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파격기우 농바우끄시기 의 관행을 『경국대전』에 12단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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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금산민속의 특색과 갈래 203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삼았던 우리 민족에게 있어 우순풍조(雨順風調)와 시화 연풍(時和年豊)에 대한 기대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때문에 물의 이로움(水利)을 극대화하고 가뭄이라는 불가항력의 기상이변에 대응하려는 노력은 다양한 방식으 로 전개되었다. 그 전형의 하나가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무제·비우제]이 다. 오늘날처럼 수리관개(水利灌漑) 시설이 용이하지 못했던 시대에 가뭄은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은 지대한 관 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기우제는 농경의 시작과 더불어 그 기원을 함께 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오랜 역사 를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7년(253)에 “5월부터 7 월에 걸쳐 비가 오지 않아 조상의 묘(朝廟)와 명산에 기우제를 지내자 곧바로 비가 내렸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비단 신라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에 한발이 들었을 때 왕이 손수 기우제를 주관하거나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서 비를 기원하는 풍속은 고대사회 이래 중요한 의식의 하나였다. 이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옛 부여의 풍속에 날씨가 순조롭지 않아 오곡이 익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마 땅히 바꾸거나 혹은 죽여야 한다.”는 기록에서 엿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기우(祈雨) 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치수(治水)의 문제는 고대의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덕목이요 선결과제였다. 이러한 기우제 전통은 고려-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기우(祈雨)와 관련된 무수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 의 관행을 『경국대전』에 12단계로 세목을 마련하여 명문화했는가 하면, 성종 5년 (1474)에는 예조에서 기우제에 관한 9개 항목을 정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또한 『국 조오례의(國朝五禮儀)』나 『기우제등록(祈雨祭騰錄)』 ,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 齋叢話) 』에도 ‘기우지례(祈雨之禮)’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신 증동국여지승람』 각 현의 산천조에는 기우에 영험한 장소에 대한 기록이 허다하여 일일이 다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지난날 농업용수를 확보하는 일은 풍흉을 좌우하 는 관건이었던 만큼 국가 차원에서 법제화하여 이를 따르도록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각 지방마다 독특한 기우풍속의 전통을 발전시켜 왔으니, 금산 제2절 여성들의 파격기우 농바우끄시기 제2권 전통이 살아있는 터전

Transcript of 여성들의 파격기우 농바우끄시기 의 관행을 『경국대전』에 12단계로...

  • 제1장

    금산

    민속

    의 특

    색과

    갈래

    203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삼았던 우리 민족에게 있어 우순풍조(雨順風調)와 시화

    연풍(時和年豊)에 대한 기대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때문에 물의 이로움(水利)을

    극대화하고 가뭄이라는 불가항력의 기상이변에 대응하려는 노력은 다양한 방식으

    로 전개되었다. 그 전형의 하나가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무제·비우제]이

    다. 오늘날처럼 수리관개(水利灌漑) 시설이 용이하지 못했던 시대에 가뭄은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은 지대한 관

    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기우제는 농경의 시작과 더불어 그 기원을 함께 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오랜 역사

    를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7년(253)에 “5월부터 7

    월에 걸쳐 비가 오지 않아 조상의 묘(朝廟)와 명산에 기우제를 지내자 곧바로 비가

    내렸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비단 신라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에 한발이 들었을 때

    왕이 손수 기우제를 주관하거나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서 비를 기원하는 풍속은

    고대사회 이래 중요한 의식의 하나였다. 이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옛 부여의

    풍속에 날씨가 순조롭지 않아 오곡이 익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마

    땅히 바꾸거나 혹은 죽여야 한다.”는 기록에서 엿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기우(祈雨)

    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치수(治水)의

    문제는 고대의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덕목이요 선결과제였다.

    이러한 기우제 전통은 고려-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기우(祈雨)와 관련된

    무수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

    의 관행을 『경국대전』에 12단계로 세목을 마련하여 명문화했는가 하면, 성종 5년

    (1474)에는 예조에서 기우제에 관한 9개 항목을 정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또한 『국

    조오례의(國朝五禮儀)』나 『기우제등록(祈雨祭騰錄)』,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

    齋叢話)』에도 ‘기우지례(祈雨之禮)’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신

    증동국여지승람』 각 현의 산천조에는 기우에 영험한 장소에 대한 기록이 허다하여

    일일이 다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지난날 농업용수를 확보하는 일은 풍흉을 좌우하

    는 관건이었던 만큼 국가 차원에서 법제화하여 이를 따르도록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각 지방마다 독특한 기우풍속의 전통을 발전시켜 왔으니, 금산

    제2절 여성들의 파격기우 농바우끄시기

    제2권 전통이 살아있는 터전

  • 204제

    2편 민

    의 ‘농바우끄시기’와 ‘대늪치기’는 우리나라에서 전승되고 있는 다양한 기우제 가

    운데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이고 기상천외한 민간기우의 전형이라 해

    도 손색이 없다.

    농바우끄시기는 바위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기우행위로써 ‘농바우를 끌다’ 또

    는 ‘끌어내린다’는 뜻이 담겨 있다. 농바우는 부리면 어재리 금강변에 있는 바위인

    데, 절벽 위에 위태롭게 걸려있는 모습이 마치 반닫이 농(籠)을 뒤집어놓은 것처럼

    생겼기 때문에 유래된 명칭이다. 그런데 이 바위에는 용력이 출중한 장수의 갑옷이

    들어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으며, 농바위가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면 천지가 개

    벽한다는 속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런 까닭에 극심한 가뭄이 닥치면 주변의

    부녀자들은 동아줄을 꼬아서 농바위에 걸고 줄다리기를 하듯 끌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비가 내리기를 기원한다. 이를 ‘농바우끄신다’고 하는데, 이렇게 한바탕 농바

    우를 끄시고 난 뒤에는 크게 효험이 있어 반드시 비가 온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농

    바우끄시기는 천지개벽을 도모함으로써 이를 보고 놀란 하늘에서 비를 줄 것이라

    는 사고를 전제로 성립되었다.

