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와드 기따에 나타난 끄르슈나의 논증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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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 27(2009), 125159바가와드 기따 에 나타난 끄르슈나의 논증과 그 평가 박효엽 * I . II. III. IV. V. Ⅵ. Ⅶ. Ⅷ. Ⅸ. Ⅹ. Ⅺ. Ⅻ. 요약문 [주요어: 논증, 좋은 논증, 설득, 행위, 도덕] 바가와드 기따 를 논증 중심적 관점에서 읽을 경우, 논증의 화자인 끄르슈나의 결론은 아르주나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결론을 뒷받침하는 4가지 전제들은 ①‘행위를 한다고 해서 죄악이 발생하지 않 ’, ②‘행위를 하지 않음은 그 자체로 죄악임’, ③‘행위 속에서 행위를 하지 않음이 가능함’, ④‘신의 대리자로서 행위를 하는 것은 정당함. 행위에 부정적인 전제과 긍정적인 전제는 행위의 본성을, 이 두 전제를 종합하면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주는 전제은 행위의 방법 , 전제을 강화하는 전제는 행위의 근거를 각각 제시한다. 결과적 으로 끄르슈나의 이 논증은 좋은 논증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사 람 사이에 실제 대화의 형태로 전개되는 설득의 과정에서 보이는 복합 적인 변수들과는 무관하게, 오직 4가지 전제만으로 논증에 설득력이 있 다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현실감 있게 와 닿지 않는다. 즉 논리적 기준 에서 이 논증은 좋은 논증이지만, 대화적 기준에서도 과연 그러한지 평 가해 보아야 한다. 결국 이 논증을 결론과 전제들의 논리적 관계를 중 심으로 평가한다면, 이 논증은 아르주나가 최종적으로 싸우겠다는 결심 을 하는 데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리고 대화적 기준에서 도 이 논증은, 끄르슈나가 최고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아르주나 에게 도덕적 정당성이 확보되는 그 지점에, 좋은 논증이 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진다. Ⅰ. 바가와드 기따 (Bhagavad-gītā, ‘신의 노래’), 오늘날 인도인 * 경북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연구초빙교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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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 제27집(2009), 125~159쪽

바가와드 기따 에 나타난

끄르슈나의 논증과 그 평가

박효엽*

1)

I . II. III. IV. V. Ⅵ. Ⅶ. Ⅷ. Ⅸ. Ⅹ. Ⅺ. Ⅻ.

요약문 [주요어: 논증, 좋은 논증, 설득, 행 , 도덕]

바가와드 기따 를 논증 심 에서 읽을 경우, 논증의 화자인

끄르슈나의 결론은 ‘아르주나는 행 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결론을

뒷받침하는 4가지 제들은 ①‘행 를 한다고 해서 죄악이 발생하지 않

음’, ②‘행 를 하지 않음은 그 자체로 죄악임’, ③‘행 속에서 행 를

하지 않음이 가능함’, ④‘신의 리자로서 행 를 하는 것은 정당함’이

다. 행 에 부정 인 제①과 정 인 제②는 행 의 본성을, 이 두

제를 종합하면서 패러다임의 환을 보여주는 제③은 행 의 방법

을, 제③을 강화하는 제④는 행 의 근거를 각각 제시한다. 결과

으로 끄르슈나의 이 논증은 좋은 논증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사

람 사이에 실제 화의 형태로 개되는 설득의 과정에서 보이는 복합

인 변수들과는 무 하게, 오직 4가지 제만으로 논증에 설득력이 있

다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실감 있게 와 닿지 않는다. 즉 논리 기

에서 이 논증은 좋은 논증이지만, 화 기 에서도 과연 그러한지 평

가해 보아야 한다. 결국 이 논증을 결론과 제들의 논리 계를

심으로 평가한다면, 이 논증은 아르주나가 최종 으로 싸우겠다는 결심

을 하는 데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리고 화 기 에서

도 이 논증은, 끄르슈나가 최고신이라는 사실이 밝 짐으로써 아르주나

에게 도덕 정당성이 확보되는 그 지 에, 좋은 논증이 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진다.

Ⅰ.

바가와드 기따 (Bhagavad-g t , ‘신의 노래’)는, 오늘날 인도인

* 경북 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연구 빙교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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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가장 애독하는 힌두 경 이라는 사실과 별도로, 힌두 사상을

실질 으로 종합하고 있다는 정 평가와 함께 기존 체제를 교

묘하게 수호하고 있다는 부정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우선 이

경 은 ‘아는 것, 행동하는 것, 믿는 것’을 각각 변하는 ‘지혜, 행

, 신애(信愛)의 길(yoga)’을 종합했다고 한다. 즉 기존의 개인

심 이고 해탈 심 인 사변 철학을 그 로 계승한 채, 당 에

실하게 요구된 사회 윤리의 필요성을 충족하면서, 더 나아가

신앙의 체계를 사상계의 변방에서 심으로 끌어들 다고 보는

것이다.1) 반면에 이 경 은, 당 힌두의 지배세력이 불교의 융성

등으로 말미암은 힌두질서의 기를 넘어서기 해, 허용되는 범

내에서 기존 질서를 재구성·재편하려고 시도한 결과 다고 한

다. 이 경 이 카스트에 수반되는 의무 즉 다르마(dharma)의 요

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에서 충분히 합당한 주장이다.

사실 바가와드 기따 에 한 해석은 이러한 두 평가를

벗어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만큼 두 평가가 크게 문제시

되지 않을 정도로 하기 때문에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지 않았

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 의 상과 유명세를 두고 볼 때,

텍스트를 다른 방식으로 읽어보려는 시도가 미약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연 에서 나는 바가와드 기따 를 논증 심 에

서 읽어보고자 한다. 이 경우에 ‘논증 심 ’이라고 함은, 결

론을 지지하는 제들을 찾아내고 그 제들이 결론을 충분히 뒷

1) 바가와드 기따 는 서사시 마하바라따 (Mah bh rata)의 작은

부분이기 때문에 후자의 문화 총화 인 특성이 자에도 반 되어 있다.

고 인도 문화의 총화로 평가받는 마하바라따 는 그 이 시 와

당 의 모든 사고체계를 종합하고 있다. 이 서사시는 어울릴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아리안(베다) 문화와 토착(비베다) 문화, 제식 심 인

라흐만의 사유와 민간신앙 심 인 비 라흐만의 사유, 세속주의와

탈세속주의를 조화시키고자 한다. 한 베다, 우빠니샤드, 상키야, 요가,

불교, 유신론 종 의 교리 등과 같은 다양한 사유 체계들을 종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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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침함으로써 최종 으로 설득력을 가지느냐를 따지는 것에

을 맞추는 근이다. 그리하여 이 에서는 특별히 어떤 새로운

해석의 결과물을 도출하려는 데 집 하지 않는다. 단지 이 경 이

포함된 서사시 마하바라따 의 맥락을 참고하면서 즉 그 서사

의 배경을 고려하면서, 바가와드 기따 의 가르침이 는 서사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느냐를 따져보고자 한다. 그리고 나의 이러

한 근은 바가와드 기따 를 서구 합리주의로 재단하려는 데

목 을 두지 않으며, 오히려 이 경 을 힌두가 아닌 그 구나 공

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로 읽어보려는 데 목 을 둘 뿐이

다. 결국 이 근은 ‘텍스트에 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 하기

해 ‘텍스트를 다른 방식으로 읽어보기’에 가까운 편이다.

Ⅱ.

바가와드 기따 를 논증 심 으로 읽기 해서는 마하바라

따 라는 서사의 맥락을 먼 알아야 한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

음과 같다.

① 옛날 북인도의 꾸루(Kura) 지방에 형인 드르따라슈뜨라(Dhṛtara

ṣṭra)와 동생인 빤두(P ṇḍu)라는 두 왕자가 살았는데, 형이 장님이었

기 때문에 동생이 왕 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② 형에게는

10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까우라와(Kaurava, 꾸루의 후 )라

고 불 고, 동생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빤다와(P ṇḍav

a, 빤두의 후 )라고 불 다. ③ 빤두 왕이 은 나이로 죽자 장님인

형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동생의 5아들을 잘 길 고 그 가운데 장남을

왕 계승자로 삼았다. ④ 까우라와 사 들이 빤다와 5형제를 박해했

지만 이를 잘 견뎌낸 5형제는 왕국의 반을 얻어 번 한 나라를 만들

었다. ⑤ 그러나 도박을 좋아하는 맏이인 왕이 까우라와 측과의 도박

에서 패함으로써 왕국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12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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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를 당했다. ⑥ 유배생활을 끝내고 나서 왕국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까우라와 측은 거 하 고, 그로 인해 양측은 각각의 동맹군과 함께

꾸루 벌 에서 18일 간의 쟁을 벌 다. ⑦ 빤다와 측이 승리한 결과

로 100명의 사 들은 모조리 죽었고, 빤다와 5형제는 왕권을 되찾았으

나 비통과 속죄로 가득한 여생을 보냈다.

