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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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Fascism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펴내는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파 시즘의 기본 개념, 그것의 다양한 변(형)태들, 앞으로의 전망 등에 관한 간명한 식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완전에 근접한 대안의 바탕으로 기여할 것이다. 현실은 이론을 거부하니 이론적 활동이 부질없어 보인다 해도 우리는 이를 포기 할 수 없다. 이성적 사유를 포기하는 순간이 곧 파시스트적 열정에 몸을 맡기는 시점始點이다.” 0. 연표 1. 파시즘의 정의 2. 역사적 파시즘 (1) 이탈리아 3. 역사적 파시즘 (2) 독일 4. 역사적 파시즘 (3) 일본 5. 오늘날의 파시즘 6. 보론: 파시즘, 민족, 인종 7. 보론: 파시즘 이전의 파시즘 8. References 9. Article: Ian Kershaw, 《The Hitler Myth》 “5. 오늘날의 파시즘”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음. 2008.02.22. 초고, 2008.06.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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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Fascism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펴내는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파

시즘의 기본 개념, 그것의 다양한 변(형)태들, 앞으로의 전망 등에 관한 간명한 식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완전에

근접한 대안의 바탕으로 기여할 것이다. 현실은 이론을 거부하니 이론적 활동이 부질없어 보인다 해도 우리는 이를 포기

할 수 없다. 이성적 사유를 포기하는 순간이 곧 파시스트적 열정에 몸을 맡기는 시점始點이다.”

0. 연표

1. 파시즘의 정의

2. 역사적 파시즘 (1) 이탈리아

3. 역사적 파시즘 (2) 독일

4. 역사적 파시즘 (3) 일본

5. 오늘날의 파시즘

6. 보론: 파시즘, 민족, 인종

7. 보론: 파시즘 이전의 파시즘

8. References

9. Article: Ian Kershaw, 《The Hitler Myth》

“5. 오늘날의 파시즘”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음.

2008.02.22. 초고, 2008.06.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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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연표: “Point of no return”을 생각할 것

1848 《공산당 선언》

1871 파리 코뮨의 궤멸: 좌파의 몰락

1871~1914 아름다운 시대Belle Époque

: 우파의 헤게모니가 관철되었던 시대

: 제국주의적 경쟁과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등장: 국민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시너지 효과

1914~1918 제1차 세계대전: 총력전(홉스봄): 독일군의 ‘참호 속의 동지애’ 경험

1917 러시아 10월 혁명

1919 파시즘 선언, 나치당 결성, 베르사이유 조약

1922 로마진군

1928 로렌스D.H.Lawrence, 《채털리 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

“우리의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의 시대이다.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Ours is essentially a tragic age, so we refuse to take it tragically.”

: 전쟁의 트라우마로 인하여 사회에 만연한 나른한 분위기와 패배주의적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작품

: 우파의 헤게모니가 무너져가는 조짐.

1920~1929 광기의 시대Années folles

: 미국 문화pop culture의 유입

: 우파 헤게모니의 위기

: 독일에서는 사회민주당이 헤게모니를 잡으려 함

1929 대공황

: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 자유주의의 몰락 (ref. 칼 쇼르스케, 《세기말 비엔나》)

: 우파의 헤게모니 상실, 좌우파 어느 쪽도 헤게모니를 쥐고 있지 않은 상황

: 경제, 사회, 정치적 위기 속에서 질서회복의 수단으로서의 파시스트 운동 약진

1929~1939 독재가들의 득세

1933 히틀러 제3제국 수상 취임: 1933년 1월 나치즘이 권력을 잡기에 이른다.

1936~1939 스페인 내전

1939~1945 제2차 세계대전: 파시즘의 결렬을 향해

1942~1943 스탈린그라드 포위공격: 파시즘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 (ref. 홉스봄, 《극단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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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시즘의 정의

《파시즘》, 2장: ‘A이면서 A가 아닌 것’: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1.1. 역사적 파시즘: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파시즘

무솔리니는 “1919년에 좌파와 기존의 보수주의 모두에 대한 적대감을 초민족주의와 결합시킨 운동에 이 말을 적용했다.”

즉 파시즘은, 계급에 기반한 좌파와 우파 모두가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지 못하고 있을 때, 계급이 아닌 민족에 기반하여

등장한 이데올로기이다. “무솔리니가 ‘전체주의’ 사회 창출에 나섰을 때 히틀러는 인종적 유토피아 창출에 나섰는데, 그 유

토피아는 유대인들을 독일에서 제거하고 동유럽을 군사적으로 정복하는 꿈을 수반한 것이었다.”

“점차로 파시즘과 그것에 반대하는 이들 사이의 투쟁이 정치적 지형을 지배하게 되었다.” “파시즘과 반파시즘 사이의 투쟁

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군사적 팽창주의 때문에 국제적인 관계로까지 넓혀졌”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외교적으로 추방된 상태’에 있던 소련은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파시스트와 나치의 탐욕스

러운 정복욕은 그것에 대항하는 국제적인 연대를 만들어냈으며, 결국 수백만의 사람이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되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파시즘은 궤멸될 수 있었다.”

1.2. 개념정의의 문제

“파시즘은 자유주의, 보수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와 함께 20세기를 형성한 거대한 정치 이데올로기의 하나다.”

그렇지만 파시즘은 “스킨헤드와 지식인에게 호소하고, 보수주의자들과 연대하면서도 부르주아를 비난하며, 마초 스타일을

채택하면서도 많은 여성들을 끌어들이고, 전통으로 복귀하자고 요청하면서도 기술에 열광하며, 대중을 이상화하면서도 대

중 사회를 경멸하고, 질서의 이름으로 폭력을 설교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의 말대로

파시즘은 항상 ‘A이면서 A가 아닌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모순성으로 인해, ‘파시즘’이라는 용어가 남용되고, 그 결과 그 “사악한 본질”을 흐리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파시즘의 학문적 정의에 대한 필요성이 놓여 있다.

