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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安 洵 亨 (昌原大)

    Ⅰ. 들어가면서

    Ⅱ. 律藏의 도입

    1. 律藏 도입의 배경

    2. 十誦律의 傳譯

    Ⅲ. 南朝에서 十誦律의 전파Ⅳ. 江南에서 十誦律 盛行의

    원인

    Ⅴ. 나오면서

    Ⅰ. 들어가면서

    律藏이란 經․律․論의 三藏 가운데 하나인 律을 결집해 둔 율서의

    총칭이다. 戒律1)은 敎祖 釋迦牟尼가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이 잘못

    을 범할 때마다 하나씩 제정했던 것이라 전한다. 隨犯隨制의 원칙에

    따라 계율의 제정은 오직 敎祖만의 권한으로, 그의 사후에는 더 이상

    조항이 추가되지 않았다. 하지만 계율은 僧團이 처한 환경이나 구성원

    의 성향에 따라서 각 조항에 대한 해석은 異見을 보일 수밖에 없었

    다.2) 그로 말미암아 佛滅 후 1백년 경에는 ‘10事’를 둘러싼 논쟁으로

    근본분열이 발생하였고,3) 이후 계속하여 18部派로 분열하면서 각 조문

    1) 奈良康明 著, 정호영 역, 인도불교 (민족사, 1990), p.114에 의하면, “戒와 律은 본래 다른 것으로 戒는 주체적․자율적인 것임에 반해 律은 위로부터 주어

    진 것이지만 그 기본은 계에 있다”고 본다.

    2) 佐藤密雄 著, 金浩星 역, 초기불교교단과 계율 (민족사, 1991), pp.49-51 참조.

    3) 平川彰 著, 이호근 역, 인도불교의 역사(상) (민족사, 1989), pp.103-105.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2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게 되었다.

    각 부파의 율장은 팔리어․산스크리트어․티베트어․漢語 등 불교

    의 전파지역에 따라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져 현재까지 전해진다. 한

    어의 율장은 後秦 鳩摩羅什이 傳譯한 十誦律(406년)부터 唐代 義淨이 전역한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710년)까지 가장 방대하면서도 체계적인 것으로, 설일체유부․대중부․법장부․화지부․근본설일체유부

    등 5부파가 傳持한 광율이다.4) 의정이 전역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4部

    는 모두 晋末宋初(406-424년)에 전역된 것으로, 그 중에 십송율이漢地에서 가장 성행하였다.5) 십송율을 전지한 ‘薩婆多部’는 漢語로‘一切有’를 의미하는데, 諸法의 一切가 有相이라고 說한다.6) 이것은 원

    래 優婆離가 송출한 80誦이었지만 5대 전수자인 優婆掘이 후세에 근기

    가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10誦으로 줄여서 수지하도록 하면서 그 명칭

    도 결정되었다.7)

    십송율은 광율 가운데 최초로 長安에서 전역되었지만 오히려 강남에서 널리 선교되었다. 반면, 북방에서는 北齊의 慧光이래 四分律이 점차 흥기하였고, 唐 中宗시기가 되면 道岸의 奏請으로 사분율이강남지역까지 확대 시행되었다.8) 唐 후기부터 동아시아 불교계에서는

    줄곧 사분율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도선의 續高僧傳이나 贊寧의 宋高僧傳 등의 明律篇도 四分律師들이 주류를 점하게된다. 동진이래로 남북에서 각기 다른 율장이 성행한 것이나 당대 이

    후 서서히 사분율로 통합되어 간 것은 남북간에 사회적․문화적 차이, 통치계급과 대중들의 수요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9)

    4) 平川彰 著, 釋慧能 譯, 비구계의 연구 Ⅰ (민족사, 2002), pp.35-47.5) 湯用彤校注, 高僧傳 卷11 (北京: 中華書局, 1992), p.443.6) 蕭晋仁․蕭鍊子 點校, 出三藏記集 권3 (北京: 中華書局, 1995) 新集律來漢地四部序錄 , p.116.

    7) 위와 같음; 大智度論 권100(大正新修大藏經 25冊, 이하에서는 ‘大正藏’이라약칭함), p.756c, “略說有八十部, 亦有二分. 一者摩偷羅國毘尼含, 阿波陀那本生有

    八十部, 二者罽賓國毘泥, 除却本生阿波陀那, 但取要用作十部.”

    8) 宋高僧傳 권14 (대정장 50책) 唐光州道岸傳 , p.793c.9) 湯用彤, 湯用彤全集 (第2卷: 隋唐佛敎史稿) (石家莊: 河北人民出版社, 2000),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3기왕의 연구자들은 각 廣律을 상호 대조하거나,10) 중국불교사의 일

    부로 율장을 탐구하거나,11) 율장과 중국사회의 관계12) 등에서 많은 업

    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 율장과 중국사회, 특히 漢地에서

    최초로 전역되어 남북에서 널리 세력을 형성했던 십송율에 대한 연구는 미비한 편이다.13) 따라서 본고에서는 율장의 도입 배경과 십송율의 도입, 남조에서 십송율의 전파 현황, 강남에서 유독 십송율이 흥기하게 된 원인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律藏의 도입

    1. 律藏 도입의 배경

    漢代는 佛典이 한지에 전래되고, 曹魏시기는 曇柯迦羅가 처음으로

    계율을 전래하였다. 그는 中天竺 출신으로 조위의 嘉平연간(249-254)

    에 낙양에 왔다. 한인들은 불교를 신봉하여 삭발은 했지만 여전히 歸

    戒를 하지 않고, 불교의 齋懺을 행하면서도 유교의 祠祀를 본받고 있

    pp.402-408.

    10) 平川彰 著, 釋慧能 譯, 비구계의 연구(1-4권) (민족사, 2002-2011); 同氏, 비구니율의 연구 (민족사, 2011) 등.

    11) 湯用彤, 앞의 책, 제4장 5절; 孫昌武, 中國佛敎文化史(第3冊) (北京: 中華書局, 2010), 第15章; 郭朋, 中國佛敎思想史(上卷) (福州: 福建人民出版社, 1994),제21장 등.

    12) 何玆全, 佛敎經律關于寺院財産的規定 , 佛敎經律關于僧尼私有財産的規定

    (五十年來漢唐佛敎寺院經濟硏究, 北京: 北京師範大學出版社, 1986); 嚴耀中, 佛敎戒律與中國社會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7) 등.

    13) 黃夏年, 龜玆十誦律在江南地區的傳播與影響 (新疆師範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第34卷 第2期, 2013-3月)은 부파불교, 계율의 사상적 측면을 다루고있으며, 焦毓梅, 十誦律常用動作語義場詞彙硏究 (四川大學 博士學位論文,2007); 戴軍平, 十誦律詞彙硏究 (曁南大學 博士學位論文, 2012); 龍國富, 十誦律中的兩個語法形式 (語言硏究, 2004年 2期) 등은 언어학적 측면을 다루고 있다.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4었다. 그는 승려들의 요청으로 僧祇戒心14)을 역출하였다.15) 또한 安息僧이었던 曇帝도 율학에 뛰어났는데 조위 正元연간(254-255)에 낙양

    에 와서 曇無德羯磨를 역출하였다.16)이후에도 僧建․僧純․竺佛念 등이 율서를 계속 전역했지만17) 동진

    후기까지는 여전히 미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북방교단의 지도자 道

    安은 여러 경전을 참조하여 독자적인 僧制를 제정하였고,18) 그의 제자

    로 남방 불교계의 영수였던 慧遠은 율장을 완비하기 위해서 法淨 등을

    서역으로 파견하기도 했다.19) 法顯은 60세가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

    고 율장을 구하기 위해서 직접 천축으로 갔다가 15년 만에 강남의 동

    진으로 귀국하여 그 중의 일부를 傳譯하였다.20)

    조위시기 전역된 초기의 율장은 간단한 계본이나 갈마서가 중심이

    었다. 동진 중기에는 각 부파의 율서들이 전역되었고, 5세기 초에는 說

    一切有部의 十誦律을 비롯한 다양한 廣律이 남북지역에서 잇따라 전역되었다. 4세기 말까지 경전 중심의 구법과 역경이 5세기 초부터는

    점차 율장에 주목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불교 교세의

    성장으로 각 방면에서 나타났던 세속 통치자와 갈등을 해결하고, 한편

    으로는 불교계 스스로가 승단의 질적 향상을 통해서 교세를 안정적으

    14) 歷代三寶紀 卷5 (대정장 49책), 曇柯迦羅 , p.36c에는 “魏僧祇戒本一卷”이라고 있다.

    15) 隆蓮(全根先․張有道 主編), 中國佛敎文化大典(第1卷) (西寧: 靑海人民出版社, 1996), p.164에서는 당시 僧祇戒本이 역출되었지만 수계 때는 四分羯磨를 이용했을 것이라 추측하면서 受戒와 受持에서 계율의 불일치를 지적한다.

    하지만 사분율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지 명확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어의문이 남는다.

    16) 高僧傳 권1, 魏雒陽曇柯迦羅傳 , pp.12-13.17) 出三藏記集 권2, p.46, “十誦比丘戒本一卷(或云十誦大比丘戒). 右一部, 凡一卷. 晉簡文帝時, 西域沙門曇摩持誦胡本, 竺佛念譯出. 比丘尼大戒一卷. 右一部,

    凡一卷. 晉簡文帝時, 沙門釋僧純於西域拘夷國得胡本, 到關中, 令竺佛念曇摩持慧

    常共譯出.”

    18) 高僧傳 권5, 晋長安五級寺釋道安傳 , p.183.19) 高僧傳 권6, 晋廬山釋慧遠傳 , p.216, “律藏殘闕, 遠慨其道缺, 乃令弟子法淨法領等, 遠尋衆經 ······皆獲梵本得以傳譯.”

