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추가절(仲秋佳節) 공자·맹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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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2012년 9월25일 Worldwide Federation of Young Leaders and Enterpreneurs 15 오피니언 3.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의 강의 강의는 토요일 저녁 2시간씩 2주간에 걸쳐 있었 다. 그 강의를 듣기 위해 아내와 나는 두 번 심야고 속버스를 타야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서울에 있는 두 딸들과 함께 나란히 한 가족이 강의를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기동 교수는 폴 케네디의 말을 인용하여 현재 달러화의 위치하락, 유럽통합의 균열현상, 동아시 아의 군비확장, 유엔지도력의 상실 등이 마치 역사 의 분수령에서 산업혁명전야를 보는 것 같다고 말 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의 순환이 있는데, 한번은 ‘몸’의 시대가 오고 다음에는 ‘마음’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 다. 현재는 ‘몸’의 시대인데, 그 특징은 ‘경쟁’이다. 미 국이 금융위기로 흔들리는 이유도 경쟁으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몸’의 철학을 가지고 묻는 것으로 답이 없다. 이제는 ‘마음’의 시대가 오고 있다. 한국인은 정이 많고 ‘마음’이 따뜻하다. 한국인의 마음이 유교이 고, 유교가 장단점이 있지만 우리는 벗어날 수 없 다. 논어와 맹자는 ‘마음’을 챙기는 책이다. 마음 경 영학, 인(仁)의 경영학이 중요하다. 결국 그는 우리 모두가 ‘마음’이 연결되어 한마음이 되고 열린 마음 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오석원 교수는 토인비의 말을 인용하여 “20세기 까지는 서양의 시대이고, 21세기 이후에는 동양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고 김수환 추기경 도 “나는 사제이기 전에 내 몸 속에는 유교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유학 이 몰려오는 시대’이고, 우리는 이에 응전해야 한다 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공자 이전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없 는 신(神)중심시대였고, 공자가 인간에 초점을 두 게 되었다. 공자는 중국 최초의 ‘인본주의’ 철학자 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사회인 ‘대동사회’는 복지문 제까지 언급되어 있다. 공자의 사상은 요·순· 우·탕·무 등 성군 5명의 영향을 받아 그때까지 전해지던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다. 유학은 천자의 학문(帝王之學)이다. 공자사상의 핵심은 과불급이 없는, 중용의 중(中)사상이다. 순(舜)임금이 말한 윤 집궐중(允執厥中)이다. 유학은 실천철학으로, 아는 것보다 실천, 지속이 중요하다. 또한 맹자는 공자사상을 계승, 발전시켜서 맹자 가 없으면 공자가 없을 것이란다. 맹자는 직설적, 호방한 성격으로 성선설을 주장하고, 호연지기(浩 然之氣)를 길러야 한다고 했다. 공자의 인(仁)을 계 승하고, 전국시대라는 험한 세상 때문에 의(義)를 붙여서 새롭게 강조했다. 맹자는 의리사상, 선비정 신의 원조다. 또한 왕도정치를 강조하고, 임금이 임 금답지 않으면 바꾸면 된다는 역성혁명론을 제기 했다. 천(天)에서 임금이나 백성이 같이 나오고, 민( 民)이 제일이며 민심이 천심이라는 민본주의자라 는 것이다. 여담으로, 오 교수는 사람의 오만가지 생각 중 단 지 4%만 쓸모 있고, 나머지는 쓸데없는 생각이란 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인생에서 행복한 시간은 6 년 7개월이고, 40년은 괴로운 시간, 나머지 27년은 잠자는 시간이란다. 그 괴로운 시간을 위해 종교가 있는 것인가. 유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듣는 강 의라 알아듣기 어려웠다. 나중에 동양철학 책들을 읽으면서 알게 된 말이 많았다. 4. 여행의 동반자들 주변 몇 사람에게 유적지 답사여행을 가자고 권 유를 했다. 골프여행이라면 몰라도 무슨 고리타분 한 공맹이냐는 반문이었다. 결국 아내와 둘이 가기 로 했다. 2011. 11. 11. 07:30 새벽잠을 설치며 인천 공항에 모인 사람은 37명. 대부분 필자같이 한겨레 신문을 보고 나선 것이었다. 여행 도중에 자기소개 를 하는데, 각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 놀랐다. 80세 할아버지, 춘천의 여성민우회장, 이화여대 철학과 여학생, 고려대 역사학과 학생, 교사, 교수, 공인회계사, 한문학원장, 양계장주인, 소 키우는 사람, 직장인, 자영업자, 가정주부, 특별한 직업 없 이 주유천하한다는 사람, 특이하게 서울신학대학 교 총장까지 다양한 연령과 계층사람들이 함께했 다. 