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산군 본문 201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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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E-비즈니스과정 책쓰기 초안입니다.작가님의 손길이 필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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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화전식품 김경애입니다.

결혼을 흔히 두 번째 인생의 시작이라고들 하지요. 지금부터 제2의 인생스토리를

풀어보겠습니다.

내 나이 27세에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직장생활만 착실하게 할 것 같았던 9살 연상

의 남자였답니다. 우직하고 착실해 보이는 그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이차

가 크다고 결혼을 반대하시는 부모님에게는 그나마 8살 연상이라 속여야 했습니다.

평소, 여자가 시집을 가서 가장 고생스럽다고 생각한 것은 어른들의 육순, 회갑, 진

갑 잔치라 생각이 들었기에, 엄마에겐 그런 큰 행사는 다 지나 없다고 고생스럽지

않을 것이라 설득하여 우여곡절 속에 결혼을 했답니다.

결혼 직전까지도 집안일이라고는 손에 물 한번 제대로 묻혀 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속옷까지도 친정어머니가 빨아 챙겨주셨던, 진짜 고생이 무엇인지 몰랐던 저였습

니다. 근데 이게 웬일!! 직장만 잘 다닐 거라 생각했던 남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결혼 후 몇 달 되지도 않아 우리 큰딸 혜정이와 저를 시골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데

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엔 저도 모르는 사이 건물이 하나 지어지고 있었습니

다. 그때부터 저에겐 부담 백배, 짐이 지어지기 시작 했지요.

남편은 장류 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

저는 너무나 반대하고 싶었지만, 결혼 전부터 심사숙고하고 시작한 일이라는 남편

의 뜻을 존중하고 싶었기에 하는 수 없이 승낙했습니다.

저희 살림집은 시내 쪽에 있었고 공장은 시골에 있다 보니 남편은 퇴근 후엔 그곳

http://blog.sciletters.com/89

01: 초보 주부 제2의 인생 스토리

- 김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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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살다시피 했지요. 옛날 방식 그대로 장을 만드시는 어머님만 믿고 시작한 사업

이었으나, 한 해가 지나 어머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남편이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을 토대로, 주말만 되면 우리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장류를 하고 있는 웬만한 곳

은 모두 다니며 벤치마킹을 했고, 갖은 노력 끝에 우리만의 구수하고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장을 만들 수 있었답니다.

그렇게 2~3년이 흐른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은 나에게 또 황당한 말을 건넸지요. 다

짜고짜 내일 공장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입니다. 공장을 늘 비워둘 순 없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저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것도 이사 전 날 통보

를 하다니요. 황당하고 놀랬지만 시집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새색시가 남편과 소리

지르며 싸울 수도 없고... 혼자 울며 안 간다고 했지만 저의 힘으론 어쩔 수가 없었지

요. 남편은 제가 가지 않겠다는 말에 다음날 저희 형님을 모시고 와서 부엌살림 정

리를 부탁했고 저는 그 시간 아무 말도 못하고 보일러실에서 실컷 울다 가자는 소

리에 울며, 지금 살고 있는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들어온 후에도 이곳에

적응을 못한 저는 늘 겉돌며, 새로운 생활에 안정을 찾지 못했어요.

그래도 벌여 놓은 사업이라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예산군에서 안내하는

직거래 및 행사장엘 다니며, 홍보 겸 장류 판매까지 하게 되었지요. 지나다니는 손

님들께선 저희 제품에 대해 이것저것 제게 물어 와도, 아는 것이 없던 저는 대충대

충 넘어 가며 상황정리를 하곤 했습니다. 그땐 이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감사하게도 장을 드셔 보신 손님들께서 맛있다는 말씀들을 많이

해주시고 후에도 주문해서 드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그렇게 다니던 중 우리 장에 관심을 갖고 수출을 해보자는 제의를 받아 미국에 수

출을 하게 되고 미국 식품 안전청 FDA에 가입도 하게 되었지요. 한창 장류 사업이

날개를 단 듯이 궤도에 올라 잘 나가고 있던 때, 큰 아이를 낳고 7년만에 둘째 재훈

이를 낳게 되어 육아가 저의 발목을 잡고 말았습니다. 아이 낳고 3~4년은 육아에 전

념하느라 꼼짝도 못하고 집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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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둘째가 4살 되던 어느 날, 농업기술센터 김기예 선생님의 전화 한 통은

제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e-비즈니스 과정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낯선 소

리였지만 집에서만 생활하기에는 너무 싫었기 때문에 한 번 배워보기로 결정하고

농업기술센터 컴퓨터교실을 찾아 갔습니다. 그곳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땐 너무 생소

하고 어색하여 다시 나오고 싶은 생각뿐이었지요. 처음 보는 시골 아저씨, 아주머니

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저에겐 다였거든요. 그렇게 그분들과의 만남이 하루하루 더

해지자 오히려 제 자신이 더욱 초라하고 못났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창피했습니다.

나이가 드셨지만 낮에는 일터에서 종일 일을 하시고 그 밤에 나오셔서 잘 보이지도

않는 자판을 두드리며 배우시는 모습을 보며, 공부는 죽을 때 까지 한다는 말이 맞

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분들을 보며 한 분, 한

분이 존경스럽고 훌륭하지 않으신 분이 없었습니다. ‘정말 대단들 하시다...’ 제 입에

서 저절로 이 소리가 튀어나오더군요. 난 여직 뭐했나 생각하며, 후회가 막심했습니

다.

저에게 컴퓨터란? 약간의 워드, 쇼핑하는 정도로만 사용했고 솔직히 기본적인 메일

보내는 것조차 잘 못 했던 저지만 지금 컴퓨터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습

니다. 처음에는 블로그가 뭔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blog.naver.com/wajen9001 이렇

게 멋진 나만의 블로그를 내가 직접 만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엔 제가 사랑하는

가족의 모습, 제가 살고 있는 곳의 아름다운 모습, 제가 하고 있는 일 등 제가 담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제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기에 너무나 신기하고 흐뭇합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에도 조금씩 변화가 온 것 같습니다. 사업에 사자도 몰라 겉돌며,

내 일이 아니란 생각을 했던 마음이 이제는 내가 해야 하는 일, 늘 열심히 장을 만드

는 남편의 뒤에서 보조만 하던 내가 직접 손을 걷어 부치고 보조가 아닌 주인이 되

어 움직이게 되었고 얼마 전에는 저희가 새로운 상품으로 장과는 잘 어울릴 것 같

지 않은 초콜릿을 만들게 되었지요. 예산에 맛있는 사과와 초콜릿이 만나 사과초콜

릿! 그냥 먹긴 좀 구수한 냄새가 나는 청국장과 초콜릿이 만나 청국장의 냄새를 없애

고 초콜릿의 단맛이 덜한 청국장초콜릿! 드셔 보신 분들의 반응이 참 좋았지요.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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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소비자와 좀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그래서 올해 부터는 소비자들이 체험 할 수 있

는 공간을 만들고 그분들이 쉬었다 갈 수 있는 “꽃과 콩나무”란 예쁜 이름을 가진 팬

션도 열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많은 분들께서 이용을 하시고 만족하시기에 저

는 너무나 행복하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하고 있는 활동을 좀더 많은 분들에게 알리

고 싶은 마음에 농업기술센터 김기예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2009년엔 홈페이지를 통

해, 사이버공간 안에서도 저희 점포를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부족하지만 올

해 e-비즈니스 3년차로 부족한 것을 넉넉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갑자기 선녀와 나무꾼이란 동화 속 이야기가 생각이 나네요. 또 선녀와 나무꾼이란

노래도 있었지요. 이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옛날부터 이 노래는 제 애창곡 이었

거든요. 첫째 혜정이를 낳아 키우는 내내,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의 성격

이 저에겐 정말 맞지 않았거든요.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도망갈 기회만 엿봤던 것

같아요. 그러다 둘째 재훈이를 낳고 보니 그 마음이 점점 약해지더군요. 그러다 제

가 얼마 전에 셋째 승열이를 낳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젠 남편이 어디가 아플까

겁나고, 없어질까 겁이 난답니다. 셋째를 낳고 나선 책임감이란 단어가 더욱 가슴

깊이 새겨지고 이제야 세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화전식품의 주인으로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아 서툴기만 했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후회가 되기도 한

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앞으론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죠? 요즘, 세 아이를 바라보는 저

희 부부는 너무나 행복하답니다. 또한, 앞으로도 사이버공간 속에서 떠오르는 별

(☆)인 화전식품과 꽃과 콩나무를 활발히 운영할 것입니다.

제가 지금처럼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기에 제2의 인생은 성공한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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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울에서 나고 자라 20여년을 살아왔답니다. 사과 열린 모습에 반해 낮 설고

물 설은 이곳으로 신랑 하나 믿고 시집을 왔습니다. 농사에 농자도 모르는 채로 말

입니다. 눈이 많이 내려 날씨고 추운 12월 18일 여기로 둥지를 틀었답니다. 정말 아

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의 시간은 적응하기 엄청 애를 먹었습니다.

그해 봄 사과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 적과를 해야 하는데 작은 사과나무 열

매 따낸 것을 아까워서 주머니에 한가득 넣어서 가지고 다니던 기억도 있네요. 그렇

게 새로운 세상과 접하면서 83년도에 시집와 85년도에 큰아이를 낳았지요. 그 아이

키우느라 정신을 쏟다 보니 농사는 그저 손님이 왔다 가는 것처럼 그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87년 둘째 아이를 낳았지요. 아이들을 어느 정도 스스로 놀 수 있을 때까

지는 농사일을 주변에서 보고만 지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작한 농사일. 그때는 복숭아도 과수원에 있었거든요. 복숭아는 특성상 하

루만 늦어도 과육이 물러서 상품 가치가 떨어지니 바로 수확을 해야 하는 상황 이

었답니다. 그러니 신랑하고 복숭아를 수확해서 고덕 시내에 있는 과일 가게에 배달

을 해야 하는데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리어카에 의자를 달고 아이를 앉혀 신랑

은 끌고 저는 밀며 복숭아를 팔러 다녔지요. 그리고 이른 벼를 심어 익어가니 새들

이 벼 낟알을 쪼아 먹어 피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논둑에서 아이와 함께 새를 쫒

다가 아이가 갱구랑(개울)으로 굴러 놀란 기억도 스쳐 지나갑니다. 다행히 다치지

는 않아서 그렇게 지나가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드네요. 그때도 일반농사를 짓기는 했지만 농약을 치는 횟수는 다른 사람들보다 월

등히 적은 횟수로 방제를 했지요.

그러다 유기농사에 대한 강의를 듣고 빠져들기 시작해 태평농법에서부터 직파재배,

http://blog.daum.net/jinny2192/13427006

서울 새댁, 사과나무 엄마 -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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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농법 정말 안 해본 농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직파 재배를 한다고 했다가 수확

량이 턱없이 줄어 고생한 시기, 오리농법 한다고 오리를 300마리 정도 논에 넣어 제

초작업을 한다고 한 것이 하루저녁에 너구리 녀석이 급습을 해 50마리가 한꺼번에

죽었던 일 정말 생각하면 파노라마 같이 스치고 지나가네요.

그래도 두 녀석들 큰 병치레 없이 잘 자라 주었답니다. 시할머니에 시어머니, 시동

생 셋이 있는 이곳으로 시집와 멋모르고 지낸 세월이 벌써 25년. 이제는 유기농사도

안정이 되었고 판로도 확실한 곳이 생겨서 농사짓고 판매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지만 매장으로 보냈다가 판매대금을 못 받고 손해 본 일, 쌀값을 2년 만에 받았던

일, 이런 저런 일들이 제가 걸어온 발자국들이랍니다. 이제는 큰아이가 대학 졸업반

이고 작은 아이가 대학 3학년이니 제가 신경을 써주지 못해도 스스로 알아서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정도는 된듯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 모습도 많

이 변해 있더군요. 농사일 이라면 아무것도 모르던 서울 새댁이 이제는 사과나무 전

지에서부터 적과 등등 사과나무에 대해서는 알아서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으니

20여년 세월이 허송세월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일은 식구 모두 편안하게 즐거운 삶을 이어갈 수 있게 준비 하는 것 만

남은 것 같습니다. 서로 의지 하며 즐겁게 일하면서 노년을 함께할 방법들만 찾으면

될 것인데 그것이 가장 큰 숙제로 남은 것 같습니다.

* 원고가 너무 짧고, 블로그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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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mvpda/10045337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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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시장 점유율 1%를 향하여 - 김낙천

농촌에서 평범하게 생활하며 부모님과 생활하던 중, 농업전문대 입학 때 아버지께

서 참나무 3,000본을 사오셨다. 청양에서 표고버섯을 재배하시는 외가댁의 자문을

받아 처음으로 버섯재배를 시도하시려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종균을 사오시고

드릴과 접종기구가 준비되면서 표고버섯 접종이 시작되었다. 내가 버섯과 첫 인연

을 맺게 된 것이다. 버섯은 접종 후 배양과정을 거쳐 집 앞 밭에 하우스를 짓고, 차광

망을 씌우고 말목을 박아 반생이 철사로 줄을 띄워 버섯 목을 세워 놓고, 발생을 위

해 스프링클러를 설치하여 살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과정이 끝나고 버섯

목에서 첫 발생한 버섯을 보았을 때, 그 모습이 얼마나 신기하고 예쁘던지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서 아른거린다. 지금도 버섯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고

부자가 된 듯 넉넉해진다.

그렇게 시작된 버섯재배는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전역할 때까지 계속 되었

다. 전역 후 이듬해 봄에 표고접종을 마치고, 경기도 군포에서 1달 동안 원정 가서

표고접종을 할 때 집에서 전화가 왔다. 농촌진흥청에 들어가서 일용직으로 기술을

배우고 익히라는 거였다. 전화통화 후 집으로 내려와 이력서 1통을 가지고 진흥청

장 비서관실로 갔다. 그 길로 비서관님을 찾아 뵙고 바로 농업기술연구소에서 균이

과로 입사하면서 버섯인으로서의 내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균이과에서 맡은 업무는 병재배 버섯사 관리였다. 1993년도 당시에는 균상느

타리재배에서 판넬 구조의 자동화 설비의 첨단시설과 대량생산의 초기단계로 병

버섯재배의 도입시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운이 상당히 좋았던 것 같다. 농촌진흥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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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새로운 버섯 기술 보급과 대량생산 체계를 확대하기 위해 교육생을 받아 버섯

생산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교육생들에게 새로운 재배방법과 균 관리 및 기계사용

방법 등을 가르쳐 주는데다 대부분 정부 보조금을 받아가며 교육받고 있는 교육생

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작은 형 집에서 출퇴근을 하였고 공무원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작업을 마치고 청소 중에 잠깐 졸았던 모양이다. 한순간 왼손가락

중지와 약지가 기계 속으로 들어가 손가락을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하여 병원에 입

원하였고, 그 기간에 바로 시험 날이 있었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은 치르지도 못하

였고, 대신 당시 함께 교육받던 교육생들과 대화를 통하여 정부지원을 받는 방법 등

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1994년도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하여 1995년도에 우여곡

절을 겪은 후 유통특작지원사업을 받게 되었다. 1994년도 봄에 농촌진흥청을 퇴사

했는데 아마도 그때까지가 내가 버섯에 몸담고 있던 중 가장 황금기였다고 생각된

다. 근무하는 동안 전국의 많은 버섯인을 알게 되었고 많은 기계업자를 알게 된 것

이 훗날 아주 큰 재산이 되었다.

퇴사하면서 경북 칠곡에 있는 버섯 재배사에서 컨설팅을 하면서 대량 재배의 경험

을 쌓게 되었다. 1995년에 5억5천만원(보조금 1억2천, 융자 3억3천, 자담 1억2천)의

큰 사업을 받았다. 그때 나이가 28살,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금오영농

조합법인을 설립하고 사업에 착수하였다. 아버지께서 사업자금 3천만원을 주셨고

대지 2천평을 내주셔서 토목업자와 8천에 계약하고 계약금으로 3천만원을 건네주

었다. 드디어 토목공사가 시작되었다. 불도저가 흙을 밀어내고 덤프트럭에 자갈을

실어 정지 작업을 한 위에 쏟아 부으면 그래이더가 나라시하고 진동로더가 땅을 다

지는 모습을 보며, 버섯 대량 생산을 할 꿈과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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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희망도 잠시, 토목업자가 사라진 것이다. 말로만 듣던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

이다.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했다. 그래도 사업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사라진 토목

업자 이외 두 명과 같이 토목공사는 끝이 났다. 문제는 공사대금이었다. 아버지 논

밭을 담보로 하여 5천 8백만원을 대출받아 대금을 일부 결제하고 나머지로 철골과

건물 판넬 공사를 시작하였다. 공사는 자재는 내가 사주고 시공만 맡겼다. 문제는

또 자금이었다. 철골과 판넬 비용으로 1억8천만원이 소요된다. 자금동원 방법을 총

동원 하였지만 방법이 없었다. 결국 후계자자금과 전업농자금으로 8천만원을 지원

받아 공사가 진행되어가지만 갈수록 자금 압박을 받았다.

그 당시의 하루 일과는 농협과 군청에 출근도장을 찍다시피 했다. 판넬은 평택에서

사오면서 지불각서를 써주고 조달하여 공사 진행 중 시공업자와 트러블이 생겼다.

대금결재 일부를 결재 해주고 나서 작업은 진행되어 가고 있던 중 8월에 태풍의 피

해로 재배사 1동이 파손되어 날아가 버리고 전봇대에 판넬이 걸쳐있는 걸 보니 암

담하고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앞이 캄캄했다. 그 후 군청에서 태풍피해 보상 융자 3

천만원을 지원받아 다시 작업이 진행되어 가던 중 추석에 업자는 짐을 챙겨 철수해

버렸다. 큰일이다. 다른 업자를 선정하여 작업은 진행되고 건물 성과에 따라 후취

담보를 신청하고 냉동기 설비를 1억5천만원에 계약하였고 기계계약을 1억4천만원

에 계약하였다. 계약금은 냉동업자에게 3천만원을 주고 기계업체는 신용으로 믿기

로 하였다. 이때 농촌진흥청에 있으면서 맺었던 인맥이 이렇게 큰 도움이 되리라고

는 생각도 못했다.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돈은 주위사람이 벌어준다

는 말씀과 사람과의 인맥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균이과서 기계업체는 기계 개발을 하는데 실험과 자문을 많이 받았고, 그때 기계업

체를 알게 되었다. 드디어 건물이 완성되고 냉동설비가 완성되고 기계설비가 갖춰

져 재배사가 완성되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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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해결되지 않은 자금문제는 12월을 지나 1월에 건물 등기 후 후취 담보로 하여

3억3천만원을 받아 해결하고 남은 금액은 벌어서 갚기로 하고 대망의 팽이버섯 재

배가 시작되었다.

1995년은 평생 잊지 못할 할 해이며 평생 할 마음고생과 28살 어린 나이에 감당하

기 힘든 어려움을 경험하고 극복한 해로 지금 생각하면 대견하기도 하고 어떻게 했

는지 이해가 안가며 지금 하라면 아마 못할 것 같다. 버섯종균을 만들고 입병하고

접종하고 배양이 완료되어 균긁기를 하고 발생실에서 버섯 발생이 될 때 그 조마조

마함과 설레임과 뿌듯함의 감격을 느끼는 순간이다. 버섯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걱

정도 하고 잘 자라기를 바라며 첫 수확하는 날 비로소 진정한 버섯인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1995년 10월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1996년 3월 2일 결혼을 하였고 버섯은 일일 생

산되어 소득을 올리며 시설비용의 외상 빚도 갚으며 아버지 논과 밭의 담보대출을

갚고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2~3년 흘러 아들과 딸이 태어났으며 IMF

를 겪으며 버섯 값이 하락하고 대형업체의 등장으로 버섯업계의 커다란 위기가 찾

아와 중소 규모의 업체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2007년에 충남농업기술원에서

‘미소느타리버섯’을 개발하여 시험 재배를 하여 성공함으로써 통상 실시를 받아 현

재 미소느타리를 재배하지만 규모가 작고 홍보 부족으로 유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

다. 그러나 버섯시장 점유율 1%를 목표로 열심히 하고 있다. 목표가 이루어 질 때까

지 노력하면 꼭 이루어질 것이다. 버섯시장 점유율 1%가 되는 그 날까지....