    20) 高僧傳 권3, 宋江陵辛寺釋法顯傳 , pp.87-89.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5로 성장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兩晉, 특히 동진시기가 되면 불교계의 부단한 노력과 통치계급의 적

    극적인 후원으로 불교의 교세는 급속히 확대되었고, 그 결과 교단 내

    부에서는 부패와 타락의 요소가 점차 증가하였다. 서진 永嘉 4년에 낙

    양에 왔던 佛圖澄은 神異力을 이용하여 後趙의 石勒과 石虎를 위해 복

    무하게 되자, 이에 대한 보답으로 정치적․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

    아 대규모의 승단을 갖추게 되었다.21) 釋道安도 북방의 혼란 속에서

    수백 명의 제자를 지도하였고, 襄陽에서는 白馬寺가 좁아서 방이 4백

    여 칸이나 되는 檀溪寺를 다시 건립할 정도로 교세를 확장시켰다.22)

    또한, 龜玆 출신의 鳩摩羅什도 軍務에 대한 예지력과 경율에 대한 깊

    은 소양으로 後秦의 姚興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고, 僧䂮․僧遷을비롯한 승려 800명이 그에게 수학하였다. 그 결과 장안은 불교의 重鎭

    으로 발전하였고, 그의 문하에는 남방 출신의 門徒들이 모여들어 3천

    이라는 대규모의 승단을 이루었다.23) 대규모 승단의 출현으로 서진시

    기 二京의 사찰이 180곳, 僧尼 3,700여 명이었던 것이 동진시기는 사찰

    1,768곳에 승니가 24,000명으로 급증하였다.24)

    당시 불교 교세의 급속한 확장은 신심이 돈독한 불자들의 결집만으

    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앙 외적인 요인으로 많은 사람

    들이 불교교단 내에 혼재하였다. 그로 인해 교단 내에는 세속 사회와

    마찬가지로 부패와 퇴폐적 요소가 많이 나타났다. 후조에서는 백성들

    이 오랜 전쟁과 가혹한 부역을 피해서 면역 특권이 있는 불교에 의탁

    하면서 사원에서는 진정한 수행자와 가짜가 뒤섞이게 되었다. 석호는

    세속의 도피처가 된 사원을 군주의 권위로 숙정해야 하는가 여부를 中

    書에 下問하였다.25) 이것은 교단의 自淨 능력이 부족할 때 세속 통치

    21) 高僧傳 권9, 晋鄴中竺佛圖澄傳 , p.356.22) 高僧傳 권5, 晋長安五級寺釋道安傳 , pp.178-179.23) 高僧傳 권2, 晋長安鳩摩羅什傳 , pp.52-54. 五胡시기 북방의 통치자와 고승

    들의 神異에 관한 내용은 이영석․안순형, 高僧傳神異編에 관한 연구 (中國史硏究 제58집, 대구, 중국사학회, 2009.2)를 참조.

    24) 辯正論 권3 (대정장 52책), 十代奉佛上篇 , pp.502c-503a.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6자가 교단에 간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脫世俗을 추구하는

    승단에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동진 중후기 尼僧의 경우도 비록 法服을 입고는 있었지만 가장 기

    본적인 五戒조차도 수행할 수 없는 자들이 많았으며, 황제를 비롯한

    권력층과 교류에만 몰두한다는 비난을 받았다.26) 釋法遇 승단에서는

    ‘不飮酒戒’를 범하고도 승단에서 퇴출당하지 않는 사례가 있었다. 법우

    는 계율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도안의 제자였지만 처음에는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처리하려다가 스승의 훈계를 받았다.27) 이것은 교세가

    급속히 확대되고 있던 일부 승단에서는 계율이 그다지 엄격하게 준수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동진시기는 사원경제가 신속히 성

    장하면서 승단의 부패도 심화되어져 식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승단

    내부에서도 비판이 있었다. 구마라집의 제자였던 釋道恒은 당시 사문

    들의 타락상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사문들이) 이익을 찾기에 급급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혹은 전답을 개

    간하여 농부와 같은 무리가 되고, 혹은 행상과 교역을 하면서 여러 사람

    과 이익을 다툰다. ······ 혹은 道를 속이고 권력을 빌어서 時意에 영합하

    고, 혹은 재물을 축적하고 쌓아서 생활에 여유가 있고 ······ 이것은 모두

    時政에 무익하고 治道에 유해한 것으로, 이것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에

    게 깊은 근심이고,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의 大患이다.28)

    통제되지 않는 승단 구성원의 팽창과 사원경제의 급속한 성장, 사원의

    무질서한 난립은 당연히 敎內의 질서를 붕괴시키고 결국은 僧俗간에

    많은 불화를 유발하였다. 사문인 도항이 보기에도 당시 사문들의 행위

    는 세속의 농부․상인․의사․점복사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출가자의 本務인 수행보다 토지를 개간하여 대량의 재물을 축적하고,

    時流에 영합하여 권력자와 긴밀히 교류하는데 관심이 더 많았던 무위

    25) 高僧傳 권9, 晋鄴中竺佛圖澄傳 , p.352.26) 晉書 卷64, 簡文三子傳 , pp.1733-1734.27) 高僧傳 권5, 晋荊州長沙寺釋法遇傳 , p.201.28) 弘明集 권6 (대정장 52책), 釋駁論 , p.35b.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7도식자였다.

    동진후기에는 집정자였던 桓玄도 사치․타락․淫亂이 자행되던 불

    교계를 숙정하고,29) 독립적 상태의 승단을 국가 통제 하에 두고자 하

    였다.30) 남방 불교계의 영수였던 혜원은 ‘왕에 대한 예경’과 ‘沙門沙汰’

    에 대해서 일부 동의했지만 한편으로는 ‘在家’와 ‘出家’를 분리하고,

    “악덕사문의 복장은 폐지”하더라도 “불교의 禮制는 보존”되어야 한다

    면 출가 승단의 독립성을 주장하였다.31) 하지만 혜원은 세속 군주에게

    출가승단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승단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었고, 스스로가 엄격한 수행생활을 통해서 청정한 승단을 유지해야

    만 하였다. 이를 위하여 도안과 같이 스스로 僧制를 제정할 수도 있지

    만 여전히 모든 구성원에게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규율이 필요하였다.

    그 규율이 바로 석가모니가 직접 제정했다는 계율의 律藏이다. 체계적

    인 율장의 도입은 승단 내부의 부패 타락을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

    라 교세를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다음으로, 동진 중후기 출가하는 승려가 증가하고 불교의 교세가 성

    장하면서 교내외에서는 종종 해당 구성원들이 적법한 受戒를 했는가하

    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한인 승려들은 보다 완벽한 율장의 전역으로

    이런 비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불교가 전래된 초기의 二衆은 三歸를

    통해 수계하였고, 大僧과 沙彌의 구별도 없었다.32) 曹魏시기에 율전이

    처음 전래되기는 했지만 受戒를 위한 적법한 戒本과 僧數가 부족하여

    二衆은 여전히 如法하게 수계할 수가 없었다.33) 특히 二衆受戒를 해야

    하는 비구니의 경우는 더욱 어려웠다.

    4세기 초기에도 출가를 원했던 여성은 비구로부터 10계를 수지할

    뿐 구족계는 받을 수가 없었다.34) 이로 말미암아 여성들의 구족계에

    29) 弘明集 권12, 桓玄輔政欲沙汰衆僧與僚屬敎 , p.85a.30) 환현의 불교교단 통제에 대해서는 安洵亨, 東晋 孝武帝-恭帝時期 상층계급과

    불교 (愚堂李榮奭博士停年退任紀念論叢, 중앙디자인, 2012), pp.487-489 참조.31) 弘明集 권12, 廬山慧遠法師答桓玄書沙門不應敬王者書 , pp.83c-84a.32) 大宋僧史略 卷上 (대정장 54책) 立壇得戒 , p.238b.33) 湛如, 敦煌佛敎律儀制度硏究 (北京: 中華書局, 2003), p.92.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8대한 갈망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4세기 중반에는 僧建․曇摩

    羯多․釋道場 등의 노력으로 율장이 점차 완비되어지고, 구족계를 수

    지하는 漢人 비구니가 출현하게 된다.35) 하지만 그들의 수계는 여전히

    비구 一衆에게서만 받아 온전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漢人 비구니들은 서역이나 천축의 비구니가 ‘二衆受戒’를 했다

    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들도 이중수계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승단과

    율장을 정비해야만 하였다.

    그럼 한인 승려들은 왜 율장에 의거한 수계의식을 중시했는가? 특

    히 비구니들은 왜 그렇게 이중수계에 집착을 했는가? 그것은 佛經이나

    외래승들의 ‘中國’에 대한 강한 자부심, ‘邊地’에 대한 비하의 인식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한인들은 불경이나 율장을 적극 수용

    하여 지리적으로 漢地가 변지인 것을 극복하여 스스로를 불교의 本鄕

    인 서역이나 천축과 동일한 수준으로 ‘中國化’하려고 하였다. 후한의

    支婁迦讖은 세상의 18가지 어려운 일을 열거하면서 부처가 在世할 때

    ‘中國’에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는 내용의 경전을 전

    역하였다.36) 孫吳의 支謙은 부처는 변지에서는 태어날 수 없으며, 일찍

    이 세상에 출현한 모든 부처는 ‘中國’인 천축의 ‘迦維羅衛’에서 출현했

    다는 내용의 경전을 전역하였다.37) 설령 사람으로 태어날지라도 ‘중국’

    이 아니면 불교의 감화를 제대로 받을 수 없다는 설법이 일찍부터 漢

    人들에게 전래되고 있었다. 5세기 초까지도 외래승들은 한지를 ‘변지’

    로 인식하면서 천축과 같이 높은 수준의 불법이 행해질 수 없는 곳으

    로 간주하였다.38)

    일찍부터 천축 중심의 세계관을 수용했던 한인 불교도들은 惡業이

    있으면 설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항상 변지에서만 태어날 수밖에

    34) 王孺童 校註, 比丘尼傳 卷1 (北京: 중화서국, 2006), 晋竹林寺淨撿尼傳 ,p.1.

    35) 比丘尼傳 권1, 晋竹林寺淨撿尼傳 , p.2.36) 雜譬喩經 (대정장 4책), 502a.37) 佛說太子瑞應本起經 卷上 (대정장 3책), 473b.38) 고승전 권6, p.218, “羅什見論而歎曰, 邊國人未有經, 便闇與理合, 豈不妙哉.”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9없고,39) 변지에 태어나면 忠孝仁義를 알지 못하며 三寶를 볼 수 없다

    고 생각하였다.40) 따라서 그들은 외래승들이 전해주는 불전을 적극 수

    용하였고, 결핍한 부분은 일찍부터 목숨을 담보로 서역과 천축에서 구

    법하였다.41) 이로 말미암아 한인들은 율장에서 10僧으로 계를 받을 수

    있고, 邊地의 경우는 5명으로도 받을 수 있다42)는 조항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수계를 통해서 변지라는 문화적 비하의 인식에서 탈피하고자

    하였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단편적인 계본을 비롯해서 다수의

    광율이 전역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천축과 서역의 소승 율승들이 불교의 弘傳을 위하여 스스로 東來한

    것도 역시 한지에서 율장이 흥기할 수 있는 주요한 원인이다. 불교는

    법을 베푸는데 인색한 사람은 불법이 없는 변지에 태어날 것이라고 경

    계하며43) 스스로의 수행뿐 아니라 불법을 널리 선교할 것을 강조한다.

    그 결과 천축의 승려들은 적극적으로 대외 선교에 나서게 되었다. 특

    히 4세기말에서 5세기 초에 罽賓國 출신의 율사들은 목숨을 걸고 사막

    이나 바다를 건너서 직접 漢地에 율장을 전하였다. 經律에 뛰어나서 毘婆沙律을 잘 외웠던 曇摩耶舍도 처음에는 자신의 수행에만 정진하였다. 꿈에서 사문은 마땅히 널리 교화하고 많은 중생을 구제해야 한

    다는 博叉天王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바다를 건너 한지로 왔다.44)

    당시 외래승들의 도래는 일신의 영욕을 넘어 불교의 弘傳을 위한 것으

    로, 구마라집의 사례에도 잘 반영되어져 있다.