바가와드 기따 는 18일 쟁의 첫날 양측의 군 가 마주하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불의의 집단으로 간주되는 까우라와의 1

00형제와 정의의 집단으로 간주되는 빤다와의 5형제는 사 사이

지만 장에서 불구 척의 감정으로 립해 있다.2) 이 가운데 5

형제의 셋째인 아르주나(Arjuna, 이하 A로 표기함) 왕자와 그의

친구인 끄르슈나(Kṛṣṇa, 이하 K로 표기함) 신3)이 바가와드 기따

의 두 주인공이다. 당 최고의 장수인 A는, 비슈 (Viṣṇu) 신의

8번째 화신(권화)으로 태어난 K가 마부로 나선 마차를 타고 장

의 한복 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A는 이 한 상황에서 쟁에

참여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K는 그가 쟁에 참여

하도록 끊임없이 설득한다. 바로 이 설득을 목 으로 하는 K의

노래가 바가와드 기따 이다.

사실 바가와드 기따 는 마하바라따 의 정 즉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 마하바라따 의 이야기는 행 규범이자 도덕 당 인

다르마4)를 따른 측이 그 지 않은 측과 립할 경우 자가 필연

2) 이 18일 쟁은 내면의 쟁이 아니라 실제 쟁이다. 마티랄은 이

쟁이 선·악 이분법이나 정의·불의 이분법으로 나눠지는 흑백의 쟁이

아니라, 아주 실감 있는 회색 쟁이라고 쓴다. Matilal(2002) p. 94

참조.

3) K는 마하바라따 에서 독특한 상을 가진다. K는 주로 인간 웅으로

등장하지만 바가와드 기따 에서처럼 최고신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는

18일 쟁에서도 신성을 사용하지 않고 여러 인간 간계를

사용하여 빤다와 측의 승리를 이끌어낸다.

4) 앞서 ‘다르마’를 ‘카스트에 수반된 의무’라고 말하 지만, 이 용어는

다의 인 동시에 규정하기 힘들다. ‘다르마’는 ‘세계의 질서’, ‘행 규범’,

‘도덕 당 ’, ‘특정 상황에서 올바른 행 ’ 등 인간과 사회의 행 규칙과

련된 뜻으로 자주 사용된다. 그리고 이 다르마는 반드시 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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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승리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에,5) 쟁은 피할 수 없는 실

이어야 한다. 이 불가피한 쟁의 첫날에 신이 인간에게 다르마의

요성을 가르친다. 그래서 이야기 구조상 정에서 바가와드 기

따 의 가르침은 정서 긴장감과 함께 집 력을 이끌어냄으로써

생명력을 가진 경 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다르마의

쟁’(dharma-yuddha)6)으로서 이 쟁은 신이 정의의 승리를 이

끌기 해 변수 가운데 하나인 A의 고민을 해소하는 데

을 맞출 수밖에 없다. 그리고 K가 A를 설득하는 과정은, 물론 당

연히 설득에는 성공하겠지만, 당시 힌두 사회에서 다르마가 정당

화되는 하나의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지표라고도 할 수 있다.

Ⅲ.

바가와드 기따 에 한 논증 심 근은 인도 독립 운동사

에서 표 강경 이자 문헌학자이기도 한 띨락(B. G. Tilak, 18

56-1920)의 해설서와 심재룡의 에서 그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자는 행 (karma)라는 심어를 축으로 바가와드 기따 에

한 천편일률 인 기존의 해석을 탈피하면서, 윤리 결단 앞에서

않고 상 이기도 하다.

5) 다르마에 속한 측에 승리가 속한다는 말은 곧 K가 속한 측에 승리가

있다는 말이라고 마티랄은 쓴다. Matilal (2002) p. 99 참조: yato dharmas

tato jayaḥ.=yataḥ Kṛṣṇas tato jayaḥ.

6) 바가와드 기따 의 첫 시구인 1.1은 “다르마의 벌 인 꾸루의 벌 에”로

시작한다. ‘꾸루’(Kuru)라는 실제 지명의 벌 을 ‘다르마의 벌 ’으로

명명한 것은 이 쟁이 다르마의 우열을 따지는 데 목 이 있음을

시사해 다. 다르마의 쟁을, 가 다르마에 충실한지 정이 내려지는

다르마 추수의 쟁, 다르마를 따른 측과 따르지 않은 측 사이에 벌어지는

쟁, 무사 집단의 행 규범을 수해야만 하는 쟁, 쉽게 규정될 수

없는 다르마의 특성을 보여 과 동시에 삶의 노라마를 보여주는 쟁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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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A의 회의와 그를 설득하는 K의 응답을 핵심 구조로

악한다. 후자는 바가와드 기따 에서 A가 직면한 딜 마를 시작

으로 K가 그 딜 마를 해소하기 해 내놓는 묘수들을 찾아내면

서, 과연 K의 설득이 성공하 는가를 순차 으로 따지고 있다.

먼 띨락이 제시한 것 가운데 획기 인 사항은 다음 세 가지

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바가와드 기따 를 마하바라따 의 맥

락에서 읽어야 한다. 둘째, 그러할 경우 바가와드 기따 의 주제

는 지식이나 신애가 아니라 행 이다. 셋째, 그러할 경우 바가와

드 기따 는 행 를 거부하는 A에 해 K가 행 를 구하는 내

용이다.7) 결국 띨락은, 바가와드 기따 체를, 세 가지 요가를

심으로 나 는 통 인 분류법8)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나

고자 한다. 이를 김호성은 ‘① A의 회의 → ② K의 설득 → ③

A의 참 결심’9)으로 표 하고 있다. 각각에 해당하는 내용을 정

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주인공 A는 장에 도열해 있는 군들

사이에서 자신의 스승과 친척 들을 알아보고는 도덕 딜 마에

빠진 채 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② 다른 주인공 K는 이

러한 A가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지 하면서 쟁에 참여해야 하

는 이유를 제시한다. ③ K의 설득에 의해 A는 쟁에 참여할 것

을 결심한다. 그러므로 띨락의 근은 논증 심 근을 가능

하는 방식으로 바가와드 기따 의 이야기 구조를 분석하고 있는

7) Tilak(2004) ‘Author's Preface’, ‘Part I의 Chapter 3’, ‘Appendix의 서론

Part I’을 참조하시오. 띨락의 바가와드 기따 해석에 해서 김호성이

잘 정리해 놓았음. 김호성(2004)을 참조하시오.

8) 컨 라마 자(R m nuja, 1017–1137)는 첫 번째 6개 장(1장~6장)에서

지혜의 요가를 동반하는 행 의 요가를, 두 번째 6개 장(7장~12장)에서

인격신의 본성과 신애의 요가를, 세 번째 6개 장(13장~18장)에서

세계· 혼의 본성과 세 요가에 한 심층 탐구를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마두수다나 사라스와띠(Madhusūdana Sarasvat , 16-17세기)는 첫 번째

6개 장에서 행 의 요가를, 두 번째 6개 장에서 신애의 요가를, 세 번째

6개 장에서 지혜의 요가를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9) 김호성(2004) p. 202 참조. 김호성은 Tilak(2004)의 pp. 34-36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주 선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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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이다.

다른 한편, 심재룡 역시 바가와드 기따 가 “첫째 가름 ‘고민’에

서 시작하여 마지막 열여덟째 가름 ‘결론’에 끝마 을 하는데,

간 가름들은 이 ‘고민’의 해결 내지 해소를 한 방법을 노래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10)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A의 고민은 바로

도덕 딜 마이다. 이 딜 마란 ‘싸우면 상 편 을 죽여야 하

고, 그 지 못하면 자신이 죽게 된다.’라는 내용, 즉 다시 말해서,

‘싸우면 자신의 친족을 죽여야 하고, 싸우지 않으면 무사로서 자

신의 다르마를 어기게 된다.’라는 내용이다.11) 이러한 딜 마를 제

시한 후 심재룡은 K가 ‘ 한’ 세 가지 설득을 제시한다고 하는

데, ‘육체를 죽여도 혼을 죽일 수 없다는 것’, ‘무사의 의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 ‘비겁하게 물러서지 말고 죽어서 극락에

가거나 살아서 지상의 왕국을 차지하라는 것’이 그 세 가지이

다.12) 마지막으로 심재룡은 ‘고차원 인’ 묘수 세 가지 즉 논증 세

가지가 K에 의해 제시된다고 말한다: ① 선험 논증- 변화하는

것은 진짜 있는 것이 아니지만, 실재( 혼)는 선험 으로 진짜 있

는 것이다. ② 특수(요가)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논증- 특수한 요

가체험을 통해 원불변하는 자아를 알 수 있다. ③ 자 신을

믿고 사랑하면 만사형통- 인간은 신의 수단으로서 무조건 으로

신의 말을 따라야 한다.13) 이런 까닭에 심재룡의 근은 순 히

논증 심 인 근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연구 결과에 기 어 논증을 심으로 바가와드

기따 를 나 면 다음과 같다.

10) 심재룡(1988) pp. 258-259.

11) 앞의 책, pp. 259-264 참조.

12) 앞의 책, p. 265 참조.

13) 앞의 책, pp. 267-279의 내용을 요약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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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논증

주체주장 논증 결과

1.1~2.914) A ‘싸우지 않겠다.’ A: 체념과 요청

2.10~18.78 K ‘싸워야 한다.’K: 설득의 성공

A: ‘싸우겠다.’

