁극적 실재는 유한적이든

무한적이든 모든 존재자들로 구성되는“우주적 사회(the Cosmic

Society)”74)라고 그가 명명하는 것이다. 이 우주적 사회 속에서 하나님

론은 신적 실재를 드러내는“하나의 상징(a symbol)”68)이며, 상징은 신

적 실재의 신비를 보여주는암시와 실마리를제공할뿐이다.

2. 브라켄: 경륜적삼위일체를내재적삼위일체속으로담금

(immersing)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관한브라켄의입장은 경륜적 삼위

일체를 내재적 삼위일체로“담그는(immersing)” 입장으로 엄연히 나아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성부는 자신을 성자에게 직접적으로 전적으

로 내어주며, 성부는 성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내어줌을통하여 모든유

한의 존재자들에게시초적 목적을 제공한다. 성자는 성부에게직접적으

로 완전하게 반응하며, 성자는 모든 유한적 존재자들의 반응을 성부에

대한 성자자신의 완전한 반응속으로 통합시킨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

를 완벽하게 매개하며, 성령은 신적 공동체 내에서의 성부-성자의 매

개를 통하여 매순간 성부와 세계와의 매개를 포함시킨다. 이런 식으로

경륜적 삼위일체는내재적 삼위일체 속으로담겨진다.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게에 관한자신의 입장을 제안하기위하

여, 브라켄은존재의 형이상학(a metaphysics of being)으로부터 되어감

의 형이상학(a metaphysics of becoming)으로의 변환을 시도한다.69) 그

리고 후자와 관련하여 피턴저는 카파도키안 교부들의 페리코레시스

(perichoresis) 개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재적 관계성( s u b s i s t e n t

relations)의 개념,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창조성의 원리를 창조적으로

전용함으로써,70)“사회적 존재론(social ontology)” 또는“사회의 존재론

1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93

68) Pittenger, God in Process, 50.

69) Bracken, “Trinity: Economic And Immanent,” 8.

70) Bracken, “Trinity: Economic And Immanent,” 14-16. 페리코레시스라는 그리스 개

념에 대해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켄은 카파도키아 교부들을

서방교회에소개한 지지울라스에게비판적이다. 왜냐하면, 브라켄은지지울라스가자

연과 인격을 이원론적, 암묵적으로 구별함으로써 하나님과 세상을 엄연히 분리하는

쪽으로 나간다고주장하기때문이다.

71) 브라켄은 현실적 계기들의 사회들이라는 화이트헤드적 개념을 자기장중심형의관점

에서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후기 활동기에서는“상호주체적 형이상학(a metaphysics

of inter-subjectivity)”을 다음의 책에서 전개시킬 수 있었다. The One in the Many:

A Contemporary Reconstruction of the God-World Relationship (Grand Rapids:

Eerdmans, 2001). 그리고 브라켄은 이것을 다른 주제들과 관련하여 더 광범위하게

다룰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Intersubjectivity and the Coming of

God,” Journal of Religion vol. 83 No.3 (July 2003): 381-400; “The Hiddenness of

God: An Inter-Subjective Approach,” Dialog vol.45 No.2 (Summer 2006): 170-

175. 이후로 “The Hiddenness of God” 로 표기함. “Intentionality Analysis and

Intersubjectivity,” Horizons vol.33 No.2 (Autumn 2006): 207-220; “Dependent

Co-Origination and Universal Intersubjectivity,” Buddihist-Christian Studies

Vol.27 (2007): 3-9.

72)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27.

73) Bracken, “The Hiddenness of God,” 174.

Page 9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삶의 어느 주어진 순간에 더 고차원적인 윤리적 종교적 가치들을 성취

하도록 우리가“유인(lure)”되는 것 속에서“성부”의 현존이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모든 유한의 계기들은 때때로 의식적으로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 무의식적으로“성부”에 대한“성자”의 계속되는 반응 속에서

“성자”와 연합된다는 점에서,“성자”는 참으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그

리고 전체로서의 세상과정을위한 임시적인 현실성의원리이다. 그러나

[이것은]“성령”에 의한 더 높은 목표들과 가치들을 성취하는 것에 도

움이 될 뿐이다.“성령”은 세상 과정을위한 궁극적현실성의원리이며,

그럼으로써 매 순간의 각 계기에 주어지는“성부”의 시초적 목적에 대

한 장기적 목적이다.75)

이러한 관찰들을 고려하면, 브라켄의 입장은 삼위일체론에 신비의

개념을 인식론적 의미이든 존재론적 의미이든 많이 허용하지 않는다.

신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발생할 것이라고 이미 기대되어진 어떤

것이다. 이 점을 감추어진 하나님(divine hiddenness)이라는 개념에 적

용하면서, 그는다음과 같이진술한다.

예수의 인격 속에 있으며 그리고 구원사에서의 하나님의 섭리의 활동

들 속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감추어짐(the hiddenness of God)은 전

적으로 신비인 것만이 아니다(not a total mystery). 그러나역동적인상

관관계 속에 있는 경험의 주체들에 의하여 형성되는 세계 속에서 일어

나리라고기대되어질수 있는어떤것이다.76)

더욱이, 아래에서 인용된 바와 같이, 브라켄이 자신의 논문“삼위일

체: 경륜적 그리고 내재적(Trinity: Economic And Immanent)”에서 결

론적인 언급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신비는 오히려 증명되어질 수 있는

어떤것임을 함축한다.

은 존재의 외적인 토대로서가 아니라 내적인 토대로서 유한한 현실의

존재자들의 총체와 상호 주체적으로(intersubjectively) 계속적인 관계

를 맺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세계의 모든현실적 계기들의 복잡계

(the complex society)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러한 의미로, 기존의 본

체론적 신개념들(substantial notions of God)이 전제하는 하나님-세계

의 구별을 존재론적으로 명쾌하게 내릴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회적 존재론에서는심지어 하나님조차도 하나의 사회로서, 즉 신적인

세 위격들의 사회로서 이해되며 이 신적인 사회의 관계들은 페리코리

시스적 일치를 이룬다. 그리고 공동체적 위격들의 존재론적 일치는 개

별 본체보다는 더 고차원의 존재와 지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삼위일

체 하나님은 삼위 상호 간에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에서 역동적인 상호

작용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항상 과정 중에 있는 분이시다.

즉, 세 신적 위격들의 공동체가 상호 간에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에서

사랑과 지식이꾸준히 성장하고있다.

이러한 사정이므로, 브라켄에게는 하나님과 세상과의 사이에는 존재

론적 거리가 그리 많지 않다. 비록 그가 하나님과 세상과의 구별을 주

장하더라도, 그것은 분리가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세상

의 외적인근거가 아니라 내적인 근거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브라켄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어느 정도의 인식론적 차이

를 허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항구적인 불가능성이

전혀 아니며, 단지 일시적인“불인식(incognitio)”일 뿐이다. 브라켄은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제공된 시초적 목적을 보통 인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계속 진행되고 있는 방향성

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것을 우리의 삶의 현실성 속으로 통합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브라켄은이 점을다음과 같이상술한다.

1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95

74) Bracken, “Panentheism from a Trinitarian Perspective,” 7 and 19.

75) Bracken, “Panentheism from a Process Perspective,” 103.

76) Bracken, “The Hiddenness of God,” 174.

Page 9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존재론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바는, 심지어 하나님 조차도 세상과 본

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분이며 그래서 세상 속에 내재하고 있는 하

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도영향을 받는분임을 뜻한다. 존재한다는것

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며, 이런점에서 모든 현실성은 자신의 에너지

를 모든 후속적 계기들에게로 전달함을 의미한다.79) 수코키는 이 점을

근거로 내재적 삼위일체가 그 자체로 폐쇄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내재하는 것으로서간주한다.

인식론적 측면과 관련하여, 수코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두 종류의 계시, 즉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에 호소한다. 그러나

위로부터아래로의 방향이라는 전통적인 계시의 개념과는 달리, 수코키

의 계시의 개념은 정반대로서 아래로부터 위로의 방향이다. 이러한 계

시 개념은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이 하나님의 본성을 계시적으

로 드러낸다고 하는 그의전제에 근거하고 있다. 그에게 일반계시는하

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여 주시는 시초적 목적을 의미하며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뭔가를 알 수 있다. 세상 속에서의 하

나님의 활동들은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 뭔가를 알려줄 수 있으며, 그

래서감추어진 하나님(divine hiddenness)의 어떤장막을 제거할 수 있

는 정도이다. 비록수코키는 일반계시를통한 하나님지식이간접적이며

심지어 모호하다는 점을인정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는하나님에

관한우리의 지식은어쨌든 가능한 것이라고주장한다. 게다가, 그는더

나아가서 일반계시는 우리로 하여금“하나님을 세상에 충만하게 현존

하는분으로서 이해할 수 있도록, 즉 궁극적인 지혜자인 분으로서 그리

고 정의의 권능자인 분으로서 이해할 수 있도록”80) 우리를 움직이는 것

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수코키는 특별계시에 의존하지 않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불가해하다고주장하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 내에

서의 부정신학의 전통이 옳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그러한 신적 신비를

증명하려고시도하는일을결코 포기하지말아야한다.77)

3. 수코키: 내재적삼위일체를경륜적삼위일체로흡수(absorb-

ing)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관한수코키의입장은 내재적 삼위

일체를 경륜적 삼위일체 속으로 엄연히“흡수(absorbing)”하는 경향을

지닌다. 왜냐하면 내재적 삼위일체는 세상 속에 이미 내재하는 경륜적

삼위일체(the immanent-i n-t h e-world economic Trinity)로서 우리로

하여금 경륜적 삼위일체를, 즉 현존, 지혜, 권능으로서 경험되는 삼위일

체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측면과 관련하여,

수코키는 화이트헤드에 근거하여78) 내적 관계성의 존재론(an ontology

of internal relation)을 제안한다. 외적 관계성이 아니라 내적 관계성의

1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97

77) Bracken, “Trinity: Economic And Immanent,” 16. 상당수의과정신학자들이신비의

개념을 다룬 것은주목할 만한일이다. 이 논문에서 다루는 피턴저도 논의하였다. 이

논문에서 다루는피턴저도 신비의개념을 다루었다. 오웬샬키(Owen Sharkey)는 다

음과 같은 논문을 썼다. “Mystery of God in Process Theology,” in God in

Contemporary Thought (New York: Learned Publisher, 1977): 683-725; 그리고

캐서린 켈러는 과정신학의 관점에서 신비에 접근한다. On the Mystery: Discerning

Divinity in Proces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8).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과의

범재신론적 관계는 몇몇 과정신학자들로 하여금 과정사상에 비추어 신비주의를 탐

색하도록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Diana Culbertson, “Western Mysticism and

Process Thought,” Listening vol.14 No.3 (Fall 1979): 204-222; Bruce Epperly, “A

Mysticism of Becoming: Process Theology and Spiritual Formation,” E n c o u n t e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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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Alfred P. Stiernotte, “Process Philosophies and Mysticism,” I n t e r n a t i o n a l

Philosophical Quarterly vol. 9 No.4 (December 1969): 560-571.

78) Suchocki, God, Christ, Church, 4 and 12.

79) Suchocki, God, Christ, Church, 33.

80) Suchocki, God, Christ, Church, 47-48.

Page 10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내적인 관계적 존재론에 이미주어진 분이기 때

문이며, 이러한 삼위일체는 현재는 모호하게 인식되어질 수 있으나 그

러나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어쨌든 장차 명시적으로 그리고 충분히 알

려질것이기 때문이다.

I V. 결론

위의세 명의과정신학자들의논의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첫째, 피턴저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로 최고로 표현

되지만 그러나 독점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하나

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집중적이고 결정적으로 활동하시지만 그

러나 신적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에로만 한정되는 것

이 아님을, 그리고 성령은 초대교회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

도 안에 드러난 신적 행동에 반응할 수 있도록 하는 신적 반응이지만

그러나 신적 반응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활동하는 성령에로만 제한

되는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와같은 피턴저의 입장에서는그가 삼위

일체의 신비를 강하게 강조하기 때문에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

위일체와의 간격이 더 넓게 벌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

재적삼위일체는 팔레스타인의삼위일체보다 훨씬 더 크다(much more

than).

둘째, 브라켄은 되어감의 형이상학(a metaphysics of becoming)과

사회적 존재론(an ontology of society)을 발전시키면서 경륜적 삼위일

체를 내재적 삼위일체로“담그는(immersing)”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내재적 삼위일체의 활동들의 방식은 경륜

적 삼위일체의 활동들의 방식과 단지질적으로 다를뿐만 아니라 또한

전자가 후자를 자신의 활동들 속으로 통합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브라

켄은 삼위일체론에 신비의 개념을 말할 수 있는 조금의 여지도 두지

는다. 수코키는특별계시는우리가 일반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바와 일치하며 또한 확증함을 인정하지만, 그는 우리의 삶

속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대부분 의존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외로움의 곤경에 처해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나와 함께

현존하시는 분으로 경험한다. 우리는 일시성의 곤경에 처해 있기 때문

에 우리는 하나님을 지혜로우신 분으로 경험한다. 그리고 우리는 불의

의 곤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권능이 있는 분으로 경

험한다. 이와 같은 경험론적 접근으로 인하여 수코키는 하나님을 현존,

지혜, 권능으로서의이해하는 우리의 지식은 성경의 특별계시에 의존하

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나사렛의 예수안에서 강력하게 드러난 하

나님의 현존이 기독교적인 특별계시임을 인정하더라도, 특별계시는 인

간의식 안에 있는하나님의 형상을 강력하게 강화함으로써 발생한다고

주장하며, 이런 점에서 특별계시와 성육신은 오직 한 번 뿐인 현실적

계기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과정이며 일련의 다수의 계기들이라고

주장한다.

수코키의 존재론과 인식론 안에 내재된 몇몇 논리적 비약에도 불구

하고, 수코키의 관계론적 존재론(relational ontology)과 경험론적 인식

론(experiential epistemology)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은 현존, 지혜, 권

능으로서의 삼위일체임을 확증할 수 있도록 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

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길은“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다(God is for us)”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다. 수코키에게“우리를위하시는하나님(God for us)”는 삼위일체와복

음을 함께 전달해주는 표현이다. 달리 표현하면, 삼위일체와 복음은 최

종적으로는 바로 이러한 신비, 즉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

라는 신비이다.81) 그러나 수코키는 신비의 성격에 대해서는 더 상세하

게 다루지 않는다. 그러한 주된 이유는 현존, 지혜, 권능으로서의 삼위

1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199

81) Suchocki, God, Christ, Church,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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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다. 그에게는 항구적인 신비란 없으며, 단지 일시적인 불인식

(incognitio)일 뿐이나, 이것 또한발생할 것이라고 이미 기대된 것으로

최종에는증명될 수 있는 어떤것이다.

마지막으로, 수코키는 관계적 존재론(a relational ontology)에 대한

강한 강조점으로 인하여 내재적 삼위일체를 경륜적 삼위일체 속으로

엄연히“흡수하는(absorbing)” 경향을 보인다. 수코키에게 내재적 삼위

일체는 세상 속에 내재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로서 이미 본질적으로 세

상과 관련을 맺고 있는 삼위일체이다. 하나님은 현존, 지혜, 권능의 삼

위일체로 경험되어지는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바로신비

이다. 그러나 이 신비는 경험될 수 있는 어떤것이며 우리의 내적인 관

계적 존재론 속에서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러

한 신비는 비록 현재에는 애매하게 인식되고 있지만, 이후에는 명시적

으로충분히 우리의경험을 통하여 알려질 수 있는어떤것이다.

주제어

과정신학, 내재적-경륜적삼위일체, 존재론, 인식론, 신비

Process Theology, The Immanent-Economic Trinity, Ontology, Epistemo-

logy, Mystery

접 수 일 2010년 7월 14일

심사(수정일) 2010년 7월 23일

게재확정일 2010년 8월 15일

2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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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203

Page 10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own position.

First, Pittenger argues that the immanent Trinity is supremely

expressed in the economic Trinity, but not exclusively, which implies

that God acts focally and decisively in Jesus Christ, but this divine

action is not confined only to the historical person of Jesus Christ,

and that the Holy Spirit is the divine response which enables the early

Christians to respond to the divine action in Jesus Christ, but this

divine response is not restricted to the Spirit within the Christian

community. This position is based on his strong focus on the mystery

of the Trinity, which makes an impact in opening a wide gap between

the immanent and the economic Trinity. Thus Pittenger considers the

immanent Trinity as much more than the Palestinian Trinity.

Second, Bracken, while developing a metaphysics of becoming

and an ontology of society, has a strong tendency towards

“immersing” the economic into the immanent Trinity, for the way of

the workings of the immanent Trinity is not only qualitatively

different from that of the workings of the economic Trinity, but also

the former incorporates the latter into its own activities. Here Bracken

does not leave any room for a notion of mystery in his doctrine of the

Trinity. For him, there is no constant mystery, but merely a temporary

incognitio, which is already expected to take place. It is something to

be proved in the end.

Last, Suchocki, due to a strong emphasis on a relational ontology,

leads inexorably towards “absorbing” the immanent into the econo-

mic Trinity. For Suchocki, the immanent Trinity is the immanent-in-

the world economic Trinity, which is the Trinity already intrinsically

in relation to the world. Here Suchocki maintains that God is experi-

enced as the Trinity of Presence, Wisdom and Power. Thus God for

Some Responses of Process Theology to the Doctrine of the Trinity

Choong-hyun Paik

Lecturer

Soongsil University, Presbyterian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Process theology heavily draws on philosophical works such as

“Philosophy of Organism” by Alfred North Whitehead and

“Surrelativism” by Charles Hartshorne, which, in spite of their

differences, are widely known as process philosophy for their

common positions. And its understanding of God is primarily

characterized by the dipolar structure of the nature of God. Thus most

process theologians such as John B. Cobb, Jr. are predominantly

concerned with the relation between the transcendence of God to the

world and the immanence of God in the world, to the neglect of the

inner distinctions within God. On the contrary, there have been some

process theologians such as William Norman Pittenger, Marjorie

Hewitt Suchocki, and Joseph A. Bracken, who make an attempt to

explicate the doctrine of the Trinity within the framework of process

theology, though they are very different to each other.

