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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어문학』제87호

(2008. 6): 97-124

차이의 윤리에서 합일의 윤리로의 이동:

데리다, 레비나스, 라캉과 노자에서 들뢰즈와 장자로*1

이 재 성(부산대학교)

I. 서론

우리는 동양의 학자들로서 오늘날의 서양의 문학과 예술의 비평이론

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해내고 있는가? 우리 동양의 학자들은 영문

학에서 비평이론을 연구하기 때문에 우리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에

무관심하고 서양의 이론을 배우고 익히기만 해도 되는가? 필자는 그렇

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동양인들로서, 그리고 한국의 학자들

로서 우리의 정체를 소홀히 취급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면 이 문제

를 어떻게 다루기 시작해야 할 것인가? 우선 지금까지의 동양 철학과

서양 형이상학의 합일을 목적자체로 삼는 생각은 흔히 오리엔털리즘이

라는 개념으로 대변되는 바의 동양을 비화하는 생각을 확대시키거나,

반대로 동양 사고가 서양의 논리적 사고보다 매우 심오하고 한 단계

위라는 식의 결론에 도달한 사례들이 많이 있어왔다. 그러한 연구는 하

나가 되어가는 세계의 예술과 학문, 문화에 근본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길이 아닐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 동양과 서양의 만남은 아무래도 현재

학문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서양의 이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밝

히는 작업으로 시작되고 그 필요를 동양의 사상으로 보완해야 동서양

모두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해체론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서구에서 발전을 더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계열의 담론, 그 중에서도 윤리학 계통에 위치하는 담

* 이 논문은 2006년 정부(교육인적자원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KRF-2006-321-A0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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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움직임을 동양의 장자의 도 사상을 이

용하여 발전시키는 목적을 갖는다. 이 논의의 중요한 기반은 윤리학적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 중 데리다와 레비나스, 라캉

등이 자아와 그 자아의 근본적 외계로서의 타자의 차이와 분열을 중시

하는 반면 들뢰즈는 자아와 타자의 하나 됨을 부각시킨다는 점이다. 이

렇게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어온 차이를 중시하는 현재의 해체론적 서

양의 사고는 과거의 형이상학보다 오히려 주체와 타자의 진정한 만남

으로 발전될 가능성을 더 많이 내포한다. 데리다와 레비나스, 라캉의

이론보다 들뢰즈의 초월적 존재론이 자아와 타자의 진정한 근본을 추

구한다는 것을 논증한 후 장자에서 그 예를 듦으로써 자아와 타자의

합일이 어떻게 문학과 영화 작품을 대하는 독자나 관객의 마음을 이끄

는 가를 탐구하려한다. 물론 한국의 이퇴계와 이율곡의 철학등도 이용

할 수 있으나 본고의 논의는 동양, 그것도 장자로 국한하기로 한다. 들

뢰즈와 장자를 같이 읽음은 모더니즘까지의 논리성을 진정으로 벗어나

감성, 특히 초현상적 감각에 더욱 관여하는 비평이론을 창출시키고자하

는 필요에 따른 것이다. 문학 뿐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의 비평에도 이

용하여 실제 비평이론화 함이 본고의 최종목표이다. 본 논문의 지면상

문제로 인하여 다른 철학자들의 사고와는 다른 성격을 갖는 라캉의 정

신분석학에 대한 논의는 많이 다룰 수없는 어려운 점이 있음을 서두에

밝혀둔다.

II. 자아와 타자의 "차이" - 데리다, 레비나스, 라캉, 그리고

노자

포스트모더니즘은 혹여 이미 시대착오적인 사상이라고 하는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료따르(Francis Lyotard)등을 비롯한 많은 영미권의 학

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제 겨우 시작단계에 있음을 명확히 해두고

싶다. 특히 영미권에서 각광을 받은 데리다의 해체론과 라캉의 포스트

구조주의, 레비나스의 포스트모던적 윤리학, 들뢰즈로 대표되는 포스트

모더니즘 등이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고, 명칭과 내용을 달리하는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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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론들의 중추적 기반이 되거나 더 나은 발전을 이룩하도록 공헌

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과 이론의 발전에 이제는 동양의 사상도 한 몫

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포스트모던 윤리학자인 레비나스와 포스

트모던 존재론자들인 들뢰즈와 거타리가 의미하는 바의 “초월”과 “내

재성,” 그리고 노자가 말하는 “도”의 공통성을 비교함으로써 시작하기

로 한다. 눈에 보이지 않고 인지의 체계에 흡수되지 않는 진정한 초월

로 향하는 길로서의 도는 인간의 근본적 연결과 상호의존이 현상적으

로 감지되는 것보다 한 단계 위의 차원에서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자아

혹은 주체의 생각과 느낌 등의 현상을 진정으로 초월한 단계이다. 도는

일상의 의미에서의 생각이나 느낌으로 형성되는 현상적 주체, 시간과

공간 안에 갖혀 있는 주체(또는 자아)의 존재를 초월하는 초현상의 영

역, 재현의 가능성이 없는, 자아의 현존의 온전한 외계(the outside, the

exterior)를 온전히 받아들인 상태라 하겠다. 느낌과 생각을 진정으로

초월한다함은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재현될 수 없는 초현상의 수준을

의미한다.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것은 자아의 현존의 온전한 외계는 포스트모

더니즘/포스트구조주의에서 일컬어지는 타자와 같은 영역을 의미한다

는 것이다. 데리다와 레비나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의 다른 주된 학자들이 의미하는 바의 “타자”(the other)는 많은 경우에

서 오인되듯이 단순히 “남”이라거나 주체와 그의 편에 속하는 사람들

의 집단으로부터 무시당하고 따돌림 받는 타인이나 집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의 기본적 능력은 대상을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그

것이 어떤 것이라고 결정하는 인지의 능력인데, 타자란 이러한 자아의

인지 내지 인지능력의 온전한 외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타자는 특히 종

래의 서양철학에서 논의되어온 “초월적 기의”(transcendental signified)

가 될 수 없다. 다른 한 인간이나 국가 등을 타자라 할 때에도 주체의

인지가 미치지 못하는 온전한 바깥인 타자성을 지녔고 따라서 자아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러한 인간이나 집단을 의미한다. 타자성의 영

역은 초현상의 영역이고, 자아와 타자의 관계가 형성되는 영역 역시 초

현상, 혹은 전현상 내지 준현상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는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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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현존하게 하는 순수한 연결성이 원문자를 통하여 그 자취를 남긴

다는 생각으로 기존의 말하기 중심의 서양 형이상학을 공격하는 한편,

레비나스는 그러한 순수한 절대타자성(alterity)은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다는 윤리학을 주장한다. 자아와 그 외계로서의 타자는 들뢰즈와

라캉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이렇게 타자를 타자로 보게 된 역사적 사실을 그 이전과 비교하여

명확히 하자면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와서야 이렇게 그 어느 수단에 의해서도 표현

될 수 없는 온전한 바깥이 존재(Being)와 존재자들(beings)의 차이가 사

라져버려 알 수가 없다고 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등에 의해 이

해되기 시작했고, 타자성의 초현상성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20세

기 중후반에 명성을 얻은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 이

었다. 데리다는 그의 초기저작부터 고도의 체계와 능수능란한 언어구사

력으로 서양형이상학의 전통을 해체해오며 철학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

비평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쳐온 바임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데

리다 자신 뿐 아니라 그의 해체론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문학비평의 체

계를 세우는 이론가들은 해체론이 타자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데리다에 비해 인간의 근본적 윤리를 강조하는 레비나스가

일컫는 주체는 종전의 철학에서 의미하는 현상적 자리를 차지하는 주

체가 아니라 초현상적, 윤리적 자아, 타자에 대하여 (초현상적 차원에

서) 윤리적 복종을 하는 자아, 말하자면 복종을 뜻하는 subjection의 준

말로서의 subject이다.

