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농(竹儂) 서동균(徐東均, 1903-1978) 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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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Vol.14. No.1 2015. 4. pp.13~31 13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죽농(竹) 서동균(徐東均, 1903-1978) 산수화 연구 * ** Study on Landscape painting by Juknong( ) Seo Dong-gyun( 徐東均 , 1903-1978) Lee, In suk 국문 요약 근현대기 대구는 서화의 수준이 높았으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사군자화가 주류를 이루었다는 사 실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산수화 또한 기석(箕石) 허섭(許燮, 1878-1934)이 ‘묵산수(墨山 水)’로 지칭되었던 개성적인 수묵표현의 관념산수 화풍을 이룬 이래 작가 고유의 필묵적 개성이 산수화 를 통해 드러나는 특징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죽농(竹儂) 서동균(徐東均, 1903-1978)은 사군자화로 명성이 높지만 산수화에도 일가를 이룬 산수화 가이기도 하다. 허섭을 고모부로 두었던 서동균은 1930년대부터 허섭풍의 묵산수를 그렸고, 독자적인 화풍을 모색하는 시기를 거쳐 자신의 산수화풍을 이루어 1970년대까지 꾸준히 산수화를 그렸다. 서동균 의 산수화는 1930년대-1940년대에 허섭의 묵산수를 학습하고 이를 심화시켜간 초기, 1950년 경-1965년 경 실경의 현실미를 추구하고, 자신만의 표현법을 탐색하는 등 독자적 화풍을 모색한 중기, 1966년 경 부터 작고하기까지 담채를 도입해 수묵과 조화시키고 관념경에 실경을 복합하여 개성적인 화풍을 이룬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서동균은 후기 산수화에서 정형산수의 공인된 회화적 장치를 활용한 관념미를 위주로 하면서 중기의 실경 사생에서 얻은 현실미 표현을 절충하여 현대적인 맛이 있는 고전풍 산수화를 이루었다. 대구화단 산수화는 현실경의 사생에 기반 한 수묵풍경화의 성격을 갖는 중앙화단 동양화나 사의화풍이면서도 감 각적인 호남화단 남종화와 달리 작가 고유의 서예적이고, 추상적인 필묵미가 산수화라는 장르를 통해 나타나는 점이 특징이다. 주제어 : 죽농 서동균, 산수화, 대구, 기석 허섭, 근현대기 산수화 * 이 논문은 2014년 12월 13일 사단법인 죽농서단 주관 ‘제2회 죽농서단 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완한 것임. ** 대구대학교 강사(Lecturer, Daegu University), E-mail : [email protected], Tel : 053-764-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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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Vol.14. No.1 2015. 4. pp.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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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죽농(竹儂) 서동균(徐東均, 1903-1978) 산수화 연구*

    이 인 숙**

    Study on Landscape painting

    by Juknong(竹儂) Seo Dong-gyun(徐東均, 1903-1978)

    Lee, In suk

    국문 요약

    근현대기 대구는 서화의 수준이 높았으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사군자화가 주류를 이루었다는 사

    실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산수화 또한 기석(箕石) 허섭(許燮, 1878-1934)이 ‘묵산수(墨山

    水)’로 지칭되었던 개성적인 수묵표현의 관념산수 화풍을 이룬 이래 작가 고유의 필묵적 개성이 산수화

    를 통해 드러나는 특징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죽농(竹儂) 서동균(徐東均, 1903-1978)은 사군자화로 명성이 높지만 산수화에도 일가를 이룬 산수화

    가이기도 하다. 허섭을 고모부로 두었던 서동균은 1930년대부터 허섭풍의 묵산수를 그렸고, 독자적인

    화풍을 모색하는 시기를 거쳐 자신의 산수화풍을 이루어 1970년대까지 꾸준히 산수화를 그렸다. 서동균

    의 산수화는 1930년대-1940년대에 허섭의 묵산수를 학습하고 이를 심화시켜간 초기, 1950년 경-1965년

    경 실경의 현실미를 추구하고, 자신만의 표현법을 탐색하는 등 독자적 화풍을 모색한 중기, 1966년 경

    부터 작고하기까지 담채를 도입해 수묵과 조화시키고 관념경에 실경을 복합하여 개성적인 화풍을 이룬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서동균은 후기 산수화에서 정형산수의 공인된 회화적 장치를 활용한 관념미를 위주로 하면서 중기의

    실경 사생에서 얻은 현실미 표현을 절충하여 현대적인 맛이 있는 고전풍 산수화를 이루었다. 대구화단

    산수화는 현실경의 사생에 기반 한 수묵풍경화의 성격을 갖는 중앙화단 동양화나 사의화풍이면서도 감

    각적인 호남화단 남종화와 달리 작가 고유의 서예적이고, 추상적인 필묵미가 산수화라는 장르를 통해

    나타나는 점이 특징이다.

    주제어 : 죽농 서동균, 산수화, 대구, 기석 허섭, 근현대기 산수화

    * 이 논문은 2014년 12월 13일 사단법인 죽농서단 주관 ‘제2회 죽농서단 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완한 것임.

    ** 대구대학교 강사(Lecturer, Daegu University), E-mail : [email protected], Tel : 053-764-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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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연구 제14권 제1호

    Abstract

    It is not well known, with Seoul and Pyongyang, that Daegu in modern times was considered

    as a city, in which economy and culture was flourishing with high standard of painting and

    calligraphic works, and the capacity continued to contemporary times. It is known that the Four

    Gracious Plants was the mainstream, and only a bit of research is done on Seokjae(石齋) Seo

    Byeong-oh(徐丙五, 1862-1936) and Juknong(竹儂) Seo Dong-gyun(徐東均, 1903-1978). But

    since 'Muk-san-su(Landscape in black and white, 墨山水)' called by Kiseok(箕石), Heoseop(許

    燮, 1878-1934) formed a characteristic ink landscape painting.

    Seo Dong-gyun learnt Muk-san-su from Heoseop, who was the husband of Seo

    Dong-gyun's aunt, and painted high-quality landscapes. Seo Dong-gyun's landscape paintings

    can be divided into three stages; 1930s-1940s, the early stage when he learnt and deepened

    Heoseop's Muk-san-su, from 1950 till about 1965, during this middle period he pursued the

    beauty of reality of the actual view and tried to seek his own independent painting style by

    exploring some techniques of expression, during the latter part, from 1966 till his death, he

    harmonized ink with light coloring and achieved the ideal sceneries by adding the actual view

    to the conceptual scenes, which is the classical beauty of landscape painting. Seo Dong-gyun's

    late landscape paintings gained the general classicality of the beauty of landscapes by

    combining the natural features of the season which enhances the reality as well as by applying

    the accredited picturesque device of typical landscapes.

    KeyWords : Juknong Seo Dong-gyun, Landscape Painting, Daegu, Kiseok Heoseop, Modern

    Landscape Painting

    Ⅰ. 머 리 말

    근대기 대구는 서울, 평양과 함께 3대 도시로 꼽혔던 경제와 문화가 융성한 지역이었다. 대구는 1601년

    경상감영이 설치된 이래 경상도의 행정, 사법, 군사 중심지였고, 낙동강 수운과 함께 경부철도의 거점역이

    라는 교통의 편리성으로 인해 상업 또한 활발하였다. 칠곡, 성주, 경산 등 향리의 전답을 관리하면서 도심

    에 거주한 대지주 출신을 비롯한 근대기 대구의 부유층은 한학을 익히고 시문과 서화의 교양을 갖춘 유교

    지식인이 많았다. 1900년대 초 이후 약령시와 서문시장의 물류 유통 등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상업 자본

    가들 또한 기존 지역유지 층의 문화 취향을 추수하여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시서화를 향유하는 경향을

    띠었다. 대구에는 일제강점기에도 경상도청이 존속하였고 대구복심법원, 대구사범학교와 대구의학전문학

    교 등 고등교육기관을 비롯한 남선(南鮮) 유일의 여러 상급기관이 있어 고위 관료나 지식층 일본인 또한

    다수 거주하였다. 근대기 대구는 서예와 전통회화 애호층이 폭넓게 분포했고 그런 만큼 서화계의 역량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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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수준 또한 높았다.1) 1922년 후진 양성, 전람회 개최, 상설 전시관 설치 등을 목적으로 교남시서화연구회가

