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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제7회 개혁신앙강좌 2010 가을 화란 개혁교회의 역사와 신앙 신정욱 목사 1. 네덜란드(화란)의 종교개혁 네덜란드의 종교개혁과 개혁파 교회의 역사를 보면 네덜란드 종교개혁과 이 후의 개 혁파 교회의 역사가 신조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견디고 항거하기 위해 벨직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과 같은 신 조를 만들어 신앙을 고백하였고, 이웃 독일에서 만들어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Heidelberg Catechism)을 받아들여 사용하였고, 예정론과 관련하여 이 신조들이 고백하는 바를 거부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맞서 이전 신조들에 고백된 것과 일치하는 것을 도르트 신경에 담아 다시금 고대의 신조들과 화란개혁교회가 신앙을 고백하였던 그 신조들 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흔히 나더러 레포르마치(Nadere Reformatie)라고 부르는 17세기-18세 기 초의 화란개혁교회의 제2의 종교개혁(the second Reformation)을 주도한 이들에게서도 이런 경향은 두드러져서 푸치우스(Voetius) 같은 경우는 경건에 관한 그의 가르침들에서 종 교개혁자들에게서 물려 받은 교리들을 철저하게 옹호하는 가운데 경건을 강조했다. 오히려 그의 경건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으로서 교리는 중요한 요소로서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비단 화란의 종교개혁기인 16-17세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화란의 개혁파 교회의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졌음을 볼 수 있다. 화란 개혁 교회사 에 있었던 ‘아프스케이딩(Afscheiding)’이나 ‘돌레앙치(Doleantie)’ 그리고 31조파의 분리와 같은 수 차례의 ‘분리와 복귀’ 운동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 위해 그들은 옛적 그들의 선조들이 만든 ‘하나되게 하는 세 가지 신조’ 곧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도르트 신경에 의지하고 그것들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약하면 화란 개혁파 교회는 성경적인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신조를 만들었고, 성경 적인 신앙을 간직하기 위해 신조를 고수하였고,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 경을 잘 가르쳐 주는 신조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본 글은 이와 같은 면에 주안점을 두고 화란 개혁교회의 역사를 아래에서 간략히 개 관하면서 그 역사에 나타난 그들의 신앙을 살펴보려고 한다. 1.1 정치적 배경 네덜란드의 종교개혁을 보면 종교개혁이 일어난 여느 나라의 경우처럼 정치적 독립 과 무관하지 않다. 그 이유는 정치적 독립 없이 종교적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 능한 상황들 때문이다. 화란의 경우도 다른 지역과 다르지 않게 종교개혁은 카톨릭교를 국 교로하는 국가의 정책에 의해 가해진 박해 가운데 종교적 자유를 획득하지 않으면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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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개혁신앙강좌 2010 가을

화란 개혁교회의 역사와 신앙

신정욱 목사

1. 네덜란드(화란)의 종교개혁

네덜란드의 종교개혁과 개혁파 교회의 역사를 보면 네덜란드 종교개혁과 이 후의 개

혁파 교회의 역사가 신조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견디고 항거하기 위해 벨직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과 같은 신

조를 만들어 신앙을 고백하였고, 이웃 독일에서 만들어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Heidelberg Catechism)을 받아들여 사용하였고, 예정론과 관련하여 이 신조들이 고백하는

바를 거부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맞서 이전 신조들에 고백된 것과 일치하는 것을

도르트 신경에 담아 다시금 고대의 신조들과 화란개혁교회가 신앙을 고백하였던 그 신조들

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흔히 나더러 레포르마치(Nadere Reformatie)라고 부르는 17세기-18세

기 초의 화란개혁교회의 제2의 종교개혁(the second Reformation)을 주도한 이들에게서도

이런 경향은 두드러져서 푸치우스(Voetius) 같은 경우는 경건에 관한 그의 가르침들에서 종

교개혁자들에게서 물려 받은 교리들을 철저하게 옹호하는 가운데 경건을 강조했다. 오히려

그의 경건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으로서 교리는 중요한 요소로서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비단 화란의 종교개혁기인 16-17세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화란의 개혁파 교회의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졌음을 볼 수 있다. 화란 개혁 교회사

에 있었던 ‘아프스케이딩(Afscheiding)’이나 ‘돌레앙치(Doleantie)’ 그리고 31조파의 분리와

같은 수 차례의 ‘분리와 복귀’ 운동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 위해 그들은 옛적 그들의

선조들이 만든 ‘하나되게 하는 세 가지 신조’ 곧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도르트 신경에 의지하고 그것들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약하면 화란 개혁파 교회는 성경적인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신조를 만들었고, 성경

적인 신앙을 간직하기 위해 신조를 고수하였고,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

경을 잘 가르쳐 주는 신조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본 글은 이와 같은 면에 주안점을 두고 화란 개혁교회의 역사를 아래에서 간략히 개

관하면서 그 역사에 나타난 그들의 신앙을 살펴보려고 한다.

1.1 정치적 배경

네덜란드의 종교개혁을 보면 종교개혁이 일어난 여느 나라의 경우처럼 정치적 독립

과 무관하지 않다. 그 이유는 정치적 독립 없이 종교적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

능한 상황들 때문이다. 화란의 경우도 다른 지역과 다르지 않게 종교개혁은 카톨릭교를 국

교로하는 국가의 정책에 의해 가해진 박해 가운데 종교적 자유를 획득하지 않으면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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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들이 개혁파 신앙을 받아들이고 박해 가운데서도 그토록 개혁신앙을 고수한 것은

그것이 참으로 성경적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처음에는 로마가 약 400년을 그리고 이어서 프랑크 왕국이 이 땅을 차지

하고 다스렸다. 화란은 이 프랑크 왕국에 의해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

었다. 그 후 프랑크 왕국은 프랑스, 독일 등 몇 개의 나라로 갈라졌는데 이후 이 저지대 지

역은 남부[현 벨기에]는 프랑스에, 북부[현 네덜란드]는 독일에 속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프랑스나 독일은 힘이 강하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에 화란은 남의 간섭을 받

지 않고 1300년대까지 무역과 공업으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가 발전

한 화란을 누르고 막대한 세금을 요구하고 무역까지 간섭하자 화란의 중심 지역이었던 플

란더즈 상인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영국이 프랑스와 100년 전쟁(1337-1453)에

돌입하게 되자 영국 편을 들었다. 플란더즈 지역의 상인들 뿐만 아나라 프랑스 지역에서도

프랑스 왕을 배신하고 영국 편을 든 지방이 있었다. 그곳은 부르고뉴 지방이었다. 부르고뉴

는 이 전쟁을 통해 플란더즈 지역과 가까워지게 되었으며 1369년 부르고뉴의 필립 공과 플

란더즈의 왕위 계승자인 마아가렛 공주가 결혼하여 플란더즈 지방이 부르고뉴 지방과 합치

게 되었다. 그후 부르고뉴의 왕 필립 공이 세상을 떠나자 1477년에 부르고뉴의 공주이며

왕위 계승자인 마라아가 오스트리아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시집을 감으로서 부르고뉴는

물론 플란더즈 지역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막

시밀리안 12세의 손자 카알 5세(1500-1558)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1506년 저지대의 통치

권은 부르고뉴 공국에서 스페인 왕 칼 5세(또는 챨스 5세)에게 넘어갔다. 칼 5세는 합스부

르그 왕가(王家) 사람인데 그는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했다. 그는 화란의 개신교도

들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카알 5세는 화란에 관용 정책을 폈었으나 그 자신이 독실

한 로마 카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신교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종교재판의 절차를 이용해서

신교도들을 처형하는 박해를 가하였다. 카알 5세의 개신교 탄압으로 인해 가장 많은 희생을

당한 사람들은 루터교도가 아니라 재세례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1523년에 시작된 이

박해는 30년 이상 많은 신자들을 화형장과 교수대로 보냈다. 카알 5세의 재위 기간 중에

적어도 5천명 이상이 이단으로 재판 받고 처형되었다. 카알 5세의 치하에서 개혁파를 비롯

한 화란의 개신교는 종교적 자유가 없었다.

카알 5세는 왕위를 스페인의 왕으로 있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아들 필립 2세

(1527-1598)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영국의 메리 여왕의 남편이었다.

카알 5세의 뒤를 이어 필립 2세(재위 1556-1598)가 스페인 왕이 되었을 때 화란 개혁교회

의 종교적 자유는 보다 제한되었다. 카톨릭 신자인 필립 2세는 4년간 네덜란드에 살았는데,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그는 로마교회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정책을 수행하였다. 필립 2세는 자신을 세계 카톨릭의 수호자라고 생각했

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제국의 신앙을 로마 카톨릭으로 일치시키려 시도했으며, 과대한

세금을 부과하고 이에 저항하는 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종교재판을 강화시켰다.

그의 배다른 여동생인 파라 후작부인 마가레트를 네덜란드 총독으로 파송하여 개신

교도들을 박해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권위를 위해서 스페인 병사들을 강화시켜 항상 주둔하

게 하였다. 이들과 주민들 사이의 분쟁은 계속 일어났다. 1566년 마가레트는 필립에게 박해

정책을 강행하도록 요구했다. 모든 백성들은 트렌트 종교회의의 규례대로 신앙을 고백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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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강요받았다. 다시 말하면 카톨릭의 신앙과 여러 의식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대로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계속 종교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네덜란드 사람들

로 하여금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게 했다. 많은 귀족과 지도자들은 형이 언도되고 그 재판

정은 피의 법정이 되었다. 탄압이 심해질수록 개신교는 널리 퍼졌으며 애국심과 동일시되었

다. 당시 필립 2세는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프랑스와 임시 휴전이 이루

어짐으로, 그 전쟁에 동원했던 스페인 군대를 화란으로 보내, 화란인의 독립운동을 탄압하

기 시작했다. 그런데 1566년에 칼빈주의자들의 주도로 귀족들이 동맹을 맺고 브루셀에 있

는 총독에게 청원서를 내서 개혁신앙을 탄압하는 것을 약화해줄 것을 청하였다. 또 같은 해

에 상인들도 동맹을 맺어 권리와 자유를 요구하였다. 다급해지자 국가의회는 종교 재판을

중지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예배의 자유를 허락한다고 해 놓고 필립 2세는 이단과의 약

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잠잠해진 틈을 타서 개혁자들을 죽일 군대를 준비하였다.