This paper investigates, analyzes, and describes some responses of

trinitarian process theologians to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n so

doing, it focuses on how each comes to formulate each own position,

that is, on what kind of ontology and epistemology each has in each

2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백충현, 삼위일체론에대한과정신학의반응들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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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의 몸-되기’를 통한신학과과학의연대(連帶)

신비의 근원과 탈 영토화된몸 안에서만나다

김화영(연세대학교)

I. 서론

작금에 와서, 근대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신학과 과학은 밀월

의 상태였다고, 탁월한 신학자들이과학을 리드하면서 통합을 이루었다

고 회상하는 것은낭만적인 추억일지도 모른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지동설 이후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과학이 승리의 깃발

을 차지하거나, 혹은 과학의 선공에 비틀거리면서 힘겨운 씨름을 했던

쓰라린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의 진화설, 뉴튼(Sir Isaac Newton)의 만유인력의 법칙, 갈릴레

오 갈릴레이(Galilei, Galileo)의 지동설 증명과 낙하의 법칙 등 과학은

성스러움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것을 속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을 계속적

으로 해 온 반면, 신학은 이에 대한 변증과 속화(俗化)의 부담을 떠안

아야 했다. 즉 근대 이후 신학적 사조는 주도권을 가진 과학발전과 평

행을이루며 변형되어왔다고할 수 있는것이다.

신학이 과학과의 소통을 위해 취한 방식1)은 과학의 큰 역사적 전환

을 중심으로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뉴튼의 물리학적 성과이후에

us is the mystery, but it is something to be experienced, and the given

in our internally relational ontology. In this sense, it is what can be

explicitly and fully known through our experience of it, though it is

now recognized ambiguously.

2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207-233

Page 10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본 연구는 신학과 과학이 서로 연대(solidarity)하는 새로운 전제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그 과정은 다음 두 가지의 물음

들로부터 출발한다. 1) 신학과 과학이 소통하는 궁극적 본질은 과학의

‘객관적’합리성보다 더 큰 어떤 근원, 신비적이고 종교적인‘비합리

적’합리성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2) 그 본질 안에서 이루어지는 실

천적인 연대는 구조적 타자를 끌어안는 탈-가부장적 가치관 안에 있지

아닐까?

이 질문을 기초로 연구자는 신학과 과학이 본질적으로 소통하고 연

대될수 있는 가능성을제시하되, 특별히 기독교 신비주의 신학에 나타

나는‘무(無)’의 특성을 탈 영토화된페미니즘적‘몸-되기’에 적용함으

로써 수행하고자 한다. 1장에서는 지금까지 두 학문의 소통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던 과학적 객관성의 한계를 밝힌다. 즉 과학의 본

질로서 새로운 전환이 일어날 때 보이는 종교적 체험과도 비슷한 비합

리적 합리성이 소통의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음을 밝힌다. 2장에서

는 신학이 과학과 소통하는 비합리적 합리성의 영역으로서 무에 대해

나타난 흐름으로서 발견과 관찰이라는‘과학적 논리의 객관성’을 전제

로 하여 소통하는것이다. 과학에 대해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창조과

학자들이든 근대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역사 비

평적 성서해석자들이든 기본적으로는 과학이 주장하는 객관적 지식과

방법론의 전제 위에서 대응해야만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아인슈타인의

양자물리학 이후의 흐름으로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의‘불확정성의 원리’를 비롯하여, 보어(Niels Herik David Bohr)의 상

보의 원리(complimentary principle) 등 유기적 전체성과 상보성을 전

제로 소통하는 것이다. 특히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는 인간과

모든 생명체는 촘촘히 짜인 그물망처럼 연결돼 서로 의존적일 수밖에

없으며,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와 협동을 통해서만 생태계를 유지하고

변화된 상황에 적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화이트 헤드(Whitehead)

의 과정철학이나 존 캅(J. Cobb) 과정신학, 마크 테일러(M. C. Taylor)

의 해체주의 신학이나 린드버그(G. A. Lindberg)의 후기 자유주의 신

학 등을 비롯한 탈 현대적 포스트모던 신학 사조가 그 대응의 산물이

라고하겠다.

상관적(相關的)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영역을 아예 분리된 것으로

보는 흐름도 있다. 이 흐름은 과학과 신학의 영역을 아예 분리하는 것

으로, 각자 자기의 갈 길을 가면서 실천적 측면에서 만나는 것이다. 종

교는 가치의 언어를 과학은 사실의 언어를 사용하므로 그 둘은 중첩되

지 않은 영역(Non-Overlapping Magisteria)이라고 한 스티븐 제이 굴

드(Stephen Jay Gould)의 주장이 대표적인예이다.2)

2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화영, ‘무의 몸(無)-되기’를 통한신학과 과학의 연대(連帶) 209

1) 이안 바버(Ian G. Barbour)는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갈등(conflict), 독립( d e p e n-

dence), 대화(dialoque), 통합(integration)의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그 네 가지 유

형들의 장단점을 비교하면서 과정철학적 바탕에서 통합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

요한은 이 분류가 면밀한 분석과 통찰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고 유형적이어서 상호교

차적인 요소를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한다. 현요한,「신학과 과학의 관계」,『본질

과 현상』, (서울: 2009), 131-132.

2) 김윤성, 신대식, 장대익, 『종교전쟁-종교에미래는 있는가?』(서울: 사이언스북스,

2009), 50-51. 신재식은 신학과 과학의 대화에 적극적인 대표적인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아서 피코크, 존 폴킹혼, 이언 바버, 로버트 러셀, 셀리아 딘드럼먼드

등은‘과학자-신학자(scientist-theologian)’로 불리는데, 자연과학 분야의 박사학위

소지자로 과학계에서 활동하다 성직자가 된 사람들이다. 또한 테드피터스, 필립 헤프

너, 존 호트 등의 신학자들이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적극적이다. 한편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를 주장하는 이들은 윌리엄 뎀스키, 마이클 비히, 필립 존슨, 뒤앤 기시

(Duan Gish) 등이대표적이다. 자연 과학이나 철학 쪽에서 보면 근래 종교에 관한 저

작을 출판한 사람들로, 대니얼 데닛, 스콧 애트란, 파스칼 보이어, 스티븐 핑커, 마이클

루스,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에드워드 윌슨, 데이비드 윌슨 등등이 있으며,

프랜시스코 아얄라, 케네스 밀러, 존 러프가드 등은 자연 과학자이면서 과학 지식과

기독교 신앙과 조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종교와 과학의 역사적 상호 작용에

대해관심을 가지는 존 부룩, 데이비드 린드버그, 로널드 넘버스, 리처드 올슨 등은 종

교와과학의방법론에 관심을가지면서 둘 사이의 구조적유사성이나차이 등을논의

한다. 과학 철학이나 종교 철학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웬츨 밴 호이스틴,

낸시머피, 마이클 스텐마크 등을들 수 있다. 김윤성, 신대식, 장대익,『종교전쟁-종교

에 미래는있는가?』(서울: 사이언스북스, 2009), 76-77.

Page 10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으로보이게 된다.4)

과학의 객관성에 결정적으로 회의를 품게 만든 이론은 토마스 쿤

(Thomas Kuhn)의『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이다. 그는 과학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는

데, 과학은 객관적인 논리체계라기보다는개념체계며 개념의 변천이라

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쿤은 한 시대의 과학적 가설, 법칙 이론, 믿음,

실험의 총체를 패러다임이라고 명명하였고,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패러

다임으로 전이하는 것은‘비합리적’과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

리에따르면 새로운 패러다임이생기면 그 이전에 객관적이라고전제하

고 사용하던내적논리는더 이상통하지않게되고, 다른요인들, 즉 사

회가 최상의 것이라고 선택한 이론이 끼어든다. 그러므로 기존의 패러

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에는건널수 없는 불연속적심연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마치종교적 회심(conversion)과도같은과정이라는것이다.

쿤은 과학이 혁명적인 따라서 불연속적인 변화에 의해 진보되어 왔

으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이론과는‘전혀 새로운 과학의 개념’5)이 등

장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이와 같이양립 불가능한 혁명적 과학이

론이 성립되는 데는 과학 공동체의 사회학적 성격이 중요한 역할을 수

행한다는 것이다. 즉 과학의 진보는 단순히 사실자체의 발견에 근거한

다기 보다는 과학자 사회가 특정한 패러다임을 지양하고 새로운 패러

다임을 수용하는 끝없는 선택의 과정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패러다임

은“어떤 특별한 과학자 사회가‘선택한’일반적인 이론적 가정과 법칙

들, 그리고 그것들의 적용에 대한 기술들6)”로서 위기를 대처하는 과학

살펴본다. 과학의 본질에서 보이는 비합리적 합리성의 특성을 기독교

신비주의의 무(nothingness)의 특성과 연관하여 살펴본다. 논객으로 에

크하르트 신비사상을 기독교 유일신론적 관정에서 재해석한 루돌프 오

토(Rudolf Otto)를 초대한다. 3장에서는2장에서 살펴본 무를 들뢰즈-

가타리(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의 기관들 없는 몸( T h e

Body without Organs)에 이르는 과정으로 보고 탈 가부장적 기호계의

관점에서 풀어본다. 4장에서는 무의 몸을 실현하는 과정, 즉 무의 몸-

되기를 여성-되기를통한연대의 과정으로 보고신학과 과학의 실천적

연대가능성을제시한다.

1. 과학의본질로서비합리적합리성3)

현대 과학혁명의 결과로서 등장한 새로운 자연과학, 특히 양자역학

으로 대변되는 현대물리학의성과들은 과학이 확실하고 객관적이며 보

편적인 지식이라는 고전 물리학적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과학의 이론이 시험과 관찰에 의해 불충분하게 결정된다는 콰인의

(William V Q. Quine)의 불충분 결정론이나 과학자의 관찰은 객관적

이 아니며 과학자의 이론의 영향을 받는다는 핸슨(R. N. Hanson)의 관

찰의 이론 의존성(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 등은 모두 과학의

데이터, 법칙, 이론 등이 모두 인간의 주관적인 이해, 판단, 믿음에 의해

영향을 받게된다는 것을 증명하게 한 이론들이다. 또한 과학이 사회와

문화를 초월한 듯이 보이지만 이데올로기로 인해 그릇된 과학이 만들

어질 뿐 아니라, 보편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과학의 이론과 실험도

실은 과학외적인 요인들, 즉 사회문화적 요인들로 인해더욱 확정된 것

2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화영, ‘무의 몸(無)-되기’를 통한신학과과학의 연대(連帶) 211

3) 앞으로 제목을 제외한 본문의 글에서는비합리적 합리성을 비합리성이라고표기한다.

여기서 비(非) 합리성은 불(不) 합리성과는 다른 것으로, 불합리성이 비논리적인 것을

의미하는 반면, 비합리성은 이미 그 본성 안에 이미 합리성과 논리성을 포함하고 있

는 통합적 직관과같은것이다.

4) 해러웨이(Haraway) 같이 급진적인 사회구성주의학파에 속한이들은 여기서 더 나아

가 과학과 상회문화는 경계불분명하며 과학은 문화이며, 과학적 진리로 판명된 것은

실은 시대적 문화의 흐름에 따라 과학자들의 합의하여 구성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한

다. Donna J. Haraway, Simians, Cyborgs, and Woman: The Reinvention of Nature.

(New York: Routledge, 1991), 230.

5) 토마스 쿤 / 조형옮김, 『과학혁명의구조』(서울: 이대출판부, 1980), 17.

6) 위의책, 151.

Page 10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식의 존재양식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을 보여주며, 과학의 본질이 합리

적 논리체계가 아니라 종교적 체험에 가까운 비합리성에 연유하며, 구

조적이데올로기와도밀접하게연결된다는점을보여준다.

한편 새로운 패러다임이 전혀 다른 차원의 사유로 전이(轉移)된다

하더라도 두 패러다임이 본질적으로 다른 불연속성의 관계로 되는 것

은 아니며, 둘 사이에는 게슈탈트적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형성된다. 그

예로, 쿤은뉴튼의 역학이론이아인슈타인 이론의 특수사례이며양자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원리에 따라

몇 가지 제한적인 조건을 가정하고 수정하면 뉴튼 역학이 아인슈타인

의 역학에서 연역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롭게 제한되고 수정된 이론

이라할지라도 이미 예전과 같은의미는 아니며, 새로운 차원의 패러다

임이 주는 전체적인 인식 안에서만 논리적 연속성을 가진다.10) 즉 새로

운 패러다임을 끌어가는 비합리적 통찰력이 객관적 합리성을 계승하는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2. 과학과신학이소통하는비합리적합리성의영역: 무(無)

1장에서 언급한 과학의 비합리적 합리성의 특성은 종교의 본질인

비합리성과 아날로지(analogy)를 가지며, 그 결과 신학과 근본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한다. 쿤이 앞서밝힌 바와 같이과학의 본

질인 비합리성은 전혀 다른 불연속적 앎이면서도 유기체적 전체성

(Organic Wholeness)과 같은 것이다. 또한 종교적 체험과도 같지만 그

안에는 합리성과 연결될 수 있는 요소 역시 잠재되어 있다. 여기서 비

합리성(非合理性)은 불합리성(不合理性)과는 다르다. 비합리적 합리성

은 합리성의 척도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것, 그러나 그 안에 합리성

을 내포하는 유기체적 전체성이 포함된‘무엇’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

자 사회의 채택기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과학의 패러다임에 단순히

객관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적 위기와 과학의 정당성을

마련해주는사회적 가치전제와 이데올로기가깔려있는셈이다.7)

새로운 패러다임이 과학자사회에서 인정되면 그 연구를 행하는‘정

상과학(normal science)’이 성립되며, 정상과학이 자신의 패러다임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되면 다시 폐기된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발견은 절박한 사회적 요구에 대해 중요한 해결책을

내놓을 때 더 심각하게 고려된다.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 과학자들은 단

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아니라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사유

를 해야 하는데,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이는‘본질적’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단순히 객관적인 관찰의 방식으로는 일어나지 않

는다. 그것은 전혀다른종류의 사고를 요청하는데, 기존의 사고로는총

체적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 혜안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사유’는 일종의 회심과도 같은 것으로,8)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것과같은체험이다.

(위기들은) 정상과학에 의해 고쳐질 성질이 아니다. 정상과학은 궁극적

으로 이상 현상들을 인지하고 위기로 인도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

은 심사숙고와 해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게슈탈트적 전환과 같이 돌발

적이고 비구조적인 사건에 의해 끝을 맺는다. 그러면 과학자들은“눈에

서 비늘이 걷혔다”고 말하거나 전에는 모호하던 퍼즐에‘넘쳐드는’,

‘번득이는 섬광’과도 같은 빛에 관해 자주 말한다. 다른 예로는 어떤

깨달음이꿈속에서얻어진다.9)

즉 번득이는 영감과 통찰력이라는 전혀 다른 사유에 의해서 과학적

패러다임의 전이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쿤의 관점은 어떤 종류이든 지

2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화영, ‘무의 몸(無)-되기’를 통한 신학과과학의 연대(連帶) 213

7) 위의책, 56.

8) 위의책, 188.

9) 앞의책, 156. 10) 앞의책, 133.

Page 10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러한 무를 자연계시의 측면에서 부분적으로나마 대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학의 영역에서는 무를 인식하는 순간, 비합리적이고 유기적인 전

체성을 지각하는 직관이 형성되면서 그 이전의 개념화된 신으로부터

이탈된다. 순수‘신성’은 이해될 수 없고 설명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모든 가능한 설명은 신의 개념을 모호하고 혼란스럽

게 할 뿐만 아니라,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하느님을‘우상(an idol)’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은 비(非)하느님(Not-God)이며 비(非)성령

(Not-Spirit)이고, 순수한 침묵(pure silence)이며 소리 없는 공허고, 실

로 완전한‘무(無)’이다.16)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이 무(無)

에 매달려 있다.17)

한편 무는 구조화되어 있어서 세계와 자아의 중층성을 반영한다. 한

편으로 무는 존재의 근원인 신성을 나타내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계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세계 안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와 거짓 자아를 무화(無化)하는 과정과 연관된다. 자연스럽

게 무와 연결되는 참 자기(the self)와 거짓 세계관과 연결되는 자아

(ego)가 첨예한 갈등에 놓이게 된다. 자아는 사물들을 존재에서 분리하

여 소유화하고 세계관에 예속되어 있지만, 결국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에서스스로를해방시켜야만 한다.

무는 비합리적 합리성으로 구성된 새 패러다임을 형성하며, 합리적

성찰과 추론을 통해 체계화되면서 점차로 완성된다. 신학의 입장에서

라서 과학과 신학이 소통할 수 있는 본질로서의 비합리성은 불(不)합

리성이 아니어야 하며, 유기체적 전체성(Wholeness)을 담지해야 하며,

일종의 회심과도같은체험으로서‘종교적본성’과도연결되어야한다.

신비신학에서 말하는‘무’는 이러한 비합리적 합리성이 출현하는 종

교적 본성의 근원(根源)이면서, 동시에 거짓된 세계관과 자아가 소멸되

는‘무엇’을 가리킨다. 오토에 따르면, 무는“대상적이고현상적인세계

관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 실재의 모든 분열을 넘어선 곳, 곧 주

관과객관의 분열, 자기와 세계와의분열을 넘어선 곳, 합리적인 개념을

넘어서 존재하는”11) 신성(Godhead)를 지시하는 상징이다. 이때 나타나

는 비합리성은 기존의 세계관이나 합리적인 사고로는 생각할 수 없는

무엇, 본질적으로 이질적이며 반대적인 그 무엇(mirum)을 충만하게 대

면하는 데서 생겨나는 종교적 인식이다. 신비적 직관(intuitus mysti-

cus), 비합리적 감각(non-rational sense), 조명(illumination)의 빛, 무

지의지(unknowing knowing)12)로 표현되는 비합리적 합리성이나타나

는 곳이며,13) 영혼의 근저(ground of the soul)에서부터 우러나는 앎이

다. 신에 대한 합리적 개념은 이 무로부터 탄생했다.14) 무는 모든 객관

적인 이해와 파악을 초월해 있지만,15) 다른 한편으로 그 안에 전체성과

합리성을 포함하고 있어서 각각의 영역과 연결되는 내적 논리가 있다.

과학의 패러다임이 전환될 때 나타나는 비합리적이고 전체적인인식은

2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화영, ‘무의 몸(無)-되기’를 통한신학과과학의 연대(連帶) 215

11) C. 헤네르 잉게베르크 편저,『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서울: 한국신학연구

소, 1983), 84-85

12) Rudolf Otto, Mysticism East and West- A Comparative of the Nature of Mysticism,

trans. Bertha L. Bracey & Richenda C. Payne (New York: Meridian Books, 1957).

26.

13) 앞의책, 27.

14) “영혼은 무 속에서 신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무 속에서 하나님이 탄생한다.”