    방등의 심오한 교의는 마땅히 眞丹에 크게 펼쳐야 하는데 그것을 東土

    에 전하는 것은 오직 너의 힘에 달렸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아무 이익이

    없으니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집은 ······ 만약 큰 교화를 퍼뜨려서

    39) 諸經要集 권2 (대정장 54책), 15ab.40) 諸經要集 권2, 126a.41) 고승전 권4, 晋洛陽朱士行傳 , p.145, “此經大乘之要, 而譯理不盡, 誓志損身,遠求大本”.

    42) 比丘尼傳 권2, 景福寺慧果尼傳 , p.43.43) 大智度論 卷67(대정장 25책), 532c.44) 고승전 권1, 晋江陵辛寺曇摩耶舍傳 , pp.41-42.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0몽매한 세속을 깨우칠 수 있다면 설령 스스로가 끓는 가마솥의 고통을

    당하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45)

    구마라집은 東來한 이후 모친의 예언과 같이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그는 後凉의 呂光에게 婬戒를 범하도록 강요되어졌고,46) 後秦의 姚興

    도 구마라집의 재능을 이을 수 있는 후사를 남기도록 강요하였다.4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33부 300여 권의 경율을 전역하여 중국불교사

    에서 불멸의 공적을 남겼다. 특히 그가 전역했던 십송율은 중국에서최초로 완역된 廣律이었고, 이 전역은 이후 중국 율장의 발전에 지대

    한 공헌을 하였다.48)

    2. 十誦律의 傳譯십송율은 인도의 카시미르[罽賓國]지역에서 유행했던 有部계통의

    광율이다. 漢地에서도 4세기 중반이 되면 십송율과 관련된 단편적인계본이 일부 전역되고, 정리되었다. 동진의 簡文帝 시기 曇摩持의 十誦比丘戒本(1권)과 釋慧常의 比丘尼大戒本(1권),49) 孝武帝 시기 竺曇無蘭의 十誦比丘戒本(1권),50) 竺法太의 十誦比丘尼戒所出本末經(1권)51) 등이 그 사례이다. 또한 불완전하지만 십송율과 같은 계통의說一切有部의 광율인 鼻奈耶律(10권)도 건원 19년(383) 장안에서 역출되었고,52) 그 직후에 도안은 그에 대한 서문을 지어 널리 선양하고

    자 하였다. 설일체유부 계열의 율서가 다른 부파의 율장들 보다 먼저

    한지에서 유포된 것은 여러 광율 중에서 십송율이 가장 먼저 전역되45) 고승전 권2, 晋長安鳩摩羅什傳 , p.48.46) 출삼장기집 권14, 鳩摩羅什傳 , p.532.47) 출삼장기집 권14, p.535.48) 平川彰 著, 釋慧能 譯, 비구계의 연구 Ⅱ (민족사, 2004), p.608.49) 歷代三寶紀 권8 (대정장 49책), p.75bc50) 歷代三寶紀 권7, p.70b.51) 歷代三寶紀 권8, p.77a.52) 平川彰 著, 釋慧能 譯, 비구계의 연구 Ⅰ (민족사, 2002), p.372.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11고, 널리 유포되는데 좋은 배경이 되었다.

    한지에서 십송율의 전역과 유포에는 구마라집과 卑摩羅叉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먼저, 구마라집은 일찍이 두 스승으로부터 십송율을수학했던 것 같다. 그는 12~13세 쯤에 沙勒國에서 佛陀耶舍에게 阿毗曇과 십송율을 수학하였다.53) 일찍이 鎌田茂雄은 불타야사가 사분율을 한지에 전역했던 승려임으로 구마라집이 그에게 십송율을배웠다고 전하는 출삼장기집의 기록은 잘못이라고 보았다.54) 하지만실제로 율장은 불교의 經과 論에 비해서 각 부파간의 차이가 크지 않

    다.55) 당시 각 부파가 준수했던 율장의 상호간에 대립이 심하지 않았

    다는 것은 四分律이 한지에서 전역되는 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불타)야사는 계빈에서 사분율을 持誦했으나 胡本을 가지지 않고 장

    안에 왔다. ······ 姚主는 호본이 없어 증험하여 믿기가 어려웠고, 많은 승

    려도 대부분 異見이 있어 (전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라집은 “야

    사는 기억력이 대단히 깊으며 자주 듣고 외워 익혔으므로 일찍이 빠뜨리

    거나 잘못된 것이 없을 것”이라고 권하였다. ······ 마침내 전역하도록 하

    였다.56)

    사분율이 전역될 때 구마라집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7) 만약 각 율장간에 큰 차이나 대립이 존재했다면 404년에 이미 십송율을 전역했던 구마라집이 410년에 불타야사가 사분율을 전역하는 것을 돕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타야사는 다양한 율장이 성행했던

    계빈 출신으로 대소승의 경전에 해박했던 삼장이었다. 그럼으로 사분

    53) 출삼장기집 권14, 鳩摩羅什傳 , p.531; 같은 책 같은 권의 佛陀耶舍傳 ,p.536.

    54) 鎌田茂雄 著․章輝玉 譯, 중국불교사 2 (장승, 1993), p.249.55) 佐藤密雄 著, 金浩星 譯, 초기불교 교단과 계율 (민족사, 1991), pp.149-150.56) 출삼장기집 권3 新集律分爲十八部記錄 , pp.117-118.57) 고승전 권2, 晋長安佛陀耶舍傳 , pp.66-67, “時什在姑藏遣信要之 ······後語弟子云, 吾欲尋羅什······ 行達姑藏, 而什已入長安······ 什聞其至姑藏, 勸姚興迎

    之, 興未納······ 方至長安, 興自出候問, 別立新省於逍遙園中, 四事供養”에서도

    불타야사가 고장이나 장안으로 오는데 구마라집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

    작할 수 있다.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2율의 명장인 그가 구족계를 받기 전인 어린 사미에게 사분율을 비롯한 여타 율장의 대강을 가르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구마라집이 구족계를 받은 이후 준수했던 율은 卑摩羅叉에게 배

    웠던 십송율일 것이다.58)구마라집은 십송율을 수지했지만 율장에 대한 이해나 준수가 철

    저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는 呂光이나 姚

    興의 강요로 婬戒를 범하고, 사분율의 명장인 불타야사의 東來를 갈망하고, 십송율의 胡本을 암송한 佛若多羅가 장안에 왔을 때 각별히존경을 더했다. 뿐만 아니라 홍시 6년(404) 10월에는 長安中寺에서 불

    야다라와 십송율을 전역하다가 그가 사망하여 더 이상 호본이 송출될 수가 없자 역경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59) 만약 구마라집 스스로

    가 경론처럼 십송율을 철저히 수지했었다면 호본을 암송할 수 있는曇摩流支의 도래를 기다릴 필요 없이 역경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홍시 7년(405) 가을에 담마류지가 장안에 도래하자 요흥 뿐만 아니라

    평소에 구마라집과 긴밀히 교유했던 혜원도 제자 曇邕을 파견하여 십송율이 완역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십송율은 장안에서 모두 전역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입적할 때까지 십송율을 善本으로 정리하지는 못하였다. 고승전는 그 이유를 전역직후에 그가 입적했기 때문에 선본으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

    가 없었다고 전한다.60) 하지만 구마라집은 그 후에도 홍시 11년(40

    9)61) 입적할 때까지 수많은 경론의 선본을 정하면서 유독 십송율만은 선본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출삼장기집의 아래 기록에서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58) 고승전 권2, 晋長安佛陀耶舍傳 , p.48.59) 고승전 권2, 晋長安弗若多羅傳 , pp.60-61.60) 고승전 권2, 晋長安曇摩流支傳 , p.62.61) 겸전무웅, 앞의 책, pp.223-240에서는 고승전 출삼장기집 광홍명집권

    23 鳩摩羅什法師誄 등의 다양한 자료를 분석하면서도 정확한 생몰 연대를 밝히

    지 못하고 잠정적으로 홍시 11년에 입적했다고 보고 있다.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13비마라차는 (구마라집이) 핍박당한 일을 모르고, 그에게 “그대는 한지

    에 큰 인연이 있는데, 법을 전수받은 제자가 얼마나 있는가?”하고 물었

    다. 구마라집은 “······ 3천의 徒衆이 모두 저에게 법을 배웠지만 저는 쌓

    은 ‘業障’이 깊어서 스승으로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

    였다.62)

    여기서 말하는 ‘業障’이란 앞에서 언급한 ‘婬戒’를 범한 것을 말할 것

    이다. 음계는 4바라이 가운데 첫 조항으로 승려의 자격은 박탈당하고,

    승단에서 축출 당하는 최고 수준의 징벌이다. 비록 구마라집이 새로운

    경론을 대거 전역하여 門徒가 3천이나 될지라도 婬戒를 범한 그 스스

    로가 십송율의 선본을 결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완전하지 못했던 십송율을 刪削하여 구마라집의 悔恨을 해소하고,

    毘尼誦 을 첨부하여 현존의 善本(61권)을 정리했던 것은 그의 계율사

    였던 卑摩羅叉이다. 그는 구마라집이 입적하자 장안을 떠나 남방의 壽

    春 石澗寺와 江陵 辛寺에 머물면서 십송율을 정리하고 한편으로 그것을 개강하여 널리 유포하고자 하였다. 장안에서 함께 했던 慧觀이나

    강릉에 주석하고 있던 慧猷 등이 그의 講律을 듣고, 그 요지를 정리하

    여 당시 불교의 重鎭인 건강에 전하면서 강남에서 십송율이 점차 성행하게 되었다.63)

    Ⅲ. 南朝에서 십송율의 전파남북조시기 불교상을 반영하는 현존 문헌들은 대부분 남방에서 편

    찬되어져서 북방의 상황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한다. 하

    지만 남방의 자료가 다수라는 것은 남방의 불교상을 더욱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晋末-宋初에는 南北에서 여러 종류의

    광율이 전역되었다. 그 중에서 십송율은 남북에서 모두 발전하였지

    62) 출삼장기집 권14, 鳩摩羅什傳 , p.535.63) 고승전 권2, 晋壽春石磵寺卑摩羅叉傳 , pp.63-64.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4