지역별로도 서울, 춘천, 대전, 대구, 광주, 경남 밀양 등 전국에서 모였다. 더구나 부부끼리 온 사람은 몇 안 되고 대부분 혼 자였다. 일을 마무리 하느라 새벽까지 일하다 온 사 람도 있고, 대기업 근로자는 자리를 비운다는 비난 을 받지 않기 위해 며칠간을 야근 하고 왔다고 했 다. 모두가 자기소신과 주관이 뚜렷한 사람들이었 다. 그러니 남편, 마누라 놔두고 혼자 왔겠지만. 대 전에서 온 사람은 공자님 앞에서 예의를 지켜야 한 다고 검정 양복에 넥타이까지 차고 왔다. 물론 젊은 사람들은 여행 도중에 술 파티도 벌인 것 같았으나 대부분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바쁜 직장생활에도 시간을 내서, 새벽에 일어나, 멀리서 가족도 놔두고 혼자들 왔을까. 직업과 관계없이 그들은 나름의 식견을 가 진 사람들이었다.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에 눈뜨고 강국사이에 낀 한국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서 도 각자의 주관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었다. 5. 강태공사당과 태산을 거쳐 여행경로는 인천에서 청도(靑島)로 날아가 몇 군 데 들른 다음, 버스로 이동하여 치박(淄博)에서 강 태공사당과 고차(古車)박물관을 구경하고, 태산(泰 山)을 거쳐 유적지로 가는 코스였다. 치박일대가 옛날 제나라 땅이었다. 강태공은 집 안을 돌보지 않아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전한다. 그 후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다가 주나라 문왕의 초 빙을 받아 스승이 되고, 무왕을 도와 은의 주왕(紂 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했다. 그 공으로 제나라 의 시조가 된 강태공의 사당이 그곳에 있었다. 고차 박물관은 고속도로 밑에 있었는데, 과거 말과 마차 를 순장한 화석이 발견된 곳이다. 태산에 오르려면 태안(泰安)으로 가야 한다. 태안 은 태산의 남쪽에 있는 도시다. 태산은 제남, 치박 등 몇 개 도시에 걸쳐있는데, 우리나라의 지리산 크 기만큼 된단다. 저만큼 태산이 웅장한 모습으로 버 티고 서 있었다. 큰길가에 새로 지은 건물들을 제외 하면 아직도 우중충하고 빛바랜 건물들뿐이다. 가 이드가 밤에는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고 한다. 드디어 그렇게도 유명한 태산에 오르게 되었다. 동쪽의 태산, 서쪽 화산, 중앙의 숭산, 남쪽의 형산, 북쪽의 항산을 오악(五岳)이라 하는데, 태산은 그 중의 으뜸이라고 한다. 공자도 “태산에 오르니 천 하가 작게 보인다”라고 태산을 예찬했다고 한다. 진시황제와 한무제를 포함하여 역대황제들이 하 늘의 뜻을 받는 봉선의식(封禪儀式)을 행했던 곳이 다. 태산 기슭의 대묘(岱廟)는 황제가 행차할 때 머 물던 집이라고 하는데, 경내의 천황전은 북경 자금 성의 태화전, 공묘의 대성전과 함께 중국 3대 건축 물로 꼽힌다고 한다. 태산에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다. 케이블카를 타 거나 골짜기의 7000여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막상 정상에 올랐을 때의 심정은 안타까움 같은 것이었 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주변에는 도교 사당이나 여관건물 같은 것들이 즐비하고 도대체 지저분한 느낌뿐이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태산 이던가. 11월의 찬바람만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다. ※본 기고글은 2012년 8월부터 12월까지 4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 공자·맹자를 찾아서 특별연재 이 정 희 광주광역시 고문변호사 광주지방변호사회 제48대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 우리 민족은 세계 여느 민족에서도 찾아보기 드물게 사시사철 절기마다 독특한 풍속을 형성 하였다. 절기의 풍속을 형성하고 후대에 전하 며, 그 과정에서 대동단결하고 정서적 순화를 꾀하는 슬기와 지혜를 함께 익혔다고 할 수 있 다. 3대 명절인 설, 단오, 추석에도 이 시기에 맞 는 다양한 풍속이 아직까지 전해 오고 있다. 추석(秋夕)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가을 저녁, 나아가서는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니 달이 유난히 밝은 좋은 명절이라는 의 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추석’이란 대단히 상징 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라 할 수 있다. 