    창설되기도 하였다.2)

    그러나 대구 전통화단의 내면은 사군자화가 주류를 이루었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고, 작가로는 석재(石

    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6), 죽농(竹儂) 서동균(徐東均, 1903-1978)에 대한 연구가 약간 이루어졌을

    뿐이다.3) 필자는 근현대기 대구 서화계에 관심을 갖고 수년간 연구를 진행해 왔다.4) 그러한 가운데 기석

    (箕石) 허섭(許燮, 1878-1934)의 산수화를 주목하게 되었다. 허섭은 사군자화 중심의 근대기 대구 전통화

    단에서 특이하게도 산수화를 그려 ‘묵산수(墨山水)’, ‘먹산수’로 지칭되었던 자신의 고유한 산수화풍을 이

    루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어 허섭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쓰게 되었다.5) 대구 산수화는 허섭의 묵산수

    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1980년대까지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간 허섭이나 대구 화단 산수화

    에 대한 인식과 연구는 이루어진 바 없었다.

    서동균은 사군자화가로 명성이 높다. 그러나 서동균이 1930년대부터 1970년대 까지 지속적으로 산수화

    를 그렸으며 자신의 화풍을 이룬 산수화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그간 주목되지 못하였다. 서예와 사군자

    화로 출발한 서동균이 산수화를 그리게 된 것은 허섭이 고모부였다는 사실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6)

    서동균은 허섭보다 25년이나 나이가 아래였지만 근대기 전통 화단에서 함께 활동하며 1934년 서양화그룹

    인 향토회 전람회에 나란히 찬조 출품도 하였다.7) 서동균은 많은 산수화를 남겼을 뿐 아니라 대구 산수화

    의 근대기에서 현대기로의 이행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서동균의 서예와 회화는 1986년 「죽농 서동균 서화

    집」이 출간되어 작품세계가 알려졌고 약간의 연구가 이루어 졌다.8)

    1) 필자는 근대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 대구 서화계의 전개를 서병오의 사승을 중심으로 파악해 본 바 있다. 이인숙, 2010,“20

    세기 ‘대구문인화파(大邱文人畵派)’의 형성과 변천 연구” 참조.2)「동아일보」1922.1.27, ‘서화연구회 조직’, 교남 시서화 연구회는 1922년 1월 15일 창립하였고 인적 구성은 회장 서병오,

    부회장 박기돈, 강사 정용기ㆍ서병주, 총무 이영면ㆍ김재환, 이사 김홍기, 회계 서창규이다.3) 石齋 徐丙五(1862-1936)는 시와 서예, 사군자화 등에 능하였던 시서화 삼절의 서화가이다. 서병오의 작품은 1989년 예술의

    전당에서 ‘석재 서병오 회고전’이 열렸고, 1998년「석재 서병오 시서화집」(이화문화출판사)이 대형 도록으로 간행되었다.

    연구 논문은 다음과 같다. 박근술, 1992, “석재의 사군자화 연구”,「논문집」15, 한양여자전문대학교 ; 김정숙, 2001, “석재

    서병오의 서예에 대한 연구”, 경주대학교 석사학위석사논문 ; 이인숙, 2010, “석재 서병오(1862-1936)와 ‘교남시서화연구

    회’의 재인식”,「민족문화논총」45,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김지영, 2010, “석재 서병오(1862-1936)의 서화 연구”, 고

    려대 문화재학협동과정 석사학위논문 ; 이인숙, 2011, “석재 서병오(1862-1936)의 시서화와 대구의 문인화” 상ㆍ하,「월간

    墨家」69ㆍ70, 묵가 ; 이인숙, 2012,「대구인, 석재 서병오(1862-1936년, 75세)」,「근대예술의 재발견」, 학진출판사 ; 이인

    숙, 2013,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 1862-1936)의 기명절지화 연구”,「민족문화논총」55,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이인숙, 2014,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6) 묵란화 연구”,「영남학」26,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4) 필자는 주4)의 서병오, 주9)의 서동균에 대한 연구 외에도 근현대기 대구 전통화단에 대한에 대해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인숙, 2012, “1900년대 대구 화단 죽석화(竹石畵) 연구”,「영남학」22,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이인숙, 2012, “근대기

    근대기 대구의 문인화가 긍석 김진만(肯石 金鎭萬, 1876-1933) 기명절지화 연구”,「민족문화논총」52,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

    소 ; 이인숙, 2013, “20세기 대구 전통화단 기명절지화의 전개와 표현 양상”,「영남학」24,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이인숙,

    2013,「사람이 만든 장소, 장소가 만든 사람들-근대기 대구의 복합문화공간」,「근대와 현대의 만남」, 대구미술비평연구회.5) 이인숙, 2014, “근대기 대구의 산수화가 기석 허섭(箕石 許燮, 1878-1934)의 ‘묵산수(墨山水)’ 연구”,「민족문화논총」58,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6)「달성서씨 현감공 파보」10, 964면.7)「동아일보」1934.11.22, ‘대구 향토회 미전’, 역전 상품진열소에서 열린 제5회전은 “금년부터는 특히 대구에 있는 동양화

    권위자 제씨의 찬가출품이 이십 여 점이나 있어 금상첨화의 미술전당을 이루리라 한다.”라고 하고 서병오, 고 김진만, 서

    동균, 허섭 등을 언급하였다. 8) 서동균의 산수화에 대한 연구는 없으며 서화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정치환, “죽농 서동균 연구: 문인화를 중심으로”,

    1982, 경희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이국희, 1992, “서동균의 사군자 연구”, 영남대 동양화과 석사학위논문 ; 김령희,

    1995, “죽농 서동균과 죽사 이응로의 묵죽화 비교연구”, 성신여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신규열, 1996, “죽농 서동균

    의 작품 연구: 사군자를 중심으로”, 전주대 미술학 석사학위논문 ; 최금진, 2004, “죽농 서동균 서화 연구”, 대전대 서예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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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연구 제14권 제1호

    이 연구는 서동균의 산수화가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한 것이다. 서동균의 산수화 화풍이 형성되는

    과정을 기년작을 중심으로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시기별로 파악하였다. 초기는 1930년대-1940년대로

    허섭의 묵산수를 소화하면서 이를 심화하는 시기이며, 중기는 1950년 경-1965년경으로 실경을 사생하며

    자연의 현실미를 추구하고, 수묵 표현의 기법을 탐색하는 등 자신의 독자적 화풍을 모색하는 시기이다.

    후기는 1966년 경 부터 작고하기까지로 수묵에 담채를 조화시키고 관념경에 실경을 절충하여 고전풍의

    산수미를 이룬 시기이다. 아울러 현대기 대구 산수화에 대해서도 서동균의 제자들에 의해 전개된 상황을

    살펴보았다.

    서동균은 근대기 서화시대부터 현대기 미술시대를 모두 경험하며 서화의 제반 환경이 급변했던 60여

    년을 지필묵연의 매체를 고수한 서화가로서 살았다. 서동균의 산수화는 20세기를 통해 지속된 전통회화

    로서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국 근현대미술사 연구에서 서화 분야에 대한 관심은 미진한

    형편이다. 지방 작가의 경우는 연구의 시선이 더욱 미치지 못하였다. 전통회화와 지역미술의 구체적 내용

    에 대한 연구는 한국미술사의 균형 잡힌 이해와 지역 미술사 정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연구는

    그간 주목되지 못하였던 서동균의 산수화를 통해 그의 산수화가로서의 작가적 위상을 정립하고, 근현대

    기 대구에서 전개된 산수화의 양상을 밝힘으로서 대구미술사와 한국미술사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고자

    하였다.