* 소셜웹과 관련한 부분 인터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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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 고향은 전라남도 고흥이랍니다. 50이 낼 모레인 제가 7살 때부터 지금은 69

세이신 큰오빠가 평생을 유자농사 해서 막내 동생인 저와 당신 자식 오남매를 키워

내셨지요.

고흥유자는 지리적 표시 등록이 되어 있고, 친환경 저농약 인증을 받아 제초제 사용

을 전혀 하지 않고 ‘헤어리베치’라는 풀로 잡초제거를 한답니다. 그동안 나 살기 바

쁘다고 돌아볼 새 없이 살았는데 언제부터 오빠의 쇠잔해진 뒷모습에 가슴이 먹먹

해 짐을 느끼게 되었네요.

어제 하루 유자를 따는데도 이리 힘든데, 평생을 독한 유자가시에 찔리면서 농사지

으셨을 오빠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유자가시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강

하거든요. 멋진 유자사진 올리고 싶은데 리더기를 안 가져 왔네요. 여긴 읍내 한 번

나가려 해도 한참을 가야 하는 깡촌이거든요. 아직 오염이 전혀 안된 순수한 시골

공장도 축사도 없는 그야말로 청정 깡촌 시골이에요. 마을 앞에 있던 멋진 바다가

지금은 논으로 변한 것 말고는 어릴 적 그 모습 그대로인 시골이랍니다.

조카들이 아버지 심심하실까봐 중고 컴퓨터를 설치해 드려, 느리긴 하지만 이렇게

글을 올릴 수 있어 좋네요. 제 블로그에 있는 사진 복사해서 올려보네요.

형님이 돌아가셔서 책임져야 할 조카가 둘 있고 홀어머니를 모시는 남편을 만나 결

혼하겠다는 나에게 아버지는 ‘볏짚을 안고 불로 들어가는 줄로 알라’는 말씀과 함께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내가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기에 네 아이들의 엄마로 직장

인으로 열심히 살아 이제 안정된 삶을 사는가 싶은 98년 6월 평생을 직장인으로만

http://stsupporters.tistory.com/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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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의 행복한 만남 - 류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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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것 같던 남편은 한 달 동안 예산으로 출장을 갔다 오더니 갑자기 예산에 가서 농

기계 대리점을 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한 번도 가 본적 없는 생면부지의 땅.

지도를 들고 찾아온 예산은 멀고 험한 길을 2시간 30분을 달려서야 도착했습니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남편은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다며 설득을 하고 나 또한 젊은데

해 보자 하는 생각에 남편 뜻을 따르기로 하고 대학생부터 초등학교 6학년인 막내

까지 아이들을 대전에 두고 간단한 짐을 꾸려 험한 차동고개를 넘을 때 왜 그리 서

럽던지요.

적응되지 않은 시골 생활과 두고 온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에 내 마음은 깊은 웅덩

이가 생겨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고 심한 우울증으로 치료가 필요해질 정도로 마

음이 황폐화 되었습니다. 2002년 고3이 되는 딸아이를 핑계로 대전으로 가 막내딸

의 고3 까지 보내고 나니 주말 부부를 해야 하는 의미는 퇴색되고 남편과 아이들은

제가 아내의 자리로 돌아오길 바랐습니다. 때문에 2005년 다시 예산으로 왔지만 언

제든지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던 차에 2007년 12월 29일부터 일

주일간 딸들과 여행을 하며 마음을 정했습니다.

시골 외갓집의 추억에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세련되었지만 삭막한 도시보다

예산에서 남은 인생을 보내는 것도 그 동안 아이들에게 가졌던 미안한 마음을 조금

이나마 보상해 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래 이제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정말

이곳에서 터를 잡는 거야’ 라고 생각하며 보금자리를 만들 터도 마련하고 하면서 내

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보게 된 지역 정보지에서

농업기술센터에서 e-비즈니스 컴퓨터 과정과 사과대학이라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전업농이 아니라는 생각에 몇 번을 망설이다가 전화를

했습니다. 매주 금요일에 있는 사과대학엔 다행이 작은 과수원이 있던 터라 갈수 있

었고, e-비즈니스 과정은 인원이 다 되어 지금은 수강이 어렵다는 대답에 실망했지

만 개강식 날 농업기술센터 김기예 선생님으로부터 결원이 생겼으니 하고 싶으면

오라는 전화에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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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예산에도 내가 발붙일 곳이 생긴 것이지요. 매주 화요일 저녁 e-비즈니스 교

육과 금요일 오후 사과대학 교육에 가는 발걸음은 신나기만 했습니다. 항상 반갑게

맞아주시던 농업기술센터 직원 분들과 제게 허물없이 대해 주시는 수강생 여러분

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유능한 강사님들의 좋은 강의를 들으니 그동안 드리워졌

던 마음속의 그늘이 서서히 녹아, 예전의 밝은 모습을 찾게 되자 남편과 가족들은

농업기술센터가 병원이라며 제 활동에 적극 찬성하며 힘을 실어줍니다.

컴퓨터라면 아주 기본적인 메일 등 기본적인 것만 알고 사용하다가 큰 회사만이 아

닌 개인도 전자 상거래로 상품을 판매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홈페이지라는 것과 블로그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포토샵이며 사진

촬영 등 다양한 교육을 농업기술센터와 충남농업기술원을 통해 배우게 되면서 ‘내

가 이 예산에서 대체 무얼 하며 살까‘ 하던 막연함에서 벗어나 건강한 먹거리를 만

들어 전자상거래로 정직하게 판매하고 작은 쉼터를 만들어 마음이 힘든 사람 누구

나 쉬어갈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그동안 남에게 맡겼던 사과농사도 올해부터는 직접 하면서 땀의 진정한 의미와 자

연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작년 정보화 대회를 보면서 충남전자상거

래연구회이란 곳을 알게 되고, 조남준 사무국장의 열정에 반해 카페에서도 활동하

면서 온라인에서 다양한 경험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장태평 장관님과의 덕산 번

개며, 농림부 홍보대사님들과 파워블로거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며

꿈꾸는 것으로 머물지 않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하나씩 준비해 봅니다. 내 꿈이 이

루어지는 그날을 위하여...

내 고향 고흥에 계신 오빠의 다급함과 미안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전화기 저 너머에

서 들려옵니다. '언제쯤 올수 있냐' 아버지 같은 오빠. 칠남매의 장남으로 5남매의 아

버지와 같은 오빠의 존재. 그중 막내인 제겐 오빠의 존재가 더욱 특별합니다. 오빠

힘으로 학업을 할 수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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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유자농사. 유기농 인증은 없지만, 항상 내 새끼가 먹을 거라 하시는 오빠언

니의 농사철학은 최소한의 농약사용과 따뜻한 가슴과 거칠어진 손과 발의 수고로

해야 한다고 내 식구 내 새끼 먹거리라고 한없는 정성으로 지은 유자 농사. 뭔가 도

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수확 철이면 남편과 봉사활동 갑니다. 고흥 유자 따러 가세

~ 매번 싫다 안하고 가주는 우리 신랑... 정말 고맙지요!

바람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고흥 유자로 내 정성으로 담은 유자차를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를 시집온 후 25년 동안 했지요. 다들 정말 맛있다며 유자차 장사라도 시작

해라 했지만, 사느라 바빠써 못했는데 올해는 조금 많이 담았네요. 가져가신 분들의

좋은 반응에 힘이 납니다. 조금이나마 오빠에게 힘이 되어드릴 수 있어 행복합니다.

■ 이름 : ■ 닉 : ■ 이메일 : ■ 블로그 : ■ 소속 / 하는 일 ■ 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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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언간 인생의 반 백년이란 덧없는 세월이 지나간 지금 지나간 그 시절, 그토록 꿈

많았던 젊었던 시절. 삼대독자이신 시아버님에 장손 며느리로 시집을 오니 시아버

님과 계모 시어머님 고등학교에 다니는 시동생과 다섯 식구가 살면서 어려운 우여

곡절이 많았다. 그때 이미 시아버님께서는 인삼 농사를 짓고 계시던 터. 인삼에 인

자도 모르고 시집와서 날마다 식구들이 인삼 일에 몰두하는 것이 신기했고 생소했

다.

산에 가서 억새풀을 베어다 겨울에 발을 짜고 벼 짚으로 이영 엮고 이런 일을 동네

아낙들이 모여서 품앗이를 하신다. 그때만 하여도 모두가 어려운 시절 이었고, 어쨌

든 부모님 모시고 공경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의 임무.

어려운 시골살림을 시작했다. 시아버님께선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지극정

성으로 따뜻하게 베풀어 주셨고, 반면에 시어머님은 질투 반 시샘 반 섞어서 며느리

에 대한 차가운 시선뿐. 정을 주지 않으시는 시어머님과의 전쟁과 갈등은 시작되었

고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은 나의 존재를 잊게 하였다.

외롭고 쓸쓸한 시집살이에 하루하루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결혼 삼년 만에

큰 딸을 낳았고 이년 후에 작은딸 딸 딸을 낳은 뒤에야 기다리던 아들이 우렁찬 함

성과 함께 태어나게 되었고 아이들로 하여 나의 인생은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는 시골 일이 모든 일이 수작업이기 때문에 시아버님께선 아침 일찍 일어나 아

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에 물을 가득 데워놓으시곤 하셨다. 밥을 해 식구들 밥상을

차려드리고 품앗이를 하러 일터로 가는 것이 매일 같은 일상생활이었다.

* 아궁이 이야기/ 품앗이 이야기 --- 농촌정서

→ 추억이나 얽힌 에피소드 등 구체적 추가 사연 듣고 싶어요.

http://leemix.tistory.com/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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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균이네 인삼농장 - 문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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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늦게 밭에서 돌아오면 시어머님은 집안일은 아무런 관심 없이 밖에 나가셨다

가 며느리가 집에 와야 집에 들어오시곤 하셨다. 아이들은 하루 온종일 흙에 먼지에

꾀죄죄한 모습으로 허기진 채로 그냥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다. 속상하고 마음 아파

도 어찌 해야 될지를 몰랐던 그 시절. 어려운 시골살림 어떡하면 남한테 아쉬운 소

리 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품을 팔아 돈을 벌어야 했고, 또 내가 많

이 배우지 못했던 공부를 아이들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려고

안간힘을 다해 노력하였다.

하루는 남의 인삼밭 일을 하러 경운기를 타고 갔다. 팔십 년대 초만 하여도 시골에

선 경운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고, 마을에서 인삼밭을 갈려면 한 시간내지는 두

세 시간은 보통거리 이다 보니 일 끝나고 밭에서 해 넘어간 뒤 집에 오면 보통봄여

름엔 여덟 아홉시는 기본. 캄캄한 밤에 집에 오니 난리 가 났다. 며느리 기다리던 시

어머님께서 저녁밥을 지어 드시는데 누룽지를 뜨겁게 끓여 밥상머리에 놓은 걸 두

살 바기 막내딸 이마에 화상을 입고 울고 있다. 그런데도 그 옆에 식구들은 그대로

저녁밥을 드시고!

정신 없이 아이를 들쳐 업고 신작로로 나와 지나가는 차를 세워 타고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병원까지 데려다 준 트럭 기사아저씨가 지금도 감사하며 고맙기 한이 없다.

다행이 빨리 병원에서 치료해서 흉터는 생기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그때를 생각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왜 그랬을까... 그 어린 피부에 화 독기를 빼낸다고 독한

소주를 발랐으니 어린 것이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 아직까지도 미안하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품앗이 가면 모유가 꽉 차서 가슴이 아파 팔을 들을 수가 없

어 몸이 아플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젖을 충분이 못 먹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이 메어온다

이른 봄 찬 통에 점심을 싸서 오토바이 뒤에 싣고 집에서 30~40분 거리를 달려가면

무릎이 시려 굳어버린 다리를 한참 동안 주물러 언 다리를 풀어주는 것이 아침에

일하기 전 준비운동 이다. 부지런히 일을 하다 점심때가 되어 아침에 싸온 도시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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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 점심을 먹으려 밥통을 여는 순간, 통속에 밥은 크고 작은 주먹밥이 되어있다.

오토바이에 싣고 오는 동안 비포장 에 사정없이 흔들어 밥통 속에서 요절 복통을

한 탓이다. 어쨌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남편과 나는 웃음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주먹밥을 나눠 먹곤 했다.

이르면 양력 삼월 중순에 인삼밭 두둑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하면 종묘 채굴해서 상

품을 등급별로 선별해서 식재 한다. 인삼 싹이 올라오면 늦은 서리 때문에 냉해가

올 수 있어 바람 방지 해 가림 준비로 막대기로 기둥을 세우고 연재 걸고 그 위에

발을 짜서 올려놓고 집으로 이영을 엮어 덮는 일을 한다. 이 모든 것이 끝나면 일차

로 영양제를 뿌려주고 밭에 나는 잡초 제거를 해 준다. 해서 시간은 빠르면 한 달 정

도면 우선 식재와 집짓기가 완성이 되는 셈이다. 신포가 끝나면 구포손질까지 하고,

이 한 바퀴를 돌고 나면 5월 초나 중순이 되어 있다.

하루 온종일 일하고 해가지면 집에서 하루 종일 엄마 아빠를 기다리다 잠이든 아이

들을 볼 때 마다 아이들한테 미안한 마음에 들어 잠든 아이들을 꼭 안아주곤 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커서 엄마 아빠 보다 키도 크고 착실하고 성실 하게 예쁘게 잘 자

라 의젓한 사회인으로 장성을 한 것이 고맙고 대견스럽기만 하다. 아무튼 건강 하고

숨결마다 걸음걸음마다 복과 행운이 늘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가 할 몫인

것 같다.

덧없는 세월은 흐르고 또 흘러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채 안되어 시어머님 그토

록 미운 며느리를 놔두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기고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이

후로 홀 시아버님과 5년을 같이 살았고 아버님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큰 슬픔에 해

를 거듭 하던 중 나에게 새 삶을 갖게 된 동기는 운전면허를 취득하게 된 것이 중요

한 날개를 단 최초원인이다. 그리고 곧이어 컴퓨터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였고 가정

형편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초보운전에 차를 끌고 열심히 다니며 컴퓨터도 배우

기 시작했다. 변해가는 세월 속에 나 또한 변해야 세상 흐름에 끼어서 살고 싶어 노력

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배우고 돌아서면 잊어버려도 다시 배우고 또 복습하고 이

제는 어느 정도 정보화 수준이 올라가다 보니 그래도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는 게 더

많이 있는 것이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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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지금 컴퓨터에 글씨를 쓰고 있지 않는가! 여기까지 온 과정은 길었을

지언정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나는 지금 내 삶을 윤택하게 살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열심히 노력 하고 알을 박차고 깨어나는 병아리처럼 시

작은 있으되 끝을 모르는 인생 즐거운 삶을 행복으로 간주하는 나는 행복한 여자.

그리고 농업리더과정 e-비즈니스 4년차도 꿈꾸고 있지 않는가!

내가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있기까지에는 농업기술센터에 생활개선회가 있었고 역

대 소장님을 비롯하여 과장님, 계장님, 지도 사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지칠

줄 모르는 끈기 인내심 덕분입니다.

너무 감사하고 앞으로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 나의 각오 -

나를 이끌어주는 는 용기만이

소리 없이 사뿐사뿐 내리는 눈처럼

온 천하가 하얀 백색으로 변해

눈꽃을 만들듯이

나의 지식창고에도

눈송이 숫자만큼

많은 지식과 덕을 쌓으며

지나온 세월만큼 열심히 달려 나갈

각오를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행복은 나를 지켜줄 것이며

나는 행복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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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이화영 ■ 닉 : yiabb (이얍) ■ 이메일 : [email protected] ■ 네이트온 : [email protected] ■ 블로그 : http://leemix.tistory.com ■ 소속 / 하는 일 웹사운드 전문가, 프리랜서 사운드 디자이너, 웹 기획, 음원서비스 기획 ■ 태그 : 웹사운드, 웹뮤직, 사운드디자인, 뮤직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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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대찰을 배경으로 한 산촌에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농부인가 신선인가. 예산군 가야 약선마을 대표 박광수씨가 그런 사람이다. 이

런저런 가공식품도 내놓고 유기농 나물채소도 상품화한 농가라 해서 특별한 시설

재배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현장은 영 딴 판이다.

박 씨는 농업경영인 중 임업후계자이다. 수덕사를 품고 있는 가야산 3부 능선쯤의

산 35만㎡에 참죽, 오가피, 엄나무, 두릅, 도라지, 더덕 등 40여 종의 약용과 식용이

가능한 산야초를 재배하는 임업인이다. 봄이 오면 이런 나무들의 새순을 따서 나물

채소를 팔기도 하고, 가을에는 열매를 따다 장아찌를 담거나 뿌리로 즙을 내기도 하

는 소위 혼자서 생산, 가공, 유통을 다하는 신지식 농업인이다.

그런데 그의 농법이 예사롭지 않다. 그 흔한 무농약, 저농약 운운하는 유기농법이

아니고 완전 자연농법에 가까운 농사를 하고 있다. “햇빛, 달빛, 별빛에 물과 바람을

고스란히 맞히지 않고는 자연 임산물이라 말 할 수 없다” 는 것이 박 씨의 신념이며

고집불통 농법철학의 바탕을 이룬다.

모든 작물은 어린 묘목 때 잡초에 치이어 이겨내지 못하고 질 때가 문제이지 그 단

계만 지나서 잡초보다 커지면 별문제 없이 성장한다.그래서 물길 닿고 햇볕 좋은

곳을 찾아 작물을 심고 한두 해 잡초를 제거하는 것, 이것이 이곳의 농법이다. 그 다

음은 야생 작물과 똑같이 비바람 맞으며 크게 놔두고 적기 수확하여 이용하는 것이

란다.

백문이 불여일견. 4륜 구동 차를 타고 산판길을 돌아 그의 농장을 돌아보니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생산된 임산물의 관건은 판로이다. 박씨는 각종 상을 타고 매스

http://junzzang.com/entry/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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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달, 별, 빛이 머무는 가야약선농장 - 박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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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도 타기 시작하면서 산림청, 농업기술원, 농업기술센터, 지자체에서도 이런저런

정책, 기술지원을 해주어 여건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모든 것이 나의 몫이라는 생각

으로 주경야독하면서 계속 탐구하고 쫓아다니는 신지식 농업을 한다.

카페에 띄워 번개 만남으로 농식품부 장관이 이 마을을 방문하기도 하고 지인과 마

니아들을 이곳에 유치하여 시찰 프로그램을 운영, 입소문을 퍼뜨리며 경영개선 노

력을 기울인다.

겉보기엔 유유자적하는 농사꾼인 것 같지만 역시 농사도 경영 수지를 맞추진 않고

는 어림도 없는 험산험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씨는 자기 집 앞에 약초체험관은

물론, 덕산 스파캐슬, 수덕사, 성지순례길 심지어 한서대학까지 지근거리의 모든 여

건을 감안한 홍보 전략과 체험프로그램을 마련 중이란다. 농민의 살아남기 위한 처

절한 노력의 일단을 볼 수 있었다.

* 이야기가 좀 더 풍부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연농법을 시작한 사연, 소셜 웹을 활용한

사례가 없네요,

■ 이름 : ■ 닉 : ■ 이메일 : ■ 블로그 : ■ 소속 / 하는 일 ■ 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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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과를 만들며 농촌체험관광 사업을 하고 있는 나는 강원도가 고향이다. 강원도 하

면 산과 계곡 그리고 푸른 바다가 먼저 떠오른다. 나의 고향은 푸른 바다를 가지고

있는 삼척. 지금은 관광산업이 경제 동력의 한 축이라지만 당시 삼척은 굉장히 조용

한 곳이었다. 여느 학생과 다를 바 없이 평범히 지내던 나는 학교 졸업 후 서울로 상

경 후 재미있는 시절을 보냈다.

