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52
1 민족문제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Transcript of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Page 1: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1민족문제연구소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

민 족 문 제 연 구 소 회 보

201708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기원하며즈시 미노루 씨가 주문제작한 과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차 례

01 여는 글 역사적폐 청산의 상징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함께 해주십시오 이이화

04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깃든 용산에 드디어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들어섭니다

08 주변 역사문화유적

09 용산의 역사 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이순우

14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18 추진경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22 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 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번역 노기카오리)

24 소장자료현황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김승은강동민

32 기증자료현황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안미정

38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43 이런 박물관 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안녕하십니까 격변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적폐 청산을 위해 달려온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 저는 항상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회원 여러분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라는 무겁지만 행복한 소임을 제게 맡겨 주셨으니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팔십 평생 마지막 역사적 소명으로 생각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고대하며 하루하루 결의를 다집니다 오늘도 lsquo역사전쟁rsquo을 치르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일본은 아베 총리 집권 이후 더욱 노골적으로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독도 문제뿐 아니라 일제 침략사 전체를 왜곡하거나 삭제 미화하고 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 잔재들이 다시 부활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오도하고 있는 꼴입니다 주변국인 중국도 1990년대부터 이른바 lsquo동북역사공정rsquo을 내걸고 우리 고대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왜곡하는 억지를 부려왔습니다 이는 단지 고대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남북통일 문제에도 중요한 논란거리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난 보수정권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고 이를 국정교과서를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치려는 역사도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촛불시민의 힘으로 불의한 권력을 청산했지만 우리에게는 친일의 잔재와 반민주적인 행태 등 뿌리 뽑아야 할 적폐가 여전히 많습니다 오늘 친일청산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대중들에게 깊이 이해시킬 수 있을지 더 고민하고 더 실천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 실천의 일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크고 좋은 박물관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국민성금으로 조성된 독립기념

여는 글역사적폐 청산의 상징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함께 해주십시오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위원장

1

2 201708

관에 가보면 수장고에 많은 자료들을 수집해 놓았습니다 드넓은 야외 공간에 각종 기념 조형물도 많습니다 하지만 민족의 수난과 저항의 역사를 강조하다 보니 lsquo식민지rsquo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이 부족하고 대중들에게 식민지 시대를 제대로 전달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퇴임 직전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 lsquo대한민국역사박물관rsquo을 개관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전시하면서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미화하는 내용으로 채우다 보니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아주 소홀하게 다루었습니다 역사 인식의 시대적 한계와 동시에 박물관이 권력의 정치 선전장으로 전락하기 쉬운 공간이라는 위험성을 이런 국립박물관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위험성들을 반성하며 꾸준히 자료를 수집하고 준비를 해왔습니다 지금까지 회원들의 기증과 소중한 회비로 모은 자료가 7만여 점이나 됩니다 31독립선언서 등 국내 몇 점뿐인 희귀본도 다수 소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직접 보았던 무운장구 어깨띠 lsquo진충보국(盡忠報國)rsquo 이런 것들을 써놓은 일장기 공출로 뺏긴 놋그릇 대신 받았던 사기그릇도 있습니다 내 동무의 형뻘 되는 분들이 징용징병에 끌려갔고 이웃마을 사는 누이가 일본군 lsquo위안부rsquo로 끌려가는 모습도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들이 사지로 끌려가는 줄도 모르고 저는 어른들을 따라 나가서 박수를 쳤었습니다 새삼 어릴 때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자료들은 일제 식민 잔재가 얼

3

마나 오랜 기간 해를 끼쳐왔는지를 제대로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 식민 지배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무엇을 반성하고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역사의 힘을 찾아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할 것입니다우리가 만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자료 전시만이 아니라 영상을 통해서도 시민에게 현장을 가본 듯한 실감나는 교육의 장이 될 것입니다 세계의 홀로코스트 박물관 인권박물관 등과도 교류의 폭을 넓히고 특히 일본의 건강한 시민들과 연대하는 중요한 장소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또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 함께 실천해 나가는 세계 시민운동의 새로운 터전이 되리라 희망합니다 특히 일본 시민들은 우리의 이런 문제의식에 뜻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을 만들어 모금도 하고 자료도 수집해 기증해 주고 있습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가교로 삼아 과거 침략과 지배 갈등의 역사가 아닌 인권 평화 미래를 여는 연대의 길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데 이게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 취지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과거를 알기 위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인권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든든한 터전으로 가꾸어 나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으로 온갖 어려움과 협박을 뚫고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냈고 한국 사회에 정의의 이정표를 세웠던 경험을 함께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통해 다시 한 번 재현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더 이상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미래 자손들에게 민족의 유산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남길 수 있도록 많은 회원 여러분과 시민들이 동참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다행히도 그동안 우리가 모금활동을 벌이는 데 많은 시민들이 몇 만원부터 몇 억까지 십시일반 동참해 주시고 있습니다 기금만이 아니라 자료 기증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평생 역사를 공부하면서 모은 자료들을 여기에 다 내놓으려고 합니다 자료는 쌓여가지만 장소가 좁네요 실감나는 교육의 현장으로 꾸미려니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국고를 하나도 받지 않고 순수한 시민의 모금으로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아직도 목표액이 많이 모자랍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꼭 큰돈을 기부해야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설렁탕 한 그릇 값이라도 모아주신다면 그 정신 올곧게 이어서 박물관 건립을 끝까지 추진하는 큰 용기로 삼겠습니다 여러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 현실과 맞지 않는 막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 문제이자 통일의 문제 미래의 민주주의 확대와 인권의 문제라고 이해하시면서 여기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4 201708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깃든 용산에

드디어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들어섭니다

위치 서울시용산구청파동효창원인근규모 지하1층~지상5층 연면적475평

준공 2006년4월18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지

5

2층

1층

3층

4층

5층

전시middot체험공간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연구middot사무공간

연구실 사무국 회의실

교류middot협력공간

시민단체 학술연구단체

사무실 공유

보존middot열람공간

열람실 아카이브 수장고

교육middot나눔공간

강의실 세미나실

bull 전문가middot활동가 육성과 교육자료 개발bull 청소년middot시민 대상 상설 역사middot문화 강좌 개설 정기

역사기행 진행bull 해외 동포middot연구자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

근현대사 교육

bull 일제침략사독립운동사민중생활사middot현대사를 아우르는 전시구성

bull 다양한 기획 전시와 공연 등을 펼칠 수 있는 기획전시실 bull 자료열람을 병행할 수 있는 오픈 라이브러리 배치 bull 증언 영상 등을 관람할 수 있는 영상 시설

bull 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근현대사 구명bull 과거사청산 관련 전문 연구기관 bull 전문 연구자 네트워크 구축과 연구지원 활동

bull 과거청산을 위해 활동하는 세계 각국의 연구소middot시민단체middot자료관과 교류

bull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체험을 올바로 기억하기 위한 연대사업 추진

bull 해외 연구자middot활동가 지원과 자료middot정보 편의 제공 bull 해외 한민족 역사문화네트워크 구축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일제침탈사 자료조사middot연구 과정에서 얻어진 일제강점기에 대한 총체적 연구기반 활용

bull 도서middot문서middot유물middot사진middot영상middotDB 등 종합아카이브 구축

6 201708

bull 쉽고 명료한 전시콘텐츠 구성

전시 콘텐츠 가공과 스토리텔링 공간구성 미디어선택 전시디자인을 통해 쉽고 명료한 전달이 가능하도록 구성

차별화된 전시연출 전략 실현

bull 입체적 전시연출

자료의 일방적 제시와 평면적 나열을 지양하고 관객과 능동적이고 쌍방향적 정보소통 추구

평면적 건조한 전시유형을 벗어나 관객의 감성과 동시대적 문화수준에 호응하는 다양하고 입체적이며 밀도 높은

전시연출 지향

bull 다양한 전시 매체 활용

회화 드로잉 판화 조각 부조 사진 등 전통적 조형예술 장르 동원

동영상 멀티미디어 설치미술 등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의 풍부한 성과와 전시디자인 기법을 선택 활용

전시구성

박물관 프로그램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유물의 수집 및 보존 전시라는 전통적인 박물관의 기능에 한정되지 않는다

강좌middot체험활동 찾아가는 박물관 문화공연 등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bull 교육 강좌의 상설화

일반 시민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강좌를 개설하여 문화 공간으로의 역할을 수행

청소년 어린이 인물과 사건 그리고 역사적인 lsquo터rsquo와 관련하여 쉽고 흥미롭게 구성하여 관심 유발

전문가 양성 박물관 안내해설사 지역사해설사 등 양성 교육

bull 역사답사의 정례화

식민지역사박물관 인근 역사 유적들과 연계한 역사문화관광 벨트 탐방 프로그램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한 답사코스 개발

해외 독립운동유적지 답사 확대

일본 유럽 등 외국 방문객 유치 확대

bull 박물관 연계 프로그램 활성화

역사 관련 박물관 탐방과 각 박물관의 특징을 비교

3middot1절 광복절 등 기념일에 개최하는 기획전시 투어

전국의 작은 박물관 행동하는 박물관과 연대 사업 추진

세계 인권박물관과 연계 프로그램 운영

bull 찾아가는 박물관 운영

국내외 순회전시 지속

문화소외 지역 이동 전시 등 움직이는 박물관 지향

전시주제

식민지일상

제국

과 식

민지

전쟁

과 식

민지

독립의 외침

조선총독부와식민자들

한국

과거

청산

운동

반민

특위

부터

일인

명사

전 편

찬까

지한일 과거사 청산을위한 민중연대사

제국과 식민지bull 세계 식민지 분포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bull 제국의 렌즈 조작된 역사 bull lsquo조선병합rsquo 시나리오

bull 망국전야 열도의 침략자와 조선의 레지스탕스

조선총독부와 식민자들bull 조선총독 bull 경찰 헌병경찰 보통경찰 일상의 지배

bull 일본군 조선주둔 일본군 만주출동 조선의 병참동원

bull 경성-서울에 새겨진 식민지의 흔적 남산 일대 용산 일대

bull 출세의 길 관료의 꽃 군수

bull 식민지를 지배한 사람들 재조일본인

bull 친일파군상 매국형-관료형-전쟁협력형

식민지 일상bull 일상을 지배한 차별 bull 일기로 본 식민지의 일상

bull 유행으로 본 식민지 근대 bull 거대한 감옥 -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bull 일상을 지배한 일제 잔재

전쟁과 식민지bull 전시체제기 식민지 전시 생활과 동원 체제

bull 황국신민화-내선일체의 현실

bull 전쟁과 아동 전쟁과 여성

bull 끌려간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삶 조명

bull 버려진 사람들 떠다니는 삶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 동포

재일조선인 등

독립의 외침bull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과 무장 투쟁 bull 3middot1운동과 임시정부

bull 민중운동의 분출 농민 노동자 청년 여성

bull 의열투쟁 bull 해외 민족해방운동

한국 과거 청산 운동사 반민특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까지 bull 해방과 귀환 bull 1949년 반민특위 와해 친일청산의 좌절

bull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남겼나

bull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bull 2000년대 국가 차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bull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

한일 과거사 청산을 위한 민중연대사 bull 20세기전반 반제국주의 반전 평화 연대운동의 경험

bull 20세기후반 아시아침략전쟁 책임 추궁을 위한 연대의 힘

bull 21세기초반 식민지주의 극복을 위한 한일 시민연대 활동

bull 분야별 연대운동 강제동원 위안부 교과서 야스쿠니반대

7

출입구

8 201708

주변역사문화유적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자리잡게 될 용산은외세에 짓밟힌 역사와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상처가 켜켜이 쌓인 곳입니다

bull 지하철4호선숙대입구역500m도보7분1호선남영역730m도보10분6호선효창공원앞역1km도보15분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

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

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

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lsquo방(坊)rsquo을 기준으

로 살펴보더라도 lsquo용산방rsquo은 청파역 공덕

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

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

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

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

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

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는 1899년 12월 lsquo용산행rsquo 전차가 처음 개통

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

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

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

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lsquo신용산(新龍山)rsquo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lsquo용산정거장rsquo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

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

바 lsquo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rsquo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

이방인이 아니면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이순우 책임연구원

용산의 역사

lsquo구용산rsquo 종점과 lsquo신용산rsquo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985172경성번창기985173 1915)

9

10 201708

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lsquo둔지방(屯芝坊)rsquo에 속

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lsquo용산군영지rsquo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lsquo용산rsquo이라

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구분 전환시기 사령부 소재지

한국주차군사령부 1904년 3월소공동 대관정(1904년 4월) rarr 필동 군영지(1904년 8월) rarr 용산 신군영지(1908년 10월)

조선주차군사령부 1910년 8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사령부 1918년 6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관구사령부제17방면군사령부

1945년 2월 용산 군영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

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11

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lsquo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rsquo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985172조선사단창설기념호 (조선사진화보특별호)985173 1916년 11월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985172소화 8년 조선요람985173 1932)

12 201708

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lsquo시베리아출병rsquo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2: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기원하며즈시 미노루 씨가 주문제작한 과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차 례

01 여는 글 역사적폐 청산의 상징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함께 해주십시오 이이화

04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깃든 용산에 드디어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들어섭니다

08 주변 역사문화유적

09 용산의 역사 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이순우

14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18 추진경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22 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 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번역 노기카오리)

24 소장자료현황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김승은강동민

32 기증자료현황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안미정

38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43 이런 박물관 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안녕하십니까 격변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적폐 청산을 위해 달려온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 저는 항상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회원 여러분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라는 무겁지만 행복한 소임을 제게 맡겨 주셨으니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팔십 평생 마지막 역사적 소명으로 생각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고대하며 하루하루 결의를 다집니다 오늘도 lsquo역사전쟁rsquo을 치르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일본은 아베 총리 집권 이후 더욱 노골적으로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독도 문제뿐 아니라 일제 침략사 전체를 왜곡하거나 삭제 미화하고 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 잔재들이 다시 부활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오도하고 있는 꼴입니다 주변국인 중국도 1990년대부터 이른바 lsquo동북역사공정rsquo을 내걸고 우리 고대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왜곡하는 억지를 부려왔습니다 이는 단지 고대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남북통일 문제에도 중요한 논란거리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난 보수정권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고 이를 국정교과서를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치려는 역사도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촛불시민의 힘으로 불의한 권력을 청산했지만 우리에게는 친일의 잔재와 반민주적인 행태 등 뿌리 뽑아야 할 적폐가 여전히 많습니다 오늘 친일청산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대중들에게 깊이 이해시킬 수 있을지 더 고민하고 더 실천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 실천의 일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크고 좋은 박물관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국민성금으로 조성된 독립기념

