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가을학기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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䀇Ẅ ㇋⊳㤟 㑼ᶓ㑫⯜ 㱋⌋䄷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주관 ㅣ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 주최 ㅣ 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 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 Handong Institute of Learning and Faith http://academia.handong.edu 2 0 1 0 F A L L S E M E S T E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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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주관 ㅣ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주최 ㅣ 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

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Handong  Institute  of  Learning  and  Faith

http://academia.handong.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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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자는 2010년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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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 ㅣ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주최 ㅣ 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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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Section 1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정신 : 타자의 윤리에서 기독교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Emmanuel Levinas and Christianity: What should Christians learn from the ethic of Other?

2010. 9. 15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Section 2

이항대립체계는 유죄인가, 무죄인가?Is the system of Binary Oppositions guilty or innocent?

2010. 10. 14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Section 3

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The Idolatries in the Society of Consuming

2010. 11. 2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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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The Memories and Perspectives of the Christian Scholarship Movement in Handong Community

2010. 11. 12 제 4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Section 5

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An Afternoon of thinking Deeply and Collectively about the Death Penalty

2010. 12. 2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서의 법’ 학술대회

Section 6

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An Evening of thinking Deeply and Collectively about the Death Penalty

2010. 12. 2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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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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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1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정신 : 타자의 윤리에서 기독교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Emmanuel Levinas and Christianity: What should Christians learn from the ethic of Other?

2010. 9. 15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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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정신타자의 윤리에서 기독교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Emmanuel Levinas and Christianity-What should Christians learn from the ethic of Other?-

2010 Fall Semester 1st Colloquium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주최_한동대학교 학문과 신앙 연구소 [Institute of Learning and Faith]

지난 십여 년 간 세계의 지성사회 내부에는 고통스런 20세기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타자의 윤리를 정초했던 유대인 현상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가르침을

깊이 청종하려는 흐름이 있어 왔습니다. 

이를 반영하듯 한동 캠퍼스 안에서도 '시간과 타자'

'윤리와 무한' 같은 그의 저작들을 함께 읽으면서 성찰하고 또 감동하는 모임들이 생겨났습니다.

2010년 2학기 첫번째 학문과신앙 콜로키엄은 그와 같은 토대 위에서

레비나스의 철학과 기독교정신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탐색하는 대화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한동 구성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사회 : 이국운 교수 (한동대학교, 법학, 학문과신앙연구소장)발제 : 박원빈 교수 (남서울대학교, 기독교 철학 및 신학)토론 : 장수영 교수 (포항공과대학교, 산업경영공학) 나윤숙 교수 (한동대학교, 영문학)

All Nations Hall 3029/15 (Wed), P.M.7:15[ ]

Prof. 이국운 Prof. 박원빈 Prof. 장수영 Prof. 나윤숙

발제자_박원빈 교수

숭실대학교 교양특성화대학 교수

보스턴대학교, University Professors Program, Ph.D.

프린스턴신학대학원 졸업, Th.M.

장로교신학대학원 졸업, M.Div.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 B.A. 대표 저서 : '레비나스와 기독교-

기독교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현대 철학'(북코리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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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11ㅗㅗ

2010 년 가을학기_제 1 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행사 사진-1]

2010 Fall Semester_1st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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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2010 년 가을학기_제 1 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행사 사진-2]

2010 Fall Semester_1st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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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13ㅗㅗ

2010년 가을학기_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2010 Fall Semester_1st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주관 :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 [ACE 사업]

주최 : 한동대학교 학문과 신앙 연구소 [Handong Institute of Learning and Faith]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정신

-타자의 윤리에서 기독교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Emmanuel Levinas and Christianity

-What should Christians learn from the Ethic of Other?-

2010. 9. 15

이국운 오늘 이 모임은 ACE 사업의 일환으로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라는 사업에서

진행되는데, 사업을 지원해주시는 학교당국과 관련부서에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학문과 신앙

연구소에서는 작년 2학기부터 매 학기 세 번에서 네 번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전공의

교수님들, 그리고, 활동가들, 학자들을 모시고 함께 대화의 장을 열어보는 학문과 신앙 연구소

콜로키움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지난 두 학기 정도 토론을 해 본 결과, 왜 진작 이런 대화의 모임을

조금 더 빨리 시작하지 않았던가 생각이 듭니다. 그 동안의 성과 위에서 이번 학기에는 첫 번째로

레비나스에 관한 대화 모임을 하려고 생각합니다.

제가 초대하는 발문에다가 썼습니다만, 레비나스 선생님은 20세기 말 들어서 우리 인류 전체,

조금 후 교수님이 말씀 해주시겠지만, 20세기에 인류가 겪었던 대 참사를 본인의 몸으로 몸소 겪어

내신 분이고, 그 아픔과 고통을 철학적으로 수용하여서 정초해 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노력에

감사하고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서, 레비나스 선생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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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 것인지를 한번 진지하게 묻고 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오늘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학교 안에서, 제가 하는 기독교와 현대사상 수업에서 한번 ‘ 시간과 타자’ 를 꼼꼼히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삼 년 정도 지났는데요, 제가 하는 독서모임에서도 학생들과 함께 ‘ 윤리와

무한’ 이라는 책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지난 학기에는 학문과 신앙 교수님들과의 독회에서

‘ 시간과 타자’ 를 역시 함께 읽으면서 많은 깨우침을 얻고, 혹시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가지면서도 감동을 하고 그렇게 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이것을 소화하는

자리를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모임은 예전에는 저희가 네분의 교수님을 모시고 모두 각각 10분씩 짧은 발제를 듣고

모두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왔는데요. 오늘은 조금 형식을 바꾸어서 멀리 남서울 대학교에서

박원빈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박교수님께서는 숭실대학교, 장신대학교, 보스턴 대학교를 나오셨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으신 목사님이시고, 숭실대학과 남서울대학교에서 기독교

과목을 가르치고 계시고, 올해 초에 ‘ 레비나스와 기독교’ 라는 한글로 된,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인의

시각을 담은 첫번째 책을 출간하셨습니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고 거기서부터 시작하게 될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학기 중에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제가 불쑥 전화 드려서 와주십사 했을 때,

하나님이 감동을 주셨는지 선뜻 그러시겠다고 하셔서 오늘 이 자리에 와주셨습니다.

박원빈 선생님으로부터 이 주제에 관한 한시간 정도의 강의를 먼저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윤숙 교수님과 장수영 교수님을 모셔서 두 분이 가지신 생각을 각각 10분 정도씩

듣고, 그 다음에 논의를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대게 저희 모임이 아홉시 반 정도에 끝나는 것으로

예정하고 시작하는데 대게는 그렇게 안 끝났습니다. 오늘 촬영도 하는데, 테이프에 여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촬영하게 되면 더 좋고, 어디까지 가나 해 봤으면 좋겠고요. 특히 박원빈 교수님께서 오늘

학교 안에 숙소를 잡으셨어요. 어디 안 가실거예요. 오랫동안 레비나스에 취해보는 밤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너무 길었는데, 그러면 이 자리에 박원빈 목사님 교수님을 모셔서 특강을 한시간

듣도록 하겠습니다.

박원빈 한동대에 와서 여러분들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이렇게 귀한 기회를 주신

이국운 교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제가 오후 네시경에 도착해서 학교도 둘러보고 캠퍼스를 걸었는데

너무 학교가 활기차고, 또 학생들을 보면서 한동대 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에 대해서 제가 간단하게 여러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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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15ㅗㅗ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잠깐 시작하는 말씀으로 제 소개를 잠깐 드리면, 저는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 종교철학과 윤리를 전공했습니다. 철학에 있어서 학문과 신앙, 영어로는, Learning and Faith

Institute 이렇게 된 걸 잠시 확인했는데, 소위 철학과 신학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는가 하는 것이

고대 철학 이후에 항상 중요한 문제였지 않나 생각합니다. ‘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터툴리안(Tertullian)의 말도 생각이 나는데, 저는 간단하게 제 고백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저는 좋아하는 말씀 중에 에베소서 4장 13절에 있는 말씀인데, 제가 한번 읽어드릴게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 데까지 이르리니라"는 말씀입니다. 학문과 신앙에 목표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저는 성서학자는 아니지만 바울이 이야기 한 것,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믿는 것은 우리 신앙의 영역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아는 것이라고

함은 학문의 영역, 우리가 이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모든 영역을 지칭하는 그런 구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는데 까지 이르러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신학과 철학과 관계된 과목들을 수업을 듣고 나름대로 계속 공부하면서 제가

가졌던 끊임없는 질문 중에 하나가,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 것인가, 학문과 신앙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 것인가 라는 것이 저의 큰 개인적인 물음 가운데 하나였고 이것이 꼭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두 개의 영역이 같이 갈 수 있겠다는 생각들을 나름대로 확신하고,

학문에서 이성을 통해서 하는 작업이 즉 학문이 신앙을 보다 바른 길로 나아가고 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성을 통해서 좀 더 건전한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이런 관계를 갖는 것이 참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칸트(Immanuel Kant)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기억하시는 분도 많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중요한 말 중에 하나가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칸트는 자기의 짧은 명제를

통해서 근대철학의 합리론과 경험론의 전통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저는 이

명제를 살짝 바꾸어서 학문과 신앙의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제가 만든 건데요,

"신앙 혹은 신학 없는 철학은 공허하며 철학 없는 신학 신앙은 맹목적이다." 라고, 칸트를 약간 패러디

했지만, 제가 어디 등록하고 싶은 프레이즈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신앙과 학문,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서,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수 있을까,

제가 철학사 전체를 조망해서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은 이 짧은 시간에 어려운 일이고

또 방대한 작업이기 때문에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 같고요. 아주 간단하게 레비나스 라는 사람을

다루게 될 텐데, 이 사람이 근대 철학 서구 철학의 지성사에 있어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근대 철학에

있어서 레비나스라는 사람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라는 측면에서 근대철학 이후에 철학과

신학의 관계, 신앙과 학문의 관계가 어떤 위치 어떤 관계를 가지고 진행이 됐는지 간단하게만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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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고 싶습니다.

중세 이후에 중세는 한마디로 말씀 드리면, 중세를 한마디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중세 신학의 역사 철학의 역사를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면 대체로 어거스틴, 즉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이후부터 신앙이 신학 혹은 신앙이 이성의 우위에 있는 학문적인

태도와 학문적인 방향성이 지속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이 학문보다 위에 있는

소위 Faith가 Reason보다 위에 있는 경향성은 천년 정도 내려오다가 근대라는, 우리가 많이 이야기

하는 모더니티라는 철학적인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근대에 있어서도 여러가지로 철학과 신학의

관계, 혹은 종교와 이성, 좀더 좁게 말해서 기독교와 철학의 관계를 여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대체로 중세에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최우선 순위에 있어서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 군림했다면 근대

철학자들은 성향은 학문의 영역에서 점점 신앙적인 요소를 배제하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철학자 중에 하나가 데이비드 흄(David Hume)같은 사람은 인간의 사고의 영역에서

신앙, 신학을 완전히 배제해야 할 영역이라 이야기했고요, 헤겔은 반대로 전체를 철학으로, 신앙을

포섭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철학적인 시스템 안에서 철학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칸트같은 사람은 경험론과 합리론의 전통 속에서 어떻게 이 양자를 조합할까 고민하다가, 칸트는

신학의 영역을 철학과 구별되지만 우리의 보다 풍부한 삶을 위해서 신학적 개념을 신 이라던지 영원

이라던지 이런 고도관념들이 요청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상당히 제가보기에는 궁색한

궁여지책적인 결론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근대 철학이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 할 것인가 라는 것을 놓고 많은 근대

철학자들이 시름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일반적인 경향은 철학의 영역에서 신학을, 신앙의 영역을

배제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고, 이 가운데 예외적인 인물도 있는데요,

대표적인 사람이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같은 사람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들으신 적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42세의 나이에 아주 짧은 생을 마감했는데, 이

사람은 자신 스스로가 철학자라고 불리우기보다 종교 저술가라고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을 혐오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철학을 접근했습니다. 철학을 혐오했다지만 철학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철학이라는 것은 헤겔 류의 철학들을 말합니다.

헤겔의 철학 중에, 여러분 헤겔 철학을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이것도 상당히 위험이 있는

말씀이지만, 여러분 헤겔 하면 떠오르는 도식이 있잖아요, 소위 발하는 정반합의 도식인데, 이것은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테제(Thesis)와 안티테제(Anti-thesis) 양자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진테제(Synthesis), 종합으로 나아간다는 일종의 전체성의 철학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헤겔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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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17ㅗㅗ

안에서는 너와 나의 갈증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앞에 손화철 교수님이 앉아계신데,

손화철 교수님이 아주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세요. 그래서 오늘 식사하다가 엄청 많이 싸웠거든요.

예를 드는 거예요. 그런데 헤겔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큰 문제가 아닌거죠. 손교수님이랑 저랑 저는

A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고 손교수님은 B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식사하다가 너무 화가 나서 상을

엎을 정도로 열을 받았는데, 아무리 그렇게 싸운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이름으로,

치고박고 싸우고 해도 어떤 순간에는 이러한 이견이 합으로 도출돼서 하나의 전체성을 향해서

나아간다고 이야기 했기 때문에 헤겔 철학에서는 갈등구조라는 것이 그렇게 크게 중요한 모멘트를

하지 않습니다.

케에르케고어는 이러한 헤겔 철학에 구조 자체를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철학적인 사유를 진행하다보니까, 키에르케고르는 앞에 붙는 수식어가 뭐죠? 실존주의 철학자죠.

굉장히 거창한 말 같은데 실존주의 철학자라는 말이 뭐냐면 나 개인의 주체, 개인성을 강조한다는

말입니다. 헤겔철학의 구조에서는 나와 너의 다른 것들이 별로 중요하게 작동하지 않고, 나와 너의

차이가 나와 너의 의견의 다름이 어떤 면에서 묵살되거나 무시되는 경향을 키에르케고르가 발견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키에르케고르가 썼던 유명한 책이 바로

'Enten-Eller' 즉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번역이 되는데 무슨 말씀이냐면 헤겔철학에 반기를 들고 쓴

책입니다. 헤겔철학이 전체성의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게 되니까 키에르케고르는 팔딱팔딱 뛰는듯한

개인의 이야기, 나의 실존의 이야기가 전체성 철학 속에 묻혀버리게 된다고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A냐 B냐

선택하는 것이 왜 중요하지 않냐, 그것은 인간의 실존에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어디로 갈지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가 아주 중요한 문제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의 ‘ Enten-Eller’ 라는 책을 볼 때마다 여호수아 24장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여호수아 24장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앞에 놓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아무리 족속을 섬길 것인지 여호와를 섬길 것인지 너희가 선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고 선포하잖아요. 이것이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결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헤겔 식의 전체성의 사유를 가지게 되면 키에르케고르가 가지고 있는

이런 실존의 결단 신앙적인 결단을 하기 아주 어려워진다고,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점을 봤던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장황하게 신앙과 학문의 관계를 이야기 했는데, 근대까지 이렇게 내려오다가 드디어 오늘

레비나스로 왔습니다. 레비나스도 키에르케고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물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레비나스도 신앙과 이성에 갈등관계

속에서 근대 철학이 이성 쪽으로 점점 기울어졌다면, 이 관계를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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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측면에서 많이 연구했고 고민했던 사람이 레비나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라는 분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아마 처음 듣는 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간단하게 이분의

비블리오그래피를 설명해드릴까 합니다. 이분은 리투아니아라는 곳에서, 지금의 구 러시아, 러시아에

딸린, 예전의 구 소련연방인 리투아니아 태생의 유대인 입니다. 어릴 적부터 러시아 문화를 배웠고

정통적인 유대교 가족에서 자라났던 사람이 레비나스였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시기였냐면 중고등학교 시절이 1917년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였어요. 러시아

국내정치가 아주 어려웠던 상황이었는데 레비나스의 부모가 러시아에서는 더이상 정상적인 교육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프랑스로,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로 유학을 보내게 됩니다. 그곳에서

대학생활을 하게 되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18세부터 철학을 공부하게 되고, 레비나스가 프랑스에서

공부하다가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는 하이데거라는 철학자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됐습니다. 하이데거는

그당시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이 프랑스에 알려지면서, 프랑스의 실존철학자들이 소개되면서

레비나스도 하이데거 철학에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하이데거를 제대로 배우려면 독일로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1928년경에 가서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 대학에서

유학을 하게 되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프라이브루크로 하이데거를 배우러 갔는데, 여러분들 전공 다

있으시죠? 여러분 지금 전공 들으면서 어떠세요? 공부할 때 관심분야가 바뀌고 그러시죠. 입학할 때는

내가 이 전공으로, 이것 참 재미있을 거라고 했는데 공부해보시니까 좀 지나니까 이건 내가 생각했던

그게 아닌가봐 하면서 소위 회의하고 방황하는 분들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레비나스도 어떻게 보면

그랬던것 같아요. 나는 하이데거 철학에 철학적인 일생을 걸고 이것만 하겠다고 했는데, 독일에서

후설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요.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에 깊이 심취하게 됩니다.

이 현상학을, 어려운말 같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현상학, Phenomenology, 현상에 대한

연구라고 말 그대로 이해하시면 될거예요. 아주 간단하게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의식에 대한 연구인데요. 우리 의식이 어떻게 사고작용과 더불어서 사물을 표상해내고

나타낼 수 있을까하는데,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예를 들어보면 이런 겁니다. 여러분들이 제가

오다가 보니까 포항의 영일만, 아주 아름답던데, 거기를 혼자서 산책하신다 생각해보세요. 한시간 동안

혼자 바닷가를 걸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혼자 한시간 걸을 때와, 만약에 여러분들이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있어서 영일만을 여친, 남친이랑 한시간 걸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차이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차이가 전혀 없겠다고 하신 분들은 연애를 전혀 안 해보시거나 연애에 대해서 모르는

분이죠. 혼자 걷는거랑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걷는 것은 똑같이 물리적인 시간의 단위지만 나에게

느껴지는 의식의 양태는 아주 다르게 느껴진다는 말이죠.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현상학이란 바로

이런 의식의 차이를, 우리에게 드러나는 여러가지 의식의 차이들을 어떻게 규명해낼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이해하시면 될것 같습니다. 레비나스가 독일에서 후설을 만나면서 현상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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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19ㅗㅗ

방법론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게 내가 철학을 하게 된다면 이런 현상학적 방법론을 내 철학에

도입해서 연구를 진행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레비나스가 그의 사상적인 여정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이예요. 2차 대전 때 일어난 홀로코스트. 철학자를 연구할 때는 여러가지 방법론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생애와 사상적인 내용을 분리해놓고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생애와 사상이 밀접하게 간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는데, 레비나스의

경우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레비나스 스스로도 자신의 사유의 여정에서

2차 대전 당시 대량의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가 엄청난 사상적 임펙트를 가지고 왔다고 고백하고

있거든요. 2차 세계대전에 일어난 홀로코스트가 어떤 사건인지 대체로 다 아시리라 생각이 드는데,

여기 사진을 하나 갖고 왔어요. 이사진은 누구 사진이냐면 러시아에 그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바실리 그로스만(Vasily Grossman)이라는 사람이예요. 이사람이 종군기자로서 러시아 레닌그라드에,

독일군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그 전선에 참여하면서 독일군과 러시아군이 벌였던 전쟁에 대해서

책을 썼어요. 그 책의 이름이 바로 "Life and Faith" 라는 책이예요. ‘ 삶과 운명’ 이정도로 번역이 될

것 같아요. 독일과 러시아의 전쟁을 그린 소설인데, 레비나스가 후에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고 나이가

많이 들어서 거의 원로학자가 되었을때 바실리 그로스만의 소설 이야기를 참 많이 인용을 했어요.

자신의 사상에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레비나스에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가 얼굴 개념인데, 여러분들 옆에 앉아있는 친구분들

얼굴을 보세요 보시면 좀 은혜가 되세요? 한숨이 나오세요? 걱정이 되세요? 은혜가 되셔야 되요.

레비나스는 얼굴이 사람의 얼굴에, 이런건 형이상학적 이야기지만, 사람의 얼굴에 하나님의 신성의

자취, 신성의 그림자가 담겨있다고 이야기해요. 여러분들 친구의 얼굴을, 사람 외모로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돼요. 내 얼굴 안에는 내가 아무리 잘생기고 못생겼던 건에 남들이 뭐라든 간에 내

얼굴에는 하나님의 신성의 자취가 깃들어 있다는 거죠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죠.

이 소설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어요. 예브게니라는 사람이 등장인물인데, 러시아 전쟁터에서

치고박고 싸우다가 러시아의 한 감옥에서 감옥소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실리 그로스만이

묘사하는 대목이 나와요. 이 부분을 레비나스가 직접 인용하면서, 이 부분이 그의 철학적 사유의

발전과정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고 이야기해요. 사람의 등이예요. 앞에 앉은 친구분들의 등이 보이시죠.

"예브게니는 등이 풍부한 감정을 표현해낸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 앞에 앉아계신 분의 등을

보세요. 지금 막 들썩이거나 움직이거나 몸이 막 꼬이는 분들은 뭐의 표현이예요? 강의 재미없다는 웬

철학자이야기를 하고 이런 것의 표현이잖아요. 사람의 등이 얼굴이 아님에도 그와 같은 여러가지

감정을 표현해 낸다는 것. "사람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창문 밖을 내다보게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갇혔다고 하니까 얼마나 자유가 얼마나 그립겠어요. 얼마나 바깥세상이 그립겠냐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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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그리고 창 밖을 보기 위해 높이 올라간 그들의 등과 긴장된 어깨는 마치 흐느끼고 소리치며 울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건 아마 이런 유사한 감옥에 갇혔다던지 정말 자유가 구속된 상태에 있을

때라면 이 구절이 더 깊이 가슴에 와닿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튼 레비나스는 이런 바실리

그로스만의 소설을 보면서 2차대전 때 홀로코스트때, 유대인 컨센츄레이션 켐프라고 그러죠 유대인

수용소에 갇혔던 자신의 동족을 떠올렸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이 소설을 읽은 다음에 이러한 이야기를 했어요. 도덕적으로 깨끗한 매일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아무리 거룩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타자의 얼굴은 대표적으로 얼굴을 표현하지만

얼굴에는 모든게 다 포함되죠. 혹은 목과 등에라도 우리의 모든 신체가 다 타인을 나타내는 도구라는

것이죠. "타자의 얼굴을 모든 요구를 뛰어넘는 것이다. 얼굴은 당신을 부르며 당신에게 요청한다.

이러한 요청은 이미 시내산 말씀에 울려 퍼진다. "살인하지 말지니" 이 말씀은 너는 타인의 삶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말해 타인에 대한 사랑을 매우 구체화 한 표현이다. 당신은 어느

하나도 당신이 빚진 게 없는 타인에게 책임이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관계는 원천적 사회성보다

이전의 관계이다." 이게 아주 심오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원천적 사회성, 다시 말해서 다시 한번

옆에 분들 얼굴을 보세요. 옆에 친구가 나에게 뭔가를 요청하고 있대요? 뭐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나를 죽이지 마. 나를 인격적으로도, 말로도, 혹은 여러가지 방법으로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나에게 요청하고 있다고 해요.

그리고 이러한 타인이 여러분의 친구가 나에게 걸어오는, 말을 해서가 아니라 얼굴로 온

몸으로 나에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부름은 원천적 사회성보다 이전에 서구 사회에서 서구에 소위

근대가 발전하면서 발달했던 개념이 시민 개념이라고 이야기해요. 근대국가가 농업사회에서 급격하게

상업사회로 전환되면서 근대국가가 급속히 성장했어요. 이때 사람들이 발견했던 것이, 인간이 아주

이기적인 존재구나 라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 당시 중세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다스리고 교회가

다스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런 큰 갈등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사람들이 개인의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정당화 되고 이러면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유명한 철학자인 홉스(Thomas Hobbes)라는 사람은 인간이 사는 사회는 만인이

만인을 위한 투쟁 같은 사회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짓밟고 누르고 밟고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이런 투쟁을 해야지만, 나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사회라고 이야기했던 거예요.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인류가 필요했던게, 근대사회가 필요했던게 소위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한

계약(Contract)이었다는 거죠. 개인의 자유가 아주 중요했는데, 이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양도해서라도, 누구한테? 국가에게 양도해서라도 내 개인의 자유를 지킬 수만 있다면 우리가 국가라는

제도에 우리의 자유를 어느 정도 양도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는거예요. 그때부터 법이 발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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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21ㅗㅗ

국제법이 발달하고 이런 것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이러한 원천적 사회성, 소위

인간이 필요했던 가장 기본적인 사회계약보다도 오히려 더 한발 앞선 것이 타인에 대한 타인의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해야 한다는 거죠. 레비나스는 이러한 자신의 사상을 바실리 그로스만의 소설을

통해서 영감을 받았고 실질적으로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중요한 사상적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단순한 생각과 거룩함 중간쯤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룩할 수 있는 선한 사회도 믿지 않는다. 그가 오로지 믿는 것은

유일하고 사려 깊은 선한 행동과 친절함뿐이다." 이것은 소설에 나와있는 한 사람의 인간상인데, 이

사람은 굉장히 선한 사람이에요. 선한 사람에 중요한 것은 친절함 그리고 선한 행동, 윤리적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것이 어떻게 보면 유대교 인간상의 가장 중요한 예시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후반부에 기독교와 레비나스 철학의 차이점들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번 언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홀로코스트 때 찍은 유명한 사진 중에 하나예요. 독일의 한 홀로코스트

지방에, 홀로코스트는 폴란드에 있는 지방이고, 체코에서 열차가 도착했어요. 열차가 보이시죠? 가운데

독일 장병이 있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 노동자캠프로 보내져서 살 사람들이고, 왼쪽 줄에 있는

사람은 가스 쳄버로 보내져서 죽게 될 사람들이에요. 독일기자인지 러시아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인지,

보관이 돼서 나중에 이렇게 알려지게 됐어요. 아주 인상적인 사진이죠. 가운데 독일 장교가 서 있고,

저는 너무 가슴이 아픈게, 줄 한번 잘못 서서 자신의 삶이 왔다 갔다 하는거 아녜요?

여기에 선 사람은 어떻게 됐냐면, 여러분들이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영화나 기록들을 보시면

노동을 한참 하다가 어느 순간인가 자신이 사망일이 정해지죠. 그러면 옷을 다 벗겨요.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 샤워를 시킵니다. 그러면 다 벌거벗은 체로 샤워를 하게

되는데 노동자 수용소에 갖혀 있었으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몸을 못 씻었겠어요. 그러니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 들어가는데 들어가서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우리가 씻는구나 너무 좋다 하고 좋아하다가

물이 끊기자마자 천장에서 가스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으면 서로 엉키고

설키고 시체더미가 쌓이게 되죠. 독일 나치들이 시체를 모아다가 불에 태우죠. 그래서 그 사람 몸에서

나오는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었다는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전해지고 있죠. 맨 앞에 아이를 안은

엄마는 이쪽으로 간 것 같죠? 꼭 이쪽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이쪽을 향하고 있으니까. 왼쪽 줄에 있는

사람들은 죽음의 수용소로 들어가게 되는데.

혹시 여러분들 미국에 가실 기회가 있으면 워싱턴DC에 홀로코스트 뮤지엄이 있어요. 거기를

꼭 가보시기 바래요. 제가 올해 1월에 거기를 잠시 다녀왔는데, 제대로 보려면 두어시간 걸려요. 2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홀로코스트에 관한 생존자들의 증언과 독일 나치의 일들을 생생히 자료화해서

모아놨어요. 인류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같은 인류에게 저질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박물관이라

생각해요. 디즈니랜드나 유니버셜 스튜디오 이런걸 보시는 것도 좋지만 홀로코스트 뮤지엄,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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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가보시는 것을 추천해요. 제가 가서 사진을 찍어오려고 했는데 박물관에서 사진 찍는게

금지되어있어요. 제가 가장 인산적이었던 건, 박물관투어를 마친 후에 맨 마지막에 기도의 방이 있어요.

큰 원형 방에 촛불을 밝게 켜고서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위해서 잠시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거든요. 그 시간이 저에게 좋았고, 인간이 근대라는, 근대성이라는 이름으로 홀로코스트를

통해 저질렀던 비참한 인류의 참사를 반성하고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건 어린 아이의 사진인데 굉장히 끔찍한 사진이죠. 이 당시 인체실험을 많이 했어요. 특별히

나치들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흩어졌던 집시를 여호와의 증인들(Jehovah's Witnesses)을 다

잡아다가 생체실험을 자행했어요. 엄청난 끔찍한 모습들이 나중에 공개됐고 보이시죠. 어떤 사진인지

아시겠죠. 사람이 죽은 시체, 수 만명, 수 천명이 집단 학살되고 이것을 나중에 중장비로 묻어버리는

장면을 생생한 영상으로 아직까지 확인할 수 있어요. 레비나스는 이런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던 거죠. 만약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홀로코스트 현장에서 하나님이 어디

계셨는가라는 질문을 충분히 할 수 있게 되죠. 여러분들 고난을 겪어보세요. 어떤 반응이 나타나요?

하나님 정말 살아계십니까?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그런 질문 해보신 적 있으세요?

한동대 학생들은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실 거라는 굳건한 믿음을 갖고 계신 것 같은데 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 삶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면 이런 질문이 생기게 되죠.

노벨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Elie Wiesel)이라는 유대인 문학가가 있어요. 이분이 1970년대

노벨상 수상자 이신데,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이분을 한번 뵈었어요. 이분이 쓴 책 중에 'Night'란 책이

있어요. '밤' 이라는 책인데, 우리나라말로도 번역이 된 것 같은데 혹시 기회가 되시면 읽어보세요.

미국에서는 주로 학부 학생들이 많이 읽는 책 중에 하나예요. 어린 한 소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열세

살짜리 소년이 아버지가 수용소캠프에 갇혔다가 아버지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노란 별을

붙이는데, 유대인이라는 것만으로 교수형을 당하는 것을 직접 봐요. 본인의 자전적 스토리가 같이

들어있는 거죠.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Where is God?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레비나스도 같은 질문을

하는 거죠. 레비나스도 2차 대전에 자기부모와 친척들을 다 잃었어요. 다행히 자신의 아내와 딸은

프랑스에 있었는데,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카톨릭 수녀님들이 가족들 아내와 딸은 숨겨줘서

목숨만을 구할 수 있었는데, 러시아에 있었던 나머지 친척들은 다 학살을 당한 상태에 있었죠.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계셨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기독교인들도, 제가 도전적 질문을 해볼게요. 한동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방학 중에 선교여행을

갔다고 생각해보세요. 갔는데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홀로코스트를 겪고 살아난 할아버지를 만났어요.

여러분에게 만약 이런 질문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한동대 학생이시고 크리스쳔이라는걸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믿는 유대교와 여러분들이 믿는 기독교만이

하나의 형제 간의 종교이고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홀로코스트를 겪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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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23ㅗㅗ

나로써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정의로운 하나님을 믿기 너무 힘듭니다. 이렇게 대답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죠? 그리고 또 만약에 여러분 중에 한 학생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하나님의 큰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답을 모르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겠죠. 이렇게 대답했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러면 그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한다고 가정해보세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정의와 섭리 가운데 이 끔찍한 사건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받아들인다고 할 지라도

이것이 정말 내가 어떻게 하나님이,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일으켰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라고 되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냐는 것이죠. 기독교 신학에, 우리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오는 질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은 신앙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레비나스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홀로코스트가 미친 영향을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 이것은 신정론의 종말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The end of

theodicy라고 이야기 합니다. theodicy라는건 그리스어의 theos, 하나님을 뜻하는 theos 라는 희랍

말이랑 dic이란 정의라는 말의 합성어예요. 하나님의 정의를 영어로 번역하면 Justification of God,

이렇게 번역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자기정당화, 이정도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걸

신정론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간단히 말해 역사 속에서 어려운 일이 많이 일어났는데,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개인에 힘든 일이 닥치고 할 때,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인데 어떻게 이 세상에 어떻게 악이

존재하는가 라는 것이 신학자들의 큰 문제였어요 여기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신학의 한 학문 중에

하나가 신정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세상에 있어서 악의 문제는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도전으로

다가왔던 것이, 만약에 하나님이, 보통 이야기 하듯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라고 이야기

하잖아요. 그런데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어요? 만약에 선하신 하나님이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면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님이면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는 악을

없애버리시거나 제한할 수 있으신데 왜 그러지 않으시는 거예요? 답은 두 가지죠. 하나님이 실제로

전지전능하지 않으시거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우리가 겪는 고통에 관심이 없으시거나.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죠? 그러면 오늘부터 채플드릴 이유가 없어지는 건가요? 큰일나는거 아니에요?

세상에 악의 문제는 신정론에 큰 도전을 가지고 왔는데, 신학자들이 신정론을 통해서 악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하나님은 이 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 신정론의 큰 신학적인

흐름이라고 말씀합니다.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서구신학에 있어서 신정론은 붕괴되었다.

종말을 고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홀로코스트같은 사건이 일어나겠는가

이야기하고, 또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는 고통의 문제였어요. 신정론에서는

고통 즉 Suffering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어떻게 이야기하냐면,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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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일어나는 잠깐 겪는 고난의 과정의 일부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깐 말씀 드리자면, 저는 미국에서 8~9년 있었던 것 같은데, 제가

미국에서 지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기간이, 제가 목회하고 있을 때 제가 이민교회를 맡아서 담임목사를

잠깐 하고 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절에 제 아내가 유산을 했었어요. 그때 제가 가장 소화하기

힘든 말씀 중 하나가, 우리 교인들이나 동료 목사님들이 찾아와서, 물론 그분들은 좋은 의도로, 저를

위로하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었는데, 제가 소화하기 힘든 말씀이, '목사님 큰 일에 쓰시려고 이런

고통을 주시나 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니에요. 자꾸 들으니까 막 이런게

올라오더라고요. 그럼 큰 일하게 당신이 한번 당해보시지 하는 마음들이 솔직히 생기고요. 제가

실존적으로 힘들어지니까 저는 레비나스가 그런 차원에서 신정론, 개인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어려움, 고통들을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정당화시키니까 우리가 느끼는 고난들, 고통들, 삶의

깊이있는 바닥에서 느끼는 눈물들을, 키에르케고르에서 말씀드리면서 얘기 했듯이, 잊어버리고 그냥

넘어가더라는 거죠. 고난이라는게, 우리가 눈물을 흘리려야 하는 자리에서는 눈물을 흘려야 되고

아파하는 자리에서는 같이 아파해야 하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우리 아버님 천국가서 너무

좋아요 하고 웃고 있어요. 나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아버님과 함께, 물론

천국에서 다시 뵙지만 이 땅에서 살았던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슬퍼서 울 수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슬퍼서 울어야 되는데, 신정론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아름답게 변한 것이다. 고통은 중요하지 않아. 하는데 점점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봤어요.

레비나스는 이런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서구 신학과 철학에 있어서 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신정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라고, 신정론의 종말을 고했다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서구 도덕성의 붕괴나 인간성의 붕괴나 이런 것들은 근대사회가 함께 보여준 여러가지 측면도

있기 때문에, 제가 간단하게만 얘기 할게요. 근대 모더니티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이루었던 가졌던

중세에 교회의 지배, 교황의 교권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인류가 가졌던 꿈 중에 하나는 인간이 과학을

통해서 유토피아, 인간이 정말 고통이 없고 아름다운 세상, 인간이 주인이 되는 정말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겠다는 그런 희망이었어요. 그것을 통칭적으로 말해서 "모던 프로젝트(Modern Project)"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거예요. 근대가 가지고 있던 하나의 목적이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이렇게 과학이 급속히 발달하다가는 어느 순간엔가 우리가

꿈꿔왔던 고통과 질병과 눈물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유토피아에 인류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었는데, 홀로코스트 사건이라는, 정치적으로도 근대의 낭만주의적인 긍정적인 미래상에

충격을 가져다 주었죠. 인간이 이성으로 제도적으로 비도덕적이고 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에, 근대가 한참 진행되면서 2차대전 때 홀로코스트 사건을 통해서 이 이후에

포스트모던 담론이라는 것이 활발하게 시작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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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25ㅗㅗ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신은 죽었는가? (Is God Dead?)라는 문구가 하나가 될 것 같아요.

이것은 타임지(Time Magazine)표지인데 1966년 4월 8일자 판이라고 해요. 하나님이 죽었는가라는

아주 도발적인 제목으로 타임지 기사가 실렸던, 표지 스토리였겠죠. 소위 1945년에 2차 세계대전이

종결한 후에, 66년이면 약 20년이 흐른거죠. 홀로코스트의 참화를 겪으면서 인류가 어떻게 이렇게

근대의 낭만적인 근대사회가 발전하리라는 이상이 다 붕괴되고 난 후에 1960년대 인류가 철학자들

지성인들이 생각했던 것은 신이 죽은 세계를 이야기 했던 거예요. 희망이 사라진거죠.

여러가지 사람이 있어요. 대표적으로 토머스 알튀르라는 사람이 사신신학, 소위 신의 죽음의

신학을 이야기했고요. 특히 유대교 신학자들, 홀로코스트라는 개인적인 그리고 집단적인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포한 리차드 루벤스타인(Richard Rubenstein)같은 유대인 학자도

있어요. 이러한 2차 대전 이후에 신의 죽음의 신학들, 지금까지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레비나스는 이러한 줄기와는 조금 다르게 소위 타자윤리를 주창하게 되죠 .소위 신의 죽음의

시대, 하나님이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영역과 학문의 영역,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을 다시 한번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면서, 레비나스는 이것이 바로

타자에 있다고 이야기해요.

이 타자, Ethic of Other, 타자윤리라고 이야기하는데, 레비나스는 타자가 어떻게 얘기할 수

있는가. 아주 간단히 얘기해서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옆에 앉은 친구분들, 나의 이웃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신성이 깃들어져 있다. 그 신성, 그 하나님의 타자, 내 옆에 있는 이웃이 하나님이고,

그 이웃으로부터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돌볼 것을 요청받는다고 이야기해요. 더 나아가서

레비나스는 주체 소위 Subjectivity, 근대에 가장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가 주체성, 나, 자아, 자아 인식

같은 자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데카르트(René Descartes)부터 시작해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인데,

레비나스는 여기까지 얘기해요. 나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나는 타자를 통해서만 나의 바른

인식이 가능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나는 타자를 통해서, 내가 내 주위에 있는 타자를

통해서만 나는 나 자신을 파악할 수 있다고 얘기해요. 이것은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저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동양적인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재미있는 것은 미국에서 오래 살면서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점을 몇 가지 발견했는데,

우리는 항상 주어에 ‘ 우리’ 가 오죠. ‘ We’ 가 주어에 오죠. 그래서 아내를 소개할 때 여기 우리

아내입니다. This is 'our' wife가 되잖아요 그러면 미국사람이 깜짝 놀라는거죠. This is 'my' wife가 되야

하는데, This is 'Our' wife? 언제 당신이랑 나랑 아내를 공동으로 섬겼나? 우리 말 가운데는

문법적으로는 어긋나지만 소위 공동체 의식, 이걸 어떤 학자는 ‘ WE’ Consciousness 우리의식이다

라고 얘기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는 유교문화권 속에서, 소위 나라는 존재는 항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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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속에서 규정돼요. 나는 누구집 자식이고, 어느 부모님 밑에 있고, 내 형재자매는 누구이고, 나는 어떤

학교를 다니고 그래서 우리 사회 속에서 학연 지연 그리고 이런 것들이 중요시되는 이유가, 한국인의

심성이 있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우리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의식구조 속에 그런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외국인들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죠.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뭘 좋아하고 My hobby is 이렇게 얘기하고, 저는 항상 소개 할 때마다 힘든게, 내

취미가 뭐가 있지? 이런 것을 이야기할 때, 항상 같이 하고 같이 놀고 했는데, 혼자 있으면?

정서상에서 오는 의식 구조상에서 오는 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차이들이 있는데

레비나스는 굉장히 동양적 사유를 하는 사람이라 이야기할 수 있어요 나는 나 혼자 유아독존하는

그런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사회성 속에서 여러 사람들의 관계성 속에서 내가 규정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죠. 그래서 레비나스는 어떻게 까지 얘기하냐면, 나는, 주체는 타자의 볼모로 잡혀있다.

Hostage로 잡혀있다고까지 이야기해요. 나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타자의 음성에 귀 귀울여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규정된다고 이야기하죠.

바로 여기서 책임, Responsibility가 생기게 되는 거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레비나스의 책임이라는 것은 단순한 선한 행위 선한 사마리아인이 한번 도와주고

여비를 주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헌신적인 책임을 의미해요. 어느

정도까지 가냐면, 이 책임이 어느 정도까지 실현 가능할 수 있을까? 레비나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얘기하는 건 좋은데, 도무지 그게 실현 가능하냐?

아주 어려운 질문이에요. 레비나스는 어떻게 이해하냐면, 주체와 내가, 나와 타자의 관계에 있어서

나는 타자에게 전적으로 종속되어있는 관계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타자 앞에 서면 나는 항상

작아지는 존재예요. 타자의 요구에 귀 기울여야 하고 돌보아야 하는 그런 입장에 서 있는 관계를

얘기해요. 이러한 생각은 현대의 철학자들이나 윤리학자들 신학자들에게 어려운 문제들을 제기하죠.

어떤 면에서 그러냐면, 현대 윤리학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평등이라는 개념이거든요. Receive

probity라는 상호성, 너와 내가 동등한 위치에 섰을 때, 그때 윤리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거든요.

어떤 사람이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혹은 힘에 관계에 있어서 A가 B라는 사람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고 한다면 벌써 이건 평등한 관계가 아니잖아요. 이건 윤리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윤리적으로 평등한 지평에서 시작한다고 이야기해요. 이 사람이 내가 어떤 지위와 어떤 배경인지 전혀

모르고, 나는 윤리적으로 이 사람과 그 사람이 어떤 배경이든지 간에 대통령의 아들이건 혹은 심지어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민주주의에서는 그 사람과 내가 윤리적으로는 동등한 관계에 있다고 보는 거죠.

그게 소위 말하는 존 러기(John Ruggie)가 얘기했던 무지의 배일에 싸인 기본적인 윤리적인 기초적인

상황이다 라고 얘기를 드릴 수 있어요. 아무튼 이 레비나스는 이러한 현대 윤리학이 가진

상호동등성을 완전히 파괴시키는 거죠. 이 무게중심이 나와 타자에 있다면, 근대에는 주체에 있어서

근대철학자들은 주체가 중요하다, 내가 중요하다 라고 했는데, 레비나스는 이 관계를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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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27ㅗㅗ

역전시켜버립니다. 타자가 훨씬 중요하다.

레비나스가 이렇게 얘기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힘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의 개인적인 실존적인 홀로코스트 경험에 있지 않나 생각이 들고요, 또하나는 이 타자를

통해서 레비나스는 신의 음성과 연결을 시키고 있죠. 타자가 나에게, 나좀 도와줘 이렇게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는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다 라고 까지 얘기하고 있어요. 제가 그림을 하나 가지고

왔는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그림 중에 하나에요. 레비나스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그러한 그림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체코의 화가인 레오 하스(Leo Haas)라는 사람이 ‘ The Blind of

Theresienstadt’ 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Theresienstadt는 체코에 나치가 만든 유대인 수용소였어요.

Theresienstadt의 시각장애인들이라는 의미죠. 이 시각장애인들 그림을 잘 보세요. 모두가 시각장애를

가지신 분들이죠. 그런데 서로 팔짱을 끼고 연대해서 걸어가고 있죠. 또 인상적인 것은 이분들이 다

하얀 지팡이를 짚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앞은 못 보지만 자신의 하얀 지팡이를 짚어가면서 어두운

세상을 밝혀나가는 길을 걸어가는 힘이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를 잘 보여주는게 아닌가 생각해요.

레비나스는 철저하게 유대인이었어요. 유대인이다라는 말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고,

우리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차이가 어디서 드러나냐면, 기독교를 비난하는 글을 레비나스가

쓴 적이 있는데, 기독교를 이야기하기를 Childish Religion이라 이야기해요. 아까 말씀 드렸던 신정론과

관련해서 이야기하는데, 기독교는 고통이 찾아오면 너무나 쉽게 하나님에게 의지하려 든다 라는 거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서로 손을 잡으면서 자신들의 삶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극복하려 한다. 유대교는 Adult Religion이다 라고 합니다. 기분 나쁘죠. 그리고

정확하게 레비나스가 유대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게, 기독론이 가지고 있는 초월과 내재의

변증법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시는데,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예요? 참 인간이신 동시에 참 신이다라고

고백하잖아요. 그 말은 뭐냐면 예수님이 초월적임을 보이시는 동시에 우리 삶에 함께하신다 라는 거죠.

다시말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레비나스에 있어서는 예수그리스도라는 고리가 없다고 보시면 되요. 그러면 어떻게

나아가느냐,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내가 타자를 향한 윤리적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이 윤리적 실천에는 구체적이고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노력이 필요하죠.

굉장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에요. 과연 인간이 타자를 위해 100% 헌신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보고,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 신학자 입장에서 인간관이 죄인이기 때문에 레비나스처럼

하라면 못할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감히 타자를 위해서 어떻게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을까. 그런

자신이 솔직히 없어요. 윤리적 실천만으로 구원이 가능할까.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를 가리켜서 Jewish

Humanism이라 이야기하죠. 유대교적 인본주의다 라고 이야기 해요. 레비나스는 이 말을 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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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반론을 제기할거예요. 왜냐면 그는 레비나스가 초월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가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결국 우리가 초월을 안다는게, 뭔가 초월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적 세계 저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네 이웃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사람에게 정말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라고 이야기하거든요.

레비나스는 소위 계시, 우리는 계시를 이야기하는데 특별 계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계시

아니에요? 유대교에 있어서 계시는 윤리적 차원의 계시예요 내가 남을 돕는 가운데 타자를 위해 나의

삶을 전폭적으로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길이 바로 내가 하나님의 자취를 체험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이렇게 얘기 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리면서 얘기해볼까 합니다. 아까도 얘기 했듯이, 레비나스의 이런 타자

윤리는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근대성에 대한 여러가지 위기를 겪고 있는 서구의 신학계, 철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그가 가지고 있는 타자에 대한 윤리는 서구철학에 수 천년간 내려온 근대 이후

가져왔던 주체중심의 철학, 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소위 주체 중심의 철학을 완전히 뒤엎고 타자가

우선이라는 새로운 전혀 역발상적인 새로운 시스템을 제시했기 때문에 큰 반향을 가지고 왔고

레비나스 이후에 많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 신학자들이 레비나스의 철학에 열광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론적으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레비나스의 철학을, 신학을 혹은 신학적인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을 생각해보면서 마무리를 할까 합니다. 저는 레비나스가 비록 유대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지만 우리가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사유할 수 있고 또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그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열려있다고 봐요. 그 가운데 하나는 탈 근대성 속에서 주체가

근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주제였다는 주체성을 상실한 시대, 포스트모던 시대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 라는거, 우리가 기독교의 복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전파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결국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와 함께하는 삶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단순하게 내가 복음을 외치고 예수천당 불신지옥과 같이 이차원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좀더 타자의 삶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하는 삶, 타자를

단순히 돕는 차원을 넘어서 타자와 함께하는 삶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레비나스가 기독교 신학에 혹은

우리 기독교인에게 주는 도전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건 아주 도전적인 요구죠. 우리가 한번

도울 수는 있죠. 자선할 때 한번 돕고 여러가지 기부를 할 수 있고 그런데, 제가 도발적인 질문을 하면,

거지를 한번 도울 수는 있지만 거지와 같이 사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잖아요. 그런데 레비나스는 지금

자신의 삶 속에서 거지와 같이 살라고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바로 네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취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거예요. 그러니까 굉장히

레비나스가 기독교신학에 주는 도전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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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29ㅗㅗ

또 하나는 고통의 문제를 잠시 얘기 했는데, 기독교인 입장에서 레비나스의 고통에 관한

지적은 기독교인이 정말 깊이 반성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봐요. 고통의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다

해결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학생들한테 제 경험을 이야기하면, 제가 아까 잠시 개인적인 말씀을

드렸는데, 제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제가 가장 크게 은혜 되었던 분은, 찾아와서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목사님을 크게 쓰시려고 그래요. 하는 분들이 아니라, 제가 가장

크게 은혜 되었던 분은 그냥 와서 아무 말 없이 저를 꼭 안고 한참 같이 울어주는 우셨던, 저희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계셨어요. 그분이 제 마음에 가장 큰 은혜가 되셨어요. 그분이 제게 가장 큰

은혜가 되셨어요. 결국은 타자와 함께 하는 게 그런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누구를

위로한다고, 고통에 대해서 반응한다고 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남들의 고통, 남들의 어려움을 함부로

이해하고 해결해줄 수 있겠어요? 다만 같은 마음을 가지고, 내가 너와 함께, 내가 너의 고통을 다

모른다 할지라도 내가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마음을 표현하는 게 가장 좋은 위로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이런 도전을 줘서 기독교인이 가지게 되는 고통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해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두서없이 얘기했는데 지금까지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국운 네 감사합니다. 시간을 더 드렸으면 좋겠는데, 레비나스가 특히 시온주의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입장이라던지, 여러가지 얼마나 개인적으로 괴팍한 분이었는가 이런 얘기까지 말씀을

듣고 싶었는데 시간이 허락치 않는것 같습니다. 예정된 대로 얘기를 진행해보겠습니다. 두분

교수님께서 오늘 박교수님 하신 말씀에서 어떤 실마리를 잡아서 시작해주셔도 좋고 아니면 그동안

한동 안에서 이런저런 나누어졌던 이야기들 속에서 실마리를 잡아도 좋고 아니면 그런 것과 상관

없이 그냥 이 자리에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을 하셔도 좋습니다. 10분 정도씩 두분 말씀을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나윤숙 가나다 순으로 하시자고 해서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토론회를 지난주에 갑자기

교수님이 알려주셨는데, 만들어놓았던 질문을 먼저 드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두번째 세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제주도 글제주도 없는 사람이지만 몇 자 적었거든요. 일단 읽을게요.

우선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레비나스 같은 유태인 철학자가 고통의 문제, 특히 타자의 고통의

문제와 신의 개념을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과 일종의

죄의식 같은 것이 제 안에서도 꿈틀거렸던 것 같습니다. 일단 잠정적으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자아

개념을 여전히 차용하자면, 레비나스 선생님도 고통스러워 하셨기는 하지만, 내가 나의 고통을

바라보는 혹은 수용하는 자세와 내가 타자의 고통을 대면하는 자세는 인간 실존에서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곤 합니다. 제 담화가 좀 칸트적이지요, 특히 지적하신 것처럼 신정론의 이름으로

자행된 타자의 고통에 대한 합리화 내지는 정당화, 그리고 어차피 한 고리에 걸려 있는 나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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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회피라는 문제는 저 역시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절대적으로 무기력하지만 또한 절대적으로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타자에 대한 무한 책임론을 들고 나왔고, 이러한 명령으로서의 타자에 대한 책임을 통해 거꾸로

우리는 신, 혹은 신적인 것을 경험하게 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면, 타인의 위치에 내가 들어가서,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그야말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

고통을 온전히 대신 수용해야 하는 것이 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아주 유사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물론 유대교 전통에 있는 레비나스에게는 incarnation 자체가 처음부터 어불성설일

수 밖에는 없었을 수 있고, 또 인간을 대신하여 속죄양이 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오용 내지는

악용하여 타자에 대한 나의 윤리적 책임을 떠 넘길 위험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겠으나, 아주 조심하고있어요.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를 완벽하게 구현한 샘플이라고 제게는 여겨지는

예수그리스도를 혹은 십자가 사건을 레비나스는 어떻게 수용 내지는 해석 하고 있는지 조금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 제가 원고를 받고 질문을 만들어봤고요.

제가 그 전에 제가 마음대로 타자에 대한 이해 없이 만들어놓은 질문, 요즘 슈퍼마켓 가면

우유 하나 사면 요구르트 같은걸 두개 정도 얹어줘요 그런데 정말 우유 사러 갔다가 우유보다

요구르트가 더 맛있을 때가 있거든요 그런 심정으로 들어주시면 됩니다. 잘 알려진 대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유대교, 기독교 모두의 정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외재성 차원에서 볼 때 자칫 이 명령이 레비나스가 주체의 폭력이라고 했던 동일성의 문제와

중첩될—물론 오해라면 좋겠지만요—혐의가 있다고 여겨질 소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박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질문이 하나 더 남았어요 제가 이왕에 토론의 역할을 맡은 여성으로서 여성에 관한

질문을 드리지 않는 것도 실례가 될 지 몰라 예의 상 한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사실 여성들에게

레비나스는 애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철저하게 소외된 타자의 얼굴을 중심으로 한 그의

윤리철학은 역시 역사에서 소외된 주체로서 고통 당한 여성들과 같은 집단에게는 아주 반가운 소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레비나스는 타자성을 잡히지도 않고 신비하다는 표현을

하며 여성성에 비유하고,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책임을 잘 나타내주는 예로 어머니, 혹은 모성을

들고 있습니다. 물론 이를 통해서 향유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간주되었던 전통적인 어머니상에서

타자에게 내가 향유하고 소유하는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일종의 윤리적인 주체로 어머니상이

재정립된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레비나스가 '나'를 남성으로

전제하면서 여성처럼 타자를 환대하라고 권면할 때, 여전히 여성의 희생을 전제로 한 남성의 윤리성

회복을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조장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가 희생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신정론의

이름으로 타자에 대한 고통을 회피하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던 것처럼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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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31ㅗㅗ

여성이라는 타자를 미화시키고 존재를 왜곡시키는 오류를 다시 반복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이에 대한 박원빈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국운 이거 지금 우유 통에 매달려 있는 요구르트가 굉장히 큰 것 같습니다. 조금 이따가

모아서 같이 해주시겠어요?

장수영 저는 질문을 만들어오지는 않았고요. 저는 과학기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기

선생님들과 레비나스를 읽는데, 레비나스가 누군지도 모르고 재미있는 책이라고 해서 읽었는데, 그

경험이 저한테는 참 재미있었어요. 저만 재미있는지 알았는데, 거기 선생님들 다 오셔서 레비나스를

읽으러 오면 엘리스의 원더랜드에 갔다오는것 같다는 이야기까지 했어요. 여러분들 한번 이 책을

읽어보시면 공감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참 읽기 힘든 텍스트였던것 같습니다. 그때 느꼈던 것과,

마지막에 한가지만 교수님한테 토론 말씀 드릴까 합니다.

저는 사실은 과학기술을 하는 사람으로써 다원주의적인 생각이 불편해요. 과학하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현대에 가장 중심에 있었고, 확실성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첫 장이 끝날 때부터

카르미데스(Charmides)와 결별하겠다. 우리는 다원성을 지양한다. 그리고 중심에 있는 게

환원불가능성,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처음에 새롭기도 하고 도전이 됐어요.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 환원이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무엇을 측정하고 예측하고 통제한다는 것에 기본이 되는

과학기술이 설 자리가 좁아지는데, 이게 다 환원이 되니까 우리가 종이 위에다 얹어서 숫자로

환원해서 다시 구성해서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자동차도 만들고 기계도 만들고 대포도 쏘는 이런

것들을 하는 게 과학기술인데, 그런데 쭉 읽으면서 나중에 깊이 이해하면서, 아 이게 어디선가 느끼는

점이 있겠다 했던 부분이 향유라는 부분에 들어가서, 그때 좀 알게 된 것 같아요. 과학기술이 가지고

있는 환원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환원 불가능한 실제가 환원불가능성에 의해서 과학적으로 맞지

않는,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내가 바라보고 있는 불완전한

이해이지만, 그래도 그것이 주는 유익은 내가 향유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은 했습니다. 지난번

콜로키움에서 그런 것들을 나누어보았는데요. 그때 레비나스의 생각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학문을 한다는 것, 도대체 주체성, 그런 것들이 해체가 되는데, 레비나스에 의해서. 그

다음에 빛, 이성 파악하는 것, 그리고 남성성, 파악하고 손아귀에 넣고 분해하고 다시 새롭게

구성해내고 하는게 그런걸 포기한 학문이 가능할 것인가 학자로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후반부를 읽어가면서 아들의 이미지가 나올 때 재미있었습니다. 비록 잡을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몸짓, 애무라고 표현하는데, 그런 것들을 통해서 여성성, 존재하고 있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게 되는데 그것은 나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나의 연결이고 연장이지만 그러나

타자의 존재이죠. 그것이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 이상으로 우리 삶 속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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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산물을 레비나스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생각한다. 말한다. 소리를 낸다고 하지만

우리가 알고 하는 게 아니거든요. 소리라는 과정을 전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가 손을

이렇게 움직이는데 교수님 손 움직이시는 건요, 그 안에 전기가 어떻게 흐르고 화학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건 아무도 모르는 것이거든요. 우리는 단지 향유할 뿐이죠. 그런 결과물들, 그런

가능성도 있겠다. 그런 학문의 가능성도 가능하겠다. 내가 이렇게 뒤로 물러서서 관조하고, 사고와

모든 생각의 결과들이 내 소유가 아니고, 그것은 이세상에 대한 나의 몸짓, 무언가를 잡으려는 몸짓

아래서 나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 속에서 만들어지는, 아들과 같은 것들이다. 라고 그렇게 굉장히

겸손한 태도의 학문도 가능하겠다 같은 생각도 가능하겠다 하는 생각도 좀 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기독인에게 그 타자가 하나님이냐, 복음에서 명쾌하게 읽으면서 저는

박교수님 의심의 해석학 the hermeneutic of suspicion, 모든 것을 다 해체하는 이런 생각을 그런

생각을 할 때 결국 하나님을 버리게 하는, 하나님이 죽었다는 결론을 내리기 쉬운데, 레비나스의

철학은 거기서 오히려 윤리의 회복, 비록 의심의 해석학 가치, 의심으로 출발하지만 오히려 회복을

한다는 교수님 말씀이 인상적이었고 이해가 됐습니다. 그래도 그 타자는 구약에 나와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소리를 들었던 아브라함을 생각해보면, 그리스도라는 역사도 없었고 정말 이방인들 속에 있었을 때

들리던 그 음성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 레비나스가 얘기하고 있는 그런 타자의 존재와

맞아떨어지는 것 같고, 그 후에 역사들이 만들어짐에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어떤 색깔을

갖게 되기 때문에, 그것까지 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와 연결시키기 어려워지기는 것 같습니다.

원초적으로 유대인이 가졌던 하나님의 모습은 레비나스가 말했던 타자와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신약의 하나님과는 어떻게 되느냐, 이건 믿음의 문제인데, 신약의 하나님은 로마서에서

1장 18절을 제가 가지고 왔는데,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좆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그러셨다 하거든요. 성경을 통해서라는 말도 없이 그냥.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영원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로마서 1장 20절) '알면서' 그 다음 구절이 나오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래서 감사하지도 않고 우리가 우둔하게 우상을 만들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또

갈라디아서에 가게 되면 몽학선생 이야기가 나오고 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넣어두신 창조물의 모든 현상과 모든 것 안에, 사실 우리 안에 우리가 지성이라고 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그거 안에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이다. 난 너희들에게 이렇게 사는 삶을 제시하고 있다.

하는 그런 것을 다 심어놓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레비나스를 들으려고 한다면 타자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갈라디아서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 믿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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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33ㅗㅗ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해요.

질문은 이게 마지막인데요. 우리가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기도 힘들고 너무나 사람의 생각과

철학이 확고하고, 그 사람이 구성한 나름대로의 세계관이 탄탄하게 있는 대상에게 접근할 때. 더

어려워 지는 것은, 그 사람과 내가 같이 공동체를 만들어서 공공성 윤리 정의를 같이 만들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이런 다원주의 속에서 여러 개의, 여러 형태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안에 어떻게 공공성을

건설할 수 있는가 하는, 그런 공공성의 기반이 뭐가 될 수 있는가 생각했을 때 저는 여기서 말하는

몽학선생. 마음에 드러나는 하나님,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 그런 것들이 우리 기독인들이 이제

그리스도 온 후에는 필요 없는 것이지만, 그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는

우리는 공공성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런 다원주의 사회 안에서 그래도

이세상을 붙들 수 있는 공공성을 건설하는 이것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를

돌보는 일을 위해 그리고 파괴적 전체성에 대하는 공공성을 건설하기 위한 범 세계관. 즉 연대에

정언적 기반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는데요.

정언적 기반의 가능성이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제 1 철학으로서의 의미, 이유가 없다는 거죠.

왜냐면 정언적으로 '살인하지 말라' 아무 설명이 없어요. 가언적이다 하는건 조건이 붙는다는 거죠.

조건이 붙어서, 이러니까 하지 말라는 거야, 네가 사람을 죽이면 나중에 네가 죽임을 당하잖아. 이건

가언적인 것이죠. 그런데 레비나스는 그렇게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전혀 내 안에 포섭할

수 없는 존재가 나에게 와서 다짜고짜 '죽이지 마' 그런다는 거죠.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윤리가 사실은 상당히 그렇게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선행을

볼 수 있다고. 그래서 여기서 레비나스가 그런 문을 열어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잘 알 수는

없지만 레비나스가 죽은 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렇게 되면 왜 너는 나에 대한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잘 풀어나갔는데 왜 직접적으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냐고 하면 그랬을 것

같아요. ‘ 화가 나서 그랬어요’ 라 할 것 같아요.

박원빈 예 우리 두분 교수님들 말씀이 너무 감사하고요. 제가 선배 교수님한테 배운 건데

별로 안좋은 건데, 학회에 가서 가장 잘, 자신의 발표할 것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좋은 길중에

하나는 발제원고를 최대한 늦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그런거였는데, 제가 고의로 그랬던건 아닌데

여러가지 사정이 있다 보니까 이국운 교수님 재촉하실 때까지 깜빡 잊고 있다가 급하게 원고를

드리고. 이국운 교수님 말씀하시기는 여러 과 교수님들이 오셔서 그냥 개인적인 이야기 하고 편하게

말씀 하시는 거라고, 그래서 저도 편하게 왔는데, 두분 평을 해주시는 걸 듣고 두분이 전공이 영문학

산업경영학 이런게 아니시고 전공이 철학이신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깊이 있는 이해와

질문 감사드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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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나윤숙교수님 말씀하신 것부터 제가 생각나는 대로 간단히 말씀드리면요. 나의 고통과 타자의

고통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레비나스는, 제가 나눠드린 논문에도 잠깐 언급을 했지만 일반 윤리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여러가지 케이스 스터디를, 사실 윤리라는게 굉장히 파워 다이나믹스(power

dynamics)가 배제된 체 이야기할 수 없는 거죠. 거기 일단 힘이 들어가게 되면 윤리적인 상황이

발생하고 그 가운데서 윤리적인 테제들을 이끌어내어 지는데 레비나스는 나와 타자의 관계에 있어서

겪는 여러가지 개별상황을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아까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절대적인 차원에서

타자의 우선성만을 얘기하고 있거든요. 하면서 나의 고통과 타자의 고통과의 관계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구체적 실생활 속에서 적용한다고 했을 때 조금 더 논의가 되어져야 하고 구체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을 하는데, 레비나스 본인은 나의 고통과 타자의 고통의 문제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타자의 고통 만이 우선이 되고 그 가운데서 나의 고통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고통에 있는 모든 관계성에서 타자가 우선된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고.

예수그리스도의 관계에 있어서 잠깐 말씀드렸던 것처럼, 레비나스는 철저히 유대교 식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레비나스가 기독교의 기독론, Christology를 비판하면서 자기는

도무지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겸비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 했거든요. 이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유대교 정통성에서 나오는 건데, 여러분 ‘ 야훼(Yahweh)’ 라는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야훼를 히브리말로 쓰면, 야훼라는 발음을 못해서 유대인들이 ‘ 아도나이(adonay)’ 로

바꿔서 읽었거든요.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야훼라는 이름 자체가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야훼라는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도나이라는 것이 '주', '주님' 의 그거거든요. 성경에

주께서 나를 어떻게 하시고 라는 건 다 아도나이에 번역인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는 것을 두려워했어요.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했거든요. 모세, 가장 지상의 온유함이 승한

사람이었던 모세도 본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고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등이었거든요. 하나님이

지나가시고 난 후에. 왜냐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직접 보면 다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레비나스도 이런 유대교 전통 가운데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제가 잠깐 말씀 드렸지만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돼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 앞에 구원의 보좌로 나아가는 그런 식의 구원의 교리를 말씀들은

레비나스 책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아까 나교수님이 잘 말씀해주셨는데, 다만 예수그리스도가

레비나스가 말한 가장 타자를 위해 자기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신, 인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레비나스가 말하는 참된 인간상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바로 그 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를 기독교적으로 이해했을 때 우리가

기독교 신학의 케노시스(Kenosis)라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빌립보서 2장에 하나님께서 보좌를

버리시고 스스로를 비우시고, 영어성경 King James 버전을 보면 'empty himself'라고 되어있어요.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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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35ㅗㅗ

스스로를 비우셨다' 라고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자기 스스로를 비워서 낮은 자리에 까지 처할 수 있을

때, 그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의 참된 아들로서 이 땅의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실 수 있던 것처럼, 우리가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의 가르침대로 만약에 실천한다면,

내가 내 자신이 가진 것을 얼마나 포기할 수 있을까 라는 구체적인 질문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요즘에 하버드에 마이클 센달 교수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데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정의는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될 수 있어요.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다시 조사해보아야 한다는 거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혹은 타자의 향유를 타자가 누리고 있는 것을 빼앗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철저하게 나 자신에

대해서 나의 소유, 내가 당연하다고 느끼고 받아들였던 것들을 철저하게 재구성하지 않고서는,

조사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정의를 이룰 수 없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도전적인

가르침인데, 아까 교수님 말씀하셨던 질문에서 두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면, 제가 첫번째 질문은 잘 못

들었어요. 우유와 요구르트 얘기가 너무 재미나서,

나윤숙 두번째 질문 다시 읽어드릴게요. 잘 알려진 대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유대교, 기독교 모두의 정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외재성 차원에서

볼 때 자칫 이 명령이 레비나스가 주체의 폭력이라고 했던 동일성의 문제와 중첩될—물론 오해라면

좋겠지만요—혐의가 있다고 여겨질 소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의견을 듣고싶습니다.

박원빈 굉장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도 제가 이 질문을 듣고 나교수님은 철학전공 하신것

같다는 생각을,

나윤숙 상대적으로 제 전공에 취약하고 잘 모른다는 말씀이시죠? (청중 웃음)

박원빈 이웃사랑을 타자의 외재성과 연결해서, 이것도 또 하나의 동일성으로 오해될 수 있지

않냐, 그런 질문이신 것 같은데, 이것은 제가 마틴 부버(Martin Buber) 이야기를 좀 했으면 좋겠어요.

마틴 부버 하면 레비나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유대교 철학자인데, 마틴 부버가 썼던 유명한 책 중에

"Ich und Du", "나와 너"라는 책이 있습니다. 근대성 사회 이후에 인간의 관계, 마틴 부버도 관계성을

중시했거든요, 인간의 관계가 나와 그것, 즉 I와 It의 관계로 전락되었는데, 나와 사물, 그 어떤

인격성이 배제된 도구적이고 사물화된 개념으로 전락되었는데 이런 인간관계에서 벗어나서, 나와 너

인간 대 인간이 만나는, 인격 대 인격이 만나는 새로운 관계로 전환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레비나스는 마틴 부버의 나와 너의 도식을 비판을 했어요. 그 이유는 나와 너라는 건 항상 1인칭과

2인칭의 관계 속에 있는 것 아닙니까? 1인칭과 2인칭의 관계 속에서는, 항상 여기에는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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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나믹스가 존재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쉽게 말씀을 드리면, 제가 한동대에 초대를 받아서

왔는데, 저는 손님으로 왔는데 나교수님은 여기 교수님으로 계시거든요. 저는 나교수님보다 힘에서

약할 수 밖에 없겠죠.

나윤숙 손님은 왕이죠. (청중 웃음)

박원빈 손님이 왕이면 손님이 힘이 더 세질 수도 있고, 이런 여러가지 파워 다이나믹스가

나와 너라는 2인칭 관계 속에서는 항상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레비나스가 말하는 이웃 개념, 타자

개념은 일리아(Ilya)라는 단어, 어떻게 보면 철학적인, 테크니컬한 용어인데요 '제 삼자성' 이라는 것을

들고나옵니다. 나와 너의 파워 다이나믹스를 배제하고, 나와 타자의 관계라는 것은, 타자는

2인칭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3인칭으로부터 나에게 오는 것이다. 라고 얘기해요. 그래서 이

타자는 항상 레비나스가 이해하기에는 항상 모호해요. 타자를 내가 주재화 시킬 수, 하나로 주재화 할

수 없다고 얘기하거든요. 주제화 할 수 없다는 것은, 쉽게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나윤숙 교수님,

한동대학교 교수님 이렇게 한마디로 나교수님을 한마디로 카티고리 안에, 규범 안에 가둬놓고, 그렇게

규범지을 수 있기 때문에, 타자성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타자성은 나와 너의 파워 다이나믹스를

초월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신성한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리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나와 너의

힘의 관계를 배제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야만 된다고 얘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레비나스는

타자의 음성에 내가 유일하게 반응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얘기하는 것뿐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부분은 종교적이죠.

그렇기 때문에 레비나스의 철학이 많은 철학자들로부터 이게 무슨 철학이냐 신학이지 라고

비난받기도 하고, 또 많은 신학자들로부터는 이게 무슨 신학이냐 철학이지라고 비난을 받는 이유가 그

부분에서 기독교 철학과 유대교와 서구철학의 경계선 상에서 양자를, 히브리적인 것과 헬라적인 것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자신의 사유의 논의를 펴고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두가지 면이 다

나타나고, 그래서 레비나스가 가장 염려했던게 그러한 자신의 타자성이 동일성으로 오해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되냐면, 나와 너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면 그럴 수밖에 없죠. 이것은 아까도 얘기 했듯이

헤겔의 변증법, 헤겔의 변증법이 제가 초두에 말씀 드렸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체성의

철학이거든요. 나와 너의 다른 것들을 하나의 전체적인 Totality라는 하나의 체계 속에서 묶어버리겠다

라는 거죠. 그래서 나와 너가 그 전체성의 체계 안에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죠. 결국 그 체계를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레비나스가 자신의 도식을 깨기 위해서 철학적 기획으로 가져온 것이

‘ 제 3자성’ 여기에 종교적인, 신학적인 의미를 가미해서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음성이고 신성의

자취이다 라고 얘기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국운 페미니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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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37ㅗㅗ

박원빈 페미니즘은 아까 얘기했듯이 페미니즘은

나윤숙 저는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결코 쓴 적이 없는데 (청중 웃음)

박원빈 여성주의, 레비나스 철학을 페미니즘과 적극적으로 연결하려는 일군의 학자들이

있고요. 그리고 레비나스 체계 자체가, 아까도 말씀드렸다 싶이 정의 개념과 연결해서 말씀 드리면,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기 남학생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 한국 사회에서 여성관계에 있어서

생각을 할 때, 내가 남성으로 누릴 수 있는 지위, 가정에서 아들로 누리는 지위, 사회 속에서 남자로서

누리는 지위, 혹시 그게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 부당한 것이 없는가를 철저하게 내면화 하면서

자기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게 레비나스의 정의라고 얘기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은 우리가

얼마든지 연결할 수 있고, 다만 레비나스의 용어 가운데, 이 사람도 1905년 생이거든요. 그러니까

할아버지 세대예요. 그러니까 현대에 있어서 Neutral Language,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그의 글에서 하나님(God)을 He라고 쓰는 건 전통 유대교 주의자답게 그런 부분에서 너무

남성적인 언어이다 하는 비난을 받는데, 그것은 상당히 지엽적인 비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레비나스 책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페미니즘으로 연결해서 발전시킬 수 있는 사상적인 체계들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국운 나교수님 질문은 제가 기억하기에는 그것이 오히려 여성을 더 타자화 하지, 그런

결과를 낳지 않느냐는 것을 기억이 되는데.

나윤숙 레비나스 선생이 의도하셨다 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렇게 될

소지가 있을 수도 있으니.

박원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국운 여성이 자기를 비우고 남성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나 이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박원빈 그렇죠. 그럴 수도 있죠.

이국운 답을 하셔야 합니다. 안하셔도 되고

장수영 저는 사실은 레비나스가 여성성과 남성성을 이야기할 때 남성, 여성 우리가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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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개념 보다는 우리 존재 본질 자체에서 내가 뭔가를 거기에 어떻게 파악하고 그것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을 남성성이라 얘기 하는거고, 거기에서 포기 상태에서,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따르는

어떤 결과들을 떠안는, 그리고 생산성, 토양이 되어주는 그게 보니까 그 시대에 봤던 그 시대의 남성의

그리고 여성의 성질을 가져다 쓴 것이지, 오히려 그보다는 주체성과 어떻게 보면 그걸 남성성이라

보고 여성성이라는 것은 그것 안에서 자기 주체를 사실로 직시하고 바라보기를 포기했을 때 그런

토양 안에서 뭔가 향유하게 되고 얻게 되고 그런 의미 아닌가요?

나윤숙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요, 레비나스 선생님이 안티 페니미스트거나 그런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단지 후대의 사람들이 그분의 어떤 선한 의도와 무관하게 그렇게 악용하거나

오용한 소지를 자신도 모르게 남기신 분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이 부분에 우리가 주의하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원빈 이미 답을 가지고 말씀하신거기 때문에 저도 철저히 공감합니다.

이국운 : 그런데 그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에서 과부를 홀아비로 바꿔 읽어보면, 요새는 또

차라리 과부는 삶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윤택함을 유지할 수 있는데 홀아비들의, 특별히 기러기

홀아비의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개입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장교수님 특별히 덧붙일 말씀이

있으신가요?

장수영 없습니다.

박원빈 장교수님 레비나스를 아주 기독교적으로 잘 이해하셨고 너무 좋은 코멘트라고 생각을

하고요. 초반부에 말씀 하셨던 다원성에 관련된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레비나스나 혹은 근대 이후에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자라던지 철학자들이 강조하는게 타자를 얘기하고

주체를 해체시키고 타자의 의식, 타자의 존재성, 존재론을 기존의 전통적인 서구 철학의 도식을

뛰어넘어서 타자를 얘기하다 보니까 당연히 그 동안 Marginalized 되었던 타자의 잊혀진 목소리들을

자꾸 발견해내고, 그런 작업들을 하고 있어서 앞으로 우리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기독교 변증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아주 중요한, 기독교인으로서 주어진 과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교수님 말씀하신 것, 공공성의 건설 얘기하시고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윤리적 책임

말씀하셨는데, 결국에는 그게 레비나스가 말했던 것과 잇닿아 있지 않나 생각이 들어서요.

결국에는 공허한 신학적 사변이나 구호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삶으로 보여주실 수

있는가가 중요한 과제로 남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 기독교가 한국 사회

속에서 많이 어려움을 겪고 있고 비난을 받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가, 예수의 가르침, 성서의 가르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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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39ㅗㅗ

너무 많이 미달되게, 우리가 다 죄인이고 거기에 완벽하게 도달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삶의 모습에, 이게 너무 지나치게 가면 율법주의가 되는 오류를 피할 수 없지만, 윤리적

모습에 있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많이 있어서, 그런 믿지 않는 사람들의 비난이 점점 거세지고

있는데, 그런 부분을 우리가 좀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우리 삶과 신앙을 어떻게 일치시켜나갈

것인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을 어떻게 하나로 우리 삶 속에서 구현해 낼 수 있을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레비나스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유대교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유대인의 선민의식이 진정한 인류를 구할

휴머니즘이고 이것이 바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인간적 Universalism이다 라고 까지 얘기

하거든요. 그러니까 굉장히 유대교 뿌리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기독교인이 한동대

학생들이 글로벌 크리스천의 비전을 품고 기독교인이 어떻게 세계를 품고 세계로 나아갈 때 결국

영향력 이라는 것은 삶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닌가, 하루하루 삶의 영성에서 나오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이런 부분에서 좀 도전을 받고 고민하고 지금부터 실천하는 노력들을 서로 해나간다면

중요한 기독교적 실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장수영 저는 사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다원주의와 윤리가 어떻게 가능한가? 그렇지 않아요?

나는 사람 죽이는게 좋다. 예를 들면. 왜 그런데? 그냥 그렇다. 그러면 그렇게 살게 놔둘 수 없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어디서부터 안되는 거냐? 저는 이게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레비나스가 아주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 사람이 유대교가 희망이라 할 수 있는 그것도 어떻게 보면 호소력 있는것

같아요. 아무런 전재를 허용하지 않고도 우리 존재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고 난 후에 그렇지 않냐?

했을 때 굉장히 호소력 있게 들리는 것 같아요. 나한태도 타자가 말하는 것 같아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저는 그렇게 해석되는데, 그 소리를 듣게 해주는, 그리고 그 이후에 그래 우리가 서로

인정해야 되지만 우리에게 떨어지는 선언적인 정언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 아주 매력적이었어요.

호소력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국운 여러분들이 개입할 시간인데요 원래 계획보다 좀 늦었습니다. 질문을 하셔도 좋고

그냥 코멘트를 하셔도 좋고, 아니면 넋두리를 하셔도 좋습니다. 노래를 한판 부르겠다. 그건 좀

생각해봐야겠는데요. 얘기를 돕기 위해서 제가 간단히 제 고민을 내어놓을까 해요. 레비나스에 관한

이야기를, 요새 정말 레비나스 산업이 도래했다고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합니다. 특별히 기독교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일반 철학자들 신학자들이 많이 합니다. 최근에 사회과학자들도 하기 시작 했습니다.

한국 만이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그렇습니다. 책들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게 기독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편으로는 굉장히 반갑게 느껴집니다. 이제 사람들이 아까 말씀하신 동등성

상호성을 전재로 윤리를 사유하는 시대를 벗어나서 비대칭성, 그런데 나를 중심으로 하는 비대칭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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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아니라 타자를 우위에 놓는 비대칭성으로 사유하기 시작하는구나. 이게 뭔가 그래도 21세기는

20세기와는 다른 세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교회식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이 레비나스를 쓰시나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좋은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순간 크리스천으로서는 갑자기 절벽 앞에 선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때 오늘

자꾸 오늘 채플 생각이 나는데 김남준 목사님이 아마 굉장히 오랫동안 준비해오신 말씀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누가복음 24장을 펼치시고 십자가의 사건을 구경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 위에서

죽어가고 있는 한 사나이에 관해서 말씀을 하셨어요. 그것보다 더 강렬한 기독교의 메세지가 없는데,

오늘 채플에서 이상하게 그 말씀이 풍겨져 나오는듯한 느낌을 김목사님이 받으시지 않았는가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비슷한 느낌을 지금 우리가 레비나스에 물들어가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기독교인이

느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이야기 할 때, 세상 사람들은 그냥 우리는

타자의 윤리를 알고 있어 라고 답하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얘기해야

합니까? 오늘 박교수님이 우리한테 가져오신 질문, 레비나스의 질문이기도 하고요. 과연 신정론이

가능한가? 하나님이,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엘리비젤의 그 ‘ nights’ 라는 작품, 아주 훌륭한

작품이죠. 그때, 당신이 가장 필요했을 때 당신은 어디 있었습니까? 라는 물음 자체를 이제 던질 필요

없다. 레비나스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 물음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저는 이 다음 국면으로 가서는, 제가 레비나스를 지난 한 10년동안 굉장히 감동해왔는데,

요사이는 전전긍긍하고 있어요 복음은, 복음의 독특성은, 복음의 호소력은 어디로 가는가? 오늘 저녁

모임을 준비하는 바쁜 마음 중에 제가 오늘 체플에 갔는데 김남준 목사님의 그 모습 속에서 저는

상당히 불길한 느낌을 가졌습니다. 솔직한 제 생각입니다. 결코 지금 여러분들에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서 해보는 말이 아닙니다. 교수님 좋은 말씀 있으신 것 같아요 우리학교에 두분 계시는

언어학자중 한분이십니다. 윤상헌 교수님 입니다.

윤상헌 학생들 질문할 시간을 뺏을 것 같아서. 예 참 감사합니다. 오늘 튕겨져 나왔던 건

저도 비슷하게 느꼈는데, 하나님이 어디계셨는가 하는 질문은 저는 어떻게 와 닿았냐 면요, 예수

믿는다고 하는 기독인, 기본적으로 우리가 다 기독인 이지만, 너희들 어디 있었느냐 그 질문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저는 그건 굉장히 존재론적인 질문 같지만 레토릭인 것 같습니다. 화가 나서,

하나님 안 계시다고 하면 하나님이 사라지시는게 아니잖아요. 하나님 살아계신데 그래서 아까

유대인적 휴머니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들으면서 제가 어떤 생각이 하나 들었어요 우리 주님의

incarnation이 기가 막힌거다, 레비나스가 못 볼 정도니, 그 신성에 충만하신 하나님이 변장을 기가

막히게 하셨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런데 초월과 내재의 변증법으로 기독론을 이해했다

그런데 그게 저는 뭐 신학적인 이해냐 존재론적인 이해냐에는 관심이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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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41ㅗㅗ

아마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까도 이야기 한 소위 작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들이

역사가운데 이 사회 문화공간 속에서 그냥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을 종교 소비제로 쓰고, 혼자

배부르고 그래서 문밖에서 내 형제가 헐벗고 배를 움켜쥐고 있는데 나는 잔치를 벌이고 감사하다

하고, 또 다른 바리세적인 참의를 드리고 있고, 그것에 대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유대인적

휴머니즘이란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초월해야 될 때 초월하지 않고, 내재할 때 내재하지 않고,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데, 내가 앙가주망(engagement)을 해야 할 때는 disengagement 하고

disengagement 해야 할 때는 달라붙는, 그러니까 내 욕망에 관해서는 우리가 disengagement 해야

하는데 철저하게 앙가주망을 해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개차반이 되어야 할 때 반대모습을

보이고, 그것이 또 고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까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인간이 윤리적 실천만으로 구원이 가능한가 우리는 답이 있어요.

답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요. 이 질문에 내재된 의식세계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거죠. 우리

윤리적 행위로 실천만으로 구원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이것이 아까 초월과 내재의

기가 막힌 이중국적자들이 군복무 안하고 권력이나 유지하려고 하는 것 같은, 윤리적인 실천으로

구원이 가능하지 않다고 하면서 최소의 윤리적인 실천도 하지 않고 그리고 채플에서는 Sing & Sleep

그 다음에 손들고 펄펄 뛰기도 하고 그러나 펄펄 뛰어야 할 장소에서는 펄펄 뛰지 않고 그런

차원에서 크리스천 휴머니즘이 가능한가? 종결을 짓겠습니다.

저는 레비나스가 하나님을 성자 예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잘 알지 못해서

정직하게 표현해서 결과적으로 부인하였는데, 오히려 신성의 충만함을 저는 느꼈어요 그 독회에서

읽으면서 시간과 타자를 읽고 있는 동안에, 빈약한 예배를 하는 기독인의 예배에서도 뭔가 신성이

빈곤한, 빈곤한 신성, 마치 너무나 귀한 물건을 값싼 보험삼품 팔듯이 파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재우나 최시우 그들이 토해냈던 인내천을 능히 덮고도 남는 신학의 가르침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인데, 우리가 함부로 살인하고 함부로 형제를 팔고 그럽니다. 그것도 솔직하게 내 이름으로 그래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럽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한. 선생님께서는 크리스쳔 휴머니즘에

대한, 크리스쳔 휴머니즘이 가능하겠는가 저는 사실 그 부분에 대한 소망 아까 공공성 말씀을

하셨는데,

이국운 학생들 얘기를 좀 더 듣고 해볼까요.

장수영 비난을 막 당했는데 기분이 나쁘잖아요. 선생님이 막 몰매를 때리신것 같은데.

이국운 저는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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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윤상헌 저도 아닙니다.

장수영 제가 보기에는 타자들이 와글와글거리고 있는데요.

윤상헌 죽비로 좀 때렸습니다.

이국운 타자의 또 다른 의미에서.

장수영 아 그렇지요.

이국운 여러분의 타석입니다. 아 이걸 농담이라고 하고 있는데 (청중 웃음), 오늘 이야기가 좀

어려웠나요?

장수영 여러분들 그 영화 보셨어요?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저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아 저렇게 죽음을 초월 할 수 있겠다. 맨 마지막에 잔잔한 메세지 속에 이렇게 두 사람이

죽었는데 아름다웠잖아요. 그렇게 해서 죽었다 해도 그 삶이 아름다웠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배제한 상태로 우리가 공공성을 만든다고 했을 때, 그러네 하나님이 없어도 우리가 충분히 충족할 수

있구나로 갈까봐, 거기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십자가 의 길과 이제는 몽학선생이 아니다,

믿음이 왔으니까 그리스도가 왔으니까, 그렇게 해야하는게 우리의 미션인데 그런 답답함을 느낍니다.

이런 헐리우드 영화에서 만드는 사람들한테 그리스도를 어떻게 전할까, 이런 생각이 많이 있었어요.

밀양에 마지막 장면에서 느끼는 그 잔잔함 충족감,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데, 저는 완전히

하나님의 부제, 시궁창에 묻히는 그렇게 하면서 끝나잖아요. 있기는 뭐가 있어, 그냥 그대로 머리에

맴돌면서 그러고 가거든요. 그리고 그게 존재야 어때 괜찮잖아, 하는.

이국운 장교수님이 지금 시간을 끌어주고 계십니다.

장수영 얘기 해봐요.

이국운 다른 질문이나 이야기가 잘 떠오르지 않는가요? 우리 교수님 뭘 열심히 적으시고

그러시는데 대체로 지금쯤에 개입하시지 않아요?

손화철 저는 제 생각에는 저한테 제일 어려웠던 문제라고 생각이 되는데, 제가 옛날에

96년에 지금 서강대에 계시는 서동욱 선배한테 제가 이것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뭔가 대답 했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서 좌절하고 다시는 이제 다시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잘 이해가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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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43ㅗㅗ

그러니까,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명령한다 라는 이야기가 굉장히 묘한 말이거든요. 왜냐면 타자를

아무리 봐도 나에게 명령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명령을 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이제 두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는 사실은 타자가 나에게 명령하고 있는 중인데 내가 모르는 거예요. 타자가

나에게 명령함으로써 내가 사실은 생겨나는데, 나의 주체가 그때 확보가 되는데, 나는 그걸 모르고

마치 사유하는 내가 있는 것처럼 생각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사실은 타자가 명령 하는지 모르지만

그런 측면이 있으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윤리적으로, 타자가 명령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해라, 이렇게

두 가지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첫번째는 타자가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가, 혹은 네가 너인 것이 타자한테

얽혀있다라고 이야기 하는, 그때는 사실은 타인이 나에게 명령하거나 말거나 나의 주체성이 타자한테

걸려있는 것, 타자인것처럼 생각하면서 행동해, 아니 타자가 사람인것처럼 생각하면서 행동해 그게

두번째 인 것 같아요. 그런데 레비나스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항상 많은 분들이 두번째 이야기를,

이야기를 하다 보면 타자를 너무 무시하면서 살았어, 타자를, 이웃을 하나님처럼 생각해 그렇게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살려니까 다 바쳐야 하는데, 다 바치면서 살 수 있니? 살수 없잖아? 그러니까

우린 뭔가 문제가 있어. 이 이야기가 기독교는 그렇게 무리한 요구는 안하는데, 레비나스는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 같아. 얘기가 이렇게 되는데, 그러고 나면 타자를 하나님처럼 생각하는게

감동적이기는 한데, 그러고 나서 다시 타자를 봐요. 사랑하는 학생들을 아무리 봐도 아무 소리가

안들려요. 그러니까 그런 명령에 강력함이 있나? 저한테 전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아요. 그리고

TV에 나오는 배고픈 아이들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찡하죠. 그래도 그걸로 그만인데, 그게 명령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그 다음에 이제 여지가 남은 존재들만 알게 된다고 하는데, 그 지점이 알 것 같기도

하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제일 저한테는 불편해요. 타자의

얼굴이, 타자가 나에게 명령한다. 이렇게 얘기했지 타자가 명령한다고 생각해, 이렇게는 한 바는

없거든요. 그런데 보면 명령 안하는데 명령 한다고 하는게 그게 굉장히 애매하군요.

이국운 근데 지금 이 말씀을 깨려면, 반박하려면 '명령 하는데요' 이렇게 하면 됩니다. 팁을

하나 줬어요.

박원빈 예 손화철 교수님 질문에 먼저 잠깐 타자의 얼굴은 아까 말씀하신 그 전자

레비나스에서 제가 이해하기에는 전자가 더 가까운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비교를 하자면 거기에서

레비나스와 칸트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레비나스는 타자의 음성이,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그 부분에서는 굉장히 존재론을 넘어서 종교적 차원으로 넘어가거든요. 그분이 레비나스가

타자를 만나는 부분은 신에 음성에 대해서 타자가 신의 음성으로, 신의 자취로서 나에게 다가올 때

그부분에 내가 내 실존적인 결단으로 응답할 수 있느냐 라는 이런 차원인데, 그 후자의 이해는 타자가

하나님이니까, 마치 그래야 해 라는 것은 칸트의 정언명령 수준으로 도덕적 차원에서 얘기를 하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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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그 부분은 손교수님이 정확하게 이해하신게, 이게 사실 레비나스가 철학을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를

첫번째 말씀하신 신성의 명령으로 아무리 이해하려고 하고 그렇게 받아들인다고 할 때, 저도 아까

말씀 드렸듯이, 이게 부딪치는 문제가 이게 어떻게 실천 가능한 것이냐 라는 문제가 항상 제기가

되거든요.

손화철 거기서 실천 가능한가 하는 문제 전에, 타자가 나에게 명령한다 라고 하는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선포를 해버리니까,

박원빈 그 부분은 선포적인 면이 굉장히 크고요. 그래서 종교적이고 신학이다 라고 비난받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두번째 식의 오류를 잡고 이해로 자꾸 가는 이유 중에

하나는 레비나스 철학을 신학을 자꾸 응용시키다 보니까 그런 식의 이해가 많이 등장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손화철 그런데 그 선포가 사람들한테 설득력 있는 이유가 뭘까요? 저만 안보이고 다들

타인의 얼굴이 마구 명령하는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인지.