    현지조사에 의하면 농바우끄시기는 어재리 느재를 비롯하여 금강 상류에 위치한

    수십 개의 마을이 참여한 대규모의 기우행사였다. 그것도 철저하게 남성은 배제된

    채 여성들이 주관하는 기우였으며, 여느 기우제와 견주어 주술적 장치가 매우 풍부

    하고 자못 역동적일 뿐 아니라 독특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눈

    길을 끈다.

    이와 같이 여성들이 주관하는 농바우끄시기는 금강 상류에서 전승되는 기우제

    가운데 가장 독특하면서도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농바우에 동아

    줄을 걸고 이를 끌어 당기며 비를 기원하는 풍속은 전형적인 위협기우(威脅祈雨),

    즉 비를 주관하는 용신이나 천신에게 위해를 가함으로써 비를 줄 것이라는 민간사

    고에 기초한다.

    1. 농바우끄시기의 유래

    농바우가 자리한 곳은 부리면 어재리 느재에서 동남쪽으로 300~400m쯤 떨어

    진 시루봉 중턱이다. 이곳은 부리면 평촌리와 신촌리를 휘돌아 느재를 지나던 금강

    의 물줄기는 점점 좁아지면서 여울(갯여울)을 형성하는데, 그 오른쪽으로 100m쯤

    떨어진 시루봉 밑에 농바우가 위치한다. 크기는 가로 3.7~4m, 세로 2.7m인데, 깎

    아지를 듯한 거대한 절벽 위에 직사각형의 농바우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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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금산

    민속

    의 특

    색과

    갈래

    이다.

    그 형태가 마치 농처럼 생겼기 때문

    에 농바우라 불리는 이 바위는 실제 반

    닫이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과 흡사

    한 형상을 띠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옛

    날에 이 마을에 살던 힘센 장수가 농바

    우 속에 갑옷을 넣고는 아무도 꺼낼 수 없도록 뒤집어 놓았다는 전설이 구전되고 있

    으며, 그 자태가 자못 신비로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런가 하면

    농바우 옆에는 남성의 성기를 닮은 거대한 갓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장수의 갓

    (혹자는 임금의 갓)이 들어 있다고 전한다. 농바우와 갓바우는 예전에 손이 귀한 집

    에서 아들을 낳으면 이 바위에 팔아 무병장수를 빌었고, 또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

    은 농바우와 갓바우에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렸다. 실제 느재에는 뒤늦

    게 아들을 둔 집에서 농바우에 아들을 팔아 그 이름을 농바우라 지은 사람도 있다

    고 한다.

    농바우끄시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밝히기란 쉽지 않다. 대개의

    민속이 그러하듯 농바우끄시기의 유래에 대해서는 누대에 걸쳐 입에서 입으로 전

    해지는 전설만 무성할 뿐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는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몇 조각의 이야기를 수습하여

    갈무리한다면 농바우끄시기의 역사적 실체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

    된다.

    농바우 주변에는 유난히 전쟁 및 장수와 관련된 전설·지명이 집중적으로 분포

    한다. 이는 금산지역이 삼국시대 이래 숱한 전란을 겪어온 요충지라는 역사적 사실

    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 중심에 농바우가 있으며 지금도 주변마

    을에서는 여기에 얽힌 다양한 전설이 구전되고 있다.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농바우

    농바우 근경

  • 206제

    2편 민

    ① 수 백 년 전의 일이다. 어재리 느재마을에는 두 명의 부인을 거느린 장수가 살고 있었다.

    장수의 부인들은 질투가 심하여 서로 먼저 장수를 차지하려고 늘 투기를 일삼았다. 그러

    던 중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하여 장수는 부인을 집에 두고 싸움터로 나가 전쟁에서 커다

    란 공을 세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벗어 놓은 장수의 갑옷을 두고 또다시 두 부인은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오른 장수는 갑옷을 빼앗아 바위로

    된 단단한 농속에 넣고 다시는 꺼내 볼 수 없도록 뒤집어 놓았다. 그때 장수가 갑옷이 보

    관된 농이 지금의 농바우라고 한다.

    ② 옛날에 힘센 장수가 살고 있었다. 장수는 자기의 갑옷을 농바우 속에 넣어 두었는데, 세인

    들이 그 소문을 듣고 갑옷을 구경하려고 몰려들어 자꾸만 농바우를 열어보았다. 이에 화

    가 난 장수가 농바우를 뒤집어 놓고 다시는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다.

    ③ 언제부터인가 농바우에는 임금님의 갑옷이 들어있다는 전설이 내려왔다. 그런데 임금에

    게는 애첩이 한 명 있었는데, 갑옷이 몹시 보고싶어 자꾸만 농바우를 열어 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화가 난 임금님은 장수를 거느리고 직접 이곳에 행차하여 갑옷을 꺼내 입고는 장

    수로 하여금 농바우를 뒤집어 놓도록 하였다. 임금은 돌아가는 길에 농바우 옆에 있는 갓

    바위에서 갓을 꺼내 쓰고 말짜작바우가 있는 쪽으로 말을 몰고 사라졌다. 그때 임금님이

    말을 타고 간 바위에는 말 발자국이 여러 개 찍혀 있는데, 그 바위가 지금의 말짜작바위라

    고 한다. 또한 농바우와 100m 가량 떨어진 강변에는 망바우(아랫망바우, 윗망바우)라 불

    리는 바위가 있다. 이것은 임금이 농바우에 행차했을 때 군사들이 그 바위에 올라가서 망

    을 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시루봉 아래 위치한 농바우 원경 농바우 좌측에 있는 갓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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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금산

    민속

    의 특

    색과

    갈래

    마을에서 구전되는 농바우 전설에는 한결같이 장수와 갑옷이라는 공통점을 가지

    고 있다. 사례 ①과 ②는 단지 장수의 부인이 빠져 있다는 점이 다르고, ①과 ③은

    장수의 갑옷이 임금의 갑옷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장수와 갑옷은 비를 기

    원하는 농바우끄시기의 유래와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의 실마리는

    다음에서 쉽게 찾아진다.