알바 공작은 스페인과 이탈리아 연합군을 이끌고 나타났다. 알바 공작은 필립 2세로부터 전

권을 물려받은 통치자로서 섭정 보다도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다. 그의 임무는 반란과 이

단을 네덜란드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것이 있다. 그는 스페인과 이태리 군대로 편성된

1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개혁파 인사들과 고위귀족들을 다 반역죄로 몰아 처형하였

다. 포로들은 스페인식의 종교재판으로 무참히 처형되었다.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을 목

매어달고 화형에 처하며 태형을 가하고 생매장을 하였다. 결국 네덜란드에서 필립의 정책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의 제단과 상(image)을 파괴하였다. 1572년

알바를 반대하는 봉기가 레이덴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퍼졌다. 북부 네덜란드는 "침묵의

사람"으로 역사에 알려져 있는 오란여의 빌렘 공(公) (1533-1584)은 프로테스탄트를 지지

하여 네덜란드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가 되었다. 1572년 4월 1

일 홀란드와 질란드의 중요 도시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드디어 빌렘은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선언되게 된 것이다. 빌렘은 국민의회를 돌트에서 소집하였고, 여기서 주어진 권한으로 로

마교회나 신교의 예배는 동일한 자유를 갖는다고 선언하였다. 1573년 알바는 해임되었다.

빌렘 공은 레이덴에 대학을 세워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576년 프

린스 빌렘은 남부지역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1579년 위

트레히트 연합 (Unie van Utrecht)을 체결하여 벨기에 지역(친 로마교회)을 빼고 북쪽 지방

들로 네덜란드(친 개혁파)를 구성할 기초를 놓았다. 빌렘의 지휘 아래 네덜란드 북부 7개

주는 독립하고 1579년 네덜란드 공화국이 한 연방을 형성하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

국과의 해전에서 패하자(1588년) 휴전을 선포하고(1609년), 개혁신앙이 지배적인 저지대의

북부지역인 네덜란드에서 모든 것을 잃고 철수하였다. 따라서 네덜란드가 암묵적으로 독립

을 유지하다가, 1648년 30년 전쟁을 끝내는 웨스트팔리아 조약에서 유럽의 열강이 네덜란

드의 독립을 보장하는 조항을 넣음으로써 스페인-네덜란드의 80년 전쟁은 마침표를 찍는

다. 그리하여 정치적 독립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얻어 네덜란드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려

고 하는 뜻이 세워졌다. 즉 네덜란드는 개혁신앙이 주도적이 된 나라가 되었다. 이 나라는

실제로는 장로주의 공화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장로주의의 대표적인 정치형태는 일반

세속정치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칼빈주의는 네덜란드의 국가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네덜란드 국민의 생활 가운데 계속적으로 현저한 요소가 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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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개신교의 시작

네덜란드의 종교개혁은 네 시기로 나눠진다: 루터교 시기(1517-1526), 성찬논쟁 시

기(1526-1531), 재세례파 시기(1531-1546), 칼빈주의 침투 시기(1545와 1560의 두 차례).

그러나 네덜란드 종교에 있어 근대적 시기(the modern era)는 루터나 칼빈과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라, 14-15세기의 형제단 운동, 특히 공동생활 형제단 (Brethren of the

Common Life)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1378년 제라드 흐루트(Gerard Groot)

와 플로렌트우스 라데빈스(Florentius Radewins)에 의해 창설되었고, 그 요람인 데벤터

(Deventer)에서부터 여러 동네로 전파되어 북유럽의 많은 대학들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학교 교사로서의 형제단원들은 학문과 지성(literacy and intelligence)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신약성경 헬라어와 다른 성경연구에 흥미를 보였으며, 구어체로 된 성경의 보급을

주장하고 그것에 힘써왔다. 평범한 언어로 된 “성경을 읽을 필요성(The Usefulness of

Reading Sacred Scripture in the Common Speech)”은 창설자들의 동료인 제라르 제르볼

트(Gerard Zerbolt)가 쓴 논문의 제목이였다(1398년). 형제단은 이러한 목적 및 다른 종교

적 목적을 위한 인쇄 출판에 있어서 선구자였다. 그들의 신학은 어거스틴적이었다. <그리스

도를 본받아>를 저술한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 본명은 Thomas Haemerken)는 데보

티오 모데르나 (Devotio Moderna)1)를 가장 잘 요약한 사람이다. 그는 라덴빈스(F.

Radewins)의 영적 지도 아래 있게 된 12세 때부터 그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그 운동에 전

적으로 몰두하였다. 데보티오 모데르나(혹은 the Modern Devotion) 운동의 지도자들은 종

교적 학교들을 세웠다. 여기서 학생들은 도덕과 하나님 경외를 배웠으며, 이와 같은 방식으

로 수도원과 교회에서 생활할 사람들로서 준비를 갖추었다.

공동생활 형제단의 학교와 수도원은 신비적 명상의 삶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사람들에게 회개와 신앙의 필요성을 가르쳤다. 그들의 학교는 학문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고 특히 고전 연구를 격려하였다.

본격적인 네덜란드에서의 개신교의 역사는 루터교의 역사로부터 시작된다. 비록 후에

칼빈주의가 그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표현이 되었지만, 루터의 글들이 먼저 소개되어 널

리 읽혔다. 1517년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가 교황청을 정면에서 공격함으로써 불을 붙인

종교개혁의 바람은 저지대로 들어왔다. 저지대 지역은 상공업이 발달하고 자유분방한 사회

풍조였으므로 루터교가 확산될 조건이 성숙되어 있었다. 화란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부터 종교개혁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빨리 직접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는 출판의 힘

이 컸다. 화란의 안트벨프(Antwerp) 시(市)는 프랑스의 파리 다음 가는 유럽의 출판 도시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종교개혁의 서적을 많이 출판하였다. 독일에서 1517년에 종

교개혁 운동의 깃발이 휘날린 그 다음 해인 1518년에는 벌써 루터의 저서들이 화란어로 번

역되었을 뿐만 아닐 1523년에는 신약 성경이 화란어로 번역되어 널리 보급되어 읽힘으로써

화란인들은 일찍이 개신교회의 신앙에 눈을 떴다.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파 수사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가르쳤고, 1523년에 이미 그 수사

1) 데오피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는 14세기 말에 시작된 종교적 갱신(religious renewal) 운동이다. 그 운동은 후기 스콜라주의의 지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써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영성(personal, interior spirituality)을 강조하였다. 그 운동은 네덜란드로부터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으로 퍼져나갔다. 스페인에서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of Loyola)가 그 영향을 받았다. 그 운동의 고전적 표현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n of Christ)이다. 그 운동은 대중 교육과 성경의 자국어 번역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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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가운데 두 사람이 이단 혐의로 브뤼셀(Brussels)에서 화형을 당했다. 그 두 사람의 이름

은 하인리히 뵈스(Heinrich Voes)와 요한 에쉬(Johann Esch)이다. 그들은 개신교 신앙을

위한 최초의 순교자들이 되었다.

1.3. 개혁파 신앙의 확립

화란은 루터의 종교개혁의 영향과 함께 칼빈의 영향도 함께 받아 왔다. 칼빈주의의

신학 사상과 신앙은 로마 카톨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융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차 박

해의 정도가 심하자 칼빈주의자들은 해외에 망명하여 있게 되면서도 칼빈주의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다. 그래서 화란에서의 초기 칼빈주의 교회(1548-1550)는 국내가 아닌 국외에 세

워지게 되었습니다. 런던(London), 엠덴(Emden), 프랑크푸르트(Frankfort), 그리고 팔라티

네이트에 칼빈주의의 화란 개혁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엠덴은 화란인의 새로운 칼

빈주의 중심지로 자리잡는다. 영국 내의 개혁교회는 폴란드 출신의 귀족이자 위대한 조직가

인 요한네스 라스코(Johannes a Lasco)에 의해 지도되었다.

해외에서의 화란 개혁교회가 이렇게 활발한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서 화란 내에서도

개혁교회는 칼빈주의 신학 사상과 신앙에 의해서 점차 그 뿌리를 내린다. 그에 따른 결과의

열매는 점차 가시화되었는데 칼빈주의 신학자 귀도 드 브레(Guido de Bres)에 의하여 1561

년에 벨직 신앙고백서(또는 벨직 신앙고백; Belgic Confession)가 작성됨으로써 개혁교회가

자리잡고 그 뿌리를 내려갔다. 그는 1559년에 작성된 불란서 신앙고백을 따라 1561년 37

개조의 반박문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화란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의 기초가 되었

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는 귀도 드 브레(Guido de Bres)이나, 그는 이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아드리안 드 사라비아(Adrien de Saravia)와 모데투스(Modetus)와 윙겐(G.

Wingen)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일차적으로 완성된 후에는 안트베르프의 왈룬(Walloon)

과 보르쥬(Bourges)의 프렌시스 유니우스(Francis Junius)에 의해서 좀 더 분명한 칼빈주의

적 정신이 포함된 형태로 완성되었다.

완성된 벨직 신앙고백서는 당시 교회의 핍박자이던 스페인 왕인 필립 2세에게 보내

졌다. 마치 칼빈이 프란시스 1세에게 기독교강요를 헌장하듯이, 필립 2세가 이것을 읽고 개

혁교회에 대하여 관용 정책을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거절될

때에는 참되고 바른 신앙정신이 무엇인지를 순교를 각오하고서라도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

에서 바쳐진 것이다.