장수영 그런데 그건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것 아닙니까? 예수 믿는 사람 이야기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는거,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가슴 아파 하실 것 같다고 얘기 하고,

이런걸 아는데, 그런 질문을 하고 계신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손화철 예 그런데 이제 그러니까 어떤 종교라는 세팅에서 경전을 가지고 우리가 그런걸 쭉

할 때 하고, 레비나스라는, 한때는 ‘ 듣보잡’ 이었던 사람이 나타나서 타인이 얼굴로 명령하잖아,

그러니까 ‘ 아멘’ 하는 식으로,

장수영 아니 그런데 크리스천 커뮤니티에서 우리가 정언명제 때문에 공감하는 것 아니에요?

하나님이 어떠하셨고 그것이 왜 그런지, 누가 그렇다는 것을 확인해본 것도 아니고 그런 것처럼

레비나스가 던지고 있는 것도 타인이 그렇게 얘기 하니까 들을게 있으면 들어라고 이렇게 하는게

아닌가요?

전명희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제가 오늘 레비나스 처음 만나서 레비나스 선생 하시는

말씀을 전해들었는데,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어떤 삶을 살았나 궁금했거든요. 왜냐하면

성경에서 예수님도 그런 감동하는 삶을 살았고 한데, 레비나스는 타자의 음성을 들었는가, 들었으면

거기 반응하는 삶을 살아냈는가. 제가 전혀 몰라서 무식이 드러날걸 감안해서, (청중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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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45ㅗㅗ

박원빈 예 아주 좋은 질문이시고요. 레비나스는 공부를 마치고 프랑스로 귀화를 하게 돼서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않고 평생을 프랑스에서 소르본 제 4대학인가요?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교수로

지냅니다. 어떻게 보면 레비나스는 프랑스 유럽 지식인의 삶을 살았죠. 자신이 어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처럼 예일대 교수를 하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공동체로 들어가고 그런 사람은 아니고요. 이

사람은 철저하게 직업철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런 면에서 레비나스

너는 자기도 못하면서 왜 남한태 부담을 주냐, 질문을 분명히 할 수 있는데,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무슨 말씀이냐면, 레비나스가 바라봤던 것은 서양

철학에 그러니까 동일성의 철학, 존재론 우위의 철학, 타자를 망각하는 철학을 역사를 내려오면서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체험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철학의 흐름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를 굉장히

고민했던 사람이고요. 여기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응답을 철학적인 시스템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얘기

했던 사람이 레비나스 입니다.

제가 엘리비제를 만났을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제가 레비나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엘리비제 선생님이 자기가 레비나스를 잘 안다고 하시더라고요.

1960년대에 같은 랍비 밑에서 동문수학을 했던 사람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레비나스는

철학으로 자기 철학적 시스템을 구축한 사람에 불과하다 철학자였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냐, 레비나스가 여러 책에서 자기는 철저하게 Totality 혹은 시스템이란 말을 가장

싫어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했더니 웃으면서 엘리비제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레비나스는

시스템을 부인했지만 헤겔식의 시스템을 파괴하고 자기 만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을 뿐이다 라고

얘기 하시더라고요. 자기는 유대교 문학가로서 홀로코스트를 겪을 때 문학적인 차원에서 삶의 고통을

얘기하고 있다. 레비나스와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을 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걸 들었는데, 레비나스는

직업철학자였다. 직업 철학자라는게 폄하대상은 아닐 것 같고요. 아무튼 서구 철학계에서 수백년 동안

흘러왔던 흐름을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적인 논지와 시스템을 가지고 새롭게 제시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는 차원에서 이해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윤숙 아까 손화철 교수님 말씀하신 것이 제가 생각하고 있던 거고, 제가 사실 요구르트

하나 더 넣을까 말까 했던 건데 또 관련이 있을 듯도 하여서

이국운 오늘 나윤숙 교수님이 요구르트 아줌마가 되었어요. (청중 웃음)

나윤숙 제가 문학번역이라는 과목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가르치고 있는데요. 니체나

쇼펜하우어, 이렇게 뭔가 이상적인 것에 집착하는, 그런 염세주의 선생들께서 대게는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여기세요. 특히 완벽한 시 번역은 불가능하죠 그런데 레비나스 선생님이 번역에 대해

재미있는 말을 하셨는데, 이론상 번역에 불가능할 수도 있으나 우리가 실제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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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번역책을

보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드리는 거냐면, 제가 손화철 교수님의 말에 제가 100% 공감을 해요. 아무리

정언명령으로 주어져도 제 이웃이 제 몸처럼 사랑이 안되고 또 얼굴로 현현한다는데 명령처럼 실천할

힘이 부족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그냥 타자의 얼굴이 그렇게 확 다가서지 않는데 그러면 그게 그렇게

선포하면 그것을 내가 다가서게 만들, 스스로 내것으로 만들, 내 안에 체화될 동력이 있어야 될 것

같은데 라고만 생각하니까 없는 것 같은 거에요.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대한 나의 은혜

외에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아주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지금 레비나스 식의 타자가

현현하는 체험을 못하는 찌질한 인간일 지라도, 적어도 비슷하게라도 저를 타자로 대해주는 인간이

계신 거예요.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 그래서 저를 타자로 대해주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 나는 남을

그렇게 타자로 못 대해도 레비나스 선생의 명령이 그게 정언명령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닐 수

있겠구나 라는 체험으로 제가 인식이 됐고요. 그런데 제가 야구루트 하나 남겨놨던 것이, 그러면 나를

타자로 인식해주는 그 고마운 또 다른 의미의 타자 대상에 나에 대한 환대를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대해야 하며 수용해야 하는가 그런 질문도 드려볼까 했다가 관뒀었어요.

이국운 아까 손교수님께서 레비나스를 ‘ 듣보잡’ 이라고 잠깐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은

진중권 선생이 유행시킨 그 말을 써야만 할 만큼 레비나스 선생의 타자의 윤리가 강력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라고 생각이 들고요. 그 이유를 제가 읽은 글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의 그 명령은 칸트 식의

정언명령, '하라' 라는 그 명령이 아니고 근본적으로는 청유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하면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나를 죽이지 마라 라고 무섭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칼을 들이대는 데도

나를 죽이지 마세요,

박원빈 울면서 얘기하죠.

이국운 죽여도 죽여도 계속 그렇게 말한다고 하는,

박원빈 죽임을 당하면서도,

이국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칸트의 정언명령보다 더 무섭게 더 그 앞에 우리를 꿇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 주체를, 주체라는 말 자체를 무색하게 해서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를 보는

사람 얘기가 좀 그런데, 오늘 주로 철학자 이면서 목사님이시고 신학자 이면서 철학자시고 사실은

우리 레비나스 선생님이 종교와 철학과 신학 사이를 왔다갔다 했는데 박원빈 선생님도 비슷하게

철학자들 모임에는 신학자로 취급받으시고 신학자들 모임에 가서는 철학자 취급을 받으시고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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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47ㅗㅗ

장수영 : 산업과학도 그래요. 경영학 가면 공대 공돌이라 하고, 공대 가면 문과라 하고.

이국운 : 그런데 그런 분들에게서는 기대할게 있고, 기대하지 못할게 있어요. 이를테면

레비나스의 철학이 과연 실천 가능하냐, 뭐를 도대체 하라는 거냐?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 이를테면

법학의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년 2학기에 내가 이 시간에 하는 수업에서 예일에 있는 세일라

벤하비브(Seyla Benhabib)가 쓴 타자의 권리라는 책을 읽었어요. 세일라 벤하비브는 하버마스

주의자입니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 하는데, 타자의 권리라는 생각

자체를 레비나스에서 가져온 것 같아요. 확실히 그런 혐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하는 것은

그동안 근대국가 시스템 안에서는 언제나 국민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그 구성원의 자격을

전제로만 권리를 얘기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일런트 시커들이 너무나 많다. 그 사람은 그러면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거냐. 이 바운드리 바깥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건가, 그런데 이분은 아주 감동적으로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서 한 구절을 가지고 와서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법학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법학은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법학은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믿을만 하지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레비나스의 윤리가 실현 불가능하다, 이건 그냥 호소일

뿐이다, That's it. 법학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것이 방향을 바꾸어서

적어도 우리에게 찾아온, 그 어느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은 나그네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 심지어는 그것이 그들의 권리라고 말하는 것, 그것 해볼 수 있다, 그게

어디서 온거냐, 레비나스의 청으로서의 타자의 윤리에 대해서 법은 법률가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서 온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이 부분에 있어는 목사님들이나 신학자나 철학자들 말고 경영학자가 나온다면, 우리가

아까 ‘ 히즈빈스(Hisbeans)’ 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사회적 기업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를 레비나스의

호소 속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뭔가 조금 더 삶에 가까이 있는, 대체로 우리

한동에는 그런 전공들이 많은데, 철학이나 고전 읽고 이런 건 없고 국제 어문 이라던지, 통역을

한다던지, 법 이런건 어떤 의미에서는 약간 공대스러운거, 이러한 것들이 많은데, 어떤 의미에서는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철학자들, 신학자들 한테는 기껏 해봐야 레비나스 이야기를

반복하고 나서 근데 좀 어려워요 하고 마는 것, 그 자리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Late people들이 뭔가

반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교수님들이 시간을 끌었는데도 뭔가 반응을

보이지 않을거에요?

학생 1 머리 속에 많이 질문할 것들이 정리가 안돼서 맴도는 건 많은데 정리가 안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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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일단은, 레비나스가 홀로코스트를 겪어서 그런 타자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크리스쳔들도

예수그리스도의 상황을 자기가 체험하기 전까지는 정말 그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없듯이, 만약에

레비나스가 홀로코스트라는 그런 엄한 사건을 겪지 않았다면 과연 그가 타자의 얼굴에 대해 상상할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장수영 그러면 홀로코스트 라는 사건이 그나마 레비나스를 깨우쳤으니까 약간은 필요성이

있다는 건가요?

이국운 고통에도 뜻이 있다?

학생 1 아까 손화철 교수님께 그런 얼굴이 안보인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얼굴이

너무 보이거든요. 지금 이 자리에서나, 강의실에서 교수님 들에게나, 제가 예전에 있던 지난날에

있어서도 늘 그런 얼굴을 남에게 취해왔었고, 정말 제가 생각하는 악한사람에게도 그런 얼굴로 도움을

구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저한테 그런 심정이 있어서 그런지 남의 얼굴을 보면 그런게 약간은

보이거든요. 그래서 사람마다 겪는 그런 사건들이 다르기 때문에 체험하는게 다 다르지 않을까

몽롱하게 보이던지 간절하게 보이던지 몰라도 다 다르지 않을까 아예 안보이던지.

학생 2 저는 손화철 교수님과 비슷한 의견인데요, 저도 타인의 얼굴이 막 다가오고 이런걸 못

느낍니다. 레비나스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그걸 못 느끼는 원인은 무엇인지, 이국운

교수님 수업에서 '물화'라는 텍스트를 가지고 하는데, 우리가 인정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망각하는게 물화라는 원인으로 짚고 계신데요, 그러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은 타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내재적으로 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제가 왜 그걸 못 느끼는지

혹시 그거에 대해서도.

박원빈 레비나스가 이야기 한다는 것은 간단하게 말씀하면, 자기 향유 자기 욕구에 너무

만족해서 타인의 욕구를 망각한다는 거죠. 아까 제가 말씀 드렸듯이 레비나스에 있어 정의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철저히 신 앞에서 철학적으로 반성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들을 반성하는 순간

어느 순간엔가 내가 소유한 것들이 이게 다 나의 향유를 누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 순간부터 타인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고, 내가 이제 그 안에서

윤리적인 갈등이 일어나게 되고 타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학생 3 저는 아까 질문 하셨던 것처럼 교수님들의 얼굴을 보면 뭔가 계속 강의를 들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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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49ㅗㅗ

박원빈 교수님이 타자로 보이시는가요? 도와드려야 될 그런 타자로?

학생 3 계속 궁금했던 것이,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가 신정론의 종말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 이어지는 것이, 타자는 신의 음성이다. 또 타자의 얼굴에 하나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다. 이렇게

타자를 내세우는 타자의 윤리를 레비나스 선생님이 얘기 하고 있는데, 여기서 신이라는 얘기가 제가

기독교 인이기 때문에 내가 신이랑 연결이 되는데, 이것이 레비나스도 똑같은 입장이 아니었을 텐데,

그렇다면 이 신이 절대윤리로서의 신인지, 그렇다면 결국은 타자의 얼굴이 신이다 라는 곳까지 가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한 개 더 궁금한건 이것이 유대교 전통에서 철학을 발전시킨 레비나스라고

생각하면 유대교의 전통에서 또 어떻게 해석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학생 4 저는 아까 개인적으로 타자라는 말을 이국운 교수님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됐고

레비나스도 오늘 처음 알게 됐는데, 강의 들으면서 다시금 타자에 대해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하고,

타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아서 감사 드리고요. 저는 제가 질문하려고 계속

고민했던 거랑 답변해 주신 거랑 접목시켜서, 제가 생각한 타자의 윤리의 한계점, 제 생각으로 제가,

저도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서 말이 정리가 좀 어눌한데, 아까 설명해주신 타자의 음성을 위해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들, 내가 철저히 버렸을

때에 그 타자의 음성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라는 행동적인 부분에 대해서 얘기 해주셨었는데, 제

생각에는 타자윤리에 대한 한계점이 타자를 통해서 타자와의 관계 또 어떻게 보면 타자에 대해

종속되어져 있음으로 인해서 나의 주체성을 알게되고, 타자의 음성과 타자가 원하는 그런 부분들을

알게 되지만 결국 반대입장에서 봤을 때는 저 자신이 타자에게 타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되면 그 타자의 음성과 타자의 윤리적인 것을 내가 맞춰주기 위해서 아니면

오히려 그것을 내가 기독교인이지만 그런 기독교인 간의 또 어떤 타자를 위해 내가 나를 버려졌을

때는 내가 타자에게 내 자신이 그 타자의 타자가 되지 못하는 이게 아니게 되지 않을까 그 생각을

했을 때 그 레비나스와 기독교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정론이 완전 배제된 것으로 저는 이해했는데요.

제가 생각했을 때는 그런 관계적인 것이나 나를 버려지게 되고 타자를 찾거나 그런 것들에

있는 것에는 좀 한계가 있지 않나, 오히려 나의 주체성이 바로 정해지고, 그리고 이국운 교수님이 아까

설명해주신 것에서 말을 빌리면 아무것도 속해져 있지 않은 그런 관계적인 부분,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나그네가 오히려 신이라 봤을 때, 그 아무것도 경계가 없는 신과 내가 먼저 바르게 정립이 되야

근본적인 시작으로부터 시작이, 우리가 말하는 창조의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같이 동등하게 같이

서로에게 타자로서 윤리가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굳이 나를

그렇게 버리고 비우면서 주체성을 잃으면서 까지 그 윤리를 내가 굳이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게 약간

한계성을 보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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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학생 5 저는 03학번 법학부 정아령이고요. 아까 말씀하신 분이랑 저도 좀 비슷한 생각인데

타자윤리라는 것이 사실 위선일 지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왜냐하면 우리 사실 사람 살아가는 것

자체가 타자에서도 나오지만, 먹고 에너지를 내것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사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멀쩡하게 살고 있으면서 온전히 타자를 위해서 라고 얘기 할 수 있는가. 솔직히 저는 거기에 공감이

안가거든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면서 또 그냥 먹으면서

그렇게 살아야 될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저는 차라리 그냥 솔직하게 나를 위해서 산다고

얘기 하는게 낫지 않나, 한마디로 레비나스가 틀리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국운 글쎄다.

학생 6 저는 타이틀이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레비나스와 기독 정신을 병립시켜 얘기

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레비나스와 기독교의 쇠태’ 이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레비나스의 철학과 복음을 같이 두고 보는 것은 조금 불유쾌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이 세태가

복음을 잘 못 전해서 레비나스의 의견이 들쑤시고 다니는 거지, 복음이 만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들쑤시고 다니는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저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를 오늘 처음 접하면서

그 윤리를 접하면서 복음이랑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면 이 시점에서 오히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진정성에 대해서 더 얘기를 나눠보고 타자의 윤리를 위라고 볼 수는

없지만 좀더 유리한 입장에서 바라 볼 수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국운 우리 한동 학생들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무거운 질문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학생 7 안녕하세요. 법학부 05학번 이세훈 입니다. 저는 레비나스에 대해 궁금한게,

레비나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 타인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과 타자의 윤리가 서로 갈등한 적이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적 소수자의 문제에

있어서 소수자의 입장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권리의 문제와 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법적으로 그것을 허용했을 때 보호받지 않은 대상들 즉 성적 소수자가 아닌 자들에게는 그렇게

살아도 될 유형으로 비추어지지 않는가 그런 불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시 정리를 드리자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르지 않는 사람과 타자의 윤리와의 불편함 마음입니다.

이국운 어쩌시겠어요. 방법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계속 가는 방법이 있고요. 좀 가다가 그치고

차수변경이라는, 이건 밤 문화, 또는 회기를 변경해서 내일 아침에 연장전을 하는 방법이 있는데 일단

말씀 좀 듣겠습니다.

박원빈 간단하게만 말씀 드리면, 제가 뭐 레비나스를 공부했지만 여러가지 질문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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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51ㅗㅗ

대답해야 할 의무와 책임은 전혀 느끼고 있지 않은데, 저도 잘 모르겠는 부분들, 그리고 저도 지금까지

고민하는 부분들을 교수님들, 학생 분들이 너무 진지하게 질문을 해 주셔서 참 저는 질문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씀을 좀 드려보면, 지금 여러분들이 하셨던 질문은 제가 논문을

쓰면서, 공부하면서 부딪쳤던 질문들, 그 노력들이 그대로 생각이 나네요. 그래서 참 너무 지난 시간을

뒤돌아 보는 시간이 됐고,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여전히

아직까지 고민하는 부분 중에 하나인데, 저는 레비나스를 공부하면서 고백적인 말씀을 드리면, 굉장히

차갑다는 생각을 했어요. 유대교 휴머니즘으로 표현을 하지만 너무 차가워서, 다 말이 맞고 동의는

하는데, 웬지 모르게 이 사람에 사상의 바다에 뛰어들었다가는 얼어 죽어버릴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제 그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가 결국 거기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레비나스를 이해할 때 철저히 기독교 적으로 이해 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제가 실마리를 잡은 것은 결국 예수그리스도에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신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 인간과 하나 되었을 때 결국은 타자 윤리의 신적인, 타자윤리의 구현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고, 예수님만큼 타자윤리적인 삶을 산 분이

있을까 하는 생각. 앞에 결국은 타자의 윤리를 제가 기독교인 입장에서 이해하는 바로는,

예수그리스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라고 저는 제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을 했고요. 여전히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손교수님이 질문하신 것도 여러 학생들이 질문 했던 것처럼 아직

그 답답함, 갈등들 그리고 저 자신의 한계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가 설 수 있는 기반이다 라는 것들을 확인하면서, 결국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게,

니부어(Reinhold Niebuhr)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산상수훈에 여러가지 기독교윤리들을 얘기하면서,

기독교 윤리는 불가능에 가능의 윤리이다 Impossible possible ethic, Ethic of impossible possibility다

라고 이야기 했거든요. 불가능의 가능의 윤리.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지만 결국 거기서 은혜의

차원이 작용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 힘으로는, 나는 도저히 아까 우리 학생들도 잘 얘기 했던

것처럼, 나는 내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 살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내 욕망도 성령의 비추임과 조명을 받을 때 나를 새롭게 나도 타자윤리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은혜의 힘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다시 한번 레비나스를 기독교 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제가 그냥 여러분들 질문에 하나하나 답하기 보다는 그냥 좀 두서없이 말씀을 드리면, 아까

교수님이 질문하셨던 것 중에 크리스천 휴머니티의 가능성에서 잠깐 언급 하고 갔는데, 그 말씀이

아직 저는 계속 앉아서 들으면서 뇌리에 남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가장

종교적이지만 거기 신성이 곁들여지지 않은 하나님 앞에 선, 그런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진지함이

보이지 않는, 종교적 바리세인의 모습, 신성을 상실한 모습과 하지만 신성이 없다고, 하지만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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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삶으로 타자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던지는 사람을 보면서 기독교 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서 보여지는 어떤 거룩한 신성의 자취들을, 이게 결국은 우리들이 갖게 되는 아이러니고 고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데 저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하지만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가

결국은 그 가운데서 계속 Struggle하는 게, 천국에 갈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제고 사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해봅니다. 질문에 답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국운 아무래도 연장전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에 9시부터 맘스키친에 따로 된

공간에 박교수님 모시고 제가 있겠습니다. 여러분들께 커피를 드리겠습니다. 오셔서 교수님 아까

어려운 말씀을 하셨는데, 개인적인 경험 아까 목사님 크게 쓰시려고 이러신 것 같아요 이런 말을 들을

때 이렇게 뭐가 올라왔다고 하셨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이런 얘기를 포함해서 조금

더 Informal한 얘기로 내일 아침에 하고, 열시 쯤 되시면 나가셔야 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늘 이 모임을 기획하면서 기획할 때부터 클로징을 생각합니다. 법 배운 사람에 직업병

같은 건데요. 계속 생각했던 것은 신정론에 관련된 교수님 글을 보면서 어쩌면 하나님이 후회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 보냈으니까 이제 끝이라고 하셨지만, 여러분

왜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이 너무 패악하니까 하나님이 머리 끝까지 화가 나셔서, 이 나쁜자식들

다시는 안해 하고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예전에 했던 약속 파기하고 너랑 나랑 같이 하자 이렇게

하시는 장면이 나와요. 거기서 모세가 하나님을 달래는 유명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태면

홀로코스트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죽이셨습니까? 하나님이 지구를 수 십번 폭파시켰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탄을 만들라고

그러셨습니까? 이 수많은 악들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허용했다고 이야기 하는데, 쉽게 말해서, 제가

2년 전에 그 수업에서 신정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내가? 내가 언제?' 이렇게

오히려 하나님은 그 추악한 죄악의 현장에서 이거 다 집어치우자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여러분 제가 어제 글을 받고 나서 코가디스의 마지막 장면을 제가 계속 생각했어요. 코가디스

도미네라고 하잖아요. 베드로가 로마에서 나오다가 예수님이 나 십자가 한번 더 져야겠다 하시니까

그러지 마시라고 그러고 들어가서 그 양반이 거꾸로 달린다 다 알려진 이야기 이죠. 글쎄요. 우리가

얘기를 끌어간 모든 전제가 신정론이었는데, 그 전제 자체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아 나

너희들 정말 싫다 나 이거 정말 무효로 하고싶다, 만약에 만약에 조금 도전적으로,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 하나님을 다시 임하시게 하는 그 호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우리

박교수님이 두 가지 관점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첫째는 당신이 정말 필요할 때 어디

계셨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추궁하는, 다른 하나는 이제 하나님을 찾지 말자 이제 우리가 우리의 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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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53ㅗㅗ

해결해야 한다. 자 이 둘 중에 어떤게 모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화가 잔뜩나신 하나님을 좀

달래자 우리를 버리시지 않도록, 그 호소에 조금이라도 가까운게 될까. 오늘은 그냥 이렇게 아프게

마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박교수님 멀리서 오셨는데 축도를 부탁 드리는건 아니고요. 오늘 이

모임을 좀 마지막 기도로 마쳐주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박원빈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이 밤을 허락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한동의 주의 지체들 교수님들 학생들과 함께 모여서

귀한 시간 가졌습니다. 하나님 이자리에 함께 해주시고 꼭 우리가 여러가지 말들 속에서 우리의

우둔한 지혜와 표로 하나님을 오해하고 곡해한 것이 있다면 성령께서 이 자리에 함께 임재해 주셔서

어두웠던 부분들 잘못 알았던 부분을 밝히 이해하게 해 주시고 우리의 부족함들 주님 누구보다 잘

아시오니 날마다 우리 삶 가운데 함께해 주셔서 참으로 동행하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삶의 깊은

고통에 현장 질곡의 현장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믿음의 용기 허락해

주시옵소서. 우리 학생들 여러가지 공부하는 중에 학업하는 중에 여러가지 말못할 고민들 힘든 것들

가지고 공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그때 친구가 되어주셔서 그들의 삶의 현장에 함께해 주시고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 주님이 늘 함께 하심을 깨닫고 느끼며 캠퍼스 생활에서 참으로 이 시대를

밝히는 귀한 주의 정병으로 성장하고 훈련될 수 있도록 주님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늦은 밤

기숙사로 돌아가는 발걸음 들을 주님 인도해 주시고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고, 날마다 우리 삶 가운데

주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하루하루 숨쉬며 살아가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감사 드리며 귀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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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신학담론으로서 타자윤리의 가능성과 한계

박원빈 (남서울대학교)

1. 들어가며

레비나스의 무한 개념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개념인가? 레비나스의 초월과 무한에 대

한 이해는 자신의 철학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1960년대 『전체와 무한』발표 이후

끊임없이 제기된 질문이다. 특히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는 초월과 내재의 문제를 중요한 과제

로 삼아온 기독교 신학에 윤리라는 실천적 매개를 통한 양자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어서 많

은 기독교 신학자 및 철학자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연구는 레비나스가 어떻게 타자윤

리를 통해 무한과 유한, 초월과 내재를 매개하는지 밝힘으로 그의 타자윤리가 신학으로써

자리매김 할 수 있는지 그 타당성을 검토하는데 있다. 무한과 유한, 초월과 내재의 가능성

을 탐구하는 이 연구는 철학적 신학(philosophical theology), 혹은 종교철학(philosophy of

religion)의 기반을 세우는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통 조직신학 체계 안에서 다

루는 신론(神論)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매개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시도가 될

것이다.1)

프랑스 현상학자 장-뤽 마리온(Jean-Luc Marion)은 철학과 신학의 이러한 통합적 연구

방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신학의 대상이 철학이 제외한 초월적 영역만을 추구

해 왔기 때문에 양자의 간격은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진단한다.2) 신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신학이 다른 제반 학문 분야에 비해 어려운 이유는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도 말했듯

이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우리의 인식에 포착될 수 없고 쉽게 대상화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신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려는 종교 철학의 시도는 “두 가지 아주 험

난한 기로에 서게 된다. 먼저 종교현상이 지닌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객관적

으로 정의할 수 있는 현상들만 다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유한 종교적 현상을 다루지만

그것을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는 입장을 포기하는 것이다.”3) 그렇다면 철학적인 엄밀

함을 가지고 종교현상을 다루는 종교철학 혹은 철학적 신학은 불가능한 과제란 말인가? 최

근 들어 이러한 가능성은 프랑스 현상학자들에 의해 점점 증대되고 있는데 필자는 그 중심

혹은 그 중심의 시작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윤리가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1) 이러한 문제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 신론은 본질적으로 윤리적임을 믿는 필자의 신학적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

다. 마태복음 22장에서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는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

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예수는 이웃사랑을 말하면서 둘째 계명이 첫 번째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질적으로 같다는 의미로 “둘째도 그와 같으니”(39절)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땅에 드러난 하나님의

신비한 지식과 계시를 밝히는 것이 신론의 가장 큰 주제라면 이러한 주제는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이웃사랑을

통해 온전히 드러남을 밝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Jean-Luc Marion, “Le phénomène saturé,” Phénoménologie et théologie (Paris: Criterion, 1992), 79.

3) 앞의 책, 79.

Page 68: 2010년 가을학기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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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정론의 유혹을 거부하며

레비나스는 신에 대한 담론(theo-logy)으로서의 신학이 그 자리를 상실했다고 진단한다.

신학이 일탈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철학의 언어로 신을 증명하려고 했기 때문이

다. 레비나스는 시몬 베이유(Simone Weil)의 글을 인용하면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냐하면 “존재는....신을 담기에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

스의 신 이해는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전통적인 [기독교] 신 이해와 정반대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전통 신학이 추구한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 언어를 통한 신 이

해는 정작 신성의 가장 중요한 거룩함을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 전통신학은 이성(the

logos)안에서 초월을 주제화함으로써 초월을 세상 안으로 응고시켜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

았다.4) “세상 안에 응고되어 버린 하나님”의 자리는 “초월이라는 종교적 조건을 파괴시킨”

신학적 언어의 자연적 귀결이며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언어는 오류이며, 신화이기

에 결코 문자적으로 취할 수 없는 것이다.”5) 최고의 절대적 존재자로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레비나스의 신 이해는 전통 신학에 심각한 도전을 던져준다.

레비나스가 전통신학의 신 이해를 거부하는 것은 신정론(theodicy)에서 극명하게 나타난

다. 신정론은 세상의 악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를 변증하는 중요한 신학적 도구였다.6) 레비

나스는 과연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협의가 없으며 신앙의 이름으로 신성을 구출하려는 이러

한 신정론의 시도가 적절한 것인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레비나스는 신학에서 신정론은 형이

상학적 최종체 (metaphysical finality)로서 유비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서구 신학은 신정론을 통해 도덕적(혹은 철학적) 논의의 배후에 항상 “신의 섭리” 혹은 “신

의 계획”에 따라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음을 주장한다.7) 이러한

견해에 따라, 자비로운 지혜와 절대 선이신 하나님에 의해 추구된 초월적 왕국은 자연과 역

사라는 한계 내에서 여러 가지 질곡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과정은 비록 궁극적 선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 할지라도 매우 고통스러운 것 이었다.8) 신학적 이상으로서 초월적

4) Emmanuel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 (Hague: Martinus Nijhoff, 1981), 5.

5) 앞의 책, 197.

6) 신정론(神正論, Theodicy) 라는 말이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자기정당화”(justification of God)이라는 뜻

이다. 이 말은 G.W. Leibniz (1647-1716)가 처음 사용했는데 하나님을 뜻하는 Θεος (God) 와 정의를 뜻하

는 δικη (justice) 의 합성어이다. 그 후 이 신조어는 세상에 현존하는 악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

을 변호하는 자연신학적 입장에서 주로 적용되었다. 라이프니츠의 책 Theodicy 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

지 현존하는 악의 모습을 열거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주장한다. 첫 번째는 형이상학적 악 (metaphysical

evil) 인데 세계가 만들어 질 때 내재되어진 퇴행성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는 자연악 (Natural evil)으로 이것

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시련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도덕악 (Moral evil)은 자연악이 정당한 형벌

이 되도록 만드는 사람들의 죄를 가르킨다. 신정론 (Theodicy)은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선한 사람들의 고통

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정의를 나타내려고 하는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

다. 이러한 면에서 신학에서는 인간의 고통도 보이지 않는 신의 계획의 한 부분임을 말한다. Walter Kern

and Jӧrg Splett, “Theodicy,” Encyclopedia of Theology: The Concise Sacramentum Mundi, ed. Karl

Rahner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75), 1644-71 와 Y.K. Kang, “Levinas on Suffering and

Solidarity,” Tijdschrift Voor Filosofie 59(1997/3), 482-504를 참조; 최근 도덕악과 관련된 신정론 논의로

Susan Neiman, Evil in Modern Thought: An Alternative History of Philosoph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y Press, 2002), 22 참조.

7) 플라톤의 이데아, 칸트의 예지계와 현상계의 구분, 헤겔의 절대정신 등이 이러한 형이상학적 최종체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8) Emmanuel Levinas, “Useless Suffering,” Entre Nous: Thinking-of-the-Othe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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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 도달하기 위해 고통은 이 땅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과정이었으며 고통을 신

학화함으로써 고통은 이제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고통으로 변화된다. 더

나아가 세상과 개인이 겪는 고통은 세상에서 절대 선을 실현하거나 증진하기위한 효과적 도

구로 이용되었다. 신적인 경륜에서 이루어지는 이 세상의 총체적 고통의 현실은 각 개인의

고통의 삶까지도 침투하여 신의 경륜 안에서 고통은 쉽게 설명되고 이해되었으며 심지어 고

통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권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이해는 사람들의 고통

이 크던 작던 간에 종극에는 선에 도움을 주며 고통조차도 신의 섭리 안에 있는 선물이라는

믿음을 낳게 되었다.

레비나스는 기독교 전통 신학이 가르치는 이러한 신정론을 통해 이 세상에서 고단한 실존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고통은 “쓸모없는 고통” (Useless Suffering)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고 진단한다. 레비나스에게 고통은 다른 모든 경험처럼 비록 그것이 우리 의식 가운데 주어

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종합할 수 있는 성질의 경험이 아니다. 고통은 칸트식의 초월적 통

각(transcendental apperception)9)처럼 어떠한 일치나 종합에로 이를 수 없는 성질의 경험

이다. 고통은 감각과 같이 주어지는 것으로 고통의 종합이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고통

은 하나의 의미론적 전체성을 가질 수 없다. 고통은 따라서 질서를 전복시키며 그 자체에

항상 동요가 자리하고 있다. 고통의 무규정적이며 철저한 무의미성 때문에 고통을 상황화

(contextualize) 할 수 없다. 고통을 상황화 한다는 것은 우리의 시공간 속에 가두어 놓고

언어를 통해 그 의미를 포착하고 개념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고통의 의미를 존재

론적으로 범주화하려는 시도를 철저히 부정하면서 레비나스는 고통의 “상상할 수 없는 측

면”(unassumability)을 강조한다.10) 각 개인의 고통은 철저하게 사적인 영역이며 타인의 고

통과 환원불가능하다.11) 이러한 고통의 성격 때문에 레비나스는 고통이 초월적 성격을 가진

다고 말한다. 고통의 초월성은 “부정적 초월성"(negative transcendence)이다. ‘부정적’이라

는 형용사는 고통이 가지는 과다(excess)한 성격을 일컫는다. 레비나스는 고통의 부정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악은 통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통합할 수 없는 것의 비통합성이다. 악은 마치 칸트식의 형식적 통합처럼 아무

리 복잡한 정보라도 범주를 통해 정보를 종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악은 예외이다. 악은 그 형식에 있어서

그 잡다성이 바로 악의 사악성(malignancy)을 드러내는 형식이고 이러한 잡다성은 바로 [범주나 오성의 작용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파악되는 것에 저항한다.12)

9) 칸트는 ‘경험적 통각’(transcendental apperception)과 초월적 통각을 구분했다. 경험적 통각은 일상적인 우리

의 의식 안에 일어나는 모든 경험을 말하는 반면에 초월적 통각이란 이러한 모든 경험을 하나로 통합해 주는

기능을 하는 경험으로 이러한 초월적 통각을 통해 주체는 모든 가능한 경험과 사고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

기도 한다.

10) Levinas, Entre Nous, 91.

11) 비트겐쉬타인은 그의 저서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no. 243 에서 사적언어의 문제를 제기한다. 아픔

(pain)의 문제를 예로 들면서 그는 이러한 사적 언어가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철저하게 사적일

(private) 수 있는가라는 것을 탐구한다. 그의 결론은 이러한 언어는 의미와 관련하여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비트겐쉬타인이 언어의 사용과 관련하여 사적언어의 불가능성을 논구한다면 레비나스는 실존적인 차원에서

고통은 소통불가능함을 말한다. 고통은 오직 윤리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야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

다. 비트겐쉬타인의 사적언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A.J. Ayer, “Can There Be a Private Language?,”

Philosophy of Language, ed. A.P. Martinic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5)와 H.N.

Castandeda, “Private Language Problem,” Encyclopedia of Philosophy, ed. Paul Edwards (New York:

Macmillan, 1967)을 보라.

12) Emmanuel Levinas, Collected Philosophical Papers, trans. Alphonso Lingis (Dordrecht: Martinus

Nijhoff, 1987), 180.

Page 70: 2010년 가을학기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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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통으로서의 악이 지닌 현상학적 특성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기독교 신정론을 비판한다.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고통으로서 악이 지닌 철저한 무규

정성과 무의미성에 맞서 신정론으로 대응해왔다. 신정론을 통해 인간의 고통을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입증한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이미 증명하였듯이 아우스비츠

(Auschwitz) 이후 모든 신정론은 비도덕적으로 변질되었고 그 효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신

정론은 마치 칼 맑스가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폄하했듯이 고통당하는 자를 위한 일시적

위안과 도덕적 합리화에 불과하다. 이러한 신정론은 ‘나’로부터 유래하는 일종의 속임수이며

도피일 뿐이다. 고통을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통해 타인의 고통은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되지만 반대로 고통 받는 자에게는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고통의 현상을 분석하면서 악에 존재하는 두 가지 층을 밝혀낸다. 첫째는 고통 받는

당사자에게 현존하는 고통 그 자체가 악의 일차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면 또 하나는 나

(주체)에 의해 타자의 고통을 합리화하는 시도야 말로 더 사악한 악임을 주장한다.13) 레비

나스는 이 두 번째 악의 개념, 다시 말해 타자의 고통을 합리화하는 악을 가리켜 “모든 비

도덕성의 근원(the source of all immorality)”이라고 말한다.14)

레비나스는 타인의 고통을 정당화하며 드러나는 고통의 참된 의미의 부재는 고통이 단순

히 개인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 상호간(inter-human relation)의 문제

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15) 하지만 기독교 신학은 신정론에서 나타나듯이 신의

완전하심과 정의로우심을 위해 타자의 고통을 정당화함으로 타자에 대한 주체의 책임을 망

각하여 하였고 결과적으로 악을 배가하는 신학적 오류를 낳고 만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러

한 신정론의 유혹을 거부하고 타자윤리를 주창한다. 세상의 악의 문제를 대처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통해서이다. 바로 타자에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있고

그 타자와의 만남에 무한의 자취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3. 무한의 자취로서 타자의 얼굴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보는 사회적 소수자들로 나타나는 동시에 그

이상의 초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체성과 무한』에서 타자의 두 가지 형태의 얼굴에

대해 상당부분을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 고아, 과부

등의 얼굴이다. 두 번째로는 주인의 얼굴 혹은 힘을 가진 상대방의 얼굴임을 알 수 있다.

양자의 얼굴 모두 타자성을 결정하는 비대칭성, 비균등성, 비환원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

면 어떻게 우리는 악한 자의 얼굴과 선한 자의 얼굴의 차이를 구분한단 말인가? 만약 타자

가 파괴만을 일삼을 악한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직면하는 사실은 타자가 항상 고

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아니라는 것이며 또한 자아는 반대로 이기주의적 쾌락주의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레비나스는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고려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레비나스는 어떤 특정한 사례에 집중하여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가치 판단을 하는 상황윤리적 관점에서 자신의 윤리를 주창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학

의 근본전제를 세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피할 수 없는

13) Richard A. Cohen, Ethics, Exegesis, and Philosophy: Interpretation after Levina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275.

14) Levinas, Entre Nous, 99.

15) 앞의 책, 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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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칸트의 정언명령과 유사하다고 말하지만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의 동기가 인간의 이성

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이성의 바깥에서 초월적으로 이성에 침투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훨씬 더 철저하고 종교적임을 알 수 있다.16)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이 이성의 필연적 당위의 결과물인 정언명령보다 더 종교적이며

철저한 이유는 타자의 얼굴이 다름아닌 무한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그의

철학적 작업을 통하여 끊임없이 무한의 개념은 우리의 인식과 표상을 초월하는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다.17) 무한이란 “어떠한 능력도 미치치 못하고 어떠한 기반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변화의 깊이”라고 말한다.18) 레비나스의 무한에 대한 이해는 근대 인식론의 창시자라

고 할 수 있는 데카르트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주체가 모든 개념의 근원인

지 아닌지를 묻는 질문에서 시작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주체는 그 자체보다 더 크고 완벽한

관념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데 그 이유는 결과는 그 원인보다 더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주체보다 크고 완벽한 신 개념은 결코 주체로부터 올 수

없다고 말한다. 신 개념은 주체의 능력 밖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남는 것은 신에 대한 관념으로 이것은 내가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내

가 마지막으로 고려해야할 대상인 것이다. 신의 이름 때문에 피조물인 나는 영원하고 독립적이며, 전

지하고, 전능한 실체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의 개념은 너무나 광대하고 완

벽한 것이어서 내가 그러한 관념들에 고려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나에게서 그러한 위대한 신의 개념

들이 유래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통해 내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비록 신의 완벽한 실체개념들을 지니고 있지만

나는 유한한 존재로서 무한한 신의 개념을 지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유한한 존재로서 무한의

개념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무한한 어떤 실체가 나에게 이러한 무한의 개념을 심어놓았기 때문이

다.19)

데카르트는 유한존재로서의 인간은 결코 신의 개념을 생각해 낼 수 없으며 이러한 신의 관

념은 틀림없이 외부로부터 연유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레비나스에게 주체에 대한 데

카르트 해석이 중요한 이유는 데카르트가 초월적 자아의 유아론에 빠지지 않고 무한과의

만남을 시도했다는데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무한과의 만남은 주체를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고 또한 무효화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한과의 만남을 통해 주체는 새로운 개념 정립

이 가능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데카르트의 하나님 개념을 타자에 대한 자신의 이해로 대체한다. “무한은 절

대적 타자이다.”20) “신은 타자이다”21) 등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데카르트의 신 이해를

타자 개념으로 대치시킴을 통해 레비나스가 그의 저서 『전체와 무한』에서 자주 언급하는

용어들인 무한, 초월, 외재성, 타자성등의 개념을 보다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무한에

대한 데카르트의 개념은 무한에 대한 존경과 철저한 외재성을 유지하는 존재와의 관계를

16) 칸트와 레비나스의 도덕성에 대한 비교 연구로 Catherine Chalier, What Ought I to Do? Morality in Kant and Levinas, tran. Jane Marie Todd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2002)를 참조하라.

17) Totality and Infinity, 80-81.

18) Emmanuel Levinas, Of God who comes to Mind, trans. Berttina Bergo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66-67.

19) Rene Descartes, The Mediations and Selections from the Principles of Rene Descartes, trans. John

Veitch (LaSalle: Open Court, 1962), 54.

20)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49.

21) 앞의 책,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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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낸다.”22) 신을 인식론적으로 이해한다는 의미는 끊임없는 인식론적 긴장을 야기 시킨

다. 신은 다른 사물이나 사람처럼 쉽게 대상화되지 않기에 주체는 신이라는 대상 이해에 지

속적인 한계를 호소한다. 이러한 인식론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대상으로서의 신과 신을 인식

하는 인식주체로서의 자아 사이에서 인식 대상이 인식 주체를 넘어서는 모순적 상황이 발

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에게 이러한 인식론적 모순은 모순에서 그치지 않는다. 왜

냐하면 이러한 인식론적 모순은 인간주체로 하여금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다.23) 외재적으로 주어진 무한에 대한 인식론이 해결해 줄 수 없는 욕망은 주체로 하여금

타자에 대한 책임을 추구하도록 독려한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오직 타자에 응답

하는 것 만이 결국 인간 주체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신 이해가 주목받는 것은 데카르트, 파스칼, 키에르케가르로 이어지는 기독교

철학자들이 존재론적이며 실존적으로 신을 이해한데 반해 철저하게 윤리적 차원에서 초월

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신을 인간의 인식론적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

상으로 보지 않을 뿐 더러 하나의 무한 존재자(an finite being)로 보는 것도 거부한다. 신

은 레비나스가 거듭 말하듯이 “존재를 뛰어넘는” 분이다. 다시 말해 레비나스에게 있어 신

은 이 세상을 넘어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부재의 바로 그 지점(the point

of absence)까지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시다.24) 우리의 인식과 존재를 뛰어넘는 그 신은

우리 앞에 바로 타자의 얼굴로 그 흔적(trace)을 끊임없이 계시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을 전개함에 있어 도덕적 언어(책임, 대속, 연대성 등)를 즐겨 사용

한다. 하지만 그가 도덕적 언어를 사용한다고 도덕적 선택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칸

트 도덕철학에 있어서 선택은 의식적 주체의 산물인 반면 레비나스가 추구하는 책임이란

타자의 관계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책임은 내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추구하든지

안 하든지 아무 상관없이 나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주체와 관련한 모든

논의는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다. 책임이란 주체에게 일어나는 한갓 우연한 사건도 아니요25)

타인에 대한 “자애적인 의지와 자연적 사랑의 본능”26)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레

비나스의 책임은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책임 그 자체가 주체의 근본적인 개념 가운데 포함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주체의식을 가진 인간이면 그 인간은 누구나 다 윤리적

으로 책임적인 존재이다. ‘나’라는 주체는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데 개별 주체로서

나의 존재는 전적으로 타자와의 관계 가운데 얽혀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관계를

일종의 강박관념(obsession)으로 묘사하는데 그 이유는 타자와의 관계가 전적으로 나를 지

배하기 때문이다고 밝힌다.27) 다시 말해 주체는 자기 스스로를 타자에게 노출시킴으로써 존

재하게 된다. 개별적 존재로서 ‘나’라는 주체가 이처럼 전적으로 타자에 지배되어있는 주체

와 타자 관계의 독특한 성격이 “나는 타자의 볼모(hostage)로 잡혀있다”란28) 표현 속에 함

축적으로 드러난다. 주체는 나위에 군림하는 타자의 힘을 외면할 수 없기에 오히려 핍박받

는 존재이다. 이러한 레비나스의 주체이해는 기존 서구철학의 인식론과 존재론의 차원에서

22) 앞의 책, 50.

23) 레비나스는 이러한 욕망을 ‘형이상학적 욕망’(metaphysical desire)라고 불렀다.

24) Of God who comes to Mind, 69.

25)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114.

26) 앞의 책, 111-112.

27) Emmanuel Levinas, “Langage et proximite,” En decouvrant l' 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 (Paris: Librarie Philosophique J. Vrin, 1967), 228-31, 233-34를 보라. 또한 Otherwise than Being, 158

도 참조.

28)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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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매우 생소하고 주체를 해체하려는 급진적인 시도로 까지 비쳐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

다.

주체를 향해 무한의 책임을 요구하는 타자와의 만남은 그래서 신을 만나는 ‘신적체험

(epiphany)'에 비유할 수 있다.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나타날 때 이 얼굴은 전적으로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29) 타자의 얼굴이 나의 의도적인 행위로 이루어지는 지적인 표상작용과

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에 얼굴이 존재하는 방식은 보여질 수도 없으며 명확히 체험될 수도

없다.

타자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은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있는 타자의 개념을 초월한다. 이러한 양식

은 내가 바라봄으로 하나의 주제를 파악하지도 않고 하나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몇 개의 성질들을

조합과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얼굴은 매 순간마다 나에게 이러한 모든 조작된 이

미지들을 파괴하고 쓸어낸다. 이러한 개념은 다 주체의 도구로서만 존재할 뿐이며 감각 자료의 재료

로서만 적절한 것이다.30)

위의 인용문에서 나타나듯이 레비나스는 계속해서 타자의 얼굴은 우리가 쉽게 주제화하거

나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타자의 얼굴은 나의 힘에 복속되기를

거부하는 무한한 저항인 동시에 윤리적으로 나에게 명령하는 신의 음성인 것이다.

4. 신학 담론으로서 타자윤리의 가능성

레비나스의 하나님은 존재를 뛰어넘는 선(the good)의 개념과 연결되기에 필연적으로 윤리

와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 레비나스의 신학을 철학적 신학 혹은 신학적 철학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레비나스에게 신학의 궁극적 의미인 하나님에 대한 모든 담론

은 타자와의 윤리적 만남을 통해 이루어 진다. “신학”과 “윤리”라는 단어는 신과 사람 사이

의 상호적 역동성을 묘사하는 학문이기에 이 둘은 레비나스에게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레

비나스의 타자윤리를 통해 우리는 신학과 철학, 초월과 내재를 아우르는 새로운 접촉점을

얻게 된다. 이런 이유로 초월을 다루는 신학의 과제는 레비나스에게 언제나 중요한 과제였

다.

우리는 그동안 신학을 무시해 왔던 지난 날의 과오를 비난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신학이 다시 회복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주장하지도 않았고 적어도 그 기회조차 만들지 못했음도 비난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점진적 소생은 초월을 경험한 후에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것으로 일차적인

것이다.31)

레비나스의 신학은 타자윤리로 나타난다. 레비나스의 신학은 비록 그가 전통적인 철학의

언어, 즉 존재론적이며 인식론적인 신 담론을 거부하나 한때 미국에서 유행했던 것처럼 신

의 ‘죽음의 신학’에 빠지지는 않는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도

덕적 진리의 외적 원천으로서의 신은 죽었으며 따라서 인간 개인이 스스로 신의 자리에 서

야 함을 역설하였다. 물론 레비나스도 니체와 마찬가지로 신성을 타자에 대한 책임을 다루

29) Levinas, En de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 , 173.

30)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50-51.

31) Levinas, Of God who comes to Mind, 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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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윤리적 차원, 즉 인간성(humanity)의 큰 범주 안에 정위시키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레

비나스의 타자는 “구약성서의 전통 속에서 인간 존재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존

재”임을 깨우쳐 줌으로 그 인간존재가 초월과 잇닿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32) 레비나스에

게 하나님의 형상은 따로 떨어진 자율적 인간상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형상이 아닌 항상

타자와 윤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다. 이러한 주체와 타자의 연결은 앞서 말했던 것

처럼 주체가 타자에게 “볼모”로 잡혀있다라는 의미인데 주체가 타자에게 볼모로 잡혀있다는

말은 주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타자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로 신의 편재

(omnipotence)의 또 다른 윤리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33)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신적 권위에 버금가는 타자의 힘은 바로 철저한 무기력함

(powerlessness)에서 나온다. 이러한 타자의 무기력함을 표현하기 위해 레비나스는 성서의

“나그네, 고아, 과부”의 메타포를 사용한다. “초월을 통해 나를 압도하는 타자는 내가 [책임

져야 할] 나그네, 과부, 고아이다.”34) 이러한 사회적 소수자는 모두 결핍이라는 공통된 존

재양상을 지니고 있다. 나그네는 친구가 결핍된 자요, 과부는 배우자의 결핍을, 고아는 부모

의 결핍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타자가 지니는 윤리적 저항은 바로 이러한 소수자들이 지

니는 육체적 힘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레비나스는 하나님을 하나의 존재자로 고려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신의 존재론적 부재의 공간에 타자에 대한 인간의 책임

을 정위시킨다. 이러한 타자에 책임을 통해 우리는 신의 자취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레

비나스에게 하나님의 자취는 타자의 얼굴에서 발견되어 지고 타자의 얼굴은 다름 아닌 신의

자취의 현현이다.35) 타자의 얼굴에 드러난 신의 자취는 레비나스로 하여금 인간실존의 문제

에 대해 등을 돌리거나 어떤 초월적 신비경험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고통 가운데 있

는 인간 실존과 직면하도록 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레비나스가 신정론을 그토록 완강

히 거부했던 이유도 신정론은 서구 신학에서 신의 정당화를 위해 타자의 고통을 합리화함으

로써 타자에 대한 주체의 책임을 망각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의미에

서 레비나스 철학이 지닌 신학적 성격이란 타자에 대한 책임을 통해 신정론의 오류를 극복

함과 아울러 타자에 대한 주체의 책임이야 말로 다름 아닌 우리가 이 땅에서 무한의 자취를

맛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임을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레비나스는 자신의 신학을 “신을 향한

다는 것은 다름 아닌 타자를 향한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다시한번 이같은 입장을 확인해

주고 있다.36) 레비나스 신학의 중요한 장점 중의 하나는 그가 끊임없이 전통 신학(특히 신

정론)에 대한 의심의 해석학(the hermeneutics of suspicions)을 적용하지만 이러한 의심의

해석학이 신의 해체나 신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윤리라는 회복의 해석학(the

hermeneutics of retrieval)을 통해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우리

를 인도한다는 점이다.

32) Emmanuel Levinas, Alterity and transcendence, trans. M. Smith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9), 64.

33) Otherwise than Being, 5; Totality and Infinity, 200.

34) Totality and Infinity, 215.

35) 레비나스의 신과 윤리의 개념에 대한 최근의 연구로 J. Bloechl이 편집한 The face of the other and the trace of God: Essays on the Philosophy of Emmanuel Levinas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0)을 보라.

36) Emmanuel Levinas, “The trace of the other,” in Mark Taylor ed., Deconstruction in Context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86),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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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오며

레비나스에 따르면 신정론은 지금까지 타자의 고통을 정당화하는 작업을 통해 주체가 타

자에 대한 책임을 망각하도록 했다. 근대철학은 윤리학을 주체 안에 가두어 놓음으로 이성

의 광기가 지배하는 20세기의 비극에 대해 어떠한 해답도 해 줄 수 없었다. 레비나스가 윤

리학을 주체 밖에 정위(正位)하여 어떠한 상호성(reciprocity)도 거부함으로써 윤리학을 초

월적 신의 명령에 대한 응답으로 여기는 것도 바로 서구 철학에서 드러난 전체성의 폭력에

대한 반동이라고 볼 수 있다.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는 신정론의 종언을 통해 신의 이름으로

타자의 고통을 정당화하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하며 고통에 대한 해결은 오직 타인에 대한

무한한 책임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타자 윤리를 통해 신학과 철학, 초월과 내재를 아우르려고 하는 레비나스 철학(혹은

신학)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과연 레비나스의 윤리가 실천가능한가

라는 단순한 물음에서 시작하여 그의 타자를 통한 신이해를 기독교의 신 개념과 동일한 것

으로 여길 수 있는가라는 복잡한 신학적 물음에 이르기 까지 그의 사상은 많은 과제를 우리

에게 던져준다. 특히 그의 신 이해는 전통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

운 부분도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의 하나인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의 기

념비적 저작인 『종교경험의 다양성』(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이 지나치게 개

인적 경험을 강조한 나머지 종교가 지녀야할 공동체적이며 윤리적인 성격을 간과했다는 비

난을 받는다면 레비나스의 신학은 그 어디에도 신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말하고 있지 않는

다는 점에서 정 반대의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레비나스 스스로도 이러한 신 개념과 타자이해를 둘러싼 복잡한 논의를 미리 염두해 두기

라도 한 듯 타자에 대한 주체의 의무는 항상 채워질 수 없으며 항상 잉여(surplus)로 남는

다고 말한다.37) 이 말은 우리의 타자를 향한 무한한 윤리적 책임 또한 신을 이해하는 결정

적이며 궁극적인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이른 말이다. 타자의 필요를 완전히 충족시킨다는 것

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이런 실천적 아포리아(난제)의 문제를 고려하면서 자신의 타자이론을 발전시

켰다. 이는 비록 그의 사상이 실천적으로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 할지라도 세상의 어찌할

수 없는 악과 부조리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윤리적인 책임을 통해서임을 체

험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통한 신의 자취로서만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온전히 보

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38)

37) Emmanuel Levinas, Basic Philosophical Writings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6), 17.

38) 고린도전서 13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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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2 0 1 0F A L LS E M E S T E R

Section 2

이항대립체계는 유죄인가, 무죄인가?Is the system of Binary Oppositions guilty or innocent?

2010. 10. 14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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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체계는 유죄인가, 무죄인가?-Is the system of Binary Oppositions guilty or innocent?-

2010 Fall Semester 2nd Colloquium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주최_한동대학교 학문과 신앙 연구소_Handong Institute of Learning and Faith

서구 문명이 주도한 20세기의 지성사에서는 서구의 근대 문명 그 자체의 토대를 문제 삼는 근본적인 비판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도 특히 서구의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s)적 방법론을 위계적이고 억압적인 이성중심주의(hierachical and oppressive logocentrism)와 연결시켰던 포스트모던 철학자 자크 데리다 등의 비판은 가히 치명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2010년 2학기 두번째 학문과 신앙 콜로키엄은 한동대학교에서 다양한 학문을 전공하시는 네 분의 교수님들을 모시고 각각의 분야에서, 그리고 학문 전체에서 이항대립체계의 위치를 평가해 보고자 합니다.

필경, 방법론으로서의 이분법의 문제, 전제로서의 이원론의 문제, 그리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항대립의 평가 문제에까지 이르게 될 이 토론은 한동의 가을밤을 깊은 학문적 담론으로 채울 것이 분명합니다.

가능하다면, 유죄냐 무죄냐를 묻는 법률가들처럼, 치열하고도 가슴 아프게 이 논의를 이끌어보고자 합니다.

한동 구성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사회 : 이국운 교수 (법학, 학문과신앙연구소장)발제 : 곽진환 교수 (생명과학/약학) 이준용 교수 (전자공학) 신순철 교수 (언론학) 손화철 교수 (과학기술철학)

All Nations Hall 10310/14 (Thur) P.M.7:15[ ]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Prof.이국운 Prof.곽진환 Prof.이준용 Prof.신순철 Prof.손화철

이번 토론회는 특별히 한동국제법률대학원의 협조로법률대학원 103(B)호 Courtroom에서 진행합니다.법률대학원 내부에서는 정숙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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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79

2010 년 가을학기_제 2 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행사 사진-1]

2010 Fall Semester_2nd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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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2010년 가을학기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2010 년 가을학기_제 2 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행사 사진-2]

2010 Fall Semester_2nd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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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81

2010년 가을학기_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2010 Fall Semester_2nd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주관 :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 [ACE 사업]

주최 : 한동대학교 학문과 신앙 연구소 [Handong Institute of Learning and Faith]

이항대립 체계, 유죄인가 무죄인가?

Is the system of binary oppositions guilty or innocent?

2010. 10. 14

이국운 저는 학문과 신앙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이국운 교수입니다. 오늘 우리 학문과

신앙 콜로키움 2010년도 두번째 순서가 열리면서 에이스 프로젝트에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라는 상당히 특이한 이름으로 개최되고 있는 이 모임의 두번째 모임에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 한동국제법률대학원에서 모의법정 자리를 빌려주셔서

과거보다는 조금 격식있는 공간 속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허락을 해주신

이유를 제 스스로 생각을 해보니까 오늘 주제가 유죄냐 무죄냐 이렇게 되고 있기 때문에, 유죄냐

무죄냐를 다투는 자리에서 하는 것이 좀 났겠다 싶어서 배려를 해주신 것 같은데, 과연 오늘 얘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이야기하려는 주제는 이항대립체계에 관한 것입니다. 잠시 기도하고

모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이항대립체계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이항대립체계라는 말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의 개념에 익숙하지

않다 뿐이지 아마 이항대립체계 자체에 관해서는 다들 몸으로 느끼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진 모르겠으나 우리 인류는 지금 사태를 두 개의 대립항으로 만들어서 분석하고 이해하고

때로는 재구성하는 이런 어떤 흐름 속에 존재해 있습니다. 선과 악, 합법과 불법, 남자와 여자,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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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010년 가을학기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또는 0, 1 플러스, 마이너스 이렇게 나누기도 합니다.

제가 이 발문에다가 쓰지는 않았습니다만, 사실 제가 마음 담아서 쓰고 싶었던 말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구분입니다. 과연 이렇게 세계를 두 개의 대립항으로 나누어서 분석하고 이해하고 또

재구성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에 관해서 공부를 좀 한 사람이라면 늘 뒷머리에 과연 내가 이걸

잘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철학자는 철학자대로 공학자는 공학자대로 생명을

연구하는 생명과학자는 또 그대로 진리와 거짓 이 두 개의 흑백논리를 결국 나는 답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서 네 분 선생님을 모시고 솔직히 이항대립체계에 관해서 어떤

생각들을 갖고 계신지 듣고 싶습니다. 네 분 선생님께 마이크를 드리기 전에 이 문제에 관해서 이미

돌아가신 철학자 중에 자크 데리다를 대표로 하는 이 포스트모던 철학자들 가운데 아주 심각한 반론,

비판론을 이야기하신 것이 있어서 제가 짧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자크 데리다 선생님은 플라톤 이래에 이처럼 이항대립으로 만들어서 세계를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서구의 정신의 근원을 이루어 왔는데 그것이 다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공격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언제나 그 이항대립 중에 어느 한편에 서서 비대칭적으로

편파적으로 이항대립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이성과 욕망이라고 하는 이분법은

언제나 이성의 입장에서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은 언제나 남자의 입장에서 문명과 야만이라고 하는

이분법에서는 문명의 입장에서 만들어졌다. 데리다 선생이 우리에게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거나

대항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 별 얘기를 하지 않으신 것으로 압니다. 한번 다 해체해보자라고

말씀하시고 본인이 그렇게 실천하시다가 지금은 어디 가 계신 줄 압니다.

오늘 제가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자크 데리다를 비롯한 해체주의자들의 이항대립체계 그

자체에 대한 거부와 고발의 논리를 먼저 말씀 드린 이유는 오늘 이 토론이 그냥 한번 해보는 토론이

아니라 도대체 진리를 찾아간다고 하는 배움의 장에서 우리가 이 이항대립체계 말고 다른 어떤

방법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인가라는 심각한 토론으로 오늘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데리다

선생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네 분 선생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맨

오른쪽에서부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생명 과학부의 곽진환 선생님 오셨습니다. 원래

약학박사님이십니다. 정상과 비정상에 관해서 좀 말씀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옆에

전산전사공학부의 이준용 교수님 오셨습니다. 언론정보문화학부 신순철 교수님 오셨습니다.

철학자께서 이런 자리에 안나오실 수가 없습니다. 손화철 교수님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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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83

시간 계획을 겸해서 어떤 방식으로 오늘 이야기를 끌고 갈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이 7시

반인데요 네분 선생님께 10분 이상의 짧은 발제를 부탁 드렸습니다. 발제가 끝나면 8시 10분이 좀

넘을 것 같은데요, 그 뒤에 일단 네 분 선생님들 가운데서 혹시 생각이 좀 어긋나는 부분이 있거나

또는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일단 네분 선생님들 사이에서 잠시 좀 토론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5분 정도면 족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에게 토론을 오픈 하겠습니다. 그

때까지 생각들을 가지고 계시다가 질문도 좋고 논평도 좋고 자기 얘기를 하는 것도 환영합니다. 무슨

말씀이시든지 말 안하고 후회하지 마시고 이 자리에서 털어놓으시길 바랍니다. 저희가 대체로

전체토론 시간을 한 시간 정도로 예정해서 9시반 정도에는 이 모임이 마쳐지는 것으로 예정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7번 정도 모임을 가졌었는데 단 한번도 9시 반에 끝난 적은

없습니다. 좀 더 이야기가 길어지더라도 여러분들이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광고말씀만 드리고 잠시 드리고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정부에서 에이스

사업으로 이 모임을 지원해주셨습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저희 학문과 신앙 연구소를 중심으로 저를

돕는 티에이들이 열심히 노력을 해주셔서 저희 홈페이지가 생겼습니다. academia.handong.edu 를

치시면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그 동안의 자료들과 오늘의 자료도 올려놓을 생각입니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은 범위 내에서 녹취한 내용을 올려놓을 생각입니다. 오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신순철 교수님께 말씀하실 순서를 드리겠습니다.

신순철 감사합니다. 신순철입니다. 집단지성 중에 집단만 해당되고 지성과는 거리가 먼데

그래서 집단적으로 묻어가는 성격이기 때문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성인 대접을 받는 것 같습니다.

이항대립 체계가 무죄냐 유죄냐 이 질문에 철저하게 저를 가두고 제 발제를 하고자 합니다. 그 말

자체가 이항대립체계의 유죄 무죄를 따지는 것 자체가 이미 이항대립적이기 때문에 여기서

이항대립체제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하는 순간 이항대립체제를 부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이

언어의 틀 안에서 저는 무죄를 선언하고자 합니다. 이항대립체제는 무죄입니다. 왜냐하면 무죄냐

유죄냐 만을 물었기 때문에 유죄냐 무죄냐가 우리 말로는 유죄 무죄 이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Guilty,

Innocent일 것 같지만 사실 영어에선 Guilty, Not guilty입니다. 그래서 이거냐 아니냐 A냐 B냐가

아니라, A냐 A가 아니냐라는, 이항대립구조 중에서도 굉장히 타이트한 이항대립구조거든요 그렇다면

유죄냐 무죄냐 우리 말로 하면 선택의 폭이 극단에서 극단으로 가는 것 같지만, 영어로 표현을 하자면

이게 더 A와 B 사이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A 혹은 Not A의 선택을 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어쨌거나 유죄냐 무죄냐를 묻는 이 물음 자체가 이항대립적입니다. 이 이항대립적인 질문체계를

가지고 이항대립의 유 무죄를 따지자니 무죄를 선고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항대립체계를 극복해야 된다는 주장을 여러분들도 이런저런 자리나 경로를 통해서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아마 제 수업을 들은 학생들도 이항대립체계를 극복해야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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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2010년 가을학기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근데 거기까지만 보통 기억을 하지 그 다음에 제가 한 말들은 기억을

못하는데, 그 뒤에 제가 꼭 그런 말을 붙이는데요, 이항대립체계를 극복해야 된다는 생각은 또 얼마나

이항대립적인가, 세상에는 이항대립적인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다. 즉 A가 있고 Not A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극복이 있고 매몰이 있고 어디로부터 나가야 되고

어디에 매몰되어있고 그 자체가 이미 너무 이항대립적이에요. 이항대립으로서 이항대립을 극복해야

하는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우리가 처해있는 거에요. 이항대립적으로 순수하게 생각하는

것이나 이항대립체계를 극복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사실 그 모든 것의 정체는

이항대립적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자기가 이항대립적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최소한 정직한 면은 있습니다. 근데

이항대립체계를 극복해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도 이항대립적인 사고 안에 있으면서

마치 자기는 아닌 것 인양 위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직성의 가치는 갑자기 증발이 되어버린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이항대립체계는 무죄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러면 정말로 우리가 데리다

아저씨나 다른 수많은 해체주의자들, 후기구조주의자,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이 얘기 했던

이항대립구조를 극복한 사고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정말 가능한가 그게 도대체 어떤 모습의

사고인가를 생각했을 때 그분들이 한 애기를 통해서는 우리가 명쾌한 답을 구하기는 사실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후기구조주의자들 해체주의자들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이 그 자기네들이

생각하는 어떤 극복방향, 혹은 극복해야 하는 이유, 기존의 서구의 근대적인 이성중심적인 사고,

계몽주의적인 사고, 혹은 문자중심의 사고, 여기서 가지고 있었던 이항대립적인 문제점을 지적한

논리적 근거를 따졌을 때, 그들도 사실 상당부분 이항대립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모든 당위론,

목적론 우리가 무엇무엇을 해야한다, 무엇무엇을 지양하고 무엇무엇을 지향해야한다 라는 주장들은

이항대립적이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모든 당위론은 어떤 것이 바람직하고 어떤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것을 이미 내포하고 있어요.

데리다를 예로 들면 서구의 문자중심의, 이성중심의 사고를 지양하고 그것이 아닌 말

중심이고 좀 더 해체적인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한다는 극명한 이분법적인 사고를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통해서 이항대립적인 사고를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게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서 가능하기나 한 건가 이미 수많은 세월 동안 우리가 인식론적인 틀에서 혹은 언어의

틀에서 이항대립적으로 살아왔고 사고해왔고 교육받아왔고 모든 것이 인간의 삶의 질서라는게 그렇게

형성이 되어왔는데 어느날 갑자기 우리가 그것을 모두다 근원적으로 바꿔서 새로운 삶의 질서를

구현하는게 혹은 사고를 하는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는게 도대체 가능이나 한가 여기에 대한 좌절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당위적으로 인정을 한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버리고

그 방향성 혹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다르게 될 곳의 모습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짐작하기 매우

어려워지는 그런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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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85

그러면 최소한 지금 제가 생각하는 수준에서 이항대립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것은 이미 유죄냐 무죄냐를 떠난 어떤 사고가 돼버리는데요, 유죄 무죄 문제에선

무죄를 선언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돼버렸고요. 그럼 이제 이항대립적 사고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걸 극복한다는 것이 어떠한 사고를 의미하는가 어찌할 수 없이 저는 결론적으로 이항대립을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수용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항대립은

우리가 전적으로 부정해야 하는 Not A다 라고 말하는 순간 너무 이항대립적이 되 버리기 때문에,

부분적이나마 이항대립이란 것도 있을 수 있다. 혹은 그것이 주는 인식론적인 혹은 커뮤니케이션적인

어떤 질서가 이미 구현이 되어있다. 실제로 그런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어적으로 혹은 사고를 함에 있어서 이항대립적인 모습을 완전히 버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어 버리는 거죠. 그래서 이항대립은 극복해야 될

대상이 아니라 수용해야 할 대상이 되 버린 것이에요. 그렇지 않고는 이항대립을 극복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이게 기막힌 처지가 되 버린 거죠. 무엇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수용해야 하는.

근데 또 생각해보면 못할 것도 없죠. 특히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극복이 안됩니다. 슬픔을 수용하지 않으면 슬픔을 극복할 방법이 없어요. 관념적으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야 된다고 아무리 백날 외쳐봤자 그 사람이 진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인생이 슬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슬픔을 극복할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상당 부분 이항대립적이다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정말로 이항대립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사고는 부분적이나마 이항대립적입니다.

또 그럴 때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무엇에 대한 인식이 판단이 가능해지고 옳고 그름이

가능해지고 모든 인식적인 활동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항상 이항대립적인 것들이 유지되어 왔고

확산되어왔고 이항대립을 극복해야 된다는 슬로건 조차도 이항대립적으로 구성이 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이항대립도 가능하다. 어떤 경우에는 일항, 삼항, 다항 대립도 있다. 어떤 측면에서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 그럴 수 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만이 사실 이항대립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럼 어떤 경우에는 그게 일항이고 삼항이고 사항이냐, 사실 그걸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긴

어렵죠.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당신은 그럼 이항대립을 지지하는 사람입니까 유죄 무죌 떠나서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어떤 방법이

되어 버리는 거에요.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동시에 인정도 부정도 하는 이항대립적인 사고도

분명히 내 사고 안에 있다. 하지만 전적으로 이항대립적 사고를 하지 않는 방법이 이항대립을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이항대립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상당부분 수용하는 측면이 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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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해서, 이게 말 장난 같습니다만, 논리적으로 이렇게 하지 않고는 이항대립을 극복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져 버렸기 때문에 저의 인식 수준에서는 그렇게 돼버렸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애기도

이항대립적이죠.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침묵과 발설이 있고 이해되는 부분과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거에요. 동의하시는 분이 있고 동의하시지 않는 분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겠습니까. 그 사실을

인정해야죠.

인간의 인식이 불완전합니다. 이항대립적으로 사고하는게 맞는지 아니면 다르게 사고하는게

맞는지 어떤게 정말 건강한 사고방식인지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인식에 대해서 우리 인식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언어도 불가능해요. 인식도 불가능한데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언어는 더 불완전해요.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어떤 언어를 구사를 하는게 이상적인 건지,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의사소통이 잘 돼는건지 나의 의식이 그나마 오류를 적게 하는 방향으로 상통할 수

있을 것인지 언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택할지 알 수가 없어요. 근데

인식이 됐건 언어가 됐건 무언가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것에 대한 상대개념으로 불완전하다라고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거죠. 이야기 자체가 이미

이분법적인 사고가 돼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이걸 극복한다고 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실 아무 말

안하고 있으면 이분법적인 최소한 대화는 부정한 꼴이 돼버리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발설의

반대의미인 침묵이라고 또 인정이 되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도 이항대립이

우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고 우리 스스로도 이항대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럴바에는 그걸 때어버릴 수 없을 때에는 그것을 포용하는 것이 대안이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이상으로 저의 생각을 마치겠습니다.

이준용 전산전자학부 이준용입니다. 이국운 교수님께서 저를 불러주신 이유가 제가

전산전자를 전공하니까 0과 1이라는 숫자로 이루어진 바이너리 로직을 가지고 그런 시스템을 다루기

때문에 저 사람은 아마 이분법론자일꺼야, 아마 그렇게 생각해서 부르신 것 같아요. 먼저 말씀을

드리면 그 디지털 로직과 여기서 말하는 이분법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바이너리 로직을 쓰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쓰는 것입니다. 0이나 1, 2 세개의 숫자로 엘쥐비알을 구성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공학에서 쓰는 시스템들이 Switching Theory에서 나온

것인데, On, Off 두 개의 Stage를 갖고 있습니다. 끊어지거나 연결되거나 둘 중에 하난데 그런 작동에

의해 동작하는 회로의 메커니즘이 0과 1로 이루어진 어떤 수학체계의 구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모델링하기 위해서 수학을 쓰는 것이지 이분법하고는 좀 다른 것 같고요.

사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조예가 많이 없어요. 아마 여기 오신 분들 중 제가 가장 문외한

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논의들이 많이 되어왔고 또 이런 자크 데리다 이런 분의 주장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제가 한 가지 그래도 좀 발견한 것이 있어서 그 부분을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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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87

하는건데, 전통적인 이분법론자들이나 이에 반대하는 어떤 다원주의자들이나 공통으로 범하고 있는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영역이나 특정사안에 적합할 법한 어떤 사유체계를

모든 사안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그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말은 이분법론자들도 마찬가지고 해체론자들도 동일하게 그런 가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그

부분의 논리의 비약이 너무 심하지 않나 하는 것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런 면에서 우리 신교수님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Fact를 추구하는 자연계의 원리나 사실의

진위여부를 추구하는 과학의 영역과 절대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의 영역과 어떤 예술의 영역과

사회과학의 영역은 그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어떤 특정 부분에서 이분법 혹은 다원주의가 말이

된다고 해서 다른 영역에서 동일하게 말이 된다는 것은 저는 논리의 비약이 너무 심하다고 보고요,

거기에 대해 우리가 다른 접근을 해야 하지 않나 그게 뭔지 이야기하기 전에 적어도 그 차이점은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출발이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크 데리다가 얘기 했던 이분법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예시로서 이런 것이 있습니다.

흑백을 대비 시키는게 단지 색의 차이 뿐만 아니라 선악의 개념과 결부가 많이 됩니다. 흑은 악이고

백은 선이고 그래서 White가 더 우월한 것이죠. 심지어 이것이 인종의 영역에 결부가 되어서 흑인과

백인, 영화를 보면 왠지 백인이 더 우월한 것 같고, 이런 부당한 억압기제가 이분법에 스며들고 있는

것을 고발하면서, 이런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이분법은 해체되어야 한다 이런 주장으로 가고

있는데 이 예시에서의 문제는 평등하게 취급 되어야하는 인종의 문제에 부당한 억압기제를 포함하고

있는 이분법적 사고를 들이대고 있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인종은 평등하고 이분법적인 사고를

들이대면 안되는 영역입니다. 근데 거기에 어떤 우월하고 열등한 개념을 가진 이분법을 들이댄 것이

문제의 시발이었고요.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이런 해체주의를 다른 쪽에 모두 일반화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보고요.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자연계를 공부하는 과학은 끊임없이 진위를 추구합니다. 어떤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사실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려고 애씁니다. 당연히 거기서는 사실이 우월한

것이고 거짓은 열등한 것입니다. 과학에서 그것은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에요. 사실이거나 거짓이지

둘 다 아닌 것은 잘 없습니다. 수학적인 논리도 수학적으로 참이거나 거짓 둘 중에 하나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이런 것은 없습니다. 명확한 논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해체주의적, 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무리 입니다.

마찬가지로 절대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의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기독교는

이분법적인 논리가 가장 많은 종교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다원주의론자들이 제일 많이 공격하는

종교가 기독교이구요. 성경 안에는 선과 악 천국과 지옥, 참 신과 거짓 신, 분명하게 나누고 여기에는

억압기제 정도가 아니라 나머지 한편은 대놓고 범죄시 해버립니다. 그런 논리들로 가득 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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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그럼 이런 논리들을 이분법적이기 때문에 다 해체 시켜야되냐, 이것은 절대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제시하는 명제들이 참이냐 거짓이냐가 문제 인거죠. 내가 그걸

믿어지는지 믿어지는 사람은 믿고 안 믿어지는 사람은 안 믿겠지만, 그게 참이면 참이고 거짓이면

거짓이지 그 거짓인 근거로 이분법적인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죠. 이건 사안이 그런 것이 아닌거죠. 그래서 이런 부분들, 종교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고요, 뭐 다른 것도 많습니다.

반대로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이분법적 논리에 너무 익숙해져서 적절치 않은

이분법적인 논리를 다른 영역에 들이대는 잘못을 범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술의 영역은 객관적인

실체보다 주관적인 느낌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고요, 어떤 절대적인 가치보다는 상대적인 가치가

더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예술과 문학과 음악의 영역에 이분법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적절치

않겠죠. 그러면 종교와 신앙 안에는 모두가 이분법적인 접근이 맞는거냐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우리

신앙 안에도 극단적인 잘못된 이분법적인 접근이 많이 있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저는

엔지니어기 때문에 가끔 그런 질문들을 합니다. 엔지니어링이 과학기술이 선이냐 악이냐 그런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마 엔지니어들은 엔지니어링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잘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어떤 사람들은 과학 기술은 엔지니어링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높아지기

위해 쌓은 바벨탑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굉장히 애기하지 힘들어요.

제 개인적 의견은 엔지니어링은 가치중립적인 부분에 있다고 봐요. 그걸 선하게 쓰느냐 악하게

쓰느냐에 따라 선도 될 수 있고 악도 될 수 있고 과학 기술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중립적인 영역인 것 같아요. 엔지니어링만 그런 것이 아니고요 사회과학도 마찬가지고요 심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리학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심리학을 전공으로 삼는 학생이 내가 심리학을 전공해서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서 사람을 돌보는 일에 하나님을 위해서 잘 쓰겠다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이 학생이 어떤 날 교회를 갔더니 목사님께서 심리학은

인본주의적이에요 비성경적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학생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학생 공부

계속해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비성경적이라는데. 심리학도 몰라요, 인본주의적인 부분도 많이

있겠지만 저는 사회과학도 상당히 중립적인 영역에 있다고 봅니다. 근데 이분법에 익숙한 우리

크리스천들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립적인 영역의 존재자체를 인정하는 것을 굉장히 불평해해요.

이거 뭐 하나님 것도 아니고 세상 것도 아닌거 뭐냐, 굉장히 불편해해요. 그래서 자꾸 적절하지 않는

영역에다가 이분법적인 논리를 자꾸 잘못 들이대는 그런 오류를 우리가 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본의 아니게 양비론적인 입장에 서는 것 같아서 죄송하긴 한데 일단 출발은 영역과 사안에 따라서

적절한 사유체계의 구조는 어떤 것이 적절한지는 부분에 따라서 고민을 해봐야되고 그거를

취사선택을 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되지 않을까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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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89

곽진환 안녕하십니까. 생명과학부 곽진환입니다. 제가 유죄냐 무죄냐 이 말이 부담이 되어서

이국운 교수님께 어제 전화를 걸어서, 법정에서 한다던데, 유죄냐 무죄냐 말해야되냐 물었더니 안해도

된데요 그래서 제가 좀 안심을 하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가 최근에 고가의 디지털 카메라를 샀습니다. 사진을 좀 배워보려고 책도 좀 읽다 보니

대학원생이 책을 권해주더라고요.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요새 디지털 카메라는 굉장히

성능이 좋아서 해상도도 높고 픽셀수도 높아서 거의 아날로그에 필적할 만큼, 아까 0,1은 아날로그가

아니라 했지만 어쨌든 0,1을 디지털 도구를 이용해서, 연속적인 것을 디지털화하면서도 거의

아날로그에 버금가는 그런 기술을 갖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아는 많은 작가들은 아직도 필름

카메라를 선호하고 또, 그것만이 진짜 작품이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제가 그림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빛입니다. 사실 빛의 파장은 10의 -4승부터 10의 18승까지,

동그라미가 열두 개입니다. 아주 다양한 파장으로 섞여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눈이 보는 파장은 약

400에서 700정도, 그러니까 엄청 넓은 곳에서 점 같은 부분만을 우리가 인식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도 여러분 연속체로 존재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항대립은 싫든 좋든 우리가 우리를 이해하는데

필연적인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쨌건 이분법으로 우리가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데 그러나 오늘날의 이

복잡하고 다양한 문명과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이항대립체계로서는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죠. 남자와 여자처럼 중간 항이 없는 그런 부분도 있지만 가령 흑과 백, 흑 백 사이에는

분명 회색지대가 존재하죠. 또 수직과 수평 사이에는 대각선이 존재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관념론과 경험론을 예를 들어도, 플라톤의 관념은 동그라미나 삼각형 같은

개념들은 이미 우리 인간정신에 내재되어있다고 보는 것이 플라톤의 관념론이고 경험론은 우리가

이런 도형을 경험을 통해서 보면서 완벽한 원은 아니지만 원을 우리가 설명할 수 있게 된다하는 것이

경험론입니다. 이 두 가지는 철학의 중요한 주제인데, 근데 최근에 생명과학에서는 이 도형을 볼 때

어떻게 설명을 하느냐 하면 우리 망막에 있는 많은 세포들은 어떤 세포들은 수직에 반응하는

세포들이 있고 어떤 세포는 수평을 인식하는 그런 세포가 있고 어떤 세포는 대각선, 어떤 세포는

중심형태와 배경만을 인식하는 이런 것들이 복잡하게 작용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경험과 관념의 구조가 아니고 이 둘 사이에는 어디 중간쯤 되는 것에서는 이 신경계가 있어서

관념과 경험을 매개하는 것이라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몇 가지 제 전공과 관련된 이항대립적인 사례를 설명하고 왜 이것들이 이 사회를

문화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는가를 말씀 드리고, 어떤 대안이 가능한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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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2010년 가을학기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면서 기독교적 과학, 과학과 종교를 이야기하는데, 한

때는 과학과 종교에서 종교가 우위를 점한 적도 있었지만 데카르트 이후 과학이 종교의 우위를

점하고 대립의 구조를 갖고 왔습니다. 그렇지만 이 종교와 과학에 관해서는 여러분 알다시피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를 보면, 여러가지 모델들을 설명하고 있죠, 여러분 아는 갈등이론, 독립이론 통합이론

조합이론 이런 것들을 설명합니다. 과학과 종교를 설명할 때 갈등이론과 독립이론은 이항대립을

인정하는 것이죠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 통합이론이라고 얘기하는 이항대립이 아닌 이 둘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아인슈타인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을 했냐면,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고 과학이 없는 종교는 장님과 같다. 그러니까 이

두가지는 따로 대립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통합해서 보는 것이 올바르게 종교와 과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또 창조와 진화를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창조와 진화도 중요한 이항의

대립구조 가운데 있는데, 사실 최근의 많은 창조론자 가운데서, 저는 진화를 인정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많은 기독교에서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이 진화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종을

다양하게 만드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모든 생물체가 무생물로부터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만드시고 이 생명의 다양한 것은, 여기서 제가 말하는 것은 대진화 소진화,

여기서 말이 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하여튼 이런 유신론적 진화론을 통해서 이러한 대립을

극복해보려고 하는 것을 여러분 알 수 있습니다.

물리학에서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로 대변되는 양자역학과 뉴턴의 역학은 하나는

미시세계를 다루고 하나는 거시세계를 다루고 그런데 뉴턴의 역학은 미시세계에서는 적용될 수 가

없고 양자 역학은 거시세계에서 적용될 수가 없는 그런 한계를 갖습니다. 즉, 서로 상극의 관계를

가진 이항대립의 체계로서 하나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역설이고 모순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우리 인간을 설명할 때도 어떤 사람은 유전자결정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은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 사실 인간은 양자의 영향을 다 받거든요, 일란성 쌍둥이도 남 북한에서

20년 정도 떨어져있다 만나면 유전자는 동등한데 외모, 체형, 성격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만납니다.

그렇만 서로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부부지간은 정말 사랑이 깊어지면 우리 부부처럼 많이

닮아집니다. 즉 어느 한 가지 가지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공하는 생명과 물질의 세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현대 생물학이 발전하고 바이러스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많은 과학자들은 과연 생명이 뭘까라는 것에 대해서 혼란에 빠지게 됐습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바이러스는 단백질과 DNA 순수한 물질로 돼있거든요, 근데 이것이 살아있는

세포안에 들어가면 물질인 바이러스가 생명체로 바뀌게 됩니다. 이 물질과 생명 사이의 개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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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91

없어진거죠. 여러분 생명 현상을 이야기하는 가장 기본단위는 세포입니다. 살아있는 사람하고 죽음

사람하고는 적어도 세포 레벨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도 손톱이 자라고 머리카락이

자랍니다. 다시 말해 세포가 성장한다는 것이죠. 세포레벨에서는 생명의 기본단위가 세포인데, 근데 이

세포를 가지고 생명과 물질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생명과 물질의 이항대립도

우리는 이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고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이 연속선을 어떤 양극단을 이용해서

이분법으로 설명하는 것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고 이 이항대립들

중에서 그렇지만 양극단에서 시작됐지만 갈등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거죠.

제가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이어령 선생님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읽었는데,

일주일도 안되서 계속 도서관에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예약되어 있으니까 반납하라고요. 이어령씨가

쓰신 칼럼 중에 중간항의 문화라는 칼럼이 있습니다. 거기서 어떤 것을 다루고 있냐 하면, 서구사회는

주먹과 보의 이분법으로 되어있다는 것이죠. 그 분은 가위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가위는 주먹과

바위의 중간 항이라 볼 수 있죠. 주먹은 가위를 이기지만 가위는 보자기를 이기고 보자기는 또 주먹을

이김으로써 갈등구조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이항대립 가운데서 중간

항을 인식하게 될 때 많은 갈등구조가 해결될 것이라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분이 지으신 책 중에 또 디지로그라는 책이 있죠.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입니다. 이

분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모순과 대립을 해결하는 데에는 굉장히 탁월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데카르트의 이론적 사고에서는 항상 올라가고 내려가고 들어가고 나오고

이분법적 사고인데 한국의 경우에는 올라갈둥 말둥, 들락날락, 보일락말락, 먹는 둥 마는 둥 이런

표현을 통해서 이항대립의 구조를 벗어나서 이 두 가지 모두를 한꺼번에 표현해주는 이런 것들이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서구인들이 가질 수 없는 장점이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O냐 X냐 양자 선택을 강조받는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O나 X를 선택하게

되면은 그 사이에 중간항이 있다라는 것, 그리고 세상 모든 일에는 가운데는 없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다원화가 되어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이

복잡한 사회를 O나 X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항대립은 유죄냐 무죄냐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 사회는 이항대립, 0과1같은 디지털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중간지대가 있다는 거죠. 이런 회색지대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양극단을 이야기 하면 속된 말로 뽀대가 납니다. 그렇지만 중간항을 이야기하면 굉장히

비겁하고 변절자같고 회색같은 느낌이 들지만은 사실 경우에 따라서 중간에 설 수 있는 그런 용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항대립이 아니라 중간항이 존재할 때 우리 사회가 안정화되고 갈등은

균형과 조화 속에서 많은 해결의 여지를 갖게 되지를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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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운 이 모임을 준비하면서 같이 읽은 글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 중에 데리다에 관해서

김영현 선생님께서 쓰신 글들을 선생님들께서 보셨으면 좋겠다 싶어서 보내드렸는데, 그 글에

파르마콘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데리다가 말하고 있는 것을 표현해서 김영효 교수님께서 설명하고

계시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파르마 콘이라는 말이 독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약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는 말씀입니다. 곽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중간항이라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매개항인데요, 대립항을 매개할 수 있는 그 매개항의 존재가 단지 비유적으로만이

아니고 어쩌면 더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이디어, 이 파르마콘이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을 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약학박사님께서 약이 곧 독이다 라는 말씀을 하실 것을 많이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마치 철학 교수님이나 문학평론가처럼 말씀을 하셔서 제가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손화철 저는 철학 전공입니다만 제 세부전공은 기술철학입니다. 과학기술철학인데,

과학기술철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철학의 꽃은 형이상학입니다. 존재론을 하는 것이 진짜

철학이고 칸트 헤겔 이런 걸 해야지 진짜 철학이라고 할 수 있고, 과학기술철학은 응용철학이라고

해서 약간 좀 급이 떨어집니다.

주제가 이항대립이 이항대립이 유죄인가 무죄인가 하니까 얘기가 복잡해지는데, 형이상학의

주제일 수 밖에 없는데 이런 거에 대해서 제가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부담이 많이 됩니다. 왜 나는 철학전공을 해서 이럴때, 먼저 아까 물론 신교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제목에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철학에서 배우는 것은, 할말이 없을 때는

제목부터 까고 가라는 것입니다. 제가 비록 철학의 중심에는 못 가고 주위에서 왔다리 갔다리 하지만

그래도 주워들은 것이 있겠죠. 뭔가 좀 불리할 것 같으면 제목을 까라.

이 제목은 굉장히 심각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심각한데, 우리가 유죄이냐 무죄이냐 해서 두

가지 항을 놓고 있다. 질문 자체가 매우 이항대립적입니다. 강력한 판단을 요구하고, 이거 아니면 저거,

모 아니면 도 하나를 요구합니다.

또 하나는 제목이 단순합니다. 밑의 설명을 보면 결국은 서양철학에서의 이항대립체계 혹은

좀 더 나아가서는 서양근대철학에서의 이항대립의 체계가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이야기 해야될텐데

그냥 싸잡아서 이항대립체계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묻는 것이죠. 무지하게 단순합니다. 이게 이제

데리다가 심각하게, 많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비판하는 이항대립체계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유죄인가 무죄인가라고 이야기해서 가치판단을 유도합니다. 유죄는 죄가 있는

것이죠 잘못된 것입니다. 무죄는 죄가 없는 것이니까 괜찮은 거고. 근데 모든 이항대립체계가

가치판단을 내포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제목이 그렇게 단순한 제목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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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93

이국운 교수님이 모종의 음모를 가지고 제목을 이렇게 만드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중 웃음)

일단은 논의의 맥락을 좀 더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은데, 서양철학에서는 이원론이 계속해서

있어왔습니다. 서양근대철학에 와서는 그것이 점점 더 노골화되었습니다. 이성과 감성을 나누고

이성이 더 중요합니다. 몸과 정신이 있고 정신이 더 중요합니다. 인간과 자연이 있으면 인간이 더

우월합니다. 문명과 야만에선 문명이 더 우월합니다. 또 이 이분법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을 빼놓을 수

없겠죠. 그 다음에 그것에 대해서 이의가 제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왔는데,

그 이분법이 과연 정당한가 물어봅니다. 이항대립체계는 세상을 둘로 나누어서 보고, 그러니까 빛과

어두움으로 세상을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항대립체계가 항상 문제였는가.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를 들어서 여성과 남성간의 불평등의 문제, 아니면 인종차별의 문제 아니면

몸을 천대하는 문화가 분명히 있어왔고 최근에 와서 우리가 문제를 삼기 시작합니다. 또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항대립체계가 다 잘못되었다는

건가, 아니면 그건 옛날부터 문제가 있었는가, 아까 이준용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는데, 영역에 따라서

문제가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우리가 또 동양사상을 보면 아주 이분법적입니다. 음양사상이라 해서

모든 것을 음과 양으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항대립체계가 사실 동양에도 있는데 우리가 그것은 염두에 안 두고 이항대립체계라고 한 것이죠.