1.3. 마르크스주의적 접근

“마르크스주의는 가장 단순한 형식으로 보아 근대 사회가 두 개의 근본적인 계급으로 나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개의 거대 계급 사이에는 쁘띠 부르주아가 있는데 여기에는 자영업자, 소규모사업자, 농부, 사무직 노동자가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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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그것이 자본주의와 관련되어 있음을 굉장히 강조한다.” 1935년 공산주의 인터내셔

널에서는 파시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권력을 장악한 파시즘은 가장 반동적이고 쇼비니스트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금

융자본주의 요소의 개방적이고 테러적인 독재체제.” 다시 말해 파시즘은 “자본주의 해체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압력이

극단적으로 솟아오를 때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력을 방어하기 위해 테러에 호소하는 체제”이다. “일단 파시즘

이 권력을 잡고 노동 운동이 파괴되면 자본가들은 더는 파시스트당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고, 그에 따라 그것을 억압하

거나 주변으로 내몬다.”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의 강점은 그것이 파시즘을 20세기의 사회적 투쟁이라는 더 넓은 맥락 속에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계도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파시즘을 우파의 도구로 본다. 그렇게 보면 파시즘이 주요변수가 아니게 된다.

이러한 접근은 파시스트 운동이 가지고 있는 자발적인 측면들, 즉 우파 자본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형성된 요소들을 무시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거의 배타적으로 원인에만 관여하고 우리가 파시스트 운동을 어떻게

식별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또 한가지 문제는 자본의 위기가 되었다 하여 반드시 우파가 파시즘을 체제 방어 수단으로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의 위기가 왔을 때, 우파가 사회의 공권력과 공식적인 통치, 규율을 장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파시즘을 동원할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언제나 파시즘을 동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1.4. 파시즘과 반 모더니즘

이른바 ‘베버주의적 접근’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파시즘의 책임을 자본가들에게 돌렸다면 베버주의자들은 전前산업적,

봉건적 지배계급 - 동부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포Po강 계곡의 대토지 소유자들, 남부 스페인의 대토지 소유 영주나 일본의

무사계급 - 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침식하고자 대중적인 민족주의 운동을 후원했다.”

“파시즘은 주로 반反 모던적 운동이며, 이는 전前 산업적 엘리트와 반동적인 프티부르주아가 수렴된 결과다.”

“베버주의적 접근으로 파시즘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아주 크게 진전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도 여전

히 남아있는 봉건적 맥락과 그 영향에 대해 설명해냈기 때문이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정부에 들어간 것에는 자본가들

못지않게 낡은 귀족정도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그러나 “파시즘은 상당히 많은, 이른바 ‘근대적’ 특징도 포함하고 있기 때

문에 파시즘을 전적으로 ‘반 모던’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베버주의의 난점이 있다. 또한 베버주의적 접근 역시 마

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엘리트가 인구의 상당수―특히 프티부르주아―를 제멋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고” 가정한다. 그

로 인해 베버주의는 “파시즘의 급진적 특징들을 현실적으로 고려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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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전체주의적 민족주의의 한 형태인 파시즘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이탈리아 대중을 ‘국민화’하려는 노력―이탈리아의 요구에 봉사하기 위해

대중을 동원하여 위계질서적이고 준군사화된 공동체 안에 통합하려는 노력―을 정리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그 개념은

학자들의 영역으로 들어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냉전시대이다. 그 시대의

“반마르크스주의적 사회과학자들은 이 개념을 파시즘과 연동하여 공산주의를 비난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전체주의의 기원들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이 바로,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쓰여진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C.J.프리드리히Friedrich는 전체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1. 한 사람이 이끄는 단일한 대중정당. 체제의 핵심을 형성하고 정부 관료 조직보다 우월하거나 그것과 긴 하게 얽혀

있음.

2. 경찰이나 비 경찰에 의한 테러체제. 현실적이고 상상된 체제의 적을 직접 겨냥함.

3. 대중매체에 대한 독점적 통제.

4. 무기에 대한 독점이나 다름없는 상태.

5. 중앙 통제적 통제.

6. 인간 실존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고, 강력한 천년왕국적(메시아주의적인 또는 종교적인) 순간을 포함하는 정교한 이

데올로기”

하지만 이 여섯 가지의 속성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것일 뿐, 파시즘에 대한 규정이 아니다.

“1970년대에는 전체주의 개념이 쓰이지 않았다. 냉전이 막을 내렸고, 나치와 파시스트 (그리고 공산주의) 체제가 ‘위에서

아래로의’ 통제체제이기는커녕 불명료한 권위구조와 행정적 혼돈의 성격을 띠었음을 논증하는 연구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시즘을 “절대적인 원리에 따라 이상적 세계를 창출하려는 시도를 대표한다고 보는 전체주의적 이론의 관점”은,

저변의 “경제적, 사회적 또는 이해관계의 표현”으로서의 이념을 연구하기보다는 그 “내적인 구조를 분석”하는 데 집중하는

포스트모던주의자들에 의해 재조명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절대적인 원리”는 무엇인가? “전체주의

이론은 초민족주의가 파시스트 세계관의 중심이며, 파시스트들이 신봉하는 것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체

주의 이론은 또한 파시즘이 종교적 근본주의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점, 파시즘은 반대자가 악마적인 음모의 일부

라는 확신에 의해 정당화되는 폭력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체주의 이론의 약점은 마르크스주의적 접근과 베버주의적 접근이 약점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우선 전체주의 이론이 일

방적으로 이념만 논한다는 것은 그것이 파시즘의 원인규명에 취약함을 뜻한다. 전형적으로 그것은 전통적 이념의 위기, 방

향 상실이라는 느낌, 대체 종교의 추구에 대한 기계적인 일반화에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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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정의

1.6.1.

“우리의 파시즘 정의는 마르크스주의적, 베버주의적, 전체주의적 이론의 장점을 통합한 것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파시스트

이념이나 그것이 다양한 사회적 집단과 맺는 관계를 무시해서는 안되며, 파시즘의 급진적, 반동적 측면 둘 다를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캐빈 패스모어와 로저 그리핀의 견해차이에서 보다 뚜렷이 드러난다. 로저 그리핀은 “지도자 숭배,

준군사주의, 군중대회, 조합주의적 경제” 등은 전간기의 고유한 현상이므로 비본질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캐빈 패스모어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의 문제점은 파시스트가 신봉하는 민족주의가, 그 이데올로기의 다른 특징들 못지않게 전간가의 산물

이라는 데 있다.” “파시스트들은 파시즘의 의미와 다른 측면들에 상대적인 가치를 두는 것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사실상

모든 부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1.6.2.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이념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이념이나 정책과 같은 이론적 측면과, 그를 실천하는 제도적 장치와 같은

실천적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는 “이념과 실천의 통합적 묶음”인 것이다. 따라서 파시즘을 연구하

기 위해서는 이론적 측면에서의 초민족주의와 그 실천적 측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에 덧붙여, 파시즘의 구성원과 지지자들에 대한 인구학적 연구demographic research 역시 이루어져야 할 것인데, 원자

화된 대중을 동원mobilize하며 운동의 핵심으로 삼는 것이 중요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준에 입각하여 살펴본 파시즘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이론적 측면: 초민족주의

실천적 측면: 인종주의, 일당독재 엘리트주의, 준군사주의, 대중동원, 카리스마적 지도자

1.6.3. 캐빈 패스모어의 정의: 분절과 번호 등은 내가 덧붙인 것이다. 원문은 캐빈 패스모어, 《파시즘》, p. 62.