중국인들 은 추석 무렵을 중추(中秋) 또는 월석(月夕)이라 하는데, 『예기(禮記)』에 나오는 조춘일(朝春日), 추석월(秋夕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추석날 밤에는 달빛이 가장 좋다고 하여 월석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중엽 이후 한자 가 성행하게 된 뒤 중국인이 사용하던 중추니 월석이니 하는 말을 합해서 축약하여 추석이라 고 했다는 설이 있다. 중추절이라 하는 것은 가 을을 초추(初秋), 중추(中秋), 종추(終秋)로 나누 었을 때 추석이 음력 8월 중추에 해당하므로 붙 은 이름이다. 그러나 한국 고유명절로 추석은 ‘ 가윗날’이라 부르는데 이는 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왕 이 신라를 6부로 나누었는데 왕녀 2인이 각 부 의 여자들을 통솔하여 무리를 만들고 7월 16일 부터 매일 일찍 모여서 길쌈, 적마(積麻)를 늦도 록 하였다. 8월 15일에 이르러서는 그 성과의 많고 적음 을 살펴 진 쪽에서 술과 음식을 내놓아 승자를 축하하고 가무를 하며 각종 놀이를 하였는데 이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이 때 부른 노래가 슬프고 아름다워 회소곡(會蘇曲)이라고 하였는 데, 이 행사를 가배라 부른 것은 여러 의미가 있 다. 가배의 어원은 ‘가운데’라는 뜻을 지닌 것으 로 본다. 즉 음력 8월 15일은 대표적인 우리의 만월 명절이므로 이것을 뜻한 것으로 볼 수 있 으며 다음은 진편에서 이긴 편에게 잔치를 베 풀게 되므로 ‘갚는다’는 뜻에서 나왔을 것으로 도 유추된다. 고려시대에 나온 노래인 《동동》에 도 이 날을 가배라 적었음을 보아 이 명칭은 지 속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가윗날이 신라 이래 국속으로 지속되었음은 중국에서 나온 《수서(隋書)》 동이전 신라 조에 임금이 이 날 음악을 베풀고 신하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상으로 말과 천을 내렸다고 하 였으며, 《구당서(舊唐書)》 동이전에도 신라 국 에서는 8월 15일을 중히 여겨 음악을 베풀고 잔 치를 열었으며 신하들이 활쏘기대회를 하였다 고 쓰여 있다. 한가위가 되면 아침저녁으로 기후가 쌀쌀해 지므로 사람들은 여름옷에서 가을 옷으로 갈아 입는다. 그래서 한가위에 입는 새 옷을 추석빔 이라고 하기도 한다. 옛날 머슴을 두고 농사짓 는 집에서는 머슴들까지도 한가위에 새 옷을 한 벌씩 해 주었다. 한가위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차례를 지내는 일이다. 차 례 상은 설과 달리 흰 떡국 대신 햅쌀로 밥을 짓 고 술을 빚으며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어 차 례를 지낸다. 차례를 지낸 뒤 음복을 하고 조상 의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는데, 한가위에 앞서 미리 갈아놓은 낫으로 벌초를 한다. 한편 지금 은 잊혀져 가는 풍속이지만 예전에는 ‘반기’가 있다. 옛날에는 사방 한 뼘 크기의 목판이 집집 마다 수 십 개씩 있었다. 바로 명절 때 반기(음 식을 나누는 것)를 하기 위한 ‘반기나무접시’이 다. 집집마다 정성껏 차린 시절음식들을 예쁘 게 담아 어린이들이 분주히 오갔다. 이날에는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와 중간지점에서 만나 반나절을 함께 회포를 풀고 가져온 음식을 나 눠 먹으며 즐겼는데 이를 중로상봉(中路相逢), 즉 ‘반보기’라 하였다. 차례음식은 기제사(忌祭祀)와 거의 같지만, 명절 계절 특식을 천신하는 제례여서 제삿밥( 메)과?제사국(갱)을 올리지 않고 그 자리에 송 편을 올린다. 따라서 추석에는 시접에 숟가락 은 담지 않고 젓가락만 담는다. 진설 방법은 각 가정이나 지방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다. 과실 류의 진설에 있어서 ‘예서’에는 남쪽 끝줄에 올 린다고만 되어 있을 뿐 그 순서를 밝히지 않아 이설이 분분하다. 추석의 대표적인 음식은 송편이다. 햅쌀로 만든 송편은 ‘오례송편’이라 한다. 토란탕과 밤 단자, 닭찜, 화양적, 누름적, 배화채와 배숙 등 도 추석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하지만 산업사 회로 들어서면서 이러한 풍속은 많이 사라졌 고, 가정이나 지방에 따라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어 접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 우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 만 같아라’는 속담처럼 항상 풍요롭고 정이 넘 치는 사회를 만들어 가도록 노력합시다. 중추가절(仲秋佳節) 안 성 수 논설위원장 동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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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중추가절(仲秋佳節) 공자·맹자를 찾아서jcikorea.bestdnp.com/newspaper/586/586-15.pdf여행경로는 인천에서 청도(靑島)로 날아가 몇 군 데 들른 다음,