    出三藏記

    集名僧傳 高僧傳 비고

    宋 壽陽 石澗寺 卑摩羅叉 晋 壽春 石磵寺 卑摩羅叉(권2)*

    宋 長安 大寺 曇摩流支 晋 長安 曇摩流支(권2)*

    猷律師傳 宋 江陵 辛寺 惠猷 宋 江陵 釋慧猷

    鄴律師傳 宋 吳 閑居寺 僧業 宋 吳 閑居寺 釋僧業

    詢律師傳 宋 廣陵 長樂寺 惠詢 宋 京師 長樂寺 釋慧詢

    儼律師傳 宋 汴泗 道儼 宋 彭城郡 釋道儼 4部 律에 뛰어남

    光律師傳 宋 吳 閑居寺 惠光 宋 吳 閑居寺 慧光 율학

    宋 江陵 枇杷寺 僧隱 宋 江陵 釋僧隱

    遠律師傳 宋 北法輪寺 道遠 宋 道遠 율학

    具律師傳 宋 江陵 上明寺 成具 宋 江陵 上明寺 成具

    宋 閑心寺 道榮 宋 京師 閑心寺 釋道營 僧祇律

    香律師傳 宋 涼洲 公府寺 法香

    力律師傳 宋 涼洲 法力

    耀律師傳 宋 棲玄寺 釋惠耀(卷14)* 宋 栖玄寺 慧曜

    璩律師傳 宋 京師 莊嚴寺 釋僧璩

    宋 廣漢 (長樂寺) 釋道房 율학

    宋 京師 道場寺 釋慧觀(권7)*

    度律師傳 齊 瓦官禪房 超度 齊 瓦官寺 超度

    穎律師傳 齊 長干寺 法穎 齊 京師 多寶寺 釋法穎

    宋 蜀郡 靈建寺 法琳 齊 蜀 靈建寺 釋法琳

    嵩律師傳 齊 定林下寺 道嵩

    齊 天保寺 惠文 齊 天寶寺 慧文 여러 율장에 능함

    齊 閑心寺 僧祐 齊 閑心寺 慧祐 僧祇律

    暢律師傳 齊 長干寺 玄暢(권13)* 律檢을 익힘

    獻律師傳 齊 上定林寺 釋法獻(권13)* 僧祐의 스승

    稱律師傳 齊 安樂寺 智稱 齊 京師 安樂寺 智稱

    만64) 특히, 강남에서는 당 중종시기까지 성행하였다. 본 절에서는 남조

    각 시기 十誦律師의 활동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宋․齊시기 십송

    율사의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면 아래의 과 같다.

    宋․齊시기 십송율을 수학한 승려

    64) 사분율이 성행했다는 북방에서도 慧光 이전에는 그 세력이 미약하였다. 뒤의 南齊 十誦律師였던 靈曜寺의 志道 부분에서 언급하겠지만 적어도 5세기 중

    반까지 북방에서는 십송율이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15

    道律師傳 齊 靈曜寺 志道(권25)* 齊 鍾山 靈曜寺 釋志道

    熙律師傳齊 (鍾山) 草堂寺 惠熙(권17)*

    齊 京師 建初寺 釋僧祐

    暉律師傳

    ※ 出三藏記集卷12 薩婆多部師資記目錄序 ; 名僧傳권18 律師 ; 고승전권11明律 . ‘*’ 표시는 해당 승전 외에 () 안의 해당 자료를 인용한 것이다.

    南齊의 율승인 僧祐는 薩婆多記(5권)에서 印度僧 90여 명을 정리하고, 권4에서는 이 율을 전승한 한인승 20명을 정리하였다. 이들 중에

    유송의 인물이 11명, 남제의 인물이 9명으로, 暉율사 외에는 모두 명승전과 고승전에도 수록되어 있다. 승우의 제자인 寶唱도 명승전에서 외래승 2명을 포함한 율사 20인을 수록하였다. 그는 스승이 율사

    로 수록했던 일부를 法師(혜요․혜희)나 苦節(지도)篇에 수록하거나,

    승거․현창․법헌․휘율사 등은 삭제하였다. 또한 스승과는 달리 십송율을 수학했던 승려(승은․법림) 뿐만 아니라 승기율에 뛰어났던승려(도영․혜우 등)도 함께 수록하였다. 慧皎도 보창과 같이 승기율을 수학했던 율사(혜우․도영 등)를 추가하였다. 반면에 보창과는 달리

    외래승 2명을 역경편에 포함시키고 승우나 보창이 율사로 선정했던 인

    물(香율사․力율사․嵩율사․熙율사 등)을 삭제하기도 하였다.

    의 한인승 28명만으로 宋齊시기 강남에서 율장의 상황을 일반

    화 하는 것은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추세의 파악은 가능하리라 본

    다. 유송시기에는 율장에 조예가 깊었던 한인승이 15명 확인된다. 그

    중에 11명은 십송율을, 1명은 승기율을, 3명은 단지 율장에 뛰어났다고만 전한다. 강남에서 십송율을 수지했던 승려들은 당시 불교의발전 추세와 같이 대부분이 長江의 각 重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65)

    즉, 북방에서 남하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江陵 최종 목적지인 建康

    65) 嚴耕望 撰, 魏晉南北朝佛敎地理稿(嚴耕望史學著作集)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7), pp.35-36의 “東晋時代高僧駐錫分布圖”와 pp.41-42의 “東晋時代高僧

    遊錫圖” 참조.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6그 배후지로 士族들의 활동공간인 吳가 주요 활동 무대였다.

    강릉에서는 혜유․승은․승구 등이 활동하였다. 혜유는 비마라차에

    게 직접 수학했는데, 十誦義疏를 저술하여 陝西지역 율사들의 宗師가 되었다.66) 비록 율사는 아니지만 道場寺의 慧觀도 강릉에서 비마라

    차의 십송율 강연을 듣고, 관련 저술(2권본)을 편찬해서 건강에 전달하여 십송율이 성행하는데 공헌을 하였다.67) 수도인 건강에서는 혜순․승거․도원 등이 활동하였다. 승거는 십송율과 관련된 僧尼要事(2권)68)을 찬술하였다. 그는 율장에 밝아서 유송의 小帝에게 5계를주었고, 효무제는 孝建 초에 그를 승관인 僧正으로 임명하여 中興寺에

    머물며 부패했던 불교계를 숙정하도록 하였다.69) 혜순은 십송율과함께 승기율에도 뛰어났으며,70) 그에게 수학했던 도영은 특히 승기율에 능통 하였다.71) 이를 통해서 볼 때, 당시 건강에는 십송율뿐만 아니라 다른 율장도 선양되고 있었다. 이 외에도 수도 건강의 배후

    지로 士族의 집결지였던 吳에서는 승업․혜광 등이, 서역 불교의 流入

    口인 凉州 公府寺에서는 法香․法力 등이, 蜀의 廣漢 長樂寺에서는 도

    방이 십송율을 선교하고 있었다.유송시기에는 강릉과 吳 등의 수도 외곽에서 십송율이 성행하였

    다. 강릉은 도안을 비롯한 關中의 승려들이 남하할 때 많이 이용했던

    남북 교통의 요충지였다. 구마라집의 입적으로 장안이 불교계에서 구

    심점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고,72) 夏의 赫連勃勃 혹은 북위 태무제가

    불교를 탄압하자 關中의 승려들은 대거 강남으로 남하하게 된다.73) 그

    66) 고승전 권11, 宋江陵釋慧猷傳 , p.428.67) 고승전 권2, 晋壽春石磵寺卑摩羅叉傳 , p.64.68) 開元釋敎錄 권5 (대정장 55책), p.532a.69) 고승전 권11, 宋京師莊嚴寺釋僧璩傳 , pp.430-431. 동진남조의 승관제도에 관

    해서는 謝重光, 晋-唐僧官制度考略 (何玆全 主編, 五十年來漢唐佛敎寺院經濟硏究), 제2절 東晋南朝的中央, 地方僧官和僧務機構 참조.

    70) 고승전 권11, 宋京師長樂寺釋慧詢傳 , p.430.71) 고승전 권11, 宋京師閑心寺釋道營傳 , p.434.72) 고승전 권2, 晋壽春石磵寺卑摩羅叉傳 , p.63; 同書 권7, 宋京師道場寺釋慧觀

    傳 , p.264.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17들의 대부분은 강릉을 경유하거나 혹은 머물러 건강 불교계의 動態를

    관망하면서 이곳의 불교를 발전시켰다.74) 또한, 吳는 지리적으로 수도

    건강과 근접한 경제적 배후지일 뿐만 아니라 사족들이 집결해 있어서

    문화적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곳이다. 유송초기 승업이 이곳에

    서 講律하던 것을 승거나 曇斌75) 등이 수학하고, 이후 건강으로 진출

    하여 선교하였다. 따라서 강릉이나 오에서 십송율의 발전은 건강에서 십송율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남제시기 강남에서 율장에 조예가 있었던 한인승은 13명이었다. 그

    중에서 8명은 십송율을, 1명은 승기율을 전공하였고, 3명은 단지율장에 뛰어나다고 전하며, 1명(暉律師)은 미상이다. 전공을 알 수 없

    는 4명 중에 法獻은 십송율의 대가인 승우의 스승으로 정림사에 주석하였고, 玄暢은 유송과 남제에서 僧官을 담당했으며, 暉율사는 薩婆多記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모두 십송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같다. 유송과는 달리 남제의 율승은 蜀郡에서 활동했던 法琳을 제외하

    고는 모두 지리적으로 京師나 혹은 경사의 인근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각 部의 율사들은 독자적으로 講律을 하였고, 한편으로는 황실 및 상

    층지배층의 요청으로 수도인 건강이나 그 배후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율

    장을 선교 하였다.76) 승려들 스스로도 계율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는

    율장이 성행했던 수도 건강으로 나아가 수학하는 적극성을 보였다.77)

    73) 고승전 권11 宋吳閑居寺釋僧業傳 , p.429, “値關中多難, 避地京師”; 集沙門不應拜俗等事 권2 (대정장 52책), p.452a, “(赫連勃勃)行五刑之虐, 便言佛佛,謂已是人中之佛, 堪受僧禮······”; 神異傳 권2 (대정장 50책) 曇始傳 ,p.956a, “赫連勃勃破獲關中斬戮無數, 時始亦遇害······ 普赦沙門皆不殺.”

    74) 釋僧隱을 통해서 볼 때, 강릉은 장안의 불교뿐만 涼州→ 巴蜀→ 江陵→ 建康

    이란 노선에서도 교통의 요충지였다.

    75) 고승전 권7, 宋京師莊嚴寺釋曇斌傳 , p.290.76) 고승전 권11, 宋京師閑心寺釋道營傳 附釋慧祐傳 , p.434, “齊初入東山講摩訶僧祇部. 齊竟陵王子良遣迎出都, 仍止閑心寺焉”; 同書 同卷, 齊京師建初寺釋

    僧祐傳 , p.440, “齊竟陵文宣王每請講律, 聽衆常七八百人. 永明中, 入勅吳, 試簡

    五衆, 幷宣講十誦, 更申受戒之法.”

    77) 續高僧傳 권5 (대정장 50책), p.466a.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8남제시기 율장이 건강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것은 당시 불교의 일반적

    인 추세와 궤를 함께 하는 것이었다.78)

    敦煌 출신인 法穎은 凉州 公府寺의 법향에게 십송율을 배워서 명성을 얻었고, 원가말에는 건강으로 진출하여 교통의 요충지인 新亭

    寺79)에 머물렀다. 그는 유송과 남제에서 僧主로 임명될 정도로 왕실로

    부터 존중되었다.80) 법영은 비구를 비롯하여 니승도 함께 지도했는

    데,81) 십송계본과 갈마를 저술함으로써 강남에서 십송율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 하였다. 그에게 영향을 받았던 율승으로는 智稱․僧祐

    등이 있다.