    II. 화풍의 형성과정

    1. 초기: 1930년대-1940년대, 허섭(1878-1934) ‘묵산수’의 학습과 심화

    한국미술사에서 지역에서 유명작가가 나타나 이름이 전국으로 알려지고 지역 서화계가 형성되는 것은

    18세기 말 경이다. 19세기 전반기가 되면 전주의 창암(蒼巖) 이삼만(1770-1847), 평양의 눌인(訥人) 조광

    진(1772-1840) 등은 서울의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못지않은 명필로서의 명성을 지역에서 누리게

    된다.9) 전주와 평양에 비하면 그 시기가 늦고 이름도 전국적으로 알려지지 못했지만 팔하(八下) 서석지

    (1829-1906)를 대구에서 작가가 출현하는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기 대구 서화계는 서

    병오의 존재로 인해 서예와 사군자화를 중심으로 융성하게 되었다.

    서병오는 사군자 뿐 아니라 서예적 필치의 문인화풍으로 괴석, 화훼, 기명절지 등 수묵화를 그리는 가

    운데 산수화도 그렸고, 서병오와 교유하며 대구를 자주 드나들었던 석강(石岡) 곽석규(1862-1935), 백송

    (白松) 지창한(1849-1920), 석하(石下) 김우범(金禹範) 등의 수묵산수화도 지역에 알려져 있었다. 많은 작

    품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대구의 서화가인 석초(石樵) 정안복(鄭顔復, 1833?-?), 추범(秋帆) 서병건(徐丙

    과 석사학위논문 ; 정태수, 2007, “죽농 서동균의 묵죽화 연구”,「서예학연구」10, 한국서예학회 ; 김현미, 2012, “죽농 서동

    균(1920-1978)의 서화 연구”,「한국학논집」49,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 이인숙, 2013, “20세기 대구의 문인화가 죽농

    서동균(1903-1978) 기명절지화 연구”,「서예학연구」22, 한국서예학회.9)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지방 화단의 태동과 확대에 대해서는 유홍준,「개화기ㆍ구한말 서화계의 보수성과 근대성」,

    「구한말의 그림」, 학고재, 1989, 77-93면 참조.

  •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 1903-1978) 산수화 연구 17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허섭, 김진만 題, , 1933, 지본수묵, 50×154cm, 영남대박물관

    허섭, , 지본수묵, 52×156cm, 영남대박물관

    서동균, , 1934, 지본수묵, 21.5×86cm, 개인

    建, 1850-?) 등도 산수화를 그렸다. 그러나 허섭 이전 대구에는 본격적인 산수화가가 없었다. 허섭의 1933

    년 작인 을 보면 허섭이 1930년대에 자신의 개성이 뚜렷한 묵산수 화풍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을 보면 일찍이 서병오에게 배워 1920년대 중반 서예가, 사군자화가로서 입지를 세우고

    있었던 서동균이 1930년대에 산수화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10)

    서동균의 산수화는 「죽농 서동균 서화집」에 66점과 참고도판 16점 등 82점이 수록되어 있고 ‘오정ㆍ소

    정컬렉션’에 6점, 대구미술관에 1점이 소장되어 있으며, 개인소장도 많이 있을 것이다. 「죽농 서동균 서화

    집」에서 보면 기년작은 50대 5점, 60대 4점, 70대 10점으로 많지 않은데다 70대에 편중되어 있고 30대,

    40대의 기년작은 실려 있지 않다. 특히 그가 자신만의 표현법을 모색하며 고민했던 40대와 50대 기년작이

    많지 않아 화풍의 형성 과정을 면밀히 추적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현재 알려진 가장 이른 산수화는 1934

    년 3월의 이며, 1935년 겨울 안동에서 그린 도 초기 기년작이다. ‘오정

    ㆍ소정 컬렉션’의 6점은 1930년대 중반의 작품으로 여겨지며 「죽농 서동균 서화집」 도판287로 수록된

    도 화풍

    으로 보아 1930년대 작품

    일 것이다. 모두 허섭의

    화풍과 밀접한 초기의 산

    수화들이다.11)

    같은 횡피 형식인 서

    동균의 1934년 작 과 허섭의 1933년 작

    , 비슷한 시기

    로 판단되는 를

    비교해 보면 서동균이 허

    섭의 묵산수를 충실히 학

    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과 는

    화면 중앙에 다리를 건너

    는 점경인물이 있고, 다

    리의 양안(兩岸)으로 키

    가 큰 수목 사이에 가옥

    10) 서동균은 서석지와 교유하였던 조부 徐瑢默(1846-1911)에게 어려서부터 서예를 배웠는데, 우연히 어릴 때 글씨가 서병오

    의 눈에 띠어 ‘붓으로 농사짓는 사람’이라는 죽농(竹農)으로 호를 받고 18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서화를 배우게 되었다.

    서동균은 남다른 자질과 노력으로 1926년 24세 때 전람회를 열었고 25세 때 초청전람회를 갖는 등 약관에 작가로 입신하

    였으며, 1928년 제7회와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묵죽으로 입선하였다. 서병오는 작고할 때 당시 34세의 젊은

    서동균에게 자신의 명정을 쓰게 하여 후계자로 인정하였다(「매일신문」1974.8.18, ‘書畫六十年 竹儂徐東均回顧錄’ 8). 서

    동균은 72세 때인 1974년 8-9월 20회에 걸쳐 대구「매일신문」에 ‘書畫六十年 竹儂徐東均回顧錄’을 연재하였고, 이 글은

    「예술평론」(대구예술평론가협회, 1992)에 수합되어 실렸다.11) 서동균이 허섭의 산수화에 화제를 써서 합작한 작품은 오정ㆍ소정컬렉션에 4점이 있으며, 개인소장의 12폭 병풍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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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연구 제14권 제1호

    서동균, , 1935, 지본수묵, 11.6×76cm, 대구미술관

    허섭, , 지본수묵, 97×48cm, 개인

    을 배치하였으며 화면 상단으로 여백을

    남기면서 완만하게 중첩되는 원산이 있는

    유사한 구도이다. 필묵 사용에 있어서도

    경물 묘사에 먹점을 반복하여 찍어 먹으

    로 덮인 부분이 많은 검은 화면을 이루는

    점, 굵고 진한 서예적 필선을 윤곽선처럼

    덧대어 형태감을 뚜렷하게 한 점 등이 유

    사하다.

    차이도 있는데 산과 물의 화면 점유 비

    율에 있어서 허섭이 물을 중심으로 산수

    를 구성하는데 비해 서동균은 산과 언덕

    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나무 표현에서

    허섭이 농담과 엽법(葉法)을 다양하게 구

    사하며 수목을 풍성하게 배치하는데 비해

    서동균은 마른 나뭇가지를 많이 그렸고,

    산과 언덕의 입체감을 붓질을 중첩하여 표현하고 있어 화면이 훨씬 복잡하다. 화제의 구성과 배치에서

    서동균은 에서는 제목 두 글자를 상단 가운데에 예서로 썼고 는 상단에 가로로 길게

    화제를 배치하며 역시 예서로 썼다. 이는 허섭의 작품에 화면 상단 좌우의 적절한 여백에 5언시나 7언시

    2구가 행서로 써넣어져 있는 방식과 다르다. 유사한 구도인 서동균의 와 허섭의 를

    비교해 보면 서동균이 경물의 구성이나 화면의 구도 등 허섭의 묵산수를 충실히 배웠음을 알 수 있고,

    한편 섬세한 붓질이나 다양한 발묵에서 자신의 개성 또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은 ‘오정ㆍ소정 컬렉션’에 소장된 2폭 가리개 3건 중 하나이다. 이 컬렉션은 오정(梧庭) 이종

    면(李宗勉, 1870-1932)과 아들 소정(小庭) 이근상(李根庠, 1903-1934)의 유품을 이근상의 아들인 이기환

    (李基煥, 1925-?)의 부인 안영주(安英株, 1927-)교수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한 서화 민속유물 1,356