“파시즘은 배타적인 생물학적, 문화적 그리고/또는 역사적 관점에서 정의된 민족을 모든 다른 충성심의 원천 위에 두려 하

고 동원된 민족공동체를 창출하려는 이데올로기와 실천의 묶음이다.”: 좁은 의미의 이데올로기, 즉 이론적 측면

“파시스트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와 여성주의가 민족보다는 계급이나 성을 우선시한다고 간주하므로”: 초민족주의

“그것들에 대해 화해할 수 없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반동적이다. 파시즘이 ‘극단적인’ 우파의 운동인 까닭이

이것이다.”: 보수반동적 극우파

“파시즘은 또한 ‘급진적’ 우파의 운동이기도 한데, 사회주의와 여성주의의 패배와 동원된 민족공동체의 창출이 1) 카리스마

적 지도자에 의해 지도되는 2) 대중적이고 3) 군사화된 정당에서 구현되고 인민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새로운 4) 엘리트

권력의 출현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실천적 측면

“파시스트들은 사회주의와 여성주의를 똑같이 증오하기 때문에 보수주의로 향해 가지만 민족의 이익이 요구되는 곳에서는

보수주의적 이해 관계 - 가족, 재산, 종교, 대학, 시민부문 - 를 무시한다.: 파시즘과 보수주의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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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스트 급진주의는 또한 노동과 여성운동의 요구가 민족적 우선성에 합치하는 한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불만족을 누

그러뜨리려는 열망에서 도출되기도 한다. 파시스트는 노동자와 여성의 이익을 당의 특정한 부문 안으로 그리고/또는 조합

적 체계 안으로 동원함으로써 민족의 이익과 조화를 꾀하려 한다. 이러한 조직과 그 조직이 구성원들에게 베푸는 혜택에

접근하는 것은 개인의 민족적, 정치적 그리고/또는 인종적 특성에 달려 있다.”

“파시스트 정책의 모든 측면은 초민족주의로 가득 차 있다.”: 파시스트 정책의 모든 측면은 초민족주의의 하위 규준으로서

의 인종주의로 가득 차 있다.

1.7. 파시즘과 보수주의의 차이점

파시즘을 “보수주의적 독재(전간기 동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의 군사 체제와 같은)와 비교”하는 것은 그의 “엄 한 본질을

더 상세하게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7.1.

권위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은 보수주의적 ‘이해관계’에 자리잡은 것들―재산, 교회, 가족, 근대, 정부―의 우선성을 옹호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파시즘은 보수주의자에게는 신성한 것인 재산이나 가족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권위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은 재산―그것이 유대인의 재산이라 해도―에 대한 공격이라면 어떤 것이든 불편하게 여긴다.”

그러나 파시즘은 민족에 따라 “직업시장과 복지혜택의 분배” 등에 차별을 두며, 파시스트 사회에서 “‘외국인’의 재산은 강

탈” 될 수 있다.

또한 파시즘은 “경제와 가족부문에서 합법적 ‘간섭’이라고 여기는 것을 용인한다.” “대자본의 ‘이기심’(민족 안에서의 조화

를 희생시키면서도 이윤을 추구하는)이 노동자를 기만하고 사회주의에 귀의하는 것을 촉진할 것”이고, “남성과 여성의 에

고이즘은 민족을 위해 건강한 아이를 생산하기 이전에 편안한 삶이나 경력을 추구하게”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규제에 좌

우”되며 “아이 낳기는 정치적 의무가 된다.” 보수주의자들은 “민족의 건강이라는 이름 아래 가족을 공격하려 하지” 않는다.

1.7.2.

“파시즘은 또한 권위주의적 보수주의와 제도적으로 구별된다.” 보수주의는 “기존의 체제 구성요소―교회, 군대, 시민 부문

―를 통해 통치”하므로 “현존의 모든 비정치적 연합을 거의 억압하지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파시스트 정당은 엘리트

주의에 입각하여 “정치적 대표성에 대한 독점을 추구하며 보수주의가 의존하는 행정적, 군사적 위계질서와 교회의 위계질

서를 침식하려 한다.” “파시스트들이 보기에 인민은 투표를 통해서 지도자를 선택할 능력이 없다. 선거는 단순히 이류의

대중이 대표자를 선택하는 방식일 뿐이다. 대중적 주권은 파시스트당과 지도자를 통해 ‘직관적으로’ 표현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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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파시즘 (1) 이탈리아

《파시즘》, 4장: 이탈리아: ‘철권으로 역사를 만들다.’

2.0.

순수한 형태의 자유주의 국가나 공산주의 국가는 없었지만, 순수한 의미에서의 파시스트 국가는 실재實在하였다. 따라서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을 살펴보는 것은 파시즘의 실증 사례 분석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2.1. 대중운동으로서의 파시즘 형성

“베니토 무솔리니는 1912년 이탈리아 사회당의 급진파 지도자”였다. 그러나 1915년부터 무솔리니는 “민족주의자들 편에

섰고, 그 때 이후로는 민족을 계급보다 더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여겼다.” 민족을 계급보다 상위의 계층에 둠으로써 사회주

의자로서의 정체성을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들에게 영향을 받아” 폭력주의를 받아들였으며, 이

를 도구로 삼아 “민족주의가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끝장내고 새로운 이탈라아를 형성해낼 운동을 만들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당시 좌파는, 남부와 북부 모두에서 세를 얻고 있었다. 붉은 해biennio rosso, 즉 1918~1920년에는 북부지역 도시에서 공

장점거 파업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포 계곡에서는 농업노동자와 농부들이 파업에 가담했으며, 남부의 땅 없는

노동자들은 경작되지 않은 땅을 점거했다.” 좌파의 약진에 이어 “국경지역의 슬라브족과 독일인들은 자치를 요구했”으며

“하원은 여성참정권을 승인했다.” (좌파는 결국 패배했는데, 이 때의 패배가 그람시로 하여금 “진지전”을 생각하게 하였다.

ref. 《옥중수고》)

이러한 상황들은 보수주의자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토지 관리자의 아들, 소도시 관리, 교사, 상당수는 퇴역군인들

이었던 이들은 사회주의와 가톨릭 동맹에 맞서 싸울 임무를 수행할 수단을 파시즘에서 발견했다.” “정부가 파업자를 지원

한 것에 절망한 대토지 소유자와 대자본가들은 파시스트들에게 격려를 보내고 자금도 제공했다.”