제586호 2012년 9월25일 Worldwide Federation of Young Leaders and Enterpreneurs 15오피니언

3.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의 강의

강의는 토요일 저녁 2시간씩 2주간에 걸쳐 있었

다. 그 강의를 듣기 위해 아내와 나는 두 번 심야고

속버스를 타야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서울에 있는

두 딸들과 함께 나란히 한 가족이 강의를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기동 교수는 폴 케네디의 말을 인용하여 현재

달러화의 위치하락, 유럽통합의 균열현상, 동아시

아의 군비확장, 유엔지도력의 상실 등이 마치 역사

의 분수령에서 산업혁명전야를 보는 것 같다고 말

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의 순환이 있는데, 한번은 ‘몸’의

시대가 오고 다음에는 ‘마음’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

다. 현재는 ‘몸’의 시대인데, 그 특징은 ‘경쟁’이다. 미

국이 금융위기로 흔들리는 이유도 경쟁으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몸’의 철학을 가지고 묻는 것으로 답이

없다.

이제는 ‘마음’의 시대가 오고 있다. 한국인은 정이

많고 ‘마음’이 따뜻하다. 한국인의 마음이 유교이

고, 유교가 장단점이 있지만 우리는 벗어날 수 없

다. 논어와 맹자는 ‘마음’을 챙기는 책이다. 마음 경

영학, 인(仁)의 경영학이 중요하다. 결국 그는 우리

모두가 ‘마음’이 연결되어 한마음이 되고 열린 마음

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오석원 교수는 토인비의 말을 인용하여 “20세기

까지는 서양의 시대이고, 21세기 이후에는 동양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고 김수환 추기경

도 “나는 사제이기 전에 내 몸 속에는 유교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유학

이 몰려오는 시대’이고, 우리는 이에 응전해야 한다

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공자 이전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없

는 신(神)중심시대였고, 공자가 인간에 초점을 두

게 되었다. 공자는 중국 최초의 ‘인본주의’ 철학자

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사회인 ‘대동사회’는 복지문

제까지 언급되어 있다. 공자의 사상은 요·순·

우·탕·무 등 성군 5명의 영향을 받아 그때까지

전해지던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다. 유학은 천자의

학문(帝王之學)이다. 공자사상의 핵심은 과불급이

없는, 중용의 중(中)사상이다. 순(舜)임금이 말한 윤

집궐중(允執厥中)이다. 유학은 실천철학으로, 아는

것보다 실천, 지속이 중요하다.