그러나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데리다와 레비나스, 라캉 등은

주체와 타자의 만남과 합일되는 과정보다 차이가 만들어 지는 과정에

그들의 논의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그 둘이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보다 분리에 역점을 둔다는 점이다. 합일보다 차이와 분리에 역점을 두

는 현상이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가 시작하여 지금까지 진

행되어온 바의 자아와 타자의 차이에 대한 담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

은 당연한 추세라 하겠다. 왜냐하면 모더니즘까지 추구해온 합일의 형

태는 주로 현상 내에서의 융합을 뜻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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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 형태를 해체시키는 큰 학문적 흐름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스

트들이 흔히 공격하는 주 대상은 플라톤(Plato)의 이데아, 데카르트

(René Descartes)의 코기토,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변

증법 등이다. 그들은 크게 보면 모더니즘까지 진행된 철학, 그 중에서

도 현상적인 전체와 그에 의한 결정이 가능하다고 논증하는 것에 결정

적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이는 플라톤, 데카르트, 헤겔 등의 철학을 그

들의 주 공격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데리다는 현상적 구조를 해체하여

근본적인 차이를 밝히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 그는 그의 이론의 근저

를 형성하는 초기 에세이 「차연」(Différance)에서 서양의 형이상학이

무시해온 “차연은 현존하지 않으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떠한

형태도 갖지 않는다”(...that différance is not, does not exist, is not a

present-being (on) in any form)는 점을 여러 각도에서부터 보며 설명

한다(6). 그가 말하는 차연은 하나의 현상과 다른 현상(들)간의 차이가

아니라 현상과 그 외계인 초현상의 차이이다. 즉 초현상인 바깥에 접근

하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현상적 결정도 그것의 외계와의 “차이”에 압

도당하며 그 재현이 계속 “연기”됨을 의미한다. 차연을 문학과 예술 작

품의 이론에 적용해보면, 독자/감상자는 그 예술작품의 (현상적인)주제

가 나타날 가능성이 항상 차연에 의해서 불가능해짐을 깨닫게 된다고

하겠다. 즐거움과 고통 등의 현상적 감정으로 이루어진 자아는 이렇게

틀이 해체되어 외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미학적 순간은 주체가

순간적으로나마 “도”(Tao)를 경험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레비나스의

진정한 즐거움(enjoyment)와 라캉의 쥬이상스(jouissance)등이 그러한

순간적 체험이다. 노자가 말하는 바의 “도”(the Way)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레비나스가 의미하는 바의 초현상의 절대윤리를 실현하는 “초월”

의 상태, 혹은 라캉에 의하면 실재와 만나는 상태에 이름이라고 하겠으

며, 독자가 문학 텍스트를 읽을 때에 순간적으로 이러한 상태에 이른다

고 하겠다. 독자의 자아는 텍스트를 통하여 외계로 향하게 되고 근본적

윤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현상적 결정이 끝없이 유보된다함은 비

결정의 상태가 계속됨을 의미한다. 결코 헤겔의 변증법적 합일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다. 헤겔의 변증법적 합일은 주체와 객체간의 현상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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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합일로서 다른 현상이 일어남을 의미하며, 이러한 점은 절대정신

이 아무리 초현상으로 이끄는 힘이 된다는 뜻이 헤겔에 의해서 의도되

었다 하더라도 현상의 단계에서 벗어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필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독자의 현상적 자아 혹은 텍스

트의 현상적 주제의 가능성이 해체된 상태가 이미 초현상적인 영역에

서 그 차이를 통하여 외계와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비결정성

(undecidability)은 서양철학의 전통 안에서는 약함과 불완전함, 여성의

상태, 혹은 혼돈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무시되어 왔지만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모더니즘까지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비결정성은 결정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약한 상태, 여성과 어린

아이의 상태를 일컫는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사고는 노자가 『도덕

경』(Tao-te Ching)에서 부드러운 여성성이 강인한 남성적 결정력보다

진정한 강인함의 상태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6, 10, 36, 40, 45, 51, 52

장)과 같다.2 『도덕경』 29장은 이러한 상태를 어린아이와 같이 약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근본적으로는 온전한 힘을 지닌 상태임을 밝힌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에게 비결정성이 중요하다하더라도, 데리다와 레비

나스, 라캉은 남성자아를 포함한 일반적 의미의 자아와 힘의 구조의 해

체에 역점을 두며, 노자 역시 현상에서 벌어지는 힘의 구조를 허무는

생각의 필요성과 그 결과를 설파한다. 그러나 그들은 해체의 필요성에

서 더 나아가 초현상적 합일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도덕경』 57

장에서 노자가 자신은 조용함을 좋아하며 그 어떠한 의식적 목적도 없

고 (현상적)욕망도 없음을 밝히는 대목을 보는데(“I love quietude… I

tend to matters without conscious purpose…I am utterly free of

desire…”), 이 정도로 논리가 부족한 이야기로는 문학과 예술의 독자/

감상자의 의식의 움직임, 그리고 인간의 삶이 말로 할 수 없이 많은 차

이로 가득하다는 것을 설명해냄으로써 문학과 예술 사회를 비평하고

발전시킬 수는 없다.

1 노자와 장자, 그리고 그들이 한말이 기록되어있는 서적들은 다른 동양의 사상가들의 경우와 마찬 가지로 영어철자법이 여러 가

지이다. 노자와 장자는 Lao Tzu, Chuang Tzu에서 Laozi, Chuangzi, Zhuangzi등으로 변해왔으며 지금도 혼용되고 있다. 도덕경은

Tao-te Ching에서 Dao-te ching으로 변하였다. 필자는 가장 좋은 영역을 고르다보니 Laozi, Chuang Tzu 등 일치하지 않는 철자법

이 사용된 서적을 사용하였고, 도덕경은 Tao-te Ching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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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유한한 자아와 무한한 외계와의 "합일" - 들뢰즈

이제 차이와 비결정성보다 초월적 합일에 그의 사상의 초점을 맞추

는 들뢰즈의 철학과 장자의 도 사상을 탐구하기로 한다. 들뢰즈는 현재

의 인문학에서 인간의 순수욕망과 무한에 대한 포스트모던 윤리의 생

각을 진척시키되 그 이론의 형태를 실제적 삶의 존재에 그 바탕을 둔

존재론(하이데거의 존재론보다 포스트모던적으로 발전된)에서 찾고 있

는 대표적 이론가이다. 들뢰즈가 자아의 역동적인 힘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 뿐 아니라 서양의 형이상학 전반, 그리고 동양의

사상도 공히 이분법을 모든 현상을 파악하기 위한 근본 방법으로 여겨

져 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양의 음양의 차이에 대한 사고

와 지금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다루는 유무(presence and absence)의

차이에 대한 생각은 일치한다. 모든 현상은 근본적으로 이분 되어있어,

그 이분이 다양성의 근본이고 모든 현상의 시작점이다. 이분이라 함은

남자와 여자, 하늘과 땅, 기쁨과 슬픔의 감정, 음과 양 등의 모든 반대

되는 양태를 지니는 현상의 이종적(heterogeneous) 성격을 뜻할 뿐 아

니라 더욱 근본적으로 현상의 있음과 없음을 뜻한다. 물론 다양성과 자

유가 중요하고 다원주의가 중요한 가치를 지님은 사실이나 하나의 현

상(a phenomenon)의 근본은 이분이다. 들뢰즈는 거타리와의 공저인

『반 오이디푸스』(Anti-Oedipus)의 시작부분에서 모든 것이 그 근원이

이분되어있는 기계(binary machines)라고 부르며 그 이분은 욕망과 함

께 이해되어져야 함을 역설한다(5). 이분은 역시 거타리와의 공저인

『천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의 첫 장에서 모든 현상이 어느

방향으로도 진행될 수 있는 자유로운 형태를 취하는 라이좀(rhizome)의

현상을 설명하며, 사실 들뢰즈는 그의 모든 저서를 통하여 이렇게 철저

히 다원적인 자유로움을 강조한다. 노자도 『도덕경』 전반을 통하여

이분된 상태의 조화가 모든 현상의 근본이 음과 양이나 그 이상의 복

합의 형태로 진행됨을 설명한다.