이 경우에 반부는 A가 회의에 빠지고 체념함으로써 ‘싸우지

않겠다’고 단한 뒤에 K에게 가르침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후반

부는 K가 여러 논거들을 통해 ‘싸워야 한다’고 설득에 성공함으로

써 A로 하여 ‘싸우겠다’는 최종 단을 이끌어내는 내용이다. 그

런데 간략한 편에 속하는 반부 A의 논증이 아니라, 후반부 K의

논증이 바가와드 기따 의 핵심이다. 즉 K의 논증이 A를 설득하

는 목 을 달성하는 데까지의 과정이 이 경 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K의 논증 과정이 A가 당면한 고뇌에 해

한 해결책을 주고 있는지 그 논증을 구성하고 평가해 볼 필

요가 있다.

Ⅳ.

K의 논증을 재구성하기 해서는 A의 논증을 간략하게 살펴보

아야 한다. 황을 시찰하기 해 양 군 의 간으로 나아간 A

는[1.20-1.24], 자신이 쟁에 참가할 경우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

고 제하면서 승리할 경우에 발생하는 두 가지 결과를 비교한다.

하나의 결과는 왕국·쾌락·즐거움 등등이고, 하나의 결과는 주

요 다르마의 연쇄 붕괴15)이다. 자는 좋은 결과이고 후자는 나

14) 앞의 숫자는 ‘장’을, 뒤의 숫자는 2행으로 된 시구의 번호를 지시한다.

컨 , ‘2.9’는 2장 9번 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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쁜 결과이다. 그리하여 A는 싸우는 선택지에서 좋은 결과의 ‘좋

음’이 있음에도 나쁜 결과의 ‘나쁨’이 더 심각하다고 단함으로써

[1.28-1.46], 좋은 결과를 얻기보다 나쁜 결과를 막고자 하는 의도

에서 K에게 싸우지 않겠다는 의사를 간 으로 내비친다. 이러

한 A의 논증은,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 사이에서 A가 내린 단

을 생략한 채로 규정하자면, 다음과 같이 가언논법이자 후건부정

논법이다.

만약 내가 싸운다면, 친족을 살해하는 죄악을 지르고 그 결과 주

요 다르마가 연쇄 으로 붕괴된다.

나는 친족을 살해하는 죄악을 지르고 그 결과 주요 다르마가 연

쇄 으로 붕괴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싸우지 않겠다.

그러나 A가 마차에 주 앉으며 체념하고 있을 때[1.47, 2.1], K

는 무사인 A가 나약함에 빠져 있음을 꾸짖는다[2.2-2.3]. 즉 A가

무사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에 A는 여

히 스승을 죽일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이 싸워서 승리할 경

우의 결과와 자신이 싸우지 않아서 패배할 경우의 결과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지 모르겠다고 말한다[2.4-2.6].16) 바로 여기에

직 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A의 숨어 있는 딜 마가 놓여

있다. A의 딜 마는 복합구성 딜 마로서 다음과 같다.

만약 내가 싸운다면 주요 다르마가 연쇄 으로 붕괴되고, 싸우지

않는다면 무사의 다르마가 무시된다.

나는 싸우거나 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요 다르마가 연쇄 으로 붕괴되거나 무사의 다르마가

15) 주요 다르마의 연쇄 붕괴란, 친족 살해로부터 가족(kula) 다르마의

붕괴, 가족 다르마의 붕괴로부터 계 (varṇa, j ti) 다르마의 붕괴이다.

16) 단 으로 말해서 이 부분은 A 스스로 자기 단이 마비되었음을

시인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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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된다.

이 딜 마는, 싸우는 선택지만을 고려하는 A에게 K가 싸우지

않는 선택지 역시 고려해야 함을 조언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

자 이 딜 마에 빠진 A가 이번에는, 도 체 다르마가 무엇인지

혼돈스러우니 K에게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2.7]. 즉 ‘싸워서 주

요 다르마가 연쇄 으로 붕괴되는 것’과 ‘싸우지 않아서 무사의

다르마가 무시되는 것’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해서는 다

르마에 해 분명한 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A는 자신

이 싸워 승리하더라도 이 슬픔을 제거할 수 없을 거라고 고백하

면서 최종 으로 싸우지 않겠다는 의사를 K에게 한다[2.8-2.9].

결국 A에게 가장 요한 것은 자신이 싸우는 선택지를 선택한 뒤

에 발생하게 될 나쁜 결과이다. 그 나쁜 결과가 자신을 압도함으

로 말미암아 A는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요컨 , A는 싸우는 선택지만을 고려하면서 나쁜 결과를 논거

로 삼아 싸우지 않겠다는 삼단논증을 펼치지만, K는 싸우지 않는

선택지를 A에게 일깨워 으로써 A를 딜 마에 빠지게 한다. 다르

마의 가치서열과 계되는 이 딜 마는 A로 하여 싸우지 않는

선택지를 다시 고려하게 만들지만, A는, K가 어떤 이유에서 ‘싸워

서 주요 다르마가 연쇄 으로 붕괴되는 것’보다 ‘싸우지 않아서

무사의 다르마가 무시되는 것’을 더 심각하다고 암시하는지 도

체 알 수 없다.17) 그래서 다르마를 가르쳐 달라는 A의 요청은,

17) 다스굽따는 승서(Smṛti) 문헌이 계하는 한 모든 카스트가 수해야

하는 ‘일반 ·공통 의무’(s dh raṇa-dharma)가 ‘카스트

의무’(varṇa-dharma)나 ‘아슈라마 의무’( śrama-dharma)와 같은 특수한

의무들과 충돌하면 후자가 우세해야만 한다고 쓴다. 그는 이 로서

끄샤뜨리야인 A에게 K가 쟁에서 싸울 것을 구하는 것을 들고 있다.

Dasgupta(1994) pp. 94-95 참조. 따라서 K가 ‘싸워서 주요 다르마가

연쇄 으로 붕괴되는 것’(그 시발 으로 친족을 살해하는 것)보다

‘싸우지 않아서 무사의 다르마가 무시되는 것’이 더 심각하다고 암시한

것은 다르마에 한 통 견해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 이 경우에

살인을 하지 말라는 것은 일반 ·공통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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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의 다르마를 무시하지 않고 따르는 것’ 즉 ‘ 쟁이라는 의무

를 수행하는 것’이 왜 더 가치 있는 행 인가를 묻는 것이다. 즉

A는 재 자신의 생각을 통해 싸우는 선택지의 나쁜 결과 때문에

싸우지 않겠다고 결정하는데, 이와 달리 싸우지 않는 선택지의 나

쁜 결과18) 때문에 싸워야 한다고 종용하는 K에게 왜 그러한지 이

유를 묻고 있다. A는 만약 K가 자신의 재 결정을 넘어서는 좋

은 이유를 제시한다면, 싸우지 않는 선택지의 나쁜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 받아들인 채 싸울 비가 되어 있다. 그 지만 K가 그

것을 제시해 주기 까지는, 싸우는 선택지의 나쁜 결과로 말미암

아 자신의 재 결정이 싸우지 않겠다는 선택지임을, 마지막으로

K에게 달하며 싸우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A는 싸우는 선택지의 나쁜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한 A는 다르마의 갈등 상황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이에 K는 바가와드 기따 체에서 ‘행 의 결과를 고려하

지 않은 채 자신의 다르마(의무)를 행하라.’고 설교한다. 즉 다르

마의 갈등(딜 마) 상황 아래선 결과에 해 연연하지 말고 그

자기 다르마를 행하는 것이 최선책임을 지속 으로 강조한다. 이

단순한 해결책을 K는 어떤 식의 논증으로 구체화하고 있는 것일

까?

Ⅴ.

A를 설득하고자 하는 K의 결론은, 싸우지 않으려고 하는 A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즉 결론은 ‘(행 를 거부하는) A는 행 를

해야 한다.’이다. 이러한 K의 결론을 지지하는 제들은 4가지이

18) 싸우지 않는 선택지의 나쁜 결과란 무사의 다르마가 무시되는 것이요,

그 구체 인 양상으로는 ‘불명 ’ 등이다[2.31-2.38].

1 3 6 ∙ 印度哲學 제27집

다.19)

결론: A는 행 를 해야 한다 = [A는 싸워야 한다.]

제①: 행 를 한다고 해서 죄악이 발생하지 않음 = [A가 싸운다고

해서 죄악을 지르는 게 아니다.]

제②: 행 를 하지 않음은 그 자체로 죄악임 = [A가 싸우지 않는다

면 무사의 의무를 버리는 짓이다.]

제③: 행 속에서 행 를 하지 않음이 가능함 = [A는 싸움의 결과

에 한 집착 없이 싸울 수 있다.]

제④: 신의 리자로서 행 를 하는 것은 정당함 = [A가 신을 염두

에 두고 싸우면 그 싸움은 정당하다.]

이상의 4가지 제는 바가와드 기따 체에 등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제①과 제②는 각각 2.11-2.30과 2.31-2.38에 등장

한다. 따라서 이 2가지 제는 비교 선명하고 간단한 방식으로

알려지는 셈이다. 그와 달리 제③과 제④는 경 의 체에 골

고루 등장한다. 이 경우에 제①은 지혜의 요가, 제③은 행

의 요가, 제④는 신애의 요가와 각각 련되어 있다. 이 3가지

요가가 바가와드 기따 의 핵심 가르침이라고 알려져 있는 만큼,

‘1장 부’와 ‘2장에서 제①과 제②가 련된 부분’을 제외한

경 체는, 제③, 제④를 직 으로 드러내거나 제①,

제③, 제④를 보충하는 논의들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다.