그러니까 제목이 잘못된거에요. (청중 웃음) 어떤 경우에는 이항대립체계로 설명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날로그 카메라에 집착이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지만 사실상 눈으로 더 감지할 수 없는 수준에서

디지털이 연속적인 것을 다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0과1로 표현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걸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래서 이제 문제는 이항대립체계는 언제 문제가 되는가, 왜 문제가 되는가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특별히 서양근대의 이항대립체계가 두 가지 정도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일단, 비교를 통해서 생각을 해봐야겠는데, 동양의 이항대립체계와 서양근대의

이항대립체계가 무엇이 다를까를 생각해보면, 동양의 이항대립체계는 설명을 위해서 굉장한 설명력을

가집니다. 거기에는 사실 평가가 누락되어있습니다. 평가가 없습니다. 음양의 조화의 문제이지 양은

좋고 음은 나쁘다 이게 아닙니다. 그리고 양과 음이 교차가 되어있습니다. 남자하고 여자가 각각 양과

음이죠, 그러나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보면 여기서 또 양인 장기가 있고 음인 장기가 있습니다.

여자에게도 양인 장기가 있고 남자에게도 음인 장기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양과 음이 이렇게

저렇게 지그재그로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굉장히 복잡한 것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설명력을 가집니다. 제 생각에는, 디지털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고를 잘 설명해 주셨는데, 이것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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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2010년 가을학기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마찬가지입니다.

이항대립체계를 자꾸 연결하면 무지 복잡한 세상이 설명이 됩니다. A와 B가 있으면 A는 또

A와 B로 나누어지고 B도 A,B로, 이렇게 밑으로 계속 내려가다 보면 밑에는 무수하게 많은 사태를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엄청난 설명력을 가질 수 있는 매우 체계적인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설명할 때에는 평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디지털 기기들에서 0은 좋고 1은

나쁘다, 스위치가 on은 좋고 off는 나쁘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죠, 그러나 기독교의 이항대립은 약간

다릅니다. 기독교의 이항대립은 거기에 가치평가가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마귀는 악하겠죠.

선과 악이 있고 옳음과 그름이 거기에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양의 이항체계하고

좀 다릅니다. 태생적으로 서양의 이항체계는 그 안에 불평등을 그 안에 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그 전에 조로아스터교도 있었고, 그 동네는 한 쪽으로 편을 드는 분위기로

이야기를 합니다. 조로아스터에서도 선이 이기니까요. 그러니까 본래 기독교에는 선과 악이 있고 그

이분법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다음에 그러면, 물론, 데리다 같은 사람은 그것부터가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두 개로 나눠서. 그러나 저는 비슷한 주장을 하이데거도 했는데. 저는 근대에 와서 이분법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데리다는 데카르트 전에는 안 나왔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즉 데리다

전에도 이분법이 있었지만 그 이분법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근대철학이 나왔기

때문에 근대철학에서 이항대립체계가 매우 극단화됐기 때문에, 그 폭력성이 절실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데리다 같은 사람이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근대의 이항대립체계와 중세의 이항대립체계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것도 제 생각입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초월을 부인하게 됩니다. 즉 신의 존재,

선의 담지자로서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자가 있는데 그 초월자의 존재를 근대에 와서는 부인하게 되죠.

그 자리에 사람이 들어가게 되죠. 그 다음부터는 동등하지 않은 이항에 한편에 사람이 서게 됩니다.

그 담에 이걸 둘로 나누어서 좋은 편에 백인 남성 지성을 놓고 불리한 쪽에 마이너스 흑인 여성을

놓죠. 그렇게 해서 세상을 둘로 나눠서 굉장히 폭력적인 행사를 하게 됩니다. 인간과 자연을 나눠서

자연에 대한 무제한적인 개발을 용인하게 됩니다. 그것이 대표적인 근대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 여기서 이제 서양근대가 주체의 문제가 굉장히 중요했다, 뭐 이런 얘기를 할 때, 아마

주체의 문제도 여기에 나올 것입니다. 데카르트에서 생각하는 내가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게

데카르트 철학의 초점이 되는데, 생각하는 나 내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신이 나오는 거거든요.

초월은 벗어난 거에요. 저는 초월이라고 이야기할 때 단순히 기독교의 신 하나님 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때의 초월은 나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하이데거는 경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이데거는 와 이게 뭐지 하는 경이의 감정이 근대 이전의 철학자들에게는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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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95

말합니다. 그 경이의 감정, 나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 초월, 신비로운 것에 대한 감흥이 없어지고

세상을 둘로 나누어 보고 그러나 기독교에서 무엇은 끌고 왔을까요, 옳고 그름은 가져온 거에요.

옳음을 담지하던 신은 빠지고 옳음은 끌고 와서 이항대립체계 안에 넣어놓고 가치판단을 하니까 이제,

폭력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게 아마 자 여기서 이제 평가의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이항대립체계의

평가가 들어가게 되는데, 평가에서 초월이 빠졌습니다. 그게 서양 이원론적 체계의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아까 이항대립체계는 매우 설명력이 좋다고 그랬는데 서양근대철학에서는 이게

단순화가 됩니다. 아까, 세상의 복잡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대충 둘로 나누어 보자, 그 다음에 또

둘로 나누어보고, 밑으로 쭉 가서 설명을 하려는 이항대립체계가 있는가 하면 다양한 현상을 보고 이

걸 그냥 뭉게는 방식의 상향식 이원체계가 있습니다. 세상을 그냥 둘로 나눠서 보자. 복잡한데, 그냥

둘로 뚝뚝 나누어서 얘네들 다 똑같다고 쳐, 자꾸 합쳐나갑니다. 내려가는 방식이 있고 올라가는

방식이 있습니다. 헤겔이 아마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겔은 이 복잡한 세상을 이렇게

저렇게 엮어서 결국엔 마지막엔 두 개도 하나로 합쳐집니다. 세상이 점점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상향식 이항체계라고 제가 이름 붙였습니다. 하나는 설명을 위한 것 다른 건

단순화를 위한 것. 서양의 철학은 이항대립을 통해서 차이를 극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뭉게버리는 방식의 이항대립체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게 서양철학의 폭력성을 유발하게 된

것 같습니다. 뭉겐다는 것은 신비, 초월의 영역까지도 뭉게버리는 그런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리고 싶었던 것은 이항대립체계가 언제 문제가 되는가를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설명을 위한 이항대립체계가 아니라 뭉게는 것, 단순화를 위한

이항대립체계일 때 이항대립은 문제가 있다, 유죄가 되는 것 같습니다. 또, 평가의 요소가

이항대립체계에 포함될 때 이항대립체계가 폭력성을 가집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항대립체계 자체는

근거가 없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근대에 와서 이항대립체계가 강력하게 나오면서 힘을 발휘했는데,

설명력 영역에서 굉장히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과학기술이 엄청나게 발달을 했습니다. 차곡차곡

분석해나가는 힘을 가지고 정당성을 확보한 다음에 그걸 다른 영역에 갖고 가서 다 적용을 하려고

합니다. 과학에서, 획득한 정당성은 다른 영역에 가서 모든 걸 다 이항으로 설명하려고 하고 거기다가

과학에는 없는 평가적인 요소를 넣어서 이건 맞고 이건 틀렸어 이렇게 이야기 하기를 좋아합니다.

복잡하고 미묘한 세상을 간단하게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제 수업을 듣다가 교수님은

맨날 잘 생각해봐야 된다고,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고, 미묘한 거라고 도대체 답은 이야기하지

않고 맨날, 결국은 수업시간에 끝나는 말이 똑같다는 거에요. 단순하지 않아. 그게 싫은 거에요.

그래서 답이 뭐에요, 어떻게 하라는 거에요? 한 큐로 딱 옳고 그른 것을 끝을 보자는 거죠.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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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2010년 가을학기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자, 이항대립체계를 하향식으로 하면 점점 이게 복잡해집니다. 두 개가 있는데 그 하나를

다시 보면 두개로 나눠져 또 다시 나눠져, 계속 나눠지는데, 세상은 굉장히 복잡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디지털카메라가 현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현상을 잘 이해하는 체계적인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근데 이걸 자꾸 뭉게 버리려고 하면 데리다가 지적했던 폭력성을 띠게 되는

안 좋은 종류의 이항대립체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국운 마지막에 결국 우리 철학자께서 이항대립을 좋은 이항대립과 안 좋은 이항대립으로

나누셨습니다. 디지털카메라가 많이 발전해서 아날로그카메라와 거의 같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 두

개를 동일시 할 수 있는 근거가 괴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디카가 그렇게 발전했다는 말은

동시에 조작과 복사가 가능해졌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얘기해두고 싶습니다. 네 분 말씀을

들어보니 2:2 정도로 유죄 무죄가 갈려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통박을 하셨기 때문에 이 콜로키움의 제목을 이따위로 만든 제 변명을 조금

드리고 다시 교수님들에게 마이크를 드려야겠습니다. 물론 저에게 존경하는 교수님들의 말씀을 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듣게 하기 위해서 아주 강력한 광고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 이항대립으로 만든

혐의가 있고요, 일부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죠. 조금 더

근본적으로는 법률을 공부하는 제가 이항대립의 문제를 보는 것에, 조금 다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많은 교수님들께서는 거의 대부분 다 이항대립이라고 하는 것이 인식의, 공부의

차원에서 상당히 도움이 되고 그걸 실천의 문제에 끌어들일 때는 조심을 해야 된다, 이런 식으로

저에게는 들렸는데요, 저희가 공부하는 법률은 좀 방향이 정반대로 다릅니다.

저희는 사실 인식의 차원에서 뭐가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 그렇게 큰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면 그런 문제로는 사건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변호사를 그런 문제를 갖고 찾지

않습니다. 문제는 누가 표절을 했다던지, 학회자리에서 싸움이 났다던지, 학회장 선거하다가 문제가

생겼다든지 하는, 실천의 문제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 누가 말하는 대로 세상이 구성 되어야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법률가들이 드디어 나서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사용하는 이항대립은

합법 불법, 유죄 무죄 하는 이항대립은 근본적으로 갈등을 전제합니다. 이미 벌어진 갈등을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 유감스럽게도 법률이 동서양 막론하고 지금까지 발전시켜온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이 실천적 이항대립을 더 극단화시키는 것입니다. 매개항을 없애고 중간지대를

없애고 두 입장을 극단적으로 대변하는 두 명의 변호사를 세우는 것입니다. 마치 거짓말 경연을

하듯이 이항대립은 유죄라고 이항대립은 무죄라고 주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법률은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결정하는 것이 그 이야기를 듣지 않고 결정하는 것보다 사태를 수습할 때,

법률 하는 사람들의 용어로는,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 조금 더 가까운 방법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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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97

있습니다. 제가 이 모임의 제목을 유죄냐 무죄냐 이렇게 잡은 이유는 단지 마케팅의 차원에서만은

아니고 이항대립의 문제를 바라보는 법률 공부하는 사람의 독특한 고민이 있다는 사실을 좀

알아주시면 박수 한 번 주십시오.

교수님들 한번씩 말씀하셨는데요, 대체로 먼저 말씀하신 분이 대단히 불리합니다. 신교수님,

이교수님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시면 좀 더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교수님들 별다른 말씀이 없으시면

이제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질문을 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논평도 좋습니다. 나윤숙

교수님께서 손을 드셨습니다.

나윤숙 정말 재미 있게 잘 들었고요, 저보고 페미니스트라고 하셨는데 갑자기 왜 이런

예문밖에 생각이 나지 않을까요. 프랑스의 시몬 드 버바라 여사께서 이항대립체계의 남성적

여성적이라고 나뉘어지는 것에서 남성적이라고 분류된 여러 성질들의 우월적인 가치가 부여됨으로써

생긴 부당한 차별에 억울한 생각이 드신 고로, 여자는 과연 여자로 태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여자로 길들여지는 것인가라는 이항대립적인 질문을 하신 적이 있어요. 질문자의 마음

속에 이미 답이 있는 질문이죠. 여자는 결코 여자로 열등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이항대립체계적인,

남성우월적인 체제 속에서 하등한 여자로 간주되어지고 길들여지는 것이라는 대답이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인데, 이 콜로키움의 질문, 이항대립체계가 유죄인가 무죄인가 잖아요, 포스터를 본 독자의

입장에서 뭔가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은 이항대립체계가 유죄다라고 이미 전제하는 듯한 일방적인

느낌을 받았어요. 유죄라고 전제하고 있거나 아니면 유죄로 인도해서 뜨거운 토론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강항 열망이 느껴지는 질문인 거에요.

근데 신순철 교수님께서 이항대립체계는 무죄다 라고 쾅, 폭탄을 떨어뜨리셨는데, 인간의

존재가 이항대립체계를 원천적으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항대립체계는 무죄다, 제 이해로는

거기까지 밖에 안된 거에요, 교수님 얘기를 들으면서, 조금 더 이항이 무죄다라고 과감히

선포해주셨으니까, 조금 경험론적이랄까 구체적인 차원에서 문제에 관한 변론을 이국운 교수님 구미에

맞게 해주시면 듣는 청중들도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꼭 법학적이라기 보다는 무죄라는 변론을 좀 더

실증적으로 해주신다던지,

그리고 이준용 교수님께는 정말 초보적인 질문을 드릴 건데요, 아날로그 디지털 설명을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한데요. 도대체 0,1로 모든 것이 작동된다는 것이 공학적으로 어떤

원리이며 어떤 기능이 있고 효과가 있는지를 저희 수준에 맞게 설명해주실 수 없는지 여쭤봅니다.

나머지 두 분 교수님께는 이항대립체계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말고, 이항은 왜 대립하는가, 이런

질문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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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2010년 가을학기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신순철 제가 먼저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저는 처음에 이 제목이 낚시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낚시네요. 저 혼자만 순진하게 정말 유죄일까 무죄일까 고민했네요. 근데 전 이것을 생각할

때 정말로 이 틀 안에서 생각하기로 하고 생각했습니다. 유죄냐 무죄냐를 판가름해야 한다는 그 틀

안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틀 안에 들어와서 이것을 얘기하는 것이지 이분법적 사고 자체에 대한

당위론 적인 논의나 이런 것을 하기위해 발제를 준비하지 않았거든요. 이미 이항대립적인 사고 틀

안에 그런 줄 알면서도 상당부분 저 스스로를 포섭시키고 이 안으로 들어온 것이지, 아 낚시니까

조심해야 되는거 아닌가 라든가 낚시의 견고한 틀을 깨버릴까 뭐 이런 불순한 생각 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보다 굉장히 체제순응적인 사람입니다. (청중 웃음)

제가 법을 전공한 사람은 전혀 아닌데요. 이국운 선생님도 말씀 드렸다시피 법리가 큰

대문자 T를 쓰는 Truth를 추구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작은 티자를 쓰는 truth를 추구하는

학문이거든요. 제가 이항대립에 대해서 얘기한 게, 큰 티를 쓰는 초월적 진리로서의 이항대립체계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게 맞는지 안 맞는지 잘 모르겠으나, 우리가

이항대립에 대해서 유죄라고 생각하는 것이 작은 티로써의 진실된 입장이냐 무죄라고 하는 것이

진실이냐, 둘 다다 작은 티, 그런 차원에서 얘기를 하고자 했었고요, 실제로 정말로 초월적인 당위론

이런 것으로서 어떤 것인지에 대해선 저도 사실 정말 궁금합니다. 이항대립체계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지금도 고민을 하고 있고, 제가 말씀 드렸듯이 이미 상당 부분 내가 이항대립에 노예가

되어있는 부분에서 나 스스로를 내가 해방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내가 해방됐다고 얘기하는 거

자체가 해방과 해방 아닌, 제 2라운드로 들어가놓고, 마치 내가 해방된 것처럼 이항대립을 극복한 양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난 이항대립적 사고를 많이 하고 있다 라고

얘기를 하는게 오히려 더 가능성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었던 거구요.

존재론적으로 세상이 이항대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물질이던 비물질이던. 전 거기에

대해서 모릅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그게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상당부분 이항대립적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심지어 이항대립을 극복해야 된다는 말 자체가 이미 이항대립적인 논의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논의가 돼버렸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지 형식적으로 모순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고요. 그리고 제가 무죄를 선고했지만 그게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위론적으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당위론적으로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Truth가 되는 것이고요.

무죄라는 것은 그것을 우리가 비난할 자격이 없거나 유죄임을 입증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무죄라고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서 한 것이지, 제가 당위론적으로, 존재론적으로 거대한 의미에서 무죄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요. 따라서 제가 말한 무죄는 바람직하고 이상적이고 추구할 만하고 그렇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후도 또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결국 이항대립적인 것이죠. 무죄는 바람직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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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99

거야 아니야? 거기에 대해서 니 입장은 뭐야? 라는 질문자체가 얼마나 이미 이항대립적입니까. 그래서

이항대립에 대해서 어떤 문제를 제기해도 계속 그 안에서 맴돌고 있는게 아니냐 그러면 우리의

언어나 사고 자체가 이미, 그게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이항대립적으로 너무나

견고하게 틀 지어져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스스로를 완벽히 해방하기에 너무 어려울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이상입니다.

이준용 질문해주신 나 교수님 감사드리고요, 제가 아까 발제를 시작할 때 말씀을 드렸는데,

저는 정말 제가 전자공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0,1을 가지고 일을 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이분법자로

보이는 게 너무 싫어서, 나 교수님께서 또 디지털과 아날로그 설명을 해달라고 하셔서, (청중 웃음)

자꾸 그 쪽으로 질문을 하셔서, 좀 그렇긴 하지만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제가 이분법에 대한

유죄냐 무죄 한 쪽에 치우쳐 서면, 한 편에 서면 공격을 받을까봐 양비론 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이국운 교수님께서 저를 무죄 쪽으로 분류를 하셔서 거기에 대해서 좀 부연설명을 하겠습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라는 것은, 쉽게 얘기하면,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쉽게

얘기하면, 여러분 키가 얼마에요 라고 묻는다면 저는 173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제 키가 정말

173일까요? 사실은 173과 174 어딘가 중간쯤 있을 거에요. 제 키, 길이라는 양은 연속적인 것이기

때문에 딱 떨어진 숫자로 절대로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숫자로 굳이 얘기하면 173,xxxxxxx….영원히

가야 합니다. 그게 아날로그고요. 173입니다, 173.5라고 말하는 것은 디지털화한 것입니다. 그것을

잘라서 몇 등분을 해서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골라준 것 입니다. 그게 디지털이고요. 0,1을 쓰는 것은

여기가 우리가 잘라준 레벨의 개수가 두 개면 0,1 둘 중에 하나로 쓰면 되고요, 네 개면은 0,1 두

자리를 씁니다. 0001, 1011등을 써서 네 개의 레벨을 나타내고, 이진수를 3개를 쓰면 8자리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디카에서 가장 해상도가 높을수록 거기에서 사용되는 넘버, 0,1의 자릿수가

늘어납니다. 그게 아주 크게 나타나면 숫자간의 차이가 굉장히 작아져서, 즉 우리가 등분해주는게

아주 작아져서 거의 연속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죠. 그것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제가 한가지 보충설명을 하고 싶은 것은, 허용 가능한 이분법과 문제가 되는

이분법에 대해서 손교수님 말씀하실 때에 어떤 체계를 설명하기 위한 이분법은 가능한 것이고 잘

쓰이는 것이지만 거기에 가치평가가 들어가게 되면 문제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그런 취지로 제가

이해를 했고요. 저도 거기에 동감을 합니다. 동감을 하는데 조금 거기에 부연을 하자면, 그 가치

평가가 부당한 가치평가가 들어갈 때 문제가 된다고 얘기를 드리고 싶어요. 가치평가가 들어가는 모든

이항대립이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치 중에 어떤 선과 악이라든지 한 쪽에 치우친

가치를 포함한 사안들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가치기준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면,

신도 없고 종교도 없고, 윤리도 없다면 그런 전제하에서는 어떠한 가치평가가 들어가면 그것은

부당하겠죠. 그러나 누군가 어떤 믿는 종교가 있다든지, 신뢰하는 윤리가 있다든지 그런 규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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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2010년 가을학기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존재한다면 그런 체제 안에서는 가치평가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부연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국운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질문하거나 코멘트 하실 분 있으면 몇 분 더 듣고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학생 1 저는 07학번 법학부 손재연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수학문제를 풀다가 확률문제가

나왔는데 주사위를 던져서 1이 나올 확률이 뭐냐고 물어보길래 1/2이라고 대답했거든요. 1이 나오거나

1이 안나오거나, 이렇게 1/2라고 대답을 했는데, 너무 자신 있었는데 틀린 거에요. 그래서 3년 내내

고민하다가 문과로 바꿨어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이항대립의 체계를 너무 가지고 있었거든요.

저는 계속해서 이항대립을 이렇게 변호하고 싶은 입장인데, 사실 한번 더 높게 생각을 하면, 이게

1/2냐를 떠나서, 확률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던 것 같아요. 왜냐면 제가 기준을 잘못 1에다가

두었기 때문에 그게 이항대립의 파괴성으로 가는 것 같은데, 그 기준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이항대립으로서 또 한 차원 높은 문제로 가는 것 같아요. 왜냐면 확률에서 1/n로 측정했을 때 n이

여러 범위가 있잖아요, n이 1-6까지 있다면 1/1이든지 1/6이든지 이렇게 가는데, n이 0이 아닌 경우에

있는 거잖아요, 근데 n이 0이 되어버리면 그게 무한해 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체계가 없어지잖아요.

그 말은 저한테는 곧 기준이 없어진다는 말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1/n이 n이

0일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 들었어요. 그래서 이항대립체계가 물론 파괴성으로 갈 수 있는

확률이 있지만 n이 0으로 되는 그 무한성의 범위가 되어버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더욱 더 문제가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면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이항대립체계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체계가

없음에 따라서 오는 대립이 없는 그냥 무한한 항이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과연 이런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무한항의 논리 아닌 체계 없는 대립 없는 무한항으로써 이항대립체계를 반박할

수 있는지 갈등이 되었습니다.

이국운 결국 무한항이 가능한가, 하는 무한항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렇다고 이항대립이

살아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뭐 부연이 있습니까?

학생 1 그리고 그거에 대한 대안으로서 곽교수님이 매개항을 말씀하셨는데 매개항은 흑과

백이 있으면 회색이 있는거잖아요, 근데 그 회색이 과연 흑과 백 없이 존재할 수 있느냐 이것도

질문입니다. 매개항 역시 이항대립 속에 갇혀진 한 가지일 뿐이지 그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 2 02학번 국제어문학부 김상범입니다. 저는 유죄를 말씀하셨던 손교수님이나

곽교수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 전 처음에 포스터 주제를 보면서, 사실 막스 베버가 저술했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나왔던 칼뱅이 구원을 받았는가 아닌가 사이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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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101

고민했었던 모습, 그러니까 구원과 구원받지 않음 두 극단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칼뱅의 모습을

봤었는데, 사실 이게 자신의 생존, 혹은 극단적으로 가지 않고 중간에 있으면 참 좋다라고 얘기하면

좋은 거지만, 이건 생존의 문제다, 아주 극단적으로 유죄, 구원받았음이냐 안받았음이냐 라고 몰아갈

때는 그거 그냥 중간에 있는게 좋지 않겠느냐 혹은 뒤로 좀 물러서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건 너무

폭력적이다라고 얘기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설명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우리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이 다 같이 살고 있지만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굉장히 비기독교인적 삶을 살고 있고,

기독교인적 삶을 살고 있다고 평가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일단 너는 기독교인이냐

비기독인이냐 라는 나눔 가운데 우리가 평가를 하는 것이지, 비기독인이면서 기독교적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 사람 참 기독교적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 사람은 일단 비기독교인이라는 틀

가운데서 사고를 하는 것처럼, 우리가 가장 첫 발을 내딛는 것은 결국 두 항을 선택하고 난 다음에

주어지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서, 너무 뒤로 물러선 입장 아닌가, 극단적으로 우리가 생존의 문제로

밀어붙였을 땐 그 두 개를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거라고 부정하신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반론을

해주실 지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이국운 교수님들끼리 무마를 해보려고 했는데, 지금 아주 무서운 질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자, 한 두 개만 더 받아보죠.

학생 3 언론정보 김상헌입니다. 이런 질문들이 계속 나오는데 이런 질문들에 대해선, 확실히

제목이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신교수님의 팬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국 다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상황과 특수성이라든가 이항대립이라는 하나의 기준이라는

것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잘 판단을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그 상황에 대한

판단을 하려면 솔직히 어느 정도의 통찰력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면 그 통찰력에

이르기까지 공부를 하고,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이항대립의

순간들이라던가 가치판단의 수간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과연 어떻게 대처를 해야 되는 것인지

손교수님의 개인적인 의견을 듣고 싶고요. 그리고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말했던 사르트르의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르트르는 그렇게 말을 했었죠. 문학가들은 모든

부정에 항거해야 한다고, 그런 식의 가치판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사르트르는 어쨌거나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서

거기에 물론 주체가 많이 들어있긴 하나, 도덕적 판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던 사르트르의 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학생 4 10학번 이재우입니다.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좀 지엽적인 부분인데요, 아까

손교수님께서 원래 서양의 이항대립체계는 항상 불평등이나 가치평가를 내재하고 있다고 하셨고, 근대

이전에는 초월 신비의 영역을 사람이 대신하면서 지금처럼 굉장히 심화된 이항대립체계가 나타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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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2010년 가을학기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말씀하셨는데, 중세 때도 보면 마찬가지로 심각한 이항대립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거든요. 예를 들면

그전에는 분명히 하나님이라는 초월자를 믿고 전제해놓고 있었지만 중세시대의 십자군 전쟁이라던가,

아니면 마녀사냥이라던가, 마녀사냥은 여성들에 대한 이항대립에서 뭉게버리는 이런 현상이었고

십자군 전쟁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 오히려 초월자를 사용해서 이렇게 이항대립체계를 심화시킨 것

같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질문드립니다.

손화철 : 형이상학 이야기 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이런 자리 나오면 끝까지 우기는

게 중요합니다. 제목은 이미 쳤고 끝까지 우기는 게 중요합니다. 분수 얘기부터 해봅시다. 우선 우리가

포스트모던이 어떻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단순화의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준을 다 없애버렸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생각에는 좀 억울할 것 같습니다. 데리다가 최근에 죽었으니까 컴퓨터로

글을 쓰고, 과학기술과 문명의 이기들을 어느 정도 이용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이항대립체계 전체를 다 허물자라는 것이 해체주의가 아닐 거에요.

아마도. 해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모를 0으로 만들었다,

0으로 만드는 게 좋냐 라고 이야기 한다면 사실은 굉장히 좋은 설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보느게.

그러나 과연 그게 우리가 그렇게 해서 넘어갈 수 있는 문제냐. 이항대립체계가 좋거나 안좋거나 자꾸

이야기를 하게 되고, 저는 이항대립체계가 내포하고 있는 폭력성에 대해 우리가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폭력성이 더 부각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그것에 대해서 좀

더 우리가 sympathetic 할 필요가 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단순히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싸잡아서

0이라고 했다, 윤리적 사회주의자다라고, 간단하게, 아까 사르트르 얘기도 했는데, 사르트르는 모든

선악의 구분 자체를 하지 않겠다, 라고 선포한 사람들의 부류에 들어간다. 세상에는 윤리적 기준이

있다는 사람과 없다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중에 사르트르는 이쪽에 들어가 있으니까 애당초

옳다 그르다라는 말을 하질 말았어야 했는데, 왜 했냐, 이렇게 되는 거거든든요. 이거는 전 사실 뭐

그렇게 해야지 우리가 토론이 되는 것이긴 한데, 저는 항상 질문이 버겁습니다.

질문에 대해서 두 가지 말을 한꺼번에 할 수 밖에 없는데, 이항대립적이지 않게, 그 질문은

맞기도 하고 약간 불공평하기도 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으로 딱 나눌 수 있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구원 받았냐, 안 받았냐, 기독교의 진리는

그 사람이 교회의 명부에 이름 올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은 옛날부터 알려진

사실입니다. 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원론의

폭력성이라는 것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을 내가 알 수 있는 것처럼 했을 때, 사람이 신의 자리에

올라갔을 때 시작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교회 명부를 가지고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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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103

못한 사람을 나누려고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세 때 일어났던 폭력은 초월을 인정하는 시대였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욕심이 신의 자리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의 자리에 나를 올려놨을 때, 폭력성이

드러납니다. 근대가 중세보다 더 심각하다고 하는 것은 근대는 구조적으로 신의 자리, 초월의 자리를

배제했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중세에는 실제적으로는 일어났지만 이론상에서는

없었습니다.

신순철 제게 제기된 질문은 아니지만 저 학생의 질문이 재미있어서 잠시 제 생각을 말씀

드리면, 포스트모던이라는 것이 기존의 체계를 와해시키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물었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와해된 다음에 무의 체계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체계가 있는 것이죠. 체계의 공백상태는 없습니다. 이 우주의 어느 곳에도 체계의

공백 상태는 없고 무질서는 없죠. 무질서라고 우리가 이름 붙인 상태는 복잡성이 고도화 되다 보니까

우리가 그 복잡성의 원리를 잘 이해를 못해서 그냥 함부로 붙여 버린거지 무질서란 상태는 없습니다.

우리가 모를 뿐이죠. 모르니까 질서가 없는 양 이분법적으로 붙여버린 겁니다.

근데 그렇게 얘기하면 이해가 편한데 이건 우리가 이해 못하는 고도의 어떤 복잡화된

질서일거야 라고 이야기를 하면 사실은 그게 존재론적으로 맞는 이야긴데,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것이죠. 그리고 포스트모던이라는 게 그 자체가 저는 그 안에 정말 새로운 게 있는가 라고 했을 때

별로 새로운 것은 없거든요. 항상 그런 사람들은 있었어요. 체재에 반항적인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포스트모던이라는 말, 자체가 뒤에, 후기, 탈출 이런 뜻인데 우리가 여기서

탈출해서 이상향으로 가자 이 얼마나 이분법적인 사고입니까. 그리고 이것은 항상 권력을 낳거든요.

데리다가 그토록 싫어했던 권력이란 것이 그 안에 고스란히 있어요. 그리고 이게 탈근대인데,

근대에서 탈출해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근대는 모든 적의 총 종합선물세트고,

우리는 아주 순결한 어딘가로 가야 한다는데, 그게 어딘지도 잘 모르겠고, 그게 어디라고 할지언정

여전히 매우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권력의 담지자로써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아니지 않았겠는가.

차라리 그러느니, 근대로 근대를 극복하자는, 이성으로 이성을 극복하자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습니까? 이성을 부정함으로써 이성을 극복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이성적인 행위입니다. 이성이

없으면 그런 생각을 하기 어렵거든요. 역설적으로 항상 이성을 증명해 온 것이죠.

이국운 한동대학교니까 해봐야 되는 질문을 좀 꺼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그냥

근대, 데리다를 갖고 이항대립 얘기를 해왔는데, 많은 선생님들께서 기독교가 어쨌든 이항대립을

전제로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아직 그 증명은 없습니다. 적어도 오늘

토론에서는. 이항대립체계에 대해서 그것이 근대적인 것을 말하든 보편적인 것을 말하든, 동양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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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2010년 가을학기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포함하든 아니든, 인식에 관한 것이든, 아니든, 나누든, 다 포함하든 간에 도대체 기독교인으로서

이항대립체계에 관해서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 얘기를, 기왕에 시작하는 게 속이 시원하지 않을까.

얘기를 하는 것이 속이 시원하기보다 가슴이 아플 수도 있는데, 제가 그 발문에다 쓴 대로 하면 그저

방법론으로서 이항대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제로써 존재론으로써, 선과 악 거룩한 것과

저주받을 것 이렇게 나누는 것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아까 우리 손교수님께서 잠깐

말씀하셨습니다만, 우리는 city upon the hill 에 살고 우리가 지리적으로 좀 그렇죠, 저 아래 것들 것

거시기하다 이렇게 하는. 글쎄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또 그리스도인이면서 지성인들의 삶의

방식이나 세상에 대한 태도 등에서 이 이항대립체계의 문제는 어떻게 의미 지어져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져봅니다. 선생님들께서 말씀하셔도 좋고, 학생들이 이야기해도 좋고, 혹시 제 질문에 구애

받지 마시고 기탄 없이 털어놓아 주십시오.

학생 5 저는 국제어문학부 김상범입니다. 법정의 변론적인 모습이어서, 말씀하신 손교수님의

변론에 다시 한 번 변론을 드리고자 말씀을 드립니다. 구원의 영역이 하나님이 하나님이 판단하실 수

있는 영역이니, 그것을 취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라고 하는 것은, 역시 저에게 들리기에는 그 실존의

문제까지 다 가지 않은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존 칼뱅이 왜 그 사이에서 힘들게

고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과 구원 아님을 내놓았으며 그 사이에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느냐 생각해보면 구원받았다 받지 않았다라는 것을 던져두어야 하는, 그건 신의 영역이니까

우리는 모르는거야 하고 넘어갈 수 없는,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이야기해주어야만 하는,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좀 더 손화철 교수님을 몰아가는 입장인데, 그래서

신이 없다, 신의 자리를 우리가 취한다라는 것으로 질문을 회피하시기 보다, 그것을 얘기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다시 말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말씀 부탁 드립니다.

학생 6 언론정보 최종원입니다.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과연 이항대립적인

하나님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드리기에 앞서 베이스가 되는 말을 드리자면 먼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공기와 같이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잘 모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언어가

우리의 모든 것을 표현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휘력이 좋은 언어는 풍부한

표현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진 본성을 100% 정확히 표현해 내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피터 한센이 지은 카스파 라는 극을 보면 해체주의의 일종으로서,

언어로 이루어진 극의 구조를 다 해체하고, 굉장히 모순적인, 전혀 질서 없는 언어들로 극을 하나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극도 결국 일종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특히 고정관념이나 틀을 깨부수려는 예술가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성향인데, 이항대립적인 면을 굉장히

거부하는 면이 예술가들에게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재 예술가들 중에 동성애자가 그만큼

많고, 이성을 선택해야 된다는 틀에서 벗어 나고자 하는 그런 틀에 대한 개인적인 반역으로써

동성애자가 되거나 성전환을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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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105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항대립적이시지 않은 하나님이라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결국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어딘가를 보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중도의 길을 가라는 성경말씀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다른 부분에서는 해라,

하지 말라는, 영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 있을 때, 구름기둥이 멈춰있으면 유진하고

움직이면 진군하라 라고 하신 것처럼 어떤 때는 굉장히 이항대립적인,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순종과 불순종, 그런데 또 어떤 때에는 중도를 지키라는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아서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과연 하나님이 바라시는 천국은 우리가 만약 하나님 곁으로 가게 된다면,

하나님과 저는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소통하기 때문에 이항대립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그렇다면 왜 성경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 성경을 우리에게 선물하신

하나님은 왜 그렇게 이항대립적일 수 밖에 없었는가를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학생 7 저는 기독교를 이항대립적인 종교라고 생각하는 게, 선과 악 이런 개념적인

이항대립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하나님과의 문제 이런 것에서 이항대립을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내가 동행하면서 사느냐,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사느냐,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기독교가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아서의 이항대립적인 종교가 아닌가 라고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하나님과 부분적으로 함께하는 이런 연속적인 개념은 아닌 것 같고요.

학생 8 경영경제 5학번 김성근입니다. 이준용 교수님께서 가치중립적인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는데, 가치중립적이란 게, 어디서 제가 그것을 생각해봤냐면은, C.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 앞 부분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생각할 때, 피아노 건반에 대해서 비유를 했던 것 같아요.

악보가 옳지 않으면, 망가져 있으면, 본성이, 피아노 건반이 있더라도 제대로 될 수 없다. 본성 자체는

기능이다 라고 설명을 했던 것 같거든요. 그 기능이 이제 어떻게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죄가 되고

아니고 이렇게 설명을 했던 것 같은데요. 기술 자체가 가치중립적이라고 하셨는데, 사람이 사실

기술에 대한 우상화가 있거든요, 기술이 발전함으로써 기술이면 모든지 다 할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기술이 이제 신의 영역까지 넘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물론 이제 실제로는 말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자체가. 그래서 손교수님께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학생 9 제가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서 ‘삶, 그것이란’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그

영화에는 손자를 찾으려는 할아버지가 나오고 우연히 할아버지가 창녀를 만나요. 근데 창녀가

할아버지를 계속 도와줘요. 할아버지는 돈이 없지만 세계대전 때 받은 훈장들을 갖고 있고 이것을

창녀에게 주고 팔아서, 내 방 값을 다오, 라고 말합니다. 결국 창녀는 할아버지가 준 모든 훈장들을

모아서 할아버지 드리고 자기가 몸을 팔아서 할아버지 방 값을 대드립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느낀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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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2010년 가을학기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을 봤거든요. 그 창녀 안에서. 창녀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더러운

존재이지만, 성과 속으로 나눴을 때 완전히 속에 속한 사람이지만, 조건 없이 자기 몸을 희생해서 한

노인을 도운 거잖아요. 그런 것을 봤을 때 하나님은 성과 속을 떠나셔서 어디에든지 임하신다고

생각하고요. 제 생각인데, 저 학우가 말하듯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지만 어떤

데에서는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성경을 말씀하실 때에는 맥락을 보시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맥락이 없이 글자만 보다 보면 그게 맥락을 벗어나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 답이 되고, 이단들이 말하는 게 성경을 쪼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먼저 저자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본다면 아마 그런 게 더 줄어들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학생 10 언론정보문화학부 07학번 추은혜입니다. 교수님들 토론을 들으면서, 이항대립을

생각했을 때, 이항대립의 어떤 극복이나 수용을 넘어서, 왜 이항대립이 이항대립이어야 하는가가

궁금했었는데요. 이항대립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언가를 우리가 나누어서 생각하려는 욕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면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을 설명을 하려고 시도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가령 세상이 너무 복잡해서 잘 모르겠는데, 에이 비로 나누어서 생각해보면 그게 그런 것처럼

보이고 그 에이 비가 또 에이 비를 낳고 계속 그러다 보면, 아 이게 정말 그렇구나 싶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것이 그것이 반복이 가능하게 되어서, 맞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여긴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가령 남자 여자라는 것도, 남자의 특성은 이러이러한 것이고 여자의 특성은 이러이러한

것이어서 우리가 남자와 여자가 이항대립적이다, 이항대립으로 존재한다라고 그렇게 생각을 당연하게

하는 것 같은데, 사실 알고 보면 남자와 여자라는 개념이 먼저 선행을 하고, 이게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남자와 여자에 대한 그런 생각을 이항대립적으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게 설명이 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정말 설명이 되었는가라고 생각해보면, 더 이상 그 이후의

차원에서는 논의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가령 디지털사진 같은 경우에도, 그게 정말 거의

실제같이 보이지만, 그게 환원은 가능하더라도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자연과 아무리

몇 백만 화소의 디지털 사진이 같다고는 볼 수 없는 것처럼, 설명이 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궁극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이 들고, 이항대립적인 존재자체가 문제라고 생각이 들고요.

아까 말씀하신 곽교수님께서 하나의 대안으로써 데리다의 매개항을 사용하셨는데, 제가

생각했을 때, 나누고 구분 짓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봤을 때, 그게 그럼 두 개가 아니라 세 개가 되면

궁극적으로 해결이 된 것인지, 3항 대립이 되면 4항 대립이 되면 해결이 되나 하는 그런 문제가

여전히 저한테 있어서 질문 드립니다.

학생 11 언론정보 03학번 전봉헌입니다. 이항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무엇을 쉽게 보기 위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옳고 그름, 좋고 그름으로 단순화시켜서 이해를 하는데,

저는 모든 것에는 다 여러가지 면이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하나님도 이원적으로 봐야 하는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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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107

하나님이 맞느냐 아니냐로 또 다시 나누고 우리가 어떤 존재에 대해서 계속해서 인식을 쉽게하기

위해서 두 가지로 다시 나누는데, 방금 말씀하신 분께서 3항이면 되냐 4항이면 되냐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을 저는 통째로 봐야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속에서 그것을 나누어서 쉽게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손교수님께서 복잡하게 봐야한다 라고 말씀을 하시는게 저도 이해가 되는게,

자꾸 이렇게 분리가 되다 보면 우리는 점점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그 하나를 선택하게 되면, 보이는

대로 믿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내가 좋은대로 해석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왜 이항으로 나누어서 계속해서 바라봐야 하는가. 하나로 놓고, 하나 안에서

취사선택을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정말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으로 우리가 감싸 안을 생각을 해야 하는데, 구분 지어서 가르고 틀렸다라고

규정짓는 게 저는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 12 경영경제 07학번 신경환입니다. 저는 폭력적인 단어 하나로 시작해보려고 하는데요,

예수천당 불신지옥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이 세상은 이런 이분법적인 대립체제로 인간을 반으로 쪼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규분포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렇다면 예수를 믿어서 천당에

가는 것이 도대체 어떤 사람을 반으로 쪼개서 천당으로 보내고, 지옥으로 보낼 것인가,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무지한 인간들을 쉽게 이해시키려고 이런 식의 이항대립체제를 만든 것인가 아니면

정말 문자 그대로 폭력적인 하나님이셔서, 우리들을 반으로 가르실 것인가 라는 질문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또 곽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중간항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성경에서는

연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바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사후세계에 갔을 때도, 중간항이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서 어떻게 각자 생각을 하고 계신지 듣고 싶습니다.

이국운 전공이라는 게 있는데, 오늘 교수님들에게 전공에 관한 질문은 얼마든지 답을

하시겠습니다만, 신앙고백을 해라, 또는 교리적 선언을 해라 라는 얘기는 그냥 질문들 듣고 각자

생각해보는 걸로 타협합시다. 나중에 정말 우리가 더 많은 내공이 쌓이고 나면 공동체 안에서 이런

얘기들의 답을 가지려고 토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학생 13 저는 경영경제학부 09 우홍섭입니다. 신순철 교수님께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교수님

말씀하실 때에 담론을 종결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항대립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이항대립의 논리 속에 있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논리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니체의 책을 한 권밖에 읽지 못했습니다만, 그 분이 진리라는 것은 진리와 비진리를

나누는 것을 넘어서서, 진리는 여러 개다, 진리는 천 개의 길이다, 라고 말하는 게 이항대립의 논리

속에 포섭될 수 있는 것인지 그것에 대한 질문이 들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학생 14 안녕하세요 저는 10학번 정순찬입니다. 신교수님께 질문 드리고 싶은데, 교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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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2010년 가을학기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결론이 존재와 당위가 혼용되어버렸다고 생각이 들어서 거기에 대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존재

부분에서만 설명을 하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교수님의 변론은 존재적인 측면에서만 설명이 됬지,

당위적인 측면에서는 서명이 되지 않은 것 같아서 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국운 존재와 당위, 존재와 당위를 구분해야 된다는 것은 당위적인 명제입니다.

학생 15 언론정보문화학부 전민규입니다. 간단하게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이항대립이 유죄냐

무죄냐 했을 때 유죄라면, 무슨 죄를 물어야 될까요. 사실 법에서도 유죄냐 무죄를 가릴 때, 넌

유죄니까 어떤 형을 구형해야 되잖아요, 이항대립을 없애야 되냐, 아니면 이항대립이 있으니까

이항대립을 무시하고 다른 체제로 나아가야 되냐,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냐라는 물음에 대한

교수님들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이국운 법학부처럼 질문 했습니다. 교수님들 가능하면 2-3분 안쪽으로 답변해주십시오.

곽진환 제가 말한 중간항은 제 3항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항상 서구문명에서는 이항대립을

이야기할 때 전자가 억압하는 구조였거든요 항상 either , or의 구조였습니다. 데카르트는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죠, 그래서 기독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적인 자살행위다. 제가 아까 이어령

선생님의 글을 잠깐 인용했는데, 이어령 선생의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 말은 이분이 그 책에 보면

나는 지금 문턱을 넘는 단계에 있다, 이 말은 이분이 이성을 포기하겠다는 건가, 지성을 포기하겠다는

건가, 그게 전혀 아닙니다. 이분은 영성을 인정하지 않다가 이제 영성을 인정하게 됐다는 것이죠. Both

all의 구조죠. 사실 이것은 서구의 문명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하고 나머지를 억압하는 구조에서.

사실 어떤 면에서, 매개항이라는 것은 방법론으로서는 이항대립은 굉장히 훌륭하지만,

이것으로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라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결국 이 가운데 많은

것들은, 여러분 미시세계에서는 양자역학만 해당이 되고 뉴턴의 역학은 거시세계만을 얘기하는데,

세상은 모든 부분을 포함하고 있잖아요. 어떤 의미에서는 종합의 통합의 모습이라 볼 수 있습니다.

Either or 의 관점이 아니라 Both all의 관점에서 가운데 있는 매개항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준용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 고민할 것이 없고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이항적인 하나님인지 다항적인 하나님인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아니죠.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한다고 한다면 사람의

언어로 주신 성경의 계시를 통해 이해가 되는 것인데, 그 중에 어떤 구조가 이항대립적인 면을 가졌기

때문에 기독교가 이항대립적인 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일부 얘기할 수 있고요. 그렇다고 하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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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109

이항대립적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논리의 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우리가

성경 속에 나타난 이항의 근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했을 때 종교 안에서 신앙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지, 성경에 나타난 이항구조 자체가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고요.

구원의 문제도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있고요,

예정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합리적이지 않다라는 생각을 하는데요.

하지만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이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받아들여야

할 지 아니면 폭력으로 받아들여야 할 지 쉽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만 속한 어떤, 신비에

속한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이항이냐 폭력이냐 은혜냐 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구원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물론 성경이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물론 그것을 안

믿겠다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판단이고요, 그러면 복음을 듣지 못했던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느냐,

아무런 자의식 없는 애기가 죽었을 때 그 아이는 구원받았느냐, 라고 했을 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추측은 해볼 수 있지만 판단하지 못합니다. 구원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만 속한 영역입니다. 단지

우리는 성경의 계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지 모든 케이스에 대해서 우리가 판단하고 이렇게 한다 단정지을 수 없는

영역이라 생각하고요.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리면, 좀 무책임한 결론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이라면 당연한 과정입니다. 그것은 필요한 부분이지만 사실

너무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아마 욥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해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욥이

그 많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질문들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왔을 때 결국 하나님의 대답은

창조의 이야기를 하면서 도대체 네가 아는 게 뭐냐, 네가 가진 이성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도대체 뭐냐 결국은 너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는데, 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다고 나한테

그렇게 따지고 드냐 하는 것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상당 부분은 어떻게 보면 인생을 마칠 때까지

해답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런 부분들은 하나님의 영역에 올려드리는 것도

괜찮은 자세가 아닐까, 그런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신순철 앞서 제가 발제 포함해서 유죄냐 무죄냐 말했던 것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당위론적으로 말씀 드린 것이 아니고요, 그야말로 콜로키움의 주제, 유죄냐 무죄냐 판단해라 라는

이분법적인 틀 안으로서 들어가서 이야기 하겠다 라고 여러 번 말씀 드렸기 때문에, 그게 제 신념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고, 물론 완전히 담론적인 립서비스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이분법이 굉장히 광범위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층적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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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2010년 가을학기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말씀드리고 싶었고요. 그런 차원에서 내가 똑같은 입장에 있는데 누군가에게 유죄냐 무죄냐라는 것을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법리적인 판단을 함에 있어서 너무나 모순이기 때문에 무죄라고 얘기했던

것이지, 무죄는 곧 이분법적인 사고가 당위적이다, 옳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야된다 이런 뜻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지금부터 할 얘기가 Big Truth 의 얘기죠. 기독교와 이분법의 관계는 무엇이냐. 지금부터가

이분법에 대한 저의 솔직한, 존재나 당위와 모든 것이 결합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얘기가 길어질 거라는 것이죠. 기독교와 이분법을 질문하라 그래서 저는 틀림없이 심신이원론이나

믿음과 실천 이런 것을 물어볼 줄 알았는데 안 나와서 사뭇 놀랐고요, 안 나와도 어차피 하려고 했기

때문에 관계는 없습니다만, 대부분의 여러분들이,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소위 말하는 Pauline

christian들이죠. 사도 바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기독교인들이죠.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 더 영향을 많이 받은, 로마서나 그런 것들이요. 사도 바울이 평생 했었던 희랍 철학을

가지고 기독교 교리를 완성한 것 아닙니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다 가져와서 한 것

아니겠어요. 물론 거기에 나중에 자기가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고, 이미

편지 다 보냈고, 이미 주일설교로 계속 반복적으로 회자되고 있고 그래서 배설물이라고 선언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고, 그래서 사도 바울의 영향을 받다 보니까 마치 몸과 마음이 따로인 것이고, 믿음과

실천이 따로 인 것이고,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따로인 것이고, 교회가 세상이 따로인 것이고,

성과 속이 따로인 것인 양 우리가 계속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죠.

그 영향력이 강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우리가 또 한번 이분법으로 이분법을 극복한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요. 세상의 원리가 있고,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는 원리가 있어요. 하나님의

원리가 있고, 하나님의 원리를 이해하는 원리가 있어요. 하나님을 이해하는 원리로써 사도 바울이 그

이분법을 쓴 것 입니다. 그럼 우리는 그 이분법을 극복하기 위해선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그 이분법이 극복이 되고, 진짜 하나님은 뭔지, 신앙과

실천,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가 알아진다는 것이죠.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가 그런 것 까지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한 이천년쯤 뒤에 포항의 어떤 신 모라는 선생이 이 얘기 하면서, 오히려 사도바울의

이분법적인 얘기가 도전이 되어서, 그렇다면 진짜 하나님의 원리는 뭘까, 하나님을 이해하는 원리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원리는 뭘까,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도대체 뭘까 하는

문제제기를 이 늦은 밤에 이렇게 해대고 있을 거다. 곽 교수님은 계속 그 얘기하는 사람을 별로

예뻐하시지 않을거다. (청중 웃음)

그래서 아까 학생이 물은 질문에 대답을 하자면요, 다시 또 그럼 이 덫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니체나 그런 사람들이 얘기한 수 많은 모양의 진리, 수 많은 얼굴을 한 절대자들, 그런 것들

것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처음에 발제 했듯이, 니체가 됐건 누가 됐건 모든 사람들은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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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체제, 유죄인가 무죄인가? 111

목적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이해해야 된다. 이게 아니겠니, 뭐가 잘못된 것이고 뭐가 옳은

거 아니겠니 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이분법이 아닌 목적론이 존재할 수 있겠냐는

것이죠. 모든 목적론이 이분법일 진대, 니체든 플라톤이든 다 그 이분법 안에서 이야기 하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이분법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분법을 모두 다 싸그리 도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이분법이 있을 수도 있겠다, 또 어떤 부분은 이분법이 아닌 다른 어떤 무엇도 있겠다, 사실

그것을 그냥 인정하는 수 밖에 없어요. 이 정도에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손화철 여러 가지 이야기 하셨는데, 저는 그냥 제가 한 말을 되풀이 하면 될 것 같아요.

이항대립이 좋은 점이 있어요. 상당 부분 설명이 되기 때문에. 저는 이항대립으로서 이항대립을

극복해야 된다는 말에는 우리가 그냥 이항대립을 통으로 밀어내고 또 한 개를 한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되죠. 그러니까 이항대립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파워를 현실적인 파워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까

이항대립이 왜 있냐, 왜 설명이 안 되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냐, 그 말도 맞지만, 그렇다고 설명

안되니까 우리가 통째로 이해하자, 이게 말이 좋아서 통째로 이해하는 거지, 그게 통째로 이해가 되야

말이죠.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라든지, 총체적 이해를 해라, 학문을 융합해라, 다 좋은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려면 결국 그것을 잘라서 생각을 하는 수 밖에 없어요. 그게 제일 효과적으로

지금까지 학문발전에서 그 역량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이항대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도리 있는 하나님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원리가 있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원리가 있는데, 설명을 하려다가 보니까, 교리를 만들고,

교리를 만든 것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는데, 나중에는 성경은 안보고 교리만 믿죠, 하나님이

구원을 받았다는 얘기는 천국가, 지옥가, 이런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라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데, 구원받았니, 너 구원의 확신있니 이걸로 모든 걸 싸잡아서 한 마디로 해결해버리는

게 문제라는 거에요.

그 물음이 절박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 이항대립의 관계를

이용하지만 여전히 초월을 인정하는 것, 이분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것을 바라보지만 그 너머에

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저는 그것이 이분법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굉장히 현실적이 되는 것이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항대립이 문제가 있으니까 싹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왜 그게 그렇게 폭력성을 띠는가를 살펴보고 거기서 그 폭력성을 제거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이 있어야겠는데, 그건 3항도 있겠고, 이항대립으로 이항대립을 극복하는 방법도

있겠고, 저는 초월을 인정하는 것, 내가 알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간단한 거에요. 여러분 애인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잘 생각해보세요. 그게

초월의 영역에 있습니다. 그게 전 이항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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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2010년 가을학기 제 2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이국운 늦은 시간까지 좋은 토론을 한 것 같습니다. 마치면서 여러분들의 말씀 중에

전민규가 한 얘기가 제 마음 깊숙이 있습니다. 유 무죄를 가리는 자리인데, 적용법규가 뭐냐, 무슨

죄에 지금 걸린거냐, 아마도 무슨 죄라고 말하면 그 무슨 죄는 누가 정한거냐 할 것이고요, 다시

우리가 정말 공평한 그런 이항대립을 할 수 없다. 적용법규는 권력을 가진 쪽에서, 지식을 가진

쪽에서 얘기할 것이다, 그렇게 얘기가 될 것입니다. 적용법규가 뭐냐, 민규 학생으로부터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하고요,

전 이럴 줄 알았습니다. 이 문제를 과연 우리가 결론 낼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지난

번에도 한번 말씀 드렸지만, 법률가의 고민은 어떻게 끝낼까 하는 것인데요, 제가 내내 생각해본 것이

이런 것입니다. 인류가 이런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재판이란 것을 하는데요, 크게 보면 세가지

정도 재판 형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이렇게 해서 그냥 끝내는 것입니다. 사실은

재판이 아니죠. 저는 이것을 일 항에 끝내기라고 생각합니다. 쫓아내기, 죽이기. 또 하나의 재판

방식이 있는데요, 이 재판은 결투 같은 것입니다. 두 사람이 이항으로 나누어서 대결을 하는 것입니다.

그 대결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입니다. 오늘 저는 교수님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공히 말씀하신

매개항의 문제를 들으면서, 인류가 지금 가지고 있는 3번째 방식의 재판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저의 일종의 흉계에 말리셔가지고 마치 유죄를 주장하는 쪽, 무죄를 주장하는 쪽인 것처럼

변론을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초대한 오늘의 세팅은 변론의 세팅이 아니고요, 배심원의 세팅입니다.

자, 이제 양쪽의 변론이 다 끝났습니다. 피고인과 검찰은 재판장에 남아있고요, 열두명의

배심원들이 조그마한 방에 모입니다. 유죄인지 무죄인지 무엇 때문에 유죄인지 무엇 때문에 무죄인지

끝까지 토론합니다. 그런데 이 열두 명의 사람들은 정말 불쌍합니다. 만장일치가 되지 않으면 결론을

낼 수 없습니다. 결론을 내지 못하면 집에 가지 못합니다. 여러분 미국 법정 영화들 많이 보실텐데

열두명의 불쌍한 배심원들이 그 안에서 집에 가자는 얘기까지 합니다.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적어도

유죄라고는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하루 이틀 어떤 때는 일주일 토론을 계속하는데도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해도 만장일치의 결론에 다다르지 못하면 배심원 대표가 판사에게 연락을 합니다.

머리를 긁적긁적 저희들이 결론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판사가 설득을 해보다가, 정말 안되겠으면, 이

배심원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영어로는 이것을 Hung jury라고 합니다. 끝내지를 못하고 배심원들을

돌려보낸 다음에 다시 새로운 배심원들을 모아서 재판을 시작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오늘 이 Hung

jury를 선언해야 하는 상황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이항대립의 문제에 관해서 유 무죄를 가리려고

하는 저희들의 시도가 실패한 것 같습니다. Hung jury입니다. 다음 번에 다른 배심원들을 소집해서

또는 변호사들을 바꿔서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 때까지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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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2 0 1 0F A L LS E M E S T E R

Section 3

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The Idolatries in the Society of Consuming

2010. 11. 2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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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Fall Semester 3rd Colloquium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주최_한동대학교 학문과 신앙 연구소_Handong Institute of Learning and Faith

백화점마다 상품이 가득하고 미디어마다 콘텐츠들이 넘쳐나는 데도 모두가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과 콘텐츠를 갈망하는 지금 이 세상의 정직한 이름은 무엇입니까?

2010년 2학기 세번째 학문과신앙 콜로키엄은 이 질문에 대하여 소비사회(the society of consuming)라고 대답하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욕망의 질주가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이미지들의 거래와 변신과 자기증식이 영원히 계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와 같은 사회는 오로지 무한한 '소비'(consuming)에 의해서만 지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인간인 까닭에 소비사회의 정당성을 묻고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의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콜로키엄은 이 처럼 직접적인 토론보다는 기독교전통이 발전시켜 온 우상숭배의 관점을 활용하여 소비사회의 인간군상들을 다양하게 분석하는 일종의 우회로를 택하고자 합니다.

이 담론전략은 어려운 질문을 피해보려는 얄팍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은 금방 눈치채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번 콜로키엄에서 분석될 소비사회의 인간군상들은 바로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동 구성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사회 : 이국운 교수 (법학, 학문과신앙연구소장)발제 : 장규열 교수 (언론홍보학) 지범하 교수 (경영학)        이   강 교수 (컴퓨터공학)        김민희 교수 (대구대학교, 교육행정학)

All Nations Hall 30211월 2일 (화) 저녁 7시15분[ ]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The Idolatries in the Society of Consu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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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17

2010 년 가을학기_제 3 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행사 사진-1]

2010 Fall Semester_3rd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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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2010년 가을학기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2010 년 가을학기_제 3 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행사 사진-2]

2010 Fall Semester_3rd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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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19

2010년 가을학기_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2010 Fall Semester_3rd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주관 :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 [ACE 사업]

주최 : 한동대학교 학문과 신앙 연구소 [Handong Institute of Learning and Faith]

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The Idolatries in the Society of consuming

2010.11.2

이국운 오늘 학문과 신앙 연구소에서 주최하는 콜로키엄, 2010 년도 2 학기 세번째 모임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이 모임은 ACE 사업의 지원을 받아서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라는

이름으로 진행됩니다. 그 동안에 두번의 콜로키엄이 있었고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학문과 신앙 연구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시면 그간 해온 콜로키엄을 보실 수 있습니다. 졸업생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참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제는 소비사회에서 우상숭배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소비사회라고 하는

어떤 명칭은 1990 년대 초반부터 서구사회에서 상당히 유행하기 시작한 단어이고 2000 년대에

들어와서는 서구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발전된 자본주의, 특별히 금융 자본주의가 낳는 사회현상들

전체를 일컫는 말로 발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아가서는 좁은 의미의 경제영역뿐만 아니고 미디어,

연구, 교육 심지어는 정치영역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욕망을 끝간데 없이 확대 재생산해서, 그

욕망으로 하여금 우리 사회를 이끌고 가게 하는, 하나의 드라이빙 포스가 되게 하는 그런 형태의 삶의

구성방식을 소비사회라고도 일컫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소비사회는 우리 삶 안에 존재하는 비효율들을 없애고 코스트를 다운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더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뜻으로도 쓰이는 것 같습니다. 소비사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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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2010년 가을학기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소비자사회가 반드시 같은 뜻은 아니지만 물건을 구입하고 무언가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주권이 점점

더 인정된다는 점에서 좋은 뜻으로도 쓰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에 오면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소비사회는 나쁜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쓸데없는 물건들을

많이 생산해놓고 그 물건들을 소비하게 만드는, 우리나라에, 저도 그 마수에 몇 번 걸렸습니다마는,

홈쇼핑마다 지름신을 강림하게 하는, 이 소비사회의 사제들이 존재한다. 저는 LG 홈쇼핑의 안경 쓴

뚱뚱한 분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그 분 앞에만 서면 5 분이 지나지 않아서 전화를 돌리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됩니다. 홈쇼핑을 보아도 그렇고요. 여러분들에게 좀 아픈 얘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왜 그런지, 스펙을 쌓고 쌓고 또 쌓는 스펙 컬렉터로 변해가고 있는 우리 시대의

학생들. TV 를 켜면 나오는 모든 아이돌들이 과거에는 별로 상품화되지 않았던 자그마한 동작들

까지도다 상품으로 만들어서 파는,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증식하고 자기생산 해내는. 교수님들의

사회도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주어지는 연구 프로젝트들. 무엇을 위한 연구인지

잘 모르지만 그래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그 일에 복무하지만 그 결과가 과연 왜 이런

결과를 우리가 목적했던가에 관해서 반성할 시간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이런 세상. 뭔가 지금 우리가

이미 익숙한 존재지만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그런 사악한 존재 앞에

다가서있지 않은가 하게 되었습니다.

소비사회라고 하는 단어, 그 단어에 의해 규정되는 우리 현재의 삶을 한번 반성해보자고

내놓은 주최자로서, 기획자로서의 제 생각입니다. 여기 계신 대부분들 예수 믿는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우상숭배라고 하는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문제를 분석하는 것이 마땅히 늘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세상이 계속 세속화되고 이성중심이 되면서 우상숭배라고 하는 상당히

전통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분석하는 것이 뭔가 좀 구식으로 보이는 이런 식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네 분의 고명하신 교수님들을 모셔가지고 각각의 전공분야에서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우상숭배의 관점을 가지고 소비사회를 들여다 보면 어떤 모습이 보이는가, 그리고 그 모습이 우리에게

잘했다 하게 만드시는가 아니면 이건 아니다 하게 만드는가. 네 분을 초대해서 말씀을 좀 들어보고자

합니다.

제가 소개 드리겠습니다. 대구대학교 교육대학원에 계시는 김민희 교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우리 경영학과에서 가르치고 계시는 지범하 교수님 오셨습니다. 또 언론정보문화학부에서 가르치고

계시고 학교에서 총장님을 가까이서 보필하시면서 많은 일들을 하시느라고, 죄송합니다 표현이, 팍삭

늙으신 장규열 교수님 소개합니다. 이 모임을 주최하면서 맨 처음에 이 분은 꼭 모셔야 되겠다

섭외했던 교수님입니다. 좋은 말씀기대하고요. 전산전자 공학부에서 가르치고 계시는 이강 교수님

이십니다. 어떤 분이 먼저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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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21

장규열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소개받은 장규열입니다. 제가 가르치는게 광고에요. 광고 홍보,

이렇기 때문에 사실은 오늘은 세 패널의 구성으로 보아서 3:1 의 수세로 보이는데, 시간이 길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 이야기는 못할 것 같아요. 그러나 여러분에게 중요한 부분을

짚어가면서 이것이 광고나 소비자주의가 이제는 더, 뉴 웨이브가 도래했다 라는 말도 하는데,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까닭 때문에 그렇고, 그것이 어떻게 흘러가고 경계해야 할 일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간단히 짚어가 보려고 합니다.

지금 뭐 우리가 이제 온전한 우리 사람은 외부의 영향을 받을 적에 지금 당장 겪는

외부로부터 받는 충격 영향에 가장 민감하게 되어있어요. 옛날에 우리에게 서서히 영향을 미친 것은

생각을 못하고 지금도 우리 이 교수님 소개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에 홈쇼핑 이야기를 했잖아요. 홈쇼핑,

인터넷 이렇게 가면서 디지털 월드 이렇게 되면서 소비자가 당하는 영향이 지대한 것은 맞기는

맞는데, 우리가 소비자로서 자본주의사회를 영위하면서 사회에 살면서 우리가 소비자적인 역할을

가졌던 것이 과연 최근의 일이냐. 그건 절대로 아닌 것 같아요. 거꾸로 돌아가자면 1830 년 즈음에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였던 알렉시스 데 토크빌이란 사람이 미국을 가서 한참 구경을 하고 돌아와서는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책을 썼어요. 데모크라시 인 아메리카란 책을 썼는데 거기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당장 곧 죽기나 할 것처럼 이세상 물건에 집착하면서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언가를 집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꽉 집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또 다른

무엇인가를 또 다시 잡아야 하기 때문에. 라는 생활 방식을 벌써 1830 년대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1830 년대라는 것은 굉장히 오래된 일이잖아요. 우리처럼 풍요로운 소비사회가 아니었을 텐데

미국인들 사이에 소비성향으로 의심되는 증상이 있었다는 것이죠. 성경에 잠언에서 솔로몬이 해

아래서 새 것은 없다라고 할 적에 해 아래라고 할 적에 이 세상에 아무리 보아도 새 것은 없다.

로마서 1장 25절에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서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섬기니라,

그렇죠. 이천년전에 벌써 이런 생각들이 비취는 거에요. 마태복음에 너희가 하나님과 제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예전의 이야기들 그런 경향이 벌써부터 있었음을 한 번 접어놓고 최근의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은 이게 뭐 소비사회가 발전해오면서 신용카드 등이 자유로워지고 신용을 사용하는 일이

빈번해지다가 보니까, 우리가 소비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좋은 소비도 있고 나쁜

소비도 있고 그런 것 같아요. 물론 경계가 분명히 정해져 있고 죄목이 정해져 있지 않겠습니다만,

좋은 소비라고 하면 우리가 교육을 위한 소비, 건강을 지키기 위한 소비,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이겨내서 우리가 요즘 주로 의심하듯이 흥청망청 과도한 소비가 불필요한 것처럼 진행될 때 나쁜

소비라고 하면 그것이 비교적 상대적으로 많아지는 상황에는 틀림없이 좋은 소비에 쓸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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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2010년 가을학기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가용수입이 줄어들 것이죠. 그게 첫번째 가장 나쁜 영향인 것 같아요. 그야말로 건강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데 경제가 점차로 발전하고 확장해야지만 소비자들의 생활수준이 이전보다 나아질 것은

분명한 일이겠죠. 점점 좋아졌으면 좋겠다는 것이 우리 보통사람들의 생각일거에요. 대중적 소비가

소비자들의 일반 삶의 질을 높여주는 효과는 반드시 있겠죠. 그런데 소비사회가 형성된 후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미래가치를 현재에 당겨쓰는 좋지 않은 버릇들을 우리가 자꾸 쌓고 있는 것 같아요. 아주

계획적인 소비를 하고 규모에 맞는 소비를 잘 꾸려나갈 때는 그런 일이 없겠지만, 우리를 물론 정도의

차이겠지만 현대를 살면서 내 주머니에 있는, 내게 허락된 이상으로 소비하게 되는 것도 또 고백해야

되는 것 같습니다. 근데 그렇게 중첩되다가 보면 틀림없이 미래에 사용해야 될 가치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뭐 국민연금이나 이런 데 뭐 이런 거시적인 경제지표들로 우리가 이미 벌써 경고를 받고

있는 것이, 공적인 투자를 많이 하지만 세대가 지난 다음에 혜택을 받을 후손들이 안전한지 알 수

없다. 심히 걱정된다 이런 얘기를 하죠. 자본주의 자유원칙을 고수하는 경제학자들마저도 한 가지

위험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버드대학의 줄리엣 슈어라는 여성경제학자가 이런 생각을

적었어요. 전통시장경제를 옹호하던 효율이론들도 소비자들이 지속적으로 물질적인 부에 높은

수준만을 지향하게 된다면 소비자들은 스스로 불만족을 가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계속

많이 가지는 것이 계속 좋았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스스로 또 불만족을 더 느끼게 하는 결과를

초래해서 끝간데 없는 소비가 계속 생기게 되면 그것이 또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결과가 되겠죠.

자본주의가 개인중심주의만을 고집하게 되면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제가 요즘 재미 있게 읽고 있는 책이 장하준씨가 쓴 자본주의가 이야기해주지 않는 23 가지

진실이라는 아주 젊은 경제학자가 책을 잘 썼던데 그 중에도 바로 이 부분을 경고하고 있어요. 우리가

개인주의로 치달을적에 자본주의의 한 가지 축으로써 믿을 수 있는 신념의 한가지로써 개인주의,

개인이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스스로 결정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주의 만을 고집할

적에는 서로 서로 욕구 불만족이 충돌하는 결과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도 사회주의가

무너진것 처럼 무너질 위험마저 있어보인다라는 것이다.

소비주의는 다른 사람들 판매와 가격, 세 번째 경고는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들 대하거나 의사가 환자를 대하거나 그런 선의의 관계로 좋은

서비스를 주고 받고 좋은 소비를 하는 관계가 아니라 물건으로 물건을 가운데 놓고 서로 주고 받는

관계가 되다가 보면 모든 관계에 있어서 주고 받음의 관계로만 계산하게 하게 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가져도 가진 자체를 가지고는 만족을 성취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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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23

한 가지 재미 있는 통계가 있어요. 미국의 연간 노동시간. 연간 노동시간이 1940 년대로부터

1970 년대까지 연간, 보통 노동자가 일 년 동안 하는 노동시간을 평균해보니까 1520 시간 정도가

됐답니다. 30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어요. 근데 1970 년 동안 그 다음 30 년 동안 2000 년 됐을

때의 통계가 거의 1950 시간이에요. 그러니까 400 시간 늘어난 거에요. 왜 70 년대 이후로 급격히

늘어났는가? 분석해보니 두 가지 테마가 나오는데 첫번째는 현실적인 이유로 노동운동이 그전에는

굉장히 과격했었는데 70 년대 이후로 노동운동이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노동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이

있고 두번째는 그 사이가 새로운 소비사회, 물질만능주의, 소비제일주의, 신용카드의 사용의 확장이

급격히 늘어난 것과 거의 시간을 같이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더 많이 가져야 되거든요. 더 많이 써야

하다 보니까 더 많이 일해야 하거든요. 이것은 노동자들 일하는 사람들 본인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노동시간을 늘여온 결과로도 보인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급등하는 소비생활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일하는 사람들이 노동시간을 자발적으로 늘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죠. 그 증가 폭은

지금도 줄어들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 이같이 개인적인 성취에만 몰두하게 하는 원흉을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제가 전공으로 삼고 있는 광고가 그 중에 한 원흉으로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데 방어를 좀 해

야할 것 같은데, 광고가 상당 부분 설득 작용을 하는 것이 맞기는 맞죠. 그렇죠.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

더 내가 소개하는 물건에 대해서 소비를 일부 조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으로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기업 쪽에서 보면 마케팅활동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활동임이 분명한 것 같아요. 그런데 한가지

중요한 것은 광고가 허무맹랑하게 사람들이 전혀 인식도 못하고 있는 필요나 욕구를 아무

생각도안하고 있는 사람 머리 속에 그저 만들어 낸다, 강요한다 라고 까지 논지를 확장해서 비난하게

되면 사실은 그것은 광고 쪽에서 보면 억울하다. 소비자 쪽에서 봐도 조금 자존심상하는 일이죠. 나는

아무 생각을 안하고 있다가 순전히 광고를 봤기 때문에 물건을 산다, 그건 아닌 것 같죠.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광고를 봤기 때문에 물건을 산다, 일대일 대응이 되는 소비생활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는 곰곰이 따져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만 사야 하느냐, 필요로 구분을 해보면 실제적인 필요와 가상적인

필요를 구분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실제적인 필요는 우리가 의식주기본적인 생활을 이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건들은 실제적인 필요겠죠. 그러나 우리가 저도 집에 가면 세 사람 사는데 아파트 들어갈 때

신발장 보면 세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아요. 그것이 과연 내가 광고 때문에 산 건가요? 내가 필요하지

않은데 누군가로부터 강제 당해서 샀을까. 그것도 사실 또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옷 한

벌로 족한 사람이 있긴 있겠지만 그렇게 많지 않을 거에요. 사실 광고는 가상적인 필요에 작동하는

마케팅커뮤니케이션일 것입니다. 가상적필요를 한 단계 끌어올려서 사고 싶게 만드는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광고가 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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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2010년 가을학기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가상적필요는 이미 욕구, 또는 want. 필요와 욕구를 구분하자면 필요는 우리가 need 라고

한다면 욕구는 want. 하고 싶다, 하고 싶게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want일

것인데, want 를 만들어내는 것이 광고가 할 것인데요. 유명한 광고인 중에 데이빗오균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이 한 말 중에 이런 게 있어요. 광고는 절대로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진실 아닌

것을 광고하려고 생각도하지 마라. 첫번째 말만 들으면 좀 심심하죠. 두번째 줄에 광고인들을 땡치는

말이 있어요. 광고가 진실만 가지고 얘기해야 하지만 진실만으로 얘기 했는데 그것이 들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사고도 싶게 만드는 것이 광고인이 설득작용으로 해야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전혀

내 속에 없었던 것을 사게 만든다는 비난은 조금 억울한 것 같아요. 시편 23 편에 이렇게 말씀하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걸 영어로 보면 I have no want 에요. 내가 더

바랄 것이 없다. 더 욕구할 것이 없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그만큼 내게 만족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짚어봅니다.

완전히 금욕적으로 사는 것도, 풀어 놓고 마구 써대는 것도 둘 다 적절한 해결책은 되지 못할 것

같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욕, 성취욕, 성공욕에 한계를 만들어 놓으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창세기에 선악과가 바로 그런 경계를 설정하신 하나님의 아주 속 깊은 생각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한계를 넘어서 문제를 일으킨 것은 인간이었죠. 그래서 내가 내 속을 더 잘 들여다봐야 할 것

아닌가,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지는 소비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스스로 훈련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 입니다. 누구도 나 스스로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도록 강제할 사람은 사실 없어요. 우린

그렇게 소비생활하고 있다고 하면 과연 그것을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인지 잘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소비생활을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과도한 소비생활에서 세 가지 지적할

것이 있다면 외모와 풍족함과 성취 아니겠어요. 더 아름답게 보이고 싶고 더 많이 가지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그것을 향해서 살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지혜롭게 살고 어떻게 하면 더

섬기면서 살고 어떻게 하면 내가 욕구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겠는지 잘 한번 생각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이국운 제가 기획할 때 오늘 이야기들이 좀 Descriptive 하게 소비사회에서 깨닫지 못했는데,

아, 이런 우상숭배가 있었구나 그 양상들을 좀 얘기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했음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마 전달이 잘 안됐는지, 교수님께서 상당히 Prescriptive 하게 말씀을 하셨어요. 이렇게

이렇게 살자는 말씀을 하셨는데 마지막에 말씀을 부탁할 것을 그랬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쎄요

두번째 교수님은 조금 더 Descriptive하게 말씀을 해주면 될 것 같습니다.

지범하 이국운 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항상 어떤 문제에 접근할 때, 먼저 시작해야 할 것은

Description 입니다. 문제가 뭔지 알고 상황이 어떤지 알아야지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가는

Prescription 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물론 섞을 수도 있지만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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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25

대안을 갖기 위해서는 Description 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Prescription 을 이야기하려고 제일 뒤에

이야기하겠습니다. 했는데 아무도 매를 맞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제가, 이렇게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야기 꺼내보겠습니다.

저는 법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언론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교육도 아니고 깊이 있는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Description 이 얼마나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주제를 듣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자, 소비사회 왜 이렇게 되어가고 있을까. 특히 우상숭배,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프레임이 뭔가 잘못되어있기

때문에 이렇지 않은가 생각을 해보면서, 문제를 생각해보니까 개인들이 이렇게 물질주의가 되면서

소비를 과도하게 하는 그 배경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자본주의의 문제도 아니고

장교수님 아까 말씀하셨는데 저는 장하준 교수 저는 그분의 논의에 대해서는 동의 안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제 오늘 이 자리는 원래 그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깊이 있게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이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가장 부합되는 현재까지 나온

제도 중에 하나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 논의는 나중에 하구요.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는,

물질주의랑 자본주의를 똑같이 보시는데 그건 아니죠. false capitalism 우리가 그런 conception 을

가지고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자 이렇게 소비로 치닫는 이러한 현상 속에 어떤 큰 그림자가

깔려있을까를 보면서 몇 가지 우상들을 찾아보는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장규열 교수님도

토크빌이야기를 했는데, 토크빌이 쓴 책의 결론은 뭔가 하면 미국 시스템이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멋있다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꼬집는 것은 하나의 현상의 불과하고. 그런데 그런 미국도,

그러니까 그런 미국도, 이 사람은 19 세기 초의 미국은 참 이상적이다, 우리 프랑스는 이상해져 가고

있는데 미국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어 있고 사람들 개인의 책임의식이 강하고 굉장히 열심히

일한다, 이런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미국이 지금 여러분도 알다시피 GNP 를 계산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가치를 더

만들어내냐. GNP 계산하는 방법 경제학 공부하신 분들 아시죠. 소비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늘어납니다. GNP 는 income 이라 생각되는데 어떻게 소비가 늘어나면 GNP 가 늘어납니까.

Demand 가 생기니까 기업이 공급을 하고 생산이 일어나고 올라간다 이런 GNP 가 사실은 우리의

행복지수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소비를 많이 해라 Demand 를 많이 올려라, 그래서

GNP 가 늘어나면 경제가 커진다. 그런 환영 속에 우리가 있는 거죠. 미국에서 GNP 의 삼분의 이가

소비자들의 소비에 의해서 생성되는, 말하자면 미국 경제의 생산 규모입니다.

그러니까 뭔가 우리가 얼른 볼 때 경제학을 잘 모르는 분들도 볼 때, 저건 정상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돌아가는 거 속에서 어떤 우상이 있을까 생각해보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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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2010년 가을학기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우리의 잘못된 자유의식이다, 우리가 더 자유로워지겠고, 더 내 마음대로 하겠다, 이러한 그릇된

자유의지가 하나의 우상으로 뒤에 똬리를 틀고 있지 않나. Consumer Freedom 이라고 합니다.

Consumer Freedom 이라고 하는 큰 폭군이 뒤에 앉아있다. 우리는 내가 결정해서 내가 소비를 하는

것 같지만 뒤에 앉아있는 Consumer Freedom 이라고 하는 큰 폭군이 큰 사회에서 그림자같이

드리우면서 그 우상이 우리를 향해서 충동질을 하고 자, 너는 자유인이야 네가 원하는 대로 언제든지

누릴 수 있어 한번 해봐 뒤에서 부추기고 있죠. 근데 이 freedom 이라는 게 좋은 이야기 아닙니까.

거꾸로 자유라는 것은 순수하면서, 아까 제가 자본주의는 좋은 것인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false

conception of capitalism 은 좀 이상한 거다 이렇게 이야기했죠.

자유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유도 똑같은 Freedom이라고 하지만 잘못된 Freedom이 있습니다.

Consumer Freedom 의 Tyranny 는 바로 그런 걸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어떤 정신분자가

우리 문명을 설명하면서 우리 문명은 이런 Freedom 과 Security 의 안전, Freedom 과 Security 의

Trade off 가 하나의 우리의 문명을 우리가 문명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가 내 자유를 찾기 위해서 그 동안의 안전했던 그런 틀에서 벗어나서 뛰쳐나가려는 것이 하나의

문명입니다. 반대도 물론 있죠. 그래서 Freedom 과 Security 의 이런 Trade off 가 Freedom 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잘못된 나의 그런 내 스스로 혼자 하겠다. 뛰쳐나가니까 뭐가 망가졌습니까, Security가

망가졌죠. 그러다가 보니까 그런 Insecure 한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서 새로운 Freedom 을 찾는 것이죠.

이게 하나의 소비행태로 변한 것이죠.

기독교 세계관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의 Freedom 이 어떤 Freedom 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우리는 문화명령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나아가야 되는데 또

우리에겐 그런 Freedom 이 있습니다. 자유의지가. 그렇지만 우리가 그런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Freedom 을 추구하지 않고 내가 주인이 돼서 내 Freedom 을 추구하다 보니까 아까 그 Security 가

망가지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 마음 속에 전에 있던 안전지대가 망가지니까 그것을 채우려는 시도가

특히 물질문명의 발달과 맞닥뜨려서 하나의과도한 소비행태로 계속 상승작용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제 Description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개인은 그런데, 우리가 개인만 소비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반대가 있지

않습니까. 물건을 사고 팔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이 내가 소비하겠다고 뛰쳐나간다고 해서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그걸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상대가 있어야죠. 이것이 마켓입니다. 저는

시장주의자이지만. 우리가 마켓에 대해서 현재 시장이 그러면 우리가 얘기하는 바람직한 구조인가

하는 거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기업이 마켓을 보면서 뭡니까. 이 시장에서 사람들에 대한

기본전제가 뭐죠. 우리가 합리적인 소비자라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합리적으로 자기의 필요가

뭔지를 알고 판단해서 자기의 효용을 최대화 시키기 위해서 구매행위를 합니다. 그래서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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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27

자유시장을 만들어줘야지 소비자들의 효용이 최대화되고 효율이 극대화 되는 이런 경제시스템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한편에 있어서 기업들은 소비자들은 합리적인 소비자입니다 하고

자유로운 거래를 주장하면서 소비자한테 어떻게 합니까. 소비자한테 접근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단순히 합리적인 소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조작하기 시작하는 것이 기업입니다.

소비자는 과도하게 소비를 상승작용 하면서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업 또한 공급을

낮추면서 우리가 말하는 Excessive supply 를 하고 있는거죠. 광고는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서 그 사람들을 조작하고 그 사람들 말로는 수요를 창조, 소비를 창출한다는데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소비가 창조되는 것은 아니죠. 광고라고 하면 자, 정보를 알아야 되고

자, Need 가 있는데 Need 가 모르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는 아까 포세씨즈 광고가

가능하죠. 그것만 아니라 Branding 이라고 하죠 Branding 전략이라고 해서 상품은 상품의 Need 와

상품을 연결시켜줘야 하는데 이 사람들 막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가치를 창조합니다 라고 해요.

우리는 need 를 충족시켜 줍니다가 아니라 가치를 창조한다고 해요. 그래서 상품이나 서비스의 어떤

가치 사회적인 가치 라던지 다른 status, security 이런 것들을 링크시키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기업도 마켓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런 Excessive supply, 소비와 공급모두가 같이 신나게 춤을

추면서 댄스의 템포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의 개인일 뿐 아니라

사회의 멤버입니다. 우리가 그냥 자유로운 개인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입니다. 멤버죠. 그러면 이

사회에 나는 책임이 있게 됩니다. 극단적인 개인적인 소비사회는 우리 개인이 이 사회에서 공동체에서

나의 Membership 을 망각시켜버립니다. 이 전체는 어떻게 되던 나만 내 욕망을 충족시키면 되는 거죠.

그래서 이게 Prescription 입니다. 개인적으로 아까 그런 문제 때문에 잘못된 자유의식이 Insecurity 를

자아내게 되고 그런 불안한 감이 나의 소비를 통해서 얼마든지 생각을 하는. 소비를 통해서 나의

Needs 를 충족 시키는 것 아니라 소비를 통해서 어떤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원하는 그건 투자를

통해서 내가 되어야 하죠. 공부를 통해서 교육을 통해서 내가 되어야 하는데 소비를 통해서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원하는 것 이죠. 그게 진짜 나 입니까. 아니죠. 가상의 나죠. 실재의 내가 아니라

가상의 나를 만들어가게 됩니다. 이게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Description이고요.

간단하게 Prescription 을 말씀 드린다면, 자, 잘못된 나의 정체성. 우리는 뭡니까.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본다고 한다면 나는 완전히 독립된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형상대로 만든 그런

존재로써의 나입니다. 하나님모든 창조계를 소유하고 계시고 모든 창조계를 컨트롤하고 게시고 또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니드를 공급하고 계신다는 나의 자아의식을 정확하게 갖고 있을 때, 나는

거기에 대해 적당한 만족이 있게 되고 또한 이런 공동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내가 관리하고

보존하고 하는데 동참해야 될 의무가 있다. 그런 청지기의식, 거기서 우리의 제한된 세상의 자원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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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2010년 가을학기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환경을 관리하는데 잘 유지하는데 하나의 사회의 일원으로서 동참해야 된다는 책임의식이 있게 되고

그에 따라 기업도 사람들에 대한 의식이 아까 이야기한대로 합리적인 소비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이야기하는 fallen nature 회복되지 않은 인간은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로운 시장에서 어떤 한계가 없는 무절제한 소비를 하게 된다면 그 소비행태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부터 우리가 그 가장 바람직한 효용극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이런 깨달음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앞에, 개인과 시장과 사회 전체의 구조 속에서 우리가 이런 잘못된 자유의지에 대한

우상과, 컨트롤하려는 모든 것을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하는 잘못된 우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과도한 소비사회로 나아가는 이런 환경에서 우리가 정확한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자아의식과 실천의지를 가질 때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측면에서

두서없이 제가 생각한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국운 감사합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키기 위해서 제가 좀 덧붙여보고 싶은데요.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이게 이제 소비사회라고 저희가

정의를 하고 싶었던 것이고요. 이게 존재하려면 두 가지가 충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소비를

감당할만한 유동성, 돈이 어떤 형태로든지 만들어져야 합니다. 노동을 통해서 되든, 빌리든, 또는 뺏든,

어떤 형태로든지 돈이 있어야 소비를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소비하고 싶어져야 합니다. 욕망이

자극되어야 합니다. 욕망이 계속해서 생겨나야 결국 소비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두 부분에 있어서

그러니까 욕망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것 하나, 그리고 그 욕망을 소비로 연결시킬 수 있는 돈을

어떤 형태로든지 만들어내는 것 둘, 이 두 고리에서 우리가 우상숭배의 문제를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이제 다른 두 분 교수님 말씀을 듣기 전에, 한 가지 장 보드리야르라는 프랑스의 사회학자를

통해서 우리가 많이 배운 이야기를 제가 좀 해보고 싶습니다. 아마 한 십년 전쯤에 우리나라를 떠나서

중국의 오지로 선교하신 어떤 선교사님이 계서서지 금 다시 한국에 돌아오신다고 한다면, 가장 크게

바뀌었다고 생각하실 것은 커피일 것 같습니다. 이 나라가 커피공화국이 되었다. 한 십 년 전에

본인이 떠나실 때에는 이 자판기 커피를 먹던 사람들이었는데 대한민국의 도시란 도시들은 모두다

콩과 별과 베네와 탐과 이런 친구들에 의해서 또는 천사에 의해서 정복되었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가계산을 해보면 여러분들이 4 천오백원 오천원 내고 잡수시는 커피 안에 물, 커피, 설탕,

얼마 안된다고 하거든요. 근데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그 때 우리가 소비하는 것은 커피가 아니고 물이

아니고 결국 스타벅스라는 것의 기호다. 이것이 우리가 보드리야르를 통해 많이 배운 소위 기호의

정치경제학이라는 것입니다.

기호의 특성은 자기증식이 됩니다. 얼마든지 카피해도 됩니다. 얼마든지 돈을 비싸게 붙여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큰 제벌가 딸들이 경쟁적으로 명품관을 만들어서 명품관 안에는 한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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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29

만들고 밖에는 줄을 서서 표를 타고 기다리게 만드는 이런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기호의 소비,

기호의 정치경제학 이 안에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두 가지 포인트, 끊임없이 욕망이 자극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소비로 연결시킬 수 있는 유동성이 공급되어야 한다 이 두가지 두 고리들 중에

어디에 우상숭배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이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조금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는데요.

장규열 한 가지 들자면요, 욕망도 있고 돈도 있다면 소비를 계속 해나가는데 문제가 없겠죠.

욕망은 언제나 있죠. 욕망은 끊임없이 있을 수 있는데 돈이 모자라기 때문에 충돌 또는 불만족 그런데

거기다가 기호의 경제학까지 겹쳐지니까 그러면 이게 문제가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는 상황이

언제가는 오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있어보이는 상황입니다.

이강 아무래도 멀리서 오신 손님께서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아서. 저는 5 분을

준비해왔습니다. 제가 처음에 주제를 이국운 교수님께 부탁을 받았을 때 거절을 하려다가 아 그거

하고 딱 떠오르는 게 있어서 5 분이면 말할 수 있겠다 싶어서 제가 승낙을 했습니다. 앞에서 좋은

말씀해주셨는데, 욕망과 돈이 소비를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엔 두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기술과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 두 가지가 기술과 자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존재하는

욕망에 원하는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자원을 돈을 끌어들여서 그것을 제품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되거든요. 제가 그것 때문에 여기 불려온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커피가 여기에 오려고 할 때 아무리 못해도 항해기술이 있어야 하고요 배를

만드는 조선기술과 항해를 할 수 있는 기술 그것이 없다면 커피가 우리나라에 도착할 수 없죠. 그래서

이 기술이 소비를 일으키는데 하나의 매개 역할을 하는 것 같고 우상숭배를 조장하는데 일정 정도

기여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 기술 주에 여러분들도 자유로울 없는 것이 IT 기술이죠.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은 그런 면에서 정말 천재인 것 같아요. 우리가 언제부터 스마트폰 들고

다녔다고, 아이폰 때문에 스마트폰 생각하게 된거고, 아이폰 때문에 삼성도 갤럭시 S 를 많이 팔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삼성이 노력한 것이 아니라 애플이 만들어 놓은 시장에 무임승차를 한 것이죠.