물론 차이보다 합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의 기본은 데리다의 사고와

정면으로 배치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데리다보다 라캉과 레비나스의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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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에서 더 분명한 단서를 잡을 수 있다. 라캉은 그의 정신분석학에서

자아가 자신의 틀을 깨고 그것의 외계와 초현상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정신적 단계를 설명한다. 라캉에 의하면 자아는 상상계와 상징계

를 거치며 형성, 성장하며 실재계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러한 라캉의

설명을 자아의 정신적인 현상에 대한 임상적 해석으로만 볼 수는 없다.

사실은 실재가 항상 근원적 욕망을 가동하는 원천의 힘으로 정신현상

기저 혹은 너머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초

현상적)타자성도 실재와 매우 흡사한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레비나

스는 그의 윤리학에서 자신의 구조를 허물고 타자에게 (초현상적으로)

복종(subjection)을 하는 의미의 주체(subject) 나아가는 주체는 결코 그

구조가 와해된 주체일 뿐 아니라, 자아를 버렸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완

전한 조화(perfect harmony)를 가질 수 있게 된, 말하자면 제 2의 자아,

새로운 단계의 주체를 설명한다. 이러한 자아는 타자에 의해 해체될 뿐

아니라 그 해체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자아를 일컫는다고 하겠다. 들뢰

즈의 윤리에 대한 설명은 자아의 타자에 대한 직접적(차이에 대한 설명

에 치중하지 않는) 접근의 윤리라 하겠다. 이러한 흐름의 주된 힘이 되

는 철학가가 들뢰즈이다. 들뢰즈의 사상을 논의함에 있어 항상 유의되

어야 할 점은 들뢰즈가 말하는 합일이란 현상적으로 성립하는 개념으

로 이루어지는 논리와 감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초현상적 감각의 영역

에서 이루어지는 합일, 즉 단순히 현상적으로 파악되는 존재로서의 주

체와 객체의 융합이 아닌, 주체와 타자의 초현상적인 합일이라는 점이다.

다시 데리다로 돌아가 문학비평의 문제를 다루어보기로 하자. 데리다

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작품 전체가 지니는 그 어떠한 주제도 결정과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주어진 문학작품의 주제와 같이 보이는

생각은 다른 생각들과의 차이로 인해서 주제로 정해질 수 없고, 다양한

가능성이 공존한다는 것은 그 중 어느 것도 주제로 선택될 수 없고, 게

다가 그러한 결정이 계속 연기됨으로써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

한다. 결국 그 어떤 주제가 가능하다는 판단은 끝없이 보류된다. 그런

데 그 어떠한 판단도 보류된다 함은 동시에 그 모든 판단이 동시에 가

능하다는 역설로 귀착된다. 그 어떤 주제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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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주제가 가능하다는 매우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초현상의

차원이 아니라 현상의 차원에서는 윤리를 형성하는 방법은 차이와 연

기일 뿐이다. 즉 텍스트는 이미 자신을 해체하고 있으며, 독자를 그 해

체의 과정으로 독자의 자아를 이끈다. 텍스트는 독자에게 자기해체의

과정을 보여주고, 독자는 텍스트가 어떻게 자기해체를 하는가를 이해하

고 그 이야기를 따라감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아의 틀을 허물고 타자로

향하게 된다. 사실 텍스트가 자기해체를 한다는 생각은 해체론의 태두

에서부터 성립해왔다. 그러나 들뢰즈는 그의 직접적 접근의 윤리학을

통하여 텍스트가 이렇게 독자의 자아로 하여금 그 현상적 (논리적이거

나 감성적인) 틀을 벗고 진정한 외계인 타자로 향해 나아가도록, 즉 자

아가 타자로 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러나 해체론 이후에 차이에 의한 연결이 새로운 의미의 차원으로

부각되는 학문적 흐름이 주체와 타자의 차이에 대한 담론에서 더 나아

가 양자의 초현상적 합일에 대한 사고로 선회해오고 있는 것이다. 데리

다가 타자보다 해체 그 자체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 레비나스와

라캉은 주체가 자신의 구조가 해체되며 외계로 향할 때에 진정한 즐거

움 (enjoyment)이나 쥬이쌍스(jouissance), 혹은 서브라임(the sublime)이

라 일컬어지는 감각을 느끼게 됨을 밝힌다. 레비나스와 라캉에 의하면

문학과 예술 작품의 주 역할은 독자/감상자의 자아를 쥬이상스를 통하

여 그 외계인 절대타자로 이끄는 것인데, 쥬이쌍스는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 수반되어 하나가 된 상태이다. 들뢰즈는 주체와 그 대상

이 하나가 되는 과정의 설명에 모든 힘을 쏟는다. 그런데 들뢰즈가 대

상이라 함은 현상적 존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매우 중요

하다. 들뢰즈의 “생성” 혹은 “됨”은 근본적, 원초적인 변화이므로 주체

가 상대로뿐 아니라 자신을 향해서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즉 들뢰즈

는 현상적 차원에 머무는 주체가 그 틀을 벗고 다원적으로 변하며 결

국 초현상, 즉 초월의 영역에 다다르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초월

이 있기 때문에 현상적 주체가 그 틀을 벗고 다원적으로 자신을 변화

시키며 그 변화는 무한성으로 향한다.

들뢰즈는 주체의 욕망으로 존재론적 초월관을 시작한다. 주체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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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를 분리하는 힘은 외계로 향한 주체의 근본적 욕망이다. 물론 이분

된 상태로 존재하는 욕망은 현상적 성격이 있기 때문에 주체의 객체에

대한 욕망이라고 표현되지만, 모든 현상의 기저에 있는 힘으로 작용하

는 이 욕망은 현상의 틀을 깨고 그 범주를 벗어나려는 욕망이다. 이러

한 욕망은 이미 현상의 차원의 위에, 즉 현상이 생기기 전 단계에 위치

하며, 그 무엇을 필요로 하거나 가지고 싶어 하는 욕구가 아니다. 『반

오이디푸스』에서 설명되듯이, 이 욕망은 그 어떠한 것도 결핍하지 않

으며(Desire does not lack anything), 더 나아가 욕망과 그것의 대상이

하나이며 같은 것이라고 한다(Desire and its object are one and the

same thing)(26). 어떻게 이러한 말이 가능한가? 욕망과 그 대상이 정말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결핍이 없는 욕망은 대해서는 레비나스와 라캉도

탐구한다. 데리다는 자신의 이론인 해체론에서 욕망의 문제를 관련시키

지 않지만 레비나스는 이 순수욕망을 현상적 대상이 없는 “형이상학적

욕망”(metaphysical desire)라고 부르며 자신의 윤리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삼는다. 들뢰즈의 욕망의 개념 또한 그 무엇도 결여하

지 않는 욕망이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주체의 외계를 직접적으로 타자

라고 명명하며 초현상성(초월성)과 무한성이 타자성의 특징임을 주장하

지만 들뢰즈는 초현상과 현상이 만날 때에 무엇이 생성되는가를 다각

도로 설명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차연의 영역에 속하는 순수욕망을 지

닌 기계는 아무 결여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그 자체가 욕망하는 대상

이 없고, 따라서 그 위치가 고정되어있지 않고 유목민과 같이 자유롭게

이동하며 무엇이든 그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욕망과 그것의 대상은 하

나이다. 그러나 들뢰즈의 이러한 말을 다원론 정도에 머무는 철학으로

성격 지울 수는 없다. 들뢰즈는 그의 전 저서를 통하여 주체의 최종적

대상은 현상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 자아의 바깥임을 설명

하고 있다. 결핍이 없는 욕망이란 그 어떠한 부족이나 결핍도 없고, 따

라서 뚜렷한 현상적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욕망이기에 그 어떠한

현상도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서두에 밝혔다시피 라캉에 대한 논의에 많은 지면을 할애할 수는 없

으나, 모든 구조를 초월하는 실재가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근본적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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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윤리에서 합일의 윤리로의 이동107

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필자는 라캉 역시 온전한 타

자성에 대한 욕망을 그 기초로 하고 있다고 믿는다. 라캉의 이론에서는

자아의 진정한 바깥이라는 의미의 타자성은 실재(the Real)에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라캉은 특히 욕구를 채우기 위한 필요(need)에 대한 개

념으로서 욕망(desire)을 논의하는데, 그 욕망은 바로 레비나스가 의미

하는 형이상학적 욕망, 그리고 들뢰즈와 거타리가 가리키는 바로 그 순

수욕망이다. 『정신분석학의 윤리』(The Ethics of Psychoanalysis)에서

라캉은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에 의해 시작될 때부터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현실과는 다른 윤리적 차원을 가리켜왔다고 하며, 그는 또한

자신이 필요와 욕망의 차이를 설명해왔음을 확실히 하고, 욕망에 대한

그러한 연구는 윤리에 대한 탐구에 필수라고 한다(207). 다만 필자가 본

논문에서 문학비평이론에 영향을 주어온 사상가들을 다루고 있는 바로

는, 데리다, 레비나스와 함께 분류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 주된 이유

는 정신분석학은 임상적으로 환자를 고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따

라서 철학보다 구조적 설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조의 설정 자체

를 중요시하지 않는 들뢰즈와, 그리고 장자와는 다르다고 보기 때문

이다.