    지칭은 京口 출신이지만 유송시기에 益州의 印선사를 따라 촉군의

    裴寺에서 출가하여 십송율을 배웠다. 촉군은 승은이 강릉으로 진출하기 전에 弘敎했던 지역으로 십송율이 성행하던 곳이다.82) 그는 강릉에서는 승은․성구에게 수학하고, 건강으로 진출해서는 법영에게 자

    문을 받았다. 이후 竟陵王의 요청으로 건강의 普弘寺에서, 僧志나 慧始

    의 요청으로 餘杭의 寶安寺나 자신의 고향인 경구에서 십송율을 강의하였다. 그는 전교한 40여년 동안 총 30여 차례 율장의 大本을 강의

    하고, 十誦義記(8권)을 찬술하여 십송율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83) 僧祐도 법영에게 수학하여 남조 율장의 종사가 되었는데, 그는

    칙령으로 오군에서 십송율을 강의하기도 했다. 승우는 梁武帝를 비78) 嚴耕望의 앞의 책, pp.47-48의 “南北朝時代高僧分布圖”와 pp.59-60의 “南北朝

    時代高僧遊錫圖” 참조.

    79) 孫文川․陳作霖 撰, 南朝佛寺志卷上(江蘇廣陵古籍刻印社), pp.36-39에 의하면 동진의 新亭寺, 유송․남제의 中興寺, 梁代의 天安寺는 모두 동일한 사찰이

    다.

    80) 고승전 권11 齊京師多寶寺釋法穎傳 , p.436.81) 비구니전 권2 普賢寺寶賢尼傳 , p.109, “元徽二年, 法穎律師於晉興寺開十誦律題, 其日有十餘尼, 因下講欲重受戒”; 同書 권4, 禪林寺淨秀尼傳 , p.165, “請

    法穎律師重講十誦”.

    82) 고승전 권11, 宋江陵釋僧隱傳 , p.432.83) 廣弘明集 권23 (대정장 52책), 南齊安樂寺律師智稱法師行狀 , pp.268c

    -269c. 단 郭朋은 앞의 책, p.789에서 혜교의 지칭에 대한 평가는 다소 과장되

    었다고 지적한다.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19롯한 후궁․종실 등과 널리 교유하여 1만이 넘는 門徒를 거느렸다. 또

    한 三紀동안 십송율을 70여 차례 강의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薩婆多部師資記(5권)와 十誦義記(10권)를 찬술하기도 하였다.84)

    이 외에도 남제에서 십송율과 관련해서 주목할 인물로는 法琳과志道가 있다. 남제시기 대부분의 승려가 건강지역에서 활동했던 것과

    는 달리 법림은 익주의 촉군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유송시기 십송율에 뛰어났던 승은이 촉에 이르자 그를 따라서 용맹정진 하였다. 뒤에

    승은이 섬서로 돌아가자 강릉까지 따라가서 계속하여 율장을 수학하고

    다시 촉의 靈建寺로 돌아와서 승니들에게 율장을 홍교하였다.85) 당시

    승려들이 건강으로 집결했던 것과 달리 그는 강릉과 촉 지역을 중심으

    로 십송율을 발전시키는데 일조하였다.지도의 경우는 불교의 남북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십송율

    은 장안에서 번역되어 남쪽으로 전래되었지만 북위 태무제 太平眞君 7

    년(446) 3월부터 전국에서 불교에 대한 탄압이 시행되면서 북방에서

    가람․불경․불상 등은 모두 파괴되고 승려들도 자취를 감추면서 불교

    계는 급속히 몰락하였다. 文成帝 興安원년(452) 12월 을묘일에 비록 復

    佛의 조칙이 내려졌지만86) 북위의 승려들은 이 시책을 의심하며 적극

    적인 동참을 주저하고 있었다.87) 그 결과 북위 영내에서는 조정의 지

    원으로 승려의 출가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授戒를 포함한 불교의식에

    는 결여된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강남에서 십송율에 뛰어나다고 평가를 받던 지도88)는 북위 불교계에 율장을 다시 弘通할 것을 서

    원하고 동료 10여 명과 北行하였다. 그는 引水寺에서 낙양 등지의 사

    문들에게 율학을 강의하여 북방에서 십송율이 다시 행해질 수 있도록 하였다.89) 이것은 남북의 정치적․군사적인 대치국면 속에서도 율

    84) 출삼장기집 권12, pp.466-476 pp.496-498 ; 고승전, pp.440-441.85) 고승전 권11, 齊蜀靈建寺釋法琳傳 , p.437.86) 魏書 권5 高宗紀 , p.112.87) 고승전 권11, 宋長安寒山釋僧周傳 附僧亮傳 , pp.414-415, “初永昌王請僧,無敢應者, 咸以言佛法初興, 疑有不測之慮.”

    88) 湯用彤, 漢魏兩晉南北朝佛敎史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1997), p.595.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20장을 매개로 한 문화교류는 부단히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梁․陳시기에도 십송율은 여전히 성행하였다. 양․진시기 십송율을 수학하고, 弘傳했던 승려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梁․陳시기 십송율을 수학한 승려寺名 및 姓名 활동 내용 출처

    鍾山 開善寺 釋智藏

    年十六代宋明帝出家, 以泰初六年勅住興皇寺, 事師上定林寺僧遠僧祐天安寺弘宗 ······ 遂流連會稽多歷年紀 ······但以律部未精重遊京輦 ······ 俄而十誦明了諸部薄究.

    속 권5

    楊都 建初寺 釋明徹

    (齊永明十年) 徹因從祐受學十誦, 隨出楊都住建初寺 ······天監末年勅入華林園, 於寶雲僧省, 專功抄撰.

    속 권6

    奉誠寺 僧辯 (僧)辯性廉直戒品冰嚴 ······ 常講十誦. 속 권6

    楊都 天竺寺 釋法超

    晩從安樂寺智稱專攻十誦 ······ 自稱公歿後獨步京邑······ (帝)使僧尼於五篇七聚導意獎心, 以超律學之秀, 勅爲都邑僧正 ······ 普通六年, 遍集知事及於名解, 於平等殿勅超講律.

    속 권21

    (法)聰 稱弟子聰超二人, 最善毘尼, 爲門徒所挹. 고 권11

    鍾山 雲居寺 釋道禪

    乃以永明之初, 遊歷京室, 住鍾山雲居下寺, 聽掇衆部, 偏以十誦知名 ······ 都邑受其戒範者數越千人.

    속 권21

    禪林寺 淨秀尼 欲請曜法師講十誦律 ······ 後又請法穎律師重講十誦. 비 권4

    閑居寺 僧述尼從禪林寺淨秀尼出家 ······ 遊心經律, 靡不遍覽, 後偏功十誦.

    비 권4

    西靑園寺 妙禕尼 講大涅槃經法華十地, 並三十餘遍. 十誦毘尼每經敷說. 비 권4

    山陰 招明寺 釋法宣尼

    從惠熙法師諮受十誦 ······ 於是移住山陰招明寺, 經律遞講, 聲高于越.

    비 권4

    楊都 光宅寺 釋曇瑗

    從諸講席專師十誦 ······ 宣帝下詔國內, 初受戒者夏未滿五, 皆參律肆. 可於都邑大寺廣置德場. 仍勅瑗總知監檢,明示科擧 ······ 帝又下勅榮慰, 以瑗爲國之僧正, 令住光宅, 苦辭以任, 勅特許之.

    속 권21

    楊都 奉誠寺 大律都釋智文

    傳業之盛獨步江表 ······ 文初依辯學後歸彖下, 十誦諸部罔弗通練. 以梁大同七年, 靈味瓦官諸寺啓勅, 請文於光業寺, 首開律藏 ······ 屬梁末禍難, 乃避地于閩下 ······ 講十誦八十五遍 ······ 著律義疏十二卷, 羯磨疏四卷

    속 권21

    攝山 栖霞寺 釋慧峰

    住栖霞寺 ······ 未出都偏弘十誦, 讚誘前修, 聽者如市. 속 권25

    楊都 大禪衆寺釋慧勇

    從靜衆寺峰律師, 遊學十誦 ······ 天嘉五年, 世祖文皇,請講於太極殿.

    속 권7

    ※ ‘고’는 고승전을, ‘속’는 속고승전을, ‘비’는 비구니전을 지칭한다.89) 고승전 권11, 齊鍾山靈曜寺釋志道傳 , p.435. 속고승전 권21, p.607c, 慧光傳에 “先是四分未廣宣通. 有道覆律師, 創開此部”로 보아 혜광의 이전에는 志

    道가 전수한 십송율이 성행하였을 것이다.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21

    속고승전권21 明律上篇의 正傳에는 15명, 附傳에는 12명이 수록되어 있다. 남북조시기의 인물이 6명으로, 梁代는 法超․道禪이, 陳代는

    曇瑗․智文이, 北齊는 慧光․曇隱이다. 비록 明律篇에는 梁代에 2명의

    율승을 수록했지만 각 전을 살펴보면 지장․명철․승변․(법)총도 십송율에 뛰어난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먼저, 양대의 십송율사는 지칭과 승우의 계열로 나눌 수 있다. 지칭의 문하에는 法超가 (法)聰율사와

    함께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 그는 무제의 家僧으로 도읍승정에 발탁되

    었고, 보통 6년에는 知事들을 모아서 칙령으로 講律하여 불교계의 숙

    정과 통제에 일조하였다. 奉誠寺의 승변도 지칭의 제자로 십송율에뛰어나 강남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되었다.90) 그는 양무제가 ‘斷

    肉’ 논쟁으로 불교계를 숙정하고자 할 때 莊嚴寺의 法超, 光宅寺의 寶

    度 등과 다양한 불교교리를 인용하여 ‘斷肉’의 정당성을 제공하였다.91)

    혜순․慧度․智文 등이 승변에게 십송율을 수학하였고, 그가 주석했던 봉성사는 隋代 釋道成 때까지 십송율 선양의 중심지였다.92)승우의 문하인 明徹이나 智藏은 ‘義解’에 뛰어나 비록 明律篇에는 수

    록되지 않았지만 율장에 뛰어났다. 명철은 승우가 三吳에서 講律할 때

    십송율을 수학하였고, 후에 승우를 따라 건강으로 나와서 건초사에머물렀다. 이곳은 승우가 정림사와 함께 집중적으로 불사를 일으켰던

    곳으로93) 십송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양무제는 교단의 통제와 승려들의 수행을 위하여 특별히 율장을 중시하였고, 천감말년에