Eckhart, Meister Eckhart: The Essential Sermons, Commentaries, Treatises, and

Defense (1981), 323.

15) 루돌프오토 / 길희성 옮김,『성스러움의의미』(왜관: 분도출판사, 2003), 6.

16) Rudolf Otto, Mysticism East and West - A Comparative of the Nature of Mysti-

cism, 6-7. “당신은그분(신성을 의미)을 하나님이아닌분으로, 영도인격도 아닌분

으로 어떤 이미지도 없는 분으로 사랑해야 합니다.”,“그 어떤 구분도 없는 심연, 적

막한광야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없고 오직 신 자체만

있습니다.”Eckhart, Meister Eckhart: The Essential Sermons, Commentaries,

Treatises and Defense. Edmund Colledge and Bernard McGinn, trans. (New York:

Paulist Press, 1981), 208, 198.

17) 앞의 책, 25.

Page 10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로기및 자아의 허위성을드러내야만 하는것이다.

들뢰즈-가타리의‘기관 없는 몸(The Body without Organs)’ 은‘무

의 몸’을 구체적인 현실에서 사유하는 교두보를 제공한다.‘무’사상이

비합리적 합리성의 근원과 탈-이데올로기를 가능하게 하는 강점이 있

음에도 불구하고 몸과 연관하여 논하고자 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신

비사상이 가진 형이상학적이고 이원적 경향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

의 사유가 가진 강점은 현실적 몸 안에서 무를 사유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론에 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있어서 무의 몸은 대지의

몸, 기관 없는 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기관 없는 몸이란‘텅 빈

몸’혹은‘기관이 텅 빈’이라는 뜻이 아니라 유기체라고 불리는 기관들

의 조직체가 없는 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 사회, 자연의

진정한 근원으로서의 무의 몸은 현실속에서는 이미역사와 사회의 지

층화작용(stratification)의 습곡과 주름, 혹은 퇴적물 등등으로 쌓여 있

어서‘기관들로 가득 찬 몸’(the full body with organs)22) 혹은 전제군

주적 기호체계 안에서 영토화(territorialization)된 몸이며, 전제군주적

기호체계 안에 하나의 유기체로 부속된 몸이라는 것에 있다. 즉 기관

없는 무의몸, 혹은 기관들로 가득찬 몸이라는 이중적 몸의형태는 사

변적으로는 구분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구별불가능한 형태로 혼재되어

볼 때 비합리적 합리성과 합리성의 관계는 신비에 대한 해석의 작업이

며 그것은 말씀묵상과 성찰, 기도, 혹은본질을 잘 드러내는 정교한 교

의체계일 수도 있다.18) 즉 불가사의한신비로 존재하는 신성은 한편으로

모든 피조물을 넘어서서 비합리적 특성을 나타내지만, 다른 한편으로

몸을 매개로 성령을 통해 내재함으로써 합리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 과학적 측면은 유기적이고 통찰력 있는 과학의 새 패러다

임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의 패러다임보다 더 근원적인 것과19) 같

다. 예를들어서 양자물리학의 패러다임으로뉴튼의 고전물리학을설명

하고 또 제한적인 조건을 붙여서 이해하거나 사용할 수 있지만 그 반

대는성립되지않은것과마찬가지이다.

3. 무의몸: 탈 가부장적기호계인기관 없는몸

지금까지논의한 무를 현실과 연관해서 생각하려면, 몸에 대한 총체

적 사유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카엘 셀즈(Michael Sells)는 에크하

르트가 개념화되지 않은 신성을 표현하기 위해무와 무를 드러내는 담

론으로서 수많은 몸을 형성했다고 말한다.20) 무는 몸21)을 통해 담론을

형성함으로써, 신성으로서의 무의본질을 드러냄과 동시에 세계이데올

2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화영, ‘무의 몸(無)-되기’를 통한신학과과학의 연대(連帶) 217

18) 앞의책, 132.

19) 하지만 이러한 몸의 본질은 모든 활동을 초월하는‘신성을 지시하는 무’와‘일치하

는 한’유지되며, 근원과의 관계를 잃어버릴 때 우상적 이데올로기로 변질된다. 따라

서 합리적 체계화가 형식적이거나왜곡된 것으로 흐르지 않으려면성찰이 필요한데,

근본적으로 무의 몸은‘직관에서 직관으로의 해석적 순환’안에서 형성되기 때문이

다. 오토는 그러한 순환이 합리성이 가진 한계나 틀에 막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때, 루터가 발견한‘오직(sola)’의 직관이 근본주의나 문자주의로 전락한 것과 같은

결과를 빚게된다고 말한다. Ibid., 189.

20) 셀즈는 에크하르트가 절대적 일자의 영역과 신성을 드러내는 영역 사이에 다양한

이름을 통해담론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사막, 무(Nihitheist), 영혼의성, 영혼의 근저

(Ground) 등이무의 담론이 형성되는 지점이다. Michael Shells, Mystical Language

of Unsaying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 148.

21)“인간은 몸을가지고 있는것이아니라 몸이다”라고말한불트만이‘몸(soma)’이 단

순히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체 인격을 가리킨다는 것을 밝혔다면, 건드리

(R. H. Gundry)는 실제적이고 신체적이면서도초월적이고 부활된 몸에대해 언급하

였다. 로빈슨(J. A. Robinson)은 한 걸음 더 나아가“부활된 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세계의 연대로서의 몸이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몸의 육신성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지극히 육체적인 현실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동시에 우주적이고 세

계적인 전체성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재성,「제국적 이데올로기와 바울

의‘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동체 해석」,『신학사상』(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0),

103-104.

22) Gilles Deleuze & Felix Guatta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

phrenia, trans. Brian Massumi (Me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3-4.

Page 11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포함하여 모든 학문이 지닌 가부장적 구조를 밝혀내는 과제와 연결된

다. 신학의 가부장적 경향이야 이미 여성신학의 오랜 화두에 속하지만,

여기서는 객관적이며 가치중립적이라고 하는 과학조차도 중립적 객관

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수잔셔

원(Susan Sherwin)은“과학적 연구는 실험 대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가하는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 존재하는 억압과 지배의 양상과 어

떤 연관이 있는가하는 측면에서도 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4) 즉 모

든 연구는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와 세계

관 안에서 이루어지기때문에,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나객관성의신화는

재고되어야만한다는 것이다. 이런맥락에서 이제껏 합리적이고객관적

이고가치중립적이라는것은 결국남성적, 즉 서구 백인남성 중심적이

라는 말과 동의어였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과학과 합리성, 남성성이

결합되고 과학과 비합리성, 여성성은 역사적으로 분리되게 되었으며,

과학을 포함한 서구적 인식이 남성적 특권에 종속되게 되었다. 즉 학문

에 있어서 남성적 앎의 방식(ways of knowledge)과 관찰방식이 부당

한 권위를 부여받게 되고, 공적-객관적-이성적-합리적 영역은 남성

적인 영역으로 사적-주관적-감성적-비합리적 영역은 여성적인 영역

으로 간주되었다.25)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로서의 합리성과 남성성

이 이원적이고 위계적인연상작용의형태로 결합된 것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몸을 탈근대의 인식론의 표면으로 끌어올린 것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는‘몸을 통하여 무를’사유하는 방식을 택한

다.23) 그들에게 무는 몸 안에 내재되어 있고, 기관들로 가득찬 몸인 영

토와 기관 없는몸인 대지로 구분 없이 섞여있다. 따라서 우리가 무의

몸을 사유한다는 것은 영토화된 몸과 영토화된 몸을 통하여 간헐적으

로 드러나는 대지의 몸을 동시에 사유한다는 것을의미한다. 그것은 끊

임없이 신학과 과학 내에 존재하는 영토로서의 몸으로부터 탈출하여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와 재영토화(reterritorialization)의 과정’

을 통해지속적으로생성해 가는과정이다.

무의 몸을 향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은 결국 신학과 과학을

2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화영, ‘무의 몸(無)-되기’를 통한신학과과학의 연대(連帶) 219

23) 김수연은 들뢰즈와 가타리의‘기관-없는 몸’은 철학의 입장을 견지하며 끊임없는

자기 부정의 역동성을 유지하여 본질을 해체하는 구조를 지닌 반면 기독교 신비주

의의 자기 이해나 신 이해에있어서‘무(無)’는 끊임없는 자기 부정의 뒤에 늘‘초-

본질(hyper-essentiality)’, 즉 지향하는 바를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탈근대

주의 입장에선 신학자들과 철학자 데리다 사이에서 이루어진 논의에서 주목하는 바

이다(“How to Avoid Speaking of Negative Theology,” God, the Gift, and Post-

modernism, ed., John D. Caputo.). 다시 말해 기독교 신비주의와 탈근대 철학 사이

에는 유사한 점만큼이나 차이도 크다. 즉 기독교 신비주의는 종교라는 테두리 안에

서 신성으로서의‘무(無)’라는 종착점을 추구하고 있고, 해체 철학은 끊임없는 생성

과 변화를 유지하도록 그 논리 체계를 열어놓는다는 것이다. 김수연,“무의 몸으로서

의 페미니스트노마돌로지를읽고”, 『신학과과학』, 제5회 한국조직신학자전국대회.

그러나 기독교 신비주의에 대한 루돌프오토의 해석은 신비신학과 해체주의의 간극

을 해소할 실마리를던져준다. 그에따르면 다른범신론적신비주의나자연신비주의,

타종교의 신비주의와 구별되는기독교 신비주의의 특징은 바로‘살아 있는생명력으

로 끊임없이 생성되는’무의 개념이다. 그 무는 초 본질적인 전제가 아니라 현재의

살아있는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빛나는 강이며, 영원히 움직이는 수레바퀴이며, 자

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끊임없이 생성되는 생명(Life)이며, 무한히 솟아오르는

내적 힘이다. 신비주의자들의‘자기 자신으로부터 굴러가는 바퀴’,‘자기 자신 안으

로 흘러들어가는강’과 같은은유는하나님 자신의끊임없는자기생성이라는현재

적 의미를 표현한다. Rudolf Otto, Mysticism East and West - A Comparative of the

Nature of Mysticism, trans. Bertha L. Bracey & Richenda C. Payne, (New York:

Meridian Books, 1957). 3-6, 168-174, 205.

24) Susan Sherwin, No Longer Patient: Feminist Ethics and Health Care (Ph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1992), 174-175.

25) 전통적인 생물학적 결정론에서는남성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나 여성은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과학이론

에서는 여성의 이같은 속성은 생물학적인 성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

로 구성된 성 역할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흐름은 생물학적 결정론 대

사회적 구성주의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Donna J. Haraway, Simians, Cyborgs, and

Woman: The Reinvention of Nature= (New York: Routledge, 1991), 133, 136을 참

고하라.

Page 11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를 지시하는 과정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기표들이 기존

의 기표와 지시하지 않는 새로운 기의(signifiance)를 갖는 것은 불가

능하며, 이러한 기호의 네트워크 안에서 기의는 고착되고 의미생성의

중심적 기의로서 대문자 기표(Sign)가 자리 잡게 된다. 결국 이 기표가

모든 기표들의 기의를 고정하고 지배하기 때문에 전제군주적 기호체계

로 불리는 것이다.28)

이 대문자 기표가 본 연구와 연관하여 가진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체계존속을 위한중요한 해석자의역할을 담당하기때문이다. 중심기표

는 갇힌 체계가 유지되기 위한 의미를 지속적으로 생성하도록 원 안에

조직화하고 그 원들이 확장되도록 한다.29) 객관성, 합리성, 합목적성, 전

체성 등은 그 체제 안에서 각각의 요소들이 다른 요소들과 맺는 관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전체

성도합리성도 아니다. 이러한 기호체계 안에서 몸은무의 근원과 연결

점을 잃어 버리고 기계적 배치물로 전락하면서 기표작용을 하는 유기

체로귀속된다. 국가철학과 결합한 신학자나 과학자그룹이이러한 기호

체계를 존속시키는 해석의 전문가 집단이 되며, 중심기표의 역할에 적

합한해석의 메카니즘을제공하게된다.

무의 몸이 생성되는 계기는 독재적 기표체계를 해체하고 중심적 기

표를 전복시킴으로써 탈 기표작용적 기호계가 형성될 때이다. 탈 기표

작용적이란 의미는 더 이상 체계를 존속할 수 없는 비합리적 우발성,

전체를 지시하는‘무’의 계기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정

상과학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변종이 나타나서 기존의 문제를 해결하면

서 전복되는것과같다. 탈 기표작용적 기호계는 중요한 패러다임의전

환점마다새롭게 형성되고, 재형성된 기호계는국가권력과 결탁하면서

중심기표로 떠오르면서 확산하게 된다. 예를 들어 중세는 종교의 절대

그 주제가 데카르트 이후의 정신-몸이라는 이원론적 구분에 저항할

수 있는 가장효과적인 화두였기 때문이었다. 즉 이러한 이원구도가 서

구철학의 기저를 이루는 이데아(Idea)-시뮬라크르(simulacre)와 연결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시뮬라크르 중의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

있는 몸을 사유의 중심에 놓은 것이다.26) 따라서 들뢰즈-가타리에게 몸

은 단지이데아의 복사품이 아니라 의미덩어리로 존재하는 개별존재들

이다. 몸이무를생성시키는무한한 잠재력을지니게 된 것이다. 그들에

게 몸은 그릇된 세계관과 거짓 자아를 전복시키는 저항의 장소이자 대

지로 표현된 무의 근원에 도달하는 무한한 생성의 통로이다. 즉 무의

몸은현상적 몸과본질적 몸, 구체적으로 합리성-비합리적합리성, 신-

신성, 부분-유기적 전체, 인과성-우발성이 구분되지 않고 상호연결된

몸이라는 것이다. 이 몸은능동작용-수동작용을 통해 수많은 변용체들

을 만들어내는몸이다.

이러한 무의 몸이 생성되는 계기는 네 가지 기호체계의 상호작용과

연관된다. 네 가지 기호체계는 기호의 기표작용적 체계( s i g n i f y i n g

regime of signs), 전 기표작용적 기호계(pre-signifying regime), 반 기

표작용적 기호계( c o u n t e r- signifying regime), 탈 기표작용적 기호계

(post-signifying regime)이다.27) 이 혼합된 기호계 안에서 각각의 기호

체계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이 중에서 특히 기표작용적 기호체계

는 전제군주적(despotic), 사기적(deceptive), 특권적 기호체계로도불리

는데, 기호와 기호가 서로를 지시하며 폐쇄적이고 인과적인 순환을 이

루는 것이 특징이다. 일종의 합목적성, 규칙적 합리성을 보여주는 체계

안에서 기호는 다른 기호를 지시하고 다른 기호는 다시 또 다른 기호

2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화영, ‘무의 몸(無)-되기’를 통한신학과 과학의 연대(連帶) 221

26) Gilles Deleuze, ed. Constantin V. Boudas, trans. Mark Lester with charles Stivale,

The Logic of Sens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0), 253-254.

27) Gilles Deleuze & Felix Guatta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

phrenia, trans. Brian Massumi (Me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ch. 5.

28) 앞의책, 111-112.

29) 앞의책, 114.

Page 11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 아니라 모든 구조적인 타자를 대변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여성-되

기와 소수자-되기는 일면 상통하는 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타자

가 지닌 구조적 특성 때문이다. 타자는 내가 지각하는 다른 사물이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지각장의 구조이

다. 들뢰즈는 이를 구조-타자(Structure-Other)라고부르는데, 나의 의

식과 대상을 구별하고 이 세계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선험적 타자이

다.31) 즉 타자는 나를 나되게 하는 지각과 사고와 인식을 조건 짓는 구

조인 것이다. 가부장적 타자의 구조 안에서 여성-되기가 이루어지듯,

지배자의 억압과 횡포 구조 안에서 소수자-되기가 형성된다. 또한 역

으로 여성-되기와 소수자-되기의 변용 속에서 가부장적 타자와 다수

자들의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그들에 의하면, 서구, 남성, 백인들은

“현재에 대한 저항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32) 몸으로 실천하는 탈근대

의 구체적 전략인 페미니즘(그리고 탈식민, 생태)이 없이는 기관 없는

몸에 도달할 수 없다. 특별히 분자화된 여성으로서 소녀-되기를 강조

하는데, 여성이 유기체의 역사와 발화주체가 중심이 되는 지층화된몸

이라면, 소녀는 몰적주체가 각인되기 이전의 기관 없는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33)

성과 초월성을 중심기표로 삼고전제군주적기호체계를 존속시키던 시

기로서, 근원적 의미를 생성시키는‘무’와 몸은 이원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지나면서개인의 욕망과 신앙에 억압되어있

던 기의가 발흥이 되면서 탈 기표작용적 기호계가 형성된다. 동시에 서

구의 국가철학은 기독교적 신이라는 초월성과 동일성의 중심기표를 버

린다. 그리고 정신-몸 이분법의 과학적 객관성을 중심기표로 삼으면서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전제군주적 기호체계를 재형성했다. 그리고

보면 중세 신학이 절대성과 근대 과학이 합리성과 제휴를 한 것은 그

가부장적가치를 존속시키기위해필연적인것이었다.

4. 무의몸-되기: 구조적타자로서의여성-되기를통한연대

그러면 탈 기표작용적 기호계를 형성하여 기관 없는 무의 몸이 되

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되기(becoming)’를 통해서이

다. 들뢰즈-가타리의‘되기’개념은 결코 비결정적이거나 총칭적인 것

이 아니라 동물-되기(becoming-animal), 분자-되기(becoming-mole-

c u l e )처럼 무엇-되기( b e c o m i n g-s o m e t h i n g )로 나타나는 진행형이다.

여기서 되기는 두 항을 연결해주는 선분이 아니라 무의 몸이 생성되는

일종의 운동이다.30) 따라서 무엇-되기는 무엇과 주체를 동일시하거나

그 위치가 되어본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몸과 무엇의 몸이 서로 영향

받고 침투되면서 변용(metamorphsis)을 일으켜서‘무’에 이른다는 것

이다. 즉 나와 무엇의 경계가 어딘지 모를 정도로 공유하는 어떤 것이

바로 무의 몸-되기인 것이다. 이 되기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고정되

고 전체적인 물적주체성을해체하고분자화하는 일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모든 되기의 핵심을 여성-되기( B e c o m i n g

Woman)로 본다. 여성-되기는 단순히 성으로서의 여성을 의미하는 것

2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화영, ‘무의 몸(無)-되기’를 통한신학과과학의 연대(連帶) 223

30) 앞의책, 273.

3 1 ) Gilles Deleuze & Felix Guatta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

phrenia (1987), 307.

32) 앞의책, 108.

