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을 확장하면서 유원 劉園 이라 불리게 되었다쑤저우(蘇州)는 장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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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저우(蘇州)장쑤성 제일의 명승지로 꼽힌다. 항저우(杭州)함께 중국 대륙에서 자연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이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다. ‘하늘에는 천국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라는 의미다. 쑤저우는 창장(長江) 삼각주 평원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동양의 베네치아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물의 도시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토질이 좋아 자원이 풍부하다. 중국 역사문화도시 하나로 BC 514년에 성립되었다. 성립 초기부터 중국 동남부 최대 도시로 번영해 사주지부(絲綢之府, 비단의 도시), 어미지향(魚米之鄕, 쌀과 수산물이 풍부해 살기 좋은 )으로 일컬어졌다. 특히 송대에 이르 러서는 비단 생산지로도 명성을 얻었다. 쑤저우를 가리키는 별호 하나가 원림지도(園林之都, 정원의 도시)이다. 쑤저우의 부유계층이 많은 관심을 기울인 분야가 정원이었다.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쑤저우의 정원도 유명해져 천하의 원림(園林)강남에 있고, 가운데 쑤저우의 정원이 으뜸이다라는 말을 탄생시켰다. 쑤저우의 정원 조성은 비단 장수들이 활개 치던 송나라 시대에 본격화되었고, 명성은 ·대로 이어졌다. 쑤저우는 대운하의 요지에 자리한 지리적 장점과 견직물 산업 활성화로 인해 부유 상업도시로서 기반을 유지할 있었다. 쑤저우의 정원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정형화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중국 남방 고전원림 건축의 정화라 있을 만큼 고도로 양식화되었다. 송대부터 이어진 정원은 현재 200곳에 이르는데, 현재 10곳은 거의 완벽하게 복원돼 개방되고 있다. 송대의 창랑정(滄浪亭), 원대의 사자림(獅子 ), 명대의 졸정원(拙政園)유원(留園) 등이 대표적인 원림으로 꼽히고 있다. 유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쑤저우의 9정원에 속한다. 19세기 후반 청나라 황실의 여름 별장이었던 베이징 이화원과 함께 중국 4명원에 속한다. 명나라 만력 21(1593) 벼슬을 버리고 고향 쑤저우로 돌아온 서태시(徐泰時)꾸민 작은 정원이 시초다. 후대에 유서(劉恕)정원을 확장하면서 유원(劉園)이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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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쑤저우(蘇州)는 장쑤성 제일의 명승지로 꼽힌다. 항저우(杭州)와 함께 중국 대륙에서 자연경관이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이라는 말이 전해질정도다. ‘하늘에는 천국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라는 의미다.

    쑤저우는 창장(長江) 삼각주 평원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동양의 베네치아’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물의 도시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토질이 좋아 자원이 풍부하다. 중국 역사문화도시 중 하나로 BC514년에 성립되었다. 성립 초기부터 중국 동남부 최대 도시로 번영해 사주지부(絲綢之府, 비단의도시), 어미지향(魚米之鄕, 쌀과 수산물이 풍부해 살기 좋은 곳)으로 일컬어졌다. 특히 송대에 이르러서는 비단 생산지로도 명성을 얻었다.

    쑤저우를 가리키는 별호 중 하나가 원림지도(園林之都, 정원의 도시)이다. 쑤저우의 부유계층이많은 관심을 기울인 분야가 정원이었다.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쑤저우의 정원도 유명해져 ‘천하의원림(園林)은 강남에 있고, 그 가운데 쑤저우의 정원이 으뜸이다’라는 말을 탄생시켰다.

    쑤저우의 정원 조성은 비단 장수들이 활개 치던 송나라 시대에 본격화되었고, 그 명성은 명·청 시대로 이어졌다. 쑤저우는 대운하의 요지에 자리한 지리적 장점과 견직물 산업 활성화로 인해 부유

    한 상업도시로서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쑤저우의 정원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정형화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중국 남방 고전원림 건축의정화라 할 수 있을 만큼 고도로 양식화되었다. 송대부터 이어진 정원은 현재 200여 곳에 이르는데,현재 10여 곳은 거의 완벽하게 복원돼 개방되고 있다. 송대의 창랑정(滄浪亭), 원대의 사자림(獅子林), 명대의 졸정원(拙政園)과 유원(留園) 등이 대표적인 원림으로 꼽히고 있다.