    농바우가 굴러서 땅밑으로 떨어지는 날이면 천지가 개벽하여 새로운 세상이 온다. 그래서

    극심한 가뭄이 들어 농작물이 타들어가면 부녀자들이 농바우에 동아줄을 걸고 끄시는(끌어

    당기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이를 본 하늘에서 깜짝 놀라 속히 비를 내려준다.

    요컨대 농바우는 장수 혹은 임금의 값옷이 들어있는 신령스런 바위이고, 언제부

    턴가 그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천지가 개벽한다는 전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때

    문에 부녀자들은 그러한 관념을 역이용하여 날이 가물면 농바우를 끄시는 척하는

    것인데,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내려다보고 농바우가 굴러서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를 내려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지개벽의 관념은 농바우끄시기를 잉태하는 민간사고의 원천으로 작

    용하였음을 알 수 있고, 애기장수전설과 결합되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

    러낸다. 농바우가 위치한 금산군 부리면 어재리와 평촌리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마

    을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구전되고 있다.

    옛날에 어재리 느재마을에 마음씨 착한 노부부가 살았다. 부부는 농사를 지으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지만, 후사를 이어줄 자식이 없다는 것이 커다란 근심거리였다. 그래서 노

    부부는 하루를 거르지 않고 지성으로 불공을 드렸다. 그들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부인

    에게 태기가 있더니 마침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갓 태어난 아이는 이빨이 나고 또 겨드랑이에는 날개와 같은 비

    늘이 달려 있었다. 노부부는 불길한 징조라 여겼지만 만년에 얻은 자식인지라 금지옥엽으로

    열성을 다해 키웠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이의 나이가 세 살이 되었다. 이때부터 집안에서는 해괴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부부가 농사일을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도저히 어린이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물건들이 여기저기 옮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일을 하러가는 척

    하고 밖으로 나갔다가 몰래 집으로 돌아와서는 문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

    니 아이가 빗자루를 가지고 주문을 외워 군사를 만들고, 그 군사들을 호령하면서 병정놀이

    를 하는 것이었다. 이를 본 노부부는 집안이 망할 징조라 여겨 궁리 끝에 아이를 질식시켜

    죽이고 말았다.

  • 208제

    2편 민

    아이가 죽고 나자 멀쩡하던 하늘에서 뇌성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 앞에 있는 구

    라리(제원면 용화리 소재)라는 산에서 백마 한 필이 슬피 울면서 뛰어오더니 지금의 농바우

    가 있는 곳에서 죽는 것이었다. 그 백마는 장차 아이가 장성해서 군사를 지휘할 때 탈 말이

    었고, 백마가 죽은 농바우에는 아이가 장수가 되면 입을 갑옷이 들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이웃 마을에 사는 욕심 많은 석수쟁이의 귀

    에도 흘러들어 갔다. 소문을 들은 석수쟁이는 바위 속의 갑옷을 꺼내 입을 요량으로 산 정상

    에 있는 농바우에 올라가 징으로 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이 얼추 마무리될 무렵에 날이 저

    물어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이튿날, 남의 눈에 뛸세라 부랴부랴 농바우가 있는 산으로 향하던 석수쟁이는 그만 소스

    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산꼭대기에 있어야 할 농바우가 굴러 떨어져 뒤집힌 채로 산 중턱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후로는 주변 마을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모두가 굶어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주민들은 하늘만 원망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을 지나던 스님이, “석수쟁

    이가 농바우를 건드렸기 때문에 하늘이 진노하여 가뭄이 들게 한 것이다. 하늘을 더 노하게

    하면 비를 줄 것이다.”하고 일러주었다. 촌로들이 그 방법을 묻자, “농바우를 흔들어라. 농바

    우를 끄셔서 하늘을 노하게 하되 반드시 여자들만 가야 한다.”라고 일러주고는 홀연히 사라

    졌다.

    스님의 말대로 마을의 모든 부녀자들이 몰려가서 농바우를 끄시니 과연 응함이 있어 멍석

    날 같은 비가 쏟아졌다. 그 뒤부터 가뭄이 들면 이웃 마을의 부녀자들은 농바우를 끄시며 비

    가 내리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애기장수 전설은 조선 후기 변혁을 갈망하는 백성들의 의

    지의 산물이다. 곧 애기장수가 태어나면 어지러운 사회를 평정하고 그동안 천대받

    고 억눌렸던 사람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대동의 세계가 도래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기장수전설은 기존의 봉건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당시 민

    심 흐름의 일단을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후천개벽과 같은 혁세사상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고 농바우 전설의 천지개벽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전설 속의 애기장수가 으레 꿈도 펴기 전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시대상황(변

    혁 주도세력)의 한계를 의미한다. 즉 민중은 구원자의 출현을 간절히 바라고 있으

    면서도 동시에 변화와 혁명을 두려워하여 구원자의 이미지는 결실을 보지 못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장수설

    화에 의하면 농바우에는 장수의 갑옷이 들어있다고 했다. 그러나 애기장수전설에

    는 단순한 장수의 갑옷이 아니라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고 대동의 세상을 열어갈

    미래의 구원자가 장차 병정을 지휘할 때 입을 갑옷이 들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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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금산

    민속

    의 특

    색과

    갈래

    따라서 석수쟁이가 갑옷을 꺼내기 위해 농바우를 건드린 것은 곧 천지개벽이라

    는 성역의 금기를 깨뜨리는 도전행위이다. 왜냐하면 농바우가 열리는 것은 애기장

    수의 출정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것이고, 그것은 또한 신의 뜻을 정면으로 거부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변혁의 상징인 애기장수는 이미 죽임을 당했고 또 갑