33)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소녀가나이 어린 소녀를 지시하는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그들이 말하는 소녀는 여성이 되는 소녀가 아니라 여성-되기가 생산하는 탈주선인

보편적소녀이다. 소녀는 그자체로되기곧 생성인셈이다. 분자화된 여성, 기관 없는

몸으로서의 여성-되기를 말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에 구체적인 역사와 성역할

을 강조하는 페미니스들의 반론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엘리자베스 그로즈(E.

Groze)는 Volatile Bodies: Toward a Corporeal Feminism에서 들뢰즈 이론에 대한

비평들을 조목조목 소개했다.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는 여성은 기관 없는 몸

이전에 기관 자체를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고 비판한다. 브라이도티( R .

Braidoti) 역시 남성-여성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폐기하고 성역할을 일반화함으로써

오직남성만이 여성-되기를 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반론은 대부분여성-되기의 보

Page 11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를 내는 것이다. 가부장적 국가 철학의 영향 안에 있는 정상과학(혹은

정상신학)의 중심기표들을 분석하고 분자-되기를 통해 구조-타자가

말할 수 없는것을 말해야 한다. 구조적으로 수립된 기관들로 가득 찬

기존의 몸들을 해체하여 주체와 욕망 사이에 연대가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창조적 혼돈을 생성하고 변화를 일으키며 소수자, 이방인

들과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며, 정체된 과학과 신학이 보지 못하는

살아 있는 힘들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기관 없는 무의 몸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의 몸-되기는 감각적 통일성이 미리 주어지지 않고 자유

롭게선택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기관 없는무의 몸이야말로 어떤

기관을 끌어당기고 밀어낼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으며, 변용역량을 최

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몸이다. 그것은 자유인의 몸이기에, 신학과

과학이 온전히 자유하게연대할 수 있는열린가능성을제공한다.

조직체 안에서는 기관들의 구성이 미리 정해져 있지만 기관 없는 몸은

미리 결정되어있지않다.36)

무의 몸-되기는 자유와 욕망의 역설이다. 기관 없는 몸은 근원적인

욕망의 거대한 흐름 안에서 충만하며, 동시에 자유는 욕망을 재배치하

고 욕망은 자유를 가능하게 하기때문이다.37) 욕망은 몸을“다양한 접속

그렇다. 모든 되기는 분자적이다…우리는 인간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

할 수 있다. 비록 여성과 어린이가 이러한 생성의 관계에서 특권적인

위치를차지하는것이 가능하지만, 분명하게구별된 몰적인실체로서의

여성이나 어린이를 닮지않은 여성-되기, 어린이-되기가 있다. 몰적인

실체라는 것은 예를 들어 형태에 의해 정의되고 기관과 기능이 부여되

고 주체로 배정된 여성이다. 여성-되기는 이러한 실체를 모방하는 것

이 아니며, 그것으로 변형되는 것도 아니다…즉 여성의 형태를 모방하

거나 가정하는 것이아니라 분자를 방출하여운동과 휴지의 관계, 혹은

근접성과 미시여성성(microfeminity)의 지대로 들어가서 우리 안에 분

자적여성을 생산하고창조하는 것이다.34)

여성-되기는 수많은 개체들이 동맹이나 결연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많은 선분의 경계에 위치하여 각 개체 스스로 생성할 수 있게 만드

는 욕망의 에너지 원천기계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거대한 욕망의

흐름에서 여성-되기란 지속적으로 기관들 없는 몸이라는 내재성의 장,

즉 모든것을생성하는블랙홀이나혼돈의 바다가되게하는힘35)이 되

는 것이다.

그러면 신학하기와 과학하기에 있어서 구조적 타자로서의 여성-되

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본주의와결탁된 남성중심의구조-

타자를 거스리는 다른 타자-되기(여성-되기, 소수자-되기)의 목소리

2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화영, ‘무의 몸(無)-되기’를 통한신학과과학의 연대(連帶) 225

편화, 일반화에대한우려이다. 결과적으로여성의육체성과 주체성을배제한 남성만

의 담론이 될 것이며 여성의 투쟁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E. Groze, Volatile

Bodies: Toward a Corporeal Feminism (Bloomington: Indiana UP, 1994), 161-63.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대부분 들뢰즈-가타리의 분자이론, 몰주체 이론을 정치구조

와 연관해서 생각하지 못한 오해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소한 들뢰즈의 이론

은 남성 중심주의 철학에 기초한 것은아니며, 들뢰즈 자신의 말처럼 보다 구체적인

육체성을 가진 여성-되기이론이 근대, 서구, 남성들이 아닌 다른 주체에 의해 주초

되어야 한다.

34) 앞의책, 275.

35) 장시기, 『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서울: 당대, 2005), 124-5.

36) Gilles Deleuze. The Logic of Sense, ed. Constantin V. Boudas. trans. Mark Lester

& charles Stival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0), 77.

37) 에크하르트에게욕망이 무의 몸과 결합할 수 있는 연결사는 인 관뚬(in guantum, in

principio, so far as)이다. 에크하르트에게 신성, 즉 무(無)의 존재는 완전히 공허한

개념이 아니라 측량할 수 없을만큼풍부한 개념, 즉 풍부함 그 자체(dives per se)이

다. 이 존재에 이르는 한(in guantum), 누구나 존재의 모든본질적 풍부함 안으로 들

어온다. 신성은 유일한 선이고 그 안에 모든 개별 선을 포함한다. 그것은 완성이고

충만한 기쁨이며 합일이다. 신성은 충만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어떤 욕망

과도 대립하지 않는다. 그 앞에서 모든 것은 바다에 떨어지는 물 한 방울이다. 물방

울이바다가 되듯신성으로흡수된영혼은 하나가된다. 구원은 원형적인것이다. 시

Page 11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굉장한 행복과 엄청난 좌절을 경험한다. 기관들 없는몸이 우리에게스

며 들고 우리는 그것에 스며든다.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기관들 없는

몸에서 사랑을한다.39)

욕망한다는 것은 생산한다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욕망기계라

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조직체가 구조적으로 생성하는 변용태를

끊임없이 주어진 기관으로 한정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갇힌 조직체를

뚫고 나가 새롭게 기관이 형성되고 더욱 다양하게 변용될 수 있는 무

의 가능성을부여하는 힘이다. 동시에 욕망기계를무한히 생성할 수 있

는 힘은 무가 가진 자유의 몸에서 나온다. 자연히 무의 몸-되기는 경

계를 무너뜨리고 연대(solidarity)를 불러 일으킨다. 이 연대는 이방인,

유색인종, 장애인, 노약자, 노숙자, 임시노동자, 동성애자를 대변하는 여

성-되기를 통해 무의 몸-되기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으로 존재한다. 또

한 대지의 몸, 기관 없는 욕망을 더욱 생성되게 할 것이며, 스스로 여

성-되기의 실천을 통해 계급과 차별을 철폐할 것이며,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차원의 신학-되기, 과학-되기를 형성할 것이다.

이제 신학과 과학은 국가철학의 합리성에 갇힌 기호체계의 해석자

가 아니라 기관 없는 무의 몸과 몸으로 연대한다. 신학과 과학의 그러

한 연결은 살아 움직이는 힘을 직시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변용시키는

타자로 서로를 인정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신학과 과학은 자신 안에

숨어있는 가부장적이고 전제군주적 기호체계에 갇힌 남성주의를 해체

하고소수자, 약자, 주변인과연결되고 변용되는 여성-되기를 통해서로

소통할 것이다. 신학은 무의 근원과 직면하면서 얻은조명의 빛으로 교

회와 세계를 향해 예언적 소리를 내게 될 것이고, 거대한 구조-타자의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될 것이다. 과학은 국가철학의 중심기표 노

릇을 내던지고 신학이 내는 예언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실을 사

실자체로 발견하고 관찰하게 될 것이다. 둘은 통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에 개방하여 완전한 배치, 순환, 연접, 각층과 문지방, 통로, 강렬함의 분

포, 영토와 탈영토화를 행하게 하는”3 8 ) 힘이며, 다른 몸들과의 배치

(assemblage)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소통하고 변하는 생성을 생산하는

동인이다. 이 욕망은 국가철학이나 선분화된 기존의 욕망, 즉 기호체계

의 서열과 권력 배분에 의하여 구조화된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리비도

의 근원적 생명성으로, 탈영토화를 선택하는 고통와 함께 끊임없이 탈

영토화와 재영토화를 반복하게 만드는 순수한 욕망 자체의 흐름이다.

따라서 그것은욕망이자동시에 비욕망이다.

그것은 욕망일 뿐 아니라 비욕망이다. 그것은 인식이나 개념이 아니라

실천들의집합이다. 당신은결코 기관들없는몸에 도달하지못한다. 당

신은 영원히 그것에 도달하는 중이다. 그것은 하나의 극한이다…사람

들은“그럼 도대체 이 기관들 없는 몸은 무엇이요?”라고 묻는다. 그러

나 당신은 이미 기관들 없는 몸 위에서 벼룩처럼 뛰어다니고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미치광이처럼질주한다. 기관들 없는몸은 사막의여행자들

이거나 스텝의 유목민들이다. 기관 없는 몸위에서 우리는 잠자고 깨어

있는 삶(waking life)을 살아 가고 싸우며 우리자신의자리를 추구하고

2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화영, ‘무의 몸(無)-되기’를 통한신학과과학의 연대(連帶) 227

간과 공간을 넘어 창조가 일어나는 태초에는 인간, 일자(一者)와 전체, 온 인류는 그

안에서 나뉨 없이 서로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다. 합일 안에 있는 인간 안에 인간성

의 실재 개념이 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개념은 일자(一者)의 합일 안으로

모아진다. 그러므로 완전하고 비차별화된 존재인 일자(一者)는 영원히 충만하며 모

든 것은 일자 속으로 들어오지만 일자는 어떤 것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즉 자아와

세계관을 돌파하여 영혼이 무와 합일될 때, 모든 다양성 ? 분류 ? 분리 ? 다수성이

포함된다. 그러나 잠시라도 구별이 존재하면, 존재의 근원을 떠나서 자아를 삶의 주

인으로 모시고자 하는 욕망이 발생한다. Ibid., 16. 따라서 존재의 근원과‘일치하는

한’, 자아의 욕망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향한 순수한 욕망이 있는 한, 진정한 자기

(The Self)와 일치하는 한, 국가철학에 예속되어 기표작용적 기호체계의 하수인으로

종속되지 않는 한, 욕망은 몸을 무와 연결시키는 역동적 힘이 된다. 따라서 합일의

관점에서볼 때 무는몸과대상적으로분리되거나해체되지않는다.

38) Gilles Deleuze & Felix Guatta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

phrenia (1987), 160. 39) 앞의책, 3-4.

Page 11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야한다고본다. 그것은 국가나 자본, 사회적위치나 입지등을생각하지

않고 먼저 무의 몸이 가진 생성적 관계를 최우선적으로 사유하는 삶이

다. 그 삶은 무욕(無慾)에서 나오는 근원의 힘과 생명으로서의 욕망(慾

望)이라는 오묘한 역설이다.

비어있음의 삶이란 / 오직 길을 따르는 것 / 길의 생성이여 / 오로지 황

홀하고 황홀하다. -도덕경중에서-

주제어

무, 몸, 여성-되기, 연대, 기관 없는 몸, 탈영토와, 재영토화, 탈 기표작용적 기

호계

nothingness, body, becoming-woman, solidarity. the full body with organs,

de-territorialization, re-territorialization, post-signifying regime

접 수 일 2010년 7월 15일

심사(수정일) 2010년 8월 11일

게재 확정일 2010년 8월 15일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개성과 차이를 인정하면서 다양성과 차

이를통한리좀(rhizome)40)적 연대가 가능하게될 것이다.

I I. 결론

통계청이2005년 시행한 인구주택 총조사에 의하면, 종교인구는10

년 전에 비해 10.5%의 증가율을 보였지만 개신교 인구는 오히려1.6%

감소했다고 한다. 이는 한국교회가 성장이 멈추고 현상 유지에도 급급

한 상황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 하겠다.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이

고 있는 종교는 원불교였고 그 다음은 천주교로 나타났는데, 두 종교를

선택하는 이유들이 내면의 깊이가 있다는 점, 지성을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점으로 답변한 어느 인터뷰 내용이 마음에 남는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인들이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그들에게종교성이없어서가아니라,

자신 안에 깊은 종교적 생명성이 없을 뿐 아니라 현대사회를 읽어내는

독법을 갖지 못한개신교 자체의 문제라는것을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보면 오늘의 개신교회가 당면한 숙제는 영성과 지성의 회복

에 다름 아니다. 영성의 회복은 신학이 본디 몸담고 있었던 근원이라

하겠으며, 지성의 회복이란 신학의 변증역사가 증명하듯 과학의 발전

및 인문학적 소양과 소통하는 능력이라 하겠다. 들뢰즈는 오늘날의 지

식인들이 끊임없이 지배와 종속의 구조가 기다리고 있는 현실의 삶과

지식체계에 대한 저항, 그리고 노마드적 분석의 이론과 실천을 고민해

2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화영, ‘무의 몸(無)-되기’를 통한신학과과학의 연대(連帶) 229

40) 리좀이란 대나무, 고구마 등의 구근이 옆으로 증식하는 형태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리좀은 몸에 잠재되어 있는 생성하는 욕망의 변용 능력들이 결합된 형태이다. 들뢰

즈-가타리는 나무는 혈통 관계이나 리좀은 경연관계라고 말한다. 나무는“~이다”라

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라는 연결사를 조직으

로 가진다. 이 접속사 안에는“이다”라는 동사를 흔들고도 남는 충분한 힘이 있다.

Gilles Deleuze & Felix Guatta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

phrenia (1987), cha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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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1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radical change takes place, as the essence of science, and I will

illuminate that science, though insisting value-neutrality, must also

be linked to the patriarchal world view. And after, my work will

examine the body of nothingness as the junction where theology

meets with science.

That is, the characteristics found in the essence of science are to be

reviewed in conjunction with the nothingness of Christian mysticism.

The body where such nothingness is materialized is to be explained

as the process in which ‘the body without organs’ is formed through

deterritorialization and reterritorialization. To do it, I will draw on

Ruldolf Otto who reinterpreted Meister Eckhart’s mysticism in light

of Christian thought and the philosophy of 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 Lastly, I will review the discussions on the body of nothing-

ness through Deleuze’s and Guattari’s women-becoming, desire and

solidarity of freedom to propose the possibility of the theology-

science solidarity through ‘the body of becoming-nothingness.’

Solidarity of the Theology and Sciencethrough Becoming

The Body of Nothingness

Hwa-young, Kim

Lecturer

Yonsei University

Seoul, Korea

Since the advent of modern era, the communication between theo-

logy and science has proceeded in the way that theology responds to

the initiative of science. The mainstream of their communication after

Newton’s accomplishments in physics as such came out as the one

based on the ‘objectivity of scientific logic’ upheld by discovery and

observation.

The aim of this study is to explore a new premise where theology

and science could communicate and reach solidarity in the

perspective of mystical theology and feminism. I will propose the

possibility of a fundamental communication and unification of

theology and science, especially by introducing “the body of

becoming - nothingness” in which the concept of nothingness that

mystical theology advances as the origin of all things is applied to the

notion of territorialized body that feminism has developed. Firstly, I

will disclose the limitations of scientific objectivity and value-

neutrality which have played the central role in the communication

between the two disciplines. I will discuss irrational rationality,

which appears like a ‘religious experience’ that happens when a

2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김화영, ‘무의 몸(無)-되기’를 통한신학과과학의 연대(連帶) 233

Page 11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최승태(감리교신학대학교강사)

I. 서론

성만찬은 예배학, 영성, 목회상담 등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

을 것이다. 물론 이런 관점들 각자에는 그 나름의 분명한 의도와 목적

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성만찬을 신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해 보려 한

다. 이는 신학적 고찰을 통해 성만찬이 갖고있는 의미를 더욱 깊이있

게 이해하기 위해서이고, 이를 통해 한국교회(여기에서는 개신교를 말

함)가 성만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행하도록 돕고 싶기 때

문이다.

한국교회는 성만찬을 너무 적게 행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신학

적 이해를 깊이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성만

찬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가 자신의 핵심사역인 십자가의 의미를 성만찬에서 가장 명확하게 밝

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만찬을 모른다면, 이것은 기독교의 의미를 모

르는것이된다. 이런점에서, 성만찬은교회의 삶을해석하고 규정하는

2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235-270

Page 11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 가운데“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는 성만찬을 단순한 인간의 의

식이아니라 하나님의구원을 베풀어주는 성례전으로 만들어준다. 따라

서 리마문서는“성만찬의 전 행위가 성령의 임재”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3) 성령의 임재 안에서 성만찬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되고, 그

리스도에대한기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만찬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되는 것이 성령의 능력 안

에서 가능하다해도, 그것은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만일성만찬을삼위일체론적으로살피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예수

라는한 인간의 의식행위에 불과한 것이될 것이다.

또한 성만찬이 그리스도에 대한기억을 나타낸다면, 이것 역시 성령

의 능력안에서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성만찬의 기억

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관계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삶과 죽

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성만찬은 종말

론적성격을 갖고 있다. 성만찬은 최후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의잔

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가 성만찬에서 하신 약속에서 잘

드러난다:“내가 너희에게이르노니내가이제부터하나님의나라가 임

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난 것을다시마시지 아니하리라”(눅 22:18).

이런의미에서, 성만찬은삼위일체론, 하나님 나라, 그리고 종말론 등

적어도 세 가지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

면, 성만찬은 예수의 죽음이 단순히 한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적 사랑임을 나타낸다. 성만찬은 또한우

리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해준다. 그리고

성만찬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잔치를 상징하며, 이것에 대

한 희망을 갖게해 준다.

그러나 이 세 신학적 관점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련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237

1982), 10-13.

3) 앞의책, 13.