“파시즘이 대중운동으로 형성된 맥락은 이것이다.” 좌파와 우파, 그 어느쪽도 헤게모니를 쥐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파

시즘은 발현한다. 무솔리니는 1919년 3월 23일, 라노에서 “퇴역군인, 생디칼리스트, 미래파로 구성”된 전우단을 결성했

다. 이들의 “지도적인 이념은 남성과 여성, 노동자와 고용주, 농부와 지주를 세속적인 민족공동체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유념할 것은, 동원된 퇴역군인들이 나이가 든 사람들이 아니라 막 제대한 젊은 반 부르주아 불만세력이라는 것이다. 실업

상태에 있던 룸펜 프롤레탈리아트가 파시스트 행동대원의 멤버로 충원되었고, 준군사주의의 근간을 이루었다. 검은셔츠단

과 같은 집단의 인구학적 구성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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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제도적 권력장악

“그 때까지 파시즘은 의회에서 일정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전통적 보수주의자인 “정치가들과 사업가들,

군대”가 “파시스트를 정부에 참여시키는 것이 아주 안전하리라는 데에 동의”했고, “무솔리니는 1922년 10월 19일에 수상

이 되었다.”

2.3. 좌파 척결과 갈등의 표면화

“파시스트들은 행정부와 군대의 지원을 확신하고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좌파를 공격했다.” 그러자 “무솔리니가 법과

질서를 다시 세우고, ‘정상화’가 뒤따를 것을 기대했”던 “보수주의자들이 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생디칼리스트 지식인과 파시스트 노동조합 지도자, 페미니스트, 권력에 굶주린 지역당 우두머리들, 경제적 근대화

주의자들이 포함”된 급진파들은 “기성 정치인들을 교체하는 ‘2차 혁명’을 요청했다.” 좌파라는 공동의 목표에 가려져있던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요구가, 권력 장악 후 드러나게 된 것이다.

캐빈 패스모어, 《파시즘》, p. 97: 사진3. 1922년 10월 28일 로마 진군. 왼쪽부터 이탈로 발보, 무솔리니, 체사레 마리아 데

베키, 에 리오 데 보노. 이탈로 발보Italo Balbo는 파시스트 행동대 지도자이며, 무솔리니는 사회주의자 출신이다. 그리고,

체사레 마리아 데 베키Cesare Maria de Vecchi는 보수주의 행동파인 군주주의자이며, 에 리오 데 보노Emilio De Bono는

파시스트 행동대 지도자인 퇴역군인이다.

“1925년 1월 무솔리니는 급진파의 압력에 굴복했고, 진정으로 파시스트적인 체제를 마련하겠다는 의도를 천명했다. 보수

주의자들은 그를 버리면 좌파가 회복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급진파의 승

리가 공허한 것이었으며, 그 체제가 참으로 파시스트화된 것은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이탈리아 인민당은 권위주

의적 보수주의와 파시즘의 중간쯤에 있었다.”

2.4. 대중동원 조직과 동형조직, 인종주의

“국가는 이탈리아 인민당의 ‘위로부터 동원된 민족’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한 시도로 자체의 청년 조직과 여성 조직을 설

립했다.” 대중동원 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기득권 세력은 행동의 자유를 되찾았다.” “나치당과는

대조적으로 급진적 파시스트들은 법의 지배를 파괴하고 행정부를 탈구조화하는 데 대체로 실패했다.” “그렇지만 파시스트

급진파는 결코 완전하게 주변화되지 않았”다. “급진주의는 이제 다른 형태를 띠었다.” 당서기 “파리나치는 당을 이용해서

정부의 정상적인 관료방식을 우회하고 새로운 통치계급을 창출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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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동원을 위한 조직이 형성되고, 전쟁 동안 주민동원은 심화되었다. “1931년에서 1939년까지 당서기였던 아킬레 스타라

체 시기에, 당은 ‘대중 속으로’ 나아갔으며, 막대한 수의 여성과 학생을 당 집단에 등록시켰다.” 민족주의는 “철저하게 인

종주의가 되어 1938년에는 반유대인법이 도입되었다.”

파시스트 동형조직同形組織은 국가관료조직을 잠식해 들어갔다. “당은 관료제의 동형조직으로 부풀어올랐고, 당원증은 국

가기구에 취임하기 위한 선결조건이 되었다.” “1932년에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정치 아카데미(1928년 창설) 졸업자들에게

국가의 직책을 부여하도록 요구했다.”

2.5. 카리스마적 지도자

“두체Duce(지도자를 뜻하는 무솔리니의 별칭)는 어떤 논쟁에서는 최종 결정을 내리고 싶어했다.” 무솔리니는 체제가 작동

하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였다,” “그 누구도 그의 의지에 거슬리는 짓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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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적 파시즘 (2) 독일

《파시즘》, 5장: 독일: 인종주의 국가

3.0.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 사이에는 충분한 유사성이 있어서 둘 모두에 파시즘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민족의 적을 억압하고 모든 계급과 양성兩性을 영원히 동원되는 민족으로 통합함으로써 민

족적 통일을 추구하는” 전체주의적 기획이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전체주의가 궁극적으로 실패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이상적 민족공동체가 좌파보다는 엘리트에게 훨씬 더 적은 것을 양보하도록 요구하는 상황에 직면

했다는 것이다.” 즉, 보수주의적인 또는 자유주의적인 세력의 기득권을 빼앗아내지 못한 것, 역시 전체주의가 실패한 요인

의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파시즘과 무관한 보수주의는 나치체제에서 결코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1789 년 이후의 서

구세계에서 보수 세력은 사회의 안정을 보장해주는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3.1.