    점으로 「오정ㆍ소정 컬렉션」에 수록되어 있다. 이종면은 경제인으로 활동한 성주 출신의 자산가로 서병

    오와 시회 모임을 함께한 한시 작가였고,12) 이근상은 이상화(1901-1943), 이장희(1900-1929), 백기만

    (1902-1967) 등과 함께 문학 활동을 한 시인이었다.13) 서동균은 이근상을 비롯해 또래인 이들 문학가 친

    구들과 친하게 지냈다. 이근상과는 동갑이었고,14) 2살 위인 이상화와는 이상화가 작고할 때까지 가까이

    어울렸다고 하였다.15) 부유한 지역유지이자 문학인이었던 이종면, 이근상 부자가 각기 친하게 지냈던 서

    12) 1920년 10월경의 한 조사에 의하면 대구는 경성에 이어 두 번째로 자산가가 많은 도시였다. 1930년대 초 이종면은 정재학,

    이장우, 서병국, 서병조, 정해붕 등과 함께 대구의 50만 원 이상 자산가로 거론되었다(오미일, 2002,「한국 근대 자본가

    연구」, 한울아카데미, 156-157면).13) 이종면과 이근상의 시문은 1987년 영남대학교박물관에서 「梧庭詩集」,「小庭文集」으로 간행하였다.14) 서동균의 생년은 1903년이다. 그간 1902년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인숙,「20세기 대구의 문인화가 죽

    농 서동균(1903-1978) 기명절지화 연구」324면 참조. 이근상, 이상화, 서동균의 교유는 ‘오정ㆍ소정 컬렉션’에 소장된 서동

    균의 서예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이상화가 서동균에게 부탁하여 ‘一洲’에게 증정하려 하였던 것인데

    어떤 연유인지 이근상이 그대로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다(「오정ㆍ소정 컬렉션」86면 참조).

  •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 1903-1978) 산수화 연구 19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동균, 2폭, 지본수묵, 182×54cm, 영남대박물관

    서동균, 중 1폭, 지본수묵, 127×34cm,

    개인

    서동균, , 지본담채, 42.5×72cm, 개인

    병오, 서동균을 비롯한 주변 서화가들의 작품

    을 후원의 의미에서 수장하였던 것이 이 컬

    렉션의 중요 부분을 이룬다.

    허섭의 산수화 19건 34점이 소장된 것은

    이근상이 친구인 서동균을 매개자로 하여 서

    동균의 고모부인 허섭을 후원하는 의미에서

    였다고 생각한다. 이근상이 1933년 화제를 쓴

    허섭의 대작이 남아 있는데 이 때는 이종면

    이 1932년 5월 작고한 이후 외아들 이근상이

    집안의 경제권을 모두 가졌을 때이기 때문이

    다.16) 이근상은 다음해인 1934년 32세의 나

    이에 심장병으로 작고하게 된다. 그러므로

    을 비롯한 오정ㆍ소정 컬렉션의 서

    동균 산수화 6점은 이근상이 작고하기 이전

    에 그려지고 수장되었다고 판단된다.17) 은 중의 한 폭으로 허

    섭 묵산수 화풍의 영향이 짙은 1930년대 작

    품으로 여겨진다.

    한편 1930년대로 추정되지만 위에서 언급

    한 허섭풍 수묵산수화와 성격이 다른 수묵담

    채 풍경화

    이 있다. 멀리 연기를 뿜고

    있는 공장 굴뚝과 근대 건축

    물이 있는 도시 풍경이 있

    고, 앞쪽에는 초원에서 풀을

    뜯는 말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 아래 예서체

    제목은 여행 중 차창으로 본

    경치임을 알려주지만 근경

    과 원경은 매우 대비되는 광

    경이 아닐 수 없다. 실경 사

    생에 대한 자각적 인식에서

    15)「매일신문」1974.8.13, ‘書畫六十年 竹儂徐東均回顧錄’ 3.16) 「오정ㆍ소정 컬렉션」, 71면. 17) 오정ㆍ소정 컬렉션의 서동균 작품은 산수 6점, 기명절지 4점, 서예 16점 등 총 26점이다.

  • 20 이 인 숙

    대구경북연구 제14권 제1호

    서동균, , 지본담채, 75×75cm, 개인

    시도된 것이라기보다 여행 중의 일시적 감흥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대구의 1세대 양화가들인 김용준,

    최화수, 서동진, 박명조, 서병기 등과 어울리며 향토회를 창립하던 시기의 작품이 아닐까 추측된다.18) 서

    동균은 1930년 향토회 창립전에 을 출품했다고 하였다.19)

    1940년대 기년작은 파악하지 못하였는데

    는 1930년대 묵산수와 비교해 보

    면 이 시기와 그리 멀지 않은 유사성이 보이

    며, 1950년대 초 작품과는 차별되는 관념적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어 1940년대 화풍일

    것으로 여겨진다. 1930년대 작품과 비교하

    면 담채가 부가되었고, 습윤한 묵점 대신 까

    슬까슬한 갈필로 경물을 묘사하였으며, 의

    고적인 점경인물은 사라졌다. 그러나 가옥

    의 형태, 수목의 표현, 에서처럼

    길의 표현에 짧은 가로선을 그려 넣은 점 등

    의 세부는 1930년대 화풍과 그리 멀지 않음

    을 보여준다. 는 서동균이 허섭의

    묵산수를 학습하던 시기에서 진전하여 자신

    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표현의 기량을 심화

    시켜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방향은 과 같은 실경 사생에 기반 한 사경산수가 아니라 정형적인 관념산수여서 1940년대 서동균은 ‘동

    양화가’가 아니라 ‘서화가’로 자신의 입지를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동균은 1919년 해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처남이 있던 오사카로 가서 시립중학교를 다니다 곧 그만

    두고 도쿄로 가서 나카무라 후세스(中村不折, 1868-1943),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1874-1946) 등에게 잠

    시 서화를 배운 일이 있다(김현미, 2012: 102-103).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1938년 가족이 모두 옮겨가

    자 다시 오사카로 갔다가 쓰지모토 시유우(辻本史邑, 1895-1957)의 소개로 서예구락부의 사범을 맡았으

    나 병으로 1941년 귀국하였다.20) 일본에서 그린 소, 말 등의 동물 스케치가 남아 있는데 일본에서의 소묘

    학습은 그가 중기에 사생풍 산수화를 시도할 수 있었던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21)

    2. 중기: 1950년 경-1965년 경, 현실미 추구와 독자적 화풍의 모색

    1953년 51세 때 작품인 은 와는 완연히 다른 현실감과 생동감이 물씬

    18) 향토회에 대해서는 윤범모,「향토회와 대구화단」, 6-99면 참조.19)「매일신문」1974.8.22, ‘書畫六十年 竹儂徐東均回顧錄’ 11, “창립 기념 전람회를 대구역 앞의 상품진열관에서 열었다. 서동

    진은 나의 초상화(현재 보관중)를 출품했고 나는 동양화로 등 소품을 냈었다.”20)「매일신문」1974.8.23, ‘書畫六十年 竹儂徐東均回顧錄’ 12. 21) 김현미, 2012, -

  •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 1903-1978) 산수화 연구 21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풍긴다. 산수화의 역사 속에서 의미상징이 공인된 경물들로 구성된 정형산수 대신 현실의 구체적 풍경을

    소재로 삼았고, 관조와 사색의 대상으로 전형화 된 계절성이 아니라 생생하게 체험되는 역동적인 날씨를

    극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서동균이 이상미의 현현이 아니라 현실미의 반영으로 산수화에 대

    한 인식을 전환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음을 알려준다.