서울 하면 그때만 하여도 ‘서울사람은 깍쟁이’라는 나름대로의 시골사람들의 평가

가 있었지만 서울사람들도 대부분 고향을 그리워하며 생활하던 시기들 이었다. 사

람 많고 배울 점도 많았기에 어른들께 모르는 것을 배우며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고 언제나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마음이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중, 지인의 소개로 만난 지금의 남편은 동생들을 돌보며 가르치

느라 정신 없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결혼하면 시골로 가서 농사를 짓겠다는 그의 말

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 채, 콩깍지 씌었다는 남들의 이야기가 현실이

된 것은 결혼 후 불과 1년도 채 안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가장 큰 착각은 여자가 들판에서 감당해야 하는 노동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생

각지도, 꿈도 꾸지 못 했다는 것. 힘든 노동에 어린 새댁이었던 나는 여러 가지를 고

민했었고,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오신 시어머니와의 갈등 또한 수년간의 연애 끝

에 이룬 사랑을 파하고 싶다는 마음마저 들게 했다. 그때는 신랑에게 다 못했던 이

야기들... 그러나 1990년, 시어머니께서 명절 때 마다 만드시던 한과를 정식으로 제

조허가 받아 시작 한 후 수많은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 제조허가를 어디에서 받았는지, 국가에서 받았는지 등 명시를 정확히. 시어머니에

http://goood000.tistory.com/7

영원한 선생님이 되고픈.. - 박순선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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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서 만들던 한과가 어떤 특징과 장점이 있어 선정 되었는지. 시어머니가 함께 만들

던 한과를 며느리가 함께 만들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함께 만들면서 어려운 점은 없

었는지. 하는 내용이 추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한과의 종류 ♣

유과류, 강정류, 다식류, 숙실과, 정과류 등으로 나뉘어 지며 그 중 유과와 강정, 다식

의 종류는 간식용으로 애용이 된다. 유과는 각 지방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생

산되고 있으며 그 제 법은 찹쌀을 주 원료로 하며 떡 만들기-건조-튀김-즙청-고

물무치기 등의 일반적 순서로 만들어 지며 만드는 지역, 사람에 따라 다르다. 주로

중, 장년층을 주 소비자로 하고 있어 자라나는 신세대에 가까이 다가 가는 것은 한

과업계의 큰 숙제 중 하나이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기록이 있고 한과의 전성

기는 고려, 조선시대를 지나 천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생과가 없던 시절

겨울에 주로 만들어 먹었던 것으로 생과 대비 조과라고 하기도 한다.

가장 맛있게 만드는 방법은 좋은 찹쌀의 선택과 착실한 기술 ,좋은 조청의 선택이다.

유과에 있어 좋은 품질의 한과는 부드러우면서 달지 않고 기름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 관건이며 오래 될수록 노화 현상에 의한 딱딱하고 상대적으로 부드럽지 않다.

건조하고 서늘하며 햇볕이 없는 곳에 보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이, 세상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시금석이 되어 나

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1991년 한과 정부지원 업체로 선정되어 지원이 되었고,

1992년 정부품질인증을 받은 일 (농림전통8호 업체), 한과업계 최초로 낱개 포장한

한과가 히트 치던 일, IMF때의 쓰라린 추억, 그 속에서 겪었던 여러 형태의 인간들,

세상의 모습, 어려울 때마다 용기를 주었던 기도의 힘, 남의 일이라 여겼던 병마와

의 투쟁, 모든 것을 잊고 재미있게 살라는 조언을 받아, 공부하고자 다닌 기술센터

와의 인연. 컴퓨터를 배우고, 규방공예며 한지공예, 음식을 배우면서 여러 가지 느낀

새로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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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어렸을 때인 1995년에 잠시 컴퓨터를 배웠지만 지금에 비하면 너무 힘들

게 또 어렵게 배웠다. 너무 재미있게 작은아이와 같이 배우면서도 학생들 틈에 끼어

열심히 배웠지만 컴퓨터를 별로 쓸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농업기술센터에서 컴퓨

터 교육과정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처음 기초부터 다시 배울 수 있어 반가웠다. 기

초 과정부터 차근차근, 또한 블로그 개설 및 운영, 전자상거래의 가능성에 대하여는

한마디로 무한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무한 한 공간에서 마음껏

활동이 가능 할 것이라 생각 하지만 그만큼 그쪽에 시간을 할애 할 수 없다는 현실

이 안타깝다.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강구하고 있지만 정답이 없고 좀 더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잊고 살았던, 어릴 적 꿈꾸던 선생님의 길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것. 서로 알려주

고 배우며 살아가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흘러가는 모든 것 들이 아름답다. 이젠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나눔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살려 한다. 전통음식을 만들고, 바느질

을 하며, 한지공예와, 어른, 아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재미있게 가르치고 또

새로운 것들을 배우며 새로운 날을 마지막 날처럼 살려 한다. 지금은 훌~~쩍 커 버

린 아이들 앞에서, 세상 앞에서, 당당한 나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 배우신 것들을 가르쳐 줄 사람이 생긴 건가요? 아니면 현재 누구를 가르치고 있으

신 건지? 구체적으로 설명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존경 받는 선생님, 스승님처럼..

스승이 없는 지금의 시대에 스승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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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 닉 : ■ 이메일 : ■ 블로그 : ■ 소속 / 하는 일 ■ 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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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3월 18일에 7남매의 장남인 남편을 만나 예산으로 시집을 왔어요. 농촌생활

농사일이 두렵지 않아 선택했습니다. 이웃끼리 정겹고, 서로 돕고 생각하는 자그마

한 마을입니다. 85년에 남편의 권유로 농민후계자에 선정이 되었고, 그 해에 큰아들

호선이를 얻었습니다.

시골생활을 하다 보니 저는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동네의 젊은

아낙들을 보니 기동성이 없어 논밭을 다니기가 답답하다며 저를 부러워했어요. 그

래서 배우고 싶어 하는 분들을 위해 마을회관에서 자전거 타기를 가르치기 시작했

어요. 낮에는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시간을 이용해서 날마다 자전거를 가르쳤어요.

너무나 힘들었지만 남편과 시어머님께서는 아기를 돌봐주셨기에 더 열심히 가르쳐

줄 수 있었어요. 정말 보람 있었어요. 그리고 오토바이도 배우고 싶으신 분들을 위

해 오토바이도 가르쳐 드렸습니다. 매일 그렇게 가르쳐 드리면서 얼마나 힘들었는

지 허리도 꼼짝 못하고 해서 한의원을 갔다니 맥을 보시고는 임신이라고 하시더군

요. 이듬해 둘째 아들을 얻었어요. 그 후 8년 동안 병석에 계시던 아버님은 92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96년도에 공주대학 최고경영자 과정을 하면서 여성농업인 창립을 했어요.

그 해에 남편과 함께 축산을 접고 사과나무를 심었어요. 예산하면 사과의 고장이잖

아요. 열심히 노력했죠. 사과 첫 수확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여성농업

인 연합회 임원 활동을 틈틈이 하면서 사과농사와 벼농사를 하였고, 힘들었지만 보

람도 있었고 재산도 조금씩 불어나서 쏠쏠하니 재미가 있었어요.

열심히 농사일을 하면서 사는 저에게 어느 날 아무도 생각 못한 시련이 왔습니다.

감기 한 번 앓지 않고 평생 건강하던 남편이 급성 암으로 2003년 12월 25일에 갑자

http://www.ebizstory.com/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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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과 열매를 맺기까지 - 복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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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막막했습니다. 아직은 40대 젊은 나이에 기가 막혔

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사랑하는 아들 호선이, 호식이가 있기 때문에 슬퍼하며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사과과수원 4,000평, 벼농사 20,000여평... 당장 일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멈춰버리기 때문입니다.

장대 같은 아들만 바라보고 더 열심히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두

아들을 같은 해에 군 입대 시키고 정말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동네 부녀회장을

맡아 “여성이 건강해야 집안이 건강하다. 그래야 농촌이 더 잘 살 수 있다.”고 새벽

부터 저녁 늦게까지 동네 일이며 면사무소 행사며 여성경영인 일이며 동분서주 한

가지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열심히 땀을 흘렸습니다. 조금이라도 여유시간이 나면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린 남편생각에 잠 못 이루며 힘들었기 때문에 몸이 으스러지

도록 정말 일을 하고 또 하고 억척스레 살아왔습니다.

우리 마을도 이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어 거의 대부분이 60이 넘은 어르신들입니

다. 그래서 운동도 하고 친목도 다질 겸 일주일에 한번 등산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우선은 부녀회원 중심으로 가까운 산부터 도전을 하였습니다. 나의 애마 더블 캡에

여러 형님들(대개 60~70세 할머니)을 태우고 용봉산, 가야산, 칠갑산, 오서산 등을

오가며 땀 흘려 등산을 마치고 올 때는 따끈한 칼국수 한 그릇 씩 나눠먹고, 비좁은

차 안에서 며느리, 시어머니, 남편 흉도 보고 자식들 자랑도 하고 온갖 수다를 떨며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며 이웃집 숟가락 갯수도 훤히 알만큼 서로 친숙하게 살아가

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남기고 간 커다란 구멍을 동네일로, 과수원일로 달래가던 중 2004년에 농업

기술센터에서 컴퓨터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내친김에 우리 마을 모든 분들에게

컴퓨터라는 기계 구경이라도 해드리고 싶어 마을주민 단체교육을 신청하여 인터넷

활용과정까지 3주 동안을 야간으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주경야독으로 온 동네가 컴

퓨터 열풍이 불어 컴맹을 탈출하였답니다. 과정이 끝나는 수료식 날 농업기술센터

에서 동네 잔치를 벌였습니다. 떡도 하고 돼지도 잡고 직접 동네 분들과 음식을 장

만하여 직원 분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자축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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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가슴 뿌듯하던지요...

그때부터 주경야독으로 컴퓨터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2005년에 과수전자상거래

실용화과정(10개월), 2006년 전자상거래과정, 2007년 e-비즈니스과정, 2008년 e-비

즈니스심화과정, 2009년 e-비즈니스 3년차 과정, 2010년 e-비즈니스 4년차 과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마케팅이 뭔지, 포토샵이 뭔지, 블로그, 카페가 뭔지 교

육장에서 강의를 들을 때는 끄덕끄덕했는데 돌아서서 문을 닫고 나오면 뭔 소리인

지 못 알아 듣는 게 더 많았지만 콩나물 시루에 콩나물이 시나브로 자라듯이 이제

는 이메일도 연애편지 쓰듯이 잘도 쓰고, 블로그 포스팅도 자연스럽게 하고 있습니

다. 사과작목반을 구성하고 친환경 인증을 받고, 농산물직거래장터와 이곳저곳 여

러 행사장을 통하여 예산사과의 우수성을 널리 홍보하고 판매를 했습니다. 인터넷

전자상거래도 시작하여 성수기에는 택배작업 하느라 구슬땀을 흘리기도 합니다.

e-비즈니스과정을 4년차 하면서 가장 큰 수확은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된 것입

니다. 전국적인 인맥을 맺게 되어 복사과의 인기가 날로날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서

울, 인천, 수원, 대전, 천안 등 대도시 소비자들이 우리 사과를 맛있다고 성원해주셔

서 늘 기쁜 마음으로 사과농사를 짓고 있답니다.

올 겨울은 정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마을길이 눈이 쌓여 빙판길이 되어 운전하기

가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요... 그래서 마을 분들과 의논을 하여 눈이 내린 날은 동

네 분들이 모두 모여 눈을 치우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내집 앞 눈은 물론이고 동

네 골목골목 차가 다닐 수 있는 길 위의 눈을 한삽 한삽 치우기로 한 것이지요. 모두

힘을 합쳐서 일을 하니 훨씬 힘을 덜 들이고도 효과는 엄청났습니다. 우리 마을은

눈이 와도 미끄럽지 않아 안전사고도 줄어들었고 어르신들도 좋아하시고, 젊은 사

람들에게도 본이 되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아름다운 본보기가 되었답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드렸더니 주위 분들도 항상

도와 주셨습니다. 농번기가 되면 동네 분들이 못자리도 도와주시고 모내기도 함께

하고, 사과 적과, 벼 베기, 사과 따기 등 등 혼자 일해야 하는 저를 먼저 도와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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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겨주십니다. 우리 마을은 황토밭이 넓게 펼쳐서 있습니다. 황토밭에서 충분한 햇

빛을 받고 자란 복사과는 모든 이들에게 복을 담아드립니다. 농사도 정성입니다. 꽃

이 필 때부터 하늘과 땅과 농부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한올 한올 실을 짜듯이 사과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내 아들들이 먹고 부모 형제와 친척, 내 가족이 먹기 때문에

안전한 먹거리 생산이 가장 큰 화두입니다. 번거롭고 조금은 더 힘들지만 친환경자

재와 퇴비, 미생물 등을 많이 사용합니다.

금방 따서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 한입 베어 물면 단물이 입안 가득 차며 사과 향이

상큼하게 퍼지는 새콤달콤한 복사과! 농촌의 따스한 인심과 여유까지 담아 복사과

가 찾아갑니다.

올해도 주경야독하며 함께 더불어 잘사는 농촌 만들기에 굵은 땀방울을 아끼지 않

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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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시책으로 정관신도시가 탄생되던 날. 정관 주민들은 탄성을 내지르며 모두

들 축제 분이기에 젖어 들었어요. 그것도 어렵사리 김동주 국회의원님과 박태준국

무총리님이 애써 힘써준 덕분으로 좋은 결실의 열매를 맺었는데 신도시로 확정되

고 보니 우리 주민들에게는 불행의 씨앗으로 변했어요. 처음에는 다들 부자가 되는

기분이었는데 현실은 너무 초라했어요. 땅 평당싯가는 너무 낮게 책정되고 공지싯가

로 보상을 받게 됐어요 * 구체적인 가격 들려주세요. 고향주변에 정착을 해보려 하여

도 이미 주변에 땅값이 너무 올라 제2의 고향을 찾다 보니 친척의 권유로 충청도 예

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산에 정착한지도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

다더니 이제 어엿한 은솔매 농장 주인이 됐네요. 처음에 올라왔을 땐 동산에 나무들

이 우거져 작은 산속에 동그라니 집 한 채 있어 너무 삭막했는데 이젠 숲속 궁전이

됐네요. 꽃과 나무를 좋아해 한 그루 두 그루 심다 보니 꽃밭도 있고 소나무 은행나

무 향나무 여러 가지 나무동산이 됐네요. 그리고 매실나무도 심다 보니 은솔매 농장

이 탄생한 거지요.

은솔매란 은행 소나무 매실나무가 아름다운 농장이란 뜻이에요. 이른 봄이 되면 매

화꽃이 활짝 피고 꽃샘추위를 이겨낸 목련의 하얀 꽃송이가 달빛에 비추어 보면 하

얀 눈송이가 뚝뚝 떨어지는 샹들리에 눈꽃송이처럼 보여요. 목련이 지고 나면 영산

홍 붉은 꽃이 너무나 곱게 피죠. 함박꽃 라일락 백합이 고귀한 멋을 부릴 땐 천지가

백향기로 가득하죠. 그러다 보면 연록색 잎이 새침떼기가 될 때 초롱초롱 매실이 콩

알처럼 커가요. 그리고 이맘때쯤이면 고사리 땅두릅 엄나무순 두릅 참죽 죽순 나물

시장이 되는 거죠. 이렇게 자연이 주는 혜택에 늘 감사하며 살죠.

http://lifestyledesign.kr/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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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 향 나는 숲속궁전, 은솔매 - 신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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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유월이 되면 상큼한 매실이 주렁주렁 커가요. 상상해 보셨나요? 매실 철이

되면 살구랑 자두랑 보리수도 빠알갛게 익어가고 새까만 오디도 그 대열에 춤춘답

니다. 이맘때쯤 되면 잠자던 은솔매 농장에 방문객이 하나 둘 늘어가고 매실 따기

체험도 이루어져요. 작은 수입이지만 내 가게에 보탬을 주지요. 많은 사람들과 인정

을 나눌 수 있고 친해지기도 한답니다. 아침이 되면 참새들이 대나무 높은 가지에

앉아서 재잘재잘 새벽잠을 깨우고 동창너머 큰 나무 높은 가지에는 비둘기 나래를

펴고 숲속엔 꿩들이 둥지를 틀고 아침 해가 떠오르면 농부의 하루 일과가 시작되죠.

* 매실따기 체험이나 은솔매농원을 운영하는 구체적인 모습이 좀 더 그려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소셜 웹 활용은?

튼실튼실한 팔다리에 힘을 주다 보면 배꼽시계가 식사시간을 정확하게 알리는데

그때의 먹는 밥은 꿀맛이죠. 여름이 지나갈 무렵엔 노오란 은행잎이 뚝뚝 떨어지고

노오란 알맹이가 함초롬이 달리는데 자연의 신비로움에 경탄을 금치 못하죠. 노오

란 알맹이를 자루에 담아 짓눌러 물에 씻어 하얗게 말리면 살아있는 생징코민. 이놈

을 신문지에 싸 전자렌지에 4분간 구으면 쫀득한 것이 얼마나 맛있는지. 또 대추나

무에 주렁주렁 달린 빨갛게 익어가는 생대추는 얼마나 달콤한지. 벌어진 밤송이를

털어 알맹이를 까는 재미는 먹는 것 보다도 더 신바람 나죠.

가을 찬 서리에도 끄떡없는 야생들국화 금잔화 설악초 꽃송이는 꽃들의 향년에 날

아드는 꿀벌과나비들의 축제는 오늘 내가 살아있어 오감의 행복을 맛보는 최고의

기쁨이 아닐까 싶어요. 인생은 어차피 진공묘유 공수래공수거 라지만 책 속에 빠져

진리를 찾는 삼매경이나 취생몽사 몽생에서 대아를 좇는 삼매경이나 인생은 어차

피 인생일장 춘몽일진대 수신제가 이후 지천명이라 했던가. 안마을 사장님이 자주

쓰는 말씀이죠. 세상만물 만상의 끝에 서더라도 아무런 후회가 없겠죠.

계절이 바뀌면 숲속에 궁전에도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오죠. 멀리 부산에서 서울에

서 혹은 고향에서 친지들이나 고향친구들의 방문이 있을 땐 은솔매의 친환경 농산

물로 찬치를 벌이죠. 먹는재미 보는재미를 느끼면서 고마움과 감사하는 마음의 표

시를 아끼지 않죠. 정말로 세상사는 재미를 느끼고 항상 자연이 주는 모든 것에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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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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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가난한 선비가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공부를 하였는데 촛불을 밝힐 수가

없어 여름에는 들에 날아다니는 개똥벌레를 잡아 모아서 여러 마리의 반딧불이 밝

히는 불빛을 이용하여 글을 읽었고, 겨울에는 눈 내린 달밤에 달빛이 눈을 비춰 창

문너머로 들어오는 눈빛을 이용하여 글을 읽어 공을 이루었다 하여 주경야독(晝耕

夜讀),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 하였다.

우리 예산군 E-Business 교육생들은 아주 힘들게 공부를 하였다. 낮에는 각자의 농

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고, 밤에는 기술센터 정보화 교육장에 모여 컴퓨터 및 각종

교육을 받았다. 적은 예산이기에 정보화 담당직원이 직접 컴퓨터 강사가 되었고, 낮

에 교육을 받을 시에는 가격이 저렴한 구내식당을 많이 이용했으며, 교육 시간을 아

끼기 위해 식사를 배달시켰으며, 겨울 밤 추울 때에는 교육장 안에서 식사한 기억이

있다.