    는 명철에게 조칙을 내려서 화림원의 寶雲僧省에서 율장을 정리하도록

    하였다. 지장의 경우는 13세 때인 泰始 6년(470)94)에 유송의 明帝를 대

    90) 속고승전 권21, 陳楊都奉誠寺大律都釋智文傳 , p.609b.91) 광홍명집 권26, 斷酒肉文 , pp.299a-301a.92) 속고승전 권21, 隋蔣州奉誠寺釋道成傳 , p.611a.93) 고승전 권11, 齊京師建初寺釋僧祐傳 , p.440.94) 유송의 ‘泰初 6년’은 ‘泰始’의 오기인 것 같다. 그은 ‘普通 3년(522)’ 65세로 사

    망했기 때문에 457년에 출생하여 16세인 473년에 출가했다. 하지만 473년은 後

    廢帝 元徽원년으로 ‘명제’와 ‘태시 6년’이란 조건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출가 연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22신하여 출가해서 흥황사에 머물면서 승우에게 십송율을 수학하였다.이후 僧柔나 慧次를 따라서 成實論을 수학하여 義解僧으로 더욱 인정을 받았다. 그는 會稽 愼法師의 요청으로 그곳에서 수년간 많은 제

    자들을 거두어 교화하였다. 하지만 律部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다

    시 경사로 나아가서 십송율을 명료하게 밝히고 여러 율장을 두루 연구하였다. 그가 출가 초기에 율장을 깊이 연구했던 것은 이후 양무제

    가 ‘白衣僧正’을 제기했을 때 불교계가 황권에 예속되는 것을 거부하

    고, 교권의 독립과 교단의 自淨을 모색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95)

    당시 양무제는 문벌사족과의 결탁으로 方外의 특권을 향유하고, 막대

    한 사원경제력을 유지했던 불교계가 자신의 황권에 대한 중대한 위협

    이 된다고 보고, 율장의 정비나 율승의 중용을 통해서 합법적으로 불

    교계를 통제하고자 하였다.96)

    양대 십송율과 관련하여 비구니들의 십송율 수지도 주목된다.서진말에 淨撿이 최초로 공식 출가하고부터 한인 尼僧들은 율장의 완

    비를 통해 구족계를 수지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한인 니

    승들은 원가 11년(434)에 僧伽跋摩와 獅子國의 鐵薩羅 등으로부터 십송율에 근거해서 ‘二衆受戒’함으로써 변지의식을 극복할 수 있었다.97)니승들은 구족계를 받을 때만이 아니라 이후의 수행에서도 비구를 초

    청하여 십송율을 청강하고 자문하여 교단의 청정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선림사의 정수니는 십송율사인 慧曜나 法穎 등을 초빙하여 니승들

    을 위해 講律하였고, 초명사의 법선니는 영명 연간에 慧熙로부터 십송율을 자문 받았다. 한거사의 승술니는 전문적으로 십송율을 연구하였고, 서청원사의 묘의니는 직접 십송율을 널리 선양하였다. 남조에서 니승들의 계율에 대한 각고의 노력은 당연히 청정한 승단의 위상

    령이 ‘十六’이 아니라 ‘十三’이라야 가능하다. 즉 ‘六’은 ‘三’과 字形의 유사함으

    로 인한 오류일 것이다.

    95) 鎌田茂雄 著, 章輝玉 譯, 중국불교사 3 (장승, 1996), pp.207-210.96) 顔尙文 著, 中國中古佛敎史論 (北京: 宗敎文化出版社, 2010), pp.152-170.97) 李玉珍, 唐代的比丘尼 (臺北: 臺灣學生書局, 1989), pp.130-132.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23을 향상시켰고,98) 그 결과 니승 승단은 북조와는 달리 세속 통치자로

    부터도 독자적인 僧官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梁末의 불교계는 侯景의 난과 그 여파로 붕괴되었지만 陳代는 다시

    역량을 회복하게 된다.99) 陳의 무제는 널리 민심을 획득하고, 자신의

    帝位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대형 불사를 일으키고 佛牙를 이용한

    무차대회를 개최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무제처럼 永定 2년(558)에는 대

    장엄사에서 ‘捨身’을 행하였다.100) 文帝도 天嘉 4년(563)에 無碍대회를

    개최하여 ‘捨身’을 행하였다.101) 황제들의 불교계에 대한 지원은 붕괴

    된 사원의 물적 기반뿐 아니라 해체되었던 승단의 인적 기반도 복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불교의 교세가 세속의 지원으로 신속히 회복되자 승단에서

    는 기본적인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구성원들이 출현하게 되었고, 통치

    자들은 율사를 활용하여 다시 승단을 통제하고자 한다.102) 慧勇은 문

    제의 요청으로 천가 5년(564)에 태극전에서 문무백관과 七衆들을 위하

    여 강의하였다. 그는 삼론학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靜衆寺의 慧峰에게

    십송율을 수학했던 율승으로103) 교단의 숙정이나 통제라는 통치자의요구에 잘 부응할 수 있었다.

    宣帝시기의 十誦律師로는 曇瑗과 智文이 주목된다. 담원은 승단의

    청정을 위해서 계율에 대한 교육과 受持를 강조했던 선제의 불교정책

    98) 劉颻 著, 魏晉南北朝釋家傳記硏究: 釋寶唱與《比丘尼傳》 (長沙: 岳麓書社,2009), pp.83-85.

    99) 辯正論 권3 (대정장 52책) 十代奉佛上篇, p.503c, “陳世五主, 合三十四年. 寺有一千二百三十二所, 國家新寺一十七所, 百官造者六十八所, 郭內大寺三百餘所.

    輿地圖云, 都下舊有七百餘寺, 屬侯景作亂, 焚燒蕩盡”.

    100) 陳書 권2, 高祖 下, p.37.101) 南史 권9, 陳本紀, p.280.102) 陳의 後主 조차도 陳書 권6, p.108에 의하면, 太建十四年 夏四月 庚子일에

    “又僧尼道士, 挾邪左道, 不依經律, 民間淫祀祅書諸珍怪事, 詳爲條制, 竝皆禁絶”

    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103) 혜용 외에 慧暅도 혜봉에게 십송율을 수학했는데, 속고승전 권9, 隋江表徐方中寺釋慧暅傳 , p.494b에는 “從靜衆峰師受十誦律”이라 전한다.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24에 잘 호응하였다. 나아가 그는 승단의 통제를 위임받고, 승려의 선발

    방법에 대해서도 요청을 받았다. 담원은 선제에게 공로가 인정되어 국

    가의 승정으로 발탁되기도 하였다.104) 뿐만 아니라 담원의 문하에는

    북방의 승려도 십송율을 배우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105)智文은 梁末에 잠시 閩下로 피난했었지만 陳代에는 다시 십송율

    을 弘布하며 승단의 보호에 노력하였다. 그는 일찍이 봉선사의 승변과

    大明寺의 彖율사106)로부터 수학하여 30대 초반인 大同 7년(541)에 이

    미 칙령으로 光業寺에서 십송율을 강의할 정도였다. 太建 10년(578),陳軍이 北周軍에게 대패하자 선제는 僧衆을 징발하여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려고 했지만 그는 여러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107) 비록 그가

    호법의 명목으로 반대하였지만 실재는 세속 통치자가 사원경제 혹은

    노동력을 침탈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다.108)

    陳代의 十誦律師들은 강연으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다양한 저

    술을 남겨서 왕조 교체와는 상관없이 십송율이 강남에서 지속적으로융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釋道成은 隋代에 십송율사로 저

    명하였고,109) 釋智鍇는 大業연간까지 廬山 大林寺에서 십송율을 널리 선양하였고,110) 釋慧旻은 竹園寺의 志율사로부터 십송율을 받아貞觀말년까지 강연과 저술을 통해 그것을 널리 전하였다.111) 하지만

    104) 鎌田茂雄 著, 章輝玉 譯, 중국불교사 3, p.248에는 담원이 국가의 승정을담임했던 것처럼 서술한다. 하지만 “以瑗爲國之僧正, 令住光宅. 苦辭以任, 勅特

    許之”에서 볼 때, 그는 고사하고 승정은 담임하지 않았다.

    105) 속고승전 권16, 周京師天寶寺釋僧瑋傳 , p.558b, “進受具後下楊都, 於帝釋寺聽曇瑗律師講十誦, 淹于五載齋鏡持犯 ······ 天和五年以葬母東歸, 勅使爲安州

    三藏”.

    106) 속고승전 권7, p.477b의 ‘釋法朗’과 같은 책 권29, p.694의 ‘釋僧晃’을 통해서 볼 때 彖법사는 십송율사이다.

    107) 속고승전 권21, 陳楊都奉誠寺大律都釋智文傳 , p.609b.108) 何玆全, 中古大族寺院領戶硏究 (五十年來漢唐佛敎寺院經濟硏究), pp.89

    -98.

    109) 속고승전 권21, 隋蔣州奉誠寺釋道成傳 , p.611a.110) 속고승전 권17 隋九江廬山大林寺釋智鍇傳 , p.570b.111) 속고승전 권22 唐蘇州通玄寺釋慧旻傳 , pp.619c-620a.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25唐 中宗이 道岸의 주청으로 강남에서도 사분율이 시행되도록 칙령을내리면서 십송율은 비로소 점차 교세를 상실하게 되었다.112)

    Ⅳ. 江南에서 십송율 盛行의 원인십송율이 장안에서 번역되었지만 오히려 강남에서 전역되었던

    五分律이 관중에서는 성행하였다. 반면에 십송율은 5세기 초에 강남으로 전래되어 줄곧 남방에서 교세를 유지하였다.113) 십송율이 유독 강남에서 발전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학자 嚴耀中은 이미 그

    이유를 언급했지만114) 그 내용이 지나치게 간략함으로 논의를 조금 더

    진전시켜 보고자 한다.

    먼저, 십송율은 漢地에서 최초로 전역된 광율이다. 십송율 계통의 율서들은 이미 동진 중기부터 한지에 전역되었고, 승단의 지도자였

    던 道安은 鼻奈耶律(10권본)에 서문을 지어 그것을 널리 선양하고자하였다. 또한, 구마라집은 일찍이 장안에서 역경작업을 할 때, 전역된

    불전을 선양할 때 혜원을 비롯한 도안의 제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구마라집이 광율들 가운데 십송율을 선택했던 것은 한인들이 이미 십송율 계통의 율서들에 익숙해 이었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십송율이 최초로 전역되었기 때문에 이후의 사분율이나 승기율도 번역의 형식이나 내용에서 대체로 십송율의 방법을 수용하였다.115) 예를 들면 ‘僧殘’이란 용어는 설일체유부의 鼻奈耶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십송율을 거쳐서 이후 여러 율장에 수용되어졌다.116) 뿐만 아니라 십송율에 정통했던 慧觀이 유송의 문제에112) 宋高僧傳 권14 唐光州道岸傳 , p.793c.113) 南海寄歸內法傳 序文 (대정장 54冊), p.205b.114) 嚴耀中, 앞의 책, pp.52-54.