    서동균, , 1953, 지본담채, 100×130cm, 개인

    서동균, , 1953, 지본담채, 66×106cm, 개인

    한국의 현실 경치를 그리고자 한 근대적 사실주의는 안중식(1861-1919)의 1915년 작품인 경복궁과 광

    화문을 주제로 삼은 두 점의 , 호남의 등에서 나타나고, 1920년대에

    신진작가들에 의해 새로운 시대정신에 입각한 창조적 자기실현의 의지로서 추구되었다.22) 1923년 이상범

    (1897-1972), 변관식(1899-1976), 노수현(1899-1978), 이용우(1902-1952) 등이 중국화풍을 탈피하고 일본

    화풍을 배격하여 새로운 ‘우리 조선화’를 시도하자고 모였던 동연사(同硏社)는 결성에 그쳤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이후 각자 작품을 통해 실현하였다. 일제강점기 1세대 동양화가들과 달리 관념산수로

    방향을 설정했던 서동균이 1950년대 초 실경 사생으로 전환한 획기적 변화는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1940-50년대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고, 육이오동란을 겪는 등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역사적 상황은 예술적 상황 또한 일변시켜 많은 작가들은

    문부성전람회, 조선미술전람회 등을 목표로 했던 일본화의 영향, 향토적 사실주의 등 일제기의 작풍을

    재정립하였다. 조국의 광복은 많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예술을 창출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서동균에게도

    새로운 시대정신에 입각한 주체적 회화의식과 조국 산천에 대한 감회를 불러일으켜 자신의 산수화풍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서동균은 광복 후 경북여고에서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았고, 중등교원 양성소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치

    기도 했으므로 교학상장을 통해 자신의 작업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며 이 또한 변화

    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946년 결성된 경북미술연구회, 1950년 시작된 대구화우회에 참여하는 등 지역

    미술가들과의 교류도 활발하였다.23) 이승만대통령의 작품 주문과 이를 계기로 영남서화원을 개원하여 본

    22) 1910-1920년대 전통화단의 전개에 대해서는 이구열, 1976, 제2장-제4장 참조.23) 1946년 대구 미국공보원(USIS)에서 창립전을 연 경북미술연구회의 이사장은 주경, 부이사장은 박인채, 회원은 장영복,

  • 22 이 인 숙

    대구경북연구 제14권 제1호

    격적으로 후진을 양성하게 된 것 또한 서동균에게 성취감과 자부심을 주었을 것이다.24) 서동균은 “해방

    후부터 그 무렵까지가 내 생애 가운데 가장 작품 활동이 왕성했던 때가 아닌가 한다.”라고 하였다.25) 또

    대구는 동란 중임에도 전화가 미치지 않았던 지역이어서 전국의 예술인들이 피난하여 전시임에도 오히려

    예술적 활력이 풍부했다. 1953년 작인 은 광복 후부터 1950년대 초반의 새로운 시대

    적 분위기, 피난 예술인들로 인해 풍요했던 예술적 환경, 작가로서 인정받고 영남서화원을 개원한 안정된

    개인적 여건 등 여러 계기가 복합되어 서동균이 자신의 예술적 진로를 재정립한 결과로 여겨진다.

    은 가운데에 돌담과 원추형 초가지붕의 물레방아간이 있고 그 앞에는 포대기로 아이를 업은

    한복 입은 여인이 머리에 함지를 이고 비탈길을 올라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화면 왼쪽 홈통에서 물이

    힘차게 쏟아지고 오른쪽 아래로는 얕은 시내가 흐른다. 초가지붕과 돌담, 죽림과 잡목 등 향토적 풍경과

    동시대 시골 아낙으로 그려 넣은 점경인물은 이전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던 한국적 정취의 현실미가 가득

    하다. 은 갑작스런 소나기에 연잎으로 비를 가린 인물이 다리를 건너 급

    하게 집으로 향해가는 장면이다. 사선으로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그 사이로 보이는 육중한 산세,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잎들, 넘실거리는 개울물 등이 습윤하고 운동감 있는 필치로 현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26) 산수화에는 각 계절의 전형적 특징을 회화화 하여 계절감 자체를 영원의 자연경으로 감상

    했던 사시도(四時圖), 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의 전통이 있다. 은 이러한 계절적 풍광에 기반 하

    면서 계절감의 전형이라기보다 소나기의 기상적 정경을 순간적인 시각적 구체성으로 실감나게 그려냈다.

    서동균, , 1957, 지본수묵, 70×80cm, 개인

    서동균, , 지본담채, 60×80cm, 개인

    백팔용, 서석규, 변종하, 김창락, 서동균 등이다. 서동균이 1920년대부터 지역 미술인들과 교류가 많았던 것은 대구 양화

    운동을 주도했던 서동진(1900-1970)이 같은 달성서씨 현감공파로 11촌 형이었던 까닭도 있다. 24) 서동균이 영남서화원을 열게 된 것은 경북도지사 신현돈을 통해 이승만대통령이 위촉한 병풍 작품을 보낸 후 서동균이

    창작에 전념하도록 배려하라는 이대통령의 지시로 인한 것이었다고 한다(「매일신문」 1974.8.27, ‘書畫六十年 竹儂徐東均

    回顧錄’ 15). 申鉉燉(1903-1965)이 제3대 경상북도 도지사로 재임한 기간은 1951-1955년이다. 한편 서동균의 대한민국문

    화훈장 서훈을 보도하는 신문 기사에는 “56년에는 이승만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영남서화원을 지도 경영, 많은 후진을 양성

    했다.”고 하였다(「경향신문」1975.10.21). 25) 「매일신문」 1974.8.27, ‘書畫六十年 竹儂徐東均回顧錄’ 15.26) 의 화면 오른쪽 위에 “秋江驟雨 三友堂題”으로 해동서화협회 회장을 지낸 동년배의 서예가 三友堂 김종석

    (1904-1973)이 화제를 썼고, 서동균은 그 아래에 “癸巳重陽節 竹農徐東均寫”로 낙관하였다.

  •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 1903-1978) 산수화 연구 23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동아일보] 1921년 8월 29일(양력)

    는 1957년 광복절에 백두산 천지를 그린 것으로 해방의 감격이 1950년대 후반까지도 생생했

    음을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백두산 천지는 1921년 동아일보사가 등산대를 조직하여 ‘백두산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신문지상에 사진을 실은 이래 민족의 상징으로 널리 유포된 이미지이다.27) 은 나무들이 쓰러질 듯 거센 바람을 맞고 있는 가운에 멀리 옛 산성의 성곽 위로 기와

    를 올린 문루(門樓)가 높다랗게 자리하고 있으며, 근경에는 한국 산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얕은 개울이

    흐르고 있다. 성문을 향해 나있는 산길에는 봇짐을 꿴 작대기를 둘러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실경에 기반

    한 풍경, 현실성 있는 점경인물,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저물녘의 날씨를 현장감 있게 표현하려 한 점 등은

    과 유사한 화의(畵意)이다. -은 서동균이 1950년대에 이전과는 달리 실제

    풍경과 실감나는 날씨 표현으로 현실적 산수미를 그려내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 이 1953년 그려졌다는 사실은 의미 깊다. 이 때 대구에는 청전 이상범이 피난하

    고 있었다. 1951년 중공군의 공세로 정부가 서울에서 철수한 일사후퇴 때 많은 피난민들과 마찬가지로

    고희동을 비롯하여 김은호, 변관식, 노수현, 장우성, 배렴, 김영기, 이유태 등의 화가들이 부산에 피난해

    있었다. 이상범도 처음엔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여름 무렵 대구로 왔고, 1954년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대구

    에 거주하였다. 피난 이듬해인 1952년 9월 이상범은 생활고 해결을 위해 대구미국공보원에서 등 25점으로 개인전을 열었다(이구열, 1992: 204-222). 이상범의 1952년 대구 개인전은 서동균이

    1953년 작품들에서 보여준 화풍 전환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는 ‘청전 양식의 형성과 정착’

    이 이루어진 이상범 화풍의 제4기(1950-1972)이다(이성미, 1997: 20). 이상범은 1920년대부터 꾸준히 개척

    해 온 산수화의 근대적 화풍 모색을 이 시기에 자기화 시키고 현실주의적 시각으로 우리의 향토적 정경과

    시골의 삶의 모습을 독자적인 예술 경지로 실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대 초 작품인 두 점의 는 같은 모티프인 앞서의

    에서 보여준 시각적 리얼리티의 생생한 현실적 날씨 묘사와 달리 수묵의 형식미라는 조형 언어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은 주제와 소재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산수’의 표현 기법에 대한 탐

    구로 서동균이 방향을 바꾸었음을 보여준다.28) 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 농담의 미점

    (米點) 등을 실험하며 자신의 필법과 묵법을 찾아내려 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은 ‘취

    우’의 주제를 변주하면서 묵필의 사의화풍 수묵화를 보여주고 있어 1950년대의 현실미 추구와 사경에 기

    반 한 사실적 화풍과 다르다. 1960년대 전반기 서동균은 1950년대와 달리 담채 없이 수묵만 사용하고 있

    27) 「동아일보」 1921.8.21. ‘白頭靈峰에 감격한 등산대-靑於藍靜於鏡한 聖池의 秘境-’ 28) -은 모두 개인소장임.