당시에 신앙고백과 함께 동봉하여 보낸 편지가 있었다. 그 내용 가운데 중요한 점은

모든 면에서 정부에 순복할 것을 선언한다는 것이다(in all lawful things). 동시에 강조하는

것은 이 신앙고백에 표현된 바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진리를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등

에 채찍을 받고, 혀를 잘리며, 입에 재갈이 물리며, 온 몸이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편이 더

낫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 서신은 표면적으로 개혁교회가 필립 2세에게 관용을 바라는 듯

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당시의 개혁교회의 성도들이 필립 2세의 핍박 정책에 항거

하는 중요한 저항의 방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교회의 성도들이 벨직신앙 고백서를 필립 2세에게 보낼 때, 관용 정책을 베풀어

주기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교회를 탄압하고 핍박은 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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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되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신앙고백은 변함없이 힘이 더욱 분명한 결단 가운데, 자신들의

신앙의 정신을 “우리는 ...믿는다(credo)”라는 고백의 언어를 통해 후대에 중요한 유산으로

남겼다. 귀도 드 브레(Guido de Bres)는 1567년에 순교를 당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목회

자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1584년에는 로마교회의 광신자에 의해 암살을 당한 오란여의 빌

렘 공은 자신의 둘째 아들과 투쟁을 벌이면서 성경과 함께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

그 요리문답을 영적인 안내자와 위로자로 삼고 원수들의 공격을 맞서 나가기도 했다. 이처

럼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칼빈주의 사상은 스페인의 정치적, 종교적

독재와 맞서 승리를 얻게 하는 중요한 정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본 신앙고백서는 화

란의 교회와 정치, 사회의 모든 부분에 걸쳐서 깊은 영향력을 끼쳤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이 신앙고백은 당시의 성도들에게는 물론이고 나중에 핍박 중에 있는 많은 지방과 다

른 나라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개혁신앙인들을 교육하는 좋은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 신앙고백은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나중에 여러 교회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566년의 안트베르프(Antwerp) 회의,

1568년 베셀 회의, 1571년 엠덴(Emden) 총회와 1574년 전국 도르트 총회(Dort Synod),

1581년 미델부르그(Middelburg) 총회를 거쳐, 1618-1619년에 있었던 도르트회의에서 하이

델베르크 요리문답과 함께 개혁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으로 채택되었다. 더 나아가 불어,

화란어, 라틴어 본들의 비교를 통하여 도르트 전국대회(the National Synod of Dort)에서

개정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개혁파 전통의 교회 안에서 중요한 신조로 받아들여지고 고백되

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교회에서 신앙고백서의 채택에 대한 정신 중에 매우 중요한 정신

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저항의 원리로서 신앙고백을 표명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일반

사람들처럼 무력이나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진리인 말씀의 순수성

을 지키고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신앙을 파괴하는 것에 강력하게 저항하고자 했으며, 또한

이때 저항하는 방식으로 신앙고백을 표명하고 드러내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정신은 개혁신학에 있어서 성경관에 중요한 핵심적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즉 이미 사도바울이 우리가 싸우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된 병기로 하

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한 것이 있다(고후10:4)고 지적하면서 그것은 오직 하

나님의 말씀이라고 지적했던 것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이 땅에서 핍박과 고난을 당할 때 이

땅의 방식대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방식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신앙적으로 위협을 받고 도전을 받을 때마다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고백하고 표명하는가가 중요한 개혁신학의 저항의 원리로 제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우

리는 이런 저항의 방식으로서 신조가 채택이 되면서 신조의 신앙적 표명 때문에 목숨을 잃

을 수도 있는 신조의 역사를 함께 만나게 된다. 즉 신조의 표명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처럼 신조의 채택이란 것은 성경의 참된 의미를 확정하

고 또한 제시하는 최고의 표현이었기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은 이 신조의 순수한 표명에 대

해서 위협을 받으면 순교를 통해서라도 그 순수한 정신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신조의 채택 정신이 역사적 개혁신앙의 순수성임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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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정론 논쟁과 칼빈주의 5대교리

네덜란드 교회는 예정론의 본질에 관하여 격심한 신학 논쟁을 하게 되었다.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는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뜻)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리적 결론(칼빈의 입장)을 반대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암스테르

담에서 태어났고 1576년부터 1582년까지 라이덴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그 후 제네바로 가

베자(1519-1605)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일생을 통하여 철저한 칼빈주

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단지 그가 칼빈의 가르침에서 벗어 난 부분이 칼빈주의의 핵심으

로 알려진 예정론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아르미니우스라 하면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제네바에서 돌아온 아르미니우스는 1588년 부터 자

기 고향 암스테르담에서 목사로 봉직하였다. 그는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또 성경과 신

학에 관하여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는 또한 목회상담자로서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에 화란에는 코오른헤르트(Dieryk Coornhert, 1522-1590)라는 법률가

가 있었는데, 그는 칼빈주의 신학을 합리주의적인 인문주의 신학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아르미니우스는 그의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 그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르미니우스는 코오른헤르트의 사상에도 부분적으로는 옳은 점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코오른헤르트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의 영향을 받아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

의 타락에 대한 기사야말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적 증거라고 보고, 하나님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항상 협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그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자유의지론으

로부터 '힌트'를 받아 칼빈의 예정론에도 비판할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르

미니우스는 자기의 이러한 사상 변화를 상당 기간동안 숨겼다. 그러다가 1603년 라이덴 대

학 교수가 되었을 때부터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 놓게 되었다. 결국 이것이 같은 대학의 신

학교수였던 고마루스(Gomarus, 1536-1641)와의 격렬한 신학적 논쟁의 계기가 되었다. 아

르미니우스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된 사람은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였다. 그는 죽은 아르미니우스를 대신하여 고마루스와 예정론에 관

한 논쟁을 계속하였다. 이 때 고마루스는 라이덴 대학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교수직

에서 축출하려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교수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몰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은 당시 궁정목사로 있던 요한 뷔텐보가에르트(John Wtenbogaert, 1557-1644)와 문제 해

결책을 상의하였다. 위텐보가에르트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목사 46명의 서명을 받

아 화란 의회에 소위, 항의문 (Remonstrance)을 제출했다(1610-년).) 이 문서 때문에 그들

은 항론파(Remonstrants)로 불리운다. 그들은 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개 조항으로

요약하였다:

① 예정: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될 자를 미리 예

정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예정 개념은 결정론적 예정 개념이 아니었다. 그들은 절대적 선택

이나 절대적 유기를 믿지 않았다(개방적 예정론).

② 구속: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다(그러나 그들은 만인구원론

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지닌 보편적 의미를 강조하고자 했다.

③ 죄 혹은 자유의지: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선한 자유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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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했다. 펠라기우스(Pelagius)의 가르침은 주후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정

죄를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혹은 성령의 역사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사람들

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그들은 자유의지의 역할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했다.

④ 은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원죄의 영향력을 깨뜨려 버릴 만한 충분한 은

혜를 주셨다. 또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은혜로 주셨다. 만약 어

떤 사람이 중생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 충분하고도 능력있는 은혜를 충분히 활

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은혜는 불가항력적 (irresistible)이라고 말할 수 없다.)

⑤ 성도의 견인: 성경에는 성도의 견인에 관한 가르침, 곧 한 번 중생한 신자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가르침에 대해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에 반대되는 가르침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고마루스를 중심한 반항론파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1611년 반

(反) 항의서를 의회에 제출하여 국가가 정통 칼빈주의 교리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1611년 개혁파는 1610년에 작성된 항의서에 대항해서 반항의서 (contra-remonstratie)를

제출하였다. 이 문서의 작성자는 레에덴의 설교자 페스투스 홈니우스 (Festus Homnius) 이

었다. 이 때부터 그는 반항의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논쟁이 격렬해질 때 홀란드의 법무장

관 올덴바르네펠트 (Oldenbarneveldt)는 큰 자유주의자이어서 무장한 군대로 반대자들을 진

압하도록 제안하였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이제까지 중립이던 프린스 마우리츠 (prins Maurits)가 반

항의자편을 들었다. 그는 지방연합의 대표로서 반항의자들을 편들었다. 그리하여 그의 영향

아래 의회의 대다수가 국가적인 총회를 열어 이 논쟁을 해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홀란드

와 위트레흐트는 이런 총회를 반대하였다. 그 때 마우리츠 공은 두 지방에 꾸데타가 일어나

도록 하였지만 홀란드가 여전히 반대하므로 화란의회를 통하여 그는 거의 독재적인 권력을

입었다. 이로써 왕정에 반대하는 자들의 지도자들을 잡아들였는데, 올덴바르네펠트도 연합

에 대한 배신 때문에 1619년에 목베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비텐보헤르트 (Wtenbogaert)는

국외로 도망갔다.

이제 국가적 총회가 열리는 것을 막을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1618년 11월 13일

도르트레흐트 (Dordtrecht)에서 총회가 소집되었다. 각 주마다 대표들을 이 총회로 파송할

뿐만 아니라 개혁파 나라들도 대표를 파송하도록 정부가 요구하였다. 그래서 영국, 팔츠

(Paltz), 브레멘 (Bremen), 엠덴 (Emden), 헷센 (Hessen), 나싸우 (Nassau), 독일어를 쓰는

스위스와 제네바에서 대표들이 파송되어 돌트레흐트 총회에 참석하였다. 불란서의 개혁파는

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여 참석하지 못하였다. 또 화란정부 쪽에서도 18명의 대표들이 참석

하였다. 그리하여 약 100명 정도가 참석하였다. 이렇게 하여 1618-1619 년 돌트레흐트에

서 처음이고 유일한 에큐메니칼 개혁파 총회가 개최되었다. 의장은 요한네스 보헤르만

(Johannes Bogerman)이었는데, 항의자들은 소수파로 참석하였다.

이 총회의 주제는 항의운동의 정죄여부였다. 두 파가 다 서로의 주장들을 충분히 분

석하였다. 교회는 어떤 복음을 전파할지를 결정해야했다. 오직 은혜의 복음이거나 인간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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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인간의 책임의 복음을 결정해야만 했다. 항의자들은 상실된 대의를 위해서 싸우고 있

다는 것을 알고서 시몬 에피스코피우스 (Simon Espicopius)의 지도아래 끝까지 저항하였다.