신라의 화랑도가 삼국통일을 위해 전국을 다니면서 훈련을 받고 심신을 수련했듯

이 우리 교육생들도 선진 농업인을 찾아서 현장 교육을 많이 했고, 벤치마킹을 많이

했다. 강원도의 에덴양봉원과 홈삼팜을 갔을 때 비가 많이 내려 도로까지 올라와 차

가 도로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물위에 떠가는 느낌이었다. 일종의 수막현상이다. 우

리 일행 모두가 동해바다로 떠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황급히 계획을 바꾸어 수원의

농협마트를 살펴보고, 서산의 정동홍화마을을 방문하여 견학한 기억이 있다. 고양

시의 마실촌 체험농장과 마마님 청국장, 프로방스와 ~~~~(뭐죠??)을 방문하여 견

문을 넓힌 기억도 있고. 교육생 각 가정을 모두 방문하여 문제점과 발전방향을 함께

연구하였으며 윤선 박사님의 마케팅 교육 시 가야약선마을의 MBC 현장 촬영에 함

께한 기억이 있다. 땅끝 마을 해남에 갔을 때는 오랜 가뭄으로 애타고 있을 때 단비

를 몰고 가서 함박눈을 선물로 주고 왔었다.

http://happycoach.tistory.com/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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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usiness 3년 - 안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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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천암~~~~(~~부분 내용 삽입 필요)은 수령 500년의 동백나무가 특이했고, 고구마