    유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쑤저우의 9개 정원에 속한다. 19세기 후반 청나라 황실의여름 별장이었던 베이징 이화원과 함께 중국 4대 명원에 속한다. 명나라 만력 21년(1593) 벼슬을버리고 고향 쑤저우로 돌아온 서태시(徐泰時)가 꾸민 작은 정원이 그 시초다. 후대에 유서(劉恕)가정원을 확장하면서 유원(劉園)이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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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원은 19세기 말 청나라 동치 연간에 성강(盛康)이 정원을 사들여 크게 보수하였다. 성강은 정원의 명칭을 자신의 성씨를 따 바꾸려고 했지만 유 씨 집안의 반대로 음을 맞추어 유원(留園)으로 개칭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오래도록 천지간에 머문다’는 의미의 장유천지간(長留天地間)에서 유(留) 자를 따왔다고 한다.

    유원은 중앙에 연못이 있고 서쪽과 북쪽은 인공 산, 동쪽과 남쪽은 정자와 누각 등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웬만한 구릉보다 낮은 서쪽과 북쪽의 인공 산에는 대나무와 활엽수가 무성해 숲의 정취가짙다. 함벽산방(涵碧山房)과 명슬루(明瑟樓) 등 자연의 일부가 된 목조 건물들은 장식이 정교하고아름답기가 그지없다. 한겨울 눈이 내리면 연못에 비친 명슬루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을연상시킨다고 한다.

    유원에선 중국 전통 공연의 원류로 알려진 곤극(昆劇)을 매일 감상할 수 있다. 곤극은 14세기 장쑤성에서 탄생한 시, 음악, 노래, 연기, 춤의 총체극으로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재이자 베이징 경극의 모태이다. 생황, 퉁소, 피리 등 전통 악기의 반주 속에 부드럽고 우아한 노랫가락과 대사를 선보인다. 쑤저우의 사대부와 부유층이 향유하던 세련되고 정제된 가무극은 유원의 정갈한 운치에 맑은 기품을 드리운다.

    유원의 관운봉(冠雲峰)을 비롯해 쑤저우의 정원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가산(假山) 풍경이다.가산은 이름 그대로 인공 산을 말하는데, 정원 연못 주변과 담장에 태호석(太湖石)을 쌓아올려 능선과 봉우리처럼 꾸몄다. 제각기 고유한 형태와 묘미를 자아낸다. 이는 가산을 이루는 태호석의 다양함에서 기인한다. 태호석은 기기묘묘한 형상의 석회암으로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나 있다. 이것을 서로 맞물리며 정교하게 쌓아올려 다채로운 형태의 가산을 만든다.

    꽃과 나무, 정자와 연못이 어우러진 가산은 계절별로 서로 다른 풍경을 빚어낸다. 여름산은 생명력이 약동하는 듯 들쑥날쑥하고, 겨울산은 눈으로 덮인 듯 고요한 느낌이다. 장쑤성 사가원림의 주인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장 안으로 옮겨와 사계절의 풍취를 향유했던 셈이다.

  • 서기 605년 수(隋) 양제는 대운하 건설을 천명한다. 황제의 명으로 6년간 공사 끝에 베이징에서 항저우를 잇는 1764㎞ 길이의 내륙 수로가 완공된다. 두 도시의 머리글자를 딴 징항(京杭) 대운하가탄생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로 꼽히는 징항 대운하는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장쑤(江蘇), 저장(浙江)성을 관통하며 창장, 하이허(海河), 화이허(淮河), 첸탕(錢塘) 강과 만난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강남의 운하를 모두 아우른다.

    현재, 대운하는 장쑤성 서쪽 창장 삼각주 지역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창장 이북으로는 1000t급, 이남으로는 500t급의 선박이 운항돼 수상 고속도로로 기능하고 있다. 산둥성 지닝(濟寧) 이북의 대운하가 물길이 끊기는 등 원형을 잃어가는 것에 비해 장쑤성의 대운하는 1400년전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중국이 징항 대운하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한 배경에도 원형을 간직한 장쑤성의 대운하가 자리해 있다. 대운하는 장쑤성 여행과도 불가분의 관계이다. 성도(省都)인 난징(南京)을 비롯해 쑤저우, 양저우등 대다수 도시들이 대운하의 세력권 안에 놓여 있다.