  • 24 이 인 숙

    대구경북연구 제14권 제1호

    서동균,

    서동균, , 지본수묵, 131.5×32.5cm

    서동균, , 1961, 지본수묵, 127×70cm

    서동균, , 1962, 지본수묵, 35×127cm

    으며, 현실미를 추구했던 1950년대와 달

    리 다양한 묵법과 필법의 사의적 표현

    기법을 실험하며 필묵미 중심의 독자적

    화풍을 모색하였다.

    3. 후기: 1966년 경-1978년, 수묵담

    채의 고전풍 산수화

    후기의 이른 기년작으로 1968년 작인

    를 들 수 있지만,

    1960년대 초 이후의 기년작을 찾지 못해

    1960년대 중반 경으로 여겨지는 후기의

    시작을 정확히 설정하기는 어렵다. 필자

    는 임의적으로 서동균이 죽농(竹農)을

    죽농(竹儂)으로 개호한 1966년경을 후기

    의 시작으로 설정하였다.29) 서동균은

    1960년대 전반기의 수묵실험을 거쳐 수

    묵과 담채를 결합하고, 실경과 관념경을

    복합한 산수화풍을 이루었다. 후기 산수

    화의 특징은 관념적인 이상경의 구도에

    사실풍의 경물 표현을 절충시킴으로서

    획득한 현대적인 회화미의 고전풍 산수

    화라고 할 수 있다. 서동균의 후기 산수화는 수묵의 기조위에 엷은 색채를 조화시킨 격조 높은 담채미를

    보며주며,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서예적 필치와 세련된 묵법으로 생략과 함축을 구사한 여백미가 뛰어

    나다.

    서동균의 후기 산수화는 안개 속에 높이 솟은 원경의 산봉우리, 중경의 수목과 가옥, 근경의 토파와

    수면 등을 기본 구성으로 하여 주로 종축의 화면 형식으로 그려진다. 화보풍의 관념적인 구도지만 일부

    경물은 사생에 기반하고 있어 자연스러운 풍경의 분위기 또한 보여준다. 의 계류와

    언덕, 소나무 등은 한국의 현실 자연에서 느끼는 친근한 사실감을 전해주고 있어 화보풍과 사생풍이 복합

    된 절충적 화면을 이루고 있다. 가옥이나 인물이 화보풍의 중국식인 경우도 있고,

    한국적인 현실시각의 사생풍인 경우도 있다(). 점경인물은

    29) 서동균은 만년에 호 竹農을 竹儂으로 바꾸었고, 改號하였다는 사실을 1969년 67세 때의 작품에서 “我本平生戱筆墨作農

    晩年因筆墨飜爲儂”이라고 밝혔다(「죽농 서동균 서화집」 도판3). 그러나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그간 밝혀지지 않았다.

    필자는 서동균의 紀年作을 조사하여 살펴 본 바 1966년 64세 때부터 竹儂으로 서명한 것을 확인하였다. 1966년 작인 에서 ‘六四翁竹儂’이라고 하였고, 1965년 작에서 ‘六十三叟竹農試毫’라고 하여 ‘農’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

    농 서동균 서화집」 도판305). 당호는 다양하여 眉南精舍, 看山齋, 大鳳齋, 看山讀畵齋, 白石蒼苔室, 壽石山房 등이 작품에

    보인다.

  •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 1903-1978) 산수화 연구 25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서동균, , 1968, 지본담채, 127×34cm

    서동균, , 1968, 지본담채, 127×35cm

    서동균, , 지본담채, 127×34cm

    서동균, , 지본담채, 127×34cm

    에서 보이듯 현실적 인물인지, 화보 속의 은자(隱者)인지 명확하지 않기도 하다. 서동균의 후기

    산수화는 이러한 복합과 절충을 통해 관념과 현실이 조화된 고전풍의 산수미를 이루었다. 초기의 근대기

    전통산수화 학습, 중기의 사생적 현실미 추구와 필묵표현 탐구 등의 시기가 있었기에 이러한 복합과 절충

    이 가능했을 것이다.

    산뜻하고 세련된 담채가 주

    는 색채의 아름다움은 서동균

    후기 산수화의 한 특징이다.

    서동균은 청색, 황색, 홍색 등

    몇 안 되는 색채를 먹을 보조

    하는 미묘한 담채의 방식으로

    사용하여 수묵의 느낌을 벗어

    나지 않으면서 산뜻하고 정감

    있는 화면을 이루었다. 먹색과

    어울린 은은한 담채는 수묵만

    으로는 나타내기 어려운 자연

    미에 대한 공감을 친근하게 보

    여준다. 서동균의 후기 산수화

    는 극소수의 만년작 이외에는

    대부분 수묵담채이다. 수묵담

    채는 사의화풍 산수화에서 오

    래 전부터 정착된 기법이다.

    그러나 허섭의 묵산수로 부터

    산수화를 시작했고, 먹이 상징

    하는 문한(文翰)의 문화 대한

    존중과 애호의 심상이 뚜렷한

    대구의 문화적 분위기, 서예와 사군자화의 수묵 전통이 강한 대구 서화계에서 서동균이 담채를 도입하여

    전통회화에 친근성을 부여한 것은 의미가 크다.

    서동균의 필치는 두툼하지만 적확하며, 부드럽지만 힘이 있다. 굵고 투박한 서동균의 필선은 묘사의

    핵심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서동균의 산수화는 서예가로서 사군자화가로서의 숙련된 붓 사용에서 나온

    필선미의 세계이기도 하다. 화제 또한 적절한 내용과 서법으로 화면의 운치와 격조를 높여준다. -은 상단과 하단 모두 여백이 풍성하며, 원산의 운무(雲霧) 공간을 비롯하여 경물의 사이사

    이에도 미묘한 함축과 대담한 생략의 여백이 있어 그려진 부분과 비워진 부분이 모두 필요불가결한 회화

    적 공간으로서의 존재감을 획득하고 있어 조형적 밀도가 풍부하다.

    1976년 74세 작인 는 다양한 색채와 농담의 담채로 모필을 자유자재

    로 사용한 부드럽고 힘 있는 필치를 보여준다. 한국식 기와집과 둥근 창이 있는 화보풍의 가옥이 혼재하

  • 26 이 인 숙

    대구경북연구 제14권 제1호

    고, 완만한 산봉우리들과 나지막한 둔덕, 소나무와 잡목 등은 실경을 회화화한 듯 한 사생풍의 친근감과

    현실감을 화면에 주고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가지와 잎들이 풍부한 표정으로 그려져 있다.30) 1950년

    대 초 실경산수를 그렸던 시기가 있었기에 이러한 사생풍을 자연스럽게 복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팡이

    를 짚고 다리를 건너는 인물은 제목을 보면 친구를 찾아가는 화보 속의 은일고사(隱逸高士)일 것이지만,

    한편 산사로 돌아가는 노승으로 보이기도 한다. 서동균의 산수화 속 화보풍 가옥과 점경인물은 세속을

    초월한 세계를 표현하려는 회화적 장치로서 ‘운치 있고 탈속적인 고전 스타일’의 이상적 이미지로 읽힌다

    (고연희, 2007: 284). 서동균은 관념적, 정형적 산수화 양식 속에 현실시각의 사생 요소를 자연스럽게 조화

    시켰다. 서동균 후기 산수화가 보여주는 고전풍 산수미는 이러한 절충적 복합이 주는 공감과 설득력이라

    고 생각한다.