여는 글역사적폐 청산의 상징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함께 해주십시오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위원장

1

2 201708

관에 가보면 수장고에 많은 자료들을 수집해 놓았습니다 드넓은 야외 공간에 각종 기념 조형물도 많습니다 하지만 민족의 수난과 저항의 역사를 강조하다 보니 lsquo식민지rsquo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이 부족하고 대중들에게 식민지 시대를 제대로 전달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퇴임 직전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 lsquo대한민국역사박물관rsquo을 개관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전시하면서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미화하는 내용으로 채우다 보니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아주 소홀하게 다루었습니다 역사 인식의 시대적 한계와 동시에 박물관이 권력의 정치 선전장으로 전락하기 쉬운 공간이라는 위험성을 이런 국립박물관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위험성들을 반성하며 꾸준히 자료를 수집하고 준비를 해왔습니다 지금까지 회원들의 기증과 소중한 회비로 모은 자료가 7만여 점이나 됩니다 31독립선언서 등 국내 몇 점뿐인 희귀본도 다수 소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직접 보았던 무운장구 어깨띠 lsquo진충보국(盡忠報國)rsquo 이런 것들을 써놓은 일장기 공출로 뺏긴 놋그릇 대신 받았던 사기그릇도 있습니다 내 동무의 형뻘 되는 분들이 징용징병에 끌려갔고 이웃마을 사는 누이가 일본군 lsquo위안부rsquo로 끌려가는 모습도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들이 사지로 끌려가는 줄도 모르고 저는 어른들을 따라 나가서 박수를 쳤었습니다 새삼 어릴 때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자료들은 일제 식민 잔재가 얼

3

마나 오랜 기간 해를 끼쳐왔는지를 제대로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 식민 지배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무엇을 반성하고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역사의 힘을 찾아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할 것입니다우리가 만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자료 전시만이 아니라 영상을 통해서도 시민에게 현장을 가본 듯한 실감나는 교육의 장이 될 것입니다 세계의 홀로코스트 박물관 인권박물관 등과도 교류의 폭을 넓히고 특히 일본의 건강한 시민들과 연대하는 중요한 장소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또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 함께 실천해 나가는 세계 시민운동의 새로운 터전이 되리라 희망합니다 특히 일본 시민들은 우리의 이런 문제의식에 뜻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을 만들어 모금도 하고 자료도 수집해 기증해 주고 있습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가교로 삼아 과거 침략과 지배 갈등의 역사가 아닌 인권 평화 미래를 여는 연대의 길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데 이게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 취지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과거를 알기 위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인권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든든한 터전으로 가꾸어 나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으로 온갖 어려움과 협박을 뚫고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냈고 한국 사회에 정의의 이정표를 세웠던 경험을 함께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통해 다시 한 번 재현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더 이상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미래 자손들에게 민족의 유산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남길 수 있도록 많은 회원 여러분과 시민들이 동참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다행히도 그동안 우리가 모금활동을 벌이는 데 많은 시민들이 몇 만원부터 몇 억까지 십시일반 동참해 주시고 있습니다 기금만이 아니라 자료 기증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평생 역사를 공부하면서 모은 자료들을 여기에 다 내놓으려고 합니다 자료는 쌓여가지만 장소가 좁네요 실감나는 교육의 현장으로 꾸미려니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국고를 하나도 받지 않고 순수한 시민의 모금으로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아직도 목표액이 많이 모자랍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꼭 큰돈을 기부해야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설렁탕 한 그릇 값이라도 모아주신다면 그 정신 올곧게 이어서 박물관 건립을 끝까지 추진하는 큰 용기로 삼겠습니다 여러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 현실과 맞지 않는 막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 문제이자 통일의 문제 미래의 민주주의 확대와 인권의 문제라고 이해하시면서 여기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4 201708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깃든 용산에

드디어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들어섭니다

위치 서울시용산구청파동효창원인근규모 지하1층~지상5층 연면적475평

준공 2006년4월18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지

5

2층

1층

3층

4층

5층

전시middot체험공간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연구middot사무공간

연구실 사무국 회의실

교류middot협력공간

시민단체 학술연구단체

사무실 공유

보존middot열람공간

열람실 아카이브 수장고

교육middot나눔공간

강의실 세미나실

bull 전문가middot활동가 육성과 교육자료 개발bull 청소년middot시민 대상 상설 역사middot문화 강좌 개설 정기

역사기행 진행bull 해외 동포middot연구자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

근현대사 교육

bull 일제침략사독립운동사민중생활사middot현대사를 아우르는 전시구성

bull 다양한 기획 전시와 공연 등을 펼칠 수 있는 기획전시실 bull 자료열람을 병행할 수 있는 오픈 라이브러리 배치 bull 증언 영상 등을 관람할 수 있는 영상 시설

bull 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근현대사 구명bull 과거사청산 관련 전문 연구기관 bull 전문 연구자 네트워크 구축과 연구지원 활동

bull 과거청산을 위해 활동하는 세계 각국의 연구소middot시민단체middot자료관과 교류

bull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체험을 올바로 기억하기 위한 연대사업 추진

bull 해외 연구자middot활동가 지원과 자료middot정보 편의 제공 bull 해외 한민족 역사문화네트워크 구축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일제침탈사 자료조사middot연구 과정에서 얻어진 일제강점기에 대한 총체적 연구기반 활용

bull 도서middot문서middot유물middot사진middot영상middotDB 등 종합아카이브 구축

6 201708

bull 쉽고 명료한 전시콘텐츠 구성

전시 콘텐츠 가공과 스토리텔링 공간구성 미디어선택 전시디자인을 통해 쉽고 명료한 전달이 가능하도록 구성

차별화된 전시연출 전략 실현

bull 입체적 전시연출

자료의 일방적 제시와 평면적 나열을 지양하고 관객과 능동적이고 쌍방향적 정보소통 추구

평면적 건조한 전시유형을 벗어나 관객의 감성과 동시대적 문화수준에 호응하는 다양하고 입체적이며 밀도 높은

전시연출 지향

bull 다양한 전시 매체 활용

회화 드로잉 판화 조각 부조 사진 등 전통적 조형예술 장르 동원

동영상 멀티미디어 설치미술 등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의 풍부한 성과와 전시디자인 기법을 선택 활용

전시구성

박물관 프로그램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유물의 수집 및 보존 전시라는 전통적인 박물관의 기능에 한정되지 않는다

강좌middot체험활동 찾아가는 박물관 문화공연 등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bull 교육 강좌의 상설화

일반 시민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강좌를 개설하여 문화 공간으로의 역할을 수행

청소년 어린이 인물과 사건 그리고 역사적인 lsquo터rsquo와 관련하여 쉽고 흥미롭게 구성하여 관심 유발

전문가 양성 박물관 안내해설사 지역사해설사 등 양성 교육

bull 역사답사의 정례화

식민지역사박물관 인근 역사 유적들과 연계한 역사문화관광 벨트 탐방 프로그램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한 답사코스 개발

해외 독립운동유적지 답사 확대

일본 유럽 등 외국 방문객 유치 확대

bull 박물관 연계 프로그램 활성화

역사 관련 박물관 탐방과 각 박물관의 특징을 비교

3middot1절 광복절 등 기념일에 개최하는 기획전시 투어

전국의 작은 박물관 행동하는 박물관과 연대 사업 추진

세계 인권박물관과 연계 프로그램 운영

bull 찾아가는 박물관 운영

국내외 순회전시 지속

문화소외 지역 이동 전시 등 움직이는 박물관 지향

전시주제

식민지일상

제국

과 식

민지

전쟁

과 식

민지

독립의 외침

조선총독부와식민자들

한국

과거

청산

운동

반민

특위

부터

일인

명사

전 편

찬까

지한일 과거사 청산을위한 민중연대사

제국과 식민지bull 세계 식민지 분포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bull 제국의 렌즈 조작된 역사 bull lsquo조선병합rsquo 시나리오

bull 망국전야 열도의 침략자와 조선의 레지스탕스

조선총독부와 식민자들bull 조선총독 bull 경찰 헌병경찰 보통경찰 일상의 지배

bull 일본군 조선주둔 일본군 만주출동 조선의 병참동원

bull 경성-서울에 새겨진 식민지의 흔적 남산 일대 용산 일대

bull 출세의 길 관료의 꽃 군수

bull 식민지를 지배한 사람들 재조일본인

bull 친일파군상 매국형-관료형-전쟁협력형

식민지 일상bull 일상을 지배한 차별 bull 일기로 본 식민지의 일상

bull 유행으로 본 식민지 근대 bull 거대한 감옥 -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bull 일상을 지배한 일제 잔재

전쟁과 식민지bull 전시체제기 식민지 전시 생활과 동원 체제

bull 황국신민화-내선일체의 현실

bull 전쟁과 아동 전쟁과 여성

bull 끌려간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삶 조명

bull 버려진 사람들 떠다니는 삶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 동포

재일조선인 등

독립의 외침bull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과 무장 투쟁 bull 3middot1운동과 임시정부

bull 민중운동의 분출 농민 노동자 청년 여성

bull 의열투쟁 bull 해외 민족해방운동

한국 과거 청산 운동사 반민특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까지 bull 해방과 귀환 bull 1949년 반민특위 와해 친일청산의 좌절

bull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남겼나

bull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bull 2000년대 국가 차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bull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

한일 과거사 청산을 위한 민중연대사 bull 20세기전반 반제국주의 반전 평화 연대운동의 경험

bull 20세기후반 아시아침략전쟁 책임 추궁을 위한 연대의 힘

bull 21세기초반 식민지주의 극복을 위한 한일 시민연대 활동

bull 분야별 연대운동 강제동원 위안부 교과서 야스쿠니반대

7

출입구

8 201708

주변역사문화유적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자리잡게 될 용산은외세에 짓밟힌 역사와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상처가 켜켜이 쌓인 곳입니다

bull 지하철4호선숙대입구역500m도보7분1호선남영역730m도보10분6호선효창공원앞역1km도보15분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

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

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

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lsquo방(坊)rsquo을 기준으

로 살펴보더라도 lsquo용산방rsquo은 청파역 공덕

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

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

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

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

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

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는 1899년 12월 lsquo용산행rsquo 전차가 처음 개통

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

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

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

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lsquo신용산(新龍山)rsquo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lsquo용산정거장rsquo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

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

바 lsquo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rsquo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

이방인이 아니면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이순우 책임연구원

용산의 역사

lsquo구용산rsquo 종점과 lsquo신용산rsquo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985172경성번창기985173 1915)

9

10 201708

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lsquo둔지방(屯芝坊)rsquo에 속

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lsquo용산군영지rsquo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lsquo용산rsquo이라

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구분 전환시기 사령부 소재지

한국주차군사령부 1904년 3월소공동 대관정(1904년 4월) rarr 필동 군영지(1904년 8월) rarr 용산 신군영지(1908년 10월)

조선주차군사령부 1910년 8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사령부 1918년 6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관구사령부제17방면군사령부

1945년 2월 용산 군영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

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11

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lsquo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rsquo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985172조선사단창설기념호 (조선사진화보특별호)985173 1916년 11월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985172소화 8년 조선요람985173 1932)

12 201708

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lsquo시베리아출병rsquo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3: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안녕하십니까 격변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적폐 청산을 위해 달려온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 저는 항상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회원 여러분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라는 무겁지만 행복한 소임을 제게 맡겨 주셨으니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팔십 평생 마지막 역사적 소명으로 생각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고대하며 하루하루 결의를 다집니다 오늘도 lsquo역사전쟁rsquo을 치르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일본은 아베 총리 집권 이후 더욱 노골적으로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독도 문제뿐 아니라 일제 침략사 전체를 왜곡하거나 삭제 미화하고 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 잔재들이 다시 부활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오도하고 있는 꼴입니다 주변국인 중국도 1990년대부터 이른바 lsquo동북역사공정rsquo을 내걸고 우리 고대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왜곡하는 억지를 부려왔습니다 이는 단지 고대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남북통일 문제에도 중요한 논란거리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난 보수정권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고 이를 국정교과서를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치려는 역사도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촛불시민의 힘으로 불의한 권력을 청산했지만 우리에게는 친일의 잔재와 반민주적인 행태 등 뿌리 뽑아야 할 적폐가 여전히 많습니다 오늘 친일청산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대중들에게 깊이 이해시킬 수 있을지 더 고민하고 더 실천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 실천의 일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크고 좋은 박물관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국민성금으로 조성된 독립기념

여는 글역사적폐 청산의 상징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함께 해주십시오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위원장

1

2 201708

관에 가보면 수장고에 많은 자료들을 수집해 놓았습니다 드넓은 야외 공간에 각종 기념 조형물도 많습니다 하지만 민족의 수난과 저항의 역사를 강조하다 보니 lsquo식민지rsquo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이 부족하고 대중들에게 식민지 시대를 제대로 전달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퇴임 직전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 lsquo대한민국역사박물관rsquo을 개관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전시하면서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미화하는 내용으로 채우다 보니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아주 소홀하게 다루었습니다 역사 인식의 시대적 한계와 동시에 박물관이 권력의 정치 선전장으로 전락하기 쉬운 공간이라는 위험성을 이런 국립박물관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위험성들을 반성하며 꾸준히 자료를 수집하고 준비를 해왔습니다 지금까지 회원들의 기증과 소중한 회비로 모은 자료가 7만여 점이나 됩니다 31독립선언서 등 국내 몇 점뿐인 희귀본도 다수 소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직접 보았던 무운장구 어깨띠 lsquo진충보국(盡忠報國)rsquo 이런 것들을 써놓은 일장기 공출로 뺏긴 놋그릇 대신 받았던 사기그릇도 있습니다 내 동무의 형뻘 되는 분들이 징용징병에 끌려갔고 이웃마을 사는 누이가 일본군 lsquo위안부rsquo로 끌려가는 모습도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들이 사지로 끌려가는 줄도 모르고 저는 어른들을 따라 나가서 박수를 쳤었습니다 새삼 어릴 때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자료들은 일제 식민 잔재가 얼