또한 맹자는 공자사상을 계승, 발전시켜서 맹자

가 없으면 공자가 없을 것이란다. 맹자는 직설적,

호방한 성격으로 성선설을 주장하고, 호연지기(浩

然之氣)를 길러야 한다고 했다. 공자의 인(仁)을 계

승하고, 전국시대라는 험한 세상 때문에 의(義)를

붙여서 새롭게 강조했다. 맹자는 의리사상, 선비정

신의 원조다. 또한 왕도정치를 강조하고, 임금이 임

금답지 않으면 바꾸면 된다는 역성혁명론을 제기

했다. 천(天)에서 임금이나 백성이 같이 나오고, 민(

民)이 제일이며 민심이 천심이라는 민본주의자라

는 것이다.

여담으로, 오 교수는 사람의 오만가지 생각 중 단

지 4%만 쓸모 있고, 나머지는 쓸데없는 생각이란

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인생에서 행복한 시간은 6

년 7개월이고, 40년은 괴로운 시간, 나머지 27년은

잠자는 시간이란다. 그 괴로운 시간을 위해 종교가

있는 것인가.

유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듣는 강

의라 알아듣기 어려웠다. 나중에 동양철학 책들을

읽으면서 알게 된 말이 많았다.

4. 여행의 동반자들

주변 몇 사람에게 유적지 답사여행을 가자고 권

유를 했다. 골프여행이라면 몰라도 무슨 고리타분

한 공맹이냐는 반문이었다. 결국 아내와 둘이 가기

로 했다. 2011. 11. 11. 07:30 새벽잠을 설치며 인천

공항에 모인 사람은 37명. 대부분 필자같이 한겨레

신문을 보고 나선 것이었다. 여행 도중에 자기소개

를 하는데, 각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 놀랐다.

80세 할아버지, 춘천의 여성민우회장, 이화여대

철학과 여학생, 고려대 역사학과 학생, 교사, 교수,

공인회계사, 한문학원장, 양계장주인, 소 키우는

사람, 직장인, 자영업자, 가정주부, 특별한 직업 없

이 주유천하한다는 사람, 특이하게 서울신학대학

교 총장까지 다양한 연령과 계층사람들이 함께했

다. 지역별로도 서울, 춘천, 대전, 대구, 광주, 경남

밀양 등 전국에서 모였다.

더구나 부부끼리 온 사람은 몇 안 되고 대부분 혼

자였다. 일을 마무리 하느라 새벽까지 일하다 온 사

람도 있고, 대기업 근로자는 자리를 비운다는 비난

을 받지 않기 위해 며칠간을 야근 하고 왔다고 했

다. 모두가 자기소신과 주관이 뚜렷한 사람들이었

다. 그러니 남편, 마누라 놔두고 혼자 왔겠지만. 대

전에서 온 사람은 공자님 앞에서 예의를 지켜야 한

다고 검정 양복에 넥타이까지 차고 왔다. 물론 젊은

사람들은 여행 도중에 술 파티도 벌인 것 같았으나

대부분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바쁜 직장생활에도 시간을

내서, 새벽에 일어나, 멀리서 가족도 놔두고 혼자들

왔을까. 직업과 관계없이 그들은 나름의 식견을 가

진 사람들이었다.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에 눈뜨고

강국사이에 낀 한국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서

도 각자의 주관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었다.