    옷을 꺼내려던 석수쟁이의 꿈도 좌절되었다. 다만 돌아온 것이 있다면 농바우를 건

    드린 대가로 가뭄이라는 엄청난 하늘의 재앙을 초래하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노승

    의 해결책은 놀랍게도 농바우를 흔들어서 하늘을 노하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록 애기장수는 죽임을 당했지만 농바우에 갑옷이

    보관되어 있는 한, 그리고 농바우가 산중턱에 머물러 있는 한 천지개벽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노승이 농바우를 흔들며 날궂이를 하라고 권

    고한 것은 곧 천지개벽을 도모해서 비를 기원하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농바우가

    굴러서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발생하기 전에 하늘에서 비를 내려줄 것이라는 합리

    적인 사고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상 앞에서 살펴본 장수설화와 애기장수전설을 종합해 보면 농바우끄시기가 유

    래한 시기는 늦어도 조선 후기로 추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농바우 주변마을의 지

    리적 조건과 역사적인 배경을 감안한다면 이보다 훨씬 이전에 농바우끄시기가 유

    래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농바우를 끼고 있는 금강 상류지역은 이미 선사시대

    부터 인류가 정착했음이 확인되고 있고,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으

    로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삼남대로의 하나인 지

    어재리 농바우(우)와 갓바우(좌)

  • 210제

    2편 민

    웃재를 끼고 있으므로 해서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침입하는 경로가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농바우 주변에는 전쟁·장수와 관련된 전설이 널리 퍼져나갔음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농바우끄시기의 유래전설 역시 이와 같은 역사적인 맥락

    과 정녕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며, 조선 후기 애기장수전설과 같은 혁세사상

    과 결합되면서 농바우에 대한 신비감은 더욱 증폭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농바우끄시기가 더욱 강화되는 동력으로 작용하였으리라고 본다.

    2. 농바우끄시기의 전승양상

    농바우끄시기는 금강 유역의 기우풍속을 대표할 수 있는 민간기우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느 마을의 기우제와는 달리 농바우끄시기는 인명이 달려있는

    혹독한 가뭄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실행되지 않았다. 실제 촌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생동안 농바우를 끄신 것은 고작 4~5회가 지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드문 일이었

    다고 한다. 그 까닭은 주민들 스스로 천지개벽을 꾀해 비 오기를 기원하는 행위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재리 느재마을의 사례를 중심으로 부리면과 제원면 일부지역에 전승되

    었던 농바우끄시기의 전개과정에 주목해 보자.

    가뭄의 징조가 엿보이면 마을의 부녀자들은 치성을 드리며 비가 내리기를 기원

    한다. 치성을 드리는 방법은 집집마다 왼새끼로 금줄을 꼬아 대문에 걸고 부정한

    사람이나 잡귀가 출입하지 못하도록 깨끗한 황토를 군데군데 뿌려둔다. 그리고 빈

    병에 물을 가득 담아 병의 주둥이에 솔가지를 꽂고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그러면

    병에 들어 있는 물이 솔잎을 타고 흘러나와 마치 비가 오는 것처럼 똑똑 떨어진다.

    즉 비가 오는 장면을 가상으로 연출함으로써 실제 상황에서도 비가 내리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정성을 다한 다음에도 별다른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마을에서는 농

    바우를 끄셔야 한다는 분위기가 점점 확산되어 간다.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 “저

    놈의 농바우를 깨부셔야지!”, “농바우를 끄셔야 비가 내릴 몬양여!” 하고 이구동성

    으로 의견이 모아지면 마을의 이장이나 원로에게 의견을 전달하여 날을 잡는다. 그

    날짜는 2~3일을 앞두고 다급하게 잡는데, 그 까닭은 예고없이 비가 내리는 것과 같

    이 느닷없이 날을 결정해야 더욱 효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택일

    후에 동네에서 초상과 같은 궂은 일이 있으면 농바우를 끄시지 않는다고 한다.

  • 211

    제1장

    금산

    민속

    의 특

    색과

    갈래

    한편 농바우를 끄시는 날이 결정되면 마을은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먼저

    부녀자들은 집집마다 돈과 곡식을 거출하여 농바우끄시기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한

    다. 그리고 부정이 없는 정갈한 여인으로 하여금 제물과 음식을 준비하도록 한다.

    이때 시장을 보는 여인은 부정한 것이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저녁에는

    남자들이 집집마다 짚단을 걷어서 농바우를 당길 동아줄을 트는데, 그 줄의 굵기는

    20㎝ 내외, 길이는 100발 이상이 되도록 길게 꼰다.

    당일 아침, 남자들은 밤이 늦도록 꼰 동아줄을 가지고 일찌감치 농바우가 있는

    시루봉으로 가서 줄을 맨다. 농바우에 줄을 매는 동안 부인네들은 목욕재계하고 깨

    끗하게 옷을 갈아입은 다음 제물과 음식, 술 그리고 날궂이를 할 때 사용할 챙이[키]

    와 바가지를 가지고 농바우로 향한다. 다만 달거리를 하거나 그밖에 부정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판단해서 농바우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농바우에 도착하면 그 밑에 제물을 차리고 기우제를 지낸다. 마을에서는 이것을

    ‘무주[무제] 잡숫는다’고 한다. 제물은 백설기·삼색실과·포·불백기 등이며 마

    을의 형편에 따라 돼지머리를 올려놓기도 한다. 제물이 진설되면 이장과 반장이 기

    우제를 지낸다. 절차는 축문 없이 간단하게 잔을 붓고 절만 올린다. 이어서 마을을

    대표하는 부인이나 할머니가 고사덕담으로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며 다음과 같이

    소지를 올린다.