규범적인 성례전이라고보아야 한다. 성만찬에 대해신학적으로 진지하

게 숙고해야할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욱이 컴퓨터를 비롯한 스마트폰 등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듣는

것보다 보고만질 수 있는것에더욱 이끌리는 경향을 갖고 있다. 따라

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설명할 때, 설교의 형식보다 성례전의 형

식이훨씬더 효과적일수 있을것이다. 성만찬은직접보고, 만지고, 먹

음으로써 하나님의사랑을 보다가깝게 느낄수 있게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고려해 볼 때도, 한국교회는 성례전에 대해신학적으로심화

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WCC의 리마문서(BEM)에 잘 담겨

있고, 이후여러학자들이 성만찬을신학적 관점에서다루었다. 그들가

운데 대표적 학자들은 개신교의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조

프리 웨인라이트(Geoffrey Wainwright), 제임스 화이트(John D. James

White), 그리고 동방 정교회의 지지울라스(Zizioulas), 알렉산더 슈메이

만(Alexander Schmamann) 등이있다.1)

성만찬을 신학적으로 고찰해 보기 위해서는 역으로 성만찬이 내포

하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리마문서

(BEM)에 따르면, 성만찬은적어도“아버지하나님께대한감사,”“그리

스도에 대한기억”,“성령의임재를 위한기도”등 세 가지의미를 담고

있다.2)

2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1) 리마문서 이후로 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연구는 다음과 같다: 위르겐 몰트만,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박봉배 옮김(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0). Geoffrey Wain-

wright, Eucharist and Eschat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1).

John D. James F. White, Sacraments as God’s Self-Giving: Sacramental Practice

and Faith (Nashville: Abingdon Press, 1983). Zizioulas, Being as Communion

(Crestwood, NY: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93). Alexander Schmamann,

The Eucharist: Sacrament of Kingdom, trans. Paul Kachur, (Crestwood, NY: St.

Valdimir’s Seminary Press, 1988).

2) World Council of Churches,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Geneva: WCC,

Page 12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파악하기 위한 틀로서 제시되었다. 기독교는

예수가 단지 한 인간이 아니라, 성육신한 하나님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복수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기독교가

고대의 희랍인들에게 전파되었을 때, 그들은 바로이점을 이해할 수 없

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일자로서의 하나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래서 한 분 하나님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양태론이나 종속론 같은

이단 교설이 나왔다. 기독교는 이 두 이단적 교리를 극복하고 예수의

삶을하나님의 삶으로 이해하기위한틀로서삼위일체론을제시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예수의 고통에 대해 철저히 숙고하

지 못했다. 즉 예수의 고통을 하나님 자신의 고통으로 보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밖을향한 사역으로 이해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당할 수 없

는 하나님의 고통이란 모순적 등식이 성립되었고, 이것이 신학의 전통

이 되었다.5)

하지만 예수의 고통이 하나님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면, 예수의 고통

은 참된 구원의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기 어렵게 된다. 예수의 고통이

하나님 자신의 고통이 될 때에만, 그것은 단순한 한 인간의 그것이 아

니라,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

나님의 고통의 문제는 성만찬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 성만찬은 예수의 고통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

이다.

하나님의 고통의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한 현대 신학자는 위르겐 몰

트만(Jurgen Moltmann), 칼 라너(Karl Rahner), 그리고 한스 우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이다.

먼저 몰트만에 따르면,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든 고난 받을 수 없다

면, 그는 단지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을 뿐, 남을 사랑할 능력은 없다.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239

5) 앞의책, 21-2.

되어 있다. 삼위일체론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의 사역이 곧 하나님의 사

역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또한 그 하나님의 사역의 핵심이 하나님

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최종 완성이 종말론을 구성하기 때

문이다. 이 세 가지의미가 성만찬 안에포괄되어있으므로, 이 세 신학

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때, 우리는 성만찬의 의미를 보다 깊이 있게 알

수 있을것이다.

I I.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이미 언급한 대로, 성만찬은 삼위일체론적 관점, 하나님 나라의 관

점, 그리고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성만찬을 이 세 관점에

서 살펴보는 것은 성만찬 자체 안에 이 셋의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

이다. 여기에서는 성만찬을 이 세 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써, 성만

찬이지닌의미를 해명해 볼 것이다.

1. 삼위일체론적관점

리마문서는 성만찬이“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아들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시는 선물의 성례전”4)이라고 한다. 이것은 성만찬이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이해되어야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리마

문서는 성만찬이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의 의미

를 갖는다고말한다. 성만찬은예수그리스도가 제정했고, 또한그의죽

음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의식임에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나타낸다는

사실 역시 성만찬이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2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4) 앞의책, 10.

Page 12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나님께 나아오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이제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낮춤은 세상

을 위한하나님의구원의 고통을 나타낸다.

칼 라너(Karl Rahner)역시 예수의 죽음을 신적인 구원사건으로 이

해하기 위해 하나님의 고통의 개념을 발전시킨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

은 본질적으로 완전하고 변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완

전 속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갖고계신다. 완전에 근거한 절대적인 자유

속에 있는하나님은 자신과 다른 어떤 것이될 능력을 갖고있다. 그의

완전한 자유 안에서, 하나님의 불변성과 가변성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

다. 즉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불변적이고, 또한 타자 안에서 가변적이

다. 타자 안에서의 하나님의 가변성, 즉 인간성은 자신 밖에있지 않고,

자신 안에 근거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통해“인간

성을 자신의 것으로 취함으로써”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이다.10) 라너의

견해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은 자신을 넘어 인간을 자신

의 현실로 취하신다는 것이다.11) 따라서 우리는 인간 안에서의 하나님

의 고통에대해말할수 있다.

몰트만과 라너에 따르면, 하나님의 낮아짐은 아들의 성육신 안에서

절정에 달한다. 왜냐하면 성육신은“하나님인 것의 비움을 향한 하나님

의 자기-전달”이기때문이다.12) 타자안으로의 하나님의 자기-전달, 곧

하나님의 낮아짐은 단지 경륜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비움일 뿐

아니라,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연원된다. 내재적 삼위일체 하

나님의 자기-전달은 아버지가 자신의 신성을 아들과 함께 온전히 나

누고, 아들은 아버지께 절대적으로 순종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

고 아버지와 아들의 자기-비움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령은 아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241

1 0 ) Karl Rahner, 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 An Introduction to the Idea of

Christianity, trans. William V. Dych(New York: Crossroad, 1993), 222.

11) 앞의책.

12) 앞의책, 223.

또한 자신만을 사랑하는 신은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의 구원은 타자에 대한 그의 사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

의 특징은 사랑의 대상을 위해고통을 감수하는데 있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하나님의 사랑을 논하려면, 그의고통에 대해서도말해야 한다.6)

고통은 일반적으로 존재의 결핍에서 온다. 그러므로 존재의 결핍에

서 오는 고통의 개념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고통은 존재

의 결핍이 아니라, 사랑의 정열에서 온다고 말해야 한다. 즉 완전하신

하나님이 세상에 대한 사랑때문에 고통을 감수하신다는것이다. 이 사

랑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고통은 단지

경륜적 삼위일체뿐 아니라 내적인 삼위일체에도속한다.7)

몰트만에 따르면, 사랑에서 연유하는 하나님의 고통은 하나님이 세

상에 들어오심으로써구체화되었다. 이것은 빌립보서2장에서 하나님의

자기 비움(God’s self-kenosis)으로 설명되고 있다. 하나님의 자기 비

움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들어오실 때,“아무런 제한이나 한계 없이, 그

래서모든사람이 자신의생명으로하나님께참여할 수 있도록”하나님

이 인간의 모든상황을 받아들이셨음을의미한다.8)

몰트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자기-낮춤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절정

에 이른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상실된 인간의 상황”을 자

신 안에 수용하셨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아들을 버

림으로써 아버지성(Fatherhood)마저 상실하셨고, 이를 통해 죽음을 자

신이 걸머지셨고, 죽음을 걸머지심으로써,“죽음과 율법과 죄 아래 있

는”인간의 상황을 자신이 걸머지셨다.9)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이 하

2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6) 앞의책, 22-3.

7) 앞의책.

8) Jürgen Moltmann, The Crucified God: The Cross of Christ as the Foundation and

Criticism of Christian Theology, trans. R. A. Wilson and John Bowden (New

York: Harper & Row, 1974), 276.

9) 앞의책, 277.

Page 12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의해 버림받은 아들로서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몰트만과 라너의 입장이 발타자르에게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발타자르가 십자가는 아버지와 아들, 곧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분리의 사건이고, 그럼으로써 다른모든 분리들을 포괄할 수 있

는“원초적 신적 분리”(the primordial divine separation)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16)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성령 안에서 일어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분리와 결합을 모두나타낸다.

몰트만, 라너, 그리고 발타자르의 견해들 속에서, 우리는 예수의 고통

을 삼위일체하나님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틀을발견한다. 그

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의 고통은 단순히 한 인간의 고통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통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그의 아버지로부

터 고립된 상태에서 십자가에달린것이아니다. 아버지역시 아들의 고

통에 참여하고 있다. 아들이 십자가에서 실제적인 죽음을 당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자기 아들의 죽음, 즉 아들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는 것

이다.

특히 몰트만은 이 상황을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위해 사용한 단어

‘p a r a d i d o n a i’를 해석함으로써 설명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p a r a-

didonai’는 단순히“주다”혹은“보내다”란 희미한 의미가 아니라,“넘

겨주다”(hand over) 혹은“내어주다”(deliver up)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

기에서 ‘paradidonai’는 자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는 아버지의 적

극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죽음에 넘겨진다. 아들을 죽음에 내어줌으

로써,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버림 받는다. 아

들을 버린 아버지는 아버지의 신분을 상실하고, 버림받은 아들은 아들

의 신분을 상실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신분 상실

의 죽음을 경험한다.17)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분리, 즉 하나님과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243

16) 앞의책, 302.

버지와 아들의 상호사랑이기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의 성육신은 하나님

의 내적 삶과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그것의 본질과 실존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13)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에서 연원하는 하나님의 자기-비움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의 전 생애 역시 비움의 삶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비

우는 한에서, 그는 하나님의 계시일 수 있는 것이다.14) 라너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의 자기-비움의 절정이기 때문에, 십자

가는 하나님의 자기-낮춤의 절정이 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에

대한삼위일체하나님의구원적 사랑의 고통을 온전하게표현한다.

한스 우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역시 예수의 고

통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통으로 이해한다. 이에대해그는 이렇게 말

한다.

아들을 태동하는 가운데서 아버지는 자신을 비운다. 이 비움 안에 하나

님과 세상사이의 모든 가능한 드라마가 이미포괄되어있고, 또한 초월

되어 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분 안

에서만 자신의 위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분은 성령에 의해 생

기고, 또한성령에 의해연결된다.15)

그에 따르면, 십자가는 고립된 인간의 드라마가 아니라 신적인 드라

마이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분리는 영원한 신적

인 삶 안에있는그들 사이의 구분에 근거되어 있다. 다시말하면, 경륜

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로부터 배제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이

둘은 예수그리스도의 역사, 특히그의죽음 안에서 불가분리적으로결

합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한 인간으로서 뿐 아니라 아버지에

2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13) 앞의책, 224.

14) 앞의책.

1 5 ) Hans Urs Von Balthasar, T h e o-Drama: Theological Dramatic Theory, vol. I I I,

trans. Graham Harrison (San Francisco: Ignatius Press, 1988), 304.

Page 12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예수의 죽음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적인 활동으로 이해한다면,

여기에서의 성령의 역할을 또한 살펴봐야 한다. 전통적으로 예수의 십

자가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으로 이해했으면서도, 거기에서의 성령

의 역할이 무시되는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성령의 현존이 없다면, 십자

가는삼위일체적 구원사건이 될 수 없을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와아

들의분리와 일치는 성령의 능력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

면, 성령은 삼위일체의 영원한 끈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아버지가 버

림받은 자들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 아들을 버리기로 결정하고,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것은 성령 안에서 가능했다. 아버

지와 아들 사이의 분리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둘 사이의 일치는 오직

성령 안에서만 가능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

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분과 일치가 삼위일체의 영원한 끈인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십자가에서의아버지와아들의 분리와 일치

역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하나님의 내적 삶 밖에 있는 세상에 대해 폐쇄적이지 않고, 개

방적이 된다. 성령의 능력안에서 세상에 대한 내재적 삼위일체의 사랑

이 가능해진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자가에서 버림받은세상과

자신을 일치시키게 해준다.21) 예수의 고통은 세상에 대한 삼위일체 하

나님의 사랑이 되는것은성령안에서이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고통은

단지한 인간의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의고통임이분명히 드러난다. 즉

십자가의 고통이 단지하나님의 밖을향한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의자

신의 고통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의 고통을 하나님의 고통으

로 볼 수 있을 때, 성만찬은 인간을 살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례전

이 된다. 따라서 성만찬은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만 하나님의 행위가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245

20) 앞의책, 65.

21) 앞의책, 72-3.

하나님 사이의 분리가 십자가에서일어났다.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이 분리는 예수의 외침에 의해 분명하게

표현된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막 15:34).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의 전 생애에서 하나님을“하

나님”이라부르지 않고“아버지”라고불렀다.18) 그런데 그가오직 한 번

십자가에서 하나님을“하나님”이라 부른다. 아들인 예수가 하나님을 아

버지가 아닌 하나님이라 불렀다는 사실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와 아들,

곧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십자가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분리뿐 아니라, 그들 사이의 일치를 나타내기도

한다. 십자가에서 아버지는 버림받은 자들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 자기

아들을 버렸다. 아버지의 이 목적은 아버지의 뜻에대한 아들의 수동적

인 수용에 의해서가아니라, 그의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적극적인순종

에 의해 충족된다. 아버지의 뜻과아들의 뜻의일치가 십자가에서이루

어진것이다.

십자가가 아버지와 아들의 뜻의 일치를 상징하는 한, 자신의 아버지

에 대한 아들의 순종은 내재적 삼위일체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19) 내

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할 때, 이 순종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예수의 자발적인 죽

음은 그의 아들신분에서 연유한다.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순종이 내재

적 삼위일체안에서 아버지에 대한아들의 관계에 뿌리를 두고있다면,

십자가와 부활에서 완성된 세상에 대한 예수의 구원 사명 역시 내재적

삼위일체에 뿌리를 두고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점에서 예수의 고통

은 단지인간의 고통이 아니라 신적인 고통인 것이다.20)

2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17) Moltmann, The Crucified God, 241-9.

18)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80-3. The Crucified God, 145-53. 이하

여기참조.

1 9 ) John J. O’Donnell, The Mystery of the Triune God (Lodon: Sheed and Ward,

1988), 64.

Page 12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구원하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전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제우리는 성만찬을하나님의나라의 관점에서살펴볼 것이다.

리마문서에 따르면,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만찬적 기억은 적어도 세 가지를 내포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룩하신 구원사역에 대한 기

억이고, 또 하나는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에 대한 기억이며, 마지

막으로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에 대한 기억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모두하나의 주제, 즉 하나님의 나라로귀결된다. 왜냐하면 하나

님의나라는 예수의 선교의 핵심주제였기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

를 주셨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

루고 계시며, 장차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 사역을

하셨고, 지금 하고 계시며, 또한 장차 이루실 예수를 기억하는 것이 성

만찬이라면, 성만찬이야 말로하나님 나라를 집약하는 예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를 설파하고 약속한 예수에

대한기억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만찬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담지되어 있으며, 성

만찬을 행하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성만찬을 행할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안에서 하나님의나

라를 미리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성만찬을

살펴봐야할이유가 바로여기에 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핵심 주제였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신학자들

에 의해 밝혀졌다. 특히 존 소브리노(Jon Sobrino)는 그것을 더욱 강하

게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예수에게 궁극적인 것”은 자기자신이 아니

었다. 왜냐하면그는자신에 관해설교하지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

순히 하나님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을 언제나 성서적인

전통에서 보았으며, 그 전통에서 하나님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관계

적인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전통에서 볼 때, 하나님은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247

되며, 하나님께 대한감사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삼위일체론의 입장에서 보면, 성만찬은 교회 공동체의 교제를

증진시키는 성례전이란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삼위일체론의 관점

에서볼 때, 성만찬이 교인들의형제적 교제를 나타내기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만찬을 통해 그들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의

형제가 되고, 이로써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형제들의 교제를 나

누게되는것이다.

그런데 이 성만찬적 교제는 삼위일체적 교제(trinitarian commu-

nion)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성만찬의 교제는 삼위일체적 교제 안에서

수행되는 예수의 죽음에 근거하고 있기때문이다. 즉 성령의 능력안에

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무한한

사랑이 인간에 대한하나님의 사랑의 근거이고, 따라서 구원을 위한하

나님의고난의 근거란 것이다. 이런점에서, 성만찬을통해교인들은아

들의 고난에 참여하고, 이를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

며, 또한그 사랑안에서 서로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더욱이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성만찬에서 제시되는 예수의

몸과 피는 한 인간의 몸과 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 즉 아

들의 것이 된다. 여기에서 신적인 몸과 피라는 말은 신에게 몸과 피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 영적으로양육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성만찬적인 예수의 몸과

피에 대한 삼위일체적 해석은 그의 몸과 피가 우리를 살리는 참된 음

식과 음료(요 6:54)라는 예수 자신의 말씀과 상응한다. 그 신적인 몸과

피를통해교회, 즉 하나님의자녀들이양육된다.

2. 하나님의나라의관점

지금까지 우리는 성만찬을 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거기

에서 우리는 예수의 몸과 피가 단순히 한 인간의 것이 아니라, 세상을

2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있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은 세 가지에 집중되었다. 첫째로, 그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의 보편성을 가리킨다. 그들은“모든 나라들이 하

나님께로 전환하는 것”을 강조했고, 이 전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

망에 있어서 필수적 요소가 된다(막 4:13, 7:8-17; 사 49:22-26). 예언

자들은 모든나라들이하나님께로전환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께 대한 모든 나라들의 순종에 기반 해서 세워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중심적 특징은 메시아적 의로움이었다(사 11:3-

5; 렘 23:5-6). 이 의로움은주로 자기백성을 위한하나님의 정화와 갱

신을 나타낸다(사 1:25-6, 4:3-4; 렘 31:31-2; 겔 36:25-6). 셋째로, 예

언자들에게 있어서 평화는 구원과 같은개념이었으므로,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평화의 시기에, 전쟁이 없는시기에, 심지어 인간과동물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에 세워질 것이라고 기대했다(사 11:6-7). 예언

자들에게 역사의 목표란 하나님의 주권적 왕권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

움에대한, 그리고 평화와 구속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보편적

인식에 도달하는것이었다.24)

비슬리-머레이의 관점이 옳다면, 예언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역사

밖의 실재가 아니라 역사적인 실재로 이해했음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에 의해

설립될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에하나님 나라도 있

다는공식이 성립된다. 하지만 아직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통치를 인

식하고 있는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희망은 모든민족이 하

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인식하게되는것이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와 같은 구약성서적, 특히 예언

자적 전통 속에서 살았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개념 역시

이 전통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하지만 예언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역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249

24) Ibid., 20.

25) Wolfhart Pannenberg, Theology of the Kingdom of God (Philadelphia: The West-

minster Press, 1969), 60.