    115) 平川彰 著, 釋慧能 譯, 비구계의 연구 Ⅱ, p.608.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26게 존경받고, 僧璩는 효무제 시기에 僧正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통치

    계급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이것 역시 십송율이 강남에서 성행했던 것과 큰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서, 십송율은 도안에의해 전역의 토대가 마련되고, 당대 최고의 역경승인 구마라집에 의해

    전역되고, 십송율을 정리했던 비마라차와 남방 불교의 영수였던 혜원과 통치계급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혜관 등의 노력으로 강남에

    서 성행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십송율은 다른 광율과 비교해 보면 경제적인 제약이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십송율의 주요한 근거지였던 印度의 마투라가 교통의 요충지로 일찍부터 상업이 활성화된 곳이고,117)

    불교 신자들 가운데 상인이 많아서 다른 지역에 비해서 상업에 우호적

    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불교는 출세간의 수행을 통

    한 해탈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세속 정치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金銀’의 수용 문제는 원시불교에서도 상좌부와 대중부가 분열하는 근

    본 원인이 되었다.118) 비록 ‘10事’가 계율에 위배된다는 상좌부의 주장

    이 인정되었지만 화폐경제가 발달했던 東印度의 승가에서는 금전을 받

    는 것이 서서히 정착되었다. 이후 세간의 경제활동에서 화폐가 중심이

    되자,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인도 전역의 승단에서도 점차 금전을 수

    용하게 되면서 각 부파의 입장들은 그들이 준수한 율장에서도 점차 반

    영되어졌다.119) 이로 말미암아 한역된 여러 광율의 捨墮罪에는 金銀과

    관련한 ‘受畜金銀戒’․‘貿易金銀戒’와 교환과 관련한 ‘種種販賣戒’의 조

    항이 있지만 조문에 대한 해석은 각 부파마다 차이를 보였다.

    金銀과 관련해서 팔리율은 대단히 엄격한 입장을 취했는데, 심지어 다른 광율에서는 보이지 않는 ‘捨金銀比丘’를 선출하는 갈마법도 포

    함되어 있다. 사분율은 팔리율만큼은 엄격하지는 않다. 팔리율과

    116) 平川彰 著, 釋慧能 譯, 비구계의 연구 Ⅰ, p.372, p.385.117) 奈良康明 著, 정호영 역, 앞의 책, pp.199-201.

    118) 平川彰 著, 이호근 역, 앞의 책, pp.103-105.

    119) 奈良康明 著, 정호영 역, 앞의 책, pp.142-147.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27승기율은 “사타를 범한 금은은 승가에 내놓게 하고, 本人에게 돌려주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120) 사분율은 “금은은 俗人에게 내놓았다가 본인에게 돌려줄 수 있도록 되어 있다.”121) 하지만 십송율은 사분율에 비해서 더욱 완화된 입장을 취한다. 십송율은 금은의 범위를 ‘寶’로만 제한하여 사타라 보고, 만일 鐵錢이나 銅錢 등을 취하면

    한 단계가 낮은 ‘突吉羅罪’를 범한 것으로 보았다.122)

    물질적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승려는 생필품을 신자의 보시나 교환

    을 통해서 획득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된 ‘種種販賣戒’에 대해서도

    각 부파는 차이를 보인다.123) 팔리율․사분율․오분율에서는 교환만 허락되며, 이익을 구하지 않아도 판매를 한다면 ‘사타죄’를 범한

    것으로 본다.124) 십송율은 원래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경우는차후에 설령 이익을 획득할지라도 계를 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125)

    십송율은 팔리율이나 사분율보다는 매매에 대한 규제 역시 느슨하다.

    이처럼 금은이나 교환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완화된 입장을 취했던

    십송율은 비록 북방에서 전역되었지만 강남에서 더욱 널리 발전되었다. 그 이유는 남북조시기의 강남은 북방에 비해 상업 활동이 활성화

    되고, 일상생활이나 국가재정 등의 모든 방면에서 화폐 사용이 발달되

    어 있었기 때문이다.126) 사원경제의 주요 수입원도 북방은 토지에 의

    존한 地租의 수탈인 반면 강남은 상업 고리대에 의한 이윤의 획득이

    120) 平川彰 著, 釋慧能 譯, 비구계의 연구 Ⅱ, pp.367-368.121) 四分律 권8 (대정장 22책), p.619bc.122) 十誦律 권7 (대정장 23책), p.51b.123) 平川彰 著, 釋慧能 譯, 비구계의 연구 Ⅱ, p.392. 판매는 물건을 교환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고, 무역은 원하는 것을 서로 교환하여 양쪽이 모두 이익을

    얻는 것을 의미”함으로 율장에서는 ‘교환=무역’이란 용어가 더욱 적합할 것이

    다.

    124) 平川彰 著, 釋慧能 譯, 비구계의 연구 Ⅱ, p.402-403.125) 十誦律 권7 (대정장 23책), p.53b.126) 何玆全 著, 東晋南朝的錢幣使用與錢幣問題 (讀史集,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82), pp.145-184.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28주류를 이루고 있었다.127) 이로 말미암아 강남 불교계가 다른 광율에

    비해서 사원경제의 발전을 보장해 주고, 그를 통한 교세의 확장에 유

    리한 십송율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당연하다.128)교리적 측면에서도 십송율은 강남에서 널리 전파될 수 있는 많은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불교에서는 一切衆生의 평등을 설하지만 실

    제로 승단 내부에는 다양한 차별이 존재하였다. 승단 내의 차별적인

    요소는 비구와 비구니가 수지하는 계율의 숫자뿐만 아니라,129) 비구니

    교단 출현의 전제조건이었던 ‘比丘尼八敬法’ 130) 여성에 대한 ‘三從五

    障說’131) 등에도 잘 나타난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적 요소는 각

    부파가 준수한 율장마다 강약의 차이를 보인다. 오분율은 여성에 대한 五障說을 견지하며 成佛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였고, 사분율도 팔경법에 있어 오분율과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반면에 십송율은 ‘轉成男子身’의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여성이 수행을 통해 성불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132) 이것은 유송이래 강남에서 법화경이나 열반경의 ‘悉有佛性說’과 결합되면서 한인 여성들이 십송율을 수지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여성의 수계문제에서도 십송율은 다른 광율에 비해서 완화된 입장을 취하였다. 한인 최초의 니승 淨撿은 출가 초기부터 줄곧 ‘二衆受

    戒’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녀는 升平원년에 曇摩羯多를 청하여 僧祇尼羯磨로 수계하고자 했지만 戒因緣經에 의거한 釋道場에게 비판을

    127) 郭朋 著, 中國佛敎思想史(上卷 漢魏兩晉南北朝佛敎思想), pp.738-739.128) 嚴耀中, 앞의 책, p.53.

    129) 가장 큰 죄목인 바라이도 비구는 4항인 반면 비구니는 8항목이다. 특히 不

    共戒인 摩觸戒, 八事成重戒, 覆比丘尼重罪戒, 隨順被擧比丘戒는 비구에게는 없

    는 ‘同罪異罰’로 차별을 잘 반영하고 있다.

    130) 十誦律 권47 (대정장 23책), p.345c.131) 佛說玉耶女經 (대정장 2책), p.864a, “女人之法, 有三鄣十惡 ······ 一者小時父母所鄣, 二者出嫁夫主所鄣, 三者老時兒子所鄣” ; 中阿含經권28(대정장 1冊),p.607b, “阿難, 當知女人不得行五事. 若女人作如來無所著等正覺, 及轉輪王天帝釋

    魔王大梵天者, 終無是處. 當知男子得行五事 ······”.

    132) 李玉珍, 앞의 책, pp.125-126.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29받았고,133) 부득이 大僧에게 구족계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계율의 미

    비라는 비판은 피할 수가 없었다. 5세기 초에 전역된 사분율을 비롯한 대부분의 광율은 여성의 구족계가 율장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二衆

    受戒’를 해야만 된다고 했지만 십송율은 그런 제약이 없었다.134) 그로 말미암아 유송 원가 11년(434)에 師子國에서 비구니가 도래하여 사분율 등에 의거한 ‘二衆受戒’가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僧伽跋摩는십송율에 의거하여 수계를 행하게 된다.135) 십송율은 여성들에게관대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유송이래로 니승들이 독립된 승관제도를 운

    영할 수 있도록 하였고, 비구들처럼 니승들의 독립된 僧傳을 편찬할

    수 있도록 하였다.136) 남조의 니승교단이 십송율을 적극 지지하였던것도 남조에서 십송율이 교세를 확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Ⅴ. 나오면서

    漢地에서 율장의 전역과 江南지역에서 십송율의 성행에 대해서살펴보았다. 기존에 ‘佛典’ 중심의 구법과 역경 활동이 5세기 초부터

    133) 開元釋敎錄 권4 (대정장 55冊), p.512, “鼻奈耶律十卷, 一名誡因緣經······.” 당시 석도장의 비판은 니승승단 구성원 숫자의 미달과 관련이 있을 가

    능이 크다.

    134) 李玉珍, 앞의 책, p.127. 비구니팔경법의 두 번째 조문은 “比丘尼, 應從比丘

    僧乞受具戒”라 표현한 반면 3조는 “若比丘尼犯僧殘罪, 應從二部僧 ······”, 제 5

    조는 “比丘尼安居竟, 應從二部僧衆······”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十誦律에서는, 특히 팔경법 내에서는 ‘一衆’과 ‘二衆’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던 것 같다. 승려들에게 구족계의 수계는 중요한 문제로, 만약 니

    승들이 ‘二衆受戒’를 해야 한다면 ‘比丘僧’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

    라서 필자는 十誦律은 다른 율장과 달리 비구니 구족계의 수여에서는 ‘일중수계’의 입장을 취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본다.

    135) 李玉珍, 앞의 책, pp.130-132.

    136) 周玉茹, 中國早期比丘尼硏究 (西北大學 碩士學位論文, 2003), p.53.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30점차 율장에도 주목하게 된다. 이것은 교세 성장으로 말미암은 세속

    통치자와의 갈등을 해결하고, 불교계가 주체적으로 僧團의 질적인 향

    상을 통해 교세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다.

    晋末宋初에 율장 전역은, 무분별한 불교교세의 확장으로 승단의 질

    적 수준이 저하되고, 교단 내부의 부패와 타락의 요소가 증가된 것과

    관련이 있다. 교단의 自淨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세속 군주들의

    간섭은 독립을 추구하는 승단에 커다란 위협이었다. 모든 구성원에게

    절대적 권위를 가지면서 교단의 청정을 보장할 수 있는 계율이 필요하

    였다. 교세의 확장은 승단 구성원의 受戒에 대한 적법성 논란으로 이

    어졌다. 한인 승려, 특히 비구니들은 보다 완전한 율장을 갖춤으로써

    ‘邊地’라는 인식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中國化’하고자 하였다. 5세기 초

    에 다수의 광율이 전역된 것은 이런 노력의 결과였다. 또한, 소승 율승

    들도 불교를 弘傳하기 위하여 스스로 東來하였다. 불전에서 선교를 강

    조했던 것은 천축과 서역의 승려들이 적극 대외 선교에 나서도록 하였

    다.