    서동균, , 1976, 지본담채, 45×127cm, 개인

    자연으로 회귀하고 자연과 합일하고자 하는 고상한 정신을 시각화한 장르인 산수화는 동아시아인의

    자연관과 인생관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예술이다. 오랜 역사 시기를 거치며 다양한 이념적, 양식적

    변주 속에서 확고해진 산수화의 위상은 서세동점의 근대기에 ‘동양화’로 상대화 되었고, 1920년대 중반부

    터는 화보풍의 양식에 실제 경치를 사생하는 절충적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근대기에 산수화는 ‘종래의

    우주적 조화물인 탈속적 군자풍의 산수경물’로부터 ‘일상적이며 생활적인 현실경을 창작 주체의 시각적

    사실성에 기초한 원근법과 입체법에 의해 나타낸 수묵풍경화인 사생적 산수화’로 전환을 시작하였다(홍

    선표, 2009: 14).

    반면 이러한 새로운 흐름과 상반되는 군자(君子)가 지향하는 탈속적 이상경으로서의 자연이라는 동아

    시아 산수화의 고전적 이념과 모티프는 호남지역에서 일관되게 지속되었다. 20세기 한국미술사의 시각에

    서 보면 서동균 산수화의 후기 화풍은 호남화단의 남종산수와 맥락을 공유한다. 소치(小癡) 허련

    (1809-1892)로부터 시작되는 호남화맥은 1938년 광주에서 연진회(鍊眞會)를 조직한 의재(毅齋) 허백련

    (1893-1977)과 할아버지 허련, 아버지 허형(1862-1938)의 화업을 이어 1930년부터 줄곧 목포에서 작품생

    30) 의 화제는 “山亭訪友 丙辰除夜燭下 寫于白石蒼苔室 爲金兄容昊大仁雅囑 竹儂時年七十又四 試眼”이다.

  •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 1903-1978) 산수화 연구 27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서동균, , 1975, 지본수묵,

    127×34cm

    서동균, , 1976, 지본수묵, 크

    기미상

    활만 하였던 남농(南農) 허건(1908-1987)을 양대 거장으로 한

    다. 호남 전통화단의 뚜렷한 역사적 전통과 지역적 화세(畵勢)

    로 인해 남종산수는 현대기에도 일정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서동균은 어려서 조부에게 한문과 서예를 배웠고, 이후에

    도 서당식 교육방식으로 한학을 배우다 1917년 15세가 되어서

    야 해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약 2년간 신식 교육을 받았다.

    그의 친구들인 이상화, 백기만, 서동진 등이 신 문학으로, 수

    채화와 유화 등 서양미술로 나아간데 비해 그가 20대부터 줄

    곧 서화가의 삶을 고수한 것은 어릴 때 조부에게 한문과 서예

    를 배웠고 서병오, 허섭 등의 곁에서 서화시대의 정서를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체험으로 인해 서동균은 전

    통과 고전을 존중하고, 현실미 대신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

    으로서의 고전풍 산수화로 귀결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서동균의 70대 작품 중에는 담채를 구사한 일반적인 후기

    작들과 차별되는 간결한 필치의 수묵산수가 약간 있다. 서예

    에서 말하는 인서구로(人書俱老)의 경지를 보여주는 특별한

    작품들로서 이 시기에는 담채의 후기화풍도 병행되고 있으므

    로 시기를 구분하기보다 후기의 일부 예외적인 작품으로 언급

    하고자 한다. 73세 작인 , 74세 작인 가

    그러한 예이다.31) 이 두 작품의 모티프는 51세 때의 과 같다. 20여 년 전 창작열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에 그렸던 소재를 70대의 무르익은 필력으로 자신의 기억

    을 스케치하듯 그린 것 같다. 특히 50대, 60대, 70대의 기년작

    이 모두 있는 5점의 ‘취우’는 그의 예술사고와 표현양식이 전개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데, 서동균에게

    각별한 소재였던 것 같다.

    서동균의 70대 수묵화는 필세의 강약과 억양이 노필(老筆)의 무심함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스스럼

    없는 필묵의 세계를 보여준다. 모산(慕山) 심재완(1918~2011)은 ‘죽농(竹儂)’ 시기의 작품을 “의식적인 구

    도나 기교의 범주를 넘어 붓 가는대로 맡겨도 제자리 제 격(格)에 들어맞는 자연스럽고도 신묘한 예술성

    을 보이는 경지의 시대”라고 하였는데 70대의 수묵화야말로 이러한 표현에 걸 맞는 서동균 만년의 필묵

    세계를 보여준다(심재완, 1986: 235).

    31) 의 화제는 “隨手亂抹 安望合則 乙卯夏日 無如女史 淸囑 竹翁”, 의 화제는 “驟雨 寫爲根燮兒囑 丙辰

    立冬後日 竹儂”이다.

  • 28 이 인 숙

    대구경북연구 제14권 제1호

    III. 현대기 대구 산수화

    현대기 대구 전통화단 산수화는 서동균과 그의 제자인 청농(靑儂) 김익풍(金益豐), 긍농(肯農) 임기순

    (任璣淳, 1912-1994), 해정(海亭) 홍순록(洪淳鹿, 1916-1983)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서동균의 산수화를 가

    장 잘 계승한 인물은 김익풍으로 여겨진다. 서동균은 1974년 자신의 작가 인생 60년을 회고하면서 김익풍

    은 처음부터 자신이 가르쳤는데 당시 이미 사망하였다고 하였다.32) 김익풍은 대구경북지역에서 요절한

    천재작가로 알려져 있으나 생몰년을 비롯한 생애 관련 자료는 찾기 어렵다. 1930-40년대에 서동균에게

    배워 1950-60년대에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작품은 「근대 교남 서화전」에 실린 을 비롯해 산수병풍 여러 틀이 보여 산수화를 가장 잘 하였던 것 같다. 아울러 서예와 사군자화, 등도 전하고 있어 전문 서화가로서의 수업을 서동균에게 착실히 받아 작화의 범주가

    넓었던 것 같다. 김익풍의 산수화는 수묵을 기조로 하면서 담채를 약간 가미하였고 관념적인 구도에 부분

    적으로 실경적 요소를 절충하여 서동균의 화풍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는 6폭으로 함께

    전하는 병풍체 산수 중 한 폭으로 구도와 준법은 화보풍이지만 근경의 나룻배와 사공, 중경의 절벽 위

    소나무, 원경의 초가 등에서는 풍경화적인 시각을 볼 수 있다.

    홍순록은 동경 센슈대학(專修大學)에서 수학한 교직자 출신으로 서양화 개인전을 열기도 했으나 서예

    와 수묵화로 방향을 바꾸었고 서화연구실을 운영하였다.33) 홍순록은 서예를 비롯하여 사군자, 화훼, 기명

    절지 등 다양한 수묵화를 그리는 가운데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산수화를 그렸다. 초기

    작은 서동균의 와 유사한 붓질이 많은 섬세한 화풍이었으나 후기에는 수분이 많은 부드럽고

    풍성한 발묵의 과감한 필치를 구사하였다. 은 홍순록의 후기작으로 경물을 큼직큼직한 붓질로

    대범하고 단순하게 표현하였다.

    김익풍, 홍순록, 임기순 등은 1930-50년대에 서동균에게 배운 초기 제자들로 이 시기에 서동균이 산수

    화를 많이 가르쳤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34) 이들은 수묵화의 분위기를 벗어나지 않는 범주 내에서 담채

    를 약간씩 사용하고, 관념적인 이상경의 구도 속에 사생적 경물을 절충하고 있어 서동균의 영향을 받아들

    인 가운데 각자의 필묵법과 필치에 따른 나름의 산수화풍을 보여준다.

    서동균과 비슷한 연배인 희재(羲齋) 황기식(黃基式, 1905-1971)은 경산 자인 출신으로 산수, 기명절지,

    사군자, 화훼 등 여러 분야의 그림을 그렸고 개성적인 서풍의 글씨도 잘 썼다. 동생 효재(曉齋) 황기완(黃

    基完)도 그림을 그렸던 형제 서화가로 ‘황부자’로 불렸던 대지주 집안이다. 황기식은 1930년대부터 서화활

    동을 하여 허섭의 산수화에 화제를 써서 합작한 작품도 남아있다. 1963년 대구경북 서화가들의 모임인

    해동서화협회 회장을 지냈고, 1969년 65살 때 공화회관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평생 서화에 심취하였다.