와 호박을 생산하여 고소득을 올렸고 끝없이 펼쳐진 갈대숲은 이지역의 크나큰 자

랑이었다. 은향다원의 녹차밭 언덕에는 눈이 내리고 있는데도 개나리가 노랗게 피

었으며 녹차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설아다원의 펜션은 우리

일행의 보금자리였으며 전남의 명창이 이 집에 있었다. 백년지기의 무화과 재배와

연근 재배, 드넓은 농경지와 수많은 장비들은 농업도 기업임을 실감케 하였다.

~~~~어장에서 전복과 소주가 어찌나 맛있던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

생하다. 오는 길에 함박눈이 많이 내려 차량이 거북이 걸음으로 운행하여 무척 불안

했으나 우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각자의 발표와 토론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익

히며 연구했다.

Q 다녀오신 곳에 관한 지역 정보만 있고 각각의 방문을 통해서 어떤 부분을 어떻게

벤치마킹하고 계신지에 대한 언급이 없으시네요, 이 부분이 훨씬 더 중요하고 궁금한

걸요~

제주도 서부농업기술센터엔 우리나라 제일의 선인장 재배와 가공공장, 주변의 열

대 식물이 하늘을 찌를 듯이 울창하였다. 카멜리아힐은 개인 독지가가 황무지를 개

발하여 제주도의 한림공원에 준하는 인위적이 아닌 자연적인 수목원 이었다. 서귀

포농업기술센터의 <자연생태원과 감귤홍보관>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규모가

아닌가 생각된다. 올fp길 맨발로 걷기, 한라산 극기 훈련, 등산하는 도중 비를 맞으

며 등산했고, 관음사 계곡으로 하산 할 때는 8.7km의 거리를 200mm의 비를 맞으며

5시간동안 내려오면서 천둥 번개와 폭우로 인해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려도 낙뢰가

두려워서 받을 수가 없어 본 훈련에 참석하지 못한 교육생은 실종되지 않았나 하고

무척 애를 태운 모양이다. 어느 군 특수부대가 이보다 더 강한 훈련을 받으랴? 그러

나 우리는 해냈다.

우리가 본 제주도는 특별자치도로 옛날 탐라국이 재현된 것만 같았다. 우거진 숲도,

열대우림도, 돌과 바람과 바다와 과일나무 열매까지도 이국적(異國的)인 느낌을 주

었다. 다른 곳은 차량과 선박을 이용하지만 제주도는 비행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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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전연(충남전자상거래연합회) 번개모임에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이 온종일

우리와 함께 있었고, 충남농업기술원에서의 충남사이버농업인정보화대회에서도

오랫동안 함께한 것은 크나큰 자랑이다.

지난 가을부터 연말까지 Vcorea 유영진 대표와 코칭님들의 블로그, 트위터, 링크나

우 등의 교육으로 인해 많은 인맥이 연결된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 3년이란 세월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열심히 공부했다. 낮에는 일

하고 밤에 공부를 하려니 몸이 피곤하고, 쏟아지는 졸음을 견딜 수 없어 커피를 연

거푸 마셔가며 교육을 받았기에 지금의 이 수료증은 서울의 일류대학의 졸업장보

다 더 소중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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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와 준 것은 IMF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농업

이 후회하지 않는 좋은 나의 업이다. 새로운 세계에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1978년 학교를 마치고 농업에 뛰어들어 처음으로 해본 것이 고추 온상묘로 재배하

는 것과 봄배추와 양배추를 도전 했던 것이다. 고추는 성공적인 수확을 했고 배추

역시 잘 가꾸었다. 양배추는 묘상에서 실패하여 묘 숫자가 나오지 않아 한 봉지의

종자로 100여 개의 모종을 생산하여 양배추재배 특성을 파악하였다. 지금이나 예전

이나 생산은 되어도 판매가 항상 걸림돌이었다.

아버지 곁에서 하는 농업의 경험을 개혁이라 할까 어린 제 나름대로 해보았지만 판

매의 문제점이 따라다녀 하는 수 없이 한 해를 못 버티고 상경을 결정하고 아버지

께 말씀을 드리니 마음대로 해보라고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마음 가볍게 무작정 상

경해 형님 댁에 머무르고 구로 공단을 헤메기 시작했는데 정문에 구인광고가 있는

곳은 무작정 들어가 일하고 싶어 왔노라고 말하면 공장에서 원하는 인력이 아니라

는 말에 뒤통수를 긁적이며 돌아서야만 하는 일을 반복하다. 영등포역 뒤에 있던

OB맥주공장에 가서 일하고 싶다는 말을 하니 경비실에서 기선산업이란 곳을 알려

주며 거기에 가서 말하라기에 가서 말하니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묻더군요. OB맥주

가 그냥 좋아 왔노라고 했더니 내일부터 나오라기에 이제 일자릴 구한 기쁨. 하루

일하고 그만 둔 것이다. 그곳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 두게 된 것이

다. 그리고 하는 수 없이 귀향길을 택해 내려와 추운 겨울을 넘기고 다시 상경하여

신문광고만 뒤적여 보았는데 거대 삼성전자의 구인 광고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희

망과 기대에 차 이력서를 가지고 수원으로 내려가 삼성전자 정문에 서니 정말 어마

어마하게 보였다. 인사과장의 면접을 보고 나서 부서 배치가 되는데 도장부서라는

전혀 생소한 곳이었다. 나하고 같은 부서를 배정받은 동료들이 불만이 많았다. 제일

나쁜 곳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말을 들으니 뭔지 모르게 싫었다. 점심을 먹고

http://blog.daum.net/bbnworld/8441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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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리기법과 함께 한 나의 인생 - 이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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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 과장과 면담을 하고 나서 공정배치가 되는데 정문을 나선 것이다. 매주 목요일

에 모집을 하는 것을 알았기에 한 달 후에 다시 접수하여 가려고...

한 달 후에 다시 가서 면접을 했는데 재수가 이리도 없는 거야 세 명의 면접관이 있

는데 왜 또 지난번에 면접을 한 그 사람이 날 면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

까 날 알아보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오지 않았냐고 묻기에 솔직히 그렇다고 말했더

니 더 이상 묻지 않고 끝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대기업은 컴퓨터가 활용되는 시

대라 이제는 끝났구나 하고 가슴 졸이고 합격여부를 기다리고 있는데 또 먼저 그

부서였다. 다시 귀향할 순 없고 체념하고 말았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굳게 먹고 열심히 하기로 다짐하고 근무를 시작했다. 며칠 간 일을 하다 보

니 기술 분야가 보인 것이다.

이곳에서 최고의 기술은 SPRAYER가 되는 것이었다. 당장 반장을 만나 SPRAY를

배우고 싶다고 말하니 공정을 바꾸어 기능연마 할 수 있게 공정이동 배치해주어 한

달 간 기술연마 끝에 조장이 날 데리고 다음공정으로 간다. 속으로 환호의 쾌재를

외치며 내숭을 “제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라고 하니 아무 소리 말고 따라오라

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3년 씩 기다리고 있는 근무선배가 많았는데 입사한지 한 달

만에 승진코스인 하도로 공정을 옮긴 것이다.) 하도에서 약 3개월 만에 다시 중도로

중도에서 6개월 만에 상도로 진입했다. 아주 빠르게 최고의 기술공정에 진입한 것

이다. 상도에서는 DISK (미국의 RANSBERG사에서 만든 자동 원심분력을 이용한

도장기임)를 컨트롤하는 OPERAYTER까지 기능을 쌓았다. 그 당시 기능공은 회사

를 3회 이상 이동해야 임금을 제대로 받는다는 설이 있었다.

그래서 선배들이 소개한 대우통신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대우로 직장을 옮기고

나니 마음이 그리 편할 수가 토요일 오전근무 일요일 휴무 봉급은 전보다 2배. 삼성

에서는 휴일도 없어 연애 하려고 해도 근무에 시간 배치가 되질 않아 고생했는데...

이런 것이 만고강산이라고 하는 건가?

1984년 이모님의 소개로 지금의 집사람을 만나게 되어1985년 결혼를 하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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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집사람 역시 부천이 직장이라 연애하는데 편리한 점도 있었지요. 수원 천천동에

동생이 투기를 한다고 주공아파트를 당첨해놓은 것이 부동산 침체로 가격이 부동

이었다. 계약금 300만원을 넣고 중도금이 2차 연체가 되어 계약금을 날릴까 싶어 내

가 사기로 결정해 있는 돈 없는 돈 빌려가며 연체중도금을 치르고 1986년 12월에

입주를 해 수원으로 이사를 한 것이다. 수원에서 부천까지 전철로 출근을 하는데 시

간 활용을 위해 농업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버섯의 책을 보다 천마를 처음 알게 되었

고 항상 머릿속에서 궁금한 존재였다. 아침마다 전철을 타려고 아파트 정문을 나서면

삼성전자 통근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부러움이 넘쳤다.

1987년, 다시 삼성을 전에 근무할 적 선배들이 주선해서 다시 입사하게 되었다. 있

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근무했던 사람, 그것도 경력자로 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선배들이 만들어 입사를 하게 되었다). 다시 삼성에 우수한 이론 시험

성적으로 합격해 ROBOT 도장기를 컨트롤 해오면서 도장공정의 가장 큰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방향을 돌렸다. 가장 큰 문제가 색상 교환 장치 개발이었다. 여러 기능

공이 시도 했으나 실패했다는 것이다. 실패사례를 취합하여 나름 연구해 시험해 보

고 실패하고 실패를 반복해 가며 자나 깨나 출퇴근 통근버스에서도 메모지에 그리

고 쓰고 하여 개선 방안만 모색했던 것이다. 약6개월간 내 머리는 오직 연구에만 빠

진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아내가 고맙게 생각되는 것은 어떤 불평도 없이 나를 편안

하게 해주어 한곳에 집중할 수 있었기에 발명을 탄생시킨 것이다. 내가 해낸 것이지

만 너무나 큰 발명이었다. 도장인이라면 누구든 놀랄만한 발명이었다. 더욱 높이 평

가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적은 금액으로 제작이 가능하게 개발 한 것이다. 도장

업계의 혁명이라 해도 될 만큼 대단한 발명이었다.

나는 이것으로 끝을 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특허에 도전을 했다. 기술을 글로 논

리 정연하게 기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기술을 글로 쓰는데 1년이 걸렸

다 써 놓은 것을 다시 읽으면 내가 보아도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수없이 발생되어 다

시 고쳐 쓰고 읽고 하여 1년 만에 특허를 접수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심사

기간이 3~5년이 걸려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특허취득 통보가 온 것이다. 하지만 여

기서 끝을 내지 않았다. 더 욕심을 내기로 했다 해외 특허에 도전하기로 결정.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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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은 일본과 중국이었다. 2개국에 제출한 결과 중국 특허를 취득해낸 것이다. 이번

특허에 탄력을 받아 도장 공정의 모든 공정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개선에 들어갔다.

성과가 큰 개선이 나를 통해 개선이 되자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는 도중에 도장산업이 환경에 문제가 되다 보니 WET(촉촉한)에서 POWDER

(분말)로 바뀌는 추세로 LINE 이 새로 바뀌어졌다. 도장인으로서 WET 도장만 알고

POWDER를 모르면 어찌 도장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공사 중인 설

비를 틈틈이 살펴보았다. 신POWDER LINE이 생산에 진입했는데 생각대로 생산이

이루어지질 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 LINE을 안정화 시킬 사람이 나라고 판단한

과장이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내심 기다리던 것이 찾아온 것이다. 스카우

트 제의에 수락하고 부서를 이동해 설비를 파악하고 개선이 시작되었다. 일이 재미

가 있었다. 집보다 회사가 더 좋았다고 하면 믿겠는가. 이것은 경험하지 않은 분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이렇게 약5년이 지나고 POWDER 공장도 문을 닫고 말았다. 칼라강판시대가 열린

것이다. 전라도 광주 하남 공장으로 이동하게 되어 집사람과 별거가 시작되었다. 주

말부부란 꼬리표가 붙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로 내려간 지 1년 만에 그 유명했던 파

국IMF가 터졌다. 그것도 1순위로 대상에 걸린 것이다.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번을 피해도 2순위 3순위가 또 있는데... 마

음의 결정을 바꾼 것이다 나가기로...

나오고 나니 구직과 실업급여 등등 찾아 다니다 보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해고자

위로금지급에서 화가 난 것이다. 내생의 청춘을 모두 바쳤는데 위로금 1000만원을

주고 내쫓았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거대 삼성이다. 그 당시 쫓겨난 삼성인 모두가 그

런 대우를 받았다. 훗날 한국유리와 SK,토지공사 등은 위로금으로 1~2억을 주었다

는 것을 들었을 때 느꼈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승에서 요람까지 책임

진다고 회장이 말한 지 2~3년 만에 이렇게 박대를 했다. 모든 것을 다 바꾸라고 외

치며 마누라만 남기고 모두 바꾸라고 하더니... 잘 먹고 잘 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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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렇게 될 것을 예측을 하고 시골에 준비를 해둔 것이 맞아 떨어졌다. 밭에

배나무를 심어 놓았던 것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2000가을에 일반 벼 포장을 살

피다 발견한 변이종 찰흑미벼를 증식보급하며 유색 농산물에 빠지기도 했는데 고

생만 하고 소득은 없던 것을 3년을 이끌어 오다가 이제는 결정을 다시 했다. 고품질

벼를 생산하여 소비자에게 공급하기로 방향을 바꾸어 고품질 쌀만 공급한다. 배 농

사를 200그루에서 소득이 점점 늘어 1000만원까지 매출이 올랐는데, 2003년 4월에

청양에서 발생한 산불로 인해 진화작업 중 오른쪽어깨를 다쳐 배나무 과수원 소독

을 한번 거르는 바람에 적성이 침입해 나무가 피해를 입어 2년을 관리해도 회복이

되질 않아 결국 캐내고 말았다.

과거에 일을 하다 다친 어깨는 농업을 하면서 종종 빠지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일하

다 어깨가 빠지면 1톤 트럭을 왼손으로 기어를 변속하며 예산에 있는 정형외과

(20km)를 달려 맞추곤 했다. 2004년 4월에는 10일 동안 3회나 어깨가 빠지는 바람

에 마음의 결정을 했다. 수술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서울 중앙병원에 인맥을 통

해 수술일자를 예약했는데 8월 5일자로 수술 날짜가 잡혀 한 달을 기다려 수술을 8

시간에 걸쳐 마쳤답니다. 그동안 한우 축사는 이웃집후배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1

주일이 되니 퇴원을 시켜서 집에서 자활치료를 했는데 축사관리는 왼손으로 하기

시작했다. 삽자루 끝은 배에 대고 왼손은 삽자루 중간을 잡고 분변 제거 삽질을 아

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을 해야 하는 작업이 무리가 되어 결국 왼쪽 팔마저 이상이

오고 말았다. 몸은 부서지고 소득은 약하고 이때 농업기술세터의 교육에 눈이 트인

것이다.

2005년 기술원에서 영농사 양성반 2주간 교육을 최우수로 수료하고 1년간 교육 프로

그램 중 컴퓨터관련 전자상거래, 엑셀, 파워포인트, 포토샵, 무비메이커, 블로그, 홈페

이지관리, 마케팅 등의 교육을 모두 이수했다. 처음에 컴퓨터 교육을 신청할 당시의

제 자신은 직장에서 컴퓨터를 접해 봤기에 시골 분들 들보다 뒤지지 않을 것으로 생

각을 했는데 막상 교육에 임하니 완전한 판단 착오였던 것이다. 질문하는 내용을 보

니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분들이 상당 수였고 관리자 모드가 어떻고 하는데 도대체

알 수 없는 질문에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관리자 모드에 관한 질문에 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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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여도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강사도 개인적인 강의로 전락

되고...

그래서 홈페이지가 있어야 하겠다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2007년에 농촌진흥

청에서 지원한 농가 홈페이지도 지원받아 농산물 홍보 판매도 하고 있다. 충남농업

기술원 정보화 교육과정 중 정보화 과정을 3년간 모든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2007

년 E-biz 멘토링 과정이 신설되어 수준 높은 정보화 교육에 참여하게 되어 질 좋은

교육을 받고 나니 전자상거래에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1년 과정을 개근

으로 무사히 수료를 했다. 그런데 E-biz 과정이 2년 과정이 또 있다는 것이다. 더없

이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2008년 3월 어느 날 기술센터에 정보화 교육담당을 찾았는데 하시는 말씀이 충북

영동 농업기술센터에서 1년차 E-biz과정을 시작 하는데 E-biz과정을 수료한 교육

생을 불러서 먼저 배운 입장에서 소감을 발표해 달라는 제의가 있다며 저에게 가서

발표를 해보라고 말씀을 하시기에 한마디로 거절했는데 하시는 말씀이 자료 준비

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질의 응답 식으로 요청이 왔다며 가서 해주길 다시 권하시

기에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었기에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일이니 매우 갈등이 생

기기도 했는데 더욱 걱정은 지금까지 교육을 받으면서 자료 없이 와서 경험담 이라

든가 사례 발표하는 사람을 못 봤기에 망설인 것인데 질의응답 식이라니 대답을 해

놓고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실력은 없어서 파워포인트로 프리젠테이션은

못하고 한글로 줄줄이 작성해서 usb에 담아 수 없이 읽어 가며 연습을 하고 영동농

업기술센터의 교육이 저녁6시부터 인데 초행길이며 긴장이 되어 집에서 오전 10에

출발을 했다.

유성ic로 진입해서 경부고속도로를 100km로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놈의 엘란트

라가 한 번도 속을 썩인 경험이 없던 차인데 이상하게 감이 오는 것이다. 속도는

100km이니 가기는 빠르게 가고 있다. 각속페달을 밟아도 더 이상 속력이 붙질 않

는 것 같다. 시동이 꺼진 것이다. 이런 황당한 일 !!! 그것도 고속도로에서... 우측 깜

빡이를 키고 갓 차선으로 변경해서 탄력이 있어 가는 곳 까지 가다가 차를 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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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네트를 열고 의심 가는 부분을 흔들어보고 다시 시동을 시도 했는데 시동이 된

것이다. 그때의 기분이 말로 표현이 되겠습니까. 당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엄청

난 기분... 다시 달리기시작 그런데 속력이 나오질 않는 것이다. 30~40km밖에 달릴

수가 없는 것이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런 경우가 태산이구나 하고 실감했답니

다. 앞에 터널이 나타나는 것이다. 믿지도 않던 하느님께 마음속으로 빌고 빌었답니

다. 이 터널을 무사히 지나서 차가 서게 해달라고 마음 속으로 빌었답니다. 그런데

터널을 통과하는 게 아닌가! 이제 다시 하느님께 다시 빌었지요. 뭐라고? 고속도로

만 나가서 정지해달라고 말입니다. 아웃 체인지만 있으면 그냥 나가려고 마음을 먹

은 것입니다. 정비를 해도 일단 고속도로를 빠져나가야 할 것이란 생각에 빌었답니

다. 그런데 하느님이 신통하게도 내 소원을 잘도 들어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국도를

무사히 나왔지요. 또다시 하느님께 빌기 시작 뭐라고? 정비공장까지 가서 퍼지게

해달라고 빌었지요. 시내를 한참 달렸는데 정비공장이 보인다 기아 정비공장이다

내차는 현대인데도 무지무지 반갑다. 상황 설명을 하고 수리를 시작했는데 전혀 다

른 곳을 만지고 있다 이쪽 센서가 이상이 있으니 부품을 교체해달라고 했는데 그곳

이 아니라며 엉뚱한 곳을 만지작 거린다. 결국은 내가 말한 부품을 교체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수리를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수리하나 마나였던 것이다. 가속이

붙질 않는 것이 수리전과 동일한 것이다. 그냥 영동센터로 가고 있다. 멀기도 멀군

요. 물어 물어 영동 센터를 찾았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다시 시내로 돌아갔다. 슈퍼

에 가서 점심을 빵과 우유로 때우고 가게 주인과 손님과 대화로 시간을 죽이고 있

다 14시 경에 도착을 했으니 너무 일찍 당도한 것이다.

2~3시간을 시내에서 시간을 보내고 17시경에 센터에 도착해 담당자를 만나서 인사

를 나누고 교육할 장소를 살펴보고 센터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시간을 보내고 나니

드디어 발표시간이 당도 했다. 진흥청에서 오신 오상헌 박사님과 제가 발표하는 것

이었다. 발표순서가 제가 먼저하고 오박사가 나중에 하기로 되었는데 순서를 바꿔

오박사님이 먼저 다음에 제가 하면 어떻겠냐고 하셔서 좋다고 하고 시작이 되었는

데 오박사님은 2~30분으로 간단히 하시고 내 차례가 된 것이다. 단상에 올라가 큰

절로 인사를 드리고 시작을 했지요. 교육에 가장 기본적인 출석부터 참여와 목표의

식 등에 대해 발표를 했다. 내가 만든 나나리기법도 설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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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리기법이란?>

목적과 방법을 정확히 알아 실천하고 숙달되어 여유가 있으며 잊지 못하게 계속한

다. (나나리는 집 지을 장소와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반

복 숙달하여 여유가 있으며 노래로 반복을 계속한다.) 나나리 기법을 최초로 발표

한 사람이 바로 오곡농장 이능원이다.

이렇게 한 발표는 쉬는 시간도 없이 밤10:45분에서 끝을 냈답니다. 발표중간에 유

머러스한 멘트도 준비해 대답하는 분에게는 잡곡을 준비해 간 것을 상품으로 나누

어 주면서 진행을 했답니다. 끝나고 오는데 여포농장에서 포도 와인2병를 선물로

주셔서 한 병은 센터에 한 병은 내가 꼴깍 했답니다.

이제 집에 돌아갈 걱정이 태산 국도로 갈까 고속도로로 갈까? 국도로 가도 길도 모

르고 정비공장도 밤12시라 잠을 자니 소용이 없는 것. 가자! 고속도로로 또 하느님

께 빌기 시작. 차가 퍼져도 고속도로를 지나 국도에서 퍼지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고

속도로 통과 다시 바꿔 빌기 시작. 국도를 통과하고 나니 차동고개를 넘게 해달라고

빌며 오르기 시작. 저단 기어를 사용해도 20km 이상 나오질 않는다 .간신히 차동고

개를 넘었다. 요구사항이 또 변한 것이다 집에까지 가게 해달라고 집에 가서 고장이

나도 좋다고 빌며 빌며 온 것이 집에까지 도착 휴~~~~~~우. 그래도 마음은 편하다 .

발표를 못했어도 끝냈고 고장난 차가 집에 까지 도착 시켰고 발 뻗고 잘 수 있다. 현

재시각 다음날02시 잠자리에 누웠다.

* 앞에서부터 이어진 한 장 여 분량의 차 고장난 에피소드는 생략하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습니다.

이렇게 E-biz 2년차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2년차에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책임과 의무가 있어 교육이 있는 날이면 집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교육이 있

는 날은 16시부터 교육이면 오전일 하고 점심을 먹고 14시에 소 저녁을 주고 30km

거리를 달리기 시작하면 약30분소요하면 센터에 도착을 한다. 교육담당이신 김기

예 지도사님과 상의 할 사항이 있는지 교육시간 전 30분~1시간을 일찍 출근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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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차 1년을 또 개근으로 수료했다. 2년차 수료식을 센터에서 교육생들의 음식 스

폰을 받아 성대한 잔치를 벌이고, 농가 마다 생산품을 스폰 받아 고생하신 분들게

선물을 하며 풍요롭게 2년 과정 2008년을 마무리 했답니다. 2008년 12월부터는 사

이버 연구회도 구성하고 활동을 하고 있답니다. www.goodfarm.co.kr 이란 도메인

으로 사이버연구회 홍보 사이트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래도 1년 과정이 또 남았다.

3년차. 2009년도는 농장 컨설팅위주로 교육이 진행되어 현장 중심 교육을 받고 마

지막 3년 과정이니 졸업여행을 제주도로 가기로 결정이 되어 2박3일 제주도도 벤

치마킹 교육여행를 다녀왔다. 소비자와의 만남 교육생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사회

를 배우며 나눔과 봉사도 알게 되었다. 품질 좋은 쌀 공급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발

전하는 그날을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 또 허준의 드라마 바람을 타고 온 매실나

무 열풍에 매실나무 묘목을 생산 해 묘목 판매도 하다 보니 농장 주변엔 각종 매실

나무가 자라고 있다. 꽃의 색상과 꽃잎 수, 꽃의 크기, 나무의 자람 특성 및 가지가

늘어지는 수양매화 등 15종의 매화품종을 보유하고 있으며 100~120년의 수령을 자

랑하는 자계 겹 매화나무도 홍매화와 백매화가 서로 마주보고 있답니다. 꽃잎이 30

장이다. 농장주변에 1000여 그루가 봄에는 매화 꽃이 한달 간 피고 지고 매화꽃향

이 그윽하다.

그리고 천마! 말만 듣던 천마도 직접 재배해보기로 결정하고 시험 재배를 시작했다.

25년 전부터 궁금했던 천마를 드디어 직접 만나게 된 것이지요. 천마를 직접 본 주

위 분들이 거의 없어 자문도 구할 수 없이 25년을 갈망하고 지나오다가 결정을 해

본 것이다. 재배를 시작하니 구매보다는 궁금해서 보고 싶어 하는 분이 많았다. 꽃

을 좋아하는 지라 주변에 각종 꽃들이 많이 식재되어 있어 넓은 농지에 철 따라 피

는 꽃이 아름다움을 자랑하지요.

이렇게 생을 이어가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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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 닉 : ■ 이메일 : ■ 블로그 : ■ 소속 / 하는 일 ■ 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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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land Business2.0

누구에게나 과거이야기 하라면 소설 몇 권을 쓸 정도로 이야깃거리가 많을 것이다.

나도 또한 소설 몇 권을 쓸 정도는 되는듯하다. 우리의 가족은 부모님과 누나 다섯

명에 남동생 한 명 더해 7남매의 장남이다. 나의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나 소

설 같은 이야기가 많다.

4~5살 경(77년도) 한 장면이 기억이 난다, 누나들 사이에 한 누나가 부축을 밭으며