3

마나 오랜 기간 해를 끼쳐왔는지를 제대로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 식민 지배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무엇을 반성하고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역사의 힘을 찾아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할 것입니다우리가 만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자료 전시만이 아니라 영상을 통해서도 시민에게 현장을 가본 듯한 실감나는 교육의 장이 될 것입니다 세계의 홀로코스트 박물관 인권박물관 등과도 교류의 폭을 넓히고 특히 일본의 건강한 시민들과 연대하는 중요한 장소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또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 함께 실천해 나가는 세계 시민운동의 새로운 터전이 되리라 희망합니다 특히 일본 시민들은 우리의 이런 문제의식에 뜻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을 만들어 모금도 하고 자료도 수집해 기증해 주고 있습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가교로 삼아 과거 침략과 지배 갈등의 역사가 아닌 인권 평화 미래를 여는 연대의 길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데 이게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 취지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과거를 알기 위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인권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든든한 터전으로 가꾸어 나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으로 온갖 어려움과 협박을 뚫고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냈고 한국 사회에 정의의 이정표를 세웠던 경험을 함께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통해 다시 한 번 재현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더 이상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미래 자손들에게 민족의 유산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남길 수 있도록 많은 회원 여러분과 시민들이 동참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다행히도 그동안 우리가 모금활동을 벌이는 데 많은 시민들이 몇 만원부터 몇 억까지 십시일반 동참해 주시고 있습니다 기금만이 아니라 자료 기증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평생 역사를 공부하면서 모은 자료들을 여기에 다 내놓으려고 합니다 자료는 쌓여가지만 장소가 좁네요 실감나는 교육의 현장으로 꾸미려니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국고를 하나도 받지 않고 순수한 시민의 모금으로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아직도 목표액이 많이 모자랍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꼭 큰돈을 기부해야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설렁탕 한 그릇 값이라도 모아주신다면 그 정신 올곧게 이어서 박물관 건립을 끝까지 추진하는 큰 용기로 삼겠습니다 여러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 현실과 맞지 않는 막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 문제이자 통일의 문제 미래의 민주주의 확대와 인권의 문제라고 이해하시면서 여기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4 201708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깃든 용산에

드디어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들어섭니다

위치 서울시용산구청파동효창원인근규모 지하1층~지상5층 연면적475평

준공 2006년4월18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지

5

2층

1층

3층

4층

5층

전시middot체험공간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연구middot사무공간

연구실 사무국 회의실

교류middot협력공간

시민단체 학술연구단체

사무실 공유

보존middot열람공간

열람실 아카이브 수장고

교육middot나눔공간

강의실 세미나실

bull 전문가middot활동가 육성과 교육자료 개발bull 청소년middot시민 대상 상설 역사middot문화 강좌 개설 정기

역사기행 진행bull 해외 동포middot연구자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

근현대사 교육

bull 일제침략사독립운동사민중생활사middot현대사를 아우르는 전시구성

bull 다양한 기획 전시와 공연 등을 펼칠 수 있는 기획전시실 bull 자료열람을 병행할 수 있는 오픈 라이브러리 배치 bull 증언 영상 등을 관람할 수 있는 영상 시설

bull 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근현대사 구명bull 과거사청산 관련 전문 연구기관 bull 전문 연구자 네트워크 구축과 연구지원 활동

bull 과거청산을 위해 활동하는 세계 각국의 연구소middot시민단체middot자료관과 교류

bull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체험을 올바로 기억하기 위한 연대사업 추진

bull 해외 연구자middot활동가 지원과 자료middot정보 편의 제공 bull 해외 한민족 역사문화네트워크 구축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일제침탈사 자료조사middot연구 과정에서 얻어진 일제강점기에 대한 총체적 연구기반 활용

bull 도서middot문서middot유물middot사진middot영상middotDB 등 종합아카이브 구축

6 201708

bull 쉽고 명료한 전시콘텐츠 구성

전시 콘텐츠 가공과 스토리텔링 공간구성 미디어선택 전시디자인을 통해 쉽고 명료한 전달이 가능하도록 구성

차별화된 전시연출 전략 실현

bull 입체적 전시연출

자료의 일방적 제시와 평면적 나열을 지양하고 관객과 능동적이고 쌍방향적 정보소통 추구

평면적 건조한 전시유형을 벗어나 관객의 감성과 동시대적 문화수준에 호응하는 다양하고 입체적이며 밀도 높은

전시연출 지향

bull 다양한 전시 매체 활용

회화 드로잉 판화 조각 부조 사진 등 전통적 조형예술 장르 동원

동영상 멀티미디어 설치미술 등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의 풍부한 성과와 전시디자인 기법을 선택 활용

전시구성

박물관 프로그램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유물의 수집 및 보존 전시라는 전통적인 박물관의 기능에 한정되지 않는다

강좌middot체험활동 찾아가는 박물관 문화공연 등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bull 교육 강좌의 상설화

일반 시민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강좌를 개설하여 문화 공간으로의 역할을 수행

청소년 어린이 인물과 사건 그리고 역사적인 lsquo터rsquo와 관련하여 쉽고 흥미롭게 구성하여 관심 유발

전문가 양성 박물관 안내해설사 지역사해설사 등 양성 교육

bull 역사답사의 정례화

식민지역사박물관 인근 역사 유적들과 연계한 역사문화관광 벨트 탐방 프로그램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한 답사코스 개발

해외 독립운동유적지 답사 확대

일본 유럽 등 외국 방문객 유치 확대

bull 박물관 연계 프로그램 활성화

역사 관련 박물관 탐방과 각 박물관의 특징을 비교

3middot1절 광복절 등 기념일에 개최하는 기획전시 투어

전국의 작은 박물관 행동하는 박물관과 연대 사업 추진

세계 인권박물관과 연계 프로그램 운영

bull 찾아가는 박물관 운영

국내외 순회전시 지속

문화소외 지역 이동 전시 등 움직이는 박물관 지향

전시주제

식민지일상

제국

과 식

민지

전쟁

과 식

민지

독립의 외침

조선총독부와식민자들

한국

과거

청산

운동

반민

특위

부터

일인

명사

전 편

찬까

지한일 과거사 청산을위한 민중연대사

제국과 식민지bull 세계 식민지 분포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bull 제국의 렌즈 조작된 역사 bull lsquo조선병합rsquo 시나리오

bull 망국전야 열도의 침략자와 조선의 레지스탕스

조선총독부와 식민자들bull 조선총독 bull 경찰 헌병경찰 보통경찰 일상의 지배

bull 일본군 조선주둔 일본군 만주출동 조선의 병참동원

bull 경성-서울에 새겨진 식민지의 흔적 남산 일대 용산 일대

bull 출세의 길 관료의 꽃 군수

bull 식민지를 지배한 사람들 재조일본인

bull 친일파군상 매국형-관료형-전쟁협력형

식민지 일상bull 일상을 지배한 차별 bull 일기로 본 식민지의 일상

bull 유행으로 본 식민지 근대 bull 거대한 감옥 -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bull 일상을 지배한 일제 잔재

전쟁과 식민지bull 전시체제기 식민지 전시 생활과 동원 체제

bull 황국신민화-내선일체의 현실

bull 전쟁과 아동 전쟁과 여성

bull 끌려간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삶 조명

bull 버려진 사람들 떠다니는 삶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 동포

재일조선인 등

독립의 외침bull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과 무장 투쟁 bull 3middot1운동과 임시정부

bull 민중운동의 분출 농민 노동자 청년 여성

bull 의열투쟁 bull 해외 민족해방운동

한국 과거 청산 운동사 반민특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까지 bull 해방과 귀환 bull 1949년 반민특위 와해 친일청산의 좌절

bull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남겼나

bull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bull 2000년대 국가 차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bull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

한일 과거사 청산을 위한 민중연대사 bull 20세기전반 반제국주의 반전 평화 연대운동의 경험

bull 20세기후반 아시아침략전쟁 책임 추궁을 위한 연대의 힘

bull 21세기초반 식민지주의 극복을 위한 한일 시민연대 활동

bull 분야별 연대운동 강제동원 위안부 교과서 야스쿠니반대

7

출입구

8 201708

주변역사문화유적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자리잡게 될 용산은외세에 짓밟힌 역사와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상처가 켜켜이 쌓인 곳입니다

bull 지하철4호선숙대입구역500m도보7분1호선남영역730m도보10분6호선효창공원앞역1km도보15분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

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

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

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lsquo방(坊)rsquo을 기준으

로 살펴보더라도 lsquo용산방rsquo은 청파역 공덕

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

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

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

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

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

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는 1899년 12월 lsquo용산행rsquo 전차가 처음 개통

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

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

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

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lsquo신용산(新龍山)rsquo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lsquo용산정거장rsquo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

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

바 lsquo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rsquo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

이방인이 아니면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이순우 책임연구원

용산의 역사

lsquo구용산rsquo 종점과 lsquo신용산rsquo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985172경성번창기985173 1915)

9

10 201708

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lsquo둔지방(屯芝坊)rsquo에 속

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lsquo용산군영지rsquo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lsquo용산rsquo이라

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구분 전환시기 사령부 소재지

한국주차군사령부 1904년 3월소공동 대관정(1904년 4월) rarr 필동 군영지(1904년 8월) rarr 용산 신군영지(1908년 10월)

조선주차군사령부 1910년 8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사령부 1918년 6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관구사령부제17방면군사령부

1945년 2월 용산 군영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

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11

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lsquo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rsquo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985172조선사단창설기념호 (조선사진화보특별호)985173 1916년 11월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985172소화 8년 조선요람985173 1932)

12 201708

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lsquo시베리아출병rsquo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4: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2 201708

관에 가보면 수장고에 많은 자료들을 수집해 놓았습니다 드넓은 야외 공간에 각종 기념 조형물도 많습니다 하지만 민족의 수난과 저항의 역사를 강조하다 보니 lsquo식민지rsquo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이 부족하고 대중들에게 식민지 시대를 제대로 전달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퇴임 직전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 lsquo대한민국역사박물관rsquo을 개관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전시하면서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미화하는 내용으로 채우다 보니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아주 소홀하게 다루었습니다 역사 인식의 시대적 한계와 동시에 박물관이 권력의 정치 선전장으로 전락하기 쉬운 공간이라는 위험성을 이런 국립박물관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위험성들을 반성하며 꾸준히 자료를 수집하고 준비를 해왔습니다 지금까지 회원들의 기증과 소중한 회비로 모은 자료가 7만여 점이나 됩니다 31독립선언서 등 국내 몇 점뿐인 희귀본도 다수 소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직접 보았던 무운장구 어깨띠 lsquo진충보국(盡忠報國)rsquo 이런 것들을 써놓은 일장기 공출로 뺏긴 놋그릇 대신 받았던 사기그릇도 있습니다 내 동무의 형뻘 되는 분들이 징용징병에 끌려갔고 이웃마을 사는 누이가 일본군 lsquo위안부rsquo로 끌려가는 모습도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들이 사지로 끌려가는 줄도 모르고 저는 어른들을 따라 나가서 박수를 쳤었습니다 새삼 어릴 때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자료들은 일제 식민 잔재가 얼

3

마나 오랜 기간 해를 끼쳐왔는지를 제대로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 식민 지배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무엇을 반성하고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역사의 힘을 찾아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할 것입니다우리가 만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자료 전시만이 아니라 영상을 통해서도 시민에게 현장을 가본 듯한 실감나는 교육의 장이 될 것입니다 세계의 홀로코스트 박물관 인권박물관 등과도 교류의 폭을 넓히고 특히 일본의 건강한 시민들과 연대하는 중요한 장소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또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 함께 실천해 나가는 세계 시민운동의 새로운 터전이 되리라 희망합니다 특히 일본 시민들은 우리의 이런 문제의식에 뜻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을 만들어 모금도 하고 자료도 수집해 기증해 주고 있습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가교로 삼아 과거 침략과 지배 갈등의 역사가 아닌 인권 평화 미래를 여는 연대의 길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데 이게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 취지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과거를 알기 위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인권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든든한 터전으로 가꾸어 나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으로 온갖 어려움과 협박을 뚫고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냈고 한국 사회에 정의의 이정표를 세웠던 경험을 함께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통해 다시 한 번 재현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더 이상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미래 자손들에게 민족의 유산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남길 수 있도록 많은 회원 여러분과 시민들이 동참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다행히도 그동안 우리가 모금활동을 벌이는 데 많은 시민들이 몇 만원부터 몇 억까지 십시일반 동참해 주시고 있습니다 기금만이 아니라 자료 기증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평생 역사를 공부하면서 모은 자료들을 여기에 다 내놓으려고 합니다 자료는 쌓여가지만 장소가 좁네요 실감나는 교육의 현장으로 꾸미려니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국고를 하나도 받지 않고 순수한 시민의 모금으로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아직도 목표액이 많이 모자랍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꼭 큰돈을 기부해야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설렁탕 한 그릇 값이라도 모아주신다면 그 정신 올곧게 이어서 박물관 건립을 끝까지 추진하는 큰 용기로 삼겠습니다 여러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 현실과 맞지 않는 막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 문제이자 통일의 문제 미래의 민주주의 확대와 인권의 문제라고 이해하시면서 여기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4 201708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깃든 용산에

드디어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들어섭니다

위치 서울시용산구청파동효창원인근규모 지하1층~지상5층 연면적475평

준공 2006년4월18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지

5

2층

1층

3층

4층

5층

전시middot체험공간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연구middot사무공간

연구실 사무국 회의실

교류middot협력공간

시민단체 학술연구단체

사무실 공유

보존middot열람공간

열람실 아카이브 수장고

교육middot나눔공간

강의실 세미나실

bull 전문가middot활동가 육성과 교육자료 개발bull 청소년middot시민 대상 상설 역사middot문화 강좌 개설 정기

역사기행 진행bull 해외 동포middot연구자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

근현대사 교육

bull 일제침략사독립운동사민중생활사middot현대사를 아우르는 전시구성

bull 다양한 기획 전시와 공연 등을 펼칠 수 있는 기획전시실 bull 자료열람을 병행할 수 있는 오픈 라이브러리 배치 bull 증언 영상 등을 관람할 수 있는 영상 시설

bull 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근현대사 구명bull 과거사청산 관련 전문 연구기관 bull 전문 연구자 네트워크 구축과 연구지원 활동

bull 과거청산을 위해 활동하는 세계 각국의 연구소middot시민단체middot자료관과 교류

bull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체험을 올바로 기억하기 위한 연대사업 추진

bull 해외 연구자middot활동가 지원과 자료middot정보 편의 제공 bull 해외 한민족 역사문화네트워크 구축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일제침탈사 자료조사middot연구 과정에서 얻어진 일제강점기에 대한 총체적 연구기반 활용

bull 도서middot문서middot유물middot사진middot영상middotDB 등 종합아카이브 구축

6 201708

bull 쉽고 명료한 전시콘텐츠 구성

전시 콘텐츠 가공과 스토리텔링 공간구성 미디어선택 전시디자인을 통해 쉽고 명료한 전달이 가능하도록 구성

차별화된 전시연출 전략 실현

bull 입체적 전시연출

자료의 일방적 제시와 평면적 나열을 지양하고 관객과 능동적이고 쌍방향적 정보소통 추구

평면적 건조한 전시유형을 벗어나 관객의 감성과 동시대적 문화수준에 호응하는 다양하고 입체적이며 밀도 높은

전시연출 지향

bull 다양한 전시 매체 활용

회화 드로잉 판화 조각 부조 사진 등 전통적 조형예술 장르 동원

동영상 멀티미디어 설치미술 등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의 풍부한 성과와 전시디자인 기법을 선택 활용