심한 항의 때문에 그들은 총회에서 쫓겨나고 그들의 주장은 문서로 다루어졌다.

아르미니우스 논쟁은 도르트 회의(1618. 11-1619. 5)에서 결말지어졌다. 이 회의는

어떤 의미에서 개혁교회 최초의 세계대회가 되었다. 화란 교회의 대표는 약 70명이었고 그

밖의 나라에서는 모두 27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위그노 대표는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참석을 금지시켰으므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 회의에서는 [항의파]가 대표의

자격이 아니라 피고의 자격으로 출두하여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진술해야 했다.

도르트 회의는 칼빈주의 5대 원칙을 채택하였다 :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A. 부분타락과 완전타락

인본주의자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할 때에 영적 도움을 받지 못할 정도로

완전타락을 한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의 양심과 자유의

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운명을 선하게도, 악하게도 선택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이 회개하고 믿게 할 수는 있으나 인간의 자유를 간섭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인

간 각자는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양심이라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 다르도록 주어진 일반은총의 영역

에 속한 것으로, 인간에게 양심마저도 없다면 동물과 마찬가지인 존재가 될 것이다. 성경

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양심대로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므로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한다.(롬 2:14-15,20)

또한 하나님께서는 창 2:17절에서 `정녕 죽으리라'라는 말씀을 하셨고, 로마서 3:10

절에서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 하신 말씀과 같이 인간은 하나님 앞에 모두 죄

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B. 조건부 선택과 무조건 선택

인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택하여 구원하는 것은 그 부르심에 응하리라는 예

견에 기초를 두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이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

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신앙을 선택하고 이에 하나님은 그것을 기초로

하여 선택하게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에베소서 1:4-5절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

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

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는 예정섭리에는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되는 작정과 전적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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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딤후 1:9), 인간의 어떠한 선한 행위나 의

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딤후 1:9, 행 13:48)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이나 의지에 의하여 좌우된다면 이미 전능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가지신 전능 자이시며, 인간의 모

든 의지는 그분께 종속되어져 있는 것이다.

C. 일반적 속죄와 제한 속죄

인본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세계)을 위하여 죽었으며, 오로지 그러한

사실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대속이 효과를 보게 되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한다. 다른 말로 특별 속죄라고도 하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

자가가 오직 택함을 입은 자녀의 죄만을 제한하여 대속 해 주셨다는 것이다.

D. 가항력 은총과 불가항력 은총

인본주의자들은 성령이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할 수 있는 일은 하시지만, 인간

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성령의 역사에 저항할 수가 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므로 성

령은 죄인이 믿을 때까지 중생 시킬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은사는 인간이 저버릴 수도, 왜

곡시킬 수도 있다고 한다.

이를 효과적인 부름이라고도 부르는 데, 디모데후서 1:9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

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와 디도서 3:5절에 `우리

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좇

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는 말씀에서, 우리를 부르사 구원하

심은 우리의 행위에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 하신 은혜의 섭리만이 요구되어짐을 증

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부르셔서 구원하심에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필요

치 아니하며, 오직 그분의 전능하심만이 선포되어지는 것이다.

E. 구원의 불확실성과 구원의 견인

인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연결되어 일치될 때 인간의

구원이 성립된다는 신인공동사역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혹 구원받은 사람도 신앙을 잃고

타락하면 구원에서 탈락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구원을 의심하게 되어

불확실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에 그 굳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히브리서 6:17-18절에서 `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

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

라'라는 너무도 확실한 말씀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고린도후서 1:21-22절에서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

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 치시고 보증으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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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라는 말씀과 같이, 성령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대한 성

도의 보증과 인이 되어 주심으로, 이러한 약속들을 굳게 확립시켜 주시며 하나님의 틀림없

는 보호를 입어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주의 5대 원칙(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은 아르미니우스 5대 원칙

에 대응하고, 반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5대 원칙의 영어 첫 글자를 조합하면

튜울립(TULIP)이라는 말이 된다. 튜울립은 화란의 국화(the national flower)이다.2) 특히 화

란교회의 이후 역사는 이 도르트 신경을 포함한 하나되게 하는 세 신조에 충실함으로써 성

경적 신앙을 고수하려했던 역사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나더러 레포르마치(제2의 종교개혁)

나더러 레포르마치(제2의 종교개혁)는 종교개혁의 유익들을 더욱 공고히 하고 그 활

동들을 심하시키려는 운동이다. 교리를 일상생활에 융합시키려는 노력이었다. 이것은 영국

의 청교도들이 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작업이다. 화란 개혁 교회의 영성과 경건은 독일

경건주의운동에서도 강조되듯이 개혁주의 경건(gereformeerde vroomheid)의 중요한 요소인

성경적 경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2 종교개혁은 독일 경건주의와 달리 신자의 내면에만

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 역시 중시하고, 경건주의가 스콜라 정통주의를 배척한 것과

는 달리 개혁파 정통주의를 형성하고 교리를 경건과 관련하여 관심을 가지고 다루었다. 제2

종교개혁 운동은 경건을 추구하되 오직 성경에 기초하고 성경에서 나오는 경건을 지향한다.

더 나아가 개혁주의 경건은 성경에 근거하되, 그것이 개혁주의 신앙고백들로 표현된 것을

존중한다. 그래서 개혁주의 경건은 성경과 개혁교회의 신앙고백 문서들과 개혁주의 전통을

토대로 한 경건을 추구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든 개혁주의 영성 또는 경건의 특징은 하나님

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또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존중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인

간의 반응이다. 이것을 우리는 17세기가 나은 화란 개혁교회의 대표적 신학자들, 빌럼 텔링

크, 헤르만 윗시우스, 야코부스 콜맨, 푸치우스(Voetius)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푸치

우스(Voetius)가 잘 대변하고 있다.3) 푸치우스는 화란 젤란트(Zeeland) 주 미들버르흐

2) 물론 이 다섯 가지 교리가 칼빈주의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 교리는 후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기본적 골격이 되었다. 이후 장로교회란 칼빈과 개혁주의 신학 사상을 교리로 채택한 교회라는 특징을 지닌 교회를 가리키는데 이 중 칼빈주의 5대교리는 장로교회임을 구별하는 특징이 되었다.

1) 종교개혁자들의 5가지 주장을 따르는 교회이다①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의롭다 함을 받는다.②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 구원을 받는다.③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tura) 교회의 기준을 삼는다.④ 오직 그리스도만이(Sola Christo) 중보자시다.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 돌려야 한다.2) 칼빈주의의 5대 교리를 따르는 교회이다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⑤ 성도의 견인(堅忍)(Perseverance of the saints) 3) 기스베르투스 푸치우스(Gisbertus Voetius)는 1604년에 레이던(Leiden) 대학에 입학하여 유명한 프란시

스쿠스 고마루스(Fransiscus Gomarus) 밑에서 정통 신학을 배웠으며, 재학 시절 중에 알미니안 논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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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delburg)의 목사였던 청교도주의자 빌럼 텔링크(Willem Teelinck)의 서적들을 좋아하

였으며, 그와 연결된 영국 청교도들의 책들을 많이 읽었다. 그래서 그는 종교개혁 후 화란

에서 전개된 소위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더 나아가는 개혁'(Nadere

Reformatie) 운동의 중요한 한 인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운동은 16세기의 종교개혁에 새로

운 내용을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의 원리들을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에, 더 나아

가 이 교회와 사회 전체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형식화된

17세기의 개혁교회에 종교개혁적인 생활을 실현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는 경건과 학문이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경건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

해 수행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경건(pietas, godzaligheid)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푸치우스는 칼빈과 17세기의 청교도

들처럼 경건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의 모든 것으로 이해한다. 푸치우스는 경건은 '하나

님의 선택하시는 은혜의 열매'(vrucht van Gods verkiezende genade)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 경건이 중생의 열매임을 강조한다, 푸치우스는 도르트 총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모든 경

건의 원리로서 '중생'(wedergeboorte)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푸치우스는 중생 시에 사람에게

일어나는 '체험'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삶에 있어서의 '중생

의 열매'에 더 강조점을 둔다. 왜냐하면 중생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다 경건이 구원의 열매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도르트 신경의 가르침은 경건의 실천을 사라지게 한다는

어떤 이들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는 경건을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옹호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경건의 요소들에 대해 말할 때 순수한 교리를 말한다. 경건의 실천의

첫째 요소인 '순수한 교리'는 건전한 지식을 통해 생각을 조명한다. 이 건전한 지식은 영적

인 지혜를 주며, 동시에 판단을 지도하며, 감정을 통해 양심을 성결케 하며, 체험을 통해

기억을 강화한다. 2) 두 번째 요소는 '믿음'인데, 이것은 신뢰와 확신을 가져다주며, 이것에

서부터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위로가 나온다. 3) 세 번째 요소는 '삶의 회개, 새로운 순종'

인데, 이에서 참 경건의 진실성이 나타난다. 이 세 요소는 서로 함께 연결되어 있다.