집에 오는 장면 이후 부축 받던 누나는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5년 후에 안 일이지

만 그 누나는 그 당시 병으로 죽은걸 알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아버지는 젖소 1

마리을 사오셨다. 어느 토요일 건넛방에 문을 여는 순간 화재가 나고 있었다. 그 화

재에 오른손 손등이 불에 화상을 입었다. 그 흉터는 지금도 있다. 불이야 하고 소운

동장에 소똥을 치우는 아버지에게 알렸고 아버지는 불을 끄려고 건넛방 문은 열었

지만 불은 흔적도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손에는 화재에 그을린 자국도 있었

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보건소에도 갔었다. 지금도 화제의 원인이 궁금하지만 결

론은 도깨비불 이라고 믿고 싶다.

4학년 때, 그러니까 10월26일 박정희대통령이 서거하시던 날 아버지께서 경운기사

고로 손가락과 팔 등등 3군데 골절상과 살이 찢어지는 큰 사고를 당하셔 천안에 입

원을 하셨고, 목장을 하는 우리 가정의 모든 살림을 어머니께서 맡으셨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니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소 사료 운반이 문제다 경운기 운

전할 아버지는 병원에 계시고, 결국은 4학년인 내가 경운기 시동을 걸고 운전까지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지만 했다. 닥치니까 되더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농촌일

도우미가 되었고 일과 학교생활을 병행하게 되었다.

5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고(할머니는 봉사활동을 많이 하셔서 군수상, 도지사상,

http://blog.naver.com/ksseo63/120066609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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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소리 - 이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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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상, 대통령상까지 받으신 분이다. 뒤에 거론하겠다) 그 해 가을 추수철 볏

단을 탈곡하는 날 학교에 결석하면서까지 아버지를 도왔다. 그것이 나의 일생일대

의 직업이 되리라고는 그 당시엔 미처 몰랐다. 6학년말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신다

고 전답을 몽땅 팔아 쌀 방앗간을 사셨다.

중3때 난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을 갈려고 굿은 결심을 했다 그것도 잠시, 4월21일

토요일 오후2시 텔레비전 화면이 흐리게 나와 밖에 있는 안테나 파이프를 세우는

중 파이프가 고압선에 닿았다. 그 순간 고압에 감전되어 잠시 저승에 갔다. 감전되

는 도중 귓가에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내 아들 죽는다. 내 아들 살려야 한다’ 하

고 울부짖는 소리가. 내 몸은 고압에 피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 죽어가고 있다, 순간

적으로 한편의 영화가 지나갔다. 정신이 드는 순간 내 몸은 엉망이었다. 발가락 4개

는 완전히 타 버렸고, 양쪽 손가락은 주먹이 쥐어진 채 펴지지 않았고, 손바닥은 까

맣게 타 있었고 발바닥과 복숭아뼈 부근도 완전히 타버렸다. 생명이 붙어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2개월간의 병원생활. 발가락 제거수술, 3개월째 되어서 겨우 갓난

아기 걸음마 연습하듯 한 걸음씩 움직였고. 학교 유급되기 싫어 간신히 학교에 아버

지께 업혀가며 등하교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정미소를 운영하시던 아버지는 직원을 구할 수 없어 더 이상 정

미소 운영을 못하셨다. 아버진 기계치였다. 심지어 오토바이도 못 타셨다. 그러나 나

는 기계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냥 알았다. 초등 4학년 때 경운기운전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운전하듯이 그냥 알았다. 그때부터 학교 하교하면 정미소

에서 도정을 했고 토요일 일요일은 머슴처럼 일을 했다. 고3때 아버지께서 1톤 화물

트럭을 사 주셨다, 면허도 없는데 학교에 타고 다니라는 것이다. 아버지 입장에선

하교시간에 빨리 와서 정미소에서 도정하라는 의미가 컸다.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

고 졸업했다. 그리고 나의 학교 생활은 그것이 마지막 이었다

22살 또 한 번 일어날 뻔한 사고. 이것은 피했다. 천정에서 10kg넘는 쇳덩어리가 내

머리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누군가 나를 불렀다. 한 발짝 떼는 순간 쇳덩어리가 그

자리에 떨어진 것이다. 나는 온몸이 얼음덩어리가 되었다, 순간적인 생각에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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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호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나를 돕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24살 가을 수확이 끝날 즈음, 만취상태에서 음주로 5톤 화물 트럭과 내 승용차와 추

돌사고, 5톤 화물트럭은 폐차했고 난 가벼운 상처만 입었지만 음주운전과 타인의

상해를 입혀 2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사고 또한 죽을 고비를 넘

긴 사고였다.

25살 이젠 내 인생의 전환점이 왔다, 그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내

인생의 시작이었다. 기술센터 4-H회원이 된 것이다. 다음해에 고덕면 4-H회장이

되었다. 4-H회장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서 기술센터 담당인 박하승 지도사를 만

나 4-H회장이 무슨 일을 해야 하냐고 묻자 껄껄껄 웃었다. 왜 웃냐고 물었더니. 4-

H회장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러 오는 사람이 내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캐

비냇을 뒤지더니 4-H책자를 주면서 읽어보라고 해서 읽어 보았다. 그래서 책에서

시키는 대로 회원들과 했더니 그해 말 4-H정진대회에서 충남 4-H 150개 면 중에

서 고덕면이 천안 입장면에 이어 2등을 했다 상금도 150만원을 탔다. 그 이후 우리

고덕면은 예산군 모든 시상을 독차지했고 예산군에서 처음으로 호주와 뉴질랜드

견학까지 다녀왔다. 그때 알았다 책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무엇을 바라보고 한일은 아니

었다.

27살 난 제2의 인생을 살았다. 전라도 정읍 아가씨와 결혼했다. 29살해에 아버지께

서 정미소 운영권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열심히 했다. 사업이라는 게 열심히 해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는 사기꾼들에겐 아주 좋은 먹잇감 이었다. 지금

이나 예전이나 쌀은 외상으로 팔았다 전국적이 현상이었다. 200가마를 외상으로 준

것이 사기에 걸린 것이다. 총 2600만원에 달하는 양이었다. 어린 마음에 죽음까지

생각했다. 그 외상값을 받기 위해 쓴 비용도 많았다. 외상값을 받아준다는 분이 나

타났는데, 어머니 사촌 이모부였다. 그분도 쌀장사를 하시는 분이었는데 외상값을

받아 줄 테니 거래를 하자고 했고 선뜻 쌀 50가마니를 보냈다. 또 사기 당했다, 어쩌

면 세상에 이런 일이... 더 이상 쓰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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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해서 29살에 1남 1녀로 출산을 마무리 했다. 문제가 발생했다. 막내딸이 아

토피염이 심했다. 그때만 해도 아토피는 생소했고 처음 들어보는 병명 이었다. 이유

를 찾아야만 했다 결국은 원인을 찾아냈다. 아버지께서 정미소와 사과 과수원을 병

행하셨고, 나는 10여년이상 병충해방제 소독을 내가 직접 했다. 나는 농약에 약간

중독이 되어있었고 그것이 딸에게 전이가 된 것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사오신 농약

이 어떤 성분인가 조사해 보았는데 사용금지가 된 농약이 대부분이었다. 아버지가

외출한 틈을 이용해 사과나무를 전부 베어버렸다.

내 딸의 아토피는 내 책임이었고 내가 고쳐야 한다는 생각에 연구한 결과, 우리나라

농사는 화학비료와 농약 제초제에 의지하며 농사를 짓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었

다. 그때부터 친환경농법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4~5년간의 친환경농법을 연구하고

만난 분이 공주대학교 안승원 교수님을 만나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했다. 시작과 동

시에 나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어떤 이모씨는 나를 10년 동안 지켜봤다며 돕

겠다고 하셨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분이 ‘내석이는 술도 안 마시고 다방에 안 다니

고 노름도 안하고 색시집에도 안 다녀서 내석이를 도울 결심을 하셨다’라고 말씀하

셨다는 걸 후에 들었다. (사실 술은 조금 마신다.) 기술센터에서도 도움을 많이 주셨

다. 임모 소장님. 박모 계장님, 한모 과장님, 박모 지도사님, 군청의 오모 과장님, 이모

계장님 등 많은 분들이 나를 도와 함께 친환경농법을 성공시키는데 일조를 한 분들

이다

그런데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농사만 지으면 뭘 합니까. 판로는 전부 내 책

임 이었습니다. 동네 어른들과 회원결성을 하고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같이 농사

를 지었는데 판매처가 없고 회원농가들은 벼 수매값을 내 놓으라고 아우성이었고,

생산만 하면 판매는 자동으로 될 줄 알았던 잘못된 생각에 회원들은 하나씩 떨어져

나갔고, 친환경 벼는 비싼 값에 수매해서 팔리진 않아 3년 새 7천만원 적자를 냈고,

이틈을 노려 친환경 쌀을 사준다는 사기꾼에 걸려 1000만원 사기 당했다. 설상가상

으로 지게차 전복사고로 골반이 벌어지고 대퇴골 쇄골 늑골이 부러져 6개월간 누

워서 생활하는 과정에서 친환경 사업은 좌초위기에 있었으며 회원들 중 단 몇 분

만이 남아 나를 지키고 있었다. 이게 끝인가 싶었다. 이때에 어느 분이 명언을 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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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다. ‘사람은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라고. 이 말에 용기를 얻어 다시 시작

하기로 결심했다. 다시 시작하는 순간 우리집 재무재표를 보니까 빛만 억이 넘었다.

용기를 얻자마자 포기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 기술센터 정보화 담당 김기예 지도사를 만났다. 다짜고짜 홈페이

지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김기예선생님은 그냥 웃으시며 정보화교육을 받으라고

권장을 하셨다. 나는 체념하듯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 어차피 포기한 상태. 더

이상 포기할 게 남아있지도 않았다. 정보화 기초부터 마케팅, 각종 워드, 블로그, 사

진 편집 등 정보화교육 1년 과정을 마쳤다. 지난 세월이 너무너무 후회가 되었다. 마

케팅도 모르면서 사업을 했고 시장원리도 모르면서 친환경사업을 한 내가 한심스

러워 또 번 부끄러움에 스스로 고개를 떨구었다. 정보화 교육 3년째 이잰 친환경농

사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왔고 친환경농산물도 전량 판매할 정도에 이르렀다. 모

든 것이 시행착오를 혹독히 치른 탓도 있겠지만 기술센터 지도 덕분과 정보화교육

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은 틀림이 없다.

그동안 나를 지켜주신 분이 할머니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등진지 30년이 넘었지만

생전에 덕을 베푸셔 네 번씩이나 죽을 목숨을 살려주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어

쩌면 할머니를 닮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늦게 밝히지만 그동안 20년 넘게 봉사활동

을 했고 불우이웃돕기 모금행사에 17년째 하고 있다. 이유는 없다. 극적으로 살게

된 내 목숨 값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해야만 내 마음이 편해서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Q, 친환경 농법과 정보화 교육이 키워드라고 생각됩니다. 잘 풀어주시면 좋은 이야기

가 될 듯. 봉사활동은 어떤 것을 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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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 닉 : ■ 이메일 : ■ 블로그 : ■ 소속 / 하는 일 ■ 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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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land Business2.0

버섯아낙이 농업이라는 직업을 갖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세상에

응애~ 하고 태어났을 때도, 꿈 많던 학창시절에도,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아니 남편

의 파견근무를 서울근교 마석이라는 시골에서 할 때조차도. 남편은 엉뚱한 말을 자

주하곤 했습니다. 본인은 나중에 산에 가서 살 거라고... 그냥 하는 말이겠거니 하고

흘려버리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었답니다. 그리곤 덕산에 내려가자고

합니다. 한마디 의논도 없이. 덕산은 남편이 직장생활을 할 때 자주 출장 가던 곳입

니다. 본인이 장남이라 강원도는 너무 멀고, 덕산은 서해안 고속도로가 생길 것이니

가까우면서도 강원도 같다고 하였습니다. 웬일일까요? 직장을 그만뒀다는 말에는

화가 났지만, 시골로 가자는 데에 대해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항상 듣던

남편의 산생활의 바람 때문이었을까요? 아무래도 제가 무의식 중에 세뇌교육을 당

한 듯 했습니다.

그리하여 덕산 가야산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큰아이 6살, 작은아이 3살이었

습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시골생활이 시작되었기에 당장 생계가 문제였습니다. 거

처는 후한 시골 인심덕분에 관리사로 지어놓은 창고를 개조하여 살만은 했는데 먹

고 살아야 하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추천으로 버섯 농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작물은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이나 되어야 돈을 만질 수 있는데,

버섯은 3개월이면 된다는 가까운 이웃사장님의 말씀에, 또한 가야산 골짜기 작은

마을에서 무려 15가구 정도가 느타리버섯농가였었으니까요. 사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 남편은 저도 모르게 서울에 있으면서 무언가의 교육을 받았다는 수료증이 있

더군요. 아! 저만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조금은 괘씸하기도 했습니다.

http://blog.daum.net/bbnworld/8441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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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버섯촌 버섯아낙은 버섯을 재배합니다 - 이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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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관리해 준다는 조건하에 땅을 임대하여 버섯재배사를 짓고, 이웃사장님이 만

들어 파시는 다다미 같은 볏짚뭉치를 사용해 버섯을 재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것은 볏짚을 차곡차곡 쌓아 7 ~ 8 Cm 내외의 두께로 압축하여 바느질한 것을

18~20Cm정도씩 잘라놓은 것이지요. 생긴 모양이 꼭 정말 제가 어렸을 적, 집 방바

닥에 깔려있던 다다미의 축소판이었습니다. 그 당시 버섯재배농가들은 본인이 농

사지은 볏짚을 묶고 잘라서 사용했는데, 저희는 벼농사 짓는 것은 상상도 못했기에

기성품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요. 볏짚에 물을 충분히 먹여 재배사 선반에 올려놓

고(입상) 살균기라는 기계로 불을 때 증기로 균을 죽이고(살균) 일정온도를 유지해

가며 며칠 동안 볏짚을 연화시키고(발효) 버섯종균을 뿌려(종균접종) 종균이 볏짚

전체에 다 퍼지게 해야 했습니다.(배양)

그 중 배양하는 것이 가장 관건이었습니다. 배양이 정말 잘 안 되더라구요. 허나, 배

양만 잘 되면 버섯은 엄청 예쁘고 양도 많이 나왔습니다. 온도를 떨어뜨려 충격을

주면(하온) 버섯이라는 놈이 머리를 빠꼼히 내밀지요.(발이) 볏짚에 물 먹이기란 여

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볏짚을 물 속에 담가 놓고 밟고, 또 밟고... 늦가을에 입

상을 할라치면 발이 어찌나 시리던지... 또한 물먹은 볏짚은 엄청나게도 무거웠지요.

그 후로 폐면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볏짚으로 할 때의 노동력의 절반 정도랄까

요? 훨씬 쉬웠습니다. 트랙터란 농기구를 사용하였습니다. 폐면이란, 목화에서 솜과

씨를 뺀 나머지를 압축하여 만든 솜뭉치이며 대부분 수입을 합니다. 물론 솜뭉치 이

기에 덩치가 말이 아니죠. 한 뭉치가 약 160 ~ 180 Kg 정도! 한 재배사에 이것들을

넣으려면 약 10뭉치 정도가 필요합니다. 트랙터 로터리발로 지나다니며 솜을 털고

다지며 물을 쏘아 물을 먹이고(이때에는 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써야 합니다.) 솜도

그냥은 물이 축여지지 않아 트랙터로 밟아가며 물을 쏘면서 뒤집어줘야 합니다. 그

리고 물먹은 솜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두꺼운 비닐을 덮어 발효를 시킵니다.

며칠을 두고 몇 차례 씩 뒤집어 줍니다.(1차 발효) 그래야 산소공급이 되어 발효가

잘 됩니다.(호기성발효) 잘못하면 썩기 때문이지요.(혐기성발효) 발효가 잘 되면 선

반마다 일정한 두께로 올려 살균을 합니다. 볏짚재배와 순서가 조금 다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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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짚재배는 입상 ⇒ 살균 ⇒ 발효

폐면재배는 1차발효 ⇒ 입상 ⇒ 살균 ⇒ 2차발효

2차 발효시에는 솜 두께로 인해 속의 것을 바깥으로 빼주어 산소를 공급해 주는 작

업을 합니다.('뒤집기'라 합니다.) 그래야 골고루 발효가 됩니다. 그때의 집집마다의

광경은 볼 만했습니다. 이 일을 할 때는 겨울에도 얇은 옷을 입고 작업합니다. 남성

분들은 아예 웃옷을 벗기도 하지요. 여름에는 더 가관이지요. 재배사 입구에 큰 물

통이 놓여져 있고, 일하다 중간중간 뛰어나와 물통 속으로 풍덩~ 재배사내의 온도

가 찜질방 이상의 수준이거든요. 그 속에서 일하다 보면 숨도 헉~헉~ 가끔씩은 어

찔어찔하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뒤집기를 하다 뛰어나와 잠깐 숨을 돌리는 것이지

요. 온도를 내려서 뒤집기를 하면 그만큼 연료가 더 들어가기 때문에 농가들은 본인

들의 몸을 더 혹사시키는 것이지요. 또다시 온도를 올려 발효를 계속 시켜야 하기

때문에. 발효가 잘 됐다 싶으면(이때 보면 폐면 전체가 하얗게 됩니다.) 종균을 접종

하여 배양하고 하온시켜 버섯이 발생케 하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버섯생산량이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종균도 아주 잘 배양

된 듯 하얀데, 버섯이 발생하지 않을 때도 있고요, 버섯을 수확해도 양도 이전 같지

않고 또 한가지 이런 재배(균상재배)는 수확하는 시기가 연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도매시장에 버섯이 없으면 가격이 좀 올라가고, 버섯이 좀 많다 싶으면 가격은 급락

하고, 농가마다 입상시기가 거의 비슷하기에 홍수출하 되기도 쉬웠고, 가격도 불안

정하였습니다.

봉지재배를 시작하였습니다. 봉지재배는 재배사외 원료를 배합하는 기계가 있어야

하고(배합기), 원료를 봉지에 담는 기계(입봉기), 살균을 할 수 있는 공간(살균실),

접종을 할 수 있는 기계(크린벤치)와 공간(접종실), 이것들을 배양할 수 있는 공간

(배양실), 더욱이 이런 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저희에게는 그

것들을 준비할 자금이 없었고, 다행히 산 너머에 봉지를 분양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재배시설이 없고, 우리들에게는 생산시설이 없었기에 몇 농가가 그 농가에

서 분양을 받기로 했습니다. 산 너머 농가에서는 봉지로 배양까지 하고, 우리 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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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재배를 하여 기본으로 들어가는 원료비, 전기세 등을 제외하고 순이익금을 나

누기로 하고.

한가지, 이 배지가 <무살균>이라 이때까지 살균을 하여 재배해 왔던 저희로서는 사

전답사가 필요했습니다. 이 농가에서 추천을 받아 이곳에서 분양 받아 재배했던 농

가를 찾았습니다. 잘~ 땄다고들 합니다. 이 배지는 무살균이지만, 살균대신 다르게

처리하는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만의 노하우라 하였습니다. 처음엔 일이 잘

풀리는 듯 하였습니다. 점차 그곳의 생산이 어려워졌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이었지

요. 어차피 시작한 것이라 그만둘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 쪽에서 인력을 투자했습니

다. 아직 이쪽은 시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죠. 버섯을 배양하려면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3농가가 재배하려면 그만큼 봉지수도 많아야 했습니다. 정말 밤늦도록 일을 했습니

다.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 물으면, " 그럼,

접종하다 말고 오리?"합니다. 접종을 할 때는 중간에 그만 둘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

다. 입봉날과 접종날이 겹치는 날이지요. 3농가의 여자들도 그쪽에 가서 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잠만 안 잤지 살림을 차린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곳에는 여자들

이 없는 상태였고, 부엌살림 엉망이고, 없는 것 태반이고, 아쉬운 놈이 일을 한다고

전기밥솥이며, 부엌에서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다 보니 꼭 이사한 느낌도 들었습니

다. 다만 창고라는 점이 그랬지만. 예전에 창고에서 살았던 적이 있던 저로서는 별

문제 없었지만 다른 2농가 아낙네들이 걱정되었습니다. 다행히 그분들도 적응을 잘

해 주는 듯하였습니다. 그쪽농가 3사람과 우리쪽 3농가 6사람 총9사람의 공동생활

이 시작되었습니다. 함께 지내다 보니 창고 옆 그네들이 숙소로 있던 컨테이너 방까

지 청소해 주는 입장이 되어버렸지요. 일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 남자분들이 일

할 수 있게끔 뒷일 해주고, 입봉하는 데 도와주고. 배양실의 파렛트에 쌓여진 봉지

들이 가득가득.. 보기만 해도 좋았습니다.

한데, 이게 웬일일까요? 잘 배양되던 배지들에게서 곰팡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버섯도 곰팡이와 같은 미생물이지만, 곰팡이는 최대의 적이거든요. 아무래도 살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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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이 필요하다 하였습니다. 손을 뗄 수도 없었습니다. 투자에 또한 그것만 있으면

될 것 같았기에. 그래서 다시 살균실을 마련하였습니다. 뚝딱,뚝딱.. 살균을 시작하

며 거기에 맞는 바구니도 다시 필요하구요, 다행히 저희 집에 있는 바구니가 활용이

가능하여 산 너머로 이사하게 되었지요. 아~~ 드디어 종균도 잘 배양되기 시작하였

습니다.

배양된 봉지들을 뚜껑을 따고 봉지입구 비틀고 바트라는 상자에 담아 트럭에 싣고,

산을 넘어와 다시 각 농가마다 트럭에서 내려 재배사에 입상하고 버섯 나오게끔 봉

지를 칼로 찢어주고 냉동기 틀고 물주며 하온시키고 버섯을 재배하기 시작하였습

니다. 일손이 많이 필요한 것이라 버섯이 생산되면서 산 너머의 일은 그분들에게 맡

기고 3농가의 6사람이 각 농가를 다니며 같이 준비하고 같이 버섯을 따고. 힘은 들

었지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한 가지 문제는 산을 넘어 다녀야 하였기에 겨울이 문

제였습니다. 산 밑 동네라 눈이라도 조금 왔다 하면 달리 방법을 쓸 수 없었습니다.

항상 위태위태.. 불안불안.. 남자분들은 다시 의견을 내었습니다. 그쪽은 서산이고

하니 예산 쪽에서 조금의 지원을 받아 우리 쪽으로 생산시설을 옮기자고. 그럼, 건

물만 지으면 된다고. 그래서 그러자고 했습니다.

일이 잘 되려는지 마침 종균분양지원사업이 있어 그것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일을

진행하려는데 산 너머에서 갑자기 못 하겠다 합니다. 어쩝니까? 결정은 났는데 일

을 진행시켜야 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까지 모두 준비해야 했습니다. 배합

기, 입봉기, 접종기, 병뚜껑, 바트, 크린벤치, 운반구 등을. 갈수록 태산이라 한 농가가

결국 포기하겠다 합니다. 일은 시작되었고, 2농가가 정말 힘들여 일을 했습니다. 시

설도 완성되었고 내부의 것들도 마련되었습니다. 인건비라도 줄이기 위해 여자들

도 험한 일을 마다 않고 도왔습니다. 남편은 건물이 저희 집 쪽에 지어진 거라 본인

이 운영하기가 좀 그랬나 봅니다. 같이하시는 농가 분에게 모든 운영권을 다 맡겼습

니다. 경영타입이 달라 2사람이 지시하다 보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어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분의 지시에 의해 2농가와 다른 분들까지 고용해 가며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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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째 다듬은 버섯은 가격이 낮게 형성되고, 낱개로 다듬은 버섯은 일이 너무 더디고,

고용인들은 버섯을 아예 다듬지도 못하고, 다듬는다 해도 더디고 품질도 일정치 않

고. 거기에다 투자비가 엄청난 자동시설로 된 큰 버섯공장이(대형자동화시설, 정말

공장이라고 해야 합니다.) 곳곳에 생기는 바람에 버섯가격은 더 형편없어졌습니다.

마트마다 뛰어 다녔습니다. 조금이라도 가격을 더 받기 위해. 그런데 여기서는 작업

이 더 까다로워야 했습니다. 송이째 작업이 아니라 낱개 작업에 소포장까지! 가격

역시 생산자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트 쪽에서 정하고, 배달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도매시장보다는 높은 가격이라 열심히 했습니다. 일만 열심히 했지 두 집이

살기에는 힘에 겨웠습니다.

남편은 다시 한 번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러다가는 두 집 모두 밥 먹고 살지 못하겠

다고. 열심히 뛰면 한집은 먹고 살 수 있다고. 원자재 값도 오르고 가격은 안 좋고.

결국 남편이 손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버섯을 접는다는 건 아니랍니다. 잠시 쉬며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지금은 한 집이라도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

니다. 왜 우리가 접어야 하냐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그쪽보다는 좀 더 나으니 그