전시구성

박물관 프로그램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유물의 수집 및 보존 전시라는 전통적인 박물관의 기능에 한정되지 않는다

강좌middot체험활동 찾아가는 박물관 문화공연 등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bull 교육 강좌의 상설화

일반 시민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강좌를 개설하여 문화 공간으로의 역할을 수행

청소년 어린이 인물과 사건 그리고 역사적인 lsquo터rsquo와 관련하여 쉽고 흥미롭게 구성하여 관심 유발

전문가 양성 박물관 안내해설사 지역사해설사 등 양성 교육

bull 역사답사의 정례화

식민지역사박물관 인근 역사 유적들과 연계한 역사문화관광 벨트 탐방 프로그램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한 답사코스 개발

해외 독립운동유적지 답사 확대

일본 유럽 등 외국 방문객 유치 확대

bull 박물관 연계 프로그램 활성화

역사 관련 박물관 탐방과 각 박물관의 특징을 비교

3middot1절 광복절 등 기념일에 개최하는 기획전시 투어

전국의 작은 박물관 행동하는 박물관과 연대 사업 추진

세계 인권박물관과 연계 프로그램 운영

bull 찾아가는 박물관 운영

국내외 순회전시 지속

문화소외 지역 이동 전시 등 움직이는 박물관 지향

전시주제

식민지일상

제국

과 식

민지

전쟁

과 식

민지

독립의 외침

조선총독부와식민자들

한국

과거

청산

운동

반민

특위

부터

일인

명사

전 편

찬까

지한일 과거사 청산을위한 민중연대사

제국과 식민지bull 세계 식민지 분포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bull 제국의 렌즈 조작된 역사 bull lsquo조선병합rsquo 시나리오

bull 망국전야 열도의 침략자와 조선의 레지스탕스

조선총독부와 식민자들bull 조선총독 bull 경찰 헌병경찰 보통경찰 일상의 지배

bull 일본군 조선주둔 일본군 만주출동 조선의 병참동원

bull 경성-서울에 새겨진 식민지의 흔적 남산 일대 용산 일대

bull 출세의 길 관료의 꽃 군수

bull 식민지를 지배한 사람들 재조일본인

bull 친일파군상 매국형-관료형-전쟁협력형

식민지 일상bull 일상을 지배한 차별 bull 일기로 본 식민지의 일상

bull 유행으로 본 식민지 근대 bull 거대한 감옥 -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bull 일상을 지배한 일제 잔재

전쟁과 식민지bull 전시체제기 식민지 전시 생활과 동원 체제

bull 황국신민화-내선일체의 현실

bull 전쟁과 아동 전쟁과 여성

bull 끌려간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삶 조명

bull 버려진 사람들 떠다니는 삶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 동포

재일조선인 등

독립의 외침bull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과 무장 투쟁 bull 3middot1운동과 임시정부

bull 민중운동의 분출 농민 노동자 청년 여성

bull 의열투쟁 bull 해외 민족해방운동

한국 과거 청산 운동사 반민특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까지 bull 해방과 귀환 bull 1949년 반민특위 와해 친일청산의 좌절

bull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남겼나

bull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bull 2000년대 국가 차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bull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

한일 과거사 청산을 위한 민중연대사 bull 20세기전반 반제국주의 반전 평화 연대운동의 경험

bull 20세기후반 아시아침략전쟁 책임 추궁을 위한 연대의 힘

bull 21세기초반 식민지주의 극복을 위한 한일 시민연대 활동

bull 분야별 연대운동 강제동원 위안부 교과서 야스쿠니반대

7

출입구

8 201708

주변역사문화유적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자리잡게 될 용산은외세에 짓밟힌 역사와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상처가 켜켜이 쌓인 곳입니다

bull 지하철4호선숙대입구역500m도보7분1호선남영역730m도보10분6호선효창공원앞역1km도보15분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

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

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

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lsquo방(坊)rsquo을 기준으

로 살펴보더라도 lsquo용산방rsquo은 청파역 공덕

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

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

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

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

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

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는 1899년 12월 lsquo용산행rsquo 전차가 처음 개통

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

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

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

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lsquo신용산(新龍山)rsquo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lsquo용산정거장rsquo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

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

바 lsquo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rsquo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

이방인이 아니면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이순우 책임연구원

용산의 역사

lsquo구용산rsquo 종점과 lsquo신용산rsquo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985172경성번창기985173 1915)

9

10 201708

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lsquo둔지방(屯芝坊)rsquo에 속

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lsquo용산군영지rsquo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lsquo용산rsquo이라

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구분 전환시기 사령부 소재지

한국주차군사령부 1904년 3월소공동 대관정(1904년 4월) rarr 필동 군영지(1904년 8월) rarr 용산 신군영지(1908년 10월)

조선주차군사령부 1910년 8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사령부 1918년 6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관구사령부제17방면군사령부

1945년 2월 용산 군영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

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11

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lsquo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rsquo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985172조선사단창설기념호 (조선사진화보특별호)985173 1916년 11월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985172소화 8년 조선요람985173 1932)

12 201708

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lsquo시베리아출병rsquo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5: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3

마나 오랜 기간 해를 끼쳐왔는지를 제대로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 식민 지배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무엇을 반성하고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역사의 힘을 찾아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할 것입니다우리가 만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자료 전시만이 아니라 영상을 통해서도 시민에게 현장을 가본 듯한 실감나는 교육의 장이 될 것입니다 세계의 홀로코스트 박물관 인권박물관 등과도 교류의 폭을 넓히고 특히 일본의 건강한 시민들과 연대하는 중요한 장소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또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 함께 실천해 나가는 세계 시민운동의 새로운 터전이 되리라 희망합니다 특히 일본 시민들은 우리의 이런 문제의식에 뜻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을 만들어 모금도 하고 자료도 수집해 기증해 주고 있습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가교로 삼아 과거 침략과 지배 갈등의 역사가 아닌 인권 평화 미래를 여는 연대의 길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데 이게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 취지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과거를 알기 위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인권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든든한 터전으로 가꾸어 나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으로 온갖 어려움과 협박을 뚫고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냈고 한국 사회에 정의의 이정표를 세웠던 경험을 함께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통해 다시 한 번 재현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더 이상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미래 자손들에게 민족의 유산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남길 수 있도록 많은 회원 여러분과 시민들이 동참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다행히도 그동안 우리가 모금활동을 벌이는 데 많은 시민들이 몇 만원부터 몇 억까지 십시일반 동참해 주시고 있습니다 기금만이 아니라 자료 기증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평생 역사를 공부하면서 모은 자료들을 여기에 다 내놓으려고 합니다 자료는 쌓여가지만 장소가 좁네요 실감나는 교육의 현장으로 꾸미려니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국고를 하나도 받지 않고 순수한 시민의 모금으로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아직도 목표액이 많이 모자랍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꼭 큰돈을 기부해야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설렁탕 한 그릇 값이라도 모아주신다면 그 정신 올곧게 이어서 박물관 건립을 끝까지 추진하는 큰 용기로 삼겠습니다 여러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 현실과 맞지 않는 막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 문제이자 통일의 문제 미래의 민주주의 확대와 인권의 문제라고 이해하시면서 여기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4 201708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깃든 용산에

드디어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들어섭니다

위치 서울시용산구청파동효창원인근규모 지하1층~지상5층 연면적475평

준공 2006년4월18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지

5

2층

1층

3층

4층

5층

전시middot체험공간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연구middot사무공간

연구실 사무국 회의실

교류middot협력공간

시민단체 학술연구단체

사무실 공유

보존middot열람공간

열람실 아카이브 수장고

교육middot나눔공간

강의실 세미나실

bull 전문가middot활동가 육성과 교육자료 개발bull 청소년middot시민 대상 상설 역사middot문화 강좌 개설 정기

역사기행 진행bull 해외 동포middot연구자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

근현대사 교육

bull 일제침략사독립운동사민중생활사middot현대사를 아우르는 전시구성

bull 다양한 기획 전시와 공연 등을 펼칠 수 있는 기획전시실 bull 자료열람을 병행할 수 있는 오픈 라이브러리 배치 bull 증언 영상 등을 관람할 수 있는 영상 시설

bull 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근현대사 구명bull 과거사청산 관련 전문 연구기관 bull 전문 연구자 네트워크 구축과 연구지원 활동

bull 과거청산을 위해 활동하는 세계 각국의 연구소middot시민단체middot자료관과 교류

bull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체험을 올바로 기억하기 위한 연대사업 추진

bull 해외 연구자middot활동가 지원과 자료middot정보 편의 제공 bull 해외 한민족 역사문화네트워크 구축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일제침탈사 자료조사middot연구 과정에서 얻어진 일제강점기에 대한 총체적 연구기반 활용

bull 도서middot문서middot유물middot사진middot영상middotDB 등 종합아카이브 구축

6 201708

bull 쉽고 명료한 전시콘텐츠 구성

전시 콘텐츠 가공과 스토리텔링 공간구성 미디어선택 전시디자인을 통해 쉽고 명료한 전달이 가능하도록 구성

차별화된 전시연출 전략 실현

bull 입체적 전시연출

자료의 일방적 제시와 평면적 나열을 지양하고 관객과 능동적이고 쌍방향적 정보소통 추구

평면적 건조한 전시유형을 벗어나 관객의 감성과 동시대적 문화수준에 호응하는 다양하고 입체적이며 밀도 높은

전시연출 지향

bull 다양한 전시 매체 활용

회화 드로잉 판화 조각 부조 사진 등 전통적 조형예술 장르 동원

동영상 멀티미디어 설치미술 등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의 풍부한 성과와 전시디자인 기법을 선택 활용

전시구성

박물관 프로그램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유물의 수집 및 보존 전시라는 전통적인 박물관의 기능에 한정되지 않는다

강좌middot체험활동 찾아가는 박물관 문화공연 등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bull 교육 강좌의 상설화

일반 시민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강좌를 개설하여 문화 공간으로의 역할을 수행

청소년 어린이 인물과 사건 그리고 역사적인 lsquo터rsquo와 관련하여 쉽고 흥미롭게 구성하여 관심 유발

전문가 양성 박물관 안내해설사 지역사해설사 등 양성 교육

bull 역사답사의 정례화

식민지역사박물관 인근 역사 유적들과 연계한 역사문화관광 벨트 탐방 프로그램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한 답사코스 개발

해외 독립운동유적지 답사 확대

일본 유럽 등 외국 방문객 유치 확대

bull 박물관 연계 프로그램 활성화

역사 관련 박물관 탐방과 각 박물관의 특징을 비교

3middot1절 광복절 등 기념일에 개최하는 기획전시 투어

전국의 작은 박물관 행동하는 박물관과 연대 사업 추진

세계 인권박물관과 연계 프로그램 운영

bull 찾아가는 박물관 운영

국내외 순회전시 지속

문화소외 지역 이동 전시 등 움직이는 박물관 지향

전시주제

식민지일상

제국

과 식

민지

전쟁

과 식

민지

독립의 외침

조선총독부와식민자들

한국

과거

청산

운동

반민

특위

부터

일인

명사

전 편

찬까

지한일 과거사 청산을위한 민중연대사

제국과 식민지bull 세계 식민지 분포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bull 제국의 렌즈 조작된 역사 bull lsquo조선병합rsquo 시나리오

bull 망국전야 열도의 침략자와 조선의 레지스탕스

조선총독부와 식민자들bull 조선총독 bull 경찰 헌병경찰 보통경찰 일상의 지배

bull 일본군 조선주둔 일본군 만주출동 조선의 병참동원

bull 경성-서울에 새겨진 식민지의 흔적 남산 일대 용산 일대

bull 출세의 길 관료의 꽃 군수

bull 식민지를 지배한 사람들 재조일본인

bull 친일파군상 매국형-관료형-전쟁협력형

식민지 일상bull 일상을 지배한 차별 bull 일기로 본 식민지의 일상

bull 유행으로 본 식민지 근대 bull 거대한 감옥 -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bull 일상을 지배한 일제 잔재

전쟁과 식민지bull 전시체제기 식민지 전시 생활과 동원 체제

bull 황국신민화-내선일체의 현실

bull 전쟁과 아동 전쟁과 여성

bull 끌려간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삶 조명

bull 버려진 사람들 떠다니는 삶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 동포

재일조선인 등

독립의 외침bull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과 무장 투쟁 bull 3middot1운동과 임시정부

bull 민중운동의 분출 농민 노동자 청년 여성

bull 의열투쟁 bull 해외 민족해방운동

한국 과거 청산 운동사 반민특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까지 bull 해방과 귀환 bull 1949년 반민특위 와해 친일청산의 좌절

bull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남겼나

bull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bull 2000년대 국가 차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bull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

한일 과거사 청산을 위한 민중연대사 bull 20세기전반 반제국주의 반전 평화 연대운동의 경험

bull 20세기후반 아시아침략전쟁 책임 추궁을 위한 연대의 힘

bull 21세기초반 식민지주의 극복을 위한 한일 시민연대 활동

bull 분야별 연대운동 강제동원 위안부 교과서 야스쿠니반대

7

출입구

8 201708

주변역사문화유적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자리잡게 될 용산은외세에 짓밟힌 역사와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상처가 켜켜이 쌓인 곳입니다

bull 지하철4호선숙대입구역500m도보7분1호선남영역730m도보10분6호선효창공원앞역1km도보15분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

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

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

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lsquo방(坊)rsquo을 기준으

로 살펴보더라도 lsquo용산방rsquo은 청파역 공덕

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

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

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

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

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

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는 1899년 12월 lsquo용산행rsquo 전차가 처음 개통

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

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

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

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lsquo신용산(新龍山)rsquo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lsquo용산정거장rsquo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

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

바 lsquo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rsquo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

이방인이 아니면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이순우 책임연구원

용산의 역사

lsquo구용산rsquo 종점과 lsquo신용산rsquo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985172경성번창기985173 1915)

9

10 201708

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lsquo둔지방(屯芝坊)rsquo에 속

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lsquo용산군영지rsquo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lsquo용산rsquo이라

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구분 전환시기 사령부 소재지

한국주차군사령부 1904년 3월소공동 대관정(1904년 4월) rarr 필동 군영지(1904년 8월) rarr 용산 신군영지(1908년 10월)

조선주차군사령부 1910년 8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사령부 1918년 6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관구사령부제17방면군사령부