5. 강태공사당과 태산을 거쳐

여행경로는 인천에서 청도(靑島)로 날아가 몇 군

데 들른 다음, 버스로 이동하여 치박(淄博)에서 강

태공사당과 고차(古車)박물관을 구경하고, 태산(泰

山)을 거쳐 유적지로 가는 코스였다.

치박일대가 옛날 제나라 땅이었다. 강태공은 집

안을 돌보지 않아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전한다. 그

후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다가 주나라 문왕의 초

빙을 받아 스승이 되고, 무왕을 도와 은의 주왕(紂

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했다. 그 공으로 제나라

의 시조가 된 강태공의 사당이 그곳에 있었다. 고차

박물관은 고속도로 밑에 있었는데, 과거 말과 마차

를 순장한 화석이 발견된 곳이다.

태산에 오르려면 태안(泰安)으로 가야 한다. 태안

은 태산의 남쪽에 있는 도시다. 태산은 제남, 치박

등 몇 개 도시에 걸쳐있는데, 우리나라의 지리산 크

기만큼 된단다. 저만큼 태산이 웅장한 모습으로 버

티고 서 있었다. 큰길가에 새로 지은 건물들을 제외

하면 아직도 우중충하고 빛바랜 건물들뿐이다. 가

이드가 밤에는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고 한다.

드디어 그렇게도 유명한 태산에 오르게 되었다.

동쪽의 태산, 서쪽 화산, 중앙의 숭산, 남쪽의 형산,

북쪽의 항산을 오악(五岳)이라 하는데, 태산은 그

중의 으뜸이라고 한다. 공자도 “태산에 오르니 천

하가 작게 보인다”라고 태산을 예찬했다고 한다.

진시황제와 한무제를 포함하여 역대황제들이 하

늘의 뜻을 받는 봉선의식(封禪儀式)을 행했던 곳이

다. 태산 기슭의 대묘(岱廟)는 황제가 행차할 때 머

물던 집이라고 하는데, 경내의 천황전은 북경 자금

성의 태화전, 공묘의 대성전과 함께 중국 3대 건축

물로 꼽힌다고 한다.

태산에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다. 케이블카를 타

거나 골짜기의 7000여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막상

정상에 올랐을 때의 심정은 안타까움 같은 것이었

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주변에는 도교 사당이나

여관건물 같은 것들이 즐비하고 도대체 지저분한

느낌뿐이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태산

이던가. 11월의 찬바람만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다.

※본 기고글은 2012년 8월부터 12월까지 4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

공자·맹자를 찾아서

특별연재

이 정 희광주광역시 고문변호사

광주지방변호사회 제48대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

우리 민족은 세계 여느 민족에서도 찾아보기

드물게 사시사철 절기마다 독특한 풍속을 형성

하였다. 절기의 풍속을 형성하고 후대에 전하

며, 그 과정에서 대동단결하고 정서적 순화를

꾀하는 슬기와 지혜를 함께 익혔다고 할 수 있

다. 3대 명절인 설, 단오, 추석에도 이 시기에 맞

는 다양한 풍속이 아직까지 전해 오고 있다.

추석(秋夕)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가을 저녁,

나아가서는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니 달이 유난히 밝은 좋은 명절이라는 의

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추석’이란 대단히 상징

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라 할 수 있다. 중국인들

은 추석 무렵을 중추(中秋) 또는 월석(月夕)이라

하는데, 『예기(禮記)』에 나오는 조춘일(朝春日),

추석월(秋夕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추석날

밤에는 달빛이 가장 좋다고 하여 월석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중엽 이후 한자

가 성행하게 된 뒤 중국인이 사용하던 중추니

월석이니 하는 말을 합해서 축약하여 추석이라

고 했다는 설이 있다. 중추절이라 하는 것은 가

을을 초추(初秋), 중추(中秋), 종추(終秋)로 나누

었을 때 추석이 음력 8월 중추에 해당하므로 붙

은 이름이다. 그러나 한국 고유명절로 추석은 ‘

가윗날’이라 부르는데 이는 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왕

이 신라를 6부로 나누었는데 왕녀 2인이 각 부

의 여자들을 통솔하여 무리를 만들고 7월 16일

부터 매일 일찍 모여서 길쌈, 적마(積麻)를 늦도

록 하였다.