19) 여기서 나는 ‘행 ’를 심어로 하는 결론· 제들과 ‘[]’ 안의 내용처럼

‘싸움’을 심어로 하는 결론· 제들을 나 려고 한다. 자는 행

일반과, 후자는 ‘싸움’이라는 구체 행 와 각각 련된다. 분명하게

가를 수는 없지만, 제①과 제②는 주로 후자에 가깝고 제③과

제④는 주로 자에 가깝다. 결국 K는, A의 당면문제인 ‘싸움’이라는

구체 행 에 해, 처음에는 그 구체 행 와 련된 제들을

사용하다가 행 일반으로 확장된 제들을 사용하면서, A를

설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은 이 의 ‘X’에서 다시 언 된다.

바가와드 기따 에 나타난 끄르슈나의 논증과 그 평가 ∙ 1 3 7

Ⅵ.

먼 제①과 제②는 A에게 문제시되는 딜 마를 해결하려

는 K의 시도이다. K는 A의 딜 마를 ‘뿔을 잡는 방법’을 통해 해

소하고자 한다. 이 방법은 두 선언지가 모순 계일 경우에 두 가

언명제 가운데 최소한 하나가 거짓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가와

드 기따 에서 K는, A에게 싸우거나 싸우지 않는 두 선언지 이외

에 다른 경우가 없다는 것을 제한 채로, 두 가언명제 가운데 하

나가 거짓임을 보여 다. 그래서 K는 ‘만약 내가(A가) 싸운다면

주요 다르마가 연쇄 으로 붕괴된다.’라는 명제가 거짓이라는

을 제①에서 증명한다. 당연하게도 ‘만약 내가(A가) 싸우지 않

는다면 무사의 다르마가 무시된다.’라는 명제는 참이다. 그리고 이

것은 제②를 이룬다.

일단 K는 딜 마의 한 뿔인 ‘만약 내가(A가) 싸운다면 주요 다

르마가 연쇄 으로 붕괴된다.’라는 명제가 거짓임을 증명해야 한

다. 이를 해 K는 고통에 빠져 있는 A에게, ‘살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는 식으로 형이상학 인 논증을 펼친다. A가 겉

으로는 지혜로운 단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세계에

한 몰이해(무지) 때문에 고통을 자 하고 있기 때문에, A가 진

정한 지혜를 가져야만 한다고 암시한다[2.11]. 그래서 K는 원한

것과 무상한 것, 불멸하는 것과 소멸하는 것, 존재와 생성, 실재와

비실재, 혼과 육체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단 으로 말해 각각에

서 후자가 아닌 자를 분별해서 안다면 죽음에 해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할 이유가 없다고 가르친다[2.12-30].20) 따라서 제①

20) 바로 이 때문에 바가와드 기따 에 한 부정 평가가 이어졌다.

장에서 살해를 하더라도 육체만 죽일 뿐 혼을 죽이지는 못하기

때문에 살인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직 으로 련된 시구는

“그( 혼)가 살해한다고 알거나 그가 살해된다고 생각하는 자는, 이 두

가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살해하지도 않고 살해되지도

1 3 8 ∙ 印度哲學 제27집

즉 ‘A가 싸운다고 해서 죄악을 지르는 게 아니다.’라는 논거가

등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혼은 불멸이므로 쟁터에서 군을

살해하는 것은 살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A가 싸움으로써 주요 다

르마가 연쇄 으로 붕괴된다고 생각하는 것의 출발 은 친족 살

해라는 행 이다. 바로 이 친족 살해로 말미암아 가족의 다르마가

붕괴되고 더 나아가 연쇄 으로 계 의 다르마가 붕괴된다. 그

다면 이 연쇄의 출발 인 친족 살해라는 행 에 면죄부를 주면,

A는 그 행 의 결과인 주요 다르마의 연쇄 붕괴를 염려하지 않

아도 된다. K는 바로 이 에 착안하여, 친족 살해를 죄악으로 간

주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A가 싸우더라도 죄악을 지르는

게 아니라고 가르친다. 결국 A가 ‘만약 내가 싸운다면 주요 다르

마가 연쇄 으로 붕괴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A가 싸운다고 해

서 죄악을 지르는 게 아니다.’라는 제를 통해 거짓임이 드러

난다.

한편, 딜 마의 다른 한 뿔인 ‘만약 내가(A가) 싸우지 않는다면

무사의 다르마가 무시된다.’라는 명제는, 앞의 뿔이 거짓으로 드러

났기 때문에 참으로 수용하기만 하면 된다. A가 싸우지 않는다면

무사의 다르마가 무시되기 때문에, A는 싸워야 하는 것이다. K는

A에게 무사로서의 의무를 따르고 명 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축

복임을 알려주면서[2.31-2.32], 의무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 죄악을

래한다고 확언한다[2.33]. 한 불명 가 얼마나 무사로서 끔

한지 부연하여 설명한다[2.34-2.36]. 바로 이것이 ‘A가 싸우지 않

는다면 무사의 의무를 버리는 짓이다.’라는 내용의 제②이다.

이처럼 제①과 제②는 A가 싸워야 한다는 K의 결론을 지

지한다. A가 싸워야 한다는 것은 A가 행 를 해야 한다는 것과

등치될 수 있으므로, 제①은 ‘행 를 한다고 해서 죄악이 발생

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고, 제②는 ‘행 를 하지 않음은 그 자

체로 죄악이다.’라는 내용이다. 제①에서 죽음과 련된 형이상

않는다.”[2.19]이다.

바가와드 기따 에 나타난 끄르슈나의 논증과 그 평가 ∙ 1 3 9

학 분별지를 얻는다면, 행 를 함으로써 주요 다르마가 연쇄

으로 붕괴된다는 망상 즉 죄악이 발생한다는 망상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다. 제②에서 무사로서의 의무를 따른다면, 행 를

하지 않음으로써 무사의 다르마가 무시되는 실수 즉 그 자체로

죄악이 되는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 따라서 싸우는 선택

지를 가지더라도 죄악이 발생하지 않으며, 싸우지 않는 선택지를

가지면 죄악이 발생하므로, A는 싸우는 선택지를 가질 수밖에 없

다. 싸우는 선택지란 곧 행 를 하는 선택지이다.

그런데 K는 당연하게도 제①과 제②를 제시하는 것에 멈

추지 않는다. K는 2가지 제를 제시한 뒤에, “상키야(원리)에

해서 이러한 지식을 그 에게 했소이다. 이제 요가( 용)에

해서 이러한 [지식을] 들어보시오. 쁘르타의 아들이여, [그 가 요

가의] 지식을 얻는다면 행 의 속박을 벗어날 것이오.”[2.39]라고

말한다. 여기서 ‘상키야’(s ṃkhya)란 원리를, ‘요가’(yoga)란 용

을 지시하는데, 쉽게 말해서 자는 원론 인 내용이고 후자는 그

것을 실천하는 것과 련된 내용이라는 뜻이다.21) 요한 은 후

자인 요가를 따를 경우에 행 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요, 심지어 후자를 통해 쟁에서 물러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2.40]. 즉 쟁에서 싸워도 되는 구체 인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요가는 이 의 해결책 는 2가지 제와는 무언가

21) 이 두 용어에 한 이해는 아주 다양하다. ‘s ṃkhya’에 해서

샹까라(Śaṅkara)는 궁극 실재에 한 분별 지식,

라마 자(R m nuja)는 아뜨만이라는 실재, 마드와(Madhva)는

아뜨만이라는 실재에 한 지식이라고 각각 풀이한다. ‘yoga’에 해서

샹까라는 그 지식을 얻기 한 수단(up ya), 라마 자는 행 의 요가,

마드와는 그 지식을 얻기 한 수단이라고 각각 풀이한다. Chari(2005)

p. 11 참조. 자가 지식이고 후자가 그 지식을 얻기 한 방법이라는 데

의견은 일치하는 편이다. 그러나 띨락은 자가 ‘Saṁny sa-m rga’이고

후자가 ‘Karma-yoga’라고 하는데, 나는 이 해석에 으로 동의한다.

Tilak(2004) p. 884 참조. 왜냐하면 곧 이어 언 하겠지만 행 의 요가란

‘행 부정 지식 심주의’(Saṁny sa-m rga)를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이다.

1 4 0 ∙ 印度哲學 제27집

다른 해결책을 암시한다. 제①이나 제②는 순 히 원론 인

해결책이고, 요가는 그것들과는 다른 제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Ⅶ.