그러면서 예부터 애플은 컬트라고 하죠. 애플교 신자들 잡스가 그런 것을 잘 만들고 관리해온

사람입니다. 돈도 들이지 않고.

그래서 이렇게 기술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필요이상으로 과소비되고 있는 것이 현대사회고

장규열교수님께서 70 년대 이전과 이후가 많이 차이가 났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서라고 하신 거잖아요.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기술의 발전이 있는거죠. 농업사회에서 산업혁명,

거기서 정보화 시대 지금 또 스마트 시대가 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이제 기술시대가 한 획을

그을 때마다 기술의 성장속도가 거의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하고 잇습니다. 그만큼 소비도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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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2010년 가을학기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늘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 반성을 하고 있는 공학자일단의 무리들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학교에서 여러분 포스터를 보셨겠지만 소외된 90%를 위한 공학설계 아카데미 그런 것을 하고

있고 우리학교에도 그린적정기술 연구협력센터라는 것이 있고 적정기술이라고 하는 아직은 학회가

되진 않았지만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짤막하게 그것만 소개드리면요. 여러분들 슈마허를 아실는지 모르겠는데, 구두 만드는 사람이

아니고요, 이 사람이 영국의 경제학자인데요 주류 경제학에 반기를 들고 서구적인 관점에서 빈곤이나

다름없는 낮은 소득으로 살면서도 일상을 아주 만족스럽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목격합니다. 그 사람이

1973 년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을 쓰면서 거기에 중간기술이라는 것을 소개를 했습니다.

중간기술, 그것이 나중에 발전되어서 적정기술이라고 다시 정의가 되었고요, 삶의 규모에 딱 맞는

기술이라는 것이에요. 과도하지 않은 기술. 그 지역에서 남은 것으로 만들고 소비하고, 글로벌한

기술이 아니라 로컬하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기술로써 그 지역, 문화의 사람들에게 딱 알맞는 수준의

기술 그러니까 이것은 낮은 수준의 기술도 높은 수준도 아니고 그야말로 적절한 기술. 그러니까

인간의 불필요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작동하는 기술이 아닌 기술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게

1970 년대 석유파동이 일어나고 하면서 대안기술로써 새로 주목 받았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카터

정부때. 이 사람 좀 진보적인 경향이 있잖아요. 그러다가 그 뒤에 오는 레이건 정부 때 힘의 미국을

강조하면서 적정기술운동이 없어졌고요. 하지만 지금도 그 명맥이 계속 유지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있다는 것 까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김민희 이국운 선배님과 관련해서는 드릴 말씀이 굉장히 많지만, 1988 년도 처음 대학에

들어가서. 그 때와 지금이 변하지 않은게 하나 있는데, 본인은 답을 가지고 있어요. 뭔가가 있는데

끊임없이 그거를 끄집어 내고 우리로 하여금 알게 만들고. 제가 왜 저를 여기에 불렀을까 생각을

했는데 여기 와서 얘기를 쭉 듣다 보니까, 소비사회와 우상숭배 사이에 돈과 노동 욕망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느냐를 보니까, 전 교육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이에 연결고리가 기술과 자원이 발전하고 끊임없이 그것이 욕망이라고 가르쳐주고 하는

곳 사이에 교육이 있는 것 같아요. 교육으로 인해서 1970 년대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슐츠가

23%정도의 경제성장을 교육이 가져올 수 있다고 발표한 이후에 세계 각국마다 엄청난 교육적인

투자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애플 아이폰부터 해서 엄청난 기술발전과 사람들의 수준을 높였던

것은 대부분 교육의 힘이죠. 그래서 저는 오늘 사실 이것을 준비하면서 3가지 질문을 해봤습니다.

소비사회와 우상숭배가 과연 어떤 관련이 있을까. 정말 이게 마치 맞는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소비사회는 정말 우상숭배인가.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고 그것을 경제적인 관점과 성경적인 관점으로

구별을 했습니다. 분명히 성경적인 관점으로 보면 마태복음 6 장 31 절에 알고 계신다고 했어요.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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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31

말이냐면,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그 뒤에 무슨 구절이

있는지 아세요? 이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다 아시느니라. 이미 예수님은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끊임없이 소비를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임을 가르쳐주셨는데 문제는, 제가 보기에는

너희를 위하여 염려하여 라는 구절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거죠. 먹고 입고 마시는 것 자체를 과도하게,

넘치거나 하는 무절제한 부분도 있지만 예수님이 늘 말씀하시는 부분은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그런 말씀을 하셔요. 인간은 끊임없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그런 것 때문에 돈이 생겨나고 욕망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알려주는 도구는,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욕망이고 돈이 문제고,

오늘 여기 고귀하신 교수님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것도 교육의 힘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제가 어원적으로 설명해본 것이 있습니다만, 결국 교육이 아닌

것과 교육을 구분하는 여러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저는 교육학자지만 그 중에 교육행정학을 하고

있는데, 보통 암기와 반복적인 훈련과 교화 이런 것들과 교육을 구분합니다. 단순 반복적인,

수학공식외우고 화학주기율표 외우고 영어단어 외우고 교육학 쪽에서는 그것을 교육이라 얘기하지

않거든요. 그 다음에 훈련, 총 쏘고, 소매치기 가르치고, 단순 반복적으로 계속 스킬을 가지게 하는 것,

훈련도 교육이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indoctrination 무조건적으로 주입하려는 것이죠. 어떤 이데올로기,

사상. 그러면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은 가치중립적인 것이라고도 얘기하지 않습니다. 보다 가치로운

것을 지향하는 것. 그리고 지금보다 더 높은 수준의 발전을 가져오는 것 조금 더 비판적인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교육이다. 그래서 이런 교육적인 어원을 살펴보면서 이 자리가 결국 교육의

장이고 교육을 통해서 옳은 것과 그른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할 수 있는 파워,

힘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Prescription 을 얘기하지 말라고 했지만, 결국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돈과 욕망과 염려함과

근심과 불안을 이겨낼 수 있을까. 결국은 다시 교육으로 가야한다. 예수님이 장님의 눈을

뜨게하시면서 하셨던 말씀은, recover your sight. 단순히 물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 그것에 대해 눈을 뜨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로운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결국 사람답다고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냐, 반성적으로 사고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뒤집어서 생각해보고 왜 그런지를 다시한번 되짚어보고 질문하고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 아닌가. 결국은 교육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 자리가 교육의 자리이고. 만약에 계속적으로

소비사회나 우상숭배 이런 것들이 확산되고 계속적인 문제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교육의 문제로. 오늘

보니까 제일 원흉은 광고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고 교육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는데, 학생들 얘기도 들어보고 같이 토론하면서 좀 더 나은 수준의 지금보다는

들어오기 전과 나가는 순간의 다른 얘기들을 마음에 품고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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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2010년 가을학기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이국운 교육이 제일 문젠데 결국 교육으로 풀어야 한다. 결국 이 얘기를 하셨습니다. 수업

때문에 장규열 교수님께서 먼저 자리를 뜨셔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얘기들을 들으시고 좀 덧붙이실

말씀이 있으시면 좀 부탁드립니다.

장규열 덧붙이기 보다, 오늘 좋은 말씀 듣고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몇가지만 말씀 듣고

싶은 게 있어서요. 지교수님께서 아까 합리적인 소비자를 말씀하셨잖아요. 합리적인 소비자는

사람들이 다분히 계획적으로 소비하고 전략적으로 돈에 관해 아주 합리적인 지배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할 것 같은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사람들이 소비를 할 때에 계획소비와 충동소비가 있죠.

근데 아주 근소한 차이이긴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충동구매를 더 많이 한다라는 통계를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충동적 소비는 어디서 온 것인가.

이강 교수님께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아까 사회 내에서 적정한 기술을 찾아주고 개발하게

도와주는 것은 굉장히 귀한 일 같은데 그 사회에 그 기술이 적정하다고 하는 그 적정선은 누가

결정을 하는 것인지 조금 의문이 들었어요. 우리가 60,70 년대의 국가경제력을 하면서 중공업을

지향점으로 삼아서 간다고 했을 때에 과연 이교수님이 말씀하신 적정기술의 논리를 사용헀다고 하면

과연 밖에서 들어온 노동자가 중공업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교육은 너무

뼈에 와 닿는 말씀 같아서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또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지범하 질문에 답을 하겠습니다. 합리적인 소비자는 충동구매를 하지 않습니까? 충동구매를

하면 합리적인 소비자가 아니다, 그건 글쎄 뭐든지 내가 뭘 사려고 하면 내 예산 계획을 세우고

따지고, 자기 CC 가 그런 사람이라면 되게 무섭겠죠. 야 저거 사자 하면 그래 좋다 하고 가야지

마음에 맞는 사람이지 어 그래? 우리 집에 가서 주판을 튕겨보고 나서 거래를 해보자, 이런 타이밍

상에서 즉각 행동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합리적인 소비자인지를 결정하는 게 아니고 합리적인 구조가

되어있는 사람은 돌발적인 상황을 만나서 하는 충동도 그렇게 합리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장에서 기업들이 이 소비자들이 합리적인 사람들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풀어주고 틀을 만들어주고 판을 짜면서 사실은 자기네들은 광고라든지 브랜딩 전략을

통해서 그 사람들을 조작하거든요. 당신은 합리적입니다, 하면서 뒤에 숨어있는 우상은, 그림자는 뭔가

하면 그래, 속에 너 뭔가 허한게 잇지 우리가 그걸 채워 줄거야. 광고는 뭡니까. 이것은 가치를

드립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뒤에 숨어있는 우상은 끊임없는 욕망을 자극하는 너 돈 있지, 놀지

말고 더 만들어와서 욕망을 추구해라고 하면서 이런 끊임없는 조작이 광고와 마케팅 전략 뒤에

숨어있다는 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것 입니다. 얼마나 즉각적으로 결정하느냐 하고 합리적이냐 하는

것이 반드시 같이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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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33

이강 적정기술에 대한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도 적정기술 공격적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고 제가 아는 적정기술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회 발전 단계에 따라서 적정기술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지금하고 있는게 태국에 가서 온수난방시스템 만들어주고 벽돌로 된

집지을수 있도록 흙벽돌 찍어주고 이런 것을 공학교육 혁신센터에서 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이제 그

사람들은 그것도 없이 사니까 그것이 적정기술이고요, 그것보다 더 발전되어서, 태국의 다운타운에

가면 그것은 벌써 적정기술이 안되는 것이죠. 거기서는 하이텍이 적정기술이 될 수 있겠죠. 로

테크이냐 하이 테크이냐가 기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적정기술은 누가 결정하느냐 , 그것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결정해야죠. 예를 들어 태국 같은 경우, 그 지역의 촌락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 NGO 를 통해서 어떤 기술이 가장 필요한가를 조사해서 리스트가 나옵니다. 그것을 현지인들이

이해할 수 없고 유지할 수 없으면 적정기술 후보에서 밀려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의료기술 생각해보면요, 예컨데 우리 수명이 늘어난 것도 기술의덕인데, 예방백신

없었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지금 여기 앉아있는 사람 반도 없을 거에요. 어렸을 때 우리가 예방백신

수십방을 맞았기 때문에 질병과 싸워 이기고 여기 앉아있는데, 백신 만드는 하이텍이 적정기술일까요

아닐까요. 여러분이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어떻게 되는거냐. 사실 공짜 발전이

아니죠. 다 엄청난 부작용을 유발하면서 중화학공업 하면서 일어났던 부작용을 말로 다할 수 없잖아요.

그 당시 그것이 최선이었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할 것 같습니다. 과거에 삶에 비해

얼마나 더 행복하냐 얘기해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교육받아서

그런 걸 수도 있겠죠.

이국운 여러분들 시간입니다. 제 느낌에는 우리 교수들은 소비사회의 최전선에 나가있다는

생각은 덜 들고요 뭔가 약간 구경꾼스러운 입장에서 얘기를 한 것 같고, 그래서 더 생생한 디스크립션

보다는 이래야 되는거 아닌가 훈수 두는 입장에서 얘기가 진행되었다고 여러분들이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전선에 더 가까이 있다면 질문하고 그러기 보다는 전장의 상황을 보고하는

방식으로 이 주제에 대해서 얘기 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시든지 간에 얘기를 열어놓고 싶으면

시작해주십시오.

학생 1 김민희 교수님께 여쭤보고 싶은데요, 미성년일 때 교육을 해주셨던 분들을 대상으로

어느 정도 비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근데 사실 제가 교육을 받으면서

이것을 왜 제가 교육을 받아야 되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아요. 근데 지금

돌이켜보면 딱 저만큼을 위해서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을 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소비 사회에서

우상숭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걸 위해서 배웠다고 생각을 하는데, 제가 궁금한 것이 제 친구들이

임용고시를 치고 있고 그런 입장에서 굉장히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교사를 준비하고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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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2010년 가을학기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왜 이렇게 교육이 되지 않는 것인지, 도대체 한국 교육계는 무엇을 위해서 교육을 하고 있는지,

최소한, 이상적으로 이걸 위해서 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데 이런게 궁금했습니다.

학생 2 05 경영경제입니다. 제가 물어보고 싶었던게 얘기하시면서, 기독교복음주의적인

청부론에 대한 얘기가 안나와서 궁금했는데. 기독교내부에서도 소비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안하고

있고 어떻게 보면 소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청부론이라는 것도, 제가 보기에는 전 청부론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청부론이라는, 자기가 번 만큼에 대해서 소비할 수 있다는 기독교 내부의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소비사회도 있는 것 같고, 기독교 내부의 소비사회에 대한 교육의

부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민희 제가 전공하는 것이 교육행정학입니다. 교육정책을 많이 연구하는데 그러다 보니까

중앙정부 관료들을 많이 만납니다 가장 의사결정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동대학교가

에이스사업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교육정책결정과정에서 무언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 때문에 저도

이 자리에 와있는 거고. 개인적인 수준, 저는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계속 그런 질문을 던졌죠. 도대체

뭐가 문제냐. 개인적인 수준에서 시민들끼리 문제라고만 얘기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되겠다. 한국 속에

교육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도 지금 애기 키우고 있지만 사교육비 장난이 아니고, 둘이 벌지만

남는 것은 하나도 없고. 저야말로 전장에 있는 사람인데, 정말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

특별히 공적인 교육기관을 움직이는. 근데 현재 정치인, 국회의원, 정부, 와 논의를 하다 보면

교육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가 많지 않고요. 거기서 결정되는 것이 모든 학교에

들어가는데 그럼 어떻게 할거냐. 우리가 의사결정자가 되어야죠. 임용준비 열심히 해서 교사가 되고

학교장의 위치에 가고 교육감도 되고 선한 목적으로 높은 자리에 가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정말 필요하구나.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그럼 왜 우린 그러지 못했는가. 그런 환경이 없었던 것이죠. 그동안 군사정부시대, 우리

사회가 발전해오면서 지나치게 성장, 성과에 집착하는 부분.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그 여지를 두지 못한 것이죠. 천천히 움직이고 느리게 가는 것들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풍토로

인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사교육문제에 대해서도 일부 시민단체들 중심으로 사교육 없는

학교, 그 다음에 사교육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 더 그런 것들이 확산이 되어야

하고 같이 논의하는 자리가 늘어난다면, 느리지만 교육문제나, 우리 사회의 많은 것들이 해결될 수 있

을거라는 기대를 가져보고. 또 제가 어떻게 해야 할 지는 모르겠으나 정책결정의 자리에 있을 때에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거든요.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삽니다. 단순하고 답이 됐는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생각하는 개인들의 합이 많아질 때 사회가 건강해지고 더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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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35

있는 것이 아닌가. 저는 이 자리가 한동대학교라는 곳에 굉장히 와보고 싶었습니다. 밖에서 보는

입장은, 한동대학교는 그 동안의 10 년 동안에 엄청나게 교육적으로 성장하고 바람직한 한국의 모델로

여겨지고 있는 곳이에요. 내부에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외부에서 보기에는 소규모 대학으로 이렇게

교육적인 성장을 이룬 모델을 갖지 못했죠. 그것은 다시 얘기하면 그만큼 오랜 시간 교수님과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이런 자리에서 얘기했던 성과라고 보여지고요. 여기 계신 분들 만큼도 조금 느리게,

비판적으로, 되짚어보는 활동을 수업 시간, 혹은 끼리끼리 만났을 때 여러 공공장소에서 더 많은

얘기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기독교적인 청부론, 솔직히 아직 전

모르겠습니다.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부분이라서.

지범하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지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봅시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청부론에

대해서는 크게 공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게 맞다 그르다 얘기할 수는 없는데. 저는 오늘

그런 말을 하고 싶었어요. 프리스크립션에 가서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여러분들이 이런 소비사회의

풍조에 쓸려가는 것은 지향해야 할 것은 분명한데, 소비에 대해서는 좀 자유로웠으면 좋겠어요. 너무

guilty feeling 을 안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한동의 많은 분들 아주 알뜰하게 잘 쓰시는 것 같은데, 이런

환경에 있다가 보니까, 좀 더 아껴써야 하는데 아, 내가 죄 짓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자꾸 웅크러드는

경향이 있는데, 무슨 말씀인가 하면 청부론하고 연관지어서 생각해보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있어서

소비문제는 절대로 개인적인 문제이지, 이것도 하나의 집단적 원칙을 만들어서 저 사람은 저걸 하니까

틀렸어 이러면 곤란하다는 것이죠. 나한테 적용해야 된다는 거죠.

무슨 말인가 하면 청부론도 부자가 깨끗하게 돈을 벌었으면 이 돈은 내가 쓸 수 있는거 아냐,

그 이야기는 맞기도 하고 틀립니다. 성경에 보면 종이 일을 해서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거죠.

그런데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청부가 돈을 벌었으면 어느 정도까지가 내거고 어느정도가 하나님거냐.

그건 룰이 없다는 거죠. 그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청부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번 돈을 가지고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상의하면서 자기가 자기 몫을 누리고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졌다면 그건 그 사람들 얼마든지 써도 괜찮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내 몫이 정해져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소비도 마찬가지 입니다. 똑같은것을 해도, 여자들 가방, 지갑 좋아하죠. 돈을 비싸게 주고

샀어요. 근데 어떤 악세사리를 샀는데 그게 너무 아름다워요. 샀어요. 그게 너무 아름다워요. 황홀해요.

너무 좋아요. 그러면서 그 속에서 내가 아름다움에서 하나님의 창조주의 아름다움을 느껴요. 극단적인

예지만, 그렇다고 하면 그 사람이 소비를 해서 내가 만들 수 없는 나를 대신 그 소비가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소비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내가 소비를 함으로써 소비의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깊이가 있고 그분의 뜻을 더 알아가는 결과를 가졌다고 하면, 궤변같습니다만,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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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는 가능할 수 있는 것이죠. 이론적으로. 그런 소비라면 너무 guilty 를 느끼지 마시라는 것이죠.

똑같은 물건도 어떤 사람은 뭔지도 모르고 허영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걸 사고 굉장히

거기서 깊은 감동을 느꼈다. 예를 들어 커피요. 제가 스타벅스 캬라멜 마끼아또를 먹었다면 그것은

허영입니다. 제가 그 맛을 잘 모르거든요. 근데 그 커피맛을 깊이 잘 아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때에

저는 그분들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지가 뭔지도 모르면서 남이 하니까 따라서 하고 그러니까 나도

저런 사람 같에, 나도 저런 사람 인거야 해야 된다고 하면 그건 문제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너무 legalistic 하게 이것을 접근하지 말고 자, 뭐든지 모든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공급자는 하나님이시고, 그런 틀을 여러분들이 완벽하게 가지고 계시다면 거기서의

소비행태에 대해서는 좀 자유함을 가져도 좋아요. 그런데 제가 받는 더 문제는 뭔가 하면, 전체적인

차원에서는 우리가 가진 재화는 한계가 있어요.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또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지금 있는 자원을 자꾸 써서 물건을 만들어내고 버리면서 이러면서 우리가 가진 제한된 자원이

고갈되죠. 또 우리가 물건을 너무 과다하게 소비하면서 폐기물이 증가되고 해서 환경에 문제가 되는,

우리가 하나의 청지기로써,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사회가 건강하게 나가지 않는데 내가 기여를

하는 소비라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느냐, 그런 관점에서 신중하게 생각해봐야지, 개인적인 소비는

각자의 문제고 분명한 자기의 정체성이 있고 기독교적 틀에 있다면 어떻게 보면 소비를 누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학생 3 지범하 교수님께 질문 드리겠습니다. 처음에 여기 왔을 때는 당연히 돈과 자본주의가

중심 키워드가 되서 논의가 진행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왔는데, 전혀 등장하지 않아서 약간

당혹감을 가지고 있는데, 좀 전에 말씀하실 때 자본주의가 가장 기독교에 부합하는 체제라고 말씀하신

데에 대해서 의문이 들어서, 해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학생 4 제가 이해하기로 소비사회라는 것이, 누군가는 욕망을 가지고 있고, 다른 누군가는

욕망을 충족해주는 사람이 있고, 욕망을 충족해주는 입장에선 또 다른 욕망을 창조해서 욕망을

구하려는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그런 과정에서 프로슈머라는 신종어의 탄생도 있었는데, 그것은 욕망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충족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결국에는 한 나라의 경제규모를 측정하는 GDP 의

관점에서 봤을 때 GDP는 한 나라의 생산과소비가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가를 측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결국에는 한 나라에서 욕망이 얼마나 활발하게 충족시켜주는가를 나타내준다고 저는

재해석했습니다.

그럼 현대사회에서 경제규모를 더욱 확장시켜주는 경쟁 관계에 있을 때 각 국가는 그 나라는

욕망을 얼마나 더 확대시킬 수 있느냐, 또 그 욕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느냐 단지 그 욕망을

줄이고자 하는 그러한 수준이 아니라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꾸준히 확대될 수 있느냐가 체제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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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37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 욕망의 안정적인 확대경쟁에 대해서

지범하 교수님께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계신지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계신지 알고 싶고요.

또 아까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욕망의 충족이라는 것이 과하면 안된다.

적정수준에서는 괜찮다라는 식으로 정리가 될 수 있는데, 그것을 일반 대중에게 적용하려고 했을 때,

아까 김민희 교수님께서 어떠한 교육적인 차원에서 제한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씀하신 것

같기도 한데, 제가 학교제도교육에서 배웠던 것은 너무 과소비하면 안되고 저축을 해야한다. 하지만

너무 저축만 해서도 안된다. 적정하게 소비도 해야 된다.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면

과소비할 경우에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으니까 그것이 GDP 를 파괴시킬 수 있고 한 국가의

욕망의 안정적인 확대를 방해할 수 있다. 그래서 적당히 소비해야 한다. 그리고 저축도 마찬가지고요.

결국에는 대중한테 전해지는 방향 자체도한 나라의 안정적인 욕망확대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제도 교육이 어떻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궁금하고요.

이강 교수님께는 적정기술이라는 것이 발달하지 못한 국가의 욕망이 있을 때 너무 고도의

기술을 갖고 가면 욕망을 채워줄 수 있긴 한데 적절하게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수준을 낮춰서

욕망을 안정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기술을 제공한다고 이해를 했거든요. 결국에는 그것은 지금까지

욕망을 제대로 충족하고 있지 못하는 지역에 욕망을 충족시켜 줌으로써 앞으로 꾸준한 욕망 확대에

트리거를 하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학생 5 국제어문 김상범입니다. 논점에서 이탈된 것 아닌가 해서 품고 있다가 이 친구가

자본주의가 과연 기독교적인가 라는 것에 좀 엮을 수 있겠다 싶어서 생각을 한 것인데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게 너무 소비자, 주체로써의 소비자만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몰려오는 우상들을 섬기지 말아야하는 주체로서의 소비자만을 생각하시는 것 아닌가. 제가

힘겨운 것은 그 소비자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써, 소비되어지는 사람으로써, 스펙을 쌓는다거나

무언가를 쌓아간다는 사실은 내가 소비를 당하는, 기업들에 의해서 소비를 당해야 하는 내 포지션, 그

속에서는 사실 내가 우상을 끊고 내 스스로 나서야된다, 그 속에서는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을지 저는

좀 힘들지 않나. 오히려 끝까지 이렇게 소비사회로 이끌어가고 있는 자본주의 터전을 과연

기독교적으로 이게 효율적이다, 가장 이제까지 해왔던 하나님의 가장 좋은 체제다라는 선언은 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저로써는 힘겨운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서 그것에 대해서 답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학생 6 저는 지범하 교수님 말씀 들으면서 이렇게 받아들였거든요. 소비사회에서는 개인이

강조됐을 뿐 시민에 대해서 망각했기 때문에 잘못된 자아인식을 하여서 소비를 통해 나를 만들고

싶어하는게 잘못됐다고 말씀을 하셨다고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교수님께서 소비의 문제가 개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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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2010년 가을학기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차원의 문제일 뿐이지, 소비에 너무 책임의식을 가지지 말라고 하셔서 순간 당황스러웠고요.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름다움하고 제가 말하는 아름다움하고는 조금 다른데.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제가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저야말로 소비사회의 우상숭배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어제 저녁에 제가 새벽 3 시에 잤는데요. 12 시에 제가 인터넷에서 진짜 예쁜 구두를

발견 한거에요. 그게 처음에 제가 발견했을 때 미란다 커라는 모델이 신은 10 만원이 넘는 수제화를

5 만원에 공동구매를 할 수 있다는 거에요. 이걸 구매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제가 그

제목을 보기 전에는 구두가 정말 예쁘거든요, 정말 아름다워요. 근데 제가 제목을 보기 전에 제가

그것에 대해서 아름다움을 알았을까요? 브랜드 이름을 보기 전에 욕망이 있었을까요? 장규열교수님

계시지 않는데 장규열교수님 말씀 중에 제가 이렇게 받아들인 게 있어요. 욕망은 항상 실존하고

문제가되는 것은 돈의 한계다라고 하시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돈은 한계가 있어요 물질이니까. 근데

정말 욕망은 실존할까요? 제가 그걸 보지 않았더라면, 제게 욕망이 있어서 새벽 3 시까지 그걸

사야할지 말아야 할 지 고민하고 있을까요? 욕망의 실존에 대해서 묻고 싶어요.

이국운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됬으면 좋겠는데, 글쎄요, 우리가 갖고 있는 증거로는 욕망도

무한히 많이 되고 돈은 상당히 한정이 되어있다고 아까 말씀을 하셨는데, 장교수님 안계신 곳에서

죄송합니다만, 그 말씀도 좀 아웃데이트 한 것 같습니다. 왜냐면 이제 브랜튼 우즈 체제가 무너지고

난 다음에 세계의 소위 기축통화가 없어지고 난 다음에는 그냥 막 찍어내거든요? 돈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돈이 한정이 있지 않습니다. 미국이 지금 2008 년에 금융위기를 맞은 다음에 미국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달러를 엄청나게 찍어냈습니다. 그걸 가지고 모자라니까 중국더러 환율을 올려라

위안화를 절상하라고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돈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찍어내면 됩니다. 다만

소비하려는 사람이 돈이 없을 뿐입니다. 그건 다른 방식으로 조달이 됩니다.

학생 7 전산전자공학부 06 학번 조민지입니다. 김민희교수님 말씀하시는 것 듣고 질문점이

있어서 질문 드립니다. 결국에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근데 현대가 이미 소비사회를

향해 치닫고 있다고 전 생각하거든요. 단순히 교육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아까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사는 것이라고

보드리야르의 책을 보면 나와있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너는 기호를 사는 게 아니라 커피를

마시는거라고 교육을 할 순 없는 거잖아요. 단순히 그런 부분에 있어서 말씀하신 것은 교육의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신 것 같고 소비사회에 있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떤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교육이 문제여서 교육을 해결해야 된다고 하셨지만 제가 듣기엔 너무 막연한

이야기라서 조금 더 방향을 좁혀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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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39

학생 8 경영경제 09 학번 박준민입니다. 저는 소비사회에서의 노예로 저를 인식을 했는데요.

한동에 와서 재미 있는 관행 하나 보았는데요. 식사를 하고 나서 항상 매점에 가게 되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게 남들이 하는 나 돈 있어하는 허영의 효과도 아니고 너와 나의 관계를 위해서, 단지

그것 때문에 매점을 가야하는 관행. (청중 웃음) 그리고 저뿐 아니라 이미 소비가 당연한 것처럼,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이 그래 너가 이걸 필요로 하니까 내가 사줄게 그러니까 아빠 멋있지 이런

식으로 소비의 형태로만 사랑이나 우정이란 실제적 가치가 보여질수 밖에 없는 것이, 저는

89 년생인데 그 이전에는 부모님 세대에서는 많이 부족하고 그래서 저는 그걸 느끼지 못했지만 제가

태어난 이후로 저는 충분히 풍족하게 지냈기 때문에 저는 소비사회에서 그 밖에 있는 관점에 대해서

제가 시야가 좁아져서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인가 궁금하고요 그리고 사랑이나 우정이란

가치가 다른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지 않은가, 대책이 있지 않나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학생 9 아까 선배님이 소비자로써의 객체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취업하려는 입장에서

기업으로 하여금 저를 소비하게 만들어야 되고 대다수가 기업으로 갈 텐데,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소비를 촉진해야 되는 입장인데, 판매를 해야 하는 입장인데, 그때에 기독교인으로써

어떤 자세를 가지고 소비사회를 바라봐야 하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학생 10 저는 지금까지 토론을 들으면서 느꼈던게, 뭔가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뭔가 우상숭배가 되려면 어떤 선을 넘어야 하는데 그러한 선 자체가 교수님들의 말을

들어보니까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성경, 우리가 지금 성경을 근거로 뭔가 우상숭배란 이런

것이다라고 제시하고 싶지만 성경도 명확하게 제시를 하고 있지 않은 것 같고요. 그래서 제가 느꼈을

때 전제해야 할 점은 우상숭배의 기준이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 사회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싶은데.

그럼 저의 입장은 아까 지범하교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자본주의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인간의 행복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자본주의가 가장 그것을 잘 충족시켜주는

시스템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아까 그 여자분께서 구두를 지른 것에 대해서 뭔가 죄책감을 느끼면서

말씀하셨는데, 10 만원 짜리 5 만원에 사셨다고 했잖아요. 그럼 그 구두 10 만원에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겠죠. 그러면은 5 만원에 살 수 있는 이분보다 10 만원에 사는 그 분이 훨씬 더

우상숭배의 강도가 높은 것인지 제 생각에는 오히려 10 만원에 살 수 있는 사람들 덕분에 기업들이

경쟁을 해서 가격을 낮추고 이렇게 5 만원에 사서 자신의 효용을 높일 수 잇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우상숭배라는 것을 정의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아까 초반에 광고 부분에 대해서 마치 소비사회의 개선해야 할 악인 것처럼 뉘앙스를

다들 풍기시더라고요. 제가 광고에 대해서 읽은 이밴하임이라는 경제학자의 책에 의하면 미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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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2010년 가을학기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광고를 허용하는 주하고 광고를 허용하지 않는 주를 비교를 해봤더니 안경시장이었거든요? 광고를

허용한주의 안경이 더 쌌다고 하거든요. 그 광고라는 것을 단순히 티비에 나오는 메시지라고만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구조에서의 광고의 역할은 오히려 우리의 효용을 충족시켜주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소비사회는 것이 인간의 행복을 충족시키는 데서 한정된

자원이라는 전제하에서 가장 최적화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고. 그런 의미에서 이런 토론하는

것 자체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이국운 소비사회는 우상숭배와 상관없다. 쭉 돌아서 그렇게 왔네. 그것도 상당히 재미 있는

얘기입니다.

지범하 여기가 대학교 아닙니까. 대학생들에게 우리가 기대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늘 점검하고 자기가 성장해가고 지혜가 형성된다고 보는데요. 제가 좀 아쉬워하는 것은 너무

우리가 정답을 많이 알고 있어요. 그러다 보면 legalistic 하게 들어가기가 쉬워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하나의 도전으로 말을 던졌는데, 그게 하나의 명제로 인식이 되어서, 제가 조심스러운데 간단하게만

반응을 보인다면. 첫째, 자본주의는 문제투성이죠 당연히. 세상 사람들이 만든 제도들 문제

투성이입니다. 자본주의가 훌륭하다는 얘기가 아니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제도, 문제투성이라고

해서 마치 어떤 느낌이냐면 자본주의에 대해서 비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그 분들 말이 틀린

게아니라 그러면 어떻게 할것인가. 또 애굽에서 뛰쳐나오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사람들하고

비슷하다는 얘기죠.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거든요.

자본주의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씀 드리면 어떤 거냐,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해요. 그 다음에

모든 선택은 개인이 하는 거에요. 조금 더 나아가면 개인한테 자유를 주니까, 룰이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독재자가 와서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룰에 따라서. 모든 제도라는 것은 흠도

있지만 결국 운영하는 사람들의 문제다. 우리의 본성이 뭐냐에 달렸지 않나. 상대적으로는 우리에게

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주고, 나는 성서적으로도 사유재산을 인정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우리가 얘기한 다른 제도에 비해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공산주의로 갈

수도 없고 사회주의 체제 글쎄요. 그러니까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는 이퀄이 아니고 자본주의는 성서에

완전히 배치되는 그런 제도는 아닙니다 라는 뜻에서 말씀드렸죠.

그리고 소비, 소비를 왜 하느냐, 그리고 소비의 결과가 뭐냐를 우리가 봐야 되요. 개인은

모든게 내 것이 아니라고 하죠. 어떻게 쓸 것인가. 저도 그럴 때 많거든요. 뭐가 꼭 하고 싶은데 놓고

다른 거 하면 머리에 계속 뱅뱅 돌아요. 어쩔 줄을 모르는데, 하나님하고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다면

유혹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런 상태에서 내가 하는 소비행동이라면,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라는 의미에서 너무 겁먹고 소비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이야기한 것이지 우리가 소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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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41

결과가 무엇입니까. 내가 왜 이걸 소비하느냐. 그것만 사면 모든게 다 해결될 것 같지만 모든 게

보암직도 먹음직도 하지만 끝나고 나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 자신을 살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다면 그런 충동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린거고 그러니까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뜻에서 말씀드린 것이에요.

김민희 제가 생각하기에도 좀 벙벙하게 얘기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을 통해서 서로

비판하고 해결하자, 얼마나 너무 황당하죠. 소비자 사회의 우상숭배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교육이

필요할까 물어본다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쉽게는 제도교육 범주 속에서 가장 쉽게는 사회교과를

가지고 접근할 수가 있겠고요. 그런 교육을 지금까지 해오지 않았느냐 그것은 아닌 것 같고요.

문제해결능력, 비판적 사고를 길러주는 교육방법, 내용 이런 것들이 수업시간에 교실 단위에서

여러가지 교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여전히 아이들은 앉아있고 선생님들은 떠드는 그런 형식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뭔가 좀 새로운 수업방법의 혁명. 저는 존 듀이를 좋아합니다. 존 듀이의

반성적 사고과정, 문제를 규정하고, 가설을 동원해 해결해나가는, 새로운 답을 찾는, 이런 비판적

사고과정을 길러주는 힘이 사고력이 생기게 되면 거기에 어떠한 문제를 집어넣어도 새로운 대안을

같이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의 대안을 수용하고 이렇게 상승작용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이것도 좀 벙벙한 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민주시민교육 실태를 조사한 연구를 작년에

저희 남편이 프로젝트를 수행했는데, 굉장히 난감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학에서 민주시민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어떻게 조사를 하겠어요. 어거지로 약간 끼워 맞추기로 해서 하긴

했습니다만, 사회교과를 가지고 할 것이냐, 어쨋든 굉장히 중요한 교육목표죠.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은 우리 교육의 최상위에 있다고 보는데 특정 교과를 가지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만, 다만 저는 새로운 교육방법이 현재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혁명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계속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것 같아요. 소비자는 어떤 교육이 필요한가. 이런 질문을 하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배우지 않았고 모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가. 가끔 핀란드의

교실이나 다른 나라의 수업 관찰을 보면 이렇게 하진 않거든요. 다른 형식이 있는데도 왜 안될까.

조금씩 변화의 물결이 있습니다. 확산이 못되어서 그렇지. 그런 문제의식을 던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잇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정책결정자의 힘과 맞닿았을 때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이

더 좋은 것이고 옳은 것이고 어떻게 가야하고 이런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대화하고 담론을

형성하고. 기준점은 없는 것 같아요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내가 얼마나 무절제한 부분이 있는지를.

계속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따라가게 되는 거죠. 한 개인 수준에서 다시 한번 이렇게 해도

되는걸까 라는 훈련이 필요하지 않나. 그것이 제도교육의 형태로 가서 새로운 수업방법 이렇게 결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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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2010년 가을학기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하게 된다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으나, 계속 어떤 교육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은 좀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국운 오늘 우리 얘기가 처음 기획과는 달리 상당히 대세추종적으로 가고 있는 느낌이

있어요. 이게 흐름이 이렇게 잡혀있다고 해서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이 흐름을 타면서도 휩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냐 아니면 아예 돌아서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터넷에서 윤리적 소비라는 것을 쳐보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소비사회에서 사라져버린

윤리라는 단어를 소비와 연결시켜서 해보자. 그런 운동들도 있고 생협 이라든지 라는 것도 그런 맥락

속에 있습니다. 소비사회의 우상숭배에 맞서는 것이 우리가 그 속에 있다고 해서 너무 하기 어려운

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우리가 지레 겁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을 좀 하고요.

아까 우상숭배의 기준이 없지 않냐, 근데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대우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하고 있고 한 가지 증상으로써는 우상숭배가 우리한테 주는 결과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을 때 오는 결과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섬겼을 때 우리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강이 온다면, 우상을 섬겼을 때에는 공허함이 밀려오고 그래서 더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공허함의 문제는 우리가 얘기하지 않았는데 그 면에 있어서는 우리가 소비사회에서

지르면 지를 수록 더 공허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이강 적정기술이 저소득층 사람들의 욕망을 확대하는 트리거시키는 것 아니냐. 그 이전에

적정기술이란 용어보다 제가 더 좋아하는 것이 90 퍼센트를 위한 기술이라는 것인데요. 비슷한 것이긴

하지만 좀 차이가 잇습니다. 연구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하지 않겠어요. 누가 돈 주겠어요. 소비력을

가진 사람들이죠. 구매력이 있는 10 퍼센트를 위해서 전세계 R&D 예산의 대부분이 사용되고 있다.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 90 퍼센트를 위한 공학이라는 것이죠. 누가 태국의 산간마을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연구하라고 리서치펀드를 안만들어주거든요. 인간을 위한 기술을 해보자 이렇게 보시면 되는데,

그 결과로 그 사람들의 경제력이 향상되어서 소비를 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은 좋은 것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학생 11 생명과학부 김민호입니다. 지금 나온게 교육, 경영, 광고, 기술, 법을 통해서

소비사회를 만들어오셨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교수님들께서 만들어오셨다고 생각이 되고. 성경을

비유하자면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간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걸 섬겨라고 했을 때

거기에 있던 백성입장에서, 아, 저것이 야훼인가보다, 모세 형 아론이 그러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섬기고 있는데 갑자기 모세가 나와서 야 이거 우상이라고 말씀하신거랑 저는 그 느낌이 비슷한데요.

그러니까 그렇다면은 지금 보시는 소비사회의 우상이 뭐라고 생각하시고, 저 같은 경우는 당연한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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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43

그게 우상이 아니라 신인데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 당시에 교수님들이 저와

같은 때에 있었을 때에 윗 선배분들께서 계셨던 우상숭배는 뭐였는지 궁금했습니다.

학생 12 07 법학부 입니다. 저는 아까 지범하교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릇된 자유의지가

교육에 아닌 것에 투자하는 것들에 대해서 허상된 자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것보다

개인이 가진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서 내가 그런 것을 추구해서 만드는 내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 자신으로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측면인데요. 근데 우리가 생각해볼 때 부정적으로

생각되는 소비사회로 치닫고 있는 것은 어떤 사회구조적 제도가 변화하면서 관행이 그렇게 변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사회 속에서 좀 더 나은 소비를

위해서는 교육적인 측면으로 접근해볼 수 있는데, 근데 교육이 이루어지는 관점이 어떠한 딱 답이

아니라 가치관의 재정립이 필요한 것이잖아요? 이거에 대해서 과소비를 하지 말자 저축을 하자는

개념으로 볼 때도, 과소비라는 것도 딱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각 층에 따라서

과소비의 개념이 다르잖아요.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 가정과 학교 이런 것들이 있는데 그 가정이라는 것도 그 부모가 된

사람들조차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학교에서 어떻게 이러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고 이런 가치 재정립은 모두에게 현실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인데 이러한 게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정말 의문이거든요. 학교 교육도 한계가 있고 그래서 저는 그러한 교육적인 것이 어떠한

토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학생 13 전산전자 05 학번 하동우입니다. 일년 정도 제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브랜드라는 가치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거든요. 장규열 교수님 말씀하셨는데 가치 생산면에서

굉장히 존중하는 편입니다 사실. 왜냐면 그런 가치라는 것은 판매자의 자존심이기 때문에 지켜져야 할

문제인데 근데 제가 왜 브랜드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냐 면은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허무맹랑한

가치가 더 많이 추가되었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이유 때문에 우상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브랜드에 가치는 주되 허무맹랑한 가치를 없앨 수 있겠냐는 것이죠. 제가 아무리

고민해도 모르겠더라고요.

학생 14 06 학번 법학부 이창우입니다. 아까 그 앞에 학우분들이 말씀하신 것을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적절한 소비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소비하는 행위나 대상에 내가 얼마나 의존하는가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까 교육부분에서도 말씀하셨는데 교육이 지금까지

과소비를 주의하자 이렇게 진행되지만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이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있는데, 혼이 교육이 될지는 몰라도 몸 수준까지는 교육이 안되니까 그럼 이게

제대로 적용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담배가 나쁘다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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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2010년 가을학기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몸으로 직접 체감할 때까지는 심각성을 못 느끼잖아요. 그래서 내가 어떤 사물이나 제품에 대해서

의존도가 어느정도 되는지를 몸소 체험하게 되면은 지식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식한 것을 체득하게

되면 교육에 좀 교육이 되지 않을까.

학생 15 이국운 교수님께서 아까 공허함이란 단어를 언급하셨는데요, 제가 체화하면서 내가

우상숭배를 하고 있구나 생각을 할 때가 피곤할 때이거든요. 만약 물건을 사게되서 만족이나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피곤함을 느껴요. 이 물건을 샀는데 이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거에요.

이 물건을 교환을 해야 하나 환불을 받을 수 있을까. 이런 물건을 사면서 끊임없이 거기에 노예가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물건이나 상품에 얽매이는 상황에서 제가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느끼구요. 우상숭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기비판을 언급하셨어요. 저는 구매를 하고 나서 아니라고

느낄 때 자기 반성도 하고 그러는데 이런 실수가 반복된다는 말이에요. 자기 반성이라는 것도

우상숭배를 극복하는 최상의 방법일 수 있는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민희 교육학에서 자주 언급하는 개념 중에 아하 Experience 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장하준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삼 적, 세계경제를

무너뜨리는, 그 다음에 제 3 국가에 끊임없이 자본주의 질서를 강요하는, 그런 걸 읽으면서 아하

그렇구나 라고 알게되고, 지식의 세계 앞에서 겸손해 지는 것이죠. 내가 잘못 지름신을 지르고 있고

그런 과정을 열어두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고요. 교육적인 토대는 저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으면 밖에 나가서 얘기를 하는 거에요. 이게 정말 문제일까.

저는 청주로 12 년 전에 몰랐다가 한살림이라는 공동체를 알게 됐어요. 그렇게 가입하는

것이죠. 앎과 삶의 문제가 있고 교육적인 문제로 다시 가게 되는데요. 가장 낮게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담론을 구성하고 얘기해보고, 내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이런 순환을 통해 발전해

나가는, 그치지 말라는 것이죠. 그치지 말고 계속 다른 내용을 가지고 삼삼오오 모여 앉았을 때,

개인적인 고민보다는 사회적인 문제, 공공의 문제를 같이 놓고 얘기하는 것이 조금 더 커지게 된다면,

자꾸 그런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싶어요. 그것이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교육적인 토대가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지범하 저는 교육으로 개인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회의적입니다. 공동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개인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런데 세상에는 여러가지

흐름의문제가 뭐냐 현재 이런 제도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저는 우리의 문제는 인간의 본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내 자신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내 바로 옆의 사람이 어떤지

올바르게 깨닫고 있지 못한 데서 시작된 것 아닌가. 그래서 이런 큰 흐름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앞서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깨닫고 알면서 이 문제를 접근해야 된다고 보고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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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우상숭배들 145

그런데, 늘 내가 반성하고 끝나지 않습니까, 니체가 이야기한 것은, 아주 기특한 말을 했어요.

하늘이든지 땅이든지 이생이든지 저생이든지 간에 불변하는 진리는 뭘 이루려고 하면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 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이 이것을 자기 책의 제목으로

붙였어요.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 뭐든지 한 방향으로 꾸준히 오래가야 된다. 하루

아침에는 안되요. 그치만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 깨달아가면서 나를 점검하면서 우상숭배의

세상에서 나간다고 하면은, 저는 여러가지 실패가 많았지만, 제 나이가 되면은 아주 지혜로운

소비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이강 저는 짧게 말하는 사람이죠. 우상숭배의 모습이 뭐냐 물어보셨죠. 왜 우리가 쓸데 없이

윈도우 7 으로 갈아타게 됩니까 그 좋은 XP 를 놔두고. 우상숭배의 한 모습이 아닐까요. 얼마 전에

스마트폰을 샀다가 다시 바꿨어요. 불편해서 못 쓰겠더군요. 엔지니어가 파업하면 사회가 싹 가는

거잖아요. 전기 이거 다 기술의 산물 아닙니까. 기술의 힘이 굉장히 위대한데, 이 기술을 창조하는

엔지니어가 생각 없이 그냥 주는 것 받아서 하기만 하면 우상숭배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다. 뜻 있는

젊은이여 공학으로 오라.

이국운 오늘 좀 아픈 얘기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했는데, 글쎄요 우리가 이 모임도 소비한

건지 한번 생각해봅니다. 담론, 담론이라는 것이 믿을 만 한건가. 담론과 수다는 어떻게 다른가,

소비된다는 측면에서. 아까 민호군 질문 한 것. 옛날에는 어떤 우상이었는가. 저는 예나 지금이나

우상의 본질은 결국 권력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근원이다 결국 돈을 왜 사랑하느냐가 문제이고 돈 그 자체는 가지고 있어봐야 그 자체가 일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돈은 돈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돈 자체가

권력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고요, 아마 그 경제학 한 사람들은 케인즈의

유명한 말, 유동성 선호라는 개념 속에서 진리가 개념화되었다, 생각합니다.

오늘 이 모임을 마치기 위해서 그동안에 무슨 말씀을 나누면서 마칠까 생각을 해보았는데,

조금 소박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글쎄요. 우리는 예수님은 어떻게 소비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좀 더

생생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나와있는 대로 우리가 과장없이

생각하자면, 상당히 빈한 동네에서 먹고 살 걱정이 조금 있는 비교적 안정된 직업은 있었지만, 그렇게

사시지 않는가 생각하고요. 질러 놓고 나중에 보는 식의 소비생활에는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렇게 친하지 않지 않았을까. 예수님 말씀을 하나 하나 보면, 아 이분이 근본적으로

가난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하는 측면들이 있습니다. 너무 무식하고 단순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지름신이 임하는 그 현장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청년예수의 소비생활로 역사하셔서 그 두

영이 경쟁하는 것 하는 것, 적어도 그 경쟁구도는 만드는 것. 그러면 세벽 세시가 아니라 여섯시까지

고민하다가 지르지 못하고 자는. 뭐 이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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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2010년 가을학기 제 3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제가 대학 3 학년 때 있었던 일이에요. 제가 대학 4 년 다니는 동안 가장 기뻤던 날이고 제

인생에서 지금도 정말 제일 기뻤던 날들 중에 하나로 기억하고 있는 날들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가난한 동네에 개척교회 목사님 아들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나중에 교회가 좀 성장하고 아버지가

부흥회를 다니시면서 좀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판자동네에서 정말 돈이 없이 사셨던 우리 교회 권사님들 집사님들, 제 친구들 그 동료들 보다 그

앞에서 돈 자랑하는 것처럼 못할 짓은 없다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나중에 대학에 와서 성경말씀을

제대로 배우면서 예수님이 근본적으로 근로자로 오셨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벗들에 대한 부담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맑시즘이 좀

이렇게 되어서 윤리적인 요청으로까지 와서 잔디밭 한 모퉁이에서 포커 치고 있던 사람들이 처음에는

있었는데 대학교 한 2 학년쯤 되니까 어느 샌가 없어져 버리는 그런 대학생활을 살았어요. 그게

정상이었다고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런데 대학교 3 학년 때 일어났어요. 제가 다니는 학교에 후생관 이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

3 층에 신발가게가 있어요. 어쩌다가 돈이 생겨서 신발가게에 들어갔습니다. 문을 열고 딱 보는데 맨

앞에 제일 멋진 신발이 있습니다. 제가 거기에 꽂혔습니다. 30 분 넘게 고민하다 그리로 가서 그걸

들고 갚을 치르러 갔습니다. 그 때 이게 너무 비싸면 어쩌나. 근데 그게 아무리 비싸도 치를 돈이

있었어요. 그 때 이건 이 돈을 내가 내면 내 수준에 이건 예수그리스도의 윤리적 소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일종의 guilty feeling 과 그렇지만 한번 사보리라라는 guilty pleasure 도 역시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걸 값을 물었는데 제가 생각한 거보다 훨씬 싼 거에요. 그래서 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사람이 잘못 말했구나, 생각하고 값을 치르고 챙겨서 나왔습니다. 제가 그걸 신고 다녔어요.

근데 제가 그 신발을 좋아한 것 보다 다른 사람들이 그 신발을 좋아해주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일일까 생각했는데 2 주일쯤 지나서 제가 그 비밀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맨 처음에 꽃혔던

신발은 비닐로 만들어진 것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그것에 비해서 안좋게 생각했던 것은 모두 가죽으로

만들어졌던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 가죽신발은 3 배정도 비싸고 제가 원했던 것은 사실은 3 분의

1 가격 밖에 안되는 것이었어요. 제가 그 사실을 알고 다른 사람들은 속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저는

너무너무 기뻤어요. 이건 하나님이 정말 나한테 큰 축복을 주셨구나 나는 주관적으로는 비닐신발이

좋고 객관적으로는 일단 돈이 싸게 들어서 졸고, 예수님을 따르는 도리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윤리적

소비에 있어서 그 수준을 내가 넘어서지 않았으니 좋고. 아직도 저는 그 환상 속에 삽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 그래서 주관적인 만족이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그것이 객관적으로는 가난한

벗들과 함께 있는 것 그들과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 글쎄요 지난 3 주일 이것을 준비하면서

오랫동안 생각했던 끝내기인데,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전달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그 일은

제 인생 중에 가장 기뻤던 날 중에 하나입니다. 이런 소비가 어떤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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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2 0 1 0F A L LS E M E S T E R

Section 4

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The Memories and Perspectives of the Christian Scholarship Movement in Handong Community

2010. 11. 12 제 4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 워크샵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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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Fall Semester 4th Colloquium / Workshop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 워크샵

주최_한동대학교 학문과 신앙 연구소_Handong Institute of Learning and Faith

1998년 봄학기 한동대학교 교수공동체에는 작은 모임이 하나 생겨 났습니다.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대학에 근무하는 것을 긍지로 삼으면서도, 기독교적으로 학문하고 기독교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관하여 성찰과 준비가 부족했음을 절감하던 몇몇 교수님들은토요일 아침마다 대학 본관의 작은 세미나실에 모여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전공도 달랐고 신앙배경도 달랐지만, 지금 여기에서 함께 하나님의 대학을 섬긴다는 공통점은 이 교수님들의 마음을 감격과 갈급함으로 채웠고, 그로부터 13년 동안 간단없이 이어져서 한동공동체 안팎에 하나의 흐름을 이루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번 콜로키엄은 13년 전 한동교수님들의 작은 공부모임에 시작된 이 흐름을 '학문과신앙운동(또는 기독학문운동)'이라고부르는데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이루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며 또 무엇을 이룰 것인지에 관해 그동안 이 흐름 안팎에 계셨던 여러 교수님들을 모시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을 나누려고 생각합니다.

지난 13년 동안 '학문과신앙(또는 기독학문)'이 과연 운동(movement)이었는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으실 줄 압니다. 그 평가를 마음에만 담아 두시지 말고, 부디 오셔서 나누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장소 : 오도리 작은행복 펜션일시 : 11월 12일 (금) 저녁 ~ 13일 (토) 아침[ ]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 Workshop

한동공동체에서 학문과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The Memories and Perspectives of the Christian Scholarship Movement in Handong Community

6:30~7:00 이동

7:00~7:15 정리

7:15~8:00 저녁식사, 연극공연 : Marx in SOHO

8:00~8:15 휴식

8:15~10:15 제 4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10:15~10:30 휴식

10:30~12:00 양희송 교수님 특강

12:00~ 휴식

이국운 교수 법학

윤상헌 교수언어학

류대영 교수기독교 사학

양희송 대표청어람 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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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53

2010 년 가을학기_제 4 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워크샵 [행사 사진-1]

2010 Fall Semester_4th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 Work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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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년 가을학기_제 4 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워크샵 [행사 사진-2]

2010 Fall Semester_4th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 Work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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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55

2010년 가을학기_제 4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 워크샵

2010 Fall Semester_4th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 Workshop

주관 :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 [ACE 사업]

주최 : 한동대학교 학문과 신앙 연구소 [Handong Institute of Learning and Faith]

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The Memories and Perspectives of the Christian Scholarship Movement

in Handong Community

2010. 11. 12

이국운 반갑습니다.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토론회 네번째 시간입니다. 다섯번을 하려니까

너무나 힘듭니다. 다음 번엔 좀 줄여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오도리에 있는 펜션에 와서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로 진행해보려 합니다. 주제도 학술적인 주제보다는 우리 공동체 안에서 같이

나누어봤으면 하는 얘기, 한동 공동체 안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 회고라고 잡았습니다. 앞의 우리가

자그마한 연극을 하나 봤는데, 그 연극을 보면서, 뭔가 그래도 이 공동체에서 특별히 여러 학생들을

통해서 이야기들이 끝나지 않고 그래도 계속 되는구나 라고 생각이 돼서 기분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오늘은 10시 지나서까지 얘기를 하겠고요, 그 동안은 10분 10분 진행이 되었는데 그런 제한을 오늘은

두지 않고 교수님들에게 시간을 많이 드리려고 합니다.

발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1998년 봄학기 한동대학교 교수공동체에는 작은 모임이 하나 생겨

났습니다.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대학에 근무하는 것을 긍지로 삼으면서도,

기독교적으로 학문하고 기독교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관하여 성찰과 준비가 부족했음을 절감하던 몇몇

교수님들은 토요일 아침마다 대학 본관의 작은 세미나실에 모여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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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했습니다. 전공도 달랐고 신앙배경도 달랐지만, 지금 여기에서 함께 하나님의 대학을 섬긴다는

공통점은 이 교수님들의 마음을 감격과 갈급함으로 채웠고, 그로부터 13년 동안 간단없이 이어져서

한동 공동체 안팎에 하나의 흐름을 이루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번 콜로키엄은 13년 전 한동 교수님들의

작은 공부모임에 시작된 이 흐름을 '학문과 신앙운동(또는 기독학문운동)'이라고 부르는 데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 동안 우리가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이루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며 또 무엇을 이룰 것인지에 관해 그동안 이 흐름 안팎에 계셨던 여러 교수님들을 모시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을 나누려고 생각합니다. 지난 13년 동안 '학문과 신앙(또는 기독학문)'이 과연

운동(movement)이었는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으실 줄 압니다. 그 평가를 마음에만 담아

두시지 말고, 부디 오셔서 나누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두 주일 전에 학교에 계시는 여러 교수님들 가운데 어떤 형태로든지 모임 또는 기독교

세계관 대회에 참석해주셨던 분들에게 제가 초청의 메일을 드렸습니다. 근데 오늘 이런저런 일로 결국

다 오시지 못했고, 따로 이야기 손님으로 모신 3교수님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먼저 윤상헌 교수님

학문과 신앙연구소 초대 소장이셨고, 토요일 모임의 간사셨습니다. 오늘 이야기 구도에서는 안에

계셨던 분이라고 생각해서 모셨고요, 양희송 선생님은 마음은 안에 계시지만 몸은 완전히 밖에 계신

분이 한 분 계셔야겠다 라고 생각해서 모셨고, 사실 최근에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인데, 2004년부터

13학기째 기독교세계관강의를 담당하고 계세요. 매주 내려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데 화요일이

양선생님 쉬시는 날이에요. 휴일을 13학기 모두 반납하고 여기 와서 계십니다. 밖에서 보니까

이렇더라 저렇더라 애정을 가지고 말씀 해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류대영 교수님 모셨습니다. 류교수님은 우리 학교 계신 어떤 교수님보다도 기독학문, 학문과

신앙의 관계지음에 관해서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계시는 선배교수님이라고 생각을 하고 아마 많은

동료 교수님들이나 학생들도 그렇게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공식적인 흐름들

속에는 가끔씩 오시고 모셔야 오시고 독회도 안 나오시고, 그러시다가 선생님 책 좀 읽겠습니다

이끌어 주세요 라고 하면 우리 한 3년 쯤에 교수님 쓰신 역작 중에 하나인 미국종교사, 저자 직강을

받았던 시간이 있었는데, 류대영 교수님, 안팎에서 보니까 이게 어떻다라는 말씀 듣기 위해서

모셨습니다. 원래 10분씩 얘기하는 것인데, 그런 포맷으로부터 자유롭게, 먼저 유교수님 편하게 얘기

시작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윤상헌 앞 부분에 읽으면서 좀 신선하고 번역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가브리엘을 통해서

마리아가 수태고지한 장면을 유진 피터슨 선생이 번역을 영어로 한 것이죠. “잘 있었느냐 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안과 밖에 다 아름답구나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신다.” 이게 개역성경으로는

“평안할지어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시는 도다”, 이게 문안 인사인데요, 제가 이걸 왜 모두에게

얘기하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잘 있었느냐, 반갑다는 표현도 있는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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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57

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안과 밖이 아름답구나 이게 참 제 안과 밖의 추함을 보면서

목마르다, 약간 좀 지난 주말에 문화답사를 갔는데 영양 주실마을에 조동탁 선생, 조지훈선생 생가를

들렸어요. 눈물이 좀 나더라고요. 지조있는 선비를 그리워하며 라고 방명록에 글을 썼는데, 아마 제

속에 그런 분들이 많이 그리운가봐요. 그 그리움의 맨 끝에는 몸으로 오신 주님의 모습이 계신 것인데.

그런 얘기를 종종 합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구원 받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자로,

우리가 좀 거지 같이 살 때가 많지만 우리 역시 하나님 닮은 존재로 아름다운 존재기 때문에 일종의

어울림의 미학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아름답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에요. 아름답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아름답게 살고 거룩하게 살아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써 아름답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죠. 마리아에게 가브리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말을 보면서 격려내지는

그렇지, 이렇게 내가 안과 밖이 그렇게 추한 존재는 아니지, 아름다운 존재지라는 생각을 일깨워줬던

것 같아요. 말씀을 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제가 이 모임에 부름을 받고 오면서 할 얘기는 많은 것 같아요. 결국은 기독교대학 한다,

학문한다, 신앙한다 저는 학문함과 신앙함이 크게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을 해요. 제가 언어학을

전공했는데, 독특한 룰이 있어요. 문법에 UG, universal grammar 라고 하는 것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제가 하는 언어학 중에서는 principle이라고 해요 UG에 주목하는 부분을. 그러니까 보편원리가

있다 그런데 개별적인 것은 룰이라고 취급을 해요. 학문과 신앙의 개별적인 룰을 다를 수 있어요.

어휘가 다르죠. 그런데 의미체계라든지 개념구조로 들어가면 공통점이 많다. 근본적인 principle

차원에서는 흡사하다, 같은 거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확신이 점점 강해져요. 그럼 그 공통적인 것이

뭐냐, 결국 사실, Fact를 확인하는 부분이 많이 닿아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에 대한

성실이랄까, 사실에 대한 충성, 물론 굴절, 선입관이 있어서 순수 객관적인 것을 그대로 확보하긴

어렵지만 여전히 객관적인 사실을 확보하려는 태도, 그게 학문이고 하나님의 진리 앞에 서려고 하는

것, 퇴계 선생의 표현으로는 거경하고 궁리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신앙과 학문이 닿아있다는 것이죠.

아직 설익은 생각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지금 학문과 신앙, ‘과’가 좀 걸려요.

별개의 것을 접속사로 붙여놓은 같은 느낌이 드는데 사실은 ‘과’라는 것은 설명하기 위한 것이죠. 결국

두 마리 토끼는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한동 공동체에서의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인데, 주로 아마 회고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겠죠. 전망은 양 옆에 계신 교수님들께서 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한동 공동체

얘기를 함과 더불어서 한동 공동체와 우리 겨레 공동체가 있고, 한국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기독교

복음이 수용된 이후에 1980년 중반에 이르는 선교 1세기는 기독교의 터를 이루고 뿌리를 내리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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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연이 확장되는 시기로 강조점이 주로 대중전도, 예배당 건축,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해외선교에

치중되었죠. 선교 1세기에 접어드는 1980년 초반에 접어들면서 이거는 이제 이박사나 저나 제가

회심하고 제자훈련 받았던 시기하고 맞물려요. 1980년 초반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의 보수진영의

평신도들이 중심이 된 주목할 만한 흐름이 등장하는데. 신앙과 삶이 일치되어서 의식과 가치관이

성경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이 됨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한다는 취지

하에 문화와 사회 개혁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개가 됩니다.

신앙과 삶의 일치, 신앙과 학문의 통합. 그래서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 운동, 기독학문운동

이런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죠. 하나는 사회참여 운동 세력으로 초기 경실련,

기윤실, 그것과 맞먹는 비중은 아니지만 성토모. 두번째 형태로는 기독교 세계관하고 기독교

학문운동세력으로 현재 기독교 세계관 학술 동역회라고 이름을 지었죠. 합쳐졌어요 두 개가. 그것의

모태가 된 기학연, 기독학문연구회가 있었고 기대설, 혹은 기독교 학술 동역회라고 불렸던 것 같은

비중은 아니지만 라브리 운동이 그 시절에 있었죠. 이후에 좀 옛날에 있었던 운동과 다른 형태는 그런

거라고 정리를 합니다. 이 운동들이 소위 보수적인 교회 진영에서 일어났어요. 그리고 이것이

목회자나 교회지도자들이 아니라 평신도들에 의해서 진행이 되었어요. 이런 운동의 배경에는 선교

1세기의 기간 동안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 가운데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신앙과 삶, 신앙과 학문 사이의 분리된 양태, 그로 인한 왜곡. 그것에 대한 일종의 반성과 비판,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반성과 비판이 시작된 것이죠. 실제로 1970년대, 80년대 초반 폭발적인 성장의

곡선은 80년대 중반 6월 항쟁 이후로 접어들면서 주춤해집니다.

90년대 이후로는 캠퍼스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양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 기독교 사회 정치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이죠. 결과적으로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서

대체로 침묵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정부의 의견에 동조해왔어요. 결국에 사회적 공신력을 잃었다는

평가가 있어요. 또한 도시 중산층의 보수적 주류문화에 타협함으로 적응주의의 노선을 취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이 근대화 되면서 근대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고 있는 성장주의, 친미주의, 반공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 한국사회의 역기능을 비판하는 선지자의 자리에서 이탈해서 오히려 비판을

받게 되는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죠. 현재까지 계속 유효한 분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학연과 기대설로 대표되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세계관 및 기독한문 운동은

1980년대 초 중반 사회 정치적으로 보수적 영향을 강하게 받고 청년들에게 역사와 상황을 복음의 빛

가운데 보도록 하여 사회참여의 신학이념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고 근본주의적 분리의식이 팽배한

한국교회 상황에서 어느 정도 유효한 가치를 지닌다라는 평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맥락에서 한동대학교가 1995년에 개교를 했어요. 제가 사실 기대설의 멤버였거든요.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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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59

있던 위스콘신에서 경북대 교수 하시다가 휴직을 하신 양승훈 선생이 과학사 석사를 하러 오셨어요.

그래서 교류를 좀 했죠. 학문과 신앙이라는 소책자가 있는데, 그게 그 분이 쓴 책인데, 제가 거기서

저자를 만난 것이죠. 저에겐 여러 가지로 도전과 격려 내지는 외로운 유학생 시절에 좋은 교제가

됐었어요. 그 와중에 한동대 얘기를 들으면서 제 속에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이죠. 하나는 이게 잘

될까, 기대설이나 기학연 멤버들이 거의 초창기에 안들어 왔거든요. 전부 창조과학 멤버들이 들어왔죠.

인문사회학자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공학자들 중심으로. 또 하나는 잘됐으면 좋겠다,

기독교대학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하면 심하게 얘기하면 신성모독적인 표현일 수 있거든요.

그만큼 순수한 거에요. 그 마음이. 어린아이의 무구함. 두 가지 마음이 있었죠.

95년 개교 당시 설립주체는 십 수년부터 기독교 대학의 비전을 품고 밑그림을 그리고

준비하고 있던 기대설도 아니고 기학연도 아니에요. 주체는 기독학문운동의 큰 흐름에 속하긴

하였으나 운동성격상 주류라고 할 수 없었던 창조과학회 회원인 김영길 박사 등을 중심으로 해서

모인 학자들이에요. 주로 공학자들이 많습니다. 대부분 미국 등지 해외와 국내에서 학위를 마치고 첫

임지로 한동으로 온 신진학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몇 분들은 안정된 연구 교육 환경을 떠나서 실험적

기독교 대학을 기치로 내세운 한동을 선택한 중견학자들. 그 중에 설립 당시 기학연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요. 기대설에선 몇 학자가 개인적으로 참가를 했어요.

당시 한동대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재를 양성하는 하나님의 대학이란 모토를 갖고

있었던 사실이 여실히 보여주듯이 신앙의 순수성은 있으나 신앙의 치밀한 신학적 성찰과 반성이

수반되어 있지는 않았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신학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기독

대학의 밑그림을 그려야 하는 단계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한동은, 초창기 재정적 곤란과

대학 운영권을 지키기 위한 사투죠, 법적 투쟁을 겪는 가운데,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대학에 관한

충분한 묵상, 밀도 있는 공부의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대학의 소명이 무엇이고 대학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깊이 나누고 난상 토로도 있고 막장토론도 있고 그런 형태는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게 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러던 중 뜻을 같이하는 일단의 교수들이 1998년 1월 14일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위한 첫

독회 모임을 같게 됩니다. 첫 모임에 모인 교수가 13명이에요. 첫 강독 교재가 리처드 미들턴하고

브라이언 왈시가 쓴 Transforming Vision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비전. 여러분 다 읽었죠. 놀라운 사실은

이런 책을 읽지도 않고 선생들이 한동에 왔다는 거에요. 사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기독 대학의

이념이라는 책을 여러분의 95학번 선배는 읽고 왔어요. 근데 많은 선생들이 그 책이 있는지도 모르고

강독하면서 그 때 읽었죠. 여러분 선배가 제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그 책을 읽고 왔는데

내가 기대했던 기독교 대학이 아닙니다 하면서 제 앞에서 울던 장면을 지금도 기억을 해요. 그 친구

때문에 제가 저에게 많은 각오와 변화가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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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기독교 세계관의 확립과 기독학문 수행에 관한 기본도서와 자료들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형식으로 매주 토요일 주로 토요일이었는데요, 거의 매 주 모였어요. 그리고 특강 형식으로

초청강연이 비정기적으로 진행되었고 1999년을 전후로 제기된 이 때 “내사랑 한동”. 기독교대학으로써

한동의 정체성 논란이 학생들을 통해서 그런 논란은 독회와 토론 위주의 진행에서 한동의 교수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인 운동전개의 필요성을 갖게 했습니다. 그 결과물로 2000년부터 매

가을 학기 사흘간 한동 기독교세계관대회를 개최했어요. 이게 2003년까지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여름과 겨울 방학에 비정기적인 교수 집담회를 열었습니다. 기독교세계관적 관점으로 기독 신앙의

실천과 적용을 모색한 바가 있습니다. 99년 이후에는 정규교과 과정 중에 기독교 세계관 2학점,

학문과 신앙 2학점을 설치해서 팀 강의, 모둠 강의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럼 2010년 11월 현재는 무엇인가. 회고를 하면서 그 때 왜 모였지 생각해보니까 떠오르는

생각이 그런 거에요. 학문과 신앙의 관계지음의 성찰의 결과로 우리 대학이 형성된 것이 아니고

교육기관으로 설립이 되고 나서 그 관계지음에 대한 공부와 성찰이 시작된 것이에요. 일종의 Back

Formation이에요. 어휘가 만들어지는 법 중에 Back Formation이 있거든요. 말이 만들어 지는 과정

중에, 보통 Teach라는 동사가 있으면 ~er이라는 접미사가 붙어서 Teacher가 만들어져요. 그러니까

Teach하고 Teacher가 있으면 두 단어 중에 먼저 있는 것은 Teach에요. 역성법이란 것이 뭐냐면 예를

들어 Editor라는 단어가 있는데 Edit하고 Editor가 있잖아요. 어떤 단어가 먼저 있었을 것 같아요?

Editor라는 단어가 먼저 있었어요. 사람들이 Editor라는 단어를 보면서 뒤의 ~or 또는 ~er을 보면서

Edit이란 단어가 있겠거니 하고 쓰기 시작한다고요. 그러니까 명사가 먼저 있고 동사가 나중에 생겨요.

여러분 잘 아는 부활하다 라는 동사도 명사가 먼저 있었어요. 그것을 역성법이라고, Back

Formation이라고 합니다.

한동의 학문과 신앙의 통합, 요즘 통합이라는 말을 점점 쓰기가 싫어지는데, 상당히 중요한

얘기에요. 통합이라고 하면 두 개가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있는데 그게 아니라 원래는 하나인데,

그것을 나누어서 생각하니까 통합한다고 하는 나름대로 운동성을 가진 표현인데, 이게 Back

Formation 같은 것이죠. 문제는 Edit이나 Editor는 어휘를 풍성하게 하고 쓰이는데, 지금 우리가

쓰임새 있는 어휘가 되어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직 만들어지는 과정 같아요. 모로 가도 서울을 가면

안되죠. 제대로 가야되는데, 우리의 태생적인 상황이 역성적인 상황이다,

이게 많은 문제를 그 자체로 주어요. 그래서 이제 이 부분에서 나타나는 역성도 형성의 한

꼭지가 된다는 생각을 해보면, 좋게 생각해보면, 지금 애써서 좋게 생각해보려고 하는데, 문제는

뭐냐면, 우리 속에는 연구 교육 봉사 이 세 개의 축이 각각 분리되어있어요. 대립은 아닌 것 같은데,

이 3개의 항이 별개로 존재하고, 주로 교수들 안에서죠. 연구와 교육과 봉사가 상당히 유기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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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61

것이고 어떻게 보면,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대학이 하는 봉사는 연구와 교육이에요. 선교단체에서 하는

어떤 것들을 하면서 대학의 고유한 기능을 하지 않고, 마치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다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한 착각인 것이죠. 근데 그 착각이 개인적인 착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라는 고등교육기관의 소명수행에 있어서 아주 치명적이다. 지금 3항 대립, 분리가 되어

있어요. 연구 좋아하는 교수, 강의, 꼭 교육에 연결되어야 하는 연구여야 된다는 얘기, 선교 혹은 봉사,

그러면서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노터치, 존중합시다, 이런 시의 분위기, 담론 아닌 담론들이 있어요.

이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대학의 소명과 역할의 이해가, 몰이해, 혹은 오해에서 오는 것일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학문과 신앙연구소나 학문과 신앙 운동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것이 3항 대립 내지는 분립구조를 거경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각각 나누어져 있어서

서로 터치하지 않고 교제도 없고, 선교하는 교수, 연구하는 교수, 교육하는 교수, 서로 존경하지 않고,

연구 안하는 것들이 교수야 이러고 그 다음에 교육하는 교수들은 이기적인 인간들, 연구를 하나의

개인적 프로젝트로 전락시켜버리는 관점. 연구 안 하시는 분들 보면 강의 잘 하시는 분들도 많거든요.

이게 뭔가, 내가 그리스도인 학자라고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Ph.D

그거 아무것도 아냐 그냥 그건 그러면서 빌립보서의 얘기를 인용하죠. 배설물처럼 여겼다라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제법 있고,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본인의 소영웅주의에다가 경건과

학문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포착하지 않은 공동체에서 박수를 쳐주는 분위기, 이건 아닌 거죠.

정리를 하면, 결국 학문적 제자도,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 대학이라는 배가 갈 때, 돛과

노가 있는데, 돛이라고 하는 것이 제자도인 것 같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앞에서 주님이 자신을, 전부를

주신 주님 앞에 서겠다는 제자도. 그리고 끊임없이 저어가는 노로써의 학문정신. 그것 두 가지를

합쳐버리면 Scholastic Discipleship. 그러니까 학문적 제자도의 부재, 혹은 나름대로의 이해, 오해겠죠,

그리고 그런 게 뭐 필요해 라는 몰이해 이런 것들이 우리 가운데 목격이 된다.

그래서 저는 맺음말 앞 부분에 몰입, 함몰 그런 단어를 던져보고 싶어요. 우리가 몰입해야 할

것과 함몰되어 있는 것들. 어제 김규항씨도 적나라하게 지적을 잘 하셨습니다만, 우리가 함몰되어

있는 것 같아요. 자본의 논리에 함몰되어 있는 것 같아요. 비학문적인 용어를 쓰면 역전의식인데, 다른

말로는 오리엔탈리즘이죠. 우리 안에 있는. 지난 학기 레비나스 책을 읽고 이번 학기 르네 지라르

책을 읽고 계속 확인되는 것들이 앞에는 타자라는 말, 여기는 욕망이라는 말로 맞물리고 있는데,

한동의 교수진들도 마찬가지고 한국에 있는 지식분자들도 마찬가지고, 계속 남의 시선으로 나를 봐요.

남의 시선으로, 그러니까 내가 없어요. 소고기도, FTA도 마찬가지고. 근본적으로 내가 없어요. 나의

시선으로 나를 보고 남을 봐야 하는데, 그래야 타자도 인식되는 것인데, 너무 함몰되어있다. 그래서

모방된 욕망으로 귀신들린 시대 속에서 정신과 영혼을 함락시키지 않는 자세, 그게 대학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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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독교 대학은 대학의 아류가 아니라 제대로 된 대학을 해보자는 의미로 기독이라고

하는, 그게 수식어인데, 그게 숫자로 보면 대학이라는 집합의 수보다는 부분집합이에요 분명히 그런데

양이 아니라 관점이나 태도로 보면 기독교대학을 하자는 얘기는 제대로 된 얘기를 해보자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그런 어떤 몰가치성에 나를, 내 몸과 영혼을 그냥 내버려서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

정신과 영혼을 함락시키지 않겠다, 그런 것을 갖고 하는 것이 학문정신 제자도 이런 것인데, 그렇게

함몰되어있는. 결국 사실에 대한 몰각 그것은 결국 역사 공간 문화 공간 속에서의 자신의 책임을

피하게 하는거죠. 결국은 맺음말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진정한 종교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을 해체하고, 하나님의 생명원리와 창조질서에

동조하게 하는 것 그게 제자도죠. 그리고 지금 여기로 지칭되는 부르심의 자리에 구체적으로 조응하는

삶, 또는 살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잖아요. 우리가 믿어서 진리가 아니라 그것이

진리여서 우리가 믿는 것인데, 그 제자도의 치열한 실천을 통해서 끊임없는 욕망해체를 경험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조응을 위한 통찰과 분석과 운동을 생각하고 또 이름을 짓고 도모하고 만드는

것이죠. 그런 역동을 통해서 통찰과 분석과 운동을 생산하는 것이 대학이고, 기독교 대학이라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소망을 버릴 수가 없어요.

양희송 일단은 그래도 여러분들이 맥락을 서로 다른 증언을 통해서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저도 제 나름의 맥락에서 말씀을 드리면, 윤교수님 말씀 들으니까 교수님이 쭉 봐오시면서

한동이 어떻게 흘러왔는가 저도 정리가 되는 것이 상당히 많고요, 저는 앞의 교수님들 중에는 제가

나이가 제일 어리죠, 그래서 전 온누리 교회를 그 때 쭉 다니고 있었고, 오늘 이 주제와 관련해서

본다면 기독지성운동이라는 것을 저는 한동이라는 구체적인 장을 중심으로 본 것은 아니고 제가 그때

그때 마다 관심 있던 곳을 다 들쑤셔 가면서 직접 가보거나 사람을 만나보거나 그랬던 것 같아요.

대학 시절에도 그랬고 대학 이후에도 그렇게 해왔던 것 같습니다.

95년 어간이면 제가 그 때 제가 있던 온누리 교회가 관련이 있던 경배와 찬양 말년에 잡지를

만들었어요. 제가 그것을 3년간인가 편집장을 하면서 창간에서 폐간까지 다 했는데 그 잡지를 하면서

제가 제일 좋았던 것은 취재를 핑계로 여기저기, 국내외로 다닐 수 있었던 것인데, 제가 대학 다닐 때

우리가 읽었던 책이나 꿈꿨던 기독교세계관에 대한 책들을 읽었었고. 요즘은 여러분들이 거의

안읽거든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세계관 강의를 하는데 요즘 여기저기 서울이든 어디든 강의를 하면

두드러진 현상이 30대 후반 세대가 알고 있는 세계관 책은 안 읽혀요. 전혀 없어요. 한 백 명 정도

놓고 강의를 하면 기독교세계관이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 있냐 그러면 10명 남짓 보통 열명아래

손들고 그럼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책을 읽은 적 있냐 하면 2명에서 5명 사이, 교회에서 청년부

대학부 리더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서울이고 지방이고 차이 없이 비율이 그래요. 그 말은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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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63

세계관이라는 테마가 80년대 초반에 나름 활성화되고 그 시기에 대학을 거쳤던 사람은 필수 교양,

예수 믿고 대학 다닌다는 사람이 이거 책 세계관 책 두어 권 안 읽으면 어디서 명함도 못내미는,

이런게 90년대 초반까지 중반까지 겨우 지속이 되다가, 그 다음에 완전히 주저앉았고 그게 지금까지

계속되거든요. 그러니까 한 15년 이상 사실은 이 주제 자체가 시야에서 사라진 거에요. 그 사이에

올라온 세대들 지금 30대 초반 중반 까지의 세대들은 백지에요.

세계관 이야기는 새로 다 해야되고 그런데, 그 위의 세대들은 기독교 세계관 용어 자체가

가슴을 벌렁벌렁 하게 만드는 이상한 시절들을 겪으신 거거든요. 저는 끝물쯤 될 것 같은데. 근데

세계관에 대한 것들을 대학 때 많이 접하고 하면서도 액면 그대로 다 받았던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

떄 프란시스 쉐퍼의 책들도 읽고 아까 말씀하신 그리스도인의 비전, 알버스 월터스, 아서 홈즈,

도예베르트, 화란 개혁주의의 신학이나 철학까지 쭉 들어가는게 공부해나가는 코스였는데, 그걸

읽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단 매력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 이게 남한테 들은거거든요.

외국책 번역해서 읽었고 건너 들어 가지고 있는 몽글몽글한 이게 있잖아요.

제가 95년도 전후해서 취재 다니고 할 때 사실은 내 대학시절에 나를 드라이브 했던 꿈들,

이상들, 거기가면 내가 궁금해하는 게 있을 것 같은, 그런 데를 사실 다 다녀봤어요. 유럽에서 갔던

데가 스위스의 라브리, 프랑스의 떼제, 영국 와서는 찬양 사역하던 그레이암 캔드릭이니, 크리스

보튼이 다 있어요. 지금 알고 있는 찬양운동의 원조 격들 되는 사람들 다 만나고 미국에선 여기저기

최근까지도 만남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스위스 라브리에 가서 받은 인상은, 이제 됐다는 것입니다.

너무 아름답거든요 경치가. 쉐퍼가 사역을 했던 집들이 몇 채 있어요. 거기에 내가 책으로

읽었던, 쉐퍼가 강의를 했던 강의 테잎, 온 사람들이 책 읽는 도서관, 오전에 책 읽고 오후에 일하고

하는, 책으로 읽어서 생생하게 다 기억하고 있는 거거든요. 가서 실물을 보니까 도서관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빈약했고, 쉐퍼가 다루었던 주제들, 참고했을 법한 책, 들여다 보니까, 어떤

것들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겠구나 하는 것이 대충 그려지는 것이죠. 그러고 나서 전 쉐퍼를 썩

그렇게 존경하진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분이 목회자이고 사역자로써 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존경하고

존중할 만하고 그 임팩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커요. 그 분이 지적으로 일궈놓은 작업

자체는, 그렇게 까지, 여기에 길이 있다라고 할게 아니구나라는 것을 직접 방문하고 나서 오히려 좀

편하게 접을 수가 있었던 것 같고, 그 이후로도 한국 들어와서 이러저러한 갈증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남들이 해서 이게 기독교 학문이다 이런 거 말고 이제는 내가 내 눈으로 책을 읽고 내가

나름대로 지적으로 성장해 나갔을 때 그 평가나 검증 앞에서도 내가 여전히 무릎 꿇을 만하고

배울만하고 그 지점들이 있을 때 이게 같이 갈 수 있는 것인데, 조금, 무슨 책 좀 읽었다고 해서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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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2010년 가을학기 제 4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극복되어버리고 이런 방식에 지적 토대 위에 계속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일부러라도 좀 했었던 것

같고요. 그 무렵에 한동대가 개교가 됐잖아요. 한동대 처음 개교할 때 온누리 교회쪽 분들이 상당히

많이 왔습니다. 총장님, 교수님들 여러분 오셨고요. 여러분들 아실 지 모르겠지만, 대학이

교수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학생들이 일단 중요하고, 그것 말고 대학을 만들어가는

직원들, 특별히 기독교 대학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써의,

빛은 안나죠, 밑바닥을 버텨줬던 사람들이 있는데, 제 온누리 대학부에서 제 위의 선배,친구,후배 저희

대학부에서 최고의 사람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한동대학교 개교할 때에 내려와서 기숙사 사감하고

다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교수님들은 학생들 가르쳤지만 이 사람들은 학생들 데리고 살았어요. 그

노고를 알기 때문에, 같이 신앙생활 했던 그룹이거든요, 이 사람들이 한동대로 간다고 했을 때는 제가

도의적으로 느낀 부담감이 있어요 분명히. 그 때 이제 제가 안움직였기 때문에, 어쩌면 지금 13학기를

이렇게 하는게 그 때 했었으면 지금 안이래도 될 텐데 그런 생각이 좀 들고. 여러 갈래의 그룹들이

한동대란 학교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앞에서 끌어가는 사람, 밑에서 떠받치는 사람들, 야사에나

나오는 사람들 있잖아요. 교목실 거쳐간 친구도 있고, 여자 기숙사 붙잡고 했던 친구도 있고, 쭉

흘러간 역사들이지만 그 퇴적물 위에 이것들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요즘 와서, 우리는 그냥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와서 대학을 하면 그게 기독교 대학 아니냐

최소한 기독교 대학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죠. 최소한의 요건으로는 이것이 기독교 대학이 아니면

무엇이 기독교 대학이냐라는 것이 있는데, 근데 문제는 왜 그러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기독교

대학으로써,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을 갖고 있는 학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 물음이 늘

유보된다는 것이죠. 이게 아니라고 할 순 없지 않느냐, 누구도 부인할 순 없거든요. 이것이 기독교

대학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또 그렇게 흔쾌한가, 사실 쉽지가 않거든요. 올 봄에 고려대학교

김예슬 학생이 대자보를 쓰고 학교를 그만뒀잖아요. 전문을 제가 다 기억은 못하는데 대학이라는게 큰

배움, 큰 공부를 하는 곳인데, 더 이상 대학이 아니다라고 당차게 선언을 한 것이죠. 그 학생이 이거는

대학이 아니다라고 했을 때 울림이 컸단 말이에요. 교수도 학생도 있고 대학이 아니라고 객관적으로

부인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우긴거죠. 이건 대학이 아니다라고 우긴건데, 의외로 그것이 사람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더라는 것이죠. 사람들 머리 속에는 뭐가 대학인가에 대한 제도나 이 모든 것으로

부인할 수 없지만 그 물음에 대해서 여러 대학들이 넌지시 부정적인 방식으로 대답해 왔던 것을 한

순간에 돌려세우고, 이건 대학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이 훨씬 설득력을 갖고 파장을 일으키는 어떤

사건이 있다는 것이죠.

같은 맥락 기독교 대학이라는 것을 놓고 얘기를 한다면, 김예슬이 문제제기했던 방식을

그대로 사용을 해본다면, 이것은 기독교 대학인가, 이것을 기독교 대학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죠,

그러나 그 대답이 시원한 답들을 얻지 못했을 때, 오히려 우리는 질문을 거꾸로 물어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무엇이 기독교 대학을 만드는가, 기독교와 대학이잖아요, 제가 기독교 세계관 과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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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65

듣는 사람들은 기억을 할텐데, 리차드 니부어의 그리스도와 문화의 다섯가지 모델, 일부러 제가

매학기 거기에 그것을 넣거든요. 니부어의 5가지 모델에 기독교 대학이라는 테마를 던져놓고 기독교

대학을 다섯가지 모델로 각각 설명을 해봐라. 제가 몇 학기를 하다가 발견을 하게 된 부분이었어요.

기독교 대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한 가지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어느 각도에서 무슨 생각을 갖고

묻느냐에 따라서 다른 답들이 나올 수가 있고 그게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 논의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여러가지로 해석을 해 갈 수 있는데 저는 어쨌든 윤교수님 말씀하신 그 맥락을

이어간다면, 기독교 대학은 최소한 대학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가르침과 배움, 큰 배움이 일어나는 것,

그러지 않으면 기독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안학교 많이 하잖아요. 저도 대안학교 하는 분들 많이

만나기 때문에, 저도 애가 중1 초2 그래요 .교육 문제에 딱 걸려있는 상황인데 답이 없더라고요.

기독교를 내건 학교가 내 아이에게 좋은가 상당히 많은 학교가 기독교 학교가 뭔지에 대해서 잘

모르더라고요. 각자 자기 답이 있겠죠.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만족스러운 답이나 대안은 없더라는, 여전히 그 답은 유보가 되었는데,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독교 학교라면, 기독교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학교로써의 그것을 갖춰야

할 것이고, 그것이 대학이라면 대학으로써 요구되는 부분들을 심각하게 고민해야한다. 윤교수님

말씀해주신 것처럼 만들어 놓고 생각을 시작하게 되는. 근데 그건 어떤 면에서는 주어진 조건일 수

밖에 없었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난 10월달에 목회와 신학이라는 잡지에서 원고청탁을 받아서 마크 놀의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라는 책이 있어요. 90년대 중반에 소개가 됐다가 올 해 새로 번역이 됐습니다. 서평을

요청을 해서 쓴다고 해서 그 책을 다시 읽다가 굉장히 새롭게 읽히더라고요. 그 책이 15년 전이면

미국 복음주의가 최고 피크를 치고 있던 때거든요, 그 때 아직 부시가 대통령 되기 전이었고,

복음주의 이름으로 미국에서 사고치기 전이에요. 대중적으로 사람들이 악감정을 갖거나 그것이 아닌,

규모도 커지던, 그 시점에 마크 놀은 복음주의 지성은 스캔들을 겪고 있다, 스캔들의 핵심은 뭐냐,

지성이 없다라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몇 가지를 입증을 하기 위해서 논거를 대겠죠.

그 논거의 제일 첫번째가 무엇이었냐면, 미국의 복음주의는 쉽게 말하면, 교육 중심 대학은

있으나 연구 중심 대학이 없고, 연구 중심 기관 하나 갖고 있지 못하다 하는 게 마크 놀이 꼽는

첫번째였어요. 15년 전에 제가 그게 뭔 소린지 잘 이해를 못했어요. 미국에 휘튼도 있고 칼빈도 있고

유명한 좋은 리버럴 아트 칼리지들이 있고, 한국에서 기독교 대학의 고민을 한다 했을 때 휘튼,

칼빈을 얘기하잖아요. 그 모델을 갖다 쓰는데, 마크 놀이 뭐라고 얘기를 했냐면 미국은 학부 중심

교육하는 그것 말고 연구 중심의 아무런 인프라를 못 갖고 있다 이게 첫번째로 꼽는 것이더라고요.

지금에 와서 보니까 그게 무슨 소린지, 대학에 와서 오랫동안 상황을 봐오면서 대학이라는 것이,

범위를 넓혀서, 미국 복음주의 대학 전체가 이렇게 갈 수 없다는 것이죠. 학부 중심의 대학교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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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면 그로부터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 아이비리그로도 가고 잘 가는데 복음주의권 전체는

지성적으로 커버하는 학문적 아카데미나 인프라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학부 교육 잘 시켜서

세속교육한다고 욕했던 하버드 그런데로 갖다 보낸다는 것이죠. 그 모델이었다. 그러니까 더 깊게

고도의 학술적 역량을 집결해 내거나 수행하는 기관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의 복음주의는 복잡한

상황을 사고하고 자기들 스스로가 핸들링할 수 있는 지적 역량을 축적하는데 실패했다. 굉장히

냉정하게 평가를 해요.

그 사람이 이번에 서문을 새로 썼거든요. 당연히 제가 눈이 그리로 갖죠. 이 사람이

한국어판의 서문을 새로 쓰면서 자기가 옛날에 했던 평가에 대한 어떤 수정, 지금은 상황이

개선됐다든지, 근데 그대로 다시 얘기해요. 내가 그때 지적했던 포인트는 여전히 유효하다라고 하는데.