경건을 말하면서 푸치우스는 또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정확성'(praecisitas)을 강조했

다. 그가 말하는 ‘정확성'이란 인간의 행동을 하나님의 법에 정확하게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

경험하였다. 7년간의 신학 공부 후 그가 플레이먼(Vlijmen)에서 목사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확고한 반(反)알미니안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정통 신학을 옹호하며 도르트 총회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1617년에 그는 출생지인 허이스던의 교회로 청빙받아 갔다. 그가 45세 되던 해인 1634년에 그는 갓 설립된 Illustre School(Utrecht 대학의 전신)의 신학 및 히브리어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21일 그가 행한 "학문과 결합되어야 하는 경건"(De pietate cum scientia conjungenda)이라는 제하의 취임 강연처럼 그는 1676년에 죽을 때까지 평생 이 목표를 위해 진력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는 우트레흐트 대학과 화란 교회 및 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강의 시간에 경건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하였다. 그는 실천 신학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묵상 훈련을 시켰으며, 기도에 대한 지침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목회상담을 하는 법과 설교를 전달하는 법 등을 가르쳤다. 푸치우스는 잘 알려진 대로 정통신학의 옹호자이며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그는 고마루스(F. Gomarus) 밑에서 정통신학을 배웠으며, 목사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도르트 총회에 소속 노회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단지 그들의 신학 이론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평생 알미니안주의를 반대하며 도르트의 결정을 옹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후에 요하네스 꼭께이우스(Johannes Coccejus)가 신약 시대에는 안식일이 폐지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그것이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옹호하였다. 또한 철학자 데까르트(Descartes)가 화란에 들어와 머물면서 그의 회의론적 방법으로 개혁교회를 혼란케 할 때 이에 대항해서 전통적인 신학을 파수하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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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뜻한다. 이 법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으며, 참된 신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지켜지고

있다. 푸치우스에 의하면, 우리는 모든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서 정확성을 가지고 정직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성경은 이에 대한 유일한 표준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푸치우스가 개혁교회의 경건의 핵심적 특징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경건이라고 강조한 것을 볼 수 있다. 참된 개혁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삶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고,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참 경건의 모

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푸치우스의 '정확성'의 개념은 율법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우려하

기도 하는데 이것은 율법의 제3용도와 관련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은 참

으로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에게 죄를 떠나도록 채찍질 하고 우리에게 율법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소원을 일으킨다.

요약하면 "푸치우스의 경건(pietas)에 대한 이해는 은혜의 우선성으로부터 출발하며,

중생에서 일정한 상태(habitus)를 가지게 하며, 거기서부터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이

나온다. 경건은 전체 삶의 성화를 포함한다. 여기에 율법이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

것은 우리가 정확성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 경건의 실천은 따라서 전체 삶의 성화를 지향

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참된 헌신을 위해 훈련되어질 수 있는 정서

적 생활의 내면성에도 강조점을 둔다. 이 둘은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경건의 본질에

속한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이 지난 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열정이 식어지고 신앙생활이

형식화되어 가던 시대에 살았던 그는 그 시대 교회의 실상을 정확히 보고 모든 삶과 학문

에 있어서 '경건'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경건의 표준으로 삼은 것

은 큰 의미가 있다. 이런 점에서 성경과 관계없는 영성 또는 성경에서 떠난 영성을 주장하

는 것은 개혁주의 경건에서 멀다. 객관적인 성경의 권위를 가감 없이 그대로 다 인정하고서

그것을 경건의 표준으로 삼고 그 하나님의 법을 엄밀하게 지키려고 한 것이 푸치우스가 말

한 경건이다. 참으로 성령은 자신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을 벗어나서 역사하시지는 않으시

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따라서 객관적 진리와 생활의 규범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이

에 기초한 교리들을 붙는 것은 참된 영성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푸치우스가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를 철저하게 옹호하는 가운데서 경건을 강조했다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

를 갖는다. 푸치우스는 경건을 하나의 신학 이론으로 끝내지 아니하고 실제 생활을 강조하

고 스스로 힘썼다는 데 또한 큰 의미가 있다. 푸치우스가 경건의 영역을 단지 내적 체험에

만 국한시키지 아니하고 '전체 삶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도 대단히 의미 있다. 푸치우스는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에게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내적 체험 또는 감정적 체험에 치우치는

오류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푸치우스에 있어서의 경건은 개인의 삶의 한 구석으로

후퇴하지 아니하고 전체 삶의 영역에서 경건을 실천하는 성경적인 경건의 모습을 보여 주

었다. 이것은 학문의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학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법학,

의학, 철학, 비평, 시, 논리학, 역사와 고고학 등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경건함으로 학문에

임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푸치우스의 경건은 개혁교

회의 전통으로 계속 이어져서 19세기말과 20세기에 조금 다른 뉘앙스를 가지기만 하지만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과 클라스 스킬더의 문화관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화

란 개혁교회의 한 중요한 모습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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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무장한 후에 열심히 기도할 때 성령의 큰 역사가 있을

것이며 참 경건이 실천될 것이다. 혹자는 푸치우스나 화란 개혁 교회의 경건과 관련해 개혁

교회 성도들은 성경 읽기 전후에 기도하고 취침 전과 취침 후에 간단히 기도하는 전통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와 같은 강력한 기도 운동을 체험하지는 못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개혁교회의 기도는 개인적 기도가 거의 대부분이며 단체적인 기도는 매우 희소하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기도가 그 보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국교회식 기

도(통성기도나 통곡기도에서 드러나는 기도의 열심과 간절함이 있는 기도)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푸치우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한 것은 역으로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이 결여된 한국교회의 기도에 대한 보완점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교리적

엄밀성과 성경적 경건은 늘 함께 생각되어야 한다.

4. 화란개혁교회의 분리와 복귀 운동

도르트 대회(1618년)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를 쫓아낸 이후 개혁교회는 평안하게

진행하였고, 네덜란드는 사회 경제적으로도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17세기 전반기에는 네덜

란드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부(富)가 네덜란드로 몰려들었다. 그렇지

만 평온하고 부유하다고 할 때에 세속적인 요소가 교회 안에 슬금슬금 들어왔다. 화란의 개

혁교회는 생성 초기부터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화란이 로마교를 신봉하던 스페

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화란 왕실은 로마교로부터 빼앗은 교회 건물을 개신교에게 주고 수

도원 재산을 개신교를 위해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개혁 교회는 1572년부터 안정된 교

회의 성장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화란 개혁교회가 박해 없이 평안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유럽 다른 나라 개신교도들도 박해가

있을 때면 늘 개신교의 나라 화란으로 피신해 신앙의 자유를 누리곤 했다. 그러나 이런 긍

정적인 면도 있지만, 큰 폐단도 있었다. 국가의 왕이 교회의 일에 개입할 수 있음으로 인해

교회와 정부가 반대 입장에 서게 될 경우 교회는 영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었다는

점이다. 교회가 국가로부터 정치적, 물질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데서 오는 교회의 영적 손실

은 중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역사에서 늘 반성되었던 점이다. 화란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네덜란드 북부의 일곱 개 주가 주체가 되어서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오란여

(Oranje) 왕가는 특히 개혁 교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

다. 오란여(Oranje) 왕가는 개혁교회와 제휴하여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기 때문에 개혁

교회는 루터교회나 재세례파에 비하여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다. 국가의 공직자는 개혁 교

인이어야 하였고 왕실이나 주(州) 정부가 목사의 사례비도 담당하였다.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는 다른 면에서도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총회를 소집하려

면 국왕이나 주 정부 관리의 동의를 얻어야 하였는데 왕이 그것을 미루었기 때문에 1618년

이후에 거의 2백 년 동안이나 총회로 모이지 못하였다. 따라서 네덜란드 안에서도 교회의

통일성을 잘 나타내지 못하고 지역별로 교회의 주장들이 나뉘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네덜란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의

기치 아래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려고 일어났던 프랑스 사람들은 혁명의 정신을 주위의

다른 나라에 전파하려고 하였다. 프랑스 혁명군이 1795년에 네덜란드를 점령하였다. 그들은

주일을 없애고 제10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 왕실이나 주 정부가 지급하던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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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사례금도 중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개혁교회의 재산이 국가나 로마 교회로 넘어가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권좌를 차지한 나폴레옹은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일부로 만들려고 하였다. 1806년에 동생 루이 나폴레옹을 홀랜드의 왕으로 앉혔을 뿐 아니

라 같은 해에 교육법을 제정하여서 국가가 교육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전에는 공립학교에

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르쳤지만 이제는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에 섬긴 ‘최고의 존

재’를 가르치고 그것에 근거하여서 사회 윤리도 가르쳤다. 1807년에는 찬송가를 출간하였는

데 그 내용은 사람의 윤리적 선행을 강조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구속과 삼위일체에 대한

것은 없었다.7) 나폴레옹은 1810년에 네덜란드를 합병하고 세금과 징병 등을 엄격히 시행

하였으며, 20인 이상이 집회로 모이는 것도 금지하였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에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에 권력 투쟁이 있었는데 군주들이 승리

를 거두고 오란여 왕실이 근 20년 만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왕정의 복귀가 20년 전의 과거

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군과 나폴레옹의 통치 기간에 영국

에 망명하였던 오란여 왕가는 각 주에 자치권을 주기보다는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교

회에 대하여서도 영국 성공회의 모델을 따라서 왕실이 교회를 주관하려고 하였다. 오란여

왕정이 복구되었을 때에 로마 교회 신자들이 많은 벨기에 지역도 네덜란드에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오란여 왕가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왕은 그들도 만족시키면서 왕실이 종

교를 통제하는 방안을 모색하려고 하였다. 왕은 개혁교회의 교인으로서 살기보다는 왕으로

서 교회들을 통치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왕실 재정에서 목사의 사례금을 주었는데 이제는

이것도 교회를 통제하려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새로운 시도는 1816년 1월에 반포한 ‘교회 치리 정관’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교

회 치리 정관을 따르면 총회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최고 의결 기관이고 왕이 총회장을 매

년 임명하였다. 1816년 6월에 교회 치리 정관을 따라서 총회가 열렸는데 총대(總代)로 모

인 목사 12인과 장로 8인은 모두 왕이 임명한 사람이고 의장과 서기와 회계도 모두 왕이

지명하였다.10) 그들은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총회-지역 대회-노회-지교회’의 상하 관계로

재조직하였다. 도르트 교회법의 핵심인 지역 교회의 독립성이 없어지고, 국가가 교회를 주

관한다는 것이다. 왕이 임명한 사람으로 구성된 총회가 지역 교회의 문제를 주관한다는 사

실이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어려움을 주었고 반대가 일어났다. 그 문제에 대하여서 국가는

교리적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교회의 정치 체제 문제만을 다루겠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교

회의 정치 체제를 국가가 관장한다는 것은 “이 참된 교회는 우리 주께서 그의 말씀에서 가

르치신 영적인 질서에 따라서 통치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네덜란드 신앙고백서 제

30조)와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이다. 교회를 정치 조직의 일부로 보는 것은 은혜의 복음을

전파되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으로 보는 것과 정반대가 된다.