K가 말하는 요가는 바가와드 기따 에서 행 의 요가이다. 마

티랄(B. K. Matilal)은 이 경 에 등장하는 립 인 용어들을

응시키는데, ‘s ṃkhya와 yoga’, ‘jñ na와 karma’, ‘buddhiyoga와 k

armayoga’, ‘karma-sanny sa와 karma-yoga’가 그것들이다.22) 이

들에서 원리와 련된 앞의 것들은 거의 유의 이고 용과

련된 뒤의 것들도 거의 유의 이라고 그는 말한다. 실제로 ‘지식·

지혜’나 ‘지식·지혜의 요가’를 가리키는 말들과 ‘실천·행 ’나 ‘행

의 요가’를 가리키는 말들은, 맥락을 따져보면 이와 같이 구분된

다. 이 경우에 자는 ‘행 부정 지식 심주의’로서 행 의 법

칙을 극복하려는 기존의 한 시도이다. 후자 역시 행 의 법칙에

얽매인 삶의 방식을 극복하려는 한 시도이지만, 기존의 시도와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다. 그래서 바가와드 기따 에

서 K가 말하는 행 의 요가는 제③으로 기능하면서 패러다임의

환을 보여 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도철학의 궁극 목표는 해탈이고, 이는 행

의 연쇄를 끊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 행 의 연쇄에 종속

된 채로 행 의 결과에 구속되면서 윤회를 거듭할 뿐이다. K가

원리에 응하는 요가를 주장한 뒤에 베다의 결과 심주의를 비

하는[2.42-2.47]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결과 심주

의를 벗어나는 길은 행 를 부정하기만 하는 방식 즉 지혜의 요

22) Matilal(2002) p. 129 참조.

바가와드 기따 에 나타난 끄르슈나의 논증과 그 평가 ∙ 1 4 1

가만으로 충분치 않다. 곧 행 부정 지식 심주의만으로써 행

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행 를 하지 않고는 구라도 결코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물질성에서 생긴 요소들에 의해 불가피한 행 를 하게

되기 때문”[3.5]이다. 결국 K는 행 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하나의 길을 제시하는데, 바로 그것이 ‘행 들에 해 정통함·숙

련됨으로서의 요가’(yogaḥ karmasu kauśalam)[2.50]이며 행 의

요가이다.23)

그리하여 K의 제①은 행 부정 지식 심주의와 련되

고, 제②는 평범한 사람들의 결과 심 행 주의와 련된다.

제①의 경우 행 를 한다고 해서 죄악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

은, 세계의 진상을 제 로 알기만 하면 행 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지혜의 요가를 변함으로써, 행 는 행 결과를 야기

하는 근본원인인 무지를 기하기 해 지식의 요성을 강조하

는 말이다. 그리고 제②의 경우 행 를 하지 않음이 그 자체로

죄악이라는 것은, 카스트의 의무에 충실하기만 하면 죄악을 지

르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행 가 야기하는 좋은 결과를 염두에 둔

채로 행 를 하라는 말이다. 반면에 제③은 이제 행 속에서

행 를 하지 않음이 가능하다고 알려 다. 즉 제②처럼 행 를

정하면서도 제①처럼 행 의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을,

는 제①과 달리 행 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제②와 달리

행 의 결과에 속박되지 않을 수 있음을 가르친다. 그래서 제③

은 제①과 제②를 일거에 넘어서는 새로운 해결책이 된다.

앞서 K는 A의 딜 마를 해소하기 해 두 선언지가 모순 계

일 경우에 하나가 거짓임을 보여주는 ‘뿔을 잡는 방법’을 사용했

다. K는 처음에 마치 싸우는 선택지와 싸우지 않는 선택지 이외

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듯이 그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23) “포기와 행 의 요가는 둘 다 지고선으로 이끈다. 하지만 둘 가운데

행 의 포기보다 행 의 요가가 우월하다오.”[5.2]. 이 경우에 행 의

포기(saṃny sa)란 곧 지혜의 요가(지식 심주의)이다.

1 4 2 ∙ 印度哲學 제27집

K는 행 의 요가로 A의 주의를 끌면서 ‘싸움 속에서 싸우지 않

는’ 선택지가 가능함을 가르친다. 싸우는 선택지와 싸우지 않는

선택지는 모순 계가 아니라 반 계일 뿐이기에 ‘뿔 사이로 피

하는 방법’을 통해 딜 마의 해소가 가능하다. 실제로 K는 “그

의 권리는 행 자체에 있을 뿐 결과들에 있지 않다오. 행

의 결과들이 [그 행 의] 원인이어서는 안 되오. 그 는 행 를

하지 않음에도 집착하지 마시오.”[2.47]라고 말함으로써, 반드시

행 를 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K는 이 제3의

선택지를 바가와드 기따 의 편에 걸쳐서 끊임없이 강조한다.

바가와드 기따 에서 행 의 요가란 행 의 결과에 한 생각

을 행 의 동인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감각기

을 제어한 가운데 행하기’[3.7, 4.18],24) ‘집착 없는 행 ’[3.19, 1

8.6], ‘다른 사람의 다르마가 아닌 자신의 다르마를 행하기’[3.35, 1

8.47], ‘욕망과 (그 원인으로서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4.19, 6.

2], ‘만족함과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음’[4.20] 등으로 표 된다. 이

러한 표 들은 모두 ‘행 속에서 행 를 하지 않음’이라는 일견

모순 인 제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지속 으로 보여주기 해서

이다. K는, 간단하게 말해, 행 의 원인인 욕망을 제어하고 행

의 결과에 해 집착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행 그 자

체를 따르는 것이 행 의 요가라고 알려 다. 행 를 하는 데 동

기(욕망)나 목 (결과)이 개입되지 않으면 ‘행 로부터의 자유’(nai

ṣkarmya)[3.4, 18.49]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한 어

떤 결과가 나오든지 그것이 크게 요하지 않다는 동등성(sama,

samatva, samat , tulya)25)의 덕목을 가짐으로써 가능하다. 다만

행 가 어떻게 발생하고 행 가 어떻게 속박하는지를 안다면26)

24) ‘행 속에서 행 를 하지 않음’이란 제어해야 할 상이 행 기 이

아니라 감각기 임을 함축한다. 행 는 자연스러우므로 행 기 에 해

부정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반면에 행 를 하지 않음이 가능하기

해서는 감각기 에 해 부정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25) 즐거움과 괴로움을, 좋아함과 싫어함을, 성공과 실패를 동등한 으로

바라보는 것이 ‘동등성’이다. 2.48, 10.5, 14.24-25 등을 참조하시오.

바가와드 기따 에 나타난 끄르슈나의 논증과 그 평가 ∙ 1 4 3

행 의 요가를 실행하기가 용이하다. K가 “무지에 의해 발생하여

마음에 머무는 자신의 그 의심을 지식의 칼로써 베어버리고, (행

의) 요가에 념하여 일어서시오.”[4.42]라고 하면서, 행 의 요

가에 선행조건으로 지혜의 요가가 필요함을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러한 맥락에서이다.

이처럼 제③은 행 를 함에도 행 를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

다는 식으로 딜 마를 ‘뿔 사이로 피하는 방법’을 통해 해소한다.

하지만 행 의 동기나 목 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행

를 하는 것만으로는 결론을 지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

면 도덕 인 문제와 련된 행 는 어떤 식으로든 그 행 의 정

당성을 담보해 무언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비록 무사인

A에게 주어진 행 가 다르마를 다루는 문헌과 습에 규정되어

있다고 할지라도,27) 바가와드 기따 에서 K는 그러한 원천들과

별도로 이제 자기 자신이 신으로서 A의 행 를 보증한다고 확언

한다. 그래서 K는 제③을 보충할 만한 다른 제를 끌어온

다.

26) 바가와드 기따 에서 라흐만·아뜨만·뿌루샤, 쁘라끄르띠, 3구나 등에

한 가르침은 행 의 발생에 한 지식을 하기 해서이다. 그리고

의례나 제사와 련된 가르침은 행 의 속박에 한 지식을 하기

해서이다.

27) “따라서 교서는 그 가 행해야 하는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결정하는 거라오. 교서의 명령에 언 된 행 를 아는 채로 이

세상에서 행해야만 한다오.”[16.24] 다르마의 원천(기 )들로는 ‘베다,

다르마 샤스뜨라, 베다 학자의 미덕, 정직한 자의 선행, 마음의

만족’(Manusaṃhit )이라는 5가지를 들 수 있다. Matilal(2002) p. 57

참조.

1 4 4 ∙ 印度哲學 제27집

Ⅷ.

K는 3장에서 행 의 요가를 본격 으로 가르치다가 행 가

으로 물질성(prakṛti)의 요소(guṇa)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3.2

7]. 그러고 나서 K는 갑작스럽게 “나에게 모든 행 들을 맡긴 채

아뜨만에 한 일념으로, 바람도 없이 이기심도 없이 열정을 버리

고 싸우시오. 이러한 나의 가르침을 항상 신뢰하면서 불평 없이

따르는 사람들 역시 행 들로부터 해방된다오.”[3.30-3.31]라고 말

한다. K는 이제 A에게, 신인 자신에게 모든 행 를 맡기고 신의

리자로서 행 를 하라고 말한다. 이것이 제④로서, A가 신을

염두에 두고 싸우면 그 싸움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의

요가, 행 의 요가에 이어 신애의 요가가 등장한다.