1945년 2월 용산 군영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

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11

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lsquo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rsquo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985172조선사단창설기념호 (조선사진화보특별호)985173 1916년 11월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985172소화 8년 조선요람985173 1932)

12 201708

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lsquo시베리아출병rsquo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6: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4 201708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깃든 용산에

드디어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들어섭니다

위치 서울시용산구청파동효창원인근규모 지하1층~지상5층 연면적475평

준공 2006년4월18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지

5

2층

1층

3층

4층

5층

전시middot체험공간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연구middot사무공간

연구실 사무국 회의실

교류middot협력공간

시민단체 학술연구단체

사무실 공유

보존middot열람공간

열람실 아카이브 수장고

교육middot나눔공간

강의실 세미나실

bull 전문가middot활동가 육성과 교육자료 개발bull 청소년middot시민 대상 상설 역사middot문화 강좌 개설 정기

역사기행 진행bull 해외 동포middot연구자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

근현대사 교육

bull 일제침략사독립운동사민중생활사middot현대사를 아우르는 전시구성

bull 다양한 기획 전시와 공연 등을 펼칠 수 있는 기획전시실 bull 자료열람을 병행할 수 있는 오픈 라이브러리 배치 bull 증언 영상 등을 관람할 수 있는 영상 시설

bull 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근현대사 구명bull 과거사청산 관련 전문 연구기관 bull 전문 연구자 네트워크 구축과 연구지원 활동

bull 과거청산을 위해 활동하는 세계 각국의 연구소middot시민단체middot자료관과 교류

bull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체험을 올바로 기억하기 위한 연대사업 추진

bull 해외 연구자middot활동가 지원과 자료middot정보 편의 제공 bull 해외 한민족 역사문화네트워크 구축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일제침탈사 자료조사middot연구 과정에서 얻어진 일제강점기에 대한 총체적 연구기반 활용

bull 도서middot문서middot유물middot사진middot영상middotDB 등 종합아카이브 구축

6 201708

bull 쉽고 명료한 전시콘텐츠 구성

전시 콘텐츠 가공과 스토리텔링 공간구성 미디어선택 전시디자인을 통해 쉽고 명료한 전달이 가능하도록 구성

차별화된 전시연출 전략 실현

bull 입체적 전시연출

자료의 일방적 제시와 평면적 나열을 지양하고 관객과 능동적이고 쌍방향적 정보소통 추구

평면적 건조한 전시유형을 벗어나 관객의 감성과 동시대적 문화수준에 호응하는 다양하고 입체적이며 밀도 높은

전시연출 지향

bull 다양한 전시 매체 활용

회화 드로잉 판화 조각 부조 사진 등 전통적 조형예술 장르 동원

동영상 멀티미디어 설치미술 등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의 풍부한 성과와 전시디자인 기법을 선택 활용

전시구성

박물관 프로그램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유물의 수집 및 보존 전시라는 전통적인 박물관의 기능에 한정되지 않는다

강좌middot체험활동 찾아가는 박물관 문화공연 등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bull 교육 강좌의 상설화

일반 시민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강좌를 개설하여 문화 공간으로의 역할을 수행

청소년 어린이 인물과 사건 그리고 역사적인 lsquo터rsquo와 관련하여 쉽고 흥미롭게 구성하여 관심 유발

전문가 양성 박물관 안내해설사 지역사해설사 등 양성 교육

bull 역사답사의 정례화

식민지역사박물관 인근 역사 유적들과 연계한 역사문화관광 벨트 탐방 프로그램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한 답사코스 개발

해외 독립운동유적지 답사 확대

일본 유럽 등 외국 방문객 유치 확대

bull 박물관 연계 프로그램 활성화

역사 관련 박물관 탐방과 각 박물관의 특징을 비교

3middot1절 광복절 등 기념일에 개최하는 기획전시 투어

전국의 작은 박물관 행동하는 박물관과 연대 사업 추진

세계 인권박물관과 연계 프로그램 운영

bull 찾아가는 박물관 운영

국내외 순회전시 지속

문화소외 지역 이동 전시 등 움직이는 박물관 지향

전시주제

식민지일상

제국

과 식

민지

전쟁

과 식

민지

독립의 외침

조선총독부와식민자들

한국

과거

청산

운동

반민

특위

부터

일인

명사

전 편

찬까

지한일 과거사 청산을위한 민중연대사

제국과 식민지bull 세계 식민지 분포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bull 제국의 렌즈 조작된 역사 bull lsquo조선병합rsquo 시나리오

bull 망국전야 열도의 침략자와 조선의 레지스탕스

조선총독부와 식민자들bull 조선총독 bull 경찰 헌병경찰 보통경찰 일상의 지배

bull 일본군 조선주둔 일본군 만주출동 조선의 병참동원

bull 경성-서울에 새겨진 식민지의 흔적 남산 일대 용산 일대

bull 출세의 길 관료의 꽃 군수

bull 식민지를 지배한 사람들 재조일본인

bull 친일파군상 매국형-관료형-전쟁협력형

식민지 일상bull 일상을 지배한 차별 bull 일기로 본 식민지의 일상

bull 유행으로 본 식민지 근대 bull 거대한 감옥 -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bull 일상을 지배한 일제 잔재

전쟁과 식민지bull 전시체제기 식민지 전시 생활과 동원 체제

bull 황국신민화-내선일체의 현실

bull 전쟁과 아동 전쟁과 여성

bull 끌려간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삶 조명

bull 버려진 사람들 떠다니는 삶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 동포

재일조선인 등

독립의 외침bull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과 무장 투쟁 bull 3middot1운동과 임시정부

bull 민중운동의 분출 농민 노동자 청년 여성

bull 의열투쟁 bull 해외 민족해방운동

한국 과거 청산 운동사 반민특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까지 bull 해방과 귀환 bull 1949년 반민특위 와해 친일청산의 좌절

bull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남겼나

bull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bull 2000년대 국가 차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bull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

한일 과거사 청산을 위한 민중연대사 bull 20세기전반 반제국주의 반전 평화 연대운동의 경험

bull 20세기후반 아시아침략전쟁 책임 추궁을 위한 연대의 힘

bull 21세기초반 식민지주의 극복을 위한 한일 시민연대 활동

bull 분야별 연대운동 강제동원 위안부 교과서 야스쿠니반대

7

출입구

8 201708

주변역사문화유적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자리잡게 될 용산은외세에 짓밟힌 역사와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상처가 켜켜이 쌓인 곳입니다

bull 지하철4호선숙대입구역500m도보7분1호선남영역730m도보10분6호선효창공원앞역1km도보15분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

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

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

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lsquo방(坊)rsquo을 기준으

로 살펴보더라도 lsquo용산방rsquo은 청파역 공덕

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

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

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

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

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

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는 1899년 12월 lsquo용산행rsquo 전차가 처음 개통

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

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

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

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lsquo신용산(新龍山)rsquo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lsquo용산정거장rsquo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

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

바 lsquo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rsquo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

이방인이 아니면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이순우 책임연구원

용산의 역사

lsquo구용산rsquo 종점과 lsquo신용산rsquo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985172경성번창기985173 1915)

9

10 201708

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lsquo둔지방(屯芝坊)rsquo에 속

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lsquo용산군영지rsquo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lsquo용산rsquo이라

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구분 전환시기 사령부 소재지

한국주차군사령부 1904년 3월소공동 대관정(1904년 4월) rarr 필동 군영지(1904년 8월) rarr 용산 신군영지(1908년 10월)

조선주차군사령부 1910년 8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사령부 1918년 6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관구사령부제17방면군사령부

1945년 2월 용산 군영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

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11

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lsquo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rsquo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985172조선사단창설기념호 (조선사진화보특별호)985173 1916년 11월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985172소화 8년 조선요람985173 1932)

12 201708

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lsquo시베리아출병rsquo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7: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5

2층

1층

3층

4층

5층

전시middot체험공간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연구middot사무공간

연구실 사무국 회의실

교류middot협력공간

시민단체 학술연구단체

사무실 공유

보존middot열람공간

열람실 아카이브 수장고

교육middot나눔공간

강의실 세미나실

bull 전문가middot활동가 육성과 교육자료 개발bull 청소년middot시민 대상 상설 역사middot문화 강좌 개설 정기

역사기행 진행bull 해외 동포middot연구자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

근현대사 교육

bull 일제침략사독립운동사민중생활사middot현대사를 아우르는 전시구성

bull 다양한 기획 전시와 공연 등을 펼칠 수 있는 기획전시실 bull 자료열람을 병행할 수 있는 오픈 라이브러리 배치 bull 증언 영상 등을 관람할 수 있는 영상 시설

bull 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근현대사 구명bull 과거사청산 관련 전문 연구기관 bull 전문 연구자 네트워크 구축과 연구지원 활동

bull 과거청산을 위해 활동하는 세계 각국의 연구소middot시민단체middot자료관과 교류

bull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체험을 올바로 기억하기 위한 연대사업 추진

bull 해외 연구자middot활동가 지원과 자료middot정보 편의 제공 bull 해외 한민족 역사문화네트워크 구축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일제침탈사 자료조사middot연구 과정에서 얻어진 일제강점기에 대한 총체적 연구기반 활용

bull 도서middot문서middot유물middot사진middot영상middotDB 등 종합아카이브 구축

6 201708

bull 쉽고 명료한 전시콘텐츠 구성

전시 콘텐츠 가공과 스토리텔링 공간구성 미디어선택 전시디자인을 통해 쉽고 명료한 전달이 가능하도록 구성

차별화된 전시연출 전략 실현

bull 입체적 전시연출

자료의 일방적 제시와 평면적 나열을 지양하고 관객과 능동적이고 쌍방향적 정보소통 추구

평면적 건조한 전시유형을 벗어나 관객의 감성과 동시대적 문화수준에 호응하는 다양하고 입체적이며 밀도 높은

전시연출 지향

bull 다양한 전시 매체 활용

회화 드로잉 판화 조각 부조 사진 등 전통적 조형예술 장르 동원

동영상 멀티미디어 설치미술 등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의 풍부한 성과와 전시디자인 기법을 선택 활용

전시구성

박물관 프로그램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유물의 수집 및 보존 전시라는 전통적인 박물관의 기능에 한정되지 않는다

강좌middot체험활동 찾아가는 박물관 문화공연 등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bull 교육 강좌의 상설화

일반 시민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강좌를 개설하여 문화 공간으로의 역할을 수행

청소년 어린이 인물과 사건 그리고 역사적인 lsquo터rsquo와 관련하여 쉽고 흥미롭게 구성하여 관심 유발

전문가 양성 박물관 안내해설사 지역사해설사 등 양성 교육

bull 역사답사의 정례화

식민지역사박물관 인근 역사 유적들과 연계한 역사문화관광 벨트 탐방 프로그램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한 답사코스 개발

해외 독립운동유적지 답사 확대

일본 유럽 등 외국 방문객 유치 확대

bull 박물관 연계 프로그램 활성화

역사 관련 박물관 탐방과 각 박물관의 특징을 비교

3middot1절 광복절 등 기념일에 개최하는 기획전시 투어

전국의 작은 박물관 행동하는 박물관과 연대 사업 추진

세계 인권박물관과 연계 프로그램 운영

bull 찾아가는 박물관 운영

국내외 순회전시 지속

문화소외 지역 이동 전시 등 움직이는 박물관 지향

전시주제

식민지일상

제국

과 식

민지

전쟁

과 식

민지

독립의 외침

조선총독부와식민자들

한국

과거

청산

운동

반민

특위

부터

일인

명사

전 편

찬까

지한일 과거사 청산을위한 민중연대사

제국과 식민지bull 세계 식민지 분포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bull 제국의 렌즈 조작된 역사 bull lsquo조선병합rsquo 시나리오

bull 망국전야 열도의 침략자와 조선의 레지스탕스

조선총독부와 식민자들bull 조선총독 bull 경찰 헌병경찰 보통경찰 일상의 지배

bull 일본군 조선주둔 일본군 만주출동 조선의 병참동원

bull 경성-서울에 새겨진 식민지의 흔적 남산 일대 용산 일대

bull 출세의 길 관료의 꽃 군수

bull 식민지를 지배한 사람들 재조일본인

bull 친일파군상 매국형-관료형-전쟁협력형

식민지 일상bull 일상을 지배한 차별 bull 일기로 본 식민지의 일상

bull 유행으로 본 식민지 근대 bull 거대한 감옥 -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bull 일상을 지배한 일제 잔재

전쟁과 식민지bull 전시체제기 식민지 전시 생활과 동원 체제

bull 황국신민화-내선일체의 현실

bull 전쟁과 아동 전쟁과 여성

bull 끌려간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삶 조명

bull 버려진 사람들 떠다니는 삶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 동포

재일조선인 등

독립의 외침bull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과 무장 투쟁 bull 3middot1운동과 임시정부

bull 민중운동의 분출 농민 노동자 청년 여성

bull 의열투쟁 bull 해외 민족해방운동

한국 과거 청산 운동사 반민특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까지 bull 해방과 귀환 bull 1949년 반민특위 와해 친일청산의 좌절

bull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남겼나

bull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bull 2000년대 국가 차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bull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

한일 과거사 청산을 위한 민중연대사 bull 20세기전반 반제국주의 반전 평화 연대운동의 경험

bull 20세기후반 아시아침략전쟁 책임 추궁을 위한 연대의 힘

bull 21세기초반 식민지주의 극복을 위한 한일 시민연대 활동

bull 분야별 연대운동 강제동원 위안부 교과서 야스쿠니반대

7

출입구

8 201708

주변역사문화유적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자리잡게 될 용산은외세에 짓밟힌 역사와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상처가 켜켜이 쌓인 곳입니다

bull 지하철4호선숙대입구역500m도보7분1호선남영역730m도보10분6호선효창공원앞역1km도보15분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

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

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

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lsquo방(坊)rsquo을 기준으

로 살펴보더라도 lsquo용산방rsquo은 청파역 공덕

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

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

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

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

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

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는 1899년 12월 lsquo용산행rsquo 전차가 처음 개통

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

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

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

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lsquo신용산(新龍山)rsquo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lsquo용산정거장rsquo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

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

바 lsquo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rsquo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

이방인이 아니면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이순우 책임연구원

용산의 역사

lsquo구용산rsquo 종점과 lsquo신용산rsquo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985172경성번창기985173 1915)

9

10 201708

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lsquo둔지방(屯芝坊)rsquo에 속

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lsquo용산군영지rsquo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lsquo용산rsquo이라

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구분 전환시기 사령부 소재지

한국주차군사령부 1904년 3월소공동 대관정(1904년 4월) rarr 필동 군영지(1904년 8월) rarr 용산 신군영지(1908년 10월)