“히틀러는 1920년대 중반부터 자기 자신을 독일을 승리로 또는 죽음으로 이끌 메시아적 비전을 가진 위대한 지도자로 간

주했다. 그는 독일의 사명이 ‘유대-볼셰비키’적 러시아를 희생시켜 동유럽의 생존공간을 정복하는 것이라 믿었다.” 여기서

나치 독일 제국주의의 특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제국주의가 경제적 이유에 의해 작동했다면, 나치 독일의 제

국주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움직인다. 나치 이데올로기의 제일 목표인 생존공간Lebensraum(또는 생활공간; Leben(생활,

생존)+raum(공간)) 정복을 “성취할 수 있는 독일의 능력은 민주주의와 단절하고 인종적 적들을 추방함으로써 자신의 퇴폐

를 극복하는데 달려 있었다. 그렇게 하면 생활공간은 인종적으로 순수한 독일에서 사람들을 통합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해 줄 것이었다. 국내정책과 외교정책의 목적은 서로 의존적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을 억압하는 것 따위를 포함한 히틀러의 집착은 전 독일 주민에 의해서, 심지어 모든 나치당원에 의해서도

공유되지 않았다.” 공적인 문서에서 유대인을 처리하는 것은 ‘특별한 대우Sonderbehandlung’와 같이 완곡하게 표현되었

으며, 유대인 탄압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수정의 밤Kristallnacht, Night of Broken Glass’(1938.11.09~1938.11.10)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응 역시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ref. 포이케르트, 《나치 시대의 일상사》)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러한 운

동이 권력을 잡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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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1918년의 패배는 결국 권위주의적 왕정체제를 무너뜨렸다. 노동자들과 군인들의 평의회가 결성되었고, 소비에트 공화정

이 짧은 기간 동안 바이에른을 통치했다. 새로운 바이마르 공화국은 노조에 많은 것을 양보했고, 여성 참정권을 승인했으

며, 1919년 선거에서 사회주의는 대단히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익의 반동이 전개되었는데,

이것은 주류 보수주의자 연대, 범게르만주의자, 자유군단과 같은 해체된 군인집단,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포함한 새로

운 의회민족주의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범게르만주의는 이탈리아와 다른 독일만의 독특한 현상으로, 초민족주의

ultranationalism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징후라고 할 수 있다.

“급진적인 초민족주의는 위기 속에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20년 범게르만주의자인 카프Wolfgang Kapp는 베를린에

서 쿠데타를 시도했으며, 1923년에 히틀러는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장군과 연합하여 뮌헨에서 ‘맥주집 반란’이라 불

린 또 다른 쿠데타를 시도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깨지기 쉬운 상태였다.” “좌파 쪽에서는 독일 공산당이 ‘부르주아 공화국’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고, 우파 쪽에서는 독일 국가 인민당이 여전히 왕정주의로 남아 있었다.” 좌파와 우파, 그 어느 쪽도 헤게

모니를 쥐고 있지 못할 때 마침내 “나치는 광범위한 유권자들에게 자신들이 민족의 이익과 각 부문의 이익을 조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3.3.

독일은 1929년 미국의 경제공황으로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이것은 사회적 위기로 심화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그 어떤 정당성도 잃어버렸고,” “독일 민주주의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죽어가고 있었다.” ‘Point

of no return’에 다다른 것이다.

“히틀러는 1923년의 ‘맥주집 반란’으로 감옥에 있었으며, 그 경험 대문에 그는 당이 투표를 통해서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

고 확신하게 되었다.” 나치는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며 “인민의 진정한 대표자”라 주장했다. 그러나 “나치

는 1932년 7월에 37퍼센트의 표를 얻음으로써 그들의 호소범위가 상대적으로 넓어지기는 했지만 의회를 지배할 만한 의

석을 얻지는 못했다.”

“히틀러는 보수주의자들과의 연합과 거리에서 결집된 압력을 결합해 권력을 잡았다.” 보수주의자들은 바이마르 공화국도,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갈색 볼셰비키”인 나치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적 지지가 없다면 그 어떤 정

부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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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월 23일, 제국의회에서 수권법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독재의 토대가 형성되었고 법의 지배는 해체되었다. 이는 “자의적인

구타, 수용소 감금 또는 처형뿐 아니라 바로 그 법에 기반을 둔 정부, 정의, 행정의 토대를 침식함을 의미했다. 공무원들

은 숙청되었고” 이탈리아의 파시즘 아카데미와 같이, “당의 기구와 친위대는 일종의 동형조직이 되었”다. 물론 “그 구성원

은 공무원에 관한 기존절차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당에 대한 충성을 바탕으로 충원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달리 나치즘의 신조는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침투”되었다. “학교의 요강이 개정되었고, 여성 단체에서

영화협회에 이르는 모든 독립단체들은 해체되거나 나치조직으로 통합되었다.” 독일 군대, 공무원, 교수단 역시 “이탈리아

의 같은 집단들보다 더 파시스트적인 메시지에 개방적이었고, 체제의 다양한 구성요소 각각은 총통의 폭넓은 견해를 실현

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이안 커쇼Ian Kershaw가 주장했듯이 그들은 ‘총통을 바라보고’ 일했다.”

3.5. 인종주의

“이러한 모든 것의 지도적 원리는 인종이었다. 모든 독일 사람들이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고, 생물학적 반유대주의가 널리

퍼진 것도 아니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이 붕괴하자 노골적으로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지도적인 시조로 삼은 운동이 권력

을 잡게 되었디. 공산주의를 짓뭉개고 독일의 국제적 지위를 회복하면서 끌어 모은 히틀러의 막대한 대중적 인기는 많은

지역에서 유대인의 운명에 대한 냉담함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체제의 프로파간다를 어느 정도 국제화했으며, 반유대주의

구상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지렛대를 제공했다.” 다시 말해, “모성보호와 의료분배에서 외교와 교육요강에 이르는 정책의

모든 측면에” 인종주의가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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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적 파시즘 (3) 일본

4.0. 연표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

: 천황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쇼군將軍이 지배하는 사회

: 쇼군은 군사 정부의 성격을 지닌 바쿠후幕府를 통해 다이묘大名들을 지배한다. 다이묘는 쇼군에게 하사받은 영지인 한藩

을 다스리는 제후이다.

1467~1568 센고쿠시대戰國時代

1573~1603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 時代

: 아즈치 성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 모모야마 성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603~1867 에도시대江戶時代

: 에도(지금의 도쿄)를 수도로 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 타이헤이 시대太平時代: 250여 년간의 안정적인 평화

: 내전의 주역이던 사무라이侍는 행정 엘리트가 되었고, 하층민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 에도에

는 상인을 중심으로 한 시장 경제가 시작되었다. 에도시대 중기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

가 다스리던 겐로쿠 시대元祿時代에는 상인 계층인 조닌町人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주역으로 떠오

르게 되었다.