신애의 요성에 해서 K는 어떤 행 이든지 자신을 한

헌으로 여기면[9.27], ‘좋고 나쁜 결과를 수반하는 행 의 속박’에

서 해방되어 신에게 이른다고 가르친다.[9.28] 심지어 악행을 한

사람이나 천한 태생의 사람도 신을 사랑하면 신에게 이른다[9.30,

9.32]. 신에게 이른다는 것은 신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원하고 불

멸하는 곳에 도달함이다[18.56]. K의 이러한 약속은, 결국 K 스스

로가 이미 정해 놓은 결과인 A 측의 승리를 해, A가 단지 수

단(nimitta)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선명하게 확인된다

[11.33]. A의 군들도 이미 K가 오래 에 죽인 자들이다[11.33-

11.34]. A는 그 신의 리자이므로 A의 행 는 신이 정한 이

결과에 한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A는 행 의 결과에 한

집착 없이 그 신의 명령 로 행 를 하기만 하면 된다. 이는

“내 안에서 모든 행 들을 포기”[12.6]하고, “나를 한 행 를 지

고한 것으로 삼”[12.10]는 것이며, “나를 유일한 의지처로 삼”[18.6

6]는 것이다. A가 이 사실을 모른 채로 “자아의식에 의지하여 싸

우지 않겠다고 생각한다면, 이 결심은 잘못”[18.59]된 것이다. 왜

냐하면 신 자신의 기계 에 놓인 모든 존재들은 신의 환술에 의

바가와드 기따 에 나타난 끄르슈나의 논증과 그 평가 ∙ 1 4 5

해 움직이는 수단에 불과함에도[18.61],28) A가 스스로 행 하고

있다는 미망에 사로잡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에서 바가와드

기따 의 심 사상 가운데 하나로 흔히 알려져 있는 ‘거짓 행 자

와 참 행 자 사이의 분별’이란, 신애의 요가라는 측면에서는 ‘신

의 수단인 인간과 최고신 사이의 분별’이다.

만약 행 의 결과가 신의 역에 속한다면29) 행 속에서 행

를 하지 않는 것 즉 행 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 란 충분히

가능하다. 곧 제④를 통해 제③은 강화된다. 인간이 다스릴

수 없는 역에 여하는 것은 속박이고, 다스릴 수 있는 역에

만 여해야 함을 알고 행하는 것이 바람직한 요가이자 자유이다.

실제로 K는 행 부정 지식 심주의와 결과 심 행 주의

에 비해 ‘(행 의) 요가 수행자’(yog )가 더 하고, 모든 요가

수행자 가운데 믿음으로써 자신을 신애하는 자가 가장 제어된 자

라고 말한다.30) 따라서 지혜의 요가나 세속주의보다 행 의 요가

가 더 우 에 있고, 이 요가가 신애의 요가를 수반하면 더할 나

없이 최고의 요가가 되는 셈이다. A가 장에서 싸우되 그 싸움

의 결과가 신의 몫이라고 안다면, A에게는 자연스럽게 ‘싸움 속에

서 싸우지 않는’(행 속에서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선택지가 가

능하다.

28) 다스굽따는, 궁극 인 에서 아무도 자신의 행 들에 한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이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Dasgupta(1994) p. 106 참조.

29) Brahma-sūtra 3.2.38에도 “[행 의] 결과는 이것(신)으로부터 [온다] -

합당하기 때문.”(phalamata upapatteḥ)이라는 표 이 있다.

30) “요가 수행자는 고행자들보다 우 이고 지식인들보다도 우 라고

생각하오. 한 요가 수행자는 행 자들보다도 우 라오. 아르주나여,

그러니 요가 수행자가 되시오, 게다가 모든 요가 수행자들 가운데, 나를

향한 내 아뜨만으로써, 믿음을 가지고 나를 신애하는 자가 최고로

제어된 자라고 나는 생각하오.”[6.46-6.47]

1 4 6 ∙ 印度哲學 제27집

Ⅸ.

K가 제시하는 4가지 제는 모두 행 와 련된 것들로서 A로

하여 행 를 하게끔 하는 데 목 을 둔다. 행 를 한다고 해서

죄악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제①은, 형이상학 앎을 통해 행

의 본성을 규명하는 것이다. 이는 행 에 한 이론 설명으로

서, 경험 자아로서 행 주체의 행 가 본질 자아에 향

을 미치지 않는 방식으로 행 가 허용될 수 있음을 시사해 다.

그래서 제①은 행 의 요가를 설 하기 한 첫 번째 정 작

업으로서 지혜의 요가인 동시에 행 의 본성에 한 기존의 부정

입장이다. 이와 달리 행 를 하지 않음이 그 자체로 죄악이라

고 하는 제②는, 사회 계에서 행 가 필수불가결함을 암시

한다. 이 역시 행 에 한 이론 설명인데, 인간은 외 없이 자

신에게 주어진 행 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사회의 유지라는 측면

에서 행 의 본성을 설명하고 있다. 제②는 행 의 요가를 한

두 번째 정 작업으로서 행 의 본성에 한 기존의 정 입

장이다. 결국 이 두 제는 탈속과 세속 사이의 긴장, 삶의 4단계

(탈속기)와 2단계(가장기) 사이의 긴장, 해탈과 사회질서 사이의

긴장을 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31)

제①과 제②가 행 의 본성에 따라 부정 이거나 정 인

각각의 방식으로 행 를 해야 함을 말하는 반면, 제③은 행 에

한 실천 규명으로서 어떤 행 여야 하는지를 묻는 것 즉 행

의 방법을 묻는 것과 련된다. 이 방법이 바로 ‘행 속에서 행

를 하지 않음’이라는 행 의 요가이다. 행 의 허용 가능성이나

범 를 타진하는 제①과 제②를 기반으로 하여, ‘행 의 요가’

31) 상키야 학 의 이원론 에서 이 긴장은 뿌루샤와 쁘라끄르띠의

긴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경우에 순수의식·순수정신인 뿌루샤는

본질 자아이고, 물질 인 것으로서 쁘라끄르띠는 행 주체인 경험

자아이다.

바가와드 기따 에 나타난 끄르슈나의 논증과 그 평가 ∙ 1 4 7

라고 불리는 올바르게 행 를 하는 방법이 도출되는 것이다. 그리

고 제③은 다시 제④에 의해 강화되는데, 올바른 행 를 담보

해주는 근거를 찾는 것과 련된다. 이 근거는 바로 신이며, 신의

목 을 이루기 한 수단으로서 인간의 행 는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연 에서 제①과 제②는 ‘행 란 무엇인가?’, 제③

은 ‘어떻게 행 를 할 것인가?’, 제④는 ‘행 의 근거는 무엇인

가?’라는 물음에 한 각각의 답이다. 이 답은 각각 행 의

본성, 행 의 방법, 행 의 근거와 련된다. 애당 에 K가 행

를 하지 않으려는 A를 설득하기 해 논증을 펼쳤기 때문에 K의

제들이 행 문제에 집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Ⅹ.

A를 설득하기 한 K의 논증에서 사용된 제들은 바가와드

기따 라는 맥락에서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 고 인도의 행

이론은 ‘행 가 결과를 낳지 않는 방식으로 행 를 삼가야 한다.’

라는 것과 ‘행 가 좋은 결과를 낳는 방식으로 극 인 행 를

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K가 실천에 용한 것이

‘행 가 결과를 낳지 않는 방식으로 극 인 행 를 해야 한다.’

라는 제③이다. 그리고 ‘행 의 결과는 신의 몫이고 행 자는

신의 수단으로서 극 인 행 를 해야 한다.’라는 것이 제④이

다. 이러한 제들은, 바가와드 기따 가 성립할 당시의 일반 인

힌두교도라면, 특히 A처럼 교양을 갖춘 왕족의 경우라면, 수용하

지 않을 이유가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K의 제들은 결론을 한 충분한 토 가 된다. K

는 A가 쟁에서 싸워야(행 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행

속에서 행 를 하지 않음’(행 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음)이 가능

1 4 8 ∙ 印度哲學 제27집

하다는 가장 요한 제③은 A가 행 를 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

가 된다. A는 애 에 행 의 결과들을 여러 모로 미리 비교한 뒤

에, 어느 선택이 더 나은지 모르겠지만 싸우지 않겠다고 최종 결

정한다. 이처럼 행 의 결과에 과잉반응을 보이는 A에게,32) K가

수 있는 가르침은 새로운 내용으로서, 행 들에 해 정통함·

숙련됨(kauśalam)인 행 의 요가이다. 행 를 하는 순간에 결과는

이미 정되어 있기 때문에 결과를 완 히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K는 다만 행 의 결과에 한 A의 어리석은 반응을 는

A의 미망을 바로잡기 해, 행 의 결과가 신의 몫이라는 제④

를 추가하면서 행 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제①, 제②를 포 하는 제③은, 제④와 더불어 결론을 지

지하기 한 충분한 토 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A가 최종 으로 설득되었다는 바로 그 결과

에 따라 K의 제들을 결론과 연결하여 평가하는 것과 별도

로, K가 설득의 달성이라는 목 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

에 따라 K의 논증을 평가한다면, 과연 이상의 4가지 제만으로

충분하게 설득력 높은 논증이 구성되는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

다. 달리 말해, ‘A와 K 사이에 실제 화의 형태로 개되는 설득

의 과정’에서 보이는 복합 인 변수들과는 무 하게, 오직 4가지

제만으로 논증에 설득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실감

있게 와 닿지 않는다. 따라서 K의 논증을, 화가 개되는 실

맥락을 고려하면서 재구성하고 재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33)

32) A는 1장에서 “께샤와시여, 그리고 는 불길한 징조들을 니다.