교회 치리 정관과 함께 신앙고백서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임직 서약

문에서 더 분명히 드러났다. 조그마한 키가 큰 배의 항로를 바꾸듯이 새로 작성한 임직 예

식문의 한 구절이 도르트 신조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1618년의 임직 서약문과 1816년

의 임직 서약문을 대조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 서약과 함께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에 담겨 있는 교리의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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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과 요점들이 모두, 1618-19년에 도르트 총회에서 앞의 교리의 몇 조항을 설명한

것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함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신실하게 또한 주님

앞에서 선한 양심으로 선언한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교리를 근실히 가르치고 신실

하게 변증할 것을 약속한다(1618년 임직 서약문).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하나 되는 고백서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담겨 있는 교리를

선한 양심으로 받아들이고 전심으로 믿는다고 선언하고, 근실히 가르치고 지지할 것

을 선언한다. (1816년 임직 서약문)

두 서약문을 비교하면, “1618-19에 도르트 총회”라는 표현이 새로운 임직 예식문에

서는 생략되고 대신에 “하나 되는 고백서”라는 표현이 나온다. ‘하나 되는 세 고백서’가 ‘하

나 되는 고백서’로 바뀌면서 도르트 신조는 조용히 사라졌다. 또한 옛 임직 예식문의 “하나

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함”이라는 말이 새로운 임직 예식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서”라는 말로 바뀌었다. 얼른 보면 이것은 큰 차이가 아니다. 그러나 다시 읽어 보면 “고백

서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담겨 있는 교리”라는 표현은 이전의 임직 예식문과 전혀 다

른 말이다. 옛 서약문은 신조가 성경에 ‘일치하기 때문에’ 구속력이 있다고 하는데 새 서약

문은 성경과 ‘일치하는 한’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13)

1834년에 있었던 헨드릭 드 콕(Hendrik de Cock)목사와 윌룸(Ulum) 교회를 중심으

로 일어난 분리와 복귀의 운동의 결과로 네덜란드 국교회(NHK)에서의 '아프스케이딩

(Afscheiding: 분리)'이 있었다, 헨드맄 드 콕 목사는 도르트 신경을 고수하였는데, 이로 인

해 자기가 목회하고 있던 교회의 당회로부터 면직을 당한다. 결국 콕 목사는 1834년 10월

14일 분리를 선언했다.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은 네덜란드 신앙고백서를 따라서 주의 깊

게 작성되었고, 여기에서 분리와 복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들은 지금은 ‘분리’하지만

국가 교회의 상황이 개선되면 ‘복귀’하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

앙고백으로 ‘복귀’하려고 거짓 교회로부터 ‘분리’한다고 밝혔다. 드 콕 목사를 추종하여 '아

프스케이딩'에 가담한 교회들이 제1차 총회가 열리기에 이르렀다. 그 뒤 1869년에 교단명을

'기독교 개혁 교단 (Chelljk Gereformeerde Kerk)'라고 정하게 된다. 1847년 이 교단 소속

의 약 3000명의 화란인들이 국교회의 박해와 경제적 궁핍을 피해 미국의 미시간과 아이오

와 주로 이민을 가게 되어 거기서 새로운 교단을 만든다. 이 교단이 기독 개혁교회

(Christian Reformed Churches)로서 칼빈대학교 및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

가 이 교단 소속 신학교이다.

1834년 개혁의 진정한 핵심은 국가가 교회를 간섭한 것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하나

님의 말씀과 신앙고백으로 복귀하려고 분리한 것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드 콕의 윌룸

교회의 ‘분리와 복귀’ 선언문 마지막 문단에서 천명하는 것처럼 특히 ‘도르트 신조와 교회

법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도르트 신조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다는 진리를 성경적으로 가르치고, 도르트 교회법에서 규정하는 대로 목사의 강설을 하나님

의 말씀으로 받기 때문에 교회들과 직분자들이 서로 동등이고, 하나님 외에는 그들 위에 다

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다. 1816년의 교회 치리 정관에서 삭제된 1618년의

도르트 신조와 도르트 교회법으로 복귀하려는 것이 1834년의 핵심이었다.

신앙고백서가 교회의 생활에서 ‘(성경 말씀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권위에서) 파생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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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로서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에 통일성이 없고 목사들이 자

기 소견에 옳은 것을 가르칠 뿐이다. 자기들의 생각에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믿으면

무엇이나 자유롭게 가르쳤다. 심지어 아르미니안주의적인 주장을 다시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화란 개혁교회 역사는 신조를 멀리하는 것이 곧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의 이탈

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보여주었다,

1886년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를 중심으로 네덜란드 국교회에서 제 2

차 탈퇴가 있었다. 카이퍼는 이미 1880년에 삶의 전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미치게 하

려면 단순히 교회를 위한 신학교로서는 불충분하고, 개혁주의 원칙에 따른 고등교육기관을

세워야 한다는 확신에서 '자유 대학(Vrije Universiteit)'을 암스테르담에 세웠다. 그는 교회는

국가와 돈과 교회 조직에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우선 그는 수세기 동

안 교회의 명목상의 수장인 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뿐 아니라, 국가가 제공하는 돈이

아니라 믿음의 결실로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에 의존해야 하므로 국가의 돈으로부터 자유로

워져야 하며, 개혁되지 않은 기구로서의 교회 조직에서 해방되어 각 교회가 자치권을 가지

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대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대학도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했다. 카이퍼는 이전부터 화란의 기존 대학들이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기독교적

성격을 잃고 단지 국가의 소유물로 전락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정부로부터 독립

된 기독교 대학-여기서 신학부는 없어서는 아니 될 부분을 차지하는데-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그가 대학 이름을 '자유(vrij)'대학이라고 붙인 것은 이에 연유한 것이다. 이런 카이

퍼의 사상은 네덜란드국교회와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1982년 국교회에서 2

차로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카이퍼의 원대한 이상을 따라 신학과와 철학과와 다른 모든 학

과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이상적인 종합대학을 만들이 위해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립대학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대학 안에 '신학과' 가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

였다. 몇몇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일반대학을 설립하고 거기에 신학과를 개설했으니, 몇 년

이 지나면 신학생이 배출될 것이 아닌가? 그러자 기존의 '네덜란드 국교회(NHK)' 교단에서

는 이 신학생을 목사로 받아야 하느냐 받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 그

런 와중에 어떤 지역의 교회가 자유대학교 신학과 출신 졸업생을 목회자로 청빙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당시 여러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있던 차에 이것이 교회 분열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1880년에 자유대학을 설립하여 교수가 되었고, 후에 화란의 수상이 되기도 하였다

(1901-1905). 카이퍼가 정치에 참여할 때 목사가 아닌 장로로서 암스텔담 교회를 섬겼는

데, 그때 카이퍼를 비롯한 암스텔담 교회의 당회는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금하였다. 이 일로 1886년 교회당국은 카이퍼와 다수의 장로들을 제명 처

분하였고, 이 징계 파동으로 카이퍼를 중심으로 200여 교회가 국가개혁교회를 떠났다. 화

란 교회사에선 이를 '돌레앙치(Doleantie : 분리, 반대, 애통)'라고 칭한다.

그로부터 6년 후 먼저 탈퇴한 '아프스케이딩'교회와 '돌레앙치' 교회가 연합을 하게 되

면서 화란 개혁 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흔히 GKN으로 약칭)'를 형성하

게 되었다. 이때 일차 탈퇴한 '아프스케이딩' 교회 가운데 일부가 연합을 반대하며 잔류하여

'기독 개혁교회 (Christelijke gereformeerie kerken)'란 명칭을 고수하였는데, 지금도 이 교단

이 운영하는 신학대학이 아펠도른(Appeldom)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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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화란 개혁 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흔히 GKN으로 약칭)

에서 다시 분리가 일어났다. 카이퍼에 의해 이루어진 교회의 다원성 문제, 일반은총 문제,

가정 중생설 문제가 1942년 총회에서 결정되었고 이를 반대한 흐레이다누스와 스킬더 등

많은 교수와 목사 장로들이 면직되면서 1944년 8월 새로운 교회가 분리된다. 아브라함 카

이퍼가 자신의 신학, 특별히 일반은총, 영혼의 본질, 유아 세례, 중생 등에 대한 자신의 이

론을 입증하기 위해 문맥에서 떨어진 성경본문을 증거 구절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점차 비

판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카이퍼의 '언약론(곧 중생전제설)' 때문에 교회 안에는 실제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언약에 의해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이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

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교회 안의 젊은이들의 신앙생활이 나태해지고

교회출석이 해이해지는 등의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생겨났던 것이다. 이같은 점에 대한 비판

은 제 2차 세계대전 전부터 심각하게 대두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는 심각한 의견 충돌이

있었고 1944년에 교단 분열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스킬더는 결국

1944년 8월3일 우트레흐트(Utrecht)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교수직과 목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자 "이것은 부당하다. 이것은 총회가 교권으로 쫓아낸 것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항의하

는 교회들이 약 200여개 생겨났다. 그들은 총회가 스킬더를 해임하고 교수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불법이며 [교회헌법(Kerkorde)]제 31조에 의해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제 31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다수의 표에 의해 결정된 사항은, 단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교회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져

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조항인데, 종교개혁의 핵심이 되는 사상을 교회법적으로 표

현한 것이다. '다수회'(노회나 총회)의 결정이 무조건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가톨릭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면 '교권정치' 가 되고 만다. 그러나 총회의 결정이 아무

런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회중교회'처럼 되고 만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양자 사이

에 균형을 취하여 총회의 결정은 성경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다고 규정하

고 있다. 즉, 정상적인 경우에는 총회의 결정을 따라야 하지만, 만일 총회가 성경에 위배되

는 결정을 한다면 그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개개의 교회는 이 조항

에 근거하여 그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논쟁의 핵심 인물들이었던 조직 신학자 스킬더(K.Schilder) 교수와 신약 교수 흐레이

다누스(S.Greijdanus) 교수가 총회의 결정으로 타의로 교단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전체

교단의 십분의 일이 이들을 따랐다. 이들이 세운 교단은 기존 교단과 교단 명칭이 화란 개

혁교회 (Gerefrmeerde Kerken in Nederland)로 동일하다. 따라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새

교단을 프레이허마크트(vrijgemaakt, '자유로워진') 혹은 '31조파', 기존 교단을 시노달

(synodaal;총회)이라고 부른다.