래야 한다 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남편 말에 따라야 했습니다. 그래도

일터가 저희 집이라 저까지 손을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일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 일까요? 배양 중 불량률이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재배사에 들어

가는 봉지수보다 폐기하는 봉지수가 몇 곱절 씩이나 더 많았습니다.

게다가 하루하루 한숨만 쉬고 있을 즈음. 건강검진 중 제 몸에 이상소견이 생겼습니

다. 확실치 않으니 완전히 제거하는 게 좋겠다 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일은 그만두

게 되었습니다. 같이하던 농가는 1년 이상을 꾸려오다 힘에 겨웠는지 지금은 본인

집에서만 옛날같이 균상재배를 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농장주위를 정리하여 작은 농원을 꾸미자 하였습니다. 지금은 버섯생산만 해

서는 안 되고, 전부터 생각해왔던 것을 실행해 보자 하였습니다. 볼거리, 먹거리, 쉴 수

있는 공간도 만들고, 체험 손님들도 맞이하자 하였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좋은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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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갖자고 하였습니다. 제 몸도 성치 않았고, 경제적 문제도 있고

하여 생각해 보자 하였습니다.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기도 그렇고 하여, 컴퓨터 공

부나 하자 하는 생각으로 무료교육장소를 찾았습니다.

기술센터, 군청등의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벌써 신청기간이 지났더군요. 예산기술센

터의 버섯담당 지도사님께 부탁하였습니다. 컴퓨터 교육 있으면 연락 달라고. 알았

다 하시는 말씀! 한동안 연락이 없어 잊어버리셨나보다 했는데 드디어 연락이 왔습

니다. 얼마나 기뻤던지요.

그런데 이 교육은 초보교육이 아니었습니다. 능력자들의 교육이며, 벌써 컴퓨터교

육을 1년 넘게 받으신 분들의 교육이었으며, 또한 사업에 보탬이 되는 여러 가지를

알려주는 교육이었습니다. 정말 저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

거래를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센터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놀고 먹던 저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처음 취지는 그냥 쉬엄쉬엄 공부하자는 것뿐이었는데,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습

니다. 열심히 다녔습니다. 혼자서도 공부해야 했습니다. 처음이라 진도 맞추기가 어

려웠습니다. 내성적 성격이라 모르는 것도 못 물어보고 집에 와서 찾아보고 그냥 넘

긴 것도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홈페이지 제작 지원사업이 있다는 정보를 지도자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

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도사님의 도움을 받아 사업계획서를 내보기로 하였습니

다.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인터넷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은 절실히 느끼지

만, 생산만을 고집하여 온 저희에게는 문서작성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포기한다고

지도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지도사님은 그렇다고 꼭 되는 게 아니고 심사를 해서

선정되는 것이니, 예비여행 삼아 해보자 하여 준비된 문서에 글을 채워 넣었습니다.

다행이랄까? 아닐까? 채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채택이 되었다 하더라도 홈페이지

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일을 추진하자니 너무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홈페

이지 사업에 채택이 되면 업계에서 나와서 사진도 찍어주고 글도 대신 써주고 모든

걸 대행해주는 것이라 알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자료를 다 제공해줘야 한답니다.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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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사이트맵도 구성하라고 하니, 현재 진행 중인 사업이라면 좀 더 쉬울 텐데.

인터넷 쪽으로는 전혀 준비가 없었던 저희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난감했습

니다.

그러나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간단하게나마 홈페이지도 만들고, 현재 작게나

마 꾸며나가려고 합니다.(http://www.himush.co.kr) 교육 중에 블로그 만드는 방법

도 배웠습니다. 강사님이 하라는 대로 따라 했더니 저의 방이 하나 생기더군요. 아

직도 블로그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간단하게나마 제 얘기를 쓰고 있습니다.

<도림버섯촌의 사업계획>

도림버섯촌의 장래계획은 전체적으로 ‘누가 와서든 시골에 계시는 외할머니 댁이

라는 정감을 안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도시의 찌든 때를 잠시나마 잊어버리는 시간

을 드리는 것입니다. 10여 년 동안 돌보지 않았던 먹거리터를 이용해 안전한 먹거

리를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집 뒤 가야산에 분포하고 있는 나무와 야생화 등을

함께 감상하는 것입니다. 작은농원 꾸미기는 한 번에 할 수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3

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자 합니다.

1년차 계획 : 농장환경정리 및 친환경적인 주변을 정리

버섯수확 체험장 운영

농산물 시식, 판매장 설치(도림쉼터)

테마공원 기반 조성

야생화 꽃밭조성

민박촌 진입로 만들기

주말농장 분양

토종닭 키우기

2년차 계획 : 버섯테마공원 조성(정자,산책로,버섯조형물,당나귀길)

매실,고로쇠,해송등 과원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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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꽃밭 조성

민박촌 조성

도림쉼터 조성

주말농장 분양

3년차 계획 : 공원 조형물 설치

야생화 꽃밭 조성

민박촌 조성

저희의 계획이 잘 이루어지길 바라며,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열심히 하려 합니다.

앞서의 계획에 제일 먼저 시작해야 할 것은 비어있는 공장시설을 다시 정비하여 버

섯을 생산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몸도 좋아졌고 하니, 다시 하자 하였습니다. 교육과

마을 일과 농장일과 밭일과 모든 것이 겹쳐 있는 바람에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

지는 것이 없고 힘만 들었습니다. 1년 이상을 비어 둔 공장시설은 거미줄과 먼지와

정말 귀곡산장이라고 해야 할까요.. 청소를 해도해도 끝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남편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라 저의 일을 모두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일을 제치고 교

육도, 밭일도, 다른 바깥일도.. 농장 재가동에만 힘을 기울였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요. 하나하나 조금씩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남

편은 기계 쪽을 점검해 가며 일 준비를 마쳤습니다. 드디어 버섯농사를 다시 시작하

게 되었습니다. 원료공장에 전화를 해서 물건을 들여놓던 날, 가슴이 왜 그리 뛰던

지. 큰 트럭에 올라가 무거운 원료 포대를 아저씨께 밀어주고, 비 맞아가며 또 다른

원료 들여놓으면서도 기뻤습니다. 8~9명이 하던 일을 달랑 둘이서 하자니 하루가

정말 바빴습니다. 입봉만 해도 3명이 하면 2시간이면 끝날 분량을 둘이서 5~6시간

해야 했고 그렇다고 일꾼을 따로 구할 수도 없고…기계 앞이라 아무나 들여서도 안

되고.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다른 일은 못해도 주업을 다시 한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버섯도 예쁘게 나와주었습니다. 마이스터대학 교육생들도 와서 실습까

지 할 정도로 활기가 넘쳐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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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있으면 추석! 지금껏 쉬었으니 돌아오는 추석에는 맘껏 생산해 보자고 풀가동

시켰습니다. 물론 한 달 전부터~ 배양까지 거의 30~40일 정도 걸리니까 미리미리

준비해야 했지요. 중간에 다른 분들이 오셔서 도와주기도 하셨지만, 거의 둘이서 힘

들다고 하면서도 재밌게 일했습니다.

한편, 이렇게 버섯도 나오고 하니 민박준비도 하자 하였습니다. 체험거리가 있으니

쉴 곳도 마련해 보자구요. 우선 따로 민박집을 지을 여유가 안 되니 옆방을 수리해

서 그곳부터 민박을 하자 하였습니다. 방바닥을 일부 뜯고, 화장실을 들이고 싱크대

도 놓고 장판도 다시 깔고, 바깥 마루도 새로이 놓고. 생각보다 비용도 많이 들어가

고, 시간도 많이 걸렸지만, 드디어 민박을 해도 괜찮겠다는 정도까지 되었으니 조금

만 더 보충하고 민박도 해야지 했습니다.

추석이 2주정도 남았습니다. 서둘러 입상을 해야지 추석 전에 버섯을 볼 수 있습니

다. 아직 배양이 덜 된 것을 따로 빼가며 며칠 동안 차례로 입상을 했습니다. 이제 한

재배사만 입상하면 준비했던 것들을 모두 입상할 수 있습니다. 한참 전에 입상했던

재배사는 버섯이 정말 예쁘게 발이가 되고 있었습니다. 새로이 입상을 했기에 버섯

이라고 나오는 재배사는 단 한 동! ‘여기는 이제 며칠 뒤면 폐상하고 다시 입상하면

추석이 며칠 지난 뒤에 다시 버섯을 볼 수 있겠지?? 그러면 버섯은 안 끊어지고 계

속 딸 수 있을 거야… 다른 동은 물론 추석 전까지 다 따서 지금껏 만져보지 못했던

돈 좀 만져 보겠는 걸…!’ 하는 마음으로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 날도 아무런 이상낌새를 채지 못했는데. 정말 일상생활같이 버섯 따고, 그것을

저장고에 넣고, 항아리 구하러 나가다, 장날이니 버섯 장에 갖다 주자고 한 것밖에

없는데. 은행일 있으니 잠깐 있으라는 남편 말에 “그래~”, 그러고 앉아 있는데 어디

선가 불자동차소리가 납니다. “아이고~~, 어디 또 불났네. “하는 순간에 전화가 울립

니다. 다급한 앞집아저씨의 목소리.. “재호네 공장에 불 났어…” 남편과 허겁지겁 도

착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황!! 정말 무

서운 불길이었습니다. 폐허도 이런 폐허 없을 것입니다. 제 생애 처음 겪어 본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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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처음엔 그냥 멍하기만 했습니다. 하나도 건질 것이 없습니다. 94년에 내려와 모

든 것을 다 받쳤는데 이렇게 한 순간에 다 날아가다니. 정말 허무했습니다. 뭘 어떻

게 해야 하는 건지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원인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밝혀져야 뭐합니까? 다 없어졌는데..

그래도 저흰 인정을 잃진 않았나 봅니다. 매일매일 위로해주시러 오시는 분들에게

서 힘을 다시 얻습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분들에게서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엔 다시 힘내서 우리의 계획을 실행하려합니다. 우리들의 계획이

조금은 더 늦어지겠지만, 포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자,아자, 파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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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 닉 : ■ 이메일 : ■ 블로그 : ■ 소속 / 하는 일 ■ 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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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강아지

무심코 농업기술센터에서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기술센터에 갈 일

이 별로 없어서 기술센터에서 전화 올 일이 없었는데, 컴퓨터를 배우지 않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컴퓨터 한 대에2~3백만원 한다는 애기는 들었는

데 컴퓨터가 나에게 뭐 필요한가 하는 생각에 그만 두겠다고 했더니 그래도 한 번

나와 보라는 간절한 부탁에 지정한날에 기술센터에 갔는데 버스를 타라는 겁니다.

무슨 컴퓨터 배우는 데 버스를 타야 되나 했는데 버스 안에 들어가 보니 온갖 컴퓨

터 시설이 다되어 있는 겁니다.

컴퓨터를 켰다 껐다 하는 걸 연습하는 데에만 무려 한 시간가량 걸렸으니 가르치는

분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사실 그 당시에는 네모난 텔레비전 판에 어지럽게 있

는 메뉴며 도구상자들이 그냥 혼란스럽기만 했습니다. 게다가 용어는 죄다 처음 들

어보는 전문영어였지요. 왜 내가 이런 곳에 와서 침이 바삭바삭 마르면서까지 생땀

을 흘려야 하나 하며 이거 아니어도 지금까지 불편하지 않게 살았는데 투덜투덜...

교육받기 시작한 지 3일이 지났습니다. 한글타자법도 배우고 이메일 까지 배웠는데,

집에 오면 컴퓨터가 없으니 교육을 받으면 그것으로 매번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지

금 생각하니 당시에 배우던 것이 오피스에서 처음 (이 부분 글자가 깨졌습니다???)

가르치는 컴퓨터교육이었습니다. 컴퓨터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정도에서 그쳤습니

다. 교육 마지막 3일째에는 수료식이 있었는데 아주 어린 강사분이 ‘오늘 이 수료증

이 나중에 좋은 역할을 할 겁니다. 반드시 컴퓨터는 꼭 배워야 합니다. 앞으로는 일

상생활에서 꼭 필요하며 전 국민에게 정부에서 컴퓨터교육을 시킬 예정입니다’ 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믿기 어려웠던 그 말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지금까지

http://allprm.tistory.com/38

무에서 유를 창조한 블로그

- 이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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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강아지가 컴퓨터가 무언지도 모르고 달려들었던 시절의 이야기였습니다.

6학년

세월이 지나 큰 맘 먹고 이제 정말 집에 컴퓨터를 샀습니다. 무려 2백만원을 주고

샀는데 사용방법을 모르니 그 쓰임새가 라디오만도 못했습니다. 컴퓨터 학원을 다

닐까도 생각했는데, 농사일하고 시간이 맞질 않으니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혼자서

하다 보면 안 되고, 화면에 있는 도구를 만지다 보면 엉뚱한 것 건드려서 헤매게 되

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어찌나 답답하던지. 고장난 것도 아니었는데 고장이라고

신고해서 수리를 맡겼던 적도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혼자 힘으로는 익힐 수 없는 것

이구나 하고 깨달았지만 당시로선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술센터에서 60여 농가를 선정해 컴퓨터도 가르쳐주고 홈페이지도 만

들어 주는 프로그램 인원을 모집하는데, 마지막에 제가 걸렸습니다. 이전에 컴퓨터

를 배울 때 강사님이 말씀하셨던 수료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선정은 되

었는데, 그 당시 김기예 선생님이 저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전혀 대답하지 못

했습니다. 이메일 주소가 뭐냐 골뱅이 뭐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하니... 지금 생각

하면 챙피해 웃을 일도 못되지만, 사실 그때만 해도 이메일 주고 받을 그런 시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초보적인 지식도 모르는 저였지만 60여 농가에 저도 그냥 묻어가 홈페이지를 만들

었습니다. 홈페이지가 뭔지도 모르고 6학년 이 되고 말았습니다. 쌓은 과정도 없는

6학년이니, 맨날 헤매는 겁니다. 그래도 그렇게 일 년이 지나다보니 한눈에 좌대인

지 빨래판인지 메뉴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게 되더군요. 디지털카메라도

사고 사진도 올려보고 그런대로 열심히 하다 보니 할 수 있는 게 점점 많아졌습니

다. 그때는 지금처럼 사진을 바로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라 힘든 작업이 필요해서,

배우는데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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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이스농장(홈페이지 이름 정확히 다시)이라는 홈페이지에 쌀을 올려 팔기 시작

했습니다. 인터넷에 내 쌀이 뜬다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홍보도 하고, 지대미 포장도

준비하고, 어디에 내 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상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일 년

이 지나고 2년째에는 상당량의 판매를 했습니다. 정보화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한

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또 문제였습니다. 홈페이지 제작회사의 관리가 안 되니 스팸이 뜨

기 시작해서 하루에 30여건이 들어오는데, 몇 통으로 시작하던 스팸이 금방 몇 천

통이 되더군요. 제 실력으로는 전혀 삭제가 안 되니 혼란스러웠습니다. 홈페이지를

내리라는 등 여러 가지 압력이 들어왔고, 관리가 되지 않아 낯 뜨거운 홈페이지가

되어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배울 점,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많은 분들이 영세업자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했습니다. 벤처기업들이 너도나도 뛰

어들어 과열된 상태라 문을 닫은 업자들이 많았으니까요.

홈페이지에 문제가 생긴 뒤 관리가 안 되어 문을 닫은 뒤, 이제 인터넷에 집이 없으

니 고객관리만 했습니다. 사실 홈페이지라는 것은 홍보효과에 치중했지 고객과 직

접 연결하는 것은 핸드폰으로 지금도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긴 합니다. 그러던 중

2009년에 블로그 교육이 e-비즈니스과정에 있다는 것을 알고 배우기 시작했습니

다. 며칠 동안 배워보니 ‘아! 이런 것도 있었구나! 왜 이런 것을 여태 몰랐을까!’ 배우

면 배울 수록 재미가 있는 겁니다. 예전보다 사진 올리는 것도 아주 편해지고, 아는

사람들끼리 블로그로 이웃도 맺어보고... 이전에는 홈페이지에서나 할 수 있었던 것

을 블로그에서 모두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고객 분들의 댓글도 올라오고 방문객도 하

루가 다르게 증가하면서 지난해에는 방문객이벤트(7777명)도 해 보았습니다. 내 상

품도 마음대로 올리는 등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수 있으니, 이런 자유로움이 바로 블

로그의 장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2개월에 걸쳐 블로그코치님의 수고가 한양대에서 도시블로그와 불로그파티

까지 진화되었으니, 김기예지도사님과의 만남으로 시작해서 수많은 강사님과 유영

진, 박종범 블로그코치 님과의 만남이 오늘의 이라이스농장 블로그가 아닌가 싶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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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동안 도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 이름 : ■ 닉 : ■ 이메일 : ■ 블로그 : ■ 소속 / 하는 일 ■ 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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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농장의 이름은 휴무스팜입니다. 휴무스란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신 오염되지 않

은 순수한 흙을 뜻합니다. 휴무스팜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땅을 지키고자 노력합

니다. 안전한 먹거리 생산에 중점을 두어 농사일을 합니다. 저는 주로 벼농사를 지

었습니다. 그런데 2007년에 블루베리를 심자고 했을 때도 블루베리가 무슨 과일인

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그저 남들 안 하는 거니까 또 안토시아닌이 많이 함

유되어 건강에 좋다니까 안 되면 식구들이 먹으면 되지 하고 심은 게 지금은 휴무

스팜의 대표 작물이 되었습니다.

농약을 전혀 안 쓰는 블루베리 농사, 지금 생각하니 잘한 것 같습니다. 한참 수확 할

때 농약을 전혀 안 써서인지 오십 평생 보지도 못했던 쐐기와의 전쟁도 어제 일처

럼 다가오네요. 그리고 양은 많지 않지만 우리 집의 황토 고구마는 먹어본 사람이

미리 예약해야 먹을 수 있는 품종이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 휴무스팜에서는 그 외에

도 땅콩 ,팥, 서리태, 들깨 등 내년에는 또 여건이 허락되면 건강에 좋다는 아피오스

(일명 인디언 감자)도 심을 예정입니다.

영농일정을 간추려보면 봄기운이 따뜻하기 시작하는 3월부터 EM을 잘 혼합해 놓

은 거름과 퇴비를 밭에 내기 시작하고, 블루베리 나무전지 전정도 시작한다. 그래야

블루베리가 굵게 잘 열려서 품질이 우수해집니다. 일 년 중 가장 힘들고 신경을 제

일 많이 쓰는 못자리일이 4월 초순에 시작됩니다. 흙 15톤 한차를 사서 상토를 만들

고 한 보름정도 있다가 볍씨를 담그고 싹을 틔워서 모상자에 담는 일이 큰일인데

한 5년 전부터 우리 마을과 1사1촌 자매결연을 맺은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직원 분

들이 대형버스로 오셔서 가장 일손이 필요할 때 자원봉사를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

한지요. 일손이 필요한 농가에 골고루 나눠서 열심히 모든 일을 잘 마무리 해주시고

돌아갑니다.

http://allprm.tistory.com/38

블루베리 열리는 농장, 휴무스팜

- 이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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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가 끝나자마자 블루베리 수확 철이 시작됩니다. 6월부터 따기 시작해서 약

한달 반은 정말 정신 없이 보냅니다. 논둑 풀도 깎아야 하고 고추도 심고 콩도 심어

야 하고 팥도 심고 이것저것 심어야 가을에 골고루 거둬들여야 하니까요. 그러다 보

니까 지난해는 너무 바빠서 논에 농약을 한 번도 못했어요. 그냥 무농약이 된 거지

요. 가을이 되어 수확 하는데 농약을 안 해서 수확량은 좀 떨어졌지만 모든 게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지요.

지난 늦가을에는 벼 매상을 하느라고 트럭에 볏가마니를 한 차 싣고 매상장소에 가

는데 펑 하고 연기가 나더니 트럭이 도로에서 멈춰 버렸답니다. 간신히 임시로 렉카

불러서 매상은 마쳤는데 몇 몇 분들은 트럭 폐차시키라고 하는데 사실 아직 저는

차는 그저 목적지까지 굴러만 가면 된다는 생각하기 때문에 정 더 이상 손보지 못

할 때까지 탈려구유~ 12월은 농한기라서 아주 조금 한가하길래 동네 사랑방에 놀

러 갔더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매일 앉아서 윷놀이하는 것도 무의미하다며 저에게

한글공부를 시켜달라고 하시네요. 그래서 지난 2003년부터 우리 마을에서 남편하

고 저하고 동네어르신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 공부방을 시작해서 6시내고향, 리얼

코리아, 출발 모닝와이드, 서세원쇼 등 TV에 출연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은 제가 여러 가지로 바쁘다보니까 시간을 도저히 낼 수가 없어서 면사무소 복지

계문해(복지과에 문의해?) 공부방에다 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컴퓨터를 배우게 된 것도 2004년으로 기억합니다. 컴퓨터 교육이 있다

고 해서 농사지으며 농업기술센터를 처음으로 찾아갔던 것 같아요. 컴퓨터 기초과

정을 한 일주일정도 교육 받았는데 당시에는 집에 컴퓨터가 없다 보니까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일 년은 까마득하게 잊고 살다가 또 겨울 농한기만 되면 기초과정을 또

공부하고... 그래도 그러다보니 인터넷도 하게 되고 이메일도 주고받게 되고 컴퓨터

랑 친구가 되었습니다. 2008년에 다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우연히 김기예선생님을

만나서 e-비즈니스과정에 참여하게 되고 이름도 낯선 마케팅, 비즈니스, 전자상거

래에 눈을 뜨고 지금은 전량은 아니지만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블루베리, 호박고구

마, 콩 등을 도시 소비자들에게 택배로 배송하며 단골도 많이 생겼습니다. 인터넷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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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블로그도 개설하고 카페에도 가입하며 열심히 들락날락하니까 좋은 많은 사람

들을 많이 만나게 된 것이 무엇보다 컴퓨터와 친해진 뒤 제가 얻은 커다란 수확이

아닌가 싶습니다.

농사짓기 시작한지 어언 이십 년. 그저 남들 하는 대로 따라서 이것저것 많이 심어

보았는데, 돌이켜보니 무엇 하나 대박 나게 해본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건강 먹거

리 우리식구들이 먹는 거니까 농약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치다 보니 벌레 먹고 상품

가치 안 나오고 수익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특수작물을 심어보자 하고

겁 없이 하우스를 짓고 토마토를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한 일 년은 한 것 같은데 이

듬해인 눈이 많이 오던 날, 하우스는 조용히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고

참 난감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고마움을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습

니다. 지금 같았으면 세 동 되는 하우스를 일으켜 세우려면 용역에서 수많은 사람이

필요했을 텐데, 이웃 동네서까지 오셔서 무너진 하우스를 모두 일으켜 세웠던 일은

지금처럼 눈이 오고 뉴스에서 하우스 붕괴 소리만 나오면 참으로 고맙게 도와주셨

던 손길에 그저 감사한 마음이 떠오를 뿐입니다.

농사가 풍년이면 풍년인대로 흉작이면 흉작이어서 농촌과 농업인은 늘 어려운 환

경에 처해있습니다. 농산물 가격이 제대로 제 값을 잘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이

런 상황을 가장 가까이서 잘 알고 있는 농업기술센터에서 지금까지 우리농산물을

인터넷으로 판매해서 제 값을 받게 하고자, 잘사는 농촌을 만들고자 불철주야 애쓰

시는 농업기술센터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어떻게 다 전해야 할지....

모두모두 진심으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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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 닉 : ■ 이메일 : ■ 블로그 : ■ 소속 / 하는 일 ■ 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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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과 빨간 사과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넉넉한 예산의 가을은 보는 이의