휘튼 같은 학교, 코스타 때문에 매년 방문을 하면서 보니까, 원래 휘튼이 대학원이 없었는데 최근에

만들고 있더라고요. 만드는데, 이게 그냥 학부 학생들 지나갈 수 있는 대학원이 아니고 원래 휘튼에도

신학과가 없거든요. 전세계의 신학 쪽에, 특별히 성서학 쪽에는 어마어마한 학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더라고요. 보통 해당책의 주석을 쓰거나 대규모 저작으로 유명한 저자들이 있는데, 한 둘이

아니에요. 어느 분야의 탑클래스들을 불러서 휘튼에다 모아놓고 있는데, 신학교를 만드려고 하나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뭘 하냐면 박사과정을 만드는데, 한 학교로써는 과다하게 느낄 정도의

학자들을 불러 모아다가 놓고 있고, 거기에는 박사과정을 거의 장학금 다 주고 학생들을 뽑는 것

같아요. 휘튼이 그동안 해왔던 교육의 전략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고도로 집약된 연구 가능한

것을 만들어 가는데, 저는 그게 마크 놀 같은 사람들이 지적한 기독 지성, 개별 학교 단위가 아니라,

복음주의 지성이란 전체 맥락을 놓고 봤을 때, 그동안 미국 복음주의에 결여되어 있었던 지적인

영역들을 어딘가에서 감당해야한다는 것을 얘기한거죠, 미국의 복음주의는 그 얘기를 따라잡으면서

자기들 시스템 내에서 해결해나가는 방향으로 길을 잡는 것 같다라는 느낌을 받아요.

제 관심은 한국에서 한국 복음주의는 다른가, 저는 미국 복음주의보다 한국이 훨씬 더

스캔들이 심하다고 보는데, 제가 지금 관심 두고 있는 일은 다 이런 부분이에요. 어디를 쑤시면

구멍이 뚤리나, 공부했던 사람들 다 어디에 숨어있나, 다 찾아내고 크리스천으로써 학문적 성과를

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영역에서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지가 모이지가 않아요. 그 동네 서클

안에서는 대단하다고 하지만, 거기를 벗어났을 때 학문적인 위상이라든지, 연구업적의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냉정하게 봐야 하는 것이거든요. 끼리끼리 서클이 강하면 그 안에서는 왕 하는데

밖으로 나오면 완전히 졸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그러니까 조금 거칠게 판을 흔들어서 각 분야에서 대장 노릇 하고 있는 분들이 진검 승부를

해야지 한국 사회 앞에다가 이야기 했을 때에 그게 말이 먹히고 자기 주장을 디펜스 할 수 있고. 그게

기독 지성이라는 것이 한 사회 내에서 수행하는 제대로 된 역할이 우리끼리 모여서 예의 차려서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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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67

것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죠. 검객은 약속 대련 잘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약간 이종격투기지만 신학 교수 불러다가 사회학이랑 붙이고 법학이랑 다른 것이랑 붙이고 그런 식의

기획들을 좀 해봤는데 힘들어 하는 분들이 좀 있고요, 즐기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저는 즐기는

분들이 계시는 것을 발견하게 제일 큰 소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스테이지에서는 이분들이

역할을 하셔야 한다는 것이고요.

감사하게도 한동대에 그런 분들이 몇 분 계시다고 생각을 해요. 도움도 많이 받고, 류대영

교수님은 밖에는 잘 안 나오시지만 저는 서점에서 책을 많이 봤거든요. 눈에 띠었고요, 찾아보고 책

내용을 읽으면서, 또 제가 관심 있는 분야였기 때문에 읽고 굉장히 기분이 좋았죠. 아 이정도면

되겠구나, 그러니까 대중 앞에 안 나서도 좋은데, 어딘가에서 가끔씩 책 한번 나오는데 그게 판의

흔들림을 주고 그분이 책 한권 낼 때마다 그 분야의 연구가 진척이 나가는, 그런 정도의 학자가

계시면 안 나오셔도 되죠. 지켜보는 것 만으로 좋은데, 좀 아쉬운 거죠. 그런 작업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일어나고 그런 작업을 감당하고 수행하는 것이 기독학자가 단순히 우리 서클에 대한 기여만

아니라 한국 학계 전체에 기여가 되는 것이고, 다른 분야에서도 그 책을 읽고 도움을 받고 참고를

하고 그런 방식으로 가는 것이 기여다.

문제는 지금 우리의 대학 체제, 한동대로 온다면, 전 한동이 그런 면에서 이런 학자들을

보유하고 있고, 그 분들이 작업을 하는 공간을 갖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참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격려가 되야 될 일이 아닌가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게 이런 일들이 점점

격려가 되서 거기서 배우는 학생들이나, 인접 분야의 학자들이 자극을 받고 이쪽 분야는 한동대 어느

어느 교수, 어느 학과가 지적 구심점 역할을 한다, 그건 만들기 쉽지 않지만, 한번 만들어 지면 쉽게

흔들리지 않거든요. 전국적으로 그런데가 몇 군데 있어요. 아무리 지방에 있어도 이 분야는 저기가

최고다 그런게 있어요. 배우려면 그리 가던지 해야 하거든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소위 대학의

랭킹과 상관없이 학문적 리더십이라든지 구심점의 역할을 하는 학자나 집단이 있다는 것이죠.

한동대가 이곳에 입지를 두고 있으면서 학문적으로 기여를 할 수 있다면 그런 방식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전혀 뜻 밖에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분들이 격려받지 못하고 있다라는

것이 굉장히 아쉽고, 그러면 뭘 가지고 기독 학문 운동을 하는 전략을 구사 할 것인가, 하는 면에서

저는 아직 기독교 대학은, 물음에 답이 안나와요. 좋은 전략이 이미 보인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을

전략적으로 채택을 하고 더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장려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될 좋은 방향이다

라고 하는 것이 충분히 얘기가 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류대영 저는 5분 동안만 얘기하겠습니다. 이런 모임 혹은 아까 윤선생 설명하신 그런 것들이

학문과 신앙 통합을 지향하고 있죠. 근데 저는 세 분이 잠깐씩 언급하셨지만, 저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지 않고 있거든요. 참여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만 설명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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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2010년 가을학기 제 4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왜 참여를 안하느냐 하면, 근데 사실 저는 기독교세계관 운동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 됐을

때 그것을 접한 1세대 거든요. Sfc를 하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대학생 때는 어리니까 좀 더

넓은 세계를 알지 못하니까 그게 다 인가보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계속 공부를 하면서 그런

접근들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죠. 양선생님은 스위스에 가서 쉐퍼의 한계를 물질적으로 확인하는

상황이 됐는데, 사실 저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처음 시작할 땐 아주 근본주의적인 신학교에서

시작을 했죠. 근데 한 1년 반 하다 보니까 학문적인 한계를 금방 알게 되더라고요. 여기서

이래가지고선 될 일이 아니구나, 그래서 결국 주류 신학교로 옮겨가고, 그 다음에는 점 점 더 소위

말하는 외연이 확장이 됐는데, 그러면서 좀 제대로 된 학문의 세계를 접하고 그것을 공부하다 보니까

학문과 신앙 운동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분명하게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 한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신앙은 좋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학문과 신앙을

결합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학문과 신앙을 이야기하는 사람, 혹은 그것을 책으로건

말로하건 그것을 주도하는 분들을 보면 과연 그 분들이 그 분야의 학문에서 얼마나 인정받을 수 있는

분들인가 봤을 때 전혀 그렇지가 않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이 한계가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다 보니까 제가 공부를 했으니까, 학자의 길에 들어섰으니까 공부를 하는 수 밖에 없는데, 근데

이게 사실 본질적인 문제가 되겠습니다만은, 아까 양선생님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을 말씀하셨는데,

근데 거기 그러니까 결국은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복음주의권이, 소위 지성계가 내놓을 만한 지적인

업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인데, 그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현대학문이 가지고 있는 성격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현대 학문이라는 것이 분야를

막론하고 결국은 계몽주의 이후의 서구에서 진행된 어떤 전개과정에서 나온 학문이기 때문에 이것을

신앙과 연결시키는 작업이 힘들게 돼있어요.

제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는요. 예를 들어 역사학, 기독교 역사학만 하더라도 제대로 된

기독교 역사학은 사실은 하나님하고는 전혀 별개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학문 자체가

그러니까. 그럼 거기에 하나님을 다시 갖다 붙인다, 그러면 학문의 커뮤니티 속에서 설 수 있는

자리가 없는 것이에요. 아마도 다른 문과 학문들도 그렇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니까 현대 학문의

세계 속에서, 어떤 분과 학문에 속해 있던지, 그 분과학문에서 A급의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에요. 자기의 개인의 신앙하고, 신앙인으로써 존재할 순

있지만, 그것을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차원까지 간다는 것은 제가 볼 때 거의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현대학문이 가진 성격 때문에. 그것이 아마도 놀이 얘기하는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의 본질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놀과 저하고는 생각이 좀 다른 면이 있는데, 물론 대부분은 동의하는데, 그렇게 된 상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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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69

대해서는 조금 저하고 다르거든요. 저는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 근대학문이 가지고 있는 성격의

문제하고 연결되어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것이 복음주의권이 그 동안에 관심을 안 가졌다든지, 다른데,

행동주의에 관심을 가졌다든지 물론 그것은 이유들은 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아니다라고 생각을

하고. 저 같은 경우도 제가 하고 있는 분야를 그럼 어떻게 신앙과 연결시켜서 기독교적인 뭔가를 할까.

제가 기독교역사, 교회사를 하는데, 그건 당연히 연결되어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기독교 역사 페이퍼를 하나 쓰더라도 거기에 신앙이 보이게 되면은 그건 이미 빨간줄이

그어져야되는 상황이거든요. 당연히 그런 것이죠. 왜냐하면 현대 기독교 역사학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

이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게 되면, 그것은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죠.

결국은 그런 어려움들이 있고, 그러다 보니까 저는 그런 입장을 취한 것이죠. 결국 학자라는

사람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겠다,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까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적어도 제

분야에서 이룩한 사람들이 있는가? 소수지만 있긴 있거든요. 있지만 그들이, 예를 들어, 마크 놀, 조지

마스덴 이런 분들이 신앙은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학문에 있어서는 최상급의

학자들인데, 그들의 논문들이 얼마나 학문과 신앙이 통합되어 있는 형태로 쓰여지고 있는 것인가,

전혀 그런 것이 없어요. 다만 그들이 신앙인이기 때문에 주제가 복음주의, 이런 곳에 관심이 있을

뿐이에요. 그런 것을 다룰 뿐이에요. 만약에 그들이 역사학계, 영어로 얘기하면, the canon of historio

graphy라고, 역사학을 하는 표준들이 있는데, 표준들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해야지 그것이 아마도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 될 텐데, 그렇게 하면, 역사학자로써 인정이 안되는거에요. 역사학자로써 그들이

그렇게 해서 써놓으면 학자 공동체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으니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죠. 주제들은

자기들이 관심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거에요. 근본주의를 하건 복음주의를 하건 그것을 해내는 방법에

있어서는 여전히 현대역사학의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제가 얘기하는 것이 무슨 말이냐면,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고. 그래서 제가 선택한 것은 결국은 나는 공부도 못하는

사람들이니까, 통합은커녕 공부도 하기 바쁜데, 통합을 하자니까 그게 짜증도 나고, 시간도 없고, 그

다음에 저는 근본적으로 사람들 많이 모이는 것 싫어하니까, 저 학회도 잘 안가거든요. 유일하게 하나

가는데, 그것도 3년 전부터는 가서 일체 얘기 안해요. 학회라는 것도 가보면 발표하는 사람이나

논찬하는 사람이나 결국 자기가 잘났다는 소리에요. 그래서 전 공부나 하고 있어야 하는 판국인데,

능력이 그거 밖에 안되니까,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을 제가 알기 때문에, 그것을

제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냐, 공부밖에 못하는 것이죠.

학문을 추구하는 것 일단 그거부터 열심히 해서 하는데 까지 하고, 그것이 현실적 목표가 된 것이죠.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초등학교 때 우리 때는 TV보다는 잡지를 많이 봤어요. 어린이를 위한

월간지를 봤는데, 거기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아마 초등학교 4학년 정도였던 것 같은데,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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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을 갖고 있는 내용이 있어요. 그 내용이 뭐냐면, 태양이 시간이 몇 십 억년이 지나면 결국은

핵융합이 다 끝나서 이것이 적색외성이 되고 아무튼, 태양이 소멸하면서 태양계가 소멸한다는

것이에요. 그럼 지구도 소멸하고. 그게 걱정인 것이에요. 초등학교 4학년 때 그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이걸 어떻게 살릴 것인가, 몇 십 억년 후에 벌어진다는 일인데. 아무튼 그 때 제가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을 하고,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은 여러 가지 변화들이

일어나는데, 그 변화 중에 하나는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제가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이렇게 된 것이죠.

그 다음에 한동대학의 상황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한동대학은 간단히 얘기하면 학자를

소중하게 여기는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공부를 하려면 어려움이 있어요.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기가 힘든, 그런 학교죠. 그것은 학교를 인도해가는 분들도 그렇고 교수 공동체도 그렇고

더더군다나 학생들이 더 그래요. 학생들이 공부하는 선생을 별로 원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선생이 있기가 대단히 힘든 학교에요. 상당히 열악한 상황인 것은

틀림없죠. 그런 어려움들이 있죠.

그래서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한동 대학교 내에서도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어요. 과연 그 분들이 자기 개별학문에 있어서 자기의 개별

학문의 세계 속에서 최상급의 학자가 되면서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 저는 그것을 물어보고 싶은

것이죠. 그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저는 전혀 모르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관심을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분야기 때문에, 부담은 있는데 결국 내 일은 아니다 하고 제껴 놓은 상태인 것 같습니다.

이국운 그렇습니다. 세 분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저런 말씀을 들으면서, 특히 류교수님 방금

말씀하신 중에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큰 꿈이 아니냐. 특별히 서양 계몽주의

이후의 학문을 정상학문이라고 규정한 그 상황 속에서는 다시 신앙을 학문과 연결시킨다고 하는 것이

학문을 제대로 한다는 전제하에서는 너무 큰 꿈이 아닌가. 솔직한 말씀으로 들리고요.

이 자리에서 개인적인 고민을 하자면, 저는 처음부터 상대적으로 윤교수님은 통합파에

가깝고 저는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란 말은 하늘 나라 가면 그렇고, 저는 그것은 너무 힘든 것 같고,

학문과 신앙을 논문으로 통합은 못해도, 학자의 실존 속에서는 가끔씩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가

원래 침례교인이에요 장로교인하고 살고 40이 넘으면서는 루터파가 되고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비록 제가 학문과 신앙운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보자고 했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관계지으려고 하는 것. 라인홀드 니부어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불가능성의 가능성, 끊임 없이

관계 지으려고 하는 것, 잘 안오시지만 끊임없이 오시라고 하는 것, 그래서 몇 년에 한번씩은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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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가르침을 받고, 나중에 제가 쓴 글도 보여드리는 것, 그렇게 하는 것. 그래도 해야한다. 관계

지으려고 해야한다, 그런 생각을 저 개인은 갖고 있습니다.

저까지 포함해서 네 사람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여러분들에게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을

말들도 아마 우리 선생님들 말씀 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공부 안하는 선생님들 더

좋아한다든지. 오늘은 좀 다른 분위기에서 편하게 질문하고, 좀 털어놓아도 좋을 것 같고. 누군든지

먼저 시작해줄래요?

학생 1 안녕하세요 김민호입니다. 아까 공부 안하는 교수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류대영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제가 면접 때가 기억이 나는데요. 2003년도 수시 1학기 때 시험을

보러 왔는데, 생명과학부 송교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네가 여기 이 학교에 왜 오려고

하는가, 아 여기는 담배 안피고 술 안마시는 선배들 있다고 해서 저 지원했다고. 근데 사실 여기 술

마시고 담배 피는 학생들 많다고 해서, 아 그러면 좀 힘들겠는데요 라고 얘기를 다시 했는데. 문제는

뭐냐면 제시했던 수학문제는 제가 다 맞췄거든요, 내신 성적은 제가 합격은 그냥 되는 선이었는데,

제가 합격이 된 거에요.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합격이 된 것을 보면서 아 한동대학교 되게 웃긴

학교네. 내가 면접을 그렇게 못했는데도 되는구나, 그러니까 거기서 제가 느낀 것은 결국에는 기독교

대학이라면서 하나님의 대학이라면서 가르치긴 하지만, 그냥 점수 되는 애들 뽑는 거구나. 제가

느끼기에는 공부 안하는 학생들 그 이전에 그 학생들을 뽑았기 때문에 그런 학생들이 생긴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럼 문제를 다시 한번 돌릴 수 있는 것이 그런 학생들을 뽑는 것이 지금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뽑히고 있는데 입학사정관제가 엄청 문제가 크지 않나라고 생각을 하는데 교수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입학사정관제에서 제가 느낀 것은 딱 하나인데요. 10학번 중에서

기독교인 비율이 80%이 넘는다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경악을 했거든요. 어떻게 기독교인이 80%가

넘을 수 있지 입학사정관제도로 뽑았다고 하면서. 기독교 대학이면 기독교인이 아닌 학생들도 뽑아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인데, 왜 기독교인을 80%이나 뽑아서, 이미 알고 있는 애들을 뽑아서

비기독인 중에도 굉장히 좋은 친구들이 많을 텐데,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이국운 기본적으로는 교무처장과 입학처장이 있는데 그 분들이 좀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다들 아시지만 조금 더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답을 하자면, 우리 학교가 대체로 70%

정도의 자기가 기독교 신앙이 있다고 고백하는 학생들로 이루어져 왔어요. 초기부터. 한 3-4년

전까지도. 그런데 최근 들어서 아주 급격하게 기독교인 학생 비율이 높아지고 있고 최근 1-2년

정도는 90%가 넘는 학생들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학생들이다. 그런데 입학사정관제도 사실은

내부를 들여다보면, 성적 이외에 다른 것이 그렇게 많이 작용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우리나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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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하게 입학사정관제로 뽑기 어렵죠. 왜냐하면 공정성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인 틀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아주 흥미롭게도 성적으로만 뽑는데도

과거에는 70%정도의 학생들이 크리스천이었는데, 이제는 90%가 넘는 학생들이 들어오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좋게 이것을 해석할 수도 있겠어요. 한동대학교 15년이 넘는 시간을 통해서 전국에 있는

장로님 아들 딸, 목사님 아들 딸들 교회의 공부 잘하는 고등부 회장 부회장들은 한동은 일단 써놓고

본다, 이렇게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근데 좀 다르게 생각하면, 아까 기독교 대학 중에 대학인데, 대학은 근본적으로 공공적인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특정한 하나의 가치가 대학 공공성의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그것이

대학이라고 하는 것이 적어도 우리 헌법이 이야기하는 대학이라는 것이 운영되기는 대단히

어렵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큰 배움터라는 의미의, 또 하나의 세계라는 의미에 대학의 본 뜻에

가깝다고 전 생각하는데 그 면에 있어서는 우리 학교에 엄청나게 큰 도전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90%가 넘는 사람들이 전부 기독교인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열의 하나도 되지 않는

소수가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 공동체를 대학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교회로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교회에서 요구되고 교회에서 서로에게 기대하는 행동방식을 별 생각 없이 하게

될 가능성이 상당히 많고, 근데 꼴은 대학이고, 다시 말해서 고등교육법이라는 우리나라 헌법이라는

대학의 공공성을 요구하는 법령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국가로부터 이런저런 지원도 받고, 시민사회

지역사회로부터도 여러 가지 공공적인 기능을 담당해줄 것을 요구 받는 상황에서 아까 말씀 드린

여러가지 상황의 변화가 구성원들로 하여금 대학이 아니고 교회처럼 행동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상황으로 가게 된다면, 이건 대단히 큰 도전이다, 앞으로 굉장히 대학이라는 세팅 자체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우리에게 벌어질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윤상헌 입학사정관제도 자체에 대한 얘기는 지금은 좀 적당한 자리는 아닌 것 같고요. 지금

이박사가 얘기한 같은 맥락인데, 저는 숫자, %의 크기는 전 별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문제는 그것이 몇 %이건 간에 왜 오느냐는 것이죠. 여기를. 그 숫자가 적건 많건 간에 여기오면 술

담배 안하고 아웃리치 가면 학점으로도 인정되고, 예수 믿는 애들이 그래도 전반적으로 정숙하니까

각시 얻고 신랑 얻고 그 다음에 교수들 FGBS한다고 그러더라, 문턱도 없고, 아무때나 들어와서

스테플러도 빌려가고, 그런 접근성. 다 좋은데 그것이 대학의 본령이냐, 별책부록에 관심이 많아서

학교를 지원하고. 어느덧 지원할 수 없는 사실은 무엇이냐면, 교회를 다니는 아이들 중에서

한동대학교 다닌다고 할 때, 제 자식 한동대학교 다녀요 라고 할 때의 부모의 표정이나 눈빛이나

고개의 각도는 약간 상향이에요. 부모들 신앙도 상향 조정되는 이런 느낌, 이게 위험하다는 것이죠.

대안학교 얘기가 나오지만 대안학교 사실은 대안학교가 이날 특목고란 이름이 맞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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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다른 방식으로 더 잘 갈 수 있는. 그 비슷하게 기독교 대학이라고 해놓고 아이들은 착하고

좋단 말이죠, 그게 목적이 돼서 오는 90%, 아까 본인도 술 담배 그 얘기하면서 꿈꾼 것에 관해서.

기독교 대학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 뽑아서 전도하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니에요. 그건 미션스쿨이라

그래요. 기독교 대학은 예수를 잘 믿는, 예수의 복음 앞에 무릎 꿇고 뒤집어진 사람들을 가지고,

경세하겠다, 세상을, 민족을 경영하겠다. 교회 기독교 기관에서 적절하게 쓰는 그런 사람들만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밖에서도 얼마든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일꾼들을 감당하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100%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들어와도 문제는 아니에요. 문제는 뭐냐면, 100%가 들어왔을 때,

들어와서 생각하는 눈높이 자체가, 알코올 퍼센트, 치팅 하지 않는 것, 금연 캠퍼스, 이런 것이 우리가

얘기하는 담론의 최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그런 학교, 그것은 상당히 어려워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70-80 올라가는 것도 주목해야 할 만한 상황인데, 전에는 호랑이 새끼들이 좀 보였는데, 지금은

호랑이 새끼들이 잘 안보인다는 거에요. 왜 그럴까 이건. 여러가지 생각을 해봐야겠죠.

학생 2 저는 04학번 지인수 입니다. 저는 질문을 하기보다는 4학년 지내면서 바라본

한동대의 학문과 신앙 운동에 대해서 주제 넘게 진단해보았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학교에 와서 자퇴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대학이 뭔진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내가 꿈꾸던 한동이

아니었다라는 생각에 자퇴를 결심했었고 실제로 다른 서울에 있는 학교에 붙었었고 그래서 학점도

엉망이고, 그렇게 살다가 큰 변화를 겪고 학교에 남게 돼서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 전 학과 공부도

그렇고 한동 신문사에서 일을 하면서 과연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시가 되게, 하나님의 대학처럼,

하나님의 눈으로 본 세상이란 사시를 달고 있어서 정말 어떻게 기사 쓸지는 배우지 못했는데,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추상적인 구호 그것만을 가지고 괜히 마음에 부담 있는 체로

아웃풋은 아무것도 없이 3학기를 보낸 적도 있고요. 학교에서 기대위라는 단체가 아주 조용히 3-

4명의 학우들과 교수님들이 있었는데, 기대위에서 일년에 한번씩이라도 콜로키움을 열었었는데,

찾아간 사람이 기대위 학생들 빼곤 저 혼자 찾아갔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런 담론 자체가 4학년 2학기에 와서야 여기서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랍고요, 너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고, 나름대로 학문과 신앙에 대해서 우리 학교 교육 개발

센터에서 공모전도 하고 그랬지만 실제로 학우들 사이에서나 교수님들과 학우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고 간 적은 거의 없었고, 토론학회 학회장을 한 번 하기는 했는데, 선한 토론이라는 타이틀은 걸고

있었지만 사실은 상 받기 위한 토론 이상의 것을 전혀 해내지 못했고, 아무튼 여러 가지 고민과

생각을 하면서 살았지만 그로 말미암아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었고 생각만 많은 채로 4년을 보낸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한동대학교의 문제제기는 굉장히 좋았던 것 같습니다.

신국원의 문화 이야기라는 책을 보면서 그리고 양희송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제가

짐작하기에 한동대학교가 5번째 변혁모델을 가지고, 카이퍼의 견해를 따라서 짐작을 해보게 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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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세상을 구속하고 문화를 구속하고 교육을 구속하자, 이런 취지로 시작한 것 같고, 그런 취지는

굉장히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한동의 실패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기독교

대학을 세우기에 앞서서 그런 이야기를 마치기도 전에 실용주의적인 교육으로 갔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담배, 술 이런 것들 말고, 정말 기독교 대학을 세우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 제가

보기에 선행되어야 하는데, 영어나 컴퓨터, 취업 같은 것으로 서울 학생들과 소위 말하는 수능 점수

높은 학생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 그래서 영어, 컴퓨터, 취업, 술 담배, 예배 이런 것들이 중요시

되지 않았나. 그리고 그 결과 기독교 대학이라는 것은 굉장히 쓸모 없는 논쟁, 별로 실용적이지도

않고, 공부에도 별로 도움되지 않는, 이런 생각을 개인적으로 하게 됐습니다.

한동대학교가 지방대학이기 때문에 그런 실용주의적인 정책을 쓰게 된 것에 대해서는 이해는

합니다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한동대학교가 기독교 대학으로 카이퍼가 말했던 기독교

대학으로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고. 두 번째로는 교수님들께서

가르쳐주신 것 중에 학문과 신앙의 통합의 노력이 있었는가 봤을 때 저는 거의 그것을 못느꼈는데,

제가 국제와 언론을 전공하고 있습니다만, 마민호 교수님의 정치학 개론 수업이라든지 김준형 교수님

국제관계학입문 수업에서. 김준형 교수님 같은 경우에는 라인홀드 니부어를 가지고 민주주의를

설명하신다던지, 마민호 교수님은 첫째 둘째 시간에 성경을 통해 바라본 정치, 이런 것들 말씀해 주신

것 외에는 기독교적인 고민과 학문과 신앙의 통합으로 학문을 바라보는 것은 거의 없었다라고

개인적으로 결론 내리게 됐고요. 그런데 제가 6-7년 정도 학교를 다녔는데, 그동안 개선된 것은 거의

없었고, 기독교적으로 학문하기에 대해서 교수님들과 학생 사이에서 전혀 얘기를 한적도 없었고 했기

때문에 앞으로 그런 논의가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사실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Arise & Shine 같은

것들도 과연 기독교 대학을 세우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회의적인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저는 이승훈 교수님이 제시하신 기독교적 학문의 조건에서 동기와

내용이란 학문적 연관성이 조건이라 말씀하셨는데, 제가 한동대학교에 그것을 견주어보자면

한동대학교의 동기는 굉장히 좋았는데,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수업 시간을 예배로 생각하고

기도하고 그런 모습들은 좋았지만 학문을 기독교적으로 생각하고, 학문과 신앙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부재하지 않았나, 그렇기 때문에 내용이랑 학문적 연관성에서는 거의 기독교적 학문하기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이 들고, 그것의 원인으로 윤교수님께서 짚어주신, 일단 학교 세우고 봤다라는

것에 심정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결론을 내려는 것이, 김두식 교수님 책에서는 기독교 +

거시기라는 것을 굉장히 반대하시더라고요. 기독교적 학문, 기독교가 추구하는 하향성과 학문이

추구하는 상향성이 과연 조화될 수 있느냐 이런 문제제기를 하셨는데, 그것은 아마 류대영 교수님의

문제제기와 닿아있는 것 같고, 제가 보기에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가 개인적으로 갖게 된 생각은 소위 말하는 기독교가, 근본주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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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75

복음주의와 자유주의 그것을 모두 묶어서 복음주의라고 하기도 하고 더 쪼개기도 하는데,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의 천차만별성, 그 5가지 모델 중 우리 학교가 무엇을 취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의 부재, 그것이 논의되지도 않은 채로 한동대학교가 기독교 대학으로 바로 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한동대학교가 실패했지만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는 이유는 한동대학교가 그 첫 삽을 떴고 제가 한동대학교의 구성원인 덕분에 그나마 이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나. 그래서 전 그것에 대해서 한동대학교에 좀

감사함을 가지고 있고 아까 이국운 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논문으로 표현할 순 없지만 교수님들께서

수업시간에 말씀해주신 약간의 실존적인 고민들을 듣고 조각들을 모아가면서 나도 기독교적으로

학문하기를 시도해봐야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 그것이 한동대학교가 가지고

있는 의의가 아닐까. 졸업을 앞두고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국운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아니에요. 기준이 높아서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지.

결과를 없애기 위해서 기준을 일부러 높이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을 것 같고요.

상향성 하향성 문제는 일종의 범주착오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 생각을 나는 개인적으로 하고 있고.

기독교 학문은 기본적으로는 참여적으로 해야한다는 생각이 있는데, 관찰자로써 얘기하기 시작하면

상당히 어려워진다라고 생각합니다.

학생 3 03학번 박진입니다. 저는 공부를 하면서 매트릭스에 나오는 배터리 같은 인간이

되지 않고 시스템에 빨리는 인간이 아니라 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학점에 구애받지 않고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근데 과연 이 학교에서 그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학점에서 자유롭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은 과목이 일단 없었습니다. 철학,

문학,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게 그렇게 다양하게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과연 내가

여기서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 다른 학교를 가야겠다라고 생각했을 때, 그 때 선생님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럼 과연 선생님들께서는 여기 계시고 무언가를 하고 계시는데, 어떤 것을 바라보고

계시는지. 제가 올해 들어서 인문 고전 읽기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공부라도 좀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2학기 째 진행을 하고 있는데. 다들 학점, 시험이 눈에 보이면 점점 사라져 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이 학교에서 학점 말고 진짜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있을까하는 윤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런 고민도 들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그래서 결국, 선생님들께서 이 학교를

통해서 바라보시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 가시지 않고, 떠난 교수님들도 많이 계신데,

저희와 함께 계시는 이유를 졸업하기 전에 좀 듣고 싶습니다.

류대영 한동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바깥에서 오라 그럴 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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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2010년 가을학기 제 4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별로 큰 관심을 안가졌는데, 이제 늙어서 갈 수 없게 되니까 한동의 실체를 알게되고 학생들하고

똑같은 입장이죠 선생들도. 그래서 대책이 없는 상황.

윤상헌 학부 때는 어딜 가도 학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고. 근데 박진 형제가

얘기하는 그게 어떤 것인지는 느껴져요. 선생들도 요즘 고전을 읽고 있어요. 논어를. 저는

불가능하다고 얘기한 적은 없어요. 근데 그렇게 쉬울거라고 생각도 안하고. 저는 언어학을 했는데,

촘스키를 보면 28년 생이신데, 제가 제작년에 뵜을 때도 여전히 정정하세요. 그 사람의 신학적, 철학적,

사상적 포지션에 100% 동의하지 않더라도 통합을 이루어가는, 그건 그가 일가를 이루었기 때문에

위압감에 의해서 받아들이는 표현이 아니라 엄밀히 들여다보면 그 걸음에 일관성이 있어요. 동기와

내용 부분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까 우리가 통합을 얘기할 때 그 부분에 대한 좀 긍정을 꿈꾸지

않으면 못해요. 긍정을 꿈꿔도 안되는건데.

제가 한동을 떠나지 않는 이유, 거기에 이국운도 있고, 류대영도 있고, 김준형, 다 내가

꿈에서도 보면 기쁜 사람들이에요. 제가 한동에 있는 이유는 그 가능성을 보기 때문에이에요. 간다고

그러고 안가는 사람들 있어요. 아버지가 밭에 가서 일하라고 했는데, 알았다고 해놓고 안가고 카바레

가는 놈이 있고, 근데 안 간다고 그러고 투덜대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결국은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얼마나 멋있게 하느냐, 그게 중요한 거지. 어려운 것 같다, 어떤 사람은 힘들다, 손봉호 박사님 같은

경우는 안될거다 이런 얘기 하시는 분이거든요. 그런데 결국은 실제로 해내고 있다. 그 책과 글을

보면. 실존적으로 고백하는.

한동을 떠나지 않는 두번째는 제가 하나님 앞에 약속의 말씀을 받았어요. 이게 위험한

말이지 이게. 착각 아니냐, 너나 잘하세요 이런 게 있기 때문에. 저는 정말 예레미야 1장 말씀 받고,

아이라 하지 말고. 예레미야 1장 말씀이 지금도 그래요. 하나님 절 이곳에 보내셨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리고 이곳에 와서 그 가능성을 보는, 저는 아주 문여리 같은 사람인데, 마치 신랑의 친구가 신랑을

보면서 기뻐하듯이, 저도 그게 자극이 돼서 애를 낳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옥동자를 낳을 것

같은, 내 사랑하는 선배들, 후배들이 있어요. 솔직히 한동에 있으면서 참 좋아하는게, 이 양반들하고

밥 먹고 노닥거리고 바뻐서 안 놀아주고 하는데, 굉장히 내가 좋다고. 그러니까 내가 기댈 수가

있어요. 의논할 수 있고. 나는 왜 안가냐. 밖에는 이런 친구가 없어요. 대학 때부터 같이 있던

친구들이 미국 가서 7년 귀양살이 하고오고. 포항에서 장기곶 바라보면서 귀양살이 하고 있고. 그

친구들 만날 수도 없다고 내가. 이미 같이 일을 안 한지 오래됐기 때문에 마음으로야 불알친구지. 왜

여기 있냐, 즐거워서. 이 분들하고 같이 있으면 즐거워요. 그리고 가능성을 보기 때문에. 지금 이 역사

공간, 문화 공간, 우리 겨레가 처한, 한국 교회가 처한, 우리 공동체가 점유하고 있는 역사 문화

공간에서 어떤 모델이 유용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 가능성을

보기 때문에 머물러 있다 라고 얘기를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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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77

이국운 요새 들어서 갑자기 그런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방에 와서 “왜 안가세요?” 이러는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제가 정말 거기다가 대고 하고 싶은 답은 이거에요. “갔으면 좋겠냐” 그냥

해보는 말이고요. 저는 그냥 기도해요. 늘 기도해요. 하나님, 언제까지 있어야 될까요. 근데 아직은

하나님이 있어, 뭐 그거 가지고. 있어. 괜찮아. 그러세요. 그래서 그렇고요. 학자로써는 저는 한동에서

공부가 잘 되요. 여기서 오히려 공부가 잘되고요, 제 원래 계획에 비해 제 집필 스케줄이 5년 정도

늦었어요. 그런데 밖에 있었으면 제 욕심으로 많이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5년 늦어지는 동안

제가 많이 배웠어요. 정말 많이 배웠어요. 많이 배우는데 제일 큰 힘은 여러분들이에요. 내 강의를,

들어주는 사람들, 나한테 강의 듣는 사람들 대게 아는데, 1-2학년 아이들은 대게 내가 하는 강의가

표준적인 줄 알아요. 근데 3-4학년들 사법시험 공부를 하다가 오면 내가 얼마나 이례적인 헌법강의를

하고 있는지 알게 돼요. 대한민국에 어느 학교에 가도 이런 식으로 헌법 강의를 하면 짤려요.

학생들이 들어주질 않아요. 근데 여기는 제 강의를 들어줘요. 그리고 헌법 수업 시작할 때 늘 실험을

하는데, 다른 학교에서 그런 것을 하면 당장 게시판에 올라가고, 법대 이상한 교수 하나 왔다, 그럴

거에요. 제가 어디 딴 데로 간다면 로스쿨로 가겠죠. 제가 헌법강의 그렇게 하면 그 다음날로 소송

들어올 거에요.

저는 여기서 공부가 잘되요. 여러분들 때문이에요. 이 이점을 놓고 싶지 않아요. 학자로써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뭘로 날 심판하실지 뻔해요. 내가 쓴 논문, 내가 쓴 책, 내가 했던 생각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말이 되게 내가 설명할 수 있다, 내 수업에서는 그걸 진리에 대한 고백이라고

하는데, 그것 가지고 심판 받는 거에요. 하나님께 내가 그 계산을 헤아림을 받을 때 여기 지금 있는

것이 나로써는 더 장사가 잘되요. 만약에 그게 아니면 전 여러분들이 잡고 선배님이 잡고 그래도 별로

관심 없어요. 학자로써 제 본질과 관련되는 문제기 때문에. 학교에 있다가 옮겨가신 많은 교수님들

중에 저는 조금 유보가 있어요. 학자가 체무감에 의해서 우리를 길러주는 한국교회에 대한 다음세대에

대한 체무감에 의해서,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체무감에 의해서, 어떤 분은 33년 교수생활 할건데

3년 정도 여기서 봉사하고 간다, 그런 분도 있어요. 저는 그건 하나님이 별로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은 의무복무 시키는 분이 아니에요. 여기서 공부가 잘되면 여기 있는 것이고, 공부가

안되면 옮기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옮겨가시는 분들은 제가 존경합니다. 근데 그렇지 않고 다른

기준으로 옮겨가신 분들은, 글쎄요 공부가 잘 안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기독교자 붙은 거 뭐 이런거

붙은 거 다시는 안한다 이런 소리하는 사람들은 공부가 잘 안되고 있다는 표시에요. 내가 만나서 당신

공부 잘 안되는 것 같은데 다시 오라고. 그렇게 합니다.

학생 4 09학번 이주형 입니다. 류대영 교수님께 질문 드리고 싶은데요. 일단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대학교가 뭐하는데인지도 잘 모르고 그러니까 남들 다 와서 따라 온건데, 어쩌다 보니까

한동대에 왔고. 일학년 이학기 때 류교수님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아 이런게 대학교 공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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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2010년 가을학기 제 4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보다 하고 느낌을 받았는데, 처음으로 소설작품, 그러니까 객관식에서 처음으로 벗어나는 경험을 하고,

앞에서 한 명이 말하고 듣는 게 아니라 동그랗게 앉아서 토론하는 수업이었는데, 문학과 역사라고,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안들어서 폐강된 걸로 알고 있고요. 근데 그렇게 하면서 참 좋았고 더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는데요.

교수님도 말씀하셨듯이, 연구하려고 하시는 분들을 대우하지 않고 학생들도 바라지 않고,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저도 느끼고요. 교수님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계신데, 저는

우연히 그 수업을 들어서 대학이 이런 거구나 아주 조금 정말 조금 맛을 본 건데, 아직 그러지 않은

학생들, 대학이 뭔지, 대학에서 어떻게 해야되는지 방향성을 잡지 못한 학생들, 고등학교 갓 졸업한,

한국 고등학교 교육이 잘되어있지 않아서, 그래서 그 학생들에게. 지금 여기 온 사람들도

27명이거든요. 콜로키움 때도 보는 사람들이 오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게 문제의식을 갖고 계신

분께서 공적으로 이야기 해주실수는 없는지. 우리 학교가 이런 방향으로 가면 안된다, 그런 걸

신문사에 글을 써주신 다든지, 뭐가 됐든지 간에, 장으로 끌어주실 수는 없는지.. 공론의 장으로

올려주실 순 없는지 그게 좀 궁금합니다.

학생 5 전민규 입니다. 역사와 하나님 앞에 바로 선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류대영 첫번째 질문은, 글쎄요 두 가지일 텐데. 99년도에 왔으니까 올 해가 12년 차인데,

그동안에 찍소리 안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런 저런 방식으로 얘기를 했을텐데, 지금와서는 그런

식의 공론화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이게 아마

저의 성품하고 관계된 문제인데, 저는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집단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한동대학

학생들이라고 해서 추상적인 한동 대학 학생들에게 큰 관심이 없어요. 제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

만나게 되는 학생들이니까 그런 정도나 관심이 있는 것이지. 한동대학 학생들 3천 몇백명에 대한

책임감 이라던지 내가 내 불편함을 감수해서 뭔가를 하면서까지 뭔가를 하는 의무감 필요성을 잘 못

느끼죠. 질문이 그런 것을 할 의사가 있느냐, 없다. 없는데 이유를 설명한 것이죠 먼저. 그 다음에 두

번째 질문은, 제가 책에다가 써 놓은 것인데, 잘못 썼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쓴 것 같은데, 요새

같으면 안 썼을 말인데, 너무 큰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학생 6 09학번 우홍섭입니다. 1학년 2학기 때 류대영 교수님 수업을 들으면서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알게 됐고요. 그리고 올해 들어서 이국운 교수님, 류대영 교수님, 그리고 이번 학기

윤상헌 교수님 수업을 듣는데 제가 한동에서 얻은 제일 큰 소득이 교수님들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 같아요. 공부하시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신 그 삶이 되게 예수님을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이고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제가 직접적으로 듣진 않았지만 수업에 가서

들으면서 계속 매일 그게 저한테 큰 그것을 주신 것 같아서요.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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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79

드리고 싶었고요. 제가 질문하고 싶었던 것은 제가 군대를 가려고 하는데, 복학해서도 교수님들의

수업을 들을 수 있을까 그것이 질문이었는데, 류대영 교수님 답변 듣고 마음에 안심이 생겨서.

학생 7 02학번 안신열입니다. 저는 02년도에 입학을 했다가 장기휴학을 해서 중퇴가

되어있는 상황인데요. 제가 학교 다니고 있는 동안 참 많이 몰랐고요. 기회를 못 잡아서 앞에 계신

선생님들 수업을 들었던 것이 예전에 양희송 교수님 기독교 세계관 수업 한번 들었고요.

한가지는 기독교인 비율이 증가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좀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했어요.예전에 한동대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 이외의 것들. 영어 수업이라던가 컴퓨터 이런 부분에

있어서 그런 메리트가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잘하는 비기독교인 학생들에게도 이점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것들을 다른 서울에 있는 학교들이 차용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비기독인 임에도

불구하고 포항에 온다는 이점이 없기 때문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었고요.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은, 교수님이 좀 더 공론화 시켜주셨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저는 오히려 학생들이 좀 더 주체가 됐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제가

학교에 있었을 때는 다큐멘터리 상영을 한다던가 뭐, 강연회를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학생들의 관심을

모으고자 하는 작업들을 크게는 아니지만 몇 번 해봤었는데. 잘 모이지 않잖아요. 도대체 어떤 전략을

내세워야 하는지. 결국 지금 한동에 온다고 하는 학생들은 그냥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정말 신앙과

관련 없이 하나의 종교 안에서 비교적 입학하기 좋은 이런 학교로써 오는 것 아닌가 싶고. 오로지

자본주의 논리 밖에는 없는 학생들을 어떻게 설득을 시키고 어떻게 기회를 보여줄 것인가 하는

고민들이 아직까지도 어떤 답을 내야 할지를 잘 모르겠고. 그런 전략들에 대해서 선생님들께 좀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고요. 저는 이미 학교와 좀 멀어져 있는 상황이어서 이런 이야기는 다른

분들하고도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고.

저는 지금 개인적으로는 학원선생을 하고 있는데, 사실 이게 더 모순적인 상황입니다.

학원선생이 입시학원 선생이고, 학생들의 경쟁을 더 강화시키는 교육일 수 밖에 없어서, 저

개인적으로도 그 상황에서 제 신앙과 타협이 아니라 통합을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계속

부딪치고 있는 상황인데, 그건 혼자서 분투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고 사실은 좀 한편 오늘 교수님들

들어보면서 제가 받아들이고 적용시켜볼만한 것도 많아서 오늘 자리가 좋았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사실은 선생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전략들을 좀 가르쳐주셨으면 하는 바람들이고 여기

모인 많은 분들에게 함께 그 운동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그런 움직임들에 동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제언을 하고 싶고요.

이국운 돌아가시기 전에, 지금 이 순간은 후배들이라 생각하시고 한 말씀씩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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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헌 한동대학교 오면서 가졌던 생각은 전면전이 가능하겠다, 지금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닌데, 다시 산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 아닌가. 게릴라. 여러분들 속에 내 앞에서 울었던 그 형제를

닮은 그런 친구들을 만나면 참 기뻐요. 내가 대학 때보다 말하는 거나 생각하는게 더 품격이 있어.

외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말인데, 그런 형제를 보면서 소망을 담아 보는 것이죠.

오늘은 제가 더 많이 생각하고 가게 되는 것 같아요. 개인의 어려움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더 확장해서 한동, 기독학문운동, 학문과 신앙의 관계지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여전히 내

존재의 한 귀퉁이에 놓여져 있구나. 놓아서는 안되겠구나. 놓을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그래서

고민이에요. 전면전을 가능하게 하는 정규군으로 한동이 섰으면 하는 마음.

한 마디로 한동에 여러가지 많은 문제가 있는데 결국은 우리 미성숙한 신앙의 문제다. 결국

내 욕망과 하나님의 뜻을 헷갈리는 것은 결국 우리의 욕망에 붙잡혀서 학문과 신앙이라는 것을

정치적인 어젠다로 쓰고 있는 것이지, 그것의 속살을 본적이 없다. 그저 간판만 보고. 학문과

신앙이라고 하는 간판을 내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속살을 그것을 내려놓을 순 없을 것이다. 계속

다가가는 것에 의미가 있다. 포기하지 말자, 그런 얘기를 하고 싶네요.

류대영 저는 학생들에게 하는 얘기가 늘 비슷하기 때문에 들은 학생들은 지겨울 텐데. 몇 년

전부터는 과거에 의미 부여했던 것만큼 의미를 찾지 못하겠고. 결국은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고. 제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0년 전에 대학을 다녔는데, 그 때 sfc를

하면서, 내가 sfc를 한 것이 지금까지 도움이 됐죠. 신학적으로 등등에 대해서 그 세계로부터 많이

멀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sfc를 하면서 얻은 게 무엇 이었을까. 사람을 만난 거구나.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그래도 어디 가서 사기 안치고 도둑질 안하고 나름대로 바르게 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사는 게 왜 그럴까. 결국은 그 때 만났던 선생님들 때문이구나. 그 때 손봉호

선생님을 만났고, 이만열 선생님을 만났고. 그런 어른들을 만났기 때문에 이 만큼이라도 부담감을

가지고 사는구나 하는 부담감을 가지고 살죠. 결국은 사람이 중요한 것이고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에

누구의 근처에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고. 그래서 함부로 사람을 사귀는 것이 아니고.

대학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 좋은 선생을 만나고, 좋은 친구 선후배를 만나는 것이니까.

그래서 거목의 곁에 가 있어야 키가 크는 것이니까, 거목들에 곁에 가있어야 되는 것이죠.

그렇지만 재밌는게, 거목은 대부분 죽었어요. 그러니까 결국 책을 읽을 수 밖에 없고.

거목들을 만나고 곁에서 자기도 모르게 성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니까. 그런 노력들을 많이 하시기를

바라고. 주위에 있는 좋은 선생들, 좋은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착하게 살게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죠. 저 같은 신통치 않은 사람이니까 근처에 올 필요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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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81

좋은 선생들이 많이 계시니까 그런 분들 곁에서 자기도 모르게 키가 크는 것이니까. 유감스러운 것은

학교에 큰 나무들이 많아야 할텐데, 우리 학교의 특성상 거목들이 서있기가 참 힘든 학교다 그것은

학교가 아직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다른 이유들도 있으니까 결국은 책을 많이 읽기를 권합니다.

Session 2

이국운 저는 양희송 형제보다 세살 많지만 깊은 존경심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다니던 교회는 달랐지만 희송이 형제 또래들이 나에겐 조원들이었어요. 대학에 있는게, 있어

보니까 덜 치열하게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닌 건 아니더군요. 특별히 올해를 거치면서 ‘이것이

정상이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희송 형제, 대학 졸업한 다음에 한번도 제대로 월급 받는 직장에

몸을 담지 않고 대학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감격하고 꿈꾸고 그런 것들을 아주 치열하고

현실적으로 아까 이야기 했는데, ‘이상으로의 도피’와 같은 프란시스 쉐퍼의 책을 읽으며 처음에 많이

배웠습니다. 그것을 어떤 면에서는 비판하고 진상을 알고 보통 일이 아닌. 그러나 쉐퍼가 붙잡았던

꿈은 더 구체적으로 붙잡는. 여기서 고백해도 될 지 모르겠는데, 내가 희송 형제 참 사랑합니다.

황병구라고 또 있습니다. 그 사람들 다 충분히 체제 속에 들어와서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다하시고 월급 제대로 못 받는 그런 직장에 일부러 가서 쓰러져 가는 복음과 상황 편집장을 5년

가까이 하시고, 사실 청어람아카데미도 지금 잘 되고 있습니다만 처음 시작할 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양희송이 7년 동안 한동대 오는 이유가 나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청중 웃음) 희송

형제를 부른 이유. 여러분이 이제 조금 있으면 들어가게 될 ‘하나님 나라를 위한 투쟁의 현장’이 지금

어떤 상황인가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부분 좀 비관적인 느낌들이 지배적인 것 같은데, 우리 희송

형제 성격상 비관적인 이야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희송 형제가 운영하는 복음주의 클럽.

세달쯤 전에 한국 교회가 있는 것 없는 것에 대해 형제가 글을 써서 감동을 주었는데 최근에는

봉은사 땅밟기에 대하여 ‘잘못했다. 미안하다. 용서해달라’는 글을 써서 우리 교회 다니는

동료들에게는 매를 맞고. 교회가 맞아야 할 매는 대신 맞고 있습니다. 양선생님한테 여러분들이

파송이 됬든 전입이 됬든 편입이 되든 가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투쟁의 일선에 어떤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지. 추상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지금부터 할 이유가 아주 구체적일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양희송 반갑습니다. 소개를 진지하게 해주셔서. 저도 서울에서 소개할 때는 이렇게 하니까.

소개하시면서 힘주어서 이야기 하신 것이 졸업 이후로 변변하게 돈 받는 직장 한번도 간 적이 없다고

이야기 하셨는데요. 사람 인생이라는 게 굉장히 다양한 길이 있습니다. 제 강의 들은 친구도 있겠지만

제 히스토리는 모를 테니 간단히 이야기 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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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2010년 가을학기 제 4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고향은 경주이며 대학을 서울로 가면서 외지 상황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서울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처음 나간 교회가 개척한 지 1년이 되지 않았던 온누리 교회입니다. 처음에 나는

우리 교회가 작은 개척 교회인 줄 알았어요. 작은 아파트를 개조해서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습니다. 내가 나간 지 1년이 지나서 본당이 완성 되었습니다. 지금은 크게 두 채가 있지만 원래

있던 한 덩어리가 그것이고요. 원래 기독교 집안은 아니었고 국민학교 친구가 나를 전도하려고 무지

애를 썼고 억지로 교회를 몇 번 나간 적 있습니다. 인생이 허무하더라 해서 중2때 제 발로 걸어

나갔습니다. 찬바람 부는 가을 날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고. ‘일단 나간 교회는 성실하게 나가자’는

생각으로 나간 지 두 달 만에 임원이 되었습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하니까 교회에서 임원을 시켜서

서기를 했습니다. 친구들과 같이 그래서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었고, 중3 때 여름방학 수련회 때

회심하는 체험을 하여 그 다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주일 날은 공부를 안하고 낮

예배, 저녁 예배 참석하고 새벽교회도 열심히 하고 노트 필기도 열심히 했습니다. 두꺼운 노트에 설교

들을 때마다 노트를 해서 2, 3년만 지나니까 목사님이 어떤 설교를 할지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다가 서울에 갔기 때문에 온누리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에 경배와 찬양

운동이 시작되었죠. 온누리 교회에 10년을 다녔는데 감사한 점은 한국 교회의 경배와 찬양 운동의

시작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두란노도 같이 있어서 큐티니 제자 훈련이니 역시 막 시작 될

때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게 참 좋았습니다. 만들어진 일보다는 만드는 일을 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내가 이러저러한 영역들을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게

했습니다. 교회는 온누리 교회를 다니고 두란노 경배와 찬양의 핵심으로 열심히 했는데 기독 노래

운동, 뜨인돌이라고 ‘맑은 물소리’라고 알려진 찬양집 있죠. 91년부터 92년간 1년 간 재미있게

활동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서울대 들어가서 전자공학을 전공을 하면 당연히 그쪽 분야로 진로를

잡아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나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내가 대학에 가서 맞닥뜨린 신앙

운동의 임팩트는 컸고 그래도 진로를 어디로 갈 것인지는 쉽지가 않았는데요.

학교에서 수업 때 교수님이 그날 일이 있어서 박사 과정 계신 분이 대신 들어왔습니다.

수업은 안하고 파란만장한 자기 이야기를 하셨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굉장히 재미있었는데, 이

양반이 대학을 다닐 때 처음으로 서울대 영화 동아리 ‘얄라셩’에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유명한

감독들이 여럿 나왔다고 합니다. 장선우 감독. 우리나라 영화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던 초반에 상당히

두각을 많이 나타냈다고 합니다. 자기가 영화 동아리도 만들었고, 또 뭐도 했고 한참 그거 하다가

대학원 가서 공부하다가 또 하고 있는데, 박사과정 10년차인데 교수님이 학위를 주지 않는다고.

이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더군요. 전혀 맥락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아마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너무 심각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캐주얼하게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한가지에 푹 빠져서 하고, 그러다 돈도 벌다가 그게 아니다 싶으면 학교에서 공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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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83

하고 말이지요. 실제로 우리 전자과가, 요즘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전자과가 공대 중에서

제일 높았습니다. 자연대는 물리학과가 제일 높았고요. 이 친구들이 학창 생활을 하는 것을 보니까

의외의 케이스가 굉장히 많이 나왔습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사시 공부하겠다고 한 학생도 있고

영화음악 하겠다고 나간 학생도 있었습니다. 영화 산업이 활성 되었을 때도 아닌데 영화 하겠다고

나갔습니다. 이 중 제일 파격이 사시 공부한 학생이었어요. 이 친구가 사시 공부한 이유는 자기

동생이 외시에 되었기 때문이었어요. 굉장히 제수 없지 않나요? (청중 웃음) 이 친구가 그런데

되었어요. 현재 부산 지검으로 나오더군요.

하여튼 이러한 분위기에 있으면서, 외부적으로는 우리의 인생이 선택한 전공이나 진로를

좁게 보는데, 우리가 다 알고 대학에 오는 게 아니지 않나요? 옛날에는 전자과에서 뭐 하는 데 인지도

모르고 갔습니다. 요즘은 어느 과에서 무엇을 하는지 예상하고 가는데, 그 때는 모르고 갔어요. 무기

재료라 해서 무기를 만드는 줄 알고 갔었어요. (청중 웃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한 일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때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던 일이 신앙 운동이었고, 내가 느꼈던 복음주의 운동 중 결핍이 있었습니다. ‘이게 다인가’

내가 경험하는 것이 왠지 현재에 못 미치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내가 이것저것 손대게 된

이유가 된 것 같습니다. 돈은 좀 없었지만 굶을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최소한

서바이벌을 해가면서 꾸준히 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힘들기 살았습니다. 특별한 느낌은

없습니다. 그런데 남들은 힘들게 살았다고 하니 부끄럽습니다.

재미를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남들이 해놓은 일보다는 백지에다 그리는 일을 추구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며 매번 그럴 수는 없기 때문에 예전에는 뭔가 시작해서 3년 정도 하면 내가 손을 때면

다른 이가 맡아서 하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예로 서울대에서 했던 기독인 연합은 시작을 해서

지금까지 오고 있습니다. 올해가 내년이 20주년입니다. 나는 원년 멤버고 어느새 복음주의 운동을 한

원로였습니다. 복음주의 잡지 같은 경우는 받을 사람이 없어서 문을 닫았고. 그렇게 쭉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호흡이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3년 하면 에너지를 쏟아서 성과를 보고

마무리를 해서 넘겨주고 그러고 쉬고 그랬는데, 개인으로 하고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가장

큰 자산은 서울대 기독교 연합 할 때 만났던 친구들인데. 이국운 교수님을 만났던 것도 그 맥락입니다.

이국운 교수님을 학창시절에 직접 만날 틈은 없었습니다. 사랑의 교회 사람들이 유독 나만 보면 네가

보면 좋아할 사람이 있다고 해서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누구이길래 하는 마음이 있었고요.

네스돈 교회와 서울에 꽤 규모가 있고 전통이 있는 교회 리더들이 기연 하면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큰 경험이었습니다. 나도 우리 마을에서는 잘난 사람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만나니까, 다른 공동체의 사람을 만나니까, 겸손해지며 배우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서로 존경하며 그렇게 일했습니다. 그 네트워크를 흔들지 않고 지금까지 올 수 있던 것. 물론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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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사람도 있고 취업한 사람도 있긴 있는데 복음주의 운동 자체에 투신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 외에

황병구 선생도 있었고 두루두루 있었습니다. 나는 말뚝박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왔다갔다 하며 도왔습니다. 나는 대학 1학 년 때부터 운동을 시작한 셈입니다.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잡지 할 때에는 구태여 해외 취재 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99년부터 2002년까지 신학 공부를 영국에서 했습니다. 국내 신학에서 공부하는 것은

너무 목회에 초점을 맞출 것 같아서 내 관심을 복음주의 운동에 그래서 영국에 관심을 가져서 3년

반동안 아주 재미있게 공부를 했고 거기서 학사와 석사까지 마쳤는데 체력이 딸렸고 3년 이상 한국을

비우면 돌아가는 감각을 유치하지 못할 것 같아서 박사 따고 오면 할 일이 교수직 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박사 학위를 받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내가 한 일들이 교수직으로 수렴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직 운동가로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음과 상황 편집장을 하다가

뉴스엔조이 통합시켜 1년간 일했다가 청어람아카데미를 운영중입니다.

다른 일들에 비에 상당히 롱 텀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도 나이를 점점 먹어가고 있고

영향력이라는 것이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서울대에서 기독인 연합을 만든

것이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잘 하든 못 하든 죽이 되는 밥이 되는 그냥 놔둬야 하는데 가끔

선배로서 개입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그 시행착오를 스스로 하는 것이 그 시대의 축적된

역량인데 자꾸 이전 세대가 와서 개입하면 곤란합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한국의 신앙운동을 할

때 선배나 어른들이 후배들을 빨리빨리 교정해주고 싶다. 그들이 잘 짚어내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들이 후배를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늘 후배를 선배보다 못한 존재로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좀 아쉽더라도 선배들이 좀 자제해야 합니다. ‘죽이 되는 밥이 되든 니들

일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최근 청어람에서 하는 것이 있습니다. 20대 이슈가 요즘 많이 나옵니다. 88만원 세대가

대표적인데, 최근에 나온 책을. 우석훈 박사가 88만원을 써서 분위기를 띄우긴 했지만 20대를 너무

불쌍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학기에 20대 토크 앙팡 떼리블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매주 20대 강사가 옵니다. 자기 책 한 권 정도 낸 학생들을 부른다. 한동대 공모전의 여왕 박신영도

한 예입니다. 스펙트럼을 넓게 해서 운동한 친구도 부르고 박신영 같은 친구도 부릅니다. 내가 사회도

보고, 그런데 몇 가지 공통적으로 흥미롭게 드러나는 것이 나옵니다. 대학 공부가 이들에게 별로 큰

영향을 준 것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활동이나 이들이 쓴 글이 대학의 커리큘럼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들입니다. 특별한 사람만 모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름의 성공한 이들이라

볼 수 있는 20대들에게 대학에서 배운게 뭐냐고 물었을 때 ‘없는 것 같다’라고 답합니다. 조금 아쉬운

일입니다. 이것을 대학의 실패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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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85

자기 또래 중에서 나름 두각을 나타내는 친구들에게 대학 교육이 실패했다는 진단이 나올 수

있지만. 또 뒤집어 보면 대학이 언제나 그런 공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거든요. 70, 80년대

대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에서 막 그랬다고 했지만 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자기들끼리 이것저것 그랬단

말이에요. 물론 대학이 깊게 공부하려면 대학이 중요합니다. 어설프게 공부하면 안되는 것이 있어요.

류대영 교수님 같은 분이 자기는 공부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는데. 학자를 하는 데에는 그 요구

조건이 있습니다. 역사학 분야에서 글을 쓴다고 해서 다 학자가 아닙니다. 오리지널 소스에서 자기

해석을 하고 읽어 내는 능력은 그냥 길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네는 제대로 된 제도권 교육

만이 아카데믹한 성과를 내주는 트레이닝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대학이 좋은 역할을

합니다. 모든 일이 대학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대학 시절을 당사자로 살아내는 것. 누가 와서

해결해주지 않고 내가 필요하면 책 찾아 읽고, 내가 필요하면 찾아가서 만나고 스스로 글 쓰고,

괴발세발 읽어가며 비판하고, 그러면서 문학도 나오는 거고 노래도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강의실에서 알려주지 않은 대학생활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에서 이런 것이 큽니다. 내가 강의실에서

만난 교수님들과의 만남에서 나오는 임팩트보다, 이런 것들이 훨씬 임팩트가 컸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지금의 대학 특별히 한동대의 상황을 볼 경우에는 교수님들이 학생들을 잘 살펴주는

것이 좋긴 한데, 이것이 과잉 보호가 되기 쉽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대학생들이 당사자로 살아가지

않고 대리인들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입니다. 성경도 다 해석해주고, 모르는 것도 다 풀어주고.

여러분이 자기주도적 학습 습관이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13학기 째 학생들이 글을 써서 내는 것을

보면 여러분 호흡이 짧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선호하는 문체가 있는데, 이것이

어디서 왔나 생각해보면, 그것이 공부하는 방식, 요점정리, 요약에 너무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자기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책을 읽어 낸 다음 지지고 볶고 하는 방식보다, 잘 요약정리 되어서 책을 읽어

보지 않고서 잘 요약 할 수 있는, 이런 소스들을 압도적으로 공급 받는 상황에서. 이러면 책을 못

읽습니다. 여러분이 갈수록 책을 못 읽는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그냥 교양으로 주던 책을 지금은 너무

못 읽습니다. 제대로 된 훈련들을 못 접했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대체로 그렇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누가 나서서 이걸 해결해주려고 하지 않는데, 한동대는 선배도 그렇고 교수도 그렇고

해결해 주려고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남들이 고통받는 것을 못 참는 것처럼 그 사람이 자기 고민이

영글기 전에 문제를 다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번에 누가 도와주기 전에는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외롭고 쓸쓸하고 그렇긴 합니다. 우린 요즘 당사자운동 하는 것에 사회적으로 눈을

뜬다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되면 여러분이 사회 진출할 때 갈등이나 모순이나

이런 것을 정면으로 맞받아 치기 힘들게 됩니다. 조금 더 냉정하게 상황을 스스로 헤쳐나가는 일들 그

다음에 어떤 상황에 대한 비판이나 토론에 낯설어 하거나 기에 눌리게 됩니다. 이러한 프로세스

자체에 인게이지 하기 전에 멈춰버리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돌아가서 보호 받을 환경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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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면 내가 전진이 되기 보다는, 확보한 거점 안에서 생활이 대충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서브 컬쳐, 하위 문화입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크리스천이 소수일 경우 그들이

원튼 원치 않든 사회의 주류 문화에 노출이 되서 이것을 받을 거냐 말거냐를 평생 씨름하며 살게

됩니다. 한국의 경우는 술 문제, 제사 문제, 회식 문화 등등, 여러가지 이것들에 부대끼면서 크리스천

라이프라는 것이 형성되기도 하며 표현되기도 합니다. 한국 사회에 기독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내가 경주에서 신앙 생활을 할 때는, 일반 문화와 마주치면서 내 신앙을 드러내야 했다면,

서울에 가니까 문화가 너무 잘 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거기서 태어나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죽는것 까지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 다 가능해 보였습니다. 경주에서는 기독교가 아닌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이 당연한 그래서 준비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면, 서울에 와보니까 밖에 나가지 않고

사는 것이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죽는 것 까지. 굳이 힘들게

외부와 대화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성취를 한 것 같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공간을 확보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무엇인가 속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안에서 나름의 언어를 쓰고

나름의 문화가 있고 그것을 잘 맞추어 가면 되는데. ‘이게 다인가?; 그래서 쉐퍼의 이야기를 한건데,

쉐퍼만 읽어도 충분한 세상이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비판도 하고, 대안도 되는 데, 그 서클 안에서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대학 때 이 안에서 하니님의 진리가 우리 안에서 통하면 저 밖에 나가서도

통해야 되는 거 아닌가 했다가, 들고 나갔다가 들입다 얻어 맞고 깨지고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80년대 서울대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8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대학이 있었습니다.

정문에 사복경찰들이 죽 들어서 있었다. 어떤 날은 교문에서 시위를 하기도 해서 교문에서 나와

가지고 대학교 친구들과 전철역을 내려가는데 진압복을 입고 있는 애가 날 부르더군요. 잘 보니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이 친구는 완전 군장하고 지나가는 걸 보고 반갑다고 이야기를 한 건데

뭐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몸조심해라, 그러면서 인사를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 때 서울대에서 소위

예수 대행진이라는 것을 했었습니다. 서울대 캠퍼스 굉장히 큽니다. 순환도로가 있고 그걸 하기

위해서 서울대 도서관하고 본관 사이에 아크로라고 하는, 계단이 있는 공간에서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다가 총학에서 집회 해야 한다고 해서 쫓겨났습니다. 쫙 밀려나고, 그날 아마 문익환 목사님이

와서 했던 것 같고, 쫓겨난 학생들은 순환도로에서 쫓겨나서 하는데, 그 때 학생 하나가 분신을 하고

투신 했습니다. 학교는 난리가 나고 학생들이 집회 하는데 현장에서 불 붙이고 뛰어 내렸으니까

학생들은 난리가 났고, 전혀 모르고 행진을 하고 있던 크리스천 학생들한테 그 상황이 전해지면서

패닉 상황이 되는 것이죠. 이게 뭔가. 이것은 저도 입학하기 1년전에 벌어진 상황이라 잘 모르는

것이지만.

이국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나중에 이야기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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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87

양희송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찬양하고 그걸 하는데, 우리 서클에서는 그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 안에서 진리면 밖에 내놔도 진리여야 맞는데. 광장에서 밀려나고 외곽을

도는데 이쪽에서는 전혀 다른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모든 사건에 바깥으로 괄호 쳐져서 맺혀진

존재들. 이 상황의 전개에는 아무런 연결 고리를 가지지 못하니. 그니까 우리끼리 자위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된 것입니다. 정신 승리나 마찬가지인 거죠.

우리가 한 것이 정신승리가 아닌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대가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이 서울대에 있던 크리스천들에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크리스천들에게

입증 책임이 있다고 느낀 것입니다. 이것이 뻥이 아니고 정신승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을 해봐라. 이

말은 우리가 캠퍼스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한다는 것이 실제로 한국 사회에 이런 정황 속에서

세상의 변화를 의미 있게 만들어 내고, 또 그것이 요구하는, 현실이 요구하는 대가를 크리스천들이

대가를 치르고. 아닌 사람들이 봐도 사람들이 진지하게 헌신하는구나. 그런데 니들은 왜 사소한

일에만 분노하고 대형 사건에서는 항상 바깥에 있고, 끝나고 나면 안에서 찬양하고. 87년도에는 나도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서울 시내에서는 항상 시위가 많았습니다. 나는 운동조직에는 없었는데,

나중에 중간 치고 기말을 치는데, 기말 시험 모두 보이콧이래요. 그 때 6월 항쟁이라 해서 심각

했거든요. 광장에 모이면 만 명 만 오천씩 모이던 시절입니다.

나갔다가 목요일마다 경배와 찬양 했는데요, 시위에 나가서 뒤에만 있다가 온 것인데, 그러고

나서 찬양 집회 시간이기 때문에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에 와서 뒤에 앉아 있는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이랬습니다. 앞에서는 ‘예수님 찬양, 할렐루야’ 이러고 있는데, 신앙고백으로는 나도 그것을 할

수 있는데 내가 서 있는 이 상황에서. 여기서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할 수 있으면 명동 앞에서도

할 수 있어야지. 전경들 대치하고 있는 그 앞에서도 통성기도 할 수 있어야지. 왜 우리는 언제나

현장에서부터 격리된 이 안에서만 나라와 민족 걱정하고 하나님 영광 드러내달라고 울부짖고 기쁘고

즐겁게 찬양하고 그러냐는 말이지요. 일관성을 확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진리면 저기서도 진리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심각한 일관성의 괴리-이것이 진리로

통용되는 하위문화, 서브컬쳐가 있고, 그 바깥에 나가지 않은 대가로 확보한 이 안전한 공간에서 우린

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내 마음을 힘들게 했습니다. 막 꿈도 꿨습니다. 네가

신앙의 일관성. 확보된 안정된 공간에서만 발휘되는 영성 말고, 그것이 아닌 곳에서도 니가 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강박적으로 오게 되는데요. 그 때는 민주화 운동이나 사회적인 압력으로 왔지만,

한국 사회가 민주화 되면서 상당히 이런 것이 풀어졌습니다. 그런데 지성의 문제로 넘어오면 여전히

서브컬쳐 공간 내에서도 서로 ‘지적으로 탁월하십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탁월한 거면 밖에서도

이 연구 성과로 충격 받고, 그쪽 동네 패러다임이 바뀌든지 효과가 나타나야 하는데 그런게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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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단순히 그들이 기독교가 낯설고, 안티 기독교라서가 아니라, 솔직히 들여봐도 학문적인

엄정함이라든지 성취의 수준이 높지 않고 그 빈 구석을 레토릭으로 채우는 것을 돌려가면서 감동

받고 있다면 이것은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끼리 정신 승리는 하지만, 세상을 바꿔

가는데 완전 잉여인 것입니다. 있으나 없으나 인 것입니다. 지성의 영역이 그렇고. 교회의 존재 양식도

점점 그렇게 되는 것 같고. 나는 이것이 다르지 않은 문제라고 봅니다. 이것이 시기에 따라 양상을

달리 하지만, 우리가 우리 신앙을 하위 문화의 범주 안으로 후퇴시키고 철수 시켜놓고 우리 끼리 되는

문법을 가동시켜 놓고 우리 끼리 선수들 풀어서 샥샥 하는 것으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 하는데, 그래서

진검 승부니 이런 이야기를 한게 그렇게 대단한 거면 한번 까놓고 여기저기 승부를 걸어 입증을

받아야 할텐데 그런 거 안하더군요. 그래서 상당히 비겁한 일이라고 보았고. 그것을 위해 준비된 우리

안의 사람이나 그런 인프라가 없더군요.

청어람 아카데미를 하며 그 작업을 해야 하는데, 내 관심이 있는 작업이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봐선 한국 개신교가 오래 못 버티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교가 갑자기 없어지고

그러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니는 영향력은 급감 할 수 있습니다. 통일교가 대규모 합동

결혼식을 하지만 신문에 안나옵니다. 아무 영향력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몇만이 모여서 대회를

치르고 선언을 해도, 한국 사회에 의미 있는 뉴스가치를 못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가

그렇게 될 가능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사이즈가 유지 되고 상암에 몇만씩 모여도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통일교와 다를 바 없는. 내부적으로 의미가 있지 우리가 살아가는 넓은 맥락의 사회

속에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답이 궁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성찰의 대상, 남을 자꾸 평가하고 이렇게 하는 우리의

익숙한 잣대인데 남들을 다 죄인이라고 보고,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보고. 그런데 이것이 잘 안

먹힙니다. 그렇다면 시선을 스스로에게 돌려서 ‘뭐가 문제지?’하고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하는 데 1차적으로 필요한 것이 자아성찰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고, 어떤 사람인지. 우린 뭘

했는지 돌아보며 평가하고 정리해보는 것. 여러분도 연말 연초에는 자기를 한번 평가해 보지 않나요?

그러한 과정을 통해 객관화 시켜 볼 수도 있고요. 1차적으로 한국 개신교가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게 되면 앞으로의 전망도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지성 운동의 필요가 아주

절대적입니다. 지성으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고. 정서적으로 돌아보는 대표적 케이스는 내적

치유의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자기 연민으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사람 치고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상처가 있어도 치유하고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상처가 모두 치유되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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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89

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들여다 보고 자기연민에 빠져들지 말고

지적성찰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철학이 운수보고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를 이해하는 것과

남을 이해하는 것을 여러 각도로 보는 것이 아닌가요?

자기성찰이 이루어져야만 그래야 그걸 바탕으로 전진을 할 수 있는데, 우리 안에 그게 너무

없습니다. 그리고 압도적으로 그걸 감싸고 있는 하위 문화의 언어나 관행들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성찰을 쉽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솔루션들이 그리고 나와있습니다. 이걸 하면 한방에

해결된다는 등등. 우리 안에는 늘 죄책감이 있지 않나요? 구태여 모든 상처를 해결해야 하나요?

죄책감도 그렇습니다. 구원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죄책감 없이 살아야 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데, 얼마 전에 IVF북서부 지구인가 강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더군요.

서강대 강영안 교수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13시간 이야기를

했습니다. 책으로서 내년쯤 나오면 좋겠는데, 이 13시간 대화 중 강교수가 한번 울었습니다. 울었는데

뭣 때문에 울었냐 하면, 산다는 것 질병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산다는 것은

선물이다. Gift다. 하면서 우시더군요. 철학자는 이상한 부분에서 운다더니. (청중 웃음) 우리가 고기와

채소를 먹지 않습니까. 우리가 산다는 것이 다른 생명의 죽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당연히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먹고 살기 위해 닭이나 소 잡아본 적 있는가요? 나도

키운 적이 있습니다. 병아리 이런 거 나중에 크면 잡아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치킨을 즐기지만

그짓은 못하지 않습니까. 하기는 하지만 그 경험은 참 다른 종류의 경험입니다. 내가 이 짓을

해가지고 치킨을 먹는구나. 이것을 우리는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고 연결을 하지 않습니다. Vegetarian

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체질의 문제보다는 정치적인 입장의 표명인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것을, 나는 못하겠다. 그런데 그런다고 해결되나요? 채소는 생명 아닌가요? 우리의 존재를 위해

수많은 생명의 죽음들이 전제가 되는 상황. 산다는 것 생명은 선물이라고 하면서 철학자가 울더군요.

비디오로 다 찍어 놨는데 (청중 웃음)

모든 것의 죄책감을 털고 사는 것이 능사인가요? 이 경우에는 오히려 적절하게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갈 때에라야 창조 생명에 대한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책임의식을 상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나 사회 속에서나 상기 시켜야 할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삭삭 지우고

빨리 빨리 잊고 모든 상황에서 깨끗한 존재인 것처럼 하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한테 주고 싶어 하는

구원인가요? 이런 퀘스천이 붙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들과 더불어 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죄를 상기 시키고,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일깨우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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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훈련받고 공부하고 있는 환경들이 저는 그 지점까지 학생들을 끌어내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복음 이해가 저급하면, 우리가 살아 낼 수 있는 삶도 유치합니다. 우리가 삶을

진지하게 제대로 살려 하면 복음이해가 깊어져야 하고, 그리고 우리가 그냥 듣고 그런 줄 알아왔던

것들을 되짚어 보고, 남들이 질문 하지 않는 것을 물어 보고, 전혀 우리가 기대치 못한 다른 답들을

찾아 보고, 물론 대학 교육이 모두 제공해 주지는 않지만. 어쩌면 제도권 교육이 안되는 것이. 나는

강좌를 통해 해결하려 합니다. 해결해 줄 사람을 찾아 내고, 들을 사람을 모아내고. 결과가 나오면

책으로도 내고, 영화로도 내고, 그림이 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도 받은 것 들은 것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데 대학 시절에는 우리가 더

깊게 그것을 현실 앞에서 준비하고 나아가야 할 것이라면, 좀 더 과감해야 할 필요가 있고. 실험 공간.

실수해도 괜찮고 오류를 저질러도 보호 받을 수 있는 장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사자 운동으로 우리의 시간을 살아내기 위해서 확보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까 뭐 교수님들이 떠날거냐 남을거냐 그런 말씀을 했는데, 한편으로는 다양한 이야기를

솔직히 해소 좋았지만. 이게 어딘가로 떠난다고 해결된다고 해결 될 문제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느끼는 불만을 다른데 가면 해소할 것 같지만, 거기 가면 거기에도 불만은 있을 것입니다. 어디에도

유토피아가 없다면, 냉정하게 내가 서있는 지금에서 셀프 서포트하고 서바이벌하는, 나 스스로가

찾아내고 살아내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읽어야 될 책과 들어야 할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시험문제

족보 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대학이면 밑바닥에 흘러다니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고민하는 애들은 어딘가에

음침하게 모여서 돌려가며 읽고, 그러면서 그 안에서 뭔가 이렇게, 우리는 남들이 모르는 뭔가를

고민하고 있고 남들보다는 진일보한 답을 하고 있다는 그런 공간을 확보해 보는 것. 약간 미친 짓을

좀 해야 문학도 되고 예술도 되는데 다들 좀 착한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매 학기에

서평과 에세이를 받는데. 가끔 가다가 깨는 글들을 쓰는 친구들이 있더군요. 물론 요즘에는 빈도수가

떨어져서 재미가 없던데, 어떤 해에는 상당히 깨는 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냥 점수를 잘

줍니다. 자기생각 하는 것. 주어진 문제를 논술 연습 열심히 해서 탁탁탁 맞춰가지고 점수 받도록

쓰는 그런 스타일 말고, 좀 거칠게 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고민이라고 생각한다고 이렇게 자기

생각을 막 풀어가면서 써 내려가는, 물론 정리가 안되면 그냥 거칠게 되는 경우도 있고. 물론 책

읽어가며 꼼꼼하게 한 학생들은 내공이 보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다 죽은 건

아니구나. 이런 것들이 보존되고 이어지며 좋겠습니다. 두서없이 이야기를 했는데, 질문을 좀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 이야기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다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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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 공동체에서 학문과 신앙 운동의 회고와 전망 191

학생 1 지성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것 참 좋았습니다. 나는 포항에 살면서 동네

친구들을 좀 알게 되었는데, 중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집 배달을 나가는 친구나 체육을 전공한 그런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참 놀랐었던 것이. 이들 중 4년제 대학 가는 사람들 비율이 낮은

것입니다. 누구나 대학에 간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를 이루고 있는

이런 이들에게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하는 가 고민을 더 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양희송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청어람에서 20대 강사들에서 쭉 진행하면서 보니까 요즘

20대 관련 책들이 많이 나오고 내부 담론들이 잘 정돈이 되었습니다. 추천할만한 것으로는 엄기호씨가

쓴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가 있습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굉장히 처절합니다. 덕성여대와

연세대 원주 캠퍼스 학생들과 이야기하며 나누었던. 이들만이 지니고 있던 쓰라림. 그런 면에서 보면

김예슬 선언 같은 경우에는 고려대 프리미엄을 최대로 활용한, 그런 것으로, 그쪽 동네에서는 와~

하고 반응 했을지 모르지만, 엄기호씨가 정작 김예슬 선언을 덕성여대와 원주에서 이야기를 했을 때는

다들 피식피식 했다고 합니다. 누가 주목이나 하겠느냐. 처지가 다르다. 다들 풀어가는 지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내가 흥미롭게 봤던 것이, 지금 대학생, 또 한동대는 기숙사가 있어서 상황이 좀 다르지만.

서울 같은 경우에는 학생들이 주거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높습니다. 그러다보니 학생이거나 사회

생활 하는 분들이 서울 안에서 서바이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거에 대한 대안으로 나오는 것이 소위

빈집 운동입니다. 옛날 같으면 하숙집 같은 개념인데. 여기는 공동으로 돈을 내가지고 단기간

들락날락 하기가 자유로운, 어쩌면 노숙자 그것과 같은 것인데. 이것이 뭐냐 하면, 젊은 20대들이

우리나라 부동산 자체가 확보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면 굉장히

불안정해집니다. 만화방에 자는 이, 찜질방에서 자는 이, 이게 20대들이나 30대가 사회적으로 힘을 못

쓰는 대는 이들이 스스로 떠받칠 공간을 잃어버렸다는 것. 그래서 빈집프로젝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남산에서도 그렇고 중대 앞에서도 그렇고 그래서 빈집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흔히

선교 단체 미션 홈이나 공동으로 하숙집 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는데, 그래도 거기는 비용이 꽤

들어가는데 이 공간들은 그보다 훨씬 더 오픈 되어 있는 공간이고. 긴급하게나마 신세를 질 수 있는

공간인데, 또 하나는 20대 운동하는 사람들이 대체로는 가족들의 서포트를 못 받고 있거나 불화

상태가 많았습니다. 가족이 옛날에는 가족이 경제적, 주거 공관가 경제적 서포트를 해결해 주는 것이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경제적으로 어려워 지니까 가족이 주거공간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고, 학자금의 문제도 부모님이 해결 못해주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면 1차적으로 가족이

감당해주었던 역할들이 확보가 안되니까 20대가 스스로 서바이벌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가족보다 친구가 더 중요해집니다. 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과 같이

살아갈 친구를 찾는 것이, 과거에 가족이 모든 것을 서포트 했던 것을 대체해 나가는. 이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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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하게 풀어보자 하는 생각에서 20대 운동하는 사람들이 빈집프로젝트를 하는 이유입니다.

이미 대학이나 이런 공간 자체가 특권화 되어 있다기 보기에는 상당히 취약해져 있는데,

사회에 바로 진출 했거나 바로 노출된 사람들 역시도 주거 공간을 어떻게 서포트 해야 할 것인가.

역시 대안을 찾아야 하는데 이것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기독교나 교회 공동체에서

이들이 낯선 문제는 아닙니다. 공동체 문제에 대한 것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것을 좀 세게 한

것입니다. 공동체 하려면 새벽기도를 해야 한다거나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게, 다른 쪽의 아이디어를 가져와야 참신한 시도가 될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이국운 잠깐 덧붙이자면, 예수대행진 그 당시 나도 있었습니다. 1986년 5월 20일 수요일.

결코 잊지 못할 날입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같이 기도회 하고, ‘크신 주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문익환 목사님 강연이 예정되어 있어서, 우리 동료 학우들이 꽹가리를 하고 있을 때 앞에서

통성기도를 시켜서 시키니까 했습니다. 그런데 하는 중에 발로 채여서 쫓겨났습니다. 서울대학교 가본

사람들은 아크로폴리스라는 광장을 알텐데, 바로 앞에 대학 본부가 있습니다. 대학 본관 1층이 우리

처럼 구멍이 뻥 뚫려 있습니다. 그때 내가 기도할 때 눈 들면 안되는데, 차길래 눈을 떠서 봤더니

지금 검사하는 내 친구가 난 줄 모르고 발로 찼습니다. 그렇게 쫓겨나서 뒤쪽에서는 운동 가요를

부르고, 한국 사회가 지금 어떤 상황인가 그런 것이 벌어지는 중에서 서울대학교 잔디밭에서 우리가

쭉 앉았습니다. 그 와중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 했던 이만식 선교사가 설교를 했습니다. 귀에 잘 들어

오지는 않았는데, 설교의 내용은 여호수아가 성을 돈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도 성을 돌자. 학생들

대부분이 아크로폴리스에 모여 있고 아무도 없는 캠퍼스를 도는 데 나는 조금 따라가다가 빠졌습니다.

아크로 폴리스에 돌아왔는데, 문익환 목사님이 막 강연을 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그 대열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전투 경찰들이 엄청난 숫자가 와서 불과 5분 안에 아크로 폴리스를

둘러 쌌습니다. 아직도 그때 문익환 목사님을 기억합니다. ‘전경들도 들어!’라고.

서울대 중앙도서관이 엄청 큽니다. 전경들이 많으니까 거기서 공부하던 친구들이 다 짐싸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전경들이 앞에도 학생 뒤에도 학생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학생회관 한

쪽에서 학생 한 명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그 때 사람 타는 냄새를 처음 맡았습니다. 불덩이

하나가 이렇게 이렇게 하다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일. 아주 충격적인 일이었고 내 개인적인 글에 조금

썼습니다. 잘 찾으면 어디선가 찾을 수 있을거에요.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에 오신 것이

아니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세상이

어떤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서브컬쳐라고 말하셨는데, 내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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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신앙 이야기 할 때부터 그랬습니다. 자꾸 원론.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생각 보다는 자기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더 radical 하시고 행동하신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양선생이 하신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끼리는 행복합니다. 아무도 없는 캠퍼스 저 뒤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서 이렇게 돌다가 소리지르면 여리고 성이 무너질거야 라는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 날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게토 속에서

우리끼리 무슨 소리를 해도 예수님이 품으시려는 세상과는 좀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적어도 이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관점에서는 이야기를 조금 양선생이 이야기 한

것과 관련 시키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부딪히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서 깊이 분석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원론에서 그냥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게

기독교 대학인가 아닌가, 이건 굉장히 낯간지러운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책임져야 할, 여러분 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은 자기 죄만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를

대표하는데, 우리에 의해서 대표되는 누군가가 있는 데 그게 바로 세상입니다. 그 세상에 대해서

세상을 사랑하란 말이 아니고, 그 세상의 상황이 어떤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측면에 있어서는 한동대가 시골에 있는게 여러분의 삶을 구성하는 아주 근본적이고

실재적인 문제로부터 좀 떼어 놓는 측면이 있습니다. 좋다는 것은 더 근본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준다는 거에 있는데, 제대로 못하는게 문제지요. 불리하다는 것은, 여러분 삶이 좀 덜 치열해요.

덜 낭만적이고 덜 치열해요. 매사 세상을 생각할 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생각은, 억압 하는

사람들 쪽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억압 받는 사람들 쪽에서 흔히 4종 세트라고 하지 않나요?

‘고아와 과부’. 가난한자, 억압받는자, 병든자, 이방인’ 내가 한 말이 아니고 성경에서 한 말 있지

않습니까.

나는 여러 번 이야기 하지만, 돌아가신 제정구 선생을 좋아 합니다. 이분은 당시 운동한다는

사람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이 때 대게 운동하는 사람들은 막스주의자 아닌가 이들은 둘로

나뉘는 데, 한쪽은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파, 즉 레닌 파, 그런데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면

영국이나 이런데서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지 않나? 그렇다면 진짜 형멱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결국 그때그때 달라지는 것다, 당시 상황을 보면 결국 농민이 중심이다라고. 그래서 농업을 중시하는

쪽을 마오쩌동 파라고 합니다. 알지는 모르겠는데 서경석 목사님. 1970년대 말에 우리 기독교

학생운동의 리더였습니다. 70년대 말에 고생하시다가 80년대가 되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유학하기 전까지 본인이 기독교 마오주의자였고 합니다. 여기에 제정구 선생님이. ‘다 틀렸다’고

하셨습니다. 제정구 선생은 카돌릭이었고 정치가나 운동가였기 보다는 본인 스스로를 참 도를 찾아서

구도했던 사람으로 기억해주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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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주의자들과 레닌주의자들이 싸우는 것은 다 틀렸다. 진짜 핵심은 그들 모두가

가난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와 농민을 모두 도시 빈민이라 하여 한국 민주화를 이끄는 주역이라

말했습니다. 이들은 실제로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시위 현장에 가보면 있어요. 그리고

가장 절실한, 그리고 가장 조직화된 이해관계 없이. 그리고 가장 몸의 느낌에 충실하게. 제정구 선생이

일찍 돌아가셨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선지자라고까지 생각합니다. 이 양반이 살아

계셨다면 대통령이 되셨을텐데. 아무튼 도시 빈민 이야기가 아니고. 4종 세트 ‘과부 고아 가난한자

눌린자’의 초점을 가지고 여러분이 개입해 들어가야 할 세상을 살펴보고, 그것과 관련해서 지금 나는

어디있나. 지금 우리는 어디 있는가.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는 것이

우리 선배들이 해 온 것이고, 기독교 전통 안에 살아 내려온 흐름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싶고요.

내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는. 나한테 배우는 여러분들이 과부 고아는 아니지만

눌린자거나 가난한 자는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졸업을 해도 취직이 잘 안되고 되도 대게

비정규직이 되고 그래서요. 나야 뭐 공부하는 사람이니 어떻게 풀어야 하니 수삼년 전부터 나에게

영감을 많이 주시는 예일 로스쿨의 브루셀 코멘 교수님에게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7, 8년

전에 책을 써서 영감을 준 적이 있습니다. Stake Holder Society. 내용은 간단합니다. 미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졸업할 경우, 사회 준비금 8만불씩 무조건 주자. 우리 나라에서는 이것이 사회적

지분이라는 용어로 번역이 되어서 좀 알만한 사람들에게 상당히 동의를 얻고 있습니다. 논리는

이것입니다. 고등학교까지 했으면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본을 마친 거 아닌가. 그 이후에 대학을

가든 안가든 간에 20대 초부터 30대까지 뭔가를 준비는 해야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나.

자기는 하고 싶어하지만 돈이 없어, 뭔가 자기 능력을 개발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어.

그렇다면 이 사람이 미국인이라면 적어도 기회는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 사람이

라스베가스에서 다 날렸다. 그리고 불평하면 ‘8만불이나 줬는데 니가 날렸잖아’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지도 않는다면 미국이라는 사회가 과연 공정한가.