    수 양제는 대운하가 건설되자 자신의 업적을 되새기려는 듯 빈번하게 장쑤성을 찾아왔다. 숨을 거둔 이후에도 생전에 천도를 감행했던 뤄양(洛陽)이 아닌, 양저우(揚州)에 묻혔다.

    수 양제 이후 당대에서 청대까지 다른 왕조의 황제들 역시 운하 수로를 따라 장쑤성으로의 순행을즐겼다. 황제의 주유(舟遊)는 궁녀와 환관, 대소신료, 호위군사 등 수만 명이 동행하는 방대한 규모였다. 황실 패키지 여행단을 맞이하는 장쑤성의 관리와 토호, 거상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황제의

    환심을 얻으려 했다. 중국 대륙의 내로라하는 정원과 독특한 산해진미가 장쑤성에 즐비한 이유가여기에 있다. 양저우, 쑤저우 등 장쑤성의 도시들은 황제를 맞이하고 보내면서 여행지로서의 매력이 무르익게 된다.

    실핏줄처럼실핏줄처럼 도시를도시를 감싼감싼 운하운하

    장쑤성 지도를 보면 주요 도시는 운하가 거미줄처럼 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대운하 건설이후 장쑤성의 물자와 인력은 대부분 수로를 통해 오갔다. 대운하와 창장이 만나는 양저우가 대표적이다.

    양저우는 창장의 북쪽 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춘추전국시대 말기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성벽을쌓은 것이 도시의 기원이다. 수 양제가 수백만 명의 인력을 동원해 대운하를 건설하면서 물류와 상업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창장과 화이허(淮河)를 이어주면서 중국 내륙의 산물과 해안의 산물의교역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강남의 곡물은 양저우를 통해 베이징과 톈진(天津)으로 옮겨졌다.특히 소금 교역량이 많아 염정(鹽政)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양저우의 염상(鹽商)들은 대를 이어가며 막대한 부를 축적해 문학과 예술을 후원, 양저우를 장쑤성 최고의 문화도시로 만들었다.

    수서호(瘦西湖) 풍경구는 문화도시 양저우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양저우에서 첫째가는 명승지이다. 도심을 가운데 두고 길고 가느다란 형태의 호수와 수십 가닥의 물길이 나 있다.

    수 양제는 항저우의 서호를 본떠 수서호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양저우 외곽에 창장의 물을 끌어들여 인공 호수를 만들고 그 호반 위에 정원과 숲을 조성했다. 황제가 양저우에 머무는 동안 물안개 피어오르는 수서호에서는 연회와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목조 유람선을 타고 물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면 옛 성곽과 누각, 그림 같은 원림(園林)과 교각을 감상하는 맛이 일품이다.

    양저우의 수려함에 반한 것은 수 양제만이 아니었다. 송나라 휘종과 고종도 양저우에 침궁을 지었다. 특히 18세기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룩한 건륭제는 남방을 순회하면서 양저우에 여섯 번이나 찾아와 머물렀다. 수서호를 수놓는 교각 중 당대에 건립된 이십사교(二十四橋)는 조형미가 특히 뛰어난데, 건륭제가 양저우를 방문할 때마다 즐겨 찾은 곳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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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저우 여행에선 고운 최치원(崔致遠)의 발자취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 고운이 당나라에서 학문을

  • 양저우 여행에선 고운 최치원(崔致遠)의 발자취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 고운이 당나라에서 학문을닦고 관리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 양저우이다. 12살에 유학을 온 고운은 5년 만에 과거시험(빈공과)에 급제하고 양저우에서 회남절도사 서기 생활을 한다. 그는 뛰어난 문장과 업무 수행 능력으로 지역 내 유력자들의 인정을 받았다. 특히 반란군 황소(黃巢)를 토벌하자는 내용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당대의 명문으로 꼽혀 중국 전역에 그의 이름을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양저우 시정부는 지난해 가을 수서호와 잇닿은 당성유지(唐城遺址)에 최치원 기념관을 개관했다.‘당나라 하늘에서 빛난 신라의 별’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고운의 동상과 관련 사료를 전시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승인한 최초의 외국인 기념관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9세기 이역만리에서 시심(詩心)과 문장을 키웠던 신라인이 21세기 한국과 중국의 문화 교류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태호는 중국에서 3번째로 큰 호수이다. 제주도와 거제도를 합한 면적보다 더 넓어 바다처럼 다가온다. 아열대해양성 기후 지역으로 산물이 풍부해 예부터 호수 연안에 성읍과 도시가 발달했다. 또한 호반 경치가 수려해 왕조시대에는 상류 계층의 여행지로, 현재는 영화와 TV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정평이 났다. 삼국성, 수호성 등 시대별 사극 제작을 위해 조성된 대규모 세트장도 마련돼 있다.