: 그러나 “상인들과 수공업자 일부가 18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 번영을 구가한 반면” 농업은 낙후되었

고 이에 기반하던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마지

막 30년 동안 재정문제만이 아니라 농민 봉기, 사무라이들의 소요와 씨름해야 했다. 이러한 국내 상황

에 서양의 침략 위협까지 높아지면서 바쿠후 체제의 존속에 대한 의문이 심각하게 제기되었으며, 1860

년대에 이르자 국가를 통일하고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천황의 직접통치를 부활하자는 요

구가 커져갔다.”

1854.03.01.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

: 제국주의 시대로 편입

: 조슈와 사쓰마의 세력이 천황을 존중하고 외세를 배척해야 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우며 혁

명적 유신을 주도한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부국 강병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이 세력은 일본의 정치^

경제^사회를 서구식으로 개혁하면서도 전래적 가치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었던 유연한 민족주의자들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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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1911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메이지 헌법: 2 차 대전 후의 평화 헌법에 비하여, 이는 구헌법이라 불린다.

제 1 조: 천황이 대 일본제국을 다스린다.

제 3 조: 신성불가침, 즉 천황은 신이다.

제 4 조: 천황은 국가 원수로 통치권(주권)을 총괄한다.

제 5 조: 천황은 제국의회의 협조를 받아 입법권을 행사한다.

1912~1925 다이쇼 시대大正時代

: 다이쇼 democracy 의 시대

: 자유주의, 진보주의의 물결 속에서 정치적^사회적 불안정이 확산되었다. “특히 급진적인 지식인들과

노동계급이 주도한 대규모의 사회운동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과 맞물려 일본 정국을 더욱 불안정하

게 만들었다.”

1926~1988 쇼와시대昭和時代

: 1936.02.26.의 ‘2^26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군부는 세력을 장악하게 된다. 학자들은 일본 파시즘의

결정적 계기를 이것으로 보고 있다.

: 군부의 대표적 군국주의적 행태는 만주사변이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여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건설

하였고, 만주국은 대동아학원(행정관료), 만철(경제 브레인), 신경군관학교(군인)을 바탕으로 작동했다.

신경 군관학교 출신으로는 박정희와 박정희 정권 때 육군참모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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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극우 보수 군부 집권의 배경

: 1930 년대 들어 극우 보수 군부가 집권한다. 천황제 파시즘의 근간에는 이념적 이유, 사회경제적 이유, 강한 힘을 지닌

군부의 세가지 조건이 있다.

4.1.1.

“〈교육칙어〉가 국가의 공식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으며, 이에 따라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국가적 위기 상황 아래에서 천

황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주창했을 때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즉, 일본의 초민족주의는 천황숭배로 집

약되고 있었다.

4.1.2.

이미 세계 제국주의 시스템 속에 들어가 있던 일본은 1929 년의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적 불안정을 겪었다. 범세계적 경제

공황으로 인해 일본 농업은 큰 타격을 입었고, 대부분이 농촌 출신이던 젊은 군관들 사이에 극단적 민족주의 감정이 퍼져

나갔다.

4.1.3.

일본은 청일 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유럽세력인 러시아에 대한 승리는 일본에 큰 자신감을 안겨주었고, 이를 바

탕으로 군부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다. 육군장관과 해군장관을 비록한 현직 관료에 현역 군인들이 임명되었다.

이 중 천황제 파시즘의 정치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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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정치적 측면―천황제 파시즘

4.2.0

“천황제 파시즘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 된다.

1.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의 직접적인 계기는 국내의 혁명상황이었지만, 일본의 경우는 대외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군사행동이 파쇼화를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2.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파쇼정당이 대중의 지지를 배경으로 권력을 장악했으나, 일본에서는 기존 국가 기구의

담당자인 천황제의 군부와 관료가 파쇼화를 추진했다.

3.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쇼화는 긴박한 혁명상황으로 인해 급속하게 추진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점진적으로 조금씩

추진되었다.

4. 이데올로기상의 특징으로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지도자 원리나 조합국가와 같은 새로운 사상이나 이론을

만들어냈으나, 일본에서는 기존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전체주의적으로 손질하여 ‘팔굉일우八紘一宇’나 ‘대정익찬

大政翼贊 등의 이론을 만들어냈다.

5. 지배체제상의 특징에서 보면,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기존의 국가 기구를 해체하여 일국일당제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냈지만, 일본에서는 기존의 천황제 국가를 개편함으로써 파시즘 체제를 확립했다.”

이 중 1,2 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자.

4.2.1.

쿠로부네로 상징되는 제국주의 열강이 일본을 위협했고, ‘부국강병’을 계기로 한 군국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다이쇼

democracy’의 위기도 내부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나, 주요 요인은 ‘대외적 위기’라 할 수 있다.

4.2.2.

마루야마 마사오의 “위로부터의 파시즘”

《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에서 그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심리구조, 초국가주의 ultranationalism 등을 거론하며, ‘위로부터

의 파시즘’, ‘체제로서의 파시즘’ 개념을 제시한다.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은 전형적인 ‘위로부터의 파시즘’이며, ‘체제로서의

파시즘’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0 년대에 들어 총력전 체제로 형성되어간 일본의 전시 동원체제

는 많은 지식인들이나 기술자들, 그리고 사회 각계 각층에 속한 사람들의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참여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일본은 “사회 정책을 통해 개인의 생활 영역에까지 개입하고 개개인을 국민국가의 담장자인 ‘주체’로 만들어” 내었다. 즉,

경제적 생활에 낱낱이 파고듦으로 해서 국민들 스스로가 국가 정책에 자발적으로 협조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지식인, 기술

자와 같은 중간 엘리트층의 참여는 이러한 동원의 과정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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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경제적 측면―자본주의적 근대화의 모순.

“1930~1940 년대 일본에서 나타난 전시 총동원 체제를 이해할 때, 인식의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1910~1920 년대에 진

행된 급속한 산업화와 그에 수반하여 이미 1920~1930 년대에 격렬하게 분출한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모순이다.”

“일본 사회는 1 차 세계대전 전시와 전후에 걸쳐, 즉 1910 년대와 1920 년대에 걸쳐 급격한 자본주의화와 그에 따른 근대

적인 사회변용을 경험했으며, 1920 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그러한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모순이 표면화하여 현재화된 ‘근

대의 모순’에 번민하게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일본 사회의 후진성을 강조해온 지금까지의 견해와 현저하게 배치된

다.”