한편, 화란개혁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자유교단(프에이허막트)'은 교인수가 약 십일

만 명 정도 되는데 (1990년 기준. 2000년 말에는 약 12만명 정도), 여기서는 철저하게 성

경중심으로 행하고 있다고 한다. 거의 모든 교인이 주일 날 두 번씩 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기 자녀들을 자기의

신앙과 같은 선생밑에서 교육받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따로 운영하고 있으

며, 이를 위해 모든 교인이 별도로 기부금을 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들의

신앙과 신학에 입각한 견해를 진흥시키기 위해 일간지(Nederlands Dagblad)를 발행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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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 두 명은 의석수는 작으나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정당대표 연설을 통해 분명한 목소

리를 네덜란드 사회에 내고 있다,

이후 1968년에는 31조파 내에서 분리가 일어났다. 이들이 31조파에서 분리되어 나간

것은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개혁주의 교회 정치가 너무 엄격하다는 견해를 갖고 보다 여기

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기를 원했다. 이에 따라서 이들은 면직되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이

룬 교회를 '네덜란드 개혁교회'(De Nederlandse Gereformeerde Kerken, NGK)로 불렀다.

이외에도 국가교회(NHK) 안에 별도로 구성된 보수주의 교회들의 연맹인 '개혁주의

연맹'(Gereformeerde Bond)이 있다. 이들은 국가교회가 지향하는 신학을 반대하면서도 국가

교회로부터 분리하지는 않고 남아 있으면서 별도로 연맹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함께 길

을 가는 교회'(Samen op Weg;Together on Way)가 있다. 이 교회는 NHK, GKN

(Synodaal), Lutheran 교회가 합친 교회이다.

5. 화란 개혁교회의 신앙생활 모습

장로 중심의 교회정치

교회정치 형태로 보자면 화란 개혁교회는 로마교의 교황을 중심한 교권적 교회정치

형태를 거부하며 다른 한편 민주주의식 회중교회 정치 형태를 거부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장로교와 동일하다. 그러면 ‘장로교’와 ‘개혁교회’ 정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두 교회는 모

두 장로정치를 고수하므로 ‘장로회’ 곧 ‘당회’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차이가 있다.

화란 개혁교회는 16세기에 교회법을 처음 제정하면서 칼빈의 체제를 따른 프랑스 교

회법을 대부분 이어받는다. 개체 교회는 기본적으로 독자적인 주님의 몸된 교회이고, 각 교

회는 ‘당회’를 가진다. 그리고 주님의 명령대로 교회의 연합을 위하여 ‘시찰회’, ‘총회’로 모

여 영육간에 서로 도운다. 그런데 화란 개혁교회의 정치 형태의 독특한 점은 목사를 포함한

직분자의 교회에 대한 절대적 영향력을 거부한 것이다. 한 직분이 다른 직분의 우위에 있지

않고,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간섭할 수 없고, 상회가 하회의 우위를 점할 여지를 거부한

점이다. 목사는 말씀을 전하고 교회의 양들을 섬기는 수종자일뿐 다른 직분자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지 않다. 또한 한 교회에 목사가 여러 명 있을 경우 담임목사, 부목사 개념이 없

고 동역 개념에서 똑같은 목사일 뿐이다. 화란 개혁교회 목사는 설교에서 자신이 만들어 낸

이상한 내용이나 이단적 사상을 설교하여 성도들을 쉽게 유혹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목사

가 신앙고백과 다른 말씀을 전할 때는 당회가 제재를 가하여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만약 목사가 이단적 사상을 전하면 시찰과 노회의 동의하에 당회가 그를 치리할 수

있다.

화란 개혁교회의 매 예배 시간에 일어나는 아주 특이한 모습을 보면 이 점을 잘 이

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배 전 설교자로 지정된 목사는 그 주일의 수종장로의 뒤를 따라 강

단 앞까지 간다. 그 장로가 목사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간단하게 ‘수고하십시오’라는 인사말

을 하거나, 혹은 눈길을 보낸다. 그리고 목사는 강단으로 올라가 예배를 진행한다. 이 광경

은 온 교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진다. 이 의미는 당회가 이 목사님을 그 날 말씀의 수종

자로 결정했음을 온 교회 앞에 보여 주는 것이다.

각 개체 교회의 ‘당회’는 교회 정체에 있어서 가장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다. 시찰,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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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총회는 단순히 여러 교회 대표들이 ‘소수’ 혹은 ‘다수’ 모임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상

회’, ‘하회’ 개념이 없다. 이들 다수회들, 곧 시찰, 노회, 총회는 한 신앙고백 안에서 그리스

도의 한 몸을 이루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모임이고, 각 교회에서 해결하기

힘든 신앙의 문제가 있을 때 함께 성도들의 대표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말씀에 일치할 때

함께 그것을 따르기로 약속하는 모임이다. 이 모임에서 총회장은 모임이 있을 동안에만 회

의의 진행을 맡고 회의가 끝나면 아무런 힘이 없다. 총회는 ‘중간위원

회’(interim-commitee)를 두어서 대내외적인 총회적 일을 담당하도록 한다. 요약하면, 개혁

교회의 특징은 장로교와 다를 바 없지만, 직분자의 교권적 위계체제를 철저하게 없앴다는

점과, 교회 연합모임의 성격이 교권적 계단식 체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장로교와 차이가 있

다.

화란자유개혁교회는 주일 오전, 오후 두 번의 예배를 드린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오전 예배 참석숫자와 오후 예배 참석숫자가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신자들의 자녀들

은 초등학교에 입학 할 때쯤 되면 부모와 함께 예배에 참석한다. 수요 예배와 새벽 기도회

는 없다. 성찬은 3개월에 한 번 시행되는데, 성찬에 예식문(15분 정도)을 읽는 것 외에 설

교는 없다. 왜냐하면 성찬 자체가 하나의 무언의 설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성찬이 있은

주일 저녁에는 구역별로 한 성도의 집에 모여서 커피를 마시며 성도의 교제를 나눈다.

화란 개혁교회는 장로들의 역할이 크다. 화란 교회가 ‘개혁교회’라고 불리지만, 사실

‘장로교’라 불려도 될 만큼 ‘장로교회’에서의 장로의 역할보다 ‘개혁교회’에서의 장로의 역할

이 더 크다. 장로는 구역마다 두 사람이 배정되어 있는데, 구역 성도들을 심방하며 영혼을

돌보는 일을 책임진다. 일주일에 이틀 저녁은 교인 가정 심방을 한다. 매주 월요일 저녁에

있는 긴 당회 모임을 합하면 장로들의 교회 사역은 대단한 수준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장로 직분은 임기가 4년인데 너무 힘들어서 교인들이 장로 되기를 싫어할 정도이다. 그래서

4년 사역하고 2년 쉬고, 다시 선거를 통해 임명받아 사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장로

직분은 우리 한국에서와 같이 부정적 의미의 명예로운 자리가 아니라, 참으로 섬김의 직분

이다. 집사 직분도 4년 임기제인데, 한국의 안수 집사에 해당된다. 구역에 한 명의 집사들

이 배정되기에 집사가 장로보다 수적으로 적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화란 개혁교회는 시편 150편 전체에 곡조를 붙인 시

편찬송을 파이프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부른다. 이것은 칼빈이 여러 사람이 도움으로 만들

었기에 곡조는 16세기 형태로 단순한 멜로디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의 찬송가가 대부분 영

국과 미국의 부흥운동 때 불려졌던 노래들인데 비해서, 시편 찬송은 구약의 성도들부터 지

금까지 사랑받는 노래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화란 개혁교회 교인들은 왜 한국 교회에

‘시편찬송’이 없는지 의아해 한다. 반대로 한국 교회 교인들은 ‘시편찬송’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금세기에는 화란 개혁교회도 시편 이외에도 신앙적으로 건전한 찬송이면 예배 시간

에 부르기도 한다.

화란 개혁교회는 철저한 신앙고백적 신앙 위에 교회정치 체계를 세웠다. 화란 개혁교

회는 개인 각자의 상이한 신앙고백보다는 그리스도의 한 몸, 곧 한 교회 안에서 동일한 신

앙고백을 가짐으로 영적인 성도의 교제를 풍성하게 나누며, 더 나아가 이 신앙을 교회 정치

와 모든 교회 활동에서 적용하며 살려고 몸부림 친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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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 개혁교회의 신앙교육

화란 개혁교회는 사도신경, 니케아신조, 아다나시우스 신조, 벨기에 신앙고백, 하이델

베르그 교리 문답, 도르트 신조를 그들의 신앙으로 고백한다. 이 신앙고백을 통하여 화란

개혁교회가 초대교회의 신앙과 종교개혁 신앙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화란 개혁교회의 신앙이 어떠한지 알기 위해서는 이 신앙고백을 화란 개혁

교회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화란 개혁교회 교인들은 이 신앙

고백이 성경의 권위보다 우위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신앙고백이

성경을 잘 요약하고 있기에 신앙고백을 아끼고 사랑한다. 이 내용들은 설교 시간에 가르쳐

질뿐만 아니라, 교회의 여러 모임들에서도 주제로 채택되어 계속 토론되어진다. 이 때문에

일반 교인들도 이 신앙고백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 화란 개혁교회 교육의 장을 크게 ‘가

정’, ‘교회’, ‘학교’로 나눌 수 있다.