    농바우앞에 제물을 건설하고 기우제를 지내는 모습(사진 양해남)

  • 212제

    2편 민

    하늘님네 오늘 그저 비좀 내리게 해주세요.

    하늘님네 산신님네 이렇게 기도를 드리오니,

    오늘해전 많은 비를 맞고가게 점지하옵소서.

    하늘님네 만인간이 모두 하늘님네한테 공을 드리오니,

    오늘해전 멍석날같은 비가 쏟아지게 점지하시소.

    소지를 끝으로 무제를 마치면 “농바우끄시세” 하는 신호와 함께 동아줄을 당긴

    다. 이때 입심 좋은 아주머니(혹은 남성 소리꾼)가 농바우 날망에 올라앉아 구성지

    게 선소리를 매기면, 맞은편 언덕에서 줄을 잡고 있던 아낙네들이 뒷소리를 하며

    농바우를 끄신다. MBC, 『한국민요대전』(충남 민요해설집)에 실린 농바우끄시기의

    소리는 다음과 같다.

    우여차(뒷소리)

    어구여차 / 우여차 / 우리가 / 무지 지낼 때 /

    비를 내리라고 / 무제 지내잉께 / 칠년대한 /

    가물음에도 / 비를 내려야 / 농사를 지지/

    어구여차 / 힘껏 댕겨서 / 질겁게 하고 /

    힘껏 댕겨서 / 질겁게 놀고 / 기분좋게 /

    고사를 해야지 / 비를 하느님이 / 내레주지 /

    이 바우는 / 특수한 바우요 / 하나님이 /

    마련한 바우고 / 옛날옛적 / 장수바우니 /

    갑오(갑옷) / 들은 가보니 / 이 바우를 / 건들기만 하면 /

    비를 내리게 / 하는 바우니 / 동애줄을 / 묶어 가주구 /

    시방 사람이 / 끌으면 / 뇌성겉은 / 우루루루 /

    하늘에 / 울며불며 / 구름에 / 모여들며 / 소내기가 /

    오면은 / 가뭄을 / 해소하는 / 옛날에 / 전설에 /

    전통있는 / 명문옷 / 그런 갑옷 / 바우로다 / 어구여차 /

    소내기 / 오게만 / 계속해서 / 끌어주소 / 어구여차 /

    우여차 / 계속해서 / 끌어주소 / 어구여차 / 우여차 /

    에헤헤 / 이 마당에 / 고사를 하고 / 징 장구를 /

    울려가면 / 갱변이서 / 그 개(보)를 맞고 /

    한 마대기(마당) / 풍장치고 / 지깔지게 / 놀다가면 /

    무지꾼이 / 소내기 맞고 / 출출하고 / 도망가데 /

    어구여차 / 재미좋다 / 해소했네 / 가뭄을 / 해소했네

  • 213

    제1장

    금산

    민속

    의 특

    색과

    갈래

    위는 어재리 느재 마을에서 5대째 살고 있는 김현준 씨가 예전에 농바우를 끄실

    때 직접 불렀던 소리이다. 사설에는 하느님이 마련한 특수한 바위가 바로 농바위이

    고, 그 속에는 장수의 갑옷이 들어 있으며 건들기만 하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유래전설과 동일한 내용이다. 즉 농바우를 끌어당기면 천지개벽이

    일어나기 전에 비가 내린다는 마을 사람들의 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아울러

    아낙네들이 농바우를 끄신 뒤에 강변으로 나아가 여울물을 막고 날궂이를 하는 과

    정이 담겨 있다. 이에 반해 농바우끄시기에 참여했던 할머니들이 들려준 소리는 다

    소 차이가 있다.

    천하통일 이룰 장군님네

    날이 가물어 농사를 못짓컷으니

    비좀 내려주시오

    어차 어차 어기어차

    오늘내루 비나 많이 와주시면 감사하것습니다

    어차 어차 어기어차

    비옵시소 비옵시소

    멍석날같은 비가 많이 쏟아지소

    엇차 엇차 어기어차 잘헌다

    여러 양반덜 줄골라 잡아댕겨 우엿차

    한몫지게 댕겨주소 우엿차

    이쪽줄은 잘못댕겨 우엿차

    소리가 틀리는구나 우엿차

    한몫지게 댕겨주소 우엿차

    오늘날로 비가오내 우엿차

    비가오면 참좋지 우엿차

    못하것네 못하것네 우엿차

    목마르면 술마시고 우엿차

    배고프면 밥을 줄테니 우엿차

    한몫지게 댕겨주소 우엿차

    그런데 1992년 마지막 농바우를 끄실 때까지 세 번이나 선소리를 한 적이 있는

    장중관 씨에 의하면, 예전에는 장백근(40여 년 전 작고) 옹이 줄곧 선소리를 했으나

    그가 세상을 뜬 뒤에는 자신이 직접 선소리를 했다고 한다. 또한 선소리를 매길 때는

  • 214제

    2편 민

    특별히 격식을 갖추어서 하는 것이 아

    니라 상여소리를 하듯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지루하지 않도록 재담을 섞는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농바우를 끄시는 요

    령은 양쪽 줄을 동시에 당기지 않고 어

    느 한쪽이 끌면 다른 쪽은 쉬어 가며 서

    로 엇갈리는 방식으로 줄을 당겼다. 그

    리고 뜨거운 햇볕 아래서 몇 시간에 걸

    쳐 농바우를 끄셔야 하기 때문에, 동아

    줄을 끌다가 힘이 들면 나무그늘 아래서

    밥도 해먹고 쉬어가면서 농바우를 끄시

    는 것이 상례였다. 1995년 ‘농바우끄시

    기보존회’에서 복원한 선소리와 뒷소리

    는 아래와 같다.

