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태극기 휘날리며, 최초의 올림픽동아일보 컨텐츠팀장과 종합편성tv...

Click here to load reader

Transcript of 2편 태극기 휘날리며, 최초의 올림픽동아일보 컨텐츠팀장과 종합편성tv...

  • 오래된 최초

    1 / 3

    2편 태극기 휘날리며, 최초의 올림픽

    런던으로 떠났던 날

    1948 년 6 월 21 일, 훤칠한 청년들이 기합이 잔뜩 들어간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조선 올림픽 대표단’, ‘KOREAN OLIMPIC TEAM’

    부산-> 후쿠오카->요코하마->상해->홍콩->방콕->캘커타->봄베이->카이로->로마->암스테르담->런던

    이동 시간만 총 20 일

    당시 올림픽 선수단 경유지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그리고 또 비행기를 타고, 우리는 경기장을 가는 것이다...(중략)

    우리 선수들이 이러한 악조건을 능히 극복하느냐 못하느냐가 우리들의 승리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사력을 다하여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싸우고 돌아오겠다“

    - 1948 년 6 월 20 일, 동아일보. 올림픽 필승의 결의

    오늘날의 아프리카 신생국처럼, 아무도 모르는 작은 나라. 완전한 독립국도 아닌 미군정 치하에 있는 신생

    독립국인 ‘조선’. 제대로 된 훈련도, 돈도 없었던 가난한 조선의 스포츠 인들이, 독립된 우리 조국을 전 세계에

    당당히 알리겠다는 사명 하나로 무작정 런던으로 떠났던 최초의 날이었다.

    제 2 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연이어 취소된 12 회, 13 회 올림픽...

    그러던 중, 드디어 1948 년 14 회 런던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영국

    자국민도 정부의 식량과 석유배급으로 간신히 버티던 상황. 올림픽 참가 선수들 역시 군대 천막에 머물러야할

    정도로 열악하여 ‘빈민 올림픽’이라 불렸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의 올림픽이라도 꼭 참가하고 싶었던 작은

    신생국가가 있었으니 그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1946 년 일본으로부터 해방 된지 1 년 후, 조선올림픽대책위 부위원장으로 재미교포, 전경무가 취임한다.

  • 오래된 최초

    2 / 3

    우리나라 최초의 복권에 실린 주인공이기도 한 전경무, 여기엔 특별한 사연이 숨겨져 있다. 어릴 적 하와이로

    이민을 가 청년시절 워싱턴에서 조선 독립운동을 했던 그는, 유창한 영어실력은 물론, 당시 국제

    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인 에브리 브런디지와 대학 동창인 인연으로 올림픽 일을 도맡게 됐다.

    그러나,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올림픽 참가 불가능 통지를 받은 조선. 온 국민이 낙심하던

    이때, 전경무 위원장은 실낱같은 희망의 소식을 전한다. 그 해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 총회에 런던 올림픽

    참가 신청서를 직접 제출하면 참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 길로 바로 미군용 수송기를 타고 스톡홀름으로

    출발한 전 위원장. 그런데...

    “전경무씨, 올림픽 위원회 참가도중 절명”

    1947 년 6 월 1 일, 경향신문 3 면

    그가 탄 수송기가 일본 후지산 근처를 비행하던 중 추락해 승객 41 명 전원이 참사하면서 최초 올림픽

    참가라는 꿈도 산산조각 나는 듯했다. 다행이 당시 미국에 있던 교포의 도움으로 스톡홀름에 IOC 가입

    의향서를 내고 극적으로 올림픽 출전기회를 따낸 우리나라.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48 년 런던 올림픽에 발탁된 선수는 총 67 명, 런던에 가기 위한 1 인당 여비는 2000 달러, 최소 14 만

    달러가 필요했지만 그러기에 조선은 너무도 가난했다.

    결국 1948 년 12 월, 올림픽 자금 충당을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복권이 제작됐는데, 당시 최고급 공작 담배

    한 갑이 30 원인데 반해 올림픽 복권 값은 무려 100 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발행된 140 만 장이 모두

    팔려나갔다.

    이 드라마와 같은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올림픽 유치를 위해 혈혈단신 온 힘을 다했던 전경무 위원장을

    복권 전면에 내세운 것과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를 단 우리 선수들의 모습을 보기 원했던 국민들의 강렬한

    염원 덕분이었다.

    험난한 여정 끝에 태극기를 달고 출전한 최초의 런던 올림픽. 대회 중간에 선수촌 임대료가 미납돼

    선수촌에서 강제 퇴거당할 뻔 하기도 했지만, 우리 선수들은 기죽지 않았다.

  • 오래된 최초

    3 / 3

    역도 부분에서 김성집 선수가 동메달을 따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메달이 탄생했고, 권투에서 한수안 선수

    역시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비록 온 국민의 기대를 모았던 마라톤에서는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축구에서는

    세계 강호 멕시코에 5:3 으로 승리하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온 국민의 쌈짓돈을 쥐고 런던으로 떠나던 우리 선수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가난에 허덕이고, 핍박에 지친 국민들을 대신하여, 비록 여전히 작고, 힘없는 조국이지만 완전한

    독립국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전 세계에 알리고픈 마음이 아니었을까?

    완전독립국인 아닌 으로 출전한 올림픽 대표단.

    역도 김성집 동메달, 권투 한수안 동메달로 메달 종합순위 공동 32 위 기록

    런던 올림픽 폐막 다음 날인 1948 년 8 월 15 일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 수립된다.

    최초의 올림픽 참가 영웅들-

    ‘조선’으로 참가해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다.BM

    김규회 | 저자

    저자 김규회는 1986년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1989년 동아일보 수습 공채 조사기자로 입사해 줄곧 한길을 걷고 있다. 현재 동아

    일보ㆍ채널A 부장. 동아일보 컨텐츠팀장과 종합편성TV 채널A 아카이브팀장으로 신문과 방송을 넘나들며 동아미디어그룹 콘텐츠

    허브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언론사 조사기자로는 유일하게 신문과 방송을 아우르는 신문ㆍ영상 콘텐츠를 모두 다루고 있다. 1987

    년 신문ㆍ방송ㆍ통신 조사기자들이 모여 만든 사단법인 한국조사기자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정보소프트 2000》,

    《대한민국 정치 따라잡기》,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상식사전 뒤집기》 등이 있다.

    [참고도서]

    , 김규회, 끌리는 책, 2012

    , 최인진, 신구문화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