8월 15일에 이르러서는 그 성과의 많고 적음

을 살펴 진 쪽에서 술과 음식을 내놓아 승자를

축하하고 가무를 하며 각종 놀이를 하였는데

이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이 때 부른 노래가

슬프고 아름다워 회소곡(會蘇曲)이라고 하였는

데, 이 행사를 가배라 부른 것은 여러 의미가 있

다. 가배의 어원은 ‘가운데’라는 뜻을 지닌 것으

로 본다. 즉 음력 8월 15일은 대표적인 우리의

만월 명절이므로 이것을 뜻한 것으로 볼 수 있

으며 다음은 진편에서 이긴 편에게 잔치를 베

풀게 되므로 ‘갚는다’는 뜻에서 나왔을 것으로

도 유추된다. 고려시대에 나온 노래인 《동동》에

도 이 날을 가배라 적었음을 보아 이 명칭은 지

속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가윗날이 신라 이래 국속으로 지속되었음은

중국에서 나온 《수서(隋書)》 동이전 신라 조에

임금이 이 날 음악을 베풀고 신하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상으로 말과 천을 내렸다고 하

였으며, 《구당서(舊唐書)》 동이전에도 신라 국

에서는 8월 15일을 중히 여겨 음악을 베풀고 잔

치를 열었으며 신하들이 활쏘기대회를 하였다

고 쓰여 있다.

한가위가 되면 아침저녁으로 기후가 쌀쌀해

지므로 사람들은 여름옷에서 가을 옷으로 갈아

입는다. 그래서 한가위에 입는 새 옷을 추석빔

이라고 하기도 한다. 옛날 머슴을 두고 농사짓

는 집에서는 머슴들까지도 한가위에 새 옷을

한 벌씩 해 주었다. 한가위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차례를 지내는 일이다. 차

례 상은 설과 달리 흰 떡국 대신 햅쌀로 밥을 짓

고 술을 빚으며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어 차

례를 지낸다. 차례를 지낸 뒤 음복을 하고 조상

의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는데, 한가위에 앞서

미리 갈아놓은 낫으로 벌초를 한다. 한편 지금

은 잊혀져 가는 풍속이지만 예전에는 ‘반기’가

있다. 옛날에는 사방 한 뼘 크기의 목판이 집집

마다 수 십 개씩 있었다. 바로 명절 때 반기(음

식을 나누는 것)를 하기 위한 ‘반기나무접시’이

다. 집집마다 정성껏 차린 시절음식들을 예쁘

게 담아 어린이들이 분주히 오갔다. 이날에는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와 중간지점에서 만나

반나절을 함께 회포를 풀고 가져온 음식을 나

눠 먹으며 즐겼는데 이를 중로상봉(中路相逢),

즉 ‘반보기’라 하였다.

차례음식은 기제사(忌祭祀)와 거의 같지만,

명절 계절 특식을 천신하는 제례여서 제삿밥(

메)과?제사국(갱)을 올리지 않고 그 자리에 송

편을 올린다. 따라서 추석에는 시접에 숟가락

은 담지 않고 젓가락만 담는다. 진설 방법은 각

가정이나 지방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다. 과실

류의 진설에 있어서 ‘예서’에는 남쪽 끝줄에 올

린다고만 되어 있을 뿐 그 순서를 밝히지 않아

이설이 분분하다.

추석의 대표적인 음식은 송편이다. 햅쌀로

만든 송편은 ‘오례송편’이라 한다. 토란탕과 밤

단자, 닭찜, 화양적, 누름적, 배화채와 배숙 등

도 추석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하지만 산업사

회로 들어서면서 이러한 풍속은 많이 사라졌

고, 가정이나 지방에 따라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어 접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 우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

만 같아라’는 속담처럼 항상 풍요롭고 정이 넘

치는 사회를 만들어 가도록 노력합시다.

중추가절(仲秋佳節)

시 론

안 성 수

논설위원장

동신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