순수욕망에 대한 생각은 차이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 자

아의 욕망이 그 외계와 합일하려는(직접적으로 접근하려는), 타자가 되

려는 힘이라는 이야기이다. 거타리와의 공저가 아니라 혼자만의 글인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에서 들뢰즈는 강도는 차이

그 자체라고 한다(“Intensity is difference” 223). 여기서 욕망, 강도와

차이라는 모든 것이 모두 초현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힘이다. 들뢰

즈는 그가 말하는 강도(intensity)란 것은 현상적인 강도(extensity)가 아

닌 초현상적 강도임을 분명히, 그리고 거듭하여 밝힌다. 들뢰즈는 같

은 페이지에서, 주체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초현상적 강도는 현상적 차원

에 이를 때에 그 자신을 부정하고 삭제하여 현상적 차원에 이르러서는

강도로서의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고 한다. 들뢰즈는 이렇게, 주체와

그 외계와의 차이를 만드는 진정 형이상학적인 욕망은 결핍과 필요에

서 생기는 욕심이 아닌, 현상적, 존재론적 관계형성을 위한 의식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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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성108

입되지 않은 관계임을 역설한다. 진정한 합일은 초현상적이며 탈구조적

인 욕망을 토대로 하며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상

적 욕심이 없어지고 초현상적 욕망으로 다다르는 것이 주체의 목표이

며 진정 욕망과 그 대상이 하나가 되는 과정, 혹은 순수생성의 과정이

다. 이 순수생성이 계속 일어나는 현상과 초현상의 중간단계는 차이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양자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단순히 차이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들을 합일로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설명

구체적 예들은 『천개의 고원』에서 많이 나타난다. “라이좀”(rhizome)

은 바로 그 차이들을 차이로만 보지 않고 그 자체를 합일에서의 조화

와 화합으로 보는 방향이다. 라이좀은 현상적으로 하나를 만든다든가

다원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내재성의 평면은 다양성 바

깥에 있다(『천개의 고원』 21). 다양성과 차이들은 주체가 개입할 때에

가능한 것이다. 다양성과 차이들 자체들이 하나가 되어 현상으로 나타

날 때에 “기관 없는 신체”가 가능한 것이고, 들뢰즈의 철학은 이렇게

주체와 타자의 차이보다 주체와 타자로의 직접적 접근을 설명하는 방

법으로 진행된다.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에서 순수생성에 대한 많은

예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를 이해시키려 노력한다. 자아와 타자의 분리를

강조하는 데리다와 레비나스와는 달리 분리를 통해 합일로 나아가는

됨을 강조한다. 욕망과 그 대상이 하나이며 같다고 하는 말은 데리다와

레비나스, 라캉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들뢰즈의 독특한 말이다. 이것

이 필자가 주체와 대상의 차이를 중요시하는 세 사람에 대비해서 들뢰

즈는 합일을 추구한다고 보는 이유이다. 따라서 들뢰즈의 됨/생성이라

고 하는 말을 주체가 현상적인 대상과 하나가 되어버린다든가 무슨 결

론에 도달한다든가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들뢰즈 철학의 오해이

다. 들뢰즈는 현상의 근본인 초현상적인 차이가 생기는 영역에서 일어

나는, 합일로 향한 생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

을 것이다.

들뢰즈/거타리가 생성 혹은 됨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아의 바깥에서

근본적 차이를 형성하는 리듬이 생기는 것, 즉 자아가 현상적인 무엇으

로 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상적 변화의 근본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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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윤리에서 합일의 윤리로의 이동109

만드는 초현상적 변화를 가리킨다. 의식이 개입되지 않고 논리를 넘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됨에 대하여 들뢰즈/거타리는 된다고 하는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하고 진실 된 것이며 과정의 현상적 끝이 없음을 특히

『천개의 고원』에서 반복하여 설명한다(238). 자아와 타자의 합일이 추

구되는 합일의 영역, 순수욕망과 됨이 지향되는 영역에 대해서 그들의

마지막 공저인 『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Philosophy?)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들뢰즈/거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자

유로운 욕망의 움직임에서 이루어지는 생각도 “생각”(idea, thought)이

라고 표현하는데,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무한으로 향한 끊임없는 움직

임을 형성한다. 결국 순수욕망은 유한성을 넘어서려는 무한에 대한 욕

망인 것이다. 무한에 대한 욕망을 형성하는 생각은 유한한 현상과 존재

의 영역에 속하는 “개념”을 초월하는 상태이다(『철학이란 무엇인가?』

36-49). 무한이란 자아의 유한성의 영역 밖을 일컫는다. 들뢰즈와 거타

리는 주체의 무한에 대한 순수욕망은 결핍을 기본으로 하지 않는 내재

적 생성능력, 즉 초현상적으로 자신을 자신과 구분하여 새로운 자신을

만드는 힘이 있음을 밝히고, 그러한 상태를 “내재성의 차원”(the plane

of immanence)이라고 부른다. 내재성은 초현상적, 초월적인 내적 강도

로 자아와 외계의 합일이 추구되는 영역이다. 여기서 추구된다 함은 결

코 그 결론이 내려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상적인 재현은 불가능

한 영역이다. 이 내재적 생성은 데리다의 차연보다 훨씬 더 자아와 그

바깥의 합일을 추구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데리다의 차연은 자아

의 유한과 타자의 무한성이 차이를 보이고 그 차이가 연속되어 결정이

계속 유보되는 것을 설명해 주는데, 이것은 유한에서 무한을 보며 그

무한으로부터 나오는 힘으로 하여 유한성이 계속 만들어짐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라고 본다. 차이에 초점을 두는 데리다와 달리 레비나

스는 타자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지만 타자의 무한성이 어떻게 유한 안

으로 들어오는 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반면 존재론자인

들뢰즈는 타자는 현상적인 자아가 의존하는 대상이란 점에서 현상적

존재를 중요시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자아는 자신의 유한성에 만족할

수 없고 타자의 무한성과 하나가 되기를 욕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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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성110

들뢰즈의 존재론적 사고의 특색은 타자의 무한성이 다원론적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임을 확실히 하고 그러한 영역을 따로 떼어서 설명

하는 인상을 줄 정도로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존재론적 해석이기

는 하나 분명히 주체의 바깥인 타자의 무한성과 존재를 합일시키는 사

고이다. 들뢰즈는 니체(Nietsche)의 영원회귀 사상에 의지하여 타자의

무한성을 이해하며 존재의 다양성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 초현상적 차

이들은 (초월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강도)인 무한의 차원으로 다시 태

어나 그 차원을 달리함을 설명한다(『차이와 반복』 241-43). 차이들은

그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주체의 유일성과 외계 혹은 타자의 새로운 합

일의 차원으로서 부각된다.

나아가 들뢰즈는 타자를 선험적이어서 표현될 수 없는 대상이며 오

직 가능성의 표현들의 중심을 차지할 뿐임을 명료하게 말한다(260-61).