쟁에서 친족을 죽이고서 좋은 일을 견하지는 못합니다.”[1.31]라고

말한다. 이 ‘불길한 징조들’이란 쟁에서 친족을 죽인 후에 친족의

가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과 같은 ‘나쁜 결과’(좋지 않은 일)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러한 나쁜 결과를 상상하는 A는 행 의 결과에

과잉반응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33) 비형식 논리나 커뮤니 이션 논증의 주요 이론가들은, 논증이 이야기가

말해지는 문맥에서 고려되고, 그것이 사용되는 기능으로 성격

지워진다고 한다. 그래서 논증을 평가하는 일이란, 논리 의미에서

바가와드 기따 에 나타난 끄르슈나의 논증과 그 평가 ∙ 1 4 9

마하바라따 에서 A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무사로서 수많은

쟁 경험과 함께 만인의 존경을 받는다. 그러한 그가 왕국의 운

명을 건 쟁에서 친족을 앞에 두고 괴로워하면서 싸움을 포기하

는 것은 그만큼 그의 고뇌가 치명 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K는 A

의 고뇌에 아랑곳 않고 그 A의 미망과 용기 없음을 지 하면서

당장 A에게 필요한 해결책보다 근본 인 해결책을 하는 데 열

한다. 물론 K의 이러한 근본 해결책을, A를 근시 지평에서

거시 지평으로 이끄는 지평의 환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

만,34) 과연 A가 싸우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원인을 K가 통찰하고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했는지는 의심스럽다. A

가 쟁에 불참하려고 했던 이유는, 단순하게 말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지르고 싶지 않은 데 있다. 이 경우 K는 A의 쟁 참여

여부와 상 없이 동족상잔의 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하거나,35) A

측이 다르마의 우 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A에게 도

덕 확신을 필요가 있다. 즉 도덕 딜 마에 빠진 A를 설득

하기 해서는 A에게 도덕 확신을 으로써 쟁 수행이 불가

명제를 검토하는 것이라기보다 이야기의 맥락을 검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추상 논증을 상으로 하는 의미론 시각이 아니라,

일상에서 형성된 실제 논증을 상으로 하는 화용론 시각에서

논증에 근하기 때문이다. 르통 외(2006) p. 97 참조.

34) 콜러는 “우리가 기 하고 있는 것은 이들 의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한 도덕 충고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리고

아르주나도 놀랬을 것이지만), 크리슈나는 그의 논의를 다른

차원으로 환시켜, 불가멸의 원한 실재, 만유의 바탕이 되는 실재, 즉

모든 사람의 자아로 육화된 실재에 해 아르주나에게 말한다.”라고

쓴다. 콜러(2003) p. 329.

35) 이 쟁의 불가피성에 해서는 K 스스로도 나 에 인정한다. K는 18일

쟁이 끝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땅까(Utaṅka)라는 한

수행자를 만나는데, 그가 왜 신인 당신이 쟁을 막지 못했느냐고

책망하자, 진행되고 있는 일은 그 구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K

스스로도 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고 답한다. K는 그 마지막에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자신의 최선을 다해 쟁에 임했을 뿐인 것이다.

Matilal(2002) pp. 101-102 참조.

1 5 0 ∙ 印度哲學 제27집

피하고 승리가 정당하다는 을 부각시켜야 한다. 그러나 K는 그

게 하지 않는다.

만약 K가 그 게 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A는 설득된 채로

쟁에 참여하겠다고 말하는가? 분명하게도, K는 처음에 제①

과 제②를 통해 구체 행 인 ‘싸움’을 직 언 하면서 싸우

는 것이 왜 옳고 싸우지 않는 것이 왜 그른지 밝힌다. 그러다가

제③과 제④를 통해서는 ‘싸움’에 해 즉 구체 행 에

해 거의 언 하지 않은 채 행 일반에 해 언 할 뿐이다. 가장

요한 근거인 제③ 즉 ‘행 속에서 행 를 하지 않음’이란, 모

든 행 와 련된 행 의 일반 기술이요 방법이다. 게다가 제

④ 역시, 그러한 행 의 방법이 옳음을 담보하는 신의 뜻에 따라

행 를 해야 한다는, 모든 행 와 련된 행 의 일반 근거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K는 바가와드 기따 의 2장 반에 구체

행 인 ‘싸움’을 논거에서 언 하다가, 상키야에서 요가로 가르

침을 환하면서 즉 제①과 제②를 종합하는 제③을 제시

하면서, 그 이후부터는 행 일반을 논거에서 계속 언 하고 만

다. 그 결과 바가와드 기따 에서 K의 논거들은 맥락을 상실한

채로 단지 행 의 본성·방법·근거에 한 일반 진술이 되어버린

다. 심지어 제①과 제②에서 제기된 ‘싸움’의 도덕 정당성도

나 에는 그 행 를 하는 것이 왜 옳고 행 를 하지 않는 것이

왜 그른지에 한 일반 담론이 되어버린다. 결국 행 에 한

K의 맥락 배제 인 근거들은, 일 즉발의 쟁터에서 고뇌하는 A

에게 확실한 도덕 정당성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근거들은

‘A가 처한 쟁 상황’이라는 바가와드 기따 의 맥락이 아닌 다른

맥락에서도 충분히 작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일반 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바가와드 기따 에서 K의 논증이 보이는 이러한 한계

는, 논증이 개되는 역동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소되면서,

A가 설득되는 최종 결과를 낳는 데 그다지 향을 미치지 않는

다. 따라서 다시, 무엇 때문에 A는 기꺼이 설득된 채로 쟁에 참

여하겠다고 말하는가?

바가와드 기따 에 나타난 끄르슈나의 논증과 그 평가 ∙ 1 5 1

장/시구 A의 질문/요청 내용

2.4-8싸우는 것과 싸우지 않는 것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2.54 확고한 지혜를 갖춘 자의 언행은 어떠한가?

3.1-2행 보다 지식이 더 요한데, 왜 내게 행 를 명령하

는가?

3.36 사람들이 죄악을 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4.4[신성 의심] 인간으로 태어난 당신이 어떻게 태 를

아는가?

5.1행 의 포기와 행 의 요가 어느 것이 더 지고한

가?

6.33-34 마음의 제어란 어렵지 않는가?

6.37-6.39 요가의 완성에 실패한 수행자의 운명은 어떠한가?

8.1-2 라흐만·아뜨만·행 ·제사·신 등의 본질은 무엇인가?

Ⅺ.

바가와드 기따 에서 K가 A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어도 바가와드 기따 의 맥락에서는 A가 “당신

의 은총을 통해 의 미혹이 소멸되고 분별을 얻었습니다. 불변하

는 이여, [ 의] 의심이 사라지고 [확고하게] 서 있으니 당신의 말

을 행하겠습니다.”[18.73]라고 확실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

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A는 쟁 수행을 정당화할 수 있는 도덕

확신을 필요로 하고, 그 확신은 K가 최고신이라는 것을 확인

함으로써 확보된다. 그리고 이는 K의 논증이 개되는 역동 과

정 속에서 A의 자발 의지와 K의 사랑이 작용한 결과에 의해서

이다.

우선 바가와드 기따 에서 A는 K의 가르침을 일방 으로 듣기

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은 A가 K에게 던진 질문들이다.

1 5 2 ∙ 印度哲學 제27집

10.12-18 [신성 요청] 당신의 본성을 들려 수 있는가?

11.1-4

11.31

11.44-46

[신성 요청] 당신의 한 형상을 보여 수 있는가?

[신성 요청] 본래의 당신은 구인가?

[신성 요청] 당신의 친근한 형상을 보여 수 있는가?

12.1신과 미 자를 숭배하는 자들 가 요가를 잘 아

는가?

13.1 상과 주 이란 무엇인가?

14.213구나를 월한 사람은 어떠하며 월하는 방법은 무

엇인가?

17.1 믿음과 제사와 3구나의 계는 어떠한가?

18.1 포기와 단념의 본질은 각각 무엇인가?

여기서 가장 요한 부분은 A가 4장에서 신성을 의심했다는 것

과 10장과 11장에서 신성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나머지 질문들은

K의 가르침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나 더 이해하기를 바라

는 부분과 련된다. 그런데 신성을 의심하는 부분과 신성의 본질

과 시를 요청하는 부분에서 A는, 가르침을 주는 K의 권 를 문

제 삼는다. A는 자신에게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K의 가르침을 받

아들이기 해서 K가 진정 신의 권화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비록 싸우지 않겠다는 체념 이후에 K의 제자가 되기를 스스로 간

청했지만[2.7], A는 K가 출생을 가진 인간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

다[4.4]. 그리고 K가 “통찰을 수반하는 가장 비 스러운 지혜를

말해주겠소.”[9.1]라고 하면서 자신의(신의) 에 해 말하지만,

A는 다시 K의 본성에 해 듣기를 요구하고[10.18], 이어서 K

의 한 형상(rūpa)을 직 보기를 요구한다[11.3]. K는 이에 거

리낌 없이 A에게 신 인 을 주면서[11.8] 자신의 모든 함을

볼 수 있게 해 다.36) 그럼에도 A는 본래의 신이 하는 일을 더

36) 이 때 신 인 을 가진 A만이 K의 한 형상을 볼 수 있어야 함에도

산자야(Saṃjaya)가 K의 그러한 형상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11.9-11.14]. K 스스로 자신의 형상들이 지극히 보기

어렵고 신들조차도 항시 그것을 보고자 할 정도로[11.52] 보기 힘든

바가와드 기따 에 나타난 끄르슈나의 논증과 그 평가 ∙ 1 5 3

알고 싶다고 하는데[11.31], 이에 K는 자신이 세계의 소멸을 시작

했다고 하면서 앞서 언 한 제④ 즉 A가 자신의 일을 완성하기

한 수단이라고 선언한다[11.32-11.33].