당시 일본에서는 2 차 산업이 급성장하고 산업구조가 크게 변화했으며, 이로 인한 “급속한 도시화, 대중화, 계층화”가 나타

나 “사회적 갈등요인을 배양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불리는 정치적 권리에 대한 요구

움직임과 문화적인 난숙함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화가 더욱더 진전되면서 이와 아울러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와 빈부격차도 한층 더 확대되었다.” “거기에다 도쿄주변을 괴멸상태로 몰아넣은” 간토대진재가 일어났다.

관동대지진의 여파는 경제적 불황과 사회적 모순을 격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29 년 세계 대공황이 일

어났고, 이는 일본 경제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종합해보면 “자본주의적 근대의 만기적 위기가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시대 상황 속에서 전시체제로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1930 년대에 진전된 일본의 전시체제로의 이행은 자본주의적 근대의 위기에 대한

공통적인 대응이라는 점에서 독일의 나치 체제로의 이행 등과도 동시대성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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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늘날의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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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보론: 파시즘, 민족, 인종

《파시즘》, 8장: 파시즘, 민족, 인종

These: “초민족주의를 우선시하는 것이 그것의 강력한 인종주의적 요소와 더불어 사실상 모든 파시스트 운동과 체제에 공

통적”이다.

6.1. 생물학적^문화적 인종주의

“가장 경직된 형태의 인종주의는 인종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족적 정체성이 항상 생물학적으로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반의 교육 받은 유럽인들은 대개 인종을 역사와 문화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이러한 인

종주의는 민족어의 학습이나 개종을 통한 ‘동화’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덜 극단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동화

주의는 인종주의적 가정에 근거한다.” “19세기 자유주의적인 프랑스와 헝가리에서 유대인은 공공의 차별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한 완전한 시민권을 얻었다.” 뒤집어보면 이것은, “상상된 다수의 문화적 특징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평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일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적 동화주의, 강요된 동화주의, 배타적 인종주의, 절멸적 인종주의 사이에는 일종의 연속성이 있다.” “파시즘은

이 구도의 어디에도 자리잡을 수 있다.”

6.2. 나치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반유대주의를 자본가가 노동자의 비참함의 진정한 원인을 감추려고 동원한 수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

었다. 베버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이 파시스트가 혐오한 근대 세계에 대해 가져다 붙이기 쉬운 상징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

한 해석들이 부당한 것은 아니지만 인종주의는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 이상의 것이었다.”

인종은 “나치즘의 모든 측면에 파고들었”다. “히틀러 자신도 정치화된 생물학적 인종주의라는 전제에 아주 집착했다.” “권

력 장악에는 유대인 절멸이 불가피하지 않았다 해도 나치는 권력을 잡자마자 그들의 인종주의적 구상을 실행에 옮겼다.”

수권법이 통과된 후 그는 “공무원과 전문직에 유대인 취업을 제한”하였고, 1935년에 유대인은 “아리안족과 결혼하거나 성

관계를 갖는 것이 금지되었다.” “전쟁 바로 전에는 어떠한 형식적인 법적 재가도 없이 정신질환자와 정신장애인을 살해하

는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모든 조처들은 단일한 정책의 측면들이었다―인종적으로 순수하고 육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구를 창조하여 열

등한 인종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고 동쪽에 있는 생활공간을 정복하는 것.”

바로 여기서 히틀러가 집착했던 두 가지 문제―유대인 문제와 생활공간―가 연결된다. 동유럽의 생활공간을 차지하기 위

해서는 볼셰비키를 향한 대중의 증오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고, ‘마르크스는 유대인이다. 볼셰비키도 유대인이다’는 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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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반유대주의를 반공산주의에까지 확장시킨 것이다. “히틀러는 이 단계에서 유대인의 운명이 게토로 국한되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즉, 동유럽은 유대인이 아닌 독일 민족의 ‘생활공간’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6.3. 이탈리아 파시즘

“이탈리아 파시즘은 인종주의적이지 않다고 주장되었다.” “이탈리아에는 강력한 반유대주의 전통이 없었으며, 유대인들은

파시스트당과 체제에서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이탈리아가 1938년 독일의 인종법을 채택한 것도 “나치즘에 종속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탈리아 파시즘―그리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홀로코스트 가담에 대한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1938년에는 전 대륙에 걸쳐 반 유대주의가 생겨났음을 목격할 수 있”었다. “많은 나라에서 우익의 여론은 유대인

과 볼셰비키가 전쟁을 일으켰다고 비난했”으며, 특히 “나치즘의 위협에 사로잡히지 않은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이러한 환

상이 나타났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반유대주의는 단순히 독일 반유대주의의 피상적인 복사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통일된 민족공동체에 대한 열망은 이탈리아 파시즘에서 근본적인 것이었고, 이러한 열망을 추구하는 가운데 생물학

적 인종주의가 체계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았다 해도 그 체제가 상상된 이탈리아 인종의 탁월한 특성에 근거한 민족적 우월

함이라는 신화를 신봉했으며,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1919년 이후 유대인에게 허

용된 시민권”은 1938년 박탈되었으며, “무솔리니는 ‘인종적 의식’이 없다면 제국주의적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6.4. 민족적 대중주의와 인종

“현대의 파시스트들은 사회적으로 존중 받기 위해 자신들이 인종주의자임을 부인한다.” “민족적 대중주의자는 자신들이 모

든 인종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선호한다는 것을 이유로 ‘반 인종주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민과 사회적

정책에 인종주의적 원리를 적용할 것을 요구하며, 인종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 이들이 떠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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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보론: 파시즘 이전의 파시즘

《파시즘》, 3장: 파시즘 이전의 파시즘

7.1. 파시즘의 기원

18세기는 복합적인 유산을 남겼다. “한편으로 파시즘이 계몽주의 사상에 빚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회가 전통에 의해

결정될 필요는 없지만, 보편적인 원리에 근거한 청사진에 따라 유기적으로 조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하나의 보편

적인 이상, 다시말해 ‘일반의지’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는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Jean-Jaeques Rousseaw의 개념이 특히

이와 관련”된다.

“다른 한편으로, 파시즘은 반계몽주의 사상에도 빚지고 있다.” “낭만주의에서 유래한 다양한 흐름의 정신주의적 사상들이

윤리적^사회적으로 통일되고, 가부장적이고 종족적이며 하나의 언어로 결속된 공동체로서 독일인―민족volk―이라는 생각

을 제공했다.”