항상 역사와의 일정한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적 전

통에서 살았던 예수에게 궁극적인 것은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

시는 하나님이었다. 예수에게 궁극적인 것은 교회도 아니었다. 왜냐하

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예수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궁

극적인 것은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였고, 또한

단순히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the God of the King-

dom)이었다.22)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구약성서의 전통에 기인하며, 추상적인 개념

이 아니라 야훼의 주권적인 통치로 구체화된다. 구약성서 기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왕권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

치행위를 뜻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이해했는데, 이

런 이해는 출애굽 사건에서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에 대한 역

사적경험에서나왔다.23)

후대에 이르러, 하나님의 왕권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의 미래사

건을 의미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사상에서, 하나님의 종말론

적 통치는 언제나 역사 너머에서가 아니라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으로 이해되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가 역사에 한정된다는 의

미는아니다. 예를들면, 후대에 이르러 출애굽은 미래에 일어날 약속의

땅의 소유와 결합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에 근거해서

미래의 사건인 약속의 땅의 소유를 기대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조

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나라를 세워주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인 통치를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역사안에서 한 나라를 세워주실것이라고 믿었다.

비슬리-머레이(G. R. Beasley-Murray)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예언

자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특징을 언급했다. 예언자들이 지니고

2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22) Jon Sobrino, Jesus in Latin America (Maryknoll, NY: Orbis Books, 1987), 83-4.

2 3 ) G. R. Beasley-M u r r a y , Jesus and the Kingdom of God (Grand Rapids, Mich.: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6), 17-8.

Page 12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사실을 보여주었다.2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가 죽음을 포함하여 생애동

안 행했던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에 임한다는 사실

을 보여주고있다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를 세상 안에 구체화시키는

사건이 된다.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가져오기 위해, 예수는 자신의 희생

을 통해 세상의 죄와 죽음의 세력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기낮춤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부정적인 것들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부정적인것들안으로 침잠하는 하나님”에 의해나타난다는사

실을 암시한다.29)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세상의 부정적인

것들을 자신의 초월적인 능력이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자신 안으로 그

것들을 감싸안는방식으로 극복하셨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의 희생적인 십자가 사랑에서 절

정에 이른다면, 우리는 성만찬이야말로 예수의 그 사랑을 집약하고 있

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만찬이 그의 죽음의 희생적인 의미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만찬에서의 예수의 말씀은 확실하게 그의

죽음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사랑 때문이었음을 밝혀준다:“또 떡을 가

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

하여 주는 내 몸이라”(눅 22:19);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나의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달리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가져오기 위한 자신의

희생적인 죽음의 의미를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통해 상징적으로 밝

혔기 때문에, 우리는 성만찬이 그의 희생적인 죽음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점에서, 성만찬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세상이“하나님

나라를 향해”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음을 선언한다.30) 그러므로 성만찬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251

28) 앞의책, 91-3.

2 9 ) Jon Sobrino, Christology at the Crossroads: a Latin American Approach, t r a n s .

John Drury (Maryknoll, NY: Orbis Books, 1978), 220-1.

사의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었던 반면, 예수에게그 나라는 가까이 있었

다. 신약성서의 메시지는 예언자들이 기대했던 미래의 희망이 예수 안

에서 그리고 그와 함께 살기 위한 구체적인 근거이며 원리라는 것이

다.25)

세례 요한 역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그의개념은 예수의 그것과 달랐다. 세례요한이 하나님 나

라를 하나님의 진노와의 관계 속에서 선포한 반면, 예수는 그 나라를

복음으로 설교했다.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는“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분

명한 긍정”(God’s definitive yes to history)이었다.26) 다시 말하면, 하나

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그 나라의 하나님께서 세상에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따라서 세상의 비참함도 이제 막을 내렸다

는 것이다.27) 즉 예수에게 있어서, 세상에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나라

의 하나님은 형이상학적인 혹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항상 사랑이

신 자신의 아버지였다.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은 그 나라의 하나님에

대한예수의 이해의 근거였고, 그에게 궁극적인것의구성적 요소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입장에서, 하나님 나라는 구체적인 실재였다. 이것

은 그 나라의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특히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사람

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믿음을 예수가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

한다(눅 4:16).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런 이해의 바탕 위에서, 예수는

그 나라의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과 눌린 자들을 사랑하신다고 선포했

으며, 이 선포에 헌신했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의 중심

메시지였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 실재로서

인간에게, 특히 소외된 사람들에게 복음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

수는 기적들과 축사, 교육과 식사를 통해,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고 또한 긍정하신다는

2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26) Sobrino, 89.

27) 앞의책.

Page 12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랑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말로만은전달되지 않는다. 예수가 자신의 삶

으로 보여준 것처럼, 우리도 삶을 통해 그런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성만찬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인 예수의 사랑의

핵심이다.

성만찬이 예수의 타자를 향한 희생적인사랑을 개괄해준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실현시켜주는예수의 희생적인 사랑에 대한 기억

을 제정해주는 예전이 된다. 그러므로 성만찬 의식을 행할 때마다, 우리

는 예수의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기억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삶

을 따를수 있을것이다. 따라서 성만찬의기억은 우리로 하여금예수의

삶의원리인사랑에 따라살도록 격려해줄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함

을 상기시켜 준다. 성만찬은 우리가 예수의 뒤를 따라 그렇게 살 때, 하

나님나라가 역사속에서 실현된다는사실을 분명하게보여준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성만찬은 단

순한 예전의 수준을 넘어, 교회에게 실천적인 의미를 부여해준다. 성만

찬은 참여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삶을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도록 격려하고 힘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

서, 성만찬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헌신하도록인

도하는 성례전이된다.

3. 종말론적관점

지금까지 성만찬을 삼위일체론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살펴보았

다. 전자의 입장에서 성만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의 구

원을 나타내고, 후자의 입장에서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

서 맛보게 해주는 의식이 된다. 이제성만찬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살펴

보려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성만찬에서 마지막 잔치를 약속했기 때

문이다.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마지막에 베풀잔치에 대한약속을 기억하는 성례전이다.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253

은 세상을 위해내어 주는 예수의 몸과 피를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단

순히피안적인실재가 아니라 역사적인실재임을 구체적으로표현한다.

만일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가져오기 위해 헌신했다면, 그의

성만찬의 말씀역시 그것을 위한 자신의 헌신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하나님 나라가 아직도 온전히 실현되지않았지만, 예수의

성만찬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그의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이미 역사에

임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예수의 희생적인 사랑이 하나님 나라

를 세상에 가져오는 결정적 행위이라면, 성만찬은 예수를 따르는 우리

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에 실현된다는 사실을

나타내준다. 물론 그 사랑은 예수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특히 자신

의 죽음을 통해 보여준 사랑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가 사

랑의 나라임을, 또한하나님 나라의 구성원들이예수가 행했던 그 사랑

의 원리에 의해살아야 함을선포한다.

그러나 역사는 아직 하나님 나라로 변화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 나

라는우리에게‘복음’일 뿐 아니라, 일종의‘위기’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그 나라의 원리에 맞지 않을 경우,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현재적 삶이 계속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

우,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삶의원리를 그 나라의 원리, 곧 사랑으로 바

꾸도록 강제할 것이다.31) 따라서 바울이“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

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전 11:26)고 말할 때, 예수의 죽음은 타자를 위한, 특히 가난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을 위한 그의 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할 것은 바로 타자를 위한 예수의 희생적인 사

2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30) 소브리노는 두 유형의 역사를 말한다. 하나는“하나님 나라를 향한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하나님 나라에 역행하는 역사”이다. 이 둘의 기준은 사랑이다. 우리가 타인

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할 때, 역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움직인다.

Sobrino, Jesus in Latin America, 84.

31) Ibid., 67.

Page 12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재 삶과관련되어있기때문이다.34)

라너의 입장에서 보면, 종말론은 미래가 현재에 투사된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우리의 현재 경험이 미래에 투사되어있

음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는“미래의시작이며또한미래를

향한 역동성”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35) 예를 들면, 성서적 종말론적 진

술들 가운데 하나인 최후의 심판은 우리의 현재 삶과 유리된 채 파악

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현재의 삶과 연관되어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다. 인자로 묘사되어 있는 최후의 심판자는 인간을 그의 삶에 따라 심

판할 것이다. 이것을 포함하여 성서의 모든 종말론적 진술들은 미래에

로의현재삶의투사이다.

라너는 성서의 종말론적 진술들이 마지막 것들에 대한 기독교 인간

성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36) 라너에게, 기독교의 인간성은 인간이 영이

아니라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는 인격이다.37)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추상적인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하나의 총체적 인격”을 지향한다.38)

종말론적 구원은 총체적 인격에 적용되는 것이다.39) 여기에서 라너의

강조점은 종말론적인 구원의 완성은 우리의 총체적 현재 삶과 유리된

것이아니라 연관되어있다는 점이다.

라너가 현재와 관련된 종말론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종

말의감추어짐을 부정하는 것은아니다. 그에의하면, 성서가 말하는 세

상의 마지막 때는 계시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알 경

우,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알기라도 하듯이 교만할 수 있

기 때문이다. 미래사건의 신비에 대한 절대적 성격이 우리에게 알려진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255

34) Ibid., 433.

35) Ibid., 432.

36) Ibid., 433.

37) Ibid., 434.

38) 앞의 책.

39) 앞의책.

기독교의 종말론은 마지막에 대한 교리, 곧 마지막 교제(the final

communion) 혹은 구원 역사의 완성에 관심한다.32) 이 교리로 인해, 종

말론은 그리스도의 재림, 마지막 심판,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이

미래에 일어날 사건만을 다룰 뿐, 현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

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라너의 말대로, 종말론이 마지막 성취를 가리키

고 있는 한,‘미래성’(futurity)은 추상적인 인간의 희망이 아니라 모든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완성에 대한 구체적인 희망을 나타낸

다.33)

이와 같은 종말론적 희망은 그리스도가 성만찬에서 약속한 최후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의 마지막 잔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마지막 잔치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힘든 고난을 이겨낼 희망을

발견하는것이다.

여기서는 종말론을 희망과 관련하여 진지하게 숙고하는 세 신학자

들을 다룰 것이다. 그들은 칼 라너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그리고 위르겐 몰트만이다. 이들은 모두 종말론을 항상

현재와 연관된 미래의 희망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희망의 관점에서

종말론을 다루는 그들의 견해는 성만찬이 내포하고 있는 종말론적 관

점을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라너에 따르면, 종말론이 구원역사의 성취를 의미한다면, 미래는 현

재와 연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우리는 곧 미래의 우리이기 때

문이다. 따라서 종말론이 현재와 연관되어 존재하는 한, 종말론은 현재

의 인간 삶에부가적인 요소가 아니라 구성적인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진술들은 미래에 대한 진술들이 아니라 구원역사 안에 있는

인간의 현재삶에대한 진술들이다. 우리의 미래는 철저하게우리의 현

2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32) Rahner, 431.

33) Ibid.

Page 12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왔다. 미래가 예수와 함께숨겨진 형태로 이미 현재에서 시작되고 있다

면, 미래는 현재와 유리된 것이아니다. 오히려 미래의현존과 함께하는

현재의 삶은“종말론적으로 나타날 본질적인 형태로 되어가는 과정”으

로 보아야 한다.43)

하지만 판넨버그의 입장에서, 미래의 완성이 우리의 현재 삶 속에

이미 현존하고 있다할지라도, 그 미래의 삶이 현재의 연장이라고 생각

할 수는없다. 오히려 종말론적 완성의 때에도 현재의 삶이상실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항상 하나님 안에존재하

고 있기때문이다.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참된본질은 부분적으로만현

재에나타나며, 완성의 시간에 온전히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완

성은 하나님이 피조물의 참된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

다.44)

판넨버그에게서 우리의 현재적 삶이 중요한 것은 미래의 완성에 대

한 희망 때문이다. 이 희망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지향점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성서에서, 이 희망은 예수의 재림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왜

냐하면 그것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단지 첨가적인 성격을 갖는것

이 아니라, 종말론적 완성의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재림이 하나님 나라의 구성적인 요소가 되는것은 그가 자신의

삶과죽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다가옴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다시말

하면, 아버지의 나라가 아들의 지상에서의선포와 함께 그리고 그 선포

안에서 이미세상에 현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나라는 영광중에다

시 오시는 아들과 함께온전히 실현된다는 것이다. 또한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그의 다시오심은 우리의 희망을 구

성한다. 역으로 말하면, 이 희망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한다.45)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257

43) 앞의책, 604, 612-6.

44) 앞의책, 606.

45) 앞의책, 612.

다면, 기만적인 묵시가 횡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비가 이해

될 수 없는 상태로 남아있을 때, 그것은 실수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

이고, 인간을 위한 약속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40) 다시 말하면, 종말

론적 구원의 완성이 감추어짐으로 인해, 그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역사

의 끝까지 함께하는하나님의사랑에대한기대를 갖게한다.

현재가 미래를 향해 투사된다는 것이 라너의 주장이라면, 판넨버그

와 몰트만의 주장은 미래가 현재에로 투사된다는 것이다. 판넨버그는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이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희망을 구성하며, 이 희

망은“하나님 나라의 다가옴”에 의해구체화 된다고 주장한다.41)

판넨버그에 따르면, 종말론적 완성의 다가옴을 가리키는 하나님 나

라의 다가옴은“영원이 시간에로 들어옴”을 의미하며, 종말론적 완성은

피조물의 생명의 본질의 근거이다. 피조물의 삶의 본질이 온전히 발견

되는 것은 종말론적 미래에서다. 하지만 피조물은 예수의 부활 안에서

자신의 미래에 될 것을 이미발견했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은 종말론

적 완성의 선취이기 때문이다.42) 이런 점에서, 종말론적 완성의 미래는

우리의 참되고 실제적인희망을 구성한다.

판넨버그에게있어서, 우리가 우리의 동일성을 온전히 발견할 수 있

는 때는 종말론적완성에서이지만, 종말론적 미래는 예수의 역사안에

서 이미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 속에서 잘 드러난

다:“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

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다시 말하면, 종

말론적 진리는 여전히 숨겨져 있고, 오직 신앙으로만 그것의 숨겨짐을

인식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이미 예수의 활동과 함께 역사 안으로 들어

2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40) Karl Rahner,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I V, trans. Kevin Smith (New York:

Crossroad Publishing Co., 1982), 330.

41) Wolfhart Pannenberg, Systematic Theology, vol. I I I, trans. Geoffery W. Bromiley

(Grand 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Co., 1998), 527.

42) 앞의책, 603-4.

Page 13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적인“자기성”(I-ness)으로가 아니라,“약속에 대한 그의 역사적 신실

성 안에서의 자기 동일성”으로 나타난다.49)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약속

의 환경 안에서 역사 너머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약속을 역사 안에

서 실현하는 분으로 계시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동일성을 역사 안에서

자신의 약속에 대한 신실 성으로 증명하는 것이다.50) 그러므로 하나님

의 신실성은약속의 실현을 보증한다.

하지만‘약속’은 미래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때문에, 자기 약속에 대

한 하나님의 신실 성이 우리의 희망을 구성한다. 하나님의 신실 성은

우리에게대한그의 약속을 성취시켜주는 보증이기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실 성으로 인해,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오심 속에 존재한다. 이 오

심 속에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구원할 것이고, 모든 것에 대한 자

신의주권을 회복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희망은 단순히 하나님 자신

안에있는것이아니라,“지상에서의하나님의주권, 평화, 그리고 의”에

있다.51) 우리는 미래에 하나님이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될 것을 희망하지

만, 이 희망은 하나님의오심과 함께역사안으로 들어오는것이다.

몰트만은 종말론적 희망이 그리스도 사건(Christ event)과 구체적으

로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오심은 이미 그리스

도의 역사 안에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52) 그리스도의 역사가 하나님

의 약속을 포괄하고있다면, 그리스도론은이 약속의 관점에서, 곧 그리

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는미래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부활 이야

기는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약속 안에 직접

적으로 위치한다. 기독교 종말론은 그리스도 자신과 연관되어 있는 약

속을 포괄하는 부활신앙에서연유한다.53) 말하자면, 기독교 종말론은 영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 이해 259

49) 앞의책, 116.

50) 앞의책.

51) 앞의책, 118.

52) 앞의책, 139-40.

53) 앞의책, 190-4.

판넨버그에 따르면, 이런 기독교의 희망이 우리의 현재 삶 속에 이

미 현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지상의 예수가 자신의 말과 행위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그것을 보장했기 때문이고, 또한 성령의 활동때문

이다. 지상의 예수 안에서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에 대한 임박한 기대를

성취하신 성령은 우리를“예수의 메시지의 구조 안에서”살도록 인도하

신다.46)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예수께서 선포한 것, 즉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에 대한 임박한 기대를 갖고 사는 한,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은 우

리 안에서 현존한다. 성령의 활동 안에서, 우리는 이미 지금 종말론적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판넨버그는 이렇게 말한다:“종말론은

단지 여전히 앞에 존재하는 완성의 미래와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또한성령에 의해현재안에서 활동하고있다.”47)

판넨버그 같이, 몰트만도 종말론을 지금 우리 안에 현존하는 희망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몰트만은 종말론은“기독교의 에필로그”가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종말론”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종말론은 그것에 의

해“현재가 변화되고 심지어 혁신되는”기독교적 희망을 구성하기 때문

이다.48) 그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현재와 분리된 미래의 일들이 아니다.

오히려 종말론이야말로우리의 현재 삶을개혁하고 갱신시키는 구체적

인 기독교적 희망을 형성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종말론이 우리의 희망이 되는 것은 종말론적 희망

이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약속의

관점에서 인식될 때, 하나님이 계시되는 장소는“하나님이계약과 신실

성을 영원히 지키는 바로 그 지점”(시 146:6)이다. 하나님은 그의 초월

2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46) Wolfhart Pannenberg, Jesus-God and Man, trans. Lewis L. Wilkins and Duane A.

Prieb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4), 243.

47) Pannenberg, Systematic Theology, vol. I I I, 553.

48) Jürgen Moltmann, Theology of Hope: On the Ground and Implication of a Chris

tian Eschatology, trans. James A. Leitch (New York: Harper & Row Publishing

Co., 1967), 16.