    어기엇차 우엿차

    어기엇차 우엿차

    천하통일 장군님네 우엿차

    비좀내려 주옵소서 우엿차

    천상에 천왕님네 우엿차

    비좀내려 주옵소서 우엿차

    어기엇차 우엿차

    어기엇차 우엿차

    동해바다 용왕님은 우엿차

    날가문지 모르시고 우엿차

    바둑놓기 바쁘시네 우엿차

    남해바다 용왕님은 우엿차

    서천바다로 물길러갔네 우엿차

    서해바다 용왕님은 우엿차

    날가문지 모르시고 우엿차

    깊은잠에 드시었네 우엿차

    어기엇차 우엿차

    어기엇차 우엿차

    농바우에 동아줄을 걸고 끌어당기는 모습(사진 양해남)

  • 215

    제1장

    금산

    민속

    의 특

    색과

    갈래

    이농바우 흔들어서 우엿차

    용왕님네 잠깨워서 우엿차

    우리소원 빌어보세 우엿차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엿차

    용왕님께 비나이다 우엿차

    비좀내려 주옵소서 우엿차

    밥잘먹는건 시절덕이요 우엿차

    날이가물어 다틀렸네 우엿차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엿차

    만백성 소원이니 우엿차

    비좀내려 주옵소서 우엿차

    배고파서 못하것으니 우엿차

    밥이나먹고 놀아보세 우엿차

    어기엇차 우엿차

    어기엇차 우엿차

    이렇게 해서 농바우끄시기를 마치면 마을의 신기(神氣)있는 할머니(혹은 단골내)

    가 점을 쳐서 언제쯤 비가 내릴 것인지를 예언하기도 한다. 점을 치는 곳은 갓바위

    밑에 움푹 들어간 부분인데, 신기(神氣)있는 할머니가 한 사람을 선정해서 대나무

    로 된 신장대를 잡게 한 다음 무당이 공수를 내리듯이 비올 시기와 강우량을 예언하

    는 것이다. 점괘가 잘 나오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점을 쳐서 언제 비가 내릴 것인

    지를 알아본다. 이때 할머니의 입에서 “날궂이를 하고 나면 비가 내릴 것이다.” 라

    든가 또는 “집으로 돌아갈 때 비를 맞고 갈 것이다.” 하는 점괘가 나오면, 아낙네들

    은 흡족히 생각하여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날궂이를 하러 갯여울로 간다.

    강변에 내려오면 돌을 날라다가 둑을 쌓고 여울물이 잘 흐르지 않도록 막는다.

    이것을 ‘개[洑] 막는다’고 한다. 곧 가뭄이 심해 강물조차 바닥을 드러낼 지경이니

    여울을 막아야만 물속에서 날궂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인네들은 크고 작은

    돌을 날라다 개를 막은 뒤, “우리 동네 처녀들이 날이 가물어서 빨래를 못해 시집을

    못가니 오늘내루 비 좀 내려 주시오.” 하고 간곡히 호소를 한다. 날궂이를 할 때는

    모든 아낙네들이 벌거벗거나 고쟁이만 걸치고 물속에 들어가서 갯여울이 떠나가도

    록 물장난을 치고 춤을 추며 논다. 혹은 더러운 고쟁이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강물

    에 속옷을 빨면서 온갖 해괴망측한 행동을 하는가 하면 더러는 물속에 오줌을 눕기

    도 한다. 강물을 더럽혀야 하늘에서 비를 내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인들의 날궂이는 단순히 물장난을 치고 노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 216제

    2편 민

    가 비를 염원하는 유감주술의 의미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아낙네들은 바가지를 가

    지고 서로 머리에 물을 부으면서 “비 맞아라, 비요! 비요! 이 비 맞고 목깡이나 하거

    라.” 하고 실제 소낙비를 맞는 흉내를 낸다. 또한 챙이[키] 물을 담아 마을을 향해

    까부르며 비가 내리는 시늉을 한다.

    이와 같이 농바우를 끄시고 날궂이를 한 다음에는 신통하게도 비가 오는 일이 적

    지 않았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장중관씨에 의하면 어느 해는 농바우를 끄시는

    데 진악산 줄기에서 먹구름이 일어나더니 이내 소나기가 쏟아졌고, 또 날궂이를 마

    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비구름이 몰려와서 장대비를 맞고 간 일도 있다

    고 한다. 또한 예전에 농바우를 끄시다가 비가 내리면 갓바우 밑에서 비를 피했다

    는 이야기를 노인들로부터 자주 들었다고 했다.

    한편 농바우가 있는 시루봉 정상 부근에는 병풍처럼 생긴 바위(병풍바우)가 우뚝

    솟아있는데, 구전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밑에는 천하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 이곳에 묘를 쓰면 그 집안은 대대로 영화를 누릴 수 있지만, 정작 느

    재와 그 주변마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농사를 망친다는 속설이 내려온다. 그리하

    여 일제강점기까지도 여자들이 농바우를 끄시고 날궂이를 하는 사이에, 남자들은

    시루봉에 올라가서 몰래 묘를 쓴 흔적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매장의 흔적이 있으면

    여지없이 파헤쳤다고 한다. 실제 예전에 부리면 현내리에 사는 길씨 성을 가진 사

    람이 이곳에 몰래 묘를 쓴 일이 있는데, 농바우를 끄시는 날 주민들이 몰려가서 묘

    를 파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장을 한 일도 있다고 한다.

    농바우에서 바라본 금강 상류, 부녀자들이 농바우를 끄신 뒤 강물을 막아 날굿이를 행한다.

  • 217

    제1장

    금산

    민속

    의 특

    색과

    갈래

    3. 농바우끄시기와 대늪치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농바우를 끄시며 비를 기원하는 풍속은 어재리 느재뿐만

    아니라, 부리면에 속한 대부분의 마을과 제원면 일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

    게 전승되었던 민간기우의 전형이었다.