다윈의 적자생존원리 역시 파시즘에 영향을 주었다.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은 사회적 퇴화와 퇴폐를 막기 위해 “부적격자에

대한 절멸과 같은 ‘소극적인’ 조처와 건강한 이들의 출산을 장려하는 ‘적극적인’ 개혁을 제안하는 ‘우생학’을 전파했다.” 프

랑스 왕정주의자 고비노Gobineau 백작의 《인종의 불평등에 대한 시론》의 숭배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작곡자 바그너

Richard Wagner는 ‘유대적 요소’들을 제거한 게르만 기독교 정신, 반유대주의, 이교도 정신을 이상화된 독일 신화와 혼합

했다.” 히틀러는 “일생 동안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바그너적 이상을 꿈꾸었다.”

이처럼 원原 파시즘은 “신비주의와 과학주의, 전통주의와 모더니즘, 이성과 비이성을 포함한 거대한 범위의 사상의 일부였

다.” 이러한 사상이 어떻게 원파시스트 운동과 파시스트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등

장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

7.2. 파시즘의 등장 배경

7.2.1.

“우선 이 시기는 대학에서 역사학^사회학^정치학^물리학^생물학^문예비평 같은 근대적 학문 분파들이 출현한 때였다. 전

문적이고 특화된 연구가 낡은 방식의 학자들, 더러는 여러 분야에서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아마추어들을 대채했다.” 전문가

들에게 적의를 가진 박사들과 법률가들은 “정치적 성공으로 이를 보상받으려 했다.” 극우 진영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그들은 “우생학 이론을 신봉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이 신적인 구실을 할 권리를 가지게 되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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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

또한 “세기의 변환기에 민주주의가 발전하며 ‘대중의 시대’가 열”리자, 엘리트들은 “위험한 이론들을 통치하고 제어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인종주의와 우생학 이론들”에 주목하였다.

7.2.3.

이 시기는 제국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제국으로부터 공정한 몫을 분배 받지 못했다고 믿은 독일과 이탈리아는 민족주

의 히스테리를 일으켰고, 반면 거대한 제국의 방어는 영국과 프랑스의 초민족주의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유럽 열

강은 비유럽인들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당시의 인종주의적 과학에 의존했다.” “일부 원주민을 거의 절멸시킨 정

책은 홀로코스트의 선례를 제공한 것이었다.”

7.2.4.

“민족주의도 번성했다.” “민족주의자들은 낭만적 민족주의에 잠재된 비민주적 형태를 신봉했고, 이것은 주민 모두에게 민

족적 이념의 유사신비적인 면을 일상에서 확인하도록 요구했다.”

7.2.5.

“지배 민족들이 분리주의자 운동으로 위협받는 지역에서 급진우파 운동이 출현했다.”

7.2.6.

“반 사회주의는 전 단계 파시스트를 만드는 데 필요한 요소였다. 1890년대와 1900년대에 … 사회주의 정당이 대중정치에

뛰어들면서 유럽과 미국 전역에 정치적 파업이 확산되었다. 이 사회주의 정당과 병행하여 그들에 적대적인 일군의 반사회

주의 조직이 생겨났”다. “이 집단은 종종 민족주의 운동과 그 구성원이 중첩되었다.”

7.2.7.

“1890년 대에 페미니즘은 점차적으로 전문직에 대한 진입을 더 큰 목소리로 요구했고, … 대중적인 우파 조직은 피할 수

없는 남성들의 반발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사회주의는 자산, 민족, 가족 내 남성의 권력에 대한 위협을 표상했다. 유대

인들은 민족을 타락시키고 페미니즘과 사회주의를 선동한다고 비난 받았다.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자는 유대주의의 앞잡

이였다.”

→ “당시 급진 우파는 초민족주의나 극단적인 반 사회주의에서 유래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와 국가 건설이

라는 맥락에서 사회주의자, 종족적 소수자, 페미니스트, 자유주의자들에 대립하여 정치적인 명성과 직업, 재정적 보상, 교

육적 성공에 대한 일상적인 투쟁에 근거한 산만한 경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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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대중주의

“급진 우파는 정부가 인민의 요구에 더 잘 응할 것을 요구했다.” “정치적인 견지에서 보면 이러한 대중주의는 세 가지 흐

름이 수렴되어 나타난 것이다. 첫째로 대중주의는 1848년 혁명에서 정점에 올랐던 유럽의 민주적 급진주의라는 매우 낡은

전통에서 유래한 왜곡된 형태였다.” 그 저변에 깔린 배타성은 “19세기 후반 무렵, 제국주의^민족주의^반 여성주의와 반

사회주의의 맥락에서 더 명백해졌다.” “둘째로 보통 선거권은 사회적^경제적 발전과 결합하여 그 때까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일반 보수주의자들을 급진 우파로 동원했다.” 셋째로,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대중의 출현’이 피할 수 없는 과정이

며, 이에 타협하지 않으면 정치적 죽음이라는 위기에 처할 것임을 깨달았”고, “급진 우파가 더 확대된 민주주의에 대한 요

구를 덜 사악한 권위주의적 대중주의로 전환할 것을 희망하며, 급진적인 경향을 띠고 있긴 했지만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7.4.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평화조약, 전간기의 경제적 어려움은 근본적으로 상황을 변화시켰다. 어려움에 둘러싸인 정부가 전쟁을

위한 총력을 확보하기 위해 민족주의자들, 농민들, 사회주의자들, 여성들에게 현실적으로 양보를 해야 했기 때문에 기존

체제의 보수주의는 약화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전 유럽에서 일어난 대중적인 불만과 시위가 정부를 위협하여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여성, 노동자, 소수 종족에게 더 많은 권리를 부여했다. 러시아 혁명은 보수주의적 유럽을 엄청난 공포로 몰아넣

었”다.

이러한 위협에 대하여 반동적인 조치들이 취해졌고 “현존하는 보수주의 운동이 신임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반동

은 종종 새로운 우파가 이끌었다. 게다가 이것은 전쟁과 내란으로 야만화된 상황에서, 그리고 민족주의가 매우 거세진 상

황에서 일어났다.”

“전쟁 중 정부는 유럽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정도로 경제와 사회, 가족의 삶에 개입했고, 이로써 많은 이들은 위대한

국가를 재건하는 것이 과학적인 국가 계획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쟁은 또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폭력을 이용하라

고 권장했다.” “전간기 유럽 전역에서 준군사주의 운동이 등장한 것은 명확히 전쟁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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