조선주차군사령부 1910년 8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사령부 1918년 6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관구사령부제17방면군사령부

1945년 2월 용산 군영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

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11

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lsquo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rsquo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985172조선사단창설기념호 (조선사진화보특별호)985173 1916년 11월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985172소화 8년 조선요람985173 1932)

12 201708

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lsquo시베리아출병rsquo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8: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6 201708

bull 쉽고 명료한 전시콘텐츠 구성

전시 콘텐츠 가공과 스토리텔링 공간구성 미디어선택 전시디자인을 통해 쉽고 명료한 전달이 가능하도록 구성

차별화된 전시연출 전략 실현

bull 입체적 전시연출

자료의 일방적 제시와 평면적 나열을 지양하고 관객과 능동적이고 쌍방향적 정보소통 추구

평면적 건조한 전시유형을 벗어나 관객의 감성과 동시대적 문화수준에 호응하는 다양하고 입체적이며 밀도 높은

전시연출 지향

bull 다양한 전시 매체 활용

회화 드로잉 판화 조각 부조 사진 등 전통적 조형예술 장르 동원

동영상 멀티미디어 설치미술 등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의 풍부한 성과와 전시디자인 기법을 선택 활용

전시구성

박물관 프로그램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유물의 수집 및 보존 전시라는 전통적인 박물관의 기능에 한정되지 않는다

강좌middot체험활동 찾아가는 박물관 문화공연 등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bull 교육 강좌의 상설화

일반 시민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강좌를 개설하여 문화 공간으로의 역할을 수행

청소년 어린이 인물과 사건 그리고 역사적인 lsquo터rsquo와 관련하여 쉽고 흥미롭게 구성하여 관심 유발

전문가 양성 박물관 안내해설사 지역사해설사 등 양성 교육

bull 역사답사의 정례화

식민지역사박물관 인근 역사 유적들과 연계한 역사문화관광 벨트 탐방 프로그램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한 답사코스 개발

해외 독립운동유적지 답사 확대

일본 유럽 등 외국 방문객 유치 확대

bull 박물관 연계 프로그램 활성화

역사 관련 박물관 탐방과 각 박물관의 특징을 비교

3middot1절 광복절 등 기념일에 개최하는 기획전시 투어

전국의 작은 박물관 행동하는 박물관과 연대 사업 추진

세계 인권박물관과 연계 프로그램 운영

bull 찾아가는 박물관 운영

국내외 순회전시 지속

문화소외 지역 이동 전시 등 움직이는 박물관 지향

전시주제

식민지일상

제국

과 식

민지

전쟁

과 식

민지

독립의 외침

조선총독부와식민자들

한국

과거

청산

운동

반민

특위

부터

일인

명사

전 편

찬까

지한일 과거사 청산을위한 민중연대사

제국과 식민지bull 세계 식민지 분포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bull 제국의 렌즈 조작된 역사 bull lsquo조선병합rsquo 시나리오

bull 망국전야 열도의 침략자와 조선의 레지스탕스

조선총독부와 식민자들bull 조선총독 bull 경찰 헌병경찰 보통경찰 일상의 지배

bull 일본군 조선주둔 일본군 만주출동 조선의 병참동원

bull 경성-서울에 새겨진 식민지의 흔적 남산 일대 용산 일대

bull 출세의 길 관료의 꽃 군수

bull 식민지를 지배한 사람들 재조일본인

bull 친일파군상 매국형-관료형-전쟁협력형

식민지 일상bull 일상을 지배한 차별 bull 일기로 본 식민지의 일상

bull 유행으로 본 식민지 근대 bull 거대한 감옥 -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bull 일상을 지배한 일제 잔재

전쟁과 식민지bull 전시체제기 식민지 전시 생활과 동원 체제

bull 황국신민화-내선일체의 현실

bull 전쟁과 아동 전쟁과 여성

bull 끌려간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삶 조명

bull 버려진 사람들 떠다니는 삶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 동포

재일조선인 등

독립의 외침bull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과 무장 투쟁 bull 3middot1운동과 임시정부

bull 민중운동의 분출 농민 노동자 청년 여성

bull 의열투쟁 bull 해외 민족해방운동

한국 과거 청산 운동사 반민특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까지 bull 해방과 귀환 bull 1949년 반민특위 와해 친일청산의 좌절

bull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남겼나

bull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bull 2000년대 국가 차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bull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

한일 과거사 청산을 위한 민중연대사 bull 20세기전반 반제국주의 반전 평화 연대운동의 경험

bull 20세기후반 아시아침략전쟁 책임 추궁을 위한 연대의 힘

bull 21세기초반 식민지주의 극복을 위한 한일 시민연대 활동

bull 분야별 연대운동 강제동원 위안부 교과서 야스쿠니반대

7

출입구

8 201708

주변역사문화유적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자리잡게 될 용산은외세에 짓밟힌 역사와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상처가 켜켜이 쌓인 곳입니다

bull 지하철4호선숙대입구역500m도보7분1호선남영역730m도보10분6호선효창공원앞역1km도보15분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

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

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

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lsquo방(坊)rsquo을 기준으

로 살펴보더라도 lsquo용산방rsquo은 청파역 공덕

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

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

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

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

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

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는 1899년 12월 lsquo용산행rsquo 전차가 처음 개통

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

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

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

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lsquo신용산(新龍山)rsquo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lsquo용산정거장rsquo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

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

바 lsquo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rsquo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

이방인이 아니면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이순우 책임연구원

용산의 역사

lsquo구용산rsquo 종점과 lsquo신용산rsquo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985172경성번창기985173 1915)

9

10 201708

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lsquo둔지방(屯芝坊)rsquo에 속

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lsquo용산군영지rsquo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lsquo용산rsquo이라

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구분 전환시기 사령부 소재지

한국주차군사령부 1904년 3월소공동 대관정(1904년 4월) rarr 필동 군영지(1904년 8월) rarr 용산 신군영지(1908년 10월)

조선주차군사령부 1910년 8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사령부 1918년 6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관구사령부제17방면군사령부

1945년 2월 용산 군영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

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11

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lsquo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rsquo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985172조선사단창설기념호 (조선사진화보특별호)985173 1916년 11월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985172소화 8년 조선요람985173 1932)

12 201708

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lsquo시베리아출병rsquo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9: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전시주제

식민지일상

제국

과 식

민지

전쟁

과 식

민지

독립의 외침

조선총독부와식민자들

한국

과거

청산

운동

반민

특위

부터

일인

명사

전 편

찬까

지한일 과거사 청산을위한 민중연대사

제국과 식민지bull 세계 식민지 분포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bull 제국의 렌즈 조작된 역사 bull lsquo조선병합rsquo 시나리오

bull 망국전야 열도의 침략자와 조선의 레지스탕스

조선총독부와 식민자들bull 조선총독 bull 경찰 헌병경찰 보통경찰 일상의 지배

bull 일본군 조선주둔 일본군 만주출동 조선의 병참동원

bull 경성-서울에 새겨진 식민지의 흔적 남산 일대 용산 일대

bull 출세의 길 관료의 꽃 군수

bull 식민지를 지배한 사람들 재조일본인

bull 친일파군상 매국형-관료형-전쟁협력형

식민지 일상bull 일상을 지배한 차별 bull 일기로 본 식민지의 일상

bull 유행으로 본 식민지 근대 bull 거대한 감옥 -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bull 일상을 지배한 일제 잔재

전쟁과 식민지bull 전시체제기 식민지 전시 생활과 동원 체제

bull 황국신민화-내선일체의 현실

bull 전쟁과 아동 전쟁과 여성

bull 끌려간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삶 조명

bull 버려진 사람들 떠다니는 삶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 동포

재일조선인 등

독립의 외침bull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과 무장 투쟁 bull 3middot1운동과 임시정부

bull 민중운동의 분출 농민 노동자 청년 여성

bull 의열투쟁 bull 해외 민족해방운동

한국 과거 청산 운동사 반민특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까지 bull 해방과 귀환 bull 1949년 반민특위 와해 친일청산의 좌절

bull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남겼나

bull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bull 2000년대 국가 차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bull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

한일 과거사 청산을 위한 민중연대사 bull 20세기전반 반제국주의 반전 평화 연대운동의 경험

bull 20세기후반 아시아침략전쟁 책임 추궁을 위한 연대의 힘

bull 21세기초반 식민지주의 극복을 위한 한일 시민연대 활동

bull 분야별 연대운동 강제동원 위안부 교과서 야스쿠니반대

7

출입구

8 201708

주변역사문화유적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자리잡게 될 용산은외세에 짓밟힌 역사와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상처가 켜켜이 쌓인 곳입니다

bull 지하철4호선숙대입구역500m도보7분1호선남영역730m도보10분6호선효창공원앞역1km도보15분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

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

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

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lsquo방(坊)rsquo을 기준으

로 살펴보더라도 lsquo용산방rsquo은 청파역 공덕

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

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

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

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

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

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는 1899년 12월 lsquo용산행rsquo 전차가 처음 개통

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

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

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

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lsquo신용산(新龍山)rsquo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lsquo용산정거장rsquo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

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

바 lsquo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rsquo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

이방인이 아니면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이순우 책임연구원

용산의 역사

lsquo구용산rsquo 종점과 lsquo신용산rsquo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985172경성번창기985173 1915)

9

10 201708

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lsquo둔지방(屯芝坊)rsquo에 속

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lsquo용산군영지rsquo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lsquo용산rsquo이라

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구분 전환시기 사령부 소재지

한국주차군사령부 1904년 3월소공동 대관정(1904년 4월) rarr 필동 군영지(1904년 8월) rarr 용산 신군영지(1908년 10월)

조선주차군사령부 1910년 8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사령부 1918년 6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관구사령부제17방면군사령부

1945년 2월 용산 군영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

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11

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lsquo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rsquo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985172조선사단창설기념호 (조선사진화보특별호)985173 1916년 11월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985172소화 8년 조선요람985173 1932)

12 201708

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lsquo시베리아출병rsquo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10: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8 201708

주변역사문화유적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자리잡게 될 용산은외세에 짓밟힌 역사와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상처가 켜켜이 쌓인 곳입니다

bull 지하철4호선숙대입구역500m도보7분1호선남영역730m도보10분6호선효창공원앞역1km도보15분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

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

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

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lsquo방(坊)rsquo을 기준으

로 살펴보더라도 lsquo용산방rsquo은 청파역 공덕

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

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

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

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

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

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는 1899년 12월 lsquo용산행rsquo 전차가 처음 개통

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

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

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

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lsquo신용산(新龍山)rsquo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lsquo용산정거장rsquo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

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

바 lsquo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rsquo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

이방인이 아니면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이순우 책임연구원

용산의 역사

lsquo구용산rsquo 종점과 lsquo신용산rsquo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985172경성번창기985173 1915)

9

10 201708

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lsquo둔지방(屯芝坊)rsquo에 속

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lsquo용산군영지rsquo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lsquo용산rsquo이라

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구분 전환시기 사령부 소재지

한국주차군사령부 1904년 3월소공동 대관정(1904년 4월) rarr 필동 군영지(1904년 8월) rarr 용산 신군영지(1908년 10월)

조선주차군사령부 1910년 8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사령부 1918년 6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관구사령부제17방면군사령부

1945년 2월 용산 군영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

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11

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lsquo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rsquo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985172조선사단창설기념호 (조선사진화보특별호)985173 1916년 11월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985172소화 8년 조선요람985173 1932)

12 201708

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lsquo시베리아출병rsquo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11: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

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

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

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lsquo방(坊)rsquo을 기준으

로 살펴보더라도 lsquo용산방rsquo은 청파역 공덕

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

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

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

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

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

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는 1899년 12월 lsquo용산행rsquo 전차가 처음 개통

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

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

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

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lsquo신용산(新龍山)rsquo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lsquo용산정거장rsquo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

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

바 lsquo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rsquo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

이방인이 아니면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이순우 책임연구원

용산의 역사

lsquo구용산rsquo 종점과 lsquo신용산rsquo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985172경성번창기985173 1915)

9

10 201708

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lsquo둔지방(屯芝坊)rsquo에 속

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lsquo용산군영지rsquo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lsquo용산rsquo이라

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구분 전환시기 사령부 소재지

한국주차군사령부 1904년 3월소공동 대관정(1904년 4월) rarr 필동 군영지(1904년 8월) rarr 용산 신군영지(1908년 10월)

조선주차군사령부 1910년 8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사령부 1918년 6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관구사령부제17방면군사령부

1945년 2월 용산 군영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

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11

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lsquo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rsquo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985172조선사단창설기념호 (조선사진화보특별호)985173 1916년 11월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985172소화 8년 조선요람985173 1932)

12 201708

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lsquo시베리아출병rsquo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12: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10 201708

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lsquo둔지방(屯芝坊)rsquo에 속

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lsquo용산군영지rsquo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lsquo용산rsquo이라

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구분 전환시기 사령부 소재지

한국주차군사령부 1904년 3월소공동 대관정(1904년 4월) rarr 필동 군영지(1904년 8월) rarr 용산 신군영지(1908년 10월)

조선주차군사령부 1910년 8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사령부 1918년 6월 용산 군영지

조선군관구사령부제17방면군사령부

1945년 2월 용산 군영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

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11

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lsquo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rsquo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985172조선사단창설기념호 (조선사진화보특별호)985173 1916년 11월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985172소화 8년 조선요람985173 1932)

12 201708

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lsquo시베리아출병rsquo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13: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11

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lsquo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rsquo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985172조선사단창설기념호 (조선사진화보특별호)985173 1916년 11월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985172소화 8년 조선요람985173 1932)

12 201708

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lsquo시베리아출병rsquo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14: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12 201708

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lsquo시베리아출병rsquo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15: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13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장차 lsquo용산공원rsquo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

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lsquo한강rsquo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lsquo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rsquo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lsquo삼각지(三角地)rsquo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lsquo연병정(練兵町)rsquo은 lsquo남영동(南營洞)rsquo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985172사단대항연습사진첩985173 1930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16: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14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 답사코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지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17: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국치의 길을 걷다남산권역

1 정무총감관저 터 bull 총독을 보좌하고 행정사무를 통할 감독하는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거처하던 곳 bull 1957년 공보실 주관으로 lsquo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rsquo 설립 bull 옛 정무총감관저 구내에는 일제시기에 조성된 방공호 흔적이 남아 있음

2 한국주차군사령부 터 bull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의 총본산인 경무총감부(조선군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곳 bull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둔지였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개관

3 통감관저 터 bull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1906년)와 총독관저(1910년)로 사용 bull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 2010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lsquo통감관저 터rsquo 표석 건립 bull 2016년 8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기억의 터 기념물 조성