마음을 소녀의 가슴처럼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빠알간 사과는 뜨거운 심장처럼 사

랑을 이야기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슴속에 빨간 사과를 달고 사랑을 나눌 준비를

합니다. 예산은 온통 사과향기가 마음까지 향기롭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가면 신장리에서 아람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차명숙입니다. 도시 생활하다

귀농해 사과, 배, 매실 농사를 지으며 시어머니와 남편 두 딸과 함께 다섯 식구가 행

복한 시골 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농촌생활과 농사는 처음이라 농업기술센터의 다

양한 영농교육으로 농사를 배우고, 배움을 밭에 뿌리며 부족 하지만 전문 농업인으

로 지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전문농업인으로 자리 잡기까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농사를 시작한 이듬해 2,000여 평의 배 밭이 병해

를 입어 배를 한상자도 수확할 수 없었습니다. 까치가 먹은 것 한 바구니 땄을까…

또 그 이듬해 2002년에는 태풍이 할퀴고 지나간 배 밭에는 수확을 기다리던 배들이

수북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울다 울다 지쳐 배밭의 배처럼 널브러져 있으니 이장님

이 피해조사차 나오셔서 위로를 해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한동안 마음고생을 하

기도 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사계절 아름다운 자연을 선물하고 수확의 기쁨을 주는 고마운

자연이기도 하지만… 자연은 그리 자상하지마는 않았습니다. 처음 농사짓는다고 모

진 시련을 주는 것인지 어느 해는 사과 수확기에 비가 너무 많아 정품 이하의 사과

가 많이 수확되어 판매에 애를 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해도 해도 줄어들지 않는 농

사일에 지쳐 남편과 다투기도 많이 하고, 농번기 일손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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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농장 - 차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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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며 농사시기를 놓치기도 하면서 농사일을 배웠습니다.

지금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농사꾼’ 이란 말입니다. 어설픈 농사꾼이 아

니라 전문 농업경영인이란 말을 스스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생산과 판매, 가공, 체험...

그리고 농촌진흥청 지정 교육농장으로 거듭나기 까지...1차에서 6차까지 소화할 수

있는 농업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열심히 농사지으며...

땅을 살리고 자연을 사랑하며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한다는 마음에 사과와 배 모두

친환경인증을 받았으며, 농장의 사과는 껍질째 먹는 사과로 군 브랜드 의좋은 형제

박스에 넣어 판매하고 있습니다.

도시 생활하다 귀농과 함께 시작한 시골 살이는 커다란 꿈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사과나무도 처음 보았고 배나무도 처음 보았습니다. 그림책에서 본 것이 전부인 농

사는 정말 빵점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래도 그냥 앉아서 누가 가르쳐 줄 때 기다리지 않고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농사기

술을 배우고 열심히 농사지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자에게는 늘 문을 열고 기술센

터는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주고 컴퓨터 교육을 권했습니다.

열심히 농사지어서 정성들인 땀의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처음으로 생산된 사과

와 배를 보면서 너무 좋았습니다. 좋은 것도 잠시 생산된 농산물을 파는 것이 문제

였습니다. 남들처럼 공판장이라는 곳에 보내기도 하였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적은

액수의 돈이 통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서울 사시는 고모부의 도움으로 직거래도 하

였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삼천 여 평에서 생산된 사과와 배를 아름 아름

직거래로 파는 것도 한계가 있고 공판장에 올리는 것도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농업기술센터의 119컴퓨터교육에 등록해 컴퓨터의 기초부터 배웠습

니다. 교육을 통해 차츰 홈페이지라는 전자상거래가 마음속에 자라기 시작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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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컴퓨터의 사용은 남의 일처럼 도시에서 사용하는 것 인줄 알았던 전자제품이 농

산물을 생산하고 판매함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계속적인 컴퓨터 교육을 통

해 알게 되었습니다. 초급, 중급, 포토삽, 전자상거래, 동영상… 단계별로 e-비즈니스

교육을 받으면서 마음까지 성장했습니다. 드디어 아람농장이라는 입간판을 만들어

농장입구에 세우고 홈페이지(www.ijoaapple.com)도 온라인상에 뜨면서 농촌생활

은 활력을 가져오고 농장에 사람들의 발길이 머물면서 농장에서 생산된 과일들을

홈페이지를 통해 80%이상 판매하게 되었습니다.

농장 이름은 은 막내딸의 이름을 이용해 지었습니다. 딸아이 이름이 아람이 거든요.

아람이가 시골에 오던 해 나이가 7살이었는데, 무척 시골 살이를 싫어했어요, 도시

에서 태어나 어느 정도 도시의 문화생활에 익숙해지던 시기였으니 아람이 에게는

시골행을 결심한 엄마 아빠를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아파트의 편안함도, 백화점 나

들이도, 문화센터 뮤지컬도, 아파트 유치원도, 친구도 없는 시골이 얼마나 싫었으면

다시 도시에 있던 아파트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초등 저학년까지는 징징거렸지

요.

아이와 농장이름을 지어놓고, 아빠와 손수 농장간판을 만들어 농장입구에 걸어놓

고, 지금은 힘들고 어렵겠지만 농촌의 자연을 아람이에게 선물하는 뜻에서 농장의

이름을 아람이라 짓고, 아람이를 키우듯이 농사짓겠다는 마음으로 과일나무에게

사랑 주고 정성을 다하겠다는 뜻에서 지은 것 이랍니다.

이름처럼 농장의 생산물들은 맛도 좋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었습니다. 해마다 주

문고객이 늘고 입소문으로 과일 맛있다는 평이나니 본의 아니게 체험객들도 생기

고 농장은 연중 개방되어 농장을 찾은 고객들을 맞이하고 있답니다.

일곱살 아람이는 어느덧 중학교를 졸업하고 되었답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

연을 읽을 줄 아는 아이로, 농촌의 풍부함 속에서 인성 고은 아이로 자라고 있답니

다. 2008년에는 농촌진흥청 정보검색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타는 영광을 얻기도 했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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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같았습니다. 산처럼 과일상자를 저장고에 쌓아두고 어떻게 판매하나 걱정하

던 일이 해결되니 처음 농사지으면서 어려웠던 숙제를 다한 느낌이었습니다. 보너

스처럼 지난 2008년 8월 27일에 열린 충남 사이버농업인 정보화대회에서 저희 아

람농장이 홈페이지분야 우수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이번 사이

버 대회에서 수상을 하면서 농업인에게 정보화 교육은 농업을 경영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보화, 인터넷, e-편한 세상, 전자상거래, 홈페이지, 블로그… 여러 가지 단어로 정

보화는 농촌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농산물을 팔고, 농장

을 공개하면서 농장은 농장가족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시생활에 지친 몸과 마

음을, 농촌의 자연 속에서 풀고자 홈페이지를 통에 문의를 해오고, 방문하는 고객수

가 해마다 증가하였습니다. 딱히 보여줄 것도 내 놓을 것도 없는 시골 살이 이지만

자연 그대로, 농장 그대로 꾸밈없는 시골 살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향이 되어주었

습니다.

해마다 사과 수확 철이 되면 홈페이지나 전화를 통해 문의를 합니다.

사과 따러 가고 싶다고… 주위에 친분 있는 과수농가는 저에게 그럽니다.‘힘들지 않

냐고, 하루 종일 밭일에 시달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면 어려워서 어떡하냐

고…’하지만 저는 수확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그들에게 정말 내가 선택한 시골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사실 왜 힘들지 않겠어요. 농삿일 하면서 하루 세끼 밥 차리는 것도 힘든데. 수십 명

의 식사를 챙기며 하루 종일 들에 풀어놓은 강아지처럼 좋아 하는 사람들의 들뜬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데… 하지만 힘든 만큼 보람 있고 내가 생산한 농산물을 맛있

게 먹어주고, 구매도 해 주는데 그런 고맙고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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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농장을 통해 다년간 사람들의 덕담은 배로 되어 돌아왔습니다. 생산한 농산

물을 재 구매하고, 가족단위로 농장을 방문하면서 체험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습니

다. 생산한 사과로 고추장 만들기 체험도 하고, 쨈 만들기 체험을 통해 연중 농장을

방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봄부터 시작되는 매실수확체험

을 통해 농장은 가을까지 꾸준히 농장을 방문하면서, 계절상품인 수확기 과일판매

의 한정고객을 체험과 가공상품의 개발로 꾸준히 찾을 수 있도록 활성화 하게 되었

습니다. 더불어 2009년에는 진흥청으로부터 농촌교육농장으로 지정 되어 아이들을

위한 농촌교육을 위해 교육 매뉴얼을 짜고, 교육계획안을 만들면서 바쁜 2009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농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면서 농업인의 자긍

심을 높이고, 농업 소득도 올리며, 농촌자원을 이용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교육한

다는 것은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농민은 정말로 할 일이 많습니다. 농삿일도 해야 하지만, 생산물을 팔아야 하는 어

려움도 있습니다. 저 자신도 농사만 지으라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지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농사와 판매를 함께 하면서 농가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는 많은

공부와 노력이 따라야 했습니다. 예산군농업기술센터의 e-비즈니스 교육을 3년차

받으면서 스스로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극적인 농업인에서, 적극적인 농업인으로의 발전과, 끊임없는 노력이

좋은 결실을 만든다는 것을 보아오면서 기술센터의 e-비즈니스교육과 선배 농업

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늘 가르침을 받으면서 스스로도 많이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안정된 시골생활은 또 다른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정보화 교육과 함께 생활

개선회에도 가입해 우리음식 연구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가정에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사과고추장, 사과떡케익, 사과전병, 사과파이, 사과장아찌들을 실습하고 우리

음식의 우수성과 전통음식의 계승과 발전 지역농산물을 이용한 요리개발은,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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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생산물을 가공상품으로 개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농업기술센

터의 지도로 100% 사과와 배를 이용한 조청선물세트의 개발은 많은 관심을 받았고,

매실을 이용한 장아찌와 매실원액도 함께 가공상품화해 홈페이지를 통해 판매 하

고 있습니다.

2006년도에 구성되어 활동 하고 있는 한지공예연구회에서의 작품연구는 농촌에서

농업인으로 살면서 또 다른 즐거움과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전통을 배운다는 기

쁨과 함께 일반 한지공예와 달리, 김정희 선생님의 추사체를 이용한 한지공예작품

은 작품성을 높여주었고 2008년 6월에 열린 충남 관광기념품 공모전에서 입상하는

영광까지 가져왔습니다.

농사를 업으로 사는 농업인이 농사 외의 활동을 한다는 것은 시간적인 면에서 무척

어려운 현실인데 짬을 내 배워온 한지공예가 이런 기쁨을 가져다 주리라 꿈에도 생

각 못했습니다. 이처럼 농업기술센터의 한지공예교육은, 시골 살이의 보너스처럼

생활에 활력을 주었고 여성 농업인으로서 자부심도 갖게 되었습니다.

틈틈이 만들어온 작품들은 예산군 문예회관에서 전시회도 가졌고 군의 큰 행사나

축제 등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전시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는 농

업기술센터에서 한지공예교육을 회원들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전통 한지공예를 알

리고,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교육을 기회를 넓혔습니다. 첫 대상으로 농촌의 미래인

학생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90여명을 교육하였는데, 학생들이 화학풀이 아

닌 밀풀을 직접 쑨 것을 가지고 한지 작업을 하니 너무 좋아했습니다. 손에 풀이 묻

어도 마냥 좋은 듯, 스스로 만든 한지공예필동을 보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제

딸아이를 보는 것처럼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날, 그냥 아무 의욕도 생기지 않고, 강렬한 햇볕이 눈을 뜨기

도 어렵게 내리쬐던 날… 광시의 장수마을을 찾았습니다. 미리 연락을 해둔터라 마

을회관에는 어르신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더운 날씨도 아랑곳 하지

않고 40여분의 어르신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팔각상 재료를 가지고 들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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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기술센터의 일행을 반겨주었습니다.

장수마을 어르신들을 교육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 농

삿일이고, 해도 해도 표도 나지 않는 농삿일, 시부모 봉양에 남편과 자식, 가족을 위

해 허리가 굽어지는 줄도 모르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맛난 것도 만들지 않았고, 고

운 옷도 마다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마음속에 묻어두고 살아온 세월을, 조금

이나마 보상하는 듯한 시간이었습니다. 눈이 흐려 보이지 않는다며, 손이 떨려 한지

를 붙이기 어렵다며, 너무 어려워 방귀가 뿡뿡 나온다고 투정을 하면서도 스스로 만

드는 상을 요리 조리 돌려 보고, 함박 웃음 띤 얼굴로 아들 손자 며느리에게 자랑하

겠다며 상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제 가슴속에서도 뜨거운 무엇이 흐름을 느꼈

습니다. 농촌의 미래를 책임질 자라나는 학생들을 교육할 때와 다른 겸손한 마음으

로, 오래도록 장수마을 어르신들께 이런 시간을 자주 만들어 주는 기술센터가 너무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습니다.

농촌사회의 변화로 우리 지역에도 다문화 가정이 많이 생겼습니다. TV나 신문을

통해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점과, 그들의 이주국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따뜻

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이때, 기술센터에서는 음식예절과 요리교실, 전통문화를

교육하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농업기술센터의 이주여성을 위한 관심과 사랑에 힘입어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지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 집밖의 세계가 두렵기만 한

이들에게 기술센터는 한지교육을 통해, 지역민과 소통하면서 정을 나눠주는 역할

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대일 가정을 방문해 한지교육을 하면서 말문을 열어주고, 대

화를 나누고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니, 낯선 사람의 처음방문에 경계하던 눈빛이 따

뜻해져 옴을 느꼈습니다. 저 스스로도 교육을 시작하면서 두려워했던 마음들이 기

우였음을 계속적인 교육을 통해 알게 되었고, 그들과 따뜻한 마음의 정을 나누면서,

제 가슴 또한 푸른 하늘을 보듯 시원해져 왔습니다.

농업기술센터의 이주여성을 위한 끊임없는 관심과 지원은, 그들의 삶이 결코 힘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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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다는,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한지교육을 하면서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귀농을 결심하고 낯선 고향 예산에 와 살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으면

서도, 이렇게 전문 농업인으로 정착하기 까지 지역주민의 관심과 사랑, 농업기술센

터의 폭넓은 영농교육과, 정보화교육, 생활개선회에서의 활동으로 농촌생활을 활기

있고 보람되게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수입개방 압력에 밀리지 않는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는데 노력을 아끼

지 않고, 다양한 가공상품의 개발로 도시 소비자와의 교류를 이어가면서, 단순한 수

확체험이 아닌, 교육적 효과를 높일 수 있는 농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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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면 두곡리에 위치한 예당버섯은 허허벌판에 위치한 농장이다. 주변에 산이 있

는 것도 아니고 계곡이 있는 것도 아니다. 농장주인인 최영상 씨는 꿋꿋이 버섯을

키우고 있다. 그것도 아주 즐겁게... 그가 키우는 버섯은 주로 동충하초라는 버섯이

다. 그 외에 영지버섯, 상황버섯, 꽃송이버섯, 느타리버섯 등을 재배하고 있다.

Q. 버섯별 이미지 사진, 버섯별 특징

그가 귀농한지는 6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간 퇴직금과 아파트를 정리한 돈으로 지

금의 예당버섯을 이루어 놓았다. 대규모의 버섯농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버섯

시장에서 예당버섯은 아주 작은 농장이다. 규모는 작지만 연못도 있고 토끼도 있고

아기자기하게 꾸며가고 있다.

그가 동충하초를 접한 것은 1989년이었다. 강원대학교 농생물학과 88학번인 그는

성재모 교수님의 담임세미나라는 전공필수 과목에서 버섯을 공부하였다. “농촌진

흥청 병리과에서 20년 넘게 근무하신 교수님이시다 보니 병리에 있어서도 거의 모

르시는 게 없었죠. 그리고 강원대학교로 오신 이후로는 진균(fungi)류를 가르치고

계셨고 천마와 영지, 동충하초 등 버섯에 관련된 실험들을 하였습니다.”

“ 88년도에는 교수님께서 천마를 연구하고 계셨어요. 뽕나무버섯균과 공생하는 천

마라는 약재를 키워내고 좋은 균주를 선발하고 저가의 나무선발시험하고, 강원대

연습림에 재배시험하고 유리병에서도 키워보고 정말 정신 없이 일했습니다. 그러

다 보니, 교수님께서 군대에 갔다 오라고 하대요. 군대에 갔다 왔는데 교수님의 실

험실인 109호에서 선배님 한 분이 부르시더라구요. 그 선배님은 지금 하늘나라에

계신 선배님은 실험실에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구요, 완전강제죠. 젊은 혈기에 실험

실에 앉아 있기는 싫었거든요. 반 강제로 밤에만 실험실에 오는 조건으로 그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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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틀꿈틀 꿈을 키우는 ‘예당버섯’ - 최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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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따라 실험실생활을 시작했죠, 후배 하나 잘못 건드려서 실험실에서 쫓겨나고

술만 안 먹는 조건으로 또 실험실에 들어가고, 며칠 되니까 여자친구 하나 데려오라

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정훈이라는 아이에게 부탁해서 환경공학과에 다니는 남미

숙이라는 2학년 아가씨를 데려 갔죠, 아무생각 없이 데려간 나에게 그 선배가 미숙

이에게 그러더군요 “얘는 실험실에서 공부해야 하니까, 많이 만나지는 못할 것이고

이놈이랑 결혼할거니까 그렇게 알고 만나라고” 그리고 옆에 있는 나에게는 여자친

구랑 그렇게 약속된 거니까 실망시키지 말고 공부 잘하고 실험실 생활 잘하라고 하

더군요, 이런 허무맹랑한 상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현재 그 여자친구는 1남 1녀

의 어머니로 제 옆에 정말 있더라구요.

지금은 안 계시지만 그 선배님을 주축으로 109호 실험실은 불이 꺼지지 않는 실험

실로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젊은 혈기에 실험실에서 새우잠자기를 밥 먹듯이 하고

추운 날에는 배양실에서 자면서 실험은 계속되었습니다. 참 열심히도 실험한 시절

이지요.

1996년 대학원을 준비하던 중 교수님께서 경남 김해에 있는 고려식료라는 회사에

취업을 시켜주시더군요. 미생물에 관심이 많으셨던 이정식사장님께서 동충하초의

가능성을 인식하시고 교수님과 접촉하던 중 생산이 가능한 학생을 추천하신 거였

습니다. 동충하초의 배양실험은 나름대로 많이 해보았지만 삼각플라스크에서 버섯

의 자실체를 시험하던 수준이어서 대량생산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습니다. 유리재

질의 플라스크에서 작업이 용이한 플라스틱 배양병으로 교체해야만 했습니다. 병

생산하는 공장에 찾아가 버섯재배에 적합한 용기를 선발하여 주문생산하고, 접종

원생산을 위하여 액체배양기를 공장라인에 접목하기 위하여 커다란 컴프레샤에 라

인을 새로 연결하여야 했고, 앵글로 배양실 마련하고, 식품재료로써의 동충하초 생

산 등등....

“밤잠 안자고 뛰다시피 하니까 1년 6개월 걸리더라구요”. 젊은 혈기에 노력한 성과

를 빛내보려고 사장님께 건의하여 방송에 나가보자고 하였으나 사장님께서는 중소

기업인 현실에서 존폐의 문제가 있다면서 표고나 느타리의 종균사업을 추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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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제안하시더라구요. 사장님의 파격적인 제안을 뒤로하고 풀타임으로 대학원공부

를 시작하였죠.

동충하초를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 대학원공부를 시작하였

습니다.

“직장다니다가 다시하는 공부라서 쉽지는 않더라구요. 그래도 실험실의 전통을 이

어가고 후배들에게 신세 안 지려고 부지런히 실험하였습니다. 어렵게 대학원을 마

치고는 동부하이텍 종묘사업부 육종연구소에 입사를 하였습니다. 5년 넘게 씨앗의

발아부터 잎, 꽃, 열매를 맺는 종자의 소중함을 배웠고 우리나라의 농가에서 로얄티

가 문제되고 있는 상황도 인식 하였습니다”.

그러던중 동충하초의 시장은 점차로 쇠퇴해 갔습니다. 1997년 처음 시중에 알려지

기 시작할때만 해도 불로장생의 명약으로 인식되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습니

다. 1999년 버섯생산하시는 분들이 균주를 분양받아 전국적으로 생산하였으나 가

격이 비싸다보니 실제 소비자는 먹어보지 못하고 생산은 과잉상태였죠. 실제로 농

민들을 만나보니 중간유통하시는 분들이 마진을 터무니없이 붙여서 동충하초버섯

을 사장시키고 있더라구요. 그 당시 직장에 다니고 있었던 저로써는 안타까웠죠. 제

가 발로 뛰어서 만든 생산시스템이 생산자는 생산자대로 소비자는 소비자대로 만

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씁쓸했죠. 동충하초는 곤충을 기주로 버섯을 형성하기 때문에 저는 곤충사육

과 버섯 생산하는 분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거든요, 기존의 생산 시스템은 벌써 농

민들한테 기술 이전된 상태였거든요. 동충하초의 연구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많은

데 동충하초에 대한 인식은 점차 낮아져 가고 안타깝더라구요. 그래서 결정한 거죠.

동충하초를 키우기로.....

돈을 목적으로 동충하초를 키운다면 어떤 농민이건 저보다는 오래하지 않을 것 같

더라구요. 그 안타까움을 평생 갖고 사느니 내가 직접 동충하초를 재배하고 연구하

는 것이 가장 편하게 사는 방법인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2004년에 귀향 겸 귀농을

결정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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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는 아산시 도고면에서 버섯재배사를 임대하여 느타리버섯을 봉지재배 하

였죠, 실험실에서 배운 실력이 그래도 녹슬지 않았더라구요,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서 잘 키운다는 평은 받았으니까요. 동충하충하초를 재배하고 싶었지만 버섯업계

의 인식이 약용버섯을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식용버섯부터 시작하였습

니다. 차차 집 옆에 버섯재배사를 마련하였습니다. 2007년에는 신암에 버섯재배사

를 증축하여 연중생산이 가능하도록 자리를 잡았습니다. 2009년 그의 농장에는 좋

은 일들이 많이 생겼다. 2009년 농촌진흥청에서 지원하는 예산군농촌교육농장에

선정되어 오랫동안 꿈꿔왔던 버섯을 교육할 수 있는 첫 발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주

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교과서에 나오는 교과목과 과학에 관련된 농촌문화와 버

섯에 관하여 아이들에게 교육하는 농장이 선정된 것이다.

농장주변환경이 열악하여 컨설팅하는 아카데미의 연구원님들이 교육농장의 운영

에 관해서 잘 가르쳐 주셔서 이제는 하드웨어부분은 많이 갖춰진 듯하다.

농장내에는 농촌체험농장 20평과 버섯재배사 100평 매실나무, 감나무, 배나무, 목련

과 소나무, 단풍나무, 개나리, 진달래, 엄나무, 오미자 등을 심어 버섯들이 자연에서

처럼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중입니다.

Q. 앞으로 비전은 어떤 것인가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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