    농바우끄시기의 분포는 어재리를 비롯하여 신촌리·평촌리·양곡리·수통리·

    도파리·불이리·현내리·예미리·관천리·선원리 등 부리면에 속한 대부분의 행

    정리와 자연마을을 망라한다. 뿐만 아니라 농바우와 인접한 제원면 용화리·가

    마골·금성리·저곡리 닭실 등에서도 농바우끄시기를 했으며, 가뭄이 극심한 해는

    농바우가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금산읍 등 외부에서 찾아오는 일도 빈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여러 마을이 농바우끄시기에 참여했음에도 그 주축을 이룬 것

    은 당연히 농바우를 끼고 있는 어재리 느재마을이었다. 그리하여 느재에서 농바우

    를 끄시고 나면 농바우에 동아줄이 걸렸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러면

    인접한 마을에서도 서둘러 날을 잡고 농바우를 끄시기 위해 속속 느재마을로 몰려

    들었다.

    각 마을에서 농바우를 끄실 때는 가급적 일정이 겹치지 않도록 자연마을별로 날

    짜를 잡는다. 그리고 당일에는 느재에서 했던 것처럼 목욕재계하고 몸단장을 한 다

    음 술과 음식을 갖추어서 부녀자들만 농바우로 간다. 농바우 앞에 이르면 일행은

    제물을 차려놓고 간단하게 무주[무제]를 지내되, 별도로 제관을 선정하지 않고 참

    여한 아낙네들이 모두 절을 하며 치성을 드린다. 그리고 할머니 한 분이 마을을 대

    표해서 소지를 올린 다음 농바우를 끄시는데, 동아줄은 느재에서 매어 놓은 줄을

    그대로 이용한다. 각 마을의 농바우끄시기가 어재리 느재와 다른 것은 농바우 날망

    에 올라앉아 선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단지 줄을 끄는 부녀자들 중

    에서 신명있는 여인네가 선소리를 매기면 나머지 사람들은 이를 받아 넘기며 농바

    우를 끄셨다.

    농바우를 끄시고 나면 갯여울로 내려와서 벌거벗고 날궂이를 하는데 느재마을과

    같이 키질이며 비오는 흉내를 낸다. 마을에 따라서는 강가에서 여울을 파는 시늉을

    하기도 하고, 모래사장에 키를 묻고 용처럼 만들어서 제를 지내기도 한다. 또는 느

    재에서 날궂이를 하지 않고 자기 마을에 있는 강변으로 가서 치성을 드린 다음 날궂

    이를 하는 마을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농바우를 끄시고 날궂이를 한 뒤에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대늪치

    기’를 한다. 대늪은 부리면 수통리 앞을 흐르는 금강 상류의 깊은 둠벙을 말하는데,

  • 218제

    2편 민

    아낙네들이 이 둠벙에 돌을 던지며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주민들에 따르

    면 이곳에는 예부터 용이 살고 있다고 전해지며 명주꾸리 한 타래가 다 들어갈 정도

    로 깊은 둠벙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30여 년 전에 제방을 쌓아서 물길을 돌리는 바

    람에 지금은 평범한 방죽처럼 변해 버렸다. 용에 얽힌 대늪 전설은 다음과 같다.

    아득한 옛날 대늪에는 한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 승천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

    고 있던 용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어느 날 새벽, 바야흐로 구름을 잡아타고 하늘

    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을에 사는 한 방정맞은 여인네가 그것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용이 올라간다!”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순간 천지를 뒤흔

    드는 천둥번개가 치더니 승천하던 용은 그만 대늪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늘로 올

    라가지 못해 이무기가 되어버린 용은 대늪과 방우리에 있는 장자늪을 오가며 살았

    다고 한다. 그러한 일이 있은 뒤 마을에서는 소나 돼지가 없어지는 일이 잦았고, 이

    를 두고 주민들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소행이라고 믿었다.

    대늪치기의 유래는 이와 같이 용을 매개로 해서 성립한 것이다. 즉 비를 부르는

    용을 위협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용에게 위해를 가함으로써 비를 내려준다는 사고

    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처럼 대늪치기는 농바우끄시기와 마찬가지로 부녀자들에

    의한 전형적인 위협기우의 성격을 띤다.

    그리하여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으면 마을의 아낙네들은 여기저기서 대늪을

    쳐야한다고 수군거리고 급기야 날을 잡고 대늪치기를 모의하게 된다. 길일을 택해

    대늪을 치는 날이 결정되면 아낙네들은 2~3일 전부터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치성을 드린다. 그리고 집집마다 대문 앞에 황토를 펴고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

    이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막는다. 또한 빈병에 물을 가득 담아 솔가지를 꽂고 거꾸

    로 매달아 놓는데, 그러면 솔가지를 타고 물이 흘러내려 비가 오는 것처럼 방울방

    울 떨어진다. 이밖에도 마을에서는 개고기를 먹거나 초상집에 다녀오는 등 가급적

    궂은일은 보고 듣고 행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대늪치기에 소요되는 비용은 하루 전날 집집마다 쌀과 보리를 거출하여 충당한

    다. 비용이 마련되면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물과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게 하는데, 이때에도 궂은 일이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당

    일 아침 아낙네들은 목욕재계하고 몸단장을 한 다음 깨끗한 복장을 하고서 대늪으

    로 몰려간다. 대늪에 이르면 제물을 진설하고 무제를 지내는데, 그 해 마을의 형편

    이 여의치 못해도 용에게 바칠 돼지머리는 빠뜨리지 않는다고 한다. 무제에는 별도

    의 제관은 선정하지 않고, 참석한 아낙네들이 함께 절을 올리는 것으로 치성을 드

    린 다음 할머니 한 분이 대표로 소지를 올린다. 그러나 마을에 따라서는 단골내가

    징을 치고 경을 읽으면서 직접 무제를 주관하기도 한다.