4 일본적십자사 bull 일제강점기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던 곳 조선본부 터 bull 1933년 10월 준공된 청사는 현재 lsquo대한적십자사 100주년 기념관rsquo으로 사용

5 동본원사 터 bull 1895년 이후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社 히가시혼간지)가 자리했던 곳 현재 한양교회와 남산빌딩 등이 들어섬

bull 제야의 종으로 사용된 lsquo양평 상원사 동종rsquo과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光宣門)이 이곳으로 옮겨짐

6 통감부middot조선총독부 터 bull 1907년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 전환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김익상 의거터) 이었던 공간 bull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金益相) 의거 전개 bull 192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 이후에는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

7 노기신사 터 bull 1934년 남산왜성대 구 총독부청사 위쪽(현 남산원)에 일본 전쟁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추념해 노기신사 완공

bull 신사 석물 일부가 남았으며 이곳에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육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이전

8 경성신사 터 bull 1898년 개설된 남산대신궁이 있던 곳으로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 bull 1897년 설치된 왜성대공원과 겹치는 구역으로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황태자전하어주가지

처비(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碑) 이토시비(伊藤詩碑)와 같은 일제 기념시설물이 있었음 bull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9 토지조사기념비 터 bull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하여 1927년 7월에 세운 조선토지조사기념비가 있던 곳 bull 1966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 건립

10 한양공원 표석 bull 1910년 5월 서울거주 일본인들 주도로 한양공원이 개원될 때 세운 표지석 bull 앞면에는 고종태황제의 글씨를 받아 새긴 lsquo한양공원(漢陽公園)rsquo이 뒷면에는 당시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고죠 칸도(古城管堂)가 지은 lsquo한양공원기rsquo가 있음

11 조선신궁 터 bull 1925년 10월 완공 일제 식민통치의 성지이자 lsquo천황rsquo 숭배를 각인시키는 장소 bull 해방 이후 1947년 조선신궁 표석과 도리이 등 시설 일체가 철거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유구 발견

12 황국신민서사지주 터 bull 1939년 조선신궁 표참도 인접지에 건립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가 있던 곳 bull 1947년에 파괴되었으나 2009년 한양도성 발굴조사 때 기단석 유구가 노출

15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18: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이방인의 길에서독립을 꿈꾸다용산권역 1

1 경성호국신사 터 bull 1943년 11월 야스쿠니신사에 준하는 일본군 전사자 추모시설로 건립된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곳 bull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表參道)는 lsquo108하늘계단rsquo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

2 용산중학교 터 bull 1918년 4월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일본인 남학생 전용 교육기관인 용산중학교가 있던 곳 bull 현재 용산고등학교와 용산중학교 자리

3 카마쿠라보육원 터 bull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였던 곳을 1917년 8월 이후 일본 기독교 계열의 카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경성지부가 사용했던 공간

bull 조선인 고아 미아 기아를 양육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이후 영락보린원으로 사용

bull 이곳의 운영책임자였던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는 1962년 사망 이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

4 김상옥 항거터 bull 1923년 1월 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은신처로 삼았다가 일본경찰에 항거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했던 집터

bull 당시 이곳은 김상옥 의사의 매부 고봉근(高奉根)이 살던 집(후암동 304번지) bull 김상옥 의사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벗어나 장충단 왕십리 방향으로 피신하였다가 1월 19일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순국

5 조선은행 사택지 bull 1920년에 대규모로 조성된 조선은행 사택지가 자리하던 곳 bull 1958년 대부분 사택은 일반 분양되었으나 현재도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lsquo후암생활관rsquo이 남아 있음

6 삼판소학교 터 bull 용산 일본군영지 배후시설로 설치된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인 삼판소학교가 있던 곳 bull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4월 삼판(三坂)을 삼광(三光)으로 개칭

7 경성제2공립고등 bull 1923년 6월 일본인 여학생 전용 중등교육기관인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가 있던 곳 여학교 터 bull 1946년 10월 수도여자고등학교로 개칭 2000년 7월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교육청 교육시설관

리본부가 사용

8 용산연병장 터 bull 1906년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영지가 조성될 때 연병장(1908년 5월 준공)이 자리하던 곳 bull 조선주둔 일본군대의 상주군 배치결정에 따라 1920년에 야포병연대 주둔지로 전환 bull 이 연병장 때문에 연병정(練兵町) 지명이 생겨났고 여기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명이 파생

9 경룡관 터 bull 1918년에 개관한 일본인 소유의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이 있던 곳 bull 연병정 전차정류장 앞에 있었고 해방 이후 성남극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다가 폐관

10 연합군 bull 1942년 2월 이른바 lsquo싱가포르 함락rsquo 때 말레이시아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된 다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 (영국군 호주군)이 이송되어 수감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bull 1930년대에 이와무라제사공장(闇村製絲工場)이 있었고 현재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사용

11 선린상업학교 터 bull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선린상업학교가 1913년 이래 자리한 곳 bull 선린(善隣)이라는 학교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공학형태로 운영 bull 일본 실업계 거물 오구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의 재정 후원을 받았고 1927년 5월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건립

12 숙명여전 터 bull 1938년에 설립된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 개편 bull 1974년에 폐교된 효창국민학교 터를 학교 캠퍼스로 편입

13 효창공원 bull 사적 제33호 원래 조선 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역이었으나 일제가 공원으로 변형 bull 해방 후 김구 선생 주도로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유해 모심 bull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축구장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등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

설물들로 훼손됨

16 201708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19: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침략전쟁의 길에서민족의 수난을 보다용산권역 2

1 평식원 bull 1902년 미터법 도량형제도의 도입에 따른 계량기를 도량형제조소 터 제작 검사하는 기관인 평식원(平式院) 도량형제조소가 있던 곳 bull 일제강점기에는 식산국 상공과 분실로 전환

2 카토신사 터 bull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의 카토신사(加藤神社)에서 분사한 신사가 있던 곳 bull 임진왜란 때 침략군으로 왔던 카토 키요마사를 제사지내는 시설로 지금의 lsquo당고개순교성지rsquo 구역에 포함

3 삼각지 bull 1906년 6월 일본군영지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로 개설된 한강통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세모꼴 도로 지형 bull 1967년 발표된 대중가요 lsquo돌아가는 삼각지rsquo와 삼각지 입체교차로 이미지로 각인된 공간

4 용산전차차고 터 bull 경성전기회사의 출장소(전차차고)가 있던 곳 bull 원래 이곳은 경성전기회사 전신인 일한와사회사가 창립 당시 사무소를 두었던 자리

5 용산전화분국 터 bull 1923년 7월 경성우편국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이 있던 곳 bull 현재 KT 용산지사 자리에 해당

6 용광사 터 bull 일본인 사찰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가 있던 곳으로 1928년에 경복궁 경무대에서 옮겨온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을 법당으로 개조하여 사용

bull 현재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에 해당(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재이전)

7 용산우편국 터 bull 1906년 12월에 개설된 용산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용산우체국 자리

8 조선군사령부 터 bull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용산군용지 개설과 더불어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1918년에 조선군사령부 편제로 개편

bull 해방 후 미7사단사령부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멸실된 상태

9 용산총독관저 터 bull 일본군 용산군영지가 만들어질 때 한국주차군사령부 관저로 건설되었으나 조선총독의 용산관저로 전환해 쓰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귀빈 접대와 연회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625한국전쟁 직후에 멸실

bull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 121병원 자리에 해당

10 18은행 용산지점 터 bull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용산지점이 있던 곳 bull 1936년 2월 십팔은행의 조선 내 지점망이 조선식산은행으로 일괄 양도

11 용산헌병분대 터 bull 경무총감부 편제에 의한 용산헌병분대가 주둔했던 곳 bull 헌병경찰제도 폐지 후에도 용산헌병분대는 동일한 공간에 계속 존속

12 용산역 bull 1899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용산역(용산정거장)이 있던 곳 bull 군용철도인 경의선 공사와 관련하여 1906년 11월 3층 목조건물로 역사를 신축하였으나 완공 직후 화재

로 소실되고 이내 동일한 규모로 역사를 재건축 bull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lsquo출정rsquo과 lsquo귀환rsquo을 반복했던 장소이며 특히 강제동원의 통로

로 이용되어 식민지기의 수난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

13 철도국 청사 터 bull 1908년 11월부터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가 자리했던 곳 bull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청사로 전환하여 사용

14 용산철도병원 터 bull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이 남아 있는 곳(등록문화재 제428호)

15 용산철도공원 터 bull 1915년 10월 일제가 건설한 철도 1천리(哩 마일) 완성기념으로 lsquo조혼비(弔魂碑)rsquo를 세웠던 곳 bull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철도순직자조혼제를 거행

16 용산 신연병장 터 bull 조선주둔 일본군의 상주군 전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연병장이 있던 곳(1921년 12월 완공) bull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

17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20: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18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추진경과

2011

2013 2014

역사관 건립위원회 발족(20112)11차 기획회의 3차 집행위기획위 연석회의 개최(20114~20122) 역사관 건립계획서 초안 작성(20122)

〈깨어나라 역사여〉 역사관 건립기금 모금 콘서트(2011105) 이이화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안치환middot이지상middot꽃다지middot평화의나무합창단 등 500여 명 참석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억3800만원 약정 기부

친일인명사전 앱 개발(2012829) 민성금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 위해 모바일 기기를 통해구현되는 앱 개발 약 2만1000개 판매수익금 1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서울시-서대문구 서대문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제안(20123) 서울시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계획 브리핑(20127)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부처 협의 서대문형무소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건립 장기화 기관운영의 독자성 확보 불투명 rarr 박물관 자립적 추진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세우기 캠페인(20122) 박정희기념middot도서관 폐관운동과 더불어 시민참여 감시활동 전개 지배세력의 미화 도구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반대 캠페인

뉴라이트 역사왜곡middot교과서 개악 저지 운동 및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2013~)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무효화 및 채택 저지 운동(2013~201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운동(2014~2017)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 결성(201511)일본 시민과 단체 근대사 연구자 등이 11월 14일 결성 모금과 자료기증 운동 추진 2017년 6월 23일 현재 789명 10개 단체로부터 6198000엔 모금

박물관 연구프로젝트 수행 및 근현대사기념관 위탁 운영화성 제암리유적지 활성화방안 연구(201311~20144)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설계 및 운영계획 수립 위탁 운영(2016~2018)

민족문제연구소 창립25주년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후원의 밤(201611)400여 명의 사회원로와 회원들 동참 박근혜 퇴진과 역사정의 실현의 의지 다짐 역사관건립사업 홍보를 강화하는 계기 모금액 평소 18배 증가

한불수교130주년 특별초청전 콜라보라시옹 ndash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201611)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가 해방70년 특별전으로 추진한 lsquo콜라보라시옹rsquo 전시 초청전 국가 차원의 중단없는 과거청산 사례 소개

2013년부터 정례화한 시민강좌와 역사답사 정착독립운동가 관련 강좌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4middot19답사 등 매회 50여명 이상 참여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21: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19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여기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 진실 알리기 대중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판 유골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 촉구 국제회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개최 일본 산업유산 반대 캠페인-피해자 구술영상 징용시설 제대로 보기 가이드북 제작 등

2012

2015

2017

2016

참역사를 지켜낸 주인공그날의 lsquo당신rsquo을 찾습니다(201218~19) 2004년 lsquo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의 힘으로 오마이뉴스 네티즌 모금rsquo에 참가한 기부자 찾기 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보급운동 캠페인(20121~현재)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보급 운동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친일인명사전 기부 프로젝트〉(아름다운재단)2009년 11월 8일 발간 이후 7년간 약 1만질 보급 수익금 10억여 원 역사관 건립기금 적립

〈식민의 유산 유산의 추억〉 순회 전시와 금지곡 콘서트(20126~12)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념관middot동상 건립 등 이승만middot박정희 독재미화 및 전방위적인역사왜곡 시도에 반대 캠페인 진행 민주주의와 인권유린의 lsquo유신체제rsquo 재조명하는 심포 전시 시민강좌 lsquo금지곡rsquo 콘서트 진행

〈백년전쟁〉 등 영상매체 통한 역사관 홍보(201211) 이승만middot박정희 친일독재의 역사은폐를고발한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내가 겪은 강제동원〉 〈금지된 노래〉 〈긴급 리포트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 〈lsquo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rsquo의 진실〉 등 다수 제작 (유튜브 MinjokMovie 채널)

소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한 강제동원 문제 대중화(20152~)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장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사회적 관심도 제고다음 스토리펀딩 3차 진행 텀블벅 진행

한일협정50년광복70주년 특별기획(20156~8)한일과거청산운동 50년사 조망하는 전시와 강좌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개최 일본 징용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lsquo부의 세계유산과 미래가치rsquo 해외전시 개최

lsquo국치일rsquo을 아십니까(2016829)본격적인 건립기금 모금 캠페인 시작 1달 만에 6500여만 원 모금10만원 이상 발기인 기금 소액 저금통모금 등 성원 이어져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lsquo역적rsquo(20175)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 9년간의 역사적폐를 청산하자는 촛불혁명의 역사적 소명을 담아 기획 적폐의 주범 역사쿠데타의 음모와 논리 우리의 과제들을 다룸

국정교과서 폐지운동 및 촛불시민집회 기록활동국정교과서 폐지운동(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촛불시민집회 영상 기록 및 자료수집활동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22: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20 201708

건립기금총 55억원건물매입비51억원+

기타비용(리모델링+수수료+세금+이전비용등) bull 송기인 신부 lsquo마중물rsquo기금 2006~2007년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재임시 2년간 급여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역사관건립기금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부 마중물기금 2억원회원과 시민 모금 (발기인소액기부) 11억원일본 시민(780명)과 단체 모금 7천만원친일인명사전 앱 판매 기금 11억원법인 기본재산 등 출연금 12억3천만원추가모금 목표액 18억원

식민지역사박물관모금현황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23: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21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발기인 2690명소액참여 1563명기타 1명

회원 1746명비회원 2507명기타 1명

기금참여자4524명

1095236596원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24: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이

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

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

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

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985172함께만들자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985173이라는리플릿 4만부를만들

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

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

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985172주간 금요일985173(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잡

지) 985172사회신보985173(사회민주당기관지) 985172신문우즈미비985173(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

문) 985172페민985173(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

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

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

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

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

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운동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야노 히데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과일본을잇는모임사무국장제4회임종국상수상자

22 201708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25: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23

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

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lsquo위안부는 매춘부였다rsquo lsquo강제연행은 없었다rsquo

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lsquo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rsquo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

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lsquo가짜뉴스rsquo

가 아니라 lsquo팩트rsquo로 또한 lsquo대안적인 설rsquo로 사회적으로 lsquo통용rsquo(=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