이 듯이 A가 K의 신성을 몇 차례 의심하는 까닭은, 자신에게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말고 싸우라고 종용하는 K가 진정 최

고신인가를 알고자 하는 데 있다. 행 의 결과가 신의 역에 속

한다는 K의 말은, K가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신일 경우에 A에게

확실한 믿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A는 K가 신애를 처음 가르치

는 3장 이후에 4장에서 한 번 의심을 가지고, 신애를 본격 으로

가르치는 9장 이후에 10장과 11장에서 각각 의심을 가진 채 신성

을 요청한다. 그러자 K는 구체 으로 쟁의 결과로서 군의 죽

음이 이미 신에 의해 오래 에 정되어 있다는[11.33-11.34] 결

정 인 선언을 한다. 이 선언이야말로 바가와드 기따 만의 서사

에서 정에 속하고, 싸우지 않겠다는 A에게 큰 장을 불러일으

킨다. A는 K가 실제로 보여 무시무시한 형상들과 결정 선언

에 압도된 채로 K에게 합장을 하면서 율하고 경배하고 더듬거

리고 두려워하면서 머리를 조아린다[11.35]. 한 스스로 “이 에

보지 못한 것을 본 후에 의 마음은 흥분되고 두려움에 떨고 있”

[11.45]다고 고백한다. 결국 A는 이 지 에서 K에 한 믿음과 함

께 싸우겠다는 결정을 마음속으로 내렸음에 분명하다.37) 구체

으로 앞에 한 최고신이 쟁의 결과까지 이미 정해 놓았

다고 선언하는 이상, A에게 쟁 수행을 정할 수 있는 도덕

우 는 자연스럽게 확보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과정은 A 스

스로 K의 제자가 되고 K의 신성을 의심하고 요청하는 자발 해

결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K는 스스로 자신에게 제자로 다가오는 A에게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37) 람바찬은 K가 사용한 방법들이 A의 믿음이 아닌 이해를 목 으로

한다고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해(논증)와 함께 믿음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Rambachan(1999) xi 참조.

1 5 4 ∙ 印度哲學 제27집

가장 비 스러운 지혜를 알려주고, 심지어 A에게 여러 신들조차

도 보기 어려운[11.52] 자신의 한 형상을 보여 다.38) 즉 자신

의 참 모습을 알고자 하는 열렬한 욕구를 가진 자에게 신이 반응

을 보이는 형국이다. K는 “그 는 이를, 고행을 하지 않거나 신애

가 없거나 듣고자 하지 않거나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어떤 경우

라도 말하지 않아야 하오.”[18.67]라고 언 하는데, 이 한 A가

자신의 가르침을 신애와 함께 열심히 귀담아 듣고자 했기 때문에

스스로 반응했다는 사실을 A에게 지시 암시하는 것이다.39) 이

와 별도로 K는 A에게 특별한 배려마 도 꺼려하지 않는다. 바가

와드 기따 의 뒷부분에서, K는 쟁의 결과를 정해 놓았다는

선언에 이어 A의 몇 질문들에 답한 다음, “이와 같이 나는 비

에서도 가장 비 스러운 지혜를 그 에게 했소. 이를 충분하

게 숙고한 뒤에 [그 가] 원하는 로 행하시오.”[18.63]라고 하면

서, “모든 다르마들을 버린 채 나를 유일한 의지처로 삼으시오. 나

는 그 를 모든 죄악들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니, 슬퍼하지 마시

오.”[18.66]라고 한다. 여기서 K는 A의 자발 의지를 존 하여

A가 ‘원하는 로’(hitam) 행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K 자신을 의

지처로 삼는 것이 유일무이한 방법이라며 지시 A에게 다른 선

택이 없음도 알려 다. 이로써 A는 신의 일방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선택에 의해서 원하는 로 싸울 수 있는 여지를 가

질 수 있다. A에게 K가 유일무이한 의지처라는 것은, 한 K가

A에게 도덕 우 를 담보해 다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처럼 K

는 A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면서 끝까지 자신만을 믿고 의지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가르친다. 바로 이 지 즉 ‘원하는 로 행

해도 되지만 최고신에 의지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다.’라는 지

38) 물론 왜 하필 K가 A에게 그러한 특권을 주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A가 쟁의 변수임을 감안한다면 이미 정된 A 측의

승리를 해 이러한 특권은 K에게도 필수불가결하다.

39) 아가르왈에 따르면 18.67은 K가 언 한 것들 가운데 매우 요하다.

이는 지고선을 찾고자 하는 A의 욕구를 정하는 의미에서이다.

Agarwal(1993) p. 273 참조.

바가와드 기따 에 나타난 끄르슈나의 논증과 그 평가 ∙ 1 5 5

이 K의 설득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곳이다. 그리고 A에 한 K의

이러한 배려 혹은 사랑이 A에게 도덕 정당성을 주면서 A의

쟁 참여를 가능 한다.

Ⅻ.

나는 바가와드 기따 에 나타난 K의 논증에 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본다. 첫째, 논리 기 에서 K의 논증은

좋은 논증이지만 화 기 에서는 그 지 않을 수 있다.40) 그래

서 K의 논증을 결론과 제들의 논리 계를 심으로 평가한

다면, 이 논증은 A가 최종 으로 싸우겠다는 결심을 하는 데 필

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둘째, 화 기 에서도 K의 논

증은, K가 최고신이라는 사실이 밝 짐으로써 A에게 도덕 정당

성이 확보되는 그 지 에, 좋은 논증이 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진

다. 논증 제시자 혹은 화자인 K가 최고신이라는 사실은 청자인 A

가 논증을 수용하는 데 결정 인 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셋째,

결론 으로 K의 논증은 A와 K 상호간의 정 이고 우호 인 소

통 계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 이다. A의 자발성과 K의

사랑이 만드는 신뢰의 상황은, K의 권 를 확인할 수 있는 여지

를 으로써 A가 도덕 우 를 확보하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

라, A와의 사제 계 는 신애의 계를 강화하여 논증의 청자

인 A의 믿음을 공고하게 함으로써 K의 논증을 성공 으로 이끄

는 데도 기여한다.

40) 햄블린은 “논증은 진실에 다가가는 문제가 아니고 결국 믿음의

문제”라고 하는데, 이 믿음은 ‘설득 가치’로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좋은

논증이란, 화자 심 인 논리 ·인식론 기 을 충족시킨

것이라기보다, 어떤 식으로든 청자로 하여 논증을 수용할 수 있게끔

하는 화 기 을 충족시킨 것이다. 르통 외(2006) p. 83 참조.

1 5 6 ∙ 印度哲學 제2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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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 8 ∙ 印度哲學 제27집

Abstract

Kṛṣṇa's Argument in Bhagavad-g t and Its

Evaluation

Park, Hyo Yeop

(Kyungpook National Univ.)

When Bhagavad-g t is to be read from the point of

view of argument, the conclusion of Kṛṣṇa who is a speaker

in that argument is 'Arjuna should act'.

The premises to support this conclusion are: ① even

though an action is done, there is no sin, ② a non-action is

sin in itself, ③ a non-action is possible in an action, ④ an

action is justifiable if it is done by someone as an agent of

God. Among the premises ① and ② which respectively

imply a negative and a positive position on action present

the nature of action. And ③ shows a paradigm shift

synthesizing these two previous premises and presents the

method of action. And finally ④ which reinforces ③

presents the ground of action.

Consequently, this argument of Kṛṣṇa can be evaluated

as a good argument. But to say decisively that this

argument based on four premises has a persuasive power is

out of touch with reality, since complex variables that are

shown in the communicative process of persuasion between

two persons should also be seriously taken into

consideration. In other words, although this argument is

good according to a logical standard, it must be evaluated

again according to a communicative standard.

After all, if this argument is evaluated in the aspect of

logical relation between conclusion and premises, it is not a

바가와드 기따 에 나타난 끄르슈나의 논증과 그 평가 ∙ 1 5 9

sufficient condition but a necessary condition for the

Arjuna's final decision to fight in the war. Besides this

argument can also have a possibility to be good in the

aspect of communicative standard, on the ground of which

Arjuna secures a moral justification through the fact that

Kṛṣṇa is the highest God.

Key words: argument, good argument, persuasion, action,

morality

투고 일자 : 2009년 7월 25일

심사 기간 : 2009년 8월 1일 ~ 8월 10일

게재 확정일 : 2009년 8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