우리가 한 달란트 두 달란트 이야기 많이 합니다. 예수님께서 남겨간 비유 중에, 안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본적인 기회의 평등 보장하려면 8만불씩 주자. 같이 책 쓰신 세법 교수님

계산에 따르면, 국가가 보조를 해서 8만불씩 60년을 하면, 이 사람이 죽을 때 자기가 남겨놓은 재산의

40퍼센트를 이 기금의 유산으로 냅니다. 이 계산에 의하면 미국 정부가 60년 동안만 보조를 하면

죽는 사람들이 내는 돈이 돌아오기 때문에 이게 자동으로 돌아옵니다. 말하자면 전체가 계를 하는

것입니다. 계를 타는 사람은 누구죠? 19 20살 되는 학생들입니다. 이 학생들이 자기 인생을 엄마

아빠한테 기대지 않고, 사회 전체가 모아준 돈이니까 이걸 가지고 어떻게 시작은 해보겠다. 상당히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이거 못합니다. 미국은 여러가지 문제가 많이 있는데, 아무튼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 사람들은 아싸리 하기 때문에, 다음 선거나 다다음에 좋은

후보가 잘만 하면 정치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고, 어떻게 보면 계층간의 불평등도 상당히 완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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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감도 완화하고, 세대 간에 부의 불균형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해볼만한 이야기입니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 한동대학교 이렇게만 사고하면 여러분들은 고만한 인간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좀 더 크게. 여러분들은 남미 어딘가에서 오는 커피를 먹고, 중국에서 오는 신발을 신고,

맨유를 응원하지 않습니까. 그럼 그 스케일로 문제를 보고 문제를 풀어보는건 어떨까요. 교수들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들 같으면 맘 먹기 따라서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우석훈 식으로 표현하면 진을

짜라. 여러분들이 스파크만 일어나면 뭔가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학생 2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저 같은 경우에는 군종병으로 일하다가 교회에서 선언을

했습니다. 제가 수요 예배도 맡고 설교도 하고 그랬는데 내가 예수님이 더 이상 신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하고. 교회 활동은 알아서 해라 하고.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고 나왔는데. 교회가 거기

서 있는 자리에서 뭘 해보자 이러셨는데 그 틀 자체를 벗어나서 하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이

들거든요. 교회 틀에서 항상 말하는 것은 야 OO아 너의 믿음이 부족하다 너 지금 사탄에게 속고

있다. 예수님이 당연히 신이지. 내일부터 새벽 기도에 나와라 그런 해답을 주셨는데 제 틀 안이

잘못된건지 제가 불행해서 그런 틀 안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는지. 제 개인적으로는 내가 개신교인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나온 것이 굉장히 의미 있었는데. 저는 예수님이 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까

말씀 했듯이 예수님 찬양이라는 노래를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경우가 있는데. 저와 같은 친구들이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기독교 문화에서 자라 왔는데 개신교 자체를 부정하고 나오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이 벌이는 기독교 문화 운동은 없는지.

양희송 1차적으로 제가 종종 하는 이야기인데, 여러분이 만약에 대형 서점에 가서 인문

사회학 신간 서점을 살펴보면 무신론에 관한 책들이 참 많습니다. 과학 쪽에서는 생물학, 도킨스부터

시작해서 심리학까지 책이 많고. 무신론에 대한 책들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분야의 A급

학자들이 책을 씁니다. 한 5년 10년 전에 여러분이 나가서 전도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이 무신론자라고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은 신에 대해 별로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답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경우에 대화의 주도권을 크리스천이 쥐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누구를 만나는데 무신론자일 경우, 이 사람은 이론적으로 중무장 된

무신론자일 확률이 높습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정도라도 읽어 보면 고전적 신 존재 증명 이런

것을 다 꿰두었습니다. 도킨스 책을 읽어 본 사람은 이것을 다 꿰서 나타나니까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들어본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소위 말해서 변증이라든지 한국

교회가 별 필요를 못 느꼈습니다. 그 동안 이리저리 전도폭발이니 서양 기독교의 트렌드를 이리저리

도입해서 하면 먹혔습니다. 고속 터미널, 국립 묘지에서 나도 했었습니다. 지금도 되는 경우는 있지만,

사회적으로 대화권이나 이런 것도 그렇고 추가 확 기울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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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 책을 김영사에서 냈습니다. 강연회를 여는데 도킨스는 못 부르고 그걸 서울대 장대익

교수가 소화해 주었습니다. 최재천 교수의 제자이며 다니엘 대닛에게 배우기도 한 최고의 학자입니다.

장대익 교수가 가서 도킨스 책을 가지고 김영사에 출판 강의를 했습니다. 끝나고 나니까 몇몇이 와서

한국에서 무신론자 클럽을 만들려 한다 당신이 깃발을 들어 달라 이랬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무신론자

버스 광고도 하고 국내에서도 아인슈타인의 발언 이런 거 붙였다가 그만 뒀지만. 무신론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론적으로 정교하고 정합성 있는 방향으로 나오고 있고, 기독교 쪽에서

이에 대응적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무신론에 훨씬 호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할거냐. 현재로써는 변증이라는 측면에서는 이런 이탈을 막을 방도는

마땅치 않습니다. 거기다 플러스 알파 한국 개신교가 윤리적 사회적으로 점수를 계속 깎아 먹기

때문에 이탈률이 높아지고 있고, 우리나라 종교 센서스 10년마다 하는데 지난 번 2005년 조사가

아프간 사태 전이고, 이명박 대통령 당선도 되기 전이고, 봉은사 이것도 일어나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그 때 개신교가 이미 마이너스로 꺾입니다. 95년에서 2005년 사이에 불교는 현상유지 개신교가 -1.

얼마로 꺾이고 카톨릭은 74프로가 늘어납니다. 아마 앞으로는 통계적으로 보더라도 개신교와 카톨릭이

뒤바뀔 확률이 큽니다. 개신교 신앙에서는 이탈률이 좀 더 커지고, 변증이라든지 붙잡는 힘들은

약하고, 윤리적으로 좋아 보이지도 않고, 사회적으로 매력들이 점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생하는 문제가 일차적으로는,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못나가겠다. 이런

케이스들입니다. 교회는 싫지만 예수는 좋다. 우리는 이걸 ‘가나안 성도’라고 하는데. 거꾸로 하면

‘안나가’지요. 우리는 이걸 중요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12월 22일인가 월요일에 홍대 앞에서 교회

2.0이라고 프레젠테이션 파티가 있는데, 그 때 가나안 현상을 발표 하기로 되어 있는데요. 저는 이

현상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나는 예수를 믿기 위해 교회를 버렸다’

이런 선언까지 있었습니다. 이러한 게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걸 풀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교회가 이 상황을 쓰라리게 받기 전에는 해소가 안될 것입니다. 이걸 사탄의 꼬임을

받았느니 이런 식으로 접근할 경우에는 해결이 안될 것입니다. 이래선 가나안 현상은 사라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왕년의 막시스트들이 갑자기 기독교를 옹호하고 나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장 최근의 책은 테리 이글턴이라는 영국의 영문학자가 갑자기 책을 냈습니다. 이 사람이

갑자기 도킨스를 비판합니다. 청어람에서 제작년에 했던, ‘알랭 바디유’라는 프랑스 마오 주의자의

‘사도 바울’이란 책이 있는데 부제가 이렇습니다. ‘다원주의 시대에 보편적 윤리의 가능성이 있는가,

이걸 제일 잘 보여주는 것이 사도 바울이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막시스트고 마오주의자의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인데, 사도 바울을 통해서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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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사회주의를 재구성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지 아감벨’이라는 이탈리아 학자 역시

막시스트인데, 여기는 로마서 1장 1절을 가지고 책을 썼습니다. ‘남겨진 시간’이라고 발터 벤야민

논의를 끌어들이고 메시아적 시각을 끌여들여 글을 썼었고, ‘슬라보예 지잭’은 몇 권의 책이 있는데,

그 중 기억이 나는 것인데. 이제 막시스트들은 그리스도인들과 연계해서 바리케이트에서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라고 쓴 책을 냈습니다.

굉장히 이상한 현상입니다. 고전적으로는 아까 봤던 막스가 종교비판을 할 때 사실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었고, 그런 방식을 통해서 소위 말한 허위의식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종교 비판을 내세웠고, 실제로 사회 전반에 흘러왔던 전통인데, 최근 들어 막시스트 전통의 대표적

이론가들이 갑자기 기독교 친화적으로 뭐 바울이 이 시대의 대안처럼 로마서 1장 1절가지고 풀어쓰고

막시스트와 크리스천들이 연대에서 자본주의와 싸워야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건 도대체 무슨

현상인가. 그런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 그런 건 아닌데 말입니다.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자신들의 막시스트 지향 하에서 기독교를 재평가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뭐가 되었건 저는 내부적인 동력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현상 자체는

상당히 흥미로운 현상이고, 그리고 그런 책들이 국내에 막 번역이 됩니다. 그런데 번역이 좋지

않습니다. 번역자들이 예수를 모르니까. 그리고 국내 막시스트들이 이를 잘 못 읽습니다. 성경 구절

하나 가지고 왜 이렇게 읽는지 이해를 못합니다. 성경이라는 텍스트 자체가 입에 설고 눈에 잘

안잡히고 그래서 그런 것 같습니다. 출판을 하니까 중요한지는 알겠는데, 정작 소화는 못하겠고,

우리는 곁다리로 있긴 있지만 오히려 우리가 읽게 됨으로써 얻게 된 유익이 조금 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기독교로는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안 믿는 자들이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혁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생물학이나 이런 자연과학 하는 쪽에서의 강력한 무신론적 현상과 막시스트 진영에서

유난스럽게 보이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호감. 그 사이에서의 가나안 성도. 우리는 이 메시지를 비중을

크게 두고 보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나는 전체적으로 제도권 교회가 지닌 문제가 쉽게 풀릴

것이라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대세가 틀이 잡히기 전까지는 사고 칠 사람은 사고 치고, 문제가 터질

것은 계속 터질 것입니다. 오히려 개신교의 자장에서 자유롭게 나와 있는 가나안 그룹들이. 물론

이들이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이들이 옹호될 필요도 있으리라 봅니다.

강교수와의 대화에서 내가 첫번째 물었던 것이 ‘기독교는 개인에서 시작하나 공동에서

시작하나’ 물었더니 곰곰이 생각해보시더니 개인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공동체가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 특별히 개신교 전통은 개인에게 너는 이것을 왜 믿냐 하는 이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고 있고, 또 그것을 대답해 나가는 가톨릭은 모르겠지만 개신교 전통에서는 얄짤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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꽂히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한국의 개신교가 신자 개개인이 이런 질문을 받을 준비를 못시켰고

이런 질문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가나안 성도로 튕겨 나간 것인데. 나는 오히려 이 부분이 개신교인

개개인에게 던져 졌던 물음. ‘너는 무엇을 왜 믿니’라는 질문 앞에 힘들지만 전격적으로 노출이 될 수

있는 장이 된 것 같습니다. 그 지점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나간다면 나는 왜 믿지?라는 질문, 그리고

과학의 비판이나 난데없는 막시스트 진영에서 새롭게 영향력과 호감을 가지게 한 기독교를 이야기

해주는 것들을 읽어 나가며 새롭게 그리는 그림이 있지 않을까. 나는 굉장히 새로운 언어로 우리

신앙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봅니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언어들은 서브컬처, 그 안에 있습니다. 은혜

받았다는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게 그 맥락만 떠나면 도무지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를 파악하기 힘든,

그런 어떤 전문 용어들 굉장히 많아요. 피차에 규정할 수 없는, 느낌만 남는, 정의는 없는 그런

용어들이 있는데요. 울타리 바깥에서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지 못한 채 울타리 바깥에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내부에서는 어차피 새로운 언어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언어가 없어서 튀어 나간

사람들이 이쪽 저쪽 튀어 나가며 발견하는 것처럼, 이 지점. 이것이 가능하냐가 중요한 것 같고. 이를

위한 문학이나 막시스트 이론 등 모든 소스가 열려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나는 한국의 제도권 교회가

이러한 작업을 수행할 역량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거긴 필요를 못 느끼니까. 이 지점의 이 작업을

나는 서포트 하고. 인식하게 하고 언어를 여기저기서 끌고 와서 한번 해보고, 이종 격투기라는 게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일단 배우는 자세로 해 가야 하는 것이고, 흔히 해오던 것처럼

희망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나를 복음주의자라고 하는데, 이국운 교수님은 별로 안좋아

하는데요, 그래서 나는 스스로 Evangelism in the making이라고 합니다. 완성 되지는 않았으나

스스로가 끊임없이 변화되어 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언어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 지점에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학생 3 다시 20대 현재 상황에 돌아가서 저희 세대 말고 다른 윗 세대 분들이 저희 세대를

보고 말하는 것을 이렇게 보는데, ‘386’혹은 자신들의 대학 모습과 너무 달라진 전혀 사회도 관심 없고

책도 읽지 않고, 그래서 우석훈 같은 경우에는 돌을 들어라. 진을 짜라. 이런 접근을 한다던지, 책을

읽어, 치열하게 살어, 이런 접근을 한다든지, 그러면 다른 그림. 저는 이 두가지 다 불편하게 느낍니다.

저는 제가 치열하게 못 사나 이렇게 생각이 드는게, 제가 커오던 생각이 드는게, 우리 세대가 IMF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부모님이 고생하는 것을 보아서, 저렇게 힘들지 않으려면 우리

안에 스펙을 쌓아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았고,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왜 이렇게 치열하게 못

살아, 이런 것이, 뒤가 없는 상황에서 그냥 윗 세대가 바라 보는 것이 아니었는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당시 대학만 나오면, 입사 지원서만 있으면 들어가는 상황에서 우리와 비교하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불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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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접근은 그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함으로써 그것을 스펙으로 쌓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까 앙팡떼리블 하셨는데, 하나의 책 하나의 저자라는게 과연 20대를 대변하는가 의문이 들고. 고로

두 가지 다 20대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됩니다. 너무 젊은 세대 왜 이

세대에 문제가 있는가 하고 바라보지 않는가. 자본주의 틀 이 전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젊은 세대에 한정하지 말고 이 구조를 바꿔보자 이렇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국운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젊은 세대에게 돈을 주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방안이 아닐까요. 그 전체의 구조

지금보다는 한 차원 나간 지금보다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에 대한 답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양희송 정확한 지적이고 최근에 나온 책들이 사실 방금 언급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정도의 세대론이 존재합니다. 한국 사회에 한 50대 정도 50대 60대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을 볼 때 하는 말이 ‘눈 높이를 낮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경제적 세대론입니다.

눈높이를 낮추든지 아니면 자기 개발을 굉장히 잘해서 스펙을 쌓아서, 네가 네 몸값을 높이면 다

데려가고 싶어하지, 이런 방식의 논리입니다. 50대 60대가 20대를 바라볼 때 이런 세대 담론이고.

소위 386세대 즉 40대들이 20대를 바라보는 것이, 20대가 정치에 무관심해서 나라가 이 모양이다.

이건 정치적 세대론이죠. 우석훈 박사가 여기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결국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는 이 이야기가, 20대가 한편으로는 20대를 위한 처방이지만, 처방을 다 해주는 측면에서

당사자주의에서 벗어난다는 점. 그리고 철저하게 분석은 해줬지만 동력을 제시해 주진 못한 점.

그리고 우석훈 박사가 두번째 책을 썼는데 혁명을 일으켜 조용히라는 책. 이걸 읽으며 약간 불편

했던게, 88만원 세대에서는 우석훈 박사가 20대를 묘사할 때 조심스러운데, 두번째 책은 굉장히

거리낌 없이 20대들은 쫄아있고, 협력이 안된다고 상당히 단정적으로 표현을 합니다. 20대는 성장하며

경험이 없기 때문에 협력이 안된다. 그러니 진을 짜라. 이런 말이었습니다. 안되는 것을 되게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또 잊을 수 없는 것이, 20대들이 자기 세대에 대해 호감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유일하게 서로 호감을 가지는 곳이 강남 대형교회 청년들 뿐이라고요.

아까 말한 유명 20대들이 20대를 대표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세대 대표성에는

그렇게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20대는 손에 쥐어지지 않는 파편화된 상태로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를

했지만, 공통 교양이라고 여겨지고 말 할 수 있는 책이 너무 적습니다. 기껏 뭔가 소통하기 위해 예를

들거나 뭐 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만화, 광고 이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게임. 뭐 순순히 응하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웃는 사람 있고 못 웃는 사람이 있잖지

않습니까?

이국운 난 모르는 데 웃어요. (청중 웃음)

양희송 나도 게임은 안하는데 트위터에 보니 있어서 그렇더군요. 그러니까, 이제 던졌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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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가 다 반응하는 건 없습니다. 드라마 가지고 하면 그거에 반응해서 알아듣고 하는 그룹이 있고.

에반게리온 대사 말하면 알아 듣고. 수퍼스타 K에서 어쩌고 저쩌고 했을 때 그걸로 대화되는 경우가

있고 그게 전통적으로는 20대의 약점이라고 봤습니다. 집단적으로 모아서 성과를 하는 것 그런 것에

20대가 전혀 익숙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이걸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쪽이

봤을 때 저쪽이 하는 짓은 이상합니다. 나는 게임을 안해봐서 그 세계를 잘 모르는데, 스타 덕후들은

막 하지 않습니까. 그게 아직은 어떻게 다루는 것이 잘 하는지에 대해서는 딱히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강의 나오는 친구 중 한윤형이라는 친구가. 조선일보 논술 대회 우승한 후 수상

거부한 친구. 서울대 들어간 친구가 이야기 하는데. 취향이 점점 분산되고 파편화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문제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섞을 수 있도록 하는 서사가 필요한 것이다.

서사를 통해 각자가 경험한 것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지점이 다른데, 386 들이 주로 생각하는 서사는

역사를 가지고 풀었는데 지금의 20대에게는 작동이 되지 않죠. 그럼 20대들을 위한 서사는 어디서

끌어 올 것인 것인가 문제가 있습니다.

20대들이 반응하는 서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조국과 민족, 통일 이런 것으로

가기는 어렵습니다. 다 각각 취향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연대를 끌어 내고, 중요한 점을 보게 만들고.

이 지점이 과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제 어떤 식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실험을 할 것 같고, 제가

말했던 공간의 문제와 친구, 일종의 대안 공동체. 가족이 더 이상 피난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점점 더 되어가는 상황에서, 가족이 아닌 공동체를 어떻게 확보할 것이냐. 친구 만드는게

20대가 가장 취약한 것인데, 그건 20대가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추이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

지점을 돌파구를 만들어야 할 것으로 본다면, 세대 담론들이 다 약점들이 있지만 그 각도에서 보기

때문에 확 부각 되는 측면이 있거든요. 그런 것은 받을 것은 좀 받으면 됩니다. 다만, 자꾸 20대가

남들이 훈수해서 하는 거 말고, 나와 있는 재료를 가지고 자기들이 재구성 해서 어떻게 써먹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리한가. 그 지점에서 써 먹는 것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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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as Liberal Art Symposium

2 0 1 0F A L LS E M E S T E R

Section 5

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An Afternoon of thinking Deeply and Collectively about the Death Penalty

2010. 12. 2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서의 법’ 학술대회

학부교육역량강화사업한동대학교 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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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07

2010 년 가을학기_제 1 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서의 법 학술대회 [행사 사진-1]

2010 Fall Semester_1st Law as Liberal Art Sympos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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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2010 년 가을학기_제 1 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서의 법 학술대회 [행사 사진-2]

2010 Fall Semester_1st Law as Liberal Art Sympos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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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09

2010년 2학기_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서의 법’ 학술대회

2010 Fall Semester_1st 'Law as Liberal Art' Conference

주관 : 학부교육역량강화사업

주최 : 한동대학교 법학부

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An Afternoon of Thinking Deeply and Collectively

about the Death Penalty

2010.12. 2

이국운 이번 모임에서는 자유인의 교양으로서의 법을 liberal 하게 생각해보자는 모토를 갖고

시작했습니다. 오늘 오후에 네 편 논문을 함께 읽고 나서 식사를 하고 7 시 20 분 정도부터 기독교인

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살아가는 지성인들의 사람의 입장에서 사형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봐야 하는지 좀 더 솔직하고 전면적으로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학문과 신앙 연구소에서 하는

콜로키엄에 이런 걸 하려고 하는데요.

proceeding 을 만들면서 세 편의 글을 뒤에 부록으로 실었습니다. 하나는 카톨릭 주교회의의

사무국장으로 일하시는 이창영 신부님의 글 이예요. 사형제도가 기독교 정신과 어긋난다는 글입니다.

두 번째 글은 총신대학교의 정일웅 총장님께서 쓰신 사형제도와 우리나라의 생명이라는 글인데,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사형이 정당화될 수 있다 또는 되어야 한다는 강한 입장을 피력하고 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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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글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글은 제가 한 2 년 전에 청탁을 받아서 쓴 짧은 글인데 그 사이에 있는

것을 고민한 글입니다. 이 세 개의 글은 오늘 저녁에 할 토론에 바탕을 둔 글이니까 여러분들이 네

편의 글을 오늘 오후에 함께 소화하고 나서 저녁 먹고 다시 이야기 하러 올 때 여러분들의

이야깃거리와 함께 글이 길지 않으니까 한 번 읽어서 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곧 시작하겠습니다.

이국운 반갑습니다. 저는 법학부에서 헌법 가르치고 있는 이국운 교수입니다. 오늘

학부역량강화사업 지원을 받아서 한동대학교 법학부가 처음으로 개최하게 된 ‘자유인의 교양으로서의

법’ 심포지엄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오늘 전체 일정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법학부가 로스쿨

체제가 출범하면서 우리가 어떤 진로로 법학을 규정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가운데 자유인의 학문이자

교양으로서 법이 핵심적인 이상을 원래부터 가졌었고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생각을 했고, 지난 3 년 정도 커리큘럼도 그렇게 바꿨고, 떠나신 교수님 보내드리면서 새로운 교수님

모시면서 그러한 모토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학생들과도 그 동안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

졌었는데, 오늘 이제 드디어 처음으로 나랏돈을 빌려서 작은 모임을 가지게 된 것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작은 시작이지만 이 일을 통해 우리 역사 속에 하나님이 큰 일을 이루시겠다 하는 확신을

먼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이 모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겠습니다. 원래 우리가 한 세시 정도부터

시작하려고 했는데 수업 등의 관계로 조금 늦게 시작되었습니다만, 대체로 6 시 20 분 정도까지 오늘

이 주제에 관해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최근 2 년 동안은 제일 우리가 읽을 수 있고 읽어야 하는 글들을

쓰는 네 분의 교수님들을 모셨습니다. 네 편의 논문은 각각 결도 다르고 방향도 다르고 그렇지만

사형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담고 있는 글들인데 함께 읽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교수님들께서 발제하시고 한동에서 근무하시는 네 분 교수님께서 십분 정도씩 토론해주시고 함께 그

글을 읽는데 앞으로 한 두 시간 정도는 철저하게 그 글을 소화하고, 다음 세 시간 정도는 그 네 편의

글들을 소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6 시 20 분 정도에 조금 더 빨리 끝날 수도 있지만, 잠시

break 를 하려고 합니다. 밥을 먹기 위해서입니다. 사형문제를 가지고 함께 고민하지만 또 밥은 먹어야,

우리는 산 사람이니깐 밥을 먹으려고 합니다. 교수님들과 또 우리 도와주는 스텝들은 아마 그냥

여기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고, 여러분들은 늘 하던 대로 식사를 해주시고요. 7 시 20 분 정도에

다시 모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우리가 네 편의 논문을 읽은 것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민주주의 체제 속에 살아가는 지성인으로서, 특별히 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에 관하여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인가를 학문과 신앙 콜로키엄이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늘 하듯이 네 분 선생님을 모여서 각각 10 분씩 말씀하시게 하고, 그 뒤에 그것들을 기초로 함께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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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11

이 모든 순서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이름을 붙일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제 조금 덜

화실적이면서 모든 사람이 함께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해서 생각해낸 것이 “사형에 대해서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인생

가운데 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반나절이 됐으면 좋겠고, 바로 그것이 법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성찰을 더 한 차원 깊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모임을 시작하면서 제가

좀 깊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함께’라는 구사입니다. 이 문제를 각각 개별적으로 연구하고 사법시험

2 차 답안지에 쓸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법은 언제나 공동체 속에서, 자유인들의 담론 속에서 좀

돼야 된다고 만약에 우리가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 모임이 생각을 실제로 체험해보는 형성해보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전체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오늘 와 주신 교수님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발제자부터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발제자로 오신 분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기초 법학

전분야를 가르치고 계시는 홍기원 교수님입니다. 불란서에서 공부하셨습니다. 원래는 발제가 순서가

포스터에 나와있는데, 학부장님께서 다른 수업이 있으셔서 2 번 3 번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발제하실 분은 멀리 전남대학교 로스쿨에서 방문해주셨고요. 인권법학과 법사회학을 강의하고

계십니다. 안진 교수님이십니다. 세 번째로는 부산에서 형법을 가르치고 계시고, 제가 찾아보니까

비교적 최근에는 사형 폐지론에 관련해서 가장 많은 글을 쓰고 계신 분입니다. 이 덕인 교수님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서양사학 전공이시고 서양학을 20 여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몽테스키외나 불란서의 근대

정치 사상에 관련해서 좋은 논문과 글들을 많이 쓰고 계시는 부산대학교에서 근무하시는 장세룡

교수님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네 분의 발제에 대하여 차례로 논찬을 해주실 선생님을

한꺼번에 소개하겠습니다. 이희언 교수님, 지승원 학부장님, 장철준 교수님, 백은석 교수님이십니다.

한꺼번에 박수 한 번 드립시다. 감사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수업들이 있어서 지금은 많이 차지 않았는데 점점 더 많이 와서 열기가 더

뜨거워 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주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하늘도 칙칙한 날을 줬는데,

우리가 네 편을 잘 소화한다면 저녁 먹는 자리가 좀 무겁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먼저 첫 번째

발제자이신 홍기원 교수님과 이희언 교수님을 앞에 모셔가지고 첫 번째 논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발제는 30 분 안 쪽으로 해주시면 좋겠고요, 논찬 교수님께는 10 분 정도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홍기원 방금 소개받은 홍기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사형 존폐론이 언제 가장 활발하게

논의됐는지를 보면 최근에 지난 3 월에 이른바 부산 여중생 납치 살해 사건, 이런 극악 무도한 흉악

범죄이죠. 그런데 이제 사건 자체보다는 보시면 일반 시민들의 반응을 보시면, 여러분들 중에서

덧글을, 어떤 입장을 취하셨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보면 굉장히 논조가 차분하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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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감정적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진지한 토론이 이뤄지기 보다는 감정적으로

서로 찬반을 이야기 하고 서로 공격하고 그러는 경향이죠. 이에 대해서 우리나라 정부가 취하는

태도를 보면 이런 일이 있자마자 국민들의 여론이 이렇게 들끓자마자 법무부장관은 부산 여중생 사건

바로 직후에 무슨 말을 하냐면, 청송 교도소의 사형 집행 시설을 해서 사형도 집행할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지 않냐 하는 발언을 합니다. 발언의 저의가 어떤 것인지 거기까지는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면 우리가 우리 사회에서 사형 존폐론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첫째는 과연 법무부

장관도 사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청송 교도소에 사형 집행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우리 국민들의

법감정을 볼 때 타당한 게 아니겠느냐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사형 존폐문제가 국민의 이른바 법 감정의 문제로 정의해야 하는 문제인가 하는

것이고요. 사형을 포함한 형벌, 형벌이란 보통 무엇인가. 형벌의 목적은 무엇인가. 보복인가 범죄인가.

교화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형 제도를 존치한다고 하는 것이 범죄예방에

유효한가. 더 궁극적으로는 과연 사회와 국가가 그 구성원의 생명을 박탈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는 싸우다가 또 감정적으로 해코지할 수 있지만, 사회나 국가가 개인과는 다른

차원에서 제도화된 권력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가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 범죄를 정말 예방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될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는 여러분 앞에서, 저는 법 경제학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미국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차분한 이론적인 논의들이 이뤄졌습니다. 법 경제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저는 제가 법 경제학자여서가 아니라, 다만 이 문제를 우리가 생각해야 될 이

문제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차분하게 논거들을, 객관적인 논거들을 제시하면서

나름대로 사람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어요. 어떤 입장이 오던 간에 대화는

차분하게 이뤄져야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법 경제라는 문과가 이런 것을 하는 문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까 부산 여중생 사건도 있었지만 2009 년 강호순사건, 화성연쇄살인사건, 유영철 사건 등

이 사람들은 언론에서 ‘이 시대의 살인마’라고 합니다. 과연 ‘살인마’라는 말을 언론에서 채택할 수

있는 용어인지, 사실 우리나라 언론이 sensationism 에 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죠. 이런 사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차분한 논쟁이 이루지지 못하는 분위기에서는 아무리 뜻 있는

국회의원들이 사형폐지 법안을 제출한다고 해서 제대로 국회에서 논의가 이뤄지지도 못합니다.

국민들의 그야 말로 법감정을 제대로 살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정치권은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이런 문제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은데, 여러분들 자료집

2페이지에서부터 미국의 예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Page 215: 2010년 가을학기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자료집

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13

미국에서는 여러분들이 잘 알 듯이 50 개의 주가 있는데, 어떤 주는 사형을 폐지한 주도 있고,

어떤 주는 사형을 여전히 존치하고 있는 주도 있어요. 2008 년 기준으로 볼 때 사형을 허용하고 있는

주는 35 개 주, 그리고 사형을 폐지하고 있는 주는 15 개 주. 여전히 사형제도를 존치하고 있는 주가

더 많죠. 그런데 문제는 미국 헌법에 이런 말이 있어요.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을 가해서는 안

된다. 1972 년에 어떤 사람이 무단 침입 강도가 무단 침입 절도를 해서 집 주인에게 들켜서

도망가다가 넘어져가지고 총이 오발돼서 그 집에서 한 사람이 죽었어요. 그래서 이 주거 침입한

사람을 유죄로 해서 사형을 선고 받았는데, 원심에서. 사실 이 사람이 어떻게 봐도 좀 그렇죠. 사실

사람을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뭐 훔치려고 들어갔다가 도망가다가 오발돼서 사람을 죽이게 된 건데

내가 과연 사형을 받을 때 이 사형이라고 하는 것이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이 아닌가에 대해서 그것을 이의를 제기했고, 연방대법원에. 그래서 연방대법원에서는 사형이라고

하는 것은 헌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잔인하고도 비정상적인 형벌이라고 인정이 돼서 1972 년 이후에

잠깐 미국 전역에서 4 년 동안 사형이 한 건도 집행되지 않았던 적이 있어요. execution moratorium

시대라고 하는 것이 잠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1970 년대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과에서, 시카고 대학은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자유주의적 경제학이 강한 학교죠. 여기에 아이작 얼리치 교수가 있는데, 이분이 법

경제학으로 분석을 했어요. 자기가 분석을 해 보니깐 사형이 1 건 집행될 때마다 범죄가 8 건

감소하더라 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어요. 그러면 주장을 보면 사형을 1 명 시키면 8 명을 살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잖아요. 이 교수의 이러한 법 경제학적인 주장은 사형제도가 범죄억제효과를

짓는다. 그렇게 하면서 이러한 연구가 나오니깐 미국 전역에서 몰아붙이는 상태인데, 연방대법원에서

옳거니 하고서 이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거기 3 페이지에도 나오듯이 1976 년에 사형이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건 인정하겠지만, 선고절차로 법률이 준수되면 사형은 헌법에 충족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연방대법원이 다시 사형을 선고하고 미국에서 사형이 집행되고 있는 실정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후로 끊임없이 과연 사형제도가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 법경제학의 양측에서 끊임없이 논지가 오고가는데요. 1976년 이후 약 20년 동안에서는 시카고

대학의 언 지 교수의 모델을 보강하는 여러 가지 논리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 이후에 그 사람에 대해서 뭔가 그 전에는 아무리 범죄 피의자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지켜줘야 할 인권이 있죠, 고문권이라던지. 그런 것을 완전히 완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형도 마찬가지예요. 사형도 그 전보다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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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이 와중에서 여러 가지 법 경제의 양 입장에서 여러 가지 논의와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우리가 3 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나오는 2005 년도에

스탠포드 법학지에 나오는, 거기에 보면 Cass R. Sunstein 과 Adrian Bermeule 라는 두 학자가 있는데,

이 두 학자들은 자신들의 법 경제학적 연구를 통해서 ‘봐라, 사형제도가 있으니깐 범죄율이 줄어들지

않느냐’ 복잡한 근거는 여러분들이 각자 그 논문을 찾아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는

연구 결과만 소개하는 데 만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사형제도가 범죄 억제 효과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사형제도는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사형제도가 도덕적으로 정당한 제도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등을 따질 필요가 없어요. 사형제도가 있으니까 흉악 범죄가

줄어든다. 그런데 왜 사형제도의 도덕성을 따질 필요가 있겠느냐 라는 얘기를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반대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4 페이지에 보면, 존 도노휴와 저스틴 월퍼스 라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이 두 학자의 기본적인 입장은 사형제도가 범죄억제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의 연구를 잘 살펴보면 뭔가 방법론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겁니다. 표본을 선택

한다던지, 변수를 선택 한다던지 할 때 이런 것들이 자신들의 그런 어떤 일부러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뭔가 오차범위를 줄이는 데 굉장히 철저하지 못하다던지의 방법론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법 경제학적인 논의가 진행되는 중에, 미국의 입법

정치계에서는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가. 4 페이지에 보시면, 먼저 일리노이주, 보면 2000 년도에

일리노이의 주지사가 사형을 더 이상 집행하지 말자, 사형제도를 완전히 폐지한 것은 아니에요.

사형을 집행하지 말자는 거예요. 사실 2000 년도 이후에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된 이후부터 굉장히

미국사회가 경직돼 있었는데 이러한 와중에 이런 조지 와이언 주지사의 결정은 굉장히 용기 있는

결정이었고, 전 세계 지식인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왜 조지 와이언 주지사가 이러한 결정을 하였는가. 일리노이주에서 내려지는 사형

선고를 받은 289 명을 살펴 봤더니 무죄가 밝혀진 사람이 289 건 중에 18 건이었다는 거예요. 6%예요.

그런데 이거는 오판이죠. 무죄였던 사람을 죄가 있다고 생각하고, 더구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오판한 사람이 6%였다는 거예요. 하지만 실제로는 말이죠, 이것이 나중에

최종 단계에서 무죄임이 밝혀진 것이고, 항소심 단계까지 하면 43%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도 어떻게 보면 실제로 아무 죄도 없거나, 아니면 죄가 그

정도에 이르지는 않거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거죠. 이런 과정에서 어떻게 사형을 함부로

하겠느냐. 저 사람이 정말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신할 수 없는데.

캘리포니아 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캘리포니아 주에서도 사형수들에게 독극물을 주사해서

사형시킵니다. 2006 년도에 76 세의 노인에게 독극물을 주사해서 사형을 시켰습니다. 과연 이것이

국가가 사회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인가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가 있었겠죠. 그래서 2006 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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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15

이후부터는 캘리포니아 주는 사형을 집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뉴욕 주에는 형사 소송법상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형사소송법상으로는 배심원들이 사형구형 사건에서 사형과 종신형 둘 중 하나를

만장일치로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배심원들 입장에서는 고민을 하게 되죠. ‘저 사람은 나쁜 사람

같은데, 긴가민가 하는데, 저 사람을 그렇다고 사형까진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만장일치로 결정을

못 내리면 어떻게 되냐면, 뉴욕 주의 형사 소송법 상으로 판사가 20 년 이상 종신 이하의 형을 선고할

수 있어요. 이 말은 뭐냐, 만일 배심들이 사형이나 종신형을 만장일치로 못 내릴 경우에는 이 사람은

판사가 20 년 정도의 형을 내리면은 흉악범죄자가 20 년 후에 감옥에서 나와서 사회에 다시

돌아다니게 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죠. 배심원들은 일반 시민들이예요. 시민 입장에서는 저 사람이

죄가 있는 것은 알겠지만, 저 사람이 사형에 처해야 될지 안 될지 까지는 모든 사람들이 만장 일치를

할 수 있을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저 사람이 어쩌면 20 년 후에 풀려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배심원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는 거죠. 그래서 결국 배심원들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만장일치를

강제하는 효과를 가져 오게 되죠. 이런 것에 대해서 위헌이다라는 문제가 제기됐고, 결국 6 페이지

가면 2007년부터 뉴욕 주에서는 사형이 폐지되게 되죠.

우리가 고민해야 될 것은 미국에서 국회의원들이 사형을 폐지하는 것들이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정치적 판단이나 신념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것을 정치적으로 결정할 때마다

반드시 학자들의 연구나 논문을 그 근거로 대면서 한다는 것인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오늘

바로 소개 드린 법 경제학 연구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6 페이지에서 보시다시피, 최근에

2008 년도에 연방대법원에서 사건이 있었는데, 어떤 판사는 법 경제학자 중에서 사형제도는

범죄억제력이 없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하는 반면, 유명한 안토닌 스칼리아 판사 같은 사람은

사형제도는 범죄 억제력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서로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죠.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여전히 미국에서 2008 년부터 35 개주는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15 개주는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상황에서 또 사법부에서 병행한 두 가지 상반된 계획 중에 법 경제학들의 각각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연구들이 계속되고 있죠.

그 대표적인 연구가 작년 9 월에 법 경제학지에 실린 여러 논문들입니다. 이 논문들을 내용

별로 크게 보면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형집행이 범죄억제 효과가 있느냐 하는 거겠죠. 두 번째

연구 내용은 사형제도를 유지하면 국가적으로 비용이 얼마나 들까 하는 연구가 법 경제학적으로

있습니다. 물론 이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범죄 억제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에 더 관심이 있죠. 하지만 이것은 법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결론이 잘 안나요. 반면

사형제도를 유지하려면, 관리하려면 예를 들어서 청송 교도소에다가 사형 집행 시설을 설치한다고

해봐요. 그러면 돈이 들겠죠? 사람도 써야겠죠? 그러니깐 그 비용이 과연 얼마나 드는지를 계산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워요. 그래서 예를 들어서, 7페이지부터 보시면은 north caroline 대법원은 그 어떤

학자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형제도를 만약에 폐지하면 1 년에 약 1,100 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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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법 경제학적인 성과를 냈어요. 그럼 1,100 만 달러를 절약하면 어디다 쓸 수 있을까. 이것을 법원이나

형사재판보다 더 충실히 처리하는데 쓸 수 있다. 또 요즘 미국 뿐 아니라 여러 나라가 재정적자

상태인데 이러한 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교육, 의료보험 등에 더 투자해서 더 국가문제 차원에서 더

균형을 도모할 수 있지 않겠느냐 라는 제언도 하고 있습니다.

또 7 페이지 하단에 보면 레롤랜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이 주에 관한 연구는 더욱더

복합적이어서, 단순히 청송 교도소에 사형 집행 시설을 설치하면 돈이 얼마 든다는 정도가 아니라

사형사건 범죄자의 모든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모든 비용을 합쳐서 계산한 것입니다. 경제학적인

용어로는 가변수 방식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8 페이지로 넘어가서 변호비용, 고소재판비용, 법정비용,

판사비용 뿐 아니라 항소를 하게 되면 항소비용, 사무에 따른 비용, 마지막으로는 교도행정비용까지.

사형수를 사형집행하기까지 교도소에 가둬 놓을 때 발생하는 비용있죠. 그것까지 다 계산해봤더니

레롤랜드 주가 현재 사형제도를 유지하면서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1 년에 1 억 7 천만 달러를 내고

있다는 계산이 나왔어요. 1 억 7 천만 달러는 큰 돈이죠. 결국은 레롤랜드 주에서 사형 선고된 수 만큼

나눠봤더니 사형 1 건당 약 백만 달러 정도는 줄일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게

사형 제도를 유지함으로써 드는 비용, 이 돈이 아까워서 사형제도를 없애자고 말하면 그 논거는

굉장히 약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는 어떤 분은 이런 생각, 다른 분은 저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중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돈이 아까워서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말하면 좀 그렇잖아요. 오히려 사형제도가 범죄억제효과를 갖고 있다고 위화론을

펼치는 사람들의 논거가 갖고 있는 취약성, 방법론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오히려 더 강력한

주장이 될 수 있겠죠. 그래서 8 페이지 하단으로부터 나오는 연구들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소개했던 도너휴와 로빈 두 교수는 사형제도가 범죄억제효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방법론적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사람인데요. 2003 년도 이후에 쓴 논문들은 면밀히 방법론적인 것들을

검토하고 있고, 이를 9페이지에 표로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통계학적인 용어는 저도 사실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설명드리는데

자신이 없습니다만, 보통 통계학에서 쉽게 하는 방법은 X 축과 Y 축이 있으면 사형을 집행하면 할수록

범죄가 줄어든다 등을 통계로 내기 위해서는 좌표 위에다가 점을 찍죠. 그런데 그 점이 사실 찍어졌다

해서 어떤 그 분산된 점 사이에서 일관된 경향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죠. 그러니까 결국은 그 오차의

범위를 줄임으로써 분산된 점 사이의 경향성을 읽어내야 하죠. 그 때 보통 취하는 방식이 9 페이지

밑에서 ’보통최소제곱추정치‘라고 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도너휴 교수는 이 방법이 갖고 있는 어떤

방법론적인 취약성을 지적하면서 이것 보다는 오히려 10 페이지로 넘어가서 이단계 최소 제곱 모델을

써야 한다. 즉 이것은 간단히 말씀드리면 만약에 여러분 1 차함수가 있다면, Y=ax+b 에서 x 는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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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17

변동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그러나 우리가 왜 이단계로 이것을 봐야 하냐면 x 라는 변수가

사실은 또 하나의 함수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이단계로 이 오차를 최소화하지 않으면은,

이 경향성을 엄밀하게 읽어내는데 문제가 생긴다는 거예요. 방법론적으로. 그래서 이런 중요한 사안에

있어서 만큼은 이런 엄밀한 방법을 취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보통 취해야 하는 방법은 2SL

방법을 취하는 것이 정확한 경향을 읽어내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도너휴 교수가 앞에 표에서

나온 연구 있죠? 그것으로 2SL 모델로 바꿔서 봤더니 거기서 나왔던 결론이 다 유효하지 않더라 하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즉, 앞의 연구들에서는 OLS 연구로는 사형집행이 되면 범죄가 줄어들더라 하는 기울기가

negative 가 나왔는데, negative 이긴 하지만 통계적으로 유효하지 않은 결과들이 나오더라 하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10 페이지 중간에 보십시오. 요컨대, 도너휴 교수 비판에 따르면 2003 년 이후에

최신자료 바탕으로 이런 연구 중 어떤 것도 사형제도와 범죄억제효과를 입증하지 못 하며, 위에서

6 편 중에 3 편의 연구 결과가 있지만, 이 세 편의 연구도 표준 오차를 굳이 대입했을 경우, 같은

결론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다, 설득력이 떨어짐을 알 수 있다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론적인 지적과 더불어서 최근에는 제 5 장으로 넘어가서요, 사형제도가

범죄억제효과가 없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증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태까지

통계학을 적용할 때는 말이죠, 5 년이다 10 년이다 했지만 이것이 만약 20 년이다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서 다른 결론들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시간적인 범위 뿐 아니라

공간적 범위까지, 예를 들어서 미국은 큰 나라죠 그런데 만약에 뉴욕에서 사형집행이 된 것이 LA 에서

어떤 범죄억제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은 잘 생각 안 해왔다는 것이죠. 이 데이터를 사용할 때

이런 것들이 엄밀하지 못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11 페이지로 넘어가서 중간쯤에요.

이러한 것들이 결국 뉴욕에서 사형 집행된 것이 LA 에서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를 구체적으로,

당위적으로 보면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데, 결국은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도시에서의 발생하는 범죄억제효과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상이 최근에 이 문제에 관해서 미국 법경제학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는 논의들을 결론들만

소개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여러분들이 만약 이 사람들이 어떤 식의 방법론을 썼는지에 대해 더

궁금하시고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제가 참고문헌을 제시했으니까 봐 주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단지

결론적으로 11 페이지로 넘어가서요. 사형제도와 범죄억지효과간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것은 다양한

변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만큼 어려운 작업인데 억제설을 지지하는 연구결과는 단순교차

분석을 통해 변수 간의 상관관계를 쉽게 맺어주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에, 도너휴 같은

사람들은 이런 연구들이 방법론적으로 오류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요.

사형제도라고 하는 것은 정부가 시민으로 하여금 고비용이 부담되는 비효율적인 형사제재수단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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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아니라 범죄를 억제시키는 확실한 수단이 아님도, 우리도 거기에 대해서 법 경제학자 중에서도

만장일치의 결론을 못 냈다면 우리가 어떤 결론도 확신을 갖고 내릴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상태, 또 형벌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 제가 처음 시작할 때 했던 말씀인데요.

형벌의 목적은 무엇인가 생각해봤을 때, 형벌의 목적이 단순히 일반 범죄 예방이 아닐진대 사형제도의

존폐를 논하는 현대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상기하고, 형벌 제도의 본질에 대하여

숙고해봐야 하지 않을까로 끝맺음을 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국운 감사합니다. 제가 중간에 얘기는 없고요. 이희언 교수님이 말씀해주실 텐데, 아마

이희언 교수님은 영어로 하시는 게 더 편하실지도 모르겠어요.

이희언 My comment like first of all, I was beginning for those who has difficulty of

understanding these, I apologizes of that's. But also I like to speak brief comments. I make it simple as

possible, for your benefit to understand my comments on professor Hong's paper. Like commons, I am

also not an experts in Law and Economics. I was introduced this topic when I was in law school, but

I`m by no means of expert Law and Economics roll did I take many economics courses in college. So,

I`m prove it deficient in looking at analysis of the individual scholar that professor Hong has a

presented his paper, I think he does an excellent job, for I can understand in terms of summarizing the

current research for law economics perspective about the death penalty and specifically he mentioned

the question of deterrence.

Does the death penalty deter murder in United States? And as professor Hong also mentioned

in his comments, this is the discussion that as he described from before the incidence in Korea shouldn't

be legally emotional in some sense. it should be a very thoughtful, careful, calm discussion about what

is death penalty mean and whether it should be something which in this society in Korea or the United

States, or anywhere else should be a penalty giving for the crime of murder. Now as a professor Hong

described in his paper, there is as you can see a very big debate in the United States about whether or

not death penalty actually has some effect on murder in United States. And he introduced to you the

primarily the research of a John D and Justin W in his paper. And just to give you who they are John

D is a professor in Yeil law school and Justin W is a professor at University of Pennsylvania school.

And they take a law economics approach and thinking about the question of whether the death penalty

has an effect. And they were responding their research is response to an earlier work done by Eric as he

mentioned university of Chicago professor who did a study about the effect of death penalty on

murder in US. And the Professor Eric's work was very instrumental as professor Hong mentioned.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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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19

was cited in a various academic papers as well as US. it`s general. it`s the bowlful in US government

who argue shameful cases.

It`s sincerely general also use professor Eric's work, independent governments use the death

penalty in US in favor of death penalty. As the documents. There announces saying that the death

penalty has a door effect, little door effect on murder in US. So, they murder very big paper of discuss

much in US. I cannot comment on their study because we look at the economic analysis and I know

that professor Hong has book you, basic economic matrix. It`s a very difficult. I can’t begin to explain

to you some different graphs and the fact they use the calculation and some relationship with the death

penalty and murder. I think it is very difficult task. But they try to do it, they found evidences that

there is no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But I like to actually present to you at least a counter perspective, if you book on page 9, the

page 9's graph is seen reference to Denzhbakhshet. On the first line, dance box. is that the professors

are the A university. And he and another professor of the A Paul Rubin. They wrote the serious papers

arguing against done human offers. These are very active between these two sides. And they decided

done human offers saying they wrote the impact the evidences dose support that their easy connection

between the death penalty and declining the murder rate.

In US. And so, they que done human offers, they que that basically having a advices, saying

that done human offers are against death penalty. So, they have a advises in the research. And they

have an agenda. and then when they do research, they are not very objective. What they do is that they

take certain data and they fit the data for their result. And so, the data of their show in the specific

model, they come up with show that their easy effect between the death penalty and the murder rate.

But they say that all perspective is correct, because if you see all analysis it show that the death penalty

have an effect on the murder rate. I don`t need a professor Hong argue comments on the nature of the

statistic in this reports. But, I think it is very interesting issue, and so my own questions that I have just

for maybe our consider whole looking at this research and it is based two questions.

Because law economics is very powerful argument, and very powerful report tool in UN to

argue. I mean, if you argue with which reports and won the grades from the judge in US today, who is

a very strong on law economics, and is it very difficult argument people who have own economics on

their sides. Because their theme is very hard evidences, to choose between one law should be increase

or not. So, I have a particular questions about this, because I think it is very difficult to quantif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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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me, it is just average person. does it late person. It seems very difficult to quantify how to measure the

effect of the death penalty on someone`s decision to commit murder or not murder. Because I think it is

just my personal perspective I make the wrong. Because the question for you to think about is due

people use the rational choice theory. Before they decide to act certain ways. So, if the murderer, it`s

think about many of murderer, or some of thinking about murdering somebody, do you think about

okay, this think have a death penalty. So, maybe I shouldn`t commit murder. That means, there is not

the factor into the calculations for someone think about whether they commit murder or not, whether

the rational choice theory it`s somebody wish really affect the behavior of people. I think both people

say yes, rational choice theory has a really big impact the way of thinking about how people make

decisions.

I have a question. I`m not sure that is true to say that, just because people make the

economics decision that factors in qutie probably in thinking about commiting murder or not. So that`s

my first questions. Whether the rational choice theory is impact the true to think about human

behavior, so that we can think about war and policy, that`s my first question. And the second question

is the rate of law economics, because they use the economics matrix as tools. Since we very persuade.

However, the easy something with we should consider very deeply what we think about policy. Is law

economics and economic matrix something which is relevant for discussing the policy. So, even

whether or not the question of whether or not the death penalty deters or not deters. Is that a relevant

questions anywhere. The thinking about whether or not the death penalty should be in proof the

punishment or people`s exercise. Don`t care about the utility of the death penalty, maybe that question

is irrelevant. I`m going to that propose that question to you.

Whether it`s the profit for thinking for us and thinking about law policy. And so first of all,

the board question is, what is the ultimately utility of law economics in terms of formulate making a

rules. Is it desirable to construct rules penalty and such of ways in all to maximize some aspect of

efficiency. My expectations of law economics is that law economics force to be a perspective that

allows to society maximize efficiently, maximize some social value. The question is desirable relevant

basis for which we should consider thinking about the rules. I`m a teacher in Christian law school, and

so I think I heard this perspective about even this spite utility, there may be more justify or not due to

the death penalty despite fact it`s you useful value in terms of determining or not. Punishment is no

relationship to some social utility. I don`t respect that the people discussed for but that`s question

which I like to raise from this very good description of the current rate between these kinds of issues

involved the death penalty.

Page 223: 2010년 가을학기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자료집

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21

홍기원 저는 이제 한국말로 하겠습니다.

이국운 불어로 하시면 못 알아 들을 텐데, 불어로 하세요. (청중 웃음)

홍기원 첫 번째, 도너휴 등 두 교수 의 연구를 중점적으로 소개한 거죠. 물론 지적해주신

바와 같이 그 두 사람의 연구에 대해서도 거기에 나오다시피 데즈바키쉬와 루빈 교수가 또

마찬가지로 방법론대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 있어요. 여러분들에게 참고문헌 제시했어요. 사실 우리가

균형적인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의 입장만 하는 것 보다 이쪽도 귀 기울이고 저쪽도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그 이후에 다시 2009 년도에, 가장 최근이죠. 도너휴와 월퍼스가

다시 이제 방법론을 비판했어요. 어떻게 보면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서로 대화를 나누는

학계 간의 자세 같은 것은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질문이 크게 두 개로 나누어서

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과연 그러면 법 경제학적인 것을 떠나서 생각해볼 때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때, 내가

이 범죄를 저지르면 잘못하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계산하면서 rational

choice 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과연 그 범죄자들이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쓰겠느냐. 그러니까

범죄억제력을 이유로 따질 때, 범죄억제력이 있다고 말하려면 그 정도의 타당성이 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형에 구형되는 범죄에 대하여는 범죄자들은 그런 것을 rational 하게 생각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죠. 우발적이거나 아니면 병적이거나, 그럴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에도 사형제도라고 하는 것 자체가 범죄자들의

심리상태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우리가 확실히 말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과연 효용성 문제, 범죄 억지력 등 형벌을 효용의 문제로만 따질 수 있는가

하는 지적을 해 주셨고요, 오히려 어떤 여러 가지가 것들을 종합적으로 극대화할 수 있는 규칙과 형벌

체계를 마련하는 것을 더 우리가 생각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좋은 말씀 해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법경제학을 들여오게 한 것은, 제가 처음에 실토했다시피 법 경제학자는 아닙니다. 다만

우리 사회에 이런 것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습니다. 제가 온 것이 짧아서 모르겠지만, 법 경제학적인

연구가 이런 것을 밝혀주는 가장 강력한 논거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이런 것을 밝혀주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어서가 아니라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수 천 년 동안 국가 형벌권에 대해

해결 못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고민하는 지성인으로서 이런 식으로라도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소개 차원에서 저 나름대로 정리한 것을 오늘 여러분들께 발표한 것입니다. 그 다음

것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감사합니다.

Page 224: 2010년 가을학기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자료집

222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이국운 네, 고맙습니다. 우리 김재홍 교수님이 이 자리에 안 계신데, 계셨으면 분명히

보통최소제곱추정치는 이런 것입니다 라고 해 주셨을텐데. 우리 학교에도 법경제학자가 계시기 때문에

조금 아쉽습니다만 다음 번에 사형문제가 꼭 아니더라도 한 번 모셔서 법경제학에 대한 얘기를

들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오늘 첫 번째 논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여러분들 중에 좋은

법경제학자가 나오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질근질 할텐데 한 명만 지금

홍교수님이 소개하신 이 주제애 대해서 혹시 질문이나 코멘트가 있으면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겠습니다. 주최 측의 사정을 알고.. 그럼 알겠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아

두 분 교수님께 박수 한 번 드립시다.

원래 우리가 순서를 좀 바꿔서 세 번째 안진 교수님 논문을 먼저 읽으려고 했던 이유는

지승원 교수님의 수업이 4 시 반부터 시작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첫

번째에서 예상보다 조금 많은 시간을 쓰는 바람에 조금 늦어져서 원래 순서대로 다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원래대로 두 번째 순서로 부산정보대학에 계신 이덕인 교수님께서 우리나라 상황을

중심으로 ‘사법살인과 사형제도에 대한 헌법적 평가’라는 제목으로 발표해주시겠고, 장철준 교수님께서

이에 대한 코멘트를 해주시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꼭 시간을 지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덕인 제가 마이크를 잘 안 잡는 사람인데요. 이게 어색합니다. 오늘 부산에서 제가 수업을

마치고 올라왔는데 사실 버스타고 여기 올라온 차비보다 택시비가 더 많이 드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여러분들, 법학부 학생들도 있을 거고, 다른 학부 학생들도 있을텐데 참

신선하고 충격적인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여러분들이 앞으로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주도적인

인재로서 커갔을 때 우리 사회가 더 아름답지 않을까, 간단히 인사하고 사소한 친절이었지만 제가

돌아갈 때는 아마 아주 큰 걸 가지고 내려갈 것 같아요. 우리 학생들한테도 한동대 학생들이 저한테

주었던 감동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설은 여기서 그치도록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상당히 무거운 내용입니다. 무거운 내용이고, 제가 작년부터 올 해까지 약 11 편 정도의

논문을 썼습니다. 쓰게 된 배경은 작년 3 월에 형사법 전공하시는 교수님 20 분 정도, 사형제도에 대한

성명서를 제출했습니다. 저도 거기 끼여 있어서 뭔가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뭘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글로써 이야기 하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2 년간에 걸쳐서 부족하지만

저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했던 부분들을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례도 많이 보고서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제가 처음에 사형제도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게, 대학원 때 제가

인권위원회에 논문을 하나 쓰게 됐어요. 그런데 그 논문이 사형제도와 관련된 법감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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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23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최초의 헌법재판이라고 할 수 있는 63 년 판례를 읽으면서 참 감동

받았거든요. ‘사사로운 생명은 전 지구보다 무겁다’라고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 대법원의 판사님들이

대단한 철학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구나 하고 생각을 했는데, 이 판례가 48 년 일본 판례를

그대로 배낀 거예요. 알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만, 토시 하나 안 바뀌고 똑같더라고요. 거기서 많은

실망과 분노를 삼켰죠. 공간 대적상으로 사법 살인의 문제도 우리 사법부의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고민으로부터 출발하게 된 겁니다. 문제제기는 넘어가도록 하겠고요.

페이퍼가 상당히 많습니다. 35 페이지 정도 되는데 이것을 다 얘기할 수는 없고,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시간 나실 때 읽어주시고요. 간단하게 정리를 하겠습니다. 일단 저는 사법살인과 오판에

대한 사형의 문제를 지금 거의 국내의 모든 분들은 혼용을 하고 있습니다. 사법살인이라고 했다가

오판이라고 했다가 뭐가 뭔지를 알 수가 없다는 얘기죠. 그래서 제 나름대로는 사법살인은

사법왜곡행위라고 보고, 오판에 의한 사형은 사형오류 행위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미표적 고의부터 시작해서 고의적인 행위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사법 관료자들이 불법을

저지르는 행위 자체를 이렇게 정의를 하고,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과실행위 요소가 조금 있겠죠.

법관이라고 하더라도 완벽하진 않지 않습니까. 오판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일단 양자를 구별을 하는데, 왜 구별을 해야 하는가. 구별 실익은 사법관료제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하여 책임을 물어야 된다고 얘기하면은 법적 책임에

대해 우리가 다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래서 독일처럼 법외국자를 두어서, 독일에도 법외국자가

있는데 거의 상징화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의해서 처벌 받은 법관이나 검찰이 없다는 얘기죠. 그래서

일부에서는 법외국자를 만들자는 얘기가 있지만 그거 이전에 우리가 과거를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차원에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책임을, 그 당시 사법

관여했던 분들의 법조적 양심에 다시 한 번 더 두드려 보자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법살인과 오판에 의한 살인은 반드시 구별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것이 사형 폐지에 대해서 정당화 논증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죠. 앞에

발제하신 홍기원 교수님의 내용 자체가 범죄억지효과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존치론에서 거의

대다수 내세우는 논거가 바로 범죄억제효과라는 거예요. 이 시점에서 존치론의 범죄억지효과와 바로

대치시킬 수 있는 논거가 바로 오판이나 사법살인에 대한 이야기이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양 개념을

구별을 해서 접근 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과거에 사법적 불법 규모에 대한 부분을 반드시 되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지금 사형집행 건수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되어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위에

조치되고 있는 것이 법무부에서 한나라당의 공민식 의원의 제출한 자료입니다. 작년에 제출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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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자료인대요. 910 건 정도가 우리가 정수리 되었었다, 보시다시피 강력범이 562 건, 정치범이

448 건인데, 그 중 간첩사범이 43 건이죠. 저는 이 부분에 동의 하지 않습니다. 과연 과거정권에

있어서 간첩사범으로 사형선고를 내린 사람이 43 사람 밖에 없겠습니까? 물론 검찰에서는 정부기록

보존소가 화재가 나서 관련자료를 확보할 수 없다고 논거를 내고 있는데, 과연 그것을 책임 있는

누군가가 다시 나서서 밝혀야겠죠. 하지만 현재 공식적으로는 910 건이라고 얘기 합니다. 여기서

시사 IN 이라고 하는 잡지에서 2009 년 5 월 13 일 인터넷 자료를 보니까 1106 건의 사형집행이

있었다고 해요.

그리고 2003 년에 한림대학교 생사학 연구소에서 여기서 생사는 삶과 죽음을 공부하는

연구소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1634 건이 있다고 하며 연도별로 나눠서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료가 제가 볼 때는 가장 정확한 것 같아요. 왜 그러하냐면, 프랭크라고 하는 사람이 야만적

형벌이라고 하는 책을 2008 년에 냈는데, 그 책에서 최초 언급을 하고 있고, 그 언급한 내용을 사형

존치론을 주장하는 서석구 변호사님이 자기 책에서도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세 군데에서

인용된 것이 있으니까 이것이 가장 근접한 수치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 번째 보시면은 유권본부에서 법무 50 년사라는 자료를 발표한 것이 있는데요, 전쟁시기,

1 년 6 개월이라고 하는 시간 동안에 2827 건에 대한 사형집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것이 그냥

전쟁시기라서 혼란상황에서 집행을 한 것이 아니에요. 군법회의에 의해서, 헌법상 민간인에 대한

사형집행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군법회의에 의해서 재판을 했다는 것에 의의를 가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 수치에는 다양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부역자 문제 라던지, 직결처분의 형식으로

했었던 것이 있고, 군법회의에서 했던 것이 포함되어 있을 텐데 뭐 어쨌거나 이것을 다 포함하게 되면

상당히 많은 인구로 늘어난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정확한 사형 집행 통계가 부재하다는 점, 그리고

각각 다른 통계 상에는 반드시 사법적 불법, 사법적 살인 등을 포함해서 다양한 유형들의 불법이

개입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부분은 앞으로 우리가 규명해야 할 숙제와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통계는 신문에 나와 있지만, 이는 안 맞습니다.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앞서서 사법왜곡에 대한 부분을 말씀을 드렸는데, 사법왜곡은 또 다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지지

않을까. 사법살인은 정권유지와 강화를 위해서 혼란시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자행될 수가 있겠죠. 사법학살은 혼란시기를 타계하기 위해서 많이 사용을 하죠. 그래서 사법살인을

반민주 반공정권이고, 무슨 말인지는 생략하고,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우리가 군사정권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사법살인이 상당히 많이 자행된 흔적이 있습니다. 사법 학살 같은 경우에는 한국 전쟁 당시에

집단적인 양민학살과 관련해서 다양한 사례들이 과거사에 대한 부분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까. 다 확인이 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정리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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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25

왔는데 이를 일일이 이야기 하자면 좀 그렇습니다. 키워드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한 번 직접

찾아보십시오.

최용진 이 분 같은 경우에는, 설명을 제가 좀 드리자면 독립운동을 했었고, 우리 정부수립

이후에 경찰 조직을 만들었던 분입니다. 친일 경찰을 다 배제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과거에 자신의

동지였던 조명욱 박사에게서 버림을 받습니다. 신관효에서 멤버로서 같이 활동을 했는데 버림을

받습니다. 그리고 친일 경찰을 계속 기용하는 것에 대해서 분개한 나머지 제헌 국회에서 서울 종로 갑

구에 출마를 하게 됩니다. 종로 갑 구는 이승만 대통령이 출마했던 곳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싸우게

돼버렸어요. 그런데 결국은 후보 등록 조차도 못 하고 내란 예비 무급 죄로 기소가 되면서 5 년 형을

선고받습니다. 5 년 형을 선고 받고 있다가 전쟁이 나는 바람에 인민군이 서울로 들어와서 서대문

교도소를 열면서 최용진 선생님을 풀어주게 됩니다. 일단 내려오지 못 했으니까 미소급 상태로 서울에

있었겠죠. 있으면서 이 분이 반전평화운동을 합니다. 하면서 군중대회를 나가지 않습니까. 이것을

이승만 정권이 꼬투리를 잡아서 서울이 9.28 수립 되면서 이분한테 사형을 선고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과거사 위원회에서 재심문을 하라고 얘기했고, 무죄가 되었죠.

심문규 같은 경우에 이 사람이 민간인이었어요. 사법살인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자행되었던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이웃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가해졌다는

겁니다. 이 사람은 조금 특수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어요. HID 라고 한국전 당시에 간첩부대죠.

특수임무종사자라고 해서 나이 좀 드신 분들 까만 옷 입고 돌아다니시는 거 많이들 보셨죠. 사회적

이슈가 될 때마다 나오는 분들이 있는데, 아마도 그 분들과 동일한 그런 조직에 있었던 것 같아요.

북파됐는데, 북파되자마자 잡힌 거예요. 실미도 같은 스토리인데요, 잡혀서 1 년 7 개월 동안 교육을

받고 다시 이중간첩으로 남파가 됩니다. 남파 되어서 내려오자마자 자수를 해요. 자수를 했는데

자신이 몸 담고 자신을 보냈던 그 조직이 아무런 고난 없이 이 사람을 1 년 이상 구속시킵니다.

그리고 역시 간첩죄를 적용해서 이 사람도 사형이 되죠. 이 분도 역시 재심에 의해 무죄를 받고

명예회복을 하셨죠. 잘 아시는 조봉완 사건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박정희 정권에서도 다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아주 고위급 인사였죠. 중앙통신사

부사장을 했었고 판문점 출입기자를 했던 이승훈이라는 사람이 67 년인가 유엔 정전위에 영국 대표로

차를 몰래 타고 탈출을 합니다.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에서는 상당히 호세죠. 반공정권에 대한, 남한

정부가 북한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충분히 홍보할 수 있었던 호세였는데, 이 사람이 제 3 국으로 가려고

시도를 하다가 베트남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한테 잡혀서 압송되어 와서 역시 사형을 받게 됩니다.

조용수 사건을 민족일보를 생각했던 젊은 언론인이었는데, 이 사람도 조봉암 선생님과 인연이 있어서

좌파로 일단 분류가 되어서 특히 조용수씨는 박정희 정권이 그 당시 미국 정부로부터 공산주의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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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하는 과거 행적과 관련해서 의심을 받다보니까 희생양이 필요했었는데, 그 희생양으로 조용수씨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같은 경우는 잘 아시죠. 유신정권, 유신헌법에 의해서 장기집권을

견고하게 하려고 했던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자행되었던 것이고, 인혁당 관련되어 있는 여덟 분이

사형 선고를 받고 난 다음에 상고심 자체도 바로 기각이 돼 버린거예요. 그리고 18 시간 만에 확정이

되어 사형이 집행 돼 버립니다. 그래서 이 날을 사법 암흑의 날이라고 공식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선포하게 되었다는 일례도 있습니다. 사례를 크게 두 가지로 일단 봤습니다. 민족일보 사건하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인데, 상당히 말도 안 되는 내용들입니다. 사건 개요하고 재심 문제 판결 요지에

대한 부분을 말씀드리고 있는데, 논문을 읽어보시면 다 나와있는 내용이거든요.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또 수사에 대해서 검찰이 방조 공모하거나 억지 지은 것에 관한 내용도 논문에 있는

내용이니 보시면 됩니다.

그 다음에 사법 살인 관여자들에 대해서, 이 분들의 얼굴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 일단 걸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중간에 계시는 분이 생존하신걸로 되어 있는데 2007 년

7 월에 돌아가셨더라고요. 중간에 계신 분이 민복기 전 대법원장입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

대법원장으로써 활동을 하셨던 분입니다. 이 분들이 정말 사법자 양심이 좀 있다면 이제는 말 해야

하지 않느냐, 그리고 민족일보 사건 같은 경우에는 다 아시죠. 이회창 의원님. 당시에 물로 재판

자체가 군법회의라고 하는 한계성이 잇고, 민간인으로써 참여를 했다고 하지만 과거 불법에 의하여

분명히 발을 디뎠고, 그 불법에 대해서 자기 힘으로 판결문에 이름을 남겼다고 한다면, 판사는

판결기록이 말하는 것 아닙니까.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그런 판결에 대해서 자기 이름으로 기재한

판결에 대해서 책임을 안 진다는 것.

그래서 그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서 대법원에서 이일규 전 대법원장 한 분을 제외하고는

사형에 찬성을 했죠. 그나마 이 분 한 분 사형에 대해서 반대 했는데 뒤에 가서는 기억이 안 난다는

얘기로 일관을 하시더라고요. 여기 나와있는 내용들은 2007 년에 관련 생존해 있는 대법원 판사들이

사건과 관련해서 언급을 했는데, 여기서 참고할 만한 것은 이일규 대법관 내용이 되겠죠. 서민 심리

만으로 징역이 높아졌다는 재판절차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는 합의체로 넘겼으나 다른 판사들이

모두 문제없다는 의견이여서 사형이 확정됐다, 그래서 그냥 기계였다는 얘기입니다. 판사가

기계일까요. 차라리 그럴 거면 컴퓨터로 하지 슈퍼 컴퓨터를 하나 놔두고 양육할 수 있는 모든

변수들을 다 투입을 해서 그 사람의 죄에 대한 부분만 적용하게 되면 바로 output 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거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법이 아닌 것을 법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는 얘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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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27

그 당시에. 이러한 사법살인은 크게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치테러의

수단이죠. 그래서 반대세력에 대한 분쇄 봉쇄를 위한 공포정치를 강행할 때, 그리고 그러한 위기

불파를 위해서 반드시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속죄양 대신 희생양을 필요로 하고, 또

적법절차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형사소송법 배우고 계시겠지만, 형사소송법의 가장 큰

모토는 의심스러운 때는 피의자 또는 피고인을 범인이 아닌 것으로 본다고 배웠을 겁니다. 그런데 이

것이 그 당시에는 실종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속한 집행을 하죠. 자, 왜? 보통 그렇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범죄 같은 경우에 우리가 일정 기간을 유예해야 하는 건 아니죠. 지금 현행법상에

의하면 법무부 장관은 사형 선고를 받은 날로부터 6 개월 안에 사형 집행장을 발부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항간에는 집행을 13 년 동안 사형 집행을 안 하니깐 법무부 장관들이 전부 직무 유기한 것

아니냐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오판일 수도 있기 때문에, 또 재심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사형수를 함부로 바로 즉각적으로 처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정치범의 경우에 있어서 국내학에는 추후에 비난이나 구명운동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서 아주 즉각적으로 단행해 버립니다. 앞에서 애기했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되어

있는 8명의 무고한 사형수들, 18시간이라고 하는 그 시간을 두고 다 처형이 됐다는 기록을 갖고 있죠.

그래서 앞서서도 말씀 드렸듯이, 법적 책임을 추궁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회적 책임. 우리

국경이 이제는 어디까지 가 있습니까. 과거의 우리나라가 아니라는 얘기죠. 정말 외향적으로 물질적인

측면에 있어서 우리의 국경이 거기에 가 있다고 얘기하기 이전에 이제는 우리 내면을 돌아다 보고

우리 국경을 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하기 위해서도 사법살인에 대한 부분은

반드시 되짚고 넘어가야 하는데요.

이번 사연에서 가장 슬픈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얘기이냐 하면 과거에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에서 1,400 건 정도의 판결을 공개를 했는데 거기에 실명을 다 밝혔어요. 실명을

밝혔더니 일부 법조계의 인사들이 상당히 반발을 한 거예요. 그런데 실명을 밝힌 곳에 보면 그 당시,

2007 년 당시에 현직 대법관, 헌법 재판관까지 다 포함해서 10 명 정도가 거기에 다 끼어 있었고,

과거에 고위직을 역임했었던 사람들의 성명이 약 100 명이나 누계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는 얘기가

법관의 인격권과 명예권이 침해될 수 밖 없었고, 당시의 상황 논리가 그 당시에 법적 규범의 구속력을

가진 긴급조치에 의해서 재판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면필을 하려고 했다는 애기예요. 정말

무책임하고 화가 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앞서서도 말씀 드렸듯이 법관은 판결로 이야기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판결 혹시 읽어보는지

모르겠지만, 과거 판결들 보면 저 정말 짜증나거든요. 마침표가 어디서 끝나는지 몰라요. 서너

페이지를 계속해서 쉼표, 쉼표 해가지고 하며, 하고, 한 즉, 원래 그렇게 판결문 쓰는 것. 글을 그렇게

쓰는 사람들은 자신이 확신이 없다는 얘기예요. 소신이 없고 확신이 없고. 숱한 판결들을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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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썼다는 거예요. 앞서서 말씀 드렸던, 생명권과 관련해서 사형을 얘기하면서 우리가 그렇게 치욕스럽게

매달렸던 일본의 사법부가 내린 판결을 그대로 가져와가지고, 헌법 재판에 썼던 것이 과거 우리의

사법부였다는 얘기죠. 준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헌법 재판권에 대해서는 60 년대, 70 년대, 80 년대 이후에 헌재 재판 이전까지를

얘기했는데, 최초의 헌법 재판관은 48 년 3 월 12 일 날 일본에서의 판결을 그대로 복사한 것입니다.

70 년대는 없었어요. 왜 없었을까요? 유신헌법이라고 하는 서슬이 퍼런 헌법이 있었는데, 그 헌법이

위헌이라고 말할 간 큰 사람은 없었겠죠. 그래서 없었던 것 같고. 80 년대 이후에 87 년 9 월 8 일날

우리 대법원이 아주 전향적인 그런 사안에 있어서 사형을 아주 엄격하게 제한하겠다 해서

사형선택허용기준을 신중하게 하겠다 해서 장황하게 여러 가지 요건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83 년 7 월 8 일 일본 재판소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서 배낀 거예요. 헌법재판소 구성

이후를 보시면은, 95 년 9·5 사건이 있기 이전에 두 번 더 있었습니다. 89 년과 90 년에 헌법소원은 다

기각이 되어버렸어요. 왜냐면 그 당시에 헌재가 구성되고 얼마되지 않아서 좀 우왕좌왕 하고 있었죠.

그리고 89 년과 90 년의 소원은 권리 구제형 소원이었는데, 결국은 청구기간이 지났다, 재판일을 추후

지정하겠다, 재판일을 추후 지정하겠다고 하고 보니 추후 지정 하려고 보니까 사형 집행하고 끝나

버린거예요. 어처구니가 없는 그런 결과가 벌어졌고, 처음으로 우리 헌재가 헌법적 관점에서 사형에

대한 판단을 한 것이 95 헌바 1 결정입니다. 대략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청구인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95 년도 같으면은 벌써 집행되었어야 하는데, 대법원에서 화기만성이 되어가지고 무기징역이

확정되어서 부산에서 복역 중에 있습니다. 참 운 좋은 사람이죠.

사형제도에 대해서 일단 96 헌바 1 결정하고, 2008 헌가 23 결정, 최근에 있었던 거죠. 이 두

가지를 놓고 이야기 해보자면, 전자는 헌법소원이고, 아래는 위헌법률심사형이라는 점에서 좀 차이가

있고요. 일단 관련, 청구하게된 대상 헌법 조문이 95 헌바 1 결정에서는 인간 존엄에 대한 선언을

현안하고 있는 10 조와, 기본권 제한의 한계를 이야기 하고 있는 37 조 2 항을 주로 두고, 110 조 4 항

단서도 비상계엄하의 군사 재판을 한 경우에 있어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에 있어서는 단시에

하지 못한다는 규정을 부수적으로 심판 범위 안에 두고 있었는데, 이번에 위헌법률심사형에서는

오히려 110 조 4 항 단서가 합헌을 주장하려는 법관이나 위헌을 주장하려는 법관 사이에서 쟁점

사항으로 부각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은, 위헌법률심사이기 때문에, 일단 기본권에 대한 부분을 뒤로

미루게 되겠죠. 그래서 96 년과 2010 년에 있어서는 헌법 상의 쟁점이 되었던 조문이 차이가 있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재판관 별로 합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입법개선경제화권, 일부위헌, 전부위헌을 주장한

분들이 있는데, 앞에 이 분들이 횡령 당시에 인사 청문회에서 얘기 했던 것이랑 결정했을 때에

의견이랑 조금 차이가 있죠. 이강국 소장님 같은 경우에는 초지일관으로 폐지 반대한다, 합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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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29

얘기 했는데, 이동흡 재판관 같은 경우에는 폐지검토 가능하다는 요건 상의 합헌이라고 얘기하고 있고,

송두환 재판관 같은 경우에도 폐지론에 공감한다고 하지만 일단 합헌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청문회 때는 아주 인권을 생각하고 아주 공의로운 인권을 지키는 것으로 보여야 했겠지만,

실제로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는 것.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일단 지금 현재 헌법적 평가에 대한 부분을 얘기 하고 있지만, 이제 헌법적 평가에

대한 부분은 더 이상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서 십 수년 지나고 나서 이 부분에 대해서

다시 논란이 된다면, 그 때 가서 위헌이다 합헌이다 얘기를 해야겠지만, 이번에 헌재에서 내린 결정을

보게 되면은 헌법재판자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헌법 입법자들이 알아서 이 부분을 해결을

해라고 공지를 올려 놓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보시다시피 15 년부터 해서 지금 줄기차게 의원입법을

하고 있습니다. 의안을 제안해가지고. 그래서 15 대, 16 대, 17 대, 그래서 18 대에는 아주 재미있게 세

건이나 올라가 있습니다. 매년 한 건씩 올라가 있죠. 2008 년, 9 년, 10 년. 10 년은 올해죠 그죠. 얼마

전 한나라당의 주성용 의원 외 10 명이 제출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체 299 명의 의원들이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데 거의 3 분의 1 이 여기저기 다 끼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발 좀 논의를 제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앞서서 보시면 아시겠죠. 철이 없게 했느냐면 심사 진행 중에 임기만료 되고, 지금 계류되어

있는데, 이것은 정말 생각한 바에 의해서 헌재가 그렇게 화두를 던졌기 때문에 입법자들이 거기에

대해서 화답을 하는 차원에서 하는 것인지, 하는 시늉만 하는 것인지 국민들은 지켜 볼 거예요 분명히.

저도 지켜보고 있을 거고요.

그래서 일단 공이 입법자들에게 넘어가 있다는 것. 맺음말을 쓰려고 했는데요, 맺기에는 너무

무겁도 많은 고민을 더 해야될 부분이기 때문에 마지막에 정리를 하자면, 사법 살인은 앞서서도

말씀드렸듯이, 사법 불법의 관여자들의 사회적,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사법적 불법에 관하여는

남들이 나서서 얘기하기 전에 자기 반성을 해야 한다는 얘기예요. 스스로가 반성해야죠. 그리고

이용우 대법원장이 사과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건성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예요. 진심 어린

속죄를 국민 앞에 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지 우리가 사법부를 믿고, 신뢰하고 그 권위를 지켜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헌법적 평가에 관련해서는 합헌 결정에 대한 구속력이 있다고 봐야 되겠죠.

18 대 국회에서 이 문제가 좀 처리되기를 좀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상당히 부끄럽습니다. 올 연말이 과연 잘 넘어갈까. 그래서 지금 토요일에도

엠네스티에 올라가서 일을 봐야 될 상황이에요. 연말이 다들 괜찮을 것이라 얘기를 하셔요. 왜냐면,

EU 와 FTA 체제와 관련해가지고 거기 범죄자 인도 조약에 대한 부분을 걸어놨기 때문에, 쉽사리

우리 정부에서 사형집행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데, 최근에 나라 돌아가는 상황이라던지

MB정권의 어떤 성격, 벌써부터 법무부 장관의 행보 같은 것 등을 다 종합해서 보자면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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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지금 60 여 명이 전국 4 개의 금성청결로 분산되어 있거든요. 이 사람들 올 해 마지막 달력

뜯을 때까지 아마 떨고 있을 거예요. 극심하게 정신적인 고통도 받고 있을 거고, 알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다만 하나 바람이 있는 것은 뭐냐면, 제가 어제 밤 늦게까지 확인을 했거든요. 지금

정기회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 어떻게 되고 있나 봤더니만 11 월 29 일자로 14 차 전체 회의

소위원회 가입 기준 동의안이 회부가 되어 있어요. 바람이 있다면 올해가 가기 전에 반드시 비준

동의안이 가결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안 11 조에 보게 되면 우리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인류의 나라에 도망을 하면, 거기에서 구제행동을 받아서 돌아오게 되면

사형선고를 못 하게 되어 있어요. 집행부는 물론 선고도 못하게 된다는 얘기죠. 그러면 우리나라의

지금 현재 사형수 60 명 들 집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말이 안 되겠죠 그죠. 그래서 간접적인

측면에서 사형집행을 금지하기 위해서도 올 연말 안에 의원들이 제대로 일 좀 했으면 좋겠어요.

발표는 이정도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장철준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제가 예상하기로는 사형에 대해서 헌법적인 논의를 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을 안 하셔서 굳이 제가 그것을 끄집어 갖고 와서 하는 거 아닌가, 좀

그렇네요. 말씀하신 것 중에, 강의에 좀 전제하셔야 할 부분에 대해 좀 드리겠습니다. 사형에 대한

문제는 그 다른 법적 문제에 비해서 개인의 믿음이나 신념, 사회 성격 등과 굉장히,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헌법에서는 어떻게 사형을

전제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것을 정확하게

알아보는게 법을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일단 사형을 반대하시면서 기본 전제로 안 좋은 것이다 라는 전제를 하시고 계신 것 같아요. 그

이유는 그 간 우리나라에서 경험하였던, 말씀하셨던 그 안 좋은 기억, 사법살인과 오류에 의한 인권의

침해, 생명의 침해라는 unusual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근거해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과거의 문제에 대해서 저도 100% 동의를 드리고요,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요새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말도 많이 하는데, 민주화 이후의 우리의 법제도와 특히

사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과연 인혁당 사건 같은 것이 지금 다시 일어나리라고는 별로

그렇게, 제가 너무 유토피아 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사회가 그

정도까지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요 근래 경험, 아무리 지금

정치체제가 회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 하더라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제는 좀

더 정상적인 차원에서 그 환경에 전제를 놓고, 사형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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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31

그래서 제가 놓고 볼 것은 쓰신 글 중에 과거에 그런 경험들은 일단 뒤로 하고, 과연

오판이라는 가장 큰 장애물이 남는데요. 오판이라는 또 하나의 unusual 한 그런 가능성 때문에 사형을

완전히 폐지시켜야 되느냐, 저의 개인의 identity 에 관한 문제는 저녁에 얘기 하기로 하고, 저는

토론자를 맡았으니까, 토론자는 원래 반대되는 맛이 좀 있어야 하니까 그 역할 좀 하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존치론이나 폐지론이나 하나의 획일적인 제도의 적용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와 갈등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형 존치론은 당연히 사형을 존재해

놓고 이를 사법제도를 통해서 계기적으로 적용하다 보니까 사형 시키지 말아야 할 사람을 잘못해서

사형을 시키는 잘못이 나올 것이고, 사형 폐지론을 한다면 과연 사형을 없애버릴 때는 수많은 사람을

연쇄 살인마라고 하는 생각 만해도 무서운 그런 사람을 그리고 어린 애기를 함부로 성적인 대상으로

나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과연 이렇게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법감정으로 생각했을 때, 저런

사람은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까지도 사형을 시키지 못하는 그런 부자연이

발생을 하게 되는데요.

그러니까 이러한 생각들이 제가 보기에는 하나의 큰 대전제의 생각, 그리고 그것을

획일적으로 변경하려는 사법 관습, 형태, 제도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돼요. 그래서

아직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사형제도를 완전히 폐지하자, 또는 그대로 놔두고 그대로 집행하자 라는

일방적인 쓸 수 있는 주장보다는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과연 이 두 상황을 함께 담아낼 수 있는,

중간적인 단계로서의 해결방법은 없을까 하고 그렇게 한 번 생각을 해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간의 우리의 사법 시스템에 국민에게 그런 신뢰를 주지 못할 정도라면, 조금 더

나은 시스템을 도입하는 방법으로라도 사형 폐지론자들의 불만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 장을 만들어

주는 것이 어떨까. 그러한 아이디어로 생각해본 것이 국민참여재판입니다. 소위 배심제라는 것을

우리가 어느 정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사형을 구형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는 정도의 사건이라면

기존의 재판 말고 배심 재판을 통해서 제대로 한 번 자신을 변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하는 것이

어떤가. 또는 지금의 우리 사법시스템에 줄 수 없는 신뢰의 정도를 한 번 주면서 제도 자체를 일단

바꾸지 않고, 주면서 마음껏 자신을 변론해 봐라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한 번 구현해 보아라, 소위

의정부 절차에서 나오는 불만은 없을 정도의 환경을 만들어 준 다음에, 우리가 그 정도의 해보고 난

후에 다시 한 번 사형에 대해서 이것을 폐지해야 하는 건가 없애야 하는 건가에 대해서 논의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글을 하나 안 쓰고, 사형제도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서 우연히 찾던 중에 미국의 애들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나 보게 되었는데요, 어떤 논문 중에 그런 게 있었습니다. 유아 성폭행, 그 사건에

대해서 사형을 구형한다는 그런 판례가 있었습니다. 과연 살인이라는, 이 비정상적인 사법 살인의

경험 말고, 살인이라는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 사형을 줄 수 있느냐가 주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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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안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부르지 않는 범죄에 대해서 그 범죄자를 사형 시킬 수 있느냐, 이런

논의였어요. 주된 논의가 뭐냐면, 범죄와 형벌은 비례하여야 한다라는 논리에서 아홉 가지 우리 형벌,

수많은 죄들 이 둘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 지고 있느냐를 따져야 하는데 이 아홉 가지 리스트 중에서

맨 위에 있는 사형은 만약에 지워버리고, 우리가 비례를 논의한다면 과연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국민들의 법 감정과 사법제도에 대해서 느끼는 생각들, 그런 것들이 갑자기 맨 위의 것이 바뀌면 너무

힘들어 질 것 같아요. 다시 생각을 적응하기. 그렇다면 그것을 놓고도 당분간은 이 비례의 원칙을

제대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만약에 생긴다면, 일단은 먼저 그것을 택하고 그 후에 조금 해본

다음에 그 후에 다시 사형의 정당성을 논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굉장히 시사점을 얻었던 것이 아까 선생님께서도 말씀 하셨습니다만 사형에

관한 문제는 일단은 법리에 관한 문제는 조금 먼 것 같습니다. 사형은 정치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안에서 결정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느끼고

있었던데요, 이 저자는 그 범죄자에 대하여 사형하는 것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논거가 뭐냐면

첫째가, strong rational consensus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살인을 부르지 않은 범죄자에 대해서 사형을

가하는 것에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 거기에 동의가 있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근거입니다. 두

번째 논거가 균형이 맞지 않다, 세 번째 논거가 US penalty system을 아예 망쳐버릴 위험이 있다. 왜?

이것은 이런 상황에서 사형을 구하는 것은 보복 밖에 안 된다. 보복의 개념으로 사형을 가하는 것에

대하여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international opinion. 사형을 유지하고 있는 소위 선진국 국가 중에 유일하다고

싶을 정도의 나라가 미국인데요, 다른 나라의 눈치를 많이 보고 있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생각 좀 하자, 연방 대법원장까지도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정치적인 문제의 사형을 우리도 좀 심각한 문제로 생각해본다면, 아직까지는

국회의원들이 발의를 매년 내는데 아직 법안으로 오지 못하고 있고요, 아직 국민들 절반에 물어봐도

아직까지는, 양 의견이 팽팽하던지 존치한다는 의견이 높던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맨 위에 있는 사형을 없애버린다면, 과연 우리 system 과 그 system 안에 살고 있는

국민들은 어떻게 느끼고 반응할까를 생각해보면 혼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런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간단히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요청드리면서 코멘트를 마치겠습니다.

이덕인 좋은 지적 감사하고요. 제가 여러분들한테 좀 생각을 해보시라고 31 페이지부터

보겠습니다. 불과 한 10 월부터 11 월, 두 달 정도 사형문제와 우리나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

방금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참여재판에 관한 부분도 우리나라에는 안 하고 있지만 11 월 16 일에

일본 요코하마 지방 재판소에서 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좀 늦었죠. 참여재판이 우리보다 조금

늦었지만 우리보다 빨리 사형선고를 시민들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일본 같은 경우에는 피고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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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33

신청하지 않아도 반드시 참여재판을 하게 되어 있지만 저희 같은 경우에는 피고인이 반드시 신청

해야지만 참여재판이 가능합니다. 구조가. 그래서 참여 재판의 구조가 다르다는 점도 그렇고요. 과연

왜 법관이 양형에 대한 부분, 특히 사형에 대한 부분은 물론이고 양형에 대한 부분에 짐을 덜려고

시민 사회에 이 부분을 던졌는가. 이 부분을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저는 느끼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이전부터 사형은 양형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형의 가장 위에 있는 최고형인 사형을 폐지해야 하느냐 하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근본적으로 사형이 양형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 죄 있는

사람에 대해서 유죄다 무죄다 라고는 얘기 할 수 있죠. 죄가 있다 없다고는 얘기 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사람한테 얼마나 적정한 양형을 가할 것인가는 상당히 곤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계면에서 무기형이 되고, 사형이 되고, 또 유기에, 자유형에 되는 것인가에 대한 경계면에 대한

부분에서 상당히 쉽지 않은 문제라는 얘기죠. 그래서 특히나 사형은 그렇습니다. 유무죄에 대한

확정은 가능하지만 너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라고 얘기할 수 있느냐 이거죠.

그와 관련해서 우리나라에서 사형권고적인 것이 33 페이지에 10 월, 11 월에 걸쳐가지고

찾아보니까요. 10 월 7 일 수원지법 여주지원 형사부에서 가정주부를 24 차례에 걸쳐서 성폭행을 한

성폭력범에서 사형선고를 내린다. 사람 안 죽었어요. 물론 최근의 어떤 상황이 성폭력 범죄에 대해서

상당히 국가적인 관심이 일어나고 있고, 어제도 보니까 동영상 돌고 이런 얘기 하던데요. 상당히

악랄한 범죄죠. 여성들의 관점에서는 죽음보다도 더 치욕스러울 수 있는 상황인데, 사람의 생명이

죽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사형 선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들이 배심원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형선고를 하시겠습니까. 어려운 문제라는 얘깁니다. 왜 그 어려운 문제들을 법관들은

시민들에게 그것을 돌리냐는 것이죠. 화살을 피하려는 것 아닐까요. 제가 너무 불온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그런 생각도 가지게 되고요. 또한 법감정과 관련해서는 참 법감정이라는 애기는 참

애매해요. 사회통념 만큼이나 애매한 개념인데, 우리에게 있어서 법감정이라는 것이 뭐냐, 그 실체를

한 번 파고들면 우리 어렸을 때도 교육 잘 못 받았어요.

여러분 형법 각칙 보시면 법익별로 나뉘죠. 교과서는 그래도 그나마 개인적 법이 제일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법전 각칙편에 보게 되면 국가적 법이 가장 먼저 오죠. 그럼 국가가 먼저이고, 37 조

2 항과 똑같은 논리 아닙니까. 국가안전보장을 위해서, 공공복리를 위해서 개인은 희생 될 수 있다는

그런 논리.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예요. 집단 중에서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삐져나오면 쳐

내겠다는 그런 생각이, 전제적인 생각이 아직도 도사리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교육을 받았고, 살신성인하는 것 우리가 굉장히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아름답죠. 나를 버려서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다. 결국은 사형수의 목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사형수의 목숨을

제거함으로서 인해서 확인되지도 않는 일반 예방과 특별 예방의 효과들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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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하는 것들, 우리가 허구인 것들을 강요받으면서 우리가 교육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법감정인 것이죠.