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

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

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

을 lsquo전쟁하는 나라rsquo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lsquo위안부rsquo 서술을 삭제

하고 lsquo도덕rsquo 과목을 신설하여(lsquo수신rsquo 과목 부활) lsquo교육칙어rsquo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

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

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lsquo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

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rsquo(1995년 무라

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lsquo국민정부rsquo와 lsquo참여정부rsquo의 맥을 이어 lsquo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rsquo 문재인 정

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

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

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

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

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

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26: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임종국 인명카드에서 7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기까지

연구소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한국근현대사 한일관계사 재외동포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middot소장하고 있다 주요자료는 일제식민지지배와 민중생활사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전시체제와 강제동원 자료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 도서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청산운동 자료도 수집했다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을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 과거청산운동 관련 종합자료센터로서 발돋움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소장자료 현황

김승은 자료실장강동민자료팀장

24 201708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27: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bull lsquo강제병합100년rsquo을 계기로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제 제기 bull 중단된 과거사 청산 추진과 역사범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중요성 대두 bull 역사수정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 역사인식의 우경화에 대응하여 식민주의 극복과 미래를 위한 역사 쓰기 추구

bull 동아시아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일 시민연대 운동 확산

자료수집배경

bull 1980년대 후반 일본 전후책임 문제 대두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종식과 민주화운동 확산bull 1990년대 일본 전쟁책임과 전후보상 운동 본격화 한국에서도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과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 운동 전개

bull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후 일제 식민지배 실태 규명과 친일 청산 운동 대중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bull 식민지 지배구조와 친일논리 규명 위해 일제강점기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유물 등 다양한 자료 수집 본격화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 착수

bull 과거사청산 여론 활성화 위한 연구서 출판 학술회의전시회 개최 bull 2000년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 추구-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운동 및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추진

bull 방대한 정보화를 기반으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편middot국외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전98권) 친일인명사전(전3권) 등 편찬

25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28: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주요자료

1만 3천장 인명카드에서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기초 사료 bull 985172조선총독부 관보985173 985172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 직원록985173 등 관찬 사료 23종 200여 권

bull 985172매일신보985173 985172경성일보985173 985172만선일보985173 등 신문자료 40여 종 잡지middot기관지 80여 종

bull 985172조선신사록985173 등 명감류 14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middot회고록middot평전류 1500여 종

bull 각 도middot시middot군지 등 지지류 160여 종 각종 연감middot사전류 60여 종 등 총 3000여 종

일제침략과 식민지 민중의 삶에 관한 자료 bull 청일middot러일전쟁기 lsquo일한병합rsquo 관련 문서 사진 지도 훈포장 등

bull 일제 식민 통치 선전 책자 기념사진 포스터 기념품 등

bull 군middot헌병middot경찰 등 억압기구 관련 공문서 사진 도서

bull 일제강점기 교육 농촌계몽 등 기타 생활사 관련 자료

bull 전시체제기와 강제동원 관련 유물 유품

항일운동bull 독립운동가 개인 일기 유품

bull 삼일운동 당시 함경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관련자 재판 기록

bull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 등

한국 근현대사와 과거사청산운동 관련 자료 bull 한국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헌 4만여 권

bull 해방 후 주요 인물middot사건middot재외동포사 관련 사진middot일기middot유품 등 개인기록물

신문middot잡지middot희귀도서 등

bull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문서스크랩 66권 약 3만매

bull 국가 차원 과거사 진상규명 보고서류

bull 연구소 간행도서 47권 학술회의 자료집 103권 연구보고서 148권

근대 체험 세대 회고 동영상 자료 bull 생존 독립운동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영상 200여 편

bull 전후보상 재판과 지원 활동 등 기록 영상 500여 편

26 201708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29: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27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30: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소장자료 활용 전시

20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실상을 알리는 기획전시 개최 bull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의 진상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등

전국 30만 명 이상 관람

bull 서대문형무소 주요 전시장으로 활용 대중에게 일제강점기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관련 전시 개최 bull 강제동원 관련 명부 한국 국회에서 전시(2001)

bull 〈시베리아억류자 귀환 60주년 자료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개최(2009)

bull 한국인 BC급 전범 관련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2013)

해외 전시 개최 bull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교토YMCA회관 고려박물관 등에서 〈거대한

감옥巨大な監獄식민지조선에 살다植民地朝鮮に生きる〉 특별전 개최(2011)

bull 일제 강제동원 시설 세계유산 등재 반대캠페인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독일 본Bonn 개최 2015)

국공립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 소장자료의 전시출품 bull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중명전 등 국립박물관 서울middot전주middot군산 등 시립박물관

김제아리랑문학관 백산안희제기념관 등 지역 박물관에서 기획전 개최

bull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 다수 박물관에 소장자료 전시출품

28 201708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31: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29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32: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소장자료 활용 출판 방송 영상물

bull 청소년 도서 역사 전문 도서 교과서 등에 자료사진 제공

bull 3middot1절 8middot15 특집 다큐 뉴스 등 보도자료 제공

bull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백년전쟁(1편) 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등 다수 역사다큐 제작

소장자료 활용 교육교재 개발

bull 청소년을 위한 강제동원 피해 자료집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DVD)

서울시내 학교에 배포

bull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듣는다〉 학교 순회 강연회 개최

bull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 광주middot제주middot충남 소재 학교 순회 전시

30 201708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33: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31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34: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32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자료 여러분이 보내주신 자료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35: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33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 안창호 선생 순국 직후 차리석 선생이 친필로 쓴 도산선생 약사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 채영희 회원 대구지역 숨은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들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회원 독립지사와 친일파 친필 서한부터 일제강점기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금융조합 관련 생활사 자료 등 2012년부터 매달 기증한 자료가 5천 점에 가깝다

마지막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친필 휘호와 유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세요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기증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 주세요강제동원 피해자 유품 기증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 사진 사지에서 보낸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시아버지의 유골함 아버지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남편의 애끓는 편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홀로 되신 어머니 사진 등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에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해달라고 당부했다

강제동원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이 자료를 통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36: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34 201708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공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평생 모은 소장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회원들

평생 모은 자료를 선뜻 내어준 기증자들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를 바랐다 윤정옥 선생이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흔적을 평생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서류상자 220개 분량이다 연구소는 윤정옥 선생의 당부에 따라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관련 자료를 모두 스캔하여 관련 시민단체와 공유할 예정이다 천황제와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해온 즈시 미노루 씨도 평생 수집한 일본 침략신사 자료 전체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소는 침략신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세계 시민과 함께 할 전쟁 반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운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종극 문응상 김옥남 회원이 평생 수집해 온 애장품을 기증했다 임부륙 최지한 박동규 등 전국의 회원들도 다양한 생활사 유물들을 기증했다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37: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35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범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합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본인의 기증

십년지기 교류협력기관 고려박물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하라다 교코 이사장 등 고려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년 연구소를 방문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꾸준히 기증하고 있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의 자료 기증 히다 유이치 야노 히데키 시모지마 요시스케 고바야시 히사토모 다케우치 야스토 씨 등이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발굴하거나 피해자 지원 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기증하고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전한 청각장애 일본인의 기증자료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rsquo에서 자료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기증자를 만나 모은 자료를 한국에 보내오고 있다

9년의 재판 투쟁 기록을 기증한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rsquo강제동원 피해보상 종합재판이라 불린 lsquo재한군인군속재판rsquo을 비롯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기록을 망라하여 대일과거청산 소송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예정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평화를 외치는 오키나와 사람들오키나와로 끌려간 피해자 유가족들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운 lsquo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rsquo이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과 그들의 활동 기록을 기증해 주었다

일본군lsquo위안부rsquo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의 기증자료 1990년대 일본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김상희 강순애 박복순 황금주 할머니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과 유품을 기증해 주었다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38: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36 201708

해외 동포의 삶과 애환도 꼭 기록해 주세요 해외 회원들의 자료 기증

고인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사례

분단된 조국 분단된 동포사회 여전히 차별받는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을 기증한 조영숙 회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에서도 활동하신 이덕문 회원 518민주화운동 이후 독일 동포사회가 앞장선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록을 전한 원병호 회원

돌아가신 후에도 고인의 삶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여정에 함께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품이 기증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인의 흔적 미래를 위한 기록으로 남기는 유품 기증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 이돈명 초대 이사장 고 윤무한 전 김영삼 대통령 연설비서관 고 정창석 동덕여대 교수 그 외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강혁 회원의 소장도서도 김재광 전 경기북부 지부장의 소개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39: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37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앞장선 사회 원로의 소장자료

역사학자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규명위 초대 위원장 1980년 해직교수협의회 성명서 임종국middot박경리middot리영희 선생과 교류한 편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자료와 사진

역사학자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 친일반민규명위 2대 위원장 서지 수집가로도 알려진 고 성대경 선생이 기증한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기문

역사학자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 정권기 성균관의 수난사를 기록한 자료

역사학자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lsquo유신체제라는 커다란 감옥rsquo을 벗어나고자 했던 1970년대 노동인권민주화 운동 자료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유린의 참혹한 유신시대의 생생한 증거 기록

그 외 박용일 변호사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소장도서도 기증되었다

정리 안미정자료실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40: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lsquo사회는 없다rsquo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lsquo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

져야 하는가rsquo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

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

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

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lsquo자본주의의 황금기rsquo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

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983661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lsquo자본의 거대한 재구

성rsquo과 lsquo노동의 국제 분업(화)rsquo를 수반한 lsquo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rsquo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lsquo정부의 실패rsquo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

기라는 lsquo신자유주의rsquo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

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lsquo영국사

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middot억압middot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rsquo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ldquo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

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

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rdquo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김민철 책임연구원

38 201708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41: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39

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

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

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lsquo자학사관rsquo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

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

계급의 역사전쟁이 lsquo역사수정주의rsquo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

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

년의 lsquo비트부르크 사건rsquo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

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

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

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helliphellip 그들도 강제수용소

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rdquo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

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

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lsquo자유

주의사관론자rsquo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

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rarr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rarr 극우 교과서

제작 rarr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

은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

는 처음에는 일본군lsquo위안부rsquo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lsquo커밍아웃rsquo하

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

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

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lsquo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42: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40 201708

lsquo이명박근혜rsquo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lsquo포괄적인 과거청산rsquo 정책을 추진하자 보

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lsquo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rsquo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lsquo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rsquo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lsquo자학사관rsquo lsquo종북좌파사관rsquo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

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

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lsquo조용한 진상규명rsquo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

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

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자학사관rsquo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

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

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

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

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

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lsquo내 마음대로rsquo였다 여당인 새누리

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

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

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

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

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

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43: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41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

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lsquo자학사관rsquo에

대응하는 lsquo자긍사관rsquo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

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ldquo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와 불

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44: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42 201708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

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middot인종차별middot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

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

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rdquo(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

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

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

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

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

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

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

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

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lsquo한강의 기적rsquo을 만들었던 수많은 lsquo난쟁이rsquo들의 이야기를 기억하

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

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

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45: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middot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lsquo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rsquo는 평화와 교육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

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

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

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

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

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

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

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

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lsquo전쟁과 평화를 생

이런 박물관어때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lsquo평화 인권 미래rsquo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일본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규모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지만 지역사회에 발 딛고 오랜 실천운동의 역사를 통해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신하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쿠사노이에 전경

43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46: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44 201708

각하는 자료전rsquo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

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

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

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

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

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lsquo평화박물

관rsquo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

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

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

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

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

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lsquo15년전쟁rsquo(1931

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

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

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

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

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

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

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lsquo피해rsquo와 lsquo가해rsquo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lsquo저항rsquo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쿠사노이에 전시장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47: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45

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

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

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middot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lsquo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rsquo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

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

교 문집과 lsquo간도 빨치산의 노래rsquo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

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ldquo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rdquo이라는 말처럼 자연

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lsquo헌법의 숲rsquo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

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lsquo박물관rsquo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

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

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

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lsquo사사노보효rsquo라는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48: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46 201708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

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

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

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

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

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

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

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lsquo타코베야rsquo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

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lsquo고겐지(光顕寺)rsquo에서 수십 개

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

도 여러 개가 있었다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

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

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

平善彦) lsquo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rsquo 대

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

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middot화

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

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

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

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

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

사사노보효 전시관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49: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47

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

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

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middot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

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lsquo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

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

를 띄우자rsquo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

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

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

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

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

蔡鴻哲 현재 강제연행middot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

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

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middot화장인허가증

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

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

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

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

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

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

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50: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48 201708

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

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

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

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

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

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

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

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middot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lsquo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rsquo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lsquo한일대

학생공동워크숍rsquo(이후 2001년 lsquo동아시아공동워크숍rsquo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

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 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lsquo70년만

의 귀향rsquo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

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51: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ldquo역사가 지금 벌판에서 비를 맞고 굶주리고 거리 시궁창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역사의 집에 모시고 우리 방에 모셔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줘야 합니다rdquo 모금 콘서트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고은 시인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일본제국 침략전쟁 범죄를 명백하게 밝혀두고 기억하여 불의한 역사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종료도 없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굳건한 다짐입니다rdquo

국치106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원 lsquo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rsquo 기증식에서 김판수 회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금을 제안하며 전종훈 신부

ldquo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이 땅의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가 새롭게 발전하는 동력이 되길 기원해봅니다rdquo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ldquo한 평생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항상역사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80 노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작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자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rdquo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Page 52: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1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708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특집호

2017년 8월호(통권251호)2017년 8월 24일 펴냄 펴낸이 함세웅 제호 조문기 펴낸곳 민족문제연구소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83 (청량리동 금은빌딩 3층) 전화 02-969-0226 전송 02-965-8879 누리집 wwwminjokorkr 누리편지 minjokminjokorkr 꾸밈 손기순 제작 디자인내일

제2의 독립군이 되어 주십시오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70년간의 일제침략 식민지배만도 35년 해방 70년

이 넘었지만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와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전시관 하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로 모욕당하는 부끄러

운 현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건국절 제정 등 끝없는 역사반란 시도 이를 방

관한다면 우리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역사와 교육의 위기 앞에서 불의한 거짓

역사를 막아내기 위해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rsquo 모금캠페인

을 전개합니다

국민성금으로 985172친일인명사전985173을 발간한 기적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입니다(가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침탈사와 조선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

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도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블로그 ibuildtistorycom 페이스북 facebookcomminjok

lsquo친일인명사전rsquo 발간의 기적 lsquo식민지역사박물관rsquo 건립으로

역사관건립기금 모금계좌 안내

회원 발기인(10만원 이상) 참여

우리은행 1006-401-235747 시민역사관건립(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시민 참여

우리은행 1005-703-038353 시민역사관(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