가 정

화란 개혁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교육의 장을 말하라고 한다면 ‘가정’이

라고 하겠다. 신앙의 기본 틀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그리고 형제와 자매의 관계로

이루어진 가정에서 자리잡힌다. 이들의 삶은 철저하게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

일 예배 시간에는 온 가족이 한 줄에 나란히 앉으며, 명절과 성탄 등의 축제가 있을 때에도

가족끼리 함께 보낸다. 아버지는 남전도회, 어머니는 여전도회, 형은 청년회, 동생은 학생회

로 흩어지는 일은 이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목사도 가정을 소홀히 하면서 교회 일을 하

지는 않는다. 이러한 화란 개혁교회의 가정 중심의 삶은 가정에서의 철저한 자녀 신앙교육

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먼저 이들의 ‘자녀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자녀관’, 곧 자녀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과 ‘교육’, 곧 그들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화란 개혁교회를 방문한 사람들은 아이들이 참 많다는 것을 말한다, 예배

때마다 부부를 중심으로 대여섯 명, 많게는 여덟 명의 자녀들이 한 줄로 길게 앉아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높은 출산률 때문이라고 한다. 화란 개혁교회 교인

들은 자녀를 많이 낳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가정에 6-7명씩 자녀를 낳기도 한다고 한다.

화란 일반 사회의 출산율이 결혼한 여성당 1.5명인 것에 비해 한다면 이는 독특한 경향이

라고 할 수 있다. 선진 서구 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저출산인데 그 속에 살고 있는 이 개

혁교회 교인들이 자녀를 많이 낳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에서 오는 것이

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주신 명령임을 믿는 신앙 안에서 가

능한 것이다.

화란 개혁교회 가정에서는 임신을 알리는 그 순간부터 축하를 받는다. 힘든 임신 기

간이 끝나고 아기가 태어나면 이 또한 경사이다. 아기가 태어난 후 산모의 몸이 회복되는

대로(보통 출산 후 2~3주일 내) 온 성도의 축하를 받으며 세례를 받는다. 이 때 부모는 아

이가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때까지 (입교) 힘껏 신앙으로 양육하며, 교육받도록 하

겠다고 서약을 한다. 교회에서 유아세례가 베풀어 질 때마다 성도들은 (유아세례 예식문을

들으며, 또 그 서약에 ‘예’라고 대답하는 부모의 대답을 들으며) 부모로서 어떤 의무를 지게

되었는지를 거듭 확인하게 된다. 자녀로 말미암는 ‘기쁨’을 누림과 동시에 자녀를 신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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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해야하는 ‘의무’가 부모에게 주어진다. 이 의무를 행함에 있어 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는다. 부모는 바로 이 권위로 자녀를 엄하게 교육한다. 이는 가정에서 아이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 되심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녀의 인격은 충분

히 존중된다.

화란 개혁교회 가정은 매 식사 전 함께 기도를 하고, 식사 후에는 성경을 읽는다. 주

로 아버지가 성경을 읽고, 필요하면 설명을 덧붙이고 질문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다. 이렇게 부모는 육신의 성장을 위하여 ‘음식’을 제공

하고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주일 같은 날은 특별히 찬송을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매일 행해지는 일상생활의 한 부분인데, 그로 인

하여 이 시간이 습관화되고 형식화되는 부정적인 면이 있기도 하지만, 이 시간이 부모가 자

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시간이며 기회임은 틀림이 없다.

이들은 주일을 어떻게 자녀들에게 가르치는가? 주일을 구별하여 지키고 하나님을 예

배하며 그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 집중한다는 원칙은 우리의 주일 개념과 다를 바 없다.

주일을 준비하는 이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면, 먼저 집안은 토요일 쯤 깨끗이 정

리되어 있어야 하고 주일 입을 옷과 신발도 깨끗하게 준비한다. 이들에게는 주일이나, 생일

등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옷이 있다. 자신의 옷 중에서 가장 단정한 옷을 정해서 특별한 날에

만 입는다. 주일에 그 옷을 입는다는 것은 곧 주일이 중요하고 기쁜 날임을 의미한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케잌이나 과자와 함께 마실 것을 먹는다. 이

시간에 어떤 가정은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은혜를 나눌 뿐만 아니라, 자

연스럽게 신앙 교육도 한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오후 예배에 온 가족이 다 함께 참

석한다. (화란 자유개혁교회는 오전, 오후 예배의 참석 인원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 큰

특징이며 한국 교회가 본받아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또 주일은 평소와는 달리 삶은 달걀

이나 샐러드 등 별식이 준비되며, 칩스나 콜라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몇 가지들이 허용되는

날이다. 부모들이 몇 가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주일에만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이유는,

그것이 비싸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고 주일을 특별히 기쁜 날, 즐거운 날로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를 통해 아이들이 주일을 즐거워하며 기다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화란도 예외 없이 한국과 같이 텔레비전 보는 것이 자녀들에게 큰 문제이다. 화란 자

유개혁교회 교인들은 텔레비전은 잘 이용하면 좋은 것이지만, 잘못하면 큰 악을 초래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녀와의 약속 하에 자녀들의 텔레비전 시청 시간과 프로그램

을 한정시키고 더 이상의 시청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교 회

화란 개혁교회의 교회교육은 주일학교가 없고, 대신에 교리문답 교육이 있다. 즉 하

이델베르그 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이 매 주일 오후예배 시간 설교를 통해 남녀노

소 할 것 없이 전 교인을 향해 가르쳐진다. 이 전통은 16세기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되어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목사는 주일 오후 설교로 이 교리문답을 설교하도록 교회법에 명시

되어 있다. 주옥같은 신앙의 핵심 교리들이 52주로 나누어 설교되는데 이를 통한 성도들의

교리에 대한 지식과 확신은 대단하다.

여기에 덧붙여 담임목사가 매주 한 번, 평일 저녁에 45분 정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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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문답 공부가 있다. 나이에 따라 반이 나누어지는데, 12세부터 시작하여 입교할 때까지

이 교육을 받게 된다. 여기에서는 교리적 주제들이 자유롭게 토론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내

용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다. 이 때 청소년들을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진 부교재를 사용

하기도 한다. 방학과 휴일을 제외하고 계속되는 이 교리문답 교육은 화란 개혁교회의 큰 특

징이라 하겠다. 이것은 한국의 ‘주일학교 교육’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화란 개혁교회의

교리문답 교육이 주중에 행해지는데 비해서 한국의 주일학교 교육은 주일에 이루어진다거

나, 화란 개혁교회의 교리문답 교육에는 대개 믿는 자의 자녀들만 모이는데 비해서, 한국의

주일학교에는 믿지 않는 부모들의 자녀들도 온다는 점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곧 화란

개혁교회 교리문답 교육이 교회 자녀들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한국의 주일학교 교육은

교회 자녀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아이들을 향한 선교적 성격도 가지고 있다.

주일학교도 없는데, 어떻게 신앙 교육을 하기에 10대-30대가 교회에 남아있는가? 교

회의 역사가 긴데, 어떻게 아직도 성장하고 있을까? 그 대답으로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과

‘기독교 학교’을 들 수 있다. 네덜란드 개혁 교회 교인들은 가정에서 가장이 중심이 되어

매일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화란 개혁교회는 주일에 어린

이들을 위한 주일학교,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예배나 모임이 없다. 대신 평일에 신자

들의 자녀들을 위한 ‘기독교 학교’가 있다. 개혁교회 자녀들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교

회와 연계된 기독교 학교에서 신앙으로 재정립된 학문을 배운다. 한국 교회에서는 보기 힘

든 이 두 전통이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아직도 살아있고 성장하는 교회로 만든다.

6. 결론

네덜란드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의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하고 하나님 말씀을

중심하는 교회 설립과 보존을 위해 신조를 작성하고 신조에 따라 믿고 신조에 충실하게 목

회하고 신조에 충실하게 삶을 살려는 것으로 보고 간단히 살펴 보았다.

종교개혁기에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믿어야 할

성경적 교리를 담은 신조들을 작성하였다. 이 신조를 통해 그들은 성경적 신앙을 정치적 박

해 가운데서도 보존하였고 마침내 정치적 독립과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이후 그들은 이 신조들을 버림으로 교회를 성경적 신앙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것

을 대항하였고, 자신들이 가진 신조를 다시금 성경적인 신앙을 충실히 전해주는 것으로 붙

잡았고 이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17,18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인문주의가 낳은 아들 계몽조의 사조의 영향으로 인해

교회는 신학적으로 자유화되고 신앙적으로 세속화되었다. 그렇지만 신실한 성도들은 이에

대항해서 칼빈의 개혁 신앙으로 무장하고 말씀으로 용감하고 끈기 있게 싸워왔다.

화란 개혁교회는 400년의 역사에서 크게 세 번 정도의 교회 분리(1834년, 1886년

그리고 1944년)를 경험한다. 이 분리는 부정적 의미의 교권쟁탈전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파수하려는 진리 운동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리의 주

역들은 이 분리들에 대해마음 아파한다고 한다. 화란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은 ‘국가 교회’

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민족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개혁교회는 동시에 재세례파처

럼 국가 제도를 경시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왕권을 자기의 민족 안에서 높이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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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내려고 노력하였다. 가정과 교육뿐 아니라 사회나 정치에서도 성경의 원칙을 시행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민족 교회로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종교개혁과 개혁파 교회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착념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이에 헌신한 것이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신조 또는 신앙고백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신조를 만들었고 신조를 보존하려 하였고 신조를 지키며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신조를 통해 성경으로 돌아가는 삶 곧 종교개혁적

삶을 계속 살았던 것이다. 개혁교회의 유명한 문구를 빌리면 “개혁된(reformanta)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reformanda)” 하는데 화란개혁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개혁이 계속되어 왔

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재. 교회와 신앙고백. 서울: 성광문화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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