역시 거기서 현실 속에서 언론도 그 시기마다 그렇게 이야기 했었고. 그런 일은 없어야

되겠지만 사형 집행이 있고 난 다음에 여러분들 조중동은 물론이고, 다양한 매체들에서 어떻게 논조를

가지고 사형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는가 스크랩을 해보세요. 정말 그런 일은 없어야 되겠지만. 앞으로

만약에 집행이 있다면. 정말 경멸스러울 것입니다. 그 논조들이. 그래서 그런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생각들을 많이 해봐야 하는 부분이거든요. 헌법에 대한 지식이 문외한이라는 것이 그런지 자꾸 그렇게

고착화가 되네요.

일단 공이 넘어 왔으니까 일단은 의원들의 목을 졸라야 한다. 계속해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딴 짓 좀 하지 말고 할 일 좀 하고 해라. 지금은 반항하는 것 그 자체가 가장

사회학적 측면에서 그렇다는 얘기죠. 법학적인 측면에서 비례서의 원칙도 있고, 최소침해의 원칙도

얘기해야 할 것이고 그런데 그것은 학사 속에서의 문제 아닐까요. 현실의 문제를 지금 개혁을 해야

되겠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이의 제기를 해야 하는 것이고,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대외적으로 그런 효과가 있겠지만 한동인들 중에는 법 조직에서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을

끌고 나갈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래서 이 사법살인에 대한 죽임도 이국운 교수님이 주제를

잡은 것이 여러분들한테 사법적 양심에 대한 부분을 한 번 생각해 봐라, 법조윤리를 한 번 생각해

봐라, 그리고 제가 발제문 앞에 보게 되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우리나라보다 1 년 앞서 가지고 헌법

재판소에서 내린 결정이 있습니다. 상당히 방대한 양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밤에 가슴이 뛰어서

잠을 못 잤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 번 읽어보십시오. 원문이든, 동아대학교의 허일태 교수님의 책을

구해서 읽어보세요. 한 번 읽어 보시고 판단을 내려봐 주십시오. 여러분들이 그 다음에 사법 윤리,

사법적 양심을 가지고 있는 법조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국운 감사합니다. 제가 이 모임을 지금 기획했는데 제 기획으로는 두 번째 발제까지

끝나면 여러분들이 롤러 코스터의 꼭대기에 올라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제가

성공했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사형이 아주 근본적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사형 존치론과 사형 폐지론. 정의와 humanity 가 부딪히는 어떤 길목에 여러분들이 다다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읽게 될 두 글은 그것을 조금 더 사상적인 측면에서,

역사적인 측면에서 다루고 계신 글입니다. 먼저는 우리 안진 교수님께서 존 로크의 정치 철학에

입각해서 사형제도에 관해서 입장을 말씀해 주시겠고, 그 뒤에 불란서의 입장을 장세룡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시겠습니다. 지금 우리 지승원 교수님께서 태권도 수업을 하러 가셨는데, 지 교수님께서 이미

글을 꼼꼼히 읽으시고 여러분이 다 갖게 되시는 한 장 짜리 작은 토론문을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지

교수님이 계시지 않지만 일단 먼저 발제를 듣고 지교수님이 오시면 함께 논찬을 나누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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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35

진행하겠습니다. 시간이 조금 오버되고 있는데, 교수님들께서 하실 말씀이 많으시겠지만 글이

있으니까 조금 가능하시면 시간 아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안진 교수님 멀리 광주에서

오셨는데 다 시 한 번 박수를 드립시다.

안진 여러분 반갑습니다. 광주에서 포항까지가 얼마나 먼지 제가 오늘 실감을 했는데요.

이국운 교수님은 지난 번 여름에 저희 법사회학 학회에 ‘불멸의 신성 가족’이라는 법 사회학 유명한을

글을 써서 논평을 해 주러 오셨는데요, 그 때 이렇게 먼 길을 힘들게 오신 줄 몰랐어요. 제가 거꾸로

이렇게 와 보니까 아 정말 차가 하루에 네 번 밖에 없더라고요. 아침 첫 차 8 시부터 저녁 막 차 5 시.

아 오늘 나는 집에 돌아갈 수 없겠구나 하고 가능하면 첫 차를 피해서 여러분들처럼 저도 올빼미

체질이라서 되게 이동은 9 시 이후에 하는데, 새벽 6 시에 일어나서 서두르고도 오늘 중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제가 사실은 사형제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에 대해서 굉장히 논쟁 중심에 뛰어 들어서

무언가를 좀 애기하고 싶은 그런 마음에 상태는 아닙니다마는, 이국운 교수님이 제가 어떻게 로크의

사형론을 발표한 것을 콕 찝어서 아시고 대충 학자들의 연구들을 다 꾀고 계신 것 같아요. 저보고

학교가 너무 아름답고, 학생들이 너무 좋다고, 꼭 한 번 오라고 그래서 꾀 많은 꾐에 빠지게 되어서

오게 되었는데,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 행사만 해도 학생들이 들락날락하며 정말

자발적인 관심을 가지고 끝가지 참석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여러분들이 이렇게 마지막 발표까지

자리를 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다행인 점은 앞의 두 분의 발표는 상당히 법 정치학적인, 입법하고 관련된 논문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저는 어찌 보면 로크하면 법철학 사회 사상에서 대가 중에 대가인데, 저는 로크의 사상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사회학자로서 범죄 사회학을 석사 때부터 열심히 연구하다가 지금은 인권법,

범죄사회학, 법사회학을 로스쿨에서 가르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로크의 전체 사상을 알면서 그

맥락 속에서 이 사형론을 정리를 했다고 하기에는 아주 부족한 글입니다. 그런데 개인 적으로 제가

범죄 사회학자로서 1980 년대 중반부터 저는 범죄학자로서 굉장히 자신있게 사형제 폐지론자였습니다.

나만큼 폐지론의 논거를 확실하게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판의 가능성, 오판의

사례들, 오늘 이 교수님이 발표하셨던 사법살인의 경우처럼 사형제의 악용과 오남용, 이런 경우의

증거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사형제 폐지에 대해서 어디서 저보고 얘기 해달라고 하면 범죄 사회학

강의 시간에도 정말 열정적으로 자신있게 강의를 했었고, 어디를 가도 나만큼 그 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요.

사실은 저의 발표는 앞에서 발표하신 두 분 발표와는 다르게 사형제에 대한 폐지 입장이

아니고, 예외적으로 사형제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제가 대학원 가서 30 년 이상 확고한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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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폐지론자에서 왜 예외적인 경우에 있어서 사형제가 존재해야 하는지 그 다음에 그 지루하고 지겨운

사형제 존폐논쟁이 왜 지금까지 종지부가 찍어지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인지 그 원인을 제가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을 깨닫게 된 계기는 제 아주 가까운 가족이 살인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 지금까지의 우리 인권 법학자의 논리들, 그 다음에 많은 법조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의

논리는 그 오피니언 리더와 많은 법학자 법조인들이 사실은 살인의 피해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보호받는 자유로운 사람들이었구나. 그런데 내게 이런 학자로서의 번민과 고뇌를 주면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의 생명권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내가 가진 지식을 다시 성찰적으로 되돌아 보게

하는 그런 소명을 주신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제가 기존에 공부하고 읽었던 것들을 다시

공부하게 되면서 존 로크를 정리했습니다.

저는 원래 제가 대학 시절이 아주 심취해서 읽었던 것들이 자유사상가들의 책은 아니고

막스주의 사상가, 막스 이론가들의 책에 심취했었기 때문에 이런 책들을 읽는 것을 아주 꺼려 했었고,

아주 지겨워하고, 싫어하고, 자유주의가 주는 이데올로기가 주는 것들로부터 거리를 주고 있었고, 제가

70 년대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이 글을 정리하고 나서도 다시 전 보고 싶지가 않았어요. 다시

사형제도의 존폐 논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로크의 관련 문헌을 번역되어 있는 참고문헌을 보면

중요한 제 서가 나와 있어요. 이 글을 정리할 대 참고한 제 서가 나와 있는데 여러분들 혹시 기회가

있으면 그 고전을 읽었으면 좋겠고요. 거기 그냥 읽고, 사형제도가 예외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에

대한 논거가 이런 대가의 저작 속에 있었구나, 그 다음에 어떤 법조계나 인권법의 담론에서

사라져버린 그것을 찾아내서 한 번 건져 놓고, 그리고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읽고 싶고 하고 싶고 뭐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사실 이 글을 쓰고 나서 잠시 덮어두는 그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로크의 사형론을 사상 소개는 간단하게 하려고 합니다. 왜냐면 앞서 두 분이 시간을

많이 쓰셨기 때문에 저하고, 우리 지교수님이 시간을 좀 절약해 드려야 되는 점도 있고요. 로크의

사형론을 정리하게 된 중요한 동기는 그렇습니다. 아까 이 교수님이 생명을 앗아간 경우가 아닌

24 명의 주부들을 성폭행 한 사람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 수원지법의 케이스를 인용하시면서 그게

사실은 성폭행과 강간의 피해자인 여성과 그 가족의 입장에서 저희가 이렇게 이야기 했을 때 그들은

어떻게 느낄까. 제가 피해자의 관점이 되면서, 물론 그 사람들은 아주 노련한 범죄자들이죠, 죽이지

않은 것은. 그리고 제가 한 가지 놀란 것은 살인범들과 살인범죄 케이스와 피해자의 피해 케이스를

저는 사회학은 연구했기 때문에 그 케이스 연구와 심층 연구와 그 면접을 해 본 적도 없었고, 그

다음에 지금까지 사형제 존폐 논쟁의 그 공백을 메워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괴롭게도 정말 흉악한 살인범들의 케이스를 찾아서 재판기록, 책, 기자들이 가지고 있는

케이스를 가지고 연구를 했어요. 그 과정이 저에게는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왜 우리는 밝은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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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37

보고 밝게 살아야 되잖아요. 그 자체가 저한테 정말 내공을 쌓아서 호흡을 하지 않으면 할 수 없었던.

예컨대 20 명을 죽인 유영철, 여러분은 살인마라고 언론에서 많이 하죠. 그 사람은 살인마가 따로

없어요. 아주 평범한 인간이예요. 그렇지만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고. 20 명의 한 여자들만 골라서

죽여가는 케이스 하나하나를 보는데 그런 죽음도 아주 즐겁게 교도소에서 열심히 글을 써서 그 글을

요구하고 받는 사람에게 열심히 보내줘서 살인 중독이라는 책이 하나 나왔어요. 여기서는 이제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20 명을 죽이게 되었는가를 다루는데, 물론 그 사람은 아직도 자신의 궁극적인

동기가 있어요. 몸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된다. 주로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자들을 골라서 막 했거든요.

그리고 사실은 그 사람이 처음 살인에서부터, 첫 살인의 자기 어머니의 반응과 마지막 가는 길까지

정말 합리적인 결정을 하거든요. 한 번 하고 나서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여러분들 잠 오는 시간에

맞춰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은 분쇄기에 갈고, 토막내고 그 사람은 어쨌든 자신의

범죄를 숨기고 잡히지 않기 위한 생각 외에는 하지 않아요.

그런데 정말 이런 타고난 살인마만 그런 것이냐, 저는 살인범들을 연구하면서, 제가 그

케이스 연구를 발표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어요 앞으로.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찌보면 처음에는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라난 사람들인데 그런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사실은 제

가까운 피해자의 경우에도 마지막 대법원 재판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다 찾아가서 봤거든요. 사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법정에 오지를 못합니다. 저는 법학 교수이기 때문에 끝까지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고통 때문에 그 자리에 아예 가지를 못 합니다. 무조건 용서한다는 마음을 가지

않으면 견디지를 못 합니다.

제 가족의 피해자의 경우는 또 다른 여성도, 두 명의 여성을 살해했던 살인범이였는데 그

다른 피해 여성은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은 대학생이예요. 그 딸은 어떤 경우에도 재판에 오지도

못하고, 어떤 대화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피해 유족이 사는 길은 무조건 잊어버리고 사는 길

외에는 없기 때문에. 그 다음에 정의나 법이 얼마나 허망하고 기만적인지 거기에 대한 분노밖에

없습니다. 유영철이 살해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남성이 한 명 끼어 있는데, 그 남성의 형과 동생은

죽었어요.

법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좌절 때문에. 그래서 그런 피해 가족들의 기록까지 더듬으면서 내

마음을 향한 과정에서 정말 대 철학자지만 칸트나 헤겔이나 이런 사람들이, 제가 정말 범죄학자로서

대학원 시절 감명깊게 읽었던 게 공리주의 사상이 풍미하던 시절에, 데칼리아라고 알 겁니다.

데칼리아의 ‘범죄와 형벌’이라는 그 고전을 읽고, 학생들에게 과제물도 내 주고 했는데, 데칼리아

조차도, 사형의 반대 논거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데칼리아의 논거거든요. 어떤 논거입니까.

우리가 사회계약을 할 때, 주권자에게 우리의 권리를 위임할 때, 내 생명까지 가져가 달라라고 위임한

적은 없다는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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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생명권 만큼은 국가가 어떤 경우에도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이렇게 했는데 제가

데칼리아를 다시 읽어보니까 데칼리아가 예외적인 경우에 사형을 허용해요. 왜 그런 대가들이 항상

예외적인 경우를 고려했는지. 그래서 제가 로크 사상을 아주 간단하게 소개할겁니다. 왜. 여러분들이

고전을 읽거나 더 하시면 되니까. 내용을 읽자면 저도 지루하고 여러분도 지루해요. 그런데 사형제

존폐론 논쟁은 어떤 폐지론을 지지한다, 사형제 존속을 지지한다라고 놓고 거기에 유리한 케이스와

이런 것을 가지고 주장함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남용하거나, 오용하거나, 주로 오남용을 오판의 가능성으로 얘기하죠. 그것을 이제 사형제

존속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적 공권력이나 파시즘 치하에서 형벌을 무겁게 부과하고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이미 존치론자들도 세련 될 만큼 세련이 됐어요. 그래서 이 예외적인 다른 사람의 생명권을

가져간 사람에 대한 처벌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앞으로의 논의는 사형제 존폐론이,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이 넘어야 될 산은 살아있는 그 범죄자, 살인범, 정치범은 제가 예외로 합니다.

우리 장교수님께서 토론을 너무 잘 해주셨기 때문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주신 것 같아서 더

얘기할 게 없어요.

넘어야 될 산은 그 살인 범죄의 피해자의 생명권을 국가가 보장해 줬어야 되는거죠. 그

보장해주지 못한 피해자의 생명권, 그 다른 사람의 생명권을 앗아간 사람의 생명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코 두 가지를 함께 보지 않습니다. 저는 인권법 강의 시간에

항상 그것을 이야기 합니다. 인권은 무지 공산의 한 사람의 인권을 떼어 놓고 봐서는 절대 안 된다.

여러분, 학생이 있고 교사 인권을 같이 논의될 수 없죠. 집에서 부모님간의 갈등 속에서도 심하게

인권을 침해 당하는 상황이 있잖아요. 부모의 양육권 다 같이 가는 거거든요.

생명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권리하고 성격이 다릅니다. 한 번 뺏기면 되돌릴 수 없는

거거든요. 다른 어떤 권리 구제의 길이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국가는 뭘 할 수 있는 것인지. 남아

있는 피해자들에 대해서 뭘 할 수 있는지. 그것을 언급하지 않고 사형 폐지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마

삼십 년의 오십 년의 그 긴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법관들의 사형제를

피하기 위한 판결들, 아까 이교수님은 죽이지도 않은 성폭행범을, 죽이지도 않았는데 24 명의 가정

주부를 성폭행한 사람에 대한 사형선고를 아주 가혹한, 사실 여자 판사가 주심 판사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아마 굉장히 판사들의 그런 것이 많이 작용하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두 명 세 명을 죽였는데도 무기 징역이 선고 된 경우가 더 많아요. 제가

가까이에서 겪은 그 경우는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판사의 논리가 법리가 없어요. 법리는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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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39

법리의 정의가 살아있다면은 사형 이외에는 길이 없거든요. 그런데 무기징역을 선고하면서 그

사람들이 이미 우리 거대한 인권 담론에 사회적인 담력, 그 다음에 또 재미 있게도 굉장히 공정하고

엄한 판사로 대접받는 분이었는데, 그 분이 1 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해서 봤더니, 바로 판사계의

변호사 교육을 하시더라고요. 이미 자신이 변호사로 나갔을 때를 생각하는 거죠. 그 다음에

법조집단의 사형 선고를 한 법조인으로서, 판사로서의 딱지를 의식하는거죠. 전문가 집단의 윤리, 직업

분위기 이런 것들의 압력을 더 받는 것이지 순수하게 법리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판결문 하나하나 분석을 해보면 다 나옵니다.

그리고 그 판사는 사형을 내리고 싶지 않으니까 정신 감정을 의뢰합니다. 너무 합리적이고

냉혹하고 정말 기가 막히게 과학적인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정신감정을 해 보니까 어떻습니까.

정상으로 나오죠. 그러니까 언젠가는 이 사람이 회개할 기회를 가져야 되니까 사형을 내리지 않아야

된다고 판결문에 썼어요. 그것이 판결문입니까. 고등법원 판결은 어떻게 나왔냐면, 원심파괴입니다.

원심 파괴가 굉장히 특이해서 또 다 찾아보고, 판결문을 봤는데. 그 사람은 의사가 정신분열병을

진료하지 않았을지라도 사회 심리적으로 정신 분열증이 있을 수 있다. 피해 망상이 있어서 이렇게

했다. 그래서 똑같은 무기징역이지만 심리 정신적으로, 사회 심리적으로 정신 상태가 그렇게 때문에

그것에 의해서 피고인의 심신미약을 받아들인다는 거죠.

이 법조인이 진정하게 피해자의 생명권과 그 다음에 살인범의 처벌과 생명권과 고뇌하고

고민하면서 하는지, 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피해자의 입장에 있어야 합니다. 형벌권은 우리가

위임했기 때문에. 로크의 논의에서도 그런 것들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결코 피해자의 입장에 있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판결문의 내용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발표를 하고 싶습니다.

사회학자이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로크의 사형론과 형사정책적인 함의는 제가

중요한 핵심 내용들만 소개를 하자면요, 시작하며 글에는 왜 지금도 법조계, 법학자들, 언론계,

오피니언 리더들을 조사하게 되면 인권위원회의 2003 년도 조사에 보면 나옵니다. 약간 50% 정도가

사형제 폐지를 주장을 하는데, 왜 일반 국민들은 70% 정도가 여전히 사형제 존치를 지지 하는지.

그것은 보편적은 도덕 감정, 그런 것이 중요한 원인이지 않을까 하고 나와 있고요.

그 다음에 아까 사법살인의 경우를 예로 이 교수님이 발표를 하셨기 때문에 제가 그 부분은

언급을 넘어가고자 합니다. 어쨌든 제가 서론에서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사형의 오남용이나 악용을

막는 일 하고, 존폐 문제를 따로 떼어 내어서 봐야 하고, 특히 살인 범죄에 희생이 된 생명권,

피해자의 생명권을 같이 논의하지 않고서는 사형제에 대한 존폐논쟁은 세상적이지 못 할 것이다. 그

종료는 힘들 것이다 라는 얘기를 하고자 했고요. 그리고 이제 서론의 마지막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로크는 사실은 자유주의 국가 이념에 아주 철저했던 사람이고, 국가라고 하는 것은 어쨌든

개인의 자유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여러분이 알다시피 인권법에서도 로크나 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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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중요한 이유가 국가에 대해 정할 수 있는 권리도, 국가가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에는 저항권도 프랑스 인권 선언 같은 경우도 명문화 되어 있고, 생명권도 중요한

세계인권선언문에 다 명문화 되어 있습니다. 우리 헌법에는 그렇지 않지만은. 그런데 이런 자유주의

사상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로크는 사실 생명권이 다른 인권과 마찬가지로 양도 불가능한

권리이지만 왜 사형을 예외적인 경우에 유지할 수 밖에 없다고 봤냐면, 그 논거가 아주 재밌습니다.

제가 보고자 하는 것은 로크 논거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순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인범들을 통해 침해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자기 생명권을 로크 식으로 표현하면

forfeit 이라고 표현합니다. 자기의 생명권을 상실하고 몰수 당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국가가뺏어온 것이 아니고, 국가에 사회계약을 통해 그 권리를 양도 했던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그것을 버린 것이다라고 봅니다. 로크가 이런 흉악범들의 경우에 사형을 유지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에

대하여 데칼리아와 똑같은 근거를 내 세웠던 것 같은데, 그것을 어떻게 같이 끌고 갈 것인가를 이런

논거로 정당화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생명권, 살인 범죄자의 생명권은 그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고 forfeit 한 것이라고 보고 그런 것들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두 가지 정도인데,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이 범죄나 여러 가지 자유권을 침해 당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가. 그 이후에 그것이 사회

계약에 의해서 국가를 형성한 다음에 그 권리들은 어떤 식으로 희생되는가, 이런 것들을 설명하는

부분들이 있는데요. 이제 그런 그 두 가지를 정리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제 2 절에 넘어가면 로크의 자연상태의 개념과 자연법적 형벌권이 나오는데, 로크의

자연상태의 개념은 홉스가 말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와는 다릅니다. 거기 두 번째 단락에

나와 있던 것처럼 자연상태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평등한 자연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고, 프랑스 인권

선언에 나왔던 것과 비슷한 표현을 제가 비유해서 들자면 다른 사람의 자유,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그것은 마음대로 향유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회과학에

의해서 자연상태에서 심사를 이행하게 되면 생명자유재산, 이것을 보다 갖기 위해서 국가에게 위임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3 절에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생명, 자유, 재산을 더 잘 보장받기 위해서, 첫

번째는 안전하게 보장받고 두 번째는 그것이 침해 당했을 때 어떻게 그것을 구제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국가의 말하자면 자연법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에서 사회 계약

이후의 단계를 이행해가게 되는데, 국가에서 입법을 하고 그 다음에 전문적인 법률 관료를 재판관으로

두고, 그리고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행정부의 권력. 이 세 가지를 만든 체제 내에서 형벌권을

국가에게 위임을 하게 되는 그런 상태로 넘어갑니다.

사실은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 극악한 폭력을 행사한 살인범의 경우는 그 살인을 당한

피해자의 친족들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 사람에 대해서 형벌권을 갖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일단은 공동체 전체의 모든 이의 유대를 해친 것이기 때문에 그 사회 전체의 유지를 결집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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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41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하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사형론에 들어가게 되면, 4 절에 들어가서 보면

사형 정당화의 논거는 생명권은 양도 불가능한 것이지만 제가 언급했듯이 누군가의 생명권을 침해한

사람은 그 침해한 순간 자신의 생명권을 상실하고 무효화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형은 정당하다.

이렇게 봤고요. 거기에 네 번째 단락에 나옵니다만, 살인 의도를 가진 폭행이나 전쟁, 이런 행위들은

생명권 침해 행위들은 그 행위를 한 자신이 스스로 생명권을 무효화한 것이기 때문에, 상실한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 자신의 생명권을 양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권을 상실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첫번째 논거고요. 그래서 인용문 뒤에 나옵니다. 45 페이지 고전 인용문 뒤에,

생명권은 양도 불가능하지만 스스로에 의해서 상실되고 무효화 된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고, 또

생명권의 무효화가 타인의 생명권을 침해한 순간 그 사람의 생명권은 완전히 상실되고 무효화된다고

보는 것이고, 이것은 어떻게 보면 윤리학에서 말하는 우리가 황금률이라 말하는 보편적인 도덕률,

주는 대로 되 받는다 라는 것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형을 정당화하는 두 번째 논거는 제가 응보주의와 공리주의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요,

사실은 형사 정책에서의 논의는 저희가 문제가 된다고 느꼈던 겁니다만 공리주의 입장, 그 다음에

범죄 예방 교정론의 입장하고 공공연히 굉장히 이분법 적으로 두 개로 나누어서 봅니다. 그래서

응보는 마치 원시적인 보복인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는데, 보편적인 윤리 원칙에 의하면 사실은

응보를 전제로 해서 그 다음에 그에 합당한, 정당한 비례의 원칙에 의한 처벌에 의하여 교정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거거든요.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제가 그 사형집행장에 들어가서 거기 사람들까지 면접을 다

했어요. 제 자신이 너무 30 년, 20 년 넘게 지켜왔던 제 입장에 대해서 너무 혼란이 왔기 때문에. 그

분들은 검사 시보로서 그 집행장에 갔던 경험, 그 참회하는 눈물, 그 사람들은 자기가 저질렀던

생명권을 침해했던, 살해했던 그 사람과 똑같은 위협 속에 놓였을 때 참회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살인범이 참회할 이유가 없어요. 반성할 필요도 없고 교정할 필요도 없어요. 그런 경우들을 내가

살인범들의 케이스를 추정하면서 상당히 몇 개를 발견을 했어요. 그 다음에 제 가까운 가족의

살인범의 경우에도 이른바 묻지마 살인인데 반성문은 형식적으로 씁니다. 반성문은 3 차 대법원까지

가는데 기가 막히게 써요. 판사님은 선처 바랍니다. 앞에다가 형식적으로 써서 내요. 자기는

무기징역을 받고, 또 감면 받아서 10 년 후에 나와서 적어도 훨씬 젊은 나이에 사회에 나와서 마음껏

살겠다면서 필요가 없죠.

저는 과거 청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의 것을 많이 봤어요. 집단 학살을 통해서 자기 유년

시절에 가족들이 몰살 당하는 것을 다 봤는데, 그 끌고 갔던 사람이 그 마을에 살아요. 그 고위

인사로 권력잡고 살아요. 그 사람이 자기 죄를 인정하고 정말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면 자기는 모든

한이 풀릴 것 같대요. 그 사람은 노인이 돼서도 한을 품고 살죠. 과거 청산, 다 호소 해보지만 한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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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있어요. 왜요. 그 이후에 더 권력을 잡고 그런 사람들은 결코 참회하지도 않고 반성하지도 않습니다.

그 마을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해서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인간의 진정한 참회와 교정은 언제 가능한가. 철학 윤리학적인 그런 문제들, 제가 이

글을 정리하면서 사실 철학 윤리학자들하고 굉장히 많은 감수를 받고 얘기를 하고 있어요. 사회학은

법학보다는 좀 더 깊고 넓게 사유합니다마는 사회학도 사실은 철학이나 윤리학이나 인문학에 비하면

천박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을 고민을 했던 것인데, 같은 사형 정당화 로크의 경우도

제가 왜 이런 예를 섞어서 말씀을 드리냐면, 이 로크가 말했던, 로크는 사실은 간단한 연고주의형을

주장했던 사람은 아니예요. 그렇지만 어쨌든 범죄 행위에 대한 비례성, 그러니까 모든 사람의 행위,

특히 살인범의 경우는 그 사람의 다른 사람의 권리에 대한 침해에 proportionate 한 형벌이 가해져야

한다는 게 로크의 사상의 두 번째 핵심이거든요.

그래서 그것에 근거해서 내용은 제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해 놨습니다마는, 그래서

이제 공리주의적인 개념은 여러분들, 공리주의에서의 형벌은 형벌의 목적이 일반 예방이든 특별

예방이든 범죄예방효과가 있으면 해야 된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입장이지만, 그러니까 공리주의의

입장은 왜 범죄자에게 고통을, 형벌을 부과해야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설명하지 못하죠. 범죄 예방

효과가 있으면 해야 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로크의 경우는 공리주의적인 범죄 억지라고 하는 것도 그

사람의 범죄 행위에 비례할 만한, 상응할만한 형벌이 가해졌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실은 현대 형사정책에서 공리주의와 응고주의를 딱 이분법적으로 나눠놓고, 건널 수 없이

해놓는 것이 아니라, 로크의 사상에서는 두 개를 좀 융합해서 통합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로크가 이용했던 성경에, 제가 성경을 다시 봤어요. NIV 로 다시 봤는데, 사형 정당화의 논거,

응고주의와 공리주의 이념은 다음에 나와있습니다만, 창세기 4:14 에 하나님이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 말한 부분이 있죠. 그 때 카인이 동생을 살해한 후에 하나님의 죄책을

받은 후 나를 발견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나를 살해할 것이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든 자기 범죄는, 아마 로크가 크리스천의 도덕성에 근거해서

사회계약설이라 이런 것에도 불구하고 흉악범, 생명권을 침해한 사람에 대한 생명권에 대해서 사형을

예외적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이러한 기독교인의 고백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했고, 사회 구성원 누구든 이런 흉악한 짓은 생명을 죽인 누구는, 누구든 찾으면 나를 죽일

것이다. 자기는 영원히 방황하면서 살 것이다라는 것이 나오는데요. 창세기 9:6 에도 보면 ‘타인의

피를 흘리게 한 자는 누구든지 자신의 피를 흘릴 것이다‘ 제가 직역을 해놨는데, 어떤 분들은 이것을

그냥 의역해서 ’다른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바로 해놨더라고요. 그래서 의미적인

표현으로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 사형죄를 어떤 식으로 성경을 논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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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43

해석을 하실지 더 잘 아시는 분들은 어떻게 해설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로크는 이런 것들을 인용을

해서 그렇게 얘기 하고 있습니다.

로크의 사형제도의 형사정책적인 함의는 제가 아까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렸던 세 번째

단락에 나와 있습니다. 미국에서 수정법 8 조를 보면서 사형을 선고한 것을 볼 때는 항상 그야말로

예외적인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외적인 경우에, 물론 그것은 확신범으로서의 증거가 명확해야 할

것이고, 여러 가지 사회적인 장치들이 있어야 되겠죠. 아까 장교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마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연세 대학교 현대 정치사변의 박명민 교수같은 분은 역 회기 불가능성, 아무리 연방들이

날 뛰고 하지만 옛날같이, 박정희 때처럼 하지는 못할 것이다. 역 회기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최소한의 것들은 지켜질 것이다고 보는데요. 물론 우리가 항상 우려하는 것은 그것을

악용하고, 정치적으로 항상 극악한 형벌이, 데칼리아가 주장했던 그 시절에 그랬거든요.

절도범에게까지 사형을 집행했던 시기였었어요. 그런데 이미 우리가 이런 논쟁을 거친 이후에 형사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좀 걸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고요. 거기 세 번째 단락에 잘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생명권 무효화 개념은 생명권 양도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사형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고, 살인범 스스로 생명권의 절대 불가침성을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국가가

보장하고 지켜주지 못한 살인의 피해자의 생명권, 그 다음에 살인범의 생명권은 함께 피해자의

생명권을 범법자의 생명권을 논의 했을 때 형사 정책적으로 굉장히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론에도 제가 그런대로 조금 생각이 보온이 되는 것들을 많이 써 놨습니다마는, 핵심

내용을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교수님의 논평을 받아봤는데요. 다시 한 번 말씀을 주시면 제가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승원 발표자께서 본문보다는 본인이 어떻게 폐지론자에게 존치론자로 바뀌었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맘을 토로하셨습니다. 아마 로크나 루소, 어떤 사회계약론자도 다 경험적인 현실에 대한

자신의 어떤 판단을 근거로 구성을 했어요. 거기에는 자신의 인간관, 그 시대의 사회상 이런 것들이

다 개재가 되어 있는 것인데, 후대의 사람이 그 계약론을 토대로 위대한 사상가가 이런 주장을

했으니까 옳다라고 말하면은 상당부분 놓치게 되는 거죠. 그 당시의 사회상이나 개인의 성향 등. 제가

보기엔 루소도 그러했고, 루소는 복종계약이라는 개념은 인정하지 않고 오직 일반 의지 하나만을

형성하는 결합계약만을 주장한 사람이어서, 이렇게 공동체 구성원 중에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거기에

결합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봐서 이 공동체 구성원에서 떠나버린 사람으로 취급을 해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양보가 필요가 없는 거죠. 상호간의 합의도 없고 사형을 감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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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로크의 경우에는 아마 영국의 여러 가지 상황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저항권을 인정하고 한글로 보면, 억울한 죽음들을 많이 봤겠지요. 당대의 눈 앞에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라도 경험적으로 기억된 많은 것들은 사람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치죠. 그래서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을 경우에 사회 계약에서 이것은 자기가 스스로 forfeit 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그 당부를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고요, 어떻게 보면. 그것은 분명히 자신의

경험을 거기에 투사한 것이니까. 우리가 지금에 와서 이론의 당부를 가지고 뭐라고 하기는 좀 그래요.

그러나 이론적으로만 보자면 양도 불가능성은 포기도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 다음에 루소도 번역할 때는 ‘양도가 불가능한 자행권으로 생명권을 인정’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무효화 될 수도 있는 것인가 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넘어서야 될 것 같고. 그

다음에 로크 이론은 응보적 공리주의를 기대하고 있는 것인데, 계약론의 현대적인 롤스의 경우에

무지의 베일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지위라던지, 특성을 다 모르는 상태에서 계약을 한다고 하자

그러면 어떻게 할까. 이런 주장을 합니다. 그를 토대로 자유주의의 이론 사회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제가 찾아봤어요. 그것이 과연 사형제도도 언급했는가 싶어서 찾아봤더니

색인으로는 나오지 않아요. 본인도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의 이익이 뭔가에

되게 밝은 사람으로 전 절에 나와있거든요.

현대적 인간관을 그대로 투사를 했어요. 그러면 그 중에 이제 자기가 최악의 상황에 몰렸을

때 이 제도를 수용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거죠. 자기가 만약에 흉악한 범죄자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

자기의 선택을 몰라요. 그럴 경우에 마지막 위험은 피하려 하겠죠. 그런 부분에 피해자가 동의 안 할

거예요. 롤스의 계약론은 되게 현대화된 오히려 공리주의를 극복하고 넘어선 새로운 자유주의의

윤리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이론에서도 보면, 거꾸로 보면 사형에 대해서 동일하지 않은 결론에

이르게 되더라고요. 계약론에 의하더라도 로크, 충분히 이해하고, 루소, 충분히 동의할 수 있지만

순수히 이론적인 면에서만 따져보면 계약론이 반드시 존치론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마찬가지예요.

어떤 계약론도 결국은 그의 현실에 대한 그의 경험이 투사된 것이라고 한다면, 사실은

양면을 다 고려해야 하는 것인데 주장자는 결국 그것 중 하나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보면 현실 사회 속에서의 범죄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분명히 둘로 나누어 져 있고요.

말씀하신대로 폐지론자에서 존치론자로 바뀌신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하고 연관이 있으신데, 제가 아주

오래전에 미국에서 오클라오마 주 청사 건물 폭발한 사건 있었죠. 그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졌는가

했는데, 그 집행 여부를 놓고 가해자의 가족하고 피해자들의 가족들 사이에 진술 했던 것, 그 심정을

대비 시켜 놓은 것을 봤어요. 다시 찾아보려 하다가 제가 게을러서 못 찾아봤습니다마는, 아직도 그

의문이 해결되지 않아요. 어느 쪽에 설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쪽을 보면 이쪽이 그렇고, 저 쪽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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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45

저 쪽이 그래요. 아마 제 주변에 교수님처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제가 아무리 목사라 해도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아마 제가 무술을 잘 하기 때문에 쥐도 새도 모르게. 어쨌든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가해자들은 절대 회개 안 해요. 우리 애가 학교에 갔다가 폭행을 당했을 때 제가 칼 쓰는 법,

젓가락 쓰는 법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제가 선생한테 한 번 더 이런 일 있으면 제 아이한테 칼 들려

보낸다고 했어요.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 때, 가족들의 복수심이나 그런 것을 생각해봐요. 그것을

그대로 놔두면 그 사람이 또다른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리고 상대방은 절대로 회개 안

해요. 제가 요구한 것이 경찰관 데려와서 강의하게 해라, 너희 한 두 살만 더 지나면 열 세 살

넘어서기 때문에 너희들은 잡혀간다. 지금은 어리기 때문에 책임이 없지만.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설문부터 합시다. 그 설문지가 엄청난 효과를 봤습니다. 설문지를 몇 반을 한 뒤에 아이들이

바뀌었어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한 뒤에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데 너가 몇 년 뒤에 대학생이 되어서

만났다고 하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학교에서 폭력이 아주 많이 사라졌어요. 어떻게든

아이들이 속으로 이러면 안 되겠구나 하고 바뀌어져야 할 것 아니예요. 아까 말씀하신 대로 인간이

되게 교활한 면이 많아서 회개를 잘 안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자신이 죽을 때 임박해서야 회개를

하게 되요.

옛날에 사는 마을에 ‘김대부’라고 있었습니다. ‘김대부’는 나중에 감리교 안 목사님이

바꾸었다고 자기 책에 나와 있던데, 되게 예외적인 케이스예요. 감염되는 것이 아니예요. 오히려

자신의 삶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회의가 되더라. 기독교인들은 혹시, 나는 근본적으로 존치론자 인

것 같아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러나 지금은, 자기가 죽음으로써 갚는 것이 훨씬 더 본인의 인격

형성에도, 본인의 영혼 불멸, 신의 존재에 대한 요청, 자신이 죽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신은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만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이것은 아마 자신의 경험이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 자체를, 사형제도를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조금 일면적인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사후의 삶 이라던지 연속성

생활에 보면 하나로 마디로 볼 때에, 그 마디가 때때로 그 사람을 진정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사형 이라는 것도 그런 면에서는 가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응보만이 아닌 교정,

교육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형제도는 계약론과는 좀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너무 오래 얘기 했습니다. 질문한 것은 아닙니다.

안진 질문 하신 것이 아니셔서 길게 답변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마는, 교수님이

교수님이시면서 목사님이셔서 인간의 고통, 사랑에 대한 것이 강하셔 저는 사실은 제 글에 대한

굉장한 반론을 토론을 하실 줄 알고 긴장을 했어요. 왜냐면은 정치적인 지형은 사회적으로 뻔하거든요,

일단 폐지론을 주장하면 굉장히 멋지고, 지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여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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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이상적이고, 감성적이고, 저도 이런 개인 케이스들을 심층 면접까지 하면서 내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서 객관화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고민을 좀 많이 했었고요. 그런데 전문가 집단이나,

법조인이나 사회 특권층들은 피해자의 고통으로부터 얼마나 둔감한가.

제가 여러분들한테 마무리 하고 싶은 얘기는 있다가 하기로 하고요. 조중동의 아주 유명한

조갑제씨가 한 말이 있어요. 제가 석사 때 조갑제 씨가 쓴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이라는 책을

봤어요. 제가 조갑제씨를 지금까지 존경하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제가 석사 때 굉장히 고문 연구를

좀 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고문을 자행했던 사람들을 연구를 했어요. 고문의 피해자들의

케이스를 끝까지 따라가면서 연구를 한 것 같은데 그 사람이 서문에 뭐라고 썼냐면, 그 고문을 한

사람들의, 사실 일상적으로 중앙정보부의 누구도 나오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자식 대학 갈 것을

걱정하면서 전기 고문하면서 그러거든요. 그 사람들이 자신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도덕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게 하려면 조갑제씨가 서문에 뭐라고 썼냐하면은 ‘그 고문을 똑같이 당하게 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런데 어느 인간이 그 고문을 똑같이 하겠습니까. 고문하는 인간, 여러분들

사형집행관의 인권까지 다 섭렵하지 않습니까.

제가 아까 다 빼버렸지만. 사형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거에 그것도 있거든요. 집행하는

사람들의 인권은 뭐가 되냐. 그러니까 그 사람이 뭐라고 얘기 했냐면, 로보트를 시켜서 자기가 했던

고문을 겪게 해야 한다. 그런 애기를 해요. 정말 그 때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성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그 고문 피해자들에 대한 강한 고통에 대한 동정, 등이 있었던. 그 때 잡지도 만들고 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진정한 의미의 참회, 교정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지. 제가 전에 얇은

범죄학자일 때는 교정 교화는 누구든지 가능하다고 봤는데요. 현실적인 이득, 모든 것이 주어지는

상황에서는 교정, 교화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교정, 교화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범법자의 존엄성, 나는 이 죄를 사죄하고 나의 존엄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존엄인 것 같아요.

칸트나 헤겔의 문헌에는 이것이 다 나오더라고요. 어려운 철학까지 결국은, 대학교 때 봤던

것까지 다 찾아보면서 읽었는데요. 우리는 그 사람을 아주 생각적인 저렴한 하급의 인간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너는 살아야 돼, 무조건이라도 살려놔야 되라고 하지만요. 사실은 정말로 고차원적으로 그

사람이 정말 인간으로 회개하고 다시 거듭난다면 나는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으니 죽여주세요.

죽겠습니다. 하는 상황으로 가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교화인 겁니다.

아까 법 경제학적인 부분에 하고 싶은 얘기가 굉장히 많습니다. 법 사회학 하면서 제가 법

경제학을 같이 하기 때문에. 국가의 형벌은 법의 이념이나 재판관의 재판대로 되지 않습니다. 형벌의

차원은 전혀 따로 봐요. 왜. 국가는 형벌에 대한 비용을 줄여야 하니까. 아까 사형제를 폐지했을 때

줄어드는 비용 얘기 하셨는데요. 이 사형수를 살려 뒀을 때 드는 비용도 엄청나게 나와요. 반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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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47

연구는. 이 한 명을 살리기 위해서, 이 흉악범을 제 주변의 몇몇 흉악범들을 연구를 하면서요. 그

사람들은 교수형 시켜주는 것은 정말 인간적인 겁니다. 그 사람들이 살해한 사람들은요, 살해

당하면서 그 흉기에 찔리면서 그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온 골목과 이것을 다 올리면서 팔도 잘리고

그러면서. 그 사람은 그렇게 점잖게 보내주는 것은 대단히 인간적인 겁니다. 그것이 피해자들의,

그러면서 이 법 앞의 이 법의 허구성, 무력함. 국가는 계속해서 형벌 비용을 줄여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것은 국가가 자기 돈을 돌려야 하는 것이고, 또 인권의 담론은 나름대로 이용하는 것이고. 이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정치적이고, 정책적으로 결정해야 된다면 이런 어떤 rational

consensus 가 필요한 문제라고 보고요. 그렇지 않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논의한다면 정직하게,

학문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치장해서 하는 것은 기만인 것

같아요. 예, 이상 마치겠습니다.

이국운 감사합니다. 밥을 먹긴 먹어야 하는데요. 그래도 마지막 논문까지 듣고 좀 break 를

하겠습니다. 저는 헌법 선생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우리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푼다면 좋겠는데,

그렇게가 아니고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헌법을 가지고 적어도 그 정당성을 가지고 정치 목적으로

풀어야 되는 상황이라서 헌법 제 10 조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모든 국민 안에 사형을 선고 받을 위기에 처한 흉악범, 살인마까지 포함되지

않는다고 볼 수가 과연 있겠느냐. 제가 이 자료집 뒤에 제가 쓴 짧은 글을 넣었습니다마는, 아까

장철준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헌법학자로서 이 문제에 다가가는 동기는 인계적이고, 도덕적이고

또는 신학적이라고 하는 그런 차원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무엇이더라도 지금 우리가 이것이

우리나라다, 라고 선언하고 있는 헌법의 규정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를 조금 더 좁게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많이 갔습니다마는 이제 마지막으로 장세룡 교수님을 모셔서 이 문제를

18 세기 프랑스에서 어떻게 빗겨가려고 했는지를 말씀 듣고 우리 백은석 교수님으로부터 토론을

듣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시간을 조금만 아껴주시면 저희가 밥을 일단 먹어야 되기 때문에.

부탁드립니다. 박수로 맞겠습니다.

장세룡 법학자들의 이 심각한 토론자리에 초청을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데 참여하게 되어서, 사실 제가 쓴 글이 그렇게 깊은 의식을 가지고 쓴 건

아니었는데,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사형제도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저는 뭐 경북에서 태어나서 지금도 경북에 주소를 두고 삽니다. 소개하셨던 인혁당사건,

또 나아가서는. 이런 분들이 사실 다 경북과 아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저도

학교를 다니면서 그런 것들이 끼친 영향을 전혀 벗어나지는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본다면 사형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만, 그렇지만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이런 문제를 사실

별로 취급하지 못한 점을 법학과 거리가 좀 있는 점이 안 있겠나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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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어느 날 집에 퇴근했는데 그 사람의 안주인이 전화가 왔는데. 남편이 부장판사인데 8 년을

했는데 일찍 퇴근해서 저녁도 먹지 않고 지금 방에 꽉 들어앉아있다. 왜 그러냐 하니까 자기가 사형을

판결한 사람이 오늘 죽는다 이거에요 그래서 그 사람이 너무나 그 마음이 무거워서 그래서 저녁도

먹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저도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던 상황이기 때문에 묘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 이튿날 물었어요. 어떻게 됐나 하니까 그 처형이 연기되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했다 합니다. 이야기를 듣고는 그렇기는 하지만 제가 사상사 전공자로서 이런

사형제도를 이야기하는 거하고 법학도로서 혹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서 사형제도를 접근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희들이 좀 더 깊이 있게 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우리 역사자로서는 대혁명 프랑스

대혁명 직전에 또는 대혁명 직후에 사형제도의 비판론이 많이 정의 되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문제하고 그러고 또 기본적으로는 사형제도 비판론이 출발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17 세기말 로크 또는 프랑스 네덜란드 스피노자 이런 사람들의 관용론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관용론의

발전이 사형제도의 비판하고 관련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아까 로크는 사형제도를

긍정했다고 말씀하시는데, 문제는 로크의 관용론에서는 무신론자는 관용할 수 없다고 했어요.

이 당시에 와서 개방적으로 이야기 하면은 우리가 잘 알 수 있듯이 종교개혁이 일어난

다음에 카톨릭 교도들이 개신교도들을 엄청나게 학살을 했지요. 여기 있는 바처럼 가장 충격 받았던

사건이 1746 년, 물론 이 때 거기에 살았던 시절은 아닙니다마는 우리가 잘 아는 것은 바로 그 때

학살이죠. 그래서 프랑스에서 권위 계승을 둘러싸고서 왕권 승계가 불확실하게 됐을 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에서는 개신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면서 아내를 사실한거죠. 아내를 사실하면서 결혼을

합니다. 이 결혼 축하연에 개신교도들이 많이 참석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파리의 개신교도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 1864 년 카톨릭이었죠. 그 새벽에 종소리와 함께 학살을 하기 시작합니다. 유명한

그 당시의 개신교의 주례사가 있는데, 그 사람부터 죽여 놓고, 당장 3500 명을 죽입니다. 프랑스

전역에서 카톨릭이 개신교를 학살한 거죠. 개신교도들이 나름대로 자기네들의 종교적인 상황을

마련하기 위해 엄청난 피를 흘렸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과 동시에 점차 개신교도들이 일정한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존 칼뱅 같은 분을 비롯해서 개신교도들이 권력을 일정한

지위를 가지고 난 다음에는 카톨릭을 학살합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어 가면서 나타난 것들이 무신론자입니다. 어느 종교도 다, 아니

무신론자들도 사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종교를 가진 자들이 도리어 한동대 와서도 보니

그렇습니다. 종교를 가지지 않는 자들도 언제든지 건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무신론자들이 개신교도들은 물론 카톨릭 교도들을 학살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떻게 본다면

이 당시의 관용론과 사형제도에 관한 논의는 바로 이 무신론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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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49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 로크가 사형제도를 주장했다고 했을 때 거기에서 거기 말려 들어가는

사람들이 전부 무신론자입니다. 로크는 무신론자도 관여하지 않고 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지적하지 않고 로크를 읽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결국 사형의 문제는

카톨릭과 개신교의 문제, 그리고는 무신론의 문제, 그 다음에는 프랑스 혁명 가까이 오는 국가의 존립

이것과 연관되면서 실제로 이 방향이 조금 달라지면서, 어느 쪽으로 종교 또는 무신론 또는

국가로부터 삐져나오는 어긋나는 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쟁점이 되었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학자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맥락과 함께 볼 때 사형제도가 이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요.

또 나아가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짧은 기간 동안 역사학자들은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역사에서는 죽는 것이 워낙 많기 때문에. 죽는

것은 눈도 깜빡하지 않습니다. 물론 특별한 죽음에 대해서는 가끔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리고 사실 이

법학도들은 평범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훨씬 더 깊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관용론, 어떻게 보면 관용론의 마지막 저술. 2 페이지로 가주시기 바랍니다.

카톨릭으로 개종하려 했던 아이들을 죽인, 그러니까 장 갈라스라는 사람이 개신교예요. 그런데 자기

아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누명을 쓰고서 처형을 당한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바로 관용론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볼테르의 관용론이 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전에

기본적으로 종교의 관점은 인간의 정신을 중심에 두는 것이지만 인간의 신체도 긍정해야 된다. 최근에

신체에 대한, 몸에 대한 이야기가 범람화처럼 되어 있고, 소녀시대부터 요새 몸이 압도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마는 몸에 대해서 새로운 초점을 맞춰져야 하는 계기가 사실은 이 볼테르예요.

또 앞서보면 볼테르가 몸의 긍정, 신체의 긍정 이러한 논리들을 실제로 인간에 대한 가혹한

형벌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리를 만들어 내는 출발점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로크도 그렇지만은, 또

한편으로는 스피노자의 이론을 많이 끌어 왔습니다. 이 당시에 스피노자는 무신론자라고 지적되었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았다라고 말하기 어렵지마는, 볼테르, 로크의 물질론에 스피노자의 신체,

정신 이론 중심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직접 사형제도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볼테르가 비판하는 것은 개신교도들에 대한 카톨릭교도들의 학살과 박해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볼테르는 이야기 합니다. 개신교도들이 사형시키면서 카톨릭교도들을 또 처형할

때, 이것은 동일한 모습을 보였다고 이야기 합니다. 나름대로 볼테르는 균형을 유지하려고 그렇게

했던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 갈라스 사건으로 전 프랑스가 들썩 거렸을 때 막상 우리가 잘 아는 루소, 아까

루소 이야기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루소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회 계약론에서

사형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누구도 다른 인간의 생명을 죽일 권리가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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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자유인의 교양으로의 법 학술대회

강조하지마는 그러나 루소도 그렇고 데칼리아도 그렇지마는 예외는 있다. 루소의 경우는 바로 국가에

대해서 공동체에 대해서 배신하는 자들, 공동체에 대해서 사회적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을, 그런

자들을 바로 조국의 배신자로서 처형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루소의 사상에는

바로 국가, 공동체에 대해서 침해하는 자는 처형할 수 있다는 것이 담겨 있습니다. 국가주의가 나왔죠.

그래서 루소에 대한 이해가, 논란이 많지만 어쨌든 루소로부터 전체주의의 기원을 끌어 낼 수도

있다는 논의가 나오는 계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루소에 비한다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디드로, 디드로도 루소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마는

말년에 오게 되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개혁에 관한 글을 많이 쓰게 되는데, 과연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살려두는 것이 바람직한 가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원칙에서는 사형 반대, 현실에서는

가변적 입장. 아마 우리의 현재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9 쪽입니다.

베카리아입니다.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형을 처하는 것은 전쟁이다. 국가가 개인에 대해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도 사형제도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아무리 가혹한 사형을

하더라도 또 극치의 범죄자는 계속 나타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사형은 예외는 있다고 하는데 이 예외의 조건을 본다면 이렇습니다. 자유를

박탈했는데도 국민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경우, 또는 위험한 혁명을 촉발시킬 위험성을 가지고

있을 경우, 또는 다른 사람의 범죄를 방지하는 데에 유일한 수단일 경우. 그런데 그 예외라는 것이

실제로 보면 베카리아도 루소를 비판한 측면이 강한데 그럼에도 실제로는 여전히 국가주의 냄새가

나는 그런 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직 벗어나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카리아가 말하는

예외라는 한 데서 우리가 너무 그렇게 깊게 배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신론이 더 바람직하다. 차라리 죽도록 일 시키는 것, 팠던 땅 또 묻었다가 또

파는 그런 일인지를 잘 모르지만은 종신론이 차라리 더 바람직한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글의 또 하나의 이론적 기반은 우리가 잘 아는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이라는 책인데, 근대적인

감옥을 그린 글입니다. 감옥이라고 해도 근대적인 감옥. 근대적인 감옥은 화장실이 더 좋은 감옥이고

이런 뜻이 아니라 감시 체제가 인간의 몸을 또한 정신을 훈육, 순화, 교화라는 이름으로 훈육하는

그런 질서로서 탄생하는 감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아예 범죄자는 죽여 버리는 것이 가장

손쉬운 길이었는데 이제는 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살려두면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런 출발점이 바로 푸코가 말한 감옥의 탄생을 이 시기에 18 세기 후반에 등극하고 이 시대에

반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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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51

그러면서도 베카리아는 법률가들에 대해서, 사형제도를 법률가들과 많이 연관시켜서

이야기합니다. 그 점에서 베카리아를 법학자들이 많이 논한 것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법률이 너무

잔인하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수많은 종교 전쟁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을 가르치는 데 법률 조차도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또 법률로서의

사형이 문제가 되는 것이 그것이 격식을 갖추고 집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너무나 절차를

갖춰야 하는데, 만약 그것에서 오류가 나타나면 여태까지 이 국가가 유지되어 나가는 온갖 격식이라는

것이 사실은 기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국가가 기만의 질서 아닙니까. 그것이 드러나게 되면

사회가 무정의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될 때 사형이 이해가 되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베카리아 같은 사람이 벤담입니다. 공리주의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마는

우리가 잘 아는 벤담, 일반감시체제, 산재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벤담의

감옥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했습니다. 벤담의 감옥을 일반 감시체제, 판옵티콘 감시체제 이 논의를

하게 된 배경은 역시 법학적인 해석을 그렇습니다마는 자본가들의 입장을 대변한 것입니다. 살려두고

노동을 시키는 것이 차라리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판옵티콘

일반감시체제를 생각하게 된 계기도 조선소 공장에서 감명을 받습니다. 그런 것에서 볼 때 벤담, 물론

벤담의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해서 자본가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막바로

이야기하기에는 벤담이 그 시대의 선구적인 인물이긴 합니다마는 그런 측면은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베카리아도 이 사형폐지론이 전 유럽에 확장되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면서

볼테르에 기대를 합니다. 볼테르가 그 당시에는 경험사상의 대단한 인물이었으니까. 당대의

군주들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실제로 프랑스 혁명 직전이 되면 새로운 형법 개정을 하니까.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워서 통과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 혁명으로 가게 되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 당연히 우리가 잘 아는 극진사상을 다 반대합니다. 새로운 형법 입법을 해서 사형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입법하고서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잘 아는 혁명개척고백의 발제로 수많은

사람을 처형시켜야 한다는 것에 앞장섰다는 우리가 잘 아는 로베스피에르. 로베스피에르는 바로

사형제도를 비판했던 유명한 연설이 있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오판과 편견이 작용될 수 있기 때문에

사형제도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당시에 실제로 그 위에서부터 오래

전부터 온갖 기독교 사상들과 어거스틴, 아퀴나스 이런 분들부터 루터까지 모두 다 사형을

동의했습니다. 사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없었습니다.

그럼 여기서 독특한 것이 칸트도 사형에 동의했다는 것이죠. 특히 이제 보수주의 사상에서는

버크. 버크는 최근에 포스트 모더니즘에 의해 이야기 됩니다마는 그 극심한 고통을 강화한 사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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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내는 숭고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차 행군이

진행되나가면서 로베스피에르 입장이 다시 바뀌게 됩니다. 다시 사형을 긍정하게 되는 모습이죠.

민주주의와 공포를 통합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공포.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은 공포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가게 되면서 공포와 민주주의의 덕성을 합치면 혁명적인 독재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형이 극진적인 단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약식적 파문, 3 만 5 천명, 4 만 명을 죽이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런 논의들이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형을,

고통 없이 죽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단칼에 도끼로 딱 치는. 옛날에는 도끼가 있었지만 지금은 기계가

있죠. 단두대에서 고통 없이 죽게 만드는 것이 나름대로의 발전이라면 발전이 된 것이고, 그 뒤로

오랜 논의를 거쳐서 200 년 뒤인 1931 년에 프랑스에서 사형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백은석 맨 마지막에 이야기 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죠. 다섯 마디 할 거 두마디

하게되고 두 마디 한마디 하게 되고 저녁시간에 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다행인데,

그렇지도 않은 가운데서 또 한가지 부담이 있는 것은 사상사 쪽에 오랜 연구를 하신 장교수님 논문에

대한 코멘트를 해야한다는 것에 부담이 많습니다. 논평이라 할지 질문이라 하기보다는 일반적인 내용

한 가지를 나누면서 제 역할을 감당했으면 합니다.

기본적으로 교수님께서 들어서 쓰신 구체적인 특정 사상가의 사상내용이라든지 그들

상호간의 관계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제가 할 내용이 아닌것 같고, 좀 큰 흐름적인 관찰점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참 두 가지가 프랑스 혁명 전후 진행되었던 사형폐지논의라고 하는 것은

사상가들이 시작했다기 보다는 이미 그 당시 알려진 있었던 우리가 오늘 또 컨퍼런스에 전반부에서

다루었던 오남용 또는 비효율성 특히 이 전반부에서는 한국 상황에 비추어서 사법살인이라든지

오판살인이라든지 이런 쪽에 초점이 맞춰졌잖습니까? 다시 말해서 특히 사법살인의 경우에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형이라는 것이 사용되어졌기 때문에 이 오남용의 이슈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는데, 그 당시 정치적인 부분들이 있지만 특히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종교탄압적인 부분, 이것이

강했었습니다. 하여튼, 이러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오남용,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지 그런 문제들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이 사상가들이 오히려 더 이론화 해야 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나. 또 그들이 이러한 상황을 이론화 하면서 그 이론이 그 당시 시대에 사형폐지론이라든지 또

다른 자료를 또는 이론적인 근거를 제시해 주지 않았나 하는 말씀이 주였습니다. 저도 그거에 참

동의를 합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사형제도에 대한 이론화가 궁극적으로는 맨 마지막 부분에 말씀하시고

계시듯이 제가 읽겠습니다. 합리적인 이성의 산물인 과학과 기술로서 인간의 행복과 만족을

증진시키려든 계몽의 기획이 인간의 신체를 합리적으로 구속하고 통제하는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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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253

기여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 하는 부분도 또 그것이 큰 그림적인 관찰점과 통하는 그런부분에

있어서도 제가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단지 제가 한가지 여러분께 또 교수님께 여쭙고 싶은 것은 이 글의 흐름적으로 답이 되어

있을수도 있는 것이지만, 책자 11 페이지 맨 윗부분에 보시면은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데카리아가

의도했던 바가 바로 이것이었을까? 데카리아의 사형제도 비판에는 그것이 잔혹한 본보기를 제공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킨다는 인권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부분에 대해서 토론자는 controversial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controversial 사전 뜻을 찾아보니까 논쟁의 여지가 있는, 또 다른 뜻이

토론을 좋아하는 이런 뜻인데, controversial 한 멘트를 하나 딱 던져주고 저는 사라지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뭐냐, 이 데카리아가 주장하는 바는 제가 이해하기로는 사형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공리주의죠, 효용성이 무지하게 떨어지는 형벌제도다. 왜냐하면 물론 거기에는 응보라는

것에 포커스를 두기보다는 그니까 과거 범죄행위에 포커스를 두기보다는 앞으로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이다에 포커스를 맞춘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탁 그냥 죽여버리면은 형벌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그

당사자 범죄자의 특별 억제력이라는 측면도 있겠지만,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의 그 범죄를 하지 않게

만드는 일반억제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그냥 죽여버리면은 그 효과가 어디나겠느냐.

차라리 오랫동안 살려둬가지고 평생 중노동을 시키는 것이 오히려 형벌을 통해서 얻고자하는

억제능력 그 효용성 이런면에서는 최고 효과를 나타내지 않겠느냐 따라서 잔인함 잔혹함보다는

형벌에 지속성 얼마나 오랫동안 그 형벌이 가해지느냐가 더 중요하다라고 데카리아가 이야기 했다고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사형에 대한 데카리아의 입장이고 또한 데카리아가 사형에 대해

제시한 이론이 좀더 인권친화적인 또 친 인권적인 관점이라고 우리가 만약 생각한다면

controversial 한 멘트를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과연 그럴까. 자기 범죄자에 대한 과거행위에 대한

응징보다는 그 사람을 이용해서 그 이외의 그 사회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범죄억제효과를 최대한 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그 당사자 범죄자에게 어떠한 형벌을 가해야 할

것인가 그 사고 자체가 그 범죄 행위자에 대한 인권에 과연 친화적일까 과연 그 사람 인권에

근접하는 더 인간의 존엄성을 더 부여하는 인정하는 사고일까 라고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칸트와 헤겔을 말씀하셨습니다만, 아주 어떻게 보면 반대 입장에 있는 사형존치 이론자들이

주로 제공하는 다분히 잔인한 듯한 인상이 주어지는 칸트와 헤겔의 이야기입니다마는 칸트가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자유중의 전통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성의 이론을 제시하는 어떠한 형태의 이론보다

가장 철학적인 기반에 있어서 자주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그니까 인간의 존엄성으로서의 권리, 그것의

근거를 제공한 사람이 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오히려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헤겔 같은 경우에는 물론 칸트 이야기도 했겠죠. 인간의 이성을 가진 자로서의 제대로 된

존엄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했을 때에 응보를 해야만이 해결될 수 있다.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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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도 포함되어 있었고, 제가 기억하기로는 헤겔은 더 잔인한 소리를 한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더

극명하게 정 반대 논리를 제시하는 것 같은데, 범죄자를 죽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도덕적 가치,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가치를 제대로 존중해주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한 것으로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controversial 한 멘트를 드리고 싶은 것은 과연 나 범죄행위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좀 아까 안교수님께서 말씀하신 피해자의 인권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봤을 때에 과연

사형을 폐지하는 것이 프로인권적일까 하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마는, 그러한 피해자의 인권이라고

하는 또 그것도 어떻게 보면 범죄자 자신의 인권은 아니잖아요 그죠? 다 연계해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범죄행위자 자신의 인권 측면에서 봤을 때도 사형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그 인권을

존중하고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반 인권적인 비인간가치적인 형벌일까 그런 질문을 우리가 던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그 사람을 respect 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의 일반 억제효과를 위해서 오랫동안 그 고통에 노출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면 과연 그것이 그 사람의 인권을 더 존중하는 것일까 하는 측면, 어떤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장세룡 저도 이 문제는 고심했던 문제입니다. 사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잔인한

사형제도를 견제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강도가 90% 밖에 안

되는 아니 90%정도 되는 대안을 제시 해야 되지 않았을까. 그것이 지속적인 고통을 가하는 것이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이렇게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형제도를 전면 폐지 또는 그것에 대한

100% 완벽한 해답이 있다고 데카리아도 생각했던 것이 아니고 아마 다른 방식으로 약간 완화 시키는

제안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마치 루쏘를 비판했지만 여전히 데카리아에게 그 예외라는 것은

국가주의적인 요소를 여전히 볼 수 있는 그런 제도였던 것은 아닐까하는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이국운 감사합니다. 특별히 저는 장교수님 쓰신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자유주의라고 대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이 홉스 뭐 이렇게 얘기하는데, 사실 그 연원을 쫓아 올라가면 종교전쟁, 그

종교전쟁을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가에 관한 아주 각고의 서양 사람들의 노력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합니다. 그때, 재발견 된 것이 몸 이라고 하는 것의 가치이고 특별히 몸이 이 땅의

삶에서 부르신 아름다운 몸 이 몸이 찢길 때 당하는 고통 그 고통은 적어도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 그 기본 아이디어가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 대단히

많은 배움이 있는 그런 글을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요, 오늘 안교수님은, 저자한테 직접

들으셨지만 시간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가지고 꼼꼼히 듣지 못했는데, 여러분이 조금 수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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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2 0 1 0F A L LS E M E S T E R

Section 6

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An Evening of thinking Deeply and Collectively about the Death Penalty

2010. 12. 2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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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_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_Handong Institute of Learning and Faith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살아가는 지성인으로서 사형에 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한 쪽에서는 "스스로를 자유롭고 민주적이라고 내세우는 정치공동체가 어떻게 그 구성원 중의 하나를 정당하게 죽일 수 있느냐"는

질문이 우리를 괴롭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비참하게 죽어간 피해자의 소리없는 외침이 우리의 몸 깊은 곳으로부터 분노의 정의,

곧 응보의 이념을 솟구치게 만들곤 합니다.

이번 학기 다섯번째 학문과신앙 콜로키엄은 이 두 가지 모순적인 정의의 요청들 앞에서 번민하는 자리에 한동 구성원 여러분들을 초대하고자 합니다.

특별히 사형에 대하여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발제를 맡아 주신 귀한 교수님들과 함께 진지하고 어려운 토론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에 여러분의 동참을 바랍니다.  

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An Evening of Thinking Deeply and Collectively

about the Death Penalty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2010 Fall Semester 5th Colloquium

사회 : 이국운 교수(한동대, 헌법/법사회학)발제 : 지승원 교수(한동대, 법철학) 홍기원 교수(서울시립대, 법사상사학) 안 진 교수(전남대, 인권법학/법사회학) 장철준 교수(한동대, 헌법학)

[ ]All Nations Hall 30212월 2일 (목) 저녁 7시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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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61

2010 년 가을학기_제 5 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행사 사진-1]

2010 Fall Semester_5th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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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2010 년 가을학기_제 5 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행사 사진-2]

2010 Fall Semester_5th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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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63

2010년 가을학기_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2010 Fall Semester_5st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주관 :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 [ACE 사업]

주최 : 한동대학교 학문과 신앙 연구소 [Handong Institute of Learning and Faith]

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An Evening of thinking Deeply and Collectively

about the Death Penalty

2010. 12. 2

이국운 오후에 네 편에 공들여 쓰신 논문을 함께 소화하는 시간을 갖느라고 조금 일정이

늦어져서 예정보다 15 분 늦었습니다.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라는 이름으로 학부역량

강화사업의 지원을 받아서 진행되는 학문과 신앙 연구소 이번 학기 다섯 번째 콜로키움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날씨가 궂은데 많은 학생들이 찾아주어서 감사합니다.

늘 해오던 이야기 이지만 처음 듣는 학생들도 있을지 모르니까, 어떻게 진행하는지 잠시

말씀해드리고자 합니다. 저희는 일단, 오늘은 사형에 대한 이야기 인데요, 이 주제에 관해서 네 분의

이야기 손님을 모셨습니다. 네 분으로부터 각각 10 분 정도씩 이 주제에 관해서 평소에 가지고 계신

생각을 듣는 시간을 가지겠고요. 그것이 끝나고 난 다음에 네 분 사이에서 혹시 더 설명이 필요하거나

아니면 의견이 다르신 부분이 있으면 토론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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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의 시간이고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입니다. 질문을 해도 좋고 그냥 자기 생각을

이야기 해도 좋고 아니면 논평 같은 형식으로 이야기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오늘 오후 3 시 20 분 정도에 시작해서 사형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에 관해서 생각들을 나누어

보고 이제 오늘 제 생각에는 9 시 반에서 열 시까지 우리가 조금 더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보다는

더 깊은, 정리가 될지 안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 고민을 해보기 전보다는 깊이 인간에

대해서 또 법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것에 대해서 생각 할 수 있는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앞에 네 편의 논문을 우리가 읽었는데요. 교수님이 먼저 자리를

일어서셔야 하는 저자 분들입니다. 옆에 계신 장세룡 교수님이신데요, 오늘 모임에 끝까지 참여하시진

못하시지만 오늘 혹시 남기고 가실 말씀이 있으시면 먼저 듣는 시간을 가시려 합니다. 장교수님 부탁

드립니다.

장세룡 먼저 일어날 것이라 말씀 드려서 먼저 발언권을 주시는 것 까지는 제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마이크를 주셨으니까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저는 법학 전공이 아니니까 법학과

관련되는 말씀을 드리기는 그렇고, 제가 한동대학교 처음 왔습니다. 경북에서 몇 년 살았는데요.

마지막 답사한 경북의 4 년제 대학 한동 대학교를 올해는 처음 왔는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좋은학교인 것 같습니다. 명성은 익히 잘 들어왔습니다. 더구나 글로벌 한동이라고 폭넓게 국제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사실 그전만 하더라도 저는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포항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다 대구로 많이 왔습니다. 포항 출신들이 특징이 약간 거칠고 의리가

있고 그래서 선배 하나 잘 잡으면 후배들 여럿이 데리고 와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조직력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글로벌 한동이기는 하지만 아까 이야기했던 이념 또는 민족의

보조 용서 실제로 경북의 역사가 정말 복합적이고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컬한 것이야

말로 글로벌 한 것이고 글로벌 한동에서 한편으로 로컬하지만 경북을 연구하시는 동안 또 알아보시려

하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 흔히 말하는 글로컬 한 것이라 하다고 치고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이

성장하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주에서 오신 어느 선생님은 광주의

기품도 있지만 경북은 경북 나름대로 정말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근대 역사에

관심을 가져주시면 보인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고.

두번째로는, 제가 다룬 부분은 18 세기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일정한

단계에 도달한 상황입니다. 이 고전적 자유주의가 도달한 단계는 적어도 우리가 말하는 르네상스 시대

15 세기에서 시작해서 약 300 년간 유럽인들 나름대로 지성인들이 피나는 노력, 정말 이렇게 까지도

고민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치열한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본다면 근대화,

압축적인 근대화를 하면서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난 500 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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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법사상으로 정치한 면이 많지만 그 사상이 일정한 정체상태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러면서 새로

우리가 서구사상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도 있고 자본주의도 있고 사회주의도 있고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깊이 고민할 틈 없이 진행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본다면 사상의 극단화가

우리들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극단으로 가지 않고 중심을 잡아갈 수 있는데

근대 서구인들의 자유주의사상이 나름대로 기여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것,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형제도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러나 막바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이 뭐냐 끊임없이 고민해

가는 그런 궤적들 그런 점들을 보면서 우리가 서구를 이해할 때 무조건 서구가 좋다 나쁘다, 요즘은

반감도 많지 않습니까? 그렇게 볼 것이 아니라 이네들의 고민해온 궤적들을 우리가 존중 하면서

우리도 그런 시도를 치밀하게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가진 현재의 갈등 같은 것들을 좀 더 풀리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북의 이런 대치상황이 터무니 없는 것이 있거든요. 이것이 이렇게

극단화 되는 데는 우리가 사상의 깊은 맛을 잘 모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마 저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공부 할 날도 몇 일 남지 않았고, 여러분들 공부 하실 때 정말 깊이 있게 하시도록 로컬

협력 서구에서 들어온 것 함께 융합 하면서 좋은 인생을 획득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사진이야기도 나왔고 했으니까 영화 ‘밀양’이 기억이 나죠. 전도현이 아들을 죽인

범죄자를 용서하러 갔을 때, 이 자는 자기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았다고 하고, 그래서

전도현이 나와서 엄청난 구역질을 하죠. 그런데 밀양도 그렇고 박하사탕도 그렇고, 이창동 감독이

대구에 봉화출신인데, 그 이야기를 하는 건, 밀양, 박하사탕은 당연히 그렇지만, 밀양은 광주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본다면 가해자, 피해자, 전도현은 피해자 광주고 가해자는

대구라고 볼 수 있는데 그래서 광주가 용서해주려고 하는데, 이미 대구는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고 나는 나를 용서 했다고 하나님께로 용서 받았다고 나오게 되고 이런 일을 겪었을 때 그

이야기를 하기 앞서서 실제로 광주가 나타나면서 결심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대구의 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가해자가 된데 대해서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창동

감독에 박하사탕처럼 나는 되돌아 갈래, 순수로 되돌아 가고싶어 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

중 내가 왜 가해자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으로 가해자가 되어 엄청나게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광주에 이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가해자와 피해자와의 문제가 이 문제는 아닙니다만 가해자가 되었을 때 가해자 대구가 어떻게

생각했을 것인가 지금은 이래저래 다 망각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끔씩 생각해보면 가해자인

우리가, '우리가'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가해자인 대구가 어떻게 해야 됐을까 저는 밀양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좀 복잡하게 이야기를 했지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거기에 광주와 대구를 대입 시켜서 설명을

함으로써 저의 생각이 있습니다만, 가해자가 어떻게 했어야 될 것인가 하는게 최근에 저의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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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광주에 대해 대구는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 이창동처럼 또는 그 집안 식구들 다 잘아는 그냥

미안하다 하면 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어야 되는 것일까 아니면 내 스스로

용서해주는 길 밖에 방법이 없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주제를 광주와 대구라는 역사의 문제를 겹쳐서, 저는 역사가니까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봤습니다.

혹시 다른 선생님들이 생각하시는 게 있으면 저도 들어보고 싶고요. 감사합니다 잘 들었습니다.

이국운 감사합니다. 부산에서 이덕인 교수님도 제 생각에는 홍교수님과 안교수님은 학교에

방을 마련해 드렸어요 그래서 안가셔도 되기 때문에 그냥 계속 가보자 이렇게 해도 될 것 같은데

우리 이교수님은 부산이 집이시라 일어서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모임에 중간에,

끝까지 계시지 못하지만 혹시 남기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이덕인 정말 아쉽습니다. 제가 앞서도 말씀 드렸듯이 엠네스티에 법률가 위원회에 간사를

맞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방에 있으면서 제가 일을 해야 할 상황이 되어서 시간을 내어서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관련되는 제 생각들을 글로써 전하겠고

여러분들도 언제든지 제 글에 허심탄회하게 답해주시면 되는 것 같고요. 하나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처음 법을 공부할 때는 도그마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면 법학을 다들 하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 생각을 해보니까, 도그마, 그러니까 법 해석에 대해 골몰을 했던 것이 상당히

부끄럽습니다. 법이 왜 법학이 되지 못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너무 지나치게 도그마에 메어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주제도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법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

사형제도를 생각해보았기 때문에, 사실 아까 발표를 했을 때 장교수님이 이야기하신 부분이 맞거든요.

우리가 헌법 평가를 하려고 했으면 그 부분에 국한을 해야 할 것인데 제가 방향을 틀었습니다.

여러분들, 법이라고 하는 것은요 양날의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휘두르면 거기 반동으로 휘두름을

당하는 만큼의 반작용이 나한테 오게되는 거에요. 그런 부분들을 좀 염두에 두시고 앞서서도 말씀

드렸듯이 분명히 여러분들은 다음 세대에 법조계를 책임질 분들이에요. 분명히. 그래서 그때 지금과

같은 이런 고민들이 계속해서 연장선상에 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물론 지금 현재 기성세대들이

책임을 져야겠죠 학자는 물론이고 법조계에 지금 계시는 분들까지 말입니다.

지난 세월들을 돌아보면 법조계에 계신 분들만 반성해야 할 게 아닙니다. 학자들도 반성할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실명을 거론하기는 힘들지만 제가 공부했을 때 형법의 바이블이라 하는

유명한 분이 있었거든요 그분은 독일 책을 그대로 베꼈어요. 독일 책을 그냥 베꼈으면 괜찮은데 일본

책, 그 독일의 원서를 일본어로 베낀 것을 다시 번역한 거예요. 우리 학계의 관행이 아직까지 그런

부분들이 지금도, 다는 아니겠죠, 그런 부분이 남아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국격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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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분에 있어서 국격이 그만큼 올라가야 할 것이고, 또 그런 부분들에 책임이 한동에 계시는

법학부 여러분들 한태도 일정부분 책임의 무게가 다 나눠져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이국운 두 교수님께서 뒤에 계시다가 편하신 시간에 가시면 되겠습니다. 사실 저희 모임이

재미있습니다. 안가셔도 됩니다. 계시다가 다시 말씀하셔도 얼마든지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시간이

조금 갔습니다만 이제 우리 모임을 좀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와 주신 네분의 이야기 손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 옆에 계신 순서대로, 멀리 전남대학에서 안진교수님이 오셨는데 안

교수님께서는 원래 사회학자이십니다. 그런데 범죄사회학 공부를 하시고 박사학위로 사회학을

받으시고 그 뒤에 여성학 그리고 인권 등을 공부를 쭉 하시다가 지금은 전남대학교에 있는

로스쿨에서 가르치고 계시고 전남대학교가 공인인권법을 상당히 잘 하는 학교인데요. 그 센터도

이끌고 계십니다. 멀리서 와 주셨는데 포항이 이렇게 먼지 알았으면 그러셨어요. 환영하는 박수 한번

하겠습니다. 그 옆에 계신 선생님은 서울 시립대학에서 기초법학 가르치고 계시는 홍기원

교수님이시고요. 홍교수님은 프랑스에서 학위를 하셨는데 프랑스에 가시기 전에 동양법제 동양법

사상사도 아주 깊이 공부를 하셨고 16 세기 17 세기에 초기 프로테스탄트들이 헌법이론정치사상을

아주 깊이 공부하고 계시고 지난학기인가요? 한번 우리 학교에 오셨어요. 제가 하는 기독교와

현대사상시간에 휴고 그로티우스 강의에 들어오셨다가, 저희 학교에 진면목을 모르시고 대게 저희

학교를 좋아하세요. 지금 학생들 인사하고 하는거, 학생들이 얼마나 책을 안읽고 글도 잘 못쓰고, 저는

이 오해가 언제까지 가나 보자 생각하고 있는데 아직은 굉장히 한동을 좋아하고 계십니다.

결혼하셨습니다. 홍교수님 소개해드립니다. 우리 법학부에 가장 최근에 결혼도 하고 딸도 낳은

장철준교수님입니다. 법학부에 아버님이시자 목사님이자 무술 사범이시자 한, 그리고 오늘 조금 늦게

온 사람들은 못 들었는데요, 아까 토론하실 때는 작은칼 큰칼 쓰는 법과 젓가락 던지는 법을

말씀하셨어요. 다 녹음이 되어있습니다. 우리 지승원 목사님 교수님 소개해드립니다. 그러면 멀리서

오신 안교수님부터 시작해서 순서대로 10 분씩 무슨 말씀을 하실지 제가 잘 모릅니다. 짜지도

않았습니다. 말씀 듣고 우리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안진 네 조금 전에 홍기원 교수님하고 둘이 귓속말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즘에

학생들이 이런 자리에 자발적으로 끝까지 함께해주기가 쉽지 않은데 이 학교는 특별한 학교인 것

같다. 그러면서 여기 계신 교수님들 누구누구의 힘 때문이지 않을까 했는데. 오늘 점심때 한번

교수님들, 발표 토론시간에 훌륭한 말씀들 저에게도 굉장히 축복받은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끝까지 경청하고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은 제목이 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오후 제가 아까 나가면서 함께 하면서도 깊이 생각해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요.

제가 사실 사형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형법 전범자 형사정책 범죄학 이런걸 해서

사형제도에 대해 생각한 것은 아니고요. 원래 저는 이상하게 제 세대에 경험이 폭력을 원치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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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었던 세대예요. 여러분들을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제가 70 년대 후반에 대학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제가 다닐 때는 대학에서 강의도 자유롭게 하지 못했고 대학 밖에 그냥 하고 친구가 성명서를 하나

내면 어느 순간 경찰들이 다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80 년 5 월 그러니까 장교수님 떠나시기 전에 말씀하셨습니다만 80 년 5 월

광주에서 대학교 4 학년이었어요 물론 대학원은 서울에서 했지만 그래서 정말, 제가 젊은 날 경험했던

국가폭력이죠. 국가폭력, 그래서 사회학이 전공인데도 박사논문에서는 국가의 억압기구들 폭력기구들

사법부 경찰 군대 이런걸 연구했어요. 그러니까 사회학이 역사학에 손을 대면 역사학자들보다 실력도

부족하면서, 요즘 여러분 표현대로 하자면, 영양가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도대체 국가라고

하는 것이, 루소 식으로 자유주의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일반의지의 구현체로서 우리가 입법을 통해서

어블로지를 만들면 이걸 잘 해서 우리의 자유를 확장해주고 변화시키고 수정해가는 그런 수단이

아니라, 장철준 교수님도 아까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만, 하나의 기만체계, 지배계급의 집단들이

지배하는 수단이고 이런 식으로 사람에 더 가깝고 친근하게 느꼈고, 대학시절을 그렇게 보내면서

경찰서에서 가벼운 수준의 고문도 경험하고 그런 세대입니다. 그때는 별거 아니에요. 그냥 동아리

활동 좀 했는데 잡아다가 그냥 밤새 취조하고, 이런 것들이 그냥 그렇게 가벼운 고문이 된거예요.

특별한 뭘 해서 한게 아니거든요. 이를테면 거물급,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었던 분들도 상당한 분들이

그럴겁니다. 저는 운 좋게도 그렇게 크게는 하지 않고 그렇게 왔었는데요.

그래서 늘 국가폭력에 대한 연구, 지금은 이제 인권 분야에서 과거청산, 과거청산도 그냥

된게 아니죠 끊임 없이 과거청산을 위한 민주화 기구의 노력이 있었고 그래서 그런 일에 관심이

많았는데 정말 너무 우연하게도 그런 국가폭력이 아닌 개인적인 폭력, 이건 사적인 폭력이죠 범죄의

폭력은, 그걸 제가 제 생애에서 경험을 하면서, 항상 공적인 영역 안에서 국가 시스템 안에서

고민했던 것들이 개인이 우연하게 사적으로 폭력을 겪었을 때도 그 폭력에 트라우마는 굉장히 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그런 피해자들이 세상에 굉장히 많이 있고 국가나 법체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법을 정의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렇지 못하구나.

그렇지만 항상 법이나 국가는 저는 사회학적으로 필요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근대국가, 근대복지 시스템, 근대 삶에서는 그런 체계 안에서 재편돼서 살아갈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우리가 모니터 해가면서 잘 가게 만들어야 하고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사실은 그 폭력, 특히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겪은 폭력과 고통 을 똑같이 공감하고 느끼면서 그런 아픔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러면서 법의 타자들, 법에서 국가에서 소외됐던 수많은 피해자들, 국가폭력을

당해서 사상이나, 저희는 48 년 여순 사건이나 아까 이덕인 교수님이 통계를 쭉 발표했습니다만, 사형

집행 비율이 45 년에서 49 년까지 50 년대에 얼마나 이루어졌는가 45 년 49 년 거기 나오는 국가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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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69

통계가 믿을만한 통계라고 하시는데 굉장히 축소된 겁니다. 48 년 여순혁명 때만 해도 즉결처분이나

이런 식으로 한 사람들이 저의 숫자로는 1600명 순이거든요.

통계적으로 보면, 그러한 것들을 쭉, 국가폭력, 개인폭력,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폭력이 없는

사회를 어떤 식으로 만들어갈 것인지 그리고 국가가 주는 폭력도 없애면서 또 개인이 겪었던 폭력을

어떤 식으로 폭력으로부터 보호도 해주고 다양한 폭력이 있죠. 여러분들 삶에서도. 가벼운 수준의

폭력이 됐든 여러가지가 있을 텐데 그것을 좀 줄여가는 것이 법학도들이, 법을 하는 사람들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사형에 대해서는, 오늘 주제가 사형이니까요, 사형에 대해서는, 제가 아까 제 발표문에

서두에서 조금 길게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나는 사형제를 찬성한다 혹은 반대한다 이런 식의

생각보다는 방금 말씀 드렸던, 인간이 저지른 죄, 무엇이 죄고 그 죄라는 것은 과연 법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어떻게 봐야되고 그 죄에 대해서 우리가 처벌을 한다면 벌을 준다면 국가나 사회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어떤 부분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어떤 부분이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조금은

균형잡힌 넓은 시각으로 그런 것들을 고민하면서 하나의 형벌제도로서 사형제도도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보는데 있어서 제가 조금이라도 이런 자리를 빌어서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주고 또

조력자로서 길잡이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법은 항상 약자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걸 운용하고

생각하고 그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사형제도, 저는 형벌제도 전체로서 사형제가 있다 없다는 그

문제, 존폐문제 이런 식으로 논의하기 보다는, 정말 우리 사회에 있는 가장 극악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흉악범들에 의한 살인, 이런 것들은 어떤 식으로 그것을 우리 사회에서 없앨 수 있고 거기에

대해서 처벌이나 형벌은 어떻게 가해져야 되는지, 이런 차원을 항상 같이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생명권의 문제를 이미 생존해있는 살아있는 범죄자 범법자 살인범의 생각만 생각하지 말고

그들의 범죄에 의해서 권력의 주체로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피해자의 생명권은 어떻게 구제하고

보장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은 그렇습니다. 가해자 개인이 정말 사죄를 하면서 어떤 식으로든지

피해를 구제하려 하고, 우리 형법체계가 그걸 보상도 하면서 관용이 되고, 이런 식으로 되어있는데요.

그런데 가해자 개인의 회개도 찾기 힘들지만 그 살인범의 가족도, 피해자가 그런 이야기도 있는데

의외로 가족의 문제도 굉장히 많더라고요. 제가 본 케이스들에서는 그 가해자의 가족이 정말

피해가족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하고 사죄하고 이런 것을 보기가 힘들었어요. 이미 살인범을 만든 그

가족 심리도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피해구제가 사적으로도 없었고요. 근대 국가의

특징 중 하나가 폭력과 형벌권은 국가가 독점을 하잖아요.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수사와 재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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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과정에서 일부 참여를 시킨다고 해도 한국은 굉장히 제한되어있어요. 그런 것들을 앞으로 개선해

가고 그런 식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입장은, 제가 아까 조금 논쟁적으로 하기 위해서 그런 예외적인 경우에 한 살인범에

대한 처벌, 형벌로서 사형제는 성경적으로고 필요하다고 논쟁적으로 단순화시켜서 표현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고민을 하고 있어요. 왜냐면 저는 인권법 전공자로서 사형제 폐지

입장이 확고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피해자의 고통이나 이런 것들을 보게 된 계기가 있었고, 사적인

폭력에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입장을 조금 바꾸면서, 예외적인 경우에 사형을 인정을 해야한다는

편입니다.

사실 그 사형보다는 제가 아까 균형잡힌 폭넓은 사고를 해보라고 한게, 그 사람의 죄값을

대신할 수 있는 형벌은 무엇인지, 종신형, 아까 백교수님 마지막 토론도 굉장히 여러분들한테 많은

사고를 하게 해주었을 것 같은데요. 정말 범법자를 진정으로 인간으로 대접해 주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 죄값을 치르게 하면서 그 도덕성을 높여주는 것 일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친일파를

처벌할 때 김구선생은 공민권박탈 이런 중요한걸 내놨었어요. 그런 식의 방식이 되었든 아니면

피해유족에 대해서 평생 피해 복구 노력을 할 수 있게끔 하는 방식들, 그러니까 그게 그 사람 평생

형벌의 효용 관점에서 우려먹는 것이 친 인권적이냐, 아까 그런 토론이 나왔었습니다만 꼭 그 사람을

효용으로 활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진정으로 조금이라도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그런데 저의 경험으로 그게 참 힘든 것 같아요.

저는 소년원에 작은 꼬마들부터 범죄학 인터뷰를 해보고 했는데요. 정말 어려서부터 사람,

고통에 대한 경험이나 윤리의식의 형성이나 이런 기회가 없이 돼버린 사람을, 성인이 됐을 때 그

사람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신앙을 통해서든 무엇을 통해서든 너무나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소년원에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쭉 그렇게 연구를 하다 보면, 아주 영리하면서도 범죄적으로 충동조절도

못하면서 이런 타입도 있고요. 여러분들이 사형제에 대해서 예외적인 경우에 극악한 살인범의 경우에

사형제 폐지론자들이 주장했던 모든 논거를 다 받아들이면서 주장할 수 있죠. 예외적인 경우에는,

여기서 뭐 학교 발표시간은 아니니까 그 긴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요, 그러되 그 고민하는

어떤 준거점이 되는 것은 인간을 균형 잡히게 폭넓게 보면서 과연 죄에 대해서 제대로 묻고 범죄의

피해에 대해서 사람을 살리고 복귀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범죄 피해 같은 경우는, 저 같은 경우는 한 사람의 피해지만 거의 전 가족 전체가

실제 활동이 야간활동이나 정상활동이 힘들 정도로 그렇게 심한 피해가 오거든요. 제 가족과 다른 그

가족이 당한 경우는 두 명이 살해됐는데요, 그 피해자의 오빠가, 사적인 일입니다만, 검찰청 어디

지청에 근무하시던 검사셨는데 그만두셨어요. 그리고 그 딸은 정상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로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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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71

그렇게 있고요. 사실 이게 특별한 경우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런 경우에, 사회에서 수적으로 몇 명

안 되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법이 정의의 수단으로 제대로 기능을 하려면, 그냥 사형제 무조건 폐지다 범법자 살아있는

사람의 생명권이 중요하다. 국가가 그 사람이 시민인데 자기 생명권 양도한 적 없다. 이런 식의

단순한 논리로는, 상당히 보수적이고 우익적인 그런 입장의 사람들에 논증 조차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조금 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지적인 훈련. 이런 것을 갖출 수

있는 법학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시계 풀어놓고 이야기하는데도 조금 길어지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홍기원 네 사실 중요한 문제고 늦은 저녁에 진지하게 만드는 주제 입니다만, 제가 평소에 이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만들어질 때마다

고민하게 되는데요. 그때마다 저 나름대로는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보고 또 이런

입장에서도 생각해보고 저런 입장에서도 생각해보고 합니다. 그런데 물론 쉽게 결론은 도달하지

못하죠. 사실 누군가가 저에게 당신이 만약 당사자가 되면 지금과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냐고 한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여러분과 같이 법을 하는 사람으로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항상 끊임없이 고민하고 답을 찾아야 되는 입장에서 볼 때에 우리가 무엇을 옳고 그른지

찾는 그 과정에서 노력 중에서 무엇에 기대서 우리가 옳고 그름을 찾고 선택할 것인가 생각해본다면

좋겠습니다. 사실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은 그런 고민 없이 사실 기존에 있는 지식을 섭렵하고

습득하는데 급급하죠.