    태호의 역사는 3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나라 태자인 태백(泰伯)이 우시(無錫)로 이주해 백성들을 교화시켜 대규모 수리 사업을 벌였다. 태백은 또한 백성들에게 농경과 양잠을 가르쳤고, 이것이 강남 문명의 시작인 오나라를 낳았다. 현재 태호는 쑤저우와 우시 두 도시가 호수를 양분해 관광지와 공업단지로 개발하고 있다. 두 도시 모두 쌀과 수산물이 풍부해 어미지향(魚米之鄕)으로 불린다. 특히 우시는 난징과 상하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교역 도시로 일찍부터 경제와문화가 발달했다.

    영산영산 풍경구의풍경구의 세계세계 최대최대 대불대불(大佛大佛)

    우시에는 명승고적이 즐비하다. 세계 최대의 대불이 위치한 영산(靈山) 풍경구도 그 중 하나다. 태호에서 멀지 않은 영산 풍경구는 당나라의 고승 현장법사가 이름을 지었다는 소영산(小靈山)의 산허리를 깎아 조성한 불교문화 관광지이다.

    영산 풍경구 초입에는 인도 불교를 부흥시킨 아소카 왕의 석주(石柱)가 수문장처럼 세워져 있다.직경 1.8m, 높이 16.9m의 화강암 기둥으로 ‘백정도 칼만 놓으면 당장 부처가 된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석주 꼭대기에는 4마리의 돌사자가 세상을 향해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내고 있다.

    ‘각오(覺悟)의 길’로 불리는 보리대도(菩提大道)와 ‘등운(登雲)의 길’로 불리는 216 계단을 올라 영산 중턱에 도달하면 88m 높이의 청동 대불이 하늘을 찌를 듯 위용을 드러낸다. 발톱 하나의 폭이거의 1m에 육박하는 방대한 크기의 입상이다. 그 앞에 놓인 높이 8.8m의 청동 향로가 소품처럼 보일 정도다. 대불과 향로의 높이를 보면 숫자 8이 반복된다. 물론 우연은 아니다. ‘돈을 많이 번다’는 의미의 ‘파차이(發財)’의 파와 발음이 비슷해 중국인이 유난히 좋아하는 숫자 8의 위세가 영산 풍경구에서도힘을 잃지 않은 것이다. 대불이 딛고 선 연화대의 꽃잎에는 몇몇 사람과 단체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대불 조성에 일정 금액을 시주한 경우라고 한다. 물질에 대한 갈망과 그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 교차하고 있다.

    영산 대불은 특히 중국의 전통적인 불교 예술과 현대 과학의 융합으로 일컬어진다. 설계 단계부터부식과 지진, 태풍과 회오리바람에 손상되지 않도록 첨단 기술이 반영됐다. 설계 회사는 상하이의

  • 부식과 지진, 태풍과 회오리바람에 손상되지 않도록 첨단 기술이 반영됐다. 설계 회사는 상하이의상징으로 통하는 둥팡밍주(東方明珠) 타워를 설계한 화동건축설계원이었다. 1994년 가을 착공했는데 청동 주조 박판 2000장을 용접해 완성시켰다. 대불을 청동으로 만든 것은 고대 중국 예술의정수가 대부분 청동으로 제작됐기 때문이다. 용접 길이는 총 35㎞에 이르는데, 치밀하고 조형미가뛰어나 멀리서 보면 늘어뜨린 옷의 주름이 더없이 자연스럽다.

    불심이 일렁이는 사원들은 태호 동쪽에 자리한 쑤저우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한산사(寒山寺)와 자금암(紫金庵)이 대표적이다.