  • 219

    제1장

    금산

    민속

    의 특

    색과

    갈래

    제의가 끝나면 언제 비가 내릴 것인지 단골내가 점을 친다. 기우점(祈雨占)은 신

    장대를 잡게 해서 신이 내리면 대를 잡은 손이 심하게 흔들리는데, 그 순간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아낙네들은 언제, 얼마만큼의 비가 내릴 것인지 질문을 한다. 이때

    비가 많이 내린다는 점괘가 나오면 신장대를 높이 쳐들고 적게 내리면 살짝 든다.

    이렇게 해서 무제를 마치면 기운 센 아낙네가 돼지머리를 잡고서 “이 놈 먹고 비

    나 많이 오게 혀.” 하고 대늪으로 힘껏 던져준다. 그리고 명태포에 돌을 매달아 “용

    머리 때리세!” 하고 외치면서 용머리바우가 있는 곳으로 던진다. 그러면 그것을 신

    호로 해서 아낙네들은 제각기 돌을 주워 “용머리 때리세!”, “비도 안주는 용 때려잡

    세!”, “대늪치세!” 하고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돌을 던진다. 뿐만 아니라 몇몇 아낙

    네들은 대늪 앞에 있는 용머리바위에 올라가서 마른풀과 나뭇가지로 땔나무를 한

    짐 해놓고 그 위에 생솔가지를 잔뜩 얹어놓는다. 그런 다음 “비가 안와서 용머리 끄

    실르러 왔으니 비좀 내려주시오.”, “오늘내루 비 안오면 용머리 깬다!” 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불을 지르고 용머리에 올라가서 한바탕 춤을 추며 논다.

    이와 같이 대늪을 향해 돌을 던지고 용머리에 불을 놓는 까닭은 수신의 상징인 용

    을 위협하면 이를 보고 놀란 용이 비를 내려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생솔

    가지를 태우는 뜻은 연기가 많이 나게 함으로써 비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하늘

    에 알리고, 동시에 그 연기와 같이 비구름이 몰려올 것이라는 유감주술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한참 동안 돌을 던지다가 힘이 들면 하던 짓을 멈춘 채 음복(飮福)을 하고 밥해 먹

    으며 신명나는 놀이판을 벌인다. 그러다가 기운이 나면 “날궂이 하세!” 하고 외치

    면서 대늪치기에 참석한 아낙네들은 모두 벌거벗고 물에 들어가서 물벼락을 치고

    춤을 추며 날궂이를 한다. 이때 아낙네들은 속옷과 고쟁이를 빨며 “물이 없어 이 물

    로 빨래라도 해야 겠습니다.” 하고 절박한 심정을 호소하기도 한다. 또한 챙이로 물

    을 까불며 “비가 온다”, “비 맞아라!” 하고 서로 상대방에게 물을 마구 퍼붓는다. 뿐

    만 아니라 날궂이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저마다 대늪을 향해 온갖 욕설이며 협박하

    는 말을 하고는 발길을 돌린다. 마을에 따라서는 이렇게 하고서도 비가 내리지 않

    으면 밤마다 자기 마을 앞에 있는 강가로 나아가 챙이[키]에 물을 담아 동네를 향해

    까부르며 비를 기원하였다.

    농바우끄시기와 마찬가지로 대늪치기는 부리면에 있는 대부분의 마을에서 참

    여했으며, 부리면과 인접한 전북 무주읍의 굴천이·산의실·앞섬[내도]·뒷섬[후

    도]·대차리·펼문이 등 많은 마을 사이에서 전승되었던 민간기우이다. 그리하여

    가뭄이 극심한 해는 하루에도 서너 마을이 대늪을 치러 올 만큼 북새통을 이루었

    다. 특히 무주의 내도리 사람들이 와서 대늪을 치고 날궂이를 하면 효험이 있어 거

  • 220제

    2편 민

    의 예외없이 비가 내렸다고 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수통리에서 마지막으로 대늪을

    친 것은 1992년이었으며, 1994년 가뭄에는 부리면 선원리의 한 마을에서 대늪을 치

    고 돌아간 일이 있다.

    그런데 농바우끄시기와 대늪치기의 분포권이 일치하는 부리면 일원의 마을에서

    는 반드시 농바우를 끄신 다음에 대늪치기를 하는 것이 상례였으며, 해방을 전후해

    서야 농바우끄시기와 무관하게 대늪을 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또한 농바우끄시

    기를 더 큰 기우행사로 인식하여 느재에서 농바우를 끄셨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각

    마을에서는 서둘러 날을 잡고 농바우를 끄셨으며, 그렇게 하고서도 비가 내리지 않

    을 때는 대늪을 쳤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농바우끄시기를 주도했던 느재마을은

    대늪을 치지 않았음에도 대늪이 있는 수통리에서는 농바우를 끄시러 왔다는 주민

    들의 증언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조선후기 산림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송계(松契)는 식민지 임정(林政)을 구축하

    기 위한 사정자료의 확보 차원에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의

    명을 받은 일제의 관학자들은 1912년 충북 영동군과 진천군에 17개의 송계가 내려

    오고 있음을 보고하였고, 1917년 조사에서는 강원도 양양군에만 무려 90여 개의 송

    계가 조직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한 토지조사사업의 수행과정을 지켜본 그들은

    “노목이 생육하여 창창했던 지방은 으레 송계가 발달했던 사실이 명백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지적대로 기실 각 지역에서는 자치적인 금양수호(禁養守護)를 통해 산림자원

    의 보호와 화목(火木)의 수급에 송계가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특히 산간지

    대일수록 송계의 기능이 더욱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현지조사 결과 금

    산군에서는 150개 이상의 크고 작은 조직이 거미줄처럼 연계되어 있어 19세기 이래

    전국에서 송계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지역으로 손꼽힌다.

    송계란 ‘산림의 보호와 이용을 목적으로 조직된 계’ 또는 소나무 숲이라는 산림

    자원을 지속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자치적으로 결성된 조직체이다. 그러나 지난

    제3절 산림문화의 모델 금산의 송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