    有部계통의 계본은 4세기 중반부터 점차 漢地에 전역되었다. 이것은

    광율 중에서 십송율이 가장 먼저 전역되고, 널리 유포될 수 있는 좋은 배경이었다. 십송율의 전역과 유포에는 구마라집과 비마라차가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구마라집은 일찍이 십송율을 수학했지만 율장에 대한 이해나 준수는 철저하지 못 하였다. 이것은 그가 바라이죄

    인 婬戒를 범한 것, 십송율을 전역하면서 스스로 胡本을 誦出하지못했던 것, 스스로 십송율의 善本을 결정하지 못 했던 것에서도 알수 있다. 십송율의 선본은 구마라집의 입적 후에 비마라차가 남방수춘의 石澗寺와 강릉의 辛寺에 머물면서 조문을 刪削하여 만들고, 그

    에 의해서 널리 유포되었다. 그에게 십송율을 聽講했던 慧觀․慧猷등이 강남에 이것을 널리 선교하면서 십송율은 점차 발전의 기초를마련하게 된다.

    십송율은 강남에서 陳代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성행하였다. 宋․齊시기 한인 율승은 28명이었다. 유송시기는 15명으로, 11명은 십송율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31을 전공하고, 1명은 승기율을, 3명은 율장에 뛰어났다고만 전한다.그들은 주로 불교 유입처인 凉州와 촉군, 교통의 요충지인 강릉, 수도

    건강과 士族의 활동공간인 吳 등지의 長江유역 각 重鎭에서 활동하였

    다. 남제시기 율승은 13명으로, 8명은 십송율을, 1명은 승기율을, 3명은 율장에 뛰어났고, 1명(暉律師)은 행적이 미상이다. 그들은 대부분

    건강과 그 인근지역에서 활동하였다. 志道는 태무제의 폐불 이후 북방

    에서 불교를 부흥시킬 때 율장의 복원에 공로가 있었다. 이것은 남북

    의 정치적․군사적 대치국면 속에서도 율장을 매개로 한 문화교류는

    부단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속고승전권21에는 梁代에 法超․道禪, 陳代에 曇瑗․智文 4명만수록하지만 양대의 智藏․明徹․승변․(법)총 등도 실재로 십송율에뛰어났다. 양대 십송율사는 지칭 문하의 법초․법총․승변 등과 승우

    문하의 명철․지장 등으로 대별되었다. 또한 양대는 비구니들의 십송율 수지도 주목되었다. 이것은 니승교단의 질적 수준과 청정한 승단의 위상을 향상시켰고, 비구 승단에서 독립된 尼僧僧官을 가질 수 있

    도록 하였다. 陳의 武帝․文帝는 帝位 찬탈과 안정을 위해서 각종 齋

    會를 이용했는데, 이것은 侯景의 난과 그 여파로 붕괴되었던 불교계의

    역량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다시 승단의 폐단이 발생하자

    통치자들은 담원과 지문 등의 십송율사를 등용하여 승단을 정비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통치자들의 불교정책에 호응하면서 한편으로는 통치자

    들이 사원경제 혹은 노동력을 침탈하는 것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십송율이 강남지역에서 번성했던 원인은 첫째, 십송율 계통의율서가 일찍부터 한지에 유포되었고, 최고의 역경승인 구마라집이 당

    시 불교계를 대표하던 혜원 등의 지원 속에서 전역하였고, 유송 통치

    자와 친밀했던 혜관 등이 유포에 적극 동참했기 때문이다. 또한, 십송율은 다른 광율에 비해서 경제적인 제약이 심하지 않았다. 계율에는‘金銀’․‘販賣’ 등과 관련된 조항이 있는데, 팔리율․승기율이 가장엄격하고, 사분율은 그 다음이고, 십송율이 가장 완화된 입장을 취한다. 남조이래로 강남지역은 상업이 활성화 되고, 화폐 사용이 발달했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32기 때문에 僧俗은 십송율의 도입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교리적으로도 오분율은 여성의 成佛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였고, 사분율도팔경법에 있어 오분율과 동일한 입장이었다. 반면에 십송율은 ‘轉成男子身’의 조건이 있지만 여성의 성불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여성

    의 수계에서도 사분율을 비롯한 대부분의 광율은 ‘二衆受戒’를 주장하지만 십송율은 그런 제약이 없었다. 십송율이 여성들에게 관대한 입장을 취했던 것은 강남에서 십송율이 성행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본고는 남북조시기 강남지역을 고찰한 것으로 북방은 제외되었다.

    강남에서 전역되었던 승기율이 북방에서 성행한 것이나, 唐代이래로동아시아 율종의 주류를 점했던 사분율의 발전상에 대해서는 차후의연구를 기대한다.

    1. 사료

    南史, 魏書, 晉書, 陳書, 陳書開元釋敎錄 (大正藏 55冊)廣弘明集 (대정장 52책)南朝佛寺志 (孫文川․陳作霖 撰, 江蘇廣陵古籍刻印社)南海寄歸內法傳 (대정장 54책)大宋僧史略 (대정장 54책)大智度論 (대정장 25책)辯正論 (대정장 52책)佛說玉耶女經 (대정장 2책)佛說太子瑞應本起經 (대정장 3책)四分律 (대정장 22책)續高僧傳 (대정장 50책)宋高僧傳 (대정장 50책)神異傳 (대정장 50책)十誦律 (대정장 23책)歷代三寶紀 (대정장 49책)雜譬喩經 (대정장 4책)諸經要集 (대정장 54책)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33中阿含經 (대정장 1책)集沙門不應拜俗等事 (대정장 52책)弘明集 (대정장 52책)2. 단행본

    鎌田茂雄 著․章輝玉 譯, 중국불교사 2 (장승, 1993)鎌田茂雄 著․章輝玉 譯, 중국불교사 3 (장승, 1996)郭朋, 中國佛敎思想史(上卷) (福州: 福建人民出版社, 1994)奈良康明 著, 정호영 역, 인도불교 (민족사, 1990)湛如,敦煌佛敎律儀制度硏究 (北京: 중화서국, 2003)蕭晋仁․蕭鍊子 點校, 出三藏記集 권3 (北京: 중화서국, 1995)孫昌武, 中國佛敎文化史(제3冊) (北京: 中華書局, 2010)顔尙文 著, 中國中古佛敎史論 (北京: 宗敎文化出版社, 2010)嚴耕望 撰, 魏晉南北朝佛敎地理稿(嚴耕望史學著作集)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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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34(中文摘要)

    十誦律的傳譯和在江南的繁榮

    安 洵 亨

    本文研究了在漢地的律藏的傳譯和在江南地區的十誦律的盛行. 以往以‘經典’爲中心的求法和傳譯活動從5世紀初逐漸轉爲關注律藏. 其原因在

    於解決教權和皇權的矛盾, 佛教界主動通過僧團質量的提高, 是爲了發展教

    勢.

    到晉末宋初, 無分別的僧呂的出家是增加教團內部腐化․墮落的要素. 由

    於教團自淨能力的不足,世俗統治者的干涉對追求獨立的僧團具有很大的

    威脅. 因此, 爲了所有成員以保持絕對權威, 需要保障教團清淨的戒律. 教

    勢的擴大引起了對僧團成員合法性的爭論. 漢人僧呂, 特別是比丘尼, 希望

    通過具備更完全的律藏, 克服‘邊地’認識, 把自己進行了‘中國化’. 在5世紀

    初, 多數廣律的傳譯是這種努力的結果. 並且小乘律僧也爲了佛教的弘傳,

    親自來到漢地. 在佛典裏強調的傳教對天竺和西域律師勉勵積極的對外傳

    教.

    有部系統的戒本從4世紀中期逐漸傳譯到漢地. 這是在廣律中十誦律最早傳譯, 廣泛傳播的基礎. 在十誦律的傳譯和傳播中, 鳩摩羅什和卑摩羅叉的貢獻很大. 鳩摩羅什曾經學過十誦律, 但是對律藏的理解和實踐不徹底. 這件事可以知道通過他犯了淫戒、在十誦律的傳譯中不會親自誦出胡本、不會親自決定十誦律的善本等. 十誦律的善本在鳩摩羅什的入寂後, 卑摩羅叉在南方的壽春石澗寺和江陵辛寺整理條文, 廣泛流傳. 向他

    受學的慧光、慧猷等, 在江南傳教的同時, 使十誦律逐漸具備了發展的根底.

  • 十誦律의 傳來와 江南에서 繁榮 (安洵亨) 35在江南的十誦律到陳代以後也仍然盛行. 宋․齊時期, 漢人律僧有了28

    名. 劉宋時期15名, 其中, 11名專攻十誦律、1名專攻僧祇律、3名卓越於律藏. ‘十誦律師’大部分活動在佛教流入處的涼州和蜀郡、交通要地的江

    陵、首都建康以及士族活動地區的吳等地的重鎮. 南齊時期13名, 其中, 8

    名專攻十誦律、1名專攻僧祇律、3名卓越於律藏、1名(暉律師)行跡不詳. 南齊十誦律師在建康和其鄰近地區大部分活動. 志道於太武帝毀佛之後

    復興佛教的時候,對回復律藏做出了貢獻. 律藏在南北政治、軍事的對峙

    局勢中, 也起到了南北文化交流的作用.

    在續高僧傳卷21中, 雖然只收錄了梁代的法超․道禪, 陳代的曇瑗․智文四位僧侶, 但是梁代的智藏․明徹․僧辯․(法)聰等也實際上對十誦律貢獻卓越. 梁代的十誦律師大致分爲以智稱門下的法超․法聰․僧辯等和

    僧祐門下的明徹․智藏. 並且梁代的比丘尼以十誦律的受持受到了關注.因此, 尼僧教團的質的水平和清淨僧團的地位得到提高, 從比丘僧團也開始

    具備獨立的尼僧僧官. 陳的武帝․文帝爲了帝位篡奪和穩定, 利用了各種齋

    會, 這件事給回復瓦解了的佛教界的力量提供了好機會. 但同時又發生僧團

    的弊端, 統治者通過提拔曇瑗․智文的十誦律師, 希望肅整僧團. 律僧一邊

    響應統治者的佛教政策, 一邊對統治者對寺院經濟或者勞動力的侵奪進行

    抵抗.

    在江南地區, 十誦律繁盛有以下幾個原因. 第一, 十誦律系統的律書曾經流傳於漢地, 鳩摩羅什在以慧遠爲代表的當時佛教界的支援中傳譯了

    廣律, 與劉宋統治者有了親密關系的慧觀等積極參與十誦律的流傳. 第二, 與別的廣律比較起來, 在經濟方面的限制沒那麼嚴格. 在律藏裏, 有了

    ‘金銀’、‘販賣’等的條款, 巴利律、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