결국 주체의 순수욕망과 순수생성은 현상적으로 특정한 객체를 대상으

로 하지는 않으며 그것의 초현상적 대상은 무한이라고 할 수 있다. 타

자와 함께하려는 욕망은 시공에 의해 제한되는 자아의 유한성의 틀을

깨고 무한의 영역으로 나아가려는 열망을 의미하며, 이 끝없는 타자성

에 대한 욕망이 바로 레비나스가 그의 윤리학에서 강조하는 바이고, 라

캉이 그의 포스트구조주의 정신분석학에서 열성을 다하여 파헤치고 있

는 바이다. 물론 들뢰즈/거타리는 레비나스가 설명하듯이 무한성을 지

닌 타자를 직접적으로 자아의 대상이라고 분명하게 하지는 않으나, 들

뢰즈(와 거타리)는 레비나스와 라캉이 강조하는 자아와 타자의 분리보

다 양자의 합일을 향하여 나아가는 두 사상가의 노력을 보여준다. 들뢰

즈와 거타리는 분리를 통해서보다는 합일의 방향에 역점을 둠으로써

자아의 자유로움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장자』에서도 보

인다. 장자는 많은 예를 듦으로써 독자의 마음을 논리의 한계선 위로

향하게 하여 준다. 『장자』 23장은 완벽한 사람은 (원천적으로 자기중

심적인)자아를 가지지 않는다(The Perfect Man has no [egoistic] self)고

하며 34장도 도는 그 어떠한(현상적, 존재론적 욕망의 의미에서의)욕심

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장자의 이러한 말은 곧 초현상적 욕망을

이룬, 즉 타자와 합일되어 그 무엇이나 현상적 대상이 될 수 있는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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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윤리에서 합일의 윤리로의 이동111

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주체가 곧 득도를 한 주체라고 하겠으며

현상을 초월하는 주체, 그러나 동시에 그 어떠한 현상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주체라 하겠다. 니체와 베르그송(Bergson), 스피노자(Spinoza)

등의 철학들을 기저로 하며 존재론적 입장을 취하는 들뢰즈는 거타리

와의 공저들에서는 “초월”(transcendence)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를 터

부시하는 것 같은 자세를 취하나, 『의미의 논리』(Logic of Sense) 등

자신만의 저작에서는 “초월”(transcendence)이라는 단어와 그에 따르는

설명을 매우 많이 한다는 사실은 중시해야 한다. 레비나스와 들뢰즈가

쓰는 초월이라는 단어는 서양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해온 바의 초

월과는 전혀 다르다.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일컬어져온 초월은 현상적,

존재론적 초월로서, 지고의 존재를 의미하는데, “초월적 기표”라고 불

리어져야 할 것으로,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그 유사계열의 사상가들에

게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지적하건대, 레비나스는 데

리다와 라캉과 같이 자아의 현상적 영역과 타자의 절대성, 초월성의 영

역이 나누이는 차이의 문제를 “절대타자”(the wholly other) 등의 개념

을 사용하여 확고히 강조하는 반면 들뢰즈와 거타리는 그 차이의 영역

이 자아와 타자의 합일로의 길임을 존재론적으로 탐구한다. 물론 들뢰

즈와 거타리가 의미하는 합일은 재현될 수 없는 합일, 즉 차이 그 자체

를 합일이라는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들뢰즈와 거타리는 차이를 통한

연결성에 역점을 두는 있는 것인데, 그들이 연속성, 일관성(consistency)

을 매우 중요시하는 것도 차이를 정지가 아닌 연속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앞서 본 들뢰즈의 언급에서처럼)자아의 안과 밖이

같으며 하나가 된다는 식의 자아의 내부와 외부를 등치시키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들뢰즈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포스

트모더니즘의 근간이 되는 자아와 타자의 “차이”를 온전히 인정하고

초현상적 타자성을 가진 타자를 받아들인다 함에서 더 나아가 그 차이

로 이루어지는 초현상적 연결과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합일을 추구

한다는 말은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하나가 됨과 다르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하다. 데이비드 홀(David Hall)은 동양사상은 포스

트모더니즘이 당면한 문제를 공유하며, 사상의 여러 흐름들 중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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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성112

도교(Taoism)를 그러한 맥락으로 하는 대표적 예로 보고 있다(701). 홀

이 수많은 차이의 생성을 가히 우주적 차이로 이해하며 그것을 받아들

이는 것이 합일이 이루는 장으로 보는 것은 들뢰즈의 생각과 같다고

하겠다. 제임스 클락(J.J. Clark) 등이 동양사상에 관하여 사고하며 주장

하는 바도 동양사상의 연구가 서양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추구하는 차이

의 인정을 성취하는 데에 큰 공헌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차이가 범

우주적이라 함은 마치 거미집과 같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어, 그 차이

로 이루어지는 초현상성이 들뢰즈의 용어로는 내재성이 연속, 일관되게

만들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우주적으로 펼쳐지는 차이를 모두 받아들임

은 일관성의 수준(plane of consistency)을 받아들임을 의미 한다. 동양

의 도 사상가들이 생각했던 바를, 비록 사고의 방식은 다르지만, 25세

기가 지난 현재 차이의 리듬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니체의 명제위에

자신들의 생각을 정립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그 부류의 윤리학자

들이 생각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이러한 사고를 문학비평이론 분야에서

이용할 방법은 독자가 그 자신과 그가 읽는 텍스트의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주체의 틀을 해체하고 외계(이미 자신의 중심에 위치하는 타자)

와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그 자체가 외계와 하나가 되는 과정을 밝히는

것이 할 일이라고 하겠다.

들뢰즈와 거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작가들은 예술적 감성을 통

하여 이렇게 인간을 정의하는 틀이 무너지고 동물이 “되는” 경험을 한

다고 한다. 동물이 된다고 함은 인간성의 독특성, 인간만이 속한다고

여겨져 온 이성과 논리의 영역을 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

아서는 기괴한 형상이라고 할 수 있는 동물이 됨은 존재가 근본적으로

동일화되는, 구분이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동물의 형태와

성질의 영역이 아니라 초현상의 차원에서 현상위의, 즉 인간의 이성을

포함한 모든 것의 초월의 영역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그러

나 이 영역이 차이가 소멸된 영역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

로, 주체가 모든 차이를 다 받아들이는 영역이다. 됨이라 함은 다른 것

이 아니라 그 자신이 된다는 말이며 곧 근본적, 원천적으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변화를 의미한다(“becoming itself”238). 이런 의미에서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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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윤리에서 합일의 윤리로의 이동113

는 그 자체가 이미 다수로 형성되어 있으며(하나의 원칙으로 정해져있

지 않은) 다른 다수형성체로 가는 문 혹은 문턱이다(249).

동물이 된다는 것은 현상으로 존재하는 작가의 정체성이나 혹은 그

의 생각 혹은 개념이 바뀌게 되는 상태가 아니다. 그들이 의미하는 됨

이란 인간성의 유일함의 허물을 벗고 동물성에 동참하는 “부자연스러

운 참여”(unnatural participation)이다(240). 들뢰즈/거타리는 이 인간이

동물이 되는 부자연스러운 참여를 뱀파이어의 존재에 비유하고 있다.