    6세기 초 남북조 시대에 창건된 고찰 한산사는 축조 당시에는 묘리보명탑원(妙利普明塔院)이라불리었다. 당나라 정관 연간에 고승 한산화십득(寒山和拾得)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995년 완공된 42m 높이의 팔각목조 보명보탑(普明寶塔)이 대표적인 건축물이다.보명보탑 꼭대기에 오르면 옛 쑤저우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한산사는 문학적인 사찰로도 정평이 났다.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가 지은 ‘풍교야박(楓橋夜泊)’을비롯해 유명 문인과 고승들의 작품이 석각 형태로 전시돼 있다. ‘풍교야박’은 중국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전각 뒤쪽 종루에는 청나라 광서 연간에 한 일본인이 바친 대종이 걸려 있는데, 매년 섣달그믐이면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수천 명의 일본 여행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물론 연말연시가 아니더라도 나룻배에 올라 풍교 아래에서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옛시인들의 시정을 느껴볼 수 있다.

    쑤저우 태호 동산(東山) 풍경구에 자리한 자금암은 당나라 시대 창건된 사원으로 16존의 나한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한상들은 남송의 조각가 뇌조(雷潮) 부부가 흙으로 빚어낸 소상(塑像)이라고한다. 그 표정과 자태가 생생하고 제각기 독특하다. 청나라 건륭 연간인 1761년 축조된 정인당(淨因堂)은 기둥과 들보 등이 녹나무(楠木)로 이루어져 있어 ‘녹나무홀’로 불린다. 녹나무는 예부터지체 높은 이들의 목관에 사용됐다. 은은한 갈색 빛깔의 정인당을 통해 쑤저우의 경제적 번영이 유구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Information

    난징(南京), 양저우(揚州), 쑤저우(蘇州), 우시

    (無錫) 등 장쑤성의 주요 도시를 일주하는 여정은 ‘박애(博愛)의 여행’으로 일컬어진다. 신해혁명의 주역인 쑨원(孫文)의 인도주의 정신을반영해 붙여진 이름이다. 지난 2000여 년 동안10개 왕조의 도읍지로서 고색창연함을 선보이는 난징, 대운하와 정원의 도시로 꼽히는 양저우와 쑤저우 등 유적과 볼거리가 많아 사계절내내 관광객으로 붐빈다.

    일반일반 정보정보 장쑤성은 동쪽은 황해, 서쪽은 안후이(安徽)성, 남쪽은 저장(浙江)성, 북쪽은 산둥(山東)성과 접해 있다. 면적은 남한과 비슷하다.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해 춘추전국시대부터 여러 왕조가 도읍을 정하고 번성했다. 특히 명대에 이르러 경제 발전으로 인해 인구가

    급증해 쑤저우, 양저우, 전장(鎭江) 등이 상공업 도시로 발돋움한다. 특히 조선업이 발달했는데, 명

  • 급증해 쑤저우, 양저우, 전장(鎭江) 등이 상공업 도시로 발돋움한다. 특히 조선업이 발달했는데, 명영락제의 후원 아래 7차례에 걸쳐 남해원정(南海遠征)을 이루어낸 정화(鄭和)의 대선단이 출발한곳도 장쑤성이었다. 장쑤성은 15세기 세계 최고의 경제력과 조선술을 갖춘 지역이었다. 최근 장쑤성은 중국 경제를 대표하는 상하이(上海)의 핵심 배후 기지로서 명대의 영화를 회복하는 중이다.중국의 변화와 발전을 이끄는 엔진 역할을 하고 있다.

    교통편교통편 장쑤성 여행은 난징이나 상하이를 기점으로 삼는다. 난징에서 시작하면 상하이에서 마치고, 상하이에서 시작하면 난징에서 대미를 장식한다. 아시아나항공의 인천-난징, 인천-상하이(푸둥공항), 김포-상하이(홍차오공항) 노선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난징, 쑤저우, 양저우, 우시 등은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관광지로 대중교통이 발달해 있다. 관광안내지도만 손에 쥐면 굳이 택시를 탈 필요 없이 버스로도 얼마든지 여행할 수 있다. 관광 명소를 연결하는 전용 버스가 자주 운행된다. 골목이 많은 관광지에선 자전거 인력거를 이용하면 편리하다.인력거 요금은 이용 전 미리 흥정을 마치는 게 좋다.

    비자비자, 환율환율, 시차시차 중국 입국 비자는 30일 단수의 경우 발급 비용이 개인 4만5000원, 단체 2만5000원이다. 발급 소요 기간은 4일이며, 여권과 반명함판 사진 1장이 필요하다. 환율은 4월 중순 매매기준율로 보면 1위안이 약 140원이다. 시차는 중국 전역이 서울보다 1시간 늦다.

    관련사이트중국국가여유국 서울지국 www.cnto.or.kr장쑤성 여유국 www.jstou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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