Page 13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다.56) 이 희망 속에서, 역사의 끝을 계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지상의 그리스도의 선교를 따르는 가운데 역사를 변화시키도록

우리를 독려한다.57) 이런 점에서, 판넨버그와 몰트만은 종말론을 미래가

현재에로투사되는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지금까지 몰트만, 라너, 판넨버그 등 세 신학자들에게서 살펴보았듯

이, 기독교 종말론은현재를 극복할 수 있는희망으로 포착된다. 이들에

따르면, 종말론은 단순히 마지막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만찬을 종말론의 관점

에서 고찰해볼 때, 성만찬의 교제는 삼위일체적 교제의 마지막 완성에

대한 선취로 여겨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성만찬에의 참여를 통해 우

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만찬에서 약속한 마지막 잔치(final banquet)

에 참여할 희망을 갖게 된다. 성만찬은 마지막 잔치를 지금 여기에서

미리 맛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만찬은 종말론적 완성을 현재

의 삶 속에 현존시켜 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프리 웨인라이

트(Geoffrey Wainwright)의 주장처럼, 성만찬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마지막 교제를 역사 안에서 부분적으로 실현시켜

주는성례전이 된다.58)

더욱이 기독교의 종말론적 희망이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을 약속하

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 속에서 두드러진다면, 성만찬은 종말론적 희

망에대한 최고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만찬 그자체가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성

만찬의 기억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261

56) Jürgen Moltmann, The Church in the Power of the Spirit: A Contribution to Mes

sianic Eschatology, trans. Margaret Kohl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1),

130-1.

57) Moltmann, Theology of Hope, 195-6.

58) Geoffrey Wainwright, Eucharist and Eschat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1), 150-4.

광 가운데 임하는 그리스도의 오심, 즉 그것을 통해 구원이 완성되는

“그리스도의 메시아적현존”속에서 구체화된다.

하지만 현재의 삶에서는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현존이 무엇인지를

인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그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

다. 그것은 오직“기대되고선취될 수”있을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리스도를 기억할 때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것은 이미현존하기 때

문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파루지아의 현존을 미리 맛볼

수 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마다, 종말

론적 구원의 완성의“아직-아니”의 특징이 우리 안에 이미 현존한다.

그래서 종말론적희망은 그리스도를 기억하는가운데서점화된다.54)

몰트만의 견해에 의하면, 영원한 삶은“무시간성”( t i m e l e s s n e s s )이

아니라“충만한 삶”(ful-filled life)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영원한 삶을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부분적으로일 뿐이다. 전 우주의

구원이 완성될 때,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우주는 하나

님의 영광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따라서 우주는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

시는 장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영원을 지금 경험할 수 있지만, 그

경험을 통해그것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또한인식한다. 이와같은

일시적인 경험은 또한 우리로 완성된 영원한 삶을동경하게 만든다. 영

원한 삶에 대한현재적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만유안에서 만

유가 되시는 종말론적 삶의 완성, 최후의 완성을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다.55)

몰트만의 입장에서, 이런 종말론적 희망은 미래와 유리된 미래가 아

니라, 그리스도의 지상의 활동을 따르도록 인도한다. 이 종말론적 희망

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부활하

고, 고양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가 그들과 자신을 일치시키기 때문이

2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54) 앞의책, 195.

55) Jürgen Moltmann, The Coming of God: Christian Eschatology, trans. Margaret

Kohl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6), 291-5.

Page 13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 떡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우주 자체에

로”확장되며, 따라서 전 피조물을 성만찬에 참여시켜서, 종말론적 완성

을 미리 맛보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말론적 관점에서 볼 때,

성만찬은인간중심적사고를 극복하고, 피조물 전체를 구원의 대상으로

이해하게만들고, 이럼으로써성만찬은인간과 다른피조물의 동료의식

을 갖게하는성례전이되는것이다.

I I I.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성만찬을 세 신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았고, 이 관

점들은 성만찬 안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들을 더욱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미 언급했듯이, 이 세

신학적 관점은 상호관련되어있다. 다시말하면, 교회가 행하는 성만찬

은 지금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단순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해를 넘

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고, 그 참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소유할 수 있게 해주며, 또한 장차 이루어질 하

나님 나라에서의 잔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해주는 성례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 마디로 성만찬은 단순한 예전이 아니라, 교회의 삶을 해석해 주고

규정해주는 규범적 성례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한 기독교의 경건

의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들에게 실천적인 의미를 제공해준

다. 성만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 인격이신 아들 예수의 뒤를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해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자

리까지 가도록 인도해주며, 종말론적 희망을 갖게 함으로써 부조리한

현실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실천적 성례전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성

만찬에서얻을수 있는실천의 구체적 방안은 적어도세 가지이다.

최승태, 성만찬에 대한신학적이해 263

분으로 기억하고,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아가서 다시 오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기억한다. 특히 그리스도의 다

시 오심이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에 대한분명한 통로이기 때문에, 그의

재림 약속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종말론적 희망을 제공

해 준다.

그러나 종말론적 희망은 우리를 미래에로만 향하게 하는 것은 아니

다. 그것은 언제나 현재와의관계속에서 존재하기때문이다. 이 희망은

언제나 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가야할 그리스도의

길은 고난의 길일 수밖에 없다. 초대교회는 성만찬을 행하면서 종말론

적 희망을 갖게되었고, 그 희망으로이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것

은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갖는 종말론적 희망은 성만찬

을 통해서 구체화되기때문이다.

특히성만찬에 대한 종말론적 관점은 생태계의 파괴로 위기에 처한

인간에게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단초를 제공해준다. 종말론적구원

의 완성은 단순히 인간만을대상으로 하는것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서8장 21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

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바울의 이 말은 인간 뿐

아니라 피조물도구원의 완성을 기다리고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관점에서 볼 때, 성만찬은 단순히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를 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떼이

야르 드 샤르뎅(Teilhard de Chardin)의 성만찬 신학에서 잘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성직자가“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Hoc est corpus

meum)라고 말할때, 그것은“떡의조각”을 넘어“모든신비한 몸을 현

존하게 만든다.”59) 다시 말하면, 성만찬에서 떡을 떼는 성직자의 행위는

2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59) Teilhard de Chardin, Christianity and Evolution, trans. Rene Hague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Inc., 1971), 74.

Page 13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성만찬에 대한 이런 이해는 한국교회가 성만찬을 이해하고 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것이다. 더욱이 한국사회로부터외면당할 지경에

까지 와 있는 한국교회가 성만찬에 담겨 있는 실천적 의미를 알고 행

동으로 옮길 수 있다면, 대외적인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

서 한국교회가 성만찬의 가치와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성만찬을 행할 뿐 아니라, 그 의미를 삶

속에적용할 때, 한 단계성숙한 교회로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주제어

성만찬, 삼위일체, 하나님의나라, 종말론

eucharist, trinity, the kingdom of God, eschatology

접 수 일 2010년 7월 15일

심사(수정일) 2010년 7월 20일

게재 확정일 2010년 8월 9일

최승태, 성만찬에 대한신학적이해 265

첫째로, 성만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이신 예수 그리

스도의 삶을본받아,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며그들의 입장에

서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게 해 준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만찬을 행

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언제나 낮은 곳으로 가야하고, 또

한 갈 수 있을것이다.

둘째로,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헌신하게 도와준다. 예

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이룩하려 한 하나님 나라

실현이 성만찬에서구체화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부정적인 것

들을 자신 안으로 침잠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을 통해서

세워진다. 그러므로 교회 역시 성만찬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

의 절망과 고통과 고난을 자신 안으로 감싸 안는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고, 또한그럴능력을 갖게된다.

셋째로, 성만찬은 교회에 종말론적 희망을 안겨준다. 다시말하면, 성

만찬을 통해, 교회는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잔치

를 미리 맛보는데, 이것은 다가올 미래의 영광이 얼마나 크고아름다운

지를 깨닫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우리도 바울처럼 말할 수 있게 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하지만 이것은 장차올 영광을 희망하면서 현실을 무조건 참아야한

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것은 칼 막스의 비판처럼, 종교를 민중의 아

편으로 만드는 일에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

나님의 사랑을 행할 때, 혹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할 때,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커도 장차올 영광의 아름다움을 희망하며 인내할 수 있

다는 의미이다. 마치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참으신 그리스

도처럼, 우리도 장차올 영광을 희망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위해

고난을 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만찬을 통한 종말론적

희망은 교회로 하여금 오늘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치열하게 살

게 하는원동력이된다.

2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접 수 일 2010년 7월 15일

심사(수정일) 2010년 7월 20일

게재확정일 2010년 8월 9일

Page 13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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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brino, Jon. Jesus in Latin America. Maryknoll, NY: Orbis Books,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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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nwright, Geoffrey. Eucharist and Eschat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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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Faith and Order. Geveva: WCC, 1982.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26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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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Inc.,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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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sianic Eschatology. Trans. Margaret Kohl.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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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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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of Christian Theology. Trans. R. A. Wilson and John

Bowden. New York: Harper & Row, 1974.

. Theology of Hope: On the Ground and Implication of a Christian

Eschatology. Ttrans. James A. Leitch. New York: Harper & 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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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hl.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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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Co.,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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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1969.

Rahner, Karl. 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 An Introduction to the Idea of

Christianity. Trans. William V. Dych. New York: Crossroad, 1993.

2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3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the present in following Jesus.

When we see the eucharist from the perspective of eschatology, it

becomes a Christian rite to help us to hope the eschatological fulfil-

lment of salvation. But it is not separated from but in relation to our

present lives. Accordingly, when we participate in the eucharist, in

the power of the Spirit we can foretaste the final banquet in the king-

dom, and through this, we can endeavor to overcome our present

difficulties.

When the eucharist is understood from these three theological

views, the eucharist is not only a rite for Christian piety, but it has a

practical meaning in that it helps us to follow the life of Jesus who

loved human beings and gave himself to them. In this sense, these

three theological perspectives help the participants to see the

eucharist as a worthwhile sacrament in and by which they can have

the triune God’s saving grace, and foretaste the kingdom of God and

the final banquet in the kingdom, that is the culmination of salvation.

최승태, 성만찬에대한신학적이해 269

A Theological Approach to the Eucharist

Seung Tae, Choi

Lecturer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Seoul, Korea

The sacrament is established by Jesus Christ, so we should think

that it is effective in itself. Therefore, the eucharist, one of the sacra-

ments, is a Christian efficacious rite. In spite of this, its effectiveness

is not working in itself but by faith. Thus we can say that faith brings

the eucharist to effect.

In this understanding of the eucharist, we will approach the

eucharist from the three perspectives of theology. These are the trini-

ty, the kingdom of God, and eschatology. This is possible because the

eucharist has these theological meanings in itself. When we see the

eucharis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trinity, the bread and wine can

be understood as the triune God’s self-giving to save the world, and

we can receive this grace when participating in the eucharist through

the Spirit.

When the eucharist is view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kingdom

of God, it is a Christian rite not only remembering Jesus Christ’s

sacrificial love for the world but also helping Christians to foretaste

the kingdom of God by the power of the Spirit. And those who

foretaste this future banquet will endeavor to bring the kingdom to

2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3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회회칙

제1조 명칭

본 회는“한국조직신학회(Korean Society of Systematic Theology)”라 칭한

다.

제2조 목적

본 회는 회원 상호간의 학문적 교류와 공동연구를 통하여 우리의 조직신학

을 정립 발전시킴으로써 한국과 세계의 교회와 신학계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 사무실

본 회의 사무실은회장이 임직하고있는학교나 근무지에두는 것을원칙으

로 한다.

제4조 사업

본 회의 목적 수행을 위하여 연구발표 및 학술대회, 학회지 출판 및 기타

사업을한다.

제5조 회원의 자격

본 회의 회원은다음과같다.

1. 정회원: 본 회의 정회원은 조직신학 및 인접 학문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거나 또는 대학이나 이에 준하는 기관에서 조직신학을 교수하

고 있는자로한다.

2. 준회원: 준회원은 조직신학 및 인접 학문 분야에서 박사학위 취득 과정

에 있는자로한다.

3. 특별회원: 특별회원은 임원회의제청에 의해서 총회에서 허락을 받은자

한국조직신학회회칙 2712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3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12조 임원회

임원회는 회장이 필요시 수시로 소집하고, 총회에서 위임된 업무를 처리한

다.

제13조 편집위원회

편집 위원회는본 회의 학술지간행및 출판 사업을주관하며 편집위원회에

관한규정은 따로둔다.

제14조 재정

본 회의 재정은 회원의 입회비와 연회비, 찬조금 그리고 기타 수익금으로

한다.

제15조 부칙

1. 본회의회칙은통과일로부터시행된다.

2. 회칙은 정기 총회에서 출석회원 2/3 이상의 찬성에 의해서 수정할 수 있

다.

3. 본 회칙에명시되지않은사항은 정기총회 및 임원회의의결과 통상관

례에따른다.

한국조직신학회회칙 273

로 한다.

제6조 회원의 가입

제5조의자격을 갖춘 자로서 본 회에 가입하고자 하는 자는 소정의 입회원

서를 제출하여총회의 허입을받아야한다.

제7조 회원의권리

본 회의 정회원은 의결권,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지며 본 회의 각종 학술

활동에 참여할수 있다.

제8조 회원의의무

본 회의 회원은 회칙을 준수하고 소정의 회비를 납부해야 하며 본 회가 주

최하는 학술대회에 참석하고학회지에 기고해야한다.

제9조 임원

본 회는 학회운영을 위하여 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회계, 대외협력부장, 편

집부장, 감사 각 1인의임원을 둔다. 필요시 학문적 교류를 위하여 지회와 지회

임원을 둘 수 있다.

제10조 선거와임기

본 회의 임원은 총회에서 2인 이상의 추천과 최다수 득표로 선출하고 임원

의 임기는 2년으로하되, 회장과부회장임기는 각각 1년으로한다.

제11조 총회

본 회의 정기총회는 매 년마다 회장이‘한국기독교공동학회’기간 중 소집

하고 회칙 수정, 임원 선거, 사업 및 예, 결산 승인, 회비 결정, 회원 허입, 특별

회원 추대 등의 회무를 처리한다. 임시총회는 회장이 학회 운영을 위하여 불가

피하다고판단되었을 때에임원회의결의에 따라소집한다.

2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3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5조 업무

편집위원회에서는 한국조직신학회 정기학술대회 주제에 대한 논문 기고자

를 위촉하고, 논문 심사위원 선정 및 우수논문을 심사하며, 한국조직신학회의

모든출판업무를 주관한다.

제6조 학술지 명칭

본회가 편집 출판하는 학술지는「한국조직신학논총」(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이라칭한다.

제7조 학술지 발간

「한국조직신학논총」은 매년 3회( 6월 3 0일, 9월 3 0일, 12월 3 0일) 발간함을

원칙으로한다.

제8조 학술지편집

논문은 투고순서에 따라 심사에 회부하며, 책의 구성 및 편집에 관한 모든

사항은편집위원회에서결정한다.

제9조 통보

편집위원회는 투고논문의 접수, 심사 및 게재 여부에 관련된 사항을 투고자

에게통보한다.

제10조 원고료및 게재료

편집위원회는 학술대회를 위하여 채택한 특별한 주제에 관해 연구 위촉한

논문에 대하여는 소정의 원고료를 지불하고, 외부 연구비 지원에 따른 연구 결

과물게재시 편집위원회에서정하는 소정의게재료를납부해야한다.

제11조 학술지 배포

본회 학술지는 연회비를 납부한 한국조직신학회회원에게 무료로 배부하며,

한국조직신학회회칙 275

한국조직신학회편집규정

제1조 명칭과사무실

본회는 한국조직신학회 회칙 제13조에 따라 한국조직신학회 편집위원회라

칭하며, 사무실은 편집위원장이 소속된 학교나 근무지에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2조 목적

본회의 목적은 한국조직신학회에 소속된 회원들의 학문적 교류를 원활히

하고자 회원들의 연구결과를 수록한 조직신학 전공 학술지를출판하는데 있다.

또한 이러한출판 사업을통해회원들의연구업적이 소속기관및 학계에서공

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받도록협조하는데있다.

제3조 위원구성임기

본회의 위원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추천한 약간 명으로 구성된다.

위원장은 본 학회 편집부장이 담당하며, 편집위원은 국내외 대학에서 조직신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동일 전공분야에서5년 이상 연구활동을 계속한

자로 연구 및 학술 실적이 우수한 자여야 한다. 편집위원의 임기는2년으로 한

다.

제4조 회의소집

편집위원회는 편집위원장이 소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필요시 인터넷

상에서 회의할 수 있다. 또한 편집위원 과반 수 이상의 요청으로 회의를 소집

할 수 있다.

2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3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제1조 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한국조직신학회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고자 하는 자가

준수해야할 사항을정하는데있다.

제2조 투고 자격

본회 회원으로서 정기적으로 본회 소정의 연회비를 납부하는 자는 누구든

지 투고할 수 있다. 본회 회원이 아니라도 편집위원회의 허락을 받아 투고할

수 있다.

제3조 투고 신청서양식

투고자는 본회‘논문투고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한다. 투고신청서 양식

(양식1)은 조직신학회홈페이지에서다운받아사용할 수 있다.

제4조 구성 요소

투고논문은 다음의 5가지 구성요소를 갖춰야 한다. 1. 논문 2. 각주 및 참고

문헌목록 3. 외국어 초록(abstract) 4. 한국어 주제어 5. 외국어 주제어( k e y

word)

제5조 논문

1. 모든 논문은 한글 혹은 외국어로 된 다른 학술지에 발표되지 않은 것이

어야한다.

2. 본회학술대회발표 원고도규정에따라 투고해야한다.

3. 「한국조직신학논총」과「한국기독교신학논총」등 학술지에 관련된 선행

논문들이 있을 경우, 이를 참고하여 인용하고, 각주, 참고문헌에 그 사실

을 표기한다.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277

도서관 및 학문 연구를 위하여 구입을 희망하는 자에게는 회비에 상당하는 후

원금을 받고배부한다.

제12조 발행및 인쇄

본회 학술지의 발행인은 한국조직신학회 회장으로 하고, 인쇄 출판 및 배부

에 관한세부사항은 편집위원회에서결정한다.

제13조 판권

본회에서 출판된 모든 글의 판권은 저자가 소유한다. 단, 인터넷 출판의 경

우 학회가그 판권을 소유한다.

▣부 칙

1. 본 규정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승인 즉시 발효하며, 이 규정에

명시되지아니한기타자세한 사항은관례에 따른다.

2. 본 규정은 편집위원2/3 이상의 찬성으로개정할 수 있다.

2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4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9조 원고 분량

투고 논문(본문 10p, 각주 9p, 바탕체, 줄 간격 160)은 A4용지15매 이내로

작성한다.

제10조 제출 방법

투고자는‘논문투고 신청서’(양식1)와 함께 논문을 E-mail로 제출함을 원

칙으로한다.