그들은 뱀파이어의 관계형성은 의식적인 결정을 통하여 되는 것이 아

니라 감염을 통하여 된다고 하는데(242), 이 감염이 행해지는 영역은 인

간과 동물의 현상적 경계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중간단계이다. 뱀파이어

는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죽었으나 “죽어있지 않은”(Un-Dead) 상태

(『드라큘라』 Dracula 191), 즉 두 군데 모두 속하거나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뱀파이어는 현상으로 형성

하는 자아의 존재와 외계의 초현상의 상태가 같이 있는 상태이다. 이러

한 상태를 주제로 하는 문학텍스트인 『드라큘라』, 나아가 『프랑켄스

타인』(Frankenstein)과 같은 고딕소설과 그것들의 영화작품의 분위기는

무섭고 으스스한 현상적 분위기를 넘어서 자아와 그 외계의 중간인 초

현상적인 영역으로 독자의 의식을 향하게 하여준다. 고딕문학의 특색은

으스스한 분위기를 형성하여 읽는 주체인 독자의 자아로 하여금 자기

해체를 하며 진정한 무한으로 향하도록 하는 힘이 강하다는 것이다. 크

게 보면 『매트릭스』(Matrix)와 같은 공상과학영화 역시 이러한 맥락

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문학과 예술 작품의 진가는 독자/감상

자를 현상에서 초현상으로 이끄는 힘에 있다고 볼 것이다. 레비나스의

표현에 의하면 무한, 자아의 외계의 그림자로서 그 실체를 표현하는 텍

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공통적으로 이성과 개념형성의 힘을 잃고 마치

불면의 상태와도 같은 현상을 체험 하도록 한다(Collected Philosophical

Papers 1-13). 그 체험은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자신의 틀이 무너지는

느낌에서 유발되고, 거기서 주체로 돌아오지 않는 생각이나 느낌이 일

어남을 말한다. 주체를 승인하지 않고 오히려 초현상으로 사라져버리는

느낌을 의미한다. 들뢰즈 역시 타자를 선험적이어서 표현될 수 없는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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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성114

상이며 오직 가능성의 표현들의 중심을 차지할 뿐임을 명료하게 말한

다(260-61). 그러나 들뢰즈는 레비나스의 논지에서 더 나아가 인간성을

의미하는 이성과 논리의 붕괴를 더욱 확대, 강조하는 것이다. 다른 말

로 하면 근원적 차이에 인한 잉여감각의 영역이라고 불릴 수 있는 초

현상적 단계에 대한 논의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설명하는 문학과

예술의 비평이론에 유효하게 쓰여야 함에 틀림없다. 예술의 힘은 꿈결

같은 감각의 흐름을 통하여 감상자의 자아로 하여금 그 바깥을 경험하

게 하는 것이라고 하여 틀림이 없을 것이다.

들뢰즈는 문학작품들의 예를 가장 많이 드는 『의미의 논리』 등에

서 생성이 어떻게 존재적 현상과 연결되는 가를 설명한다. 순수생성의

영역은 구체적 신체 조직이 없는 기관의 영역인데, 그것은 구체적인 사

항들(organs)과 기관(the body)의 표면의 사이의 순수함의 차원으로서,

아무것도 없는 부재가 아니라 가능성의 잠재의 영역이다(222). 물론 데

리다와 레비나스도 그들의 해체론과 윤리학을 통하여 이 순수연결(pure

textuality)의 차원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들뢰즈는 이 순수함의 중간차

원을 따로 분리하여 그 영역의 항상성(consistency)과 그 영역에서 이루

어지는 자유로움을 설명, 강조한다. 들뢰즈는 중간차원을 여러 생각과

행동들이 퍼져서 각각 존재하기만 하는 다원성의 차이를 넘어서는 단

편적 표면(single side)이라고 한다(220). 이 진정한 의미의 초월성인 형

이상학과 가시성의 중간단계는 라캉이 의미하는 아버지 내지 남근의

힘이 제거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없어진 연결이 결여된 조합

(disjunctive synthesis)의 상태(227; 229)이고 성의 구분까지 없어진

(desexualized) 근본적 인간본연의 자아의 차원이다.

IV. 서양사유를 발전시킬 감각에 대한 묘사: 장자

이제 이러한 논의가 어떻게 장자와 연결되어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지를 자세히 생각해 보자. 우선 장자도 노자와 같이 진정한 욕망과 지

식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며, 득도는 모든 욕심을 버린 공(空

emptiness)안에서만 가능함을 설명한다(『장자』 4장). 그러나 노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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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윤리에서 합일의 윤리로의 이동115

자아가 해체된 상태에 역점을 두고 장자와 같이 더 큰 합일의 필요성

을 중시하지는 않는다. 데리다가 차이와 연기에 대한 설명에 초점을 맞

추고 있고 합일의 단계로 진입하지는 않으며, 다른 포스트모더니트들은

주체의 틀이 깨어지는 과정을 정치한 이론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함에

반하여 노자는 이미 그 틀이 깨어져 이기심이 없고 의식적으로 바라는

바가 없는 주체의 상태를 자신이 직접 경험하여 이야기하지만 장자와

같이 모든 차이가 합일로 승화한 단계를 확대하지는 않는다. 장자가

“이것과 저것이 서로를 잉태 한다”("This" and "that" give birth to

each other)고 할 때에 그는 물론 단순히 하늘과 땅, 선과 악, 남성과

여성 등의 현상에서 이루어지는 보완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적 차이들의 근원을 가리키며, 그 근원적 차이가 초현상적 합일

(transphenomenal synthesis)로 승화됨을 의미한다. 노자보다 훨씬 자아

의 외계에 대한 직접적 접근의 설명이다. 장자가 꿈에서 깨어난 직후

자신이 나비 꿈을 꾼 장자인지 아니면 나비였는지를 모르는 상태에 있

었다고 하는 것은 자아내지 의식의 주체와 그 대상 간에 들뢰즈가 의

미하는 바의 중간영역, 필자가 논하는 바에 의하면 현상과 초현상의 합

일이며 이미 초현상적인 차원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겠다. 꿈

을 꾼 장자이거나 나비나 모두 느낌이 재현하는 이미지로서, 현상의 차

원에서는 구분이 가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데리다보다는 합일

을 중요시하는 레비나스가 이 중간영역을 표현하며 사용하는 용어는

깨어있지도 잠들어있지도 않은 불면의 상태(insomnia)이다. 그러나 레

비나스가 깨어있다 함은 진정 초현상적 타자와의 직면 상태에 있음을

일컫는 말이고 불면상태는 그가 예술작품이 감상자의 상상력을 자극하

고 이성의 힘을 반감시킨다는 약간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하는 말이

다. 즉 레비나스는 현상의 영역인 자아와 초현상의 영역인 타자의 합일

보다는 그 차이를 밝히기 위한 의도로 중간단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과 현상의 근본을 이루는 이분현상에 대한 장자의 양쪽의

차이보다 하나 됨을 중시함은 그 자신은 세상이 의미하는 바의 기뻐하

는 감정이나 불행한 감정을 가지지 않으며, 결국 세상은 (현상적으로)무

엇이 옳고 그른지 결정할 수 없다고 한다(『장자』 112). 그의 감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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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성116

결정성에 대한 생각은 그의 언어관과도 일치 한다. 장자는 표현을 하는

기능을 지닌 언어는 고기를 잡는 그물의 기능을 할 뿐이며 그러한 언

어가 해체되어야 진정한 언어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140). 장자의 언어

관은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기능을 하는 언어로서가 아니라 초현상적

인 합일을 이루는 언어관이다. 현상적 언어는 존재하여야 하나 그 현상

적 언어가 만들어내는 생각과 느낌 이상의 초현상적 차원에서만 가능

한 합일을 위한 (이미 초현상적인)연결망 내에서의 움직임은 최종진리

로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길로서의 감각을 지닌 상태이고, 그것이 도

(道)라고 하겠다. 그러나 장자의 도와 그 큰 합일을 추구하는 태도에 대

한 설명은 노자의 것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장자에게는 차이를 인정하

는 상태 그 자체보다 그것이 일구어내는 합일의 상태, 더 나아가 세상

의 근본으로서의 차이를 의미한다. 들뢰즈 역시 현상과 초현상의 차이

를 인정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양쪽의 (이미 초현상적인)연결과 합일을

추구한다고 보인다. 들뢰즈와 장자의 사유는 데리다, 레비나스, 그리고

노자의 생각보다 주체와 타자의 합일에 대해서 분명 훨씬 적극적이다.

그러면 장자는 그러한 길인 도를 현상의 범위 안에서 이루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장자가 썼다고 판단되는 『장자』는 쿤(K'un)이라

불리는 세상을 뒤덮을 정도로 큰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새의

이야기는 『우주의 조화』(Universal Harmony)라는 제목의 책에 기록되

어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장자』 전권을 통하여

매우 많이 등장한다. 서양의 형이상학자들에게는 이러한 이야기는 매우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으로만 비추일 것이다. 장자가 이렇게 현실적으

로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현실적으로 당장

가능한 것들만을 계산하고 사는 인간들의 협소한 마음을 비웃는 것이

라 여겨진다. 이렇게 보면 장자의 말은 있는 그대로 믿어버릴 이야기도

아니고 지어낸 허구라고 치부해버릴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

나 장자가 말하는 큰새 역시 하나의 의미를 지닌 이미지이다.