그런 어려운 선택을 누군가가 사실 대신해 줬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있어요. 입법자들 이라던지 정책결정자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들이 항상 결정을

회피합니다. 헌법 재판소도 얼마 전에 사실은 이런저런 말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장철준교수님이나

이국운교수님이나 잠시 후에 말씀해주실지도 모르겠지만, 헌법재판소가 결정을 내릴 때는 그래도

우리나라의 현인들 현인들이 모여서 최고의 헌법해석을 내놓는 기관에서 뭔가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어떤, 짓누르는 무거운 주제에 대해서 우리의 짐을 덜어주는 그런 결정을

내려주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려 보면, 끝에 가서는 꼭 자기자신들의 판단에 의하지 않고, 사형제도가

꼭 바람직한 제도라고 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 현재 국민 법 감정상 아직은 폐지하기 시기상조다 라는

말을 우리나라 사법기관 우리나라 최고 사법기관, 결정을 내려야 하는 곳에서 결정을 회피하는 것으로

결정문을 대신합니다.

입법부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나라 입법부도. 입법부도 항상 우리나라에서 계속, 최근에

박선영 이문원 의원이 출현했지만, 얼마 전에 감옥에 갔다 오셨던 그분도 약 10 년 전에 폐지법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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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낸 적도 있고요. 그때마다 그 법안이 항상 중간에서 아직 시기상조다라고 합니다. 안진 교수님

인용하신 자료에 따르면 첫 페이지에 나오면 첫 페이지에 나오는데 우리 국민의 70%가 사형제도를

찬성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시대 인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반 대중들이

사형에 찬성 하지 않았을 때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아까, 일찍 가셨지만 장세룡 교수님이 18 세기

프랑스 이야기를 하셨는데, 장세룡 교수님 맨 앞에 프랑스에서 사형제도가 폐지된 1981 년에 당시

로베르 바댕때르라는 법무부장관이 사형 폐지 법안을 냈어요. 우리나라 법무부 장관은 청송 교도소에

사형 집행소를 설치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프랑스의 경우에는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1981 년에 프랑스에서 법무부 장관이 사형 폐지 법안을 제출하는 국회에서 연설을 했을 때

빅토르 위고를 인용했습니다. 당시 로베르 바댕때르가 국회에서 연설한 것을 보면 이건 사형사

논문이에요. 프랑스 현대, 아까 장세룡교수님 논문과 같이 위대한 사상가의 이름이 데카르트에서부터

루소 몽테스키외 빅토르 위고에 이르기까지. 그 당시 프랑스 국민들의 여론은 어땠는가. 80%가

사형제도는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였죠 그런. 자리에서 유권자의 눈을 항상

의식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국민들의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죠. 그때 바댕때르 장관이

프랑스 국회에서 한 말이 있어요. 입법자는 여론을 추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론을 선도해야 한다고

했어요. 여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고 했어요.

법감정이 뭡니까. 여론이라는 것이 뭡니까. 아까 안진교수님께서 존 로크 말씀하시면서 남의

피를 흘린 자는 그만큼 피를 흘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구절도 있어요.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밀어라. 그리고 어떤 죄 이것이 죄다 아니다. 죄 일 수 있죠. 그러나

그것을 두고 어떤 형벌을 내리느냐 하는 것을 또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누가 봐도

그당시 어떤 법감점, 그 당시에 예수님 설교하시던 시절에 그 당시 어떤 감정으로 봐도 돌팔매질 해서

죽여도 마땅한 자를 예수님은 죄 있는 자가 이 이에게 돌을 던지라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은 무엇이 죄냐 아니냐 따지는 것과 거기 어떤 형벌을 내리는가는 별개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따질 때 항상 우리는 감정적인 측면에 서기보다는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이것을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면 프랑스에 여론은, 사형이 폐지된 지 20여 년이 흘렀죠. 30년

가까이 됐네요. 이제 당연히 여론은 확정되어있습니다. 프랑스의 대다수 국민은 사형제도는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당시 로베르 바댕때르 법무부 장관의 이야기가 맞았던 거죠. 입법자는 여론을

선도해야 한다. 물론 지금도 프랑스에서 예를 들어서 우리처럼 프랑스 여중생 살해 사건이나 안산에

꼬마 그런 끔찍한 강간사건 날 때마다 그런 흉악범들에 대해서 프랑스에서도 그런 흉악범이 있죠

지금도 그런데 우리는 그런 흉악범이 나오면 우리는 죽여야 한다고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다고 여론

재판이 이는 반면에 프랑스는 그런 재판은 있을 수 없죠. 그렇지만 프랑스에서 그런 일이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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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73

마다 여론은 들끓고 또 전에 비해서 많은 사람이 사형제도를 우리 사회에서 부활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그런 여론이 들끓는 것을

이용하는 세력은 항상 populist 들입니다.

저는 그런 것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하는 것이 옳고

그른가를 따질 때 그러한 선동적인 측면, 그렇게 격한 측면에 기대서 정치인들이 어떻게 해야하는가.

죄송합니다만 아까 안진교수님께서 이런 측면들을 다 고려해야 하는데, 학문적 지원은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형 폐지를 논하면 더 멋있어 보이고 더 지적으로 보이고 이런 말씀에. 저는 제 자신이

어떤 입장을 취해서가 아니라, 사실 사형 폐지론을 주장하시는 분이 있으면 그분들을 더 힘듭니다.

왜? 여론의 70%가 사형 존치론자들이예요. 그리고 실제로 만약에 이런 상황에서 사형폐지론을

이야기하면 돌팔매 맞기 쉬워요. 여기 지금 가셨지만 이덕인 교수님의 논문에 우리나라 국회의원에

사형폐지 법안을 내는 국회의원도 있지만 툭하면 이구원 법무부 장관처럼 툭하면 사형 집행을

제기해야 한다고 하는 국회의원도 있어요. 박모 국회의원과 이국운교수님 동기동창이예요. 그러면

누가 더 쉽겠습니까 누가 더 유리하겠습니까? 이게 만약 싸움이라 치면 어느 싸움이 더

힘들겠습니까? 물론 사형 폐지론을 펴는, 제 생각은 그래요, 사형 존지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런 역학적인 관계 속에서 조금 더 부담이 덜할지 몰라요. 이런 역학관계 속에서 사형폐지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힘든 어떻게 보면 쌓은 노력일 수 있다는 그런 이런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데는 어떤 신념이 그런 분들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고요.

마지막으로 사형제도를 존치함으로써 또는 국가 형사사법이 피해자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절차나 제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말씀도 자주 나오는 지적 중에 하나인데요, 사형을 함으로써

그것이 궁극적으로 피해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피해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은 다른 방법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히려 피해자의 상처가 생기기 이전에 그런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수 차례 언급된 여러 흉악

사건들이 있었어요. 유영철사건 뭐 많이 있죠 우리나라에 사형제도가 없어서 그런 사건이 생겼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 부산여중생 사건 있고 나서 얼마 있으면 그런 사건이 또 생겨요.

의정부에서 또 생겨요. 안산에서 또 생겨요. 우리는 사형제도가 없기 때문에 그런 흉악범죄가 계속

생기는게 아니라 그런 흉악범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적 보호장치를 만드는데 소홀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근에 어린이 성범죄 피해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여태까지 사실 우리는 어린이들을 각종 위험 속에 내던져 놓은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고 나서 그런

사건이 생기면 그것을 오로지 모든 책임을 다 가해자에게만 뒤집어씌우는 많은 부분은 우리가 함께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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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저는 마지막으로 형사사법이라고 하는 것은 Justice 라고 하는 것은 엄격한 형벌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것. 진실을 밝히고 우리 무엇, 그런 진실을 밝히고 거기 우리의 법 원칙과 법가치 이런

것들을 적용시켜서 거기에서 어떠한 우리의 우리 사회가 나아갈 가치 지향점들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확인해 나가야하는 작업이 바로 형사 사법이지 우리의 우리 스스로의 책임은 집합적인 책임은 우리가

자꾸 눈감아버리고 어느 한 사람에게만 너무 집중적으로 책임을 물으려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간혹 합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장철준 기본적으로 저는 리버럴입니다. 자유주의자입니다. 자유주의자인데 공화주의를

동경합니다. 공화주의를 하려면 자유주의가 먼저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번도

자유주의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국가에 대해서 간섭받지 않고 제대로 된

권력과 자유를 행사하고 누리고 즐길 수 있을까요? 그게 저에 근본적인 바람이고 지향점이고요. 그런

와중에 그걸 겪은 후에 우리가 개인주의로만 하지 말고 같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보자 이렇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생각할 때 특히 생명과 관련해서 가장 밀접하게 관계된 문제가 사형에

대한 문제와 낙태에 대한 문제 같습니다. 사람을, 생명이라는 것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그런 문제

중에 가장 국가의 차원에서 문제가 되고 안되고가 낙태와 사형인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리버럴의 입장에서 그리고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낙태는 반대합니다. 저는 또 생명을 하나 낳아보니까

얼마나 그 생명이 소중한지 알겠습니다. 낙태를 반대하고 낙태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낙태를 죄로 해서 국가가 처벌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이게 조금 모순되는데요.

왜 그러냐면 낙태를 국가권력으로 처벌하는 것 자체가 그 사회의 자유의 척도를 보여주는것 같아요.

얼마만큼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느냐의 정도를 낙태를 처벌하느냐 처벌하지 않느냐로 판단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왜냐면 그게 잡기 가장 쉬운 범죄거든요. 범죄화 시키기 용이합니다.

국민을 범죄자로 낙인찍기 가장 쉬운 범죄가 낙태죄인것 같아요. 왜냐면 저지르는, 행위를 하는

주체가 여성이라는 측면도 있고, 밝히기도 쉽고, 그래서 낙태를 죄로 처벌하느냐 안하느냐는 그

사회의 자유의 척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낙태를 반대하지만 죄로

처벌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이런 입장이 저는 소위 미국인들 리버럴들, 그사람들이 진짜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입장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봤을 때 국가로부터의 자유 그런 선상에 있다면 사형도 당연히 폐지가 되야죠.

저는 사형도 폐지가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폐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현실도 봐야 하거든요. 아까 홍교수님 말씀하셨지만 어느 사회나 대부분의

국민들이 사형을 찬성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가장 중요한문제가 과연

populist 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얼마나 제대로 된 우리사회의 의견을, 제가 아까 낮에 사형은 정치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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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75

문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정치적인 문제를 얼마나 민주적으로 정치적으로 잘 해결하고 있는가

사형에 관해서는 굉장히 어려운 것 같아요. populist 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정말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토론이 제대로 열려있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계속 일방의 주장만을 상대방의 말에 귀를 막고 자기의 주장만을 해나가면 답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화가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이 지금 상황에서 우리는 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회복이라 생각합니다. 가장 사형에 관한 문제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제가 믿을 수 있느냐

재판을 믿을 수 있느냐 오판이 이렇게 많은데. 진짜 진실은 하나님만이 아시겠죠 죄를 지었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 사람을 죽여야 할 만큼의 큰 죄를 저질렀는지 아닌지는 진짜 진실은 하나님만 알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된 입장에서 밝히는 그 와중에 피해자나 가해자나 재판하는 사람이나

그래 우리 마음껏 이 장에서 이야기하고 제대로 밝혀보고 제대로 방어해봤다 하는 정도의 만족감을

가질 만한 절차를 우리가 가지고 있느냐면, 저는 분명히 아닌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사형 폐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제대로 한번 우리 선생님 말씀 중에 피해자 가족들은

재판정에도 못들어간다고 그러셨죠. 그 느낌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재판과 공적인 자리에서 토론이 이루어지려면 피해자들이 너무너무 힘들다. 너 피해자에 대해서

가족들이 느끼는 고통을 생각해봤느냐. 정말 나이브한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요. 공적인 자리에서

이런 토론이 좀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 재판 시스템에서는 이게 안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대신 이야기를 한겁니다.

아까 홍교수님 논문에서는 오심률이 높은 걸로 나와있는데요. 제가 느낀 미국사람들이 가진

사법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나 자기네 법 제도에 대한 신뢰는 우리와는 굉장히 달랐습니다. 자기네

들이 가지고 있는 재판 시스템에 대해서 우리와는 다른 수준의 높은 수준의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그걸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뭔가 해보고 싶은 말들을 자기네 재판정에서 마음껏 해보고, 나의

결벽성도 잘못 그런걸 모두 커뮤니케이션 한 다음에 결과가 나온다면 무슨 결과가 나오든 제대로 좀

봐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단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그래도 너무너무 힘들고 안되겠으면

그 다음에 가서 생각해보자는, 저는 그런 입장을 가지고 있거든요. 제가 조금 두서가 없이 말씀을

드리는것 같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부터 제대로 향유를 해보는 단계가

먼저 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먼저 보장을 해준 다음에 그 다음에 공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된

특히 사법 시스템에서 제대로 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그 이후에 인권과 다른

제반의 문제들을 다시 한번 논의할 수 있는, 그리고 populist 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정도의 냉정한

토론이 제대로 우리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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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아까 흉악범죄 말이 나왔는데요. 우리 사회의 일면이 되어가고 있는데, 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렇게 이 정도로 잔인한 사건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까 5.18 때 선생님 대학생이셨다고

했는데 저는 초등학교 1 학년이었습니다. 차 타고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뭘까 하다가 공터에 이렇게

놀러 나갔다가 부러진 총 버려진걸 이렇게 주워다가 하다가 잡혀갈 뻔 했습니다. 그때는 이 정도의

상황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뭘 말해주는가 하면,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일수록 그 이면에 사람들이 제대로 교류하지 못하고 자기가

사회 속에서 밑바닥에 정체되어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소위 묻지마 범죄, 해악범죄, Hate crime 이라 그러죠, 선진국일수록 더 많아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국민들의 특성상 열 받으면 성질 내거든요. 욕하고 성질 내고 이게 건강한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스트레스를 풀고 화나도. 이런 시스템이었는데 우리가 점점 선진국화 되면서 우리도 Hate

crime 을 걱정해야 할 시기에 접어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Hate crime 을 그냥 다 잡아다가

죽이는 걸로 해결을 해야 하느냐 여기에 대한 연구도 부족하고 제대로 된 사회가 대응을 할 자세도

아직 안되어있고, 근데 점점 이런 상황은 더 많이 늘어날 텐데 많이 초보적인 것 같습니다. 공부도

많이 되야 될 것이고 제대로 된 얘기도 많이 해야 할 것이고 그런 어젠다 세팅이 먼저 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10분 딱 지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승원 정말 대답하기 힘든 주제입니다. 저는 설교나 이런걸 준비할 때 상당히 감명받은

부분이, 아벨을 죽인 카인에 대해서 카인이 두려워 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것은, 항상 피는 피로

관련이 되어, 뼈 속 깊이 박혀있다고 되어있는데요. 아주 장기간 동안 하나님은 사람 죽인 자에게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사람 살리는 형벌을 주셨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그 생각을

담보했을 때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으로는 거기 동의를 해요.

그리고 예수님이시라면 과연 사형에 동의하실까 라고 생각해보면 결코 그러시지 않으리라 생각이

되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과거에 일어났던 무수히 많은 범죄들 그리고 사법살인이라 할

만한, 일종에 사형이 아니라 처형이라고 하는 그런 또다른 정의의 이름을 쓴 무자비한 살육 그리고

그런 법조차도 없는 정복전쟁에서의 처절한 결과들을 생각하면, 사람이 사람을 죽인 다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에 관해서 회의하게 되고, 그런 집단적 범죄에 대하여 격렬히 분노하게 됩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세월이 흐른 뒤고, 수만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오늘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 속에 되살아 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와 아무런 혈연적 시간적 공간적 관련도

없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람의 마음 속에 되살아 날 때 분노가 일어나는 거죠. 하물며

자기가 어떤 관련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 그것은 때때로 도저히 평생토록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라

그러죠, 이런 걸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물론 그런 것이 사형이라는 물리적 처형에 의해서

치유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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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77

그러나 그것마저 없다면 인간은 영원히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요. 벗어나려면 우리는 아마 성인이 되야 할거예요.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되기 이전인데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잠정적인, 종말론적인 미래를 기대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현재를 살고 있으니까,

그리고 법은 지금 현재에 적용되어야 할 규범 아닙니까. 그래서 그게 우리의 고민이죠. 그래서 때때로

저는 어떤 사형이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프랑스는 격변기마다

기본 단위가 만 명 단위의 수 만 명씩의 과거사 척결을 한 나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다 법의

이름 하에서 이루어진 일들이고, 그런데 우리나라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제가

법철학시간에 가끔 고은의 만인보에서 여러 부분을 읽어주는 경우도 있는데, 한쪽 페이지는 저쪽에서

내려와서 이장 딸 죽이고, 그 다음 이쪽에서 이 쪽에서 가서 이장 딸 죽인 보도연맹 딸 죽이고, 그

둘은 나란히 무덤이 있고, 그 이름까지 실명이 거론된 장면이 있죠. 그러니까 고은도 해명이 안 되는

거죠. 둘이서 어떻게 같이 죽기 전에 학교 같이 다니면서 즐겁게 노래 부르던 그날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겠는가 답이 없다는 말입니다. 서로 처형자들을 똑같이 처형할 것인가. 서로 그렇게 처형하는

그런 의미에서 궁극적으로는 어떤 체제이던 간에 사형이 용인되지 않는 것이 합당하죠. 만약에 그게

복수가 복수를 낳고 하다보면, 그렇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답을 정말 잘 모르겠다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나는 사형 존치론자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 마음을

가만히 관조를 해보면 내 마음 속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나는 자신이 없어요. 폐지론자가 되었을

때의 자신이 없다는 거죠. 대신에 신심의 어떤 순간에, 신심이 극에 이르는 순간에는 충분히 되긴

되요. 누구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고 다 됩니다만, 그러나 나는 때때로 보통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보통사람의 상태로 삶의 대부분을 보낸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만들고 지켜내야 할 부분 그 보통사람의 삶의 시각에 적용이 되는 것들, 성인이

성인의 삶에는 정의도 필요 없고 법도 필요 없어요. 대게 로스가 성인사회인 공산주의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 있다는 거죠.

사형이란 제도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논쟁 보다는, 어떤 사형이어야 하는가. 기독교에서는

사람을 살고 죽음을 거듭남에 있다고 보죠. 오히려 기독교적인 신학적 관점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거듭남을 위해서 만약에 살인이 유용할 수 있다면 나는 살인이 용인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예를

들면 아까도 잠시 교수님들 사이에서 이야기도 했지만, 사형시키지 않고 끊임 없이 회개의 시간을

40 년, 50 년 주면은 회개할 것 같아요? 스님들 면벽구면 해도 만병은 끊임 없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감옥에 앉아서 머리 속으로는 오만 죄를 더 저지를 수도 있죠. 여러분들 연속적을 한 시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몇 일 간은 대게 죄를 짓고 나면 몇 일간은 힘들거에요. 그런데 그거 일년씩

그러면 사람이 폐인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아요. 인간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끊임 없이 회개의 기회를 준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거죠. 인간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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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그렇다면 어떤 결정적인 것으로서 인간이 진정으로 거듭나고 해방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자비일 수

있다. 때때로는 사형이 자비일 수 있다는 거죠. 그 자비 속에서 서로가 어떤 면에서 현실을 이룰 수가

있고 회해도 가능할 수 있고, 그러나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형이어야 하는가. 과거의 처형, 사법살인은 결코 용납이 안되죠. 그런데 그걸

행한 자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분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용서가 되요? 광주

분들이 전두환이나 용서가 되냐는 말이죠. 그러면 죽여야 될까요? 살려놓고 회개 하라 하면 회개

하나요? 안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요. 그러면 역사의 심판이 있죠 춘추의 필법으로, 역사에

붉은 줄을 긋는게 있죠. 그건 명예살인 아닙니까. 옛날에는 명예살인제가 있었어요. 솥에다 집어넣고

불 때는 시늉을 하면 그건 죽은 거예요. 살아있어도 죽은 것처럼. 광화문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불

때는 시늉을 해서 삶아 죽이는 모습을 갖추고서. 실제로 불을 때는게 아니니까 그 사람은 멀쩡해요,

그러면 집에 가족들은 그 사람 데리고 집에 가서 장사 다 치르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서 죽은, 적어도

그런 식의 여러가지 독특한 방법으로 형식적인 사형제도는 있었던거죠.

어떤 종류의 어떤 형태의 사형은 때때로 가장 합당한 회개의 수단일 수 있다고 본다면, 꼭

그거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은 그런 것도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아무데나 사형하고, 지금 우리 국법에는 89 가지가 있다고 하죠. 법관들은 어떤 때는 너무 신중해서

회피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폭력에 대한 물린 채로 책임을 회피하면서 사형을 선고하고, 이 두가지 다

문제가 있습니다. 범죄와 형벌에 대한 사례들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수없이 많이 접해보지 않으면

관념적으로 결코 단언할 수 없는 사건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여하튼 결론없는 말이지만 더이상 할

말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이정도에서 그치겠습니다.

이국운 안교수님, 뒤에 세분 말씀을 들으셨는데,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안진 제가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 제 최근에 고민과 변화된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이

굉장히 조심스럽고, 또 이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생각을 합니다. 제가 그냥 평범한 피해자라기 보다는

어째뜬 인권운동을 같이 해왔고, 또 강단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고민이 되고, 혼자서 책을

읽고 고민도 하고 윤리학 철학 하신 분들하고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그렇게 했지만, 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를 해서 공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이 자리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방금 지승원 교수님께서도 말씀 하셨듯이 어떤 사형이어야 하는가, 제 식으로

표현하자면, 정말 무고하게, 정말 순수하게 선하게 산 사람을 그 사람의 생명권. 그 사람의

생명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권리들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겁니다. 이건 침해하는 순간 비존재가

되는 순간이거든요. 권리의 주체가 지상에서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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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79

범법자의 생명권만 이야기해요. 사실 법에서, 국가 공동체 안에 시민 개인은 어느 순간에도 자신의

목숨, 자신의 생명을 누구로부터도 침해 당하지 않고 보호해 주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가장 큰

책임이거든요. 제가 피해자들을 몇 사람 보면 피해자 그 한 사람이 살아서 30 대 40 대, 그 사람이

50 년을 살면서 사회에서 했을 선한 일들이 정말 그림처럼 환해요. 그런데 그 흉악한 범죄자의 손에

의해서 사라집니다. 그 다음에 그 이후에 그 범죄자가 나와서 살 것은 우리가 다 예상이 되죠. 저는

지교수님 같이 신학적 고민과 그런 것을 더 깊이 있게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사회학을 한 사람으로서

정치사회학, 국가 법사회학 이런걸 해온 감각으로 보면, 우리 국가에 많은 것을 위임하고 사는데, 그

국가가 내 존재 자체를 앗아가버렸을 때 보호해 주지 못했을 때.

재미있는 것은, 제가 수사관들부터 다 이렇게 경험을 하고 제 경우에는 50 일간 범인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온 가족이 광인이 되다싶이 해서 수사관들이랑 같이 뛰었어요. 그런데 그

수사관과 법조인, 우리가 위임한, 아까 로크가 이야기 했던 세 차원 중에 형벌권을 위임받은 국가

행정부 사법부 경찰들이 하는 것은 살인이라 하면 무조건 원한이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그거밖에

보지 않아요. 그런데 방금 말씀하셨듯이 갈수록 사회에서 배제된 소외된 사람들이 많고 폭력에 둔감한

미디어와 문화체계는 커가고 그런 사람들은 한없이 생기는데, 이 범죄자들은 자기가 몇을 죽여도

자기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한다는 말입니다. 법원에서도 알고 또 제가 제 가족이 피해를 겪었던

그 사람의 경우에는 과거에 소년원에서 근무한 적도 있고 형무소에서 일한 적도 있어요 형법도 잘

꿰고 있어요. 그 사람 둘 말고 서넛은 죽이려 했어요. 첫번째는 교회 앞에서 살해했고 두번째도 죄

없는 여자를 성당 앞에서 살해했어요. 교회 앞에서 살해된 제 여동생의 경우에는 교회에서 이건

순교라고 봤어요.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모두 순교라고 보는 것이 편한거죠. 그 사람은 또 후미진 성당

앞에서 죄없는 여자를, 그것도 그냥 살해한게 아니예요. 그 살해 수법이라는게.

우리가 선진국이 될수록 이런 범죄가 더 많아지는데, 적어도 그 사람들은 굉장히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면서 살인 범죄를 저지릅니다. 제가 살인범들을 보면 그렇거든요. 나도 언젠가 나도 내

목숨을 내 놓는다고 했을 때는, 저는 그래서 분명히 일반 예방효과가 무시 못하게 있다고 보는 거예요,

내 목숨까지 내 놓을 수 있을 때 나도 죽인다. 적어도 이정도 판단은, 내 인생 이정도 되버린거

어차피 될대로 되라 이런 심리상태에서 하지만, 그래도 어느 순간 아마 최근에 방어능력이 없는

어린애에 대한 성폭력 이런 것들이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문제, 아까 populism 으로 표현했던 그런

쪽의 주장들이 다르게 갑니다만, 저는 그런 식의 갈수록 늘어만 가는 흉악한 살인범죄에 대해서

우리가 이성적으로 대처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그 사람들 그냥 살려두는 것

구차하게 더럽게 살려고 하는 그 사람들의 마인드를 계속 지켜 주는 것 그게 그 사람들을 진짜

살리는 것인지 그 사형장에 입회했던, 우리가 사형, 실질적으로 사형집행이 되기 이전에 검사시보로

들어갔던 그 검사님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그 이후로, 검사 시보는 대게 피해자 입장에서 많이 해요.

제가 보면 피해자들에 대해서 법조계 사람들과 굉장히 감각이 달라요. 교수형 당하기 전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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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사형수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그래서 정말 자기는 사형을 폐지해야겠다고 느꼈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람은 사형장에 왔기 때문에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교도소 등에 가보면, 어떤 경우도 나는

끄떡없이 살고 언제까지 나간다는 사람은 회개할 필요가 없어요. 참회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정말

이성적이라고 하는 것이죠.

홍기원 교수님, 제가 수년 전에 제가 했던 논변, 내 모습 그대로 하시는것 같아요. 내가 꼭

저렇게 말했었지, 저기다 이것만 더 보태면 됐는데 이런 느낌을 받았는데, 정말 피해자에 공감을

하면서 정말 정신병자, 치료해야 할 사람들 말고는 누구든 열어놓고 교정과 교화로만 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고 사명이라고 제가 자신있게 이야기 했고하지만, 아까 말씀 하신데 대해서 반대논변들은

바로 다 나올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무고한 피해자들이 그렇게 많은지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재수 없는 한 사람의 일이 아니고 꽤 있어요. 상당히 많아요. 그리고 피해가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요. 그리고 인간의 공격성이나 폭력성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아까 폭력이 없는

사회 그런 큰 넓은 선에서 이야기를 드렸던 이야기를 했는데요. 정말 폭력에 수위는 그 폭력을 제어할

수 있는 환경과 다른 파워가 있지 않으면 절대 제어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흉악한 살인범죄에

대한 어떤 예외적인 형벌, 아까 지교수님이 표현하셨던 어떤 사형이어야 하는가 대안적 형벌,

예외적인 형벌에 대한 그런 논의, 그러니까 그런 범법자도 똑같이 도덕성을 가지고 참회하고 회개하는

인간으로 존엄하게 보는거죠. 칸트나 헤겔이 말했던 바에 그런 인간으로 놓고 봤을 때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교정과 교화 기회를 그냥 던져주고 그걸 조롱하고 끝없이 살게 하는 것이

그것이 진정한 해결책인가.

경제학적인 것은 다른 것 같아요. 여러분들 법경제학 적으로 보면 정말 normative 하지만

normative 하게 형벌이 가해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재판관은 다 해석해서 충실하게 다 한다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본격적으로 많이 이야기하는 검거율도, 검거율을 높이면 당연히 범죄율이 줄죠.

그렇지만 국가는 검거율을 높일 수 없습니다. 왜요? 그만큼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니까요. 적정한

수준에서 할 수 밖에 없는거예요. 그런 어떤 기본적인 차원의 논의하고 국가가 형벌체계나 사법체제를

운용해 가는 정치적인 결정, 그 사이에 어떤 균형이라면 균형이고 그것들을 맞춰가는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말 완전하게 도덕적으로 피해자의 회복과 복귀, 거기서 고려되는 첫번째

변수가 피해자의 회복 생명권은 어떻게 구제 혹은 회복은 불가능하죠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그 피해 범위가 가족이나 엄청나게 많아요.

아까 제가 들었던 제 가족의 경우는, 그 두번째 했던 그 사람이 굉장히 운이 나쁘게도

달려가면서 계속 등을 치고 거의 또 세례 요한이 당했던 그런 식으로 목을 쳐죽였어요. 첫번째는

그리고 두번째도 도망가기에 뒤따라가서 그렇게 하려다가 실패를 했는데, 그 때 운 나쁘게도 그 차를

목격한 목격자가 있어서 증거를 없애던 중에 현장에서 잡았습니다. 첫번째 살인의 증거는 다 없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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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81

미국식으로 형사재판이 철저하게 지켜졌다면 그 사람은 첫번째 사건의 범인은 될 수 없어요. 정황적인

증거밖에 없는데 한국식 사법체제니까 연쇄 살인이 된거죠. 그런데 두번째 경우는 그 사람이 그

피해여성을 그렇게 하고 가서 증거를 완전히 인멸 하려고 침착하게 다 하는데 현장에서 잡혔거든요.

그리고 그 다음을 계획하고 있었어요. 첫번째 범행 후에는 다음날 뉴스를 보면서 죽었는가 확인도

하고, 재판장에서 그 사람이 보인 모습은. 제가 다른 사례를 보면서 의외로 많은 범죄자들이 그렇다는

거예요.

인간이 그런 환경에서 가족에서 버림받고 이렇게 가면서 도덕성을 잃어버린 인간을 나름대로

국가 형벌이 누구든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 순간 너는 이렇게 되는거라는 정도는 누구에게나 심어주는

그런 대안적인 형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폭력을 조장하는 거대한 이

시스템과 싸우는 데는 우리가 한계가 있고, 우리 법의 영역에서 적어도 그 정도의 장치는 마련해 줘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고민을 제가 새롭게 피해자의 관점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피해자 지원도 있어요. 법도 있고요. 그러나 그런 경우는, 정말 한 푼도 없는 피해가족의 경우에는

1000만원에서, 인상되서 3000만원이예요. 목숨값이 3000만원이예요. 경제능력이 있는 피해가족 같은

경우는, 그것도 조정위원회 같은 데서 깎아서 천만원 몇백 이렇게 줘요. 그건 국가가 취할 태도가

아니죠. 그런 것도 좀 더 현실적으로 가야 합니다.

가장 우선되야 할 게 그것이고, 아까 말씀하셨던게 그런건데, 뚝 때놓고 사형제도가 있어야

되냐, 말아야 되냐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 많은 범죄 중에 그런 흉악한 범죄 인간의 폭력적인 성향,

우리가 그런 상황이 됬을 때 어떤 인간도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도 그걸

제어할 수 있는게 형사사법체계의 장치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아마 제가 태어나서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이렇게 제 개인적인 고뇌와 고민과 필요에 의해서 이렇게 자료를 찾으면서 잠도

안자면서 이렇게 해본 적은 사실 없었어요. 이걸 나름대로 객관화 하고 냉각기도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한데요. 지금 단계에서 생각입니다만, 여러분들이 전문가로서 직업적인 성공을 위해서, 내가

앞으로 살기 위해서, 이런 식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왜 이렇게까지 흉악한 범죄가 있고 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버젓이 살고, 한 10 년이면 그 사람은 나와서 잘 살겁니다. 그것도 다 알고 있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사회에 적어도 그 정도를 어느정도 막아가면서 크게 보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살인범죄율을 얼마나 줄일 것인가는 이것은 또다른 연구인것 같아요. 과연 미국에서

사형제를 폐지한 주가 살인 범죄가 줄었는가. 이런 것이 여러가지 논문들에서 인용도 많이 되고 한데,

범죄의 피해에 대한 공감, 다양한 범죄들을 하나로 묶어서 보지 않고 예외적인, 생명권의 문제,

생명권을 침해하는 문제 그걸 꼭 같이 언급을 하면서 왜 살인범이 이 사람도 시민인데 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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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생명권을 침해하냐 한쪽만 주장해서는 아까 우리가 populist 라 하고 보수적이라 하는 도덕주의자들의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크게 봐서는 이런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미국의 부시정권이나 이런걸 보면 강한 국가,

강한 형벌을 주장하는 그 국가의 정치체제는 별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에요. 아까 우린 진정한

자유주의를 경험했던 시대가 없잖아요. 국가보안법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사상의 자유, 나

막스주의자다, 나 사회주의다 이걸 떳떳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자유주의거든요. 한국은, 여러분 그걸

말하는걸 다 두려워하잖아요. 우리는 이렇게 평범한 자유주의도 못하고 있어요. 아까 교수님

말씀하신거 너무나 공감합니다. 국가로부터 침해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

그 시기를 우리가 겪고 확고하게 되고 그러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인의 생명권 크게

봐서는 약한 국가, 그러되 윤리적인 도덕적인 이런 것들을 회복하는 사법체제는 그런 정도 도덕적인

최소한의 방어를 가지고 있는 사회를 생각해보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꿈꾸는 것도 윤리적 도덕적으로

완성된 개인이 되는 것이고 사회도 좀더 노력하는 것이고, 그다음 교육이나 의식으로 다 흘러가버리는

이상한 현상 이렇게 되어버리는데요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이국운 저는 사회자이긴 하지만 이 자리를 꾸민 사람으로서 여러분들과 함께 토론하기

위해서 생각나는 몇 가지를 덧붙여보고자 합니다. 네가지 정도 인데요. 첫째는 추격자라는 영화에

주연을 했던 싸이코페스 역할을 했던 하정우 라는 배우가 얼마 전에 무릎팍 도사에 나왔었습니다.

그때 제가 보고 느낀건데, 강호동씨가 어쩌면 그렇게 연기를 잘 했는가 하고 물었더니 하정우씨가

다음과 같이 답을 했습니다. 마음 속으로 아주 극악한 어떤 그런 생각을 하고 사람을 죽인다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해보려 했는데 그러면 연기가 안되더라. 오히려 논다고 생각하고 별것 아닌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제식을 표현하자면 어린이가 블록놀이를 하듯이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연기를 했다. 그랬더니 연기가 되더라, 여러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추격자란 영화가 상을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았고요. 제가 쓴 논문에서 추격자라고 하는 영화에

쏟아지고 있는 찬사가 무엇을 목적하고 있는가를 제 나름대로 찾아보았는데 거의 저는 예외를 찾지

못했습니다. 거의 모두가 연기를 잘했다. 감독의 연출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시나리오가 멋지다 라고

하고 있었지, 그 내용이 그 내용에 관해서는 전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소위 윤리의 미학화가 자본주의적인 미디어사업과 결탁해서 멋지게 보이는 것 멋지게 죽이는

것으로 그것까지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은 오늘 이 주제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지만 우리가

지금 그런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까 장세룡 교수님 종교혁명이나 프랑스 대혁명의 광기를 많이 말씀하셨는데 그 광기가 우리에게

있어서 극복되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연극 속에, 영화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이미지들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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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83

그렇게 이미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학생들이 많이 하는 리니지 이런 것을 보면 그

속에서는 아직도 우리가 종교전쟁을 성 바돌리모의 대 학살을, 또는 공안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두번째는 우리 나라에서 사형제도에 관한 존폐논쟁의 위선성입니다. 1990 년대 중반에

사형제도에 첫번째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왔습니다. 사실 그 결정을 내 놓는데 헌법소원을 신청한

분들이 변호사 분들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형제도 그 자체를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헌법서원을 89 개를 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9 개의 범죄 각각에 대해서 헌법재판소가

과잉금지 원칙을 쓰는데 그걸 다 들이대서 문제의 범위를 좁힐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면에서

아직 우리가 문제의 범위를 우리가 풀 수 있는 규모로 좁혀놓고 이 일을 풀어야 하는데, 오늘 우리

안진 교수님께서 한국 사회 지식인 집단 안에서 쉬 하기 어려운 말씀들을 하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형 폐지론자가 아주 열렬한 사형 폐지론자가 제한적 사형 존치론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저는

입장의 변경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문제의 범위를 합당한 수준으로 좁힌다. 이렇게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보기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앞으로 두가지를 더 말씀드릴 탠데,

각각이 다 연결된 것은 아니고요 제 나름대로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데 오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케쥬얼리스틱하게 서로 연결 없이 생각난 것들입니다.

세번째는 안교수님도 말씀하시고 지목사님도 여러차례 말씀하셨듯이 창세기 4 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 가인의 죽임 과정에서 가인에게 하나님이 주신 표에 의미입니다. 자기가 아벨을 죽인

것을 사람들이 알기 때문에 자기를 다 죽이려 할 것이다. 그 경우에 어떻게 하냐 하나님께 여쭈니까,

애원하니까. 우리 지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표를 주셨어요. 그 표를 내놓으면 사적인 형벌에서

면제를 받을 수 있다고, 대게 우리 기독교적 법 이론 정치이론을 생각하는 분들은 그 사건에서부터

이론적인 기초를 가져오곤 하거든요. 그 사건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고요.

마지막으로는 미국사람들 같은 경우에 살인을 1 급 살인, 2 급 살인 이렇게 나누어서

1 급살인의 경우에만, 자꾸 문제의 범위를 좁혀가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비해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살인죄가 너무 광범위하게 규정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형법을 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제가 최근에 고민하는 바는 안교수님 먼저 운명을

달리하신 동생분이 당하신 그런 범죄 특별한 어떤 다른 동기 없이 무고한 불특정인을 공격하는

범죄를 살인이라고 하는 범죄의 유형으로 다스리는게 옳은가. 저는 굳이 이야기 하자면 그것은 테러,

테러라는 유형의 범죄, 대게 태러라는 범죄는 국내법 상에다가 집어넣지 않고 국제법 상에, 국제법

상에도 전쟁법의 아주 특별한 유형으로 설명해서 테러에 대한 대응은 국내법적인 어떤 시스템 속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이야기 하거든요. 그런데 이 테러라고 하는 테러의 핵심징표들이 그거죠 무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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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사람을 불특정으로 공격해서 살해한다고 하는 것인데 집단살해와 상당히 같은 점도 있지만 상당히

무고하다는 점에서 상당히 다르고요. 테러에 대해서 응징해야 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같은 사건을

넓게 보아서 사형제도라도 다 집어넣어서, 너 찬성이냐 반대냐 이렇게 하기 보다는, 합당하게 문제의

범위를 좁히고, 어쩌면 테러범죄라 하는 전혀 다른 유형의 범죄 그룹으로 문제를 이월 시키는 것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풀어가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저는 오늘

하게됩니다.

사회자가 이렇게 개입하면 안되는데 제가 답답해서 말씀을 드렸고요. 9 시 15 분이

안되었는데 11 시에 들어가야 하는거죠. 교수님들은 한분은 4 호관에 한분은 비전하우스에 방을

잡으셨습니다. 또 저희야 포항에 살고요. 조금 시간에 대해서 큰 부담을 가지지 말고 여러분들이

질문을 하셔도 좋습니다. 자기 생각을 그냥 이야기 하셔도 좋습니다. 그 생각을 여기 와서 떠오른

생각도 좋고 평소에 했던 생각도 좋습니다. 심지어 교수님들이 하신 말씀에 대하여 논평 하셔도

좋습니다. 아니면 답답하다고 소리를 지르셔도 좋습니다. 무슨 반응이던지 여러분들이 보여주시면

교수님들 중에 답하실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답하시고 왔다갔다하시면 되겠습니다. 본격적인

콜로키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말씀을 열어줄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주십시오.

학생 1 안녕하세요 10 학번 이재연 입니다. 제가 예전에 사형에 대해 생각하면서 생각해본게

있었는데요. 예전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영화가 있었거든요. 그 영화가 사형과 관련된

영화였는데, 원래 책이 원작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마지막 장면쯤에 가면 그런

장면이 있어요. 주인공 남자가 사형을 당하게 돼서 사형대에 섰는데 사형집행인들이 있더라고요.

버튼이 네명 정도가 있었는데 버튼이 다 눌러야 사형이 집행되더라고요. 그 마지막 장면에서 한 사형

집행인이 버튼을 누르는 것을 고민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걸 눌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다가 결국

누르긴 했는데, 그래서 몇 달 간 많은 생각을 하다가 생각했던 게 우리들이 흔히 하는 말이 사형에

관한 그런 처벌이 국가가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은 어떤 한 사람이

있는 거잖아요. 사형집행인이라는. 그 사형집행인은 피해자도 아니고 가해자도 아니고 사실 제

3 자인데, 제 3 자한테 다른 사람을 죽이는 책임을 부과해도 되는 걸까, 그게 정말 타당할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교수님들이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싶습니다.

학생 2 안녕하세요. 04 학번 법학부 정규호입니다. 오늘 개인적으로 콜로키움 여러 차례

참석했었는데 교수님들이 확실한 답변을 주신 적이 이제까지는 없었는데 오늘 극명하게 갈라졌는데,

기쁜 반면 분위기는 어두운 것 같습니다. 들으면서 생각났던 것은 스파이더 3 마지막 장면에 제가

충격적이었던 것이 있었는데요, 주인공이 자기 삼촌을 죽인 사람을 향해서 용서한다고 말했던 그게

교수님들 대화를 들으면서 많이 생각이 났었습니다. 반대하시는 두분 교수님들께, 우리가 북한이나

인권 상황들을 보면 어떤 정치범이라는 혹은 그 외 죄를 지어서 사형이 아닌 다른 이런 형벌을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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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85

부과하고 하는데요. 그건 아니라고 다들 동의를 하는데, 그러면 사형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대안들을

생각하고 계시는건지, 그리고 또 한가지는 아까 대답을 회피하셨는데, 본인이 정말 그 입장에

당사자가 되어서 참여하는 사람에 입장에 있다면 어떻게 입장을 표현하실건지 궁금합니다.

이국운 제가 예상한 것과 비슷하게 오늘 콜로키움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오늘 콜로키움이

끝나고 나면 마음이 아주 답답하고 찝찝하고, 술 마신 사람 같으면 이대로 집에 못간다고 하는, 더

없습니까?

학생 3 법학부 박태영이라고 합니다. 저 스스로를 잠제적인 살인자로 세워보고 잠제적인 피

살인자로 세워보고 하니까 컨디션이 좋지 않습니다. 하루 저녁에 죽어도 보고 죽여도 보는것 같은데요.

영화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그런걸 보면 끝으로 가면 갈수록 사형수를

살려주고 싶어요. 추격자 보면 주인공 그 분이라고 말할 수 없죠, 그 세끼를 죽여야 되는데. 그래서

저희가 그 두가지 입장에서 다 자유롭지 못한것 같습니다. 지금 제 삼자로서 그런걸 바라보는게

오만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고 정말 잠제적인 살인자 피살자로 깊이 개입이 되어야 하지 않나 더

깊이 개입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고요. 또 문득 드는 생각이 안진 교수님 말씀하시는 것

들으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첫 인류가 아담과 하와입니까? 그 하와가 먼저 죽었습니까? 아담이 먼저

죽었습니까?

이국운 아담은 죽은게 나오는데 하와가 언제 죽었는지 잘 안나오네

학생 3 그 하와가 죽었을 때 아담이 과연 울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거든요. 우리가 어떻게

보면 인류가 역사가 있어온 이래로 죽는건 나쁜거야 하는 생각이 묻혀와서 사형은 무조건 나쁜거야

하는 생각이 흘러왔는데, 그 관점에서 사형은 좋을 수도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되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지식인으로서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고, 법률가로서도 사형 선고를 내렸다는

그 낙인이 찍히지 않으려고 그런걸 피하고 합니다. 이런걸 보면서, 사형제가 나쁘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죽는게 나쁘지만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또 고문에 대해서 조갑제씨가 말하는걸 말씀하시면서 똑같이 고문을 당하게 해봐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고문에 개입이 되면 안되니까 로봇을 시켜야 한다. 그런데 로봇은 또 누가 만들며

로봇에 또 누가 붙이며, 그런 둘이 같이 두게 누가 그 제한적인 공간을 만들며, 개입이 안될 수 없을

수 없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A 가 B 에게 생명권을 박탈하는 동시에 A 의 생명권도 자동적으로

박탈된다고 하는데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A 의 생명권이 박탈되는 것이라 본다면 또 C 가 개입되게

되고 그 C 가 생명권을 박탈하는 그것을 또 누군가는 박탈을 해야 또 그게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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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그러면 A 다음에 B 다음에 C 다음에 D 다음에 그러면 생명권이라는 것 자체가, 이렇게 밝은데

스위치 딱 끄듯이 그렇게 쉽게 켜졌다 켜지는 그런게 아니잖아요. 저희가 삶이 영속한다고 믿고는

있고 믿고 싶기는 하지만, 맞기만 해도 아픈데 죽는건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힘든겁니까. 그게 스위치

끄듯이 그렇게 쉽게 여겨지는 풍조 그런 논의에 대해서 저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학생 4 언론정보문화학부 이윤창입니다. 이번 집단지성 토론회가 오후부터 시작한 건가요?

오후 다음에 저녁, 저는 저녁에 촬영차 나왔는데 평소에 궁금해 하던게 있었습니다. 사형에 대한 것

보다는 어떤 인간에 존엄성 문제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은데요. 미디어 속에서 나타나는, 예를 들어서

전쟁에 의해서 사망한 사람들 이야기라던가 아니면 어떤 범죄를 저질렀을 때 사형에 의해서 죽은

사람들이라던가 그런 사람들이 하나의 인격체로 나타내는 것 보다는 몇 명, 몇 명 사망 이렇게,

구체화 되지 않고 일반화되어 개인의 어떤 개성이 사라져버린 물화된 존재로 나오거든요. 그러면 저를

그 상황에 대입해 봤을 때 저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일이고 저의 가족이나 친지들 친구들에게

저의 죽음이 매우 중요한 것일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미디어에서 보도되는 그런 차원이라던가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저의 죽음은 사실은 개미가 죽은 것과 다름 없다고 생각이 될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에 생각하는 차원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 일반화 된

개인의 지성이 말살된 그런 것 보다는 개개인의 존엄성이 더 존중될 수 있는가 항상

생각해봤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교수님들의 생각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학생 5 10 학번 배지은입니다. 아까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범죄자들 중에는 어릴 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기가 겪었던 나쁜 경험에 의해서 도덕을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런 경우에는 범죄자들도 사회의 피해자가 아닌가 생각을 해봤어요. 그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는 나쁜 것이지만 그 사람들도 지금 사회 체제에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을

해봤고요. 안진교수님께서 반대하는 자신의 의견에서 어느정도 바뀌셨다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처음에 범죄자의 인권을 존중하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바뀌셨는지

궁금합니다.

학생 6 안녕하세요. 저는 10 학번 GLS 학부 박한기라고 합니다. 저는 전혀 쌩뚱맞은데

공소시효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제가 가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는지 꿈에서 큰 죄를 짓는

꿈을 꿔요. 누구를 죽인다는 건 아닌데 국가에서 쫓기는 꿈을 꾸고 있으면 마음 속에서 제발 나는

숨어 있다가 공소시효 끝나면 살아는 나고 계속 도망가는 꿈을 꾸곤 합니다. 어떤 살인자는

숨어있다가 공소시효가 끝나고 나오면 비 살인자가 되는 이런 현실이 될 수 있고 다른 살인자는 진짜

뉘우쳤는데 그냥 사형을 당하는 경우가 있을 텐데 그런데 만약에 다른 살인자가 혼자 숨어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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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87

진짜 뉘우친 다음에 세상에 나와서 잘 살수도 있는데 그런 범죄자 안에서도 다시 살인 충동이 재발한

확률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경우에 공소시효가 정말 필요한 체계인지 궁금합니다.

학생 7 안녕하세요 저는 09 학번 법학부 명이라고 합니다. 안진 교수님 말씀하신 것에서

궁금한게 있어서요, 사형제도 찬성 반대 이런걸 떠나서 교수님께서 사형은 정당하다고 했듯이

응보성이나 범죄행위에 대한 상호성 비례성에 대해서 들으면서 든 생각이, 말씀하신 것처럼 요즘에

사이코페스처럼 극악무도한 문제들을 보면 사형제로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아까 교수님들

사이에서도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안진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형제의 예로 드는 근거가 단순히

응보주의나 범죄에 대한 상호성 비례성이라면 단순히 상호성 비례성을 하는게 아니라 정말 죽지 않을

만큼 괴롭히다가 또 살려주고 또 괴롭히고 그렇게 하는게 마땅한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아까 프랑스 시대로 발전하면서 그렇게 안하게 된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마음은

정말 찢어죽이고 싶고 계속해서 벌을 주고 싶지만 인간으로서 인간 존엄성이라던지 이런게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했거든요. 그러면 같은 맥락에서 사형 제도도 정말 복수하고

싶은 마음 이런 면에서는 놔두고 싶지만 오히려 그런 것만 가지고 예외를 두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싶습니다.

이국운 네 교수님들 많이 질문도 받으셨고 했는데 안교수님부터 먼저 말씀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진 아까 질문하신 것 중 한 분이 사형제 폐지론자들에게 당연시 되는 전제가 죽는 것은

나쁘다 그런데 그 죽는 것은 나쁘다는 그 공식을 이중적으로 적용을 하고 있죠. 죽임을 당한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그 사람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은 모든 생존도 힘든 상황인데, 그건 아예 사법체제 안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최근에서 피해자 지원 이런 걸로 조금 이야기가 되고 있고 하는데요. 우리

법학의 테두리 안에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지만 철학과 윤리학에서는 많은 논의가 된 것 같아요.

정말 그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사람이 되고자 자기 스스로의 존엄성, 아까 존엄성 문제와 연결이

되는데요, 이렇게 도덕적으로 내 행동에 대해 책임지고 이렇게 생각할 정도 수준까지 될 정도라면

정말 고통스러워 하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자기를 죽여달라고 하죠. 죽고싶고. 살아서 자기가 좀 더

잘해보고 싶은데. 형장에서 눈물을 흘린 눈물들이 그것일 것입니다. 살아서 다른 삶을 산다면 나는

잘해보고 싶은데 그런데 나는 너무 큰 죄를 지은 거죠. 그런 정도가 되면 좋겠지만 그건 얼마

안됩니다. 근대 교정이 실패한 것은 이미 증명이 다 되었거든요. 살인 범죄 뿐만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사형제도 논의할 때 특히 제가 이야기 했던 것은, 사법 살인 같이 정치범이나 이런데

악용 했던 그런 것 말고, 제가 이야기 했던 것은 범위를 좁혀서 이야기 한겁니다. 다른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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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생명권을 이유 없이 무고하게 그렇게, 권리 침해 이런 표현은 부적절 한 것 같아요. 그건 권리의

침해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권리를 침해하는 순간 그 사람의 권리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법학의 보편적인 용어로 표현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은

정말 그게 인권 담론 속에서 이야기 되면서 더 문제제기가 되지 않고 당연시 되는 것처럼 되는데요.

그 사람을 살려두는 것 만이 정말 진정으로 존엄성을 존중해주는 것인지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피해유족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그런 절차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이게 흔히 형사사법

절차에서는 피해 회복의 노력이라 이야기 하죠. 그 사람이 혹은 그 사람 가족이 있는 대로 재산이라도

다 털어서 어떻게 하면서 그렇게 하면 되는데 대게는 그 가족들도 두번 다시 돌아보고 싶지도 않고

살인자 가족 부모 형제 다 이것 때문에 제가 본 경우는 두 경우 아예 연락도 끊어버리고 자기

아버지가 와서 사람 죽인 놈은 죽어야죠 죽여주세요. 이렇게 말하거든요. 이건 거꾸로 말하면 그

아버지로부터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거죠. 사실은 그래서 그런 부분은 저는

굉장히 머리가 열려있는 학생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죽음은 무조건 나쁜 것이고 무조건

죽이면 안되고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 하면서 생명권을 논의하잖아요. 그런데 꼭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 아마 헤겔이 말했던 중요한 표현에 따르면 그 사람을 진정하게 다른 사람처럼

도덕적으로 존엄한 존재로 봤을 때 스스로 사형을 선택할 수 있게 그래도 스스로 사형을 선택하지는

않죠. 어떻게 그 부분을 말씀 드리고 싶고요.

그 다음에, 이 학생 질문은, 그 사람들도 또 하나의 피해자지 않나. 제가 원래 석사 때

범죄학 중에 비판범죄학을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뭔가 사회적으로 성장기 때, 저는 사실 어떤 진정한

교정 교화가 안되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기고 교육이나 그런게 잘되면 문제를 예방할 수 있고

이상적으로 봤었는데요. 실제로 이렇게 흉악범들 사이코 페스나 흉악범으로 갈만한 잠재적인 소년원의

존재들을 보면서, 국가 사법체제는 잠재적으로 움직이는 것이거든요. 한 인간이 자기를 버리고 이사람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몇 사람 들러붙지 않으면 정상 인간으로 통합해서 돌아오기 힘들겠다는 그런

판단을 지금은 정말 절실하게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냥 젊은 범죄학자, 법사회학자 이렇게 기존의

범죄학은 왜 잘못 됬는가,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했던 때와는 아주 다르게, 그 수많은 흉악범 강력범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진짜 사람을 만들 수 있는가, 그 길은 뭔가 이런걸 고민하게 됩니다. 국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형사 사법체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정책적 경제적 측면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말씀 드렸던 것은, 그래도 국가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가져갈 정도에 대해서는 다른

식의 대안적인 철저한 형벌체계를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폭력은 그래요 여러분들 권력관계에서 약자일 때 누구를 죽여도 성폭력을 하고 해도 그것이

감춰지고 드러나지 않는, 여러분들 성희롱과 성폭력은 어때요? 초범 재범 사실 초범은 의미가 없어요

성폭력범들 초범들은 대개 발견된 것이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잠재적으로 수없이 했어요 권력관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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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89

약한 사람들 그게 극한까지 가면 살인범이나 사회에 대한 공격성과 좌절감이 표현되면 사회에 대한

좌절과 폭력성이 드러나면 끊임없이 그렇게 만들죠. 그런데 제가 피해자들이 굉장히 실존적인 위기에

빠지는 것은. 우리가 선하게 모든 것을 용서해 줄 때 악의 무리들은 선을 먹고 자란다 라는 표현을

윤리학자가 한 적도 있었어요 거기에 대해서 사회가 도덕적인 윤리적인 하한선과 상한선을

유지해가는 메커니즘이 없으면 정말 잘못된 인권이라는 개념으로 그 사람들을 보장해주게 되게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이해를 하죠. 인권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해요. 여러분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최 말단의

가장 약한 사람들의 인권이 올라가면 전체 인권이 그만큼 올라간다고 하잖아요. 이 범죄의 경우

조차도 정말 흉악범들 목숨이 보장이 된게 아닌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까마는 장애인들이나 성

소수자이거나 다른 약자의 인권은 놔두고 흉악범들의 범죄를 다르게 봐야한다거나 윤리적인 도덕적인

걸 봐야한다는 데 대해서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 아까 스파이더맨 3 에서 용서한다 제가 스파이더맨 본건 몇 편인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정말 피해 유족들이 모든 것을 손실을 입게 되는 상황들이 많은데요 용서하는 마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그 피해자들이 나와서 저처럼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궁금해요. 아까 그건 너무나 무거운 주제잖아요. 내가 잠재적인 살인자도 되보고 잠재적인 피해자도

되 보고. 이건 얼마나 우리의 많은 그걸 요구하는 겁니까. 그걸 우리는 피해갈 수가 없죠. 여러분들

전공도 그렇고,

정말 평화롭고 자유롭고 용서하는 마음이 어떻게 될 수 있을까. 아까 지목사님 말씀처럼

성인이 됐을 때 가능한 것 같아요. 아니면 그 사람이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면, 피해자들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그 조금이라도 참회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요. 그러나 정말 그만큼도 보이지

않거든요. 참회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용서하는 마음, 정말 그 가족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다른 경우에도, 아까 그 형제 공무원 형제가 살해된 한 사람은 살았고, 그 경우에 정말

만나보고 싶어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 다음에 여러분들 성폭력도 대게 그렇지만, 폭력이 해야

하나 특별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거기 가지까지 굉장히 공격적인 환경에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제 표현을 빌리자면, 그 아들을 잃은 엄마 같은 경우는 아무렇지 않게 몇 년 후에

나와서 그렇게 살 것이라 생각하면 이 세상은 너무나 잘못되어있고 너무나 어둡습니다. 자기 아들을

다 순진하게 정말 성실하고 착하게만 살았는데 우리에게 이런 일이 오다니.

아들이 죽은 그 고통의 순간에 겪었던 것을 가서 좀만 반성하면 살 것 같데요. 그런데

면회를 가서 황산이라도 뿌리고 그 고통을 겪고 살아가게 해주고 싶대요. 그걸 보면 자기 마음이 조금

치유가 될 것 같데요. 그런건 피해자들이 공통적인거 같아요. 저도 그 생각을 해봤는데 가서 한번

만나볼까 했는데 법정에서 만난 그 사람의 그걸 보게 되면 그 공격성과 살인 그게 아직도 너무

이글이글 타오르는 거라서 면회를 가서 만나서 보는 것 자체가 그 에너지를 다시 받겠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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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그러면 그럴 수도 없죠. 그런데 법적으로는 증인 피해자 신문 피고인 신문에 참여할 수 있고 하게는

되어있어요. 지금 현재 법이 바뀌어서, 개선은 됐지만 굉장히 형식적이어서 거기 나서서 하는 사람은

되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죠. 그러니까 이성을 붙들고 피해자들이 있는 것 자체를 사회가 이상하게

보죠.

그 용서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정말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형제를 반대하는 사이트에

보면, 죽어버린 자기 손자 손녀 대신 그사람한테라도 사랑을 퍼부으니까, 불우한 환경에서 커서

그렇게 했으므로, 나는 살게 되었다고하는 케이스가 있어요. 그게 사형제 폐지 반대하는 사람들이

올려놓고 인용을 하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분들은 어떻게 용서했을까 가만히 따져보고 들여다 보면

그냥 본인이 괴로워서 용서한 거예요. 살 수 가 없으니까. 긍정적인 착각은 때로는 우리 삶을

구원해주잖아요. 저희 냉정한 과학 하는 사람들은 그게 쉽지가 않죠.

여러분들 아는 유명한 주적파 살인 사건도 아실거예요. 저희가 제가 좀 젊었을 때 같은데요.

그 경우에는 이걸 신고를 못하게 하려고 집단적으로 하면서 피해자를 잡아다가 납치한 피해자가 다른

사람을 죽게 하고, 거기서 영리한 여성 피해자가 시키는 대로 하는 척 하다가 탈출해서 신고하고

살아남은 경우인데요. 그 사람들 경우는 정말 처음에는 사회에 대한 적개심 이런 걸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자기들을 방어하고 가버린 경우인데요. 그 신고했던 여성은 지금도 삶이 힘들죠. 항상 그

사람들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진다면 편하게 살 거에요. 사형선고 받고도 언젠가 나오면 어쩌나 자기

삶이 불안하겠죠. 그 여성 피해자는 나중에 언론하고 인터뷰도 피해요. 사실 흉악범 피해자들의

인권이라면 인권이고요.

그 사람들이 그 용서라고 하는 것은 국가형벌체계가 강요하는 것 같아요. 심리적으로

강요하는 것 같아요. 정말 자연스럽게 이렇게 그런 경지가 돼서 용서하는 그런 거기 가기까지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저는 치유 프로그램이나 이런 것들이 같이 가줘야 하지 않을까 싶고 다른 것들과

달리 다른건 이렇게 자조모임이 있어요. Self-Help 이런게 있는데, 피해자 이런 경우는, 얼마나 제수

없으면 저런 일을 당했을까 하는, 우리 사회에 이런게 있잖아요. 이중 삼중의 편견이 가깝게 있어요

몇 겹으로 쳐 있더라고요. 그걸 말하고 알리지 않고 다 숨기고 살아요 성폭력 피해자는 더해요. 마치

전쟁 때 좌우 이데올로기 피해자들이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숨기고 살았던 것들이 일종의 이런 것

같아서요, 그래서 용서하는 마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그들도 또하나의 피해자라는건 저는 모르겠어요. 나쁜 환경 속에서도 그 정말 사회에

도덕규범을 지키면서 그 안에 편입된 사람들이 있고 충동조절을 못하는 경우도 있고 한데 저는 크게

봐서는 사회정책적으로 소외되고 그러지 않은 정책을 국가가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거가

전체적으로 보면 그 정책에 가야 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흉악한 범죄까지 행동이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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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91

사람이라면 그런 경우는 사법정책적인 안전망이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제가 너무 답변을 독점하면

안될 것 같고 아까 교수님이 답변하셔야 될 질문을 제가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만.

홍기원 여러분들 이렇게 늦게까지 정말 끝까지 자리 지켜주시고, 제가 한동대를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국운 지금 여기가 예네들 집이예요. (청중 웃음)

홍기원 아 그걸 제가 잘 몰라서, 여러분들 덕분에 저도 오늘 오래간만에 사실 저는 제

스스로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지적으로 고민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요즘 제 삶을 보면 그런

지적인 고민 없이 행정적인 업무에 막 뒤치닥거리 하면서 쫒겨다니는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은데, 지금

오늘 이자리가 굉장히 귀한 자리인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질문도 있었지만 또 그에

대한 안진교수님의 답변도 있었고요. 어느 특정 한 분의 질문에 답하기 보다 이 이야기를 연장선

상에서 계속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 해야만 한다 아니다 이런 것을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제 말뜻에 오해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그렇다면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즉,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것이지 가해자를 용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있으되 그에게 가할 형벌의 종류를 정말

엄격하게 제한하자는 겁니다. 절대 용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아까

어떤 질문자께서는 답변을 회피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아마 저를 두고 하신 말씀 같은데 제

스스로도 내가 만일 그 피해자다 하면 어떻게 용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피해자가 아닙니다. 국가입니다, 국가고 사회입니다. 그러면 국가와 사회가 가해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만이 피해자가 입은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길일까 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 선생님들에 비해서 인생은 짧습니다만 그 짧은 기간 동안에 한국에서도 살아보고

외국에서도 살아보고 했습니다. 만약에 우리나라 범죄 피해자들이 자기 범죄 피해자, 경찰이 개입하고

형사 소송절차를 거치면서 재판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피해자가 공권력으로부터 받는 그런 처우와

만약에 외국에서 살면서 피해자 중심으로 형사사법체계가 수십년 전부터 발전되어 온 유럽국가 같은

나라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사법체계에 대해서 자기가 받은 피해 그거는 아마 다를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가끔가다 젊은이들한테 두들겨 맞은 적도 있거든요 경찰을 불렀거든요

그런데 경찰이 저를 죄인 취급해요. 경찰은 우리나라 경찰은 물론 우리나라 모든 경찰이 다 그런건

아니죠. 사건을 빨리 끝내고 싶어해요 되도록이면 빨리빨리 마무리짓고 싶어해요. 그래서 심지어

저보고 연행한다. 현행범으로 연행한다고 그래요. 난 정말 때려보지도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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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제가 프랑스에 살면서 소매치기다 강도다 여러번 당했어요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범죄

피해자가 생기면 경찰이 출동함과 동시에 여유가 있으면 심리 상담사가 반드시 같이 출동합니다.

피해자가 입었을 정신적인 충격을 어루만지기 위해서. 경찰관이 진술을 받는 동안 심리상담사가 같이,

인력에 여유가 있을 때, 매번 100% 심리상담사가 따라 붙는건 아니죠. 심리상담사가 범죄피해자를

상담합니다. 트라우마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계속 보살펴줍니다 이런 식으로 수 십년

전부터 피해자 중심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피해가 최소화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법체계를

갖춘 나라와 우리나라와 같은 이런 여전히 가해자 중심으로 사건 실적 올리는 식으로 경찰이나 형사

실무가 이루어지는 나라에서 피해자가 국가권력에 대해서 받는 느낌이나 이런 것은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물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분들 보기에 사형 폐지론자처럼

보일 지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그런 자리에 자주 참여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알게 된 몇 분의 소중한 인연이 있습니다. 고 모 목사님이 계신데 강호순 사건으로

따님을 잃으신 목사님 입니다. 그분이 사형 폐지 운동을 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이명박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이 이상한 말하고 박 모 의원이 이상한 말 할 때 미국에서 급하게 우리나라를 방문한

단체가 있었어요 미국에 범죄 피해자 가족 모임이예요. 그런 흉악한 범죄로 인해서 자기의 소중한

가족을 잃은 자기 딸 아내 아니면 다른 가족구성원을 잃은 범죄 피해자들이 물론 그 가해자는 다

사형선고를 받았죠. 그런데 이 범죄 피해자 단체도 가족 협회도 사형 페지운동을 해요.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국회도 방문하고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자신들의 생각일 이야기 해주기 위해

우리나라를 급하게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흉악범죄 범죄 피해자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로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겠죠. 그리고 사형 폐지론자라 할 지라도 꼭 용서 했다는 뜻은 아니죠. 다만

정말 나는 가서 그 가해자한테 가서 똑같이, 우리 어머니도 쓰시니까, 찢어 죽이고 싶지만, 내가 그걸

하는 것과, 국가가 그걸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거든요.

나의 복수를 국가가 대신 해준다는 것, 이건 분명 사회가 국가가 문명적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형제도를 존재케 함으로서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그 사형수에게 참회의

기회를 준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렇죠.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사형수를 죽음에 직면하기까지 몰고

감으로서 그 사람에게 자기가 남의 생명을 박탈한 죄가 얼마나 큰지 새삼 깨우치게 하고, 생명, 자기

자신에 생명이 박탈당할 것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함으로서 참회를 하게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참회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한 참회가 아니에요. 참회는 말씀과 설득으로

해야되요. 공포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보복에 대한 공포를 강요함으로써 그 사람이 참회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참회를 유도해야 진정한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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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93

제가 여러분한테 소개해 주고 싶은 책이 있어요. 88 명의 남자와 2 명의 여자. 미국의 한

사형집행인이 자기가 직장생활, 즉 사형집행을 평생 하면서 사형대에서 보냈던 사람이 90 명인데, 그

중에 88 명이 남자고 두 명이 여자예요. 그 사람 90 명의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들이 여기 담담한 수필

식으로 쓰여있어요. 여러분들 영어 잘하시니까 꼭 읽어보세요. 여기 정말 사형수 중에는 정말 천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뉘우치지 않을 사람도 있어요. 당연히 있죠. 그러나 여기에 아흔명의 사람들

중에는 정말 스스로 뉘우친 사람들 이야기도 많이 있습니다.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 한 이야기를

보면, 버피라는 사형집행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형장으로 가는데, 사형장으로 가기 전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여태까지 하지 못한 일이 있는데, 나를 위해서 기도해줬던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기도 하지 못했다. 이제 내가 그걸 하겠다. 그러고 마지막으로 사형장 가스실로 가면서

사형집행인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나에게 성경이 한 권 있는데 내 동생한테 보내달라고 아마 내

동생한테 이 성경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저는 실천가는 아닙니다. 운동가는

아닙니다. 그냥 고민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런 고민을 하면서 만났던 분들 중에 사형수 교정목사 하시는 신부님 목사님 스님들

수녀님들 계세요 그분들의 경험담을 들으면요 물론 그 중에는 당연히 절대로 뉘우치지 않는 사람도

있죠 그런데 그분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수십년동안 그 교정목사나 그런 일을 해오셨던 분의

경험담을 듣건데 그만한 성자가 없다고 합니다. 사형장으로 떠나기 직전에 떠나기 이전에 이미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치고 정말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그런 성자가 없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루 하루

자기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거 얼마나 고통이에요. 고통을 저는 그런 경험담을

전해 들으면서 그 고통을 종교가 어떻든 천주교던 개신교던 불교던 뭐든 간에 저분들이 그 고통을

함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까 다른 이야기에서 공소시효 이야기가 나왔는데 공소시효 제도 중에 그 근거는 뭡니까.

그만큼 마음고생 했으면 됐다 뭐 이런 것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자기가 지은 죄를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그 사람이 가장 잘 압니다. 그 사람에게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뉘우칠 기회를 시간, 말씀과 설득으로 뉘우칠 기회를 줘야지 똑같은

그 사람이 침해한 것과 똑같이 법의 침해로 몰고 감으로써 참회를 강요하는 것은 국가가 취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사형 대체는 뭐가 있을까 이런 질문도 있었는데 사형을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형은, 아까 빅토르 위고나 바뱅대르 법무부장관의 표현을 빌면, 문명국가가 취해서는 안될

형벌입니다.

이국운 지금 안교수님과 홍교수님을 모신 이유가 두 분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모신게

아닌데 자꾸 상황이 그렇게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오래 하지 않고 이번 한번만 더 학생들

이야기를 듣거나 질문 받거나 하고 우리 네 교수님에게 잠깐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리고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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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마가복음처럼 뚝 끝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야 여러분들이 이 생각에 이

파편들을 가지고 조금 더 어두워 질 수 있지 않나 생각을 잔인하게 합니다. 무슨 이야기든지 더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 기회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학생 8 안녕하세요 저는 07 학번 법학부 강예슬입니다. 사형제도에 대해서 처음 생각을

해보게 된 것이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밀양 영화를 봤었는데요, 사형제도에 대해서 생각

할 때마다 마음이 어렵습니다. 방금 홍기원 교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느꼈던 것은 제가 지나치게

피해자의 입장에서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로 설득을 하면 좋은데 그게 안되는 사람들을

그렇게 끝까지 말로 설득을 한다는게 너무 억울한거예요. 그리고 책에 나온 내용이 안진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데 그중에 극히 예외적으로 진심으로 참회를 한

사람들의 이야기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만약에 제가 죄를 지어서 마지막에 예수님을 영접을

했고 그랬을 때 진짜 제가 제 삶을 통곡하면서 후회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사람을 바라보는

피해자는 이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죽었고 이미 그 사람은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상처를 남긴

사람인데 그 사람이 마치 밀양에서 전도현이 느꼈던 감정이 그냥 계속 마음에서 그 억울함이 과연 그

억울함을 누가 치유해주시나, 예수님이 해주시긴 하겠지만 어떨 때는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제가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저도 진짜 잘 모르겠는데,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진짜 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치는 뭘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정말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 생각 가운데서 계속 걸리는 생각 한가지는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죽어간 그 누군가가 그

사람은 정말 무고한 희생자가 되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데 사형제도가

있으면 모두에게 적용이 될건데 그런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계속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사형제도

존폐에 대해서 제가 제 생각에는 평생 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할 것 같은데, 사람이 간사해서 내가

아는 사람이 가해자면 그쪽으로 가고 내가 아는 사람이 피해자면 저쪽으로 갈 것 같아요.

학생 9 콜로키움 계속 참여하고 있는데, 저는 평소에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한 것을

질문드리겠습니다. 살해자들은 그 피해자들의 인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인권을 우리가 생각해야 하나 하는, 사형에 대해서 그정도

생각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학기 특별히 이국운 교수님의 기독교와 현대사상이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물화라는 개념을 배웠습니다. 물화 라는 개념은 우리가 타자에 대한 인정이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이라 제가 배웠는데 타인의 인정을 잊는다는 것 타인에게도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그 지점을 잊고 있기 때문에 범죄자들이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피해자가 그 고통을 자기가

생각할 수 있다면 결코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사회가 개개인을 좀더

물화하고 그 물화된 개인이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일들도 저지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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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95

그런 이미 물화된 개인에 대해서 사회가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도 점점 물화되어가는데,

저는 그 지점에서 이번 학기 선배들과 친구들과 같이 단테의 신곡을 같이 읽는 시간을 가졌었는데요.

신곡을 풀어주신 일본의 이마미치 도모노부라는 철학자가 지옥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부분에서

중세시대 사람들은 지옥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그 사람들의 보편적인 윤리적인 준거

틀로서 있었는데, 지금 우리 시대에는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라는 그런

어떤 말씀 하셨던 것이 기억이 났어요. 지금은 포스트모던 사회라고 하는데 정말 어떤 가치도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옥이 그렇게 영속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공간이 있다는 인식을 하면, 아까

말했듯이 행동에 대한 윤리적인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이건 스물 한 살의

철없는 생각인데 제도적으로 그런 지옥도를 구현하는 것은 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이

자리에서 해봤습니다. 이게 기독교인으로서 용납될 수 있는 생각인가에 대해서는 많이 그게 있지만

아까 사형에 대안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영속적으로 고통을 주는 공간에 대해서 우리 구성원

모두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면 과연 형벌을 준다는 것이 범죄를 예방하는 차원이 있음을 인식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두서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학생 10 안녕하세요. 저는 언론정보문화학부 이가원입니다. 제가 전공이 이쪽이니 여기

이어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 요새 미디어에서 많은 매체들에서 특히 영화에서 각각 언급하셨던 특히

추격자가 그렇듯이 범죄에 대해서 특히 너무 선정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그 범죄 현장이나 범죄자의 심리를 너무 자세하게 드러내려고 하면서 개인들이 좀 논쟁이 많이

있기는 한데 모방범죄의 가능성이 많아서 범죄율 높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한면으로는

아직 인권이나 어떤 다른 부차적 문제에 대해 생각을 그렇게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끔찍한

사건만 보고서는 정말 이러 사람은 죽여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어떻게 보면

범죄자들을 제출하고 있기도 하고, 사형제에 대한 존치와 재판 집행을 조장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거든요. 미디어가 그래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시는 교수님께서는 미디어에 있어서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학생 11 안녕하세요. 10 학번 윤요한이라 합니다. 오늘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사형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이 사형이라는 제도의 목적이 무엇인지가 궁금했거든요. 왜냐면 저희가 형법에서

사형이라는 것을 집행을 했을 때 사형 선고를 내렸을 때 그 이유는 이 인간, 인간이라 생각하지도

않는 이 인간이 진짜 우리 사회에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극단적인 결정이 그 사람의 생명을 뺏는 사형이라는 법을 집행하는 게 가장 기본적이라 생각이

듭니다. 이게 과연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한 저희 인간 사회에서의 응징 또는 인간에

내리는 벌이라고 저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피해를 당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기 때문에 그 가해자의

생명 역시 뺏어져야 한다 이런 말인지, 그 가해자로 인해서 고통받는 다른 피해자의 가족이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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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유족들, 엄청난 슬픔에 싸여있을 사람들이 과연 그 가해자를 이 세상에 살려놓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와 같은 고통을 가해자에게 주기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생각할 수 있는 저희

기준에서 이세상에 살지 않는 것이 가장 두렵다는 기준에서 선택한 방법이 사형인지 이런 것들을

보면 그 사형이 어떤 목적에서 시행이 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악마를 보았다는 영화를 보면 최민식이 맡은 악마의 역할이 자기는 사람을 죽이고 거기서

이런, 최민식이 잡고 풀어주고 끊임없는 고통을 주고 다시 잡고 고통을 주고 하는데, 이병헌이 아무리

큰 고통을 줘도 얻은건 아무것도 없는게, 결국에는 연쇄살인범은 이병헌의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았고

주변의 모든 소중한 것을 잃었는데, 결국에 이병헌이 살인자를 죽임으로써 얻은 것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얻는 것은 그것뿐이잖아요. 뭔가 대등하게 그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되기는 무리가 있는 것

같고요. 즉 이런 사형이라는 제도가 과연 법에서는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되잖아요. 죄를 지었으면

여기에 대한 벌을 똑같이 내려야 되는데 과연 사형이라는 제도가 그 죄에 대해서 정당하게 집행되는

벌이라는게 가능한건지에 대해서 궁금하고, 또 다른 이야기는 사형을 집행하는데 죄를 뉘우친다는

말을 했는데 그건 인간 본성이 착하다는게 전제에 깔려있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그런데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본성이 착하다고 확신할 수 없잖아요. 원래 착하게 태어난 사람도 있을거고 원래 나쁘게

태어난 사람도 있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고, 우리가 너는 이걸

잘못했어 라는 것을 끊임없이 교육시킨 결과라고 밖에 생각이 안되기 때문에 그게 과연 어떻게

그걸로 만족을 할 수 있을지 거기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학생 12 안녕하세요 저는 09 학번 경영경제학부 김예슬인데요. 안진교수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교수님은 사법체계가 엄격하게 적용이 되면 범죄억제가 된다는 그런 뉘앙스로 들었는데,

그래도 선진국에서는 홍기원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범죄 후에 그런 제도도 잘 되있고 사법

체계도 잘 되 있지만 묻지마 살인이 일어나는 것은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그 살인 이전에

병리적 살해의 교화 더 중요한 것 같거든요. 그래서 사법 체계에 변화도 중요하지만, 저는 사실 법을

잘 몰라서, 사회적으로 봤을 때 지금 이 사회를 병든 사회를 고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되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학생 13 네 안녕하세요. 저는 법학부 전은희라고 합니다. 일단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밀양,

저도 밀양이 떠오르는데요 저는 과연 밀양에서 그 살인을 한 살인자가 과연 하나님께 진정으로

용서를 받은 자인지 의심스럽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를 봤고 그런데 왜냐하면 그 사람이 정말로

진정한 참회를 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하는 회개의 모습을 자기가 상처를 준 사람에게도 해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참회가 진정한 참회 같지 않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리고 또 그렇다면 저는 사형제도에 대해서 찬성을 합니다 왜냐하면 뒤에서도 어떤 분이

언급하셨는데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사형제도를 정말 폐지해야 한다고 하는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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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97

사람들이 정말 이런 기회를 주면 참회를 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인데, 저는 그 사람들은 이미 살면서 그런 기회를 스스로 버린 사람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거든요. 물론 이 말은 흉악범들에게만 적용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착한 사람들에게는 물론 기회를 줬을 때 그 사람들이 고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강한 처벌이 요구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처벌을 줘야만 되는가라고 생각했을 때 저는 북한에서

정치범들이나 사상의 반기를 드는 사람들에게 어떤 처벌을 주는가 생각했을 때 사회가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통제가 잘 되고 있거든요 그리고 정말 잘 되고 있어요. 왜 그렇냐면 엄청난 고통을

주기 때문에 씨족을 말린다고 하잖아요. 내 죄로 인해서 삼 사대까지 멸하는 벌이 적용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누군가가 없어지고 사형을 당했을 때 절대 그와 같은 일이 너무나

희박하게도 일어나지 않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흉악범들이 있다면, 물론 전체적인 사회의 분위기가

만약 북한의 어떤 사형제도가 적용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그냥 어떤 흉악범 들에게는

정말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끔 하는 강한 제도가 정말 이 사회에서는 필요 하지 않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성경에서도 용서 받을 자가 있고, 구원 받는 자가 있고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이세상에서도 사형이 완전히 폐지 돼야 한다 아니면 그 반대로 그게 아니라

사형을 받아야 될 사람이 있고 사형을 받지 말아야 될 일반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정리가 됐습니다.

학생 14 안녕하세요. 국제어문학부 07 학번 지영인이라고 합니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이고

천명을 죽이면 영웅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예를 들어서 정말 국가공익에 큰 기여를 하는

살인은 부패정부를 척결하기 위한 혁명 이라던지 그런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살인에 대해서도

공사를 뛰어넘는 의미에서 사형이 유효한지 아니면 이런 경우에 있어서는 사형을 해서는 안되는지

저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학생 15 네 저는 이 사형, 살인에 대해서 가인의 표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이 가인을 어떻게 하냐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 하니까 표를 주시잖아요. 그런데 그 표가 단순히 가인을 지키는 것 만이 아니라 어떤,

가인을 살해하는 사람한테 오히려 가인을 손대는 사람은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라는 표를 주시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가인만이 아니라 그 다음에 어떤 사람 역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데 하나님이 또

이 사람을 건드린 사람한테 더 큰 벌을 주신다는 그런 표를 그 사람한테 주시거든요. 그래서 왜

하나님이 왜 이랬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요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연세드신 분들이

많이 하는 산사람은 살아야지 하는 말 있잖아요. 그 말씀 많이 하시잖아요. 대게 고난, 그런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는 이야기를 하시잖아요.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인한테 표를 주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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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가인을 지키려는 것보다도 그 가인을 건드리고 싶은, 가인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을 지키시려는 일이

아닐까 생각을 했어요.

아벨이 원래 히브리어로 헤벨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헤벨은 전도서에서 나오는 헛되고

헛되도다에 그 헤벨이라는 단어예요. 아벨이라는 천수를 못 누리고 죽은 그 인생 자체가 헛되다 하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탄식이 나오는 사건이잖아요.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아벨의 이름이 아벨이 될 정도로 하나님께서 진짜 헛되구나 하는 탄식이 나올 일인데,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그 아벨 때문에 가인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가인에게 묶이는 가인의 죄에

그 사람들도 속박되는 것을 끊고 싶으셨다는 생각을 해봤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지금도 생각하는 게,

우리가 뭐 피해자는 어떡하냐 원한이 있어서 어떡하냐, 그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있는 것을 보면

피해자들은 어떡하냐 어쩌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표 사건을 봤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어쩌면 피해자 가족들이

그 가해자에 대해서 가해자는 나쁜 놈, 물론 그가 하나님께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

한이라는 것이 절대 해결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람을 어떻게 죽인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닌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이, 피해자의 가족들이 그 어떤 가해자에게 묶이는 것을, 가해자와

가해자의 죄에 묶이는 것을 싫어하시는게 아닌가 그 사람들도 같이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있기를

원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국운 알겠습니다. 그만합시다 이제 교수님들 가운데 혹시 덧붙이실 말씀이 있으면 삼분씩

밖에 드릴 시간이 없는데요. 지교수님, 학생이 히브리어 문자를 썼는데. (청중 웃음)

지승원 저는 9 시 이후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오후에 한번 하고 밥 먹고 또

하는거 절대로 저는 한적이 없습니다. (청중 웃음) 성경 이야기 나오고 다 나왔는데, 그렇겠죠.

그러니까 계시의 점진적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진입 시에는 이족을 격멸하고 700 년

뒤에 이사야는 아시리아와 애굽이 같이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다 했고, 그 다음 또 600 년쯤 더 지나서

한 분은 원수를 사랑하라 이렇게 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다른 사람의 죄의 대속물로 준다는 식으로

스스로의 고난을 이해하셨고, 누구는 그게 바로 기독교 법의 진리라 주장을 합니다만, 아무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거죠.

인간에 고양된 정신은 자기희생 그리고 타인의 죄에 대한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할

것을 지향하고 있지만 그 도상에 있는 존재로서 인간은 그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하늘의 뜻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사람들은 시간에 따라서 시기에 따라서 좀 달리 이해를 했습니다.

하늘에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응분의 대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인간에 대한 죄는 하늘에 대한 죄로

생각했고, 동양은 늘 그랬죠. 근대에 서구 신학자 중에 맥케이거라는 여성신학자가 있어요.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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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299

바디오 갓이라고 우주를 하나님의 몸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성들을 생각하면서 우주가

사람을 포함한 몸으로 몸에 대한 해석으로 인간의 죄를 이해하고 구원은 몸의 회복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저는 사형제도의 존치여부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은 약간 핀트가 어긋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사형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되어서는 안되는가 라고 물으면 맞으실 거예요.

만약에 존재한다면 어떤 의미의 형벌이어야 하는가 해서 형벌의 본질론으로 들어가서 다시 한번

점검해보면 사형 폐지론 존치론 하는게 약간은 일면적인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죠 사형수들 만나보면 나주에 다 성인군자처럼 되어서 죽는데 박상교수님도 그렇고 안제연

신부도 그렇고 늘 그랬었어요. 그런데 어쩌면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가 사형수였기 때문에

사형수로서 살았기 때문에 회개를 했을 가능성도 높죠.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고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됐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포항교도소에서 상당히 장기수들의 경우는 나이 드신 경험만은 교도관들하고 이런

사람들은 교정 잘 안 된다고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러니까 교도관들 꼭대기에 앉아있어요 쉽게

말하면 한 사람의 범죄자를 진짜 인간다운 인간으로 만드는 데는, 그보다 훨씬 도사 같은 사람이

굉장히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 가능할 지 몰라요. 그리고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걸쳐서, 이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니까. 우리가 종신형 감형은 종신형이라 해도 그건 또 하나의 복수일 뿐이지

사형에 버금갈만한, 사형이 아니기 때문에 정당화 될 수 있는 인간 존엄을 구현하는 형벌제도라고

하기에는 조금 힘들어요. 그러니까 아직은 해봐야 안다는 거죠. 그리고 다른 여러가지 의문들은

나중에 합시다. 전 이정도 하겠습니다.

장철준 진짜 열한시까지, 흔히 하는 말로 빡십니다. 제가 아까 왜 그렇게 리버럴이라고 하며

국가로부터 자유라고 자꾸 했냐는 것을 설명을 드리고 싶은데요. 국가권력 위에서 제가 안전하게

혜택을 받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것이

국가권력일 수 있고, 그게 본질적으로 너무너무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까 5.19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나중에 중학교 고등학교를 가면서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데, 5.19 는 알던 동네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 화면을 보면서 꿈에도 잠을 못 자고, 총 들고 쫓아오는 것 같은, 그 느낌을 겪었죠. 그리고 군대,

만약에 제가 지금 상황에서라면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정말 반대하는, 제 뜻과 너무나도 다른 전쟁을

국가에서 해라고 동원령을 내린다면 가야 되거든요. 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저와 너무나도 신념이

다른 명령에 총을 들고 싸워야 하는 상황에 내가 처해있을 때, 그리고 많은 사람을 죽여야 되는

상황에 내가 처해있다고 가정을 하면 너무나도 두렵고 떨립니다. 그러니까 국가 권력이 본질적으로 참

고마운 측면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악하고 너무나도. 무섭고 두렵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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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2010년 가을학기 제 5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그렇기 때문에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싶고, 그렇게 내 영역을, 권리를 찾고 싶은 욕구가,

본능적으로 생기는 것 같습니다. 아까 미디어에 관한 질문도 나왔습니다만, 국가 권력이 함부로

개인의 기본권 특히 권한을 함부로 이렇게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저의 주의입니다.

아까 그런 영화가 많이 나오고 폭력적인 영화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국가가 제제를 해야하지 않느냐.

글쎄요. 너무 그렇게 잔인하면 사람들 안보게 되지 않을까요? 사이코페스가 그런 영화를 보고 실행을

할까요? 영화 때문에 그럴까요? 오히려 너무 그러면 사람들이 멀리하는 그런게 있기 때문에 돈이

안돼서 그런 영화 만들지 않지 않을까요? 국가가 나서서 이리저리 간섭하는 것 자체가 지금 상황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 길가는 사람을 살인하는 싸이코페스보다도

훨씬 더 무섭게 변할 수 있는 것이 국가권력일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그렇게도 자유를 찾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정도만 말씀을 드려보고 싶어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국운 저는 클로징을 어떻게 할까 늘 고민합니다. 제가 마이클 왈처라는 미국의

정치철학자를 아주 좋아하는데 그분이 지난번에 9.11 테러가 났을 때 미국이 보복을 해야 한다고 할

때 뉴욕 타임즈에 아주 유명한, 나중에 유명해진 칼럼을 썼습니다. 문명의 이름으로 답하라. 야만의

이름으로 공격이 왔는데 그걸 야만으로 답하면 우리는 문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명의 이름으로

답하라 그 글이 아주 큰 반향을 일으켜서 미국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오늘 우리

여러 말씀들 중에 아까 계시의 점진적 성격을 지교수님도 말씀하셨고 홍교수님도 문명에 관해서

말씀하셨는데, 저는 고민이 있습니다.

문명의 입장에서 제가 자료집의 멘 뒤에 쓴 짧은 글입니다만, 혹시 보시면 제 입장을 좀

아실 텐데, 저는 기독교인으로서는 기독교 교리가 사형을 지지하는 쪽에 조금 더 가깝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자유민주주의국가가 기독교 교리의 입장에서

대단히 정당화 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치적인 반영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라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고요. 그리고 저도 헌법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민주적 헌정국가는 시민의 몸,

시민의 생명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중요시 여긴다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우리가 선언했다면 그렇게

합의했다면 사형을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하는 것은 그 원칙 자체에 대한 위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사형 폐지론 쪽에 그렇게 넓게 하지 않고 아주 제한적으로 보더라도

폐지론 쪽에 더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어요. 그 입장으로 가면서 남몰래 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문명이라고 하는 것의 꼬리에 그 문명이란 놈이 사형을 하지 않으면서 사형이 제도로는 있지만

우리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창조주께, 우리는 사실 모두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다만 국가나 사람이 하는 사형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간 속에서 사형을

이미 언도받고 있는 사람인데, 그 문명이란 놈이 고개를 쳐들고 창조주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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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대하여 함께 깊이 생각하는 저녁 301

당신은 사형을 시키지만 우리는 사형하지 않소. 이렇게 말을 하는 거예요. 저는 그게 늘 걸려요.

마지막에 가면 소위 우리가 말하는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우리 중심으로 세상이 돈다고 하는

불사의 인본주의라는 비판 앞에서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데드맨 워킹이라는 영화가 있잖아요. 내가 지금까지 본 연기 중에서는 그 영화에 나오는

숀펜의 연기가 정말 연기라고 생각하는데, 언젠가 추격자의 하정욱군이 더 연기가 발전해서 데드맨

워킹같은 연기를 찍고, 그 소스라치는 용서를 구하고 사형장으로 가는 그 연기는 하정욱군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결론은 없고 그냥 여러분들 더 좀 힘들게 만들어 보려는 그런

생각만 있습니다. 제가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충분히 마음 아프게 몸도

힘들게 고민을 했는데 밥 먹고 또 그만큼 더 했습니다. 하나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저희들의 지혜가 부족하고 지식이 부족합니다. 저희들이 저희들 안에서 우리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이

흉악한 범죄들 앞에 무력합니다. 그 범죄들로 인하여 죽어가는 생명들 앞에서 무력합니다. 그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설득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진심 어린 회개도 우리가 얻지 못했습니다. 또 우리가

그들을 사형으로 처분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관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그저 이런저런 논란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무엇보다도 이런 험악한 세상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도록 주여 특단의 조치를 내려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자리에 많이 이야기한

사람들보다 많이 이야기 들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날들이 남아있는 것을 압니다. 그들에게 특별히

축복하여 주시어서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주여 만들어가게 힘주시기를 구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랍니다. 예수님 살아계신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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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NG GLOBAL UNIVERSITY

이 책자는 2010년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