제11조 제출 기한

원고 마감은출판 3개월전으로 하고, 제출된 원고는반송하지않는다.

제12조 게재 논문제한

논문은 연속으로게재되지않는것을원칙으로한다.

▣부 칙

1. 본 규정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승인 즉시 발효하며, 이 규정에

명시되지아니한 기타자세한사항은 관례에따른다.

2. 본 규정은편집위원2/3 이상의찬성으로 개정할수 있다.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279

4. 고전어(히브리어, 헬라어)는 원어 사용을 원칙으로 하되, 음역할 수도 있

다.

5. 내용 구분은I, I I → 1, 2 → 1), 2) → (1), (2) → a), b) → (a), (b)의 순으로

한다.

제6조 각주와참고문헌

1. 논문은 각주를 사용해야 한다. 각주 및 참고문헌의 양식은 표 1을 참조

한다.

2. 논문에서언급된것만을참고문헌목록에포함한다.

제7조 외국어초록

1. 내용

논문의 목적, 연구방법론, 연구내용및 연구성과 등 제시

2. 분량

A4 1매 이내 혹은외국어 300단어내외

3. 제목및 인적사항

논문제목, 성명, 학위, 직위, 소속, 소재지를기재

예) Kyun-Jin Kim, Dr. Theol.

Professor, College of Theology

Yonsei University

Seoul, Korea

비전임의경우직위를Lecturer로 표기함

제8조 주제어

한국어와외국어 주제어를각각 5개 이내로작성한다.

2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4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pretation 49 (January 1995): 229-280.

2) 저서 인용의경우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I』(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135.

Peter C. Hodgson,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67.

3) 편·역서 인용의경우

위르겐몰트만/이신건옮김, 『희망의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56.

Dietrich Bonhoeffer, The Way to Freedom, trans.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32.

Helmut Thielicke,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43.

Donald K. McKim,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Cam-

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51.

Peter C. Hodgson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56.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4.

4) 학위논문인용의경우

김철수,“우리말 사도신경에 삭제된‘음부에 내려 가사’에 대한 연구,”(계명대

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12-23.

H y u n-Shik Jun,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

western University, 2001), 68.

2. 참고문헌 작성법

1) 전체 구조는 한국어 자료를 앞 쪽에 배치하고, 그 뒤에 외국어 자료를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281

「한국조직신학논총」각주및 참고문헌작성법 (투고규정표 1)

*각주 및 참고문헌에서의 영문 표기는“시카고 스타일”을 따른다.

The Chicago Manual of Style, 15th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3). 각주 및 참고문헌 작성에 있어서의“시카고 스

타일”의 대한 간단한 용례(Chicago-Style Citation Quick Guide)는

다음을 참고할 것: http://www. chicagomanualofstyle.org/tools_

citationguide. html

I. 한국어 학술지

1. 각주표기원칙

·논문의 제목은 쌍 따옴표(“ ”)로, 학술지나 정기간행물 이름은 외 꺽쇠

괄호(「 」)로, 한국어 도서의 경우는 쌍 꺽쇠괄호(『 』)로 표기한다. 단,

외국어 책 제목과학술지 제목은모두이탤릭체로표기한다.

·동일한 논문이나 책을 바로 다음에 다시 인용할 경우: 앞의 논문(또는

앞의책), 30.

·동일 저자의 논문이나 저서를 각주 한 개 이상 건너 뛰어 다시 인용할

경우: Tillich, Systematic Theology (1957), 34.

1) 논문인용의경우

황승룡, “폴 틸리히의 신학에서의 그리스도론의 위치,”「조직신학논총」6

(2001), 101-119.

김균진,“인간복제,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인가?”「기독교사상」506(2001, 02):

96-115.

Jack Dean Kingsbury, “The Resurgence of Systematic Theology,” I n t e r-

2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4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McKim, Donald K.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Thielicke, Helmut.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by John W. Dober-

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I I. 외국어 학술지

1. 각주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동일한 페이지에 있는 글을 연속적으로 인용할

경우: Ibid.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다른 페이지에 글을 연속적으로 인용할 경우:

Ibid., 34.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글을 각주 1개 이상 지나서 다시 인용할 경우:

Tillich, Systematic Theology (1957), 34.

1) 논문/학위논문의경우:

Jack Dean Kingsbury, “The Resurgence of Systematic Theology,”

Interpretation 49 (January 1995): 229-280.

H y u n-Shik Jun,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western University, 2001), 68.

2) 저서/편 역서의경우:

Dietrich Bonhoeffer, The Way to Freedom, trans.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32.

Helmut Thielicke,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43.

Donald K. McKim,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283

배치하는것으로하되, 반드시 각주에서사용된 자료만을제시한다.

2) 국문 자료의 경우 저자의 성명에 따라 가, 나, 다 순으로, 영문 및 외국

자료의 경우는알파벳순으로제시한다.

3) 저자 및 책명에는 마침표를 붙이고, 출판지, 출판사, 출판 연도를 표기함

에 있어서는괄호를삭제한다.

4) 외국인 이름 혹은 한국인의 영어명은 성, 즉 가족명(family name)을 앞

에 쓰고 이름을뒤에쓰며 그 사이를콤마로구분한다.

5) 동일한 필자에 의해 쓰인 논문/저서는 아래 하이픈( 하이픈을 6

번 누름)을 써서 동일 필자에 의한 논문/저서임을 밝히되, 최근에 출판된

것부터 먼저제시한다.

6) 논문명 혹은 책명이 길어서 둘째 줄까지 사용하게 될 때는 저자명이 잘

드러나게9칸 들여서글을 쓴다.

김균진.“인간복제,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인가?”「기독교사상」506(2001, 02):

96-115.

. 『기독교조직신학I』.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김철수.“우리말사도신경에삭제된‘음부에내려가사’에 대한연구.”계명대학

교 박사학위 논문, 2004.

몰트만, 위르겐/이신건 옮김. 『희망의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56.

황승룡.“폴틸리히의신학에서의 그리스도론의위치.”「조직신학논총」6(2001):

101-119.

Bonhoeffer, Dietrich. The Way to Freedom. Trans. by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Hodgson, Peter C.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Jun, Hyun-Shik.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

western University, 2001.

2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4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회심사규정

제1조 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한국조직신학회학술지에 투고된 논문의 심사에 관한 제

반 사항을정하는데있다.

제2조 투고에서발송의과정

편집위원회는아래와같은 일을수행한다.

1. 논문투고안내를 학회홈페이지및 회원들에게E-mail로 공지한다.

2. 투고된 논문의 구성요소(투고 규정4조 참조)들이 미비할 경우 투고자의

수정을거친후, 논문접수를통보한다.

3. 편집위원회의에서 익명으로 처리된 각 논문에3인의 심사위원을 배정한

다.

4. 심사결과를 종합하여 편집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게재여부를 결정하며, 1

주일이내에심사결과를투고자에게 통보한다.

5. 게재 논문은1, 2차 교정을 거쳐 인쇄하며, 인쇄된 학술지는 모든 회원에

게 발송한다.

제3조 심사위원자격

본회는 논문심사를 위해 국내외 대학에서 해당 전공분야의 박사학위를 취

득한 후 5년 이상 전공 관련 주제에 관한 강의 또는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온

자 가운데 편집위원회에서 의뢰한다(양식2 논문심사 의뢰서). 심사의뢰 시 소

정의심사료를지불한다.

제4조 심사기준

심사위원은 아래의 심사기준에 따라서 기일 내에‘논문 심사결과서’(양식

3)를 제출하여야한다.

한국조직신학회심사규정 285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51.

Peter C. Hodgson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56.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4.

2. 참고문헌작성법

*위에서 제시한한국어 논문작성법용례의 경우와동일하다.

Bonhoeffer, Dietrich. The Way to Freedom. Trans. by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Hodgson, Peter C.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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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elicke, Helmut.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by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2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4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사 결과는 필자 이외에 타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심사위원은 심사대상, 내용

및 결과와관련된 모든정보를 타인에게누설하지 않는다.

제7조 심사결과통보

투고자에게심사결과를 즉시통보한다.

제8조 재심 신청

심사위원3분의2 이상으로부터‘수정 후 재심’판정을 받은 논문 제출자는

지적 사항을 수정한 후 재심을 신청할 수 있으며, 재심을 포기할 경우는 게재

불가로 판정한다. 재심을 청구할 경우 동일 심사위원의 재심을 통과해야 차호

에 게재할수 있으며논문재심 신청은1회에한 한다.

▣ 부 칙

1. 본 규정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승인 즉시 발효하며, 이 규정에

명시되지아니한 기타자세한사항은 관례에따른다.

2. 본 규정은편집위원2/3 이상의찬성으로 개정할수 있다.

최윤배, 마르틴부처의 성서주석들에 나타난해석학적관점들에대한연구 287

1. 논문형식심사

투고된논문의 구성요소들이미비되었을경우수정을 요청한다.

2. 논문내용심사

1) 논문구성의완성도(20점)

논문의 구성상 목차와 내용 전개가 논리적이며 참고문헌 및 문장은 적

절한가?

2) 연구주제의 타당성및 심도(20점)

주제에 관한연구가타당하며, 충실하고심도 있게이루어졌는가?

3) 학문적 독창성(20점)

주제의 선정과내용전개 및 결론제시가독창적인가?

4) 학문적 공헌도및 적용성(20점)

주제에 관한 연구가 국내외적으로 학문적 공헌도가 있으며, 교회와 사회

에 적용성이있는가?

5) 연구방법, 선행연구및 통합학문적지향(20점)

연구방법은 타당하며, 선행연구의 검토와 통합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졌는

가?

제5조 심사판정

1. 제출 논문은 관련 전공자인3인의 심사위원에게심사를 위촉한다. 심사점

수가 90점 이상‘게재가,’89-80점‘수정 후 게재,’79-70점‘수정 후 재심,’

69점 이하‘게재불가’로 판정한다.

2. 심사위원2/3 이상이‘게재 가’또는‘수정 후 게재’(즉 80점 이상)이면

‘게재가’로 판정하고 투고자에게 수정 부분을 고치게 한 후 게재한다. 심사위

원 2/3 이상이‘수정 후 재심’또는‘개재 불가’(즉 79점 이하)이면‘게재 불가’

로 판정한다.

제6조 비밀유지

심사과정에서 심사위원이나 논문 제출자는 모두 익명으로 하여야 하며, 심

2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4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①연구윤리확립에 관한사항

②연구부정행위의 예방, 조사에관한사항

③제보자 보호와비밀유지에관한사항

④연구윤리위반검증, 검증결과처리와후속조치에관한사항

⑤피조사자명예회복 조치에관한사항

⑥기타 위원회위원장이부의하는사항

제5조(구성)

위원회의 구성은 위원장을 포함하여 총 5명으로 한다. 회장이 위원장 및

위원을임명하고, 이 중 1명을택하여 필요한행정업무를 관장하게한다.

제6조(임기)

위원의임기는 해당사건의종결 시까지이다.

제7조(회의)

①위원장은위원회의 회의를소집하고 그 의장이되며, 회의를 주재한다.

② 회의는 재적위원 과반수이상의 출석과 출석위원 과반수이상의 찬성으

로 의결한다. 단, 징계 판정에서 제17조의 ④-⑥에 해당하는 의결은

재적위원 3분의 2이상의 출석과 출석위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으로 의

결한다.

③위원회의 회의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며, 필요에 따라 관계자의 출석

을 요구하여의견을청취할 수 있다.

제8조(권한과 책무)

① 위원회는 조사과정에서 제보자, 피조사자, 증인, 참고인에 대하여 출석

과 자료 제출을요구할 수 있다.

②피조사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 또는 자료 제출을 거부할 경우에는

혐의 사실을인정한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③위원회는 연구기록이나증거의 멸실, 파손, 은닉또는 변조 등을 방지하

기 위하여 그에상당한 조치를취할수 있다.

④위원회 위원은 심의와 관련된 제반 사항에 대하여 비밀을 준수하여야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289

한국조직신학회 연구윤리 규정

제1조(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연구자의 연구윤리와 부정행위의 규제에 관한 제반 사

항을 정하는데 있다.

제2조(적용대상)

본 규정은 본 학회에 소속되어 있는 회원으로서 한국조직신학회가간행하

는 학술지나저서에 기고하는자에한하여 적용한다.

제3조(연구부정행위의범위)

연구에서의 부정행위는 연구의 제안과 수행, 연구결과의 보고 및 발표 등

에서 행해진다음각 호의행위에해당한다.

① 존재하지않는데이터 또는연구결과 등을허위로만들어 내는행위

② 다른 사람의 독창적인 연구내용과 결과를 정당한 승인 또는 인용에 대

한 정확한정보의 기재없이표절하는행위

③연구 내용 및 연구 결과에 공헌 한 사람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논문저

자/역자의 자격을 표시하지 않는 경우, 반대로 아무런 공헌이 없는 자

에게 감사 또는 예우를 목적으로 부당하게 논문저자/역자를 표시하는

행위

④ 동일 논문을 반복하여 게재하거나 이미 발표된 자신의 논문과 현저하

게 유사한논문을 이중으로발표하는자기표절행위

⑤ 학계에서 통상적으로 허용되는 범위를 심각하게 벗어난 부정행위로 위

원회의자체적인조사가필요하다고판단되는부정 행위

제4조(연구윤리위원회의설치와운영)

제3조의 부정행위를규제 및 조치하기 위한 연구윤리위원회(이하 위원회)

를 두며, 이 위원회는 연구윤리와관련된 다음각 호의사항을 심의, 의결한다.

2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4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14조(기피, 제척, 회피)

①위원에게 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 경우에 제보자 또는

피조사자는그 이유를 밝혀 기피를 신청할 수 있다. 기피신청이 인정된

경우에 기피신청된위원은 당해조사와관련하여배제된다.

②당해 조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자는 안건의 심의, 의결, 조사에

관여할 수 없다.

제15조(이의제기및 소명기회의 보장)

위원회는 제보자와 피조사자에게 의견 진술, 이의 제기 및 변론의 권리와

소명의기회를 충분히보장해야할의무를갖는다.

제16조(조사, 심의 및 판정기간)

①위원회는 부정행위에 관한제보가 접수된 날로부터 6개월이내에 조사,

심의 및 판정을내려야 한다.

②제보의 접수일로부터 역산하여 만 5년이 경과된 부정행위는 원칙적으

로 처리하지않는다.

제17조(징계판정)

심의결과 부정행위로판정될 경우아래의징계들을판정할수 있다.

①경고

②논문 불인정

③일정기간논문투고금지

④제명

⑤일정 기간재가입 불허

⑥해당 기관장에게 통보

제18조(결과의 통지)

위원장은 조사결과에 대한위원회의 결정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지체 없이

제보자및 피조사자등 관련자에게이를통지해야 한다.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291

한다.

제9조(부정행위제보 및 접수)

제보자는한국조직신학회임원회 및 편집위원회에직접 또는서면, 전자우

편 등으로 제보하되 논문 명(또는 연구 과제명)과 구체적인 부정 행위의 내용

과 증거를제시하여야한다.

제10조(부정행위의조사)

위원회는 구체적인 제보가 있거나 상당한 의혹이 있을 경우에는부정행위

의 존재여부를조사하여야한다.

제11조(출석및 자료제출 요구)

①위원회는 제보자, 피조사자, 증인, 참고인에 대하여 진술을 위한 출석을

요구할수 있으며, 이 경우피조사자는이에반드시응해야 한다.

② 위원회는 피조사자에게 자료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으며, 증거자료의

보전을 위하여 해당 연구기관장의 승인을 얻어 부정행위 관련자에 대

한 해당연구자료의압수, 보관등을 할 수 있다.

제12조(제보자의권리 보호)

①위원회는 제보자의 신원을 보호해야할 의무를 지니며, 제보자의 실명은

공개되지않도록 해야한다.

②제보 내용이 허위임을 알고도 이를 신고한 제보자에 대해서는 신원보

호의 의무가 요구되지 않으며, 사안에 따라 관련사실을 해당 소속기관

에 통보할수 있다.

제13조(피조사자의권리 보호)

위원회는 부정행위에 대한 사실규명의 조사가 종료될 때까지 피조사자의

명예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무혐의로 판명될 경우 피조사자의

명예회복을위해노력하여야한다.

2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4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임원명단

회장 서창원 (감리교신학대학교)

부회장 윤철호 (장로회신학대학교)

총무 정홍열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

서기 이승갑 (장로회신학대학교)

회계 황돈형 (중앙신학교)

편집부장 이세형 (협성대학교)

대외협력부장 김성원 (나사렛대학교)

미디어부장 최광진 (호서대학교)

감 사 구춘서 (한일장신대학교)

편집위원

편집위원장 이세형 (협성대학교)

편집위원

신옥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장윤재 (이화여자대학교)

신재식 (호남신학대학교) 전현식 (연세대학교)

심광섭 (감리교신학대학교) 최인식 (서울신학대학교)

이상직 (호서대학교) 허호익 (대전신학대학교)

이오갑 (그리스도대학교) 황재범 (계명대학교)

제19조(재심의)

판정에 대한 재심의 요청의 경우, 판정 이후 3개월 이내에 해야 하며, 재

심의 요청이있을경우 위원회는6개월이내 재심의하여결정을 내려야한다.

제20조(비밀엄수

위원회는 제보, 조사, 심의, 판정, 재심의 및 건의조치와 관련된 일체의 사

항에 대해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갖으며, 여기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한 자

역시도 모든정보에 대하여비밀을지켜야 한다.

제21조(기록의 보관및 공개)

① 조사와 관련된 기록은 조사 종료 시점을 기준으로 5년간 보관하여야

한다.

②판정이 끝난 이후의결과는 학회 상임이사회에보고 해야하며, 제보자,

조사위원, 증인, 참고인, 자문에 참여한 자의 명단 등 신원과 관련된 정

보에 대해서는 당사자에게 불이익을 줄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 위원회

의 결의로공개대상에서제외할 수 있다.

제22조(운영예산)

위원회 운영 및 조사와 관련하여 필요한 예산은 별도로 책정하여 지급할

수 있다.

▣ 부 칙

1. 이 규정은 2008 년 12월 19일부터 시행한다.

2. 이 규정은윤리위원회의결의로개정할 수 있다.

3. 이 규정은학회임원회의승인하에효력을 갖는다.

2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Page 14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논총제27집

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2010년 9월 25일 인쇄

2010년 9월 30일 발행

편집 한국조직신학회편집위원회

발행 한국조직신학회

주소 경기도화성시 봉담읍상리 14-1

전화 (031) 299-0814

E-mail: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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