그러면 장자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장자가 나타내려는 바는 도

를 추구하는 길은 그 어떤 기표로 형상화된 사상 등을 받아들이고 그

것에 따라 삶과 예술을 분석하기보다 현실의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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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윤리에서 합일의 윤리로의 이동117

들이는 간단함의 중요성이라 할 것이다. 자아가 그 외계와의 중간에 위

치하는 중간매개자 없이 곧바로 초현상적 진리로 도달할 수 있는 길

(unmediated access)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언어

예술인 문학을 논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의 주제를 정하고

왜 그 주제가 타당한 가를 설명하는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작품이 어

떻게 그 자신의 구조를 허물고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를 상징의 현상적

구조위의 차원에서 세상을 보도록 큰 마음상태를 가지도록 이끄는 가

를 설명하는 것이다. 문학작품을 읽음에 있어, 그 현상적 언어가 구성

하는 내용이 독자의 마음을 어떤 사상이나 주제로 이끌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이 설립하는 것 같이 보이는 구조를 허물고 나아가

그 어떠한 주제도 가능하지 않음을 깨닫게 됨으로써 독자로서의 주체

는 그 외계를 받아들이고 우주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생성들을

받아들이는 감각의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작품을 이루는 인물들과 사

건들은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독자의 마음을 그러한 초현상

의 항상성을 지닌 도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장자는 자아의 생각의 능력을 포기할 때에 진정 자유를 누린다고 한

다. 그는 완전한 사람은 자아를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The Perfect Man

has no self)(26). 이 말이 들뢰즈의 사고와 함께 다루어지면 서양사상을

발전시키는 데에 공헌할 것이다. 아무리 완전한 사람이라도 “자아를 가

지지 않는다”함은 현재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도 강한 표현일 것이

다. 그러나 자아를 가지지 않는다는 말은 사물을 구분하는 능력을 허물

고 그 바깥과 하나가 됨을 의미하며, 안(현상)과 밖(초현상)이 구분될

뿐이다. 이것은 들뢰즈의 용어를 빌자면 "기관 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s)라 하여 틀림없을 것이다. 장자는 또한 이러한 순간은

자아의 옳고 그름의 판단위에 진정한 사랑이 행해지는 순간이라고도

한다. 물론 전통적, 통상적 차원에서 보면 불일치와 혼돈의 영역이나,

타자와의 초현상적 합일이라는 생각으로 보면 이 영역은 모든 차이들

이 전체(the Whole)를 이루며 조화, 합일, 화합이 되는 영역이며 그 가

치는 온전한 조화(perfect harmony)에 있다고 한다(70).

이렇게 자아의 틀이 허물어져야 형성되는 감각의 상태는 현재 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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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성118

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이다. 즉 해석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

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예술작품, 타인, 타그룹 등의 뚜렷한 대상에

대한 자아의 해석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쥬이상스를 논의하고 있는데,

장자는 현실의 진정한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간단함을 주장

한다. 이렇게 표현될 수 없는 전체성은 들뢰즈보다 레비나스가 그의 논

리적인 글을 통해 많이 설명하는 바이다. 들뢰즈 역시 반복적 설명과

수많은 예를 통해서 이 현상위의 전체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장자

는 이 두 학자들이 설명하는 방법보다 더욱 해석을 거치지 않는, 직접

적인 방법으로써 전체성에 도달하기를 자세한 설명보다는 자신의 경험

과 예에 의존하며 가리키는 것이다. 장자가 가리키는 바를 비평의 방법

에 적용해보면, 예술작품에 대한 논리적 해석으로서의 해체보다는 미세

한 감성을 통하여 그것이 가리키는 초현상으로의 길을 만나는 것이라

고 하겠다. 작품과 내가 하나가 되는 길은 자아의 진정한 바깥인 타자

와 자아 사이에 현상적 중간단계가 부재함을 의미한다. 작품과의 합일

을 통하여 우주적 차이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V. 합일로 향하는 시간 이미지

이제 영화의 비평에 이용될 수 있는 들뢰즈의 시간관에 대해 이야기

함으로써 자아와 그 외계의 합일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려한다. 현상적

영역의 자아와 초현상적 타자와의 관계는 생각과 언어뿐 아니라 시간

의 유한과 무한으로도 나누어짐은 베르그송(Henry Bergaon)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유한한 자아의 생각과 감각, 언어가 무한을 추

구하듯이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은 무한으로 이어지는 것이

다. 들뢰즈는 『영화 I: 움직임-이미지』(Cinema 1:the Movement-image)과

『영화 II: 시간-이미지』(Cinema 2: the Time-image)에서 베르그송의 시

간관을 (자신의 의견을 곁들여가며)상세히 설명하며 프랑스영화들과 할

리우드영화들에서 많은 예를 들고 있다. 들뢰즈는 영화에 관한 이 두

서적에서는 시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주체의 감성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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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윤리에서 합일의 윤리로의 이동119

성적 판단의 문제와 시간의 문제는 떨어져서 각각 이해될 것이 아니라

둘 다 독자의 의식이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자기해체를 경험하고 타자

와 합일이 된다는 필자의 논제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위의 두 저

서에 나오는 들뢰즈의 움직임과 시간에 관한 생각 역시 이 중간차원에

뿌리를 둔다. 이렇게 중간단계의 순수함을 지니는 이러한 이미지는 인

간의 가장 순수한 단계로서 현상적 관계위에서 이루어지는데, 들뢰즈가

무관계의 관계인 이 관계는 현상에 의하여 굴절되어진 간접적 시간이

미지이가 아니고 “직접적”인 시간이미지이다. 들뢰즈의 시간과 그 시간

안의 움직임에 관한 생각은 보통 여겨지는 바의 시간의 세 부분이 이

렇게 합쳐지자 나누어지는 근본을 향하고 영화에 그러한 순수시간이

가장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먼저 『영화 I』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

의 테두리 속에 그 틀이 정해지지 않는 움직임을 정의하고 설명한다.

“직접적”이라는 말은 자아의 근본적 움직임의 이미지가 현상으로 그

형태가 정해지지 않는, 일상적 의미의 기쁨과 슬픔 등의 감정적, 심리

적, 논리적인 상태가 무너지는 영역이다(56).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실재

태와 잠재태를 설명하며 현상적 현재를 초월하는 시간의 틈으로 우리

를 안내한다. 과거는 이미 우리의 인지로 확인이 되고, 현재의 가장 중

심을 차지하는 위치는 말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간대가

같이 모여 구분되지 않는 상태, 초현상의 상태를 의미한다. 과거에 대

한 기억에서 나오는 이미지(recollection-image)는 잠재태가 아닌, 생각

하는 사람의 지각활동에서 그 구조와 성격이 결정지어진 현상적, 존재

론적 이미지일 뿐이고 이것은 들뢰즈가 수정같이 맑은 시간(crystal

time)이라고 부르는 바, 현상적 시간의 바깥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구

조 바깥의 시간은 우주적 차이들이 모두 전체를 이루는 시간이다. 외계

의 시간은 장자가 의미하듯이 자유와 무심의 시간이다. 모든 차이들이

그 현상적 모습을 드러내기 전 단계 혹은 그러한 현상을 초월하는 단

계에서의 시간은 구속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받아드리고 우주의 조화

를 따라가는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의 영역은 모든 차이가 초현상적으

로 합일을 이루는 영역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자아가 그 외계인 타

자로 향하며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장자는 이러한 순간을 도로 향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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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성120

문지방이라고 한다(35).