    황기식의 산수화는 서동균과 달리 지필묵을 사용한 풍경화의 성격이 강하여 실경 스케치에 의한 작품이

    32) 서동균은 김익풍은 처음부터 자신이 가르쳤고, 서병오 생존 시부터 杜雲 李命龍, 斗人 李源一 등을 지도했는데 육이오

    때 월북하였다고 하였다(「매일신문」1974.8.16, ‘書畫六十年 竹儂徐東均回顧錄’ 6).33) 홍순록의 업적을 기려 1986년 대구경북서예가협회 주최로 대구시민회관에서 ‘해정 홍순록선생 유작전’이 열렸고, 2006년

    ‘향토출신 작고작가 회상-김수명, 손일봉, 홍순록전’이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다.34) 서동균은 “젊었던 시절에 산수, 기명절지, 영모절지, 사군자, 서예 등을 했으나 후에 사군자와 서예에 집중하였다.”고 하였

    다(「대구일보」 1963.7.10, ‘가장 아끼고 싶은 그 작품’).

  •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 1903-1978) 산수화 연구 29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김익풍, 6폭 중, 견본담채, 136×34cm, 개인

    홍순록, , 지본담채, 139×52cm, 개인

    황기식, 2폭 중, 지본담채, 110×57.5cm, 개인

    임기순, , 지본담채, 32×95.5cm, 개인

    여럿 보인다. 은 금강산도 2폭으로 구성한 가리개 중의 한 폭이다.

    임기순은 대죽을 많이 그린 사군

    자화가로 화분에 담긴 매난국죽을

    주요 모티프로 하는 기명절지화도

    그렸고 개성적인 초서도 잘 썼다.35)

    1950년대에 서동균에게 배웠던 임

    기순은 처음에는 산수화를 많이 그

    렸던 듯 다수의 산수화가 전한다.

    은 횡폭의 수묵담채로 폭

    포가 있는 산속의 물가 풍경을 사생

    에 기반 하여 회화화 하였다.36)

    1970-80년대 대구에는 풍경화풍의

    수묵산수화를 그린 작가들이 여럿

    있었다. 청도 출신인 소산(小山) 박

    대성(1945-)은 20대 초인 1960년대

    중반 서동균에게 배우기도 했고, 국

    전에 연이어 입선하며 대학에도 출

    강하는 등 대구에서 활동하다,37)

    1975년 매일신문 부설화랑 개관기

    념전을 끝으로 서울로 올라갔다.38)

    또 동경 우에노(上野) 미술학교를

    졸업하였으나 한의사로 활동하다

    만년에 다시 붓을 든 벽성(碧星) 국

    명웅(1907-1987)도 북화풍 산수화

    를 그려 1980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인전을 갖기도 하였다.

    허섭의 묵산수로 부터 시작된 근대기 대구 산수화는 서동균에 의해 수묵담채화풍으로 변모되어 1980년

    대까지 전개되었으나,39) 홍순록 이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40) 서병오로 부터 시작된 근대기 사군자화

    가 현재 5세대, 6세대 작가들에게까지 직접 사승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현상이다. 전통회화에

    35) 계명문화대학 교수를 지낸 미술평론가 權沅純(1940-)은 1956년 자신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서동균에게 서화를 배우러 가

    니 임기순이 배우고 있었고, 얼마 후 박근술이 배우러 왔다고 하였다(2009년 10월 21일 구술).36) 화제는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肯農”으로 이백의 시 중의 구절이다.37) 서동균의 아들로 계명대학교 서예과 교수를 지낸 野丁 徐根燮(1946-)은 1966년 서울의 국전 출품 장소에서 박대성과 만

    나 알게 되었는데 이듬해 대구로 찾아왔고 서동균에서 배웠다고 하였다(2014년 12월 13일 구술).38) 「동아일보」 1975.4.3. ‘대구매일화랑서 소산 박대성씨 동양화 귀국전’39) 1970년대 이후로는 영남대, 계명대, 대구대, 대구가톨릭대, 경북대 등의 미술대학에 동양화과, 한국화과가 설치되어 교과

    과정의 일부로 산수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40) 산수화로 알려진 홍순록의 제자는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아들 묵농(墨儂) 홍종표(洪宗杓)의 묵죽화 등이 전하고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잘 알 수 없다.

  • 30 이 인 숙

    대구경북연구 제14권 제1호

    대한 일반의 호응도와 수요의 측면에서 산수화가 사군자화보다 우위에 있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상황에

    서 볼 때 대구는 산수화보다 사군자화, 문인화가 더 선호된 특이한 현상을 보여준다. 20세기 대구 전통회

    화의 전개에서 근대와 현대를 연결한 서동균이 사군자화와 산수화를 모두 다 잘 하였던 사실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다.

    IV. 맺 음 말

    근현대기 대구는 서화 애호계층이 폭넓게 존재하였고 전통화단의 역량이 매우 높았다. 산수화는 대구

    전통화단에서 근대기에서 현대기로 이어지며 지역적 특징을 가지고 전개되었으나 그 내용은 잘 알려지지

    못했다. 이 연구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산수화를 그렸으나 사군자화가로서의 위상에

    가려 주목되지 못했던 서동균의 산수화가로서의 위치를 정립하고 그의 산수화풍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고

    자 한 것이다.

    근대기 대구 산수화는 허섭으로 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허섭은 한학과 시문서화 애호계층이 많

    았던 지역의 문화적 분위기와 서예와 사군자화 등 필묵 자체의 표현성을 중시하는 대구 서화계의 특성과

    상통하는 묵산수 화풍을 이루었다. 허섭 이전에 정안복, 서병건 등 산수화의 뿌리가 지역에 있었고, 서병

    오도 산수화를 그렸으며 곽석규, 지창한, 김우범 등의 수묵산수화가 지역 서화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다.41)

    그러나 허섭 이전 대구에는 본격적인 산수화가가 없었다.

    허섭을 고모부로 둔 서동균은 근대기에 허섭의 묵산수로 부터 출발하여 수묵과 채색, 관념경과 현실경

    을 복합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었고, 대구화단에서 산수화가 근대기에서 현대기로 이어져 전개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서동균의 산수화는 1930년대-1940년대에 허섭의 묵산수를 배우고 이를 심화한

    초기, 1950년 경-1965년 경 실경의 현실미를 추구하고, 표현기법을 탐색하는 등 자신의 독자적 화풍을

    모색한 중기, 1966년 경부터 작고하기까지 수묵과 담채를 조화시키고 관념경에 실경을 절충하여 고전풍

    산수미를 이룬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서동균은 오랜 역사성을 지닌 정형산수의 공인된 회화적 장치를 활

    용하면서 사실감 있는 경물을 복합하여 보편적 이상경의 산수미를 획득하였다.

    현대기 대구 산수화는 서동균과 그의 제자인 김익풍, 임기순, 홍순록 등에 의해 1980년대까지 그려졌다.

    이들은 수묵과 색채, 관념경과 현실경을 절충한 서동균의 화풍을 따르면서 각자 자신의 고유한 필묵적

    개성을 나타낸 산수화를 보여주었다. 근현대기 대구화단 산수화는 현실경의 사생에 기반 한 수묵풍경화

    의 성격을 갖는 중앙화단 동양화나 사의화풍이면서도 감각적인 호남화단 남종화와 달리 산수경물을 통해

    나타나는 필법과 묵법 자체의 서예적, 추상적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필묵성을 특징으로 한다.

    41) 이에 대해서는 이인숙,「20세기 ‘대구문인화파(大邱文人畵派)’의 형성과 변천 연구」, 469-473면 참조.

  •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 1903-1978) 산수화 연구 31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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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접수일:2015. 02. 23, 심사완료일:2015. 03. 31, 최종원고:2015.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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