『영화 II』에서 들뢰즈는 직접적으로 순수한 이미지로 더욱 구체적

으로 이루어지는 영화에서의 예들을 보여준다. 들뢰즈는 이 순수한 시

각적 청각적 묘사들이 어떻게 고다르의 영화 등에 녹아들어 있는가를

설명하는데, 특별히 플래시백(장면의 과거시간으로의 순간적인 전환)을

사용하는 『시민케인』(Citizen Kane)의 논의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행해졌거나 행해지고 있는 사건들의 연속으로서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

일반인 잠재태가 진정 시간의 중심인 것이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어

우러져 미래의 진실을 형성하는데, 현상이 형성되기 전인 현재의 중심

이자 공백이 직접적 시간이미지(direct time-image)로 표현된다. 이 직

접적 시간이미지에는 과거, 현재, 미래로의 흐름을 형성하는 연대성이

배제되어있다. 시간을 이렇게 파악해보면, 절대과거와 인간의 인지가

그러잡을 수 없는 현재의 현존만이 있을 뿐 통상적 이미지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이러한 직접적 시간이미지를 형성하는 매우

좋은 작품으로 『시민케인』을 꼽는다. 영화는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

기자에 의해서 진행되는데, 그 기자가 네 사람을 만나 신문 왕 케인의

주변의 다섯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플래시백

을 통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대를 형성하는 연결점은 없어지고,

따라서 시간은 단일성의 실체로서의 흐름으로 정의될 수 있는 가능성

의 범위를 벗어난다. 이것은 관객의 주의를 막대한 부와 성공을 이룬

주인공 케인의 삶의 중심의 공허함으로 이끄는 효과를 지닌다. 그의 인

생을 결론짓는 이름인 “장미봉오리”(rosebud)가 케인의 이혼 후의 두

번째 부인의 성기를 뜻하는 것은 미국인의 꿈을 가난한 자들과 흑인들

을 위한 삶을 살아서 진정으로 위대해질 뻔 했었던 주인공 케인의 삶

이 퇴색하고 무너진 것을 풍자하고 비웃는 역할을 한다. 케인은 노래를

못하는 두 번째 부인을 위하여 오페라 하우스를 짓고 그녀를 유명 성

악가로 만들려고 하고 그녀는 자신이 스타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

기 때문에 케인이 원하는 것으로부터 고민하다가 자살을 하고 만다. 이

와 같은 고집으로 삶을 사는 케인은 기껏 해 봐야 그 자신의 애착을

의미하는 장미봉오리와 같은 것으로 표현될 수 있을 뿐 진정 남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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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윤리에서 합일의 윤리로의 이동121

위한 연결 끈과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그 두 번째 부인도 따라서 “장

미봉오리”가 뜻하는 케인의 인생의 중심은 강인한 남성의 힘을 해체하

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주인공의 성격의 해체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의 해체와 함께 진행된다. 영화가 자신

을 보여주지 않는 기자에 의해 진행되는 것은 내용을 로맨틱하고 주관

이지 않은 상태, 좀더 객관적인 상태로 만들어 들뢰즈가 말하는 직접적

시간이미지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다.

즉 직접적 시간이미지로 향하는 영화는 케인의 현상적인 주관이 배

제되는 영역, 과거, 현재, 미래로의 시간이 그 틀을 잃어버리는 자기해

체의 힘으로 관객을 이끄는 것이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간접적으

로 자기해체를 경험함으로 인하여 타자로 향하도록 한다. 근원적, 초현

상적 차이들이 합일과 조화를 이루는 길은 장자가 말하는 도로 향하는

길이라고 하겠다. 도는 이렇게 자아가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외계를

받아들이며 깨치고 본원적으로 하나를 이루는 초현상적 영역이다.

필자는 『시민케인』에서처럼 플래시백의 효과가 잘 발휘되어 직접

적 시간이미지를 탐구하는 작품으로 『나비효과』 (The Butterfly Effect)

를 들겠다. 『시민케인』과는 이야기 전개의 방식은 다르지만 플래시백

을 통해 현재의 중심이자 모든 현상의 공백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형식

은 같다. 『나비효과』는 『백투더퓨쳐』에서와 같이 삶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과거로 돌아가 그 근원을 제거해버리고 현

재로 돌아오면 그 현재가 바람직한 상태로 고쳐져 있을 수 있는 허황

된 시간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즉 전체 중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한 부분을 고치려고 하면 그 부분 뿐 아니라 나머지 요소들도 뜻한 바

대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인간의 인지가 예상할

수 있는 현상 이상의 차원에서 결합되고 섞여져 있어, 마치 매우 작은

나비의 날개 짓이 크고 맹렬한 선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과 같이 예측

을 불허하는 전면적인 움직임으로 변형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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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결론

이론적 논의와 문학과 영화의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연구를 통하여

독자/감상자의 자아가 텍스트를 통하여 평범한 구조를 허물고 그 외계,

혹은 타자로 나아가는 것이 차이의 형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차이의 형성 그 자체가 합일을 뜻함을 검증해 보았다. 우선 서

양철학의 전통에 반기를 들기는 하지만 바로 그 서양철학을 모태로 하

고 있는 포스트모던 윤리학은 자아와 타자를 나누며 그 차이의 나타남

을 분석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는 점을 명료히 하려 하였다. 그런 다음,

차이를 중시하는 이론보다는 자아와 타자의 합일, 현상과 초현상의 합

일, 텍스트를 통한 독자와 타자의 합일에 역점을 두는 이론을 데리다와

레비나스, 라캉 등보다 나중에 각광을 받고 있는 들뢰즈에서 보고 도의

사상가로서는 노자보다 장자가 차이보다 합일을 강조함을 확실히 하려

하였다. 본고에서의 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학비평이론에서 다루어

지는 “희열,” 쥬이상스, 서브라임(enjoyment, jouissance, the sublime,

bliss) 등의 개념들과 직결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이 논의의 효과가 앞으로의 문학과 예술비평에 동양철학을 이용하여

앞으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계열의 비평이론을 발전시

키는 데에 조금이나마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소수의

서양 학자들이 다원성의 문제, 세상을 존재하도록 만드는 차이와 비결

정성, 자아와 타자의 분열을 이해하는 방법 등에 있어 동양의 철학에서

배우려고 하였으나 대다수의 동양의 학자들은, 특히 문학비평이론의 분

야에서는, 서양의 이론을 배우는 데에 치중하고 동양의 사상은 무시하

는 경향이 있어온 것이 사실이라고 본다. 이제 우리 동양 사상도 신비

성으로 대변되는 성격에서 벗어나 서양의 포스트모던 윤리학의 발전에

공헌을 할 때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주제어: 합일의 윤리, 레비나스, 들뢰즈, 장자, 시민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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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윤리에서 합일의 윤리로의 이동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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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성124

From the Ethics of Difference to the Ethics of Direct

Access: Moving from Derrida, Levinas, Lacan, and

Laozi to Deleuze and Zhuangzi

Lee, Jae Seong

Abstract

Among theorists of postmodernism and/or poststructuralism, Derrida,

Levinas, Lacan concern themselves mainly with the difference between self

and other, whereas Deleuze stresses becoming oneness and union and go on

to consider and describe the transphenomenal relation as a separate

dimension. This paper starts with a revelation that the other is not just a

person ignored by majority. All these scholars define the other as the

exterior, or outside, of the self or subjectivity. This direction of studies from

the separation to the (postmodern sense of) union can be developed with

Oriental ideas because Oriental thought in general builds up the way of

viewing the union of cosmetic differences. I place Laozi with Derrida,

Levinas, Lacan, and Zhuangzi with Deleuze. I inquire into how we can

develop the contemporary thought of critical theory with Chuangzi's wisdom

of the harmony of difference(s). I apply these ideas to literary reading and

viewing films -- the state in which the self and the other face to face with

each other and become one -- which I would call the dimension of the

Ethics of Direct Access. I briefly explain two Gothic novels and Matrix and

discuss Citizen Kane and Butterfly Effect.

[Key words: Ethics of Direct Access, Levinas, Deleuze, Zhuangzi, Citizen

Kane]

논문투고일: 2008. 5. 12

논문수정일: 2008. 4. 9

게재확정일: 2008. 6. 9